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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그래도 또 전화했다.

예인은 멘트를 다 준비했다.

기획회의 전에 작품에 대한 플랜을 알아두고 싶고...

전화를 안 받는다. 벨은 울리는데. 열 번쯤 울리는거 듣고 있으면 기분 참...

한 시간 쯤 있다가 다시 해 봤다. 바빠야 하는데, 그래야 전화를 다시 할 텀이 길텐데.

또 안 받는다.

계속 안 받았다. 벨 울리던 것도 멈췄다.

예인은 혈압이 오른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혼자만의 속앓이.

 

" 선배. "

" 응. 왜? "

" 그냥, 뭐하나 싶어서. 연짱 쉬는날이쟎아. "

" 원래 주5일제 하는 사람들은 다 쉬고 있어. "

" 누가 뭐라나. 뭐했어? 밥 먹을까? "

" 너 회사니? "

" 응. "

" 일욜에 회살 뭐하러? "

" 선배가 회사 위에 사니까 습관적으로 나오는 거야. "

농담처럼 얘기 안 했는데. 예인은 왜 선배가 웃는거지? 하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 "

" 난 밖이야. 밥은 혼자 먹든지, 얼른 집에 가서 먹든지. "

" 선배, 나 집에서도 혼자거든. 밖이면 어딘데? 내가 갈테니 밥 좀 사 줘 봐. "

" 쫓아다니는 사람이 밥 사 줄께. 하고 쫓아다니는 거지. 누가 사 달래냐? "

" 그래서 맨날 많이 사 줬쟎아. "

" 근데 왜 이젠 안 할라 그래? 사 주는거 딴 사람한테 해야 하니깐? "

이건 또 무슨...오늘 왜 이렇게 안 먹히냐. 예인은 짜증이 날 것 같다. 작업 들어가기 전의 정지작업이 이렇게 안 되서야 뭘...

" 선배, 왜 이래? 후배 밥 사 주는게 그렇게 힘들어? "

" 나 밥 먹고 있어. "

가슴이 덜컹. 한다. 예인, 침착해.

" 누구랑? "

" 몰라도 돼. "

" 이작가님? "

" 아니야. "

" 그럼 누군데? "

" 그만 끊는다. "

" 잠깐만, 선배. 근데 이작가님은 만났어? 연락 돼? "

" ... "

" 선배? "

" 이예인, 신경 꺼라. 끊을께. "

어쨌거나, 예인은 정보를 종합했다, 선배는 이작가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구 연락도 안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답을 못 하지. 그리구 그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거다. 라고 추측이 된다.

누구? 예인은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그 전화기 너머의...친구. 이작가님의 친구인듯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생각은 많으나 할 일이 없다. 예인은 사장실 책상 앞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일어나서 가야하지만 아니 가고 싶지만, 어떻게 이작가의 주소지를 찾아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린단 말인가. 뭐라구, 무슨 명분이 있어야.

절로 전화기에 손이 갔다. 이틀전부터 수차례나 누른 번호를 눌렀다. 자동인식, 즐겨찾기에 링크되어있는 번호.

벨이 울렸다. 안 받는다. 열 번쯤 울리는 건 기본으로 듣고 있게 되었다. 근데.

받았다.

" 네. "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은 건 아닐까? 예인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착 가라앉은 목소리, 기운없는 음성이나 이작가다.

" 안녕하세요? "

" 네..."

" 아, 저에요. 이 예인. "

" 아, 네. 사장님. "

그녀는 왜 전번을 저장해 두지 않는 걸까.  지속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 어디 아프신가 해서요."

" 네. 그냥 좀...몸살끼가 있어서. "

" 피곤하셨구나. "

" 아뇨...꽃샘추위 땜에. "

" 맞아요. 너무 추워졌어요. 바람이 많이 차더라구요. 어디 나갔다 오셨어요? "

" 아...니요. 추워서 안 나갔어요. "

"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병원에라도 가신 줄 알았어요. "

" 집에 있을땐 핸폰을 그냥 던져놓고 있어서. 미처 확인을 못 했네요. 무슨 일이라도..."

" 아, 그게 뭐 별일은 아니구..."

예인은 무슨 스토리를 준비했었는지 까먹었다.

" 네... "

" ... "

말이 끊어졌다. 어쩌지. 예인은 긴장감이 와짝 올라왔다. 그녀가 말을 안 한다.

" 아, 저기...작품계획이 어떠신가 들어볼려구... "

" 네...그것이..."

" 네? "

" 계획 없는데...지금은 좀...."

" 네, 뭐 지금은 작업 중이시니까 뭐.. "

" 아니...그보다...지금은 좀 제가 피곤해서..."

" 이작가님? "

그녀의 목소리는 느리고 점점 잦아든다.

" 미안해요. 제가 지금 너무 졸려서...요. 나중에...전화 드릴께...요. "

예인은 기다려 연결음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쓰러지기라도 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도무지 말 할 기분도, 기운도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정말로 바로 잠든 것 같다. 잠 속에서 몸을 녹이고 마음을 재우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죽어 없어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다시 눈 뜨고 바라보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말을 만드는 것, 이젠 하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귀찮다. 무얼 더 바라...눈 들고 하늘을 볼 것인가.

예인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수필에서 이런 분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뭐라고 했던가, 아무도 없는 곳 숲속 깊은 곳에 들어가 혼자 있다 보면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그런 말을 왜 했지? 예인은 그녀의 주소를 핸폰에 찍었다. 차를 빼서 거치대에 올리고 네비를 작동시켰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리리라.

 

그녀는 잠옷 차림이었다.

시계를 보더니 아직 아이들이 올 시간은 아니라고.

무슨 일이 있냐구, 말을 주워섬기긴 하나 물어보는 데에도 의욕이 없다.

" 계획하는 거 없는데...어쩌죠? "

그녀는 그말을 하더니 소파 옆에 쌓아둔 베개들에 어깨를 기대인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다 덮는다. 추워서...하고 중얼거리며.

" 주무시는데 깨웠나봐요. 그냥 계세요. 전 갈께요. "

" 아...네...문....닫고...안녕히 가세...요. "

예인은 현관에 선 채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이미 눈을 감았다. 아니 감기는 것 같았다. 파리한 낯빛, 표정 없이 감은 눈. 입술도 다물고 있다. 숨을 쉬고는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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