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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뜨거웠던 레일

앗!

뜨거워.

비명마저 속으로 외치는 혜정은 철도 레일 위에서 얼른 내려왔다.  다들 맨발로 올라 걷고 있었지만 한 발도 더 내딛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의아히 쳐다보았다. 동기들, 이 두 명의 남자동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제 말에 우쩍 일어나 양 손에 슬리퍼를 벗어든 채 외줄타듯 레일 위를 걷고 있는 걸까. 박통시절에는 더 그랬지만 전통시절에도 유격훈련 중 죽어나가는 군인들이 가끔 카더라통신를 타고 흘러나왔었다. 외줄을 타는 두려움이 어느정도일진 모르겠으나 여름 땡볕에 달궈질대로 달궈진 철로 위에 맨살의 발바닥을 대고 걷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이게 무슨 일제시대 고문장치도 아니고... 쟤들 왜 저러니... 혜정은 의뭉스레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 야, 누가 더 오래 걸어가나 해 봐라, 니들 중 난 놈 좀 골라보게. "

 

혜정이 말하자 영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사회과학써클에서 여자애들의 인기를 얻기는 난해해서, 1학년 신입부원으로 들어와 몇 달이 지났지만 썸씽은 남의 동아리 얘기였다. 상철과 종철은 냅다 철로 위로 올라섰다. 순식간에 불붙는 이 경쟁심, 저 놈을 제쳐야 내가 난 놈이 되어 세상을 제패할 것이다. 하는 듯. 남자애들이란.

신촌기차역에서 한시간에 한 번 정도 오는 기차를 타고 능곡을 지나 백마역에서 내리면 이쁘고 분위기있는 카페, 레스토랑이 있고 통기타로 라이브를 하는 화사랑도 있고 혜정의 써클이 어제부터 엠티를 와있는 민박집도 있다. 도착하고부터 선배들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러고도 아침에는 피티체조에 조깅에...이제 겨우 한숨 돌리며 동기들과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중이었다.

영혜는 세미나를 할 때도 조용했지만 동기들과 어울려서도 말 수가 적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혜정은 동기들과 친하고 싶었다. 남자애들과도 친구로 훌륭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근데 여자친구와도 이리 잘 사귀어지지 않는다. 내가 문젠가? 어릴때부터 반친구 사귀기가 힘들어 하교길이며 쉬는 시간이며 손잡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 부럽게 혹은 고깝게 보곤 했던 혜정이었다. 대학은 좀 다르지 않을까. 더구나 사회과학 써클인데.

결국 뜨거운 레일 위를 맨발로 걷는 것에 승리한 것은 종철이었다. 아니 상철이었나? 기억에 숨은 의도가 있는지, 편견이 있는 지 모르겠으나 엠티 이후 여름방학 동안에 자취를 감춘 영혜를 찾아다니던 상철에게 한참 망설이다가 말해주었었다.

 

" 영혜, 선배랑 사귄대. 좀...됐나 보더라구. "

 

혜정은 일그러지는 상철의 표정을 보면서 짐짓 의연하게 사회과학도답게 일침을 가했다.

 

" 그 선배, 정말 웃기지 않냐. 저는 운동해도 되지만 지 애인은 운동하면 안 된대. 써클 그만두라고 강요했다더라구. 영혜도 뭐, 자기 걱정해서 그런거니까. 하면서 갈팡질팡하더니 과에도 안 나와. 여자애들은 대학도 다닐 필요 없다는 건지! "

 

1980년대, 우연히 들어간 운동권써클에서 발을 빼기 위해선 휴학도 불사해야 했다. 그러는게 나았을까. 혜정을 죽자고 쫓아다니던 종철은 2학년이 되자 마자 군대를 갔다. 안 가고 싶었지만 갈 수 밖에 없다는 군대에서 줄기차게 보내온 편지들엔 지방에선 알아주는 제일고 우등생답게 흘려쓴 궁체로 저의 애환을 늘어놓고 여친의 안부묻기를 잊지 않았지만 제대 후엔 다 잊었다. 혜정과 함께 한 세미나도, 밤새 불렀던 동지가도, 백마의 철길에서 있었던 동기들과의 추억도.

여름 한 밤, 술을 마시다가 없어진 종철을 기다려 새벽을 볼 때쯤 혜정은 주머니 가득 채 크지도 않은 조막사과를 서리해 온 동기를 면박주면서  어찌 이 조그만 게 사과맛이 난다냐? 했었다. 헤실하게 웃던 그 놈, 난 놈이 되고자했던 종철도 상철도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5공청문회를 끝으로 80년대가 이울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한  넘들 중 한 명을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 어디 가니? 이 시간에. "

" 영업맨이라서. "

" 그래, 살긴 어디 살구? "

" 쩌기..광릉쪽에. "

" 영업한다면서 왜 그리 멀리 살아? "

" 애들이랑 마누라가 공기 좋은 데서 살고 싶대서. "

" 그래. 그럼, 잘 가라. "

 

혜정은 대학생들이 그렇지, 뭐. 하면서 전철을 내려 바삐 걸었다. 동지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간다. 시간약속에 칼인 노동자들이 아닌가. 약해보여서도 느슨해보여서도 안된다. 여자라고 봐 주지 않을 터이니.

 

 

ps. 나두 참...문센글쓰기샘이 이비에스 대국민사연공모 주제가 여름이야기래서 함 내 볼까하구 썼지만...이런 글이 걸리겠냐...난 왜 여름 추억이 이렇게밖에 안 떠오르냐...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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