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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나중에 그녀가 대학에서 데모를 하러 다니고, 낮에.

밤에는 세미나를 하러 다닐 때. 학교를 벗어나서 알 수 없는 여러 대학의 여러 남녀들과 어울려 세미나를 하느라 그녀는 주로 밤에 모였다. 룸이 있는 카페들이나 아니면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그리고 지하철이 끊길 때쯤 막차를 탔고 여느 대학생들처럼 남자들은 여자들을 바래다주지 않았다. 물론 커플이 된 여자애들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몰라서 그렇지, 커플이 되어가는 중이었던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지도.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여자동기는 항상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집이 큰 길가에 있어서 자기는 위험한 골목길이라는 걸 잘 몰랐다고. 하지만 그 여자동기는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들이 많이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주택가에 집이 있었다고. 그렇게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여자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고. 운동을 하는 남녀 대학생들은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차별을 간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그런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가던 동기는 정말로 집 근처에서 성폭행을 당했었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녀는 뭐라 위로해야 할 지. 그냥 담담히, 그런 건 그냥 사고같은 거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라고. 우리들은 모두 그런 현실에 분노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다행히 친구는 많이 힘들었지만 많이 도와주었던 친구가 있어서 잘 극복할 수 있었다며. 그리고 그 친구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였었다.

 

그녀는 여자들은 위험해.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 힘으로는 남자들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까. 공정한 싸움이 안돼.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이라거나, 몸으로 한 판 붙고 나면 더 친해진다거나 그런 건 여자애들에겐 해당이 없지. "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 여자를 향해 진심으로 완력을 사용하는 어떤 남자들의 무지함과 천박함을 생각하는 듯. 비참한 표정, 그늘이 이마에 드리웠다.

그녀는 남자들의 더 강한 완력을 싫어했다. 더 넓은 어깨도. 더 크고 굵은 가슴이나 팔뚝. 나중엔 오동통한 돌쟁이 사내아이의 더 무거운 체중조차. 무거우니까 더 힘들어. 하면서. 골목길을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의 빠른 달리기솜씨나 욕지기와 함께 거칠게 내뱉고 가는 남자아이들의 고함소리에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걸 남자다움이라고 말하는 혹은 말하고 싶어하는 아줌마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빙그레 미소를 걸고 아들을 쳐다보는 퉁퉁한 뱃살의 사내들을 피해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고 걸었다. 알고 지내고 싶지 않으니 말 걸지 말라는 듯이.

 

그래서일까,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샤프했다. 마른 체형에. 순한 표정,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아무리 화가 나도 상욕을 하지 못 하고 혼자 툴툴 거리는 소심가들. 츱...오래 사귀지는 못 했다. 쪼잔해서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 커피를 마시면 꼭 비스켓을 하나. 피아노연주가 들어있는 음악이 있으면 더 좋다. 튀는 음악,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가요, 비트가 있어 배경으로 깔기에는 부담스러운 곡이 나오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귀로 상대방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 해 표정은 점점 멍해져갔고 결국 빨리 헤어지기를 원하며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 다른 음악 없어? "

 하고 그녀가 요청하는 일은 드물었다. 진은 그녀와 사귀며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또 연극을 보며 덕수궁이나 프랑스문화원을 돌아다녔으며 그러지 않는 더 많은 시간을 정독도서관의 잔디밭에서 보냈다. 나중에는 그녀가 다녔던 대학 캠퍼스의 호수 주변, 오래된 문과대의 허름한 외벽 아래 그리고 고전음악감상실에서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찾아내고는 했다. 그리고 학교 앞의 작은 찻집들을 찾아 전전했다. 주로 조용한 음악을 틀고 있는 곳으로.

그녀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하기보다는 빨리 헤어져 혼자가 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은 그녀가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기에 집중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어린 왕자

이런 제목의 간판을 달고 있는 카페들이 대체로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크고 넓은 창과 함께, 테이블 구석엔 밤시간이 아니라도 곧잘 사용되는 낮은 촛대와 밝은 색깔의 초가 놓여있고.

그녀에게 가장 추천해서는 안되는 데이트코스는 스포츠경기 관람이었으며 두번째로는 액션영화였다. 그녀는 거의...고문을 견디는 표정으로 자리을 지키곤 했다. 그것도 꼭, 정말로 그 동행했던 사람과 헤어져서는 안되는 불가피한 목적성이 있었을 경우에만. 결국 그런 것들이 그녀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너무나 어색하게 참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편하게 느끼지 못 했으므로. 티비 앞에서 그녀는 시선을 멀리 혹은 빗겨두고는 했고, 드라마 속의 배역들을 변별해 내지 못 했으며 주변사람들의 수다 중에 등장하는 이름이 극 중 인명이 아닌 연예인의 이름인 것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티비보기를 포기하고 노래방가기를 꺼려하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아닌 술자리를 기피하는 그녀는 학창시절 이후에도 편하게 알고 지내는 지인을 얻지 못했다. 거기다...남자의 완력과 여자의 순종, 돈 벌어오는 기계와 같은 남편과 하녀처럼 가사서비스에 몰입하는 부인들을 보면서는 결코 그네들과 말 나누기를 하지 못 했다. 그녀가 누구와 대화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집에서도. 결혼한 시댁의 사람들과도.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 공유하는 자신의 집에서도. 그녀는 항상 혼자 있고 싶어했다. 열 아홉살에도, 그 이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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