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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고방을 감상하며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집난이같이 송구떡

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

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알밤을 밝고 싸

리꼬치에 두부 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짚신

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끼

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고방 즉 광이라는 공간에 놓여있는 사물들인 질동이에 남아있는 송구떡, 오지항아리 속의 찹쌀탁주, 나무발쿠지에 아주 많이 걸려있는 짚신들, 그리고 화자가 숨어있는 쌀독들을 나열하는데 그 사물들 각각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송구떡을 집난이(출가한 딸)을 비유하는데 다른 귀한 먹거리가 많은 고방 안에서 송구떡이 인기가 없어 오래 남아있듯이, 친정에 다니러 와 있는 집난이가 갈 줄 모르고 하냥 머물러있지만 집난이의 친정집을 상징하는 듯한 질동이 속에 남아있다는 표현을 통해 특별한 일이 아닌, 평범한 풍속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질동이보다는 훨 좋은 그릇인 오지항아리의 찹쌀탁주, 이를 통해 출가한 딸 뿐만 아니라 아직 분가하지 않은 장성한 아들인 삼촌도 찹쌀로 빚은 귀한 막걸리를 집안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좋아하며 먹을 수 있었음을, 즉 평안도 이북 지방에서 먹을꺼리가 귀할 수 있으나 비교적 풍족한 집안임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어린 화자가 사춘과 함께 막걸리를 채어 먹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어찌보면 아이들이 광에 몰래 들어가 술을 훔쳐먹었다 혼날 수도 있지만, 그저 집안에서는 삼촌의 좋아하는 것을 가로채어 먹은 것뿐으로 웃어넘기는 일이 되는,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제삿날이면~의 구에서는 귀가 먹으실 때까지 장수하신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분주함 속에서 아이들이 알밤을 까고 싸리꼬치에 산적을 꿰는 등 함께 일을 하는 모습과 맛있는 먹거리들에 모여드는 아이들을 파리떼같다. 라고 직유하고 또 할아버지가 그러지 말라고 내어둘르는 손을 곰의 발 같다라고 직유하고 있다. 여기서도 제사와 같은 큰 일을 치루는 중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정겨움과 특히 곰으로 은유되는 할아버지의 강건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 손이 곰의 발과 같으니 이북지방에서 젊은 시절부터 농사와 함께 사냥 등을 하며 가정과 마을을 꾸려온 장정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삼아 걸어놓은 짚신이 마치 소신과도 같다라고 비유되는 것에서도 보여진다. 소신이란 소에게 일을 시킬 때 신기는 짚신이니 무척 촘촘하고도 질기게 만들어질 것인데, 할아버지의 곰발같은 손으로 10개를 의미하는 한둑도 아니고 여러둑이, 즉 둑둑이라는 것처럼 아주 많이 걸리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쇠짚신같은 짚신 뿐만 아니라 고방 구석의 나무말쿠지에는 유용한 다른 것들도 쟁여져 있음을 걸리어도 있었다하는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다.

옛말이 사는~에서는 고방이라는 공간이 의인화된 옛이야기가 살고있는 곳으로 상정된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 혹은 고방 속의 사물들을 통해 상징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살고 있다고 의인화되는데 이는 고방이라는 공간 속에 놓여진 사물들 각각이 집난이, 삼촌, 짚신을 삼은 할아버지의 이야기, 이야기되어진다는 것 자체가 시간적으로 과거의 사건임을 의미하는데, 동시에 고방 속 쌀독 뒤에 앉아있는 화자의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리하여 옛말은 고방 속에 살고 있다라고 의인화되는 힘을 얻고 있다.

나아가 이 옛말 즉 옛이야기는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들었을 옛이야기로서 민중문화 속에서 구전되어온 이야기들이며, 이 옛말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것은 민중의 삶 자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성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이 컴컴한 고방은 화자에게 아늑한 공간이며 낮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끼니때나 되어서야 어른들이 찾고 있지만 그 조차도 무시하고 홀로 아늑한 행복감 속에 있다. 그것도 쌀독 뒤에서. 그 쌀독에 쌀이 없거나 바닥이 보이는 상황이 아님은 전편을 통해 흐르는 정겨움 속의 여유로움, 그 저변의 풍족함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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