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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1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달랐다.

아니 좀더 편협하게, 여중과 여고는 많이 다르다.

아이들의 태도도, 말도, 행동도.

정원은 처음부터 다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업 중에 옆얼굴이 따갑다 싶으면 여지없이 빤히 보고 있는 그 눈과 마주쳐야 했다.  입학식 후 자리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일렬로 섰을 때도 정원은 맨 뒤에 서 있다가 선생님의 손짓에 마지못해 앞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선생님은 재가 수즙음이 많아 그런가? 하며 그럼 뒷줄에 앉으라고 했다. 교실의 맨 뒤에서 두 줄 앞의 좌석을 차지한 정원,  진의 얼굴을 옆으로 돌아보면서 수시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 나랑 친구 해. 우리 같은 중학 출신이쟎아. "

" 모르던 사이도 아닌데, 뭘 새삼스레? 그래 잘 지내보자. "

중학교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도맡았던 정원과는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피아노반주 땜에 이래저래 얼굴을 익혀온 사이였다.

" 그럼 이제부터 나랑 같이 다니는 거다. 알았지? "

정원은 '나랑' 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애가 날 좋아하는가 보군. 진은 담담히 생각했다. 가벼이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익숙한 경험이었기에. 여자아이들은 원래부터도 자주 패를 지어다녔지만 개중에는 초등학교 때처럼 단짝을 만들어 꼭 붙어다니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고등학교 오면 좀 달라질까 했더니?

여느 아이들처럼 쪽지를 보내거나 사소한 볼일들을 만들어 말을 붙이거나 아니면 멀리서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그런 류의 행동을 정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 나가 놀던 자기집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처럼 " 진아, 가자. " 라고 말하며 팔짱을 끼고 앞서 나갔다. 당연한 듯 와서 도시락을 펼쳤고 오래 사귄 벗처럼 자연스럽게 동행했다. 처음에 진은 같은 중학 출신이니까 편해서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정원이 그리 친한 티를 내자 고교에 와서 처음 만난 아이들은 쉽게 친구의 자리를 만들어오지 못 했다. 좀 더 어렸을 때처럼 그저 호쾌하고 성격좋은 친구가 편하고 좋아서 잘 어울려다니는,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진을 바라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게 아닌 척을 못 하는 여고생들에게 정원은 내 친구에게 딴 맘 먹지 말라는 듯,  죽마고우인 자신의 자리 외에 더 만들 자리는 없다는 듯 고개를 높이 들고 두 눈을 휘 둘러보며 진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진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 했다. 아니 정원이라는 새로운 친구 외에  다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정원의 '나랑' 이란 실인즉 '나랑만'이라는 뜻이었지만 진은 그걸 예민하게 파악하지 못 했다. 늘 절친한 여러명의 친구가 있었을 뿐 단짝을 갖지 않았던 지난 과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원이 그 단짝의 자리를 자처하고 나섰고 새로운 학교,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선점에 성공하자 단숨에 고착화시켰다.  진에게 친구들은 계속 생겼고 그 중 몇 명과 더 친해졌지만 그들은 정원보다 더 친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진과 친해질 시간과 공간을 허락받지 못 한 주변부의 아이들,이를테면 교실에서 비교적 먼 곳에 앉아있는 키작은 여자애들과 윤 진과 클라스메이트가 되는 행운을 얻지 못한 불행한 소녀들은 진과 그의 친구들을 부러워했으나 정작 그의 친구들은 자신이 주변부에서 바라보는 여자애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특별한 위치는 오직 정원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건 이미 오래된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학기초였고 진의 생일을 알기에는,  알아도 선물을 챙기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정원은 교실에 화려한 꽃다발을 안고 들어섰다.

" 어머나, 예쁘다 ! " " 얘, 뭐니, 이거? 어느 선생님 줄껀데? " " 오늘 무슨 날이니? " 

여고생들은 한마디씩 하며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느 선생님에게 주던 우리반에서 주는 거니 함께 자랑스러울 수 있으리라...정원이 이쁨을 받는대도 제 일처럼 기뻐할 것 같은 얼굴로 모여든 얘들에게 정원은 " 응, 오늘 진이 생일이쟎아. 내가 케잌도 주문했으니까 이따 점심시간에 같이 파티하자. "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그러자고, 케잌이 수위실에 도착하면 자기가 가지러 가겠다는 둥 책상을 붙여서 과자랑 음료수를 더 사다 놓고 하자는 둥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개 중에는 왜 진이의 생일을 미리 알아두지 않았을까,  괜히 망설이지 말고 선물이랑 준비할 껄, 점심시간에 나갔다 와서 이따 집에 가기 전에 주면 안될까 하는 등의 생각으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차려진 젯상에 상돈 올리는 격 밖에 안 되는 지라 아예 몰랐던 척 축하나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진은 채 다 알지도 못 하는 동급생들이 차려주는 생일상에 감격해했다. 보다 더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에 함께 신나했다. 그리고 꽃다발을 받으면서 " 고마워" 하고 말했고 그러면서 다시한번 정원을 쳐다보았다.

그 후로도 진의 반에서는 모둠을 지어 생일파티를 하는 일이 없지 않았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술 마실 껀수의 하나로 누군가의 생일을 차용해오기를 자주했지만, 윤 진의 퍼스트는 정원이라는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진 자신에게도 말이다.

정원은 예쁘다라고 말하면 시샘하는 맘이 아니고서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긴 생머리를 항상 등언저리까지 정갈하게 빗어내리고 다녔고 티나지 않게 화장한 얼굴에 잘 다듬은 눈썹과 밝고 화사한 뺨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톰하니 육감적인 입술은 건강한 붉은 색이었다. 중학시절 단발머리의 정원이 한 학급의 아이들 전체를 앞에 두고 카라얀처럼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두 팔을 활짝 뻗으며 지휘봉을 휘두르던 모습을 진은 알고 있었다. 빨간 마이에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아가씨들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다리를 보이는 단상 위에서 지휘하는 그 모습에선 사뭇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에 비하면 정원은 다소 얌전 아니 차분 아니 참해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크게 웃지 않고 한 손을 입술 가까이로 올리며 웃기도 한다. 분명하게 레이스나 핑크색, 예쁜 소품들에 대한 선호를 나타냈고 가방이나 옷가지에 그런 취향을 살리고는 했다. 정원에겐 꽃, 오완식 커텐, 푸짐하고 질 좋은 돈까스 그리고 붉은색 포도주가  어울리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정원의 구김살없는 웃음,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거칠것 없다는 듯 큰 목소리, 호감을 표시하고 또 보답받고자 하는 분명한 기대와 요구, 그런 솔직함과 애교스러움을 진은 좋게 보았다. 정원과는 분식점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어야 했고, 동대문보다 명동을 가야 했으며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다가도 가끔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기도 해야 했다. 봄날 다사로운 해 아래 정원과 손을 잡고 학교에서 버스정류장에 이르는 가로변의 부띠끄 앞을 지날 때, 살랑이는 치맛자락이며 투명한 망사리본 따위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정원에게, "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 하며 진은 캉캉스타일의  풍성하게 펼쳐지면서 발등까지 내려오는 하얀 치마를 사 주었다. " 어머, 정말이야? 그래도 돼? " 하며 정원은 기쁜 듯 햇살같이 웃었다.  진은 귀엽고 또 예쁘다고 생각했다. 당장 다음날 학교에 정원은 그 치마를 입고 왔다. 너무나 눈에 띄는 그 치마를 이틀 더 입고 왔으나 생활지도부 선생의 부드러운 지적이 있은 후 " 진아, 아무래도 이 옷, 여기서는 못 입을 것 같아. 나중에 놀러나갈 때 입어야겠어. " 하며 그렇지만 정말 우아하고 멋진 옷이라며 이걸 입고  함께 파티같은 데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맞아, 네겐 파티의 공주님이라는 자리가 어울린다하고 진은 생각했다. 이렇게 순진하게 웃는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도.

정원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것 같았다. 지금은  정원에게 그런 기사와도 같은 역할을 자신이 해 준대도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추억이 될 꺼라고, 그리 생각하는 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여고생들은 좀 더 어렸을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예전처럼 여럿이 함께 다가오기 보다 자기 혼자만을 봐 주기를 원하는 듯한 속내를 자주 흘리고 있었다. 진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일세하는 맘으로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이라면 조금은 얘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예쁜 아가씨는 소중히 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조금 멍청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원은 순진하게 웃을 때면 야, 바보같아 보여 하는 핀잔을 자주 받곤 하였다. 얘기를 오래 나누다 보면...한 번에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생각을 못 하기도 해서 좀 천천히 정리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랴, 이쁜 것이 공부도 잘 하면 미움받는다고 정원은 그다지 성적이 좋게 나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엔 재능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팝송과 함께 클래식도 혼자서 잘 듣는 편이었다. 함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러 가서는 똑같이 좋아하는 오페라에 환호했고 그 웅장함에 감동했다. 살리에리의 분노와 자괴감에 공감하는 마음도 함께 나누며 우리,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에 좀더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며 같이 심각해지기도  했다. 정원은 언젠가 자신의 바이올린에 피아노반주를 부탁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꿈을 얘기하기도 했다. 정원이 여고에서의 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친구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 듯 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원과 진이 둘 다 자주 가는 음악실, 그 어스름한 오후의 인적없는 공간에서 그들이 함께 깜박 잠이 들었던 때에 일어난. 진은 여기서 오래 자면 안되는데....정히 선생님이 늦을 것 같으면 그만 연습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지...정원이는 어쩌지, 데려다 주고 갈까....하는 생각을 얕은 잠 속에서 계속하고 있었다. 음악실의 기다란 의자가 등뼈와 쇄골에 부딪혀서 불편하기도 하고 또 좁기도 했다. 시체처럼 차렷 자세로 눕기에도, 옆으로 돌려 누워있기에도 불편해서 한 손은 허리께에 다른 한 손은 이마 위에 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피곤함이 느껴진 그러나 여느날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평일이었다. 아, 컨디션이 안 좋다며 생리때가 되가는 것 같다던 정원 땜에 피로감이 전염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문득 진은 지금 자기손이 어디로 떨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이나 아니면 이마 위에 올리고 있던 팔이 좁은 장의자에 누워있다보니 스르륵 밑으로 떨어졌나 보다. 근데 이 의자 아래에 있는게 뭘까......부드럽고 따뜻한, 어린 시절 엄마의 젖가슴에 손을 넣었을처럼 쑤욱 미끄러지며 손바닥에 느껴오는 이 온기는? 어린 강아지의 턱밑을 간질었을 때와 같은 이 가실한 감촉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손끝마디마디에 물렁한 듯 단단한 듯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열기는?

진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누운 옆에 무릎을 꿇은 듯 풀어헤쳐진 가슴이 보였다. 유두, 붉게 팽창한 유두와 함께. 그리고 자신의 한 손과 함께 아래로 쑥 들어간 채 가늘게 떨고 있는 팔꿈치, 튀어오른 혈관과 뜨겁게 맺혀있는 땀방울을.

정원은 잠깐....잠깐만.... 조금만 이대로 있어 줘...하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듯 진의 손등을 꽉 부여잡은 채 힘껏 흔들어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의 깊은 한숨, 이마에 맺혔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얼굴로 받으며 진은 자신의 손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뭐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진은 이게 뭐지? 이게 자위? 그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하는 정원에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아이들의 그 눈빛에 담긴, 작년과는 다른 그 알 수 없었던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정원의 축 늘어진, 그러나 뜨거운 물에서 건져올린 오징어숙회같은 입술이 누운 채로 멍해져 있는 자신의 입술 위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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