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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일상

effect

" 그때 왜 그애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까? "

상량한 표정의 소년은 낮게 중얼거렸다.

굳게 닫히는 수도원의 철문, 철창의 안쪽에서 흔들리는 커텐. 첨탑을 바라보는 소년의 높이 쳐든 턱. 목줄기. 가늘게 이어져 숨어드는 가슴골. 그녀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소년은 직감했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폐부 속에서 무언가가 빙결되는 게 느껴졌다. 닫힌 문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 빛나던 눈동자. 새된 숨소리...오, 그녀를 다시는 안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이 덧칠되어 양감되는 부조처럼 확신에 찬 절망감에 소년은 부르짖었다.

" 널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 "

fade out.

 

시사회는 성공적이었다.

3대 일간지의 문화면에 기사가 실리고 5대 검색엔진의 메인에 article 이 떴다.

" 감독님, 축하드려요. "

연예부기자의 인터뷰와 출연배우들의 광고성 멘트들이 이어졌다.

 

" 무슨 일 있으세요?"

" 아니,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 아닐까? 별로 색이 변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지인들과 평론가들의 블라인드토크가 시사회 끝난 후의 리셉션장에서 건네지고 있었다.

" 해피엔딩 아니쟎아요. "

" 맞아요. 남는 감정이 슬퍼요. 막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

" 속상해요. 그쵸? "

" 응, 이상해요. 지금까지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비통해하거나 절망적인 감정으로 엔딩샷된적 없쟎아요. "

" 감독님...무슨 일 있으신거 아네요? "

 

예인이 소리를 낮춰 조감독에게 물었다. 방송국에서 이감독을 끌고 오는데 톡톡히 한몫 한 그녀로서는 충무로판에서의 입봉작이 어떻게 평가될지 여간 걱정이 되는게 아니었다. 왜 갑자기 색이 변했지?

" 그렇게 색이 변한건 아닌 것 같은데... "

조감독은 말하면서도 영 자신이 없다.

" 여전히 정확한 구성이고 스토리라인도 한 줄로 잘 짰고 분위기는 좀 어둡지만 원래 그 스타일이고..."

" 희망이 안 보이쟎아요 ! "

예인은 딱. 그거라는 듯 소리쳤다.

" 지금까지 남주가 여자애 보내놓고 울면서 끝난 적 있어요? 항상 다시 만날 꺼라는 전제 하에 크게 짜여진 에피소드였쟎아요. 이감독, 원래 트레이드 마크가 그거쟎아요. 옛날 이야긴데, 그 자체로 주제 잡아내고 그 속에서 재밌고 예쁜 사랑하는, 그러다가 헤어지지만 금방 다시 만나든가 아니 만나는거 안 나와도 언젠가 만나질게 예측되어서 그냥 그렇게 편하게 볼 수 있는. "

예인은 분명 뭔가 달라졌다는 데에 확신을 걸면서 조감독을 다그쳤다.

" 이감독, 애인 찾았죠? 그 뒤에 어떻게 되었어요? 그거 깽판 난 거 아네요? "

" 예에? 그건 또 무슨? "

피디로 평생 가겠다고 충무로에선 밥 먹기 힘들다며 애 둘 딸린 자기는 건드리지 말라더니 결국 이감독이 사표 내자 따라서 사표내고 예인에게 끌려왔던 조감독은 아무리 저희들의 운명을 거머쥔 기획사 사장이지만 너무 사생활 침해스러운 거아니냐고 항변할 듯 했다.

" 잡아떼지 말아요. 내가 수삼년 공들여 이감독 스카웃해 오면서 그 정도 정보 없을 줄 알아요? 유감독은 방송국 입사할 때부터 이감독이랑만 파트 짰으니까 알꺼 아네요. 기존의 드라마들하고 완전 딴판이쟎아요. "

" 그러니깐, 드라마하고 영화는 다르다구요. "

" 뭐가 달라요? 시간 차이? 노출 차이? 개런티?  "

" 에...왜 그래요..."

" 제작비 적게 줬다고 비난했었죠? "

" 크랭크 아웃했으면 끝난거죠. 배우들도 개런티에 불만 없었어요. "

" 제작사는 맘에 안차도 감독이 맘에 들었으니까? "

" 에...왜 그러세요...대표님도 감독보고 시작한 거면서... "

" 시작했지만 계속 할 자신이 없어요. "

" 대표님 ! "

예인은 영 불안을 지울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길고 풍성하게 틀어올려졌던 머리카락 한 올이 풀려 흔들렸다.

" 내가 이감독 콜했을 때는 이렇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영화 만들라는 거 아니었어요. "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 무서울 지경이에요. 엔딩샷 말이에요. 주인공이 희망을 놓고 있어요. 후회, 절망. 자책...앞에서 실컷 보여줬던 소녀와의 사랑, 은밀함, 부드럽고 개구졌던 행동들, 그런 것들이 전부 망각될 정도에요. 멜러로 도배해놓고 호러로 끝냈쟎아요. "

" 대표님. 드라마 아니니깐 그정도 틈은 보여도 되쟎아요. "

조감독은 짐짓 무거운 어조로 얘기했다.

" 틈? 무슨 틈? "

" 감독님, 원래도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았어요. 추억 이야기 늘어놓으면서 뭐 얼마나 희망적이겠어요. "

예인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소리쳤다.

" 아, 그래요. 고등학교 때, 아니 중학교 때인가. 국어선생님이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추억을 새기는 사람은 현실이 불행해서 그런 거라고. "

히죽 웃으며 조감독은 사십대 이른 나이에 충무로에서 빠지지 않는 기획사를 홀로 꿰어차고 있는 이 재벌집 외손녀를 바라보았다.

" 맞아요. 감독님 드라마 다 그랬어요. 현실에 힘들어하면서 추억으로 위로받고, 그거 필름으로 만들어놓고 돌리고 또 돌려보면서 때워내는 식이었죠. "

" 뭘 때워내요? "

" 힘든 현실? "

" 뭐라구요? 지금 말장난 해요? "

예인은 그러나 화내고 있지는 않았다. 조감독이 웃으면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추억으로 위로받는다고 진짜로 행복해 지진 않쟎아요. 감독님은 항상 절망적이었어요. 더 힘들고 아프고 절망감에 사무칠 때, 더 밝고 예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 만들곤 했었죠. 그 자신에게 그게 필요했으니까. "

" 그럼 지금은요? "

" 지금이 뭐 어떻다는게 아니라, 영화니까 단막으로 끝내야 하고 그래서 러브라인을 질질 끌지 않으니까 슬퍼보이는 거에요. "

" 그렇게 보인다구요? 그렇게 느끼면 그것으로 영화리뷰는 끝나는 거에요. "

" 맞아요. 기쁨이 길지 않고 슬프게 끝나기는 마찬가지니깐 결과적으로 슬픈 영화가 되어도 할 수 없어요. 감독님이 그 정도 자기 마음밭의 한 고랑도 안 보이고 영화를 마무리할 수는 없쟎아요. 그러면 거짓말이 되어버려요. "

" 절망의 엔딩샷이 없으면 거짓말이 된다구요? "

예인은 여전히 다는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중언부언했다.

조감독은 잠시 말을 끊고 예인을 쳐다 보았다. 흥행이 안 될까 봐 걱정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 감독님...지금 애인이랑 안 좋은 건 사실이에요. "

" 뭐라구? "

예인은 어린애처럼 되물었다. 자신이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듯이.

" 이전 작품하고 달라질 수 밖에 없긴 해요. 절망적이었지만 그걸 생각만 하고 있는 거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현재 진행형으로 체감하고 있는 건 다르니까요. "

" 그래서요? "

예인은 뭔가 꼬리를 잡아내고 말겠다는 태세로 표정을 굳히고 짧게 질문했다.

"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거에요. "

" 뭘? "

" 힘들다고요. 자긴 지금 절망하고 있으니까...도.와.달라고...? "

영화평론가처럼 해설하듯 말하는 조감독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예인, 아차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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