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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에서 낙타고개를 넘으면 송강마을 가기 전에 왼편으로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사당은 일부러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작다. 이곳이 월산대군을 모신 사당으로 석광사(錫光祠)라고 한다. 이곳은 후손들에게 어떤 일(설사 역모로 몰리더라도)이 있어도 사당에서 모시는 제사는 그치지 말라는 왕의 특명인 이른바 불천위(不遷位)의 장소이다. 석광사는 1786년 정조 임금이 중수(重修)하고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 월산대군을 모신 불천위(不遷位) 사당 석광사(錫光祠)
사당 건너편(국도 건너편)으로 월산대군의 무덤이 있고, 국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 야산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대거 묻혀있다. 이곳은 원래 월산대군의 별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예전의 별장(別莊)은 집만 덩그러니 있는 요즘 별장과 달리 전답이 딸려 있는 생활자치공간이기도 하였으니 아마 이곳이 월산대군의 식읍(食邑)지가 아닌가 한다.
이곳은 이웃에 서삼릉이 있고, 각종 왕족들의 무덤이 근처에 있으며, 바로 아래 송강 정철의 유적이 있는 등 수없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두를 한꺼번에 돌아보고 싶지만 그러기는 어렵고, 글로 아우르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월산대군과 그 후손만을 다뤄보고자 한다.
1. 어쩔 수없이 정치적이어야 했던 가계(家系)
월산대군은 세조임금의 맏손자이자 적(嫡)손자이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어 작은 아버지인 예종이 세조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예종은 임금에 오른 지 불과 1년 남짓 만에 승하하니 후사가 문제였다. 이때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4세), 월산대군(16세), 자을산군(13세) 등 3명으로 압축되었다. 결국은 적장자도 아니고, 나이도 월산대군보다 작아 가장 왕이 될 가능성이 적은 자을산군이 형인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성종이다.
제7대 세조 ┬ 정희왕후 윤씨
┌──────────┴─────────────┐
장남 덕종(의경세자 장) ┬ 인수대비 한씨 차남 제8대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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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대군
┌─────────┴─────────┐
장남 월산대군 ┬ 승평부부인순천박씨 차남 제9대 성종(자을산군)
(1454-1488) (박원종 누나) |
┌─────────┴─────┐
장남 제10대 연산군 차남 제11대 중종
(1476-1506)
성종이 왕이 된 데에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는 인수대비 한씨의 야심과 당시 실권자인 한명회의 이해가 맞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성종의 비가 한명회의 딸(공혜왕후 한씨, 후사 없이 젊어 죽음)이기도 하였으니 권력의 화신이기도 하였던 한명회로서도 내치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 왕릉에 못지 않게 당당한 월산대군 묘
부자연스럽게 왕이 결정되니 어떻거나 성종도, 월산대군도, 제안대군도 모두 난처한 관계가 되었다. 성종이야 임금이니 난처한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할 것이지만, 월산대군이나 제안대군은 자칫 잘못하다간 역모에 휩쓸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죽음은 물론 처자식들도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에 역모로 몰리면 왕족도 죽음뿐만 아니라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제안대군은 실제 바보였는지 너무나 처세가 뛰어나 바보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바보로 보일만큼 세속일과 거리를 두어 일단 역모로부터 벗어난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장록수도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였다고 한다. 근친으로 어쩔 수없이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연산군과 달리 남자구실도 못한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주색도 멀리하였다고 한다.
2. 다정다감하고 풍류를 아는 왕자
월산대군은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는다. 건강한 체질이 아닌데도 효심이 깊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자신의 병을 숨기면서까지 간병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병이 도져 숨졌다고 한다.
동생인 성종의 안타까운 돌봄이 있었지만 왕권과는 늘 거리를 뒀다고 한다. 무덤자리도 한양을 등지고 잡도록 하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실제로 낙타고개에 있는 월산대군의 무덤은 북향(北向)이다.) 월산대군은 정치대신 풍류를 즐겨 수없는 시문을 남겼다. 그의 호(號)를 딴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시문집이 사후에 성종에 의해 간행되었고, 이 문집은 중국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도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시조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돌아오노매라.
▶ 월산대군 신도비의 두전(頭篆)의 月山 이 그림문자처럼 쓰여진 게 이채롭다.
3. 불행의 시작(1)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왕이 못 된 것을 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사후 후손들이 겪는 불행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 사후의 불행을 불행이라고 말하기는 그러하다. 그러나 후대를 살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후 불행도 불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재위 1469-1494)도 죽고 문제의 연산군(재위 1494-1506)이 즉위한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알다시피 폐비 윤씨다. 매우 빼어난 외모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눈 밖에 나 끝내 사약을 먹고 죽음을 당한다. 그 때가 연산군이 4살 때였다고 하며, 어린 연산군은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부인 박씨, 박원종의 누나)이 주로 키웠다고 한다. 모성결핍이었다고 전해지는 연산군은 주색에 빠지고 폭군이 된 후에도 큰어머니인 승평부부인을 매우 따랐나보다. 큰어머니를 궁궐에 불러 오래도록 있게 하곤 하였고, 그러다 보니 항간에는 연산군이 큰어머니와 통정(通情)을 하였다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 월산대군묘 뒤에 위치한 승평부부인 박씨묘/ 죽음에 얽힌 설화 때문에 지아비 무덤 뒤에 숨어있다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적장자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성종)으로 앉히고, 섭정을 할 만큼 대가 센 인수대비는 결국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죽음으로 증명하라며 자신의 큰며느리인 승평부부인에게 자결을 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승평부부인은 자결을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었을까.
연산군에 비교해 승평부부인의 나이가 어떠했는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박원종이 연산군보다 10살이나 많고, 월산대군은 연산군보다 22살이 많은 것으로 나이 차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통상 여자의 나이가 더 많았던 당시 결혼 풍습으로 볼 때 승평부부인은 최소한 연산군보다 22살 이상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나이차나, 어렸을 때 친어머니처럼 길러주었던 사정 등을 봤을 때 연상군이 승평부부인과 통정을 했거나 강간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이 폭군임에 틀림없지만 시문에 정통할 정도의 학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정부분 상식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악행은 후세 반정세력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것이 요즈음의 통상적인 해석이다.
그럼에도 승평부부인이 자결에 이른 것은 인수대비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연산군에 대항하여 중종반정을 앞장 서 이끈 박원종은 자기 누나의 일을 반정의 명분 중 하나로 삼은 듯 하다. 결국 자기 누나의 자결에 앙심을 품고 반정의 선봉에 섰다는 박원종은 자기 누나의 죽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4. 불행의 시작(2)
승평부부인은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아들을 낳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월산대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이가 덕풍(德風)군이다. 덕풍군은 연산군이 쫓겨나는 중종반정이 있기 직전에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 월산대군의 아들 덕풍군의 신도비/ 역모로 몰린 계림군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가 역적의 아버지라 하여 칼로 내리쳤고, 그곳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 사선으로 그어진 자욱에는 붉은 빛이 돈다.
덕풍군의 부인은 현부인(縣夫人) 파평윤씨이다. 현부인이 또한 이 가문의 불행의 씨앗이라면 씨앗이랄 수 있다. 이분은 윤여필의 따님으로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언니이고, 후에 권세를 잡았다가 윤원형에게 밀려 사형을 당한 윤임의 누나이다. 중종 사후에 그의 큰 아들인 인종과 둘째 아들인 명종이 차례로 왕이 되면서 외척인 윤임과 윤원형의 세력이 크게 대립되어 권력투쟁은 끝내 피 튀기는 사화(士禍)로 발전하니 먼저 윤임 일족이 윤원형과 그의 누나 문정왕후의 세력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한다. 이에 덕풍군의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윤여필(尹汝弼) 윤지임(尹之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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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풍군부인(현부인) 윤임 장경왕후 - 중종 - 문정왕후 윤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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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명종
(인종 : 재위 1544. 11 - 1545. 7)
덕풍군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가 파림군이고, 둘째가 계림군(송강 정철 누님의 남편. 정철의 큰 누님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다.), 셋째가 전성부정(全城副正)이다.
인종이 조선왕조 최단명인 왕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니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일거에 몰아낼 궁리를 하는데, 윤임이 인종이 승하하자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역모로 고변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 을사사화이다. 계림군은 성종의 셋째 아들(연산군의 서 동생)인 계성군의 양자이기도 하였으니 유력한 왕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중종의 정통 왕자(대군)인 명종(경원대군) 있으므로 윤임 일파가 계림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을사사화로 전성부정이 국문을 당하다 죽고, 지레 겁먹고 도망갔던 계림군은 한양으로 잡혀와 참수형을 당하고 머리는 군기시(軍器寺) 앞에 효수(梟首)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다섯 아들 중 13세가 넘는 위로 세 아들이 함께 사형을 당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덕풍군의 큰아들인 파림군은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죽어 화를 면했다. 전성부정의 아들(靈川守 감)은 아버지가 죽을 때 겨우 4살이라 화를 면했다. 그러나 집안의 충격 때문인지 19세 어린 나이에 죽었고, 그의 초라한 무덤을 볼 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산이 몰수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전성부정의 아들 영천수 감의 묘/ 대군의 증손 무덤치고는 서민의 무덤처럼 매우 작다.
계림군과 계림군의 아들들, 전성부정 등은 32년이 지난 선조 10년에 율곡 이이선생의 41회에 걸친 간곡한 신원(伸寃) 상소 끝에 복권된다.
5. 기타 불행
월산대군의 묘는 대군이 무덤으로는 가장 장엄하다고 한다. 이는 동생인 성종의 애틋한 형제애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조선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재정적으로 풍족한 성종시대의 사회적 반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산군과 통정 혐의를 받았던 승평부부인 박씨의 무덤이 월산대군의 뒤에 있는 것을 두고 마치 부끄러워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지만, 문학적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웃에 있는 월산대군 아들인 덕풍군의 무덤도 부인의 무덤이 뒤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집안의 불행과 관계가 있기도 한 한명회의 무덤 또한 부인 무덤이 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일종의 당시 무덤 양식 또는 풍수의 영향이랄 수 있을 것이다.
▶ 덕풍군과 그의 부인 묘/ 이곳도 부인 묘가 뒤에 자리잡고 있다.
월산대군의 묘에는 석물들이 당당하다. 좋은 돌로 만든 장엄한 문인석은 우뚝 선 콧날이 여전히 생생할 정도이다. 행적을 담은 신도비(神道碑) 또한 한눈에 보아도 매우 공들여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신도비 위의 전서(篆書)는 그림문자에 가까운 파격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도비를 지은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간신으로 분류돼 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않았던 임사홍(任士泓)이다. 임사홍은 이 비문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두 아들이 공주, 옹주의 부마가 될 정도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지만 어쩔 것인가. 결국 간신이 지은 비문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을.
▶ 월산대군의 신도비/ 당당한 모습과 달리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으로 불리우는 임사홍이 지은 비문을 지니고 있다. 밑으로는 새로 난 순환고속도로다. 멀리 낙타고개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금은 월산대군 묘 밑으로 순환고속도로가 새로이 나 무덤으로 오르는 길조차 없는 실정이다.
6. 불행 중 다행
‘불행 중 다행’, 글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월산대군의 장손들은 왕실 후손에 걸맞게 큰 재산은 유지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 일행이 한양에 돌아왔을 때 왕실의 궁궐이라는 궁궐은 모두 불타 월산대군의 사저(私邸)를 궁궐로 삼으니 현재 덕수궁의 시작이다. 물론 덕수궁은 현재보다 훨씬 넓은 영역으로 월산대군의 집을 중심으로 삼았다고 하며, 당시 이 저택의 소유자는 월산대군의 증손이며 파림군의 아들인 양천도정(陽川都正) 성(誠)이다.
▶ 양천도정 성의 묘비/ 월산대군의 맏 증손이며, 파림군의 아들/ 파림군 묘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다.
온갖 풍상을 거쳤어도 증손자 대까지 한양에 대저택을 소유했다는 것은 여전히 큰 재력을 소유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7. 기타
▶ 대군의 막내손자 전성부정의 묘/ 을사사화로 죽은 이후 선조 10년(1577년)에 복권되니 신도비와 장명등, 그리고 제법 당당한 묘는 복권된 이후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무덤에 다듬은 돌로 4면을 만든 무덤 양식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형태이다. 선조 대에 조성된 무덤으로는 매우 희귀하다.(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밑에서 싸운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의 아버지 묘소의 경우 정도)
▶ 위의 전성부성의 문인석과 아래 파림군의 문인석이 한 사람의 작품처럼 비슷하다. 가장 큰 특징은 수염이 있다는 것! /
▶ 덕풍군 묘소 위 산줄기의 바위/ 풍수에서 무덤을 향한 날카로운 바위를 피한다고 하는데, 여기도 바위를 뽑아 눕혀놓은 게 풍수적인 비보인 것 같다.
▶ 덕풍군 묘 위로 난 산책길/ 한달 전이라 아직 황량하지만 제법 운치있다.
▶ 계림군 후손(증손)의 비문/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藥泉) 남구만이 짓고 쓴 비문이다. 글씨 자체로는 잘 썼겠지만, 왠지 과장되고,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든다.
남구만은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소론의 영수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인물 평은 매우 상반되어 한 쪽에서는 옹졸한 쫌팽이로, 또 한 쪽에선 대단한 명신으로 평한다고 한다.
위 시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남구만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위 비문을 본 내 느낌은 별로 좋지 않다. 당시 일부 사람들이 남구만을 가리켜 "70세에 얻은 서자에게 전답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및 종실의 비문을 가리지 않고 짔는다"고 했는데, 이 비문과는 어떤 관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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