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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8
    제주올레걷기2 - 7코스 두 번째
    풀소리
  2. 2010/07/20
    제주올레걷기1 - 7코스 첫 번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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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7/19
    아~ 정난주 마리아!!!(2)
    풀소리

제주올레걷기2 - 7코스 두 번째

 7코스 지도/ - 대전참좋은산악회

 

 

 숙골에서 할머니로부 산 해물과 한라산 소주(전편에서 보았죠? ㅎ)

 

 

두 번째 이야기는 저 위 지도로 볼 때 숙골부터입니다.

할머니로부터 해물을 사서 소주 한잔을 한 곳입니다.

 

자 이제 다시 길을 떠나 볼까요.

 

 

 길 옆 동산에 가득한 야자나무

 

 

 바닷가로 난 길은 해무에 잠겨 꿈결처럼 몽롱합니다.

 

 

숙골에서 법환포구로 가는 길은 거의 해안길입니다.

때로는 바다를 끼고 난 길로, 때로는 밭 사이로 길로, 때로는 언덕길도 걸었습니다.

 

 

 언덕길을 오르는 일행들

 

 

 바닷가 절벽 위로 난 예쁜 길

 

 

 이녀비는 신이 나 바닷가에서 날아 오르고~ ㅎ

 

  

 법환포구 주변 항공사진지도

 

 

법환포구에 다다를 때까지는 이렇다 할 특별한 풍경은 없습니다.

법환포구에서 우리는 사람과 차가 다니는 윗길을 버리고, 선창길을 택했고, 바위를 넘어 가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론 잘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법환포구의 용천수

 

 

커다란 현무암 바위 밑으로 용천수가 콸콸 쏟아졌습니다.

물이 잘 스며드는 현무암지대라 한라산에 내린 빗물은 지하로 스며들어 해안가에서 이렇게 솟아난다고 합니다.

물은 맑고 시원했습니다.

용천수 밑에 미니 풀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이 남자들 목욕탕이라고 합니다.

 

 

 법환포구의 빨래터(?)/ 용천수를 이용해서 빨래터도 만들어놨습니다. 

 

 

 올레안내센터 겸 커피하우스

 

 

법환포구는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집들도 많고 다양한 시설이 있습니다.

포구와 올레안내센터, 해녀의 집, 다양한 조형물 등등...

 

  

 물고기에게 먹힌 해녀에게 들이대는 이녀비

 

 

 해녀2가 된 미루

 

 

 테우/ 물고기잡이에 이용한 뗏목입니다.

 

 

 용천수를 이용한 풀장

 

 

 해녀의집을 엿보다 들켜 딴청피는 뱅기

 

 

 다른 쪽에서 엿보다 들켜 쑥쓰러워 하는 이녀비

 

 

 나오다가 놀라는(?) 미낭자~ ㅎ

 

 

 해녀의집 안 풍경/ 해녀들이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젖은 몸을 말리기도 했나봅니다.

 

 

위의 '해녀의집'은 나중에 알고보니 제사공간이었습니다.

만약 제사공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인물사진을 찍지 않았을 텐데요...

본의 아니게 결례를 하였습니다...

 

 

 간이 탈의장/ 아마도 개인용인가 봅니다.

 

 

위의 사진이 진짜 해녀들이 쓰던 탈의장입니다. 물론 지금은 옆에 현대식 탈의장이 있어 그곳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요... 

 

 

이래저래 볼거리가 많은 법환포구입니다.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의 반란(목호(牧胡)의 란, 1374년)이 일어났고, 그것을 진압하였던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고요.

또 1273년 이곳에서 삼별초가 마지막으로 진압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 법환포구는 제주도에 대한 100년 원의 지배가 시작된 곳이면서 동시에 끝난 곳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뭐니뭐니 해도 해녀의집을 만난 것이 가장 반가웠습니다.

물론 지금은 바로 옆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그곳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곳을 이용하는 해녀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사용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사람들의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제 7코스 막바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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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걷기1 - 7코스 첫 번째

7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 운영자들과 함께 한 제주도 여행이었습니다.

가는 날인 1일과 오는 날인 5일은 올레걷기를 하지 않고, 2, 3,4일 이렇게 3일 동안 걸었습니다.

 

날짜도 벌써 열흘이 흘렀으니 더 이상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죠? ㅎ

 

우리의 숙소는 서귀포와 남원 중간에 있는 금호콘도였습니다.

제주올레 5코스의 가장 풍광이 좋은 중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금호콘도 풍경/  사진 - 한길의 블로그

 

 

우리가 7월 2일 함께 걸었던 길은 제주올레 7코스입니다.

 

 

 제주올레 7코스 지도/  지도 - 대전참좋은산악회

 

 

자 함께 떠나 볼까요~

 

 

 7코스가 시작되는 외돌개 부근 항공사진지도

 

 

우리는 서귀포에서 택시를 타고 외돌개 주차장에 내렸습니다.

함께 간 뱅기님과 미루님은 이곳을 걸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솔빛바다를 찾았습니다.

솔빛바다는 찻집이지만 올레안내소를 겸하고 있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각종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솔빛바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뼈대만 앙상하게 해체되어 있는 잔해를 보았습니다.

무허가 건물이라 철거를 하였다네요~~

 

 

 외돌개 해변/ 해무가 끼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섬이 범섬인 듯 한데, 여전히 안개에 쌓여 있습니다.

 

 

 외돌개/ 외돌개는 바다로 쑥 나가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외돌개를 벗어난 산책길/ 미루님은 뭔가 신기한 것을 본 것 같습니다.

 

 

 7코스 서귀포여고 부근

 

 

외돌개에서  돔베낭골 주차장까지는 거의 해변입니다.

이곳 해변은 경치도 좋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중국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와 외돌개 주차장과 돔베낭골 주차장 사이를 걷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많습니다.

 

돔베낭골에 가면 동네 수퍼가 있습니다.

마침 막걸리도 파네요~

참새가 방아간 그냥 지나칠 수 없죠? ㅎ

 

우리는 막걸리를 사서 파라솔 의자에 앉아 마셨습니다.

제주 특산이라는 조껍데기술이나 감귤막걸리는 사실 맛이 별로였습니다.

대신 우리는 그 가게에서 모자와 햇볕가리개를 싸게 산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서귀포환경사업소 옆 해안가는 길/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이녀비가 한껏 멋을 냈습니다~

 

 

 서귀포환경사업소 옆 해변가 냇물에서/ 미루님를 모델로 이녀비가 사진을 찍고, 뱅기님은 도하준비를 위해 신발을 벗고 있습니다.

 

 

돔베낭골에서 서귀포환경사업소까지는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것 없습니다.

서귀포환경사업소 옆으로는 정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보너스로 맑고 시원하며, 수량이 풍부한 냇물도 흐르니까요~

 

우리는 신발을 벗고 냇물을 건넜습니다.

참 시원했습니다.

 

 

 울창한 야자숲

 

 

 야자나무 줄기의 무늬는 아라베스크를 연상시킵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백년초(선인장)/ 놀라지 마십시요. 겨우 15년 자란 것이랍니다~

 

 

이곳에는 시원한 냇물과 울창한 야자숲, 안개낀 바다. 정말 이국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제주도를 처음 방문한 저에겐 더할나위 없는 눈호강이었습니다.

 

한참을 둘러보는데 좌판을 벌려놓은 할머니가 우리를 부릅니다.

멍게, 해삼, 소라, 전복, 낙지 등을 담아놓고 팔고 있습니다.

 

막걸리를 마시고 온 거리가 1km도 안 될 거 같아 든든하게 찬 위장에게는 미안했지만,

할머니의 싱싱한 해물을 보니 구미가 당겼습니다.

 

 

 멍게 꼬다리를 먹으면서 할머니 손질을 보고 있는 이녀비

 

 

 할머니가 내온 해물과 한라산 소주

 

 

"할머니 한 접시에 얼마에요?"

"한접시에 2만원. 잘 해줄테니 먹어봐~ 할머니들이 바다에서 건져와서 싱싱해~"

 

우리는 한접시를 시켰습니다.

 

할머니는 멍게를 썰고, 해삼을 썰고, 뿔소라를 썰었습니다.

전복을 써시며 "이건 한 개에 7천원이야" 하십니다.

낙지 한 마리를 꺼내 도마에 놓으시면서 "이건 만5천원이야" 하십니다.

 

저는 속으로 할머니 '인심도 좋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지와 전복만 해도 2만2천원이니까요~

 

근데...

"다리 3개만 드셔."

 

다리 세개만 자르고 수조에 쓱 던져버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깜짝 놀라는 우리 일행을 보며 "저래도 다 살아." 하며 오히려 위로(?)를 하십니다.

 

놀란 마음대로라면 먹을 수 없을 텐데,

간사한 것이 입인가 봅니다.

접시와 혀에 착착 감기는 낙지맛이 일품이었습니다... ㅠㅠ

물론 한라산 소주맛은 말할 것도 없고요~ ㅎ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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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난주 마리아!!!

제주에서 올레걷기 둘째 날, 11코스 지도를 보면서 '정난주 마리아 묘'라는 지명을 보았습니다.

급히 검색을 해보니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의 부인입니다.

 

순간 가슴이 멍멍해지면서 꼭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묘소는 올레코스에서 약간 비켜나 있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무덤/ 저는 비록 비신자지만, 저 무덤가에 있는 못박힌 예수님의 십자가 상이 마음에 짠하게 와 닿습니다.

 

 

초기 천주교도.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도, 조선정부에서는 그들을 모질게 대했습니다.

서울 절두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서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목이 잘렸고,

황사영은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여 능지처참(팔, 다리, 머리가 잘리는 형)을 받았습니다.

 

 

 정난주 마리아 묘 입구

 

 

정난주(丁蘭珠, 아명 命連, 1773~1838, 세레명 마리아)는 정약용 선생의 큰형인 정약현의 따님입니다.

1790년(정조 14년) 18살에 2살 어린 황사영과 결혼했습니다.

 

이 해 황사영은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진사가 된 황사영에게 정조 임금은 손수 손을 잡아주며 20살이 되면 좋은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임금이 손수 잡아주신 손이라 하여 붉은 비단을 토시처럼 만들어 팔에 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무덤을 쓴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무덤을 못 찾고 있었는데, 송추 선영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발굴할 때 비단 토시가 들어있는 청화백자와 돌로 된 십자가 등이 나왔다고 합니다.

 

시대를 거스르기는 했지만, 집안에서 보면 보기 드믄 수재이고, 다정다감한 자손이었을 겁니다.

그의 무덤에 붉은 비단토시를 저렇게 고이 묻어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갔습니다.

 

 

- 황사영 묘지에서 나온 토시함과 설명

 

 

정난주 마리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황사영에 대하여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송추 부곡리 선영 밑에 있는 황사영의 묘

 

 

황사영이 묻혀 있는 송추 부곡리 부근 지도 

 

 

황사영(1775년 영조51∼1801년 순조1)은 송추 부곡리에서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황사영의 집안은 남인 계열로 알려졌습니다.

 

황사영(黃嗣永, 1775년 영조51∼1801년, 순조1). 초기천주교회의 신자·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산데르, 자는 덕소(德紹).

 한림학사 석범(錫範)의 유복자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정약종(丁若鍾)을 사사하였다.

  

1790년(정조 14) 1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였다.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진지한 토론 끝에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입교 직후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단하고 관직 진출을 단념하였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난 뒤 그의 측근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798년 경기도 고양(? 양주의 오기인 듯)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이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에게 시켜 1801년 10월에 떠나는 북경 동지사(冬至使)일행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3일 후인 음력 9월 29일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부도죄로 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어머니·작은아버지·아내·아들은 모두 귀양가게 되었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어려서부터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정약종(丁若鍾, 1760년 영조36∼1801년 순조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현(若鉉)·약전(若銓)·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이다.

일찍이 이익(李瀷)을 사사하여,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성품을 지녀,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가톨릭교리를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가장 교리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천주교박해로 형제와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멀리 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입국한 뒤로는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문본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우리말로 《주교요지》라는 책을 써서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 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01년 주문모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2월에 체포되고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2월 26일 이승훈(李承薰)·최창현(崔昌顯)·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정난주 마리아 무덤 원경

 

 

황사영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습니다.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29세, 그의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겨우 두 살이었습니다.

 

기록은 약간의 혼선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정난주 마리아는 연좌되어 제주도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보내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들 경한도 추자도의 관비로 보내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첫째 당시 경한의 나이가 2살로 어린 점이고, 둘째 당시 추자도에는 관청이 따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기록대로 정난주 마리아가 머리를 써서 어린 아들 경한을 추자도에 떼어 놓아 노비신세를 면하게 해 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밑의 교회 기록이 더 맞을 거 같습니다.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렀다고 한다.

  

제주도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배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헌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헌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 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 씨 집안에서는 황 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한의 묘가 있다(김병준, <황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 10.).

 

 

정난주 마리아는 남편이 능지처참 당하고, 친가와 친정(남동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음)이 대거 목숨을 잃었고, 어린자식 마저 함께 살지 못하고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유배되는 모진 시련을 겪었지만 묵묵히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오히려 노비를 관장하는 김씨 가문으로부터 "서울 할머니"라고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난주 마리아가 죽었을 때 김씨 가문에서 무덤을 만들어 주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자도에 있는 아들 경한에게 부고편지를 두 번이나 보낸 기록이 있습니다. 부고편지에는 정난주 마리아를 '대부인'이라고 호칭하는 등 존경의 표현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 두 번째 보낸 부고편지

 

 

 정난주 마리아 묘소에서 바라본 입구(멀리 희미한 봉우리가 모슬봉입니다.)

 

 

 정난주 마리아 묘소 담장에 피어난 흰 치자꽃/ 은은한 향이 습도 높은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 퍼졌습니다.

 

 

 푸르른 기장밭/ 정난주 마리아 묘를 나오니 넓고 푸른 기장밭이 나왔습니다.

 

 

올레걷기를 하면서 정난주 마리아의 묘를 들르게 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전에 장흥유원지 뒤 말머리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송추 부곡리로 내려올 때 부근에 있는 황사영 묘를 꼭 들르고 싶었었습니다.

그러나 입구가 가시 울타리로 막혀 멀리 돌아가야 해서 포기했었지요.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 그들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를 택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기꺼이 세속적인 파멸로 나아가게 했을까???

 

정난주 마리아 묘를 들러보면서 내 머리와 시야는 잔뜩 흐리고, 옅은 안개마저 낀 날씨처럼 희뿌였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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