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계획을 하고 떠난 여행과 그 여행기입니다.

5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16
    제주도 여행기 1 - 제주시내
    풀소리
  2. 2009/12/17
    겨울 서오릉(2)
    풀소리
  3. 2009/11/04
    고양 올레길(3) 걷기(3)
    풀소리

제주도 여행기 1 - 제주시내

사실 사는 것이 점점 어렵고, 지치고, 무섭기도 하다...

주변을 돌아봐도 힘겹게들 고군분투 하지만, 성과는 미미하거나 의미없는 것이 되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여행기를 올리기도 쑥쓰럽고 무안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방치된 블로그에 자그마한온기를 불어넣는다는 심정으로 포스팅을 한다.

 

---------------------

 

7월 1일 드디어 제주에 발을 디뎠습니다.

 

저에게 제주도는 아끼고 또 아꼈던 여행지였습니다.

너무나 아꼈나요.

모든 것에 적절한 시기가 있듯이, 시기를 놓친 저는 이제서야 제주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3시 15분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일행들은 늦은 시간에 오지만, 저는 제주시를 보고싶어서 비행기 시간을 늦추지 않고 그냥 제주로 향했습니다.

 

 

 용두암 가는 길

 

 

 도로변에 피어난 코스모스

 

 

커다란 야자나무 가로수.

제주에서 가정 먼저 만난 이국적 풍경입니다.

 

저는 걸어서 제주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싶었습니다.

공항에서 관광지도를 얻어 가야할 곳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용두암 - 용연 - 제주목관아 - 제주항 - 삼성혈 - 버스터미널

 

각각 의미가 있었습니다.

용두암은 각종 사진에서 워낙 많이 본 풍경이라 들르고 싶었습니다.

용연은 제주목관아 가는 길에 있기에 들르기로 한 것이고요.

제주목관아는 사실 제가 제주시 관광을 하고자 결심하게 한 주된 목적지입니다.

예전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15~1565) 스님이 이곳에 귀양와 당시 목사(牧史)인 변협에 의해 맞아 죽은 곳입니다.

최고 지성에 대한 편협한 종교적 광기에 의한 살해...

잔인하지 않은 살해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보우에 대한 살해가 전 조선역사를 통털어 가장 잔혹한 정치적 살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그렇습니다.

 

제주항은 예전부터 육지의 뱃길이 닿던 곳이기에 그곳에 가서 풍성한 상상을 하고 싶었습니다.

삼성혈은 사실 시간이 날지 안 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용두암

 

 

용두암까지 가는 길은 멀었고, 포장도로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은 높은 습도와 만나 푹푹 쪘습니다.

그래도 바닷가는 시원하더군요.

 

용두암에 다다랐습니다.

사실 저는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였지만 너무나 많이 본 풍경이었기에 그럴 겁니다.

아니면 너무나 알려진 풍경에 대한 저의 선호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용두암 근처의 조선시대 무덤

 

 

 용연

 

 

용연에 갔습니다.

제주시를 관통하는 한천(漢川)은 하류에서 바다 쪽으로 깊은 협곡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에 호수처럼 깊고 잔잔한 물이 있는데, 이곳이 용연입니다.

 

예전에 이곳에 유배 온 관리들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변방의 유력자들은 비록 당장은 변방으로 귀양을 왔지만 한 때 중앙무대의 주역이었고, 언제 다시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복귀할 지 모를 귀양객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 같습니다.

 

 

 용연 옆에 있는 정자

 

 

 용연 옆 벤치

 

 

 용연 옆 산책길

 

 

용연에서 제주목관아 가는 길목에 제주 향교가 있습니다.

이곳에도 잠깐 들렀습니다.

참 잘 보존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주 향교 내부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에 들어가는 문/ 높이가 매우 낮아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제주목관아 정문인 진해루

 

 

제주목관아에 갔습니다.

길가에 있는 커다란 정자인 관덕정은 수리중이라 온통 천으로 가림막을 쳐 놓았습니다.

옆으로 가니 정문인 진해루 문이 잠겼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관람시간이 지났답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6시 20분인데, 6시까지만 관람이랍니다.

 

세상에...

여기를 목적으로 온 것인데...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이웃에 있는 우체국 건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몇 컷 찍었습니다.

 

 

 제주목관아 사진/ 맨 오른쪽 뒤 건물이 목사가 정사를 보던 연희각입니다.

 

 

조선 사대부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블렸던 보우스님.

그러나 과연 그는 사대부들이 주장한 대로 요승이었을 뿐일까요?

 

그의 시 한편을 보지요.

 

    한적한 곳

  

    암자는 겹겹 구름 속

    본디 사립문도 없다네

    늘푸른 삼나무와 저녁햇살 어린 국화 하나

    서리맞은 열매 떨어지고

    스님은 여름지난 옷을 꿰매나니

    이 한적함이 내 옛 뜻이거늘

    돌아갈 길 잊고 시 한편 읊네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에 읊었다는 임종게(臨終偈)를 보까요.

 

    허깨비가 허깨비 고을에 들어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처럼 놀았네

    인간의 영욕을 다 겪고

    중의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른다.

 

    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동국대학교 역경원 ;<한글대장경> 김상일 번역)

 

그의 시에서도 보이지만 그는 당대 대표적인 지성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원자인 문정왕후(명종의 모후)가 죽자 이율곡을 비롯해 수없는 사람이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를 했고,

조정에 도달한 상소문만 1,000여 통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당시 그곳의 수령은 목사 변협(邊協)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무과를 거쳐 제법 출세한 벼슬아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곳으로 귀양 온 보우스님에게 매일 동헌 주위를 쓸게 했고,

또 매일같이 지역 무뢰배를 시켜 보우스님에게 주먹질을 하게 했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보우스님은 죽었습니다.

지성에 대한 무뢰배의 모독...

 

아무리 죄인이라도 귀양지에서 관리가 임금의 명령 없이 죽이면 큰 죄가 됩니다.

죽은 지 몇 달 뒤 보우의 죽음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지만, 변협은 죄를 받지 않습니다.

임금은 노했지만, 당시 관리들은 모두 변협을 감쌌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목관아의 동헌자리인 연희각을 바라봅니다...

지금도 힘겹게 비질을 하는 한 노인이 보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겨울 서오릉

그저께(12월 15일, 화) 생활권 주변에 가족들이 쉴 수 있는 숲길을 만들고 있는 덕양구 공무원들이랑 서오릉에 갔었습니다.

 

저는 서오릉을 참 좋아하는데, 이곳에 간 건 참 오랜만인 거 같습니다.

왕릉이라 잘 알려졌고,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자주 가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서오릉 안내도/ 노랑길로 창릉까지 가서 빨강길로 따라가다 파랑길 갈래길에서 익릉, 수경원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총 5km 정도 걸은 것 같습니다.

 

1) 경릉 - 덕종(추존)과 비 소혜왕후(추존) 한씨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로 태어났으나 20세에 돌아가시고(1457) 뒤에 그의 아들 성종이 즉위 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서 월산대군과 성종형제를 두었으나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라 일컫게 되었다.

 

2) 익릉 - 숙종의 원비 인경황후 김씨(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숙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 6년(1680) 경희궁에서 20세에 승하하였다.

 

3) 창릉 -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1498)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세조3년(1457)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세조 14년(1468)에 즉위하였다. 안순왕후는 우의정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로서 예종 즉위년(146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4) 명릉 - 숙종(1674-1720)과 그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그리고 제 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쌍분으로 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옆에 따로 있어 같은 언덕에 배치된 형식이다. 숙종은 현종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8년(1677) 세자로 책봉되었고 예론이 한창 일어나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때 인현왕후 민씨를 몰아낸 사건을 겪었으나,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등 업적을 남겼다.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 7년에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숙종 15년 왕자 균(뒤의 경종) 책봉 문제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당하였으나, 후에 장희빈이 몰락하면서 복위된(1694)뒤 35세로 승하하였다.

 

5) 홍릉 - 영조(1724-1776)의 비 정성왕후 서씨 능이다.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서 경종 원년 (1721)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왕후는 소생이 없이 영조 33년에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6) 수경원 -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산소이다. 영빈 이씨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영조 40년 69세로 승하하였다.

 

7) 순창원 - 명종(1545-1567)의 원자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산소이다. 순회세자는 명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에 승하했고, 공회빈 윤씨는 윤옥의 딸로서 선조 25년 (1592년) 3월 3일 승하했다.

 

8) 대빈묘 -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1701)의 묘이다. 숙종은 궁녀 장소의에게서 숙종 14년에 왕자 균(경종)을 얻어 이듬해 균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장소희를 희빈으로 대하였다. 그후 왕비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이를 후회하고 숙종 27년 (1701)에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은 사사되었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는데 1969년 6월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 기념비

 

 

서오릉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 기념비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 처음으로 왕릉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 왕릉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곳엔 당쟁과 환국, 왕비의 교체 등 긁직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인물인 숙종과 그의 왕후들, 한때 왕후였던 장희빈의 무덤이 모두 모여 있어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울러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영빈이씨의 수경원도 이곳에 있습니다.)

 

왕릉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곳은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그 사이로 난 길들이 평탄하면서도 길어 참 걷기에도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서오릉 들머리

 

대빈묘/ 비운의 주인공 장희빈의 무덤입니다. 무덤 뒤의 소나무가 자란 바위가 유명해졌죠?

 

대빈묘에서 창릉 가는길

 

서오릉의 서쪽 끝 창릉/ 창릉 때문에 창릉동, 창릉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창릉을 끼고 외곽으로 산림보호길이 있습니다. 그곳은 가장 먼 길이지만 지금은 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창릉 앞에서 우회전하면 위의 지도에 나타난 빨강색길입니다. 이 길에는 인공 구조물이 전혀 보이지 않고, 숲이 잘 가꾸어져 있는데다 길이 산의 경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서 서오릉을 자주 찾는 이들이 참 좋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창릉 에서 시작되는 외곽 산책길

 

조금만 올라가면 이런 길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산을 그대로 두면 서어나무가 숲의 주인이 될 거라고 합니다. 이곳은 서어나무가 절반쯤 점령했습니다.

 

산림순찰로와 마주치는 지점에 있는 안내판/ 이런 안내판이 군데군데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왕릉 중간에 있는 커다란 맷돌 흔적/ 왕릉에서 썼을까요? 아님 왕릉이 들어서기 전 민가에서 썼을까요? 

 

 

다른 왕릉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곳도 소나무가 참 좋습니다.

저는 높이높이 솟은 소나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서오릉 소나무 

 

왕릉 곁으로 갈수록 키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왕릉 옆 소나무숲

 

소나무에 둘러싸인  익릉 

 

 

눈 왔을 때 서오릉 번개 함 할까요?

 

눈덮힌 서오릉/ 문화재청 홈페이지

 

고양올레길 만드는 사람들

http://cafe.daum.net/gyoll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고양 올레길(3) 걷기

지난 일요일(11월 1일) 고양 올레길을 걸었다.

이번에 걸었던 구간은 세 번 째 개척한 길이다.

이름하여 고양 올레길 3.

 

올레길 걷기에 참가한 사람들

 

 

전날 비가 많이 와 '몇 명이나 올까', '길은 괜찮을까'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래도 많이 왔다.

전체 20명이 나와서 본격적으로 걷기를 함께 한 이들은 16명이다.

 

고양 올레길 3/ 총 길이 13km가 넘는 꽤 긴 구간이다.

 

 

'올레길 3'은 이전에 걸었던 곳보다 걸이가 약 3-4km 길다.

시간으로는 1시간 정도 더 걸릴 수 있고, 힘들어 하는 이들도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단풍이 절정이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걷자고 생각했다.

 

출발지인 성라공원 입구

 

 

원당역을 벗어나면 바로 성라공원이다.

성라공원은 어울림누리에서 국사봉 일대에 걸친 공원이다.

 

국사봉은 일명 성라산(星羅山)이라고도 하고 우리 말로는 별아산이라고 한다.

산에 오르면 밤하늘에 별들이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산 높이로 따지면 왠만한 빌딩보다도 낮지만,낮은 구릉을 넓게 품고 있어 숲이 참 넓다.

숲이 넓으니 성라공원만 돌아도 운동이 될 정도다.

 

성라공원 안에 있는 유일한 찻길/ 국사봉 정상에 있는 군부대 가는 길이다.

 

성라산 공원 산책길

 

 

이번 올레길 걷기는 처음에 계획했던 길을 조금 수정했다.

올레길을 만들면서 '될 수 있으면 흙길을 걷고', 그리고 '옛날 동네길을 걷자'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단풍과 늦가을을 좀 더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길을 수정했다.

 

아스팔트가 있어서 고민했던 길/ 물론 외곽도로라 차들은 거의 안 다닌다.

 

외곽도로 옆 풍경/ 전형적인 농촌풍경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홍도동 천변길

 

은행나무잎이 깔린 길에서는 다시 10대 소녀로 돌아가고...

 

은행나무잎들과 놀다보니 일행은 저만큼 멀어지고...

 

산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놓인 전봇대 다리/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들 건넜다.

 

낙엽 가득 쌓인 산길

 

산길

 

멋진 원흥동 느티나무

 

원흥동 마을 텃발옆 나팔꽃

 

조선시대 대표적인 사랑이야기의 주인공 심희수와 일타홍의 무덤

 

 

산길을 내려가면 원흥동 마을이다.

야산으로 폭 쌓인 마을이라 큰 길에서는 보이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마을이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우리나라에 청자가 처음 생산되었던 시기인

신라말, 고려초기의 청자 가마터가 넓게 자리잡고 있고,

을사늑약 당시 대포를 앞세우고 기세등등한 이토 히로부미에 맞서

끝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당시 수상대리격인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표적인 로맨스의 하나로 꼽히는 주인공인

심희수와 일타홍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우리는 심희수의 무덤에서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더듬으면서 간식을 먹었다.

 

 

대규모 택지조성공사를 하고 있는 삼송지구 안길

 

고종의 후궁이었던 귀인장씨 묘터를 바라보며/ 올해 조선왕릉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올 6월에 한양CC 권역에 있던 귀인장씨 묘를 이장했다.

서삼릉이 복원되더라도 이곳만은 제외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이권이 강하게 작용했겠지...

 

 

삼송지역에 맞대고 있는 곳이 서삼릉 지역이다.

서삼릉 지역은 생각만 해도 속이 터지고 슬프다.

서삼릉은 원래 100여만평의 넓은 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7만평이 조금 넘고, 그것도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지역은 2만 4천평밖에 안 된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한쪽을 뚝 떼어서 한양CC를 만들고, 또 한쪽을 뚝 떼어서 뉴코리아CC를 만들었다.

 

거기서가 다가 아니다.

릉 바로 코앞에 종마장을 만들고, 젖소 목장을 만들었다.

 

골프 클럽에서 '나이스 샷'을 외치고,

돌아가는 길에 주막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면서 서민인척 했던,

나라를 다 가진듯 기고만장하던 그들의 모습이 선하다.

 

만추의 서삼릉-농협대길

 

서삼릉 미공개지역

 

미소마을에서 기다리던 점심을

 

우선 동동주부터 한잔씩

 

우리도 건배~

 

미소마을에서 배다리술박물관 오는 길/ 이 길도 참 운치가 있다.

 

 

꽤 긴 길이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