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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9
    함양 상림(上林) 숲
    풀소리
  2. 2009/10/27
    봄이 오는 집(8)
    풀소리
  3. 2009/10/26
    지리산둘레길(8)
    풀소리

함양 상림(上林) 숲

함양 '상림(上林) 숲'에 다녀왔다.

 

상림은 내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곳 여행목록에 늘 있었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이준 선배네 집에 다녀올 때 떠나는 우리를 보고 이준 선배가

'가을 상림이 참 좋으니 들렸다 가라'고 했고, 다행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인엽도 흔쾌히 동의해서

바라고 바라던 상림에 갈 수 있었다.

 

함양 상림 숲

 

 

상림 숲.

눈으로 보기 전에 귀로 더 많이 들었던 숲이다.

하천 홍수를 막기 위해서 조림된 숲이고,

도심 한 가운데 커다란 숲이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컷었다.

 

그러나 상림에 도착했을 때 내 눈앞에 보인 건

커다란 숲보다는 수많은 인공 시설물들이었다.

 

위천 제방에 가꾸어진 상림/ 남아 있는 숲은 1.6km에 약 6만 평이라고 한다.

 

 

나는 눈에 거슬리는 인공 시설물을 내 감각 속에서 소거해버리고 보기로 했다.

그래야 천년을 지켜온 상림의 내밀한 모습이 보일 것 같았다.

 

상림 숲은 이제 막 가을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뭍어나는 커다란 나무들이 많고,

120여종의 나무가 자란다고 하니 숲의 생태계도 건강하다는 증거이리라.

 

천여년의 세월,

식민지 시절과 잔혹한 한국전쟁

특히 이른바 '새마을 운동'과 같은 무차별적인 개발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를 거치면서도

이만한 숲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상림 숲은 원래 지금은 없어진 하림과 합쳐 총 6km 구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남아 있는 건 겨우 1/3도 채 되지 않는다.

함양 들이 아무리 넓다고 하여도

천여년 전에 이런 커다란 숲을 만들었다는 건

그 시절 사람들의 상상력과 배포가 남다랐을 것 같다.

 

위천변의 상림 숲

 

위천의 관개수로는 상림에서 냇물 구실을 하고 있다.

 

 

상림 숲을 거닐다가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연리목(連理木)이었다.

 

연리목(連理木)/ 비슷한 크기의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을 맞대고 자라 한 나무가 되었다.

 

 

나무 가지가 위에서 붙어서 한 나무가 되는 연리지(連理枝)는 지난 번에 본 바가 있는데,

연리목(連理木)도 있구나...

 

연리목을 잡고 기도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단다.

의미 붙이길 좋아하는 이들은 만든 말이겠지만, 이 나무를 잡아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메말랐고, 또 한편 누구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반증일까...

 

괴산에 있는 소나무 연리지

 

 

당나라의 대 시인 백낙천이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長恨歌)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을 때

당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장한가의 끝 구절로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하신 말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간 데가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이다...

 

 

상림 연꽃 공원의 수초/ 몇뿌리 남은 연잎이 물 위에 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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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집

산청 이준 선배네 집에 다녀왔다.

지난 금요일(10월 23일)에 도착해서 일요일(10월 25일) 아침에 돌아왔다.

 

앞 밭에서 본 이준 선배네 봄이 오는 집 

 

봄이오는집 문패와 편지함/ 물론 용도는 다양하다~

 

 

이준 선배는 지난 8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이 있는 산청으로 낙향(?)했다.

산청 간디학교 근처 둔철마을에 있는 이준 선배네 집은, 집도 아름답고, 주변 풍경도 수려하다.

 

나는 선발대로 출발하였지만, 짧아진 해 때문인지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다.

둔철고원은 해발고도 400m가 넘는 고원 분지이다.

그만큼 하늘이 가까워서일까, 도착하니 하늘엔 별이 가득하고 은하수도 보인다.

 

우리는 짐을 풀고 별구경을 나왔다.

별똥별이 떨어졌다.

별똥별을 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데,

별똥별이 떨어지는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했다.

정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빌려면 포스트잇에 소원을 적어서 손에 들고 있다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다 척하고 붙여야 할 것 같다.

 

어찌됐든 올해 초에 왔을 때 별똥별이 떼로 떨어지는 유성우가 내린다고 해서

잠도 설치며 목이 뻣뻣해질 때까지 하늘을 봐도 별똥별 하나 못본 이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대부분 별똥별을 또렸이 봤다.

 

아이들은 일어나자마자 감을 땄다.

 

나와 태하네는 텃밭의 배추를 묶었다.

 

울타리 근처에 피어 있는 쑥부쟁이가 아름답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장대를 들고 감을 땄다.

태하네와 나는 배추를 묶었다.

 

아침을 먹고 동네 마실을 갔다.

외지에 살다가 이 동네로 함께 이사온 이들이 마을을 만들었다.

이집 저집 집들 모양도 제각각이고, 사연도 다 다르다.

 

봄이 오는 집 아침/ 대부분 이곳에서 나는 재료로 만들었다. 특히 갓의 향과 맛이 참 좋았다.

 

집집마다 모양도 사연도 다 다른 둔철마을 이주민들의 마을

 

옆의 토박이 할아버지네 집 키위는 가꾸지 않아 이미 야생이 되어버렸다.

 

텃밭에서 따온 호박/ 이 호박도 하나씩 가져왔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지리산 둘레길로 갔다.

백무동 가는 마천에서 짜장면을 먹고, 노루목 장항마을로 갔다.

장항마을에서 중군마을까지 5.4km 구간, 특히 황매암까지의 3.4km 구간은 숲길이 좋아

이준 선배가 가장 추천하는 길이라고 했다.

 

(둘레길 걷기 이야기는 http://blog.jinbo.net/jium/?pid=827)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오리구이도 먹고,

돌아와서는 술도 마시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함께 보기도 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 이브라힘/ 까만 얼굴이 사진으론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비록 아이들은 빠졌지만 말이다.

 

일찍 돌아와야 하는 태하네는 곧장 집으로 출발하였지만,

우리는 단풍이 제철인 함양 상림으로 향했다.

 

단체사진/ 이준 선배는 그 사이 얼굴이 많이 탔다.

 

 

2박 3일,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좋았지만, 봄이 오는 집엔 너무나 많은 폐를 끼쳤다.

그래도 싫은 내색 전혀 없이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환영해주고,

함께 해주신 이준 선배와 형수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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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맛을 아주 쪼금 보고 왔다.

 

지난 금요일(10월 23일) 산청 간디학교 근처 둔철에 사시는 이준 선배네 집에 갔다.

이준 선배는 올 8월 회사를 그만두고 둔철로 완전히(?) 내려왔다.

 

이준 선배가 회사를 그만두고 내려가면서 '한번 내려오라'고 문자를 보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몇몇이 의기투합했고,

결국 성인 6명, 아이 4명이 참가하는 대단위 원정단(?)을 꾸려

이준 선배네 집으로 쳐들어 간 것이다.

 

산청 이준 선배네 '봄이오는집'

 

 

도착 다음날,

이준 선배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고민하다가 지리산둘레길을 가지고 했다.

나는 '완전 ' 환영이다.

 

집을 나서서 마천을 지나 노루목(장항마을)으로 갔다.

장항마을에서 황매암을 거쳐 중군마을까지의 산길, 숲길은

이준 선배가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간이라고 했다.

 

장항마을 둘레길 이정표

 

 

장항마을 둘레길 이정표 가는 길에도 사람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정표를 조금 오르면 느티나무들이 몇 구루 있는데,

이곳에서는 둘레길 걷는이들에게 막걸리와 간단한 요기를 파는데, 이미 왠만한 시장이 되어 있었다.

와~ 둘레길 완전 대박이다~

 

이미 장터가 되어버린 장항마을 둘레길 초입

 

400살이 넘었다는 장항마을 당산소나무

 

 

노루목에서 출발하는 길은 경사가 급해 들길 걷는 것 보다는 등산하는 맛이 났다.

비탈밭에는 주로 고사리를 키웠고, 밭둑에는 붉나무가 붉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수도권에선 보기 힘든 산국이 군데군데 흔하게 피어 있었다.

 

장항마을 둘레길 초입의 고사리밭과 붉나무, 그리고 노란 산국

 

길섶에도 산국이 많이 피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데도 누구도 꽃을 따가지 않았다.

 

 

산길 꼭대기는 배넘이고개이다.

옛날에 이곳에 배를 대었다는데, 뭍이 솟아올라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돼었든 배넘이고개부터 길은 완만하다.

 

배넘이고개 오르는 산길

 

배넘이고개마루에 있는 커다란 개서어나무가 길손들의 쉼터를 만들어주고 있다.

 

배넘이고개를 넘어서는 길이 완만하다.

 

붉은 산벚나뭇잎과 노랑 서어나무잎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다.

 

흐르는 물을 그냥 마실 수도 있고, 손발도 시원하게 씻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쉼터를 만들어주는

계곡 물

 

황매암 가는 길에 잠깐 나온 포장된 임도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내려오니 황매암(黃梅庵)이 나타났다.

 

물맛이 일품이라는 황매암 석천

 

황매암 대웅전 오르는 길

 

대웅전과 저 멀리 요사채로 쓰는 것 같은 황매암

 

황매암 현판

 

해우소에서 바라본 황매암

 

 

황매암 정면에는 '塵外孤摽'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위 사진 중 처마 밑에 희미하게 보이는 현판이다.

이준 선배는 어떻게 읽고, 뜻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준 선배와 머리를 맞대고 '塵外孤摽'라고 읽는 데 성공했다.

 

뜻은???

직역을 하면 '속세를 떠나 외롭게 떨어진다'는 뜻인데,

孤摽에 많은 뜻이 있어 그렇게만 해석하기 어려운 것 같다.

 

시경에 보면 '摽有梅'라는 시가 있는데, 직역하면 '매실 떨어지니' 쯤 된다.

매실은 익어서 떨어지니 황매암의 '黃梅'는 노란 매화꽃이 아니라

잘 영글어 노랗게 된 매실인가보다.

 

속세를 떠나 보는 이 없어도 스스로 영글어 간다면, 진정 수도자의 모습이기도 하겠다...

 

황매암 해우소

 

 

화장실을 찾던 아이들이 해우소에 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온다.

들어가 봤더니 푸세식이지만, 나름 정갈하고, 또 깊이가 매우 깊어 냄새도 없다.

 

해우소에 달린 메모

 

해우소 선반에 꽂힌 책들

 

 

황매암에서 중군마을까지는 2km 거리다.

 

암자를 조금만 내려오면 비탈밭, 비탈논이 나온다.

추수를 한 논, 추수를 앞둔 수수밭, 추수한 콩을 길가에 말리고, 감나무에는 노랑 감들이 주렁주렁

정말 가을풍경이다.

 

황매암 밑에 있는 양봉(꿀벌)장

 

호젓한 농로길/ 제일 막내는 맨 뒤에 가는 6살 이안이다.

 

노란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

 

우리들의 도착지 중군마을

 

중군마을 벽화/ 잣과 꿀이 특산물인가보다.

 

지리산길 팻말

 

 

우리가 걸은 길은 장항마을에서 중간 냇물까지 2km, 황매암까지 1.4km, 중군마을까지 2km

도합 5.4km였다.

지리산둘레길로 치면 매우 짧은 구간이지만, 서울 근교의 등산길로 치면 짧은 길도 아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과 6살 이안이까지 별 어려움 없이 걸었다.

 

우리가 간 날은 토요일이라 마치 서울 근교 산처럼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평일에 오면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한다.

 

둘레길도 때로는 험하기도 하고, 호젓하기도 하니

왁자지껄 다니기보단 혼자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길 같았다.

 

이런 좋은 길을 만든 사람들도 고맙지만, 또 고마워해야 할 분들이 있다.

바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다.

이런 길을 내준다는 건 농민들이나 원주민들에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꺼이 길을 내준 이곳 주민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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