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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슬슬 추워진다

다시 밤차다. 이번에는 차를 타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폭우다. 버스는 퍼붓듯이 쏟아지는 빗길을 잘도 달리는데 갑자기 버스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멀쩡하기 이를 데 없는 볼보 버스가 새기 시작한 것이다. 천장에 있는 창문 틈새로 흘러든 빗물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떨어진다. 당황한 안내군이 와서 걸레로 닦고 수건으로 막아 봐도 그때뿐이다. 버스가 만원이라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앉을 수도 없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물세례를 받고 있다. 이 멀쩡하게 생긴 버스가 물이 새다니.. 내 자리에 물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자꾸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이 한밤의 코미디는 한 시간쯤 뒤 비가 그치고 서야 끝이 난다. 차안은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잠시 자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다.

 

카파도키아에는 페티예의 헥토르만큼이나 유명한 이가 있으니 그는 카파도카아에서 트래블러스 펜션을 운영하는 베컴이다. 본명은 베키르라는데 그저 부르기 쉽게 베컴이라 불리는 이 아저씨 역시 철저한 픽업서비스와 정가제로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이다. 헥토르와 베키르, 터키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름을 듣게 된다는 이 사람들은 같은 서비스를 주변보다는 약간 싸게 그러나 절대로 깍아 주지는 않는 전법을 고수하고 있는데 남들이 나보다 천원이라도 싸게 했다면 무조건 우울 모드(?)에 돌입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믿거나 말거나 헥토르가 자기네 회사용 티셔츠를 한국인 누군가가 달라고 해서 줬다가 거의 삼개월간 나는 왜 티셔츠 안주냐는 사람들의 항의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한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인포메이션에 부탁하자 5분도 채 안 걸려 픽업이 도착한다. 그래, 이 공짜 픽업서비스도 한국인들에게 먹혀드는 전법인 것이다^^

 

픽업온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한다. 카파도키아는 사실 지명은 아니라 버섯 모양의 기괴한 형태의 바위들이 밀집해 있는 여러 도시를 통칭해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는 카파도키아 안에 제 이름이 있는 여러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괴뢰메라는 마을에서 묵게 되는데 이 마을 역시 마을 전체가 버섯 모양의 봉우리로 되어 이루어져 있다. 화산 폭발로 인해 날아온 화산재가 바위산을 덮었다가 설로 다른 풍화 작용 탓에 만들어 졌다는 이 봉우리는 봉우리의 모양만으로도 신기한데 옛날 로마 시절 박해를 피해 피난 온 기독교도들이 그 안을 파고 주거시설과 교회 등을 만들아 놓아 그 신비함이 한층 더 느껴지는 곳이다. 당연히 숙소의 방들도 이 바위 모양의 봉우리들을 파서-혹은 이미 파져 있는 것을 보완해서-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괴뢰메의 숙소들의 대부분은 케이브펜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동굴 방들은 약간 어둡고 눅눅하긴 하지만 따뜻하고 운치가 있다.


파샤바, 버섯 모양의 바위들


이 바위들을 파서 교회나 주거 시설로 사용했단다.   

 

이곳에 오니 제법 쌀쌀하다. 이곳이 다른 곳보다 약간 일찍 추워지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9월 중순인데.. 좀 당황스럽다. 한낮에 쏟아지는 햇살이야 여전히 따갑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로 한기가 몰려온다. .. 사리아와 요르단까지 내려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좀더 빨리 움직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카파도키아에서 도착한 날부터 라마단이 시작된다. 무슬림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라마단은 일년에 한 번, 한 달간 해가 뜨고 나서 해가 질때까지 전체 무슬림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는 단식 기간이다. 독실한 무슬리들은 침도 섬키지 않는다는 이 기간엔 술이나 담배도 당근 삼가야 한다. 터키야 널럴한 이슬람 국가인데다 그나마 관광지에선 식당들도 다 연다고는 하니 큰 걱정은 안 되지만 다른 사람들 굶고 있는데 아구아구 먹는 것도 못할 노릇이니 이거 춥고 배고픈 나날들이 한동안 이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하도시, 서서 다닐 수 있을 만큼 넓다


셀리메 빌리지, 스타워즈의 촬영 장소란다

 

일행들과 함께 그린투어를 가는 날 아침부터 비가 추적거린다. 그린투어는 카파도키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돌아보는 투어인데 지하도시나 으흘랄라 계곡 등 혼자서 가기엔 교통이 애매한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 거의 모든 여행자가 한번은 다녀오는 투어이다. 일단 전체적으로 돌아본 뒤 나머지 것들은 천천히 산책삼아 돌아보자 싶어 도착한 다음날 신청을 했더니 날씨가 이 모양이다. 오전에 버섯 바위 몇 개와 지하도시를 둘러본다. 박해를 피해 온 초기기독교인들이 건설했다는 지하 도시는 그 규모가 굉장하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지하 6층 규모의 만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었다는 이 데린쿠유 지하도시 외에도 서너개의 지하도시가 더 있다고 한다. 주거시설은 물론이고 교회며 학교까지 갖추어진 이곳은 겨우 한층의 일부만 돌아보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자꾸 베트남에서 보았던 구찌터널이 오버랩된다. 하긴 이곳은 서서 걸어다닐 정도는 되는데.. 외부의 탄압에 막선 인간 의지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경이로운 한편 오죽하면 이런 곳에서 생활했을까 싶은 생각이 마음 한켠이 아릿하다. 터널을 나오니 어느새 비는 폭우로 변해 있다. 결국 계곡 트래킹은 포기하고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 버섯 바위 몇 개를 더 보고 도자기 공장-판매가 주목적인- 들러서 돌아온다. 하루지만 투어는 정말 고역이다. 이제부터 슬슬 주변이나 산책하며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침마다 관광객을 태운 벌룬이 계곡 위로 날아 오른다


러브밸리에서 본 일몰, 멀리 우치히사르성이 보인다.

 

나머지 날들은 동네를 산책하거나 숙소에서 놀면서 보낸다. 숙소 손님의 칠팔십 퍼센트는 한국인이다. 대부분 이삼일 머무르다 떠나는 사람들이라 한동안 있으면 사람들이 들고 나는데 무감해진다. 각자야 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일텐데 이상하게 모아놓으면 비슷한 무리들로만 기억이 된다. 이삼일 머무르던 내 일행들도 동부로 떠난다. 어차피 바쁜 일정인 것이다. 다행이 이곳에서 훈자에서 만났던 친구를 다시 만난다. 일본에서 한국어 강사를 한다는 이 친구, 중앙아시아 쪽으로 올라가려고 터키에 왔다가 이곳에 발이 묶여 한달 가까이 머물고 있다고 한다. 영어, 일어는 물론이고 약간의 터키어까지 구사하는 이 친구는 방값을 내지 않는 조건으로 숙소의 일을 거들고 있어 사람들이 투어를 나간 낮에는 그저 커피나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일단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몇군데 비자를 신청해 두긴 했는데 터키어에도 관심이 생겨 몇 달간 터키어 공부나 할까 고민 중이란다. .. 나도 터키에 확 눌러 앉아 버려.. 아니다. 난 터키어에 별 관삼이 없지^^

 

첨에 그리도 신기하던 카파도키아의 풍경들이 익숙해질 무렵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이곳만 지나면 슬슬 시리아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일단 넴룻을 거쳐 산리우르파, 하란을 거쳐 시리아 국경으로 내려가는 코스다. 넴룻은 날이 추워지면 투어프로그램이 끊긴다는데 너무 늦어지면 안될 것 같지만 혼자서는 또 투어가 쉽지 않다니 고민이 된다. 어찌할까 하고 있는데 넴룻을 거쳐 동부로 간다는 한국 남자 한 분이 등장한다. 일행이 생겼으니 또 움직이기로 한다. 어차피 하루 이틀 더 있어도 움직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듯싶다. 한국어 강사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한다. 여행에서 만나는 인연이란 또 그만큼이라는 걸 나보다 더 잘 아는 그 친구도 담담하게 인사를 한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보게 되겠지.. 그러면서도 가끔씩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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