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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6/20
    <델리> 더위는 여전하다(12)
    제이리
  2. 2006/06/20
    <바라나시2> 조금씩 무심해진다(3)
    제이리
  3. 2006/06/20
    <바라나시1> 미음이 무겁다(4)
    제이리
  4. 2006/06/20
    <고락푸르> 기차표 사다 죽을 뻔 했다(3)
    제이리

<델리> 더위는 여전하다

 

저녁 6시 30분에 바라나시 출발해 아침 8시 경이면 델리에 도착한다던 기차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뉴델리역에 들어선다. 인도에서 기차 연착이란 대단한 화젯거리도 못 되어서 누구는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차가 아직 안 떠났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저 담담한 걸 보면 4시간 연착 가지고야 명함도 못 내밀 일이긴 하지만 에어컨도 없는 기차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냥 몇시간씩 갇혀 있어야 하는 일은 그저 황당한 일을 당할 때 여행자들이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여긴 인도잖아요^^-로는 용서가 안 되는 맘이다. 그래도 어쩌랴.. 그저 배낭을 메고 내리니 델리의 더위 역시 만만치 않다. 다행히 델리의 여행지 거리인 빠하르간지는 뉴델리역 바로 앞에 있어 릭샤들과 실랑이는 안해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혼잡하기 그지없는 역을 빠져 나와 역시 혼잡하기 그지없는 빠하르간지로-대체 인도에는 무슨 사람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로 들어서니 이곳 거리 역시 쓰레기며 오물 천지다.


바라나시의 한국인들이 추천해 준 숙소에 짐을 푼다. 날이 더워 에어컨을 쓸까도 했지만 인도는 이상하게 같은 방이라도 에어컨을 사용하는 경우에 그냥 팬만 쓰는 것의 두 배 이상의 방값을 요구하는 지라 그냥 팬으로 견뎌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내가 쓴 객실의 경우 팬만쓰면 6,000원 가량인데 에어컨을 틀면 거의 14,000원 정도를 내야 한다- 그러나 팬에서 더운 바람만 나오고 방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더위를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밥 먹으러 찾아간 한국인 식당들도 대부분 그냥 건물 옥상에 있는 곳들이라  더위를 고스란히 견디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밥을 먹고 돌아와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그냥 방에서 지낸다. 그날 일기 예보에서 알려준 델리의 온도는 무려 42도다. 말이 42도지 아마 사우나를 제외하고 일상에서 느껴 본 가장 높은 온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여튼 추위도 문제지만 더위도 여행엔 만만치 않은 적수다.


델리의 여행자 거리, 빠하르간지


지금은 인도는 망고가 제철이다.


그래도 담날에는 비자 신청을 위해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다행히 아침부터 비가 조금 내리더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먼저 이란 비자를 받기 위해 필요한 레터를 받으러 한국대사관으로 간다. 네팔의 한국대사관에서는 한국인 직원은 코빼기도 볼 수 없더니 이곳 델리에서는 한국 직원이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콜라도 한잔 얻어 마시며 잠시 기다리는 사이 간만에 한국TV도 보고 여튼 편안한 분위기다. 한국인 직원은 레터를 건네주며 집에 자주 전화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한해에 인도대사관에만 150여건의 실종신고가 들어오는데 대부분 집에 전화를 안 해서 생긴 일이라면서 주변 여행자들에게도 꼭 전해달란다. 흐믓한 맘으로 한국대사관에서 나와 이번엔 중국대사관으로 향한다. 친구는 파키스탄에서 다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중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중국 대사관은 비교적 한산하여 금세 일이 끝난다. 다음은 이란대사관이다. 이란대사관 역시 신청서 두장을 작성해 사진과 함께 제출하니 다음주 금요일에 오란다. 여튼 대충 비자 신청은 끝낸 셈이다.


비자를 찾는 날까지 대략 일주일이 남았으니 좋으나 싫으나 델리에서 일주일은 보내야 하는데 그래도 델리는 수도라 그런지 이곳저곳 갈 곳은 많다. 유적지도 찾아보면 이래저래 꽤 되는 모양이지만 이 더위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여행자 거리에서 가까운 델리 중심가인 코넛 플레이스에 나가 냉방장치가 된 커피숍이며 레스토랑, KFC, 맥도날드 등만 찾아다닌다. 인도 물가를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한국 가격으로 환산해보면 여튼 한국보다는 싼 게 사실이라 큰 부담은 없다. 이곳에는 영화관도 있어서 하루는 인도 영화를 보러 간다. Fanaa라는 영화인데 대략 우리나라의 쉬리와 비슷한 내용이다. 어느날 델리, 스리나가르에서 온 여자가 어떤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남자는 인도에 투입된 파키스탄의 스파이였던 것이니.. 결국 남자는 폭탄테러의 임무를 완수한 뒤 죽음을 가장해 떠나고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작전 중 부상을 당한 남자가 우연히 그 집 앞에 쓰러지고.. 하는 그렇고 그런 얘기다. 힌디로 대화가 진행되지만 내용상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고 인도 영화 특유의 흥겨운 뮤지컬들이 삽입되어 세시간이 넘는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극장이 너무 좋아서인지-우리나라 멀티플렉스 저리 가라다- 영화를 보면서 노래도 따라 부르고 심지어 춤도 춘다는 인도 영화팬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건 좀더 작은 도시에서나 가능하지 싶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헤나를 해 본다, 손바닥


손등, 한 열흘이면 거의 지워진다.


델리에서 딱 하루, 그래도 왔으니 유명하다는 곳 한두 곳 정도는 가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가이드북을 뒤져 붉은성(레드포트)과 그 근처에 있는 자마 머스짓을 보러 간다. 레드포트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서 성전체가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타지마할을 지은 샤 쟈한이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천도하기 위해 지은 성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천도를 채 끝내지 못하고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폐위되어 아그라성에 유폐되고 말아 결국 아우랑제브가 이 성의 주인이 된 셈인데 그가 무글제국의 마지막 왕이니 그 영화가 오래 가지는 못했던 듯싶다. 게다가 인도가 영국을 대상으로 항쟁을 계속할 때 영국군의 공격으로 페허가 되다시피 했다니 지금으로서야 온갖 보삭으로 치장되었던 그 당시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대리석 건물의 흔적만으로도 그때의 화려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더위를 피해 느즈막히 출발했건만 햇살은 여전히 따가워 한시간 여 만에 레드포트를 빠져 나와 인도 최대 규모의 모스크라는 자마 머스짓으로 걸어간다. 모스크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배경삼아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막상 도착하니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나 있어 모스크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단다. 좀 아쉽긴 하지만 인도만 지나면 보이는 건축물들이 죄다 모스크일텐데.. 위안하면서 숙소로 돌아온다.


레드포트


자마 마스짓, 역광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는..


이렇게 며칠을 빈둥거리다 날짜가 되어 비자를 찾으러 다시 대사관으로 간다. 비자피만 은행에 내면 그 날로 발급해 줄줄 알았더니 비자피 영수증을 챙긴 대사관 직원은 다시 월요일에 다시 오란다. 금요일에 비자를 받을 줄 알고 토요일 밤차를 끊어 놓았다며 예매한 기차표까지 보여줘도 원래 2주 걸리는 걸 특별히 월요일에 해 주는 거라며 대사관 직원도 막무가내다. 별 수 없이 돌아와 수수료까지 물고 예매한 기차표를 환불한다. 원래 기차표는 암리차르행으로 델리 거쳐 바로 파키스탄으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월드컵 축구를 무척 보고 싶어하는 친구의 일정에 왕창 차질이 생긴다. 결국 월드컵 축구 한국전을 보기 위해-물론 같이 다녔던 신혼부부의 꼬임에 넘어간 탓도 있지만- 암리차르행을 포기하고 다람살라행 버스를 끊는다. 다행히 월요일에는 비자가 나와준다. 그날 저녁 결국 국경도시인 암리차르가 아닌 티벳 망명정부가 있다는 다람살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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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2> 조금씩 무심해진다

 

바라나시의 평균 온도는 대략 40도를 오르내리는 듯 도무지 낮에는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담날 아침부터 생각나는 단어는 무거움이나 아득함이 아니라 그저 덥다이다. 그랬던 것 같다. 그저 담담해지려고 나가 본 강가도, 익숙해지려고 나간 골목길도 도무지 다니기 힘든 온도가 계속된다. 더워더워 하다가 그저 숙소로 돌아온다. 물론 숙소도 시원하진 않지만 그나마 볕이라도 안드니 그래도 바깥보다는 조금 낫다. 이곳 숙소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어서인지 꼭 이곳에 묵지 않더라도 다양한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인도 여행의 비수기인 5월임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연령층의 한국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인도에서 3년 동안 살았다는 남자와 첫 여행에서 그 남자를 가이드로 만나 사랑에 빠져 두 번째 인도로 온 여자, 인도로 신혼여행을 온 새내기 부부, 도로공사에서 회사 연수차 왔다는 직원 일행, 그리고 시따르, 따블라, 반수리 등의 인도 전통 악기를 배우는 바라나시 죽순이 언니들이 끼니때마다 바꿔가며 얼굴을 보인다. 이곳 인도는 장기 여행자 아니면 수차례 다녀간 여행자들이 많아서 인지 적당히 수다를 떨고 적당히 정보도 나누다 또 적당하게 일어서는 미덕이 몸에 배인 듯 그저 편안한 분위기다.


아침에만 여는 4루피(100원)짜리 탈리집


꽃불(디아)을 파는 부자


가끔은 더위를 피해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보트를 탄다. 강가에 다가면 거의 예외 없이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물건을 팔려는 사람, 마사지를 권하는 사람 아님 그냥 저팬? 코리아?를 묻는 사람들로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는데 그 중 가장 말을 많이 건네는 사람은 보트를 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다. 마담, 보트, 베리 췹 프라이스, 보트 호객꾼들은 지치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성별에 따라 마담이나 써 혹은 마이프렌드로 호칭만 바꿔가며 보트 탈 것을 권한다. 바가지로 악명이 높은 이곳에서도 그들이 부르는 가격은 그리 높지 않다. 대체로 4인 정도가 1시간가량 타면 50에서 60루피 정도를 주는데 뭐 우리 돈으로 1500원이 넘지 않는 가격이다. 아침에 해가 막 떠오르는 때나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즈음 아무 생각없이 보트에 앉아 강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 그저 시간이 흐른다. 결국 한시간 가량 보트를 타다보면 어김없이 화장 가트를 지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신이 운구 되어 오거나 뽀얀 연기로 피어오르는 모습도 무심히 보게 된다.     


가트에서 목욕하는 사람들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들어간다


그러다 하루는 혼자 걸어서 화장 가트쪽으로 가본다. 아직 한낮이라 강변에는 호객꾼 몇을 제외하곤 순례객도 그리 많지 않다. 화장가트인 마니까르니까 근처에 가니 사람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온다. 차마 가트 안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화장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봐서 서너 구의 시신이 화장되고 있는 것 같다. 화장하는 사이사이로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로 화장터는 그저 다른 가트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돌아설까 좀더 가까이 가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 화장을 하는 것은 가족만 볼 수 있다, 여기에 있지 마라, 하지만 나는 화장터가 잘 보이는 곳을 알고 있다. 나를 따라 와라, 인터넷에서 이미 읽은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다. 따라가면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모여 있고 그들에게 박시시(기부)를 하라며 거의 협박조로 돈을 뺏는다고 하는데 그 돈이 결국 그 노인에게 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고.. 역시 예외는 없는 듯.. 귀찮아.. 하면서 사진은 안 찍었다. 화장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보고 싶은 맘이 없다. 하면서 돌아선다. 굳이 누군가 화장되는 모습을 꼭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굳이 실랑이까지 하면서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결국 화장가트 입구에서 그냥 돌아선다.


오후가 되면 갠지스강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수영교실이 열린다


수영을 배우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는 엄마들


이렇게 한차례 실랑이라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에는 맥주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데 정작 인도에서는 허가를 받은 식당이 아니면 술을 팔지 않는다. 물론 여행자 식당 같은 데에서는 몰래 술을 팔기도 하지만 모든 몰래가 그렇듯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인도에서 술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주류 판매점까지 릭샤를 타고 가서 직접 사오는 방법이 제일 저렴한데 이 또한 더위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맥주를 사와도 얼음이나 냉장고가 없으니 곧 식어버려 차가운 맥주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가방에 꽁꽁 싸온 맥주를 다시 수건으로 말아 마셔도 도무지 시원하지를 않으니 이번엔 인도위스키를 사다가 찬 콜라나 소다와 섞어 마셔 본다. 그래도 갈증은 쉬 가시지 않는다. 결국 하루는 릭샤를 타고 나가 주류 판매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온다. 오가는 인도 사람들을 죄다 쳐다보고 골목에는 파리가 들끓는데 시원한 맥주 한 병 마셔 보겠다고 한 짓이라니.. 그래도 뭐 시원하기는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누군가의 주도로 인도 전통 음악 공연을 보러간다. 그저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한명이 따블라를, 다른 한 명이 시따르를 연주하고 나머지 하나가 인도의 전통춤인 까딱댄스를 잠시 보여주는 공연인데 인원이 일정 정도 되면 의뢰를 해서 만들어지는 공연이다. 한국사람 열대여섯 명이 우르르 공연을 보러간다. 밤에도 덥긴 마찬가지여서 옥상으로 바람이 통함에도 불구하고 땀이 비오듯 흐른다. 싯따르의 연주에 이어 따블라가 이어지고 그 다음은 댄스가 이어진다. 인도의 까닥댄스는 남자가 여장을 하고 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인데 여성스러운 손동작에 비해 현란하면서도 힘이 많아 들어가는 발동작을 보니 남자 무용수들에게 전수되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다. 한시간반 가량 되는 공연을 보고 다시 밤길을 걸어 우루루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다. 같이 다니니 밤에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던 가트도 그리 무섭지 않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열린 작은 콘서트


그러다 어느 날 델리로 떠난다. 바라나시와 델리 사이에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가 있건만 이 더위에서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델리에서 그래도 시원하다는 북부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지만 흔히 가는 코스인 다람살라-마날리-레-스리나가르 코스가 대략 티벳이나 안나푸르나와 비슷하다는 소문에 것도 그냥 건너뛰기로 한다. 그래도 스리나가르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이곳은 여전히 파키스탄과 분쟁 중인데다 얼마 전 반군이 공공연히 외국인에 대한 살해를 공언한 곳이라니 아무리 가고 싶어도 참아 주어야 할 것 같다. 결국 바라나시 찍고, 델리 찍고, 암리차르 찍고 파키스탄을 넘어가는 일정이 될 것 같은데 인도가 아무리 아쉬워도 이 날씨에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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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1> 미음이 무겁다

 

열차가 바라나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경임에도 주위는 어느새 환하게 밝아 있다. 이곳 날씨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기차 안은 이미 한낮의 더위를 방불케 한다. 역시나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철로와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는 역사를 벗어나니 이번에는 릭샤들이 떼로 몰려든다. 경험 있는 일행들이 흥정을 하고 오토릭샤 두 대에 나눠 타고 여행자들이 묵는다는 고돌리아로 향한다. 릭샤를 내리자 뭐 당연한 수순처럼 가격이 원래 흥정했던 것에서 두 배로 오른다. 재밌는 건 일행의 반응인데 거의 못 들은 척 혹은 농담도 잘하네 하는 반응을 보이며 그냥 약속했던 돈만 건넨다. 그럼 또 그것만 받고 두 말은 없다. 나중에도 꽤 여러 번 이런 일을 겪게 되는데 일단 좀 더 달라고 해보는 게 거의 습관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좀만 더 줄래 뭐 아니면 말고..하는 식인 것이다.


친구가 이전에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간다. 이전엔 인도인 가족이 운영하던 곳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둘째 아들이 여행 왔던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해 거의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처럼 운영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골목길은 여기저기에 개와 소가 널부러져 있고 온통 오물과 쓰레기투성이다. 그 쓰레기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 떼며 진동하는 지린내로 숨을 쉬기도 쉽지 않다. 익히 들었던 이야기이긴 하나 직접 보니 한숨이 나온다. 밖에서 본 숙소들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여기에 어떻게 묵나 싶었는데 그나마 이 게스트하우스는 얼마 전부터 공사를 시작해 실내가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막막해진다. 가장 인도답다는 바라나시에 오긴 왔는데 대체 덥고 더럽다는 첫 인상 외에는 아무 감흥이 없다. 아니 도무지 이 도시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다. 하긴 뭐 꼭 좋아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도시라는데 그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다 싶다. 그저 편견없이 며칠을 지내보기로 한다.


골목길의 소, 이상하게 사진으로 보면 그래도 조금은 깨끗해 보인다


골목길의 개, 낮에는 널부러져 있던 개들이 밤이 되면 늑대^^로 변한다.


도착한 첫날 저녁 사람들을 따라 강가로 나가 본다. 힌두교도들의 성지, 갠지스강. 살아 이곳에 몸을 씻으면 모든 죄업이 사라지고 죽어 이곳에 뿌려지면 윤회의 업이 끊긴다고 하여 모든 힌두교도들이라면 한 번쯤은 오고 싶어 한다는 곳이다. 강을 따라 돌계단-가트라고 부른다-이 이어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사원이며 게스트하우스들이 늘어서 있는데 각 구획마다 가트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부분은 목욕 가트이지만 그 중 두 군데는 화장 가트이다. 화장터라야 그저 노천에 장작을 쌓아 놓고 시신을 태우는 것이 고작이다. 그 장작이 다 탈 때까지 때우다 미처 태우지 못한 시신은 그저 강가에 흘러 보낸다고 한다. 해질녁에 배를 타고 먼저 강 건너로 가 본다. 강 건너에는 부정한 땅이라고 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데 그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사공이 손짓하는 곳을 보니 강기슭에 시신 한 구가 보인다. 화장을 하지 않는 사람-사두, 어린아이, 임산부, 코브라에 불린 사람 등등-이나 돈이 없어 화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냥 강에 버려지는데 그중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고 물 밖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멀리서 보긴 했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다.


옥상에서 본 바라나시 전경


보트에서 바라본 가트


배를 타고 강 하류 쪽 화장가트 가려 하는 걸 친구가 말린다. 멀리서 나마 시신을 보고 난 내 표정이 영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일행 중엔 그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사람들에게 미안해져 친구에게 괜한 짜증을 부린다. 배안의 분위기는 싸해지고 친구도 맘이 상했는지 말이 없다. 강 건너에서는 하루 한번씩 강의 신에게 드린다는 제사 의식인 뿌자가 한창이고 그 옆으로는 밤낮없이 화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끊임없이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그저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소원을 담아 디아라고 하는 꽃불을 띄워 보낸다. 결국 다시 강을 건너와 뿌자 의식을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온다. 그저 다른 도시들처럼 느끼는 대로 보면 될 것을 인도에 아니 바라나시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려 해서인지 오히려 맘만 무겁고 보이는 것들이 전부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괜시리 우울한 마음이 들어 이곳에서 보낼 일이 아득해진다. 어차피 친구가 사진을 찍었던 곳이고 다시 찍고 싶어 하는 곳이라 한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쩌랴.. 그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강 건너편은 마치 사막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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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푸르> 기차표 사다 죽을 뻔 했다

룸비니를 떠나 소나울리 국경에 도착하자 먼저 정신이라곤 하나도 없는 국경 모습에 기가 질린다. 네팔은 거의 모든 물자를 인도에서 들여온다는데 그 물자를 수송하는 화물차가 도로를 가득 메운 사이로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육로 국경이라면 제법 넘어본 편인데도 내가 본 가장 혼잡한 국경인 태국 캄보디아 국경 저리 가라다. 일단 네팔 쪽 출입국신고소에서 출국 신고를 한 뒤 남은 네팔 루피를 인도 루피로 환전한다. 대충 맞춰서 썼기 때문에 환전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인도에서 넘어 온 한국 사람에게 이미 인도 루피를 얼마간 환전해 두었기 때문에 ATM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대충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혼잡은 인도로 들어서자 더 심해진다. 거리도 훨씬 더 지저분한데다 이미그레이션 마저 따로 사무실이 있는 게 아니라 처마 밑에 책상 하나 두고 있는 것이 전부다. 인도 비자는 카트만두에서 이미 받아두었으니 출입국 절차라야 입국신고서 한 장 쓰고 비자에 도장하나 찍으니 끝이긴 하지만 이런 이미그레이션은 또 처음이다. 


다시 혼잡한 거리를 걸어 바라나시 가는 버스를 알아본다. 이곳 소나울리에서 바라나시까지는 버스로 대략 10시간 걸리는 거리이고 일찍 출발한 덕에 아직 오전이니 버스를 탈 수만 있으면 저녁 늦게 바라나시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바라나시 가는 버스는 이미 떠났으며 다음 버스는 오후에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오후 버스를 타면 한밤중에 도착하게 되는데 아무리 일행이 여럿이라도 그 악명 높은 바라나시에 한밤중에 도착하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다. 결국 가장 가까운 도시인 고락푸르로 이동해 버스를 알아보거나 아니면 한밤중에 출발해 바라나시에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거나 하기로 하고 일단 고락푸르행 버스를 탄다. 버스는 두 시간여를 달리더니 다행히 고락푸르 기차역 바로 앞에 선다. 룸비니에서 같이 떠난 일행은 모두 일곱 명, 그중 다섯 명은 바라나시 갈 예정이고 둘은 델리로 떠날 사람들이다. 고락푸르에 도착해 버스를 알아봐도 역시 저녁에 떠나는 버스뿐이다. 일단 기차표를 끊어보기로 한다.


고락푸르역은 상당히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다 누가 인도 아니랄까봐 그 혼잡한 대합실에 개가 누워 자고 있지를 않나.. 떡 하니 소가 버티고 있지를 않나.. 게다가 개와 소 사이에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지를 않나.. 한마디로 무슨 난민수용소 같은 분위기다. 그 틈을 비집고 창구마다 표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대합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다행히 그 중 한 창구가 외국인과 여성 전용 창구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창구는 무늬만 외국인과 여성 전용 창구인지 현지 남성들까지 버젓이 줄을 서 있는데다 남녀가 유별이어서 그런지 창구는 하난데 줄은 남자줄 여자줄 해서 모두 두 줄이다. 일단 남자줄이 좀 짧아 보여 남자줄 뒤에 일행 하나가 줄은 선다. 그러나 줄은 창구 가까이 갈수록 엉망이 되는데다 중간에 새치기하는 사람, 아는 사람에게 표를 부탁하는 사람 등등 때문에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표 파는 속도는 왜 이리 느린지 한사람 표 파는데도 부지하세월이다. 


음식점 옥상에서 본 고락푸르역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죽치고 있었던 음식점 옥상, 무지 더웠다.


두 시간쯤 기다려도 도무지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일행들을 동원해 새치기 정리에 나선다. 일행 하나는 줄을 서고 나머지가 창구 옆을 지키고 있다가 슬며시 끼어들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슬쩍 팔로 막거나 그래도 안 되면 내놓고 뒤에 가서 줄을 서라고 한마디 해준다. 사람들이 아직은 순진한 건지 대부분은 멋쩍은 듯 뒤에 가서 줄을 선다. 그 와중에 매표소 직원과 표사는 남자 하나가 말다툼을 하는지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경비원인 듯 한 사람이 와서 창구 앞에 서 있는 현지 남성들을 모두 쫓아낸다. 멀쩡하게 표 팔때는 언제고 수틀리니까 쫓아내는 것도 황당한데 모두 항의 한마디 못하고 비실비실 쫓겨난다.


여튼 덕분에 창구 앞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는데 창구 앞은 대략 아수라장이다. 그동안 현지 남성들 때문에 표 살 엄두를 못 냈던 여성들 줄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너도나도 창구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아귀다툼이 따로 없다. 결국 남자 일행으로는 힘들 것 같아 그 줄에 내가 가세를 한다. 뒤에서 미는 여자들의 힘이 장난이 아닌데다 큰소리 반, 사정 반의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 자기가 먼저 표를 사야겠다는 것이다. 나도 두시간 이상 기다렸다니까 자기들은 세시간 넘게 기다렸단다. 사실 나도 누구 사정을 봐 줄만한 상황은 아니다. 지금 당신들 사정 봐줄 때가 아니거든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냥 무시한다. 몸싸움이라면 뭐 내가 인도 여자들 보다는 한수 위다. 다행히 주먹 하나 밀어 넣는데 성공은 했으나 그 창구에는 이미 내 것까지 주먹이 세 개이다. 다행히 내 신청서를 먼저 받아든다.


인도에서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먼저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행선지, 이름, 나이 등을 명기해야 한다. 문제는 열차편을 써 넣어야 하는데 이곳 타임테이블에는 바라나시행 열차편명이 나와 있지 않아 빈칸으로 두었더니 대뜸 열차 편명을 적어 오라며 신청서를 집어 던진다. 뒤에서는 빨리 나오라고 아우성인데 여기서 나갔다간 다시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판이니 열이 확 뻗치기는 하지만 다시 웃으면서 사정을 해본다. 열차편명을 모르겠으니 좀 알려주면 안 되겠냐고.. 한사람을 처리하고 나선 마지못해 열차편명을 불러준다. 여전히 창구에 왼손은 집어넣은 채로 오른손으로 열차편명을 쓴다. 다시 이리저리 신청서를 살펴보던 매표원이 이번에는 주소를 쓰라며 다시 신청서를 집어 던진다. 으.. 열받어.. 하지만 어쩌랴 아쉬운 건 난데.. 다시 나는 여행자고 인도 주소가 없다고 했더니 한국 주소를 쓰란다. 참 나.. 한국주소는 알아 뭣하게.. 하면서도 다시 한손은 왼쪽 창구에 박은 채로 한국 주소를 대충 적어 준다. 그동안 뒤쪽에선 다시 몰려온 현지 남성들이 빨리 비키라고 툭툭치고 뒤에서 밀고 장난이 아니다. 다행히 일행인 남자들이 뒤에서 아직 안 끝났다, 밀지 말라며 계속 싸운다. 결국 바라나시행 2등 침대칸 표를 받아쥐니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옴 몸은 땀으로 젖어 있고 거의 모든 진이 다 빠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에고 기차표 두 번만 샀다간 탈진할 것 같다^^


늦은 점심을 먹고 기다리다 밤10시 45분발 바라나시행 열차를 타러 간다. 기차역은 여전히 사람들로 발디딜 틈 조차 없다. 결국 물어물어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 넘버를 찾아간다. -인도에서는 열차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야 그 열차가 몇 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뭐 가끔 그래놓고도 다른 곳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단다^^- 간신히 기차를 찾고보니 이번엔 칸찾기를 해야 한다. 인도 기차는 등급이 다른 경우 기차칸과 기차칸 사이를 막아 놓기 때문에 아무 칸에나 올라타면 안된다는 거다. 어떤 경우는 칠판에 백묵으로 대충 써놓기도 한다는데 그래도 이번 기차는 플라스틱으로 된 표지를 걸어놓긴 했다. 대신 기차가 아주 길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 짐들고 죽어라 뛰지 않으려면 조금은 여유 있게 역에 도착하는 편이 좋다. 간신히 기차칸을 찾아 올라탄다. 바라나시에서 출발하는 기차라 다행히 자리는 비어있다. 3층으로 된 침대가 마주 보고 있는 모양은 중국 기차와 비슷한데 통로 쪽에 두개의 침대가 더 있다. 뭐 좀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셈이다. 인도 기차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이미 들을 만큼 들었지만 그래도 일행이 여러 명이니 조금은 맘을 놓아도 될 것 같다. 중간 칸에 배낭을 묶어 놓고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인도에서의 첫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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