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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1/27
    <시하눅빌> 여기도 심란하다.(6)
    제이리
  2. 2005/11/20
    <프놈펜2> 다시 혼자가 되었다.(7)
    제이리
  3. 2005/11/20
    <프놈펜1> 첫날부터 우울한 풍경이 계속된다.
    제이리
  4. 2005/11/20
    베트남여행경비 총정리(6)
    제이리
  5. 2005/11/15
    <메콩델타> 국경을 넘다.(12)
    제이리
  6. 2005/11/15
    <카오다이-구찌> 또 투어를 가다(5)
    제이리
  7. 2005/11/15
    <호치민> 베트남의 마지막 도시로 오다.(2)
    제이리
  8. 2005/11/08
    <므이네> 과음에 성공하다(12)
    제이리
  9. 2005/11/08
    <달랏> 괴짜스님을 만나다.(5)
    제이리
  10. 2005/11/08
    <나짱> 한국인들을 떼로 만나다.(6)
    제이리

<시하눅빌> 여기도 심란하다.

시하눅빌은 이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70년대 국왕의 이름인 시하눅빌로 개명되었다는 캄보디아 최대의 해변도시이다. 버스가 시하눅빌에 도착하자 대략 난감해진다. 해변이 여섯 개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대충 해변을 둘러보다 괜찮은데 짐을 풀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은 바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와르르 무너진다. 해변과 해변사이가 걸어다닐만한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빅토리와 오쯔띠알, 두 해변에 게스트 하우스가 모여 있는 모양인데 이 두 해변이 하나는 이쪽 끝이요 하나는 저쪽 끝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바다 빛깔이 그나마 더 낫다는 오쯔띠알 해변으로 간다. 이름도 빅토리 해변보다야 캄보디아스럽지 읺은가 말이다. 기사가 내려주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보니 이곳의 숙소들은 모두 바다와는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꼬싸멧의 악몽이 떠오른다.


이년 전인가.. 없는 시간을 쪼개어 휴가를 갔었더랬다. 앙코르와트를 돌아보고 나서 그래도 휴가의 한자락은 해변에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방콕에서 비교적 가까운 꼬사멧섬으로 홀로 갔다는 거 아닌가. 뭐 바다 빛깔도 고왔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도 운치 있었지만 문제는 도무지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틀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다가 나오는 날 다시 혼자는 해변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어찌어찌 또 해변에 와 버린 것이다. 사실 내 인도차이나 여행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인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의 작가 유재현의 <시하눅빌 스토리>라는 소설 제목에 끌린 바 크긴 하나 오기 전 그 소설을 결국 못 읽었으니 그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캄보디아는 갈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핑계나 대기로 한다.


오쯔띠알 해변,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첫날은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숙소에서 TV나 보고 지낸다. 일행과 시간을 맞추다보니 너무 바쁘게 다닌 탓이지 아님 선풍기나 에어컨 탓인지 딱히 감기는 아닌데 목도 아프고 몸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여행자가 못 되서 그런지 쉬는 것도 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각 같아선 맘에 드는 작은 마을을 만나면 며칠이고 쉬어가고 싶은데 막상 작은 마을이 현실로 다가오면 괜히 답답해지면서 여기서 뭐하고 지내지 하는 마음에 금세 짐을 싸게 되는가 하면 도시에선 자꾸만 움직여야 하는데 하는 초조함이 든다. 다행히 해변에서야 그리 답답할 것도 많이 움직일 것도 없어 그냥 쉬기에는 가장 적당한 장소이지만 그도 하루가 지나니 좀이 쑤신다.


결국 햇빛을 피해 아침부터 바다로 나가본다. 그저 해변이나 걷다가 햇살이 퍼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 올 생각이었다. 해변에는 제법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오쯔띠알 해변은 자국민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몇군데 되진 않지만 여태까지 가본 동남아 해변에서 늘 서양 여행자만 득시글거렸는데 여름 휴가라도 온 듯한 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더러는 버리바리 싸온 음식들을 풀어놓고 먹고 있는가하면 더러는 아이들과 함께 모래성도 쌓고, 모래 찜질도 하며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같이 갔던 여름휴가가 겹쳐지면서 이내 행복한 기분이 된다.


해변에서 노는 아이들


해변에서 노는 어른들


결국 제법 긴 해변을 끝에서 끝까지 걷고도 숙소로 들어가기가 싫어져 그냥 비치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하지만 해변에는 행복한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거의 일분에 한 번 꼴로 무언가 사라거나 돈을 달라거나 하는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다. 여기는 물건을 사라고 보채는 상인들이 거의 아이들인데 서너살짜리로 보이는 꼬마부터 제법 큰 아이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그나마 팔찌 등의 조악한 약세사리나 불량 식품 비슷한 먹을거리를 들고 다니는 아이는 좀 나은 편이고 캔이나 병 따위를 모으는 아이들이나 그냥 구걸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다. 안쓰러운 마음도 잠시 좀 지나니 누군가 다가온다 싶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래도 그냥 가는 경우는 없고 옆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는 가는데 결국 30분쯤 뒤에는 똑같은 아이와 또 부딪치게 된다.   


이렇게 앉아서 하루종일 사람구경이나 한다.


그러다 해가 진다.


해변에서 하루를 빈둥거리다 저녁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들어선다. 마침 옆자리에선 캄보디아 아저씨들이 술자리를 벌이고 있다. 옆자리 남자들은 여느 캄보디아 사람들과는 달리 배까지 나온 아저씨들이다. 그 옆에서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남자애 하나가 맥주캔이 비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 그 아이는 내가 들어가고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이삼십분을 기다려 캔 2개를 더 챙긴다. 그러더니 종업원들의 눈을 피해 주섬주섬 남은 음식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뭐 남긴 게 없는 듯 손가락으로 음식 찌꺼기 몇 개를 집어먹고 만다. 마침 입맛이 없어 밥을 깨작이고 있던 나는 이거라도 먹으라고 하려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아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왜 처음부터 접시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밥 덜어줄 생각을 안했는지 후회하고 있는 사이에 또다른 여자애 하나가 다가오더니 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까만 비닐봉지에 남은 밥을 담아서 간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저렇게 내몰까 싶어 안쓰럽다가도 애들을 이용하면 물건이 더 잘 팔리니 저러겠지.. 그러니 저 물건을 사주면 저애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저런 애들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 거야.. 라며 영악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좀 아니다 싶다. 그냥 좀 못사는 거 하고 밥을 못 먹어 배가 고픈 거 하곤 가난의 차원이 다른 거다. 그 애가 배가 고플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멍하니 있다가 계산을 하고 그 애가 사라진 쪽으로 따라가 본다. 뭐 어찌할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싶다. 하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 가득 또다른 그애들이 여전히 무언가 팔러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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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2> 다시 혼자가 되었다.

다음날 일행들이 아침 일찍 일행들이 앙코르와트로 떠난다. 잠시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시하눅빌쪽 국경으로 빠질까 하는 생각도 안해 본 건 아니지만 언제 헤어져도 헤어질 건데 이삼일 더 같이 있는 게 뭔 소용이랴 싶어 그냥 혼자 남기로 한다. 창문도 없는 3불짜리 싱글룸으로 방을 옮기고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 같아 좀 덥더라도 움직여 보기로 한다. 캄보디아로 넘어오니 날씨가 제대로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한낮에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거리로 나서니 햇살이 따갑다. 그저 그늘을 골라 밟으며 지도대로 왕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본다.


먼저 나란히 붙어있는 박물관과 왕궁을 둘러본다. 박물관은 그 외관부터 앙코르의 유적인 반따아이 스레이를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내용물도 거의 앙코르와트의 유적들로 채워져 있다. 그저 조상의 유적으로 먹고 사는 나란가 싶은 게 어제의 영향인지 맘이 곱게 먹어지지가 않는다. 그 맘은 왕궁까지 이어져 제법 규모있게 지어진 왕궁을 보고도 국민들을 죽어가는 데 지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네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맘만 든다. 다음에 프놈펜에 오는 분들은 킬링필드와 뚜얼슬랭은 마지막날 가시기를 권해드린다. 뭘 봐도 겹쳐 보이는 게 후유증 생각보다 오래 간다--;: 왕궁을 나와서도 계속 걷는다. 걷다보니 프놈펜이라는 수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왓프놈 사원이 나오고 호수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는 조그만 여행자 거리도 나온다.


국립박물관. 외관이 반띠아이 스레이와 비슷하다.


왕궁 내에 있는 실버파고다. 바닥이 은으로 깔려 있어 그렇게 부른단다.


근데 이놈의 호수도 참 문제인 게 도대체 주변에서 호수를 바라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건 호수 주변은 벤치도 놓여 있고 사람들도 좀 나와 앉아 있고 하기 마련인데 호수를 주변으로 건물이 빙 둘러서 있어 도무지 호수 쪽으로 진입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거기 호수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게 되어 있더라는 거다. 여행자 거리 쪽으로 한참을 들어가 카페에 들어서고 나서야 호수가 눈에 보인다. 콜라 한병을 시켜놓고 앉아있으니 호수가 전부 시야에 들어오는 게 풍경이 그만이다. 호수 주위에 건물이 있는 사람들이야 이보다 좋을 순 없겠지만 다시 뭐 이런 나라가 있나 싶어진다. 후유증 오래 간다니^^


호수 주변의 까페들


마침 내가 머문 기간이 캄보디아 최대의 축제인 워터페스티발이 시작되는 날이라 담날은 강변으로 나가 본다. 워터 페스티발은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카누같은 배를 저어 누가 빠르나 경주하는 게 주 내용인데-TV에서 생중계도 한다- 이미 강변에는 노점상이며 응원하는 사람들로 한창 축제 분위기다. 나야 경기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그저 축제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다녀본다. 가족들의 손을 잡고 나온 나들이객이며,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젊은이들이며 모두 환한 표정들이다. 프놈펜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누군지에게 모르게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워터페스티발, 경기 준비가 한창이다.


응원도 한창이고


거리는 축제 분위기다.


거리에는 여전히 팔다리 잘린 구걸하는 아저씨들이며, 아이를 주렁주렁 달고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는 아낙네들이며, 하루 종일 팔아도 돈 될 것 같지 않은 조악한 기념품 따위를 파는 열 살도 안 됐을 것 같은 아이들로 넘쳐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심하게 귀찮다 싶은 오토바이 아저씨들의 호객행위도 그럭저럭 견딜만해진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에 들어오고 부터는 숙소비니, 차비니 따위에 크게 신경이 곤두선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친절하진 안하도-베트남인의 아니 베트남 상인의 친절은 너무 속이 빤히 보여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구석이 느껴진다. 한나절을 강변에서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워터페스티발에서 만난 캄보디아 소녀의 웃음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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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1> 첫날부터 우울한 풍경이 계속된다.

프놈펜에 도착한 날 구찌 투어에서 만난 여자친구 2명이 합류해 일행이 다섯이 된다. 그래봐야 넷은 하루정도 프놈펜을 돌아본 뒤 모두 앙코르와트로 갈 예정이라 일행으로 같이 보낼 시간은 단 하루다.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시내와 근교를 포함한 하루투어를 신청한다. 시간이 없을 땐 비용이 좀 들더라도 투어를 신청하는 편이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긴 하다. 나야 어차피 이삼일에 슬슬 돌아볼 생각이라 그냥 숙소에서 쉴까하고 있는데 인원수가 안 차서 투어가 무산되었단다. 프놈펜의 볼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걸어갈 수 없는 거리에 있는 킬링필드를 툭툭을 섭외해 간다길래 나중에 혼자 갈 생각 하니 그도 썩 내키지는 않는데다 같이 움직이는 편이 비용면에서도 나을 것 같아 킬링필드와 뚜얼슬랭 박물관만 동행하기로 하고 일행을 따라나선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에 바라본 ,프놈펜 시내는 한나라의 수도라기보단 그저 지방도시 같다. 한나라의 수도에 시내버스도 미터택시도 없고, 길도 중앙도로 몇 개를 제외하면 대충 비포장도로다. 그나마 아침에 두어시간 내린 폭우로 군데군데 도로가 잠겨 있다. 그래도 우리를  태운 툭툭은 물웅덩이를 이리저리 피해 한 삼십분을 달린 끝에 킬링필드 앞에 내려준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이곳은 프놈펜에서 약 15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쯔엉아익이라는 곳으로1980년에 발견된 폴폿 정권의 집단학살지인데 이곳에만 약 8,900여구의 시신이 집단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킬링필드에 들어서면 일단 위령탑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80m 높이의 위령탑 가득히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마음이 서늘해지는 한편으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맘이 복잡해진다.


킬링필드내의 위령탑


위령탑 가득 유골이 들어있다. 정작 캄보디아인들은 영혼이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무슨 마음으로 유골을 저리 쌓아 둔 것일까  


위령탑 근처의 들판에는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여 있고 적게는 수십 구에서 많게는 수백 구까지 시신이 발견된 곳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나마 아직 수습되지 않은 혹은 수습하지 않은 옷가지며 뼈들이 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나마 학살지 여기저기에 유남히 까만 캄보디아 아이들이 관광객들을 따라다니며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핼로핼로원투쓰리스마일..” 하며 표정도, 억양도 없이 계속 중얼거리는데 -통역하자면 사진을 찍혀줄테니 돈을 달라는 소리다- 거짓말 안 보태고 그 소리 그대로 따다가 단편영화 사운드로 쓴다면 어지간한 괴기영화 한편쯤은 사운드만 가지고도 제작이 가능하겠다 싶은 게 영 오싹하다. 그나마 학살의 현장을 이렇게라도 남겨두고 교훈을 삼으려는 것일까.. 시간이 조금 더 되었다 뿐이지 만만치 않은 학살의 역사를 가졌으나 어느 한곳도 제대로 보존은커녕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문득 겹쳐진다.    



아직 수습하지 않은 뼈들이 땅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때 집단 매장지였던 웅덩이에 이제 나팔꽃이 핀다.


무거운 마음으로 킬링필드를 나와 찾아간 곳은 뚜얼슬랭 박물관이다. 말이 박물관이지 이곳역시 학살의 현장이다. 이곳은 원래 뚜얼슬랭 고등학교였던 곳을 크메르루즈가 21보안대 건물로 사용한 곳으로 전 정권의 관리들에 대한 심문장소와 고문장소, 그리고 나중에는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곳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크메르루즈의 통치 기간인 1975년 4월에서 1979년 1월까지 2만명이 들어가서 불과 6명이 살아 나온 악명 높은 장소였단다. 뚜얼슬랭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는 내리는데 철조망이 쳐진 건물의 스산함이라니.. 들어가니 심란함이 하늘을 찌른다. 사진 위주로 전시된 전시관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들의 사진을 필두로 이곳에 끌려와서 찍힌 듯한 사람들의 사진이며 심지어 사형집행 직전의 사진까지 온갖 사진들이 건물 한층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시야 이후 정권이 했겠지만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야 가해자 당사들일텐데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생생한 사진을 낱낱이 찍어 놓았을까.. 옆건물로 옮기자 고문실로 쓰인 곳이 나온다. 교실크기의 반 정도 되는 방에는 철제 침대와 고문 도구가 놓여 있고 벽에는 그 침대 위에서 죽어간 시신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런 고문실이 일층에만 7-8개가 있고 그것도 모자라 이층으로 이어진다. 더는 보지 못하고 그냥 건물을 나온다.


뚜얼슬랭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고문실. 시신의 사진이 걸려있다.


나머지 건물들도 그저 우울하고 음산하기만 하다. 방 하나에 한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있을 만큼 벽돌로 칸을 나눠 둔 감금실이며, 한때는 유골들로 캄보다아 지도를 채워 전시했다가 비난 여론에 밀려 이제는 그저 캐비넷에 담아둔 유골들을 돌아보다가 마지막 방에 이르자 살아나온 사람들의 지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는 방이 나온다. 끌려 온 사연도 가지가지지만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 모진 고문 끝에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도 살아있다면 그저 보통사람들로 늙어 갔겠거니 싶은 게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살아나온 사람들, 왼쪽 아래가 끌려간 당시고 큰 사진이 현재의 모습이다. 


박물관을 나오자 비는 어느새 그쳐 있다. 일행들도 마음이 무거운지 말이 없다. 그저 다른 소리나 하다가 밥을 먹고 일행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다. 혼자 있는 오후 내내도 마음이 편치 않다. 프놈펜에서의 우울한 첫날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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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여행경비 총정리

 여행경비 총정리시리즈 2탄 되시겠다. 뭐 여행씩이나 다니는 와중에 돈정리 따위나 하고 있나 하는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저 취미 생활이겠거니 이해하시라. 그래도 나름 재미있다니.. 못 믿겠거든 오늘부터 가계부라도 써 보시든가.. 아님 그러려니 하시라.


먼저 베트남비자 중국에서 받았다. 중국돈 400원

우리 돈으론 5만 2천원쯤 된다.

근데 이게 이상한 게 캄보디아에서 받으면 30달러니까 3만원쯤인데 중국과 뭔 차이가 이리 많이 나는지 도대체 비자피의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다. 그 나라 소득 수준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님 나라마다 상대적으로 금액을 책정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일 듯 싶은데 그렇다면 한국인은 한국에서 발급받는 금액을 동일 적용해야 하지 않나.. 잘 모르겠다. 


각설하고 베트남에서 머문 총 29일 동안 쓴 돈은 7,185,300동이다. 뭐 기분상은 한 칠백만원 쓴 것 같지만 베트남은 돈단위가 너무 커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그리 많은 금액은 아니다. ATM 수수료 포함해서 대략 10,000동을 우리 돈 700원쯤으로 계산하니 얼추 맞아 떨어지는데 이렇게 계산하면 대략 500,000원 정도를 쓴 셈이 된다. 이걸 29로 나눠 보면 하루에 만칠천원 조금 더 쓴 셈인데 중국보다는 조금 덜 들었다. 그래도 에어컨룸은 아니라도 거의 싱글룸으만 다녔고 먹는 것도 베트남이 좀 나았다는 걸 감안할 때 중국보다는 베트남 물가가 조금 싸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도 분류 들어간다.


1등은 중국에서 1등을 차지했던 교통비를 제치고 투어비가 차지한다. 이건 중국에서는 없던 항목인데 대략 교통비, 식비, 입장료 등이 섞여있는 항목되겠다 1,990,700(약 139,349원)

2등은 숙박비가 차지한다. 1,626,400동(약 113,848원)

3등은 식대 및 간식 그리고 음료비가 차지했는데 1,536,000동(약 107,520원)이다. 날짜가 베트남이 며칠 적은데도 중국과 비슷하게 나온 걸 보면 중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던 과일쥬스나 커피 등의 음료에서 차이가 난게 아닌가 싶다.

4등은 교통비다. 1,143,000동(약 80,010원) 이건 사실 교통비의 일부이고 나머지는 투어비에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하며 이 비용은 그저 도시간의 이동이나 오토바이 비용 정도의 합산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잡비들

담배 및 맥주 477,900(=33,453)

인터넷 104,000(=7,280)

생필품 99,400(=6,958)

말 그대로 잡비 : 세탁, 전화, 팁 등등 207,900(=14,553)


뭐 전체적으로 베트남도 원래 생각했던 비용보다는 조금 덜 든 셈인데 동남아시아는 대략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쓰는 용돈 정도의 비용으로 먹고 자고 한 셈인데 어떠신가들.. 이 정도면 하던 일 때려치우고 날아오셔도 괜찮지 않겠는가? 아니다. 날아오는 비용이 만만치 않겠구만^^


달랏의 광쭝저수지. 별 짓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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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델타> 국경을 넘다.

 

결국 일행들의 일정에 따라 예정보다 하루 빨리 베트남을 떠나기로 한다. 메콩델타를 돌아보는 투어는 메콩델타를 지나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1박 2일짜리 투어를 신청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육로로 흔히 넘는 목바이 국경이 아니라 쩌우독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이 국경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비자 발급이 안된단다. 1달러를 수수료로 내고 캄보디아 비자를 대행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대사관에 갔다오는 비용이나 수수료나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배낭여행자 의식(?)이 발동 잠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가볍게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생각을 바꾼다. 점점 게을러지는 것이 이젠 어디가 1달러라도 싸나 하면서 다니는 발품도 팔기가 싫어지는 게 다 더운 날씨 탓이지 싶다.


일행이 있어서인지 베트남 남부 지방부터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 것 같다. 막상 호치민을 떠나려니 뭔가 두고 온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가면 안 될 것도 같은 게 묘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래도 짐을 싸고 투어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는 두어시간을 달려 메콩강가에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거기서 다시 보트를 갈아타고 코코넛 캔디를 만드는 곳이며, 라이스 페이퍼를 만드는 곳이며 -죄 가내수공업 수준의 제작 공정이다- 몇 군데를 보여주더니 다시 보트에 태워 메콩강을 흘러간다. 메콩강은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흐르는 거대한 강인데 이것이 베트남으로 와서 바다에 이르기 전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메콩델타라 부른다고 한다. 메콩강이라면 이전 라오스에서 스피드보트-말이 스피드보트지 나룻배에 모터를 장착한 매우 작고 시끄러운 배다- 7시간이나 탄 경험이 있어 그런지 강가의 풍경들도 그만그만하다. 배는 육지에 닿고 다시 버스로 갈아타 서너시간을 달리니 국경도시 쩌우덕이다.


배에서 본 메콩델타1


배에서 본 메콩델타2


쩌우덕 가는 길은 이때까지 본 베트남들의 모습들과는 사뭇 다르다. 군데군데 강이 펼쳐져 있어서 그런지 수상 가옥들도 종종 눈에 띄고, 벼가 자라는 마을이며, 동네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며,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그저 70년대쯤의 우리네 시골로 시간을 돌려놓은 것 같다.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도 그저 맑기만 하다. 쿠의 비웃음이 눈에 선하지만 별 쓸 말이 없는 고로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고향이 쩌우독인 한 시인의 시를 인용하기로 한다. 물론 가이드북에는 해석도 되어 있지만 여러분들의 영어실력을 너무 무시하는 행위가 될까봐 해석은 생략하오니 알아서 해석하시도록..


Thinh's story


when I think of Vietnam

I don't think of naplam

I don't think of a war

when I think of Vietnam

I just think of Chau Doc

where I grew up


길에서 만난 아이들


쩌우독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시 보트를 탄다. 투어의 일정이 아직 안 끝났는지 이번엔 작은 나룻배를 타고 액젓 만드는 곳과 쌀로 만드는 강정 따위를 만드는 공정을 보여준다. 나룻배는 주로 두명씩 태우고 여자들이 뒤에서 배를 저어 가는데 이미 땀꼭에서 경험한 바 팁을 요구할 것 같은 불길하나 예감이 든다. 그러나 베트남동은 이미 죄다 담배로 바꿔버려 한 푼도 없는데다 담배를 팁으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일행에게 돈을 좀 빌려야 하나 하고 있는데 먼저 내린 배에서 배젓는 아낙네 하나가 이만동 짜리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고 있다. 또 어떤 정신 나간 서양애가 팁을 저렇게 많이 줘서 사람 난처하게 하나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돈이 없으니 그냥 내린다. 어차피 그 보트가 몇군데 들리니 팁을 주더라도 마지막에 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로 가니 다른 아낙네가 똑같은 짓을 한다. 아.. 작전이었구나 싶다. 결국 마지막에 일행에게 빌려서라도 팁을 좀 주려던 마음을 바꿔먹고 그냥 내린다. 참 가지가지 하는 나라다.


나룻배, 사람이 직접 젓는다.


이제 국경을 넘을 시간이다. 다시 큰 보트로 갈아타고 잠시 내려 국경을 넘는다. 대략 짐작은 했지만 새까맣게 몰려있는 구걸하는 애들과 환전상들을 헤치고 강가에 있는 소박한 국경사무소에서 간단히 국경을 통과하고 이번에는 캄보디아 보트로 갈아탄다. 보트에 적혀 있는 코카콜라 2000에 뭔 물가가 이리 싸나 잠시 당황하다 아.. 단위가 동이 아니라 리엘이구나 생각하니 국경을 넘은 실감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보트는 하염없이 메콩강을 달려 어느 선착장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다시 버스로 갈아타란다. 버스의 상태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나 거기서 거긴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게다가 도로의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포장도로이긴 하나 군데군데 패인 곳이 많아 덜그럭거리는 짐들과 억, 억 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날이 다 저물어서야 최종 목적지인 프놈펜에 들어선다. 


베트남측 국경 모습


캄보디아에서 갈아탄 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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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다이-구찌> 또 투어를 가다

호치민의 대표적인 투어 상품은 <카오다이-구찌> 일일투어와 <메콩델타> 투어인데 메콩델타는 캄보디아를 넘어가는 일정과 연계하기로 하고 혼자서 일일투어를 다녀온다. 일행이 둘다 별로 내켜하지 않아 그저 구찌만 반나절 갔다오려다가 메신져에서 만난 일산주민의 “되게 웃겨” 한마디에 맘을 바꿔 카오다이까지 들러보기로 한다. 카오다이 투어는 베트남산 반외세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인 카오다이교의 사원을 둘러보고 매일 거행되는 정오 예배를 관람하는 투어인데 투어를 가다가다 못해 이제 남의 종교 의식까지 구경을 가는가 싶지만 시간도 남아도는데다, 1불만 더 내면 되는 것을, 게다가 되게 웃기기까지 한다는데 굳이 안갈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버스는 정확히 11시 40분에 카오다이 사원에 내려준다. 별다른 문화재라거나 눈에 띄는 사원 하나 제대로 없는 베트남에서 오래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외관을 갖춘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실내는 더 으리 번쩍하다. 용이 휘감고 있는 여러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사원에는 이들의 상징인 카오다이 즉 하늘의 눈이 정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교, 불교, 도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교리를 가진 종교답게 하늘의 눈 아래에 공자님, 부처님, 에수님 그리고 노자 내지 장자님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이좋게 부조되어 있는데 총 8명인 그 부조들의 나머지 4명을 두고 같은 버스에 탔던 한국인 일행 2명과 추측을 해보았으나 별로 아는 사람도, 그나마 아는 이름의 얼굴도 가물가물해 결국 훌륭한 사람이겠지 뭐 하고 포기하고 만다^^


정오 예배가 시작되자 흰옷을 입은 카오다이교 신도들이 열을 지어 사원 안으로 들어오고 정확히 간격을 맞추어 자리에 앉는다. 이 모습은 이층에 마련된 관광객 전용으로 보이는 난간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움직임이 무슨 매스게임이라도 하듯이 일사불란하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들은 선한 본심과 평등을 추구하며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교리는 얼마나 훌륭한가 말이다. 종교란 그 교리대로 산다면 혹은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누구를 믿든지 간에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은 드는데 외형적인 질서가 주는 일사불란함 때문인지 무슨 사이비 종교 행사나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슨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어쩌자고 자신들의 종교적 의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글쎄, 이것도 넓은 의미의 선교 활동일지도 모를 일이다^^


카오다이교 사원


카오다이교 정오 예배 모습


예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구찌로 향한다. 정확하게는 구찌지역 주변에 있다는 여러 개의 지하터널 중 하나를 보러 가는 것이다. 구찌터널은 프랑스 식민통치 시대에 지방게릴라들이 파기 시작한 것을 베트남전 당시에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하고 확장하게 되었다는데 총연장 250km에 지하 30m 지점까지 마치 개미굴같은 땅굴이 만들어져 게릴라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미국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아 이 지역 주변에 하루 80톤의 폭탄을 쏟아붓는가 하면 그걸로도 모자라 고엽제 7,200만 리터를 살포해 지금까지 도 그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러나 터널이란 지하에 있는데다가 워낙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모형단면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 막상 구찌 터널에서는 그 입구 몇 개와 실물 크기의 인형을 제작해 재연해놓은-우리 나라의 민속박물관을 떠올리면 된다- 몇 개의 모형이 있을 뿐이다. 뭐 한 20미터 가량 터널 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체험코스도 있긴 하지만 이도 관광객을 위해 실제보다는 약간 넓게 되어 있다고 하고, 부분부분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그저 투어의 이벤트 정도로 느껴진다. 물론 구찌 자체가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반나절 구찌투어라는 상품이 그렇다는 말이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들이 먹었다는 파피오카라는 고구마 비슷한 음식을 시식하게 되는데 육이오때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주먹밥먹기 행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시식 이후 판매가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뭐 물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코스의 마지막은 실탄 사격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돈을 내고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인데 다행히 우리 투어에서는 신청한 사람이 없어 그 꼴은 안 봐도 되긴 했지만 투어 내내 들리는 총소리는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땅굴입구,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넓이가 아니다^^


 땅굴체험, 길진 않지만 폐쇄공포증이 있는 분들은 삼가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덩치 큰 분들도 가급적 자제하시기를..


시식용 파피오카. 고구마랑 감자를 섞어놓은 맛이 난다.


여느 투어와는 이번 가이드는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다. 당연히 베트남전 즈음에는 열혈 청년의 나이이었을 그는 나만 그렇게 보였는지 몰라도 뭔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보인다. 한때 자신들의 생존 기지였을 땅에서 그 적들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는 기분이라니.. 그는 투어 내내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 베트남에 평화가 온 것은 그저 30년 정도의 세월일 뿐이라고, 전쟁 기간 중에 사람들은 고통스러웠으며, 아직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 찾아온 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며칠 들렀다 가는 관광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이 나라 어디에나 전쟁의 상흔은 마을마다, 거리미다 그리고 사람들의 가슴마다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의 깊이를 내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저 베트남에도, 한국에도 그리고 전세계 어디에도 전쟁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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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베트남의 마지막 도시로 오다.

또다시 도시 한복판으로 들어와 버렸다. 호치민은 하노이보다도 훨씬 크고 번화한 듯 보인다. 여행자 거리도 하노이보다는 넓어 보이는데 오토바이의 절대량은 호치민이 많을지 몰라도 길이 넓은 탓인지 하노이보다는 덜 복잡해 보인다. 아님 그 사이에 오토바이에 좀 익숙해져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에서 두 달 살았다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하루밤 신세를 진다. 여행자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취방은 생각보다 깨끗한 건물에 위치해 있다. 방세는 한달에 백불이라는데 아마도 외국인이라 시세보다는 비싸게 내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친구의 싱글 침대에서 둘이 하루밤을 자고 나니 더는 신세를 질 수도 없고 므이네에서 하루늦게 출발하는 친구의 친구와 방을 같이 쓸 요량으로 베트남에선 처음으로 에어콘룸을 잡아둔다.  


친구의 친구는 므이네에서 만났던 벨기에 남자를 결국 달고 온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하루 더 있겠다고 할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니^^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같이 술을 마신다. 그놈의 영어가 참 이상한 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들리는데 나한테 말하는 건 안들리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긴 들려봐야 대답도 안되는데 들리면 또 뭐 한단 말인가^^ 결국 몇마디 주고받지도 못하고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기만 한다. 벨기에 친구는 비오는 노천에서 꼬막 삶을 걸 안주로 놓고 먹는 술이 익숙지 않은지 웃고는 있지만 불편한 얼굴이다. 게다가 이 친구 해물을 전혀 못 먹는단다. 결국 까페로 자리를 옮긴다. 대략 호치민 여행자 거리의 물가는 하노이 두배다. 그냥 노천이나 길거리 음식 가격은 그만그만한데 까페나 식당의 메뉴가 그렇다는 건데 마지막으로 ATM으로 돈을 인출하고 나니 나가는 날까지 부족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인다.


호치민은 전체의 넓이가 서울의 3배라는데 이곳 역시 볼만한 관광지는 대략 걸어 다닐만한 거리에 모여 있다.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본다. 호치민에서 올라왔던 친구들은 죄다 무지 덥다고 입을 모았는데 비가 내린 탓인지 그리 덥지는 않다. 시장을 지나 한때 대통령 관저였다는 통일궁을 지나 전쟁기념박물관에 들어선다. 주로 사진 위주로 전시가 되어있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사진이 주는 실물감 때문인지 베트남전의 참상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베트남전 여기서는 미국전이라 불리는 전쟁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여행자일 뿐이라고.. 이런 소모적안 감상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애써 외면하려해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통일궁에서 바라본 베트남 시내, 좌측에 보이는 것이 다이아몬드 플라자다


전쟁기념박물관 입구의 포스터


오후에는 폭우가 내려 역사박물관이나 가보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그저 잠시 들렀다가려던 다이아몬드플라자에서 발이 묶인다. 다이아몬드 플라자는 포스코에서 지었다는 주상복합건물인데 백화점이며 오락실, 볼링장 따위가 영업중인 곳이다. 샴푸니 바디샴푸 등이 떨어질 때가 되어 슈퍼나 얼쩡거린다. 베트남산 샴푸와 다국적 기업의 샴푸를 들고 잠시 고민하다 중국에서 샀던 중국산 치약의 씁쓸하고 뻑뻑한 맛이 떠올라 그냥 펜틴을 들고 나온다. 누구말대로 상품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베트남산 상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비는 계속 내리고 백화점을 두어바퀴 더 돌아도 별로 할 일은 없다. 게다가 누가 한국백화점 아니랄까봐 가격도 한국에서의 가격과 맞먹는다--;: 언젠가 이곳에서 떡볶이를 판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거의 먹지도 않던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우리돈으로 이천원 남짓이지만 이곳에선 그리 싼 가격도 아니다.


저녁무렵 비가 그치고 다시 거리로 나가 사이공강 쪽으로 걸어가 본다. 다이아몬드 플라자와 사이공강을 잇는 동코이 거리는 호치민 최대의 번화가인데 그 명성에 걸맞게 프랑스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며, 카페, 꽤 비싸보이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거리도 제법 널찍해서 그저 서울 시내 어디쯤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이때까지 간 도시마다 강이건 호수건 아님 바다라도 꼭 물을 끼고 있다. 하긴 인류문명도 강을 중심으로 발생했다니 -기억들 나시나.. 티크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지명도 생소한 4대 문명 발생지를 외우던 시간들이- 어지간한 대도시는 다 물 옆에 자리잡고 있게 마련이긴 할터, 그런데 이 사이공강은 특이하게도 유람선이나 떠다니는 강이 아니라 제법 화물선도 보이는 것이 도로망이 미비한 베트남에서 화물 운송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듯도 싶다. 그래서 그런지 강이 아니라 연안부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인민위원회앞에 있는 호치민 동상


해질 무렵 사이공강


도시를 돌아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친구의 친구는 벨기에 남자와 데이트중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KBS월드라는 한국TV가 나오는 덕분에 뒹굴뒹굴 최진실이 신파를 떠는 드라마나 보며 시간을 죽인다. 그래, 눈 큰 남자친구가 생길래도 의사소통이 되고 볼 일이다. 다들 열심히 영어공부들 하시라 뭐 짬짬이 피부 관리에도 신경 쓰면 그보다 좋을 순 없겠고^^ 그도 저도 귀찮으면 가까이 있는 한국말되는 남자를 잽싸게 찍어 버리든가 할 일이다. 특히 조커와 일산 주민은 새겨들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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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이네> 과음에 성공하다

므이네로 가는 투어버스가 결국 말썽을 부린다. 티켓을 구입할 때는 오전 7시 30분 출발로 되어 있었는데 컨펌을 하러가니 새벽 4시에 나오란다. 7시 30분차는 나짱으로 갔다가 므이네로 가니 그걸 타든지 맘대로 하란다. 결국 3시 반에 일어나 버스를 탄다. 타고 보니 손님은 나 혼자다. 너 혼자니 못간다 안한게 차라리 고맙게 느껴진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더니 이 버스 떠난 지 3시간만인 6시 50분에 므이네에 내려준다.  -보통 투어버스로  6시간 걸리는 길이다- 내 총알택시는 들어봤어도 총알버스는 난생 처음이다^^ 뭐 그 와중에도 창문에 머리박아 가며 잤으니 나도 할 말은 없다.


달랏에서 이틀을 함께 보낸 친구의 버스는 정상적으로 7시 30분 출발이고 이 친구와 나짱에서 만나 므이네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또 다른 친구도 오후에 도착 예정이니 대충 조용한 리조트 트리풀룸을 잡아 사람들을 기다린다. 시간이 되어 만나기로 한카페에 나가보니 한시에 도착한다던 친구의 친구도, 2시에 도착 예정인 친구도 2시 반이 넘도록 보이지 않는다. 괜히 트리풀룸은 잡아가지고.. 이러다 침대 세 개 번갈아가며 쓰며 하루밤을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된다. 세시가 조금 못 되어서야 이래저래 모두 만나게 된다. 게다가 그 카페에 있던 또다른 남자 여행자와 친구의 친구는 이미 호치민에서 만난 적이 있는 관계라 4명이 자연스럽게 일행이 된다. 워낙 해변에서 혼자 지내는 것에 질려 있던 터라 므 이네도 그냥 피해갈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덕분에 재미있는 이틀을 보낸다.


므이네에서 묵었던 타이호아 리조트


리조트에서 바라본 바다


므이네는 생각보다 리조트 사이가 떨어져 있어 리조트네에서 밥을 먹지 않는 한 거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 한명은 남자여행자의 오토바이에 타고 두명은 오토바이를 섭외해 그랜드캐년, 샌드듄, 피싱 빌리지등을 간단히 돌고-뭐 말이 그랜트캐년이지 그냥 붉은 라테라이트 토양이 그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 제법 볼만한 경치를 만들어낸 곳이며, 샌드듄도 건조한 기후 탓에 일부가 사막화 되어 있는 곳이다. 어느 곳이나 동네아이들이 가이드를 자처하며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현지인들에게 유명하다는 해물전문식당으로 향한다. 므이네에 두 번째 온다는 남자 여행자가 이미 혼자 다녀온 식당이다. 우리네 수산시장처럼 살아있는 해물을 고르고 요리법을 정해 주문하면 되는 식당인데 새우, 게, 홍합과 굴을 튀기거나 쪄 달라고 한다. 이미 과음이 나의 최대 소원임을 밝히고 소원풀이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은터라 과음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나름 그랜드캐년


여기는 나름 사막


해물 한상차림


술자리는 숙소로 이어져 파도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신다. 호치민에서 두달 살았다는 가장 먼저 만난 친구는 앙코르와트 여행 후 귀국 예정이고, 두 번째 만난 여행자는 호주에서 귀국길에 호치민에서 스톱 오버해 여행중인데 역시 앙코르와트를 갔다가 귀국예정이란다.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 친구는 하노이로 인해서 한달간 여행을 마치고 담날 호치민에서 귀국 예정이다. 남자 친구는 귀국이지만 나머지 셋은 일단 메콩델타를 타고 프놈펜까지는 같이 가기로 합의를 본다. 아마 나머지 두 친구는 앙코르와트까지 동행하게 되겠지만 나는 프놈펜에서 시하눅빌과 깜뽓으로 빠지게 되니 동행은 어려울 것 같다. 베트남은 5시 30분이면 해가 지는 탓인지 술자리가 제법 길어졌는데도 잠자리에 든 시간은 12시를 간신히 넘어있다. 아무래도 해뜰 때까지의 과음은 일산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싶다^^ 


담날은 어느 날보다 맑은 날씨다. 날씨 탓인지 바다 빛깔도 전날보다는 제법 푸른빛을 띠고 있다. 리조트 앞에 있는 해변에 나가 누워있는다. CF에서나 볼 법한 하얀 비치용 의자에 누워 있으니 배낭여행자가 아니라 그냥 휴가라도 온 것 같다. 맥주가 다시 한병씩 돈다. 이번엔 여행오고 처음 낮술도 먹는다. 역시 가끔은 일행이 있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므이네에서는 그저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낸다. 오토바이 소리도, 뭔가 사라는 현지인들의 구애도 없는 이틀을 보내고 나니 베트남에서 가장 번잡하다는 호치민으로 갈일이 꿈만 같다. 이제 호치민에서 삼사일만 보내면 베트남 여행도 슬슬 마무리가 된다. 첨에 언제 거기까지 내려가나 아득했던 것에 비하면 시간이 참 빨리 흐른 셈이다. 그래도 하노이를 겪어봤으니 그럭저럭 살아지겠지 하며 익숙하게 짐을 싼다.


하루에 대부분을 이렇게 누워서 보냈다. 부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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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랏> 괴짜스님을 만나다.

달랏으로 가는 버스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간다. 바깥 온도야 버스 안이라 알 수 없으나 파란 하늘이며 청명한 공기가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 일년에 한두번 볼 수 있는 쨍한 가을날의 풍경이다. 달랏에 내리니 공기는 선선한데 햇살이 따갑다. 고원지대라 그런지 베트남에선 통 볼 수 없던 가파른 언덕길이 보인다. 숙소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서 본다. 밤늦게 술먹다 처음 가보는 자취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버스타러 나올 때 그 기분이다. 언덕을 넘어 큰길이 나올 만한 곳으로 걸으며 여기가 달랏이지 신림동 언덕길인지 잠시 헷갈린다. 선선한 기후탓이지 그저 쌀국수집이 분식집 같고 옷가게며 빵집, 문방구까지 우리네 그곳과 닮아 있다. 지도를 따라 걸어보니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단지 오르막이 많아 시클로가 없다는 걸로 봐서 자전거로 시내를 돌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달랏가는 길. 공기가 차고 맑아 시야가 선명하다.


숙소 옆의 언덕길. 낯익은 동네 같다.


그래서 그런지 시내와 근교를 묶어서 오토바이로 돌아보는 투어가 달랏의 대표적 관광 상품인데 걸어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오토바이 기사들이 달라붙는다. 가격은 하루 10에서 12달러 선으로 만만치 않다. 여러 명이 같이 다니는 버스 투어와는 달리 기사와 둘이 다녀서 그런다는데 글쎄 굳이 그 가격에 커피 농장이며 실크 공장 따위를 다녀야 하는지 별로 내키지 않는다. 그저 시장이나 돌아본다. 베트남의 다른 시장들은 일찍 문을 여는 탓인지 대략 6시경이면 문을 닫는데 여긴 선선한 기후 덕분에 야시장이 선다. 뭐 우리나라에선 잼 만드는 용으로나 쓰일 만한 자잘한 딸기며 감, 따뜻한 죽과 두유 등 베트남의 다른 도시에선 보기 힘든 것들이 눈에 뛴다. 특히 옷가게에서 파는 스웨터나 두툼한 파카 따위가 이채로운데 다른 도시에서 잠시 다니러 온 베트남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달랏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까지 저렇게 추위를 타나 싶은게 미리 듣긴 했지만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된다.


달랏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는 도착 예정 시간을 두시간이나 넘겨 숙소로 찾아온다. 나짱에서 떠나기로 한 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넘겨 버스가 왔다고 하는데 뭐 그러려니 해야지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담날 오전에는 걸어서 시내를 오후에는 시외곽의 관광지 몇 군데를 찍어 로컬오토바이 기사와 흥정하기로 하고 시내로 나선다. 베트남 2대 대통령의 딸이며 모스크바에서 건축공부를 했다는 항응아가 만든 게스트 하우스가 첫째 목적지다. 뭐 게스트하우스 따위를 관광하냐고 하겠지만 이 건축물이 기이한 형태로 만들어져 묵는 손님보다는 입장료로 연명하는 듯 보이는데 초기에는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손님들들부터 욕도 숱하게 얻어먹은 곳이라고 한다.


다음은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의 여름 별장이다. 여름에 이곳만큼 시원한 곳도 없었던지 이곳에 별궁이 3개나 있는데 그중 한 곳을 가본다. 가이드북에는 2층은 호텔로 사용된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왕과 왕비 그리고 자식용이거나 아님 손님용이었을 침실을 복원해 놓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당시 사용하던 가구며 그릇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일명 크레이지 하우스, 저 통나무 모양의 구조물에 객실이 있다.


바오다이 황제의 여름별장. 생각보다 소박하다 했는데 달랏에만 별장이 3개나 있었단다.


사실 달랏은 기후나 풍광 외에 별다른 유적지는 없어 보인다. 그저 가는 길이라 크레이지 몽크라고 불린다는 달랏대학 출신의 괴짜스님이 있다는 절에 잠시 들러본다. 가이드북에 그만큼 소개되었고 시내외 투어에 빠지지 않는 코스니 귀찮아서라도 스님은 없고 다른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이 스님 그 절에 혼자 계신다. 게다가 산중에서 몇 년 혼자 지낸 사람처럼 반가워하는데 대략 난감이다. 절 자체나 스님이 쓰거나 그린 그림들이야 내 예술에 문외한이니 논할 바는 못 되나 뭐 그리 대단해 보이는 건 아니고 그저 잠시 들렀다 가려고 했는데 앉으라더니 이런저런 수다를 풀어놓는다. 영어로 하는 수다에는 분명한 한계가 느껴져 사진이나 찍고 나오려는데 이 스님 옷을 차려입고 문앞까지 따라나오시더네 친구집에 가서 녹차나 한잔 하고 가란다. 호기심반 강요반 따라 나서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정집이 나온다. 가정집에는 부처님옆에 예수님이, 예수님 앞에는 성모마리아가 서 잇는 퓨전 불당이 세 개나 있는데 우리네 6,70년대에나 봤을법한 종이꽃이며 크리마스 장식용 꼬마전구가 현란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오 주여, 꼴통 기독교 신자들이 봣으면 불이라도 질렀을 법한 풍경이다. 짧은 영어로 연유를 물었더니 그도 짧게 대답한다. 모든 종교는 다 세임세임이란다. 이 스님 도가 통한건지 사이비 교준지 내 알바 아니나  꽤 재미있는 분임에는 틀림없다.


크레이지 몽크와 집에서 한 장. 정면에서 보이는 분이 스님의 어머니다. 글구 사진 꼭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으니 보내긴 해야 하는데 어디서 인화를 한단 말인가.. 에휴


한끼 얻어먹은 스님네 집 채식 식단. 우리네 반찬과 비슷하다.


친구네 집이라던 그집에는 스님의 어머니가 살고 계시고 신도로 추정되는 대여섯분이 점심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모두 채식으로 마련되었다는 식탁에 얼떨결에 초대받아 밥을 먹는다. 베트남 가정에서 밥을 먹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밥상 역시 두부며 숙주나물, 단호박찜 등 우리네 식탁과 닮아 있다.  그 와중에 스님, 우리의 가이드북을 받아 자기가 나왓다고 자랑도 하시고, 찍은 사진 꼭 보내라며 주소도 적어 주시고, 주소를 적으시다 친구의 볼펜까지 달라고 해서 챙기신다^^결국 스님의 어머니가 재들도 놀아야 하니 그만 보내라 하신 이후에야 스님도 그만 가보라고 하신다. 재미있는 경험이긴 했지만 행여나 길에서 다시 만날까 다른 길로 재빨리 빠져 나온다.


오후에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시외곽을 돈다. 영어가 안 통해 애를 먹기는 했지만 숙소앞에 진을 치고 있는 가이드가 아니라 그냥 로컬 아저씨들과 계약을 하니 대략 반값이다. 세시간가량 돌고 숙소앞에 내려 약속한대로 오만동을 건네주니 제법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맞았는데도 얼굴이 금새 환해진다. 저 아저씨들에겐 오늘이 운수좋은 날이었을까.. 설사 그 돈이 바가지였대도 기분이 흐믓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앞으로 두세달은 따뜻한 물이 그리워질 날은 없을 것이다. 꺼내입었던 긴옷들도 다시 집어넣는다. 이 옷들도 당분간을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한국은 많이 추울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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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짱> 한국인들을 떼로 만나다.

저녁 무렵 나짱으로 가는 오픈투어 버스를 탄다. 버스는 아직 노선도도 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 922번 좌석버스다. 한때 도봉산에서 용산을 오가던 버스다. 내 생전에 좌석버스를 12시간 탈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저 퇴근해서 집에 간다는 맘으로 버스에서 정신없이 자다보니 나짱이다. 버스는 예외없이 여행자거리에서 꽤 떨어진 연계 호텔 앞에 서고는 여기 묵든지 아님 알아서 원하는 숙소로 가라는 분위기다. 배낭 메고 찍어둔 숙소로 터덜터덜 걷다가 5불짜리 씨뷰룸이 있다는 삐기님 말씀에 혹해 따라가 본다. 정말 씨가 뷰하긴 하는데 6불이란다. 결국 그냥 가겠다는 액션을 취하고 난 뒤에야 5불로 내려간다. 지겨워.. 이건 뭐 헐리우드 액션도 아니고 시시때때로 이래야 하니 대략 난감이다--:;


숙소에서 본 일출

 

나짱은 별다른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고 6km에 이르는 해변을 따라 바다가 펼쳐져 있는 해안 도시이다. 섬이 아니어서 방갈로나 리조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를 따라 호텔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그저 부산의 해운대나 광안리를 연상시킨다. 나짱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일일 보트트립을 신청해 놓고 담시장쪽으로 걸어가 본다. 제법 규모가 큰 시장임에도 크게 둘러볼 맘이 내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마다 시장이란 시장은 죄다 다녔으니 내가 뭐 시장전문조사요원도 아니고 이제 시들할 때도 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시장의 핵심 기능이란 뭔가 사거나 파는 것인데 매번 사지는 못하는 반쪽짜리 구경이다 보니 오히려 욕구 불만이 생기는 듯도 하다^^ 시장 근처에 베트남에서 처음보는 슈퍼마켓이 문에 띄길래 들어간다. 그간 궁금하던 몇몇 물건값의 실체를 확인한다. 대략 내가 사던 가격의 2/3가 정가인 듯 하다. 뭐 그 정도면 바가지치고는 양호한 편이다. 단 공산품만 그럴 뿐 먹거리의 가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여행자 부부를 만난다. 호텔앞에서 한국말이 들리길래 그냥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호치민과 나짱을 일주일가량 여행하고 있는 휴가 온 젊은 부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지금 디스코텍을 가는 길인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느다. 아.. 아무리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싶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사양한다. 담날 저녁이나 같이 먹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담날 자전거로 나짱 근교를 한바퀴 돌고 다시 부부를 만나 저녁을 먹는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로컬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더니 영어 메뉴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종업원도 없다. 대략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요리법을 조합에 쇠고기 뭐를 시켰더니 베트남식 샤브샤브가 나온다. 맛은 좋은데 양이 너무 적다. 한 접시를 더 시키기는 뭣해서 그냥 쌀국수 사리를 시켜 남은 국물에 넣어 먹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 보트트립을 해서 너무 피곤하다는 부부와 헤어지고 어디가서 맥주나 한잔 할까 하고 있는데 한국 아저씨들이 떼로 몰려온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또 먼저 인사를 건넨다.


포나가 참사원에서 본 나짱


롱썬사에서 본 나짱


아저씨-라고는 하지만 알고보니 내 동갑이거나 한두살 아래다^^-들의 정체는 광명 시청 공무원들이다. 공무원들 견문넓히기 정도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각 부서에서 헌 명씩 차출되어 출장 겸 휴가 겸 베트남에 왔다고 한다. 길거리에서 한참 떠들다가 남자분이셨으면 어디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할텐데 라는 인사치레를 놓치지 않고 냉큼 저 술 잘먹어요 한다. 거의 두달 만에 만나는 수다와 음주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아저씨들, 온 지 일주일도 안돼 나같은 홀로 여행자를 이미 둘이나 만나셨다는데 그 수다에 이미 한 질림 하신 분들이다. 그래도 어쩌랴..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간만에 맥주를 네병이나 마신다. 물론 절대 과음이라 할 수 없는 양이나 그래도 여행 시작하고 처음이다. 아저씨들 친절하게도 맥주값까지 자신들이 낸다. 에이, 한국돈으로 삼천원인데 하면서 내껀 내거 낼께요 하는 헐리우드 액션도 취하지 않는다. 뭐 좀 싸가지가 없어 보였을래나 싶긴 하지만 팁으로 5불씩 주고 다녔다는 아저씨들의 씀씀이로 보아 그리 큰 걱정은 안해도 되지 싶다^^ 


담날 보트트립을 가는 버스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또 만난다. 사람이라야 열댓명 남짓한 버스였는데 만나질려니 계속 만나진다. 이번엔 호치민에서 두달간 살았다는 여자 여행자다.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려고 일년 예정으로 베트남에 왔는데 일이 예정대로 풀리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베트남 관광이나 하고 가려고 왔단다. 둘다 혼자 뻘쭘하게 보트에 있어야 하나 걱정이다가 서로 심하게 반가워한다. 보트트립은 그 유명세답게 유쾌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그 친구와 나 둘다 무슨 일인지 배멀미 때문에 오전 내내 보트에서 누워지낸다. 공짜 점심도 굷고 헤롱거리다 그래도 흔들리는 배보다는 바다 속이 낫겟지 싶어 수영하는 곳마다 바다로 뛰어든다. 대체 수영은 왜 배웠는지 구명조끼를 입고도 불안해 튜브까지 끼고 노는 애들을 그 친구와 나뿐이다. 아.. 그리고 믿을 수 없겠지만 파란 꽃무늬 비키니는 결국 입었다는 거 아닌가.. 사진을 올려라 뭐 이런 요청은 하지 말 것.. 내가 봐도 심히 괴로웠음--:;   


보트트립 중에 있는 레크리에이션 시간. 각 나라의 포크송을 그 나라말로 불러주고 마이크를 들이민다. 덕분에 둘이서 아리랑 불렀다--::


보트투어 도중 한시간 가량 정박하는 섬


보트트립에서 돌아와 그 친구와 나짱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현지 식당에 간다. 사실 혼자라도 가고 싶던 곳이었는데 혼자가기 망설여져 마지막 날까지 미뤄둔 곳이다. 저녁으로 새우와 생선을 숯불에 구워먹는다. 다 먹고도 부족해 밥에다 돼지고기까지 구워 먹고 일어선다. 그 다음엔 아이스크림까지 디저트로 먹어 준다. 일행이 있으면 확실히 먹거리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일정을 맞춰보니 달랏-므이네-호치민으로 비슷한 일정이다. 다만 그 친구가 그날 아침에 나짱에 도착한 관계로 하루 더 나짱에 있을 생각이어서 담날 달랏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아마 일정대로 된다면 호치민까지는 그 친구와 동행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같이 다니면 또 그런대로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달랏으로 가는 맘이 한결 편해진다.


새우와 생선 숯불구이


새우만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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