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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내 안에 들어온 제3세계

  • 등록일
    2006/06/22 01:37
  • 수정일
    2006/06/22 01:37

-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 기고한 서평 -

 

내 안에 들어온 제3세계 -굶주리는 세계 (창비)


 나에게 처음 제3세계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서성거리는 검은 피부의 외국인으로 낯설고 두렵게 다가왔다. 두 번째는 서투르지만 한국말을 곧잘 하고 김치도 잘 먹는 신기한 이방인으로, 세 번째는 “강제추방반대”, “노동비자쟁취”라고 쓰인 붉은 띠를 두르고 준엄한 눈빛으로 이 사회를 노려보는 투사로 다가왔다. 지금은 그저 보통 남자인 남편으로 내 옆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세계는 여전히 나에게 수수께끼이고, 가장 밑바닥에서 내 존재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표면에는 떠오르지 않는 경계 밖의 그 무엇이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달랑 옷가방 하나 들고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는 그런 낯선 나라의 대도시로 떠나게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온갖 차별과 탄압, 강제추방의 공포를 감수하게 하는가? 이렇게 쫓기는 것 보다 고향에서 사는 것이 더 싫은 이유는 뭘까?

그런 와중에 떠난 인도, 방글라데시 여행은 제3세계 현실의 표면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말끔한 옷을 입고 방글라데시 다카 공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편에,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철조망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이 저편에 있는 현실,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심한 대기오염 속에서 에어콘을 단 외제차량 안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이쪽에, 그리고 차가 정지하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차창을 두드리며 구걸하는 얼굴들이 저쪽에 있는 현실. 가난이 단지 남루한 것이 아닌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인 저쪽. 그리고 그들을 풍경처럼 지나치는데 익숙해져버린 이쪽의 무관심과 냉담.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만난 자히드는 한국 기업도 대거 진출해있는 자유무역지대의 노동착취 공장의 비극을 얘기해주며, “돈 없으면 굶어 죽는 정글세계”라고 자기 나라를 묘사했다. 이주노동을 떠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든 책이 창비에서 나온 굶주리는 세계였다. 전 세계의 식량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단체인 푸드퍼스트(원래 명칭은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 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가 펴낸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은 멕시코 깐꾼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 농민 이경해씨에게 바쳐지고 있다. 굶주림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는 이 책은, 굶주림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국면이란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없는 무기력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무기력한 굶주림의 상황에 빠져 있는가? 이 책의 대답은 간단하다.


분명 먹을 것이 모자라서는 아니다... 지금 세계는 먹을 것으로 가득하다. 자연재해 탓도 아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


여기서의 민주주의는 외형상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닌 토지와 식량 접근권에 대한 민주주의이다. 즉 가장 가난하다고 알려진 나라에서 조차 모든 국민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있고, 심지어 식량 수출량이 수입량보다 현저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에 대한 접근권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대량의 굶주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굶주림의 원인에 관련된 여러 ‘신화’들이 굶주림의 진짜 원인들을 가리고, 그것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따라서 이 책의 대부분은 굶주림의 진짜 원인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신화들을 분석하고 깨는 것에 할애된다. 그 신화의 목록은 우리가 주류언론으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온 것들이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인구를 줄여야 한다’, ‘시장과 무역의 자유를 보다 확대하면 식량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 된다’ 등등. 특히 굶주림을 종식하겠다며 자유무역을 주도해온 WTO와 FTA가 오히려 굶주림을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며 남미와 멕시코를 일례로 조목조목 따지는 부분은 지금 한창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를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더 귀 기울여 들어야할 얘기다.

부유한 사람들은 점점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세계화되는 현실의 문제. 그 세계화 속에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그 가난에 어떠한 책임을 지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결국 가장 밑바닥에서 현대의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 들어온 제3세계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화운동의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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