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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함께 ‘작은대안무역’을!

  • 등록일
    2005/09/08 11:55
  • 수정일
    2005/09/08 11:55

[일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작은대안무역’을!

추방된 이주활동가가 보내온 메시지

- 매닉 기자

 

 올해 2월경 방글라데시로 추방된 이주노동자 활동가 자히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빚쟁이들이 수시로 집을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협박과 갖은 욕설을 퍼붓고 간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후로 집에 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빚을 내어 생활을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결코 돈을 달라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 다시 가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말하는 문장 속에서 그의 유난스러웠던 자존심과 고집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선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노동허가제 쟁취”, “노동3권 보장”을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천막농성투쟁이 있었다. 농성 도중 많은 활동가들이 출입국에 잡혀 추방되었는데, 이중에는 출입국의 표적 연행에 잡혀 여수보호소에서 30일 넘는 단식을 한 후 강제 추방당한 농성단 대표 샤말 타파 외에도, 비두, 굽타, 깨비, 헉, 자히드가 포함돼 있었다. 자히드는 거의 농성 막바지에 붙잡혀가 강제추방을 당해 함께 하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자히드 편지 속에는 추방된 이주노동자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 있었다. 돈 문제도 문제거니와 많게는 10년 이상의 세월을 한국에서 생활한 이들에게 고국은 또 다른 ‘외국’이고 낯선 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주노동자 운동의 성격상 한 번 추방되고 나면 그 전의 활동과는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에, 함께 투쟁해온 동료 활동가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지고 마는 망각의 고통을 함께 앓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주 활동가에게 추방의 무게란 사회적 “죽음”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법무부와 출입국도 이주활동가의 체류자격을 약점으로 삼아 이주운동 탄압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국내의 이주노동자 노조와 운동단체들도 당면한 국내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추방된 이주활동가의 생존과 생계 문제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운동과 대안무역운동의 만남

자히드의 편지를 읽고 나를 비롯한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의 친구들 몇몇이 후원금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금은 원래 목표로 했던 금액에 훨씬 못 미쳤고 나중엔 각자 주위에 아는 이들을 “포섭”해서 후원을 요청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든 이주활동가들이 어려운데 누구는 돕고 누구는 돕지 않느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또 일방적인 후원보다는 쌍방의 상호부조에 입각한 교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작은 대안무역’이다. 추방된 이주활동가의 가족이 만들어 보내준 물건들을 각종 집회와 행사 때 판매해서 그 판매 금액의 50~70%를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돌려주고, 나머지는 국내 이주활동가들을 위한 지원금 등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를 통해 추방된 이주활동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추방되기 전에 함께 했던 활동가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되어 단절되었던 활동에 연속성을 부여해준다는 것이 우리가 그린 ‘작은대안무역’의 밑그림이다.

‘대안무역’은 영어의 ‘공정무역’(Fair Trade)에서 유래한 말로, 1세계 중심 다국적 기업이 3세계의 노동력, 자원, 생산품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불공정 무역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또 제3세계를 극심한 빈곤과 착취로 몰아가는 자본의 세계화 흐름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 신뢰와 연대로써 돌파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대안무역 운동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한국에선 ‘아름다운 가게’가 몇 년 전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작은대안무역’은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파생돼 나왔기 때문에 대안무역의 관점보다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보다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불공정 무역과 제3세계의 빈곤, 이주노동은 ‘자본의 세계화’라는 흐름에서 얽혀있으므로, 이주노동자 운동과 대안무역운동이 함께 갈 수 있는 여지는 크다.

옷에 수 놓인 여성들의 이름

자히드와의 인연으로 작은대안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올 5월 노동절 집회에서였다. 자히드의 여동생과 누나들이 염색하고 수놓은 옷들을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판매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판매가 제법 잘 됐다. 그 이후에도 각종 이주노동자 집회와 대학 축제, 여성 행사 등에서 판매했다. 추방된 이주노동자과 함께 하는 대안무역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여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보내온 옷들이 예뻐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6월에 있었던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Migrants' Arirang” 행사에서는 허락 받지 않고 판매부스를 차렸다가 행사장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시청 앞 광장 행사장에서 쫓겨난 우리들은 인도로 나와 6월의 뙤약볕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판매를 계속했다. 판매부스에 들러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에 다행히 상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또 큰 행사가 별로 많지 않았던 8월 중에는 홍대 앞 길거리에서 노점을 차렸다가 근처 음식점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테이블과 옷가지들을 들고 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후에 상실과 좌절에 빠져있던 자히드와 그의 가족들이 작은대안무역 이후 생활에 활기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여동생과 누나들이 옷을 염색하고 그 위에 수를 놓고, 그 옆에는 자히드가 옷을 손질하고 다리는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보내준 옷 하나 하나에는 디자인을 한 여성의 이름과 디자인 명이 정성스레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히드의 여동생과 누나들이 이 일을 계기로 가족 내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여자들이 바깥일을 할 수 없고 철저히 집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평소 방글라데시 친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히드가 이주노동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온 이유도 그가 가족 중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작은대안무역과 함께 하는 사람들

우리는 자히드의 물건뿐만 아니라 이주여성 활동가인 라디카가 만든 목걸이, 귀걸이, 팔지 등도 함께 판매했다. 라디카는 명동농성 기간에 있었던 단식 투쟁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앓던 지병이 악화되어 농성이 끝난 후에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공장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7월에는 네팔에 있는 샤말로부터 함께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샤말은 명동성당 농성단의 대표였지만, 올 3월 정부가 농성단을 와해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를 강제 추방했다. 추방된 뒤 지금은 네팔 노조의 이주노동자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주지부의 활동자금이 없어 작은대안무역을 통해 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지만 그의 개인적인 경제사정도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닌 듯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추방되거나 자진 출국하여 네팔에 돌아온 사람들은 1, 2년 고국에 머무르다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을 떠나게 되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고국에 와도 먹고 살 일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 고국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샤말도 다른 나라로의 이주노동을 생각해봤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다시 이주노동자로 차별 받고 탄압 받는 것보다 고국인 네팔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동료, 친구들에게 스스로 증명해 보여주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자히드, 라디카, 샤말 외에도 작은대안무역이 함께 해야 할 이주노동자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작은대안무역이 제안하는 것은 정부나 기업, 큰 단체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크게 벌여 가능한 많은 이주노동자를 한 번에 도와주자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어진 능력 안에서 투쟁을 통해 맺어진 이주활동가들과의 끈끈한 개인적 친분을 기반으로 ‘가늘고’ 소박하게 가자는 것이 우리의 운동 방식이다.

우리의 운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명되어 여기 저기에서 서로 다른 작은 대안무역 모임이 생겨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커다란 운동의 대의명분보다는 이주노동자 개인의 삶에 더 밀착된 풀뿌리 모임들이 모여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작은대안무역(stopcrackdown.net)에 참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이주노동자 집회나 반전집회, 각종 여성행사, 소수자 행사에 차려지는 작은대안무역 부스에 한번쯤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둘째, 수중에 돈이 있고 물건이 마음에 들면 주저 없이 산다. 셋째, 좋은 물건은 주위 사람에게도 권한다. 넷째, 작은대안무역의 활동가가 되어 판매에 직접 참여한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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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Live Christian!

  • 등록일
    2005/08/08 12:00
  • 수정일
    2005/08/08 12:00

크리스티앙이 살아있다!

이주 노조 게시판에서 그의 글을 발견했다.

출입국 개새끼들이 만나볼 사람이 있다며

크리스티앙을 인천공항으로 속여서 끌고 갔고

그의 저항으로 1차 실패, 2차 시도에서 그를 비행기에 태우는 데 성공,

곧바로 독일로 날아갔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집(서울)에 있다

나는 완전히 0 에서 다시 출발해야한다."

 

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암담함과 서글픈 보다는

낙천적인 자조가 떠올리는 건,

그의 투쟁과 온갖 풍상들이 만들어 낸 어떤 "빛"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그와 나는 생각이 너무나 달라서 논쟁도 몇번 했지만

결국에 내가 나가는 집회에는 꼭 그가 있었다.

그가 저기에서 구불구불 돌아 오는 동안,

내가 여기에서 구불구불 돌아 가는 ,

다르면서도 같은 길을 가고 있지는 않았었나 싶다.

 

 

나와 친구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의 신념에 대한

그의 유머러스한 반박

 

 

 

"총을 얻었으면 부러뜨리지 마라.

 후에 쓸 날이 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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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은 어디로...

  • 등록일
    2005/08/08 11:26
  • 수정일
    2005/08/08 11:26

크리스티앙이 인천출입국으로 넘겨졌다는 소식

이주노조에서 들은 것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크리스티앙은 6주전에 출입국에 잡혀 화성보호소에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서울 출입국으로 옮겨졌다.

이유인 즉슨,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보호소를 조사하는 기간이기때문에

트러블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을 보이지 않게 "빼돌린" 것이다.

크리스티앙은 닭장 같은 출입국 보호실에 갇혀 있으면서

형편없는 식사, 불결하기 그지없는 환경 등에 대해 항의했지만

직원들은 무시로 일관하였고 그는 단식투쟁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주노조는 크리스티앙의 보호소내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보도자료를 뿌렸다.

그러나 가증스런 법무부는 단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뻥"을 치곤 급기야 크리스티앙을 인천 출입국으로 넘겼다.

일이 커지기 전에 보내 버리려는 수작이다.

 

그나저나 크리스티앙은 지금 어디로...

그의 투쟁에 무심했던 내가 밉다.

 

크리스티앙의 사진을 찾으니

그가 찍은 사진은 많은데 정작 그를 찍은 사진은 없다.

그가 찍은 명동 이주노동자 농성 때의 사진들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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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명암

  • 등록일
    2005/06/15 09:35
  • 수정일
    2005/06/15 09:35

이주노동자 세상 2회분

  • 등록일
    2005/06/03 09:45
  • 수정일
    2005/06/03 09:45

이주노동자 TV(MWTV)에서 만든 "이주노동자 세상"이라는 RTV프로그램의
2회분입니다. 이주노동자가 직접 기획,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을 합니다.
한국활동가는 번역이나 기술적인 보조 역할만 한다고 해요.
촬영도 편집도 아직 서툴어보이지만,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TV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해요.



300K
RTV (www.rtv.or.kr) VOD 프로그램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주노동자의 5월
[이주노동자세상] 이주노동자 본격 제작 프로그램 - 5월21일(토) 오후 10시


5월1일은 115주년을 맞는 노동절. 노동절을 기념해 한국의 노동조합과 이주노동자 문제를 조명한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 결성식과 버마민주화를 위한 서명 현장을 찾아보고 노동3권의 현실과 이주노동자의 인권상황을 다시 짚어본다. 한국 버마행동 대표 뚜라가 취재했다.


“미등록 문제로 평소 자유로운 외출이 어려워 가족들과 편히 놀러갈 기회도 없었는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5월5일 한강시민공원에서 열린 ‘외국인노동자 자녀와 함께하는 어린이날 무지개축제’. 한국이주노동자건강협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필리핀, 몽골 등 아시아 각국의 이주노동자 가족과 한국인 가족 등 3백여 명이 어울려 동심의 시간을 보냈다. (오른쪽)“산달이 가까워지자 해고를 당했어요. 아기가 병을 앓고 있는데 보험이 안 돼 안타깝습니다. 남편 아짐 아메드(방글라데시, 프레스공)가 한국에 온 지는 14년째예요. 저도 아이만큼은 꼭 한국에서 기르고 싶지만 양육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5월의 명암을 마붑(방글라데시)이 취재했다.


5월8일 조계사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행사에는 네팔, 몽골, 스리랑카 등의 활동가들뿐 아니라 많은 불교도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프로그램 바로가기::http://rtv.or.kr/kor/brdprg/listVodPrg.jsp?bbs_id=102&prg_code=CB88C


* '이주노동자의 방송'에서 이주노동자 관련 제보를 받습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http://www.mwtv.or.kr
    담당 : 마붑  010-7759-5952 ,   02-6366-0621,     equal916@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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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근로자"와 자매결연, "호스트 패밀리"라?

  • 등록일
    2005/05/23 13:11
  • 수정일
    2005/05/23 13:11

각종 신문에서 "외국인근로자"와 자매결연행사로 "호스트 패밀리"란 걸 했다고 보도했다.

이 행사에 유명한 국회의원이나 대학총장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주노동자를 노동기계처럼 부리면서
쓰고 나면 불법이라며 버리는 대한민국의 그늘.

한편, 겉으로는 자매결연이니 패밀리니
번지르르하게 내걸고
아시아 각국으로 기업이 진출하기 위한
이미지 전략이자 윈윈이라고 한다.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인정한다면
이주노동자 노조 설립 신고를 노동부에서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설립신고서를 받아들자마자
노조 위원장인 아노아르를 잡아갔다.
그것도 20여명이 한명을 떼로 몰려가 덮치고 때리고 밟았다.

 

음지에선 밟고
양지에선 손내밀고

 

이게 뭐~~니
정말

코리아 재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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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세상 만세

  • 등록일
    2005/04/18 09:24
  • 수정일
    2005/04/18 09:24

3/12이주노동자 연대의 밤

  • 등록일
    2005/03/14 09:25
  • 수정일
    2005/03/14 09:25
* 이 글은 no chr.!님의 [어제/이주노동자 연대 밤] 에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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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일요일에 피자매 달거리대 오프라인 판매합니다

  • 등록일
    2005/03/12 14:55
  • 수정일
    2005/03/12 14:55
명동성당 농성중에 추방된 이주노동자 자히드를 돕기 위해 피자매연대도 나섰습니다.
직접 손바느질로 하나씩 만든 달거리대를 판매합니다.

시간: 2005년 3월 13일 일요일 오후 2시-6시
장소: 서울 홍대앞 놀이터

조약골의 노래 공연과 면생리대 만들기 즉석 워크샵도 열릴 예정입니다.
많이들 와주세요!
* 비가 내리면 취소가 됩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http://www.stopcrackdown.net 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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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추방

  • 등록일
    2005/03/12 14:39
  • 수정일
    2005/03/12 14:39

2004 12월 1일 새벽에

이주노동자 해단식이 끝나고 며칠 안되

자히드가 잡혀갔다.

술먹고 시비가 붙어 싸우다 경찰에게 잡혔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출입국으로 넘겨졌다.

빌우는 그의 블로그에 이주노동자 투쟁을 하며 조직을 더욱 환멸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가끔 이런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 문제들이 또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해결될때마다 

조직을 환멸하게 된다.

그도 사람이고 그래서 술을 마시고 성과없이 끝난 농성을 분노하고 슬퍼하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하나, 밥은 어떻게 먹고 지낼 것이며, 잠은 또 어떻게...하며

불안해 하는 연약한 인간일뿐이다.

(가끔 이주노동자 운동은 그들도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자명하지않을 수도 있는 것인양 "주장"해야 하는 모순을 숨기고 있다.)

연단에 올라가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큰 소리로 정부를 비판하고 언론을 질타하고 나서

밤이되면 동지들이 바람이 숭숭들어오는 천막에서 새우잠을 잘 시각에

혼자 깨어 술 마시고 돌아다니며 온갖 객기를 다 부리는

그저 보통의 술주정꾼이며 가끔 아주 사소한 말싸움에도 감정이 먼저 욱 해버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약한 사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을 경찰이 한번 잡아가고 출입국이 두번 잡아갔다.

대개 취객이라면 경찰서에서 하룻밤정도만 자고 나오면 될 것을

그는 10년의 청춘을 바친 코리아라는 고향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코리아의 경찰, 출입국, 정부가 한번 추방하고,

또 조직의 이미지를 위해 모두 함께 다 같이 소리높여 쉬쉬하는

그 놈의 조직이 한번 더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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