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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몰트만이 민중신학자들에게 던진 비판적 질문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이 상징론(서남동), 혹은 사건론(안병무)적으로 “고난 받는 종”(이사야53장)과 예수, 그리고 민중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는 이러한 민중신학의 방법론이 예수를 민중의 상징으로 “위축”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인류의 구원은 “타자와 함께 하는 현존”이라는 연대행위와 “타자를 위한 현존”이라는 대리행위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민중신학의 민중메시야론은 연대행위만을 이야기할 뿐 민중의 바깥에서, 민중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대리행위의 기독론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리행위 없는 단순한 연대는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속죄의 고난과, 극복되어야 할 백성의 고난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민중의 연대만으로는 구원은 불충분한 것일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있어야 그 위에서 민중의 연대, 민중의 자기 초월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몰트만은 변증법을 신학에 도입함으로써 세계와 분리되어도 별 상관이 없는 기존의 군주적 절대신론을 극복하고 신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러한 변증법은 다시금 그를 기존의 신학체제 속으로 포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몰트만의 이 질문에 대해 민중신학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족하리라. “도대체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이 - 그 사람이 사실은 신이었다 한들! - 어떻게 오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혹은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다면, 예수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라고 그의 질문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독론은 결국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 범죄한 인류, 내려져야 할 징벌”이라는 프레임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애초에 구원자와 구원받는 사람의 구분(혹은 심판받아야 할 세상과 심판할 하느님의 구분)이라는 신학의 프레임 바깥에 서 있다. 구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변증법적 종합이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오히려 몰트만의 구원론이야말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비판받아야 할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제 고통 받는 사람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심지어 그가 이전엔 믿지도 않았던 신을 믿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민중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몰트만의 비판적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변증법적 프레임 바깥으로 더욱 탈주하는 것이다. “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이라는 안병무의 주장이나,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는 곧잘 변증법으로 오해받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변증법에 대한 완전한 폐기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즉 민중 사건과 예수 사건을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하나의 탈주의 사건으로, 그리하여 또 다른 탈주를 촉발하는 하나의 감응(affect)적 사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안병무가 성서와 역사에서 “화산맥”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사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개념을 폐기한 것이었다. 그 대신 민중신학이 발견한 것은 수다한 민중의 분출이요, 그리하여 수다한 예수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해방신학과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통신학과 해방신학은, 말하자면 만 사람이 있어도 하나의 구원,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만이 있다. 다만 정통신학이 그 하나의 구원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 ‘믿는 자’의 천국행으로 이해했다면, 해방신학은 그것을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우선적 선택으로 이해함으로써 내용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학의 틀과 ‘형식적’으로도 구분된다. 만 사람이 있으면 만 개의 구원이 있다. 구원은 수없이 일어나고, 또 그 구원사건들은 서로 소통하고 촉발한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과제는 하나의 구원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은 정치적 행동에 있어 기존 신학의 대리적 기독론에 상응한다 할 수 있는 대의적/주권적 정치와 구별되도록 이끈다. 오직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해방실천만이 대중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초월적 구원자 - 교회든, 정당이든, 예수든 - 는 없다.


p.s. 복음서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 사건의 한 모습으로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혈루병 걸린 여인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구원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 호소하고 투쟁한다. 그들은 예수가 가졌던 이방인에 대한 통념을 깨뜨려 예수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하고(수로보니게 여인), 감히 정결하지 못했던 손으로 예수의 옷을 잡음으로 그의 능력이 유대의 정결법을 깨뜨리고 흘러가도록 한다.(혈루병 걸린 여인)

 

이러한 깨뜨림의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예수마저 구원한다. 예수가 유대 민족주의에서 멈추지 않도록, 남성 중심의 정결법 체제로 흡수되지 않도록 그들은 예수에게 있어 메시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설한 말들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주위의 이러한 민중들, 단지 고통받고 억눌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을 창조하는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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