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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 이어진 질문과 응답

한 열린 기독교 커뮤니티에 아래 글을 올렸는데 몇 개의 토론이 있었다. 그 중 하나.

클럽장님:

여러번 읽다보니, 첨 읽을때보다는 낯섬이 덜하다 싶네요.^^
그래도, 전 여전히 '그러면 왜 예수인가?'란 질문이 남습니다. 이건 제 질문이 아니라, 제가 과거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세미나에서 발제할 때, 참여하셨던 민중교회 출신의 성도 한분이 좌중에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적절한 대답을 못 얻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민중사건을 중심으로 사고한다면 예수사건이란 것이 갖는 의미나 위상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을텐데, 왜 우리는 여전히 '기독교'를 말하고, '예수' 얘기를 하고 이러고 있는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혹 여기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해주실 수 있을런지?

 

조계영님:

저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습니다..그럼 왜 예수를 말하고, 기독교란 이름을 유지해야 하는가? 김강님의 글에서 느낀 바는 절대적인, 초월적인 그 어떤 것도 상정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읽히는데, 그럴 경우, 예수나 기독교란 이름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전 이 글의 제목을 보고 낚인 것 같다능..ㅋㅋ

김성연님:

제가 궁금하던 것을 클럽장님께서 질문해주셨군요. 같은 맥락에서, 민중신학에서는 어떻게 성서가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는지, 아니 도대체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될 수는 있는건지 궁금하네요.
만약 될 수 있다면 다른 텍스트들과 차별화될 여지는 있는건가요? 아니면 그냥 수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일 뿐인가요?

 

 

 

답변을 올릴까 말까 좀 고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금다니엘이 한 마디 했듯이, 여기다 이런 글 쓰는 게 민중신학 전도할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저한테 민중신학은 하나의 탈주선입니다. 저에게 탈주선인게 누군가에게도 동일한 탈주선이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정*길씨를 참 싫어하는 건, 그분이 보수신학의 욕망과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글쓰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보수신학의 도그마가 모두가 따라야 할 진리였다면 그분은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우겨넣고 싶어하시더군요.

 

 

전, 교리나 그 사람의 '사상'이 그 사람을 결정적으로 형성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리나 사상에 대한 태도"가 그 사람을 형성한다고 봅니다.

 

똑같은 정통주의 교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교리에 충성하는 사람과, 그 교리를 탈주선으로 삼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논쟁도 하고, 제 이야기도 하고, 때로 계몽적인 태도로 글쓰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가 이 클럽에서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제 이야기를 모두가 따라주길 원해서가 아니라

제가 경험한 탈주를 이야기함으로써 어떤 촉발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진 알 수 없지요.

 

 

 

 

아무튼 서설이 길었네요^^

 

양희송 님과 조계영 님께서 "그러면 왜 예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저는 반대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왜 예수'만'인가?"라구요.

 

상대주의.. 뭐 맞겠습니다.

"진리"라는 걸 놓고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두 항만 세상에 있다면 저는 상대주의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는 절대주의인데, 왜냐하면 이 세계 바깥에는 다른 존재(즉 이 세계와 상대적인)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세계는 주어져 있고(물론 저도 여기에 참여함으로 세계형성을 이루어가고 있고)

모든 사유와 실천은 주어져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출발합니다.(또 세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세계"와 "진리"는 다릅니다. "진리"가 무수한 "비-진리"를 삭제함으로써 동일성과 절대성을 획득한다면

"세계"는 그 무수한 것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절대'가 아닐까 해요.  

 

그리고 이 세계의 무수한 것들 중 하나가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이야기, 성서 이야기, 기독교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뭐, 제가 없애려고 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에게 왜 예수냐면, 저는 그저 "주어진 것을 선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겠습니다.

성서의 예수 이야기가 저를 여전히 탈주하도록 촉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도 "백지"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에게 가장 크고 귀한 출발점은 예수이고

그래서 예수 이야기를 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를 하며

그들과 소통할 수 있기에, 친구를 구할 수 있기에, 예수 이야기를 합니다.

 

김성연 님께서 "민중신학에서 어떻게 성서가 의미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의미있는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서남동은 아예 "민중현실이 텍스트고, 성서가 콘텍스트다"라고까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또 안병무는 성서는 "고전이며, 적어도 나에게는 최고의 고전이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조계영 님께서 "예수가 걸림돌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으셨는데...

글쎄요. 현재까지는 별로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나 진지하게 세계와 그리스도의 심급을 구분하지

비그리스도인들이야 원래 예수 이야기를 세계 안에 있는 여러 이야기 중 하나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제 주변에는 오히려 기독교인은 별로 없고 거의가 비기독교들인데요, 복한한 요즘은 좀 다르지만)

오히려 제가 쓰는 성서 이야기(아래 요한복음 묵상은 비 기독교인들이 주로 드나드는 제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나 신학과 사회를 이어가며 사유한 글들을

비기독교인들이 재밌게 읽어주더라구요. 그 부분은 별로 걱정 안 하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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