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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죽음, 민중의 부활(1)

화려한 휴가 中

 

민중신학은 신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5.18광주에서 우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 분은 무력하다.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고문당하는데 하느님은 안 계신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그렇다. 그는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울부짖는다. 예수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데, 그래서 지금 예수가 이끌었던 민중운동이 궤멸될 상황인데 하느님은 침묵한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이 하느님의 침묵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예수는 무력하고, 예수가 섬겼던 하느님도 무력하다. 예수를 따랐던 민중도 무력하게 도망갈 뿐이다. 마가복음은 유다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졌다. 로마군에 의해 유대 전역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며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죽음을 기록했다. 예수의 죽음에서 그는 동족의 죽음을 읽었다. 거기에 하느님은 개입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없다. 죽었다.

 

주류 신학은 말한다. "모든 것은 절대적인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하느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그래서 "모든 고통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밀양>에서 신애를 전도하는 약국집 집사님에게서 우리는 이런 신앙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고통에는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신의 죽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구? 정말? 정말 그런거야? 아니야. 고통에는 뭔가 의미가 있겠지. 결국은 하느님이 다 갚아 주실 거야. 살아 있는 동안 안 되면 죽어서 보상받을 거야. 하느님은 살아 계셔.(안 계시면 안 돼!) 이것은 일종의 '고통의 치환'이다. 고통을 받으면 받을 수록 이들은 그래서 더욱 신을 사랑하며, 신에게 메달린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예수는 고통을 그대로 직면했다. 하느님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이 되갚아 주실 것이다."같은 예언은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에게 항의한다. 왜 나를 버리냐고! 그 고백은 "왜 당신은 없느냐!", "왜 당신은 죽었느냐"와 다르지 않은 고백이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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