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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내재화

천지창조?


나는 하느님을 세계 바깥의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불어 '인격'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즉, '부정의 신학'의 기획도, '유비의 신학'의 기획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신을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인격적인 존재로 사유하는 신학은 사실상 성직자의 권력을 위한 신학에 불과하다. 신은 초월적이기에 신과 세계(사실상 인간)을 중재하는 매개가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교권), 성서, 혹은 성직자로 역사상에서 나타났다. 또한 인간적 유비를 빌어 신의 인격을 설명하는 신학은 신과 인간을 탁월성에 의해 구분하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 안에서의 탁월성의 유비가 그대로 신에게 적용된다. 즉, 탁월한 인간, 교황, 성직자, 혹은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 나타난다.

한편, 신을 세계에서 구분된 초월적 실체로 그렸을 때, 세계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 되고 만다. 신은 세계 밖에서 계시를 통해 세상으로 들어온다. 계시는 명령이다. 인간은 명령에 따르는 노예이며, 죄인이며, 약자이다. 때문에 스스로 서려는 사람.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악인이며, 세상과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오, 우리의 연약함을 살피소서"가 인류의 보편적 구호가 되며 성직자들은 이러한 노예의 도덕에 기생하여 그들을 착취한다.

초월적 신학에도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신을 절대적인 초월자로, 세계와 무관한 자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부정신학의 철저한 수행. 인간과 신의 모든 유비는 사라지고 신과 인간 사이에는 단절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데, 신은 더 이상 세계와 상관이 없기에 우리는 그를 알 수도 없고, 그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은 오직 세계의 창조와 절멸의 시간에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세계는 그저 세계일 뿐이며, 모든 경건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었으며, 하느님의 절대 타자성을 견고히 주장한 칼 바르트도 계시와 유비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기획(몰트만)이나, 만유재신론적 입장(과정신학)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쨌든 신을 철저히 내재화시키는 신학으로 나아가고 싶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스피노자주의적인 기획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은 곧 자연이다. 다르게 말하면 만물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인 신의 양태들이고 때문에 만물은 특이적으로 존재하지만 신이라는 공통의 신체를 이루고 있다.(존재의 일의성) 때문에 스피노자에게서 경건함의 가치는 삭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건함은 더 이상 초월적 신에 대한 복종적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함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 특이적인 것의 공통성을 구성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제 "우리 이제 만물을 사랑하고, 공통의 관계를 만들어 갑시다. 즉, 세계를 창조내 나갑시다."하는 권유문이 된다.

이것을 '기독교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기독교'를 교리나 전통에 의거한 정체성으로서가 아니라 '경건의 운동'으로 정의할 때 나의 신학은 여전히 기독교 신학이다. 여전히 성서의 이야기들은 이 경건의 운동에 모티프를 제공해준다. 나는 예수에게서 이러한 경건의 운동을 발견하며, 예수를 내 삶의 준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이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이거나,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0:34>)더 이상 '기독교'의 절대성이나 탁월성은 주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의미하다. 아니, 무의미를 넘어 그러한 주장은 세상의 파괴를 가져온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절대성이나 탁월성이 아니라 기독교를 오늘날 공통성의 형성에, 그리하여 신에 다다르는 길에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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