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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단상

최후의 만찬(Pinacoteca Sassetta)

 

창섭씨와 이야기하면서 타로카드점 이론의 시간관은 우리에게 일반화 된 어거스틴적 시간(시작으로부터 끝으로 향해가는)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로 점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평면에 있다.

 

요즘 하루에 한 장씩 명상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 용수의 중론(정확히는 정화스님의 중론 강의)에서도 시간은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생각해보면 과거는 일단 '기억'으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고, '미래'는 '씨앗'으로 역시 현재에 존재한다. 시계와 역사, 미래학의 덕분으로 우리는 시간을 세고 있지만, 이것은 분별의 지식에서 나온 것이고, 사실상 시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혹은 언제나 현재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성서의 전승자들, 저자들은 어땠을까. 그들은 성서가 완결된지 수백년 후에나 나온 어거스틴의 시간관과는 다른 시간관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게 중요한 것은 특히 성서의 종말론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두 가지의 종말론을 말한다. 하나는 개인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들이고, 또 하나는 세계(역사)의 끝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을 어거스틴 적 시간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사후 천국 이론과 재림 이후의 유토피아 이론이 세워진다.

 

그러나 어쩌면 종말은 시간적(양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성서의 저자들 역시 그런 시간관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다면 종말은 '질적'인 것이다. 정확히는 '현재'라 이름붙여진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현재'에서 살아가는 것이 '종말'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 이러한 사유와, 이러한 실천은 - 현실성의 영역으로부터 잠재성의 영역으로의 탈주가 아닐까. 

 

예수는 부활했다.(고 성서 전승자들과 그 후예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는 시간을 넘어 끊임없이 출몰한다. 그분은 항상 현재다. 그러나 현실성이 아니라 잠재성이다. 이미 규범화되고 몰화된, 그래서 '체제'가 된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잠재성으로써, 종말로써 그분은 항상 현재다. 부활한 예수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 '잠재성의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p.s. 업(카르마)에 대한 책,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과 리라이팅 클래식의 개론서),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을 찬찬히 읽어봐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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