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주권적 신앙체제에서 구성적 신앙으로

"배반의 체계를 보편적인 것으로까지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유대인의 신을 배반하고 유대인들을 배반하며, 신에게 배반당하고("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된 인간인 유다에게 배반당한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 240p)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하든 아니면 순화시켜서(신학적 이론으로, 혹은 여러 감성적 언술로) 말하든 주권적 신앙의 명령어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이 주권적 신앙의 명령어인 것은 아니다. 주권적 신앙의 다양한 변조가 존재한다. 기독교세계관, 하나님 나라, 규범윤리, 제자도의 담론 속에서, 또는 "'역사적 예수'를 따라 분단을 넘어서자"라는 어느 진보적 기독교인의 주장([복음과상황] 169호) 속에도 주권적 신앙의 명령어가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담론 자체가 주권적 신앙체제이다.

주권적 신앙체제에서 나는 신을 위하여 봉사한다. 내가 여기서 굳이 '하나님'(하느님)이라는 기독교적 기표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주권적 신앙체제의 신은 하나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은 하나님이며, 교회이며, 목사이며, 민중이며, 역사적 예수이며, 신앙의 그리스도이며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다. 신은 내게 명령하며 나는 그의 말씀을 청종한다.

때로 나는 명령을 부과하는 신의 얼굴로부터 머리를 돌린다. 교회와 목사라는 신으로부터, 복음주의와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신으로부터 나는 머리를 돌려 그를 배반한다. 그러나 파라오라는 신으로부터 탈주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주하며 그들의 새로운 신 야훼를 위하여 성전을 세웠던 것처럼 나는 민중이라는 새로운 신, 역사적 예수라는 새로운 신을 위한 성전을 세워 사제가 되거나 이미 파괴된 성전의 통곡의 벽 앞에서 울부짖는 향수병 환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서"며,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에 힘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교회성장과 해외선교를 명령하는 교회에 봉사하던 나는 하나님 나라 실현과 기독교적 세계관 수립을 명령하는 선교단체에 똑같은 모습으로 봉사한다. 복음주의라 불리는 이러한 주권적 신앙체제를 벗어나더라도 민중을 위하여, 역사적 예수를 따라서 "내 생명 다 하도록 주 얼굴만 구하"는 일은 반복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주권적 신앙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예수는 히브리인들과 달랐다. 그는 "다 이루었다."(요 19:30) 무엇을 다 이루었는가? 우선 그는 탈주를 다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유대의 혈통적 가족제도를 버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마12:50)임을 선언했다. 그는 또한 성전체제와 그 해석자들을 배반하였으며(그는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 로마 제국이 명령하는 삶(또한 그것에 저항하는 반란자들이 명령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가족, 성전, 제국적/민중민족적 정치. 그는 이러한 당대의 명령자-신들 모두를 배반하였다.

성전체제의 수호자들과 제국의 군대, 민중,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다. 그는 완전히 버림받았으며 그것을 통해 "다 이루었다." 니체는 멋지게 이야기하였다. "이제 진짜 기독교 역사를 이야기해 보겠다. - 기독교라는 말 자체가 벌써 잘못된 말이다. - 기독교도는 사실 단 한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기독교적 실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삶만이 기독교적인 것일 뿐이다."(니체, [적그리스도])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주장할 때 그는 또 하나의 주권적 신앙체제의 사제가 된 것일까? 니체의 저 말에 동감하여 나는 "아니다."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신'이 아니다. 예수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한 하나님이 예수를 섬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인 거룩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4-35) 예수에게는 붓다(깨달은 자)가, 아라한이 삼위일체의 제2 위격보다 훨씬 더 어울린다.

그가 이런 탈주를 통해 "다 이룬" 것은 구성적 신앙의 삶이다. 규범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서의 신앙에서 삶을 구성하는 신앙으로 예수는 나아갔다. 새로운 정치(학) 혹은 새로운 윤리(학). 8복은 위대한 구성적 신앙의 선언문이다. "······복이 있나니"라는 개역의 번역보다 공동번역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 "······행복하다." 기독교회가 이해해온 바와 달리 산상수훈의 윤리는 결코 규범윤리가 아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율법책으로 보고 그것의 자구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주권적 신앙체제에 속한 사람에게 산상수훈의 윤리는 고통이요 금욕이지만 구성적 신앙인에게 산상수훈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산상수훈의 자구를 내 마음대로 수정한다 하여도 예수는 기뻐하리라.

앞서의 질문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이 주권적 신앙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나는 배반과 예속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반복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반복되는 배반과 예속화의 과정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듭할수록 구성적 신앙이 주권적 신앙체제의 강고한 벽을 깨뜨리며 탈주하는 속도가 빨라졌으며, 더 강렬해졌다는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명령하는 교회에 봉사했을 때보다 하나님 나라 실현과 기독교적 세계관 수립을 명령하는 선교단체에 봉사했을 때에 나는 주권적 신앙체제에 대한 불만을 더 많이 가졌다. 또 그것을 넘어서 다른 주권적 신앙체제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불만은 한층 더 커졌다. 그리고 불만에 비례해서 구성적 신앙의 활력 역시 더욱 커졌다. 이 과정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1)

이제 구성적 신앙의 활력이 만개하고 있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나도 나의 신을 찾는다. 신은 이제 명령자가 아니라 봉사자이다. 신만이 아니라 친구들도 필요하다. 나와 함께 해방의 탈주선을 그리며 접속할 친구들. 주권적 신앙을 넘어, 자본주의를 넘어 구성적 신앙, 구성적 정치로 나아갈 우리들. 그러나 아직 한 가지를 해결하지 못했다. 정확히 인용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가에서는 "길을 가다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어떤가? 성전은 파괴되었다. 이제 예수를 죽여야만 하는가?


1)사실 과거를 회상하건대, 내가 처음으로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그 때 - 복음주의 권에서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때 - 나는 삶의 구성을 위해 교회 생활을 선택했다. 교회 생활은 지긋지긋한 대한민국 중(고등)학생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나의 '행복의 길'이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때의 나에게 신앙생활은 탈주선이었다. 물론 나는 금새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주권적 신앙체제의 노예가 되었지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