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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가, 남한인가, 꼬레아(COREA)인가

■ COREA국호는 회복되어야 한다


                                               

                                                21세기코리아연구소 연구위원 정형기, 2003.10.25


 * 아래는 조선대 교지 ‘민주조선’에 기고한 글이다.

 1

오 필승 COREA!, FORZA COREA!
지난 월드컵 때 코리아반도 이남에서는 4천만이 모두 목놓아 외치던 구호이다. 정부와 대회 관계자들은 모두 KOREA를 사용했는데, 왜 사람들은 COREA를 사용하였을까? 선수들도 축구협회에서 제작한 KOREA로 표기된 운동복을 입고 뛰었는데, 사람들은 선수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응원을 하면서도 굳이 국호만은 COREA이기를 바랬다.
월드컵 이후 COREA국호회복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카페와 커뮤니티들이 우후죽순 솟아나는 등 기층에서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이 운동은 이제 남북 학자들이 모여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국회의원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용할 한반도기에 COREA국호를 표기하자는데 합의하고 돌아왔다. 북이 참가했던 부산 아시안게임과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도 남북이 공동응원을 하면서 COREA를 힘차게 외쳤다. COREA국호를 회복하는 것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국호를 ‘변경’한다고 하지 않고 ‘회복’한다고 하는가? 회복이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본래의 질이 자기의 본성에 맞지 않게 변경되었던 것을 다시 되찾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회복의 단계를 거치면 본래의 것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병에서 회복하면 면역능력이 강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철학 용어로 ‘부정의 부정’이라고 한다.

*출처: http://www.21corea.org/corea/corea_01.asp

 



2

우리의 국호표기가 서양에 처음 알려졌던 것은 고려시대인 1200년대부터이다. 프랑스 선교사인 루브류끄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명령으로 몽골에 파견되었다가 1255년 8월에 귀국하여 발표한 여행기(linterarium fratris William de Rubruquis de ordine fratrum Milorun)에는 중국 동쪽에 ‘까울레(CAULE)’라는 나라가 있다고 쓰여있다. 1296년에는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폴로가 중국을 여행한 후 동방견문록을 썼는데, 이곳에도 우리나라를 까울리(CAULY)라고 표기하였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 대해 적혀 있는 서양의 문헌을 보면 COREA, CORAY, COREY, CORIE, COEREE등 모두 첫 글자가 ‘C’로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헌뿐만 아니라 당시 제작된 지도에서도 우리의 국호를 모두 COREA로 표기하였다. 유럽인들의 세계지도 작성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지도를 포함시킨 네덜란드 사람 빼뜨로 프란치오의 ‘세계지도’(1594년)로부터 시작하여 1894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도서 ‘은둔국조선’에 부록으로 첨부된 조선지도 등 16세기 초에서 19세기 말까지 간행된 20여 가지의 코리아반도가 포함된 세계 및 아시아 지도 중 거의 모든 지도들에서 우리나라 국호를 COREA로 표기하였다. 1943년에 일본의 지도학자 마쓰모또 겐이찌가 편찬한 ‘유럽고판일본지도집’에 소개된 19개의 코리아반도 지도 중에서 우리나라 국호의 외래어 표기 첫 글자를 ‘K’로 표기한 것은 1734년에 러시아사람인 요한 키릴로브가 제작한 ‘러시아지도’와 1840년 필리프 프란츠 폰 시볼트가 제작한 ‘일본지도’뿐이다. 여기에서 러시아 사람이 작성한 ‘러시아지도’에서 우리나라 국호의 첫 글자를 ‘K’로 표기한 것은 러시아어 자모에서 ‘ㄱ’음을 나타내는 것이 ‘K’밖에 없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 국호의 첫 글자를 ‘C’로 표기하는 현상은 19세기 말까지 프랑스어나 포르투갈어, 영어, 네덜란드어 등 그 어종에는 관계없이 유럽에서 모두 다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정부도 서양과의 외교문서에 COREA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1882년 5월 22일에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국호의 영문표기를 ‘KINGDOM of COREA’로 쓰면서 COREA를 우리나라의 국호표기로 정식 인정하였다. 이때로부터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의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대외문서에서 COREA는 우리나라의 공식 국호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 국호의 첫 글자가 700여 년 동안‘C’로 사용되다가 ‘K’로 바뀐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넘보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이다. 국제적인 회합이나 문서의 작성에서 나라이름들의 나열은 해당언어의 자모순에 따른 것이 관례이다. 영어 표기의 경우 조선의 국호표기인 COREA의 첫 문자 ‘C’는 일본의 국호표기인 JAPAN의 ‘J’에 비해 자모순에서 훨씬 앞서므로 COREA가 JAPAN의 앞에 놓이게 된다. 당시 조선을 식민지지배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던 일본의 대조선인식에 보면 조선이 일본의 앞에서 거론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일제는 교묘하게 우리의 국호를 KOREA로 바꾸기 위한 공작에 착수하게 된다.
일제는 우선 같은 제국주의 국가인 영미 등 서양의 친일인사들을 동원해 국호왜곡을 치밀하게 준비해 나간다. 미국의 친일적 선교사였던 아펜젤라는 자신이 간행하던 잡지 ‘코리언리포지터리’(1897.12)에서 일본의 학자들 속에서 제안된 주장을 쫓아 ‘ㄱ’의 영어 등가물이 ‘K’이므로 ‘C’를 쓰는 것은 낡은 방법이라는 괴이한 논리로 KOREA국호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즉, 700여 년간 우리나라와 세계가 공인하여 온 COREA라는 표기가 언어학적 원리에 맞지 않는 낡은 표기이므로 그 첫 글자를 K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1864년부터 일본에 와서 근무하였고, 1880년부터는 요꼬하마영사, 1884년부터는 조선에서 영국총영사까지 지낸 바 있는 윌리엄 조지 아스톤도 일제와 결탁하여 우리의 국호를 왜곡하는데 일조한 사람 중의 하나다. 아스톤의 저술을 보면 1876년 영국황실아시아협회의 잡지에 낸 논문을 제외하고는 1878년 이후로 줄곧 KOREA를 사용하고 있다. KOREA의 쓰임이 맹아적 단계였던 1880년대의 주요한 5개의 영문문헌자료들에 가운데서 4건이 아스톤의 저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그가 일본에서 활동한 1884년 이전 시기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아도 당시 일제의 코리아표기 왜곡에 아스톤이 얼마나 발벗고 나섰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헐버트, 커즌, 게일, 비쇼프 등 영미의 친일 인사들이 일제와 결탁하여 국호 왜곡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제국주의국가의 친일세력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국호를 왜곡할 준비를 마친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본격적으로 국호를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선 통감부와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모든 관보에 우리의 국호를 의도적으로 KOREA로 표기하였다. 조선통감부시정년감과 같은 연보들과 조선의 재정개혁(1906년), 조선에서의 새로운 진보(1910년), 조선정부년보(1924, 1927, 1931년) 등의 관보는 일문판과 함께 영문판으로 출판 발행되었는데, 이 영문판 관보에 조선을 모두 KOREA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관보에 인용한 사료의 인용문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일의정서(1904), 한일협정(1905) 등 인용문의 원본에는 우리의 국호가 COREA로 표기되어 있는데, 사료를 인용한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KOREA로 표기하였다.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등과 함께 3대 민족말살정책 중의 하나였던 국호왜곡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한번 왜곡된 국호는 해방 이후에도 복원되지 못하였다. 미국에 의해 이승만파쇼정권이 수립된 이남에서는 일제식민지배하에서 친일로 호위호식하던 매국노들을 대거 입각시켰다. 뼛속까지 친일이 배어있던 그들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미국과 친미독재정권에 기생하여 살면서 여전히 권력의 보호망 안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국호를 회복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국호왜곡과정에 참여하였고, 친일파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보호했던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3

외세에 의해 국호가 강제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양한 증거로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국호 회복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앙일보의 박철희는 KOREA는 이미 국제적으로 정착된 국호라면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까지 국호를 바꾸어야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국호회복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본에 대한 자격지심이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보수논객들의 공통된 논리에 의하면 대부분 세계가 영어 공용화가 된 상황에서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쓰는 것은 당연하다거나, 국호변경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들이 토론마당에서 흔히 내세우는 시기상조론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COREA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긴 사실인가보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 첫째, 영어공용화시대이기 때문에 영어식 표기인 KOREA를 써야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이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말을 외국어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전자법이나 전사법에 따라 써야 된다고 한다.
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말의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로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 표기에 쓰이는 글자, 즉 한글의 철자를 로마자로 적는 것이다. 전자를 전사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전자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신라, 종로’라는 단어를 로마자로 적을 때, 전사법에 따라 발음을 로마자로 옮기면 ‘Silla, Jong-no’로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전자법에 따라 철자를 로마자로 옮기면 ‘Sinra, Jong-ro’로 옮겨진다.
그러나 전자법에 의해 표기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글자가 있어야 하고, 또 맞추어 적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COREA가 사용되기 시작한 1250년대는 우리민족이 한자를 사용했던 시대로 훈민정음이 창제되기까지는 아직도 200여 년이 더 남아있던 때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도 한글은 ‘언문’으로 불리며 여전히 홀시되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대중화되었다. 우리나라의 존재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1250년대에는 우리민족의 글자가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전자법에 의거해서 표기할 수가 없었다. 특히 19세기 말엽까지 세계적으로도 전자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방법이 널리 유포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의 국호에 전자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우리나라 국호표기는 그 어떤 규범적인 성격을 띤 특수한 문자나 부호에 의한 표기가 아니라 라틴문자에 의한 표기이기 때문에 전사법을 적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한 나라의 국호가 전사법이나 전자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경험에 의거해 어원을 밝히는 역사어원론에 근거해서 표기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CANADA(캐나다), COLOMBIA(콜롬비아), CAMEROON(카메룬), 콩고(CONGO), 코스타리카(COSTA RICA), 캄보디아(CAMBODIA), 키프로스(CYPRUS) 등 우리말의 ‘ㅋ’에 해당하는 나라들의 국호의 첫소리가 모두 ‘C’로 쓰인 것인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국호 표기를 영어식 표기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국호표기가 역사적으로 일단 형성, 고착되면 그 표기를 계속 대를 이어 전승하여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국호표기는 일단 형성, 고착되면 그것이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계속 쓰여 내려오면서 그 나라의 상징으로 된다. 바로 COREA가 우리나라 국호의 상징으로 된 것이다.
둘째, 국호를 변경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주장은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논리의 연장에 있다. 국호회복운동은 과거 우리의 국호가 COREA였던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동시에, 반세기의 분단시대가 종결되고 코리아반도가 재통일될 때 사용할 우리의 국호로 COREA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국제대회에서 사용할 코리아반도기에 COREA국호를 표기하자는 남북간의 합의도 나오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이후 코리아반도의 재통일은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코리아반도가 재통일된다는 것은 지구상에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국가가 등장하여 새로운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비용이 드는 문제가 아니다. 혹여 비용이 든다 하더라도 어차피 우리민족이 치러야 할 비용이며, 또 통일된 마당에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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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회복하는 운동은 우선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국호를 되찾아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운동이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한 오늘의 시점에서 이 운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낮에 여중생을 장갑차로 깔아 죽여도 가해자 미군을 처벌할 수 없어 장갑차라도 구속시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코리아반도 이남의 현실에서 미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인천을 통해 진주한 맥아더 군대는 그들의 포고령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코리아반도 이남에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총독부 건물에 걸려있던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올리면서 시작된 코리아반도 이남의 예속체제는 현재까지 수많은 억울한 죽음을 낳아왔다. COREA국호회복운동은 변혁운동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세력까지 포함하여 대중적으로 광범위하게 민족자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국호왜곡 과정에 개입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이 운동은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운동을 더욱 고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호를 회복하는 운동은 또한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운동이다. 나날이 높아가는 국민들의 민주적 요구를 가로막고 있는 수구세력들은 일제시대 친일파의 후예들이며 해방 이후 현재까지 친미사대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세력들이다. 그들은 지난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입은 응원복을 두고 색깔론을 폈던 사람들이고, ‘FORZA COREA’라는 구호에 알레르기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들은 COREA국호되찾기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KOREA국호고수론을 펴고 있다.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방해하는 이 세력들을 반대하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데에서 국호회복운동은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국호를 되찾는 운동은 또한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운동이다. COREA국호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고려시대였다. 앞으로 재통일될 날에 새로운 국호를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려’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국호가 될 것이다.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자주, 민족화해의 운동이 적극 전개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제기된 COREA국호되찾기운동은 그 자체가 6.15공동선언실천이며 조국통일운동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낮은 차원의 조국통일운동이자 통일국호를 제정하는 궁극적인 조국통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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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의해 강제로 왜곡되고 고착화된 우리 국호를 COREA로 바로잡는 것은 재통일을 눈앞에 내다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과제가 되었다. 부정의 부정을 거쳐 다시 되찾을 COREA는 일제 강점 이전의 COREA면서도 그렇지 않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더 이상 외세로부터 수탈당하는 나라가 아니며, 지배자의 탄압에 숨죽이는 나라가 아니며,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루는 나라가 아니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외세나 매국노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호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뜻을 모아 만들어지는 우리의 국호이다. 다시 되찾을 COREA는 코리아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국호이다.
KOREA는 예속과 독재와 분단의 상징이다. 자주와 민주와 통일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KOREA라는 옷은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낡은 옷이다. COREA를 우리의 옷에 새기고, 얼굴에 새기고, 머리와 가슴에 새겨 넣자. 새 시대에 걸맞는 우리의 국호, 그것은 ‘COREA’이다.(21세기코리아연구소 연구위원 정형기, 200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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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vs 일(-미) 구도로 가는가?

 

盧, "日, 침략과 가해의 과거를 영광으로 생각"
  독일신문과 인터뷰, "일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세계의 불행"
  2005-04-08 오전 10:00:42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 영유권 문제 등 한일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의 태도는 인류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맞지 않는다"며 "침략과 가해의 과거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전 세계에 큰 불행"이라고 일본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독일 방문을 앞두고 가진 독일의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의 인터뷰에서 한일간 '외교분쟁'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인들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왜곡 미화하고 정당화하려 한다는 것"이라며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고 이 신문이 8일 인터넷판을 통해 보도했다.
  
  "일본 과거 침략전쟁 정당화, 과거 사과 백지화 시키는 행동"
  
  노 대통령은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관련,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아주 민감한 이유는 일본이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를 미화시키는 잘못된 교육할 경우 미래에 대한 평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한일간 과거사 문제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이 몇 차례 사과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은 최근 이런 사과를 백지화시키는 행동을 보였다"며 "사과라는 것은 사과한 취지에 저촉하는 새로운 행위를 하지 않아야 계속해서 유효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우리도 과거사 문제를 자꾸 거론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계속 과거사에 얽매이고 싶지 않으며 자꾸 과거를 말하고 싶지도 않다. 결코 기분 좋은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현재와 같은 태도를 계속 보인다면 한국 국민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와 불안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일본의 태도는 인류사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맞지 않다"며 "침략과 가해를 과거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전 세계에 큰 불행"이라고 강도높게 일본을 성토했다.
  
  "독도 편입이 바로 전쟁행위.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韓.中에 모욕행위"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선 노 대통령은 "독도는 침략전쟁으로 빼앗아 간 땅으로 그것을 우리는 1950년대 초에 돌려 받을 수 있었는데, 일본이 결국 침략전쟁의 결과물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 한국 국민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점유에 관한 것, 독도에 대한 실효 지배권을 행사한 것에 대해 우리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며 "그러나 점유에 관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던 과정이 바로 전쟁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나는 독일과 프랑스가 이룩한 화해, 나아가 철강 석탄 공동체에서 유럽 공동체를 거쳐 유럽연합(EU)으로 서서히 발전을 이룩한 것을 관심과 경탄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면서 "독일이 어떻게든 과거를 스스로 극복하고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나는 국내에서의 긴장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량이라고 생각한다"고 독일의 과거사 반성을 높게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해 중국, 일본 즉 동북아에서는 아직까지 그런 희망의 징조가 없다"며 다시 한번 일본을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은 물론 중국에게도 "대단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고 이 신문이 밝혔다.
  
  "북핵문제, 미국에 새로운 양보 요구하는 건 무리"
  
  한편 북핵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은 "지금 시점에서 미국측에 새로운 양보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라며 "우선 북한이 협상 테이블로 복귀해야 한다"며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는 미국측에 북한의 정권 교체를 의도하거나 핵무기를 포기하는 이상의 요구를 제기하는 발언을 하지 말도록 요구했다"며 "미국은 그 사이에 몇가지 감정적인 표현들을 보이기도 했지만 북한에 대해 어떤 공격적인 행위를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에 대해 "대단히 전략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노 대통령은 "현 상태에서 회담을 특별히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지금 시점에서 북한이 이런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회담을 제의해올 경우 언제 어디서든지 그와 만날 용의가 있다"면서 "남북대화의 주제는 전부 북한 핵 문제로 집중될 수밖에 없고 한국은 결국 미국측과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입장을 갖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정된 평화구조가 무엇보다 중요"
  
  노 대통령은 독일 통일에 대해 "축복받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독일과 같은 방식의 통일은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는 것"이라며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적 통합을 이룩해 나갈 수 있는 한국 경제의 역량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이런 통합의 결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할 것"이라면서 "남북간의 불균형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사회적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역량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한 이후에 한반도에서의 조속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어떤 일괄적 정책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조속한 통일을 실현하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통일을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통일을 자주 말할수록 통일은 더욱 어려워진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한국 통일정책에서 첫 단계는 남북한 연합으로 EU에서의 국가간의 관계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아직은 이런 시기가 오지 않았다. 나는 안정된 평화 구조가 어떤 관념적인 통일 계획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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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quot;햇볕정책 계승 아직 모델 없다&quot;

인터뷰/임종석의원 “햇볕정책 계승 아직 모델이 없다”
0 : 869
기사작성일: 2004-07-22

“안전보장만 해결된다면 김위원장은 개혁 개방을 해나갈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본다. 특히 핵문제에서 있어 비핵화를 이끌어내고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안정보장문제를 같이 언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지원을 해줘야 한다. 북한 내에서도 군부와 정치권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위원장이 경제개혁과 개방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찰도 하고 연구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송복남 l 편집장


북한문제 안정보장이 필요하다


386의원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임종석의원. 16대에 이어 17대에도 무난히 국회에 입성한 그의 정치적 관심사는 무엇일까. 임의원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위 위원이다. 우선은 그의 정치적 관심사가 남북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탄핵정국 이후 국민적 관심사에서 한층 초라해져 가기만 하는 열린우리당의 386의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 내부의 갈등이나 정책혼선 등 신중치 못한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것이다. 탄핵국면에 비하면 이후는 상당히 이완되어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서민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지고 챙겨야 할 민생문제 등 개혁과제가 많은 데 당이 신속하게 정비에 나서지 못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열린우리당의 패배 원인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용을 보면 열린우리당의 총체적인 문제점을 짚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는“정리”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사용했다. 그러면서도“잘 될 것”이라는 말로 당의 미래를 시사했다.

이 시대의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국가권력과 시장경제의 현재 틀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해, 그의 진보의 개념은 기존의 이념적 토대에 기반을 둔 진보의 개념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진보정당이냐는 질문에는“좌파이념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이 있는 한 진보정당이 아니다”라고 답해 그이 진보관을 명확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그의 관심사는 남북문제였다.
“안전보장만 해결된다면 김위원장은 개혁 개방을 해나갈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본다.”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한 그의 시각은 북한을“파트너”로 인식하는 그의 남북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서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참여정부가 아직 계승정책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이 부분에 대한 정책계발을 강조했다.
이어 현재 진행중인 남북국회회담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통한 남북교류촉진법의 개정과 냉전적 제도와 시스템을 개혁할 호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라크파병문제 역시 자신의 기본 태도와 변함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UN의 역할에 따라 파병문제를 유연성 있게 대처할 의중임을 비쳤다.
그렇다면 그의 이념적 포지션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
“생각 안 해봤다. 자신의 이념적 포지션은 스스로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규정해 주는 거라고 본다.”





당은 대통령 인사권 존중해야 한다


-17대 국회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16대 국회는 국민의 정부를 통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국회는 과거 수구 여당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국회가 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친일문제와 남북문제다. 개혁 대 수구의 가장 큰 인식의 차가보이는 부분이 남북문제다. 그러나 이번 17대는 개혁세력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했으므로 이런 쌓여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17대 국회가 해결해야 한다.

-80년대의 패러다임은 민주화였다. 지금의 패러다임은 뭐라고 보는가?

“80년대는 독재 대 반독재, 민주 대 반민주였다. 이 큰 이슈가 나머지 사회적 사안들을 압도했다. 민주주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통일문제 등 갖가지 사회문제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민주화세력 진영이 독재타도라는 대의 속에서 독재세력과의 정면충돌이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민주화나 남북문제 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자율성과 창의성 다양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시대에 놓여 있다. 분권과 자율이다.”

-이 시대의 진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진보란 상대적 표현이지 이념적 기반을 가지고 규정하기는 힘들다. 진보나 민주는 동의어다. 시민사회에서는 시장의 새로운 모델을 추구하는 운동진영이 진보라고 본다. 국민은 진보와 개혁을 같이 쓴다. 진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국가권력과 시장경제의 현재 틀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적 시장경제에 대안을 말한다.”

-열린우리당은 진보적인가?

“민주노동당이라는 좌파정당이 존재하는 한 진보정당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복지부장관 문제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는데?
“어느 한 사건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 내부의 갈등이나 정책혼선 등 신중치 못한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것이다. 탄핵국면에 비하면 이후는 상당히 이완되어 있어 긴장감이 떨어졌다. 서민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지고 챙겨야 할 민생문제 등 개혁과제가 많은 데 당이 신속하게 정비에 나서지 못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선거에 패배했다고 본다.”

-총선직후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곤두박질을 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이 문제는 아닌지?

“그런 부분도 있다고 본다. 총선직후 당의 정비가 안된 것은 물론 당청관계도 정비가 안됐다. 그러다보니 정책혼선도 생기고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졌던 것 등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비춰졌다. 여당이 국민에게 안정감을 주기위해서는 당청협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홍역은 오래가지 않는다고 본다. 당청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은 긴밀하게 공조체제를 유지해야 하고 정치적으로는 청와대의 고유업무에 당쟁의 대상이 되서는 안된다. 즉 당에 대통령이 개입한다는 문제점을 없애고 정책적인 문제는 당청이 협조하는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당과의 거리감을 두는 듯한 발언을 하셨는데.

“그것은 대통령께서 당과 국회운영의 권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총리문제 논란에 대한 입장은 뭔가?

“당사자가 고사를 했는데 입장이 필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당에서 극렬반대를 한 것은 아닌가?

“극렬반대 하지 않았다. 언론이 과대포장을 한 것이다. 당이 어떻게 특정인을 추천을 할 수 있겠나. 총리문제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관한 문제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선택하면 당은 이를 수렴하면 된다. 인사청문회가 있기 때문에 호락호학하지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청은 상호비판과 견제를 통한 건강한 관계를 갖는 협력관계이며 당은 여론을 수렴해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주한미군문제, 일부정치집단과 언론의 선동은 더 위험하다

-열린우리당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e-party를 - 정당민주화의 대안적 방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보는가?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참여민주주의 활성화는 열린우리당 탄생의 중요한 기반이었고 또한 열린우리당이 나아가야 할 기본방향이다. 당은 창당 때부터 전자정당 추진을 당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지만 아직 당이 정비되지 않아서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시스템상으로 구축하고 있지만 활성화 되고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요즘 외국에서“사이버 정치를 공부하려면 코리아(KOREA)로 가라” 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한국의 네티즌들의 정치의식과 참여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뜨겁다고 생각한다. 유사성이 인접성을 압도하는 인터넷 시대에 실제로 많은 길이 사이버 세계에서 출발하고 사이버 세계로 통한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열린우리당 홈페이지가 정당민주화와 참여민주주의의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지금 송영길 의원이 전자정당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당을 정비해 나가면서 무엇보다 여기에 역점을 두고 잘 하리라고 본다.”

-개혁의 초점을 사법개혁과 언론개혁이라고 했다. 사법부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보는가?

“예민한 부분인데… 우선은 검찰의 권한이 비대하다. 수사권과 기소유지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 이 권력을 분산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다. 일부 수사권의 경찰이양문제나 인사시스템의 개혁이 초점이다. 법원이나 검찰은 요즘 일부 변화하고는 있으나 인사문제에 있어서 능력중심이 아닌 기수나 서열 중심의 인사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17대 국회 시작과 함께 다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이라크 전쟁을 보는 시각이나 우리의 대응에 관해서는 저의 가치 기준이 변한 것은 없다. 다만 상황이 여기까지 와 있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16대 국회에서 추가 파병이 의결되고, 정부가 미국과 약속을 한 조건에서 이걸 어떻게 다뤄야 외교적 피해를 줄이고, 원래 얘기하는 평화재건이라는 목적에 맞게 할 것인가.
일단 이 문제는 국제사회와의 협력 속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라크 문제가 UN의 역할이 강화되고, 국제 사회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마땅히 우리가 이라크의 평화재건을 위해서 파병하고 민간인력도 지원해야 되는 문제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라크의 평화 문제가 실패하고 있고, 자꾸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국이 UN 동의를 받을 때 6 월말까지 자치정부에 이양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조속한 자치 정부 이양과 UN의 역할을 높이는 방향으로 국제 사회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파병하기 전에 그런 변화를 유도해내고, 합의해낼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정부도 대체로 그런 고민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냥 이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느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상황을 풀어 가는데 좀 더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고민해봐야 될 문제로 본다. 물론 시민사회는 올바른 주장을 해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고, 국회에서도 그런 목소리가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정부는 이런 것을 지렛대 삼아서 외교적으로 정면 충돌하는 선택보다는 국제 사회와 함께 이라크 평화재건의 틀을 바꾸는 노력을 하는 게 중요하다.”


북한은 파트너, 김위원장은 개방적 인물

- 최근 주한미군 감축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자주국방 혹은 협력적 자주국방이란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인지. 또 주한미군 재배치와 관련해 안보불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리고 군 구조개혁과 국방예산 증액 등의 논란도 있다.

“미국은 6월 6일 주한미군 감축 첫 협상에서 2005년 말까지 주한미군 1만 2,500명을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앞으로 한미간 협상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겠지만, 미군 감축의 규모나 시기 그리고 발표의 전격성이 국민들에게 놀라움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의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일련의 움직임은 오래전부터 준비되었던 미국의 해외방위력 재배치(GPR) 계획에 따라 추진되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이 이라크 전에 무리할 정도로 군사력을 투입하고 있다. 본토의 군대까지 빼서 이라크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아마 그 때문에 주한미군의 재배치 계획이 조금 더 당겨진 느낌이다.

미국은 분명 일정한 로드맵을 가지고 진행을 하고 있겠지만, 일부 국내의 보수적인 쪽에서 한미 관계가 악화돼서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정략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추진되고 있는 GPR 계획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한미정부간 긴밀한 협의 속에서 한국의 입장이 존중되는 감축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 이 국면을 소모적인 안보논쟁으로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차제에 남북간의 군사회담을 정례화하거나 활성화해서 남북간의 상호긴장완화 조치를 이뤄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국면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남북장성급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적인 NLL 무력충돌방지 합의처럼, 예견되는 주한미군 감축 상황을 남북군사당국자 간 직접회담의 확대와 그를 통한 한반도 긴장완화 및 평화정착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낼 수 있다면 국민들이 안심을 하고, 오히려 이 국면을 한반도 평화라는 측면에서 더 나은 발전의 계기로 만들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한마디 꼭 해두고 싶은 것은 이런 중요한 문제를 무분별하게 정략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일부 정치 집단이나 일부 언론의 선동은 정말 위험하다. 주한미군 감축협상을 심각한 안보불안 상황으로 규정하고, 이를 마치 한미갈등의 결과처럼 왜곡하며 청문회 실시를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태도는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하지하책(下智下策)이라 할 수 있다. 외교문제야말로 초당적으로 접근해야 할 국익의 보루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가능성은?

“많지 않다. 어떤 경우라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긴장해소를 위해 가고 있기 때문에 전쟁가능성은 아주 적다. 문제는 남북관계는 긴장관계 해소로 가는데 북미관계의 질을 관리하는데 실패를 하면 문제는 여전하다고 본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라는 이 두 개의 관계를 동시에 관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 위기관리다.”

-국민의 정부에서의 통일정책은 햇볕정책으로 대변된다. 가장 큰 업적은 냉전해체라고 본다. 참여정부의 통일정책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햇볕정책의 계승이다. 참여정부의 평화와 번영 정책이 바로 햇볕정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분단이래 처음있는 국민의 정부에서의 정상회담 이후 참여정부 들어서는 실무회담과 남북장성급 회담 등 군사회담이 이어지는 등 성과가 있었다. 이것이 햇볕정책의 계승이다.
DJ 때 남북문제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로 했지만 국회가 뒷받침을 할 수 없었던 조건이었기 때문에 투명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북문제가 항상 투명할 수는 없다. 17대에는 국회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수월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햇볕정책의 뼈대를 발전시키는 모델은 나오지 않았다. 가장 우선은 평화구축이다. 평화구축이 되지 못하면 남북 갈등해소는 안된다고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도주의적 경제지원이 숙제로 남아 있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를 통한 남북교류촉진법률을 개정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남북국회회담을 추진 중에 있는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남북국회가 이루어지면 냉전시대의 제도를 정비하는 데 탄력이 붙을 것이다. 상대를 부정하는 헌법도 바꾸어야 한다.”


북한은 파트너, 김위원장은 개방적 인물

-북한의 기득권층 중 가장 개방적인 인물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을 어떻게 보는가?

“안전보장만 해결된다면 김위원장은 개혁 개방을 해나갈 의지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본다. 특히 핵문제에서 있어 비핵화를 이끌어내고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안전보장문제를 같이 언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지원을 해줘야 한다. 북한 내에서도 군부와 정치권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김위원장이 경제개혁과 개방문제에 관심을 갖고 시찰도 하고 연구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에 인터넷상의 북한주민접촉승인제 폐지를 위한 개정안 발의가 있었다. 온라인상에서 정치 군사관련 인터넷을 제외한 인터넷류는 통일부장관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하자는 법률개정안이다.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른다.”

-북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북한은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이다. 함께 민족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할 파트너이다.”

-대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무엇을 통해 신뢰구축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재로서는 남북간 경제, 문화적 교류 그리고 인적·물적 왕래를 통한 다양한 만남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적 발전이 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남북경제문화협력의 확대는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초석임과 동시에 남북 상호간 경제적 요구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민주당과 민노당이 동의 해줄 것


-남북교류의 우선은 경제교류다. 국민의 정부에서 지향한 것은 서로 “경제적 상호의존도를 높이자”라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쌍방향성이 결핍됨으로로써 남북경제교류에 투자한 기업은 모두가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떤 방식의 경제교류여야 성공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남북경협에 투자한 기업이 모두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분명 사업상 애로와 위기가 많아 순탄치 않았다는 점은 사실이다. 남북경협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고 남북간 특수성으로 인해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남북경협을 안정화 단계로 진입시키고 활성화시켜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단순 위탁가공이나 교역을 뛰어넘는“경협”의 새로운 모델 창출이 필요하다. 16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남북경협이 현재 침체된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산업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데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 영세기업들은 개성공단을 새로운 탈출구로 기대하고 있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건설, 동해선·경의선 도로 철도 연결 사업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 경협 3대 산업은 더디긴 하지만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개성공단의 경우 2000년에 현대와 북한이 건설에 합의하고 최근에 와서야 착공식을 가지고 첫 삽을 뜨기 시작했다. 전력, 용수 지원 문제 등이 정치적 딜레마에 묶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9차 남북경협추진위원회에서 전향적인 합의가 있었던 만큼 개성공단 추진은 가속도가 붙으리라 기대하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 밖에 개별 기업 차원의 남북경협이 확대되는 것이 중요한데 북측이나 남측 기업 관계자들이나 서로 접촉하고 사업을 함께 추진해 나가는 데 일정한 개런티가 필요하다. 돈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느냐가 확인되지 않으니 접촉과 상호이해에만도 시간이 소모되곤 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몇 년간 고민해서 올 초에‘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창설했다.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를 이사장으로 모시고 송영길의원, 우상호 의원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우리 재단을 통해 남한의 기업들을 신뢰할 수 있고 남한 기업들은 재단이라는 안전막을 배경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바램으로 시작했다. 아직 초기 단계라 더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름대로는 새로운 경협 모델 창출과 남북교류협력 활성화를 염두에 둔 시작이었다.

17대 국회는 정치개혁과 민생안정 그리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임무를 부여받고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남북교류협력, 남북경제협력사업은 이제 그동안 남북한간의 합의와 초기단계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17대 국회는 남북관계발전기본법 제정 및 다양한 남북교류협력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송두율교수가 감옥에 있다. 이 문제를 사법부가 판단을 한 것이지만 이것을 온전히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어도 사법적 판단은 마찬가지다.

“송두율 교수님이 구속 수감 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보안법 개정 및 폐지가 논의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이런 비극은 없으리라고 기대하고 싶다.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형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법이고, 형법이 만들어질 때 이미 국가보안법이 없어질 것을 감안해서 형법에 담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에 영향이 있는 것처럼 왜곡 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문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국회 의결이 필요한데, 열린우리당 그리고 거기에 더해 민노당과 민주당은 대체로 동의해주지 않을까 싶다. 다만 여전히 반대하는 세력도 거의 절반에 가깝기 때문에 이것이 지나친 사회적 갈등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국론분열이 아니라 국론통합의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최대한 폐지를 위해서 노력하되 그것이 관철이 어렵다면 대폭 수정하는 성과를 17대 국회가 만들어내야 한다.

-자신의 포지션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생각 안 해봤다. 자신의 이념적 포지션은 스스로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규정해 주는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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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중-일, 적인가 동지인가

가깝고도 먼 中-日, 적인가 동지인가?
이코노미스트誌 특집기사   
기동훈련 중인 일본의 해상자위대


[이코노미스트誌 특집기사]

일본과 중국. 일반적으로 두 나라는 옛날부터 가깝고도 먼 나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근세에 들어서는 양국은 처절하게 전쟁을 벌인 적대 국가이기도 했다.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다. 영국의 시사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특집기사(4월1일자)를 통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영토*역사분쟁을 심층 분석했다. 이에 본지는 기사의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주>

日中,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

만일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나라(일본, 중국)가 서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중국은 홍콩을 포함할 경우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제1위 교역대상국으로 부상했으며 일본은 미국과 함께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대상국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의 기업인들은 중국과의 경쟁을 우려했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일본과 중국의 경제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의존관계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값싼 물건을 사들이고 있으며 중국인들은 일본의 정교한 장비를 자국으로 들여와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다.

한편 일본과 중국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를 아우르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달러 환율의 하락을 막는데 있어서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에 일본과 중국은 외환위기를 피하기 위해 ASEAN 국가들과 함께 외환위기가 있을 경우 각국은 자국의 보유외환을 상호 교환한다는 ‘치앙마이협정’을 약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증권거래자들과 음모이론가들 사이에서는 일본과 중국이 경제뿐만 아니라 조만간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공조체제를 갖출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전망은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일중양국은 고위급 군사회담을 갖기도 했으며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이 본받아야할 경제 모델로 일본을 꼽았다.

日, 中의 군사력 팽창 우려

그러나 최근에는 이와는 반대되는 전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지난 세기 쓰라린 라이벌 관계였던 일본과 중국이 여전히 긴장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10일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沖繩)현 사키시마(先島)제도의 일본 영해를 중국의 한(漢)급 원자력 잠수함이 세 시간 동안 휘저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는 비상이 걸렸다. 핵 잠수함이 사전에 아무 통보 없이 영해에 들어왔다면 이는 공격이나 다름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결국 일주일 뒤 중국이 일본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중국이 잠수함 함대의 규모와 전력, 활동범위 등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사건이 계속 발생할 게 확실시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국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잠수함은 70여대로 2010년까지 20대가 추가된다. 증강 분은 첨단 장비를 갖춘 스텔스형 잠수함이다. 이 중 3대가 원자력 추진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은 비록 성능 면에서는 뒤질지라도 수치상으로는 미국보다 더 많은 잠수함을 갖게 된다. 이러한 중국의 ‘잠수함 세 불리기’는 이웃 나라들을 자극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상품 수출과 에너지, 원자재 수입에 이용되는 해상 수송 항로를 사실상 중국이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최근 미국과의 합동 안보 성명서에, 대만에 대한 중국의 점증하는 위협을 우려하는 구절을 공개적으로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중국은 일본이 대만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자 헌법을 개정한 뒤 군사력을 증대하기 위한 상징적 움직임이라며 일본을 비난했다. 지난 12월 발간된 일본의 방위백서는 중국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중국은 국방비 증액으로 맞서고 있다. 중국의 올해 국방비는 지난해보다 12.6% 늘어난 2500억 위안(약 3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지난 1996년 이후 연 10년째 이 어지는 두 자리 수 증액이다.

중국의 올해 국방비는 물론 미국의 4000억 달러(400조원), 일본의 470억 달러(47조원)에 비하면 아직 절대액수에서 적다. 그러나 다른 예산에 숨겨진 것으로 의심되는 유사 국방비 항목을 따질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현재의 최대 4배, 최소 2배는 된다는 것 이 일반적인 평가다.

한편 일중 양국의 고위급 외교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1년 이후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중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다. 물론 중국도 지난 1998년 장쩌민이 일본을 방문한 이후 공식적인 중국 지도자의 일본 방문이 없는 상태다. 이는 지난 1972년 양국의 외교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가장 긴 양국간 외교관계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센카쿠 제도를 둘러싼 영토 분쟁

특히 일본과 중국은 영토분쟁중이다. 양국간 영토분쟁의 핵심은 센카쿠제도(釣魚島*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다. 갈등의 1차적인 씨앗은 석유자원이다. 5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이 섬에서 1970년대 석유 매장이 확인되면서 양국간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 모두 역사적인 근거를 들이대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20년 동안 수시로 센카쿠제도에 상륙해 시위를 벌여왔다.
일본과 중국의 영토분쟁

현재 일본 방위청은 센카쿠제도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이 섬에서 가까운 사키시마(先島) 제도에 육상자위대 200명을 주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2월에도 센카쿠제도에 설치된 등대를 국유화해 중국의 반발을 샀다. 대만 역시 센카쿠제도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전부터 대만 동부 이란(宜蘭)현에 속한 지역이라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동중국해의 중국*일본 중간수역에서 벌어지는 천연가스 확보 분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중국의 춘샤오(春曉) 천연가스전 개발을 둘러싼 갈등으로 이 지역은 일본과의 경계해역에서 불과 5㎞ 떨어졌다. 일본은 중국이 이미 1986년 해저지질조사를 통해 일본과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겹치는 중간지점을 넘어서까지 엄청난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을 파악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사실관계를 중국 측에 문의하는 한편 상세 데이터 제출을 재차, 삼차 요구했으나 중국은 공동개발 제안만 되풀이하고 있는 상태다. 일본과 중국 정부는 지난 99년부터 ‘해양법문제에 관한 중*일 협약’ 체결 협상을 시작했지만 이것도 진전이 없다. 이처럼 점증되는 일본과 중국의 긴장관계는 결국 두 나라의 경제적 의존관계가 심화됨에 따라 사라지게 될까?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두 나라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상호의존과 상호경쟁 관계

전문가들은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맹주 자리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동시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의존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호의존과 상호경쟁의 양면을 지닌 관계’로 보고 있다.

역사를 보면 중국은 19세기 이전 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승자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일본은 정치경제적으로 중국을 앞질렀다. 일본은 대만과 조선을 속국으로 만든 후 중국을 침략 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60~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반면 비슷한 시기 중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었으며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등소평은 중국의 경제 체제를 계획경제에서 자본주의경제체제로 바꾸어 놓았다. 이에 따라 중국이 다시금 일어서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기회로 보는 동시에 우려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현재까지 경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아직까지 중국을 다른 나라들처럼 경계하고 있지는 않다.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일본과 중국의 경제관계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본과 중국이 장기적으로 자원 확보를 둘러싸고 상호 경쟁관계에 들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치열한 日中간 자원 확보전쟁

일례로 중국은 지난해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원유 수입국이 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일본과 중국은 러시아가 건설하게 될 사상 최초의 시베리아 석유 파이프라인(송유관)이 자국을 경유하도록 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으나 러시아는 결국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양국학자와 관료들은 오늘날 일본과 중국 사이의 대립관계가 생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20세기 역사에서 찾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양국의 대립은 상호 불신(mistrust)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의 가오 헹(Gao Heng)박사는 일본의 정치인들 중 일부는 여전히 대만을 속국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다며 대만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받는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가오 박사의 경우 일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부모는 과거 일본군을 피해 지하 굴에 숨어 살았으며 박사 자신도 이 시기(1939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최근 나고야에서 열린 비공개 경제 단체장들의 모임에서 일본의 한 경제인은 최근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보이고 있는 영토적 야심 그리고 자원 확보에 대한 야망은 1930년대 히틀러가 추구했던 ‘레벤스라움’(Lebensraum*게르만 인종을 위한 영토 확보)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의 이와 같은 야심을 일본은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국의 자존심과 불신의 대결은 군중집회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중국의 젊은 관중들은 일장기를 태우고 일본의 외교관 차량을 파손시키는 등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 이와 같은 난동은 얼마 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도쿄의 ‘야스쿠니신사’를 고이즈미 총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발생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 인사들은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고려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를 만류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며 재계 인사들의 충고를 뿌리쳤다.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은 일본이 더 이상 중국의 압박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으로서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시아에서 중국만이 유일하게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나라는 아니다. 한국도 중국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동안 중국처럼 집단적인 대규모 반일 시위는 없었으며 대부분 한일 양국 정부관계자들의 유감표명으로 끝나곤 했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과 중국에는 아직까지 지난 1984년 베르덩(Verdun)에서 “다시는 역사에 과오를 남기지 말자”면서 함께 손을 잡았던 독일의 헬 무트 콜과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1945년 이후의 역사를 왜곡한 사례가 없는 반면 일본의 경우 역사교과서를 통해 20세기 초반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정당화 하는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중국에 가한 최대 잔혹행위의 하나인 난징대학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공산주의의 대립

중국도 역사를 왜곡하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은 지난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비무장 상태의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던 중국 공산당의 과오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역사교과서를 통해 반일감정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의 긴장관계는 서로가 정치*경제*역사적 이해관계를 너무나도 잘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 발생하고 있다. 특히 양국의 긴장관계는 공산주의(중국)와 민주주의(일본)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양국의 정치체계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EU)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양국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동아시아공동체와 같은 연합체제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국가 주권을 공동체에 양도하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어느 한 순도간도 자국의 주권을 양도하는 것에 대해 고려해 본적이 없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본과 중국도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국가주의적 성향을 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양국의 긴장관계는 완화될 것이다.

이를 실현키 위해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 그리고 과거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일본과 관련된 중국 역사를 학자들이 충분한 토의를 거친 후 서술할 수 있도록 장려하여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행동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특히 중국은 현재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해양주권문제와 관련해 일본과 진지한 협상을 시작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야스쿠니 문제의 해법은 2006년 선출될 신임총리가 고민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는 국가의 자존심이란 차원에서 일본의 알링턴 국립묘지 격인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야스쿠니 신사는 1940년대부터 민간종교시설이기 때문에 정부는 그곳에 안치된 전범을 옮기라고 명령할 헌법상의 권리가 없다고 고이즈미 총리는 말했다. 이점은 사실이나, 알링턴이나 프랑스의 무명용사 묘지처럼 총리가 논란의 여지없이 참배할 수 있는 정부가 운영하는 묘지를 설치하는 것이 해법이 돼야 함을 의미한다.

한편 모든 전시 배상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본의 공식적 입장이라는 것이 보상 이슈의 핵심이다. 하지만, 최근 독일이 강제노동에 대해 보상을 재개하기로 한 것처럼, 일본도 강제노역이나 전시의 정신대 여성들에게 포괄적인 보상을 제공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을 가능성이 크다.

전시 동기 및 행위에 관한 일본 내부의 논의가 발전의 징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원적인 사회에서, 일본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수의 견해가 중국의 발전에 따라 일본도 힘이 필요하다는 선동과 정치적 감정과 결합할 경우 힘을 얻게 된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경우 패권추구 대신 화해를 추구할 때만이 긴장은 가라앉을 것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김필재기자  2005-04-05 오후 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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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 관련 일본 좌파 입장

“노무현정권 동정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담”
독도문제와 관련된 일본진보정당과 좌파단체의 최근 입장

 

최백순 기자 redsqure@dreamwiz.com

 

   
 ▲ 일본공산당 기관지 적기(赤旗). 일본공산당은 독도문제에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최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독도군대주둔’ 성명으로 당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진보정당과 좌파단체들이 독도문제에 관한 입장을 속속 피력하고 있다. 이들은 독도문제와 관련해 다소의 차별화된 입장을 발표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일본정부의 태도는 동북아 평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상호주권을 인정하고 교섭을 통해 해결해야

민주노동당과 공식적인 교류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본 신사회당은 기관지를 통해 “노무현대통령의 3.1절 기념연설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독도문제를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침략의 사과와 배상’을 주장한 노대통령의 발언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일본사민당의 입장이 발표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소 의외.

일본공산당은 구체적 입장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일본공산당은 ‘교섭에 의한 해결’이 당론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3월 6일 당 기관지인 적기를 통해 “다케시마의 날 강행은 교섭에 의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3월 6일자 적기는 시마네현(縣)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과 관련하여 공산당 소속의 미촌(尾村) 현의원의 질의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미촌 현의원은 현의회 질의에서 “다케시마는 1905년의 영유 수속 이전에도 일본의 문헌 등에 일본의 실효 지배를 나타내는 내용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일본에 다케시마의 영유권이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촌 현의원은 계속해서 “한국은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조선의 식민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어 검토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즉, 교섭에 의한 해결이 당론인 점에서도 보듯 공산당 의원들의 입장은 다소 애매한 양시론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다리를 밟는 쪽은 잊어버리지만, 밟히는 쪽은 기억 한다”

미촌 현의원은 이어서 “다케시마에는 1905년 문제 등 복잡한 경과와 배경이 있어 그 올바른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호의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 우호의 정신과 원칙을 관철하면서 끈질기게 교섭해 해결해야 마땅하다”며 이러한 조례 제정 강행은 교섭에 의한 독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며 우려를 표했다.

가즈오 공산당위원장은 3월 16일 국회기자회견에서 “독도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서는 양쪽 모두 일방적인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라며 “선린우호의 관계 속에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자세가 요구 된다”고 교섭에 의한 해결이라는 당론을 재차 확인했다.

3월 18일 공산당 소속의 오가타 국회의원은 대정부 질문을 통해 다케시마 문제는 “식민지배의 피해를 받았던 한국의 국민감정을 고려해 문제 해결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장을 밝히고 답변을 요청했다. 마츠쿠라 외상은 “지적한 대로다”라며 “교섭에 의한 해결을 모색하고 싶다”고 답변했다고 적기(3월 19일자)는 소개했다.

외상은 20여회 방한한 사실을 거론하며 “다리를 밟는 쪽은 잊어버리지만, 밟히는 쪽은 기억 한다”는 속담을 들어 독도영유권문제와 침략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영토 약탈은 침략전쟁의 시작”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좌파단체들은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제4인터내셔날 일본지부(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는 4월 4일자로 발행되는 당 주간지 ‘다리’를 통해 “다케시마의 날 조례는 국수주의자가 현 의회를 포위한 상황 속에서 채택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일본의 침략행위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는 동시에 노무현 정권의 반일 강공정책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기본구상이 정치, 경제 환경 속에서 파탄 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부시와 고이즈미의 과도함을 이유로 노정권을 동정하는 것은 “노정권이 진행하는 무자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가담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국과 일본의 노동계급이 연대해 신자유주의 파고를 독도문제로 돌리려는 양국 정권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4인터내셔널 일본지부는 이러한 민족주의 강공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무현의 두뇌 역할을 하는 한국 민중운동의 “옛” 투사들이 반일 기운을 이용해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 민중을 분리하기 위해서 달콤한 말로 포장한 이번 [성명]을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청와대 참모진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의 주요 좌파단체인 혁마르파(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맑스주의파)와 중핵파(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중핵파)도 각각 기관지 해방과 전진을 통해 ‘국제연대’를 강조했다. 특히 중핵파는 4월 4일자로 발행되는 기관지를 통해 “일본은 최근 평화 헌법개정의 움직임과 함께 평양 선언에 반하는 대북 적대정책의 지속이라는 군국주의 망동을 즉각 중단해야 마땅하다”는 민주노총의 성명을 소개하고 있다.

 

2005년 04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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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제국주의를 생각한다 -장석준

 

다시 반제국주의를 생각한다

장석준


최근 들어 ‘반미자주화’투쟁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SOFA개정투쟁이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하면, 매향리 미군사격장반대투쟁은 공중파에 1시간 짜리 르포로 보도되기도 했다. 또한 녹색연합이 폭로한 용산 미군기지 포름알데히드방류사건은 미군 당국의 사과 거부로 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동안 한총련 학생들의 철없는 구호로만 여겨져왔던 ‘주한미군철수’ 요구는 이제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과연 지금 한반도에는 ‘반제국주의 직접투쟁’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이와는 다소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또 다른 변화도 감지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 당국이 천명하고 있는 주한미군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 그것이다. 북한 당국은 주한미군문제를 남북회담의 기본전제로 내세워왔던 그 동안의 태도를 백팔십도 바꿔, 이제는 단순히 주한미군문제 거론의 유보 정도를 넘어서서 주한미군의 장기간 주둔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언질을 흘리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일각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최근 진보진영의 통일 관련 토론회석상에서는 일부 통일운동 활동가들이 북한의 입장 변화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진영도 주한미군문제에 대해 신축적인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기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한편에서는 주한미군철수 요구가 모처럼 대중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까지 주한미군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던 통일운동 내부에서 소위 ‘유연한’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작금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그 동안 우리 민중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했던 반제국주의투쟁이 그 뿌리부터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한다. 사실 민중운동 내 비NL 진영이 주한미군철수 요구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내세웠던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해당 국면에서 지극히 몰정세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반미투쟁은 그러한 비판의 사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반미제국주의투쟁의 새로운 가능성


사실 미군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이미 제도 언론에서도 관심있게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남미의 미국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섬에서도 미군사격장에 대한 반대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몇십년의 전통을 갖고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반대운동이 최근 일련의 미군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크게 불붙고 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미군문제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반미투쟁의 물결은 전 세계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미에서는 냉전 붕괴 이후 미국 자본의 경제 침투와 미국 정부의 대(對)남미 직접지배전략이 노골화되면서 반미제국주의투쟁이 새로운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반미 민족해방투쟁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던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저항의 아이콘만이 아니라 하나의 노선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상황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유일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경제, 정치, 군사를 막론하고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지구 전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자본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의 이면에서는 사실 전 세계의 미국화라는 또 다른 진실이 자리잡고 있다. 앵글로색슨 자본주의를 보편화시키고 있는 세계은행과 IMF의 뒤에는 미국의 금융자본과 초국적자본이 웅크리고 있고 이들의 집행기관이 바로 미국 정부다.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을 검열했던 97년의 상황은 이제 월스트리트 자본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보들을 미국으로 소환해 ‘검증’ 절차를 거치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걸프전이 그래도 UN이라는 껍데기를 걸쳤다면 코소보 폭격을 계기로 미국은 이제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워 하고 있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마저도 저항의 대열에 불러들이고 있는 반미투쟁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결국 이러한 도도한 흐름에 대한 필연적인 반작용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 반미투쟁의 전통은 주로 NL 진영에 의해 견지돼왔다. 그런데, NL 경향은 주로 ‘민족자주화’와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주의 담론에 기반해 반미투쟁을 지속해왔다. 반면 NL 경향의 이러한 측면을 비판한 남한 민중운동의 여타 흐름들은 상대적으로 반미제국주의의 문제를 소홀히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미제국주의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NL 전통은 반미투쟁의 자원으로서 새롭게 활력을 되찾고 있다. 이에 반해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다소 추상적이며 합의가 덜된 구호에 열중하던 운동 세력들은 반미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낡은 논의 지형을 벗어나 2000년의 세계 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반미제국주의 문제는 진보진영 전체의 적극적인 과제로 부각되어야만 한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이 과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NL-비NL 분열 구도의 일정한 극복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NL 전통의 여전한 모순


하지만, 여타 진영으로부터 NL 진영에 가해졌던 비판의 쟁점들은 여전히 문제거리다. 하나의 ‘국가 공동체’(물론 통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미완의 공동체)로 전제되는 ‘민족’ 관념이 반제국주의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어쩌면, 반미투쟁의 호기에 등장한 통일운동 내부의 일정한 혼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NL 경향은 반제국주의투쟁의 근거를 ‘민족’에서 찾고 이 ‘민족’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로 완성되는 무엇으로 상정한다. 반미‘자주화’라는 말 자체가 민족국가에 대한 관념을 깊숙이 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미제국주의 과제란 것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과제에 통합되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성취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한편으로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이러한 NL 경향의 전통적인 관념에 기반한 반미투쟁에 일정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는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의 존재가 냉전 해체 이후 줄곧,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더더욱 그 정당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 점에서 최근 오키나와와 매향리 투쟁의 부각은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 당국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주한 미군의 장기 주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베를린 합의 이후 열린 잠정적인 평화 국면을 북한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유 시간으로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 미군 문제 등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는 흡수통일 가능성의 차단을 위한 북한 국가의 지속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현실정치상의 가능한 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국가의 선택이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 과연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만을 지니는 것인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군 문제는 이미 북한과 미국의 대치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아래서 동아시아 주둔 미군은 미국의 최대 가상적국인 중국에 대한 무력 견제 장치로 존재한다. 미군의 존재가 일본 군사력에 대한 일정한 견제력이 된다는 일부의 궤변은 그야말로 궤변일 따름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파트너로서 육성돼왔고, 지금 판은 정확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철수투쟁은 중․러 대 미․일의 신제국주의 분열 구도를 낳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전략 사슬의 한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전 세계 반미제국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어쩌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중국, 베트남, 북한 등의)이 반미제국주의의 핵심 주체를 이루던 시기는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국가의 선택과 동아시아에서의 반제국주의 과제가 꼭 일치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NL 노선의 한 논리적 귀결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북한 정권이 취했다고 생각되는 정책 노선의 추종을 위해 동아시아 차원의 반미제국주의 과제를 소홀히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 정권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운동에 기반한 반미제국주의 역량의 성장은 북한 정권이 주한미군문제를 양보하면서까지 확보하려 한 평화국면 그것을 위해서도 북한 정권의 현재의 정책 노선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진보세력은 현재 이 국면을 주도하는 것이 각국 정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고히 할 것은 각국 정부가 아니라 반제국주의 평화․민중운동 역량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 역사의 불가역지점을 넘어선 듯이 보이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조차도 단기적으로는 부시 공화당 정권과 한나라당 정권의 출범 가능성에 의해, 장기적으로는 중․러-미․일의 신냉전 구도에 의해 충분히 교란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대안적인 상상력을!


SOFA개정투쟁과 매향리투쟁은 확실히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매향리의 경우, 어떤 추상적인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피해 대중들 자신의 투쟁의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앞으로 주한미군반대투쟁은 계속해서 이러한 대중적 이성에 기반해 발전해야만 한다. 요구사항이 SOFA 개정이어야 하느냐 철폐여야 하느냐, 혹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냐 즉각 철수냐 하는 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쟁점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중간적인 요구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투쟁의 대중적인 발전을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바로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반제국주의 과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함과 동시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진보세력들이 반미투쟁 구호가 몰정세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대중운동과 반제국주의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미제국주의의 경제지배전략과 정치․군사지배전략을 총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제국주의 비판의 새로운 전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매각반대투쟁 등의 노동자 투쟁을 반제국주의 인식과 분명히 연결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IMF 위기 당시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등이 현실적 전술로 제시했지만 노동운동 주류에 의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됐던 모라토리움 요구 같은 것을 재평가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른 과제는 반미투쟁의 근거인 ‘민족’의 내포와 외연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족=민족국가’라는 제한을 넘어서는 게 관건이다. 여기에서 오키나와 기지반대투쟁과의 연대 가능성은 단순한 전술적 중요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존재 의의가 의문에 부쳐지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의 미군반대 국제연대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들이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된 주체는 아니게 된 현재의 상황에서 반미제국주의의 새로운 주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지금 반미투쟁은 민중운동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각자의 과거 노선과는 상관없이 이에 주목해야 하며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난 세기의 민족해방투쟁과 그것의 민족주의적 편향과는 다른 근거를 찾는 가운데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20세기 민족해방투쟁의 와중에서도 그 단초를 보여준 바 있었던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한 핵심으로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정신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결코 빈약하지만은 않은 실마리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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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신자유주의와 진보의 용광로 -장석준

 

동아시아, 신자유주의와 진보의 용광로

- 백낙청 외, ꡔ21세기 한반도 구상ꡕ, 창비, 2004.



장석준 (기획부장, newer@jinbo.net)


요즘 ‘동아시아’가 난리다. 서점의 인문․사회과학 서가에 가보면 ‘동아시아’를 제목으로 단 책들이 수십 권은 나와 있다. 대체로 한 세기 전의 격동기를 다룬 역사 연구서들이 많지만, 걔 중에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를 다룬 책들도 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동아시아’를 열쇠말로 해서 한국 사회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책들이 잇달아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하영선 엮음, ꡔ21세기 한반도 백년대계ꡕ(풀빛)나 한국동북아지식인연대 엮음, ꡔ동북아공동체를 향하여ꡕ(동아일보사)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평자는 최근에 나온 이런 류의 책들 중에서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 바탕을 두었다고 평가받는 책으로 백낙청 외 지음, ꡔ21세기 한반도 구상ꡕ(이하 ꡔ구상ꡕ)을 살펴보려 한다. 이 책은 계간 <창작과 비평>에 2003년 여름호부터 겨울호까지 세 호에 걸쳐 실린 기획특집 논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창작과 비평>은 본래 문예지이지만 창간자인 백낙청(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을 중심으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왔고 사회과학 논문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왔다. 해외에서는 이 잡지를 한국의 대표적 ‘좌파’ 저널로 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럼 ꡔ구상ꡕ은 ‘동아시아론’의 홍수 속에서 진보적 분석과 대안의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ꡔ구상ꡕ의 구상들은 현재 동아시아 담론 일반이 그런 것처럼, 혼란과 모순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왜 지금 ‘동아시아’인가?


우선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왜 하필 지금 ‘동아시아’가 이렇게 문제냐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동아시아가 화두가 되었던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회상해보면 우회적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는 정확히 100년 전 19세기와 20세기의 교체기였다.

백낙청이 ꡔ구상ꡕ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격변하는 세계 질서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그 혼돈 속에서 역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탐색과 논란이 계속되었다.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황쭌셴(청의 외교관)의 ꡔ조선책략ꡕ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책이다. 청, 일본, 조선이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세력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합종연횡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주된 관심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위정척사파부터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까지 어지러이 이합집산했다. 기층 민중들의 세계에서도 동학운동이 나름대로 이러한 초국가적 격변에 대해 대안의 밑그림을 제시하려 했다.   

세월은 흘러 20세기와 21세기의 교체기를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100년 전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것은 단순히 외면상의 유사성만은 아니다. 역사의 기본 구조 측면에서도 유사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100년 전에 동아시아의 격변을 낳은 세계자본주의의 운동이 지금의 세계자본주의 양상과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 당시의 세계자본주의는 오늘에 와서 ‘제국주의’라고 불린다. 그것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한 서구 자본주의의 축적 모순을 함포외교를 통한 식민지 해외시장의 확보와 열강간의 극한 대립으로 풀려던 시대였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다시금, 투자 배출구를 찾지 못하는 금융독점자본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세계화’라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는 군함과 해병대 대신 해외 주식시장을 누비는 기관투자가와 IMF 고위 관료의 서류가방이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지만, 100년 전 제국주의와 작금의 세계화 사이의 유사성은 결코 좌파만의 강박관념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이제 다시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 한 복판에 놓여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가 전 세계의 행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100년 전의 그것 훨씬 이상이다. ꡔ구상ꡕ에 실린 글들에서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시장의 부상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자본주의의 사슬 속에서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경제로 부상했다. 그러면서도 이들 국가는 예를 들어 유럽에 비해 훨씬 불안정한 국가 체제, 그리고 국가간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북핵 위기로 집약되는 한반도의 지속적 불안정성은 그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한 마디로 세계자본주의의 장래 한, 두 세대를 좌지우지할 지역이면서 또한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가장 불안한 곳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천형(天刑)인지 우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로 그 한 가운데에 있다.


ꡔ구상ꡕ의 동아시아론은 과연 진보적인가


하지만 ꡔ구상ꡕ을 비롯해서 ‘동아시아론’을 특징짓는 음조가 꼭 비관적이고 착잡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동아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잘만 하면 한국이 그 흐름의 주된 수혜자 중 하나로 떠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많은 이들을 들뜨게 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자가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는 전임 김대중 정부에서 비롯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 국가’ 구상을 더욱 발전시켜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중국 시장을 배후로 한 소위 ‘거점 경제’(hub economy)를 구축하기만 하면 한국이 2류 소국에 머무는 대신 동아시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게 그 골자다. 다만 ‘거점 경제’의 주축을 놓고 노 정권 내에서도 ‘금융 중심’이냐, ‘물류 중심’이냐, 아니면 ‘연구개발(R&D) 중심’이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위기’를 ‘기회’로 살린다는 변증법적 낙관주의라는 점에서는 ꡔ구상ꡕ도 노 정권 못지 않다. 사실 <창작과 비평>이 애초에 이런 기획을 내놓은 것도 노 정권의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에 화답하고 그것에 나름대로 개입하려는 취지에서였다. 한 마디로 노 정권의 구상을 상수(常數)로 놓고 그것에 훈수를 두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ꡔ구상ꡕ은 노 정권의 구상과 만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ꡔ구상ꡕ의 필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백낙청 등 <창작과 비평> 단골 필자들은 ‘동아시아론’을 단순히 한국 경제의 생존 전략 차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백낙청의 언급에 잘 드러나 있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절대적 요구가 인류문명의 발전이나 존속과 양립하기 힘든 성격이라고 한다면,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에서의 대안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을 필요가 절실해진다. (23쪽, 강조는 원저자의 것)


그렇다면 동아시아 변혁과 노무현 정권 식의 구상은 과연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ꡔ구상ꡕ의 가장 야심찬 목표는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가에 따라 ꡔ구상ꡕ의 대안이 과연 ‘진보적’인지 아닌지가 판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평자가 보기에 이 목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12편의 논문과 1편의 긴 좌담을 다 읽어봐도(물론 이중에는 한국 사회 정치개혁의 현 주소와 방향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김종엽의 「정치개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등 썩 괜찮은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변혁과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이 서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필자들 중 다수가 동아시아 차원의 변화가 한반도 분단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제시해준다는 데 주목한다는 점이다. 남한과 북한, 두 국가의 관계로만 놓고 볼 때 항상 막막함만을 던져주던 분단 체제도 동아시아 다자 질서를 염두에 두고 보면 해결의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북 경제협력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그것이 중국, 일본, 러시아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매개로서 동아시아 차원의 에너지 협력(천연가스관 등)․사회간접자본 협력(대륙횡단철도)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물론 북핵 위기나 동북아의 신냉전 가능성에 비하면 이런 식의 경제협력 전망은 분명히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노 정권의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론 전반을 긍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ꡔ구상ꡕ은 그러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한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극복해야 한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 일환으로 추진되는 노 정권의 정책 방향을 일방적으로 긍정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김원배(국토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동북아중심 구상의 재검토」 같은 글이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을 주장하는 글들과 나란히 한 책에 실리게 되는 것이다.   

김원배의 글은 그야말로 노 정권의 정책 지향의 대변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주장은 아주 전형적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제조업 제품의 수출을 통한 발전전략이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만큼 써비스 수출로 전략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55쪽)

 

김원배는 한국 경제가 물류를 중심으로 하고 금융과 연구개발을 보조축으로 하는 ‘거점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는 우정은(미시건대학 정치학과 교수이며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인 부인이기도 하다)의 글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 역시 마찬가지다. 동북아 금융․물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분단 모순의 극복이 필요하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 김원배와 다를 뿐, 노 정권의 구상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 자체는 다르지 않다.      


전장(戰場)으로서 ‘동아시아’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평자가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 동아시아 경제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게 결코 아니다.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순환구조의 형성이 분단 체제의 극복에 결정적 의의를 지닌다는 주장에도 분명 고개가 끄덕여지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사회 통합의 전망이 항상 신자유주의 교과서를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장지상주의에 충실하고 사회적 권리들에 배치되는 정통파 경제학의 낡은 교과서를 따를 때 경제․사회적 통합은 실패하고 만다. 각국 국민의 구체적 이해들과 충돌하는 자유무역협정의 일정들만이 남게 되고,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한 ‘동아시아산(産)’ 초국적 자본이 등장하게 될 뿐이다. 

노 정권의 구상은 이미 이러한 모순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거점 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 거점 경제가 내수와 어떠한 선순환 구조를 이룰지, 다수 노동 대중은 어떻게 소득과 복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 아무런 대안이 없다. 오직 인천과 광양 같은 몇몇 도시가 부흥하면 국민 모두가 ‘2만 달러’의 소득을 누리게 될 것만 같은 환상만이 덧칠돼 있을 뿐이다. 수출은 호황인데도 내수는 침체하고 국민 전반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현재의 ‘이중 경제’ 상황이 ‘동북아 물류․금융 중심’의 구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도기가 아니라 그것이 영구화할 우리의 미래가 아니냐는 의구심에 대해 ‘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전략은 아무런 답도 던져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수 언론이 제시하는 ‘우리 내부에 고립될 것인가, 아니면 바깥으로 향할 것인가’라는 구도는 쟁점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참된 쟁점은 차라리 우리의 눈을 동아시아로, 세계로 돌리되, ‘어떤’ 방향으로 돌리는가에 있다.  

가령 김석철(명지대 건축학과 교수)이 ꡔ구상ꡕ의 기획좌담에서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ꡔ구상ꡕ의 필자들이 가진 현실 인식이나 평자의 그것이나 서로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제일 큰 문제는 인력과 금융자본의 과잉입니다. 4백조가 굴러다니고 있어요. 몇몇 분야의 기술수준은 제가 보기에 최강입니다. 중동에서 가장 제대로 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 그리고 조선과 전자 및 자동차에서 한국을 세계 최강으로 만든 사람들이 밀려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올 때까지 참여했던, 또 그런 과실로 생긴 금융과 인력들이 놀고 있거든요. 잉여금융은 지금 투기자본화해 자본시장․노동시장을 왜곡하고 있어요. (346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그럼 그 ‘400조’를 어떻게 투자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백낙청이나 김석철은 ‘황해도시공동체’의 건설을 주장하는데 그런 식의 새로운 발전 전략을 추진하려면 결국 누가 나서야 하는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 제시하는 것처럼 경제특구를 만들고 규제철폐경쟁을 벌여 ‘바닥을 향한 경주’라는 신자유주의의 전형적 시나리오를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노동자 농민 운동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민주화된 국가기구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투자 계획의 주역으로 나서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적절히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동아시아’라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새로운’ 무엇일 수 없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는 결코 그 자체 해답의 실마리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대안이 각축하는 또 다른 전장(戰場)일 뿐이다.

ꡔ구상ꡕ은 비록 ‘진보적’ 동아시아 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로서는 성공작이라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적어도 이 전장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동아시아 구상’이 정리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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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자의 북쪽 이야기(1)

“좌파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박영자의 북쪽 이야기](1) - 진보진영은 왜 ‘북한’을 알아야 하는가?
박영자 
20세기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정치・경제적으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승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아직도 20세기 ‘역사와 공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역사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이념과 현실 간 갈등’이라는 역사의 현장에 놓여있으며, 더욱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며 ‘정치적 민주주의의 추진과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폭력이 공존하는 불협화음’이 진보진영의 진로를 고민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진영을 혼란스럽게 하는 노무현 정권의 불협화음에 근저에는 경제문제로 외현화된 20세기 사회주의의 몰락과 더 중요하게는 북한과 통일문제가 놓여 있다.

한편 노동에 대한 정당한 권리 확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등을 중시하며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유지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고민하는 진보진영 내 좌파는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급격히 변화는 중국의 시장사회주의, 그리고 북한과 통일문제에 무기력하다. 물론 더욱 세련되어지는 노동자계급의 분할 통치전략과 아직도 무수히 벌어지는 노동착취와 사회적 약자의 문제들이 진보진영 내 좌파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더 깊숙이 들어가 현재 진보진영 내 좌파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이들의 운동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①과거 소위 주체사상 그룹과의 갈등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북한사회를 이성적으로는 사고할 수 없는 사회주의의 ‘예외국가’로 치부하거나 ②맑스와 레닌의 전통교리를 벗어났다며 북한사회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지 않았고, ③이데올로기일 뿐인 민족주의에 기반한 통일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방해하는 해악적인 전술로 사고하고 비판하면서 북한과 통일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제도권과 소위 주체사상 그룹의 전유물로 넘겨준 것이다.

그런데 ①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종주국인 소련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동유럽 사회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체제전환을 추진하였으며, ②중국이 시장사회주의라는 논리로 자본주의의 운영메카니즘을 급속도로 흡수하여 실업과 빈부격차 문제 등을 야기하면서 고성장하고 있고, ③북한의 경제위기와 한반도 통일의 문제가 자본과 국가권력에 의해 남북경협과 교류로 현실화되며, ④탈북자들이 급속히 증대되어 남한의 하층 노동자가 되고 있는 상황, 더 중요하게는 ⑤자본주의의 병폐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의 삶을 끝없는 경쟁체계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좌파 진보진영은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문제들, 그리고 한반도의 국제적 긴장과 정치경제적 문제에 주요 변수가 되어 노동자 일상의 의식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과 통일문제를 외면할 것인가?

필자는 좌파 진보진영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의 삶을 조건짓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어야 삶과 운동의 동력을 풍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일의 신문과 텔레비전, 라디오와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고민할 것을 제기하고,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쟁력 강화와 강대국 건설이라는 논리에 의해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남북 경제협력과 다양한 통일의 흐름을 우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스스로 사회주의를 포기한 20세기 사회주의국가들이 급속도로 자본주의화 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회문제와 갈등들은 결코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나부끼는 자본의 논리가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병폐를 해결해주거나 이전보다 더 나은 ‘인민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다수가 다시 20세기 사회주의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의 상대적 수혜자였던 사회적 약자와 노년층, 그리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수는 회귀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활동인구 다수는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필사적이며 생활수준의 향상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주객관적 상황에서 남한사회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로 발전하기를 희망하는 좌파진영은 더 이상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와 북한문제를 외면하거나 방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냉전시대 남북한 정치체제는 고정화된 이념으로 상대방과 대결하였다. 북한에게 남한은 자본주의적 착취 속에서 계급갈등에 신음하며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고통받는 ‘이중종속’ 국가였으며, 남한에게 북한은 1인 독재의 전체주의 공산체제하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기능이 마비된 ‘폐쇄국가’였다. 북한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인 남한사회를 해방시켜 사회주의체제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정치의 핵심목표로 삼았으며, 남한은 1인 독재와 전체주의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북한사회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에 굴복시켜 통일하는 것을 정치의 핵심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 김대중 정권과 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진보의 담론’이 현실정치로 제기되기 시작하자, 그동안 굳건하게 침묵을 지켜도 기득권이 보장되던 보수세력이 ‘보수의 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과거 민주화운동진영이 보여주었던 절실함과 응집력을 다양한 집회와 가두시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민주화진영이 총결집하여 ‘역사의 유물’로 박물관에 보관하려 하였던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지 못하였으며, 수많은 민주주의의 부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보수세력은 ‘북이라는 적’이 여전히 건재한데 ‘남남갈등’을 유발하는 노무현 정권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이들은 단지 정치권의 일부만이 아니다. 해방 60년의 역사 속에서 반공을 내면화했던 대중들이 이러한 불안을 표출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진영의 붕괴와 1994년 김일성사망, 그 이후 연속된 자연재해와 생산력약화 문제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이들은 생존을 위해 시장을 형성하고 탈북을 감행하기도 한다. 북한정권은 위기상황에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 보루로 군대와 군인정신을 선전하며 체제를 재정비하고 있다. 소위 ‘선군정치’ 즉 군을 앞세워 국가안정을 이루고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하여 농민시장이나 암시장 등 과거 불법적인 시장경제를 합법화하였다. 북한주민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실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정책이다. 1990년대 중반이후 탈북자가 증대하였으나 각종 탈북자조사와 증언을 통해 볼 때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북한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김일성에 대한 향수와 김정일에 대한 충성, 그리고 강성대국 건설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말 사회주의 혁명의 종주국인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몰락, 그리고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위기는 우리에게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대인인 것처럼 인식되게 하였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탈사회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병폐와 갈등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들고 전 세계를 재조정하려는 미국의 절대패권에 의한 갈등과 이에 대한 저항흐름이 노골화되고 있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과연 21세기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의 깃발을 펄럭이는 20세기 자본주의체제의 승리로 종결될 것인가?

또한 북한의 핵문제가 사실 여부의 상황도 확인되지 않은 채 연일 회자되어 국제사회를 뜨겁게 하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경제문제와 미국의 패권이라는 정치경제적 배경 속에서 딜레마에 빠져있는 남북한 상황,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에 전염된 듯한 중국과 일본의 패권적 국가주의가 한반도의 사회구성원에게 다시 한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폐쇄적인 결집을 불러오고 있는 상황에서 좌파 진보진영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길을 걸어가는 것’, 이러한 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 우리 주변의 노동자와 일상인들과의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가 가능하겠는가?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거창한 이론이나 수많은 문제의식을 쏟아 부으려하지는 않는다. 다만 더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내가 알고 고민하는 수많은 현실과 상상을 ‘북한’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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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합동군사훈련과 라이스 미국무장관 방한

“한미합동군사훈련, 미국의 대북정책 강요 수순”
대규모 군사훈련에 맞춰 라이스 미국무장관 방한
용오 기자 

3월 19일부터 25일까지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과 ‘독수리 훈련’을 연계한 대규모 군사훈련이 실시될 예정이어서 반전 평화단체들이 강하게 반대하게 나섰다. 특히 이번 대규모 군사훈령 기간에 맞춰 부시행정부의 대표적인 대북강경론자인 라이스 미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추측을 불러오고 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상임대표 홍근수, 문규현) 등 반전평화 단체들은 18일 오전 미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 한미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라이스의 한국방한에 대해 “군사훈련으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정부에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강요하려는 수순을 밟기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 우리의 의구심”이라면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즉각 중지 △라이스방한반대 △라이스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반전평화단체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현재는 북미간에 대화 상태가 아닌 심각한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만이 존재하고 있는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세 하에서 벌어지는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 느끼기 어렵고 대화상대방인 북한에 대한 심각한 자극과 도발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참가단체들은 오는 19일부터 한미합동군사훈련과 라이스방한반대 투쟁을 각 지역에서 벌여나갈 예정이다. 서울지역은 21일부터 25일까지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매일 집회를 열 계획이며 19일에는 지역별 동시다발 집회도 잡혀 있다. 참가단체들은 특히 울산지역에서 22일 해병대 훈련과 관련한 구체적인 집회를 갖는다는 계획도 밝혔다.

김종일 평통사 사무처장은 “만약 미군이 한반도 상륙작전을 곳곳에서 벌일 경우 강력히 작전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이 끝나고 홍근수 평통사 대표 등은 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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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를 파시즘으로 막을 수는 없어

독도 둘러싼 긴장,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
극우를 극우로, 제국주의를 파시즘으로 막을 수는 없어
윤태곤 기자
일본 시마네 현 의회의 조례안 제출로 촉발

독도 전경
사진출처 : 울릉군청 홈페이지
  
지난 1월 13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 의원 연맹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 제안을 현 의회에 제출하면서 문제는 다시 촉발된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쉽사리 식지 않을 것 같다. 조례안 제안 당시 조다이 요시로 현의원은 “우리는 다케시마의 날 을 제정해 영토권 확립 움직임을 북돋우기를 원한다”며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또한 실효적 지배의 관점에서도 명백한 한국 영토인 독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에도 양국 정부간에 논란이 격화됐었으나 결국 이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협정을 체결하기로 미봉책에 합의했다. 당시 협상 과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독도를 폭파시켜 버리겠다”는 어이없는 발언을 내놓아 빈축을 사기도 했다.

또한 1999년 1월 발효된 한일어업협정 협상당시에는 독도를 중간수역에 포함시키는데 한국 정부가 합의하고 독도를 ‘섬’이 아니라 ‘암석’으로 해석함으로 분란을 자처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자체 차원이 아닌 일본 중앙정부 노림수 있나

한편 독도를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는 일본 중앙정부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해 일본 외무성은 2005년 외교 목표를 ‘국민을 보호하고 주장하는 일본 외교‘로 설정했다.

이 맥락에서 ’한일 양국간 논쟁이 계속되는 동해 호칭문제에 대한 실태조사와 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독도 자료작성‘을 명목으로 약 80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결국 시마네 현 지방정부의 조례 제정으로 독도 문제가 다시 촉발됐지만 결국 그 뒤에는 일본 중앙정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시마네 현 의원연맹이 조례안을 현의회에 제출하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민감한 시기인 지난 2월 23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다카노 주한 일본대사가 “다케시마 문제는 한일간에 분명한 시각차가 있다”며 “하지만 역사적으로 법적으로 다케시마는 명백한 일본 땅”이라고 이례적으로 발언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긴장은 격화되 지난 11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던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항의 표시로 일본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는데 이르렀다. 이 와중에 일본의 극우단체 ‘새역사를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든 후소샤간 일본 공민교과서 검정 제출 소식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가져왔다.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식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 한 것은 2001년판과 다를바가 없지만 이번 개정 교과서에는 "한국과 일본간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다케시마“라는 설명과 함께 독도 전경 사진까지 수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일본 극우잡지에 식민지 지배 정당화하고 친일 과거청산은 친북, 친공적 주장이라는 글을 게재한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 사건도 민족감정 자극에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그리고 지난 16일,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사태는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 평화헌법 폐기, 중러와 연이은 충돌과 궤를 같이 해

독도-박대성 작 48X44cm 한지에 수묵담채 2002  

이보다 이틀 앞선 14일, 일본의 여당인 자민당 신헌법기초위원회는 4월 확정될 예정인 신헌법 초안에 대해 중간보고 했다. 이 초안에 따르면 군대와 전쟁을 포기하고 전수방위 원칙이 포함된 일본의 ‘평화헌법’의 핵심조항인 헌법 제 9조 2항이 개정되어 군대부활이 가능해 진다. 또한 집단자위권의 명분으로 해외파병등이 가능해지게 된다.

또한 ‘국방의 의무’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켜 국민 강제징집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 밖에 정교분리 조항을 완화해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헌법으로 허용하게 했다. 심지어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하는 방안도 검토중이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본이 북방 4개섬 관련해서는 러시아와 충돌을 일으키고, 조어대및 센카쿠 열도를 두고는 중국과, 독도를 두고는 한국과 좌충우돌하며 동북아 전역에서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군국주의적 헌법’ 제정과 밀접하게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주변국과의 분쟁과 충돌을 통해 일본 내의 보수적 흐름을 강화, 헌법 개정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의도라는 설명이다.

‘한일 우정의 해‘의 허약성

사실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져 나오기 이전까지 최근 한일 관계는 해방 이후 최고조에 달했을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와 정례적으로 이른바 '노타이 회동'을 갖기로 했고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은 "내 임기 중에는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내놓아 빈축을 사기도 했다.

또한 ‘욘사마 열풍’으로 대표되는 한류가 일본열도를 강타했고 특히 월드컵 공동 개최 이후 민간 부문에서 한일 양국은 적대적 관계에서 동반자적 관계로 바뀌는 조짐까지 보였다. 이러한 밀착감을 바탕으로 한일 양국 정부는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 일본대사관에서는 연일 일장기 소각 시위가 이어지고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박지문 외교부 장관등 한국의 주요 외교라인이 연달아 대일강경방침을 내놓는등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다시 떨어졌다. 이러한 점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반성, 식민지배에 대한 성찰적 인식의 확립, 한일 양국 극우 세력에 대한 시민사회 차원의 공동대응 등이 밑받침 되지 못한 탈정치적 한일 우호 관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지점이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결국 양국 민중의 손에

잊을 만하면 다시 터져나오고는 하는 ‘식민지배는 강제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일본 대중정치인들이 내뱉는 망언들이 일회성 발언이 아니라 일본국내정치 보수 우경화, 일본내 독점 자본의 이해와 역사성을 반영하는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임을 감안할 때 독도 문제를 비롯해 일본의 보수회귀를 막는 길은 일본 민중들의 건강한 의식 확립 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전공투 세대의 붕괴와 제1야당의 지위를 언제까지 지킬 것 같았던 거대 야당 사회당의 몰락, 노동운동의 퇴조, 심지어 NGO의 부재와 젊은 세대의 탈정치화 현상은 일본사회 우경화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지적이다. 마찬가지로 독도 문제등 일본의 우경화를 제어하기 위한 단기적 해결책은 요원하고 결국 한일 민중의 연대를 통한 제어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독도의 상징성이나 일본 식민지배에 의한 고통, 민족감정등을 감안한다 할 지라도 최근 일부 극우 진영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보이는 행태들은 적절치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할복, 투신자살 기도를 통한 시위는 파시스트들의 그것을 연상시키기 까지 한다. 극우를 극우로, 제국주의를 파시즘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2005년03월18일 13: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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