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내려온 축구 유망주, 혹은 '빨갱이'
한국전쟁 기간 중에도 축구는 계속됐다. 그 중심에는 최대 적산(敵産) 기업인 조선방직이 존재했다. 당시 조선방직의 본사는 부산에 있었고 대구에도 공장이 있었다.
1951년 조선방직의 강일매 사장은 부산과 대구에 각각 축구팀을 만들었다. 전쟁으로 흩어졌던 축구 선수들을 모아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참가시키기 위해서였다. 흥미롭게도 대구 조선방직 축구팀에는 한국전쟁 중에 남으로 내려온 월남(越南)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1951년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전쟁고아 구제를 위해 마련된 대회에서도 역시 우승을 거머쥐었다.
당시 언론은 대구 조선방직을 월남인이 중심이 돼 박력 있고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팀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조선방직에서 뛰고 있는 월남인 축구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한국전쟁 중에 남하했던 이 선수들은 '빨갱이'로 의심받는 경우 허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들은 언제든 '빨갱이 사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들에게 구세주는 특무대였다. 특무대는 공산당 색출이 임무였기 때문에 이들이 더 이상 빨갱이로 의심받지 않고 축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안식처였다. 더욱이 특무대 대장(隊長) 김창룡 소장은 이들과 같은 월남인이라 북에서 내려온 축구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특무대를 이끌었던 김창룡은 함경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본 관동군 헌병이었다. 그는 해방 공간에 이북에서 친일 전범으로 몰렸지만 월남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입대한 후에는 공산당을 잡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군에서 공산당 색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큰 공헌을 했다. 이를 계기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김창룡은 1951년에 특무대장이 됐고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이승만 정권에서 군 장성들 간의 파벌 경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 축구 경기는 이들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특히 군대 내에서 정보와 감찰 업무를 수행했던 특무대와 헌병사령부 간의 축구 경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더욱이 김창용은 갑작스러운 승진으로 다른 군 장성으로부터 견제를 심하게 받고 있었다. 김창룡은 축구로 다른 군 장성들을 제압하고 싶어 했다. 김창용은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신조로 선수들을 다그쳤고 선수들은 승리를 향한 집념으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특무대 축구팀의 선수들과 김창룡은 승리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1953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대구에서 펼쳐진 이 경기에서 특무대와 조선방직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결국 추첨으로 우승 팀을 가려야 했다. 추첨 결과 우승은 조선방직이었다. 이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창룡은 지프차에 탑승한 채 경기장에 난입해 공포탄까지 쏘며 결과에 거세게 항의했다. 주심은 이에 깜짝 놀라 진해까지 줄행랑을 쳤고 우승 팀을 확정 짓지 못한 채 대회가 막을 내렸다.
그라운드에서 일군 '38 따라지' 성공 신화, 그 배경에는…
특무대는 그라운드의 폭군이었지만 축구 실력은 뛰어났다. 1954년 한국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도 특무대 소속 선수들의 활약이 컸다. 최정민과 박일갑이 그 주인공이었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남쪽으로 내려온 두 선수는 힘과 스피드를 앞세워 한국 축구의 새 바람을 일으켰고 일본과의 월드컵 예선에서 빛을 발했다.
최정민과 박일갑의 스피드는 한국 축구의 특장점이었던 '킥 앤 러시' 스타일에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궂은 날씨 때문에 진흙탕에서 펼쳐졌던 일본과의 예선 1차전 경기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과의 경기에는 두 선수 외에도 4명의 월남인 선수들이 대활약을 했다. 이들은 귀국길에 지프차에 나눠 타고 경무대까지 행진했고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은 이 순간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38 따라지'에서 '축구 영웅'으로 변신했다. 축구는 월남인들이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성공 신화를 만든 분야 중 하나였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은 한국전쟁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온 '38 따라지'들에게 희망봉이었다.
월남인 축구 선수들의 활약으로 한국은 1956년과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2연패를 차지했다. 이들 가운데 최고 스타는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북한 축구 대표선수가 됐다. 1·4 후퇴 때 남하해 한국 축구 황금기를 만들었던 그는 이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얻으며 당시 아시아 축구 중심지였던 홍콩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그와 대다수 월남인 축구 선수들이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한국 축구는 암흑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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