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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9>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4월혁명, 여덟 번째 마당] '일본과 일전불사' 대통령, 속셈은 따로 있었다

[4월혁명, 아홉 번째 마당] 제자들의 의로운 죽음, 선생도 나라도 바꿨다

[4월혁명, 열 번째 마당] 결정적 순간, 야당 지도부는 비겁했다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프레시안 : 5.16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군인들 세상이 된다.

 

서중석 :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KBS 방송국에서 '혁명 공약'까지 나왔는데, 5월 18일 결국 장면 내각이 사퇴하고 쿠데타 주동자들이 시행한 계엄을 추인했다. 이제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날짜로 군사혁명위원회라는 걸 설치했다. 군사혁명위원 30명과 고문 두 사람의 명단까지 이날 발표했다.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이름이 좀 문제라고 봤는지, 아마 머리 좋은 김종필이 이야기했을 건데, 이튿날(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꿨다. 이게 군사혁명위원회보다는 훨씬 부드럽지 않나.

 

6월 6일에 가서는 (군정 시기) 일종의 헌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는데, 최고회의를 최고 통치 기관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기능은 최고회의가 수행한다", "국무원의 권한은 최고회의의 통제와 지시 하에 내각이 수행한다", 이렇게 돼 있었다. 내각도 최고회의 하부 기관으로 둔 것이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정지됐다. 5월 20일에는 최고회의의 통제를 받는 내각이 장도영을 수반으로 해서 구성됐다.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내각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거의 전부 군인이 차지했다. 장관들도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군인이었다. 서울시 교육감까지 군인으로 발령했듯이 전문직으로 볼 수 있는 데까지도 조금 있으면 군인을 임명했다. (이때 서울시 교육감이 된 박현식은 1967년 9사단(백마 부대)장으로 베트남에 파견되고 1974년엔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을 맡는다. 군인을 서울시 교육 책임자에 앉혔다가 해외 파병 부대장으로 보내고, 예편시킨 후 경찰 총수에 앉힌 것은 박정희 정권 시기 인사의 특성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편집자>)

 

국영 기업체 같은 데도 태반이라고 할까, 아주 많은 경우 그 임원을 군인으로 교체하는 걸 볼 수 있다. 심지어 군수, 면장, 읍장도 군인으로 거의 다 충원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우리한테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하더라. 대위 출신인데 면장 자리가 떨어져서 면장 하러 간다고 그러더라. 그럴 정도로 '장' 자 붙은 자리는 거의 전부 군인이 차지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군인 천하…대다수 요직 차지하고 기본권 옥죄는 법 양산

 

프레시안 : 1170년 반란을 일으켜 힘으로 권력을 탈취한 고려의 무장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1970∼1980년대에 고려 무신 정권을 연구한 역사학자들 중에는 5.16쿠데타로 성립한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그 시기에 관심을 둔 경우도 있었다.

 

서중석 : 고려 무인 정권 시대에 무인들이 권력 기관에서 차지한 직위보다도 한때는 더 많이 군인들이 주요 직위를 다 차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공무원들을 이만큼 대폭 갈아치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인들이 들어오자마자 싹둑싹둑 직원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상공부 산하 직원 3000여 명이 잘렸다고 보도가 나오더니만 조금 있으면 내무부에서 1만2000명을 정리해서 해임했다는 식으로 발표가 나온다. 이건 1980년 5.17쿠데타 직후 고급 공무원을 해임한 것하고 비교가 안 된다. 그때는 고급 공무원을 중심으로 일부만 한 건데, 이건 일부라고 할 수가 없다. 1961년 8월 13일 자 발표를 보면 공무원 3만8684명이 해직된 걸로 돼 있다. 굉장한 비중이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설 때도 고위직은 다 바뀌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은 안 바뀐 걸로 돼 있다. 충성만 하겠다고 하면 유임한 것이다. 관리가 제일 많이 바뀐 건 1894년 갑오경장 때로 돼 있다. 새로운 시험 제도가 생기면서 대폭 물갈이를 한 걸로 돼 있다. (수백 년간 이어진 과거제가 갑오경장으로 폐지됐다. <편집자>) 또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을 때, 그러니까 1910년 8월 이른바 병합이라는 걸 했을 때도 많이 갈아치웠다. 고위직은 일본인이 차지했다. 그러나 고위직은 소수인데, 그런 고위직을 빼놓고는 일본에서 일본인을 데려다가 갑자기 충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또 한국인을 썼다. 일단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여러 조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도 상당히 바뀌었지만, 5.16쿠데타 직후처럼 몇 달 사이에 그렇게 막 갈아치운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점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 고위층을 중앙 행정에서 배제하는 대신 중추원이라는 한직에 묶어뒀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대한제국 관리들을 대부분 재임용했다. 지방에 안정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할 때까지는 일제에 저항하지 않는 대한제국 관리들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다. 그 후 지배 체제를 어느 정도 정비했다고 본 일본은 대한제국 관리 출신 중 다수를 강점 5년 이내에 내보내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은 이들로 점차 그 자리를 대체했다. 아울러 중앙뿐만 아니라 점차 지방 관청에서도 일본인 관리를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45년 일제가 물러나면서 다시 큰 변화가 찾아왔다.

 

서중석 : 해방 후 미군은 일본인 도지사 등 고위직에서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유임했다. 그렇지만 1945년 연말을 기한으로 해서 그 후엔 거의 다 쫓겨났다. 그 자리를 메운 한국인이 많았다. 그게 몇 퍼센트냐. 일제 말에는 전쟁 때문에 일본인 관리가 조금 줄었다. 한국인이 그전에는 40퍼센트가 안 되게, 그것도 대개 낮은 직책에 충원됐는데, 일제 말에는 반반에 가깝게 된다.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 관청의 한국인 관리 비율은 1922년 39.4퍼센트, 1932년 36.6퍼센트였다가 1942년엔 44.5퍼센트로 늘어났다. <편집자>) 일본인이 차지했던 그 절반을 해방 후에, 더욱이 고위직까지 한국인이 차지하게 됐으니까 대단한 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이 끝나고 우리 정부가 들어설 때는 별로 이동이 없었다. 미군정 관리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유임한다고 헌법에 아예 못을 박아 놨기 때문이다. 장관 같은 고위직이야 다 바뀌었지만 그런 고위직을 빼놓고는 그랬다. 그러니까 5.16쿠데타 때 바뀐 건 일제 말에서 해방 직후 사이에 바뀐 것에 버금가는 대규모 이동으로 보인다. 그만큼 공무원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에서는 '세대교체는 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군인들이 뭘 알았겠나. 행정도 그렇고 더군다나 경제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군인 문화, 군인 사회에 있던 방식으로 행정 처리도 하고 전문적인 일까지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게 과연 잘한 일인가.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프레시안 : 쿠데타 후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법이 많이 늘었다.

 

서중석 : 최고회의는 새로운 법도 무지하게 많이 만들었다. 해방 후 헌정 중단이 세 차례에 걸쳐 있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중 최고회의로 이름이 바뀐 1961년 5월 19일부터 1963년 12월 16일까지 1008건의 법령이 통과됐다고 돼 있다. (최고회의가 헌법 외에 725개의 법률을 입법·공포하고 1300개의 각령(閣令)을 발표·집행했다고 나오는 자료도 있다. 자료에 따라 수치는 약간 다르지만, 많은 법령을 새로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편집자>)

 

그리고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3년 3월 12일까지, 이때도 비상국무회의에서 무지하게 법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건 270건이다. 5.16쿠데타 직후보다 기간이 조금 짧아서 그런 것 같다. 그다음에 5.17쿠데타가 일어나고 그해 10월에 가면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게 만들어진다. 그전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있었지만 국보위는 법을 만들지는 못하고 숙청 같은 것만 대대적으로 했다. 법을 만드는 날림 기관이 바로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것이었는데, 1980년 10월 28일부터 1981년 4월 20일까지 189건의 법률이 통과됐다고 한 통계에 나온다.

 

어느 경우나 노동권을 비롯한 기본권을 제한하고 비판을 봉쇄하는 법이 많았다. 물론 최고회의가 만든 법들 중엔 시대가 바뀌면서 시급히 만들어야 할 것도 있긴 했을 텐데, 그런 걸 국회 없이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만든 것이다. 너무 손쉽게, 심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만든 것이 무척 많아서 나중에 그런 법들을 수정하는 작업도 굉장히 어려웠다. 잘못된 법일지라도 계속 시행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2년 11월 13일). ⓒ연합뉴스

▲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1962년 11월 13일). ⓒ연합뉴스

 

 

 

중앙정보부 탄생…권한은 FBI+CIA, 핵심 기능은 정권 안보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이 이 시기에 한 일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중앙정보부 창설이다.

 

서중석 : 최고회의가 최고 통치 기관임을 명시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실질적으로 그 당시 제일 센 기관은 중앙정보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법을 공포하기 전에 이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활동하는 게 나온다. 그런 걸 보면 법 이전에 중앙정보부부터 만든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최고회의도 마찬가지다.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6월 6일에야 나오는데, 최고회의는 그 이전에 생기지 않나. (쿠데타 당일 오전 10시 김종필은 정보 기구 설치에 관한 복안을 제시하고 설치 작업에 착수했다. 1961년 5월 25일에는 최고회의령 제2호로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또한 법을 공포하기 1주일 전인 그해 6월 3일에는 각 도에 장교를 보내 공무원들이 쿠데타에 순응하는지, 민심은 어떤지 등에 관한 정보를 은밀히 모으도록 지시했다. <편집자>)

 

중앙정보부는 최고회의의 6개 직속 기관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최고회의, 내각 그리고 중앙정보부, 이 셋 중에서 어디가 제일 센가에 대해 당시에도 이미 '중앙정보부가 더 세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조직 자체가 엄청나게 방대했다. 자료에 따라 이것도 아주 다르게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 30만 이상의 요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오는 것도 있다. 그런 것에는 끄나풀을 어디까지 볼 것이냐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관련돼 있는 걸로 난 본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한국 정치에서 유일하게 강력하고도 광범한 조직이고 군정 하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중앙정보부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법 자체에 "중앙정보부의 직원은 그 업무 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 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한 것에서도 중앙정보부가 셀 수밖에 없었던 면이 드러난다.

 

프레시안 : 중앙정보부가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정보를 수집하는 권한만이 아니라 범죄 수사권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중석 : 그렇다. '미국의 경우 연방수사국(FBI)이나 중앙정보국(CIA)이 굉장히 힘센 기구로 알려져 있는데 FBI는 수사권만, CIA는 정보권만 갖지 않느냐',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앙정보부를 비판한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한 것이다. '어떻게 CIA와 FBI의 권한을 동시에 갖는 기관이 있을 수 있느냐. 그 기관은 통제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중앙정보부의 중요 기능은 대북 정보 분야로 돼 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기구가 남쪽에 대해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보부가 과연 북한에 대해 얼마나 정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느냐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많다. 김일성 사후에 나온 여러 이야기를 보더라도, 그때는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로 바뀐 후인데, 북한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그랬다. 이렇게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정부가 북한에 대해 잘 몰랐는데 과연 1960년대, 1970년대에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나 갖고 있었겠는가.

 

하여튼 1970년대에 보면 중앙정보부 제5국(대공수사국)이라는 큰 건물이 남산에 있었는데, 여기서 대북 정보를 많이 다루고 간첩을 수사하고 그랬다. 그 건물은 지금도 남산에 남아 있다. (중앙정보부 제5국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한 악명 높은 곳이다. 2012년 10월, 서울시는 중앙정보부 제5국이 있던 서울시청 남산 별관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임대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중앙정보부가 힘이 셀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보안 업무라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처의 정보, 수사 활동을 통제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기관이 보안 업무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를 감독하는 일이었다. 그건 정부만이 아니더라. 언론 기관, 노동 기관 등에 대해서조차 그랬다.

 

일각에서 '너무 자료가 많아서 현대사 공부를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엔 자료가 없다. 제일 큰 이유가 보안 통제하고 관련이 있다. 문서를 잘 폐기하더라는 것이다. 어떤 문서가 드러나 문제가 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공식 문서를 빼놓고는, 그런 공식 문서를 가능하게 한 이면 관계를 알 수 있는 문서가 우리 사회에 아주 드물다. 정부 각 기관이 남기지를 않았다. 그렇게 된 제일 큰 이유 중 하나가 정보부의 보안 통제 기능이 아닐까 싶다. 이건 각 기관을 통제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중앙정보부 보안 감사에 걸려들면 그 기관의 장들이나 책임자들은 혼날 수 있었다. 그러니 얼마만큼 중앙정보부를 무서워했겠는가.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중앙정보부, 정치 주무르는 데 몰두…이름은 바뀌었어도 체질은 그대로

 

프레시안 : 중앙정보부는 18년간 박정희 정권을 지탱한 기둥이었다. 본연의 임무인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중석 : 중앙정보부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건 대북 정보가 아니라 국내 정치 파트였다. 그러니까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중앙정치부라고 할 수도 있다. 야당 의원들 하나하나에 대해 약점까지 포함한 개인 문서를 갖고 있었다. 더 나아가 야당을 항상 분열시켜 무력화하는 작업을 했다. 1962년 12월 31일 만든 정당법이 근대적 정당, 야당을 육성하기 위한 법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중앙정보부가 야당 무력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래서 '야당에는 왕사쿠라가 있고 사쿠라가 즐비하게 피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 (1960∼1970년대 야당 정치인 중에는 겉으로는 야당 행세를 하지만 실제로는 뒷돈과 이권에 넘어가 여당과 야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사쿠라 야당'이라 불렀다. <편집자>)

 

야당 당수 선출에까지 많이 개입했다. 1960∼1970년대에 그런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많이 나오지 않나. 더 나아가 중앙정보부가 야당 대통령 후보까지도 누구로 해보려고 하는 짓들을 벌이고 하지 않았나. 야당이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던 것, 무력했던 것은 중앙정보부라는 존재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보다 더 큰 힘은 여당 통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힘이 셌던 건 야당 통제 쪽이 아니라 사실은 여당 통제 또는 여당 관련 활동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국회를 일사천리로 통제하고, 행정 정치 또는 행정 독재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해나가려면 대통령이 국회를 손아귀에 꽉 쥐어야 한다. 그런데 여당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면 그게 안 되는 것이다.

 

1960년대 국회에서는 여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71년 총선 결과 야당 의원이 많이 늘어나지만, 그전엔 교묘한 여러 방식에 의해 그 수가 적었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175석 중 110석을 차지했다.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은 33.5퍼센트밖에 안 됐지만, 무소속 출마 금지로 인해 야당이 난립한 탓이었다. 1967년 6월 8일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175석 중 129석을 차지했다. 3선 개헌을 위해 정권 차원에서 이뤄진 부정 선거의 결과로 꼽힌다. 그러나 1971년 5월 25일 치러진 총선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총 204석 중 89석을 차지하며 약진했다. 이승만 정권 후반기와 마찬가지로, 야당은 도시에서 압승했다. <편집자>) 그래서 여당을 통제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일사천리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 획일적으로 지시하고 그것에 복종하도록 하는 데에서 공화당 내 조직도 역할을 했지만 중앙정보부의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프레시안 : 중앙정보부의 후신이 안기부, 국정원이다. 안기부는 중앙정보부와 마찬가지로 정권 안보를 위해 국민을 짓밟는 데 앞장섰다. 국정원은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성찰 작업을 거쳤음에도, 이명박 정부 탄생 후 옛날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댓글 공작을 비롯한 2012년 대선 개입 등에서 이는 여실히 드러났다. 국정원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시절의 체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비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들어 국정원 개혁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정보 기구가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중앙정보부 자체가 쿠데타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데서 비롯했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 기사 : <"'이명박근혜' 국정원, 박정희 때로 회귀한 까닭은…"> <"우린 전두환 각하 분신"…국정원 DNA 안 변했다>)

 

서중석 : 민주공화당을 만든 게 어디인가.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만들었다고 누구나 이야기하지 않나. 엄청난 여당을 만들 때부터 중앙정보부가 굉장한 정치적 힘을 가질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1969년 3선 개헌 때도 중앙정보부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국회의원 선거에도 중앙정보부가 깊이 개입돼 있겠지만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를 총괄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71년 대선 때는 그런 이야기도 듣고 그랬다.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반드시 승리하도록 하는 데 중앙정보부 역할이라는 게 얼마나 컸나. 각종 공작, 선전, 정책 입안, 공약 같은 것들에 중앙정보부에서 상당한 작용을 했다.

 

유신 체제로 가면 '유신 체제를 유지하는 곳은 중앙정보부'라고 말할 정도로 중앙정보부가 훨씬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국민 투표 같은 걸 할 때도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지만, 예컨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여기서 대통령을 뽑는 건데 '100퍼센트 대통령'을 뽑도록 하려면 어디서 개입해야겠나. 입후보하는 데부터 그렇게 되지 않겠나. 유신 직후 국회의원 후보로 나서는 것에도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돼 있다고들 이야기하지 않나. 그러니까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꼭 필요했고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국내 정치 파트에 있었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 같다.

 

중앙정보부는 언론, 노조처럼 민간 기구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일도 많이 했다. 언론 기관에 오랫동안 상주하기도 하지 않았나. 학원, 대학가에도 상주했다. 언론이라는 게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나. 또 노조가 힘을 쓰는 날이면 정권으로선 그것도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중앙정보부는 중요 문화 기관에도 관련돼 있었다. 극단, 무용단 같은 걸 만들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정책적인 사업이었다.

 

 

▲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었다. 사진은 중앙정보부가 만들었던 양지 축구단 선수들이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 안에서 2009년 9월 친선 경기 후 기념 촬영을 한 모습. ⓒ연합뉴스

▲ 중앙정보부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었다. 사진은 중앙정보부가 만들었던 양지 축구단 선수들이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 안에서 2009년 9월 친선 경기 후 기념 촬영을 한 모습. ⓒ연합뉴스

 

 

 

청와대를 위한 정치 공작에 앞장선 중앙정보부

 

프레시안 : 중앙정보부는 축구팀도 만들었다. 1966년에 열린 월드컵에서 북한은 아시아 최초로 8강에 진출했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67년 1월 양지 축구단을 창설했다. 북한을 격파한다는 목표 아래 우수 선수를 모아 군 복무 대신 양지 축구단에서 활동하게 하면서 특급 대우를 해줬다. 중앙정보부 부훈(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대로 이름을 지은 이 팀은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70년 해체됐다. 국가 안보를 지킨다는 정보 기구가 축구 승리를 목표로 팀까지 만드는 모습은 박정희 정권 시기의 흥미로운 풍경 중 하나다.

 

서중석 : 그렇다. 그뿐만 아니라 김형욱 회고록 같은 걸 보면 경제 부문에도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돼 있었다. 재벌들을 통제한다고 할까,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데 중앙정보부가 작용했다. 중앙정보부 내에 경제 파트 부서가 있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는 우리나라에서 못하는 게 없다. 남성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을 빼놓고는 다 한다',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중앙정보부가 지방에까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장치가 또 하나 있었다. 관계 기관 대책 회의라는 것이다. 이제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기능했는가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몇 가지 자료와 증언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경우에 따라 지방에는 상설화돼 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강원도 사북에 있는 탄광에서 무슨 사태가 일어났고 광부들이 뭘 했다, 이러면 거기에 있는 관계 기관들이 싹 모여 대책 회의를 열고 조정하는 것이다. 누가 뭘 책임지고 누구를 만나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등등이 다 여기서 결정됐다. 이걸 주관하고 주도권을 행사한 곳이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 곳에서 다른 여러 기구가 중앙정보부에 잘못 보이면 어떻게 되겠나. 중앙정보부가 하부 행정 기관까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것과 관련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을 비롯한 굉장한 권력 기관들이 있었지만 관계 기관 대책 회의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건 역시 중앙정보부였다. 이러니 다른 기관들이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를 넘볼 수가 있었겠나. 물론 1979년 12.12쿠데타 이후에는 보안사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예외로 친다면, 그렇게들 이야기한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쏜 10.26사건 후 한동안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눌려 지내야 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중앙정보부는 최고 권력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었다. 국민은 물론 국회의 통제도 제대로 받지 않으려는 못된 습성은 국정원까지 이어졌다.

 

서중석 : 중앙정보부는 참 방대했고 '정부 밖의 정부'라는 이야기를 듣는 특이한 권력이었다. 이 무소불위의 특이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중앙정보부장은 전부 군 출신이었다. 여기서 전 국민을 감시한다는 이야기를 1960년대에도 많이 들었고, 특히 유신 시대에 많이 들었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 수많은 사건을 터뜨렸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예산에 대해 자유로운 곳이었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예산이 얼마인지 일반인한테 공개가 오랫동안 안 됐다. 그래서 그것의 상당 부분은 정치 자금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여러 번 나왔다. 그걸 축소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1980년대부터 끊임없이 나왔다. 유신 시대 초기에 데모할 때 제일 강한 구호가 뭐였냐 하면 "중앙정보부 혁파하라"였다.

 

어쨌건 중앙정보부는 이렇게 강한 힘을 발휘하며 민주공화당이라는 거대 여당도 만들어냈다. 최고회의의 일부 구성원은 자신들이 권력의 실세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소외됐다는 게 나중에 드러난다. 그래서 최고회의 내에서 중앙정보부 문제를 둘러싸고 김종필 쪽과 대판 싸움이 벌어진다. 아주 난장판이 벌어지고 하면서 민정 이양기에 여러 차례 풍파를 겪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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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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