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국민은 '진짜 변화'를 원한다

필리버스터의 교훈…야권 총선 승리하려면?
[주간 프레시안 뷰] 국민은 '진짜 변화'를 원한다
 
| 2016.03.04 17:41:35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20대 총선 레이스의 서막을 가장 강력하게 열어젖힌 '필리버스터'가 멈췄습니다. 38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펼친 무려 192시간 25분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국회로 온 나꼼수'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 등 20-40을 중심으로 필리버스터는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야당 국회의원들의 '존재 증명'을 기꺼이 시청하고 퍼날랐습니다. 이 현상은 소셜 미디어의 울타리를 넘어 술집에서도 주요 이슈였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 이런 강력한 메시지 폭풍이 또 있었을까요?  
테러 방지법을 반대하기 위한 이번 필리버스터 대장정은 단순히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 승화됐습니다. 젊은이들에겐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한계에 도전하는 정치 스피치 리얼리티 쇼를 관람하면서 '한국의 야당에게도 이런 국회의원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지난 2월23일 오후 7시6분에 시작해 3월2일 오후 7시31분에 종료된 필리버스터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돌연한 직권상정 방침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이었습니다. 사전에 기획된 퍼포먼스가 아니었던 것이죠. 필리버스터가 국회선진화법의 규칙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해 간 것도 그것의 자연발생성,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과감한 헌신성, 국민의 기본권 침해 우려가 상당한 테러 방지법 반대라는 정의로운 목적성, 고루한 국회TV를 소셜 미디어로 퍼나르고 참여의 공간을 넓혀낸 강력한 소통성 등이 융합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파장은 강력했습니다. 선두타자 김광진이 안타를 치고 문병호가 번트를 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폭발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필리버스터 현상으로 만든 것은 은수미였습니다. 10시간 18분 동안 이어진 은수미의 필리버스터에는 테러 방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진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사람들은 그 진정성에 마법처럼 빨려들었습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부르는 요정이 찾아온다고 했었죠. 그 영감을 받아 외화시키는 것은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요정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은수미에게 테러방지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공포였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은 거의 무제한 개인 사찰이 가능한 법이었구요. 정의화가 직권상정을 결정했을 때 은수미는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국민의 기본권이 파괴될 수 있는 테러방지법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것은 의원총회에서 '테러방지법을 막을 순 없더라도 국민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리고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는 필리버스터라도 하자'는 의견으로 이어졌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이를 전격 수용하면서 거대한 정치 록페스티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필리버스터 10시간을 넘긴 은수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TV나 소셜 미디어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은수미는 가누기조차 힘든 몸을 연단에 기댄 채 마지막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영상 앞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엔 매우 복잡한 의미, 젊은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열정과 오랜 투옥생활, 아주 미흡하다고 느낀 4년 간의 국회의원 생활, 그가 대변하려고 했던 비정규직을 비롯한 '을'들의 고단한 삶, 청년들의 절망, 나아가 혼신을 다해 무제한 토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 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을 겁니다.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광속으로 오가는 회한과 연민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도 전달됐습니다. 은수미의 길고 긴 필리버스터의 흔적인 국회속기록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발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는 대한민국 국민을 믿습니다. 이 법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또 누군가 고통을 당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덜 고통받는 방법을 제발 정부 여당은 좀 찾읍시다. 이것은 저는 사람을 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정치에는…여당도 야당도 없고, 보수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국민을 위해서 생각하고요." 


지난 2월23일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4일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에서 필리버스터를 언급한 글은 무려 338만8766건이 검색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숫자입니다. 이 같은 언급량은 2014년 4월16일부터 열흘 동안의 세월호 언급량 214만5028건을 웃도는 폭발력입니다. 은수미가 활약한 지난 2월24일 하루 언급량만 83만5218건을 기록해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세월호 일일 최다 언급량을 기록했던 2014년 4월17일엔 33만3312건이었습니다. 인물 연관어 분포에서도 은수미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해 가장 강력한 '필리버스타'임을 증명했고 김광진, 박원석, 정청래, 신경민, 박영선, 이종걸, 강기정, 홍종학, 김용익, 이학영, 문병호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24일 은수미 하루 언급량은 50만 건을 돌파해 소셜 빅데이터 관측사상 일일 최다 인물 언급량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기존 기록은 2012년 대통령선거가 임박했던 12월16일의 박근혜 43만 건과 문재인 36만 건을 훨씬 웃도는 수치입니다.

 

 

ⓒ유승찬


필리버스터는 정치 의제로는 보기 드물게 긍정어 분포가 부정어 분포를 압도한 것도 특징이었습니다. 긍부정 연관어를 살펴보면 합법적 반대, 응원, 중요하다, 필요하다, 잘하다, 기막힌, 좋은 같은 단어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했습니다. 다소 길게 필리버스터가 어느 정도의 크기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를 몇 가지 데이터를 곁들여 살펴보았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한국 정치사에 가장 뜨거운 한순간으로 기록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필리버스터 현상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돌연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담대한 마음으로, 테러 방지법을 막겠다는 각오로 필리버스터를 더 진행했다면 판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었는데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할 겁니다. 혹자는 앞서 인용한 베버의 열정(필리버스터)을 제어할 균형감각(중단)을 발휘한 것이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균형감각이 아닙니다. 역풍을 우려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보수언론의 협박성 프레임 말고는 뚜렷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중단을 결정한 더민주 지도부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경제 프레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거에서 역풍이란 이기고 있는 정당이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야권분열 이후 1여다야 구도가 형성됐고 새누리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은 가운데 야당은 판을 흔들 모멘텀을 일부러라도 찾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민주 지도부는 새누리당의 일방독주를 막을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은 균형감각이라기보다 두려움의 소산이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정의로운 결정이라기보다 비대위 지도부의 권력체계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19대 국회 들어 거의 처음 주도권을 쥔 더민주가 전투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일부러 내준 기이한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김종인 비대위는 문재인 안철수 갈등의 화근이었던 혁신안마저 버리고 당무위 권한까지 위임받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체계를 완성했습니다. 혁신안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반대여론조차 형성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가 권력의 수렴청정 흐름에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정례 여론조사는 필리버스터가 더불어민주당의 존재감을 상당히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민주 지지율이 지난 주 대비 4%포인트 급등한 23%를 기록했고 새누리당 지지율은 4%포인트 급감한 38%를 기록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면 이 같은 추세는 더 가파르게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20~40세대와 특히 여성층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20대 지지율은 새누리당의 경우 전주(27%) 대비 10%포인트가 줄어든 17%를 기록했고 더민주는 전주 대비 5%포인트 증가한 31%를 기록했습니다. 30대 지지율도 새누리당은 전주 대비 7%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은 각각 3%포인트, 4%포인트, 3%포인트 증가했습니다. 40대와 50대 초반에서도 지지율 이동이 감지되는데 특히 40대 새누리당 지지율은 8%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각각 5%포인트씩 상승했습니다. 새누리당 콘크리트 지지율을 보이는 60대 이상에선 의미 있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경우에도 움직임이 뚜렷했습니다. 새누리당 여성 지지율은 42%에서 37%로 5%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여성 지지율은 19%에서 26%로 7%포인트나 껑충 뛰었습니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 여론도 반대 39%, 찬성 51%로 나타났고 박근혜 대통령 국정지지도도 30%대로 미끄러졌습니다. 필리버스터가 테러방지법에 대한 국민 여론을 실제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테러 방지법의 위험성을 알리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를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강렬한 정치 퍼포먼스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민주 지도부가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낡고 단순하며 수세적인 프레임에 갇혀 끓어오르는 대중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입니다.  


물론 선거에서 경제 이슈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불평등 문제와 청년실업, 경제민주화 등의 이슈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기된 문제, 즉 국민의 사생활 침해 위험성이 매우 큰 법안을 회피하는 정당이 경제 이슈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테러 방지법은 단지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성들이 여론조사 데이터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핸드폰과 계좌를 뒤질 수 있다는 공포는 상존합니다. 최근 텔레그램으로의 이주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대중의 관심의 크기에 따라 전파됩니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비롯한 내부 시스템 정비 문제가 시급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판을 뒤엎을 수도 있었던 거대한 흐름을 역동적으로 껴안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가 불러일으킨 극적 깨달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회 안의 필리버스터 정신을 국회 밖에서 창조적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대중의 패배주의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새로고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권이 이번 총선에서 집권여당의 공세를 뚫고 승리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강한 열정을 조직하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주 40시간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샌더스의 공감과 "캐나다 국민들이 변화를 원하면, 세상의 모든 자본도 변화를 멈춰세울 수 없다"는 트뤼도의 열정, 연두연설에서 최저시급 '텐텐법안'을 발의한 버락 오바마의 프래그머티즘을 구현할 수 있다면 아직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운동'이 보여줬듯이, 국민들은 '진짜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일도 스물여덟, 영원히 위대한 서정시의 탄생


등록 :2016-03-04 22:10수정 :2016-03-05 16:25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특집 / 동주가 돌아왔다
▶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장례가 1945년 3월6일 뒤늦게 치러졌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서거 71주기입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지난 2월24일~3월1일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고,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저예산 영화 <동주>도 조용한 흥행몰이 중입니다. 몰락한 시대, 끝없이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시가 어깨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의 시가 다시 불어오는 것은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탓일까요.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 1942.4.14.-

 

 

이름 잃은 사내가 빛 잃은 거리를 서성이다 모퉁이 속으로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랑하는 그림자를 어둠 속에 소리 없이 보내고 뒷골목을 돌아 찾아온 방. 시들어간 귀를 안고 황혼으로 물드는 작은 방에 앉는다. 양처럼 풀포기를 뜯자. 그제야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이름 잃은 사내는 히라누마 도주(25). 시인 윤동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자리한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先科) 1학년 윤동주는 1942년 4월14일 일본인들 사이를 서성이다 돌아와 시를 쓴다. 12일 전 입학한 신입생은 어쩐지 괴롭고 그립다.

 

태극기 날리는 간도 명동소학교
잃어버린 조국 밖의 조국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나라 잃은 설움에도 꿋꿋했다
몽규와 동주는 문학을 사랑했다

 

열일곱 몽규가 신춘문예 등단
동주는 시에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몽규는 열여덟에 무장투쟁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동주가 남았다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이 그립다

 

시 ‘십자가’ 육필 원고.
시 ‘십자가’ 육필 원고.

 

흐르는 거리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이름을 잃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10일 총독부 제령 19호로 ‘창씨개명’을 공포하고 참여가 저조하자 소설가 이광수 등을 동원해 1940년 8월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린다. 1941년 11월 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에게 제재조치를 공표한다. ‘자녀는 학교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행정기관은 모든 민원 사무 취급을 안 한다.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해 경찰 수첩에 기입해 철저히 사찰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 제출한다.

 

유학을 결심한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선 일본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닷새 전 그는 한 편 시를 원고지에 적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1942.1.24.-

 

 

그가 ‘참회록’을 쓰고 원고지 아랫부분 왼쪽에 끄적거려본다. ‘詩人의 告白’(시인의 고백). 연필이 쉬이 그를 놓지 않는다. 그 아래 적는다. ‘渡航 證明’(도항 증명). 일본으로 떠나는 도항을 증명한다. 시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가 종이 위에 답한다. ‘詩란 不知道’(시란 부지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동주는 1942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일본행 배를 탔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교토제대 사학과에 입학한 송몽규, 릿쿄대 영문학과생 윤동주는 미리 유학와 있는 당숙 윤영춘을 만난다. “나는 둘의 손목을 잡고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를 내 집 뜨락처럼 쏘다녔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 시와 조선이라는 이름은 말버릇처럼 동주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1976년 여름호)

 

넉넉한 집안의 아들 동주는 대학노트를 끼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어느 밤 바닥에 그려진 낯선 그림자처럼 부끄러움이 그를 길게 따라다닌다. 그런 밤 동주는 잠이 들지 않고 원고지에 자신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밤비가 속살거린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1942.6.3.-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의 탄압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학풍 가운데 공부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새로운 길’)을 잠시 그려보지만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다시 수난의 시간을 맞는다. 1941년 3월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데 이어 이듬해 4월 문학잡지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된다. 윤동주가 존경한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는 1938년 11월 강제 해직됐다가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된다. 연희전문은 이제 수탈된 조국에서 숨을 트는 호흡기가 아니다. 대학 4학년 가을, 시인은 잃어버린 길 위에 섰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1941.9.31.-

 

꿈은 깨어지고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윤동주는 중국 만주 간도의 명동마을에서 자랐다. 1917년 12월30일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1945년 2월16일 일본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본토를 떠나 타지로 갔다. 만주 간도에서, 경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마을을 고 문익환 목사는 1976년 4월 <월간중앙>에서 이렇게 기억한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어보면, 한국인들은 북간도에서 중국인들에게 행패를 당해 망국민의 설움을 톡톡이 당한 것처럼 되어 있다. 물론 그런 곳도 적지 않았고 그런 사건도 있었다. 명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동에서 이야기된 일이 밖으로 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전 주민이 민족애로 뭉쳐 있었다. (…) 동주와 내가 졸업하던 1931년까지 명동학교는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다. 작문시간에는 어떤 제목이 나오든 조선독립으로 결론을 끌고 가지 않으면 제대로 점수를 못 받았을 정도였다. 망국의 울분을 짓씹으면서도 우리는 조국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었고 땅속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활촉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구 같은 생활도구들이 땅을 가는 보습에 걸려 나왔다. 거기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거기만은 조국이 살아 있었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다녀온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는 1918년 한일병합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명이다.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안중근이 명동마을 뒷산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두 명의 주인공이 출연한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와 윤동주. 둘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함께했다. 시인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달랐지만 그 길 끝은 죽음이었다. 둘은 문학을 사랑했다. 명동소학교 동급생인 시인 김정우의 기억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5학년 때 잡지 <새 명동>을 몇 호 발간했다. 몽규는 동주보다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1934년 12월 은진중학교 3학년, 열일곱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으로 당선된 것. 몽규가 당선된 그해 12월24일부터 동주는 시에 날짜를 기록한다. “동주는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지’라는 말을 가끔했다. 몽규를 의식하는 말이었다.”(고 문익환 목사, 1976년 4월 <월간중앙>)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세 사람은 은진중학교에서 한 명의 은사를 만난다.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명희조 선생. 명희조 선생은 유학 시절 일본인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전차를 타지 않았다. 명희조 선생은 몽규를 눈여겨봤다.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은진중학교는 교실마다 태극기를 걸고 삼일절과 단군 기념일을 지켰다.

 

“명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으로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기어이 은진중학교를 못 마치고 같은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마치고 연전(연희전문)으로 올라온다. 일본 경찰은 동주보다 몽규를 주목하고 있었으리라.”(문익환)

 

송몽규는 1935년 4월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난징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으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김구 선생이 반일 민족독립전쟁에 나서려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명희조 선생의 소개였다. 몽규는 신춘문예 당선으로 열린 출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3월에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문익환은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숭실중학교로 먼저 편입했다. 당시 연희전문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불리했다. 송몽규는 중국으로 떠났다.”(김응교, <처럼>, 문학동네, 2016)

 

윤동주는 문익환보다 늦은 1935년 9월 편입시험을 보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민족애국주의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침략된 조국의 좌절을 처음 맞닥뜨린다. 당시 기독교는 신사 참배파와 반대파로 갈등을 겪었고 1935년 12월4일 숭실중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해산했다.

 

“학생들은 모두 와카마쓰 신학교 앞에 모였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다음으로 크고 장엄하게 지었다는 평양신궁은 모란봉 산정 부근에 위치했다. 신궁에 올라가기 위해서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이미 참배를 마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숭실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었던 학생장 임인식 형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뒤로돌아’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 이 일로 숭실학교의 조지 S. 매퀸 교장(한국명 윤산온)은 다음해인 1936년 1월20일 파면됐다. 그 며칠 후 2월 초였다. 윤 교장의 파면 소식을 듣고 학생들이 두 명씩 세 명씩 교정에 모여들었다. 새로 학생장이 된 유성복 형의 인솔로 교장을 내놓으라며 데모가 시작됐다. (줄임) 이 일로 인해 숭실학교는 무기 휴교가 되고 나를 포함한 주동 학생들이 피검되었다. 당시 급우였던 애국 시인 윤동주는 광명학교로 옮겨야 했다.”(김두찬,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동아일보> 1982년 8월16일)

 

열아홉 윤동주는 깊은 겨울밤 불 꺼진 화독을 품에 안았다. 재만 남은 가슴으로, 문풍지 소리에 떠는 가슴으로 시를 쓴다.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 1’, 1936.3.25.-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가슴 3’, 1936.7.24.-

 

 

윤동주와 문익환은 1936년 3월 평양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간도의 용정으로 돌아온다. 둘은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된 광명학원 중학부에 입학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들이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회고한다. 한달 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지난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송몽규는 일본 경찰 블랙리스트에 기록된다. 함경북도의 어느 교도소에 투옥된다. ‘이런 날에는/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이런 날’, 1936.6.10)

 

자유로운 학풍, 연희전문에 입학
곧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암흑의 시기에 오래 침묵한다
시인은 창씨개명계를 내고
‘참회록’ 시로 부끄러워한다

 

동주는 시집을 출간하려다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후배는 시집을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땅속 항아리에서 기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무서운 시간

 

1938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는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번갈아 했는데 1940년 두 학년 아래인 정병욱을 기숙사에서 만난다.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하던 1941년 봄, 기숙사를 떠나기로 하고 누상동 마루터기에 있는 하숙방을 구했다. 한 달이 지나고 하숙집 사정으로 떠나야 할 신세가 되어 새 하숙을 구하러 길을 나선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송씨의 부인 조성녀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동주의 시집 제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1941년 5월과 6월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어도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우울한 세태 속에서 환대하는 하숙집 주인 내외분을 만난 기쁨 가운데 시를 쓸 수 있었다. (…) 빈틈없고 알찬 일상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1941.11.5.-

 

 

두 사람은 1941년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 소설가 김송씨의 집을 나와 북아현동의 하숙집에 살았다. ‘별 헤는 밤’은 이때 쓰인 시다.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시를 보였다.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윤동주는 정병욱의 말을 듣고 마지막 네 줄을 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현재 시집의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이 마지막 넉 줄을 덧붙인 것이 과연 이 시를 살렸는지 사족이 되게 하였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려니와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존중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동주의 너그러운 아량에 다시금 머리가 수그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정병욱, 위의 책)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은 자필 시고 3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한 부를 본인이 가졌다. 이 시집의 이름은 ‘병원’으로 지으려다 바뀐 것이다.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여서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이양하 선생은 검열에 통과할 수 없다며 출판 보류를 권했다.

 

윤동주가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 후 반년이 지나 정병욱도 학병으로 끌려갔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시집을 맡기며 “나나 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잘 간수”해 달라고 부탁한다. 혹시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꼭 알려달라는 유언이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전남 광양시 망덕리 집 마루 아래에 흙을 파내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싼 시집을 묻었다. 땅속에 오래도록 묻힌 시집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슬픈 족속

 

윤동주는 릿쿄대학을 자퇴하고 1942년 10월1일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입학한다. 송몽규와 윤동주의 집은 걸어서 4~5분 거리. 1942년 겨울 윤동주를 만난 당숙 윤영춘의 기억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방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 두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이것이 거의 그날그날의 과제인 모양이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이듬해 여름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된 시기는 송몽규 1943년 7월10일, 윤동주 7월14일. 둘을 포함해 같은 공부 모임에 있던 학생 7명이 체포됐다. 죄명은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체포된 윤동주는 교토경찰서 형사의 지시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판결은 이러하다.

 

“소무라 무케이(송몽규)와 소화 18년(1943) 4월 중순경 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교쿠 시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초 60번지 시미즈 에이치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에겐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로 교환하며 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하면서 함께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서로 비판하며(…) 위 사람과 찬드라 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대해 논의하고….”

 

윤동주의 독립운동 혐의가 어느 층위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송몽규와 주도한 것인지, 몽규의 모임에 참석만 한 것인지는.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당숙 윤영춘이 형무소를 찾아갔다.

 

“죽은 동주는 후에 찾기로 하고 산 사람부터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몽규를 먼저 찾았다. (…)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다. (…) 일본 청년 간수 하나가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운명했다’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윤영춘, 위의 책)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이 옥사했다. 윤동주가 죽은 열흘 뒤인 3월7일 송몽규도 숨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경(일본 경찰)은 이 남의 나라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물었을 테고 동주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고 죽은 것이 아닐까? ‘너는 유태인의 왕이냐?’ 하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맞다’고 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대답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듯 일경도 동주의 말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했을 때 그는 일차원적인 고향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6일에 치러진다. 윤동주는 가장 몰락한 시대에 서정시를 썼다. “서정시는 가장 외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시인 윤동주의 죄는 끝없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기사는 <처럼>(김응교, 문학동네, 2016),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정병욱, 집문당, 1980), <월간중앙>(1976년 4월호)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제목은 윤동주의 시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민평화대회 “한반도 긴장 고조 전쟁 연습 안돼”

장대 빗 속 “한미 전쟁연습 중단” 함성
 
시민평화대회 “한반도 긴장 고조 전쟁 연습 안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05 [23: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민사회평화연대가 장대 빗 속에서도 한미 전쟁 연습을 중단하라는 집회를 열었다.     ©이정섭 기자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시민 사회단체들이 한.미 양국이 진행 예정인 한미연합 키리졸브 전쟁연습과 독수리훈련, 쌍용훈련이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킬 수 있다며 훈련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민사회평화연대회의는 5일 오후 3시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오는 7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가량 사상 최대의 규모, 최대의 핵전력이 배치되는 이번 훈련은 ‘평양진격훈련’. ‘김정은(김정은 제1위원장) 참수작전’등이 진행되는 등, 호전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로 인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단체들은 “존 C 스테니스 항모전단과 로널드 레이건호 항모전단 예하 일부 선단 및 병력이 참여한다.”면서 “미국이 핵 항모 전단을 2개나 운용하는 가운데 예년보다 5천700여 명이 증원된 미군병력, 전투기 45대 추가 투입, 스텔스 전투함을 이끌고 한미 해병대 훈련에 참가하는 미 본토 해병대 등 역대 최대의 규모의 전력이 한반도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 집회 참가자들은 이번 훈련은 방어훈련이라는 허울 바져 벗어 던진 전쟁연습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킨다며 전쟁연습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그러면서 “훈련의 내용으로는 선제공격의 성격이 전면 강화된 작전계획 5015를 기반으로, 미군 최강의 특수부대라고 불리는 네이비 실과 델타포스를 참가시켜 ‘평양진격훈련’. ‘김정은(김정은 제1위원장) 참수작전’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은 또, 한미연합 상륙훈련에서 중형 항모급 기동상륙지원선(MLP·Mobile Landing Platform)을 동원하여 수십 척의 상륙함을 동원하지 않고도 최단시간에 대규모 상륙작전이 가능한 차세대 상륙작전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전했다.

 

단체들은 “이는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표방했던 방어훈련'의 허울조차 던져버린 극단적이고 도발적인 무력시위”라고 규탄했다.

 

또한 북이 지난 23일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성명을  통해 “한미 군 당국의 특수작전무력과 작전장비들이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보이는 경우 그를 사전에 철저히 제압하기 위한 선제적인 정의의 작전수행에 진입할 것”이라며, 키리졸브와 독수리훈련을 북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직접 사전에 제압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상기했다.

 

이어 지난 3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른바 참수작전과 체제붕괴와 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마지막 도박에 매달리고 있어 현 정세가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는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이제는 적들에 대한 우리의 군사적 대응방식을 선제공격적인 방식으로 모두 전환시킬 것"이라 경고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일촉즉발의 충돌위기가 심각한 전쟁의 참화로 비화될 수 있는 심각한 국면”이라면서 “이런 국면 속에 박근혜 정부의 ‘북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에 기반한 대북적대정책, 제출 11년 만에 국회에서 통과 된 북인권법 사례에서 보여지는 야당의 태도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방향이 아닌, 한층 더 악화시키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요구하는 정치권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고 현 정부와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위험천만한 전쟁훈련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국민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집회참가자들은 ‘전쟁연습 중단!’, ‘평화가 민생이다’, ‘평화정책 실패, 박근혜정부규탄’, ‘평화협정체결’등의 구호 현수막을 펼치며 빗속 시위를 이어갔다.

 

한편 시민사회평화연대는 오는 12일 진행되는 호전적인 상륙훈련에 대응하여, 전쟁연습중단과 평화를 요구하는 평화버스가 훈련예정지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개성공단 폐쇄.남북관계 파탄, 홍용표 통일부장관 사퇴하라!"

민권연대 통일부앞서 기자회견, '통일부 존재가치 의문' (전문)
백남주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6.03.05  15:51:59
페이스북 트위터

 

   
▲ 민권연대는 4일 통일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남주 통신원]

3월 7일,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을 앞두고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는 4일 오전 11시 통일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홍용표 통일부 장관 사퇴를 촉구했다.

민권연대는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위기관리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현재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한반도 리스크’가 증가하고 증시가 불안정해지는 등 국내경제도 타격을 입고 있다고 민권연대는 주장했다.

민권연대는 통일부의 존재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마지막까지 남북 간 대화채널을 유지하고 평화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할 통일부가 오히려 남북관계 파탄과 전쟁위기 고조에 앞장서는 행동들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최근 미국과 중국 등이 UN제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과의 대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남북 간 모든 대화채널을 막아 버린 통일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민권연대 원로들도 직접 행동에 나섰다. 왼쪽부터 윤한탁 민권연대 명예의장,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홍갑표 민권연대 고문. [사진 - 통일뉴스 백남주 통신원]

특히 얼마 전 명확한 근거 제시 없이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로켓 개발에 유용되었다는 주장을 펴며 개성공단 폐쇄에 일조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홍용표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일부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해 책임을 져야하며,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홍 장관의 말 바꾸기로 인해 이미 홍 장관의 신뢰는 바닥을 쳤다는 것이 민권연대의 주장이다. 그런 인사에게 민족의 대업인 통일사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3월, 한반도 전쟁위기는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3월 박근혜 정부가, 특히 통일부가 어떤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기자회견문 (전문)>
개성공단 폐쇄, 남북관계 파탄. 홍용표 통일부장관 사퇴하라!

오는 3월 7일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이 시작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될 예정인 이번 훈련에 전략핵무기를 비롯해 최첨단 군사장비들이 동원된다고 한다. 특히 선제공격에 이어 북한 지도부를 제거한다고 하는 작전계획 5015, 일명 '참수작전'을 훈련예정이라 북한이 강력반발하고 있어 전쟁위기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다.

어떠한 경우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아야한다. 한반도 전쟁은 승자없는, 우리 민족의 공멸로 마무리 될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의 유일한 길은 남북간 대화와 협력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전쟁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특히 통일부는 마지막까지 남북간 대화채널을 유지하고 평화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통일부는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은커녕 오히려 남북관계 파탄과 전쟁위기 고조에 앞장서는 행동들을 벌이고 있다.

특히 통일부의 수장인 홍용표 장관은 근거도 없이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로켓개발에 유용되었다는 주장을 펴며 개성공단을 폐쇄하는데 앞장섰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측에 대한 제재효과는 없이 남측 기업들에게만 악영향을 주며, 우리 안보에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음에도 홍 장관은 듣지 않았다.

그로인해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한반도 리스크’가 증가하고 증시가 불안정해지는 등 국내경제도 타격을 입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도산위기에 처해있고, 해당기업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개성공단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노동자 2000여명 중 80~90%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노동자들의 보상요구마저 묵살하고 있다.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는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보상은 없다. 관련 기업들은 보상이 어렵다면, 피해구제나 손실보전이라도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는 법적 규정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통일의 징검다리가 되어왔던 관련 기업들의 이익을 옹호해 줘야할 통일부는 실질적인 대책은 없이 생색내기에만 급급하다.

남북간 모든 대화채널을 막아 버린 통일부의 행동은 통일부의 존재가치를 의심스럽게 한다. 해외언론에서는 북한과 미국과의 협상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미국과 중국에서 UN제재의 목적이 북한과의 대화개시를 위한 것이라는 등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앞 뒤 가리지 않고 대북압박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통일부가 남북간 마지막 대화통로가 되고 남북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함에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이렇게 통일부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제 역할을 못하게 만든 책임자인 홍용표 장관은 직접 책임을 져야한다.

특히나 홍용표 장관의 경우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전용됐다며 개성공단 폐쇄에 앞장서다가 ‘확증은 없다’고 말을 바꾸기까지 했다. 야권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도 홍 장관 사퇴의 목소리가 크다. 이미 홍 장관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있다. 이런 인사에게 어떻게 앞으로 통일사업을 신뢰하고 맡길 수 있단 말인가.

허위사실로 개성공단을 폐쇄시키고 남북관계 파탄에 앞장선 홍용표 통일부장관은 사퇴해야 한다.

2016년 3월 4일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北 "유엔 제재결의, 수수방관할 우리 아니다"

北 "유엔 제재결의, 수수방관할 우리 아니다"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 발표.."유엔 결의 인정한 적없다" (전문)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6.03.04  17:56:04
페이스북 트위터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로골적으로 짓밟는 길에 들어선 이상 우리의 단호한 대응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수수방관할 우리가 아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지난 3일(한국시간) 북한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에 대한 '대북 제재 결의 2270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데 대해, 북한은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4일 '우리 공화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난폭하게 유린한 유엔안보리사회의 대조선 제재 결의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서나갈 것이다'라는 제목의 북한 정부 대변인 성명을 보도했다.

공화국 정부 대변인 성명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 보다 격이 더 높다.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결의에 대한 북한의 공식입장인 셈이다.

성명은 "제재결의는 이미 예견된 것으로서 별로 놀랄 것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라면서도 "제재결의가 당치않은 구실로 자주적이며 정의로운 주권국가를 고립압살하기 위한 가장 노골적이며 가장 극악한 국제적 범죄행위"라고 반발했다.

그리고 4차 핵 실험(수소탄 실험)은 '핵억제력 확보조치'이고 장거리 로켓 발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권리행사'라며 세 가지 입장을 밝혔다.

성명은 먼저, "악랄한 대조선 제재결의를 존엄높은 자주독립국가인 우리 공화국에 대한 가장 극악한 도발로 낙인하고 단호히 배격한다"며 "원래 우리는 공화국에 대한 유엔의 모든 제재결의들을 단 한번도 인정해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로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노골적으로 짓밟는 길에 들어선 이상 우리의 단호한 대응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대응에는 강력하고 무자비한 물리적 대응을 포함한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들이 총동원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 수수방관할 우리가 아니다"라며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누구도 바라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 유엔 제재결의에 가담한 자들이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 번째로 "이번 특대형 국제범죄를 계기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국제정치질서를 결정적으로 깨버리기 위한 범세계적인 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나갈 것"이라며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의 자대에 따라 합법성과 비법성이 제멋대로 재단되고 정의와 진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성명은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앞으로도 병진노선의 기치를 억세게 틀어쥐고 자위적 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며 위성대국의 영마루를 향해 이미 선택한 길을 따라 과감히 전진할 것"이라며 "국제적 정의와 공정성을 어떻게 바로잡아나가는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공화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란폭하게 유린한 유엔안보리사회의 대조선《제재》결의에 단호한 대응조치로 맞서나갈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대변인 성명(전문)-

     우리의 수소탄시험과 인공지구위성 《광명성-4》호의 완전성공에 기절초풍한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은 3월 3일 새벽 드디여 유엔안전보장리사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악랄한 대조선《제재결의》 제2270호를 조작해내였다.
    《결의》가 채택되자마자 미국의 오바마는 《환영메쎄지》라는것을 발표하고 국무장관 케리를 내세워 《지지성명》을 공표하게 하였으며 잇달아 어중이떠중이들은 멋없이 그에 맞장구를 치고있다.
    미국은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제재결의》의 효과성을 떠들어대면서 우리 군대와 정부의 핵심일군들을 《특별제재》대상으로 지명한 《독자제재》까지 덧붙여 발표하였다.
    일본도 덩달아 아베의 《지지론평》과 기시다외상의 《지지담화》를 내보내였다.
    지어 남조선의 박근혜패당까지 한밤중에 《성명》이라는것을 내고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제재》니,《단호한 메쎄지》니 뭐니 하고 고아대고있다.
    새해를 맞으며 세계를 진감시킨 우리의 수소탄뢰성과 《광명성-4》호의 성공적발사에 질겁한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57일간이나 숙덕공론을 벌린 끝에 조작해낸 이번 《제재결의》는 이미 예견된것으로서 별로 놀랄것도 새로운것도 아니다.
    문제로 되는것은 이번 《제재결의》가 당치않은 구실로 자주적이며 정의로운 주권국가를 고립압살하기 위한 가장 로골적이며 가장 극악한 국제적범죄행위라는데 있다.
    이미 천명한바와 같이 우리 공화국의 수소탄시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침략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과 가증되는 핵위협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한 자위적인 핵억제력확보조치이며 우리의 위성발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권리행사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공모결탁하여 우리의 자주권을 엄중히 위협하고 우리의 정의의 위업에 전면도전하는 유엔안전보장리사회《제재결의》를 조작해낸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립장을 세계앞에 천명한다.
    첫째,유엔안전보장리사회의 악랄한 대조선《제재결의》를 존엄높은 자주독립국가인 우리 공화국에 대한 가장 극악한 도발로 락인하고 단호히 배격한다.
    이번 대조선《제재결의》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여야 할 유엔안전보장리사회가 자기의 사명과 임무를 줴버리고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장단에 놀아나 국제적정의와 공정성을 란폭하게 유린하고 조작해낸 범죄적인 문건이다.
    원래 우리는 공화국에 대한 유엔의 모든 《제재결의》들을 단 한번도 인정해본적이 없다.
    둘째,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로골적으로 짓밟는 길에 들어선 이상 우리의 단호한 대응이 뒤따르게 될것이다.
    우리의 대응에는 강력하고 무자비한 물리적대응을 포함한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들이 총동원될것이다.
    나라의 자주권과 생존권이 유린당하는것을 뻔히 보면서 수수방관할 우리가 아니다.
    조선반도와 그 주변에서 누구도 바라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 추종세력들,유엔《제재결의》에 가담한자들이 지게 될것이다.
    셋째,유엔안전보장리사회가 저지른 이번 특대형국제범죄를 계기로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국제정치질서를 결정적으로 깨버리기 위한 범세계적인 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나갈것이다.
    정의와 공정성이 유린되고 이중기준과 부정의가 판을 치는 세계의 흐름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수 없다.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의 자대에 따라 합법성과 비법성이 제멋대로 재단되고 정의와 진리가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는것이 우리의 립장이다.
    우리 공화국은 그 누가 뭐라고 하든 앞으로도 병진로선의 기치를 억세게 틀어쥐고 자위적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해나갈것이며 위성대국의 령마루를 향해 이미 선택한 길을 따라 과감히 전진할것이다.
    세계는 유엔《제재결의》를 천백배의 대응조치로 맞받아나가는 우리 공화국이 미국을 비롯한 대국들과 그에 추종해나선 얼간망둥이들의 독판치기로 전락된 유엔의 죄많은 력사를 어떻게 끝장내고 국제적정의와 공정성을 어떻게 바로잡아나가는가를 똑똑히 보게 될것이다.

    2016년 3월 4일
    평양

<출처-조선중앙통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용감한 바보

싸움만 하면 이기니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하다
 
강기석 | 2016-03-04 12:33: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래 한국인들의 기피 1호 식품인 일본산 수산물이 지난해부터 수입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보도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인간의 적응력이다. 좋은 의미에서 적응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처음에는 저항하다가도 얼마 안 가 될 대로 되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 합리화라는 말이니, 인지부조화 이론이란 것들이 그래서 생기는 모양입니다. 일본산 수산물 뿐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그렇게 압도적 힘에 굴복하거나 상황논리에 빠져 저항력을 잃어버리고,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그런 한심한 상황이 국내 정치에서도 온 것 아닌가 두렵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 국민이 그랬다.

 

 
지금 ‘헬조선’ 박근혜 여왕님의 폭주가 무섭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일방적인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 밀어붙이기 등등… 국회를 무시하고 거리에 나가 국민들을 선동하지 않나, 범 무서운지 모르고 사드를 들고 중국에 대해서까지 종주먹을 들이대고 있다.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청년실업률은 하늘로 치솟는데 박 정권은 “법 통과 안 시켜주는 야당 때문”이라고 야당 탓을 하며 정치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싸움만 하면 이기니 재미를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하다.

 

막강한 국정원과 검찰이 칼을 휘두르고, 기꺼이 종노릇하는 여당 국회의원들, 입속에 혀처럼 노는 언론, 시녀 사법부를 거느리고 있으니 정치게임에서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겠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슬로건이다. 아무리 정치게임을 잘 해도, 아무리 책임 전가를 잘 해도 경제가 나쁘면 민심은 결국 집권세력을 탓하게 마련이다.

더민주당이 4월 총선전략으로 ‘경제실정 심판’을 제시하고 나선 가운데, 조중동이 어제 일제히 사설을 통해 박근혜 정권의 경제무능을 정면 비판하고 나선 것이 눈길을 끈다. 경제는 나날이 심각한 위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데 낙관론과 대증요법, 남탓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질타하고 있다. 보수지들이 재계 등 보수진영의 불만을 대변했다는 분석이다.

 

 

역사는 설사 지배를 당하는 세력이 저항을 포기해도, 지배세력 내부의 배신과 의혹으로 폭압정권이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보여주고 있다. 새누리당 벽에 붙였다가 뗐다는 ‘한 방에 훅 간다’는 슬로건이 마음에 쏙 든다. 아니면 나라가 망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3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의 사법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6/03/05 10:24
  • 수정일
    2016/03/05 10: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국의 사법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
 
 
 
정설교 화백
기사입력: 2016/03/05 [00:09]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한국의 법은 아직도 권위주의, 관료주의에 식민통치 수단이던 일본식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며 다수의 진보적 학자들의 견해다. 일제의 주도로 심어진 일본만의 이익을 위한 근대 사법제도가  36년간 뿌리내렸고 이어진 미군정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판사들을 대거 등용하여 친일판사들은 한국인의 이익은 뒷전이고 미국의 이익에만 치중했다고 비평했다. 이에 한국의 법관들이 미국의 이익에  얼마나 열심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한국에서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언급하는 자는 사법부 관리로서 자격이 없다. 미국에 반대하는 자<반미>나 좌파 <종북>에  해당하는 자는  그들의 범법행위를 증명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엄중히 처벌해야한다."< 1946년 6월 9일 대법원장 김용무> 이를 보도한 1946년  7년16일 Seoul times

 

"한국은 악법들이 온존하는 나라다.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 공무원의 단체활동과 정치활동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노동조합과 제3자 개입금지조항 등이 헌법에 어긋나며 이러한 악법을 합헌이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와 국적불명의 학설들을  동원하여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학자들과  이들 악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헌법은 우리들의 상식이며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출처- 박홍규 교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국텔' 열풍, 완전히 새로운 뉴스 소비자들의 출현

 

[기자수첩] 콘텐츠 담는 그릇도 콘텐츠… ‘날 것 그대로’에 열광하는 독자들, 뉴스가 재밌으면 안 되나

 

 
조윤호 기자 ssain@mediatoday.co.kr  2016년 03월 05일 토요일

 

야당의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중단을 전하는 미디어오늘의 기사 제목은 ‘보수 언론과 시민들이 벌인 9일간의 투쟁’이었다. 보수언론은 필리버스터의 의미를 왜곡하고 축소했지만 시민들은 국회를 찾았고 오랜 만에 정치인들에게 열광했다.

시민들은 필리버스터를 일종의 콘텐츠로 소비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미디어를 이용했다. 따라서 9일 간 190여 시간의 필리버스터는 새로운 미디어 소비행태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성 미디어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필리버스터 현상은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종사자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 시민들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는 콘텐츠에 높은 주목도를 보였다. 그간 시민들이 접하는 정치인의 말이나 언행은 언론에 의해 편집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언론은 자신의 기사에 맞춰 정치인들의 말을 가공하고, 정치인의 행보를 편집한다. 물론 이를 잘 아는 정치인들도 언론을 활용한다.

 

▲ 지난 3월 1일 필리버스터 방청을 위해 국회를 찾은 시민들. 사진=이치열 기자


언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갈등과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친박과 비박의 갈등, 친노와 비노의 갈등. 언론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혐오를 조장한다. 시민들은 언론의 정치 기사를 “저놈들 다 잘라버려야 돼” “맨날 싸우기만 하는 놈들” 등 ‘씹을거리’로 소비한다.

시민들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보며 “생각보다 괜찮은 정치인들이 많다” “정치인들이 저렇게 똑똑한 줄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편집되지 않은 정치인의 말을 접했기 때문이다. 국회방송은 190시간 동안 정치인들의 말을 편집 없이 보여줬고, 언론에 보도된 정치가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정치를 보면서 새삼 정치인이 싸우기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란 걸 학습한 셈이다. 

미디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틀에 따라 무엇을 반영할지, 반영하지 않을지 결정한다. 그리고 미디어의 권력은 이 결정권에서 나온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생중계를 보며 정치혐오를 씻어낸 시민들에게 미디어의 권력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조선일보는 2월 25일자 사설에서 “야당은 아무리 걱정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국민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정치 염증을 키우는 필리버스터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며 “아무리 합법의 테두리 내에 있더라도 마치 선거운동하듯 필리버스터를 악용하면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을 키울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간 미디어의 권력을 이용해 정치혐오를 부추겨온 이들은 기성 미디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일보의 이 주장은 그 권력을 누리지 못할까 우려하는 불편함으로 들린다.

 

▲ 2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둘째, 콘텐츠를 담는 그릇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필리버스터가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은 그 형식 덕분이다. 시민들은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하는 국회방송을 두고 MBC ‘마이리틀텔레비전’(마리틀)을 빗댄 ‘마이국회텔레비전’(마국텔)이라고 불렀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마국텔의 형식은 마리텔과 매우 유사했다.

시민들은 ‘마국텔’을 보며 실시간으로 SNS에 댓글을 남기거나 시청 소감을 남겼다. 강기정 의원이 울부짖듯 연설을 할 때는 같이 울먹이기도 하고, 정청래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 성대모사를 할 때면 ‘ㅋㅋㅋㅋㅋㅋ’를 남발했다. 마리텔과 매우 유사하다. 마리텔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김구라, 백종원 같은 유명인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실시간 방송을 통해 보여주면, 누리꾼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단다. 그러면 방송 진행자들은 다시 그 댓글을 방송에서 읽어준다.

마리텔이 치용한 아프리카TV 등 1인 방송의 가장 큰 특징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또 다른 콘텐츠가 된다는 점이다. ‘마국텔’도 마찬가지였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하는 의원들은 자신의 SNS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구했다. 김경협 의원은 ‘테러빙자법’ ‘국민스토킹법’ ‘국민감시악법’ 시민들이 댓글로 남긴, 테러방지법 네이밍 60개를 소개했다.

 

▲ 강기정 의원의 필리버스터 생중계 장면을 MBC 마이리틀텔레비전 형식에 합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 http://nightworld.tistory.com/128


이미 젊은 층은 아프리카 TV처럼 직접 방송을 보고 댓글을 남기고, 이 댓글이 또 다른 방송 콘텐츠가 되는 방식의 미디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익숙함이 정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마저 즐거운 콘텐츠로 만든 셈이다.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과 의원들이 언급한 단어, 심지어 의원들을 방해한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김학용’ 의원 자리에 앉아서 항의하는 장면이 잡히자 김학용 의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정청래 의원이 필리버스터 도중 고성을 지르는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다음 총선 때 도움 받으시려면 이름을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한 이유다. 마리텔에서도 방송에 따라 실시간 검색어가 변동하고, 진행자들과 시청자들이 이를 함께 즐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신경민 의원은 “필리버스터는 새누리당 공약“이라며 새누리당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이 말에 누리꾼들이 몰려가면서 새누리당 홈페이지는 다운 됐다. 마리텔에 출연한 가수 데프콘이 ‘뽐뿌’ ‘엠팍’ 등 특정 사이트 이름을 거론하고 누리꾼들이 특정 사이트에 몰려가는 식으로 맞장구쳐주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마리텔을 제작하는 박진경 MBC PD는 26일 자신의 트위터에 “엄청난 강자가 나타나버렸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그만큼 마국텔이 마리텔과 유사했다는 뜻이다. 더불어민주당 공식계정은 이에 ‘좀 쎄지요?’라는 맨션을 보냈다.

셋째,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도 콘텐츠가 된다. 필리버스터를 소비한 시민들은 의원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했다. 누리꾼들은 맨 처음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최연소 김광진 의원은 ‘민주당 학생회장’이라는 별칭을, 신경민 의원에게는 ‘죄 읽어주는 남자’라는 별칭을 붙였다. 

강기정 의원은 “진작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폭력 의원이 안 됐을 것”이라며 눈물을 보였다가 ‘강 목사의 신앙 간증’이라는 별칭을 안게 됐다. 누리꾼들은 차분차분 연설하는 김경협 의원이 심야 라디오 DJ를 닮았다며 ‘법이 빛나는 밤에’라는 이름을 붙였고, 김 의원의 연설에 끼어든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은 ‘법밤의 깜짝 손님’이라고 불렀다. 누리꾼들은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팬아트를 그리고 의원들을 ‘모에화’했다. 캐릭터를 바탕으로 2차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 필리버스터 직후 더민주 김광진·은수미·신경민, 정의당 박원석 등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팬아트(fan art, 좋아하는 대상을 소재로 한 그림)가 만들어지는 등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컸다. (사진 = 닝구)

누리꾼들은 이미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로 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방식을 가장 즐겨 쓰는 매체가 피키캐스트다. 피키캐스트에는 ‘아이언형’ ‘괜찮은언니’ ‘평타공주’ 등 콘텐츠를 올리는 에디터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한다. 피키캐스트는 ‘에디터의 파우치를 털어보자’ ‘에디터들은 설날에 뭐할까’ ‘에디터의 제주도 여행’ 등등 에디터를 소재로 한 콘텐츠를 만든다. 피키의 독자들은 이런 콘텐츠를 통해 에디터를 ‘덕질’한다.

필리버스터는 그 열광만큼 실망도 컸다. 의원들이 계속하겠다는 필리버스터를 ‘선거에 이겨야한다’고 지도부가 뒤집었다. 정치혐오를 씻겨준 필리버스터의 결말은 구태정치의 전형이었다.

잔치는 허망하게 끝났다. 하지만 필리버스터가 미디어에 대한 질문과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치라는 무거운 콘텐츠도 젊은 층에게 익숙한 미디어의 소비행태와 잘 만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필리버스터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늘 가도 또 가고 싶은 절, 합천 해인사의 '옥에 티'

 

장경판전 전면 통제,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

16.03.04 21:15l최종 업데이트 16.03.04 21:15l

 

기사 관련 사진
▲ 팔만대장경과 고려각판 견본 견본이 장경판전에서 학사대 가는 길목에 걸려 있다. 바로 옆에는 장경판전 내부와 팔만대장경 사진을 붙인 간이 벽이 세워져있는데, 이것을 배경으로나마 사진을 찍으라는 절의 '배려'인 셈이다. '인증샷'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흉물스러울 뿐이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장경판전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지난 해 12월 말 광주-대구 간 고속도로가 확장 개통하면서 광주에서도 해인사 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톨 게이트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길도 4차선으로 확장되어, 중간에 휴게소에 들르는 시간을 감안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변변한 중앙분리대조차 없어 '죽음의 도로'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왕복 2차선의 88 올림픽 고속도로 시절에 견준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해인사는 1년에 적어도 두세 번은 찾게 되는 고향집과 같은 곳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 때문만은 아니다. 꼬불꼬불 절에 오르는 길, 길동무 같은 홍류동 계곡의 풍광이 아름다워서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1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나무들과 대화하며 걷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다. 여느 절이 지니지 못한 해인사의 '복'이라 생각한다. 

해인사는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흔히 '삼보사찰'로 불린다. 부처의 말씀, 곧 불법을 목판에 새겨놓은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어 '법보사찰'로 명명됐다. 주변에 수십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릴 만큼 사찰의 규모 또한 크고, 경내에 국보와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도 즐비해 사시사철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인사만큼 숨은 볼거리가 지천인 절이 또 있을까 
 

기사 관련 사진
▲ 해인사 경내에 오르는 길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오르는 길,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이 반갑게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지난 25일 해인사로 봄 마중을 나섰다. 대개 탐방객들은 주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팔만대장경을 향해 내달리지만, 해인사만큼 숨은 볼거리가 지천인 절이 또 있을까 싶다. 그나마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절의 맨 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서망정이지, 만약 입구에라도 있었다면 절 안마당으로 들어와 보지도 않았을 성 싶다. 서둘지 않고 안내판만 찬찬히 읽어봐도 해인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절에 오르는 길,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 스님의 승탑(부도)을 놓치긴 아깝다. 그의 가르침을 현대적 조형미로 형상화 한 승탑 앞에서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언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성철 스님의 사리를 모셔놓은 이 승탑은 지난 1999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환경문화상을 수상한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해인사 관광 안내판과 나란히 자리한 곳에 생뚱맞은 삼층탑 한 기가 눈에 띈다. 이름조차 생소한 묘길상탑으로, 딱히 예술적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작품인데도 보물 제1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폐허가 된 절터 등에서 옮겨온 게 아니라면 마땅히 법당 앞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텐데, 절에서 쫓겨난 듯 일주문 바깥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다지 볼품이 없어 탐방객들에게 별 관심을 끌진 못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문화재는 아니다. 호족세력이 할거하고 농민봉기가 들불처럼 번지던 신라 말, 왕실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다 전사한 수십 명의 해인사 승려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위령탑이다. 더 이상의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 없지만, 당시 절이 무능하고 부패한 왕실과 결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욱 재미있는 건, 이러한 내력을 담은 탑지를 작성한 이가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이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라 조정에 환멸을 느꼈을 그가 임금에게 보인 마지막 충정이었을까. 묘길상탑이 감추고 있는 역사의 비밀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장경판전에서 멀지 않는 절 뒤편에는 천 년 수령의 아름드리 전나무 한 그루를 이고 있는 학사대라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최치원이 시와 서를 즐기며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는데, 일설에는 고무신 한 켤레를 벗어두고 홀연히 산속으로 사라진 터라고도 한다. 그 전나무도 당시 최치원이 거꾸로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 무성해진 것이라고 전한다.

그뿐 아니다. 장경판전 내 법보전에 모셔진 목조 비로자나불좌상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으로, 883년이라는 제작년도가 밝혀져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인사의 창건 때부터 줄곧 함께해온 불상인 셈인데, 아무리 금을 입혔다고는 하나 천 년을 견뎌낸 나무라니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나무의 나이로만 본다면 이 불상이 팔만대장경보다 한참 선배다.

일주문 못 미친 곳에 세워져 있는 '원표'도 스쳐지나가기 아까운 유물이다. 해인사에서 동서남북 방향의 주변 고을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사각 돌기둥으로, 절에 세워진 것으로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대구부, 김천군, 진주군 등의 낯선 지역명으로 미루어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당시에도 해인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실 해인사는 대학시절부터 단골 답사코스였다. 죽으나 사나 팔만대장경만 팔며 호객하거나 규모가 크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그런 절이 아니었다. 근래 들어 군데군데 무늬만 기와집인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경내가 조금 어수선하고 답답해진 느낌이 있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담긴 해인사는, 고백하건대, 늘 가도 또 가고 싶은 몇 안 되는 절이다.

오죽하면 딸 이름을 낳기 전부터 해인이라고 지었을까. 출생신고를 하는데 주민 센터 직원이 사람 이름에 도장 인(印)자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본다며 한자가 맞는지 재차 묻곤 했다. 명색이 가톨릭 신자가 딸의 이름을 절에서 따왔다고 하니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에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강물을 다 받아주는 바다처럼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거라며, 내 방식대로 해석해 설명해주었다.

'오직 현금 결제만 가능' 못내 아쉬운 점  
 

기사 관련 사진
▲ 장경판전 내부에 설치된 철망 틈으로 손을 뻗어 대장경판을 꺼내보려는 일부 탐방객들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창틀 왼쪽 윗부분에는 'OO 왔다감'이라는 못자국이 나 있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못내 아쉬운 점도 있다. 하나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오래 전 관행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은 전에 없던 관행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매번 매표소를 지날 때마다 불만을 토로했고, 돌아와서는 직접 전화를 걸어 요구해온 것인데도 여전히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답변이다. 매표소에 카드 단말기 한 대 설치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듯 나 몰라라 하는 것일까.

요즘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관광지는 거의 없다. 몇 백 원짜리 입장권조차 기꺼이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에, 현금 아니면 안 된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배짱이 놀랍기만 하다. 하물며 해인사의 경우, 어른의 경우 입장권이 3천 원(박물관 입장료는 별도)인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주차료는 4천 원이니, 한 가족이 간다면 2만 원 가까운 돈을 현금으로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어쩔 수 없이 현금을 건네면서 물어봤다. 대형버스를 타고 온 단체관광객들도 예외가 없는지. 수표를 건네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어떻든 카드로는 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입장권에는 금액과 해인사 주지 명의의 날인이 찍혀 있고, 뒷면에는 문화재 보수 및 유지, 관리에 쓰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입장권 수익을 절과 정부가 일정 비율로 나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더욱 카드 결제가 투명하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굳이 차 몰고 절 코앞까지 가는 탐방객들
 

기사 관련 사진
▲ 장경판전의 출입 통제선 해인사 탐방의 백미인 장경판전 안마당 출입이 전면 통제됐다. 간이 울타리를 따라 서너 명의 어르신 봉사자들이 철저히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수준이 낮아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이런 볼썽사나운 관행도 있다. 절 아래에 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굳이 차를 몰고 절 코앞까지 가는 탐방객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대동한 경우를 제외하곤 차량의 접근을 막는 건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당연한 조처다. 그런데, 예외가 너무나 많은 듯하다. 언뜻 걷는 탐방객보다 오가는 차량의 수가 더 많아 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대형 버스들이 수시로 오르내리기도 한다. 입구에서 물어보니 다른 지역의 불교 신자들을 태운 사찰 순례 차량이란다. 물론 그들 중에도 연로한 어르신들이 없진 않겠지만, 절을 아끼고 사랑하는 불자들이라면 마땅히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탐방객들에게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걸어오라고 통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불자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리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모름지기 '해인삼매'를 구현하겠다는 절답지 않은 관행도 생겨날 판이다. 탐방객들의 장경판전 접근을 아예 차단한 것이다. 곧, 장경판전 내 팔만대장경과 고려 각판(국보 제206호)은 별도로 마련된 외부 게시판의 견본품을 통해 만날 수밖에 없다. 일부 탐방객들의 몰상식한 행동에 맞서 세계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적이 민망한 일이지만, 장경판전 기둥에 뾰족한 물건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흔적도 있고, 창틈으로 손을 끼워 넣어 대장경판을 꺼내보려는 걸 막기 위해 철창을 덧댄 모습도 있다. 한 해설사는 탐방객들의 저급한 수준을 나무라며 전면 통제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했다. 어쨌든 곳곳에 설치한 CCTV도, 상시 근무 중인 해설사와 자원봉사자들도 별무소용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입구와 출구를 따로 정해 동선을 일원화하고, 동시에 관람하는 탐방객 수를 입구에서 조정하는 것이다. 또, 순서를 기다리는 탐방객들에게 잠깐이나마 훼손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협조를 당부하는 교육을 행하는 것도 효과적이라 본다. 물론, 여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처럼 건물과 직접 접촉하지 못하도록 통제 라인을 세우는 것은 기본이다. 

'ㅁ'자형 장경판전으로 에워싸인 마당 가운데에 서서 느끼는 아늑함과 편안함은 먼발치에서 장경판전과 그 틈으로 팔만대장경을 바라보는 감동에 비할 바 아니다. 해인사가 수많은 화재와 난리를 겪었음에도 이곳 장경판전이 무탈했던 이유를 굳이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 이상 만끽할 수 없게 된 건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무작정 막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반도는 애초 둘로 나뉜 땅이었다

한반도는 애초 둘로 나뉜 땅이었다

조홍섭 2016. 03. 04
조회수 67 추천수 0
 

고생물학자의 옛 땅이야기 ‘생생’

남·북 중국 두 땅덩어리 충돌하면서 한반도 탄생

금강휴게소엔 ‘눈덩이 지구’ 흔적, 태백 이웃은 호주

 

ch6.jpg

 

 

 

 

 

 

 

 

 

 

 

 

 

 

 

10억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지질학자, 기록이 없는 시대의 한반도를 찾다   
최덕근 지음/휴머니스트·1만4000원
  

 

10억년 전은 기껏 100년을 사는 인간에게 어림하기도 힘든 먼 과거다. 길이로 바꿔 1년을 1㎜라고 한다면 10억년은 1000㎞, 한반도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거리다.

 

그 까마득한 기간 동안 한반도가 어떻게 형성돼 현재의 꼴을 이뤘는지를 상상이나 짐작이 아닌 관찰과 추론을 토대로 연구하는 이들이 바로 지질학자다. 이들은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는 자연사의 비밀을 암석을 ‘읽어’ 알아낸다. 

 

ch3.jpg» 퇴적층에서 지질조사를 하고 있는 지질학 연구자들. 오른쪽 끝이 지은이인 최덕근 교수.  

 

우리나라의 대표적 삼엽충 연구자인 최덕근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명예교수는 평생 화석과 퇴적암을 들여다 보며 시간여행을 했다. 이 책은 고생물학자가 대중을 위해 쓴 최초의 ‘한반도 시간 여행기’인 셈이다.
 

북한 당국이 들으면 ‘분단 고착화를 획책한다’며 펄쩍 뛰겠지만, 한반도는 애초 둘로 나뉜 땅이었다. 10억년 전 지구의 모든 땅덩어리는 하나로 모여 초대륙 로디니아를 형성했다.

 

초대륙은 이후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는데 한반도는 두 개의 땅덩어리에 나뉘어 자리 잡았다. 3억년 전 새로운 초대륙 판게아가 생겼지만 서로 떨어진 상태였다. 결국, 백악기 초 판게아가 분열해 떠돌던 두 땅덩어리는 대충돌을 일으켜 오늘날 보는 한반도의 꼴을 이루게 된다.
 

단순화해 말한다면, 황해도 이북의 북한과 영남지방은 중국 북부를 포함한 땅덩어리의 일부였는데 중국 남부를 실은 땅덩어리와 충돌하면서 그 일부가 북한과 영남 사이에 끼어 현재의 경기·충청·호남을 이뤘다는 것이다. 
 

ch4.jpg» 최덕근 교수가 제안한 한반도 지체구조도. 한반도를 3개의 지괴로 나누고 옥천대로 알려진 지역을 태백산분지와 충청분지로 나누었으며, 임진강대를 황해도 전역을 포함하도록 넓혔다는 점이 특징이다.

 

최 교수는 10억년 전부터 3억년 전 사이 한반도를 포함한 땅덩어리가 겪은 수많은 사건을 5억년 전 한반도에 서식하던 삼엽충 연구자의 시각에서 되짚었다. 최 교수는 2014년 <한반도 형성사>(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이런 이론을 정립한 바 있다. 그는 “한반도의 기원에 관해 일반인도 널리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번 책을 집필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모를 흥미로운 얘기도 적지않다. 금강휴게소 국도변에 드러난 절벽에서는 눈덩이 지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7억년 전 적도까지 두꺼운 얼음에 덮여 지구가 사실상 눈덩이처럼 바뀌었을 때 쌓인 빙하 퇴적층이 곧 이은 온난화 시기에 쌓인 석회암층과 함께 드러나 있다. 당시의 지층은 충주호에서 옥천까지 이어져 나타난다.

 

ch1.jpg» 지구가 눈덩이처럼 거대한 빙하에 덮였을 때 쌓인 빙하퇴적물. 가는 모래와 점토로 이뤄진 바탕에 다양한 크기의 자갈이 박혀있다. 충주호와 옥천을 잇는 구간에서 볼 수 있다.
 

5억년 전 태백은 지금의 서해처럼 얕은 바다였으며 오스트레일리아뿐 아니라 히말라야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삼엽충이 살았다. 지금은 태백이 영월보다 50㎞ 동해에 가깝지만, 당시엔 영월은 깊은 바다 태백은 얕은 바다였다. 출토되는 화석의 종류에서 그런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가 중국을 남·북으로 자른 땅덩어리가 충돌하면서 형성됐다는 가설은 지질학계가 받아들이지만 ‘어떻게’를 놓고는 논쟁이 뜨겁다. 최 교수는 이른바 ‘만입쐐기모델’를 제시했다.

 

ch5.jpg» 최덕근 교수가 제안한 동아시아 지체구조도. 한반도의 북부비괴와 남부지괴는 중한랜드에 속했고 중부지괴는 남중랜드의 가장자리에 위치했는데 두 땅덩어리가 충돌하면서 중부지괴가 북부와 남부지과 사이로 끼어들었다.

 

남중국을 포함한 땅덩어리(남중랜드)가 북중국 땅덩어리(중한랜드) 아래로 파고들면서 남중랜드 가장자리에 있던 퇴적물이 중한랜드에 달라붙어 임진강대와 경기육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전혀 다른 시기에 형성된 태백산 분지와 충청 분지가 합쳐져 남한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옥천대를 형성한 것이 한반도의 모태가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옥천대 형성의 비밀을 밝히고 그 내용을 대중에 알리는 일을 이번 저작의 후속작업으로 하겠다”라고 밝혔다.
 

이 책은 과학자가 꿈이었던 한 소년이 지질학자로 터잡는 과정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성적이 모자라 원하던 화학과 대신 지질학과로 진학하고, 중생대 꽃가루를 전공하다 삼엽충을 연구하게 된 우연과 행운의 역정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1억년 전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기다리다 엉겁결에 5억년 전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5억년 전 세계에 불시착한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라고 그는 적었다.
 

북한산 등산로를 속속들이 꿰는 사람은 흔해도 그 산의 화강암체가 언제 어떻게 형성돼 지금에 이르렀는지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반도는 땅은 좁아도 25억년에 걸친 암석이 고루 분포하는 복잡한 지질구조를 지녔다.

 

땅덩어리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시간 여행을 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목적지가 있을까.


글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사진 휴머니스트 제공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표창원 "밑바닥 '박근혜 반대 정서' 강하다"

 
[정치통] "내 꿈은 검찰 개혁, 경찰 수사권 독립 추진"
 
| 2016.03.03 16:46:48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영입 1호 인사로 들여온 표창원 비상대책위원 겸 선거대책위원은 더민주 최고의 스타 중 하나다. 그의 영입은 정치권에 인재영입 바람을 불러 일으켰고, 현재까지 굵직한 당직을 맡으며 더민주의 '입'으로 종횡무진하고 있다. 경찰대 교수 출신인 그는 경찰대가 있는 경기도 용인정 지역에 출사표를 사실상 던진 상태다. 
 
표 비대위원은 경찰대학교 출신으로 영국 엑시터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파일러로 이름을 날렸고, 경찰대 교수를 지냈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 산하 자치경찰 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직후에는 국가인권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를 만들 때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표 비대위원은 지난 2일 <프레시안>과 팟캐스트 <시사통 김종배입니다>가 공동 기획한 '정치통(通)' 인터뷰에서 더민주의 총선 전략과 관련한 폭 넓은 이야기를 했다. 
 
표 비대위원은 "제 꿈은 경찰 개혁, 검찰 개혁이다. 욕심이 좀 크다. 그러려면 정권 교체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표 비대위원은 특히 "경찰을 분권화시키고 민주적 감시를 강화시킨다면, 경찰은 투명한 조직이라 수사권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을 시민들이 많이 갖고 있다"며 "가장 문제의 핵심은 검찰(개혁)이라는 데 국민 총의가 모아져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찰 출신 국회의원은 사실 많지 않다. 경찰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주장이다. 표 비대위원은 "만약 당선이 된다면 한번 하고 물러설 생각이 없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고 족적을 남기고 그만두겠다"고 강조했다. (☞정치통 표창원 인터뷰 바로가기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이번 총선은 히딩크에 한번 맡겨보자" 
 
표 비대위원은 '중간층', '정치 무관심층'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햇볕정책 업그레이드론' 발언 등은 전략적 행보의 일환이라는 설명도 내 놓았다. 표 비대위원은 이제 "히딩크에 맡겨달라"고 했다. 계파, 학맥 등으로 얼룩져 있던 한국 축구계에 뛰어들어 '개혁 선발'을 통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김 대표를 대입한 것이다.  
 
표 비대위원은 "이미 과거에 선명한, 하나로 된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의 모습으로 (선거를) 해 봤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패배를 했다. 현재 2016년의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선택은 다채롭고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정당 모습이다"라며 "일단 이번 경기는 히딩크(김종인)에 맡겨달라"고 말했다.  
 
"'햇볕정책 업그레이드론' 등 정체성에 대해 의문부호를 찍는 문제의 발언들이 김종인 대표에게서 나온다"는 지적에 대해 표 비대위원은 "대단히 전략적인 행보라고 보고 있다. 일단 정면대응이다. 호남에서의 이야기지만 전국을 향한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표 비대위원은 이어 "호남이 더민주의 고향이고 원천이고, (더민주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고 있다는 말도 전달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대와 다르다. 그 때 만들어진 것을 금과옥조처럼 철칙으로,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바꾸지 않겠다는 태도에는 반대한다. 이런 발언을 호남에서 한다는 것은 '정면돌파'를 하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표 비대위원은 "호남의 반응이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냐'고 하는데 그런 반응도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봐 달라"며 "그 모습을 보면서 전국에 있는 다른 유권자와 국민들은 더민주가 과거로 돌아가는 '도로 민주당'은 아니구나, 외연을 확대하고 넓히고 수권정당으로서의 책임있는 자세를 가져가려고 하는구나, 하는 모습이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 ⓒ프레시안(최형락)

표 비대위원은 "호남에서도 언제까지나 과거의 변화가 되지 않은 모습만으로 호남 민심을 얻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호남 민심은 호남만의 정당, 호남만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 호남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전국적인 정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졸속 협상과 관련해 김 비대위원이 "한일 위안부 협상을 고칠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고 발언한 데 대해, 표 비대위원은 "역시 현실론이다. 김종인 대표의 언행들을 보면, 대단히 차갑다는 느낌이 들고 전략적이다.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이라는 게 읽혀진다"고 평가했다. 
 
표 비대위원은 "위안부 협상에서도 정치적 코멘트라고 하면 '최대한 바꾸도록 하겠다'는 게 모범답안이지만, 김 대표는 그렇게 안하더라.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표 비대위원은 "당이라는 게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할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각자 다른 입장을 낼 수도 있고, 특히 더민주는 문재인 전 대표가 가진 철학과 이념과 행보, 현재 비대위 대표인 김종인 대표가 보여주는 행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다른 가운데 합쳐서 하나가 돼 있다. 그것이 나라 전체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수 있는 수권정당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도 외연 확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노린 전략적 발언인가"라는 질문에 표 비대위원은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내부에서의 반발과 분열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구분되는 지점이 무엇인가"라는 취지의 질문에 표 비대위원은 "새누리당은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다. 국민의 인권을 지켜내는 정당이 아니다. 대북 정책, 국제 관계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라며 "어떤 위험도 불사하겠다, 전쟁도 하겠다, 이것은 도저히 저희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스탠스다. 새누리와 더민주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고 말했다.  
 
표 비대위원은 "여론조사로 잡히지 않는 밑바닥의 반 박근혜 정서가 강하다는 데 대해 기대를 하고 있다. 체감도 하고 있다. 현장 목소리 등을 본다면 꼭 더민주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지금 박근혜 정부는 안 된다. 바뀌어야 한다는 정서는 읽힌다"고 주장했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 ⓒ프레시안(최형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정희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 마음 없앨 수 없다”

최규화 북DB 칼럼니스트 somecrud@interpark.com  2016년 03월 03일 목요일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이정희의 말, 말, 말

-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 "(민중연합당을)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프리즘②]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

- 이정희는 누구? : 
혹시 그 이정희? 맞다. 그 이정희다. 2012년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서 집권여당 후보에게 “당신 떨어뜨리려 나왔다”라고 말하던 사람.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표. 정당 해산 이후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아까운 진보 정치인’과 ‘시대착오적 운동권 정치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좀 천천히 삽니다"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 어떤 책을 냈나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진보를 복기하다>다. 통합진보당의 핵심 과제로 추진됐지만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것, 또는 주목받게 되어 비난을 불러온 것”들 가운데, "진보의 대안을 담고 심어진 새싹"들을 골라 담았다. 참신하거나 근본적이거나 절박한 것들부터. 그렇다고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이 직시해야 할 잘못과 한계가 깊은 반성과 함께 담겨 있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한 줄 서평을 남겼다. “딱 이정희 같다."

- 지금 왜 이정희를 만났나: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던 2014년 겨울부터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되고 봄을 바라보기까지, 1년 2개월 동안 정치판과 언론에서 이정희는 사라졌다. 그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가 2월 20일 보도된 ‘주간경향’ 인터뷰다. 그리고 이번이 그녀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두 번째 인터뷰. 정치인 이정희를 ‘저자 이정희’로 만나, 그녀가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뼈아픈 패배를 곱씹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남긴, 이정희식의 사죄를 따라 읽기 위해서였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 
진보정책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녀는 정치평론가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서서 반성문을 읽는 느낌과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할 때도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씩 말을 멈추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예민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분명 그 점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긴 고민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는 분명한 사죄의 대상만큼이나 분명한 질타의 대상도 있었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2월 20일, 진보당 해산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머리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라는 대답을 읽었는데, 살아보려고 애쓰는 와중에 이 책을 쓰려고 한 이유는 뭔가요?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 혼자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소멸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이 정책들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내가 가지게 된 것들만큼은 그분들께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Q. 그 주인공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통상절차법에 대해 이 책에 썼는데요, 그 법은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경험하고 나서 만든 거였어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영감을 준 촛불소녀와 촛불시민 같은 주인공들이 있죠.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은 온전히 농민들이 만들어내신 거라 그분들이 주인공이고요. 기업살인처벌법은 산재로 고통 받은, 지금도 위험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이 만든 법인 거죠. 그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들께 "당신들의 목소리가 이런 법안을 만드는 데까지 갔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집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국회의원들이 임기를 마칠 때쯤 되면 지역구 주민들께 의정보고서를 돌리기도 하고 정책보고서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그런 일을 할 겨를조차 없이 그저 해산 결정에 따라서 강제된 스스로의 사망신고를 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작년 10월 중순에, 갑자기 잊혀가는 정책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오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웃음) 책에는 맺음말로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글을 먼저 썼고, 그 뒤로 두 달 반 정도 쓴 것 같아요.

Q. 책에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성도 많이 있습니다. 뼈아픈 기억을 되짚어야 했기 때문에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쓰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몇 분을 뵐 일이 있었어요. 당이 해산당하고 나서, (세월호 가족처럼) 고통을 겪고 계신 당사자 분들을 잘 못 뵙겠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그러다가 작년 11월쯤에 기회가 있어서 뵀어요. 뵙고 나서 한참 몸살을 앓았어요. 그분들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제가 너무 싫더라고요. ‘잘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건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 책을 내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괴감이 많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Q. 11장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각 장마다 있는 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이 구성은 직접 아이디어를 내신 건가요?

박홍규 화백님의 ’무제’라는 그림,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을 다룬 장에 실린 그림을 책에 꼭 넣고 싶었어요. 농민들이 앉거나 서 있는 뒷모습을 그렸는데, 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이 꽂힌 대상은 화폭에 등장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백님의 설명은 "농민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라는 말이었어요. 박 화백님도 농민이기 때문에 차마 그릴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태풍이 오고, 정부는 무관심하고, 그해 농사지은 것들을 다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농민의 한 해가 다 날아가는 상황을 그린 거예요.

그 그림을 책에 싣고 싶다고 화백님께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시면서, 당신이 그리신 그림 가운데 책과 맞는 것이 있으면 더 써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짧은 기간에 네 작품 정도를 새로 그려주셨어요. 굉장히 마음이 찡하고 참 감사하더라고요. 책 편집도 한 달 정도로 굉장히 빨리 한 것인데, 책을 받아보고 나서 출판사에서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주셨다는 게 느껴져서 참 고마웠어요.

Q. 각 장마다 다른 책에서 찾은 시구나 감성적인 글귀들이 인용돼 있습니다. 전부 직접 읽고 찾은 것인가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죠.

지금도 독서노트를 쓰는데요, 거기서 골라낸 글들이에요. (기자 : 얼마나 된 습관인가요?) 몇 년 안 됐어요. 삼사 년?(웃음) 평소에도 좋아하는 글귀는 1장 기업살인처벌법 부분에 실린 김해화 시인의 ’이렇게 나뉜 사랑-상사화’라는 시예요. 김해화 시인께서 철근 일을 지금도 하시는데, 당신이 일하시면서 느끼는 생생한 감성들이 날 것 그대로가 아닌, 한번 아픔을 겪으면서 걸러지고 다듬어진 것으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읽었어요. 시를 책을 싣도록 허락해주셔서 애독자로서 매우 영광이었어요.

 

 
"혁명을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 헌법 안의 진보만 생존 가능"

 

Q.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기업살인처벌법에 대한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온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일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너무 비극적이고, 한 순간도 연장돼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동자가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또 세월호 참사처럼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먼저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진보의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해요.

Q. 기업살인법 부분을 보면 ’정명(正名)’이라는 단어와 함께 "진보정당이 만들어내는 대안은,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진보세력이 시급하게 만들어내야 할 말, "말하지 못했던"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보도 혁명이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가 됐잖아요.(웃음) 인류의 역사는 혁명으로 진보해온 거죠.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헌법 안의 진보’만을 생존 가능한 것으로 만들잖아요. 세상을 정말 근본에서 바꾸고 싶다면 그 말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저항권이고, 저항권이야말로 헌법의 핵심이고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죠.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민주주의 자체를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Q. 책에서 "평화를 이상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는데, 지금 가장 필요한 평화정책을 법안의 형식으로 제안하자면요?

아마 ’한반도 평화협정 비준동의안’쯤 되겠죠. 제가 제안한 정책 가운데 ‘한반도 4자 평화선언’에 대해 책에 한 꼭지를 넣으려다가 넣지 못했어요. 한반도에서 분쟁상태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 정전(停戰) 상태가 아니라 평화 상태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종전(終戰)선언이 가장 시급하다고 제안드린 바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평화협정 이야기가 중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고 북-미 간에도 의논이 있었다고 하고,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Q. 그 이야기를 책에 쓰려다가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회의원 일을 하면서도 늘 고민스러웠는데요, 평화통일 문제를 다룰 때 국회의 논의만으로는 참 쉽지 않더라고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대외관계와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정당 입장에서도 정책을 제안할 수는 있는데 당장 국회에서 뭔가를 통과시키기가 어려워서, 이 책에 하나의 장으로 담지는 못했어요. 다만 국회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분단의 올가미에 사로잡혀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일만은 없게 하는 것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차별금지법과 대체복무법에 담겨 있는 거죠. 이 정도라도 국회가 해준다면 분단에 발목 잡히지 않는 진전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비슷한 맥락에서 군데군데 국가보안법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철폐가 답이라 생각하시기 때문인가요?

만약에 제가 ‘꼭 없애야 할 법 열한 가지’ 이런 책을 썼다면 국가보안법이 첫 번째로 들어가겠죠.(웃음)

Q. 통상절차법을 다룬 부분에서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꼭 만들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국회 들어오기 전에 제가 기지촌 여성 문제부터 주한미군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다뤘어요.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 인권 문제들을 보게 됐는데 그때 가진 의문이 있어요. ’우리 정부가 아무리 나하고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적어도 외국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안에서는 투닥투닥 서로 싸워도 밖에 나가면 우리 식구가 좀 번듯하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인 거죠.(웃음)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대외적 독립성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독립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국민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한미관계부터 우려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그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나가고 싶었어요. 특히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잖아요. 그 에너지가 성과를 남기기를 바랐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 게 진보, 결국 남는 건 사랑"

 

Q. 책의 마지막은 ‘사랑’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사랑하기에 진보다." 어찌 보면 좀 뻔하고 뜬구름 같은 사랑이란 말을 마지막에 한 이유는 뭔가요?

유행가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죠.(웃음)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얼굴들이 잘 안 잊히기 때문이었어요. 진보라는 것이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의 현실도 계속해서 바뀌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해법도 계속 바뀌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면, 결국 고갱이로 남는 건 사랑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니까 그걸 표현한 겁니다.

Q. 최근 민중정치연합(인터뷰 이후 민중연합당으로 정식 창당)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이 목격됩니다. 옛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이유로 “재건 통진당”이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 마음들이 어떤 순간에는 민주노동당으로, 또는 통합진보당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모일 수 있는 거죠. 보수언론들에서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사람의 말할 권리와 모일 권리가 보장돼야 민주주의 사회인 건데요,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덕분이라는 것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웃음)

Q. 과거 한 강연에서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추천하시는 걸 봤습니다. 당 해산 이후, 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당 해산 이후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봤어요. 네루다가 1945년에 칠레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광부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니죠. 그 장면을 쓴 대목이 있어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 한 대목을 읽음)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노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에서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제조업 공장 생산라인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순간이었어요. 여기저기 불꽃도 튀고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정신없어요. 비닐장갑도 끼고 목장갑도 두 겹씩 끼고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면 그 장갑을 하나하나씩 벗고 손을 잡아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짜릿해요.(웃음) 네루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나서 많이 와닿았어요. 누군가에게 ‘맞아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군가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마음을 주는 대상이 되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죠.

Q. 읽어주신 대목 중에서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라는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이 전 대표님 스스로가 ‘아픔을 생각해주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문득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요,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안 남아도 괜찮아요.(웃음) … 그게 욕심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Q. 마지막 질문은 대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질문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언제쯤이면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준비가 언제 끝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인터파크도서 북DB와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제공합니다. 북DB 기사 보기)

 

 
 

 

 

 

사진 : 신동석 · by 글/사진 최규화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이정희의 말, 말, 말

-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 "(민중연합당을)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프리즘②]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

- 이정희는 누구? : 
혹시 그 이정희? 맞다. 그 이정희다. 2012년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서 집권여당 후보에게 “당신 떨어뜨리려 나왔다”라고 말하던 사람.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표. 정당 해산 이후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아까운 진보 정치인’과 ‘시대착오적 운동권 정치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좀 천천히 삽니다"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 어떤 책을 냈나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진보를 복기하다>다. 통합진보당의 핵심 과제로 추진됐지만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것, 또는 주목받게 되어 비난을 불러온 것”들 가운데, "진보의 대안을 담고 심어진 새싹"들을 골라 담았다. 참신하거나 근본적이거나 절박한 것들부터. 그렇다고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이 직시해야 할 잘못과 한계가 깊은 반성과 함께 담겨 있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한 줄 서평을 남겼다. “딱 이정희 같다."

- 지금 왜 이정희를 만났나: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던 2014년 겨울부터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되고 봄을 바라보기까지, 1년 2개월 동안 정치판과 언론에서 이정희는 사라졌다. 그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가 2월 20일 보도된 ‘주간경향’ 인터뷰다. 그리고 이번이 그녀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두 번째 인터뷰. 정치인 이정희를 ‘저자 이정희’로 만나, 그녀가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뼈아픈 패배를 곱씹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남긴, 이정희식의 사죄를 따라 읽기 위해서였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 
진보정책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녀는 정치평론가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서서 반성문을 읽는 느낌과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할 때도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씩 말을 멈추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예민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분명 그 점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긴 고민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는 분명한 사죄의 대상만큼이나 분명한 질타의 대상도 있었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2월 20일, 진보당 해산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머리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라는 대답을 읽었는데, 살아보려고 애쓰는 와중에 이 책을 쓰려고 한 이유는 뭔가요?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 혼자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소멸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이 정책들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내가 가지게 된 것들만큼은 그분들께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Q. 그 주인공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통상절차법에 대해 이 책에 썼는데요, 그 법은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경험하고 나서 만든 거였어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영감을 준 촛불소녀와 촛불시민 같은 주인공들이 있죠.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은 온전히 농민들이 만들어내신 거라 그분들이 주인공이고요. 기업살인처벌법은 산재로 고통 받은, 지금도 위험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이 만든 법인 거죠. 그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들께 "당신들의 목소리가 이런 법안을 만드는 데까지 갔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집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국회의원들이 임기를 마칠 때쯤 되면 지역구 주민들께 의정보고서를 돌리기도 하고 정책보고서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그런 일을 할 겨를조차 없이 그저 해산 결정에 따라서 강제된 스스로의 사망신고를 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작년 10월 중순에, 갑자기 잊혀가는 정책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오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웃음) 책에는 맺음말로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글을 먼저 썼고, 그 뒤로 두 달 반 정도 쓴 것 같아요.

Q. 책에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성도 많이 있습니다. 뼈아픈 기억을 되짚어야 했기 때문에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쓰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몇 분을 뵐 일이 있었어요. 당이 해산당하고 나서, (세월호 가족처럼) 고통을 겪고 계신 당사자 분들을 잘 못 뵙겠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그러다가 작년 11월쯤에 기회가 있어서 뵀어요. 뵙고 나서 한참 몸살을 앓았어요. 그분들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제가 너무 싫더라고요. ‘잘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건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 책을 내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괴감이 많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Q. 11장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각 장마다 있는 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이 구성은 직접 아이디어를 내신 건가요?

박홍규 화백님의 ’무제’라는 그림,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을 다룬 장에 실린 그림을 책에 꼭 넣고 싶었어요. 농민들이 앉거나 서 있는 뒷모습을 그렸는데, 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이 꽂힌 대상은 화폭에 등장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백님의 설명은 "농민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라는 말이었어요. 박 화백님도 농민이기 때문에 차마 그릴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태풍이 오고, 정부는 무관심하고, 그해 농사지은 것들을 다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농민의 한 해가 다 날아가는 상황을 그린 거예요.

그 그림을 책에 싣고 싶다고 화백님께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시면서, 당신이 그리신 그림 가운데 책과 맞는 것이 있으면 더 써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짧은 기간에 네 작품 정도를 새로 그려주셨어요. 굉장히 마음이 찡하고 참 감사하더라고요. 책 편집도 한 달 정도로 굉장히 빨리 한 것인데, 책을 받아보고 나서 출판사에서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주셨다는 게 느껴져서 참 고마웠어요.

Q. 각 장마다 다른 책에서 찾은 시구나 감성적인 글귀들이 인용돼 있습니다. 전부 직접 읽고 찾은 것인가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죠.

지금도 독서노트를 쓰는데요, 거기서 골라낸 글들이에요. (기자 : 얼마나 된 습관인가요?) 몇 년 안 됐어요. 삼사 년?(웃음) 평소에도 좋아하는 글귀는 1장 기업살인처벌법 부분에 실린 김해화 시인의 ’이렇게 나뉜 사랑-상사화’라는 시예요. 김해화 시인께서 철근 일을 지금도 하시는데, 당신이 일하시면서 느끼는 생생한 감성들이 날 것 그대로가 아닌, 한번 아픔을 겪으면서 걸러지고 다듬어진 것으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읽었어요. 시를 책을 싣도록 허락해주셔서 애독자로서 매우 영광이었어요.

 

 
"혁명을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 헌법 안의 진보만 생존 가능"

 

Q.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기업살인처벌법에 대한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온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일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너무 비극적이고, 한 순간도 연장돼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동자가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또 세월호 참사처럼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먼저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진보의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해요.

Q. 기업살인법 부분을 보면 ’정명(正名)’이라는 단어와 함께 "진보정당이 만들어내는 대안은,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진보세력이 시급하게 만들어내야 할 말, "말하지 못했던"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보도 혁명이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가 됐잖아요.(웃음) 인류의 역사는 혁명으로 진보해온 거죠.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헌법 안의 진보’만을 생존 가능한 것으로 만들잖아요. 세상을 정말 근본에서 바꾸고 싶다면 그 말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저항권이고, 저항권이야말로 헌법의 핵심이고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죠.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민주주의 자체를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Q. 책에서 "평화를 이상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는데, 지금 가장 필요한 평화정책을 법안의 형식으로 제안하자면요?

아마 ’한반도 평화협정 비준동의안’쯤 되겠죠. 제가 제안한 정책 가운데 ‘한반도 4자 평화선언’에 대해 책에 한 꼭지를 넣으려다가 넣지 못했어요. 한반도에서 분쟁상태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 정전(停戰) 상태가 아니라 평화 상태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종전(終戰)선언이 가장 시급하다고 제안드린 바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평화협정 이야기가 중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고 북-미 간에도 의논이 있었다고 하고,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Q. 그 이야기를 책에 쓰려다가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회의원 일을 하면서도 늘 고민스러웠는데요, 평화통일 문제를 다룰 때 국회의 논의만으로는 참 쉽지 않더라고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대외관계와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정당 입장에서도 정책을 제안할 수는 있는데 당장 국회에서 뭔가를 통과시키기가 어려워서, 이 책에 하나의 장으로 담지는 못했어요. 다만 국회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분단의 올가미에 사로잡혀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일만은 없게 하는 것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차별금지법과 대체복무법에 담겨 있는 거죠. 이 정도라도 국회가 해준다면 분단에 발목 잡히지 않는 진전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비슷한 맥락에서 군데군데 국가보안법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철폐가 답이라 생각하시기 때문인가요?

만약에 제가 ‘꼭 없애야 할 법 열한 가지’ 이런 책을 썼다면 국가보안법이 첫 번째로 들어가겠죠.(웃음)

Q. 통상절차법을 다룬 부분에서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꼭 만들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국회 들어오기 전에 제가 기지촌 여성 문제부터 주한미군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다뤘어요.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 인권 문제들을 보게 됐는데 그때 가진 의문이 있어요. ’우리 정부가 아무리 나하고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적어도 외국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안에서는 투닥투닥 서로 싸워도 밖에 나가면 우리 식구가 좀 번듯하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인 거죠.(웃음)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대외적 독립성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독립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국민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한미관계부터 우려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그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나가고 싶었어요. 특히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잖아요. 그 에너지가 성과를 남기기를 바랐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 게 진보, 결국 남는 건 사랑"

 

Q. 책의 마지막은 ‘사랑’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사랑하기에 진보다." 어찌 보면 좀 뻔하고 뜬구름 같은 사랑이란 말을 마지막에 한 이유는 뭔가요?

유행가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죠.(웃음)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얼굴들이 잘 안 잊히기 때문이었어요. 진보라는 것이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의 현실도 계속해서 바뀌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해법도 계속 바뀌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면, 결국 고갱이로 남는 건 사랑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니까 그걸 표현한 겁니다.

Q. 최근 민중정치연합(인터뷰 이후 민중연합당으로 정식 창당)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이 목격됩니다. 옛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이유로 “재건 통진당”이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 마음들이 어떤 순간에는 민주노동당으로, 또는 통합진보당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모일 수 있는 거죠. 보수언론들에서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사람의 말할 권리와 모일 권리가 보장돼야 민주주의 사회인 건데요,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덕분이라는 것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웃음)

Q. 과거 한 강연에서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추천하시는 걸 봤습니다. 당 해산 이후, 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당 해산 이후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봤어요. 네루다가 1945년에 칠레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광부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니죠. 그 장면을 쓴 대목이 있어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 한 대목을 읽음)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노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에서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제조업 공장 생산라인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순간이었어요. 여기저기 불꽃도 튀고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정신없어요. 비닐장갑도 끼고 목장갑도 두 겹씩 끼고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면 그 장갑을 하나하나씩 벗고 손을 잡아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짜릿해요.(웃음) 네루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나서 많이 와닿았어요. 누군가에게 ‘맞아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군가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마음을 주는 대상이 되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죠.

Q. 읽어주신 대목 중에서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라는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이 전 대표님 스스로가 ‘아픔을 생각해주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문득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요,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안 남아도 괜찮아요.(웃음) … 그게 욕심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Q. 마지막 질문은 대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질문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언제쯤이면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준비가 언제 끝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인터파크도서 북DB와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제공합니다. 북DB 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2270호 채택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6/03/04 07:54
  • 수정일
    2016/03/04 07: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70년 유엔 역사상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한 제재"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6.03.03  00:35:53
페이스북 트위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3일 0시 17분(한국시간) '대북 제재 결의 2270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지 57일만이다. 

결의 2270호는 전문 12개항, 본문 52개항, 그리고 4개 부속서로 구성 돼 있다. △무기 거래, △제재대상 지정, △확산 네트워크, △해운.항공 운송, △대량살상무기(WMD) 수출통제, △대외교역, △금융거래, △제재 이행 분야에서 기존 결의 2094호 등에 들어있는 조치들이 대폭 강화됐다.

나아가 기존 결의에는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조치들도 다수 포함됐다. 

우선, 주권국가의 자위권 유지 차원에서 허용됐던 소형무기(small arms) 수입까지 금지했다. 전면적인 무기 금수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재래식 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물품 거래를 불허(catch-all 수출통제)하고, 군사훈련 교관 파견 등 군경협력도 불법화했으며, 무기 수리.거래를 위한 운송도 금지했다.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공업성, 노동당 군수공업부 등 단체 12곳과 현광일 국가우주개발국 과학개발부장, 리만건 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최춘식 제2자연과학원장 등 16명을 제재대상으로 추가 지정했다. 미.중의 초안에 들어있던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 러시아 대표는 러시아 측의 문제제기로 최종 명단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유엔 차원에서 제재대상으로 지정된 북한 단체는 32개, 개인은 28명으로 늘었다. 

제재 회피나 위반에 연루된 북한 외교관과 정부 대표 추방을 의무화했다. 북한의 불법행위에 연루된 외국인 추방도 의무화했다. 

북한을 들고나는 모든 화물에 대한 전수조사가 의무화됐다. '금지 품목이 포함됐다고 믿을 만한 이유'라는 요건을 없애 각 나라가 원하면 언제든 모든 북한 화물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금지품목을 적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북한 항공기의 이착륙 및 영공통과가 금지됐다. 북한이 제3국 항공기.선박을 대여해 제재 회피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제재 대상이 된 선박이나 불법활동 연루 의심 선박 입항을 금지했다. 특히, 이미 제재대상이 된 원양해운관리회사(OMM) 소속 선박 31척을 자산동결대상으로 명시했다.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모든 물품에 대한 수출통제(catch-all)를 의무화하고, 핵.탄도미사일 관련 교육.훈련 프로그램 제공이 금지되며, 탄도미사일 발사 관련 모든 기술 협력이 금지됐다. "북한의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가장한 탄도미사일 능력 증강을 방지하고, 유.무형의 모든 기술 이전을 차단(정부 당국자)"하자는 취지다.  

북한산 석탄, 철, 철광 수입을 금지했다. 북한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는 석탄 거래를 차단해 돈줄을 죄겠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 목적으로 WMD와 무관한 경우는 수출 예외를 적용했다. 금, 바나듐광, 티타늄광, 희토류 수출은 예외없이 전면 금지됐다.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북한 나진항을 통해 다른 나라로 운송되는 러시아산 석탄에 대해서는 예외가 인정됐다. 

로켓 연료를 포함한 항공유 수출이 금지됐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전투기는 물론 민항기 운항이 위축되어 북한의 대외 인적.물적 교류가 축소되고, 북한 공군 운용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북한 민항기에 대한 해외급유가 허용됐다.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가 대폭 강화됐다. 북한 은행의 해외 지점.사무소 신규 개설이 금지됐을 뿐 아니라, 기존 지점에 대해서도 90일 이내 폐쇄를 요구했다. 유엔 회원국 금융기관의 북한 내 사무소나 은행계좌 개설도 금지됐으며, 기존 사무소나 계좌도 인도지원 등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90일 이내에 폐쇄하도록 했다. 국제금융시스템에서 사실상 축출된 북한이 금괴 등을 이용해 제재를 우회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금수 대상 사치품도 기존 7개(진주, 보석, 보석용 원석, 귀금속, 요트, 고급자동차, 경주용차)에서 12개로 늘었다. 고급 손목시계, 수상 레크레이션 장비, 스노우모빌, 납 크리스탈, 레크레이션 스포츠 장비가 추가된 것이다. 

안보리 결의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북한 인권문제가 거론됐다. 전문에 "북한 주민이 처한 심각한 고난(grave hardship)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표현이 들어갔다. 

정부 당국자는 "금번 안보리 결의는 70년 유엔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 결의"라고 자평했다. "북한의 WMD 개발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WMD 차원을 넘어서 북한 관련 제반 측면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제재 조치들이 포괄적으로 망라돼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관계부처 회의를 통해 국내 이행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해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우방국들과 공조해 모든 유엔회원국들이 이번 결의를 철저히 이행해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행과정에서 열쇠를 쥔 나라는 여전히 중국이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일 "만일 결의가 통과된다면, 중국은 착실하게 결의를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8일부터 방한 중인 우다웨이(武大偉) 중국정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도 한국 측 당국자에게 '전면적인 이행'을 다짐한 것으로 알려졌다.

2일자 단둥발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은 1일부터 자국 내 금융기관에 북한 기업 및 개인에 대한 달러화 및 위안화 송금 중단 지시를 내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일 중국이 일부 항구에서 북한산 광물 수입 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2일(현지시간) 안보리 결의 2270호 채택에 맞춰 북한 국방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 등 단체 5곳과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오극렬, 리용무 국방위 부위원장,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등 개인 12명을 제재목록에 추가했다.  

(추가, 02:40)

<유엔 안보리 추가 제재 대상>

0 단체 (12곳)
 
국방과학원, 청천강해운, 대동신용은행, 혜성무역회사, 조선광선은행, 조선광성무역회사, 원자력공업성, 군수공업부(또는 기계공업부), 국가우주개발국, 39호실, 정찰총국, 제2경제위원회.

0 개인 (16명)

최춘식 (전) 제2자연과학원장, 최성일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 현광일 국가우주개발국 과학개발부장, 장범수 단천상업은행 시리아 대표, 장용선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KOMID) 이란 대표, 전명국 단천상업은행 시리아 대표, 강문길 남천강무역회사 대표, 강룡 KOMID 시리아 대표, 김중종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 김규 KOMID 대외업무담당, 김동명 단천상업은행장, 김영철 KOMID 이란 대표, 고태훈 단천상업은행 대표, 리만건 군수공업부장, 류진 KOMID 시리아 대표, 유철우 국가우주개발국장.  

(자료제공-외교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임 대통령이 깔아놓은 남북 도로 역주행

클린턴이 DJ에게 맡긴 운전대, '폭주족'이 잡았다

[북핵 20년과 박근혜의 역주행 ③] 전임 대통령이 깔아놓은 남북 도로 역주행

16.03.03 20:09l최종 업데이트 16.03.03 20:09l

 

 

북한은 왜 핵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일까? 1차적 배경은 1991년까지 존재한 주한미군 전술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의 안보우산이었던 북-중-러 북방삼각동맹이 사실상 붕괴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남한이 러시아(1990년)-중국(1992년)과 수교함에 따라 냉전시기의 북방삼각동맹이 깨진 반면, 북한은 자국이 추진했던 북-일, 북-미 수교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독자 생존을 위해 핵무기 보유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 배경은 동구권의 몰락과 외교적 고립으로 인한 경제난, 중-러 안보우산의 상실 같은 복합적 요인들이 중첩돼 있지만, 결국 핵심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이 시기에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적대적인 안보환경을 변화시키고자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다. 북한은 북미 대화에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폐기를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체제와 북미 수교를 요구했으며, 그 결과로 '북미 공동성명'(1993)과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1994), '국제테러에 관한 북미 공동성명'(2000), '북미 공동코뮤니케'(2000) 등에 잇달아 합의했다. 

북한은 특히 '국제테러 공동성명'에서 모든 국가와 개인에 대한 테러행위에 대해 반대할 것임을 공식 표명하고 테러 관련한 유엔협약 등의 가입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등장으로 북미관계는 수교 문턱에서 멈춰 섰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클린턴을 계승한 엘 고어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으면 북미 수교까지 갔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MAD(상호확증파괴)에서 NPR(핵태세검토)로

2001년 9.11테러 이후 부시 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독트린'을 담은 '핵태세보고서 2001'(NPR 2001)을 발표했다. 이에 북한은 반발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4년의 허송 세월 끝에 부시 2기 행정부는 2005년 9월 4차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북미 수교,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의 구축을 교환하는 내용의 '9.19공동성명'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은 공동성명과는 별도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관련계좌 동결조치를 병행했고,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북한은 미국과 BDA 문제를 줄다리기한 끝에 2007년 2.13합의를 위한 대화의 장으로 나왔으나,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악화 이후 핵개발을 협상-보유 양면카드에서 보유 쪽으로 전환하는 전략적 노선 변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2009년 1월 김정은 3대 세습체제를 내부적으로 결정한 뒤, 핵무기 개발과 이를 운반할 장거리로켓의 개발에 한층 박차를 가해왔다는 것이 조성렬 박사(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등 많은 전문가의 시각이다. 

인류가 첫 핵실험을 한 해는 1945년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현재 전세계 추정 핵무기는 15,800여 기로 미국-러시아가 전체의 93%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작전 배치된 핵무기는 4,500여 기로 추정된다. 그보다 더 많은 핵무기들이 그동안 감축되거나 해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만든 수만 개의 핵무기 중에서 실전에 사용된 것은 '리틀 보이'와 '팻 맨', 두 개뿐이었다. 전자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우라늄탄이고, 후자는 사흘 뒤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플루토늄탄이다. 
 
기사 관련 사진
▲  냉전 시기 핵억지력으로 작동해온 상호확증파괴 (MAD)는 너 죽고 나 죽자?
ⓒ 나무위키

관련사진보기


핵무기의 가공(可恐)할 위협을 감안하면 '뿐'이라는 조사는 부적절하다. 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생산-배치된 수만 기의 핵무기 중에서 실전에 사용된 것이 2기뿐인 까닭은 'MAD' 덕분이었다. 미-소 양극체제 하에서 상대방에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냉전 시기에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유지하는 억지력으로 작동되어온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증파괴)는 UAD(Unilateral Assured Destruction, 일방적확증파괴)로 바뀌었다. 계기는 2001년 9.11테러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NPR(Nuclear Posture Review, 핵태세검토)이다.

냉전 시기 미국과 구소련은 전략폭격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핵잠수함으로 구성된 '핵 3원체제(Nuclear Triad)'로 핵억지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9.11테러는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보복 억지전략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죽으려고 달려드는 놈한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자살을 무릅쓴 핵테러리즘으로부터 본토를 방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핵전략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기존의 Triad를 대체하는 New Triad(핵무기와 비핵무기 및 방어무기체계의 '새로운 조합')로 공격적 타격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제적 핵공격 의지를 명문화한 미 국방부의 NPR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대상국

2002년 1월 미 국방부가 의회에 보고했다가 언론에 공개된 NPR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방부는 유사시 핵무기 사용대상국으로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 외에도 당시 부시 대통령이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며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 5개국을 지목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잠재적 핵공격 대상국을 늘렸을 뿐 아니라, ▲ 지하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 상대방의 핵-생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보복 ▲ 돌발적인 군사사태 등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상황을 종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상정했다. 보고서는 이런 상황에 쓰기 위해 적합한 소형 특수핵무기를 새로 개발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미국은 이 5인의 악당 국가 가운데 이라크에 이어 리비아, 시리아를 무력으로 침공했고, 이란과는 강온 양면으로 핵협상을 타결지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4월에 발표한 '핵태세보고서 2010'(NPR 2010)에 따르면, 북한은 여전히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국이다. 

오바마는 NPT 탈퇴국가 및 위반국가에 대해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제외한다는 '제한적 핵선제공격 독트린'을 유지했다.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현재 미국의 핵선제공격 대상국은 북한뿐이라는 얘기다. 이에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각종 핵무기를 필요한 만큼 늘리고 현대화하게 될 것"이라고 핵보유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기사 관련 사진
▲  [표] 세계 핵무기 보유 현황(2016년 기준)

그러나 <CIA팩트북> 등을 참조해 작성한 CNN의 '세계 핵보유 현황'([표] 참조)에서 보듯, 북한의 추정 보유핵무기는 10기 미만이고, 작전 배치된 핵무기는 없다. 아직은 탄두의 경량화-소형화에 이르지 못했고 핵폭탄의 폭발력 조절 능력도 없는 원시적 핵무기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선제 타격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만, 그것은 곧 미국의 일방적확증파괴에 의한 북한의 '절멸'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아무리 무모하고 천지 분간을 못해도 미국과 핵무기로 싸우면 절멸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북한은 "미제를 위시한 제국주의자들은 이 나라들(이라크, 리비아)에 대량파괴무기가 없음을 확인하자 마음 놓고 침략하였다"면서 자위권 차원의 핵무기 보유노선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핵문제는 94년 6월 1차 북핵 위기 이후 이미 20년이 넘게 반복된 일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폭격(surgical strike)을 계획했다. 당시 미 국무부 수석통역 김동현(미국명 Tong Kim)의 <신동아> 기고문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는 가족까지 피신시킬 만큼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의 승인을 받기 전에 한국에 와 있던 군인 가족들과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방문 중이던 딸과 손자들을 서둘러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전쟁 시나리오에서 미군은 5만 명 이상, 한국군은 수십만 명, 일반 시민은 100여만 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일단 전쟁이 나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한다는 것이 최종목표로 설정됐다. 이 목표는 현재의 작전계획에도 반영돼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작전계획 목표가 전투력 못지않게 억제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신동아, 2005년 9월호)

클린턴 "한반도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운전대 잡아달라"
 
기사 관련 사진
▲  1998년 6월10일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남쪽 잔디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이후 북핵 위기는 카터의 중재와 뜻하지 않은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봄눈 녹듯 해소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대북정책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하며 클린턴의 갈피를 못잡게 했던 김영삼이 물러나고 오랫동안 분단문제를 고심해온 전략가 김대중이 등장했다. 

김대중은 98년 6월 미국을 처음으로 국빈 방문했다. 클린턴은 김대중을 남아공의 만델라, 체코의 하벨 등과 함께 이 시대의 '자유의 영웅'이라고 칭송하고 예우하면서 대북정책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김대중은 신명난 어조로 30분간 자신이 평생 갈고 닦은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조율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에 따르면, 클린턴은 진지하게 경청하며 적극적인 찬동을 표시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을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해주기 바란다.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임동원, <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2008)

한국 대통령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쥐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더불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시각도 붕괴론에서 변화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98년 11월 18일 밤 축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주영 명예회장을 포함해 826명의 관광객을 태운 금강산관광선이 동해항을 출발했다. 

한국을 답방한 클린턴은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두번째 관광선이 출항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튿날 한미 정상회담 공동회견에서 "어젯밤 축제 분위기 속에서 관광객을 가득 태우고 출항하는 평화스런 장면을 보고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며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남북 화해협력의 현장을 목격한 미국 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반도 위기를 외치는 강경파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코리아 리스크'로 투자를 꺼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클린턴이 김대중에게 '핸들'을 맡긴 결과였다. 2년 뒤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도 김대중이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잡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근혜의 애국가, 4절까지 부른다고 애국자는 아니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탓에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지만,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 FTA 같은 중대 사안에서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모습을 보여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허송 세월 끝에 성사시킨 2차 남북정상회담은 멈춰선 남북관계를 추진할 동력을 확보하기에는 너무 늦게 개최되었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은 되지도 않을 '비핵개방3000'을 내세워 5년을 허송 세월로 보냈다. 이명박도 첫 미국 방문 때 부시와 함께 차를 타면서 운전대를 잡기는 했다. 그런데 부시가 내어준 것은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는 차가 아니라 쇠고기 수입을 약속한 대가로 태워준 '골프카' 운전대였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던 그가 한 것은 금강산관광 중단에 이어,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경협을 중단시킨 5.24 제재조치뿐이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18일 오후(현지시각) 워싱턴D.C 북쪽 메릴랜드주 미 대통령 공식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 조지 부시 대통령을 옆자리에 태운 채 골프 카트를 운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

관련사진보기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표방하며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집권 2년만에 '통일대박론'으로 국민을 들뜨게 하더니 집권 3년만에 남북관계의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마저 중단시켜, 정부를 믿고 투자한 기업인들을 하루아침에 '쪽박신세'로 만들었다. 운전에 비유하면 깜박이도 켜지 않고 차를 모는 난폭하기 짝이 없는 '후진' 운전이다. 전임 대통령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전략적 인내'로 깔아놓은 남북관계의 고속도로를 '역주행'하는 범법운전이다.

청와대는 최근 박 대통령의 취임 3년을 기념해 3년 동안의 연설문과 회의속기록 등 공개발언 1,342건을 바탕으로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국민'(5029회), '경제'(4203회), '대한민국'(4012회)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는 특히 "국민과 대한민국이 주로 관용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 관련어 사용이 많았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나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고 해서 애국자인 것 아니다. 그렇게 경제를 외쳤지만, 집권 1년차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위기관리의 무능으로 경제도 실패했다. 집권 2년차는 메르스 사태에 대한 국가방역관리의 무능함으로 역시 경제도 실패했다. 그리고 집권 3년 차는 개성공단 전면중단이라는 분단관리의 무능함으로 경제 실패를 예고했다. 세월호나 메르스와 달리 분단관리의 실패는 전쟁으로 발발하기 십상이다.

'막장 드라마' 박근혜, 불복종과 탄핵밖에 답 없다
 
기사 관련 사진
▲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2016.2.24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최근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통과 노래를 불러온 황교안 총리가 정작 자신이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인줄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김광진 의원의 송곳질의에서 밝혀진 것도 애국가와 애국자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필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줄 알아야 애국자'라고 믿는 매우 단순한 사람인 것 같다. 요즘 박근혜의 얼굴을 보면, 30여년 전에 '전라도 출신 대학 재학생=데모 학생'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신병들을 구타한 고참의 얼굴과 중첩된다.

박근혜는 최근 국무회의에서 '코리아 리스크' 언급하며 국회를 윽박질렀다. '코리아 리스크'는 자신이 개성공단을 중단시킨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도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제가 또 발전할 수 있겠나"라고 국회를 겁박하고, 야당이 국회법에 보장된 필리버스터를 활용한 것에 대해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대중과 샌더스도 했고, 새누리당도 공약한 필리버스터를 '기가 막힌 현상'이라니 이쯤 되면 국정이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이다.

'배신'은 막장 드라마 핵심 코드 중의 하나이다. 연인의 배신, 가족의 배신, 친구의 배신 등등. 박근혜는 지금 한반도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북한과 중국, 그리고 국회(야당)의 '배신'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면서 '김정은 참수작전'과 사드(THAAD), 그리고 국민의 응징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나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것이냐"고 국회에 호통을 친다. 박 대통령이야말로 도대체 전쟁이 터져 얼마나 않은 국민이 죽어야 퇴로 없는 강경몰이를 그만둘 것인지 되묻고 싶다.

남은 2년간 더는 나라가 거덜나지 않고, 이 땅의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게 하려면 지금이라도 국민이 '운전면허'를 취소하는 수밖에 없다. 임기도 반환점을 지난 지 오래다. 그동안 박정희 성역화와 새마을운동 국제화,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운전대를 놓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국민의 불복종과 탄핵밖에는 답이 없다는 얘기다. 탄핵할 사유는 차고 넘친다. 

우선 비상사태나 긴급한 사유가 없음에도 명백하게 사유재산을 침해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한 헌법을 위반했다.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인 분단 관리에 실패해 '코리아 리스크'를 조장하고 국민을 전쟁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3~4월에는 한미 키 리졸브-독수리훈련이 예정되어 있어 안보위기와 군사적 긴장 속에서 총선거를 치러야 할 판이다. 이 또한 민주적 헌정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탄핵 사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하는 판사

 
대법원이 독재권력과 결탁해 흑과 백을 뒤섞어 놓은 사례가 비일비재
 
강기석 | 2016-03-03 08:48: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지원 의원이 결국 자기 갈 길을 제대로 갔다. 새정치연합에서 탈당을 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할 때나, 결국 더민주당에서 탈당을 결행할 때나, 대법원에서 자신에 대한 무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이 났을 때나 늘 ‘통합’해야 한다고 외치더니, 결국 통합과는 아주 먼 길을 갔다. 아니 앞으로도 그는 자신이 야권통합을 위해 국민의당에 갔노라고 강변할 것이다.

 

 

아무튼 그는 정치 하나는 기막히게 잘 하는 셈이다. 이 쪽, 저쪽 애를 태우다가 안철수 국민의당이 가장 간절하게 자신을 원할 때 그 손을 잡은 것이다. 박 의원이나 안 의원이나 상식과 이성이 있는 정치인들이라면, 곤두박질치는 국민의당 지지율이 박 의원의 합류로 다시 올라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곧 구성될 원내교섭단체가 유일무이한 목적일 것이다. 묵직한 국고 지원금이 쏟아지면, 박 의원의 역할이 결정적인 만큼 그의 몫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이 같은 박지원 의원의 빛나는 한 수는 무엇보다 사법부의 아량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저축은행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이 1심 무죄의 손을 들어 준 덕분에 다 죽어가던 정치생명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호남토호이며 반노 인사다.

반면에 대표적인 이른바 친노인사인 한명숙 전 총리는 대법원이 2심 유죄의 손을 들어 준 탓에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비슷한 범죄혐의에 대해 이른바 친노 한명숙 전 총리는 유죄, 이른바 반노 박지원 의원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뭐 대단한 객관적 증거의 차이나 법리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법관이 어떤 증인의 증언을 신빙성 있게 받아 들였느냐의 차이다. 한 총리 때는 돈을 줬다던 사람이 법정에서 양심선언을 하며 돈을 주지 않았다고 진술 번복했는데도 믿지 않았고, 박 의원 때는 돈을 줬다는 사람이 일관되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는데도 믿지 않은 것뿐이다.

하나는 유죄, 하나는 무죄인데 결과는 똑같이 야당에 타격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총리 유죄는 야당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었고, 박 의원 무죄는 야당의 혁신을 방해하고 통합을 수렁에 빠트리는 결과를 빚고 있다. 의도적으로 무죄를 유죄로, 유죄를 무죄로 뒤집었을 리야 있겠나만, 결과적으로 두 경우 모두 대법원이 현 집권세력을 돕는 정치행위를 하고 만 셈이다.

 

 

그래도 대법원을 최종적인 진실과 정의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대법관도 인간이니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차원의 문제 제기가 아니다. 과거 간첩사건과 시국사건에 대한 재심 무죄판결에서 보듯 대법원이 조직적으로 독재권력과 결탁해 흑과 백을 뒤섞어 놓은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정치적 사건에 있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진실과 정의에 눈 감고 늘 수구 집권세력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왔다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33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