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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아베 美의회 연설, 노골적인 거짓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06 09:36
  • 수정일
    2015/05/06 09:3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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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아베 美의회 연설, 노골적인 거짓말”“집단적 자위권 거부.. 적극적인 평화주의 인정 안 해”
강주희 기자  |  balnews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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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05  11:30:17
수정 2015.05.05  12: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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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오에 겐자부로가 아베 신조 총리를 향해 신랄한 비난을 했다. 오에는 일본 헌법 시행 68주년 기념일인 지난 3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개헌 반대 집회에서 “아베의 미국 상하원 연설은 너무 노골적인 거짓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뉴스1> 등에 따르면 오에는 이날 연설에서 아베 총리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총리’라는 경칭은 7차례나 생략된 채 ‘아베’로 지칭했다.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며 집회에 참석한 시민 3만 명은 오에의 연설에 박수를 보냈다.

   
▲ 3일 일본 스포츠 전문지인 '스포츠호치'에 실린 오에 겐자부로의 아베 비판 발언 기사 화면 캡처.(이미지출처=스포츠호치)
오에는 아베 총리의 자위대 파견과 국제 분쟁 개입을 지적하며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대해 강력한 동반자가 되고 싶어 한다. 적극적인 평화주의는 전쟁에 대한 자기 변호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일본 국민은) 집단적 자위권을 거부하고 적극적인 평화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

 

올 여름까지 안보 법안을 성립시키겠다는 아베총리의 약속에 대해서는 “의회에서 의원들에게 명확히 설명을 하지 않았고, 국민들의 찬성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설 말미에서 그는 “나 같은 노인이 이런 큰 집회에서 사람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은 마지막이겠지만, 평화와 생명의 존엄을 기본으로 일본 헌법을 지키고 살려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를 겨냥한 오에의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오에는 지난 3월 방한해 서울 신촌 연세대에서 진행된 포럼에서 “아베 총리는 전쟁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 과거 일본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는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군 위안부는 천황제까지 그 뿌리가 이어진 일본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가 부른 여성 차별의 결과”라며 “일본 정부가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질타한 바 있다.

1957년 등단한 오에는 ‘일본의 살아있는 양심’이라 불리며 군국주의 등 일본 사회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이후 아쿠아가와상,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 등을 수상하며 최근에는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며 일본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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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남은 동생 꿈에 누나가 유령으로 나왔다

등록 :2015-05-05 20:08수정 :2015-05-05 20:10

 

일러스트 박민희
일러스트 박민희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③ 생존 
살아남은 동생, 그 뒤 17년

 

“완전히, 네, 완전히 극복했어요.” ‘살아남은 아이’가 말했다. 그도 이제 스물셋. 더 이상 아이는 아니다. 화상과 상처로 뒤덮인 앙상한 몸으로 ‘집’에서 구조됐을 때가 여섯살이었다. 한살 위 누나는 이미 죽어 마당에 파묻혀 있었다. 아이도 “이 상태로 며칠이면 사망했을” 상태였다. 17년이 흘렀다.

 

“요즘 가장 즐거운 거요? 편의점 일 재밌어요. 단골손님 중에 웃긴 사람 있어서 되게 재밌어요.” 그는 “거기 알바생한테 제가 먼저 말 걸었다”며 자신이 요즘 “많이 변했다”고 자랑을 했다. 심한 낯가림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뒤 취업이 어려웠던 그다.

 

아이는 한국 사회에 아동학대란 무엇이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린 첫 사례였다. 형제자매 중 누군가 사망할 정도로 심각한 학대를 받은 아이 중에서 평생에 걸친 지원과 관찰이 이루어진 첫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 4월20일, 그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오랜 시간 아무도 믿지 않고, 과거의 일에 입을 닫고 지냈다. 하지만 스물셋의 그는 가족의 이야기도 회피하지 않았다. “가족 얘기를 하면 예전에는 울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옛날에 누나가 꿈에 나올 땐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했는데, 요즘엔 푹 잘 자요.” “어렸을 때는, 아팠죠. 마음에 멍이 들어서.” “원망스러운 사람요? 지금은 없는데, 어렸을 때는 새아빠가 미웠죠. 아, 그게 친아빠였나요?”

 

학대 현장에서 구출된 이후 17년, 그의 삶을 사회복지사·의사·임상심리전문가 등 다섯명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망가져버린 6년의 기억으로부터 삶을 복구하기 위해 불안과 불신, 공포와 결핍을 이겨내며 걸어온 아이의 길을 되짚었다.

 

 

발견 당시 누나는 마당에 묻혀있었고
동생은 구조됐다
그리고 17년 세월을 견뎠다

 

 

 

1. 성인이 된 아이/ “네 완전히 극복했어요” 기다려주자 다가왔다
-김정미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사업본부장

 

1998년 4월, 아이 발견 당시 그는 성남 아동학대상담센터의 신입 간사였다. 두 해 전 문을 연 센터는 비영리법인인 굿네이버스가 운영하는, 아동학대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국내 유일의 기관이었다. 사회복지사인 김 본부장은 당시 만삭의 몸으로 아이를 담당하게 됐다. 그는 병원에서 아이와 첫 대면을 했다.

 

그 뒤 17년째 아이를 ‘아들’이라 부르며 돌보고 있다. 처음부터 자신이 엄마가 되어주려 한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두번의 가정 위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아이를 쉼터에서 직접 돌보기로 했다. 2001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학대아동 쉼터에 입소해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이가 쉼터에 처음 오던 날이 생생해요. 두번째 위탁 가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왔죠. 회색 정장을 입고 작은 넥타이도 매고 왔어요. 시무룩하게 현관에 서 있길래 제가 다가가서 안아줬어요.” 많은 아이들이 들고 나는 쉼터지만 아이만은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르게 했다. ‘널 오래도록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훗날 쉼터에 들어섰던 그날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졌던 순간”이라 떠올렸다.

 

김 본부장은 살인, 아동복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러 교도소에 간 적도 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여권을 만들어주려면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해서였다. “아이처럼 마르고 단단한 체형이더군요. 아이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묻지 않더라고요. 아이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느꼈죠.”

 

아이의 초·중·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하며 김 본부장은 아이가 성인이 되는 날을 대비했다. 전세 자금을 준비하고, 아이에게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운전면허를 따게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된 뒤, 취업이 잘 되지 않자 조바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마다 말했죠. 아이가 구조되던 당시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렇게 살아가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일이다. 좀 더 뭉근히 기다려주자고요.”

 

 

2. 청소년기/ 자존감 없었던 아이 “경찰이 되고 싶어요”
-홍창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홍보협력팀장

 

경기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아이를 돌봤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를 만나 중학교, 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했다. “그 시절 아이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뭘 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자존감이 워낙 낮아서 자기 의사 표현도 안하고, 어떤 일에도 동기부여가 어려웠죠.”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충동 조절 때문에 약물도 복용해야 했다. 학업 수행에도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아이들의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는 것은 다반사다. 홍 팀장은 “학대를 극복한 ‘대한민국 1호’ 아이로 국가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놀이 치료, 음악 치료, 미술 치료 등이 매주 이어졌다.

 

자꾸만 “뭘 하고 싶냐”고 묻는 그에게 아이는 종종 “경찰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찰 되려면 뭘 해야 돼?” 여러번 물으면 아이는 한번씩 “태권도도 하고 수영도 해야 돼요”라고 했다. 홍 팀장은 아이를 데리고 태권도 도장도 가고 수영장에도 갔다. 축구 선생님을 초빙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쉼터 친구들과 어울려 가출을 하거나 쉼터 주변을 배회하는 일도 여러번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초등학생과 어울렸고, 어린이용 학습지를 오래 풀었다.

 

하지만 이 기간, 아이의 정신세계는 성숙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그때까지 매주 치료를 진행하던 심리치료사들도 아이에게 더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어렸을 때처럼 강아지나 친구를 때리는 폭력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변해가고 있었다.

 

 

3. 초등학교 시절/ 입 닫아버린 함구증 드디어 말을 걸었다
-김성준 임상심리전문가

 

아이에게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2003~2005년이다. 당시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김성준 임상심리전문가가 쉼터를 찾아왔다. 평생 자원봉사만 하면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멀찍이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와 빨리 친해지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우르르 나가서 술래잡기, 얼음땡, 축구, 물총놀이, 구슬치기를 했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쉼터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러더니 “선생님, 어부바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날부터 아이는 일주일에 두번 오는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는 아이를 만나면 들어올려 빙빙 돌려줬다.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아이는 아기 같은 유희를 원했다. 어느 날은 작은 축구공 모형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사람에게 무심해 보였지만, 아이는 사실 정말 따뜻한 아이였어요. 전 그 마음을 진하게 느꼈죠.”

 

자원봉사를 2년째 할 무렵, 그는 쉼터의 아이들을 상대로 12주 동안 심리치료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치료 전 아이의 상태를 검사해보니 입을 닫아버린 함구증이 있었다. 불안과 우울, 사람에 대한 불신감, 자책감이 강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 나타났다.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과거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썼다. “이때는 6살 때 일이었다. 엄마 아빠가 누나를 굶기면서 비웃고 그래서 내가 몰래 밥을 주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그림 속에서 아이는 왜 우느냐고 묻는 한 아주머니를 향해 “으아앙. 안 말할래요. 아빠하고 엄마가 누나를 굶겨 죽였어요. 엄마 나빠요. 왜 때려요”라고 답했다.

 

아이는 밤마다 누나가 유령으로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선생님의 위로에 힘을 얻은 아이는 꿈속 누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누나, 나 도와주고 잘해줘서 고마웠어. 나 누나한테 밥 주다가 엄마한테 죽을 뻔했어. 다리미 갖다 등에 대서 타죽는 줄 알았어. 하지만 나 많이 나아졌어. 지금 나 누나랑 많이 놀고 싶어. 누나 새엄마 진짜 나빴지. 누나 많이 보고 싶다.”

 

마침내 아이는 계모를 향해 글을 썼다. “저를 괴롭히고 때리고 그러니까 벌을 받지요. 놀려주고 싶은 거 알지요. 똑같이 해주고 싶네.” 이날 처음으로 그동안 무서워서 그리지 못했던 부모의 얼굴을 그려냈다.

 

12주의 치료가 끝난 뒤, 아이는 한결 홀가분해졌다. 말을 하게 됐고, 자책·불신감·불안·분노 등 모든 정서적 수치가 눈에 띄게 안정됐다. ‘집-나무-사람(HTP) 검사’ 결과로도, 누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줄어들면서 위협감이 감소됐고 현실을 감당해내는 힘이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을 겪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아이는 매일 악몽을 꾸며 과거를 현재처럼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 상처가 있는데도 ‘덮어놓고 앞을 향해 가자’, 그러면 안 됩니다. 학대받은 아이들이 좀 더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의 열정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일러스트 이강훈
일러스트 이강훈

 

4. 구조 뒤 치료기간/병원서 끝없는 집착 불안에 자주 똥지려
-안동현 한양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연구소장)

 

응급실로 달려가 아이를 대면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3살 아이 수준에 불과한 14㎏의 체중, 지독한 영양실조, 발등과 발바닥에 수없이 찍힌 상처, 등에 있는 다리미 자국 화상, 전신의 멍과 피부염, 욕창, 결핵, 파상풍, 세균 감염에 의한 패혈증 등 성한 곳이 없었다. 영양보충과 상처 치료가 시급했다.

 

“제일 중요한 건 의식주를 포함해 기본적인 것을 제공해 아이가 안심하도록 하는 것이었죠. ‘살려주는구나’, 그 느낌을 준 다음에 신뢰관계를 맺고 그다음이 심리적인 치료인 것입니다.” 안 교수는 치료시간이 되면 아이와 바닥에 함께 앉아 기차놀이, 공놀이를 했다.

 

병원에서 아이는 끝도 없이 먹었다. “입원 기간 동안 아이는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어요. 밥도 군대에서 수북이 쌓아놓고 먹는 거만큼, 기본적으로 두세 그릇을 먹었죠. 과자나 과일도 끊임없이 먹었고요.” 아이는 한밤중에도 깨어나 배가 고프다고 서럽게 울다가 과자 상자를 끌어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식탐뿐만 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사준 곰 인형과 로봇을 다른 아이가 건드리자 이를 갈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매일같이 예측 불가능한 부모와 함께 지내다 보니까 불안이 강하고, 너무 부당한 일을 당하다 보니 분노 조절이 안 됩니다. ‘안전지대’로서 집이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결핍에 시달리는 거죠.”

 

몸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 아이가 사자, 기린, 뱀과 같은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능의 문제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경험도 또래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 불안 때문인지 자주 똥을 지렸다. 안 교수는 “장기적인 심리 치료가 필요했고 지속적으로 신뢰관계 맺을 사람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5. 구조 당시/온몸 상처 깡마른 몸 석고상처럼 미동 없어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섰을 때의 냉기를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기억했다. 4월이었지만 집 안은 추웠고 안방에만 온기가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덥수룩한 머리에 비쩍 마른 아이가 웅크린 채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방문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이가 맞는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고 하니 엄마는 “애가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고 받아쳤다. “아줌마한테 와보자.” 장 관장의 말에 아이는 수긍도 반항도 하지 않고 품에 안겼다. 아이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학대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해 부모들은 여름에도 아이에게 긴팔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옷을 들춰보니 염증과 상처가 뒤범벅된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많이 아프니?” 아이가 엄마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아파요.”

 

새 가정을 꾸리고 두 딸을 낳은 부부가 전처의 자식인 남매를 데려다가 학대한 사례였다. “이 아이는 야반도주한 친척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던 아빠는, 곧 “아이 누나는 어디 있느냐”는 경찰의 추궁에 무너졌다. 다음날 경찰은 마당에 파묻혀 있던, 죽은 지 5개월 된 누나의 주검도 수습했다.

 

아이의 누나는 부검 결과 위장부터 대장까지 아무런 음식의 흔적이 없는 상태였다. 1997년 12월 아이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려다가 부모에게 발각돼 폭행을 당했다. 6일 동안 아이는 늘 갇혀 있곤 했던 차디찬 방에 누워 있다 숨졌다. 그 방 벽에는 “말 안 들으면 세탁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아빠의 협박이 적혀 있었다.

 

그날 장 관장은 아이를 안고 자동차에 타며 아이에게 속삭였다. “이제 아줌마가 살려줄게.” 잠시 뒤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자 먹고 싶어요.” 장 관장은 “미국 아동학대 교과서에서 봤던 사례와 정황, 아이 모습 등이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말했다. 이 일을 겪은 뒤 그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가해자인 아이의 친아빠에게는 5명의 아이가 있었다. 세 남매는 첫번째 부인의 자녀들, 두 딸은 새 부인의 아이들이었다. 한 명이 죽었고, 한 명이 구조됐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08년 이후 기록이 남아 있는 아동학대 사망자 113명 중 ‘살아남은 형제자매’가 있다고 확인된 경우가 40.7%(46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해자로부터 ‘살아남은 아이’의 분리가 확인된 경우는 7건에 그쳤다.

 

스물셋이 된 아이는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멋진 아빠는 ‘잘 웃어주는’ 아빠다. “아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잘 알려주고, 못하는 게 있으면 더 잘 알려주세요.”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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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박근혜는 아픔도 연민도 모르는 벽창호”

[창간 20주년 인터뷰] 명진 스님 “무능한 문재인과 그릇 작은 정동영으론 야당 미래 없다”
 
입력 : 2015-05-05  13:39:39   노출 : 2015.05.05  21:20:54
이정환·강성원 기자 | black@mediatoday.co.kr   
 

<편집자주. 1년이 넘도록 거리에서 눈물을 쏟아낸 세월호 유족들은 삭발과 단식으로 세상의 외면과 냉대에 맞서고 있다. 박근혜 정권 3년차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한 극단에서 새로운 질문을 맞닥뜨리고 있다. 반성은커녕 유체이탈 화법으로 천연덕스런 변명만 늘어놓는 대통령, 권력과 결탁하는 걸 넘어 스스로 권력화한 언론, 민중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폐해졌고 열패감과 무력감에 빠진 한국 사회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미디어오늘 창간 20주년을 맞아 국민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명진스님과 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대표신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영주 총무목사를 만나는 연속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 = 이정환 편집국장. 정리 = 강성원 기자.

좌우여야를 막론하고 국가 최고 권력자들에게 이처럼 거침없는 독설을 퍼부었던 종교지도자가 있었을까. 지난 이명박 정권 4년 동안 “법구경을 읊어야 할 스님의 입으로 ‘욕’구경만 해댔다”던 명진 스님은 봉은사 주지로 있던 지난 2010년 정권의 외압으로 사실상 봉은사에서 쫓겨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전과 14범의 파렴치한 범죄자”라고 힐난하는 등 ‘강남 좌파 주지’로 찍혔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의 일침을 피해갈 수 없었다. 명진 스님은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 과거사 사과 발언을 했을 때도 “역사가 무슨 전당포냐. 왜 걸핏하면 역사에만 맡기자고 하느냐”고 날 세워 비판했다. 당시 명진 스님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지만 야당의 무능함에 깊이 실망한 후 지금은 신당 ‘국민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서 명진스님을 만났다. 
  
- 박근혜 정부는 시민이 세월호 참사에 헌화하는 것도 경찰로 막고, 자유롭게 말할 자유도 빼앗고 있다. 국민은 마음속으로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행동하는 데에는 겁을 먹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다고 보나.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단순 무식하게 ‘잘 살아보세’가 통치이념이 됐다. ‘반공’이라는 외피를 둘러싸고 물질적 풍요를 끝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이 규정돼 버렸다. 일본에 36년 치욕적 수탈을 당하고 나서도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청산 없이 돈 몇 푼으로 해결하려 했던 무식의 극치가 한국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다. 물질적 욕망은 지금도 계속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와 747공약(7% 경제성장·국민소득 4만 달러·7대 강국)이 먹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 잘 살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전과 14범을 대통령으로 만든 나라다. 결국 우리 국민의 저급한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이렇게 타락시켰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돈을 획득하기 위해서 모두 부를 위해 모이다보니 부를 축적하기 위해 끝없이 남을 짓밟도록 가르쳤다. 자비심이라든지 연민은 조금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 굶어 죽고 집 없어 쫓겨나도 아무 상관 없이 나는 100평짜리 아파트에 살면 행복한 짐승 같은 사회가 돼 버렸다.”  

- 이런 ‘짐승의 시대’에 언론이 아무리 비판해도 대통령은 아프다고 누워있고 말도 안 통하고 수많은 비판 기사를 쏟아내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40%에 육박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결합하는 팬층이 있기 때문이다.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은 박 대통령이 결혼도 못 하고 부모가 총 맞아 죽어서 불쌍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경북의 유교적이고 보수적 사람들은 박정희를 보고 찍은 것이어서 박 대통령이 아무리 잘못해도 안 무너진다. 정치를 아무리 잘못해도 ‘저 불쌍한 사람, 청와대에서 독수공방하고 나라 걱정밖에 할 게 뭐 있겠어. 밑에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지’라며 박 대통령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본인도 항상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유체이탈식으로 나오는 것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 비서실장과 총리가 잘못했다는 확신을 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 시대가 안 깨진다고 본다.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벽창호 같다.”

 

   
▲명진 스님   사진=강성원 기자
 

- 박 대통령이 매번 자신과 관련된 일에도 ‘역사에 맡기자’고 하니까 스님은 ‘역사가 전당포냐’라고도 했다. 수많은 기사보다 강렬했던 말이었다. 박 대통령이 유체일탈식으로 말하는 이유,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 분은 책을 안 읽는 것 같더라. 인문학적 소양이 거의 없다. 언어 구사하는 걸 보면 보통 우리는 누가 원고를 써 주면 잘못된 부분을 바로 보면서 고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잘 써 준 것도 못 읽는다. ‘전화위기의 기회로 삼아서’라든지, 보통 전화위복이라고 하지 전화위기라고 안 한다. 지하경제도 양성화시키겠다고 해야 하는 걸 활성화시키겠다고 얘기한다. 더구나 정말 웃기는 건 ‘솔선을 수범해서’라고 그렇게 쓰고 싶어도 안 써진다. 이건 거의 책을 안 읽고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나라가 불행한 이유 중 하나다.” 

- 그래도 예전에 박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는데 정말인가.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경선했다. 그때 내가 봉은사에 들어가 있었다. 야당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고 그나마 비교적 괜찮은 사람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왕이면 이명박 보다는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이 박 후보 진영 쪽에 들어간 것 같다. 하루는 박 후보에게 전화가 왔다. 그날이 8월15일이었다. 그러면서 박 후보가 ‘오늘이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다. 현충원에 어머니를 참배하고 나오는 길인데 스님이 평소에 저를 응원한다고 말을 들었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스님께 고맙다고 인사했을 것이다. 어머니 대신 제가 말씀드린다’고 했다. 육영수 여사는 독실한 불자였다. 그래서 ‘어머니 마음으로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끊었다. 그러고 나서 박 후보는 경선에 떨어졌다. 만약 그때 박 후보가 경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됐으면 나는 지금 국사(國師)가 됐을지 모른다.(웃음) 난 이명박 때문에 망한 사람이다.”

- 박 대통령이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보나. 특히 세월호 참사 후 대통령이 보인 태도를 볼 때 어떻게 평가하나. 

“근본적으로 인간이 가져야 할 것이 연민이라고 본다. 아픔과 고통에 대해 같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연민. 세월호 유족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을 때 약간 비웃듯이 쳐다보면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분에게는 연민이 없구나’라고 느꼈다. 그 역시 부모가 둘 다 총을 맞아서 세상 떠난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더 같이 아파할 줄 알았는데, 자식 잃은 부모의 애끊는 울음소리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지나갈 수 있다면 인간의 품성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마음속에 조그만 자비심도 없는 사람은 제도(濟度)를 못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런 상황에선 유가족들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 

-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 박 대통령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세월호는 왜 한 시간 반 이상 골든타임에 아이들을 그대로 놔뒀는지에 대해 부모들이 한이 맺힌 것이다. 살려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 의문에 답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때 대통령은 뭐했나. 사고 7시간이 지난 이후 나와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는데 왜 발견이 어려워요’라고 말한 게 결정적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모든 의혹의 핵심이 여기 있다. 다른 의혹을 다 제쳐 두더라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7시간 동안 어떻게 된 건지, 보고를 잘못 받았는지 아니면 안 받았다든지, 본인 입으로 얘기해야 한다. 큰 사고가 나고 국내에 있었는데 7시간 만에 나타난 이유가 너무 이상하다. 난 정윤회를 만난 건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게 어떻게 국가기밀인가. 세월호 때는 대통령 행적이 국가기밀이고 지금은 아파서 누워있다고 브리핑도 하는데 그럼 국가기밀을 어기는 것인지, 국가 기밀이 몇 개월마다 한 번씩 바뀌나. 이런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경우가 바뀌는 것에 국민이 분노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뭔가 마취가 돼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문제에 대한 합리적 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국가가 해야 한다. 국민의 의심을 종북이라고 몰아선 안 된다. 천안함 때도 이명박 정권이 보여준 태도가 국민이 더 강한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의심한다고 종북 빨갱이라고 하는 건 국가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그런 의심을 못 하게 국가가 완벽하게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

- 스님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으면서 국민모임 신당 창당에 참여했다. 사실 신당의 어젠다가 무엇인지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신당은 야당이 잘하면 나올 수가 없고 나와서도 안 된다. 지난 대선에서 나도 문재인 대표를 지지하고 도왔는데 대선 이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드러났는데도 본인이 당사자면서 대선 불복은 아니라고 어정쩡하게 물러섰다. 어느 나라에서 국가기관이 거의 총동원돼 개입한 선거를 상대 정당의 후보가 그렇게 쉽게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가. 국가기관이 개입한 정말 부정부패한 선거이기 때문에 대선 후보로서 인정 못 한다고 투쟁해야 했다. 그래야지 야당이다. 그래서 신당 얘기가 나온 것이고 신당이 진용을 갖추고 국민 여론을 모으면서 갔어야 하는데 갑자기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보궐 국면으로 가게 됐다.” 

- 그런 점에서 문 대표를 초식동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초식동물도 뿔이 있고 들이받기도 한다. 그 당시 대선 문제는 복종 불복종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든 국기문란 사건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문 대표가 국가의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을 너무 쉽게 인정하는 아주 겸손한 태도에서 많은 실망을 느꼈다. 그리고 세월호 때도 야당은 여당이 쳐놓은 가이드라인대로 가져와 유가족을 설득했다. 그게 어떻게 야당이냐. 유민아빠 단식 때 문 대표는 유민아빠의 단식을 말리기 위해 단식했다. 이걸 보고 결정적으로 문 대표는 무능하고 점잖은 사람이지, 정말 국민이 뭘 바라고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판단력도 없다고 봤다. 실제 강력한 투쟁을 통해 야당다움을 보여줘야 했다.”

- 오늘 보궐 선거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정동영 후보도 당선이 어려울 것 같다. (명진 스님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이날은 보궐 선거 투표 마감이 몇 시간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편집자 주>)   

“그래서 난 끝까지 정동영 출마를 반대했다. 나는 ‘정동영이 죽어야 죽은 거름을 통해 싹이 트여 난다. 그래야 국민모임 신당이 살고, 신당이 사는 게 정동영이 사는 거다. 안 그러면 국민모임도 죽는다’고 요구했다. 정동영의 지난 5년 동안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용산참사 현장을 다니는 모습은 정말 진정성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정동영 부부를 강원도로 오라고 해서 하룻밤씩 불러 재우고 얘기해줬다. ‘김구와 장준하, 문익환 선생처럼 오랫동안 정신적 지도자가 될 생각을 왜 안 하느냐. 정동영의 행보는 그런 길을 가도 된다. 5년짜리 대통령, 국회의원에 연연하지 말고 정신적 지도자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6 ·15남북공동선언이라는 굉장한 업적을 이뤄냈다. 정동영도 남북문제에 대해선 전문적 소견과 비전을 갖고 있더라. 그 부분은 높이 평가 한다. 남북 간 통일문제를 끌고 나가는 정신적 지도자가 되라고 나는 계속 출마를 반대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보니 후보 등록을 했더라. 그래서 ‘사람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구나’하고 실망을 많이 했다. 정동영이 되면 천정배와 연결되면서 파괴력이 생길 거라고 보는데, 떨어지면 국민모임의 동력 상실이 우려되고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하고 있다.”

 

   
▲명진 스님  사진=강성원 기자
 

- 아마 오늘 보궐 선거도 새정치의 참패로 끝날 것 같다. 현실정치에서 여전히 제3정당의 길은 멀고도 멀다. 

“예전 70~80년대 싸움은 재야가 있고 학생·노동운동 있어서 싸운 것이 아니다. 뚜렷한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김대중·김영삼이라는 야권의 정치지도자 있었고 거기에 재야와 학생, 노동계가 합세한 것이다. 그때 김대중·김영삼과 같은 정치지도자가 없었으면 재야가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싸움이 안 됐다고 생각한다. 지금 야당에서 누군가 그 역할 해야 한다. 강력한 투쟁을 통해 그러면 재야와 종교계가 다 같이 모일 거다. 지난해 대선 부정 여론이 막 끓어오를 때 친노계라도 삭발 투쟁하고 농성하면서 싸움 붙기 시작했으면 큰 싸움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문제 때도 몇몇 의원 빼고는 코빼기도 비추는 야당 의원이 없었다. 문 대표의 지금 모습도 다음 대선에서 중도보수표를 노리는 행보들인데 난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난 정치인들에게 ‘대통령 되기 위해, 도지사·국회의원 되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마라. 좋은 일을 해라. 그러다 운이 닿고 복이 되면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되기 위해 행보를 하는 것은 욕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 보수언론은 박근혜 정부 보호보다 정권의 재창출을 노리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세월호엔 ‘세금 도둑’, 성완종 리스트엔 ‘노무현 사면’이라는 프레임 만들어 확 밀어붙이고 종편서도 떠들면 실제 뉴스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지난 몇십 년간 그렇게 해왔던 상황에서 말은 오염돼 죽어 있고 언론은 제구실을 못 하고 있다.

“말도 안 죽었고 언론이 제구실 못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미디어오늘에 기사가 올라가면 좋은 기사는 SNS로 퍼져 나간다. 예전에 등사기로 밀어서 돌릴 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다. 그런데도 일반 독자들이 들었을 때, 젊은이들이 봐도 ‘아!’ 소리가 나오는 구사력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언론은 글 자체가 활구(活句)가 아니라 사구(死句)가 됐다는 것이고 활구로써 감동을 주고 번쩍 정신이 나게 하는 구사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떨어져 있는 것이다.”

- 그 말은 목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방식에서도 힘을 많이 주고 유연하지 않다는 건인데, 이는 진보진영의 문제 같기도 한다. 

“진보진영도 굳어져 있는 것이다. 프레임은 굳어진 틀이다. 틀 밖으로 나와서 쳐야 하는데 틀 안에서 싸우니 똑같은 결과가 만들어진다. 나는 독재자와 싸울 때 막 물러가란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이 들었을 때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규정이 제일 무서운 것이라고 봤다. 지혜롭게 싸우려면 철학적 사유를 통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비우는 사람의 행위나 언어는 지혜롭게 배어난다. 진보언론이 지혜롭게 싸우기 위해선 철학적 사유를 통해 ‘비움’을 익혀야 한다. 매번 똑같은 얘기만 하지 말고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폐부를 찌르는 언어들이 나와야 국민도 손뼉 치고 동의하며 힘이 생긴다. 새가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자유롭게 날듯이 우리의 사유를 자유롭게 하는 게 반독재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절대적 무기가 되는 것이다.” 

-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풍요와 물질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물질이 없고 가난할 때는 불행했는가. 물질은 필요하지만 우리 행복을 충족시켜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 끝없는 고뇌가 필요하다. 그것은 더불어 사는 세상,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물적 토대가 공평히 분배되는 세상, 배가 고프고 집이 없어서 곤궁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세상, 국가가 그런 걸 만들어 줘야 한다. 그게 실현된 곳이 덴마크다. 그곳이 이상세계 유토피아 같은 꿈같은 세계라고 해도 우린 그쪽을 향해 가려고 애쓸 때 비슷한 근사치 답이라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려면 철학자가 정치가가 되는 세상 돼야 한다. 이명박 같은 사람이 정치를 해서 극도로 나빠진 지금의 대한민국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야만의 시대라고 본다.”

- 그래서 스님도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하고 정치 참여도 하는 것인가.

“플라톤이 한 유명한 말이 있지 않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가장 큰 벌은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정치라는 게 단순하게 대통령, 국회의원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사회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방향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라도 뜻을 모아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고통은 생로병사의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닌 사회적 고통도 있다. 독재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도 사회적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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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안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대통령과 이 정부에게 요구하기 위해서 실명을 밝히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해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위해서,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서, 그를 통한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우리 사회 절대적인 과제를 위해서 유가족과 시민들과 함께 노력해왔던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입니다. 

지난 3월 27일 해수부가 갑작스레 4.16세월호참사진상규명특별법 시행령안(대통령령안)을 발표한 뒤 우리 사회는 홍역을 앓았습니다. 세월호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아직 출범조차 하지 못한 상황에서 해수부가 내놓은 시행령안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정부가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막기 위해서 시행령으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가로막기로 작정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쓰레기 시행령'이라고 불렀고, 쓰레기 시행령의 폐기를 요구하며 거리에서 한 달 넘도록 싸워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세월호 참사 1주기도 지났습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당신은 7시간 동안 종적이 묘연했었는데, 올해 세월호 참사 1주기에는 유가족들이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던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를 외면하고 팽목항을 방문한 뒤에는 별로 특별히 중요한 일정도 없는 것 같은 외유일정을 떠났습니다. 유가족과 국민들은 국민들이 가장 아파할 때 그 아픔을 보듬어 주는 대통령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이 나라에 대통령이 있는가? 정치가 있고, 정부가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국민들은 이 나라에 대통령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유가족과 국민들은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했지만, 청와대로 가는 길은 매번 '근혜차벽'으로 가로 막혔고, 당신의 안위만을 지키려는 충성스런 경찰들의 캡사이신과 물대포와 폭력으로 얼룩져야 했습니다. 유가족에게마저 캡사이신을 뿌려대는 경찰의 모습, 시위대를 적으로 몰아대고 물대포와 폭력을 서슴없이 가하는 괴물 같은 경찰들 앞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은 너무 멀기만 했습니다. 

그 멀기만 한 거리는 절망이 대신 자리잡고 들어섰지만, 그 절망은 당신에 대한 분노로 다시 채워졌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은 당신의 비정함에 치를 떠는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마도 당신은 잘 모를 겁니다. 그럼에도 늘 당신은 유체이탈 화법 일인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 불통 대통령으로 불린 지 오래입니다.

진실 알고자 하는 유족들에게 쏟아진 혐오와 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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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조합원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역 네거리에서 세월호 시행령 폐기를 위한 1박2일 범국민 철야행동을 벌이자, 경찰이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로 유가족을 향해 난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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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당신을 대통령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고, 지금껏 당신을 대통령으로 존중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부정선거개입을 통해서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년 동안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당신의 이중적이고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계산된 태도에서 인간의 모습이 아닌 철면피한 괴물의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시기에는 유가족을 만나 손도 잡고 눈물도 짓다가도 정치적 상황이 조금 유리하게 전개되자마자 자신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리고 표변해버리는 당신의 모습에서 차디찬 얼음덩어리 야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가을 국회에서 울부짖는 유가족들 옆을 단 한 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당신의 모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가족들은 진실을 알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청와대 게시판에 굳이 글을 쓰게 되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알려줄 게 있어서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아이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애써왔습니다. 오로지 진실규명, 오로지 책임자 처벌을 통한 안전사회라는 시대적 과제를 온몸에 받아 안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모욕, 폄하였습니다. 

이번 시행령 입법예고 기간에도 정부는 엉터리 배·보상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마치 이 돈이나 받고 떨어져라 하는 듯한 모욕이었습니다. 능멸을 당한 유가족들은 눈물의 삭발식을 해야 했고, 아이들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다시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보도행진을 해야 했습니다. 

핵심은 그대로 둔 채 '문구'만 바꾼 시행령안

지난 한 달 중에서 당신은 울부짖는 유가족과 국민들이 보기 싫다고 해외로 떠나서 12일을 지내다 돌아오더니 다시 1주일을 몸이 아프다고 누워버렸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아프다고 누워 있지도 못하고, 배고파 밥 먹는 것도 죄스러운데 당신은 천연덕스럽게 잘도 지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서운한가요? 이 정도를 갖고도 서운하다고 하면 이 나라 국민들이 최소한 지난 1년 동안 당했던 설움과 고통은 정말로 모르는,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진상규명을 하자고 특별법을 만들자며 전국을 순회하고, 광화문과 국회와 청운동에서 노숙했던 밤들과 끼니마저 끊으며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던 유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당신이 해외에 나가 있고, 와병 중이었던 그 시간에 청와대가 바로 바라보이는 광화문 일대에서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경찰의 노골적인 적의에 찬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만은 알기를 바랍니다.

왜 유가족과 국민들은 쓰레기 시행령을 폐기하라고 대답도 없는 정부를 향해서 외치고 싸울까요? 국민들은 말합니다. "감추려는 자, 범인이다." 시행령안은 4.16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특별조사위 조직을 고위 공무원이 장악하여 실제 진상규명을 할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꽁꽁 감추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니까 '기획조정실장'을 '행정지원실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여전히 위원장과 각 소위 위원장들은 조사업무 등에 관여하지 못하게 막아서 정무직 위원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도를 시행령안에서는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진상규명국의 조사1과장은 국회에 특별검사를 요청하고, 고발과 수사 의뢰도 하고, 청문회도 진행하는 업무를 맡는 등 진상규명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이걸 시행령안에서 검찰 수사서기관이 맡도록 해놓았습니다. 즉 검찰의 지휘 하에 특별조사위원회 전체를, 최소한 진상규명국을 좌지우지하게 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또 안전사회과는 '4.16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조사와 대책 마련으로 특별법에서 정한 업무 범위를 최소화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위험 요소들을 점검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유가족과 국민들의 염원을 배반한 것입니다.

"나부터 조사하라"고 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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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참사 1주기인 4월 16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해외순방 출발에 앞서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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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핵심은 바꾸지 않고 몇몇 조항의 문구들만 바꾼 채 이 시행령안은 지난 4월 30일 차관회의를 통과했고, 내일(5월 6일) 오전 부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에서 처리한다고 합니다. 한 달 동안 내내 이 시행령을 폐기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안을 수용하라고 했지만 역시 당신과 정부는 불통정부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5월 4일) 여야 원내대표들이 만나서 이 시행령의 국무회의 통과를 보류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특히나 조해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6일 국무회의 의결을 보류하고, 시행령안을 보완해 처리할 것을 정부와 청와대 쪽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혹시 이런 요청을 받았는지요? 늦게나마 국회가 이 시행령안의 심각한 문제점을 인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시행령안대로 시행령이 제정된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행령인 대통령령으로 법률을 타고 앉아서 목을 조르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주호영 정무특보는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든다"는 그 말로 특별법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삭제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입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시행령을 당신과 당신의 정부가 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당부를 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이제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갈무리할까 합니다. 

정녕 두렵습니까? 당신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책임져야 할 일이 태산처럼 무겁고 커서 두렵습니까? 묻고 싶었습니다. 아니라면, 성역없이 조사해서 유가족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특별조사위원회에 "나부터 조사하라"고 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성역인 당신을 보호하려는 쓰레기 시행령을 폐기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에 나서겠다고 밝히십시오. 내일 오전 국무회의를 지켜보겠습니다. 

유가족과 국민들은 아직 힘이 모자라지만, 이 시행령을 그대로 통과시킨다면 지금보다 더 큰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근혜차벽으로 막는다고 해도, 경찰의 캡사이신과 물대포와 폭력으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으면 당신은 대통령의 권좌에서 물러나야 마땅합니다. 분노한 국민의 손에 의해 끌려내려 오기 전에 말입니다. 

부디 유가족이 경찰의 근혜차벽 앞에서 절망하고 울지 않도록, 그들이 당신과 정부를 믿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그런다고 돌아갈 수 있는 유가족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도 아이들이 없습니다.) 당신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고통 가운데에 있는 유가족과 함께 1년을 울면서 버티어 온 한 사람으로 마지막으로 드리는 당부입니다.

2015년 5월 5일
박래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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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권력이 벌이는 유체이탈 사기극

언론권력이 벌이는 유체이탈 사기극
[손석춘 칼럼] 재보선 결과 과도한 야당 책임과 과소한 언론 책임
 
입력 : 2015-05-04  17:24:46   노출 : 2015.05.05  10:04:28
손석춘 언론인 | 2020gil@hanmail.net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들머리에 쓰며 물음표를 덧붙인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선거가 그 상식과 무장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4월29일 4곳에서 치른 재보선 결과로 ‘정국 주도권’이 여당으로 옮겨갔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어도 과연 좋을까? 그 ‘해석’을 누가 했는가 찬찬히 짚을 필요가 있다. 재보선 다음날,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권력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심판받았다며 정쟁을 그만두고 경제 살리기에 나서라고 몰아세웠다. 새누리당 대변인 권은희는 집권여당과 언론권력의 속내를 압축해서 드러냈다. 재보선이 “박근혜 정부 3년차, 경제살리기에 더욱 매진하라는 격려의 뜻”이라며 “또한 국민을 괴롭히는 정치 공세를 지양하고 국민의 삶을 얼어붙게 하는 투쟁 정치를 멈추라는 뼈아픈 질책”이라고 언죽번죽 부르댔다.

과연 그러한가. 진실은 저들의 주장 속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선거 다음날 “문 대표, ‘친노’부터 넘어서야 살길 열릴 것” 제하의 사설에서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참패는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사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사설은 “새누리당이 ‘성완종 리스트’라는 대형 악재에 휘말려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며 야당의 패배를 부각했다. 비단 조선일보만이 아니라 많은 언론, 더구나 일부 진보적 매체에서도 어금버금한 주장이 나타났다.

그런데 어떤가. 선거가 있던 날, 조선일보 인터넷은 노무현 캠프에서 성완종에게 “2억 달랬더니 3억 보냈더라”는 큰 제목의 기사를 ‘당시 이재정 본부장 측’의 입을 빌려 머리로 배치했다. 이 기사를 보면 성완종 리스트는 정부여당의 ‘대형 악재’가 아니다. 그런데 기사 끝자락에 나오듯이 노무현 캠프가 성완종으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은 사실은 이미 2004년에 밝혀졌다. 당시 검찰은 성완종을 소환 조사했지만 기소하지 않았다. 불법 정치자금 규모가 비교적 작은 기업들은 ‘선처’했기 때문이다. 그 선거에서 불법 정치자금은 지금의 집권여당이 견줄 수 없을 만큼 훨씬 많았다. 그런데 그 기사를 머리로 올린다? 과연 이들을 언론인이라 할 수 있는가? 당일 지면 1면 기사는 “박 대통령 ‘성 두 차례 사면 진실 밝혀야’”이다. 이어 “정치부패 청산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다짐’을 표제로 부각했다.

선거 당일 조선일보 보도를 보기로 들었을 뿐, 재보선 정국 내내 조중동 신문과 종편은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주장을 날마다 살천스레 쏟아냈다. ‘성완종 리스트’를 결코 정부여당의 ‘대형악재’일 수 없게 여론화 한 그들이 선거 결과를 놓고 ‘대형악재가 있었음에도 정부여당이 이겼다’고 해석하는 작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가증스럽다가 적확하지 않은가.

조선일보 사설은 ‘진실’을 더 드러내준다. “투표율이 30%대 초·중반인 재·보선에서 지금의 야당이 이기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현 야권에 비판적인 50대 이상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문제는 50대 이상에게 조중동과 조중동 종편이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이다.

그래서다. 언론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재보선에 대해 우리 사회의 담론이 ‘과도한 야당 책임, 과소한 언론 책임’으로 기울어 있다고 분석한다. 더구나 해석되어야 할 당사자인 언론권력이 해석을 제 편의로 여론화하는 작태는 그 어느 ‘OECD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기극이다.

저들의 사기극이 가장 심각한 것은 야당이나 세월호 유족들 때문에 경제가 침체되어있다는 식의 주장을 서슴지 않는 데 있다. 명백한 왜곡이다. 경제 살리기를 못하는 주체는 다름 아닌 박근혜 정부 아닌가. 한국 경제가 침체되고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취업을 못해 방황하는 일차적 책임은 박 대통령에게 있다. ‘경제 민주화’를 공약으로 당선된 뒤, 정반대로 낡을 대로 낡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매달려 ‘규제는 암덩어리’ 타령이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보라. 청와대만이 아니라, 언론권력도 ‘유체 이탈’을 만끽하고 있다. 새정치연합과 문 대표가 ‘경제 정당’으로 방향을 잡아도 보도조차 않거나 ‘위장 전술’ 따위로 논평한 자들이 현 정부의 경제실정을 야당이나 세월호 유족 탓으로 돌리는 행태는 사기극의 절정이다.

   

▲ 손석춘 언론인

 

 

학자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따위로 몰아세울 윤똑똑이들을 위해 명토박아둔다. 나는 새정치연합과 문재인 대표에 대해 그들이 집권세력일 때 공약을 실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지금 언론이 가장 감시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성완용 리스트의 부정부패 추문에 휩싸인 현 집권세력이다. 그건 언론인으로 밥을 먹고 살아가는 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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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어린이날이 될 수는 없을까요?

 
 
[92번째 어린이날]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시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
 
김용택 | 2015-05-05 08:55: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어린이 헌장>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나 부량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어린이 헌장입니다. 
 
오늘은 92회 째 맞는 어린이 날입니다. 어린이 헌장 이대로 잘 실행되고 있을까요? 혹시 어린이들에게 미안하다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없을까요? 어린이도 하나의 당당한 인격체가 아니라 미성숙한 존재로서 보호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없을까요? 어린이날 약간의 선물과 어린이 공원이나 휴양지에 데리고 가 부모와 함께 보냈다고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없을까요?  
 
혹 내 자식이니까 어린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없을까요? 아니면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한 대타자로서 생각하시는 부모는 없을까요? 어린이 헌장에서 보듯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 하고,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규정은 어린이 헌장뿐만 아닙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아동이나 그 부모, 후견인의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종교, 정치적 의견, 민족적∙인종적∙사회적 출신, 재산, 장애여부, 태생, 신분 등의 차별 없이 이 협약에 규정된 권리를 존중하고, 모든 아동에게 이를 보장해야 한다.’(UN아동권리협약 제 2조) 

 
헌법과 UN아동권리협약에도 어린이는 공부가 짐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인권을 보호하고 신분이나 피부색, 그리고 빈부차에 따른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 10명 중 5명은 “부모와 아침을 먹지 못한다.” 
▲ 10명 중 5명은 “가족과 대화 30분도 안한다.” 
▲ 어린이들이 방과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학원” 
▲ 어린이들이 방과 후 가장 즐거울 때 “친구와 놀기” 
▲ 경제수준이 낮은 어린이일수록 “스마트폰 사용시간 많다.” 
▲ 어린이 수면시간, 10명 중 6명의 어린이 “11시 넘어 잔다”
▲ 어린이 스트레스 1위 “학원”
▲ 공부하기 어려운 과목 1위 “사회”
▲ 10명 중 2명 학교 체벌 경험

 

현재 15세 이하의 어린이 1,645만 명이 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공부해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문 산하기구인 참교육연구소가 지난해 3월 13일부터 28일까지 전국의 초등학교 5,6학년 어린이 1,955명이 참여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중 463명(30.2%)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공부해라”라는 말이였으며 그다음 많이 듣는 말이 “숙제하라”(9.21%)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조용히 하세요, 떠들지 마”였습니다.

어린이들이 얼마나 힘겨운 생활을 하는 지 어린이날을 맞아 부모들이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 번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설문결과를 한 번 보십시오.

이 설문에 따르면 부모와 아침식사 유무, 가족 대화 시간, 스마트폰 사용시간, 방과 후 가장 즐거울 때, 수면시간, 스트레스 1위, 가장 어려운 과목, 체벌 경험 등 15가지 항목의 객관식과 자유서술형으로 부모님과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듣고 있는 말, 듣고 싶은 말을 적어보도록 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린이 식생활을 보면 대상 어린이 10명 중 5명의 어린이는 평일 아침식사를 부모님 없이 형제(자매) 혹은 혼자 식사를 하거나 거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침을 부모님과 함께 먹는 어린이는 50.2% 정도였습니다. 학교 정규수업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의 하루 생활을 보면,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학원에 가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전체 어린이의 60.6%가 2시간 이상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어린이 10명 중 5명은 가족과의 하루 대화 시간이 30분 이하 또는 아예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놀랍게도 어린이들이 방과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학원’이었습니다. 전체 어린이의 42.8%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을 ‘학원’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공부하기(숙제포함, 29.1%) > 스마트폰(27.1%) > TV시청(24.2%)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방과 후에 컴퓨터 게임을 아예 하지 않는 어린이는 58.9%로, 스마트폰 사용을 하지 않는 어린이 18%로 보다 많았습니다.

어린이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일 1위는 학원 다니기(52.1%)> 2위 학업성적(48.4%)> 3위 따돌림 (19.8%) > 4위 외모 (15.8%)순으로 나타났다. 공부하기 어려운 과목은 사회(44.2%)> 수학(39.9%)> 영어(34.6%)> 과학(31.7%)> 음악(20.4%)> 미술(17.4%)> 국어(12.8%)> 체육(10.5%)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학원 수강 내용을 보면 영어> 수학> 국어> 과학> 사회> 체육> 음악 순으로 주지 교과의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10명 중 7명의 어린이가 영어 사교육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시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되 늘 보드랍게 해 주십시오’
 
1923년, 당시 인구 30만 명의 서울 거리 곳곳에는 이러한 글이 적힌 선전물이 무려 12만 장이나 뿌려졌고, 참가자들은 ‘경축 어린이날’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앞세우고 고적대 행진곡에 맞춰 파고다 공원에서 광화문까지 가두 행진을 벌였습니다.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이날 서울 종로구 경운동 서울 천도교본부 운동장에는 1000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모인 가운데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바로 천도교소년회ㆍ조선소년군단ㆍ불교소년연맹 등 40여 소년 단체가 연합해 마련한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우리의 첫 번째 어린이날 기념식이 이처럼 성대하게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이 큰 힘이 됐기 때문입니다. 방정환선생은 어린이를 정성껏 보살피고 소중히 키운다면 이들이 자라나 반드시 조국의 광복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이 제정되기 2년 전인 1921년, 소파방정환선생과 김기전ㆍ박래홍 선생님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전국적으로 어린이에게 존대말쓰기 운동을 펼치는 한편 어린이를 '아이'라고 얕잡아 부르던 말을 높임의 뜻이 담긴 '어린이'로 부를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후 1937년에는 일제에 의해 기념식이 강제로 금지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1961년 아동복리법으로 5월 5일이 어린이날로 지정,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오늘은 92번째 맞는 어린이날입니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놀 친구가 없는 어린이들… 좋은 옷에 부족함이 없이 자라지만 그들 마음 속 한곳이 늘 텅 비어 있지나 않을까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데 학원과 학교, 집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의 욕심이 어린이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고 있는지요?
 
이번 어린이날은 어린이날 하루만 행복한 날이 아니라, 모든 날이 어린이날이 될 수 있도록 부모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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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제포럼] 불평등한 세상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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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5/05/05 10:53
  • 수정일
    2015/05/05 10:53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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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국제포럼] 불평등한 세상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 ... 여성부문세션
  • 여성부문세션 <평등세상을 위한 민주주의와 여성인권> 
     
    민주국제포럼 첫째날 <평등세상을 위한 민주주의와 여성인권>을 주제로 한 여성부문토론회 27일 한국기독교회관 민들레영토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에는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활동가들이 참석해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하고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변경혜 제민일보전기자의 사회로 먼저 한명희 여성역사포럼대표의 발제가 있었다. 한명희대표는 <여성대통령시대 여성은 정말 평등한가>라는 주제로 일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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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대통령시대, 여성은 평등하지 않다
     
    한대표는 <대통령이 여성이라고 해서 그 사회의 여성이 평등한가 라는 질문에 대부분 아니라고 답할 것>이라며 <일하는 여성들의 삶, 여성인권, 성평등한 삶이 정책에 우선시되지 못하면 아무리 여성대통령이라고 해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없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현정권의 반통일정책과 공안탄압, FTA·TPP 신자유주의정책을 지적하고 <집권초기부터 인사참사로 시작해 성완종리스트까지 도덕적이지도 못하고 부정부패한 정권>이라며 <이제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국민들을 범죄자취급하고 있다.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민주적이기까지 한 박근혜정권을 여성이라고 옹호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에서 성평등실현과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성주류화정책이 채택된 이후 제도적으로 많은 발전과 성과>가 있었지만, <신자유주의체제 강화와 보수정권 연장으로 그나마 진행됐던 성평등담론이 위축되고 여성정책의 후퇴, 진보거버넌스파괴 등으로 일하는 여성들을 더욱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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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예로 여성노동자의 성별임금격차, 고용형태에 따른 임금격차의 심각한 상태를 지적하며 특히, 여성비정규직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로 인해 <대부분의 여성이 인권유린 상태>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농정의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농민의 경우 <남성농민과 같이 농업수입 감소로 빈곤에 노출되고 가부장적 농촌사회에서 2중3중의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농업에서 여성농민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60.3%로 한국농업은 여성 없이 안되는 상황이며 여성농민이 농업의 실질적 후계자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에 따른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여성농업인육성지원조례가 있지만 현장체감도는 높지 않고 여성농민의 기여도에 비해 경제적 지위와 권리는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농민들의 신자유주의반대투쟁, 농업과 농촌에서 평등투쟁은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제시대 여성운동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서 나아가 민족해방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역사를 이야기하며 <일하는 여성들을 비롯한 여성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데 우리가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좀더 진지하고 폭넓게 공유하고 토론하며 실천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여성의 연대와 단결로 앞당기는 통일, 한반도 세계평화>을 주제로 엄경애 인천여성노동자회전사무국장의 발제가 이어졌다.
     
    분단은 성차별적 억압 확산, 여성의 소외화·차별화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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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경애전국장은 <김포에서 민통선 분단체험학교 평화해설사를 하고 있다. 김포는 분단으로 인해 남에서 갈 수 있는 최북단이고 통일에 대해 한번더 생각을 해보는 곳>이라며 발제를 시작했다. 
     
    먼저 엄전국장은 분단70년역사를 되짚어보고 <분단초기에 비해 민주주의가 발전한 듯 보이지만,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아직 있고 시시때때로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진보세력을 이적단체로 몰아서 탄압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분단과 남북대치는 군사문화를 확산시키고 성차별적인 가부장제가 결합해서 더욱 억압적인 문화와 엄격한 위계조직을 일반화하고 그래서 여성은 더욱 소외되고 차별하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일반적인 여성문제 해결, 성평등실현의 과제와 더불어 분단구조를 극복하는 통일운동과도 함께해왔다.>고 말했다.
     
    엄전국장은 여성운동역사를 정리하며 <일제시기에는 3.1운동에 죽을 각오로 조직적 참가를 하였고 직접 총을 들고 빨치산으로 싸우거나 군자금모금과 같은 재정활동도 하였다.>고 밝히면서 <해방시에도 좌우합작으로 여성조직을 결성하였고, 90년대에도 방위비삭감을 위한 천만인서명운동을 진행하였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코리아여성의 전쟁피해중 가장 큰 것은 일본군위안부문제>이며, <현재 피해할머니들이 50여분 남아계신데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피해국여성들의 연대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코리아여성운동은 <다양하게 반전구축활동, 평화문화운동, 평화교육·연구활동을 대중적 일상적으로 진행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한반도DMZ평화걷기운동을 국제연대를 통해 더 대중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반통일정권 때문에 남북교류가 주춤하고 있지만 독일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민간차원에서 교류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반도DMZ평화걷기운동의 정식명칭은 <2015 WOMEN CROSS DMZ>로 5월24~25일 여성평화걷기축제와 국제여성평화심포지엄이 열린다. 세계적 여성운동가들과 코리아전참전 12개국 여성평화운동가들이 준비하고 있다.
     
    다음으로 한선이 서천군비정규직지부지부장은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를 주제로 발제했다.
     
    경제의 세계화 · 빈곤의 여성화 막기 위해 초국가적 연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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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선이지부장은 먼저 <비정규직>용어에 대해, 80년이후 신자유주의정책에 따라 <온 세상을 하나의 공장, 하나의 시장으로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이념이 결국 노동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을 던져주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동의 유연화는 본래 <노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노동자의 삶을 여유롭고 윤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노동자의 요구가 중심이 아닌 자본의 입맛에 따라 이용>되면서 <자본의 힘에 떠밀려 삶의 자율성을 잃고 돈벌이에 급급해 하루하루를 사는 노동자의 삶을 만들어왔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노동유연화의 대표적 수단인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양산 현실속에서 <여성의 경우 노동의 조건과 상태에 관해 심각한 하향화와 양극화를 경험하고 구조조정의 칼날 아래 성차별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구조조정정책아래 여성노동자들이 우선해고되면서 노동시장에 비공식부문으로 참가하기도 했지만, <임금동결이나 고용전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공식부문으로 일하는 많은 여성이 임금보충을 위해서 비공식부문에서도 노동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저임금, 장시간노동, 기업복지에서 외면, 고용조건과 부당해고, 무원칙 해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결국 여성의 빈곤화와 더불어 노동강도증가를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덧붙여 현재 10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중에서도 <여성과 청소년, 이주노동자들이 더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지부장은 충남지역을 예로 들며, <2013년기준 15개시군 지자체소속 무기계약직 노동자들 중에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무기계약의 경우는 남성비율이 59%로 높았고 또 고용불안정한 여성의 경우에는 68%로 월등하게 높게 나타났다.>며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한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약화시키는 경제의 세계화, 빈곤의 여성화를 막기 위해 초국가적인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여성노동자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데 반해 여성의 상황은 국가적 규제나 노조의 범위에서도 벗어나있다. 여성노동자는 남성중심의 노동조합속에서도 소외되고 있다.>며, <여성노동자들은 수동적인 생존전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변혁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계속해서 박소현 고려대세종캠퍼스총여학생회장은 남코리아여학생들의 처지에 대한 이야기로 발제를 시작했다.
     
    온사회 평등과 민주주의투쟁에 여학생회가 함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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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소현총여학생회장은 <남코리아에서 지방대, 인문계, 여성 세가지단어는 정규직취업이 불가능한 3대조건이다. 노동유연화로 비정규직을 대량양산하고 있는 기업들이 수도권대학에 있는 상경계열 남성 위주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 때문이다.>며, 대학생 단기아르바이트 채용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이같은 불평등은 대학내도 마찬가지로 <4월21일 서울대연구소에서 발표한 전국남녀기혼대학·대학원생들의 학업·가정생활 조사결과에 따르면, 학업 때문에 결혼을 포기해본 적이 있다는 답변이 34%에 달했고 그중 한명의 여성은 임신사실을 연구실에 알렸다가 지도교수에게 왜 피임을 안했냐고 오히려 면박을 받았다고 한다.>며, <논문심사과정에서 지도교수의 성추행과 성희롱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성에 대한 배려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며 여학생회에 대한 역차별논란으로 <전국적으로 여학생회자체가 부정당하고 심지어 여학생회가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원래 역차별용어는 <여성의 권리보장이 남성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져서 오히려 남성을 차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등장으로, 여학생회가 사업을 벌이는데 있어 남성인권을 탄압한다고 주장한다.>면서 <눈에 보이는 불평등을 이야기하면 차별이라는 낙인이 찍혀 공격당하고 매도당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인권을 말하는 데 있어 중심을 성대결,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 아니라 모든 착취당하는 계층들의 연대를 통한 온사회 평등에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파편화된 인간관계>에서 찾았다.
     
    덧붙여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당하는 불합리한 것들을 개인의 자질부족으로 생각하고 좌절한다. 여학생조직이 올바른 노선을 갖고 이렇게 파편화된 학생들을 이끌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제들이 더 심화된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여학생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현존하는 여학생회들이 더이상 전처럼 일방적인 여학생의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온 사회의 평등, 이 사회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면 여학생회존재가 부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인권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길에 학생들이 앞장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클라우디아 하이트 독일좌파당(링케)국제담당은 독일 여성들의 평화운동 사례를 소개했다.
     
    제국주의반대투쟁과 사회주의 이상은 독일평화운동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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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트는 대표적인 예로 독일 여성평화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소개하며 <로자는 세계1차대전 당시 투옥되었다. 그 당시 집권당이 로자가 대중을 이끌어서 전쟁을 반대하는 커다란 운동을 조직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결국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었다는 이유만으로 우익민병대에게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암살되었지만,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지금도 독일에서 평화운동이 계승하고자 하는 유산이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평화운동사례로는 군사연습을 위한 도시건설계획반대운동과 군의 모병활동 반대운동을 전했다. 
     
    하이트는 첫번째사례에 대해 <아프가니스탄 등에 파병되어 있는 독일군들은 이 지역에서 다 훈련받아야 한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주를 위해 만들어지는 도시가 아니라 군사훈련만을 위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지하철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미 10억 유로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군사도시건설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곳을 전투기지로 해서 이란과 같은 나라에 해외파병이 더욱더 확대될지 모르고 유럽에 군대를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주민들과 함께한 항의시위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토론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바로 시위참여 여성들이 사진에 찍힌 이야기였는데 <여성들이 분홍페인트스프레이를 가지고 시위에 참여해서 군대가 훈련을 위해 지나갈 때 탱크에 분홍색칠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군대가 분홍색이 칠해졌다는 것에 아주 짜증내했다. 군인들이 스프레이 칠하려는 여성들을 막으려고 쫓아다녔다.>고 전했다. 결국 이걸 막기 위해서 군사지역보호구역 팻말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군사도시건설 반대운동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이트는 두번째사례로, <군측에서 학교를 다니며 군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쿨한 것인지, 총을 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설명을 하며 모병활동을 했다.>며 <학부모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학부모들을 조직하여 운동을 시작했고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모병활동을 막겠다고 결정한 곳도 많다.>고 전했다.
     
    이어 <학부모들이 나섰기 때문에 군대가 들어오지 않는 학교라는 운동이 크게 일어나, 군에서 발간하는 보고서에는 이 운동이 모병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언급했고, 군측이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기분이 좋다.>고 말해 또한번 웃음을 자아냈다.
     
    마지막으로 신경미 충남성평등교육문화센터대표가 <성평등현황과 여성의 역할,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안과 국제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발제했다.
     
    한국성평등지수 점점 낮아져, 체계적인 양성평등교육 절실
     
    신경미대표는 성평등현황과 관련된 조사자료를 근거로 <한국의 성평등지수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고 평가했다. 
     
    먼저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14 세계성평등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42개 중에 117위를 기록했다.>며 <이는 경제활동참여기회와 교육, 건강, 정치참여 등 4개 부분에서 성별격차를 수치화해 매긴 순위로 한국은 다양한 부분에서 성별 격차가 심각한 상태>라고 발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강부분에서 평균수명이 1위로 높지만 출생 시 남녀성비불균형은 120위, 74위이며 정치참여부분은 여성국회의원이 91위, 여성국무위원이 94위, 여성최고지도자 39위 합해서 93위를 기록했고, 정치참여 및 기회영역에서 취업자 중 관리직, 전문직비율 성격차수준은 2009년 변화가 없는 가운데 순위가 더 떨어져 심각하다.>고 설명했다. 
     
    또, <유사직종 임금격차 또한 2007년을 제외하고 비슷한 점수로 낮은 점수를 이어가고 있는 형편으로 유사직종 임금격차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고 평하며 이밖에 정치권한 영역에서도 장관과 국회의원 성비율이 큰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폭력에서 안전한가>를 살펴봤을 때, <한국성폭력발생건수는 2013년 2백만7천건으로 전년대비 3.2% 증가했다. 성폭력 건수는 증가하고 있으며 성평등지수가 낮아지듯이 성폭력피해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평했다.
     
    신대표는 성매매가 빈번한 지역의 성폭력 발생빈도를 보면 <성매매 집결지역이 성폭력 다발지역>이라며 <성폭력과 성매매 증가는 양성평등에 대한 기본인식이 양성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기본 증거>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성평등인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유아기때부터 양성교육을 체계적으로 하도록 법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현재 남코리아는 대학교육과정에 양성평등교육계획이 세워지고 있는 단계이며 성평등지수 1위인 아이슬랜드는 2세부터 양성평등교육이 시작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외국사례를 공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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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가 끝난 후 발표자들간 자율토론과 질문이 이어졌다.
     
    독일통일과정에서 여성의 역할과 독일 성폭력·성매매법규 현황, 남코리아의 비정규직투쟁과 여성농민들의 신자유주의반대투쟁 등에 대해 발표자들 간 질문과 토론이 있었다. 그밖에 청중질문으로 독일 경제상황 변화에 따른 모병활동의 변화, 군사도시 건설이 무상교육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한 질의응답이 오갔다.
     
    민주국제포럼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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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정부안 수용? <조선>의 오도... 개정안 낼 것"

 

특조위도 긴급 입장 발표 "허위·왜곡 보도, 법적 책임 묻겠다"

15.05.04 20:39l최종 업데이트 15.05.04 22:03l

 

 

이석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오는 6일 국무회의 통과를 앞둔 정부의 세월호 시행령안에 반대한다고 거듭 밝혔다. 이 위원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정부안은 세월호 특조위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훼손해 진상 규명을 방해한다"며 "이 시행령이 공포된다면 개정안을 내겠다"고 전했다.  

특히 이 위원장은 이날 정부안을 수용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선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특조위도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허위·왜곡 보도에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4일 <조선일보>는 "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시행령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던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원장 등 일부 특조위 위원들이 정부 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오는 6일 시행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특조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고 보도했다.

"정부안 통과되는 즉시 개정안 낼 것... 수용이라고 오도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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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앞둔 지난 4월 15일 오전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특조위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하고 기능과 권한을 약화시킨 해수부 시행령(안)을 철회 및 특조위 안을 바탕으로 한 시행령 제정을 박근혜 대통령에 촉구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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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정부안 합의' 소식이 알려진 뒤 이석태 위원장은 "오는 6일 국무회의에서 정부안이 강행된다며 저희로선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배정된 예산으로 인력을 충원하고, 즉시 개정안을 내는 등 정부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라며 "이를 수용했다고 오도하면 안 된다"고 전했다. 

또한 앞서 보도에서 "유족들과 지난 주말 대화를 거쳐 정부안을 받아들이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정부 시행령의 문제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유가족과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협의한 적은 없다"고 바로 잡았다. 

특조위도 이날 오후 5시 17분께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특조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조위원들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적이 전혀 없다"며 "정부 시행령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공포되면 시행령으로서의 효력은 발생하겠지만, 특조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령 개정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특조위는 "조선일보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내용이므로 허위 및 왜곡 보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며 "조선일보는 즉시 기사를 삭제, 정정 보도하고 특조위에 사과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특조위 제대로 하자는 취지 정부가 이해 못해 매우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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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앞 연좌농성에 돌입한 세월호특조위 이석태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원, 비상임위원들이 지난 4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하기 위해 이동하자, 경찰들이 이를 저지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해양수산부가 발표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시행령 수정안 철회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해수부가 발표한 특별법 시행령 수정안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입법취지를 호도하는 문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다"며 "대통령의 결단만이 희생자와 유가족의 한을 풀고 국민의 진상규명 염원에 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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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석태 위원장은 지난 4월 27일부터 7일 동안 정부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을 벌인 바 있다. 특히 지난 4월 30일에는 이 위원장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며 면담을 위해 청와대로 향했으나 경찰 병력에 가로 막혔다. 이후 지난 3일까지도 청와대로부터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자 그는 "더 이상의 농성은 의미가 없다"며 농성을 중단했다.

이날 이 위원장은 농성 중단을 알리는 보도자료에서 "오늘 밤 21시를 기하여 비록 특조위 위원장이 광화문 광장을 떠나지만, 기존 입장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며 "특조위가 반대하는 입법 예고 수정안을 국무회의에서 그대로 통과시킨다면, 시행령 개정 운동을 포함하여, 특조위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활동 보장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특조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부 시행령안 폐기를 요구해왔다. 먼저 ▲ '기획조정실장' 권한이 지나쳐 특조위 독립성을 현저히 침해하며 ▲ 특조위의 업무 범위를 '재해 재난 예방'과 '안전 사회'가 아닌 해상 관련 업무로만 축소시키고 ▲ 진상규명 등 업무를 정부 공무원이 지휘·감독하며 ▲ 직원을 120여 명→90여 명으로 줄여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후 지난 4월 29일 정부가 한 차례 수정안을 제시했지만, 논란이 됐던 정부 시행령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수정안은 ▲ '기획조정실장'을 '행정지원실장'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진상규명·안전사회 건설대책 등 각 부서 업무를 총괄하는 기능은 그대로 뒀고 ▲ 전체 정원은 출범 시 90명으로 하되 6개월 뒤 확대하도록 했으며 ▲ 안전 사회 과장 업무 범위를 "다른 부처 업무와 겹칠 수 있다"는 이유로 '416 세월호 참사 관련'으로 한정했다. 

이와 관련 이 위원장은 "특조위 활동을 제대로 하자는 취지를 정부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어 매우 유감"이라며 "아직 국무 회의 통과가 남아 있어 답변하기 조심스러운 상황이지만, 정부 시행령 안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린 뒤 개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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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폭력에 멍든 5살 연수의 ‘SOS’…어른들은 외면했다

등록 :2015-05-04 19:56수정 :2015-05-04 22:05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일러스트 이강훈 leebido@daum.net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② 방관

 

다섯 살, 연수(가명)가 죽었다. 연수는 유독 집에만 들어오면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눈물도 많아졌다. 자장면을 다 먹고 고봉밥을 한 그릇 더 비웠다. 그런 아이를 아빠는 때렸다. 다시 울었고, 바지에 오줌을 지렸고, 손톱을 뜯었다.

 

목격자는 어른들이었다. 신고해야 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저하고 외면하고 회피했다. “아는 사이” “이번만” 등이 이유였다. 어른들이 연수가 보낸 구조신호를 무시하는 사이, 아빠와 엄마는 약으로 연수의 멍을 지우고, 거짓말로 상처를 변명했다. 어른들이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다. 판결문과 공소장 등 자료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연수의 마지막 6개월을 되짚었다.

 

뇌출혈로 죽은 연수 
학대 신고 의무자들은 
구조신호를 목격하고도 
응답하지 않았다

 

사망 2013년 9월21일 밤 11시. 연수를 건네받은 간호사는 “동공-반응 없음”이라고 써 내려갔다. 아빠의 품에 안겨 응급실에 도착한 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당직 의사는 아빠에게 응급처치를 위해 경위를 물었다.

 

“혼나다가….”

 

“씻고 나와 방으로 가다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

 

밤 11시, ‘들려온’ 딸의 상태를 아빠는 설명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빠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함께 온 (연수가 고모라고 부른) 새엄마는 침착했다.

 

“경위는 잘 모르고 평상시에 잘 넘어져요.”

 

보호자들의 두서없는 진술은 응급진료기록부에 고스란히 남았다.

 

“같이 내원한 보호자 진술로는 혼나는 과정에서 경기하고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넘어졌다고 함. 오른쪽 눈 주변으로 피멍. 다친 경위에 대해 물었으나 정확하게 진술하지 않고 잘 모르겠다고 함.”

 

응급수술이 가능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5시간 뒤 연수가 수술대에 올랐다. 뇌출혈은 급성과 만성이 혼재돼 있었다. 머리는 출혈로 가득했다. 연수는 겨우 하루를 더 힘겹게 살았다. 2013년 9월23일 밤 11시였다. 낮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 가을치고는 무더운 날이었다.

 

연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이 찾아왔다. 관할 지역의 경관, 과학수사반 등 3명은 연수의 죽음에 대해 역할을 나눴다. 연수는 급성과 만성의 뇌출혈로, 몸의 멍으로 학대를 ‘증거했다’. 연수가 처음 실려간 병원의 응급기록지는 그날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살피는 일은 경찰에게는 가욋일이었다. 침묵하는 가족, 병원 사이에서 죽음은 사고사를 의미하는 ‘변사’로 처리됐다.

 

연수네 식구는 아빠와 연수, 연주 세 부녀와 엄마와 지연이, 지혜 세 모녀가 한 살림을 차린 지 6개월 만에 식구가 줄었다. 아빠는 새 가족을 꾸리기 몇달 전 이혼을 했고, 새엄마도 이혼 경험이 있었다. 연수와 연주는 새엄마를 “고모”라고 불렀다. 지연이와 지혜는 아빠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150일 전 아빠가 연수를 데리고 한 대학병원 정신과를 찾았다. 아빠는 연수의 욕설, 잦은 거짓말이 고민이라고 했다. 손톱을 뜯는 버릇도 고쳤으면 했다. 친엄마와 살다 아빠한테 온 지 한 달 만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연수의 얼굴에서 멍자국을 발견했다. 정신과 의사는 아빠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그런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들 중 한 명만 눈뜨고 있었다면…

 

아빠의 발길질을 본 이웃 
멍을 확인한 어린이집 교사
머리를 꿰맨 의사와 간호사

 

그들은 모두
잊히길 바랄뿐…
그 사이 학대는 동생에게 갔다

 

 

연수의 이상행동은 원인이 분명했다. 의사가 “잦은 학대 경험(매, 언어폭력)”, “아버지에게 체벌” 등의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연수 치료를 위해 가장 급한 것은 아빠를 신고하는 것이었다. 의사는 신고의무자였다. 그럼에도 의사는 경고만 했다.

 

 

100일 전 2013년 6월, 베란다에서 벌을 받던 연수가 아빠의 발길질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이웃이 있었다. 새엄마가 십수년 동안 동네 언니로 알고 지낸 김승미씨가 수박을 자르다 벌떡 일어섰다. 김씨 말고 이웃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데리고 온 딸의 충격을 걱정할 만큼 연수 아빠의 발길질은 거셌다. 김씨가 아빠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네가 아는 사람이라 넘어가는데… 만약 내가 너를 몰랐다면 아동폭행으로 신고했을 거야. 만약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연수의 구조신호를 무시하기는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였다. 2013년 6월 어느 날 한 어린이집. 똥을 눈 연수를 닦아주기 위해 교사가 들어섰다. 엉덩이 밑 허벅지 쪽에 여기저기 가늘고 길쭉한 멍자국이 보였다.

 

“연수야, 괜찮으니까 말해볼래?”

 

연수는 거듭된 질문에 “맞았다”고 답했다. 교사는 폭행 사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신고는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는 법상 신고의무자다.

 

한 달 뒤인 7월 어느 날이었다.

 

이 교사는 등원한 연수의 왼쪽 눈두덩에 지름 10㎝ 크기의 둥근 멍자국을 봤다.

 

“왜 멍이 들었어?”

 

“넘어져서 그래요.”

 

교사는 결국 ‘고모’한테 전화를 했다.

 

“거짓말을 해서 혼냈어요.”

 

돌아온 답은 오히려 담담했다. 교사는 이 또한 일일보고서에 기록했다. 어린이집 원장도 이날을 기억했다. 하지만 원장도 교사도 신고하지 않았다. 이날은 연수가 어린이집에 나온 마지막날이었다.

 

원장은 이날의 상처에 대해 “신발 모양이 나올 정도로 딱 봐도 맞은 멍이었다”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이렇듯 연수가 몸으로 보낸 구조신호는 번번이 응답받지 못했다.

 

결국, 연수는 죽었다. 죽음은 사고로 처리됐다. “넘어졌다”는 보호자들의 진술은 의학적 상식과 불일치했다. 경찰은 그 진술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침묵했다. 어른들은 공모자였다. 병원의 침묵에,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찰도 학대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연수가 죽음으로 알린 마지막 신호 또한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동생 닿지 못한 구조신호가 반복되는 사이, 동생은 언니의 고통을 물려받았다. 동생 연주도 언니처럼 손톱을 물어뜯었다. 배꼽을 뜯다가 생채기를 냈다. 밥을 편식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많이 먹었다. 모든 게 맞을 이유였다. 새엄마 딸인 지연이는 경찰서에서 “삼촌(아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진술했다.

 

멍은 일상다반사였다. 아빠는 학대를 멈추는 대신 성실하게 약을 발랐고, 먹였다. 동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새엄마는 그 이유를 경찰에서 말했다.

 

“일단은 때린 게 드러날까봐 무서웠어요.”

 

동네 약국에서는 당시 이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타박상에 바르는 약은 흔하다. 학대는 약이 멍을 지우는 시간보다 잦았다. 이번에는 연주의 구조신호가 시작됐다. 10월 어느 날, 연주는 ‘두피의 열린 상처’를 한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연수의 죽음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그 죽음이 사고로 결론이 난 것과 같은 시기다. 병원에서는 연주의 상처가 학대의 결과라는 것을 몰랐을까. 새엄마는 급정거하는 차 안에서 다친 상처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의학적 소견을 참조해 폭행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병원은 침묵했다.

 

“연주가 사나흘 아니면 일주일 결석하고 오면 그때마다 상처가 있었고 멍이 들어 있었어요.”

 

연주가 다닌 어린이집의 담임교사는 연주의 멍을 기억했다. 12월에는 소변에서 피가 비쳤다. 닷새를 결석한 1월, 열흘을 결석한 2월 어김없이 몸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어린이집 담임교사가 기억하는 멍의 횟수만 10여 차례, 어린이집 원장도 대여섯 차례를 기억했다. 얼굴에 긁힌 상처와 볼과 이마 쪽의 멍, 팔, 다리, 엉덩이 부위에 몽고반점과 같은 멍자국…. 교사가 밝힌 멍의 기억은 표적지처럼 정확했다. 피와 멍을 본 교사들, 이들도 신고‘의무자’였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

 

아빠의 발길질을 목격했던 김승미씨가 다시 그 집을 찾은 것은 연수가 죽고 나서다. 동생 연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멍이 오른쪽 얼굴 반을 가릴 정도였다. 며칠 뒤 다시 찾아 연주 얼굴과 어깨의 멍을 확인했다. 김씨는 친엄마를 찾아 나섰다.

 

 

연수 친엄마는 큰딸의 죽음도 해를 넘기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보험 처리를 위해 서류를 떼던 과정에서였다. 죽음을 의심하기 힘들었다. 배운 사람이, 여유있는 사람이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맡긴 두 딸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연주가 얼굴에 멍을 달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는 연주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곧바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도움을 구했다. 2014년 5월, 연수와 연주를 아빠에게 보낸 지 1년2개월, 연수가 죽고 연주가 학대를 물려받은 지 8개월 만이었다. 아빠는 집에서 체포됐다. 경찰은 연주의 학대를 수사했다. 그러다가 8개월 전 연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수가 숨지기 이틀 전 실려간 병원의 응급기록지를 지나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결국 아빠는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아빠는 연수의 죽음을 사고로 가장해 사망보험금까지 수령했다.

 

아빠는 5년형을 받고 복역중이다. 새엄마는 벌금형을 받고, 자신의 두 딸을 키우며 산다. 연주는 친엄마에게 돌아갔다. 더이상 식탐을 부리지 않는다. 대소변도 의젓하게 스스로 해결한다. 수사를 맡았던 경찰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다. 이웃은 기자에게 그들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연주에게 언니 노릇을 곧잘 했다는 연수는 어떤 아이였을까. 일일보고서 몇 줄로 추측해볼 뿐이다. 그 안에서 연수는 다섯 살 꼬마 그대로다. “바람이 시원하다”고 이야기하고,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하며 즐거워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연수는 어린이집이 더 좋았을까. 오후에 선생님 차량이 가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일일보고서(김연수)

 

7월2일 “바람이 시원하다며 이야기함.”

 

7월4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함.”

 

7월5일 “오후 시간 선생님 차량 가면 눈물 보임.”

 

7월8일 “거짓말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거 같음.”

 

7월11일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해보면서 즐거워함.”

 

7월15일 “얼굴, 눈에 멍들어 옴.” “거짓말을 해서 혼났다고 함.”

 

7월16일 “세수 깨끗이 하겠다고 이야기함.”

 

7월18일 결석

 

 

 

연수는 죽었지만, 모두들, 별일 없이 산다.

 

연수의 멍을 목격한 어린이집 교사와 원장, 발길질을 본 이웃, 응급실 의사, 간호사, 수술을 한 의사, 사고사로 결론 낸 경찰, 다 무탈하다. 연주의 머리를 꿰맨 의사, 피와 멍을 본 어린이집 교사도 하나같이 사건이 잊히길 원했다. 이들 또한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일러스트 박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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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13년 “사법정의에 환상 버렸다”

 
[인터뷰] '연행전문'이 된 권영국 변호사 "민중이 권력 행사할 정치적 모색 시작해야"
 
입력 : 2015-05-03  18:31:00   노출 : 2015.05.04  11:44:59
이하늬 기자 | hanee@mediatoday.co.kr    
 

“연행 전문 변호사가 됐어요. 연행 당한 사람을 빼내주는 게 아니라, 연행을 당하는 변호사.” 권영국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권 변호사는 세월호 1주기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다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지난 2013년 7월 대한문 집회에서의 연행에 이은 두 번째다. 당시 그는 경찰의 집회 방해에 항의하다 연행됐다. 두 번 모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됐다. 

권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즉각 규탄성명을 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한 변호인에 이름을 올린 변호사는 50명이 넘었고 서울중앙지법 영장실질심사 법정에는 34명의 변호인이 출석했다. 이대순 변호사는 “권 변호사를 구속한다면 변호사업계 전체의 업무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다음날 오전 2시 10분께 풀려났다. “신경이 굉장히 곤두서있었어요. 경험상 결정이 늦게 나면 영장 발부에요. 그래서 사실은 자포자기 상태였어요. 구속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구속의 의미가 신경을 건드렸지요. 내가 검찰과 여러 건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데 판사가 검사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죠.”

검찰뿐 아니라 기업도 그를 싫어한다. ‘삼성전자서비스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티브로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무효 소송’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 취소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등이 적힌 서류가 사무실에 가득했다.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해우법률사무소에서 권 변호사를 만났다. 

   
▲ 권영국 변호사. 사진=이하늬 기자
 

경찰과 검찰, 기업이 싫어하는 변호사

권 변호사는 2002년 권두섭, 강문대, 김영기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을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노동운동도 법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 변호사의 나이 마흔이었다. 변호사가 되자마자 이를 택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애초 3년 정도는 집에 ‘돈을 벌어다 줄’ 생각이었다. 실제 사법연수원에 있을 당시 괜찮은 법률사무소에서 제의도 받았다. 

“조건이나 이런 건 다 이야기가 됐었고 서로 얼굴만 확인하면 되는거였어요. 법률사무소 면접을 가는 날 권두섭 변호사가 연락이 왔어요. 면접 직전에 서초동에서 잠시 만났지요. 민주노총 법률원 계획서를 들고 왔더라고요. 순간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거죠. 면접을 보류하고 집으로 갔어요. 한 3주 정도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할 바에야 지금 하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이 결정에는 노동운동 경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방위산업체 ‘풍산’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려다가 인사조치됐고 1988년 회사 공장 폭발사고로 노동자가 숨지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해고됐다. 몇 년 동안 복직을 위해 노력했지만 회사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복직에 실패한 후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노동자를 위한 변호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당장의 생계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했어요. 결국은 노동자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풍산에 있을 때 한 노동자가 그랬어요. ‘당신은 대학 나온 사람 아니냐. 상황이 불리해지면 당신은 얼마든지 떠날 수 았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느냐’ 그 말이 굉장히 가슴에 와서 꽂혔고 ‘여러분이 나를 밀어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어요. 배신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는 인터뷰 내내 ‘믿음’ ‘배신하지 않겠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 올해 초 열린 '국민파업집회'에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권영국 변호사가 합법적인 행진을 막고 있다며 경찰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냐”던 노동자

권 변호사는 노동자들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노동문제,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집회, 기자회견 현장에서도 늘 함께한다. “권영국이 여러 명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맡고 있는 법정 싸움만 챙겨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굳이 현장에 나오는 까닭을 물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굳이 연행되고 구속영장이 청구될 이유도 없다. 

“사무실이나 법정은 뒤처리하는 곳이에요. 현재 진행형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요. 젊은 변호사들에게 그래요. 현실을 정면으로 봐라. 그래야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내야 하는지 문제의식도 갖고 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도 갖게 된다. 사건으로 만나게 되면 늘 타인의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민주주의 후퇴나 경찰 인권침해, 노동현장의 권리침해가 타인의 문제일까요.”

그는 애초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 순응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강원도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살아왔고 학창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전부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배들이 교복자율화 투쟁을 벌였어요. 저는 공부하기 싫은 선배들이 자기 과시 하고 싶어서 하는 시위로 보고 동참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마주한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청재킷을 입은 남학생이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걸 봤어요.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도 그 남학생은 '살인마 전두환 물러나라'고 외쳤어요. 데모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배웠는데. 저렇게 피흘리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뭐지?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은 서 있었어요. 그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기 위해 일부러 수업도 빠져보고 일탈을 했던 것 같네요.”

   
▲ 경찰에 항의한 권영국 변호사가 경찰이 뿌린 최루액을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사법정의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노동변호사·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지 13년째, 그는 일이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만 갈수록 친권력·자본적으로 구성되는 사법부, 그리고 그 운동장에서 싸워야 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쌍용차 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개의 경우 2심 법원의 판단이 대법원까지 이어진다. 2심 법원까지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것이고 대법원은 법리적인 해석만 다투기 때문이다. 당시 권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졌다. 쌍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에서. (중략) 대법원에 일말의 기대를 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참담하다. (중략) 오늘로서 나는 천민자본과 이를 옹호하는 권력의 카르텔이 너무도 강고한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망상을 버리도록 한다. 이 땅을 우리 후손들에게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민중이 진정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모색을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정치적 모색’에 대해 물었다. 현실 정치 참여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노동기본권을 침탈하는 자본을 규탄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권리침해를 구제하는거나, 제도정치를 하거나 모두 정치적 행위라고 봐요. 경우에 따라서 가능하다면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정말 필요하다면 국회의원 출마도 못할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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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간 갇혀 산 민이…13살 7.5kg 소녀는 미라 같았다

등록 :2015-05-03 19:39수정 :2015-05-04 10:33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leebido@daum.net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leebido@daum.net
[탐사기획] 부끄러운 기록 ‘아동 학대’

 

13살 민이와 또래 신체 표준 비교
13살 민이와 또래 신체 표준 비교
2013년 2월12일 낮, 한 소도시의 병원 응급실에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남녀 한 쌍이 내렸다. 남자의 손에 축 늘어진 아이가 들려 있었다. 13살 민이(가명)였다. 남자의 딸인 민이는 그해 설을 이틀 앞둔 2월8일 구토를 하며 음식물을 토하고 죽었다. 민이는 죽기까지 약 4600일을 살았다. 그동안 자란 키가 109㎝였고, 몸무게는 7.5㎏이었다. 또래 아이들(12~13살)의 평균 키·몸무게인 152㎝, 43㎏과는 차이가 크게 났다. 민이의 주검을 본 경찰은 “마치 미라와 같았다”고 말했다.

 

부부는 민이가 숨진 지 나흘 만에 병원을 찾았다. 나흘 동안 몸의 수분 등이 증발한 점을 고려하면 아이의 몸무게는 죽기 직전 8~9㎏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는 아이의 맥박과 동공 등을 확인하고 사망을 확정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였다. 의사는 사체검안서를 쓰고 곧 경찰에 신고했다. 민이가 집 안에 갇혀 지낸 지 9년 만에 사회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민이가 미웠다. 25살, 결혼 4년 만에 얻은 첫아이였지만, 양육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맞은 아이는 엄마에게 기쁨이 아닌 스트레스였다. 남편은 물론 시집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째 현이(가명)가 태어난 뒤, 엄마의 관심은 민이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아내가 민이에게 별로 정이 없었다.” 아빠의 증언이다. 민이는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짜증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가정불화에 경제적 곤란이 겹쳤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가족이 한곳에 머물러 살 수 없게 됐다. 잦은 이사 탓에 2006년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친인척들과 연락도 끊겼다. 아이는 물론 엄마도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아빠는 빚쟁이를 피해 멀리서 일했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만 집을 찾았다. 빈곤은 다시 불화를 키웠고, 민이네 가족은 사회적으로 완벽히 고립됐다.

 

 

2004년 2월 어느 날, 네 살 민이가 울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어쩌지 못하다, 엄마가 막대기로 아이를 때렸다. 아이의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폭행이었다. 엄마는 10년 뒤 경찰 조사에서 “아이가 넘어져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 살 아이가 넘어져서는 생기기 힘든 부상이었다. 경찰 조사가 계속되자 엄마는 자신이 민이를 때렸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민이는 방 한쪽에 누워 지냈다. 깁스를 푼 민이가 겁을 먹고 걷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걷기 연습도 시키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민이는 어느 순간 그저 ‘누워 있는 아이’가 되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 말없이 민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이가 다쳐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부부는 민이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돈도, 의지도 없었다. 아빠는 “나중에 살림이 나아지면 치료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아진 뒤에도 민이는 치료받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거나 장애아동으로 신고해 치료를 받도록 할 수 있었지만 부부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민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꿨는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랐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2013년 2월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민이는 9년 동안 방에서 누워 지냈다.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몸무게는 채 10㎏이 되지 않았다. 키도, 민이가 폭행당한 시절인 5살 수준(109㎝)에 머물렀다. 죽기 직전 민이는 걸을 수 없었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민이를 돌봤다. 민이 사망 사건을 다룬 판결문에는 “1일 1회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날이 있는 등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았고, 1년에 1회 정도 목욕과 양치질을 시키는 등 피해자를 방치했다”고 돼 있다. 민이의 공식 사망 원인은 영양결핍 또는 영양불균형 및 탈수였다. 사망 시간은 2013년 2월8일 오후 4시에서 10시 사이였다.

 

준비되지 않은 부모 만나
다리 골절뒤 누워서 생활

 

엄마는 우울증·대인기피증
아빠는 사업 실패로 쫓겨

 

‘1일 1식’도 못먹는 날 있어
치명적 방임이 부른 슬픔

 

신체 학대에 이은 치명적인 방임이 이뤄졌다. 민이의 주검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 변사자가 식사를 잘 못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건강관리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골절 치료 후 재활치료를 권유받았음에도 받지 않았고 누워 지내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고하였을 때, 소아방치(child neglect; 소아에게 음식과 물, 주거지, 건강관리, 교육, 정서적 지지 등이 제공되지 못하는 경우)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부검감정서를 썼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업무수행 지침을 보면 방임은 ‘보호자가 아동에게 반복적으로 아동 양육과 보호를 소홀히 함으로써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로 보고 있다.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재판까지 받았지만 민이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친부모이고, 이들이 사건의 공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민이의 죽음은 물론이고 민이의 존재조차 몰랐다. 민이가 살던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2년여 전 이곳에 살던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은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에 “전혀 몰랐다. 이 아파트는 단지가 작아 웬만한 사실은 금방 소문나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던 민이네 가족은 아파트 거주인 명단에조차 자신들을 올리지 않았다.

 

가족이 스스로를 감추고 고립시키는 상황에서 민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다만 국가가 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차례 있었다. 2007년 민이가 만 7살이 되고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취학통지서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민이는 전년도에 주민등록이 말소돼 취학통지서를 받을 수 없었다. 민이처럼 거주지가 분명하지 않아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한 해 평균 1000여명에 이른다. 국가는 병역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청년은 경찰에 고발해 찾아내지만,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신고할 때까지 방치한다. 민이 동생 현이도 2013년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현이 역시 방임으로 인한 학대를 당한 셈이다.

 

어렵게 살던 민이네 가족은 아빠가 괜찮은 직장을 구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살림이 핀 뒤에도 엄마·아빠는 민이를 치료하지 않았다. 부부를 변호한 변호사는 “그때는 이미 아이 상태가 어찌할 수 없는 단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냥 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2013년 10월 유기치사죄로 4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에 있다. 아빠는 1년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간 집행을 유예받았다. 부부는 항소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민이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둘째 현이는 뒤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곧바로 초등학교 고학년에 편입해 들어갔지만 엄마가 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친 덕분에 성적은 뒤처지지 않고 있다. 현이는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현이를 맡았던 담임 선생님은 “현이가 언니와 엄마 얘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해서, 물어보지 않았다”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공부도 썩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현이와 함께 아내가 석방되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민이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내와 둘째에게도 늘 잊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다만 아내가 아직 아파서 이겨내지 못하고 있어 걱정입니다.” 그와 기자의 만남은 지난달 2일 비 오는 밤, 그의 집 앞에서 우연하게 이뤄졌다. 짧은 대화 끝에 긴 인터뷰를 제안했고, 긍정적인 답을 얻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둘째딸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빠와 현이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를 면회하러 교도소에 간다. 돌아오는 길에는 납골당에 있는 민이에게 들른다.

 

최현준 임인택 기자 hao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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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피할 수 없다. 불법 대선자금 ‘증거’ 드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해야 하는 이유
 
임병도 | 2015-05-04 08:56: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성완종 리스트로 이완구 총리가 물러났지만, 명단 속에 나온 인물들의 수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2015년 5월 3일 SBS는 단독으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전달’이라는 뉴스를 보도했습니다.1
 
SBS에 따르면 검찰은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이자, 전 경남기업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했던 한 모 전 부사장이 대선 직전 성 회장의 지시로 경남기업 회장실에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 김 모 씨에 현금 2억 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대선 직전 성완종 전 회장이 현금 2억 원을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은 대선자금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흘러들어 갔다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대선 직전 늘어난 경남기업의 비자금 인출’

성완종 전 회장은 홍문종 의원에게 현금 2억 원을 전달했다고 리스트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2011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와 대선 시기, 경남기업의 비자금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겠습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현장 전도금’2 명목으로 대규모 자금을 현금으로 받아 개인용도 내지는 비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총 32억 8731만 원의 현금이 현장 전도금 명목으로 사용됐습니다.3

비자금 의혹을 받는 경남 기업의 현장 전도금 인출 액수를 보면 2011년과 2012년에 급증합니다. 7년 동안 인출된 현장 전도금 명목 중 가장 많은 금액이 이 시기에 집중됐습니다.

2011년 경남기업의 현장 전도금 7억 1200만 원이 2012년은 9억 5400만 원이 현금으로 인출됐습니다. 2011년과 2012년은 총선과 경선, 대선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경남기업의 비자금 인출 증가 시기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돈을 줬다는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제 검찰은 비자금이 박근혜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과 연관이 있는지 조사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홍문종의 거짓말, 그를 소환 조사해야 한다’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가 불거지자, 기자회견을 자처하면서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홍문종 의원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의 만남조차 부인했습니다.

홍문종 의원은 4월 14일 JTBC 뉴스룸에 출연했을 당시 덕산스파캐슬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디트뉴스에 따르면 홍문종 의원은 새누리당 사무총장 시절 '충남정치대학원 제3기 수료식에서 특강을 했고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은 인사말을 했습니다.4
 
새누리당 충남도당 위원장은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이었습니다.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지역도당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위원장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누가 봐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횡설수설했던 홍문종 의원의 변명은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킬 뿐이었습니다.

▲성완종 전 회장이 죽기 전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 ⓒ오마이TV

경남기업의 한 모 전 부사장은 경남기업 회장실에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원을 줬지만,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성완종 전 회장은 대선 때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에게 2억 원을 줬다고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았다고 홍문종 의원은 주장하지만, 현금 액수와 시기, 건넨 장소,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돈을 준 정황이 나오고 있습니다.

홍문종 의원이 거짓말을 하는지, 성완종 전 회장이 치밀하게 홍문종 의원을 옭아매려고 2012년부터 작업을 했는지, 배달 사고가 났는지,5 검찰은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 홍문종 의원의 말은 이미 신뢰를 잃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수사해야 하는 이유’

성완종 리스트에 명시된 불법 정치자금이 대선자금으로 흘러들어 갔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명단 속 인물들이 2012년 박근혜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완종 리스트에 있는 홍문종 의원은 2012년 대선 당시 조직총괄본부장으로 전국 719개 단체와 60만 명을 관리했던 인물입니다. 유정복 직능총괄본부장이 운영했던 직능본부만 해도 1000억이 필요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6 당연히 많은 대선 자금이 필요했던 직책에 있었습니다.

대선자금이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일도 있지만, 산하 조직을 운영 관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성완종 전 회장이 홍문종 의원에게 줬다는 돈 현금 2억도 곧바로 선대위 관계자가 받아 비공식적으로 사용됐을 수도 있습니다.

불법 대선자금이 유입됐다면 누구를 위해서겠습니까? 바로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사용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도 수사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성완종 리스트와 박근혜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법 대선자금의 핵심에 있는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관련 뉴스는 포털에서 사라졌습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포털 뉴스에서 허태열, 홍문종 관련 기사는 4월 10일에서 12일까지는 591건과 352건이었지만 이후로 점점 사라지고 나오지도 않았습니다.7
 
불법 대선자금이 어떤 방식으로 유입됐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국민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론이 숨기려고 해도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이제 성역없는 수사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대선 캠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검찰에 출두하라고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그녀가 떳떳하다면 그녀 또한 검찰 수사에 응해야 합니다.

이제 몸도 다 낫고 선거도 끝났으니 검찰 수사만 받으면 될 듯합니다.

1. “새누리 선대위 관계자에게 2억 전달” SBS 2015년 5월 3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2959077 
2. 사업장 운영을 위해 본사에서 사업장에 보내주는 경비
3. 홍준표·홍문종에 돈 줬다는 시기, 경남기업 ‘17억’ 인출 경향신문 2015년 4월 13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132326505 
4. 새누리당 “충남도지사부터 기초의원까지...” 디트뉴스 2013년 11월 27일.
http://www.dtnews24.com/news/article.html?no=356590 
5. 어쩌면 검찰은 배달사고 등으로 개인비리 수사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6. 박근혜 대선자금 의혹, 이렇게 가려지나.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 2015년 4월 24일.http://blog.daum.net/espoir 
7. 박근혜의 돈 창구, 허태열 홍문종이 사라졌다. 뉴스타파 2015년 4월 23일.
http://newstapa.org/24976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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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역사인식과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강화

아베의 역사인식과 샌프란시스코체제의 강화

2015. 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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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도입된 지 60년, 이제 중국 봉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고 훨씬 복잡하며 모순에 가득 찬 체제로 진화하고 있다."

 - 존 다우어  MIT 명예교수

  아베 일본 총리는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던 날인 4월 28일에  맞춰서 미국을 방문했다. 아베의 미국 방문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 국방장관들은 뉴욕에서 미일 안전보장위원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본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세계적으로 넓히는 방향으로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했다. 자위대는 이제 지구방위대가 되었다. 아베가 오바마 미국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의원 합동연설을 한 것은 모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일에 따라 이뤄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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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일은 일본 주권회복의 날?

 

 아베 총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유독 집착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61년이 되는 2013년 4월 28일을 ‘주권 회복 및 국제사회 복귀의 날 기념식’으로 하고 4월 28일을 ‘주권 회복의 날’로 규정했다. 기념식이 끝날 즈음에 참석자들은 ‘천황 폐하 만세’를 세 차례 외쳤다.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는 아베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인인 4월 28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아베가 2차대전 종전 70주년이자 일본의 패전 70주년인 2015년 4월 28일에 맞춰서 이 같은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은 2차대전 전범국가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아베의 행보는 일본이 더 이상 전범국가가 아니라 보통국가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아베는 전범국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과거사를 사죄한 독일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던 역대 일본 내각의 입장을 모두 부정했다. 일본은 1982년에 미야자와 담화를 통해서 교과서 기술에 대해 주변국을 배려하는 입장을 밝혔다. 1993년에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고, 1995년에는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사죄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들은 대부분 한일 두나라 사이의 과거사에 대한 것이다. 아베는 지난 4월 22일 반둥회의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본은 앞선 대전(大戰)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했다. 일본이 중국, 미국과 전쟁을 한 2차대전(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해서는 사과는 없지만 반성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는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아베 총리의 이같은 행보는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당시 상황을 연상시킨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미일안보조약과 함께 1952년 4월 28일 발효되었다. 이 조약 2조에서는 일본의 영토와 영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주권행사의 범위를 지정한 것이다. 아베가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서 일본의 영토와 영해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생겨난 규칙, 절차, 제도 등을 포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부른다. 샌프란시시코 체제로 인해서 일본은 과거 전쟁과 침략의 범죄에 대한 사과 없이 국제사회에 무임승차한 것이다. 일본은 과거 범죄에 대한 징벌이 없이 샌프란시키코 체제를 통해서 오히려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는 중국, 소련, 북한 등 공산주의 진영과 대결을 위한 미국의 전략 때문이었다.

 

치유되지 않는 제국주의 침략의 상처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2차대전 이후 동북아에서 미소대결, 중국의 공산화 등의 상황을 반영한 미국의 전략에 따라서 형성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동원하여 대소, 대중 봉쇄를 위한 동아시아 전진기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군국주의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은 채 일본이 재무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체제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는 불안전한 체제였다. 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2015년 4월 28일 아베 총리의 미국 방문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일본역사에 대한 세계 최고의 권위자인 존 다우어 MIT대학 명예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대해서 전쟁의 유산을 미청산하고 착취구조를 유지시킨 체제라고 비판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본은 번영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형성된 냉전체제의 결과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가 탄생했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세계적인 차원의 냉전체제의 하위체제가 되었다. 냉전은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종전 70주년과 분단 70년을 맞이해서도 변하지 않고 있다. 종전 70주년이 분단 70년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 70년은 구호 뿐이다. 하지만 종전 70주년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로 표출되고 있다. 70년 전에도 한반도가 국제정세에 의해서 지배받았듯이,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반도는 국제정세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상황인 것이다. 
 종전 70주년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의 ‘신형대국론’과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의 충돌이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미국은 과거 냉전시기에 미국과 소련이 대결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고 공존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신형대국론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신형대국론을 중국의 성장을 위한 시간벌기용 전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소련의 부상을 위험스럽게 염려해서 대소련 봉쇄정책을 펼친 것처럼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될 경우에 태평양 건너 미국의 위협이 된다는 발상이 자라잡고 있는 것이다.

 

성과 없는 미국의 아시아정책- 다급해진 오바마 정부

 

  탈냉전 이후에도 미국에게 있어서 일본의 존재는 미국이 세계전략 및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추진해가는 데 있어서 재정적 지원자였다.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점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중국을 견제하거나 포용하는 데 있어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전략적 파트너로 여겨졌다. 특히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이 같은 일본의 존재가 미국에게 더 긴요해졌다. 
  미국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범죄에서 면죄부를 받아 군사대국화하려는 일본의 보통국가 전략을 용인해주고 있다. 미일동맹이 중국 봉쇄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이 대외적으로 팽창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고,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같은 미국의 전략에 따라서 형성되는 미일관계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Pivot to Asia)은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중시하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하고 한미일 삼각협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부활하여 재강화되는 것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했다. 게다가 2015년은 오바마행정부 2기 3년차이다. 올해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오바마 정부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정부는 일본과 협력을 강화해 아시아 정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한일 과거사 문제의 원만한 타협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샌프란스시코 조약 체결 당시 한국을 제외시키면서 한일 간의 과거사 미청산의 씨앗을 뿌린 것이 한일관계가 악화된 원인이다.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이해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부활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샌프란스시코 조약 그 자체가 샌프란시스코 조약 부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재생산되는 한반도 분단체제

 

 결국 미국이 뽑아 든 카드는 한일 과거사에 대한 봉합이다. 미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커트켐벨 전 차관보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과거사 문제 때문에 미국이 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진단해왔다. 그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기초를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2015년 2월 웬디셔먼 미국무부 차관은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를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애슈턴 카터 미국방장관은 지난 4월에 “한미일 협력의 잠재 이익이 과거의 긴장과 현재의 정치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 중시 정책을 펼쳐 왔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정부는 아베 총리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은 2013년에 아베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아베의 집단적 자위권은 지지하면서도 아베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해서는 ‘미일동맹의 그림자’라고 생각하고 우려를 표명해왔던 것이다.  2015년 웬디 셔먼의 발언을 계기로 미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면서 한일간의 역사갈등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도 처음에는 조약 체결국가 명단에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일본의 로비에 의해서 한국이 배제되었다. 당시 요시다 일본수상은 한국이 조약체결에 참가하면 일본이 한국에 막대한 전후배상금을 물게 된다는 이유로 한국의 참여를 배제했다.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결국 한일 과거사 미청산의 씨앗이 된 것이다. 
 최근 미국이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을 보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 당시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견제, 일본 중시, 한미일 삼각협력을 중심으로 하는 오바마의 아시아 회귀정책은 오바마 정부 2기 3년차를 맞이해서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 틈을 타서 아베는 재무장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에는 두 개의 큰 전선이 있었다. 하나는 G2로 성장한 중국과 아시아로 회귀하는 미국이 만들어내는 전선이다. 전통적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부딪힘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전선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보통국가화하려는 일본과 일본의 지배와 침략을 당한 나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전선이다.  하지만 이 전선이 변화하고 있다. 역사전선을 유지해서 미국의 견제를 뚫으려는 중국과 역사전선을 약화시켜서 중국 견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대립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는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정세를 규정한다. 동아시아에서 강대국들이 만들어 내는 대립과 협력의 새로운 질서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새롭게 재생산하고 있다.

 

 

** 이 글은 지난 4월 22일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이사장: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분단 70년, 남북관계는 어디로 가고 있나?”를 주제로 주최한 제15회 월례정책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이  다시 수정 보완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5월호(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383 ) 에 공동으로 게재한다.

 

글·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전 국가안보회의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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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밖에 안 남은 유가족, 우리는 약하지 않았다

 

[현장] 5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의 기록

15.05.03 20:45l최종 업데이트 15.05.03 21:2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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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2015 세계노동절대회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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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부터 2일까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견뎌 낸 뜨거운 시간들이 있었다. 주먹이 부르트고 이가 악물어질 만큼 참혹한 시간도 있었지만,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 속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시간도 있었다. 그 이틀간을 15개 장면으로 되짚어 보려 한다.

#1 노동자들을 향한 유가족의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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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각역 사거리에서 마무리집회를 열고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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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125주년 노동절을 맞아 서울 시청광장에서 세계노동절대회가 열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조합원 5만여 명은 박근혜 정부와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 뜻을 모았다. 

다양한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년간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고통을 나누며 행동해 주신 민주노총 모든 조합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몸을 굽혀 큰절로 인사하는 유경근 집행위원장에게 노동자들은 시청광장을 가득 채우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응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는 416연대가 준비한 범국민 철야행동에 민주노총도 함께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2 소망으로 끝나 버린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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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역 부근 아스팔트 바닥에 적힌 글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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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국역 부근 아스팔트 바닥에 적힌 글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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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막힌 노동자들은 다시 종각역 사거리로 돌아왔다. 오후 7시쯤이었다. 방송차 위로 올라간 김종인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안국역 쪽에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있는 1000여 명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오늘 세계노동절대회 행진은 여기서 마칩니다. 여기 계신 동지들 모두 안국역 유가족들의 곁으로 달려가 주십시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조 깃발을 흔들며 커다란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행진이 마무리되자 깃발들은 저마다 다른 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국 이튿날 아침까지 유가족들의 곁을 지킨 노조 깃발은 채 서넛이 되지 않았다. 안국역 부근에서 만난 한 금속노조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행진이 끝난 후 단위가 조직적으로 철야행동에 참여한다는 결정은 없었다. 각 단위 노조가 알아서 참여하는 식이었다." 

소망은 그렇게 소망으로 끝났다.

#3 낙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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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철학적인 낙서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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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부근으로 가니 이미 많은 깃발들이 모여 있었다. 청와대 방면에 세워진 차벽 앞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람들은 도시락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필로 아스팔트 바닥에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시꺼먼 아스팔트가 금세 거대한 칠판으로 변했다.

경찰버스로 둘러친 차벽은 어느새 예술가들의 공간이 돼 버린 듯 알록달록한 낙서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차벽에 적힌 낙서들 가운데 가장 심오했던 것은, 원래 버스 옆쪽에 적혀 있는 '경찰'이라는 두 글자 뒤에 누군가 그려 넣은 '?'였다. 과연 이 시대의 경찰은 누구의 편이며 어떤 존재들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짧고도 강한 낙서였다.

#4 물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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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오 뒤쪽에서부터 날라져 오는 생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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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사이신 용액을 얼굴에 맞은 사람들을 위해 시민들이 마련한 물병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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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가 넘자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이 차벽 뒤 어디선가에서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벽 왼쪽에 경찰들이 모여 있는 곳을 뚫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방패를 밀어붙이자 경찰은 사람 얼굴을 정확히 조준해 캡사이신 용액을 쏘았다. 비명을 지르며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물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대오 뒤쪽에서부터 크고 작은 생수병들이 끝없이 날라져 왔다. 어떤 사람은 갖고 있던 보리차를 꺼냈다. 캡사이신을 맞아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물로 얼굴과 손을 씻은 뒤에야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캡사이신은 다시 허공에 물보라처럼 튀었고 최루액을 끼얹은 듯 사방이 매캐해졌다. 똑같은 물을 쓰는 데도 서로 쓰는 방법이 너무나도 달랐다. 

#5 격리된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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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을 지키고 있는 장애인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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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쪽 길목으로 가 보았다. 경찰들이 방패를 앞세운 채 나란히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찰들을 휠체어 탄 사람들이 막고 있었다.

원래는 거꾸로 돼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경찰은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 존재가 돼 있었다.

#6 통곡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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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퍼부어지고 있는 물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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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처럼 뽀얗게 될 만큼 최루액이 진하게 섞인 물을 경찰은 유가족과 시민들을 향해 쏘았다.
ⓒ 개미뉴스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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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0시 30분을 넘기자 종로서 경비과장은 '살수차를 써서 강제 해산에 들어가겠다'고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물대포가 날아들었다. 

물대포는 모두 셋이었다. 흰 물줄기가 밤하늘을 시원하게 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물줄기의 끝은 항상 사람을 겨냥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머리를 정통으로 맞으면 위험할텐데, 경찰은 유가족이든 시민이든 기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겨냥해 물을 쏘았다. 

최루액을 얼마나 섞었는지 바닥을 흐르는 물줄기가 우유처럼 새하얬다. 사람들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기침과 재채기를 하며 뒤로 물러섰다. 숨을 쉬면 쉴수록 콧속과 허파를 철수세미로 긁어 대는 것 같았다. 경찰은 그렇게 최루액을 서너 차례나 더 발사했다. 

#7 유가족들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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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을 막아선 세월호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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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최루 물대포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맨 앞에 서서 물을 맞은 이들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이었다. 이튿날 오후까지 경찰들과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있었지만 언제나 맨 앞에는 유가족들이 있었다. 대체 어디서 힘이 나오기에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궁금했지만 답은 간단했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가 지쳐 주저앉은 한 유가족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 마지막 순간만큼은 안 힘들어."

최루 물대포 사격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차벽 앞으로 모여들었고 유가족들도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 앞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 유가족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경찰들을 향해 말을 쏟아 냈다.

"너희도 부끄럽지? 그러니까 눈 내리깔고 방탄모에 방탄복 입고 이렇게 엉거주춤 서 있는 거 아냐? 오늘 밤 같은 일은 경찰 기록에도 남을 거고 역사책에도 논문에도 낱낱이 기록될 거야. 너희들 나중에 자식 태어나서 너희들에게 엄마 아빠는 그때 어디서 뭐했느냐고 물으면 이야기할 수 있겠어? 못해. 너희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1년 전,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서 경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식 하나 못 살린 죄인'이라며 두 손을 싹싹 빌던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8 삼성서비스노동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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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벽 앞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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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자 차벽 앞에서는 자유발언이 시작되었다. 어느 대학생은 끝까지 이 자리에 함께 있어 주지 않은 민주노총이 많이 야속하다고 말했고, 어느 할아버지는 종로서 경비과장에게 이제 그만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자유발언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부산에서 올라온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의 이야기였다.

"저는 부산 지역 삼성 노동자입니다. 삼성서비스지회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아까 캡사이신 물대포 많이들 맞으셨죠? 저도 이렇게 독한 건 오랜만에 맞아 봅니다. 작년에 염호석 열사의 유골을 지키기 위해 경찰들과 맞서면서 캡사이신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티니 나중엔 맛도 있었습니다. MSG 맛이 나니 아마 라면 좋아하시는 분들은 먹을 만할 겁니다. (웃음) 저희는 그렇게 싸워서 삼성의 76년 무노조 경영 원칙을 깨고 마침내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세월호 투쟁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삼성노동자들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피해자들 곁에서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9 어떤 기자, 눈 까뒤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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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고 들어오는 경찰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유가족들과 시민들
ⓒ 박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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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어느 영상 활동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경찰들 앞에서 계속 영상을 찍고 있는데 기자처럼 생긴 어떤 여자 분이 사복 경찰과 계속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뭔지 궁금해 그쪽을 얼쩡거리면서 계속 찍었더니 그 여자 분도 제가 신경 쓰이는지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자 분이시냐고 물어보니 명함을 꺼내 보여주는데 아무개 매체 기자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웃으며 그랬어요. '어차피 아무개 매체면 경찰과 한통속이겠네요?' 그러니까 그분이 제 앞에서 충혈된 두 눈을 까뒤집으면서 '이거 왜 이러세요? 저도 아까 캡사이신 맞았거든요?' 이러고 가 버렸어요.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죠."

#10 내게 산소 같은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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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단보도를 막아선 경찰들 앞에서 계속 신호 숫자를 세던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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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두 시부터는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간담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경찰들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 시민들을 인도로 몰아넣었고, 유가족들을 따로 고립시켜 버렸다.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거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일 뿐 벽을 뚫지는 못했다. 

오전 4시가 넘도록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고, 나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 잠들기 전에 내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경찰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가게 하죠? 이렇게 하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지금 두 번째 파란불입니다. 두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잠시 후) 지금 세 번째 파란 불입니다. 세 번째가 되는 동안…."

눈을 뜨니 어느새 푸르게 동이 터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손전화를 꺼내려는데 귓가에 아까 그 목소리가 흘러들어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 횡단보도고 파란불인데 왜 못 건너게 하나요? 지금 마흔아홉 번째 파란불입니다. 마흔 아홉 번째가 되는 동안 경찰 여러분들은 계속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경찰은 어서 길을 열고…."

내가 잠든 사이에도 끊임없이 숫자를 세며 경찰과 맞섰을 그 아주머니는 오십 번째를 넘기자 그만 지쳤는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경찰들의 얼굴이 좀 풀리나 싶었던 것도 잠시, 절대로 지칠 리가 없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국동 사거리 동일빌딩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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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에게 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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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보니 웬 아저씨가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의 단추를 꾹 누르고 있었다. 

경찰들에게 꽁꽁 포위당한 채로 맞이한 그날 아침이었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저항들이 나의 숨통을 조금 트이게 했다는 것을 그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알고 있을까? 

#11 경찰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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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밧줄을 목에 건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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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멀찍이 돌아 유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경찰들은 여전히 청와대 쪽 방면에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반은 인도에, 나머지 반은 차도에 앉아 있었다. 한 유가족이 경찰을 향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인도로 가지 말라며! 그래서 차도로 가려는데 왜 못 가게 해? 그럼 우리 보고 어떻게 가라는 거야! 날아가? 어떻게 인도로 가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 있어?"

진부한 수작이었다. 경찰은 유가족들의 목적지가 어디든 청와대 방면으로 가는 듯하면 무조건 길을 막는다. 그런데 막을 명분이 없으니 왜 막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인도로는 갈 수 없다고만 되풀이한다. 그래서 차도로 가면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을 어겼다며 불법시위로 몰아붙인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이상 꼼짝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는 덫이다.

#12 악에 받친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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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과의 몸싸움 끝에 탈진해 버린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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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가 넘자 완전히 날이 밝았다. 유가족들이 하나둘 경찰 앞으로 모이더니 밧줄을 꺼내 차례로 목에 감았다. 한 사람이 밧줄을 목에 한 바퀴 감고 옆에 넘기면 옆 사람이 그 줄을 받아 자기 목에 감고 다시 옆으로 넘기는 식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목을 이어 맨 유가족들은 그대로 경찰벽을 향해 돌진했다. 종로서 경비과장은 유가족들이 '위험한 시위행위'를 하고 있다며 방송차 안에서 떠들어 댔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탈진한 유가족들이 하나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밧줄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자 유가족들은 다시 방패 앞에 앉았고,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한 유가족은 머리를 바닥에 짓찧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사람들이 달려와 그 유가족을 말리며 바닥에 눕혔지만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주변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13 방패 앞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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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들 앞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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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꾸벅꾸벅 졸며 유가족들 옆에 앉아 있는데 경찰들의 방패 앞에서 노란 실로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가족은 아니었다. 무얼 하고 있는지 가서 물어보았다. 

"별을 뜨고 있어요. 평소에 아버님들이 발언하실 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을 것'이라 말씀하세요. 그래서 아버님들의 그런 뜻을 저희가 좀 이어 보고자 이렇게 별을 만들게 됐어요. 광화문 농성장에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함께 별을 뜨고 유가족 분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있어요."

노란 실로 짠 노란별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14 경찰에게 유가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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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인도 전부와 차도 일부를 막아 버린 경찰 때문에 차도 바깥으로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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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 철야행동은 원래 오전 11시에 광화문 광장에 모여 마무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록 경찰은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청와대가 아닌 광화문으로 간다고 해도 경찰은 묵묵부답이었다. 

차도 일부와 인도 전부를 막고 있는 경찰은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차도 바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유가족들이 '우린 막아도 좋으니 시민들에게는 인도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경찰도 어쩔 수 없이 방패 사이로 사람들을 지나가게 했다. 흥분한 몇몇 사람들이 왜 유가족들만 못 지나가게 하느냐고 경찰에게 따지자 경찰은 간단히 대답했다.

"저분들은 일반 시민이 아닙니다."

유가족들이 일반 시민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재차 물었지만 경찰은 다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15 유가족들은 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강하다

오후 2시가 될 때까지 유가족들과 경찰들의 몸싸움은 계속되었다. 경찰들은 이제 대놓고 유가족들의 얼굴에 캡사이신을 겨냥해 쐈다. 다른 누군가를 겨냥하다 잘못 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찰벽 앞에서 유가족들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2시가 넘어서야 유가족들이 조계사 쪽 길을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광장에 도착해 잠시 쉰 유가족들은 기자들과 시민들을 모아놓고 마무리집회 겸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서 있을 힘도 없었던 나는 그때 광장 구석에 있는 화단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에 앉은 한 유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어제부터 꼬박 현장을 취재했다고 하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갈아 마셔 버리겠다고 써 주세요. 이제 우린 악밖에 남은 게 없어요."

나는 꼭 그렇게 써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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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마무리집회 겸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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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사진을 몇 장 찍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오니 그 유가족은 다른 유가족 품에 안겨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이틀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유가족들은 강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버티지 못한다. 약하기 때문에 자꾸만 잡아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 손 맞잡아 준 다른 손들과 함께 유가족들은 이틀을 보냈다. 이틀 동안 유가족들은 강했다. 그러나 그 힘은 유가족들을 비롯해 서로 손 맞잡은 모든 이들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그건 곧 나의 힘이기도 하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해서 머리도 아프고 걸음 옮길 힘도 없던 나는 유가족들에게서 받은 힘, 혹은 내가 유가족들에게 전해야 하는 힘 같은 것이 몸에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아 가만히 몸을 일으켜 보았다.

그러고는 분향소 앞에서 시민들과 얼싸안고 울고 있는 유가족들을 뒤로 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광장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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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단심(丹心), 노자의 선택은?

 
이인우 2015. 05. 03
조회수 80 추천수 0
 


 

 

 

【논어명장면】노자, 그 잃어버린 이야기

 노담일사(老聃逸事)<상>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경왕(景王) 연간(B.C 545~520)에 왕실 사관(史官)을 지낸 노담(老聃)이라는 사람의 약전(略傳)이다. 나, 이생이 공자께서 ‘노자’(老子)를 만났다는 전래 설화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에 듣게 된 전승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노담은 생애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전승들도 대부분 그 신빙성을 자신할 수 없다.① 그래서 약전의 제목을 노담의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이야기란 뜻의 <노담일사>(老聃逸事)라 하고 <공자, 노자를 만나다> 편의 부록으로 삼는다. 한 편의 ‘문화사’로 읽는다면 시간의 낭비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생(李生) 

 

 

1. 내력(來歷)

노담은 어릴 때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귀 모양이 특이했던 듯 하다. 그의 자(字)로 여겨지는 담(聃)은 ‘귓바퀴가 없을 정도로 귀가 늘어졌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의 관직으로 추정할 때, 공자보다 한 세대 위, 즉 약 15~20살 정도 나이가 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담의 출신지는 중국 남방의 초(楚)나라 고(苦)현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고현은 원래 진(陳)나라 상(相)땅이다. 진나라는 소국으로 초나라의 보호국이었다가 서기전 479년(공자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초나라에게 합병 당했다. 담은 상 땅이 진나라에 속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 상 땅이 나중에  초나라에 흡수되었기에 후대 사람들은 노담을 초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다.

 

노담의 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약소국 진나라 출신으로 주왕실의 태사(太史;고대 중국에서 천문역법(天文曆法)을 관장하는 벼슬)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최소한 서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나라 공실의 성은 규(女+爲)씨이다. 규는 고대의 성스러운 왕인 순(舜)의 성이다. 어쩌면 그의 집안은 낙양으로 진출한 진나라 공족의 후예였을지 모른다. 또는 중원의 공력 높은 무사(巫史) 가문이었을 수도 있다.

노담의 집안이 언제부터 주나라 수도 낙양에 살게 되었는 지도 알 수 없으나, 고조나 증조부 대부터 주왕실의 사(史)를 세습하였던 것 같다. 이 집안에는 비전(秘傳)하는 양생술(養生術)이 있어서 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장수하였다. 그런 탓에 늙도록 왕실에 충성한 할아버지는 귀족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았다. 담의 아버지는 태사의 지위에서 은퇴한 뒤에도 후배 사관들에게 ‘노사’(老師)라 불리었다. 이런 자랑스런 가계 때문에 담은 어렸을 때부터  ‘장로의 손자 담’,  ‘노사의 아들 담’이라고 불리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매우 장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담을 존칭하여 ‘노담 선생’이라 불렀다. 노자(老子)라는 존칭은 아마 여기서 처음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담의 직책은 왕실 사관(史官)이었다. 사(史)는 본래 고대 원시사회의 무축(巫祝)에서 비롯되었다. 무축은 모계(母系) 중심의 원시농경사회에서 신에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사냥과 전쟁의 유불리를 점치는 사제자(司祭者)이자 주술자였다.

이 제사장 집단에서 무사(巫史)가 나왔고 유(儒)와 사(史)가 분화 되었다. 유가가 이 집단에서 제전(祭典)을 실행하는 층의 후예라면, 사는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기록(정확히는 기억)하는 층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들은 고도의 상징과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신과 닿아있음을 자부했다. 그들이 사용한 은유로 가득 찬 주술적인 언어들은 집단의 ‘공동기억’으로서 가문 안에서만 전승됐다. 이들은 무축의 시대가 가고 왕권의 시대가 오자 세력을 잃고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소수는 그 비전(秘傳)한 지식으로 권력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정치력을 갖춘 자는 권력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왕실의 사(史)가 본래 모계(母系) 사회의 성직자였음을 암시하는 노담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신비한 암컷이라 한다.

 신비한 암컷의 문이여!

 이를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한 듯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곡신불사)/是謂玄牝(시위현빈)/玄牝之門(현빈지문)/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綿綿若存(면면약존)/用之不勤(용지

불근)②

 

제사자에서 왕의 정치적 자문관이 된 사는 일상적으로는 조정과 왕실의 제례와 의전에 관한 전거와 기록의 관리를 담당하며, 유사시에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점사(占辭)를 행하고 해석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관으로서 노담이 맡았던 주요 직책 중에는 왕실도서관인 수장실(守藏室)의 장관직도 있었다. 당시 왕실 도서관이 소장한 하은주(夏殷周·고대 중국의 3대 왕조) 시대의 전적과 기물들은 오직 왕실과 왕명을 받은 자만이 열람·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장실 장관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노담은 또 ‘주하사’(柱下史)라는 직책을 겸하였다. 주하사는 말 그대로 ‘기둥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시어사(侍御史)의 직책’이었다. 왕을 정치적으로 보필하는 근신(近臣), 나아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총신(寵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노담과 같이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사관은 그 광범위한 지식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했다. 왕실 소속의 세습 사관 겸 정치자문관으로서 담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잠언이 있었다.

 

 도(道)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임금이 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되리라.                        

 교화를 억지로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이름없는 통나무가 되어 못하게 하리라.

 이름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심이 없을지니,                            

 욕심내지 않고 고요하여                                 

 천하는 저절로 안정하리라.                             

 道常無爲(도상무위)/而無不爲(이무불위)/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化而欲作(화이욕작)/吾將

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無名之樸(무명지박)/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不欲以靜(불욕이정)/天下將自定(천하장

자정)③

 

nojaedit.jpg

*노자. 출처 : 위키피디아

 

2. 영광의 시절

노담이 태사일 때 주나라 국왕은 경왕(景王)이었다. 그는 27년간 재위하며 군왕의 자질을 발휘했던 아버지 영왕(靈王)으로부터 군주의 도를 배웠다. 노담은 이런 경왕에게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일종의 비밀업무로서 ‘제왕학’과 ‘군사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주나라는 외적을 피해 낙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사실상 천하의 주인으로서 권위와 힘을 상실했다. 왕국은 작은 영토로 축소되어 이웃한 강력한 제후국인 정(鄭)나라와 진(晉)나라에 의지하여 겨우 천자(天子)의 지위를 유지했다. 따라서 지각 있는 왕이라면 왕자(王者) 본래의 권좌와 위력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영락한 작은 나라에 불과한 왕실이 몇배나 힘이 센 제후국들을 별다른 무력도 없이 통어(統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왕은 부왕인 영왕의 뜻을 이어받아 주왕실의 이런 서글픈 처지를 바꿔보고 싶었다. 노담 집안은 그런 왕실의 ‘비밀 두뇌’였다.

“왕실이 저 사나운 제후들을 말과 개처럼 부릴 지혜를 강구하시오! 왕도(王道)를 회복할 길을 반드시 찾아주시오!” 그런 지침을 받은 노담 집안이 찾아낸 치도(治道)는 무엇이었을까? 

 

 없는 힘으로 있는 힘을 다스린다

  

바로 성인(聖王)의 도(道), 즉 무위(無爲)의 치(治)였다. 무력(無力)으로 유력(有力)을 아우르고, 없음(無)으로 있음(有)를 덮고, 부드러움(柔)으로 굳셈(剛)을 감싸고, 약함(弱)으로 강함(强)을 이끄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노담이 간절한 마음으로 왕에게 무위(無爲)의 덕의 중요성을 가르친 글 한편이 전해진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여 이기는데              

 물과 바꿀만 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오욕을 짊어지는 자                     

 그를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하며              

 나라의 불행을 떠매고 가는 자                      

 그를 일컬어 천하의 주인이라 한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

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

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④

 

또한 노담은 강력한 제후의 군사력을 역용(逆用)하여 약한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 제후의 군사지휘권을 왕의 통제하에 두어 그것으로 제후를 복종시키는 용병술도 깊이 연구하였다.

“도(道)로써 덕(德)을 넓혀 지(智)와 무(武)를 복종시켜라!”

“제후가 병기를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함부로 행군하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병권을 성왕에게 바치게 하라!”

  

 무릇 아무리 좋은 병기(兵器)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器物)일 뿐이다.                               

 만물이 다 싫어하는 바이니,                                         

 도(道)를 지닌 자는 병사(兵事)에 몸을 두지 않는다.    

 병기는 도무지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것이니                                         

 사용함에 초연하고 담담해야 한다.                          

 이겨도 아름답지 않으니                                     

 승리를 찬양하는 자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천하의 지지를 얻겠는가.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슬픔과 자비로 애도해야 하니                                        

 전승(戰勝)의 의식,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이 도리일진저.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

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

(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⑤

 

경왕은 주실 중흥(周室 重興)이란 자신의 염원이 태자 시대에서는 꼭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경왕은 태자를 담에게 맡겨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경왕이 태자 수(壽)에게 노담을 교부(敎父)라 부르게 하니, 노담이 경왕 부자 앞에서 태자에게 바친 시가 전해진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셋이 있으니                         

 어려서 부모를 잃는 고(孤·고아)요,                      

 같아 살 배필이 없는 과(寡·과인)요,                            

 사람으로서 굶주리는 불곡(不穀·먹을 곡식이 없음)이니 

 그래서 왕공(王公)은 이를 자신의 칭호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더해지고                                                   

 더하려면 오히려 줄어듭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지만                        

 지금 다시 이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부(敎父)의 이름으로                                              

 오직 이 한 말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

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⑥

 

태자는 총명하여 충실한 학업으로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왕실은 평안했고 미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왕실 중흥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 만 같았다. 노담의 가슴에도 뜨거운 자부와 웅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3. 비극의 시작

“담 선생!”

“노담 선생!”

수장실(守藏室)로 당직 사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히…”

“큰일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급서하셨다고 합니다!”

노담의 손에 들려있던 도필(刀筆)이 쨍그러니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기전 522년 주나라 경왕 18년, 태자 수(壽)가 왕후에 이어 갑자기 죽었다. 노담의 나이 40대 후반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자체로 왕실의 큰 슬픔이면서 노담에게도 커다란 좌절이었다.

“그동안 제후들 몰래 연구한 제왕학(帝王學)을 꽃피워 줄 성군의 재목이었는데… 아, 주실(周室)의 천록(天祿)이 진정 여기까지인가…”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만개할 것이 분명했던 노담의 영화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태자의 죽음이 장장 17년에 걸친 골육상쟁의 서막이 될 줄이야…

  

경왕은 태자와 왕후가 잇따라 죽는 슬픔 속에서도 군왕으로서 사고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우선 새로 정비를 맞아 적자를 생산하는 일을 서둘렀다. 경왕에게는 태자 말고 여러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조(朝)는 장자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기상도 늠름했지만, 경왕은 왕위만큼은 적자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경왕은 곧 새 왕후를 맞아 새로 2명의 아들을 얻었다. 맹(猛)과 개(빌 개)였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경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왕은 자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자, 비로소 태자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맹은 이제 겨우 세살박이가 아닌가. 이리같은 제후들과,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노회한 공족들 틈바구니에서 저 아이가 제대로 임금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게다가 왕후 집안을 중심으로 새 외척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몇몇 탐욕스런 귀족들이 작당(作黨)을 부채질하고 주도했다. 왕은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만 갔다.

 

“노담, 어찌하면 좋겠소?”

“…”

노담은 죽은 태자의 스승으로서 다른 왕자들이 태자의 지위를 논하는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서장자(庶長子) 조의 사부인 빈기(賓起)를 추천했다.

“그런 일은 저보다 빈기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의 스승이니…”

태자가 죽은 후 맏아들 조에게 허전한 마음을 의지해온 경왕은 마침내 서자이나 이미 장성한 성인인 맏아들로 태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조의 기상이 실로 할아버지 영왕(靈王)을 닮았다. 왕실의 중흥을 도모하려면 이 길뿐이다…” 

경왕은 조를 태자로 삼기 전에 중단한 결단을 하나 더 내렸다.

“태자의 외척들이 순순히 찬성할 리는 없을 터…”

태자 맹 형제를 에워싼 외척과 귀족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태자 교체는 말도 꺼내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들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를 배후세력으로 갖고 있었기에 왕으로서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고민하는 경왕의 귀에  빈기가 속삭였다.

“폐태자를 하려면 우선 맹 왕자의 훈육을 맡고 있는 하문자(下門子)의 입부터 막아야 합니다. 다른 죄를 씌어 하문자를 먼저 내치십시오. 그런 다음 망산에서 여름 사냥대회를 열어 공경(公卿)들을 모두 초대하십시오. 왕의 부름에 선(單)공과 유(劉)공(외척의 후견 세력)도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냥하는 틈을 보아 둘을 처단한 뒤 즉시 태자의 교체를 명하신다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렇게 왕의 비밀작전이 착착 진행되어 마침내 사냥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왕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궁을 나와 사냥터와 가까운 왕족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경왕이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고 만 것이다.

왕자 조와 빈기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붕어’(崩御)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지만, 암살의 증거 또한 없었다.

“살해자가 있음에 틀림없건만…”

 

사자굴에 들어갈 뻔 한 사실을 깨달은 태자당은 즉시 왕자 맹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선씨와 유씨가 섭정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바로 군사를 보내 빈기를 척살하고, 조정 안팎에 포진해 있던 선왕의 측근과 총신들은 물론 서왕자들과 가까운 백공(百工· 왕성 안에 살며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공급하는 세습적인 상공(商工)집단을 말한다.)들까지 축출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을 배치했다.

전광석화처럼 새 왕 체제가 들어서고 2달 뒤 경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이 끝나고 새 왕의 정식 즉위식이 거행되기 전에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자 조를 지지하는 왕족들과 숙청된 백관 및 백공 세력이 연합하여 왕궁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선대 두 왕의 직계 왕자들도 모두 조의 편에 가담하니 전세가 단숨에 서장자 쪽으로 기울었다. 선씨와 유씨 등은 맹과 개 형제를 들쳐업고 이웃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 이 내전의 와중에 태자 맹이 놀라 죽자 척신들이 동생 개를 추대하니 이 사람이 경왕(敬王)이다. 호족들이 어린 이복동생 개를 즉위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도 즉각 왕위에 오르니, 주나라 수도 낙양에 두 명의 왕이 동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낙양에는 두 개의 성이 있는데 서쪽에 본래의 왕성(王城)이 있고  동쪽에 새로 쌓은 성주(成周)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왕성에서 즉위한 조를 서왕(西王), 동쪽 성주에 들어간 개를 동왕(東王)이라 불렀다.

 

한쪽은 비록 서자이긴 하나 선왕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명분이 있었고, 한쪽은 선왕의 유지가 없는 갓난아이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이란 명분이 있었다. 약점과 명분이 뒤섞여 어느 쪽도 온전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낙양사람들은 두 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줄을 잘 못 섰다간 온 집안이 역적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느쪽이든 빨리 승부가 나기만을 바랐다. 노담의 상황은 더욱 안좋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서왕자들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태사로서 서자들에게 적통의 계승자를 제치고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선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어린 왕자를 허수아비삼아 권력을 농단하는 귀족들을 추종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왕 세력이 불러들인 진나라 군대가 낙양에 진군했다. 낙양은 진나라 군대를 사이에 두고 왕성의 서왕파와 성주의 동왕파로 갈려 사활을 건 대치에 들어갔다. 오늘 서왕파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면 내일은 동왕파가 만세를 부르는 격이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나라 군대의 노략질까지 당하게 된 백성들은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떠났다. 노담의 가족도 전화(戰禍)를 피해 낙양을 떠났다가 전선(戰線)에 가로막히자 고향인 남쪽 진(陳)나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 내란이 장기화되면서 궁중의 관리, 악사, 공장(工匠)들도 낙양을 떠나 중국 전토로 흩어져 갔다. 음악을 사랑한 공자도 사방으로 비산(飛散)한 악사들의 운명을 전해 듣고 안타깝게 여긴 마음이 <논어>에 전해질 정도였다.

 

‘태사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료는 채나라로 가고, 사반결은 진(秦)나라로 가고, 고방숙은 하(河)로 들어가고 파도무는 한(漢)으로 갔고, 소사양과 격경양은 발해 너머 갔느니… -<논어> ‘미자’편 9장

 

이복형제간의 맹렬한 왕위 다툼은 5년을 끌었다. 싸움은 진(晉)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친 동왕의 승리로 끝났다. 서기전 516년 서왕은 주왕실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로 한 진나라의 대공세에 밀려 지지세력을 이끌고 마침내 초나라로 망명했다. 주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던 서왕은 이 때 주나라 왕실 수장고에 있던 창업이래의 수많은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갔다.  주나라 왕실 전적의 남천(南遷)은 중국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⑧ 당시까지 중원 문화권의 밖에 존재하는  ‘오랑캐’ 지역(초나라)이 갑자기 쏟아진 높은 수준의 외래문화와 문물을 흡수하여 급속하게 ‘중화’(中華)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왕 조는 비록 왕위싸움에 져서 주나라 봉건질서 밖의 초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나, 자신이 그토록 자부한 `천자의 나라’가 그 문화적 영토를 양자강 이남의 남쪽 지방까지 확장시키는 예기치 못한 기여를 ‘중국’에 한 셈이 되었다.

서왕은 망명하면서 각 제후국에 이러 조칙을 내리고 떠나갔다.

“왕실이 혼란할 때 선씨와 유씨의 무리들이 천하를 착란시켜 한결같이 불순한 짓만을 자행하면서 ‘선왕의 후사에 어찌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가? 오직 내 마음내키는대로 할 뿐이니 누가 감히 나를 토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하늘의 버림을 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왕실에 혼란을 조성하고(…) 선왕의 명을 가탁해 거짓을 자행하는 데도 진나라는 부도(不道)하여 저들을 도와 그 끝없는 탐욕을 멋대로 부렸다. 지금 나는 난리를 피해 형만(荊蠻·초나라)으로 도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나의 형제친족인 제후들은 하늘의 법을 따라 나의 성공을 돕고 교활한 자들을 돕지 말라. 선왕의 명을 따라 하늘의 벌을 부르지 말고서 부덕한 나를 용서하여 위난의 평정을 도모한다면 나의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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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과 바꾼 단심(丹心)

내전이 끝나자 전장으로 변했던 낙양에 오랫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낙양을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와 본래의 생업을 되찾았다.  한편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줄을 잘못 선’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와 부역죄로 처단되거나 투옥과 유형을 감수해야 했다. 비록 구체적인 혐의는 없다할지라도 서왕파와 조금이라도 가깝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왔다.

낙양으로 불려들어온 노담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적통을 폐하고 서자를 받들려고 했던 ‘역적 중의 역적’ 빈기란 놈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너도 그와 한패가 틀림없으렸다!”

그런 의심 속에서 노담은 제발로 낙양에 온 것을 천번만번 후회했다.

‘차라리 서왕을 쫓아 초나라로 갈걸 그랬나…아, 동쪽 바닷가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다면 이런 위태로움은 없을 것을…’

서기전 515년 노담이 나이 50대 중반에 맞이한 인생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 노담을 구한 건 다름아닌 그가 지닌 ‘지식’이었다.  서왕이 수많은 왕실 전적을 가지고 망명하는 바람에 새로운 지배세력은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할 의전과 제례의식 거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른 시일 안에 왕실 전적을 보완해 제후국들에게 체통이 깎이는 일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고전에 정통한 학자들이 다수 필요했는데, 노담은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용케 화를 피한 동료들이 노담에게 권했다.

“노담선생.  서왕쪽과 맺었던 과거 친분은 모두 부인하세요. 낙양을 떠난 것도 진나라 군대의 약탈을 피해 떠났다가 서왕파의 군대에 막혀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사정하세요. 거짓말로라도 서왕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금상(今上)을 사모한 증거가 아니냐고 하세요. 사람은 일단 살고 볼 일이 아니요?”

“나는 선왕의 지극한 은총을 입은 몸. 그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데 내가  어느 편을 들어야 옳았단 말이요? 나는 그저 선왕을 기리며 여생을  살고 싶을 뿐이오.”

“선생의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금상은 여기 낙양에 있고 서왕은 천리밖 오랑캐 땅에 있소이다.”

제자들도 노담을 붙들고 간청하다시피 조언한다.

“선생님! 텅 빈 수장실을 전적으로 채우라는 성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애꿎은 사관 하나가 매를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

“지금 섭정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제후들에게 뽐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전고(典故)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에게 비장한 전적을 보내달라고 읍소를 해야할 지경인데, 우리 수장실에서 이 업무를 감당할 분은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허리를 굽혀 주신다면 미력한 저희들은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점을 살펴주십시오.”

죄인의 신분으로 낙양에 끌려오다시피했던 노담은 결국 서왕을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아 수장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실된 전적을 보충하고 새로 바쳐지거나 복사된 전적을 감수하는 일을 맡았다. 그것은 매우 깊고 넓은 지식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노담에게는 더이상 `학문‘이 아니었다. 비루한 목숨값이었다. 그에게 독서와 연찬은 목숨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닌 한, ‘누군가의 찌꺼기를 핥는’  부끄럽고 비루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5. 늙은이의 노래

어느 화창한 봄날 성주성의 축성이 끝났다.  여러 나라에서 차출돼 온 역부들은 고향에 돌아갈 기쁨에 성을 돌며 ‘성주풀이’를 지어 불렀다. 왕과 신하들은 제단을 쌓고 신에게 축성을 고한 뒤 군신(君臣)이 더불어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서약식이 끝나자 대부 이상의 관리 출신 ‘사면자’들은 왕실이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과 섭정들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나온 수장실의 동료가 노담에게 넌즈시 말했다.

“까짓 웃으라면 웃고, 춤을 추라면 춥시다. 기왕이면 왕이 직접 보고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또다른 친구가 말했다. 

“하늘에도 눈이 떠다니고 땅밑에도 귀가 있소. 괜한 소리말고 주는 술이나 받아마시고 조용히 있다가 갑시다.”

노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더이상 ‘학문’도 없고, 학문으로 봉사할 성왕도 없다. 내가 무엇때문에 형편없는 왕자들의 개같은 싸움에 내 소중한 목숨을 던져주랴. 만세를 부르라면 실컷 불러주자,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잔치날에 노담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네                  

  큰 잔치상을 받아 들고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 하네.              

  나는 홀로 조용하네                            

  아무런 느낌없이                             

  아직 웃는 것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네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뭇사람들은 다 잔치를 즐기는데           

  나는 홀로 떨어져 있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              

  세상사람들은 다 밝다 하는데              

  나는 홀로 깜깜하고                            

  세상사람들 다 총명하다 하는데          

  나만 홀로 어둡네.                              

  고요하기가 바다같고                         

  맑은 바람처럼 머무는 곳 없네.           

  뭇사람들은 다 높이 받들건만             

  나의 뜻은 홀로 낮은 곳에 처하는 것    

  나는 홀로 뭇사람들과 다르니             

  산다는 것의 본질을 귀히 여기노라.      

  衆人熙熙(중인희희)/如享太牢(여향태뢰)/如春登臺(여춘등대)/我獨泊兮(아독박혜)/其未兆(기미조)/如孀兒之未孩(여상아

지미해)/루루兮(루루혜)/若無所歸(약무소귀)/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

야재)/沌沌兮(돈돈혜)/俗人昭昭(속인소소)/我獨昏昏(아독혼혼)/俗人察察(속인찰찰)/我獨悶悶(아독민민)/澹兮其若海(담혜기

약해)/요兮若無止(요혜약무지)/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而貴食母(이

귀식모)

  

잔치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진심으로 즐겁지 않다. 그래서 아직 웃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술을 마신다. 잔치가 무르익어 흥청거리자 노담은 조용히 따로 떨어져 나와 홀로 술잔을 기울인다. 우두커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 잔, 또 한 잔을 마신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니 꽃이 흐드러진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흰구름은 어디선가 일어나 어디론가 흘러간다.

  

      학문을 끊어 근심의 뿌리를 잘랐으니    

  이제 나에게 ‘네’와 ‘예’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선과 악의 차이는 또 얼마란 말이냐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 한다.                            

  아, 생(生)의 도(道)                           

  아득하여 다 깨달을 수 없구나…

     絶學無憂(절학무우)/唯之與阿(유지여아)/相去幾何(상거기하)/善之與惡(선지여악)/相去若何(상거약하)/人之所畏(인

지소외)/不可不畏(불가불외)/  荒兮(황혜)/其未央哉(기미앙재)⑩

 

진심으로 충성하는 ‘예’와 마음을 감추고 대답하는 ‘예’의 차이가 굳이 얼마나 된다고 이러나? 저마다 선을 주장하는 데 과연 그 선이 말하는 악과는 또 얼마나 차이가 지나? 나는 또한 그 이치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 담은  ‘예’든 ‘네’든 개의치 않으련다. 이제 더는 선악을 묻지 않으련다. 나는 지금 승자를 따를 뿐이다. 나도 별 수 없는 인간, 뭇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 한다.

 

그렇다, 나도 남들처럼 죽음이 두려웠을 뿐이다. 인생이란 아직 다 건너지 못한 강, 다다르지 못한 평원을 가는 것과 같다. 나의 삶은 천명을 따르고 있는가? 거스르고 있는가? 옳다는 것은 무엇이고, 틀린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아직 그 멀고 깊은 끝을 보지 못했다. 삶의 여정(道)이여, 이치(道)여,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 나는 알 수가 없구나….

 

<하편 계속>

 

 

 

<원문 보기>

 

① 노담의 신상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사마천의 기록이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老子者, 楚苦懸여(갈 여)鄕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聃, 周守藏室之史也.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하략)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그러나 사마천 자신도 당시 전해져 온 노자에 관한 전승을 사실로 확신하지 못했다. 일례로 노담의 성이 이씨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 초기에 이씨 성을 가진 실세 가문이 노자의 가계를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사마천은 또 공자 사후 1백여년 뒤의 인물인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그에 관한 세상의 풍설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공자 사후 129년 후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배알하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바로 이 태사 담이 노자라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사람들도 그것이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自孔子師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담見秦獻公曰(…) 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② <노자> 6장 전문

 

 ③ <노자> 37장 전문

 

 ④ <노자> 78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正言若反(정언약반))

 

   ⑤ <노자> 31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用兵則貴右(용병칙귀우))/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吉事尙左(길사상좌)/凶事尙右(흉사상우)/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上將軍居右 (상장군거우)/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⑥ <노자> 42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道生一(도생일)/一生二(일생이)/二生三(이생삼)/三生萬物(삼생만물)/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强梁者不得其死(강양자부득기사))/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⑦ <좌전> 노소공 22년조

  

 ⑧ 김학규,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⑨ <좌전> 노소공 26년조

 

 ⑩ <노자> 20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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