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남북 극적 타결 기대 어렵다" 오후 3시 30분 남북 접촉 재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8/23 19:36
  • 수정일
    2015/08/23 19: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5신] 북측 "대북 심리전 중단" vs. 남측 "지뢰 도발 사과해야" 맞서15.08.22 20:18l최종 업데이트 15.08.23 16:18l김도균(capa1954)황방열(hby)강신우(fabiuse)

기사 관련 사진
▲ 민통선 통제하는 군인들 북한 포격도발로 남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군인들이 민통선 내 정착주민을 제외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5신 : 오후 4시]
오후 3시 30분 남북 고위급 접촉 재개

남북이 23일 오후 3시 30분경, 고위급 접촉을 재개했다고 청와대와 통일부 관계자가 밝혔다. 

하루 전 양측은 오후 6시부터 이날 새벽 4시까지, 10시간 가량 장시간 마라톤 협상을 벌인 바 있다. 

북측은 지뢰 도발, DMZ 인근 포격 도발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우리 군의 대북심리전 방송 중단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정부는 북측에 지뢰 도발 사과 및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섬에 따라 2차 접촉에 극적인 타협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된다. 

[4신: 23일 오후 3시 5분] 
판문점 협상 "이상한 모양 될 가능성 높다" 

북한의 굴복을 전제로 한 남북의 군사위기의 극적 타결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왔다. 

군사평론가 김종대 <디펜스 21 플러스> 편집장은 23일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린 글에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열려 상황을 안정 시킨 건 기대이상으로 잘 된 일"이라면서도 북한의 굴복을 전제로 하는 남북합의는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김 편집장은 "이번 판문점 협상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이상한 모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추후 다른 대화 채널을 통해 문제를 지속적으로 협의한다"는 정도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 편집장이 남북 고위급 접촉에 대해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이번 접촉이 공개된 협상이라는 점이다. 공개된 협상에서 북한은 국가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으려 총력을 경주할 것이고, 남측에 굴복했다는 결과만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 편집장은 우리측이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 지뢰사건, 포격도발에 대한 북측의 사과 내지 유감표명 ▲ 사격준비 태세에 돌입한 핵심무기를 평시상태로 돌리는 것 ▲ 대북 확성기 방송은 최고 존엄에 대한 비방만 자제하고 지속 ▲ 대북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이므로 막을 수 없다고 버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신 북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금강산 관광 재개, 5.24 조치 해제 정도를 검토하는 것으로 우회한 다는 것. 하지만 이런 식으로 북측이 합의를 한다면 협상테이블에 나온 김양건과 현영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 김 편집장의 분석이다. 

반대로 북측은 (최근 도발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유감 표명은 할 수 있으나, 대북 확성기 방송과 대북전단 살포 중지 보장을 반드시 받으려고 할 것이라고 김 편집장은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북측의 요구를 박근혜 정부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편집장은 결국 이번 남북접촉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기 쉬운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 편집장은 "이 교착 상태를 풀려면 북한에 대한 인식과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면서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럴만한 내적인 동기나 동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김편집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전문이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려 상황을 안정시킨 건 기대 이상으로 잘 된 일입니다. 그러자 이제껏 북한에 강병 일변도의 군사대책을 주문하던 평론가들도 방송에 나와 대화를 주장하는군요. 만일 이 대화가 성공하여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로 반전된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의 '철의 여인', 한국의 마가렛 대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북한으로 하여금 지뢰사건, 포 사격사건에 대한 사과 내지 유감표명과 함께 전방의 사격준비태세에 돌입한 모든 핵심무기를 평시상태로 돌리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확성기 방송은 북한의 최고 존엄에 대한 비방만 자제하고 계속 합니다. 대북 전단살포는 민간의 표현의 자유이므로 막을 수 없다고 버팁니다. 그 대신 북한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금강산 관광 재개, 5·24조치 해제 정도를 검토하는 것으로 우회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이번 전쟁위기를 성공적으로 막은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케네디 행정부에 비견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나리오는 북한의 굴복의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저는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이런 정도의 거래라면 남북 비밀접촉에서나 가능한 흥정인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협상이 된다면 북한은 국가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으려 총력을 경주할 것이고, 남측에 굴복했다는 결과만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남한과 합의를 했다면 김양건과 현영철은 북한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북한은 적절한 수준의 유감 표명은 할 수 있으나 그 대신 남측이 확성기 방송과 대북전단 살포는 안하겠다는 보장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박근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적어도 김관진 안보실장이 대화의 대표로 참석하는 이상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판문점 협상은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이상한 모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후 다른 대화 채널을 통해 문제를 지속적으로 협의한다,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요? 여기까지가 박근혜 정부의 한계입니다. 그 이상 하고 싶어도 박근혜 정부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 북한은 더 크게 판을 벌여 미국과 대화할 수 있는 다른 경로를 모색할 것입니다. 물론 이도 쉽지는 않겠지요. 

이런 상황을 바로 교착상태(dead-lock)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번 판문점 협상은 이를 타개하는 데 역부족이죠. 그러면 휴전선 상황은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위기가 진전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대북 감시태세를 낮출 만큼의 평시 상태로도 되돌아가지는 못합니다. 긴장은 지속되되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 상태로 장기화 될 개연성이 큽니다. 

물론 이런 저의 예측은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연성이란 측면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반면 국내 대다수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군통수권자로서 위기를 잘 관리했다는 용비어천가 일색일 될 것입니다. 이건 매우 확실한 이 정권의 전리품이 될 것이구요. 

이 교착상태를 풀려면 북한에 대한 인식과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그럴만한 내적인 동기나 동력이 없습니다. 아마도 한반도 외부에서 변수가 있지 않을까요? 강대국 간의 막후협상이나 비밀접촉에 기대를 거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3신 수정 : 23일 오전 6시 52분]
무박2일 10시간 협상...진통 겪는 듯 

 

기사 관련 사진
▲ 남북 고위급 접촉 정회... 오후 3시 재접촉 민경욱 대변인이 2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남북이 북한의 서부전선 포격도발로 한반도 긴장 고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고위급 접촉을 22일 전격적으로 진행했으나 입장차를 조율하지 못하면서 23일 오후 3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며 남북 고위급 접촉 협상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남측의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북측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오늘 오전 4시 15분까지 접촉을 진행했으나 최종 결론을 내지 못해, 오후 3시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무박 2일'로 10시간 가까이 자리를 함께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양측은 접촉 중에 수차례 정회하면서 각각의 수뇌부의 의견을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남북은 8월 22일 오후 6시 30분부터 잠시 전인 23일 새벽 4시 15분까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을 진행했다"면서 "이번 접촉에서 쌍방은 최근 조성된 사태의 해결 방안과 앞으로의 남북관계 발전 방안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고 밝혔다.

민 대변인은 이어 "남북은 오늘 새벽 4시 15분에 정회했으며 쌍방 입장을 검토한 뒤 오늘 오후 3시부터 다시 접촉을 재개해 상호 입장의 차이에 대해 계속 조율해 나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사 관련 사진
▲ 다시 서울로... 남북관계 상황을 전반적으로 논의하는 남북 고위급 접촉이 22일 오후 6시부터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려 10시간 넘게 이어졌다. 회담을 마친 23일 오전 4시 55분께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앞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차량이 서울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처음에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통일부에서 접촉결과를 브리핑하기로 공지됐다가 22일 오후 9시께 수석대표인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직접 청와대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 때문에 회담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게 아니냐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날짜를 바꾸면서까지 접촉시간이 장기화하고, 정회를 거쳐 오후 3시에 재개되는 상황을 보면서 접촉이 진통을 겪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애초 예상한 대로 우리 측은 지뢰폭발과 포사격 사건에 대한 북측의 시인과 사과·재발방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반면, 두 사건 자체를 "남측이 조작한 것"이라고 부인해온 북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김 실장과 홍 장관은 서울로 귀환했다가 판문점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북의 황병서 국장 등은 평양으로 갔다가 돌아오기에는 빠듯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개성 등으로 갔다가 다시 판문점으로 올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 시간 동안 '(남북 간) 상호 입장 차이'가 발생한 사안들에 대해, 각각의 수뇌부와 논의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2신 : 23일 오전 1시 43분]
남북고위급 접촉 이틀째 진행중... 김관진 실장이 브리핑 예정

 

기사 관련 사진
▲  22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홍용표 통일부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북측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당비서와 회담을 하고 있다.
ⓒ 통일부

관련사진보기


남북고위급 접촉이 날짜를 넘겨 계속되고 있다. 남의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북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22일 오후 6시 20분께 회담을 시작해 이틀째 마라톤 회담을 이어가고 있다. 양측은 회담 과정에서 수차례 정회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오후 이날 9시께 회담이 종료됐다는 보도가 나왔다가 정정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통일부에서 접촉결과를 브리핑하기로 공지됐었으나,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수석 대표인 김 실장이 직접 언론 발표를 한다는 점에서 회담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게 아니냐는 관측과, 회담이 뜻밖에 장시간 계속되면서 진통을 겪고 있다는 추정이 엇갈리고 있다. 

[1신 : 22일 오후 8시 18분]
남북 고위급 접촉 시작... 김관진-황병서 대좌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된 가운데 남북이 22일 오후 판문점에서 만났다. 남측에선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참석했고, 북측에선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고위급접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관진 실장 등 남측 대표단 일행은 오후 4시 30분께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앞서 청와대는 남북 고위급 접촉이 오후 6시에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 회담 시작은 그보다 다소 늦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 [영상] 22일 오후 6시 남북고위급회담 장면 공개 남과 북이 22일 오후 6시 20분께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긴급 고위급회담을 열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홍용표 통일부 장관,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모여 대화를 시작했다.
ⓒ 영상제공 : 통일부, 편집 : 강신우

관련영상보기


한편 이날 접촉에 나온 김양건 비서가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한 사실이 확인됐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오후 남북 고위급이 접촉할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김 비서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소개했다. 그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후계자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한 바 있다.

 

기사 관련 사진
▲  22일 오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홍용표 통일부장관,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북측 황병서 총정치국장, 김양건 당비서와 회담을 하고 있다.
ⓒ 통일부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곽우신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개혁이라는 달콤한 유혹, 누굴 위한 생존전략인가?

 
 
노동자들이 불행한 나라를 두고 모든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
 
김용택 | 2015-08-19 10:16: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자기가 받는 임금을 깎겠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경영자 맘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면 좋아할 노동자들이 있을까?

△임금피크제 도입 △업무부적격자 해고요건 완화 △통상임금 기준 정비 △근로시간 유연성 확대 △실업급여 확대 △비정규직 보호 강화 

정부가 하겠다는 4대구조개혁 내용 중 노동개혁의 골자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 ‘임금피크제 도입’과 ‘업무부적격자 해고요건 완화’ 2가지다. 

이러한 개혁(?)을 두고 박대통령은 “노동개혁은 생존을 위한 필수전략”이라고 했다. 누구의 생존인지 모르지만 무슨 말인지 그 뜻부터 보자. 첫째 ‘임금피크제’란 ‘정년연장 또는 정년 후 재고용하면서 일정나이, 근속기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감액하는 제도다.

임금피크제는 ’정년연장형(기존의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을 줄이는 방식)과 재고용형(정년퇴직 후 재고용하면서 임금을 줄이는 방식) 그리고 근로시간단축형(기존의 정년을 연장하거나 정년은 그대로 두고 정년퇴직자를 재고용하면 임금을 줄이고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방식) 등 3가지가 있다. 정부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겠다는 이유는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면 중년근로자로 계속 일할 수 있고 청년의 일자리도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의 ‘업무부적격자 해고요건 완화’다. 노동시장 유연화란 ‘외부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인적 자원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배분’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업무가 등장하였을 때 그에 적합한 지식이나 기능을 가진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고(기능적 유연성), 필요한 사람 수 또는 시간만큼 인원을 투입하거나(수량적 유연성), 다양한 임금체계에 맞춰 사람을 쓸 수 있어야 한다(임금적 유연성)는 것이 원론적인 노동시장 유연화다.

말이 좋아 ‘노동시장 유연화’지 알고 보면 ‘업무부적격자를 경영자 맘대로 직장에서 해고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근로기준법 23조에는 사측에서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은 ‘징계해고’와 ‘정리해고’ 두 가지다. ‘저성과자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직원‘을 사측이 원하는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노동시장 유연화’다. 지금까지도 사측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노동자권익이나 따지고 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불량노동자(?)를 해고해 왔는데 여기다 임금적 유연성까지 허용하면 임금이 많은 노동자를 맘대로 해고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100번 양보해 청년실업문제와 생존을 위한 필수전략이라고 치자. 그런데 오늘날 우리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책임은 누구 잘못인가? 이번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기업의 지배구조실태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재벌기업의 총수 지배체제와 경영권 세습’은 물론 0.05%에 불과한 오너 일가 보유 주식으로 대기업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황제경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국내소비자 혹은 노동자들의 피땀흘린 결과를 정부가 재벌을 위한 편들기로 만들어 놓은 결과가 아닌가?

지금 정부는 노동개혁주장에 앞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 합리적이고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구조개혁부터 해야 한다, 경제난과 청년실업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전가시키겠다는 것은 일방적인 재벌 편들기다. 통계자료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 노동자 중 정년퇴직까지 일 하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7%에 불과하다. 2014년 3월 기준으로 정규직의 15%, 비정규직의 51%가 근속년수 1년 미만의 단기근속자다. ‘쉰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두고 정년을 60세로 늘리면 청년고용이 늘어나 청년들의 일자리가 생긴다는 게 맞는 말인가?

현재 근로기준법에는 2년인 기간제 비정규직의 계약기간(35세 이상)을 노동자가 원할 경우 최대 2년까지 추가로 연장하도록 하고 있다. 4년 후에도 정규직전환이 안 되면 이직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비정규직들이 1년 11개월만 쓰고 버려지듯 사용기간이 4년으로 연장되면 3년 11개월만 쓰고 버리겠다는 정책이 ‘비정규직 규제합리화’다. 전체 근로자 중에서 근속연수 1년 미만 근로자의 비중이 35.9%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을 두고 임금피크제와 노동시장 유연화란 가혹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전체 임금 근로자 1,751만 명 중 40.2%가 최저임금, 퇴직금, 사회보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공식 근로자’다. 
 
박근혜정부가 주장하는 4대구조개혁이란 ‘경쟁적 시장, 더 작고 권위주의적인 정부, 오너와 경영진이 지배하는 위계적 대기업, 자기조정시장, 무한대의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다. 한계상황에 처한 저임금 근로자와 기간제 노동자를 두고 자본의 탐욕을 채워 줄 신자유주의 논리는 멈춰야 한다. 노동자들이 불행한 나라를 두고 모든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30&table=yt_kim&uid=18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본 석탄재 폐기물 수입 봇물…막을 법안 야당이 '발목'

 
김정수 2015. 08. 19
조회수 187 추천수 0
 

환경 우군이던 야당 반대로, 폐기물 수입 줄여줄 법 제정 물 건너갈 가능성

재활용 가능 폐기물 매립 억제하고 지속가능사회 위한 ‘자원순환법’ 표류 3년째

waste1.jpg» 강원도 동해안의 한 야적장에 점토 대용 부원료로 쓰일 일본산 수입 석탄재 폐기물이 쌓여 있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폐기물을 소각·매립할 때 부담금을 물리는 ‘자원순환법’이 제정되면 국내산 석탄재의 재활용이 늘어나면서 일본산 석탄재의 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사진=최병성 <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 저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시멘트에는 흔히 일본에서 수입된 폐기물이 부원료로 들어간다. 점토 대용으로 사용되는 석탄재가 대표적이다. 18일 환경부 집계를 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최근 5년간 국내 시멘트 제조업체가 일본에서 들여와 시멘트에 넣은 석탄재 폐기물은 597만t에 이른다.
 

국내에 석탄재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최근 5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석탄재 가운데 화력발전소 인근에 매립 처리된 양만 636만t이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석탄재를 전량 대체하고도 남을 규모다. 국내 석탄재가 남아도는데 왜 일본 폐기물까지 들여다 처리해주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일본산 폐기물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지만 일본 석탄재 수입은 2011년 112만t, 2012년 123만t, 2013년 135만t, 2014년 131만t으로 오히려 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과 한국의 폐기물 매립 비용 차이 때문이다.

 

일본에선 재활용이 가능한 폐기물을 매립할 때는 높은 매립세를 물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웃돈을 얹어줘서라도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싸게 먹힌다. 매립세가 없는 한국에서는 비싼 수송비를 들여 재활용하는 곳까지 보내주는 것보다 땅에 묻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그 결과 국내 폐기물 매립률은 일본(1.3%)보다 7배나 높은 9.3%에 이른다.
 

2013년 7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 소속 최봉홍 새누리당 의원이 ‘자원순환사회 전환 촉진법안’을 대표발의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2월까지 법안명에 ‘자원순환’이 붙은 5개 법안이 잇따라 국회에 제출됐다. 이들 법안은 모두 국내 자원의 효과적 이용을 유도해 일본 석탄재 수입을 줄일 수 있는 ‘소각·매립 부담금’ 신설을 담고 있다.

 

05329010_R_0.jpg» 공중에서 내려다본 인천 쓰레기 매립지의 모습. 폐기물을 매립하기에 앞서 유용 자원을 재활용하도록 이끄는 법안의 필요성에는 모두가 공감하지만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진=이정아 기자

 

2000년대 초부터 이런 입법의 필요성을 제기해온 환경단체에서는 큰 기대를 갖고 법안 처리 과정을 지켜봤다. 하지만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 첫 법안이 제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환노위 법안심사소위의 문턱도 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어서다.
 

정부안을 포함한 5개 법안은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고 재활용을 최대화해서 자원이 효율적으로 순환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목적에 차이가 없다. 다만 실행 방법으로 내려가면 재활용할 수 있는 ‘순환자원’의 정의와 구분 방법을 놓고 둘로 갈린다. 최봉홍 의원 안과 이를 보완한 정부안은 폐기물 가운데 사람의 건강과 환경에 유해하지 않고 경제성이 있다고 정부가 인정한 폐기물만 순환자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을 비롯한 나머지 3개 법안은 유용성만 있으면 모두 순환자원으로 보고, 유용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시장에 맡겨두자는 쪽이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자원순환이 중요하다고 해서 국민 건강과 환경 보호보다 앞설 수는 없다. 유용성이 있다고 사업자가 신고하는 것을 모두 순환자원으로 인정해서 폐기물 관리에서 제외하면 유해 폐기물이 방치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실제 전 의원 안은 재활용할 수 있도록 적절히 모아져 있지 않고 분리·선별 과정을 거쳐야 이용할 수 있는 폐기물도 순환자원에 포함시키고 있어 이런 우려를 더한다. 쓰레기 문제 해결을 목표로 활동하는 전국 180여 시민·환경·소비자·여성단체로 구성된 자원순환사회연대 김미화 사무처장은 “자원의 순환 이용은 당연히 확대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첫번째 전제조건이 안전이다. 폐기물이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어도 어떤 조건에서 배출되고 어떻게 관리됐는지 따져서 유해성이 있을 때는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 법안 처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쪽은 뜻밖에도 그동안 환경단체의 우군이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다. 국회 환노위 소속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이 법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일부 의원들은 환경부가 낸 안과 여당의 최봉홍 의원이 낸 안이 더 낫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야당에서 계속 법안 심사를 미루고 있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다. 6월16일 열린 환노위 법안심사소위 속기록을 보면, 새정치민주연합 환노위 간사인 이인영 의원은 자원순환사회법 처리에 대한 야당의 태도 변화가 있느냐는 권성동 소위원장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전병헌 의원께서 발의하신 법체계하고 정부가 생각하고 있는 법체계가 너무 다르다. 그런데 전병헌 의원이 우리 당의 최고위원이신데 원내대표도 하시고,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기 쉽지 않다 이렇게 생각이 든다.”

 

정부와 다른 방향의 법안을 내놓은 같은 당 의원의 정치적 지위와 무게 때문에 법안 심사를 진행하기 난감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에 대해 이인영 의원실은 “전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이 지난 대선 때 우리 당 대선 공약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어서 잘 조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취지의 발언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보다 못한 환경단체들이 나섰다.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 등 주요 환경단체로 구성된 한국환경회의 운영위원회는 7월23일 환노위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보좌진들한테 간담회를 제안해, “자원순환법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매립장 포화 등 쓰레기 대란에 대응하며 일본 석탄재 폐기물 수입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조속한 법 제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뚜렷한 변화 움직임은 없다. 환경단체들 사이에 이러다 올해 국회 회기를 넘기고 내년에 총선 분위기에 휩쓸려 법안이 자동폐기 수순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 미사일 기술과 전쟁 가능성

북한 미사일 기술과 전쟁 가능성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8/18 [22: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북에서 시험발사한 금성3호 대함미사일     © 자주시보

 

▲ 러시아의 kh-35, 우란 대함미사일     © 자주시보

 

우란 미사일 발사 동영상

 

 

 북의 금성3호 대함미사일 발사 동영상

 
 
✦러시아 우란과 북의 금성3호의 차이
 
북이 올해 시험발사 장면을 공개한 금성3호 대함미사일은 그 모양이 러시아의 kh-35 일명 우란 대함미사일과 똑같이 생겨서 그 복제품이라는 주장이 많다.
 
러시아에는 썬번, 야혼트 등 순항미사일임에도 초음속을 내며 단 한발로 대형 구축함은 물론 항공모함도 격침시킬 수 있는 매우 위력적인 대함미사일이 여럿 있다. 전술핵폭탄을 탑재하면 항공모함도 한 방에 수장된다. 이들은 초음속 미사일이라 방어할 시간이 짧아 미국이 매우 두려워하는 미사일이다. 우란 대함미사일은 초음속은 아니지만 최종 타격단계에 바다에 바짝 붙어서 비행하여 타격하는 능력이 탁월해 매우 위력적인 대함미사일이다. 과거 러시아는 이런 미사일 수출을 꺼렸지만 지금은 내놓고 수출하고 있다. 하기에 중국이나 인도 등에서도 역설계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이 우란미사일을 인도에서 수입하여 시험발사 해 본 결과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목표함선을 명중시키는 위력이 대단한 미사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특히 이 미사일은 목표물 근처까지는 레이더를 켜지 않고 관성유도장치에 의해서 날아가다가 목표함선 바로 앞에서 목표물탐지 능동호밍 레이더를 켠다. 레이더를 켜는 순간 목표물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지만 상대 함선에서도 이 레이더를 감지하여 기관포 등을 무더기로 쏘아 미사일을 요격하게 되는데 요격을 피하기 위해 이 우란 미사일은 그  목표 함선 앞에 가서는 수면에서 4미터 높이로 즉, 바다에 바짝 붙어 비행하면서 강력한 터보팬 엔진을 작동시켜 맹렬하게 목표함선을 들이박게 된다. 특히 한 두발은 요격에 걸릴 것을 예상하고 여러발을 동시에 발사하는데 단 한발만 명중해도 5000톤급 함선 정도는 격침되거나 대파되게 되는 강력한 대함 무기이다.
 
문제는 러시아와 북의 이 두 미사일 동영상을 잘 분석해보면 모양은 똑 같지만 추진불꽃은 달라보였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퍼지는 형태이지만 북은 살짝 끝이 붓끝처럼 모아지는 형태였다. 또 그날의 대기조건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 북의 미사일은 흰연기를 거의 내뿜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미사일은 궤적이 자세히 보일 정도로 초기 가속시 수증기나 연기로 보이는 분출물을 많이 내 뿜었다.  
특히 촬영장비의 차이일 수 있지만 목표함선에 돌진하는 속도도 북의 미사일이 훨씬 빠른 것으로 보였다.

✦ 북제품이어도 더 러시아보다 위력적인 북의 미사일
 
역분해방식을 이용한 똑같은 복제가 아니라 엔진과 전자장비를 북 주체적으로 바꾼 완전히 다른 미사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모양이 같다고 해서 결코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스커드미사일만 해도 러시아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의 스커드미사일은 걸프전쟁 때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거의 같은 시기 더 싸게 북에서 스커드미사일을 수입했던 예멘의 경우는 큰 덕을 보고 있다. 지금 사우디와의 전쟁에서 그 북의 스커드 미사일이 미국의 최첨단이라는 패트리어트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사우디 공군기지 등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2006년 7월 13일부터 8월 12일 휴전협정일까지 딱 30일만에 종료되어 '30일 전쟁'이라고도 하는 레바논전쟁에서 헤즈볼라는 스틱스 계열의 구형 대함미사일로 이스라엘의 첨단 미사일구축함을 명중시켜 병사 4명이 즉사하고 함정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바 있다. 이스라엘 미사일정은 대함, 대공 미사일을 80여발 장착하고 있으며 온갖 방어장비와 최신 레이더로 중무장한 첨단 미사일함정이었다. 그런데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구형 스틱스계열 미사일에 당한 것이다. 이 대함사일은 이란이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란은 이를 북의 기술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서 헤즈볼라는 지하 갱도로 이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대전차 미사일로 이스라엘 탱크를 초장에 40여대나 박살내버려서 기갑부대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고 이스라엘 헬리콥터도 휴대용 대공미사일에 격추되었으며 일명 카츄샤포라고 불리는 로켓포 4000여발이 이스라엘 본토를 유린하여 100여만 북부 이스라엘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로켓을 요격했다고 자랑을 했지만 정말 요격할 수 있었다면 전 주민을 대피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한 달만에 휴전협정에 도장을 찍고 이스라엘군이 퇴각한 바 있다. 
이 전쟁에서 갱도전 등 북의 전법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에 타격을 준 무기가 모두 이란, 시리아 등에서 제공된 로켓무기, 즉 미사일무기였다. 이란과 시리아는 대표적인 친북국가이다.
 
 
북의 대형로켓기술은 독창적이면서 매우 위력적이라는 사실이 은하3호 위성발사를 통해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매우 추진력이 강했다. 필리핀 영해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우회기동을 하면서도 정확하게 제 궤도를 찾아 안착시킨 첨단제어능력은 사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보여준 적이 없는 신기술이다.
이 은하로켓의 불꽃은 다른나라 로켓의 불꽃과 그 모양부터 다르다. 최근 들어 러시아나 미국에서 개발한 신형 대형 우주로켓들은 오히려 끝이 모아지는 북의 은하 로켓형태를 따라가고 있다. 추진불꽃모양만 놓고 보았을 때 북이 지금 세계 기술을 선도한다고 봐야할 정도이다.
 
▲ kh-35 우란 미사일의 탄두부는 목표물을 자동 탐색하는 관성유도장비와 레이더 장비가 장착되어 있다.  북도 이런 관성유도장비와 레이더 전자제어시스템 개발에 있어 많은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의 동영상을 보면 느리고 큰 목표물은 물론이고 작고 빠른 로켓목표물도 자동탐색하여 정확히 요격하는 북의 휴대용로켓무기를 보면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자주시보
 
 

[동영상: 작고 빠른 로켓마저 저렇게 자유자재로 따라가 요격하는 것을 보면 입을 다물수가 없다. 이런 기술을 가진 북이기에 전투기나 함선처럼 덩치가 크고 느린 목표물을 탐색하여 명중시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요격 로켓의 속도는 목표 로켓보다 정확히 두 배나 빨랐다. 매우 강력한 로켓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두고 있는 것이다. ] 

 

북의 소형로켓분야도 이미 국제적으로 그 능력을 충분히 입증 받았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의 2005년 보고서에서 러시아는 북으로부터 휴대용 대공, 대전차 미사일을 1250기나 수입했다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조갑제 닷컴의 김필재 기자도 이를 주목하여 우리 정부의 대책 마련을 주문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김필재 기자는 기술을 러시아가 제공하고 북은 생산만 담당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러시아가 수호이 전투기를 인도나 중국 등에 기술이전도 하면서 수출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지 러시아가 수입하여 사용할 때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러시아도 인정하는 북의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사용할 휴대용 로켓무기를 북에서 수입한 것일 것이다.
 
 
북은 소형로켓엔진개발이나 그 자동조종체계 개발 능력에 있어서도 뭔가 매우 위력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이미 전에 개발해놓고 이제와서 하나씩 공개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소형로켓에 속하는 대함미사일 로켓도 북이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자체 기술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가 똑같은 모양의 미사일을 북이 공개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 러시아의 첨단 무기 핵심 기술은 모두 북에 의존?
 
오히려 '러시아의 핵심 무기의 원천 기술이 북에서 도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보도도 적지 않다.
스푸트닉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이 올 초에 러시아의 첨단무기 관련기술 국산화율을 높이겠다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 아직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놀랄만한 사실을 북이 근년 들어 두번이나 노동신문이라는 최고 권위의 언론을 통해 공개한 바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대북 정보를 자주 검색해보는 한 대북전문가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북은 러시아의 신형 잠수함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 '블라바' 시험발사에 성공한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보도를 하면서 '최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첨단무기 설계로부터 조립, 생산에 이르기까지 국산화율을 2017까지 30%, 2030년까지 90% 더 나아가 100%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내용을 덧붙여 노동신문을 통해 보도했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러시아에서 미사일종합체 훈련(S-400으로 추정)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소식을 보도하면서 앞서 언급한 러시아 첨단무기 국산화 계획을 똑같이 덧붙여 보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엔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핵심 전략무기기술 교류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이나 인도의 경우엔 러시아보다 한참 뒤떨어져있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의지할 나라는 북밖에 없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첨단전략무기 중에서도 가장 중시하는 블라바와 같은 잠수함발사 대륙간탄도미사일과 S-400대공미사일 기술을 거의 북에 의존하고 있다고 북은 노동신문을 통해 은근히 암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러시아가 지금 첨단 무기 기술을  70% 이상을 북에 의존하고 있다니 사실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북의 컴퓨터자동조종프로그램 제작능력이 탁월하여 미사일 회피기동이나 자세제어 등에 관해 러시아가 북에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했었다. 하지만 북에서 발표한 비율을 놓고 보면 거의 전부 북에서 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 북에서 공개한 러시아 S-400급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강의 번개5호 대공미사일, 여군이 손을 흔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마 레이더를 이용 목표탐지관련 일을 하는 병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 자주시보
 
사실 이번 북이 발사한 북극성 1호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의 불꽃은 블라바와 같은 것이었다. 북도 좀더 큰 미사일만 장착하면 블라바보다 위력적인 잠수함발사용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북의 번개5호 대공미사일 시험발사 장면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 크기만 보면 러시아 S-300보다 더 커서 S-400급으로 보인다고 분석한 바 있다. S-400미사일은 러시아도 어느나라에도 수출한 적이 없다. 최근 시진핑 주석의 방문 때 푸틴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에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는 했지만 실제 제공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만큼 러시아에서 중시하는 전략무기이다.
 
 
결국 이런 무기들은 러시아도 현재 수출하는 곳이 없어 북이 역분해방식으로 복제 생산하려고 해도 구할 곳이 없다. 따라서 북의 첩보원이 러시아에서 훔쳐왔거나 북이 러시아보다 먼저 자체로 개발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훔쳐왔다면 지금처럼 러시아가 북에 15조나 되는 부채를 탕감해주고 북의 철도 도로 기반시설을 건설해주는 일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올해 북에서 발표한 북의 대 러시아 주요 수출품 중에는 광학부품 등 군사용 장비에 쓰이는 것들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북은 공개적으로 2000년 푸틴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북의 미사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푸틴의 탄복'이라는 제목의 북 언론보도였는데 지금은 차단되어 볼 수 없는 상태이다. 

✦ 북 무장력으로는 미국과 얼마든지 한 판 붙을 수도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북의 첨단무기기술 수준이 러시아를 능가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의 화성13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러시아의 토폴M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못지 않은 위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블라바 못지 않은 사거리와 위력 그리고 정확도를 가진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도 이미 북에서는 대형원자력 잠수함에 작전배치해놓고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북이 영변에 공개적으로 소형원자로를 만든지 얼마나 지났는데 원자력 잠수함하나 만들지 못했겠는가.  금성5호 즉, 우란 대함미사일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썬번, 야혼트 등 미국에도 없는 초음속 대함순항미사일도 북은 이미 실전 배치해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여차하면 그런 미사일들이 지금 북을 압박하는 훈련에 동원되고 있는 미국의 구축함과 항공모함을 불시에 습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남측도 이제는 위력적인 대함미사일과 대공미사일, 그리고 북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있는 탄도미사일을 개발 배치하고 있으며 북의 막강한 방사포에 대항할 신형 다련장로켓포도 개발에 성공하였다. 미국의 통제와 제재만 아니라면 더 강력한 사거리의 미사일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나로호를 놓고 보았을 때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아직 무리인 것 같기는 하다. 다른 여타 미사일도 핵심부품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작심하고 개발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문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북의 그 많은 방사포와 그 많은 고속정과 잠수함을 요격하고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을 다 구비하려면 국가의 전 세금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다. 북은 사회주의시스템이기 때문에 개발비용이 우리와 다르다. 거기다가 미국은 물론 유럽 등 그 연합세력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무기량을 비축해놓고 있다.
 
세상에 스커드 탄도미사일을 한 번에 100여 발 시험발사하는 나라는 세상 천지 어디에도 없다. 미국도 러시아도 그런 시험을 하다가는 군사비 감당 못한다. 그런데 북은 지난해 공개적으로 그런 시험을 진행한 바 있다. 지금도 비공개로 얼마나 많은 무기 시험을 진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북과 무기경쟁을 한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 그렇다고 미국과 강대국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막고 있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보복 핵억제력을 구축할 수도 없다.

✦ 미군만 믿고 있어도 돼나?, 한반도 평화 대책 절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서울 상공으로 군용헬기들이 날아다니고 북이 한반도 현재 상황을 전쟁상황으로 인식했다는 속보가 뜨고 있다.
제도권 언론에 주로 등장하는 군사전문가들과 여야 정치인들은 북이 감히 미군을 건드렸다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기에 미군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는 주장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데 북의 군사 기술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이 북에게 북침으로 오인하게 하여 북의 선제타격을 유발할 우려도 없지 않다. 북은 이미 이라크전 수준의 미군 무장력이 한반도 주변에 집결하면 전쟁 개시행위로 간주하여 먼저 선제타격하겠다고 선언한지 오래다.
 
미군만 믿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아직 우리의 대북 군사력 억제력은 부족한 상황이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핵억제력이란 한계도 있다. 하기에 근본적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즉 평화적 통일의 길을 하루 빨리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야당 문재인 대표가 찬란한 통일경제론을 최근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데 그것도 남북관계가 풀렸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전쟁이 나면 그런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정 한반도의 평화번영을 바란다면 북미대결전이 더는 격화되지 않도록 자주적인 입장에 서서 실질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미국의 행보를 보면 북이 더 위력적인 무기를 개발하기 전에 북과 뭔가 결판을 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북도 지금까지 공개한 무기만 가지고도 미국과 일전불사를 외칠 준비는 된 것으로 판단된다. 몰론 미국도 북의 군사력을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고 북도 전쟁이 나면 심각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기에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 주변에 너무 강력한 무력을 집결시키고 있고 연례적인 훈련 강도도 계속 높아가고 있다.
또 북의 미사일 기술만 봐도 북이 미국의 이런 무력동원을 전쟁 개시를 위한 것으로 판단할 경우 미국에 굴복하여 협상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전격적인 선제타격으로 대응할 우려도 없지 않다.
 
대통령과 여당이 나서지 않으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이 위험천만한 한반도 전쟁위기를 막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더 미국의 압박이 강해지면 상황은 심각해 질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제부터 내가 널 맡겠다" 이근안의 관절꺾기에 그만

 

[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②] 김명인 인하대학교 교수

15.08.18 19:22l최종 업데이트 15.08.18 19:22l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10만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쓰러진 후, 잠시 동안 따스했던 이른바 '서울의 봄' 때의 일이다. 당시 서울역에 모인 학생들에게는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선택의 기로. 각 학교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오랜 시간의 논쟁 끝에 군 출동의 빌미를 주지 말자며 해산을 결정한다.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뒤에 벌어진 일은 알려진 대로다. 2일 뒤인 5월 17일 확대된 비상계엄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광주의 살육으로 이어진다. 찰나의 봄, 그리고 여름과 가을을 뛰어 넘은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대학가는 한동안 침묵의 움츠림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12.12군사쿠데타 1주년을 하루 앞둔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학교에 A4지 2장 분량의 유인물이 살포된다.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 유인물을 살포했던 4명의 학생이 연행되면서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출범 직전의 대규모 공안사건으로 비화된다. 학림사건과 부림사건의 전조가 된 <무림사건>이다. 

현재 인하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김명인은 당시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을 직접 쓴 무림사건의 주범이다. 연행 후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이근안을 만난다. 컴컴한 남영동 고문실. 그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13일, 김명인 교수를 만났다. 
 

기사 관련 사진
▲ 김명인 인하대 교수 서울대 77학번인 김명인 교수는 일명 <무림사건>으로 이근안의 국내 공안사건의 첫 고문대상이 된다. 그러나 김명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만 해도 이근안은 꽤 젊잖은 편이었다.
ⓒ 한영수

관련사진보기


"서울역 회군이 광주시민 희생에 결정적인 원인"

- 선생님은 1980년 5.17계엄 이후 서울대의 첫 시위로 알려진 일명 <무림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당시 학생운동의 상황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후반 서울대의 상황은 민청학련 사건(1972년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 정권이 1974년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40명을 체포한 당시 최대의 학생운동 공안사건-기자 말) 이후 1975년 5월 22일의 김상진 열사 추모집회(이른바 522사건)로 많은 재학생들이 투옥되거나 제적되고 나서는 한동안 투쟁의 흐름이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서울대에는 학회라는 독특한 서클문화가 있었어요. 고전연구회나 흥사단아카데미, 기독학생회처럼 본부에 등록된 (반)공개 서클도 있었지만, 법과대의 경제법학회, 농법학회, 사회대의 한국사회연구회, 농업경제학회, 국제경제학회, 사회복지학회, 인문대의 역사철학회 등 사실상 비공개 운동서클인 각종 학회들이 무척 많았어요. 빠뜨리면 섭섭할 친구들이 있을 텐데(웃음).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고 학내 시위가 어려워지고 나서는 이 학회 핵심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학생운동의 방향, 전략 등을 논의하는 틀을 만들었는데, 이걸 '언더'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1977년부터 1979년 10.26사건이 터지기까지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교내시위는 이 '언더'에서 조직됐다고 봐야 할 겁니다. 주동자들은 대부분이 학회에서 성장한 4학년생들이었는데, 저는 역사철학회의 77학번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 그 '언더' 모임에서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위도 주도했던 건가요?
"서울역 시위 전체를 주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울대는 주도했다고 봐야지요. 10.26, 12.12가 일어나면서 어떻게 대처할 거냐는 논의는 굉장히 많이 했어요. 우리가 본격적으로 언더 조직을 만들고 비밀리에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한 게 77년부터인데, 한 3~4년 정도 학내에 조직을 잘 만들어서 사람들을 많이 키워놨어요. 그런데 학생들의 의식수준을 끌어 올리는 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야 더 큰 역량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서울대는 1980년 5월 14일에야 첫 가두시위에 나갔습니다."

- 준비를 철저히 하려다보니 막상 대중행동에는 발이 느렸던 거군요. 5월 14일 시위에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 했습니까?
"당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인 사람이 대략 8천 명에서 1만여 명이라고 추산되고 있는데 사실 이게 계산이 잘 안 돼요. 전에는 그렇게 많이 모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경찰들이 교문을 겹겹으로 막고 있었는데 이 정도 숫자가 되니까 결국 뚫고 나가게 되더군요. 경찰들이 일부러 터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돌 나르고, 던지고... 정말 어마어마하게 싸워서 뚫고 나간 건 사실이에요."

-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워서 5월 15일에는 10만여 명이 서울역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학생운동 지도부들은 계속 싸우기보다 해산을 결정했어요. 우리 민주화 운동사에서 뼈아픈 실책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1만 명, 2만 명은 감당이 되는데, 각기 다른 대학에서 10만여 명이 모였으니까 우리도 많이 당황했어요. 우리 내부('언더' 그룹-기자 말)에서도 '계속 싸우자', '아니다. 해산해야한다' 논의는 분분했지만 그 엄청난 인파가 모인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의견을 모을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설사 어떤 의견 일치를 보았더라도 당시 관광버스 안에서 난상으로 이루어지던 각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에 의견을 전달할 방법도 없었고요.  

또 그런 의견을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 사람 혼자서 대다수 온건한 입장이었던 학생회장단 전체 의견을 모을 방법도 없었을 겁니다. 결국 학생회장단에서 '해산하자'는 결정이 나오고 시위대가 흩어지기 시작하니까 다시 모을 방법도 없었어요. 당시 학생운동의 역량으로는 불가항력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회군에 대한 역사적 책임까지 면할 수는 없겠지요."

- 당시 해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의 행로가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당시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식이 퍼졌어요.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죠. 그렇지만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쪽에서는 '오히려 (공수부대가 왔다면) 그게 더 좋다'는 입장이었어요. 해산하자는 쪽은 미국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공수부대까지 왔다면 미국이 좌시하지 않을 거다, 회군해서 공수부대에 빌미를 주지 않고도 신군부를 컨트롤 할 수 있다'라고 본 것 같아요. 당시 운동권에 영향력이 컸던 정치인도 회군 입장이었고. 굉장히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이었어요. 

만일 회군하지 않았다면 정말 공수부대를 투입했을까? 쉽게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시는 정보도 부족했고, 또 누군지 모르겠지만 버스를 밀어서 전경 한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친 사건도 있었어요. 그 사건도 해산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그렇지만 만일 다음 날에도 그 정도의 인원이 나왔다면 전두환도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폭력적으로 진압하든, 퇴각하든 도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당시에 회군하자, 회군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번갈아 들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어느 쪽이 옳았을까 판단이 잘 안 서요." 

- 학생들이 해산을 결정하고 결국 광주에서는 살육전이 벌어졌습니다. 만일 공수부대가 출동했더라도 서울이었다면 광주와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광주는 풍선효과였어요. 서울의 상황이 안정되고 나니까 신군부 입장에서는 여력이 남아서 광주라는 제한되고 봉쇄 가능한 지역에 무장력을 투입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광주가 특별히 잘 싸웠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서울역 회군이 광주시민의 희생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무림사건, 그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회장들은 5월 17일, 이화여자대학교 식당에 모여 대책을 논의한다. 김명인은 그 다음 주 월요일(5월 19일)부터 다시 대규모 가두투쟁 방침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학생회장단 회의를 움직이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계엄군이 들이닥쳐 학생회장들을 연행했다. 회의장 밖에 있던 김명인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 주방으로 들어가 식당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주방복과 주방모를 걸치고 감자를 깎으며 겨우 검거를 모면했다. 계엄군과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밤에도 식당 창고에서 대형 수납장을 벽쪽으로 뒤집어 놓고 숨어 있어야 했다. 결국 새벽녘에야 계엄군의 감시망을 겨우 벗어났지만, '빌미를 주지 말자'며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던 학생회장들은 김명인의 표현대로라면 "평생 맞을 것을 다 맞았을" 정도로 심한 구타에 시달려야 했다. 

- 학교에 돌아와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7월쯤 되니까 5월에 잡힌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도 2학기에 복학했어요. 당장 싸울 수는 없었으니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의 대학들을 연결해서 은밀하게 대규모의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이밍을 1981년 봄으로 잡았죠."

- 나중에 80년대 학생운동 초기 논쟁인 이른바 '학림-무림 논쟁'에서는 무림쪽이 준비론적 입장에서 시위 자제를, 학림쪽이 전면적 투쟁론을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위 자제를 주장한 것은 맞죠. 나중에 학림으로 불린 그룹들이 우리에게 '왜 시위 안 하냐, 선도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은밀하게 1981년 초를 준비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보안이 중요했으니까요. 물론 시위를 한 번 할 수는 있지만 시위하다가 걸리면 그 사람만 잡혀가는 게 아니라 조직 전체가 깨질 가능성이 컸어요. 

그 때 은밀하게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준비론을 가장한 운동 포기론자처럼 보였어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질려서 운동 포기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언제나 싸우자는 쪽과 싸우지 말자는 쪽이 논쟁을 하면 싸우자는 쪽이 이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궁지에 몰렸죠.(웃음)"

- 1981년 초에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운동포기자'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위를 자제해 왔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무림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조직 사건이 터지면서 서울대 운동권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결과인데요? 
"사실 우리는 이게 그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학내에서 하도 (시위를 벌여야 한다는) 반발이 커지고 갈등도 심해지니까 '안 되겠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 정도는 발표하자'는 결론을 내렸죠. 어차피 1981년 초에 큰 시위를 하려면 불필요한 갈등을 지속하기보다는 논쟁으로 가는 편이 좋다고 봤어요. 그래서 광주 이후에 대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입장을 내기로 했어요. 

이렇게 준비한 게 1980년 12월 11일 시위입니다. 12월 12일은 12.12사건 1주기니까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망이 심할 것 같아서 하루 당긴 거죠. 그래서 저하고 현OO, 최OO 등이 기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위를 주도할 4명으로 팀을 꾸리고 저는 선언문을 기초했는데 상당히 강도 높은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광주항쟁의 교훈을 반영해서 70년대 학생운동권이나 재야 운동처럼 순진한 반정부투쟁 수준을 넘어서는 본격적인 민중혁명 의지를 고취하는 선언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썼어요. 그나마 저는 제목만은 온건하게 <학우들에게 고함>이라고 썼는데 나중에 시위주동팀이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으로 바꿔버렸지요."

- 처음에는 이 시위가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 못하셨던 것인가요?
"유인물을 살포하면 연행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시위를 주도한 4명이 연행되면, 그 친구들이 시간을 벌다가 현OO군의 이름을 밝히고, 그 다음에 현OO군이 연행되고 나면 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피생활을 시작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이 사건의 대내외적 파장이 커지면서 잡혀간 친구들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어마어마한 고문을 받았어요. 전기고문에 물고문까지 받다보니 엉겁결에 제 이름까지 나온 것 같습니다."

"옷 다 벗어라" 끊임없는 몽둥이질, 물고문, 통닭구이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배포했던 <반파쇼학우투쟁선언문>은 그 논리 정연함 때문에 공안당국으로부터 '외부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신군부는 유인물을 작성·배포한 이들이 간첩이거나,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최소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언론에서는 "공산 폭동 혁명론이 대학가에 나타났다"고 보도했고, 대대적인 구속과 수배, 연행자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이 이어졌다. <무림사건>의 시작이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
ⓒ 아우라픽쳐스

관련사진보기


- 어떻게 연행되셨습니까?
"현OO군이 잡혀가면 내가 도피하기로 했었는데 당시 늘 감시당하고 있던 제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오히려 눈에 띄게 될 것 같아 일상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12월 16일에 학부 졸업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황당했죠. 계획대로라면 현OO군이 먼저 잡혀가야 하는데 제가 먼저 잡혔으니..."

- 연행되고 어디로 가셨나요?
"처음에는 관악경찰서 지하실로 갔어요. 넓은 지하실에 들어가니까 첫 마디가 '옷 다 벗어라'에요. 옷을 다 벗겨 놓고 '유인물 누가 썼냐?'고 물어요. 내가 썼다고 했죠. 이미 제가 쓴 걸 다 알고 잡아온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몇 번을 확인하더니 (유인물을) 외워보라고 하더군요."

김명인은 8절지(A4 두배 크기)로 앞 뒤 두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유인물을 접속사 몇 개를 제외하고 정확하게 다 외웠다. 먼저 연행된 사람 중 한 명이 고문 끝에 자기가 썼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자기가 직접 쓰지 않은 선언문을 외우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덕에 그는 고문만 더 당했다. 그러나 김명인은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선언문을 외워냈다. 1차 임무를 완수한 관악경찰서는 그를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보냈다. 

두 눈을 가린 채 고문실이 쭉 늘어져 있는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들어간 김명인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세 사내들의 구타였다. 몇 마디 질문 이외에는 별다른 말도 없었다. 몽둥이질, 발길질, 주먹질... 엄청난 구타가 있은 다음 날에는 물고문과 일명 통닭구이 고문이 이어졌다.

- 묻기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고문은 어떤 식이었나요? 
"때리고 물고문 하니까 오히려 시간을 벌어준다고 생각했어요. 얻어맞고 물고문 당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물고문 할 때 할 말 있으면 손가락을 까딱 하라고 하니까 고문 받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손가락 까딱하고... 거짓 진술을 한 뒤 경찰들이 확인할 때 좀 쉬고... 선배 이름을 대라고 하면 나름대로는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된 선배들 이름 대고... 저 때문에 죄 없는 선배들이 고생을 좀 했어요. 이틀인가 사흘 정도 그러다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게 잘 안 나오니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옮겼어요."

"자결하지 않는 다음에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별칭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고문의 고통에 시달렸다. 1985년 김근태 전 의원을 잔인하게 고문했고, 1987년에는 박종철을 고문·살해해 6월항쟁의 도화선을 만든 그곳이다. 

- 남영동에서 선생님 수사는 고문수사로 악명 높은 이근안이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영동으로 가니까 얼굴이 큰 수박만하고 덩치가 하마 같은 사람이 악수를 청하더니 '내가 이근안이다. 이제부터 내가 널 맡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당시에 이근안은 다른 수사관에 비해서 굉장히 점잖았어요. 제가 그때만 해도 꽤나 동안으로 보였던 때문인지 '너처럼 애기 같고 예쁘장한 놈이 올지 몰랐다'면서 '정말 네가 썼냐? 다시 외워 봐라'고 하더군요. 내가 썼다는 걸 믿는 눈치였어요. 다 외우니까 이번에는 왜 이걸 썼는지 쓰라고 해서 몇 번을 썼죠. 평생의 일대기를 다 썼어요. 물론 숨길 건 숨겼지만."

- 이근안 하면 잔인한 고문수사로 악명이 높습니다. 선생님께도 심한 고문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이근안은 저에게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같은 건 안 했어요. 제가 썼다는 건 이미 이야기했고 본인도 믿으니까. 대신 저를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똑똑한 친구로 본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저를 지능범으로 보고, 자기도 물리적인 고문보다는 저와 머리싸움 하는 걸 즐겼던 것 같아요. 게다가 이 사람이 일찍 결혼을 해서 아들이 있었는데 저하고 나이가 같아요. 당시 그 아들이 전경으로 입대해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도 좀 났나 보더라고요."

- 그럼 남영동에서는 고문이 없었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지요. 다만 칠성판(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위해 고안된 고문 도구. 이근안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기자 말)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세 가지 고문을 했어요. 첫 번째는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러요. 이게 피는 안 나면서 굉장히 아픕니다. 두 번째는 손톱 누르기. 세 번째가 '관절 꺾기'였어요. 손목만 꺾어도 뼈가 탈구되는데 너무 고통스럽더군요. 남민전 관련자인 이재문씨에게도 고문하면서 무릎 꺾고 팔 꺾고 나서 '5미터만 제 발로 걸어가면 널 석방하겠다'고 했다더군요. 

저도 그때 결국 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울대 내에 운동을 지휘하는 비밀 조직이 있다고... 그때쯤이면 대부분 도피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수사대상이 너무 많으면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댔어요. 후배들의 이름은 숨겼지만 웬만한 선배들, 운동권 명사들은 전부 관계있다고 떠벌였습니다."

- 육체적인 고통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서승 선생님(재일교포인 서승은 1971년 서울대학교 유학시절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심한 고문을 받던 중 난방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시도해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기자 말)이 고문을 받다가 난로 기름을 부어서 분신을 시도하신 적이 있잖아요?

저도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박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어요. 내가 자결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 육체적 고통보다 제가 선배와 동료들의 이름을 밝히고 조직을 와해시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최대의 치욕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문당한 사실을 말하기도 힘들었어요. 결국 적과의 싸움과 나 자신과의 싸움 모두에서 진 거니까요." 

결국 축소된 무림, 살아남은 자의 책임감

김명인은 어쩌면 운이 좋았다. 먼저 구속된 이들은 칠성판에 올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사건을 처음 맡았던 이근안에게는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이 흥미는 이근안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똑똑해 보이는 그를 당시 유흥수 치안본부장이 직접 찾아와 '3급으로 특채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거부했다. 그런데 얼마 뒤 이근안의 상관인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장 박처원이 찾아와 이상한 제안을 한다.  

-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소환되고 언론에서 간첩조직사건처럼 다룬 것에 비해 무림사건의 결말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경찰에서는 조직사건을 뜻하는 림(林)에, 사건이 안갯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霧)를 붙여서 <무림사건>으로 불렀어요. 
"유흥수 치안본부장이 찾아오고 나서 박처원이 찾아왔어요. 그러고는 '네 진술을 들으면 유신 때 운동권부터 다 잡아들여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크다. 줄이자'고 하더군요. 수사 받을 때는 사형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너무 놀랐습니다. 박처원이 '조직사건으로 다루면 너무 커지고 부담되니까 몇 사람이 주동한 학생시위 사건으로 하자'라고 해서 사건이 축소됐지요. 제가 지니고 있던 서적들 때문에 반공법으로 걸렸는데, 이런 것만 가지고 사건을 전체적으로 축소시켰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뒤집어놓을 엄청난 간첩조직사건인 듯 시작했던 <무림사건>은 계엄법과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변했다. 타이밍이 좋았다. 1981년 1월 17일 기소가 되어 2월 말에서 3월 초에 첫 재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식과 겹친 것이다. 광주에서의 살육 이후 또 다시 대형사건이 터지는 걸 부담스러워 한 신군부에서 애초의 그림보다 사건을 축소한 것이다. 최소한 사형 구형은 받을 줄 알았던 김명인도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 받고 1983년 8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러나 <무림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문을 이긴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고문에 졌다는 '당연한' 결과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함께 조사받은 후배들 대다수가 군대로 강제 징집되었고 그 중 일부는 악명 높은 <녹화사업>에 동원되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기도 했다. 5공 시절에는 운동권 친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한 악질적인 이 녹화사업 과정에서 6명이 사망했다.  

- 출소하고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죄인이라는 생각에... 괴로웠지요. 그 와중에 녹화사업도 당하고 군대 가서 죽은 친구도 있어요. 감옥에서 나온 뒤로 두문불출하고 운동하던 친구들과도 거의 못 만났어요. 출소 두 달 후에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10개월 정도 일하다가 1984년 9월에 복학조치에 따라서 복학을 했어요. 어떻게 계속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다 출판사에 취직하고, 문화운동 특히 문학평론을 통해 싸우자고 결심했지요."

- 지금도 그 때 고문 받은 후유증은 남아 있습니까?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꿉니다. 또 잡혀가서 옷 벗기고 항문검사 당하고 취조당하고... 지금에서야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한 달 정도를 엄청난 폭력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집중하다 보니까 강박증과 우울증 같은 게 생겼어요. 어떻게든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종의 완벽주의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실수를 추궁하면 몸이 확 나빠져요. 얼굴이 달아오르고 붉은 반점이 나타나고 온몸이 가렵기도 하고...그럴 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지요. 

무엇보다 죄책감이 제일 오래 남아서... 어떤 즐거운 일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었어요. 좋은 일로 기분이 좋다가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맛있는 걸 먹어도 '내가 이걸 먹어도 되나...' 이런 식으로 계속 마음에 남았지요."  

- 고문했던 이들에 대한 원망도 남아 있습니까? . 
"원망보다는 연민이지요. 그들도 체제가 만든 사람들이에요. 이근안도 아마 경찰이 된 후에 워낙 신체조건이 좋으니까 대공분야 쪽으로 배치된 거고, 또 공도 많이 세우고 전문가가 되니까 80년대 차츰 노골적으로 대공사건 조작이 시작되면서 인생이 망가진 겁니다. 그 사람도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걸었을 거예요. 애국한다고. 안 그러면 스스로 무너지니까. 연민이 느껴지죠."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을, 사죄를 통한 화해를..."

김명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근안은 대공수사에서는 매우 잔인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다. <무림사건> 수사로 1계급 특진한 이근안은 이제 서울대 운동권은 끝났다고 봤다. 

수사팀도 '공안팀의 승리'로 자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1981년 3월, 서울대에서는 다시 격렬한 시위가 발생한다. 뒤에 벌어진 학림사건 등에서 이근안은 더욱 잔인해졌고, 결국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악마적인 고문수사로 수배 길에 오른다. 김명인은 "이근안이 <무림사건> 이후에도 서울대에서 또 시위가 터지니까 학생들은 봐주면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돌아버린 것 같다"고 봤다.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문수사관 중에서는 이근안이 제일 유명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했던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이근안들은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 김명인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7월 16일 제안된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의 제안자로 이름을 올렸다. 
 

기사 관련 사진
▲ 김명인 인하대 교수 이근안 고문 피해자인 <무림사건> 주모자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지난 7월 16일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제안자에 이름을 올렸다. 과거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인정과 사죄,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 한영수

관련사진보기


- 지난 7월 16일에 제안된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 사업에 제안자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때의 분노심이나 복수심 때문인가요? 
"우리가 반(反)헌법 행위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에 제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이들에 대한 적대감이 없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지요. 

하지만 제 개인적 복수심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운도 좋았고 학연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조건들이 좋아서 지금 이나마 잘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뿐인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 미치거나 폐인이 되거나 소리 없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을 꽃 피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꺾였습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어요.

우리 헌법에 다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국민이 이런 대우를, 이런 피해를 받으면 안 된다고. 이게 최저선인데 이조차도 안 지켜졌다면 이제라도 지켜야지요. 가해자들도 가해자라는 사실 때문에 정상인 사람 별로 없습니다. 명백한 잘못도 부정합니다. 왜? 고통스러우니까 자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기 암시를 걸지 않으면 그들도 못 견디는 겁니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사죄와 용서와 화해와 이뤄지면 이러한 심리적 고통과 강박은 상당히 해소됩니다. 고문 조작한 사람들, 헌법과 인권을 유린한 사람들이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받고 화해의 길로 나서는 것, 그걸 해보자는 겁니다."

고문 피해자들이 평생을 죄책감과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가해자들도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암시에 고통 받는 나날을 보낸다. 그것을 벗어날 유일한 길은 자기 잘못의 인정이다. 인정을 통한 사죄, 사죄를 통한 용서, 용서를 통한 화해다. 용기 있는 이들의 제보를 기다린다. 

(*제보: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주비위 이메일: badmen815@gmail.com)


○ 편집ㅣ장지혜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통일시론> 박 근혜, 이대로 주저앉는가?

<통일시론> 박 대통령, 이대로 주저앉는가?
데스크  |  tongil@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5.08.19  01:28:00
페이스북 트위터

집권 반을 넘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은 어떨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퇴임 후 자신의 업적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정치, 경제, 외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보자. 국내 정치는 여야가 늘 티격태격하면서 정치적 혐오를 주는 터라 누구라도 점수 따기가 쉽지 않다. 경제 경우도 창조경제를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 개념도 어렵고, 또 경제라는 게 글로벌화 된 현대에 있어 일국적 차원에서 부침하는 것도 아니고 성과가 빨리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남북관계를 비롯한 외교는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상승에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그렇다면 당연히 치적을 여기에 둘 만하다. 그러나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아온 북측에 대한 강경 입장, 해외에서의 패션외교도 2년이 넘으니 약효가 떨어진 듯하다. 게다가 현실은 더 혹독하다. 한국은 세계 패권을 꿈꾸는 동북아시아의 두 강자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오락가락 행보를 강요받고 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경우처럼, 미국이 중국 전승절 행사의 한국 참가에 반대 의사를 밝히자, 난처한 입장이 됐다. 취임 이후부터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경색돼 왔고, 미·중 사이에 채이다 보니 사면초가에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집권 초기엔 호기라도 부렸지만 이제 임기 반을 넘기니 한계를 느끼는 듯하다. 한마디로 꽉 막힌 남북관계와 한일관계를 자력으로 뚫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초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게 이번 광복절 70주년 8.15경축사에서 나왔다.

먼저, 8.15경축사를 앞두고 남북관계에서 현안은 남측이 지목한 ‘북측 소행의 DMZ 지뢰폭발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 남북관계 부분 모두(冒頭)에서 “지금 북한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숙청을 강행하고 있고, 북한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며 평소대로 강하게 압박하면서 “북한은 우리의 거듭된 대화 제의에 응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깨뜨리고 남북간 통합에 역행하고 있다”며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을 북측 탓으로 돌렸다. 여기까진 상투적이라 하자. 이어 박 대통령은 “특히, 최근에는 DMZ 지뢰 도발로 정전협정과 남북간 불가침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겨레의 염원을 짓밟았다”며 현안인 지뢰폭발사건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대응이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며 당연하고도 원론적인 경고에 그쳤다. 더 이상의 확전을 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 “만약 북한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오면 민생향상과 경제발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회’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DMZ 세계생태평화공원 조성과 남북간 철도·도로 연결 △남북 이산가족 명단교환 연내 실현 △홍수·가뭄·전염병 등 자연재해와 안전문제 공동 대응 △민간차원의 문화와 체육교류 통한 민족 동질성 회복 등 북측에 네 가지를 제안했다. 물론 이들 제안은 대개 이전에 제시한 것들인데, 특히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관련 “남북 이산가족들이 금강산 면회소를 이용하여 수시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북한의 협력을 촉구한다”고 강조했으나 현 남북관계 상태로 보아 공허할 뿐이다.

다음으로, 한일관계에서 현안은 8.15 하루 전에 있었던 아베 신조 총리의 담화였다. 아베 담화에서의 국민적 관심사는 ‘식민지배, 침략, 반성, 사죄’ 등이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일본은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해 왔다”면서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식민지배’와 ‘침략’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고, ‘반성’과 ‘사죄’도 역대 내각의 표명으로 대신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특히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전쟁터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두 차례에 걸쳐 언급하면서도 ‘위안부’ 동원에 대한 주체는 명시하지 않았다. 모두가 아베의 ‘진정성’ 문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일단 “우리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여기까진 그렇다고 치자.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아시아의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 점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후한 평가를 하며 사실상 면죄부성 입장을 밝혔다. 아베 담화에서 ‘진정성’ 문제의 추궁을 회피한 것이다. 그러면서 방향을 돌려 “특히,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속히 합당하게 해결하기를 바란다”며, 일본 측에 한일관계 개선의 시금석으로 줄곧 제기해온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거듭 촉구했다. 그러나 이 촉구는 기약 없는 메아리로 비쳐질 뿐이다.

이렇듯 박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지뢰폭발사건’과 ‘아베 담화’라는 두 가지 현안에 대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다. 분명 집권 상반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확전을 피한 박 대통령은 북측과 일본 측에 관계개선을 위한 두 가지 문제를 꺼냈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산가족 상봉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 이 두 가지 문제는 그동안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 및 한일관계와 관련해 스스로 그어놓은 마지노선이었다. 북측에는 남북대화의 조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일본 측에는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의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해 왔다. 이렇게 볼 때 박 대통령에겐 남북관계와 한일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강한 투쟁의식도 없고 그렇다고 단절된 두 관계를 타개하겠다는 창발적 대안도 없다. 그냥 흘러간 옛 노래를 다시 튼 것이다. 그러기에 ‘지뢰폭발사건’과 ‘아베 담화’에 대한 추궁을 더 이상 하지 않고 대신 관계개선을 위해 북측과 일본 측에 각각 이 문제를 꺼낸 것은 일종의 양보였다. 그런데 양보를 하더라도 소위 ‘분별 있고 질서 있는 퇴각’이 필요했다. 민족적 차원에서는 배려하고 외세에는 엄격한 것 말이다. 즉 북측엔 이산가족 상봉을 제시하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와 그에 다른 5.24조치 해제, 나아가 상호 비방 중상 금지 등 군사문제까지 일괄논의하자고 제안했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 측에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기에 아베 담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이 두 가지를 차별하지 못하고 뭉뚱그려 두루뭉수리 넘어갔다. 민족 문제와 외교 문제를 똑같이 취급한 것이다. 시간에 쫓겼는가? 힘에 부쳤는가? 분별없는 양보로 북측은 받기 어렵고 일본 측은 받을 수 있는 모양새가 됐다. 박 대통령이 남북 문제와 한일 문제의 줄타기에서 스르르 주저앉는 모습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실패한 ‘친일 청산’의 꿈...반민특위 위원장 아들의 ‘광복 70주년’

[인터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김정륙 씨

양지웅 기자  최종업데이트 2015-08-17 21:05:20 이 기사는 현재 건 공유됐습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TV로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TV로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있다.ⓒ양지웅 기자
 
 

광복70주년인 15일 아침 독립운동가 김상덕(1891~납북) 선생의 아들인 김정륙씨는 집 앞에 태극기를 걸었다.

올해 나이 80인 김정륙 씨는 고령으로 인해 수원에서 열리는 광복절 기념식 참석은 포기했다.

TV에서는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흘러나왔고, 김정륙 씨는 말없이 화면만 바라봤다.

김정륙 씨의 아버지 김상덕 선생은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해방 후 귀국해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반민특위는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조직된 특별기구였다. 김상덕 선생은 이광수와 최남선 등 유명인사와 노덕술 등 친일파 경찰까지 조사했지만 경찰의 습격을 받으면서 결국 해체됐다. 이후 김상덕 선생은 한국전쟁때 납북되었고, 남아있던 김정륙 씨는 납북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에 묶여 고통 받았다.

김정륙 씨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지만 연좌제로 인해 취업을 하지 못해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다. 연좌제의 꼬리표는 1990년 정부가 김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한 이후에 뗄 수 있었다.

16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국민은행 주차장 입구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국민은행 주차장 입구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의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 일용직 전전한 고단한 삶

김정륙 씨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면서 "독립운동으로 인한 어려움을 2대에서 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어떻게든 자식들은 교육시켰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의 자녀들은 직장생활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김정륙 씨 가족사를 보면 독립운동가 가족의 고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정륙 씨의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머니는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세 살이던 막내도 배를 곪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정륙 씨의 부인도 십여 년 동안 신장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김정륙 씨의 소원은 조용한 교외에 아버지와 어머니, 부인, 여동생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드는 것이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언젠가 그도 그자리에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미 제 나이 80이지만 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느님이 허락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김정륙 씨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70년 전 독립운동가 아버지 손을 잡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열 살 소년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김정륙 씨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모임을 갖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홍보대사 임명식에 참석해 영화 '암살'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을 만나기도 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양지웅 기자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회고록을 쓰고 있다.ⓒ양지웅 기자

“젊은 세대 위해 독립운동 역사 제대로 기록해야”

김정륙 씨는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아버지를 요원이라고 쓴 문장 하나를 고치기 위해 1년 가까이 국가보훈처를 드나들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7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회고록을 쓰고 있다.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친일로 흐트러진 민족정기가 정리되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버리니 독립운동가가 테러범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어요. 게다가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자리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자라나는 우리 후대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어 걱정됩니다. 이들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광복 70년 8월 15일 김정륙 씨가 남긴 말이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태극기를 계양하고 있다.
김정륙 씨가 15일 오전 경기도 의정부 자택에서 태극기를 계양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김대중에 대한 평가, 야박한 이유 무엇인가

 
 
김대중 서거 6주기에 부치는 글
 
김갑수 | 2015-08-18 09:00: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8월 18일 오늘은 김대중 서거 6주기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여전히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다, 거두절미하고 묻는다. 김대중만 한 저항가가 있는가? 김대중은 생전에 사형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대중은 차량 테러와 납치 그리고 가택연금과 망명 등 보통 정치인으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감내하기 힘든 고난을 두루 겪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영달과는 무관한 이 나라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매카시즘과 지역패권주의라는 시대의 괴물과 맞서 싸웠다. 김대중은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하던 IMF 환란을 극복했다. 아울러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몸소 실천한 데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지도자로서 민족 화해를 성사시켰다. 이렇듯 김대중의 수난은 세계의 어떤 저항가보다 혹독했으며, 그의 성취는 어떤 국가 지도자보다 풍성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역사적 인물을 사심을 가지고 평가하는 나라의 역사는 발전하지 못한다. 1948년 이래 대한민국은 여러 대통령을 배출했다. 이승만에서 박근혜에 이르기까지 그들 나름대로의 공과가 있었다. 하지만 ‘저항과 성취’라는 양면에서 김대중만 한 업적을 이룬 지도자는 없다. 김대중은 저항하면서도 과격해지지 않았으며 성취를 이루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분단으로 인한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의 시련을 겪었다. 이러는 사이 한국인들에게 ‘자기 것의 우월함’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파의 입장에서 볼 때 백범 김구가 40년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인물이라면, 김대중은 70년 분단시대를 남과 북 통틀어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런 인물은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2000년 6월 15일 조선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이것은 그의 부친 김일성 주석이 살아생전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이었다. 김대중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평양으로 가서 북의 지도자를 만났겠는가?

 


김대중은 이미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4대국한반도평화보장론’이나 ‘3단계평화통일방안’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통일정책들을 제시했다. 1972년 김대중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김대중의 주장들은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6자회담 등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런 선견지명 때문인지 그는 용공주의자라는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전라도 차별의식을 가진 자들은 김대중을 부단히 깎아 내렸다. 민주화를 두려워하거나 통일을 원하지 않는 수구세력은 그의 주장을 부풀리거나 날조하여 그에게 ‘좌빨’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지금도 여전히 조갑제처럼 한심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사람도 많다. 수구 보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 진보들조차 김대중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이유는 무엇인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23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 사이트, 北사회를 엿보는 창


[친절한 통일씨] 선전에서 사회문화 소개까지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승인 2015.08.17  15:45:48
페이스북 트위터
   
▲ 북한 만수대창작사가 운영하는 해외홍보용 사이트 'Mansudae Art Studio Gallery'. [캡쳐-만수대창작사 해외 홍보용 사이트]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북한 사회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방문하고 북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금강산과 개성을 관광하던 발길이 끊기고, '5.24'조치로 남측 국민들의 북녘땅을 밟는 길이 가로막혀 북한을 직접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북한의 현재 모습을 알기 위해 북한 방송을 보고듣거나, 북한 사이트를 접속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 방송을 보고듣거나 사이트를 접속하는 방법은 쉽지않다. 방송통신위원회과 경찰청이 이들 사이트를 유해 사이트로 분류해 차단하고 있어 우회 사이트를 통해 접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 사이트 접속과 조회는 불법이 아니고 처벌대상도 아니다. 다만, 북한 사이트를 접속해 해당 내용을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활용했다면 이는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된다. 여기서 활동은 북한 사이트에 가입해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작성하는 등은 물론, 북한 사이트 내용을 유포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북한 사이트 개설과 활용

북한이 사이버공간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3월 해외단체인 '북미주 조국통일동포회의'를 통해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면서부터다. 1997년 1월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일본 도쿄지사라고 할 수 있는 '조선통신' 사이트를 개설했다.

이후 1999년 첫 공식 웹사이트인 '조선인포뱅크' 사이트를 개설해 인터넷을 통한 경제적 활동 영역으로 확장했고, 2001년 북한 내부와 인터넷 교신이 가능하도록 한 전자우편 중계서비스를 하는 '실리은행'이 개설됐다.

   
▲ 북한 내부에서는 인트라넷을 사용한다. 이는 외부에서 접속할 수 없다. 사진은 김일성종합대학이 제작한 버섯 소개 전자도서편람 '불로초'. [캡쳐-불로초]

북한이 개설한 사이트는 'kp'라는 국가도메인을 사용한다. 일부는 '.com'으로 주소를 명시한다. 아시아태평양정보통신망센터(APNIC)에 따르면, 북한은 2009년 12월 현재 1천24개의 IP를 등록했다. 서버는 대체로 북한, 중국에 두고있다.

북한은 자신들이 만든 사이트를 어떻게 접속할까. 북한 내부에서는 국가범위의 거대한 인트라넷 '광명'이 구축되어 인터넷처럼 북한 내부에서 자신들이 개설한 사이트를 접속할 수 있다. 그래서 외부인이 북한 내부 인트라넷으로 접속가능한 사이트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즉, 북한은 우리가 이용하는 인터넷과는 차단되어 있지만, 내부에서 자신들만의 사이버공간을 만들고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사이트 들여다보기

북한 사이트를 접속하기 위해서는 우회 서버를 활용해야 하지만 우회서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북한 사이트 대부분은 북한의 정치를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종의 사이버 선전전, 사이버 심리전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사이트는 각 전문 영역에 따라 성격이 다르지만 대부분 북한의 사상과 정치구호를 강조한다. 특히, 대표적으로 북한 국가홈페이지 '내나라'가 있다. '내나라'는 조선컴퓨터센터(KCC)가 2004년 6월 개설해 운영을 시작했지만, 사이트 주소가 변경된 이후 정치, 경제.무역, 사회.문화, 역사.민속, 통일분야, 관광 등 북한을 홍보하고 있다.

특히, 한글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아랍어 등도 서비스하고 있다.

   
▲ 북한 국가홈페이지인 '내나라'. [캡쳐-내나라]
   
▲ '조선의오늘'. 이 사이트는 관광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가 최근에는 북한 사상.정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북한 평양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있다. [캡쳐-조선의오늘]

'조선의오늘'은 2014년 12월에 선보인 것으로 북한 관광을 주로 다뤘지만 최근에는 관광 외에도 북한의 정치, 군사, 사회 등 전 분야를 다뤄 북한 선전매체의 성격이 강하다. 특징적으로 초단위로 평양시간이 표시돼 서울.평양 간 30분 시차를 실감하게 한다.

언론의 기능을 하는 사이트는 북한 관영 통신사가 운영하는 '조선중앙통신',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등이 있다. '조선중앙통신'과 '노동신문'은 말 그대로 각 사의 기사를 제공하고 있어 언론인과 연구자들이 반드시 접속하는 사이트이다.

'조선중앙통신'은 1997년 1월 일본 도쿄지사라고 할 수 있는 '조선통신' 사이트를 개설한 뒤 2010년 10월 10월 공식 사이트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11년 일본어, 2012년 중국어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1년 1월부터는 동영상 뉴스도 게재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2011년 2월 16일 홈페이지를 개설, 2012년 영문, 중문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6월 디자인을 개선하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사진을 많이 배치하거나 날짜별 검색을 쉽게하는 등 사이트를 개편했다. 사이트 개편 초기에는 기존 <노동신문> 'PDF' 파일 형식이 아닌 그림파일 형식으로 전환했지만 최근 'PDF' 파일 형식으로 바꿨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산하 '조선륙일오편집사'가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도 언론의 기능을 포함해 남북을 중심으로 한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는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 <통일신보>, <조선중앙TV> 등의 기사도 제공하고 있어 일종의 언론포털의 형태를 보여준다. 유튜브, 트위터 등을 개설해 IT환경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도서, 잡지, 영화, 드라마, 노래,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해 북한 사이트 중에서 매우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노동신문' 사이트 [캡쳐-노동신문]
   
▲ '조선중앙통신' 사이트 [캡쳐-조선중앙통신]
   
▲ '우리민족끼리' 사이트. [캡쳐-우리민족끼리]

또한 '조선중앙방송위원회'가 운영하는 '조선의소리', 무소속 민간방송을 자임하는 '통일의 메아리' 등도 있는데, 이들은 대외용 라디오 방송을 인터넷으로 제공하고 있다.

언론인과 연구자들이 일상적으로 접속하는 사이트 외에도 북한의 각 기관이 운영하는 사이트도 있고, 북한의 사회문화를 홍보하거나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사이트도 있다.

'민족화해협의회'가 운영하는 '려명',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의 '류경', '반제민족민주전선(반제민전)'의 '구국전선',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공동사무국 홈페이지, '조선년로자보호연맹'의 '로인들을 위하여', '조선장애자보호연맹'의 '희망', 김일성종합대학의 '룡남산' 등이 있다.

그리고 만수대창작사가 해외홍보를 위해 운영하고 있는 'Mansudae Art Studio Gallery', 북한 사상 학습을 위해 제작된 '우리민족강당', '조선영화수출입사' 홈페이지, 조선요리협회가 운영하는 '조선료리'가 있다.

이 밖에도 '대동강 특허 및 상표대리소', '평스제약합영회사', '평양해당화식품' 등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사이트들도 운영되고 있다.

   
▲ 조선요리협회가 운영하는 '조선료리'. [캡쳐-조선료리]
   
▲ 조선장애자보호연맹이 운영하는 사이트 '희망'. [캡쳐-희망]

한국에서 북한 사이트를 접속하는 방법은 쉽지 않다. 이는 정부가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통망법) 제44조 7 '불법정보의 유통금지' 등의 조항에 따라 북한 사이트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 사이트의 불법유통을 막기 위해 북한 사이트가 소개되자마자 경찰청, 검찰청,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은 사이트를 차단시킨다. 북한 사이트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사상과 정치를 강조하고 있고 이는 심리전의 일환이기에 차단의 이유는 일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은 인류 사회문화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도구가 됐고, 피할 수 없는 환경이다. 북한 사이트의 홍수를 막는 방법만 찾지 말고 건전한 토론의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쉽지만 우회 사이트를 통해 북한 사이트를 접속하는 수고는 여전할 듯하다. 단, 연구나 언론보도 목적 외에 사이트에 가입해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유통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기사수정: 20:00, 내용 중 북한 사이트 접속이 불법이라는 점은 사실과 달라 수정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제민주단체 〈합동군사연습·심리모략책동 중지〉공동성명 발표

  • [국제] 국제민주단체 〈합동군사연습·심리모략책동 중지〉공동성명 발표
  •  

     

     

    아시아아프리카인민단결기구·조선평화통일지지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 등 조선인민과의 친선 및 연대성단체·국제민주단체들은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적인 합동군사연습과 심리모략책동을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7일 조선중앙통신에 게재된 공동성명에서 국제민주단체들은 <미국이 제아무리 <연례적>이며 <방어적>이라는 궤변으로 합동군사연습의 침략적본성과 위험성을 가리워 보려고 하지만 방대한 무력과 핵전쟁장비들까지 투입되어 실전의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군사연습이 절대로 <방어적>일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 꼬집었다.

     

    이어 <남조선당국은 반공화국삐라살포와 그 무슨 <지뢰폭발>사건으로 북남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데 이어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또다시 벌려놓음으로써 조선반도정세를 전쟁접경에로 몰아가고있는데 대하여 스스로 인정하여야 한다>며 <낡아빠진 <대북심리전>에 계속 매달리는것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라 규탄했다.

     

    계속해서 <이런 부당하고 위험한 군사연습과 모략책동은 오늘날 세계의 규탄과 배격을 받고있으며 응당 중지되여야 한다>며 <미국과 남조선당국이 침략적인 합동군사연습을 당장 걷어치우며 대조선적대시정책과 대결정책을 철회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다음은 전문이다.

     

    미국과 남조선당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침략적인 합동군사연습과 심리모략책동을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
    --조선인민과의 친선 및 련대성단체, 국제민주단체들의 공동성명--


     지금 조선인민은 해방과 분렬의 70년을 맞으며 경축의 기쁨과 함께 강렬한 통일열기에 넘쳐있다.
     그러나 오늘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인민의 이러한 기쁨과 통일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조선민족을 핵전쟁의 참화속에 몰아넣는 실로 위험천만한 정세가 조성되고있다.
     미국은 조선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조선인민과 세계평화애호인민들의 념원과 지향에 배치되게 지난 3월 《키 리졸브》,《독수리》합동군사연습을 감행한데 이어 침략적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합동군사연습을 또다시 벌려놓았다.
     끊임없이 벌어지는 미국남조선합동군사연습들은 조선반도에서 대결과 긴장격화의 악순환을 낳게 하고 전쟁위험을 몰아오는 장본인이 다름아닌 미국이라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위험을 제거하고 긴장을 완화하며 평화적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성의있고 대담한 통일제안들을 내놓았으며 인내성과 아량을 가지고 대화와 협상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시대착오적인 대조선적대시정책에 끈질기게 매여달리면서 위협의 도수를 가일층 높임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핵보유에로 떠밀었다.
     미국이 제아무리 《년례적》이며 《방어적》이라는 궤변으로 합동군사연습의 침략적본성과 위험성을 가리워보려고 하지만 방대한 무력과 핵전쟁장비들까지 투입되여 실전의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군사연습이 절대로 《방어적》일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최근 조선반도정세가 나날이 악화되고있는데는 반공화국대결정책을 집권유지에 리용하고있는 현 남조선당국에도 커다란 책임이 있다.
     남조선당국은 전체 조선민족이 해방 70돐을 성대히 경축하고있는 때에 반공화국삐라살포와 그 무슨 《지뢰폭발》사건으로 북남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킨데 이어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또다시 벌려놓음으로써 조선반도정세를 전쟁접경에로 몰아가고있는데 대하여 스스로 인정하여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노린 전쟁연습을 벌려놓고 낡아빠진 《대북심리전》에 계속 매달리는것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이런 부당하고 위험한 군사연습과 모략책동은 오늘날 세계의 규탄과 배격을 받고있으며 응당 중지되여야 한다.
     조선인민과 함께 조선해방 70돐을 성대히 경축하고 분렬의 상징인 판문점까지 행진하면서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강렬한 통일의지와 자신들의 사명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우리들은 조선인민과의 친선 및 련대성단체,국제민주단체들을 대표하여 미국과 남조선당국이 침략적인 합동군사연습을 당장 걷어치우며 대조선적대시정책과 대결정책을 철회할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아시아아프리카인민단결기구
     조선평화통일지지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
     오스트랄리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친선문화협회
     단마르크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친선협회
     인도네시아조선친선문화교류협회
     아일랜드조선친선협회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지지 일본위원회
     에스빠냐에 본부를 둔 조선과의 친선협회
     라오스조선친선협회
     몽골-민주조선친선다리협회
     조선통일촉진 네팔위원회
     뉴질랜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협회

     

    (조선중앙통신 2015.8.17)

     

    김재권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교수 죽음까지 불러온 부산대 사태, 왜?

 

총장 선출 둘러싼 총장-교수회 대립 폭발... 투신 사건까지

15.08.17 18:09l최종 업데이트 15.08.17 19:20l

 

기사 관련 사진
▲  교수 투신 사고가 발생하기 전인 17일 오전 부산대학교서는 전국거점국립대교수연합회와 전국공무원노조대학본부가 총장 선출 관련 부산대 교수회의 직선제 선출 입장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정민규

관련사진보기


총장 선출을 놓고 김기섭 총장과 교수회 사이의 갈등이 이어져 온 부산대학교에서 교수의 투신 사망 사고까지 발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17일 오후 3시 5분께 이 학교 고아무개(54) 교수가 4층 높이에서 총장직선제 시행을 요구하며 투신했다. 곧바로 구급차가 출동했지만 고 교수는 심정지 상태였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다. 

부산소방본부에 따르면 고 교수는 대학본부의 4층 국기게양대에서 "총장은 약속을 이행하라"고 외치며 1층 현관으로 떨어졌다. 고 교수의 마지막 외침은 김 총장을 향한 총장직선제 시행 요구로 보인다. 

그동안 부산대에서는 총장간선제를 시행하려는 김 총장에 맞서 교수회가 집단 반발하는 등 내홍이 끊이지 않았다. 교수들 사이에서는 총장간선제가 시행될 경우 시국선언 등에 나선 교수에 대한 총장 선출이 제한되는 등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뀔 것이란 우려가 있어 왔다. 

"부산대, 민주주의 최후 보루였는데... 참담"

고 교수는 투신 전 작성한 유서에서도 총장 직선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 교수는 "(부산대가) 교육부 방침 대로 일종의 총장간선제 수순밟기에 들어갔다"면서 "부산대는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 중 하나였는데, 참담한 심정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교육부의 방침 대로 총장 후보를 선출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후보를 임용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학의 자율성은 전혀 없고 대학에서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오직 교육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갈등은 김 총장이 자초한 바가 크다는 분석이다. 앞서 김 총장은 지난 4일 교내 통신망에 올린 성명에서 "차기 총장 후보자 선출을 간선제로 치르기로 최종 결정했다"며 내년 1월로 끝나는 자신의 임기를 고려해 "차기 총장 후보자 선출 일정을 미룰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총장이 애초 총장 직선제를 지키겠다고 밝혀오다 뒤늦게 정부의 재정지원 등을 이유로 들어 총장간선제로 입장을 선회하자 교수회 내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지난 6일부터 김재호 부산대 교수회장은 본관 앞 단식에 나섰고, 고 교수의 투신이 있던 날 오전에는 전국거점국립대교수연합회와 전국공무원노조대학본부가 부산대 교수회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교육부의 소위 국립대 선진화 방안은 국립대 구성원 간, 국립대와 교육부 간 불화와 갈등만 심화시켰다"며 간선제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급기야 오후에 투신 사망 사고까지 발생하면서 부산대 총장 선출 갈등은 더 큰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 출장 중이던 김 총장은 일정을 급히 취소하고 학교로 복귀해 고 교수가 안치된 병원을 방문했다. 부산대교수회는 긴급 회의를 열고 향후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보수’여, 역사의 무지에서 깨어나라!

 
 
 
8.15 주미대사관저 시위, 너무나 당연하다
 
김갑수 | 2015-08-17 13:08:0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광복절에 주미대사관저 앞에서 反美 시위한 진보단체”

이것은 8월 16일 자 조선일보 인터넷 판의 톱기사 제목이다. 이런 제목의 기사를 톱으로 올린 데에는 일말의 저의가 있어 보인다. 먼저 이 기사는 ‘8.15 광복과 미국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묻고 있으며, 다음으로 ‘한국의 진보는 기회만 생기면 반미 책동을 일삼는다’는 점을 널리 알리려 한 것으로 읽힌다.

마침 이 기사에 달린 아래 댓글들은 조선일보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관철되었음을 방증한다. 대표적인 댓글 하나만 뽑아 읽어 본다.

“이 놈들아, 광복 70주년에 너희들이 잘 먹고, 잘살고, 미 대사관 앞에서 반미를 외칠 수 있게 만들어 준 분들이 바로 미국이요, 미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비무장지대에 지뢰매설로 너희 동생들이요, 형의 다리를 절단한 김정은에게 달려가서 시위를 하라! 경, 검찰은 저 놈들을 일벌백계하라!”

물론 이런 댓글은 맑은 정신으로 보기에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 진지하게, 애국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속칭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 대부분의 의식구조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전반적으로 대동소이하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한국의 자칭 보수언론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무지와 순수(?)를 이용해 먹고 사는 기업들이다. 아니면 그들의 수준 자체가 이 정도이어서 다른 관점의 기사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위에 제시한 댓글이 한국에서 속칭 ‘보수’라 일컫는 국민의 의식 수준을 대변한다고 보고, 이런 의식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먼저, 댓글은 우리가 지금 ‘잘 먹고 잘산다’는 점을 기정사실처럼 전제하고 있다. 물론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 조선 왕조 518년 중에서 최소 450년 이상 동아시아 16개 왕조국가 중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 기준만으로도 1~3위 수준을 유지했다. 지금은 어떤가? 국민소득 기준으로 아시아 49개 국 중 10위 권 밖 수준이다. 이것도 반쪽 국토와 불평등지수는 반영되지 않은 수치다.

다음으로 댓글은 우리가 ‘광복’을 맞이한 것이 미국의 도움 때문이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광복이란 ‘빛을 다시 본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1945년 8월 15일에 빛을 보았는가? 좋다. 보았다고 치자. 그런데 정작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자는 누구인가? 일본을 앞잡이로 이용한 제국주의 세력이며 하나를 특정하여 짚으면 바로 미국이 아니었던가?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독식하도록 허용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엄청난 전비 지원을 했다. 우리는 미국이 1905년 7월 일본과 비밀리에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알고 있다. 여기서 가쓰라는 당시 일본 수상이고 태프트는 미국 육군장관이었으며, 이후 1910년 경술국치 때에는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올라앉아 있었다.

최근 속속 공개되고 있는 문서와 자료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은 일본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미 제국주의의 태평양 공략 중 하나로 추동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 식민지 침략의 책임은 일본 못지않게 미국에도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은 조선 식민지 침략의 주범 아니면 최소한 교사범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당연히 빛을 보았어야 할 ‘조선의 빛’을 다시 한 차례 앗아갔다. 그들은 조선에 광복이나 해방 대신 ‘점령과 분단’이라는, 식민지에 버금가는 부정적인 역사를 강요하여 관철시켰다. 이쯤 되면 8월 15일에 주미대사관저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끝으로 보수들아, 비무장지대 지뢰 매설은 누가 했겠는지를 최소한의 이성이라도 작동시켜 사색해 보라. 북측이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토록 머리가 안 돌아가는가?

소설 <병신과 머저리> 일독을 권한다. 이청준이 쓴 이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체험한 기성 보수는 ‘병신’이고, 자기가 병신인 줄도 모르는 신세대 보수는 ‘머저리’라고 말한다. 신생 대한민국에는 무수한 병신과 머저리들이 횡행하고 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23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장준하 장남 “박근령, 아버지 박정희에 세뇌돼 뼛속까지 친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8/17 15:07
  • 수정일
    2015/08/17 15: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2015-08-16 17:11수정 :2015-08-16 18:00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66)씨.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66)씨.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 40주기…장남 장호권씨 인터뷰
“박 대통령, 가족의 친일 행각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김무성 대표의 ‘부친 행적 미화’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기득권 누려온 친일파 후손들, 또다시 ‘이완용’ 될 수 있어”
“진정한 광복은 외세 영향 없이 자주독립과 통일 이뤄져야”
“진정한 광복은 외세의 영향 없이 자주독립과 통일이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하는 정신으로 자주독립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

 

‘영원한 광복군’으로 불리는 장준하(1918~1975) 선생의 40주기를 맞아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66)씨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수도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친일파 후손들이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장악하는 등 진정한 광복을 맞지 못하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장씨는 지난 1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제에 충성한 친일 민족반역행위자들을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그들을 최소한 지배세력에서 몰아내고 정통성 있는 세력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씨는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70년 동안 숨죽여 지낸 반면 친일 민족반역행위자 후손들은 기득권을 누려왔다. 이들은 또다시 이완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 박근령씨의 최근 ‘친일 발언’과 관련해 장씨는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만주 군관학교 출신의 아버지 박정희에게 세뇌되어 뼛속까지 친일임이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가족의 친일 행각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홍영표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나의 조상은 친일파였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또 우장춘 박사(1898~1959)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부친 우범선의 죄과를 씻기 위해 좋은 자리도 마다하고 평생 농업 연구에 몰두해 국민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업적을 남겼다. 가족의 망언에 대해 사과조차 못하면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박근령씨는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황폐하’라는 칭호를 거듭 사용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일본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자꾸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고 있다. ▶ 바로 가기 : 박근령 “일본에 사죄 요구는 바람피운 남편 소문 내는 것”

 

2008년 8월15일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 묘역에서 열린 육영수씨 제3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 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령씨. 그 옆으로 박지만씨와 부인 서향희 변호사도 보인다. 자료사진
2008년 8월15일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 묘역에서 열린 육영수씨 제3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 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령씨. 그 옆으로 박지만씨와 부인 서향희 변호사도 보인다. 자료사진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반대했다는 그는 “박근혜 자체가 밉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친일 반민족행위와 군사독재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우장춘 박사가 걸었던 삶처럼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며 조용히 살기를 바랐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친일·독재세력이 부활해 대한민국 역사를 후퇴시켰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왜 했냐’ ‘일본 지배 덕분에 근대화’ 등 
최근 젊은 세대 역사 인식에 안타까움 토로하기도

 

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행적 미화 논란에 대해서도 “일본에 충성한 사람을 독립군이나 애국지사인양 탈바꿈시키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며 “홍 의원처럼은 못하더라도 친일파 후손으로서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을 돌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초청강연을 해온 장씨는 “민족 정통성이 없는 친일세력들이 나라를 관리하면서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진실과 역사를 왜곡시켜왔다. 왜곡된 역사를 배운 젊은 세대들로부터 ‘독립운동을 왜 했냐’는 얘기가 나오고, 심지어 ‘일본이 지배하지 않았으면 근대화가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며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가 광복군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임시정부에 찾아간 것이 26살 때였다. 아버지가 뜻을 못이루고 돌아가실 때 내 나이가 26살이었다”며 “광복 70년과 아버지의 40주기를 맞아 마음이 착잡하고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사무총장직을 그만둔 그는 다음달 서울 마포에 장호권근현대사문제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으로 자주독립과 통일문제를 파고들 예정이다.

 

오는 10월께는 장준하 선생의 항일 수기인 <돌베개> 후편을 발간할 계획이다. <돌베개>는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장준하 선생의 회고록으로, 중국 쉬저우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해 임시정부 광복군에 투신한 6000리 대장정과 1945년 11월 임시정부가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2년에 걸친 독립운동 활동상이 담겨 있다. <돌베개> 후편은 장 선생이 남긴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자료와 기억을 더듬어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난맥상, 한국전쟁, <사상계> 발간, 4·19혁명, 5.16군사쿠데타에 이어 유신철폐 100만인 서명운동까지 장 선생의 눈을 통해 바라본 한국현대사의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 장씨의 설명이다.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육군 중위로, 박정희(오른쪽)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군의 육군 소위로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았다.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육군 중위로, 박정희(오른쪽)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군의 육군 소위로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았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유신철폐운동을 벌이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부는 실족사라고 발표했지만 2013년 3월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공동위원회는 ‘외부 가격에 의한 두개골 함몰’이 사인이라는 유골 정밀감식 결과를 내놨다.

 

 

장 선생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13년 12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정의화 국회의장 등 여야 의원 104명이 ‘장준하 의문사 등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사청산 특별법안’(장준하특별법)을 공동 발의했으나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외면으로 법안은 아직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장씨는 “국회에서 하루빨리 특별법을 제정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억울한 죽음들의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은 17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장준하 선생 40주기 추모식과 제1회 장준하 추모문학 공모전 시상식을 연다.

 

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한호석의 개벽예감 <16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8/17 [11: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2. 랭리급 항공모함에서 니미츠급 항공모함까지 95년 
3.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4.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 드리운 종말징조
5. 패권적 지위의 상실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다

 

▲ <사진 1> 1915년 2월 8일 미국의 저명한 영화감독 데이빗 그리피스가 제작한 영화 '국가의 탄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봉상영되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미국내전의 상처를 반세기만에 털어버리고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의 모습을 비쳐주는 그 영화에 열광하였다. 아메리카제국 100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아메리카제국 100년, 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Is the American Century Over?) 이 물음은 2015년 1월 미국에서 출판된 화제의 저서에 붙어있는 제목이다. 그 저서를 집필한 사람은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가정보위원회 의장,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을 연이어 지냈고, 지금은 하버드대학교 석좌교수, 국무부 대외정책부 위원, 국방부 정책부 위원으로 활동하는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조셉 나이(Joseph S. Nye, Jr.)다. 이름이 꽤나 알려졌다는 정치학자들이 거의 모두 그런 것처럼, 조셉 나이도 아메리카제국을 옹호하는 자기의 정치성향을 숨기지 않는다.


조셉 나이 교수는 자기 저서에서 ‘미국의 세기’라는 말을 썼지만, 그건 지배세력의 비위에 맞는 치장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더 정확한 말을 쓰면, ‘미국의 세기’가 아니라 아메리카제국의 세기라고 해야 한다. 그가 자기 저서에서 제기한 물음을 나의 언어방식으로 옮기면, 아메리카제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될 수 있다. 


조셉 나이 교수가 자기 저서에서 사용한 ‘미국의 세기’라는 말에서 세기는 100년을 뜻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저서에서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답한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아메리카제국의 한 세기 100년은 이제 끝난 것일까?


조셉 나이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자기 저서에서 결론하였다. 그는 그런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 논거를 늘어놓았지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런 논거들은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억지주장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늘어놓은 논거들을 일일이 논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이 글에서 다른 논거를 제시하면서 아메리카제국의 세기가 끝났음을 논증하려 한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조셉 나이 교수의 저서가 2015년 1월에 출간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1915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2015년 1월에 맞춰 그 저서가 출간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신흥제국으로 출현한 원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5년에 그 신흥제국에서 무슨 특기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일까?

 


미국의 저명한 영화감독 데이빗 그리피스(David L. W. Griffith)가 제작한 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 1915년 2월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사진 1> 오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51달러나 되는 고액의 입장권을 사야 관람할 수 있었던 그 영화는 당시 뉴욕 맨해튼 극장가에서 무려 44주 동안 연속상영되면서 놀라운 흥행기록을 세웠는데, 1936년에 미국 극장가를 휩쓸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수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 영화사상 두 번째로 많은 흥행수익을 올렸다. 웃드로우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당시 미국 대통령도 백악관 정원에 임시로 설치된 영사막 앞에서 그 영화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영화 ‘국가의 탄생’이 불러일으킨 관람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수 있다. 


1915년의 미국사회는 왜 그 영화에 열광한 것일까? ‘국가의 탄생’이라는 영화제목에서 진한 냄새가 풍기는 것처럼, 1861년부터 1865년까지 계속된 내전으로 입은 상처를 반세기만에 털어버리고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의 모습을 형상한 영화이었기에 당시 미국사회가 그토록 열광했던 것이다. 

 

▲ <사진 2> 이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증기선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영국의 여객선 루시태니어호다. 1915년 5월 7일 미국 뉴욕항을 떠나 영국 리버풀항으로 항해하던 루시태니어호는 독일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였다. 1,191명이 몰살당한 그 날의 대참사는 1815년부터 100년 동안 전 세계를 지배해온 대영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말해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915년 신흥제국으로 일어선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는데, 미국의 참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은 1915년 5월 7일 미국 뉴욕항을 떠나 영국 리버풀항으로 항해하던 44,000t급 영국 여객선 루시태니어(Lusitania)호가 아일랜드 앞바다에서 독일 잠수함 U-20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바람에 1,191명이 몰살당한 대참사였다. 그 여객선에 탔다가 졸지에 사망한 미국인은 128명이었는데, 미국인 사망자들 가운데 저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미국의 분노가 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국의 여객선이 유럽의 2등 국가인 독일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대참사는 1815년부터 100년 동안 이어진 대영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말해준 극적인 사건이었다. <사진 2> 역사가들은 중국에서부터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2,600만㎢에 이르는 식민지영토를 강점하고, 4억 명에 이르는 식민지인구를 지배, 착취한 대영제국의 시대가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본다.


역사가들이 공인하는 것처럼,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핵심수단은 증기로 움직이는 군함과 전선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전보였다. 당시로서는 최강의 무력수단이었던 증기군함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통신수단이었던 전보통신이 없었더라면, 대영제국의 시대는 1915년 이전에 일찌감치 막을 내렸을 것이다.


대영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린 1915년에 미국에서 신흥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문제의 영화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장기상영된 것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었다. 영국 여객선 루시태니어호의 비극적 최후와 미국 영화 ‘국가의 탄생’의 열광적 흥행은, 대영제국의 시대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로 대체되었음을 알려준 극적인 사건들이었다. 아메리카제국이 출현한 1915년으로부터 100년 세월이 흐른 오늘 2015년에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물음이 미국사회에서 제기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 <사진 3> 1850년대 대영제국 해군이 보유했던 2,300t급 호위함 밸로러스호의 모습을 그린 사실화다. 범선에 증기추진력을 추가한 이 호위함에는 함포가 19개 장착되었고, 승조원 175명이 탑승하였다. 1855년 흑해에 출동한 이 군함은 러시아제국 해군과 맞붙은 크리미아전쟁에 동원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영제국의 시대 100년 동안 그 제국을 유지시켜준 요인은 증기군함과 전보통신을 사용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 해군들이 범선을 타고 바다에 나갈 때, 영국 해군은 증기군함을 타고 바다를 누볐으니 그 무력격차는 너무 컸다. <사진 3> 또한 다른 나라 육군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연락병을 배치하여 파발마식 통신을 운영할 때, 영국 육군은 전기를 사용하는 전보통신체계(telegraph system)를 구축하였으니 그 기술격차는 너무 컸다. <사진 4>

 

▲ <사진 4> 영국인 발명가 프랜시스 로널즈가 1816년에 만든 첫 전보통신은 13km 떨어진 곳에 송신되었다. 이 사진은 1837년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된 전보통신기기를 촬영한 것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지난날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무력수단이 증기군함이었다면, 대영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메리카제국을 유지시켜주는 무력수단은 핵추진 항공모함이다. 또한 지난날 대영제국을 유지시켜준 통신수단이 전보통신이었다면, 대영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메리카제국을 유지시켜주는 통신수단은 위성통신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날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동향과 전지구적 위성통신망 동향을 분석적으로 고찰하여야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 <사진 5> 1920년 4월 미국은 대형 석탄운반선에 비행갑판을 올려놓은 첫 항공모함 랭리호를 만들었다. 13,900t급 항공모함 랭리호는 프로펠러식 함재기 36대를 실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은 모두 68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하였고, 그 항공모함을 해외침략전쟁에 내몰아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웠다. 아메리카제국의 항공모함 역사는 제국의 세계침략전쟁 역사와 겹쳐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2. 랭리급 항공모함에서 니미츠급 항공모함까지 95년


미국이 첫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된 때는 1920년 4월 11일이다. 미국의 첫 항공모함 랭리호(USS Langley)는 함재기 36대를 싣는 13,900t급 항공모함이었다.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강점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도발하려면 무엇보다 해군력을 강화해야 하였던 미국은 대형 석탄운반선 주피터호(USS Jupiter)를 항공모함으로 개조하여 첫 항공모함이 랭리호를 만들었다. <사진 5> 항공모함에 맛을 들인 미국은 곧이어 순양함을 개조한 항공모함 2척을 만들어냈는데, 렉싱턴호(USS Lexington)와 쌔러토가호(USS Saratoga)가 그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은 석탄운반선이나 순양함을 개조하는 식에서 벗어나 항모설계기술을 발전시켜 본격적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건조된 첫 항공모함은 1933년 2월 25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4,000t급 레인저호(USS Ranger)였다. 이 항공모함에는 함재기 86대를 실을 수 있었다.    


항공모함 랭리호가 건조된 1920년부터 항공모함 조지부쉬호(USS George H. W. Bush)가 건조된 2003년까지 83년 동안 미국이 건조한 항공모함은 모두 68척이다. 1920년부터 오늘까지 95년에 이르는 미국 항공모함 역사를 살펴보면, 세 차례의 획기적인 전환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2년 7월부터 1945년 5월까지 기간에 에쎅스급(Essex-class) 항공모함 24척을 건조하였는데, 항공모함을 그처럼 짧은 기간에 대량으로 건조한 것은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첫 번째로 일어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또한 미국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7월 항공모함 역사에서 처음으로 포레스털급(Forrestal-class)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초대형 항공모함 시대에 진입하였는데, 이것이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두 번째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당시 미국이 초대형 항공모함을 건조한 까닭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가 프로펠러기에서 제트기로 교체되자 제트기를 이착륙시키기 위한 길고 넓은 비행갑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52년부터 2003년까지 기간에 초대형 항공모함을 모두 19척 건조하였는데, 1960년 9월 24일 사상 처음으로 원자로를 장착한 핵추진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USS Independence)를 건조하였다. 인디펜던스호의 건조는 40년에 걸친 재래식 항공모함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핵추진식 항공모함이 등장한,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세 번째 획기적인 전환으로 되었다. 2015년 현재 미해군이 보유한 초대형 핵추진 항공모함 10척은 모두 니미츠급(Nimitz-class) 항공모함들이다. 니미츠급 항공모함 이외에, 2015년 현재 미국이 건조 중인 포드급(Ford-class) 초대형 핵추진 항공모함 1척은 2016년에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95년에 이르는 미국 항공모함 역사를 고찰하면, 항공모함이라는 강력한 무력수단을 가지고 약소국들을 침략하고 전 세계를 지배해온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종말징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종말징조들은 아래와 같다.

 

 

3.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첫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항공모함 건조능력이 감소된 현상이다. 지난 1940년대에 10년 동안 재래식 항공모함 27척을 건조하여 전무후무한 항모건조기록을 세웠고, 그 이후에도 핵추진 항공모함을 10년 단위로 2~3척씩 꾸준히 건조해오던 미국은 2010년대에 접어들어 핵추진 항공모함을 10년 동안 겨우 1척밖에 건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항공모함 건조능력이 눈에 띄게 감소되었음을 말해준다. 


2015년 4월 2일 미국 국방부 부장관 로벗 워크(Robert O. Work)가 작성하여 미국 연방의회 상하원군사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 ‘해군전함 장기건조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2018년부터 2043년까지 기간에 포드급 항공모함을 5년마다 1척씩 건조하여 모두 7척을 건조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그런 전망은 비현실적이다. 포드급 항공모함 1척을 건조하는데 드는 비용은 120억 달러나 되는데, 미국의 국가재정이 파산상태에 빠져든 조건에서 그처럼 막대한 건조비가 드는 항공모함을 5년마다 1척씩 건조할 것이라는 미국 국방부의 전망은 파산 직전에 있는 국가재정능력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 <사진 6> 미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 상시적으로 전진배치해둔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는 2015년 5월 18일 그 기지를 떠나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갔다. 그런데 지금 국가재정파산위기에 빠진 미국은 조지워싱턴호를 퇴역 1순위로 지목하였다. 미국에서 제2차 국방비자동삭감조치가 불가피한데, 그렇게 되면 조지워싱턴호는 고철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미해군 항공모함 작전력이 급속히 하락하는 현상은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종말징조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두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항공모함 운용능력이 격감된 현상이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조셉 나이 교수의 저서가 미국 서점가에 나온 때로부터 넉 달이 지난 2015년 5월 18일 일본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서 환송식이 진행되었다. <사진 6> 2008년 9월 미해군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기지에 상시적으로 전진배치되었던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USS George Washington)가 원자로연료를 교체하고 정비와 수리를 받기 위해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돌아가는 환송식이었다. 원래 핵추진 항공모함은 25년마다 한 차례씩 원자로연료를 교체해주고 전체적인 정비와 수리를 받아야 하는데, 올해 조지워싱턴호의 차례가 된 것이다. 해군정비소에서 항공모함의 원자로연료를 교체하고 전체적인 정비와 수리를 받으려면 3년이 걸린다.


하지만 조지워싱턴호는 앞으로 3년 뒤에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영영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군 소식지 <성조> 2014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척 헤이글(Chuck Hagel)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국가재정자동삭감조치가 또 다시 시행되는 경우 조지워싱턴호를 2016년에 퇴역시킬 수밖에 없으며, 운영비를 절약하기 위해 미해군 항모강습단 10개 가운데 절반의 작전회수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로이터통신> 2014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2014년 3월 25일 미국 연방하원 세입세출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미국 해군장관 레이먼드 메이버스(Raymond E. Mabus, Jr.)는 내구년한이 이미 절반이 지난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의 경우 원자로연료를 교체해주고 정비수리를 하는가 아니면 퇴역시키는가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국방비 대폭삭감으로 재정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바람에 그 결정도 1년 이상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미해군은 조지워싱턴호를 계속 운용하고 싶지만, 항공모함 운영비를 5년 동안 70억 달러나 지출해야 하므로 국방비를 대폭 삭감하게 된 조건에서 항공모함의 퇴역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척당 가격이 45억 달러가 되는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을 운영하려면, 연간 승무원급여 1억6천만 달러, 연간 연료비 및 유지비 4억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 세계경제 9월 위기설로 불안에 떠는 미국에게 국방비의 추가삭감조치는 불가피한데, 그렇게 되면 운영비가 가장 많이 드는 항공모함부터 퇴역시키라는 압박이 커질 것이고, 그럴 경우 미해군 7함대 소속 조지워싱턴호가 제1순위 퇴역대상인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2011년 12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비가 1조 달러 삭감되는 경우 항공모함 2척을 동시퇴역시켜야 한다.


지난 시기 미국은 해외 각지의 해상작전구역들에 항공모함 3척을 전진배치해놓고, 또 다른 항공모함 3척을 북미대륙 인근해역에 대기시켰는데, 2015년 현재 미국이 해외 각지의 해상작전구역들에 전진배치한 항공모함은 2척으로 줄었고, 북미대륙 인근해역에 대기시킨 항공모함은 1척으로 줄었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브레이킹 디펜스(Breaking Defense)> 2015년 7월 7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올가을 미국 항공모함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동해역에 항공모함을 1척도 배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5년 5월 18일 요꼬스까 미해군기지에서 미국 본토의 해군정비소로 떠난 조지워싱턴호의 귀로는 고철더미로 해체될 퇴역의 항로였음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세 번째 종말징조는 미국의 적국 또는 잠재적국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치명적인 공격능력을 강화한 것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두 가지 치명적인 무력수단은 디젤전동식 잠수함과 대함탄도미사일(ASBM)이다.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한 <UPI> 2008년 4월 9일 보도에 따르면, 미해군 항공모함은 러시아산 디젤전동식 킬로급(Kilo-class) 잠수함의 수중공격위협에 노출되었다. 항공모함이 두려워하는 최강의 적수가 수중소음이 가장 적은 디젤전동식 스텔스 잠수함이라는 사실은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미국의 군사전문 웹싸이트 <디펜스 뉴스(Defense News)>가 2013년 3월 12일에 인용, 보도한 미국신안보센터(CNAS) 보고서에 따르면, 대함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된 이후 미해군 항공모함은 공격대상에 접근하기도 힘들게 되었고, 미사일공격을 받기 쉬운 취약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현대전을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의 작전비행거리는 482km밖에 되지 않는데, 중국이 실전배치한 항모타격미사일 둥펑-21D의 사거리는 1,500km나 된다. 이것은 미해군 항공모함이 함재기 편대를 발진시켜 중국의 군사기지를 공격하기 전에 중국에서 발사된 항모타격미사일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공격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 <사진 7> 미국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위협하는 요인이라고 습관적으로 지목하지만, 미해군 항공모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조선이 올해 들어 세상에 공개한 전략잠수함, 금성-3호 대함미사일, 항모격침결사대다. 위의 사진은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금성-3호 대함미사일을 수중에서 성공적으로 발사한 직후 해수면 위로 떠오른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미국 군사전문가들은 미해군 항공모함의 위협요인을 거론할 때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을 습관적으로 지적하지만, 그런 지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미해군 항공모함에게 직접적인 위협요인으로 되는 것은, 미국 군사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중국의 잠수함과 항모타격미사일이 아니라 조선이 올해 들어 세상에 공개한 전략잠수함, 금성-3호 대함미사일, 항모격침결사대다. <사진 7>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에게 강한 전의가 품지 않은 중국과 달리, 미국과는 반드시 최후결전을 벌이려는 강한 전의를 가진 조선이 미해군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치명적인 타격수단을 보유한 것이야말로 미국을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이제껏 5대양이 좁다하게 돌아치며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유지해준 핵추진 항공모함은 ‘세계 최강의 불침항모’라고 자랑하는 무력수단인데, 그런 무력수단의 작전력이 요즈음 급속히 약해지면서 조선으로부터 직접적인 격침위협까지 받게 된 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4.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 드리운 종말징조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는 미해군 항공모함 작전력의 약화현상에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를 유지시켜주는 또 다른 핵심수단인 위성통신망이 미증유의 위험에 빠지게 된 것도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던 1916년 3월 8일 미국 보스턴 근교에 있는 터프스대학교에서 무선방송전파가 송출되었다. 미국인 발명가 해롤드 파워(Harold J. Power)가 3시간 동안 연속하여 진행한 그 무선방송은 세계 최초의 라디오방송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전보라는 유선통신망에 의해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 동안 유지되었던 대영제국의 시대는 1916년 미국에서 출현한 세계 최초의 무선방송에 의해 아메리카제국의 시대로 대체되었다.


그 이후 오늘까지 100년 동안 지속된 아메리카제국의 시대에 무선통신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 미국이 저지구궤도(LEO)로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통신위성 엑코(Echo)-1호가 우주공간에서 무선신호를 발신하기 시작한 1960년 8월 12일 인류는 위성통신시대에 접어들었다. 위성통신기술을 독점한 미국은 자기의 제국주의지배력과 제국주의침략무력을 더욱 공고하게 강화시키는 듯하였다. 

 

▲ <사진 8> 2007년 1월 11일 중국은 위성요격미사일을 발사하여 이미 수명이 다한 자국의 기상위성을 우주공간에서 파괴하였다. 이 사건은 위성통신기술을 독점하면서 전 세계를 지배해온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가 치명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오늘 미국에게 있어서 우주는 더 이상 독점공간도 안전공간도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위성통신망에서 종말징조가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러나 위성통신기술 독점으로 그처럼 공고화된 듯이 보였던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는 2007년 1월 11일 치명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바로 그 날 중국이 위성요격미사일(ASAT)을 발사하여 이미 수명이 다한 자국의 기상위성을 우주공간에서 파괴한 것이다. <사진 8>


오는 2015년 10월 초 조선이 정지궤도를 향해 통신위성을 발사하면 그것은 중국이 위성요격미사일을 발사한 것보다 더 놀라운 사변으로 될 것이다. 올해 10월 초에 진행될 것이 확실해보이는 조선의 통신위성발사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위성요격미사일이 출현한 이후 미국의 전지구적 위성통신망은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우주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위성통신망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미증유의 위험에 빠진 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말해주는 극적인 변화다.

 

5. 패권적 지위의 상실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다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지배해온 미국 금융자본의 총본산인 뉴욕 월스트릿 금융가에 군림하던 대형 투자은행들이 2008년 3월 16일부터 9월 16일까지 6개월 동안 사상 최악의 연쇄파산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이러다가 미국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미국사회에 엄습하였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는 몇 가지 견해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국에서 이름이 꽤나 알려진 폴 케네디(Paul M. Kennedy) 교수의 견해와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의 견해를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8년에 발간된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미국 예일대학교 폴 케네디 교수는 2008년 10월 12일 영국 <썬데이 타임스>에 발표한 자신의 글에서 군사적 과잉팽창과 과도한 재정적자로 미국의 국력이 쇠락하였지만 ‘미국의 세기’가 당장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는 오스만제국, 합스부르크왕가, 대영제국 같은 제국들이 무너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면서, 제국은 패배와 파산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자기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오랜 기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그 기간이 어느 정도 연장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08년 11월 20일에 펴낸 보고서 ‘세계의 추세 2025년(Global Trend 2025)’에서 2025년쯤 미국의 패권주의가 무너지고 다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세계는 불안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폴 케네디 교수는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패권적 지위가 앞으로 오랜 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였지만,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앞으로 20년 뒤 미국은 패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미국의 국력이 차츰 쇠퇴하여 2025년에는 패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사진 9>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메리카제국은 전 세계 40개 나라들과 자기 해외영토들에 865개의 해외군사기지를 설치하였고, 그 군사기지들에서 약소국들에 대한 무력침공을 도발하고 있다. 2014년 현재 4,650만명이 식량전표에 의존하여 끼니를 잇는 빈곤한 나라 미국이 무력침공을 준비하는 해외군사기지들에 지출하는 연간 군사비는 무려 2,500억 달러나 된다. 아메리카제국은 이성을 잃고 광기를 부리는 거대한 육식공룡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미국의 국력이 차츰 쇠퇴하여 20년 뒤에 패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아메리카제국의 해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20년 뒤에 아메리카제국이 자기의 패권적 지위를 상실해도 아메리카제국 자체는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하지만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의 종말은 제국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인데, 아메리카제국의 해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전망은 핵심내용을 놓쳐버린 불투명한 전망으로 생각된다. <사진 9>


그런 그들과 달리, 아메리카제국의 해체를 정면으로 다룬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 있다. 폭로와 비판의 칼날을 아메리카제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들이댄 저서들을 2004년부터 연속 발표하다가 2010년 8월 17일 자신의 마지막 저서 ‘제국의 해체: 미국이 지닌 최후, 최상의 희망(Dismantling the Empire: America's Last Best Hope)’을 세상에 내놓고 3개월 뒤 노환으로 별세한 차멀스 존슨(Charmers A. Johnson) 교수는 아메리카제국이 해체되어야 할 세 가지 논거를 이렇게 제시하였다. 


미국은 자기의 전후 팽창주의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패하면 막대한 군비지출이 유발한 국가재정적자로 파산될 것이라는 점, 미국은 자기의 해외군사기지들에서 은밀히 자행되어온 현지여성들에 대한 성폭력, 납치, 살인 같은 범죄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차멀스 존슨 교수는 아메리카제국이 마땅히 해체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논하여 미국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지만, 미국의 양심이 바라는 아메리카제국의 자진해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류사에 출현하였던 다른 제국들의 멸망사가 말해주는 교훈은, 아메리카제국이 다른 군사강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때 해체되리라는 것이다.

 

▲ <사진 10> 이 사진에서 보는 조선의 선전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쟁광기를 부리며 약소국들을 짓눌러온 아메리카제국에 복수의 핵탄을 겨눈 조선은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주저없이 나설 것이다. 조선은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결전의 날은 임박하였다고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그렇다면 오늘날 어느 군사강국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용감히 나설 수 있을까? 아메리카제국으로부터 무력침공과 봉쇄압박을 받은 최대 피해국, 그리하여 아메리카제국에 대한 피맺힌 원한 때문에 그 제국을 날강도 또는 승냥이무리라고 타매하는 반미자주국가, 아메리카제국과는 반드시 피로써 결산하겠노라고 불같이 다진 보복일념을 안고 60년 동안 허리띠 졸라매며 억척스레 최후결전을 준비해온 군사강국, 그리하여 전쟁광기를 부리며 약소국들을 짓눌러온 아메리카제국에 복수의 핵탄을 겨눈 핵무장국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할 반미대전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사진 10>


“조성된 현실 앞에서 우리 군대와 인민은 날강도 미제를 과녁으로 삼은 우리의 거족적인 반미투쟁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 진입한다는 것을 온 세계에 정식으로 공표한다.” 이 인용문은 2015년 6월 25일 조선국방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 아메리카제국을 해체하려는 조선의 결전의지가 얼마나 강렬하고 단호한지 누구나 직감할 수 있다. 1915년부터 오늘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났는가라는 물음에 조선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 기념 남북물류포럼 칼럼

 
2015. 08. 17
조회수 117 추천수 0
 

 a김영윤.jpg

 광복의 참된 의미는 통일에 있다. 광복 70년과 함께 분단 70년이 따라 다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를 결코 묻지 않는다. 통일의 방법이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통일에는 오직 결과만 있을 뿐이다. 이에 가장 앞장서 있는 사람이 현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가 '통일대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모두 대통령처럼 통일의 이익만 생각하고 있다. 이들에게 통일은 오직 “북한만 무너지면” 되는 것이다. 북한이 어떻게 무너질 것인지, 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북한 붕괴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일대박'에만 함몰되어 있다. 겨우 찾은 대답이 “동독이 갑자기 붕괴되어 통일되었기 때문에 남북한의 경우에도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정말 그럴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너무도 급진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독일 통일은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다, “역사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다. 독일통일에서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결코 가지 말아야할 북한 붕괴의 통일

 

  독일 통일은 동독 주민이 요구한 것이다. 그 요구는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동유럽 국가에 대한 개혁과 개방(페레스토로이카, 글라스노스트)과 연결된 시민혁명을 통해 분출되었다. 그들 모두는 통일을 하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동독 주민들의 그와 같은 믿음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것은 분단 아래 부단히 이루어진 양독간의 길고 긴밀한 교류·협력을 통해 생겨났던 것이다. 교류협력을 통해 얻었던 대서독의 경험이 통일을 하면 서독과 같이 자유롭고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르바초프를 등에 업고 거리로 나왔고 동서독간 단절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한사코 통일하려고 했다. 그것도 서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통일 말이다. 서독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평화통일을 쟁취했다. 동독주민의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통일. 그것이 “동독의 붕괴”에 의한 통일이라고 한다면, 그 붕괴는 동독 주민 스스로가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 다른 사회적 실험”을 원치 않았다. 서독처럼 당장 풍요롭게 살 수 있는 통일을 원했고, 그것을 서독이 가능케 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럼에도 독일통일은 결코 잘못된 통일이 아니다. 비록 많은 부작용과 문제를 가져왔지만, 적어도 동독 주민의 마음을 샀던 통일, 그들이 스스로 원해서 이룬 통일, 그리고 그것을 주변국들이 동의한 통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솔직히 말해 우리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형태의 통일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가 강하게 원하고, 정부가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더구나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통일. 이것이 어떻게 독일에게 가능했을까? 동독주민의 마음이 서독에게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 서독은 스스로도 모르게 동독주민의 마음을 샀고. 통일이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이었다.

상대의 마음을 사지 못하면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한반도가 통일하려면 동독주민이 통일을 원했던 것처럼 이를 가능케 하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통일이다. 북한 붕괴를 전제한 통일은 여기에 낄 자리가 아니다. 결코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말의 성찬을 거두어라

 

  집권 3년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은 화가 치민다.'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드레스덴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중 무엇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실천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실천되지 않는 것은 전부 북한 때문이라는 타령만 계속해야만 할까? 북한이 그렇다고 치부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말로 아무런 대안도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대안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인가?

  왜 대통령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신뢰 형성을 위해 전제조건을 달지 않고 남북한간 대화를 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김정은과도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한 약속은 내동댕이치면서 화려한 말의 성찬은 끝닿는 데가 없다. “전력·교통·통신 분야 인프라 구축, 개성공단의 국제화, 지하자원 공동개발, 남·북·러 가스관 부설과 송전망 구축사업, 나선  등 북한의 경제특구 진출, 보건·의료 협력과 녹색경제(농업·조림·기후변화)협력 체계화,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학술ㆍ종교 등 다방면의 교류, 인도적 문제의 지속적 해결, 대북지원의 투명성 제고와 영유아 등 취약계층에 대한 우선 지원, 이산가족 문제에서의 실질적 성과, 국군포로와 납북자 귀환 도모, 남북간 대표부 역할을 할 수 있는  '남북교류협력사무소'를 서울과 평양에 설치, 북한의 국제금융기구 가입 및 국제투자 유치 지원” 이게 말의 성찬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한나라의 지도자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뜻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말만 계속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이라도 ‘선(先) 조건 충족, 후(後) 관계개선이라는 구도를 버리라’라고 말하고 싶다. '원칙'으로 질못 포장된 대북 우월적 자세를 바꾸고, 북한이 곧 붕괴할 수 있다는 생각, 못살고 가난하기 때문에 남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굴복해야 한다는 도그마를 버리라고 하고 싶다. 북한이 수용하지 않고 있다는 상황 그 자체를 먼저 인정하라. 우리 헌법 제4조에 담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을 지부터 생각하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대통령이 지고 있다는 헌법 제66조를 한시라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통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통일이 가능하다. 북한 주민들이 모두 남한 사회로 통합하는 데 동의를 하는 것이 통일을 이루는 가장 확실하고 바람직한 방법이다. 북한 사람들 모두의 동의를 얻어 하는 통일이 과연 가능하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건 북한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하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남북간의 교류와 접촉의 면을 넓히는 일 외 다른 것이 있는가? 영영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북한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변해있다. 개성공단에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을 보라. 그들은 모두 내심 그 곳에서 오래 일하기를 원한다. 남한 기업이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고맙게 생각한다. 일하는 동안 우리에게 동조하는 의식을 갖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는 돈 주고도 얻기 힘든 효과다. 이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북한과는 어떤 형태의 통일을 추진해야 할까? 다름 아닌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이다. '사실상의 통일'은 남북한이 경계를 초월하여 서로 넘나드는 상태다. 남북간에 자본·기술·노동력이 왕래하고 자유 방문과 관광이 가능한 상태가 ‘사실상의 통일’이다. 남북교류협력이 부모라면 ‘사실상의 통일’은 그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와 같다. 교류협력이 활성화하면 할수록 북한은 그만큼 빨리 '부식(erosion)'된다. 그런 어느 순간 정치·제도적인 통일은 요식 행위가 될 것이다.

  서독의 브란트 수상의 대동독 정책과 같이 북한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조처가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을 서로 다른 체제의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그들 스스로 체제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면서도 통일을 말하지 않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원하나, 강요하지 않는. 이것이 북의 진정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북한을 인정한다는 것이 북한의 모든 것, 모든 행위를 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북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이야기다. 북한 인권이 참혹하고, 경제가 어려운데 도발만 일삼는다고만 이야기하지 말고, 대화도 하고 협상도 해서 그들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의 통일’에 다가서는 것이다.

  북한을 추동해 내듯 미국을 추동해 내라. 북미관계 개선에 한국이 앞장서야 한다. 적어도 남북관계개선과 미·북관계 개선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도록 하라. 우리가 남북관계개선을 하겠다는 데 미국이 막는다면 그것을 하지 말게 하라. 그만한 힘이 있지 않는가? 지금이라도 주어진 6자회담의 틀을 한반도의 평화를 실천해 나가는 발판으로 삼아라. 북한 핵문제는 이미 국제문제다.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국제 차원에서의 공조 유지가 더 중요하다. 다자간 안보협력체제의 형성에 남한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유럽의 CSCE(유럽안보협력위원회)와 같은 '동북아 안보협력체제' 구축을 위해 한국이 반드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남북한간에는 종전 선언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라. 제2차 남북정상선언 합의문은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제4항)고 명시해 놓고 있다. 왜 이를 이용하지도 실현시키려고 하지도 않는가? 제발 북한의 비핵화에만 모든 것을 걸지 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잘못된 것이다.

  남북교류협력은 남북 쌍방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다. 상호 긴장을 완화하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남북관계가 정치적·군사적인 관계로 인해 악화되어도 민간차원의 남북경협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당장이라도 그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법·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라, 악화된 정치·군사 환경에서도 기업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투자된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경제협력의 바탕을 마련하라. 이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민간단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남북경협은 공공재다. 정치·군사적 긴장완화를 추동하는 기능을 한다. 개성공단 건설과 금강산 관광을 위해 군사 분야의 합의 도출이 필수적이었던 것이 그 예다. 남북이 상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특구를 활성화하고 북한의 타 지역과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질적인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의 시작이다. ‘사실상의 통일’은 경제특구건설을 통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경제특구는 북한 지역에 남한의 생산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집단적 진출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한 남측 요구가 그대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 지역 특구는 남한과 필수적으로 연결된다. 해로, 육로, 항공로, 통신으로 남북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물적 교류와 인적교류, 정보교류가 궁극적으로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심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할 것임이 틀림없다. 이것이 북한 변화의 원동력이다. 작은 규모라도 좋다. 경제특구를 평양·남포를 비롯, 점차 신의주나 나진·선봉지역에 조성하고, 남쪽과 연결시키자. 베를린이라는 동독 내 ‘섬’이 독일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라.

 

 이것은 명령이다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북한과 통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다. 대북 교류협력의 궁극적 목적과 목표가 통일,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내용과 형태의 통일이기에 우리는 한사코 교류협력을 해야 한다.

  교류협력이 돌아가는 것 같지만 가장 빠른 통일의 길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통일과 같은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북한을 방문할 수 있고, 소규모라도 여행할 수 있고, 가족을 만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통일이다. 사업을 위해 언제든지 인원과 물자가 육로를 통해 오고갈 수 있게 되면 그 때가 통일의 적기다. 정치적인 통일, 제도적인 통일은 언제든 하면 된다. 오히려 더 쉽다. 이런 통일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북한 주민의 마음은 이미 우리를 향해 우리보다 먼저 와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 누구도 감히 바깥으로 피력하지 못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그들 모두는 남한으로 안겨올 것이다.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의 통일을 원했듯이. 그런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바로 교류와 협력으로 들어가자. 교류와 협력이 ‘대북한 퍼주기’라는 말은 그만하라. 그동안 우리 사회는 비판을 통해 크게 성숙했다. 상황을 인식하고 있는 이상, 보다 나은 방안은 얼마든지 마련될 수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져라. 지금, 바로 지금. 이것은 명령이다. 

 

 

*이 글은  지난 8월 6일 광복 70주년 기념 경제정의실천연합이 주최한  '염원에서 실천으로'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며, 남북물류포럼과 공동으로 게재함. 

http://www.kolofo.org/?c=user&mcd=sub03_01&me=bbs_detail&idx=1814&cur_page=1&sParam=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