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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개고생 아비들, 호로자식 한국 후손들

 
 
[손석춘 칼럼] 명량으로 지킨 나라 100여년간 말아먹은 호로자식들
 
입력 : 2014-08-18  15:47:58   노출 : 2014.08.19  17:16:38
 
손석춘 언론인 | 2020gil@hanmail.net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후손들이 알까모르것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


관객 신기록을 날마다 경신하고 있는 영화 ‘명량’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온 대사입니다. 어느 비평가는 감독의 ‘노골적 의도’가 보인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더군요. 이형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김한민 감독 쪽입니다. 물론, 의도는 보이지요. 하지만 의도 없는 영화 대사가 있기나 한 걸까요. 저에겐 이 부박한 시대에 그 투박한 정직함이 드문 미덕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그 대목을 평가하는 이유는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호로자식’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아비도 모르는 자식’ 소리 들을 만큼 싹수없는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적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대화는 우리의 무뎌진 역사의식, 둔감한 사회의식을 단숨에 깨워줍니다. 

이순신. 

세계 해전사에서 그와 견줄 이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명장입니다. 영화 ‘명량’은 장군으로서 이순신만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그려내는 데도 돋보였지요. 

물론, 이순신의 성취는 혼자만의 업적은 아닙니다. 장군을 도운 숱한 민중이 있었지요. 실제로 명량이 ‘울돌목’으로 불릴 만큼 바닷물 흐름이 빠른 곳임을 이순신에게 가르쳐준 이도 그곳에 터 잡고 오랜 세월 자자손손 이어온 어부였습니다. 이순신이 진격할 때 그 아래서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내 전함의 노를 저은 격군도 민중이었지요. ‘개고생’은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을 이르는 순우리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닷물에 산채로 수장됐을까요. 바로 그렇게 우리 선인들은, ‘개고생 아비들’은,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강연 때마다 젊은이들에게 툭 던져온 질문이지만, 이순신을 낳은 조선의 해군은 그로부터 300여 년 뒤 정작 나라가 망할 때 무엇을 했던가요? 이순신과 그를 중심으로 뭉친 ‘개고생 아비들’이 애면글면 지켜낸 조선은 결국 다시 온 왜적에게 ‘정규 전쟁’도 없이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불편하겠지만 우리 진실을 마주합시다. ‘호로자식’들 아닐까요. 물론, 1890년대와 1900년대를 살아간 모든 이를 그렇게 ‘정죄’한다면, 그야말로 ‘호로자식’이겠지요. 골골샅샅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바로 그 의병들을 살천스레 ‘비도’로 몰아친 자들입니다. 누구일까요.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한 귀퉁이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던 권문세가들이고, 그들을 대변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독립신문이 의병을 ‘의병’으로 보도하지 않았지요. 독립신문은 의병을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무리’라는 뜻의 ‘비도’로 기사화했습니다. ‘비도 7놈을 죽였다’는 따위로 서슴없이 ‘놈’으로 몰아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바로 그 신문의 창간기념일이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신문의 날’입니다. 

이형. 생각해봅시다. 과연 이순신은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그가 온 몸으로 지켜낸 나라가 300여 년 뒤 바로 그 적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을. 그것도 모자라 다시 분단된 채 남과 북이 300만 명을 서로 죽이는 전쟁을 벌일 사실을. 휴전 뒤에도 내내 적대시해오는 꼴불견을. 그나마 남쪽은 다시 동서로 나누어 명량의 개고생 한 후손들을 암암리에 차별하는 오늘을. 장군이 민중과 더불어 눈부시게 승전한 울돌목 바다 바로 옆에서 폭우는 물론 바람조차 불지 않던 청명한 날에 수백 여 명의 청소년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실을. 그 진상을 규명하자는 일에 권력이 언구럭부리며 유족들을 조롱하는 오늘을.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 울돌목. 명량의 그 바닷소리에서 2014년 오늘, 영화 명량이 1500만 명을 돌파하는 지금, 이순신의 피울음, 장군의 통곡을 듣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못난 후손들이지요. ‘아비도 모르는 자식들’이라는 1590년대 어느 민중의 ‘예언’이 적중해온 셈입니다.

이형. 명장의 심장이 멎은 뒤 400여년이 흘렀습니다. 나라가 동강 난 이 꼴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순신을 죽였던가요.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숱한 인재를 질시하고 모함해온 역사의 귀결이 아닐까요.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이념과 지역, 세대 차이를 떠나 모든 영역에 걸쳐 ‘이순신’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가 기우는 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소리, 자살하는 비정규직·실직자들의 최후 소리, 저 육중한 진보세력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소리’들은 또 어떤가요. 그 또한 울돌목의 피울음 아닐까요. 
 
   
▲ 손석춘 언론인
 
더구나 일본의 아베 정권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국립 서울대의 교수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장서서 전파하는 나라에 우리 ‘후손’으로 살고 있습니다. 

청천하늘 잔별처럼 많았을 개고생 민중의 통곡을 담아 꾹꾹 눌러 다시 쓰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후손들이 알까모르것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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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37일째' 김영오씨를 살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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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 36일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의 모습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중인 단원고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의 모습. 왼쪽이 단식 첫날인 7월 14일, 오른쪽은 단식 36일째인 지난 8월 18일 오후의 모습이다.
ⓒ 권우성/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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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37일째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단식을 중지 시키는 것이다. 세월호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족대책위 그리고 법률대리인인 대한변협 변호사들이 먼저 설득해야 한다. 세월호참사범국민대책회위의 입장도 궁금하다.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필요하다. 광화문 현장에 있는 의사도 의학적 소견을 바탕으로 즉시 김영오씨의 강제 입원을 결정해야 한다. 

물론 여야가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되는 세월호 특별법 통과에 합의하는 순간 김영오씨의 단식이 끝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재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김영오씨가, 또 다른 유가족이 국회에 가서 법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여야 간에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른바 '특검추천권'을 둘러싸고 국회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여야는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취임한 이래 단 한 건의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해 '식물국회'라는 오명에 빠져 있다. 또 지금 본회의를 소집하지 않으면 단원고 3학년생을 수혜자로 하는 대학입시특례법안도 시기를 상실해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한다. 

'특검추천권' 문제만 정리되면 아무 문제 없는 걸까

세간에 알려진 대로 만일 특검법에 따른 '특검추천권'과 관련해 야당이 특검 후보를 한 명 더 추천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면, 세월호 특별법은 아무 문제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것이 유가족과 국민들이 청원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에 근접하는 것이라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인가. 

장담할 수 없다. 솔직히 특검법에 따른 특검추천권을 야당이 행사한다고 해서 유가족이 동의할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다. 꼭 야당이 행사하는 것이 옳다거나, 국민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확신도 없다. 그런데도 여야 협상은 마치 특검추천권이 핵심 쟁점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물론 협상은 어렵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협상의 전략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다. 때로는 명분을 가지고 책상을 내리치거나, 뒤집을 수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협상에 힘을 보태줄 우군을 움직이는 지혜도 필요하고, 인내력도 필요하고, 돌파력도 필요하다. 국회의원 의석수가 많다고 꼭 주도권을 쥐는 것도 아니고, 또 적다고 꼭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어느 한 편이 힘의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협상은 좀처럼 성립되지 않는다. 힘과 힘, 논리와 논리의 순간적인 변화를 누가 더 빨리 장악하고, 최대한 유리한 지점에서 협상을 마무리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협상의 예술이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과 관련해서는 첫째도 유가족 의사, 둘째도 유가족 의사, 셋째도 유가족 의사임을 존중하는 게 옳다. 협상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라는 이야기다.

잘못 꿰어진 협상의 첫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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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이완구,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7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세월호 특별법 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한 여야 원내대표 정례회동을 하고 있는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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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집단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과 관련해 유가족보다 더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협상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여당이야 그렇다 치고 왜 야당은 처음부터 유가족 대표가 참여하는 3자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의 전략적 판단 실책, 그리고 의원총회에서의 부결 등도 바로 협상의 구조를 잘못 짠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새정치연합 국회의원들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혔다거나 또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지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협상의 구조, 협상안의 설계 등에서의 심각한 오류를 그대로 두고 '특검추천권'이라는 곁다리만 긁고 있는 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대의정치의 양대 축인 여야가 유가족과 국민의 대의를 배제해 버린 '대의정치의 위기'를 현실로 인정하고 협상의 구조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 

세월호 특별법의 내용 중 '특검추천권'은 극히 일부의 쟁점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도 특검법에 따른 특검추천권보다도 진상규명위원회에 수사권을 보장하는 특별법이 훨씬 더 철저한 진상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 수사권을 포기하는 대신 야당이 특검추천권을 갖는다고 해서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되는 진상규명특별법을 주장해온 유가족이 동의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김영오씨를 살리고, 세월호 특별법을 살리는 길

그런 상황에서 유가족을 배제한 또 한 번의 여야 협상이 또다시 유가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결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더 이상 특검을 여당이 추천하느냐 야당이 추천하느냐는 문제로 국회를 공전 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완구·박영선 원내대표는 '특검추천권'에 매달릴 게 아니라 우선 여야·유가족대표 3자협상으로 유가족이 동의할 때까지 세월호 특별법 제정 협상을 하겠다는 원칙에만 합의하라. 그리고 세월호가족대책위, 범국민대책회의 등은 이를 계기로 김영오씨의 단식을 중지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비록 늦었지만 여야·유가족대표 3자협상으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과정을 세월호 희생자, 실종자, 생존자 가족들의 치유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로써는 그것이 김영오씨를 살리고, 세월호 특별법을 살리고, 또 교착 국면에 빠진 국회를 정상화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택수 변호사는 민변 세월호특위 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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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핵개발사 다시 쓰기와 ‘최후 결전 ’ 예견

 
한호석의 개벽예감 <12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4/08/19 [01:2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1> 이 사진은 평안북도 녕변군 핵시설단지에 있는 흑연감속로 시설의 일부를 오래 전에 촬영한 것이다. 요즈음 녕변핵시설단지를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미국은 쉬쉬하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지만, 녕변핵시설단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게 확장되고 일신되어 왕왕 돌아가고 있다. 거기서 무기급 핵물질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외부에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원래 북은 1961년에 녕변핵시설단지 공사에 착공하였고, 같은 해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 북의 핵무기개발을 담당한 1세대 핵과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인 도상록 교수는 "조선이 원자력분야에서 실험과 개발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놀랍게도,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북의 핵개발사는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 자주민보

  

 

1960년대 후반 북은 이미 핵보유국이었다

 

분단 40년을 맞은 1985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단호한 결심이다.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 이 인용문은 1985년 당시 평안북도 녕변핵시설단지 우리늄정련공장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일하면서 ‘핵으로 조국통일의 대문을 열자’라는 제목의 합창시를 창작했다는 탈북자가 2004년 2월 28일 <미래한국> 기자와 대담한 기사에 들어있다. <사진 1>


북의 기동예술선전대 작가가 어떻게 북측 최고영도자의 대외비발언에 대해 알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북의 작가들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사상과 의도를 인민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최고영도자의 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면 북의 핵무기 개발에 관한 심층정보가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핵탄을 만들려면 고폭실험을 실시해야 하는데, 북이 고폭실험을 실시한 때는 언제였을까? <연합뉴스> 2013년 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북이 고폭실험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북이 1980년대 후반에 고폭실험을 실시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핵탄을 만들어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루취코프(Vladimir Kyuchkov)가 1990년 7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8차 회의에 제출한 보고서 ‘#363-k’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이 “첫 원자폭발장치(first atomic explosive device)를 완성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당시 소련 국가안보위원회 의장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북의 ‘첫 핵폭발장치’는 핵탄미사일 탄두부에 장착하는 핵탄두(nuclear warhead)가 아니라, 초기형태의 핵탄이었다. 초기형태의 핵탄을 소형화, 경량화하는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핵탄두를 만들게 되는데, 북은 언제 핵탄두를 완성하였을까?


미국의 조선인민군 연구가인 조셉 버뮤디즈(Joseph S. Bermudez)는 ‘제인스정보평론(Jane's Intelligence Review)’ 1999년 7월호에 실린 글에서 북이 1993년 10월 20일 평안남도 평원군 석암리 염소골에서 핵탄두 기폭장치를 실험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전스 프랑스 프레스(AFP)> 1994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위관리 블라디미르 쿠마체프(Vladimir Kumachev)는 북이 핵탄두를 보유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이런 정보를 종합해보면, 북은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를 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위관리가 북의 핵탄두 보유사실을 언급한 때로부터 5년이 지난 1999년 당시 파키스탄 핵개발을 지휘한 총책임자였던 압둔 카디르 칸(Abdul Q. Khan)이 방북하였을 때, 북은 그에게 핵탄두 실물까지 보여주며 핵탄두 설계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이에 관해서는 <워싱턴 포스트> 2009년 12월 28일부에 실린 칸의 회고담에서 알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북을 방문 중이던 칸이 평양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산 중의 지하시설을 방문하였을 때, 북측 관계자들은 그에게 “완성된 핵탄두(finished nuclear warheads)” 세 발의 부품들이 담긴 상자를 보여주면서 그 핵탄두들은 한 시간 안에 미사일 탄두부에 장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서 북측 관계자들은 칸에게 핵탄두 설계법에 관해 설명해주면서 핵탄두 핵심부품들이 들어있는 상자 6개를 더 보여주었고, 핵탄두 한 발에 설치되는 “64개의 뇌관/기폭장치들”이 들어있는 또 다른 상자 6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른 공업제품들과 마찬가지로, 핵탄두도 제조기술수준에 따라 저급핵탄두로부터 고급핵탄두에 이르기까지 차등으로 분류되는데, 1999년에 북이 칸에게 실물을 보여준 핵탄두는 어느 등급이었을까?


어느 나라에서나 핵개발은 국가기밀사항에 속하므로, 북의 핵개발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외부인으로서 북의 핵탄에 관한 정보를 가장 자세히,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압둘 카디르 칸의 회고담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2011년 9월 15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Fox News)> 온라인판에 칸의 ‘자백서(Confession)’ 전문이 실렸는데, 그 ‘자백서’에 따르면, 북은 칸 자신과 미르자 박사(Dr. Mirza)에게 파키스탄 핵탄보다 기술적으로 더 진보한 “완벽한(perfect)” 핵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에서 핵개발을 이끄는 최고 수준의 핵과학자들이 북의 핵탄을 직접 관찰하고 그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자기들이 만든 핵탄과 비교하여 북의 핵탄이 완벽하다고 평가했으니, 북의 핵탄제조기술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살펴보면, 북은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던 1985년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완벽한 기술로 제조된 핵탄두를 다량 보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이 핵개발에 착수한 때로부터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에 숱한 과학기술적 난제를 해결하고 ‘완벽한 핵탄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칸의 ‘자백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백서’에는 칸이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에게 핵개발기술을 전수해준 북의 핵공학기술진 대표자와 여러 차례 만나 협의하는 장면이 서술되었는데, 칸은 그 대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강 장령(Gen. Kang)”이라고만 적었다. <워싱턴 포스트> 2011년 7월 6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칸이 만난 그 장령은 강태연(Kang Tae Yun) 소장이다. (Yun은 윤으로도 읽을 수 있으므로 강태윤일 수도 있다.) ‘자백서’ 원문의 그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강 장령의 상관에 따르면, 북은 코리아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아 핵무기 몇 발(a few weapons)을 제작하였다.”


위의 인용문이 들어있는 문맥을 앞뒤로 읽어보면, 강태연 소장의 상관이 칸을 직접 만나 위와 같은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고, 강태연 소장이 자기 상관으로부터 들은 사실을 칸에게 말해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북과 파키스탄은 핵개발부문에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북은 파키스탄 핵과학자들을 초청하여 핵탄두 실물을 보여주고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해주었고, 파키스탄은 자기 영토에서 북이 비공개핵실험을 실시하도록 허용하였을 만큼 서로 협조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의 핵공학기술진 대표자와 파키스탄 핵개발 총책임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핵관련 비밀정보를 교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이 1955년경에 소련으로부터 무기급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아 핵탄을 만들었다는 위의 인용문은 사실로 보인다. 무기급 핵물질과 핵무기 설계도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핵기술지원에는 비밀합의 체결절차가 따르는 법인데, 1955년경 북과 소련도 그런 내용의 비밀합의를 체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중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였던 시기에 그 사업을 지휘한 네룽전(聶榮臻) 중국인민해방군 원수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측과 ‘새로운 무기 및 군사기술장비 생산과 종합적인 원자력산업 발전에 관한 합의’를 채택한 때는 1957년 10월이었다. 이 비밀합의를 채택함으로써 중국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57년부터 소련의 핵기술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중국이 22킬로톤급 핵탄을 터뜨린, 자국의 첫 핵실험을 실시한 때가 1964년 10월 16일이었는데, 중국보다 조금 앞선 1955년경부터 소련의 핵기술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북도 1960년대 중반에 핵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북에서 핵탄을 만들었던 핵전문가들은 1956년부터 소련의 모스크바공학물리연구소, 바우만고등기술대학, 모스크바에너지연구소에서 각각 공부하고, 두브나(Dubna)와 오브닌스크(Obninsk)에 있는 핵과학연구시설들에서 현장실습까지 마친 300여 명 이상의 우수한 북측 1세대 핵과학자들이었다. 조셉 버뮤디즈가 ‘제인스정보평론’ 1994년 2월호에 실린 글 ‘북코리아의 핵기반시설(North Korea's Nuclear Infrastructure)’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함경북도 길주군에 ‘원자무기훈련소’를 설치한 때는 1958년 1월이었는데, 그 때 벌써 핵탄사용훈련을 실시하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주목하는 것은, 1955년경 소련으로부터 무기급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입수한 북이 그것을 가지고 핵탄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북이 녕변핵시설단지에서 추출한 무기급 플루토늄 40kg으로 핵탄 약 10발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그런 계산범에 따르면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핵탄 약 50발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대 후반 북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 핵보유국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북의 핵개발사는 고쳐 쓰여야 한다.


1997년 뉴욕에서 출판된, 미국의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코리아의 양지 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 따르면, 1957년 8월 백악관은 ‘국가안보문서 5702/2호’에서 미국 핵무기를 남측에 배치하는 조치를 결정하였으며, 1995년 뉴욕에서 출판된, 미국의 분석가 마이클 마자(Michael J. Mazaar)의 책 ‘북코리아와 핵탄(North Korea and the Bomb)’에 따르면, 미국은 1958년 초부터 남측에 핵포탄, 핵탑재미사일, 핵폭탄, 핵지뢰를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미국의 집중적인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서 북이 자체 기술로 제작한 핵탄 약 50발을 보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1969년 미국군 정찰기 격추사건이 일어났을 때, 만일 미국이 북에게 핵공격을 감행했더라면, 북도 주한미국군기지들과 주일미국군기지들을 핵보복공격으로 파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북이 1960년대 후반에 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제조한 핵탄 약 50발은 북이 1999년에 칸에게 보여준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가 아니라 1950년대 핵기술로 만든 크고 무거운 핵탄이었다. 2001년 11월 1일 미국의 분석가 대니얼 핑크스턴(Daniel A. Pinkston)이 청취한 탈북자의 진술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66년 또는 1967년에 미사일 탄두부에 장착할 핵탄두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미국의 분석가들인 로벗 노리스(Robert S. Norris), 윌리엄 아킨(William N. Arkin), 월리엄 버(William Burr)가 공동집필하여 ‘원자과학자휘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1999년 11월/12월 합본호에 발표한 ‘그것이 있었던 곳(Where They Were)’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1967년 중반 미국은 핵탄 약 3,200발을 태평양지역에 배비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약 2,600발은 남측과 오키나와에 배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압도적인 핵무력으로 대북핵공격을 노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으로부터 그처럼 집중적인 핵위협과 핵공갈을 받던 북이 그에 맞서 1960년대 후반에 이미 핵탄개발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 핵탄을 소형화, 경량화한 핵탄두개발을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단 40년을 맞은 1985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려 한다”는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면서 언급한 핵개발은 1950년대 핵기술로 오래 전에 만들었던 핵탄과 다른, 새로운 핵기술로 신형 핵탄을 개발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신형 핵탄을 만들어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는다는 뜻이었다.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핵보유국이었으므로, 1985년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완벽한 기술로 제조된 신형 핵탄두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진 2> 이 사진은 파키스탄 펀잡(Punjap)주의 카후타(Kahuta)에 있는 핵연구단지인 칸연구소 정문을 촬영한 것이다. 그 곳의 지명을 따서 카후타연구소라고도 불린다. 바로 이 곳에서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 총책임자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국책사업을 지휘하였고, 바로 이 곳에서 파키스탄 핵과학자들은 1993년과 1994년 사이에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으로부터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중국과 같은 시기에 핵개발에 착수한 북은 다른 핵보유국에게 관련기술을 전수해줄 만큼 세계적인 기술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미국의 감시를 따돌리고 북으로부터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받아 파키스탄의 핵무력을 증강시킨 압둘 칸은 미국의 미움을 받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가택연금을 당했고, 당시 핵무력 증강의 군부책임자였던 무샤라프도 나중에 미국의 미움을 받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반역죄로 법정에 끌려나갔다.     © 자주민보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현지에서 가르친 북의 핵공학기술진 

 

1950년대 중반부터 오랜 기간 극비로 추진되었던 북의 핵개발에 관해 정보를 거의 갖지 못한 국제사회는, 녕변핵시설단지에 건설한 흑연감속로를 가동하여 추출한 무기급 핵물질로 플루토늄핵탄 약 10발을 만든 북이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라늄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그 원심분리기를 설치한 우라늄농축시설을 녕변핵시설단지에 건설하여 현재 가동하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정보부족에 빚어낸 착오다. 국제사회가 알지 못하는 것은, 북이 처음부터 두 종류의 핵탄을 동시에 만들기 위한 핵무기 개발에 달라붙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의 핵탄이란 우라늄핵탄과 플루토늄핵탄이다.


북은 2009년 6월 13일에 발표한 외무성 성명에서 우라늄농축이 시험단계에 들어섰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북측 외무성이 그 성명을 발표한 시점보다 조금 앞선 2009년 5월 초순 미국 국가정보국장실(ODNI)은 미국 연방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보는 미국 정보기관 일부인사들의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북의 우라늄농축은 그런 공식발표내용과 달리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미래한국> 2006년 10월 21일부에 실린 탈북자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가 1985년 8월 인민군에서 제대하여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작품창작을 위해 열람하였던 핵개발과 관련된 대외비문건들 가운데는 “북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평가가 들어있는 문건도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회고담은 북이 이미 1985년 이전에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를 자체 기술로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북은 1985년 이전에 언제쯤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를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찾을 길 없지만, 북이 1962년 1월 소련으로부터 받은, 고농축우라늄을 원료로 쓰는 2메가와트급 실험용 원자로를 녕변핵시설단지에 설치하는 작업을 끝마친 때가 1965년 6월 중순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북은 1967년 이후 그 우라늄원자로의 성능을 4메가와트급으로, 8메가와트급으로 차츰 강화시켜나갔는데, 이것은 북이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우라늄농축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1960년대 후반에 우라늄농축기술을 보유하였던 북은 그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1990년대 중반에 기존 우라늄핵탄보다 기술적으로 더 발전된 신형 우라늄핵탄을 제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압둘 카디르 칸의 ‘자백서’에 따르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북이 파키스탄에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이 파키스탄 핵연구단지에 머물렀는데, 북의 핵공학기술진은 그곳에서 원심분리기와 그 부품들을 제작, 조립하는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가르쳤다(instruct)”는 것이다. <사진 2>


당시 파키스탄의 우라늄농축기술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은 이전에 P-1 원심분리기를 자체로 제작하였던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신형 P-2 원심분리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이 그처럼 높은 수준의 우라늄농축기술을 가진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현지에서 가르쳤다면, 이미 그 무렵 북의 우라늄농축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워싱턴 포스트> 2009년 12월 28일 보도기사와 압둘 카디르 칸의 ‘자백서’ 내용을 종합하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은 파키스탄이 만든 P-1 원심분리기 20기와 P-2 원심분리기 4기를 달라고 요청하여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주목한 미국의 분석가들은 북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농축기술을 전수받고 나서 우라늄농축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그런 추정은 빗나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위에서 언급한 칸의 ‘자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백서’에 따르면, 당시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의 핵공학기술진은 무기급 핵물질을 만드는 고농축우라늄 생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고농축우라늄 생산설비 설계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파키스탄이 만든 원심분리기만 귀국할 때 가져갔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고농축우라늄 생산기술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은 북의 핵공학기술진이 귀국할 때 이상하게도 원심분리기만 가져간 것은, 북이 자체로 만든 원심분리기 성능을 개량하여 경수로에 들어가는 저농축우라늄을 생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의 핵공학기술진이 파키스탄 원심분리기를 가져가기 훨씬 전에 북은 이미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농축우라늄을 생산하였으며, 고농축우라늄을 가지고 우라늄핵탄도 만들었다.


미국의 분석가인 데이빗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는 2010년 10월 19일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압둘 카디르 칸과 은밀히 핵거래를 해오다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포섭된 스위스 기술자 프리드릭 티너(Friedrich Tinner)와 그의 두 아들이 2004년 5월 스위스에서 사법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스위스 당국자들은 그 피체자들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에서 아주 정교하게 작성된 신형 핵탄 설계도를 발견하였는데, 그 설계도가 어느 나라에서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신형 핵탄 설계도는 1999년에 방북한 칸에게 북이 실물로 보여준 바로 그 핵탄의 설계도인 것이다. 북으로부터 신형 핵탄 설계도를 받은 칸은 자기의 핵거래 대상자인 티너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가 스위스 사법당국에게 압수당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이 파키스탄에게 제공한 신형 핵탄 설계도가 우라늄핵탄 설계도라는 사실이다. 1998년 5월 30일 북이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사막 핵실험장에서 비공개핵실험을 실시할 때 사용한 핵탄은 플루토늄핵탄이었는데, 파키스탄에게는 우라늄핵탄설계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다. 북은 그 동안 우라늄핵탄만 만들어온 파키스탄에게 더욱 발전된 우라늄핵탄설계기술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핵개발로 통일의 전환국면 열어놓으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은 절반 정도 실현되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대외비발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북측 언론매체들은 북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미국의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설 강력한 억제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핵무기를 가져야 했다는 대응적 핵개발론을 거론해오고 있지만, 이미 30여 년 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의 핵무력이 미국의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서는 억제력이라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런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위의 인용문에서 명백히 밝힌 것처럼 북의 핵무력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공세력이라는 사실이다. 북이 핵무력을 보유하게 된 근본목적이 한반도 통일 실현이라는 점에서, 북의 핵무력은 러시아나 중국의 핵억제력과 성격을 달리 하는 핵공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핵공세력을 갖게 된 북은 그 힘을 가지고 한반도 통일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하였을까?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5년에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언급한 비공개발언에는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는 내용이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는 핵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려 한다”고 말했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는 말은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의미심장한 뜻을 지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북의 핵개발이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를 일으켜 한반도 정세가 통일실현단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 가운데 첫 번째 정세변화는, 미국이 다른 핵보유국에 대해 감히 전쟁을 도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북이 핵개발로 미국의 대북전쟁도발의지를 꺾어놓는 변화를 뜻한다.  


그러나 북의 핵개발은 미국의 대북전쟁도발의지를 억제할 수는 있었으나 완전히 꺾어놓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기의 핵무력만 믿고, 대북핵전쟁연습을 지속적으로 감행해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북의 핵무력이 자기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정보를 파악한 뒤에도, 그런 사실을 극구 숨기는 한편, 북의 핵무력을 속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얕보는 척하는 기만술을 펼치고 있다. 핵대국의 체면을 유지하여야 자기의 추종국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궁색한 처지에서 미국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사진 3> 이 역사적인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오후 3시 7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머물던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서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회담은 중간에 10분 휴식시간을 두고 세 시간 동안이나 진행되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서 논쟁이 없이, 모든 게 다 잘 되었습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특사로 2010년 10월 10일 백악관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회담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당시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각각 발표된 조선-미국 공동성명에 미국 대통령의 방북일정이 명기될 만큼 북미관계는 격동적 전환국면에 도달해 있었다. 만일 미국 내부의 방해세력들이 클린턴의 방북을 극력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구한 북미담판이 2000년 말에 성사되었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6.15 공동선언이 실현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 자주민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 가운데 두 번째 변화는 북미핵협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북은 자기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경우, 핵확산금지를 가장 중대한 과업으로 여기는 미국이 북의 핵개발에 크게 자극을 받아 대북핵협상에 응할 것이고, 일단 미국이 북미핵협상에 응하면 그 협상기회를 이용하여 미국을 북미담판까지 끌어갈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였던 것이다. <사진 3>  
그러나 북의 핵개발이 북을 상대조차 하지 않던 미국을 북미핵협상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북미담판까지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북이 요구하는 북미담판에 끌려나가는 것은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미국은 북미담판을 요구한 북의 초강경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속 없는 각종 다자회담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북미핵협상을 끊임없이 공전시키다가 결국 9.19 공동성명마저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원래 북은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여야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판단은 일제식민지강점기에 이룩된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오랜 전통을 지닌 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인정되었다. 그런 까닭에 지난 시기 북은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북미담판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시기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최후 담판’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북이 미국을 북미핵협상에 끌어내고 ‘최후 담판’에로 끌어가려고 하였던 정책전환의 배경에는 급격한 정세변화가 놓여있었다. 1990년대에 북에 휘몰아쳤던 세계사회주의진영 붕괴의 파장과 북의 건국 이래 가장 혹심하였던 ‘고난의 행군’과 ‘사회주의강행군’의 연속적인 시련이 그것이다. 그처럼 극도로 불리한 정세 속에서 북의 핵무력이 수행해야 하였던 당면목표는 북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수호전’의 승리였고, ‘사회주의수호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북은 대미협상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006년 10월 9일 북이 실시한 제1차 지하핵실험은 북이 ‘사회주의수호전’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였기 때문에 대미협상기조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말해주는 사변이었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핵개발로 한반도 통일의 전환국면을 열어놓으려고 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은 절반 정도 실현되었고, 나머지 절반을 가득 채워 한반도 통일위업을 완성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이 추진해온 제1방도와 제2방도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대외비발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북이 핵무력으로 한반도 통일의 실현과정을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북에서 나온, 통일방도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분석하면, 북이 두 가지 통일방도를 추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추진해온 두 가지 조국통일방도들 가운데서 제1방도는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한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이 추진해온 두 가지 조국통일방도들 가운데서 제2방도는 북이 ‘최후 결전’까지 가지 않고 북미담판에서 승리하여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킨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제1방도는 북미전쟁을 통한 통일방도라고 볼 수 있고, 제2방도는 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핵확산금지를 가장 중대한 과업으로 여기는 미국은 북이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크게 자극을 받아 다급한 김에 덜컥 대북핵협상에 응하기는 하였지만, 북이 요구하는 북미담판에 끌려나가는 것이 북에 대한 정치적 굴복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기 때문에 북미담판을 요구하는 북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실속 없는 각종 다자회담을 늘어놓으며 북미협상을 끊임없이 공전시키다가 결국 9.19 공동성명마저 외면하고 말았다. 따라서 북이 추진해오던 제2방도(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는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한반도 통일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2009년 7월 16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말한 것은 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를 더 이상 추진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발언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이 추진할 통일방도는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한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제1방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음이 자명해진다. 


제1방도를 실현하려는 북이 세계 최대 핵대국인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려면, 미국 수도권을 비롯한 미국 본토 전역을 각종 핵타격수단으로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첨단핵무력을 가져야 하였다. 북이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발사하는 핵타격미사일, 부분궤도폭격체계(FOBS), 전자기파(EMP)공격체계 같은 각종 핵타격수단을 가져야 미국 수도권을 비롯한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고, 그런 강력한 핵무력을 가져야 미국의 핵공격의지를 꺾어놓을 수 있는 것인데, 북이 이미 그런 첨단핵무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상세히 논증한 바 있다.


2012년 1월 1일 북에서는 새로운 최고영도자가 이끄는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었는데, 한반도 통일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김정은 시대’는 북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통일방도인 제1방도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최후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북의 최고영도자로 추대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에게 넘겨준 제1방도를 실현하기 위한 ‘최후 결전’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기간에 실제로 단행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사진 4> 2012년 8월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선군절 경축연회가 열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경축연회 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사상 처음 공식 언명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조선인민군은 발사명령, 돌격명령만 내리면 즉각 전 전선에 걸쳐 전면타격을 개시할 수 있는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다.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은 2013년 4월까지 지속되었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추진하였던 제1방도와 제2방도 가운데 제2방도 추진과정이 미국의 거부로 중지된 가운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제1방도를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최후 결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 자주민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8월 25일 선군절 경축연회에서 “지금 이 시각 나의 명령을 받은 영용한 인민군장병들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의 무모한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전투진지를 차지하고 적들과의 판가리결전을 위한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최후 결전’을 단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에 조선인민군은 실제로 준전시태세에 돌입하였다. <사진 4>


이와 관련하여 남측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 것은 미국의 관영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RFA)>이었다. 2012년 11월 7일 그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10월 20일경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고, 11월 3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공동명의로 작성된 준전시상태에 관한 명령서가 북측 전역에 하달되었다고 한다.


당시 북에서 선포한 준전시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동아일보> 2013년 8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2012년 8월 ‘준전시사업세칙’을 개정하였는데, 미국과 남측이 북의 최고존엄을 모독한 경우, 대북군사도발을 감행한 경우, 북의 최고이익을 침해한 경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한다고 규정했다고 한다. 그런 규정에 따라 북은 ‘최후 결전’에 즉각 돌입할 수 있는 준전시상태를 2012년 11월 3일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만일 사태가 준전시상태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 북은 즉각 전시상태로 넘어가게 되는데, 전시상태 선포에 관해서는 북이 2004년 4월에 제정하고 2012년 9월에 개정한 ‘전시사업세칙’에 밝혀져 있다.


그런데 당시 미국과 남측은 북이 2012년 10월 20일경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고, 11월 3일에는 준전시상태를 공식 선포하였다는 정보를 은폐하였기 때문에 남측 국민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당시 대선열기에 휩싸인 남측 국민들의 눈에는 긴박한 군사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선열기에 휩싸인 남측 국민들이 긴박한 군사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것과는 대비적으로, 미국군과 한국군은 준전시상태에 돌입한 북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다급한 군사행동을 연이어 취하였다. 이를테면, 2014년 10월 24일 미국은 자국 잠수함들 가운데 가장 큰, 수중배수량 18,000t급 핵추진잠수함 오하이오호(USS Ohio)를 부산항에 급파하였고,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군산공군기지에서는 ‘맥스 썬더(Max Thunder)’라는 명칭의 한미공중연합훈련을 이전보다 더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11월 27일 청와대에서는 전군 지휘관회의가 진행되었고, 같은 날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전군 작전지휘관회의가 진행되었다. 12월 6일과 7일 미국은 남측 정부관리들을 참가시킨 가운데 ‘확장억제수단운용연습’이라는 명칭으로 한반도에서 핵전쟁준비태세를 점검하는 도상훈련(tabletop exercise)까지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은 2013년 4월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일정한 잠복기를 거치고 있는 중이다.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전쟁위기상황이 어떻게 재발될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2014년 8월 이후 북에게는 ‘최후 결전’을 단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지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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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사라진 7시간’ 오바마는 몽땅 까발렸는데

 
‘박근혜 사라진 7시간’ 오바마는 몽땅 까발렸는데
 
세월호 참사 당일,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대통령의 직무유기
 
임병도 | 2014-08-18 08:53: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던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백 명의 목숨이 죽어가던 그 시간에 대통령으로서 그녀가 도대체 어떤 조치를 했는지에 대한 당연한 의혹 제기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밝히라는 여론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초별로 다 까발리는 게 온당하다고 보나요? 지구상에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어요?"라며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세상에 오바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 몇시 어디에 있는 것까지 소상히 밝히라는 것이 온당한 주장인가요. 한 나라의 국가권수를.엄청난 얘기 아닙니까?"라며 갑자기 오바마 대통령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의 행적을 까발리는 나라, 여기 있습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오바마 대통령을 거론했으니 아이엠피터가 알려드리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그날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정표입니다. 

백악관은 오전 10시를 시작으로 1시, 1시35분,20시30분, 3시10분.3시45분,5시45분,6시45분,7시20분까지 거의 시간대별로 오바마 대통령의 스케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청와대와 백악관이 공개하는 대통령 일정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던 4월 16일 그 주의 일정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4일 오전 특성화고 현장 방문, 4월 15일 국무회의 4월 16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 4월 17일 세월호 사고 현장 방문, 4월 19일 4.19혁명 기념 4.19 묘지참배 일정만 공개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 백악관은 4월 14일 월요일부터 4월 18일 금요일까지 오바마 대통령이 누구와 미팅을 하고 회의를 하고 어떤 행사에 참석했는지 그 일정을 시간대별로 정확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달랑 한 개의 일정을 공개한 청와대와 시간대별로 주요 일정을 모두 공개한 백악관, 왜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자꾸 매달리는지 그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통령 동선까지도 공개하는 미국'

한국과 비교하면 미국은 대통령의 일정을 홈페이지 자체만으로 알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하고 하는지 그 장소와 동선까지 모두 공개한다는 점입니다.

 

 

 


7월 29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정을 보면 장소와 동선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북쪽 출입구 팜룸에서 출발한 오바마 대통령은 몇 시에 앤드류 공항을 출발하고 몇 시에 캔사스에 도착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4월 16일 일정에서도 백악관에 도착한 시간이 정확히 공개되어 있다.)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대통령의 동선을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한국과 다르게 미국은 대통령이 언제 백악관을 출발하고 언제 도착하는지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보다 더 중요하고 위험한 인물이라서 그럴까요?

미국 백악관은 언론에 공개할 수 없는 행사나 미팅이라도 그 일정을 공개하고 비공개라고 표기해놓습니다. 

언론에 공개되는 풀 기자단
 1의 경우도 어느 매체가 어떤 분야에서 취재했는지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백악관 안과 외부 행사에 동행 취재한 기자단의 소속 언론사를 밝힘으로 취재 공정성에 대한 판단을 국민이 하도록 공개해준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일정을 낱낱이 공개하다 보니 부작용도 있습니다.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 기간에 세계은행 김용 총재와 골프를 친 일정을 공개했습니다.

문제는 당시 미국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주리주 흑인사망 소요 사태가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서 아무리 휴가라도 골프를 친 사실에 대해 미국 국민과 언론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의 일정을 공개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대통령이 자신의 직무를 정확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국민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대통령은 아예 국민의 알 권리와 판단의 근거를 사전에 차단해버리고 있습니다. 


'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대통령의 직무유기'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국민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청와대가 아니라 엉뚱하게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이 그날 대통령의 일정을 공개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호하겠다고 내놓은 그날의 일정을 보면 더 이상합니다. 

가장 먼저 9시에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이 배에서 탈출을 시작했다면 단순한 침수가 아닌 대형 참사가 예견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 청와대는 9시 24분 여객선 침수라는 최초 보고를 대통령에게 합니다. 늦은 감이 있으면서 초기 사태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전 11시 19분 SBS는 '학생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오후 1시 13분 총 370명이 구조됐다는 보고를 합니다. 2시 50분 안보실은 유선 보고를 하는데, 대형 참사가 이미 확실시되는 상황인데도 단순히 유선으로 보고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합니다. 

 

 

 

오후 3시 30분이 비서실의 서면보고가 있었던 후 약 2시간 후 박근혜 대통령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하여 "생존자를 빨리 구출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 15분까지 그녀가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내린 지시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날 박근혜 대통령 행적에 대한 의문입니다. 

최소한 청와대 벙커에서 사고 현장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면 괜찮겠지만, 오로지 유선으로 보고받다가 생뚱맞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는 질문만 던집니다.

 

 

 

동아일보와 신동아는 김기춘 비서실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의혹 제기가 너무 답답하다'는 김 실장의 입장을 보도했습니다. 

핵심은 그날 청와대와 대통령은 왜 대형 참사 소식을 늦게 알았고 '학생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느냐는 점입니다. 

4월 16일 305명이 죽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보여준 지시와 행동은 도저히 대통령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무려 7시간 동안 대통령이 사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강력한 구조 지시 등을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금 왜 국민이 그녀의 사라진 7시간을 알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이 왜 잘못된 보고를 받았는지, 대형 참사가 예견된 상황에서 왜 직접 사고 정보를 파악하지 않고 제대로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지는 반드시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특별법으로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1. 모든 기자들이 대통령을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에 일부 기자가 대통령과 밀착취재를 하고 그 기사를 언론사가 공유하는 시스템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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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교황 리더십'에 빠지다...오늘 마지막 날

[뉴스브리핑] 수신제가 안 되는 한국 고위층들
김민하 기자  |  acidkis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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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8.18  07: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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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 오늘의 조간 헤드라인 전해달라.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마지막 날이다. 교황은 마지막 공식행사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쌍용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 등이 초대된다. 이에 앞서 교황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를 만나 종교간 평화와 화해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미사 후에는 명동성당 지하성당에 안치된 성인들의 유해를 참배하고 오후 1시 귀국 비행기를 탄다. 교황이 방한하는 동안 여러 인상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교황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오늘 조간 1면은 그간 교황 방한 중 깊은 인상을 남긴 데 대한 해석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배치돼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나흘째인 17일 오후 충남 서산 해미읍성에서 열린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 각 신문들은 교황 방한이 무엇을 남겼다고 평가하고 있나?

<경향신문>은 교황이 한국사회에 숙제를 던졌다고 평가했다. 약자를 섬기는 낮지만 큰 행보를 통해 치유를 넘어선 사회문제의 해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는 결국 우리의 몫이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교황의 약자를 위해 몸을 낮추는 행보가 ‘진정성’을 통한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교황의 꽃동네 방문에서 교황과 장애인들이 모두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하면서 교황의 낮은 곳을 향한 손길이 우리 사회에 행복을 전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중앙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미사와 아시아청년대회 폐막 미사에서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등 도움을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겨레>는 교황이 물질보다 인간을 강조하는 성직자의 참모습을 보였고 고급차나 숙소를 거부하는 따뜻한 리더십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한국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픈카에서 내려 세월호 유가족들의 손을 직접 잡고 꽃동네에 가서는 의자를 사양하는 등 행동을 통해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전했다.

- 사설에서는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나?

세월호특별법 관련 주말에 여야 원내대표 및 정책위의장 회동이 이뤄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오늘 조간에는 이와 관련한 사설이 배치됐다. <동아일보>는 7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에는 반드시 열어야 한다면서 세월호특별법 합의와 관계없이 분리 국감 법안, 경제활성화 관련 법안 등이 처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8월 임시국회를 소집할 경우 새누리당 조현룡 의원 등에 대한 방탄국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앙일보>도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로 오늘 본회의가 열려야 한다면서 법안은 처리하지 못하면서 세비만 받아 챙기는 국회의원들을 비난했다. <경향신문>은 새누리당이 새정치민주연합이 세월호특별법 관련 합의를 깼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지만 세월호특별법 관련 합의를 매듭을 푸는 것은 새누리당이 전향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교황의 ‘세월호 메시지’를 깊이 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요 뉴스

- 주말의 세월호특별법 여야 협의는 진전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17일 밤 비공개 회동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합의에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특검추천권을 정치권이 합의하는 형태로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얘기하고 있다. 야당이 추천권을 행사하지만 여당이 반대하는 인사는 특검으로 추천하지 않는 방식이다. 또,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 청문회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출석하는 방안 등으로 여당의 양보가 있을 지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새누리당 주호영(왼쪽)·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정책위의장이 17일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하려고 국회 운영위원회 소회의실에서 만나 물을 마시고 있다. (연합뉴스)

원내대표 간의 회동 전에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과 새정치민주연합 우윤근 정책위의장이 법안 처리 등에 대한 사전조율에 나섰지만 세월호특별법의 합의 여부와는 별도로 단원고 학생들의 특례입학 및 분리 국감 관련 법안 등을 처리할 지에 대해 이견이 있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논란이 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4월 16일 행적에 대해 대통령이 외부인사를 접견한 일정은 없다면서 보안 상의 이유로 동선을 공개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해 발언했다.

- 북한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아 화환을 전달했다고?

북한은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개성공단을 방문한 17일 김양건 조선노동당 비서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주기를 추모하는 조전과 화환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이 함께했다.

   
▲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5주기를 하루 앞둔 17일 오후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옆 북측 개성공단 총국사무소에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가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김홍업 전 의원 등 방북단에게 조전문을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자리에서 김양건 비서는 최근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여러 제안과 관련해 “반가운 소리가 없다”면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지원 의원은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양건 비서 측이 특히 핵 문제 해결을 전제한 제안에 불쾌감을 표시했으며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 의원 등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언급하는 등 이명박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김양건 비서 측은 우리 정부가 남북이산가족 상봉 등을 논의하기 위해 제안한 고위급 접촉 성사 여부에 대해 당 중앙에 보고했다고 발언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아들이 군 가혹행위의 가해자로 밝혀졌다고?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장남이 군 가혹행위의 가해자로 군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데 대해 사과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장남인 남 모 상병은 강원 철원군 육군 6사단 예하 부대에서 후임병을 폭행하고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군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남 모 상병은 업무와 훈련을 제대로 못한다는 이유로 모 일병의 턱과 배를 때리는가 하면 전투화를 신은 상태에서 다리를 걷어차고 욕설을 하거나 바지 지퍼 부위를 툭툭 치는 등의 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남경필 도지사는 “아들은 조사 결과에 따라 법에 정해진대로 응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면서 “아버지로서 저도 벌을 같이 받는 마음으로 반성하고 뉘우치겠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남경필 도지사는 해당 사건을 지난 13일 군에서 연락을 받고 알게 됐다고 밝혔다.

   
▲ 17일 오후 경기도 수원 경기도청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장남이 군대내 폭행과 성추행 혐의로 조사를 받는 것과 관련 피해 장병과 그 가족,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 제주지검장이 음란행위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고?

제주소방서 인근 김밥집 공터에서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김수창 제주지검장이 조사를 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2일 귀가를 하던 여고생이 분식집 공터에서 한 남성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음란행위를 하는 것을 목격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해 분식집 테이블에 앉아있던 남성을 검거했는데 유치장 입감 직전 김 지검장이 동생의 이름을 대 신분을 감추는 등 석연찮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김수청 지검장 측은 자신이 분식집 의자에 앉기 전에 한 남성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았다면서 자신이 그 남성인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생 이름을 댔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과 경찰이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갈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대검 감찰본부는 진상조사를 진행하려했지만 경찰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감안해 이를 중단했다. 경찰은 인근 CCTV 등을 확인해 사실을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 최근 잠시 일대에서 싱크홀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서울시가 이를 미리 알았다는 보도가 있는데?

서울시는 지난 13일 석촌지하차도 주변에서 발견된 대형 동공에 대해 지하철 9호선 3단계 터널 공사 때문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시공사 측이 쉴드 공법이라는 방법으로 터널 공사를 진행하면서 지반의 틈새를 메우는 그라우팅을 하지 않아 동공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공사인 삼성물산 측은 2012년 8월 서울시에 시공계획서를 제출할 당시 해당 공사구간의 지반 취약과 공사 기법 등에 대해 모두 보고했지만 서울시가 이에 대한 별다른 대책마련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18~31일 전국 대형 굴착공사에 대한 일제 안전점검에 들어가지만 추가로 지반 침하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불안감은 확산되고 있다.

더 짚어볼 뉴스

- 오늘의 더 짚어볼 뉴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해준 메시지에 대해 조금 더 심도있게 다뤄볼 필요가 있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릴만한 메시지를 던졌다. 첫째는 현재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현안에 대해 리더십을 보였다는 점이다. 교황은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복식 미사에 앞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발견하고 직접 차에서 내려 이들을 만났다. 33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김영오씨의 손을 잡고 그의 말을 경청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오씨는 자필 편지를 교황에게 전달했고 교황은 이를 자신의 옷 속에 넣었다. 또, 교황은 어제 주한교황청대사관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 이호진씨를 불러 직접 세례를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이호진씨에게 자신과 같은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김영오 씨로부터 편지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발언도 화제였는데?

그게 두 번째 메시지다. 교황은 15일 대전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도들을 향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과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길 바란다”고 말하는가 하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 경제모델을 거부하길 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맞서 싸우라거나 거부하라는 표현은 평소 교황의 발언을 빗대 보더라도 강한 표현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한 해석이 분분하다.

- 교황의 행동과 발언에 사람들이 감동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지점을 얘기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간 우리가 받지 못했던 어떤 위로를 교황을 통해 받게 된 데에 대해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교황의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배려는 사실 우리 사회와 정치권이 감당했어야 할 몫이다. 세월호특별법의 처리 여부와는 별개로 대통령이 진심을 다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여야 원내대표도 세월호특별법 처리에 진심을 다할 것을 약속하고 혹여 만족스럽지 않은 형태의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이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상황이 최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팽목항을 떠나지 않고 있는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정도를 제외하면 정치권의 그 누구도 그런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들이 결국은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교황의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늘 긴 시간 동안 일하고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무한경쟁에 응해야 하는 신세인 우리들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게 문제라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데 그런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이 대신 해준 것이다.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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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전제조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임동원.박지원 등 방북, '김정은' 명의 조화와 조전문 수령
개성=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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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7  22: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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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아 17일 추도 화환과 조전문을 보냈다. 김양건 북 아태위 위원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전문을 개성공단을 방문한 유족 대표 김홍업 전 의원과 임동원 전 장관, 박지원 의원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아가 통일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공적 잊지 않을 것이며 그가 남긴 업적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7일 김양건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을 통해 전달한 조전문(조의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유가족들에게 서거 5년을 즈음하여 이희호 여사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남측에 공식 조의문과 추도 화환을 보낸 것은 처음이다. 화환에는 왼편에 ‘고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며’, 오른편에 ‘김정은’이라고 쓴 붉은 리본을 달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전문과 추도 화환 전달은 이날 오후 5시경, 개성공단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을 방문한 유족 대표 차남 홍업 씨와 김대중평화센터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시 서울을 방문한 뒤 오랜 만에 만난 남북 인사들이 기자들에 둘러싸인 채 환담하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북측에서는 노동당 비서이자 통일전선부 부장인 김양건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 위원장과 통일전선부 부부장인 맹경일 아태 부위원장이 전달자로 나왔다.

박지원 의원은 “김양건 비서는 ‘김정은 원수’라는 표현을 쓰면서 화한을 정중하게 전달해 상당한 예우를 갖췄다”고 전했다.
 
<환담 머리부분>

- 김양건 : 추모행사 준비로 바쁜 시간에 나와줘서 감사하다. 
= 박지원 : 이희호 여사께서도 감사히 생각한다. 
= 임동원 : 오래간만이다. 잘 지내나?
= 박지원 : 김기남 비서 잘 계시나?
- 김양건 : 잘 있다.
= 박지원 : (김양건에게) 5년전이나 변함이 없이 똑같다.
- 김양건 : (환한 웃음) 역시 선생들도 같다.

 

 

   
▲ 환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북 관계자들. [사진 - 공동취재단]
박지원 의원은 북으로 출발하기 직전 도라산 출입경사무소에서 기자들에게 “김양건 비서가 나온다고 확정된 건 없지만 간접 조율할 때 김양건 비서가 나올테니 임동원 전 장관이랑 저랑 와달라는 메시지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5년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 김기남 비서와 함께 남측을 방문한 바 있는 이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기자들을 물리친 채 예정시간을 넘겨 한시간 가까이 환담을 나눴다.

박지원 의원은 도라산 출입사무소로 돌아와 브리핑을 갖고 비공개 환담 내용을 전했다.

임동원 전 장관은 “문제는 대화와 실천”이라며 “우리 박근혜 정부도 해나가려 하기 때문에 북도 이에 맞춰야한다. 남북고위회담 제의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거기에는 5.24 해제조치, 금강산 관광 등 그런 좋은 제안도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양건 비서는 “남측에서 많은 소리가 난다. 반가운 소리가 없다. 방송 언론도 자꾸 시비를 건다”며 “북한 주민도 이런 걸 허용하지 않고 격노한다”고 불쾌감을 토로했다. "제발 정세를 악화시키는 놀음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진심이 통하고 통일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고 호소했다는 것.

박지원 의원은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핵폐기 조건의 빗장을 풀지 않았느냐”며 “이런 호기(고위급접촉 제의)를 김 비서께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설명해서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고 대화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그리고 뭔가 하려고 하는데 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김 비서는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핵문제를 거론한 점과 한미군사연습을 하면서 2차 고위급접촉을 제안한 점을 꼬집은 뒤 “6.15 공동선언처럼 하나하나 해결해야 남북관계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김양건 비서는 당국이 긍정적 출발을 하도록 우리가 노력해 달라. 이명박 대통령 때 허물어진 남북관계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또한 김 비서의 발언들을 종합해 “결론적으로 보면 전제조건 없는, 저는 그것을 핵 폐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그 실천을 위해 지도자가 결단해야 한다”는데 방점을 찍었다고 밝혔다.

 

   
▲ '김정은' 명의의 추도 화환을 북측 관계자들이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 대형 트럭에 추도 화환이 실리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이 외에도 김 비서는 남북 국회회담과 이희호 여사 방북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 입장을 보였으며, 임 전 장관은 남측 통일준비위원회와 북측 전문가들의 토론회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남측이 제안한 고위급 접촉에 대해서는 “특별한 메시지는 없었지만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군사훈련 문제를 얘기했다”고 확인했다.

박 의원은 이번 방북과 관련 청와대 측과 의견조율을 거친 바 없다고 확인하고,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없었다고 밝혔다. 

김양건 위원장과 맹경일 부위원장은 남측 언론의 질문에 일체 답하지 않은 채 남측 방문단을 전송하고 돌아갔다.

한편, 북측은 '김정은' 명의의 조전문 외에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위) 및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이름으로 조전문을 전달했으며, 남측은 이희호 여사가 보내는 노벨평화상기념관 개관기념 장식용 접시를 답례품으로 전달했다.
 
박지원 의원 브리핑(전문)

<모두발언>

 

   
▲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김양건 아태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 공동취재단]

 

김양건 비서의 초청으로 김대중 대통령 5주기 맞아 김정은 위원장 조화를 개성 북측사무소에서 전달받아. 한 시간 오 분, 예정보다 더 길게 대화 나눴다. 먼저 김정은 위원장 조화를 가족대표인 김홍업 전 의원에게 전달하면서 아울러 김정은 명의의 조의문을 낭독했다. 그 내용은 “김대중 전 대통령 유가족들에게 서거 5년을 즈음하여 이희호 여사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의 화해와 단합 나아가 통일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공적 잊지 않을 것이며 그가 남긴 업적은 후세에 길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유가족들과 김대중 평화센터 관계자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의 뜻을 이어받아 통일사업 계속 앞장서 나가길 바랍니다. 김정은.” 이렇게 이름만 되어있고 ‘주체 114년 8월 18일’ 일자였다.
또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및 민족화해협의회 이러한 단체에서 김홍업 전 의원에게 거의 비슷한 조의문 전달했다. 특히 김양건 비서는 ‘김정은 원수’라는 표현을 쓰면서 화한을 정중하게 전달해 상당한 예우를 갖췄다. 그 후 저희는 준비해간 이희호 여사님의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건물 기념 접시를 전달했고 김양건 비서는 꼭 김정은 동지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다.

1시간 5분 중 15분 정도 그런 의례적인 이야기를 했고 나머지 50분은 김양건 비서 임동원 전 장관 저 박지원이 얘기했다.
김 비서는 이희호 여사님 활동 상황을 보도를 통해 잘 보고 있다. 건강이 어떠시냐고 물어. 그래서 ‘93세이신 여사님은 지금도 매월 최소 2박3일 내지 3박4일 지방여행 하시고 꼭 차로 하신다’고 했더니 굉장히 놀라며 노령인데 그러시냐며 ‘꼭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김 전 대통령의 유업을 이어받아 민족이 화해하고 번영하고 나아가는데 역할해주길 바란다’라는 말에 이어 615 공동선언은 북남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 민족 선언인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린 일관되게 하고 있다. 남북관계 온 민족이 화해 번영을 바라는 그런 세상이 와야 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가슴 아프다. 우린 민족 기쁨 위해 민족이 바라는 대로 사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선대가 바라는 내용이지 않나 이런 말했다.

임 전 장관이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고 과거 정부에선 그러지 않았지만 박 정부는 무언가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쉬운 거부터 해 나가자. 그러기 위해선 계속 대화해야하고 이번 김정은 위원장이 발표한 7월7일 성명에 대해서도 숙지를 한다. 문제는 대화 실천이다. 우리 박 정부도 해나가려 하기 때문에 북도 이에 맞춰야한다. 남북고위회담 제의는 시작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거기에는 5.24 해제조치, 금강산 관광 등 그런 좋은 제안도 포함돼 있다”라고 전문가답게 설명했다.

거기에 김 비서는 상호간 양측이 노력해야 되고 무슨 일이 계속 생긴다. 진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남측에서 많은 소리가 난다. 반가운 소리가 없다. 방송 언론도 자꾸 시비를 건다. 북한 주민도 이런 걸 허용하지 않고 격노한다.
이에 임 장관이 과거에도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우리 남측 사회는 복잡하지 않느냐. 북이 이해해야 한다”라고 한 것을 말해줬다. 
제가 박 정부에 대해 국내 정치 상황에 저는 새정치 소속 의원으로서 비교적 날센 비판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북문제에 대해서 박 정부의 정책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것에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은 선 핵포기 조건을 내세워서 그럴 경우 북 국민 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준다고 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박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핵폐기 조건의 빗장을 풀지 않았나. 그리고 고위급 회담만 하더라도 새정치민주연합과 저 박지원은 모든 언론에 나와서 이산가족 상봉, 5.24해제, 금강산 관광 재개를 강력 주장 요구했지만 아무런 여당 응답 없더니 이번 고위급 회담 제안하면서 이런 것도 검토할 수 있다라고 한 건 확실하게 박 정부가 이명박 정부와 다른 점이다. 이런 호기를 김 비서께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설명해서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고 대화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그리고 뭔가 하려고 하는데 이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이 기회를 북한에서 화요일부터 있는 을지훈련. 이거 군사훈련 아니냐라고 하는데 북도 군사훈련 하지 않느냐. 어떤 경우에도 이번 기회 포착해야 상호협력이다 라고 했다.

김 비서가 그런 접촉에 대해 당 중앙에 보고를 했다. 그렇지만 8.15 경축사에서도 핵을 버리라는. 이런 자꾸 핵문제 거론하면서 어떠한 것을 하자고 하는 건 그 내용이 실현되겠느냐. 그리고 하겠느냐란 의심을 한다. 군사훈련을 하고. 왜 하필이면 2차 접촉 제안하면서 하려고 하나. 미국과 한국만. 이런 것을 추진하면서 우리가 하는 실탄연습에 대해 언급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정세 악화시키면서 어떻게 풀자고 하느냐. 제발 정세를 악화시키는 놀음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진심이 통하고 통일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 문제는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다. 615 공동선언처럼 하나하나 해결해야 남북관계가 해결된다라고 김 비서가 말했다.

내가 이어 “박 대통령은 대중 대미 대일 외교에 대해서 미국과 중국에 대해서는 등거리 외교를 잘 하고 계시고 대일외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노선을 견지하는 상당히 나는 높이 평가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이나 외교는 나는 잘 한다고 방송에 나와서도 얘기를 한다. 미국이 MD(미사일방어)를 강하게 요구를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우리 한반도에 필요한가에 대해서 결정을 하지 않고 경제협력 PPT에 대해서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장한 대로 대한민국이 도랑에 든 소이기 때문에 미국 풀도 먹고 중국 풀도 먹어야 하는데 (지금) 얼마나 잘하고 있나. 이런 것을 북에서도 평가를 해야지 자꾸 그러한 모든 것을 비난하면 안 된다”라고 했지만, 그 면에서 웃더라. 그러면서 상당히 긍정적 평가를 하는 것으로 저는 느꼈다.

김양건 비서는 당국이 긍정적 출발을 하도록 우리가 노력해 달라. 이명박 대통령 때 허물어진 남북관계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런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임동원 전 장관이 우리 남측 통일준비위원회와 북한의 통일전문가들이 한번 모여서 세미나 등 그러한 토론을 한번 해보도록 제안을 했고 결론적으로 김양건 비서는 한미군사훈련에 대해서 민감한 생각을 가지지만 제 설명에 대해서도 수긍을 하고 결국 최종적인 얘기는 전제조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김양건 비서가 강조했다.

그리고 제가 정의화 국회의장이 저에게 말씀하신 노무현-김정일 위원장 간에 합의한 국회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협력을 부탁했더니 긍정적인 교류협력이 국회 간에도 있어야 한다. 제가 김정일 위원장이 이희호 여사님을 편하실 때 초청을 하셨는데, 그 노령에 북한 아이들을 위해 뜨게질 같은 걸 전부 준비하고 있으니깐, 지금 노령이시기 때문에 좋은 시기에 그 약속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얘기했고, 이때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통일운동을 함께한 권노갑, 김옥두 이런 분들도 좀 초청해 줬으면 감사하겠다고 했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초청한 이희호 여사의 초청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좋은 때 다녀가실 수 있도록 말씀드리겠다고 얘기를 했다.

이상이 1시간 5분 동안 주고받은 대화내용, 다 얘기했다

<질문 답변>

- 김양건 비서가 우리 정부에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 가장 하고자 한 메시지는 전제조건 없는 실천을 결단해 줘라. 하면서 ‘핵을 머리에 두고’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8.15 경축사 등에 핵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 전제조건 없는 실천은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인가?
= 김 비서는 5.24나 금강산 등 구체적 얘기는 하지 않았다.

- 가기 전, 청와대 측과 의견조율은?
= 전혀 없었고 일정에 대한 조율만 제가 통일부 장관과 직접 했다.
제가 그 말도 했다. 과거에 김정일 위원장 조문 때 이명박 정부에서는 제가 조율했는데 절대 정치인이니 갈 수 없다고 허락하지 않아서 이희호 여사님과 김홍업, 가족, 그리고 실무자들만 갔는데 이번에는 간접적인 연락을 받고 통일부 장관에게 연락했더니 적극적인 협력하는 모습만 봐도 이명박 정부와 달라졌지 않느냐 했다. 일정 외에 청와대나 통일부로부터도 어떠한 메시지나 협의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제가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대북정책에 대해 강하게, 저답게 설명했습니다, 반응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보면 전제조건 없는, 저는 그것을 핵 폐기 요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 그 실천을 위해서 지도자가 결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고위급 접촉 다른 메시지는 없었나?
= 특별한 메시지는 없었지만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군사훈련 문제를 얘기했다.

- 고위급 접촉 우리측 제의에 대해 김양건 비서가 말했나?
= 중앙에 보고를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긍정적인 내용이 있었지만 전제조건에 대해 강하게 군사훈련 하면서 왜 제안했냐, 지금까지 국내 언론에 보도된 대로 핵문제와 한미 군사훈련 문제에 대해 아직도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었다.

- 인천아시안게임 응원단은?
= 전혀 이야기 없었다

- 김정은 명의 화환 처음 받았는데 ‘김정은’ 명의로?
= 김.정.은. 개인으로.. (딱딱 끊어서)

- 김정은 위원장 아니라 ‘김정은’인 의미는?
= 어떻게 됐든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자이고 실체이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해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조화를 보내왔기 때문에 이희호 여사님이 말씀 하신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 신호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도 제가 전달했다.

- 개성공단 관련해서 얘기 있었나?
= 개성공단 관련 얘기 전혀 없었다.

- 김양건 비서가 의원님을 오라고 한 이유는?
= 이전에도 접촉 했으니까 오라고 한 거 아닐까. 
오늘 제가 말씀 드린 게 오히려 내가 한국에서 매주 서너 차례 언론에 얘기하면서 대북정책에 대해서 박근혜 정부가 상당히 평가할만 하다, 오히려 제가, 우리 정부에서 가는 사람보다도 신랄한 정치적 비판을 하는 야당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이번 고위급 회담 제의, 8.15 경축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설명하니까 좀 의아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성 있는 것이 전달됐다. 그런 의미에서 김양건 비서도 굉장히 경청하면서 좋은 표정으로 부분적으로 얘기를 했는데 아마 그 메시지라고 하는 것은 전제조건 없는 실천 가능한 것을 좀 지도자가 결단해 달라는 거 아닐까 싶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없었나?
= 저도 안 가지고 갔는데 있을 수가 없죠.

- 또 만나자는 계획이나 약속은?
= 없다.

(정리 - 공동취재단,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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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자주통일대회, ‘365일 통일대장정’ 결의

2014자주통일대회, ‘365일 통일대장정’ 결의
 
<분석과전망>광복70주년을 ‘새로운 평화체제 실현의 해’로 만들기 위한 방도로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4/08/17 [19:15]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사진 통일뉴스 펌    © 한성 자유기고가

 

▲ 815자주통일대회 통일선봉대 활동 사진 페북에서 펌    © 한성 자유기고가

 

 

올해의 통일행사는 내년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조국통일운동을 전진시켜나가기 위한 당면과제를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이른바 현 시기 통일운동의 구체적인 투쟁과제를 제시한 셈이다.

아울러 이 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투쟁의 성과들에 기초하여 내년 광복 70주년에는 새로운 남북협력의 시대를 열어내기 위해 온 민족이 총 매진해야 된다는 것을 결의했다는 점이다그 어느 때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다.

 

주요행사는 '광복 69주년 8.15자주통일대회 추진위원회'가 14일 자정 여의도에서 진행한 ‘2014 8.15 자주통일대회’ 그리고 15일 서울역에서 ‘8.15추진위원회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가 공동으로 진행한 '일본 집단적 자위권 반대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범국민대회'였다.

 

‘8.15추진위원회가 자주통일대회’ 결의문 형식으로 채택하여 제시한 당면 과제는 아래와 같이 총 10가지였다.

1. 한반도 평화와 주권을 위협하는 일본 집단 자위권 행사재무장을 저지하자!

1. 일본 재무장에 날개다는 한일 군사협력, MD 참여 반대한다!

1.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전쟁연습 막아내자!

1. 한반도 평화협정 즉각 체결하라!

1. 남과 북 가로막는 5.24조치 해제하라!

1. 아시안게임 남북공동응원과 남북교류 보장하라!

1. 통일의 이정표 6.15선언과 10.4선언 관철하자!

1. 반민주 반통일악법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양심수를 석방하라!

1. 내란음모 조작이다구속자를 석방하라!

1. 분단 70자주민주통일의 문을 힘차게 열어내자!

 

 

▲ 9월 19일 열리는 인천아사안 게임에 출전하는 북한 선수들을 형상화한 시민들의 퍼포먼스 /사진 페북에서 펌    © 한성 자유기고가


 

자주통일대회는 특히 남과 북의 화해와 단합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최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용인과 을지프리덤가디언(UFG) .미 연합군사연습 등을 겨냥, "남과 북은 모든 전쟁연습을 중단하고 평화를 위한 대화화해와 협력을 위한 만남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동치는 동북아강대국들의 각축 속에서 겨레의 권리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남과 북의 협력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였다.

 

15일에 있었던 범국민대회에서 이창복 '6.15 남측위원회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통해 남과 북이 분단극복을 위해 뜻을 모은 소중한 합의들남북공동선언들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이창복 상임대표는 "오랜만에 이 땅을 찾으려는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동포들을 향해 뜨겁게 가슴을 내밀고 과감히 얼싸안아야 한다"며 "상대방을 격멸하겠다는 식의 군사행동을 중단하고협력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들은 현 시기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제 2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제안한 것과 결부되는 만큼 매우 현실성을 띠는 주장으로 된다.

 

우리 모두 광복 70분단 70년을 새로운 평화체제 실현의 해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가 '8.15자주통일대회의 대회사를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특히 이와 관련분단 70년 8.15 국제평화대회를 8천만 동포의 힘으로 성사시켜 낼 것을 천명한 것은 구체적으로 주목되는 내용이다.

이창복 대표에게서도 같은 기조의 발언이 확인되었다. "분단 70년의 해를 시민들의 대대적 진출로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해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것들이 주목되는 것은 14일 15일 양 행사가 공히 남북 공동행사로 열리지 못한 조건에서 내년 통일행사의 상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것이어서이다즉 남북해외 통일운동의 3자연대 사업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사업으로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통일운동단체 일각에서 제기되었던 내년 거족적인 통일행사 대신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그랬다.

 

한 대표가 대회사에서 현 시기 통일운동의 과제를 실현해가는 데 있어서 ‘365일 통일대장정이 유독 돋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현 시기 통일운동의 과제들을 ‘365일 통일대장정을 통해 내년 광복 70주년까지 힘 있게 실천해나가고 그에 기초해서 내년 광복70주년을 새로운 평화체제 실현의 해로 맞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통일운동단체들은 이후 8.15행사들에 대한 전반 평가를 진행하고 그에 기초하여 내년을 향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자료 통일뉴스에 펌     © 한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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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서재에서 아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등록 : 2014.08.17 10:38수정 : 2014.08.1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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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17일 아침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이호진씨 제공

[한겨레21]두 아버지가 파파에게
“교황의 서재에서 아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38일간 800km 길을 걸어 메고온 세월호 십자가 교황에게 전달
이호진씨 “교리 배우지않았지만…”, 교황 “세례받을 자격 충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반짝였다. 세월호 참사로 막내아들을 잃고 38일간 십자가를 메고 800km(2천 리)를 걸었던 두 아버지가 소망을 이뤘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와 2학년4반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52)씨는 지난 8월15일 오전 10시15분께 성모승천대축일 미사가 열린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교황을 만났다. 웅기군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은 304명의 영혼과 고통이 십자가와 함께 있다. 그들과 같이 미사를 집전해달라”며 교황에게 십자가를 선물했다. 길이 130cm, 무게 6kg의 나무 십자가는 앞서 천주교 대전교주장 유흥식 주교에게 전달돼 교황 제의실에 갖다놓은 상태였다. 교황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천주교 교황방한위원회는 십자가를 바티칸으로 가져갈 절차를 밟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웅기군 아버지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교황의 서재에 십자가를 두어 아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17일 아침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이호진씨 제공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 받은 1호 한국인

 

승현군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를 받는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그는 교황을 만났을 때 “2천 리 180만 보를 한발 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디뎠다. 교리를 배우지 않았지만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라고 질의했다. 교황이 다른 사제들과 잠시 논의하더니 “자격이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는 교황에게 직접 세례를 받고 싶다고 청했고 교황은 흔쾌히 응했다. 세례식은 8월17일 아침 7시께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열렸다. <한겨레21>은 두 아버지가 800km를 완주하고 교황을 만나기까지 39일간 동행했다.

 

8월14일 오전 9시 두 아버지가 최종 목적지인 대전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 지난 7월8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를 출발한 이들은 충남과 전북, 전남을 거쳐 21일 만인 7월28일 진도 팽목항에 다다랐다. 다음날인 29일 팽목항에 머물며 사고 현장을 찾아가 바닷물을 플라스틱병에 담았다. 그리고 30일부터 다시 하루 20~30km씩 걸어 16일 만에 대전월드컵경기장을 밟았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가 17일 아침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이호진씨 제공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를.’ 이 말은 (세월호 사고일인) 4월16일 9시28분 웅기가 휴대전화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예수가 십자기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졌다. 길을 함께 걸어준 동행자가 바로 그 시몬이다. 웅기, 승현이,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나눠줬다고 생각한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를.’”(웅기군 아버지)

 

“졸지에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 때문에 한을 품고 걸었다. 이제 겨우 800km 내려놓았다. 더 걷고 싶은데 이제는 몸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아무도 지지 않는 십자가를 대신 지고 걸을 때 돌아서지 않는 세상이 너무도 야속했다.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진실 규명과 특별법 제정에 대한 집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 것이다.”(승현군 아버지)

 

두 아버지가 단원고를 떠날 때만 해도 교황과의 만남은 물론 대전 미사 참석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이 도보 순례를 떠났다는 소식이 <한겨레21> 페이스북(www.facebook.com/hankyoreh21)을 통해 알려지자 자발적 동행자가 급증했다. 광주를 지날 때는 500명이 훌쩍 넘었고, 대전 진잠다목적체육관에서 월드컵경기장까지 마지막 순례길(9km)에는 300여 명이 동행했다. 천주교 대전교구·전주교구·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도 유가족 순례단을 적극 후원하면서 두 아버지의 8월15일 대전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참석이 확정됐다. 또 교황은 미사가 시작하기 전 제의실에서 두 아버지를 포함해 세월호 유가족 8명과 단원고 생존 학생 2명을 따로 만나기로 결정했다.

 

이호진씨가 받은 세례증서와 메달. 이호진씨 제공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이 모여

 

오전 11시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연주하는 오카리나 소리가 청아하게 성당을 채웠다. “그대 보내고 멀리, 그 아픈 사랑을 지울 수 있을까.” 웅기군 아버지가 순례길에 나서기 전에 안산 세월호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반복해 들었던 곡이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오카리나 연주자 정미영씨는 결국 공연을 하다 눈물을 흘렸다. “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일 수밖에” 없음에 공감하는 관객도 숨죽여 흐느꼈다.

 

두 아버지의 2천 리 완주를 기념하는 세월호 작은 음악회 ‘길 위에서’가 대전 유성성당에서 열렸다. ‘세월호 게릴라 음악인’이 주관하고 <한겨레21>이 후원한 음악회에 300명이 참석했다. 순례길에서 만난 이들은 2시간 동안 울고 웃으며 어우러졌다. 이날 음악회는 <하니TV>로 생방송됐다. 승현군 아버지가 사회자로 나섰다. 그는 교황을 만나 “세례를 부탁할 것”이라며 “그러면 주교급 신자가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 길 위에서의 경험을 기록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포부도 밝혔다. 두 아버지가 묻고 답하는 ‘유족이 유족을 인터뷰하다’ 코너에선 웅기군 아버지가 “지금까지 가슴이 아파 아들의 이름을 두 번 이상 불러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내일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가 끝나면 ‘웅기야, 웅기야’ 이렇게 수백 번 불러보려고 한다.”

 

마지막 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두 아버지와 공연자, 관객이 합창했다. ‘산 자여 따르라’는 노랫말이 메아리치자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 되돌아왔다. 두 아버지는 함께 길을 걸어준 관객을 바라보며 큰절을 올렸다.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겠다.” 관객도 맞절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성당 앞마당에서는 <한겨레21>이 주관하는 야외 사진전 ‘길 위에서’가 열렸다. 박승화·김명진 사진기자가 두 아버지와 동행하며 찍은 20점이 잔디 위에 전시됐다. 제자 7명과 전시회를 찾은 고3 담임 선생님은 두 아버지가 지난 7월28일 진도 팽목항에 도착해 짊어지고 걸었던 십자가와 아이들 초상화를 나란히 놓고 미사를 드리는 사진을 구입했다. “학교에 걸어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많이 울던 아이들과 함께 보며 마음의 키를 한 뼘 더 키우고 싶다.”

 

이호진씨가 받은 세례증서. 이호진씨 제공

 

8월15일 새벽 5시 교황을 만나는 날, 두 아버지는 설렘으로 잠을 설쳤다. 안산 분향소에서 출발한 다른 세월호 희생자 가족, 생존 학생 34명과 대전월드컵경기장 부근에서 만났다. 안산 유가족은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두 아버지는 순례길을 걸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두 아버지가 38일간 짊어졌던 십자가는 천주교 대전교구 박상병 신부가 유흥식 주교의 허락을 받아 월드컵경기장으로 들여왔다. 하지만 7월29일 ‘아이들의 눈물’이라 생각하며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담아온 바닷물은 반입이 금지됐다.

 

“I love you” “I love you”

 

오전 10시 5만 명이 운집한 대전월드컵경기장에 교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앞서 교황은 오픈카를 타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신자들과 인사했다. 카퍼레이드가 제단 왼쪽 끝 앞줄에 앉아 있는 세월호 유가족을 지날 때 교황은 차에서 내렸다. 유가족들과 손을 맞잡기 위해서였다. 특히 두 아버지와 함께 순례길에 나섰단 승현군 누나 이아름씨는 교황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The truth of the ferry Sewol disaster should be come out entirely.”(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낱낱이 밝혀져야 합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교황은 유가족들과 한참 그곳에 머물렀지만 생방송 화면에는 그 모습이 전혀 비춰지지 않았다. 3시간30분 동안 행사가 진행될 때도 유가족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오전 10시15분 미사를 봉헌하기 직전 교황은 경기장 중앙제단 뒤에 있던 제의실 앞에서 유가족 8명과 단원고 생존 학생 2명을 만났다. 애초 사무실에서 따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교황이 KTX를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만남의 시간이 짧아졌다. 결국 제의실 앞에서 모두 선 채로 마주했다. 웅기군 아버지가 무릎을 꿇어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며 첫 번째로 인사했다. 그가 십자가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하자 교황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승현군 아버지는 “I love you”(사랑합니다)라고 두 차례 말하며 교황의 손에 입 맞췄다. 교황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김형기 수석 부위원장이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우리 곁에 계신 한국 천주교를 밀어달라. 가족에게 어떤 고난과 고초가 닥칠지 모른다. 두렵다. 그때 교황님이 우리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다른 유가족이 “광화문에서 단식 중인 유민이 아빠를 안아달라”고 말하자,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8월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에는 유가족 600여 명이 참석한다. 김병권 가족대책위 위원장은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 죽은 아이들을 살릴 수는 없지만 우리 아이들이 왜 죽어갔는지 이유는 알고 싶다. 진상 규명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래야 죽어서도 아이들을 떳떳하게 볼 수 있다”며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10명을 위해서도 기도해달라”고 청했다.

 

15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교황은 유가족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며 때론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시했다. 또 손을 잡거나 안아주며 위로했다. 두 아버지의 십자가 이외에도 유가족들은 영어와 스페인어, 한글로 쓴 편지와 세월호 참사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팔찌, 세월호 희생자들의 사진이 담긴 손바닥 크기의 앨범을 선물했다. 희생된 이들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였다. 특히 가족대책위에서 만든 14쪽 분량의 앨범은 1반부터 10반까지 희생된 학생과 단원고 교사, 일반인 희생자의 사진이 실려 있다. 교황은 유가족들에게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져온 묵주를 선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이호진씨. 이호진씨 제공

 

‘우리랑 한 가족이구나’ 싶었다

 

오전 10시30분 미사를 집전하려고 등장한 교황은 유가족이 선물한 노란 리본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배지의 의미를 유가족에게 전해들은 교황이 유흥식 주교에게 청해 가슴에 달았다. 이 모습에 유가족은 감동했다. “만나뵈었을 때는 너무 떨려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노란 리본을 달고 나오신 것을 보니 ‘우리랑 한 가족이구나’ 싶었다.”(김병권 위원장)

 

이날 교황은 미사 삼종기도에서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 대재난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한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당신의 평화 안에 맞아주시고, 울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주시며, 형제자매들을 도우려고 기꺼이 나선 이들을 계속 격려해주시길 기도한다.”

 

대전=정은주 <한겨레21>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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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독일어판 낸 이영빈 목사 부부

“우리 그런 사람들에게 화내지 않아”『경계선』독일어판 낸 이영빈 목사 부부
독일=이은희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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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7  10: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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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경계선』 독일어판을 출간한 이영빈 목사. 서재에는 이응로 화백의 작품이 걸려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은희 통신원]
지난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이영빈 목사와(88)와 김순환 선생(86) 부부가 함께 낸 독일어판 『경계선』(Grenzgaenger, 2013)과 김순환 선생의 자료집 『거센 바람을 거슬려가며』(2010) 출판을 함께 기념하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경계선』은 1996년 한국 내 ‘도서출판 고난함께’에서 출판된 책으로 2005년 증보판이 발행된 바 있다. 이 책은 이영빈 목사가 1955년 독일로 유학한 이래 동포사회사역자로서, 독일교회 목사로서, 통일운동가로서 살아온 노부부의 활동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활동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사건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듬뿍 담겨있는 책이다. 이에 앞서 1994년에는 『통일과 기독교』가 ‘신앙과 지성사’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을 접하면서 두 분을 찾아뵈었다. 이영빈 목사의 서재에는 이응로 화백의 작품(사진)이 둘 걸려 있었다. 오른쪽 작품은 이 화백이 본에서 이영빈 목사와 교류하던 시기의 작품 <이집트로 피신하는 예수>이며 독일어판 『경계선』의 표지화로 쓰인 그림이다. 왼쪽 그림은 이 화백이 파리로 간 후 서양의 전격적인 추상화에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으로 이응로 화백과 이영빈 목사 사이의 우의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노부부의 식탁 뒤로는 흑백사진의 추억들과 고향산천 풍경화가 걸려 있다.

이영빈 목사 부부는 동포사회 초기에 간호사 광부들이 노동환경과 체류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적극 봉사하며 활동하였지만, 동포사회 속에 조작된 이데올로기와 철조망으로 인해 ‘한인회’ 중심의 동포사회에서는 유리되어 있다. 책 출간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찾아뵙고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동지와 같은 부부

□ 풍경 :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 이영빈 : 목사로서 공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혼자만의 삶이 아닌지라 기록을 해 둘 필요를 느꼈습니다. 일부내용은 주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자료로서 남겨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낸 독일어판 『그렌츠겡어』(Grenzgaenger)는 독일교회 측에서 자료를 남기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 햄스터 기질을 발휘해 3년에 걸쳐 탈고한 자료집 『거센 바람을 거슬려가며』의 독일어판을 최근 발간한 김순환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이은희 통신원]
■ 김순환 : 난 햄스터 같은 기질이 있어요. 뭘 물어다 놓고 절대 버리지 못하는 속성이지요. 이사를 다니면서도 별의별 자료를 다 들고 다녔어요. 이 자료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정리하였습니다. 거의 3년 걸렸습니다.

 

잊혀진 사람

□ 풍경 : 한인사회 원로이신데 ‘한인회’ 모임에선 잊혀진 분 같으십니다.

■ 이영빈 목사 : 이미 옛날에 느낀 일입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4년 동안 4천 명 간호사와 3천 명 광부들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호사와 광원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하며 매일 백 킬로미터에서 천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겔젠키르헨에서 20명 노동자들이 병가를 자주 낸다는 이유로 예고도 없이 해고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노동법에 따르면 병가 때문에 해고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계약(Rotationsvertrag)에 따르면 3년마다 신선한 노동력을 한국에서 공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력 수출을 한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 개인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에,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문제가 있을 때 공관에서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노동력 수출정책에 따라 독일 맘에 들고 안 들고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말이 광부이지 대부분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노동을 해 본 이들이 거의 없어 쉽게 상처를 입거나 아파 드러눕기 일쑤였습니다.

마침 내게 구스타브 하이네만 변호사 사무실 같은 위력 있는 조커가 있었지요. 하이네만의 변호사 사무실은 당시 상당히 유명하였는데 노동자 문제를 전문적으로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한 번도 고용주를 위해 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하이네만 변호사 사무실에 한국노동자 무더기 해고 건을 넘기게 되니 광산기업에서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하이네만 사무실이 우리들의 위탁을 받아서 고용기업에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라서 내게 전화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동자들과 변호사 사무실 사이를 중재한 것이냐 하면서 사정을 하소연했습니다. 원자력으로 바꾸려고 준비하는 중이라고 하며 한국에서 한 달 생활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내게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변호사와 이야기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해고처리가 바로 취소되었습니다. 쾌거였지만 이 일로 대사관측에서는 이영빈 목사가 좌파 목사라고 소문을 퍼뜨렸지요.

3년 후에는 귀국하여야 한다는 3년 로테이션 계약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계약은 바꿀 수 없었지만 광부들이 3년 노동계약을 마치고 귀국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 년 반 동안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노동국장과 협상한 결과 3년 계약은 변경할 수 없더라도 1년 반에서 2년 정도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해당된 사람들은 내가 도움을 준 것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대부분 캐나다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

동포사회 속의 철조망

□ 풍경: 12년 전 뒤셀도르프에서 어떤 분이 목사님이 편지를 당국에 써 주시며 도와주셔서 체류문제가 해결된 이야기를 하면서 이영빈 목사가 독일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 이영빈 : 아,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간호사와 광원노동자가 결혼한 경우 간호사는 독일병원에서 붙들고 싶어해서 꼭 계속 일하게 하고 싶어해서 비교적 체류 문제가 잘 해결되었지만 남편이 광부인 경우 생이별 압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 풍경 : 한인사회 초기에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한인사회에서 따돌림받는다는 느낌이라든가 그런 소외로 인한 외로움은 없으신지요?

■ 김순환 : 처음에는 좀 안타까운 느낌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의로움을 위해 행동하였습니다.

■ 이영빈 : 동포 개인의 문제를 위해 일하는 시기는 60년대 말에 마무리되었습니다.

□ 풍경 : 오늘날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통일운동가로만 알고 있지만 한인사회 초기에는 노동문제 이주문제에 많이 관련하셨군요.

■ 이영빈 : 많은 동포분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했고 서로 인사를 잘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70년대 말부터 북의 교회와 대화를 시작하자 우리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공관에서 심어놓은 철조망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사람들이 우리와 잘 지내면서도 공공연하게는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고 우리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려 들지 않곤 합니다. 우리에 대해 좋게 말했다간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순환 :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해서 그런 것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쓸 것입니다"

 

   
▲ 동지이자 부부인 이영빈 목사와 김순환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이은희 통신원]
□ 풍경 : 분단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 모든 문제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앞으로의 남북의 문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김순환 :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북에 대해 나쁜 말만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며칠 잠시 다녀와서 그 사회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격려하며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 풍경 : 다음 책을 계획하십니까?

■ 김순환 : 또 쓸 것입니다. 어떤 책을 쓸까요? 다음에는 좀 재미있는 동화나 소설 같은 것으로 쓸까요?

* 이 인터뷰 기사는 독일 이은희 통신원이 독일 동포신문 <풍경>에 게재했던 것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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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노예’가 된 박근혜 풍자 광주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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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7 11:16
  • 수정일
    2014/08/17 11:1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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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의 문화비빔밥]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광주정신, 국가 국비에 종속되다
 
입력 : 2014-08-17  09:36:04   노출 : 2014.08.17  09:36:04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 media@mediatoday.co.kr    
 
지난 8일 개막한 2014광주비엔날레의 <세월오월> 전시 유보 논란은 애초에 예술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치적 문제인 것으로 보였다. 작품내용 가운데 군복을 입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처럼 조종하고 있는 모습이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그림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이었으니 정치적 쟁점화로 보였다. 광주의 주먹밥 아주머니와 시민군이 세월호를 들어 올려 구조하는 전체적인 모습은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의 전시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들은 다름이 아니라 광주시와 광주 비엔날레 재단 측이기 때문이다. 돈-국비에 스스로 종속된 자화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광주는 민주와 인권의 도시이며, 또한 국가적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런 맥락에서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달콤한 이슬–1980 그 후>가 기획되었다. 하지만 광주시와 광주 비엔날레는 너무 직설적인 표현을 하고 있으며, 애초의 기획의도와 다르기 때문에 전시를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수시로 수정지시가 내려졌다.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라 함을 의식한 듯, 작가는 이를 고통 받는 닭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결국 전시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1980년 이후 달라진 것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퇴행했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조차 그림에 넣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유의 도시, 꿈꾸는 도시 광주에서 광주의 정신을 정면으로 배반할 수 있는 만행적인 행위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든든한 지기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시와 광주비엔날레가 이러한 예술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모를 리가 없다. 알고도 남는다. 아는데 왜 그럴까. 청와대나 새누리당에서 먼저 문제제기 하기도 전에 작품의 전시를 알아서 유보한 것은 스스로 공포감에 휩싸였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광주시와 광주비엔날레가 무서워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도, 김기춘 비서실장도 아니다. 더구나 보수 세력의 고발도 아니었다. 정말 무서워 한 것은 돈줄이었다.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정부 예산이 끊길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지난 2012광주비엔날레의 총 예산 가운데 국비 지원은 30억 원에 이르렀다. 광주에서 지원한 시비도 15억 원이었다. 광주시는 올해에도 광주비엔날레 개최 25억 원을 편성했고, 특별전에 12억 3000만원을 지원했다. 국비도 지난번 대회에 버금간다.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출품작인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 비엔날레 재단 측은 홍 화백의 작품에 대해 최종 전시 유보 결정을 내렸다. ⓒ노컷뉴스
 
중요한 것은 광주비엔날레 예산이 아니었다. 광주시가 정부에 신청한 일반 예산에 그림 ‘세월오월’이 영향을 미칠까봐 그림 전시를 불허했다. 실제로 광주시는 ‘4조 원의 국비를 신청했는데 만약 10%만 깎여도 4000억 원이며, 기초생활수급자 천명에 지급될 돈과 같다’고 했다. ‘그림 한 장 때문에 예산이 깎이면 못사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맥락은 광주시가 “시의 예산지원으로 개최되는 비엔날레에서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광주시에서 지원을 했으니, 중앙정부에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국비지원을 삭감할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스스로 허수아비 괴물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로써 좌충우돌 자중지란이 일어났으며 해결이 되어도 만신창이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요컨대, 중앙정부에서 국비를 삭감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림은 광주비엔날레에 전시 될 수 없다. 이는 민주와 인권, 불의에 대한 항거라는 광주정신을 그대로 소각 해버린 것과 같다. 광주비엔날레는 국비를 타기 위한 매개물이 되어 버렸다. <세월 오월>을 전시하지 않아 애초의 국비를 다 받아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로써 피로 쓴 광주정신이 국비라는 돈줄의 파란 빛으로 점철되었다. 이로써 광주비엔날레가 무엇을 위해 그간 달려왔는지 되짚어야 한다.

지난 5월, 광주비엔날레는 미술 인터넷 매체인 아트네트(artnet)가 선정한 세계 5대 비엔날레에 꼽혔다. 전 세계에는 약 200여 개의 비엔날레가 있는데 이중에 다섯 안에 들어간 것이다. 평가기준은 관객의 수, 예산, 국제 사회의 영향력, 큐레이터 등이었다. 예산은 많은 부분 자립적으로 구성하지 못하고 있음은 앞에서 충분히 보았다. 또한 관객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뢰할 수가 없었다. 2013년 10월 광주시의회 자료에 따르면, 광주비엔날레의 관객은 늘어났지만, 5년 전보다 유료관객은 10만 명이 줄고, 무료관람객은 39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간 규모만 키운 것이다. 내실은 없었고, 경제적로 비주체적이었으며 이는 그대로 작품 기획과 전시의 제한으로 나타났다. 

비엔날레가 그럴듯한 국제대회를 표방하지만, 1980년대 대학가의 거리만도 못해졌다. 대통령을 비판한 걸개그림조차 창작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본질을 볼 때 광주비엔날레가 세계 5대 비엔날레가 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광주정신의 외형을 둘러싸고 허명을 쫓는 사이, 예술정신은 물론 광주정신도 국비의 노예가 되었다.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광주정신이 국가 국비에 종속된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자체가 예술적 가치와 지향점을 잃고 말았다.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삭감할까봐 알아서 작품을 자체 폐기하는 예술행정풍토라면 그 비엔날레의 규모와 위상이 어떤 한들 이미 존립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대내외에 자랑하기 위한 허영의 대회가 아니라 작더라도 그 야초의 정신과 가치를 올바르게 실현해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무엇보다 1980년 이후 변한 것은 국가 권력의 탄압 이전에 스스로 돈에 얽어매는 행태의 무감각한 용인이다. 그 사이에 국비를 타기 위해 예술을 도구화 하거나 배제하고 있었음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보았다. 예술예산과 관련 없는 전체 국비를 더 타기 위해서 시민과 작가 수 십 명이 같이 작업한 작품을 떼어 냈으니 말이다. 알 수 없는 공포감을 스스로 가지니 자발적인 노예화와 자중지란을 낳게 하며 서로를 스스로 무너지게 하니 참 편리한 노릇이다. 이제 국가 폭력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국가 예산이 무서운 시대다. 그러니 군홧발과 곤봉이 아니라 예산권만 휘두르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신화는 스스로 만든 것인가, 타자들이 만든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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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성당 신도들이 함께 만든 동영상, 교황님께 보여드렸어요

'교황 사칭' 동영상, 교황이 보시고는...

시골 성당 신도들이 함께 만든 동영상, 교황님께 보여드렸어요

14.08.16 20:43l최종 업데이트 14.08.17 10:28l

 

 



"교황님 사칭죄, 큽니다. 근데 보기 좋습니다. 공범 할래요."(아르헨티나 교포의 동영상 시청소감) 

예수님이 한국에 오신다면 어디를 먼저 가실까. 청와대일까 명동성당일까.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일까 시골 공소일까. 우리 시대에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누구일까.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노약자들은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농민은 최저임금 수준 아래의 인건비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농민이 이렇게 사회적 약자인데도 오히려 정부로부터 더 많은 홀대를 받고 있다. 아니 한중 FTA, 쌀 전면개방 등의 신자유주의의 정책을 통해 정부는 농민을 말살하려 하고 있다.

교황님이 한국에 오셨다. 그동안 교황님의 행보로 보아 어디를 먼저 가실까. 내가 일하는 전주교구 진안성당 부귀공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교황님이 우리 공소를 방문하시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박수치고 춤추며 노래하는 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노랫말을 짓고 인디언 수니님께 작곡을 맡겼다.

<프란치스코 빠빠, 우리 사랑>

우주의 춤으로 시작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랑/ 하늘이 열리고 쏟아진 평화/ 영원한 사랑 영원한 행복

구유에서 피어난 이 천년 전 그 사랑/ 새들과 꽃들에게 희망을/ 가난한 영혼으로 살다간 성 프란치스코/ 지금 여기에서 타오르는 평화/ 오- 아름다운 사랑

사랑은 주는 것 평화는 사는 것/ 당신은 사랑 당신은 평화/ 사랑은 주는 것 평화는 사는 것/ 당신은 사랑 당신은 평화

우리 희망 빠빠 우리 평화 빠빠/ 우리 사랑 빠빠 빠빠 빠빠/ 당신과 손잡고 천국으로 향하리/ 빠빠 우리 평화 빠빠 우리 사랑

교황님이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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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성당을 찾아오신 농부 교황(?) (동영상 갈무리)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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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고추를 따는 바쁜 시기다. 저녁 8시에 모여 노래를 연습했다. 의자를 두드리며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이며 함께 노래했다.

"피로가 한 방에 날아가네요."
"천국이 따로 있나요. 지금 이 행복이 천국의 기쁨이죠." 

주일 미사를 마치고 동영상을 찍었다. 나는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을 좋아하시는 교황님 역을 맡았다. 흰 여름 수단을 입고 집에서 만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면을 썼다. 전용차는 내 자가용인 6인승 트럭이다. 반장화를 신고 밀짚모자를 쓰고 트럭에서 내렸다. 

교황님의 공소 방문을 축하하는 노래가 시골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고 발이 리듬을 따라 흥겹게 움직였다. 큰 냄비뚜껑을 양손에 들고 꿍짝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는 천국열차를 타고 행복의 나라로 가는 듯한 감동이다. 해바라기꽃처럼 활짝 핀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들, 행복의 나라 노래에 취한 어린이들처럼 신명이 났다. 이렇게 행복한 모습을 언제 보았던가. 코끝이 찡해 온다.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교황님이 시골 공소에 오셨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교황님이 공소를 방문하신 것만으로 행복한데 함께 손잡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있으니, 그 행복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희망을 준다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그만큼 희망이 넘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 한 사람을 넘어 전 인류에게 희망을 주시는 교황님, 그 교황님 역을 맡았으니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행복할 때 불행한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누가 말했던가. 내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지 않도록 명심하라는 말일 것이다. 특히 양심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와 가난한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고위 지도자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복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꽃다운 아이들을 세월호에 수장시키며 배우고 있다.

부정부패를 뿌리 채 뽑으려는 교황님과는 정반대로 부정부패를 은폐하려는, 한 지도자가 수천만 국민에게 절망을 주고 있다. 이처럼 추한 일이 교황님 방문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지 않고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밥그릇, 소수의 가진 자들만을 위한 탐욕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 천주교회를 넘어 모든 종교 지도자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을 주시는 교황님의 삶과 정신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거듭나길 간절히 두 손 모은다.

동영상 본 교황님의 한마디 "Muy simpat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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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성당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춤추는 교황님(?) (동영상 갈무리)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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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 것일까. 예수회 한국지부장 정제천 신부는 교황님 방한 4박 5일 동안 통역을 맡았다. 오랜 인연이 있는 분이다. 나는 용기를 냈다. 카톡으로 편지를 썼다. 

나의 사제서품 모토는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4,18)는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 가난한 사람들인 농민과 자연을 선택하기 위해 진안 부귀공소에서 신자들과 농사를 배운지 6년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밀농사 짓는 농부가 없으면 성체를 축성할 수 없습니다. 포도농사 짓는 농부가 없으면 성혈도 축성할 수 없습니다.

공소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밤 8시 공소에 모여 '프란치스코 빠빠, 우리 사랑'을 연습했습니다. 맨 처음 트럭을 타고 저희공소를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교황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자급자족 만나생태마을에서 유기농으로 농사짓고 공동체를 이루며 생태적으로 사는 삶이 너무 힘듭니다. 도망가고픈 유혹이 매일 찾아옵니다. 그 유혹을 이기게 해주는 분들이 공소신자들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교황님 생각만 해도 힘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무엇보다도 농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가에 이슬이 고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눈물이 예수님의 연민의 정,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대의 눈물이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이신 교황님, 그래서 교황님 방한 축하노래를 소박하게 준비했습니다. 노래연습을 하면서 공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무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우리 사랑 빠빠' 라는 희망의 노래가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희 공소가 천국이라는 것을, 그런 큰 선물을 주신 교황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공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영광이 될 수 있게 교황님께서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루 종일 고추 따고 밭에서 일하고 밤에 모여 연습했습니다. 공소신자들에게 평생 추억이 되도록, 천국에서 교황님 만났을 때, 공소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교황님께 자랑거리가 되게 말입니다. 

그러자 정 신부님이 "우와, 최 신부님, 잘 만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교황님께 보여드릴게요. 좋은 하루 되시게요"라고 답장이 왔다. 그리고 잠시 후 답장이 또 왔다.

"교황님께서 방금 보시고 'Muy simpatico!'(깊이 동감합니다!)라며 좋아하시네요. 안부 전해달라고 하셔요.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신다고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전주교구 진안성당 부귀공소 신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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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빼들고 악수하자는 것 다름없다"비난

북, '박대통령 근본문제 외면 논할 가치 없다'비난
 
"총칼 빼들고 악수하자는 것 다름없다"비난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8/17 [09:27]  최종편집: ⓒ 자주민보
 
 

북측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5일 발표한 광복절 69주년 경축사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을 위한 근본문제를 외면한 것으로서 논할 만한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며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특별한 내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연합뉴스 등 국내 주요 언론들은 조국평화통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가 지난 16일 개인 필명의 논평에서 “경축사라는 데에는 오늘날 북남관계를 개선하는데서 절박하게 나서는 문제들, 남조선민심과 온 겨레의 지향과 요구에 부응하는 내용들은 하나도 없고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내용들만이 열거되어있다"면서 "실천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에 옮기자’느니, ‘생태계를 연결하고 환경협력의 통로를 만들어가자’느니, ‘하천과 산림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느니 하는 말들 자체가 단어만 바꾸어놓았을 따름이지 이미 휴지장으로 낙인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나 ‘드레스덴선언’에서 다 거론된 것들"이라고 의미가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우리민족끼리는 "분열과 대결의 상징인 원한의 콘크리트장벽을 그대로 놔두고 그 무슨 
이 신문은 ‘하천과 산림공동관리’를 떠들고 외세와 침략적인 전쟁연습에 광분하면서 ‘건설적 대화’를 제창하는 것이야말로 대문에 빗장을 지르고 총칼을 빼들고 서서 악수를 하자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라며 "미국의 승인이 없이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남조선당국이 아무리 ‘건설적 대화’니, ‘문화의 통로’, ‘환경협력의 통로’를 제창한들 그것이 과연 실현될 수 있겠는가”고 비난했다.


신문은 "(남측이) 이미 이룩된 (남북)선언들과 합의들을 부정하고 그 이행을 악랄하게 반대하고 있는데 있다"며 남북관계 경색이 남측에 있음을 분명히했다.

 

또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는데서 견지해야 할 원칙과 정치, 경제, 문화, 인도주의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전면적으로 확대발전시켜나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도들이 명시된 북남합의들만 철저히 이행되면 구태여 그 무슨 ‘하천공동관리’나 ‘환경협력의 통로’ 같은 것은 저절로 되고도 남는다”며 남북공동 선언 이행을 촉구했다.

 

특히 "구구하게 그 무슨 서푼짜리 제안을 내놓고 설명하느라 고심하기보다는 이제라도 북남선언들을 인정하고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이라며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이 합의한 사항을 철저히 이행 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 북은 박근혜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인천아시안 게임에 참가등록을 하는가 하면 오늘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기 조화를 보내 오는 등 남북관계 개선의 끈을 놓지 않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도 전제 조건이 있기는하지만평화체제 구축과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있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플리는 것 아니냐는 희망 썪인 전망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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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코미디, 교황은 만나고 대통령은 피하고

세월호 코미디, 교황은 만나고 대통령은 피하고
 
약속깬 불통 박근혜와 소통의 교황, 흑과 백처럼 대조적
 
육근성 | 2014-08-16 12:25: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 처리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던 세월호 가족들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향했다.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한 이유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한 이유가 있다지난 5월 청와대 면담에서 박 대통령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을 것이다당시 박 대통령은 울분을 토하는 유족들에게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국회에서 그 법(특별법갖고 토론할 텐데 유족 마음 잘 반영되도록 협조하고 지원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약속은 여지없이 깨졌다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며칠째 요구하고 있지만 경찰에 의해 봉쇄돼 청와대 쪽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상태다.

단원고 학생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독립적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을 요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31일째 단식투쟁 중이다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16일 교황이 주재하는 시복식 미사를 통해서라도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겠다며 영어와 스페인어로 작성된 피켓 앞에서 진상 규명을 외치고 있다.

지난 5월 유족에게 한 약속 깬 박근혜

경찰은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로 행진하려 했던 유가족들에 대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신고 되지 않은 불법 집회라는 게 이유다농성 중이던 유족들이 내린 비로 온 몸이 젖자 시민들은 포대자루와 깔개를 전달하려 했다경찰은 이 조차 막고 나섰다심지어는 유족들이 가지고 온 담요까지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의 유족이 실신했고 두 명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찰과상 등 부상을 입은 유족도 있었다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경찰을 향해 유족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대통령이 5월 대국민 담화로 약속한 것은 국회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었나?”

 

대통령이 우리 아이들을 살려낼 수는 없지만 특별법을 제정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를 제출하라는 국회의 요청을 거부한 청와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법과 원칙을 따지면서 왜 합법적 시위를 막는 건가?”

지난 5월 대통령과 면담에서 박 대통령은 요청 들어 주겠다고 말했다사탕발림이었나?”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왜 들어주겠다는 약속 한 건가?”

“5000만 국민 앞에서 했던 약속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청와대는 유족 피하고 교황은 유족 만나고

정부가 경찰 병력을 풀어 유가족들의 외침을 짓밟고 면담 요구를 외면하는 동안 바티칸에서 온 교황은 바쁜 일정을 쪼개가며 가급적 자주 유가족을 만나려고 애를 썼다유족들에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진정한 대통령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교황과 유가족들의 만남은 서울공항에서부터 시작됐다영접 나온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고 세월호 잊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며 위로했고,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직전에는 세월호 가족들을 별도로 만나 비공개 면담을 가졌다.

유족들은 감동했다미사 봉헌을 주재하기 위해 단 위에 오른 교황의 왼쪽 옷깃에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교황의 노란 리본을 본 유족들은 큰 힘이 된다며 울먹였다.

 

노란 리본 단 교황리본 거부하는 박근혜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또 있을까멀리서 온 교황은 방문국 국민의 슬픔을 잊지 않겠다며 도착하자마자 리본을 패용했다누구보다 더 슬퍼해야 할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 가슴에 단 한번도 노란 리본을 단 적이 없다.

아이러니는 또 있다경찰은 교황이 주재하는 시복미사 장소임을 들어 유족들의 광화문 단식농성장을 강제철거하기 위해 안달복달이었지만 교황 측은 유족들의 뜻을 받들어 농성장 철거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교황 측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내쫓고 예수님과 사랑의 미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농성장에서 시복미사를 함께 드렸으면 좋겠다는 말로 유족들을 위로했다.

불통의 박근혜 소통의 교황흑과 백처럼 대조적

교황의 세월호 관심은 진심이었다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십자가를 들고 안산에서 진도로다시 진도에서 대전까지 걸어 도착한 단원고 희생자 부모로부터 십자가와 진도 바닷물을 전해 받은 교황은그 십자가를 바티칸 집무실로 가져가겠다고 밝혔다팽목항에 남아있는 실종자 가족들의 영상 편지도 함께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진상 규명은커녕 은폐하기 바쁜 대한민국 정부와 세월호 참사가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청와대와 여당반면 교황의 행보는 정반대다유가족의 외침과 하소연을 가슴에 새기고 세월호 참사를 영원히 기억하려 한다.

멀리서 온 푸른 눈의 교황이 대한민국 대통령보다 더 국민을 아끼고 진심으로 국민과 소통하려 애쓴다불통과 독선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소통과 겸손의 교황흑과 백처럼 그렇게 대조적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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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 글로브, ‘세월호 진실 못 밝히면 살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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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죽이지도, 죽이는 전쟁연습도 하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과 존엄성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자주권과 생존권을
권오헌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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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16  0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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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헌 /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신문보기가 겁나는 우리 사회

하루하루 신문보기가 겁이 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대형 참사 말고도 병영에서 사회에서 엽기적 살인이 이어지고 전쟁의 이름으로 수많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뉴스속보로만 알리던 살인과 학살 소식이 언제부터인가 예삿일처럼 일상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사람도 언젠가는 그 삶을 다하게 된다. 바로 자연사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의도적으로 또는 그대로 두면 죽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했다면, 이는 살인행위가 된다(미필적 고의 포함). 그래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인륜에도 자연에도 반하는 범죄행위로 된다. 이러한 반생명 반인륜 범죄는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생명존엄의식을 엷게 한 사회적 책임도 있다. 또 구성원의 생명과 인권을 책임질 국가(기관)의 책임도 있다. 아직도 그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늦어지고 있는 최근 사례가 그것들이다.

서둘렀다면 대부분 충분히 구조되었을 그 황금시간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최고통치권자가 일곱 시간이나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국가최고비상사태를 방치하여 끝내 300여 생명을 죽게 한 일, 따돌림을 받아온 병사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료병사를 죽게 한 일, 병영 상급자들이 하급병사를 집단적으로 매질하여 죽게 한 일, 여학생들이 나이 든 남자들과 공모하여 또래 여학생을 입에 담을 수 없는 엽기적 만행으로 죽여 사체를 유기한 일, 오래전에 죽었다는 버려진 남편사체 위에 또 다른 남자를 죽여 고무통 속에 방치하는 등 사람세상에서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인간 반인륜적  야만행위들가 자행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같은 비극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보다 돈이 우선되는 이윤추구사회, 계급사회의 폭력성이 방치되고 있는 병영의 폐쇄적 환경,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극단적 개인주의 등, 전반적인 사회구조적 모순과 인간이성이 마비된 병리현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반인륜 야만행패 중에는 전쟁행위가 있다. 앞에서 말했던 하루하루 신문보기가 겁이 났다는 말속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범죄적인 무차별 학살이 시기적으로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량학살 하는 범죄, 그것은 국경과 인종, 종교와 문화를 뛰어넘는 온 인류의 분노와 규탄의 대상이다. 오늘 우리가 다 같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되고 있음과 같이 오늘 온 세계의 양심은 맨몸으로 저항하는 어린이에 중무장한 군인들의 일방적인 살육만행에 분노하고 있다. 원래 이 같은 이스라엘군의 반인륜 전쟁범죄가 이 글의 주제였지만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죽음들이 이어지고 있어 앞글이 장황해졌다.

전쟁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공동체사회에서 경쟁사회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남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더욱 치열했으며 전쟁장비(무기)의 발달로 대량살육과 파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러한 전쟁사가 아니다. 오늘 이 시간 자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학살만행을 말한다.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인종청소 같은 살인전쟁을 말한다.

이스라엘 살인자들의 반인륜범죄를 고발한다

그랬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국가이익이 걸려 있는, 양보할 수 없는 조건에서, 우열관계가 있지만 공격과 방어수단을 갖춘 쌍방이 벌이는 전쟁이 아니었다. 기껏 로켓포 몇 십 문으로 저항하는 ‘하마스’에 살인자들은 가자지구 전체를 물샐틈없이 바다와 하늘과 땅에서 포위·봉쇄한 채 최첨단 장비로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며 비행기로 함포사격으로 미사일로 탱크로 이 잡듯 살육만행을 자행했다.

지난 7월 8일 이스라엘 살인자들은 이른바 ‘프로텍티브 에지(견고한 절벽작전)’란 이름으로 하루 동안 적어도 273차례의 집중폭격을 퍼부어 27명을 죽이고 130여명을 다치게 한 이후 8월 1일 72시간 잠정적 휴전합의가 이뤄졌을 때까지 1460여명을 죽였고 80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게 했다. 외신 등 언론이 전하는 극히 일부만을 짚어보며 살인자들의 반인륜범죄를 고발한다.

학살만행의 명분은 6월 12일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청소년 3명의 실종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팔레스타인 무장정파)를 배후로 지목,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팔레스타인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감행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 배경은 6월초 팔레스타인 파타정부(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요르단강 서안지구 통치)가  하마스정부(가자지구)와 손잡고 통합정부를 꾸리기 위한 과도정부를 구성했고 국제사회가 이를 사실상 용인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파타정부만을 협상대상으로 인정했던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송두리째 없애려고 이 같은 인종청소 살육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살인자들은 하마스 무장대원을 공격한다며 민간 건물이나 일반가정, 길거리까지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두 돌도 채 안된 아기 무함마드의 몸이 폭격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게 했고 난민촌을 공격하여 살라 나와스라(23)와 임신 4개월인 그의 부인을 죽였다(7월 9일). 10일 새벽 1시 30분, 가자지구, 칸 유니스에 사는 50대의 재단사 부부와 자녀 6명은 이스라엘 공습으로 한꺼번에 모두 숨졌다. 당시 집에 없었던 큰 아들 야시르 알하리(27)가 하마스 대원이란 이유로 폭격대상이 된 것으로 추정됐다.

또한 이슬람 사원과 장애인 보호소 등 종교·보건 시설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7.12), 하루 동안 52명을 죽게 했으며 은행과 병원사무실 기술대학 등 민간시설과 (7.12) 베이트 하눈 가자시티, 칸 유니스 등의 7개 상수도관이 파괴되면서 3만1000여명에게 물공급이 중단되었다. 무차별공습으로 완파 또는 반파된 집이 940채 모두 5000여명이 삶의 터전을 잃게 했다(7.13).

이스라엘 학살자들은 공습, 미사일공격, 함포사격에 이어 공격 10여일 만에 가자지구 경계를 넘어 지상군을 투입했다(7.17). 탱크와 70톤이 넘는 초대형 방탄불도저를 앞세운 살육과 파괴작전을 감행했다. 또한 가자지구 동부 샤자이야에서만 하룻밤 사이 70여명이 목숨을 잃고 그중에는 어린이가 17명 여성 14명이 포함되고 있다. ‘피의 화요일’이었다(7.20). 그리고 강철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 21일 오후 기준으로 사망자 505명 가운데 79%인 397명이 민간인이었다. 가정집 완파 464채를 포함, 2945채가 훼손됐고 학교 45곳, 모스크 54곳, 구급센터 1곳, 병원 4곳이 파괴되었다(7.21).

피의 일요일을 피해 가자시티 중앙에 있는 고층아파트를 임대해 피난했던 킬라니(54) 일가족은 화요일 밤사이 무차별 공습으로 독일시민권을 가진 그의 일가족 12명이 모두 죽었다(22일). 10층 건물 절반이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5층과 6층 사이에 눌린 주검은 몸의 절반을 건물 바깥으로 드러낸 채 매달려 있었다.

학살자들은 가자지구에서 유엔이 피난민 대피시설로 운영하던 학교시설을 공격하여 한 살 짜리 아기와 유엔직원을 포함해 최소 16명을 죽였고 200여명을 다치게 했다. 운동장에는 피가 흥건한 웅덩이가 생겼고 아이들의 주검은 찢어져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7.24).

또한 가자지구 중부 다이르알 발라흐 마을에 이스라엘 탱크가 포탄을 퍼부었고 출산을 앞둔 23살의 임심 8개월 예비엄마 샤이마 까난은 무너진 집에 깔렸다. 까난은 병원 수송 중 숨졌다. 그때 뱃속아이가 꿈틀대는 것을 발견한 의료진은 긴급절개수술을 하여 여자아기인 샤이마가 태어나 울음을 터뜨렸다(7.25). 이렇게 25일 하루에만 115명이 목숨을 잃어 이날까지 817명이 죽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26일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동안 주검수습과 부상자 후송 등 ‘인도주의 활동’을 위한 정전에 합의했다. 이 시간동안 가자지구 안에 있는 건물잔해에서 주검 147구가 발굴되어 이스라엘 공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047명까지 늘어났다(7.26).

이스라엘 살인집단은 가자지구 북부의 샤티 난민촌 놀이터를 폭격, 어린이 9명 등 10명이 숨졌고(28일), 가자지구에서 가장 큰 의료시설인 시파병원에 딸린 건물도 폭격을 당해 40여명이 다쳤다. 살인자들은 28일 밤과 29일 새벽사이 가자지구 하늘에 조명탄을 환하게 쏘아 올리며 육상, 해상, 공중에서 학교와 유치원, 이슬람사원 등을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감행하여 하룻밤사이에 적어도 60여명을 숨지게 했다.

또한 학살자들은 7월 30일 새벽 4시 30분께 가자지구 북부 자빌리야에서 유엔이 대피소로 운영하는 여학교에 탱크로 공격, 교실 2곳과 화장실 1곳에 명중해 19명이 숨지고 120명을 다치게 했다. 30일 오전 공세에서만 35명이 숨졌다. 이렇게 23일째인 이날까지 1258명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29일 새벽에도 미사일공격으로 가자지구의 유일한 화력발전소가 파괴되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대한 ‘집단처벌’에 해당되며 제네바협정이 금지하고 있는 인도적 재난의 ‘전쟁범죄’ 행위였다.

2014년 8월 1일 오전 8시(현지시각)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두 번째 72시간 휴전에 들어갔다. 이날까지 팔레스타인 주민 등 1460명이 숨지고 8000여명이 부상당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식량과 의약품을 조달받고 사망자를 매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또한 수도와 발전시설설비 등 파괴된 기반시설의 일부 복구도 가능할 것으로 언론들은 전망했다. 72시간 휴전 중에 본격적인 회담을 통해 장기평화까지도 기대할 기회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학살자는 학살의 본성을 가리지 않았다. 저들의 전술기회에 따라 폭격을 계속했다. 본격적 전면 재공격은 없었지만 72시간 휴전발효 이후에도 이어진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피해는 계속 늘어나 8월 11일 현재 총 1939명이 죽고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학살기간 이스라엘군의 사망은 67명이었다.

이 같은 이스라엘 학살만행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의 건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분쟁사를 짧게 짚어보기로 한다.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분쟁사

다 알려졌듯이 이스라엘(유대인)은 2000여년 전 로마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 (유럽과 러시아 등)로 흩어져 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아랍인들이 자리 잡고 살아 왔다.

1차 세계 대전시기 팔레스타인 지역도 대부분 아랍세계와 함께 오스만 터키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독일과 터키제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영국은 아랍인들의 군사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약속하는 이른바 ‘맥마흔 서한(1915-1916)’을 교환했고 다른 한편 전쟁승리를 위해 로스 차일드 가문과 같은 은행재벌 등 유대인의 전쟁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별도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국가 건설을 약속한 ‘밸푸어선언’을 하는 아랍인과 유대인들에 모순된 이중약속을 하게 된다.

그리고 1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년 산제보 회의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이 통과됐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격렬하게 저항, 반영투쟁과 독립투쟁을 하게 되고 영국은 위임통치권을 이용,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정책을 강행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7년 11월 국제연합(유엔)은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국가에 43%를 아랍국가에 할당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은 영토의 87.5%를 소유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했었는데도 이처럼 미·영의 입김으로 불공정한 할당을 한 것이다.

이 같은 유엔의 부당한 분할안에 유대인들은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이에 따를 수 없었다. 수백만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2000년 넘게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이로써 유대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른바 ‘중동전쟁’의 단초가 된 것이다.

1948년 5월부터 49년 3월까지 이어진 1차 중동전쟁 결과는 이스라엘의 승리였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장악했다. 나머지 22%는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으로 분리되어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통치하에 서안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1967년까지 계속 되었다. 1956년 2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점령당하는 참패를 겪었고 1967년 3차 전쟁(6일전쟁)에서는 43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추가로 쫓겨났고 남은 100여만 명은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하에 놓여지게 되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을 이스라엘이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이스라엘군에 점령당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랍제국의 연패는 아랍인들의 단결력과 전의가 부족한 면도 있지만 결정적 요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첨단무기 제공과 경제적 군사적 지원 때문이었다.

1969년에 결성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에는 각기 다른 이념을 가진 여러 정파들이 있었다. 주류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당(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이고 현재 서안지구의 대표기구이다. 이른바 이들 온건파는 이스라엘과 공존을 감내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대학살이 감행되고 있는 가자지구에는 1987년 1차 인디파타(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이후 마흐메드 야신이 창설한 하마스(이슬람저항운동)가 집권하고 있다(야신은 2004년 3월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되었음). 2006년 치러진 자치의회 선거에서 하마스가 132석 가운데 절반이 넘는 74석을 따내며 압승을 하면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최초의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이 되었다. 2005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군한 후 하마스의 승리가 있자 이스라엘은 가자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을 달가워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에 지원해 온 각종 원조를 동결했다. 그것은 하마스의 독자정부 출범 1년만인 2007년 2월 서안지구의 파타와 거국정부구성에 합의한 이유였다. 이스라엘 학살자들은 가자지구에 대한 전면침공을 감행(2008년 12월) 22일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1400여명을 죽였다. 특히 2012년 11월에는 하마스 소속 군참모총장을 암살하고 무차별 공습을 자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살육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스라엘 학살만행의 배후이자 한반도 평화통일에 결정적 방해자, 미국

위에서 보았던 이스라엘 살인자들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과 학살만행은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를 연상케 한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사람, 미친 듯 울어대는 말, 사람과 동물의 고통을 묘사한 전쟁의 야만성과 폭격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1936-39년, 선거에서 이긴 합법적인 인민전선정부와 파시스트 프랑코 반란군 사이의 전쟁) 당시 1937년 4월 26일 프랑코 반군을 지원하는 독일공군 ‘콘돌군단’의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작은 도시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를 포함한 1654명을 죽게 하고 889명에게 부상을 입힌 대재앙을 묘사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살 이틀 뒤에 이 소식을 듣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붓을 들어 이 작품을 완성했다. 바로 ‘게르니카 대학살’이었다.

피카소의 전쟁과 학살만행 고발작품은 ‘게르니카’만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것은 우리 민족과 관련된, 바로 6.25 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조선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a)’이 그것이다. 그림의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이들을 향해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이 그려져 있다. 겁이 질린 한 아이는 여인의 품속으로 달려들고 있고 아직 전쟁의 참혹함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아이는 이 와중에도 흙장난을 하고 있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부대가 양민을 학살하고 있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투구 속에 가려진 총과 칼을 겨누는 학살자들은 경직되고 무표정한 맹목적으로 묘사돼 있다. 전쟁과 학살의 잔인성과 맹목적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1951년 1월에 그려졌고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미군 전투지역이 38도선 이북이었다는 점,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35,000여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보고서(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가 협회의 보고서) 등을 연결해 추정한다면 학살자가 누구라는 것을 어림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만행과 60년 전에 자행된 미군범죄의 잔혹성만을 말하기엔 이 순간 언제라도 총·포탄이 오갈 수 있는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먹구름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 이은 박근혜 정부의 외세공조 동족대결 정책이 그렇고, 70년 가까이 이 땅을 강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핵선제공격을 비롯한 고립압살정책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 학살만행이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지원이 있었다면, 이 땅에서의 미국은 정전협정을 위반하여 영구강점을 기도하고 7.4남북공동성명 6.15공동선언에 따른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결정적 방해자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군 격멸, 북정권 전복, 통일여건 조성’이란 군사력에 의한 흡수통일 망상 속에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북침전쟁연습을 자행하고 있다.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 중지하라

오는 8월 18일부터 21일까지 감행되는 을지프리덤가디언 북침전쟁연습이 또다시 전쟁국면으로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이번 전쟁연습에서는 이른바 ‘맞춤형 억제전략’을 실전훈련으로 적용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북의 핵위협 상황을 임의적으로 판단, 선제공격하는 대응 전략이다. 언제라도 미군의 판단에 따라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미군은 을지프리덤가디언뿐만 아니라 키리졸브·독수리연습 등에서 핵잠수함, 핵추진 항공모함 또 다른 핵타격 수단인 B-52 전략폭격기 등을 제 마음대로 이 땅에 전개시키고 있었다.

오늘 이 땅에는 핵전력이 아니라도 최첨단 대량살상무기로 대치되고 있어 자칫 잘못하여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 민족은 몇 번이라도 절멸될 수 있다.

마침 오늘 이 땅에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며 남북관계 개선의 좋은 기회를 맞고 있기도 하다. 이미 북은 상호 비방·중상 중단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군사적 적대행위의 중단을 제안했다. 또한 9월에는 아시아인의 평화와 친선을 위한 아시안게임이 열리게 된다. 북측의 동포선수들과 응원단을 조건 없이 따뜻하게 맞아, 화해협력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반도 평화와 화해’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북핵 타령만 할 게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 전쟁연습 단을 요구하고 핵선제 공격 선언 철회, 모든 핵공격수단의 전개를 반대해야 한다. 또한 6.15선언, 10.4선언 이행 의지를 분명히 하고 당장 5.24조치 철회, 금강산 관광 재개 등 진정한 통일의지를 보여야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비극은 사라져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과 존엄성을,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자주권과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죽이지도, 죽이는 전쟁연습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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