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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BM 발사 연기...미국이 우려하는 북한의 ‘오판’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4/08 10:24
  • 수정일
    2013/04/08 10:2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미 군사적 긴장 최고조, 10일 전후 북한의 미사일 시험 여부에 주목

이정무 기자 jmlee@vop.co.kr
입력 2013-04-07 19:06:09l수정 2013-04-07 23:13:05

 

7일 오전 외신들은 미국 국방부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미니트맨3’ 실험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AP 통신은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이번 주 중 실시할 예정이던 미니트맨Ⅲ(Minuteman 3) 실험을 다음 달 중으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헤이글 장관은 지난주 금요일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통신은 전했다.

‘미니트맨3’은 사정거리가 1만 Km를 넘는 대륙간탄도미사일로, 핵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과 B-52와 B-2 스텔스 폭격기와 함께 미 핵전력의 삼중점(nuclear triad)을 이루는 전략 무기다.

통신은 또 미 국방부의 고위 관리를 인용해 이번 결정이 “ICBM 실험이 북한의 ‘오판’을 초래하거나, 한반도 위기가 더욱 고조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군사적 조치 열 올렸던 미국...북한의 선제타격 우려(?)

미국 정부가 북한의 ‘오판’을 우려한다는 목소리는 이미 지난 주 미국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4일 CNN은 미 국방부 고위 관리를 인용해 “우리(미국)는 그동안 북한이 도발적인 수사를 통해 긴장을 고조시켜 왔다고 비난했는데, 우리도 똑같은 일을 했음을 깨닫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리는 “(미국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라며 “한·미 연합훈련은 계속되지만 앞으로는 덜 요란하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정부 관리들이 말하는 북한의 ‘오판’이란 핵을 포함한 북한의 선제공격을 의미한다.

북한은 3차 핵실험 이후 “선제타격과 전쟁에 대한 선택권도 저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큰 오산은 없다”면서 핵을 포함한 ‘선제타격 권리’를 주장해왔다.

사실 ‘선제타격’은 미국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군사교리다. 21세기 들어서도 부시 행정부는 여러 차례 선제공격론을 공식화해 왔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서도 이 교리를 적용한 바 있다. 즉 “WMD를 가진 적들이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필요하다면 자위권을 행사하는 차원에서 선제행동을 할 것”(2006.3 국가안보전략보고서)이라는 게 선제공격론의 논리다.

북한은 최근 벌어진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반발에서 이 논리를 그대로 인용했다. 핵을 가진 미국이 자신에 대해 적대적 행동을 계속한다면 자위권 차원에서 선제타격을 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건 북한이 ‘선제타격’을 실제 행동에 옮긴다면 이는 한반도에서의 북미 전면전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3월 내내 이어진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해 북한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지난달 8일과 19일 미국이 B-52를 한반도로 출격시켜 폭격 훈련을 벌이자, 21일 북한은 공개적으로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대피 훈련을 한 데 이어 “전략폭격기가 조선반도에 다시 출격한다면 적대세력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반발했다.

미국은 그 이후에도 B-2스텔스 폭격기, F-22전투기 등을 잇달아 한국 영공에 출격시켰고, 이른바 ‘X-밴드 레이더’ 등 최신 무기의 배치도 계속했다. 그 때마다 북한이 극단적인 수사를 동원해 이를 비난하는 일도 이어졌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지난 토요일 국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 평양 주재 외국 공관들에 대한 철수 ‘제안’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이 제안을 통해 자신들의 정세 인식을 외부로 알리고, 미국에 대해서는 ‘최후 경고’를 보낸 셈이다.

북한, 미사일 시험 강행할까?

미국의 ICBM 실험 연기가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7일 연합뉴스는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를 인용해 “(긴장국면을) 대화로 돌리기 위한 미국의 구체적인 움직임이나 계획은 없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미국의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가도 미지수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이 6일(현지시간) 내놓은 보도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타르타스 통신은 북한에 공관을 두고 있는 영국 외교관을 인용해 “평양이 워싱턴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다음 주 10일 전후로 북한이 미사일 시험을 할 것인지도 관심사다. 7일 김장수 청와대 외교안보실장은 “10일 전후로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 반격 차원에서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을 한다면 공은 다시 미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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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솎아보기] 한반도 위기 진전 모드에 돌입..

 

북한사이트 명단에… ‘박정희’부터 ‘이효리’까지
[아침신문솎아보기] 한반도 위기 진전 모드에 돌입…우리민족끼리 수사 본인확인 인증에 난항
이재진 기자 | jinpress@mediatoday.co.kr

한반도 위기가 완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각종 첨단무기를 통해 공개시위를 벌였던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연기하기로 했고 오는 16일 개최예정이었던 한미군사위원회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두 조치 모두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군사적 도발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다.

세계 각국도 평양 주재 공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평양 역시 특별한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평양 주재 외국 대사들의 증언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회동을 갖기로 결정하면서 유엔이 한반도 문제에 중재자로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북한에 특사를 보내는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다만, 북한이 개성공단과 북한 주재 외교공관 등에 오는 10일까지 철수 계획을 내놓으라고 한 것과 관련해 정부는 해당 시기를 전후로 미사일 도발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이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공개한 명단을 입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는 내사 대상자를 추리고 있지만 본인 확인 단계부터 사실상 입증할 만한 단서가 없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명단 이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해 유명 연예인 이름까지 나온다. 사이트 회원 가입 당시 실명 인증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도용한 사례가 속출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8일자 아침종합신문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꽃피는 봄, 시샘하는 눈(포토뉴스)>
국민일보 <2·3세대 오너들이 내수 독점해 中企·소상공인 몫 뺏으면 안돼">
동아일보 <봄인가 싶었는데(포토뉴스)>
서울신문 <원자재·쌀 동나 난방 안돼 고생"
세계일보 <남북결단 외엔 묘수 없어 정부도 기업도 피 마른다>
조선일보 <"개인정보 1억4000만건 北에 넘어간 듯">
중앙일보 <4월, 눈꽃이 피었습니다(포토뉴스)>
한겨레 <'생명버스' 탄 난치병 문주씨 "제발 공공의료 걷어차지 마세요">
한국일보 <엉터리 범죄 통계 검·경 2년간 '쉬쉬'>

한반도 위기 진정모드에 돌입하나?

미국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미니트맨Ⅲ 발사를 연기한 것을 두고 한반도 위기가 진정 모드에 돌입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은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이번 주에 실시할 예정이던 ICBM 미니트맨Ⅲ 실험을 다음 달로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연기 배경에 대해 미 고위 관리자는 "한반도의 긴장 상황을 감안할 때 북한의 오판을 초래하거나 도발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조치들은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각종 첨단무기를 선보이면서 한반도 긴장에 위기를 고조시켰던 미국이 북한 도발의 빌미제공을 막기 위한 명분을 내걸면서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의미있는 변화로 해석된다.

또한 한미 군 당국은 정승조 합참의장과 마틴 뎀프시 미 합참의장이 미국 워싱턴에서 16일 개최할 예정이던 한미 군사위원회(MCM)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7일 밝혔다.

동아일보는 연기 배경에 대해 "군 일각에서는 '이 역시 북한에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한 영국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북한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안정시킬 조건 중 하나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당 제1비서에게 직접 전화를 걸 것을 바라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평양 주재 외공 공관들도 북한이 철수 계획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정상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독일 외무부는 6일 성명을 통해 “대사관의 안전과 위험 노출도를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대사관 업무를 계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고, 영국 외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의 통보가 위협적 발언의 연장선이라고 믿는다. 철수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특히 중국도 당장 공관을 철수시킬 뜻이 없음을 내비치면서 "평양 주재 외교공관들의 혼란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외교부 고위당국자)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평양도 평온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평양 주재 대사들의 증언이다.

호베르투 콜린 평양 주재 브라질 대사는 6일 현지 일간 <폴랴 지 상파울루>와 한 통화에서 “평양 거리에서 군용차량이나 군인들을 볼 수 없으며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다. 국제기구들도 별다른 이상 징후를 느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겨레는 보도했다.



 

   
▲ 한겨레 5면
 

 

반기문 총장, 한반도 문제 중재자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엔과 미국 백악관은 5일(현지시각) 오후 동시에 성명을 통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1일 백악관에서 만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2011년 2월 이후 처음이다. 반기문 총장은 지난 6일에도 왕이 중국 외교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반도 긴장 국면을 우려 속에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긴장 국면이 속히 해결돼 통제 불능의 사태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우려를 전했다.

한겨레는 "반 총장이 이렇게 나서는 것은 한·미와 북한 간의 긴장 국면이 5개월째 접어들었지만 대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국제분쟁 중재 의무가 있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북한에 특사를 보내는 등의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우리 정부는 10일 전후로 미사일 도발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7일 “북한이 개성공단과 북한 주재 외교공관 등에 오는 10일까지 (철수 계획 등) 방안을 내놓으라는 것은 사전에 계획된 행태로 보인다”며 “그 시기를 전후해 미사일 도발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특히 <손자병법>에 나오는 ‘무약이청화자 모야’(無約而請和者 謨也·약속 없이 화친을 청하는 것은 음모가 있는 것)라는 구절을 인용해 "대화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급하다고, 위기라고 해서 섣부른 대화를 시도하진 않겠다"며 "대화할 계기를 북한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강경대응의 끝이 전쟁이 돼서는 아닌 바에야 결국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국면 전환의 주도권을 한반도 사태의 이해 당사자인 우리가 쥐어야 한다"면서 "대책 없이 강경론만 외치다 국제사회가 대화국면으로 돌아서면 우리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민족끼리 가입자 명단에 박정희 전 대통령 이름도?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우리민족끼리 국내 가입자 정보를 공개하고 난 뒤 내사에 착수했던 경찰이 난항을 겪고 있다.

경찰청 보안사이버수사대는 1차로 공개된 9001명과 2차로 공개된 6216명의 명단을 추가로 입수해 조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공개된 회원 정보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는 내사 대상자를 추려내기 위해 성별과 나이, e메일 계정 등 다수의 유형별로 가입자를 분류하고 있다고 경향신문은 보도했다.

경찰은 분류한 정보를 구글링 검색을 통해 신상 정보를 파악하고 이들의 이적활동 여부를 확인한다는 계획이지만 내사 시작부터 본인인지 확인이 어려워 난항에 빠졌다.

수사를 개시하기 위해서는 명단에 나온 사람들이 실제 가입했던 본인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는 가입시 실명 인증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이름 도용 가능성이 높다.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사이트에 가입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명단 분석 결과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름도 나왔다. 이효리, 씨스타, 티파니 등 유명가수와 아이돌의 이름까지 등장한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 잦은 개인 정보 유출 사건 때문에 누군가 유출된 개인 정보를 가지고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에 가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경향 10면
 

 

또한 공개된 정보에는 인터넷주소가 명시돼 있지도 않다. 명단의 이메일 계정 중 상당수가 중국 이메일 계정이고 중국의 인터넷 주소를 경유해 접속한 경우가 있는 것으로 파악됐지만 중국 당국의 협조가 불투명하다.

경향은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의 본사와 서버가 중국에 있어 경찰이 압수수색을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중국이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지 않아 실제 가입자를 찾는 것도 힘들다"고 지적했다.

진주의료원 폐업 놓고 홍준표, 김문수 지사 신경전

진주의료원 폐업 논란이 지방자치단체장 신경전으로 확산되고 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의료원 폐업을 강행하자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까지 나서 홍 지사의 행보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홍준표 지사는 지난 5일 새누리당 소속 경남 의원과 당정협의를 갖고 "진주의료원은 노조를 위한 병원이지 공공의료를 위한 곳이 아니다"고 폐지 강행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는 단식 농성 중인 민주통합당 김용익 의원을 찾아 "서울시에도 (공공의료기관인) 시립병원이 열 개 넘게 있는데 적자여서 혁신도 하고 공공성도 높아지게 지도했다"고 말했다. 진주의료원 폐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도 지난 2일 한양대 최고경영자과정 조찬 모임에서 "경기도립병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설문조사가 도민의 1%만 나오면 나는 병원을 없애지 않겠다. 도립병원이 노숙자들 병 고치고 어려운 사람들 고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홍준표 지사는 김문수 지사의 발언에 대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 지사가 그러니까 경기도 살림이 엉망(인 것)"이라며 "도 살림이나 잘 살피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뿐 아니라 홍 지사는 "(김 지사는) 보수층에서는 의심받고 진보에서는 배신자로 불린다"며 "여론을 따라가는 게 지도자가 아니다. 여론을 만들어가는 게 지도자"라고 훈계했다.



 

   
▲ 경향 2면
 

 

정수장학회 장학생, “김삼천씨 안돼”

정수장학회 장학생 출신 모임 '상청회'의 김삼천씨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에 임명된 것을 두고 상청회 내부에서 반발 움직임 나오고 있다.

대구 출신에 영남대를 졸업한 김삼천 이사장은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 상청회장을 지내며 의원 시절의 박 대통령에게 3000만원의 후원금을 지원했다.

또한 박 대통령이 30년 넘게 이사장으로 재직한 한국문화재단에서는 감사를 지냈을 뿐만아니라 육영수여사기념사업회에서도 함께 이사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된다.

이에 상청회 16대 회장을 지낸 유이관씨가 지난 1일 역대 상청회 회장·임원진에게 “상청회 이름으로 김삼천씨의 (정수장학회) 이사장 취임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장학회 이사진을 만나 이사장 지명을 철회하도록 건의하기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 주목된다.

유씨는 "하필이면 민감한 이 시기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하면 김삼천씨 개인적으로 영광이야 있겠지만 우리 상청회가 ‘장물장학회’ 운운하며 매스컴과 정치판에서 난도질당하는 게 자존심 상한다"며 "이는 박 대통령 통치력에도 치명타가 되므로 중립적인 교육자 중에서도 장학재단 운영 경험이 있는 자를 추천해야 제3자들도 납득하리라 본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상청회 전 임원은 경향과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과 무관한 인물이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아야 한다는 얘기가 이번에 처음 나온 게 아니다"라며 "누가 봐도 (박 대통령과) 연결고리가 뻔한 인물을 재차 장학회 이사장으로 세우니까 장학생들의 순수한 사회봉사 단체인 상청회까지 정치색을 가진 것처럼 오해를 받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MBC 차기 사장 선임은 언제?

MBC의 경우 후임 사장이 하루빨리 정해지지 않아 문제인 경우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후임 사장을 뽑는 논의를 두차례나 미뤘고 일부 이사들은 외국 출장을 가면서 MBC 정상화가 늦어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재철 전 사장이 해임된지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방문진은 후임 사장을 뽑는 일정과 내용을 논의하지 않았다. 지난달 29일과 4일 이사회를 열었지만 사장 선임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또한 7일 방문진의 김광동·차기환·박천일 이사는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국제 영상물 전시회인 ‘밉티브이(MIPTV) 2013’에 참가해 오는 18일에서야 정기 이사회가 열리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이 안광한 부사장의 직무대행 체제로 이어가자고 주장하고 나서 반발이 예상된다.

안광한 부사장은 김재철 전 사장과 함께 직원들의 동의없이 보안프로그램을 직원들의 컴퓨터에 설치해 개인 전자우편과 인터넷 메신저 내용을 훔쳐본 혐의로 고발돼 경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 한겨레 31면
 

 

한겨레는 방문진의 늑장 사장 선임 행태를 비판하면서 <방문진, 문화방송 새 사장 선임 않고 뭐하나>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상처난 조직원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힘을 한데로 모아 공영방송 문화방송의 경쟁력을 복원하려면 새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방문진이 청와대나 새누리당의 지침을 기다리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면서 "눈치도 없이 자율적으로 새 사장을 인선했다가 자칫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한심한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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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오바마 '아시아로의 귀환' 길잡이 돼야

"'박근혜 독트린', 역사적 행운을 놓치지 말라"

[한완상-김민웅 대담] 朴, 오바마 '아시아로의 귀환' 길잡이 돼야

이재호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7 오후 1:16:40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촉발된 한반도 안보 위기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좀처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오히려 한반도의 안보 불안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 3일 19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던 한완상 전 적십자 총재와의 대담 자리를 마련해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 위기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해 봤다.

한 전 총재는 한반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큰 그림에 이 모든 사태를 수렴시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 관계와 관련해 보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는 만큼,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박근혜 독트린"을 선언하고 이를 추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현재의 한반도 상황은 겉으로는 위기이지만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현상 타개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위기관리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년 전에 비해 중국의 역할은 비약적으로 커졌으나 오늘날 북한이 마냥 중국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불신과 경계심을 보이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음도 아울러 언급했다.

한 전 총재는 핵무기개발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김정은의 발언을 주시하면서, 목표는 경제발전의 여지를 만들겠다는 것인 만큼 이러한 점을 잘 파악해서 미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의 전략을 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미국이 북한과 관계 정상화할 경우 (미·중간 경쟁에서) 미국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과정에서 북한의 핵무기 문제도 해결되는 통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한완상 전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북-미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주도권을 행사한다면 민족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을 수 있다면서, 5월 방미 시,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이 한-미-일 대 중국의 대결구도가 아니라 중국과 협력적으로 만들어지는 국제질서가 되어야 함을 설득해야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한국의 MD 참여는 미·중간 대결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4월 말, 한미 군사합동 훈련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상황타개의 분위기가 다시 생겨날 것으로 전망했다.

대담은 지난 4월 3일 오후 한완상 전 총재의 자택에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와 함께 진행되었다.<편집자>
 

▲ 한완상 전 적십자 총재 ⓒ프레시안(최형락)


김민웅 :여전히 건강하시니 반갑다. 우선 현재 한반도 상황에 대해 진단해보자. 정말 위험한 것인가? 아니면 위험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인가? 동북아 전체 관련 지역에 각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에 평화의 길이 보이나 싶었는데, 최근 상황을 보면 불안한 정도가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든다. '설마 뭐 별일이야 있겠어?' 라는 분위기도 있지만 '이거 아닌거 같다'는, 위험에 대한 민감함도 높아지는 것 같다. 특히 언론에서 북한의 대응에 대해 보도하는데, 이것이 '정치적 수사'라는 차원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과거와는 달리 상당히 거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건 예전과 좀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 문제에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인데, 미국에서 평화적 해법을 위한 제안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 제대로 관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오늘의 문제는 과거에 뿌리가 있다. 현실적 대안을 내놓는 것과 함께, 현안에 대해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는 일도 필요한 시점이다.

한완상 : 개인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건강은 심상치 않게 보인다. 남북관계에 항상 노심초사했던 사람으로서 현 상황이 안타깝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는 정전 60주년이다. 우리는 정전 상태를 너무 오래 끌었다. '한국 전쟁'이라는 열전의 시기 3년까지 보태면 총 63년이다. 이제는 이렇게 너무 긴 전쟁을 끝내야 할 때가 됐는데 최근에 더 악화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20년 전 이맘때, 1993년 부총리 겸 통일부 장관
취임한 뒤 김영삼 대통령에게 과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북 정책을 펼치자고 건의했다. 취임사에도 이런 사항들을 강조했다. 그런데 말로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실제로 추진한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 장기수로 복역했던 이인모씨 북송 문제를 거론했다. 이인모씨 북송 문제는 전 정권인 노태우 정부 때 남북 간 현안의 하나였다.

당시 남북 간 현안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북한 핵 사찰 문제, 두 번째는 팀스피릿 훈련 재개, 마지막으로 이인모씨 북송 문제였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나름의 성과를 거뒀음에도 이 세 가지 현안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악화됐다. 그 시기에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그래서 과감한 패러다임 전환을 제시한 것이고 실행에 옮기려고 한 것이다.

이 중 북한에 심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이인모 북송문제를 꺼내 든 것이다. 당시 3월 11일 오후에 이인모씨를 북한으로 보내겠다고 결단을 내렸는데 바로 다음날인 3월 12일 오전 10시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충격이었다.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순간, 북한의 NPT탈퇴가 악재로 터지면서 상황이 뒤엉켜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만 20년이 지난 오늘, 상황은 그때보다 더 악화됐다. 김대중, 노무현 10년 동안 그나마 노력해서 이뤄놓은 성과들도 홍수에 휘말려 떠내려가는 것 같지 않은가?


김민웅 : 상황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전쟁이라는 대재앙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건 우리 모두가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돌이켜 보면, 그래도 당시 문민정부가 대북관계를 풀기 위한 의지가 강력했고, 그것에 대한 하나의 표시로써 이인모씨 송환이 결정된 것 아닌가. 아무리 북한과 관계가 좋지 않아도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그런 의지가 결국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틀까지 짜려는 쪽으로 이어진 것 아니었나?

한완상 : 문민정부 초기엔 그랬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내각이나 집권당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YS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도와줬던 분들 가운데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몇몇만 그렇게 생각했다. 북한의 NPT 탈퇴만 없었더라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남북관계를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든 확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태가 터지니까 YS 정부의 출범을 굉장히 불안하게 생각했던 사람들, 특히 '어떠한 동맹도 민족을 우선할 수 없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취임사를 보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이제 북한에 대응하고 공격할 수 있는 흐름이 생겼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들이 힘을 얻어서 새로운 대북정책을 좌절시키는 일을 줄기차게 해왔다. 평화적인 해법에 대한 역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국민들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어떤 면으로 보면,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영변의 핵 시설을 정면 폭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시기의 국민적
불안감보다는 지금이 낮은 것 같기도 하다.

김민웅 : 지금은 이중적인 구조가 있는 것 같다. 북한의 대응이 상당히 강력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과, 한국의 국제적 가치나 역량이 높아진 상태에서 전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엇갈리게 겹쳐 있다. 불안과 희망이 애매하게 교차되는 불확실한 상태다. 어느 쪽으로 상황이 기울지 사실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때는 김영삼 정부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니까 그나마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국민적으로 확대되지 않았던 것 아닌가?

한완상 : 당시 YS 정부 내에 새로운 대북정책을 추진할 만한 구조적인 힘은 없었다.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YS의 대통령 취임사를 읽고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클린턴 정부가 협상을 제시하기 전에 이미 김일성 주석은 남측 정부와 일괄 타결할 생각을 했다. 이렇게 보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것이 어떤 징조로 나타났느냐 하면, NPT 탈퇴 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교착관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주석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10대 강령을 4월 말에 발표하고 이어 5월 25일경 부총리급
인사로 특사교환을 제안했다. 강성산 총리가 제의했던 통지문을 보면 '남한에도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남북간 현안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라고 되어 있었다. 여기서 "포괄적"이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핵문제'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남북간
기본합의서에 비핵화 선언이 있다. 남북간 합의된 기본 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을 위시한 이 문제도 남한 정부와 논의하면서, 최고위의 의중을 정확히 알고 있는 통일을 전담하는 부총리급으로 특사를 교환하자고 했다. 이것은 총리 회담의 대안이었다. 1991년 총리 회담으로 남북기본합의서까지는 만들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고, 노태우 정부 마지막에 세 가지 현안으로 남북관계가 악화되기만 했다. 이제는 포괄적으로 하자, 최고위의 의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을 특사로 해서 문제 해결하자, 이렇게 북쪽도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YS의 의중을 알았지만 YS는 내 의중을 몰랐던 것 같다. 안타깝지만, YS와 그 주변 참모들은 남북관계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끌고 가자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북쪽의 제안을 잡아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추진력이 떨어졌고 취임사 정신에서 날이 갈수록 이탈하게 됐다.


김민웅 : 결국 위기 해결에는 최고 결정권자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 그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해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문제를 풀자는 것 까지는 일정한 궤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한완상 : 김일성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무산되기 했지만, 1994년의 남북정상회담은 김영삼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전 대통령 카터의 공헌이 크다. 카터가 남북 상황을 보니 전쟁이 날 것 같이 보였던 거다. 클린턴도 북한의 핵시설이 있는 영변에 정밀 폭격 하겠다며 작심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 카터가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때 마침 레이니가 주한 미 대사였다. 레이니, 카터 둘 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의견이 같았다.

당시 레이니가 참으로 현명했다. 8군 사령관이었던 개리 럭 장군과 긴밀한 소통, 네트워크를 만들어 의견을 수렴했다. 그때 럭 장군 또한 판단을 잘 했다. 럭 장군은 만약 북한 핵시설에 정밀 폭격을 하면 평양은 전면전으로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선 럭 장군은 전면전이 발발하면 개전 후 며칠 사이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죽는다고 예상했다. 이건 클린턴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군사비용은 1000억 달러, 경제 손실은 1조 달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클린턴이 이런 비싼 전쟁을 왜 정밀폭격을 하면서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카터가 북한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클린턴도 입장을 전환했다.

94년의 남북 정상회담은 레이니와 카터가 기본적인 추진
동력을 만들어 냈다. 사실 그때 클린턴은 아주 미온적이었다. 게다가 카터가 방북한다고 하니까 청와대에서 한국에는 오지 말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카터는 한국에 왔다. 남쪽에서는 냉대를 받다시피 하고 북으로 갔던 카터는 귀국 길에 YS에게 북한 김일성과 정상회담에 대한 합의를 보고 왔다고 전했다. 그제야 YS가 깜짝 놀라면서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정상회담이 내부의
기획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추진되어 갔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카터의 "평화적 개입"으로 정상회담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그렇게 한참 분위기가 올라가고 있는 판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이 사안을 잘 정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 북한에 조문을 가냐 마냐를 두고 이른바 "조문 파동"이 터졌다. 상중에 있던 북으로서는 남쪽의 조문 파동으로 격앙해버리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던 것이다.

20년 전과 지금은 닮은 듯 다르다


김민웅 : 듣고 보니 참 아슬아슬한 고비들이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엎치락뒤치락 이다. 남북관계의 특징이란 것이, 잘 풀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복병이 있게 마련이고, 그럼에도 또 쉽게 무너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하나는 내부에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풀겠다는 동력이 설사 약하거나 없다 하더라도, 워낙 한반도 문제라는 것이 국제적 규정력이 압도하기 때문에 제3의 평화적 개입이 가동된다면 나름대로 활로가 열릴 수 있다고 본다. 평화에 대한 의지를 끌어내는 누군가의 역할이 계속 축적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성과와 실패가 혼재되고 있기는 하지만 20년 동안 북한과 굉장히 많은 대화와 접촉이 축적되어 오지 않았는가? 국제관계도 달라졌고.

 

▲ 대담은 한완상 전 총재 자택에서 진행됐다. 왼쪽부터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한완상 전 적십자 총재 ⓒ프레시안(최형락)


한완상 : 우선 북핵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때 미국이 염려했던 것은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를 이용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하는가였다. 비핵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즉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아무리 국제사회나 미국이 북한을 핵 보유국가로 인정 안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종국적으로는 비핵화를 추구해야하겠지만, 지금의 단계에서는 일단 비핵에서 비확산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또 하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국제적인 평화적 개입의 가능성도 달라졌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이 어떻게 이 문제에 대응할지에 대해 우리 자신이 별로 인식하지 않았다.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어떻게 움직이느냐, NPT체제를 어떻게 지키느냐 등의 문제가 중심이었지 중국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었던 시기였다.

김민웅 : 그렇다. 게다가 중국도 남한에 대한 지렛대가 없었다.

한완상 : 당시 한중 국교가 정상화 된 지 1년밖에 안 됐었다. 서로 경제적인 의존도가 어느 정도 심화될지 예측도 못할 단계였으니까.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중국은 G2의 자리를 확실히 굳혔다. 여기에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도 크게 달라진 점 중 하나다. 미국은 2011년 말부터 소위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을 언급하며 대외정책의 중심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옮긴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에 따르면-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에 따라 다르지만-민주당은 대중국 견제를 위한 포위망을 전제로 하면서도 포용과 협력의 입장도 취할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만치 중국이 가진 경제적 파워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극복하고 평화, 안정을 가져오는 데 대단히 중요한 변수가 됐다. 지금은 미·중이 어떻게 공조해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관건이 된 셈이다. 공조 방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북에 대한 제재를 세게 가하는 방법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대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 있는데 지난 한 달간은 중국이 미국과 제재를 하는 쪽으로 공조를 했다. 그러니까 북한이 불쾌하고 불안해했다. 북의 고강도 대응은 그 불안의 표출이다.

중국에 대한 북한의 신뢰는 불안정한 측면이 있다. 북한은 2006년 김정일 위원장이 후진타오의 요청대로 남방순회를 하고 상하이를 보면서 자신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돌아갔다. 북한의 경제개방 계획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극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그런데 실천하는 과정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임명한 신의주 경제개발특구의 책임자 양빈을 중국이 감옥에 넣으니까 북·중관계가 냉각되고 말았다. 당시 중국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신의주 특구에 미국 자본까지도 수용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것이 혹 동북 3성에 대한 북한의 전진기지 마련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잘 따지고 보면 이때 김정일 위원장의 신의주 특구 기획은 오히려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의 의미가 컸다는 느낌이다.

결국 북·중관계가 속으로 곪아 들어가면서,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이 평화회담 주체를 3자 혹은 4자로 하자는 이야기까지 거론하게 된 것이다. 주체를 3자로 하자는 얘기는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은 결코 뺄 수 없으니 결국 중국을 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북한은 중국에 대해 내심 불만과 경계심이 있었다. 그러다가 5~6년 이후 현재 상황이 발생했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는 데 이번에는 G2가 힘을 합치는 것을 보고 북한 엘리트, 특히 김정은 제1비서는 2006년 당시 아버지의 마음을 역지사지한 것 같다.

김민웅 : 20년 전과 지금의 차이가 좀 있는 것이, 예를 들자면 김영삼 정부 때는 북한에 김일성이라는 절대적인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힘이 존재했다. 김정일 위원장도 김일성 이후의 북한체제를 빠르게 안정시키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났다. 이런 요소들이 남북관계의 안정성에 기여를 했던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점에서 정권 초기의 취약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지속적인 자극을 통해 북의 대응 능력을 시험해보려 하고 김정은 정권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는 수준으로 가는 상황이다. 한반도 정정 불안이 이렇게 쌓이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남이든 북이든 안정적으로 체제를 이끌고 가면서 평화정착의 힘을 만들어내는 일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완상 : 1993년 1차 핵위기 때 김일성이라는 중심인물이 있기 때문에 안정적이라고 하셨는데, 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권 취임사 보고 감동했다는 김일성 주석이 NPT 탈퇴를 선언한 것을 보고 당시 정세를 김일성보다는 군부가 장악했다고 봤다. 물론 김일성에게는 군부를 장악한 김정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미 그때 권력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체제의 안정성은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0년 후인 지금의 김정은이 얼마나, 어느 정도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지난해 12월 12일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월 12일 핵실험, 이 두 가지가 김정은의 리더십을 공고화시키는 데에는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김정은 체제가 이 두 차례의 실험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강경한 발언도 나오는 듯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강경한 발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가 이다. 미국은 이번 훈련을 통해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핵과 관련한 신(新)무기 3가지를 선보였다. 괌에서 발진한 B-52 폭격기는 신무기는 아니지만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을 때도 이에 대한 북의 공포심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6년 판문점 미류나무 도끼살인 사건 당시 미군 장교의 죽음에 분노한 키신저는 핵무기를 탑재한 B-52를 휴전선 부근까지 보낸 적이 있다. 이틀 후 김일성은 미국에 대해 사과성명을 냈다.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위협적인 무기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폭격기가 날아왔고, 스텔스 폭격기인 B2가 미국 본토에서 한반도 영공에 진입했다. 또 F-22 전투기는 일본의 가데나(嘉手納) 기지에서 한반도로 출격했다.

그런데 무기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그 출격지가 매우 주목된다. 미국의 최첨단 폭격기와 전투기들이 괌에서, 미국 본토에서, 그리고 일본의 미군기지에서 날아왔다. 미국은 북한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대해 '우리는 어디서든 발진할 수 있고 짧은 시간 내에 목표지점을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미국은 글로벌 체제를 새로운 무기로 관리할 수 있다고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대단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 공포심 앞에서 김정은 제1비서가 과잉 대응을 하는 것이 아닌지 싶기도 하지만 그런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현 사태의 해법을 찾는데 일차적으로 필요한 시선이다.
 

▲ 미국 B-2 스텔스폭격기 ⓒ뉴시스


김민웅 :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는 북한이 반발하는 맥락을 '역지사지'를 통해 판단하는 시도 자체를 '종북'이라고 낙인찍는다. 방금 말씀하신 시선의 문제는, 그로써 북의 행동 방식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동기를 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자는 것 아닌가. 그래야 해법도 정확히 나올 것이다. 개인적 갈등과 대립에서도 상대의 대응에 깔려 있는 심리적 동기나 상황적 요인을 객관화시켜보려는 노력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유독 남북관계만큼은 그런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면 날이 갈수록 갈등이 깊어질 것만 같다.

한완상 : 우리나라 사람이야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지 않았나. 사이버 해킹도 북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런데 최근 희망의 조짐이 보이는 것이 미국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존 케리 국무장관의 발언이다. 이들은 이번에 미국이 신무기를 공개한 것은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방어적 성격인 동시에 남한의 대북 강경대응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것처럼 언론에 흘리고 있다.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보호할 테니 남쪽이 북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응한다든가 또는 핵무기 개발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다.

김민웅 : 남쪽의 대응이 강경해지지 않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본질적으로 북의 반발을 일정하게 누그러뜨리면서도 여전히 신무기 과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와 동시에 남쪽도 관리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지배전략이 가지고 있는 특성 아니겠는가.

한반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드나

김민웅 : 그런데 이는 결국 상황의 주도권은 미국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인데 그 주도권의 성격이 문제라고 여겨진다. 북한 내부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과 핵 탑재가 가능한 스텔스 폭격기로 정밀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등이 북한의 반발 강도를 높이고 있다고 보면, 미국은 긴장도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그 주도권을 발동해야 할 텐데 아니지 않은가?

과거의 경험상 시기적으로 놓고 보면 한반도 상황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이 5, 6월 국지적 충돌이다. 이런 시기적 변수와 현재의 긴장 분위기가 겹쳐지면 만만치 않은 상황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또 전쟁이라는 것은 뭔가 미리 준비해서 체계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작은 우발성이 큰 전략의 틀과 맞물려 점화되면 감당이 안 되는 것 아니냐. 이전과 다른 것이 지금은 위기가 발생했을 때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안전장치, '핫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위기 시 발동시켜야 할 핫라인 장치들이 하나하나 해체되어 왔다. 북한이 3일 개성공단 관련 조처도 여기에 포함되는 사례로 보인다. 이렇게 되다보면 결과적으로 대화의 공식, 비공식적 통로 자체가 소멸되고 말 텐데, 이것이 우발적 충돌에 평화적 해법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라지게 하는 시스템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완상 : 현재 상황을 꼭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김민웅 : 비관적으로 보겠다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데 여기에 제동을 거는 힘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 관측을 할 만한 요소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여쭙는 것이다.

한완상 : 그래도 한두 가지 좋은 징표가 있다. 북한이 이전과 달리 다소 강하게 나오는 것에 대해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도발의 의지를 보인다기보다는, 최악의 상태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나오는 겉보기의 강경대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4월 말이 지나면 사태가 호전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군사훈련이 4월 말까지로 예정돼 있는데 너무 길다. 하지만 이 훈련이 끝날 때까지 북한은 좀 거친 반응을 계속 보일 것이다. 훈련이 끝나면 조금 다른 국면이 전개될 것으로 본다. 물론 4월 내내 북한은 개성공단을 관리하면서 개성공단에 들어가는 생산 원료 물자를 실은 차량도 못 들어가게 할 것이다. 언제까지 못 들어가게 할지 지켜봐야겠지만.

또 하나 면밀하게 읽어야 할 것은 김정은이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하면서 경제개발과 핵무기 개발을 병진하겠다고 한 사실인데 이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과거 김일성, 김정일 정권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논리적이고 대담한 발언이다. 왜그러냐 하면, 김정은은 핵개발을 하면 국방비가 싸게 든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즉 군비를 줄여 살림살이를 피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핵개발과 경제 발전을 상호 보완적 관계로 제시한 것이다. 핵무기 개발이 북한의 경제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이야기다.

원래 북한이 핵을 이야기할 때의 논리는 '미국과 협상을 해보니 말로는 안 되더라. 핵무기를 만들어야겠다. 핵무기를 만드는 원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기가 있어야 저 사람들이 우리말을 존중해준다'는 것이었다.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유리한 방법을 개발해낸 것이 핵 개발이었다.

여기에 우리와 서방은 왜 북한 인민들을 굶겨가면서 핵개발 하느냐'라는 논리로 맞섰다. 그런데 이번 김정은의 발언은 우리의 이런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북한 인민들을 잘 먹여 살리기 위해라도 국방비 아끼려고 핵개발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재래식 무기 개발로 드는 비용을 줄여 이걸로 북한은 안전보장도 하고 경제문제도 동시에 푸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4월 이후 남북관계가 나아질 것을 예고해주는 또 하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김민웅 : 그 메시지를 좀 더 깊게 해독해보자면, 그래서 '현재 김정은 체제는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김정은 체제는 경제적 안정과 발전을 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국제정세의 불안요인이 풀리지 않기 때문에 핵무기 프로세스를 가동을 하고는 있지만 가동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라고 말해도 되나? 결국 그러면 안전보장의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는 지점에서 동북아시아의 경제권에 적극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내다본다면 그것이 고리가 돼서 국제관계에서 여러 가지 평화적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을 것 같다.

한완상 : 우리 사회에서는 잘 주목하고 있지 않지만, 김정은은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통합력을 보여주는 "지혜"가 있다. 우선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계승해서 인민들에게 쌀밥과 고깃국을 먹게 하는 소망을 자기가 이룩하겠다는 경제 분야의 목표가 있다.

다음으로 자기 아버지인 김정일의 이미지 계승이다. 김정일은 군부를 확고하게 장악했다. 이렇게 군을 장악하는 능력을 김정일에게 이어받고 싶은 것이다. 김정은은 이 위기를 통해 그 두 가지, 경제와 정세안정을 얻으려고 한다.
 

▲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이게 결국 북한이 계속 지향해 왔던 것인데, 남한이나 미국과 협상할 때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평화체제수립이었다. 이게 핵심이다. 평화체제 만들면 안전보장이 따라오지 않나. 그리고 경제발전의 토대로 만들고 말이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만들고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까지 가려는 것이다. 이걸 잘 파악해야 대북관계의 기준과 지침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핵 비확산 문제에 대해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핵 원료를 만드는 것은 힘으로 옥죄는 것이 가능하지만, 비확산의 문제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관리범위가 확장되고 통제불가능의 상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가장 우려한다. 김정은은 5월이 되면 미국의 우려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입지를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협상 국면으로 몰고 갈 것이다.

김민웅 : 그렇게 되면 좋은데 염려가 되는 사항이 있다. 미국으로서는 협상이 불가피하다면 그 전에 상대방의 협상력을 최대한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들의 군사적 위협의 능력수준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다. 협상 전에 이 수위를 서로 어떻게 조절하면서 풀어나갈 것인지가 주목되는 고강도의 '긴장된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또 한국전쟁은 통상 3년이라고 했지만 전체 기간은 37개월, 휴전 협상만 25개월을 했다. 휴전협정 기간에 전투를 일단 멈춘 것이 아니라,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협상 이전에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걸 보면 결국 각자가 협상력을 최고로 높이기 위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형이 여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상대의 협상력을 줄이기 위한 과정에서 분쟁이나 희생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그 다음단계인 협상으로 아예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평화적 개입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주도권을 쥐고 평화적 개입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한완상 : 협상 원칙과 신뢰문제라고 생각한다. 클린턴부터 오바마까지 20년 동안 민주당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 내 정치 환경에 있다. 미국 내 공화당이 이제는 굉장히 원시화가 됐다. 미국 정치가 후퇴해서 근본주의, 원리주의적인 대결이 돼버렸다.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국면에서 거의 옛날 한국 정치문화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 현 정부가 공화당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오바마 1기 때는 하나도 진전 못하고 한반도 정책은 MB한테 다 맡겨버리지 않았나. 이른바 '전략적 인내' 5년에 북한은 로켓 쏘고 핵실험 성공했다. 이제는 햇볕정책이 핵무장을 강화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퍼줘서 핵무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결주의만 강화한 결과다.

그런데 오바마가 이제 2기에 들어왔다. 자신의 역사적 유산을 생각해야 할 단계다. 오바마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수준까지는 못 가더라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북한의 강경책을 강자의 입장에서 포용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오바마는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와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 '쥔 주먹을 펴게 하겠다'고 했는데 지금 북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악수를 하지 않고 대결적 관점에서 상호주의적인 입장에서만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텔스기는 북한에 대한 공격신호가 아니라 북의 도발에 대한 방어라고 하면서 평화적 접근의 제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신념을 갖고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북한과 협상이 확 트일 것이다.

북한의 벼랑 끝 강경책의 핵심은 대화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베트남과 중국처럼 대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도 중국과 베트남처럼 개발해보자' 이런 말이다. 지난 3차 핵실험 이후 카펜터라는 사람이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썼는데 '핵 갖고 있는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라는 주제였다. 그는 '북한의 핵이 부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 비확산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해법을 선택하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식은 과거의 사례를 들었다. 지난 1971년 닉슨이 마오쩌둥을 만나 핑퐁외교를 했다. 당시 반공주의자인 닉슨이 중국을 인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의 미ㆍ중관계를 정상화시켰고, 이 미ㆍ중관계 정상화가 소련과 대결에서 대단히 큰 전략적 자산이 됐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96년 클린턴이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베트남을 우방으로 만들면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미·중간 영향력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던 것을 언급했다. 이처럼 오바마는 닉슨과 클린턴의 결단과 비슷한 방식으로 북한을 미국의 우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인규 : 일전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그런 지적을 했었다. 미·중간 균형에서 북한을 미국 쪽으로 끌어들이면 미국에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라는. 즉 미ㆍ북간 관계정상화가 미국에도 대단히 유리한 전략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민웅 : 맞다. 사실 북한은 미국에 전략적으로 이득을 주겠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온 것이 아니었나. 어찌 보면 이전의 북한을 떠올리면 상상할 수 없는, 친미적 국가로서의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친미란 종속적 친미와는 다른, 미국과 상당히 친한 나라가 될 가능성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대중관계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한반도의 두 세력을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그걸로 대중국 관계에서 지렛대의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고,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꾀할 수 있다.

한완상 : 오래 전부터 나도 그랬고 카펜터도 최근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좋게 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정권 초기부터 기틀을 확고히 잡고 신념을 가지고 하지는 못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금융위기를 해결해야 했고, 노무현 정부시절에는 부시의 강경한 군사적 대외정책이라는 여러 상황적 요인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당장 시급하게 발등에 불이 떨어질 판인 국내적 위기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정부가 고강도의 압박정책으로 한반도를 불안하게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이 60년 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역사적인 업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권고하고 자극을 주기에 가장 좋은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이다. 국내 보수 세력도 이러한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에 대해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김민웅 :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제안에 관해서는 잠시 뒤 조금 더 정리해보도록 하자. 아까 말씀하신 대로 북한이 미·중, 미ㆍ베트남 같은 형태로 자신들과 미국의 미래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신의주에도 금융 특구를 만들어 미국의 금융자본을 들여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지 않았나. 원산의 미군기지조차 가능성까지 흘렸던 상황도 있었다. 북한의 특구에 미 금융자본이 들어오면 미국에 있어 북한은 공격대상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전환된다. 한반도 냉전체제를 근본적으로 깨는 엄청난 변화다. 그런데 북이 이런 전략을 구사했지만 미국이 이걸 잡아서 활용하지 않았고, 결국 평화체제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지금 우리는 보통 이 상황을 '핵문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평화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다. 중요한 말씀이다. 사실 핵무기를 만들었던 세계 여러 나라들과 달리 북한 핵무기 관련 정책은 특별한 조건이 있었다. 핵보유 국가 모두가 다 핵 보유의 영구성을 주장했는데 북한은 미국과의 안전보장만 이루어지면 핵 포기할 수 있다는 조건부 핵무기였다. 이것은 핵무기 역사상 이례적인 선언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떤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미 핵보유국가가 된 상태에서 이것이 단지 협상력으로 존재하고 폐기될지, 아니면 그대로 갈지 말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협상은 늘 그래왔었다. 지난 시기에 미국은 이 과정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한완상 : 2007년 2.13합의, 10.4합의가 됐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잘만 하면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라는 기대 말이다. 그 때 까지만 하더라도 평화 체제를 먼 미래의 일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 보장만 된다면 핵을 내려놓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 한완상 전 적십자 총재 ⓒ프레시안(최형락)

91년인가 남북기독자협의회 때,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하던 그 기간에 북한 유엔 대표부 대사를 지냈던 한시해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북한하고 미국하고 관계가 좋아지는 쪽으로 미국 친구들에게 설득 좀 해달라." 그 때가 91년 5월로 기억하는데 그런 마인드를 북한의 지도자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과 친해지는 것은 당연히 여러모로 북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지금 북한은 '우리 이미 핵 가졌으니까 비핵 이슈 날아갔다. 비핵화 논의는 지금 적절치 않다. 단지 비확산에 대해서 협의를 할 수 있다. 이 협의의 기준은 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가는 협상을 핵보유국의 위치에서 하겠다는 의미다. 북으로서 가장 절박한 현실 문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평화회담인데 그것을 위해 핵개발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오바마 설득해야

김민웅 : 핵무기가 협상용의 의미 이상으로 발전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핵무기 폐기와 비핵화가 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큰 그림이 안 그려져 있다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본다. 60년 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꾼다는 그림이 있다면 모든 것은 거기에 수렴되는 과정으로 들어갈 텐데. 평화협정체제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이 과정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로 보인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대로 박근혜정부는 그 국내외적인 위치상 잘만 하면 평화체제로 넘어갈 수 있는 기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박근혜정부에 대한 제안의 차원에서, 어떤 로드맵을 설정해야 할까?

한완상 : 국제정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미국의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정책에 한국과 일본만 들어가 있다. 여기에 중국이 들어가도록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5월에 방미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를 만나면 우선 '아시아로의 귀환'은 참 잘한 결정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의 중심은 한국, 중국, 일본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여기에서 중국을 뺐다는 것은 미국의 대외 정책 큰 그림에 있어서 결격 이유가 된다고 알려줘야 한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체제로 가는 데 중국과 미국이 갈등을 하면 한반도의 평화는 당연히 오기 힘들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이 서로 땅을 갈라 먹으려고 싸울 때 우리는 항상 갈라지고 불안했다. 강대국의 대리전쟁을 하다가 지금 한반도가 이렇게 됐는데 이걸 회복하기 위해 평화체제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을 아시아 정책에서 중심으로 삼아 협력체제를 만들라고 미국한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워싱턴과 베이징의 사이가 좋아야 남북간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미국에게 동아시아의 평화 주도권을 강화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도 생각할 바가 있다.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에 대한 수정이다. 이 정책은 사실 2007년 10.4 선언으로 끝난 것이다. 북한은 미국, 중국과 좋아지려면 남측과도 좋아져야 한다. 일본과 관계 정상화도 필요하고. 변화된 국제정세 위에서 사고해야 한다.

김민웅 : 여기서 하나 짚어볼 것은 교차관계 불균형의 문제다. 냉전 종식 이후 우리는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했는데 북한은 미국, 일본과 여전히 국교가 공식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교차 승인의 구조가 불균형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은 결국 북의 고립을 강제화하는 것이자 한반도 불안정 요인이 증폭되는 것이다. 이 문제와 평화협정체제가 함께 풀려나가야 동아시아 평화의 기본구조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한완상 : 그렇지 않아도 바로 그 교차승인의 국제관계를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얼마 전 방한했던 도널드 그렉과 나누었다. 그가 주한 미 대사했을 때가 노태우 정권 때다. 노태우 정부에서 가장 칭찬받을 만한 일이 북방정책인데, 이 정책이 사실 아버지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탈냉전을 하면서 그 여파로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그렉이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 교차승인의 출발점이 사실 여기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고 지난 3월초 그렉이 서울에 왔을 때 내가 물었다. 서울과 베이징, 서울과 모스크바는 관계 정상화되고 잘 되는데 평양과 워싱턴, 평양과 도쿄는 왜 안 된 거냐고. 그랬더니 그렉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더라.

묻는 김에 하나 더 물었다. 왜 1992년 가을에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냐고(당시 남북대회 진전을 위해 중단하기로 약속했던 팀스피릿 훈련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개됨으로써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이듬해 북한이 NPT를 탈퇴하는 주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당시 청와대 안보수석을 했던 분한테 물었더니 남북 협상 시 팀스피릿 훈련은 향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옵션 중에 하나였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건 남북 협상의 원리상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렉은 당시 국방장관인 딕 체니였고 그가 팀 스피릿 재개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결국 네오콘을 비롯한 미 공화당의 매파들은 한반도 상황의 안정을 바라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래서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세력, 즉 남북관계가 악화되어야만 이득을 보는 세력들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런 힘들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미국 정부가 노력해야 하고 우리도 그걸 미국에 설득해야 한다. 북한이 미국, 일본과 관계 정상화하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 핵문제는 그냥 계속 너 먼저 핵 포기해라 하는 식이 아니라, 이런 구조와 맥락 속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답일 것이다.

김민웅 : 말씀을 들으면서 정리해보자면 두 가지로 압축이 될 것 같다. 하나는 평화협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초석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 하나는 이렇게 동북아시아의 교차승인관계가 불균형하게 되어 있는 것 자체가 아까도 언급했지만 북한을 고립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따라서 이 부분을 풀면 자동적으로 교차관계의 불균형이 만들어내는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국제관계망이 생겨난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평화협정과 교차승인의 균형을 토대로 하는 아시아로의 귀환"이라는 것을 중심에 세우면 동아시아의 정세는 일변할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하나의 궤도 위에 올려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한완상 :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설득에 있어 중요한 것이 있다. 한중 관계 20년 동안 양국의 경제관계가 강화됐다, 우리에게 미ㆍ일 시장을 합친 것보다 중국시장이 더 커지고 있다. 결국 중국과 우리의 총체적 관계가 돈독하게 되어야 남한의 경제적 안정과 평화,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과 평화가 올 수 있다, 그러니 이 점을 고려해 달라. 이렇게 박 대통령이 오바마에게 설득해야 한다. 북한과의 적대적 긴장은 이를 해친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즉, 미국이 중국과의 안정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우방인 한국의 안정에도 긴요하고 그 안정은 결과적으로 미국에 필요한 동아시아의 안정적 기반의 강화에도 크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간 고리로 북한을 평화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야 한다.

나아가 미국이 우리에게 MD 시스템에 들어오라고 하지 말라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거기 들어가는 순간부터 중국과 군사적 대치관계가 된다. 이렇게 되면 당장 경제인들부터 중국시장을 걱정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한국을 MD 체제로 편입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MD 시스템은 중국 봉쇄, 압박 전략이다. 박 대통령은 '우리를 도와서 한반도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미국으로서는 중국과 싸울 이유도 없고 러시아 견제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해서 남은 힘을 중동 문제 푸는 데 집중할 수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미국으로서는 제일 골치 아픈 게 이란과 북한의 핵개발이 어떻게 연계되고 상호 강화될 것인지의 가능성 문제다. 북한과의 관계가 해결되면 이 문제는 자동적으로 풀려나간다.

'초당적' 협력이 필요한 때. '박근혜 독트린'을 만들자

김민웅 : 위기의 성격을 이야기했고 이것이 위험강도가 높은 것 같지만 잘하면 길이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전망도 세워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려야 할 그림이 확실해지면 그 그림으로 이 모든 위기상황의 해법을 수렴해보자 라는 이야기로 정리됐다. 그럼 이것을 하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 보면 박근혜정부 내에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냐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국내정치 지형의 문제다. 한반도 평화는 민족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만큼은,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문제만큼은 박 대통령이 진보 보수를 아울러서 지혜를 구하고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동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그렇다면 진보 진영도 박근혜정부에 대한 평가나 자세와는 별도로,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풀어야 할 의지를 가져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남북관계를 위해 애써왔던 모든 힘들이 모아져서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적극 협력하고 그림을 구체화시키는 길이 열렸으면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한반도 평화 정책과 관련해서 박근혜정부를 정말 도울 수 있는 지식과 경험, 동력은 민주 진보진영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박 대통령이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대통령 본인이 인식의 지평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것 같다.

한완상 :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국내정치를 할 때 쓰는 방식을 쓰면 어렵다고 본다. 대외정책, 한반도 정책, 대중, 대일, 대미정책 등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수첩만 바라보면 곤란하다. 통합적으로 인재를 모아야 한다는 김 박사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진보진영에서도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평화협정체제를 만들기 위한 우리 사회 내부의 세력화가 생겨야 한다.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흐름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도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여론이 정부를 비판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 흐름을 받아들여서 정책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청와대나 내각에서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 자신도 남북관계에서 신뢰 프로세스를 하겠다는 건데 정작 이를 위한 태스크포스(TF)가 없는 것 같다. TF를 청와대나 통일부에 세워야 한다. 신뢰 프로세스의 시작은 정상끼리 합의한 것부터 시작해서 남북간 모든 합의를 존중하고 실천하기 위한 실용적 대화 구축을 해야 한다. 더군다나 북한은 할아버지-아버지로 이어져 온 세습 정권이기 때문에 김일성, 김정일이 선언한 것은 최고의 수준에서 신성하게 보는 측면도 있다. 즉, 그쪽에서는 선대가 만들어 놓은 합의에 대한 이행을 더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6.15 선언과 10.4 선언, 우선 이 두 가지라도 실천하는 각론적 실무회담 추진반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이게 곧 신뢰프로세스의 실제적 가동이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해야 할 실무적인 조치는 5.24조치 해소,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이 될 것이다. 이러면서 동시에 정상회담을 실천하는 실무 대화 추진반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적 지혜를 모아서 박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정전협정 종식시키고 평화협정 체제를 만들어서 글로벌 탈냉전을 이뤄야 한다. 한반도의 대결상태가 종식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냉전 종식의 마침표가 될 것이니까.

1989년 부시 아버지와 고르바초프가 몰타에서 탈냉전을 선언했지만 그것은 아직 미완이었다. 글로벌 탈냉전의 마지막 도장을 찍는 세계사적 일을 박 대통령이 중심이 돼서, 오바마 대통령을 끌어들여서 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 확립은 전 세계에 냉전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도장이다. '박근혜 오바마 선언' 혹은 시진핑까지 함께, 즉 남북한과 미ㆍ중까지 함께 평화체제 선언을 하는 거다.

김민웅 : '박근혜의 평화체제 독트린'이라는 형태로?

한완상 : 바로 그거다. 1993년 통일원 장관 취임 후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이 한반도 탈냉전 선언이었다. 이른바 '김영삼 독트린'이다. 이걸 하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접게 됐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햇볕정책으로 이어지더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한 거 보면서 "그때 잘했으면 YS가 받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93년 5월 부총리 특사 제의에 포괄적으로 문제를 해결, 비핵화 선언 남북 합의서, 최고위급 실무자 대화 등등을 거치면서 내가 당사자로 지목됐다. 그래서 함부로 나서질 못한 측면도 있었다. 내가 나섰다면 사실 보수진영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고. 진보진영 인사는 그런 점에서 국내 정치와 이념의 지형상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김민웅 :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굉장히 유리한 것 아닌가?

한완상 : 그렇다.

김민웅 :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 박 대통령이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뭐가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에는 보수세력의 공격을 신경 써야 했었는데, 박근혜는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라도 어떻게 하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한완상 : 지금은 바른말 해줄 수 있는 사람, 쓴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민웅 : 적어도 그걸 위해 남북간의 교착과 위기 상태를 해결하는 문을 따는 조치 정도, 일을 좀 풀 수 있는 사람은 없나?

한완상 : 안타깝지만 주변에 별로 그런 사람 없는 거 같더라. 청와대에서 원로 모임 보니까 뉴라이트 쪽 사람들만 불러서 듣더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것 같다. 근데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행동방식을 보면, 위기에 빠진다는 위험을 느낄 때 그 반대로 확 돌아서는 순발력은 대단한 것 같다. 지난 선거 때도 경제민주화 같은 야권의 성과물을 자신의 자산으로 그대로 가져가지 않았나.

박인규 : 본디 위기란 위험과 기회가 함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보면 최근 수개월 동안은 한반도의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위험 상황이지만 우리가 잘 대처하기만 한다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수십 년 묵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누가 현 상황을 깨는 주도자가 될 것이냐는 것이다. 1994년에는 카터가 그 역할을 했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기회를 놓쳤다. 이번에는 오바마인가, 아니면 한국의 박근혜인가. 두 분의 말씀은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건데, 과연 북·중이 앞에 말한 큰 그림을 보고 대담한 발상을 추진할 수 있는지 우려스럽다. 오히려 한 전 총재가 걱정한 것처럼, 북한의 핵 위협을 막아달라며 미사일 방어망을 비롯한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면서 남북관계 악화는 물론이고 미ㆍ중간 대결의 인질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김민웅 : 보수세력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일동 웃음)

한완상 : 내가 걱정하는 것은 두 가지인데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우리가 제안한 것을 소화할 만한 확고한 자신의 가치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위기에 몰렸을 때 순발력 있게 유턴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이건 내 가치관이다, 신념이다' 라고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좀 염려스럽다.

두 번째로는 오바마가 염려스럽다. 1기 때는 재선 때문에 못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MB가 한 이야기를 어떻게 저렇게까지 받아들일까 싶었는데 이게 계산된 행위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MB의 말을 들어주며 FTA를 통해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얻어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역사적인 유산을 걱정해야 할 집권 2기가 도래한 상황에서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
 

▲ 한완상 전 적십자 총재 ⓒ프레시안(최형락)


미국은 시퀘스터(자동예산삭감) 때문에 국방비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한국이나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군사비용을 해당국에 넘기려고 할 것이다. 또 어떻게 하든지 중국이나 한국에 무기를 팔려고 할 것이다.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장사니까. 그래서 긴장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박 대통령에게 무기 사달라고 부탁할 가능성도 높다. 일본과 한국의 국방예산을 많이 채택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박 대통령을 설득하고 박 대통령도 거기에 동조하면 우리가 계속 끌려가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김민웅 : 사실 최근의 상황도, 미국의 군수산업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한 군사적 긴장의 지속적 창출전략과 맞물려 있지 않은가? 무기 체제의 증강이라는 방식으로 전쟁체제가 더 강화되는 쪽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득의 논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완상 : 기본적으로 오바마의 역사적 유산은 평화라고 박 대통령이 크게 평가해줘야 한다. 또 그런 점에서도, 박 대통령이 오바마에게 일본과 우리와 관계가 독도와 위안부, 역사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 미국의 대외정책인 아시아로의 귀환에도 결함이 생긴다고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극우세력이 북한을 미워한다고 해서 일본 극우세력을 좋아하는 거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한ㆍ일간 역사적 문제는 심각한 문제고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중국을 포위한다는 구상의 한ㆍ미ㆍ일 구축은 더욱 안 된다. 이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동아시아의 구성원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는 평화정책의 수립이 오바마 정부의 세계사적 기여라는 점을 적극 설파해야 한다.

케네디 딸을 주일 대사로 보낼 것 같다는 외신 보도를 봤는데, 케네디 딸 정도면 미국에서는 상징적인 거물이다. 영국이나 중국쯤에 보내야 할 인물인데. 이 인물을 일본에 보내는 미국의 결정을 보며 우리는 대체 뭔가 싶다. 이런 걸 보면 미국정부가 우리를 너무 홀대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미국에 불만도 표현해야 한다.

이번에 박 대통령이 방미할 때 좋은 참모를 데려가서 오바마와 이야기할 때 이런 이야기들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본다.

김민웅 : 대통령 본인에게 큰 그림이 있고 그림에 맞는 사람을 앉혀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박인규 대표가 압축했듯이 한반도 상황이 위험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잘 돌파하면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완상 :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을 빼고 모든 대통령이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역사에 남는 일을 하고 싶어서 대체로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도 7.4 공동선언 만들지 않았나. 어디까지가 정말 진심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치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안됐지. 진보적인 두 대통령도 사실 수구세력의 반대로 크게 평화기반을 다지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나마 정상회담을 하기는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역사적 행운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찾아온 것 같다. 본인이 잘 생각하기에 따라서 평화 통일이라는 역사적 위업의 성취 기회가 박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박 대통령은 주변에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따랐던 냉전 수구세력들의 이야기를 참고는 하시되 귀를 기울이지는 마시고, 전 세계적인 평화체제, 탈냉전을 통한 전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이루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이 동북아시아로 모여 있다. 미국과 중국의 힘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일본과 러시아도 가세해 있다. 이 한복판에 우리가 있다. 남북이 사실상의 통일 상태를 이룩해서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국가연합단계까지 진입해서 통일의 효과가 나오면 우리는 세계의 G4가 될 수 있다는 벅찬 상상이 되지 않는가? 8천만 인구에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넘는 나라가 미국, 일본, 독일밖에 없지 않나. 이런 절묘한 역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박 대통령 재임 기간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신념과 자신을 가지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쪽으로 공조를 취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 지역의 평화를 최우선의 가치와 목표로 놓고 우리의 경제적, 군사적 안정을 위해 보다 단호한 태도로 의사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김민웅 :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시기에 어떻게 보면 우리 나름만의 장밋빛 기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 비관해도 미래에 대한 의지를 낙관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이 시대의 한계를 밀고 나가는 태도가 아닌가 한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던 진보진영이 오늘의 현실에서 박근혜정부의 평화정책에 힘을 보태겠다면, 대통령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한반도의 평화는 진보 보수를 떠나 모두의 생존과 미래가 걸려 있다. 전쟁의 먹구름을 뚫고 평화의 햇살이 환히 비치기를 우리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오늘 긴 시간 동안 감사하다.

 
 
 

 

/이재호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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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기관지 <근로자> 논설을 통해 본 북의 경제구상

 

현실 요구에 맞게 경제관리방식 개선
노동당기관지 <근로자> 논설을 통해 본 북의 경제구상
 
 
2013년 04월 08일 (월) 05:28:51 정일용 <민족21> 편집국장 tongil@tongilnews.com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다양한 논의 진행

북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와 ‘키 리졸브’ 한미군사훈련 등으로 긴장된 정세 속에서도 10년 만에 전국 경공업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 참석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연설한 내용은 지난해 북 내부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제정책 방향을 담고 있다. 이것은 지난해 노동당 비공개 내부자료로 발간된 이론기관지 <근로자>를 통해 확인된다.

지난 3월 18일 북은 평양에서 10년 만에 전국 경공업대회를 열고 경공업 발전을 통한 인민생활 향상을 강조했다. 이 대회에 직접 참석해 연설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경공업 공장에서는 생산을 정상화할 데 대한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며 “공장, 기업소에서 생산을 정상화하는 것을 선차적인 과업으로 틀어쥐고 인민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소비품을 다량생산하며 기초식품과 1차 소비품 생산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10년 만에 경공업대회 개최

농업전선과 경공업전선을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주공전선으로 설정한 북이 지난해 농업분야에서 이룩한 증산 성과를 기초로 올해에는 경공업 발전에 힘을 더 쏟겠다는 정책 방향을 시사한다.

특히 김 제1위원장은 경공업 발전을 위한 재원조달과 관련해 “중공업의 위력도 인민의 생활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며 단천지구 광산들과 공장, 기업소를 뚝 떼어 전적으로 인민생활자금을 보장하는데 복무하도록 해주셨다”라고 처음 밝혀 눈길을 끌었다. 경공업 발전을 위해 단천지구에서 생산되는 마그네사이트와 연.아연 등 유색금속을 수출해 벌어들인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김정일 위원장시절에 “부강할 조국의 래일을 위하여 나라에 있던 돈의 전부라고 할 있는 귀중한 자금을 최첨단CNC기술을 개발하는데 모두 돌리도록 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한 것과 유사하다(최상건,〈지식경제강국에로의 력사적전환의 길을 열어놓은 위대한 당〉<근로자>2012년 제10호).

또한 “일촉즉발의 첨예한 정세가 조성된 속에서도 당 중앙은 전국 경공업대회를 열도록 했다”는 김 제1위원장의 언급은 북이 긴장국면에서 대화국면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대화국면으로의 전환 모색?

경공업 발전방향과 관련해 김 제1위원장은 “이미 마련된 생산 잠재력을 최대한 남김없이 동원하여 인민소비품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며 현대화, 과학화를 힘있게 추진하여 경공업을 세계 선진수준에 올려 세우는 것”을 경공업분야에서 추진해야 할 중심과업으로 명시했다.

이를 위해 1) (필요한) 인민생활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과 수출의 일체화를 실현하고 다른 나라들과의 가공무역을 확대발전시키며, 2) 생산공정들을 현대적으로 개조하고 현대적인 인민 소비품 생산기지들을 많이 건설하고 원료의 국산화를 실현하며, 3) 지방공업을 발전시키고, 4) 8월3일 인민소비품생산운동처럼 질 좋은 소비품들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전 군중적 운동, 전 사회적인 사업으로 전개 등이 ‘선차적인 과업’으로 제시됐다.

또한 김 제1위원장은 생산 정상화와 함께 인민봉사사업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공업공장들과 상업봉사기관들에서는) 생산된 제품이 비법적으로 거래되는 현상”을 없애고 “경공업부문 일군들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여야”하며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려는 생각보다 다른 나라에서 상품을 들여다 팔아 돈을 벌 생각을 앞세우는” ‘수입병’을 고쳐야 한다고 언급했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기본으로 경공업 생산과 지방공업을 정상화하고, 경제관리 및 인민봉사업을 개선해 불법 거래를 근절하고 인민생활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김 제1위원장의 이같은 언급은 지난해 북 내부에서 논의된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북에서 발간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이론기관지 <근로자>에 실린 글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실 반영한 경제관리개선 주장

가장 주목되는 글은 리영민이 쓴 <경제관리방법을 개선하는 것은 현실발전의 절박한 요구>(<근로자>2012년 제7호)이다. 그는 지난해 김정은 제1위원장이 “경제관리방법을 결정적으로 개선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경제관리방법의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그는 기존의 집체적 지도, 계획화 등의 원칙을 살리면서 실리 추구, 수요와 공급의 균형 보장 등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변화된 환경과 조건, 혁명발전의 요구에 맞게 우리 식으로 경제관리방법을 개선완성하는 것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간곡한 유훈이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확고한 결심이고 의지”라고 강조해 앞으로 경제관리개선이 꾸준히 이뤄질 것임을 시사했다.

본보기 사업과 경험을 일반화

지방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방향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평안북도 창성군 림진섭 당 책임비서는 <지방공업의 새로운 변혁의 력사를 펼치신 불멸의 업적>(<근로자>2012년 제8호)이란 글에서 “본보기를 마련하고 그 성과를 일반화하는 것은 우리 당의 전통적인 사업방법”이라고 강조하면서 창성군이 이룬 성과를 소개했다.

“지방당 및 경제일군 창성연석회의 50돐(2012년)을 계기로 식료공장과 직물공장을 비롯한 군안의 모든 지방공업공장들이 1~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난 세기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리고 지식경제시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며 “산을 낀 곳에서는 산을 잘 리용하고 바다를 낀 곳에서는 바다를 잘 리용할데 대한 방침도 지역적 특성에 맞게 의료원천을 탐구하고 지방공업공장들의 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할 것을 바라는 당의 의도의 반영이다”는 것이다.

지방 경공업 발전과 관련해 북은 군(郡)의 역할도 강조했다. 황해북도 연탄군이 대표적인 모범군으로 거론됐다. 연탄군의 성과에 대해 리항걸 군당 책임비서는 <군은 오늘의 총공격전의 중요한 전구>란 글에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방산업공장들도 일부 설비와 공정을 더 차려놓은 식으로가 아니라 새 세기에 맞게 완전히 일신하여 생산능력을 평균 3배이상 높이게 하였다”며 “우리 군 주민들은 군에서 생산한 된장, 간장, 기름, 비누를 비롯한 1차소비품들과 갖가지 과일, 남새들을 달마다, 철마다 공급받고 있으며, 자연수에 의한 수도화가 전면적으로 실현되여 물 걱정을 모른다. 탁아소, 유치원, 학교들에 대한 콩우유공급이 정상화되고 있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자랑했다.

농업분야의 경영자율성 확대

농업분야에서는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태천군 은흥협동농장, 남포시 강서구역의 청산협동농장 등이 본보기 단위로 언급됐다.

“최근 년간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과 태천군 은흥협동농장을 비롯한 많은 협동농장들에서는 자기 단위의 실정에 맞게 종자선택으로부터 모내기와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농공정수행을 과학기술적으로 하여 같은 자연기후조건에서도 정보당 알곡소출을 부쩍 늘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며 “지방마다 자기 실정에 맞는 농사방법이 있을수 있는데 자기 지대에 맞는 능률적이며 효과적인 농법이 바로 제일 좋은 농사방법”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지방마다 특성에 맞는 농사'를 강조한 심상복의 글은 지난해 북이 농업분야에서 시행한 개혁조치와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북은 지난해 시범적으로 협동농장에 작물 선택 및 토지이용에 대한 선택권을 대폭 이양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학기술을 생산과 일체화

북은 경공업과 농업 발전을 위해서도 과학기술이 중시해야 하며, 과학기술을 생산에 접목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생산을 밀착시키고 일체화하여 경제의 면모를 지식집약형으로 전환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부문에서 과학기술발전을 강성국가건설을 위한 중대사로, 생산장성의 가장 큰 예비로 보고 여기에 과학기술력량과 자금을 집중하는 동시에 최신 과학기술성과를 제때에 받아들여 경제건설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은 각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에 계획의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면서도 내각책임제를 강화하면서 경제사업의 중앙계획과 규율성은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경제관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내각의 통일적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영호 내각 사무국장이 쓴 〈사회주의경제발전과 내각책임제, 내각중심제〉란 글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각책임제, 내각중심제를 강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경제건설에 대한 당의 령도를 철저히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요구”이며 “내각책임제, 내각중심제는 그 어떤 단위든지 경제사업과 관련된 문제들을 내각을 제쳐놓고 자의대로 처리하거나 더욱이 전인민경제적인 리익을 떠나 개별적인 집단의 리익을 앞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각의 통일적 지도와 '비사회주의적 현상'에 대한 경계

또한 북은 ‘비사회주의적 현상’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고 있다.

“사치와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현상, 술판, 먹자판을 벌려놓으며 안일해이하고 부화방탕하게 생활하는 현상, 불순출판물 선전물을 밀수밀매하거나 보고 류포시키는 현상, 우리 식이 아닌 옷차림과 몸차림을 하고 다니는 현상 등 비사회주의적 현상들은 우리 인민의 혁명적이며 전투적인 생활기풍, 고상하고 건전한 생활방식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으로 사회주이적 생활방식을 흐리게 한다”며 “일군들이 인민들의 생활조건을 보장해주기 위한 사업을 잘하지 못하면 비사회주의적현상을 결코 없앨수 없다. 일군들은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정신을 가지고 인민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뛰고 또 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이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지속적으로 지적하며 이것의 근절을 주장하는 것으로 역으로 그만큼 ‘비사회주의적 현상’이 북 사회에 퍼져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현상을 없애기 위한 대책으로 인민생활 조건 보장 및 일꾼들의 헌신적 복무정신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검열과 단속만으로는 없앨 수 없다는 현실을 북이 깨닫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당 이론기관지 <근로자>에 실린 글들을 분석해 볼 때 북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자립적 경제 건설노선과 사회주의적 경제운영방식을 큰 틀에서 흔들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무역의 확대하고 변화된 현실을 반영해 경제관리방식을 개선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상당한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계획과 자율의 조화, 자립과 개방의 조화, 수요와 공급의 균형 등 어쩌면 상호모순된 정책방향 속에서 북이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다만 현실 요구에 맞게 경제관리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원칙은 확고하게 서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 이 기사는 <민족21> 2013년 4월호에 실렸으며, <통일뉴스>와의 기사제휴에 따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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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원로 김영식 선생 팔순잔치

 

 

 

패륜의 분단 역사를 끝내야 한다!
 
통일 원로 김영식 선생 팔순잔치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4/07 [23: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스스로 김영식의 선생의 아들딸이고자 하는 통일의 자손들 © 이정섭 기자

자하철1호선에서 9호선까지 빠짐없이 돌고 돌며 ‘우리민족끼리 화목 하게’를 외치는 할아버지의 어깨띠에는 “남북이 하나 되어 6.15선언으로 10.4선언 이행으로 우리민족끼리 화목하게 살아갑시다.”라는 구호가 적혀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외치며 분단과 예속에서 벗어나 동족을 적으로 삼지 말고 단군할아버지 자손으로 하나 되어 화목하게 살자고 외치는 ‘통일열차 할아버지’(기자가 붙여본 이름) 김영식 선생의 어깨에 오늘은 띠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덥수럭 하던 수염도 말끔히 깎았다. 김영식 선생에게 4월 7일은 특별한 날이다.
바로 80회 생신이기 때문이다. 김영식 선생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생신 잔치가 7일 오후 1시부터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진행 되었다.

▲ 업는 사람도 업히는 사람도 행복한 모습은 통일조국의 미래의 모습이 아닐까? © 자주민버보 이정섭 기자

기자가 낙성대에 도착하니 웃음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급히 가방에서 시진기를 꺼내 들고 들어가니 김영식 선생을 업고 집안을 한바퀴씩 돈다. 아들도, 딸도, 손주도, 서로 업고 달려보겠다고 등을 들이민다. 과묵하기만 한 선생님의 얼굴에는 행복의 웃음이 가득하다. 업고달리는 알들, 딸, 손주들의 성은 각각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생물학적 혈육이 아니라 정치적 생명체로 굳게 맺어진 동지이자, 혈육이다.

선생이 잔치상에 조용히 앉는다. 선배 동지인 양원진 선생도 곁에 앉고 잔치가 시작 됐다.

김영식 선생님의 얼굴은 행복 속에서도 가느다란 회한과 아쉬움이 흐른다. 아마 조국 분단의 아픔과 분열로 인해 생긴 가족과의 생이별이 선생의 행복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리라.

더욱이 외세에 의해 70년이라는 기나긴 고난의 민족의 수난사가 이어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비수가 되어 선생의 가슴을 후비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기자의 가슴도 아프고 쓰리다.

함께한 동지 선후배들이 이내 눈치를 채고 김영식 선생에게 오늘만큼은 웃어보라고 강요(?)한다.

선생이 실 낱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음이 슬픔으로 보이는 분단이라는 야만의 시대를 어찌 할까?
▲ 친구로, 정치적 생명의 유기체로 함께 해 온 동지들이 조국통일로 김역식 선생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고 결의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오늘 잔치는 양심수 후원회와 민가협,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함께 마련했다고 한다.

십시일반이라고 음식도 여기저기서 준비해 푸짐했다. 음식보다 푸짐한 것은 주고 또 주고 싶은 정이 아닐까?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이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선생님이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이 한분도 안 계신 이곳에서 팔순을 맞이하셨는데 많은 선후배 동지들이 오셨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신 것은 김영식 선생님의 인품이 뛰어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선생님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타고난 도덕의리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로움 속에 실천으로 살아가시고 계신다.”고 선생의 애국애민을 기렸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지하철에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선생께서는 어깨띠를 두르고 지하철에서 통일선전 활동을 하시는데 선생의 행동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공통적으로 가지는 생각은 선생의 애국 애족의 마음이 너무나 깊고 진정성이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 명예회장은 “선생께서는 금강산을 다녀오셨는데 당시에는 고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되돌아 오셔야했다. 얼마 후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했는데 이명박 정권 이후 돌아 갈수 없었다. 정세가 아무리 험악하지만 내년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하시길 빈다.”고 기원했다.
▲ 김영식 선생님과 동지들 권오헌 명예회장등이 축하빵을 자르며 선생의 만수무강과 통일을 기원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축하의 말에 이어 김영식 선생이 답례를 하는 순서인데 갑자기 어깨띠를 찾는다. 하루도 안매면 안되는가 보다. 어깨띠를 두르고 김영식 선생은 이내 전철안의 그 목소리 그 모습으로 대사를 외운다 “단군의 자손 아들딸이라면 우리 화목하게 삽시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민족이 비참하게 살았는데 광복이후 미국이 들어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의 고통 속에 빠드린지 70년이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단군할아버지를 모신 한 자손이면 정신 차리고 행복하게 삽시다. 제 한목숨 편안하게만 살라면 지주에게 달라붙거나 제국주의에 달라붙어 살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고 조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통일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국통일 그날까지 만수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꼭 신파극 대사를 외우듯 줄줄줄 대사가 흐른다.

이어 선후배 동지들의 술잔과 절이 이어지고 구성진 우리가락도 잔치 분위기를 돋운다. 멋들어진 사철가는 선생의 한과 설음을 풀어내는 가락으로 이어졌다. 후배 동지들이 덩실덩실 추는 춤은 마치 재롱잔치를 보는 듯하다. 이 얼마나 가슴 뜨거운 장면인가. 제부모도 멀리하고 내다 버리는 세상에 조국애와 민족애를 가진 동지를 친아버지, 할아버지로 모시고 팔순 잔치를 치르는 통일동지들의 모습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미풍이며 도덕의리이다.
▲ 김영식 선생과 통일동지들이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국가보안법피해자모임 회원들은 눈물로 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편지를 목메임 속에 낭독했다.

조선에서 만든 들쭉술과 도토리 술이 한 순배 돌자 흥이 나고 흥 따라 노래 소리가 낭랑하다.

함께 생활하시는 박희성 선생은 두고 온 아내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다며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을 부르고 김영식 선생은 ‘금강산 타령’으로 화답한다.

동지들은 물론 이웃집 아저씨도 노래와 어깨춤으로 선생의 팔순을 축하했다. ‘분단 조국을 통일 된 조국으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보석보다 귀한 청춘의 시절을 고문과 탄압으로 지세우며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선생의 파란 많은 인생을 어찌 슬픔으로만 보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제 끝장을 봐야 한다. 부모와 자식, 부부의 연을 끊는 이 패륜의 역사와 식민의 역사를 하루빨리 끝장내야 한다.
▲ 낙성대 만남의 집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김영식 선생의 팔순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선생의 원한을 풀고 조국의 창창한 미래를 만들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우리 가슴에 품고 실천의장으로 뛰쳐나가자. 외세 없는 자주의 세상으로 우리민족끼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그날을 향해 나가자. 이것이 김영식 선생의 팔순이 주는 의미이며 요구가 아닐까?
▲ 김영식 선생이 지하철에서 선전하는 그 목소리, 그모습으로 통일서넌을 하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김영식 선생 이력

1934. 4. 7 강원도 이천군 방상면 가하리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5 조국광복 40년 일제 강제징용당한 부친 귀향

1948 민주청년동맹 가입활동

1950. 6.25전쟁 조선인민군 입대

화천 철원 정선 전투 참여

1953 원산 방어전 참전

1953 12 휴가중 신춘옥 여사와 결혼

1956 군제대 원산수산업사업소 근무 신포 명태잡이

1959 아들 현일 봄.

1960 따님 봄

1962 3월 안내선 무전병으로 울산해안 이르러 체포

88,12,21 27년만에 특별사면으로 출소

88년 출석 이후 채석공, 과수농장 노동으로 일함

2002년 6월 2차 송환 촉구 및 고문사례발표

그 이후 서울 낙성대 나눔의집에 살면서 지하철에서 통일선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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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가 몰락한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의 싸움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가 몰락한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의 싸움 때문이었다

 
조현 2013. 04. 06
조회수 369추천수 0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커지고 있는 지금, 되새겨 볼만한 역사의 교훈이 있다.

찬란한 문명을 가졌던 고대 그리스가 몰락한 것은 외부와의 싸움이었던 페르시아전쟁보다, 내전이었던 펠로폰네소스전쟁 때문이었다는 것을.

평화를 버리고 서로 싸우자, 신들도 그들을 버렸다는 것을.

 

고대올림픽 달리기 재현-AP-.jpg

고대 올림픽의 달리기를 재현한 모습 사진 <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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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올림픽 경기의 모습 사진 <디스커버리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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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올림픽 때 나체로 성화를 봉송하는 주자들을 그려놓은 그림. <한겨레> 자료.

 

 

 

고대올림픽 재현-.jpg

그리스 올림피아 고대올림픽 경기장에서 고대올림픽을 재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 사진 <한겨레> 자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서로 전쟁을 일삼으면서도 올림픽 때만은 휴전을 지켰다. 이런 단결력은 그리스 외부로부터 오는 적과 대항할 대 힘을 발휘했다. 페르시아란 세계 최강의 적이 침입했을 때 도시국가들은 힘을 합쳐 그리스를 지켜냈다.

 

민족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함께 제사를 지내고 스포츠 경기를 벌이고 마시고 노래를 불렀을 때는 찬란한 영광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리스 안에서 싸움에만 치중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붙은 내전은 공통의 신도, 언어도 무색케 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외부와의 싸움인 페르시아전쟁보다 내전인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훨씬 큰 고통을 가져다주엇다면서 이렇게 썼다.

 

"헬라스(그리스)인들 자신들에게 함락되어 폐허가 되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전례 없는 인명이 손실됐다. 유례없이 격렬한 대지진이 발생했고, 일식이 자주 일어났고, 극심한 가뭄이 들어 기근으로 이어졌고, 역병이 엄청난 타격을 가하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모든 재앙이 헬라스인을 덮었다."

 

모두가 어우러진 축제를 버리고 전쟁을 택하자 신조차 그들을 버렸다.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로마의 속국이 되어 그리스의 신전은 파괴되고, 1000년이나 지속되던 올림픽도 기원후 393년 중단되기게 이른다. 축제를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스인생학교>(조현 지음, 휴) 8장 '나체의 향연장, 올림피아' 중에서

 

 

올림피아풍경1.jpg

*고대에 올림픽이 얼렸던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의 평화로운 모습들.

 

올림피아풍경2.jpg 올림피아풍경3.jpg

*올림피아 유적지의 달리기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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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발하는 한반도 관련 속보, 추락하는 시청률

 

CNN, “한반도 전쟁 직전” 보도… 그 속내는?
 
[분석] 빈발하는 한반도 관련 속보, 추락하는 시청률
 
김원식 | 2013-04-06 09:47: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일 한바도 위기를 보도하는 CNN 4월 5일자 누리집

 

미국에서 보도 전문 채널의 대명사인 CNN, 요즘 CNN만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는 이미 전쟁이 발발했다는 판단을 할 정도로 CNN의 한반도 정세 관련 보도가 '전쟁 일보 직전'을 주제로 극에 달하고 있다.

CNN은 5일(이하 한국시각)에도 누리집은 물론이고 해당 뉴스를 진행하면서 전문가를 동원해 한반도 전쟁 발발 시 어떠한 공격이 진행될 것인지를 그래픽을 동원해 보도하는 등 한반도 상황이 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연일 속보나 특집으로 보도하고 있다.

거의 보름을 넘게 이어오는 한반도 관련 특집 보도이다. 일례로 5일 저녁 10시 40분경에도 갑자기 CNN의 누리집에는 속보(Breaking News)가 떴다. 내용은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대(launcher)에 장착(load)했다”는 기사였다.

이 기사는 한국의 <연합뉴스>가 한국군 관계자의 정보를 인용해 이러한 사실을 보도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연합뉴스>의 보도 내용 뉘앙스는 달랐다.


익명 전제 먼저 속보 보도… 이후 재탕, 재인용을 통한 위기 가중 보도

오히려 CNN이 5일 오전에 먼저 미 국방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며 "북한이 동해안으로 탄도미사일과 발사대 등을 이동시키고 있다"고 속보로 전했다. 그리고 CNN이 이러한 내용을 보도했다는 것을 <연합뉴스>가 다시 중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연합뉴스>가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이번 주 초 사거리 3천∼4천㎞의 무수단 중거리미사일(IRBM) 2기를 동해안 지역으로 옮기고 난 뒤 발사대가 장착된 차량 2대에 각각 탑재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연합뉴스>는 “이들 차량은 이후 갑자기 정보 당국의 감시망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며 북한의 이러한 정보 노출이 기만전술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를 CNN은 다시 ‘북한 미사일 발사대에 장착 보도(Report: North Korea loads missiles onto launchers)’이라는 제목으로 속보로 보도하며 “한국의 준관영 통신인 <연합뉴스>는 군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한에서 중거리 미사일 두 기가 이동식 발사대에 장착되었다고 보도했다”고 속보로 전했다.

보도 내용의 순서만 놓고 본다면 CNN이 미군 관계자의 정보를 이용해 북한 미사일의 동해 쪽으로 이동을 특종 보도하고 이를 다시 <연합뉴스>가 인용 보도하고 <연합뉴스>가 한국 측 정보를 이용해 이를 다시 보도하면서 기만전술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도했으나, CNN은 마치 이제는 한국 언론에서도 (한국군 관계자도) 북한 미사일의 이동과 장착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재탕과 확대 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다.


다른 언론과는 달리 유독 CNN만 ‘한반도 위기 상황 조성’…이유는?

CNN은 5일에도 간판 앵커인 앤드슨 쿠퍼가 진행하는 메인 시간대 방송에서 은퇴한 미군 전문가를 초빙하여 남북한의 전쟁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지를 관련 그래픽을 동원하며 실감 나게(?) 보도했다.

 

북한이 어떻게 한반도를 공격할 것인지를 전문가를 초빙해 보도하는 CNN

 

한반도 상황의 긴장이 급격히 조성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왜 유독 CNN은 이렇게 연일 한반도가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고 보도하고 있을까?

한반도 상황에 관해서는 다른 주요 외신들도 전쟁 위험성에 관한 보도도 하고 있지만, CNN처럼 이렇게 과도하게 확대하고는 있지 않다. 5일 비슷한 시간대에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긴장이 한국 경제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한반도 위기가 한국 경제에 미칠 가능성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도하였다.

<워싱턴포스트>도 “평양의 긴장 추구에도 남한은 차분”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한국 사람들은 북한이 예전에도 늘 그렇게 해왔다며 의외로 차분히 대응하는 모습이다”라는 주제의 기사를 내 보냈다.

AP통신도 “북한이 긴장을 강화하자 남한 불안(jitter)의 첫 신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의 일상에 별다른 변화가 없으나 북한이 1990년대 이후 최고의 강도 높은 위협적 발언들을 연이어 하고 있어 한국인들이 불안해하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라는 주제의 기사를 전 세계로 타전했다.

하지만 CNN은 5일만 하더라도 누리집에 “북한은 미국이 순하다(soft)고 생각할까?” “왜 북한은 자살과는 거리가 멀까?” “김정은이 미치지 않은 이유” 등 무려 10여 개의 북한 관련 기사들이 누리집 최상단을 자치하고 있다.


추락하는 CNN의 시청률… 또 다른 전쟁이 필요?

보도 전문 채널인 CNN이 1990년 발생한 ‘걸프전’을 생중계하면서 일약 최고의 보도 채널로 자리매김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종료되면서 CNN의 시청률 추락은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다른 보도 전문 채널인 ‘팍스 뉴스(Fox News)’에 1위 자리를 내어준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며 이제는 2위 자리도 'MSNBC'에 내어주고 끝없이 시청률이 추락하고 있다.

CNN이 고전하는 이유가 보수-진보의 대립 구도가 심화되고 있는 미국 정치환경에서 사실 중심의 보도에 치중하며 중립적 논조를 고수한 것이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만큼 해당 보도에 대한 분석과 기획력이 떨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어쩌면 CNN에게는 다시 시청률은 만회할 수 있는 호기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 위기 상황의 조성과 이러한 전쟁 발발의 보도가 시청자들을 영원히 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지난 CNN의 역사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연일 관계자의 익명 보도를 기반으로 한반도 관련 위기 상황을 확대하고 있는 CNN의 보도 태도가 과연 CNN이 바라고 있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한반도 전쟁 억제와 평화 조성을 위한 여러 관련 보도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가중하는 한반도 위기 상황에 관한 여러 분석이나 체계적인 기획 보도 없이 그저 위기 상황 발발에 일희일비하는 CNN의 최근 보도 태도를 보면서 CNN의 시청률이 끝없이 추락하는 또 다른 이유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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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국어 올바로 쓰자 했더니, '북 괴뢰'라 모함을!

[프레시안 books] 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5 오후 6:33:13

 

저자가 개그맨 출신 방송인이라는 사실, 그가 우리말글 사랑운동을 펼쳐온 사실, 그리고 40세 나이에 학부에 입학해 1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한 끝에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기에 이른 사실을 이 책을 보고야 알았다. 하나하나 의미가 큰 이 사실들을 엮으면 좋은 기사가 될 것도 같지만, 내 몫이 아니다. 책 내용에 관한 생각만 적더라도 한 꼭지 글에 담기가 벅차게 느껴진다.
 

▲ 정재환 씨. ⓒ프레시안(전홍기혜)

지난 연말 통과된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이 책 <한글의 시대를 열다 - 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정재환 지음, 경인문화사 펴냄)는 부제와 같이 해방 후 10년간 한글학회(1949년 9월 이전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는 하나의 민간단체이지만 1920년대 이래 민족의 말과 글에 관련된 활동이 이 학회에 집중되어 있던 사정을 놓고 본다면, 이 학회의 활동은 해방된 민족과 새로 세워진 국가의 어문정책을 전면적으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의 성격을 어문정책의 차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독자로서 큰 소득이었다.

북한 건국과정에서 제2인자 역할을 맡은 김두봉이 주시경을 사사한 한글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북한 정권이 어문정책을 중시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이 적은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 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하면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이다. (…)

이북에는 적어도 김두봉 씨, 이극로 씨, 김병제 씨 들이 있는데, 그리고 문장가로도 이기영 씨, 이태준 씨를 비롯하여 한설야, 안회남, 김남천, 임화, 이원조 등 다사제제(多士濟濟)한데, 어쩌면 그렇게도 진부한 표현 방식을 언제까지고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의식적인 어떠한 움직임이 없더라도 오랫동안 한글을 전용하노라면 저절로 말씨가 부드러워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인데, 갈수록 어려운 한문 문자투성이가 되어감은 대체 어찌한 때문일까. (<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 1950년 9월 10일)

 

▲ <한글의 시대를 열다>(정재환 지음, 경인문화사 펴냄).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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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의 어문정책에 큰 기대를 건 근거로 김두봉과 함께 이극로와 김병제의 존재를 제시했다. 이극로(1893-1978년)와 김병제(1905-1991년)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협상 후 평양으로 옮겨간 '월북' 학자들이다. 김성칠이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북쪽으로 떠나는 친구 하나를 배웅한 뒤 적은 일기를 보면 당시 남한의 문화정책이 빈약하여 많은 문화인들이 북쪽을 향하는 실정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 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같은 책, 1950년 9월 26일)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에 많은 인구 이동이 있었다. 상황에 몰려 본의 아니게 옮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발적 선택으로 고향이나 활동하던 곳을 떠나 건너편으로 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것을 월남 또는 월북이라 한다. 월남 인구가 월북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으나 문화예술인과 민족주의자 중에는 월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정황으로 보아 당연한 사실이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점령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역할을 맡은 반면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고 자치 권한을 키워주었다. 이남에 대한 미국경제원조가 컸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월남이 많았지만, 민족-문화 정책에서는 이북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미군정에게는 조선인의 민족주의가 통치의 방해 요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찰과 군정청에 적극 등용하여 권한을 쥐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가 '건국 주도세력'으로 자라났고, 그 세력을 발판으로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등지는 성격과 민족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화의 중심 요소인 말과 글을 아끼는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는 1921년 창립 이래(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 학회의 형태이면서도 민족주의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더욱이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제 말기 최대의 민족주의 탄압이었기 때문에 해방 당시 50여 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주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해방 때까지 함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4인의 회원이 해방 이틀 후 출옥하여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어학회 재건 작업이 시작된 것은 해방된 민족의 문화 사업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학회의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것은(1945년 10월 26일 간사회 결정) 분단 점령과 좌우 대립의 상황 속에서 학회 사업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사(1946년 2월까지는 '간사')진은 위의 4인 및 함께 옥고를 겪다가 먼저 출옥했던 장지영과 이극로, 그리고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인 김병제로 구성되었다. 학술적 권위와 민족주의적 명망을 겸비한 진용이었다.

학회본부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학회 간부들이 미군정에 협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장지영(1887~1976년)과 최현배(1894~1970년)가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어문정책에 관여했고, 조선어학회가 지켜 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관철된 것은 그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개적 정책 검토 없이 실무적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이 '간소화 파동'을 일으킬 빌미를 남겼다. 미군정의 적극적 어문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 활동은 민간 차원과 회원들의 개인 차원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북에서는 정권 지도부에게 적극적 어문정책의 의지가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전문 인력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이극로와 김병제의 월북이 이북의 필요에 부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인데, 저자는 이 사정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특히 박지홍 교수의 인터뷰에서 매우 의미가 큰 증언을 끌어낸 것이 눈길을 끈다.

"1948년에 남북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59~60쪽)

김두봉이 이극로에게 와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봐서 매우 그럴싸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58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간접 증언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 반공독재 기간 동안 '월북자' 이극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언급조차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의미 있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짤막한 증언 하나에서만도 여러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한 사실 외에도 이극로가 북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북행 계획을 비밀로 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밀로 하면서도 원고를 주기로 했던 출판인에게는 의리상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까지 이 증언에 담겨 있다. 간접 증언이기는 하지만 원로 학자의 자발적 진술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늦게나마 이런 증언을 열심히 모은 저자의 노력을 치하한다. 텍스트에 매여 사는 역사학도로서는 손이 가기 어려운 분야인데 방송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반갑다.

연구 대상 인물의 인간성에 대한 접근에서도 방송인의 감각이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박지홍 교수의 위 증언에서도 이극로의 인간성이 살짝 드러나는데, 박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이극로의 아래 발언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 우리 학회가 낸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최현배 선생의 문법 체계가 그 토대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최현배 선생의 문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큰 사전의 체계를 이렇게 빨리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체계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물론 명사, 대명사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최현배 선생이 굳이 이름씨, 대이름씨로 해야 하겠다고 우기신다면, 우리는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맞서서 명사-대명사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흡사 남이 다 지어 놓은 집에 가서 벽지는 무슨 색깔로 하라, 못은 어디에 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최현배 선생은 왜정 때 생명을 걸고 우리말의 문법을 집대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선생이 세운 체계를 두고 용어만은 우리 생각에 맞게 고치겠다고 하겠습니까?" (53쪽)

이극로의 활동 범위를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947년 <조선말큰사전> 첫 권 발간을 앞둔 토론에서의 이 발언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껍데기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조선어학회의 중심 사업인 사전편찬 사업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 경위도 이 발언이 보여주는 자세에서 석연히 이해가 된다.

최현배는 한국어 문법 연구의 업적 못지않게 고집 세기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순 우리말에 대한 그의 집착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한편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름씨, 그림씨 등 문법 용어의 고집이 그 단적인 예다. 1947년 조선어학회의 토론 분위기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다수 회원이 그의 급진적 주장을 난감해 하는데도 그는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극로는 돌파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용어 자체로는 '이름씨'보다 '명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문법을 세워준 최현배가 고집한다면 그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의 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최현배로서도 자기 주장의 급진성을 인정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성향이 서로 다른 동년배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오고가는 것이 존경스럽고도 사랑스럽다.

이극로는 학회 간부 중 이례적으로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이전의 사전 편찬 사업에서도 당대 일류 명사들과 교분을 가진 그의 '섭외'능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고, 그 교분이 해방 후 그를 정치활동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민족운동의 범위를 지켰고, 파당적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7년 가을 조선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분단건국의 위험이 짙어지면서 이극로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 홍명희, 김병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협상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홍명희, 백남운 등과 함께 북쪽에 눌러앉았다.

이극로가 북한의 첫 내각에서 무임소상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밝힌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이다. 평양에서 그의 활동 내용은 바로 초기 북한의 어문정책 그 자체였다. 김두봉이 그를 부른 뜻, 이에 응해 그가 북으로 향한 뜻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그들이 내다본 것처럼 북한 정권이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꾸준한 어문정책에 대비되는 것이 이 책 뒤쪽에서 다룬 남한의 '한글맞춤법 간소화 파동'이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날 담화 중 한 대목에 '간소화 파동'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국문을 쓰는 데 한글이라는 방식으로 순편한 말을 불편케 하든지 속기할 수 있는 것을 더디게 만들어서 획과 음을 중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한글 초대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이 글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니 이 점에 깊이 재고를 요하여 여러 가지로 교정을 하여서 우리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340쪽)

이 메시지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이듬해 한글날 담화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근래에 이르러 신문 게재나 다른 문화 사회에서 정식 국문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이전 것을 개량하는 대신, 도리어 쓰기도 더디고 보기도 괴상하게 만들어놓아 퇴보된 글을 통용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것을 교정하지 못하면 얼마 후에는 그 습관이 더욱 굳어져서 고치기 극난할 것이매 모든 언론기관과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속히 개정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340쪽)

이승만은 문제를 꺼내놓기만 한 채로 몇 해 동안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국회 내 세력도 약하고 전쟁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가 재선 후 국회에 안정 기반을 확보한 1953년 봄 이 문제를 꺼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4월 27일 백두진 국무총리가 각 부처 장관과 각 도 지사에게 보낸 훈령으로부터 한글 간소화 파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우리 한글은 원래 사용의 간편을 안목으로 창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온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철자법은 복잡 불편한 점이 불소함에 비추어 차를 간이화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도 누차 계시기에 단기 4286년 4월 11일 제32회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 정부에서 정하는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용 철자는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던 바, 기중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오니, 이후 의차 시행하기 훈령함. (343쪽)

1년 남짓 이어진 파동 속에서 벌어진 별의별 우스운 일, 웃지 못 할 일을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고, 1954년 7월 하순 이승만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파동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7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행 맞춤법이 옳다고 하는 것은, 학생들이나 또는 언론인들이 한글의 이치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면서 습관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이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좋다." (377쪽)

이승만의 '간소화' 주장의 본질은 '문법 폐지'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일체의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조선어학회도 생기지 않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 시절의 문자생활에만 익숙하던 그가 "옛날 성경처럼 적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었냐?"고 한글학자들의 그 동안 업적을 몽땅 갖다 버리라는 것이었다. 민족문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독재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어문정책이 1년 넘게 마비되는 그런 국가가 초기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식민지시대에 민간-학계의 민족운동으로 추진되던 <큰사전> 편찬 사업은 건국 후에도 한글학회의 민간사업으로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간소화 파동으로 지체시키기까지 하고, 심지어 미군정 시기부터 받아온 록펠러재단의 지원까지 받기 어렵게 만든 사태조차 있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을 한글 간소화 파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1953년 파동이 시작될 때 문교부장관 김법린과 편수국장 최현배는 한글운동에 오랫동안 노고를 바쳐 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파동 속에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남쪽의 어문 사업은 아무개가 있으니 자기는 마음 놓고 북행할 수 있다고 이극로가 말했던 그 최현배, 그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모두 6년간 편수국을 맡아 어문정책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의 뜻을 키워주지 않았다.

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나? 김법린이 비운 문교부장관 자리를 맡은 이선근은 1954년 7월 12일 국회 질의 중 간소화 정책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에 대해 "수일 전 북한괴뢰들이 방송할 때 사용한 말과 같다."고 대꾸했다고 한다.(372~373쪽) 아, 이 더러운 기시감!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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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개시 되면 담숨에 남한 전역과 제주도까지 해방"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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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3/04/07 07:56
  • 수정일
    2013/04/07 07:5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북, 미국 3대핵타격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
 
"전쟁 개시 되면 담숨에 남한 전역과 제주도까지 해방"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4/07 [07:32]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 F-2A 스텔스 전투기 그러나 조선은 이 전투기와 3대 핵전략무기들을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이라고 평했다. ©이정섭 기자
조선이 한미 양국에 대한 강경 자세를 누그려 뜨리지 않고 미국의 3대 핵타격 수단은 무용지물이라고 밝혔다.

조선로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조선반도에서 핵전쟁의 발발은 시간문제로 되고 있다. 날로 엄중해지는 핵전쟁위험에 대처하여 우리 공화국은 정부,정당,단체들의 특별성명을 통하여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 할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내외에 다시금 엄숙히 천명하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로동신문은 “적들이 핵으로 위협하면 그보다 더 위력한 정밀핵 타격수단으로 맞받아치고 부정의의 침략전쟁에는 정의의 전면전쟁으로 대답하는 것이 우리의 고유한 대응 방식”이라면서 “특별성명에는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철옹성같이 수호하고 이 땅위에 기어이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고야말려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신념과 의지가 힘 있게 맥박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신문은 “정의의 조국통일대전은 민족의 운명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한 정당한 선택”이라며 “조국통일은 장구한 분열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민족이 일일천추로 바라고바라는 간절한 소원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근 70년 동안이나 외세에 의해 둘로 갈라진 나라의 지맥을 잇지 못하고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더없는 수치”라고 피력했다.

신문은 “분열의 비극사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결코 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며 “그것은 전적으로 이 나라의 절반 땅을 타고앉아 저들의 철저한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꾀하는 미국과 침략적인 외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이익을 송두리 채 팔아먹으며 동족대결에 미쳐날 뛴 남조선괴뢰들의 악랄한 반공화국 책동때문”지적했다.

또한 “미국이 추구하는 대조선적대시정책은 날로 승승장구하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해치고 남조선의 식민지체제를 북반부에로 확대함으로써 조선민족을 현대판노예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 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틀어쥐려는 침략야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러한 흉심으로부터 미국은 우리 민족끼리 손을 잡고 자주통일에로 나아가는 것을 덮어놓고 반대하였을뿐 아니라 남조선의 친미주구들을 부추겨 동족간에 불신과 대결을 야기 시키고 북침전쟁소동을 강화하면서 조선반도정세를 항시적으로 긴장 시켰다.”고 미국을 고발했다.

이어 “‘국지지 도발대비계획’에 맞도장을 찍어줌으로써 군사 불한당들을 우리와의 전면대결과 군사적 도발에로 적극 내몰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 상전의 부추김을 받고 북침열에 들뜬 남조선의 괴뢰보수패당과 군부깡패들, 극우보수언론들은 연일 극단적인 반공화국대결소동과 북침 전쟁광기를 부리며 정세를 일촉즉발의 초긴장상태에로 몰아가고 있다.”고 폭로했다.

아울러 “모든 사실은 미국과 괴뢰호전광들의 핵전쟁광증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증해준다.”면서 “우리 민족과 인류의 운명을 위협하는 방대한 핵타격수단들과 침략무력이 집결되어있는 남조선에서 자그마한 전쟁의 불꽃이라도 튕기는 경우 그것이 국지전에만 그치지 않고 삽시에 전면 전쟁으로, 열핵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며 “미국과 괴뢰 호전광들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운명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 땅위에 핵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오는 극악한 도발자,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단죄했다.

로동신문은 “조국통일대전은 민족의 지향이고 천만군민의 의지이며 시대의 요구이다. 참을성과 자제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라고 단호함을 드러내고 “지금 원수들에 대한 우리 군대와 인민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무섭게 폭발하고 있다. 이제는 침략자들과 말로써가 아니라 선군총대로 총결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천만군민의 확고부동한 의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미국은 시대가 달라졌으며 우리 인민도 어제날의 인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천금을 주고도 살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를 이룩하고야말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절대로 빈말이 아니”라면서 “우리는 지구상 그 어디든 침략자들의 본거지들을 모조리 초토화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타격수단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 무진 막강한 위력 앞에서 괴뢰 호전광들이 호신부처럼 여기는 미국의 《3대핵타격수단》따위도 막대기보다 못한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 위력한 무력이 있음을 분명히했다.

로동신문은 “우리는 강 위력한 억제력과 함께 세상에 없는 일심단결을 가지고 있다. 강자에게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으며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문제를 놓고 우리가 주저할 것은 더욱 없다.”며 “공화국정부, 정당, 단체 특별성명은 현 북남관계는 전시상황에 처해있으며 쌍방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가 그에 준하여 단호하게 처리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이것은 그 어떤 사소한 적들의 도발적 행위에도 예고 없는 무자비한 보복의 불벼락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전시상황에 놓여 있음을 상기 시켰다.

신문은 “우리의 조국통일대전이 일단 개시되면 오래 끌 것도 없으며 그것은 침략자들이 미처 후회할 사이 없이 남조선의 전지역과 제주도까지 단숨에 타고 앉는 벼락같은 속전 속결전으로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이 정의의 성전은 조국통일을 바라는 북과 남의 온 겨레가 참가하는 전민항쟁으로 될 것이며 최후승리는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목숨 바쳐 수호하려는 우리 군대와 인민, 온 민족에게 있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신문은 끝으로 “우리 민족은 조국통일대전에 산악같이 일떠서 극악한 대결광신자들과 호전광들, 인간쓰레기들을 비롯한 반역자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가차 없이 벌초해버리고 분열과 대결, 전쟁의 악순환에 영원히 종지부를 찍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통일된 조국 땅에서 우리 겨레가 세기와 세기를 이어오며 쌓이고 쌓인 한을 가슴 후련히 풀 역사의 그 시각은 바로 눈앞에 있다.”며 대결이 임박했음을 시사해 주목된다.

한편 한미 양국의 당국자와 국회 일부에서는 강력응징 등의 강경자세에서 대화와 협상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있어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흐를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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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대권 시동 거나?... 서울시장 당선 후 첫 '정치강연'

 

박원순, 대권 시동 거나?... 서울시장 당선 후 첫 '정치강연'
 
박근혜의 '창조경제'에 대해 쓴소리도...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3/04/06 [11:32]
 
 
 
박원순 서울시장이 5일 국회에서 공개 강연을 하며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에 시동을 걸고 있다. 2011년 보궐선거로 서울시장에 오른 이후 '정치 강연'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박원순 시장
'정치인 박원순'이라는 브랜드를 강화하는 한편, 서울시장을 넘어 차기 대권을 향해 보폭을 넓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 경제(http://www.asiae.co.kr/news/) 보도에 따르면 박 시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원순씨, 정치를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했다. 특강은 민주통합당의 시민사회단체 출신 보좌진 모임인 '새정치연구회'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GH의 '창조경제'에 대해 쓴소리

박 시장은 "창조경제를 멀리 하늘에서 찾는 것 같은데, 우리 가까이에 있다"면서 "재미있게 살고 삶이 즐거우면 모든 것이 창조경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공공기관이 보유한 빅데이터를 공개해 시민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면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면서 "이것이 창조경제"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당정청 워크숍에서 창조경제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청와대 고위 공직자들을 비판하는 한편, 박 대통령도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는 지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면서 박 시장은 서울시청 1, 2층의 시민참여 공간인 서울시민청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민원을 하는 '소셜미디어센터' 등을 창조적 사례로 들었다.

정치개혁에 대해 박 시장은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당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면서 "정당이 시민들의 진정한 대변자가 되고, 시민을 당의 주인으로 모시는 제도와 노력이 함께 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강연이 끝난 뒤 박 시장은 "차기 대선 주자로서 행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제 모든 관점은 서울시정에 있다. 99.9% 그렇다"면서도 "민주당 당원이고 정치인이기도 하니까 그런 정도는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국회 본청에서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 중인 김용익 민주당 의원을 방문해 "건강이 상할 정도로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격려했다.

박 시장은 여야 모두에서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재선에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에도 이견이 없다. 민주당 관계자들도 "박 시장은 당 내 적이 없고, 서울시장을 통해 행정 노하우를 크게 얻었다"면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당 5·4 전당대회에 출마를 선언한 예비후보들은 너도나도 박 시장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이용섭 의원이 서울시청을 방문해 박 시장을 만난 데 이어 김한길, 강기정 의원도 곧 박 시장과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청사 코 앞에 위치한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농성장 철거에 가슴 아픈 심정을 밝히며 조속한 사회적 해결책 마련을 촉구했다.

박 시장은 5일 밤 늦게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집앞 목련이 살포시 제 얼굴을 드러내고 웃던 그저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데, 어제 오늘 내내 제 마음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듯 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겨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을까?"라며 "이미 22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더 이상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시장은 특히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절규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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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료원 사태, 공공의료의 시장편입 막아야

 

 
 
[분석]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다
 
편집부 | 등록:2013-04-05 15:17:53 | 최종:2013-04-05 16:02: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 * 시사블로거 다람쥐주인님이 5일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글을 필자의 동의하에 소개 합니다 - 편집자 )


▲ 공공의료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런던올림픽 개막식. 경향신문

작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도중 난데없이 수백 개의 병상과 간호사들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레이트 오르몬드 스트리트 어린이병원(GOSH)과 무상의료제도(NHS)를 600여명의 건강보험직원들과 어린이들이 경쾌한 춤을 통해 형상화 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무상의료제도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보여준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2차 대전 직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국민 무상의료제도를 도입했던 영국의 사례는 재정난 때문에 의료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자들의 주장을 옹색하게 만듭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없기에 영국의 NHS역시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국민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지난 2월 26일 경상남도는 진주의료원을 폐업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홍준표 지사가 밝힌 폐업의 근거는 ‘적자’입니다. 공공의료기관을 운영상의 적자를 이유로 폐업한다니 도통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각계의 비난이 쏟아지자 홍 지사는 지난 1일 “공공의료를 빙자해 진주 의료원을 강성 노조의 해방구로 만들어 도민의 혈세로 노조원들만 배불리게 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반한다”며 폐업의 원인을 노조에 돌렸습니다. 홍 지사의 발언은 여러차례 보도된 대로 사실관계가 전혀 맞지 않을 뿐더러, 이는 ‘해방구’와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해 반노조정서를 이용하고자 하는 계산된 발언입니다. 그가 노련한 정치인임을 환기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다리짓는데 수백억씩 쏟아붓는 경남도가 연간 10억 남짓한 공공의료시설의 적자를 감당못한다는 주장이 엄살로 들리는건 당연합니다. 모든 공공재는 운영상의 ‘적자’에 기초합니다.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습니다. 홍 지사는 어째서 이 간단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수익을 내는 공공재라면 국가가 소유할 이유가 없다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홍준표 지사는 의료라는 영역을 시장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주의자에게 적자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는 이유는 의료분야를 국가가 마땅히 최소의 가격으로 제공해야 할 공공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 이래 이러한 공공재와 시장의 힘겨루기는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주의료원을 둘러싼 힘겨루기는 어딘가 특별합니다.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료라는 영역이 다른 영역과는 달리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료원 폐업은 한국 공공의료 붕괴의 신호탄이 될지도

국가는 가정의 지불능력을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훌륭한 기초교육과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좌파지식인이나 노동운동가의 말이 아닙니다. 전세계 시장주의자들의 어머니이자 민영화의 화신인 마가렛 대처의 저서 <국가경영(Statecraft)> 중 가장 앞쪽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1982년 국영 화물회사를 시작으로 영국통신(1984), 영국항공(1987), 영국석유(1987), 영국철강(1988), 영국수도(1989), 영국전력(1990), 영국석탄(1994) 등 국가의 기간산업을 모조리 민간에 팔아치운 ‘철의 여인’ 대처지만 그녀조차 의료분야 만큼은 손을 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건강과 교육은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가 책임지는 게 훨씬 낫다”라는 그녀의 스승 아담 스미스의 말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장주의를 창시한 학자와 역사상 이를 가장 충실히 실행했던 정치인조차 의료서비스만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공공의료의 개념을 굳이 멀리서 찾을 이유도 없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동서대비원과 혜민국을, 조선시대에는 활인서를 설치해 국가가 빈자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능력없으면 끊어”

흡연자라면 자주 들어봤을법한 ‘자본주의적 농담’입니다. “능력없으면 먹지말아라”, “능력없으면 입지말아라”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능력없으면 죽어라”라는 말을 쉽게 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공공의료란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능력이 없어도 죽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공공의료의 개념은 굳이 그 역사나 정의를 모르더라도 측은지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진주의료원 입원 환자와 가족, 진주시민, 지역 정치권과 보건복지부까지 폐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홍 지사의 고집은 완강합니다. 진주의료원은 지난 3일 한달간의 휴업을 시작했고, 휴업이 끝나는대로 폐업에 들어간다는 계획입니다. 경남도는 "공공의료법의 개정으로 민간병원도 공공의료서비스를 할 수 있기 때문에"라며 공공의료법 개정을 진주의료원 폐업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경남도의 설명과는 달리 지난해 2월 개정된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은 오히려 공공의료의 확대를 위한 취지로 도입된 법률입니다. 이를 근거로 공공의료시설을 폐업한다는 것은 법의 취지를 반대로 해석한 아전인수입니다.

물론 경남도측의 설명처럼 진주의료원이 폐업한다 해서 당장 그곳의 환자들이 죽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00년넘게 전문 공공의료기설로 기능해 온 진주의료원을 민간병원이 대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공의료의 시장편입을 뜻하며, 의료원의 폐업으로 인한 민간병원의 대폭 수가인상도 예견되는 상황입니다. 설사 운영상의 불합리한 점이 있다 해도 불과 5년전에 큰 돈을 들여 신축이전한 병원을 폐업하는 것은 답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폐업을 위한 폐업입니다.


홍준표의 ‘공공 병원 죽이기’, 진짜 목적은 1000억 원? http://bit.ly/YzkK28

진주의료원의 폐업이 더욱 우려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한국 공공의료의 붕괴를 촉진하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국 34의 지방의료원 중 27개의료원이 적자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중 하나가 만성적자를 이유로 사라진다면 아주 나쁜 전례가 되는 셈입니다.

▲ 홍준표 그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다


경남도민들이 분명한 경고 보내야

홍 지사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은 표가 떨어질 행동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가 쇄도하는 비난을 감수하며 진주의료원 폐업을 밀어부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치인의 비인간성은 그를 뽑아 준 유권자들의 비인간성에서 비롯됩니다. 홍 지사는 지난 선거에서 63%라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습니다. 경남지역의 정치지형을 볼 때 아마도 진주의료원 폐쇄보다 더한 파행을 한다 해도 그의 재선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정치인에게 표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홍준표는 계속 나올 것입니다.

김정은이 핵폭탄을 터뜨리는 와중에도 미국인들의 관심사는 온통 건강보험개혁에 쏠려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10년 이상 건강보험이 없는 수백만 명의 국민에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연간 2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개인 투자자들과 25만 달러 이상을 번 가구에 대해서 ‘투자수익세’를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인 공공의료 후진국인 미국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죠.

오바마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힘은 그를 뽑아준 유권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미국인들은 공공의료확충을 약속한 오바마를 뽑았지만 경남도민들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인 홍준표를 도지사로 뽑았습니다. 홍 지사가 시장논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들로부터 나옵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홍 지사가 지독한 시장논리를 철회할 근거도 유권자들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경남도민들이 진주의료원폐업을 원치 않는다면 정치인 홍준표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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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아르마니 탐했던 소년, '진보 교주'로 부활하다!

[노정태의 논객시대] 딴지 총수부터 '나꼼수'까지, 김어준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4-05 오후 6:33:44

 

 

1.

1988년 서울올림픽의 모토는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였다. 당시 대한민국은 급변하고 있었고, 동시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시민사회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감을 얻었지만, 동시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나긴 정치적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후, 그간 기층 단위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운동이 표면화되면서 이른바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공장의 말단 직원부터 중간 관리자까지, 전두환의 신군부가 억지로 찍어 누르고 있던 임금이 대폭 상승했다. 국민 모두가 이른바 '중산층'이 되는 그런 시대가 열렸다고, 다들 꿈꾸게 되었다.
 

▲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프레시안(최형락)

높아진 임금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 서울로 몰려들었고,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시장 등 온갖 금융 영역이 넘실거렸다. 더욱이 당시는 이른바 '3저(低) 호황'의 시절이기도 했다. 금리, 유가, 달러 환율이라는 세 가지 주요 경제 지표가 모두 낮아졌다. 누구나 쉽게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기름 값 부담 없이 자동차를 사고, 더 여유가 있으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을 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사실상 좁은 섬 안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은 바야흐로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때 한 청년이, 3수 끝에 지망하던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87학번이 되었어야 했을 그는 89학번이 되었고, 자신이 원하던 서울대가 아닌 홍익대에 들어갔으며, 학교 안에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는 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들락거렸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그렇게 배낭여행에 몰두한 것은 입시에 실패하였다는 자괴감을 "여행을 떠나 세계를 만나"면서 "내가 살던 동네가 얼마나 비좁은 공간인지 절감"하고, "그를 통해 내가 겪은 실패라는 게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라"(<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26쪽))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묘한 방식으로 때를 잘 만났다. 만약 본인의 뜻대로 서울대 87학번이 되었더라면, 87년 6월 항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 대학교 새내기 시절을 보낸 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89년 무렵에는 이미 3학년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배낭여행을 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배낭여행을 통해 경험하는 내용들로 자아를 형성하기에는 다소 때를 놓치는 모양새가 된다. 배낭여행에서의 경험을 '근원적 체험'으로 삼기에는 그 전에 겪은 일들의 무게가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3수를 했고, 87년 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절묘하게 비껴간 채, 민주주의와 역사의 흐름에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

신문 칼럼, 강연, <딴지일보>에 본인이 쓴 글 등을 통해, 김어준은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원체험의 몇몇 굵직한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를 몇 개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 양복점에서 두 달 치 여비를 털어 BOSS 양복을 충동 구매한 이야기
(2) 이탈리아에서 다비드 상의 허리 라인을 보고 그것이 아르마니 양복과 쏙 빼닮았음을 깨닫고, 문화적 심미안을 가질 수 없었던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애를 느낀 이야기
(3) 독일에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바닥이 기울어지도록 만들어진 버스를 본 이야기

각각의 내용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파리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에 타기 전날, 90년대 초반 배낭여행을 하던 김어준은 파리 오페라 극장 대로변에 있는 한 양복점의 쇼윈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양복에 말 그대로 '꽂혔다.' 뭔가에 홀린 듯 가게에 들어가 와이셔츠, 바지 등을 하나씩 착착 걸쳐가며, 그때까지 자신이 봐온 스스로의 모습을 훨씬 뛰어넘는 누군가를 보았고,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두 달 치 여비에 해당하는, 100만 원 가량. 냉큼 지르면 두 달 굶어야 할 상황이다. 김어준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절약한 100만 원을 향후 두 달간 숙소와 식량에, 합리적으로 소비한다면, 그럼 지금 당장의 이 환희는,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같은 책, 48쪽) 물론 대답은 '아니오'였고, 일단 옷을 산 그는 로마에서는 배낭여행객 숙소 '삐끼' 노릇도 했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암달러상으로 여비를 벌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그 여행에서 겪은 일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피렌체에서, 김어준은 본인이 인솔하던 학생 관광객들을 우피치 미술관에 몰아넣은 후 고개를 들어 그 전까지 백 번은 넘게 마주쳤던 다비드 상을 보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어 벌떡 일어났다.

"쇼윈도 안에 진열되어 있던 '페라가모' 구두 뒤축에서 느꼈던 그거. '긴장감.' 동시에 돌멩이를 움켜쥔 오른팔의 늘어진 곡선 역시 낯익었다. 맞다. '야들야들.' '아르마니' 양복의 허리 라인이었다. 터무니없게도 말이다."(같은 책, 74쪽)

훗날 <한겨레>에 연재한 상담 칼럼 '그까이거 아나토미'를 묶어 <건투를 빈다>(푸른숲 펴냄)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면서 이 기억을 곱씹던 김어준은, 온 세상을 쏘다니며 좋다는 명작들은 다 보고 다니면서도 왜 본인이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지, 왜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그렇게 '후지게' 세팅되어 있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그 이유를, 명작들을 '외워서' '시험 보게' 만드는 한국의 공교육에서 찾고,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야 할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낸 스스로가 '인간의 말을 배울 시기를 놓친 늑대소년'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길든 짧은 여행에서 돌아와 국적 불명의 아파트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도시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단상이 하나 있다. 우리 유전자 어딘가에 몇 천 년을 축적해온 고유한 선과 면과 색에 대한 감각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식민과 전쟁과 개발을 정신없이 겪어내느라 그 집단 기억을 상실해버린 무국적의 우리 도시들을 보고 있자면, 늑대소년으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잃고 으르렁거리는 것밖에 못 하게 만든 정글을, 떠올리게 된다. 난 이 콘크리트 정글에서 그렇게 늑대소년으로 길러졌던 게다. (같은 책, 76쪽)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은 김어준의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독일에서, 굳이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의 한 기준을 얻게 된다. 장애인을 약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 바라보고, 그래서 대중교통이니까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대중들이 버스에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혜주의적, 온정주의적 관점이야말로 더 큰 폭력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고 대우하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 <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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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겨레21>에서 김규항과 함께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두 사람이 방담을 나누는 형식의 코너 '쾌도난담'을 진행할 때, 장애인 인권 확보를 위한 전국청년학생연합 공동 대표인 박지주 씨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바라는 건 동정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인정을 해 달라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아주 근본적인 이런 부분부터 뒤집어가야"(<쾌도난담>(김규항ㆍ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 태명 펴냄), 151쪽)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모범적인,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적 발언의 구성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1) 본인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적 태도, 동시에 미래의 두려움과 불확실함을 핑계로 현재의 쾌락을 유예하지 않는 자세. (2)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본인 및 한국 사회의 심미적 미발달에 대한 인식, 그러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3) 타인의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약자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포지션을 노리지 않고, 평범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하는 정치적 태도.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주로 <건투를 빈다>에 수록되어 있는, 대중들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김어준의 사고방식의 얼개가 나온다.

3.

자기 스스로 자기 삶에 책임을 지되, 엄숙하지 않고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 동시에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자기 인생의 미적 측면을 늘 생각하는 사람. 타인들을 자신과 똑같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바라보고 바로 그 시점에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 배낭여행을 다니며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김어준이 스스로를 구성하고, 또 타인에게도 통용될 수 있을만한 어떤 '주체의 유형'으로 창출해낸, 말하자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모델이다.

한국인들은 습관적으로 일본을 '섬나라'라고 부르곤 하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힌 대한민국이야말로 사실상 일본보다 더 작은 조그마한 섬나라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때문에 국민들에게 해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아주 늦은 시점부터 제공하였고,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든 국민에게 해외여행이 '허락'된 것은 김어준이 대학에 들어간 1989년부터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1987년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을 누군가와 1989년에 대학물을 먹기 시작한 이가 걷게 되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가 굳이 말하자면 '구세대의 막내'였다면, 후자는 한국인 중 거의 최초로 '세계'를 본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신세대의 맏이'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첨단에 김어준이 서 있었고, 그는 5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일종의 역할 모델로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좀 더 개인사적인 맥락을 짚고 들어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는 1987년에 들어갔어야 할 대학의 문턱을 1989년에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만 놓친 게 아니다. 재수를 안 하고 대학에 들어갔다면 온몸으로 즐겼을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혀 향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과 귀가 쏠리는 자기 자신을 질책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스포츠 중계를 본 후 자꾸 고개를 드는 불안함을 어떻게든 달래야 했을 것이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올림픽 슬로건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웃긴 말"이라고,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도 아니"(<건투를 빈다>, 56쪽)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모습에서, 눈앞에 열린 축제를 즐기지 못하면서 쪼그라드는 자존심을 추슬러야 했던 한 수험생의 번민이 인간 꼬리뼈처럼 남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 생뚱맞은 일만은 아니다. 1988년에는 '세계'가 '서울'로 올 수는 있었지만, '서울'이 '세계'로 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당시에는 정말 세계가 "우리만 달랑 빼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만든 무슨 특설 링"이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한 김어준의 열광을 이해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 축구는 멋진 스포츠이며, 쿨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해서 자기 나라 대표 팀의 경기에 열광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보며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그 기억을 끝없이 반추하며 김어준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캐릭터는, 앞서 우리가 말한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4.

2002년 6월 13일, 포르투갈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1대 0으로 힘겹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다. 조별 예선 3라운드, 한국은 폴란드를 상대로 1승을 거두었고 미국과 비겼기 때문에, 기왕이면 이겨야 복잡한 계산 없이 꿈에 그리던 16강 고지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 팀은 포르투갈을 이겼다. 이른바 '황금 세대'라고 하는, 당시 유명한 선수들을 망라하고 있던 우승 후보 포르투갈을 꺾고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문제는 그에 대한 언론 반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론들이 포르투갈 전을 보도하는 그 태도가 김어준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이틀 뒤인 6월 15일, 그는 자신이 '총수'로서 운영하던 사이트 <딴지일보>에 자신의 이름을 달고 한 편의 글을 올린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와는 또 다른 하나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건투를 빈다>(김어준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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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포르투갈 대표팀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면 16강 진출이 어려워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거칠게 플레이했고 반칙이 많이 나왔는데, 그러다가 당대 최고 수준의 스트라이커인 주앙 핀투가 퇴장당했다. 곧이어 또 한 명의 선수인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포르투갈은 9명, 한국은 11명이 경기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상황에서 박지성의 결정골이 터졌고, 포르투갈은 그 한 점 차이를 결코 만회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어쨌건 즐겁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하지만, 김어준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이 홈 어드밴티지를 이용해서,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에 힘입어, 제 실력대로 하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고 16강에 올라갔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어딘가에 있긴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발언을 반박하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축구 전문가"가 누구인지에 대해 지금의 우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아무튼 그런 태도,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스스로 비겁한 승리를 했다고 생각하고야 마는 패배주의 근성을 김어준은 질타하기 시작했다.

이번 게임에선 우리가 이길 만하니까 이긴 거다. 우리가 정당하게 페어플레이해서 이긴 거 맞다. 그러니 우리가 비겁하게 승리를 뺏어낸 거라 생각하고 스스로 쪼그라들고 스스로 비아냥거리는, 만성적 패배주의에 찌들어 차분하기 짝이 없는 일부의 소심한 사람들아, 이제 제발 그만 차분해 하고 흥분해서 발광을 하며 날뛰는 주변의 정상적인 인간들이랑 어깨동무하고 같이 마음껏 난리치길 바란다. ('우리는 강팀이다', <딴지일보>, 2002년 6월 15일)

이탈리아 전에서도 역시, 세계 톱클래스 선수인 토티가 퇴장을 당한 후 한국이 이겼다. 마찬가지로 오심 논란이 있었고 홈 어드밴티지 논란도 있었다. 그에 대한 김어준의 대응도 역시 한결같았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한국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또 이겼다. 김어준은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혹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는 '패배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그래서, 한편으론 정말 속상하다. 그동안 얼마나 이겨보지 못했으면, 얼마나 패배에 익숙해져 있으면, 얼마나 바깥의 눈치를 보고 살아왔으면…이렇게까지 작은 행운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도리질하고 있는 건가 말이다. 제발 이제부턴 익숙해지자.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 ('믿어라! 우리가 강팀임을', <딴지일보>, 2002년 6월 24일.)

5.

2003년 9월 1일, <딴지일보>에 새로운 글이 하나 업데이트되었다. 제목은 '우리는 강팀이다 II'. 작성자는 당연히 김어준 총수였다. "승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봐라"고 권했던 그가, 자신이 남들에게 권한 바로 그 '승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모종의 체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해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상대한 수많은 나라 중, 김어준은 이탈리아 전에서의 승리를 각별한 것으로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는 축구도 잘하지만 유니폼도 멋진 그런 나라이기 때문이다. 전직 복서 출신의 스트라이커 비에리의 거대한 체구가 공포감을 자아내는 만큼, 그들이 입고 있는 파란색의 쿨한 유니폼 역시 김어준에게 깊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편 태클은 기술이고 상대편 태클은 폭력으로 자동 해석되는 그 전쟁 상황에서조차, 도대체 그들 유니폼의 상대적 세련미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며, "그리고 난 그 유니폼이, 비에리의 선제골만큼이나 부러웠다"('우리는 강팀이다 II', <딴지일보>, 2003년 9월 1일)며 김어준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 본론의 내용 중 대부분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김어준의 주요 레퍼토리 중 (2)번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어쩌면 (2)의 내용이 '우리는 강팀이다 II'를 쓰는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 고착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선후 관계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김어준이, 본인이 배낭여행을 다니며 '개인'으로서 느꼈던 문화적 격차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법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눈을 호린 이탈리아의 '명품'들이 수많은 가족 기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가족 기업에서 일하는 장인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왜 그것이 나에게까지 아름답게 보이는가, 왜 나에게는 내가 익숙한 대로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전통과 문화적 맥락이 없는가 등을 고민하던 그는, 하릴없이 다음과 같은 '서론의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가 발명한 민족주의라는 허구의식으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며 단군신화 파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 몰랐던 우리네 가치와 새롭게 정립해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보다 세련되고 보다 당당하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자는 이야기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련다. (김어준, 같은 곳)

'우리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보다 자유롭고 보다 행복한 개인이 되"는 것 사이의 간극을 과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당시 <딴지일보>를 열심히 보던 나 또한 김어준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자주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했지만, 단절된 역사적 지평 위에서 자아를 형성해야 하는 변방의 식자들이 겪는 공통의 문제에 대해, 김어준이라고 해서 뾰족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고자 하면,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사실 앞서 말한 '어설픈 근대적 자아'가 자신의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지평 위에 서있을 뿐,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의 음악인 힙합을 하면서 '미국인 흉내'를 내는 것만큼이나, 이미 전통이 단절된 지 오래라는 현실을 무시하고 '조선인 흉내'를 내고자 발버둥치며 '만들어진 전통' 위에서 국악을 하는 것 역시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세계'의 존재를 실감한 모든 이들이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어준은 그 문제에 대한 태도와 축구 경기를 볼 때의 응원하는 자세, 한국팀의 승리를 당당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인 태도 등을 잇는 어떤 '선'을 발견했다. 우리가 비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강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몸에 찌든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그렇다고, 승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을 들이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외쳤다. '이거 파시즘적인 구호 아냐?'라고 의심하지 말고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보면 언젠가 대한민국도 이탈리아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6.

2003년 9월의 김어준이 사회진화론적 뉘앙스를 지니는 논의를 전개해가며 문명사적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02년 12월 '역사의 후퇴'를 막아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시 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정몽준은 갑자기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그때까지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려가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 노무현은 위기에 빠졌다.

탁월한 연설 능력, 열성적인 핵심 지지자 층의 헌신적인 선거운동, 독보적인 정치적 감각과 타이밍 등을 통해 그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선후보 경선을 승리로 이끌어내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갑자기 정몽준이 등장하고 나니, 노무현이 차지하고 있던 '깨끗하고 신선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많이 빛을 잃었고, 온 나라를 휩쓸고 있던 축구 열기가 그에게 전혀 이롭지 않게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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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다시 한 번 창의적인 방법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정몽준 측에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를 제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여론조사가 정치의 도구로 전면화되었고, 동시에 '본선 경쟁력'을 이유로 후보들이 단일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었는데, 이것은 모두 이후 10년이 넘도록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노무현은 정치적 도박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으로서의 정치인에 관심이 많았던 김어준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그를 인터뷰한 전적이 있었다. 노무현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과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했다는 것은 김어준의 자부심 중 큰 부분을 구성한다. 김어준에게 노무현의 당선은 역사의 가치가 현실화된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퇴보할 일은 없을 터였다. 월드컵에서 당당하게 이탈리아를 무찔렀고, 대선에서 당당하게 '수구꼴통'들을 이겼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강팀이라는 것을 아직도 못 믿는 패배주의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전파하는 일 뿐이다.

그것이 2003년 9월의 일이다. 하지만 고작 반년이 지났을 뿐인 2004년 3월 12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물론 2004년 5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탄핵의 역풍으로 그가 자신의 지지 세력과 함께 만든 열린우리당은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는 쾌거를 누리게 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된 대통령이 되었다.

김어준뿐 아니라 다른 노무현 지지자들이 누리고 있던 '정신적 태평성대'는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 그들에 의해 막연하게 무리 지어진 '기득권', 혹은 '수구꼴통'이나 '조중동'으로 표상되는 거대한 악과의 투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터였다. 내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들은 '우리 대통령'을 공격한다. 내가 손을 놓고 있으면 '우리 대통령'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김어준의 머릿속에서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7.

김어준은 축구가 전쟁의 대리물이라는 사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축구라는 대리전쟁에서 승리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그의 언설 속에는, 마치 러일전쟁 당시 자국을 응원하고 승전보를 기뻐하던 일본 지식인의 그것과 비슷한 정조가 흐른다. 동시에 그에게 '우리'의 세상은 '저들', 즉 서양의 그것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하지 못해 역사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자기 자신의 문화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도리어 부끄러워하는 경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국가대표 축구팀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근대적이지도 않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응원하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응원의 대상이 반드시 축구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대입하거나 적어도 몰입할 수 있는 '섹시'한 대상과, 그 대상에 몰입하는 것을 추하다고 혹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흥을 깨지 않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김어준에게 바로 그런 대상이었다. 황우석 박사가 <사이언스>라는, 서양의 합리성과 이성을 대변한다 할 수 있는 과학 전문지의 1면을 장식하는 것 역시, 김어준에게는 과학이 아닌 '우리'의 승리였다.

황우석 박사팀이 연구원의 난자를 이용해 배아줄기세포 배양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PD수첩>은 폭로했다. 2005년 11월 22일의 일이다. 이틀 뒤인 11월 24일 황우석 박사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민국이 황우석 사태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황우석의 편을 들고 있었고, <PD수첩>과 <프레시안> 그리고 일부 지식인만이 황우석 팀의 연구 윤리 등을 지적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는 김어준,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어준은 <부산일보>에 '황우석 사태 관전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11월 29일의 일이다. "황우석 사태, 생뚱맞게도, 월드컵이 오버랩 됐다"며 말문을 연 그는, "말하자면 <PD수첩>은, 2002년 안정환의 이태리전 결승 헤딩골은 카메라 사각이어서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안정환의 핸들링이었다는 것을 온갖 자료를 동원해 증명해내고 또 손에 닿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안정환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입증한 꼴" ('황우석 사태 관전기', <부산일보>, 2005년 11월 29일)이라는 독창적인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11명의 태극전사가 축구를 하는 것과, 10여 명의 연구진이 실험실에서 배아줄기세포 복제 연구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단번에 지워진다. "모든 이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위한 것이므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줄기세포복제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 윤리 위반'이 문제인 것으로 여겨졌던 11월 말, 김어준의 입장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팀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 논란이 일어났을 때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FIFA에서 새로 적용한 심판 규정 때문에 토티가 퇴장되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듯이, "충분히 자발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연구원 난자기증 가능하단 것이 배아복제 실험과정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고 국제과학계에 주장하는 꼴 좀 봤음 한다"고 김어준은 말했다.

전쟁의 대리물로서의 축구.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 하여 이제는 세상사 모든 일이 '감정이입'하고 '열광'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축구경기이자 곧 전쟁이 되어버렸다. 황우석의 연구 자체가 날조된 것임이 확인되어 본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어준은 <한겨레> 지면을 빌어 "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고 외친다.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황우석 사태, 이제 그만 닥치자', <한겨레>, 2005년 12월 29일)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에 대해 순순히 "닥칠" 수 없던 것은 정작 김어준 자신이었다. 2006년 2월 2일 <한겨레> 지면에 오른 '황우석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어준은 황우석과 미즈메디와 공동연구자 새튼과 또 다른 과학 전문 학술지 <네이처> 등을 소재로 삼아 이런 저런 음모론과 가설을 마구 던져놓는다. 물론 그 중 어떤 주장에도 책임을 질 수는 없기에, "나중에 바보 되면 내 배는 내가 알아서 째리라. 하지만 난 이 사건이 도대체 이상하다. 나만 그런가"('황우석 미스터리', <한겨레>, 2006년 2월 2일)라고 흐지부지 결론을 내리지만,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스타일은 이후 김어준의 활동 방향을 그대로 예상할 수 있게끔 한다.

8.

박지성에게 '두 개의 심장'이 있듯이, 우리는 김어준에게 '두 개의 자아-캐릭터'가 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배낭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을 곱씹으며 만들어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가 한 편에 서있다면, 노무현의 당선과 2002년 한일월드컵, 노무현 탄핵, 황우석 사건, 이후 노무현의 검찰 조사와 자살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비극을 통해 확고해진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다른 한쪽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양자 사이의 간극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개인주의자 김어준과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고의 프로세스를 가지고 움직인다. 개인주의자 김어준에게 조직이란 개인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며 삶을 방해하는 조직이 있다면 개인은 그것을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 하지만 정치선동가 김어준에게, 우리가 어지간해서는 벗어날 수 없는 조직인 대한민국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응원하고 자랑스럽지 않아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 김어준이 황우석에게 '올인'했다가 황우석의 연구 조작이 드러나면서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한동안 발언권을 잡지 못했던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 김어준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겨레>에 연재된 상담 코너 '그까이거 아나토미'는 김어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개인주의적 감수성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고 시원시원하게 조언하는 '딴지 총수' 김어준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사이언스> 1면의 논문 게재를 안정환의 헤딩슛과 비교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 2011년 11월 30일 서울 특별공연을 연 '나는 꼼수다' 팀 ⓒ프레시안(최형락)


그렇게 대중적 입지를 회복한 김어준은 2011년 <닥치고 정치>(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를 출간하고 그해 연말부터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시작하면서 완전한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임기 4년차에 접어들어 예전만큼 권력의 '말빨'이 먹히지 않게 된 대통령 이명박을 소재로 삼아, 정치선동가 김어준의 관심사인 온갖 음모론과 '시나리오'들이 가미되자, 특히 노무현의 자살 이후 정신적 공허감에 빠져있던 구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상당히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1위를,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아이튠즈 전체 팟캐스트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개인주의자와 정치선동가의 묘한 동거는 지속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닥치고 정치>를 펼쳐보자. 개인주의자 김어준은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의 배후로 노무현을 지목했다는 사실을 놓고 "자기들 잘못을 정면으로 인정할 수 없는 초라한 정신세계를 가진 자들이 가장 쉽게 매달리는 사고 패턴"이라며, "그런 자들은 일이 잘못되면 배후나 음모가 있어줘야"(<닥치고 정치>(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푸른숲 펴냄), 104쪽)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책을 조금만 넘겨보면 이번에는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사실이 어떻게 언론에 알려졌는가에 대해, 김어준 본인이 바로 그런 "배후나 음모"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른은 이명박의 법무적 경호실장"인데, "그런 바른이 이지아의 법적 대리인"이고, "그 재판의 정확한 성격을 알았던 사람은 이지아 측 변호인단밖에 없지 않느냐는 추론이 가능"(같은 책, 10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지적 가카 시점"이라는 유명한 유행어가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다시피, <닥치고 정치>와 '나는 꼼수다'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런 음모론에 할애된다. 그렇다면 음모론적 사고방식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이 책에 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개인주의적 자아가 남겨놓은 다잉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9.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은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이고,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은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라고, 따라서 우리는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취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살펴본 것처럼 <닥치고 정치>에서 김어준의 개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듯, <건투를 빈다>에는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아르마니 양복 밑에 감춰져 있는 'Be the Reds'티셔츠의 땀자국이 남아있다. 양자는 떼어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얼굴이다. 그 부분을 확인해보자.

나이 70이 되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어본 김어준은, 기력이 쇠하고 난 후 동네에서 작은 식당을 하나 하고 싶다며 본인의 "70대 리스트" 중 일부를 공개한다. 그는 "그저 열 받는 것과 흥분되는 것이 공유되는 '꽈'가 같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수다 떨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영 관련 없이 늙어가고"(<건투를 빈다>, 83쪽) 싶은 것이다.

하여 그런 거점으로 난 식당 하나를 열 게다. 그래서 35년 전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을 이야기하면서 어제 일처럼 같이 열광하고 30년 전 2008년 광우병 사태를 이야기하며 오늘 일같이 함께 흥분하는 사람들, 노년엔 그렇게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놀고 싶다는 거다. (김어준, 같은 곳)

자, 지금의 김어준이 볼 때, 35년 후의 김어준이 여전히 열광할만한 소재가 있다면 무엇인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이다. 30살을 더 먹은 김어준이 여전히, 분노의 뉘앙스로 흥분할만한 일은 뭘까? 2008년 광우병 사태가 그것이다.

잠깐, 2008년 광우병 사태라고? 이 말은 좀 이상하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솔직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꽈'가 같아서, 통하는 사람들하고만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 박사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과오를 악마적 의도라고 단정하는 진영 논리로, 저지른 잘못에 합당한 징벌을 상회하는 결과적 폭력이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그저 생래적 보수성을 타고났을 뿐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사회적 걸레로 용도 폐기하는 진보의 잔인한 비인간성을 목격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져야 하니까, 그건 그냥 내가 욕먹고 말게.(웃음) 다만, 국익 드립.(웃음) 난 황우석이 말한 국익에 전혀 관심 없어. 이해시키기 힘들다, 참. 끝.(웃음) (<닥치고 정치>, 299쪽)

반대로, 우리는 대체 "2008년 광우병 사태"의 그 무엇이 김어준을 그토록 흥분하게 하는지, 그런데 그 흥분을 대중들과 나눌 수 없어서 굳이 개인 클럽까지 열어가며 통하는 사람들에게만 속삭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광우병 사태의 악역은 이명박이요 선량한 희생자는 <PD수첩>과 국민들이었다. 혹시 김어준은 광우병을 다루던 <PD수첩>의 '취재 윤리'가, 마치 황우석 사태 때의 그것처럼,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대세에 휩쓸려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인가?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고 이명박을 감싸 안으며 '<PD수첩>, 광우병, 씨바 왜 그따위로 검증하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인가?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어준이 지금까지도 분노하는 사건은 황우석 사건이지 광우병 사태가 아니다. 겁먹은 개인을 대중과 미디어가 몰아가서 벼랑 끝으로 밀어낸 사건. 앞서 인용된 것처럼 김어준은 황우석 사태를 그렇게 이해한다. 우리나라를 위해 뛰는 선수가 핸들링을 했다고, 한국인들이 FIFA에 제소해서 그의 선수 자격을 박탈해버린 사건. 우리가 우리 편을 구석으로 몰아붙인 사건. 개인을 도구로 삼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진보의 잔인함을 드러낸 사건. 그리하여, 노무현의 탄핵 및 자살과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사건.

월드컵에서 황우석으로 이어지는 김어준의, 말하자면 '흑역사'를 그의 단행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각각에 대한 언급이 이러한 형태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것이이야말로 의미심장한 일이며,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에 들린 단행본을 열쇠삼아 인터넷을 검색하게 되었고, 김어준이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나머지 반쪽의 자아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시대의 밑그림을 얻게 된 것이다.

10.

김어준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주는 포스코에 입사했지만 6개월 만에 퇴사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그 일마저도 끊기게 되어 하릴없이 만든 것이 <딴지일보>였고, 이후 그는 지금까지 '<딴지일보> 총수'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대학 시절을 배낭여행으로 보내고도 국내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이 그것을 박차고 나와 "인생은 비정규직"이라고, 삶에 보직은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애초에 정규직이 될 가능성조차 너무도 희박해서 한 줌의 지푸라기를 쥐고자 그가 말하는바 '초식동물'의 삶을 감내하는 이들은, 부러움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난 다음부터, 기존에 정의되었던 표준적인 삶의 모델들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직장은 더 이상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챙겨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쓰고 버리는 건전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고, 김어준이 유럽에서 보던 으리으리한 명품들은 이제 서울 시내 백화점만 가도 손쉽게 구경할 수 있다.
 

▲ 김어준. ⓒ프레시안(김하영)


김어준이 만들어낸 개인의 모델,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는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다. 삶이 통째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칼날이 언제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개인주의자이고, 따라서 기존 정당과 노동운동의 조직 등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약하디 약한 '나'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감정이입과 열광뿐일 것이다.

정치선동가 김어준은 바로 그 결여를, '나는 대중들에게 열광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자아-캐릭터를 통해 채워 넣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마약 중독자이기도 한 마약 딜러처럼, 음모론적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정치인을 연예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선별하여 대중들의 앞에 던져놓는다. 본래 서울대 조국 교수를 '띄우기' 위해 <닥치고 정치>를 기획했지만, 간을 보고 아니다 싶어서 문재인으로 갈아탄다는 그 모든 과정이 책에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치선동가로서의 김어준은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다. 김어준이 선동하는,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자는 그 '정치'는, 경제적 굴레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속하지 않을 수 없는 현재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그저 '박근혜는 아니지 않느냐', '공동체의 최소한의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문재인을 닥치고 찍어봐야, 어차피 우리 모두의 인생이 비정규직이다. 대통령 바뀌었다고 해서 너와 나의 직장만 정규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삶의 조건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대통령을 바꿀 수 있지만, 결국 인생은 알아서 사는 것이므로, 대통령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없다. 대통령 뿐 아니라 모든 '정치'가 그렇다. 정치를 향한 참여와 열광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지난 10여 년간, 반대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실제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어만 갔다. 결국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문재인이 아니라 박정희와 노무현이 맞붙는 상징계의 싸움이 되어버렸고, '나는 꼼수다'의 열광은 세대별 인구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앞에서 '멘붕'했던 김어준은, 마이크도 채 끄지 않은 채 스튜디오를 떠났고, 스스로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카페 가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며 유럽·미국 뉴스 훑고, 알아둘 기사 있으면 그쪽 기자에게 연락해 뒷이야기 듣고, 관계 맺고 자료 조사하고, 구상"(<시사IN> 290호, 39쪽)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음모론적 정치선동가가 패배를 곱씹는 사이,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페르소나가 팬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11.

1987년 민주화 투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모두 놓친 한 청년은 이 좁은 세상이 너무도 갑갑했다. 때마침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고, 또 3저 호황의 결과로 국내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만한 여비를 손쉽게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청년의 20대는 더욱 우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좋은 시점에 대학에 들어갔고, 사실상 '배낭여행 1세대'로서 개척 세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만끽했다.

<한겨레>에서 주관한 인터뷰 형식의 특강에서, 김어준은 늘 그렇듯 젊은이들에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연애를 하라고 조언했다. 문제는 그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다. 김어준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다른 나라의 여행 여건과 편의시설 등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찍어주는 대신 여행사에서 자신에게 항공권을 제공하는 '딜'을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 애를 써서 방법을 찾다 보면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생각"(<화 - 6인 6색 인터뷰 특강>(진중권 외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89쪽)한다고,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방법을 찾아서, 해외여행을 많이 해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구글 지도로 파리와 뉴욕과 런던의 뒷골목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글 스트리트 뷰로 에베레스트와 킬리만자로까지 구경할 수 있게 된 지금, 이런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어준이 처음 여행을 다니던 그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세계'의 물꼬가 트였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사람들은 또 누구보다 빨리 한국에 돌아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세계'의 모습을 소개하고 전파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낭만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아직까지는 세계가 덜 평평했던 그런 시대의 모험담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자의 캐릭터가 김어준을 '쿨'한 존재로 만들어줬다면, 88올림픽을 즐길 수도 없었던 한 청년이 2002년 월드컵을 보며 개인에서 '우리'로 도약한 후 몇 번의 질곡을 거쳐 주조해낸 음모론적 정치선동가의 캐릭터는 그를 '핫'하게 만들었다. 얼핏 보기에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입장이 한 사람의 몸에, 모종의 담론적 굴절을 통해 안착해 있다.

그 둘을 떼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치선동가가 이끌어낼 수 있는 대중적 팬덤은 개인주의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지만, 정치선동가가 삐끗할 때면 언제나 개인주의자가 구원투수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자유주의와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열광의 정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시즘의 이상향으로 서서히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김어준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부모에게 인생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서는 안 될 개인이면서, 동시에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보고 함께 환호해야 마땅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늙은 몸을 인질로 삼아 자식들의 삶을 침범하는 부모와 싸우는 청년의 건투를 빌어주지만, 그 청년이 닥치고 문재인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김어준은 그를 '겁쟁이 유인원' 쯤으로 낙인찍을 것이다. 김어준이 말하고 실현하는, '인생은 비정규직'이기에 오는 자유는, 그의 자유를 동경하는 수십만 비정규직 청취자들의 비자발적 자유가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이 간극과 양면성이야말로, 늑대소년이 PC방에 앉아 이번 시즌 아르마니 수트를 검색하고 있어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자체다.
 

본 원고는 비정기 문화 잡지인 <DOMINO> 3호에 실렸던 '늑대소년은 이탈리아에서 무엇을 보았나'를 수정·증보한 것입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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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탈출 러시, 그래도 못 떠나는 사람들은…

 

 
[르포]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요”… 군(軍)은 못 미덥고 언론은 위기만 조장
강성원 기자 | sejouri@mediatoday.co.kr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날씨는 완연한 봄이지만 마음은 봄 같지가 않다.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 위협과 북미 간, 남북 간 긴장 상황 때문에도 왠지 마음 놓고 봄을 즐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민 반응일까. 그렇다면 이미 수차례 북한의 도발과 직접 공격을 경험했던 연평도 주민들의 심정을 어떨까.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 개에게 물려본 사람은 짖는 개를 두려워한다. 기자가 연평도에서 만났던 주민과 아이들도 여전히 ‘그날’의 공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 반 친구 중의 한 명은 군인들 사격훈련 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대피소로 뛰어가자고 그래요. 헬리콥터 소리를 들어도 무서워해요. 다른 친구들도 예전엔 헬리콥터를 보면 손을 흔들면서 ‘저도 태워가요’ 그랬는데 이젠 아무도 그러지 않아요.”

연평성당 앞에서 만난 연평초등학교 6학년 방지혁(가명·12)군은 북한이 포격을 가했을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지혁군은 그날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한 포격이 쏟아지자 무척 당황하고 놀랐다고 한다. 지혁군은 부모님과 함께 그날 바로 어선을 타고 인천으로 대피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섭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혁군은 “그냥 포 쏘는 건 괜찮은데 우리집이 맞을까 봐 무서워요”라고 대답했다. 지혁군은 앞으로도 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우리집’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집과 가족을 산산이 파괴할 수 있는 전쟁의 공포를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 연평성당 안에 세워져 있는 '기적의 성모상' 뒤편으로 북한 포격 당시 표적이었던 탄약고가 있다.
ⓒ강성원
 


불안한 주민들 대피소 가져갈 가방 싸 놓기도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의 무차별 포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연평성당에서도 무너진 사제관은 다시 복구됐지만 당시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당 안에 세워진 성모상은 불과 100m 정도 떨어진 탄약고를 등지고 마을 주민을 향해 있었다. 그날 이후 이 성모상은 북한의 포화 속에서도 주민을 지킨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불린다.

미사를 드리러 성당을 찾은 한 주민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해 심리치료와 힐링 프로그램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며 “보건소에서 약 처방 정도만 해줄 뿐이지 주민들을 실질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연평도 주민들은 이제 군(軍)과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 불안하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약을 대비해 대피소로 가지고 갈 가방을 싸 놓기도 했다. 홍성훈 연평성당 신부는 “주민들의 불안감은 높지만 정부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대책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며 “일부 언론들이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위기감을 조장하는 것도 문제”고 지적했다. 홍 신부는 이어 “그제 탈북자가 꽃게잡이 배를 타고 나갈 때도 군에서는 좋은 자리 찾으러 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며 “밤 10시가 넘어서 나갔으면 출항금지 시간인데 그대로 뒀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무차별 포격으로 피해를 입은 주택이 보존돼 있다.
ⓒ강성원
 

기자가 연평도에 도착한 5일에 앞서 지난 3일 밤, 탈북자 이혁철(28)씨가 연평도에서 일하던 어선을 훔쳐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월북했다. 5일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연평면에 방문한 조윤길 옹진군수는 연평 주민과 간담회를 갖고 주민들의 요구가 중앙 정부에 반영될 수 있도록 대통령과 자리를 주선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연평도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박태원(53) 주민대책위원장은 “다수의 노인들과 주민들은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말했고 주민 김영식(62)씨는 “주민들의 불안은 연평도에 거주하는 동안 계속될 것이며 정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직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최근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이다.

외부 시선이 더 걱정…관광객 감소에 상권 침체

연평도 주민들이 느끼는 또 하나의 위협은 ‘생계 불안’이다. 4월부터 본격적인 꽃게 철이 시작됐지만 남북 간 갈등 상황이 더 고조돼 어업통제가 이뤄질까 봐 걱정이다. 아직은 바다에 꽃게잡이용 어구만 깔아 놓은 상태지만 5월부터는 꽃게 수확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북한이 도발 위협 수위를 높이면서 어선에서 일할 인부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어 연평도를 떠났던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의 발길도 끊겼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지 않았을 때 많게는 600명이 넘었던 주말 관광객 수도 요즘은 100명이 넘기 힘들다. 안보 교육을 위한 학생들의 견학 신청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식당과 민박 등 지역 상권은 계속해서 불경기다.
 

 

   
▲ 연평도 종합운동장 피폭 장소에는 벽화 사진이 그려져 있다.
ⓒ강성원
 

기자가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할 때도 연평도로 들어가는 사람보다 나오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편의점에서 만난 한 마을주민은 관광객이 많이 준 것 같다는 물음에 “요새 관광객이 어딨느냐”고 반문했다. 그나마 한동안 머물렀던 언론사 취재진도 거의 다 나가고 없었다. 연평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송영옥(52)씨는 북한의 도발보다 연평도를 바라보는 외지 사람들의 시선이 더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전쟁 위기다, 북한이 도발한다 그러는데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연평도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위험한 곳,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오히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뉴스를 보고 안부 전화를 해요.”
 

 

   
▲ 연평중·고등학교 지하에 설치된 대피소.
ⓒ강성원
 

연평도 주민들은 과거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지금도 군부대 포격 훈련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안심하고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끔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해 상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대피소만 늘릴 게 아니라 주민들의 행복과 삶의 터전을 지켜줄 혜안이 절실하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사고 이후 붙여진 ‘눈물의 연평도’의 재앙은 더는 일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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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한호석의 개벽예감](57) 연안해전 능력 키워온 인민군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3/04/05 [21:42]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13년 3월 25일, 함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2013년 4월 1일 <교도통신> 기사 한 편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기사는 그 날 한국군 2함대 사령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보고 내용 가운데 일부를 인용보도한 것인데, 2013년 3월 마지막 주에 황해남도 해안의 갱도진지들에 배치한 인민군 해안포 부대들이 포구를 개방하고 사격태세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인민군 서해함대 함선들이 ‘북방한계선(NLL)’ 인근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지난 시기에도 서북해역(북측에서는 서남해역)에서는 ‘북방한계선’ 문제가 촉발한 세 차례의 서해해전과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났고, 특히 요즈음에는 일촉즉발 상태로 격화된 전쟁발발위기가 팽배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민군 서해함대가 그처럼 긴장된 서북해역에서 해안포 사격태세를 취하면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긴박한 상황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뉴시스> 2013년 3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3월 28일에는 인민군 서해함대와 동해함대가 각각 서해와 동해에서 “동시다발적인 해상훈련을 실시(하면서), 고속정 기동훈련을 비롯해 우리쪽(남측을 뜻함-옮긴이)을 향한 실사격훈련도 감행했다”는 것이다. 위의 보도기사들이 말해주는 것은, 인민군 서해함대와 동해함대가 일촉즉발의 전쟁발발위기가 조성된 서해의 서북해역과 동해의 해상분계선 인근 해역에서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연속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실시하면서, 남측 해상을 향해 실탄사격까지 하였다는 사실이다.

위의 보도기사들이 충격을 안겨주는 까닭은, 정승조 한국군 합참의장과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 주한미국군사령관이 2013년 3월 22일 오전 10시에 ‘한미 공동 국지도발대비계획’에 서명하였다는 사실을 한국군 합참본부가 2013년 3월 24일에 공개하였기 때문이다. ‘공동대비계획’에 따르면, 만일 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이나 ‘북방한계선’에서 무력을 행사하면 “한국군이 즉각 ‘응징’하고, 미국군의 전력지원을 받아 인민군 지휘소까지 타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내용이 명문화된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자, 친미수구언론들은 한국군이 인민군의 ‘국지도발유형’을 수십 가지나 정리해놓고 유형별로 세부적인 대비계획을 세워놓았다고 반기면서, “북한이 실제로 도발했을 때 강력히 응징해 도발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드는 의미가 있다”는 정승조 합참의장의 발언을 전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었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자마자 그 이튿날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에서 ‘공동대비계획’이 서명, 발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한 인민군이 즉각 군사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과 남측의 대북적대행위에 맞선 북의 대응발언이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군사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그런 즉각적인 군사행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처럼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만일 한국군 2함대 수상함(surface ship)들이 서북해역에 나타나기만 하였어도, 격노한 인민군 서해함대는 그 함선들을 향해 불시에 기습타격을 퍼부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에서 말하는 통일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 서해함대가 실탄을 장전한 채 한국군 2함대 함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날, 2함대 함선들은 서북해역에 단 한 척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왜냐하면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대규모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는 극도로 급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한국군 2함대 함선이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사흘 전에 발효된 ‘공동대비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한국군 2함대는 그 작전계획에 따라 인민군 서해함대의 남하기동과 실탄사격훈련에 ‘보복응징’을 가하고 미국군의 작전지원을 받아 인민군 지휘소까지 타격해야 하였던 것인데, 이상하게도 그 날 서북해역에서 한국군 2함대는 무슨 ‘응징’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처럼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한국군 2함대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방일보> 2013년 3월 25일 보도기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 날 한국군 2함대에 소속된 초계함 세 척이 폭뢰를 투하하는 대잠훈련과 해상표적물에 사격하는 대함사격훈련을 실시하였고 한다. 인민군 서해함대가 대규모 실탄사격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던 날, 한국군 2함대는 초계함 세 척만 출동시켜 일상적인 수준의 훈련만 실시하고 끝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해상기동훈련이 벌어진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인민군 서해함대는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남하하여 실탄을 사격하는 대담무쌍한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한국군 2함대 초계함 세 척은 ‘북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격렬비열도 인근 해상에서 일상적인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 2013년 3월 25일 기동훈련을 서해 격렬비열도 인근 해상에서 실시할 것이라는 한국 해군 발표는 <국방일보>가 3월 21일에 보도한 바 있다. 서해 격렬비열도는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2010년 12월 2일 <동아일보>가 보도한 한국군 합참본부 사진자료에 따르면, ‘해상사격 훈련구역’이라고 표시된 네 구역이 서북해역에 표시되었는데,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넓은 ‘D구역’은 ‘북방한계선’ 남쪽에 붙어 있는 접속수역이다. 그런데 한국군 2함대는 자기의 해상사격 훈련구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20km나 밀려난 것이다.

그러면 동해를 작전구역으로 하는 한국군 1함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방일보> 2013년 4월 2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제1함대는 3월 28일부터 4월 1일까지 “동해 작전구역에서 전대급 기동 및 실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함대의 동해 작전구역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연합뉴스> 2013년 3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동해안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속초 앞바다가 1함대 작전구역이다.

인민군 서해함대가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까지 대규모 남하하여 기동하면서 실탄사격훈련을 실시하는 극도로 긴박한 상황이 조성되었는데도, 그 현장에 함대를 출동시키지 못하고 아주 멀리 떨어진 남쪽 해상에서 초계함 세 척이 폭뢰 몇 발 투하하고, 함포 몇 발 쏘는 식의 빈약한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것은, 한국군이 무슨 ‘응징’이니 ‘지휘소 타격’이니 하면서 ‘공동대비계획’을 거창하게 발표해놓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허풍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군은 왜 긴급대응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그처럼 후방에서 허풍만 떨었을까? 한국군 함대는 인민군 함대와 실전을 벌일 경우 자기들이 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다.

연안해전능력 극대화한 인민군 해군

일주일에 한 차례씩 <자주민보>에 발표하는 나의 글들 가운데는 2013년 3월 16일에 게시된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제목의 글(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2190)도 있다. 그 글에서 나는 지상전 시나리오에 대해서만 논하였고, 해상전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북이 말하는 통일대전은 대규모 전면전이므로, 그런 대규모 전면전을 시나리오로 예상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지상전 시나리오와 해상전 시나리오를 각각 따로 논할 수밖에 없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인민군 지상군부대들은 한미연합군 지상군부대들이 지키고 있는 방어진지들을 돌파하여야 하지만, 서해와 동해에는 그런 방어진지가 없다. 쌍방 함대가 바다에서 격렬하게 맞붙는 대규모 해상전만 있을 뿐이다.

만일 서해와 동해에서 해상전이 벌어진다면, 대양해전이 아니라 연안해전이 될 것이다. 원거리 대양해전에서는 순양함, 구축함, 호위함, 초계함 같은 큰 군함들이 요구되지만, 그와 달리 근거리 연안해전에서는 몸집이 크고 육중하여 민첩성이 떨어지는 대형군함들은 별반 쓸모가 없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대양해전에서나 작전능력을 발휘할 그런 대형군함이 한반도 연안해전에 나서면, 전쟁상대의 지대함 미사일과 중어뢰에 맞아 격침당할 위험만 커질 뿐이다.

근거리 연안해전에 요구되는 것은, 몸집이 작고 날렵하여 민첩하게 기동하는 소형함정이다. 적함을 단방에 격침시킬 타격수단으로 무장한 소형함정을 많이 건조하여 강력한 연안작전능력을 갖춰야 근거리 연안해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남측의 친미수구언론과 엉터리 평론가들은 일본에 주둔하는 미국의 7함대 항모강습단이 한반도로 출동하면 북이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친미사대주의가 빚어내는 무지와 억측이다. 항모강습단을 연안해전에 동원하는 작전방식은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에서나 가능한 것이었으며, 인민군이 지대함 미사일과 공대함 미사일을 배치하고, 잠수함작전과 정밀핵타격작전을 준비하여 해군무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킨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의 항모강습단 작전은 베트남 전쟁의 색바랜 전쟁신화로 남았다.

현 시기 미국이 한반도 연안해전에 동원할 타격수단은, 북의 군사전략거점을 향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불시에 쏠 수 있는 핵추진 잠수함이다. 한해에도 몇 차례씩 한반도 연안에 출동하는 7함대 대형 수상함들은 평시 무력시위 이외에 거의 작전적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불리한 상황을 간파한 미국은 최근에 연안전투함(littoral combat ship)을 부랴부랴 개발하였지만, 미국이 새로 개발한 연안전투함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남단 항구 샌디에고(San Dieo)를 모항으로 하는 프리덤호(USS Freedom), 인디펜던스호(USS Independence), 포트워스호(USS Fort Worth) 세 척뿐이다.

지난 60년 동안 미국 해군의 절대적 영향과 지도를 받으며 미국식을 따라해온 한국 해군은 미국 해군처럼 대양해전을 꿈꾸며 연안해전에 필요한 작전능력 배양을 소홀히 여겼다. 한국 해군이 연안해전에 필요한 작전능력을 배양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6월 29일 제2차 서해해전에서 패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와 완전히 다르게, 인민군 해군은 처음부터 소련식을 따르지 않고 ‘우리식 해군무력’ 건설에 달라붙었다. 북에서 말하는 ‘우리식 해군무력’ 건설이란 연안해전의 근거리 작전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된 것이다. 북측 자료를 분석해보면, 인민군 해군이 개발한 ‘우리식 해상전술’의 핵심은 고속돌진전술과 화력집중전술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인민군 해군무력도 당연히 고속돌진전술과 화력집중전술에 맞게 강화, 발전되어 왔으며, 해상기동훈련도 그 두 전술에 맞게 실시하며 실전능력을 키우고 다져왔다. 그들이 그렇게 60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실전능력은 얼마나 강해졌을까?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각종 해군함선들 가운데 강력한 연안해전능력을 지닌 일곱 종류의 함선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2012년 3월 8일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해군 제123군부대를 시찰하는 보도사진에는 어느 군항에 계류된 함정들이 보인다. 그 함정들은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22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63km인 고속미사일정이다. 북에서 그 고속미사일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서주급 미사일정(Soju-class missile boat)’이라 부른다. 인민군 고속미사일정은 사거리 100km인 함대함 미사일 4발,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둘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16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80km인 고속어뢰정이 있다. 북에서 그 고속어뢰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셔센급 어뢰정(Shershen-class torpedo boat)’이라 부른다. 인민군 고속어뢰정은 533m 중어뢰 4발,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셋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82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74km인 고속방사포정이 있다. 북에서 그 고속방사포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차호급 로켓정(Chaho-class rocket boat)’이라 부른다. 고속방사포정은 사거리가 30km인 40련장 122mm 방사포 1문, 23mm 고사포 1문, 14.5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넷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선체 길이가 약 40m이며 항해속도가 시속 90km인 스텔스 고속정이 있다. <조선일보> 2010년 5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이 스텔스 고속정은 1990년대 말 북에서 생산되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스텔스 수상효과함선(stealth surface effect ship)이라 부른다. 인민군 스텔스 고속정은 57mm 함포 1문, 30mm 쌍열 고사포 1문으로 무장하였다.

다섯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200t이며 항해속도가 시속 80km인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이 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은 수상효과 고속미사일정이라 부른다. 인민군이 실전배치한 스텔스 고속미사일정은 사거리 120km인 초음속 함대함 미사일 8발, 85mm 함포 1문, 30mm 쌍열 고사포 2문으로 무장하였다.

여섯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배수량이 80t이고 항해속도가 시속 74km인 스텔스 고속어뢰정이 있다. 북에서 그 스텔스 고속어뢰정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공식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스텔스 고속어뢰정은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인민군 스텔스 고속어뢰정은 533mm 중어뢰 2발, 30mm 쌍열 고사포 1문으로 무장하였다.
일곱째, 북에서 자체로 건조한 무인고속어뢰정이 있다. 2011년 8월 22일 남측 주요 언론매체들은 북이 신형 무인어뢰정을 2011년 초에 개발하였고, 8월에 실전배치하였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작전능력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2013년 3월 24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제1501군부대를 시찰하였는데, “그 군부대에서 자체로 연구제작한 첨단전투기술지재들을 보아주시였다”고 한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2012년 5월 23일 그 군부대를 찾아가 “현대전의 요구에 맞는 첨단전투기술기재들을 연구개발할 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는데, 그 과업을 받은 제1501군부대에서는 “그 어떤 전투정황 속에서도 적들의 급소를 무자비하게 타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현대적인 첨단전투기술기재들을 자체로 연구제작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적진을 향해 명중탄을 날리며 맹렬히 돌진하는 모습이 선히 보이는 것만 같다”고 묘사한 그 첨단무기는, 북측 보도사진에 상층부 일부만 나타난 모습을 보면, 무인화된 고속미사일정인것으로 보인다. 이미 2011년 8월 초에 무인고속어뢰정을 실전배치한 북은 무인고속미사일정도 건조하였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살펴보면, 인민군 해군무력은 연안해전에 최적화한 각종 함선을 고속기동화, 선체소형화 및 경량화, 화력집약화, 스텔스화하였고, 최근에는 현대식 무기개발의 최고 수준인 무인화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그처럼 강력한 연안해전 해군무력을 건설한 나라는 북 이외에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남측 언론매체들은 위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고 인민군 해군이 낡은 경비정이나 몇 척 가지고 있는 것처럼 왜곡해왔다. 북에서 그런 낡은 경비정은 실전에 쓸 함정이 아니라, 해양순찰과 어로지도에 쓰는 함정이다. 북에는 해양경찰이 따로 없으므로, 해군이 해경임무까지 맡아본다. 그러므로 북의 해양경찰급 함정만 보고 인민군 해군무력을 평가하면 너무 크게 오판하는 것이다.

서방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추산에 따르면, 인민군 함대가 운용하는 각종 수상함은 동해함대에 약 470척, 서해함대에 약 300척이 배치되었다. 770척 수상함이 동해함대 19개 해군기지와 서해함대 7개 해군기지에 배치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인민군 해군무력의 중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을 기준으로 인민군 잠수함이 88척이었으니, 올해 2013년에는 90척이 넘었을 것이다. 인민군 잠수함대의 특징은 시속 370km의 초고속으로 13km 밖에 있는 적함을 격침하는 533mm 초공동어뢰(supercavitating torpedo)로 무장한 스텔스 잠수함들을 많이 보유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2012년 6월 17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미 항공모함은 왜 동해에 들어가지 못할까?’(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9872)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또한 주목하는 것은, 배수량이 100,000t이 넘고, 함재기를 90대나 싣고 다니는 미국 해군의 니미츠급(Nimitz-class) 초대형 항공모함을 한 방에 격침시킬 폭발력 15킬로톤급 핵어뢰(nuclear torpedo)로 무장한 초강력 스텔스 잠수함이 실전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2010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2009년에 시작한 핵어뢰 개발사업을 2012년까지 완료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올해는 이미 실전배치하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군 함대는 구축함 15척, 초계함 21척, 미사일고속정 12척, 참수리급 고속정 75척을 합하여 모두 122척의 수상함을 실전배치하였고, 잠수함 12척을 실전배치하였다. 인민군 해군무력에 비해, 격차가 너무 커 보인다.

10시간 만에 끝날 해상전 시나리오

만일 실전상황에 돌입하는 경우, 인민군 해군무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의식하여 북상공격을 사실상 포기한 한국군 함대는 동해와 서해에서 해상방어진을 세 겹으로 쳐놓고 인민군 함대의 남하기동을 저지하려고 할 것이다. 한국군 함대의 해상방어진은 고속정대, 초계함대, 구축함대 순으로 배치해놓은 3중대형이다. 한반도 연안해전 시나리오를 예상하면 아래와 같다.

한반도 연안해전이 벌어지면 인민군 함대도 당연히 손실을 입겠지만, 700여 척 수상함들이 고속돌진과 화력집중으로 삼면공격을 해오는 인민군 함대의 압도적인 공세를 한국군 함대 122척이 막아내는 것은 누가 봐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군 함대는 미사일고속정 12척과 참수리급 고속정 75척으로 서해와 동해 최전방에 제1방어진을 칠 것이다. 그에 대응하여 인민군 함대는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병기인 무인고속어뢰정 편대와 스텔스 고속정 편대를 선봉에 세워 제1방어진을 돌파할 것이다. 한국군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으면서 시속 90km로 나는 듯이 항해하는 스텔스 고속정 편대의 공격으로 한국군 함대의 제1방어진이 큰 혼란에 빠지면, 그 방어진을 강력한 화력집중전술로 격침시키는 타격임무는 40련장 122mm 방사포를 퍼붓는 막강한 화력을 갖추고 고속남하하는 고속방사포정 편대와 고속어뢰정 편대가 맡게 될 것이다.

인민군 함대의 선봉무력이 한국군 함대의 제1방어진을 격파하면, 한국군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이 인민군 함대의 남하기동을 가로막을 것이다. 인민군 함대의 고속어뢰정 편대와 고속미사일정 편대는 고속기동전술과 화력집중전술로 한국군 함대의 제2방어진을 사면팔방에서 공격하게 된다. 노후한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은, 고속정 87척이 구축한 제1방어진보다 더 취약하다. 한국군 함대의 노후한 초계함 21척은 인민군 고속어뢰정 편대의 중어뢰 공격과 인민군 고속미사일정 편대의 함대함 미사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전멸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후한 초계함 21척이 구축한 제2방어진이 무너지면, 그 뒤에 구축함 15척이 구축한 마지막 제3방어진이 버티고 있다. 한국군 구축함 15척 가운데 4척은 미국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다가 노후화되어 버리게 된 것을 넘겨받은 ‘구호물자’여서, 바다에 떠다니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실전에서 작전능력을 발휘할 한국군 구축함은 11척이다.

시속 56km의 느린 속도로 기동하는 한국군 구축함 11척은 시속 80km로 민첩하게 기동하는 인민군 스텔스 고속미사일정 편대가 집중발사하는 사거리 120km의 초음속 함대함 미사일을 피하기 힘들다. 혹시 그 미사일타격을 용케 피해 살아남은 구축함 몇 척은 인민군 스텔스 고속어뢰정 편대가 발사하는 533mm 중어뢰를 맞고 격침될 것이다.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이 서해와 동해에 출동하여 남하기동하는 인민군 함대에 공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한국군 함대를 지원하지 않겠는가 하고 예상할 수 있지만, 북이 전면전을 개시하면 남측 공군기지들을 순식간에 미사일로 파괴하고, 특수전 병력이 기지포위공격으로 기지 자체를 점령하려고 할 것인데, 그처럼 격렬한 이중공격을 용케 피해 출격한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은 비좁은 한반도 상공에서 인민군 전투기들과 상상을 초월한 공중전을 벌여야 하기 때문에, 한미연합군 전투기들이 전멸위험에 빠진 한국군 함대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와 같은 한반도 해전시나리오를 예상하면, 서해와 동해에서 벌어질 해상전에서 한국군 수상함 122척은 개전시각으로부터 10시간 안에 전부 격침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격렬한 해전 중에 인민군 수상함도 일부 격침될 것이다. 그러나 북은 그들이 말하는 ‘정의의 조국통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으므로, 수상함 일부가 격침당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민군 함대와 맞붙은 해전에서 한국군 함대의 수상함들이 거의 궤멸되는 것과 달리,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쉽게 격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90척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잠수함대를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해야 한다. 잠수함을 격침시킬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잠수함이다. 인민군 잠수함들은 한국군 잠수함기지 바깥이나 한국군 잠수함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미리 사전침투하여 엔진을 끄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앉는 착저매복전술로 한국군 잠수함을 격침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한국군 잠수함 12척은 인민군 대잠헬기의 추적망과 인민군 수상함 편대의 폭뢰투하망을 뚫고 살아남아야 한다.

잠수함이 잠항할 때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지 못한 한국군 함대의 손원일급 잠수함 3척은 살아남기 힘들지만, 그보다 신형인 장보고급 잠수함은 생존율이 높기 때문에 9척 가운데 몇 척이 끝까지 살아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남은 잠수함은 전쟁이 이미 끝난 것을 알지 못한 채 캄캄한 바다 속을 헤매고 다니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한 전쟁시나리오를 예상하면, 한반도 지상전과 달리 한반도 해상전은 10시간 만에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초단기해상전이 인민군 함대의 승리로 끝나자마자, 인민군 륙전대(남측에서는 해병대)가 공기부양정과 상륙함을 타고 고속으로 남하하여 남측 후방지역 해안 곳곳에 상륙할 것이다. 특히 서해에서 고속공기부양정을 타고 남하한 인민군 륙전대 정예병력은 아라뱃길을 통해 서울 도심으로 직행하고, 동해에서 고속공기부양정을 타고 남하한 인민군 륙전대 정예병력은 강원도 동해시에 상륙한 뒤에 동해안 7번 국도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직행할 것으로 보인다. 고속공기부양정과 상륙함은 북측 항구에서부터 각각 인천과 동해시까지 계속 왕복하면서 인민군 륙전대 병력을 남측에 실어나를 것이다. 인민군 동해함대와 서해함대에는 상륙함 131척과 공기부양정 136척이 즉각출동을 대기하고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2013년 3월 25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동해안에서 인민군 해군 제597대련합부대 상륙훈련을 지도하였다. 제597대련합부대는 동해함대로 알려졌는데, 상륙훈련에 참가한 륙전대 병력은 공기부양정을 타고 “해안으로 련이어 벼락같이 돌입”하였고, “해안에 등륙한 일당백 전투원들은 평시에 련마한 전투동작으로 <적>진을 향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실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실시한 상륙연습으로 보인다.(2013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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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춰본 한반도 위기

먼저 ‘큰 나라’에 도전한 ‘작은 나라’ 쿠바 1962, 그리고 북한 2013

이정무 기자 jmlee@vop.co.kr
입력 2013-04-04 17:39:40l수정 2013-04-04 21:54:30

 

미국의 유력지인 USA투데이는 2일자에서 군사전문가인 미국 랜드연구소의 블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을 인용해 북한의 위협과 이에 미국이 반응하는 태도가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다”고 보도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옛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 하면서 발생했던 냉전시대의 최대 전쟁위기였다.

쿠바는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친미 정권을 몰아낸 이후 미국과 국교가 단절됐다. 케네디 행정부는 2년 뒤인 1961년에는 쿠바인 망명자들을 주축으로 해서 이른바 ‘피그만 상륙작전’을 펼쳤으나 카스트로 정권 전복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에 대한 쿠바의 역공이었다. 카스트로는 소련과 손잡고 핵미사일을 도입하기 위한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이를 포착하자 쿠바를 미 군함으로 봉쇄한 후, 미사일을 싣고 오던 소련 화물선과 대치했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쿠바에 대한 공습을 주장하기도 했다.

위기가 지속되면서 강온을 오가던 케네디는 결국 소련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소련도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는 대신 화물선을 되돌림으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는 12일 만에 마무리됐다. (자세한 내용은 '간추린 쿠바 미사일 위기' 참조)

미국, ‘전략적 인내’ 대신 무력 시위
 

미국이 주도한 대북조치

미국이 주도한 대북조치ⓒ민중의소리 유동수 디자인실장

미국이 이번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여러 당국자들의 말로 표현되고 있다.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3일 “그들(북한)은 지금 핵 능력(nuclear capacity)을 갖고 있으며, 미사일운반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위협은 괌에 있는 우리 기지를 직접 겨냥했고, 하와이와 본토 서부해안을 위협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 B-52, F-22 스텔스 전투기, 핵추진 잠수함 샤이엔 등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무기들을 한반도 주변에서 공개함으로써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 국방부는 또 몇 주일 내에 고고도방어체계(THAAD)를 괌에 배치할 예정이다. 북의 무력시위에 더 큰 무력시위로 맞선 것인데, 이는 그 동안 오바마 행정부가 견지해 온 ‘전략적 인내’ 노선과는 다르다.

유럽과는 달리 자국 내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미국은 본토에 대한 공격 가능성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다룬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역시 미국으로부터 140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쿠바에 적대국의 핵미사일이 배치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북한은 당시 쿠바처럼 ‘국가 차원에서’ 반미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군사적 능력 문제는 미국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공습을 주장하는 매파와 세계대전을 우려해 소련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비둘기파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2기 오바마 행정부에서 가장 큰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먼저 ‘큰 나라’에 도전한 ‘작은 나라’ 북한

쿠바는 미국에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나라’다. 북한 역시 미국에 비할 수 없는 ‘작은 나라’다. 미사일 위기 전후로 쿠바와 미국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격렬하게 대립했던 것도 북미 사이의 오랜 정치군사적 대립과 비견할 만하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북한은 이스라엘이나 인도, 파키스탄과 같은 다른 핵개발국과 전혀 다르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지원 혹은 비적대적인 관계 위에서 핵무기를 개발한 반면, 북한은 처음부터 미국을 겨냥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왔다.

‘작은 나라’가 먼저 ‘큰 나라’에게 도전했다는 것도 쿠바 미사일 위기와 현재의 한반도 위기가 비슷한 점이다. 이럴 때 ‘작은 나라’의 행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상황 변화’의 의지다. 상대를 압도할 수는 없지만 상대에게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음을 보여줘서, ‘일방적 약자’의 위치를 벗어나보겠다는 것이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는 지난 달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미국이) 세계최대의 핵보유국이고 항시적으로 핵위협을 가해”왔지만, “(상대가) 지구상 그 어디에 있든 핵무기로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능력만 든든히 갖추면 그 어떤 침략자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 제1비서는 또 “정밀화, 소형화된 핵무기들과 그 운반수단들을 더 많이 만들며 핵무기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대외적으로는 ‘선제핵공격’을 거론하지만 실제에서는 핵 보유고를 늘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방향으로 중,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첨예하고 장기적인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최종적으로 소련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미사일 기지 건설 중단을 맞바꾼 것이다. 이번에 북미 간에 조성된 위기에서 이런 ‘맞바꾸기’는 가능할까? 현재로서는 낙관하기 어렵다.

우선 북한의 핵 보유 의사가 완고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재확인했다. 탈냉전 이래 지속된 미국의 절대적 우위 상황을 바꿔보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전쟁 불사’를 호언할 정도다. 1962년 당시 쿠바는 소련이라는 후견국이 있었지만 지금 북한에게는 미국에 비견할 수 있는 후견국이 없다. 한 발 물러설 여지가 적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미국은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용인할 수 있을까? 만약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논리적으로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방법과 더 큰 ‘대가’를 치르고 북한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방법만 남게 된다. 미국이 이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전면전과 국지전의 버튼은 누가?' 참조)

미국의 선택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북미 양측의 긴장은 더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건 협상이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번 한반도 위기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해 첨예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장기화될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은 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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