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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을 보면 대한민국 '보수'의 실체를 안다

 


대한민국 4성 장군 출신의 한 인물 때문에 정국이 시끄럽습니다. 60만 대군의 수장으로 김병관이라는 사람을 임명하려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를 반대하는 야당의 모습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국방을 책임지는 국방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논의되는 쟁점은 이상하게도 국방보다는 오히려 '거짓말'과 '도덕성' 때문입니다.

그를 둘러싼 의혹을 보면 대부분 국방 관련 정책을 묻기도 전에 기본적인 인사검증 시스템에서 거르지 못한 이유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보수언론과 보수단체들은 그를 반대하는 것을 마치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뉴데일리'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 후보를 “곧 떨어뜨리겠다”며 당당하게(?) 떠드는 세력들은 누굴까.
만약 청와대와 여당이 이런 것을 ‘국민 여론’이라며 김병관 후보를 낙마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지적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방장관은 김정은이 검증하고 임명한다”

'조갑제닷컴'
김정은·從北이 ‘김병관’ 낙마시킬 이유 분명해졌다
보수(保守) 김병관 국방장관 내정자를 낙마시켜라(?)


뉴데일리나 조갑제닷컴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김병관을 사퇴시키려는 세력은 김정은의 사주를 받은 '종북'세력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입니다. 김병관 후보가 '전작권 이양과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를 하고 있으며, 지금 그를 둘러싼 의혹이 언론의 김병관 죽이기에서 비롯된 음모이기 때문입니다.

' 출입국 기록까지 조작한 범죄자, 그가 대한민국 국방장관?'

인사청문회에 나오는 인물은 반공직자입니다. 아니 공직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정된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조직은 적극 그에 대한 준비를 함께 해주고, 보고서만 채택이 되지 않을 뿐,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그를 데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내정자,김병관 장관 후보자와 한미연합사를 방문한 박근혜 당선인. 출처: 세계일보

 


대한민국 국방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미연합사를 방문하면서 박근혜 당선인은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내정자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대동했었습니다. 이것은 한미연합사의 모든 장성들에게 이제 앞으로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은 '김병관'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랬던 사람이 인사청문회에 제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문서 중의 하나인 서류를 위조하고 감췄습니다.

 

 

▲김병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 제출한 자료. 출처:민주당

 


김병관 후보는 KMDC의 주식을 매입한 과정과 보유 사실을 숨긴 사실로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그저 지인을 통해 매수했고, 그와 관련해서 전혀 의혹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떳떳함에 비추어 관련 자료를 조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병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 제출한 후보자 출입국 기록을 제출하면서 2011년 1월19일부터 1월23일까지의 행선국을 '미상'으로 기록한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이상한 점은 그냥 간단하게 공항에서 발급하는 출입국 기록을 갖다 제출하면 될 것을 굳이 자신이 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지난 2011년 1월 자원개발 업체인 KMDC 관계자와 함께 미얀마를 방문해 관계자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출처:KMDC 홈페이지

 


이유는 KMDC 홈페이지에 있었습니다. 주식 보유 의혹을 사고 있는 KMCD 홈페이지에는 김병관 후보자가 미얀마를 방문해 회사 관계자들로부터 '버마 해상광구 탐사개발권' 설명을 듣고, MOU(양해각서)체결식에도 참석한 사진이 버젓이 있었습니다.

결국, 김병관 후보자는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문제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예 출입국 기록에서 미얀마 출국 사실을 숨긴 것입니다.

KMDC 이영수 대표와 함께 미얀마 행정수도 '네피도우'를 방문할 당시에는 새누리당 의원들도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개 회사의 사업 설명회와 MOU체결 기념식에 국회의원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명이 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이런 사진을 KMDC가 홈페이지에 올린 것은 이것을 통해 자신들의 사업을 정치권에서도 인정했다는 홍보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재향군인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법질서 준수'를 외쳤던 김병관 국방장관 내정자

 


주식 보유를 떠나 이런 사실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만으로 '국회에서의 증언 및 감정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로 1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죄를 묻는 것을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종북' 세력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이 된 것입니다.

' 이런 자들이 국가안보를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대한민국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바로 '성우회'라는 곳입니다. 지난 3월 3일 성우회는 김병관 국방장관 후보자에 대한 사실상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그전에 성우회가 김병관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여론을 의식한 듯 성우회는 "위기 관리에 경험과 능력이 출중해 추천된 안보라인 핵심 직위자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임명이 지연되고 장기간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우며, 특히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을 부풀리고 왜곡해 여론몰이를 함으로써 개인은 물론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면서 하루빨리 국방장관을 임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전직 예비역 장성들이 김병관 장관 후보자를 지지하니 그가 마치 국방장관의 적임자인 듯 보이지만, 사실 '성우회'라는 조직 자체가 문제가 많은 조직입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발표하면서 독재 정권을 수호했던 서종철, 평화의 댐을 주도했던 '이기백', 린다김 로비사건의 주역 '이양호', 록히드마틴에 국가 기밀을 돈 받고 넘겼던 '김상태' 등이 모두 성우회 출신입니다.

우리가 흔히 군복 입고 '자유 수호' '종북 척결'을 외쳤던 반공단체의 시위를 주도했던 오자복의 가족 대부분은 미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쟁이 나면 도망갈 것 같은 비리 인물들이 군 장성 원로라고 하는 행동은 마치 국가 안보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듯 보입니다.

 

 

▲ 예비역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가 전작권 이양을 재연기하라고 촉구했다는 보도. 출처:조선일보

 


이들의 주장은 매번 똑같습니다. 전작권을 한국이 가져오지 말고 그대로 미국이 유지하도록 하자는 소립니다. 전작권 이양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대체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장군들은 무엇을 하길래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작전권을 도대체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군인은 진급하기 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작전 능력을 평가받고 진정한 자주 국방을 위한 명령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원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들 대한민국 장군은 자신의 능력과 머리가 아닌 누군가에 붙어서 꼬리로 살고자 하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전작권 이양을 가장 반대했던 단체가 '성우회'였고,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김상태 전 공군참모총장은 2009~2010년까지 군사기밀을 넘긴 대가로 미국 록히드마틴사로부터 25억원의 수수료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 예비군 안보교육 위탁사업을 진행했던 성우회 산하 '성우안보전략연구원'

 


대한민국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 산하에는 '성우안보전략연구원'이 있습니다. 이들은 강사를 파견해서 예비군 훈련 교육을 맡아 하는데, 그 지긋지긋하게 재미없는 예비군 안보교육을 '성우회'가 맡아서 했던 것입니다.

장군으로 사병들의 복지 예산을 강탈해 골프 하며 군생활 하더니 나와서는 친목회 하나 만들어 놓고 이것을 빌미로 나라에서 주는 예산을 빼먹고 살았던 조직이 '성우회'입니다.

[국방] - 병사들 깔깔이는 없어도,장군위한 골프장은 무조건?
[국방] - 대한민국 군인이 무슨 잔반처리반입니까?

온갖 비리를 다 저지른 자들이 마치 국가 안보를 걱정하는 충신처럼 전작권 이양을 반대하고 온갖 비리로 얼룩진 범죄자를 국방장관에 임명하라고 성명서를 냅니다. 보수언론은 옳다구나 하고 이들을 이용해 '종북 척결' 타령을 외칩니다.

 

 

 


어제 금융기관 전산망 장애로 집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지 못하는 이등병에게 시민들이 돈을 모아 버스비를 마련해줬다는 목격담이 트위터 미담으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발생한 원인은 대한민국 '군인공제회' 때문입니다.

예비역 장성과 영관급들이 주도하는 '군인공제회'는 군인들의 모든 급여와 경제 활동으로 이용되는 '나라사랑카드' 사업을 신한은행과 독점 체결했습니다. 이들 군인공제회는 신한은행과 10년 독점 장기계약으로 카드 1장당 2천원의 수수료를 받고 있으며 이 수입만 연 6억원에 달합니다.

다른 은행과 함께 사업을 운영하지 않고 독점으로 나라사랑 카드를 운영한 의혹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지만, 아직도 이런 문제는 시정되지 않았고, 결국 어제처럼 신한은행의 전산망이 마비되면 군인들은 버스 하나 타기 어렵게 됩니다.

 

 

 


대한민국 보수는 법에도 없는 이상한 논리로 '종북' 타령을 운운합니다. 그러나 진짜 대한민국 보수에 필요한 것은 우선 자신들의 불법을 법에 의해 준엄하게 심판받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자고 외치는 사람이 '종북'이 되고, 범죄자가 '애국 시민'이 되는 이상한 나라에서는 결코 국가 안보를 스스로 지키려는 진정한 군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 진짜 군인은 안보를 팔아 자신의 일신 영달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며 국가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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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B-52 상상밖 타격으로 초토화 시킬 것”

 

 

 

북, 미국 모든 무기 가지고 덤벼봐
 
조선, “B-52 상상밖 타격으로 초토화 시킬 것”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3/21 [06:2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조선은 미국을 향해 모든 전쟁 무기를 동원해 덤벼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며 도발하면 무자비하게 초토화 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이정섭 기자

조선은 B-52핵전략폭격기의 한미합동훈련 참가를 비난하며 미국이 모든 전쟁무기를 꺼내들고 덤벼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도발 근거지를 초토해 버릴 것이라고 밝혀 주목된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핵 몽둥이를 휘두르며 세계를 좌지우지해보려던 야망도 끝장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민족끼리는 “그런데도 아직까지 미국은 변화된 시대를 판별하지 못하고 강권과 오만으로 그 무엇인가를 달성해보려고 어리석게 놀아대고 있다.”며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가 지난 8일에 이어 19일 감행된 《B-52》전략폭격기의 조선반도출격”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이 신문은 “물론 비행훈련에 앞서 괴뢰군부나 언론들을 내세워 《B-52》전략폭격기의 전술적 제원과 성능을 요란스럽게 선전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길이와 너비, 무게요 하는 것은 물론 최대 항속거리며 최대상승고도가 얼마라느니, 수소폭탄을 몇발 실을 수 있다느니, 폭발력이 얼마라는니 등등 …”이라며 B-52 출격 공개를 성토했다.

신문은 “미국이 지난 1945년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한 핵폭탄의 폭발력과 대비할 때 어마어마한 제원과 성능을 가진 전략폭격기인, 그래서 《하늘의 요새》라고도 한다는 《B-52》전략폭격기를 북침전쟁연습에 동원하고 그 사실을 이례적으로 공개한 것은 우리 공화국에 대한 또 하나의 엄중한 핵공격위협이며 우리의 초강경대응조치에 질겁한 남조선괴뢰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북침핵전쟁소동의 돌격대로 계속 써먹자는 기도의 발로”라고 평가절하 했다.

또한 “이것은 조선반도정세가 전쟁접경에로 치닫고 있는 때에 전략적 핵타격 수단을 조선반도에 끌어들이는 엄중한 군사적도발로서 미국은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의 초강경의지를 떠보려고 무모하게 시도하고 있다.”고 미국의 의사가 무엇지를 강조했다.

이어 “내외여론들은 《B-52》전략폭격기의 조선반도비행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하면서 전쟁위기의 극한에 선 조선반도에서 전쟁발발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조성된 사태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고 돗붙였다.

아울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은 전략폭격기 《B-52》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으며 전략폭격기가 조선반도에 다시 출격한다면 적대세력들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미국이 《B-52》폭격기를 가지고 무슨 《하늘의 요새》니 뭐니 하며 《선제타격》이라는 문구를 외워대고 있지만 그것으로써는 결코 우리를 놀랠 수 없다.”며 “ 《B-52》 한대가 아니라 미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쟁장비들을 모조리 꺼내들고 위협하여도 우리 군대와 인민은 눈섭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원수들이 끝끝내 도발해온다면 우리 군대와 인민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고 정밀 핵 타격수단을 포함한 모든 화력타격수단들을 동원하여 일찍이 있어 본 적이 없는 상상밖의 타격으로 도발의 근원들을 송두리 채 초토화 시켜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민족끼리는 “그 타격에는 조선반도에 다시 날아든 《B-52》폭격기도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한편 조선은 B-52가 한반도 비행을 마친 하룻만에 김정은 원수의 지도로 진행 된 정밀자행 로켓 타격 훈련을 전격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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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3만7천여명..정원 8천명 이상 초과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3/21 09:01
  • 수정일
    2013/03/21 09:0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주한미군 3만7천여명..정원 8천명 이상 초과
미 국방부 '2012년 기지구조보고서' 발표
 
 
2013년 03월 21일 (목) 08:09:41 조정훈 기자 whoony@tongilnews.com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수가 한.미 당국 사이에 합의된 2만 8,500명보다 훨씬 많은 3만 7,000여 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된 주한미군 범죄와의 관련성 여부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지난해 발표된 미국 국방부 연례보고서인 '기지 구조보고서'(Base Structure Report Fiscal Year 2012 Baseline)에 따르면, 주한미군 병력수는 2011년 9월 말 기준으로 3만 7,35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9년 9월 말 기준 2만 6,305명에서 2010년 3만 1,839명으로 꾸준히 증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미 양국이 줄곧 주한미군을 2만 8,500명으로 동결하기로 합의해온 것과 달리 8천 854명이 많은 숫자이다.

'기지 구조보고서'는 2007년 9월말 기준 2만 8,356명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에는 2만 7,968명, 2009년에는 2만 6,305명으로 집계, 2,051명이 감소해 주한미군 병력 2만 8,500명 유지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기지 구조보고서'에는 주한미군의 숫자가 월등히 증가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 지난해 발표된 미국 국방부 연례보고서인 '기지 구조보고서'(Base Structure Report Fiscal Year 2012 Baseline) 표지. 2011년 9월 말 기준으로 주한미군의 숫자가 3만 7354명으로 집계됐다. [캡쳐-기지구조보고서]

 

'기지 구조보고서'에 따르면, 주한미군 3만 7,354명 중 지상군 3만 82명, 해군 104명, 공군 7천168명이며, 특히 평택 캠프험프리 주둔 병력은 1만 977명으로 2009년 3천 536명에 비해 7천여명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 관계자와 국방부 관계자는 "공식적인 숫자는 2만 8,500명"이라며 "기지구조보고서 내용은 현재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종대 <디펜스21> 편집장은 "병력증강이 맞다고 봐야한다. 아프간, 이라크 전쟁 이후의 여파"라고 분석했다.

김종대 편집장은 "사실상 한.미간에 합의된 결과이다. 아프간과 이라크의 잉여전력이 나와서 중간 기착지로 한국을 택한 것"이라며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국제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이는 한반도 정세에 비춰 우리의 안보중시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유영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미군문제팀장도 "미국의 필요요구에 따라서 주한미군 숫자가 들락날락한다. 이는 아프간, 이라크의 병력이 한국과 일본, 독일 등지로 분산배치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영재 팀장은 "2004년부터 변동수치를 보면 주한미군의 숫자가 연차적으로 줄어들어 2008년까지 2만 5천명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지만 2010년부터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라며 이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결과라는 설명이다.

 

   
'기지구조보고서'에는 주한미군의 숫자를 2011년 9월 말 기준으로 3만 7,354명으로 보고하고있다. [캡쳐-기지구조보고서]

 

특히, 이는 평택미군기지 주둔병력의 숫자 변동에서 엳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기지 구조보고서'에 따르면, 평택 캠프험프리 주둔병력은 2009년 3천 536명, 2010년 4천 880명에서 2011년 1만 977명으로 2년 사이에 7천 441명이 늘어났다. 이는 아프간, 이라크 전쟁 참전군인 철수에 따른 잉여인원의 재배치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주일미군도 2009년 4만 1512명에서 2011년 8만 7182명으로 급증했으며, 주독미군의 숫자도 2009년 5만 3,106명에서 2011년 6만 477명으로 증가해 이를 뒷받침해준다.

 

   
지난 3년간의 주한미군 변동숫자를 확인해보면, 2009년 2만 6305명에서 2010년 3만 1839명, 2011년 3만 7354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지상군의 숫자가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그래픽-통일뉴스]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주둔 미군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는 지난해 1월에 발표된 미국의 '신 국방전략 지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국방전략 지침'은 △크기는 작지만 기민하고 효율적인 군, △신속한 투사 및 배치가 가능한 유연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군, △첨단무기와 장비를 갖춘 다기능적 군 건설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주요핵심의 토대는 미국의 눈이 유럽에서 아.태 지역으로의 전략적 우선순위 조정이다. 이는 한국, 일본 등 주둔미군전력을 강화해 대북 억지력을 높이고 나아가 대 중국 관계를 관리한데 있어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프간.이라크 전쟁에서 철수된 병력이 대거 한국과 일본으로 이동, 병력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급격히 증가한 주한미군의 숫자는 지상군 감축 계획을 담은 '신국방전략 지침'에 따라 줄어들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종대 편집장은 "한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고 하지만, 미국이 지상군 병력을 감축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한미군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주한미군 병력의 증가는 최근 빈번히 발생하는 미군 범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유영재 평통사 팀장은 "인원이 늘어나면 범죄비율이 당연히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관리하기 힘든 숫자에 통제하기 어려운 자원들이 주한미군 병력에 포함되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주한미군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2만8천여 명으로 봐야한다. 군사훈련이 있으면 늘거나 줄기 때문"이라며 병력숫자 증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미군은 오랫동안 전쟁을 해왔다. 그래서 현재도 부대 내 불미스런 일들이 증가하고 있다"며 "이들이 도심으로 진출해 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것들이 보도되면서 과거에 알려지지 않은 범죄들이 소개되는 것"이라면서 병력수와 범죄율이 무관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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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외국인이 바라보는 주체사상, 무엇인가?

[단독] 외국인이 바라보는 주체사상, 무엇인가?

[Exclusive] Juche Ideology by Foreign Eyes, What is it?

 

 

Korean Translation and Journal by Joon H. Park

English Translation by Intira. P

Interview and Video Editing by Chin. B

Photos and Video by Media Thai Post

 

 

Prologue: 오늘 글을 이미 지난 주 목요일(단기 4344년 12월 29일)에 진행했던 태국 주체사상 연구회 회장이신 송짙 박사(Dr. Songjit)와의 인터뷰 입니다.


박사님과의 인터뷰 기사는 이미 정식으로 기사화 되었으며 세 개의 동영상 인터뷰 역시 발행이 된 상황이나 한글로 인터뷰 전문을 옮기는 과정이 태국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다시 영어에서 한글로 옮겨야 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시간 적인 간극이 있었습니다.


인터뷰가 종결된 후 바로 인터뷰의 의 후기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그 전에 독자 분의 의뢰로 군산 미 공군기지에서의 대단위 F-16C 전투기의 동시 출격 훈련에 관한 분석을 의뢰 하시는 바람에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늘의 영어 번역 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발행 하기로 수정한 것임을 알립니다.


관련기사--> 군산 미8 공군 여단의동시 F-16C 출격훈련의 의미는 무엇인가?[What’s behind Simultaneous F-16C Combat TO DrillAt the USA 8th Wing in Kunsan, South Korea?]

 

자, 그럼 태국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북조선의 주체사상은 과연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인터뷰 전문을 일단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가겠습니다.


01. 북조선의 인간본위 주체사상, 외국인은 어떻게 보고 있나? [Human Dignity Centered Juche Ideology of the DPRK, What is Foreigners Perception on it?]


기자: 교수님의 간단한 자기소개와 최근의 연구 과제를 말씀해 주시지요.


교수: 제 이름은 송짙 푼랖 박사(Dr.Songjit Poonlarp) 이고요, 저의 최근 약력은 지난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던 있는 뱅콕 소재 라자팥 프라나콘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professor of Humanity) 이었으나 사실, 제 전공은 수학 이고요 지난 시절 약 10여 년 이상을 수학을 대학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은퇴 후 현재의 라자팥 프라나콘 대학의 여러 분교에서 지역공동체를 주제로 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전공이 수학 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 가셑샅 대학(Kasetsart University)에서 제가 평소 지니고 있던 관심사이던 지역사회 와 관련된 연구, 특히 지역공동체(Community Development)를 연구 과제로 석사 학위를 취득 했어요.


1983년 당시, 저는 라자팥 프라나콘 대학의 인문학 학과에서 지역공동체 개발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현재는 은퇴한 교수 신분 입니다.


기자: 자, 그럼 이제부터 무엇이 교수님을 북조선의 사회주의 연구에 몰입하게 만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소개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교수: 사실은, 제 자신 북조선 이외에도 지구 상의 모든 문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북조선의 주체사상이 제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불과 지난 10년 이었습니다. 주체사상 이전에는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마르크스 레닌(Marks Lenin) , 중국의 모택동(Mao Tse Tung) 그리고 중남미의 체게바라(Che Guevara)와 연관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중이었지요.

 

즉, 이들 모든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인 배경이 제 주된 관심사 이었던 시절 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지난 서기 1984년 에는 남한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던 새마을 운동에서 지니고 있을 법한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주의적인 개년 역시 과심을 갖고 연구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실이지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사회주의적인 개념을 공부 하기 보다는 북조선의 주체사상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던 시절 이었고요, 마침내 일단의 가셑샅 대학(Kasetsart University) 의 교수들과 함께 북조선을 방문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요.


기자: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태국 내에 주체사상 연구회를 구성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교수: 제가 처음으로 북조선을 방문하고 느낀 것인데, 이 주체사상 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번 북조선을 방문하고 그 모든 심오함을 터득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큰 하자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처음 그 나라를 방문하고 그들 인민들이 무척 평안하고 쾌적하게 살아가고 있는 생활 상을 목격하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을 설명 하기 위해서 본인은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단순화 해서 말을 해주곤 합니다.


“숲 속에 자리잡고 있고 전혀 인공적이지 않으며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로 여러분을 명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하나의 사찰이 북조선 이라면, 도심 한 복판에 화려하게 지어진 인공적인 사찰은 남한 이라고 비유를 하곤 합니다.


남한의 그것이 인공적으로 지어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북조선의 그것은 이미 자연의 조화로 빚어진 완벽한 자연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 북조선을 방문했을 그 당시, 주체사상을 영어 번역본을 가능한 모두 구입 하려고 무진 노력을 했습니다.


 

첫 방문을 한 다음 해 역시 북조선을 방문했고 방문할 때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주체사상에 대한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체사상은 단순한 ‘지식체계’ 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주체사상은 이미 존재하던 마오이스트(Maoist), 레닌(Lenin) 또는 막시즘(Marxism) 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그 순간부터 제가 북조선으로 주체사상 세미나를 위해서 방문 하는 것이 제가 그 전까지 행하던 모든 사회주의 사상 중에서 단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동서양의 사회주위 사상을 총 망라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김일성 광장을 실제 가보시면 그곳에 마르크와 레닌의 초상화가 여전히 전시되고 있습니다. 북조선의 정부와 인민들이 지금껏 이 두 사람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 예요.


김일성, 북조선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그 분은 주체사상의 완성을 위해서 동서양을 총 망라한 일체의 사회주의 사상 예를 들면, “마오이스트, 호치민, 불교, 공자 및 원숭이 나라의 신토를 심도 있게 공부” 하였다고 합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 이고요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저로써는 그저 궁금할 뿐 입니다.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에 이제 개인적으로는 주체사상이 실질적으로 각 인민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들여다 보고자 한 것이에요. 주관적으로 사안으로 들여다보고 매우 정밀한 실체를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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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북조선은 외부로부터 차단 되어있는 나라 라고 인식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으로의 방문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교수: 그건 북조선 이라는 나라가 외부로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일단의 조직 또는 국가들이 비난 하는 것일 뿐 이예요. 일단, 북조선의 실체를 알게 된다면 북조선의 반대편에 있는 언론사들, 예를 들면, CNN, 로이터(Reuter) 또는 미국과 연결고리를 두고 있는 언론사 들에 의해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 언론 들은 그간 북조선이 외부로부터 철저히 폐쇄된 나라 라는 인식을 하게끔 만드는 일단의 사건을 지속적으로 조작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매년, 수 백 국가에서 북조선이 개최하는 주체사상 연구 세미나에 참석 하거든요. 제 경우에는, 독립적인 사안으로 북조선에서 개최되는 세미나에 참석할라치면 제 국적인 태국 말고 최소한 40-50개 국가에서 석학들이 참석을 요청 합니다. 이러한 석학들뿐만 아니라 수 많은 학생들이 약 130 여 객 국에서 참석을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들이 모두 북조선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 것이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간 후 발행하는 학술 논문 이라든지 언론기사를 보면 꽤 많은 수가 북조선에 상당히 왜곡되고 부정적인 정보를 외부 세계에 전달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자: 그게 그렇다면, 교수님과 교수님의 일행은 북조선으로부터 환영 받고 있다고 보아도 되는 겁니까?


교수: 정확합니다.


기자: 현재, 태국과 북조선 사이에 주체사상 연구를 위해서 결성되어있는 단체 또는 조직이 몇 개나 되는지 알고 싶은데요.


교수: 주체사상을 위한 학술 단체를 위해서는 태국 내에서 본인이 회장으로 있고요, 우리 단체가 있기 전에 일종의 우호단체가 존재 했었다는 것을 제외 한다면 우리 단체는 8년 전에 결성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겁니다. 그 전의 우호단체는 이미 작고하신 타이랕 신문 사(Thai Rath News Paper)의 프리차 선생님(Khun Preecha)이 이끌던 단체 이었습니다. 지난 시절에, 타이랕 신문 사가 북조선의 평양 공중곡예단을 매년 태국으로 초대해서 공연을 할 수 있게끔 했었어요. 타이랕 신문 사의 사주이신 캄폰 선생이 작고 하신 후, 매년 열리던 북조선의 평양 공중곡예단의 공연이 점차 뒤안길로 잊혀져 간 것이에요.


개인적인 제 믿음으로는, 북조선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솥(JISOT, Juche Idea Study of Thailand)으로 약칭되는 태국 내 주체사상 학술 연구회를 조직 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태국 내의 중앙지방, 북동 및 북부 그리고 남부의 대학에서 몸담고 있던 많은 학술 지인들을 해당 학술 회에 초창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들, 초청에 응하고 연구 활동을 벌이던 수 백 명의 학자들이 그간 지난 10년 동안 북조선의 초청을 받아 들고 북조선을 방문한 소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 분들이 북조선을 방문할 당시 나 역시 그들과 같이 북조선을 방문한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 입니다.

 

이들 모두는 대학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러한 연구 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는 교수들 이며 이들은 이러한 기회로 인해서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서로 다른 시각차이를 좁힐 수 있게 하는 매우 귀중한 기회라고 말들을 합니다.


현재, 태국-북조선 우호협회 회장인 차나이 박사(Dr. Chanai Lok-ngoen)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본 대학의 교수님 이시고, 사시나(Khun Sasina) 또는 크라테(Kratae)로 지칭되는 선생님이 부회장을 맞고 계십니다.


그리고, 최근 가장 많은 학자들을 북조선에 파견해서 연구활동을 돕고 있는 라자팥 프라나콘 대학(Rajabhat Pranakorn University)이 세 번째 학술 단체를 결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북조선을 몇 번이나 방문 하셨는지요?


교수: 14년 동안 11번 방북 했습니다.


기자: 매번 방분 하실 때마다 몇 명의 학술단원들이 동행했으며 당시의 방분 목적은 무엇이었는지요?


교수: 매번 방문 전에 개인적으로 북조선의 관리들께 최대한 많은 학술 단을 꾸릴 수 있게 도와 달라는 요청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의 방문단은 북조선 측에서 우리들에게 더욱 많은 신경을 써줘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어요.

 

기자: 북조선 측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한 건가요?


교수: 예, 그 쪽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 했어요. 경비라 하면, 방문 일정에 따른 항공료와 모든 음식과 숙박 그리고 일정 상 움직일 상황에서 필요하게 될 자동차와 안내원 등 전부를 그 쪽에서 부담을 한 거죠.


처음에는, 우리 방문단이 불과 5-6명 정도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무려 12명까지 허용을 받았습니다.

 

당시, 다른 국가들의 방문단을 평양에서 만나 보았으나 우리같이 대단위 방문단을 허용 받은 국가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른 국가들을 보면 가장 많은 방문단 수가 고작 3명 이었습니다. 한 때 많은 수의 방문단 가능했던 우리 측으로써는 짧은 시간에 많은 수가 방북을 하고 주체사상에 관한 연구를 다른 국가들 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대중에게 빨리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작용을 한 거죠.


기자: 교수님이 북조선을 방문하고 받으신 인상 중에 기억이 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교수: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제가 북조선과 남한을 비교할 때에 북조선은 마치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사찰 이고, 남한은 도심 한 복판에 건축된 사찰”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아름답다고 한다면 둘 다 아름답죠. 다만, 남한의 그 아름다움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미가 없는 인공미 라는 것 만이 다를 뿐 입니다.


그러나, 북조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저를 감동 시킨 것입니다.


첫째로, 북조선에는 직장이 없는 무직자가 없습니다. 전 인민이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둘째로, 거리에서 거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빈민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넷째로, 남녀가 다른 남녀의 몸을 돈으로 사고 팔면서 쾌락을 취하거나 수입을 내는 장소, 즉, 사창가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로, 범죄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여섯 번째로, 사람이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공기와 식수로 사용할 강물에서 오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곱 번째로, 도로에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상황을 눈 씻고 보아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항목 중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항목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태국에서 현실화 된다고 하면 본인은 개인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모두가 알듯이, 태국 역시 서방 식 자본주의를 국가 운영 체계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나라 이고요 다른 여타 자본주의 나라들과 동일하게 매일같이 격어야 하는 교통체증이 매우 심각한 수준 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인터뷰가 진행 되는 대학을 오기 위해서 제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 단 20분 이면 가능 할 것을 교통체증으로 인해서 장장 1시간 하고도 30분을 더 소비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 이라는 뜻이에요.


간단히 정리를 한다면, 북조선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사회적인 문제 라든지 문화적인 문제 또는 환경문제 라든지 경제문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 입니다.


그렇다면, 외부의 다른 세계인들은 왜 그들이 식량의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고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외부인들이 증언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북조선의 모든 인민들은 그저 전혀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일용하는 식단을 들여다보면 밥과 김치가 전부일 때가 흔한 일이고요, 그들은 그러한 간출한 식단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합동농장 또는 공기업들은 그 지역에서 필요로 할 모든 채소와 쌀을 생산하고 동등하게 배분 한다는 것이에요.


(이 부분에서 단군 박공이 의도적으로 번역을 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나오듯이 북조선의 합동농장과 공기업의 공동생산 및 공동분배를 시연 하고자 태국 내 북동쪽에 조그마한 공동지역 체를 실험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는 증언을 교수님께서 하신 부분이 있는데요, 단군 박공의 믿음으로는 작금의 꼴통과 같은 태국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전반적인 체제를 돌아본다면 전혀, 전혀 실현 가능 성이 없을 것이라 굳이 짜증나게 이곳에 번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지역 공동체의 명칭이 타이 청산리, Thai Chung San Li, 라고 하는 것만 알고 계시다면 족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태국에서 올해로 14년 차 입니다. 교수님은 14년 간 11번을 방북을 하셨으나 단군 박공은 태국에서 현지인들과 같이 14년째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단군 박공의 판단을 믿으셔도 무방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남아 상황은 손금 보듯이 보고 있습니다.)


북조선의 인민들은 그저 식생활이 우리들과 비교해서 매우 단출 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식생활 문화를 우리들 몸에 익숙하게 베어버린 서방 식 잣대로 들이대서 바라본다면 아마도 저들이 식량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요.


더불어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진 태국의 북동부 출신인 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일용하는 식단을 서양인들이 그들의 잣대를 들이밀고 들여다본다면 아마도 그들이 북조선의 인민들을 평가할 때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들, 북동부 출신 또는 그곳 인민들의 식단이 북조선의 인민들의 식단과 매우 유사하게 “밥과 고추 정도” 이거든요. 우리들도 그저 매우 단순한 식생활 문화를 지니고 있을 뿐 이에요. 사실, 태국의 북동부 지역이 남들 알다시피 황폐한 땅이 아니거든요, 기름진 땅입니다. 단지, 우리네의 식생활이 뱅콕의 그들과 비교해서 훨씬 간단한 것 뿐 입니다. 북동부 지역의 인민들 역시 사용하고 남을 정도의 식량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걸 서방 식 잣대를 사용해서 측정을 하려다 보니 착시 현상이 발생하고 사실이 왜곡되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면 이런 겁니다. 서양 에서는 년간 개인이 섭취해야 할 단백질(Protien)을 못을 박아서 규정 하고 그 규정에 미치지 못하면 영양실조 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이렇게 자신들만의 잣대를 다른 국가, 다른 식생활 문화를 이어오고 있는 사회에 적용을 하니 올바른 측정이 나올 수 없는 거죠. 태국의 북동부 지방의 인민들을 이싼(Issan) 사람들 이라고 호칭 하는데요, 그 지방 사람들은 밥에 고추와 다른 몇 가지 양념을 버무려서 만든 고추양념(Chilli Paste)에 식사 하는 것을 선호 합니다. 북조선 인민들이 밥에 여러 가지 양념이 조화롭게 첨가된 김치로 식사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 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생활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 이싼(Issan) 사람들이 죄다 기아에 허덕인다고 보아야 할까요?


문제는, 서양은 항상 단백질 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에서 출발 합니다. 아닌가요?


기자: 북조선을 겨냥한 세계 언론들에 의하면 외부인들이 북조선을 향한 시각이 매우 부정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교수: 그건, 단순한 일방적인 방향으로 치우쳐 있는 언론사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만행 입니다. 그들 모두가 서방 식 자본주의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언론사들 이라는 의미 에요. 굳이 상대방을 깍아 내리고자 하는 말이 아니고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북조선이 자신들과는 상충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밖에는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통상적인 현상 이에요. 단지, 제 자신은 이 둘을 모두 보았고 경험했기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사실적으로 알 수 있기에 정의와 부정의 사이를 분간 할 수 있다는 것뿐 이고 그래서 제 자신은 진실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나 자신의 판단으로는 북조선 측에게는 매우 공평치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난해(단기 4343년, 서기 2010) 10월, 북조선을 방문한 우리 일행 중에 대학에서 언론 분야(Media field)를 강의하시는 한 교수가 동행을 했습니다. 그 교수분과 동행했던 구성원들은 3부작 도큐멘터리 시리즈 물인 일명, “취파존 롴(Cheepajorn Lok)” 또는 영어로는 “박동치는 세계(the World Pulse)” 라는 방송 물을 제작 했습니다. 태국의 방송 가에서는 꽤나 지명도가 높은 네이션 미디아 그룹의 방송 앵커(a anchor of Nation Media Group, 단군 박공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언론 사 입니다. 수꼴 중의 한 축 이라서 그렇습니다.)인 수티차이 윤(Sutichai Yoon)이 주임 앵커로 해서 지상파를 타고 나간 것입니다.


그 도큐멘터리가 태국에 방송된 이후 다른 언론사들이 북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종이 뉴스매체들 일 테니 중립적인 성격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정밀하지 않은 표현 입니다만 크게 딴지 걸지 않고 넘어 가고자 합니다. 태국은 대한민국 보다 더 썩은 나라 입니다. 그러니, 한 두 번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본 북조선 관련 방송 물을 보고 그 얼마나 많은 이들이 교화 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많은 의혹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까지도 단군 박공의 태국인 지인들이 북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에서 확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북조선 측에서 모든 경비를 부담했으니 이들 방송사에서 파견된 글쟁이들 그리고 앵커들은 자신들이 지고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전혀 의혹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후원 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다음부터는 국물도 없다는 사실, 이들 썩어 문드러진 기자 나부랭이들은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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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 통상적으로 북조선에 관한 기사들에 대해서 왜곡된 것을 알고도 내보내던 또는 고의적으로 왜곡 방송 또는 기사화 하던 여타 언론들은 이 일이 있은 후 다소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방송에서 내보낸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북조선을 방문해서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가감 없이 도큐멘터리 화 해서 방송한 것뿐입니다.


개인적으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저들 자본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는 언론사들이 북조선의 정황적인 현 사실들을 왜곡해왔다는 것을 말이지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은 중립적인 방식으로 북조선을 묘사해 왔으나 대다수는 철저하게 왜곡 시켜왔어요.


제 사견으로는,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 북조선 측에서 보았을 때에 공평치 않다는 것이에요. 만일, 북조선이 지옥과 같은 비난 받을 상황 이라면 내 자신 스스로 그 나라를 지난 14년간 걸쳐서 11번을 방문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본인은 계속 북조선을 방문 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불자들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부처님의 땅을 보고 싶다면 북조선을 가보라” 고 말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땅 이라는 의미 입니다.

 

지금 현재의 북조선은 50년 또는 심지어는 100년 전의 태국과 비슷한 모습 입니다.

 



북조선의 거주지 역시 여타 다른 국가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국가들이 흔히 보여주듯이 20-30층의 고층 건물들이 타락을 유도하는 제반 상가 건물로 사용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거주를 위한 용도로 건설 되고 있음을 주목 해야 합니다.


건축되는 건물들은 그곳에 영원히 존재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묵었던 45층짜리 호텔은 30년 전에 건설된 호텔건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텔로 사용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45번째 층은 전체가 서서히 회전하는 식당이었어요. 놀랄 일 아닌가요? 북측에 의하면 조만간 100여 층을 넘기는 고층 호텔을 하나 더 건설할 것이라고 합니다만 아직은 공사를 진행 시키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요지는, 북조선 이라는 나라는 전적으로 인민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 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주체사상(Juche Ideology) 이라는 말 자체가 그 중심에 사람 이라는 인본주의를 최종 목표로 하기 때문인 것이 마치 작금의 태국이 그들의 국민들을 위해서 국가 경제와 사회를 개발 하고자 하는 양상과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이 부분은 그냥 이 분이 자신의 국가를 위해서 내뱉는 일종의 맆 서비스 라고 봐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본 글과 같이 붙인 동영상이 있으니 차 후 혹시라도 있을 수 있을 정부 측으로부터의 정신적 및 물질적인 압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 이라고 너그러이 양해를 해드리것이 좋을 듯싶다는 생각 입니다. 올해 연세가 이제 70을 넘기시는 분이니만큼 주위에 말 한번 잘못해서 민폐를 끼치게 되는 입장으로 전락해서는 아니 될 것이기에 더욱 그런 것이지요.)


기자: 그렇다면 말입니다, 통상적으로 말하기를 북조선이 “전쟁 광(Thirst for War)” 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교수: (이 부분에서 교수님의 손짓과 몸짓이 매우 거칠어 집니다. 또한, 입가에 상대방을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시기를 반복 하십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전쟁 광 이라는 표현은 북조선이 아닌“미국(America)”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데, 내가 이건 확정적으로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보장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민감한 글을 또는 영상을 내보내기가 부담되면 차 후 영상을 편집해도 자신은 섭섭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ㅋㅋㅋ…뭐, 이 정도 가지고.)심지어는 그들 미국은 한국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에 그들의 군대를 지금까지도 주둔 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조선의 친구와 이야기 도중 “미국과 같은 거대 국가들이 핵 무장력을 갖추고 싶은 만큼 우리 같은 조그마한 나라 역시 핵 무장력을 갖추고 싶어한다” 라고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이렇게 조그마한 나라인 북조선의 일개 인민도 미국 이라는 거대 군사 강국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 하는 것에서 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조선의 인민들은 존엄성(Dignity)이 있었고 또한 독립적(Independence) 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거대한 국가들은 핵 무장력을 갖출 수 있고 조그마한 나라들은 동일한 핵 무장력을 갖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형평 성에 비추어 보아도 납득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이들 나라들은 모두 핵 무장력을 갖춘 나라들 입니다. 만의 하나, “북조선이 현재 핵 무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지도 상에서 지워지는 일이 발생” 했을 거에요.


현재의 북조선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자주적인 체계(Self Reliant)를 지니고 있는 나라 입니다(이 부분에서 조금 헷갈리더군요. 이 양반이 태국인 인지 아니면 주 태국 북조선 대사관을 대신하는 공보관인지 말입니다...^^;) 비록,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조선이 인근 나라들인 중국과 러시아에 의존하는 관계가 있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만, 작년 10월을 경유 하면서 북조선 내에서 모든 군사적 무장력에 필요한 장비 수급에 관한 전량 “자체 해결능력(Self-Reliant)”이 완결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제가 북조선을 좋아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 입니다, “자주적 해결(Self-Reliant).”

 



기자: 교수님께서 생각하실 때에, 태국 역시 자주적 해결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계시는지요?


교수: 그게요, 현재의 태국의 상황은 지난 30년, 20년 그리고 10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북조선이 했듯이 그렇게 단시간에 자주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태국의 정치적인 구조(Political Mechanism) 자체가 북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조 라는 것이 이유 입니다.


태국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제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품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완성된 제품을 돈을 주고 구입 하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민족 이잖아요. 이런 과정들이 반복 되다 보니 태국 내에서 자생 할 수 있는 기술적인 토양이 구축되지 않았던 것이고요 그 결과 태국은 기술적인 산업 분야가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로, 태국 내에는 불법 총기 제조가 오늘날까지 많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 입니다만 정부 에서는 이들 총기 제조업자들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후원 및 육성 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은 정부차원에서 기술자 육성을 하지 않을 뿐더러 이미 완제품을 그저 취득 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국도 자체 기술로 제조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뭐, 어쨌든 지난 시절 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빠르게 성장 하는 부분이 있기는 있습니다. 섹스 산업과 부동산 산업 입니다. 허벌나게 빠르지만 배울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이라 그저 거시기 할 뿐 입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북조선과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교수님께서 남한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실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교수: 작금의 대한민국 정부에 한마디 하고 싶어요.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며, 제 3계의 입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면 오로지 하나의 민족으로 합쳐야 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한민국의 정권에서는 북조선과의 통일 문제를 두고 진지한 의견을 교환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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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한 해빙 무드가 작금의 남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고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금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쥐새끼)은 북조선을 매우 적대시 하고 있다고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미국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이 마치도 지난 시절의 태국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태국이 지난 시절 작금의 대한민국과도 같은 행보를 보였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당시 태국 이라는 나라가 미국의 52번째 주 라고도 할 정도 이었으니 말입니다.



만일, 작금의 대한민국이 미국에 예속되어있다면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독립상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가 경제 역시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 하기에 대한민국이 북조선과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예속 시키고 있는 제3세력들로부터 완벽하게 독립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미국을 포함한 그 어느 외세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 입니다.


기자: 만일,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이 시점에서 북조선에 관한 좀더 심층적인 공부를 하고 한다면 교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교수: 그런 분들은 이미 전에 언급한대로 네이션 미디아 그룹(Nation Media Group)에서 제작 방송한 “박동치는 세계(the World Pulse, Cheepajorn Lok)”를 시청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후, 북조선의 주체사상과 그들의 생활 상을 더욱 심층 있게 공부 하고자 한다면 라자팥 프라나콘 대학 내의 주체사상 연구 학회를 방문 하기를 권장 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 분들이 우리들과 함께 더욱 진보적인 관련 정보 취득을 위해서 함께 노력할 수 있을 겁니다.


02.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 북조선과 주체사상, 올바른가? [The DPRK and Juche Ideology seen by Foreign Eyes, Truthful?]


정답은 50대 50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중입니다.


그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위의 교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부분 입니다만(매우 민감한 부분이라 단군 박공이 공식 인터뷰를 종결한 후 비공식적으로 질문을 드리는 시간에서 포착을 한 부분 이라서 인터뷰 에는 포함 시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외국인 주체사상 연구 단체들은 단순히 주체사상적인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안에 관한 심층적인 이해와 통찰력이 자생하기 위해서는 사상적인 배경 만을 근거로 사상을 100% 소화 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 외국인들이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아이러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어떻게 방어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단군 박공이 교수님께 아래의 두 개의 질문을 했습니다.


 

01. 작년 3월에 있었던 서해 백령도 부근에서 발생했던 대한민국의 천안함 침몰에 관한 단상


02. 작년 10월경에 발생한 대한민국과 북조선 간에 주고받은 연평도의 포격전에 관한 단상


교수님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본인은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연구해서 태국 사회에 적용 시키고자 하는 학자이니 정치적인 사안에 관한 분석은 무리가 있다.”


본질을 피해서 안전한 방향으로 흘러가겠다고 하는 매우 안일한 행동양식 입니다.


물론, 단군 박공이 그 말을 들은 후, 더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습니다. 시간 낭비 일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이들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북조선 및 그 뿌리 사상인 주체사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매우 한정적 이지 않나 하는 분석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과 단군 박공이 공통분모 적으로 느끼는 전체 줄거리에는 이견이 없다는 것을 보면 그간 11번에 걸쳐서 북조선을 방문하고 보고 느끼고 배운 점이 없지는 않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문제는, 이들이 진정으로 북조선의 “주체사상(Ju Che Ideology)과 선군사상(Military First Idea)”을 납득하려면 단순히 그러한 사상적인 배경만을 중점으로 연구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고요, 북조선을 둘러싼 악의 축들(3 Axis of Evils)인 미국(the USA) 그리고 쟈이오니스트 조직(Zionist Regime)인 이스라엘(Israel) 그리고 전세계의 돈줄을 쥐고 있는 일루미나티(Illuminati) 세력의 검은 자본을 해체하는 자세로 연구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들이 왜 코딱지 만한 조그마한 나라인 북조선을 상대로 저렇게 집단으로 들러붙어 근 66년간 다굴을 놓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 드리지만 “큰 틀” 즉, “북조선이 세계평화의 축(The DPRK is the Axis of World Peace) 이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군사 강국, 자본 강국들이 악의 축(The USA and the Western Financial Power House is the Axis of All Evils) 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매우 좋은 만남은 확실한 듯이 보였다는 것이지요.


인터뷰 중간에 그리고 인터뷰가 종결된 후 간간이 교수님께서 단군 박공에게 그러시더군요.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대한민국 사람과는 무척 다른 아주 유닠한 사람이에요.”


무슨 말씀 이시냐고 다시 물으니, “그간 만나본 대한민국 출신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북조선을 주적으로 여기고 매우 적대시 하는데 당신에게서는 전혀 그런 부정적인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그저 쓴 웃음만이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또 한마디 물어오십니다.


“자네, 북조선 대사관 사람들과 남한 대사관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가?”


그레서, 단군 박공이 받아쳤습니다.


“북조선 대사관 직원들과는 이미 지난 주에 조문 겸 스치듯이 만났으며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된다면 전혀 스스럼없이 만날 준비가 되어있는데, 대한민국의 대사관 직원들을 굳이 만날 이유도 없을 뿐더러 그들 모두 수구꼴통들 이라서 만나고 싶은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그 분 입가에 '씨익' 하고 미소가 스쳐지나 가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걸작 입니다.


“그 놈들 죄다 꼴통 들이여, 허구헌날 나한테 와서 북조선 자료 요구하고 말이지. 바로, 2틀 전에도 주 태국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 중 대사 비서관인 미스터 리(Secretary to the Ambassador, Mr. Lee)가 날 찾아와서 무슨 정보 좀 없느냐고 조르잖아요.”


그 말씀을 들으니 또 기억이 나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해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서거 일이 19일 오전이 아닌 그 이틀 전인 17일 오전 8시30분인 것을 미국을 비롯한 현세에 내놓으라 하는 첩보기관 등에서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을 그 당시 이미 이 분은 18일 오전에 한 다리 걸러서 김정일 최고사령관님의 서거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 거대한 미국과 서방의 첩보 능력이 일개 초로의 학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니 머리에서 쥐가 다 납니다.


그런데, 이 분의 북조선 사랑이 대단하다는 것을 간출한 저녁을 대접 받으면서 알았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교수님이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를 식탁에서 들려주시더군요. 그 음조는 매우 간단하나 가사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매우 의미심장 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요 단어만 짚어서 옮긴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동방의 조그마한 나라, 북조선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쳤네

미국과 서방의 거인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선군사상으로 뭉친 민족 핵폭탄 만들어내니

미국의 자본주의 사상은 잔말 말고 안녕일세


그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태국인 만이 지니고 있을 만한 그 독특한 해학이 우러나온다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글로는 위와 같이 기록이 되겠으나 실제로 그 분이 음률에 맞춰서 가사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 있다보니 웃음이 나와서 한참을 옆의 부장과 킥킥거렸습니다.


Epilogue: 짧지 않은 그렇다고 그다지 길지도 않은 약 2시간에 걸쳐서 진행이 되었던 개인적으로는 매우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인터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 입니다.


그간, 많은 현장 인터뷰를 진행해 보아 왔습니다만 이렇게 우리 민족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주체적인 인터뷰를 진행한 경험은 사실 금번이 최초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가 태국 내 북조선의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술단체인 태국 주체사상 연구회(JISOT, Juche Idea Study of Thailand)의 회장이신 송짙 푼랖 박사(Dr.Songjit Poonlarp) 님과의 인터뷰 기사 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본 주체사상 학술단체의 학자들과 기획되어있는 그룹 인터뷰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각 인터뷰마다 요지를 뽑아서 기사화 할 것이니 관심 기울여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 하시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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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주역 12人, 누구도 '참회'하지 않았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3/20 08:53
  • 수정일
    2013/03/20 08:5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10년 지난 오늘도 "21세기에 발생한 가장 훌륭한 일"

이재호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20 오전 7:21:34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이 20일로 10년을 맞았다. 2001년 9.11테러로 촉발된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됐다. 미국은 전쟁 발발 20여 일이 지난 4월 9일 바그다드를 함락시켰고 5월 1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임무 완수를 선언했다. 이로써 이라크 전쟁은 손쉽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이라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이라크 통치세력에 대한 반발과 수니파-시아파로 대표되는 내부 세력의
갈등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11년 12월 미국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이라크의 국가시스템은 붕괴됐고 정치적 불안은 각종 테러와 폭력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역시 이라크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1조 7000억 달러(한화 1892조 9500억)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고 4488명의 미국인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미국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은 14일(현지시간) 이라크 전쟁 10년을 맞아 CFR이 특집으로 준비한 인터뷰에서 "미국인의 피와 재산을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전쟁에 엄청나게 쏟아부었다"고 개탄했다.

재정악화 및 미국인들의 희생과 더불어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자존심이 큰
상처를 남겼다. 부시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감추고 있고 이것을 테러 집단들에게 넘겨주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이 연계되어 있다는 증거 역시 나오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성이 잇따라 제기되는 가운데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방송 MSNBC는 이라크 전쟁을 기획했던 주요 인물들을 추적했다.(☞바로가기) 방송은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악관은 중동자유를 가져올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상황은 그들이 말한 것처럼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방송은 당시 이라크 전쟁을 기획했던 몇몇 사람들은 이라크 전쟁이 엄청난
전략적 실수로 판명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정책의 확고한 신봉자들로 남아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들 중 10년 전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방송이 소개한 주요 인사들이다.<편집자>
 

▲ 2001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 공습을 감행했다. 바그다드가 공습을 받아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알자지라 캡쳐


■ 존 볼튼

존 볼튼은 1998년부터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왔다. 그는 신보주의자들(네오콘)이 주요 구성원인 PNAC(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을 공격하라고 독촉했다.

이후 부시 대통령 첫 번째 임기 때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을 맡았다. 그는 후세인이 아프리카에서 핵무기의 원료로 쓰이는 우라늄을 찾았다는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볼튼은 이를 내세워 유엔의 합의 없이 미국의 단독 행동으로 진행된 이라크 전쟁을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옹호했다.

현재 볼튼은 공화당의 대외정책에서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남아 있다. 미국 공화당 계열의 정책 연구 기관인 미국 기업 연구소(AEI)의 선임 연구원으로서 그는 지난해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의 외교자문 역할을 담당했다.

■ 폴 브레머

'제리' 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폴 브레머는 이라크 침공 이후 수년 간 이라크 최고 행정관을 맡았다. 그는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켰고, 새로운 정부에 기존 집권당인 바트당이 진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는 이라크 내 긴장을 더욱 증폭시켰고 미국에 반대하는 반란군이 세력을 확장하는 빌미가 됐다.

그는 MSNBC와 인터뷰에서 "나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전히 난 전쟁을 지지한다. 이라크 사람들이 그들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훨씬 잘 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에 대해서 브레머는 "(미군 철수는) 우리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 스티븐 캠본

이라크 침공이 발발하기 몇 주 전, 스티브 캠본은 국방부 정보담당 차관이 됐다. 그는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를 찾아내기 위해 국방부와 CIA로 구성된 이라크 조사단의 활동을 조정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이 조사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명 났다. 그리고 그는 미군의 이라크 수감자 학대로 악명 높았던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수용소 문제에 연루되었다.

펜타곤을 떠난 이후 캠본은 방위산업체의 고위 간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금은 빌라노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여름에 열린 아스펜 안보포럼에서 이라크 침공을 두고 "21세기 전반기에 했던 일들 중 가장 훌륭한 전략적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 엘리엇 코헨

코헨은 크리스톨이 세운 PNAC의 창립 멤버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9.11 공격에 대해 날을 세웠던 대표적인 선동가다. 2001년 11월 한 논평에서 그는 테러와의 전쟁은 곧 "세계 4차 대전"이라고 주장했다.

코헨은 미국이 이라크를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라크가 "알 카에다를 도와줬고",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뒤이어 그는 9.11에서 여객기를 납치한 무함마드 아타와 사담 후세인이 관계가 있다고 과장 선전했다. 2002년 의회 청문회에서 코헨은 "미국에게는 사담 후세인에게 대량 살상무기를 획득하도록 허락하거나 혹은 그를 전복시킬 조치를 취하거나"하는 선택지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코헨은 현재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2005년 당시 이라크의 안정화를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이어 코헨은 "5년 혹은 심지어 10년 후에도 여전히 이라크 침공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더그 페이스

페이스는 국방부의 최종 정책 결정 부서에서 근무했다. 그는 리처드 펄, 폴 월포위츠와 함께 대표적 네오콘으로 꼽힌다. 이들은 전쟁을 위한 새로운 정보부서를 만들었다. 2007년 국방부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페이스는 직속 부서원들에게 "이라크와 알카에다 간 의미 있는 관계를 찾아내도록" 종용했는데 그들은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라크 사령관이었던 토미 프랭크스 장군은 "페이스는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이라며 맹비난했다.

2005년 공직을 떠난 후 그는 하버드, 조지타운 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 페이스는 허드슨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다. 지난해 10월 그는 오바마의 "미국의 혐오가 테러를 낳고 있다"는 주장을 비난했다.

■ 루이스 "스쿠터" 리비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 겸 안보보좌관이었던 리비는 '리크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2002년 2월 CIA는 조세프 윌슨 전 이라크 대사를 니제르에 파견해 이라크 정부가 니제르로부터 우라늄을 구입하려했다는 정보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윌슨은 조사 결과 이 정보가 허위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이라크 침공 명분을 찾던 부시 행정부는 윌슨의 보고를 무시했다.

그러자 윌슨은 2003년 7월, 이 내용을 <뉴욕타임스>에 투고했고 바로 일주일 뒤 친 공화당의 칼럼니스트였던 로버트 노박은 <워싱턴포스트>에 윌슨이 CIA의 비밀요원인 부인 플레임 덕에 니제르 임무를 맡을 수 있었다고 폭로했다. 윌슨의 니제르 조사는 단순한 관비여행이었으며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칼럼은 CIA요원의 신분을 누설했다는 비난을 받게 됐고 미 법무부는 특별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과정에서 신원 유출에 가담한 자가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백악관의 칼 로브와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인 루이스 리비인 것으로 밝혀졌다. 리비는 2007년 워싱턴 지방법원에서 위증 및 사법 방해 혐의로 2년6개월 징역형과 벌금 25만 달러를 선고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이후 리비의 형을 감면시켜줬지만 체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면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딕 체니는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지 이틀 후에 "리비는 심각한 오판의 희생자다. 나는 그가 대통령의 사면을 받을만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리비는 현재 워싱턴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의 수석 부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요즘 중동 정책에 대한 강의를 자주 하고 있다. 그는 유죄판결로 인해 변호사로 일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달 버지니아 주지사인 밥 맥도웰(공화당)은 리비의 선거권을 복원시켰다.
 

▲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정파와 민족간 갈등으로 이라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19일(현지시간) 바그다드에서는 시아파를 노린 차량 폭탄테러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AP=연합뉴스


■ 메간 오설리번

오설리번은 2003년 4월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이라크 현지 총 책임자인 제이 가너를 보좌했다. 이후 이라크를 관할하는 미국 주도의 연합국 임시 행정처(CPA)의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을 보좌했고 이라크의 과도국가 헌법을 세우기 위한 작업에서 이라크 사람들과 CPA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오설리번은 이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의 문제를 다루는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역임했다. 당시 그는 조기에 이라크를 "수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오설리번은 지난해 밋 롬니의 대선 캠프에서 외교 정책 자문역을 맡았다. 그는 현재 하버드의 케네디 스쿨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블룸버그>에 외교 정책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 리처드 펄

리처드 펄은 부시 재임기간 동안 미국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이라크 침공 후에 "우리는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해에 그는 미국 공영방송인 PBS에 출연해 "사담 후세인과 그의 군대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화약냄새가 나자마자 붕괴할 것"이라며 "24시간 내에 이라크가 붕괴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한 달이 넘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가 데이비드 프룸과 함께 2004년 집필한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에서 그는 "미국인에게 중도란 없다. 승리 또는 홀로코스트(전멸)만 있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2006년 펄은 이라크 전쟁을 후회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만일 내가 이 시점에서 이라크 문제를 봤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가 이라크로 가야하나?' 라고 물었다면 나는 '아니야. 사담 후세인이 테러 집단들에게 대량 살상무기를 건네주고 있다는 염려를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해보자'라고 말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펄은 MSNBC에 그때의 발언이 맥락을 벗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가 언급한 '실수'란 부시의 임무 완수 선언 이후 미군이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라크를 점령하려고 계속 머무른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펄은 침공을 결정했던 것은 적절했다고 밝혔다.

■ 랜디 슈너먼

랜디 슈너먼은 1998년 미 의회가 통과시킨 이라크 자유법의 초안 작성과 법안 통과에 힘을 쓴 상원의원이다. 이 법안은 이라크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를 미국의 공식 정책으로 만들었다. 2002년 말 슈너먼은 부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이라크해방위원회'(CLI)를 설립했다. 슈너먼은 이라크 침공 한달 전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 치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2008년 매케인 대선 캠프에 몸담았다. 당시 그는 매케인과 미하일 샤카슈빌리(Mikheil Saakashili) 그루지야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는 데 다리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슈너먼이 2007년 1월부터 매케인 후보 캠프에서 외교 정책 자문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야 정부의 로비스트 역할을 겸한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슈너먼은 이라크 문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MSNBC에 보낸 메일에서 "후세인은 주변 국가들이나 이라크 국민들에게 다시는 화학 무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겼고 그는 졌다. 세계는 사담 후세인이 없어진 이후 훨씬 더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 댄 세너

댄 세너는 CPA의 미디어 및 홍보 담당으로서 이라크 전쟁의 낙관적인 전망을 알리는 TV 브리핑에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이라크의 상황은 그가 브리핑하는 내용과 달랐다.

지난해 세너는 롬니 후보의 주요 자문인사로 참여했다. 롬니가 이겼다면 세너는 백악관 수석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2010년 그는 9·11테러로 무너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자리였던 '그라운드제로' 인근에 이슬람 센터가 자리 잡은 것과 관련, 이 센터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너는 공화당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짐 윌킨슨

짐 윌킨슨은 홍보 전문가로 칼 로브, 루이스 리비 등과 함께 백악관에서 국민들에게 이라크 침공에 대한 홍보를 벌인 인물이다. 그는 이후 도하에 있는 미군 중부사령부의 수석 대변인을 역임했다. 그는 NSC 대변인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대변인, 그리고 2008년 재정위기 당시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윌킨슨은 현재 펩시콜라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을 지낸 대표적인 네오콘 인사였던 월포위츠는 부시정권에서 가장 강력하게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인물이다.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은 월포위츠가 9.11테러 이후 처음으로 이라크 침공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침공 전 월포위츠는 이라크를 안정시키는 데 1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에릭 신세키 전 육군참모총장은 2003년 2월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라크 전쟁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수십만 명의 미군 병력이 필요하다"고 증언했다. 이후 이라크 내 미군 사령관은 신세키의 예측이 맞았다고 증언했다.

2005년 월포위츠는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했다. 그러나 2년 뒤 <파이낸셜타임스>에 같은 세계은행에 몸담고 있는 여자친구 샤하리자에게 승진과 보수에 특혜를 제공한 것이 알려지면서 사퇴했다. 그는 현재 미국 기업연구소에 몸담고 있다.

 
 
 

 

/이재호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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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분석] 원세훈 원장 지시와 국정원 개입 논란 사건들

원장님이 '말씀'하면 현장은 요동쳤다

 

13.03.20 08:05l최종 업데이트 13.03.20 08:05l

 

2009년 5월 15일 국가정보원 내부 전자게시판 중 하나인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게시판은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확대부서장 회의에서 강조한 내용을 국정원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공간이다.

"불법집회나 불법노조를 등한시한 부분이 있는데, 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정상화해야 하며 특히 일부 언론의 편향된 정부비판·좌파옹호에는 적극 대처해나가야 함."

약 2개월 후, 양천구청 공무원 출신인 양성윤 당시 통합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후보는 구청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서울에서 열린 공무원 시국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양천구청은 서울시에 양 후보의 중징계를 요청했다. 양 후보는 "국정원 등 각종 기관에서 압력이 들어와 (구청이) 중징계를 요청하게 됐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양천구청 관계자도 언론 인터뷰에서 "국정원에서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2009년 2월 원세훈 국정원장 취임 이후부터 게시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중 일부 내용은 같은 기간 일어난 국정원 개입 사건들과 상당한 연관성을 보인다. 특히 ▲종북좌파단체 대응 및 공격 ▲여론조작 시도 ▲국내 정치 현안 개입 관련 발언이 개시된 전후로 지시 내용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듯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동안 국정원 개입으로 논란이 된 사건들이 원 원장의 지시에 따라 진행됐을 가능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종교단체 정치개입 바로잡아야" 지시 후 종교행사 중단·사찰 주지 교체
 

2009~2012년 원세훈 지시(발언) 전후 '국정원 개입 논란 사건' 비교 분석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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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첫 지시에 이어 원 원장은 같은 해 6월 19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종북좌파 단체들이 시민단체·종교단체 등의 허울 뒤에 숨어 활발히 움직이므로, 국가의 중심에 서서 일한다는 각오로 더욱 분발해주기 바람"이란 지시사항을 게시했다. 이는 전날 전교조 소속 1만 7천여 명의 교사들이 정부의 공권력 남용과 특권층 위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하자,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의 정부비판을 사전에 견제하기 위한 대응으로 보인다.

닷새 뒤 이미경 환경재단 사무총장 등은 국정원의 방해로 환경영화제 예산이 줄어들었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2004년부터 매년 환경영화제에 2억여 원씩 보냈던 환경부와 서울시는 2009년 갑자기 지원금을 보류했다. 당시 이 사무총장은 "국정원 조정관이 서울시 담당 본부장에게 전화해 지원금을 보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무총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이 시민단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위의 원장 지시 전후로 '아름다운재단 후원 대학·기업 압박' '범민련 사건' '한국진보연대 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국정원이 시민사회단체를 과도하게 수사하거나 활동을 방해한다는 의혹이 일었다.

2010~2011년 불거진 국정원 종교단체 활동 개입 의혹도 원 원장의 지시 내용과 연관성이 높은 대목이다. 2010년 2월에는 국정원 직원이 조계사에 전화해 정부 비판 행사를 막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2011년 3월에는 명진 스님이 봉은사 주지 자리에서 퇴출되는 과정에 원 원장이 개입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2010년 3월 9일 게시된 "일부 종교단체가 정치활동에 치중하는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원 원장 지시 내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종북·좌파단체 대응 지시는 2011년 2월 "종북좌파 관련 내·수사 매듭을 서두르라"는 지시로 확대됐다. 그러자 같은 해 5월부터 청학연대 사건, 왕재산 사건, 전교조 사건, 평통사 사건 등 국정원이 반국가단체로 의심하는 곳을 압수수색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진성준 민주통합당 의원 등이 발간한 정책자료집 '국가정보원 개혁을 위한 제안서'(2012.2)는 "(국정원의) 대대적인 수사, 광범위한 압수수색으로 종북 논란이 확대 생산돼 인권이 유린당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부터 논란이 된 국정원 댓글 사건 역시 원 원장 지시 내용을 실행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원 원장이 2011년 11월 18일 트위터·인터넷과 관련해 "국정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고 지시하자, 곧이어 국정원 산하의 '심리전단'이 '심리정보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2012년 12월에 드러난 국정원 직원 댓글 사건도 이러한 원 원장 지시 내용에 부합한다.

세종시 등 현안 지시도 사실상 실행... "국정원, 정권 전위부대"
 

▲ 진선미 의원, "원세훈 원장, 불법적으로 여론조작 시도" 문건 공개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재임기간 중 불법적으로 여론조작에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며 국정원 내부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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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국정원이 원 원장의 지시에 따라 국내 정치 현안에 개입했다고 의심되는 사건이 있다. 다음은 2010년 1월 22일 원 원장의 지시 내용이다.

"세종시 등 국정 현안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보다 정공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음.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 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

당시 정치권에서는 '세종시 원안 고수'와 '원안 수정'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1월 1일 연기군의회 임창철 자유선진당 의원은 "국정원 직원이 세종시 원안 수정을 받아들이라고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관계자도 당시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연기군 관계자들과 접촉한 사실을 시인했다. 사실상 국정원 세종시 주민 회유 사건과 세종시 관련 원 원장 지시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이다.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은 "원 원장 지시 내용들은 어떻게든 현장에서 실행됐을 것이라고 본다"며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국정원 개입 사건이 의혹이나 논란에 휩싸인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이어 진 의원은 "이번 지시 내용 공개로 국정원이 사실상 정권의 전위부대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정원은 지난 18일 보도자료를 통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의 존재를 사실상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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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수개표]는 백성과 민족의 생존전략

[투표소 수개표]는 백성과 민족의 생존전략
(서프라이즈 / 명태 / 2013-03-19)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떤 분이 18대 대선에서 수개표만 정확하게 했더라면, 정권을 도둑맞지 않고, “국립대학통합”, “대학입시지옥철폐”가 이뤄졌으리라고 말했다.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교육과 언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수개표를 하지 않아 정권을 도둑맞음으로 인해서 온 국민의 그 비원은 물거품이 되고 있다.

어디 교육과 언론뿐이랴. 비정규직문제와 정리해고문제도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도 물 건너가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있다. 한반도가 전쟁의 참화를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목숨을 걸고 단식 투쟁을 하고 있는 춘몽님도 바로 백성과 민족의 사활과 운명을 걱정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먼저, 18대 대선에서 수개표를 하지 않고 콤퓨터로 개표결과를 제멋대로 조작한 불법부정선거를 바로잡자고, 그와 동시에, “투표소 수개표”로 선거법을 개정 입법하자고 목숨 걸고 투쟁하고 계신다.

문재인+안철수+야당 국회의원들+명망가들+기자들+지식인들+일반 국민들은 수개표 하지 않은 불법부정선거를 바로 잡으려 할 경우 나라가 혼란스러워질까 우려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바로 수개표를 하지 않은 불법부정선거를 바로 잡고 투표소 수개표로 개정 입법하는 길만이 백성과 민족의 살길, 생존전략임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야당들과 야권 국민들은 앞으로도 모든 선거에서 지는 것은 물론 차기 대선에서도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야당국민들이 무슨 신명이 나서 문재인+안철수+박원순+야당국회의원들을 믿고 다시 표를 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춘몽님처럼은 못할망정, 수개표를 하지 않은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투표소 수개표로 개정 입법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야당국민들께서 또다시 힘을 내서 그들을 지지해주시지 않겠는가?

 

명태

 

 

‘제주 해군기지 반대’ 양윤모 49일째 옥중단식
(민중의소리 / 정혜규 기자 / 2013-03-18)

 


▲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다 1년 6개월 실형을 받고 수감된 영화평론가 양윤모(57)씨가 19일로 단식 49일째에 접어들었다 사진은 양씨가 첫번째 단식을 이어가던 2011년 모습.ⓒ제주의소리 제공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벌이다 1년 6개월 실형을 받고 수감된 영화평론가 양윤모(57)씨가 19일로 단식 49일째에 접어들었다. 문정현 신부 등이 양씨를 면회한 자리에서 단식 중단을 호소하고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 교수가 양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등 그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3년간 160일 넘도록 단식

양씨는 지난 2월 1일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된 이후 이튿날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양씨가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이다 단식에 들어간 것은 2011년 74일간 단식을 한 이후 세번째로 그가 지금까지 해군기지 사안으로 단식을 벌인 날을 모두 합치면 160일이 넘는다.

양씨가 세 번째 단식에 들어가자 동료 활동가와 강정마을 주민들은 모두 만류했다고 한다. 양씨가 장기간 단식으로 이미 몸이 악화된 데다 몸을 회복하지 못한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2년 동안 단식을 해온 상황에서 또다시 단식에 들어갈 경우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씨는 주위에서 만류를 할 때마다 “잘못된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해왔는데 국가가 법을 통해 형을 살게 하는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양씨는 강정마을에 거주하는 활동가들 속에서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꼽힌다. 그는 강정마을에 내려오기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강우석필름아카데미 초대교장을 역임하는 등 30여년간 충무로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그러다 고향인 제주도에서 요양을 하던 중, 정부가 강정마을 주민들의 반대속에도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저지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중덕사라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거주하면서 반대운동에 앞장서왔는데,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크레인 밑으로 들어가 공사를 막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양씨는 이 싸움을 하다 2010년 이후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모두 4번 수감되기도 했는데 주민, 평화활동가 등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벌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수치이기도 하다. 그가 구속이 되거나 단식을 벌일 때마다 사그라들었던 강정마을 이슈는 다시 전국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

문정현 신부 등 단식 중단 목소리 높아져

양씨의 단식이 또다시 길어지면서 단식 중단과 석방을 요청하는 국내외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노엄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명예교수는 18일 연대 메시지를 통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다 구속돼 단식을 투쟁을 벌이고 있는 양씨를 즉각 석방하고,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정의롭고 용기있는 저항을 자유롭게 지속할 수 있게 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도 지난 12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양씨에게 단식을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15일에는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 문 신부, 문규현 신부,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이 양씨를 면회한 자리에서 단식을 철회할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대책회의 관계자는 “우리는 70일 검증기간 평가와 향후 활동계획을 확정하면서 양씨에게 단식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며 “지난 2011년부터 이어진 양씨의 단식은 해군기지 강행의 문제점을 전국적인 사안으로 확장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 이제는 그가 단식을 중단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http://www.vop.co.kr/A00000611150.html

 

 


<한미FTA 효과, 통계로도 보이지 않는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318101411&section=02


<[뉴스타파 호외 영상] '국정원장 정치개입 지시' 의혹 문건 공개>

http://cafe468.daum.net/_c21_/bbs_read?grpid=1RcF1&fldid=Il2P&contentval=00065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77&regdt=20130318230532


<긴급)민주노총법률원이 부정선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http://cafe468.daum.net/_c21_/bbs_read?grpid=1RcF1&fldid=Il2P&contentval=00061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73&regdt=20130318200954


<한반도 긴장고조와 평화의 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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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룸살롱'취업 후 접대 못한다고 '보도방' 넘겨

 


제주 경찰은 보도방을 운영한 업주와 조직 폭력배를 검거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보도방 업주 24명은 2009년 9월부터 제주시 신제주지역을 중심으로 보도방을 차려 유흥업소에 소개하고 약 13억의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합니다.

보도방 업주 김모씨 등 업주와 조직폭력배 27명은 유흥업소에서 여성 접대부를 원하면 이들을 보도방 전용 승합차에 태워 유흥업소에 투입한 후 시간당 2만5천원 또는 매월 40만원씩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보도방 업주 김모씨는 중학생 A양 등 10대 청소년을 고용해 유흥업소에 100차례 이상 소개하고 소개비 명목으로 1일 2만5천원씩 165만원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주의 소리' 에 따르면 여중생 등 10대 청소년 2명은 처음에는 룰살롱에 취업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들 여중생 등 10대 청소년 2명은 겨울방학이던 지난해 12월 룸살롱에 취업해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접대를 했다가 어린 나이에 룸살롱 접대를 잘하지 못하자, 해당 업소 사장은 "손님 접대를 잘 못하니 보도방에 가서 일 좀 배우라고" 말하며 보도방으로 넘겼다고 합니다.

경찰은 보도방 업주를 상대로 조사를 벌이다 지난해 2월13일 제주시 연동소재 모 노래텔에 이들은 내려준 김씨를 현장에서 검거했고, 10대 청소년 2명은 가족에게 인계했습니다.

' 보도방 연합회에 변호사 선임 비용 지원까지, 조직화된 범죄집단'

이번에 검거된 보도방 업주들은 2009년부터 '제주지역 보도방 연합회'를 구성해 18개 업체 회원사가 매월 5만원씩 받으며 회칙까지 구성해 조직적으로 보도방을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제주경찰이 보도방과 유흥업소에서 압수한 통장과 차량,현금, 성인용품. 출처:제주의 소리

 


보도방 업주 김모씨를 중심으로 조직된 '제주지역 보도방 연합회' 회칙에 따르면 이들은 신규 보도방 업주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도 했고, 회원 보도방 업주가 경찰에 구속될 경우 변호사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무전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여종업원 공급 현황을 수시로 공유하는 것을 회칙에 명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보도방 업주는 물론이고,'키스방'.'풀살롱' 등 여성 접대부를 공급하는 범죄 집단이 벌이는 행태는 교묘하면서 법망을 이리저리 피하기도 합니다.

 

 

▲ 업주와 종업원이 구속됐지만 여전히 영업중인 풀살롱. 출처:SBS뉴스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모텔과 연계해 성매매까지 제공하는 이른바 '풀살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강남주변에 많이 있는데, 선릉역 주변 한 풀살롱 업소를 지난 2월 14일 경찰이 기습 단속해 업주와 종업원 등 12명을 입건했습니다. 그러나 3주 뒤에 그곳을 찾았지만,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업소는 두 차례나 단속됐지만, 영업을 계속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간판과 사장의 명의를 바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실소유주를 파악해 구청에 통보해 영업정지를 내리려면 경찰 단속 후 보통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점을 업주들이 악용해 버젓이 영업하는 것입니다.

' 범죄와의 전쟁, 그 실효성은?'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지난해 7월2일 '성매매특별단속 TF팀'을 구에 조직해 호텔과 룸살롱 등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왔다고 합니다. 강남구는 강남경찰서,수서경찰서,민간 단속반까지 편성해 성매매 유인 홍보물 배포와 성매매 현장 오피스텔 등에 대해 집중적인 점검에 들어갔습니다.

강남구가 성매매특별단소 TF팀을 구성해 단속에 들어가 R호텔과 다른 L,S 호텔 등에 영업정지 1~2개월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시도를 했지만, 강남구에 있는 '키스방','풀살롱','안마'등의 불법 영업은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 강남구 일대에 뿌려지는 성매매 업소 관련 전단지.

 


성매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대한 법률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창녀촌','윤락가','사창가' 등에 대한 집창촌은 붕괴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묘하게 이루어진 '휴게텔', '풀살롱', '침대방', '안마시술소', '키스방', '인형방', '페티쉬 클럽', 'XX방' 등의 변태적인 성매매 업소는 늘어만 갔습니다.

강남구청장이 아무리 특별단속반을 만들었어도 강남은 신종 성매매 1번지로 계속 자리 잡고 있으며, 특급호텔 객실 수십 개를 장기 입차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등의 조직적이고 대규모 불법 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 단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의 엄중한 집행'

우리 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성폭력,성매매 등의 성범죄를 예방하고 단속하기 위해 수십 차례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늘 단속을 강화했고,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성폭력 등을 근절하겠다고 나섰습니다.
 

 

▲ 경찰대 졸업식에서 성폭력 범죄 근절 등 4대 사회악을 근절하겠다고 밝힌 박근혜 대통령. 출처:청와대

 


지난 3월 14일 박근혜 대통령은 경찰대 졸업 임용식에서 4대 사회악인 '성폭력','학교폭력','가정폭력','불량식품'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강조하면서 '4대 사회악 근절 추진본부'와 '성폭력 특별수사대'등을 발족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서는 앞다퉈 성폭력 등에 관한 TF팀을 너도나도 조직하고 나섰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 4대악 근절과 연관된 캠페인과 TF팀을 조직한 경찰

 


경찰청은 성폭력 사범 검거 100일 작전을 펼치고, 지역 경찰서와 무슨 본부와 같은 조직에서는 '4대악 근절 캠페인'을 벌이고, 일선 경찰서는 형사들을 중심으로 TF팀을 다시 구성한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일들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경찰이 성범죄, 성폭력 단속 어쩌고 하면 나오는 것이 과거 성범죄자들을 방문해서 확인하는 일인데, 이런 일을 견디다 못해 성범죄자들은 오히려 주소 이전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몰래 거주하는 등 그 실효성에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성범죄와 성매매와 같은 범죄를 근절시키는 방법은 이처럼 캠페인을 벌이고, TF팀을 조직하는 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례1)
대전고법은 청소년 3명을 고용해 성관계까지 강요했던 A씨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

사례2)
부산지법은 미성년자 등 여종업원을 고용해 속칭 '키스방'을 운영한 혐의로 B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사례3)
청주지법은 성매매 알선 업소를 운영해 수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형의로 기소된 C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3억여원을 선고.


사례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에서 미성년자를 고용해 성매매 알선을 했다고 무거운 형량을 받지는 않습니다. 아동,청소년 성매매를 알선한 업자에게 7년 이상의 징역형을 처벌하는 현행법이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2년 이내에서 형량이 구형되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들은 어떤 형량을 받을까요?
 

 

▲ 미국 조지아주 연방법원에서 판결을 기다리는 스티브 레머리.


미국 조지아주 연방법원은 미성년자 약취와 성매매 알선혐의로 기소된 스티븐 레머리에게 징역 80년을 선고했습니다. 여기에 90세 이후에나 가석방을 신청할 수 있도록 가석방 불허기간을 50년으로 정했습니다. 결국, 스티븐 래머리는 90세가 넘어서야 겨우 사회에 나올 수 있으며, 그와 함께 청소년 성매매 알선에 가담했던 친구도 30년형을 받았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성폭력,성매매,아동 청소년 성매매 등에 관한 형량이 50년 이상이 된다면 아마 지금보다 성범죄가 줄어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번이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사회와 영원히 격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조직적인 성매매 업자들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속을 아무리 하고, 검거해도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범죄에 대한 근절 효과는 그리 높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인권 침해 소지도 일부 있을 수 있는 조항도 있겠지만, 미성년자를 고용해 보도방을 운영하며 청소년들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면 '얼굴에 염산을 뿌리겠다'며 폭행과 협박을 강요했던 악질 성매매 업자와 같은 자들에게는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무거운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10대 아이들은 그들의 삶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과 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순간의 실수로 성매매에 뛰어든 아이나,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아이들은 보호해야 합니다. 또한, 인륜을 저버린 성범죄 청소년을 단순히 미성년자라고 그저 용서하는 일도 잘못됐습니다.

단순하게 일회성 대국민 범죄와의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하고 효과도 없습니다. 딸을 키우는 부모들에게 대한민국은 결코 안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4대악 근절 운운하는 소리가 별로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지키는 힘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범죄를 응징하고 재범을 막을 수 있는 체계적인 법률과 지속적이면서 효과적인 경찰의 단속 시스템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에도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성범죄를 저지르면 90세 이전에는 절대 사회에 돌아갈 수 없는 강력한 잣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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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등록일: 2013.03.18 [18:07] | 조회: 80 스크랩 0회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 함세웅(왼쪽) 신부가 지난달 2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생명평화미사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함 신부는 매주 월요일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 1979년 구속 100일만에 풀려나 기뻐하는 모습.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 19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 1974년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고함석헌(오른쪽)선생과 함께.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 1965년 우르바노대 신학원 유학시절.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 함세웅 신부는 지난해 사제직에서 공식 은퇴했지만 우리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향후 활동 계획에 대해 말할 때에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이호정 기자 hojeong@seoul.co.kr

 

우리 나이로 일흔둘. 오랜 삶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 신부지만 지난 일보다 지금의 일에 대해 더 들려주고 싶어 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많다.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숨 고를 틈조차 없이 활동하는 이유다. 함 신부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핍박받는 이들이 널려 있다는 증거다. 그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사망 사건(1987년)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정치 민주화를 이끈 지 올해로 26년이 됐지만, 경제민주화, 남북 화해·통일, 역사 바로 세우기 등 그가 나서야 할 일들은 수북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노(老) 신부의 마음은 바빠 보였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함 신부를 다시 만나 민주화 이후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이어 갔다.

민주화 이후 함 신부와 사제단에 전국민적 시선이 다시 쏠린 건 2007년 10월 김용철(55)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 민주화의 물꼬가 터진 지 꼬박 20년째 되던 해다. 삼성그룹 구조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내 이름의 계좌에 삼성 비자금 50억원이 관리되고 있다”고 말문을 열며 시작된 사건은 17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한국 사회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10월 29일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사제단은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경제정의민주화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의 고문인 함 신부도 회견 자리를 지켰다. 그는 김 변호사를 처음 만난 그해 10월 18일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김 변호사가 가까운 친구 등과 저를 찾아왔어요. 그는 자신이 삼성 탓에 당했던 고통을 쏟아냈어요. 예컨대 삼성에서 나온 뒤 검사 출신 선배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삼성이 압력을 가한 까닭에 사건을 못 맡고 있다는 등의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비자금 조성 등 삼성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 털어놨어요. 얘기를 다 듣고는 저와 동료 사제들이 김 변호사를 나무랐어요. ‘삼성에서 간부를 지낸 당신도 결국 공범자인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왜 왔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저도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요. 삼성을 위해 일하면서 잘못한 일은 인정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책임자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크니까 자기고백을 통해 삼성의 범죄도 고발하고 싶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모두 알아채고 정화시켰으면 좋겠다는 취지였어요.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물었죠. ‘김 변호사, 당신 감옥 갈 각오 돼 있소?’라고요. 그랬더니 ‘돼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죠.”

 

▲ 함세웅(왼쪽 세 번째) 신부가 지난해 8월 26일 서울 중구 신당6동 청구성당에서 사제 은퇴를 앞둔 마지막 미사를 집전한 뒤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 함세웅 신부가 지난해 10월 22일 서울광장에서 ‘유신 40주년에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한다’를 주제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국시국기도회에서 강론을 하고 있다.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함세웅(왼쪽 두 번째) 신부가 북한 조선종교인연합회 장재언(가운데) 위원장 등 남북 대표단 일행과 2010년 3월 중국 다롄 뤼순 옛 일본군 감옥 ‘안중근 의사 추모실’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이후 사제단은 김 변호사를 보호하며 삼성의 비자금 조성과 사회 전방위로 진행된 불법 로비의 수법, 검찰·언론계·관계와의 유착 의혹 등 파괴력 있는 폭로를 이어 갔다. 함 신부와 사제단은 이 사건이 단순히 거대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경제민주화의 신호탄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검찰과 언론은 물론 믿었던 노무현 정부까지도 사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성 돈의 힘이 컸어요. 부끄럽게도 노무현 정부는 삼성에 이미 예속돼 있었어요. 노 대통령은 물론 그 아래 참모진도 몇 명 빼고는 모두 삼성 편에 서 있었습니다. 어렵게 특검까지 끌고 갔지만 특별검사가 삼성에 종속된 사람이었어요. 특검은 의혹 대부분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일부 조세포탈 및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만 기소했어요. 결국 우리가 폭로한 삼성의 불법 행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나고 삼성 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에 대해서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인정해 유죄판결을 내리는 등 법의 심판이 일부 있었지만 이마저도 넉달 만에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해 줬습니다. 삼성이 우리 사회 전반을 다 돈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체감했어요. 그때가 기업민주화와 경제민주화를 할 절호의 시기였는데…. 몇몇 기자들이 비아냥대며 ‘신부님이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오히려 찾아준 셈이에요. 이건희씨에게 감사받아야 해요’라고도 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계나 법조계, 언론계와 달리 자본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천주교단은 사제단에 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함 신부의 설명은 달랐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자 가운데 삼성에 다니는 간부들이 많고 대기업으로부터 사회복지 후원금을 많이 받으니까 기업의 불법성을 고발하지 못해요. 어찌 보면 교회는 기업이 흘리는 떡 부스러기를 집어먹고 사는 거죠.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었을 당시 김 변호사를 도왔던 전종훈(57) 신부에게 안식년을 명분으로 3년이나 성당을 맡기지 않았어요. 권한을 남용한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죠. 신부들이 삼성비리 폭로에 앞장서니까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함 신부와 사제단은 정계 등의 인사들로부터 ‘왜 삼성 같은 기업을 몰아세우느냐’는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함 신부는 “우리도 국제적 기업인 삼성이 잘되길 바랐다. 다만 건강한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 것이다. 불의한 오너 일가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사유화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 결과는 사제단의 애초 계획과는 엇나갔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자신의 회고록에 “열병같은 진실을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사제단이 있다’고…”라고 적을 만큼 함 신부와 동료 사제들에 게 깊은 경의와 신뢰를 표했다.

함 신부가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공식 은퇴한 뒤 가장 공을 들이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근태 기념 치유 센터’ 건립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권의학연구소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사업인데 고문 등 잘못된 공권력 탓에 정신적 상흔을 껴안고 사는 이들을 위한 치유 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이다. 함 신부와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의 노력 속에 건립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고문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대부’인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이름을 내걸었다. 함 신부가 고문 피해자 문제에 다시 관심을 가진 것도 김 전 의원 때문이다. “1970~1980년대에는 정부기관으로부터 고문당한 분들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수십년을 들으니까 저도 고문 피해의 무서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김 전 의원한테도 마찬가지였어요. 김 전 의원과는 1980년대 만나 30년을 가깝게 지냈거든요. 우리들은 그에게 ‘민주화 선봉가로 앞장서라, 더 뛰어라’, ‘왜 그렇게 행동에 신중하냐’라고 채근하고 등을 떠밀었어요. 그런데 2011년 12월 30일 김 전 의원이 돌아가신 뒤 그가 서울 남영동의 경찰 대공분실에서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은 사실이 재조명됐잖아요. 그제서야 ‘아, 우리가 김 전 의원이 고문당한 사실을 잊고 지냈구나. 사선을 넘나든 분께 위로와 치유를 주기보다는 너무 가혹하고 모진 주문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문을 견뎌 냈던 김 전 의원같은 분들 덕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열매를 맛보고 있잖아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이 김 전 의원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권력 피해자와 그 자녀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센터 건립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또 지난 1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함 신부는 진보정치 진영의 원로다. 지난해 18대 대선 때도 재야원로회의에 참석해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대선 결과는 그가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통합을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대(大)자가 들어가면 항상 거짓이 있어요. 통합은 진실과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구원론을 통합원리와 해체원리로 설명하거든요. 통합원리는 사랑, 용서, 자비, 은혜, 상생 같은 것이고 해체원리는 회개, 갈등, 뉘우침, 고발 같은 것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큰 집을 지으려면 잘못 지어진 집을 허물고 땅을 파야 해요. 이것이 해체 기능이에요. 그런데 아무런 기초작업 없이 큰 집만 짓겠다는 것은 거짓이죠. 다시 말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뉘우치고 청산해야 화합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구호는 구호일 뿐 정치가 될 수는 없어요.”

함 신부는 야권에도 애정 어린, 그러나 따끔한 질책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열린우리당 의원의 절반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과 똑갚습니다’라고요. 성향과 관계없이 정치꾼인 거예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야권 내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는 것이 가슴 아프죠. 정치인 본연의 소명대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야당 정치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정권교체는 저절로 이뤄지겠죠. 한 시민으로서 저도 야당 의원들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끌어가야겠죠.”

함 신부에게 “세간의 평가처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진보, 보수로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모순된 답변인 듯 들려 재차 물었다. “보수와 진보를 지금처럼 나누는 언론의 인식이 잘못됐어요. 원래 보수라는 단어는 뜻이 좋아요. 한자로 ‘보전하고 지킨다’는 것이니까요. 즉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결국 참된 진리를 지키고 보전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거죠. 언론이 말하는 보수는 수구라고 생각해요. 역사를 왜곡하고 친일·반민족 행위를 칭송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겠어요.”

사회 약자의 편에 서서 한평생을 산 함 신부에게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행복해질 수 있는 비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선 ‘어려움아, 놀자’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해요. 요즘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근엄하고 초월적인 존재로만 인식하지 않고 인간과 함께 뛰어 노시는 하느님,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신으로 인식하거든요. 두 번째로는 우리보다 어렵고 억울한 사람을 생각해 보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이 사회에 주신 메시지는 아마 ‘그래, 나 억울한 사형수다. 네가 힘들고 억울해도 나보다 억울하냐. 난 죽었잖아. 넌 그래도 살아 있잖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청년들 가운데 피자를 10분 빨리 배달하려다 사고로 숨진 이도 있고 제철소에서 일하다가 용광로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잖아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젊은 기자는 “종교·사회의 원로에게 살아가면서 힘이 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함 신부의 답이 돌아왔다. “원로? 나 원로 아녜요. 아직 청춘이지(웃음).”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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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눈감은 그림자 엄마와 추억 지우는 남자

[황유미, 그리고 6년 ⑤] 한혜경 씨 모녀와 정희수 씨의 하루

최형락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19 오전 7:51:18

 

'삼성 백혈병'으로 상징되는 산업 재해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끝내 산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희생자의 유가족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기로 한 것은 이 문제가
지금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다르지 않은 고통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8년째 투병 중인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 작년 5월 세상을 떠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를 만났다.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기록했다. <편집자>

혜경 씨와 그림자 엄마

엄마는 그림자 같았다. 하루 종일 혜경 씨 옆을 떠나지 않았다. 보행기를 잡고 걷는 딸의 뒤를 엄마는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따라 걸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8년. 엄마는 딸의 삶을 따라 살고 있었다.

 

 

▲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교 병원에서 만난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 ⓒ프레시안(최형락)


혜경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수백 개의 칩이 꽂힌 회로기판솔더크림을 바르고 챔버(가열기)에 넣었다 뺀 뒤 까맣게 타버린 불량을 체크하는 일을 했다. 솔더크림의 주성분은 납. 안전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2001년까지 6년을 일했다.

2005년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크기로 봐서 7~8년은 된 종양이었다. 머리를 열고 종양을 제거했다. 예전 같으면 수술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수술은 감행됐다. 종양은 다 제거되지 않았다.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지체장애, 시력장애, 언어장애 1급.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산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 질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심까지 불승인되자 2011년 4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걸었다.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오는 4월 12일 예정된 것까지 공판만 여덟번 째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복시 때문에 안경알 한쪽을 뿌옇게 만들어 놓았다. 왼 눈은 쓰지 않는다. 두 다리는 중심 잡기와 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1년 전부터는 보행기를 잡고 걷게 됐지만 아직 혼자 걸을 수는 없다. 듣고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말은 느리고 어눌하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는 음절을 조합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밤에는 두세 차례 꿈을 꾼다. '학교 가야지'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신발을 신으려고 내려오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울대 분당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절이 잦아 먹기 시작한 약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아침에 9알, 낮에 2알, 저녁에 9알의 약을 먹고도 자기 전에 꿈 안 꾸게 하는 약 4알을 먹어야 한다.
 

 

▲ 강원도 춘천의 강원대 병원에 입원한 혜경 씨. 이 병동에는 뇌질환 환자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어머니 김시녀 씨는 딸 간병 생활이 8년째다. 이젠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나서 집에는 1~2주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말한다. 힘든 때는 아플 때다. 딸을 돌봐야 하니 아파도 가지 않던 병원에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달려가곤 한다. 딸 때문에 아플 수도 없다. 때론 아프지도 못하는 게 서럽기도 하다.

엄마의 하루는 혜경 씨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혜경 씨를 목욕시키고 7시 반이면 아침을 먹는다. 9시 반에 재활 치료, 11시 반에 작업 치료를 다녀온다. 점심을 먹고 걷는 연습을 하고 3시 15분에는 자전거 운동 기구를 태운다. 30분이던 것이 이용자가 많아 그마저 25분으로 줄었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간이 침대에서 잠이 든다.

행복한 가정 이루는 꿈, 그러나…

엄마는 혼자 식당을 해서 남매를 키웠다. 고생하는 엄마를 본 딸은 착하고 속 깊게 컸다. 하루 500원을 주면 아끼고 모아 한 달에 2000원을 쓰고 1만3000원을 돌려주는 딸이었다. 삼성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은 일의 강도가 셌지만 성과급이 많아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6년을 다녔다. 김시녀 씨는 삼성에는 똘똘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기억한다.


혜경 씨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들과 행복가정을 꾸리는 것. 그녀는 평범하게 살았고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이 소박한 꿈을 꾸게 된 데는 불우했던 유년의 기억도 한몫했다. 혜경 씨는 홀로 남매를 키운 엄마에 대한 애착만큼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도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혜경 씨의 꿈은 병이 생기면서 산산조각 났다. 고생하며 마련하고 지킨 아파트병원비로 고스란히 날아갔다. 모아 놓은 돈도 거의 다 써버렸고 지금은 월세집을 얻어 산다.

"뭐 생각해?"

"또 늦어진 거."

"몇 년을 기다렸는데 또 못 기다리겠냐."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 인생이 없어졌으니까."

"넌 엄마가 이러면 버릴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혜경이 네가 나야."

혜경 씨는 밤마다 간이 침대에 누우며 편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병실의 밤은 편할 수 없다. 심전도혈압 체크, 채혈 등으로 늘 어수선한 병실에서 8년째 잠드는 엄마를 보는 것은 그래서 미안하고 불편하다.

"엄마한테 잘해야 해요.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엄마는 내가 엄마라는데 저한테는 엄마가 저예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언제까지 미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착한 딸이 아니에요. 속만 썩이는…."


 
ⓒ프레시안(최형락)
 
 
 

 

"삼성,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다"
 
 

 

혜경 씨가 그림자 엄마를 멀리하는 순간이 있다. 삼성 얘기를 할 때다.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것이 싫어 다른 데 가 있으라고 한다. 엄마가 가지 않으면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그녀가 서투른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느리지만 얼굴과 목소리에는 독기가 서렸다.

"내 삶이 엉망이 됐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다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열받아요. 마음앓이 많이 했어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어요. 돌릴 수만 있으면 돌리고 싶어요. 하! 내 인생 돌려내."

삼성은 3년 전 합의를 종용했다. 엄마는 너무 힘이 들어 합의에 응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딸이 반대했다. 딸만큼이나 제정신일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냐고 엄마는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의 합의 제안은 산재 신청 기한을 넘기게 하려는 꼼수였다. 제대로 보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걸 알고 항의하자 그쪽에서도 시인한 일이다.
 
 

 

엄마와 딸, 꿈이 남아 있을까?
 
 

 

8년간의 투병은 모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직도 투병은 끝나지 않았고 더디게 진행 중인 소송에서 무엇을 더 빼앗길지 알 수 없다. 어떤 희망도 꿈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모녀는 삶의 계획을 세우고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바람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딸이 혼자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보행기를 잡고 혼자 걷고 밥을 떠먹을 수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2년쯤 뒤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의외였지만 혜경 씨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발을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가 시원하대요. 안마사 하고 싶어요. 아픈 사람 시원하게 해 주고 싶어요. 풍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혜경 씨도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하면 되지. 왜 못해"라는 말로 딸의 희망을 홀로 긍정했다.


모녀의 하루가 저물었다. 춘천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기차 안에서 창 밖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기차는 새벽이 오고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을 달릴 것이었다.

 
▲ 엄마가 혜경 씨의 손을 잡고 있다. 혜경 씨는 수술 이후 시력이 악화되고 몸의 균형을 제대로 못 잡아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엄마는 마치 그림자 같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작업 치료. 핑크색을 좋아하는 혜경 씨가 오늘은 파스텔톤 파란색을 마음에 들어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작업 치료 중 색칠하기를 하고 있는 혜경 씨. 힘 조절이 안 돼 큰 필기구를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재활 치료 중 혜경 씨가 선생님들과 같이 만들었다는 모형물을 들고 어머니가 자랑을 한다. 재활에 열심인 혜경 씨는 더디지만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딸과 엄마는 8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함께했다. 둘 다 상대방이 자기라고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산재 불승인 이후 2011년 행정소송을 걸었지만 2년이 되도록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고 있다. 오는 4월 12일 8차 공판이 열린다. ⓒ프레시안(최형락)

 
▲ 오후 3시가 넘으면 자전거를 탄다. 혜경 씨는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 조절이 잘 안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혼자 움직이는 딸을 엄마가 급히 뒤쫓는다. 혜경 씨는 1년 전부터 보행기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의 한 정육점. 정희수 씨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 큼지막한 화면에 가족 사진을 띄웠는데 넘겨도 넘겨도 사진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가족은 너무 멀리 있었다. 아내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혼자 사는 가장에게 사진은 큰 재산이었다. 사진을 넘기며 그가 살아온 얘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아내와 첫 만남, 그리고 이별

희수 씨가 아내를 만난 것은 2002년 크리스마스였다. 부산에서 막 서울에 올라온 그는 차를 몰고 천안까지 내려가 윤정 씨를 만났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윤정 씨는 4촌 누나의 회사 동료였다. 셋째 딸이라서 그런지 착해 보였다. 1년 반의 연애 끝에 2004년 5월 대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변변한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상가 2층에 작은 방을 마련해 살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조금씩 집을 늘려가면서 행복도 커졌다. 아들딸 하나씩을 뒀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10년 5월 5일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급히 응급실로 옮겼다. 머리 사진을 찍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교모세포종, 뇌암이었다. 병원은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병세가 깊어졌다. 말수가 적어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간병을 하면서 가게에는 신경 쓸 수 없었다. 처남이 도와줬지만 고기 장사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자리 비우면 매출은 줄게 마련이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다. 보험금이 실비보다 적게 나왔다. 결국 벌어 놓은 돈을 까먹기 시작했다.

희수 씨는 좋다는 것은 모두 해 먹였다. 주위에서 가망이 없다며 말렸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병을 알고부터 2012년 5월 7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내는 딱 2년을 살았다.
 
▲ 정희수 씨와 이윤정 씨. 부부는 많은 곳을 놀러 다녔다. 즐거운 한때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삼성과 맺은 악연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쓰던 유독물질 때문이었다. 이윤정 씨는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6년을 일했다. 반도체 칩이 꽂힌 기판을 챔버에 넣고 빼며 불량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2003년 퇴사하고 7년이나 지났는데 뇌암이 발병했다. 2010년 7월 산재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2011년 4월 행정소송을 걸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2월 22일 7차 공판이 열렸지만 공판만 거듭될 뿐 아직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다. 그러나 그 사이 윤정 씨는 세상을 등졌다.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아내를 잃은 남자의 삶은 온전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부산 큰누님 집으로 보냈다. 가게에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데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이 커서 그나마 가능했다. 그는 혼자가 됐다. 억울한 마음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 시위에 100번도 넘게 갔다.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막았다. 울분이 치밀어 싸웠다. 그는 투쟁이니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그런 건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파탄 난 가정의 가장'이어서 그곳에 갔다고 했다.

황유미 씨가 죽은 지 6년 되던 날 희수 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갔다. 공장을 나오는 꽃다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오는 얼굴마다 밝지 않았다. 불쌍하고 마음이 안 좋았다. 살아서 윤정 씨의 표정이 그랬으리라.

ⓒ프레시안(최형락)

혼자 남겨진 남자

희수 씨는 부천에서 10년을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방학동에 잠깐 살다 이곳에 이사와 정착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도, 결혼해 아내와 집을 늘려가며 자리를 잡은 것도 이곳이었다. 아이들도 여기서 키웠다. 그런데 여기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고향에 내려갈까 생각도 많이 했지만 떠나기는 또 쉽지 않았다.

오늘은 옆집 과일가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마음 넓은 주인 아주머니가 불고기와 미역국을 끓였다. 혼자 지내다보면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를 때가 많고 점심은 사먹거나 가게에서 라면으로 대충 때운다. 그래서 이웃이 신경 써줄 때가 더없이 고맙다.

과일 가게에 들어섰다. 강아지 사랑이가 뜨끈한 앉을 자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 앉아 희수 씨는 전화를 건다. 부산에 있는 아이들이다. 뭘 잘못했는지 일곱 살 딸이 고모한테 혼나고 울고 있다.

"아빠~~~."

"고모한테 혼났어? 괜찮아."

"아빠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아빠 언제 와?"

"4월에 갈게."

"4월 언제? 6일?"

"글쎄 15일쯤? 그때 상황 봐서 갈게. 비행기 타고 숑 갈게 기다려."

"아빠 빨리 와~~~. 보고 싶어~~~."

아이가 서럽게 운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고개 숙인 희수 씨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는데......(한숨) 아이들 울고, 아빠 보고 싶다 하는데 그런 마음 누가 알겠어요. 애들은 무슨 죄라고…."
희수 씨는 사별 후 상당한 우울감을 겪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지금도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부산에는 두 달에 한 번 갈까 말까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가족 사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죠.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나요?"
 
▲ 화상통화. 아이들은 부산에 내려보냈다. 가게 때문에 돌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귀가.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휑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했다. 집에 들어섰다. 아이들 사진은 있는데 윤정 씨의 사진이 없다.

"처음엔 그냥 뒀는데 보면 자꾸 마음이 아파서…. 그래서 지금은 뗐어요"

그는 혼자 있을 때 아내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말한다. 추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희수 씨는 이 집에 살기 어려워 4월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희수 씨가 방 안에 들어가 아내의 유품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 공부했던 노트가 몇 권 보였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대신 공장으로 가서 언니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착한 아내는 늘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내의 유언도 자식들 공부시켜서 대학에 꼭 보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해 대학 안 가고 공장 가면 싫다고. 윤정 씨는 결국 대학 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는 그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픔을 지우기 위해 추억을 지워간다던 남자. 그는 그것을 지울 수 있을까? 돌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홀로 남겨진 남자는 천천히 유품 상자를 덮었다.
 
 
▲ 부천시 송내동에 위치한 정희수 씨의 정육점. ⓒ프레시안(최형락)

 
▲ 고기는 단골 장사라서 주인이 꼭 자리를 지켜야 한다.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희수 씨는 틈틈이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을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정육점 지하 창고에서 앨범을 들춰보는 희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 과일가게. 혼자인 희수 씨에게 신경 써 주는 이웃이다. 가끔 밥을 얻어 먹기도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퇴근 후 옆집에 들렀다. 강아지 사랑이(11)가 주인 아줌마의 품에 안긴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나마 화상통화 덕에 아이들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귀가 ⓒ프레시안(최형락)

 
▲ 아무도 없는 휑한 집에 혼자 들어서는 희수 씨. 사별 후 처음엔 집에 잘 안 들어오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윤정 씨의 유품을 열어본다. 대학에 가고 싶어 하던 아내의 노트. 주고받은 편지, 선물,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가족으로 북적이던 아파트에 혼자 사는 희수 씨는 4월 작은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는 그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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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국정원장 정치개입 지시 내부자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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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정환봉 기자 / 2013-03-18)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맨 앞)이 지난달 12일 북한 핵실험 관련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진선미의원 확보…선거때 인터넷 여론관련 활동 주문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댓글’ 사건과 일맥상통

원세훈(62) 국가정보원장이 직원들에게 직접 국내정치 개입을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긴 국정원 내부 자료가 공개됐다. 자료에 나오는 지시 내용은 지난 대선 때 인터넷 여론조작을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가 작성한 글과 매우 비슷해, 김씨의 활동이 원 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고 있다. 국정원법은 국정원이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만큼, 원 원장과 국정원 전반으로 수사를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가 17일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보면, △선거에서 인터넷 여론에 개입 △국정원 직원 김씨가 소속된 심리전단의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 △종교단체의 정부 비판 활동 견제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에 대한 대국민 여론전 등을 지시·주문한 내용이 다수 발견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민주노총 등을 탄압하기 위해 일선 직원뿐 아니라 간부들까지 나서 정부 기관에 압력을 넣도록 한 정황도 들어 있다.

<한겨레> 취재에 응한 복수의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은 국정원 본부 국장과 지역 지부장 등 주요 부서장이 참석한 가운데 한달에 한번꼴로 열리는 확대 부서장회의에서 원세훈 원장이 발언한 내용을 정리해 국정원 내부망(인트라넷)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입수된 자료에는 원 원장 취임 직후인 2009년 5월부터 2012년 11월까지의 지시사항이 담겨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2011년 10·26 보궐선거 직후 나온 지시사항에는 “악의적 허위사실은 선거에 미치는 영향 막대. 선거가 끝나면 결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함. 특히 종북세력들이 선거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 해야 함”(2011년 11월18일)이라고 적혀 있다. 선거 정국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형성되는 여론에 인위적으로 개입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2010년 7월19일 지시사항에는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바로 우리 원(국정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국정원 직원 김씨가 젊은층이 자주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보배드림’, ‘뽐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또 2011년 2월18일 지시사항을 보면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민주노총), 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협조를 하기 바”란다고 돼 있다. 2010년 3월19일에는 “일부 종교단체가 종교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 정치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함”이라고 주문했다.

진선미 의원은 “믿을 만한 제보를 통해 이런 내용들을 입수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부당한 정치개입을 통해 국기를 문란하게 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반드시 엄단해야 할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대변인은 “내부망에 게시된 내용은 확인해줄 수 없다. 관련 내용이 있는지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58.html

 


 

[단독] ‘국정원장 정치개입’ 내부자료 입수
(한겨레 / 정환봉 최유빈 엄지원 기자 / 2013-03-18)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맨 앞)이 지난달 12일 북한 핵실험 관련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실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2011년 2월18일 “민노총·전교조 등 징계, 유관기관장 협조 얻어라”

국정원 ‘원장님 지시·말씀’ 내용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의 지시사항을 담았다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정치·사회·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국정원이 개입하도록 지시·주문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모두 국정원 본연의 구실인 ‘국가 안전보장을 위해 필요한 정보활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독재정권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등이 야당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사찰과 고문을 일삼고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다.

2010년 1월22일/ 세종시 논란 간여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2010년 3월19일/ 4대강 사업 관련
“일부 종교단체 정치 활동에 치중 바로잡으려는 노력 필요”

2011년 11월18일/ 서울시장 선거 후
“선거기간 트위터·인터넷 등 확실하게 대응 안 하니… 우리 원이 역할 제대로 해줘야”

2012년 4월20일/ 총선 직후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 인물 국회 진출함으로써 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

■ 선거 등 정치 개입 의도 드러나 2011년 11월18일 지시사항에는 “선거기간 동안 트위터, 인터넷 등에서 허위사실 유포. 확실하게 대응 안 하니 국민들이 그대로 믿는 현상 발생. (중략) 선거가 끝나면 결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국정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날 지시사항에는 “특히 종북세력들이 선거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를 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된 직후 나온 것으로, 당시 선거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형성된 여론이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판단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 국회의원을 종북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2012년 4·11 총선 직후인 4월20일 지시사항에는 “이번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흔들기, 원(국정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하라고 적혀 있다. 이는 4·11 총선에서 당선된 13명의 통합진보당 의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5월20일 지시에서는 “지난 재보선에서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인물이 강원지사에 당선”됐다고 언급했다. 최문순 지사를 겨눈 말이다.

또 “4월 국회에서는 주요 개혁 입법들이 모두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2010년 3월19일) 등 국회 고유 권한인 입법활동에까지 개입할 것을 지시한 내용도 나온다. 당시 4월 국회에서는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주변 개발사업을 위한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안’ 등 정부·여당이 주도하는 법안이 논의될 계획이었다.

■ 종교단체까지 ‘종북좌파’ 낙인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세력은 모두 ‘종북’으로 규정됐다.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2010년 3월19일 지시사항에는 “일부 종교단체가 종교 본연의 모습을 벗어나 정치활동에 치중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적시돼 있다.

그 나흘 전인 3월15일, 불교·천주교·개신교·원불교 등 4대 종단은 낙동강 상주보 건설 현장에서 ‘생명의 강을 위한 4대 종단 공동기도회’를 열고 4대강 사업 중단을 호소한 바 있다. 서울 봉은사의 조계종 직영사찰화 논란도 한창이었다. 2010년 3월11일 조계종 중앙종회는 특별분담금 사찰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는 안건을 찬성 49명, 반대 21명으로 가결했다. 봉은사 주지로서 이명박 정부의 각종 정책에 반대 의견을 활발하게 표명해온 명진 스님은 직영사찰화를 반대하다 그해 11월 주지직에서 물러났다. 명진 스님은 이듬해 3월6일 마지막 법회에서 “원세훈 국정원장이 지난달 봉은사를 방문해 리영희 교수 49재에서 내가 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에 대해 항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국정원이 자신의 퇴출에 개입했음을 시사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거나 후원금을 낸 전교조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중징계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었다는 정황도 드러난다. 2011년 2월18일 지시사항에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민주노총), 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들에게 맡기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직전인 2011년 1월26일 서울중앙지법은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당비나 후원금을 낸 혐의로 기소된 전교조 및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속 교사와 공무원 260명에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만~50만원을 선고했다. 가벼운 벌금형에도 불구하고 이후 교육과학기술부는 일선 교육청에 이들을 파면·해임 등 중징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 4대강 보위에 앞장선 국정원 ‘지시·강조 말씀’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4대강’이다. 2011년 1월21일 지시 내용을 보면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이 원활히 추진되기 위해 책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지역민들에게 최대한 성의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주문이 담겼다. 당시 경남 의령군 낙동강 19공구 인근 주민들은 “4대강 공사로 농지 침수 현상이 나타난다”며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한 바 있다. 이 지역 성산마을 주민 40여가구는 2011년 1월5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책사업 때문에 주민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데도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4대강 사업이 장마철 이전 마무리되도록 지부장들은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공사현장의 안전문제 점검”(2011년 2월18일), “낙동강·한강변 등에 집을 지으면 4대강 사업의 완성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2011년 6월17일), “4대강 그랜드오픈이 한달여 정도 남았는데 지역단체 언론 등을 통해 행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사전 면밀점검”(2011년 9월16일) 등 ‘4대강 사업 챙기기’ 지시사항이 다수 발견된다.

실제로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해온 한 환경단체 간부는 “2009년부터 지인을 통해 국정원이 나를 사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년쯤 뒤에는 해당 국정원 직원이 내게 직접 전화해 몇 번 만난 적도 있다. 국정원 직원은 나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편하게 해주는 것, 대통령이 가장 자신있게 내민 4대강 사업을 이루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세종시 논란과 관련해선 2010년 1월22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중략) 우리 원이 앞장서서 대통령님과 정부정책의 진의를 적극 홍보하고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 2010년 1월11일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직후다. 세종시 수정안은 당시 야당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도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로 신뢰만 잃게 됐다”며 반대해온 법안이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59.html

 


 

[단독] 국정원 김씨 인터넷 글, ‘지시 말씀’ 의도 충실히 따른듯
(한겨레 / 정환봉 기자 / 2013-03-18)


 

원장이 ‘해군기지 반대’ 우려하자
한달여 뒤부터 6차례 댓글 올려
 
대통령 외교성과 지속 강조에
“순방 역대 최고” 잇달아 칭송
 
여론 대처 구체적 방안까지
김씨 작성 어투에 영향 준듯

지시 내용-댓글 비교해 보니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의 지시를 담았다는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내용은 대선 여론조작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가 ‘오늘의 유머’(오유) 게시판 등에 올린 글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지시 내용 중 방점이 찍힌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주민 비판 △이명박 전 대통령 해외순방 칭송 △야당 정치인 종북 낙인 등은 김씨가 작성한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김씨의 인터넷 활동이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한다.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자료를 보면, 지난해 9월21일 지시 내용 중 “제주에서 개최된 세계자연보전총회 시 종북좌파들이 행사장 앞에서 방해활동”을 하고 있다며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달여 뒤부터 김씨는 ‘오유’ 게시판에 모두 6차례에 걸쳐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과 시민단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해군기지 반대하는 건지?”(2012년 11월2일), “해군기지사업 이제 와서 중단하라니”(2012년 11월12·13일), “팽 당한 구럼비바위”(2012년 11월20일), “해군기지 뭐 어쩌자는 거지?”(2012년 11월30일), “하루라도 빨리 완공하라고 쪼는 게 정상 아님?”(2012년 12월10일) 등이다.

 

▲ 불법 대선 여론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오른쪽 둘째)가 지난 1월4일 오후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경찰은 김씨에 대한 수사를 3개월 넘게 벌여왔지만 아직까지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 칭송도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이 2010년 6~7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4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캐나다·파나마·멕시코 등 북중미 3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대통령님의 외교가 국내 정세와 연계될 수 있도록 원이 더욱 역할을 다해야 함”(2010년 7월19일)이라는 지시 사항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강조하라는 홍보 방침은 2년여 뒤까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지난해 ‘오유’ 게시판에 “이명박 대통령이 내일부터 5일간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순방한다고 한다. 이번이 자그마치 48번째 해외순방이라는데 압도적인 역대 최고”(11월6일), “평창올림픽, GCF(녹색기후기금) 유치 등등 MB(엠비) 외교력이야 워낙 정평이 나있지 않나. 이번에도 UAE(아랍에미리트)의 원전 3~4호기를 우리 기업이 추가 수주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할 것이라고 한다”(11월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무려 49회의 해외순방을 했다고 한다. (중략) 외교가 바로 경제이고 경제가 외교인 시대에 사는 지금 우리 대통령이 외교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다”(11월27일) 등 4차례에 걸쳐 이 전 대통령의 외교력을 칭송하는 글을 썼다.

김씨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 후보를 비판하는 글을 3차례(2012년 12월5·6·7일) 쓴 것 역시 “이번 선거 결과 다수의 종북인물들이 국회 진출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흔들기, 원(국정원)에 대한 공세 예상되니 대처할 것”(2012년 4월20일)이라는 지시 사항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국정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는 여론 개입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대목도 있다. “원(국정원)도 훈수두기식 활동을 탈피, 국정성과 홍보 확산 실행 주력할 것”(2012년 1월27일), “홍보내용도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말고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을 선별하여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홍보방법에서도 우리 시각이 아닌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구체적이면서도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할 것”(2012년 9월21일) 등이다. 실제로 국정원 직원 김씨가 욕설이나 과격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 전 대통령의 핵심 정책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옹호한 것은 이 지시 사항에 부합한다.

지시 사항 대부분이 김씨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작성한 글에 반영됐다는 점에서 국정원이 지난 대선 때 정부·여당에 유리한 활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는 의혹이 더욱 커지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1월 김씨가 ‘오유’ 등에 정치적으로 편향된 글을 쓴 사실이 <한겨레> 보도(1월31일치 1면)로 드러나자 곧바로 “정상적인 대북심리전 활동”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국정원은 이후 “(게시글 작성은) 김씨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84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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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이 추앙하던 박정희, 제주를 '미군기지'로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으로 내정된 남재준 국정원장 내정자가 제주 4.3에 대해 '무장폭동 내지 반란'이라고 강연을 하고 다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민주통합당 김현 의원은 남재준 후보자가 2008년부터 작년까지 '북한의 대남전복전략 실체와 우리의 자세'란 제목의 강연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전력증강과 전쟁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시키는 한편 우리 국군의 전투력 증강을 방해하고, 힘을 소진시키기 위해 가용한 모든 요소를 총동원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48년도 남한 단독총선을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던 제주 4.3사건" 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남재준 후보자의 강연에 대해 민주당 김현 의원은 "제주 4.3사건을 무장폭도 및 반란으로 규정한 것이 맞냐?"고 질의했고, 이에 대해 남 후보는 "우리 군인들이 알기는..사법부는 달리 판단했다. 내가 말한 건 전체가 아니라 김달삼 등에 한정돼서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날 국정원장에 대한 제주4.3 질의가 이어지자 갑자기 새누리당 서상기 위원장은 "(질의가)개인 신상에 관한 것이다. 마이크 끄세요"라고 외쳤고, 인사청문회가 소란스럽자 서 위원장은 정회를 선포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 내정자가 지닌 제주4.3에 대한 개념과 가치관을 제주에 사는 '아이엠피터'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제주에는 제주4.3에 대한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 박정희를 추앙하는 제주도민, 그의 딸 박근혜를 지지하다'

제주에서 박정희라는 이름은 제주를 풍족하게 해준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감귤 산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고, 5.16도로와 같은 제주의 도로를 건설해준 '은인'처럼 생각하는 도민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문 관광단지 개발 현장과 감귤 농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출처:1978년 경향신문

 


박정희는 제주를 자주 찾은 대통령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휴가도 제주로 자주 왔고, 제주의 귤밭 사업과 축산, 그리고 관광 사업 개발과 도로 확충 등에 많은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덕분인지 제주 유지들은 박정희가 제주에만 오면 ' 각하께서 (제주)를 방문하시면 아버지가 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기뻐들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제주에서 밀감 사업을 장려하고 도로를 확충했다는 이유로 지난 대선 때 제주에서 노령층은 대부분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 제주도 유세 중에 밀감을 선물받은 박근혜 후보. 출처:서울신문

 


제주도민 중 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고, 이는 그대로 18대 대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국, 도내 전체 33만967표 중 박근혜 후보가 16만6184표를 얻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야당이 강세였던 제주였지만, 지난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박정희의 '경제성장'과 '감귤' 사업으로 제주가 부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 국토건설단이 만든 5.16도로에 파묻힌 인권'

제주에서는 5.16도로라고 불리는 도로가 있습니다. 이 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입니다. 원래 5.16도로는 일본이 만든 임도를 확장 포장하여 만든 도로인데, 원래는 5.16도로가 아니라 '한라산 횡단도로'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를 기념하기 위해 5.16도로를 주장했고, 이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라산 횡단도로 개통식 장면, 출처:오마이뉴스 ⓒ 김동식

 


한라산 횡단도로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국토건설단'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 국토건설단은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한 뒤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조직인데, 원래는 장면 정부에서 '대학생 취업'을 돕기 위해 구상된 취업 확대 시스템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대학생 취업이라는 본래 취지를 없애버리고, 병역미필자를 구제한다는 이유로 전국의 불량배,부랑자,병역기피자에 대한 검거를 실시해 이들을 '국토건설단'에 강제로 넣었습니다. 예비역 군인들을 감독관으로 폭력과 인간 이하의 대접으로 마치 죄수처럼 노역에 시달렸던 '국토건설단'은 결국 국민 여론의 반발로 해체됐습니다.

 

 

▲MBC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출처:MBC

 


'국토건설단'에 의해 만들어진 5.16도로는 제주도민에게는 혜택이겠지만 단지 병역을 기피했거나 부랑자, 또는 시국에 대한 불순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 죽도록 고생하고, 다치고 죽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전두환이 만든 삼청교육대가 박정희의 '국토건설단'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사실만 봐도, '국토건설단'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노동력 동원과 통제방식으로 결과 이전에 과정 자체가 불법과 인권유린의 현장이었음을 제주도민은 깨달아야 합니다.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려던 박정희'

박정희를 제주의 은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박정희가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선언한 박정희. 출처:경향신문

 


1969년 박정희는 미국이 오키나와 기지를 일본에 반환하게 되는 경우나 아니면 새로운 미군기지 등 어떠한 형태라도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박정희의 이러한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 선언은 단순히 군사력 증강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국토를 외국 군대에 아예 넘기겠다는 위험한 발상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제주도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력을 동원한 군대 출신 대통령답게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독재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박정희의 제주 미군기지 제공에 대해 미국의 반응이 쌀쌀했다. 출처:경향신문

 


제주도민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자기 생각대로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박정희의 생각은 오히려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습니다. 미국은 제주가 항만시설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수도와 전력시설도 없으며, 바람이 세서 미군기지에 적합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어떤 이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완성되고 하와이처럼 미군이 들어서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짜 하와이 주민들은 오히려 미군기지 때문에 겪는 피해로 지금도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와이에 관광 오는 사람들은 좋을 수 있겠지만, 사실 하와이에 사는 주민들은 물 부족과 주택난,예산 부족에 허덕이며 높은 생활비에 환경문제까지 하와이를 죽음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주에 방문해 제주해군기지 설명을 듣는 박근혜 후보. 출처:한겨레

 


박근혜 후보는 지난 대선 때 제주를 방문해 마치 해군기지가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으로 만들어지면 제주가 하와이처럼 발전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시사] - 제주도민이 박근혜의 말에 경악했던 사연

'아이엠피터'는 제주해군기지를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정부의 행동과 모습, 그리고 그것이 마치 지상낙원과 같은 유토피아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박근혜는 제주4.3을 완벽히 해결할 수 있을까?'

제주에 살면서 제주4.3을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제주4.3에 대한 악몽과 연좌제에 걸려 있던 고통을 기억하는 제주도민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 제주4.3사선을 다룬 영화 '지슬'의 한 장면

 


제주가 제주4.3희생자 유족에 대한 추가 신고를 받은 결과 총 2만7792명의 제주도민이 제주4.3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10명 중 한 명은 제주4.3사건으로 죽거나 행방불명 됐거나 그 희생자의 가족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제주에서 제주4.3은 제주도민이 대다수 연루됐지만, '무장폭동과 반란'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숨겨졌다가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진상조사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다시 '무장폭동과 반란'으로 규정돼 수십 년간 말도 꺼내지 못해 살다 겨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억울함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와 제주에서 발견된 무더기 부정표. 출처:동아일보

 


제주 사람 일부는 제주 경제발전을 가져다준 사람이 박정희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남발했던 국토개발로 제주는 지금도 땅 투기꾼들과 재벌들이 소유한 수십만 평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인권을 무시한 5.16도로는 그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경제적 혜택을 준다고 부정을 눈감아주고, 인권을 무시하고, 불법과 무분별한 환경 파괴까지 자행하며, 억울한 제주4.3을 말하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로 '아이엠피터'는 박정희가 제주의 '은인'이 아니라 제주의 '파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8대 대선때 제주에 걸렸던 새누리당 현수막.출처:트위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제주4.3추모 국가기념일 제정' 공약을 내걸었고, 새누리당은 곳곳에 '4.3 완전한 해결 새누리당이 해내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제주4.3을 아직도 '무장폭동과 반란'이라고 강연에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국정원장에 내정한 박근혜 대통령이 과연 제주4.3을 완전하게 해결할지는 의문입니다.

누군가 빵을 준다면 그 영혼까지 팔겠다고 하겠지만, '아이엠피터'는 아무리 누가 나에게 빵을 준다고 해도 내 영혼을 팔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 박정희가 제주에 남긴 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아픔까지도 생각하며 대선 때 약속한 제주4.3 관련 공약을 반드시 지킬지 두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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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선제 타격 날 다가오고 있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3/19 09:52
  • 수정일
    2013/03/19 09:52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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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선제 타격 날 다가오고 있다
 
“도발과 침략의 아성을 모조리 불바다”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3/19 [08:36] 최종편집: ⓒ 자주민보
 
 

▲ 미국은 대북적대정책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키고도 모자라 연일 조선의 지도자와 체제를 모독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정세는 더욱 엄중해 지고 있다. 북의 김정은 원수를 비롯한 지도부와 군민들은 하나가 되어 대미 항전에 나서고 잇다. ©

조선이 연일 한미합똥군사훈련을 북침전쟁연습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핵선제타격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는 입장을 발표해 주목된다.

로동신문은 18일 ‘도발과 침략의 아성을 모조리 불바다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같이 밝혔다.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남조선전역에서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북침합동군사연습이 본격적으로 감행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괴뢰군부깡패들은 저저마다 나서서 극단적인 전쟁폭언들을 마구 늘어놓고 있다.”고 한국군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로동신문은 조선을 향해 지난6일 합동참모본부 작전부장의 경고성명과 국방부 대변인 성명, 국방부장관 내정자 등의 발언을 싣고 “말 한마디에 전쟁이 터지는 법이다. 괴뢰들은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도발을 걸어옴으로써 이 땅에서 한사코 북침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발광하고 있다.”고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 신문은 한미양국이 합동으로 실시하고 있는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의 성격과 규모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현실은 조선반도에서 도발의 불집을 연이어 터뜨리며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파국상태에로 몰아가는 장본인, 주범이 다름 아닌 남조선 괴뢰들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신문은 “우리는 핵전쟁으로 민족의 운명을 위협하는 호전광들, 더욱이 우리의 신성한 체제와 최고 존엄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천하의 역적무리들을 추호도 용서치 않으며 무자비하게 죽탕쳐버릴 것”이라며 “괴뢰들이 미국과 야합하여 우리에게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극단적인 전쟁폭언들을 줴치고 있는 이상 우리의 결심은 더욱 확고부동해지고 있다.”고 단호함을 보였다.

또한 “두 차례의 혁명전쟁에서 제국주의강적들을 타승하고 만난을 무릅쓰며 언제나 승리의 한길을 걸어온 우리에게 괴뢰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략로케트 및 정밀핵무기들은 결코 진열품이 아니다.”면서 “누르면 발사하게 되어있고 퍼부으면 불바다로 타번지게 되어있다. 우리의 단호한 군사행동이 시작되는 그 순간 청와대는 산산이 박산 나고 서울은 물론 남조선전역이 재가루속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 불바다 론 언급했다.

이어 “연평도의 불바다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전쟁이 터지면 남조선은 그 어디를 막론하고 완전 초토화 되고 영구불모지로 화하게 될 것이다. 남조선괴뢰들이 그토록 구세주처럼 믿는 미국상전의 ‘확장억제력’도 주구들을 비참한 종말의 운명에서 구원해 줄 수 없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우리는 이미 조선정전협정이 완전히 백지화되는 3월 11일부터 북남사이의 불가침에 관한 합의들도 전면무효화 될 것이라는 것을 공식선언하였다. 동족대결에 환장이 되여 북침전쟁책동에 광분하는 괴뢰패당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기에 우리는 북남직통전화도 단절해버렸다.”며 “이것은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전쟁의 개시에 장애가 되는 온갖 허접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정의로운 조치”라며 정전협정 백지화를 비롯한 조치들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특히 “침략자들의 본거지, 도발의 아성들에 대한 우리의 핵선제 타격권리 행사의 날은 다가 오고 있다.”며 미국과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다가 오고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 백악관 제이 카니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이 북한 관련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며 “미국을 표적으로 하는 핵 미사일 개발을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말해 조미대결전은 피 할수 없는 상태로 빠져 즐고 있어 관련 당사국들의 평화적 노력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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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비밀접촉' 관여한 유완영 회장

 

“남북관계,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
'싱가포르 비밀접촉' 관여한 유완영 회장 (수정)
 
 
2013년 03월 18일 (월) 15:38:02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통전부장 직접 협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

   
▲ 유완영 유니코텍코리아 회장이 13일 여의도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2009년 10월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이명박 정부의 대북 협의 중에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전부장이 협상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다. 통전부장이 직접 협상을 했다는 것은 분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009년 10월 임태희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간의 이른바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유완영 유니코텍코리아 회장은 지난 13일 오후 2시 여의도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북측이 통전부장을 내세웠을 때는 그만큼 중요한 관계개선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처음으로 ‘싱가포르 비밀접촉’ 관련 인터뷰에 응했다는 유완영 회장은 “그때까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통전부장과 협상해본 적이 없지 않느냐”며 “중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면할 수 있는 위치의 고위급 협상을 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임태희 전 실장은 지난해 6월 20일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면서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접촉한건 사실”이라고 공식 확인하고 “북측이 국군포로와 납북자에 대한 ‘인도적 조치’를 하면, 우린 그에 상응하는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기본원칙을 갖고 북측을 설득했다”면서 “말하자면 한국판 ‘프라이카우프’였던 셈”이라고 밝힌 바 있다.

‘프라이카우프’(Freikauf)는 서독이 동독에게 경제적 대가를 치르고 정치범을 데려오던 방식으로 ‘자유를 산다’는 뜻이며, 이명박 정부는 비밀접촉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식량지원을 하는 방안을 제시해 북측에서도 사실상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태희 전 실장이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추진한 2009년 10월 싱가포르 비밀협상은 11월 통일부와 통전부 간의 이른바 ‘통-통 라인’의 협상으로 이어졌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유완영 회장은 “언론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국군로포.납북자 문제를 명문화 했다는 것은 분단사상 처음으로 금기시되는 대목까지 서로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라며 “많은 사람을 데려오느냐 적게 데려오느냐 차이 가지고 논란은 있었지만, 그 행위를 처음 명문화 했었더라면 역사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관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오랜 남북경협 경험을 토대로 ‘싱가포르 비밀접촉’에 간접 관여했던 유 회장은 임태희 전 실장이 비밀접촉에 나서게 된 계기를 “언론에도 보도됐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 특사조문단이 왔을 때 임태희 전 실장이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임태희 전 실장은 남북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협의가 통일부로 넘겨져 남측 통일부와 북측 통전부의 이른바 ‘통-통 라인’으로 전환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대통령 입장은 남북관계는 통일부가 해야 된다는 인식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인 임태희였다면 아마 달랐을 수도 있지만 노동부 장관인데 주무 부서가 있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특히 ‘통-통 라인’ 접촉에서 합의가 파탄난데 대해 “김태효 비서관도 예전에 계속 이야기했지만, ‘한 1년만 끌면 북이 무너진다’는 인식이 강했다”며 “지금 본다면 대통령이 잘못된 보고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하고 “결국 통치하는 사람의 철학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은 “나는 (협상이) 깨진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라고 본다”며 “이명박 정부의 북측과의 접촉에서 있었던 많은 얘기들이 북측으로부터 공개됐지만 결국 임 전 실장과 협의했던 내용에 대해서는 북측이 아직까지 어떤 말도 없었다는 것은 그쪽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주목된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당시 협상 내용에 근거해 다시 추진해 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

   
▲ 유완영 회장은 남북관계는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다.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서 남북관계는 상당히 변화할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해서 우리가 특사를 보내서 설명한 적도 없고 그 얘기를 해준 적도 없다”며 “그러니까 북측 입장에서는 ‘비핵.개방.3000’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유 회장은 “박근혜 정부는 ‘이러이러하게 남북관계를 가겠다. 너희도 여기에 우리랑 맞춰라. 그러면 뭔가 다른 면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진지한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며 “남녀가 연애할 때처럼 서로의 공통분모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박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신뢰를 기반으로 해서 간다면 성공확률이 높다고 본다”면서 “매번 협상을 하거나 할 때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고 전략적으로 정해지면 끝까지 가야한다. 설령 진행하다가 조금 실수가 있더라도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 회장은 “지금 핵문제로 인해 시끄럽기 때문에 그 잠복기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며 “미국은 핵확산 억지력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핵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므로 이 차이를 한미 간에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지금 3차 핵실험 이후 유엔 제재가 나왔는데 바로 북한은 또 핵실험을 한다든지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것”이라며 “북미 간에 극단상황까지 가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그런 시점을 본다면 10월까지는 이런 상황이 가지 않겠나”라고 진단하고 “그 기간 동안 우리 안보라인이 흔들리지 않는 정책을 가지고 북쪽을 설득하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때 가서 이렇게 하고 저때 가서 저렇게 바뀌는 것은 지난 5년을 풀어 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는 것이며, “오늘은 제재하고 내일은 대화하고, 이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길정우 새누리당 의원의 대북접촉 시도와 최대석 대통령직 인수위원 낙마와 관련해서는 “대통령의 의중을 받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통일부장관과 국정원장도 임명되지 않아 대북정책 방향이 나오지 않았는데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남북관계 개선돼도 레버리지 상당히 떨어져”

   
▲ 유완영 회장은 이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 물류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운종 객원기자]
실제로 평양에 모니터 조립공장 등을 운영했던 유 회장은 “지난 정부에서는 개성공단과 금강산이 중요하다 보니까 내륙에 들어가서 고생한 기업들에 대한 문제점이나 이런 생각은 전혀 못했다”며 “왕래가 없다 보니까 관리를 할 수 없는 입장이 돼 버렸고, 관리를 못하니까 투자해놓고 거의 벌거벗고 나와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스크가 컸지만 또 돌아올 수 있는 게 컸다라고 생각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갔던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통일부 가면 맨날 돈이나 달라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 정부는 어떨지 몰라도 북측의 변화는 경협인들이 손실을 본 것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도와줘야 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은 최근에 달라진 부분 중에 하나”라며 “공식석상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북측) 관계자들이 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고 밝혔다.

유 회장은 “지난 5년을 거쳐 북측도 남북관계가 풀려야지 먹고 산다는 개념은 많이 떠났다”며 “북측도 일단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상당히 많은 학습효과를 가졌고, 남북 거래했던 부분들이 전부 중국과 직접 거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중국이라는 새로운 카드가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개선된다고 해도 레버리지(지렛대)가 상당히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며 “경제논리로 지금 거래하고 있는데 남측이 온다고 해서 더 비싸게 사주지 않는 한 우리한테 뭘 주겠냐”고 반문했다. “일반 기업하는 입장에서 거래처 하나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는 것이다.

유 회장은 “5.24조치가 풀어지지 않는 한 남북 민간교류는 갈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며 경협업자들의 방북을 허가해야 한다고 제언하면서도 “지금은 핵문제에 또 걸려 있다 보니까 그 자체도 풀 수 있는 해법이 상당히 적어지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유 회장은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물류분야에 진출해보고 싶다며 “철도.도로 연결이라든지, 라진선봉 화물운송 부분에 관심이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수정,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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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3/18 10:17
  • 수정일
    2013/03/18 10: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협동조합 설립 바람, 운영할 수 있는 의식과 문화 만드는 일에 먼저 힘써야

 
이남곡 2013. 03. 17
조회수 256추천수 0
 

 
이남곡1.jpg
 
H형께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이제 이 곳 산골도 봄이 완연합니다. 장독대에 반짝이는 봄햇살하며, 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 곧 터질 것 같은 새잎들, 농사 준비하는 농부들의 바빠진 움직임들이 봄의 생명력을 느끼게 합니다.
 
평생을 농촌과 협동을 위해 살아오신 H형께서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처럼 협동조합 바람(?)이 분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감탄만 할 수 없는 형의 심경에 저도 동감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듯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내부역량과 때맞추어 어미닭의 쪼아줌이라는 외부조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확실히 지금은 줄(啐)보다는 탁(啄)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을 해오신 분들은 이것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내부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는 바람이 혹시 일시적인 거품으로 끝나, 오히려 진정한 협동조합의 발전에 장애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지요. 자활이나 사회적 기업과 같이 관이 지원하는 이상한 형태로 되어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봅니다. 줄(啐)과 탁(啄)의 갭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요.
 
협동조합박원순.jpg
 
지금 협동조합을 하려는 사람들, 단체들, 정부관료, 지방자치단체들이 많이 견학을 하러가는 유럽 등 협동조합의 선진국들은 15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전된 시스템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하는 문화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외형적인 시스템이나 규약, 원칙 등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케하는 의식, 문화, 생활 등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머리로 이해한다하더라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이 눈에 보이는 부분을 있게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역사에는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상당히 우수하고 정교한 시스템인 두레나 계(契)와 같은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원래 협동을 잘하지 못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전통을 발전시키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결국 나라를 군국주의 일본에 식민지로 강점당했던 역사와 해방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좌우대립이 지배하면서 이런 전통들이 발전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단절의 역사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거의 한 세기 가까우니까요. 그것을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DNA 속에서 꺼내 현재에 살린다는 것이 결코 녹녹한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는 원래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에는 안 맞아’ 하는 부정적이고 비관적 관념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요즘 국내외 정세, 특히 남북관계를 보면서 그 질기게 변치 않는 대립적 사고의 완고함에 많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요즘의 협동조합 바람이 북 쪽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남쪽에서만이라도 그 완고한 사고방식들이 근저(根底)에서 변화하는 신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다싶이 그간의 완고하고 교조적인 이념대립은 모든 창조성들이 싹을 트지 못하게 한 주된 원인의 하나였지요.
 
협동조합을 보더라도, 이익 즉 탐욕에 눈먼 사람들이나 문화 속에서는 협동조합은 돈벌이 수단으로 왜곡되어버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협동조합은 개량주의 즉 근본적인 변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취급되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노정되는 지금, 양극화, 저성장, 고용없는 성장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양심적인 우파에게도 협동조합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고, 사회주의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주듯 제도를 변혁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못한다면 반대만 하지 결국은 낡은 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는 합리적인 좌파들에게도 협동조합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대단한 정치적 잇슈는 아니지만,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우리의 경직된 과거의 사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진정한 좌우 소통과 창조의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의 편지에서 얼핏 스치듯 말씀하신 가운데, 협동조합운동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의 기미가 보인다는 말씀을 듣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관점이 다른 면은 있겠지요. 또 하루 아침에 생각의 틀이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요. 또 지금의 협동조합 바람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밝은 것만도 아니구요.
또 협동조합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이구요.
 
다만 우파에게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격을 높이는데, 상당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좌파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양성되고 여러 가지 현실적 시스템들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데서 저는 대립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분야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좌우가 협력할 수 있다면, 비록 전체적으로는 미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대단히 뜻 깊은 창조의 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단 벌어져 있는 갭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좋아진 외부여건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빨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체 빠른 국민이니까요.ㅎㅎ
 
러나 눈에 안 보이는 것, 즉 협동조합의 원칙과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를 만드는 일은 그렇게 빨리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패하거나 왜곡되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겠지요. 그 과정에서 좋은 모델들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개가 실패하더라도 제대로 된 하나의 모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넓어져 가는 것이지요.
저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다소라도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안 보이는 영역, 그 의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미력이라도 힘을 보탤까 합니다. 협동운동과 인문운동의 접합점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은 ‘협동조합을 위한 맞춤형 인문(연찬)프로그램’입니다.
 
서울대생협.jpg
*한겨레 자료사진
 
잘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다듬어가면서 협동조합 안에 내장(內藏)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나이가 만만치 않지만, 특히 저보다 연상이신 형께서 아직도 정열이 젊은이 못지 않은 것을 뵈면서 저도 힘을 얻습니다.
노욕(老慾)으로 되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는 있습니다.
세상에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없다(毋必)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꿈결 같이 지나는 인생이라지만, 이 기적 같이 만나는 순간들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늘 건강하소서!
 
2013. 3. 12
南谷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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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에 투신 4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겸손으로 진리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토회 불교사회연구소장을 거쳐 경기도 화성 야마기기마을공동체에 살았으며, 2004년부터 전북 장수의 산골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된장·고추장 등을 담그며 산다. 서울에서 매주 ‘논어 읽기’ 모임을 이끈다.
이메일 : namgok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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