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바티칸에 날아든 새의 뜻은

바티칸에 날아든 새의 뜻은

 
조현 2013. 03. 14
조회수 3380추천수 0
 

 

bird on pope chimney-.jpg

교황 선출 직전 바티칸 굴뚝에 날아와 앉아있는 새 구글

 

 

새교황-.jpg

선출 직후 신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프란치스코 교황 AP/뉴시스

 

 

 

성령의 바람이 어디로 불 것인가.

 

세계 가톨릭을 이끌 제266대 교황에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76) 추기경이 선출됐다. 비유럽권에서 교황이 선출된 것은 시리아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천282년만이다. 시리아도 옛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지중해 지역이었던만큼 이번 교황은 비유럽권 최초의 교황이라고 볼 수 있다.

 

 새 교황은 교황 즉위명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다. 프란치스코(1182 ~ 1226) 성인은 아틸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으나 모든 소유물을 걸인들에게 나눠줘버리고 출가해 평생 청빈과 가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해 ‘제2의 그리스도’로 까지 칭송 받는 인물이다. 요즘으로 보자면 그는 재벌가의 후계자였는데, 그 모든 부를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의 첫 교황이다. 예수회는 종교걔혁 바람이 불던 1534년 로욜라가 설립한 수도회다. 루터가 가톨릭을 박차고 나가 개혁을 주창했다면 로욜라는 가톨릭 내에서 개혁을 했던 인물이다.

 

 예수회는 국내에서도 빈민지역에 가서 사목을 한 대표적인 수도회다. 정일우 신부나 박문수 신부처럼 빈민사목의 대부들이 예수회 출신들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가톨릭 대학이자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서강대가 바로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이다.

 

프란치스코성인과 로욜라성인은 둘 다 전쟁에 참전했던 전사였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뒤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빈민과 사회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철도노동자 출신에 예수회 출신이고, 빈민사목에 그처럼 관심을 보여왔기에 50년 전 요한23세에 의해 시작돼 1978년 바오로 6세가 선종할 때까지 대변혁이 시도된 '제 2차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을 되살릴 수 있을 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교황의 추기경 시절-.jpg

교황으로 선출되기 며칠 전 아르헨티나에서 교황의 서민적인 모습 AP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jpg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대성당 내에 전시돼 있는 생전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사진 조현

 

 

 제2차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은 요한 바오로 2세와 전임 베네딕도 16세의 보수 회귀 정책에 의해 멈춰진 상태다.

 한 국내 예수회 관계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야당 성향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면서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변화를 보일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톨릭은 교황이 전 세계의 주교 임명권을 갖고 있는 일사분란한 조직이기 때문에 교황의 의중이 중요하다. 예수 이후 가장 큰 변혁을 가져온 제2차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는 그런 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무려 20년 동안 세계 가톨릭을 이끌던 비오 12세(1876 ~ 1958, 재위1939~1958)가 갑자기 서거하자 교황청은 새로운 정식 교황을 맞아들이기 전에 77세의 노인인 요한23세를 임시로 내세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그래서 요한 23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임시 교황’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의 바람은 바로 그로 부터 나왔다.

 

 “모두들 내가 임시적인 혹은 과도기적인 교황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나는 앞으로 해야 할 큰일을 앞두고 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거부하지도 않는다고 했던 성 마르티노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요한23세-.jpg

50년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해 예수 이후 최대의 개혁을 시작한 요한23세

 

 

 1962년 81살의 교황 요한 23세은 이런 발언으로 가톨릭 교회의 변혁을 시작했다. 이렇게 1962년 10월11일 소집돼 1965년 12월8일 폐회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의 백성’을 가톨릭 신자에서 전 인류로 확대했고, ‘교회의 사명은 선교가 아니라 인류의 존엄성 증진과 공동선 실현’이라는 이상주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임시교황’또는 ‘징검다리 교황’쯤으로 여겨졌던 교황 23세는 지금 역대 교황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가톨릭의 심장인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한 가운데는 260여명의 교황 가운데 그의 유해만이 유리관으로 안치돼 전세계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요한 23세가 서거한 뒤 그의 뒤를 이은 262대 교황 바오로 6세(1897~1978, 재위 1963~78)는 요한 23세의 서거로 자동 폐회된 공의회를 재개해 완결시킨다. 바오로 6세는 동방정교회와 성공회, 개신교 등 다른 기독교 종파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협정을 맺어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가 등장해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인 라칭거 추기경(후에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전통 교리의 수호자인 교리성장관으로 임명해 보수로 회귀시키면서 개혁의 시계를 멈췄다.

 

 과연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앙인들은 자연의 현상에서조차 신의 징표를 찾고 싶어한다.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사임을 발표한 지난달 11일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 지붕위에 번개가 내려치자 ‘사람들이 이를 신의 뜻으로 보았다’는 외신이 이를 말해준다. 교황청의 부패 스캔들과 잇따르는 고위성직자들의 성추행 스캔들 등에 대한 신의 분노의 표출이 아니냐는 것이다.

 

교황청 벼락-.jpg

지난달 11일 베네딕도 전임교황 사임 발표날 바티만 첨탑에 내려친 벼락 사진 AP

 

 

 

비둘기-.jpg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대성당 내 프란치스코 동상을 지키고 있는 비둘기 한쌍 사진 조현

 

 

 그런데 13일 오후(현지시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신자들과 전 세계의 이목이 새 교황의 선출 여부(선출되면 하얀 연기, 선출 안되면 검은 연기를 내보냄)를 알리는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 쏠려 있을 때,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흰 새 한 마리가 무려 40분 간이나 굴뚝을 지킨 이후에 훌쩍 날아올라 어디론가 사라지자 이를 ‘성령의 강림’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는 외신이 또 전해진다.

 

 새가 날아간 지 불과 20분 뒤 드디어 새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자 성령께서 새 교황 선출의 희소식을 암시했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이후 멈추버린 개혁 시계에 안타까워하던 이들도 그 하얀 새가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부는 신호가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다.

 

 옛부터 새는 성령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동안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 비둘기를 성령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긴다.

 

새 교황이 교황명으로 정한 프란치스코 성인도 새와 깊은 인연을 보인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나고 자란 곳에 세워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대성당 내 프란치스코상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둘기가 있다.

 

 성당쪽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한 뒤 지금까지 한 쌍 중 한쪽이 숨을 거두면 다른 비둘기가 찾아와 짝을 채우면서 끊임없이 한 쌍의 비둘기가 프란치스코 상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인과 비둘기의 우정은 1,000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민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의 약속을 예수께서 인류 전체로 확대했다면, 인간에게만 국한된 ‘하느님의 축복’을 대자연으로 넓힌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었다.

 

세상적인 욕망을 포기하고 끝없이 낮아져 인류의 약자들은 물론 동물과 자연물까지 형제로 여겼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계승된다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다시 보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견인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국정원 사찰 피해자' 박근혜, 유혹 떨쳐낼까

 

수사권 이전 등 국정원 개혁 요구 고조... '군인' 출신 남재준은 다를까

13.03.14 21:42l최종 업데이트 13.03.14 21:42l

 

 

민주통합당 진선미 진성준 의원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장주영 회장, 참여연대 장유식 행정감시센터 소장이 14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치개입 근절을 위해 입법청원한 국정원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괴물 같은 국가정보원(아래 국정원)을 박근혜 정부에서 바로 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

기자회견이 끝날 즈음 장유식 변호사(참여연대행정감시센터 소장)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14일 공안기구감시네트워크가 국회 정론관에서 국정원의 권한남용을 막기 위한 개정안을 입법청원했다고 밝히는 자리였다. 명칭을 국정원에서 해외정보원으로 바꾸고, 국내정보 수집 권한은 폐지하면서 수사권을 분리·이전하고, 국회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 등이 골자다.

특히 장 변호사는 국정원의 수사권에 주목했다. 그는 "국정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지면서, 당시 나치의 게슈타포(Gestapo)나 구소련의 KGB처럼 수사권을 가진 비밀경찰로 출범해 지금까지 이어졌다"며 "경쟁력이 있는 비밀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수사권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영국·독일 등 주요 국가의 정보기관은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의 입법청원을 소개한 진성준 민주통합당 의원은 "대선기간 벌어진 국정원 직원의 온라인 여론 조작 등 불법 선거운동 사건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민주주의 핵심요체인 선거제도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며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스스로 '사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박근혜 대통령도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의혹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국정원 구조 개편 작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3월 18~19일 예정된 남재준 국정원장 내정자 인사청문회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국내 파트' 폐지한다더니... 국정원 활용 유혹 벗어나지 못한 이명박 정권

국가정보원과 이명박 대통령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지난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국정원이 보여준 불법사찰·선거개입 논란 등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 초기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도 초기에 국정원의 국내 파트를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지난 2007년 대선 때 일부 언론이 "국정원 직원 K씨가 정부 전산망에 접속해 이명박 후보의 처남 김재정 씨 등 이 후보 친인척의 부동산 거래내역을 열람한 혐의를 잡고 국정원이 감찰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 후보 측은 "국정원의 불법적 자료열람은 야당후보 죽이기로 불법을 일삼는 국정원 국내파트를 폐지해야 한다"(나경원 대변인)고 발끈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국정원을 국내 정치 정보 수집의 도구로 활용하고 해당 정보를 바탕으로 정권을 운용하려는 유혹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이 대통령의 측근인 원세훈 전 서울시 부시장을 국정원장으로 임명하면서 국내 정치 개입 의혹 논란을 예고한 것이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지난 2009년 2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정치가 체제 전복세력의 침투 대상이므로 (국정원이) 정치 정보를 수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해, 국정원 역할을 국가안보에서 정권안보로 전환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의혹 사건이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논란이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09년 희망제작소 사업이 무산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방송인 김미화씨는 지난해 "국정원 직원이 찾아와 'VIP'(이명박 전 대통령)가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폭로해 연예인 사찰 파문이 일었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 여직원이 문재인 민주통합당 전 대선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논란은 절정에 달했다.

사찰을 하다가 들켜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국정원은 지난 2010년 5월 표현의 자유 문제를 조사하러 한국을 방문한 유엔 보고관을 미행, 사찰하다가 덜미를 잡혔다. 지난 2011년에는 우리나라 무기를 구입하겠다고 방문한 인도네시아 사절단의 호텔방에 잠입한 것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당하기까지 했다.

특히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원으로부터 사찰을 당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석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1년 6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세종시 문제로 파란을 겪은 후 2009년 4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사찰하기 위한 팀이 약 20명 인원으로 국정원 안에 꾸려졌고, 이모 팀장의 지휘 아래 4월부터 7월까지 박 전 대표를 집중 사찰했다"며 '박근혜 사찰팀' 의혹을 폭로한 것이다.

이 의원은 "국정원 직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사를 찾아가 박 전 대표의 신상문제·주변 인물을 조사하고 가까운 친인척을 접촉해 육영재단 영남대 정수장학회 부산MBC 등 재산관계도 소상히 파악했다"고 덧붙였다.

국정원은 당시 이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지난 2월 검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이와 관련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지난해 19대 국회의원 선거 전후로 "(정치사찰의) 같은 피해자"라며 "(박 대통령은)지난 정권과 현 정권을 막론하고 정치 사찰과 허위사실 유포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근혜 측근 남재준도 해바라기형 국정원장 될 듯"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사진은 지난 2004년 12월 15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청사에서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 당시 모습.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 초기 국정원 개혁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은 국내 정치 개입 논란과 함께 국정원의 대북 정보 수집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지만 국정원은 그 사실을 52시간이나 지난 뒤 나온 북한의 TV발표를 접하고서야 알았다. 앞서 2011년 5월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때에는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단독 방중 했다고 밝혀, 세계적인 오보 소동이 일었고, 지난해 12월에는 북한 장거리 로켓(미사일) 발사를 제때 감지하지 못해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박 대통령의 불행한 개인사 역시 국정원 구조 개편의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에 의해 시해됐다. 이 때문에 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에 대한 심각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이 최측근 정치인이나 민간인이 아닌 육군참모총장 출신 남재준 후보자를 국정원장으로 지명한 것을 두고 국내정치 상황 등에 휘둘리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에서는 오히려 남재준 후보자 역시 박 대통령의 특보를 지낸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국정원을 대통령의 직할체제로 운영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남재준 후보자는 지난 2007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당시 국방안보 분야를 조언했고, 지난 대선에서는 박근혜 캠프 국방안보 특보로 활동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김현 민주당 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남재준 후보자는 군에서 정보 등을 수집하는 작전통이었기 때문에 국정원의 고유업무를 담당할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그런 사람에게 국정원의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우려했다.

김현 의원은 또 "원세훈 원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민간인 사찰·국내 정치 개입 논란이 불가피했던 것"이라며 "남 후보자도 박 대통령의 특보를 지낸 측근이라는 점에서 오로지 대통령만 바라보는 해바라기형·맞춤형 원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불거진 국정원 직원 여론 조작 사건과 관련 경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일부 혐의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도 그의 국정원 개혁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국회 정보위원회는 3월 18∼19일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한다. 민주당은 남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 직원 여론 조작 사건'과 함께 국정원 개혁 문제를 집중해서 검증할 예정이다. 남재준 후보자의 입에서 어떤 얘기가 나올 지 귀추가 주목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통령직 노리고 벌인 박근혜의 '사기의 기술'

 


2012년 11월 21일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기, 대다수 국민의 관심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였습니다. 이날 밤 11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를 놓고 TV토론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 토론이 있기 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서 '박근혜 대선 후보 교육정책 발표' 대국민 기자회견을 합니다.

이날 박근혜 후보는 교육정책을 발표함으로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TV토론에 쏠리는 유권자의 관심을 돌리는 선거전략을 펼쳤고, 일정부분 그 효과는 유권자에게 먹혀들어갔습니다.

특히 박근혜 후보가 발표한 교육 정책 일부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사교육 근절' 방안의 하나로'온종일 무료 돌봄교실'을 운영 하겠다는 정책이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 박근혜 후보는 교육공약 발표 기자회견에서 오후 5시는 물론이고 밤 10시까지 무료 돌봄을 실시하겠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박근혜 후보는 초등학교에서 '온종일 학교'를 운영하여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오후 5시까지 방과 후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고, 맞벌이 가정 등 늦은 시간까지 돌봄을 원하는 경우를 위해 오후 10시까지 무료 돌봄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방과후 학교운영 및 교육복지지원법'을 제정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박근혜 후보의 이런 교육정책 발표가 있자 11월 21일 당일과 11월 22일은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TV토론에 버금가는 보도가 언론의 지면과 방송을 뒤덮었습니다.

 

 

▲ 밤 10시까지 무료 돌봄을 보도했던 11월21일,22일 신문들.

 


TV 방송과 신문들은 '밤 10시까지 초등학교 무료돌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고, 이를 본 맞벌이 가정이나 일하는 엄마들은 '역시 여성대통령'이라는 말을 쏟아 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밤 10시까지 초등학교 무료돌봄' 등의 교육 정책이 나오면서 방송과 언론은 후보단일화를 놓고 벌이는 두 야권 후보보다 정책 위주의 박근혜 후보가 더 낫다는 식의 보도를 내기도 했습니다.

 

 

▲11월22일 조선,중앙일보 기사.

 


박근혜 후보가 교육 공약을 발표한 다음 날 조선일보는 박근혜 후보의 여성 대통령론이 여성의 마음을 움직여 지지율이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중앙일보는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단일화를 놓고 격돌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공약 행보를 하면서 올바른 선거 운동을 하는 식으로 그녀를 미화했습니다.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신문들만이 그녀의 교육 공약을 찬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상파 방송도 이에 못지않았습니다.

 

 

▲ 11월2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박근혜 후보의 교육 공약 발표 당일 MBC 뉴스데스크는 박 후보의 기자회견을 보도하면서 "사교육 근절"이라는 제목을 달면서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야권 단일화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처럼 요행수라는 식으로 보도했습니다.

이처럼 2012년 11월 21일 대선을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의 야권 단일화에 맞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교육 공약을 내세움으로 단일화에 밀려 이슈를 선점하지 못했던 고지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 교육관련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정과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를 보면 저녁 10시까지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온종일 돌봄교실 운영에서 '무료'라는 말이 빠져 버렸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교육과학기술부는 최근 방과후 ~오후 5시 주간 초등돌봄교실은 무료로 운영하고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야간 돌봄교실 이용학생에게는 비용을 받는 방안을 확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박근혜 후보가 본인의 입으로 선거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발표한 선거 공약이 거짓으로 밝혀진 셈입니다. 또한, 박근혜 후보가 말한 오후 5시까지의 초등학생 방과후 돌봄프로그램은 진짜 '무료'가 아니었습니다.

 

 

▲ 초등돌봄교실 안내문

 


현재 진행되는 초등 돌봄교실의 수강료(프로그램비)와 간식비는 별도로 청구됩니다. 현재 프로그램 비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간식비만 월 15,000원을 내야 합니다.

'아이엠피터'가 사는 제주 농촌 학교는 그나마 지원금이 교육청에서 나오니 저렴하지만 육지나 도시 지역은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에 돌봄교실 비용은 더 올라갈 전망입니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된 가정은 무료로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선정기준 4인 가족 월 149만원 이내) 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보통 가정은 돈을 내고 초등돌봄교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과연 이것이 박근혜 후보가 말한 '무료'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 준비되지 못한 대통령이 남발한 거짓 공약'

박근혜 후보가 '무료'로 온종일 돌봄교실을 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실천되지 않은 이유는 재원은 생각하지도 않고 공약을 남발했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교육청은 484억원이던 초등돌봄교실 운영비를 무려 161억원이나 삭감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학교마다 난리가 나서 월 5~6만원이던 학부모 부담비를 1만원가량 인상해서 부족분을 메꿀 예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도교육청이 운영비가 줄어드니 학교에서는 돌봄교실 프로그램 강사를 모집하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질문:2011학년도 초등 돌봄 교실 운영교로 지정이 되었으나 돌봄강사를 구하지 못해 운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봄강사를 구할 때까지 운영을 미루어도 될까요?
답변:돌봄강사를 구하지 못했더라도 돌봄교실 아동과 돌봄담당교사가 지정된 상황이므로 돌봄교실을 정상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학교 저학년 교원들의 협조를 얻어서라도 돌봄강사를 구할 때까지 운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질문:우리 학교는 시 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도교육청으로부터 인건비를 월 60만원 지원받았으나 60만원으로 돌봄강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돌봄강사 인건비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지급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답변:수익자 부담금의 일부를 강사료 보전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수익자 부담 금액과 사용 내역은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해야 합니다.



돌봄강사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교육부는 무조건 학교 선생님을 활용해서라도 돌봄교실을 하라고 하는데, 온종일 수업을 하고 잔무에 시달리는 선생님들이 다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과연 효율적일까요?

특히 인건비가 부족하다보니 돌봄강사 중에는 무자격자가 수두룩하고, 부족한 금액은 학부모에게 거둬 운영하라고 하는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돌봄교실이 운영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의 교육 정책을 담당했던 행복교육추진단 김재춘 교수는 당시에 1조 7천억원 정도의 예산이 들 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성 있는 예산은 마련하지도 못하고 청와대로 가버렸습니다.

예산이 충분히 필요한 교육 공약을 그저 야권 후보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남발했던 점을 보면, 과연 박근혜 후보가 제대로 된 교육정책을 생각하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박근혜 후보의 밤 10시까지 무료 돌봄교실 운영은 공약집에는 빠져 있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과연 문서와 대국민 기자회견, 어느 말이 법적인 효력이 있을까요?

"내가 당신 부부가 맞벌이하는 동안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무료로 봐주겠다."
"정말입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역시 자애롭고 마치 우리 친정어머니와 같으시군요"
"아니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돈을 내라고 하십니까? 시간도 밤 10시도 아니고 겨우 5시라니, 그때는 우리 부부가 퇴근도 못할 때인데, 어떻게 아이들을 데리러 갑니까?"
"내가 말은 했지만, 문서에는 밤 10시까지 무료라는 조항이 없잖아, 문서에 없으면 거짓말 아니야"


 

대통령이 되겠다고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무료'라는 말을 거침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하고, 다른 후보들보다 유리하게 여론의 혜택을 본 사람이 박근혜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통령이 되니 공약에 나왔던 '무료'는 진짜 무료도 아니었고, 밤 10시까지도 흐지부지되고 있습니다.



 

▲ 교육공약 기자회견에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공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어쩌면 대한민국 맞벌이 학부모들은 박근혜 후보의 이런 공약에 사기를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은 이런 별거 아닌 공약으로 사기꾼이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위에 친척도 없고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맞벌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5시에 끝나면 그들을 데리러 회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학원에 보내 퇴근 시간까지 사교육에 아이들을 맡겨야 합니다.

획기적인 "사교육 근절" 방안이라고 방송에서 칭찬했던 박근혜 후보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교묘한 선거상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니 아예 사기에 가까운 사기성 선거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은 '사기의 기술'에 당하여 타짜 대통령을 뽑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2012년 12월 19일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억울한 마음뿐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 "이미 개시된 반미대결전의 승리를 위하여"

 

 

 

북, "이미 개시된 반미대결전의 승리를 위하여"
 
"오늘 절호의 기회 놓치면 통일강성국가 멀어져"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3/15 [07:12] 최종편집: ⓒ 자주민보
 
 

조선이 조국통일대전의 최후승리와 이어진 오늘의 결정적인 시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라며 전면대결전을 이어가겠다고 암시해 주목된다.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15일 사설을 통해 "만일 우리가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반세기이상 통일강성국가의 휘황한 미래를 내다보며 허리띠를 조이면서 준비해온 민족의 숙원실현이 아득히 멀어지게 된다"며 이 같이 밝혔다.

로동신문은 "미국과 괴뢰패당의 광란적인 북침핵전쟁소동인 '키 리졸브', '독수리' 합동군사연습이 본격적인 단계에서 강행 되고 있으며, 미국은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여 우리에 대한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시도하고 있다."며 일촉즉발의 긴장 된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정전협정과 남북 불가침 합의가 백지화로 우리 혁명무력은 무자비한 정의의 총대로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수인 미제 침략자들과 총결산하고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대업을 이룩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동지께서는 최대열점지역에 위치한 장재도방어대와 무도영웅방어대를 시찰하신데 이어 월내도방어대를 찾으시어 일단 명령이 내리면 미친 광증에 걸린 적들의 허리를 부러뜨리고 명줄을 완전히 끊어놓아 백두산혁명강군의 진 짜전쟁맛을 제대로 보여 주라고 가르치셨다"며 전대미대결전을 고조 시켰다.

신문은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은 판가리 싸움의 그날이 오면 침략자들을 씨도 없이 무자비하게 족쳐버리고 전승의 축포가 오르는 열병식 광장에 보무당당히 들어 설 불 같은 결의에 넘쳐 있다."며 "미국과 남조선 괴뢰들의 용납 못할 추태의 후과로 이 땅에서 또 다시 바라지 않는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에서 미국과 남조선 괴뢰들은 수치 스러운 파멸을 맞을 것이며 위대한 우리 민족은 조국통일의 찬연한 새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김정은 원수의 말을 게재했다.

또한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제국주의자들이 그 것을 강요하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의 전쟁으로 대답하는 영용한 혁명가들로, 세계는 선제타격을 떠드는 침략자들에게는 보다 앞선 선제타격으로 대응하고 핵공갈에는 그보다 더 위력한 정밀 핵타격 수단으로 맞서며 자주와 정의를 철벽으로 지켜가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 기상과 위력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라고 승리를 자신했다

이어 "미국과 그 추종세력과의 전면대결전은 통일되고 강성번영하는 우리 조국,우리 민족의 찬연한 새날을 안아오기 위한 최후결전"이라며 "우리는 조국통일대전의 최후 승리와 이어진 오늘의 결정적인 시기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반세기이상 통일 강성국가의 휘황한 미래를 내다보며 허리띠를 조이면서 준비해 온 민족의 숙원실현이 아득히 멀어지게 된다."고 하면서 반민 대결전에 나설 것을 고무했다.

아울러 "핵무기보다 더 위력한 일심단결과 그 어떤 대적도 씨도 없이 소멸해버릴 수 있는 무진막강한 군력을 가진 강국으로 일단 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방사포와 같이 우리 당과 인민이 결심하고 개시한 미국과의 전면대결전은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 될 것이며 우리는 조국통일의 역사적대업을 기어이 이룩하고야 말 것"이라고 기세를 올렸다.

특히 "최후승리를 위한 전면대결전에 돌입한 오늘의 준엄한 정세는 전당, 전군, 전민 앞에 영예로운 전투적 과업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모든 것을 반미대결전의 최후승리를 위하여,이것이 현시기 우리 군대와 인민이 억세게 틀어쥐고나가야 할 전투적 기치"라고 피력했다.

로동신문 사설은 "우리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최대의 애국 유산이며 후손만대의 삶의 터전인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는 길에서 사나운 맹수가 되고 육탄, 자폭영웅이 되여야 한다.1950년대에 미제의 내리막길의 시초를 열어 놓았다면 오늘의 전면대결전을 통하여 미제를 이 지구상에서 영영 매장 해버릴 각오와 배짱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문은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에서 생산과 건설을 힘있게 다그쳐나가야 한다. 오늘의 첨예한 정세는 언제 어느 지점에서 불과 불이 오갈지 예측할수 없다.우리는 전시생산을 중단없이 보장 할 수 있게 만단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며 전시생산 보장을 차질 없이 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사설은 "우리의 전체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며 판가리결사전에 산악같이 떨쳐 나섰다."며 "천만군민의 심장마다에 필승의 신념이 만장약 되어있고 온 나라 강산이 멸적의 기상으로 세차게 끓고 있다."며 "모두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의 두리에 굳게 뭉쳐 조국통일대진군에 떨쳐나 선군조선의 영웅적기상을 만방에 힘 있게 과시하자."며 일심단결을외쳤다.

한편 조선의 강도 높은 행동에 대해 국방부는 특이 동향이 관찰 되지 않고 있다며 북의 행동이 포착되면 대응 할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고 맞불을 놓고 있어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미FTA냐, 쌀이냐…국민대토론회 열자"

[한미FTA 발효 1년 인터뷰 ①] 송기호 변호사 "한미FTA 대응 전략 필요"

이대희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3-14 오전 10:00:03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15일로 딱 1년이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해 불붙은 찬반 격론은 수년간 이어졌다. 결국 이명박 정부 말기에 이르러서야 '굴욕 협상'이라는 비판 아래 발효됐다. 불씨는 발효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발효 직후 열린 지난해 4월 총선에서도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등 일부 항목이 핵심 이슈가 되기도 했다.

발효 1년을 맞아
관세청과 무역협회는 한미FTA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를 발표키로 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일부 공개된 이 자료의 핵심은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있으나 한국의 대미 수출은 한미FTA 덕에 소폭 흑자를 유지했다는 것과 우려했던 농업 부문 적자 규모는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언론은 아예 '농업 피해 우려는 기우였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기도 했다.

과연 그런가. <프레시안>은 송기호 변호사와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를 연달아 만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문제점이 많고, 한미FTA가 가져올 불행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송기호 변호사 인터뷰는 12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송 변호사는 "정부가 한미FTA 이후 전략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며 공개 국민대토론회를 제안했다. 나아가 한미FTA는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사회, 곧 미국식 사회로 뜯어고치는 '새 체제'의 상징이며, 이로 인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특히 송 변호사는 한미FTA로 인해 쌀 시장의 개방은 필연적이며, 이는 한국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라는 의견까지 내놨다.

송 변호사는 '한미FTA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반복되는 내용이 있음에도 가급적 줄이지 않고 전한다. 다음은 송 변호사 인터뷰 전문.

 

▲송기호 변호사는 한미FTA라는 미국식 새 제도를 선택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미FTA라는 괴물이 거리를 배회한다"

프레시안 : 무역협회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어쨌거나 한미FTA 발효 1년간 대미 경제 성적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했고, 곡물과 육류 수입량은 전년보다 줄어들었다.

송기호 : 1년은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앞으로 관세 철폐 항목이 점차 늘어난다. 정부의 이번 통계를 그대로 믿기도 힘들다. 통계 대상·시기를 교묘히 조정했다.

<동아일보>가 인용한 정부 통계의 기준 시기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이다. 그런데 2월의 잠정치를 포함하면 대미 수출이 오히려 줄어들었다(편집자: 관련 통계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두 번째 인터뷰 이해영 교수 편에서 소개될 예정이다). 따라서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판단을 지금 성급하게 내리긴 힘들다.

더 중요한 건, 앞서 말했듯 한미FTA의 본질은 단순한 관세협정이 아니라 제도 변화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한미FTA라는 제도 변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되짚어보고, 특히나 지난 1년간 얻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다시금 한미FTA 대토론회를 열어야 한다. 한미FTA로 인해 변화되는 제도가 무엇인지를 투명하게 짚고, 그런 변화가 우리 사회에 끼칠 영향이 어떠한지를 공개적으로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부에 적극 제안한다.

프레시안 : 송 변호사는 한미FTA 발효 전 정부 주장을 비판하고, 한미FTA를 반대했다. 당시 한미FTA를 단순한 경제협정으로 보지 않고, 한국 사회를 완전히 바꾸는 새 시스템으로 해석했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이는 이 '한미FTA 체제' 1년이 한국 사회를 예상한 만큼 바꿨다고 보나?

송기호 : 발효 전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관에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제 그 괴물이 관에서 나왔고, 우리 사회가 달라졌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미FTA는 우리 피부에 닿지 않는 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박주선 의원실이 정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한미FTA 발효를 전후해 우리 법률 23개를 바꿨다. 우리의 공적 체계와 법적 장치를 미국식으로 바꿨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런 변화는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정부가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도입 시기를 2015년으로 늦추지 않았나. 이 제도는 온실가스 과다 배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마련된 제도였는데 한미FTA로 인해 적용하기가 어렵게 됐다. (☞관련 기사 : 한미FTA, 결국 공공 정책 발목 잡았다)

프레시안 : 구체적인 사례를 좀 더 제시해 달라.

송기호 : 예전에는 저작권 위반이 친고죄로 다뤄졌다. 위반 소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피해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으면 형사 처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미FTA 발효 후에는 피해자 주장이 없더라도 곧바로 검찰이 형사소추를 할 수 있게 됐다.

2년 후에는 발효 전에도 크게 논란이 된 의약품 허가 특허 연계 제도가 도입된다. 이 제도야말로 기존 우리 상식과 크게 다른, 상징적인 미국식 제도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미국에 집중된) 세계적 제약 회사의 특허권이 사실상 영구적으로 보장된다. 지극히 사적인 특허권 보호를 위해 우리 사회의 공공 부조로서 역할을 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무력화된다. 보편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특허 이익이 우리 사회에도 엄연한 기업의 권리로 일반화된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가 있다. 우체국 보험 가입 한도액을 4000만 원에서 6000만 원으로 늘리려고 했으나, 이 역시 (한미FTA 협정문 위반 우려로 인해) 좌절됐다.

이렇게 미국식 제도로 변화하는 것은, 긴 시간에 걸쳐 우리 사회 구성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공공 영역이 축소된다. 최근 복지가 우리 사회의 담론이 된 데서도 드러나듯, 우리는 그간 공공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 경제 민주화, 복지국가 담론, 지역 상권 보호 등의 노력이 대표적이다. 한미FTA는 이런 노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한다.

프레시안 : 송 변호사의 말은 '한미FTA는 한국 사회를 장기간에 걸쳐,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미 한국 사회 작동 원리의 기반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닌가?

송기호 :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사회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성균관대 교수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한·중·일의 '소농 사회'를 꼽았다. 19세기~20세기의 개화마저 소농 사회 체제에 비하면 그 의미가 작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동아시아는 영미권과 다른 사회적 특성을 갖고 있다.

소농 사회의 특성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공의 영역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사익을 양보하는 체제다. 한미FTA는 이런 동아시아적 체제, 곧 소농 사회를 미국식 사익 추구 국가로 바꾼다.

물론 1997년 (IMF) 외환 위기 사태라는 충격파가 오긴 했다. 그러나 IMF 사태는 충격파였다. 한미FTA는 충격을 법률로 제도화한다.

한미FTA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 확대를 내걸고 당선됐다. 한미FTA 협정문과 정부 정책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한미FTA는 (IMF 외환 위기로 경험한) 미국식 사익 추구 체제의 충격을 제도화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송기호

: 아직 박근혜 정부의 구체적인 비전을 알기 힘들다. 다만 박근혜 정부의 핵심 기조를 '선진화'와 '경제 민주화'로 잡는다면, 한미FTA와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정부의 국정 목표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앞으로 우리 정부의 국정 목표 상수에 한미FTA, 나아가 미국 정부가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앞으로 5년간 미국의 수출을 종전의 2배로 늘리겠다고 했다.
제조업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수출 시장으로 아시아 시장을 잡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 정부는 서비스 산업, 특히 지적재산권 부분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는 제도만 바꾸면 부가 창출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은 미국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앞으로 한국에 미국 기업의 이익 실현을 더욱 강하게 강요할 것이다. 미국의 요구와 한국 사회의 요구가 충돌할 때 박근혜 정부가 한국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는 대단히 어려워진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경제 민주화 관련 정책을 힘 있게 추진하긴 힘들 것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가 한미FTA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 여태껏 노무현·이명박 정부에는 한미FTA 발효 전략밖에 없었다. 발효 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한미FTA로 인해 미국이 바꿔야 할 법률은 얼마 없다. 반면 한국 정부는 앞으로도 많은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 숙제는 한국에 있다.


프레시안 : 어떤 대응 전략이 필요한가?

송기호 : 어렵다. 앞으로 수년간 더 개방해야 할 항목이 한둘이 아니다. 기간 통신도 의제 법인에 개방해야 하고, 농업 관련 수많은 관세를 철폐해야 한다. 이제부터 본격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는 말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각 세부 항목별로 정부 전략이 뭔지를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학교 급식친환경농산물을 과연 제대로 도입할 수 있을지, 미국이 한미FTA 항목을 들이밀어 이를 지적한다면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지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 확대되는 개방 폭에 대해 정부는 단계적으로 어떤 전략을 수립할지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 6-7년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FTA 발효를 밀어붙였다. 이제 와서 정확하지도 않은 통계를 제시하고 나 몰라라 할 때가 아니다.

ISD 재협상 가능하다… 왜?


프레시안 : 당장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는 재협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다. ISD,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 문제, 쇠고기 추가 개방 요구에 대응할 방안 등을 준비해야 하리라는 지적이 많다. 부문별로 알아보자. 어느새 '재협의'로 의미가 축소된 ISD 재협상 문제는 한미FTA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 중 하나다. 재협상, 가능할까?

송기호 : ISD 문제 해결은 미국에 달렸다. 미국에 한미FTA는 동아시아 역학 관계에 변화를 줄 지렛대다. 미국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중국을 고립시킨다는 이 전략의 핵심은 일본이다.

그런데 일본은 TPP 참가는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참가 조건으로 ISD는 제외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 자민당의 핵심 지지층이 우체국과 의사회, 농업 종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다. 자민당은 이런 기본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ISD를 빼야 한다는 태도다. 역시 TPP 대상인 호주도 FTA 협상에서 ISD를 제외하는 게 국가 방침이다.

결국 미국은 TPP를 현실화하기 위해 ISD를 완전히 조약에서 빼거나, 적어도
독소 조항은 크게 후퇴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관련한 미국의 입장이 정리돼야 한미FTA에서 ISD 재협의도 가능하다. 만약 미국이 ISD를 약화시키기로 한다면, 한미FTA에서 재협상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정부는 ISD 조항 중 항소 제도를 강화하거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등의 협상안을 재협상 대상으로 제시하는데, 이건 이미 기존 협상안에 다 있는 내용이다. 지금 정부의
목소리는 단순히 대내적으로 '우리도 미국에 뭔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

프레시안 : 우리 요구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요구도 받아들여야 한다.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 문제를 미국이 협상 카드로 제시하리란 전망이 많다.

송기호 : (촛불 집회로 인해 만들어진) 2008년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자체가 굉장히 타협적이었다. 미국이 계속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쇠고기 수입 시장을 30개월령 이상으로 확대 개방하면, 이를 지렛대로 일본에도 교역 수준을 낮추라고 요구할 수 있다. 미국은 쇠고기 수출 시장 확대를 위해 압박을 더 강화해 나갈 것이다.
 

▲한미FTA 발효를 하루 앞둔 지난해 3월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올레스퀘어 앞에서 열린 '한미FTA 발효 환영 대회'에서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비롯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노무현·오바마·이명박 대통령 모습의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미FTA는 노무현 정권이 시작해 이명박 정권이 타결했다. ⓒ뉴시스


개성공단은 정치적 산물…"노무현 정부의 잘못"

프레시안 : 개성공단 문제는 북핵 변수로 인해 사실상 정부가 손대기 어렵게 됐다. 입주 중소기업은 (한미FTA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변수라는 더 어려운 환경을 맞았다.

송기호 : 나는 2006년에 쓴 <한미FTA의 마지노선>에서 '개성공단을 한미FTA에 포함시키는 게 한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개성공단이 한미FTA의 협정 대상이 된 건, 순전히 정치적 고려였다고 생각한다.

1단계로 개성공단 생산품이 국산 지위를 받고, 2단계로 미국의 대북 전략이 수정돼 북미 수교로 이어지는 그림, 곧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즉, 미국은 노무현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유인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의 명분을 '국내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개성공단이라는 정치적 상징물을 필요로 했다.

개성공단 문제는 한미FTA를 통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아니다. 지금도 미국 의회의 별도 승인을 받아야만 풀린다. 한미FTA와 상관없이, 개성공단 문제는 북미 간 수교가 이뤄진 후 양자 대화를 통해 풀면 끝이다. 개성공단 상품이 관세 혜택을 받느냐는 이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한미FTA와 개성공단을 연결하려는 전략 자체가 잘못됐다. 개성공단을 한미FTA 협상 대상에 포함시킴에 따라, 한미FTA가 북미 관계에도 완전히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프레시안 : 한미FTA는 결국 노무현 정부로부터 시작했다. '친노 세력' 중에는 여전히 한미FTA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다.

송기호 : 나는 민주주의 정부를 지탱한 이른바 리버럴의 잘못된 엘리트주의가 낳은 결과물이 한미FTA 체제라고 본다. 한미FTA 체제의 도입 시동은 분명 노무현 정부가 걸었다. 노무현 정부가 없었다면 한미FTA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보이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라도 그들이 솔직히 얘기했으면 좋겠다. 지난 총선 때 적잖은 야권 인사들이 '한미FTA 재협상'론을 들고나왔는데 그게 진심이었는지, 당선을 위한 수사에 불과했는지 궁금하다.

역사에는 과문하지만, 민주화의 성과를 가장 많은 대중에게 돌려줘야 할 민주화 세력이 오히려 정반대 결과를 낳을 한미FTA를 추진했다. 수많은 사람의 피로 얻은 민주주의 체제의 성과가 이제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으려는 때에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

나는 어떤 사람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 하는 최근의 냉소적인 분위기의 배경에 노무현 정부의 잘못된 엘리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무지하다. 우리는 선각자다. 우리가 먼저 한미FTA를 추진하고 나서면, 언젠가는 우리의 생각에 대중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라는 생각이 한미FTA를 추진한 원동력이라고 본다.
 

▲한미FTA 발효를 앞둔 지난해 3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통상부 건물 앞에서 열린 한미FTA 발효 규탄 및 추가 보완 대책 조속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농축산연합회 회원들이 FTA 발효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FTA로 인해 농업은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뉴시스


농업 포기냐, 한미FTA 체제 유지냐

프레시안 : 지난 1년간 농업 피해가 예상보다 크지 않았지만, 농업 부문의 피해가 가장 크리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정부는 한미FTA 피해 대책 예산의 대부분을 농업 부문에 쏟고 있다. 그러나 감사원 자료에서도 드러났듯이,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농업 부문 보호를 위해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는 뭔가?

(편집자: 박주선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감사원 산하 감사연구원은 '농업 부문 FTA 보완 대책의 추진 현황 및 위험 분석'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농업 부문 FTA 대책 예산의 대부분이 한미FTA 대책이며, 이를 뜯어보면 "살처분 보상금 등 FTA 피해와 직접적 관련성이 낮은 사업들이 FTA 대책에 포함"되는 등 실질적인 한미FTA 대책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또 농업 대책 중 일부는 "농가 재무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이었고 이 때문에 "한미FTA 대책 중 상당수, 특히 핵심 신규 사업들은 대부분 (…)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감사연구원은 지적했다.)

송기호 : 농가 대책의 핵심은 쌀이다. 당장 2014년 이후에는 일정 물량의 쌀 수입을 의무화해야 한다. 나아가 쌀 수입 자유화로 치달을 것이다. 현재 우리 법은 정부 허가 없이 쌀을 수입하면 범죄로 취급하는데, 이게 없어진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책이 없다. 쌀 수입이 자유화되면 우리 농가의 중심인 소농 사회가 무너진다. 박근혜 정부가 직면할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나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한다. 우리 사회 운영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농업이 무너지더라도 미국이라는 요인을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생산물의 무역을 자유화하는 건 반대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프레시안 : 쌀을 지킬지, 한미FTA를 지킬지 양자택일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건가?

송기호 : 그렇다. 지난 10여 년간 온갖 쌀 대책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농업의 부가가치는 성장하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한미FTA로 관세장벽마저 없앤다면, 우리 사회에서 쌀은 농산물로서 의미를 잃는다. 어떠한 대책도 안 듣는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 역시 생색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책을 위한 대책에만 119조 원이 투입됐다. 오직 농업의 급격한 해체를 막기 위한,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한 대책에 불과했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이처럼 정부의 대응책이 실효성이 떨어졌음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다.

그래서 이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무너지는 농업을 기반으로 나머지 사람의 삶이 윤택해졌다. 그러나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다. 한미FTA 체제로 인해 더 이상 결정을 늦출 여지란 없다. 쌀은 전 세계 생산량의 7~8%만 교역된다. 즉,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그 체제를 벗어날 것인지, 한미FTA를 폐기할 것인지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이대희 기자,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화교 돈을 노린 박정희의 '화폐개혁' 무참히 실패

 



어제 인터넷 검색어와 SNS는 때아닌 '화폐개혁'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박근혜 정부가 화폐개혁을 추진한다는 보도로 시작된 화폐개혁 논란은 기획재정부가 "재정부는 화폐개혁에 대해 전혀 검토한 바 없다"고 보도자료를 배포함으로 우선 일단락되었습니다.

화폐개혁을 전혀 검토한 적이 없다고 기획재정부는 말하지만, 사실 화폐개혁을 전혀 검토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기획재정부에서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손꼽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그가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사실 그를 경제 대통령으로 부르기에는 일부러 미화시켰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그가 경제 정책에서 실패한 사례는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화폐개혁이라는 화두와 함께 박정희가 왜 '화폐개혁'에 실패했는지 알아봄으로 우리가 화폐개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북한군에게 뺏긴 조선은행권 지폐 원판'

1905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과정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을 빼고 한국에서의 화폐개혁은 총 3번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그 중의 한 번은 박정희의 화폐개혁이고 나머지 두 번은 한국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화폐개혁이었습니다.

 

 

▲1차 화폐개혁으로 구화폐는 무효가 됐다.

 


한국정부는 조선은행이 아닌 한국은행을 새로 발족함으로 구조선은행권을 폐기하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려고 했으나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남한 지역 대부분이 북한군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 북한군은 당시의 조선은행권 천원권(A기호) 원판과 백원권 (48A 기호)수중에 넣게 됩니다. 천원권과 백원권 원판을 확보한 북한군은 천원권을 대량으로 찍어내서 전국에 유통합니다.

북한군의 통화공작을 차단하기 위해 한국정부는 1950년 8월 28일 자로 '대통령 긴급명령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일차로 영남지방 및 제주도 일대의 조선은행권을 우선 정리합니다. 그 후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10일간 전국적으로 구화폐를 교환해주고, 이후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2차 화폐개혁으로 바뀌어진 화폐 단위. 출처:1953년 동아일보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지만, 한국은 전쟁으로 통화남발이 발생하면서 인플레이션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전쟁 전에 통화량은 560억원이었는데 1952년 말에는 1조원이 넘었으니 얼마나 인플레이션이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고 100원을 1환으로 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동안 사용됐던 일본정부 지폐와 주화, 조선은행권, 원표시 한국은행권 등의 유통을 금지합니다. 이처럼 2차 화폐개혁을 통해 11,367억원이 발행됐던 구권을 97%인 11,066억원을 회수하기도 했습니다.

1차 화폐개혁이 1:1의 화폐 교환이었다면 2차 화폐개혁은 화폐의 명칭변경과 함께 명목절하가 이루어진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었습니다.

'폭발물로 위장해 들여온 새 화폐'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침체된 경제활동 때문에 정권 유지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적자는 물론이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위험 수위에 올라가자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6월 9일 저녁 밤 10시에 '긴급통화조치'를 실시합니다.

 

1) 화폐단위를 환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10환=1원으로 1/10의 명목절하
2) 유통화폐의 은행등 금융기관의 환화표시 금전채무의 거래를 금지. 단 국가,지방자치단체,금융기관,주요 관리기업체 등은 원화표시 화폐로 지급
3)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구권과 6월10일 이전에 발행된 수표. 어음 또는 우편환 증서 등은 금융기관에 신고하고, 6월17일까지 신고하지 않은 청구권은 무효


쿠데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발생한 화폐개혁은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재무장관 천병규를 비롯한 5명의 화폐개혁 준비반은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기밀 누설시 총살형도 감수한다"는 선서를 했을 정도입니다.

화폐개혁에 사용할 돈은 영국 드라뤼 회사에서 제조됐는데, 영국제 새 화폐는 화폐개혁이 있기 44일 전 부산항에 도착, 폭발물로 보안 처리된 상태에서 보관되기도 했습니다.


 

 

▲ 은행 앞에서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밤새 줄 서 있는 시민들.

 


 

전혀 예상치 못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화폐개혁은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생활비에 한해 6월17일까지 10대1의 비율에 따라서 가구당 한 사람에게 5백원 한도로 새은행권을 바꿔준다고 했지만, 9일밤 저녁 10시에 발표된 화폐개혁은 10일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노려 통제를 됐지만, 사회적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날은 통금 시간까지 앞당겨져서 귀가하는 시민들이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택시 기사가 구권은 이제 소용없다면서 승차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포목상과 쌀집은 늦은 밤에도 현금을 들고 와 치마 저고릿감을 사거나 쌀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발표된 화폐개혁으로 귀가하는 시민들은 버스와 택시로부터 승차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화폐개혁이 단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돈이 없는 서민들은 술에 취해 '알게 뭐냐'고 외치기도 했으며, 지방에 있는 가족에게 화폐개혁을 알리고 빨리 신고하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이 많아 전화 교환양은 '눈코 뜰 사이가 없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군사정부가 급작스럽게 시작한 화폐개혁은 대한민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일으키면서 그냥 밀고 나가면 할 수 있다는 군사문화의 전형적인 정책과정을 보여줬습니다.

' 지하 자금으로 군사정부를 살리려 했던 박정희의 화폐개혁'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하루빨리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와 화교의 현금을 확보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는 부정축재자들은 검은돈을 몰래 숨겨 놨을 것이고, 화교는 은행을 이용하지 않고 있어 현금을 다발로 집에다 모아 놨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막상 화폐개혁이 시행되자 이런 자금은 별로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긴급통화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환화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습니다. 6월 9일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원만이 회수되지 않았습니다. 신고액을 보면,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는 불과 7건 12억에 불과하였다.

즉 박정희는 화폐개혁만 하면 이런 지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박정희의 예상과 달리 여유자금을 현금으로 거액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오히려 금과 같은 현물을 보유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박정희의 화폐개혁은 1961년 최고회의 재경위원이었던 유원식이 박정희에게 제안하여 시작됐는데, 모든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심지어 한국은행 총재와 최고회의 재경분과위원장이었던 김동하조차 몰랐습니다.

 

▲10환을 1원으로 화폐개혁을 했던 1962년 6월10일자 경향신문. 한국은행 앞에 총을 든 군인 사진이 보인다.


미국은 박정희의 '무계획'적이고 비전문가적인 '화폐개혁'에 불같이 화를 냈고, 화폐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봉쇄한 예금계정을 빨리 풀지 않으면 아예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을 했습니다.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은 경제 혼란과 함께 산업계의 자금이 묶이는 사태가 발생해 오히려 경제 침체만 더 가중됐습니다.

혁명정부 예산의 반을 미국 원조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던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예금봉쇄를 해제함으로, 처음 계획했던 퇴장자금을 끌어내 군사정부의 재정적자를 막겠다는 박정희식 '화폐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화폐개혁을 주도했던 유원식,천병규 등은 1963년 증권파동 사건으로 구속된다. 출처:경향신문

 


박정희 '화폐개혁'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행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62년 군사정권을 영구히 하기 위해 증권파동으로 불법자금을 마련했던 군인들 머리에는 법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만 존재했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경제 지배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군사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경제정책에 따라 겨우 경제를 회복했고, 박정희는 미국의 도움으로 성공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상한 현상이 한국사회에 미화된 것입니다.

'화폐개혁'을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은 없습니다. 경제가 변화되고 시대가 변화되면 '화폐개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과 철저한 계획으로 '화폐개혁'을 준비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는 아예 않으니만 못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박정희식 '한강의 기적'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정책의 성공 배경은 미국이었고, 실패는 박정희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 박정희가 왜 실패했고, 그가 미국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박근혜 대통령이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실패는 본받고, 미국의 경제 지배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녀 또한 군사문화처럼 독재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어설픈 지식과 실력으로 큰일을 벌이면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는 아버지의 실패를 명심하고, 박근혜 정부 5년을 이끌었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65년 동안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제 그만 불렀으면"

[이 사람의 삶] 겨레 동요 작곡가 안병원

13.03.13 16:30l최종 업데이트 13.03.14 09:44l

 

 

겨레의 동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가 안병원(87)씨가 1947년 처음 작곡할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65년 동안이나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니…. 부끄러운 일이에요. 이제 그만 좀 불렸으면 좋겠어요."

94주년 3·1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 말, 굴곡의 한국현대사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작곡가인 안병원씨가 털어놓은 말이다. 올해 87세인 안병원씨는 '민족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했지만, 노래의 유명세 만큼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음악인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한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면 열 중 아홉은 고개를 흔든다. "'안병원'이라는 분인데요, 동요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도 작곡한 분입니다"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외국 동요 '힌눈사이로 썰매를 타고…' 우리말 번역자이기도 한데요"라고 말하면, "어, 그래요?"라는 반응이 나온다.

안병원씨는 혼런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 대학 2학년이었던 약관 22세에 겨레 동요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했다. 작사자는 바로 그의 아버지 안석주(1950년 2월 작고)였다. 노래는 남고 그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기억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작사자 안석주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4개월 전인 1950년 2월에 작고했고, 작곡자 안병원씨는 1974년 어머니와 손아래 동생이 살고 있던 캐나다로 홀연히 이민을 떠났기 때문이다.

청량한 초원의 빛이 대지를 어루만지는 2월 말, 미국 플로리다 목초지에서 열린 기독교 건강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노선영(77)씨와 함께 올랜도에 온 안병원씨를 만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 얽힌 삶의 역정을 들었다. 안씨는 긴 거리 보행에서나 사용하는 지팡이를 한 손에 들었지만, 90세를 앞둔 노인 답지 않게 목소리는 카랑카랑 했고 눈매와 혈색은 젊은이 못지 않게 밝고 맑았다.

다만 살아온 날 수 만큼이나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 탓인지 종종 중요한 사건의 앞뒤 정황을 혼동하는 바람에 평생의 동반자인 부인 노선영(77)씨가 인터뷰를 도왔다. 또 일부 연대기 등은 안씨가 보내온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에서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안씨의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
ⓒ 삶과꿈

관련사진보기

- 1947년 당시 노래의 제목은 '독립의 노래'였죠? '우리의 소원은 독립' 작곡 당시의 정황은 어땠나요? 역사에 기록될 곡의 탄생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처음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것은 순전히 친구 때문이었어. 중앙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 담당 배준호가 어느날 나를 찾아온 거야. 그는 '해방 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절에 색다른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없냐'고 물어왔어. 이리저리 의논하던 끝에 우리는 '독립의 날' 노래극을 만들어보자는데 합의를 보았지."

- 처음부터 작곡은 '내가 해야 겠다'는 욕심이 생겼나요?
"아마도 친구는 처음부터 내게 어떤 것을 기대하고 왔던 듯해. 음대생이니 작곡은 내가 할 터이고, 작사는 언론인인 아버지에게 부탁할 심산이었던 것 같았어. 당시 방송국 사정으로는 대본 원고료, 작사료, 작곡료 등을 지불할 형편이 못 되었고, 반주 악기도 피아노 밖에는 없었다고. 더구나 나는 그 당시 이미 어린이 합창단인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지."

-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버님은 엄격한 분이셨어. 특히 9남매의 장남인 내가 공부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늘상 쏘다니는 걸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셨거든. 찾아간 그날도 신문일로 바쁘신 아버님이 '이놈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나' 하는 귀찮은 눈빛을 보이셨어. 우리의 뜻을 상세히 말씀드렸더니 한참 생각하시더니 '써주겠다'고 하시는 거야. 기특하다고 여기셨던 게지."

결국 안병원과 배준호는 아버지 안석주로부터 25분짜리 노래극 원고를 받아냈다. 5곡이나 되던 노래 모두 안병원이 작곡을 맡았고, 출연진은 안병원이 만들어 지휘하던 '봉선화 동요회'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배준호가 막연하게 내놓은 '노래극'은 안병원 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한 잔치가 된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작곡 당시의 안병원씨. 약관 22세 서울대 음대생이었다.
ⓒ 안병원

관련사진보기

- 가사를 받은 후 작곡 구상은 주로 어디에서 했습니까.

"당시 친구 권길상의 아버님이 목사님으로 있던 명륜중앙교회에서 밤낮으로 살다시피 했어. 풍금을 두들기다 말고 한숨을 짓고 교회 의자에 드러누워 그대로 쓰러져 밤을 새우기도 했지. 그렇게 수주 동안을 뒹굴며 고민하던 끝에 5곡의 노래를 작곡하게 되었어. 그 가운데 하나인 '독립의 노래'는 일주일 동안의 고통 속에서 탄생했다네. 당초 '독립의 노래'용으로 3곡을 작곡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겠더라고."

- 고민해서 세 곡을 만들었는데, 그중 한곡을 어떻게 낙점하게 되었나요.
"다시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그 가운데 유난히 마음이 간 하나를 짚으며 '이게 어떨지 모르겠다' 넌지시 내밀었더니 '야, 그거 참 좋다, 그거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 부전자전 이심전심이었던 거야."

안병원의 아버지 안석주는 일제말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학예부장 등으로 일한 언론인이자 화가다. 당시 그의 신문소설 삽화와 한컷 짜리 만평은 장안의 화제였으며, 웬만한 논설 집필자보다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으로 시작하는 '독립의 노래'가 안병원-안석주 부자에 의해 탄생했다. 이 노래는 삼일절 방송을 타기 전인 2월 28일 오후 2시 종로 YMCA 대강당에서 연 삼일절 기념 아동음악회에서 '봉선화 동요회'가 먼저 합창으로 불렀다.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오후 5시 30분 방송을 타고 전국 곳곳에 퍼진 후에 나타난 반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당시의 반응을 회고하실 수 있으신지. 겨레의 신데렐라가 된 그날의 광경을.
"(천장을 쳐다보며) 허헛참,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었지. 9남매 중 장남으로 늘 꾸중만 듣고 자란 터에 아버님으로부터 오랫만에 칭찬이란 것을 듣었다고. '야 너 참 잘했다' 그러는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말야, 전국의 지방 방송국들은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생판 알지도 못하는 학교들로부터도 악보를 보내달라는 성화가 빗발치는 거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어."

- 1947년 2월이면 이미 해방이 된 지 1년 6개월여가 지난 때였는데요. 왜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노랫말을 짓게 되었나요.
"당시 웬만큼 뜻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독립은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버지 역시 우리 민족이 진정한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봐. 당시 미군정이 계속되고 있었고, 정부 수립 문제로 좌우가 대립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잖아."

잠시 덧붙이면, 안병원 부자가 '우리의 소원은 독립'을 만들고 있던 당시 한반도는 단독정부냐 통일정부냐를 놓고 정치세력들 간에 밀고 당기는 쟁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독립의 노래가' 전국 방송망을 타던 그날 제주도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서 좌익계 인사들을 포함한 제주 주민들이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시발이 되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인 제주 4·3사태가 발생하여 2만5천여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 우연 치고는 가슴이 아픈 일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뀐 사연
 

1954년 어린이음악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해 48개주를 순회하던 당시, 이들의 활동을 톱기사로 다룬 미국의 일간지
ⓒ 샌프란시스코 뉴스

관련사진보기

- 그런데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바뀌게 된 계기가 궁금하군요.

"독립의 노래가 만들어졌던 다음해인 1948면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부터 삼팔선이 막혀버렸지. 어느날 문교부로부터 '이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고쳐 부르는 게 좋겠다'는 제안이 왔어. 1950년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처음 실리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아예 단골로 교과서에 실리게 된 거야."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안병원은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에서 어린이 음악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고, YMCA어린이합창단 지휘, 경기여중고, 경복중, 용산중고 교사, 숙명여대 강사, 각종 음악인 단체장 등을 지내며 캐나다 이민 전까지 엄청나게 바쁜 세월을 보냈다.

전쟁이 막 끝난 1954년에는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3개월 동안 미국 48개주를 순회했는데, 가는 곳마다 미국 언론과 미국인들로부터 열띤 환영과 갈채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순회공연은 많은 신문에 보도됐고 미 전역 97개 TV에서 방송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또 공연 도중 뉴욕 유라니아(URANIA) 레코드사가 어린이 합창단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경무대와 국회의사당을 방문하고 국무위원 초청 파티 등에 참석했다. 또 이들을 위한 귀국환영대회가 시청 앞에서 열렸다.

-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동요가 아닌 '가곡'으로 분류하자는 주장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내가 반대했어. 나는 처음부터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겨 부를 수 있는 동요를 작곡한 것이었어. 나는 어렸을 적부터 동요인생을 살고 싶었다고."

- '동요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계기는?
"동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생 시절이었지. 어느날 신문사 학예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극장 티켓을 얻어 오셨는데, 빈 소년 합창단 순회공연 영화 티켓이었어. 당시 부민관(전 국회의사당)에서 상영된 그 영화가 준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해. 그날 어린 합창단원들이 내는 소리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나도 후에 어린이 합창단을 조직하여 세계 일주 음악 공연을 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세웠다네.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음악사절단을 이끌고 미국 48개주를 순회해 내 꿈을 어느정도는 달성했다고 봐."

안병원은 일찌감치 음악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줬고, 오로지 동요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작곡한 동요는 '우리의 소원', '구슬비', '가을 바람', '학교 앞 문구점', '나 혼자서', '푸른 바람' 등을 포함해 300곡이 넘는다. 번안 동요까지 합치면 족히 500곡이 되고도 남는다. '흰눈 사이로', '소나무여, 소나무여' '노래는 즐겁고' 등으로 현재까지 즐겨불리는 외국 동요를 비롯한 수많은 번역동요은 안병원의 청년시절 작품이다.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중간중간에 '헤이!'를 넣어 부르게 한 것도 그였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현제명으로부터 사사할 정도로 음악에 푹 빠진 그는 1945년 해방이 된 두달 후인 10월 친구 권길상과 함께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었다. 이 동요회는 나중에 YMCA어린이합창단, 육군 및 해군 정훈어린이음악대, 중앙방송국 어린이 음악프로그램, 미국 순회 어린이음악사절단의 기틀이 된다.

그가 젊은 시절 음악인생을 살며 키워 냈거나 영향을 받으며 후에 음악인으로 또는 사회인으로 대성한 인물들을 대략만 꼽아보면, 한동일(피아니스트), 이규도(성악인), 이화영(이화여대 교수), 신갑순(잡지 <삶과꿈> 발행인), 장영신(애경유지 회장), 김경순(이수성 전 국무총리 부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김자경, 이흥렬, 오현명, 이인범, 황병기 등 이름만 대면 금방 알 만한 음악가들과 한두 번씩 인연을 맺으며 한창 시절을 보냈다.

눈에 밟히는 윤이상 선생의 뒷모습
 

안씨는 1993년 동경에서 열린 <한겨레 음악회>에서 40년 만에 윤이상 선생을 만났던 일을 회상하며 그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고 털어놨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 선생님이 만나신 분들 가운데 윤이상 선생도 눈에 띕니다. 윤이상 선생님에 대한 기억 한토막을 듣고 싶습니다.

"윤이상 선생을 생각하면 늘 어둡게만 보이던 얼굴과 쓸쓸하게 느껴지던 뒷모습이 떠올라. 1953년쯤인가 한국작곡가협회 일로 종로의 다방에서 자주 뵈었지만, 이미 이름있는 음악가 선배여서 가까이 하지 못했어. 그러다 무려 40년만인 1993년 4월 동경에서 열린 <한겨레 음악회>에 참가했다가 같은 호텔에서 1주일쯤 지내게 되었어. 윤 선생은 남한의 음악계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고, 고향을 무척 가고 싶어 했어. '다리가 너무 쑤시고 아픈데, 한국에 가 침을 맞으면 금방 나을 것 같은데…'라며 말끝을 흐리던 모습이 눈에 밟혀. 참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 과거 언젠가 '안병원은 반정부 좌빨이다'는 비난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좌빨입니까?
"하하 참, 말도 안 되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철공장도 다니고, 편의점도 하고, 빵집도 열어 자식들 키우면서 사느라 정신 없이 지냈고, 종종 한국 초청으로 음악회에서 지휘 몇 번 한 것이 내 삶의 전부였어. 1988년과 1989년 두 차례나 북에서 초청장이 왔을 때도 '이산가족들도 가지 못하는 데 내가 무슨 낯으로 북한을 가나' 하고 사양했다고. 2001년에 북한에 갔을 때 북측에서 자기들 체제 찬양 발언을 슬며시 요청해 왔을 때도 '나는 잘 모르는 일이라서 못하겠다'고 했지."

- 지난 수년 간 종종 유화전을 열어 '북한어린이 돕기' 등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동기가 있나요?
"난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돕겠다는 것이었지. 2003년인가 서울 프레스센터 서울 갤러리에서 '안병원 북한아동돕기자선유화전'을 열었는데 모두 팔려 나가더라고. 바로 옆에서 국내 유명화가들이 현대미술전을 열었는데 거의 팔리지 않았어. 이걸 본 한 화가가 내 유화전을 보고 '뭔가 생각할 점이 많다'는 얘길 했다고 해. 그날도 내 유화전이 '빨갱이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며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기가 막히더라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65년 동안이나 부르다니"
 

안병원씨 부부는 1990년 '남북 송년음악회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7차례나 불려진 것을 일생 최고의 감격적인 일로 회상했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 원로 음악인으로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1990년 12월 서울에서 250여명의 남북음악인들이 함께 모여 남북송년음악회를 열었는데,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 없어. 난 그때 청중석에 앉아 있었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이 자리에 우리 민족에게 귀중한 분이 왔다"며 나를 부르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단 위에 올라가 남북 음악인들을 세워 놓고 지휘를 했지. 청중석에서 재청이 거듭되고, 그래서 아예 뒤를 돌아서 청중들을 지휘했는데, 또 부르자고 난리를 치는 거야. 모두 일곱 차례나 불렀는데, 눈물바다를 이루었어. 행사가 끝나고 여기 저기서 몰려오더니 악수를 하고 부둥켜 안고. 아이고 그때 분위기로는 통일이 멀지 않은 것만 같았어. 누가 연출하라고 해도 그런 거 다시 못할 거야."

"(노선영씨가 다시 나서며) 북한 사람들이 이양반 손을 잡고 막 우는 거야.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나중에 들으니 데모를 하는데 '우리의 소원'을 부른다고 금지곡이 될 뻔 했다고 했다네요."

- 현재의 답답한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 듯한데.
"이제 그만좀 했으면 좋겠어요. 남이나 북이나 너무 미워하고 너무 많이들 죽고 죽이고 그랬어요. 북한은 남쪽 적대시만 하지 말고 자존심 버리고 사정 털어놓고 도와달라는 얘기 왜 못하나. 남쪽도 그래 자신감이 생겼으니 좀 양보했으면 좋겠어. 서로 요구만 하지 말고 조금씩 양보하면 되지 않겠어? 양쪽 모두 잘 못하고 있는 거 같아."

- '우리의 소원' 말고 '안병원' 개인의 소원은 뭡니까.
"(이때 부인 노선영씨가 기다렸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참, 말도 안되고 부끄러운 일이에요. '우리의 소원'이 65년이나 불려지다니. 세상에 '우리의 소원이 통일'인 나라가 우리나라 밖에 또 어디 있나요?"
"(안병원씨가 끼어들며) 기막힌 일입니다. 제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흘러간 옛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어. 나의 마지막 소원은 통일이 되는 날 판문점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원' 합창을 지휘하는 것이야."

덧붙이는 글 |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에도 올려졌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진> 북이 밝힌 군사 무력

 

<사진> 북이 밝힌 군사 무력
 
미사일.조선인민군. 로농적위대 등 담아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3/03/14 [07:11] 최종편집: ⓒ 자주민보
 
 
최근 조선인민군최고사령부와 외무성, 인민무력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의 강경 입장을을 담은 담화와 성명이 이어 지고 있는가운데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과 조평통 기관지인 우리민족끼리에서는 무력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키리졸브. 독수리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조선의 인공지구위성, 제3차 지하핵시험에 대한 대북제재로 촉발 된 한반도 전쟁위기가 가시고 평화협정이 체결돼 민족공동의 번영의 날이 오길 기대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정섭 기자
▲ ©
▲ ©
▲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북은 공동선언 이행, 북.미는 평화협상 시작”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3/03/14 10:29
  • 수정일
    2013/03/14 10:2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반전평화 공동행동 7일차
 
 
2013년 03월 14일 (목) 02:10:25 강인옥 통신원 tongil@tongilnews.com
 
   
▲ 광화문 정부청사 정문 앞에서 반전평화 공동행동 칠일째 농성이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12일 저녁에 잠시 내린 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지난 7일 전쟁연습 중단촉구 기자회견 중 현기증으로 주저앉으신 한재룡 선생은 그 후 농성에 결합하지 못하고 계신다. 이천재 선생 역시 무리해서 농성에 참가하더니 다시 병석에 누었다.

통일원로 선생님들의 건강이 걱정이다.

   
▲ 속도 모르는 취재 기자들은 농성장을 마련하자마자 몰려들어 '구호를 외쳐달라' '한 번 더 해달라' 요구하는데 참 야속했다.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속도 모르는 취재 기자들은 농성장을 마련하자마자 몰려들어 '구호를 외쳐달라' '한 번 더 해달라' 요구하는데 참 야속하다. 그래도 키리졸브 연습 중단의 목소리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어야 한다고 원로선생들은 피켓을 높이 들고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반전평화 공동행동은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키리졸브 연습 중단과 유엔 안보리 제재를 반대해왔다. 그러나 강도 높은 선박검색과 금융제재를 내용으로 대북제재가 채택되었고 키리졸브는 계속되고 있다.

   
▲ 왼쪽부터 문승진 최진미 강경란 이상훈 김영승 발언자들.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농성을 운영하는 범민련 남측본부 김성일 사무차장은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북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북과 대화를 하자는 건지,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키리졸브 훈련과 관련해서는 언론 보도도 거의 되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미 항공모함이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는데 군사훈련을 크게 진행하지 않으면서 북에 대한 자극을 중단하겠다는 건지, 또 다른 위기 국면을 만들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미국은 대화하자고 하지만 상대의 변화만을 강요하거나 위기국면을 만들었던 원인들을 해소하지 않고 대화하자는 것은 기만이고 사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이라며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려면 미국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를 폐기시키고 키리졸브 훈련을 중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에서 키리졸브 중단 촉구 1인 시위를 할 때면 일명 '보수 할아버지'가 나타나 "늬들이 전쟁을 알어?"라며 전쟁불사를 외치곤 한다. 그러나 또 역시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마이크를 잡은 김영승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의 연설은 그들과 너무도 다르다. 한 마디로 '국민생명을 담보로 하는 키리졸브 당장 집어치워라'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다. 왜냐면 핵전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패권을 위해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나만 살고 너는 죽어야한다는 생각이 전쟁을 불러온다. 상인들은 북의 도발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한다. 국민들이 이렇게 전쟁정세를 모르고 있는데 전쟁연습 반대를 외치는 우리가 너무 적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서도 외쳐야 한다. 촛불같이 범국민적으로 일어나는 진보진영의 단결이 있어야 가능하다."

코리아연대 이상훈 공동대표는 청와대 앞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서로 사전의 협상도 없이 총성 한 번으로 우리 땅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최대위기를 굴욕과 예속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반도의 운명이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도록 투쟁"하자고 했다.

   
▲ '농성 7일째'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최근 건강 문제로 병원 신세를 진 전국여성연대 최진미 집행위원장이 아직은 혈색이 좋지 않은 얼굴로 농성에 함께했다. 그는 곧 군입대해야 하는 부모로서 간이 콩알만 해지곤 한다는 심정을 밝혔다. "전쟁을 부추키는 보수세력은 평화를 얘기하면 종북이라면서 늬들이 6.25를 아냐고 공격한다. 그걸 잘 안다는 분들이 어떻게 또 전쟁을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전쟁으로 인간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경험하신 분들이 또 전쟁을 하자는 건 어떻게 된 사람인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1천 회가 넘도록 수요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 분들의 상처도 원한도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만큼은 다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국민들이 한 마음이 되길 바란다."

두 아이를 둔 통합진보당 구로을 문승진 위원장은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져도 전쟁이 나면 모두가 참혹하게 죽어야한다는 게 두렵다. 아이들에게 작은 행복조차 지켜주지 못할 것이 두렵다. 구로광장에서 매일 선전전을 하고 있지만 시민들은 전쟁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 사는 것 자체가 전쟁 같아서, 철탑에 올라 농성을 하고, 비정규직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새벽밥 지어먹고 자정에야 퇴근하는 노동자들 삶 자체가 전쟁 같아서 전쟁을 느낄 틈이 없나 생각됐다"고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또, "전쟁주의자들은 연평도 같은 국지전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도시가스 배관 문에 서울과 수도권은 포탄 하나로 전멸될 수 있다."며 구로에서 아침저녁으로 진행하는 선전전에 더 열을 올려 전쟁연습 중단 촉구의 마음을 많은 대중들 가슴에 스미도록 하겠다고 결의했다.

통합진보당 강경란 여성부장도 "전쟁위기 때문에 고령에도 거리에서 농성을 하시는 선생님들께 부끄럽다"고 인사하고 "오랫동안 분단이 지속되고 전쟁위기가 닥쳐오면서 누구보다 통일열망이 높은 선생님들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라며 정전60년을 평화협정 체결의 목소리를 더욱 높이겠다고 했다.

청소년들 사이에 휴교령이 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이들도 심각하게 전쟁위기를 받아들이고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보수언론들은 전쟁을 부추키고 국민복지를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미국 뒤에 숨어있다. '육사 정부'라고 별칭까지 불려지는 박근혜 정부는 유신세력들로 청와대를 장악하면서 나라를 안보정부로 만들려한다.

   
▲ 변함없이 농성장을 지키는 통일원로들.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7일차 농성 참가자들은 미국이 지금의 대결국면에서 발을 살짝 빼려는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남북 긴장을 부추키는 장본인은 미국'이라며 '시작도 미국이었으니 결자해지도 미국이 해야 한다'면서 하루속히 북과 평화협상에 임해야한다고 했다.

농성을 마무리하고 지금의 위기상태를 심각하게 우려하는 박순경 6.15학술본부 명예대표와 전화통화를 했다. 남북은 6.15공동선언으로 북미는 평화협상으로 나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다음은 박 명예대표와의 전화통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 '시민과 함께' [사진-통일뉴스 강인옥 통신원]

 

 

<박순경 6.15남측위원회 학술본부 명예대표 '남북은 공동선언 이행, 북.미는 평화협상'>

상황의 문제부터 이야기하면, 한미연합 키리졸브라는 전쟁훈련으로 북핵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이 틀렸다. 전쟁훈련으로서 대응할 것이 아니다.

이런 대응방법은 북.미대립, 남북대립을 끝없이 지속시키는 것 밖에 아무 효과를 얻지 못한다. 이렇게 한미연합으로 대북 전쟁훈련을 하면 북에서도 비상사태가 벌어지거든. 군대나 무기를 배치하고 이러다보면 어느 순간에 실전의 계기가 터질지 모르는 거다. 그래서 한미가 전쟁연습으로 대응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라는 것이다.

북이 핵을 개발하고 세계에 공표하고 있는 것은 대미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평화협상의 요구인거지 미국에 대해서 핵전쟁도 가능하다는, 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미국이 이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미국이 북의 의도대로 되게끔 놔두질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북의 핵개발, 핵보유에 대한 한.미.일의 대응이 잘못됐다. 북의 핵은 자체의 안보체제를 위한 보호체계이다.

지금까지 북은 미국과의 협상을 추진해왔지만 조금도 성공한 게 없다. 미국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렸다. 그럼에도 협상을 요청하고 있는 거다. 미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북이 세계와 교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남한이 미국과 북쪽을 중재해야지, 이걸 꼭 미국을 업고서 어떻게 해서든 북과 대결을 해보자는, 그 대결에서 승리하자는 구도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북의 핵개발은 대미관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러니까 남측은 이걸 풀어야 하고 중요한 것은 대결구도가 아니라 통일로 풀어야한다는 것이다. 통일의 궤도는 핵문제와는 상관없이 열어 나가야하고 핵문제는 북.미관계에서 해결 되어야한다. 미국의 대북 안보위협 가능성이 제거되기 전에는 핵문제 해결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완화시키고 해결할 구도는 통일이다. 북핵과 상관없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실천의 길을 추진하는 길 밖에 없다. 정부든 통일운동 단체든 마찬가지다. 즉, 통일로 나아가면서 북.미관계를 화해와 평화적인 관계로 이끌어 갈 수가, 그 길을 열어나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북이 핵실험을 했다 해도 남쪽이 떠안고 대북 대결구도로 대응하면 우리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생전가도 안 된다. 남쪽이 대북 대결로 나가면 미국이 옳거니 하면서 이 계기를 계속 이용만 하게 된다. 남북관계도 북.미관계도 해결이 안 된다. 우리가 반민족행위를 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북은 남과의 통일을,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통일의 길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우리 민족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통일을 해야 동북아에서 평화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통일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동북아, 세계를 불러올 수 있는 초석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은 남북공동선언 이행으로, 북과 미국은 평화협상으로 풀어가야지, 북핵은 절대로 안 된다거나 일방적으로 폐기하라고 해선 안 된다. 대북 전쟁연습과 북핵 폐기는 양립할 수 없다.

북.미관계에서 핵폐기는 요원한 문제인데 오히려 남측이 이것을 떠안으려 한다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과 옥신각신만 하지 돌파구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남측이 미국을 돌파하지 못 하는데는 새누리당 정권, 군부, 그리고 반북세력들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북핵 포기를 주장하면 한도 끝도 없고 통일도 없다. 그리고 대북 전쟁연습 중단이 아니라 폐기를 외쳐야한다. 북핵포기라는 것은 양립도 안 될뿐더러 일각에서 ‘북도 자제’하라고 하는데 지금은 자제할 단계가 아니다. 북의 요구를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북.미 간의 평화협상이 성립되도록 남쪽이 궤도를 바꿔야 한다. 미국과는 평화협상, 그것이 관건이다. 북핵문제는 평화협상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북의 안전 체제 보장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키리졸브 관련한 뉴스를 보다보면 답답하다.

사태를 왜 이렇게 만드나, 이것은 국력소모다. 우리 국민들 생활도 곤궁한데 왜 이렇게 우리를 소모시키고 연평도 주민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나. 평화롭게 대응할 수 있음에도 왜 우리를 더 궁핍으로 몰고 괴롭히기만 하나. ‘전쟁훈련이 어느 선을 넘지 않으리라’ ‘전쟁으로 비화되는 상황은 오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왜 미국에 하나. ‘북이 도발하면 전쟁도 불사다’라고 하면서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해놓고 왜 우리 국민을 미국에 의지하게 만드나. 이게 어떻게 민족의 자존심인가. 정말 안타깝다.

다시 강조하건대 북.미관계에서 해결 되어야 한다.

북은 체제안정 보장 그리고 미국과의 평화관계로 세계로 진출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진로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미국은 왜 자꾸 틀어막나. 미국은 북의 요구를 뻔히 알면서 제재하고 압박하고 차단하는 건 미국의 악의다, 악의.

북이 이 위기 상황을 잘 넘겨줬으면 한다. 남북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실천으로 이 위기상황을 잘 넘어간다면 북.미협상도 일어나게 되어 있다. 박근혜 정부에게도 유리한 것 아닌가. 도대체 박근혜 정부는 신뢰프로세스는 언제 써먹을 건지. 단번에 시작해야한다.

 

 
관련기사
· “박근혜 정부는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고 있다” · 전쟁연습 중단의 함성이 울려퍼져야 할 때
· “전쟁전야의 전쟁훈련은 전쟁이다” · 전쟁을 막기위한 정당한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
· “조선일보는 전쟁을 원하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냐” · ‘정전 60년의 역사는 분단 60년의 역사’
 
강인옥 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원로 역사학자가 말하는 박근혜시대 단상

원로 역사학자가 말하는 박근혜시대 단상

 
휴심정 2013. 03. 12
조회수 374추천수 0
 

[복음과상황 267호 커버스토리] 박근혜 시대와 개신교의 역할/[267호] 2013년 01월 24일
이만열 mahnyol@hanmail.net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18대 대선 다음날 새벽 2시. 엎드려 그분의 뜻을 물었습니다. 매일 읽는 순서를 따라 누가복음 24장을 읽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이 그들을 격려하며 부활의 새 소망을 들려주십니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5)라는 구절이 와 닿았습니다. 성경 읽기에 이어 찬송을 불렀습니다. 먼저 찬송가 460장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발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뒤 이어 찬송가 373장을 불렀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2, 4절)
 
시련을 당할 때마다 말씀은 탈진한 육신에 회복제가 되었고, 찬송은 새로운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말씀과 찬송을 통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주는 영적 소성(蘇醒, 다시 살아남)에 힘겹게 이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난 대선이 저 사악한 정권과 그 정권을 뒷받침하는 정당을 심판하는 재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절반이 넘는 유권자들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른 바 ‘정책 대결’ 대신 네거티브와 감성에 호소하는 세력에 표를 던졌습니다. 하여, 나는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승리일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하여 마침내 “정의가 사는” 꿈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깊고 어두운 새벽녘, 우리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시 110:3)에게는 “새벽을 깨우는”(시 57:8) 사명이 여전히 주어져 있습니다.
 
지난 MB 정권을 두고 반민주, 반민족, 반인권, 반생태, 반통일 정권이라 거듭 비판해 온 건 나름 근거를 둔 것이었습니다. MB 정권은 총체적으로 거짓된 정권이자, 역사를 공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볼 때 아주 사악한 정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번 대선이 사악한 정권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그 뒷받침인 새누리당에 대한 심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박근혜 당선자는 1970년대 유신 독재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발을 담갔으니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회개가 있고서야 우리 민족사에 그가 대통령 후보든 대통령이든 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최근 외신에도 보도된 바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제정 선포하기 전 북한 김일성 정권에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북에서도 소위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었는데, 바로 김일성을 초국가적, 초당적인 존재로 만드는 법안이었습니다. 결국 40여 년 전인 1972년 12월 27일, 같은 날 남에서는 유신헌법을, 북에서는 사회주의 헌법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남북의 독재체제 강화였습니다. 대선 전에 이미 그런 지적을 한 바 있지만, 외신에서도 이번 대선 이후 40년 전과 비슷한 구도가 나올 수 있겠다고 보도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미 3대째 세습이 이어지고 있고, 남한에서도 유신체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민주적 절차인 선거를 통해서 당선한 박근혜 당선자의 경우를 어찌 북한의 3대 세습에 견줄 수 있느냐고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라면 박정희 대통령도 거쳤으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헌법에 손댄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선 결과를 반성적으로 생각할 때, 신앙적으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MB 정권의 악이 아직 턱밑까지 차지 않았으니 이를 마저 채워서 심판하시겠다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악한 정권의 악이 더 확대되거나 연장되지 않도록 추궁하고 때에 따라 분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MB를 뛰어넘겠다고 몇 번 말한 적 있는데, 그런 공언(公言)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게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압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혼자 추스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성적 네거티브 선동의 승리
 
그러나, 민주당의 준비 부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만 되면 정권 교체가 가능하리라 전망한 것은 참 안이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새누리당의 네거티브 선거운동에 대해 “정의가 승리한다” “국민의 수준을 믿는다”는 식의 막연한 발언 외에는 별다른 전략적 대응이 없었습니다. 이번 대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MB 정권에 대한 심판과 정권 교체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이 무엇인지, 젊은 세대에게든 5, 60대에게든 제대로 계몽하고 조직화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새누리당은 정책을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박근혜 후보가 TV토론회에 나와서 자신의 정책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정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다 보니, 상대방 의혹 부풀리기와 선동질에 기우는 건 필연일 겁니다. 감성적 선거 전략 말입니다.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정책 대결을 하자는 이성적 접근은 무시되고 감성적 접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없는 사실도 반복적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은 그 얘기를 진실인양 착각하게 됩니다. 새누리당에서는 이 점을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날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의혹 부풀리기를 펼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새누리당의 감성적 접근과 선동은 유권자들의 건전한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대선에 대해 주로 ‘50대의 역습’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나의 이런 설명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방송 황금 시간대에 <KBS>는, 박근혜 후보의 경우는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말을 편집하여 전달한 반면, 문재인 후보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야당 쪽에서 정책 대결을 펼치려 했다면, 좀더 논리적이고 호소력이 있으며 그래서 시청자에게 설득력이 있는 박영선 의원 같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박 후보의 또박또박한 유세를 박 의원이 상쇄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정수장학회 문제나 그 밖에 항간에 떠도는 문제들을 네거티브로 물고 늘어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정책 대결 위주로 젠틀하게 선거전을 치르고도 이겼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순진하게도’ 네거티브 전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여전히 우리 시민의식이 그런 감성적 네거티브 선거 전략을 분별할 정도로 성숙하진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NLL 논란’만 해도 그렇습니다. 새누리당은 이를 국경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철통같이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들도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이 국제법적으로도 영해를 규정하는 경계선은 아니라는 국제법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경선을 북한이 침범하게 놔두는 게 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식으로 감성적 선동으로 나가고 보니, 공산주의를 경험한 세대는 판단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무조건 민주당이 잘못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NLL 대화록’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적으로 함부로 공개,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새누리당이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도 이걸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경향신문> 칼럼에도 썼지만, 차제에 대화록을 공개해서 진실을 밝힘으로써 허위 비방과 선동을 한 당사자를 처벌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좌빨’ ‘종북’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분명치 않기에, 평화와 통일, 인권을 말하는 이들에게 불온딱지 붙이듯 갖다 붙여서 무차별 공격을 해댑니다. 안보 무능으로 드러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쪽이 안보와 국방 문제를 들고 나와 큰소리치면서 국민의 이성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MB 정권과 개신교
 
이명박 정부 때 한국의 개신교는 정권과 밀착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MB가 대통령이 되는 데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설교를 통한 음성적 지원은 있었던 걸로 압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예언자적 사명을 완전히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권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언자적 위치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함에도 주류 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감싸고 돌거나 눈감았습니다. 어떤 목사는 정부가 시민단체에 주는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 거래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 기독교는 예언자적 사명을 상실하고 ‘개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이승만,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실패한 정치인들입니다. 이승만, 김영삼의 경우 그들의 실패를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MB 정권은 워낙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기독교와 정교(政敎) 유착 행태를 드러냈기에 선교의 문까지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유례없는 일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정치권과 밀착해서 좋은 결과를 낸다 한들 그게 교회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존폐까지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의 기독교는 기로에 섰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땅히 통절한 반성과 재를 무릅쓰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새 정부에 대한 고언
 
박근혜한겨레자료사진.jpg
 
이제 새로 들어서는 박근혜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든, 대내 관계에서든 최소한 MB가 취한 정책을 바로잡고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 남북 관계에서는 MB가 차단한 것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정상회담이라도 해야 합니다. 물론, 극우 세력이 야단을 치겠지요. 그래도 실타래처럼 꼬여 버린 남북 관계를 풀어내려면,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남북 관계를 복원한 토대 위에서 중단된 6자 회담을 다시 여는 단계로 나아가는 획기적 전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 관계에서는 대통령의 일관되고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대내 관계에서 MB는 ‘불통 정권’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말을 해도 아예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박근혜 당선자가 어머니처럼 국민을 품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소신을 행동으로 내보여야 합니다. 그 일은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 MB 정권에서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들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울러, 전문가 그룹에 귀를 열어놓고 경청해야 합니다. MB 정권은 5년 내내 역사교과서 문제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국사학계와 정권의 갈등이었는데, 역사교과서 문제를 전문 사학자들에게 맡기지 않고 정치적으로 접근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그룹에 귀를 기울이고 맡길 일은 맡기면 같은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역사학자로서 개인적으로는 새 정부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박 당선인이 정말 좋은 대통령이 되려면 자기 견해가 있더라도 학계가 논의해서 역사 문제를 풀어가도록 맡겨야 합니다. 학자들에게 정부가 의도하는 것 외의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면 MB 정부 이상의 갈등이 빚어질 것입니다. 정말 좋은 대통령이 되려면, 역사학계의 합의에 맡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보를 봐서는 사실상 크게 기대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한 정당의 대표나 대통령 후보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었으니 모든 언행이 더 폭넓게 공개될 것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마지막 봉사의 기회를 잡았으니 멋진 지도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2대 황제였던 태종 이세민의 연호가 곧을 정, 볼 관을 쓴 정관(貞觀)이었습니다. 그가 신하들과 나눈 대화록이 바로 <정관정요>(貞觀政要)인데, 역사가 오긍이 편찬한 이 책이 제왕학의 교과서처럼 명성을 얻어 군주와 제왕들이 탐독했고 조선에서도 두루 읽혔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세민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틀렸을 경우 바로 인정하고 고쳤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동양의 제왕들 중 명군(明君)으로 꼽히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영화배우 출신의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썩 유식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전문가 그룹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교회와 기독 청년들에게 고함
 
박근혜 정부하에서 한국 개신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지난 17대 대선에 이어 이번에도 보수 정치권을 지원하는 개신교 내의 ‘묻지마 지지’ 세력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속한 이들이 새 정부에서 자리를 얻거나 긴밀히 밀착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MB 정권에 지나치게 밀착했던 개신교 주류의 행태에 대한 반성의 뜻으로라도 거리를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성찰하는 시간과 더불어 예언자적 위치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한국의 개신교가 복원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 개신교 자체가 변해야 합니다. 교회의 ‘가난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부유하고 가진 것이 많습니다. 교회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는 작은교회운동을 지향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고통받는 이웃들,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 속으로 들어가는 풀뿌리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복원력과 자생력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단지 새 정부 아래서 한국 개신교가 해 나가야 할 과제만은 아닙니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를 쏙 빼닮은 한국교회가 회생(回生)의 길을 밟으려면, 가장 먼저 가난 실천과 작은교회 운동을 통한 영성 회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정권과 밀착했던 대형교회가 풀뿌리교회운동, 가난 실천의 작은교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리라고 당장 기대하긴 어려운 현실임을 모르진 않습니다. 구조적인 대전환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한국교회가 살 길이 없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대형 교회가 스스로 나서서 가진 것을 나누고, 교회 건물이나 토지를 매각해서 슬림화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또 몹시 더딜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세대는 바뀌게 마련입니다. 새로운 사고를 지닌 이들이 한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면 가능성이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 대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젊은 세대가 선거 이후 패배감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웬만큼 산 나에게도 이번 선거 결과는 가슴에 큰 상처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아직도 골리앗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심정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진 채 엎드려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어디서 무너졌는지 철저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동시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당겨주고 밀어주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젊은 세대가 좌절해서 자포자기하면 이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특히 기독 청년들이 좌절하면 안 됩니다. 비신앙인들이 좌절할 때 우리는 신앙인답게 힘을 내고 위로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고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정의가 사는 꿈”으로 다시 일어서자고 외치면서 이 ‘깜깜한 새벽을 깨우러’ 나갑시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mahnyol@hanmail.net
 
 
이만열 님은 한국의 대표적 역사학자로 숙명여대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길러내는 일에 매진했다. 전두환 군사독재하의 해직 사태 때 교수직에서 해직당해 4년의 광야생활을 보내는 동안,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에 힘을 쏟았고 한국 교회사 연구 수준을 격상시켰다.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고, 현재 숙명여자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만열 교수의 민족 통일 여행일기> <한국기독교사특강>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등 다수의 책을 썼다.
 
 
*이 글은 <복음과상황(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정희대표"색깔론에 얽매이지 말고 똘똘뭉쳐 평화를 지킵시다"

이정희 대표, ‘전쟁위기 해소· 한반도평화를 위한 비상시국 기자회견’발언
(통합진보당 / 2013-03-11)

 

○ 전쟁위기 해소, 한반도평화를 위한 비상시국 기자회견
○ 3월 11일 13:00/ 프레스센터 19층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당장 어디서 총소리가 날지 알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위기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일전불퇴’ 의사만 확인하고 있습니다. 국회도 북을 규탄하는 대북결의안 채택이외에 어떤 실질적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전쟁위기를 막을 수 없습니다. 국민의 안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과 북이 동시에 상대를 자극하는 말과 행동을 중단해야 합니다. 남북 양측이 벌이고 있는 군사훈련 모두 동시에 중단되어야합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적 발언을 거두고 겨눈 총부터 내려놔야 대화가 가능합니다. 벌써 세 번째 호소 드립니다. 박근혜 정부는 북과 대화를 시도하십시오. 즉시 대북특사를 보내셔야 합니다.

오늘 전쟁반대 평화수호의 한목소리로 많은 종교인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모이셨습니다.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지켜낸 평화를 영구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평화협정체결을 위해서도 끝까지 함께 해주실것을 부탁드립니다.

평화수호를 위한 공동의 기구를 건설하자는 오늘의 제안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더 폭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힘도 크게 모아낼 수 있습니다. 색깔공세 같은 비이성적인 시비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우리 후손들과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사상과 종교, 정견을 뛰어넘어 단결해야합니다. 고맙습니다.


2013년 3월11일
통합진보당 대변인실

 


<‘한반도 전쟁방지를 위한 긴급 호소문’>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지금 한반도가 다시 전쟁 위기 속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외교와 정치가 사라지고 상대를 위협하는 군사 행동과 위험한 언술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정전협정까지 무력화되는 사태 전개는 군사적 긴장의 일상화와 충돌의 위험성을 크게 높이는 절대적 위기의 상황입니다. 전쟁이 일시 중단된 '정전'상태의 한반도에서, 쌍방의 무력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전협정마저 백지화된다면 전쟁의 위험을 제어할 수단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참담한 마음입니다.
지금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북한의 태도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우려하고 있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한미 양국의 ‘실패한 정책’도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대화와 협상을 배제하고 제재만을 취해 온 정책은 상대에게 선택의 여유를 주지 못합니다.
이 과정에서 평화협정 논의가 실종되었습니다. 남북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모여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하자고 합의한 때가 2005년 9월 19일입니다. 도대체 8년이 다 되도록 반반한 대화 한번 못해 보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쟁을 걱정하게 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입니까?

국민여러분!
위기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랬듯이,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채 우발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하면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표방되는 남북 당국의 목소리에 참화의 위험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번 위기상황은 미국이 직접 연결되어 있는 대치상황이라는 점입니다. 남북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벌이는 이 무모한 행위를 더는 두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요구합니다.
서로를 자극하는 일체의 군사행동을 양측 모두 중지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겨레가 만들어 온 평화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팀스피리트로 명명되던 연례적 한미군사훈련을 중지하는 결단 속에서 북미대화의 물꼬를 열었던 1992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전히 군사독재의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던 노태우 정부 시절의 일입니다.
이 교훈대로 한미당국은 한미연합 키리졸브 군사연습을 중단하고 북한은 정전협정 백지화, 불가침합의 무효화 등을 즉각 철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한미당국과 북한은 일체의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평화를 위한 대화로 나서야 합니다.

평화협정 논의 선언이 지금 당장 시작하십시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논의를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평화협정은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인 동시에, 불안한 정전상태를 항구적인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입니다. 이 주장을 누가 먼저 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간 한미양국이 선핵폐기만을 외친 채 평화협정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결과 무엇이 남았습니까? 북이 선제핵타격을 공언하는 작금의 이 엄청난 사태를 전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고 한반도를 항구적 평화상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평화협정 논의입니다.

남북대화를 제안하십시요.
지금 전쟁 고조의 구조는 북미간 적대관계입니다. 남북관계를 이 구조속에서 독립시켜 틀을 흔들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선도하는 일, 한국 정부가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책임에서 자유로운 새 정부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 첫길이 대통령 특사 파견입니다.

국민여러분!
이 땅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됩니다.
6.25의 참화를 기억하는 민족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 어떤 말도 전쟁을 합리화시킬 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국민평화기구를 만듭시다. 종교와 정당, 시민사회가 합심하여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여기 걸릴 우리의 표어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가 될 것입니다.


2013년 3월 11일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자리 9000개 늘렸다'는 대우조선, 대부분 비정규직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3/03/13 10:02
  • 수정일
    2013/03/13 10:0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현장편지] 박 대통령의 한국형 노사협력 모델은?

13.03.13 09:22l최종 업데이트 13.03.13 09:22l

 

 

지금 세계 조선업은 깊은 불황에 빠져 있습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로 인해 전 세계 물동량이 급감하고, 유럽과 미국 선주사들의 수주 계약 해지로 국내 선박업계도 위기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2012년 국내 조선업체 수주량은 750만 CGT로 2008년 대비 41%로 줄어들었고, 수주잔량 역시 2008년에 비해 57%로 급감했습니다. 세계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의 영업이익률도 줄어들었습니다. 지난 6일에는 삼성중공업이 유럽 선주사로부터 수주한 네 척의 천연가스저장 선박의 계약이 해지되기도 했습니다.

중소 조선소의 사정은 더욱 심각합니다. 조선경기 침체로 허덕이던 세코중공업·삼호조선·세광중공업은 2011~2012년 청산했고, 신아SB·21세기조선 등 중소조선소는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조선강국 한국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1년 새 정규직 900명... 사내하청은 8200명 증가

<서울경제>는 지난 3월 7일, '서프라이즈! 대우조선해양, 일자리 1년 새 9000개 창출'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 인터넷 서울경제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한반도 남쪽 끝 거제 옥포만에 있는 대우조선해양이 지난 1년 동안 9000여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주목받고 있다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서울경제>는 지난 7일치 신문 1면에 '서프라이즈! 대우조선해양, 일자리 1년 새 9000개 창출'이라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대우해양조선의 핵심 사업은 컨테이너선 등 일반 상선에서 해양플랜트로 이동했습니다. 한 척당 100~200명의 노동자가 투입되는 일반 상선에 비해 대형 해양플랜트 작업에는 10배가 넘는 2500명 정도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대우조선해양 직원은 지난 1년 사이에 정규직 노동자 900명, 사내하청 노동자 8200명 등 총 9100명이 늘어 정규직 1만3200명에 사내하청 2만7300명을 합쳐 총 4만500명이 됐습니다.

이는 지난 1년 사이 새롭게 창출한 일자리의 90%는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라는 것이며, 현재 대우조선해양에서 일하는 사무직·기술직·생산직 노동자 4만500명 중에서 67.4%가 사내하청 노동자라는 뜻입니다.

사내하청 노동자가 원청의 '인력'이라고요?

'세계 초인류 조선해양 전문기업'이라는 대양조선해양은 자사 인력 규모를 3만여 명으로 밝혔습니다.
ⓒ 인터넷갈무리

관련사진보기


대우조선해양은 누리집을 통해 자사를 '세계 초인류 조선해양 전문기업'이라고 소개하며 '인력 3만여 명(협력사 포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년 사이에 늘어난 9100명이 포함되지 않았거나, 물량팀과 일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숫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우조선해양 자신들이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고,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로서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당당히(?) '인력'에 포함시켰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으로 두 차례나 판정한 현대자동차나, 지난 2월 28일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으로 판결한 GM대우차, 노동부가 불법파견으로 판정한 이마트 모두 불법파견을 피하기 위해 사내하청 노동자를 자신들의 '직원'이나 '인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직원으로 표현한 이유가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서였을까요?

해양플랜트 기능직 노동자 10명 중 9명 사내하청

한국조선협회의 <조선소별 인력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의 2011년 말 기준 사내하청 노동자는 1만5500명이며, 전체 직원은 2만7201명입니다. 여기에 사내하청 노동자 8200명, 정규직 900명이 늘어났다고 하면 사내하청 노동자는 2만3700명, 전체 직원은 3만6301명이 됩니다. <서울경제> 기사와는 대략 4000명 가량 차이가 납니다.

이 인원 차이는 물량팀 때문으로 보입니다. 파워공 등 일부 고숙련 노동자 중심으로 활용됐던 물량팀이 다단계 하도급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취부·용접·사상 등 선박 건조 거의 대부분의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현재 하청업체당 1개 이상의 물량팀이 활용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우조선해양의 사내하청 노동자 현황을 보면 충격적입니다. 기능직(생산직) 노동자의 68.2%가 정규직이 아닌 사내하청 노동자입니다. 즉 현장의 노동자 10명 중 7명이 비정규직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해양플랜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 노동자 10명 중 9명이 사내하청 노동자입니다. 사실상 '비정규직 공장'이라는 것입니다.

'해양플랜트 100억 달러 수주' 이면에 깔린 그림자

지난해 대우조선은 세계 조선업계 처음으로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100억 달러 이상 수주해 조선업계 수주실적 1위를 달성했습니다. 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해체선 등 현재 옥포조선소에는 모두 아홉 기의 해양플랜트 건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아홉 기의 해양플랜트 건조작업에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투입돼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우조선해양이 새로 뽑은 정규직 노동자 900명은 대부분 기술직 엔지니어이며, 생산직 노동자는 사내하청과 물량팀으로 해양플랜트를 건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우조선해양 고재호 사장은 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해양플랜트는 선가가 일반상선의 10배나 되며 투입되는 인원도 10배가 넘는다"며 "이를 통해 회사의 이익증대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 화두인 고용창출에도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해양플랜트를 통한 대우조선해양의 고용창출은 비정규직에 의해 이뤄지며,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통해 회사의 이익을 증대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주가 늘어나면 사내하청을 늘렸다가 건조작업이 끝나거나 수주가 줄면 비정규직을 자르는 게 '고용창출에 크게 공헌'하는 것입니까?

비정규직이 떠받치는 한국 조선


대우조선해양뿐만 아닙니다. 선박건조 분야에서 기능직(생산직) 대비 현대중공업(66.3%)과 삼성중공업(63.9%)의 사내하청 비율은 모두 60% 이상이며, 현대삼호중공업은 73.6%이고, STX조선은 무려 86.2%에 달합니다. 한국 조선소에서 배를 만드는 노동자의 70%는 정규직이 아닌 사내하청 노동자이며, 해양플랜트의 경우 80~90%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입니다.

배 만들다 죽어나가는 노동자도 비정규직

대우조선해양 옥포 조선소 NO.2 드라이도크. 사진은 지난 2월 24일 세계 최대 크기의 1만8000TEU 컨테이너선 진수식 당시.
ⓒ 대우조선해양

관련사진보기


지난해 11월 15일 오후 2시 10분, 5~6톤 짜리 선박 받침대 이동 작업을 하던 사내하청 노동자 박아무개(48)씨가 받침대 아래에 깔려 숨졌습니다.

이어 두 달 뒤인 1월 15일에는 오후 2시 30분 조선소 내 2도크에서 컨테이너선을 조립하던 사내하청 노동자 민아무개(23)씨가 325톤짜리 선박 블록이 머리 위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2월 7일 오후 2시 30분에는 대우조선해양 컨테이너선 위에서 선박건조작업을 하던 사내하청 노동자 전아무개(18)씨가 20여 미터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꽃다운 청춘이 배를 만들다 사라졌습니다.

3개월 동안 세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여졌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모두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 생산 공정의 70~90%를 사내하청 노동자로 채워 모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 조선강국 대한민국의 '쌩얼'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지난 2월 20일 경남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작업 공기를 맞추는 데 급급한 원청 대우조선해양이 충분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아 3명이 목숨을 잃었다"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고용노동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3월 14일 서울로 올라와 대우조선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할 예정입니다.

지난 2월 20일 경총을 방문한 박근혜 당선인에게 이희범 경총 회장은 "고용경직성이 강하다, 이 점이 일자리를 만드는 데 고려됐으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이희범 경총 회장은 정규직은 관리자들 뿐이고 모든 생산공정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운영해왔던 경남 창원의 STX중공업 회장입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한국형 노사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고용경직성에 대해서는 정규직·비정규직 모두 입장을 고려해서 해법을 찾자"고 말했습니다.

전국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습니다. 일자리를 늘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형 노사협력 모델이 죽음의 조선소 대우조선해양입니까. 생산공정이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로 운영되는 비정규직 조선소입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작성한 박점규 기자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전 금속노조 비정규국장입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 <레디앙> <참세상>에도 송고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 군종신부는 '괘씸죄 사상검증' 미국은 '명예훈장'


 

 

 


한국 군대는 군종장교라는 특수병과가 있습니다. 각 종교 전공자들이 군에 복무하면서 군대 내에서 군인들의 종교 활동을 돕거나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미사와 예배, 법회를 진행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가장 숫자가 많은 기독교 군종장교들은 경쟁률이 높아 탈락자가 많지만, 천주교 군종신부는 탈락자가 거의 없습니다.

군종신부의 탈락이 없는 이유는 천주교의 군종신부는 군 복무를 이미 마친 사람들이 교구의 추천을 받아 군종신부 면접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군종신부 면접 과정에서 신부 3명이 탈락했습니다. 이들 신부 3명이 탈락한 이유는 국방부가 제시한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종신부 파견 이후 처음으로 면접에서 탈락한 사건'

이번에 군종신부에 지원한 사람은 총 9명이고, 이들은 면접 당일이었던 1월 31일 신체검사를 거쳐 5명과 4명으로 나뉘어 면접을 치렀습니다. 이들 중 탈락한 신부 3명이 국방부로부터 받은 '사상검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탈락한 신부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군종신부 후보자는 "해군기지는 내용보다 이행 과정이 잘못됐다. 잘못된 과정으로 사람들이 아파하는데,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가?"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면접에 참여한 신부들은 "연평도 포격"에 대한 면접과 "천안함 사건"에 대한 서면 질의도 함께 받았습니다. 당시 신부들은 "분단국가의 60년 응어리가 곪아 터진 것이다. 사제 입장에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친 대답을 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비슷하게 했는데, 이에 대해 면접관이 " 신부들의 답변이 다 같다,다른 신부들도 그런가?"라고 물었고, 이에 신부는 "이념적인 질문이 사목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군종장교이지만 군대 내의 특수성 때문에 분명 이들에게 안보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종교를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해군기지 건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질문 그 자체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종교인의 가장 큰 화두이자 평생 짊어져야 할 종교의 본질인데, 그것을 종교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왜곡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군종신부 후보자들이 면접에서 탈락한 이유는 면접관으로 참관한 영관급 장교들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군종이 아닌 일반장교들은 2012년 선발부터 면접관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김관진 국방장관이 지난 해 "군종장교를 포함한 모든 장교들의 국가관을 확실하게 검증하라"고 지시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이번에 탈락한 군종신부 후보자는 광주,대구,안동교구의 신부들이었는데, 이들은 지난 1월31일과 2월1일 선배 군종신부와 사무국을 통해 불합격 사실을 전달받았습니다.

 

 

 


탈락한 신부들의 탈락 사유를 보면 A 신부는 '국가안보의식에 현격한 문제가 있다'였고, B신부는 해당교구 사무처를 통해 '괘씸죄'때문이었다고 전달받았다고 합니다. C 신부는 자신의 탈락원인이 되었다는 답변 내용이 아예 '자신이 직접 받지도 않은 질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탈락한 신부들은 "비록 군인의 신분이지만, 사제로서 파견되는 이들에게 사목과 관계없는 시국사건에 대한 질문을 하고, 답변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요구,사상검증을 시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천주교에 대한 괘씸죄'

천주교 군종신부들은 군종신부 파견이후 한 번도 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탈락했던 이유는 바로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천주교 신부들의 활동 때문입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문정현 신부가 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성체가 훼손된 사건.

 


천주교의 군종신부들은 신학교 시절 이미 군 복무를 마친 예비역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군인의 개념보다 일정 기간 군대에서 봉사하는 사제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 편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대해 해군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면접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군종신부 후보자:정책 자체보다는 이행 과정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자연과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지 모르겠다.



군종신부 후보자들은 아무리 군종신부로 임관할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약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사] - 제주 강정마을에서 짓밟힌 '성체'에 담긴 의미

전투장교와 군종장교는 엄연히 하는 일이 다릅니다. '전투장교'는 용감하게 전투를 이끄는 사람이고, '군종장교'는 상처받고 고통받는 군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투장교와 같은 역할을 강요하는 것은 '사상검증'의 무차별적인 잣대를 통해 아예 종교의 사상까지도 검증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전장의 예수, 미국 군인 최고 훈장을 받다'

한국에서 군종신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줬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에밀 카폰 신부입니다. 1916년 캔자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에밀 카폰은 1940년 사제품(신부)을 받고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미 육군 제8기병 연대 소속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에밀 카폰 신부가 전쟁 중에 벌판에서 병사들과 미사를 드리고 있다. 출처:BBC

 


전투중에 부상병을 구출해 동성훈장을 받았던 에밀 카폰 신부는 제8기병 연대가 원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자, 철수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는 상처를 입지 않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부상병과 함께 남아 있다가 포로로 잡혀 중공군 관할 평안북도 벽동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포로 생활 중 에밀 카폰 신부는 다리에 혈전이 생기고 한쪽 눈이 세균에 감염돼 고통 속에 있었지만, 수용소에서도 부상자들의 옷을 빨며 그들을 도왔고, 음식이 부족한 포로들을 위해 감자와 소금,곡물 등을 훔쳐 그들을 도와줬습니다. 그러다 결국 이질과 폐렴에 시달리다 35세의 나이에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미국은 에밀 카폰 신부의 이런 희생과 박애 정신을 높이 사 4월 11일 미 군인 최고의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관하는 추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영화 메리크리스마스의 포스터

 


1차 세계대전의 실화를 다룬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에는 독일,프랑스.영국군이 성탄전야에 전투를 멈추고 함께 비무장지대에 모입니다. 이들은 파머 신부가 집전하는 크리스마스 미사에서 평화를 기도하며 '아멘'을 외칩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전투를 통해 적을 살상하고 이기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성을 잃고 짐승이 되지 않도록 종교가 그들을 막아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 군종장교가 있고, 종교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사상검증'이라는 이유로 신부에게 종교를 탄압하는 행위는 일제강점기에 천황폐하를 위해 신사참배를 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초코파이 군대편 광고

 


에밀 카폰 신부가 전투를 잘해서 미 군인 최고의 '명예 훈장'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해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도 군종신부에게 박애와 희생의 '사랑'을 강요해야지, '사상'을 검증해서는 안 됩니다.

초코파이 하나 먹기 위해 참여하는 종교활동이 힘든 군생활에서 유일한 낙이 되는 고통받은 군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영역까지 짓밟는 대한민국 군대가 되지 않기를 기도해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재미동포들, 미국의 전쟁연습 반대시위 뉴욕서 벌여

 

 

 

유엔본부앞 함성 “키리졸브 규탄한다!”
 
재미동포들, 미국의 전쟁연습 반대시위 뉴욕서 벌여
 
이동원 기자
기사입력: 2013/03/12 [22:07] 최종편집: ⓒ 자주민보
 
 

11일 낮 12시(미 동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 유엔본부 앞에서 북을 겨냥한 미국의 대북 전쟁연습을 반대,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뉴욕 등지에 거주하는 재미동포들이 주최한 이번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파괴하고 전쟁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대북 적대정책의 산물인 독수리 및 키리졸브 연습 등의 대북 전쟁연습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근본적 해결책으로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 등을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또한 “대북제재 결의 채택을 주도한 미국 오바마 정부와 미국의 주도에 따라 결의안을 채택한 유엔 안보리 성원국들을 규탄”했다.

이번 시위는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대표위원장 신필영) 회원들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성원과 개별 인사들이 참가했다.

한편 미국의 전쟁연습 반대 및 규탄 시위는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준비 중인데, 16일(현지시각)에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 백악관 앞에서, 17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 11일 낮 12시(현지시각) 뉴욕 맨해튼의 유엔본부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참가자들 © 6.15뉴욕위원회
▲ 한 참가자가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 6.15뉴욕위원회
▲ 유엔본부 앞에서 행진하고 있는 참가자들 © 6.15뉴욕위원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통정권’유신부활을 꿈꾸나?? ‘과다노출’ 범칙금 5만원!!

 

희망의 새 시대, 제2의 한강의 기적?
 
‘박통정권’유신부활을 꿈꾸나…‘과다노출’ 범칙금 5만원
 
耽讀 | 등록:2013-03-12 10:23:05 | 최종:2013-03-12 10:32: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바야흐로 곳곳에서 유신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 21일 대통령직인수위는 국민에게 준법교육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140개 국정과제 중 하나인 ‘민주시민의식과 준법의식 함양’은 독재자 박정희가 지난 1968년 12월 5일 반포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이었습니다. 나라가 국민을 교육하겠다는 발상은 전체주의 다름 아닙니다.


국민준법교육, 제2새마을운동, 제2 한강기적…3공 시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 직후 회견에서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의 신화를 만들어, 국민 모두가 먹고사는 것 걱정하지 않고 청년들이 즐겁게 출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밝혔습니다. ‘잘살아보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971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해 전국에 보급한 노래 제목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1월 16일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농어촌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주민 역량을 결집해 마을 발전을 선도해나갈 수 있도록 2011년부터 추진 중인 ‘우리 농어촌 운동’을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확대 추진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달 4일 충청지역 국회의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새마을 운동을 국민 정신운동으로 승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는 박정희 국가기록원동영상 갈무리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민 여러분과 함께 희망의 새 시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위대한 도전에 나서고자 한다”며 “국민 개개인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그 국력을 모든 국민이 함께 향유하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라고 했습니다. 제2한강기적은 박정희 추종자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한강의 기적 운운은 박 대통령이 3공 시대로 회귀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윤여준> 2회 ‘취임사로 살펴본 박근혜 정부의 오늘과 미래’에서 “ ‘제2 한강의 기적’, ‘하면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 3공 때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박 대통령은 3공때 패러다임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럼 결국 그런 국정운영 패러다임이 시대의 흐름과 부딪히게 마련이고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라고 비판했었습니다.


과다노출 처벌…유신시대 미니스커트 단속 부활인가?

▲ 1973년 3월 10일 파출소에 잡혀 온 여성의 치마 길이가 단속 기준인 ‘무릎 위 17cm’를 넘었는지를 경찰관이 자로 재고 있다. 위반하면 길에서 팻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다노출’이 부활하고, 지문채취검지도 경범죄로 처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박근혜 정부 첫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과다노출 ▲지문채취 불응 ▲특정 단체 가입 강요 ▲무임승차 ▲무전취식을 하다가 적발되면 범칙금 5만원을 내야 합니다. 이 가운데 과도노출은 유신 선포 직후인 1973년 경범죄 단속대상으로 포함됐다가 미니스커트에 대한 자의적 단속 등이 논란을 빚으면서 유신시대 종료뒤 폐지됐던 조항입니다. 특히 지문채취 불응에 대한 범칙금 부과는 새로 신설되는 것으로, 인권단체들이 인권침해 우려를 이유로 반대해온 조항입니다.

과다노출하면 범칙금 5만원을 내는 것은 유신시대 미니스커트 단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니스커트는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10월유신’ 이듬해인 1973년 3월 10일 ‘개정 경범죄 처벌법’은 경찰에게 대나무 자를 손에 쥐게 해 줬습니다. 경찰은 여성 허벅지에 대나무 자를 댔습니다. 무릎위 17cm가 넘으면 단속돼 길에서 “긴 치마 입으세요.” 팻말을 들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단속은 미니스커트만 아니었습니다. 경찰은 ‘장발장’(장발청년)을 잡아 머리 위에 ‘고속도로’를 냈습니다. 예를 공직사회도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구청장이 각 동사무소를 순시할 때면 수행하는 총무과장의 휴대품에 가위는 필수품이었습니다. 소속 직원의 머리가 길다고 구청장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총무과장은 자의든 타의든 직원의 머리에 고속도로를 냈습니다. 역에서는 경찰이 퇴폐향락풍조를 추방한다는 명목으로, 놀러 가는 청년들의 기타를 압수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 유신시대…단속과 금지 시대였다

▲ 장발단속. 머리카락이 귀를 덮으면 위반이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렸다.

유신시대를 한 마디로 규정하면 ‘금지의 시대’였습니다. 문화·예술·출판에 대한 각종 심의와 검열 제도를 두어 수많은 금지곡과 금서들을 쏟아냈습니다. 독재자 박정희는 1975년 모든 대중가요를 재심사하여 225곡을 금지곡으로 묶었으니 부를 노래가 없었습니다. <아침이슬>은 대학생들이 집회 때 부른다는 이유로, <행복의 나라로>는 행복한 나라로 가자면 대한민국은 불행한 나라냐는 이유로, <거짓말이야>는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 따위로 금지곡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 <왜 불러>, <고래사냥>도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지은 노래는 교과서까지 실렸습니다. <나의조국>입니다.


박정희 <나의조국> “후손에게 물려주세”, 학생들 “큰딸에게 물려주세”로 개사

1.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 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

2.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조상들의 피땀 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 모두 정성 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3.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정신을/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영광된 새 조국(?새 누리)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린 건전가요 < 나의조국 >

‘나의 조국’은 1학년 1학기 음악교과서에 실렸습니다. <나의조국>은 전형적인 일본 군가풍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일본군 출신임을 보여준 노래입니다. 왜색이라고 금지했던 곡들이 많았는데 왜색을 따진다면 <나의조국>이야 말로 가장 앞장선 노래입니다. <나의 조국>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인 <새마을노래>와 함께 박정희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유신시대 내내 학교와 직장에서부르게 했으며, 매일 방송이 시작될 때 애국가 다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술집에서 <나의 조국>을 개사하여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10월 유신 없었으면 이 나라 망했겠네 길이길이보전하여 큰딸에게 물려주세”라고 불렀습니다.

이게 독재자 박정희가 ‘통치’한 유신시대입니다. 유신시대가 얼마나 금지와 탄압시대였는지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문: 다음 중 유신 시절 시행된 긴급조치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①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을 제안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위와 같은 규정(긴급조치)을 비방한 자도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③ 학생이 부당하게 출석이나 수업 또는 시험을 거부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
④ 고려대 교내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모두 정답입니다. 이게 유신시대입니다. 이런 유신을 바란다면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다시는 유신이 부활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그 유신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듯합니다. 하나둘씩 박정희시대 부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과다노출 경범죄 부활에 대해 경찰청 생활질서계 관계자는 “원래부터 없었던 조항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즉결심판 대상을 통보처분으로 확대 포함한 것이 이번 시행령의 핵심인데 관련 언론보도가 시민들의 오해를 살 수 있게 나가고 있다”며 유신시대 미니스커트 단속과 연결시키는 것을 반박했습니다.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

하지만, 최영일 대중문화평론가는 “대중들은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살아왔고 과다노출과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사회문화적 표현을 해왔다”면서 “경찰의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단속의 공포심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을 애써 정부와 경찰이 촉발시키면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고 <미디어오늘>은 보도했습니다.

국민준법교육과 제2새마을운동, 제2한강기적같은 박정희 업적을 중심으로 한 국민운동과 과다노출 범칙금같은 시민 생활과 직결되는 것부터. 바야흐로 유신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