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철새 지목 방역활동, AI확산 부추겨”

AI 관련 국제TF “철새 지목 방역활동, AI확산 부추겨”
“야생조류서 고병원성 발견? 역학적 증거 부족”…“습지 방역은 생태계 파괴”
 
입력 : 2014-02-01  15:27:46   노출 : 2014.02.01  16:22:56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달 28일 최근 국내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는 야생 철새로부터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같은 날 AI 관련 국제협력기구는 “야생조류를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지목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류인플루엔자와 야생조류 학술대책위원회(Scientific Task Force on Avian Influenza and Wild Birds)는 이날 한국의 가금류와 야생조류에서 발생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8)에 관한 성명서를 내고 “야생조류가 고병원성 AI의 근원지라는 증거는 현재까지 없어 이들을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아닌 피해자로 간주해야 한다”며 “야생조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실제 근원을 벗어나 효율적인 질병 통제라고 할 수 없으며, 생물다양성보전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지난달 16일 전북 고창에서 고병원성 AI H5N8 발생이 처음 보고된 후 오리와 닭의 가금류 농장에서 집단 살처분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야생조류에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것은 보통 가금류 농장과 유통과정에서 저병원성 바이러스가 변이 과정을 통해 고병원성으로 변환하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며 “농장 간 가금류와 가금류 제품, 사람과 장비의 이동뿐만 아니라 오염물질의 배출 등으로 인해 가금류와 야생조류에 바이러스가 확산됐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대책위는 “비록 많은 사람이 AI 바이러스를 야생조류가 전파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 야생조류 감시활동에서는 야생조류에서 H5N8이 발견된 적이 없고, 이 주장은 지금까지 역학적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았다”며 “가창오리는 수십만 마리가 군집생활을 하므로 만약 이 바이러스가 철새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더 높은 사망률이 이전에 이미 발생했을 텐데, 지난가을에 도착한 가창오리에선 질병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 조류인플루엔자(AI) 관련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 공식홈페이지
 
한국 정부에서 AI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철새 도래지에 방역작업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대책위는 “야생조류를 보호하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금류 농장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방역 기간 동안 야생조류들이 서식하는 환경, 특히 습지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습지에 방역을 실시하는 것은 바이러스 확산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생태계에 해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책위는 “H5N1 고병원성 AI가 발생했을 때와 같이 바이러스 유입의 책임을 야생조류에게 전가하는 것은 AI 질병 확산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행동이고 효율적인 질병 통제 활동보다는 바이러스의 잠재적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언론과 학계, 동물보건단체들은 야생조류의 역할과 조류인플루엔자를 고려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하며,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야생조류를 바이러스의 근원지로 지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류인플루엔자와 야생조류 학술대책위원회는 국제연합환경계획(UNEP)과 이동성 종의 보존에 관한 협약(CMS),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와 함께 AI와 야생조류 간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AI가 야생조류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설립된 국제협력기구이다.
 
강성원 기자의 트위터를 팔로우 하세요. sejouri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여수 기름유출로 주민들 두통과 구토, 어지럼증 호소

[현장] GS칼텍스 유출된 기름성분 인체 피해 여부 빨리 밝혀야

14.02.01 17:12l최종 업데이트 14.02.01 21:02l
유성애(findhope) 황주찬(yshjc)

 

 

[2신 : 1일 오후 8시 40분]

신덕마을 주민들, 기름유출 방제 작업 일시 중단 
 
기사 관련 사진
▲  1일 오후 5시, 여수해양경찰서 회의실에서 김상배 서장이 '여수산단 낙포각 원유 2부두 기름 해상유출'과 관련해서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1일 오후 5시, 여수해양경찰서 회의실에서 김상배 서장이 '여수산단 낙포각 원유 2부두 기름 해상유출'과 관련하여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김 서장은 브리핑에서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법적 조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김 서장은 "사고 경위 파악 및 안전관리소홀 여부를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김 서장은 해상 오염에 대해 "묘도에서 국동항까지는 엷은 유막이 분포해 있고, 묘도에서 오천동 앞 해상까지는 갈색 유막이 있으며, 낙포부두에서 모사금해수욕장까지는 엷은 갈색 유막과 검은색 기름띠가 10여 개소 정도 발견된다"고 말했습니다.

해안가 오염에 대해 "GS칼텍스에서부터 오일허브코리아와 신덕마을 해안가에 갈색 기름이 부분적으로 부착됐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김 서장은 기름 유출량과 유출된 물질 그리고 기름유출에 따른 피해액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복잡한 지휘체계 단순화 시켜라"
 
기사 관련 사진
▲  오후 5시, 삼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신덕마을 주민과 해양수산부 관계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특히, 가스 발생 여부에 대해서는 "GS칼텍스와 전문가 집단에 설명을 의뢰했다"며 "조만간 정확한 유출량이 밝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시간인 오후 5시, 삼일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신덕마을 주민과 해양수산부 관계자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민 대표 조현근 마을 이장은 "방제 작업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철수했다"며 "목숨 내놓고 작업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조 이장은 "관계기관이든 사고 회사든 주민들에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정확히 얘기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방제작업과 관련해서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복잡한 지휘체계를 단순화 시켜 달라"고 말했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김상일(삼일·묘도·주삼동 시의원) 의원은 "해상오염은 해경이 맡고 해안가 오염은 자치단체가 맡고 있어 사고 현장이 어수선하다"며 "최근 여수에 설치된 화학재난 합동방제센터내에서 해양오염 사고와 관련된 부서도 만들어 체계를 단일화 하는 방안도 고민하라"고 임송학 해양수산부 해양환경정책과 과장에게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에대해, 임송학 과장은 "주민들 의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신덕마을 주민들은 1일 오후 3시 30분부터 그동안 진행하던 오염 방제작업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기사수정: 1일 오후 6시 40분]
 
기사 관련 사진
▲ 침묵 신덕마을 현장회의에서 윤장관은 주민들에게 신속한 방제 작업과 피해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기름 냄새 때문에 마을 어르신 몇 분이 병원에 입원했다."
"설 명절이 어디 있나. 아이들은 모두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다."
"잊을 만하면 기름유출사고가 터지는데 환장하겠다."

여수 신덕마을 주민들이 또 다시 터진 기름유출사고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1일 오후 4시 50분께 마을주민 4명이 여수성심병원을 찾아가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 등을 호소했고 30분간의 문진을 거쳐 오심억제제와 두통완화제를 처방받았습니다.

1일 오후부터 마을주민들은 여수시 삼일동 주민센터에 모여 여수해양항만청 사고수습대책본부 관계자들과 만나 이번 기름유출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전남 여수 신덕마을 앞바다로 검은 기름이 밀려왔습니다. 싱가포르 국적 유조선(선박명:WU YI SAN, 278,585톤)이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 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 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원유가 바다로 유출돼 신덕마을까지 밀려왔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 충돌 싱가포르 국적 유조선(선박명:WU YI SAN, 278,585톤)이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 받았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여수 신덕마을은 GS칼텍스 원유2부두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50세대 700명이 살고 있는 조용한 어촌 마을입니다. 설을 맞아 마을을 찾은 가족들은 마을 앞바다로 밀려온 기름 때문에 정든 집을 급히 떠났습니다. 유출된 기름에서 올라오는 냄새로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는 사람까지 생겼기 때문입니다.
 
기사 관련 사진
▲ 신덕마을 신덕마을은 S칼텍스 원유2부두로부터 약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250세대 700명이 살고 있는 조용한 어촌 마을입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지난 31일에 이어 다음날인 2월 1일까지 마을 청년들과 어르신들은 온종일 바다에 나가 기름을 제거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자식들 세배도 못 받았습니다. 조현근 마을 이장은 "우리 마을은 설을 폐쇄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김민철 마을 청년회장은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며 "역한 기름 냄새와 가스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 방제 전남 여수 신덕마을 앞바다로 검은 기름이 밀려왔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기름유출 마을 청년들과 어르신들은 온종일 바다에 나가 기름을 제거했습니다. 자식들 세배도 못 받았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주승용 의원 "GS칼텍스, 인체 유해한 성분 없는지 빨리 밝혀라"

1일 오전 11시 30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과 주승용 국회의원 그리고 김충석 여수시장이 전남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윤 장관은 사고 발생 지점인 GS칼텍스 원유2부두와 기름 피해를 직접 입은 신덕마을을 둘러봤습니다.

신덕마을 현장회의에서 윤 장관은 주민들에게 신속한 방제 작업과 피해 조사를 약속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주승용 국회의원은 "GS칼텍스는 유출된 기름이 어떤 기름인지 밝혀야 한다"며 "원유라면 인체에 유해한 성분은 없는지 빨리 밝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 회의 2월 1일 오전 11시 30분,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과 주승용 국회의원 그리고 김충석 여수시장이 전남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기사 관련 사진
▲ 기름제거 마을 주민들이 기름제거에 나섰습니다. 간밤에 역한 기름냄새로 한숨도 못 잤습니다. 변변한 마스크도 없습니다. 인체에는 무해할까요?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또, 그는 "기름 확산을 막는 방제작업이 가장 중요하지만, 어떤 기름이 흘렀느냐에 따라 방제 방법도 달라진다"며 "방제 작업에 동원된 주민들이 두통을 호소하고 있는데 방제 작업시 어떤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인체 피해도 고려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31일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받아 발생한 기름은 조수 흐름에 따라 여수 신덕마을에서 부터 여수산단 앞바다에 위치한 묘도동을 휘감고 광양만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해경과 관계기관은 방제 작업과 사고 원인 및 기름 유출양을  파악중입니다. 

GS칼텍스(대표이사 허진수) 측은 이번 사고의 원인이 '운항 중 조작 미숙' 탓으로 보인다면서, 현장으로 인력 110여명을 급파하는 등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 광양만 GS칼텍스 원유2부두에 접안중 워크웨이(잔교) 배관을 들이받아 발생한 기름은 조수 흐름에 따라 여수 신덕마을에서 부터 여수산단 앞바다에 위치한 묘도동을 휘감고 광양만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 황주찬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MB 거쳐 박근혜 시대 맞은 ‘대안언론’ 어떻게 살고 있나

뉴스타파·국민TV 언론인 충원하고 TV개국 준비하며 확장세, 유튜브 플랫폼 한계…
1세대 대안언론 프레시안·오마이뉴스·미디어오늘 ‘악전고투’
 
입력 : 2014-01-29  15:20:01   노출 : 2014.02.01  12:34:19
정철운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2012년 1월 27일 노종면·이근행 등 해직언론인들은 역사적인 뉴스타파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이명박정부는 언론장악과 함께 ‘대안언론’이란 씨앗을 뿌리고 퇴장했다. 박근혜정부도 대안언론 씨앗을 키우고 있다. 박근혜정부 첫 해인 2013년 4월 1일 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라디오방송이 개국했다. 대선 전후로 팩트TV·고발뉴스 등 매체들이 활기를 띄었다. 시민참여방송 RTV는 케이블채널 531번에서 뉴스타파와 고발뉴스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탄생한 대안언론은 광고에 의존하지 않고 후원이나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수익모델을 찾아 정부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한 공통점이 있다. 지난해 탐사저널리즘센터로 새롭게 태어난 비영리법인 뉴스타파와 오는 4월 1일 TV개국을 준비 중인 국민TV가 대표적인 대안언론이다. 이들 언론사가 KBS·MBC·YTN 등 공정성이 무너진 공영방송을 대체할 수 있을까.

탐사저널리즘 뉴스타파, 잘 만드는 데 보는 사람 적어
 
   
▲ 뉴스타파 제작진 ⓒ 뉴스타파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내 제작단으로 출발해 비영리 탐사보도전문매체로 진화한 뉴스타파는 ‘한국형 프로퍼블리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성장했다. 지난해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두환의 차남 전재국씨 등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로 비자금을 빼돌린 이들을 공개해 전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뉴스타파는 지상파뉴스에 등장했고, 언론인들이 인정하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뉴스타파 성원 32명의 중심은 공영방송 출신이다. KBS 탐사보도팀장 경력의 김용진 대표를 비롯해 최경영·김경래·박중석 기자 등 KBS 출신과 YTN 출신 정유신·권석재·최기훈 기자, <PD수첩>의 상징이었던 최승호 MBC PD와 이근행 PD가 뉴스타파를 이끌고 있다. 처음엔 해직언론인 위주에서 점차 사표를 내고 자발적으로 합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EBS에 사표를 내고 객원 PD로 참여 중인 김진혁 PD도 그 중 한명이다.

뉴스타파의 플랫폼은 홈페이지·유튜브·팟캐스트·포털사이트·RTV다. 회원수는 31,994명이다. 회원수는 큰 감소 없이 유지되는 추세다. 평균을 내긴 어렵지만 회원 1명당 1만 원 정도의 회비를 내고 있다. 올해는 회원들을 위해 달력을 만들어 배포했다. 후원회비 외의 새로운 수익모델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운영상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광고자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이뤘다.

2월 중에는 경력기자를 충원한다.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우리의 강점이 데이터분석인데, 워낙 다양하고 방대한 데이터가 많아 인력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올해는 예산과 정책분야에도 집중할 계획”이라고 설명한 뒤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제에 집중해 국민의 알권리를 확장시키고 탐사보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혔다.

뉴스타파의 고민은 확장성이다. 총선·대선이 있던 시기에 비해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나오지 않는다. 뉴스타파를 지지하는 언론인 중에서도 뉴스타파를 챙겨보는 이는 소수이며 챙겨보더라도 끝까지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다. 그러나 뉴스타파 현재 형식을 바꿀 계획은 없다. 김용진 대표는 “웹사이트를 기본 플랫폼으로 소셜미디어 기반을 더 다져서 확장성을 넓힐 것”이라고 전했다. SBS취재파일 방식의 취재후기를 늘리는 등 텍스트 기사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국민TV 뉴스방송, 노종면과 협동조합의 도전
 
   
▲ 국민 TV 개국광고 ⓒ 국민 TV
 
1월 28일 현재 미디어협동조합의 조합원은 2만 1144명, TV개국을 위한 출자금은 35억 6800만원이다. 회원이 정체된 뉴스타파와 달리 조합원이 조금씩이라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TV개국에 대한 기대감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 4월 1일 개국한 라디오방송의 경우 인기 프로그램은 20만 명 이상이 청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민 국민TV PD는 “라디오방송은 미디어협동조합의 비전을 보여주기 위한 모델하우스”라고 설명했다.

국민TV는 지난해 하반기 노종면 전 YTN 해직기자를 영입하며 본격적인 TV개국 준비에 나섰다. 드디어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노종면 기자는 지난해 11월부터 국민TV 개국TF 단장을 맡았다. 노종면 기자는 뉴스타파에 이어 국민TV에서도 ‘개국공신’을 맡았다. 국민TV는 지난해 11월 20여명의 신규인력을 채용했으며, 현재 확보한 TV제작인력은 22명이다. 오는 4월 1일부터 1시간 분량의 데일리생방송뉴스를 구상하고 있으며 구상안은 2월 중순 조합원설명회 자리에서 공개된다.

노종면 단장은 “적은 자본으로도 방송뉴스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노종면 단장은 뉴스전문채널 출신으로 YTN <돌발영상>을 성공시킨 전례가 있어 뉴스타파·JTBC메인뉴스와 차별화된 콘텐츠를 내놓을 것이란 기대가 높다. 이와 관련 노 단장은 “상식과 합리라는 기조 아래 출입처 제도 등 기존 관행은 아예 지울 생각”이라고 밝혔다.

국민TV의 주요 플랫폼은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과 PC다. 국민TV 초기 논의됐던 셋톱박스에 의한 TV시청은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셋톱박스가 내장된 스마트TV시대가 오면 자연스럽게 유튜브 기반 콘텐츠도 TV속으로 진입할 것이란 설명이다.

박근혜 정부에선 케이블 진입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김용민 국민TV PD는 “JTBC뉴스와 CBS시사프로그램도 틈만 나면 편파적이라고 괴롭히는 상황에서 지상파나 케이블 진입이 가능하겠나. 당분간은 법외방송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김 PD는 “지상파 플랫폼의 벽을 뛰어넘을 스마트미디어의 환경이 점차 다가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안언론 1세대,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악전고투’

참여정부 시절 대안언론으로 성장했던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등은 네이버 뉴스캐스트체제에서 증가한 온라인광고수익으로 이명박 정부를 버텼지만 네이버 뉴스스탠드 도입 이후 온라인 트래픽이 급감하며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7월 주식회사를 없애고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조합원은 1월 현재 2600여명이다. 전체 운영비의 6분의 1 정도가 조합비로 충당되고 있다. 최근에는 독립언론네트워크를 설립해 지역 대안언론과 기사를 교류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만드는 온라인 웹진과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사업과 각종 강연도 계획 중이다.

이대희 프레시안 협동조합 팀장은 “현재 7개 지역신문과 네트워크 되어있다. 서울 중심의 낙하산저널리즘을 깨고 각 지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뉴스를 조합원에게 제공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밝혔다. 이대희 팀장은 “조합원들의 언론활동을 북돋우자는 취지에서 등장한 온라인웹진은 사이트 구축을 준비 중이며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할 것”이라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10만인 클럽’ 정기후원과 각종 강연·교육 사업 등으로 수익을 얻고 있으나 10만인 클럽의 경우 대선직후 늘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추세다. 1월 현재 10만인 클럽은 8200여명 수준이다. 오마이뉴스의 한 기자는 “진영논리가 강한 사람들이 10만인 클럽 후원을 많이 하는데 야당 비판기사를 쓰면 항의나 탈퇴가 이어진다”며 “후원으로 인해 오히려 기자들이 진영논리에 갇힐 우려도 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수익모델을 다각화하는 과정에서 최근 지자체로부터 무리한 용역사업을 받으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올해만 해도 ‘안양 시민 희망 아카데미’ 강연행사를 주최하며 안양시로부터 행사 위탁에 따른 1950만원의 지원비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양시에서 작성된 ‘2014년 언론사별 예산요구 현황’에 따르면 오마이뉴스는 ‘고양 누리길 종합 활성화 연구용역’ 사업 명목으로 5천만 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같은 모습은 광고수익 감소에 따라 자생적 생존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오늘도 최근 유료독자 ‘미오친구’서비스를 도입해 수입구조 다변화를 꾀하고 있으나 아직 해당사업을 본격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보수우파진영에서 주간 미디어오늘의 광고에 대한 견제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등 광고 수주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밖에도 2002년 야심차게 개국했던 시민참여방송 RTV(스카이라이프 가입자 대상 531번)는 2009년부터 한 해 20억수준의 방송발전기금 지원이 중단되고 공익채널선정에서도 탈락해 방송국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 2008년 40명 수준이었던 인력은 상근직원 2명으로 급감했다.

결국 관건은 콘텐츠… 플랫폼 확장과 수익모델 연구도

한국사회 언론지형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에서 위축된 언론자유를 대체하기 위해 대안언론이 성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시민들은 후원금과 조합 가입으로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인 열망으로는 대안언론이 공영방송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하기엔 난망한 상황이며 현실은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콘텐츠 소비가 이뤄질 뿐이다. 때문에 대안언론이 기성주류언론의 대체제가 되기 위해선 플랫폼 확장과 수익 증가에 대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MBC의 한 중견 시사교양PD는 “뉴스타파는 재원구조와 시청층에서 시스템적 완결성이 있어 미국의 프로퍼블리카처럼 잠재력이 있지만 유튜브 형식의 매체플랫폼으로 확장성을 확보하기에는 TV라는 장벽이 만만치 않다”고 평했으며, “국민TV는 인터넷방송 수준을 뛰어넘는 질적 전환문제에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 PD는 그러나 “대안언론을 바라보며 공영방송 구성원으로서 자괴감을 느낀다. 대안언론이 성장해 언론지형의 정상화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뉴스타파·국민TV등 대안언론의 전파범위는 안타까울 정도로 미약하다”고 전제한 뒤 “우선 대안언론사끼리 공조체제를 통해 취재의 깊이를 높이고 좋은소비 캠페인을 통해 진보적인 언론 가운데 한 곳을 구독·후원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대안언론이라면 단순히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콘텐츠의 품질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뉴스타파의 경우 1분 전후의 현장성 있는 리포트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대안방송의 현실 가능한 모델, PBS
최진봉 교수 “지역방송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면 전국방송 가능”

뉴스타파와 국민TV가 지상파로 진입하게 된다면, 롤 모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해외 비영리 저널리즘의 현황을 연구했던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대안적인 지상파 방송으로 미국 공영방송 PBS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PBS는 비영리 민간법인 공영방송사로 1970년 개국했다. 미국 전역에 있는 356개 지역 방송국을 통해 뉴스를 포함한 문화·어린이·교육·역사·사회 등 다양한 공익프로그램을 제작·편성하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비밀의 국가 북한>을 방영하며 한국에도 소개됐다. 시청률은 FOX 등 민영방송에 비해 낮지만 뉴스신뢰도는 민영방송보다 높다.  

 
   
▲ 미국공영방송 PBS ⓒ PBS
 
PBS는 광고방송이 금지되어 있으며 재원의 90%가 각종 기금과 지원금으로 충당된다. 2008년 말 기준 수입의 26%는 시청자들의 자발적 후원금이었다. 정부보조금은 30% 수준에서 부시정부 들어 10% 초반까지 감소했다. PBS 이사회는 35명으로, 공식적으로 정부인사는 없다. 최진봉 교수는 “주요 지역방송국의 대표들이 선발돼 이사회를 구성한다”며 “PBS가 공영방송이지만 정부가 관여하지 않는 배경은 높은 후원금 비중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미국 정부가 공영방송에 후원하면 비영리단체 후원과 동일한 소득공제 혜택을 주기 시작하며 후원금을 내는 비율이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PBS모델이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 교수는 “PBS시스템으로 가려면 지역마다 소출력 방송사들이 생겨나야 한다. 아마 10여명 안팎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지역방송들이 거미줄처럼 전국을 연결하게 되면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으면서 전국방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처음부터 큰 방송사를 만들기는 어렵다. 처음엔 소출력 방송으로 시작해 전국망을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할 당시의 사회적 열망처럼, 소출력 방송들을 기반으로 대안적인 공영방송 모델에 대한 열망을 모으면 ‘한국형 PBS’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최진봉 교수는 “뉴스타파와 국민TV처럼 인터넷·유튜브 플랫폼만 갖고 가는 경우 그들만의 리그에 봉착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PBS와 미국 공영라디오 NPR이 뉴스타파·국민TV와 다른 점은 지상파라는 사실이다. 대안미디어도 기성매체로 진입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플랫폼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한된 시청자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지배자들이 빼앗지 못한 희망, 설날

[한도숙 칼럼] 지배자들이 빼앗지 못한 희망, 설날

한도숙 한국농정신문 대표
입력 2014-01-29 14:44:20l수정 2014-01-31 13:09:22
 
 
 
 
 
 
 
 
 
 
 
 
 
 

기자 SNShttp://www.facebook.com/newsvop

 

설은 희망의 농사준비를 알리는 명절이다.

1895 년 갑오년 다음 해 을미개혁으로 설날은 없어졌다. 서양력을 공식화한 탓이다. 그러나 수천년을 내려온 문화와 풍습이 하루아침에 법령 하나로 사라질 것인가. 백성들은 관행대로 음력 1월 1일 설날을 챙겼다. 그도 그럴 것이 설날은 새해를 맞이하는 첫날이다. 그러나 양력으로는 1월 1일이 입춘과 한 달이나 떨어져 있다. 반면에 음력 1월 1일은 입춘절 전후로 들어 태양의 운행질서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농경사회에선 입춘절이 한해의 시작이 된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입춘절로부터 보름 정도 지나면 얼었던 땅이 녹고 푸릇한 싹들이 밀려 올라온다. 농사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 새해는 입춘절과 함께 하는 것이 순리지 싶다. 

일 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양력을 채용했다. 그것을 우리에게도 강요하다시피 한 것이다. 이후 을사늑약과 한일 병탄으로 설은 말 그대로 서러운 날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공동체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혼을 훼손하려 설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가래떡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차례를 지내지 못하도록 했다. 꼭 저 70년대 통일벼를 심으라며 공무원들이 재래 나락 모판을 밟아버린 것처럼 떡판을 밟아버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민족혼은 더욱더 설날을 강하게 기억하도록 만들고 소극적이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설날을 쇠기도 했다. 

해 방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서구의식으로 설을 복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민중들은 왜놈 설이라며 신정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가정의례준칙을 발표하고 설을 쇠지 못하도록 했다. 이른바 이중과세 금지였다. 없는 살림에 두 번씩 설을 쇠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며 경제발전에 매진하자는 것이었지만 당시 박정권의 존망은 식량 자급에 달려 있었다. 해서 한 톨의 양식도 아껴야만 정권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설 날은 정월 초하루이지만 보통 보름까지 설 기간으로 잡고 세시행사를 한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양도 많고 일을 하지 않으니 박정희는 그것을 바꿔보려 한 것이다. 많은 공무원 가족과 부유층이 신정을 쇠기도 했지만 신정은 설날을 대체할 수 없었다. 거대한 민족 문화의 뿌리는 잘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막 산업화가 시작 되며 고향을 등졌던 사람들이 구정이면 귀성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1969년인가로 기억되는 서울역 참사사건은 당시 설을 쇠러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설렘에 찬물을 뒤집어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때뿐 다음 해엔 더 많은 귀성객이 서울역을 메웠다. 

일 제가 뭐라던 박정희가 뭐라던 민중들은 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고향엔 어른이 계시고 자신의 삶의 근거가 있다. 거기서 설을 쇠어야만 그동안 유리된 채로 살아온 산업사회의 파편들이 공동체로 잠시나마 복귀해 위로받고 상처를 아물리게 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민속의 날인가로 설을 인정하다가 89년인가 설은 제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번 설에도 귀성으로 인한 교통대란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설 고향가는 KTX를 타러 이동하는 시민들

설연휴를 하루 앞둔 29일 오전 서울역에서 귀성객들이 고향으로 출발하는 KTX를 타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희망이 거론되지 못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설 날은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차례가 끝나면 성묘를 하거나 세배를 다닌다. 아이들이야 세뱃돈 욕심에 멀고 가까운 친척을 가리지 않는다. 가까운 이웃의 어른과 먼 곳의 친척까지도 보름 전까지 세배를 드린다. 그리고 연을 날린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연을 만들고 날린다. 지금은 다양한 연들이 개발되어 날리지만 예전에는 주로 방패연이었다. 방패연은 역사가 길다. 이미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며 김유신 장군도 연을 이용해 신호했다고 하니 군사용으로 개발되어 민간 풍속으로 정착된 것 같다.

세 시풍속은 다양하다. 연날리기, 윷놀이, 여자들은 널뛰기 등 공동체 놀이가 중심이다. 우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린다. 차례를 지낸 후에 떡국을 반드시 먹었는데 떡국은 꿩고기를 넣는 것이 정석이다. 꿩이 없으면 닭고기를 넣는데 ‘꿩대신닭’이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하얀 가래떡을 동그랗게 썰어 넣어 엽전을 연상케 했다. 돈이 많이 들어오라는 기복 풍습이다. 세배는 웃어른에 대한 예의다. 세배를 받은 웃어른은 세뱃돈을 나누어 줬는데 이 또 한 돈이 많이 생기라는 의미의 복돈이다. 글을 아는 어른들은 토정비결을 봐주었다. 올해 생기게 될 운세를 점쳐주는 것으로 아녀자들에겐 인기 만점이라 너도나도 그 어른께 세배 드리러 간다. 

토 정비결은 아산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이 지은 것으로 일종의 예언서이다. 여기엔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 등을 숫자로 따지고 주역(周易)의 음양설(陰陽說)에 근거하여 일 년의 신수를 보는 것이다. 지금도 토정비결은 한해 운세를 점치는 대중적인 놀이처럼 유행하고 있다. 토정 선생은 마포 근처에 흙으로 정자를 짓고 기거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호이다. 토정 선생은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는 모습을 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유도하기 위해 비결을 지어 퍼트린 것이다. 

개 인의 운세를 토정비결이 점쳤다고 한다면 한해 해운은 무엇으로 아는가. 그것은 책력에 나와 있다. 해마다 운세가 다른 것은 천지간의 조화다. 지구의 움직임, 별들의 흐름, 태양의 변화들을 종합하여 나타낸 것이다. 농경시대엔 이런 천지간의 조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농민들에게 해운을 미리 알림으로서 대비하고 정치적으로는 이데올로기화하여 근면한 생활을 유도했음이다. 

임 금이 신하에게 설날 새 달력을 나누어주면 그것으로 해운을 점치고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것은 토정비결을 보는 개인의 행불행을 점치는 것보다 먼저였다. 세상이 변해 산업사회가 되다보니 해운은 간데없고 토정비결만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선지 곳곳에 점집이 늘어가는 추세다. 미신이라고 터부시하던 60년대를 능가하는 점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다.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다. 점집들이 호황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출마를 예정하는 사람들이 본인은 아닐지라도 배우자나 가족들이 운세를 보기 위해 점집 문턱을 닳게 할 것이 분명하다. 

사 회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점치는 양반들도 이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해운까지 참고한다면 개인의 행불행이 사주팔자에만 묶이지 않고 사회 전체의 상황과 천지간의 조화까지도 담아냄으로써 전체 사회의 행복도 미리 점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다. 

자 그럼 올해 태세를 짚어보도록 하자. 올해는 용이 세 마리다. 말이 다섯 마리, 소가 열두 마리다. 거기에 신(辛)일이 열흘이나 된다. 그럼 각자의 역할을 보자. 용은 치수를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용이 많으면 비가 많다고 풀이한다. 말은 수확물을 운반을 담당한다. 말이 수가 많을수록 수확물이 많다고 본다. 소는 경전을 담당한다. 소가 많을수록 더 많은 밭을 갈 수 있다. 신일은 모든 씨받이 생명의 수분수정이 가능한 날수다. 수분일이 길수록 열매가 많이 달린다고 해석한다. 

독 자들께서도 해석해 보시라. 이 네가지 경우의 수가 서로 견제하면서 해운이 결정 나기에 해석 여하에 따라 해운을 잘못 짚을 수도 있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욕구와 희망을 정서적으로 아우르고 극대화하는 날이 어느 민족에게나 있었을까. 세시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농사를 제대로 지어보려는 민중들의 염원이 녹아들어 있다.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고 대사이기에 설을 통해 강조하고 다짐을 두고 소원했다. 

이 렇듯 설날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세우는 날이었다. 모든 새로 만든 것으로 조상에게 예의를 차리고 또한 동고동락의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 먹고 서로에게 희망의 덕담을 나누어주고 하는 세시풍속의 모든 것이 새로운 희망들을 만들어 내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희망의 장을 가두고 이중과세하지 말자는 표어와 정책으로 눌러버린 지배자들의 놀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 보인다. 

농 사가 죽어버린 우리에겐 지금 희망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마당이라는 구조 공동체가 없어져 버렸다. 희망이 거론되지 못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입춘절 양지 바른 곳에서 흙을 밀고 올라온 푸릇한 기운들을 보고 희망을 만들어 세웠던 설. 우리가 시급히 복원해야 할 희망의 마당은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농업의 새로운 판짜기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저 갑오년의 농민들이 희망을 갈구하며 일어선 것처럼 우리의 입으로 희망을 말할 수 있도록 판짜기를 해야 한다. 이번 설은 그런 설이 되어야 한다. 설, 잘들 쇠시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간첩 김낙중, 사형선고만 다섯 번…후회하지 않는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강천(剛泉) 김낙중 "나는 여전히 '무기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31 07:33:53

 

 

 

 

 

 

이쪽은 착한 편, 저쪽은 나쁜 편이라 했다. 이 선을 분명 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한 녀석이 있다. 한 대 콕 쥐어박아도 소용이 없다. 동무들도 그 존재가 귀찮다. 여러 번의 지적에도 변함없는 걸 보니 저 녀석은 문제아가 틀림없다. 순결한 우리, 바닥에서 돌멩이를 찾아 꼭 쥐어라. 저 선을 넘은 더러운 아이에게 힘껏 던져야 한다.  
 
아이는 전쟁 가운데 다시 전쟁이 나던 시절 태어났다. 화약 냄새를 맡으며 그것이 원래의 풍경인 듯 자라난다. 청소년 시절 폐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깊은 의문에 빠진다. 부처님에게 자비를, 예수님에게 사랑을, 공자님에게 인을 배운다.

 

"일요일 아침엔 새문안 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를 들었다.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나는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을 죽이기를 요청받았고, 9.28 수복 후 국군 치하에서 나는 다시 국군에 나가서 인민군 죽이기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에 나간 중학교 동창들을 죽여야 되는지? 또 나는 왜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고향 국민학교 동창 친구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일단락된 후 모두가 북진 통일을 외칠 때 이제 청년이 된 소년은 혼자서 평화를 외친다. 그가 배운 것은, 그가 지켜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메말라 버린 마음들에 대고 감히 눈물을 찾는다.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이 난리 통에 감성팔이를 해 대는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이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고 등불에 적어 혼자 평화시위를 했다.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고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전쟁 그만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느냐.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통일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사람이 없느냐'고 거리에 나가 외쳤다."

 

청년은 진심은 모두에게 통하는 것이라며 겁도 없이 지난 시절 형제였을지언정 지금은 속이 시꺼먼 놈들로 가득할 북한으로 건너간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통일방안을 만들었기에 전해 주겠다고 한다.

 

"남북한의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제안서의 내용은 20세 미만의 청년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에서 제외하고, 이를 주축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자치적으로 운영되게 양쪽 국가가 공동으로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제안서를 남한에도 북한에도 전달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청년은 무려 1년이나 그곳에 있었다. 그는 어떤 세뇌를 받아왔을까. 어떤 잔인한 북한의 지령을 들고 와 우릴 잡아먹으려 할까. 이미 속이 시꺼먼 간첩임이 틀림없는 저놈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 분명하다.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그 문제아 바보 빨갱이는 양쪽 모두에 버림받고 다섯 번의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18년간의 수감 생활을 한다. 청년은 이제 83세의 온통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었다. 그는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 질 한다. 모진 삶 가운데 겹겹이 쌓인 원망이 그의 시야를 다 막아 버렸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보는 여전히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이 땅에 눈물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굳이 '평화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살고 있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는 거예요. 눈물을 가진 이들이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것처럼 말이지요.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사랑의 인류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해요. 아직 살아서 이렇게 젊은이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참 기뻐요."

 

노인의 여직 맑은 눈망울엔 아직 다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있다. 진짜 까만 것은 누구에게 있었던가. 잘못된 것은 그 인가, 우리인가, 혹은 이 사회인가. 깊이 주름진 그의 눈 안에 통일 동산을 뛰어놀던 해맑은 소년이 있다. 탐루(探淚)를 외치며 혼자 시위를 하던 열정 가득한 청년이 있다. 그의 눈에서 '평화'를 읽어낸다.

나는 슬며시 내 손안의 돌멩이를 내려놓는다.

 

 

- 1931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6살 때는 일본 비행기들이 중국을 향해 날아다녔다. 그 후 일제 말기에 지금은 서울농업대학이 된 경성농업이라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모두 근로동원으로 보냈다. 반면 농업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실습지에서 일을 하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했기 때문에 동원에서 제외됐다. 그래서 일부러 농업학교에 갔다. 그러다 거기서 폐병에 걸려 잠시 고향 파주에 내려갔다가 회복 된 후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중학교 2학년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녔다.

 

- 광복 후 1950년 당시 스무 살이던 시절 6.25전쟁이 있었다. 우리는 간혹 전쟁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곤 하는데 선생님이 직접 겪으셨던 전쟁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8.15를 '광복'이나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15는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것이 끝난 것뿐이다. 조국해방이 아니라 일제보다 힘이 센 나라들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다. 일제의 점령지에서 다시 미소의 점령지로 바뀐 것을 마치 우리가 해방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더구나 수백 년간 함께 살았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정권을, 소련은 소련이 원하는 정권을 세웠다. 각각 자기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괴뢰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냥 ‘8.15’라고 말하는 게 맞다.

 

내가 스무 살 때 6.25가 터졌는데 당시 서울중학교 5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부모님이 계시는 파주에 갔다. 걸어서 무악재 고개를 넘어 파주로 가는데 가다 보니 여기도 시체, 저기도 시체가 즐비했다. ‘왜 이렇게 서로 싸우면서 죽여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갔다. 고향에 도착해 아버지를 도와 밭도 매고 책도 보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난 당연히 의용군 모집대상이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들은 거의 다 의용군에 나가서 3분의 1 이상 죽었다. 나는 그 길로 도망을 쳐서 산골짜기에 땅굴 파고 숨어서 살았다. 밤이면 몰래 밥을 가져다 먹으며 한 3개월쯤 살았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미군과 국군이 올라온 것을 보고 혹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을까 하고 굴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학교는 미군이 주둔해 철조망이 쳐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영어 선생님이었던 분이 나와서 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공부를 하려고 왔다고 하니 전쟁 중에 학교가 언제 개학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대신 미군부대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다시 고향에 내려가는 것보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뒤로 1.4 후퇴가 시작되기 전까지 3개월쯤 접시를 닦았다.

 

그러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까지 내려와 나도 미군 꽁무니를 따라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계속 미군부대 안에서 접시닦이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부대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국군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면 몇 살이냐고 물어보고 죄다 국군으로 잡아갔다. 그러던 중에 학교의 학생들은 국군 징집 보류라는 광고가 나왔다. 중학교든 대학교든 학교에 등록하면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당시 부산으로 옮겨 온 서울중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권세가 있거나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다 부산에 피난 와서 학교에 다니면서 합법적으로 징집보류를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중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다. 매일 일선에서 밀려오는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와 부상자들을 보면서 나는 학교에 갔다. 이 모든 현실이 너무 참혹하고 비참했다.

 

거기서 졸업을 하고 대학은 서울대 사회학과로 갔다. 인생이 무엇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서로 죽이는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이것을 좀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의 사회가 무엇인데 사람을 서로 죽이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 1954년 부산에 있을 때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은 채 '탐루(探淚)'라고 적힌 등불을 들고 단독 평화 시위를 했다.

 

당시 부산에서 이승만 박사가 휴전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를 시켰다. 나는 내 스스로 미군부대에서 통역하고 학교에서 공부한답시고 군대도 가지 않았으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용군도, 국군도 아니고 그저 도망꾼일 뿐이었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 바에는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깨끗이 목욕하고 머리도 박박 깎고 속옷도 갈아입었다. 백의민족이란 말에 따라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등불 하나를 들고 거기에 눈물을 찾는다는 뜻인 '탐루'라는 글을 쓰고 광복동거리로 나갔다. 남과 북 양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누구 하나 전쟁을 그만하고 같이 평화롭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결심하고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평화적으로 같이 살길을 찾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다.

 

눈물의 의미를 아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아프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얼'이다. 사람의 얼이 병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얼이 병들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통일운동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통일운동가 이전에 평화주의자다. 통일보다 우선 평화가 중요하다. 자기가 싫어하는 원수를 전부 없애고 먼저 통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이 건강해서 서로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 왜 혼자 그런 시위를 하신 건가? 당시 생각을 같이 하던 사람들은 없었나?

 

대학 동기들 몇몇 사람에게 눈물을 찾는 조직을 만들자고 했는데 함께 한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너의 말은 맞지만 그걸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라면서 다 뒤로 물러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도 북쪽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언급하면 '종북(從北)'이라고 몰아세우는데 그때는 더 심각했다. 그러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과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위를 단독으로 하게 됐다.

 

- 청년들을 위한 통일 방안을 만들어 당시 이승만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했다고 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나?

 

부산경찰서에서 등불시위를 하던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게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게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져가며 1년에 걸려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만들었다. 그것의 핵심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면 그냥 따로 살면서 교류하고 평화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거다. 일본과 미국이 과거에는 서로 싸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은 두 국가가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롭게 산다. 독일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리아는 한번 싸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지금도 으르렁거리며 타도를 주장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이제껏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주장이었다.

 

1955년 봄에 정식으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이승만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제출했다. 헌법에 있는 청원의 권리로 청원서로 보냈다. 일주일 만에 치안국에서 나를 불러 취조를 했다. 나보고 타도해야 할 북이랑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너 빨갱이가 아니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적도 없고, 사적소유를 없애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다만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면 따로 살면서, 자식들한테만은 서로 죽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같이 살길을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한 것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결국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 아직 전쟁의 잔상이 크게 남아 있던 시기에 독단적으로 북한에 갔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결국 치안국에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 나를 정신병원에서 인계받아 가게 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치안국에서 "김일성이 또 전쟁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북으로 가자. 가서 직접 한번 알아보고 내가 구상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제안하자"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파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지금껏 이런 생을 살지 않았을 거다. 운명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재 잡고 헤엄쳐 놀던 곳이 바로 고향 파주에 있는 통일동산이었다. 통일동산 앞에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조강이 있는데 이 조강과 그 앞에 바다에는 휴전선이 없다. 휴전 협정상에 통일동산에서 한 3∼4km 올라와서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샛강이 있다. 여기서부터 휴전선을 그린 것이다. 다만 휴전 협정상 조강 쪽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남과 북이 알아서 하라고 되어 있다. 이 조강을 따라 북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단독 북진을 하던 날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필 그날이 6월 25일이었다. 에어매트리스에 바람을 넣어서 강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오른쪽이 이북이고 왼쪽이 이남이어서 혹시 서해로 떠내려갈까 봐 오른쪽으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좁은 데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한강하구의 밀물이 올라와 출렁하는 바람에 매트리스를 놓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오른쪽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철조망이 있고 그 뒤쪽으로 보리밭이 있었다. 보리밭을 가로질러 갔더니 민가가 있어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내가 "평양에 가는 사람인데 잠시 쉬어 가도 되느냐"라고 하니, 아랫목 뜨듯한 데서 쉬라고 했다. 한 30분쯤 쉬고 있는데 "손들어!" 하면서 인민군들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날 쉬게 하고 나가서 신고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닐에 싸서 고무줄로 차고 왔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보여주며 "이것을 평양에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풀어주었다.

 

-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선고 집행 없이, 1년이나 있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평양에 간 지 일주일 만에 방학세 내무상에게까지 갔다. 그가 내게 누가 보냈느냐고 해서 보낸 사람이 없이 스스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남한 군인들과 북한 군인들에게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잔뜩 지뢰를 묻어놓았는데 어떻게 안 터지고 왔느냐는 거였다. 나는 잘 모르겠고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했다. 결국 고작 몇 분을 만나고, 평양 예심처라고 하는 감옥에 보내졌다. 바로 옆방에 박헌영 씨도 있었는데 그의 심복 부하들이 김일성을 죽이려는 반역을 꾀했다는 의심으로 2년이 가깝게 갇혀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국가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 씨도 의심을 못 풀어서 2년이 되도록 못 나가고 있는데 나 같은 피라미 대학생이 암만 우연이라고 말해도 통하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결론은 그들이 믿고자 하는 대로 남쪽에서 보내서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백하겠다고 했더니 자세히 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뭘 잘 알아야 쓰지 어떤 것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여기 오기 전 경무대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냈을 때 나를 잡아다 취조한 치안국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나를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왔다고 썼다. 거짓말로 가득 쓴 것이다. 그랬더니 나보고 "진즉 썼으면 이렇게 고생 안하지 않느냐"라면서 다음날 나를 기소했다. 이제는 간첩으로 사형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당시 북으로서는 남쪽에서 평화적 통일방안을 가져온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당시 북한도 국제사회에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나를 이용해서 다시 남한으로 보내자는 결정을 한 것 같다. 죽이려고 머리까지 다 깎아놓고는 결국 죽이지 말자고 결정하고 며칠 후에 나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들은 "휴전선에 데려다 줄 테니 남쪽으로 가서 너를 보낸 사람한테 가서 네가 가져온 평화통일방안을 그대로 동의는 못하지만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내 꼴을 보니 머리는 박박 깎였지, 단식하는 바람에 살이 많이 빠졌지 이 몰골로는 바로 남한에 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남한 치안국에서 '그것 봐라, 네가 다 죽게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라면서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더 있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며칠을 토의한 후 나를 지금의 압록강 하구의 황금평에 있는 상의군인병원으로 후송했다. 거기서 머리도 자라고 건강도 회복된 후에 딱 1년 만에 남한으로 오게 됐다. 내가 6.25 한국전쟁 날에 건너갔고, 그다음 해 6월 22일에 그들은 나를 휴전선에 데려다 놓았다.

 

- 간첩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가 아니었나. 남한에 다시 돌아왔을 때 많은 의심을 받았을 것 같다.

 

휴전선에서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미군이었다. "Stop!(멈춰!)" 하고 총을 들이댔다. 내가 "I'm a citizen of Seoul!(난 서울 시민이다)"이라고 했더니, 나를 태워 미군 수용소로 데려갔다. 3개월에 걸친 취조를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왜 자꾸 너희가 나를 취조하느냐? 날 한국에 넘겨라"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래, 남한 경찰로 가면 좋을 거다"라며 나를 남한 치안국에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에 넘겼다. 그때가 1956년 가을쯤이었다.

 

치안국으로 옮겨진 후 미군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대한민국의 고문사를 쓰라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50년대 고문, 60년대 고문, 70년대 고문, 90년대 고문을 다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는 방법은 같으나 자국이 안 남게 하는 방식으로 고문 기술이 달라졌다. 그때의 고문은 일제시대에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했다. 결국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가 돼 경찰로 넘어갔다. 여기서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 병원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북에서 잡혔을 때는 남한의 치안국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치안국에서 보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취조를 하면서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라고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했다. 이후 검찰에 넘겨져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간첩죄는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국가 보안법 위반죄로 1년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뒤엎을 생각도 없었고 군사기밀을 갖다 준 것도 없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상고했더니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집행유예도 억울하다고 해서 대법원에 상고하니 1960년 4.19가 난 직후에 면소판결(免訴判決)이 났다. 이렇게 이 사건은 끝났다.

 

당시 남과 북의 집권자들을 보면서,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국민들의 자유, 공산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없는 인민들의 평등이란 자기의 부와 권세를 확장하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에게는 강력한 외국을 등에 업은 권력자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당국들의 권력투쟁을 위한 동포 간의 상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이후 다시 투옥되고 사형까지 구형받은 것이 여러 번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1961년에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에 대해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당시 나는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대는 내가 일전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내기 전에 서울대를 자퇴한 후 다시 들어간 학교였다. 4.19 혁명 전 4.18 때도 고려대에서 데모가 있었고, 5.16 때도 먼저 고려대에서 데모가 일어나니 박정희 정권이 이것을 때려잡기 위해서 무언가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은 '김낙중이 북에서 간첩교육을 1년간 받고 돌아와 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대 애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있다'는 묘책을 세웠다. 각종 신문에 '간첩 김낙중을 체포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TV에 크게 나왔던 거다. 이 사건으로 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느닷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반정부 운동이 조용해지자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군사 정부가 학생 탄압용으로 나를 이용한 것이었다. 

 

징역형을 복역한 뒤에 노동문제연구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산업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노동자로 변하면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직장으로 삼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동 교육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이에 반대해 학생들이 유신반대 투쟁을 시작했는데, 정부 당국은 학생들을 공포 분위기로 진압하기 위해 다시금 간첩사건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간첩으로 지목을 받았다. 그즈음 독일 에버트 재단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노동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여권을 신청했었는데, 그 기록을 가지고 '간첩 김낙중이 독일로 가서 동독을 거쳐 북한으로 탈출하려했다'라는 소설을 구체적으로 썼다. 그 사건으로 '간첩예비죄'라는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7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 이후 실제로 북한 사람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만남이 수차례 이어졌고 심지어 돈을 받아 남한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친북 정당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전에 모의 된 것이 아니라면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었나? 

 

수감 생활 후 '민족통일촉진회'라는 단체에서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다. 1989년 국회 주최 한 통일관련 공청회에 참석해 '한꺼번에 통일하려고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이뤄가자'는 4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떤 30대 중반의 한 젊은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자기를 부산의 어느 대학 강사라고 소개하면서 내가 북에 왜 갔는지 쓴 <굽이치는 임진강>이라는 책을 열 번을 읽었고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젊은이 두 명이 정말로 나를 찾아왔고,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국회에서 발표하신 단계적 통일방안에 대해서 전적으로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협력해주시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나는 처음에는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날 떠보기 위해서 이 사람들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신들,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거 아니오?"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어서 갸우뚱하니 그 젊은이가 "제가 선생님께서 옛날 평양에 와서 말씀하신 자술서의 내용을 다 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께서 남한으로 돌아오셔서 당했던 일들을 보니 과거에 북에 오신 것이 남쪽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 사람들이 진짜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남한에 와서는 내가 이북에서 허위진술을 하고 왔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헤어졌다.
 
한국의 실정법상 북한에서 온 사람과는 허가 없이 접촉할 수 없으며,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신고를 하면 그들에게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 당연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가 걱정됐지만, 결국 나는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방문한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민족 문제들을 토의했다. 물론 나와 북측 당국의 의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나는 당시 민중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재오의 끈질긴 설득으로 민중당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중당 대표를 하면서 당시 갈라져 있던 야당 세력들을 합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난번에 찾아왔던 젊은이가 또 나를 찾아와 "선생님 민중당 대표를 축하합니다. 열심히 해주십시오"라고 하더니,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하고 보따리를 주고 갔다. 그가 간 뒤에 펴보니 달러로 한 20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돌려줄 새도 없이 가버려 남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때 한국 정치는 정말 돈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다들 돈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생긴 돈 공적으로 잘 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대문시장에 가서 달러를 한화로 바꿔 당시 몇몇 정치인들이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장독 밑에 숨겨뒀다. 우리 할멈한테 지금까지 구박을 받는 것은 그 달러를 잔뜩 묻어놓고도 자기를 위해서 선물 하나도 사다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웃음). 생전 돈 한 푼 제대로 벌어다 준 적 없으면서 달러를 쌓아두고도 내색하지 않았으니 서운해했던 거다.(웃음) 단지 그 돈은 나나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1992년 남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사형을 구형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북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온 것이 사실이었고, 이번에는 이북에서 달러를 받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감옥에 투옥되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집에 오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지금도 나에게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다. 나에게만 그치면 괜찮은데 우리 가족들도 쉴 틈 없이 괴롭혀 왔다. 그것이 마음 아프다.

 

 

- '정답사회'에 사는 우리이다. 남들과 다른 행보는 용납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다른 어떤 신념이 있으셨던 건가?

 

중학교 시절 폐병에 걸렸을 때 나는 '인간은 죽을 건데 왜 태어났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 당시 폐병이면 거의 죽었다. 매일 남대문 도서관에 가서 ‘인생은 무엇이고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해, 일요일 아침 10시에는 새문안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강의를 들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를 다니면서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런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자고 결심했다.

 

지금도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상대방을 서로 인정을 하지 않는 상태다. 내가 60년간 한결같이 한 일은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고 같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평화통일시민연대'라는 곳에서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고 국회에서 여야와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한반도평화통일시민단체협의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왔다 갔다 활동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보고 기회주의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귀가 두 개가 있는 이유는 이쪽 얘기도 듣고 저쪽 얘기도 들으라고 있다고 믿는다. 양쪽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것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음양이 하모니를 이루면 오케스트라가 된다. 조화를 시키면 아름다운 교향악이 되고, 조화를 못시키면 잡음이 된다.

 

'구동존이(求同存異)'라고 말이 있다. 다르지만 같은 것을 찾아서 서로 조화의 길을 찾아가자는 거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서로 부딪힌다. 다름을 전제로 하고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혼이다. 여자는 이리로 가자고 하고 남자는 저리로 가자고 하는 모순이 있는데, 이 모순을 조화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혹시 다름에서 오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서로 다른 걸 인정하고 함께 길을 찾아가야 된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길을 걸어왔다.

 

- '과연 통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을 해서 뭐하냐"라고 하는데 그게 맞다. 지금 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남한은 아직 남북통일을 얘기할 자격이 못된다. 남쪽사회 내부에서 계층 간 지역 간 갈등부터 해결하고 그러고 나서 남북을 얘기해야 한다. 북한사회에서 못 살겠다고 도망 나온 탈북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 와보니 바닥에서 살 수가 없는 거다. 남북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더불어 살려면 아픔을 서로 느낄 수가 있어야 한다. 옆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몇백 억 불을 쌓아두고 외국은행에 빼돌려 자기 새끼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얼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남한사회 내부에서조차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통일이 아니라 평화가 선행이다. 네 가족, 내 가족, 박 씨네 가족, 이 씨네 가족 다 다르니까 따로 살 수 있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민족이다. 저 미국에 사는 흑인도 같은 한 겨레다. 한겨레의 입장에서 보면 '니 꺼, 내 꺼'라고 하면서 서로 죽일 일이 없다. 가족, 씨족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지 못해서 서로 자기네 가족만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가족도 안 챙기고 자기만 챙긴다. 내게 통일이란 민족통일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통일의 문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코리안의 임무라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 되는 일에 코리아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는 지금껏 다른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침략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3.1운동 정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우리는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거다. 평화라고 하면 제일가는 민족이 지금 남북 간에 갈등을 겪고 있다. 이 갈등을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해결할 수 있다. 언론이 아무리 차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소통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살 길은 갈등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고 갈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조화하는 것만이 같이 상생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코리아가 소련의 탱크나 미국의 비행기,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서로를 용납하면서 하나의 길을 찾아갈 때에 선구자 역할을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코리아를 '세계문명의 쓰레기통'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시대에는 인도문명에서 들어온 불교, 이것이 폐단이 생겼고 조선시대에는 유교, 도교라는 중국문명이 들어와서 살았다. 근데 이것도 노론 소론 싸워서 끝이 났다. 그리고 뒤에 일제가 들어오면서 지중해의 서양문명이 들어왔다. 나일 강에서 흐른 이집트 문화와 로마 문화가 합쳐져 대서양으로 가서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을 통해서 남쪽으로 왔다. 육지로는 동유럽을 통해서 러시아를 통해서 북쪽으로 들어왔다. 세계문명이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음양이다. 이 양과 음이 코리아에 들어와 만나 싸울 것인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결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도문화권, 중국문화권, 지중해문화권이 코리아 역사 속에 흘러들어와 다 겪으며 살았다. 우리의 DNA 속에 다 들어 있다. 통일은 하나의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것인데, 하나의 지배체제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같이 더불어 사는 게 필요한 거다. 코리아가 세계사 속에서 자기 구실을 할 때가 온다고 생각한다.

 

-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남쪽에서의 문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다. 부동산과 현금의 소유 분포를 그려보면 상위층 10%가 모든 부동산과 현금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제도를 부인하면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야 된다고 하면서 지적한 것이 사유재산제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공산주의의 문제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권력 가진 자가 결정한다. 권력이 있으면 자유가 있고 권력이 없으면 다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북은 권력독재고 남쪽은 금(金)력독재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어떤 권력자나 부자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1989년에 통일이 되기 전에 서독에 갔다. 의료, 교육 다 공공이어서 국가가 다 부담했다. 의료비, 교육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동독을 보니까 정부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국유화를 했는데 권력을 쥔 사람들이 맘대로 하는 거다. 결과적으로 서독에 비해 동독은 3분의 1밖에 못살더라. 동독사람들이 서독을 보니 이게 진짜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했다. 돈이 없이도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언가. 이렇게 해서 동독사람의 민심이 서독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싸울 궁리만 하고 자기가 쌓아놓고 있는 재산은 나눌 생각을 안 한다. 미국도 빈부격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재벌들이 자진해서 사회로 환원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은 가족주의가 심해서 돈을 벌면 자기 새끼한테 물려주려고 외국으로 빼돌린다. 지긋지긋하게 갈등이 심하다.

 

남한사회 내부에 갈등이 심하게 많은 이유는 그 갈등의 밑바닥에 물질적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재산제도에 있어서 ‘공동상속제도’의 도입이다. 한집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동상속 제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무개의 재산이 몇조 원이라고 하면 그것을 공동상속의 대상으로 보고, 적어도 몇백 억 원은 사회의 공동상속기금에 내놓고 이 기금을 새로 자라나는 18세 혹은 20세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서 사유화하는 것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그들의 자식은 똑같이 공동상속을 받는 거다. 상속의 형태는 회사의 주식형태도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회사의 사원이면, 그 공동상속기금에서 그 주식을 사서 주면 회사는 내 회사가 되는 것이다.

 

- 전쟁 이후 6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휴전 상태 속에 살고 있다. 이 긴 싸움의 종결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미소(美蘇)냉전이 끝난 것은 고르바초프가 수상이 되면서 무기경쟁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무기를 줄이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이미 충분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도 현재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남북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 북은 생존을 위해 핵을 절대로 포기 안 할 거다. 카다피도 핵을 포기했다가 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북한과 전쟁할 것도 아니면서 그 많은 무기들을 어디다 쓰려고 계속 사들이는지 모르겠다. 국방부에서 수조를 들여서 무기를 사들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의 군수산업이 가장 많은 로비자금을 쓰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군비 경쟁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이미 충분한 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눈치를 보며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 평화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끊임없이 공격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 누군가에게는 ‘평화주의자’라는 존경을,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악마 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한 사람의 비난에도 쉽게 쓰러지는 우리이다. 참 모진 삶이 사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삶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의 바른길을 찾아가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갈림길이 참 많았다. 그때마다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마음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갔다. 여기에 있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진리요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찬송가 중에서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양과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양을 좋아한다. 내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무엇을 할 수가 없을 때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송을 한다. 그리고 이전에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을 받았다가 사형은 면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본 풀하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풀, 나무, 새소리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게 나를 지켜온 내 생활의 자세인 것 같다. 물론 지난 세월 녹록하지 않았다. 사형을 다섯 번이나 구형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돌아보니 백 년, 천 년을 살았던 것처럼 까마득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83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살아서 청년들을 마주하는 것이 또 얼마나 기쁜가.

 

- 더불어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이 사회에 참 많은 갈등들이 있다. 갈등이라는 것은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이다. 부처는 욕망을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욕망은 필요한 거다. 하지만 욕망을 부리게 하는 엑셀레이터가 있다면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 브레이크를 잡을 때가 있고 엑셀을 밟아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행로는 이 둘을 잘 조화롭게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모니를 만들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이 사회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가는 거다. 그런 그림을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한다.

 

- 김낙중에게 자유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다. 노예라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국가의 국민이 자기 의사에 의해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의 전제 조건은 각자 저마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강제하지 않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는 사람의 자유는 고용주의 자유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권력 가진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사는 거다. 피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마다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어떤 말을 하면 ‘너는 빨갱이다, 반동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얘기를 해도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대화다. 설득이 제대로 먹히려면 이 의미를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입장을 바꿔보고 이해하려는 노력,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용납의 자세가 자유인의 필수조건일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전공 김예리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과 조경일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미 유일의 한인타운, 산티아고가 슬픈 이유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36]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칠레 산티아고

14.01.31 18:25l최종 업데이트 14.01.31 18:25l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넘나들던 험난한 일정을 끝내고, 마침내 칠레의 중심부인 산티아고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마음씨 좋은 숙소의 안주인은 안전을 당부하며 다음에 올 때 가게에 걸어둘 태극기를 잊지 말라는 인사를 전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바람을 채워주면 좋으련만. 

이제 파타고니아를 떠나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눈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있는 두꺼운 점퍼를 마치 숨기기라도 하듯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처박은 뒤에 우리는 기나긴 버스여정길에 올랐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까지는 국경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만 우리는 말도 안통하는 그 곳에서 단 한 번의 사건사고도 없이 버스에서 제공되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떼우며 각자 지난 몇 주간의 얼음의 세게를 되새김질 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인다라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조금씩 가까워지는 선명한 빛깔의 호수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 즈음, 나는 의식을 잃었다.
 
기사 관련 사진
▲  산티아고 도심 중심에서 휘날리는 대형 칠레국기. 가로로 넓게 칠해진 붉은색은 스페인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2층 버스 맨 앞좌석의 위력. 다시 눈을 떠보니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둘씩 드러나는 높은 건물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 자동차들의 행렬과 시끄러운 소음, 수트를 입은 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데스 산맥을 제외하면 서울의 어느 도심이나 마차가지다 싶은 순간 대형 칠레 국기가 창 밖을 스쳐지난다.  

도착한 산티아고 버스터미널의 아침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양손 가득 짊어진 짐을 버스에 싣기 바쁜 가족들, 터미널 안에 가득찬 상가들은 하나씩 문을 열면서 도시를 깨우고 검은 수트에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은 앞뒤로 커다란 가방을 들쳐맨 독특한 차림의 여행자는 투명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휙휙 지나친다. 버스터미널만 해도 세개나 있는 대도시 산티아고를 보고 있자니 일 주일 전 우리를 죽음에 가깝게 한 빙하의 땅, 토레스 델 파이네와 같은 나라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기사 관련 사진
▲  빙하와 사막과 바다와 도시. 어찌보면 칠레는 여행자들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나라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수도는 독특한 이미지를 하나씩 갖기 마련인데, 사실 칠레는 지구에서 가장 긴 나라다. 지구본 상의 모습을 보면 폭은 겨우 175km 밖에 안되지만 길이가 무려 4300km에 달하는 독특한 나라다. 언젠가 '칠레를 가려면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땅을 파고 뛰어드는 것이 가장 빠르다'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북쪽에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인 아타카마 사막이 진을 치고, 남쪽은 눈과 빙하로 덮힌 산맥이 장벽을 쌓았다. 왼쪽은 태평양이고 오른쪽은 안데스 산맥이 가로 막고 있으니 어찌보면 빠져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칠레의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다. 산티아고는 불의 사막과 얼음의 빙하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구어낸, 어쩌면 신기루와도 같은 도시인 것이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산티아고에서 찍었노라 사진을 보여주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 여기가 그 순례길이구나?'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순례의 도시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와 글자와 발음까지 똑같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남미의 여느 대도시가 그렇듯, 1540년 스페인 정복자 발디비아가 이끈 군대에 의해 토착 원주민들은 몰락하고 그 땅 위에 새로 지어진 도시가 바로 지금의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다. 한 나라의 수도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지어진 도시라니. 이상한 느낌이 든 건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기우였을까. 
 
기사 관련 사진
▲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는 정복자 발디비아(좌)의 동상과 자신들의 땅을 침략한 발디비아를 죽인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 지도자의 초상을 새긴 석상(우)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도시의 중심가인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자 나의 기우는 깊어졌다. '정복자'와 '침략자'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발디비아의 동상과 유럽풍의 교회들은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룬 산티아고의 위상을 나타내지만 보란듯이 광장의 다른 한 켠에는 침략자에 맞섰던 원주민 독립전쟁 지도자의 초상이 돌로 새겨져 있다. 광장의 한쪽에는 정복자의 동상이, 반대쪽에는 독립전쟁의 지도자의 석상이라니. 칠레는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일까.

한눈에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칠레의 원주민 마푸체 족은 지금도 제법 그 수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칠레 국기의 빨간색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흘렸던 피를 상징하는 반면, 그 후손들은 유럽풍의 도시에서 스페인어를 국어로 쓰며 살아가고 있으니 역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이국적인 풍경을 간직한 문화도시 산티아고의 다양한 모습들. 한국의 대도시와 비교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어쨌거나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티아고는 남미 제일의 문화도시로 손꼽힌다. 언제나 붐비는 아르마스 광장의 한 켠에 가득한 예술가들과 오래된 유럽의 고성 같은 모습의 중앙우체국, 바로크 양식을 본 뜬 대성당에 구 시가지를 벗어나면 마주치는 아기자기한 카페들까지, 산티아고는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거기에 일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만 이어지니,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산티아고는 남미에서 유럽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쉬어가는 그런 도시다.
 
기사 관련 사진
▲  대통령 궁인 모데나 궁전. 정원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미 공예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 김동주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과거는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던 산티아고에도 한 때 혹독한 비가 내린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 9·11테러와 같은 날짜인 1973년 9월 11일, 수도 산티아고 국영 라디오에서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냈고 미국 CIA와 피노체트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그들의 작전명이었던 셈.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저 모네다 궁전은 장갑차와 탱크로 포위당했고 결국 궁전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버린 산티아고의 평화의 끝에는 피노체트의 긴 독재가 이어졌다. 1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지던 도시가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도 피노체트의 추종자들이 시위를 열고 그의 악랄했던 정치를 미화하여 사건사고를 일으키고 있으니 어쩌면 칠레 사람들이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은 스페인 정복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켰던 피노체트일지도 모른다.
 
간략여행정보
한국에서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가는 항공편은 파리, LA, 토론토 등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던 중남미의 모든 대도시는 '아르마스' 라는 이름을 가진 광장이 꼭 있는데 이는 도시의 중심임과 동시에 여행의 시작점이다. 산티아고 역시 마찬가지. 모든 관광안내소와 숙소, 오래된 대성당들이 모여 있으며 광장에는 언제나 여행객과 거리의 예술가들이 뒤섞여 활기가 넘친다. 

서울만큼이나 큰 대도시인 산티아고에서는 특별히 무언가를 한다기 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쉬어가기에 좋다. 남미에서 제일가는 문화복지 도시답게 세련된 건물들이 옛 시가지와 조화를 이루고 잘 정돈된 거리 곳곳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면 유네스크 세계 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된 발파라이소가 2시간 거리에 있다. 이외에도 세계3대 와인 생산국인 칠레의 대표 와이너리, 해변도시 비냐델마르도 가까우니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으며 남미에서는 유일하게 한인타운이 생성되어 있어 한국의 다양한 식품의 구매도 가능하다.

좀 더 자세한 칠레 산티아고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2258853
태그:세계에서가장긴나라, 칠레, 산티아고 태그입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KN-08)’ 그 불편한 진실

북한 이동식 ICBM 이미 실전 초기 배치… 킬체인 효과 있을까?
 
김원식 | 2014-01-31 14:34:2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지난해 7월 정전협정 60주년 열병식에 다시 등장한 KN-08

미국의 국가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 국가정보국(DNI)의 제임스 클래퍼 국장은 지난 29일(아래 현지시각) 북한의 군사력과 관련한 중대한 발언을 했다. 그는 "아직 (발사) 실험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북한이 이미 이동식(road-mobile)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KN-08)의 (실전) 배치가 초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고 밝혔다. 
(We assess that North Korea has already taken initial steps towards fielding this system, although it remains untested,)

클래퍼 국장의 이러한 발언은 그가 이날 미 의회 상원 정보위원회에 서면으로 제출한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이날 증언에서 북한이 영변에 있는 핵 관련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 시설 규모를 확충하고 있으며 플루토늄 원자로도 재가동에 들어갔다고 확인했다. 한국의 대다수 언론들은 '북한 원자로 재가동'을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확인했다는데 방점을 두어 보도했다.

하지만 관련 보도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의 원자로 재가동은 북한도 이미 가능성을 언급했으며 우리나라 정보기관도 재가동을 확인했고 관련 전문가들도 여러 위성 사진을 통하여 재가동 사실을 확인한 사례이다. 물론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이를 공식 확인했다는 의미는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북한 전문 누리집인 '38노스(38north)'에 올라온 북한 군사시설 관련 평가서에도 이 KN-08이 언급되었다. 이 평가서는 북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이 확장 공사를 거듭하고 있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지만, 북한이 지난해 초에 이어 12월에서 올 1월 사이에도 이 KN-08의 엔진 실험을 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날 클래퍼 국장이 공식적으로 실전 초기 배치를 확인한 북한의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KN-08, 일명: 화성 13호)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동안 각국의 정보기관은 물론 여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모조품(mock-up)' 혹은 '가짜(fake)'논란을 빚어온 북한의 KN-08의 실전 배치가 가지는 불편한 진실의 의미를 살펴보자.


'도발 원점 타격' 그러나 원점이 이동한다면... '킬체인' 유명무실 가능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KN-08의 등장은 타격 사거리(6천km에서 1만km 이상까지 분석이 다양하다)가 넓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보다도 바로 대륙 간을 횡단할 수 있는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고정된 미사일 기지가 아니라 이동식 장착 차량에 의해서 이동이 가능해 어느 때이든 알 수도 없는 곳에서 발사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ICBM 등 이른바 '비대칭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도입하겠다는 것이 '킬체인(Kill Chain, 일명: 타격순환체계)'이다. 전문 용어로 표현하면 이른바 '시한성 (긴급) 표적(Time Sensitive Target)에 대한 표적화 과정(Targeting steps)'을 '킬체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동식 미사일의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해당 표적을 탐지하고 대응 공격 여부 등을 결정한 후 공격 후에는 제대로 목표물에 적중했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 국방부가 2015년까지 조기에 구축하겠다는 이러한 '한국형 킬체인'은 북한의 이동식 탄도미사일을 탐지한 후 최소 30분 내에 선제 타격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미의 정찰위성과 정찰기 등 감시 및 정찰자산으로 1분 내에 위협을 탐지' '1분 내에 위협 식별' '식별된 정보를 바탕으로 3분 내에 타격을 명령' ' 25분 내에 목표물을 타격을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이른바 '한국형 킬체인'이 실행 과정의 여러 기술적인 문제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과연 도발 원점을 파괴할 수 있는 선제공격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방부 출신 인사들도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윤연 전 해군 작전사령관은 지난해 10월 8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 ('킬체인-한국형MD'의 허와 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1일 건군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킬체인(kill chain)과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체계 완비로 북한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대응능력을 조기에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킬체인은 북한 탄도미사일을 탐지-식별-결심-타격이 가능한 선제공격을 말한다. 얼핏 보면 자신감 넘치는 계획으로 보인다. 그러나 킬체인에는 허점이 있다. 우리 조기경보체제가 북한 미사일을 공격 전에 탐지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설사 탐지했다 해도, 결심해서 적을 타격하는 것은 많은 정치•군사적 어려움이 있다)


미국, 가장 우려하는 사항이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이동식 ICBM

우리 국방부가 미국의 정찰 위성 등 미국 정보•군사력을 활용하겠다고 밝혔듯이 그렇다면 미국은 이러한 이동식 탄도미사일 특히, 지금 가장 우려가 되고 있는 KN-08의 등장에 관해 '킬체인' 등을 통하여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안심하고 있을까. 답은 '아니다'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월 17일, 미 중앙정보국(CIA) 소식통을 인용하여 "미국은 이전에 북한의 이동식 미사일 발사체(KN-08)가 실전에는 배치되지 않았다고 보았지만, 최근 정보는 이미 이 발사체가 전국 각지에 분산 배치되었으며 쉽게 은폐가 가능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의 안보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는 것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고 특종 보도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미 일 년 전에 이러한 KN-08의 실전 배치와 이에 따른 위협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난 2012년 4월 15, 평양 김일성 광장에 처음 등장한 KN-08 이동식 탄도미사일을 일부는 종이 수준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미 정보 당국은 실제로 미국을 위협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더욱 북한의 지난 (2013년) 동계 군사 훈련 중에 이 이동식 미사일이 북한 전역에서 기동하는 장면이 미 CIA 첩보 위성을 통해 관측됨에 따라 미국 정보기관에 비상이 걸렸다"고 보도함으로써 사안의 심각성을 전했다.

이는 기존 핵시설과 미사일 발사기지 등은 얼마든지 선제 타격이나 대응 공격으로 정밀 파괴할 수는 있지만, 이동과 은닉이 가능한 새로운 미사일 발사체가 북한 전역에서 등장하자 미국이 대응책 마련에 골머리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새로운 이동식 탄도미사일이 남한이나 미국 기지가 있는 괌 정도가 아니라 바로 미국 본토를 핵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차마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 은하 3호 계열 미사일의 미 본토 타격 능력을 설명하는 CNN

하지만 지난해 3월 16일, 미 국방부의 제임스 윈네펠드 장성은 미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4월 열린 열병식에서 관측된 북한의 KN-08 이동식 탄도미사일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며"이 KN-08은 이동과 은닉이 쉬워 발사 지점에 대한 파악을 어렵게 하며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미국 정보 당국이나 국방부가 이 사항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잘 나타났다.

지난해 북한이 이 KN-08 탄도미사일보다 한 단계 아래 급인 이른바 이동식 '무수단 미사일'을 마치 한•미 정보 당국의 위치 탐지 능력을 테스트라도 하듯이 이리저리로 이동해 다니면서 시험 발사 위협을 시도함으로써 긴장을 몰고 왔던 사례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이동식 탄도미사일의 탐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종합해 보자면 이렇게 미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일 년이 훨씬 지나 이번에 클래퍼 국장이 의회 보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가 이 보고서에서 쓴 "'이미(벌써, already)' 실전 초기 배치되었다"에서 '벌써'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북한 미사일 기술 향상은 '전략적 인내' 정책의 결과물"... 협상 나서라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에 주는 위협은 간단하다. 아무리 완벽한 '킬체인'이 구축되어 있더라도 (이도 100% 완벽할 가능성도 없지만) 단 한 대의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핵무기가 발사되어 미 본토를 타격한다면 이는 아무리 선제 혹은 대응 공격으로 북한을 전멸시켜도 그와 똑같은 타격 효과를 미국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이 핵무기와 이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대량 파괴 능력이 어쩌면 상호 간의 이른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유지하며 전쟁 억지력을 가지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의 핵 능력의 고도화는 특히, 동북아 정세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북한은 이만큼 핵 자위력과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선전할지 모르나,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루기 힘든 또 하나의 강력한 핵무장 국가가 등장한 것은 굳이 일본 핵무장론이나 한국의 핵무장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이러한 핵무장이 바로 전임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현재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대북 정책으로 견지하고 있는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에서 미국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는 현실적으로는 대화와 협상도 거부하는 이른바 '전략적 무시(strategic negligence)' 정책으로 일관되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아무런 평화 체제 구축도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북한은 더욱 강력하게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치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북한과 대화를 하는 것은 오히려 핵무기를 고도화할 시간만 벌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협상을 하지 않는 것도 시간을 벌어주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우세한 '킬체인'과 초정밀 고도의 선제 맹폭을 감행한다 해도 북한 전역에 이미 최소 6대에서 20대까지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이 KN-08 미사일 중 살아남은 한 대가 혹은 두 대가 핵무기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가 할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 국가정보국 클래퍼 국장의 북한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KN-08)의 실전 초기 배치 확인은 군사적 의미에서도 즉, 군사적 긴장 해소와 대량살상무기(WMD) 감축 협상을 위해서라도 미국과 북한 간 그리고 한국과 북한 간 더 나아가 동북아 관련국을 대표하는 '6자 회담'이 조속히 개최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더하고 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1&table=newyork&uid=4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국,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설 단상>북의 화려한 유화공세는 또 하나의 강력한 대미공격
 
한성 
기사입력: 2014/01/31 [15:07]  최종편집: ⓒ 자주민보
 
 

1-북의 집요한 대미공격
북의 대미공격이 지속적으로 쉼 없이 전개되고 있다. 북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대미공격의 맨 앞장에 서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보다 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46주년인 지난 23일 노동신문은 미국이 '도발 책동'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이는 계기별 사안에 대한 정치적 언급으로 된다. 특별할 리가 없다. 원칙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그 원칙은 보다 구체적인 것들을 짚어나가기 위한 첫 출발이 된다는 것을 노동신문은 보여준다. 
27일,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무력을 증강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신냉전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공격이었다.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북의 공격은 단순히 미 군사정책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미국이 중동지역을 포기하고 새롭게 수립한 미 세계지배전략에 대한 공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아태지배전략에 대한 공격이었다. 북이 미 아태지배전략을 공격하는 것은 미국이 아태지배전략의 기둥으로 한미일3각동맹을 설정하고 있다는 판단을 해서일 것이다.
노동신문은 28일에는 미국이 특수전 무력을 증강하는 것을 북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반발하는 것으로 대미공격을 이어갔다. 
29일에는 대미공격의 본령에 맞추어졌다. 2월 말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겨냥한 것이다. 한미군사연습으로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주 있는 공세이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의례적인 것으로 볼 수가 없다. 
27일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에 대한 공격이 있었던 뒤라 미국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미국의 아태지배전략과 결부하여 공세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 아태지배전략의 기둥을 한미일3각군사동맹이라고 할 수 있다면 수십년 동안 지속강화되어왔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은 한미일3각군사동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받고 있을 것이다. 북의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한 공격이 언제라도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미국 아태지배전략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에 걸맞는 위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이유이다. 
글 제목은 '조선반도에 끊임없는 위협과 도발을 몰아온 주범'이었다.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 “긴장한 조선반도 정세를 최악의 사태로 몰아가는 위험천만한 도발행위”라고 규정을 했다. 노동신문은 특히 ‘키 리졸브’가 평양 공격을 염두에 둔 미국의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신문의 집중적인 대미공격은 유엔주재 신선호 대사의 기자회견과 결부됨으로써 보다 화려해졌다. 1월 25일이었다. 신선호 대사는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과 한국이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을 실시할 경우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파괴한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미국을 공격했다. 국제사회를 향해서는 미국의 ‘책동’을 더 이상 허용하지말 것을 주문했다.
사람들이 신선호 대사가 대미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지난해 였다. 신 대사는 지난해 6월 21일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에 주둔 중인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는 것이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긴장완화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요구라는 내용의 발언문을 발표했었다.
신 대사는 발언문에서 유엔군사령부는 조직 초기부터 유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유령기구이며 본질에 있어서 미군사령부라고 주장함으로서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지재룡 주중 북 대사 역시 반미공격의 대열에 동참하고 나섰다. 
29일 중국 베이징 주재 북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신년사 내용과 지난 16일 국방위원회가 발표한 중대제안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중단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정부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 대사는 기자회견에서 북핵문제 관련 언급을 함으로써 대미전선을  선명하게 쳤다. 
"우리는 6자회담의 재개를 지지한다"
지 대사는 "우리가 6자회담이라는 쪽배에 먼저 타고 자리를 잡았으니 나머지 참가국들이 빨리 타서 이 쪽배가 출항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지 대사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의 변함없는 정책적 목표라는 것을 강조했다. 방식은 북의 일방적인 선핵포기가 아니라 동시행동이라고 했다.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원칙을 다시 강조한 셈이다. 이어 지 대사는 9·19 공동성명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국에게 책임을 돌렸다. “미국 등 일부 다른 참가국들이 저들의 책임은 회피하고 우리의 의무만 부각시키면서 이행문제를 떠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계속되는 한 핵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지 대사는 자신들의 핵무기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과 핵공격 위협의 산물임을 그리고는 북핵문제의 해결 방도를 그렇듯 명확히 밝혔다.
지 대사가 북핵문제와 관련해 밝힌 입장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북이 세워놓고 있는 기존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북 대사가 직접 외국에서 외신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북 대사관 안에서 기자회견이 열린 것은 지난 2007년 이후 6년 반 만이다. 이것들은 지 대사의 기자회견이 대미공격을 하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유화공세는 대미압박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북의 집요한 대미공격들이 일반적인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북의 유화공세가 끊임없이 그것도 화려한 수준에서 구사되고 있는 것과 직접 맞물려있다는 것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북미대결전에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양상이다. 
"북은 왜, 우리정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유화공세를 펴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공격의 고삐를 잔뜩 움켜쥐는 것일까?"
많은 대북전문가들이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랬다. 화두 급 문제의식이었다. 
이에 대한 답은 29일 주재룡 대사의 기자회견에서 그 기미를 찾을 수가 있다. 
기자회견에 외신 기자만 받겠다던 당초 언급을 깨고 SBS를 비롯한 일부 한국 언론의 입장을 허용한 것은 단연 주목할 만했다. 한국기자들을 자신의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은 국내언론들이 크게 취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극히 중요한 조처이다. 북의 유화공세에 대해 한국의 일부 언론들이 위장유화공세라고 했던 말을 일거에 무색하게 해버리기에도 충분했다. 
다음으로 지 대사가 자신들의 핵개발과 관련, "철두철미하게 미국의 핵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동족을 공갈하고 해치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말은 북핵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결과물이라고 강조하는 것 그리고 한미합동군사훈련 취소를 촉구하는 말과 연동되어 나온 것이었다. 
  
지 대사의 기자회견은 유엔에서의 신선호 대사의 기자회견과 함께 북의 유화공세가 우리정부를 뛰어넘어 국제적 범주로 확장되는 등 점점 화려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음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북의 유화공세가 우리정부를 뛰어넘어 국제적 범주로까지 확장되는 데에서 중요하게 확인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북의 화려한 유화공세가 강력한 대미압박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북이 우리정부에 대해서 연일 유화공세를 펴면서 지난 1월 16일 국방위원회를 통해 ▲상호 비방중상 행위 중지 ▲상호 군사적 적대행위 전면중지 ▲핵재난 막기 위한 상호조치 등을 골자로 하는 중대제안을 발표했었다. 
이를 객관적으로 접근해보면 우리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로는 첫 번째 내용밖에 없다. 나머지 사안은 우리정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인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정부에 대한 북의 유화공세에서 성과가 나느냐 안나느냐는 우리정부가 아니라 미국이 결정적으로 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은 그르든 그르지 않든 상관없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은 북이 유화공세를 국제적 범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대미압박전술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북이 유화공세를 펴면서도 대미공격을 집요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적확한 설명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처럼 던지는 말은 언제라도 중요하다. 
“북의 화려한 유화공세 그리고 대미공격에 미국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민족이라면 남과 북이든 함께 즐기는 설명절을 보내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민족끼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한편,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는 이유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무라야마 日 전 총리 “아베 신사참배는 매국행위”

무라야마 日 전 총리 “아베 신사참배는 매국행위”

디지털뉴스팀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전 총리가 30일 아베 신조 총리의 작년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매국행위’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31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전날 도쿄에서 열린 사민당 회합에 참석,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왜 나쁜 일이 될 것을 알면서 참배하는가’하고 격노했다”고 소개한 뒤 “본인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라를 파는 것 같은 총리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 내 (아베 총리의) 측근으로 불리는 총리 관저 인사에게 ‘왜 당신들이 막지 않는가’라고 물으면 ‘뭐가 잘못됐는가. 이것이 국민의 마음이지 않나’라며 내게 반론한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역시 전범들이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며 “일본이 일미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조약)을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복귀했으니 그 약속을 생각하면 총리가 참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과거 자국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단죄한 ‘도쿄재판’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사회당(현 사민당) 출신인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은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야당이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하면서 “앞으로는 국민들 목소리뿐”이라고 말했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자민당 장기 집권체제 붕괴로 연립여당이 구성된 1994년 6월부터 1996년 1월까지 총리를 역임했다. 재임 중인 1995년에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내용의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설 맞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31 16:43
  • 수정일
    2014/01/31 16: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빼앗긴 청춘"…명절도 눈물 쏟는 '아흔 소녀' 아리랑

[르포] 설 맞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

서어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빨리 가야지 이제는 너무 지쳐.”

밑지고 파는 거라는 장사꾼의 말, 시집 안 간다는 말과 젊은 여성의 말, 그리고 이젠 가야지라는 노인의 말이 3대 거짓말이라고 한다. 노인은 습관처럼 “죽어야지” 소리를 했다. 능청을 떨며 “에이 할머니, 여전히 정정하신데요”라고 했다. 노인은 빙긋 웃고는 “그래” 했다.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아니라 지금 제 앞에 앉은 젊은 아가씨라는 걸.

 

 

▲나눔의 집 입구를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나눔의 집 입구를 서성이는 할머니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내 청춘 돌려다오… 오늘도 눈물 쏟는 아리랑”

올해 아흔을 넘긴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다. 배 할머니는 아홉 분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 여성 쉼터 ‘나눔의 집’에 살고 있다. 1997년 이곳에 처음 왔으니, 이번은 나눔의 집에서 17번째 맞는 설이다.

28일 오후 두 시. 평소 같으면 점심을 먹고 방에서 쉴 시간이지만, 이날은 느긋하게 쉴 틈이 없었다. 명절을 앞두고 손님들이 몰려오는 탓이다. 고령의 할머니들은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거실로 나와 손님을 기다렸다. 거실 한쪽엔 선물꾸러미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화장지, 과일, 김 박스. 조억동 경기도 광주시장이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

선물보다 늦게 도착한 조 시장과의 만남은 짧았다. 안부 인사 한두 마디, 두 번의 기념촬영이 끝나자 조 시장이 일어섰다. 할머니들은 “놀다 가라”고 성화였다. 배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는 서로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조 시장은 “다음에 꼭 듣겠다”며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손님이 왔다 간 자리가 휑했다. 잠시 들떠 보였던 할머니들은 다시 입을 닫았다.

삼십여 분 후 다음 손님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손자 손녀 40여 명. 인근 지역 고등학교 봉사동아리 학생들이다.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 앞에 둘러앉아 질문세례를 퍼붓더니, 이젠 재롱잔치를 하겠다며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를 부른다. 잔뜩 부끄러워하며 노래하던 학생들이 맹랑하게 이젠 할머니들 차례라며 마이크를 넘긴다.

풍류에 일가견 있기로 소문난 배 할머니가 냉큼 마이크를 잡았다. 시장님 앞에서 노래를 못한 한을 풀 기회가 왔다. 배 할머니는 가사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했다.

“봉숭아꽃 꽃잎 따서 손톱 곱게 물들이던 내 어릴 적 열두 살 그 꿈은 어디 갔나. 내 어릴 적 13살 내 청춘은 어디 갔나. 내 나라 빼앗기고 이내 몸도 빼앗겼네.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쏟는 아리랑. 내 꿈을 돌려다오 내 청춘 돌려주오."

할머니의 아리랑은 구성지다 못해 구슬펐다. 이 노래는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 ‘소녀 아리랑’이었다. 할머니가 노래를 불러준다기에 까르르 웃으며 신나하던 학생들은 어느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9살에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는 배 할머니는 유독 ‘옛날 얘기’를 꺼렸다. 다른 할머니들은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에서, 또 언론 인터뷰에서 끔찍한 그 시절에 대해 고발하고 일본 정부를 꾸짖는다. 그러나 배 할머니는 말수가 적은 것도 아니면서 옛일을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과거 참상을 또다시 떠올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이런 일을 당했었다’며 속 시원히 말하는 대신, 늘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속을 풀곤 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도 노래뿐이다. 자식도, 손자 손녀도 없는 배 할머니는 명절에도 나눔의 집에 남아있을 예정이다.

“난 공부도 못 하고,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 TV에서 나오는 노래 따라 부르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가.”

 

 

 

▲ 학생들에게 과거 증언을 하는 강일출 할머니. ⓒ프레시안(최형락)

▲ 학생들에게 과거 증언을 하는 강일출 할머니. ⓒ프레시안(최형락)


“아흔 다 됐지만 엄마, 아빠 생각만 하면” 

 


“나도 어렸을 땐 독창도 잘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노래를 못해.”

강일출 할머니는 배 할머니를 옆에서 부러운 듯 쳐다봤다. “난 노래만 부르려고 하면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부를 수가 없거든. 목이 갈라지고 떨려서.”

열두 남매 중 막내딸이라 무척 여렸다던 강 할머니는 씩씩한 할머니가 됐다. 배 할머니가 나눔의 집 공식 가수라면, 강 할머니는 자타공인 공식 웅변가다.

“우리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 중국으로 끌려갔어. 중국에 부모님도, 친척도 없었어. 그런데 할 수 없이 끌려갔어. 그러다 2000년에 한국 정부에서 나를 찾아주고 생활을 다 책임진다고 해서 아들 둘 딸 하나 손자들을 데리고 한국 왔어. 나는 고향이 곶감 나고 대추 밤 많이 나는 경상북도 상주인데, 와서 보니 엄마 아빠도 죽고 오빠들도 다 죽었어. 그게 너무 슬프지만 가족들이 없어도 우리나라 정부가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학생들 세배를 받고 덕담 한마디 한다는 게 말이 조금 길어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빨려 들어갈 듯 강 할머니 얘기를 들었다. 

“중국에 살면서 내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는지 몰라. 나라를 지키려면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해야 돼. 그럼 우리들처럼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지 않을 거야. 일본놈들이 말야. 아베 (총리)도 보면, 지금도 배상도 안 하고 고개를 쳐들고 다니잖아. 이런 걸 안 보려면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강 할머니의 가족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중국에 함께 ‘공출’로 보내졌다가 나눔의 집에서 다시 만난 벗도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지난 2008년 돌아가신 고(故) 문필기 할머니 얘기다.

“길림성 장춘이라는 곳에 있는 위안소에 같이 있었어. 그 사람하고 나하고 거기서 ‘언제가 되면 우리가 고향에 가보갔나’ 이런 얘기를 했어. 그러다가 할매 돼서야 여기 왔는데, 그 사람은 죽었잖아. 가끔 생각나.”

 

 

▲설을 앞두고 나눔의 집에 배달된 선물 꾸러미들. ⓒ프레시안(최형락)

▲설을 앞두고 나눔의 집에 배달된 선물 꾸러미들. ⓒ프레시안(최형락)

 

 

 

"이제 몇 명 안 남았는데 저기선 헛소리만"


강 할머니는 지난 26일 돌아가신 고(故) 황금자 할머니 얘기도 꺼냈다.

“그 사람이랑은 수요집회 가서 많이 봤지. 이렇게들 다들 가. 정말 몇 명 안 남았어.”

강 할머니와 배 할머니 모두 ‘위안부’ 할머니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했다.

“우리도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지쳤어.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다들 빨리 죽어야지….”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크고 작은 명절 선물들이 끊임 없이 배달됐다. “선물을 받으니 기분 좋으시겠다”고 했다. 배 할머니는 “고맙다”면서도 “죽을 때 다 되어서 선물 받아야 뭣해. 모아두기만 하지.”라고 말했다. 배 할머니는 선물들을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방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할머니들이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아니, 받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이다.

“저기선(일본에선)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어찌 될는지….”

강 할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237명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단 55명. 이들은 앞으로 몇 번 더 있을지 모를 설을 맞이했다.

     

서어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너도 외롭구나

 

등록 : 2014.01.31 09:57

툴바메뉴

기사공유하기

보내기
 
서울 지하철 2호선 객차에서 승객들이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od@hani.co.kr

[표지이야기] 멀리 있는 당신을 찾아 안부를 묻는 ‘안녕들 하십니까’와 ‘응답하라’의 열풍
진정한 개인을 찾기 힘든 한국, 공동체를 향한 열망과 옛날 그리운 향수 공존
한겨레21 바로가기

너도 너를 찾고 있었구나.

 

상념은 뒤늦게 찾아온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지나가고 <응답하라 1994> 드라마도 끝나고. 그러나 여전히 끝없이 패러디되며 울림이 끝나지 않은 두 문장은 모두 ‘너’를 찾고 있다. 옆에 있는 당신이라기보다는 멀리 있는 너. 나와 비슷하게 ‘안녕하지 못한 당신’, 나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 그것은 당신도 나처럼 고립돼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몸은 어쨌든 하루를 견디고, 일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다행히 집안에 큰 우환은 없다. 해고되지 않았으니 잡혀가지 않았으니 아프지 않으니까 감히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헛헛하다.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처럼. 가까이 있는 이에게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고, 멀리 있는 당신에게 응답하라고 호소하는 아우성, 그것은 남의 목소리가 아니다.

 

 

 

“의미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너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은 나를 너로 만드는 과정이다. 성장이 나로 사는 것을 받쳐줬다. 경제도 성장하고 집 평수도 느니까 그나마 헛헛함이 채워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너가 되는 연습이 안 돼 있다.”-사회학자 엄기호

 

 

 

태초부터 외로움은 있었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외로움은 세상에 세들어 사는 월세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시인은 쓰지 않았던가. 어쩌면 우리는 외로운 사람들이라고 가수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일찍이. 묵묵히 견뎌야 마땅할 터인데, 자꾸만 아우성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잉여들.” 엄기호 사회학자가 말했다. 어머, 나만 좀비가 아니었구나, 위안이 든다. 헛헛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의미는 나로부터가 아니라 너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은 나를 너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힐링을 설파하는 이들은 “나로부터 의미를 찾으라”고 속삭인다. “나한테도 너가 있고, 나도 누군가한테 너가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나 아니면 남이다.” 하루이틀 이렇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지금 더 헛헛한 이유는? “성장이 나로 사는 것을 받쳐줬다. 경제도 성장하고 집 평수도 느니까 그나마 헛헛함이 채워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끔찍할 정도로 너가 되는 연습이 안 돼 있다.”

 

너가 되어야 하는구나. 그런데 너가 되기엔 힘이 달린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다시 엄기호씨는 “‘굳이’에 비밀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처지는 영육을 붙잡고 ‘굳이’ 무언가를 해야 비로소 의미 있는 너가 된다는 말씀. 그는 대학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즘 청년들은 굳이 연애를 하려 하지 않고 연애가 끝나도 굳이 이어붙이려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 요즘 젊은이를 만나보자. 40대의 외로움은 나를 통해, 노년의 쓸쓸함은 어머니를 통해, 느낌 아니까.

 

회사에 인턴으로 온 20대 남녀에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대학교 졸업반, 그녀의 일과.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9시에 등교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강의와 학교 내 알바를 정신없이 오간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밤 9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한다. 외로울 시간도 없겠다. 그러나 혼자 있는 밤이면 “모든 사람이 중력을 잃어버리는 상태”가 찾아온다. 의미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의 태양이라고 느끼는 아침도 있다.” 옆에 앉은 그도 하루 종일 공부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 공부한 게 쓸모가 있나?” 회의에 시달린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회, “연애는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굳이 누구를 배려해가면서 만날 마음이 지금은 없다”고 답했다.

 

 

SNS, 로맨틱 코미디 혹은 자기복제

 

 

누구나 하나쯤 중독을 달고 산다. 외로운 당신의 마지막 동아줄, 네트워크에 매달린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2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나온 그는 “이상향은 부산, 현실은 대구에 있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 웃기는 동영상을 보면서 향수를 달랜다. 친구가 누른 페이스북 ‘좋아요’는 여기로 오지 못하는 친구가 가져온 동영상 같다. 그만이 아니다. 나의 말을 아는 너, 나의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과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매달린다.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다. 그러니 자꾸만 멀리 있는 너를 부른다. 그러나 SNS의 신기루를 경험한 뒤다. 이제는 안다. 그렇게 연결되는 것이 난망한 일이란 것을. 엄기호씨는 이런 SNS를 통한 관계를 “쌉쌀한 것은 빼고 달짝지근한 것만 취하는 로맨틱 코미디 같다”고 비유했다.

 

 

 

“개인화가 진행돼 공동체에 대한 역진적 그리움이 발생한 결과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개인화가 덜 진행된 결과로 보인다. ‘응답하라’에서 보이는 회고는 집단적 회고다. 원래 노스탤지어는 복원 불가능한 것에 대한 회한의 정서다. 지금 한국은 1990년대를 즐겁게 회고한다.” -노명우 교수

 

 

 

네트워크에 매달려도 헛헛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예전엔 당신과 연결될 방법이 없어서 외롭다는 변명이 있었지만, 이제는 연결될 망이 있는데도 외롭다. 자책감이 더해진다. 그러니 더욱 외롭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문화비평)는 “끝없는 자기복제”라고 지적했다. SNS는 나와 다른 타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나와 의견이 같은 이들을 모으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복제를 통한 자기확인은 허망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문화연구)는 ‘안녕들’에 대해 “고독의 원인을 개인의 취향으로 보지 않고 경제·노동·도시·주거의 사회문제로 규정해 함께 풀어보자는 제안”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질문에는 “공동체 문화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열망은 2008년 촛불처럼 번지지는 않았다. ‘안녕들’에 담긴 ‘껄끄러운 진실’을 말하는 이도 있다. 이택광 교수는 ‘자기계발의 흔적’을 지적했다. “안녕들의 타자는 윤리적 타자다. 자기계발의 벽에 부딪히자 ‘왜’를 고민하다 너에 대한 호출이 없어서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비판을 통해서 완성되는 나. 여기서 너는 또 다른 나로서 너다.”

 

지금 여기서 가장 잘 팔리는 향수는 ‘응답하라’다. 마케팅 수단으로 숱하게 패러디되는 ‘응답하라’는 대형마트에서 1990년대 유행했던 브랜드 옷을 다시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당신, 응답하라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한쪽은 민주화, 한쪽은 종북 논리, 정치도 자꾸만 과거로 회귀한다. 한국적 향수의 향기에 대해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화가 진행돼 공동체에 대한 역진적 그리움이 발생한 결과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개인화가 상대적으로 덜 진행된 결과로 보인다. ‘응답하라’에서 보이는 회고는 집단적 회고다. 과거를 같이 회고할 누군가를 열심히 찾는다. 원래 노스탤지어(향수)는 복원 불가능한 것에 대한 회한의 정서다. 지금 한국은 1990년대를 즐겁게 회고한다. 더구나 현재적 복원에 가깝다.” 마침 ‘아이러브스쿨’의 동창회 열풍은 ‘네이버 밴드’로 다시 살아났다. 수도권에 2천만여 인구가 몰려 살고, 인터넷 인프라는 지구촌 최고 수준이다. 누군가 찾으면 찾아질 것 같은데 찾아지지 않는다. 찾아도 외로움은 풀리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종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매체는 외로움을 보여주고 외로움을 판매한다. 이택광 교수는 ‘문화적 거울’에 대해 말했다. “외로움은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면서 성찰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은 매체가 발달할수록 커지고 강화된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것처럼, ‘응답하라’고 호명하자 사람들은 외로움을 발견하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교수의 지적처럼 “문화적 거울은 훨씬 상징적이고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외로움을 파고드는 적들도 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이름도 희미한 옛날옛날 유명인들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는 종합편성채널(종편) 방송. 종편의 핵심은 정치가 아닐지 모른다. 종편의 극우적 정치에 공감하지 않는 중·장년도 자신의 시대와 함께했던 이들이 등장하는 방송을 보면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확인한다. ‘샤우팅’하는 정치쇼가 아니라 당신의 어제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하는 토크쇼가 종편의 핵심이다. 혼자만의 방에 우두커니 앉은 노년은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거짓 위로라 해도 달콤하다. 달콤한 옛 얘기는 당신의 쓸쓸한 오늘을 위로한다. 노년을 현재형 인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종편은 일종의 향수 산업이다. 엄기호씨는 “말의 세계에서 추방된 노인들을 종편과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말의 세계로 끌어들였다”고 표현했다. 그들을 외면한 민주화 세대가 어쩌면 자초한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들을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는 순간 박정희라는 상징이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엄기호씨는 딜레마를 지적했다.

 

고독은 이제 독신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정한 소통이 없는 관계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마인드프리즘 대표)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인정은 산소와 같다”고 표현했다. 존재 자체로 사람을 주목하고, 존재 자체로 서로를 축복하는 관계는 점점 줄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에 집중하기에 교사는 버겁다. 정혜신 박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었냐’ 손 잡아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직장에서는 해고 위협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비교의 스트레스에 지친다. 홀로서라고 하지만, 홀로서기는 홀로 하지 못한다. 정혜신 박사는 “축복받고 사랑받고 위로받는 관계를 경험해야 비로소 홀로서기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홀로서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 소리가 넘친다. 엄기호씨는 “그런데 자기 고통만 넘쳐난다. 대통령부터 걸인까지 내 고통을 들어달라 호소하지만, 서로 얼굴을 보며 고통의 소리를 들어주는 너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의미 있는 너가 되지 못한 너는 불편한 너가 된다.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굳이’ 소모되느니 차라리 안전한 너를 택한다. 비판이 어려운 멀리 있는 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너의 응답은 얻기 어렵다. 이런 고통을 잊으려 누구나 하나씩 가벼운 중독에 기대어 산다. 무심코 반복적으로 ‘무슨 짓’을 하다가 외로워서 이러나 의심한다. 문제가 생기면 인터넷부터 찾는다. 엄기호씨는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슬기로우냐가 아니라, 어떤 레퍼런스(참조) 집단을 가지고 있느냐다. 다들 이런 집단이 별로 없다. 이것을 인터넷 정보로 대체하려 하지만 정작 인생의 문제가 닥치면 정보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독하기도 친교를 나누기도 어려워

 

 

고독과 친교의 이분법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고전연구가 고미숙 박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있듯이, 고독 안에서 편안할 수 있어야 우주적 인드라망(우주 만물이 한 몸이자 한 생명이라는 깨달음)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근대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고독을 누리는 능력도, 친교를 나누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현상의 근원에 자연과 인간의 단절이 있다고 보았다. “문명이 발달하면 혼자서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 대해 무관심해진다. 근대 이전에는 먹고사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적 연대를 전제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적 전제는 천지만물에 대한 변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난해도 이런 연결 고리가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현상은 운명적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몸이다. 그는 “몸에서 출발하면 소통이란 결국 몸을 적극 활용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삶의 근본 문제가 소통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있듯이, 고독 안에서 편안할 수 있어야 우주적 인드라망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근대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고독을 누리는 능력도, 친교를 나누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졌다.” -고전연구가 고미숙

 

 

 

그렇다고 외로움이 모두에게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문제다.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쓴 노명우 교수는 “외로움을 선택하는 것이 희생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로움을 통해 얻게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시대에 ‘다 함께 홀로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동연 교수는 이런 집단의 출현에 대해 “소외감과는 다른 개인화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나 개인은 나타나지 않은 자리에 혼란은 더해진다. 가족이나 직장에서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우리는 ‘나와 같은 너’ ‘확장된 나’다. 그 배경에는 가족주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노명우 교수는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가족주의의 유지냐 약화냐가 아니다”라며 “가족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같아야 한다는 논리가 모두를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족 역시 사회처럼 이질적인 정서와 사회관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의미 있는 너가 되기에 서투른 이유를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 사회의 초고속 근대화, 불균형 발전, 토건 자본주의는 근대적 주체의 개별화와 분화를 가져왔다. 사람을 유기체적 연대의 존재로 향하게 하기보다는 자기 생각만 하는 일중독 상태로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은 지금 더 이상 일에서 보람을 찾기 어려워한다. 아니, 현 상태의 유지조차 버겁다. 사회가 구성원을 섭섭함과 배신감에 몸을 떠는 존재로,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좀비로 만들어버렸다.”

 

 

공포와 직면하지 않으면 좀비가 된다

 

 

때로 타자는 공포다. 그러나 공포와 직면하지 않으면 좀비가 된다. 가끔 자신이 좀비가 아닐까 의심하는 당신, 혼자가 아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남북관계 개선 외엔 답이 없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1/31 11:09
  • 수정일
    2014/01/31 11:0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중국의 군사적 증강에 대처하려면…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남북관계 개선 외엔 답이 없다

이재봉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정치외교연구소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31 07:33:53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이 눈부시다. 그리고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이 주목할 만하다. 중국은 지난해 12월 14일 달 탐사위성을 무사히 달에 올려놓았다. 지구에서 수십만 킬로미터 떨어진 달을 탐사할 수 있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초정밀 타격’ 기술을 충분히 갖췄음을 보여준다. 우주에 떠 있는 미국의 위성을 정확하게 타격함으로써, 위성을 이용해 전투기 항로를 결정하는 ‘위성항법’ 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1월 9일엔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됐다. ‘음속’은 흔히 ‘마하’로 나타내는 ‘소리의 속도’로 시속 1224 킬로미터 인데,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은 ‘마하10’ 또는 시속 12240 킬로미터로 비행했다고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을 막기 위해 미국이 구축해온 ‘미사일방어망(MD)’을 뚫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밖에 중국은 자체 기술로 항공모함과 세계 최대 규모의 수륙양용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항공모함’이란 수십 대의 전투기와 각종 군 장비를 싣고 다니는 군함으로, 이동하는 해군기지와 공군기지를 합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웬만한 국가의 국방력을 뛰어넘는다. ‘수륙양용기’는 말 그대로 바다나 육지 어디에서든 뜨고 내릴 수 있는 비행기를 가리킨다.

 

 

중국의 이러한 과학기술 발전과 군사력 증강은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률에 맞춰 군사비 지출도 급격하게 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미국, 중국, 프랑스, 영국, 일본, 독일, 러시아 등 세계 군사비지출 7대국 가운데 중국의 군사비 지출이 2000년대 이전까지는 맨 꼴찌였지만, 2010년부터는 미국을 제외한 어떤 군사 강국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급속한 군사력 증강을 부추기는 가장 큰 요인은 미국의 중국 견제와 포위 전략이다. 미국 국방비는 중국 국방비의 다섯 배 정도 되고, 미국을 뺀 세계 군비지출 10대국 국방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데, 미국은 군사력의 절반 이상을 중국을 둘러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가장 심각한 군사적 위협은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핵잠수함이다.

 

여기서 미국의 핵무기 전략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부터 ‘핵무기 없는 세상’을 주창하면서 2010년 러시아와 ‘새 전략무기감축협정 (New START)’을 체결해, 2018년까지 각각 핵무기를 1550개씩 줄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작년 6월 “핵무기 사용 전략 (Nuclear Weapons Employment Strategy of the United States)”을 발표했다. 미국 국방부 주도로 작성하고 대통령이 확정한 이 전략의 핵심은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해 핵무기 수량은 줄이되 품질을 높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실어 나르고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크게 세 가지로 폭격기와 미사일 그리고 잠수함이다. 미국이 2013년 현재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배치해놓은 핵무기는 약 2000기인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잠수함에 실려 있다. 미국은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SLBM)’을 실은 이른바 ‘핵잠수함’ 14척을 운용하는데 이 가운데 9척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돼 있으니, 대략 700~800기의 미국 핵무기가 중국 및 한반도 주변 해역을 떠돌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미국 국방부와 백악관 그리고 핵과학자협회에서 발표한 자료들에서 찾을 수 있다. ☞국방부 자료 바로가기 ☞백악관 자료 바로가기 ☞핵과학자협회 자료 바로가기
  
이에 맞서 중국은 미국의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비롯한 최첨단 무기들을 개발하고 있으니, 두 나라 사이의 군비경쟁이 그치기 어렵다. 점진적으로 쇠퇴하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나라를 견제하려는 것도 당연하고, 급격하게 떠오르는 2위 국가가 자신을 포위하려는 나라를 따라잡으려는 것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직접 그리고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덩달아 군비경쟁에 끌려들어가기 쉽지만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이 작년 11월 동중국해 일대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자 박근혜 정부는 서둘러 이지스 구축함을 건조하고 공중급유기를 도입하겠다고 했는데, 이런 군사적 대응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돈도 많이 들기 마련이다.

 

평화적이고 큰돈도 들지 않는 가장 바람직한 대응 방안은 ‘세련된 중립적 외교’일 것이다. 문제는 남북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는 미국에든 중국에든 이런 외교를 펼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남한이 세계 200여 개 나라 가운데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10위 안팎의 강국에 속하지만, 그에 걸맞은 정치력이나 외교력은 갖지 못하고 있는데, 북한과 적대적으로 대치하면서 어찌 미국에 자주적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중국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재봉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정치외교연구소장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 기획] 당신의 디지털, 안녕하신가요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30 14:33
  • 수정일
    2014/01/30 14:3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 2014.01.29 18:36수정 : 2014.01.30 10:39

툴바메뉴

기사공유하기

보내기
 

[2014 기획] 당신의 디지털, 안녕하신가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박은호(가명·18)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9시에 나가 밤 10시에 들어왔다. 집에는 정부에서 지원해준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었다. 박군에게 컴퓨터는 학습과 정보생활의 도우미가 아닌 모든 걸 잊고 몰입하게 만드는 사이버 세상이었다.

 

방학이면 온종일 인터넷 게임을 했다.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고 자폐 증상도 나타났다. 그렇게 5년이 흘러 고등학교에 올라갈 나이가 됐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박군을 지역아동센터에 보냈다. 센터 교사가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집의 컴퓨터를 압수했다.

 

그 뒤로 박군의 생활은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공부에 전념해 고2 때는 전교 1등을 하기도 했다. 박군은 올해 3월 자신이 원하던 전문대 진학을 앞두고 있다. 박군은 “센터 선생님이 그때 제 컴퓨터를 없애지 않았더라면 전 아직도 게임에 빠져 어머니 걱정만 시키는 아들이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서울교육청 지역별 학생조사결과 
스마트폰 ‘위험·주의 사용군’ 
금천·구로·영등포, 강남·서초보다↑ 
소득 낮을수록 중독위험 높아져 
저소득층 학생들 ‘정보화 지원’에도 
중독 등 부작용 방지책 미흡 지적 

 

 

■ 저소득층이 인터넷 중독률 높아 정부의 디지털 격차 완화 정책이 하드웨어 지원을 통해 접근성을 높이는 양적 접근에 집중된 결과,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다. 소득이 낮은 지역의 학생들이 디지털 미디어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현상이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제공한 ‘서울시교육청 스마트폰 및 인터넷 이용습관 전수조사’(2013년 4월) 결과를 보면, 남부교육지원청 학생 중 ‘인터넷 위험 및 주의 사용군’에 속한 학생은 4.1%(2만1896명 중 900명)로 강남지역교육청의 2.8%(2만8784명 중 795명)보다 높았다. 남부교육지원청 관할인 금천·구로·영등포구 지역은 강남교육지원청이 담당하는 서초·강남구보다 소득 수준이 낮다.

 

박홍근 의원은 “소득 수준이 낮은 가정에선 부모가 맞벌이를 하거나 한부모가정인 경우가 많아 자녀들의 인터넷 사용에 대한 적절한 개입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부교육지원청 관할 지역에서 학생들의 과다사용률이 높은 것은 이런 이유인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0년부터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보호대상자 학생을 대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비를 지원하는 ‘초중고 학생 교육정보화 지원 사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2013년까지 5900억원을 들여 197만2000여명의 학생이 수혜 대상이었다.

 

이 사업은 학생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어 게임 과다 사용 같은 부작용을 막는 데는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현재 교육청에선 이 학생들의 인터넷 사용 실태를 따로 관리하지 않는다. 대신 1년에 1차례씩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 중독 예방 교육을 한다. 또한 정부가 1년에 한 차례 전국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습관 전수조사를 진행한다. 여기서 위험 또는 주의 사용군으로 나온 학생들은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에서 상담을 받거나 증상이 심한 경우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서울시교육청 담당자는 “통신비를 지원받는 학생만 따로 관리를 하면 낙인 효과가 우려돼서 별도 관리를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 스마트폰으로 격차 배가 인터넷만이 아니다. 스마트폰도 디지털 격차를 키우는 데 가세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에 살면서 단대부고에 다니는 조아무개(18·고2)군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피처폰(2G)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사용했지만 스마트폰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조군 스스로 학업에 방해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마트폰의 부작용에 관한 뉴스를 보던 어머니가 “스마트폰은 놀거리가 많아서 방해되니까, 대학 가서 스마트폰으로 바꾸자”고 말한 뒤로, 조군은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조군은 “학교 친구들도 고3 올라갈 때가 가까워지면서 스마트폰에서 피처폰으로 바꾸는 경우가 우리 반에서 5명 정도 된다”고 말했다.

 

구로구에 사는 황아무개(16·중3)양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했다. 방학인 지금 하루에 4~5시간가량 스마트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낮에 스마트폰을 하면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기 때문에 밤 11시부터 스마트폰을 집중적으로 쓴다. 웹툰을 보고 게임과 카카오스토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4시가 된다. 황양이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자가진단’ 검사를 한 결과 ‘고위험 사용자군’으로 분류됐다. 황양은 “가끔은 스마트폰을 그만 해야 하는데 싶어도 습관적으로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저소득층 가정 청소년들이 고소득층 가정 자녀들보다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위 서울시교육청 조사에서 ‘스마트폰 위험 및 주의 사용군’ 학생은 강남교육청에서 4.6%(2만6430명 중 1213명)지만 남부교육청은 7.8%(1만8768명 중 1458명)로 현저히 높았다. 이는 스마트폰 보유 비중과 반대된다. 스마트폰 보유율에서 강남교육청 관내에 사는 학생들(91.3%)은 남부교육청 관내 학생들(84.5%)보다 높지만, 실제로 스마트폰 과다사용률에서는 남부교육청 학생들이 훨씬 높게 나타난 것이다.

 

■ 저소득층 부모는 스마트폰 몰라 자녀들에게 올바른 스마트폰 사용을 지도하기 위해서 저소득층 부모들이 스마트폰을 잘 알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2013년 발표한 ‘2012 신디지털 격차 현황 분석 및 제언’ 보고서를 보면, 일반 국민의 ‘모바일 정보화 수준’을 100으로 뒀을 때 저소득층은 46.1%에 머물렀다. 진흥원은 2012년 8~11월 전국의 일반인과 4대 소외계층(장애인·저소득층·농어민·장노년층), 북한이탈주민과 결혼이민자 등 모두 1만7500명을 조사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 이 중 저소득층엔 전국 만 7~76살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3000명이 해당된다.

 

연구 책임자인 이재웅 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저소득층의 모바일 정보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기본 기능만 탑재한 저사양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저렴한 요금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소외계층의 눈높이에 맞는 모바일 활용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는 왜 뼈만 남은 누렁이를 '안락사'했나

2012년 순창 소 아사사건 생존소의 최후... '경제가치'만 좇은 결과


그러나 3개월이 지난 시점인 2012년 5월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50여 마리의 소들은 축사에서 굶어 죽었고, 뼈만 남은 25마리의 소만 생존했다. 2012년 5월 22일 동물사랑실천협회는 살아남은 25마리 중 9마리 소를 구출해 과천 정부종합청사에 찾아갔다. 정부의 대책 마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동물사랑실천협회는 남은 16마리의 소도 구출하려 했지만, 농장주는 소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동물사랑실천협회와 농장주 그리고 순창군은 협의를 통해 지자체가 먹이를 제공하고 1년 동안 농장주가 16마리의 소를 맡는 방식에 합의했다.
 
기사 관련 사진
▲  2012년 순창에서 굶어죽은채로 발견된 소의 사체.
ⓒ 동물사랑실천협회

관련사진보기


이 '소 아사 사건'을 계기로 동물보호법이 개정됐다. 2013년 4월 5일부터 고의로 급수·급식을 하지 않아 동물을 죽이면 동물학대죄로 처벌받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16마리의 소는 삶의 평안을 되찾지 못했다. 

2013년 현재 16마리의 소 중 12마리가 죽고 4마리의 소만이 남았다. 농장주는 더 이상 4마리의 소를 맡을 수 없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2013년 12월부터 사실상 4마리의 소가 갈 곳은 없게 된 것. 대한민국에서 소는 먹기 위한 자원인 만큼 일정 정도 보호하고 도살장에 보내는 게 상식이다. 소를 죽음의 순간까지 반려동물처럼 보호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기사 관련 사진
▲  남아있는 소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장면, 뒷모습에서 이미 뼈가 앙상한 것을 볼 수 있다.
ⓒ 동물사랑실천협회

관련사진보기


다행히도 전주시의회 오현숙 시의원과 박정희 녹색당 전북 공동위원장·동물사랑실천협회의 노력으로 4마리의 소는 전주 지역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이게 2013년 12월 19일의 일이었다. 이제 소들은 좀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까. 

그런 바람도 잠시. 2014년 1월, 4마리의 소를 임시보호하던 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중 누렁소가 쓰러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며칠째 아예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시름시름 앓다 죽게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수명을 다한 것이라면 이제 먼 곳으로 떠나야 할 때. 그러나 질긴 목숨은 그 고통을 연장시키고만 있다. 

임시보호를 하는 분도, 주변의 많은 분들 모두 안락사 이야기를 꺼냈다. 회복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고통스러운 삶이 지속적으로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면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은 안락사였다. 보호소에서 개나 고양이를 안락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으나, 막상 소를 안락사한다니…. 막연하고 낯선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동물의 긴급 안락사, 참 어렵다
 
기사 관련 사진
▲  주저앉아있는 누렁이에게 다가갔다.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인도적인 안락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좋을지 여러 수의사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동시에 외국 동물단체의 가이드라인을 참고했다. 

영국동물보호협회(RSPCA)의 안락사 규칙과 가이드라인(Euthanasia rules and guidelines, 2014)에는 소, 양, 염소, 돼지, 말, 당나귀와 같은 대동물을 안락사할 경우, 캡티브 볼트(captive bolt, 가축총으로 불리며 금속봉을 발사하며 가축을 도살하기 전 기절시키는 용도로 쓰임)를 이용하거나 펜토바비톤 소듐(pentobarbitone sodium)을 정맥으로 주사(1.5kg 당 1ml)하는 방법을 쓰도록 조언하고 있다. 

안락사를 도와줄 수의사 선생님을 찾았다. RSPCA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펜토바비톤 소듐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으나, 현재 국내에서는 마약류로 분류돼 있어 급하게 구하기는 매우 어려운 약물이라는 답변뿐이었다. 그렇다고 아파서 주저앉은 소를 위해 캡티브 볼트를 구해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그 장비를 사용하는 데는 숙련자가 필요했다. 캡티브 볼트는 아무나 조작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를 도살 처분할 때 많이 쓰이는 근육이완제 석시니콜린(succinyncholin)을 단독으로 쓰면 인도적인 안락사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석시니콜린은 짧은 시간에 작용하는 근육이완제로, 근육이 마비돼 통증에 반응하지는 못하지만 의식이 또렷해 그대로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을 경감 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반드시 마취제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연락을 시도한 수의사 선생님들 모두 시원한 답변을 주지는 못했다. 

지난 1월 23일 안락사를 도와주시겠다는 수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안락사할 때 어떤 약물을 쓰시나요?'라는 질문에 그 선생님은 짐짓 놀라는 듯했다. '왜 물어보냐'는 반응. 나는 인도적 안락사가 누렁이에게 이뤄져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수의사 선생님은 그제서야 럼푼(Rompun)을 쓴 뒤 석시니콜린을 쓰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나는 럼푼은 전마취제로 진정제일 뿐, 충분히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없으니 마취제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수의사 선생님은 마취제로 그간 많이 쓰였던 케타민(Ketamin)은 2006년 2월부터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됐다고 설명했다. 케타민 외에 많이 쓰였던 졸레틸(Zoletil) 역시 2013년 12월부터 임시 마약류로 지정돼 관리 대상이 됐기 때문에 긴급하게 마취제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의 경우 개와 달라 마취제가 있어도 고용량이 필요하다. 결국 소 같은 대동물의 긴급 안락사는 매우 어렵다는 결론. 결국 다른 수의사 선생님을 찾기로 했다. 

어렵게 다른 수의사로부터 안락사를 도와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난 1월 24일 약속을 잡고 나는 동물사랑실천협회 활동가들과 전주로 향했다. 농장에 도착하니 수의사 선생님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AI 방역 중이니 소우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역복을 입으라고 했다. 우사 안으로 들어가니 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누렁소가 보였다. 보기에도 이미 뼈가 앙상했다. 배설한 뒤에도 몸을 움직이지 못해 소의 항문 아래는 배설물이 가득했다. 누렁소를 처음 본 수의사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락사하는 소가 거의 없는 까닭
 
기사 관련 사진
▲  등은 이미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모습. 몇 차례 수의사선생님이 찾아와 치료했지만 이미 소용없는 상태까지 갔다고 한다.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조금 더 일찍 연락하지 그랬어요. 이렇게 말랐을 정도면 고통이 심했을 텐데…." 
"왜 며칠째 밥을 못 먹고 있을까요?" 
"그때 얼마나 굶었다고 했죠?"
"두 달간 물만 먹였대요." 
"아마 그때 내장기관이 많이 상했을 거예요. 이미 신체기관이 거의 손실돼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거죠."

고통을 덜어주자. 이미 살아날 가능성은 0%. 수의사 선생님이 가방에서 주사기와 약병을 꺼냈다. 

"소를 안락사할 때 마취제는 거의 안 써요. 하지만 동물단체에서 그렇게 부탁하니까…,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알게 됐다. 소에게 안락사가 없는 이유를. 소는 식용을 위해 인간이 키워낸 존재가 돼버렸다. 즉, 먹기 위한 재료이니 몸이 아파 쓰러져 죽어갈 때까지 키울 이유가 없는 존재라는 이야기다. 안락사에도 비용이 소요되므로 그냥 방치하거나 도살장으로 보내면 그만인 동물이 소였던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약물이 들어가자 옆에 누운 모습.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우선 럼푼으로 소를 안정시킨 뒤 마취제를 주입했다. 소의 눈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시니콜린을 주입. 수의사 선생님이 "약간의 경련이 있을 수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말했으나 생각만큼 경련이 심하지는 않았다. 몸이 약간 흔들리고 잠시 후, 눈이 완전히 감기고 몸의 작은 움직임마저 멈췄다. 수의사 선생님은 손으로 호흡과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이제 호흡이 멈췄네요." 

그렇게 누렁이는 세상을 떠났다. 누렁이는 2009년도 생이니, 5살 정도가 됐다. 내가 누렁이를 처음 본 날은 누렁이가 죽은 날이 됐다. 지금까지 나는 동물이 죽어가는 것을 많이 봐왔다. 그런 상황은 익숙했지만, 그날 내가 본 장면은 마음 속에 편하지 않은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이 모두에게 행복은 아니다. 적어도 이윤을 위해 동물을 굶겨 죽이는 게 동물학대라는 상식을 넘어 법이라는 강제규정이 됐다. 

'가축'이라는 슬픈 삶
 
기사 관련 사진
▲  남아있는 세 마리의 소
ⓒ 전경옥

관련사진보기


누렁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멀리 너른 농토가 보였다.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AI가 충청·전라 지역을 강타하면서 겨울철새가 먹이를 구하는 곳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죗값은 말 없는 철새가 뒤집어쓰고 있다. 

야생상태에서 철새가 AI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어 병이 발생해 대량으로 죽어 나가는 일은 없다. 적어도 인간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들은 자신만의 생태계 흐름 내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가축'인 오리와 닭은 인간의 개입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유전자는 단일하며 환경도 열악하다. 개체 한 마리 한 마리 삶의 행복을 모두 고려하다가는 이윤은커녕 손해만 보고 농장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가 '많이' '자주' 그리고 '풍족하게' 먹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축'을 생산해냈다. '가축'으로 태어나 죽어가는 그들의 삶. 누렁이는 그나마 우리들의 '극성스러운' 부탁으로 진정제·마취제·안락사 약물까지, 최대한 인도적인 처우와 배려를 받았다. 우리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누렁이의 뺨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가축들은 이름도 없이, 최소한의 마지막 배려도 없이 땅에 묻히고 있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은 지금 상황에서 매우 공허한 말이다. 자식 같은 닭을 땅에 묻는다고 토로하는 분들의 말이 되레 냉혹하고 차갑게 다가왔다. 생명보다는 경제적 가치가 더 우선인 사회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식 같은 소를 왜 굶겼을까. '가축'은 그저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 자원이 '똥값'이 됐으니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됐을 뿐이다.

2014년 1월 27일 현재, 전국적으로 64만4000마리의 오리와 닭이 도살 처분됐다고 한다. AI로 인한 농가보상액은 2008년의 경우 1817억 원, 2010년에서 2011년에는 807억 원에 달했다. '가축'에 경제적 가치만을 부여한다면 누렁이 같은 굶어 죽어가는 소들, 자루에 담겨 땅에 집단으로 묻히는 오리·닭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2000년부터 거의 매년 발병하는 가축 질병에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축이 땅에 묻혔다. 대한민국, 동물에게는 공포의 킬링필드다.

덧붙이는 글 | 전주 인근의 농가에 임시보호되고 있는 남은 3마리 역시 곧 농가를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소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태그:동물보호법, 순창소, 동물학대 태그입력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철도파업 그 후, '파업둥이' 아버지의 명절 나기

[르포] 해고 처분 앞두고 어머니가…"철도 노동자는 명절 없어요"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30 10:11:06

 

 

 

 

 

 

 

 

 

 

 

 

 

 

 

 

전국철도노조(철도노조) 서울기관차승무본부장은 지난 철도파업 때문에 해고 위기에 처했다. 곧 '배제징계(해임, 파면 등 해고에 해당하는 징계)' 예상되는 상황에서 처분서를 받아들 것이다. 그는 최근 어머니가 위독해져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에 내려갔다. 설 연휴(1월 30일~2월 1일)가 지나면 처분서가 올 것이다. 설상가상이다.

 

지난 2013년 12월 9일 오전 9시, 철도노조는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철도 민영화 반대', '수서발KTX 설립 취소'를 요구했다.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23일간의 파업은 놀라운 현상들을 만들어냈다. 난생 처음으로 여고생의 편지를 받아봤다는 김성주(가명, 36) 기관사는 파업 기간 동안 이어졌던 시민들의 관심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할 상처는 가혹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파업 철회를 호소했던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최연혜 사장은 파업 시작과 동시에 4000여 명을 직위해제했다. 총 8773명에 대한 직위해제, 7790명에 대한 징계 회부, 191명에 대한 업무 방해 고소 고발, 490명에 대한 중징계 회부, 손해배상 152억 원 청구, 가압류 116억 원 신청 등.

 

철도 노동자들은 그렇게 '민영화'라는 단어를 대한민국 한 복판에 던져 놓았다. 공공재, 그리고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함께 던져 놓았다. 그리고, 파업이 끝난지 한달여 만에 상처 투성이 명절을 맞이했다.

 

 

▲ 서울 수색차량기지 ⓒ프레시안(박세열)

▲ 서울 수색차량기지 ⓒ프레시안(박세열)

 

 

징계 앞두고 '국민 대수송'에 나선 '파업둥이' 아버지 김성주 씨 이야기 

 

서울기관차승무지부의 휴게실에서 만난 김성주 기관사는 설 직후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4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2009년 철도 파업에 참여했다가 사소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된 후 '해고' 날벼락을 맞았다. 2월이었던 구정 명절을 며칠 앞두고.

 

서기지부 교선부장이었던 김 기관사가 징계를 받게 된 이유도 황당했다. 행신역에서 예정된 기자회견에 늦게 갔던 김 기관사는 선전물에 실을 사진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기자회견이 끝난 공간을 돌아다니며 사진기 셔터를 몇 번 눌렀다. 그 모습을 본 경찰이, 김 기관사를 현장에 남아 있는 시위대로 생각하고 연행해버린 것이다.

 

파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경찰에 연행될 당시 어떤 불법적인 행동도 하지 않은 그는, 사측의 해고 통지를 받아들고 지노위(서울지방노동위), 중노위(중앙노동위)를 들락거렸다.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잠재적으로 불법 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사측의 주장은 황당한 수준이었다. 가족들은 걱정했다.

 

"지노위, 중노위에서 다 해결 되니 걱정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김 기관사의 어머니는 한숨만 내쉬었다. 결국 그는 승소했고, 1년 반 만에 일터로 돌아오게 된다.

 

김 기관사는 그러나 2014년, 또 다시 명절을 앞두고 징계위 출석 요구서를 받아들게 됐다.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자꾸 생각났다. 파업 기간에 생긴 아이여서 "파업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아이었다. 파업 중에 경사가 난 것이다. 아내는 그가 파업에 참여할 때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했다. 아내 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만난 이름 모를 시민들이 모두 든든한 지원군이라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했다. '철도 민영화 저지'의 명분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받은 것 같아 흥분도 느껴졌다. 23일이나 파업을 이끌게 된 동력이었다.

 

 

▲ 서기지부의 조합원 '사랑방' ⓒ프레시안(박세열)

▲ 서기지부의 조합원 '사랑방' ⓒ프레시안(박세열)

 

 

많은 기관사들은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를 잘 한다. 더군다나 지부의 교선부장을 지냈을 정도면 말글 깨나 다룰 줄 안다는 이야기다. 올해 서른 여섯인 김 기관사는 철도청이 철도시설공단과 코레일로 분할되면서, 코레일 공채 1기로 입사했다. 한국항공대학교 출신인 그는 철도 기관사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운전 직열에 지원하면 차장이 될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차장이면 높은 사람 아닌가"라는 생각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는 "차장이 운전하는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며 웃었다. 그렇게 기관사가 됐다. 항공대에 진학한 계기도 "항공대에 가면 스튜어디스를 많이 만날수 있다"는 외삼촌의 주장 때문이었는데, 스튜어디스 지망생은 항공대에 입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학에 와서 알게됐다고 했다. 시커먼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대학을 다녔다.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던 그는 "징계를 받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에 대한 징계보다 지부장의 해고 여부가 더 걱정인 듯 보였다. 그는 "그래도 할 일은 해야죠"라고 답했다.

 

김 기관사는 설 당일인 31일 새벽 2시에 출근한다. 그날 운행할 객차를 조성(운행할 열차를 편성해 이어붙이는 일)하는 일을 하게 된다. 입환(차량의 분리, 결합, 전선(轉線) 등을 하는 작업)용 기관차를 몰고 객차를 살펴 운행 가능하도록 이어붙이는 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문제가 생긴 객차가 있으면 골라내야 한다. 마치 구슬을 꿰면서 불량 구슬을 골라내는 것과 같다.

 

 

▲ 수색차량기지에서 한 기관사가 차량을 살피고 있다. ⓒ프레시안(박세열)

▲ 수색차량기지에서 한 기관사가 차량을 살피고 있다. ⓒ프레시안(박세열)

 

 

그가 레버를 쥐자 수십 톤 쇠뭉치가 움직였다

 

김 기관사는 다행이 집이 서울이어서, 설 근무가 끝난 오후에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수 있다. 고향이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명절이라도 해도 별 의미가 없다. '명절 추억'을 공유할 상대도 모두 동료들이다.

 

"명절이요? 철도 노동자는 명절같은 거 없습니다. 그냥 평상시랑 똑 같아요." 서울 경의선 수색역에 있는 서기지부 조합원 '사랑방'의 뜨끈한 온돌 위에 누워있던 기관사들이 입을 모았다.

 

"저 친구는 집이 여수고, 이 형은 집이 안동이예요, 명절때 고향에 간 기억이 없네요. 대수송기간이라, 귀향길, 귀성길 사람들 실어 나르고, 서울본부에 떨어지면, 다음 돌아올 근무자가 누군지부터 확인합니다. 근무자를 확인하면 전화를 걸죠. 그렇게 시간 맞는 기관사들끼리 한잔 걸칠 때가 있는데, 그게 우리한테 명절이예요."

 

 

김 기관사는 동료를 한명 가리키며 "저 형님도 명절 지나면 징계위에 출석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동료는 웃음을 슬쩍 지어보였다. 그는 "징계는 사실 두렵지 않아요. 과거에도 몇 차례 당한 적이 있어서..."라고 말을 흐렸다. 또 다른 기관사는 "본가에도 처가에도 '아시죠? 저 바빠서 집에 못 갑니다' 전화 한통이면 귀향길 안가도 되니 오히려 얼마나 편합니까"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직위해제는 대부분 '원상복귀'됐다. 열차는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처분서를 기다리고 있는 150명 가량의 배제징계 대상자와 500명 가량의 경중징계 대상자들이 남았을 뿐이다. 인터뷰 시간이 끝나간다. 김 기관사는 검은 색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굉음을 내고 있는 디젤 기관차에 올랐다. "출고선 위에 선 묵직한 쇳덩이를 가볍게 움직이는 손맛"이 기관사가 돼 맛보는 행운이라고 한 기관사가 말했다.

 

명절과 징계와 파업을 뒤로하고, 가슴에 "철도 민영화 반대" 리본을 단 기관사가 레버를 쥐고 가볍게 힘을 주니 수십 톤 쇠뭉치가 '철컹' 하며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차창 밖 세상이 진짜로 움직였다.

 

 

▲ 디젤 기관차 안에서 본 풍경 ⓒ프레시안(박세열)

▲ 디젤 기관차 안에서 본 풍경 ⓒ프레시안(박세열)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