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근혜, 인디언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박근혜, 인디언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뉴스와 분석] 박 캠프 “200만표 승리, 인수위 구성”... 샴페인 준비?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2-02 03:02:59 | 최종:2012-12-02 04:29: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올 대선 본선의 초반 판세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조금 앞서 있다고 한다. 여론조사 수치로는 대략 3% 정도. 무시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유의미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권투경기로 치자면 10라운드 게임에서 1라운드는 박근혜가 이긴 셈인데 문제는 남은 9라운드 경기를 누가 잘 마무리 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혜로운 체력 안배와 무엇보다도 ‘한 방’의 결정타도 꼭 필요하다. 전략 가운데는 티 안나게 재주껏 하는 ‘반칙’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랄 수 있다.

비록 1라운드이긴 하나 자기편 후보가 이기고 있으니 박 캠프로선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박 캠프에서는 벌써부터 판정승도 아닌 ‘KO승’을 장담하며 경기 후 시상식과 그 때 쓸 샴페인을 준비하고 있다는 식의 얘기가 들린다. 기뻐서 들뜬 나머지 성급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 왜 없을까 마는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싶다. 기껏 1라운드에서 가벼운 훅 몇 방 날렸다고 벌써부터 챔피언 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니 말이다.
 

지난달 30일 부산지역 유세에서 선거운동원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박근혜 후보

지난달 30일자 <경향신문> 보도(29일 밤부터 인터넷판 게재)에 따르면, 새누리당 선대위의 한 관계자는 29일 “문재인은 안철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프레임도 이상하게 잡고 있다”면서 “어떤 식으로 표 계산을 해도 우리가 이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수도권에서 15% 이상 지지 않는 이상 지역별로 표 계산을 해보면 절대로 질 수 없는 선거를 하고 있다”며 “최소한 200만표 이상으로는 이길 것 같다”고도 했다고 한다.

 

이어 또 다른 선대위 관계자는 “마지막 변수는 안철수의 지원 강도다. 안철수가 적극 지원하면 3~4%포인트는 올라갈 수 있다”면서도 “투표율이 야당이 원하는 만큼 높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투표율이 80% 정도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질 수 없는 선거로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최대변수였던 야권 후보단일화가 ‘감동’을 주지 못한데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근혜가 앞서고 있으니 이같은 희망 섞인 판단을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 보도가 나가자 트위터 등 SNS에서는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반드시 뒤집자”는 등 야권 결속을 주장하는 야당 지지자들의 글이 잇따랐다. 급기야 새누리당 김무성 선대위 총괄본부장은 이날 밤 의원들에게 긴급 문자메시지를 보내 ‘입조심’을 시키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는 “벌써부터 선거분위기를 해치는 당내 인사의 언론 인터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인터뷰는 절대 해선 안된다”며 함구령을 내렸다. 일종의 ‘표정관리’인 셈이다.

1일자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국내 모 재벌그룹에서 작성한 내부 보고서에는 박근혜가 이기는 걸로 나와 있다고 한다. 선거에 민감한 집단 가운데 하나는 재벌이다. 결과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여야 후보들이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 같이 경제민주화, 즉 재벌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있어 더욱더 민감할 것이다. 어떤 그룹에서는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하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모르긴 해도 앞에서 언급한 ‘모 재벌그룹’은 국내 1위의 삼성그룹일 가능성이 크다. 그들 역시 선거에 관심이 있으니 선이 닿는 대로 안테나를 풀로 가동해 정보를 모으고 또 분석을 할 것임이 분명하다. 국내 재벌그룹의 경우 계열사 가운데 보험회사를 갖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이곳이 주요 정보수집 창구로 알려져 있다. 실핏줄 같은 전국의 지점망을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날 것’으로 수집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조직인 경찰 정보와 버금갈 정도로 알려져 있다.
 

지난달 25일 오후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

따라서 새누리당 자체 분석이나 모 재벌그룹의 내부 보고서는 현 시점에서는 나름으로는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이미 ‘박근혜 대세론’이 엎치락뒤치락 한 적도 있고, 여론조사 역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저런 변수로 인해 ‘지속성’이 담보될 수 없다면 그런 정보는 일시적으로 유용할 뿐이다. 따라서 본선 초반에 박근혜가 승기를 잡은 것은 흔히 화투판에서 하는 말로 ‘초장 끗발’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새누리당이 대선 승리의 관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안철수의 지원 여부와 그 강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투표율’이다. 우선 안철수의 문재인 지지 여부와 그 방식, 강도 등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치 않다. 3일(월) 안 캠프 해단식 때 참석해 이와 관련해 무슨 입장표명을 할 것이라고 하니 미리부터 왈가왈부할 것은 없다. 그 때 들어보면 안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문재인을 돕지 않겠느냐는 것이 중론이다.

다음은 투표율. 이건 문재인에게 불리한 편이다. 문재인에게 우호적인 20~30대 젊은층은 박근혜에게 우호적인 50~60대보다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낮다. 이번 선거에서 이런 ‘경험칙’이 깨질 것이라는 기대는 갖기 어렵다. 게다가 안철수와의 후보 단일화 역시 매끄럽게 마무리되지 않아 안철수 지지자 가운데 예상보다 ‘이탈자’가 많을거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여럿 있었다. 결국 객관적으로 볼 때 이변이 없는 한 문재인이 불리한 형국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위의 둘만이 대선의 변수는 아니다. 변수는 얼마든지 있다. 우선 상상해볼 수 있는 것으로 투표일에 임박해서 터질 수도 있는 ‘돌발사건’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유형으로는 대형 금전비리사건이나 사생활 관련인데 이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자칫 한순간에 선거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여야 유력후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박근혜, 문재인 두 사람 모두 오래전부터 대통령을 준비해온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24일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에 앞서 허리숙여 인사하는 박근혜 후보

다음 변수로는 박근혜의 지지율(혹은 지지기반)이다. 혹자는 박근혜는 40% 안팎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정수장학회, 5.16쿠데다, 유신 등 잇따른 과거사 논란은 물론 측근들의 잦은 ‘말썽’에도 불구하고 끄떡없는 걸 보면 이는 ‘객관적 사실’로 인정할 만하다. 혹자는 박근혜가 설사 사생아 열을 낳았다고 해도 이 ‘콘크리트 지지율’은 깨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박근혜가 이 ‘콘크리트 지지율’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박근혜 지지율은 ‘취약점’이 적지 않다. 우선 전국적인 판세로 한번 따져보자면, 제일 덩치가 큰 서울/수도권은 여전히 야권 강세다. 과거에도 그랬고 이번 대선에서도 별다른 변화는 아직 감지되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대구/경북은 여전히 ‘텃밭’ 그대로다. 반면, 또 하나의 텃밭이었던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은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여전히 우세이긴 하나 지금은 ‘공동농장’ 비슷하게 돼버렸다. 참고로 문재인과 안철수가 부산 출신이다.

호남(광주/전남북)은 여전히 민주당의 ‘문전옥답’이다. 다만 밭고랑에 ‘금’이 좀 갔다. 밭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이다. 강원도는 현재로선 새누리당이 절대 우세지역이다. 다만 문재인이 대북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있어 보인다. 대전/충청은 현재로선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가깝다. 옛 주인(자민련, 자유선진당 등)이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누가 잘하느냐에 따라 아무나 새 주인이 될 수 있다.

결국 박근혜가 공략할 포인트는 두 지점으로 판단된다. 우선 과거 새누리당의 ‘텃밭’이었다가 지금은 ‘공동농장’으로 변해버린 ‘부울경’이다. 그래서 요즘 박근혜의 부산/경남 방문이 부쩍 잦다. 일단은 ‘집토끼’부터 챙기는 게 상책이다. (반대로 문재인은 요즘 광주/전남행이 잦다) 그다음은 ‘무주공산’을 상대로 ‘땅따먹기’에 나서고 있다. 박근혜가 27일 공식 선거유세 첫날 대전과 충남 공주를 찾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식 선거유세 첫날인 지난달 27일 대전역 유세에서 이회창 전 대표와 만나는 박근혜 후보

 

이 두 지역 공략을 위해 박근혜 캠프는 이곳에 정치적 기반을 둔 외부인사를 잇달아 영입했다. 호남 공략 차원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와 한화갑 전 의원을, 충청 공략을 위해서는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와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잇달아 영입했다. 다만 이들이 호남-충청 지역에서 얼마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 그래서 표를 얼마나 모아올지는 미지수다.

그렇다면 표 계산을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취약지역인 광주/전남북을 공략하고 있으나 텃밭인 ‘부울경’에서는 문재인에게 제법 잠식당했다. 그런데 ‘부울경’은 전체 유권자의 15.8%(부산-7.2, 울산-2.2, 경남-6.4%)를 차지하는 데 비해 광주/전남북의 유권자는 10.3%(광주-2.8, 전남-3.8, 전북-3.7%)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부울경’의 10%와 광주/전남북의 10%는 비율은 같지만 표차는 5.5%(대략 200만표)나 된다. 박근혜로서는 득보다 실이 커 보인다.

게다가 ‘아성’으로 믿고 있던 ‘TK’도 흔들리고 있다. 8대 지역 언론사들이 지난 11월 27~28일 리얼미터에 의뢰해 19세 이상 TK지역 주민 194명을 대상으로 한 4차 여론조사에서(유선전화 80%·휴대전화 20% 자동응답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7%포인트)에서 문재인이 25.1%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17대 대선 때 정동영이 얻은 득표율 6%와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이 조사에서 문재인은 20대에서 50.8%의 지지율로 박근혜(29.3%)보다 21.5% 포인트 앞선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하겠다.

박근혜는 1일 김무성 총괄본부장 등 당 핵심인사들을 대거 대동하고서 부산 범어사를 찾았다. 두 가지 목적에서다. 하나는 ‘집토끼’ 단속 차원, 또 하나는 불심(佛心) 잡기. 전통적으로 부산/경남은 전국에서 불심이 가장 깊은 곳이다. 이날 범어사 부(副)주지인 범산스님은 김 본부장 등에게 ‘아픈 얘기’를 했다. 범산 스님은 “지금 가장 새누리당에서 문제가 되는 게 네거티브”라며 작심한 듯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또 소통 문제도 지적했다고 한다.

본선 초반에 여야 할 것 없이 ‘네거티브’에 매몰된 형국이다.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며 여야 후보 진영 모두 경계해야할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네거티브 전략이 누구에게 불리할까 하는 점인데, 문재인보다는 박근혜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재인보다는 박근혜의 지난 삶이 더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이미 나올 만큼 나왔다고 해도 ‘과거사’는 털면 또 나오는 법이다. 또 포장하기 나름으로 ‘얘기’가 되기도 한다. 요즘, 마치 인디언 인형처럼 웃고 있는 박근혜는 과연 막판까지 웃을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

 
법인 스님 2012. 11. 30
조회수 636추천수 0
 

 

달 산양-.jpg

산양, 보름달 산책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파파고 공원에서 16일 밤,

보름달을 배경으로 산양들이 언덕을 오르고 있다 2011년 5월 -AP통신

 

 

 

35전년에 출가한 나는 지금 산승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을 등지고 환속한 것은 아니다. 3년 전, 내가 늘 깃들어 살고 있는 땅끝마을 두륜산을 떠나왔으니 산승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겠고, 조계사가 자리한 서울에 살고 있으니 수도승이라 함이 마땅하겠다. 산승과 수도승은 출가수행자를 분류하는 우리들 세계의 객쩍은 은어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에게 “스님들은 피나게 정진해도 수행의 소득이 없을 수 있으나 우리들 수도승은 굳이 참선하고 경을 읽지 않아도 저절로 도가 높아진다.”고 놀려 먹으며 힘든 도시생활을 스스로 위로한다.

 

출가수행자가 산사를 떠나 도심에서 살아가는 일은, 새가 숲을 떠나 낯선 세상에서 날개짓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온갖 시비와 복잡이 얽혀있는 도심 한복판에서 출가할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일구어내야 하는 수도승 생활은 여간 조심에 조심을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수도승의 옷을 입은 지도 어느덧 3년을 넘었다. 돌이켜보면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수행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삶의 진행이라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유약하고 모호한 태도를 극복하며 보다 단단해진 것 같다. 일을 통해서 세속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보듬게 되었다. 사람과 일을 통해서 새로운 눈으로 경전을 보는 힘도 얻었다.

 

 

달을 안고-.jpg

‘엠시어리’(M-Theory)의 ‘문 프로젝트’ - 프랑스 천체사진가 노르베르 뤼미아노와

말레이시아의 천체사진가 친웨이룬이 찍은 실제 보름달 천체사진으로 제작된 달 모양 러그,

쿠션(사진), 침대, 카우치.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평범한 일상에 환상과 상상을 선물한다. 텐바이텐 제공

 

 

그러나 잃은 것도 많다. 내면의 빛이 바랜 경향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를 아끼는 이웃들의 말을 빌자면 감성의 물기가 많이 빠지고 여유의 멋도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때로는 사무적이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고 한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 맞는 말이다. 매우 죄송한 일이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나의 말과 표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께 진심으로 참회의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퇴색한 감성과 여유를 찾기 위해서 서울에서도 나름 안간힘을 쓴다. 그 중에 하나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 산책하는 일이다. 한밤중, 새벽녘, 저물 무렵을 가리지 않고 산책을 즐긴다. 사람에 걸리지 않는 독신과 독거가 이래서 더없이 좋다.

 

오늘도 새벽녘에 북촌을 거쳐 삼청공원을 지나 경복궁 돌담길까지 걸었다. 조금은 싸늘한 공기가 정신을 맑게 한다. 비록 겉으로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달빛을 밟고 걸어간다. 지상에 내린 달빛에 눈길 주고 마음을 얹으니 나는 분명 하늘의 달빛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길을 가면서도 수시로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본다. 그러자니 모든 게 새삼스럽다. 어! 서울에도 하늘이 있네. 달이 있네, 나무가 있네, 꽃이 있네. 아하! 정녕 마음을 열고 보니 눈이 열리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니 하늘의 달과 지상의 꽃이 보이네. 홀연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한다. 더불어 내 곁에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마음 열고 눈을 주면 세상 만물은 그대로가 나와 함께하는 한 생명 한 호흡이라는 오묘한 이치를 가슴으로 깨닫는다. 달빛을 밟고 가려니 달빛에게 고맙기도 하려니와 미안해지려 하기도 한다. 달 아래서는 잡념과 시비와 번뇌가 절로 사라진다. 달은 그 존재만으로도 힐링이다. 이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오늘 새벽 덕스러운 만월보살滿月菩薩님께 시를 공양하였다.

 

한빛 황토(黃土)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만(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빛에 비쳐주리라

가다가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내 사랑은, 박재삼

 

달을 생각하면, 달 아래 서면, 나는 제일 먼저 이 시가 생각난다. 시골 농촌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던 나는 유달리 달을 참 좋아했다.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도 초가지붕 위에 달을 많이 그렸다. 가난한 한 가족이 마당에 평상을 펼쳐 놓고 옥수수를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 것도 보름달 아래서였다. 그런 날, 모기를 쫓고자 야생 잡초에 불을 지피면 그 매운 연기 사이로 보름달을 보며 나는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곤 했다.

 

양재천 달-박재동-.jpg

그림 박재동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후에도 나는 달만은 버리지 못하고 늘 함께 살았다. 새벽 예불을 위해 산사의 경내를 돌며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다가 산 위에 걸린 달빛에 취하여 그만 염불을 놓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늘 하는 독경이 싫증나서 불경 대신 위의 시 ‘내 사랑은’을 목탁에 맞추어 낭송(?)하기도 했다. 까닭없이 마음이 많이도 아팠던 20대 시절에 나는,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이라는 구절이 가슴에 꽂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주문처럼 읊고 또 읊어댔다. 그래서 언젠가는 달빛 젖은 조약돌 하나를 건져 내 볼에 대어 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달이 그토록 뜨거운 줄을 알았다.

 

하지만 달은 뜨거운 것만 아니었다. 태양처럼 눈부셔 바라보기 힘든 게 아니라 마음 내키는 데서 마음내킴으로 바라볼 수 있는 편안한 대상이다. 그래서 달빛으로 세상 읽기가 가능하다. 하얀 달빛은 온 누리를 맑고 은은하게 정화해준다. 손님처럼 찾아온 번뇌가 묻은 마음바탕을 깨끗하게 헹궈준다. 굳이 특별한 세탁소를 가지 않아도 무겁고 축 늘어진 번뇌의 옷을 깔깔하게 말려준다. 이렇게 보자면 달은 우리 삶과 의식의 심층구조이자 랑그*이자 시니피에**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절집에서는 달을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경전에서도 선시에서도 달의 대목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호탕무애한 도심道心의 세계를 달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대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竹影掃階塵不動

달빛이 물 밑을 뚫어도 물결 하나 일지 않네月穿潭底水無痕 -야보 도천

 

여기에서는 세상에 어떤 일에도 마음 기울지 않고 마음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를 달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이웃을 위해 연민과 자애의 마음을 나누더라도 그 마음은 늘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는’ 그런 무심과 무욕의 바탕에 서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비리고 비운다는 건 바로 텅 빈 충만이다. 이 텅 빈 충만이 물결 하나 일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요즘은 산중에도 사람들의 방문이 많아졌다. 번잡한 일상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고자 산사에 머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오니 달을 보게 되네요.”

 

나는 그들의 말과 표정에서 애틋한 감회와 씁쓸함을 읽는다. 아니, 서울에는 달이 안 뜨나?

그런 것 같네. 달은 어디에도 있는데, 달은 보는 사람에게만 뜨는 것이었네. 정말 그렇네.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달은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네. 정말이지 그런 것 같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어떤 신비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삭막한 서울일지라도 조금만 눈을 주면 길가의 가로수를 볼 수 있고 골목길의 담쟁이넝쿨을 볼 수 있다. 집 앞에 화분으로 가꾼 배추와 고추도 볼 수 있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그것들에 눈을 주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그것들은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 유정무정의 모든 생명은 이렇게 눈으로 연결되어 한 호흡으로 숨 쉬고 있다.

 

* 랑그(langue) :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그 사회에서 공인된 상태로의 언어를 의미한다. 곧 언어능력에 해당하고 음악 연주에서 악보에 비유된다.

 

** 시니피에(signifié, 記意): 기호에서 어떠한 것의 본래 성질(개념)로, 예를 들어 ‘나무’라고 했을 때 그 의미 ‘木’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무’라는 말(청각영상)은 시니피앙(signifiant, 記標)에 해당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치인 ‘안철수’가 나아가야 하는 길

정치인 ‘안철수’가 나아가야 하는 길
(서프라이즈 /뉴요코리안 / 2012-11-30)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분배 정의를 말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 극보수 세력의 프레임을 알아야 한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이 55-60%라는 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선은 참 기이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바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이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 프레임이 이를 왜곡하고 있으며 몇 안 되는 진보 언론마저도 이를 깨지 못하고 오히려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화, 혹은 이른바 아름다운 단일화를 목마르게 기다린 순진한 국민들이나 안철수 개인이 아닌 안철수 현상을 지지했던 국민들은 적잖게 실망하였을 것이고 이에 따라 이 신화를 창출한 극보수 언론들의 승리의 함성 소리가 필자가 있는 미국에까지 들려오고 있다.

부족한 필자는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로서가 아닌 그 잔재를 모두 함축하고 있는 박근혜의 집권을 막아보고자 여러 글들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역사를 길게 보고 말하지 않으려 했던 안철수 현상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다시 올리고자 한다.

이는 더욱 민주화를 진행시키고 극보수 언론들이 집권욕에 가득 차서 대국민 우민화를 위한 아편 투척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고 또 깨어나는 국민이 늘어나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고자 한다.

아직도 안철수 현상의 근본을 모르고 있는 국민들...

필자가 이러한 글을 올리는 데에는 나름대로 안철수, 혹은 안철수 현상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외 거주하는 일개 국민에 불과한 필자의 판단이 대선이나 향후 한국의 정세 흐름에 무엇이 중요하랴마는 그래도 깨어나길 희망하는 국민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안철수는 이제 정치인이다. 그가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고 고백해서가 아니고 그는 이번 정치 입문 과정에서 더 뼈저리게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를 지원해 주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법륜 스님의 조언(?)을 듣고 손학규를 만나 향후 방향을 떠볼 만큼 그는 정치인이 이제는 다 되었다.

필자는 수차례 안철수 신드롬에 대한 문제점을 글과 댓글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정치인은 특히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은 그 기반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익히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정확한 의미의 진보 정치인(국회의원)은 없다. 혹자는 통합진보당을 운운할 줄 모르나 걸음마도 떼지 못한 정치 공학을 모르는 소리는 하지 마시기 바란다.

김영삼은 극보수 기득권 세력의 줄기에서 군사 기반 세력과 각을 세운 것이 특징이며 김대중은 거기에서 한 걸은 나아가 보수 진영과도 일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던 것이며(김종필과의 부분적 연대가 이 한계를 잘 말해준다.) 노무현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탈기득권, 친서민적인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다가 극보수 기득권 세력의 반동으로 실패하고 만 것이 작금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다.

역사의 흐름에 서지 않으면 정치인 안철수도 보수 세력의 대표일 뿐이다.

필자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안철수가 말하는 안철수의 생각(정책)이나 새정치라는 것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는지가 정의나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이제 말을 바로 하자면 그는 당연히 극보수 기득권층 내의 다소 하부를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러한 것을 기반으로 이른바 새정치라는, 국민이라는 전부를 안고 가려고 하는 이상적이고 소설적인 정치 타령을 했으니, 단일화 여부를 떠나도 그는 당연히 실패한 것이고 이 실패를 거울 삼아서 이제 정당을 만들고 극보수 하부 진영부터 연계하여 또 다른 보수정당(본인들은 죽어도 아니라 하겠지만, 즉 새정치를 희망하는 국민정당이라 포장하겠지만)을 곧 만들어 나갈 것임은 이미 두 눈에 훤히 보이고 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안철수 그는 이미 대선 이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 바른 소리를 하자면, 필자로서는 아름다운 단일화가 아니라 안 박사 자신이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된 정치 상황을 타개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게 일단은 그래도 다소 진보적인 현 야권으로의 정권 교체를 진행한 다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를 바랐으나, 이는 필자가 그의 기반도 인정할 수 없었고 그의 과도한 욕심도 한몫을 하였기에 당초에 버렸어야 할 희망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호불호를 아무리 논해도 이제는 보수 정치인이 다된 안철수 박사는 정치인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에, 다만 조금의 조언을 하고자 한다. 필자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안 박사가 사퇴 전 의논을 한 법륜 스님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CBS 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 인터뷰에서 법륜스님은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국민의 열망을 받아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역부족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국민은 더 변화, 더 참신함을 요구했는데, 나쁘게는 안 했지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해야 한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렇게 변화시키겠다' 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고 평가했다.

너무도 정확한 평가가 아닌가?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함이 바로 저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안철수 개인과 안철수 현상의 본질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적인 한계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분배 정의를 말한다.

필자도 여러 번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는 아주 선문답 같은 소리만 거듭한 바 있어 이제 쉽게 말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분배의 정의를 추구하고 확립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부동하다는 자신들을 보수층으로 알고 있는 30-40%는 분배의 정의가 확립되어 부동한 것이 아니고 분배를 독점하는 1-2%층의 극보수 기득권 세력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기에 자기들에게 일함에 따른 분배는 어느 정도 되는 줄로 착각하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을 굳이 진보화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분배의 정의를 확립해서 이들이 진정한 보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한국 사회에서 분배의 정의가 확립되어 가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쌍용차 사태에서부터 길게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문제까지 그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자면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집권 극보수 소수 엘리트 세력은 이러한 근본 문제를 국민이 느끼지 못하게끔 즉 국민이 깨닫지 못하게끔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아편의 이념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한국의 국민들이 깨어나 있었다면, 안철수의 등장과 안철수 신드롬에 환호성을 질렸을 것이 아니라, 당신은 그러면 기반이 무엇이며 향후 정책의 방향은 무엇이며, 민주화에 가장 기본이 되는 분배 정의는 어떻게 실현하겠느냐고 물었을 것이고 어쩌면 안철수 거품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선 결과보다도 중요한 한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

한국은 정치 경제적 정세의 본질을 말한다면 바로 이러한 분배 정의를 추구하는 싸움의 시작일뿐이다. 박근혜가 되더라도 더욱 소수 1-2%의 극보수 가진 자들의 이익만 추구해 나가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싸움은 그칠 수도 없는 역사의 흐름이며 분배 정의라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통합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재벌 개혁, 행정 수도의 이전 공고화를 통한 분배 정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현실 정치, 경제 개혁의 미진함과 노무현 시절에 보아 왔듯이 극보수 기득권층의 반발로 쉽지 않은 행로를 보일 것이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나름대로 보수와 민주의 선이 다소 분명해져 있다는 차이뿐이다. 점증하는 분배 정의의 요구로 오바마는 경합주에서도 승리하는 등 중산층 이하 세력들의 승리를 가져왔으며 공화당도 이제는 조금씩 가진 자들의 돈을 내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고 선거의 결과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보수 언론이 김을 빼려고 시도하는 단일화가 문제가 아니며 더더욱 대선의 일시적 결과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분배 정의 왜곡의 근본에 있는 군사독재 잔재 세력의 청산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국민들이 깨어나야 하고 더 깨어나는 국민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더욱 분배 정의를 위한 목소리들이 높아져 갈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가 일부 극보수 언론의 치장으로 새정치라는 신화를 가진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집중되었더라도 그것은 본질이 아닌 것이다. 이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서 분배 정의의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이다.

안철수, 그리고 문재인 후보! 역사의 바른 입장에 서면 답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역사적 사실과 사명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인식하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을 핑계 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대선의 기간 동안에 가장 하여야 하는 일차적인 일은 바로 정권 교체일 것이다. 정권을 교체하고 이명박 정권의 부정을 올바르게 심판하고 그리고 분배 정의의 문제를 확립하고 추구하여야 역사의 올바른 길에 서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그리고 정치인 안철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한 것이다. 이제 그가(그들이) 어떠한 길로 나아갈지는 국민과 역사가 지켜보게 될 것이다.

정치는 가장 기본인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분배 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장밋빛 정책이나 공약의 남발은 일시적으로 국민을 속일 수는 있으나 곧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 세계의 정치사가 증명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추악한 한국언론의 ‘민낯’ 고발하다

 

아이엠피터, 추악한 한국언론의 ‘민낯’ 고발하다
 
[집중분석] 기울어진 대선 경기장 만든 사람, 누군가 봤더니…
 
임병도 기자 | 등록:2012-11-30 13:32:38 | 최종:2012-11-30 13:43: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어제 <한겨레> 신문에 '수사자료 훔친 <중앙일보> 기자 징역 8월 선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중앙일보> 검찰 출입기자가 서울중앙지검에 수차례 침입해 수사자료를 훔쳐 기사를 냈고, 이에 법원은 절도로 불구속 기소됐던 <중앙일보> 기자를 법정구속했다는 기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핵심 단어를 알 수 있습니다. '출입기자',' 검찰 조사실 침입'.'특종 보도'라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언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도 단행했다가 실패했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 일명 '기자실 통폐합' 사건입니다.

참여정부는 각 부처마다 있는 기자실을 3~4군데로 통폐합, 전자브리핑 시스템을 통해 실시간 동영상 브리핑, 기자들의 공무원 업무공간 출입 제한을 골자로 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발표합니다. 이 발표가 있자, 보수우익 언론은 물론이고 진보성향 언론까지 모두 개떼같이 들고 일어서 '언론탄압'이라고 외쳐댔습니다.
 

 

▲ 기자실 통폐합에 반대했던 기자단과 정부 기관들

 

정부 부처 출입기자단은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 일부 부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방침에 정면으로 반대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실 통폐합'을 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출입처 기자단이 얼마나 엉터리로 기사를 쓰면서 정부 부처를 헤집고 다니면 권력을 누렸는지, 언론의 폐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언론 기자는 누구나 출입처가 있습니다.(소규모 언론사와 인터넷 언론사는 제외하고) 출입처에는 자신들의 데스크가 별도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사무실을 하나 주는 것입니다.

▲ 대한민국 정부 기관에는 어디나 기자실이 있으며, 기자들은 자신만의 데스트에서 기사를 쓰고 송고하기도 하고, 팩스와 전화를 무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세금으로 각종 혜택을 기자들에게 주는 일 자체도 문제거니와, 기자들이 끼리끼리 출입기자단이라고 만들어 놓고 벌이는 행태 또한 가관입니다. 만약 정치블로거로 살아가는 '아이엠피터'가 인천공항 기자실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브리핑에 참석도 못하고 쫓겨 납니다. 설마 그럴리가라고 생각하시나요?

"험한 소리 나오기 전에 나가란 말야" [현장중계] 인천공항 기자실에서 쫓겨난 뉴스게릴라 (오마이뉴스)

실제로 2001년 오마이뉴스 기자는 인천공항 기자실에서 쫓겨났습니다. 왜냐구요? 출입기자로 등록되지 않았고, 출입기자들로 구성된 '출입기자단' 소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출입기자라는 명목으로 자신들끼리 친목회처럼 만들어 놓은 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브리핑실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출입기자들은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취재한답시고 함부로 정부 부처 사무실을 마음대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행을 없애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은 취재를 위해서는 사전에 취재 요청을 하고 부처에 출입하는 방안 등의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기자실통폐합을 언론탄압 대못질로 규정하며 비난했던 언론,정치인들. 출처: 뉴시스

 

기자실 통폐합을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던 언론인들과 달리 당시 미국대사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7년 주한 미대사관발 전문에서 언론제약이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국 언론은 현재 정부 각 부처와 당국자들에 대한 놀라운 수준의 접근권을 누리고 있다.대사관 직원들은 (한국 정부) 부처 로비에서뿐 아니라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기자들을 자주 만난다.고위 당국자들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이 쉽다는 점은 명백하며,정부의 내밀한 정보가 신속하게 유출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따라서 정부 부처에 대한 기자들의 접근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한국이 풍부하게 누리는 언론 자유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외국에서는 흔한 `경계'(boundaries)를 치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주한 미국대사 버시바우)

대한민국 기자들을 보면 외국기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정부 부처에 취재 약속을 하지도 않고 수시로 정부빌딩을 드나드는 한국 기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권력을 가진 기자들이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정부 부처를 다니면서 쓰는 기사들 대부분은 브리핑실에서 나눠준 보도자료 베끼기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런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한다고?'

참여정부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했던 언론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국민의 알 권리를 짓밟는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제대로 보도하고 나서 그런 말을 했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냄비 저널리즘, 선동 저널리즘, 특종 욕심에 휩싸인 오보를 당당하게 보도하는 언론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그들의 말을 절대 수긍할 수 없습니다.

 

▲2007년 5월23일자 조선일보 기사.

2007년 조선일보는 '노란점퍼 15만장 주문해놓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냅니다. 열린우리당에서 봉사단체 회장이면서 의류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노란점퍼 15만 장을 주문해놓고는 찾아가지 않아 노인 무료금식까지 중단될 위기에 있다는 조선일보의 기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노란 점퍼를 주문한 사람은 열린우리당도 아니었고, 조선일보가 오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끝내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누가 주문했느냐가 아주 중요한 팩트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 기자는 그런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무조건 기사를 내보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비난했습니다.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 사진을 1면에 게재했던 조선일보.출처: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 사건에서 '범인 고종석의 얼굴'이라며 한 장의 사진을 1면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 인물은 범인이 아닌 개그맨 지망생이었고, 오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찾았던 억울한 시민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났으며, 지금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 연평도 포격 당시 신문기사들. 출처:http://photohistory.tistory.com/9213

 

연평도 포격 당시 조선일보는 사진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사진 자체의 색깔을 바꾼 부분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조선일보의 제목입니다. '대한민국이 공격당했다'는 제목을 통해 마치 '전쟁'이 시작됐다는 식의 보도는 분명 조선일보가 무엇을 노리고 사진의 색깔을 바꿨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 김일성 사망 오보를 낸 조선일보. 출처:조선일보

 

조선일보는 김일성 사망 소식을 발표하면서 '조선일보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도한 기사는 오보였으며, 이는 두고두고 네티즌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방] - '김정일 사망'을 예언한 미국과 조선일보 오보

이렇게 수차례 오보를 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도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언론사였습니다.

"본보(本報. 우리 신문)에서 일장기 말소사건을 야기하여 당국이 꺼리는 일을 건드린 것은 실로「너무나 죄송해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이제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 해제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아 이제부터 한층 더 근신하여「다시는 이와 같은 불상사를 야기치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지면을 새롭게 바꾸고「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서「조선 통치라는 날갯짓에 도움을 주려 하오니」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를) 확실히 아시고 … 애호해 주시기 바란다." (동아일보, 일장기 삭제 사건 후 나온 기사)

[시사] - '조선일보'의 오보로 인한 한국인의 치욕
 

 

▲조선일보가 SBS 오보를 비판한 기사. 출처: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오보는 텍스트 몇 줄로 얼버무리면서 다른 언론의 오보는 하이에나처럼 물고 뜯습니다. 마치 자신들은 아주 완벽하고 올바른 언론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언론의 왜곡과 조작,선동질에 관한 자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대해 언론은 물론이고 국민이나 지식인조차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언론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울어진 대선 경기장, 언론편'

참여정부시절 '기자실 통폐합'을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던 언론인들에게 이명박 정권은 어떠하냐고 물어보면 탄압이 아닌 '언론 잔혹사'라고 말을 합니다. 언론을 탄압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언론사를 장악해 기자들의 펜대를 쥐고 온 나라의 방송과 신문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다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동아일보 11월28일자 기사.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안철수, 문재인 후보 간의 틈 벌리기에 늘 힘을 쏟습니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지지자들을이간질 하면서 자꾸 정치 혐오증을 유발합니다.

그들을 보면, 팩트에 근거한 기사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후보를 위해 어떻게 하면 유리할 수 있는지를 늘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 최악의 대선보도로 선정된 MBC 뉴스데스크 화면

 

MBC는 최악의 대선보도 4관왕에 뽑힐 정도로 편파적인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안철수,문재인,박근혜 후보가 동시에 대선 공약을 발표했지만, 박근혜 후보만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영상을 제대로 편집해서 보여줍니다. 박근혜는 띄워 주고,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깎아내리는 교묘한 대선용 홍보 방송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KBS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야권단일화의 불협화음을 내보낸 뒤, 박근혜 후보의 비판, 그리고 그녀의 대선공약을 친절하게 보여줍니다.

'꼼수 정치꾼이라고 맹공을’(11.16),
‘또 염치없이 국민을 앞세웠다며’(11.17),
‘혼탁한 정당과 권력 나눠먹기’(11.19),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이전투구만 남았다’(11.21),
‘반칙으로 경쟁자를 짓밟았다’(11.25)

MBC, KBS 방송을 보면 철저히 박근혜는 띄워주고,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축소,왜곡합니다. 교묘한 대선용 홍보 방송을 수신료까지 받아 먹는 공영방송이 하고 있는 꼴입니다.

 

뉴스보도뿐만이 아닙니다. 대선후보가 나오는 각종 토론회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눈부십니다. 마치 스타를 만들듯이 이들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는 아낌없는 방송기술을 선보이면서도 유독 야권 후보에게는 최소한의 방송 모습을 보여줍니다.

2007년 박근혜 후보는 기자실통폐합에 관해 "그런 식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다. 부처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기자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했던 그녀가 지금 방송사 파업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방송사 노조들이 초청해도 가지 않고, 언론사 파업을 단순히 '안타깝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2007년 기자실 통폐합 반대를 위해 모인 전국신문사,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 긴급회의 모습.출처:조선일보

 

참여정부 시절 기자실 통폐합을 반대하기 위해 48년 만에 전국 신문사,방송사,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언론탄압'을 멈추기 위해 모였고, '언론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일선 기자들의 저항과 투쟁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라고 말하면서 '기자실 통폐합'을 매우 위중하고 엄중한 상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KBS,MBC,YTN 등 대부분의 언론사가 파업을 진행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월급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올바른 언론이 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2007년에 모였던 편집,보도국장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2007년 기자협회에서 기자 2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편집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압력은 편집간부 39%, 광고주 25.6% 순이었습니다. 이것은 왜 지금 언론이 올바른 언론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언론사를 장악한 간부들이 누구를 위해 서 있는지를 보면 지금의 언론이 왜 국민에게 외면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주 산골에 있으면서 어떻게 자료를 찾느냐는 말을 합니다. 인터넷으로 자료 대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대부분 보도자료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인터넷으로 정보공개만 잘 활용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한민국에서 탐사보도를 하는 기자들은 사라지고, 보도자료를 베끼고 짜깁기하거나 온라인 댓글이나 SNS를 가지고 누구나 쓸 수 있는 기사를 선정적인 제목으로 보도하는 언론사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언론의 기능과 수준은 나라 미래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언론권력'으로 불리는 그들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한, 공정한 대선도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촛불 개입' 신영철 대법관, 대선 앞두고 수상하네

'촛불 개입' 신영철 대법관, 대선 앞두고 수상하네

[게릴라칼럼] 서울 교육감 선거 앞두고 대법선고로 교사 6명 해직

12.11.30 19:28l최종 업데이트 12.11.30 19:28l
김행수(hs1578)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대법원 2부(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29일 2008년 서울교육감 선거에서 교원들로부터 선거자금을 지원받아 기소된 주경복 교수에 대한 상고심에서 유죄를 확정했다. 함께 기소된 전교조 소속 교사 21명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 재판 결과에 따라 6명의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나게 됐다.

국가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 등에 따르면 교사가 일반 범죄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거나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퇴직해야 한다.

이로써 MB정부 들어서만 전교조 교사 44명이 해직되어 교단에서 쫓겨나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전교조 설립을 이유로 군사독재정권에서 1500명이 해직된 이래 역대 정권 최대다.

MB정권들어 일제고사, 정당후원, 시국선언 사건에 이어 주경복 교육감 선거 사건까지 44명의 교사들이 해고를 당했다. 전교조 설립으로 1500명이 해고된 이래 역대 정권 최대다.
ⓒ 김행수

관련사진보기


2008년 MB정권이 들어선 해부터 일제고사(학업성취도평가) 거부로 인해 13명, 진보정당에 월 5천~1만원 정도의 소액 후원을 이유로 현재 9명, 굴욕적 미국산 소고기 수입협상과 경쟁적 교육정책을 비판한 시국선언을 이유로 16명이 해직과 파면된 데 이어 공정택식 교육을 바꾸어보자며 선거에 뛰어들었던 주경복 교수를 지원한 혐의로 교사 6명이 다시 해직을 당하게 된 것이다.

서울교육감 선거와 대선 앞두고 이루어진 대법 선고

신영철 대법관. (자료사진)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대법원의 선고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물론 이 사건이 2008년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만 본다면 다급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러나, 2심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이유 없이 선고를 미뤘던 대법원이 대통령 선거와 서울교육감 선거를 불과 20일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선고일을 잡고 유죄를 확정해 버린 것에 대해서 선거 개입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의 주심판사가 촛불시위로 기소된 국민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 하급심재판에 개입한 의혹으로 퇴진 요구에 직면했던 신영철 대법관이라는 점에서 의심은 더 커지고 있다.

현재 이 사건과 연관된 위헌법률 헌법소원 또는 위헌법률 재청이 헌법재판소에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교원의 정당 가입과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정당법과 국가공무원법, 그리고 교원의 정치자금 후원과 후원회 가입을 금지한 정치자금법과 국가공무원법에 대해서는 위헌법률 헌법소원이 청구되어 있으며, 또한 교원노조의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교원노조법에 대해서는 법원이 직접 위헌법률 재청을 헌법재판소에 신청하여 심리가 진행 중이다.

이번 주경복 사건은 위에서 제기된 관련 법률들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법원은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또 다시 전격적으로 선고를 해버렸다. 이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대법원이 먼저 선고를 해버렸다는 점에서 얼마 전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에 대한 사후매수죄 판결과 비슷하다.

문제가 되는 결정은 또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6월 공포한 '서울특별시 교권보호와 교육활동 지원에 관한 조례안(교권조례)'에 대해 대법원이 지난 15일 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해당 교권조례는 교원에게 노조·교원단체 활동권과 학생평가권 등을 보장해야 하고 교육감과 학교장은 교권침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권조례에 대해 진보교육단체들은 환영했으나 교과부와 보수 교육단체들은 조례에 반대했고, 교과부는 지난 7월 '교권조례를 만든 것은 부당하다'며 대법원에 무효확인 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대법원이 교과부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더욱이 이 결정 역시 신영철 대법관이 주심으로 있는 대법원2부에서 결정됐다.

현재 서울시의회의 학생인권조례, 서울교육청의 교사특별채용 직권 취소, 경기교육청의 교사 징계 직권 취소, 전북교육청의 자체 교원평가시행계획 직권 취소 등의 사건에 대한 대법원 소송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떤 결정도 하지 않은 대법원이 갑자기 이후에 제기된 사건에 대해 먼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전북의 교원평가 시행계획 직권취소는 2011년 6월, 경기도의 교사징계 직권 취소 건은 2011년 7월에 대법원에 소가 제기되었고,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가 2012년 1월, 교사특별임용 취소 건이 3월이라는 점에서 왜 대법원이 나중 사건에 대해 먼저 선고를 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판결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이 왜 갑자기 교권조례 건만 효력정지 결정을 내리고, 주경복 사건만 선고 기일을 잡은 것인지 사법부가 서울교육감 선거와 대선에 개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대법 한명숙 재판은 미루고·헌재 민감한 사건 뭉개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의 행태는 사법부의 생명과도 같은 정치적 중립에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곽노현 전 교육감 사후매수죄 사건에서 현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인 사건에 대해서 선고를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통령선거와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20일 남겨 둔 시점에서 갑자기 주경복 교육감 선거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해버렸다.

반면에, 하급심에서 두 차례나 무죄 선고를 받은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 수수 의혹 사건과 같이 정권에 부담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은 변수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1년 가까이 선고를 미루고 있다. 이러고도 대법원이 정치적 중립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교원의 정치활동 관련 위헌 청구 사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계속 선고를 미루고 있다.
ⓒ 김행수

관련사진보기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고 있는 헌법기관은 또 있다. 바로 헌법재판소이다. 헌법재판소는 곽노현 교육감의 사후매수죄에 대한 위헌 신청 사건에 대해서 선고 기한 180일을 훨씬 넘겨서 계속 판결을 미루고 있다. 또한 주경복 사건과 관련된 헌법 소원에 대해서도 기약없이 판결을 미루고 있다.

교사의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국가공무원법과 정당법, 정치자금법에 대한 위헌 소송은 제기된 지 1년 10개월이 지났고, 법원이 제기한 노동조합법에 대한 위헌법률 심판 신청도 1년 8개월이 지났다. 선고 기한인 180일을 한참 넘겼다. 2005년 직권상정을 거쳐서 개정되고, 한나라당과 보수사학들의 집단적 반발로 2007년 재개정된 사립학교법에 대한 위헌신청 사건에 대해서는 5년 넘게 선고를 내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헌법재판소가 헌법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을까?

정치적인 유불리를 따라 판결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고 있는 헌법 최고 수호기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을 국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KAL858 관련 논문 쓴 박강성주 박사

 

“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이 변했다”
KAL858 관련 논문 쓴 박강성주 박사
 
 
2012년 11월 30일 (금) 16:44:52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박강성주 박사가 29일 프란치스코작은형제회 성당에서 열린 KAL858기 사건 25주기 추모제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제 논문은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의 관점에서 4가지 방법들, 그러니까 안보, 젠더, 고통, 진실 이 4가지 항목들이 ‘김현희 KAL858기 사건’에서 서로 어떻게 얽혀져 있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KAL858기 사건을 소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박강성주 박사가 29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성당에서 열린 KAL858기 25주기 추모제에서 자신의 박사논문 『여성주의 국제관계학, 소설쓰기 국제관계학, KAL858; 115번 죽어야할 처녀 테러리스트』의 내용을 요약 발표했다.

10년 전 통일부가 주최한 대학생통일논문 공모전에 응모한 자신의 논문이 우수상에 입선했지만 KAL858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문제가 돼 수상이 취소되면서 그는 이 사건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돼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을 모두 이 사건을 주제로 썼다.

박강성주 박사는 추모제에서 자신의 박사 논문을 발표한 직후 인근 커피숍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못다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박강성주 박사의 발표 내용과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가감없이 전제한다.

 

<박강성주 박사 발표>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으로 본 안보, 젠더, 고통, 진실

   
▲ 박강성주 박사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의 내용을 요약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강성주라고 합니다.
(전략) 먼저 짧게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제 논문은 국제관계학,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의 관점에서 KAL858 사건을 소재로 다룬 논문입니다. 좀더 말씀드리면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의 관점에서 4가지 방법들, 그러니까 안보, 젠더, 고통, 진실 이 4가지 항목들이 김현희 KAL858기 사건에서 서로 어떻게 얽혀져 있는가에 관한 내용이고요.

안보라고 했을 때는 크게 말씀드리면 남북 분단 관계에서 이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 부분이고, 젠더 같은 경우에는 어려운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김현희씨가 여성이라는 것, 그 다음에 여성공작원으로서 미모에 관심을 많이 받았다는 점, 그 부분에 관한 것이고요. 고통이라는 것은 일단 당사자 분들, 그러니까 115분의 실종자분들, 그 다음에 그 실종자분들의 가족분들, 그 다음에 또 저는 김현희씨도 나름의 고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고통의 문제가 있고요. 진실과 관련해서는 저는 이 사건의 이른바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기존의 안기부 수사결과대로 북쪽의 테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쪽의 흔히 말하는 조작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북쪽의 테러도 아니고 남쪽의 조작도 아니고 다른 제3의 그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논문에서는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냐 라고 밝혀냈다라기 보다는 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진실들이 있다. 그래서 논란이 있다. 그런 과정들을 이야기 하고자 했습니다. 진실과 관련해서는.

짧게 말씀드리면 안보, 젠더, 고통, 진실, 이 문제들이 KAL858기 사건에 서로 어떻게 얽혀져 있는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제목 안에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하면 제목은 ‘여성주의 국제관계학, 소설쓰기 국제관계학, KAL858’ 이것이 주제목이고요, 부제목은 ‘115번 죽어야 할 처녀 테러리스트’입니다.

하나씩 설명을 드리겠는데요, 일단은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은 기본적으로는 김현희씨가 여성이라는 점, 미모로 주목받았다는 점인데요, 여성주의라는 것은 이것뿐만 아니라 더 넓은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몸의 문제, 몸에 새겨져 있는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낼 건다. 그 부분이 하나 있고요.

또 다른 것은 고통의 문제,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서 이야기할 건가. 그러니까 여성주의라는 것은 이 부분들에 대해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런 관점 중의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 소설쓰기라는 것은 제가 학술회의나 그런데서 논문 쓰는 과정에서 몇 번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이 사건은 미스터리 같다. 소설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부분과 그 다음에 국제관계학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학에서 정보가 부족한 사건 또는 국가 기밀에 해당되는 부분이 많은 그런 사건을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정보가 부족한 이 사건을 상상력을 동원해서 풀어낼 수 있다라는 것이 제가 주장하고자 했던 내용이고요.

좀더 말씀드리면 제가 직접 사건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 박사논문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거기서는 실종자 가족분과 김현희씨가 주인공으로 된 소설이고요. 여기에서 제가 실종자 가족분을 모델로 해서 인물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이름은 ‘그레이스 한’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레이스는 영어로 그레이는 회색빛을 뜻합니다. 색깔. 그래서 뭔가 확실하지 않은, 흐릿한 부분들이 이 사건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회색이라는 색깔에서 이름을 하나 가져왔고요, 그리고 한이라는 것은 가족분들 마음 속에 쌓여 있는 그런 응어리들, 한 거기에서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이스 한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사실 제가 실종자 가족분의 이야기에서 그렇게 모델을 삼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오늘 와계시지만 이을화 선생님의 따님, 여성 승무원으로 비행기에 타고 계셨던 그분을 모델로 해서 만들었는데, 그레이스 한이라는 분은 그 여성 승무원의 쌍둥이 언니입니다. 그냥 언니가 아니라 쌍둥이 언니인데요, 이 부분이 중요한데, 삶과 죽음의 문제, 삶과 실종, 실종자분들과 가족분들을 연결해줄 수 있는 부분, 이것을 상징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그냥 언니가 아니라 쌍둥이 언니라는 인물로서 표현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부분이 소설쓰기 국제관계학에 관한 부분입니다.

KAL 858은 말 그대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부제목인 ‘115번 죽어야할 처녀 테러리스트’입니다. 먼저 처녀 테러리스트라는 것은 1990년에 신상옥 감독이 이 사건을 바탕으로, 더 정확히는 기존에 안기부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마유미’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부제목이 바로 이 ‘처녀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제 부제목 중의 하나를 가져왔고요.

‘115번 죽어야할’, 이 부분은 논문 과정에서 실종자 가족분들을 면접했는데 제가 면접했던 가족분 중의 한 분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가족분은 기존 수사결과가 맞다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김현희씨가 폭파범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김현희씨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바로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가족분은 김현희씨를 사형시켜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김현희씨가 일단은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에 김현희씨를 죽여서는 안된다. 하지만 만약에 김현희를 죽어야 한다면 한번이 아니라 115번을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비행기에 타고 계셨던 분들이 115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김현희씨 본인의 입장에서는 115번 죽어야 한다는 말이 가혹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실종자 가족분들의 마음은 응어리가 쌓여있다, 그런 뜻에서 115번 죽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논문의 그런 핵심내용은 다 말씀 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말씀드리자면 고통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는 115분 실종자분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심했던 결과가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서 제안했는데요, 한국어로 옮기면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라는 용어입니다. 영어로는 ‘The unliv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실종이 이 사건과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시신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부분들에 문제가 있는데, 시신을 보셨으면 포기를,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종이기 때문에 다른 사건과는 많이 구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장준하 선생의 경우는 시신이 있었고, 두개골에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종에서 오는 고통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이분들이 가족분들의 꿈에 나타나거나 일상생활 속에서 계속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과 관련해서 ‘살아 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존재’라는 개념으로 논문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가족분들 면접을 나름대로 했는데요 홧병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과정 중에 돌아가신 분들도 계셨고요, 그러한 답답한 그런 마음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 다음에 머리가 아주 답답하고 뭔가 꽉 차여 있고, 아프고 그래서 병원에 다니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족분들의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고요.

또 하나는 진실과 관련해서 저는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기존 안기부 수사결과에 문제가 많기 때문에 철저하고 전면적인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비공개 공문을 살펴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이 5개국에 정보공개 청구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비밀문서를 나름대로 받아왔는데요, 그 중에 시간이 없어서 딱 한부분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88년 1월 12일자 호주 비밀문서의 내용입니다. 당시 서울에 있던 호주 대사와 한국의 외교부 관리가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관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김현희씨가 사형을 당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사회에 새롭게 정착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중요한 것은 1988년 1월 12일 이 날짜입니다. 수사결과는 1월 15일에 발표가 됐습니다. 그 다음에 김현희씨 재판은 훨씬 뒤에 진행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이 진행되기도 훨씬 전에, 그 다음에 수사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김현희의 사면 가능성이 이야기되고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요. 그러니까 김현희씨에 대한 사면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할 그 시간에 실종자분들, 아니면 실종자 가족분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이라도 더 했으면 어땠을까. 나아가서는 87년 12월 2일에 안기부에서 무지개공작이라는 문건을 작성합니다. 이 KAL858기 사건을 당시 대선에 어떻게 유리하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한 문서입니다. 저는 또 생각이 들었던 게 그 공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예산이 쓰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예산의 일부분이라도 수색하는데 좀더 썼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생활이 어려워진 실종자 가족분들을 위해서 그런 예산을 조금이라도 썼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분들이 있는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제가 영국에 있다가 스웨덴으로 옮겨가게 됐는데요, 논문 심사를 마치고 영국에 남아 있는 짐을 스웨덴으로 부쳐야했습니다. 그런데 제 책들과 물건들이 도중에 분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소포가 실종이 됐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소포회사에 많이 연락도 하고 했는데 결국 찾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최근의 일인데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좀 춥고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딱 들었던 생각이 ‘어딘가에 있을 내 책들 물건들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라는 생각이 아침에 눈을 뜨는데 들었습니다. 또 들었던 생각이 ‘아, 이게 혹시 실종자 가족분들의 그런 심정이 아닐까. 내 딸들, 내 아들들, 내 남편, 내 가족들은 지금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라는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그날 아침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책들을 잃어버리면서 또 생각하게 된 게, 제가 이 사건으로 박사논문도 썼고 해서 저는 이제 다 끝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 잊어버려도 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입장인데, 그렇게 잊지 말라는 뜻에서 제 책들이 도중에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논문을 통해서 이 사건의 실체적인 진실이 무엇이다라고 감히 말씀드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모르기 때문에.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결국에는 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논문 면접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국정원에서 왔느냐, 아니면 북쪽에서 왔느냐, 아니면 KAL858기 실종자 가족이냐, 친척이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학부생일 때 통일부에서 주최했던 통일논문공모전이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응모를 했는데 운이 좋아서 우수상에 입선이 됐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전화가 왔는데 “논문 내용 중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으니까 다른 내용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삭제를 해라”.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하니까 그 상이 취소가 됐습니다. 그 문제가 됐던 부분이 바로 이 KAL858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라고 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겪으면서 제가 나름대로 신경쇠약 비슷한 증상도 겪고 나름의 어려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 신경쇠약을 겪고 그랬던 시간, 제가 마지막으로 논문을 다 쓰고 책들을 잃어버린 그런 사건.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 KAL858기 사건이 저 자신의 문제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논문은 다 썼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이 사건, KAL85기 사건을 제 자신의 문제로 끌어안고 가겠다라는 말씀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이 변했다

   
▲ 박강성주 박사는 29일 추모제 직후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박사학위를 언제부터 썼고, 왜 외국으로 나가서 박사학위를 했나?

■ 박강성주 박사 : 원래는 이 사건을 소재로 석사 논문을 다 쓰고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었다. 밖에 나가서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제가 석사학위 논문을 썼던 시기가 마침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한 시기였다. 조사관으로 지원을 해보라는 주위분들의 말씀에 고민을 하다가 대여섯 번을 계속 지원했지만 안됐다. 어차피 공부할 계획이었으니까 준비를 해서 2008년 여름부터 올해 여름까지 박사과정 공부하면서 이번 논문을 쓰게 된 거다. 올해 7월에 심사가 있었고, 학위가 나온 건 8월이다. 이번 여름에 학위까지 다 끝난 거다.

□ 어느 대학에, 어떤 인연으로 공부하게 됐나?

■ 영국의 랑카스터 대학 소속이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였는데, 제가 같이 공부하고 싶었던 선생이 영국에 계셔서 그 학교에 가게 된 거다. 박사과정을 지원할 때 선생과 미리 이야기한 다음에 했고, 지원도 딱 한 군데 했다. 크리스틴 씰베스터 선생인데, 여성주의 국제관계학 분야에서는 꽤 괜찮은 학자다.

□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국내가 아닌 국외에 머무를 계획이라고 들었다. 이유는?

■ 처음에 영국으로 가기 전부터 밖에서 자리잡을 생각을 하고 간 거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국에 들어올 계획은 없었던 거다. 어떤 거창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가 사실은 학부생 때 기회가 좋아서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밖에 나가서 경험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하다보니까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혹시 밖에 나와서 공부할 기회가 다시 있으면 쭉 바깥에서 생활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약간 공부와 관련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타자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이른바 유럽에서 공부하는 제3세계 국가의 학생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런 타자성이 제가 공부할 수 있는, 이렇게 사유하는 자원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점을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느꼈다. 그래서 이런 타자성을 나한테 부족하고 불리한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공부할 수 있는 자원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원으로 전환시켜서 하나의 힘으로 이용을 하면 괜찮겠다 는 생각을 했다.

□ 논문 작성과정에서 실종자 가족 등을 면접조사 했는데, 어떻게 진행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소개해달라.

■ 일단은 63명을 면접했고 그 중의 절반 정도가 실종자 가족들이다. 그런데 처음 계획은 실종자 115명의 가족들 전부를 면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상의 제약이나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일단은 30여명 면접했고, 나머지는 이 사건을 다뤘던 언론인들, 국정원발전위나 진실화해위에서 이 사건 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 전직 공무원들, 이 사건을 어떤 형태로든지 짧게나마 다뤘던 역사학자들이 절반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이 사건에 대해서 기존수사 결과를 지지하시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가족들 중에서도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들의 위치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언론인은 언론인의 입장에서, 재조사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기존 수사결과를 지지하는 이들은 또 어떤 입장인지, 그에 반해서 의문점을 제기하는 이들은 어떤 입장인지. 다 그들의 위치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랐다. 실종자 가족들 중에서도 문제를 제기한 이들도 있고 기존 수사결과가 맞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제 논문 부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115번 죽어야 한다”고 한 이 가족은 김현희씨가 폭파범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유일한 증인이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약에 죽어야 한다면 실종자 가족의 수만큼 115번을 죽어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이렇게 여러 가지 갈래구나. 그런 느낌도 느끼게 됐다.

□ KAL858기 사건과 관련한 정보공개 청구를 꾸준히 해왔는데, 정보공개 청구를 소개해주고 그 내용을 평가해 본다면?

■ 일단은 한국,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5개국에 대해서 정보공개 청구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한국의 경우는 국정원이 거부했고, 미국 CIA(중앙정보국)와 국무부, 영국 외무성, 호주 외무부, 스웨덴 외무부 이런 기관에 대해서 정보공개 청구 작업을 했다.

이미 <통일뉴스>에 모두 기고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일단은 미국 중앙정보국 같은 경우에는 ‘이 사건이 북쪽이 한 것이 맞다라고 했을 때 너무 빨리 일어났다’라든가, 아니면 미국 국무부가 통일원의 남북회담 사무국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또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말했던 ‘동기를 이해하기가 어렵다’라든지 이런 부분들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게 특히 미국 쪽 같은 경우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한국 수사결과를 지지했다는 그런 큰 방향에서 이런 부분들을 부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밀문서에 그런 부분들이 있다고 해서 바로 이 사건에 어떤 커다란 중대한 조작이 있었다고 바로 연결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런 비밀문서에 남아있는 그런 기록들은 생각할 지점들이 있다고 보는 거다.

□ 논문이 마무리됐는데, 이후 출판 계획 등이 있는지?

■ 일단은 영국 쪽 출판사에 지금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 이야기를 진행했었고, 영어권 쪽에 논문을 출판할 계획이다. 그 다음에 한국 쪽도 당연히 출판할 계획으로 있다. 그런데 한국 쪽 같은 경우는 일단 번역하는 문제가 있고 논문 자체가 학술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좀 쉬운 언어로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래도 한국어로 나오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 '진실'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박강성주 박사.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오늘 추모제에서 논문 내용에 대해 축약해 발표했는데, 추가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이 논문을 쓰면서 석사논문 썼을 때랑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2007년에 냈던 책에서의 진실과 관련된 입장이, 생각이 변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이 뭐냐면 2007년 정도까지는 철저하고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입장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면 분명히 기존 수사에 문제점들이 많기 때문에 철저하고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계속 똑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이번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이 변했다.

그 전에는 일단은 진실이라고 했을 때 ‘이 사건이 북쪽의 테러라는 쪽, 남쪽의 조작이라는 쪽,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실체적 진실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뭔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밝혀내기 위해서 철저하고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논문을 쓰면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학술적인 용어로 ‘담론의 효과’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은 어떤 진술이나 증거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둘러싼 여러 가지 말들, 그 다음에 해석들, 그 다음에 이것들을 포함한 정치가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실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고정돼 있지 않다. 이게 여러 가지 과정이나 해석들, 정치에 의해서 끊임없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이라는 게 실체로 딱 있어서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생각이 변했다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진실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가 제 논문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다.

그런데 또 하나는 위치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는데, 제 논문의 결론 부분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제가 만약 실종자 가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 진실이라는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면, 제가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가 연구자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연구자의 위치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또 제 진실과 관련해서 논문의 결론 부분에, 전체적으로 논문을 돌아보면서 적어놓은 부분이 있다.

□ 언제 출국하고 이후 계획은?

■ 이번에 온 것은 추모제 때문에 잠깐 온 것이고 월요일 아침에 나간다. 언제 한국에 들어올지는 모르겠고, 저는 일단은 밖에서 자리잡을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계속 밖에서 아마 머물 것 같다.

□ 경제적인 문제나 직업문제는?

■ 크리스틴 씰베스터 선생이 초청교수로 가게 된 스웨덴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일단은 있는데, 지금 스웨덴 소재 대학들에 자리를 몇 군데 지원해놓은 상태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추모제 발표에서 고비도 있었다고 얘기했는데, 유학생활이 힘들거나 어렵지 않나?

■ 일단 공부를 제가 원해서 시작한 것이고, 또 제가 원해서 간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아까 말한 고비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좋았다. 제가 겪었던 고비, 고통의 문제가 다 연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의 고통, 실종자들의 고통, 아니면 김현희씨도 나름대로 고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통과 제 고통도 다른 차원이지만 서로 공명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여성주의 국제학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소재로 쓴 논문인데, 여성주의는 어떤 몸에 새겨져 있는 경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관점 중의 하나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고통이 서로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가, 그런 쪽과도 연결이 돼서 논문에 쭉 제 이야기를 녹여내고자 했던 것 같다.

□ 이름도 박강성주라고 오래전부터 썼던 것으로 안다. 여성주의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었나?

■ 계기라기 보다는 여성주의자인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제가 나름대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여성주의 관련된 기사나 글들을 읽으면서 접하게 된 것이다.

□ 남기고 싶은 말은?

■ 저는 박사논문을 이 사건을 토대로 썼지만 단순히 하나의 특정 사건을 소재로 쓴 논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2002년 여름 통일논문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10년 걸려서 박사논문을 썼다. 저는 이 논문이 하나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10년의 삶을 나름대로 아로새긴 그런 작업이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 가장 중요한 청춘의 시기 10년을 KAL858 사건과 함께 한 것 같다. 이후 생각하고 있는 연구 주제는?

■ 사실 KAL858 사건 같은 경우는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이 중요시하는 ‘제 몸에 새겨져 있는 경험’을 논문으로 쓴 것이었는데,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 나갈 텐데 제 몸 바깥에 있는 제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사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그런데서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류 사회과학에서 중요시하는 것이 연구자와 연구대상을 분리시키는, 그러니까 연구자를 객관화된 위치에서 어떤 특정 대상을 연구하는 것이 주류 사회과학의 접근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박사논문 공부하면서 공부했던 방향은 기존의 연구자와 연구대상이 객관적으로 분리되는 방향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방향에 맞는 다른 연구소재를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 고민도 더 필요할 것 같고, 아무튼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 계속 한국 현대사와 관계된 주제를 연구할 생각은 없나?

■ 일단은 남북관계, 북남관계에 관련된 사건들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기사
· “김현희씨 왔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KAL 858기사건은 모두가 거짓 !

 

 

 

KAL 858기사건은 모두가 거짓 !
 
가족회 추모사 통해 진실 규명 달성 염원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2/11/30 [00:12] 최종편집: ⓒ 자주민보
 
 


▲ 그리운 남편, 딸과 아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느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25년째 누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릅니다. 국가권력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할 대신 진실의 행방을 쫒는 가족들과 양심세력을 협박하고 진실을 감추려 애씁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족들과 국민들은 알고 싶습니다. 쌓여 가는 국화꽃 송이가 늘어 갈 수록 국민들의 분노도 쌓여가며 역사의 칼은 더욱 날을 세웁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1987년 11월 29일 115명이 한날 한시 같은 장소에서 실종되었다.
바그다드를 출발해 한국을 향하던 대한항공 보잉 858기는 승무원을 포함한 115명의 탑승자가 타고 있었고 미얀마 상공을 지나 던 중 폭파됐다고 정부는 밝혔다.


전두환 정권과 안기부는 당시 이 KAL858기 폭파사건의 배후로 북을 지목했으며, 공작원 김현희(마유미)와 김승일(신이치)을 주범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북은 즉각 조선의 소행이 아님을 내외 통신을 통해 밝혔다. 당시 안기부가 김현희의 어릴 때 모습이라고 제시한 사진은 김현희가 아니라 정희선이라며 실제 인물을 등장 시켜 동영상을 통해 확인하기도 했다.


무엇이 진실인가?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들은 아직도 알고 싶어하며 진실을 향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9일 중구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1층 성당에서는 엄숙하고 비장하며, 한이 서릿발 같이 서린 분위기에서 바닷물 보다 시퍼렇게 멍든 가슴들이 모여 KAL858기 실종자 25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 사회를 맡은 (사)안중근평화연구회, 안중근기념사업회 윤원일(경제학 박사 단체 사무총장)은 뜻밖의 사실을 토로했다. “얼마전 북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북 관계자와 우연히 KAL858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저는 북에서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증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북의 관계자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 만해도 우리가 증언하고 밝힌 것만으로도 진실은 밝혀졌다. 그러나 이를 악용하려는 남측 정부와 사건을 진실이라고 믿어 버린 남쪽 사람들은 어떤 진실도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관계자의 말을 듣고 나는 더 할 이야기가 없었다. 이 사건은 김현희의 진술만 있고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며 이 사건이 조작 되었음을 시사했다.


최근 <KAL858 전두환, 김현희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출간한 서성국 신부는 자신이 이사건의 진실에 다가서게 된 동기와 우여곡절, 그리고 성과, 미진한 부분들에 대한 진실 소명을 위한 각오를 밝혔다.


▲ 신성국 신부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신 신부의 진실찾기는 그래서 국가권력도, 종교권력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거짓을 진짜라고 우겼던 사람들의 거짓이 드러날 때입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신성국 신부는 2003년 KAL858기 사건을 주재로한 소설 ‘배후’를 읽으면서 진실을 밝혀낼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사건 진실을 결심하고 얼마 안 있어 손님(국정원 요원)이 찾아와 사건 규명에서 손을 땔 것을 강요했지만 거절하자 그들(국정원 요원들)은 주교에게 찾아가 사실을 알리고 신성국 신부가 자제 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주교의 우파들이 찾아와 “주교님의 명령이니 KAL858기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신성국 신부는 “나는 진실을 규명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았으니 주교님의 명령을 거절 한다”며 강단 있는 자세를 보인 것이었는지 미국으로 발령을 받고 꿈에도 없던 미국행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미국에 가서도 사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노력은 계속되었다, 캔사스주에서 워싱톤까지 3박4일을 자동차를 이용해 달려가 CIA 문서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나 깊이 숨겨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다시 캐나다로 발령 받은 신 신부는 국내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신부를 찾았지만 선뜻 응해 주는 신부가 없었으나 예수회 소속 김정대 신부가 응해주었다며 이 사건이 국가권력에 의해 은밀히 그리고 철저히 감추어지고 있으며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압박이 가해지고 있는지를 암시했다.


신 신부는 “안기부(현 국정원)가 내가 KAL858기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했을 때 손을 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밝힌 수사기록들이 거짓이라는 것을 반증 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신성국 신부는 KAL858기 사건의 중요성을 몇가지로 요약했다. 이 사건은 남북분단이 가져 온 비극이며, 분단은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 시킨다는 것.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두환의 삶을 보면 사건의 답이 보인다는 것이다. 또, 유가족들의 땀과 정성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남편과 자녀, 부모대한 간절한 사랑은 반드시 진실을 규명 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다른 하나는 책을 집필하면서 국정원 수사기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거짓이 진실의 역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역시 이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 주리라생각하고 있었다.


김현희는 TV조선에 나와서 대책위 사람들을 종북 좌파로 몰아친다. 나의 아버지는 장교출신으로 박정희 세력이었다. 나같은 사람이 종북이면 박근혜 후보는 종북 수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때론 힘들기도 했고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차옥정 회장을 비롯한 유가족들을 보면서 끝까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며 “이제 희망을 갖는 이유는 12월 19일 평화통일을 실현할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면 KAL858기 사건은 반드시 규명되리라는 것”이라며 정권교체가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 할 것이라는 신념에 넘쳐있었다.


KAL858기 사건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박강성주 박사는 “논문을 쓰는 동안 너무 어렵고 힘들어 자살할 결심까지 했으나 유가족들의 고통을 되 세기며 어려움을 넘겼다”고 고백했다.


▲ 박강성주 박사는 KAL 858기 사건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죽음을 각오한 논문이었고 숨을 끊는 것이 더 수월했을 논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진실을 알리는 사색과 고통을 우리 모두 나누어 짊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유족들은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라는 추도사를 통해 “2012년 11월 29일 오늘은 KAL858기 사건 발생 25년이나 된다”고 회상했다.


유가족회는 “우리 가족회는 지난 25년 오직 진상규명 활동에 매진해 오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3가지를 폭로했다.첫째,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안기부 수사 발표는 모두 거짓이었다. 당시 사건 기록과 김현희 진술문을 확인하고 조사한 결과 잔 하나의 진실도 없었다.


둘째, 김현희가 북한 출신이라는 증거는 전무하다. 안기부와 검찰은 김현희가 북 출신이라는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김현희는 자신의 공민증과 노동당증 번호 조차 모르고 있으며 그의 가족 사핳과 북 경력 사항도 모두 허위다.


셋째, 김현희는 지난 11월26일 TV조선에 출현하여 이 사건은 북의 행위가 아님을 고백하고 있다(그러나 이 부분은 다른 언론사 관계자에 의하면 잘못 전해진 것이라함). “훗날 세월이지나면 이 사건은 북이 한 짓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우리는 이 발언이 김현희의 양심선언으로 받아들이며 진상규명을 위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요구하는 바라고 주장했다.


▲ 사건 당시 50대였을 유족 이제는 고희가 넘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에 주름살이 깊어 지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국가는 이제 그들의 깊은 주름살과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만 합니다. © 이자주민보 정섭 기자


이들은 “금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KAL858기 사기극을 벌인 전두환 계승세력들이 반드시 패배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정치세력이 집권하기를 바라며, 진상규명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바란다.”고 염원했다.


당시 광주 시민을 살육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에 무릎을 꿇고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받아들였지만 도저히 정상적인 직선제 투표를 통해서는 정권 연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유리한 어떤 작품이 필요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작전은 성공했고 그들의 명맥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흐르는 역사의 진리를 그들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백일하에 죄과를 들어내기 전에 죄 지은 자들은 죄 없이 사라진 실종자들과 그 가족 앞에 민족과 양심 앞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해야 할 것이다.


그날이 참된 용서의 날이 될 것이며 역사에 죄를 씻는 길인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퍼스트 레이디-재단 이사장- 5선 의원 출신이 ‘서민’이라니…

 

그런 ‘서민’, 나도 한번 해보고 싶소!
 
[기고] 퍼스트 레이디-재단 이사장- 5선 의원 출신이 ‘서민’이라니…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1-30 03:25:52 | 최종:2012-11-30 04:19: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캠프의 강기석 언론특보단장(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이 박근혜 후보의 ‘서민대통령론’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소개합니다. 새누리당이나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이 글에 대한 ‘반론’, 혹은 이와 유사한 내용(주제, 분량 등)으로 문재인 후보에 대해 비판글을 보내올 경우 게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둡니다...편집자)

 

오렌지공(公) 윌리엄3세
네덜란드의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3세가 1688년 명예혁명을 성공시켜 영국에 입헌군주제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위계승 서열 1순위였던 메리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틀림없는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이었기에 역설적으로 스튜어트 왕가의 전제정치와 타락상을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의 수장 자리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는 이처럼 혁명의 ‘수괴’마저도 왕족의 핏줄을 필요로 했다.

 

조선시대 중종이나 인조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성공한 반란군의 수괴였기 때문이며, 그들이 반란군 수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또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도 그가 그때 살아 남아있던 거의 유일한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운이 좋았다. 다른 수많은 이씨 성을 가진 왕족들은 정변이 실패하거나 정변이 일어날 조짐이 있을 때마다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왕조국가 시대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때 정치는 사대부, 즉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귀족만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왕조시대

그러나 민주국가에서는 다르다. 왕족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귀족만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 왕조국가 시대에는 정치를 하는 데 핏줄이라는 ‘선천적 자격’이 절대적이었지만 민주주의 시대에는 더 많은 유권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리더로써의 ‘후천적 품성과 자질’이 필요할 뿐이다.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품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평생 서민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발끈하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에는 서민 출신만이 정치를 할 수 있고, 또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로 오해한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쓸모없는) 전깃불이 들어와 있으면 불을 끄고, 물이 줄줄 새고 있으면 수도꼭지를 잠글 정도로” 근검절약 정신에 투철하기 때문에 서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강변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장에서 한 말이다.

가급적 형광등 하나 덜 켜고 수도꼭지를 꽉꽉 잠그고 사는 것이 서민생활이라는 건 맞다. 그렇다고 돈 많은 재벌이라고 밤새 집안을 환하게 밝히고 수도꼭지를 활짝 열어 놓고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쓸모없는 불이 들어와 있으면 끄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줄줄 새면 잠그는 것은 누구나 하는 보편적 행동이다.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하는 것은 오히려 귀족들, 자수성가한 부자들의 대표적 덕목일 수도 있다. 서민들만의 특성이 아니라는 얘기다.
 

1960년대 후반, 청와대 시절 박정희 대통령 일가족.오른쪽 두번째가 박근혜

 

박 후보는 또 자신이 “청와대에 살았기 때문에 무조건 그렇게(자신을 서민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은 청와대에 살면서도 굉장히 철저한 어머니의 교육철학 덕분에 입는 옷이나 먹는 것, 모든 것에 대해 ‘중류’처럼 살려고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또 “스스로 저소득층, 사회약자 등 어려운 분들을 항상 많이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사실들을) 저에게, 우리들에게 들려줬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받아 고달픈 서민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가 ‘서민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서민’임을 가장하고 싶은 강박증

그가 청와대에서 살던 당시 그의 가족들은 칭호부터 달랐다. 부친 박정희 대통령은 각하, 모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님, 그와 여동생(근영)은 영애님, 남동생(지만)은 영식님으로 불렸다. 이들에겐 전속 비서가 딸려 있었고 경호원이 늘 따라 붙었다. 청와대에서 사는 게 답답했다는 점에서 서민과 같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이유는 분명 다르다. 비서와 경호원이 따라 붙는 삶이 서민의 삶일 수는 없다. (사족으로, 그 때 ‘박근혜 영애님’을 충심으로 보좌했던 비서가 지금 정수장학재단 최필립 이사장이다)

한 재벌이 자신의 호화로운 사생활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며 투덜거렸다고 한다. “내가 금쌀로 밥을 지어 먹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래?” 맞다. 하지만 그는 서민과 똑같은 수준에서 살기 위해 금쌀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밥을 먹을 뿐이다. 그 재벌이 외국에서 임원회의를 할 때는 풍광 좋은 곳에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린다고 한다. 자신이 실질적으로 소유한 골프장에서 아침마다 승마를 즐기고 수백 대의 외제차를 개인컬렉션으로 소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비록 서민과 똑같은 쌀밥을 먹긴 하지만 그는 역시 재벌인 것이다.

박 후보는 어머니의 훌륭한 가정교육마저도 74년 어머니가 괴한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끝났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지 않고 대신 ‘궁정동 안가’ 출입을 선호한 탓에 그는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게 됐다. ‘인혁당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할 때도 그는 퍼스트 레이디였으며, 유신 시절 내내 그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게다가 정체가 모호한 최태민 목사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 같은 전국 규모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정신개조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사리판단 능력이 분명한 20대 때 이미 유신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퍼스트 레이디 시절 청와대를 방문한 낙도 노인들을 만나고 있다.

20대 중반부터 유신정권의 핵심역할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가 부하의 손에 암살당하고 그가 청와대에서 나온 이후의 생활을 또 어떠했는가. 전두환을 수괴로 한 신군부는 그에게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전두환은 청와대 금고를 털어 나온 박정희의 비자금 중 당시 돈 6억원을 그에게 주었다는 말도 있다. 그 이래 그는 아버지가 권력의 힘으로 강탈한 장물로 만든, 수 조원에 이르는 4대 재단(육영재단, 정수장학재단, 영남대재단, 한국문화재단)의 이사장직을 번갈아, 때로는 동시에 맡으면서 수억 원의 연봉을 받아 챙겼다. 서민의 벌이로는 너무 많다.

박 후보는 정계에 투신한 이래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지역에 가서 모든 분들 다 만나고 그 분들 애로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다 같이 호흡하면서, 그런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서민의 삶’을 살았노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당선만 되면 유권자들은 싹 잊어버리고 거들먹거리기 바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수두룩한 마당에, 그가 그토록 유권자들과 같이 호흡하며 애로사항을 해결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감동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국회의원의 삶이지 ‘서민의 삶’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분은 ‘서민’이 되고 싶어 안달인 듯싶다. 그런데 현재의 재산과 직위를 다 버리고 ‘진짜 서민’이 되려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 서민을 가장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생각을 잘못 한 것이다. 민주국가라고 해서 꼭 서민이어야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데 더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민주주의로 시작한 미국에서도 1789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1828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기 전까지 40년 동안은 오직 동부 귀족가문 출신들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들어서도 루스벨트 가문, 케네디 가문, 부시 가문 등 소위 미국의 명문가문이 미국 정계에서 일정한 프리미엄을 갖는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다. 정치의 가문세습이 아주 흔한 일이 됐다. 뭔가 교양이 더 있고, 배운 것도 많은 것 같고, 능력도 있을 것 같은 귀족 혹은 부자의 이미지는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결코 단점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민주국가에서 귀족은 정치를 못한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말춤’

그러므로 박 후보가 서민의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하는 지적은 대통령 될 자격에 대해 의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될 경우, 서민이 대부분인 국민들의 삶을 이해하고 서민들을 위해 정책을 세울 품성과 자질이 있는가를 따져 보자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도에 대해 독재 권력자의 딸-퍼스트 레이디-4대 재단 이사장-5선 국회의원-여당 대표를 지낸 인물이 “나도 서민이다”라고 반발하는 모습은 왠지 생뚱맞다는 생각이다.

 

필자 강기석 단장
정치귀족가문 출신임을 장점으로 내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작 가장 서민적인 정책을 폈다. 박 후보의 경우는 14년간 국회의원을 하면서 대표발의한 법안 15개 중 서민에 관한 법률은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 단 한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최근에는 그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때 여성 직원이 결혼하면 퇴직시켰다는 주장이 나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런 비교에 대한 답변만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사사건건 시치미 딱 떼고 사실과 다른 억지주장을 펴니 그의 화법이 유체이탈화법 혹은 동문서답화법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박 후보는 젊은이들과 싸이의 ‘말춤’을 출 뿐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자체가 ‘춤’을 추고 있다고 하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근혜·근령·지만, 그들만의 '흑역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1/30 07:30
  • 수정일
    2012/11/30 07:3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박근혜·근령·지만, 그들만의 '흑역사'

[추적] 근령 씨 남편 신동욱, 박근혜 비방해 징역형…왜?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30 오전 7:57:23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비방한 제부 신동욱 씨가 결국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살인 교사 의혹'까지 등장한 박 후보 주변 친인척들의 행태가 결국 박 후보 동생 남편의 실형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29일 명예훼손 등 혐의로 기소된 신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신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차녀 근령 씨의 남편이자 박 후보의 제부다.

신 씨의 '전력'은 화려하다. 자신의 처남인 박지만 씨, 박 씨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용희 씨, 그리고 박근혜 후보의 5촌 조카 박용철 씨 등이 자신을 중국으로 유인해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무고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또 박 후보의 미니홈피 등에 박 후보 비방글을 40여 차례 올려 역시 재판에 넘겨졌고,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에 박 후보가 개입됐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언론사에 보낸 혐의로 추가 기소를 당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을 통해 납치 살해 청부 의혹 등이 박 후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허위로 판단했다. 다만 지만 씨가 연루된 육영재단 운영권 분쟁과 관련해 재판부는 "신 씨의 처남인 '박지만 씨가 육영재단 폭력강탈 사건을 사주하고 자금을 지원했다'는 내용은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 박지만 씨와 박근혜 후보 ⓒ뉴시스

자신의 남동생을 폭력 배후로 지목 했던 근령 씨

육영재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육영재단 폭력 강탈 사건과 관련해 지난 2007년 11월 박근령 씨는 입장문을 발표한다.

근령 씨는 이를 통해 "2007년 11월25일 오후 6시경 박지만의 지시에 의해 청담동 커피숍에서 EG 정용희 실장의 주도로 오우제, 박상목, 조락기, 박용규, 박용철(5인은 현재 출입정지가처분 받음), 정용희, 이기삼(임시이사를 위해 2월달에 경찰청 협조) 등 11인 등이 육영재단을 폭력강탈하기 위해 거사비로 1인당 500만 원씩을 모금하자고 결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당시 정용희 실장 왈 '거사비를 박지만 회장님이 주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으니 사건 후 지불할 것을 약속'하며 모금을 주도하였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근령 씨는 "2007년 11월 28일 오후 1시 한센인복지협 임두성 회장(한나라당 국회의원)의 지휘로 한센인과 조직폭력배 100여명을 동원해 1시간 만에 집무중이던 박근령 이사장을 강제로 끌어내고, 근무 중이던 간부 25여명을 폭력으로 쫒아낸 사실이 있습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임두성 회장은 후에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친박계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가, 과거 폭력 전과를 신고 누락한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고, 건설업체로부터 수십억 원을 받은 혐의로 체포 구속됐다.

최태민, 육영재단 간여로 '첫 분쟁' 일어나

육영재단 사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박근혜, 근령, 지만 씨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세 자녀간 복잡한 반목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육영재단은 육영수 여사가 69년 4월 14일 설립했다. 당시 설립에 참여한 인사 명단에는 정주영 전 현대 회장,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의 이름도 보인다.

당시 육영재단 설립 목적은 "청소년에 대한 반공 정신의 앙양, 과학지식의 보급, 문화 예술과 체위 향상 등에 필요한 제반 시설을 제공하여 건전한 민족 사상을 함양 고취하고 체력의 보양과 정서의 순화를 통한 청소년의 복지 증진에 이바지한다"였다. 육영재단의 상징과도 같은 어린이회관 개관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해 서울 시내 당시 국민학교 어린이 대표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육영재단 이사장 직은 박근혜 후보가 맡게 된다. 박 후보는 83년 1월 제 3대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여러 잡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박 후보가 이사장을 맡은지 4년 후인 87년 9월 3일자 신문들은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직원 150여 명이 2일 저녁 6시 30분 부터 회관 앞마당에서 '어용간부 퇴진', '족벌 인사 체제 종식'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박 후보의 측근인 최태민 목사였다.

<여성중앙> 87년 10월호는 당시 육영재단 분쟁을 상세히 전한다. 박근혜 후보는 취임 후 1년에 한 두번 어린이회관 방문을 하다 84년쯤부터 회관 일에 적극 관여했다고 한다. <여성중앙>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회관의 모든 일을 박 이사장이 결재를 했다는 것이다. 어린이회관의 운영결재권은 상임이사인 관장의 고유권한"이라며 "문제는 이사장 결재에 잎서 최태민 씨가 먼저 결재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최 회장'으로 불리던 최태민 씨가 어린이회관 문제에 간섭하고, 최 회장의 다섯 째 부인의 6녀이면서 당시 '한국아동교육문제연구소'와 C종합학원, C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던 최순실 씨가 어린이회관이 펴내는 잡지 <어깨동무> 등에 간여하고 있고, 이들이 손을 떼야 한다는 게 회관 직원들이 농성장에서 내 놓은 주장이었다. 최순실 씨의 남편이 박 후보의 '입법보좌관'을 지냈고,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캠프 측으로부터 "비선 실세"로 지목됐던 정윤회 씨다.

"이들이 농성에 즈음해 내건 이슈는 지나친 인사 이동에 따른 부당해고와 회관신규건설사업의 지나친 상업성 추구, 새로운 예절교육을 위해 지은 근화원 건설에 따른 잡음, 직제 개편과 신규 채용의 비리 등이다. 이들 내용들이 모두 최 회장이 관련됐다는 것이 농성의 핵심"이라고 이 매체는 전했다. 당시 최순실 씨는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씨가 자문 요청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 박근혜, 근령, 지만 씨의 어릴 적 사진 ⓒ연합뉴스

"박근혜를 최태민으로부터 구출해주세요" 탄원서 보낸 두 동생

불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근령 씨와 지만 씨가 직접 나섰다. 근령 씨와 지만 씨는 90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기꾼에게 포위당해 있는 박근혜를 전 국가 원수 가족 보호 차원 아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탄원서를 올렸다. 최태민 씨가 박 후보 주변에 맴돌며 육영재단을 주무르는 등 전횡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육영재단 사태가 3년만에 전면 부상한 계기가 된 일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인사이더월드>라는 제호의 월간지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이상스러운 관계를 조사해 온 수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영(박근령)과 박지만은 증언을 통해 '우리 형제들도 언니나 누나를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 근혜 언니가 살고 있는 집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으며 우리들이 만나려고 하면 며칠씩 미리 연락을 해야 하며 전화통화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무렵 근령, 지만 씨는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 11주기 추도식을 육영수 기념 사업회 주최로 하려던 데 대해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결국 박근혜 후보는 90년 11월 3일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사퇴하고, 근령 씨를 후임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먼센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근령 씨는 이사장 취임식 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태민 씨의 혐의 사실을 믿으며, 언니는 속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을 했다.

당시 박지만 씨도 인터뷰를 통해 "원래는 최태민 씨와 큰 누나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시작한 것"이라고 '탄원서'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최태민 씨는 당시 <우먼센스>와 처음으로 인터뷰를 한다. 최 씨는 "여러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원래 내게는 개인 사무실도 없었고 (박정희 육영수 기념사업회, 육영재단 등과 관련해) 아무런 결재 권한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에 몸 담고 있었다. 기념사업회 조직이 새마음봉사단의 조직을 복원시킨 것이어서 최 회장이 고문을 맡았다는 것이다. 최 씨는 이 인터뷰를 통해 "최면술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등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해명했다.

당시 이 매체는 박근혜 후보 인터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최(태민) 고문은 이미 몇 개월 전에 완전히 손을 뗀 분입니다. 이미 물러나 있던 분에게 나가라고 하는 얘기는 무슨 의미죠? 이게 뭡니까?(이 대목에서 근혜 씨의 목소리는 약간 높아졌다. 또 몸이 불편한 듯 몸을 자주 뒤로 젖히며 오른 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만졌다) 최 고문이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고 주장한다는데 제가 나이가 몇입니까?"
▲ 19일 경북 영주시 희수사추모관법당에서 거행된 故 육영수 영부인 85주기 탄신제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과 남편인 신동욱 박사가 합장하고 있다.ⓒ뉴시스

박지만, 근령 씨 버리고 박근혜 후보 측에 서다

이 때만 해도 근령 씨와 지만 씨는 같은 편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된다. 2001년 서울 성동교육청은 육영재단 감사를 통해 당시 부실 운영 등을 문제삼고 박근령 이사장 승인 취소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박 씨는 육영재단 운영에 계속 간여해 왔다. 근령 씨가 백석대 교수를 지내고 있던 14살 연하의 신동욱 씨와 지난 2007년 2월 약혼을 하면서 박지만 씨는 근령 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육영재단 분쟁과 관련해 박지만 씨 주변 인물들이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2007년 약혼 이후 7월 지만 씨의 '그림자'로 불리기도 하는 정용희 씨와 박근혜 후보의 5촌 조카 박용철 씨는 중국 칭따오에 간다. 신 씨는 당시 "지만 씨의 비서실장 정용희 씨가 박용철 씨에게 나를 중국에서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폭로를 한다. 근령 씨와 자신의 결혼을 막으려고 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주 칭따오 한국 영사관은 "신동욱이 단란주점과 호텔에서 환각제를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공안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외교통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신 씨 일행은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신 후 성매매를 하려다가 공안의 조사를 받았다. 석방된 신 씨는 그날 밤 호텔밤에서 속옷만 입은 채 창문에서 뛰어내려 허벅지 골절상을 입었다.

이후 이 사건은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부는 신 씨가 주장한 '살인 교사' 의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신동욱 씨는 육영재단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사장에서 물러난 근령 씨가 육영재단 사무처장을 자임하며 '출근 투쟁'을 시작하자 박지만 씨 주변 인물들이 강제로 근령씨를 끌어내는 '육영재단 폭력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박 후보와 지만 씨의 관계는 돈독해졌지만, 근령 씨와 관계는 멀어졌다. 어제의 적과 동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지난해 9월에는 박용철 씨가 사촌에 의해 피살되는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박 씨를 살해한 사촌은 이후 나무에 목을 매 숨졌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무희 씨의 손자들이다. 육영재단을 둘러싼 세 남매의 역사는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점철돼 있다.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주해군기지 예산안 날치기, 여야 못믿어!"

 

 
29일 시민사회, 규탄 기자회견 열고 삭발단식 투쟁 돌입
 
 
2012년 11월 29일 (목) 12:37:09 조정훈 기자 whoony@tongilnews.com
 

 

   
▲ '강정마을회',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9일 오전 국회 앞에서 '2013년 제주해군기지 예산 국방위 날치기 통과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삭발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제주 강정마을에 건설 중인 '제주해군기지' 2013년도 예산안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새누리당 의원들 단독으로 지난 28일 통과됐다.

이에 '강정마을회',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9일 오전 국회 앞에서 '2013년 제주해군기지 예산 국방위 날치기 통과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삭발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2013년 제주해군기지 예산안이 날치기로 처리된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이는 '검증없이 예산없다'는 2011년 여야 합의와 대제주도민 약속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은 제주도민에 대한 아무런 합리적 해명없이 2010억이나 되는 국민의 세금을 해군에게 제공하기 위해 날치기 처리를 불사한 것"이라며 "집권여당이 대국민 공약과 정책을 아무런 명분없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신뢰의 정치를 강조하던 새누리당 대선후보 박근혜의 소신이란 것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고 박 후보를 비판했다.

 

   
▲정만영 신부가 삭발을 하는 모습을 문정현, 문규현 신부 등 동료사제들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들은 민주통합당에 대해서도 "여야가 합의한 객관적 검증도 관철하지 못하고, 검증없이 제출된 공사강행 예산을 두고 좌고우면 하면서 어떻게 강정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는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냐"면서 '제주해군기지' 예산안 날치기에 미온적 태도를 취한 민주당에도 비판의 화살을 쐈다.

이들은 "강정마을 주민을 비롯한 도민과의 약속인 제주해군기지의 타당성에 대한 객관적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출된 2013년 해군기지 예산이 전액 삭감되기 전까지 이 자리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최소한의 신의를 지키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기자회견 이후 문정현 신부, 문규현 신부, 정만영 신부 등 천주교 소속 사제와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박순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 등이 삭발을 했으며, 국회 앞 단식 노숙투쟁에 돌입했다.

 

   
▲ 삭발에 앞서 문규현 신부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문정현 신부가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삭발을 마친 문정현 신부를 참가자들이 위로하고 있는 모습.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조정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삼척시 호산리 화력발전소 건설현장, 분진과 소음 공해로 고통 받는 주민들

해수욕장도 관광객도 사라졌다...호산리에 무슨 일이?

삼척시 호산리 화력발전소 건설현장, 분진과 소음 공해로 고통 받는 주민들

12.11.29 18:30l최종 업데이트 12.11.29 18:30l
성낙선(solpurn)

 

 

"먹고 살게 해달라니 흙먼지 매연 소음으로 죽이네". 마을 앞 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지금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에서는 다른 지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호산리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해수욕장과 작은 항구가 있고, 마당 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푸른 바다가 한눈에 가득 들어오는 그런 마을 중 하나였다.

과거 호산리는 아름다운 해변과 항구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 동해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몽돌 해변이 있었다. 마을 앞은 오로지 망망대해였다. 동해안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 곳에 아름답다거나 깨끗하다는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지 않는다. 호산리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은 단지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이 마을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지 의심하고 있다.

멀리 월천해변 쪽에서 망원렌즈로 바라본 호산리 한국남부발전 화력발전소 공사 현장. 산 전체가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그 아래로 흙으로 제방을 쌓듯이 바다를 매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운데 타워크레인이 서 있는 곳은 한국가스공사 LNG생산기지 공사 현장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두 공사 현장 가운데 호산리가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바다만 보고 살아온 주민들, 바다를 잃어버리다

이 마을이 지금은 동해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마을로 변했다. 마을 북쪽은 산 전체가 허물어져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고, 그 흙으로 바다를 매립하느라 마을 앞 바다 한쪽이 흙으로 쌓은 산으로 변했다. 마치 바다에 흙으로 성을 쌓은 격이다.

과거에는 마을 앞 항구의 북쪽 방파제에 올라서면, 푸른 바다 멀리 임원항까지 보일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바다가 흙벽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한국남부발전(주)이 '삼척그린파워발전소'라는 이름으로 화력발전소를 포함함 5000㎿급 종합발전단지를 짓고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 해안에는 지붕이 둥그런 형태의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가스 저장용 돔)이 여러 개 들어서고 있다. 건설 자재들을 들어 오르는 타워 크레인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다. 바닷가에서 보는 풍경치고는 참으로 기이하다.

마을 남쪽 한국가스공사 LNG 생산기지 공사 현장. 마을과는 겨우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마을 북쪽 한국남부발전 화력발전소 공사 현장. 사진 왼쪽에 보이는 마을과 공사 현장이 바투 붙어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바다에서는 1.8k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 방파제를 축조하기 위해 케이슨을 제작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곳 역시 방파제용 케이슨을 제작하는 장비로 인해 바다 한쪽이 꽉 막혀 있다.

케이슨은 개당 아파트 8층 높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이런 구조물이 2014년까지 72개가 만들어진다. 2014년 이후 이 바다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곳에서는 한국가스공사가 '제4 LNG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는 이곳에 2016년까지 20만kl 저장탱크 12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공사 때문에 호산리에서는 이미 마을 일부와 몽돌로 유명한 호산해수욕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마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화력발전소를 짓는 공사가,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LNG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런 공사 현장 사이에 여전히 사람이 사는 마을이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마을 한가운데 주택가에서 바라본 한국가스공사 케이슨 공사 현장.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공사 현장 분진과 소음에 시달리는 주민들

한국남부발전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날아온 흙먼지로 더러워진 자동차. 차 유리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시커먼 흙먼지가 묻어나온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두 곳에서 벌어지는 공사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마을 주민들은 두 곳에서 공사가 시작된 이래, 분진과 소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화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날아온 흙먼지가 마을을 온통 뒤덮고 있다. 새카만 흙먼지가 끊임없이 날아들고 있다. 이후로 바닷가에서 오징어와 미역 등을 건조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생계를 잇는 일이 막막해졌다.

관광은 옛날 얘기가 됐다. 이제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더 이상 없다. 생계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조차 힘들어졌다. 호산4리 김명수 이장은 "화력발전소 공사가 시작된 이후 어업 기반이 무너졌다, 생계를 잇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공사 현장에서 날아오는 흙먼지 때문에 뜨거운 한여름에도 문을 꽁꽁 걸어 닫고 살아야 했다"며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화력발전소 조감도만 봤을 때는 마을이 이런 상태가 될 줄은 몰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남부발전 호산리 화력발전소(삼척그린파워발전소) 조감도.
ⓒ 한국남부발전

관련사진보기


흙먼지는 주민들 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을 비상대책위원회 서승원 사무장은 얼마 전 눈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특이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서 사무장은 "의사로부터 그 바이러스는 오염된 흙먼지에 묻어 날아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주민들은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진행하고 있는 발파 작업 때문에 건물 벽에 금이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진은 균열이 생긴 간격을 날짜별로 기록한 흔적.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호산리 주민들은 또 "화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진행되는 발파 작업 때문에 극심한 소음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 발파 작업 때문에 잠을 설치고 마을 건물마다 금이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남부발전 측은 마을 주민들이 겪고 있다는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간혹 소음측정기를 들고 와 마을 한가운데서 발파 소음을 측정하고는 낮은 데시빌(dB)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그때마다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회사 측이 소음을 측정할 때마다 폭팔음이 유난히 작게 들린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회사 측이 소음 측정을 위해 폭약을 적게 사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의심하고 있다.

회사 측은 당연히 피해 보상에 소극적이다. 회사 측 공사관리 담당자는 "공사 현장에 (바람막이용) 펜스를 설치하고, 마을 한쪽에 소음측정기를 설치한 것으로 피해 대책을 모두 끝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펜스는 겨우 흙산의 아랫도리를 가릴 뿐이다.

한국가스공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역시 심한 골칫거리다. 그곳에서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주민들은 한밤에 공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한국가스공사 측 역시 별다른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발전소를 못 짓게 하는 것도 아니고, 먼지 없는 곳에서 밤에 조용히 잠잘 수 있게 해달라는데, 그것마저 안 들어주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주택가에서 바라본 한국남부발전 공사 현장.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견디다 못한 주민들, 삼척시와 두 회사에 이주대책 요구

공사 현장이 마을 코앞이다. 멀어봐야 100여 m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두 회사 모두 "공사로 인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도시에서는 단 하루도 지속할 수 없는 일이 이곳 어촌마을에서는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극에 달해 있다. 그로 인해 지금 주민들은 정신적인 고통까지 호소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피해 보상을 넘어 마을 주민 전부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들은 두 회사와 삼척시에 이주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했다.

피해 보상을 꺼리는 회사들과 삼척시가 마을 이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다. 삼척시는 주민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지난 9월 "마을 이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 기관에 용역을 주고 이주 타당성 여부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척시는 내년 4월경에 나오는 조사 결과를 놓고 이주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삼척시의 이같은 방침에 주민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삼척시가 외주를 줬다는 용역 업체가 삼척시가 주로 이용하는 업체로 그 결과가 결코 주민들에게 유리하게 나오지 않을 거라는 추측이다.

주민들은 삼척시와 두 회사에 '이주 대책 마련을 위한 위원회'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더욱 더 명확한 이주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로서는 지금 이곳에서 겪는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복합에너지 거점도시'를 표어로 내걸고 있는 삼척시청. 그 위에 '삼척 원자력발전소 건설 최종 확정'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도 걸려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지금 이곳 호산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호산리는 삼척시의 미래다. 삼척시는 호산리뿐만 아니라 삼척시 전역에서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복합에너지 거점도시'를 표방하고, 전국의 발전소란 발전소를 모두 삼척에 유치하려는 기세다.

삼척시 근덕면의 동막리와 부남리 일대에 이미 핵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다. 삼척시는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 삼척시 적노동 일대 등 3곳 이상 화력발전소를 더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동양파워, 동부건설, 포스코에너지 등이 삼척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상태다.

김대수 삼척시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합에너지 거점도시 건설은 삼척의 경쟁력을 높이는 미래 비전"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다. "삼척시가 종합발전단지, LNG 생산기지 등을 건설하는 데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며 "삼척시를 인구 30만 경제 자립도시로 만들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앞으로 삼척시에 얼마나 더 많은 발전 설비들이 들어설지 알 수 없다. 정부는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13~2027)에 따라 올해 12월 말까지 삼척시를 비롯해 전국의 화력발전소 발전 사업자들을 최종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이후 이 발전소들이 모두 건설되면 삼척시는 그야말로 '초고밀도 석탄화력발전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월천리 월천해변에서 바라본 한국가스공사 LNG생산기지 현장. 월천해변은 LNG생산기지 공사가 시작된 이후 백사장이 사라지는 이변이 발생했다. 백사장이 사라진 해변에 파도가 거세져 지금은 도로에 축대를 쌓고 트라이포드로 방파제를 만들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환경운동연합, "화력발전소는 짓고 나서가 더 큰 문제다"

현재 삼척시에서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어 보인다. 문제가 있다면, 삼척시에 발전소를 짓겠다는 회사가 너무 많아 그 중 어떤 회사를 선택할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는 정도다. 발전 사업자를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 시의회와 주민 사이에 마찰이 일고 있다.

화력발전소를 짓는데 삼척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주민들의 반발이 적은 편이다. 삼척시에 화력발전소들이 몰려드는 데는 동해로 발전에 필요한 연료를 운송할 수 있어 운송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주민들의 반발이 적다는 게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발전 사업자들이 강원도에서 사업 대상지로 눈독을 들이고 있는 지역이 삼척시뿐 만은 아니다. 하지만 동해시와 고성군 등에서는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 발전소 건설에 제약을 받고 있다. 이처럼 삼척시로 화력발전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고 있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국남부발전 호산리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 입구.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지난 11월 초 호산리를 다녀온 김보삼 환경운동연합 국장은 이런 현상을 놓고 "다른 지역에서 화력발전소 건설을 다 막아냈더니, 그 화력발전소들이 강원도로 몰려가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김 국장은 "원자력발전소에 화력발전소들까지, 한 지역에 이처럼 많은 발전소들이 집중되는 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보삼 국장은 공해 문제로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양화되고 있는 화력발전소가 삼척에서는 붐을 일으키고 있다시피 하는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삼척이 나중에는 대기오염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 국장은 "화력발전소는 짓는 과정도 문제지만, 짓고 나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며 "통상 발전소 주변 반경 5km는 각종 공해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러면 (삼척시의 도약을 꾀한다는) 발전소들 때문에 (오히려) 삼척은 사람이 못 살 지경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가스공사 LNG생산기지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호산리해수욕장. 이 청정 해수욕장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삼척시

관련사진보기

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화력발전소는 대기오염을 비롯해, 석탄재에서 나오는 중금속 피해를 일으킨다. 화력발전소는 또 해양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발전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폐수 때문에 인근 어장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발전소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내는 고압송전탑도 문제다.

화력발전소들로 인해 앞으로 삼척시가 어떤 홍역을 치르게 될지는 지금 호산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호산리에서 삼척시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분명해진다. 호산리 서승원 사무장은 "호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들이 지금 이주대책을 강력히 호소하는 데는 삼척시에 발전소를 지으려는 사업자들과 삼척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자는 뜻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마을에서 공사가 진행되기 전, 발전소 건설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다.

솔섬(속섬) 뒤로 한국가스공사 LNG생산기지 공사 현장이 보인다. 월천리 솔섬은 미국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가 사진 작품으로 찍어 유명해진 곳이다. 아곳 풍경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재인, ‘문철수’가 되면 이긴다

 

문재인, ‘문철수’가 되면 이긴다
 
[특별기고] 한일수 前 대전내일포럼 공동대표(대전 두리한의원 원장)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1-28 14:35:18 | 최종:2012-11-28 16:52:5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어제부터 대선 선거운동이 본격 시작됐습니다. 여야 후보 모두 전국을 돌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 진영에서는 사퇴한 안철수 전 후보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안철수 전 후보의 지지그룹인 대전내일포럼 공동대표를 지낸 한일수 대전 두리한의원 원장이 이와 관련한 글을 한 편 보내와 소개합니다. 반론도 기꺼이 환영합니다...편집자)

“대전은요?”

안철수의 사퇴로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왔다. 더 솔직히 말자하면, 이대로 가면 박근혜가 무조건 당선된다.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겠지만,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는 60%의 유권자들에겐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열쇠는 안철수가 쥐고 있다고 말한다. 후보직에서 사퇴한 안철수가 얼마나 열심히 문재인 후보를 돕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들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틀릴 것이다. 안철수가 제 아무리 열심히 문재인을 돕는다고 해도, 문재인과 민주당이 바뀌지 않으면 박근혜가 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문재인이 전력을 다해 구태정치를 벗어나고, 안철수가 그런 문재인을 사력을 다해 도우면 겨우 이길 수 있다’로.
 

 

현재 박근혜의 당선이 유력한 이유는,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부동층이 엄청나게 늘었는데, 이들이 투표를 하지 않거나 심지어 박근혜 지지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투표에 참여하지 않던 30%에 속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바빠서 또는 정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30%의 사람들은 이회창-노무현 때도, 이명박-정동영 때도 투표하지 않았다. 훨씬 더 이전에 박정희-김대중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를 지지했다가 그의 후보 사퇴로 허공에 떠버린 유권자들은 투표 무관심층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표해줄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표를 할 수 없었던 강제적 무관심층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자들의 마음은 지금의 정당정치가 죄다 썩었고, 이런 체제에서 투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안철수가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했을 때, 그는 한국 정치에서 아무도 넘지 못했던 ‘마의 50%’ 지지율을 넘어섰다.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라. 전통적인 야권 지지자들에 더해 이들 강제적 무관심층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려면, 안철수를 지지했던 이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이들이 투표장에 나갈 것이다. 하나는 전술한 바처럼 구태 정치를 끝내겠다는 선언과 실천 방안이다. 그것도 구체적인 방안과 그것을 머리가 깨져도 지키겠다는 민주당 의원 전원의 동의를 함께 보여줘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복지와 정의와 평화’라는 시대정신을(이 구호는 물론 안철수의 것이었다)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이다.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포스터
마찬가지로 민주당 전부의 동의가 첨부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철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문재인이 안철수의 대리인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문재인이 안철수와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기표봉을 잡으러 투표소에 나갈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온 염홍철에게 트리플 스코어로 지고 있었다. 이 결과는 누가 와도 뒤집어질 수 없었다. 실제로 박근혜가 몇 번이나 지원 유세를 왔음에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위 카터칼 테러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던 박근혜가 마취에서 깨어나 던진 첫마디, “대전은요?” 한마디에 이 격차는 뒤집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전시민의 민도(民度)가 낮음을 한탄하지 마라.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치에서 박근혜가 살아남아 대통령 직위 지근거리로까지 접근한 까닭이기도 하고, 정몽준에게도 뒤지던 노무현이 원조 대세론의 주인공 이회창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된 이유이기도 하니까.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세대를 떠나 강한 정서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빚은 갚아야만 한다”는 부채의식이다. 박근혜가 왜 대구-경북에서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는지 아는가. 불쌍해서 그렇다. 부모도 죄다 흉악하게 돌아가시고 시집도 못간 박근혜에게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구 경북을 떠나 박근혜를 지지하는 많은 유권자들이 그러하다. 그래서 박근혜 지지율은 ‘콘크리트 지지율’인 것이고, 설사 그녀가 그 누구의 사생아를 낳았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 해도, 그 지지율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성에 앞서는 감성의 코드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지만, 안철수 사퇴로 투표는 하기 싫은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보낼 방법도 동일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안철수에게 느끼는 부채의식을 문재인에게 투사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문재인과 민주당이 정말 뼈를 깎는 마음으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안철수를 실천하는 길뿐이다. 문재인이 안철수가 되어야지, 안철수가 문재인이 되어선 승리할 수가 없다. 안철수의 지지와 헌신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열쇠는 결국 문 후보와 민주당이 갖고 있다.

 

▲ 필자 한일수 원장
장담컨대, 민주당 의원 중에는 문재인을 대통령 만들려고 구태정치를 청산하자는 안에 반대표 던질 인간이 꽤 될 것이다. 그런 민주당이기 때문에 안철수를 사퇴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민주당으로는 절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주당을 바꾸고 안철수의 공약을 자기 것으로 삼아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안철수 지지자들이 마음을 돌린다.

 

그러니 문재인 후보여, 안철수의 헌신은 걱정하지 마시라. 그는 미친 듯이 도울 것이다. 물론 문 후보가 바라는 방식대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도울 테니 제발 도와 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당신이 해야만 할 일을 하시라. 그리 하면 ‘문재인 대통령’이될 것이고, 반대로 안철수만 바라보고 있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된다. 볼 것도 없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초유의 검찰총장-중수부장 충돌…궁지몰린 한상대 총장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1/29 09:28
  • 수정일
    2012/11/29 09:2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초유의 검찰총장-중수부장 충돌…궁지몰린 한상대 총장

술렁이는 검찰, 일선 검사들 사이에선 연판장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29 오전 10:56:53

 

김광준 서울고검 부장검사의 뇌물 수수, 동부지검 전아무개 검사의 성추문, 여론 조작 논란을 부른 서울남부지검 윤대해 검사 사건이 잇달아 터지며 위기에 빠진 검찰이 이번엔 지도부 내분 사태로 휘청거리고 있다. 한상대 검찰총장과 최재경 대검 중수부장이 정면충돌한 것.

문제가 밖으로 불거진 건 한 총장이 최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하면서다. 이준호 대검 감찰본부장은 28일 최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최 중수부장이 김광준 부장검사에게 문자메시지로 언론 취재 대응 방안에 대해 조언한 것이 품위 손상에 해당하는지를 조사한다는 것이다.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은 검찰이 만들어진 후 처음 있는 일이기에, 이 소식만으로도 검찰은 술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최 중수부장이 감찰에 "승복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최 중수부장은 '감찰 조사에 대한 입장'을 통해 "검사 수뢰 사건, 성추문 사건 이후 총장 진퇴 문제 등 검찰의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 대립이 있었고 그것이 오늘의 감찰 조사 착수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한 감찰 명분으로 제시된 문자메시지에 대해 "친구인 김광준 부장이 언론 보도 이전의 시점에 억울하다고 하기에 언론 해명에 관해 개인적으로 조언한 것일 뿐"이고 "그 진행 과정도 총장에게 보고해 총장도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으며, 특임검사도 수사 결과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확인한 바 있다"고 밝혔다. 최 중수부장은 "향후 부당한 조치에는 굴하지 않고 적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장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대표적인 특수수사통으로 꼽히는 최 중수부장은 BBK 사건 관련자 대부분을 무혐의 처분하고,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사건을 수사해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구속기소했다.
 

ⓒ연합뉴스

사상 초유의 '중수부장 감찰' 지시, 술렁이는 검찰

검찰총장과 중수부장이 정면충돌한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대검 중수부 폐지 및 총장 퇴진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많다. 한 총장이 위기를 돌파할 방안을 두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낸 최 중수부장을 표적으로 삼아 감찰이라는 칼을 무리하게 빼든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총장은 최근 궁지에 몰려 있다. 검사 비리가 연이어 터진 것에 더해, 총장이 재벌 회장을 위해 수사에 부당하게 간섭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 총장은 600억 원대의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SK 회장의 구형량을 "(7년에서) 4년으로 낮춰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데 이어, 2000억 원대 기업 어음을 사기 발행한 혐의로 기소된 LIG 그룹 총수 일가에 대해서도 봐주기 수사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LIG 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봐주기 지시에 일선 검사들이 반발하자, 'LIG 총수 일가에 대한 기소는 하되 내곡동 특검 수사 발표 전에 LIG 건을 발표하라'고 지시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내곡동 특검 관련 사항을 LIG 건으로 물타기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한 총장은 2002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 씨를 구속 기소한 후,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중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서울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한 총장이 최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한 후, 총장에게 반발하는 목소리가 검찰 내부에서 확산되고 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중수부 검사들은 28일 밤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고 서울중앙지검에서는 간부회의를 연 것에 더해 소속 검사들에게 연판장을 돌렸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 부하를 희생시키려는 검찰총장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게릴라칼럼] 반복되지 말아야 할 5년 전의 과오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박근혜라고 다를까

 

12.11.29 09:40l최종 업데이트 12.11.29 09:40l
안호덕(minju815)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노무현 정권 5년은 1주 2회씩 공무원을 늘리고, 그들이 정부의 시장개입과 기업규제를 늘려온 기간이다. 그처럼 큰 정부, 많은 규제를 위해 늘어난 재정지출과 세금은 5년 내내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4%대 성장에 묶어놓았다. 12월 19일은 경제와 일자리 창출의 제1 주체가 기업·기업인이고, 성장을 전제하지 않는 분배론이 허구임을 주권의 이름으로 확인하는 하루여야 한다."

<문화일보> 2007.11.01. '12.19 국민 선택이 선진화 명운을 가른다' 창간 16주년 사설 일부

5년 전으로 되돌아 가보자. BBK 실소유자를 둘러싼 숱한 의혹 제기는 유권자들에게 그리 큰 관심사도 아니었고 대선에서 당락을 좌우 할만큼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잃어버린 10년, 되찾아야 할 10년이라고 강변하는 이명박 후보를 선택한 것은 쪼들린 경제난에 지푸라기도 잡아야 하는 서민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무슨 수를 내서라도 젊은 부부들에게 집 한 채씩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공약을)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언론도 보이지 않았다.

5년 전의 선택... 그 결과는?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 광고.
ⓒ 한나라당

관련사진보기


이명박 후보가 국밥 푹푹 퍼 먹고 경제를 살리겠다던 선거 CF를 보면서 747 공약이 서민경제에 햇살이 되어 줄 것이라고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은 곧바로 표로 직결되었다. 이 땅의 1% 사람들은 자기들의 부를 지켜줄 후보라 생각해서 표를 몰아줬고, 1%에 속하지 못하는 99% 사람들, 국밥 할머니와 같은 인생들이 할머니와 같은 염원을 가지고 이른 아침 투표소에 줄을 섰다. 잃어버린 10년을 찾고, 성장을 전제하지 않는 분배론이 허구임을 주권의 이름으로 확인하자던 보수 언론들. 2007년 유권자들은 보수 언론의 이 논리에 동의했고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5년. 이명박 정부는 공약에 충실했다. 기업 프렌들리 정책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임의적인 고환율 정책은 세계적인 경제 불황에도 우리 대기업들에게 사상 유례 없는 흑자 행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세금을 감면하고 비정규직을 늘리고 각종 규제 장치를 풀어버린 경제정책은 대기업, 대자본에서 땅 집고 헤엄칠 수 있는 경제적 토양을 제공했다. 떨어지는 집값을 잡기 위한 노력은 부동산 정책 18번 발표라는 진기록을 만들어 냈다. 한마디로 대기업과 대자본의 천하였다. 그게 이명박 후보의 공약이었고 그 공약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반면, 고환율 정책은 서민들을 물가고에 신음하게 만들었다. 김장철에 배춧값이 치솟고 휘발윳값은 2000원대를 오르내렸다. 길거리에는 한달 100만원 남짓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넘쳐났고, 한 골목에 하나씩 들어서는 SSM은 영세 자영업자를 길거리로 내몰았다. 전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나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비싼 전세보다 대출받아 집사라는 하우스푸어 양산책이 고작이었다. 빚더미에 올라 앉은 서민들과 길거리로 내몰리는 영세 자영업자와 저렴한 노동에 골병 들어가는 비정규직. 이는 이명박 후보의 공약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덜컥 대통령을 만들어준 서민들의 뼈아픈 자업자득이었다.

'성장이 전제되지 않는 분배'는 허구라며 성장을 기약했던 이명박 정부. 그가 서민들에게 보여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분배 없는 성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기업이나 부유층이 잘 살게 되면 저소득층까지 그 효과가 미친다는 낙수 효과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동네 빵가게, 피자가게, 치킨가게까지 문닫게 만들면서 거대해져왔던 대자본이 보여준 것은 낙수 효과가 아나라 서민들의 밥줄에까지 빨대를 꽂아야 직성을 풀리는 탐욕이었다.

박근혜 후보, 문재인 후보 공격할 자격 있나

고통스러운 5년이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5년. 많은 사람들은 기대반, 걱정반의 시선으로 대선을 바라보고 있다. 1%에 속하지 않은 99%의 사람들은 얼어붙은 서민경제에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철탑에 오른 사람들은 파리 같은 목숨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매달려 있다. 칠순 노모와 마흔 살 딸이 서로 줄을 묶고 한강에 몸을 던지는 세상. 앞으로의 5년이 지나온 5년과 같다면 서민들은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5년, 서민들은 죽을 만치 힘들었고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한 달도 남지 않는 대선. 저마다 동사 직전인 서민경제의 해결사인양 자임하고 있지만 선듯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특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향해 실패한 정권의 폐족 운운하며 양극화 주범, 비정규직 양산의 책임자라고 공격하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의 한 축으로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던 구 한나라당의 5년 행보를 생각해 본다면 후안무치의 궤변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 대학 등록금, FTA 문제에 있어서 후한 점수를 받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폭등한 부동산 가격에 대해서도 분명 책임은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처럼 뻔뻔스러울 정도로 서민들을 기만하지는 않았다. 무슨 염치가 있어 시장 순례를 하겠냐며 재래시장 방문을 한사코 마다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시장에서 어묵 먹고 시계 풀어주며 미소금융에서 대출을 권하던 이명박 대통령과는 분명 달랐다.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양산과 양극화 심화가 문제였다면 이명박 정부 5년은 반대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나 여당인 새누리당의 국정 운영은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를 고착화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아파트 경비원 등 감시·단속 노동자의 최저 임금100% 지급을 대량해고 사태 운운하며 또다시 3년 유예를 선언한 것도 이명박 정부의 고용노동부가 한 일이었다. FTA 전도사를 자처하던 김종훈과 친재벌 감세론자 나성린을 국회에 입성시킨 것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선후보였다.

당신의 미래는 70% 중산층에 포함되어 있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공식 선거운동 첫 날인 27일 오후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상설시장 앞에서 유세를 마친 뒤 시장을 둘러보며 시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관련사진보기


또다시 재래시장을 찾아 손을 내미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 후보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는 상인들의 반복되는 모습을 관람하는 것은 편치 않다. 국회에서 유통법 개정안조차 처리하지 못한 여당 후보를 환대하는 상인들. 1997년 IMF 환란에 금모으기로 대기업, 재벌에 면책을 부여했던 서민들. 그 때는 금 모으기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숱한 정규직을 거리로 내몬 무능한 경제 관료들, 탐욕스런 재벌들에게 돌팔매질을 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통법 개정도 미루고 어떻게 재래시장을 찾냐고, 이명박 정권의 어묵쇼를 또 반복하는 것이냐고 따지듯이 물어야 하는 것이 자영업자들의 처지를 알리는 길이고 유권자로서 할 일이 아닐가? 철탑에 매달린 노동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어떻게 박근혜 후보는 중산층 70%를 만들겠다는 건지 묻지 않는 유권자의 태만, 747 공약에 속아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한 번의 과오로 충분하다.

대기업의 탐욕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중산층 70%가 만들어질 수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고작 150만원도 되지 않는 비정규직 수입으로 빚 청산하고 자식들 걱정없이 공부시킬 미래가 만들어 질 수 있는지 반문해봐야 한다. 대형마트와 SSM의 공격 앞에 당장 몇 달 앞도 기약할 수 없는 자영업자들이 과연 5년 후가 되면 70%의 중산층에 포함될 수 있을까?

분배되지 않는 성장. 저항하고 바꾸어야만 서민들의 삶이 열린다. 악수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어지지 않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3세계 신학으로서의 미국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

 

 

 

미 흑인신학 “기독교적 흑인이 미국바꿔”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18) 제3세계 신학으로서의 미국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11/29 [01:59] 최종편집: ⓒ 자주민보
 
 

지금으로부터 390여년 전인 1619년에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들이 미국으로 끌려오기 시작하여 200년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약 1천2백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미국으로 끌려왔다. 17세기 말쯤에 남부지방에 흑인노예의 수가 백인의 수에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노예들은 미국사회에서 백인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엄청난 학대와 인종주의적 노예생활을 하며 수백년 동안 살아 왔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라고 하는 이름으로 세워진 기독교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흑인들에게는 자유와 정의 그리고 종교적인 삶의 길은 절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발표한 노예해방 이후에도 해방은 정치적인 술어일 뿐이고 오랜 기간 흑인들은 조금도 변함없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 노예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 백인들이 제정해 놓은 노예제도하에서 흑인의 역사, 정체성, 인간성, 공동체, 지식과 언어 등 그 모든 것이 박탈되고 부정되었다. 백인들은 흑인노예들에게 강제로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요했는데 그 이유는 흑인노예들이 백인들에게 말없이 복종하도록 하는 통치수단과 방법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흑인노예들이 기독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더라도 노예의 신분에는 하등의 변화가 없다고 법으로 규정해 놓았다. 흑인노예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노예라고 하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마음을 스스로 참고 견디기 위하여 특유한 방법으로서 기독교의 종교적 관행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 미국 흑인신학의 기원과 방법론의 특징

미국의 흑인신학은 195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들 스스로 미국에서 흑인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의 관점에서 흑인들의 인권운동을 일으키는 데서부터 처음 시작됐다. 지금까지 세계의 진보주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만 무신론과의 신학적인 논쟁에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독교신학이 제3세계에서 억압받고 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데 참여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세계적인 신학의 동향이 남미를 비롯하여 이른바 해방신학이 제3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미국의 흑인신학의 기원도 이러한 제3세계의 해방신학에 힘입어 시작됐다. 흑인의 해방이라고 하는 새로운 자아의식 운동의 정체성과 흑인신학을 확립하는데 제3세계 신학이 크게 기여하게 됐던 것이다.

미국의 흑인신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비로소 1950년대부터 자유주의사상에 힘입어 흑인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자아의식과 흑인들의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흑인들의 투쟁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은 자유해방을 위하여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규범으로 삼음과 동시에 특히 착취와 억압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인 삶의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흑인신학의 정치성과 사회적인 면에서와 경제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신학은 흑인만을 위한 신학으로서 수세기 동안 백인의 식민통치와 억압 속에서 살아온 비참한 역사적 현실에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독교적인 실천을 추구하는 혁명적인 신학이다.

이러한 미국의 흑인신학을 다음의 두 가지 형태의 맥락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인권운동으로서의 해방신학

주로 1910년-1950년대에 이르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을 기초로 하여 해방신학이 전개됐다. 이 시기에 인권운동으로 인하여 흑인들의 자아의식 수준이 급속히 발전됐으며 또 많은 책들이 출판됨으로써 흑인교회들이 백인교회에 예속당하고 있는데 대하여 부당함을 주장하여 흑인교회의 독자적 운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킹 목사로 시작된 혁명적 흑인인권운동의 출발은 비폭력저항운동이었다. 이 시기의 비폭력적 저항운동은 주로 일반적인 시민권 투쟁이었으며 백인 주도의 교회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이었으며 특별한 학구적인 투쟁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흑인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정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해도 좋은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기독교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주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의 초기적인 단계에서는 기독교 신학교육의 학위조차 획득하지 못한 일반 교회 안에서 흑인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처음 시작됐다. 하지만 흑인교회들의 투쟁들은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항거단체들이 교회 안에서 창건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ㄱ. 남부기독교인 지도자협의회(SCIC)
ㄴ. 흑인교회 전국협의회(NCBC)
ㄷ. 흑인공동체 초교파재단(IFCO)
ㄹ. 백인교회 안에 있는 흑인들의 위원회들.

어쨌든 1960년대에 흑인신학의 초기단계는 성장하여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애와 그의 신념과 업적으로 인하여 흑인신학의 기초가 마련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흑인신학이 처음 출현하는데 대하여 백인 보수주의교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혼합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킹 목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백인 자유주의적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당분간 무조건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은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바르트, 블트만, 몰트만 등의 “신의 죽음의 신학”에 대하여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흑인신학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모르는 척 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인교회들의 무관심과 냉담 속에서 흑인교회 내부에서 흑인의 해방을 위한 신학적인 탐구가 흑인교회 지도자들에게서 처음 활발히 시작되고 있었다.

ㄱ) Richard Allen(감리교 감독회의 창시자), ㄴ) Henry Garnet(장로교 설교자로서 노예제도에 항거했다), ㄷ) Nat Tuner(60명의 백인을 살해한 흑인반란의 주모자인 침례교 설교자), ㄹ) Henry McNeal(하나님은 니그로이다를 주장한 감리교 감독) 그리고 다른 많은 흑인기도교인들이 노예의 역사와 종교적인 역사를 탐구하면서 그들의 정치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교회 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0-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선두로 하여 흑인신학을 태동시켰는데 백인의 인종차별을 완강히 거부했다. 킹 목사는 신의 창조가 흑인들을 노예로 혹은 2등 시민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백인들을 향하여 주장하면서 인권운동 투쟁을 선두에 서서 전개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는 보통사람의 생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흑인들의 노예해방 100주년을 기념하는 1963년 8월28일에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행진에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여 아직도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죽음을 각오한 불을 내뿜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킹 목사는 “비폭력” 주의자였다.

킹 목사를 신학자라고 하기보다는 흑인 인권행동주의 비폭력 주의자로서 29번이나 투옥을 당하면서도 불변의 신념으로 미국 기독교 공동체로 하여금 억압은 종교적인 정의가 아니며 종교의 근본적인 사명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종교적 불변의 진리를 인식하도록 킹 목사는 죽을 때까지 주장했다.

킹 목사는 백인들의 정치쇼로 1964년 12월 10일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1968년 4월 4일에 역시 백인들의 정치적 음모로 멤피스에서 암살을 당했다.

미국의 흑인신학과 흑인 민족주의자 말컴 엑스(X) 블랙파워의 등장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1960년대에 흑인 인권운동의 쌍벽을 이루었던 운동은 말컴 엑스 (X)의 블랙파워 흑인 민족주의운동이다.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진 미국의 정치적 제도에 항의하여 말컴 엑스는 강력하게 싸웠다.

말컴 엑스(X)는 누구? 그는 백인 폭력에 대항하여 싸운 “분노한 검둥이”였다. 말컴 엑스 (1925-65)는 그의 본래의 성을 버리고 대신 엑스(X)라는 성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미국 흑인들의 성은 백인이 흑인노예들에게 제멋대로 붙여준 성이기 때문에 말컴은 백인이 붙여준 성을 버리고 차라리 엑스-X를 자기의 성으로 삼겠다고 해 말컴 엑스(X)가 된 것이다.

말컴 엑스는 흑인 침례교 목사 가정에서 6님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흑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할 것을 설교하는 반백인적 목사였다. 이로 인하여 말컴 엑스의 아버지는 백인우월주의(KKK) 단원들에게 참혹하게 산 채로 두 동강으로 잘려 살해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일로 인하여 정신착란증으로 사망했다. 말컴 엑스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아들이 되고 말았다.

말컴 엑스는 중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미시간주 소년원에 수감되어 8년을 지냈으며 그 후 다시 학교에 들어가 새로 마음을 바로 잡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반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분개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백인에 대하여 증오의 벽을 쌓기 시작했다.

졸업을 한 말컴 엑스는 뉴욕시 할렘가로 진출하여 7년 동안 방황생활과 무장강도범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처지에 빠져 있었다. 감옥생활 2년째 되는 어느 날 말컴 엑스의 동생 레지날드가 감옥에 찾아와 면담을 하게 됐다. 그 후부터 말컴 엑스는 또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독서에 전념하면서 감옥에서 5년을 지냈다. 5년의 감옥 생활은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것 이상으로 독서로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1952년에 가석방으로 자유의 몸이 된 말컴 엑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슬람교의 전도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슬람의 종교적 신념을 확실히 하기위하여 1963년에 회교 성지 메카를 순례하였고 1964년에는 “사단법인 회교사원”을 조직하여 보다 활발한 반미-반기독교적 흑인 해방운동을 전개했다. 말컴 엑스는 기독교의 종교적 편견을 뛰어 넘어 미국 흑인들의 정치, 문화, 경제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동분서주하면서 흑인해방을 위한 큰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말컴 엑스의 반미-반기독교적 흑인 해방운동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평생 동안 주장한 “비폭력 해방운동”과 “흑인-백인 통합주의적 해방운동방식”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상이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말컴 엑스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한 “비폭력 통합주의적 흑인 해방운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면으로 쓴소리를 했다.

“비폭력 통합주의? 그것이 정말 가능한가? 어떤 형식의 통합을 말하고 있는가? 만일 통합이라는 것이 백인들의 생활양식,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면 흑인은 그런 통합을 반대해야 마땅하다. 흑인이 백인과 통합해야할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백인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흑인들이 백인들처럼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흑인들의 망상이며 착각으로 여기고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흑인들의 인간성을 고상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 흑인들의 망상이고 착각이라고 백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악마와 같은 백인들과 통합하는 것을 주장하는 킹 목사의 비폭력방법으로는 흑인의 참된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 흑인으로서 백인들과의 관계로 이룩되는 비폭력 해방운동은 절대로 용인할 수가 없다. 백인들이 흑인을 지배할 만한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비폭력적 통합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흑인 해방운동이 불가능 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비폭력을 주장하는데 대하여 말컴 엑스는 “블랙파워”를 주장했다.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 흑인해방운동 방식과 킹 목사의 비폭력운동 방식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말컴 엑스와 킹 목사는 서로 다른 운동방식을 초월하고 보완함으로서 해방운동의 중요성을 보다 높이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백인교회는 킹 목사와 말컴 엑스사이에 있는 흑인 해방운동의 방법 상에 있는 차이점에 대하여 이것을 악용하여 두 진영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도록 유도하면서 보수주의적 흑인들을 충동하여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운동을 배격하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교회 성직자들은 백인 인종주의 유혹을 끝내 배격하고 백인교회의 악마적인 분열공작을 무력화시키고 미국의 흑인신학을 정착시켰다.

말컴 엑스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향하여 내뿜은 열변적인 논평에 대하여 그 일면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ㄱ. 백인이 흑인에게 “왜 우리 백인들을 증오하는가”라고 질문을 하는 것은 마치 늑대가 양에게 “왜 우리 늑대들을 증오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강간을 당한 사람이 강간범을 증오하는 것이 당연한 증오아닌가?

ㄴ. 블랙파워 흑인해방운동이 흑인신학의 의식적인 발전에 대하여 서로 공헌한다. 가난한 흑인들의 투쟁은 모두 다 동일한 투쟁이다. 하지만 블랙파워는 흑인들이 정치적 운명을 정치적으로 스스로 해결할 것을 추구하면서 힘으로 투쟁해야 한다.

ㄷ. 미국에서 흑인의 해방을 위하여 평화적인 비폭력벙법으로 싸우는 것은 미국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것 뿐이다. 백인들이 소방차 물호스를 마구 쏘고 또 개를 풀어 여자들을 물게 하며, 총으로 남자들을 쓰러지게 하는데… 오른뺨을 맞으면서 왼뺨을 내밀어서야 어떻게 흑인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겠는가?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는 “오른뺨을 맞으면 총을 들라”고 외쳤다. 말컴 엑스의 당연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미국 언론은 흑인들이 백인을 향하여 증오로 가득찬 것으로 교묘하게 묘사하여 백인들로 하여금 흑인을 증오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말컴 엑스는 1965년 2월 21일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집중 총경을 받고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꿈”을 주장했는데 말컴 엑스는 “악몽”으로 쓰러졌다.

비폭력 흑인 해방운동자인 미틴 루터 킹 목사의 운명과 블랙파워를 주장한 말컴 엑스의 운명은 흑인 해방운동 방법론에 있어서 두 사람의 차이점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진실은 흑인 해방운동 정신에 있어서 차이점 보다는 분명히 공통점이 보다 더 크고 많은 근본적으로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목적으로 투쟁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와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는 흑인 해방역사의 한 시대적인 과제를 그들의 가슴에 품고 총탄에 쓰러진 동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 간 후에 40여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미국 역사는 흑인대통령이 배출했다.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와 말컴 엑스의 블랙 파워의 염원이 극히 일부 일지라도 조금씩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킹 목사와 말컴 엑스가 꿈꾸었던 흑인의 정신으로 미국의 미래를 심도 있게 깊이 들여다 본다면 흑인들의 꿈과 희망의 성취는 빙산의 일각만도 못한 것으로써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2. 흑인신학의 혁명과 폭력에 대하여

미국의 흑인신학은 단순히 항의가 아니다. 흑인신학은 종교적 양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모순되는 백인의 법률을 타파해야할 의무를 느낀다. 그러므로 백인의 불법적인 억압에 대항하고 불복종하는 것은 흑인신학의 진리에 대한 충성이며 인종차별 사회에서 혁명적인 과업이 된다.

인간의 운명과 민족주의 진로는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미국의 흑인신학이 추구하는 확고한 신념이다. 이 신념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타락한 것을 의미한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저항은 인간적이며, 종교적이며, 혁명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흑인신학이 혁명적이라는 말은 때로는 강제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흑인신학은 “폭력신학”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백인이라는 압제자를 타도하기 위하여 흑인신학이 게릴라전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백인들이 고의적으로 만들어 악선전을 하는 말 뿐이다.

하지만 만일 피압박자의 목에 백인들이 죽음의 밧줄을 매고 그 밧줄을 잡아당기려 하는 긴박힌 순간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를 상상해 보라. 이러한 긴박한 위기에 처한 순간에 반드시 생각하게 되는 실존적 질문이다. 피입박자가 억압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깨지고 물건으로 취급당하고 있을 때 그 반응이 자연발생적인 생존을 위한 “폭력”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인 모습으로 나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백인 압박자들은 뻔뻔스럽게 “질서있는 사회에서 정의는 실현된다”라고 하면서 “폭력”이라는 말의 단어를 이유막론하고 범죄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인의 살인적인 행동을 문화와 종교적인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질서란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그러므로 흑인신학이 백인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피압박자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취급하면서 불가불 폭력의 사용 문제를 솔직하고 진리로 당연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에 의하여 희생을 당하는 약한 자를 구출해 내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의로운 혁명적 폭력이다. 정의로운 폭력이라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필요한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더 깊이 고민을 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기독교전통을 과시하고 있는 미국의 백인들에게 끝까지 추궁해야 할 정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흑인신학에 있어서 탁월한 흑인신학자 제임스 코온(James Cone, 1938- )이 있다. 코온은 현재 뉴욕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의 석좌교수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흑인 신학자로서 많은 제3세계 해방신학의 신학자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한국의 민중신학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제임스 코온은 미국의 흑인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으로 만일 기독교가 억압당하는 자를 위하여 있다면 나는 주장하기를 종교는 반드시 흑인을 위하여, 흑인을 통하여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코온은 미국의 신학은 미국의 흑인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검은 색은 미국 주류사회에서 억압의 표시로 제일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온은 그의 저서 <흑인신학과 혁명(Black Theology and Power)>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출판했는데 그의 일관된 주장은 기독교적인 흑인이 됨으로써 미국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흑인의 사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피부의 색깔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기의 피부의 색깔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자기의 영혼, 자기의 지성, 자기의 몸이 귀중하고 고귀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비록 피부의 색깔은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의 동일성을 중요시하는 것이 정말로 종교적 역할이다. 이와 같은 종교적 역할이 올바로 인식될 때 이런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를 나는 희망한다. 인류의 인간성이란 똑같다는 사실을 종교적 차원에서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 비로소 미국을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는 길이다.”

제임스 코온이 주장하는 흑인신학은 피부의 검은색의 문제가 분명이 미국의 분쟁의 암으로 역사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사실대로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백인이든 흑인이든 종교적으로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신학자이다.

제임스 코온은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유명한 미국의 흑인신학자로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적 흑인 해방운동과 그와 상반되는 말컴 엑스의 블랙파워 흑인 해방운동의 두 진영의 상이한 흑인 해방운동 방식에 대하여 두 사람이 하나의 같은 목적으로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화합하고 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임스 코온은 흑인의 해방운동 양진영의 대립에 대하여 흑인신학자적인 역할을 통하여 양진영의 운동 방식을 화합과 협동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제임스 코온의 해방신학이 미국의 백인과 흑인의 피부 색깔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는 극한상황을 종교적으로 똑같은 이념의 화합을 성취함으로써 능히 평화적으로 인종적인 색깔의 대립을 화해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임스 코온은 오늘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로서 미국의 흑백 대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미국인들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종교적 이념으로 똑같은 길을 선택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글을 맺으며

흑인과 백인이 같이 버스를 탈 수 있도록 결사적으로 투쟁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없었다면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왜 미국이 다른 나라의 인권에 간섭하고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 내의 인권 상황은 이 모양으로 날로 악화되고 있는가라고 폭력적으로 항의한 말컴 엑스가 없었다면 오늘 흑인 오바마가 가히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영화 <뿌리>, <흑인 오르페>, <흑과 백>, <칼라 퍼플> 등 흑인들의 처절한 삶을 고발한 작품들이 없었더라면 미국에서 역사적이며 개혁적인 변화가 일어나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역사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중에 흑인신학의 등장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쨌든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이후 142년 만에 미국에서 흑인이 대통령이 되어 집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신보수주의는 무능해졌고, 신자유주의는 탐욕으로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 미국은 할 수 없이 졸시 탈출구를 찾아 낸 것이 바로 백인들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선거 비상대책으로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이 덜 오만한 척 하는 위선적인 겉모양을 전 세계에 보이려고 흑인대통령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흑인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역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더욱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베트남전과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과거사에 대하여 솔직히 사과를 했다.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1975-1979년에 170만 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오바마는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미국의 과거사를 논의하는 것조차 회피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언론은 분석보도를 했다.

어디 그뿐인가? 힐러리 클린턴 외무장관과 미구 국무성 동아태 차관보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 자신은 분주하게 줄줄이 미얀마를 방문하여 미얀마-북조선(북한)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하도록 헙박하면서 이간을 조성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북조선을 고립압살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전직 대통령들의 유산을 오바마가 그대로 이어 받은 증거이다. 그뿐만 아니라 또 오바마 대통령은 오히려 대조선적대정책을 전보다 더 강화함으로써 흑인 오바마는 미국의 백인들의 기득권 세력에 아부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오바마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2월 대선에서 코리아반도(한반도) 남단에 평화정착을 이루어낼 정권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렇다. 우리민족끼리 북과 남이 손잡고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대행진이 분명히 전개될 때 오바마 대통령도 속으로 못 견디는 체 하면서 코리아반도의 난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해결하는데 양심적인 호응을 분명히 하게 될 것이다.(2012년 11월 24일)


관련기사
 
남미의 해방신학은 어떻게 생겨났나
 
한국 민중신학이 걸어온 길
 
차베스의 승리와 심상찮은 제3세계 반미운동
 
배부른 제국과 굶주리는 제3세계
 
히틀러보다 덜할 게 없는 영국의 역사
 
영국-프랑스의 2차 백년전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