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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병 사건', 김관진 靑 안보실장 책임론 분출

청와대 "진상규명이 우선"…국방부 "사건 은폐 의도 없었다"

 
기사입력 2014.08.04 10:47:10
 
지난 4월 육군 28사단에서 일어난 이른바 '윤모 일병 구타 사망사건'과 관련, 야당은 사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4일 오전 "기절하면 수액 주사를 놓고, 깨어나면 다시 폭행하는 가혹행위가 군 내에서 벌어졌다"며 "국방부의 은폐·축소가 문제를 키웠다"고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는 "사건 발생시점이 4월 7일인데 국방부는 2일 뒤 단순 폭행사건으로 진실을 은폐했다"며 "7월 31일 시민단체 기자회견이 없었다면 영원히 묻혔을지 모르는 사건"이라고 했다. 
 
박 원내대표는 그러면서 "군 간부가 과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로 부모의 면회를 막았다. 면회가 허용됐다면 죽음만은 막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며 "당시 국방장관인 김관진 실장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원내정책수석인 김현미 의원도 "군대 갔는데 휴가 나오면 어디 멍든 데 있는지 찾아보는 게 부모 마음"이라며 김 실장에 대해 "그렇게 한 분이 책임도 안 지고 청와대 가서 안보실장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김 의원은 "당시 장관을 비롯한 군 최고 책임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밑의 무슨 부대장 정도로 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청와대는 윤 일병 사건 문책과 관련 "진상규명이 우선"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윤 일병 사건과 관련해 육군 고위직 인사까지 문책을 하겠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진상규명이 우선돼야 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부모가 군대를 안심하고 보낼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며 "추가로 누구를 문책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민구 "軍, 고의 은폐의도 없어"
 
박 원내대표는 휴일인 전날 새누리당 최고위원들이 한민구 국방장관을 국회로 불러 강하게 질타한 데 대해 "집권당인 새누리당이 탁자만 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인가"라고 꼬집기도 했다. 전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분명 살인사건"이라며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책의 범위가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었다. 
 
새누리당 지도부에서는 이날도 "군 지휘계통을 통해 제대로 보고가 됐는지, 쉬쉬하고 덮으려는 건 아닌지 철저한 진상조사와 함께 책임질 사람은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김무성 대표)거나, "당나라도 아니고 대한민국 지휘체계가 제대로 돼 있는가"(김태호 최고위원)라는 등 국방부에 대한 날선 비판이 계속됐다. 
 
한편 이날 야당 아침회의에 참석한 한민구 장관은 "사건이 진행되면서 군이 고의로 은폐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다만 사건 조사결과(의) 구체적 내용이 헌병·검찰·군 수뇌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군의 미비한 대응을 일부 인정했다. 
 
한 장관은 "우리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며 "제가 장관으로서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한 만큼, 국민 여러분과 의원들이 우려하고 분노하고 질책하는 것을 깊이 명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현미 의원은 "말로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라며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군대 보낸 엄마 누구 하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라. 그저 내 아이가 안 당하고, 안 다치고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광진 의원도 "말의 성찬을 그만둬야 한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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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머리 없는 사회

[비평] 인정머리 없는 사회
 
 
 
정운현 | 2014-08-04 10:43: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인정이 많은 민족으로 불려 왔다. 유교문화를 토대로 질서와 격식을 강조하면서도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 집안의 대소사를 친인척들이 힘을 합쳐 치러 왔으며, 이웃 간에도 길흉사를 내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품앗이와 향약의 전통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길이길이 자손만대에 전할 미풍약속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도시화,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이같은 전통은 하나 둘씩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옆집에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알지를 못하며 이웃이 백주대로에서 불량배들에게 행패를 당해도 오불관언이다. 남의 불행을 내 일처럼 여기던 과거의 인정은 온데 간 데 없다. 대신 그 자리엔 과도한 경쟁과 상호 불신이 자리해 점차 인정머리 없는 세상이 돼 가고 있다.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난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비극 차원을 넘어 21세기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다. 300여명의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10명의 실종자들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도 팽목항에는 아직도 실종자 가족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식이, 부모가 불귀의 객이 된 것도 억울한데 시신마저 거둘 수 없다면 그 가족들의 심경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재든 자연재해든 사고는 늘 있어 왔다. 문제는 사고 이후의 대응과 조치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해경의 초동대응에서부터 해수부, 해군 등 관계당국의 후속조치 또한 극도의 무능을 드러냈다. 백주대낮에 그것도 심해도 아닌 근해에서 발생한 사고임에도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 어떤 해명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번 일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훼손됐다고 할 정도로 나라망신을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 발생 이후 일부 보수언론과 여당 정치인, 그리고 몇몇 보수단체 관계자들의 언행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느니, 유족들이 자식 팔아 돈을 챙기려 한다느니, 심지어 유족들이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는 식의 유언비어까지 날조해 퍼뜨리고 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여당은 진상규명에 앞장서기는커녕 온갖 이유를 들어 특별법 제정을 가로막고 있다. 적으나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7월 7일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하는 새정연 김현미 의원(뉴스타파 화면 캡쳐)

인정머리 없기로 치자면 박근혜 대통령을 첫 손가락에 꼽아야할 것이다. 사고발생 당일 박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첫 서면보고를 받은 후 오후 5시 중앙재해대책본부를 방문하기까지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한 상태다. 박 대통령은 비서실장도 모르는 곳에서 서면이나 전화로만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 엄청난 대형 참사를 말이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책무를 진 대통령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도 그럴 순 없다. 김현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향해 울먹이며 따지던 말이 생각이 난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물속에 있는데 대통령이 어떻게 단 한 번도 회의 소집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내 새끼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게 나랍니까? 지금 대한민국이 상소 올리는 조선시대입니까?”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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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처럼 오일풀링? '착한 기름' 이렇게 골라라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8/04 11:17
  • 수정일
    2014/08/04 11:1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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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좋은 기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좋은 기름을 골라서 섭취하는 것은 그리 쉽지 만은 않다. 사진은 한 대형 할인점의 기름 판매 코너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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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가 '오일풀링'이다. 참기름이나 올리브유 같은 식물성 오일을 입에 머금고 가글하면 입 안 독소가 체외로 배출된다는 인도 민간 요법으로, 최근 가수 이효리씨가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건강 관리 비법으로 소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는 물론 방송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관심이 그야말로 '핫'하다.

물론 맹신은 금물이다. 그 효과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토나 피부 질환 등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한다. 오일풀링 과정에서 '세균 오일'이 자칫 체내에 유입되면 오히려 큰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어떤 오일을 선택하느냐도 중요하다고 한다. '나쁜 기름'을 이용할 경우는 독과 독이 만날 가능성도 높아지니 어쩌면 당연한 경고다.

게다가 걸핏하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이 '나쁜 기름' 뉴스다. 그동안 참기름에서 발암 물질인 벤조피렌이 기준치를 초과해 검출됐다는 소식은 잊을 만 하면 한 번 씩 튀어나오기도 했다. 대형 할인점 판매 상품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한 대형 할인점이 위탁 생산을 맡겨 판매한 참기름 상품에서 벤조피렌이 과다 검출됐다는 뉴스가 터져 나왔던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착한 기름과 덜 착한 기름 구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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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한 대기업 제품(사진 왼쪽)과 '착한들기름 착한참기름'의 제품을 비교해봤다. 고온에서 만들어진 기름일수록 갈색을 띠고, 반대의 경우는 노란 색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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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착한 기름'까진 아니라고 해도, 그나마 '덜 착한 기름', 어떻게 골라야 할까. 직접 기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강원도 인제군 원통시장에서 '착한들기름 착한참기름'을 운영하고 있는 김미영씨와 이현주씨. 한 사람은 농민이고 한 사람은 오랫동안 생협을 이용해 온 소비자였다. 

김씨는 한국여성농업인 인제군연합회장, 이씨는 서울 토박이로 과학 선생님 '출신'이다. 이씨는 2010년에 전원 생활을 하려고 남편을 따라 고향에 왔다가 김씨와 만나게 됐다고 한다. 진짜 들기름을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직접 제조를 시작했고, 친척 등 지인에게 '깨 값'만 받고 공급하다가 그 반응이 좋아 작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벌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 제조 방식을 살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름병에 '압착식'이라고 콱 박혀 있으면 두 사람에게는 일단 '통과'다. 김미영씨는 "예전에는 깨를 쪄서 그 다음 맷돌 같은 무거운 걸 올려놓고 눌러서 기름이 나오면 받는 과정을 반복했던 걸로 안다. 그게 요즘 말하는 저온 압착식 방법"이라며 "이런 방식으로 기름을 만들었다면 자신 있게 제조 방식을 표기할 것"이라고 했다. 제조 방법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제품을 고르란 뜻이다. 

따라서 기름을 고를 땐 큰 글자보다 작은 글자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제품 유형도 '의외로' 중요한 체크 포인트다. 만약 향미유라고 써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고 한다. 이현주씨는 "향미유는 포도맛 사탕이나 바나나 맛 우유처럼 향만 넣은 기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기름 집 차리면서 관심을 갖다 보니까 알게 됐다. 그 전에는 향이 좋은 기름으로 알았었다"고 했다. 

"수입 여부를 떠나서요. 열을 많이 가해서, 태워서 짜는 기름은 아무래도 착한 기름이라고 할 수 없겠죠. 태우면 태울수록 기름이 많이 나와요. 누룽지 태우면 고소하잖아요. 태워서 고소한 맛, 식용유를 섞어서 태우면 맛이 고소해지거든요. 그러면 그게 참기름인지 뭔지, 들기름인지 뭔지 모르게 되는 거죠." (김미영씨) 
"보통 기름 갖고 사기치는 분들이 그렇게 하는 걸로 알아요." (이현주)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색깔 비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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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들기름 착한참기름'을 운영하고 있는 김미영씨와 이현주씨. 김씨는 현재 한국여성농업인 인제군연합회장이다. 서울에서 과학 선생님을 하던 이씨가 2010년 남편과 함께 귀향하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됐다고 한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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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기름 공부 결론은 이렇다. 착한 기름을 만드는 기준은 바로 '온도'라는 것. 일을 벌이기 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기름을 짜 보고 얻은 결론이라고 한다. 같은 기계라도 사용하는 사람 '의도'에 따라 천차만별. 이현주씨는 "낮게 한다는 곳도 180도, 높은 곳은 230도까지도 올라가더라"며 "100도로 하면 기름이 안 나오고 기계가 망가진다는 말도 들었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100도를 '착한 온도'로 정하자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 김미영씨는 "깨를 씻어서 볶을 때 연기 나지 않게, 물기만 말리는 정도만 볶아서 짜는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덕분에 방금 짜서 만져도 뜨거운 기운이 없다"며 "기계 허용 범위에서 온도를 최대한 낮춰서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산 참깨와 들깨를 사용하는 것과 함께 이들이 표방하는 '착한 기름'의 근거다.

따라서 이들에게 착한 기름과 그보다 덜 착한 기름을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기름 색깔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태우면 태울수록 갈색을 띠고, 반대의 경우는 노란 색에 가까워진다고 했다. 다만 곤란한 점은 현실적으로 이런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 시중에서 판매되는 기름 용기는 그 색깔이 짙어 육안으로는 비교 불가다. 보관 중 햇볕에 노출되면 산화가 잘 되는 특성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들 두 사람은 별도 케이스를 만들면서까지 투명 용기를 '고집한다'. 품질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이다. 김미영씨는 "저희가 시식 행사도 하는데 숟가락에 기름을 따라 놓으면 왜 색깔이 이러냐고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면서 "기름 농도가 진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던 분들도 직접 먹어보면 깜짝 놀란다"고 자랑했다. 이현주씨는 이런 말도 했다.

"생협 판매 제품보다 우리 기름이 더 착하다고 하고 싶네요(웃음). 수입 깨가 너무 싸다 보니까 판로가 없어서 우리 들깨가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저희가 3년 째 지역 들깨 농가에서 수매하고 있는데요. 나중에 이 분들과 함께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들고, 더 잘 되면 전국 단위로 생산자 협동조합 만들고, 더 나아가 소비자 협동조합도 만드는 게 꿈이에요. 우리 들깨 살려야죠."
 
가장 착한 기름은 들기름, 하지만 잘못 먹으면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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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도중 이현주씨는 '착한들기름 착한참기름' 제품의 검사 성적서들을 보여줬다. 발암 물질인 벤조피렌의 불검출을 '인증'하기 위해서였다. 참기름의 경우는 한 달에 한 번, 들기름은 석 달에 한 번 품질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작은 규모 업체 입장에서는 검사비(1회 16만5천원)가 다소 부담스럽지만, 식품제조가공업으로 등록한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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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기름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혈관을 깨끗하게 하고 혈액 독소를 제거하는 그 효능이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덕분이다. 김미영씨나 이현주씨 역시 가장 착한 기름으로 들기름을 꼽았다. 집에서 요리할 때 튀김 요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들기름을 쓴다고 할 정도다.

"식물성 기름은 다 좋은 줄 알지만 그건 아니라고 하잖아요. 물론 동물성 기름보다야 낫지만, 역시 오메가6가 많은 기름이 적지 않으니까요.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오메가6 섭취량이 많이 늘어났잖아요. 콩기름이나 식용유 성분에도 오메가6가 굉장히 많고요. 

그러다 보니 오메가3를 찾아 섭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오메가3 무슨 약도 나오고요. 하지만 식품으로 먹는 것이 더 흡수율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착한 기름 1등은 들기름이란 거죠. 들기름은 참기름보다 오메가3가 훨씬 많으니까요. 올리브유보다도 그렇고요." (이현주씨)

오메가3와 오메가6의 불균형 해소 차원에서는 들기름 만한 식품이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단서는 붙는다. 지난 5월 방영된 한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가들은 "들기름을 먹으면 혈관을 깨끗하게 하고 혈액 독소를 제거한다고 많이 드시는데 고온에서 만들어진 들기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놨다. 두 사람의 의견도 물론 같았다. "고온에서 만들어진 들기름은 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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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 담을 '겨레말큰사전'

'민족혼' 담을 '겨레말큰사전'[친절한 통일씨] 4년 반 만에 재개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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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03  17: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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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민간교류가 한창이던 때, 북측에서 말한다. "일 없습네다."

'일없다'. 남측 사람들이 듣기에 '일없다'는 표현은 상당히 불쾌하다. 그래서 다짜고짜 화부터 내기도 했다. 하지만 남측 사람들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에 북측 사람들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워한다. 사실 북측에서 '일없다'는 말은 '괜찮다'라는 표현이다.

60여 년의 분단만큼, 남북의 언어표현과 어휘의 의미는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하나의 민족이라고 노래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

   
▲  북측 '조선말 대사전'. '겨레말큰사전'은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측 '조선말 대사전'을 1차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오징어와 낙지라 달리 말하고, 식당 종업원을 아가씨라 불렀다가 된통 혼나지만 '접대원'이란 표현이 매우 어색할 정도로 남북의 언어차이는 상당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남북 간 이질화된 언어를 하나로 통합하고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남북이 함께 만드는 사전이 있다. 바로 '겨레말큰사전'이 그것이다.

2010년 '5.24조치'로 모든 남북 간 교류가 단절되던 시기,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도 중단됐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난 4월에 세상의 빛을 봐야 했을 '겨레말큰사전'이지만, 최근 4년 반 만에 남북이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재개했다.

'겨레말큰사전'.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은 언제 시작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고 얼마만큼 성과를 거두었을까. 과연 우리 손으로 '겨레말큰사전'의 책장을 하나하나 넘겨볼 날이 올 것인가.

문익환 목사, 김일성 주석의 유지. '겨레말큰사전'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하면 언어학자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학자들의 필요로 논의가 처음 시작됐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 문익환 목사와 고 김일성 주석이 '겨레말큰사전'의 첫 단추를 끼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통일국어대사전'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여기에 김일성 주석이 즉석에서 동의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3년 문 목사의 아들 성근 씨가 방북, 당시 북측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겸 서기국장에게 사전 편찬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그리고 2004년 1월 문익환 목사 10주기 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북측 대표단에게 문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통일국어대사전' 편찬을 요청했다. 이후 남측 '통일맞이'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가 사전편찬을 위한 의향서를 체결, '겨레말큰사전'으로 명칭을 결정했다.

이를 토대로 2004년 12월 금강산에서 편찬위원회 실무접촉을 통해 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체결, 2005년 2월 20일 금강산에서 역사적인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이 열렸다.

   
▲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 2005년 2월 20일 금강산에서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공동보도문]

남과 북의 어학 학자들은 내외의 커다란 관심 속에 2005년 2월 20일 금강산에서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실천하고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민족어 공동사전편찬을 위한 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을 가졌다.

1.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은 민족어 공동사전을 우리말과 글의 민족적 특성을 높이 발양시키고 통일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며 오랜 역사를 통하여 창조된 우리 민족어 유산을 총집대성한 겨레말 총서를 편찬하기로 하였다.

2. 민족어 공동사전의 이름을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하였으며 남과 북의 언어학자들은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전편찬사업을 2005년 2월부터 시작하여 빠른 기간 안에 완성하기로 하였다.

3. 북과 남의 언어학자들은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를 분기에 1차씩 합의되는 장소에서 진행하며 여기에서 사전편찬과 관련한 제반 문제들을 협의 결정하기로 하였다.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
2005년 2월 20일
금강산

[출처-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어 '겨레말큰사전'은 학문적 영역이라는 점을 고려, 전문조직이 필요하다는 뜻에 따라 2006년 1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사업회'(이사장 고은)가 설립됐고, 여기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따라 2007년 4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남북은 2005년 2월부터 1년에 4번씩 만나 2009년 12월까지 총 20차례의 공동편찬위원회와 4차례의 공동 집필회의를 가졌다. 여기에 정부는 남북협력기금으로 총 220억여 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2010년 '5.24조치'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중단, 2014년 4월 발간 계획이 무산됐다. 이에 국회는 2014년 4월까지 적용되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을 2019년까지 연장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지난달 29일 중국 선양에서 남북공동편찬회의와 공동집필회의가 4년 반 만에 열렸다.

   
▲ 2009년 12월 중국 선양에서 열린 제20차 공동편찬회의. 이 회의를 끝으로 남북은 4년 반 동안 '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의 조직은 남북 당국의 개입이 없다는 점에서 순수 학술집단이라는 특징이 있다. 남측의 표준국어사전 등을 편찬하는 국가기관인 '국립국어원'과 북측의 공식 학술기구인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는 총체적 책임권한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남측에서는 국립국어원 소속 연구원 일부와 언어학 교수들이 참여하고, 북측에서는 '사회과학원' 소속이지만 실제 호칭은 '조선언어학회' 회장 및 회원으로 불려 학술적 목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남측
고은 '공동편찬위원회 상임위원장', 홍윤표 공동위원장, 김재용, 오봉옥, 이태영, 이희자, 조남호, 홍종선(이상 편찬위원), 조재수 편찬실장, 정도상 집행위원장

△북측
문영호 공동위원장, 윤춘현, 정순기, 고인배, 고인국, 최병수, 방린봉, 권종성, 리명복, 허일룡(이상 편찬위원)

   
▲ 2007년 6월 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개소식이 열렸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 고은 이사장, 박용길 장로, 백낙청 상임대표, 이해동 목사(왼쪽부터 순서대로)가 개소식 떡을 자르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북이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은 '겨레말큰사전'이 처음이었을까. 남북은 사전 편찬을 위한 공식적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해왔다.

1990년대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대회'(1994~2001), '코리안 어문규범과 관련한 국제학술회의'(1995~1996), '남북 언어동질성 회복을 위한 국제학술회의'(2001~2004), 정보화시대에 따르는 민족어의 통일적 발전과 언어정보 산업표준에 관한 학술모임'(2002)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논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 논의는 일회성 행사에 그치거나 논의를 확장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혔기에, 실질적인 남북 간 언어 동질성을 위한 논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언어관 차이, 남측 '표준어', 북측 '문화어'

'겨레말큰사전' 내용을 이해하려면 언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언어의 개념을 아는 것은 매우 학술적인 분야이고 연구자가 아니라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겨레말큰사전'은 남북 간 언어관을 극복하고 하나로 통합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기에 남북의 언어관을 알면 이해하기 쉽다.

남북 언어의 본질은 같다. '나는 밥을 먹는다'는 식으로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오고 뒤이어 동사가 오는 문법구조나 'ㅏ,ㅑ,ㅓ'와 같은 모음, 자음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인 음운체계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휘, 단어에는 차이가 있다. '동무'라는 단어가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지만, 북측에서는 '혁명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 남북이 '동무'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했지만, 전쟁 이후 남측에서 '동무'라고 말했다가는 간첩으로 취급받는 것과 같이, 남북이 어휘를 두고 서로 사용법과 의미가 다른데, 이는 남북 간 언어관의 차이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60년 분단 동안 남측에서는 '표준어' 북측에서는 '문화어'라는 개념이 생겼고, 여기에 남북의 체제 의미까지 부여돼, 언어 이질화를 가져왔다.

   
▲ 2005년 11월 개성 봉동관에서 열린 4차 공동편찬회의. 회의에서는 '단일언어규범을 만들기 위한 작업지침서'(단일언어규범작업요강)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남측의 '표준어'는 의사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해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로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원칙으로 한다.

북측의 '문화어'는 주권을 잡은 노동계급의 당의 영도 밑에 혁명의 수도를 중심지로 하고 수도의 말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노동계급의 지향과 생활 감정에 맞게 혁명적으로 세련되고 아름답게 가꾸어진 언어이다.

이런 언어관을 극복하고 공통의 언어, 공통의 어휘를 사용하도록 돕는 작업이 바로 '겨레말큰사전'이다. 물론, 그렇다고 '겨레말큰사전'이 남북의 언어 통일을 주요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사전 하나로 통일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60년의 세월을 극복하는 것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이 함께 사용하는 어휘, 그리고 어휘에 대한 남북 간 뜻의 같음과 다름을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목적이 더 크다.

   
▲ 2005년 8월 서울에서 열린  제3차 공동편찬회의 중인 문영호 편찬위 북측위원장(왼쪽)과 홍윤표 남측위원장(오른쪽). [자료사진-통일뉴스]

'겨레말 큰사전', 어떻게 만들까.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는 올림말, 집필, 새 어휘, 정보화, 형태표기 등 총 5개 분과에서 작업하고 있다.

사전의 가장 큰 작업은 바로 '올림말'. 즉 어휘 선정이다. 올림말이 선정돼야 그에 대한 뜻을 정리하고 사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올림말은 20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사용되었거나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을 범위로, 표준어와 문화어 외에 새 어휘를 다량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차적으로 '겨레말큰사전'에 등재될 올림말은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측 '조선말대사전'을 대상으로 총 80만여 개 올림말 가운데 등재 후보 어휘가 선별됐다. 여기에 남북은 검토 후 1차 협의로 28만 5천여 어휘를 선정, 여기에 새 어휘 10만 개를 포함해 약 30만여 개의 어휘를 올림말로 선정했다.

여기서 새 어휘는 남북이 각자 사용하는 △문예작품 등 간행물에 나타난 문헌어, △생활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현장어, △해외에서 사용하는 우리말 중 남북의 사전에 등재되지 못한 어휘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사전에 수록될 어휘가 방대하다는 점을 고려, 남북은 약 23만 개로 줄일 계획이다.

   
▲ 2009년 10월 개성에서 열린 제19차 공동편찬회의. [사진출처-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선정된 어휘는 뜻풀이 작업인 사전 집필로 이어진다. 사전 집필은 남북의 편찬위원들이 '6.15 공동선언' 정신을 토대로 정한 '집필요강'에 따라 이루어진다.

뜻풀이 집필은 전체 올림말을 자모별로 나눠, 남측은 'ㄱ,ㅁ,ㅇ,ㅈ,ㅊ', 북측은 'ㄴ,ㄷ,ㄹ,ㅂ,ㅅ,ㅋ,ㅌ,ㅍ,ㄲ~ㅉ'를 각각 담당한다. 하지만 뜻풀이에서 일관성과 체계성이 요구되는 항목 중 언어학 용어와 문법 형태, 붙임은 남측이, 의성.의태어와 갈래말은 북측이 전담한다.

각기 맡은 자음별 뜻풀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남북이 모든 단어를 집필하고 검토한다고 할 수 있다.

각자 맡은 어휘에 대한 뜻풀이 원고는 서로 나눠 검토작업에 들어간다. 각자 검토된 원고는 다시 교환해 재검토하고, 재검토된 원고를 갖고 남북의 편찬위원들이 직접 만나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남북은 이런 방식으로 1년에 7만 6천 개 올림말을 집필, 교차 검토하기로 했지만, 2007년부터 시작, 2009년까지 전체 35만 개 올림말 중 4만 개의 합의만 한 상태이다.

게다가 2010년 이후 편찬사업이 중단, 현재 남측은 2011년 말 까지 독자적으로 12만여 개 올림말에 대한 집필을 끝냈다. 현재, 66% 진행된 것으로 위원회 측은 평가한다.

전체 올림말을 정리하고 뜻풀이가 완료되면, 교정과 교열과정을 거쳐 2019년 사전으로 편찬될 예정이다.

남북은 집필 외에도 '겨레말 말뭉치'를 구축, 사전 전산화 작업을 통해 각종 검색, 통계 및 체계화를 위한 전산처리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 2008년 12월 평양에서 열린 제16차 공동편찬회의. [사진출처-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올림말과 여기에 대한 뜻풀이 과정만 보면 '겨레말큰사전' 편찬작업은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언어 규범이 없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한다.

남북은 자모 배열순,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 형태 표기, 된소리 표기, ㅣ모음 동화형태 표기, 문장부호, 문법 용어 등에서 합의했지만, 두음법칙 표기, 사이시옷 표기, 문법형태 목록, 인용례 출전과 작가 명기 여부 등은 문제로 남아있다.

여기서 두음법칙 적용 여부는 매우 첨예한데, 김정은 제1위원장의 부인을 '리설주'냐 '이설주'냐 표기하는 법이 다르다는 점, '여자'와 '녀자' 등 남북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 될 것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도 가능하다. 하지만 남북은 '겨레말큰사전'으로 남북 주민들의 언어생활에 전혀 구속력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고, 만약, 영향을 준다면, 양측이 모두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편찬위원회는 '형태표기위원회'를 두고 '겨레말큰사전'에만 적용될 언어 규범과 표기 형태들을 호혜적으로 합의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의 단초가 될까.

'겨레말큰사전'은 매우 어렵고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들인 사전 편찬 작업은 민족의 앞길에 큰 도움이 된다.

일제시대 조선어학회가 만든 '조선말큰사전'은 1929년부터 1942년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조선말큰사전'은 분단 이후 남북의 언어사용에 큰 뿌리로 작용했다.

그뿐만 아니다. 사전과 다르지만, 1977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 번역한 '공동성서번역'은 지금도 각 교파에서 사용하면서 종교 간 화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동성서번역'은 천주교에서는 성종완 신부, 개신교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함께 작업했다.

이런 역사적 사례는 '겨레말큰사전'이 가져올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에 매우 큰 발자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겨레말큰사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남북 당국이 '겨레말큰사전'에 수록된 어휘로 공문서를 작성하고, 민간 학술교류에서 활용한다면 대중에게 미칠 영향은 클 것이다.

또한, 남북의 각급 학교에서 '겨레말큰사전'을 활용한 수업이 이루어진다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 동질성 회복을 넘어 통일세대를 키워내는 훌륭한 교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2019년 세상의 빛을 볼 '겨레말큰사전'에 등재된 어휘로 기사를 작성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 '겨레말큰사전' 집필 예. 가운데 줄은 삭제표시이고 밑줄은 추가표시이다. (출처, 홍종선(2012.3) '겨레말 큰사전'의 성격과 과제') [자료정리-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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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엘에이 동포들 통합진보당 마녀재판 규탄 연대시위

뉴욕과 엘에이 동포들 통합진보당 마녀재판 규탄 연대시위
 
 
 
김동균 통신원 
기사입력: 2014/08/04 [09:12]  최종편집: ⓒ 자주민보
 
 
▲ 7월 31일 로스앤젤레스 동포들이 총영사관 앞에서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식 재판을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     © 자주민보
 
▲ 8월 1일 미주 동포들이 진행한 뉴욕 총영사관 앞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식 재판 규탄 시위     ©자주민보
 
▲ 8월 1일 미주 동포들이 진행한 뉴욕 총영사관 앞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식 재판 규탄 시위     © 자주민보


 

어제(, 8/1)와 그제(, 7/31)  12뉴욕과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앞에서 소위 '이석기의원 내란음모 사건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박근혜 정권의 시녀 검찰이 1심 재판 과정과 항소심 재판과정에서 조작왜곡거짓 증거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밝혀졌음에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20년을 구형한 만행을 규탄하는 동서부 재미동포들의 연대시위가 이틀에 걸쳐 개최 되었습니다. 

 

그제(, 7/31)  12시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 앞의 '진보의 벗' '엘에이시국회의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참가자들은 "이석기 무죄" "진보당 해산시도 즉각 중단하라" "진보당 사수 민주주의 수호" "이석기 석방하라" "Lee Seok-ki Not Guilty" "박근혜 퇴진" "내란음모조작이다 이석기의원 석방하라등의 주장이 적힌 피켓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한 시간 가량 시위를 펼쳤으며 총영사관 앞에서 지속적으로 '세월호 촛불'을 지키고 있던 분들도 참여하여 시위를 잘 마쳤다고 하였습니다. (*사진에는 다섯 분 밖에 보이지 않지만 참가자 수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제(, 8/1)  12시 뉴욕 총영사관 앞에서는, '내란음모 조작 박근혜 정권 및 정치검찰을 규탄하는 뉴욕동포들'이 시위를 개최하였으며 시위 참가자들은 "내란조작 중형구형 정치검찰 규탄한다" "내란조작 간첩조작 박근혜정권 규탄한다" "대선부정 덮기 위한 내란음모 조작이다" "내란음모조작이다 이석기의원 석방하라" "South Korea democracy under attack Down Down NIS" "South Korea democracy under attack Out Out Park Geun-hye" "South Korea democracy under attack Free Free Lee Seok-ki" "Down Down NIS Out Out Park Geun-hye" "Free Free Lee Seok-ki" "Park Geun-hye - Dictator! NIS - Manipulator!"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우리 재미동포 시위 참가자들은 8 11일에 있을 항소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정치검찰과 박근혜 정권의 외압에 휘둘리지 말고 정의와 진실에 기초한 판결을 해 줄 것을 요구하며 만악의 근원인 국정원 해체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해 국내의 시민사회진영과 해외 전 지역의 동포들과 연대하여 끝까지 싸워 나갈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집니다.

 

그리고 시위에 참가한 우리 동부와 서부의 동포들이 <내란음모 조작 박근혜 정권정치구형 시녀검찰 강력 규탄한다>는 연대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아래에 1. <LA와 NY 총영사관 앞에서의 시위사진 모음 URL>


 

2. <성명서 전문>을 붙이겠습니다. 

 

.............................................................................. 아래 ..................................................................................

 

1. <LA 와 NY 총영사관 앞 시위사지 모음 URL – Dropbox> 

https://www.dropbox.com/sh/alxdy654j8apeh4/AAAjxeSF04u8RNaGjtapmGoqa



2. <내란음모 조작사건 정치구형 박근혜 정권 규탄 재미동포 연대성명서 – 전문

 

내란음모 조작 박근혜 정권정치구형 시녀검찰 강력 규탄한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나 일어 났던 정치적 조작사건 재판이 21세기인 오늘에도 이렇게 버젓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지난 해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 한 시점인, 8월 말에 터진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접한 일부 국민들은 설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무리 국정원 이라도 '국가내란음모같은 사건을 조작해 내겠냐며 반신반의 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되고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 당원들에 대한 무차별적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이라는 국정원의 또 다른 조작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반신반의 하던 국민들마저 국정원의 정치공작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란음모 사건의 1심 재판에서부터 지난 월요일(7/28)의 항소심 결심공판까지의 과정에서 밝혀진 셀 수 없이 조작된 거짓왜곡 증거들을 보면서 박근혜 정권이 유신정권의 부활임을 깨닫게 되었다한 예로내란음모의 유일한 증거인 녹취록에서 잘못된 녹취로 밝혀져 재판과정에서 수정된 곳이 최초에 언론에 보도된 녹취록과 비교하여 천 여 곳에 이른다 한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들은 이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박근혜 정권의 위기 모면과  장기적으로 진보정당 및 진보진영을 말살하기 위해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올 해비극적인 세월호 대참사를 겪으면서 박근혜 정권이 위기 모면과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거짓과 왜곡과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 하게 되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반신반의하며 내란음모 사건과 거리 두기를 하였던 시민운동진영종교계학계법조계정치계도 이 사건의 조작을 확신하고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주장하기 시작 한 것이다국외적으로도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규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구속자 가족들의 직접 접견이 있었으며우리 재미동포들도 잘 아는 쿠씨니치 전 의원은 내란음모 2심 결심공판이 있던 당일(,7/28), 미국의 허핑턴포스트에 발표한 박근혜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이석기 의원이 내란죄의 혐의로 체포되고 구속된 사실" "반대 정당을 해산시키려는 귀하의 노력국정원을 귀하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한 사실"등의 표현을 써 가면서 박근혜 정권의 독재성을 직접 규탄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지난 독재정권 시대에 조봉암 진보당사건인혁당 사건김대중 내란음모사건부림사건납북어부 간첩사건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등 등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정치적 조작 사건들을 보아왔으며 정의롭고 전도유망한 청년학생들과 활동가들이 불법구금강제 투옥강제 징집의문사를 당하거나 간첩으로내란사범으로 조작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몇 십 년씩 감옥에 갇혔던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그래서 지난 해부터 국내에 앞서 국정원의 불법대선개입 문제를 제기하고 국정원과 박근혜 정권을 향해 싸워왔던 우리 재미동포들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이 국정원과 가짜대통령 박근혜가 과거의 독재정권과 똑 같은 행태로 위기 돌파를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으며 다시는 과거 독재시대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불법 대선개입 규탄과 동시에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강력 규탄하며 국정원 해체와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를 전개하여 왔던 것이다 

 

8 11일에 있을 항소심 판결을 열 흘 앞 둔 오늘우리 재미동포들은 항소심 재판부가 정치검찰과 박근혜 정권의 외압에 휘둘리지 말고 정의와 진실에 기초한 판결을 해 줄 것을 요구하며 만악의 근원인 국정원 해체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해 국내의 시민사회진영과 해외 전 지역의 동포들과 연대하여 끝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1. 내란조작 중형구형 정치검찰 규탄한다!

 

2. 내란음모조작이다 국정원을 해체하고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

 

3. 재판부는 이석기의원 및 구속자를 무죄 석방하라!

 

내란음모 조작 박근혜 정권 및 정치검찰을 규탄하는 재미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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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모르면 간첩, 마을 사람들이 바뀌었다

너 모르면 간첩, 마을 사람들이 바뀌었다

2014. 08. 01
조회수 8675 추천수 0
 
   봉하마을 황새 ‘봉순이’ <4>
 노인회장님 딸 이름이 봉순이라고 진짜 극진히
 북쪽서 온 근사한 남친 만나 아들-딸 낳았으면
 
<1> 그분의 환생처럼 홀로 그 멀리서 고고하게 왔다 http://ecotopia.hani.co.kr/205372
<2> 잠자리가 고압선 철탑 꼭대기라니! http://ecotopia.hani.co.kr/205487
<3> 낙원 같은 고향 떠나 혼자 온 까닭은 http://ecotopia.hani.co.kr/205655
 
 
021.jpg» 왜가리가 먹이 터에 다가오자 날개를 크게 펴고 위협하며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한국과 일본은 무슨 차이일까. 
 나는 알 거 같아. 말해볼까? 자동차를 운전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사람들은 하나같이 급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운전하는 거 같아. 나는 엉망이면서 상대방만 탓을 해. 나는 기초질서 하나 잘 안 지키면서 관료들에게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선반에서 가방을 꺼내거나 뒤에서부터 일어나 나오는 거, 바로 그 차이 아닐까? 
 
 조심하기는커녕 날아가는 걸 보려고 되레 차를 쌩 몰아
 
 또 있어. 봉순이 네가 저만큼 논에서 먹이를 먹거나 농로에 나와 있을 때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서행을 해야 하잖아. 하지만 새가 혼비백산 날아가는 걸 보려고 속도를 줄이지 않거나 오히려 속도를 올린다는 거야. 황새인지 두루미인지 왜가리인지 백로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애교로 넘길 수는 있어. 그러나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함부로 한다면 후진(?) 국민 소리밖에 더 듣겠니?
 
020.JPG» 자동차가 다가오면 잠시 피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황새는 자리를 지키는 집념이 대단하다.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는 곳 농수로에 흰뺨검둥오리 두 가족 약 20마리가 살고 있었어. 그런데 저녁시간에 근처 동남아 근로자 세 명이 느닷없이 돌멩이로 새끼 오리들을 공격한 거야. 며칠 전 배터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던 녀석들이었지. 너도 보았으니까 누군지 알 거야 아마. 오리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었고 그 다음날까지 어미가 새끼들을 눈물겹게 찾아다니고 있었어. 겨우 찾은 새끼는 두 마리뿐. 나는 우리와 이런 친구들의 의식 차이가 일본과 우리와의 차이쯤 된다고 생각해. 점수가 너무 짰나? 아무튼 그래.
 화포천에서 너를 관찰하고 있을 때였어. 거긴 물고기잡이 금지구역인데 동남아 근로자들이 낚시와 그물을 들고 나타났어. 내가 알아듣게 설명한 후 보냈는데 잠시 후 나이 지긋한 한국 사람이 낚싯대 하나를 들고 왔어. 내가 ‘이곳은 낚시 금지구역’이라고 말했더니 뭐 이 정도는 괜찮대나? 그래서 낚시를 하지 않기로 했으면 하지 말아야지 한국인이 그러면 동남아 근로자들도 우습게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점잖게 얘기했는데 알아듣는 눈치였어. 참 다행이지? 낚시를 하면 낚싯줄이나 낚시바늘이 유실될 테고 버려진 낚시바늘에 미끼를 물고기가 먹으면 새들은 물고기를 먹게 돼. 결국 그곳에서 사는 모든 생물들이 피해를 입잖아.
 
044.JPG» 왜가리와 비교되는 몸집. 그런데 사람들은 왜가리와 황새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지성이면 감천, 김해시청에서 인공 둥지 만들어주기로
 
 하여튼 봉순이 네 덕분에 요즘 마을 안팎으로 잔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단다. 첫째, 내가 땡볕에 하루 종일 앉아 너를 바라보는 바람에 우선 마을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어. 황새와 백로와 왜가리를 구분하게 되었고 황새가 어떤 새이며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먹고 살고 황새가 사는 곳은 사람 살기도 좋은 곳이라는 거 말이다. 그리하여 네가 자주 활동하는 들판 양쪽 두 개의 마을 사람들은 너를 모르면 마을 사람이 아니라고 할 만큼 너는 유명인사(?)가 되었어. 
 
045.JPG» 황새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 
 둘째, 너에게 인공 둥지와 습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정말로 지대한 변화가 온 거지. 자동차들도 너를 발견하면 서행하기 시작했고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너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어. 더 재미있는 일이 있어. 뭐냐면 퇴은마을 노인회장님의 시집간 딸 이름이 ‘류봉순’이라는 거야. 정말 묘한 인연이지? 특히 류봉순 오빠 되는 분이 류우상이라는 분인데 가족들과 함께 너를 우상처럼 돌보겠다고 약속했단다. 역시 내가 이름 하나는 잘 지었나봐. ^.^
 엊그제는 화포천습지생태관에서 도요오카에 다녀온 보고회 겸 특강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도 초대했어. 강의를 마치고 진지한 얘기들이 오가고 봉순이 네 얘기로 꽃을 피웠지. 그리고 빅뉴스! 김해시청 정책과에서 전화가 온 거야. 김맹곤 김해 시장님이 봉순이 인공 둥지를 빨리 지어주라고 했다는구나. 세상에 이런 경사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결국 진심이 통한 거 아니겠니?
 
097.JPG» 일본 도요오카 황새마을 인공 둥지에서 쉬고 있는 황새. 
 내 역할은 세 개 정도의 인공 둥지를 지어 주고 두 사람 정도 너를 전담하는 인력이 마련되는 데까지라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봉순이 남친도 생길 테고 잘하면 아이들도 생기고 화포천도 예산처럼 황새마을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런 후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지? 서운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영 떠나는 건 아니야. 너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동화로 쓰고 싶으니까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한 게 있어. 올 가을쯤 나는 도요오카로 날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그동안 일본어도 더 열심히 배워서 도요오카 황새마을에 가서 너의 종족들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거야. 적어도 한 일 년은 머물면서 보고 들어야 너희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서야.
 
 시청 황새공생과장 명퇴 뒤에 아예 황새마을 만들기 나서
 
 도요오카 황새마을에서 생산된 쌀은 가장 먼저 어린이 급식용으로 사용됐다고 해. 어린이가 먹는 쌀이니 당연히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하더라. 국제황새회의 때 ‘밥먹기운동본부회장’이라는 분이 소개되었어. 밥 먹기 운동본부라니 나는 장난인 줄 알았어. 그러나 정말 그런 모임이 있었고 그분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어.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딱 한 마디만 했어. “밥을 먹읍시다. 밥을 먹어야 황새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감동스러운 메시지가 어디 있겠니. 그렇구나. 너희들은 논습지에서 사는 족속이니 논이 없으면 너희들도 없으니까. 나도 이참에 ‘밥 먹기 운동’ 한 번 해볼까?
 지난해야. 한일논습지심포지움이 창원에서 열렸었는데 그때 도요오카 시장이 이런 말을 했어. “우리는 100년을 내다보고 황새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번 국제황새회의 때도 같은 말을 하더구나. “우리는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100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존경 받아 마땅한 사람이지? 
 
105.JPG» 일본에서 수집한 황새 자료.
106.JPG» 황새 복원 효과 그래프.
107.JPG» 야생으로 방사된 황새 가락지 표시. J0051 봉순이도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 도요오카에서는 시장까지 와서 습지와 황새복원에 대해 설명하고 람사르습지재단 이사장도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정작 시청 담당 과장 한 사람은 겨우 20분 앉았다가 일어나더군. 화장실 가나 싶었는데 아예 나타나지 않았어.
 도요오카 황새마을에 사다케 라는 전설적인 분이 있어. 시청 ‘황새공생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명퇴를 하고 아예 황새마을 만들기에 뛰어든 분이야. 대단한 철학을 가진 분인데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봉순이 너도 태어난 거야. 이분은 ‘지금의 생태환경이 나의 손자들이 살기에 적합한가?’를 진짜 고민했대. 내가 ‘봉순이를 열심히 지켜보겠다’고 했더니 뭐라는지 알아? ‘지켜보는 것만으로 안 된다. 변화시켜야 한다’는 거야.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지. 가슴이 뜨끔하고 전율이 느껴졌어. 이 사람들 생각이 이래. 
 독일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하던 황새들이 이동을 멈춘 적이 있었어. 원인을 알고 보니 스페인의 쓰레기장 때문이야. 황새들이 쓰레기장에서 먹고 잤던 거지. 나쁜 음식을 먹은 황새들은 큰 피해를 입었어. 환경은 이렇게 중요해.
 
 너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됐으니 너는 나의 멘토
 
 7월 25일에는 김해에 귀한 손님도 오셨단다. 바로 네가 태어난 도요오카에 사는 어린이들이 너를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아이들은 농로에 미리 준비한 미꾸라지를 풀어주기도 했고 나는 생물다양성과 환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어. 아이들은 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가 너의 친구들에게 네 소식도 전해줄 거야.   
 
048.JPG» 일본 도요오카 황새마을 아이들이 봉순이를 보러 와 농수로에 미꾸라지를 풀어주고 있다. 
 하여튼 내가 살아오는 동안 크고 작은 여행이 있었지만 이번 도요오카 여행이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여행이었단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라고 있어.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리차드 클레이드만’을 멘토로 삼고 네 개뿐인 손가락으로 죽어라 연습했대. 그 말을 들은 리차드 클레이드만은 ‘내가 왜 피아노를 쳤는지 이제야 할 거 같다’고 했다는구나. 
 나도 최근에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 뭐냐면, 지난 수십 년간 사진을 찍어오면서 갈등도 많았지만 봉순이 너를 만난 후에야 왜 내가 사진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깨닫게 된 거야. 사진을 찍으면서 지금처럼 보람있는 일이 없었거든. 그러니 너는 나의 멘토가 분명해.
 
022.JPG» 논에 미꾸라지를 풀어주는 장면. 미꾸라지들은 논에서 번식하여 넉넉한 먹이를 제공할 것이다.
 봉순이 너로 인해 나는 정말 많은 공부를 했어. 도요오카 행사를 마치고 습지연대 모임에서 화포천습지생태관 곽승국 관장의 ‘봉순이 일기‘가 다시 발표되었고 나한테도 말할 기회가 주어졌어. 나는 봉순이 네가 날아온 이유를 나름대로 말했어. 첫째, 노무현 대통령의 못다 이룬 꿈에 새삼 불을 지피러 왔을 것이다. 둘째,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봉순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이 더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넷째,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손자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일 것과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랬더니 긴 박수가 쏟아졌어.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곽승국 관장도 봉순이 네 얘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웠대.
 
 달밤 화포천 물 속 둥근 달은 바로 익숙한 그이 얼굴
 
 사람들이 그래. ‘스님은 세월호 침몰, 사대강, 밀양 고압선 철탑, 원자력 발전, 제주도 해군기지, 골프장, 설악산 케이블카 등등 사회적 이슈에 별 관심이 없나봐요’라고. 또 어떤 이는 ‘스님이 목탁 치고 염불이나 할 것이지’라고 해. 그러나 모르는 말씀이야. 내가 들판에 앉아있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목탁이고 염불이 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는 걸. 
 ‘달빛 길어 올리기’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 
 “왜 이 일을 하시죠?”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나도 사람들이 물으면 “아무도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라고 대답해.
 
104.JPG» 공룡의 후예라더니…. 봉순이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며 찍은 모습. 
 행사가 있었던 도요오카 시민회관 휴게실에 ‘파도만리’라는 글이 있었어. 오늘 내가 만드는 작은 물결이 훗날 커다란 파도가 되어 세상으로 퍼진다는 뜻일 거야.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 그 글을 보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봉순이 너는 역시 특별하고 대단한 아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 봉순이 너는 남쪽에서 왔으니 북쪽에서 온 근사한 남친과 사귀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유전적으로 건강한 2세를 보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길 기도할게. 
 달 밝은 밤, 너는 잠이 들고 나는 늦게까지 화포천에 앉아 있었어. 물속에 비친 둥근 달에 누군가 빙그레 웃는 모습이 겹쳐졌어. 아아, 바로 그건 그이의 얼굴이었어. 익숙하고 기분 좋은 시골 아저씨 같은 얼굴. 
 안녕 봉순아. 
 글·사진 도연 스님
 
도연 스님은 철원 지장산의 ‘도연암’에서 삽니다. 안락한 절집을 떠나 홀로 살며 새를 즐겨 찍습니다. 새는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자유로운 존재여서 좋아합니다. ‘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 ‘그래, 차는 마셨는가’, ‘중이 여자하고 걸어가거나 말거나’, ‘연탄 한 장으로 나는 행복하네’ 등의 책을 냈습니다. 누리집 ‘나는 산새처럼 살고 싶다’(http://www.hellonetizen.com/)에 가면 그의 글과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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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씨, 수천억대 재산의 ‘비밀’

등록 : 2014.08.01 19:34수정 : 2014.08.0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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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이야기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연합뉴스,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지난달 하늘에서 바라본 강서구 공항로 근처의 야경. 내발산동은 서울 부동산 개발 열풍의 마지막 장소였다. 김형식(44·왼쪽 사진)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 기소사건은 그저 단순한 야당 소속 시의원의 스캔들이 아니다. 서울 부동산 개발의 상징적인 지역에 위치한 ㅅ빌딩에서, 부동산으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와 그에게서 건물과 토지를 ‘소송을 통해 증여받아’ 갑자기 부동산 부자가 된 전직 운전기사 송아무개(67)씨, 부동산 관련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된 전도유망했던 보좌관 출신 야당 시의원의 삶이 마주친다. <한겨레> 토요판은 위 사진 오른쪽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처리한 송씨의 부동산 치부 역사를 두루 살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송씨는 범죄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수사 대상자다. 살아있었다면 뇌물공여죄 혐의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치부의 역사가 독자들이 이번 사건을 둘러싼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둘째, 엽기 추구나 검경의 수사 속보에서 벗어나 범죄의 ‘큰 그림’(whole picture)을 독자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부동산이라는 자석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범죄를 낳았는지 분석하고자 했다. <한겨레>의 ‘취재보도준칙’은 35조(희생자·피해자 배려)에서 ‘사건·사고의 피해자나 그 가족을 취재할 때에는 마음의 상처가 덧나거나 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다’고 규정한다. 그럼에도 송씨를 분석한 이유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살해된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사망 당시 67)씨는 오랜 소송 끝에 자신이 재산을 관리해주던 재일동포의 건물과 토지를 자기 명의로 소유권 이전 하는 데 성공했다. 내발산동 ㅅ빌딩과 바로 옆에 있는 ㅂ웨딩홀 둘 다 본래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의 소유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한 일간지 1997년 11월8일치는 강서구 내발산동 주변을 “택지난 서울 마지막 보고”라고 표현했다. ‘발산’은 강서구의 수명산이 밥주발(鉢·바리때 발)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는 데서 생긴 지명이다. 그릇에 물이 담기듯, 땅값 상승에 대한 기대와 욕망이 그리로 모였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내발산동 ㅅ빌딩 터는 1970년대까지 논이었으나 이미 1991년에 개별공시지가가 ㎡당 153만원에 달했다. 올해는 694만6000원이다. 그 땅에서 세 남자의 욕망이 만났다. 송씨의 치부와 살인사건은 토건자본주의의 초상이었다.

 

 

법으로 완벽히 재일동포 재산 획득한 뒤 1년만에 피살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은 변화의 땅이다. 그곳은 1966년 6월 농촌지도사가 일하다 숨진(<경향신문> 1966년 6월29일치) 경작지였고, 1976년 5월 서울시 직원 2200여명이 모내기를 돕던 논(<매일경제> 1976년 5월25일치)이었다. 김포국제공항 덕에 해마다 7만~8만명씩 인구가 늘던 ‘서울의 변두리 지역’이자 ‘신개발지역’(<동아일보> 1979년 1월9일)이 되었고, 고도제한이 완화된 1997년 부동산 투자가들에게 ‘택지난 서울 마지막 보고’(<경향신문> 1997년 11월8일)로 알려진, 급격하게 땅값이 오른 지역이다.

 

내발산동은 지역적으로 외곽이었고 계층적으로도 그러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산업개발이 영남에 몰렸고 가난한 전라도 사람들은 관악·강서·구로 등 강서지역에 많이 살았다. 서울대 이성우 교수는 2002년 ‘주거밀도로 측정한 출신지역별 주거수준 차이’ 논문에서 “‘1995년 이후 관악, 강서, 구로 등 강서지역에서는 호남 출신의 거주 비율이 높게 나타났고, 서초, 강남 지역에서는 영남 출신의 거주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재판기록과 취재결과로 보면 
송씨는 부동산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못지않은 법 기술자 
8건 넘는 민사소송 먼저 제기 
고소당해 형사소송도 경험 

 

일본에 10개 회사 가진 이씨 
한국서 땅 사고 호텔 지었으나 
재산관리인들에 계속 사기당해 
재당숙의 딸이 마지막 관리인 
송씨가 바로 그의 남편이었다

 

 

법기술자로 거듭나게 한 ‘1991년 소송’

 

그러나 2014년 7월15일의 내발산동 ㅅ빌딩 주변은 더이상 논도 아니고, 민원이 폭주하는 행정의 외곽지역도 아니다. 지하철 5호선 발산역 5번 출구 계단을 올라온 행인은 강서구청 입구 교차로 방향으로 난 왕복 8차로의 공항대로를 보게 된다. 출구로 나오면 바로 오른편에 커피 프랜차이즈 간판이 보인다. 널찍한 보도블록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지상 3층의 ㅅ빌딩을 발견할 수 있다. 2014년 3월3일 월요일 0시39분께 빌딩 주인 재력가 송아무개(67)씨가 전기충격기와 손도끼로 살해된 곳이다. 송씨를 살인교사했다는 혐의를 받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ㅎ아파트 자택은 ㅅ빌딩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김 의원이 성장기를 보낸 화곡동도 그리 멀지 않다.

 

송씨는 1947년 1월 전남 장성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이상의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향을 떠난 뒤 서울에서 버스기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송씨는 전남 출신으로 3살 어린 이아무개씨와 1971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부인 이씨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17살이 된 1966년 상경해 성동구와 금호동 등에서 살았다. 송씨 부부는 수유리나 도봉구 창동 등 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주로 살다 1998년 5월 초 강서구 내발산동 현재의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

 

여러 재판기록과 법원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송씨는 부동산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못지않은 법기술자다.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등 8건 이상의 민사소송에서 원고로 먼저 소송을 제기했다. 여러 건의 형사재판 경험도 있다. 한국의 법률·재판 용어는 일본식 한자어로 점철되어 있다. 법과 소송 절차를 익히는 일은 쉽지 않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전직 버스기사는 어떻게 부동산 소송의 달인이 되었을까. 처음부터 법기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운수업, 건축업 등으로 그럭저럭 살 만한 정도였는데 의리에 못 이겨 친척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큰 타격을 입어 생활형편이 매우 곤궁”(2006년 송씨 형사재판기록)했다. 이 때문에 송씨 부부는 잠시 법률상 이혼한 적도 있다.

 

1991년의 한 소송이 송씨를 법기술자로 거듭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는 지난 5~7월 송씨 건물 임차인 등 송씨와 민사소송을 주고받은 4명과 만나거나 통화했다. “송씨가 언제부터 소송과 법에 익숙해졌느냐”는 <한겨레>의 공통질문에 이들 4명 모두 ‘1991년 땅 소송’을 지목했다. 이 소송의 3심 판결문을 보면, 송씨의 처제 이아무개씨가 1992년 도봉구 창동에 소유한 자신의 땅과 관련해 토지 공유자 가운데 한명인 권아무개씨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을 냈고 서울민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은 1992년 1·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94년 12월 원고 승소 취지로 2심 판결을 파기해 돌려보냈다. 3심에서 승소한 덕분에 송씨의 처제는 등기부등본에 자신의 이름을 무사히 등재할 수 있었다.

 

‘1991년 땅 소송’은 이해관계자가 많고 사익을 위해 거짓말이 난무한 소송이었다. 땅을 차지하려는 가짜가 진짜 소유자와 소송을 주고받았다. 송씨의 부인 이씨는 1981년 1월 도봉구 창동에 여러 명의 소유권자가 지분 공유자로 복잡하게 이름을 올린 땅 1078㎡(약 326평)를 구입해 이듬해 여동생(송씨 처제)에게 양도했다. 문제는 등기부였다. 송씨의 부인이 구입한 토지는 여러 사람이 자기 땅이라고 쟁송을 벌이던 터였다. 소송 과정에서 거짓말도 오고 갔다. 해당 토지의 진짜 소유자의 조카가 서류를 위조해 자신이 땅의 상속자라고 했다가 들통났다. 송씨의 부인은 이처럼 ‘등기부상의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던 땅’의 일부를 구매하면서 구매 직후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지 않았다. 토지 공유자 가운데 한명의 지분을 산 것이라 등기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소요됐다. 등기부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채로 땅을 여동생에게 양도한 것이다.

 

땅을 구입한 1981년부터 재판이 확정된 1994년까지 13년간 지속된 이 부동산 분쟁에서 송씨가 부인과 처제를 도와 법무사를 만나며 소송 업무를 도운 것으로 알려진다. 송씨와 한때 가까웠으나 훗날 송씨를 고소한 ㅂ씨는 지난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송씨가 그 소송(도봉구 땅 소송) 하면서 문서나 법무사 관계 일을 잘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해박한 문서 지식 덕분인지 가난했던 송씨는 “1987년 무렵부터 경매 관련 사업 등으로 차츰차츰 재기”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수억원의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정도에까지”(2006년 형사재판 당시 송씨 주장) 이르렀다. <동아일보> 1995년 2월13일치 15면 부동산면을 보면, 강남구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115.5㎡(35평형) 크기 1채 매매가 시세가 1억8000만~2억3000만원이었다. 그는 1990년대 중반에 소박한 부자 또는 중산층 상류 정도의 자산가였던 것 같다.

 

 

송씨는 획득한 자산을 토대로 2012년 경매 매물로 나온 염창동 스포츠센터 건물(사진)과 토지를 낙찰받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재일동포 이씨가 질려버린 사기, 사기, 사기

 

송씨가 수억원대의 부자에서 수천억원대의 부동산 자산가가 되는 데 20년도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 등기부 등을 통해 확인한 송씨의 부동산 자산은 크게 ‘부인의 재일동포 친척에게서 증여받은 부동산’과 ‘이 재산을 토대로 추가로 늘린 부동산 2곳’으로 구분된다. 종로구 장사동 토지와 건물 2곳, 내발산동 건물과 토지 3곳, 화곡동 ㅇ관광호텔 건물과 토지, 염창동 스포츠센터 건물과 토지 등 서울시내 총 7곳의 토지와 건물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시내 중심지라 시세가 높다. 서울시 부동산종합정보 사이트의 개별공시지가(2014년 1월 기준)를 기준으로, 송씨의 부동산 자산은 건물을 빼고 토지만 계산해도 694억6400만원에 이른다. 이들 토지 위에 있는 3층 ㅅ빌딩, 5층 다세대주택, 2층 상가 건물, 4층 웨딩홀 건물, 15층 관광호텔, 3층 스포츠센터 건물 등을 포함하면 송씨의 자산은 부동산만 수천억원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급격한 재산증식은 부동산 소송을 통해 가능했다. 송씨 부인의 먼 친척이 송씨 부부에게 ‘증여한 것으로 인정받은’ 재산이, 송씨 치부의 출발이자 고갱이다. 법률상 증여는 ‘한쪽이 무상으로 재산을 상대방에게 수여하는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민법 554조)하는 행위다. 송씨 부인의 친척인 재일동포 이아무개씨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명의를 송씨로 바꿔주는 평범한 증여가 아니었다. 대신 송씨는 재일동포 이씨가 재산을 자신에게 넘겨준다는 취지의 ‘위임장’을 한국 법원에 제출했고, 2002년 5월부터 2013년 7월까지 11년에 걸쳐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등 8건의 민사재판과 사문서위조 혐의 재판 등 2건의 형사재판을 거쳐 겨우 증여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송씨가 살해된 내발산동의 3층짜리 ㅅ빌딩 토지와 건물의 역사는 송씨의 치부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재일동포의 삶과, 시골에서 태어나 강서구에서 갑자기 부자가 된 전직 운전기사의 인생이 그 공간에서 얽힌다. 재일동포 이씨는 1917년 3월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많이 일했고, 자수성가했다. 일본에서 10개의 회사를 소유했다. 죽어서 한국에 묻히고 싶어했다. 한국에서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67년 2월 ‘ㅅ산업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내발산동 ㅅ빌딩 토지, 또다른 내발산동 토지 3곳, 종로구 장사동 토지 등 훗날 송씨 소유가 되는 땅들을 모두 같은 해 3~10월에 샀다. 장사동 토지에 6층짜리 ㅅ호텔을 일본에서 만나 알게 된 한국인 사업가 친구와 함께 지어 지분을 나눠 가졌다. 1987년에는 부인, 아들을 이사에, 딸을 감사에 앉혔다. 회사 지분도 가족 4명이 나눠 가졌다. 가족기업이었다. 재일동포 이씨는 한국말이 유창했지만 부인의 한국어 말하기는 듣기보다 어눌했다. 아들과 딸의 사실상 모국어는 일본어였다. 한국말을 조금 알아들었고, 거의 말하지 못했다.

 

자수성가한 부자의 땅에 탐욕이 모였다. 1967년 임명된 재산관리인이 재일동포 이씨의 토지를 계속 관리했다. 사기범이 1993년 ㅅ산업 주식회사 사원총회 의사록을 위조해 대표이사에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재일동포 이씨는 사기범을 고소하고 사원총회결의 부존재확인 청구 소송 등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일간지에도 보도됐다. 재일동포 이씨가 승소했고 사기범은 1995년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번엔 17년간 토지를 관리하던 재산관리인이 1995년 ㅅ산업 명의로 20억원 액면의 약속어음을 위조했다. 재일동포 이씨는 18년간 한국의 토지를 맡겼던 재산관리인을 해임하고 새로운 재산관리인을 임명했다. 두번째 재산관리인은 재일동포 이씨에게 허락받거나 보고하지 않고 토지 일부를 무단으로 임대해줬다. 두번째 재산관리인도 해임됐다. 재일동포 이씨는 1995년 11월 자신의 7촌 당숙의 딸을 세번째 재산관리인으로 고용했다. 1967년 이후 한국에 올 때 가끔 보던 관계였다. 7촌 당숙의 딸의 남편이 송씨였다. 이와 함께 재일동포 이씨는 자신과 아내는 이사로, 딸을 ㅅ산업 대표이사로 등기했다. 송씨는 세입자로부터 수금하는 잔무 등 재일동포 이씨의 토지관리를 거들었다.

 

 

‘문서위조’ 고소당해 징역 8년을 선고받다

 

송씨는 재일동포 이씨의 내발산동 토지에 지어진 골프연습장을 실제로 운영했고 ‘ㅅ산업 대표이사’라는 명함을(2006년 송씨 형사재판 기록) 뿌리고 다녔다. 재일동포 이씨는 1996년 10월엔 25살 된 송씨 부부의 딸을 감사에 추가 등재했다. 1997년 내발산동 토지에 빌딩을 짓고 또다른 내발산동 토지 3곳에 각각 4층 예식장 건물, 5층 연립주택, 3층 상가 등 건물 짓기 실무도 도왔다. 이들 자산은 공시지가 기준으로 300억원에 이르렀다.

 

그러다 돌연 송씨 부부는 자신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건물 6곳을 자신들이 샀으니 소유자 이름을 “재일동포 이씨에서 자신들의 명의로 바꾸라”며 ㅅ산업 대표이사인 재일동포 이씨의 딸을 상대로 2002년 5월9일 서울남부지법에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송씨 부부는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계약금과 중도금 12억원을 받았다는 1998년 3월7일 영수증’ ‘잔금 8억원을 받았다는 1999년 3월7일 영수증’ 등 3개의 문건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재판부는 피고 재일동포 이씨의 ‘무변론’을 이유로 석달 만인 8월16일 송씨 부부에게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법률상 소송의 주체인 ㅅ산업의 법인등기부상 소재지인 내발산동 사무실로 소장을 송달했다. 법인등기부에 대표이사였던 재일동포 이씨의 딸의 오사카 거주지 주소가 명시돼 있었지만, 법률상 재판문서 송달 장소는 엄연히 법인의 사무실이었다. 석달 만에, 2심과 3심으로 이어지는 법정 다툼 없이 송씨는 갑자기 ㅅ산업 소유 부동산을 전부 소유한 부동산 부자가 됐다. 내발산동의 부동산 시세는 좋았다. ㅅ빌딩 터의 개별공시지가는 ㎡당 1991년 153만원에서 2002년 당시 241만원으로 올랐다.

 

그러나 이는 11년간 지속될 부동산 소송 전쟁의 시작이었다. ㅅ산업 소유 토지에서 영업하던 예식장 사업자 등이 송씨 부부를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2004년 3월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이들은 “매매계약서와 영수증은 전부 위조되었고 송씨의 조작으로 소장이 재일동포 이씨의 딸에게 송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에서 재일동포 이씨의 딸이 변론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송씨는 재산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재일동포 이씨가 아니라 송씨에게 임대료를 낼 수 없다”며 송씨를 2004년 3월 고소하고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도 냈다.

 

검찰은 2년에 걸친 수사 끝에 송씨가 문서를 위조했다고 결론 내고 2006년 2월 송씨 부부를 불구속기소했다. 송씨 부부에 대한 총 5개의 고소 사건이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에서 병합돼 재판이 진행됐다. 사문서 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등 모두 6개 혐의를 다퉜다. 송씨의 뇌물장부인 ‘매일기록부’에 정아무개 부장검사에게 돈을 줬다고 기록한 시점이 송씨가 한창 검찰 수사를 받고 형사재판을 받던 2005~2011년 무렵이다. 검찰은 송씨가 “명의신탁 받았다”고 진술했다 번복하는 등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여러 건의 문서위조 의혹 가운데 송씨가 재산을 매입했거나 증여받았다는 증거로 검찰과 법원에 낸 5건의 문서가 핵심 쟁점이 됐다.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및 영수증, 1999년 3월7일 영수증 △1998년 3월7일 위임장 △1996년 9월12일 위임장 △1996년 5월25일 위임장 △1996년 11월25일 각서 등이다. 송씨는 “고소인들이 송씨를 몰아내고 이 부동산을 가로채려고 소송을 낸 것”이라고 고소와 소송의 동기가 ‘불순’하다고 항변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김용상)는 2009년 11월 4가지 핵심 쟁점 문서들을 전부 송씨가 위조했으며 재일동포 이씨와 그의 딸이 한국의 부동산 자산을 자신들에게 증여했다는 송씨 부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송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고 부인 이씨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씨는 ‘1998년 3월7일 매매계약서 및 영수증’을 근거로 재일동포 이씨의 딸이 공시지가로 300억원대의 부동산을 자신들에게 20억원에 팔았다고 주장했다. 또 재일동포 이씨가 매매 이후 소유권이전등기 절차를 자신에게 위임했다며 1998년 3월7일 위임장도 근거로 제시했다. 1심 재판부는 이 문서 모두가 송씨의 위조라 판단했다. 송씨가 제출한 1998년 3월7일 위임장에 오타가 있고 고령의 재일동포가 쓰기 어려운 현대어가 사용된 점 등을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한겨레>가 입수한 1998년 3월7일 위임장에는 ‘회사’ 대신 ‘화시’라는 오타가 발견되며, 위임장 말미에 ‘일본주소. 대판시 생야구 도곧동 4-9-13…과전주주 권리행사자’라고 한글타자기로 적혀 있었다. 일본에는 ‘초’(町)라는 주소 단위는 있으나 ‘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전주주’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점주주’(발행주식의 과반수를 소유하고 기업경영을 지배하는 주주)의 오기로 추정된다.

 

 

송씨는 자신이 관리하던 재산을 
자신 명의로 바꾸는 데 성공했으나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소당했는데 
검사에게 준 뇌물이 기록된 시점이 
바로 한창 형사재판 받을 때였다 

 

중요 재판 앞두고 정치인에게 
전화할 정도로 담대했던 송씨 
무수한 범죄로 얼룩져 있던 
위험한 부동산 부자가 내민 손을 
김형식 시의원은 잡고 말았다

 

 

재일동포 이씨 “송씨와는 일면식도 없다”

 

1심 재판부는 ‘1996년 9월12일 위임장’, ‘1996년 5월25일 위임장’, ‘1996년 11월25일 각서’ 등도 전부 송씨가 위조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송씨가 제출한 문서와 다른 문서들 사이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가령 송씨가 제출한 ‘1996년 11월25일 각서’에는 ‘ㅅ산업 부동산의 임대행위 및 일체의 처분행위에 대해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는 송씨가 낸 ‘1996년 9월12일 위임장’이 증여를 언급한 것과 모순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1심 재판부는 ‘행동의 모순’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송씨가 정말 증여받았다면 2004년 3월 고소당한 뒤 검찰 수사를 받던 시점에 아직 살아있던 재일동포 이씨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일동포 이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04년 10월 숨졌다.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씨 관련 의혹 흐름도
무엇보다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동포 이씨와 딸의 진술이 국제형사사법공조로 확보돼 검찰 기소와 1심 판결에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됐다. <한겨레>가 입수한 ‘오사카 경찰의 형사사법공조 요청에 대한 회신’을 보면, 재일동포 이씨는 송씨의 부인은 알지만 송씨는 “일면식도 없다”며 “자신은 집안 사람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부동산 물건을 팔지 않고 증여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답했다. 재일동포 이씨의 딸도 한국 검찰이 보낸 매매계약서 및 위임장을 본 뒤 “자신이 아버지의 도장 등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다”며 “(송씨 위임장에서) 확인한 도장은 아버지의 도장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재일동포 이씨의 딸은 “매매계약서, 영수증, 위임장을 확인했으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서면뿐이며 아버지나 내가 작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필적감정을 통해 재일동포 이씨의 자필 서명이 다른 점 △인감도장 비교 등의 과학적 근거도 제시했다. 송씨는 1심 판결로 징역살이는 물론 갑자기 손에 넣은 거액의 부동산 자산을 잃어버릴 위기에 몰렸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10년 6월25일 1심 판결의 핵심을 전부 뒤집었다. 2심 재판부는 여러 사람이 2002년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의 ㅅ산업 부동산 명의가 송씨 부부로 이전된 사실을 알렸는데도 재일동포 이씨 등은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점 등을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재일동포 이씨와 딸은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이후에도 민사소송법상 보장된 재심을 청구하거나 송씨 부부를 고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재일동포 이씨의 지인들 의견을 종합하면, 재일동포 이씨는 한국 사법부에 대한 깊은 불신과 내발산동 토지 때문에 송씨 재판 전에 겪었던 수많은 법적 분쟁에 지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믿었던 재산관리인이 함부로 행동하고 사기꾼이 접근하는 일에 지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민법의 격언이 있다. 2심 재판부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2심을 맡은 강형주 인천지법원장은 <한겨레>의 질의에 지난 25일 공보판사를 통해 “과거 재판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판결문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답했다. 오래 판사로 재직했던 이홍철 변호사가 당시 법무법인 지평 소속으로 송씨의 여러 민형사 재판에서 송씨를 대리하고 변호했다. 현재 법무법인 세종 소속인 이 변호사 사무실에 접촉했으나 “휴가”라는 답을 들었으며,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2심 재판부가 1심의 판단 중에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세금을 탈루할 목적으로 부동산 매매 이행각서를 위조했다는 혐의였다. 핵심 쟁점인 소유권 다툼과 무관한 혐의였다. 복잡한 파기환송심 끝에 송씨에 대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이 확정된 것은 지난해 7월이었다. 김 의원이 송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심 재판~3심 재판 사이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송씨는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정치인에게 전화를 할 정도로 담대했다. 2010년~2014년 6월 8대 서울시의회에서 활동했던 ㄱ아무개 전 서울시의원은 지난 6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송씨에 대해 “2010년 6·2 지방선거로 시의원에 당선된 직후 송씨가 제 의원 사무실에 전화해서 ‘내 사무실에 들르라’고 전화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 전부 ‘가지 말라’고 말해서 가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서구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들은 일부러 피했던 형사재판 피고인이자 “2000년도 이후 범죄 전력만으로도 업무방해, 명예훼손, 폭행, 상해, 모욕 등으로 여러 차례 벌금형 전과가 있었”(송씨의 형사재판 항소심 판결문)던 위험한 부동산 부자가 내민 손을, 김 의원은 잡았다.

 

송씨가 연루된 재판 결과를 모두 모아보면, 한국의 사법부는 ‘재일동포 이씨가 ㅅ산업 부동산을 20억원에 송씨에게 팔았다’(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는 주장, ‘재일동포 이씨가 부동산을 증여했다’(1996년 9월12일 위임장)는 주장, ‘재일동포 이씨가 부동산 처분의 전권을 위임했다’(1996년 11월25일 각서)는 주장 등 서로 다른 세가지 주장을 전부 사실로 인정한 셈이다. 원소유주가 사법공조를 통해 “증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법원이 “증여 의사가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2014년 7월 송씨는 강서구 유지 모두가 알지만 지금 누구도 언급하려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매일기록부’는 송씨를 만났던 지역 정·관계 유지들을 수사 대상에 올려놨다. 공적 인정에 대한 욕망은 있었던 것 같다. 송씨는 2009년 지역축제인 우장산 신록축제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재단법인 강서구장학회의 이사였다. 우장산동을 지역구로 둔 강서구의회 신창욱 구의원은 <한겨레> 기자와의 통화에서 “송씨와 어떤 자리에서 처음 만났느냐”는 질문에 “과거 공식 석상에서 봤지만 최근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송씨를 처음 안 게 “20년도 더 됐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씨에 대한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지난 7월3일 검찰로 송치되기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검찰이 송씨의 ‘매일기록부’에 나온 비리 정황을 수사할지도 관심사다. 뉴시스
네 자녀 주소지 모두 방문했으나 접촉 실패

 

송씨는 동향하고만 어울린 것 같다. 2010년~2014년 6월 6대 강서구의회 때 활동했던 ㄱ아무개 구의원은 지난 9일 <한겨레> 기자와의 통화에서 “송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지만 얼굴도 모른다”며 “그러나 저는 출신이 영남이고 그분은 호남이다. 그분(송씨)은 같은 지역 출신들만 상대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지역)사람은 못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자신의 건물 임차인에게 사소한 이유로 임대차보증금 7억원을 지급하지 않아 소송을 진행한 ‘독한’ 인물이기도 했다. 2009년 우장산 신록축제 당시 찍힌 사진 속의 송씨는 67살 나이가 믿기지 않게 어깨가 다부져 보였다. 눈두덩이 두툼하고 다문 입술이 단단한 느낌을 줬다. 평소 근력운동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과묵한 편”이며 “허튼 이야기는 안 하는 사람”이라는 한 법무사의 법정 증언(2006년 송씨 형사재판)과 사진의 이미지가 비슷했다.

 

송씨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산다. 송씨의 2남2녀 중 장남(41)은 재벌계열사 연구소에 다니다 퇴직하고 송씨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43)는 현직 세무서 직원으로 알려졌다. <한겨레>는 등기부등본에 나온 송씨의 네 자녀 주소지에 모두 찾아가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거나 출입을 통제당해 접촉하지 못했다. 송씨가 소유한 예식장에서는 취재를 거부당했다.

 

시골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 버스기사로 일하다, 법기술자들과 어울리면서 소송과 재판을 몸으로 배운 뒤 악착같은 소송을 통해 결국 수만㎡의 땅과 건물을 가진 부동산 부자가 됐다가 부동산 투기의 상징적 지역에서 숨진 남자가, 지금 어느 땅에 묻혔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무덤 부지가 몇㎡인지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건: 송아무개씨의 서울남부지법 02가합5478 소유권이전등기 소송 판결문, 서울중앙지법 2007나24741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 판결문, 2006고합145 형사재판 판결문, 2013고합39 판결문, 서울고법 2009노3265 판결문, 2013노2437 판결문, 송씨 처제의 93다1596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소송 판결문, 2006년 서울중앙지검 송씨 부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2005년 주일대사관 형사사법공조 요청에 대한 회신, 2006고합145 형사재판 공판조서, 당시 송씨 변론요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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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로켓발사장 증축, 북미대결전의 중심

북한의 로켓발사장 증축, 북미대결전의 중심
 
<분석과전망>유인우주선 발사를 위한 것인가? ICBM 발사를 위한 것인가?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4/08/02 [17: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미국의 북한전문 웹사이트 <38노스>가 지난 7월 29일 북한의 동창리 서해 발사장 로켓 지지대가 기존 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는 보도를 했을 때 일반 전문가들은 물론 한반도정세전문가들 역시도 깜짝 놀라야했다. 

일반전문가들은 곧바로 ‘은하9호’를 떠올렸다. 기존 로켓지지대는 30m이다. 2012년 4월과 12월에 각각 광명성3호 1호기와 광명성3호 2호기를 쏘아올렸던 은하3호를 장착했던 지지대였다. 은하3호의 크기가 30m인 셈이다. 

그러나 <38노스>보도에 따르면 증축된 지지대는 위로 3개 층이나 더 높아져 있었다. 총 50~55m였다. 7월 초 촬영한 위성사진들을 분석해 낸 결과라고 했다. 이는 증축된 로켓지지대에 장착될 로켓이 은하3호 보다 훨씬 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에 은하 3호보다 큰 로켓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전문가들이 상기한 것이 은하 9호였다. 은하 9호. 광명성 3호 2호기를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 은하 3호에 대해서야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에 비하면 은하9호는 생소하다. 물론 일반인 입장에서다. 전문가들이야 특별히 접했고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은하 9호이다. 

“운반로케트 ‘은하-9’ 모형을 가리키시며 자세히 보았는가고 물으시였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2년 12월 광명성3호 2호기 궤도진입 성공 뒤 열린 발사 자축 연회에 참석하여 한 말이다. 2012년 12월 21일자 <노동신문>가 보도한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그 연회에는 은하3호 그리고 그보다 큰 은하9호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은하 9호는 우리나라에 그렇게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전문가들이 아니어도 은하3호의 후속모델일 것 정도는 쉽게 짐작이 되었다. 9호라는 수치에서 확인되듯이 은하계열에서는 최고 발전된 로켓일 것이라는 추정도 누구나 했다. 은하 9호의 실체와 관련된 궁금증은 날로 커져 갔다. 그 즈음에 은하 9호와 관련될 법한 뉴스가 주목을 끌었던 것은 당연했다. 

북한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우주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라는 것에 우선, 전문가들은 남다른 주목을 돌렸다. 전문가들이 기억을 되돌려 재일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기사를 찾아내 주목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012년 4월 은하3호에 광명성3호를 장착해 쏘아올린 현장을 취재한 뒤 북한 관계자와 인터뷰를 한 기사였다. 가까운 앞날에 정지위성을 발사하게 될 것이지만 “전망적으로는 유인우주비행선까지 쏘아올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대목에서 전문가들은 은하9호를 인공위성의 최고 발전 형태인 유인우주선과 등치시킬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았다. 은하 9호는 유인우주선. 물론 조심스러운 태세로였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서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추론이 맞을 수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2013년 2월 초였다.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은하 9호를 타고’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동영상은 북한 남성이 장거리 로켓 ‘은하 9호’로 쏘아 올린 유인우주선 ‘광명성 21호’를 타고 우주여행을 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은하 9호의 실체는 그렇게 확인되었다. 물론 확정 수준은 아니었다. 여전히 추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라기 보다는 극히 대중적인 방식을 빌려서 암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우주개발계획이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는 사실만은 명쾌하게 확인되었다. 

북한이 2013년 연초에 “단숨에 ‘은하 9호’까지!”라는 구호를 제기했던 것에서 전문가들이 확인하게 되는 것도 그것이었다. 

그러한 특별한 기억이 아니었다면 전문가들은 <38노스>의 서해 발사장 증축보도를 은하 9호와 연계시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북한의 동창리 서해 발사장 로켓 지지대가 기존 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는 <38노스> 보도와 관련하여 일반전문가들은 은하 9호를 떠올렸지만 그러나 정세분석가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정세분석가들은 <38노스>의 서해발사장 증축보도를 은하 9호와 연계시키면서도 동시에 올 들어 유난히 강화되고 있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시험 훈련과도 밀접히 결부시켜서 바라보았다. 그럴 것이 <38노스>의 보도에는 로켓지지대를 높힌 것 그리고 도로를 확장한 것 말고도 특별히 주목을 끌만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KN-08’으로 추정되는 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시험 등이 감지됐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정보였다. 

7월 30일에 북한은 발사체 4발을 평안도 묘향산 일대에서 동쪽 방향으로 발사했다. 발사체사거리가 제각각이라고 하는 것이 유독 주목을 끌었다. 특히 발사지점이 해안지역이 아니라 내륙지점이라고 하는 것은 더 강조되었다. 아울러, 항상 그러하기는 했지만 항행경보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다. 

오발사고나 오착사고에 대한 염려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자신감이 읽히는 대목이라고 전문가들은 다들 입을 모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한 것은 북한이 올해 들어 왜 로켓발사훈련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날 발사체 발사는 올해 들어 무려 16번째였다. 이때까지 발사한 총 수 만 해도 100발이 넘는다. 정확히는 7월 30일 현재 102발이다. 우리군당국은 발사체의 종류와 관련하여 방사포와 스커드 및 노동 미사일, 프로그 로켓 등일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고 있다. 이중에서 탄도미사일 발사는 7번 시험발사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로켓발사시험을 두고 흔히 있는 일반적인 군사훈련이라고만 볼 수 없게 하는 특징들이다. 

결국 정세전문가들은 <38노스>의 서해 발사장 증축보도를 북한의 연속적인 로켓발사시험훈련은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한다고 했다. 


유인우주선 개발사업과 ICBM 개발사업. 동창리 서해발사장 증축공사를 두고 내놓고 있는 일반전문가들과 정세분석가들의 입장은 이처럼 서로 약간씩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그럴 뿐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 북한의 미사일로켓 능력을 높이는 활동이 적극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해발사장 증축공사에서 확인되는 북한의 로켓 능력의 강화는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면과 군사적인 면 두 가지 측면을 다 포괄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인공위성 그리고 일반전문가들이 추정하는 유인우주선 발사를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 된다. 그렇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38노스>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ICBM 능력을 높이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결국 북한의 서해 발사장 증축공사는 어떻게 접근하든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사안으로 된다. 북미대결전의 중심으로 진입해보면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북미대결전의 양상을 응축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 서해 발사장 증축 공사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북한이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민간정보기관에 의해서 흘러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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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인터뷰 사절'...단식 20일, 유가족이 위험하다

[현장] 시민 300명, 광화문서 음악회...유족들 "쓰러지면 손 잡아주세요"

14.08.02 21:56l최종 업데이트 14.08.03 11:09l

 

 

[기사보강 : 3일 오전 11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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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는 2일 오후 7시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열고 수사권 등이 보장된 특별법을 제정을 촉구했다.
ⓒ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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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일 오후 서울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 앉아 있는 김영오씨(47, 고 김유민 학생 아버지)는 말할 힘도 없어보였다. '괜찮으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씨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족들이 단식을 시작한지 20일째.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는 가운데, 유족들의 소리없는 절규는 계속되고 있다. 애초 15명을 넘던 유족 단식농성단은 유경근씨(고 유예은 학생 아버지)와 김씨 단 두 명만이 남았다.

이날 오후 6시30분께 광화문 유가족 단식장 천막 밖으로는 '면회·인터뷰 사절'이라는 종이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계속된 단식으로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국회를 오가며 세월호 유족들의 건강을 체크하는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측 관계자는 "혈압과 심박수가 너무 낮아 말하는 게 어려울 정도"라며 "국회에 있는 유경근씨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은 김씨를 지켜보던 김영현(45, 서울 은평구 불광동)씨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족들을 응원하고 싶어 자녀들과 함께 농성장을 찾았다는 김씨는 "진상규명도 안 된 상황에서 저렇게 단식을 계속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선거에서 야당이 지면서 새누리당이 자꾸 보상 얘기를 꺼내는데, 유족분들께서 힘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농성장 안에 있던 김영오씨는 7시께 힘겹게 몸을 일으켜 농성장 뒤에 있는 세종대왕상 쪽으로 걸어갔다.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가수 강허달림, 평화의 나무 합창단, 정희성 시인 등이 함께 한 이날 음악회에는 유가족 10여명을 비롯해 시민 3000여명(대책회의 집계)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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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는 2일 오후 7시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열고 수사권 등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 세월호참사 가족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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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 경주야... 네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엄마는 울지 않을게"

"사랑하는 우리 딸 애물단지 경주에게. (…중략)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행복이자 희망이었던, 우리에게 첫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던 네가 지금은 엄마 곁에 없구나. 이것이 정녕 현실이라면 나는 거부한다. 아니 의미를 잃은 것이다. …경주야, 엄마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들고 아프지 않을 거야. 엄마가 반드시 경주 눈물을 닦아줄게."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에 다니던 딸 김경주 양을 잃은 유병화 씨가 단상에 올라 딸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유씨는 "(세월호 사고 후) 109일째 광화문에서 보내는 것이 제게는 아주 특별한 휴가가 돼가고 있다"며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휴가를 가셨다고요, 아마 특별법 제정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려고 가신 것 같은데, 기다리겠습니다"라고 꼬집었다.

편지 낭독을 끝낸 유씨가 청중들을 향해 "저희가 쓰러지거나 지쳐 넘어져도 손 잡아주실 수 있으시죠"라 묻자 앉아 있던 시민들이 "네"라며 박수로 화답했다. 이어 단상에 오른 김병권 유가족 대책위원장(고 김빛나라 아버지)도 "시민분들의 따뜻한 연대가 유족들에게 너무나 힘이 된다"며 "더 나은 세상, 안전한 사회를 위한 진상규명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말했다. 

이 날 광화문 광장에는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도 찾아와 유족들을 응원했다. 이 교육감은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기소권과 수사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은 정부와 사회의 의무"라며 "(새누리당이) 보상을 해주겠다고 자꾸 얘기하는데, 진상을 규명해야 보상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니냐"며 진상 규명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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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족들이 단식을 시작한지 20일째. 특별법 제정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유족들의 소리없는 절규는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 앉아 있는 김영오씨(47, 고 김유민 학생 아버지)는 말할 힘도 없어보였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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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회'가 열린 가운데 이재정 경기도교육감(맨 왼쪽)과 20일째 단식중인 김영오씨(가운데,고 김유민 학생 아버지) 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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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어씨는 지난 31일 <미디어오늘>을 통해 밝힌 단식 일기에서 "일부 주장처럼 정말 우리는 유가족충인가, 광화문에서 언제 쓰러질지 몰라 저도 두렵다"고 썼다. 그는 또 "그래도 우리 유민이와, 공포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다 죽었을 아이들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왜 억울하게 생매장 당했는지 밝혀내려면 나라도 광화문을 지켜야죠"라고 밝혔다. 

한편 이 날 음악회를 주최한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측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함께 하는 '아주 특별한 휴가'를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다(태풍 예보로 3일은 광화문 농성장 잠시 철수). 자세한 일정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는 9일과 15일에는 문화제와 범국민대회가 각각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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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 대책위는 2일 오후 7시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음악회'를 열고 수사권 등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 세월호참사가족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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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루텐'에 대한 흔한 오해 3가지

'글루텐'에 대한 흔한 오해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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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UTEN

 

글루텐(gluten): 보리, 밀 등의 곡류에 존재하는 불용성 단백질

더 쉽게 말하자면, 밀가루 특유의 쫄깃하고 찰진 식감을 만들어주는 성분이다. 쫄깃한 면과 빵을 탄생시키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글루텐을 '만병의 근원'처럼 인식하고 있다. 소화장애, 비만, 피부 트러블 등 각종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되도록 글루텐을 섭취하지 않는 게 건강과 아름다움에 좋다는 것이다.

'글루텐 프리' 제품, '글루텐 프리데이', '글루텐 프리' 다이어트 등등, 가히 '글루텐 프리 열풍'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글루텐에 대해 반박도 만만치 않다.

 

1. 글루텐 때문에 배가 아프다?

사람들이 글루텐을 꺼리는 대표적인 이유는 셀리악병과 같은 '소화장애'를 유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권에서는 발병사례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글루텐보다는 탄수화물 과다 섭취가 문제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셀리악병 등 글루텐이 문제돼 발병한 사례가 전혀 없는 국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글루텐 기피현상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다소 의아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종수 분당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셀리악병은 국내에서 거의 진단사례가 없다”며 “미국이면 몰라도 국내에서 글루텐 섭취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정밀 혈액검사 후 소장까지 관찰할 수 있는 위내시경으로 조직검사를 해도 확진이 어려운 것이 셀리악병”이라며 “글루텐보다 탄수화물 중독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성은 한림대성심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평소 밀가루 음식 섭취에 문제가 없다면 글루텐 섭취를 피할 필요가 없다”며 “소화장애 때문에 병원을 찾은 이들 대부분은 탄수화물, 당류 섭취가 문제가 된 사람이 많다”고 했다.(한국일보 7월 28일)

 
 

하지만 정작 글루텐으로 생긴다는 장내 염증은 동양권인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선 발병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 신진영 가정의학과 교수/삼성서울병원 ▶ 
"셀리악병(장내 염증) 예측해서 글루텐 프리 식품을 드시는 것보다 탄수화물을 적게 복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개개인 체질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밀가루를 기피하기 보다는 균형 있는 식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MBC 7월 17일)

글루텐 질환으로 알려진 병들이 실제로 글루텐과 관계없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최근 셀리악병 환자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결과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글루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식품 속 다른 단백질이나 심지어 탄수화물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 2010년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글루텐 민감성으로 알고 있는 사람 32명을 대상으로 글루텐 프리 식이요법을 실시한 결과 불과 12명만이 증상이 개선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60%는 글루텐 민감성이 아니고 따라서 효과도 없는 식이요법을 한 셈이다.(동아사이언스 7월 7일)

 
 

하지만, 글루텐 민감 체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빵을 먹으면 더부룩한 느낌이 든다는 사람들도 많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밀가루 속 글루텐이 문제가 아니라 빵을 제조하면서 넣는 수십가지 첨가물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오늘날 빵을 먹고 탈이 난 많은 사람들이 글루텐을 원망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글루텐이 아니라 제대로 만들지 않은 빵을 먹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수십 가지 첨가물을 잔뜩 집어넣어 속성을 대량생산한 빵을 먹으면서 깊은 풍미를 잃고 대신 글루텐민감성을 얻게 된 건 아닐까.

다음은 20세기 초 ‘사기 억제를 위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Suppression of Fraud)’가 소집한 전문가 집단이 제시한 빵의 법적 정의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빵은 빵이 아니다!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은 빵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밀가루, 사워도우배양액(발효종) 혹은 맥주나 곡물로 만든 효모, 식수, 소금을 섞은 반죽에서 나온 산출물에만 사용된다.”(동아사이언스 7월 7일)

2. 글루텐이 탄수화물 중독을 유발한다?

글루텐이 탄수화물 중독을 유발한다는 것도 현재로서는 '증명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 지난해 10월 25일 한국제분협회 주최로 열린 '밀가루의 영향학적 가치와 안전성' 세미나에서 365mc비만클리닉 대전점 김우준 원장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밀가루가 탄수화물 중독의 원인물질이라는 속설과 밀가루를 끊으면 건강할 수 있다는 속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두 속설은 밀가루의 글루텐 성분에서 기인하는데, 글루텐은 밀에 포함된 단백질 중의 하나로 글루텐 성분이 많아질수록 쫄깃하고 찰진 식감이 강해진다. 글루텐은 위산에 포함된 펩신이라는 소화효소에 의해서 엑소핀이라는 물질로 전환되는데, 엑소핀은 모르핀과 유사한 화학구조식을 가지고 있어 중독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몸에서 만들어지는 마약성 진통제인 엔돌핀과 달리 엑소핀은 음식에 포함된 단백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식품을 통해서 외부에서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엑소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exorphine = exogenous + morphine like compound). 음식 단백질에서 엑소핀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밀가루에 포함된 글루텐뿐만 아니라 우유의 카제인, 쌀의 알부민, 혈액 속의 알부민과 헤모글로빈 등에서도 엑소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밀가루의 글루텐이 소화 효소에 의해서 마약으로 바뀌어서 탄수화물 중독을 유발할 수 있다면, 우유, 쌀, 시금치, 선짓국 등도 음식 중독을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주장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식품저널 2013년 10월 25일)

 
 

Q 글루텐이 탄수화물 중독의 원인이라는데.

증명되지 않았다. 밀가루의 글루텐이 탄수화물 중독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글루텐은 위산에 포함된 펩신이라는 소화효소에 의해 엑소르핀이라는 물질로 전환된다. 엑소르핀은 아편성 진통제인 모르핀과 유사한 화학구조식을 하고 있어 중독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에서 만들어지는 마약성 진통제인 엔도르핀과 달리 엑소르핀은 음식에 포함된 단백질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밀가루에 포함된 글루텐뿐 아니라 우유와 쌀·시금치·혈액 속 알부민과 헤모글로빈에서도 엑소르핀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유·쌀·시금치·선짓국에 중독됐다는 주장은 없다. 또 밀가루 500g을 먹었을 때 혈액에 녹아 드는 엑소르핀은 0.7㎎인데 이 정도의 엑소르핀이 중독성이나 신경계에 문제를 유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중앙일보 2013년 12월 16일)

 
 

보그걸(2010년 9월호)에 따르면, 한의사 김성현 박사도 "일부에서는 밀가루의 글루텐 성분이 탄수화물 중독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식품 자체의 영양만 비교하면 이 둘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이보다는 어떤 가공을 거치고, 어떤 음식과 곁들여 먹는지가 건강과 더 직결되는 문제죠"라고 지적했다.

3. '글루텐 프리', 먹으면 건강하고 날씬해진다?

'글루텐 프리' 제품도 글루텐이나 밀에 예민한 사람에게만 의미있을 뿐 일종의 '건강식'이라거나 '다이어트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오히려 글루텐 대신 들어가는 탄수화물 등의 성분으로 대사증후군 가능성이 더 높아지니, '글루텐 프리' 제품을 찾기보다 균형적인 식단을 먹는 게 최선이라는 지적이다. '글루텐 프리' 열풍의 배경에는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이득을 취하는 기업들도 존재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6월 23일자에는 글루텐 프리 식품이 실제로 몸에 좋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뉴스가 실렸다. 오히려 탄수화물과 당분의 함량이 높아 비만 등의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더 높다는 것. 현재 미국에서만 글루텐 프리 시장이 233억 달러(약 24조 원) 규모라고 한다. 어쩌면 대형 식품회사들은 진실의 미묘함을 알면서도 건강 염려증이 지나친 현대인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해 모든 문제를 글루텐으로 몰아 마케팅 컨셉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동아사이언스 7월 7일)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글루텐을 넣지 않은 이른바 ‘글루텐 프리(gluten-free)’ 식품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다이어트나 소화에 좋다는 인식 때문에 인기지만, 글루텐을 함유한 식품과 영양학적으론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지적이 나와 주목된다.

(중략)

전문가들은 소비자들이 글루텐 프리 제품의 이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글루텐 프리 식품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과 달리, 시판 제품 중에선 글루텐의 함량만 낮췄을 뿐 당류나 탄수화물은 되려 더 많이 함유한 경우가 많아서다.

실제 유명 파스타업체 바릴라의 ‘글루텐 프리 스파게티’ 제품은 같은 중량의 ‘통밀 스파게티’와 비교했을 때, 칼로리는 같으면서도 지방과 나트륨, 당류는 더 적었다. 글루티노의 ‘글루텐 프리 사과ㆍ시나몬 시리얼’은 일반 제품과 달리 칼슘, 철분, 비타민 A와 C를 하나도 함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마고 우탄 미국 공익과학센터(CSPI) 영양정책담당 대표는 “이젠 정크푸드도 ‘글루텐 프리’로 포장돼 유통되면서 이 글루텐 프리 유행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며 “도넛은 글루텐 프리든 아니든, 여전히 도넛일 뿐”이라고 우려했다.(헤럴드경제 6월 24일)

 
 

Q 글루텐프리 다이어트가 필요한 사람과 방법은

살을 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글루텐을 먹었을 때 복통이 오고 가스가 차거나 설사를 하는 등의 장애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밀에 알레르기가 있어 두드러기가 생기거나 과민해서 소화가 잘 안되는 사람이다. 이들은 밀·귀리·보리가 포함된 음식은 피한다. 대두·쌀·옥수수·감자는 안전하다. 유화제나 안정제가 첨가된 가공음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와인이나 증류주는 안전하지만 맥주는 위험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밀가루 섭취는 건강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서는 균형 잡힌 식사와 적절한 열량 섭취가 현명하다.(중앙일보 2013년 12월 16일)

 
 

글루텐프리 제품은 글루텐·밀에 예민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반인에게도 일종의 건강식으로 오해받는다. 실제 글루텐프리 시장은 세계적으로 연평균 30%씩 성장세다. 식품회사들은 앞다퉈 글루텐프리 식품을 내놓는다. 글루텐프리에 열광하는 이유는 밀가루가 건강을 악화시키고

비만의 주요 원인이라고 잘못 생각해서다. 일부 엄마는 아이에게 밀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이유식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밀가루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김경수 교수는 “쌀과 감자는 주로 밥으로 먹거나 쪄서 먹는다”며 “반면 밀가루는 그 자체로 먹는 게 아니라 설탕과 버터를 듬뿍 넣은 케이크·도넛·쿠키 등으로 가공해서 먹는 식품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13년 12월 16일)

 
 

업계의 과도한 마케팅이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석중 국립중앙의료원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최근 출시되고 있는 ‘글루텐 프리’제품이 비만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광고를 하고 있는데 어불성설”이라며 “이런 제품에 의존하지 말고 짜고, 맵게 먹는 식습관을 개선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했다.

그는 또 “밀가루 음식에 과민증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도움될 수 있지만 일반인에게 글루텐 프리제품은 건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글루텐 프리제품이 인기를 끌자 맹목적으로 국내에서 ‘글루텐 프리’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한국일보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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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를 키워 다른 중요한 이슈 은폐 시도

세월호 사고를 키워 다른 중요한 이슈 은폐 시도
 
호주한국일보  | 등록:2014-08-02 12:45:24 | 최종:2014-08-02 12:52:1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세월호 사고를 키워 다른 중요한 이슈 은폐 시도” 
    “천안함은 좌초 후 이스라엘 잠수함과 충돌한 사고”

 30일 이스트우드에서 천안함 사고에 대해 강연을 한 신상철 진실의 길 대표   


신상철 <진실의 길>대표 시드니 강연서 ‘충격 주장’

진보 성향의 인터넷 매체 <진실의 길> 신상철 대표가 천안함 침몰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시드니 강연에서 충격 주장을 했다. 김 대표는 31일(목) 리드컴 소재 한 교회에서 동포 80여명을 대상으로 세월호 참사에 얽힌 ‘의혹’을 설명하면서 “일부러 낸 사고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어난 사고를 바로 수습하지 않고 일부러 지연해 사고를 키워, 중요한 다른 이슈를 묻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는 충격 발언을 했다.

신 대표는 30일(수) 첫 천안함 침몰 강연에서는 “좌초와 충돌에 의한 것이지 폭발은 아니다”고 말했으며, 31일(목) 세월호 참사 관련 강연에서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 그리고 부정 선거 의혹들이 위험수위에 다다르자, 위기감을 느낀 수구 지배세력들이 세월호 침몰 사고를 악용해 구조 작업을 교묘하게 지연시켜 사고를 키웠다”라고 주장을 해 충격을 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이슈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정선거의 문제였다”라고 말한 신 대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자신에게 요청해오던 부정선거 강연이 대폭 줄어들었다”라고 전했다.

이런 위기로 위기를 막는 전략이 바로 수구세력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법이라는 것이다. 
신 대표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과 더불어 부정선거를 방지하는 선거법을 개정하지 않은 한 진실을 밝히는 세상이 오기 힘들다”라면서 “투표소에서 개표가 이루어지도록 선거법을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논란이 많았던 컴퓨터 조작을 통한 부정선거의 증거는 이미 소멸된 듯 싶다”고 말한 신 대표는 “대선 당시 투개표의 컴퓨터 처리 프로그램은 이미 폐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31일 현재 18일 동안 광화문 거리에서 단식을 하며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는 희생자 가족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보여준 진보의 역사와 많이 닮았다”며 “고통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피하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견지하고 있는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신씨가 제기한 ‘세월호 관련 10대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왜 선수를 잡지 않았나?
“사고 첫날 해경은 단 한 사람도 구조하러 가지 않았다. 민간회사 언딘에게 구조를 맡긴 것은 119에 신고했는데 레카 차가 달려온 셈이다. 
에어포켓이 가장 많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으로 침몰한 세월호에 갇혀있던 아이들은 질식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이 젖어서 옷을 갈아입은 정황도 포착된다.”
2) 컨테이너를 왜 묶지 않았나?
3) 인근 함대는 왜 출동하지 않았나? 
“목포 3함대 80km 거리, 1시간 내 도착이 가능했다”
4) 해군참모총장이 지시한 통영함(구조함) 출동을 누가 막았나?
5) 해경의 적극적 구조 방해 사실
“해경이 UDT 잠수와 어선 접근 다 막았다. 첫날, 단 1명도 물에 들어가지 않고 구조활동을 하지 않았다”
6) 선수가 가라앉은 전날 야간에 무슨 작업을 했나? 
“선수의 주야간 비교 사진을 보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는데 작업 후 바로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7) “최초 신고 시간 오전 8시55분은 거짓이다. 7시20분에 이미 구조 요청이 있었으며 단원고등학교는 8시 10분에 비상이 걸렸다.”
8) 배의 급회전은 침몰의 원인이 아니다
9) 선체의 복원력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10) 이준석 선장을 구조 후 하루동안 해경 아파트에 묵게 한 이유는? 
“현관 CCTV 내용도 사라졌다. 왜 3등 항해사를 비롯한 선원들이 출항 전 출항을 애걸복걸하며 말렸나. 사고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은 잠수함과 충돌한 교통사고” 
“한국 정부의 북한 어뢰 폭침은 날조”

신 대표는 또한 천안함 사고에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할 때 “위기관리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 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신 대표는 30일 이스트우드 강연에서 “만약 천안함 사고에서 진실이 밝혀졌다면, 세월호 참사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비극인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천안함 사고와 관련된 의혹에서 천안함 침몰은 좌초를 당한 상태에서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이스라엘 잠수함과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정부의 어뢰 폭침 주장은 날조됐다”고 반박했다. 이스라엘의 근동 잠수함 기지는 베트남에 있으며 서해까지 오가며 주로 북한에서 이란과 시리아로 무기수출을 한다고 의심되는 선박을 추적하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설명했다.

신 대표는 “이스라엘 잠수함은 서해에서 연례적으로 펼쳐지는 한미군사합동작전에 함께 참여했으며 독자적인 작전을 펼치는 도중 천안함과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한 강연 참석자는 신 대표의 주장에 대해 “충격적이지만 논리적인 측면이 있다”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훗날 이런 의혹들의 진상이 밝혀질지 현재로선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현장 취재: 김효정 korean416au@gmail.com
페이스북: 가만히 있으라 in 호주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3417&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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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복 10계명'

휴심정 2014. 08. 02
조회수 224 추천수 0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시한 ‘행복 10계명’

교황 “식사 때는 TV를 끄고 대화를 하세요”

 

14일 방한 앞둔 프란치스코 ‘이 시대의 행복 10계명’ 제시
조국 아르헨티나 언론과 인터뷰…“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다른 이의 믿음 존중하고 개종시키려 하지 마라” 제안도

 

교황 10계명1.jpg  

프란치스코 교황. 한겨레 자료 사진.
 


“저마다의 삶을 살자. 식사 때는 텔레비전을 끄자. 다른 사람을 개종시키려 들지 말라….”
이달 14일 방한을 앞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 10계명’을 내놨다.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은은한 울림을 준다.

 

교황은 최근 고국 아르헨티나의 주간지 <비바>와 한 인터뷰에서 행복에 이르는 비밀 지침 10가지를 제시했다. 미국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 뉴스 서비스’가 이를 영어로 번역해 소개했는데,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겸손과 반소비주의의 덕목이 녹아 있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평가했다.

 

교황은 무엇보다 독립적이고도 열린 삶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제1의 과제로 “자신의 삶을 살되, 남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스스로의 길을 가되, 타인의 삶 또한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는 또 “나는 연못과 같이 느리고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흐르는 삶의 상태를 좋아한다”며 친절하고 겸손하게 ‘조용히 전진하자’고 권고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다른 이의 믿음을 존중하고, 개종시키려 들지 말자”고 파격 제안을 했다. 그는 “교회의 성장은 개종 시도가 아니라 매혹시킴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며 “나는 당신을 설복시키기 위해 말한다는 태도야말로 최악의 종교적 태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타인에게 열자”고 주문했다. “마음을 닫는 순간 자기중심적이 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말했다.

 

교황은 건강한 여가로 삶에 여유를 찾자고도 했다. 그는 “소비주의가 불안과 스트레스를 초래하고 건강한 여가 문화를 앗아갔다. 일하느라 아이들과 놀 시간을 갖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반드시 시간을 내야 한다”고 했다. 또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자”, “식사 때는 꼭 티브이를 끄고, 대화를 나누자”,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자”고 권했다.

 

교황10계명2.jpg 

교황이 제시한 ‘행복 10계명’
 


그는 사회적 의제들에도 관심을 갖자고 했다. 그는 먼저 “젊은이들을 위한 가치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방법을 함께 찾자”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존엄성은 스스로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을 수 있을 때 확보된다”며 “젊은 세대가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할 때 마약에 손을 대고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교황은 “나는 ‘인간이 자연을 폭압적으로 착취함으로써 자멸의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며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자”고 했다. 그는 끝으로 “평화를 위해 행동하자”고 제안했다. “평화를 위한 호소는 우렁차야 한다. 때로 평화는 조용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평화는 정적이지 않고 언제나 주도적인 움직임이다.” 그는 이밖에 ‘이민자 지원’의 중요성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가톨릭 뉴스 서비스’는 전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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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을지프리덤으로 전쟁 나면 유엔도 책임

북, 을지프리덤으로 전쟁 나면 유엔도 책임
 
“유엔 안보리 한미 합동군사훈련 긴급현안 회의”요구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4/08/02 [07:10]  최종편집: ⓒ 자주민보
 
 

조선이 미국의 위협이 계속되는 한 핵무기를 계속 개발할 것이라며 유엔 안보리는 을지프리덤 가디언 훈련에 대해 긴급 현안으로 회의를 열 것을 요구했다.

내.외신들은 2일 일제히 지난 1일(현지시간) 리동일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는 이날 낮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북한처럼 끊임없이 위협받는 나라는 없다"면서 ”미국 등으로부터의 위협이 계속되는 한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외에 대안이 없다“고 주장해 자신들의 핵개발이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유엔 주재 리동일 차석대사는 조선의 핵무기 개발은 2002년 조지부시(아들 부시) 미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정책을 정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핵 개발의 동기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 된 것임을 주장했다.

리동일 차석대사는 “이미 요구한대로 유엔 안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문제를 긴급 현안으로 다뤄야 한다.”며 “안보리가 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세계평화와 안보를 위해 중립과 원칙을 지켜야 할 유엔이 존재목적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해 유엔이 중립성과 공정성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리 차석 대사는 “유엔 안보리가 조선의 요청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유엔 안보리와 미국이 조선의 공식 요청을 계속 거부할 경우 북한은 스스로 선택한 길로 나갈 것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미-한 합동군사훈련이 계속되면 북한도 자위적인 차원에서 맞대응을 해 나갈 것이며 조선의 대응에는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 모든 방안이 다 포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 차석대사는 “한·미 군사훈련 과정에서 불똥이 튀어 전쟁으로 번지면 이 책임은 미국이 져야 한다.”면서 “아울러 유엔 안보리 역시 미국을 불법으로 지원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해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면 유엔도 공동 책임이 있음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그는 “한국전 휴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은 무려 1만8천회로 추산된다.”면서 “한반도 평화와 안보의 최대 위협은 바로 미국”이라고 피력했다.

유엔 주재 리동일 차석 대사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해서는 “조선이 미.일, 한·미 조약의 표적이 돼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이미 이웃에 군사화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매우 위험한 일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A급 전범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반 인권적 행위”라며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해 반대의 뜻은 물론 미국이 이를 용인하는 것 자체도 잘 못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아시안 경기대회 참가에 대해서는 “조선의 아시안 게임 참가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차원”이라는 원칙적 입장과 함께 상황을 지켜 보겠다는 입장을 덧붙였다.

한편 조선은 지난 31일 조선평화옹호전국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한.미 당국이 을지프리덤 가디언 훈련을 강행하면 총와대는 물론 미국의 백악관과 팬타곤, 세계에 있는 미군기지들이 핵타격의 목표물이 될 것이라고 강조해 한반도 정세가 엄중해 지고 있어 평화를 위한 관련국들의 해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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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악 쇼' 박정희, '적폐 쇼' 박근혜…닮은꼴 부녀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8/02 14:54
  • 수정일
    2014/08/02 14:5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55> 제3공화국의 탄생, 두 번째 마당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8.02 09:15:11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

[5.16쿠데타, 첫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연재는 왜 그 신문에서 사라졌나

[5.16쿠데타, 두 번째 마당] 오랜 꿈 이룬 '박통'…대한민국은 짓밟혔다

[5.16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한국인의 '노예근성'을 주목했나

[5.16쿠데타, 네 번째 마당] 청와대·참모총장의 위험한 선택…헌법은 죽었다

[5.16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은밀한 과거', 미국이 개의치 않은 이유

[5.16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정치 깡패 이정재는 진정 죽어 마땅했나

[5.16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나라 구한 박정희? 장준하는 왜 그리 판단했나

[5.16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청와대 '부정 선거' 앞잡이, 정보부…어쩌다?

[5.16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전 재산 헌납' 삼성 약속은 왜 물거품이 됐나

[5.16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거듭 구한 은인, 제대로 뒤통수 맞다

[5.16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박통'의 특별한 선배, 왜 간첩으로 죽어야 했나

[5.16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장면 맹비난' 박정희, 사실은 대부분 따라 했다

[제3공화국, 첫 번째 마당] '가만있어라' 강조한 '박통', 은밀히 뒤통수쳤다

 

프레시안 :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5.16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내놓지 않기 위해 한 일은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만이 아니었다.

 

서중석 : 사전 조직을 방대하게, 밀실에서, 중앙정보부 조직을 최대한 이용해서 했는데 이것만 가지고 집권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얘기한 1961년 8월 12일 박정희의 민정 이양 성명에는 중요한 내용이 또 하나 들어 있었다. "구정치인 중 부패·부정한 정치인의 정계 진출을 방지하기 위한 입법 조치를 취한다", 이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구정치인 중 상당수가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법의 이름을 빌린 물리력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도 참 악명 높은 법이다. 1962년에 들어와 중앙정보부 중심으로 작업을 해서 재건동지회가 만들어진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정치활동정화법도 1962년 들어 구체화된다.

 

1962년 2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구정치인의 출마를 제한한다는 것은 재검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구정치인에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나. 간단히 이야기하면 기존의 모든 정치인을 구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인들이 신정치인이라고 한 셈이다. 그러니 자기가 대통령일 때 이 법이 통과되면 자기 동지들한테 얼마나 욕을 얻어먹겠나.

 

그런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아직도 일부 몰지각한 구정치인들이 혁명 성업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용서 못할 처사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정권을 넘길 수 없다'고 하면서 '1∼2년 동안에 이런 부패한 역사가 해결된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프레시안 : 정치활동정화법은 5.16쿠데타 세력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무기였다.

 

서중석 : 1962년 3월 16일 최고회의에서 정치활동정화법이 통과됐다. 이 법에 대해선 역시 김종필 부장이 참 짤막하고 적절하게 잘 얘기했다. 앞으로 정부가 정책을 강력히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부당한 말썽을 일으킬 만한 "보균자"들에게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국회의원만 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보균자"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은 자기들이 할 것이라고 확고하게 생각했는지, 하여튼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만 국회의원이 되지 말아 달라고 얘기했다. (김종필은 1962년 3월 20일, "정치활동정화법은 구정치인들 중 신정부를 까부술 위험성이 있는 자들을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라며 "보균자는 자진해서 국회에 안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이 말은 나중에 정확하게 구체화된다. 다수는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지만, 몇 사람은 1963년 총선은 물론 1967년 선거에도 출마를 못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두 번 출마를 못하게 되는 것이고, 상당수는 한 번(1963년 선거) 못하게 되는 것이며, 나머지 다수는 정치 활동이 허용된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정치활동정화법은 박정희, 김종필이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해 방해물을 제거하거나 정치적 반대자를 약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치활동정화법을 적절히 이용하면, 그러니까 누구는 풀어주고 누구는 안 풀어주는 식으로 하면서 야권을 서로 불신케 하고 분열, 갈등을 조장하는 간특한 머리도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반대파 옥죄고 야권 분열 조장한 정치활동정화법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선별해 끌어들이고 혁신계의 발을 확고하게 묶어두는 데도 정치활동정화법을 활용했다.

 

서중석 : 그렇다. 윤보선은 더는 대통령을 할 수 없으니 3월 22일 사임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바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다. 4374명을 '해당자'로 정하고 그 명단을 공고했다. 그러면서 구정치인 가운데 신고를 하게 했는데, 2958명이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적격 여부를 처리해달라고 청구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하면 1968년 8월 15일까지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었다. <편집자>) 1962년 5월 30일, 2958명의 45퍼센트인 1336명을 적격자로 규정해 '이 사람들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풀어줬다. 그해 12월 31일에 가서는 171명을 또 추가 해금했다. 어느 경우나 자유당이 많다. 특히 12월 31일에는 이승만 정권 말기 국방부 장관을 한 김정열, 초대 내무부 장관인 윤치영 같은 사람들이 풀렸다. 나중에 둘 다 민주공화당 의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1963년 2월 1일에는 또 275명을 해금한다. 이때도 자유당계가 많았다. 박정희 의장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앓고 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귀국 문제를 심심히 고려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유당계의 민주공화당 입당을 유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적 필요에 따른 이런 몸짓과 반대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편집자>) 마지막으로, 물론 선거를 앞두고 한 것인데, 1963년 2월 27일까지 추가 해제했으나 269명은 제외했다. 이 269명 여기에 중요한 사람들이 많았다. 자유당계로는 이승만, 민주당 정권의 장면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제일 많은 건 혁신계 간부급 인사들이다. 김달호, 고정훈, 정화암, 박기출, 장건상, 윤길중 등이 다 묶여 있었다.

 

이 정치활동정화법은 개폐할 수가 없다고 헌법에까지 못을 박았다. 부칙 제4조 2항에다가 '못 고친다'고 못을 박아 놨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 세력이 일부를 제외하면서 야당을 분열시키는 데 정치활동정화법을 이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훗날 전두환 신군부는 총칼로 권력을 잡은 후 기성 정치권 등의 발을 묶은 5.16쿠데타 세력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신군부는 1980년 11월 '정치 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 조치법'을 만들고 기성 정치인 등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 그 대상에는 김종필도 포함돼 있었다. 그에 앞서 신군부는 김종필을 부정 축재자로 규정했다. 5.16쿠데타 후 기성 정치인 등을 보균자로 몰아붙였던 김종필은 그렇게 20년도 안 돼 정반대 처지에 놓인다. 전두환 정권이 막바지에 접어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김종필은 정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새 헌법 만들어 대통령에게 막강한 힘 부여한 이유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은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야당 정치인들을 옥죄고 분열시키는 한편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국민이 직접 뽑은 대의 기관도 아닌 최고회의에서 헌법 문제를 다루는 게 적절한가 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서중석 : 나중에 제3공화국 헌법으로 불리는 것이다. 1962년 7월 11일 최고회의는 헌법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민간 전문위원을 비롯한 21명이 참여했다. 대개 새로 만드는 헌법은 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으니) 장면 정부 때 헌법의 수순에 따라 새 헌법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최고회의에서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고쳐 헌법 개정의 절차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헌법안을 만들면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 투표로 확정한다'고 했다. 이러면서 국민 투표가 다시 부각된다. 국민 투표법은 10월 12일에 제정된다.

 

국민 투표는 이승만 정권의 악명 높은 사사오입 개헌에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 이 노인네가 중임 제한을 철폐하려고, 그러니까 영구 집권을 하려고 개헌을 밀어붙였는데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들의 반대가 워낙 심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것만 개헌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개헌은 국민 투표를 할 필요성 때문에 꼭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몰고 갔다.

 

그래서 1954년 11월 국회에서 부결됐다고 선포한 걸 다시 사사오입으로 강변하면서 통과됐다고 주장하는 그 헌법에는 제7조에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 후 국민 투표에 부친다"고 돼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국민 투표 조항을 전혀 지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법률로 국민 투표법을 만들지 않았다. 1952년 발췌 개헌 때 참의원 조항을 넣었는데도 지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양원제에서 참의원은 상원, 민의원은 하원 격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헌법에 참의원 조항이 있긴 했지만 한 번도 구성되지 않았다. <편집자>) 그런데 드디어 이 군사 정권에 의해 국민 투표법이 의결되기에 이르렀다.

 

국민 투표는 그 당시 어느 나라건 간에 대개 집권 세력의 의도에 맞게 통과되며, 집권 세력의 의도와 다르게 국민 투표가 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들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최고회의에서 통과시킨 것을 합법화한다고 할까, 합리화하는 구실로 국민 투표를 치른다. 박정희 정권 때는 이것 말고도 3선 개헌, 유신 체제 때 등 국민 투표가 몇 번 더 실시된다.

 

프레시안 : 쿠데타 세력이 만든 새 헌법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했다. 이는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이 영도자의 강력한 통치를 선호한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서중석 : 이 헌법 개정안은 최고회의를 통과해서 1962년 12월 17일 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됐다. 이 새로운 헌법은 다 알다시피 내각 책임제였던 제2공화국과 달리 대통령 중심제였다. 그것도 대통령의 권한이 대단히 강화된 것이었다. 첫째, 부통령제를 없앴다. 부통령제를 없앤 데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속셈이 각각 달랐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최고위원들의 생각도 작용하고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부통령 제도를 제도화해놨더라면 과연 유신 체제가 탄생할 수 있었겠느냐, 3선 개헌을 하는 게 용이했겠느냐 하는 점은 생각해볼 수 있다. 부통령이라는 자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일정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 이 부통령제를 다시 살리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우엔 이승만 정권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따로 선거하게 하는 게 아니라 러닝메이트 제도로 꼭 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의 행태를 되돌아볼 때 부통령제를 두는 것은 충분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어쨌건, 부통령제를 없앤 대신 국무총리를 뒀다. 헌법에 국무총리의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이 되는 국무위원의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과거에 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 이승만 정권 때도 '국무총리는 장관만도 못하다', 그렇게 얘기됐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 워낙 강해서 사사오입 개헌을 할 때 국무총리제까지 없앴다. 어쨌건 새 헌법에선 국무총리제를 뒀다.

 

그리고 헌법심의위원회 다수 의견으로 국무원을 장면 정권 때나 제헌 헌법처럼 의결 기관으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쿠데타 세력은 국무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결국 심의 기관으로 격하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했다. 대통령한테는 국가 긴급권, 입법 거부권까지 보장돼 있지 않았나.

 

 

▲ 민정 이양을 앞두고, 5.16쿠데타 세력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 새 헌법을 만들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 민정 이양을 앞두고, 5.16쿠데타 세력은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 새 헌법을 만들었다. 사진은 1973년 국군의 날(10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동안 스탠드에 펼쳐진 대통령 초상화 카드 섹션. ⓒ연합뉴스

 

 

 

괴상한 비례 대표제…헌법·선거법을 자기들 입맛에 맞춘 쿠데타 세력

 

프레시안 : 이 헌법에는 독특한 조항도 있었다.

 

서중석 : 그렇다. 이 헌법에 아주 독특한 게 들어갔다. 제36조에 "국회의원 후보가 되려는 자는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제64조엔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자는 소속 정당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돼 있었다. 한마디로 무소속 후보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으로 나올 수 없게끔 만들어버렸다.

 

이것에 대해 여러 정치학자가 '정당을 육성하려고 그런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그 당시 이미 한 신문에서 '이것은 야당 난립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여러 야당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지적이었다. '무소속으로 나올 수 있으면 당을 안 만들어도 되지만 이런 식으로 해놓으면 꼭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되든 안 되든 대통령으로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당을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야당이 제구실을 할 수가 있느냐.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은 문제가 많으니 이를 고려하라'고 요구한 것에 문제점이 잘 나타나 있다.

 

이 헌법은 제38조에 뭐까지 붙여놨냐 하면, "국회의원은 임기 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 정당이 해산된 때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해 놨다. 국회의원이 당의 명령을 잘 듣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는 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야당을 난립시키면서 여당이 강력한 통치를 하기 위한 방책으로 이걸 만들어놨고 그렇게 활용된다.

 

그래서 유신 헌법으로 가면 또 싹 바뀌지 않나. 다 알다시피 유신 체제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두 명씩 뽑게 돼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한 명은 여당, 즉 민주공화당이 될 수 있다고 봤으니 문제는 야당을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려면 무소속 후보가 나오게 해야 한다. 그래서 유신 헌법에서는 무소속 출마를 가능하게 해버렸다.

 

프레시안 : 지난번에 살펴본 8.15 계획서의 핵심 중 하나는 '군인들이 민정에서도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법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법에도 이것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 눈에 띈다.

 

서중석 : 국회의원 선거법에도 문제 조항이 있었다. 1963년 1월 16일에 제정됐는데, 처음으로 전국구 비례 대표란 것을 두었다. 이게 44명이었다. 지역 대표가 131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 비중도 적은 게 아니다. 비례 대표제가 당시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 시행된 것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정당에 투표한 것에서 유실 표를 막자는 것이다. 정당 대표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직능 혹은 전문성 대표라는 의미다. 각 당이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여러 좋은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이것도 역시 강력한 통치와 관련이 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퍼센트 이상이면 비례 대표 의석의 3분의 2, 그 미만이면 절반을 주게 돼 있었다. 선거에서 제1당이 되는 건 대개 여당 아닌가. 그러니 비례 대표의 최소한 반절은 여당이 먹는 것으로 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또 야당한테도 나중에 이상하게 이용된다. 이 선거가 끝나고 그다음 선거부터는 '어떻게 보면 이게 국회의원 거저 되는 것이지 않나. 그러면 돈 좀 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됐다. 당시엔 '비례 대표는 국회의원 거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전국구로 나오려면 상당한 정치 자금을 내도록 했다. 처음에는 박정희 정권이 그걸 탄압하기도 했지만 이걸 막을 수도 없었다. 야당은 돈이 궁해 죽을 처지였으니, 전국구 비례 대표가 돈을 갹출하는 한 방법이 돼 버린 것이다.

 

비례 대표가 직능 대표성이라든가 전문성을 진정으로 갖게 되는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다. 20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여성에게 비례 대표 자리를 많이 주지 않나. 나중엔 반절까지 배정했는데, 여성이 의회에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리고 정말 직능 대표성이 있는 사람들도 각 당에서 추천하고 그러면서, 21세기에 와서는 비례 대표가 예전보다 그 본질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세력은 지방 자치의 싹도 잘라버렸다.

 

서중석 : 1962년 11월 14일, 조시형 최고회의 내무위원장은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 제도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 지방 자치 할 생각 없다. 단체장을 선임하거나 지방 의회를 구성할 생각이 없다', 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 후 30년 동안 풀뿌리 민주주의가 사라진 나라가 됐다. 전 세계에서 지방 자치를 완전히 없앤 나라는 한국 빼놓고는 없지 않느냐고까지 그때 애기를 많이 하더라.

 

이렇게 사전 조직, 그것도 이원 조직에 의한 사전 조직을 하고, 정치활동정화법도 만들고, 헌법과 국회의원 선거법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만들고, 지방 자치도 없애버리면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제 큰 골격은 이뤘다고 생각하게 된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사진은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구악 일소" 강조한 박정희 세력, '구악 중 구악' 자유당계 대거 포섭

 

프레시안 : 독재자들은 대개 '강력한 영도자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는 국회'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번에 했다. 영도자의 손발 노릇을 하는 국회라는 건데,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만든 유신정우회가 떠오른다.

 

서중석 : 비례 대표를 발전시킨 게 유신 체제에서는 유신정우회다.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는 방식으로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전두환 신군부 때 가서는 그것이 조금 미안했는지 신군부한테 절대 유리하게 의석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약간 바꾼다.(1980년 10월 신군부가 만든 헌법은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전국구로 배정하고 그 전국구의 3분의 2는 제1당이 차지하도록 규정했다. <편집자>)

 

프레시안 : '5.16 혁명 공약'에는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내용도 있었다(제3항). 정치권의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 아래 만든 것이 정치활동정화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혁신계와 민주당 정권을 쥐 잡듯 몰아세운 쿠데타 세력이, 민주당 정권보다 훨씬 부패했고 국민을 학살하기까지 한 자유당 정권의 인사들을 대거 받아들인 것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4대 의혹 사건 등이 보여준 것처럼, 쿠데타 세력이 구정치인들보다 덜 부패했다고 볼 근거도 없다. 결국 쿠데타 세력이 구악 일소를 내세워 정치 쇼를 한 셈인데, 세월호 참사 후 박근혜 정부가 내건 "적폐 청산" 주장과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예컨대 참사의 밑바탕에는 '생명 뒷전, 돈벌이 우선' 논리가 있었는데도, 박근혜 정부가 "적폐"의 핵심인 무분별한 규제 완화에 오히려 힘을 싣는 역주행을 하는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적폐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은 인사들을 중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적폐의 일부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서중석 : 거듭 얘기하지만 박정희나 김종필한테는 '상식적으로 안 맞는다', 이게 통하지 않았다. 일부 최고위원까지 포함한 다른 정치 세력을 다 묶어놓고 자기들끼리만 뭘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지 않나. 그리고 자유당계를 대거 포섭했다. 나중에 공화당 간부 중에서 군인 다음으로 많이 차지하는 게 자유당계다. 이것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고 나도 항상 의아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있다. 박정희가 1962년에 쓴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박정희의 사상과 의식이 가장 잘 담긴 책으로 보는데 어쨌든 이 책도 그렇고,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나 박정희의 다른 어떤 글을 봐도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소설가 이병주가 쓴 글에도, 쿠데타 전 부산에서 술 마실 때 박정희가 이상하게 이승만을 직접 욕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난 이런 걸 보고 참 놀랐다. 박정희 관련 자료를 많이 봤지만, 이승만을 직접 비판하는 걸 찾기가 어렵다. 자유당을 욕하는 것도 거의 안 나온다. 1963년 이후에는 욕을 좀 덜한다고 하더라도 1962년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는 자유당을 강하게 비판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가 않더라. 그때는 누구나 자유당을 비판했다. 4월혁명 이후에는 자유당 비판이 보통 강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게 별로 없다. 이와 달리 장면 정권에 대해선 하나의 장을 만들어서 엄청난 비판, 사실상 비방과 중상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박정희가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라는 정도로 비판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반공을 강조한 장면 정권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가는 등 제2공화국을 사실과 다르게 몰아세운 것에 비하면 이승만 정권을 겨냥한 강도 높은 비판은 훨씬 적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쉰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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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련 기자, 최하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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