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박근혜가 받은 6억 원이 바로 지하경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2/12 08:33
  • 수정일
    2012/12/12 08:3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가 충청권 방문에 나섰다. 첫 방문지는 충북이었다. 이정희 후보는 한라스텍폴 노조 지도부와 간담회를 갖고 현장을 돌며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어 청주 육거리 종합시장을 찾아 유세를 펼쳤다. 이 후보는 박 후보의 “지하경제 활성화” 발언을 꼬집으며 “박 후보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받은 6억 원, 이게 바로 지하경제”라고 비판한 뒤 “유신 부활을 막고 진보적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노동자들 “박근혜 후보를 꼭 떨어뜨려 달라”
 
충북 방문에서 이 후보가 제일 처음 찾은 곳은 ‘한라스택폴’이었다. 한라스택폴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전체 직원이 300여 명이고 노조원은 206명이다. 현장을 방문한 이 후보를 알아보고 먼저 달려와 반갑게 맞아 기념사진을 찍자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특히 이곳은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이다. 임병수 사무국장에 따르면 사원 공채를 할 때 일정비율을 여성노동자로 뽑는다고 한다. 여성 노동자인 김소라 씨와 윤은진 씨는 이 후보를 만나 “기분이 좋다”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 씨는 “여성들의 일자리를 넓히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유청산 씨는 “이번에는 안 되더라도 다음에는 꼭 대통령이 돼 좋은 정책을 많이 펴달라”며 “3차 토론에선 더 강하게 발언해 달라”는 바람을 전했다. 임재홍 씨는 이 후보와 인사를 나눈 뒤 “화이팅!”이라고 응원했다. 임 씨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봉식 씨는 “박근혜 후보를 꼭 떨어뜨려 달라”며 이 후보의 손을 굳게 잡았다. 정 씨는 “박근혜 후보는 절대 안 된다. 박 후보가 당선되면 옛날 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마지막에 야권이 승리하기 위해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말했다. 남덕희 씨는 “TV 토론 잘 봤다”며 “3차 토론에선 정책적으로 와 닿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라스택폴노조 송채섭 부위원장과 오병수 사무국장 등 노동자 20여 명과 함께 한 간담회에선 원청의 하청 단가 후려치기에 대한 제도 개선, 주간연속 2교대 확산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 후보 “진보적 정권교체 위해서 노동자가 힘 키워야”
 
이 후보는 “대선 판이 좀 흔들리는 것 같다. 열심히 살지만 자기 목소리 못내는 노동자, 농어민, 청년들 얘기 전하려고 했다”며 “한국 사회 금기에 계속 돌을 던지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노동자들의 힘을 모으고 얘기를 전달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교육, 언론 얘기 남아있다. 생각하시는 것 있으면 전할 수 있게 얘기해 달라”며 “진보적 정권교체의 좋은 결과로 보답하겠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 더 낮은 자세로 함께 하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아 후보는 이어진 노동자들의 질문을 경청하며 성실하게 답변했다. 오 사무국장이 “원청의 하청 생산단가 후려치기 심각하다. 이것이 노조의 압력으로 오고 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진보당의 의견을 말해 달라”고 묻자, 이 후보는 “2008년 이슈가 돼 원자재 안정제법을 발의했다. 임금인상분이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대기업과 하청기업에 맡겨놔선 안된다. 전체적인 틀도 마련하고 개별사례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임금에 대한 가격연동제, 최저입찰가 문제를 출수 있는 대안을 내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한 법 개정안을 낼 것”이라며 “중요한 건 이 의제를 부여잡고 끈질기게 밀고 가는 한 노조, 집단이 있어야 한다. 중소상인 문제도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곳이 있어 풀렸다”고 강조했다.
 
이상영 씨는 “주간연속 2교대제를 대기업에서 소기업으로 짧은 시간에 전파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 후보는 “야근이 필요한 응급실 아니면 낮에 일하고 밤에 자도록 해야 한다. 현대자동차 내년 3월부터 주간연속 2교대를 시행하는데 빨리 퍼지게 하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며 “정권교체를 이루고 노동자가 힘을 갖도록 해 노동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 이를 국민이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완주할 거냐”는 노동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 후보는 “기본은 완주다. 어떡해든 정권교체도 하고 진보적 지지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심이 없으면 어떻게 선거 치룰 수 있겠냐. 판은 흔들었으니 남은 기간 어떤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 현장의 얘기 들으면서 판단할 생각”이라며 “정권교체는 꼭 한다. 진보적 내용으로 할 것이다. 잘못되거나 그릇된 판단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 후보는 끝으로 “진보적 의제 술술 풀릴 것이라 생각 안한다. 여전히 참여정부 실패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시대의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힘을 많이 쌓아야 한다”며 노조 조직률 50% 공약을 소개하며 노조가 힘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이어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그 정부를 민주정부로 만드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를 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있는 노조는 탄탄하고 활발해야 하고, 그 노조들이 해 나가는 걸 통합진보당이 뒷받침하고 여론화시켜야 한다. 미조직비정규직을 노조 묶어내서 튼튼히 해나가지 않으면 참여정부로 돌아가기 십상”이라고 지적했다.


 
이 후보 청주 유세… “대통령이 세금 안내고 부자들 안내니 서민들은 서럽기만”
 
간담회를 마친 뒤 이 후보는 청주 육거리 시장으로 이동해 유세를 펼쳤다. 시장 상인 들을 포함한 시장 상인들은 이 후보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 후보가 연설을 시작하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유세를 경청했다. 기자에 둘러싸인 이 후보와 인사를 나누겠다며 인파 속을 헤치고 손을 내미는 시민도 있었고, 이 후보의 손을 꼭 잡으며 지지를 다짐하는 시민도 있었다. 육거리시장 상인인 남옥선 씨는 “유일한 바람은 서민이 잘 살게 되는 것”이라며 이 후보에게 “재래시장이 장사가 안 된다. 재래시장을 좀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연설에 나선 이 후보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얘기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 후보는 “이곳 육거리 시장에 오니 어린 시절 명절 전날이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두부공장에서 명절 대목으로 만든 두부를 팔고, 이곳 충북 청원 남일면에 있는 큰집에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충북 청주시민 만나면 시골 큰집 간 것처럼 따듯하다”면서 “모두가 서럽지 않고 아프지 않고 억울하지 않은 세상 만들고 싶다. 서민과 함께 살아온 사람, 서민의 마음 이해하는 사람, 서민의 눈물 닦으며 걸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 함께 책임지고 나가는 미래를 열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이어 “두 번의 티비토론을 봤을 것다. 그동안 못 들었던 얘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첫 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뿌리 확인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단 한 번도 거론된 적 없던 그 이름을 확인했다”고 충성혈서를 쓰고 일본군이 된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 후보는 또 “시장 상인들 얼마나 힘드냐. 새벽 일찍 밤늦게 쉴 시간도 없이 얼마나 애쓰고 살았나. 박 후보 어떻게 살았나. 청와대 살다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그때 돈 6억 원, 당시 은마아파트 30채. 현재 300억”을 언급하고 “유신독재의 장물 영남대, 정수장학회 이사장했고, 그 기반에서 청와대 가려한다. 그분의 뿌리에서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대통령, 고위공직자 할 수 있는 도덕성 갖고 있는지 묻는다”면서 박 후보를 비판했다.
 
이 후보는 10일 토론에서 언급한 세금 문제를 언급하며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받은 6억원, 이게 지하경제다. 재벌들 서러 오고가며 받은 뇌물 이게 지하경제다. 서민들 열심히 일하면 단 하나도 숨기지 않고 세금 낸다. 대통령이 안내고 부자들 안내니 서민들은 서럽기만 하다”며 “대통령 될 사람 지하경제 없앨 생각 확실히 해야 한다. 부정환급 더러운 돈 거기에 대해서 세금 왜 안내는지 세금 물어낼 생각있는 지 확답해야 한다. 박근혜 답하지 않는다. 역사적 책임 다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후보 “3차토론서도 서민들 절실한 목소리 답답한 마음 다 전할 것”
 
이 후보는 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재집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 생계 걱정하고 집 걱정하지만 단 한 번도 그런 걱정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한민국 에서 딱 한 사람. 그분이 바로 박근혜 후보다, 대한민국의 딱 한 사람인 그가 대통령이 되려한다. 월세 전세 살아봤나. 성북동 고급주택가에 잔디밭 깔린 고급주택 헌납 받아 살았다”며 “여러분 지금 우리에 필요한 사람 누군가. 서민 눈물 닦아줄 서민 대통령인가. 여왕이 필요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꼼짝없이 전통시장은 대형유통마트에 밟히고 밀려났다. 그래서 진보당은 유통법을 발의했고 중소상인들이 나서서 2008년 만들어냈다. 그런데 첫걸음 땠지만 구멍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가려고 한 달에 이틀 대형마트 쉬게 하는 것 한 달에 3일 쉬게 하자는 것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하니 새누리당이 반대한다. 민주당도 그냥 지켜봤다”며 “박 후보는 대선 전에 통과시키겠단 말 않고 있다. 민주당도 방관하고 있다. 전통시장 살아나게 만드는 대형유통마트 규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하루라도 빨리 대선전에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이런 정권교체를 만들고 싶다. 서민에 꼭 필요한 것이면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정권교체 만들고 싶다. 서민에 변명안하고 힘 있게, 의지있게 이명박 4대강 밀어붙인 결기 를 넘어서는 신명나는 정치 만들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 후보는 또 농민들의 문제도 언급했다. 이 후보는 “어제 토론에서 농민들 상황을 질문드렸다. 그런데 어떤 반응 나왔나. 농민 인구 20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다. 청년들 가지 않으면 농업이 어렵다. 농업 생산비 보장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더니 보수언론 사회자 뭐라고 했나. 일자리는 농촌과 상관없다고 하고, 문재인후보도 거론해선 안 되는 문제처럼 말했다. 답답했다.”며 “농업이 살아야 국민이 살고 농민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끝으로 “오는 16일 세 번째 토론이 있다. 서민들 절실한 목소리 답답한 마음 다 전할 것”이라며 “정권교체 반드시 만들어내고 서민들 속상한 것들 다 풀릴 수 있도록 진보적 정권교체 이뤄내겠다“고 약속했다.
 
충북 유세를 마친 이 후보는 대전과 천안으로 이동해 유세를 이어갈 예정이다.
 





































 
글= 진보정치 황경의·권종술 기자
사진= 진보정치 정택용 기자

 

“박 후보가 받은 6억 원이 바로 지하경제”
 
 
 
황경의 권종술 기자
기사입력: 2012/12/11 [15:4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강우일 주교, 사회적 발언의 이유

강우일 주교, 사회적 발언의 이유

 
조현 2012. 12. 10
조회수 2700추천수 0
 

 

강우일주교3-.jpg

10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책 출간 간담회에서 강우일 주교. 사진 조현

 

 

 

한국 사회에 현안이 발생할 때 ‘예수님이 온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연스런 질문이다. 어느새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하며 바라보는 얼굴이 있다. 강우일(67)주교다.

 

그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주교회의 의장인 때문만은 아니다. 2010년 구제역이 발생할 때부터 “인간들이 잘못 살고 있다”는 판단 아래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핵원전에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래 ‘침묵’이 대세인 교회지도층의 대사회적 목소리에 목말라온 교인들에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목마른 대지의 단비였다.

 

 그런 단비들을 모아 바오로딸출판사가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을 펴냈다. 50년 전 가톨릭 2천년 역사상 최대의 혁명을 꾀해 성당안의 교회를 세상으로 활짝 열어젖힌 제2차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와 생명 윤리 등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명쾌한 논리를 담은 책이다.

 

 10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연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사회적 발언에 대해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판이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여러번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항의한 분 탓이라기보다는 교회가 충분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지 못한 성직자의 부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인이 모델로 삼는 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어느 한군데 정주해있기보다는 늘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예수님이 당시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달랐던 점은 그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소외 되고, 밀려 나고, 저주 받던 밑바닥 계층 사람들과 가장 많이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메타노이아(회심)란 내부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다면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을 찾아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데 왜 교회 지도자들의 그렇지 못하냐”는 질문에 “주교들은 최종 행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분들이어서 태생적으로 쉽게 움직이기 어려렵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주교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혁명은 ‘하느님의 백성’이 곧 교회라는 것이므로 백성이 움직이면 곧 교회가 움직이는 것”고 말했다. 따라서 백성의 아픔이 있는 곳이 바로 성직자가 가야할 곳이라는 얘기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너무 가슴이 아파 소주 한 병만 올려달라고 했어요"

"너무 가슴이 아파 소주 한 병만 올려달라고 했어요"

[고공농성 현장③- 유성기업] 굴다리 난간에서 만난 홍정인 지회장

12.12.10 16:49l최종 업데이트 12.12.10 18:30l
심규상(djsim)

 

 

굴다위 난간 농성장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내가 울고 네가 웃는 절망 공장, 이겨서 다시 함께 웃자."

유성기업 정문 앞에 내걸린 현수막 글귀가 눈에 쏙 들어왔다. 9일 오후, 정문 안 공장 풍경은 평온해 보였다. 경비실 쪽에서 간간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선을 정문 앞 도로 쪽으로 돌렸다.

"노조파괴..." "부당노동행위..." "공장을 되찾자..." "투쟁..." 길게 늘어선 현수막이 붉은 깃발과 함께 어지럽게 휘날렸다. 정문을 사이로 풍경은 그렇게 갈렸다.

바람결이 칼칼하다. 깃발을 따라 가던 시선이 마지막 머문 곳은 굴다리 위 난간이다. 농사용 폐비닐과 폐자재를 쌓아놓은 듯 흉흉해 보이는, 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이다.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홍정인 유성기업 지회장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다. 밝은 표정과는 달리 덥수룩한 수염, 초췌한 얼굴... 목에는 굵은 밧줄이 무겁게 걸려 있다.

김순석 유성기업 아산부지회장이 밧줄 목걸이에 얽힌 사연을 설명했다.

"용역회사들의 노조파괴 공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민주노조가 깨졌나갔습니다. 홍 위원장이 목에 건 밧줄은 민주노조를 지키는 마지막 남은 끈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목에 매고 있어요."

가장 하고 싶은 일 "걷고 싶다"

7m 굴다리 난간 농성장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7m 위에서 홍 지회장의 몸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한 팔 길이 철재 몇 개에 얹어 있는 나무합판이다. 그 위에 비닐과 하우스용 거적을 덮어 비바람을 피하고 있다. 건물 난간에 얼기설기 지어 놓은 까치집이 연상됐다. 언뜻 보아도 초등학생 한 명이 눕기도 벅찬 공간이다. 다리나 펼 수 있을까?

"구부리고 살아요. 누워서 허공에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만 다리를 펼 수 있어요. 허공에 다리 뻗고, 윗몸 일으키기 하는 게 여기서 할 수 있는 운동이죠."

그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는 질문에도 거침없이 "걷고 싶다"고 말했다. 움직이라고 있는 발로 허공만을 딛고 있다. 프랑스 모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몸은 좀 어때요?
"처음에는 변비로 고생했는데 지금은 설사를 좀 하고, 소화가 잘 안되네요.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인지 무릎 관절하고 허리가 안 좋아요."

굴다리 난간, 소음-진동-먼지에 비행기까지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휴대폰처럼 대화가 중간 중간 끊겼다. 소음 때문이었다. 인근 군비행장으로 헬기와 군수송기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굴다리 위, 아래를 오가는 대형트럭의 엔진음과 진동도 대화흐름을 끊어 놓았다.

"소음과 진동이 장난 아녜요. 그나마 오늘은 휴일이라 덜한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먼지도 많아요. 날씨 좋은 날은 먼지 터는 게 일이에요."

그 사이 적십자 마크를 새긴 군 헬기 한 대가 다시 요동을 치며 지나갔다.

50일 전인 지난 10월 21일. 그는 아내(윤현미·42)에게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며 집을 나섰다. 그 길로 곧장 굴다리 난간 위에 올라갔다. 물론 계획된 일이었다. "붙들고 놔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할 까봐"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목에 밧줄을 걸고 50일 째(9일) 굴다위 난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홍정인 유성기업지회장.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지난해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밤에 잠 좀 자게해 달라며 주간연속 2교대제 시행을 요구했다. 사측은 노사합의를 깨고 공격적 직장폐쇄, 용역을 동원한 폭력, 노조원 구속, 27명의 노동자 해고, 어용노조 설립으로 대응했다.

지난 10월 국회청문회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이 사측과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용역업체와 노조파괴를 위한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것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용역업체에게 가해진 제재는 설립인가 취소와 벌금 몇십만 원이 전부였다.

조합원 17명이 구속돼 그 중 2명은 여전히 투옥 중이다. 반면 사용자 측은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 대전지법 천안지원과 중앙노동위원회가 최근 각각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결했지만 복직되지 않고 있다.

현장방문 안 한 박근혜-문재인 후보... "찾아와서 현장 목소리 들어야"

농성장을 지키던 한 유성기업 노조원은 "지회장이 유성기업 문제가 대선국면에 파묻히는 걸 막으려 올라갔는데 여전히 언론에는 대선 후보들 얘기만 나오고 후보들도 우리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며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농성현장을 찾은 대선 후보는 이정희, 김순자, 김소연 후보와 심상정 전 예비후보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한 번도 현장에 오지 않았다. 문 후보 측은 그나마 캠프 관계자가 한 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다시 홍 지회장에게 물었다.

- 오늘이 꼭 50일째인데 난간 농성을 하기 전과 달라진 게 있나요?
"회사 측, 경찰과 검찰, 고용노동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검찰은 불법노동행위가 명백히 밝혀졌는 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요. 고용노동부는 11월 말까지 사측에 대한 행정제재 등 방안을 밝히겠다고 하더니 눈치만 보고 있어요. 반면 현장 조합원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현장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 유성기업 문제가 왜 이렇게 악화됐다고 생각하는지요?
"MB 정부의 친 자본주의, 친 재벌 정책 때문입니다. MB 정부 성향을 믿고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여기에 경찰과 고용노동부 등 유관기관이 죄다 움직인 겁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단 얘기죠. 지금도 고용노동부가 대선결과를 놓고 움직이려고 눈치만 보고 있다고 봅니다."

- 대선 후보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요?
"말로만 떠드는 정치공약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해결' 하겠다고 하는데 막연한 얘기는 지금 힘들어 하는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안 됩니다. 찾아와서 현장의 고민을 들어야 하고 현장의 요구를 정책으로 담아 발표해야죠. 현안 파악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 새해 소망은요?
"싸움에서 승리해서 굴다리 아래에서 모두 모여 막걸리 건배를 하고 싶습니다."

농성장 옆으로 쉴새없이 대형트럭이 지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농성 전 후 달라진 것은? "현장 조합원... 고용노동부, 검-경은 그대로"

농성기간 홍 위원장이 가장 힘들었던 일은 조합원의 자살소식이었다. 지난 5일 유성기업에서 일해오던 50대 노동자가 1년 넘게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숨진 노동자의 현장일기를 보면 업무 복귀 이후 사측이 쇠파이프를 들게 하는 등 구사대 역할을 하도록 강요했다. 노조 관계자들은 '동료들과 맞서야 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처음으로 소주 한 병만 올려달라고 했어요. 많이 마시면 안 된다며 반병만 올려주더군요. 힘들었어요. 지금도..."

목소리가 젖어드는가 싶더니 잦아들었다. 그는 "사측 책임자 처벌이 가시화되고 해고자 복직, 어용노조 해산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부인은 기다려온 휴일을 맞아 남편을 위해 손수 음식을 장만해왔다.

"옷가지를 싸달라고 할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마음은 아프지만 워낙 의지가 강한 분이니까 큰 걱정은 안 해요."

굴다리 아래 마련된 농성장에서 남편에게 올려줄 간식꺼리를 챙기며 부인 윤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남편보다는 아들 녀석(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문에 짠해요. '아빠를 만나면 울기만 할 것 같다' '그러면 아빠가 약해지지 않겠냐'며 아직까지 보고 싶은 걸 꾹 참고 농성장에 한 번도 안 왔어요."

'아빠가 약해질까봐..' 속 깊은 13살 아들

굴다리 아래 천막 농성장은 조합원 가족 아이들의 놀이터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굴다리 아래 천막에는 조합원들이 교대로 대기 중이다. 폭압적인 사측의 탄압과 회유에도 50% 가까운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현장과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조합원들의 마음은 충청권 노동자들의 마음까지 하나로 모았다. 충청권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오는 14일 일제히 유성기업 농성노동자를 위한 연대파업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30년 동안 유성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조합원은 "예전에는 생산직과 사무직이 유니폼은 물론 먹는 음식까지 다를 만큼 차별과 모욕이 심했다"며 "하나씩 문제를 풀어오는 동안 조합원들이 단결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배 노동자들의 희생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14일 검찰과 노동부는 사건 발생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유성기업 사측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압수수색한 자료 속에는 창조컨설팅 관계자와 사측이 인근 염작리 OOO-O 번지에서 수시로 만나 모의를 해왔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자료가 들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창조컨설팅 관계자와 사측이 수시로 만나 노조파괴 모의를 해왔던 것으로 밝혀진 염작리 OOO-O 번지에서 본 풍경. 멀이 유성기업이 내려다 보인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네비게이션을 이용해 찾은 모의현장은 과수원 인근 작은 언덕이었다. 먼발치로 유성기업이 내려다 보였다. 그들은 유성기업 현장을 내려다보며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을까.

홍 지회장은 굴다리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공장을 내려다 보고 있다. 그가 시민들과 조합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결같다.

"올라와서 느낀 것은 고마움뿐입니다.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찾아와주시고, 문자를 보내주시고, 전화해주시는 응원이야말로 힘입니다.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박근혜 '지하경제 활성화' 공짜 7억 성북동집 때문?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2/11 06:44
  • 수정일
    2012/12/11 06:4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18대 대선 2차 TV토론이 어제 열렸습니다. 어제 TV토론은 이정희 후보의 강력한 '재벌 해체'와 공중파의 삼성 비판이 나왔으면서, 한편으로는 박근혜 후보 검증에 대한 새로운 논제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1차 토론 때는 '청와대 6억 원'이었는데, 2차 토론에서는 무상으로 받은 성북동 집에 대한 '세금 납부'와 '지하경제 활성화' 였습니다.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향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18년 동안 청와대라고 불리는 집에 사시다가, 81년에 성북동 주택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집은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이 무상으로 지어준 저택이었습니다. 잔디 깔린 마당이 있는 300평이 넘는 이 집을 거저 넘겨받으셨는데, 박 후보는 증여세 취득세 등록세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야말로 그냥 받으신 것이지요."(이정희 후보)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 후보의 세금을 납부했느냐는 질문에 '단일화 사퇴 여부'를 거론하며 성북동 집에 대한 세금 납부 여부를 피해 갔지만, 사실 이 부분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라면 반드시 그 해명 여부와 경위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는 전혀 여기에 대한 처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하지 않았지만, 꼭 검증해야 할 박근혜 후보의 성북동 집과 세금 납부 여부를 조사해봤습니다.

'박근혜 성북동 집, 대지 400평, 건평 300평, 시가 7억'

1979년 박근혜 후보는 10.26 이후 신당동 사저로 이사합니다. 그 후 1982년 성북동으로 이사하는데, 이때 성북동 집으로 이사한 이유를 박 후보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돈도 하고 그럴 필요성이 생겼는데 신당동 집이 좁아서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2007년 경선 청문회 박근혜 후보 발언)

앞서 포스팅에서 밝혔듯이 신당동 집도(대지 99평, 건평 39평,방 5개) 일반 서민이 살기에는 전혀 좁지 않은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신독재 기간의 유품이 얼마나 많았는지 박근혜 후보는 좁다며 결국 신당동 집을 떠나 성북동으로 갑니다.

[정치] - 소녀 가장(?) '박근혜'가 받은 6억 원의 실체

 

 

 


청와대 넓은 곳에 살던 박근혜 후보에게 대지 99평,건평 39평, 방 5개 신당동 집은 좁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옮긴 성북동 집은 커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대지 400평에 건평 300평으로 당시 시가로 7억 원짜리 집이었습니다.

저택이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얼마나 컸냐하면, 1982년 박근혜 후보의 동생 박근영 (당세 28세)이 풍산금속 회장 유찬우씨의 장남 유청씨와의 결혼식을 성북동 저택에서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1970년대부터 성북동에는 삼성,현대,LG 등 굴지의 재벌가 사람들이 줄지어 살았고, 주한 외국대사의 관저들도 많을 정도로 부자동네로 유명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소유했던 대지 400평에 건평 300평짜리 성북동 집은 한마디로 재벌들이 몰려 사는 동네에서도 보기 드물게 아주 커다란 저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신기수는 왜 성북동 집을 박근혜에게 무상으로 줬을까?'

성북동 집은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지어준 집입니다. 박근혜 후보는 신기수 회장이 성북동 집을 지어준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분이니, 좀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으니까, 거기에 유품도 다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이사를 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있어서 받아들인 것” (2007년 경선 청문회 박근혜 후보 발언)

먼저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누군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는 듯한데, 1983년 45살의 나이로 26살의 여배우 장미희 씨와 약혼을 했던 인물입니다.

 

 

▲1983년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과 장미희씨의 약혼소식을 보도한 경향신문.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성북동 집을 지어준 배경을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박정희와 인연'이라고 주장하고, 신기수 회장은 전두환의 지시로 지어줬다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기수 회장은 박정희,전두환보다는 오히려 박근혜 후보와 더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먼저 신동아에 나왔던 안기부 보고서의 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4년 안기부는 신기수 당시 경남기업 회장을 소환조사했다. 조사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면서 박근혜 관련 문제도 나왔다. 신기수는 1979년 박근혜 측근 최태민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이 되어 거액의 운영비를 냈고 10·26 이후엔 박근혜에게 성북동 자택을 지어줬다. 박근혜는 1980년 영남대 재단이사장이 된 뒤 신기수를 영남대 이사로 임명하는 한편 경남기업이 영남대 발주 공사를 맡도록 했다. 신기수는 공사 수주는 성북동 집을 지어준 것과 연관이 있다고 자백했다. 신기수는 인기 여배우 A양과의 관계, 박근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다.” (신동아 2007년 7월1일 574호 발췌)


 

 

 



박근혜 후보와 신기수 회장 사이에는 박정희가 아니라 최태민 목사가 있었습니다. 최태민 목사가 주도한 구국봉사단에서 박근혜, 신기수 회장은 처음 만났고, 최태민 목사의 부정부패로 박근혜가 구국봉사단 총재로 취임할 때에도 신기수 회장은 구국봉사단 운영위원이었습니다.

구국봉사단을 시작으로 박근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신기수 회장이 있었습니다. 육영재단 이사장 시절에는 신기수 회장도 육영재단 이사로, 박근혜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있었을 때는 정수장학회 이사로 등재됐습니다.

두 사람의 성북동 집에 관한 의혹이 생긴 배경에는 박근혜가 영남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신기수 회장이 영남대학 이사로 있으면서 영남대학병원 본과 건물을 수주했던 점입니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1980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단지 대통령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합니다. 당시 이사진은 10.26세대의 주역들이었는데, 박근혜의 이사장 취임으로 대거 이사진이 교체되는데, 이때 신기수 회장도 영남대 이사로 취임합니다.

영남대는 1979년 지하 3층,지상13층,연건평 1만2,793평 규모로 의과대학과 병원을 짓는데, 이때 시공업체는 '한국건업주식회사'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980년 영남대 재단 이사진 개편 등의 이유로 병원 공사는 중단됐고, 이후 경남기업으로 변경돼 다시 공사를 재개합니다.

1981년 건설사가 경남기업으로 변경될 당시 박근혜와 신기수 회장은 영남대 재단 이사였습니다. 객관적으로 성북동 저택을 지어준 신기수 회장이 공사를 시작한 1978년부터 박근혜 후보와 신기수 회장은 여러모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1980년 성북동 집으로 이사할 당시에는 영남대 이사장과 이사로 끈끈한(?) 인맥을 잇고 있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박근혜 후보가 단지 '아버지와의 인연'을 강조하기에는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공짜로 받은 7억원이 19억짜리 집으로'

박근혜 후보의 재산 신고에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삼성동 주택입니다. 박근혜 후보의 삼성동 주택은 대지 1백 47평에 2층 벽돌주택(연면적 96평)으로 총 재산신고액 21억8,104만 원 중 19억4,000만 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삼성동 주택을 구입하게 된 배경이 석연치가 않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에게 무상으로 받은 시가 7억짜리 집을 1984년에 팔고 옥수동 26평 아파트를 4천6백 만 원에 구입합니다. 당시 박근혜는 동새 지만씨에게도 용산구 한남동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다면 거의 1억에 가까운 돈을 지출합니다.

그 후 장충동 집을 산 뒤 1990년 삼성동 현재의 자택으로 이사하는 데, 이 당시 장충동 집은 6억이고, 삼성동 자택은 시가 10억 짜리 집입니다. 차액 4억 원이 더 필요한 시기였지만,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1982년 신기수 회장으로 받은 시가 7억 짜리 집을 무상으로 증여받으면서 증여세는 물론이고, 취등록세를 내지 않았다고 본인의 입으로 밝혔습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청문회에서 박근혜 후보는 성북동 집에 관련한 세금 납부를 묻는 질문에 "그때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신 회장에게) 그냥 믿고 맡겼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결국 박근혜 후보가 서류상 '매매'로 해놓고 증여받은 것이 확실하지만,세금은 내지 않은 것이 됩니다.

만약 박근혜 후보가 지난 1982년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받은 성북동 집에 대한 세금을 낸다면 얼마나 내야 하나 대략 계산해봤습니다.
 

 


 

▲ 단순히 시가 7억짜리 집을 증여받은 것으로 대략 계산한 것임.

 


시가 7억짜리 부동산을 취득할 때 내야 하는 돈은 2천5백만 원 가량인데, 납부지연일수가 있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상으로 집을 받았기 때문에 증여에 해당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대략 1억3천3백만 원 정도입니다.

이 두 개를 합치면 1억5천만 원 정도 되는데, 세무 전문가의 정확한 계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8대 대선 후보들의 재산 밀 납세액 현황. 출처:민중의 소리

 


박근혜,문재인,이정희 후보의 재산신고와 납부 세액을 보면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제일 재산이 많지만, 세금은 가장 적게 냈습니다. 세금은 무조건 내는 것이 아니라 가구별 공제와 가구 수입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문재인 후보의 경우 부인이 일하지 않기에 공제를 받고, 이정희 후보는 남편도 변호사이기에 세금 공제가 적어 제일 많이 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세금공제를 받을 수 있는 배우자나 자식이 없는 박근혜 후보가 왜 이리 세금을 적게 냈을까요?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을 대한민국 언론은 파헤치지 않을까요?
 


 



박근혜 후보는 어제 열린 대선 2차 토론에서 5조 8천억을 '오쩜 팔조'라고 하기도 하고, 비자금,사채,마약,범죄 자금으로 불리는 '지하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 후보의 이런 실수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4라는 부분도 우선 세금을 걷는다고 달려들기 전 비과세 감면(축소) 등이 있고, ‘지하경제활성화’로 투명하게 세원을 해서 10이라는 재원을 마련하겠다” (8월22일 기자 간담회, 박근혜 후보 발언)

'아이엠피터'는 작년 원고료가 늘면서 연소득 500만 원이 겨우 넘었습니다. 그런데 연소득 500만 원 이상이라고 기존에 5만 원 내던 건강보험료를 이제 8만 원씩 냅니다. 소득은 100만 원 늘었는데, 그중에 보험료만 40만 원을 더 내야 합니다. 원고료는 무조건 세금 공제를 해서 '아이엠피터'는 세금 탈루를 하려고 해도 절대 못합니다.

 

 

 



지하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금을 탈루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자꾸 '지하경제 활성화'를 말하는 이유가 자신이 성북동 집을 무상으로 취득하면서 억대에 가까운 세금을 탈루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제 열린 토론 주제는 '경제민주화'였습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소득대비 정당하게 세금을 내자는 마음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정책을 실천하려면, 정책을 펼치는 사람 본인부터 세금을 법에 따라 납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이 미사일을 초고속으로 만들어낸 비결

 

 

 

북이 미사일을 초고속으로 만들어낸 비결
 
[한호석의 개벽예감](40) “북의 미사일개발사는 미국 굴복의 역사”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2/12/10 [22:2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위성운반로켓이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바뀐 사연

2012년 12월 6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 나타난 태평양사령관이며 해군제독인 새뮤얼 락클리어 3세(Samuel J. Locklear III)는 국방부 출입기자단에게 북이 현재 준비 중인 위성 발사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북측 지도부의 현재 행동이 한반도와 아시아의 전반적인 안보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고려해주기 권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지역만이 아니라 국제안보환경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이 발언은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동일시하는 미국의 견해를 되풀이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요한 사실을 고의로 은폐하면서 북의 위성 발사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고 우기고 있다. 미국이 고의로 은폐한 것은,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였고, 지금은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우주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북이 위성운반로켓을 백두산 계열에서 은하 계열로 교체하였다는 데 있다. 북은 백두산 1호라는 이름의 위성운반로켓에 시험위성 광명성 1호를 실어 1998년 8월 31일에 쏘아올렸다. 위성운반로켓 백두산 1호는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설계기술로 만든 것이었다.

위성운반로켓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모든 나라들이 장거리 미사일 설계기술로 위성운반로켓을 만드는 초기개발단계를 거치는 법이다. 북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런 초기개발단계를 거쳤다. 그런데 만일 북이 15년이 지난 오늘에도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린다면, 북의 위성 발사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북이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북은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쏘아올리고 있다. 백두산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은 외형부터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북이 2009년 4월 5일에 두 번째로 쏘아올린 위성운반로켓에 백두산 2호가 아니라 은하 2호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인 것은, 단순히 명칭을 바꾼 것만이 아니라, 그 두 번째 위성운반로켓이 8년 전에 쏘아올린 첫 번째 위성운반로켓과는 전혀 다른 계열에 속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올해 북이 두 차례나 은하 3호를 쏘아올리면서 이전에 있었던 시험위성이 아니라 지구관측위성을 탑재한 것은 우주개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대륙간탄도미사일 티를 아직 벗지 못한 백두산 1호를 개발하였던 때로부터 그 티를 완전히 벗은 은하 계열의 신형 위성운반로켓을 개발하기까지 약 10년이 걸렸다. 북에서 그 10년은 위성운반로켓 제작기술의 비군사화를 실현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은하 계열의 위성운반로켓을 가리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우겨대는 미국의 생억지를 반박하려면, 북의 미사일 개발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필요하다.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북이 이미 오래 전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그것을 실전배치하였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위성운반로켓으로 위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인 사연

1975년 4월 18일부터 26일까지 김일성 주석은 오진우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을 대동하고 중국을 공식방문하였다. 14년 만의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부설 국제안보 및 군비통제 센터(CISAC)가 발간하는 <국제안보> 1992년 가을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당시 중국 방문 중에 탄도미사일 공동개발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제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그 제안에 즉각 응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중국은 북의 미사일 기술수준을 자기들보다 한 수 낮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과 전통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으로서는 북의 제안을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1970년대 북과 중국의 미사일 기술수준은 실제로 어떠하였을까? 북은 1973년에 소련에서 미사일 SSC-2B 여섯 기를 도입하였는데, 이 미사일은 탄두무게가 600kg, 사거리가 90km이며, 전파유도항법장치로 날아간다. 북은 이 소련제 미사일을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1974년에 마침내 미사일 생산국이 되었다.

<뉴욕 타임스> 1970년 11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분석가들은 중국이 핵탄두를 탑재하고 1,600km를 날아가는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고, 1970년 말 현재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1년 8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마쳤다고 한다. 또한 1975년 4월 14일에 발간된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가정보기관은 중국이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실어놓은 것을 항공정찰을 통해 포착하였다고 한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당시 북은 사거리 90km의 단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는데 비해, 중국은 사거리 2,4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북과 중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기술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당시 중국은 북보다 무려 26배나 앞서 있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중국이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며 응답을 하지 않던 중국이 1976년 말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을 받아들였다. 1년 반이나 시간을 끌던 중국은 왜 1976년 말에 북의 미사일 공동개발 제안에 응하였을까? 너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 관련정보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주의 깊게 분석하면 아래와 같은 내막을 엿볼 수 있다.

1970년 대 중반부터 중국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제기된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1973년 7월 2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및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소속 관리들은 중국이 핵무기 개발사업에서는 급속한 진전을 보고 있지만, 그 운반수단인 미사일을 개발하는 사업에서는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미국의 항공우주전문지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Aviation Weekly and Space Technology)> 1975년 10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은 2단형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데서 기술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주간 항공과 우주공학> 1976년 10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중국의 미사일 개발사업은 미국 정보기관이 이전에 예측한 것처럼 그렇게 급속히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의 경제적 한계와 기술적 제한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고 하였다. <워싱턴 포스트> 1977년 8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은 중국이 가까운 장래에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만큼 미사일 개발의 진척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중국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험악한 갈등을 빚고 있었으므로 중국은 미사일 기술수준에서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소련으로부터 관련기술을 도입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중국은 소련이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발전된 미사일 설계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에게 정치군사적으로 그처럼 중요한 미사일 설계기술을 넘겨줄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1976년 어느 날, 중국은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놀라운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북이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하였다는 정보였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중동전쟁에서 참패하여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이집트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리아는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러나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 군사지원단으로부터 배운 엉성한 소련식 전법을 가지고서는 강적 이스라엘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영토수복전쟁을 준비하면서도 고심해오던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동방의 어느 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집트의 나쎄르 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싸드 대통령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고 그 두 나라에 인민군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군사지원단을 파견해주었다. 파견된 인민군 군사지원단은 강적 이스라엘을 제압할 기상천외한 ‘주체전법’을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에 전수해주었을 뿐 아니라, 영토수복전쟁이 개시되자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이 기습편대를 편성하여 직접 미그 전투기를 몰고 초저공 기습침투비행으로 이스라엘 공군기지를 급습하였고 최전방에 출격하여 이스라엘 공군기들과 공중전을 벌였다. 그 전쟁에서 기상천외한 초저공 기습침투비행과 놀라운 공중전 기술로 이스라엘 공군을 격파한 인민군 기습편대를 이끈 전쟁영웅이 바로 젊은 시절의 전투비행사 조명록 차수다.

전쟁 직후, 북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동한 나쎄르 대통령은 소련이 이집트에 제공해주면서 제3국에 절대로 넘겨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소련제 탄도미사일 스커드-B 두 기와 그 미사일을 탑재하는 4축8륜 발사차량 MAZ 543 두 대를 소련 몰래 북에 보냈다. 북은 그 소련제 미사일 두 기를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신형 미사일 설계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데 앞장선 자칭 미사일 전문가 로벗 쉬무커(Robert H. Schmucker)는 1999년 6월 스코틀란드 에딘버러에서 열린 제12차 미사일 방어 다국적 회의에 제출한 글 ‘제3세계 미사일 개발: 유엔특별위 경험과 자료평가에 기초한 새로운 평가’에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과 소련, 중국, 이라크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비교하면서, 북의 미사일 개발기간이 매우 짧고 미사일 시험발사도 매우 적게 실시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대북혐오감에 사로잡힌 그의 두뇌로 북의 미사일 개발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쉬무커의 지적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는 기간은 7년에서 10년이 걸리고, 실전배치하기 전에 세 차례에서 일곱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법으로 미사일을 모방생산하는 경우에도, 미사일 생산국으로부터 전폭적인 기술지원을 받으며 20기에서 50기에 이르는 견본 미사일을 도입하여 분해-역설계하고, 여러 차례 시험발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북은 스커드-B 생산국인 소련으로부터 기술지원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이집트가 소련 몰래 넘겨준 단 두 기의 견본 미사일을 자력으로 분해하고 역설계하고, 불과 몇 해만에 초고속으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중국이 개발을 포기한 둥펑 61, 북이 개발에 성공한 화성 7호

북의 미사일 기술자들이 스커드-B 설계도를 들고 중국에 가서 중국의 미사일 기술자들과 함께 신형 미사일 개발에 달라붙었다. 1976년 말부터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을 추진하였던 그 미사일은 길이 11m, 탄두무게 1t, 사거리 600km이며,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하는 단거리 미사일이었다.

북중 미사일 공동개발사업은 약 2년 간 지속되다가 당시 중국 내부에 복잡하게 조성된 정치상황 때문에 1978년 말에 중단되었다. 2년 동안 북과 중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신형 미사일의 완성도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북과 중국이 적극 협력하면서 밀고나갔으므로 상당한 진척을 보았을 것이다.

중국이 자기 내부 정치사정으로 북과 추진해오던 미사일 공동개발을 중지하였지만, 북과 중국은 공동개발사업을 중단한 이후에도 각자 단독으로 미사일 개발을 계속 추진하였다. <뉴욕 타임스> 1979년 7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에서 송출되는 중국 라디오 방송은 중국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나온 자료들에 따르면, 당시 북과 중국이 미완으로 끝낸 공동개발에서 설계된 신형 미사일 명칭은 ‘둥펑(東風) 61’이다. 공동개발이었으므로, 중국이 중국식 명칭을 붙인 것에 상응해서 북도 당연히 조선식 명칭을 붙였을 것인데, 북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 전문가들은 조선식 미사일 명칭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981년에 북이 개발한 미사일의 명칭이 태양을 중심으로 우주를 도는 붉은 별의 이름을 따서 화성(火星)으로 붙여졌다는 사실이 북측 외부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는데, 오만하고 무식한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이라는 고유명칭이 알려진 뒤에도 여전히 ‘스커드’라는 소련식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고집으로만 볼 게 아니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미사일 기술을 자체로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덮어버리고, 소련의 미사일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미련한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1981년에 개발한 화성 미사일은 1976년 말부터 약 2년 동안 북이 중국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었던 탄도미사일의 탄두무게를 1,000kg에서 800kg으로 줄이는 대신, 사거리를 600km에서 800km로 늘인 것이다. 이 신형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북의 미사일 능력을 축소하기 좋아하는 미국 전문가들은 화성 7호를 화성 5호 또는 화성 6호와 헷갈렸다. 어떤 전문가는 북이 소련제 미사일 스커드-B를 개량하여 1985년에 화성 5호를 만들었는데, 사거리가 320km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런 주장은 의도적인 왜곡이 아니면 착오다.

북이 화성 7호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들은 나라들이 평양에 대표단을 보내 구입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1983년 4월 5일 당시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는 북을 공식방문하여 화성 7호를 구입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9월 6일에는 국방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이집트 군사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또한 1983년 10월 23일 이란 국무총리 루홀라 무사비(Ruhollah Musavi)와 국방장관 모하메드 할리미(Mohammed Salimi)도 이집트에 이어 북을 공식방문하고 화성 7호 구입계약을 체결하였다. 북은 이란에 화성 7호 120기와 발사차량 20대를 수출하였고, 나중에는 화성 7호 생산시설을 수출하고 기술진을 파견하여 현지에 생산공장까지 세워주었다. 북에서 건설해준 이란의 화성 7호 생산시설에서 만들어낸 미사일이 샤합(Shahab) 2호인데, 화성 7호에 비교하여 탄두무게를 800kg에서 990kg으로 늘인 대신, 사거리는 800km에서 750km로 줄였다.

이처럼 북은 화성 7호를 이집트와 이란에 대량 수출하였을 뿐 아니라, 쿠바, 민주콩고, 시리아, 미얀마, 리비아, 베트남, 예맨, 에디오피아,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에도 수출하였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이 화성 7호 1,000기를 생산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북이 1981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동안 생산한 화성 7호가 1,000기에 이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북, 마침내 화성 미사일을 발사하다

<서울신문> 1991년 12월 7일 보도에 따르면, 그 해 가을 북과 중국이 공동개발한 미사일을 중국 닝샤후이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시험발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과 중국은 미사일 공동개발을 1978년 말에 중단한 이후 미사일 공동개발을 재개한 적이 없으므로, 1991년에 중국에서 시험발사된 미사일을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발하였다고 보도한 것은 오보였다. 명백하게도, 그 미사일은 북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데, 북은 자기의 미사일 개발에 관한 정보가 미국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국의 동의를 얻어 중국에서 시험발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신형 미사일이 어떤 미사일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9개월 정도가 지난 1993년 5월 말에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언론인 데이빗 생어(David E. Sanger)가 1993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에 쓴 보도기사에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들어있다. 그 기사는 1993년 5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북이 발사한 미사일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데이빗 생어가 일본 정부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북의 미사일 발사지점을 강원도 원산 부근 미사일 기지라고 쓴 것은 착오였고, 실제는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 해안에서 도로이동식 발사차량에 탑재한 미사일을 동해 쪽으로 쏜 것이었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일본 열도의 동해 쪽에 있는 노토반도(能登半島) 쪽으로 미사일을 쏘았다고만 하였으나, 실상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그 미사일이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던 것이다. 북이 발사한 미사일이 부표표적에 명중하였다는 사실은, 1991년 10월 4일 <연합뉴스>에 보도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서동권의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북은 미사일 탄착상황을 관측하기 위해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동해 해상에 라진급 프리깃함 한 척과 소해정 한 척을 서로 30km 거리를 두고 배치하였다.

데이빗 생어는 그 기사에서 북이 노토반도 쪽으로 발사한 미사일의 사거리를 1,000km로 추정하면서, 실제는 500km밖에 날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가 보도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이 무수단 해안에서 쏜 미사일이 500km를 날아갔다면, 그 미사일은 노토반도를 넘어가서 도야마만(富山灣) 한 복판에 떨어졌을 것이지만, 북의 프리깃함이 일본 영해 안으로 들어가 부표표적을 설치할 리는 없으므로 실제 탄착점은 노토반도에서 서북쪽으로 떨어진 해상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해의 폭이 좁으므로, 북은 미사일 사거리를 일부러 500km로 줄여 쏘았다.

바다에 띄워놓은 부표표적이 크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북이 쏜 미사일이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춘 것은 명중률이 매우 높은 미사일을 쏘았음을 말해준다. 특히 그 미사일은 탄도비행 마지막 단계에서 탄두가 동체에서 분리되어 초고속으로 낙하하였는데, 탄두와 동체의 상호분리가 미사일 항법기능을 더욱 높여주어 명중률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되었다.

데이빗 생어의 지적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미사일은 무게 1t짜리 육중한 탄두를 싣고 1,300km를 날아갈 수 있다. 탄두무게가 1t이라는 것은 고폭탄두나 화학탄두는 물론이고 더 중요하게는 핵탄두까지 실을 수 있음을 뜻한다. 북이 1993년 5월 29일에 발사한 명중률이 매우 높은,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그 준중거리 미사일이 바로 화성 7호다. 미국은 화성 7호를 로동 1호라고 제멋대로 부른다.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하여 500km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명중시키자,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사거리가 1,300km인 화성 7호는 일본 열도를 타격권 안에 넣고 있을 뿐 아니라, 저 멀리 북으로는 호카이도에서 남으로는 오키나와까지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이 일본 전역을 타격할 미사일 공격력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 발사를 보고 일본 방위청(당시 명칭)은 “매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화성 7호의 충격에 휩싸인 일본은 자기의 보호자인 미국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93년 8월 2일 일본 방위청 사무차관 하타케야마 시게루(畑山蕃)는 미국 국방부 정책담당 부장관 프랭크 와이즈너(Frank Wisner)와 회담을 갖고 화성 7호에 대처하기 위한 미일 공동위원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일본 방위청은 북의 미사일 발사를 감시할 정찰위성을 개발하는 비공개 연구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북의 화성 7호 발사는 새로 개발한 미사일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미사일을 수입하려는 나라들에게 실제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발사였다. 이에 대해서는 1993년 8월 15일 <워싱턴 타임스>가 보도한 주한미국군사령관 출신 로벗 리스카시(Robert RisCassi)의 발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바 있다.

물론 북이 화성 7호 미사일을 발사한 목적이 미사일 수입국들에게 성능을 보여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고, 미국을 압박하여 북미 양자회담에 끌어내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치적 목적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발사 당일 현장에서는 이란의 미사일 전문가들과 파키스탄의 미사일 전문가들이 화성 7호 미사일 발사를 참관하였다. 1993년 7월 14일 일본 언론은 이란 정부 대표단이 이미 1993년 4월에 방북하여 화성 7호 미사일 150기를 수입하는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고 보도하였다. 다른 한 편, 1993년 12월에는 당시 파키스탄 총리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북을 공식방문하였다. 그녀의 방북 역시 화성 7호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2010년 3월 29일 <통일뉴스>에 발표한 나의 글 ‘이상한 핵실험과 핵확산 재개’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이란이 북으로부터 화성 7호를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이스라엘은 발칵 뒤집혔다. 왜냐하면 이란이 화성 7호로 무장하는 날, 이스라엘은 심각한 미사일 피격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의 화성 7호가 이란에 들어가는 것을 차단해야 할 절박한 요구를 느낀 이스라엘은 1993년 6월 14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 쉬몬 페레스(Shimon Peres)의 방북의사를 밝혔고, 6월 25일 당시 이스라엘 외무부 부총국장 에이탄 벤트수르(Eitan Bentsur)는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관리를 만나 이란에 화성 7호를 수출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중동문제에 관해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그처럼 민감한 협상현안이 해결될 리 만무하였다. 1993년 8월 16일 이스라엘 총리 이작 라빈(Yitzhak Rabin)은 중동지역에 미사일을 수출하려는 북과의 협상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화성 7호는 이란으로 가서 샤합(Shahab) 3호가 되었고, 파키스탄으로 가서 가우리(Ghauri) 2호가 되었고, 시리아에서도 면허생산되었다.

두 종류의 화성 미사일을 더 쏘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력적인 지도로 추진된 북의 국방공업 강화사업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실무적으로 집행하였던 김광진 차수(당시 직책은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는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이 북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말을 1990년 10월에 남긴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12년 9월 17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제4핵강국의 조용한 등장 알려주는 사진’에서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위의 정보에 따르면, 북의 화성 7호가 일본 노토반도 앞바다에 떠있는 부표표적을 맞춘 놀라운 미사일 정밀도를 과시하였던 1993년 5월 말 현재 북은 사거리 1,3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 화성 7호 이외에 사거리 4,000km 이상의 중거리 미사일도 생산하고 있었다.

미국 언론의 관련보도에 따르면, 북이 1993년 5월 29일 화성 7호 한 기를 발사한 뒤, 이튿날에는 다른 종류의 미사일 두 기를 더 쏘았는데, 이튿날에 쏜 미사일 두 기는 100km 정도 날아간 단거리 미사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추측보도는 사실과 다른 엉터리 보도다. 1993년 5월 30일 북이 두 번째로 쏜 미사일 두 기는 화성 8호와 화성 9호였다. 화성 8호는 사거리 2,0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이고, 화성 9호는 사거리 4,000km의 중거리 미사일이다.

북은 화성 8호를 남쪽으로, 화성 9호를 동쪽으로 각각 쏘았다. 화성 8호는 무수단에서 동중국해를 넘어 서태평양의 미국 영토인 괌(Guam)으로 날아가, 괌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서태평양 해상에 떨어졌다. 다시 말해서, 무수단에서 괌까지 거리가 2,100km이므로, 화성 8호는 괌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서태평양에 탄착한 것이다.

화성 9호는 무수단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 쓰가루 해협(津輕海峽)을 넘어, 북태평양의 미국 영토 미드웨이제도(Midway Islands)를 넘어, 하와이 쪽으로 날아가다가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에서 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해상에 탄착하였다. 다시 말하면, 무수단에서 하와이 진주항까지 거리가 4,400km이므로, 화성 9호는 하와이 가까이 날아간 것이다.

일본은 화성 8호와 화성 9호가 자기들 머리 위로 넘어가 서태평양과 북태평양 한 복판에 각각 떨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노토반도 쪽으로 날아간 화성 7호만 보고 깜짝 놀라 소동을 피우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를 보고 경악과 충격을 겪은 쪽은 미국이었다. 북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기들의 태평양 전략거점들인 괌과 하와이가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타격권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성 8호와 화성 9호의 충격을 겪은 미국은 1993년 6월 2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진행된 북미 양자회담에 끌려 나갔으며, 그 회담에서 미국이 북의 주권을 존중하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으로 된 북미 공동성명을 사상 처음으로 채택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적국의 무력압박을 견디지 못해 적국이 요구한 양자회담에 끌려 나가 적국이 요구하는 내용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해준 것은 미국이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였음을 말해준다. 1993년의 북미관계가 잘 말해주는 것처럼, 북의 미사일 개발사는 미국과의 격렬한 무력대결에서 이긴 북이 미국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킨 역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북은 미국으로부터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마지막 정치적 굴복을 받아내려는 반미대결전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2012년 12월 9일)


관련기사
 
북의 주체강철이 자동차 산업 일으킨다
 
무차별 공습에 맞서 싸우는 카쌈로켓
 
화성 7호는 왜 서쪽으로 갔을까?
 
재앙냄새 풍기는 박근혜 후보의 대북정책
 
‘불소나기’와 ‘핵우박’을 부르는 대북전단살포
 
헌정질서에 반하는 한국군 정신교육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한국전쟁유족회, 새누리당사 앞 박근혜 후보 규탄회견

 

"130만 유족에 박정희 못지 않은 가해 주었다"
한국전쟁유족회, 새누리당사 앞 박근혜 후보 규탄회견
 
 
2012년 12월 10일 (월) 14:56:09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전국유족회가 10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근혜 후보는 우리민족 최대의 불행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전쟁전후 민긴인 희생으로 인한 130만 유족의 마음에 또다시 아버지 박정희 못지 않은 가해를 주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는 10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를 규탄했다.

윤호상 상임대표는 “우리가 2012년 4월부터 금년 12월 4일까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선후보에게 우리 한국전쟁 피학살자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책제안을 했다”며 “그러나 우리 한국전쟁 유족들과 어느 것 하나 공식적이나 비공식적인 대화를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4월 9일을 시작으로 6월 27일 8월 22일, 그리고 11월 28일 삭발모 전달 등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10,11월 매일 1인시위를 진행한 바 있다.

특히 11월 28일 기자회견 당시 12월 5일까지 유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했고, 새누리당 당직자는 이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를 대신하여 요구 내용을 전달받아 갔지만 지금까지 응답이 없었다.
 

   
▲ 참가자들은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규탄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윤호상 상임대표는 “이것은 명백히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고 오로지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 미봉책으로 과거사 운운하는 그릇된 망상임을 우리는 알게 됐다”며 “새누리당은 국민대통합을 외칠 자격이 없다. 오로지 대통령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거짓구호와 거짓공약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명운 추모연대 의장은 “당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백골이 길거리에서 나뒹굴고 있다면 당신들은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겠느냐”며 “바로 그것 때문에 중단된 과거사(위원회)를 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명운 의장은 “마지막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중단된 과거사(위원회) 다시 시작하라고 촉구한다”며 “지금은 청원하고 부탁하지만 당신(박근혜 후보)이 끝내 외면할 때, 새누리당이 끝까지 외면할 때 우리의 바람은 분노로 바뀔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양용해 상임대표의장이 낭독한 기자회견문을 통해 “결국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은폐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과거청산을 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법 제정에 언급조차 없는 것은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민대통합이 대선과정에서 표를 얻기 위한 한낮 구호에 불과한 정치적 술수였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냈다”며 “정치적 술수나 부리며 국민대통합을 외치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국민통합에 적합하지 않은 후보라 규정한다”고 못박았다.
 

   
▲ 매일 점심시간에 새누리당사 앞에서 1인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들은 “130만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표나 얻고자 형식적으로 국민대통합을 외치는 박근혜 후보의 기만적이고 진정성 없는 행동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며 “더이상 기만적인 행동을 못하도록 모든 유족들과 함께 적극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와 ‘올바른과거청산을위한단체협의회’ 등은 오는 12일 오후 1시에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사건 등 과거사진상규명 명예회복 기본법 입법공청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새누리당 당사 앞 1인시위도 지속할 계획이다.

한편 기자회견 도중 양용해 상임대표의장은 새누리당사 민원실로 찾아가 박근혜 후보에게 과거청산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문을 전달했다.

기자회견문을 전달받은 새누리당 민원실 담당자는 “지금 새누리당을 찾아오는 집단민원, 집단시위가 많아 통상적으로 똑같이 처리한다. 일단 접수받고 접수받은 내용을 보고드린다”며 “하나같이 몇 일까지 답 내놓으라고 다들 말씀하시는데 그때까지 답변을 드릴 수 없다. 법제정은 쉬운 게 아니다”고 해명했다.
 

   
▲ 양용해 상임대표의장이 새누리당 민원실로 향하자 새누리당 관계자가 나와 현장에서 접수하겠다고 설득했지만 양 의장은 끝까지 민원실에서 공식접수하겠다고 버텨 민원실에서 접수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에 대해 양 의장은 “우리가 금년 4월 9일부터 5번에 걸쳐 정책제안서를 냈고, 그때마다 기다려달라는 답을 받았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한 번의 답이 없었다”고 반박하고 “한 번도 답이 안 왔다는 것은 새누리당이 말하는 국민대통합은 허구와 기만이다”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민원실 관계자는 기자회견문을 현장에서 접수하겠다며 양 의장의 민원실 진입을 제지했지만 끝까지 민원실 내 공식접수를 요구하자 민원실로 안내했으며, 기자의 녹음취재에 대해서도 “이건 하지 말라”고 거부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 “박근혜는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가” · 과거청산단체들 “박 후보, 과거사위원회 설치 동의” 요구
· "과거청산은 국가의 책임이자 임무" · 과거사위, 영장 청구권과 청문회 개최권 법제화 필요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특별법 제정하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살때 엄마가 집을 나가고 여섯살 때 아버지 사망, 13살때부터 섬에서 머슴 산 이 사람

12월 겨울 초입

 
서영남 2012. 12. 05
조회수 329추천수 0
 

 
 
20121205_2.jpg » 한겨레 자료 사진.
 
어느새 12월입니다.
 
 
 
엄청 추운 날입니다. 우리 손님들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걱정이 되는 날씨입니다.
 
고마운 분들 덕분에 김장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특히 여성 감정평가사 모임에 감사드립니다. 김장비용을 도와주시고 또 그 추운 수요일에 김장을 거들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민들레의 집에 새 식구가 오셨습니다.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아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다닌 것이 학교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겨우 이름 석자를 씁니다. '확인용'이라는 글자가 너무 어려워 '학인용'이라고 썼습니다.
 
남해안 어느 섬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배를 탔습니다. 엄청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서른 즈음에 어떤 여자를 만나 동거를 했는데 돈 막 쓰다가 도망가버렸답니다. 카드 빚 막아주느라 죽을 고생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다리를 다쳤답니다. 아프니까 술을 마시고 그러면서 악순환이 되어 이제는 거의 고관절을 쓰지 못합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단 결과 인공 고관절 수술을 해야만 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민들레의 집으로 주소 이전을 하고 주민센터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을 편히 자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합니다. 이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면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는 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요즘은 베로니카와 함께 꿈을 꿉니다.
 
고마운 분께서 인천 시청 근처에 있는 어느 빌라 반지하 방을 2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빌려주셨습니다. 방 두칸짜리 도시가스가 되는 아담한 방입니다. 이제 내일 모레쯤 벽지를 바르고 전기선과 전등을 교체하고 텔레비전과 냉장고, 세탁기 등 살림살이를 마련하면 세 분의 VIP 손님들께 선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분을 초대하면 좋을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작은 방에 한 분, 큰 방에 두 분이 오손도손 살 수 있게 해 드리면 참 좋겠습니다. 멋진 성탄 선물이 될 것입니다.
 
민들레의 집 식구들이 사는 집들 중에는 다섯 집이 석유 보일러를 씁니다. 아주 조금씩 기름을 넣어드렸습니다. 제발 아껴서 아껴서 쓰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천주교 인천교구 상3동 성당의 사회복지분과에서 민들레국수집에 옷을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필리핀 빠야따스에 성탄절 선물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여름 옷이 많아서 3일이나 4일쯤 필리핀으로 화물을 보내면 성탄 전에 빠야따스 아이들에게 선물로 나눠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민들레 가게에 두터운 겨울 잠바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 많던 옷들이 우리 손님들께로 갔습니다. 패딩잠바!
 
민들레희망지원센터에서는 매일 오륙십 분의 우리 손님들이 책을 읽고 독후감 발표를 하십니다. 서울에서 오시는 분들은 전철에서도 책을 읽는 분들이 많습니다.
 
멋집니다. 비록 노숙을 하면서 식사하러 인천에 오고 가기 위해 전철을 탔지만 책을 읽는 우리 손님들!
 
12월 22일에는 우리 VIP 손님들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립니다.
부평 모짜르트 카페에서,
쥴리어드 출신이신 중앙대 음대 교수이신 분께서 동료 고수님들과 함께 멋진 클래식 성악을 선물해 주십니다.
맛있는 도시락과 간식 그리고 성탄 선물이 준비될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민들레국수집을 곧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리모델링 하고 식당 열 준비를 한 다음에 예행연습으로 운영하다가 2013년 4월 1일 만우절에 민들레국수집 10주년을 기념해서 정식으로 문을 열 예정입니다.
 

관련글

서영남
전직 가톨릭 수사로, 인천에서 노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국수를 나누 는 민들레국수집 운영하고 있다. 1976년 가톨릭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 입회해 1995년부터 전국의 교도소로 장기수들을 찾아다니다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에 파견돼 출소자의 집인 ‘평화의 집’에서 출소자들과 함께 살았다.
이메일 : syepeter@hanmail.net

최신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충격) 새누리당의원, 리얼미터 여론조작 노하우 실토- 일파만파

(충격) 새누리당의원, 리얼미터 여론조작 노하우 실토- 일파만파
(서프라이즈 / 속지말자 / 2012-12-09)


삼성 이건희의 찌라시 중앙일보와 종편 JTBC의 하청을 받아
연일 여론조사 아닌 여론조작에 여념이 없는 리얼미터가
급기야 어제 광화문대첩 이후 여론조작 결과를 발표했는데
지나가는 개가 웃을 짓이라!

문재인 국민연대 정권 집권 이후 불어닥칠 경제민주화 폭풍에
공포감에 휩싸인 이건희의 삼성과 여타 재벌들이
밴드웨곤 효과를 노리고 여론조사를 이용한 여론조작에 열을 올리고
한편 민주시민들의 투표심을 저하시켜 결국 투표율을 떨어트리려는 목적으로
광분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재벌과 조중동 종편, 찌라시 경제신문들, 그들 하청업체 여론조사(조작)기관들이
한몸이 되어
어떤식으로 엉터리 여론조작 결과를 양산하고 민심을 왜곡하는지를
여실히 알수 있는 폭로 기사가 있어 전해드립니다.
열심히 퍼나르셔서 진실을 널리 알리고
유권자들이 여론조작에 절대 휘둘리지 말고
12월 19일 반드시 투표장에 나가
이명박근혜 정권을 심판할 수 있도록 합시다!

* 여론조작의 프로세스

- 재벌+조중동 수구 찌라시+지상파 3사=색누리당 발주
- 하청 여론조작사 쓰레기 여론조사(조작)
- 네이버 등 포탈, 여론 조작 확대 재생산
- 투심 왜곡 & 투표율 저하
- <스트롱맨의 딸> 당선(?)

 

 

(데스크칼럼)여론조사를 믿지마라!
(뉴스토마토 / 권순욱 정치사회부장 / 2012-12-06)


제 18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불과 2주도 남지 않았다. 승부는 박빙으로 흐르고 있다. 그야말로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상황이다. 연령대별 투표율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초점의 관심사인 이유다.

지금도 이런저런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지만, 그 여론조사를 신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50%의 지지율을 넘어섰다는 둥, 오차범위를 넘어서 박 후보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앞섰다는 둥의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참조사항이다.

실례로 2010년 6.2지방선거 당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줄곧 20% 가까이 한명숙 민주당 후보에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투표결과는 불과 0.6% 차이로 오 후보가 겨우 이겼다. 이 당시 여론조사 결과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는 유권자만 없었다면 한 후보가 이겼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서울만 그런게 아니었다. 인천의 송영길 현 시장도,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도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20% 뒤지는 것으로 나왔지만 실제 투표결과는 정반대였다.
2011년 4.27 강원도지사 보궐선거 당시에도 한나라당의 엄기영 후보가 최문순 민주당 후보에 비해 여론조사에서는 10~15%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결과는 4.5% 차이로 최 후보가 승리를 거뒀다.

같은해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의 박원순 후보에 비해 3~5% 앞서는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왔지만 투표결과는 7.2% 차이로 박 후보가 승리했다. 오차범위를 넘어서는 차이였다. 사실 이 정도에 이르면 여론조사기관은 사과문이라도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대선을 앞두고 무수한 여론조사결과가 쏟아지고 있다. 그 의도 자체가 의심되는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 특정 언론사들은 대놓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 띄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대하는 후보를 깍아내리기에 혈안이다.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는 13일 이전에 판세를 굳히겠다는 의도마저 엿보인다. 소위 밴드웨건효과를 노리는 듯 하다. 한국 말로 옮기면 '친구따라 거름지고 장에 가는' 유권자들을 만들어내고 싶어한다.

여론조사에 대한 비밀의 일단을 알 수 있는 실마리를 한때 잘 나가던, 그러나 지금은 조용히 관망하고 있는 새누리당 의원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이 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노인분들이, 특히 새누리당 지지성향의, 여론조사에 통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론조사 전화가 오면 나이를 40대로 바꿔서 답변을 하기도 한다는 것. 어차피 여론조사도 각 연령대별로 표본수를 채워야 하는데, 50대 이상은 잘 채워지지만 그 이하의 연령대는 표본수 채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40대나 50대로 속여서 응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후보의 지지율은 할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2010년과 2011년에 있었던 여론조사가 왜 실제 투표결과와 다르게 나왔는지 실마리를 제공하는 이야기다.

그럼 왜 노인분들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여론조사결과는 유권자들의 판단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친구따라 거름지고 장에 가는 효과 말이다. 또 하나는 대세가 굳어져서 반대편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투표의욕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있다.

근 10년간 온갖 여론조사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숱하게 여론조사 전화를 받아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여론조사의 맹점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각 정당의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자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에서도 활용되기도 한다. 특정 연령대 표본이 다 채워지면, 아직 채우지 못한 연령대로 속여서 응답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유권자 전화번호부를 확보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말이 공공연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새누리당 당직자가 지역구 당원명부를 통째로 여론조사기관에 넘겼다가 구속되기도 한 것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 관계자가 이런 식의 문자를 돌렸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 정도되면 여론조사는 여론조작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작금의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말해도 충분할 지경에 이르렀다. 민심을 왜곡하는 게 민주주의의 적이니까 말이다. 따라서 여론조사의 표본집단의 확대라든지, 응답률 공표 등 좀더 신뢰도를 높이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지금의 여론조사는 집 전화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그야말로 휴대전화와 인터넷전화 시대에 집 전화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다. 한가하게 집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까? 대부분 노인이나 주부, 학생, 자영업자들이다. 이런 분들이 대한민국 민심을 대표하는가?

그래서 여론조사기관마다 휴대전화 조사비율을 높이고는 있지만 개인정보보호라는 한계 때문에 여전히 집 전화 비율이 높다.

여론조사기관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작금의 여론조사는 여론조작에 가깝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면 표본수를 대폭 확대하고, 응답비율도 대폭 늘리고, 연령대별 분포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휴대전화 비율을 70%까지는 늘려야 한다. 아니면 집전화와 휴대전화 비율을 정확하게 공표해야 한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여론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을 것 같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와 그 지지자들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투표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출처: 뉴스토마토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313697

 

공지

14:00 문재인 - 안철수의 아름다운 동행
(산본역 3번 출구 중앙광장)

님의 추천 한 표, 1219 승리의 투표 한 표^^

 

속지말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동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 남북화해가 해빙의 첫 걸음"

"동아시아는 아직 냉전 중, 남북화해가 해빙의 첫 걸음"

[동아시아와의 인터뷰]<1> 박명림 연세대 교수

평화네트워크 .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2-10 오전 8:00:38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쇠퇴, 중국과 인도의 부상이 엇갈리면서,19~20세기에 서구로 넘어갔던 패권이 다시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앞날은 장밋빛이 아니라 잿빛이다.

오랜 패권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은 중국에게 그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조바심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천명한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는 그 조바심의 발로이다. 자신감이 커진 중국도 맞대응을 선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 무역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해양이 미-중 간 '갈등의 바다'로 변질되고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과 사회문화의 교류 증대가 동아시아 공동체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기능주의적 기대도 일단 빗나갔다. 오히려 배타적 민족주의와 합종연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내치(內治)의 불안을 외부의 적을 불러옴으로써 무마하려는 각국 정부의 빗나간 국가주의 열풍도 거세다. 영토 분쟁과 과거사 문제는 이를 위한
소재로 악용되기도 한다.

한반도는 패권 전환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동북아에서 패권 전환이 일어날 때마다 전란에 휩싸이거나 식민지로 전락했다.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다. 이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힘이 교차하는 지역에 한반도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딜레마는 세계와 지역 질서 변동을 날카롭게 포착해 대응하지 못한 주체적 역량의 부족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미중 패권 경쟁과 최악의 남북관계가 교차하고 있는 오늘날, 구한말의 신세가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커지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있다. 2013년부터 새로운 선수들이 동북아 정치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시작된 권력 변동은 2012년 들어 러시아, 미국, 중국,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도 그 후보 중 하나이다. 2013년에는 6자회담의 모든 참가국들에서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새로운 선수들이
경기를 더 잘 풀어가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피로감과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정치적 잠재성은 품고 있다. 그 잠재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에 있음은 물론이다.

평화네트워크와 <프레시안>이 함께 마련한 '동아시아와의 인터뷰'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획되었다.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의 전직 관료와 학자,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있다. 이를 통해 격동의 시대에 접어든 동아시아의 과거-현재-미래를 진단하고, 평화와 공동 번영의 아시아 시대를 열 수 있는 정책과 비전, 그리고 지혜를 모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첫 순서로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를 만났다. 그가 평소에 즐겨하는 "평화를 위해 전쟁 연구를 시작했다"는 말 속에는 그의 학문적·실천적 신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신념은 "학문적 주권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낳을 정도로 한국전쟁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박명림 교수는 <한국전쟁 발발과 기원Ⅰ·Ⅱ>(1부),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부)에 이어 그 완결판으로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와 국제관계에 미친 영향을 다룬 3부 집필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완결판의 목표는 "한국전쟁과 이에 대한 정권의 '해석의 독점'이 얼마나 한국인들의 정신과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바람직한 청산 방향과 민주주의와 평화와 인권과 통일 실현 방안을 제시"하는데 두고 있다. 정전 60주년이 되는 2013년에는 그의 책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첫 번째는 평화네트워크 인턴으로 있는 김유승과 은종훈이 10월 9일 만나서 진행했고, 두 번째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가 10월 30일 다시 만나서 보충했다. 끝으로는 11월 30일에 <프레시안>과 다시 만나 추가 보충인터뷰를 했다.

평화네트워크 창립 준비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 교수는 "평화네트워크의 여러 비전과 가치들이 동아시아와 세계에 널리 퍼지길 희망하고, 역할이 지금보다 더 커지게 되면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질서가 조금 더 빨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하고 있다"는 덕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 박명림 연세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먼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부터 짚고 싶다. 평화와 통일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을 보면 평화와는 동떨어진 감이 있다. 정부는 통일재원 마련을 주장하는 등 통일담론을 주도했으나 이는 흡수통일을 연상케 한 것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5년, 대북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 또는 대북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표면적으론 통일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통일에 반대되는 쪽으로 정책을 추진해왔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동서독 통일모델을 고려해서 흡수통일을 추구하려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서독이 온건정책을 통해 동독 인민의 마음을 얻고 동독이 서독의 통일정책과 체제를 수용하게 한 것처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는 북한체제와 인민들이 남한을 거부하거나 적대하는 정책을 만들어놓고 통일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실제의 정책과 언표 사이에 극적인 자기모순과 충돌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서독이 동독의 최대 후원국가인 소련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가져가서 통일과정을 잘 관리하였듯이, 우리는 북한의 최대 후원국가인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기의 한중관계는 그렇지가 않았다. 수교 이후 한중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감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해 중국의 전략적 우려를 키우고 말았다. 역시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상의 두 가지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일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몇 가지가 착종되어 있는 것 같다. 북한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화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와 하는 것이다. 북한을 비판한다는 것이 곧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둘을 일치시키고 말았다. 미국의 레이건과 부시 1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싫어했었는가? 그러나 소련과 끝없이 대화하고 그들을 현실적으로 상대했다.

북한을 악으로 생각하더라도 상대가 악하다고 생각할수록 상대가 나를 공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연계를 맺어야 한다. 만약 남한이 북한 붕괴를 추진한다고 북한이 인식하게 되면 그들은 더욱 더 단결하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려 할 것이다. 중국이 어떻게 개혁개방을 하게 되었는가? 미국과 일본, 대만이 중국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가? 접근, 교류, 원조, 무역, 지원을 포함한 온건정책을 통해 중국이 열리지 않았는가? 또 서독이 동독의 문을 어떻게 열었는가?

우리는 서독이 동독을 지원하는 만큼, 대만이 중국을 지원하는 만큼의 수십 분의 일도 지원하지 않으면서 퍼주기 논쟁을 한다. 물론 현금을 지원하는 건 안 된다. 그에 대해 저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 인도적 지원, 경제적 교역, 문화교류는 도덕적으로도, 평화이론적으로도 맞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가 실용적 대북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나?

"이명박 정부는 너무 국내정치를 의식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보수정당과 언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기에 이명박 정부는 그 정부들과 무조건 반대되는 게 옳다는 식의 강박관념을 가졌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남북관계는 보수적 이념동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나 남북 간에는 관계적인 측면과 독자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점은 남북한을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분단국가인 동시에, 유엔회원국으로서 독립적인 주권국가이고 자체 국가발전 논리와 동학이 있다. 남한이 온건정책을 펴도, 강경정책을 펴도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한의 대북정책과 분리된 북한 자체의 핵무장 논리가 있다는 얘기이다.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정부에서 퍼주어서 북한이 핵무장을 했다고 비판하고, 진보진영에서는 노태우-김영삼 정부 때부터 핵무장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상호간의 내부공격의 논리일 뿐이다. 북한에는 남한의 진보-보수 대북정책을 넘는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국가이익과 논리가 있다. 물론 이것이 남한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외려 그 반대이다."

그 반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에게도 관계적인 측면 역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저는 초기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기대했었다. 민주화 이후에 보수 정부 두 번, 진보 정부 두 번을 거쳤기 때문에 양자로부터 합리적 핵심을 배울 것으로 기대했다. 독일에서는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가 교차 집권하고 나서 보수적인 헬무트 콜 정부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폈다. 그리고는 통일을 달성했다. 대만도 국민당 보수정부가 양안문제는 더 온건하다.

만약 이명박 정부가 화해협력정책의 원칙은 받아들이고 방법과 절차의 측면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교정했다면 남북관계는 상당히 진척이 되었을 거다. 북한 역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 국민을 살상하거나 영토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선 북한이 충분히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을 했어야 한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실용주의나 시장주의,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교역, 대북투자 등이 중단되면서 남한 기업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를 고려할 때 실용주의가 아니라 이념주의가, 효율성이 아니라 관념성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의 핵심기조였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정권은 지속적이지만, 남한에서는 정권이 5년 주기로 바뀌는데 북한 입장에서 진지한 자세로 대화를 지속할 유인이 있는가? 이명박 정부처럼 지난 정부의 합의사항을 뒤집을 수도 있는데.


ⓒ프레시안(최형락)

"많은 학생들과 기자들이 그렇게 묻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한다. 북한은 정권이 교체되지 않기 때문에 외교정책이 문제가 많은 것이다. 김일성 정권의 실패를 김정일 정권이 교정할 수 없고, 김정일 정권의 유훈을 김정은 정권이 부정할 수 없다. 약간의 정도 조절은 있을 수 있어도 기조는 바꿀 수 없다. 주체사상과 선군체제 역시 못 바꾼다. 그것이 오늘날 북한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핵심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민주주의 체제는 국민 내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 간에 타협을 통해 정책이 나오니까 여러 가지 정책 수단을 가질 수 있다. 정책 수정 역시 유연하다. 역사에서 보듯 국제관계에서는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를 이긴다. 민주주의가 제공해주는 타협성, 유연성, 평화지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우월성에는 중대한 전제가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와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거다. 국가로서의 기본원칙과 합의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책실행 방법과 절차를 바꾸는 것은 가능하다. 동시에 국가로서의 일관성과 정부로서의 독자성을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거꾸로 국가로서 합의한 것도 다 뒤집어 버렸다.

6.15, 10.4 공동선언은 특정 정권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합의했던 것 아닌가? 한미 FTA는 이어받으면서 왜 이건 이어받지 못하는가? 또 이것들은 수정이나 폐기를 주장하면서 한미 FTA는 왜 수정 요구를 못하는가? 10.4선언과 6.15선언에 문제가 있었다면 합의는 지속하되 구체적인 내용과 실행 절차는 얼마든지 다시 논의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비교해야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결코 7.4 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를 수정하려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가의 영속성, 신뢰성, 주권성은 특정 정권의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를 넘는 데로부터 주어진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국가로서의 일관성과 정권으로서의 자율성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근본 속성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문제를 접근했던 것이다. 근본원칙을 부정했기 때문에 남북관계 단절이라는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선생께서는 평화를 구축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평화문화의 확산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러나 '퍼주기' 프레임은 여전히 강력하고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북한에 대한 여론도 악화된다.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한국전쟁이라는 최대의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남북 간에는 여전히 강력한 증오와 적대감이 남아 있다. 군사문제가 있을 때 전쟁의 두려움이 확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하게 분리시켜야 할 요소가 있다. 남한이 국력에서 북한에 열세에 있을 때도 우리는 북한의 군사공격을 받지 않고 4월 혁명을 이뤄냈다.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수호했던 이승만 체제도 전후 7년만에 전복시켰다. 즉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냈고 동시에 침략도 받지 않았다. 평화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 독재정권의 억압논리를 수용했다면 민주화를 못했을 것이다. 분단상태에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독재정권이 모두 민중항쟁(4월혁명, 부마항쟁, 6월항쟁)을 통해 붕괴되었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평화문화를 억압하는 논리는 안보상업주의에 불과하다. 논리적으로 근거가 부실한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시도하고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 사건에의 참여자들이야말로 민주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발전시킨, 그리하여 국가정통성과 대북 우위를 실현한 위대한 기여자들이다.

분단국가에서 안보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보논리는 사실 진정한 의미의 안보논리가 아니다. 국내의 정치논리이거나 이념논리에 불과하다. 그걸 보여주는 게 민주'국가'를 구하려 권위주의'정권'을 타도한 4월혁명, 민주화 운동, 광주항쟁, 6월항쟁이다. 남한이 북한보다 더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하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었지만, 시민들이 지혜롭게 극복해주었던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평화문화의 발전은 곧 민주주의발전과 비례했던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과 군사주의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북한을 위해서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결코 대안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북핵은 절대 안 된다는 압도적인 여론이 있으면서도 남한 국민들은 대북 인도적 지원과 교류협력은 지속되어야 하고, 남북관계는 개선되어야 하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집합적인 '시민적 지혜'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점은 과도한 안보논리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평화문화가 계속 성장한 덕분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총선에서 패배하였고, 반대로 미국의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었던 2002년에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또 천안함 사건 공식 발표 직후 이명박 정부는 6.2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다.

이 세 사례를 보면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동원하려는 시도는 실패해왔으며, 안보논리와 평화논리는 더 이상 상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안보논리를 동원해 평화논리를 제압하려 해도 남한 국민들은 둘을 분리할 지혜를 갖고 있다. 이제 남한 시민사회의 평화문화를 북한까지 확산시켜 한반도 전체에 평화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평화는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취지와 목표가 다른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평화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평화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저는 평화를 몇 층위로 분류한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평화전략이다. 그러나 저는 그 전에 평화철학, 평화비전과 평화이상, 평화이론을 먼저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평화전략과 평화실천과 평화강제가 있어야 한다.

첫째,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 평화[平和]의 말뜻을 그대로 풀어보면 사람들[口]이 식량[禾]을 고르게[平] 갖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화의 주체가 생명, 즉 사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즉 평화는 사람, 삶, 살려냄의 의미를 포괄한다. 이 때 식량은 사람, 삶, 살려냄의 근본임이 물론이다.

둘째, 평화의 뜻은 '안녕'이다. 이 때의 안녕이란 삶의 안정성을 뜻한다. 전란의 상태에서 삶이 안정될 순 없기 때문에 평화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일정한 안정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평화는 어원부터 정의와 공평, 평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생존조건이 비교적 고른 사회라면 정의롭고 안정되어 평화롭게 된다. 반면 불의하거나 불평등한 상태에서는 평화가 어렵게 된다.

마지막으로 평화는, '성장', '번영'의 뜻도 담고 있다. 이를테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정복의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인간 실존의 조건, 즉 우리들이 먹고 생활하고 누리는 것들을 위해 "생산하고 노동하라"는 것을 말한다. 스웨덴의 넉넉한 평화와 아프리카의 빈곤한 평화는 전혀 같지 않다. 평화에는 평안과 번영의 뜻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빈곤은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다. 결국 평화는 인간 영혼과 인간 실존의 생명성과 안정성, 세계질서와 인간공동체의 공정성-평등성과 정의를 갖추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대단히 포괄적으로 들리는데 전쟁의 부재를 넘어 구조적 폭력까지 제거된 '적극적 평화'로 이해하면 되는가?

"'적극적 평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이다. 저에게 평화가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세 가지로 말하고 싶다. 먼저 '생산적 평화'이다. 생산적 평화는 평화를 통해 건설적인 인간 삶과 영혼, 사회상태, 세계상황을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한다.

두 번째는 포괄적 평화이다. 포괄적 평화는 경제적으론 부유한데 군사적으로는 전쟁상태에 있다거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인데 경제적으로 극심한 불평등에 있다는 식의 영역별·분야별 불균등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균형적 평화에 도달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아직 세계 평화이론은 여기까지 나아가진 못한 것 같다.

세 번째는 영구적 평화이다. 임마누엘 칸트도 말했던 것인데, 한 사람의 일생에서 유년시절은 평화롭고, 청년시절은 고통스럽고, 장년은 투쟁기, 노년기는 안정기라는 식이 아니라 전생애에 걸쳐 항구적인 평화를 누리고, 또 어떤 세대는 평화롭고 어떤 세대는 전쟁상태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평화를 향유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저는 생산적, 포괄적, 영구적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간 영혼의 영구평안'과 '세계질서의 영구평화'는 저의 가장 오래된, 가장 소중한 꿈이다."

영구적 평화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다. 가령 현재 평화롭지 않은 상황인데 다음 세대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지금 세대가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여 현 상황을 타파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프레시안(최형락)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구조적인 억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최소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방어적이고 저항적인 폭력이 용인되지 않으면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자신과 타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수호할 수도 없다. 자기 헌신과 희생도 어렵다. 폭군에 저항한 시민투쟁이나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저항을 폭력이라고 하지는 않지 않은가? 문제는 자기 이익과 지배를 위해 타인을 억압하는 공격적이고 배제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성찰 지점이 존재한다. 인간 행동의 현실적 선택이 갖는 종교적 자기희생의 의미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차원에서는 방어적 폭력도 더 깊은 성찰을 요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폭력에 대해 예수가 정치투쟁으로 맞섰다면 그의 희생이 이처럼 영원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폭력을 무화시키는 평화를 위한 투쟁은 일종의 종교적인 자기희생과 내면성찰을 수반한다. 미래의 영구평화를 사유하면 방어적 폭력조차 재고하게 된다. 간디나 링컨, 마틴 루터 킹, 함석헌이 평화실천과 종교적 영성을 결합하려했던 것은 깊은 이유가 있다. 요컨대 평화는 이상인 동시에 실천인 것이다.저 개인의 삶은 많이 부족해서 쉽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내면윤리의 사회적 구성능력이야말로 개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체가 아닐까 싶다. "

"한국전쟁, 아직도 고민 중"

평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역시 전쟁이다. 한국전쟁의 영향이 큰 탓이 아닌가 한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한국전쟁에 대해 몇 가지 질문하고 싶다. 한국전쟁의 본질이나 성격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내전인지, 국제전인지, 혹은 둘 다로 볼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25년여를 고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최종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국제학회에서도 숱한 질문을 받았던 문제이고. 외국학자들도 한국전쟁에 대한 한국의 연구자인 저의 견해를 자주 묻는다. 그러나 부끄럽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복잡하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어떤 단일한 성격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성격의 반대 측면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극적으로 갈리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거대 사태를 도덕을 기준으로 흑백, 호오, 선악으로 나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잘 드러내주기에, 제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념과 이론화를 향한 궁극적인 학문적 소명을 포기할 수도 없다.

사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간의 살인이었을 만큼 근친증오와 근린적대는 인간들의 일반적 현상이다. 제가 이해하기에 한국전쟁은 일단 내전은 아니다. 내전(bellum civile)이라는 말은 원래 서기 이전부터 사용되던 용어로서 한 사회 안에서 어느 쪽이 전체 사회를 대표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을 뜻한다. 그 후 오랫동안 쓰지 않던 용어인데 영국 시민혁명 때 다시 등장하게 된다.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서 누가 영국사회를 대표할 것이냐 다툴 때 다시 불려나온 것이다.

이처럼 내전 개념은 어느 쪽이 한 사회를 대표할 것이냐를 둘러싼 투쟁에 쓰이는 것이다. 한 사회가 분열되어서 왕정인지 공화정인지, 전제정인지 의회정인지, 노예제 유지인지 노예제 폐지인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를 두고 싸울 때는 내전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세계체제 등장 이후 주변부 국가들에서 진행된 거대 전쟁 중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내전은 거의 없다. 그 전쟁들은 국제적 요인으로 발생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이나 국제관계학, 정치학 같은 일반학문을 하거나 한국학을 하거나 대부분 외국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저는 지금 세계 학계의 일반적 해석에 경험적 이론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을 국제학계가 내전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제국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혐의가 짙은 배제와 억압의 논리이다.

그들이 싸우게 된 기원은 국가나 종족, 민족의 분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분단의 배경인 친일과 항일,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협력세력과 저항세력으로 갈라놓은 것도 제국주의이고, 분단의 출발이 되는 영토분단도 두 제국 미국과 소련이 국제적으로 결정했고, 분할점령도 두 제국에 의해서였다. 남북 분단국가 수립과 미군-소련군 철수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사용된 무기도 미국과 소련 것이었다. 전쟁의 시작도 김일성-모택동-스탈린의 국제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남한 방어를 위한 최종 결정과 힘의 근원도 미국 워싱턴이었다. 전쟁의 기원부터 종결까지의 중요한 국면의 궁극적 결정 권한 역시 거의 전부 국제적인 요인과 주체였다. 이걸 내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내전론은 한국민들끼리 싸웠고 한국민들끼리 죽였다는 것이다. 표면을 넘어 구조를 약간만 들여다보더라도, 사실에 맞지 않는 해석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봐야 하는가?

"그런 취지만은 아니다. 한국민들도 그들 스스로의 과오에 대해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 왜 망국, 분열, 분단을 막지 못했는지, 왜 전쟁을 시작했는지 엄정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엄정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점과 이 전쟁의 성격이 내전이라는 주장은 전혀 같은 범주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숱한 국경선도 제국주의가 마구잡이로 그어놓은 것인데, 현지인들이 그걸 합치거나 변경하려고 싸웠을 때 이를 내전이라고 하면 도덕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전혀 맞지 않게 된다. 그건 그들을 두 번 억압하는 제국주의 행위와 같다. 첫 번째는 영토 침략과 분할로, 두 번째는 학문적, 해석적 왜곡으로 말이다. 제국주의가 그어놓은 분할선으로 인해 발생한 그들의 전쟁이 어떻게 내전이 되는가?

최근 들어 세계학계에서는 국제전적 시각과 내전적 시각을 통합하여 한국전쟁을 '국제화한 내전'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이것도 맞지 않다. 그들 주장의 본질은 여전히 내전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오히려 거꾸로 잠정적으로 '내전화한 국제전쟁', '내전화한 세계시민전쟁'으로 보고 싶다. 한국전쟁이 세계시민전쟁이자 내전화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훨씬 복잡했고 아직도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형태의 내전이었다면 벌써 통일이 되었을 거다."

한국전쟁을 '내전화한 국제전쟁'이라고 한다면, 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한반도 분단의 공고화와 동북아 냉전의 안정화이다. 어떻게 공고화되고 안정화되었느냐? 그건 한국문제가 더욱더 국제화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한반도 분단은 완전히 세계의 분단이 되었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와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고, 남북은 세계자본주의와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전방초소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휴전의 세계화, 국제화가 정전체제의 핵심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휴전의 군사화와 무장화가 있다. 한반도 휴전은 정전을 하면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했는데 실제로 비무장지대는 최첨단 무기가 최근접 거리에서 가장 위험하게 가장 오래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저는 이것을 최무장지대라고 부른다. 정전체제의 이러한 이중성, 즉 최고 수준의 국제화와 최고 수준의 무장화가 한반도에서의 재전쟁을 불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에 끼친 다른 영향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등장하면서 세계 냉전체제가 얄타체제와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둘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얄타체제가 처음부터 정초되지조차 못했던 것이다. 얄타체제의 핵심은 전범국가에 대한 국제적 억지를 골간으로 한, 미소 양극의 수직적 세계분할체제를 말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한국전쟁에서의 중국과 일본 요인으로 인해 얄타체제가 고착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일안보조약-샌프란시스코체제를 통해 국제사회에 무임승차했다. 그러면서 처음부터 연합국 미국과 전범국가 일본의 동맹체제가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핵심기축으로 작용하였다. 즉 한국전쟁은 일본을 도덕과 안보와 경제 세 측면에서 구출해줬다. 전범국가 일본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국제문명사회에 진입했고, 모든 전쟁물자가 일본으로 모였기 때문에 전쟁특수를 맞아 폐허상태에서 극적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영향은 일본의 자폐화, 탈보편화이다. 일본은 전쟁책임을 지지 않고 국제 사회에 등장했다. 즉 분단도 되지 않았고 천황도 처형되지 않았다. 오늘날 영토문제, 위안부문제,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 문제, 교과서 왜곡 문제 등 여러 가지 '전쟁범죄' 문제들은 만약 일본이 분단이 되었거나 국제 사회에 복귀하지 못했으면 통일을 이루고 복귀를 위해서라도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면서 해결되었을 문제들이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책임 지불 없이 곧바로 국제사회에 복귀해버려서 거꾸로 더 공세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며 문명국가로서의 자격미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부상도 말씀하셨는데, 무슨 뜻인가?

"일단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 분단이 고착되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중국과 대만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통일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국과 전쟁에서 비긴 최초의 국가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무조건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추구했고 이를 통해 언제나 이겼다. 그러나 중국이 참전하면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정전을 위한 장기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미국과 중국, 남한과 북한은 비기고 말았다. 그래서 한국전쟁은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중국이 미국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이후 중국은 군사적, 국제적으로 상당한 발언권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중국의 자율성과 중소갈등이 발생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소 양강의 수직적 분할구도는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중소갈등을 거친 이후에는 중국이 소련을 대신하여 동아시아 문제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다. 냉전체제-얄타체제를 미소의 수직 분할체제라고 본다면 그러한 세계체제는 동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일동맹은 체결-강화되고 중소동맹은 이완-해체되는 반대현상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은 동아시아에서 비대칭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어쩌면 G2구도의 거시적 단초는 한국전쟁 때 이미 놓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내전화된 국제전쟁'이라고 할 때, 그 전쟁의 영향이 여전히 큰 한반도에서 국제 차원의 규정력은 얼마나 큰가? 남북한 '우리민족끼리' 평화와 통일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갈등의 주체가 결국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싸웠는데 둘이 화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요구로 화해하면 그건 진정한 화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내전화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제적, 민족적 차원에서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통일문제를 민족문제로 접근한 우리는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고 통일문제를 유럽문제-국제문제로 접근한 독일은 벌써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은 깊은 성찰을 요한다.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이고 중심부이나 한국은 동아시아의 약소국가이고 변방이기 때문에 후자가 먼저 통일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예상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냉전시대의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국제적인 문제였다. 분단과 전쟁이 국제 문제라면 평화와 통일도 당연히 국제문제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미치는 지역적, 세계적 규정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너무 한반도 문제를 국제 문제로 환원한 것은 아닌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북간에 민족 내부적으로 해야 할 것이 많다. 남북간이 적대적이면 적대적일수록 국제적 규정력은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이 갖고 있는 불변의 상수이다. 한국전쟁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 사태였다. 게다가 국제질서는 각자의 국익 확대를 위한 투쟁의 공간이다.

따라서 남북의 신뢰가 구축되고 관계가 개선될수록 국제적인 영향력은 줄어든다. 이 점은 남북화해협력의 시점과 남북갈등대립 시점의 남북 각각의 영향력과 국제사회의 영향력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자의 시기에는 남북의 영향력이 컸다면 후자의 시기에는 압도적으로 국제사회의 영향력이 컸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도달하는 조건과 상황을 창출하는 데 있어 남북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남북한 두 한국의 리더십과 국민들의 엄숙한 책무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선생님께서는 통일문제에서 민족담론의 위험성을 이미 언급하신 바 있다. 그리고 '보편성'의 시각을 강조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통일문제와 평화문제를 우리민족끼리 달성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낭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보게 된다. 즉 분단 상대방이 잘하면 통일이 될 수 있고 평화가 구축될 수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정책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민족담론은 상대방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안 해준다고 믿는 데서 오는 증오와 배신감으로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고 공격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자기충돌적 역설인 셈이다. 즉 민족주의 담론은 민족동일성의 담론이면서 동시에 민족증오와 배제의 담론이다. 그래서 제가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 복지, 인권, 평화, 화해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 분단과 통일 같은 특수과제는 그러한 가치들의 확산을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문제는 남북 각각에서 내부의 보편적 가치 증진을 위한 노력인 것이다. 통일과 같은 좋은 목표가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같은 좋은 실천이 문제인 것이다.

좋은 목표는 좋은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좋은 실천을 반복하면 좋은 목표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반대는 그렇지 못하다. 즉 좋은 목표가 좋은 실천을 낳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평화가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점이다. 만약 보편적인 목표만을 강조하게 되면 보편적이지 않은 수단을 선택할 수가 있다. 전쟁을 통해 평화를, 분단강화를 통해 통일을 추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대개 특수한 문제는 개별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앞선 모든 사람들이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개별성과 보편성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분단, 통일, 전쟁, 갈등 문제를 해결했던 앞선 많은 사례들이 제공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와 경험을 학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지금 직면한 개별 상황의 해법을 알기 어렵다. 개별 상황 속의 인간들은 늘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우리민족끼리' 하려다가 결국 전쟁을 하고 적대를 한 사례를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저는 우리사회의 민족주의적인 통일담론과는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다. 저는 지금도 통일에 앞서 평화를 강조하고, 평화 없는 통일은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유엔과 유엔 회원국이 정전상태인 희한한 상황"

내년이면 정전60주년을 맞는다. 60년간 지속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다. 왜 우리는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는가?

"정전은 전쟁의 잠정중단이지 종식이 아니다. 평화체제는 전쟁의 공식적인 종료를 의미한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여 잠정 중단 상태에서 공식적 종료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평화체제의 첫 번째 의미이다. 그런데 남북한도 전쟁이 잠정 중지 상태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유엔과 중국, 유엔과 북한 역시 정전 상태라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유엔군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유엔과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을 맺지 않고 중국과 북한이 유엔에 가입했다. 지금 중국과 북한은 유엔 회원국이다. 결국 유엔이 유엔회원국과 정전 상태에 놓인 것으로서 국제관계 역사상 너무도 희한한 상황이다. 국제기구가 자신의 구성국가와 정전상태에 놓인 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평화협정과 평화체제가 정립되면 이런 예외적 상황들은 반드시 정리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평화체제는 남북이 상호 주권성을 인정해야 한다. 현재는 적대상태인데 상대를 평화상대로 인정하고 상대방의 국가성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가 국가 대 국가로 제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때 국가 대 국가는 통일을 이룰 때까지의 잠정적인 관계이다. 동서독 기본조약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셋째로 평화체제는 전쟁 가능성과 전쟁 수단의 현저한 축소와 직결되어 있다. 평화체제가 되면 상호 군축을 통해서 전쟁물자와 예산이 일반국민의 복지향상으로 전환됨으로써 삶의 질의 제고가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정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한반도 갈등구조의 구조적인 전환뿐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의 집합적 삶의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인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품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의미를 짚어 본다면?

"정전체제가 동아시아 차원의 맥락을 지니듯이 평화체제 역시 동아시아 차원의 함의를 담고 있다. 특히 지난 150년 동안 동아시아 갈등의 요충지였던 한반도가 평화의 발신지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한반도 평화체제는 동아시아 평화와 동아시아 통합으로 나아가는 큰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한반도 문제는 단순한 민족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지역문제, 국제문제이다."

그렇다면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수단에는 무엇이 있는가?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조건으로 전쟁억지력의 역할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남과 북은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방어수단으로서 전쟁억지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것이 상호 위협으로 작용하고 이는 다시 상호 불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방어를 명분으로 공격수단을 보유하려는 무기 확충을 서로 중단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정전협정의 기본합의이자 상호신뢰를 위해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루기 전에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에 바탕해 적극적인 평화와 교류를 모색했다. 서독이 동독을 공격한다는 것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고 동독이 서독을 공격하는 것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격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유럽 전체의 전쟁이 되고 만다. 동아시아에 유럽과 같은 집단안보기구를 구축할 수 있다면 평화체제로의 이행은 훨씬 더 용이할 것이다. 저는 이 점을 크게 강조하고 싶다. 남북이 동아시아 집단안보체제와 병행한다면 전쟁의 가능성은 획기적으로 줄고 평화와 안정의 지표는 크게 높아지게 된다. 이는 6자회담의 합의정신이기도 하다."

방금 전 유럽과 동아시아의 경우를 비교하시면서 독일은 WTO나 NATO가 억지능력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동아시아에도 집단안보기구가 있다면 국가간 신뢰가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아까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말씀 드렸는데 유럽의 화해와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전쟁은 나토 전체와의 전쟁을 의미하고 그런 안보통합이 있었기 때문에 그 뒤로 경제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안보통합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경제통합, 최종적으로 정치통합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누구도 냉전시대에 집단안보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양자주의에 묶여 있다. 여기는 미일동맹, 한미동맹, 북중동맹, 미중적대, 북미적대 등 전부 양자관계이다. 나토 같은 것이 있었다면 한국전쟁도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도 다자주의가 없다. 6자회담은 단지 다자적 접근(multilateral approach)이지 제도화된 다자주의나 다자기구는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냉전의 섬' 한반도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지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우선 표현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다. 흔히들 한반도를 '냉전의 섬'이라고 하지만, 저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아직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중동맹이 냉전시대보다 완화됐는가?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이 완화됐는가? 북미 적대관계는 어떤가? 남북관계만 적대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 자체가 냉전시대에서 구조적인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남북' 축과 '국제' 축은 상호 맞물려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상호간의 군사안보정책을 방어충분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상호신뢰와 국제신뢰가 굉장히 중요하다. 미국도 북한에 대한 신뢰가 낮고 중국도 남한 주도의 통일에 신뢰가 낮기 때문에 남북신뢰와 국제신뢰는 같이 증진되어야 한다. 국제 대결장으로서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열강들의 이익 쟁투의 장이다. 이를 완화시켜야 한다. 미•중 상호 경쟁을 활용해 미국은 이를 한미동맹 강화에, 중국은 북중동맹 강화에 투영하고 있다. 이 틀을 깨기 위해서는 남북상호신뢰와 국제신뢰 구축은 반드시 함께 가야한다."

중국ㆍ북한 2,3세 정치인이 집권, 한국ㆍ일본도 따라가려나

끝으로 다가올 한국의 12월 대선과 한반도 및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견해를 부탁드린다.

"아주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격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제 한반도문제에서 한국정부의 성격과 정책은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이명박 정부 시기 동안 미국, 중국,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을 보면서 우리는 민주개혁파 정부가 집권했었더라도 한반도 문제와 남북관계를 이렇듯 오래 방치했을까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또 김영삼 정부 시기와 이명박 정부 시기 동안 김일성과 김정일 사망 이후의 상황을 유념할 때, 만약 당시 남한에 강경보수 정부가 아니라 온건진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를 상상해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린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2~13년 동안 중국, 일본, 북한에서 기존 지도자의 2세, 또는 3세 집권이 이미 실현되었거나(중국, 북한), 실현가능한(일본) 상황에서 한국마저 2세가 집권한다면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세계적 부끄러움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에 깊이 빠져있는 서구의 언론과 학자들은, 동아시아 주요 4개국이 모두 2세~3세 집권으로 귀결된다면 동아시아의 후진성이라며 얼마나 조롱할 것인가? 4월혁명, 부마항쟁, 광주항쟁, 6월항쟁을 통해 동아시아 자생적 민주화를 앞장서 이끌어온 자랑스런 한국민들이 깊이 유념해야할 부분이다.

한국민들이 평화와 화해지향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하는 이유는, 중국-일본-북한의 2~3세 정권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국제관계를,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평화와 공존과 화해지향으로 선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민들의 선택은 이제 한반도와 동아시아질서를 좀 더 평화와 안정을 향해 나아가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로까지 상승된 것이다. 한국민들의 동아시아 및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간절히 기대하고 또 바라게 된다. 이 점은 저의 아주 오래된, 마음 속 깊은 개인적 소망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하다. 여기에서 인터뷰를 마칠까 한다.

"수고 많이 하셨다. 동아시아와의 인터뷰,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란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평화네트워크 바로가기(www.peacekorea.org)

 

 
 
 

 

/평화네트워크 .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 박사

"기업에서 종자와 살충제 만들고
5개 기업이 전세계 곡물 무역 통제"

[깨어나자 2012 : 석학을 만나다 7-①] '환경 운동가' 반다나 시바 박사

12.12.09 23:24l최종 업데이트 12.12.10 09:58l
안희경(pinkbach)

 

 

모든 일은 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이 올바를 때, 역사의 흐름은 퇴보하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는 언어들이 출렁이는 2012년, 온 지구를 가로질러 30여 개국에 선거가 있다. 변화의 시기, 한 생각은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힘의 논리로 억압하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이어가고자 <오마이뉴스>는 세계의 지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통찰력을 빌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내면의 지혜를 깨우려 한다. 한 생명이 밝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2012' 인터뷰 시리즈는 그 노력의 하나다. [편집자말]
환경, 여성, 윤리 등의 분야에서 대안적 사고와 실천을 제안하고 있는 사상가이자, 학계뿐만 아니라 운동가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반다나 시바 박사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반(反)세계화 투쟁의 지도자다. 그녀는 주요 핵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전도 유망한 핵물리학자였다. 하지만, 핵이 파괴한 인류의 삶을 알게 된 후 그 길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녀가 함께 한 곳은 히말라야 산골이었다. 전기톱을 윙윙 거리며 다가오는 벌목회사의 이윤 추구에 맞서 산골의 어머니들과 나무를 껴앉고 목숨을 내놓았다. 그렇게 히말라야의 나무와 물과 공기를 지켰으며, 정부로부터 벌목 금지 법안을 얻어냈다. 그리고, 다시 반다나는 흙을 지키고, 강을 지키고, 들을 지켜 인간의 삶을 지키는 것으로 세계인들과 연대하며 나아가고 있다.

인도에 사는 그녀는 그곳에서 포스코에 대항해 강과 토지, 사람을 지키는 싸움을 하고 있다. 또 세계적으로 몬산토로 대변되는 거대 농업 다국적 기업에 좌우되는 '식량 독재'에 맞서 모든 이들이 안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식량 민주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포스코와 몬산토에 대항해 싸우는 이유

반다나 시바
ⓒ 안희경

관련사진보기


반다나 시바 박사를 지난 10월 31일, 세계화 국제 포럼의 샌프란시스코 본부에서 만났다. 11월 6일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캘리포니아 주는 식품 포장에 유전자 조작(GMO) 성분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주민투표에 붙였다. 반다나 시바는 이 법안의 통과를 적극 지지하며, 다국적 기업의 광고 및 로비에 맞서는 주민들을 북돋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고, GMO 천국인 미국의 소비자들은 식탁의 안전을 지키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글을 준비하는 도중인 11월 20일 반가운 소식이 페루에서 날아왔다. 페루 의회가 10년 동안 유전자 조작 음식에 대한 제제 조치를 법제화한 것이다. 이로써 페루인들은 음식 제조 과정에서 비밀리에 첨가되던 유전자 조작 식재료를 차단할 수 있게 됐으며, 미국 등에서 수입되는 유전자 조작 음식을 금지하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이는 6천여 페루 농민 공동체가 앞장서서 투쟁한 결과다. 또 한 가지, 그들은 조상이 육종하여 물려준 맛 좋은 거인흰옥수수, 자주옥수수, 페루산 감자 등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종자들은 밭에서 나오는 우유라고 서구인에게 칭송받는 키누아와 마찬가지로, 다국적 농업 회사들이 유전자 조작을 하기 위해 노리던 작물들이었다.

몬산토, 바이엘 그리고 다우와 같은 다국적 농업 기업은 전 세계의 농업 정책을 좌지우지한다. 반다나 시바는 이들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식량 독재가 진행되고 있다고 규탄한다. 우리 농민들의 삶, 우리 전체 소비자의 삶 또한 식량 독재의 틀 안에 갇혀있다. 2012년, 한국 농부는 집집마다 26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지고 있다.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흉작이 이어지고, 국제 곡물 가격은 급등했다. 그리고 우리 곳간에 남아돌던 쌀도 떨어져 가고….

식량 주권과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 자살하는 농민들…. 이 모든 것을 되살리는 길은 오직 소농을 살리고 토종을 지키는 데 있다고 반다나 시바는 말한다. 더불어 먹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음식을 먹도록 밥상을 지키는 일에 소비자가 함께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가 지켜내면, 불편해도 조금만 돌아가면 기후 변화까지 되돌릴 수 있다고 반다나 시바는 말한다. 이 인터뷰에서 함께 그 희망의 싹을 찾아보길 바란다.

식량을 무시하는 정치가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 현재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농업관련 정책 가운데, 보수 쪽에서는 '안정된 농가 소득을 위해 농업이 1차 산업이 아닌 가공·유통·관광 등을 포함하고 있는 종합 산업이 되도록 복합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 쪽 의견 가운데는 농촌에 농민이 늘어나도록 정부가 재정 지원하는 취농과 한국 농업 구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소농을 지원하자는 방안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농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께서 생각하는 농업 정책의 방향은 무엇인가요?
"오늘날 식량을 무시하는 정치가는 결국 모든 현실을 무시하는 겁니다. 식량은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생태계 차원에서 그 어떤 다른 활동보다도 농업이 산업화되면서 훨씬 많은 폐해들이 전 지구적으로 발생했습니다. 75% 토양 악화, 75% 수원 파괴, 75% 종이 소멸되어 생물의 다양성이 훼손되었죠. 그리고 지구의 기후에도 40%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지금 제가 동부 뉴욕에 있었다면 아마도 허리케인 샌디의 피해를 봤을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의 문제를 풀기 위해 소농들이 짓고 있는 생태적 농사를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기아를 줄인다는 기업과 세계 기구가 제안하는 산업형 농업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약적인 산업형 농업이 자원을 절약하고 종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어 보자고 했죠. 우리 농업에서도 성장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고 추진되어 왔지만, 결과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생은 계속 이어지고, 그들이 누리던 자연의 혜택을 빼앗기며 더 많은 이들이 가난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다만 경제 수치 등 숫자로 이러한 현실이 은폐되었을 뿐입니다. 이는 세계화 속에서 더욱 심화됐습니다."

- 지난 10년의 통계를 보면, 한국도 중소 가족농이 전반적으로 하향 분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농업 정책을 펼 때,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갖는 농작물이나 축산 브랜드를 키워 농업의 산업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 아니라, 반(反) 세계화를 통한 자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우리들이 생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가 식량을 갖는 겁니다. 왜냐하면, 음식에 대한 권리가 없다면 그 어떤 생명에 대한 권리도 없는 거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먹을 것에 대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이 거래되는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농부들과 소비자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발육 촉진 호르몬이 쌓여있는 항생제가 들어갔기 때문에, 그 쇠고기 위험하니까 안 먹겠다고 몇 년에 걸쳐 싸웠잖아요? 제가 그 사실을 기억합니다."

"한국의 위험한 미국산 쇠고기 반대 투쟁을 기억합니다"

광우병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7일 저녁 서울 태평로 덕수궁 앞에서 전면 재협상을 촉구하며 촛불을 밝히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 네, 촛불을 들었죠. 학생부터 부모들까지요.
"무역 정책을 펴는 정부는,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만 집중했고, 당신들한테 가는 고기는 나쁜 고기가 아니라는 말만 했습니다. 이것이 자유무역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먹고 사는 식량의 문제이고, 농업의 현실입니다. 저는 자유무역이 진행되는 전체적인 상황과 내용에 대해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92년, 93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 대항하는 전 지구적인 저항을 조직했으니까요. 한국 농민들도 함께 했습니다. 전 세계 농민들 50만명이 인도에 함께 모여 강력하게 투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루과이 라운드는 타결되었고,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았죠. 농업과 관련한 협정에는 유전자 변형 식품을 여러 나라에 판매하도록 합법화하는 조항을 넣었고, 종자 비축과 공유를 불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농부들이 서로 더 좋은 씨앗을 소개하고 나눠가며 자연 속에서 육종해오던 그 협동의 삶을 빼앗아 간 겁니다. 일단 한 번 거대 종자 회사의 씨앗을 사면, 거기서 씨를 받아 저장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되니까. 결국 매 년 돈을 내고 종자를 사고, 그 종자를 키우느라 살충제 사고, 거기에 따른 비료까지 사야 하니 (농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 한국 농민들도 FTA 협정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공산품 수출을 위해 농민을 희생시켰다는 원망이 큽니다. 한국 정부 역시 1990년대에는 WTO로, 그 후에는 자유무역협정으로 개방의 폭과 정도를 점점 더 가중시켜 왔으니까요.
"27만명의 인도 농민들이 자살했어요. 이는 자유무역이 농부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농업의 세계화는 수백만명의 사람들로부터 생계와 식량에 대한 권리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는 소규모 농장과 소농을 망하도록 헀어요. 모든 정치인들에게는 공공 건강과 사람들의 경제적인 생활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쓰지 않는 정치인은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겁니다.

오늘날 단 10개의 기업이 230억 달러 규모의 상업용 종자 시장의 32%를 점유하고, 유전 공학적으로 조작된 변형 종자 시장의 100%를 통제하고 있답니다. 이런 기업에서 육종한 종자들의 경우 그 종자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살충제까지 한 쌍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농약 시장까지 장악하고 있는 셈입니다. 단지 5개 기업이 전 세계 곡물 무역을 통제하는 겁니다. 이런 기업들이 국제무역협정을 수립하는데 관여했고, 특히 WTO 출범을 가져온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이에 대한 국제적 연대와 대응이 지역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농부의 첫번째 역할은 식량을 생산하는 겁니다"

- 한국의 농업농민정책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한국인 가운데 6%만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20년 만에 반으로 줄은 데다 노령화가 되었어요. 이렇게 농촌을 멀리하려는 이유는 바로 농부의 67%가 한 달에 83만 원도 안 되는 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겉으로 보여지는 한국은 윤택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모습은 부자의 화려한 삶이 평범한 듯 보여지죠. 누구나 넉넉한 삶을 꿈꿉니다. 선거에 나오는 정치인들 역시 '부자 농촌'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중농을 지원해 기업화하겠다고도 했고, 지역마다 혹은 개별 농가마다 브랜드화 하는 시장경쟁 체제를 갖추도록 유도했습니다. 국가의 식량 주권을 위해 농부들에게 성공의 꿈을 접으라고 할 수만은 없을텐데요.
"자신이 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하는 농부들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인도 농부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기업은 '이 씨앗을 사용하면 부자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고, 그걸 쓴 (인도) 농부들은 빚더미에 올라 그들의 삶을 마감했어요. 새로운 교배 종자들은 해충에 취약하기 때문에 더 많은 살충제를 필요로 합니다. 극빈층 농민들은 종자와 농약 모두를 같은 회사에서 외상으로 구입해요. 해충이 마구 생겼다던지, 불량 종자가 대규모로 섞여 있으면 그 해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럼 빚내서 구입한 살충제를 먹고 죽습니다. 인도 와랭갈 지역에서는 97년에 400명이 자살을 했어요.

세상의 모든 농부가 갖는 첫 번째 역할은 식량을 생산하는 겁니다. 그것에 비하면, 다른 어떤 활동도 부수적인 일이지요. 경제가 잘 돌아간다면, 당신은 관광객만으로도 살만 할 겁니다. 그리스를 보면, 나라 전체가 관광 산업을 기반으로 하죠. 그런데 경제가 죽어가니까 관광객도 없고, 장사마저 죽어갑니다. 관광까지 연계해서 부자 농촌을 만들어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한국 사람들은 그리스의 현실도 살펴보고, 인도 농부들도 반드시 살펴봐야 합니다.

제 생각에 유일한 방법은 대안적인 시각과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겁니다. 한국의 농민과 케냐의 농민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케냐 농민의 한탄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국가 정책에 맞춰 커피를 심었습니다. 케냐 전체가 커피를 생산합니다. 나이든 케냐 농부가 말하더군요. '커피를 먹고 살 순 없잖아요.' 네 그들은 커피를 키우기 전에는 혼합재배를 했습니다. 들판에 필요한 곡식과 채소 등을 골고루 심었어요.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합니다."

"농산물을 상품으로만 취급하면서 자주권을 내준 겁니다"

반다나 시바
ⓒ 안희경

관련사진보기

-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시골에 갔을 때, 아주머니께서 논에 피를 뽑고 돌아오는 길에 논두렁에 한 줄로 경계삼아 자라던 깻잎을 따다 쪄주셨습니다. 그 깻잎은 동네 사람들 누구나 조금씩 뜯어 반찬을 해도 땅 주인이 그러려니 했죠.
"네, 단일작물을 재배하게 된 배경에는 다국적 기업이 농업을 세계적인 유통망으로 이용하면서 이뤄진 겁니다. 인도의 경우, 면화와 같은 환금 작물 재배가 늘면서 주식으로 먹는 작물은 생산이 줄었어요. 국가적으로는 면화 산업에서 수입을 얻지만, 가난한 농부는 전에 자급자족하던 식량을 사 먹게 되고, 그 주식의 값은 오르고 결국 더 가난하게 된 거죠.

제3세계 농부들은 같은 처지에요. 꽃, 과일, 새우 양식 등으로 농업 구조가 바뀌었답니다. 정작 주린 배를 꽃으로 채울 수는 없는 거죠. 인도가 꽃을 수출해서 번 돈으로 살 수 있는 식량은 그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서 얻던 양의 4분의 1밖에 안 돼요. 그 결과, 인도의 식량 안보는 75% 가량 퇴보했고, 외화 유출은 10억 루피 이상 늘었습니다. 자급자족을 포기하고 농산물을 돈을 버는 상품으로만 취급하면서 우리는 자주권을 내준 거에요."

- 한국의 경우, 현재 주식인 쌀 자급률은 아직까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위태하다는 지적이 있구요. 반면에 곡물의 경우에는 세계 5위의 수입국이죠. 축산 농가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옥수수 등은 거의 수입입니다. 여기에는 미국 정부가 옥수수 농가에 지급하는 정부 지원금에 좌우되는 가격 경쟁 때문에라도 한국 농부들이 자기 돈으로 옥수수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산업형 농업에서 생산된 농산품이 싼 것은 그 농업에 지불되는 막대한 보조금 때문입니다. 흔히 유기농 식품이 비싸다고 하죠? 유기 농사에 국가 지원금이 들어오도록, 그래도 누구나 (지금보다 싼 값에) 건강한 음식을 먹을수 있도록 식품 민주주의를 위해 나서야 합니다. 국민이 건강해야 국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농부가 홀로 싸울 수 없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만으로도 싸워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됐어요. 정의로운 젊은이들만 나서서도 이길 수 없는 투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함께 해야 합니다."

☞ '깨어나자 2012 : 석학을 만나다 7-②'로 이어집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광화문 유세' 조작사진과 고의적인 편집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유세를 했습니다. 두 후보의 광화문 유세 이후 온라인에는 '광화문 유세 조작'이라는 사진이 나돌았는데, 박근혜 후보 측의 유세 인원을 원본 사진보다 많게 인파의 수를 부풀리는 조작이 가해졌습니다.

광화문 유세 합성 사진을 보면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인원이 원래 박근혜 후보 유세 때보다 많아졌는데, 이런 조작을 누가 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했는지 등이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런 사진이 유포되고 있는지 먼저 알고 언론사에 통보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 제멋대로인 경찰 추산 인원'

사실 이렇게 광화문 유세에 참여한 인원을 놓고 말이 많은 이유는 각각의 후보 측에서 제시하는 유세 인파와 경찰 추산, 언론사별 인원이 모두 달라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후보 광화문 유세에 3만 명이, 민주당은 문재인 후보 유세에 3만 5천 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박근혜 후보 측이 1만5천명, 문재인 후보 측이 1만1천명이 모였다고 발표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경찰 추산을 놓고도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노컷 뉴스는 2만명, 뉴스1은 1만5천명과 2만5천명으로 달랐습니다. 문제는 경찰의 광화문 유세 인파 계산이 눈에 봐도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박근혜 후보 광화문 유세 사진 (위)문재인 후보 광화문 유세 사진 (아래) 출처:오마이뉴스

 


대략 같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을 놓고 보면 어느 정도 문재인 후보의 인원이 훨씬 많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오히려 박근혜 후보의 광화문 유세 인원이 문재인 후보보다 4천명 가량 더 많다고 했습니다.

실제 인원과 경찰 추산 인원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평당 인원을 경찰은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 동일하게 9명으로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광화문 유세에 참가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같은 평당 인원이라도 문재인 후보 유세 참여자들은 빽빽하게 서 있었다고 하니, 이런 평당 인원 계산법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찰은 문재인 후보의 광화문 유세 당시 어두웠기 때문에 산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변명 때문인지, 경찰은 지난 촛불 시위 때도 주최측 50만명과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5만명으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싸이공연 때는 같은 밤 시간대 공연이었지만 주최측 10만명과 경찰측 8만명으로 차이가 2만 명밖에 나지 않아, 경찰 추산이 얼마나 신빙성이 없는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 유세 인원의 실수와 허수'

선거기간 모인 사람의 수는 늘 말썽입니다. 그것은 주최측 입장에서는 참여 인원을 항상 많이 불려서 주장하고, 반대쪽은 그보다 적게 보기 때문입니다. 참여 인원이 많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기도와 관심도가 많다는 점을 나타내기 때문에 '정치적인 숫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나름 옛날부터 선거 유세장에 모인 인원수를 계산하는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기도 했습니다.

 

 

▲1971년 김대중,박정희 후보의 유세 인원 계산법, 출처:동아일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나왔습니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장충단 유세로, 박정희 후보는 대구 수성천 유세로 선거몰이를 했는데, 당시에도 참여 인원을 높고 누가 더 많았느냐에 대한 경쟁적인 숫자 부풀리기가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언론들은 자신마다의 계산법으로 평당 어느 정도의 인원이 앉을 수 있고, 전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는 등의 나름 합리적인 참여인원 계산법이 나왔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장면, 출처:동아일보

 


뛰어난 천재 수학자가 정확히 계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런 선거판의 유세 인원 계산법은 제대로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것은 유세 현장의 상황과 분위기, 선거판의 움직임이 아닐까 합니다.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연설은 지금도 명연설로 손꼽힐 만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었고, 위기를 느낀 박정희 후보도 대구 수성천 유세를 끝내고 나중에 장충단에서 연설을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지난 8일 박근혜 후보가 서울시 광장 유세를 광화문으로 바꾼 것처럼....

' 조작(?) 아니 편집은 이렇게 해야'

광화문 유세의 합성사진을 놓고 사실 여부와 진실공방이 있지만, 사실 언론사들은 대놓고 그렇게 보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교묘하게 편집된 언론사의 사진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 중앙일보 12월10일 정치면 기사.

 


중앙일보는 오늘자(12월10일) 신문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의 광화문 유세 사진을 함께 올렸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문재인 후보나 박근혜 후보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원본 사진을 보면 또 얘기가 달라집니다.
 

 

▲박근혜(위)문재인(아래) 광화문 유세 사진, 출처:오마이뉴스,

 


중앙일보는 대부분의 언론사가 찍은 가로 사진을 세종문화회관 기둥 6번째(좌측부터)에서 잘라 올렸습니다. 그런데 6번째 기둥부터가 진짜 문재인과 박근혜 후보의 유세 인원의 차이가 나는 대목입니다. 지면이 부족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독자들이 한눈에 보기 편하도록 배려한 것일까요?

 

 

▲조선일보 12월10일자 1면 기사와 역대선거 여론조사 및 선거결과

 


조선일보는 오늘 자(12월10일) 신문에서 '박 47.5,문 42.7..격차는 그대로'라는 1면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런 기사를 접한 사람들이 본다면 마치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의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고, 박근혜 후보의 상승세가 계속 유지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런 여론조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역대 선거에서 특히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 후보가 오세훈 후보에게 17.8% 정도 뒤진다고 계속 언론은 보도했지만, 막상 선거에서는 겨우 0.6%의 차이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2011년 강원지사 선거에서도 똑같은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문제는 작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였습니다. 언론은 박원순 후보가 야권단일화 후보였지만, 나경원 후보에게 10% 이상 차이가 난다고 떠들었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박원순 후보가 7.2% 앞섰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국 유권자 4천만 명 중에서 1천명을 뽑아 조사하는 여론조사가 실제 당락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마치 제주도민 11명에게 물어본 여론조사가 제주도민 전체의 민심처럼 보이게 만드는 언론이 문제입니다.

이런 여론조사를 놓고 보면 마치 '서동요'처럼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진실인양 말하는 왜곡과도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MBC가 보도한 편파적인 박근혜,문재인 대전역 유세 장면과 후보자별 웃는 모습,출처:한겨레

 


사진과 영상을 똑같이 찍었어도, 어떻게 자르고 어떤 앵글로 보여주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어떤 후보자의 표정을 잡아주느냐에 따라 후보자에 대한 호감도의 차이는 크게 납니다.

광화문 유세 합성 사진의 논란과 문제가 언론사는 아무런 책임이 없고, 일부 네티즌의 조작일 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언론은 그보다 더한 교묘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론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있습니다.

방송사와 언론은 수신료를 받기도 하고, 공영방송이라는 이유로 온갖 혜택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는 짓은 일개 특정 후보의 선거 홍보방송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론과 신문, 방송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프레임 밖의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결코 사각 창문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보고 사는 갇혀있는 죄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대적인 '문재인 지원' 나선 안철수, 수도권 6개 지역 유세 강행군

안철수 "내가 사퇴했다고 투표 안 하는 분 있으면..."

[현장] 대대적인 '문재인 지원' 나선 안철수, 수도권 6개 지역 유세 강행군

12.12.09 12:12l최종 업데이트 12.12.09 13:40l
조재현(bleedspiral)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가 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11번 출구에서 과천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 조재현

관련사진보기


"내가 사퇴해서 투표 안 한다고 하는 분 계시면 투표 참여해 주시라고 말씀해주세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선 안철수 전 대통령 예비후보는 9일 본인이 사퇴한 후 '투표 포기층'으로 돌아선 이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나섰다. 이날 오전 11시 과천정부청사역에서 첫 유세를 시작한 안 전 후보는 "12월 19일은 우리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선거"라며 "새 정치와 정권교체를 위해 꼭 투표 참여 부탁드린다"고 목소리 높였다.

이어 안 전 후보는 "지난 목요일 문재인 후보가 정치쇄신, 정당혁신에 대한 대국민 약속을 하셨다"며 "문 후보가 그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드리기로 했다"며 문 후보를 향한 지지를 표명했다.

안 전 후보는 목청껏 '투표 참여'를 외쳤지만 갑자기 몰려든 200여 명의 시민에 밀려 그 목소리가 멀리 전파되긴 역부족이었다. 이에 허영 비서팀장이 대신 나서 '인간 마이크' 역할을 했다. 안 전 후보가 말하면 그 말을 큰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식이다. '마이크'를 잡지 않는 '안철수'식 선거 운동 방식이기도 하다. 이에 영하 13도까지 떨어진 추위에도 모여든 시민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안철수 전 무소속 대선후보가 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11번 출구에서 과천시민들에게 인사를 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조재현

관련사진보기


'투표 포기층' 마음 잡기 위해 나선 안철수, 목청 높여 "투표하세요"

이후 시민들과 인사에 나선 안 전 후보는 일일이 시민들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며 감사를 전했고, 몇몇 시민들은 "다음에 꼭 나오세요"라며 19대 대선 출마를 독려했다. 목도리 선물도 이어졌다. 한 초등학생은 안 전 후보에게 아이보리색 목도리를 둘러줬다. '유독 목도리 선물을 많이 받는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모으려고 한다"며 농을 던지기도 했다.

노란 점퍼 입은 민주당 선거운동 사무원을 만나서는 "수고하십니다"라며 격려한 안 전 후보는 20여 분의 유세를 마치고 다음 유세 장소인 수원역으로 서둘러 떠났다.

일요일 오전, 안 전 후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 전 후보의 유세 행렬을 따랐다. '야권단일후보 지지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민우(38)씨는 아침잠을 포기한 채 8살된 딸과 함께 역을 방문했다. 그는 "단일화 모양새가 안 좋아서인지 안 후보가 사퇴한 이후 박근혜 쪽으로 가는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다"며 "안 전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메시지를 더 강력하게 직접적으로 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안 전 후보가 한 발짝 떨어져있는 게 더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동네 주민 김상미(44)씨는 "안 후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민주당이 정치 쇄신하도록 견인해야 더 효과가 있을 것"며 "안철수 후보가 사퇴해 실망이 많았다, 그러나 안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투표장에 갈 이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안 전 후보는 이날 수원·군포·안양·광명시와 인천 부평구 등 수도권 6개 지역을 도는 강행군을 소화한다. 이날 오후 2시 군포시 산본역에서는 문재인 후보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이름의 유세를 함께 펼칠 예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투표율 91.4%, 기득권 무너지는 혁명이 일어났다....

투표율 91.4%, 기득권 무너지는 혁명이 일어났다…
(서프라이즈 / 耽讀 / 2012-12-08)


1952년 2대 88.1%-1956년 3대 94.4%-1963년 5대 85%-1967년 6대 83.6%-1971년 7대 79.8%-1987년 13대 89.2%-1992 14대 81.9%-1997년 15대 80.7%-2002 16대 70.9%-2007년 17대 62.9%

지난 역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입니다. 1대와 8,9,10,11,12대는 간접선거였습니다. 특히 8-12대는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2012년 18대는 '91.4%'는 가능할까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투표율이 77%가 되면 명동에서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 후보가 말춤을 추는 일이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91.4%라니? 비록 드라마이지만 91.4%는 '가상현실'로 달성된 적은 있습니다. SBS 월화 드라마 < 추적자 THE CHASER > (총 16부작, 2012.05.28~2012.07.17)는 대선을 여섯 달 앞둔 시점에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강동윤(김상중 분)은 겉으로는 서민과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었지만 본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청와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강동윤은 대한민국 정치·경제·사회·언론을 장악한, 손자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 수 백 명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대한민국 총리를 전화로 호출하는 한오그롭 서 회장의 반대도 굴하지 않는 '권력욕 화신'이었습니다.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언론을 '이용'하고,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는 선거를 하나마나로 만들었습니다. 쉽게말하면 강동윤은 선거운동을 안해도 대통령 당선은 '따논당상'이었습니다.

 

▲ SBS드라마 <추적자> 강동윤 후보 본질이 드러나자 유권자들을 줄을 섰고, 투표율은 무려 91.4%를 기록했다. ⓒ SBS추적자

투표일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투표일 오후 3시 투표율은 38% 출구조사는 63%였습니다. 이미 끝난 게임이었습니다. 누구도 강동윤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투표일 오후 6시 기준 투표율은 73%였습니다.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투표시간은 오후 6시까지만 투표소에 도착하면 된다는 선거관리규정에 따라 투표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유권자들은 줄을 섰습니다. 15회분 내용을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문 유권자들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투표시간이 오후 6시까지인데 실제 투표종료 시간은 저녁 오후 8시 25분에야 투표가 끝났습니다. 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투표시간이 연장된 것입니다. 최종 투표율 '91.4%.'

 

▲ 투표율 91.4%는 놀라웠다. 대통령을 따논당상으로 생각했던 강동윤 후보는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 SBS추적자

결국 청와대 문고리까지 잡았던 강동윤은 길게 늘어선 유권자가 던진 한장의 투표용지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투표용지 한 장 한 장이 본질은 '거악'이지만 이미지가 만들어준 '서민', '선한' 강동윤을 제대로 심판한 것입니다.

91.4%는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이 '체육관선거'에서나 나올 투표율입니다. 지금은 하늘에 별 따기 투표율로 2012년 12월 19일 18대 대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91.4%를 거꾸로 하면 4·19입니다. 의미심장한 수치입니다. 한오그룹 서 회장은 줄 선 유권자들을 보면서 명대사를 남깁니다.

"이 나라 백성들 맘을 우예 알겠노. 4·19가 일어났을 때 민주주의다 뭐다 그래 난리를 치더이만, 한 해 뒤에 5·16이 일어나니까 민주주의보다 경제 발전이 중요하다고 난리를 쳤다아이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이 나라 백성들의 맘인기라"

대한민국 총리를 전화로 호출하는 서 회장도 '인민'만은 통제할 수 없었음을 인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인민이 주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국민의 주권행사는 바로 '투표'입니다. 투표를 통해 강동윤은 심판받았습니다.

"선거는 좋은놈을 뽑는 게 아니라 나쁜 놈을 떨어트리는 거다"는 말 또한 유권자가 명심해야 합니다. "정치하는 놈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은 수구기득권이 진보개혁세력을 도매금으로 자신들과 같다는 것을 심어주는 교묘한 '술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같지 않습니다. "정치인은 다 같은 놈"에 속으면 안 됩니다. 다릅니다.

<추적자>는 우리에게 겉으로는 '시민', '서민'을 입에 달고 살면서 본질은 자신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을 투표로 심판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월 19일 투표장에 나가면 투표용지에 새겨진 이름 중 대한민국을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갈 후보 이름 옆에 도장을 '꾹' 찍으면 됩니다.

5일부터 국외부재자 투표가 시작되었습니다. 투표를 했다는 인증샷과 글이 트워터를 통해 속속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만삭이 된 몸으로, 250km를 달려가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했습니다. 이분들 열정 10분의 1만 가져도 대한민국은 지난 5년과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투표시간 연장을 거부한 정당에 오후 6시가 되어도 꼬리에 꼬리를 문 유권자들이 제대로 한 번 심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 무서운 줄 알 것입니다. 아래는 국외부재자 투표를 한 이들이 트위터에 올린 글들입니다.

@minyoun******"영국 노팅엄으로 교환학생 간 제 친구(@Haera*****) 이번 주에 재외국민 투표하겠다고 기차표 값 8만원이나 썼다고 해요! 돈 없이 간 내 친구 장하다!!"

@hoj***"뉴욕에서 만삭의 몸으로 투표했습니다."

@depp*****"저도 프랑크푸르트 250km 운전해서 갑니다. 차없는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allth****"국외부재자투표 기간의 첫 날인 오늘 영사관에 들러서 생애 첫 대선 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저도 이렇게 투표했는데 투표소가 집에서 훨씬 가까운 국내 분들은 당연히 투표하시겠죠? ^^"

@katti****독일어도 하시고... 이번 주말 가족들이랑 손잡고 300km 떨어진 프랑크푸르트로 투표하러갑니다.꼭 이깁시다.!!!!"

 

耽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현장에서 본 '경제민주화'] '벼랑 끝' 중소상인 3인 방담

"진흙탕인 줄 알면서도 벌어먹고 살려고 했는데…"

[현장에서 본 '경제민주화'] '벼랑 끝' 중소상인 3인 방담 <2>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2-09 오후 12:52:19

 

2012년의 화두 중 하나는 경제 민주화다. 논자마다 그 정의는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분모는 격차를 줄이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자본의 탐욕과 양극화를 이대로 방치하면 사회가 폭발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깔려 있다.

총선을 치르고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한 해를 돌아보면 경제 민주화에 관한 말이 참 많이도 나왔음을 새삼 절감한다. 여당도, 야당도 모두 경제 민주화를 말했다. 대선 후보들도 너나없이, 자신이 경제 민주화의 적임자라고 자임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뤄진 건 거의 없다. 단적으로, 국회에 제출된 경제 민주화 관련 법안 100여 개 중 열매를 맺은 건 단 하나도 없다. 무성한 말이 무색할 정도다. 정치권의 경제 민주화 담론은 득표를 위한 말의 성찬일 뿐이며, 선거가 끝나면 경제 위기론을 앞세워 경제 민주화 요구를 질식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 민주화는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경제 민주화 주장은 시쳇말로 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 사항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것마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폭발하도록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다.

<프레시안>은 현장에서 경제 민주화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3명의 전‧현직 중소 상인들로부터 직접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무엇이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 그리고 경제 민주화를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상황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경제 민주화를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기에 마련한 자리다.

방담은 11월 29일 참여연대에서 이뤄졌다.
 

☞ 중소상인 방담 지난회: "하루 18시간 일하고도 빚지는 내가 바로 노예"

말만 무성한 경제 민주화…"솔직히 개소리, 여든 야든 차이 없다"

프레시안 : 공통 질문이다. 대선이 코앞이다. 후보들이 시장 등을 찾아 열심히 악수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에 관한 이야기도 올해 무성했고. 어떤 생각이 드나?

▲ 편의점을 운영하는 민인숙 씨. ⓒ프레시안(최형락)
민인숙 : 솔직히 말하면 개소리 같다. 얼마 전 국회의사당에 갔다 왔다. 내 마음 같지가 않더라. 그냥 앉아서 건성건성 듣더라. 서민이 엉엉 울어대니 그 말을 들어준다고 와서 앉아 있는 건 고맙다. 그렇긴 한데, 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나 힘들면 여기까지 왔는지 잘 듣고 해결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 대선? 대통령? 대선에서 이런 문제를 잡겠다고 하는데, 그럼 그동안 뭘 했는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이가 없다.

프레시안 : 경제 민주화에 관해 말은 많지만 이뤄지는 건 별로 없다. 경제 민주화 관련법으로 꼽히는 유통법 개정안 등이 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김진철 : 국회에서 유통법 개정안이 무산되기 전 그걸 통과시키려고 가서 살다시피 했다. '야, 영세 상인들이 살아남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국회의원들이 왜 대기업 편을 들까?'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뭔가 먹지 않았으면 과연 그럴까? 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발목 잡을 일이 없다. 대자본 때문에 돈 없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워진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난 대학을 안 나왔지만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많이 배운,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걸 모를까? 다 알 것이다. 그런데 왜 안 고칠까? 받아먹어야 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나. (민인숙 : 맞다.) 받아먹어야 하니까 그쪽을 키워줘야 하는 것이다.

민인숙 : 얼마 전 인터넷에서 '800미터 내 편의점 신규 출점 제한'이라는 기사를 봤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즉시 공정위에서 오보라고 발표했다. 검토한 적이 없다더라.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그리고 새로 편의점을 하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기존에 편의점을 운영하며 (근접출점 등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보상 문제를 이야기하라는 건가? 난 죽어라고 해서 회사 키워준 것밖에 안 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송용한 씨에게) 경제 민주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송용한 : 말로는 이야기하는데…. 예전과 똑같지 않겠나? 사실 오늘 법원에 다녀왔다. BBQ 가맹점을 하던 사람들이 제너시스와 소송을 하고 있다. 법정에서 판사도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하긴 하던데, 결론은 일부 승소, 사실상 패소였다. 없는 사람들은 그냥 죽어라, 이런 것 같다.

김진철 : 그래도 문재인 후보가 조금은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든다. 어쨌건 우리 시장에도 두 번이나 방문했다. 박근혜 씨는 우릴 피해 다니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유통법 개정안은 새누리당이 반대해서 통과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민주통합당도 경제 민주화 관련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김진철 : 그런 건 있지만 야당으로서 어려움이 있어 보이더라. 경제 민주화는 여야를 떠나서 해야 한다. 박근혜 씨도 영세 상인들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경제 민주화를 외친 건데,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대선 전에 그 법이 무산됐는데 대선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막막하다.

프레시안 : 경제가 어렵고 내년엔 더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온다. 그래서 당분간 경제 민주화 관련법을 통과시키는 게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김진철 : 당연하다. 그게 힘들어진다. 대기업들, 그동안 쉽게 돈 벌어오지 않았나. 대기업들은 세계로 나가 싸워 이겨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 문턱을 자꾸 낮춰주니 대기업들이 아주 쉽게 돈을 벌었다. 대선이 끝난다고 경기가 풀릴 것도 아니고 어려움이 지속될 건데, 그 사람들(대기업)이 울타리 쌓는 걸 보고만 있겠나? 어떤 짓을 하든 무마하려고 할 것이다.

민인숙 : 대선 후보나 본사에서 나온 팀장이나 하는 이야기는 똑같다. (다들 웃음) 들어보면 다른 점이 없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만 하고 이루는 게 도대체 뭐가 있나? 그러니 영세업자들이 죽어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 국민이 없으면 대통령이 필요할까? 우리 같은 영세업자가 없으면, 영세업자를 다 죽이고 나면 대기업은, 대통령은 뭘 할 것인가? 진짜 답답하다.

"동네 빵집 사장 자살, 남의 일 같지 않다"


프레시안 : 어제(11월 28일)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밀린 부산 동네 빵집 사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김진철 :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이런 상태가 다음 정권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런 사람이 100명이든 1000명이든 나올 수 있다. 상인들 중엔 대체로 자신을 하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바로 이 사람들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대로라면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밖에 없다. 난 이번에 상인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무서워할 것이다. (목소리를 높이며) 시장에 (유통법 개정안 통과를 막은 새누리당의) 박근혜 씨가 왔는데 (상인들이) 왜 지랄들을 떠나? 죽겠는데, 왜 그때는 펄펄 기운이 살았느냐고? 이런 걸 상인들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 영원히 못 바꾼다. 경제 민주화를 실천하지 않으려는 후보는 피를 보게 만들어줘야 한다. '상인들 화나니 무섭네. 들어주자.'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 아니겠나.

▲ 망원시장 상인 김진철 씨.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택시기사들이 많이 힘들어한다는 말이 곳곳에서 나온다. 프랜차이즈와 택시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송용한 : (단호하게) 프랜차이즈는 절대로 안 할 것이다. (다들 웃음)

프레시안 : BBQ가 아닌 다른 프랜차이즈라도?

송용한 : 그렇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힘들다. 내가 벌어서 본사를 키워주는 결과밖에 안 나온다.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양보해서 서로 잘되게 하면 좋은데, 그런 게 안 되니 자꾸 말이 나오는 것이다.

프레시안 : 프랜차이즈 하기 전엔 어떤 일을 했나?

송용한 : 회사에 다녔다. 정리해고 당한 건 아니고 돈을 좀 더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명예퇴직을 해 창업했다.

프레시안 : 그 다음은 '대기업이니 안전판은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안전판이 아니었음을 체험한 시간인가?

송용한 : 그렇다. 너무 심하게 하니까. 같이 갈 수 있는 방향을 생각해야 하는데 너무 독단적으로 하니까.

"다시 프랜차이즈 하느니 영업용 택시 몰겠다"

프레시안 : (민인숙 씨에게) 편의점 계약 기간이 3년 남았다. 5년 계약이 만료된 후 계속 할 생각인가?

민인숙 : 절대 안 한다. 절대로. '편의점이고 대기업이니, 개인으로 하는 것보다는 여러 부분에서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그렇지 않더라. 죽어라고, 잠 못 자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손님을 잡아끌어 장사가 좀 잘된다 싶으면 떡하니 바로 옆에 또 하나를 세워버리니 어느 누가 그걸 하겠나? 빚을 얻어 시작했는데 그 빚이 또 다른 빚을 낳고…. 장사가 안 되도 대출 이자는 나간다. 이런데 또 대출을 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결국 보험과 적금을 해약했는데, 이걸 5년 계약 만료 후 또 하란 말인가?

대통령도 바뀌어야 하고 우리 같은 사람도 바뀌어야 하는 건 맞는데, 진짜 위에서 서민들을 위해 잘해야만 사회도 대통령도 대기업도 영세업자도 산다. 그런데 대기업만을 위해서 열심히 길을 닦아놓으면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프레시안 : 얼마 전 대선 캠프에 속한 인사들이 참여한 토론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영업자가 너무 많아 문제'라는 캠프 인사의 말에 한 시장 상인이 '좋은 일자리를 충분히 만들어놓지 않았으면서, 우리한테 포화 상태라고 하는 게 적절한가'라고 따졌다. 괜찮은 일자리 부족에 더해 가계 부채 증가, 베이비부머 은퇴 물결이 겹치면서 자영업자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여기 계신 분들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민인숙 : (한숨) 아, 솔직히 갑갑하다.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살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남은) 3년간 질질 끌고 가면 제일 걱정되는 게 빚이 얼마 남을까, 계약이 끝난 후 그 빚을 갚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방도가) 없더라. 내 결론은 '안 먹자. 먹지 말자'다. 집에 앉아서 적게 먹고 안 쓰는 게 하루에 18시간씩 움직여서 빚만 느는 것보다 낫다. 18시간씩 일해 몸은 몸대로 축나고 남는 것도 없지 않나. 다시 또 한다? 아니, 집에 콕 박혀 있으련다. 그게 낫다.

김진철 : 자영업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할 수 있는 데가 있어야 가게를 안 차릴 것 아닌가. 월급을 받아야 가족들을 먹여 살릴 것 아닌가. 그런 일자리가 없는데, 그럼 폐지라도 주우러 다녀야 하는 건가? 돈을 박박 긁어서 프랜차이즈처럼 차리기 쉬운 것들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데 들어가면 덫이 있어서 거덜 나기 딱 좋다.

프레시안 :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인가?

김진철 : 그렇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들어가면 그래도 벌어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으니까. 사실 진흙탕인데. 그러다 보니 계속 밑으로 내려가고, 격차는 더 심해지는 사회가 된다. 새로 뽑히는 대통령이 이걸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민란 일어나지 않겠나.

국회에만 해도 경제 민주화와 관련해 100개가 넘는 법안들이 들어가 있다. 안 하는 게 문제다. 그중 50퍼센트만이라도 통과되면…. 이번 유통법 개정안, 그것 진짜 미약한 것이다.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되면 숨 좀 쉬겠다 했는데, 그것마저도 못 해주겠다며 법사위에서 가로막았다. 절망이다. 분노밖에….

송용한 : 일자리를 이야기했는데, 택시를 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일할 데가 있나, 일을 못 하면 돈이 없고, 그럼 마이너스 생활을 계속해야 하고….' 빨리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할 터인데.

▲ BBQ 치킨점을 운영했던 송용한 씨. ⓒ프레시안(최형락)

"문제는 자영업자 포화? 좋은 일자리가 있어야 가게를 안 차릴 것 아닌가"

프레시안 : 재벌을 옹호하는 이들 중에는 토론회에 나와서 '자영업에 뛰어들지 마라. 다 망한다. 자본이 그 영역을 책임지고 사람들은 거기 들어가서 일하는 게 안정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민인숙 : (한숨) 휴우.

김진철 : 대형 마트, 일자리가 많지도 않다. 큰 데라고 해도 100명 안쪽이다. 나머지는 입점업체들이 직원을 밀어 넣어줘야 하는 것이다. 직원을 밀어 넣는 건 입점업체들이 부담한다. 대형 마트에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건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 지역 사람 중 몇이나 되겠나? 하지만 우리 자영업자들이 망가지면? 딸린 식구가 몇인가? (심각성이) 상상을 초월한다.

민인숙 : 본사가 가져가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그 돈은 누구 입으로 들어가는 건가? 서민들이 먹고살아야 하는데, 대기업으로 돈이 들어가고 대기업은 국회의원과 대통령 먹여 살리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 롯데 회장이 담배 판매권을 갖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나. 아니 그 사람은 담배 판매권을 왜 갖고 있는 건가? 우리 같은 점주들이 죽어라고 가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담배 판매권을 받으려 그렇게 애써서 담배 판매권을 받아 세금을 내고 그러는데, 자기네들은 그걸 받아서 어디에 쓰는 건가? 솔직히, 살려줬으면 좋겠다.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기자 : 세븐일레븐은 롯데 계열사다.)

김진철 : 지금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데는 언론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감시를 제대로 안 한 것 아닌가. 정부가 대기업 편향 정책을 펴면 그 문제를 계속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최형락)

- '벼랑 끝' 중소상인 3인 방담

<1> "하루 18시간 일하고도 빚지는 내가 바로 노예"
- 늪에 빠진 중소상인

공덕시장ㆍ망원시장에 나타난 '괴물', 상인들은…
뚱이할매네 생선 가게엔 대체 뭐가 있길래…
"재벌이 '경제 아우슈비츠' 만들었다"

떠밀려 창업하는 20대…비정규직이냐, 빚 장사냐
아이스크림 '할인 가격', 정말 싸진 걸까
자영업자들의 '은밀한 덫', 권리금

대만에서 모셔온 '버블티 달인'은 왜 떠나야 했을까?
자칫하면 '빈곤층'…자영업자 패자부활전은 없다
'빚내서 빚 갚기', 자영업자 탈출구는 없다

'빚의 노예' 된 자영업자, 해법은?
- 관련 주요 기사 모음

'레드오션' 자영업 "물러서면 벼랑 끝, 눈 앞엔 핏빛 경쟁"
"자영업 강제 구조조정 온다"
IMF로 시작된 자영업 위기, 해법은?

커피 프렌차이즈, 달콤쌉싸름한 유혹 뒤엔…
'된장녀'가 일으킨 커피공화국, 이제는…
홍대 카페는 '은퇴자의 무덤'! 탈출구는?

집 대출금 400조 시대, '퍼펙트 스톰'이 몰려온다
인천, '제2의 유바리'될까…지자체 부채 75조 시대
정부가 만든 '부채 폭탄', 유럽 위기 겹치면…

가계부채 '1천조 폭탄', 수렁에 빠진 사람들
"몰려오는 폭풍, 부동산 고꾸라지면…"
한·EU FTA는 어떻게 500만 중소상인을 울리나?

김연아가 30억 투자한 명품거리 '커넬워크'도 '황량한 사막'
"연세대 송도 캠퍼스 특혜 논란, '최후에 웃는 자' 누구냐?"
KDI "3년 간 살아남을 확률…옷가게 24%, 분식점 31.5%, PC방 32%"

문 닫은 저축은행, '그들'은 웃는다
저축은행 사태에 왜 정권 실세들이 쇠고랑을 차나?
용산역세권개발 사업은 왜 표류했을까?

막창집 주인 이씨는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홍대 앞에는 왜 '부비부비' 클럽만 남게 됐나"
"돈 냄새와 정욕에 질식한 예술의 거리"

 

 
 
 

 

/김덕련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5만 : 1.1만' 박근혜 승? 문재인이 이겼다!

박-문 '광화문 대첩', 경찰의 고무줄 추산법 논란... 밀집도 등 고려 안 해

12.12.09 11:26l최종 업데이트 12.12.09 11:48l
최경준(235jun)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사진 위)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사진 아래)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시간여 차이를 두고 서울지역 집중유세를 벌였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의 '광화문 대첩' 승자는 누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문재인 후보의 '박빙 우세'였다.

대선을 11일 앞둔 8일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서울의 심장부 광화문광장에는 온종일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출렁였다. 박근혜·문재인 두 대선 후보가 이날 시간차를 두고 나란히 광화문광장에서 총력 유세를 펼쳤기 때문.

당초 문재인 후보 쪽에서 먼저 이날 유세를 '광화문 대첩'으로 이름 붙였지만, 박근혜 후보 쪽에서 뒤늦게 유세 장소를 광화문광장으로 바꾸면서 이날 유세전은 두 후보 간 세대결로 확전됐다. 문 후보가 이미 오후 5시 30분에 광화문광장 유세를 예고한 상태에서 박근혜 후보는 서울광장으로 예정됐던 오후 3시 유세를 광화문광장으로 변경한 것.

특히 박 후보는 이날 대구-경북 지역 유세까지 전격 취소하고 수도권 공략을 위해 광화문 유세를 결정하면서 문 후보에게 정면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권자의 과반 가까운 인구가 사는 수도권에서 주말 동안 형성되는 여론이 남은 선거전의 최대 변수라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쪽은 이날 유세에 엄청난 공을 들였고, 지금까지 다른 어떤 행사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경찰 추산, 박근혜 1.5만 : 문재인 1.1만... 양쪽은 3~3,5만 "서로 이겼다"

일단 경찰이 추산한 유세 참여 인원만 놓고 본다면 박 후보가 문 후보에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관할서인 종로경찰서 정보과는 이날 오후 8시 30분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박 후보의 유세에는 1만5000명, 문 후보의 유세에는 1만1000명이 운집한 것으로 추산한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언론도 이러한 경찰 추산 자료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양쪽에서 자체 추정한 유세 인파는 경찰 추산과 크게 차이가 났다. 조윤선 새누리당 대변인은 박 후보의 유세에 "3만 명의 서울시민이 모였다"고 자체 추산했다. 반면 박광온 민주당 대변인은 "경찰 추산 2만5000명, 당 추산 3만5000명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 대변인은 "주변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 의견 또한 박근혜 후보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격려해 주셨다"고 부연했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경찰 추산도 제각각이었다. <노컷뉴스>는 박근혜 후보 유세를 보도하면서 "이날 모인 시민 수는 오후 4시 현재 총 2만여 명(경찰추산, 주최측 추산 3만여 명)으로 집계됐다"고 했다. 이 신문은 이어 "박빙의 선거 판세를 보여주듯 문 후보의 유세 현장에도 역시 2만여 명(경찰 추산)의 지지자와 시민들이 몰려..."라며 양쪽이 '무승부'라고 보도했다.

반면 <뉴스1>은 "낮에 진행된 박 후보의 유세에는 1만5000여 명(경찰추산), 해 질 무렵 시작된 문 후보의 유세에는 2만5000여 명(경찰추산)의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광화문 광장과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 등 일대를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1만5000 : 2만5000'으로 문재인 후보의 압승인 셈이다. <데일리안>도 "이날 오후 6시가 가까워오면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과 KT사옥 앞에는 문 후보를 보러 온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이날 광화문 일대에만 경찰 추산 2만5000명(주최 추산 3만5000명)가량의 인파가 모였다"고 보도했다.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대규모 서울지역 합동유세에서 지지자들이 응원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의 서울지역 집중유세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노란목도리를 한 지지자들이 유세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승자는 문재인... 경찰은 왜 박근혜 손 들어줬을까?

광화문 유세 참석 인원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인 가운데, <오마이뉴스>에서 촬영한 두 행사의 전체 사진으로 비교할 경우 박근혜 후보의 행사보다 문재인 후보의 행사에 최소 2000~3000명은 더 많았다.

박 후보의 유세 당시에는 세종대왕 동상에서부터 세종로사거리까지 인파가 늘어섰고,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도 빽빽이 들어찼다. 그러나 문 후보의 유세 때는 여기에 더해 세종문화회관 건너편 KT사옥 앞 인도에까지 문 후보를 보러 온 지지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또한 박 후보의 유세 때는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설치된 무대 바로 앞에 포토라인을 넓게 치면서 빈 공간이 크게 생겼고, 무대에서 멀어질수록 띄엄띄엄 사람들 사이로 빈공간이 생기면서 밀도가 높지 않았다. 반면 세종대왕 동상 쪽으로 무대가 설치된 문 후보의 유세에는 빈공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밀도가 높았다. 게다가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이 인파로 가득 차자, 문 후보 지지자들은 계단 앞 인도까지 늘어섰다.

문 후보 유세 때 사회를 맡은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시작 전 "우리가 이겼다"며 박 후보 유세보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취재기자들도 박 후보보다 문 후보 유세에 좀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경찰은 왜 박 후보의 유세에 4000명 정도가 더 많이 모였다고 추산했을까?

경찰이 행사 참여 인원을 추산하는 방식은 다소 주관적이다. 종로경찰서 쪽은 이날 "유세 현장에 정보과 직원이 직접 나가서 인원을 추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우선 단위 면적을 기준으로 인원수를 판단한다. 3.3제곱미터(1평)당 앉으면 6명, 서면 9명으로 본다는 것이다. 밀집도가 높은 행사의 경우에는 앉으면 9명, 서면 15명으로 늘려서 계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000평 규모의 공간에 사람들이 서 있다면 적게는 9000명에서 많게는 1만5000명이 모였다고 추산하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8일 행사의 경우 박근혜 후보가 먼저 유세를 했기 때문에 문재인 후보의 유세 참가 인원수는 박 후보 유세를 기준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두 유세 현장을 비교하면서 참석자들의 정확한 밀집도 차이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후보 유세의 경우 1평당 9명이 서 있고, 문 후보 유세의 경우 15명이 서 있었어도 경찰은 양쪽 모두 1평당 9명이 서 있고 추산하게 된다. 박 후보 유세장과 비교해 문 후보 유세에 참석한 지지자들이 훨씬 촘촘하게 서 있었지만, 경찰 추산에는 이런 점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박 후보 때와는 달리 KT사옥 앞까지 늘어선 문 후보 지지자들이 경찰 추산에 포함됐느냐도 관건이다. 이 경찰 관계자는 "광화문 광장 내에 있지는 않았지만 연단을 향해 바라보는 무리도 대략 추산해서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광장에서 벗어나 KT사옥 앞 인도까지 늘어선 참석자들의 수를 어떻게 계산할지는 전적으로 현장에 나가있는 정보과 직원의 주관에 달려있다. 이와 관련 종로경찰서 정보과의 한 직원은 "문재인 후보 유세의 경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 100%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며 "경찰 추산의 경우 10~15% 정도 오차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요즘 그런 것(정당 유세 참석 인원 등) 가지고 (정치적 목적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며 "또 장난칠 이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의 외압을 받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유세 참석 인원수를 왜곡시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경찰 추산 결과에 대해 "누가 봐도 문 후보의 지지자가 박 후보보다 더 많았는데, 경찰은 오히려 거꾸로 된 추산을 내놨다"며 "MB정권의 눈치를 봤거나, 벌써부터 박 후보에게 줄을 서기 위해 일부러 문 후보 유세 참석자수를 줄여서 발표한 것 아니냐"고 의혹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한편 강태규 대중문화 평론가는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성공을 평가하면서 경찰의 '고무줄 추산법'을 비판한 적이 있다. 지난 10월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는 "어제(4일) 서울광장의 싸이 공연에 10만여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경찰은 8만 명으로 추산했다"며 "흥미로운 것은 경찰의 참가자 추산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주최 측과 경찰의 참가자 추정이 불과 2만 명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며 "4년 전 7월 촛불시위 때 주최 측은 최소 50만 명이 참가했다고 했지만, 경찰은 참가자를 5만 명이라고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촛불시위 때 참가자를 10분의 1로 추산하던 경찰이 이번 싸이 공연에서는 20%만 깎았다"며 "시위 참가자수는 팍팍 줄이고 공연 관람자 수는 넉넉하게 세는 경찰의 고무줄 추산법이 싸이의 '말춤'으로 다시금 쓴웃음을 자아낸다"고 꼬집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