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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민참여매체 <한겨레> 창간 과정에 '길'이 보인다

최초 국민주신문, '대선 멘붕' 후 40억 모았다

최초의 국민참여매체 <한겨레> 창간 과정에 '길'이 보인다

12.12.22 20:05l최종 업데이트 12.12.23 00:34l
이정환(bangzza)

 

 

'그럼에도' 역사는 나아갈 바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벌써부터' MBC 경영진이 200여 명을 권고사직시킬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노조는 "강제 해고와 같은 말이다, 상당수 기자와 PD들의 대량해직이 우려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200여 명의 폭도를 동원하여 기자, PD, 아나운서 등 130여 명을 회사로부터 축출한 <동아일보> 역사가 떠오른다. 이어 <한겨레> 창간이 맞물린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대거 참여한 최초의 국민주 신문, 최초의 국민방송을 만들자는 누리꾼들이 <한겨레> 창간을 희망의 근거로 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이번 대선을 통해 주목을 받은 <오마이뉴스>의 오마이TV나 인터넷 팟캐스트 <뉴스타파> 등에 대한 후원 열기로도 이어지고 있다. 다음(Daum) 청원 게시판 '공정 보도를 위한 방송사 설립 청원 운동'에는 서명 시작 이틀여 만에 5만 명이 훨씬 넘게 참여했다.

확실히 역사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모금 목표액이 50억 원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한겨레>의 창간 모금액 역시 50억 원이었다. 최초의 국민주 신문이 창간된 것 또한 '대선 멘붕' 다음에 이뤄졌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거울'은 이것이다. <한겨레>는 어떻게 창간에 성공했을까.

오늘을 읽는 '텍스트', 최초의 국민주 신문 창간 과정

1987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한겨레> 창간 전면광고
ⓒ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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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민주신문 '싹'이 나온 것은 1979년 11월 하순 성동구치소였다.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던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은 동료들에게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새 시대가 열린 것은 그로부터 7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1987년 6월 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 해 7월 어느 날, 옥살이에서 얻은 병마로 세상을 등진 안 위원장의 뜻을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장이 이어 받는다. 정태기 조선투위 위원장, 리영희, 임재경(훗날 한겨레신문 부사장) 등과 함께 한 저녁자리였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온 국민이 한 주씩 갖는 국민 캠페인을 벌이는 거죠. 국민 모두가 주식을 사는 방식으로 창간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특정 자본에 종속될 일이 없어서 좋고, 명실상부한 국민 모두의 자유언론 의지를 담아낼 수 있어서 좋고!."

시작도 좋았다. 곧바로 전·현직 기자 196명이 새 신문 창간발기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위원장은 '해직기자의 대부' 언론인 송건호가 맡는다. 각자 호주머니를 털었다. 한 사람당 50만원, 그렇게 모인 1억원으로 서울 안국동에 창간 사무국을 연다.

신속 과감했던 실행력...'자주민보' 될 뻔한 사연

<한겨레> 초대 사장을 역임한 송건호 선생(2001년 타계)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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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신속했고 또한 과감했다. 9월 1일 창간을 공식 선언한다. 이어 23일에 새 신문 발의자 총회를 연다. 주식은 한 주에 5천원, 한 사람의 출자 상한선을 창간 모금액 50억원의 1%로 제한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땅 밖으로 솟아난 희망의 근거는 다른 이들의 가슴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함석헌, 문익환 목사,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원로 24명이 지지 성명을 발표한다.

제호 결정에는 학생들의 의견도 반영했다. 대학신문 기자 등 대학생들과 해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자주민보, 민주신문, 독립신문, 한겨레신문 등 4개 제호를 놓고 '투표'한다. 결과는 한겨레신문 164표, 자주민보 118표. <한겨레>가 <자주민보>가 될 뻔한 사연이다.

창간 준비는 순항을 거듭했다. 10월 30일 서울 명동 YMCA 강당에서 창간 발기인대회가 열린다. 창간 발기인은 모두 3342명. 교수, 작가, 변호사, 종교인,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발기인 대회 선언문은 현재 국민 방송에 대한 당위성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동시에 오늘의 MBC가 떠오른다.

"우리가 새 신문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이 땅에 언론매체가 부족한 때문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백만의 부수를 주장하는 여러 신문, 97%의 보급률을 자랑하는 텔레비전을 포함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방송망과 수십만 부를 넘는다는 월간지와 주간지 등 수많은 언론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굳이 새 신문을 창간하고자 하는 것은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는 바르고 용기 있는 언론이 없기 때문입니다...(중략)

...오늘의 언론현실은 탄압의 결과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자진 협조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언론다운 언론의 부재는 오늘의 언론인들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정책적 의도하에 언론기업이 구조적으로 예속 당해 이미 자주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 둘 양심 있는 언론인이 남아있다 해서 언론이 제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20년 만에 실시된 직선 대통령 선거 패배 '멘붕'

20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의 '프리 허그'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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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조선일보>에 특이한 전면 광고가 실린다. "온 국민이 만드는 새 신문 - 한겨레신문의 주인이 됩시다", 이에 대한 성원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각종 후원회가 결성됐고, 대학에서, 교회에서, 사찰에서, 거리에서 모인 돈이 한 달도 채 못 돼 10억 원에 육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후 뜻밖의 '암초'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대선이었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창간 모금 열기는 눈에 띄게 시들해졌다.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 사이에서 송건호는 중립을 선언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승부'에 집중됐다. 설상가상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싸운 결과가 전두환과 다를 바 없는 노태우를 합법적으로 당선시킨 꼴"이 나왔다. 대선 결과는 '참극', 그 자체였다.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이들이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던 198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동아일보>에 실린 강렬한 문구가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다. 그 문장은 "정의는 천천히 올 수도 있는 것"이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힐링'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주화는 한 판의 승부가 아닙니다! 허탈과 좌절을 떨쳐버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모으십시오!"

단 두 달만에 모인 40억원, 마지막 고비는 '정권'

창간기금 50억원 모금 완료를 알리는 1988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광고
ⓒ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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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결한 두 문장의 '울림'은 거대했다. 광고가 나간 이후 창간기금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8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면광고를 보면 그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월 14일에는 하루 1억 4천만원의 출자를 기록하였으며, 1일 평균 7천만원의 출자금이 모이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다.

단 두 달만에 40억원에 육박하는 돈이 모인다. 대선 전 모인 돈 10억원을 더해, 마침내 2월 25일 창간기금 50억 원 마련에 성공한다. 당시 돈의 가치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 모인 것이다. 패배로 시작됐지만, 그것은 분명 승리의 시작이었다.

물론 마지막 고비는 남아있었다. 노태우 정권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윤전기가 생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윤전기는 허가받은 신문사만이 수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낡은 윤전기를 국내에서 간신히 마련하자 이번에는 신문사 등록필증 교부를 차일피일 미뤘다. 시행령 미비를 이유로 혹은 현장 시설 확인 등을 내세워 등록증 교부를 질질 끌었다고 한다.

이에 <한겨레> 사람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화문 네거리와 명동으로 달려나갔다. 결국 노태우 정권이 발동한 것은 '꼼수'였다. 4.26 총선을 하루 앞둔 1988년 4월 25일, 마침내 <한겨레>는 등록필증을 교부받는데 성공한다. 물론 당시 정권이 '머리띠'의 힘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만 2만7223명, 그 '힘'을 누를 명분이 정권에는 없었다. 그 해 5월 15일, 한국 언론사는 물론 세계 언론사에도 유례가 없는 국민주 신문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건호 "운동권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아투위의 30년 발자취를 정리한 <자유언론>은 창간 성공 비결의 하나로 "정치적 격변과 민심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신속 과감하게 한겨레신문이란 조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본으로 연결시킨 판단력과 실행력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못지 않게 송건호의 '원칙'은 지금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한겨레가 몇몇 해직기자들의 전리품처럼 인식되어서는 곤란하다"며 "한겨레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나, 그 결과물은 운동권이나 해직기자들의 몫이 아니라 국민들의 몫"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송건호에게 변하지 않는 원칙은 언론은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겨레신문은 1987년 민주화투쟁으로 탄생할 수 있었고, 모든 국민과 민주화진영의 소원대로 언론의 정도를 걸어야겠지만, 그렇다고 운동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신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송건호의 생각이었다." (2008 송건호 평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이번 대선 결과는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이들에게는 확실히 '멘탈 붕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허나 지금의 '멘붕'은 20년 만에 실시된 1987년 직선 대통령 선거 패배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위력이 약한 것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전면광고' 못지 않은 집단 지성이 이미 꿈틀거리고 있다. 역사에 '멘붕'은 없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패배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인용 또는 참고자료

2000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2002 정연주의 워싱턴 비망록1 <서울-워싱턴-평양>
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자유언론>
2008 송건호 평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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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1)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20년 후 (1)
 
(After the Fall :20 Years Later In The Former Soviet States)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기사입력: 2012/12/23 [04:33]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이 글은 전국노동자정치협회(http://lmagit.jinbo.net)에서 발간하는 '노동자정치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외부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_ 편집자 주]


출처: 진보노동당(Progressive Labor Party)의 정기간행물 <공산주의자(THE communist)> 2012년 겨울호
http://www.plp.org

 

편집자 주: 이 글은 미국 진보노동당(PLP)에서 쏘련 및 동유럽 쏘비에트 국가들의 붕괴 이후 20년 동안의 인민들의 삶이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우리는 이 글을 번역해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것이다.
 


2009년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 기념일은 유럽과 미국 자본가들의 자축이라는 향연의 시작으로 기념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쏘비에트 연합의 붕괴는 “역사의 종말1)”인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완벽하고 총체적으로 승리2)로 새겨졌다. 뉴욕타임즈는 “공산주의 체계의 공허함이 폭로되었다.”고 선언했다. “권력과 정치적 계산”은 “자유라고 불리는 한결같은 열망에 의해 압도3)”당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성대한 축하 행사가 진행되었다. 거대한 도미노가 한 줄로 설치되었고, 전직 폴란드 대통령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레흐 바웬사(Lech Walesa)가 첫 번째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동안, 미국 밴드 본 조비는 “우리는 복종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4)라는 노래를 불렀다.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쏘련 붕괴는 엄청난 후퇴로 기록된다. 노동자들이 한탄해하는 동안 서구 자본가들은 스스로를 축하였다. 동독의 한 금속 노동자는 “나에게 미래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공산주의 시절에 내가 더 잘 살았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붕괴 직후, 모스크바 병원의 한 의사는 “2년 전과 삶이 달라졌다 - 나는 한 인간이었다.”라고 했고, 새로운 “자유”가 감사한지 그에게 물어보자 그는 “무엇을 위한 자유? 포르노 잡지를 살 자유?”라고 답했다. 심지어 열렬한 반공주의 학자인 앙겔라 스텐트(Angela Stent)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황이 공산주의 때보다 악화되었다”라고 인정해야 했다.5)

진보노동당(The Progressive Labor Party)은 쏘련(그리고 공산주의 중국)이 자본주의로 복귀할 운명에 처하도록 만든 정치적 약점에 대해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6) 하지만 쏘련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성과들은 그 패배를 비통한 것으로 만들었다. 맨 처음 노동자 국가의 창조는 모든 사회의 정치, 경제적 기초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선구자들이 그러하듯, 쏘련 공산주의에는 많은 실수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는다.7) 그러나 사람들은 쏘련의 거대한 성과, 여성권리의 신장, 쏘련 내외부에서의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사회안전망 형성, 세계 최고의 무상교육과 건강 보호 체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서 나찌를 물리친 거대한 노력과 희생 때문에 쏘련을 기억한다.

쏘련이 붕괴되었을 때 그것은 1956년 쏘비에트 공산주의를 처음 공격했던 흐루쇼프 이래로 변화되어 왔던 경제, 사회적 관계의 질적인 변동을 나타냈다.8) 1980년대 쏘비에트 지도력은 완전히 부패했고, 수정주의적이었으며, 많은 관료들(특히 옐친이나 푸틴 같은)이 쏘비에트 이후 러시아 자본가 계급을 형성해 왔다는 점이 증명된다.

1930년대에 세워진 기관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분명히 타락한 상태에 있다. 1989년에 시작하여 1991년까지 진행된 쏘련의 붕괴는 구 쏘비에트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했고 자본주의 자유 시장으로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과거 쏘비에트 블록의 인민들의 삶을 전적으로 변화시켰다. 기대 수명이 줄어들었고, 실업은 급상승했으며, 인종주의와 성차별은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또한 대다수 노동자 계급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억압이 진행되었다. 쏘련 붕괴 20년 후, 한 때는 세계 최고의 노동자의 국가였던 쏘련에서의 자본주의의 영향을 평가해 여기 담아보았다.


쏘비에트 경제의 붕괴

서구 선전에서는 자본주의가 동유럽 시장을 자유롭게 해주며 침체되고 불필요한 관료적 쏘비에트 경제에 활력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구에서는 쏘련의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가 결핍을 끝내 주고 영원한 번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수십 년 동안 CIA의 통제를 받는 ‘자유 유럽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들을 이용해 왔다. 진실은 완전히 그 반대에 있었다.

헝가리가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개방된 처음 몇 달 동안 생필품의 가격은 30%가 치솟았고 순식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으로 추락했다. 생활수준에서의 이러한 극적인 추락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헝가리 공산당이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장 개혁의 추구(이른바 “굴라쉬 공산주의(편집자 주-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며 헝가리에서 자유시장 요소를 도입하던 것을 말함)”)라는 경향의 한 부분이다. 1980년대의 시장 경제로의 변화 이후에 두 가지 일을 같이 하는 노동자는 70%가 증가했고,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8.5 시간에서 14.5 시간으로 뛰었다. 20%의 빈곤선 이하의 생계인구와 더불어 1990년대까지 증가한 것은 오직 가난한 사람의 수였다.9)


사진: 쏘비에트 노동자들의 새로운 광경, 모스크바에서 실업자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자유 시장 천국”으로 들어선 처음 2년 동안 러시아에서 실업자 수는 1백만에서 8-9백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1993년까지 숫자는 1500만 명에 달했다.10) 1996년도까지 러시아에서의 생활수준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쏘련에서 4:1 수준의 빈부격차는 13.5:1로 늘어났으며, 남성의 기대 수명은 57세 까지 줄어들었다. 농업의 사유화는 생산의 하락으로 이끌었고 1995년 러시아는 30년 만의 최악의 작황을 거두었다11). 러시아에서 버려진 어린이는 과거에 거의 없던 수준에서 1998년까지 2백만 이상으로 증가했다. 러시아정신과의사협회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증가하고 있는 집 없는 아이들 중 자살률은 놀랍게도 10%에 달한다!12) 모스크바 경제 분석 기구의 대표는 자본주의가 성숙해 온 6년 동안의 일반 민중들의 느낌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악화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안정성도 없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다.”13) 라고 정리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공산주의의 “패배”의 상징이 된 동독에서는 한 달에 25-50달러씩 하던 임대료가 솟구치자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1945년 이전 동독 지역의 여러 부동산을 소유했던 서독인들이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보상청구를 하여 수많은 동독의 가정이 위협 받았다. 제기된 청구의 상당수는 나찌이거나 나찌의 상속인이었다. 동독인들이 서독의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청구를 제기했을 때에는 청구 기간이 이미 지나버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동독에 대해서는 2백2십만 건의 청구가 제기된 반면 서독에 대한 청구는 한 건도 수락되지 않았다.14)

사람들은 서독을 통해 여행하면서 엄청난 가난과 노숙 상태가 단지 쏘비에트의 선전 속에서 창작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점점 불안함을 느끼게 되었다.15) 2009년 독일의 스피겔(der spiegel) 주간지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기 이전까지는 생존, 가난과 거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면서, 독일민주공화국(GDR-동독)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었기에 “신에게 감사”한다고 했던 한 동독 노동자의 말을 인용했다.16)



서독의 합병 직후 동독의 사회학자들은 불안한 경향에 주목하였다. 자유 시장 천국에 들어서게 된 “즐거움”은 1989년 동독의 천 명 당 12명이던 조출생률(편집자 주-1년간의 출생수를 그해의 중앙인구 1,000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인구 출생률)을 1993년에는 천 명 당 5.1명으로 감소하도록 했다. 이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가장 큰 감소율이며, 2차 대전에서 패배 이후 나찌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에서 보다 높은 것이다. 한 연구자는 오직 “대파국의 시기, 절망적 궁핍과 사망이 만연한 시기”에나 볼 수 있는 출산 감소라고 말했다.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여성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은 출산율의 감소라는 경향의 한 측면이다. 동독에서 낙태가 합법적이고 서독에 비해 덜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갑작스런 낙태의 증가가 “자유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동독 여성들 사이에 냉소적 태도가 확대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7)

쏘련 붕괴 10년 후 과거 쏘비에트 국가들에서 빈곤층의 숫자는 천4백만 명에서 1억6천8백만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90년에 비해 12배가 증가한 것이다! 이들 빈곤층중에 어린이들이 5천만을 차지한다. 2000년까지 카자흐스탄에는 88%의 인구가 빈곤선 이하에 있었으며,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몰도바에서는 60에서 66%가 빈곤선 아래에 있었다.18)

동유럽 경제의 파괴는 단지 이행 기간 동안에 국가 상태에서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건설하고 소유한 쏘비에트 산업을 빼앗으려는 동구 자본가(대부분 과거 공산당의 당 관료들)와 제국주의 시장을 찾으려는 서구 자본가들의 의식적인 계획의 결과이다.

1990년에 통화연맹은 통화 교환비율을 4.5:1(동독의 4.5 마르크가 서독의 1 마르크와 같은 비율이다)에서 1:1로 바꾸어 하룻밤 만에 동독에서 450%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상품가격 상승은 동독에서 39%를 차지하던 수출 시장을 파괴했고, 그 결과 전반적인 경제 침체를 가져왔다. 동독에서 공적소유로 되어있던 사회기반 시설을 경영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시행되었다. 신탁통치는 재산을 가능한 싸고 빠르게 처분했고, 일부 공장은 1마르크 수준의 헐 값으로 팔았다. 동독의 모든 산업과 기반시설은 노동자 계급의 소유였으나 신탁통치에서의 떨이 판매로 그 중 85%가 서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고, 10%는 잡다한 외국 자본의 소유, 5%는 동독의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다.19)


사진: 리가 지역 기계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휴식(1976). 쏘비에트 블록에서의 작업장은 공동체와 사회의 중심이었다.

총 3400개의 공장, 520개의 거대 건설 회사, 465개 협동조합, 수 천 개의 소기업이 모두 사유화되었다.20) 동독 산업과의 경쟁에 지친 서독 자본가들은 그들이 구매했던 사업과 공장 문을 닫았다. 문을 닫지 않은 곳에서는 현저하게 노동자 수가 감소되었다. 예나 지방 차이스(Zeis) 광학렌즈 공장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20,000명의 노동자를 2,000명으로 줄였다. 720,000명의 농업 노동자(전체의 80%는 동독에 있다)가 집단농장이 붕괴 되고 사유화되면서 해고 되었다.20) 동독 산업에 대한 이러한 공격의 결과로, 세계 10번째로 큰 산업 국가였던 동독은 고작 40번째 규모의 산업 지역이 돼버렸다.21) 합병 15년 후 동독의 실업률은 18%로 남아있고 이는 서독의 두 배가 된다.22)

이와 비슷한 정책들이 동유럽 전체에 시행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보호주의의 잣대로 더 경쟁력 있는 상품(철강, 농산물, 섬유)은 봉쇄하고 서구 상품이 경쟁력 있는 이익이 유지되는 경우에만 구 쏘비에트 연합에 대한 시장 문을 개방했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그 첫 해에 개발 계획에 투자하기보다 화려한 사무실이나 가구에 더 많은 돈을 썼다. 이후 유럽부흥개발은행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동유럽에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동-서 합작 사업에만 투자를 하였다. 미국국제개발처(USAID)와 유럽의 Phare(폴란드-헝가리 경제구조지원)프로그램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서유럽 회사에만 재정 지원을 하였다. 서구 지원의 90%는 서방 기업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9년에는 동유럽에서 10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보던 것이 1993년에는 80억 달러의 적자로 뒤바뀌었다.23)

동유럽의 자본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적절하게 착취하는 법을 서구에서 배웠다. AFL-CIO(미국노동총연맹산별노조회의)의 자유무역조합기구(FTUI- CIA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구 쏘비에트 국가들에 여러 지부를 개설하였다. 그 곳에서 노동자 운동을 분쇄하는 적절한 방법들을 고용주에게 가르쳐 주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전복되고, 해체되었고, 패배했으며 체포되었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1990년 미국문화정보국(USIA) 수장인 브루스 겔브(Bruce Gelb)는 구 쏘련에 제공하던 전문가 훈련에 대해 언급했다. “독사, 흡혈귀, 중개인- 쏘련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나라가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다.”24)

서구 자본가들의 지원 속에서 러시아 고용주들은 쏘련 붕괴 직후 5년 동안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을 30%까지 줄일 수가 있었다. 1996년까지 미지불된 임금은 40조 루블(7.5조 달러. 편집자 주 : 현재 40조 루블이 환율로는 1조 2천억 달러 가량이라 원문에 나온 7.5조 달러 수치는 96년 환율이라 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은 수치일 수 있다.)가 넘었고 러시아의 모든 노동자들의 평균 한 달의 임금을 받지 못하는 양에 달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질(Zil) 공장에서 일하는 한 자동차 노동자는 “나는 노동자들을 돌봐주는 국가에서 성장했었다.”라며 한탄스러워했다. 한 섬유 노동자는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그들은 그 누구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존엄성을 빼앗아 갔다.”라고 말했다.25)




-다음호에 계속 -
(CCL: '저작권자표시', '비영리 사용', '동일조건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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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의 종말”은 지배계급과 한패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이 발간된 후 유명한 승리의 외침이 되었다. 책에서 후쿠야마는 인간은 사회-문화 진화의 끝에 도달했고 자본주의는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 또는 전쟁 후 역사의 특정 기간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 그 자체,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며 인류 통치 형태의 마지막인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보편화이다.”

2. 가짜 좌파에게 쏘련의 붕괴는 환영할 일로 기록된다. 영국 뜨로츠키 그룹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맑시즘 2009 행사에서 상당한 부분을 쏘비에트 공산주의의 사망을 기념하는데 할애했다. 붕괴를 거대한 “발전”이라고 언급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에게 가져다 준 압도적 가난과 격렬한 인종주의와 성차별, 너무도 많은 수백만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어 보였다. 물론 1928년 이래로 뜨로츠키주의자들은 쏘련의 파괴를 목표해 왔기 때문에 이는 놀랄 일도 아니다.

3. NYT, “A Fateful Day, and the East Tasted Freedom,”11/8/09.

4. Der Spiegel, “Berlin Celebrates the Day the Wall Fell,”11/9/09.

5.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San Francisco: City Lights Books, 1997), p 116-117; NYT, “reacherous Transition,”12/20/93.

6. See PLP, “Road to Revolution III,”available on the website, www.plp.org

7. 당은 쏘련의 역사와 교훈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해 왔다.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8. 경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던 흐루쇼프의 시장개혁 정책은 실제로 쏘비에트 경제의 침체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점차 하나씩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연속이었으며 이는 쏘비에트 경제를 내부에서부터 악화시켰다.

9. NYT, “Many Living on the Edge from Hungary’s Inflation,” 2/27/90.

10. NYT, “Soaring Unemployment is Spreading Fear in Russia,” 5/8/94; Vladmir Bilenkin, “ussian Workers Under the Yeltsin Regime: Notes on a Class Defeat,”Monthly Review, Vol. 48 No. 6, January 1996.

11.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ß 6/16/96.

12. People’ Weekly World, “People Before Profits: Capitalist ‘emocracy’–Life in the Former Soviet Union; Wages, Pensions, Public Health, Education are all Devastated,”12/23/05.

13. NYT, “Russians Choosing Today, Either Reforms or the Past,” 6/16/96.

14.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ß Paradise: Socialism in 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What Can We Learn From It? (London: Artery Publications, 2009), p 41.

15. Patty Lee Parmalee, “Learning to Live With Capitalism in East Berlin,”Z Magazine, Vol. 5 No. 7-8, July/August 1992.

16. Der Spiegel, “Homesick for a Dictatorship,”7/3/09.

17. Nicholas Eberstadt, “Demographic Shocks After Communism: Eastern Germany 1989-1993,”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Vol. 20 No.1, March 1994.

18. BBC, “Child Poverty Soars in Eastern Europe,”0/11/00.

19. John Green and Bruni de la Motte, Stasi Hell or Workers’ Paradise, p 38-40.

20. 같은 책, p 39-41.

21. People’s Weekly World, “Another View of ‘Lives of Others,’3”6/1/07.

22. Der Spiegel, “The Price of a Failed Reunification,” 9/5/05.

23. The Guardian, “When the East’ Dreams Evaporate,”11/19/94.

24. Michael Parenti, Blackshirts and Reds, p 105.

25. Vladmir Bilenkin, Monthly Review.

 


출처 : 노동자정치신문
http://lmagit.jinbo.net
http://twitter.com/labor04 (@labor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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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성은 적대세력에 내린 준엄한 철추”

 

 

 

북, 김정은 원수“더 위력한 위성 발사” 연설
 
“광명성은 적대세력에 내린 준엄한 철추”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2/12/22 [12:40]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육.해.항공. 반항공군 사열을 받으며 연회장에 들어서는 김정은 원수 ©
▲ 연회장에는 김정은 제1비서와 부인 리설주 여사,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
▲ 인공위성 개발 제작, 조립 발사를 성공시킨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 일꾼들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 운반로켓 3호에 탑재 돼 발사에 성공한 광명성 3호 2호기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 일꾼들에게 연회를 마련하고 연설하는 김정은 제1비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제1비서가 “운반로켓인 은하 3에 탑재돼 우주괘도에 정확히 진입한 광명성 3호 2호기는 적대세력에게 내린 준엄한 철추로 실용위성과 통신보다 더 위력한 위성을 개발 발사 할 것”을 우주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들에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22일 1면 기사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광명성-3호 2호기를 성과적으로 발사하는데 공헌한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 일꾼들을 위하여 성대한 연회를 마련하였다.’라는 기사에서 김정은 제1비서의 연설을 보도했다.

로동신문은 김정은 제1비서의 “나는 우리 조국의 첫 실용위성인 광명성-3호 2호기를 성과적으로 발사함으로써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빛나게 관철하고 백두산대국의 무진막강한 국력을 온 세계에 과시한 동지들을 열렬히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최첨단과학기술의 집합체인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과적 발사는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영도와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정책이 가져온 5천년민족사의 특대사변이며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동지들의 고심어린 노력과 영웅적 투쟁이 안아온 전 인민적인 대경사”라는 말을 전했다.

김정은 제1비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찍부터 우주정복의 원대한 구상을 펼치시고 그 초행길을 헤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운반로켓과 인공지구위성개발의 전략적 방침들을 제시하시고 나라의 우주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튼튼한 도약대를 마련해주셨다.”라며 “우리의 미더운 과학자, 기술자, 노동자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올해 안으로 결사관철 할 불타는 충정과 고결한 당적 양심을 지니고 운반로켓의 발사와 계단분리로부터 인공지구위성의 궤도진입에 이르는 전 과정을 사소한 부족점도 없이 완전성공 시키는 쾌승을 이룩하였다.”고 위성 발사 관계자들을 고무했다.

김제1비서는 “과학자, 기술자들은 피타는 탐구와 노력으로 운반로켓과 위성의 믿음성과 정밀도를 개선하기 위한 과학연구 사업을 짧은 기간에 결속하였으며 겨울철의 혹한 속에서 주변국가들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위성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최첨단수준에 당당히 올라선 우리의 우주과학기술을 온 세계에 힘 있게 과시했다.” 성과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또한 “이번에 우리의 미더운 과학기술전사들과 로동계급이 성과적으로 발사한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는 설계로부터 제작, 조립, 발사와 발사 후 관측에 이르는 모든 것이 100% 국산화된 주체의 위성”이라며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공적인 발사는 위대한 장군님께 올리는 우리 인민의 가장 큰 선물이며 올해 우리 당과 인민의 영웅적 투쟁의 빛나는 총화”라고 자긍심을 드러냈다.

이어“민족의 존엄을 걸고 단행한 이번 위성발사는 우리 공화국의 자주적이며 합법적인 평화적우주 이용권리를 만방에 시위한 장엄한 선언이며 선군조선의 종합적 국력을 과시한 역사적 장거”라고 말하고 “동지들은 온 세계를 진감시킨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과적 발사를 통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크나큰 민족적자부심과 필승의 신심을 북돋아주고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으려고 악랄하게 책동하는 적대세력들에게 준엄한 철추를 내렸으며 우리 공화국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전례 없이 높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노고를 치하했다.

아울러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 나라의 첫 기관단총으로 시험사격을 하신 역사적인 날에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받들어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의 발사를 완전 성공 시킨 동지들이야말로 수령님과 장군님의 참된 전사, 제자들이고 온 나라가 떠받들어야 할 영웅중의 영웅들이며 동지들과 같은 참된 애국자들이 있기에 우리 조국이 강대하고 우리 당의 혁명위업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김정은 제1비서는 “혁명의 최후승리를 이룩하며 삼천리 강토위에 온 세계가 우러러보는 천하제일강국, 인민의 낙원을 일떠세우려는 것은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라며 “현 시대는 과학기술의 시대, 지식경제 시대이며 과학기술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국력이 결정되고 나라와 민족의 지위와 전도가 좌우되게 된다.”고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웠다.

김제1비서는 “우리 당은 최첨단과학기술의 정수를 이루는 우주과학기술발전에 커다란 관심을 돌리고 있으며 위성과 운반로켓들의 보유를 강성국가의 체모를 갖추기 위한 중대한 문제로 내세우고 있다.”며 “동지들은 당의 사상과 의도를 심장깊이 새기고 우주를 정복하기 위한 최첨단돌파의 열풍을 더욱 세차게 일으킴으로써 우리 조국을 세계가 우러러보는 우주강국으로 빛내여 나가야 한다.”고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동지들은 인공지구위성 광명성-3호 2호기를 성과적으로 쏴 올린 그 정신, 그 기백으로 통신위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실용위성들과 보다 위력한 운반로켓들을 더 많이 개발하고 발사하여야 한다.”며 “나는 동지들이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볼 것에 대한 구호를 높이 들고 두뇌전, 실력전을 힘 있게 벌려 세계를 디디고 올라서며 조국의 영예와 민족의 슬기를 만방에 떨쳐 나가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고 말해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 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김정은 원수는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축복을 받으며 힘차게 전진해나가는 우리의 앞길에는 오직 승리와 영광만이 있을 것이며 우리의 위업은 정당하며 미래는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만만함을 보였다.

특히 “사상으로 억척불변하고 과학기술로 위력한 강대한 나라, 당의 두리에 천겹만겹으로 뭉친 위대한 인민의 전진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고 “백두산대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과학기술의 용마를 타고 더 높이, 더 빨리 비약하여 강성국가의 영마루에 승리의 붉은기를 휘날릴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더욱 분투하자”고 당부했다.

한편 김정은 제1비서는 실용위성인 광명성 3호 2호기 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챙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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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게 권하는 책] 박근혜를 보는 열두 가지 시선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는 버리고 전태일을 품어라!"

[대통령에게 권하는 책] 박근혜를 보는 열두 가지 시선

안은별 기자,김용언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2-21 오후 6:19:19

 

읽음과 행함은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게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한 고민을 깊게 만들어 주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유명인들의 '서재'에 대한 기사와 책이 쏟아지는 것처럼, 한 사람이 읽은 책의 목록은 분명 그 사람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가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소설가 장정일도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김영사 펴냄)에 대한 독서 일기에서, 그 중요성 때문에 대통령이 어떤 책을 읽었는가를 유심히 봤다고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덮을 때까지 개운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이 대통령이 "틈나면 어디서나 책을 읽었고 사색에 잠겼다"고 쓰면서도 감질나게 도서명은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세 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독서 스타일을 분석한 지난 8월 기사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책 한 권을 잡고 음미하기보다는 속독하는 편"이다.
(☞관련 기사 : 대통령 독서 스타일, 이명박 '속독' 노무현 '다독' 김대중 '정독' )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프레시안(최형락)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이 될 박근혜 당선인에게서는 '목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10년 여름 트위터에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한성례 옮김, 부엔리브로 펴냄)와 함께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열국지>를 추천하기도 했다.

최근 2년간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를 읽은 책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세 책 모두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박 당선인의 독서 취향을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독서에 대한 정보는 과거로 시선을 돌려야 나온다.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그는 육영재단 운영을 그만둔 뒤 정치를 시작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독서했다고 밝히면서 "법구경, 금강경 등 불교 경전과 성경", "동양 철학 관련 책들과 <정관정요>, <명심보감>" 그리고 오쇼 라즈니쉬 등을 언급했다.

2007년 한 수필 문예지에 실린 글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중국 근·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를 들었다. 20대 초반 부모를 잃은 시기에 "일기를 쓰고 나를 돌아보며 마음의 중심을 잡아가던" 중 만난 책이라고 한다.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맥락이 조금은 읽힌다. 열쇳말은 제국의 정치와 동양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다소 딱딱한 독서 취향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고, 크고 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볼 수도 있다. 독서와 함께 명상과 단전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언급과 관련하여, 동양 철학에 대한 관점이 학문적이고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명상이나 '힐링'과 유사한 효과를 기대하는 데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앞으로 5년, 목록에는 무엇이 추가될까.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 누구나 표식처럼 들고 다니는 필독서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프레시안 books'는 열두 명의 독서가들에게 박근혜 당선인이 반드시 읽어주었으면 하는 책을 물었다. 이달 초 한 출판지가 출판인 180여 명에게 '차기 대통령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물은 결과, 한병철의 <피로 사회>(문학과지성사 펴냄)가 1위를 차지하여 우리 사회의 '피로 증후군'을 반영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후보들을 고려한 결과로, '박근혜 당선인'만을 위한 추천과는 다른 효과를 지닌다.


설문 과정에서 당선인이 확정되자 "책을 안 읽을 것 같다", "할 말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반응의 핵심은 박 당선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반영된다는 것이다. 또 당선인에 대한 향후의 기대 정도도 나타난다. 어떤 이는 "대통령 한 명의 성격이 우리 운명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대통령 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결과는 박근혜 당선인에게 보내는 추천서이자, '지금 우리에게 '박근혜 당선'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시각의 스캔본인 셈이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박근혜 당선인이 실제 이 목록을 눈여겨보기를, 나아가 독서에 그치지 않고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현실적 적용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2012년 송년호 머리기사로 싣는다.

편집부가 추천하는 책은 당선인에게 정치적 기회를 열어 준 중요한 인물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다른' 이해들을 돕는 책, 이를테면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학사 펴냄)이다. <편집부>


최소한의 원칙만이라도 지키자
- 존 로크의 <통치론>


박권일 / 계간 <자음과모음R> 편집위원

▲ <통치론>(존 로크 지음, 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 펴냄).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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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고전이 좋겠다. <통치론>(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 펴냄)은 까치에서 나온 것이 번역이 잘 되어 있다. 만약 어렵다면 어린이용 만화도 있으니 그거라도 좋다. 이 책은 저자가 17세기 왕권신수설을 반박하기 위해 쓴 책으로, '자유주의'로 알려진 근대 정치사상의 교과서 격이다. 종교적, 시민적 자유라는 대의, 사회계약론 등 근대의 틀을 제창했고 현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책이기도 하다.

나는 최소주의적 관점에서 이 책을 골랐다. 통치자가 다스릴 때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그 법에 근거한 지배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신자유주의, 노동 문제 등 알아야 하고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많긴 하지만, 그 전에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원칙들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란 제도의 근간을 근본적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책의 215쪽에 중요한 한 문장이 나온다. "정부의 목적은 인류의 복지다." 박 당선인이 정부의 목적을 잘못 생각하지 않도록, 이 문장을 늘 상기해 주기를 바란다.

보수의 품격을 지켜라
- 필리프 라트의 <드골 평전>


김연철 / 인제대학교 교수

▲ <드골 평전>(필리프 라트 지음, 윤미연 옮김, 바움 펴냄). ⓒ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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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품격'에 관한 책을 한 번 보길 바란다. 한국에서 보수란 '꼴통'이란 말과 연결될 정도로, 갖춰야 할 양식이나 상식,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 속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국가를 위해 포용하고 통합할 줄 알았던,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실현한 인물도 많다.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 드골(1890~1970년)이 대표적일 것 같다. 그의 자서전이나 평전(필리프 라트 지음, 윤미연 옮김, 바움 펴냄)을 권한다.

그가 재임 중 자신을 맹비난한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를 구속하라는 참모진의 건의를 받고, "볼테르를 구속하는 법은 없소"라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는 일화가 있다. 지식인, 사상가의 입에 어떻게 재갈을 물리냐는 말이다. 그게 바로 보수의 올바른 자세다.

역사, 정치, 경제 '다시 보기'
-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파커 J.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이택광 / 문화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

고전적인 대답이겠지만 일단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김택현 옮김, 까치글방 펴냄)다. 이미 읽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더라도 다시 보길 바란다. 어떤 사람이 역사의 문제나 빚에 대해 어떤 식으로 연루되어 있다면, 그냥 사과하고 지나갈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태도가 곧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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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펴냄)이다. 당선인을 포함해 정치권에서 이른바 '정치 쇄신'을 하겠다는 목소리가 매번 나오지만, 그 내용은 새로운 정치가 전혀 아니다. 쇄신은 선언보다 내용이 더 중요하다. 정치학자인 동시에 직접 생활 정치 운동을 실천하는 시민 운동가인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새 정치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힌트를 알려준다.

책에는 정치적인 지형이 바뀐 상황에서의 새로운 정치의 어휘들이 나온다. 이른바 '생활 정치'의 어휘들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윤리적 문제와 결부된 정치의 위기에 직면해 있고, 책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 위에 새 정치의 방법들을 쌓아 올리고 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해선 홍기빈이 쓴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펴냄)를 권한다. 스웨덴이 우리의 모델이 될 순 없겠지만 참조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한다면 그걸 비켜나갈 수 있는 변수가 많은 나라다. 특히 남북관계가 큰 변수인데, 만약 그 변수가 작용한다 해도 반드시 국내의 복지 문제와 결합되어야 한다. 한국이란 특수성 속에 남북 관계와 복지 문제를 동시에 잘 풀기 위해, 이 책 속에 있는 비전들을 참고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은 절대 반지를 운반하는 사람
-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정혜윤 / CBS PD

▲ <반지의 제왕>(J. R. R. 톨킨 지음, 김번·이미애·김보원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 ⓒ씨앗을뿌리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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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당신이 궁금하다.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일까. '나는 가족도 없고 정치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했을 때, 정말 여러 가지 심정이 들었다. 나는 당선인이 많은 책을 보길 바란다. 정치도 사람을 보는 과정이기 때문에, 디테일로 가득한 텍스트를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또 많이 웃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자기가 '기쁜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국정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유머집을 추천할까 하다가, 절대 반지가 나오는 <반지의 제왕>(J. R. R. 톨킨 지음, 김번·이미애·김보원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으로 마음을 돌렸다. 절대 반지를 운반하는 프로도는, 끊임없이 그걸 소유하고 싶다는 유혹에 흔들린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프로도에게 샘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우리가 이렇게 힘든 길을 떠나는 이유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충분히 지키고 싸울 만한 가치라고 말한다.

대통령은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만, 단지 권력을 '나르고'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란 손에 쥐면 누구나 영원히 갖고 싶겠지만, 국민의 권력을 표로 이양시킨 대통령은 운반자일 뿐이다. 거기서 던져지는 질문이, '대체 우리는 이걸 왜 계속 운반하고 있느냐, 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느냐'가 아닐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굳이 알려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터이지만…
-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알라스테어 스미스의 <독재자의 핸드북>


노정태 / 자유기고가

친이계와의 오랜 투쟁을 통해 새누리당의 패권을 장악하시고, 민주통합당과의 대선마저도 성공적으로 치루고, 기어이 대통령이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이제는 손에 넣은 권력을 주어진 5년의 시간 동안 어떻게 가장 잘 유지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실 때가 아닌가 싶다.

▲ <독재자의 핸드북>(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알라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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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핸드북>(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알라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전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의 사례를 긁어모아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는가 그리고 권력을 잃었을 때 어떤 말로를 겪었는가를 실증적으로 연구 수집한 보기 드문 역작이다. 왜 어떤 독재자는 술을 마시다 부하의 총에 맞아서 목숨을 잃지만, 다른 독재자는 침대 위에서 잘 자다가 고통 없이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인 것이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것은 국민이지만, 박근혜를 국민들이 뽑아주도록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핵심적인 측근에게 이권을 잘 분배하되, 잊을 만하면 '인적 쇄신'을 해서 그들 또한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한다. 그래야 측근들이 받아먹을 만큼만 받아먹고 그 위를 넘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되 적절히 배고픈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 그것이 꼭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권력자가 살아남는 생존의 비법인 것이다. 물론 이미 선거는 끝났으니 국민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개 서생이 주제넘게 조언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박근혜 당선인은 이러한 게임에 도가 튼 달인이다. 이것은 마치 천체 물리학자가 마이크 타이슨에게 <복싱의 기초>를 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면 이런 드립을 치면서 시시덕거리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앞서, 박근혜 당선인께 굳이 <독재자의 핸드북>을 권해드리는 바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반대편에 있었던 한 인물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


강응천 / 문사철 주간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전태일기념사업회 펴냄)을 꼼꼼하게 읽었으면 좋겠다. 아마 대한민국의 역사를 100년 이상 지나 돌아볼 때,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는 분명 어디엔가 굵직하게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크게 기억될 이름이 바로 전태일이다.

▲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전태일기념사업회 펴냄). ⓒ전태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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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은 아버지라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선을 잇는 정책을 펼쳐나갈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 속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라이벌들이 수없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대편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더 크게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전태일이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 1970년에는 그와 같은 노동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전태일은 박근혜 당선인을 뽑아준 국민 속에도 있고, 그와 호각의 승부를 펼쳤던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 중에도 있다. 통합의 정치를 말하는 박근혜 당선인이 이들을 라이벌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가지고 전태일과의 역사적 라이벌 관계에서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로서 박근혜 당선인이 반드시 전태일의 일생을 이해하려 노력하기 바란다. 아주 짧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무관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 청년이 무엇을 간절히 바랐고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 같이 내던져야 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프레시안
북한·중국 무시하다간…
-<정세현의 정세토크>

김기협 / 역사학자

▲ <정세현의 정세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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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내내 몹시 불안한 일 하나가 북한이나 중국을 잘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북한을 미워하고 중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한국의 장래에 북한, 중국과의 관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잃은 기회와 입은 손해가 4대강보다도 더 크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박근혜 정권이 중국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고 북한과 대결 자세를 지키고 싶어 하더라도 상대방을 알기는 알아야 한다. 박근혜라도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는 (그리고 안 두꺼운) 책이면서 북한, 중국과의 관계를 많이 설명해주는 이 책 <정세현의 정세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를 꼭 권하고 싶다.

보릿고개 2.0 대책!
-강양구·강이현의 <밥상 혁명>

조효제 / 성공회대학교 교수

'민생'을 챙기겠다고 했으니 민생 중에서 어떤 민생을 챙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먹을거리부터 살피시라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먹을거리는 적어도 양적으로는 더 이상 큰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말하기 십상이다. 과거에 비해 절대 기근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당선인의 아버지가 권력을 잡았을 때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먹을거리의 질과 먹을거리 생산의 지속 가능성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보릿고개 2.0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 <밥상 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 ⓒ살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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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안보라는 말에 현혹되어 먹을거리를 수요와 공급의 시장 사이클에 종속시킨 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식량 수급 불안정의 위협이 우리 머리 위에서 시한폭탄처럼 재깍거리고 있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 보아 먹을거리를 일반 공산품처럼 취급한 탓이다. 그 결과 규모의 경제, 고 투입 생산, 수출형 농업 산업이 상식처럼 자리를 잡았다. 21세기 들어 이런 식의 먹을거리 비전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다. 우리가 먹는 것을 공산품처럼 취급하면 인간은 스스로 공리적이고 기계론적인 존재 양식을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먹을거리와 먹는 행위를, 단순히 몸을 중간에 놓고 음식물을 투입하여 에너지와 노폐물이 산출되는 등식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의례이자 문화이고 인간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예술에 가까운 일이다. <밥상 혁명>(강양구·강이현 지음, 살림터 펴냄)은 그런 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 풍부한 사례와 쉬운 설명으로 차근차근 알려준다. 대통령 당선인이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관점에서 먹을거리와 농업과 농민과 소비자의 관계를 보기 시작한다면 진정 민생 대통령이 될 기본적인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자살자 가족 마음 헤아려 주길
-칼라 파인의 <너무 이른 작별>

하지현 / 건국대학교 교수

▲ <너무 이른 작별>(칼라 파인 지음, 김운하 옮김, 궁리 펴냄).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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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위인 나라다. 자살은 굉장히 중요한 보건적, 정신적,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자살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자살자나 자살 시도자 자체의 양적 증가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자살자 가족들이 겪는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가족의 자살은 평생을 잊지 못하게 하는 멍에가 되는 일이다.

앞으로 5년간 자살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지금부터 그것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총체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먼저 자살자 가족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이 책 <너무 이른 작별>(칼라 파인 지음, 김운하 옮김, 궁리 펴냄)부터 읽고, 한국에선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기를 바라고 싶다.

아버지가 지은 핵발전소, 당신 손으로 닫을 수 있다면…
-히로세 다카시의 <체르노빌의 아이들>

한재각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책임자인 안드레이 세로프 가족이 핵사고로 인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죽음을 그리는 이 책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을 박근혜 당선인이 읽어 봤으면 좋겠다. 그녀에게 온갖 험담이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는 이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걱정할 수 있는 감성은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그 감성을 이 책이 일깨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핵 발전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이들과 그녀가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감성적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프로메테우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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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것은 원전 주변에서 살고 있는 목숨을 구하는 첫 발걸음일 수도 있다. 원전 주위반경 20킬로미터 내에 거주하는 주민 60만 명, 혹은 노후 원전인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에 대한 핵사고 시뮬레이션이 예측한 72만 명의 사망자들을 구하는 독서가 될지도 모른다.

아버지 박정희가 자랑스럽게 시작한 핵발전소가 지역 주민들에게 어떤 고난을 야기했는지,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위험을 얼마나 위협하고 있는지, 그녀가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 권의 독서가 혹시 그녀에게 핵 발전의 위험과 참상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할 수만 있다면….

박근혜 후보의 당선 소식을 들으면서 독일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떠올린다. 독일 사회민주당-녹색당의 적록연정이 이뤄 놓은 핵발전소 폐기 합의를 뒤집었다가,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큰 정치적 패배를 겪고 다시 스스로 핵발전소 폐기 시한을 되돌린 보수 여성 정치인.

박근혜 당선인은 후쿠시마 핵 사고에도 불구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핵 확대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정책을 뒤엎는 것이 한국 어디선가의 핵 사고가 아니어야 한다면, 박근혜 당선인과 그녀에게 투표한 수많은 지지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이 한 권의 책에 희망을 걸어보려 한다. 부질없는 짓일까?

당선인님, '노동'이 낯서시죠?
-은수미의 <날아라 노동>

양호경 /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열심히 일해서 뭐 하겠노, 돈 벌어서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라는 한 개그 프로그램의 자조적인 유행어가 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2년이나 지났고, 서울 거리에서는 지방 사투리보다 영어가 더 익숙할 만큼 국제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호구지책을 위해서 일을 한다.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에 웃으면서 씁쓸한 기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 <날아라 노동>(은수미 지음, 부키 펴냄).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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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전문 연구자에서 노동 전문 정치인으로 나선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의 <날아라 노동>(부키 펴냄)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하지만 노동은 또한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는 누구나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청년들에게 노동은 낯선 단어이다. 노동이나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머리에 빨간색 띠 두른 아저씨들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청년들은 생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부분은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대기업에 가기 위해서 취업 준비를 한다.

안정적인 직장에 가지 못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정규직이 되는 것이 꿈이 되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소고기를 사 먹는 것이 꿈이 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일터가 아니라 돈을 들고 시장에서 소비자로 나서야만 존중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노동은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차기 대통령은 청년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외로 취업하고, 도전하라는 정책을 주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이 이 책을 반드시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라고 하기 전에 꿈을 꿀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을 꾼다는 것은 일자리에서 소외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일을 통해 찾아가는 것이다.

그 핵심이 바로 호구지책의 일이 아니라 '노동'이다. 차기 대통령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노동'이 탄압할 대상이거나 사회 불순 세력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위해서 더욱 보장하고 장려해야할 것임을 알아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당선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권하는 책

유운성 / 영화평론가·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시력보다, 공간보다 그리고 자유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 내뱉는 숨을 초라하게 만들고, 말을 무력하게 만드는 사랑, 그 모든 사랑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 <리어 왕>(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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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의 맏딸 고네릴이 그녀의 아비를 현혹케 한 감언이설이다. 19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를 지켜보면서, 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떠올렸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노년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오였을까?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당신'의 자리에서 '국민'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감동하는 바보들에 대한 동정 따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 슬픈 시간의 무게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the weight of this sad time we must obey).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오래지 않아 우리는 배신당한 슬픔에 미쳐 광야를 헤매는 무리들을 보게 되리라.

그러니 <리어 왕>은 새 대통령과 그녀를 대통령의 자리에 올린 당신들보다는 정작 그의 시대를 견뎌야 하는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안은별 기자,김용언 기자 메일보내기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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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으로 재미 본 '종편' 어찌하오리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2/12/22 07:45
  • 수정일
    2012/12/22 07:4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번 18대 대선에서 가장 재미를 본 곳이 있습니다. 바로 조중동이 만든 종편채널입니다. 종편은 대선 기간 시청률도 오르고,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어쩌면 종편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박근혜 후보의 당선이 가능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해볼 정도로 이번 대선 기간 종편은 박근혜 후보 전용 선거방송의 몫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과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무슨 방송을 누구에게 했는지 분석해봤습니다.

'대선 기간, 온종일 선거방송만 했던 종편'

종편이 대선 기간 어느 정도 선거 관련 방송을 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종편 대선관련 프로그램 편성 비율. 출처:언론연대

 


대선 기간이었던 12월 3일부터 9일까지 7일간 종편을 조사한 언론연대의 분석을 보면, 종편 4사의 보도(시사)프로그램 편성비율은 55%~66%에 달했습니다. 하루평균 시간을 따져보면 채널A는 약 16시간, MBN은 15시간, TV조선은 13시간, JTBC는 6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채널A는 하루 방송 내용 중 보도프로그램을 65%이상 편성했는데, 말이 보도프로그램이지 거의 대선 특집 방송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종편이 아무리 대선특집 방송을 했다고 해도 시청률이 낮은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대선 기간 종편의 시청률은 역대 종편 시청률 중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종편의 대선 기간 전과 대선 기간 시청률 비교. 출처:오마이스타

 


2012년 11월까지 0.5%대 시청률을 기록하던 종편 시청률은 11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12월 들어서 1%를 넘기도 했습니다. 종편이 이렇게 시청률이 높아진 이유는 많은 사람이 대선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안철수,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과정은 가장 큰 이슈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50대 이상의 유권자들은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았는데, 이런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준 방송은 종편이 유일했습니다.

'박근혜는 칭찬하고 문재인,안철수는 헐뜯던 종편'

이렇게 시청률이 높아진 종편에서는 어떤 선거 방송이 나왔을까요? 대부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는 유리하고,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깎아내리는 편파적인 방송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종편의 안철수,문재인 후보 죽이기 사례는 손을 꼽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채널A '박종진의 쾌도난마'에는 주로 보수성향의 시사평론가(?)들이 나오는데 그 중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는 안철수 후보의 '안철수의 생각'에 대해 "젖비린내 난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그대로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는 "시대 흐름 패턴상 지금 여성지도자가 나올 타이밍이며,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눈이 자신감이 없다, 대권을 잡을 수 없다"면서 "박근혜 위원장의 눈은 살아있다"라는 대놓고 박근혜 후보 띄워 주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특히 화면 구성에서 박근혜 후보의 유세장면은 많은 사람들을 잡아주고, 문재인 후보는 일부 화면만 보도하는 등의 편파적이고 지능적인 보도구성은 전문가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면서 창피할 지경이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진실은 알려주지 않고, 문재인 후보의 발언은 왜곡하는 식의 모습은 과연 이들이 저널리즘을 가진 언론사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50대 이상만 봤던 종편채널'

이렇게 종편의 편파적인 선거방송을 누가 봤을까요? 대부분 50대 이상의 유권자들이었습니다.

 

 

▲종편 시청연령 분석. 출처:미디어오늘

 


종편을 보는 시청자 중에서 20~49세의 시청률은 10월까지도 0.2%도 되지 않습니다. 종편 개국 초 시청률이 0.1%대였던 점을 고려하면, 거의 차이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대선 기간 종편의 시청률은 급증했고, 이 당시 시청자의 연령대를 보면 대부분 49세 이상이었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치켜세워주고,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헐뜯는 선거 방송을 온종일 종편은 보도해주고 그 방송을 50대 이상의 유권자가 열심히 봤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저널리즘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던 종편'

종편을 언론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사실 종편은 언론사입니다. 언론은 저널리즘이라는 언론 본연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종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종편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태생부터가 편파적이었던 점도 있었지만, 개국 이후 흔들리는 그들의 존립 여부 때문이었습니다.

종편은 개국 이후 0.5% 미만의 시청률로 애국가 시청률보다 나오지 않는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체 드라마 방송은 조기종영되고, 제작비와 출연료 미지급 사태까지 나오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편은 부도설까지 나왔는데 대선이 극적으로 살려준 것입니다.

 

 

▲ 종편에 출연자가 안철수 후보를 비난하는 장면, 출처:채널A

 


종편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 드라마와 탐사,취재 프로그램은 모두 줄이고,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자칭 시사평론가라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앵커와 둘이서 정치현안에 대한 말을 주고받는 프로그램을 대폭 늘렸습니다. 이렇게 스튜디오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제작비가 거의 들지도 않거니와 자극적인 말만 조금 하면 시청률은 바로 올라가니 종편에는 일거양득이었습니다.

이렇게 종편이 제작비는 줄어들고 시청률이 올라가는 프로그램이 히트를 치자, 아예 대놓고 박근혜 후보 편들기에 나섰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만약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자신들에게 칼날을 들이댈 것을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종편 선정과정에서의 불법과 특혜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입장이고, 이것은 더 나아가 모 기업인 조중동에게 결코 유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편 채널의 방송심의규정 위반 내용. 출처:미디어스

 


종편은 18대 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 선거방송심의위로부터 총 18건(12월 4일 기준)의 제재를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재허가시 감정요인인 법정제재(주의,경고)는 7건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종편은 선거가 끝나는 12월 19일까지 연일 편파보도를 했는데,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재허가시 누가 방송위원회를 장악하느냐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수백억 원의 적자로 말미암은 부도 위기와 어차피 기존에도 재허가 위험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특정 후보에게 올인했고, 결국 그 전략은 성공했다고 봐야 합니다.

' 종편, 어찌하오리까'

대선에서 재미를 보고, 투자(?)를 잘해 종편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종편의 갈 길은 멉니다. 일단 대선이 끝난 후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에서 멀어질 것이고, 이는 종편의 재정 위기를 초래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음 대선까지도 버틴다면 그에 대한 대책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50대 이상의 유권자들은 중립성 잃은 공중파 방송과 TV만 틀면 나오는 종편의 근접성에 쉽게 노출되어 있고, 이것은 인터넷과 SNS의 파급력과 마찬가지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야권이 무조건 종편에 출연하지 않고 놔두자니 편파적인 정보만 계속 종편에 나올 것이고, 출연하자니 그런 이유 때문에 시청률이 올라가면 그 또한 문제이고, 참으로 난감한 부분입니다.

 

 

 


아무리 온라인이 발달해도 결국 나이 많은 유권자들은 전원버튼만 켜는 TV를 선호할 것이고, 그렇다면 최소한 케이블 방송을 인수하는 '국민방송'을 하나 개국해서 제작비가 적게 드는 대담 프로그램이나 보도프로그램을 위주로 유권자에게 정확한 진실을 알리는 노력을 지금부터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TV토론과 같은 형식을 통해 진보와 보수가 가진 각자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시간제한 없이 토론하는 방식은 시청률을 높이는 데 아주 유용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국민방송'을 만드는 노력을 전문가와 시민단체,해직언론인들이 나선다면 '아이엠피터'는 충분히 많은 시민들이 힘을 합쳐 개국하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도 품습니다.

우리가 그냥 5년을 기다리면 다음 대선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5년동안 눈감고 귀 닫고 산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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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눈물 "20대를 안아주고, 울고 싶다"

 

2012년 대선과 비슷했던 1992년의 기억... 뻥 뚫린 가슴, 위로가 필요하다

12.12.21 20:51l최종 업데이트 12.12.21 20:51l
전대원(amharez)

 

 

어느새 내가 이런 글을 쓸 나이가 다 되었나 싶다. 불혹의 나이를 넘기긴 했지만 마음은 아직 청춘이고, 요즘 40대라고 하면 아직 한창일 나이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선거 결과에 절망하고 있을 20대 청춘들을 위하여 조그만 위로의 선물이 필요할 것 같았다. 누가 그러던데 요즘 출판 시장은 힐링이 대세라고 한다. 정말로 힐링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문득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나이가 20대 보다는 50대와 가깝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누군가를 향해 도전해야 할 나이가 아니라 젊은 청춘들의 도전을 받을 준비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기성세대에 진입하고 있는 나이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은 50대보다는 20대를 향하고 있다. 단지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자기 위로의 의미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50대와 진행한 세대 논쟁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로 종교와 정치, 섹스 이렇게 3가지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나는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세대 논쟁이다. 급격한 산업화와 그에 따른 문화 변동의 과정을 거친 우리나라에서 세대 이야기는 잘못 건드리면 급속히 폭발할 수 있는 소재이다. 그런데 이를 망각하고 얼마 전에 50대 선생님들과 세대 논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세대인 40대와 그 위 세대와의 갈등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인 20대와 40대 이상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를 옹호하는 이야기도 아니어서 긴장을 좀 놓았는데 나의 신중하지 못한 성격이 나은 불찰이었다.

내가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었다.

'우리 40대 이상의 선생님들이 요즘 세상 좋아져서 젊은애들 살기 좋아졌다는 할아버지 같으신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실 우리보다 위 세대의 어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세대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하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많은 부를 일굴 수 있었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내일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내일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시간이고, 내일의 삶 자체가 암담한 세대이다. 나는 50대 어르신들보다는 20대 청춘들이 더 불쌍하다.'

물론 베이비붐 세대의 어려움도 알고 구조조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경쟁을 벌여야 한 세대인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계신 분들은 그래도 다른 세대의 어려움을 돌볼 여유를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세대 논쟁을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사실 고통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보다 크다 해서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의 크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 패배의 뒤안길에서 진보 진영에 한 표를 던지고 절망에 빠져 있을 20대 젊은 청춘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제18대 대통령선거 부재자투표 첫날인 13일 오후 서울 동작구청 지하1층에 부재자투표소가 설치된 가운데, 대부분 20~30대인 젊은 유권자들이 구청 정문밖에까지 길게 줄을 서서 투표를 기다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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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 기간에 부재자 투표소에 길게 늘어선 20대 청춘들의 행렬을 찍은 <오마이뉴스>보도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얼마나 절실하였으면 저 젊은 나이에 투표하겠다고 길게 줄을 서고 있을까? 한편으로는 정치에 무관심해도 용서가 될 나이에 투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지금 사는 세상이 팍팍하면 저 긴 줄을 서고 있을까 싶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진이 실린 기사를 보고 '컵밥'(컵밥은 서울 노량진 노점에서 파는 길거리 음식이다. 일회용 용기(컵)에 볶음밥 등을 담아 2500원에 판다. 돈과 시간이 부족한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인기메뉴)이라는 말도 처음 알았다. 젊은 청춘들의 힘든 한끼를 나타내는 이 말을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992년의 기억, 2012년과 비슷했다

특히 20대 진보적인 청년들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특별한 승리의 기억을 변변하게 안겨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20대라면 대부분 철이 들고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진보적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보지 못한 세대이다. 한마디로 승리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20대 초반도 그랬다. 87학번 선배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선배들은 한 때나마 승리의 기억이라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6월항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 나이 23살에 치러진 1992년 대통령 선거는 여러모로 2012년 대통령 선거와 닮은 꼴이다. 진보 세력이 서울과 호남에서밖에 못 이긴 것도 그렇고, 진보 세력의 후보가 명실상부하게 야권의 단일 후보로 나선 것도 그랬다. 야권이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에 패배한 것도, 5년 전에 이어 두 번 연속으로 대선에 패배한 것도 비슷했다. 선거 패배 후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도 지금과 비슷했다.

난 1992년 추운 겨울에 자원봉사를 하며 김대중 후보의 선거 운동원으로 열심히 뛰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꼭 이길 것 같은 생각이 이번 선거처럼 들었다. 나도 승리의 기억을 만들리라 하고 열심히 뛰었지만 200만표 차이가 나는 대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마음이 무척 슬펐다. 아래의 그림은 당시 <한겨레> 그림판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만평이다. 힐링까지는 아니어도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구나 하는 그림이었다.

1992년 12월 22일자 한겨레 그림판, 당시 대선 패배 후의 허망한 마음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 박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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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먹이는 시민들 하나씩 안아주는 표창원 교수의 사진을 보고 이 그림이 떠올랐다. 아, 지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할 시간이구나.

▲ 위로가 필요해... '제18대 대선 투표율 80%를 넘기면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트위터를 통해 약속했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투표율이 75.8%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겠다며 시민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프리허그 도중 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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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선 패배의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갔다. 1994년에는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출간돼 시집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50만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으면,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오늘 아침 이 시를 패러디한 글로 카톡의 프로필란을 바꿨다.

"잔치는 끝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을 치우고 새로운 잔치를 준비해야 한다."

나의 카톡을 보고 제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너무 절망스러워서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는데 어떻게 하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극히 선생스런 대답밖에 없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게 인생이야 ~~ "

답이 너무 미진한 것 같아서 그리고 40대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20대에도 그런 절망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절망 뒤에서 1997년의 DJ 당선을 보았고, 2002년의 노무현 당선을 볼 수 있었다고 말이다.

20대 청춘들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못나서 너희들에게 조그만 승리도 하나 만들어주지 못했구나. 우리가 좀 더 잘했으면 너희들을 그렇게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텐데.그래도 절망 속에 희망은 피어나더라. 무책임한 말 같지만 정말로 그럴 거야. 정말로 필요로 하면 어디선가 분명히 꽃은 피어나고 있을 거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쓰다가 1992년의 절망감에 사로 잡혀 있던 내가 나타나서 한참을 같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절망에 빠져 있을 20대를 안아주고 같이 한번 울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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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신의 밤, 그대 곁엔 누가 있는가

신유신의 밤, 그대 곁엔 누가 있는가

등록 : 2012.12.21 20:15수정 : 2012.12.21 21:51

 

유신 시절 젊은 세대에게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주며 고군분투했던 지식인들. 왼쪽부터 리영희, 장준하, 송건호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2> 유신시대의 겨울나기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유신과 오늘>의 연재를 시작했지만, 이제 유신이 오늘이 된 날에도 <유신과 오늘> 원고를 써야 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을 것 같으면서도, 말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 밤이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헌법 정지 선언을 들은 지식인들은 그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명박 시대가 끝나고 박근혜 시대가 온다는 것은 그래도 외형상 헌정의 테두리를 유지하던 제3공화국 대신 유신의 ‘겨울공화국’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박정희 치하의 남쪽은 ‘겨울공화국’이라 종종 불렸고, 김일성 치하의 북쪽은 ‘동토의 왕국’이라 불렸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이 겨울, 북쪽은 김일성의 손자가, 남쪽은 박정희의 딸이 다스리는 나라로 변모했다. 어디 남북한뿐이랴. 일본의 신임 총리 아베 신조는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고,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 시진핑 역시 8대 원로인 부총리 시중쉰의 아들인 태자당 출신의 2세 정치인이다. 혹자는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을 사실상 설계했고,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으로 만주군에서 복무했으며, 김일성은 일본 제국주의와 만주국 괴뢰정권을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점을 들어 동아시아에 만주국 시절의 대립구도가 부활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와 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이끄는 일본의 극우세력은 일본유신회를 만들어 지난 16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부상했는데, 한국에서 유신공주 박근혜가 집권하자 한일간에 ‘유신 연대’가 이뤄지게 되었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이번 선거의 결과로 북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것도 머쓱해졌다. 하긴 교회도 언론도 기업도 학교도 학벌도 그리고 가난도 대물림되는 나라에서 대통령 자리를 가업으로 승계한 게 무엇이 새삼스러우랴.

 

 

 

침묵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해직 뒤 월부 책장사를 하면서
장관 자리까지 거부하고
자식공부도 못 시키는 아비로
미칠 것 같은 그 시대를 견뎠다

 

북쪽은 김일성의 손자가
남쪽은 박정희의 딸이
일본은 만주국을 설계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중국은 태자당 출신 2세가…
만주국 때 대립구도 부활했나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18대 대통령 선거는 어쩔 수 없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과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라는 성격을 띠고 치러졌다. 양대 세력의 진검승부는 유신의 부활로 귀결되었다. 너무도 참담한 일이지만, 식민지 지배와 군사독재로 얼룩졌던 한국 현대사의 무게는 민주진보진영이 감당하기에는 아직 너무 무거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20세기를 돌이켜보면 대한제국 시절의 첫 10년을 제외하면 90년 중에서 4월혁명 직후의 1년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 1999, 2000년 등 딱 네 해만 빼놓고는 모두 제국주의와 군사독재 세력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우리 현대사를 물들였던 얼룩은 민주정권 10년으로 지워버리기에는 너무도 짙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한 일처럼 여기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솔직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출현한 것도 기적이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치러졌다. 나라 살림을 거덜 낸 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인제가 출마하여 보수진영의 표를 500만표나 갉아먹었다. 김대중과 김종필의 디제이피(DJP)연합은 그동안 김대중의 발목을 잡았던 지역 구도를 깨버렸고,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과 관련된 국정농단 스캔들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거기에 36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보자는 국민들의 여망이 겹쳐졌다. 위에 열거한 여러 요인 중 한가지만을 갖고도 정권교체가 이루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요인들이 대여섯개가 겹쳐졌는데도 겨우 39만표 차이로 김대중이 승리했다. 2002년의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이회창 대세론만 믿고 ‘듣보잡’에 ‘갑툭튀’인 노무현을 깔보다가 패배했다. 보수 세력은 이때 제대로 한번 바꿔보자는 젊은이들의 열망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의 등장이 갖는 힘을 감지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19대에 걸친 총선과 18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선거에서 민주 세력이 승리한 것은 4월혁명 직후의 5대 총선과 김대중의 당선,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탄핵 직후의 17대 총선 딱 네번에 불과했다. 이번 18대 대선에서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해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은 우리의 도덕적 신념에 큰 상처를 주었지만, 돌이켜 보면 5 대 5의 근접 승부를 벌이게 된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0 대 0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100 대 0에서, 그것도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민주화는 끊임없는 과정이지 단판 승부가 아니다.

 

여기저기 대중 강연을 다니면서 던져보는 질문이 있다.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제법 달아올라 있던 강연장의 분위기도 이 질문 한마디면 일순간에 싸해진다. 이번 선거로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지만 민주 세력의 집권 시기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문제는 그들의 다수가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에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1577만 유권자의 다수는 월소득 200만원 이하, 중졸 이하, 비정규직, 주부, 블루칼라층이었다고 한다. 민주진영은 젊은 세대만을 보고 투표율만 높으면 이길 것이라 예측했지만, 계급적으로 자신의 편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수구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노무현을 뽑을 당시 바꿔보자는 기대는 바꿔봤자 별수 없다는 환멸로 바뀌었다. 100만의 촛불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 모인 600만의 조문객도 어마어마한 숫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대통령 선거라는 큰 판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크게 부족한 숫자였다.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를 꽉 메운 100만의 촛불 인파를 보고 민주진영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선거 유권자의 겨우 2.5%였다. 촛불과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4·11 총선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은 거리의 운동정치에서도, 제도 속의 대의정치에서도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이 저토록 무기력해진 데에는 정치혐오증을 덮어씌운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의 역할도 상당하겠지만, 민주당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크다.

 

 

매년 사단 규모 병력이 죽어나가던 시대

 

유신공주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1970년대의 유신시대가 재현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박근혜의 ‘신유신’이 박정희의 유신보다 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근혜 시대는 그 끝을 알 수 없던 유신시대와는 달리 딱 5년이라고 끝이 정해져 있다. 이명박 5년을 거치며 지칠 대로 지친 민주시민들은 이제 어떻게든 박근혜 5년을 또 살아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우리를 덮치는 엄청난 쓰나미처럼 전혀 손쓸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우리가 중심을 잘 잡고 버텨내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다. 유신시대가 어떤 시대였고, 박근혜는 어떤 인물인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다가오는 재앙을 막아내야 한다.

 

유신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이 난을 통해 많이 설명했지만, 충분히 다하지는 못했다. 먼저 유신시대는 죽음의 시대였다. 최종길, 장준하와 인혁당 관련자들만 희생된 게 아니었다. 유신시대는 군대에서 1년에 근 1500명이 죽던 시대였다. 유신시대 전체가 아니라 1년에 1500명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죽어갔다. 유신 전체로 치면 1개 사단이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전멸한 것이다. 아니, 전쟁 없이 죽었다기보다는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상대로 치른 전쟁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민주화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과는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는 것보다도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년에 1500명의 젊은이가 소리 소문 없이 죽어나가도 입 한번 뻥끗할 수 없는 것이 유신시대였다. 둘째, 유신시대는 박정희 한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 만인의 자유가 희생된 시대였다. 박근혜가 죽어라 하고 토론을 기피했던 것은 박정희를 닮아서이다. 박정희는 유세 다니고 토론하는 것 하기 싫어서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버렸다. 그 시절 박정희는 천황과도 같은 절대적인 지위를 꿈꿨다. 셋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가 끔찍하게 유린당한 시대였다. ‘유신독재 타도하자’나 ‘유신헌법 철폐하라’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헌법을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청원)해도 영장 없이 체포해서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때려버리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오죽했으면 구속된 민주인사의 가족들이 입에 십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이고 침묵시위를 했을까. 넷째, 유신시대는 표현의 자유를 넘어 인간 내면의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된 시대였다. 친일파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좌익이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 프락치로, 좌익 프락치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한 박정희는 전향하지 않는 좌익수들의 꼴을 봐주지 못했다.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은 형기를 다 살았어도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거나, 형기를 마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다시 잡아들여 보호감호란 이름으로 기약 없는 옥살이를 시켰다.

 

모든 비판이 봉쇄됐던 시대, 박정희의 심기까지 경호 대상이 되었던 그 시대에 익숙해진 박근혜는 과연 귀에 거슬리는 비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유신체제의 퍼스트레이디 이후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에 박근혜가 공직을 맡았던 것은 영남학원의 이사와 육영재단의 이사장이었다. 불행히도 두 경우 모두 측근들의 심각한 부정부패가 문제가 되어 박근혜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영남학원이나 육영재단 정도 규모를 운영할 때에도 측근들이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다면-알고도 방치했다면 더 큰 문제다-과연 국가를 운영하는 데에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굴복 대신 무능을 택한 30~40대 가장들

 

단언하건대 유신시대의 언론은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막혀 있었다. 박정희의 집권 초기만 해도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언론인들에 대한 테러(범인이 잡힌 적은 당연히 없다)나 강제연행이 잦아지면서, 그리고 정보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인 언론은 사라져갔다. 1960년대에는 비판적인 기사를 쓴 언론인들이 가끔씩 끌려가서 두들겨 맞거나 곤욕을 치르고 나오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자리는 보존했는데, 1968년 말의 신동아 필화사건부터는 해직 언론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단 해직시켰다가 곧 복직시켜도 중앙정보부에서 모르는 척 넘어갔는데, 유신 이후에는 해직된 지식인들이 다른 곳에 취직을 해도 기관에서 찾아와 압력을 행사해 며칠 못 가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정희는 지식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서 구사했다. <사상계>에 모였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박정희가 좋은 자리를 미끼로 하나둘 빼갔다. 언론사 간부들이 서로 한 회사에 한 자리씩 나눠준 유정회 국회의원을 노리면서부터는 정보기관에서 굳이 언론사에 기관원을 상주시킬 필요도 없어졌다. 당시 비판적 지식인 중 상당수는 젊은 시절 좌익 활동에 관련된 적이 있었는데, 사회안전법의 실시는 이들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함석헌, 장준하, 리영희, 문익환같이 한 점 흠잡을 데 없는 우파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만이 그래도 입을 열 수 있었다. 유신정권은 1974년 말 민주회복 선언에 서명한 서울대 백낙청 교수를 파면한 데 이어 1975년에는 교수재임용 제도를 도입하여 전국 98개 대학에서 460명의 교수를 쫓아냈는데, 이 중 반체제 인사는 50명가량이었다.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회사에서 쫓겨났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 교수들은 대개 30대와 40대의 가장이었다. 리영희는 1969년 정부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월부 책장사를 했다. 실업자가 되어 집에서 낮잠을 자는데 옆에서 놀던 어린 남매가 ‘아버지가 실업자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이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파 월부 책장사를 한 것이다. 양손에 새끼로 묶은 소설책 더미를 들고 빙판에 미끄러져가며 리영희는 양심을 지켰다. 1975년 동아일보 사태 당시 울면서 사표를 던진 송건호 편집국장은 뒤에 그 시절에 대해 “무직 상태에서 생활하면서 처자를 거느리기가 한없이 괴로웠다”며 “생활에 대한 공포감으로 견딜 수 없었으며 미칠 것 같았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올망졸망 6남매를 둔 채 해직당한 40대 가장은 박정희가 장관 자리를 준다는 것도 거절한 채 “돼지갈비 한번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풀지 못한 채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사상계>를 통해 전쟁의 폐허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에게 지적 자양분을 공급해준 장준하 선생도 자식들 대학 공부 시키지 못한 무능한 아비였다.

 

송건호는 이때 우리 역사를 돌아보았다. 1924년생인 그가 중학생이던 일제 말기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그때 그는 민족적 양심이나 독립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지만, 자신이 해직되고 보니 “당시에 양심을 지켰던 분들이 한없이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냈나 궁금해”졌다. 송건호는 “사학자들은 구름같이 많은데 단 한사람도 (이 시대에 대해) 쓴 일이 없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기에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자신이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나온 현대사 책인 <한국현대사론>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주로 조선시대에 흥미를 느꼈던 나는 고교와 대학 초년 시절 송건호와 리영희의 글을 보며 현대사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때는 이분들이 그런 어려움 속에서 글을 썼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송건호는 미칠 것같이 괴로웠던 1970년대 자신의 처지가 일제 말기에 양심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에 비하면 훨씬 편한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자신은 박정희 정권이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1940년대 초반 국내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2012년에 대학교수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의 수는 유신시대에 비해 수십배 늘어났다. 그러나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지식인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장준하, 리영희, 송건호 같은 거룩한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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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과 하라, 그럼 나도 박근혜 지지한다”

“진정한 사과 하라, 그럼 나도 박근혜 지지한다”

등록 : 2012.12.21 20:12수정 : 2012.12.21 20:51

 

 

[토요판] 커버스토리
보수가 보수에게|표창원 경찰대 교수

대통령선거 이튿날이었다. 20일 오전 11시 표창원(48) 경찰대 교수는 인터뷰실에 들어오자마자 “조사실 같다”고 말했다. 고시원처럼 좁은 방. 국내 최고의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로 불리는 그는 기자에게 “거기가 형사가 앉는 자리”라고 말했다. 문득 요 며칠간 취조실에 갇힌 피의자처럼 그가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나흘 전인 15일 표 교수는 ‘국정원 댓글알바 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글을 올리며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현직 경찰대 교수 신분으로 경찰과 국정원의 대응을 정면비판한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밝지 않았지만 그는 영락없는 보수주의자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의와 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정적 배경 또한 이와 무관치 않았다. 결국 40대 후반 직업적 소신에 따라 정치무대에 등장한 그에게서 미국 합리적 보수의 상징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냄새가 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직을 결심하게 만든 한장의 사진

 

­어제 잠은 충분히 잤나?

 

“개표방송 보다가 밤 10시쯤 수면제를 먹고 잤다. 지난 주말 이후 뇌가 초긴장 상태였던 거 같다. 나흘 동안 잠을 못 잤다.”

 

­16일 블로그에 사직서를 내겠다고 밝혔다.

 

“엄정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할 경찰대에 누를 끼칠 것 같았다. 교수직을 유지하려면 내 자유를 제한해야 했다. 하지만 제한하거나 조절하려고 하면 이미 그건 자유가 아니다. 밤새워 내린 결론은 자유를 택하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따지기 앞서 나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아직 사표가 수리되진 않았다.”

 

­현직에서 비판할 수 없었나?

 

“누가 감히 국정원이라는 거대 정보기관에 덤비겠나? 국정원이 ‘실수했다’ ‘잘못했다’ 할 사안이 아니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냥 끝나는 사안이다. 경찰대 교수직 유지하면서 어찌 그걸 하겠나. 새누리당, 정부, 국정원에서 ‘저놈 입 좀 막아라’ 안 그러겠나. 내가 속해 있으면 주변 분들이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서 하는 게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국정원 댓글알바 의혹은 11일 밤 터져나왔다. 민주통합당의 신고를 받은 선거관리위원회와 경찰이 국정원 요원의 오피스텔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해당 요원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하룻밤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건가?

 

“불법선거사무실이라는 신고를 받고 선관위가 출동했다. 처음엔 국정원 직원이 문을 열어줬고, 확인 결과 선거사무실이 아니었으며 당사자는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다음 제보한 측에서 “우리가 첩보를 입수했는데 저 사람은 국정원 직원이고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 댓글을 단다”고 주장했다. 제보자가 말을 바꾼 상황이다. 여기서 경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고자의 저의도 고려해야 하는 한편 만약 (신고가) 사실이라면 국가기관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신고자가 이해관계자라고 해서 엄청난 파장을 담고 있는 신고를 무시할 정당성은 없다. 신고자의 신고행위에 기망(기만)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처벌하면 된다.“

 

­이 사건 하나 때문이었나?

 

“원래 나는 정치적 중립에 매몰돼 있었다. 새누리당에서 공약 만드는 데 참여해달랄 때도 거절했고, 다른 진영에도 참여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희한한 사진을 본 거다. 여성 수사과장이 국정원 직원의 집 대문에 몸을 대고 있었다. 왜 경찰이 불쌍가련한 모습으로 비쳐지나? 과감히 들어가야지, 뭐하나 싶었다. 공직선거법에서도 ‘즉시강제권’이 규정돼 있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상황이면 들어가도 된다. 신고자가 제기한 대로 그의 신분이 국정원 직원이라는 게 확인됐고, 시시티브이를 봤는데 (국정원 요원이) 하루 2~3시간만 밖에 나갔다 오는 게 발견됐다. 진실 확인을 위해서 즉시강제를 이행했어야 했다.”

 

­즉시강제란?

 

“문을 따고 들어가야 했다는 말이다. 잠금장치를 풀기 위해 소방서까지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표 교수는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는 일반적으로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국가기관의 권위를 중시하지만, 그는 ‘한국판 워터게이트’를 연상시키는 사건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다며 정치담론의 무대에 등장했다. 정권교체를 해야 이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커밍아웃’한 블로그 글의 제목은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경고하고 요구합니다’였다. 그의 아버지는 17살 때 부모와 형제를 남겨두고 “공산당 압제를 피해 목숨을 걸고 북에서 탈출”해 줄곧 해병대 등 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해병대 훈련장에서 근무할 때 만난 경북 포항 출신이다. 표 교수의 가족적 배경은 한국 보수세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수주의자라면 돌연 사직서를 던질 것 같지 않다.

 

“아니다. 보수주의자가 원래 멋있다. 안정성, 신중함만 보수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편견이다. 진보 중에도 신중한 사람 있고 보수 중에도 과감한 사람 있다.”

 

해병 아버지 덕에 해병처럼 커
경찰대 들어가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 반대편에서 살아
노태우와 이명박도 찍었는데
이명박 정권 5년에 완전 실망
언론자유 소중함 뼈저리게 느껴

 

내가 범죄를 다루지 않나
모든 범죄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다 이해한다”며
범죄자를 인정하고 동정해준다
단 처벌은 받아야 하는 것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신촌에서 “짭새”라는 이유로 몰매 맞은 사연

 

­아버지가 미군에게 해저침투 등 특수전 교육을 받고 해병으로 근무했고 미군 소속으로 국방부의 비밀 대북업무를 맡기도 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나?

 

“말하기 힘들다. 어렸을 적부터 간첩이 우릴 공격할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커왔다. 아버지도 늘 불안을 느끼고 사셨으니까…”

 

­아버지의 영향이 컸겠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해병이었고 나도 해병처럼 컸다. 초등학교 적부터 아버지와 구보하고 얼음 속에 들어가 냉수욕했다. 울고불고하면 ‘남자가 이런 것도 못하느냐’ 야단치셨다. 잘못하면 야구 방망이로 맞아서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았지. 아버지는 절대 북한이 하는 얘기 믿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그곳에선 말할 자유도 없다고 했다. 어머니도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가 베트남전쟁에 가서 한때 연락이 끊겼다. 송금도 안 오던 상황에서 어머니가 행상하면서 집을 꾸려나갔다.”

 

­경찰대는 왜 선택했나?

 

“고3 때 친구들과 경기용 화약으로 장난을 치다가 크게 다쳤다.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고 돈 안 드는 대학을 가야겠다고 했는데, 친구가 경찰대 팸플릿을 가져다줬다. ‘조국, 정의, 명예’라는 학훈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치인 정의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명예롭게 살고 싶었으니까. 셜록 홈스를 동경해왔고 수사반장도 우상이었다.”

 

­1985년에 경찰대에 들어갔다. 경찰이 민주화운동을 사찰하고 진압하던 때인데.

 

“경찰대생이라는 신분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의 시선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경찰에 희생된) 박종철, 이한열 사건 등을 보면서 표현은 못하지만 죄책감도 느꼈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해하려고 했다. 질서 유지하고 경제 탄탄히 하려다가 그렇게 된 거 아닌가. 대학 3학년 연고전 때였나. 서울 신촌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이 날 보자마자 “야, 짭새야”라고 불렀다.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나를 마구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웃음)”

 

­경찰대 졸업 후 전경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일부러 집회·시위가 적은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주 서울로 차출됐다. 시위대의 최전선엔 서울 병력이, 2선엔 경기, 3선은 광주·울산, 4선은 충남·강원, 맨 끝은 제주도가 맡았다. 시위가 여기저기서 터지니까 전경대 배치도 자주 바뀌었다. 우리 임무는 대원들 잃어버리지 않는 거였다.(웃음)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질 적에는 화성경찰서에서 기동대장을 맡았다. 살인사건 현장의 보안과 수색을 담당했지만, 시위에도 자주 끌려갔다. 한번은 한신대 진압하러 나갔는데 최루탄이 휘날리는 와중에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코뼈가 함몰됐다. 대원들이 비분강개해서 한신대 습격하러 간다고 하더라. 몰래 병원에서 나와 경찰서로 가서 ‘쟤들이 나쁜 게 아니다. 더 자유롭고 좋은 사회를 위해 하는 거다’ 하면서 말렸다.”

 

표창원 교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보수주의자로서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안전을 지켰다. 87년 결국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때 몰수됐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고, 그해 표 교수도 첫 ‘대통령 직선제’에 참여한다.

 

­지금까지 누구를 찍었나?

 

“87년엔 노태우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을 찍었다.”

 

­문재인을 찍은 이유는?

 

“이명박 정권 5년에 대해 완전히 실망했다. 특히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언론의 자유만 확보되면 언론이 정부의 잘못을 알아서 지적해주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수많은 기자와 피디가 해직됐다. (프로파일러로서) 피디수첩 등에 나가서 많이 얘기했는데, 그분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다.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버리는 신선한 충격 때문에, 이명박은 사회를 대결과 혼란으로 몰아간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찍었다.”

 

프리허그, 젊은이와 부둥켜안고 울다

 

­이번 선거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주적 절차로 복권됐다는 평가도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표창원 경찰대 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제공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전쟁의 참화 속에 국민이 굶주릴 때 먹고살 수 있게 해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한민국에 기여한 위대한 지도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재했고 저항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았다. 내가 범죄를 다루지 않나. 모든 범죄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오케이, 다 이해한다’며 범죄자를 인정하고 동정해준다. 다만 ‘당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경제 일궈준 것 감사합니다. 다만 당신이 저지른 건 분명히 죄입니다. 그건 인정하고 받아들이십시오’ 하는 거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부탁하고 싶다. 과거를 미화하려 하거나 부정하지 말라. 대선 후보 시절 인혁당 사건에 대해 사과했는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는 상태에서 한 사과는 진정성에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들에게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하고 명예회복 해드리고 새 출발 하자고 해라. 그러면 나도 박근혜 지지할 자신있다. 해직기자들, 나꼼수, 쌍용차 노동자 등 이번 정부에 일어났던 부당한 탄압의 희생자들이 제자리에 돌아가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비판적인 얘기를 해도 참고 인내해주길 바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멋지게 사회통합 이루시길 바란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젊은이가 투표장에 나왔다. 총력을 다했다. 20~30대는 문재인을 지지했고 50~60대는 박근혜에게 몰표를 던졌다. 대선 결과를 마주한 젊은이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절망과 무기력을 토하고 있다. 남은 절반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절망감, 어쩌면 집단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패배감을 느낄 필요 없다. 나는 승리했다고 본다.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그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소리를 냈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보수 쪽에도 다 진보를 ‘종북좌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정말 소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살았고 박정희 정권 때 첨예한 대립을 겪으면서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셨다. 송구스럽지만 나는 그렇게 칭찬받을 사람 아니다. 일제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 한국전쟁 때 소련·중공 남침으로부터 수호한 학도병들 그리고 이 땅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근태, 이한열, 박종철 열사 같은 분들의 희생 때문에 우리나라가 있었다. 나는 희생한 거 없다. 그런 분들과 나를 비교해선 안 된다.”

 

이번 선거에서 기력이 쇠진한 87년 체제의 우울한 종말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침묵하던 보수주의자 표창원은 종말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뛰쳐나와 젊은이들을 껴안고 있다.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서울 광화문과 강남에서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인터뷰를 마친 그가 총총 사라졌다. 그날 저녁 서초동 교보타워 앞에선, 길게 줄을 선 젊은이들이 한 보수주의자로부터의 포옹을 기다리고 있었다. 표 교수와 젊은이는 감싸안고 울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장면 같았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진보 대 보수’ 총집결 구도로 치러진 선거인 만큼 환호도 절망도 큽니다. 보수의 3.5% 승리로 마감된 대통령 선거 결과를 들고 비판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보수정부’의 길을 물었습니다. 보수적 가정에서 자란 범죄심리학자, 그리고 각각 박근혜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보수인사 등 세 명은 해직언론인,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구호하는 보수의 정신을 잊지 말라고 주문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보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프리허그’하는 당선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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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민주당 힘만으로는 정권교체 어렵다"

눈물의 캠프 해단식…"국민정당으로 가는 노력에 힘 보태겠다"

곽재훈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2-21 오후 2:58:23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선대위 내 '시민캠프' 해단식에서 민주당의 쇄신과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확장을 강조하며 시민사회의 계속적인 협력을 당부했다. 문 후보는 '강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을 되새기기도 했다.

문 후보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동화빌딩에서 열린 해단식 인사말에서 "민주당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당 힘만 가지고는 새 정치를 제대로 하기 어렵고 정권교체도 민주당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게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다같이 확인하고 절실히 느꼈던 바"라고 말했다.

문 후보는 "시민캠프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 세력들이 새 정치를 향한 노력들을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면서 "민주당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하고 민주당이 머뭇거리면 이끌고 견인해 달라"고 호소했다.

문 후보는 "시민캠프가 준비했던 해왔던 많은 사업들과, 이 사업을 위해 함께 모였던 많은 분들은 너무 소중한 자산"이라며 "선거가 끝났다고 다시 흩어지지 않고 새 정치를 만들어내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정권교체를 이뤄보겠다는 꿈은 더 새롭고 좋은 분들에게 넘겨야겠지만 새 정치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 그리고 민주당을 보다 더 큰 국민정당으로 만들어 나가는 그 점만큼은 저도 할 수 있는 역할의 여지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보태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역사 앞에 큰 죄…그러나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문 후보는 해단식 말미에서 "우리가 겪어보면 역사는 똑바로 가지는 않는다. 지그재그로 가고, 때로는 잠시 거꾸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크게 보고 길게 보면 앞으로 늘 발전해 간다"고 자신의 소회를 표현했다.

문 후보는 이어 "다들 아는 선배님이 말씀하셨는데 '강물은 굽이굽이 꼬불꼬불 흘러도 끝내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않느냐"고 했다. '강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난 2008년 2월 임기를 마친 노 전 대통령이 송별 만찬에서 했던 말이다.

문 후보는 "역사 발전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바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문 후보는 앞서 인사말에서 "지지해주신 1500만 국민들께 죄송스럽고, 역사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하기도 했다.

문 후보는 "제 개인적인 꿈이 좌절된 것이지, 새 정치를 바랐던 평범한 국민들의 꿈이 좌절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절반 가량의 국민들이 새 정치를 응원했다는 사실은 다음 정부 5년 내에 우리 정치를 좀더 좋은 정치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 후보는 "끝내는 제대로 된 정권교체, 새로운 민주정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 본다"며 "나로호 발사가 연기됐듯, 전체의 꿈과 목표가 연기됐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당부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자료사진) ⓒ뉴시스

눈물의 해단식장…'지못미 문재인' 등장

이날 해단식은 대표단과 위원장단 등 시민캠프 지도부와 유세단, 실무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참석자들의 대부분이 눈시울을 붉히거나 눈물을 훔쳤다. 행사를 진행하던 사회자마저 한때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잠시 진행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학영 공동선대위원장은 "역사는 계속 가혹함을 요구한다"며 "대한민국을 지배해 왔던 강자들의 힘이 이렇게 강하구나"라고 탄식했다. 인사말 도중 끝내 눈시울을 붉힌 이 의원은 "잊지 말자. 쓰러지지 말고 함께하자"고 말을 맺었다.

유정아 대변인은 <맹자> 이루편의 '군자 유종신지우 무일조지환'(君子 有終身之憂 無一朝之患)이라는 글귀를 인용해 "군자는 평생토록 근심할 만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소인은 하루하루 걱정으로 평생을 지낸다고 한다. 지금 겪는 어려움은 일조지환이다. 평생 같이할 고민들이 같았기에 (우리가) 함께했다. 그 고민을 놓지 않는 한 힘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캠프 관계자들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나온 '스케치북 프로포즈'의 형식과 배경음악을 빌어 후보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마지막 장에 적힌 글귀는 "기회는 5년 후에, 과정은 신나게, 결과는 승리로"였다. 문 후보의 '메인 테마'였던 "기회는 공정할 것이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를 연상시킨다.

캠프 실무자들도 발언을 통해 선거운동 기간의 소회를 밝히며 문 후보에게 변함없는 지지와 위로를 보냈고, 이들의 말은 대개 눈물로 끝을 맺었다. 한 캠프 관계자는 문 후보에게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당신은 영원한 우리들의 대통령이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문 후보는 발언을 마친 참석자들을 한명 한명 일일이 포옹하며 위로했다. 해단식이 끝난 후에도 출구 앞에 서서 퇴장하는 참석자 거의 전원과 일일이 악수와 포옹을 나눴다.

 

 
 
 

 

/곽재훈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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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론에 휩싸인 프랑스 작은 마을, 왜?

[해외리포트] "부가라슈, 12월 21일 종말론 피할 수 있는 곳"...언론 과열 취재

12.12.21 11:12l최종 업데이트 12.12.21 11:12l
한경미(cfhp)

 

 

2012년 12월 21일 지구 종말론이 프랑스를 뒤흔들고 있다. 매년 12월 21일은 동지로 일년 중 제일 해가 짧은 날이기도 한데, 고대 마야 캘린더에 의하면 이날이 인류의 한 사이클을 마감하는 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한 사이클 마감과 세계 종말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여기에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이 개입돼 있다. 프랑스 남쪽 피레네 산맥에 부가라슈 (Bugarach)라는 마을이 있다. 부가라슈는 200명 인구가 사는 작은 마을로 지구 종말론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인류의 한 사이클을 마감하는 날을 세계의 종말로 해석한 일부가 피레네 지역의 불명치 않은 한 웹사이트에서 2년 전에 2012년 12월 21일 세계 멸망설을 떠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부가라슈라는 마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가라슈 마을 뒤에는 해발 1231미터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위치하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이 산 어디엔가 UFO(미확인 비행물체) 착륙기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었다. 결국 외계인이 이 마을주민들을 구할 것이라는 황당한 설이 웹사이트에서 나돌게 되는데 2010년 말에 이 지역 신문인 <L'Independant (렝데팡당)>이 이 사실을 기사화 하면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서 다른 신문들도 연이어 이 소식을 다루고 급기야는 미국 <뉴욕타임스>까지 합세하면서 부가라슈와 관련된 12월 21일 지구 종말론설이 세계로 확산됐다.

지구 종말론에 휩쓸린 마을

12월 20일자 <르피가로>에 실린 기사 '부가라슈, 지구멸망을 기다리며 운집한 언론'
ⓒ 르피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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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 졸지에 지구 멸망설에 휩쓸린 부가라슈 마을은 주민들이 원치도 않는 상황에서 여러 종류의 소문에 휩싸이게 됐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거나, 전국 각지에서 혹은 해외에서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민박집의 자리가 남아나지 않는 등의 일이다.

세계 경제 위기로 인건비가 비싼 프랑스는 많은 기업들이 동유럽이나 아시아 등으로 이전하면서 실업자가 대거 발생하고 있는데 지구 종말론이 하나의 위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서점가에서는 세계 종말에 관한 책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오고 각 언론 매체에서도 여기에 질세라 세계 종말에 대한 방송을 경쟁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12월 21일 당일 날에는 프랑스 TV 여러 채널에서 지구 종말 관련에 대한 특집 방송이 장시간 이어질 예정이다

올해 발간된 <아포칼립스(묵시) : 절박한 위협?>이라는 책에서 저자 페네슈(Fenech)는 "아포칼립스를 맞이하여 일부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부가라슈를 집단 자살의 장소로 정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그는 1995년에 한 사이비 종교단체가 지구 종말론을 믿고 알프스 지역에서 집단 자살을 벌인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부가라슈 마을은 12월 19일에서 23일까지 100명이 넘는 경찰이 24시간 주재하면서 마을의 진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할 계획이다. 또한 21일 당일에는 프랑스 전국에서 300여명의 기자들이 세계 종말을 취재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는다.

이제껏 아무 문제 없이 조용하게 살던 부가라슈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시끄러운 현상에 당연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이 지역에는 어떤 사이비 종교단체도 존재하지 않고 있으며 경운기 3대면 마을을 봉쇄할 수 있는 상황에서 100명이 넘는 경찰이 주둔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에게 새로운 사실은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졌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전문가들, 세계 종말설 믿지 않아

<그라지아> 여성잡지에 게재된 사진 '아포칼립스 전의 마지막 정차'
ⓒ 그라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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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 전문가들까지 가담하고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과학 국내연구소(CNRS)에서도 지난 12월 12일 데일리모션(Dailymotion) 사이트에 15분 분량에 해당하는 영상을 발표해 지구 종말론을 언급하였다. 이 영상에서 한 마야 문명 전문 고고학자는 올12월 21일은 마야 캘린더에 의하면 인류의 한 사이클을 마감하는 날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구 종말론 대신 새로운 사이클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인류 사회에 "신이 도래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종말이 아닌 새인류의 건설을 약속하는 날이라고 전망했다.

철학자 미카엘 포에셀 (Michael Foessel)도 여성잡지인 <Grazia (그라지아)> 11월 30일자 ' 아포칼립스 전의 마지막 정차'라는 기사에서 세계 종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도모하고 있다. 그는 아포칼립스의 어원은 초기기독교 신자에게는 '계시'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세계의 종말은 당연히 신에게로의 귀의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의 가치가 떨어진 오늘날 아포칼립스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근의 지구 종말론이 유럽에서 나오는 이유로 유럽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데서 원인을 찾는다. 이제까지 세계의 역사를 지배하던 유럽이 세계의 주도권에서 서서히 밀려나게 되면서 지구 종말론을 끌고 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없게 된 유럽인들에게 가능한 것은 세계의 종말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철학자 포에셀은 신이 돈으로 대체된 현 사회에서 아포칼립스를 파는 자들이 횡행하게 되는데 특히 미국에서 성행하고 있는 서바이얼리스트(생존주의자)들을 위한 지하 벙커나 생존물품 세트, 무기 판매 등이 좋은 예라고 언급하고 있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지구 종말론

지금까지 우리는 여러 차례의 지구 종말론을 목격했다. 12월 20일 오후 5시 '프랑스 퀼튀르 (프랑스 문화)' 라디오 방송에서도 지구 멸망설을 다뤘는데 이 방송에 따르면 "로마 왕국 말기부터 지금까지 183개의 지구 종말론이 존재했는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더 빈번해지면서 지난 20년 동안 34개의 종말론이 나돌았다"고 언급했다.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종말론을 비롯해 2000년 버그 현상이 거기에 속한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확인 절차도 없이 다른 신문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기자들의 나태가 프랑스 작은 마을인 부가라슈 현상을 일으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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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만든 세대 VS 미래를 책임진 세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2/12/21 13:22
  • 수정일
    2012/12/21 13:2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18대 대선이 끝났습니다. 끝나고 난 뒤에 대선 결과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보다 뛰어난 정치평론가들이나 정치학 박사, 전문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지역별 표심이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에 지역만으로는 그들이 승리했던 이유를 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혹자는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과 강원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겼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고 했지만, 서울을 봐도 거의 초박빙이었던 점을 미루어 이런 식의 지역적인 차이를 가지고 대선 결과를 분석하기에는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대선마다 나왔던 지역표심이 아니라면 이번 대선에서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했던 '아이엠피터'는 그 원인을 세대별 정치성향에서 찾아봤습니다.

 

 

▲연령별 투표율과 지지율은 방송3사 출구조사를 토대로, 유권자수는 중앙선관위 자료를 기준으로 했음.

 


이번 대선에서 가장 뚜렷한 양상을 보인 것이 바로 세대별 후보 지지성향의 차이였습니다. 2030세대는 문재인 후보를 5060세대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이런 세대별 후보 지지의 차이에 따라 제시된 전략이 투표율이었습니다. 투표율이 높다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전체적인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과거에는 2030세대의 유권자가 5060세대보다 많았기에 투표율이 높았다면 2030세대의 지지율이 높은 후보가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18대 대선을 보면 2030세대보다 5060세대의 유권자가 70만 명 더 많았습니다. 여기에 투표율은 20-30세대보다 15% 더 높았습니다. (각 세대 합산 투표율 비교시) 유권자는 70만 명이 더 많았고, 가장 중심축이었던 40대의 경쟁에서도 44%의 지지를 받고 투표율또한 높았기 때문에 박근혜 후보가 과반수를 넘으면서 1백만표 가량을 더 득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2012년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는 40대와 5060세대였습니다. 이들 40대와 5060세대는 무엇 때문에 박근혜 후보의 손을 들어줬는지 알려면, 우선 이들 세대의 기본적인 계층 구성이 어떤 세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40대와 5060세대를 구성하는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베이비붐 세대라는 점입니다. 고령화 사회로 가는 이유를 흔히 우리는 80만명이 출산했던 58년생을 예로 들기도 하는데,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의 출생한 세대들이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아이엠피터'가 4050세대를 중점적으로 이번 대선의 중요한 분석 요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과거 노인층으로 그저 무지한 사람들로 치부하기에는 이들이 가진 파워나 행동이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유권자수의 51%에 달하는 사람들이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맹목적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투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박근혜 후보의 손을 들어줬는지 분석해봤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뀐 베이비붐 세대'

베이비붐 세대는 대학도 다니고 민주화도 경험했던 지식인층이 많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적에는 진보적인 성향이었던 세대가 점점 보수화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례로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2010년 중간 선거에선 그동안 민주당을 지지하다 갑자기 공화당으로 180도 변했습니다 일본의 단카이세대도 이번 총선에서 나타나듯 보수적인 자민당을 지지했습니다.

이번 대선을 놓고 한국의 5060세대가 단순히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국제적인 흐름, 시대적인 흐름에서 베이비붐 세대들이 점점 보수화되고 있다는 부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과거는 무조건 잊고 박근혜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고 분노에 차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 왜 그들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는가?'

그렇다면 왜 그들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제외하고라도 충분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세대의 사람조차 보수화로 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절박함이었습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미국과 일본과 다르게 토지와 건물의 자산 보유 비중이 높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재산이 경제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현금 보유 등의 금융 자산과 다르게 토지와 건물은 경제 영향에 따라 등락폭이 크게 차이가 나며, 국가의 세금이 많아지는 일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 즉 재산이 유지되기 위한 정책은 좋아하나, 정치적인 변화는 싫어합니다. 여기에 무상보육이나 복지 등의 재원 마련= 증세를 의미한다는 관념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좋아하나 나머지 세대의 복지는 마치 자신에게 돈을 뺏어 남에게 주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를 비교했을 때 박근혜 후보가 지녔던 기득권 보호 정책은 이들 세대의 마음을 움직였고, 민주주의 발전보다는 아파트와 같은 주택가격 상승이 그들에게는 더 절실했던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라는 사실이 이번에도 통했던 것입니다.

' 올드에이지에서 골든에이지로 바뀐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대선에서 그들이 이겼기 때문에 진보세력이 패배했다는 말을 '아이엠피터'는 하지 않습니다. 패배보다는 그들의 힘이 워낙 강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적 흐름이 2030세대보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어 그들이 단순한 '올드 에이지(old- age) 가 아니라 '골든 에이지(Golden-age)'가 됐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안고 가지 못한 요인을 문재인 후보의 패배로 보는데, 문제는 과연 이들 세력이 가진 문제점을 알면서 무조건 안고 가는 것이 옳은가라는 반문도 생깁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보수세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 법치와 도덕성,공정을 무시한 기득권 보호에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재벌의 횡포와 부패에 상관없이 그들 때문에 경제만 발전하면 그뿐이라는 식의 모습이나, 새누리당의 불법적인 행동에는 눈과 귀를 막는 모습은 상식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치동 아파트에 걸린 현수막. 출처:블로그 내가꿈꾸는 그곳(www.tsori.net)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노동자와 인권탄압은 외면하고, 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장기적인 자주국방보다는 미군에 의존하는 모습은 모순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진보세력을 무조건 종북좌파와 빨갱이로 모는 단순한 논리는 대화 단절과 양극화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나은 방법은 상식과 진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알려주고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양극화에서 교집합은 끄집어 내서 밀고 나가고, 서로 다른 가치관 중에서 감추어진 진실을 그들에게 끊임없이 제시하여 그들이 진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의 경우 왜 보편적인 반값등록금이 돼야 하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단순히 차등적 반값등록금이 세금을 아끼는 일이 아니라는 다양한 근거와 논거를 그들에게 제시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겉은 이념이고 속은 이익으로 뭉쳐진 그들에게 당장의 이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들은 가진 사상이나 가치관 모두를 포용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들의 절박함을 인정해야 하는 점은 진보가 안고 가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오백만 명 VS 천사백만 명, 여기서 해답을 찾다'

문재인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차이는 대략 백만표(1,080,496표)의 차이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한국의 진보세력이 충분히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2030세대의 투표율이 조금 더 높아지고, 40대와 50대의 보수세력 중에서 왜 대한민국에 진보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면 다음 대선에는 승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이엠피터'는 단순하게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진보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세력이었고, 이들은 기존 사회의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진보의 사상이 어느 정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닏.

새로운 정치를 싫어하는 사람이 천오백만 명이 있다고 본다면 패배입니다. 그러나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을 통해 정의로운 결과를 원하는 사람이 천사백만 명이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보수세력이 집권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안 됩니다. 미래를 본다면 이제 노동력 감소로 인해 경제력 저하와 국력 쇠퇴의 주원인이 되는 'D의 악재'가 대한민국에도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인구변동(Demography)이 '부채(debt)'와 '적자 (deficits)', '디플레이션 (deflation)'등 'D의 악재'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국가재정 짓누를 인구고령화'-LG경제연구원


40대 후반부터 5060세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보수를 선택했다고 무조건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 대한민국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불안을 특정 집단에 맡겨 놓기에는 우리 아이들의 삶은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진보하는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는 항상 발전해왔습니다. 또한, 특정 계층이 누리는 권력과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뉘어질 수 있도록 진보는 노력해왔습니다. 진보란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같이 살자는 의미입니다.

18대 대통령을 만든 세대가 40대 후반,5060세대라면 나머지 세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진 세대입니다. 대통령 만들기는 실패했어도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까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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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봉 점등 행사 지역 주민 기독계 반대

 

박 당선자에게 주는 국방부 첫 선물은?
 
애기봉 점등 행사 지역 주민 기독계 반대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2/12/21 [11:37]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애기봉 점등행사에 반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김포지역 주민들과 기독교계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김포지역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적목사가 국방부의 애기봉 점등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기자회견 참석자가 등탑 점등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 이정섭 기자


‘애기봉 점등’ 김포국방부가 22일부터 김포지역 최접경 지역인 애기봉에 점등행사를 진행 하려하자 김포지역 주민들은 물론 기독교계와 시민사회단체가 강력 반발하며 중단을 요구 나섰다.

애기봉점등 및 전단살포 반대 김포공동대책위원회와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예수살기, 진보연대, 전국농민회, 평통사 등 김포지역 주민과 기독교계, 시민사회체 30여개는 21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방부는 군사적 충돌을 불러 올 수 있는 애기봉 등탑 점등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목회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적 목사는 김포주민과 기독교계를 대표한 연설을 통해 “애기봉 점등은 남북갈등과 남남갈등을 유발할 뿐 아니라 지역경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점등행사는 분명한 심리전의 하나로 직접전쟁으로 번 질수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를 표시하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여 할 국방부가 권력의 국방부인지, 미국의 국방부인지 밝히라”고 국방부를 규탄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조승현 부장은 “김문수 지도지사와 유영록 김포시장이 20일 만나 김포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해 활성화할 방안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대북적대정책이 계속되는한 김포지역 경제는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라며 “정부와 국방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남북 갈등을 유발하고 전쟁을 불러 올 수 있는 대북심리전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지난해 4월 5일 김관진 국방장관은 스스로 심리전이 명백한 전투행위이거나 일종이라는 점을 시인했다”며 “국방부는 군사적 충돌을 불러 올 전투행위인 애기봉 점등 행사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김포지역 주민들과 기독계인사들은 22일 오후 5시경부터 진행 될 ‘애기봉 점등’ 행사를 막기위해 애기봉 진입로를 차단하겠다고 밝혀 점등행사를 강행하려는 측과의 충돌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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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남북간 실질적 해상경계선'

 

'NLL, 남북간 실질적 해상경계선'
국방부, 2012 국방백서 발간..'독도' 사진 재등장
 
 
2012년 12월 21일 (금) 12:16:38 조정훈 기자 whoony@tongilnews.com
 

 

   
▲ 국방부가 '2012 국방백서'를 21일 발간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2012 국방백서'가 21일 발간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째이다.

'2012 국방백서'는 서해북방한계선(NLL)에 대해 "1953년 8월 30일 설정된 이래 지켜온 남북간의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으로, NLL 이남 수역은 대한민국의 관할 수역"이라고 명시했다.

지금까지 국방백서는 NLL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으나 이번 백서에는 각주 형식으로 명기된 것이다.

이번 '2012 국방백서'에서 NLL에 대한 정의가 기술된 배경에는 최근 대선기간 동안 논란이 된 'NLL'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 '2012 국방백서'에 등장한 NLL 설명. [캡쳐-2012 국방백서]

 

이에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은 "NLL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께서 명확하게 기회있을 때마다 국회나 언론이나 이런 데서 답변을 통해서 말씀드린다"며 "하지만 국민들께서 국방백서가 평상시에 접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내용을 명확히 설명을 해서 분명하게 인식하실 수 있도록 이해를 돕고자 포함했다"고 설명했다.

'2012 국방백서'에는 '2010 국방백서'에 부활한 '북한 정권과 북한 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유지됐다.

'2012 국방백서'는 "북한은 대규모 재래식 군사력,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증강, 천안함 공격.연평도 포격과 같은 지속적인 무력도발을 통해 우리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이러한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 주체인 북한정권과 북한 군은 우리의 적"이라며 북한의 위협을 강조했다.

'북한정세 및 군사위협' 편 대남분야에는 "2011년 들어 북한은 수사적인 군사도발 위협과 함께 기만적 대화공세를 펴는 등 양면전술을 구사하였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북한은 전 한반도 적화통일을 목표로 우리 내부의 국론분열과 한미동맹관계의 갈등을 조장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함한 대남 군사적 위협을 지속하면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 노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군사전략' 부분에서는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에는 선군정치를 내세워 대남 우위의 군사력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왔다"며 "김정일 사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도 단기적으로는 선군정치 노선을 변경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한 "북한의 기본목표는 대남 적화통일로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한 변화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북한군의 비대칭 전력은 평시 국지도발은 물론 전시 핵심 공격수단으로서 우리 군에게 심각한 위협"이라고 명시했다.

'독도' 사진 재등장..'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

'2012 국방백서'에는 독도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했다. 특히, 독도 사진이 '2008 국방백서' 이후 재등장했다. 2010 국방백서에는 삭제됐다.

이번 국방백서에는 "특히 지리적.역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군은 강력한 수호의지와 대비태세를 확립하고 있다"며 독도 수호의지를 명확히 했다.

지금까지 국방백서는 "우리 군은 서북 5개 도서와 마라도, 울릉도, 독도 등을 포함한 동.서.남해의 우리 영토.영해.영공을 확고히 수호하기 위한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라고만 기술됐다.

 

   
▲ '2012 국방백서'에는 독도 사진이 재등장했다. [캡쳐-2012 국방백서]

 

'한일 교류협력'부분에서는 "한일 양국은 공히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협력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보의 역사 인식 문제와 우리의 고유 영토인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은 양국의 국방 교류협력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서 극복해야 할 요소로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한 일본측 반응에 대해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은 "국방백서는 오늘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이것고 관련해서 특별한 의견이 제기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2012 국방백서'는 국문 1만부, 영문 5천부를 제작, 국회, 언론기관, 행정부, 교육.연구기관, 도서관 등에 배포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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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기술로 패트리어트 연동 성공한 우리 공군

 

 
김수빈 2012. 12. 20
조회수 181추천수 0
 
호사가들에게 체계통합(SI: System Integration)이란 참 심심한 소재다. 수백억을 들인다 한들 휘황찬란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MCRC와 패트리어트의 연동이 우리 공군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에 의해 성공했다는 소식은 그다지 큰 반향을 울리지 못했다. 백억 원이 넘는 예산을 절감하고 전력화 시기를 앞당겼다는 성과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공군이 향후 네트워크중심전 수행에 필수적인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2.jpg » 공군, 작전정보통신단 창설.

 

국방부가 10월 24일 미국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패트리어트 PAC-3 도입을 공식화하면서 다시금 북한 탄도미사일 위협과 우리 군의 대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때맞추어 공개된 "현재 한국군의 PAC-2 체계로는 탄도미사일 요격 능력이 40% 이하"라는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미국 미사일방어국(MDA)의 연구 결과 또한 이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분명 PAC-3를 도입하면 지금보다 탄도미사일에 대한 방어 능력은 높아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린 무기체계는 도입하고 난 이후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도입 자체에만 매달려 군수 지원 등을 비롯한 후속 조치의 부실로 국민의 혈세를 들여 도입한 무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꼴을 많이 목격했다. 기존의 무기체계들과 제대로 통합을 시키지 못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과연 패트리어트는 우리 군의 방공무기체계와 잘 융화될 수 있을까? 미국에서 개발하고 미군이 운용하던 무기체계이니 당연히 잘 되지 않겠느냐고 막연하게 여기기 쉽다.

미군과 우리 군 작전환경의 차이

안타깝게도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미군이 방공작전을 수행하는 환경과 우리 군이 방공작전을 수행하는 환경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군은 지속적으로 이동을 하는 가운데 주둔하고 있는 지역을 탄도미사일과 적 항공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방공작전에서 기동성을 고려하는 것이 기본이다.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을 떠올려 보라. 포대는 신속하게 전개 또는 이동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장비는 차량에 탑재되어 있거나 적어도 차량으로 수송이 가능해야 한다. 이는 호크부터 패트리어트, 그리고 현재 개발 중이나 결국 실전 배치가 안 되는 비운에 빠질 것으로 보이는 MEADS까지, 대부분의 미국 방공무기체계에서 항시 고려되어 왔던 사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군의 방공무기체계는 주로 대대 단위로 작전을 수행한다. 이는 미군의 작전환경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이를 우리 작전환경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MCRC(Master Control and Reporting Center: 중앙방공통제소)를 중심으로 통합 방공작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기유도무기(SAM-X) 사업으로 패트리어트 무기체계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에도 개발업체인 레이시온(Raytheon)이 제시한 한국형 체계 배치도에서는 패트리어트 대대와 MCRC가 서로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패트리어트 작전통제 체계는 크게 대대급 작전통제소인 ICC(Information Coordination Central)와 포대의 교전통제소인 ECS(Engagement Control Station)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대대급 통제소인 ICC와 우리 MCRC를 연동시키는 것이 우리 작전환경에 적합한 체계 통합을 위한 중대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데다가 우리 군에서는 이러한 연동을 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방위사업청은 2011년 2월, MCRC와 ICC 연동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조를 미국 정부측에 요청했다. 이를 위한 예산으로는 약 129억 원이 책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난관이 발생했다.

사진4.JPG » 작전정보통신단에서 자체적으로 간행하고 있는 저널.

우리의 작전정보와 노하우를 누출시킬 것인가

수차례 회의를 거치고 미국 정부와 업체(레이시온)는 2011년 6월경 우리 MCRC 체계의 핵심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source code)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스코드란 소프트웨어를 실제로 개발할 때 사용한 명령어들이 담긴, 일종의 설계도라 할 수 있다. 이는 MCRC와 패트리어트 ICC를 연동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요구였다. 그러나 MCRC 소프트웨어에는 우리 군의 주요 작전정보는 물론이고 수년간 MCRC를 운용하면서 발전시킨 여러 가지 기술적인 노하우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우방국인 미국이라지만 이러한 정보와 기술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3개월 가까이 소프트웨어 제공방식에 대한 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 MCRC 소프트웨어의 전부를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결국 소프트웨어의 일부만을 미국 측에 제공하고 그것을 토대로 미국 측에서 개발한 부분적인 소프트웨어를 다시 우리 MCRC에 이식하기로 하는 절충안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작전정보와 노하우의 유출은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반면, 작전 측면에서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의 전반적인 구조를 모른 채 일부만 개조를 하면 그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혹여나 문제가 발생하면 MCRC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영공 방위를 책임지는 MCRC에서 이러한 상황이 용납될 리 만무했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었다.

작전정보통신단 "독자 개발 추진" 제안

한편, 당시 공군 내에서 MCRC와 패트리어트 체계의 연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조직이 있었다. 항공우주작전과 IT의 융합을 통해 네트워크중심전(NCW) 환경을 조성하고 공세적인 항공우주작전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5월 창설된 공군 작전사령부 소속의 작전정보통신단이었다. 당시 창설된 지 1년을 조금 넘긴 상태였으나 부대 요원들은 과거 MCRC 체계 전력화 당시 2년간 전문교육을 받았던 소프트웨어 개발요원을 포함하여 조종, 항공통제, 방공포병, 정보통신 등의 항공우주작전에 필요한 모든 병과가 모여 있어 높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부대장이 전술데이터링크와 무기체계 연동기술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연구자 및 발표자로 직접 참가하는 등 무기체계 연동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로 전문적인 기술을 축적하고 있던 작전정보통신단은 곧 공군 본부에 연동 소프트웨어를 자체 개발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연히 공군 본부와 방공포병사령부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자체개발 착수를 위해 공군 참모총장 보고자료를 준비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작전정보통신단장(대령 구정, 공사 30기)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분들이 '과연 작전정보통신단이 할 수 있을까?'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대형 프로젝트를 공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라며 걱정과 우려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쌓아온 연구개발 성과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 제기한 우려는 상당했다. MCRC와 패트리어트를 연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는 것은 우리 군이 지금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대형 사업이었다. 만일 개발이 실패로 끝날 경우, 그만큼 패트리어트의 온전한 전력화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패트리어트의 조기 전력화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던 관계자들이 가장 우려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작전정보와 기술 누출의 우려와 조기 전력화 실패에 대한 우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군은 고민에 빠졌다.

"리스크 없이는 획기적인 발전도 없다" 독자개발 결정

마침내 2011년 9월 27일, 참모총장 대면 보고가 끝나고 연동 소프트웨어를 작전정보통신단 주관 하에 개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나아가는 데에 부담이 없었을 리 없다. 기자의 질문에 작전정보통신단장은 이렇게 답했다. "물론 리스크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리스크 없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총장님께서도 우리를 믿고 리스크를 함께 부담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개발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작전에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소프트웨어인 만큼 개발조건이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3,000여 개의 점검 항목에 대해서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될 수 없었다. 여기서 개발요원들이 받았을 부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개발 실무를 담당했던 한 공군 관계자는 개발 당시 가장 난감했던 점으로 연동통제문서(ICD, Interface Control Document)의 부재를 꼽았다.

모든 무기체계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체계끼리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으려면 서로의 데이터 처리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통역가가 양측의 언어를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데이터 처리 방식을 설명한 문서가 바로 연동통제문서이다. 그러나 패트리어트의 연동통제문서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결국 개발요원들은 패트리어트 체계에서 나오는 모든 데이터들을 일일이 분석하고 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이 문제를 돌파해야 했다. 비유하자면 수학 시험에서 수열 문제를 일일이 숫자를 대입하는 방식으로 푸는 것과도 같다 할 수 있다.

개발기간 77% 단축, 작전개시 이상무

9월초부터 시작된 패트리어트 연동 소프트웨어 개발은 개발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2011년을 넘기기 전인 12월 9일에 완료되었다. 미측 업체에서 제시한 기간의 23%만 투입한 셈이다. 작전정보통신단은 이듬해인 올해 1월부터 수차례 MCRC와 패트리어트 ICC 간의 연동 시험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후, 마침내 2월 9일 소프트웨어 개발이 완료되었음을 공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현재 MCRC와 패트리어트 ICC 간의 연동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번 11월 5일 검열 결과 정상작전 가능 판정을 받았다.

작전정보통신단의 패트리어트 연동 소프트웨어 개발 성공으로, 미국 측이 제안했던 사항에 비해 개발기간은 10개월이 단축되었고 예산은 129억 원이 절감되었다. 이는 작년 국방 분야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아낀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덕택에 부대는 기획재정부로부터 예산 성과금 500만 원을 받았다.

공군, 네트워크중심전 원천기술 확보

그러나 작전정보통신단이 거둔 성과는 예산 절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의 성과는 공군이 장차전의 대표적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는 네트워크중심전 개념을 얼마나 실전에서 잘 구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미 미군과 나토군에서 전술데이터링크의 표준 프로토콜로 자리 잡은 Link-16을 사용하여 MCRC와 패트리어트 체계를 연동시키는 소프트웨어를 성공적으로 개발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이 프로토콜을 사용한 여타 무기체계들을 공군 자체의 역량으로도 얼마든지 통합시킬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했음을 뜻한다.

 

바야흐로 체계간 통합이 화두인 시대다. 미군은 이미 작년에 조기경보레이더(AN/TPY-2)로 탐지 및 포착한 3,000km 바깥에서 발사된 항적에 대해 SM-3를 원격으로 발사하여 요격하는 실험을 성공시켰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조기경보레이더와 SM-3 체계가 서로 연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무기체계들끼리 연동이 가능하게 되면 놀랄만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조기경보레이더가 수집하는 제원을 기존의 방공무기체계와 통합하기 위하여 탄도유도탄 작전통제소(AMD-Cell)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공군 내에서 자체 기술로 개발한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운영유지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성과이다. 충남대 종합군수체계연구소 이희우 소장의 군 경영 실태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연간 총 국방비 30조 원에서 무기체계의 신규획득에 드는 비용은 9조 원이나 운영유지에 드는 비용은 그 세 배에 달하는 21조 원이다. 단순하게 계산해 볼 때, 향후 300억 원 가까운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성과는 우리나라의 군 관련 정책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터뷰에서 구정 작전정보통신단장은 "공군은 무척 다양한 첨단 무기체계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런 복잡한 체계들에 대한 연구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은 기술과 상당한 예산 규모를 필요로 하는 사업 같은 것은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관할한다 하더라도 소규모의 연구개발에 대해서는 군에서도 각자 스스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현장에서 사업을 지휘하며 얻은 결론이었다.

중국 방위산업의 교훈

여기서 중국의 방위산업 발전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방위산업은 같은 공산권인 소비에트 연방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연구개발과 생산이 동떨어져 있어 기껏 연구개발로 완성한 디자인을 생산 부서에서 제대로 구현을 하지 못하는 일도 잦았고, 관료제의 고질적인 병폐인 부처이기주의의 만연으로 혁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중국의 방위산업이 급성장을 하게 된 것은 20세기말 들어 그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부터였다. 그 시작은 방위산업을 정부 조직이 아닌 군이 총괄하도록 한 것이었다. “최종사용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해당 산업 분야에 대해 따로 담당자들을 두기 시작하면, 이들은 결국 자기네 조직의 이익만을 좇기 마련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UCSD)의 타이밍 청(Tai Ming Cheung) 교수가 인도의 방산관계자들에게 해준 조언이다.

 

그 이후 중국의 방위산업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비록 그 실질적인 성능은 의심받고 있으나, 중국은 올해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를 선보이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중국 방위산업의 특허는 1998년에는 313개에 불과하였으나 2008년에는 11,000개, 그리고 2010년에는 15,000개가 특허 출원 중에 있을 정도로 부쩍 늘었다.

 

방위산업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결국 소요군 자신 외에 없다. 타이밍 청 교수의 조언과 중국 방위산업의 놀라운 성장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군의 소요를 가장 적확하고 신속하게 획득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방위사업청을 반드시 국방부로 원대복귀를 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대형 사업이 아닌 경우라면, 각 군에서도 자체적으로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 인력을 양성하고, 또한 국방부에서도 이를 장려하여 주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 볼만하지 않을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체 기술 개발이라는 될성부른 ‘떡잎’을 틔워낸 공군을 주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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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빈
디펜스21+ 기자
우리나라 공군 최초의 패트리어트 작전장교(TCO) 중 하나. 번역서로 <우정의 가치(까만양)>, <실비오 게젤의 경제학의 정신(인카운터)>이 올해 출간 예정.
이메일 : subin.b.kim@gmail.com 트위터 : @delcinabro
블로그 : http://plug.hani.co.kr/thew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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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교수 광화문 프리허그

"정의는 천천히 올 수도 있는 것"

[현장] 시민들 한 명씩 꼬옥... "박근혜, 유신 피해자에 사과해야 '100% 대통령'"

12.12.20 17:41l최종 업데이트 12.12.20 17:53l
홍현진(hong698)

 

 

'제18대 대선 투표율 80%를 넘기면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트위터를 통해 약속했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투표율이 75.8%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겠다며 시민들과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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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교수가 시민들을 꽉 껴안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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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가 필요해...' 표창원 전 교수와 프리허그를 하던 중 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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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2시께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는 2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밝게 웃으면서 두 팔을 크게 벌려 시민들 한 명, 한 명을 포옹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표 교수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포옹을 마친 시민들은 표 교수와 함께 인증샷을 찍었다.

대선 다음날인 이날 표 교수가 '프리허그'에 나섰다. 대선 정국 한복판에 스스로를 "보수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라고 밝히며 경찰대 교수직 사직서를 낸 그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논란 당시 경찰 수사를 비판하는 글을 올려 '합리적 보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표 교수의 사직서는 아직 수리되지는 않은 상태다.

그는 지난 18일 투표율이 77%를 넘으면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최종 투표율은 그에 조금 못미치는 75.8%. 그는 19일 밤 자신의 트위터에 "75.8%(투표율)도 기적"이라면서 "결과에 상관없이 20일 14:00~16:00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 18:00-20:00 강남 교보 앞 프리허그 진행. 22일 투표율 1위 광주 갑니다. 민주화 성지 광주,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결과는 실망스러워도 과정은 최선을 다했다"

광화문 광장을 찾은 시민들의 연령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교수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표 교수의 눈가에도 물기가 맺혔다. 표 교수는 "너무 실망하지 말자, 정의와 진리는 천천히 올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시민이 "교수님,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거겠죠?"라며 울먹이자, 그는 "그럼요, 희망이 없으면 제가 미국으로 도망갔겠죠"라고 웃어보였다.

"제 생각에는 결과는 실망스러워도 과정은 최선을 다했다. 젊은이들 정의와 진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지금 부족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갖기보다는 조금 더 좋은 민주주의를 갖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국정원 사건을 파헤쳐 달라"는 부탁에 표 교수는 "저는 수사권이 없어서 개인 자유인으로 지켜보면서 말씀드릴 일 있으면 하겠다"라고 답했다. "나꼼수도 지켜주세요", "진정한 보수의 역할 해주세요." 또 다른 시민들이 말했다.

표 교수는 새 대통령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화합과 통합, 100% 대통령이 되어달라"면서 "과거에 대한 진실되고 솔직한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 과정에서 독재를 하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탄압한 것은 사실이다. 인혁당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런 분들을 박근혜 대통령이 큰마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하고 화해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진심으로 나온다면 우리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겠다. 그것이 100% 대통령이다."

표창원 교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시민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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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전 교수와 프리허그를 하기 위해 수십명의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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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해 나온 시민들... 프리허그 하며 울먹

시민들은 표 교수에게 박수를 보냈다. 임용고시생이라는 강애(29)씨는 가방에서 연습장을 꺼내 사인을 받았다. 강씨는 "선거 결과를 보고 위로가 필요해서 학원 끝나자마자 달려왔다"면서 "보수주의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표 교수는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노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나온 강명옥(53)씨는 연신 휴지로 눈물을 찍어냈다. 강씨는 "교수님의 용기에 감동했다"면서 "저런 분이 있어서 이런 암울한 상황에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후 2시30분께, 어느새 시민들은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표 교수의 주위에는 시민들이 가져온 따뜻한 커피와 도너츠가 쌓였다. 프리허그 사진을 본 트위터 이용자들은 "마음이 아프실텐데 약속을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mul****)", "고맙습니다. 눈물나는데 위로가 되네요(@oiu***)"라는 반응을 보였다.

표 교수는 향후 거취에 대한 질문에 "나흘 동안 잠을 못 잤다"면서 "일단 겨울잠을 자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어떻게 먹고살지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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