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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제20차 공판 ③] 호주와 스웨덴은 왜 발표하지 않았나?

명패만 있고 역할은 없는 해외조사단, 그들은 한국에 왜 왔던 것일까요?
 
신상철 | 2014-01-21 07:50: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가 평택2함대에 조사를 위해 갔던 2010년 4월 30일 합조단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저를 헤드테이블로 안내하더니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브리핑을 시작하였는데 해외조사단 가운데 미국, 영국팀은 브리핑을 하였는데 호주와 스웨덴 팀은 브리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궁금하여 호주팀을 개인적으로 만나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제가 2012년 12월 출간한 졸저 <천안함은 좌초입니다>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천안함 첫 조사 그리고 자격논란
안내장교는 나를 테이블의 상석으로 안내를 하였다

문 준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간검사와 최종검사 두 번만 참석키로 하였던 나는 2010년 4월 30일 아침 9시 평택 2함대에 도착하여 안내장교가 나를 합조단 회의실로 안내를 하였다. 그런데 ‘ㄷ’자 형태로 셋팅된 테이블의 상석으로 나를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브리핑이 막 시작하기 직전이라 얼떨결에 앉고 보니 그 자리가 여간 불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상석에 의자가 넷 있는데 나를 제일 왼쪽에 앉혔다. 그러니 내 오른쪽으로 박정이 중장(군합조단장), 윤덕용(민간합조단장), 토마스에클스(미국대표)가 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뭐라고.

앞으로는 테이블이 두 줄로 놓여져 있고 그 테이블에는 군 장성을 포함 군측 합조단 조사위원들과 민간조사위원들이 모두 나란히 앉아 있었고, 한나라당 추천 민간위원들 역시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군대의 특성이 계급과 서열이고, 그것은 자리배치로 구체화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 계급으로는 기껏 예비역 중위인 내가 나이로 보나, 학위로 보나, 덩치로 보나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 없는데 앞 테이블 상석에 앉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나를 어떻게 요리하고 싶어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라 하겠다. 그들 입장에서는 중간조사에 처음 참석한 조사위원에 대한 예우로 호의를 베푼 것인데 이렇게 말한다고 섭섭하다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엄연히 권위를 이용한 매수행위와 다르지 않았다고 나는 판단했다. 

회의가 아닌 일방적 브리핑

나는 그날 중간조사 결과를 두고 토론을 하는 회이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체검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앉아 있으니 일방적인 브리핑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팀이 브리핑을하고, 미국팀이 브리핑을 하고 마지막으로 영국팀이 브리핑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모두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결론을 어뢰폭발이다’라는 것이었다. 듣다 못해 나는 손을 번쩍들고 일어서서 질문을 던졌다.

Q : 왜 좌초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가. 
A : 좌초는 없다. 이미 끝난 얘기다. 
Q : 무슨 얘기냐. 선체인양시 외판하부에 보였던 깊은 스크랫치는 명백히 좌초의 증거가 아닌가?

그러자 해군 준장이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이며 나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좌초이야기 하지 마시오. 좌초는 검토대상이 아니란 말이오”

그가 외치가 내가 따지는 가운데 상황이 아수라장 비슷하게 흐르자, 다른 장성 한 분이 나서서 장내를 안정시키고 자분자분 말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회의가 끝난 다음에 몇몇 전문위원 분들이 신 위원에게 폭발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폭발에 대해 설명이라뇨. 저는 조사하러 왔지 강의 받으러 온 것 아닙니다. 차라리 선체로 갑시다. 가서 선체를 보면서 함께 조사를 합시다”

그래서 점심 식사 후 국방부 조사위원, 미국 및 영국 조사위원 등 십오명이 함께 천안함으로 가서 선체를 조사하기로 하고 오전 회의를 마쳤다.

점심을 앞 두고 잠시 쉬는 시간, 나는 미국과 영국의 브리핑만 했는데 호주와 스웨덴의 대표단은 브리핑을 하지 않았던 이유와 오전 회의 끝무렵에 “오늘 호주와 스웨덴의 발표까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고 말한 부분이 궁금해 졌다. 그래서 호주 대표단을 몰래 만나 볼 요량으로 둘러 보았더니 보이질 않았다.

안내장교에게 슬쩍 물어보니 호주대표단은 아래층에 사무실이 있단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옆에 섰던 중령이 나를 잡는다. “아, 같이 계시다가 점심 드시러 가셔야 합니다.”

말이 조사위원이지 이건 감시와 다를 바 없다. 오전에 회의를 시작하면서 좌석만 상석을 주었지 내 테이블에만 유독 브리핑자료(파워포인트 인쇄물)가 놓여져 있지 않았고, 내 옆에 서있던 중령에게 자료를 달라고 요청을 하였으나 “곤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회의 끝나고 해군 준장에게 자료를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나에게는 어떤 자료도 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회의 끝나고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못하도록 내 손을 잡아 끌만큼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자유롭지 못한 꼴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나는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아무리 회의가 끝난 휴식시간이라고는 하지만 회의실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불을 붙이려고 하니 이번에는 중령이 “여기서는 담배 피시면 안됩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어디서 피면 되오?” 하니 “아래층에 내려가셔야 합니다”하길래 내려갔더니 그때는 잡지 않았다. 역시 한국사람들은 담배에 관대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유의미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던 호주와 스웨덴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담배를 집어넣고 방들을 둘러보니 좌우로 방문들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씩 디다보니 방마다 전문 요원들이 앉아서 일에 열중이었다. 세 번째 방인가 호주 해군대표단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짜고짜 들어가서 인사부터 하고 보니 호주 뿐만아니라 스웨덴 대표단도 함께 쓰는 방이었다. (濠: 호주대표단)

신 :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의 민간조사위원인데 잠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濠 : 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신 :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濠 : 네, 얼마든지..
신 :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濠 : 네, 그러세요.
신 : 왜 오늘 호주팀과 스웨덴팀은 중간 브리핑을 하지 않았나요?
濠 : 에... 저희는 아직까지 유의미한 결론(Meaningful Conclusion)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신 : 폭발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신가요?
濠 : 네, 그렇습니다. 
신 : 스웨덴팀도 같은 입장인가요?
濠 :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 : 놀랍군요. 그런데 왜 미국과 영국은 ‘폭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濠 : (잘 모르겠다는 제스쳐)
신 : 그러면 한 가지 여쭙겠는데, 혹시 이 배가 사고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濠 : 모릅니다.
신 : 스피드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濠 : 모릅니다. 
신 : 항로와 엔진상황에 대해 아십니까? 
濠 : 모릅니다.   
신 : 선박사고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말하지 않고 사고 원인을 밝히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濠 : 그렇군요. Mr. Shin은 아시나요?
신 : 아뇨. 말하지 않으니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천안함이 최초에 좌초했을 가능성에 대해 아십니까?
濠 : 그렇습니까? 
신 : 네, 저는 천안함이 좌초를 하였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濠 : 그에대한 정보를 주실 수 있습니까? 
신 : 네, 제가 가진 정보들을 메일로 드릴테니 님께서도 저에게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로 정보를 교환하도록 하시지요.
濠 : 좋습니다.

그렇게 서로 명함과 이메일을 주고받고 인사하고 나왔는데 미국과 영국이 우리 국방부와 함께 ‘어뢰에 의한 폭발’로 몰아가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호주와 스웨덴은 어뢰폭발 결론을 유보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게 확인한 셈이었다.

이후 모두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천안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함수에서부터 함미 끝까지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나눈 대화 몇 토막. (國 : 국방부위원, 美 : 미국위원, 英 : 영국위원)

신 : 선체하부의 스크랫치는 전형적인 좌초의 증거다.
國 : 아니다. 좌초는 없다. 배가 가라앉아 생긴거다.
신 : 천안함이 두 동강이 날 정도의 폭발이 있었다면 인근 수km 이내의 물고기듥은 모두 떼죽음을 당했어야 할텐데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폭발이 없었다는 증거다. 
英 : 죽은 물고기들이 모두 조류에 떠내려 갔을거다.  
신 : 그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英 : 당시 조류가 셌었다. 
신 : 프로펠러가 휜 것은 이 배가 좌초를 했다가 빠져나온 증거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나? 
美 ; 아니다. 천안함이 가라앉았을 때 바닥에 부딪쳐서 생긴 손상이다.
신 : 무슨 소리. 함미가 가라앉을 때 앞 부분이 먼저 가라앉는데?
美 : (손짓을 하며) 앞에서 쿵, 뒤에서 쿵, 그렇게 해저에 닿았다.
신 : 그러면 닿은 부분만 손상이 되지 왜 다섯 블레이드가 모두 휘었겠나?
美 : 프로펠러가 돌아가면서 해저에 닿았기 때문이다.
신 : 허허, 엔진이 부서져서 동력을 상실했는데?
美 : ... Anyway..
신 : (웃으며) 이 봐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넷티즌들이 당신들이 말하는 어뢰를 Environment Friendly Green Torpedo(친환경녹색어뢰)라고 부르며 놀리고 있다구.. 허 참..
美 : (자기도 씁쓸한지 웃는다)

천안함 선체조사를 하는 동안 나는 좌초의 증거와 함께 충돌의 증거 그리고 폭발이 존재하진 않는다는 증거들을 확인하고 사실상의 천안함 육안 검사를 마무리 하였다. (중략)

천안함 사고 원인의 조작과 은폐를 국민이 알게 해야 한다

천안함 선체조사를 하는 동안, 나는 이 중대한 조작과 은폐의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려야 하는지의 문제를 잠시 고민하였지만 결론을 얻는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을 덮어 둔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였고, 나는 그 다음 날 바로 컬럼으로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방부의 조작과 은폐사실을 온 세상에 알렸다. 그러자 바로 국방부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그날 이후 평택으로부터 전화콜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 불편한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딱딱함과 부드러움 모두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합조단은 공식적으로 나에 대한 자격(資格)과 자질(資質)을 문제삼으며 국회에 민간조사요원을 교체해 줄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고, 민주당에서는 그 문제가 최고위원 회의 테이블에 까지 올랐다.

후에 들은 얘기로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국방부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하니 조사위원을 교체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나의 경력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 윤덕홍 전 부총리께서 “신상철이를 내가 아는데, 그만한 전문가가 드물다”고 변론을 하셨고, 작고하신 김근태 전 의장께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천한 위원을 저들의 요구에 의해 교체하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강력한 반대로 국방부의 교체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고 들었다.

다소 섭섭함은 있지만 나의 경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분들의 의견에 대해 딱히 원망할 생각은 없으나 적극 변론해 주셨던 윤덕홍 최고위원님과 고 김근태 의장님께는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역시 사람의 깊이를 들여다 보시는 분들의 혜안은 남다른 법인가 보다. 큭큭.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민간조사위원의 지위는 잃지 않았지만 이후 국방부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민주당이 자격도 없는 사람을 조사위원으로 보냈다’는 식의 비난을 그치지 않았으니 조사위원으로서 나의 공적인 역할은 사실상 그것으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지가 되어 버렸다.

새삼 말하는 것조차 우습지만, 언론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씻기우지 않고 망령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으니 그것은 역시 언론이 나서서 씻어주기 전에는 만회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자격지심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젖어 하던 일 포기하는 일을 없겠지만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쯤은 ‘내가 걸었던 길’가운데 한 단락을 진지하게 펼쳐 놓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략)


호주팀은 해군, 스웨덴팀은 민간인

당시 제가 만났던 호주팀 두 위원 모두 해군소속이었습니다. 그들이 준 명함에는 대영제국에 속해있다는 뜻을 담아 Australia Royal Navy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두 위원 가운데 한 명은 해군본부 소속이고 다른 한명은 Port Captain(해군항만관리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사무실에는 호주와 함께 스웨덴팀도 쓰고 있었는데 제가 그 방에 들어서서 제 소개를 하자 호주팀은 반기며 테이블로 저를 안내하였지만 스웨덴팀은 자신들의 책상에 앉아 미소만 머금은채 목인사만 간단히 하였습니다. 하여 스웨덴팀과는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었지요.

지나놓고 보니 당시 스웨덴팀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였던 것이 후회가 되었는데, 만약 당시 제가 스웨덴팀에게 대화를 제안하였다고 해도 그들은 예를 갖추어 사절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의 재판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스웨덴팀은 선체의 손상원인에 대한 분석과는 거리가 먼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스웨덴팀은 프로펠러 제조회사인 가메와 소속일 가능성

이번 재판에서 프로펠러 손상원인과 관련, 박정수 준장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박 준장은 <프로펠러가 관성력에 의해 손상되었다>는 합조단의 고전적 주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논리를 펼친 노인식 교수조차도 언론노조 노종면 전 위원장이 밝히 <관성으로 휘어졌다는 프로펠러의 휘어진 방향이 관성력과 반대방향이다>는 검증에 의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한 마당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변호인과의 질의응답과정에서 박 준장은 매우 중요한 증언을 합니다. 

“스웨덴팀이 보다 상세한 (프로펠러 손상원인에 대한) 조사를 위해 비용이 든다고 했고, 대략 5,000달러 정도인 것으로 안다. 하지만 국방부가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변호인이 다시 질문을 통해 “스웨덴팀이 가메와사 소속이냐?”라고 묻자 박 준장은 “그건 잘 모르겠다”고 하였으며, 다시 변호인이 “스웨덴팀은 군인이냐, 민간인이냐?”라고 묻자 “민간인이다”라고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스웨덴팀은 프로펠러 제조회사인 가메와사 혹은 그와 관련된 군수업체 소속의 민간인으로 판단되며, 그것은 소위 천안함 사고를 조사하기 위한 다국적 조사단이라는 '합동조사단(해외조사단)'의 취지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해외조사단은 한국에 왜 왔던 것일까?

평택2함대에서 천안함 조사 당시 박정수 준장과 2함대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 영국팀이 식당에 들어오자 박 준장은 그쪽을 슬쩍 쳐다보더니 나즈막히 혼잣말처럼 그러더군요. “저 놈들은 장비 팔아먹으려고 혈안이다..”

영국팀 역시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날 오전 브리핑에서 영국팀이 천안함 사고의 원인분석 보다는 '폭발에 대한 측정'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어 브리핑하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박 준장 역시 '(폭발측정과 관련된)장비를 팔아먹기 위해 혈안인 영국팀'에 대해 못마땅한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유추해 봅니다.

이번 재판에서 변호인이 박 준장에게 당시 점심을 먹으며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그런 사실 없다'고 부인하였지만, 당시 박 준장과 함께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저 말고 또 다른 두 명의 민간조사위원도 함께 그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저도 알고 그도 아는 사실입니다.

잠수함 전문가인 토머스에클스가 이끌고 온 미국팀은 폭발물과 잠수 전문가들입니다. 그 분들이 과연 천안함 조사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제3의 부표 아래에 가라앉은 물체의 처리문제가 더 시급했는지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폭발측정장치 군수업체 대표인 영국팀, 프로펠러제조회사와 관련된 스웨덴팀, 그 분들이 만약 천안함 조사의 한 부분을 맡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생산한 보고서로 기록이 남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 준장은 여러차례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레포트가 없다”고 증언합니다.

명패만 있고 역할은 없는 해외조사단, 그들은 한국에 왜 왔던 것일까요? 

신상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3&table=pcc_772&uid=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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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최악 개인정보 유출... 금융수장 책임론 부상

사장들만 물러나면 다냐
가라앉지 않는 '국민분노'

[진단] 사상최악 개인정보 유출... 금융수장 책임론 부상14.01.21 08:42l최종 업데이트 14.01.21 10:1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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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3사 "국민들께 죄송, 피해 전액 보상" KB국민카드, NH농협카드, 롯데카드사의 역대 최대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20일 오전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카드 삼사의 기자회견에서 각사 대표들이 나와 사과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경익 NH농협카드 분사장, 박상훈 롯데카드 사장, 심재오 KB국민카드 사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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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악의 금융권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국민들의 분노가 거세다. 금융사들의 정보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가 주먹구구식 관리와 감독 부재라는 지적이 여전하다. 한마디로 예고된 인재(人災)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도 금융사들의 안이한 인식과 초기 대응 부실은 그대로였다. 개인 정보보안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뿐 아니라 책임자를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우선 이번 사건 역시 전형적인 인재라는 것이 지적이 높다. 개인신용평가회사 직원이 거대 카드사 고객정보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빼돌리는 와중에도 해당 회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카드사들은 은행보다 고객정보를 더 많이 취급하고, 마케팅 등 활용도 역시 높아 정보유출에 취약하다는 지적은 계속돼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금융회사 보안관계자는 "이번에 유출된 사례는 매우 초보적인 관리부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해당 회사 직원도 아닌 외부인력이 개인정보를 거의 맘대로 접근해서 취급하도록 한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형적인 내부통제와 안전불감증이 만들어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전형적인 안전불감증이 만들어낸 사상 최악의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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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로 붐비는 은행창구 신용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로 인해 고객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여의도본점에서 수십 명의 고객들이 카드 재발급과 개인 업무를 보기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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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번에 유출혐의로 구속된 박아무개씨가 속해 있는 코리아크레딧뷰로(KCB)는 신한카드와 삼성카드 등과도 컨설팅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 두 카드사의 경우는 내부의 강력한 보안정책으로 이번 정보유출 피해에서 일단 모면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철한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장은 "신용정보업체와 금융기관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어떻게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고, 이용하고 있는지 공개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윤 센터장은 "현재와 같은 구조라면 언제라도 다시 정보유출 사고가 터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이유는 해당 금융사들의 안일한 대응도 한몫했다. 1억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빠졌나갔는데도 카드사들이 내놓은 보상방안은 '월 300원 문자통보 서비스'였다. 정보유출 회원에 대한 실태파악은커녕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카드사들의 초기 대응은 말그대로 소비자를 두 번씩이나 우롱하는 말도 안 되는 행태였다"고 지적했다. 강 국장은 이어 "피해를 입은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피해보상과 함께 철저한 재발 방지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엔 강력히 처벌해야"... KB금융 임원 일괄사퇴·감독 당국 책임론도 거론

이 때문에 금융회사에 대한 강력한 처벌뿐 아니라 관리감독 부실에 따른 금융당국 책임론도 거론되고 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이번 카드사태로 국민의 3분의 1이 정보유출의 피해를 입었다"면서 "집단대표소송 등으로 모든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금융회사들도 개인정보보호 관리 부실에 따라 회사가 망할 수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면서 "그렇게 돼야 회사들도 정보보호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투자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도 "과거에 비슷한 사고들이 일어났을 때 문책 등 내부징계가 미미했다"면서 "내부뿐 아니라 당국에서도 보다 엄격하게 징계와 제재를 취해야 한다"고 전했다.

윤철한 센터장은 "개인정보유출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다"면서 "그때마다 정부에서도 내놓은 대책도 똑같다, 그리고 정보유출은 반복되고 소비자들은 막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감독 당국의 관리 소홀도 매번 나왔지만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강형구 국장도 "이번 사태에 대해 감독당국의 안이한 정보의식과 감독 부실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권에서도 지난해 동양사태에 이어 대규모 개인정보유출사태에 대한 금융감독 당국의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금융권 한 고위인사는 "동양사태로 지난해 감독 당국의 책임론이 거셌는데, 대형 금융 정보유출 사고까지 터져서 엎친 데 덮친 격이 된 꼴"이라며 "금융회사 책임으로만 돌리기에는 사태가 너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고위인사는 다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미 내부적으로 (보안관련) 기준 등이 다 마련돼 있다"면서 "이를 지키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인데, 이것을 자꾸 감독 당국과 연결시켜 책임을 지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항변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 이날 오후 KB금융 부사장 등 집행임원 전부와 이건호 국민은행장을 비롯해 부행장급 이상 임원, 심재오 국민카드 사장 등이 사표를 제출했다. 손경익 농협카드 사장 역시 자진 사퇴의사를 밝혔고, 롯데카드 역시 박상훈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9명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태그:개인정보유출,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태그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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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21 10:15
  • 수정일
    2014/01/21 10:1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 2014.01.21 08:04수정 : 2014.01.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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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사이버사령관 재직 때 매일 보고받고 작전 지시
사령관 지시로 작성된 글, 공소장에서만 3천여건 확인
군 조사본부는 무혐의 처리…‘꼬리 자르기 수사’ 의혹 

연제욱(사진) 청와대 국방비서관이 군 사이버사령관 재직 시절인 2012년 사이버사 심리전단장한테서 매일 대선 개입 활동을 보고받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군 사이버사 대선 개입 사건을 수사한 군 조사본부는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도 연 비서관을 사실상 무혐의 처분해 ‘윗선’ 보호를 위해 축소 수사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한겨레>가 20일 전해철 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아무개 전 사이버사 심리전단장의 공소장을 보면, 연 비서관은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2012년 이 전 단장한테서 전날 인터넷 사이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주요 이슈에 대해 매일 아침 보고를 받고 심리전단의 대응 여부와 방향 등을 ‘결심’(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연 당시 사령관의 결심과 이 전 단장의 지시로 작성된 글은 이 공소장에서만 트위트 2867건, 인터넷 블로그 글 183회 등이다.

 

이런 공소장 내용은 연 전 사령관이 2012년 대선과 총선 당시 사이버사 심리전단의 정치 개입 작전을 사실상 지휘했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러나 군 조사본부와 군 검찰은 연 전 사령관을 단 한 차례 참고인으로 조사한 뒤 현재까지 형사처벌 여부조차 결정하지 않고 있다. 후임자인 옥도경 현 사령관에 대해서도 형사처벌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연 전 사령관은 대선과 총선 기간이 대부분 포함된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사령관으로 재직했고, 옥도경 현 사령관은 2012년 10월 이후 사령관직을 맡고 있다.

 

두 사령관의 혐의와 관련해 조사본부는 지난해 12월19일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때 “북방한계선(NLL) 등 특정 사안에 대해 심리전 대응 작전 결과 보고시 정치 관련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었으나, 이를 간과했다”고 짤막하게 언급한 것이 전부다. 조사본부는 결국 두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작전을 벌인 이 전 단장과 10명의 사이버사 대원들만 정치관여와 증거인멸 교사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 전 단장의 공소장에는 심리전단의 구체적인 대선 개입 활동 방식도 드러나 있다. 이 전 단장이 사령관의 결심(지시)을 받아 현안별로 3~4개씩 대응 지침을 작전팀 요원들에게 지시하면, 요원들이 작전 문구를 만들어 전용 인터넷 카페에 올려놓고 활용했다. 작전 문구는 주로 민주당, 통합진보당 등 야권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문구뿐 아니라, 웹툰이나 동영상, 포스터, 홍보글 등을 직접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조직적인 증거인멸 또한 공소장에서 확인됐다. 이 전 단장은 <한겨레> 보도로 군 사이버사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진 지난해 10월20일, 530단의 데이터베이스·전자결재 서버 4대를 초기화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530단 자체 운용 중인 총 6대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자료가 삭제됐다. 이 전 단장은 같은 달 18일 북한·해외팀의 사이버심리전 대응작전용 노트북 9대도 초기화하도록 지시했고, 며칠 뒤인 25일에는 아예 심리전단 요원들의 작전용 노트북 전체인 60대를 모두 초기화할 것을 지시해 자료를 삭제하기도 했다.

 

또 케이티(KT)에 연락해 530단이 사용중인 인터넷 아이피(IP) 대역을 변경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기존에 기록돼 있던 530단의 아이피 주소에 대한 수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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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핵무력동원태세는 반복되지 않는다

북의 핵무력동원태세는 반복되지 않는다
 
한호석의 개벽예감 <9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4/01/20 [14:01]  최종편집: ⓒ 자주민보
 
 

화성-13호 여러 기를 출동시킨 북의 핵무력동원태세

2013년 1월과 2월 북, 미국, 중국이 각기 핵무력동원태세에 돌입하였던 긴박한 군사상황에 관한 몇 가지 정보들이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난 당시 언론보도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였던 2013년 1월 초 미국 군부를 공포에 떨게 한 놀라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놀라운 상황에 관한 군사정보는 매우 민감한 정보였으므로 그에 관한 언론보도가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상황이 발생한 때로부터 근 2개월이나 지난 2013년 3월 14일에 가서야 미국 온라인 언론매체 <워싱턴자유횃불(Washington Free Beacon)>이 미국 국방부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여 짤막하게 보도하였을 뿐이다. 그 짤막한 보도는 “미국의 정보감지장치들(intelligence sensors)이 1월 중에 북측 각지에서 몇몇 KN-08이 기동하는 것을 관측하였다”는 한 줄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 문장에 나오는 ‘정보감지장치’란 미국군 정찰위성을 뜻하고, ‘KN-08’이란 미국 군부가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에 자의적으로 붙여놓은 별칭이다. 


 
▲ 북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     © 자주민보, 한호석소장 제공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8축16륜 자행발사대에 탑재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는 미국군 정찰위성의 감시망을 뚫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위킬릭스(Wikileaks)>에 폭로된 ‘미국-러시아 공동위협평가회담-2009년 12월’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9년 당시 미국은 무게 500kg의 탄두를 장착한 북의 3단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사거리를 15,000km라고 인정하였다. 그런데도 미국 군부는 국가항공우주정보센터(NASIC)가 2013년 4월에 발표한 ‘탄도미사일 및 순항미사일 위협’이라는 제목의 공개자료에서 화성-13호의 사거리가 5,500km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였다. 
2009년 12월에 진행한 비밀회담에서는 화성-13호의 사거리를 15,000km라고 인정하였으면서도, 2013년 4월에 발표한 공개자료에서는 그 사거리를 5,500km를 대폭 축소한 것이야말로 북의 미사일능력에 대한 미국 군부의 상투적인 사실왜곡이다. 미국 군부가 왜곡한 자료를 곧이곧대로 믿은 미국 군사전문가들에 의해 화성-13호의 사거리가 5,500km라는 허위사실이 오늘 국제사회에서 ‘정설’처럼 인정을 받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이다. 

위의 보도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은 2013년 1월에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를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 여러 대를 각 지역 갱도기지들에서 출동시켜 여러 방향으로 분산기동시키면서 발사준비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 보도기사에 언급된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화성-13호를 탑재한 자행발사대 몇 대가 작전기동에 나섰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몇 대인지 몰라서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위성영상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하였는데도 그냥 “몇몇(several)대”라고만 언급하고 넘어간 것이다. 

보도기사에 나온 ‘몇몇(several)’이라는 낱말은 ‘소수(few)’보다는 많고, ‘다수(many)’보다는 적은 수량을 표기할 때 쓰인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이 취재기자에게 화성-13호의 수량에 대해 그처럼 모호하게 언급하고 넘어간 까닭은,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막강한 핵무력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미국 군부가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이다.  
  
<워싱턴자유횃불>은 화성-13호를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들이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기동한 작전시기가 2013년 1월 중이라고만 서술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작전시기는 2013년 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들이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기동하는 것은 통상적인 기동훈련이 아니라,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는 핵무력동원태세를 갖춘 것이다. 

2013년 1월 초 북은 왜 그처럼 미국을 상대로 핵무력동원태세를 취하였던 것일까? 미국은 북이 2012년 12월 12일 첫 자국산 실용위성 광명성-3호 2호기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린 것을 ‘위법행위’라고 규정해놓고 유엔안보리를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2013년 1월 중에 대북제재를 추가하려고 집요하게 획책하는 중이었다. 유엔안보리는 2012년도 활동을 12월 19일에 끝냈고, 2013년 1월 초에 재개하였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평화적인 우주개발사업을 단지 북이 실행하였다고 해서 ‘위법행위’로 규정하고 제재를 추가하려는 미국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북은 2013년 1월 초 미국 본토를 조준한 핵무력동원태세를 갖추었던 것이다.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핵무력동원태세에 돌입한 것은 북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본토를 조준하여 발사준비태세를 갖춘 여러 기의 화성-13호가 동시다발 작전기동에 돌입한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광명성-3호 2호기 발사 이후 40일 동안이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가 2013년 1월 23일에 가서야 유엔안보리를 앞세운 대북제재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그 결의안을 채택하기 사흘 전인 1월 20일에 갑자기 ‘해중전연습(USWEX)’이라는 명목으로 방대한 해군무력을 동중국해에 황급히 집결시켜놓고 대북제재결의안을 채택하는 겁먹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미국의 그런 내부사정을 알 길이 없었던 언론매체들은 유엔안보리에서 신속한 합의에 제동을 걸며 시간을 끌었던 중국의 지연전술이 대북재재결의를 40일 동안 지연시킨 원인이라고 추측하였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제임스 서먼(James D. Thurman)은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화성-13호 작전기동에 관한 보고를 받고 겁을 먹었고, 그래서 그는 대북제재결의안이 채택되기 약 12시간 전인 2013년 1월 23일 용산기지에서 열린 기지내부회합에서 “미국군은 공격 받기 쉬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나는 누구에게 겁을 주려는 건 아니고, 그렇다는 말이다”고 하면서 주눅이 든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핵탄두를 장착하고 미국 본토를 조준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가 작전기동에 돌입한 판인데 어찌 주한미국군사령관 한 사람만 겁을 먹었겠는가. 

화성-13호의 작전기동을 보고 발칵 뒤집힌 미국군 지휘부의 내부사정에 관해 알려준 것은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2월 12일부 보도기사다. 그 보도기사는 “펜타곤의 합참본부가 북의 신형 도로이동식 미사일과 그 미사일이 미국에 주는 위험에 대한 긴급위협평가를 실시하는 중(The Pentagon's Joint Staff is conducting an urgent threat assessment of North Korea's new road-mobile missile and the danger it poses to the United States)”이라고 지적하면서, 속성으로 실시된 그 위협평가는 군사기밀로 처리되어 미국군 합참의장 마틴 뎀프시(Martin E. Dempsey)에게 즉각 제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군 합참본부 대변인은 이러한 속성평가작업이 진행 중인 것에 대한 논평을 요구 받고 언급을 회피하였는데, “속성평가는 미국 정보기관들과 군부가 이 새로운 무기(화성-13호를 뜻함-옮긴이)에 대해 느끼는 우려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하였다.  

위의 보도기사는 2013년 2월 12일 북이 열핵증폭분열탄을 폭발시킨 제3차 지하핵실험 직후에 나온 것이다.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의 작전기동을 보고 질겁하여 황급히 위협평가서를 작성하며 허겁지겁하던 미국군 지휘부는, 북이 전격적으로 실시한 열핵증폭분열탄 폭발시험으로 강타를 한 대 더 얻어맞았다. 
 
2013년 1월 초에서 2월 12일에 걸친 약 한 달 사이에 미국은 북의 화성-13호 작전기동과 열핵증폭분열탄 폭발시험이라는 연속강타를 얻어맞고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세계 유일의 제국주의초대국이 동방의 사회주의국가에게 연속강타를 얻어맞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으므로 겉으로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B-52 장거리폭격기와 B-2 스텔스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으로 연속 출동시키는 군사행동으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내막을 알게 되면, 미국의 그런 군사행동이 체면유지에 지나지 않았고, 북미대결에서 승패는 이미 갈리고 있었음이 눈에 보인다. 각기 자국의 핵타격수단들을 전선에 출동시키면서 격렬하게 벌어진 북미대결에서 동방의 사회주의국가는 연속강타를 날리며 제국주의초대국에게 패배를 안겼고, 세계를 지배한다는 제국주의초대국은 체면을 유지하려는 군사대응행동에 매달리며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였다. 


북미격돌에 대비하여 핵무력동원태세에 돌입한 중국인민해방군

2013년 초부터 급속히 고조되기 시작한 북미격돌위험은 한반도만이 아니라 인접국인 중국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북미격돌위험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부 및 남부 해안지대 전체가 미국군, 일본자위대, 한국군의 해공군력에 가로막힌 중국은 자국의 안보를 지키지 위해서 싫건 좋건 북과 전략적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미일동맹군과 충돌하는 경우 중국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맞서 싸울 나라는 북밖에 없다. 북미격돌위험이 급속히 고조되기 시작하였던 2013년 초에 중국은 위기감을 느끼며 아래와 같이 군사적 비상조치를 연속 취하고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2013년 1월 14일 군기관지 <해방군보> 보도기사를 통해 “올해 군은 위기의식을 갖고 군사투쟁을 준비해야 하며 당중앙과 당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해방군보> 2013년 1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쉬치량(許其亮) 부주석이 산둥반도 남부의 칭다오(靑島)항에 정박 중인 핵동력 추진 전략잠수함에 탑승하여 동행한 군부인사들에게 “구체적인 적을 가상한 실전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오늘도 여전하지만, 2013년 1월부터 2월까지 기간에도 중국은 동중국해에 있는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위에 인용한 보도기사에서 중국 군부가 적으로 지목한 대상이 일본자위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북미격돌위험이 고조된 당시 상황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주적은 미국군이었다. 이를테면, 중국 군부의 공식 ‘웨이보(微博)’를 인용한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 2013년 2월 3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중국 공군이 “영어를 하는 제3적”과 맞서 싸우는 실전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그런 이례적인 실전훈련은 중국인민해방군이 미국군을 주적으로 여기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2013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미국군을 주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당시 극도로 격화된 북미격돌위험과 직결된 것이었다. 

 
▲ 중국인민해방군의 미사일 둥펑16호     © 자주민보, 한호석소장 제공


북이 제3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고, 미국이 그에 반발하여 더욱 압박 강도를 높이기 시작한 2013년 2월 12일 중국은 마침내 핵무력동원태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군보> 기사를 인용한 <명보(明報)> 2013년 2월 13일 보도와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2월 27일 보도를 종합하면, 2013년 2월 12일부터 중국인민해방군은 저장(浙江)성과 푸젠(福建)성에서 유사시 핵탄두를 장착하는 둥펑(東風)-16 준중거리탄도미사일을 동원한 대규모 실전연습에 돌입하였는데, 특히 장병들이 군복을 입은 채 취침하면서 24시간 경계태세를 유지한 미사일부대는 강남군산(江南群山) 산악지대에서 동중국해를 향해 둥펑-16 준중거리탄도미사일 신속발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이 5축10륜 자행발사대에 탑재한 둥펑-16 준중거리탄도미사일을 저장성과 푸젠성에 전진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동중국해를 향해 실탄발사훈련까지 실시한 것은 오키나와 미국군기지를 조준한 핵무력동원태세를 갖춘 것이다.  

<중국신문망> 2013년 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여단급 전략미사일부대는 심야에 중국의 군사거점이 핵공격을 받게 되는 긴급상황을 상정하여 미사일자행발사대를 비롯한 100여 대의 차량을 동원한 복구훈련과 반격훈련을 실시하였다. 

돌이켜보면, 2013년 1월 초부터 북, 미국, 중국은 각기 핵무력동원태세에 돌입하여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적대관계에 있는 핵강국들이 그처럼 숨이 막힐 듯한 핵무력대치상황 속에 있었건만, 군사상황에 관한 보도통제 때문에 국민들은 그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였다. 국민들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언론보도를 통해 위급한 상황을 파악한 뒤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쟁징후를 미처 알지 못한 불의의 시각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사선형 갱도기지에 배치된 목성-3호의 순환식 기동발사능력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2월 12일 보도기사에는 미국이 두려워하는 북의 핵무력에 관한 언급이 들어있다. 보도기사에 나온 명칭기술을 그대로 옮기면, 그 공포의 대상들은 “KN-08 ICBM”, “고정발사식 대포동-2호 ICBM”, 그리고 “무수단이라고 불리는 중거리 핵미사일”이다. 미국 군부를 공포에 몰아넣는 이 세 가지 핵타격수단을 북의 공식명칭으로 다시 적으면,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 목성-2호, 그리고 도로이동식 중거리미사일 화성-10호다. 

미국과 때로 협조하고 때로 갈등을 빚기도 하는 중국과 러시아는 막강한 핵무력을 가졌지만, 미국은 그 두 나라의 핵무력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두 나라는 미국을 전쟁으로 패망시키려는 적대의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오직 북만이 미국을 전쟁으로 패망시키려는 결심을 지녔기 때문에, 북의 핵무력은 미국을 공포에 몰아넣고 ‘제국의 망동’을 억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북의 핵무력에 대한 미국의 정보파악이 뜻밖에도 한심한 수준에 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해서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북이 화성-13호를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를 군사행진에 등장시켜 세상에 처음 공개한 때가 2012년 4월 15일이었는데, 미국은 2013년 1월 초 화성-13호가 작전기동에 돌입한 것을 위성영상자료를 통해 보고 나서야 황급히 그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대한 정보파악을 서두르며 야단법석이었다. 화성-13호를 탑재한 8축16륜 자행발사대가 인민군 군사행진에 등장한 뒤에도 미국은 북이 화성-13호를 아직 실전배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판하였기 때문에 화성-13호에 대한 정보파악에 게을렀던 것이다. 이러한 게으름과 오판은 미국의 대북군사정보가 얼마나 문제투성이인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당시 미국군 합참의장이었던 마이크 멀린(Mike Mullen)은 2011년 1월 27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와 대담하면서 북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하려면 앞으로 5∼10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가 그런 발언을 꺼내놓기 10여 년 전부터 북은 화성-13호를 비롯한 각종 핵무력을 실전배치하였다.

미국의 대북군사정보파악이 유독 화성-13호에 대해서만 그처럼 한심한 게 아니라, 미국 군부가 ‘KN-06’이라는 자의적 별칭으로 부르는 북의 지상대공중로케트 번개-5호에 대한 미국의 정보파악도 마찬가지다.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5월 2일 보도기사는 “미국 국방부가 북의 신형 4세대 지대공미사일(번개-5호를 뜻함-옮긴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거의 2년이나 걸렸다”고 말한 국제평가전략센터(IASC)의 군사전문가 리처드 피셔(Richard D. Fisher)의 지적을 인용하였다. 북은 2010년 10월 10일 군사행진을 통해 번개-5호를 세상에 처음 공개하였는데, 리처드 피셔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은 세상에 공개된 번개-5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2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북군사정보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둘째, 북이 군사행진을 통해 각각 세상에 공개한 화성-13호나 번개-5호에 대한 미국의 정보파악이 그처럼 한심한 지경이므로, 북이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목성 계열의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대해서는 미국의 정보파악이 거의 무지한 수준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북은 미국이 ‘대포동-2호’라는 자의적 별칭으로 부르는 목성-2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실전배치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미국-러시아 공동위협평가회담-2009년 12월’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무게 500kg의 탄두를 장착한 ‘대포동-2호’(목성-2호)가 2단형 로켓으로 제작된 경우 사거리를 10,000km라고 평가하였으며, 3단형 로켓으로 제작된 경우에는 사거리를 15,000km로 평가하였다. 목성-2호나 화성-13호는 모두 3단형 로켓으로 제작된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이므로 그 두 미사일은 무게 500kg의 탄두를 장착하고 15,000km를 날아가는 강력한 미사일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북은 목성-2호보다 성능이 훨씬 더 향상된, 사거리가 15,000km이고 다탄두를 장착한 목성-3호를 실전배치하였는데, 미국은 북이 이제껏 단탄두를 장착한 목성-2호밖에 실전배치하지 못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목성-3호에 대해서는 2013년 10월 1일 <자주민보>에 발표한 나의 글 ‘4대에 걸쳐 진보한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자세히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참조: 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3929

셋째, 위에 인용한 <워싱턴자유횃불> 2013년 2월 12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미국 관리들은 발사준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요구하는 대포동-2호(목성-2호이라는 뜻-옮긴이)가 선제공격에 취약하다고 여긴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런 지적은 북의 미사일기지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생긴 착오다. 이에 관해서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인민군 미사일부대 경비병으로 근무한 경력을 가진 탈북자가 2013년 3월 16일 서울의 대북방송에서 꺼내놓은 이야기에 따르면, 발사명령을 받은 인민군 미사일부대가 산화제를 주입하고 탄두를 조립하고 타격좌표를 맞추고 발사단추를 누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40분이라고 한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인민군 미사일부대는 항상 자행발사대에 미사일을 탑재한 상태로 24시간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산화제 주입차량이 자행발사대 곁으로 가서 미사일 주입구에 호스를 연결하여 산화제를 주입하기만 하면 발사준비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는 발사 직전에 산화제를 주입하는 미사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장기보관용 산화제(storable oxidant)를 항상 주입해두고 대기 중인 미사일도 있고, 고체연료를 내장하였기 때문에 산화제를 주입할 필요가 없는 미사일도 있다. 이런 신형 미사일의 경우 발사준비시간은 5∼8분으로 단축된다. 그러므로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화성-13호를 비롯한 각종 핵타격수단을 발사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5∼8분 정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미사일발사를 준비하는 5∼8분 간의 작업마저도 갱도기지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군 정찰위성이 인민군의 미사일발사태세를 전혀 탐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전략미사일을 탑재한 자행발사대가 드나드는 갱도기지는 미국군 정찰위성이 탐지하기 힘든 험준한 산악지대에 건설되었고, 위장도로를 가짜 갱도입구까지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설령 미국군 정찰위성이 갱도기지로 통하는 도로를 발견했다고 해도 어느 것이 진짜 도로인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정부 고위관리들의 말을 인용한 <중앙일보> 2013년 10월 10일 보도기사가 북의 수직갱발사기지에 관해 말해주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은 량강도 삼지연군 북서쪽에 있는 해발고 2,171m의 소백산 산악지대에 수직갱발사기지를 건설하였는데, 2000년대 중반에 착공하여 2013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공사기간이 7∼8년이나 걸린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난공사일지라도 대체로 3∼4년이면 끝내는 인민군 공병부대의 건설속도로 봐서, 소백산 수직갱발사기지 건설공사가 7∼8년이나 걸린 것은 그 규모가 얼마나 방대하고, 그 시설능력이 얼마나 견고한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위의 보도기사는 소백산에 완공된 수직갱발사대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고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수직갱을 여러 군데 건설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수직갱발사기지 출입구를 여러 곳에 낸 거대한 갱도기지를 건설하였다는 뜻이다. 
 
<상해역보(上海譯報)> 선임편집자의 말을 인용한 중국 온라인 언론매체 <환구망(環球網)> 2013년 6월 6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은 순환식 기동발사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공격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환식 기동발사란 사방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가진 방사선형 갱도망을 따라 자행발사대들이 여러 방향으로 재빨리 이동하면서 미사일을 연속 발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정보를 읽어보면, 소백산에 완공된 수직갱발사기지에는 순환식 기동발사능력을 갖춘 목성-3호 대륙간탄도미사일 여러 기가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한 당시 미국군 합참부의장  제임스 카트라이트(James E. Cartwright)는 2009년 10월 1일 미국 연방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북에는 고정식 발사대가 고작 몇 대밖에 없기 때문에 대륙간탄도미사일 여러 기를 연속 발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은 북의 고정식 발사대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에 선제타격으로 그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는 무지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위에 인용한 탈북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북에 건설된 미사일발사기지는 큰 산을 관통하는 갱도를 나뭇가지처럼 방사선형으로 뚫어놓았는데, 길이가 약 11km가 되는 장거리관통갱도 안에 미사일을 탑재한 자행발사대 17대, 보장차량 5대, 연료차량 등을 주차하듯이 들여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5대의 보장차량이란 기중기탑재차량, 압축기탑재차량, 컴퓨터차량, 발전기탑재차량, 통신차량이다. 그러므로 북의 미사일갱도기지는 크게 구분하여 자행발사대 보관갱도, 보장차량 보관갱도, 연료차량 보관갱도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북 대륙간탄도미사일 예상 궤도     © 자주민보, 한호석소장 제공


위에 인용한 <환구망>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직접 명령을 받는 9개 여단이 인민군 전략로케트군 산하에 편성되었는데, 인민군 전략로케트군 1개 여단은 5개 대대로 편성되었고, 1개 여단 중에 미사일 자행발사대를 배치한 대대는 3개 대대라고 한다. 나머지 2개 대대 가운데 1개 대대는 산화제 처리를 담당한 대대이고, 다른 1개 대대는 기지경비를 담당한 대대라고 한다. 위에 인용한 탈북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인민군 전략로케트군 1개 대대마다 미사일 자행발사대가 3대씩 배치되었으므로,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실전배치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와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0호는 80기 이상으로 추산된다. 거기에 더하여 수직갱발사대에 배치된 목성 계열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다. 유사시 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이 화성 계열과 목성 계열의 각종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제히 발사하면,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1,500km 상공의 우주공간에까지 올라가는 그 미사일들은 지구를 감싸고 도는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초고속 돌진비행으로 낙하하여 여러 지상목표물들을 한꺼번에 타격함으로써 미국 본토를 불바다에 잠기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런 심각한 사정을 거의 알지 못한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북이 보유한 핵탄두 수량을 최대 10기 정도라고 추정하였는데, 위에서 논한 내용을 살펴보면 북은 아무리 적게 추산해도 100기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핵무력동원태세는 반복되지 않는다

2014년 1월 16일 북측 국방위원회는 북측 정부, 정당, 단체들의 위임에 따라 남측 당국에 대결중지와 안전보장을 위한 중대제안을 전하였다. 그 중대제안은 아래와 같다.

첫째, 2014년 1월 30일부터 “서로를 자극하고 비방중상하는 모든 행위부터 전면중지하는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자”는 제안이다. 

둘째, “상대방에 대한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중지하는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하면서, “2월 말부터 강행하려는 <키 리졸브>, <독수리>합동군사훈련부터 중단하는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고, “특히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서해 5개섬 열점지역을 포함하여 지상, 해상, 공중에서 상대방을 자극하는 모든 행위를 전면중지할 때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여 제안”하였다. 

셋째, “이 땅에 초래할 핵재난을 막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도 호상 취해나갈 것을 제안한다”고 하면서, “남조선당국이 더 이상 미국의 위험천만한 핵타격수단들을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끌어들이는 무모한 행위에 매달리지 말 데 대하여 정중히 제안”하였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언급한 세 가지 중대제안 가운데서 상호비방중상을 전면중지하자는 제1제안은 청와대가 생각만 바꾸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전쟁연습을 중단하는 정책적 결단을 내려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자는 제2제안은 청와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미합동전쟁연습은 백악관의 단독결정으로 기획, 실시되는 것이고, 청와대는 그 결정과 요구에 따른 의무만 이행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핵타격수단들이 남측 지역과 그 주변에 출동하는 것도 역시 백악관의 단독결정에 따른 것이지, 청와대는 백악관에서 그런 결정이 언제 어떻게 내려지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 현실을 잘 알면서도 북은 백악관의 결정과 요구에 따른 의무만 이행해야 할 뿐 아니라, 백악관의 결정이 언제 어떻게 내려지는지 알지도 못하는 청와대에게 백악관의 결정을 거부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2제안과 제3제안은 그것을 실행할 권한이 없는 청와대에 전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실권을 행사하는 백악관에 전했어야 한다. 그런데 북은 그런 제안을 백악관에 전하지 않고 청와대에 전하였다. 북은 왜 그처럼 매우 이례적인 행동을 취하였을까?

백악관에 제안해야 할 것을 청와대에 제안한 것은, 북이 미국에게 어떤 제안도 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관계단절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북은 미국을 더 이상 말로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60년 동안 북은 대결중지와 안전보장을 위한 제안을 미국에게 수없이 전하였지만, 미국은 단 한 차례도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되레 북을 핵무력으로 위협하며 격돌위험만 끊임없이 격화시켜온 것이다. 미국의 전쟁광신증을 60년 동안 겪어온 북이 이제 말로 미국을 상대하는 협상에 더 이상 무슨 미련을 두겠는가! 
북측 국방위원회의 중대조치 제안에서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이 제안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는 실천적인 행동을 먼저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명시한 대목이다. 북이 대결중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먼저 실천행동을 취하겠다는 뜻이다. 북이 말한 실천행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한국군 정보기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문화일보> 2014년 1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14년 1월 현재 인민군은 수백명이 참가한 중대급, 대대급 규모의 동계군사훈련을 진행하는 중인데, 2월에는 수천명이 참가한 연대급, 사단급 규모로 확대하고, 3월에는 수만명이 참가한 군단급, 국가급 규모로 확대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살펴보면, 북이 대결중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먼저 실천행동을 취하겠다는 말은 다음달인 2014년 2월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연대급, 사단급 규모의 동계군사훈련을 중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북이 2014년 2월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동계군사훈련을 중지하는 경우, 미국은 2월 말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는 상응한 신뢰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미국은 대결중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동계군사훈련을 중지한 북의 성의를 이번에도 무시할 것이며,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예정된 일정에 따라 강행할 것이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중대제안을 발표한 때로부터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2014년 1월 16일 오전 백악관 대변인은 취재기자들에게 미국은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발언하였다.

북이 중대제안에 따라 자기의 동계군사훈련 전면중지를 먼저 실행하겠다는 성의를 보였는데도 지금 미국과 남측은 그 성의를 ‘무력도발을 노리는 위장된 평화공세’라고 비난하며 대북전쟁연습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럴 경우 북은 마지막 선택이 무력 충돌밖에 없다고 판단할 심각한 우려가 있다. 2013년 1월과 2월에 조성된 북미격돌위험을 상기하면, 북의 무력사용은 핵무력사용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해석의 맥락을 파악하면, 2014년 1월 하순 현재 북미격돌위험은 2013년 1월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지경으로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격돌위험이 고조된 가운데 적대세력과 맞서는 군사행동에서 반복은 곧 패배에 직결될 것이므로, 북은 2013년 1월과 2월에 있었던 핵무력동원태세 압박전술을 올해에 그대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북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핵무력동원태세 압박전술을 또 다시 반복하려는 게 아니라, 불의의 핵무력사용으로 ‘최후 결전’을 단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실 한반도는 북미 사이에 휴전 즉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정전협정 상태에 처해 있다. 그리고 실제 서해 5도지역에서는 분계선마저 획정되지 않아 수시로 무력 충돌이 벌어져왔으며 기어이 서로의 영토에 포탄을 수백, 수천 발씩 주고  받아 섬들이 초토화되는 국지전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반도는 지금 전쟁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북과 미국, 남과 북 사이에 새해벽두부터 전에 없던 엄중한 경고들이 오가고 있다. 

부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온 민족이 깨닫아 전쟁을 막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민족의 숙원인 평화적 통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앞당기기 위해 모두 다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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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농민 전쟁' 아닌 '유학 혁명'이다!

[동아시아를 묻다] 2014 : 갑오년 역사 논쟁

이병한 동아시아 연구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20 08:22:41

 

 

 

 

 

 

좌(Left)와 우(Right)

새해 벽두부터 역사 논쟁이 뜨겁다. 교학사 교과서가 불을 지폈고, <뉴욕타임스>의 사설은 기름을 얹었다. 퇴행적인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미진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새 교과서가 엉터리라 해서 기존의 교과서가 안고 있는 허물을 덮지는 못한다. 양쪽이 다투는 역사 인식의 기저, 좌·우라는 잣대부터 미덥지 못하다.

우파를 개발파라고 한다면, 좌파는 개혁파라 할 수 있다. 전자는 경제적 근대화(자본주의)를 추앙하고, 후자는 정치적 근대화(민주주의)를 옹호한다. 개발파가 시장 만능주의에 빠졌다면, 개혁파 또한 민주 만능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닮은 구석이 없지 않다. 전자는 경제 발전에 우월감을 누리고, 후자는 민주주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는다. 양쪽 모두 개화파의 적자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120년 전, 갑오경장은 개화의 출발이었다. 개화파가 공유하는 불문율이 있다. TINA(There is No Alternative)이다.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를, 일본을, 미국을 따랐다. 특히 대안은 이 땅에 없다고 했다. 이 땅의 역사와 문명에는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줄기차게 '쇼크 독트린'을 도입했다.

그 이면으로 자기 폄하와 자기 부정도 드셌다. 개화파를 우로 심화시킨 개발파나, 좌로 계승한 개혁파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파가 일본과 미국을 섬기는 만큼이나, 좌파 또한 동구와 서구를 흠모했다. 최근에는 북구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동방 문명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오리엔탈리즘 못지않다.

갑오년에 값하는, 그에 걸맞은 역사 논쟁을 해야겠다. 작금 한국의 위기와 혼란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적이고, 지구적이다. 갑오경장 이래 개화 100년의 결과이며, 개화를 강요했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결국(結局)이다. 마침내 1894년 개시되었던 '장기 20세기'의 결말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지난 세기 금과옥조처럼 배우고 외웠던 언어와 개념과 발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100년의 개화에 대한 총체적 재평가도 수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古)'를 '구(舊)'로 타박하고, '금(今)'을 '신(新)'으로 대신했던 100년의 습속부터 바로 잡아야 하겠다. 다시금 관건은 정명(正名)이다. 좌·우는 부차적이다.

신(新)과 구(舊)

갑오경장은 획기적이었다. 말이 크게 바뀌었다. 사람의 도리(道理)보다는 개인의 권리(權利)가 중요했다. 예치는 법치로 바뀌었다. 언어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점차 국문이 한문을 밀어냈다. 국문은 모름지기 개화파의 언어였다. 허나 조선의 언문을 계승하기보다는 번역과 중계에 급급했다. 그만큼 일본풍이 여실했다. 나랏말의 비애이다. 조선의 망국과도 무관치 않다.

1890년대의 신조어 중에 '사대주의'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 문하생들이 갑신정변에 관여한 일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안한 말이다. 일본을 추수했던 개화파들을 '독립당'이라 치켜세우고, 그 맞은편은 '사대당'이라 업신여겼다. 본래의 맥락을 거세하여 '사대'를 곡해하고, '독립'이 최고의 덕목인양 일방으로 편들었다.

그러나 당시를 기록한 <매천야록>을 살펴봐도 '독립'이 지상 과제는 아니었다. '독립'이 절실했던 것은 1910년 국권을 잃은 이후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래서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비로소 '독립'이라는 개념에 뼈와 살이 붙었다.

'사대주의'에 버금가는 신조어로 '중화주의'도 있다. 사대주의가 청일 전쟁을 전후해서 등장했다면, 중화주의는 중일 전쟁을 전후로 보급되었다. 전자가 조선에 책임을 전가했다면, 후자는 중국의 저항을 겨냥했다. 만사, 조선의 사대주의가 악습이고 중국의 중화주의가 병통이라 했다. 그렇게 일본의 동양학은 천하대란을 촉발하는 새 언어와 신개념들을 널리 유통하고 전파시켰다. '지(知)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동아시아는 안녕하지도, 태평하지도 못했다.

고·금을 신·구로 전도시킨 책임을 일본에만 떠넘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겠다. 고종도 떳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을 일으킨 그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웠다. 옛 것을 기본으로 하여, 새 것도 보태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편의적으로 신과 구를 활용했을 뿐이다.

국가보다는 자신이 우선이었다. '짐이 곧 국가'였다. 군주를 이념으로 규율했던 유교 국가의 이상은 무너지고, 유럽식 절대왕정이 들어섰다. 옛 것은 옛 것대로 굴절되었고, 새 것은 새 것대로 뒤틀리고 말았다. 그래서 대한제국은 옛 기준으로 봐서도 미흡하고, 새 기준으로 평가해도 부족한 국가였다. 내발적 요구에 즉응한 개혁이기보다는 흉내 내기, 따라잡기(Catch Up)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개화가 500년 조선의 전통과 결합하지 못함으로써 국정의 혼란을 야기하고 국가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결국 대한제국은 단명했다. 조선에 견주자면 턱없이 모자란 국가였다. 그럼에도 근대화를 추진했다며 고종을 높이려는 일각의 움직임이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하다.

고(古)와 금(今)

고·금은 신·구처럼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금은 고의 누적이며, 금은 또 고가 되어간다. 옛 것은 한 때의 새 것이며, 오늘의 새 것은 훗날 옛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고에 비추어 금을 반추할 수 있었고, 당장에 고착되지 않는 정신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소중한 시간 감각이며, 귀중한 역사의식이다. 물론 이 고·금의 잣대를 동방인들의 고유한 마음이라 편애할 뜻은 없다. 아니 역설적으로 유럽이야말로 고전적인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유럽에서 살아보지는 못했다. 학창 시절 배낭여행이 고작이고, 런던 생활 두 달이 최장기 체류이다. 하지만 유럽이 보유한 경쟁력의 원천을 '좌우 합작'에서만 구하는 것은 피상적 관찰이라고 여긴다. 유럽이 유럽인 것은 그 '클래식'함에 있다. 기품과 격조가 있다.

역시나 '고'의 자취 탓이다. 전통이 살아있고, 옛 것을 간직하고 있다. 식민화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즉 유럽풍 매력의 바탕에는 고금의 합작이 자리한다. 좌·우가 공생할 수 있는 기저에 고·금의 조화가 떠받치고 있다.

유럽이 미국보다 나은 점도 이와 무관치 않아 뵌다. 미국은 온통 새 것 뿐이다. 새 것의 질주를 조율할 역사의 중력이 없다. 말 그대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이다. 그러나 신세계의 용맹스런 독주는 치명적이다. 어질기보다는 거칠다. 혈기와 패기가 지나치다. 성숙보다는 성장 지향적이다. 지난 100년 미국이 부렸던 패도 또한 고전 문명의 결여와 깊이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을 배려하지 못하고, 옛 것을 존중하지 못한다. 독선적이며 독단적이다. 고약한 마음씨다.

돌아보면 갑오경장 이후 옛 것은 몽땅 사라지고, 새 것만 득세했던 것은 아니다. 동방 문명 1000년과 조선 왕조 500년의 척추에 기초한 '진화'의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적지 않았다. 과거제의 폐지는 과거제의 문호를 대폭 확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출신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오로지 학교에 몸담은 것을 기준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일신하고자 했다. 전통적 경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이 요구되는 시무(時務) 능력도 갖추고자 했다. 온고지신의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동과 서, 고와 금은 상부상조, 윈윈(Win-Win)할 수 있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자기 혁신을 수행하는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 가능했다.

이 창조적 가능성이 꺾이고 만 결정적 계기는 역시 식민지화이다. 이로써 신이 구를 압도해 버렸다. 더군다나 일본은 동방 문명의 정수를 실천해본 경험이 미천한 나라였다. 인문학의 훈련을 통해 자기 구원에 이르는 지식 기반 국가의 이상을 알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유교 문명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한 채, 불시에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노니는 '식민지 근대'로 내던져진 것이다. 불행히도 그 식민지적 기질은 대한민국과 북조선으로 이어졌다. 북과 남은 '반(反)봉건'으로 하나 되어, 식민사관을 답습했다. 좌·우가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소)분단 체제든, 동아시아의 (대)분단 체제든, 20세기가 조탁한 분단 체제의 최종 심급에는 고·금 간의 아찔한 절벽이 자리한다. '자기 소외'야말로 한반도·동아시아 분단 체제의 핵심 요체이다. 따라서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집합적 운동의 최대 강령 또한 고·금 합작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전환 시대가 좌·우의 날개로 날았다면, 반전 시대는 고·금의 날개로 비상한다. 본디 '根本'으로 돌아가는 것이 동방형 혁명의 본령이다.
 

동(東)과 서(西)

고금합작의 단서는 다시 갑오년에 있다. '동학(東學)'이 일어났다. 나는 개화기의 새 말들 가운데 '동학'을 으뜸으로 친다. 가장 창조적인 신조어이다. 다만 농민 전쟁과 동학 운동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동학 운동은 계급투쟁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학습 운동'이다. 그 학습의 범위가 농민들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다.

즉, '학이시습지…'로 출발하여 배우고 익힘을 최상의 기쁨으로 여겼던 동방 문명의 하방으로 동학이 개창한 것이다. 그래서 동학 조직은 학습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조선의 전복을 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조선을 동방의 이상에 한층 부합하는 국가로 혁신하는 운동이었지, 조선을 부정하는 운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즉, 신유학으로 출발한 조선의 끝에서 유학 국가는 민주화, 민중화되고 있었다. 유학이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면, 그 계급적 교양을 전민 교육으로 보편화시킨 것이 동학이다. 사람이 하늘이고, 인성에 천성이 담겨 있다 하셨다. 그래서 농과 공과 상도 사와 대등할 수 있었다. 신분제의 철폐 또한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다. 서학의 수용 탓만도 아니다. 신유학의 장기 지속적인 '문명화 과정'의 결실이라 해야 온당하다. 동학은 모두가 선비가 될 수 있는 나라,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는 국가를 염원했다. 유학의 혁명이자, 혁명적 유학이었다.

그래서 동학은 평지돌출이 아니다. 구(舊)와 척을 지는 신(新)이 아니었다. 고(古)의 누적이자 집대성으로 금(今)이 발현한 것이다. 멀게는 요순 시대로 거슬러 오르고, 가까이로는 18세기 영·정조의 '개명(開明)' 정책의 유산이다. 개명 아래 일정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민중 세력은 발랄한 시민 문학을 선보였다.

향촌 사회를 이끌었던 농촌 지식인이 동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18세기의 개명이 19세기의 서세동점으로 개화파의 서학과 개벽파의 동학으로 분화했던 것이다. 개화파가 유학의 타파와 조선의 전복을 꾀했다면, 고종은 절대왕정의 이데올로기로 유학을 왜곡시켰고, 개벽파는 유학의 민중화를 통한 조선의 갱신을 도모했다. 유학을 고집하는 척사파와 서학을 맹종하는 개화파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내재적 민주화'의 맹아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지 못한 길'이다.

2014년, 새 경장이 필요하다. 소학(小學)은 무너졌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大學)은 시시해졌다. 치국과 평천하를 배우지 않는다. 민도는 민도대로 떨어지고, 자질과 자격을 갖춘 지도자도 키우지 못한다. 군자가 사라지자, 소인천하가 도래했다. 대중 사회라고도 한다.

소인들이 1인 1표제와 접속하자 정치는 저열해졌다. 권력만 남고, 권위는 사라졌다. 삿된 권리 추구(私)가 공공성(公)을 잠식해버렸다. 그래서 한 원로 정치학자의 일갈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질적으로 나빠졌다." 그리고 스노비즘이 창궐한다. 허나 이 속물 근성이 비단 '97년 체제'만의 산물은 아니지 싶다. 줏대 없는 개화 100년의 누적이고 축적이다. 이광수는 이미 <무정>에서 그 원형을 탁월하게 조형했던 바 있다. 영어교사 이형식은 고(古)와 단절된 신청년의 표상이자 속물의 원조였다. 그 후예들이 소학과 대학을 접수하고 만 것이다. 동학은 100년간 고독했다.

20세기가 좌우 합작이라면, 21세기는 고금 합작이다. 새 말로는 하이브리드(Hybrid)이고, 옛 말로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다. 서학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유학의 민주화를 꾀했던 동학을 모시는 마음으로 되새기는 까닭이다. 2014년, 부디 원기(元氣)를 배양하고 근기(根氣)를 회복하는 갑오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병한 동아시아 연구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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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유신정권과 2014년 대한민국

노조 고사 시키기, 진보정당 탄압 그때와 닮아있어
 
육근성 | 2014-01-20 12:11: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한민국의 70년대. 유신의 광풍으로 시작된다.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국회 해산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전태일과 유신, 70년대를 연 두 사건

계엄령으로 꼭꼭 묶어 놓은 뒤 일본 메이지 유신과 소와 유신에서 그 이름을 따온 유신 헌법을 공포했다. 국회의원 1/3과 모든 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은 임기 6년에 횟수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하게 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기구에서 대통령을 뽑았다. 국민으로부터 대통령 투표권까지 박탈한 것이다. 국가의 모든 권력이 박정희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종신총통제’가 시작됐다. 이 유신독재헌법에 의해 박정희는 1972년 12월 대통령에 선출된다. 물론 경쟁이 없는 단독 입후보였다. 

70년대를 연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노동 운동에 불을 집힌 ‘전태일 열사 사건’이 그것이다. 청계천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수탈을 고발하며 1970년 10월 분신을 택한 전태일. 그로 인해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고, 이 땅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노동자들의 민주화 투쟁

유신독재정권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는 노동운동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독재권력자를 향한 터럭만한 불충과 불경도 용납하지 않았던 ‘유신정권’은 노동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짓밟았다. 

그래도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는 이 땅의 노동자들은 유신독재에 분연히 맞섰다. 민주화 투쟁을 이어가는 큰 축이었다. 고된 산업화 과정을 맨몸으로 끌어안으며 독재정권에 항거한 노동자들. 그들이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1979년 포악이 극에 달했던 유신정원은 김영삼 야당 총재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국회에서 제명시켰다. 노동자들도 광포한 독재권력자에 두려움 없이 맞섰다. 1979년 8월 YH 여성노동자들의 외침은 김경숙씨 사망으로 절정에 이른다. 

야당과 노동자 탄압하던 유신정권의 말로

종신총통제을 꿈꾸던 박정희에게도 끝이 찾아왔다. 이 포악한 탄압이 있은 직후 그토록 강고해 보이던 유신정이 마침내 고꾸라진다. 1979년 10월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된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유신정권의 생물학적, 정신적 계승자인 박근혜 대통령. 70년대 그 때 상황을 재연하려나 보다. 아버지 박정희가 고문과 매질로 노동자를 탄압했지만 그의 딸은 손해배상 청구라는 방법으로 노조를 고사시키려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법원은 쌍용차 노조에 대해 46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철탑 농성 중인 유성기업 노조에 대해서는 12억4000만원을 물어내라고 판결했다. 부산지법도 지난 17일 “한진중공업 파업은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회사에 59억59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손해배상 청구, 새로운 노조 탄압 수단

코레일은 장기간 파업으로 152억원에 이르는 영업손실을 봤다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청구액은 더 커질 전망이다. 코레일 스스로 감수해야 할 몫까지 노조에게 책임을 물리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금이 없는 비규직 노조의 경우 소송비용조차 감당할 방법이 없어 변호사 선임에도 애를 먹고 있다. 노조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금전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방법으로 노조를 고사시키겠다는 게 박근혜 정부의 전략이다. 

 

항소를 하려고 해도 수천만원에 달하는 인지대와 송달료가 없어 십시일반 모으거나 심지어는 좌판을 열어 물건을 팔아 충당하기도 한다. ‘9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은 울산 현대차 노조는 양말과 보온물통을 팔아 이 수입금으로 소송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유신 때와 탄압 방법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다. 손배 청구를 통한 ‘노조 고사시키기’로 바뀌었을 뿐, 노조의 손발을 묶으려는 의도는 동일하다.

1979년 유정회와 2014년 새누리당 ‘닮은꼴’

지금 새누리당은 1979년 박정희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됐던 ‘유신정우회’와 닮아있다. 역할이 고작 청와대의 거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 상황과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원내 의석을 가진 정당에 대해 해산 청구를 하고,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야당의원들의 제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야당과 노조를 탄압했던 유신독재 정권.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더니 야당과 노조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다. 70년대 유신정권과 2014년 박근혜 정권, 둘은 참 많이 닮아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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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양보 요구에 '시민' 내세운 박원순

지방선거 앞두고 박원순-안철수 신경전 시작?

14.01.20 09:50l최종 업데이트 14.01.20 11:4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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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서울시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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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체 : 20일 오전 11시 40분]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20일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에게 야권단일후보를 양보 받겠다고 밝힌 가운데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백번이라도 양보해야 한다"며 전제 조건을 내세워 반박했다. 이를 두고 신당 창당설이 나오는 안철수 의원과 민주당 소속인 박원순 시장과의 신경전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안 의원은 이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포함해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후보를)전부 낸다는 입장"이라며 "이번에는 (서울시장 후보직을)양보 받을 차례 아니냐"며 "정치도의적으로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안 의원은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며 "여전히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해 출마 여지를 남겼다. '본인이 직접 선거에 출마하느냐'는 질문에는 "가능성 없다"고 부인했다. 

안 의원은 지난 2011년 10월에 진행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게 후보직을 양보한 바 있다. 또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게 야권단일 후보를 양보했다. 

"시정에 몰두하겠다"며 확답 피한 박원순 시장 

이에 대해 박 시장은 이날 오전 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시민들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면 백번이라도 양보해야 된다"며 "기존 정치적인 시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단일화 가능성에 '시민'이라는 전제 조건을 내세우며 안 의원의 요구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 시장은 "언론이 (안철수 의원과) 이간을 시키려고 여러 노력을 많이 한다"며 "기본적으로 안 의원이나 저는 정치권에서 보는 시각하고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거 안 의원이 (시장후보직을) 양보할 때도 기존 정치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며 "사람들이 그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저에게 새로운 정치를 해달라고 기대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구체적인 양보 조건에 대해 "그런 것은 자세히 따질 줄 모른다"며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남은 5개월간 시정을 보살피는 일에 몰두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또 안 의원과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지 않나"라며 "정치라는 게 여러 가지 변화가 있고 마음대로 하기 힘든 일이 많다"고 답했다. 

그는 안 의원과의 만남에 대해 "아직 날이 잡히지 않았다"며 "만날려고 하면 만날 수 있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안 의원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안 의원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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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정보는 3600원 짜리였구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1/20 12:20
  • 수정일
    2014/01/20 12: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등록 : 2014.01.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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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기자 심재오 KB국민카드 사장, 박상훈 롯데카드 사장, 손경익 NH농협카드 분사장(오른쪽부터)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에서 고객정보 유출 관련 공동 긴급 기자회견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한편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이번 유출사고로 KB 4000만건, 롯데와 농협은 각각 2000만건의 고객정보가 유출됐다. 지난 17일 유출 조회 서비스가 시작된 후 19일까지 총 451만건의 조회가 이뤄졌으며, 카드재발급·해지를 신청한 건수는 5047건을 기록했다. (서울=뉴스1)

카드 3사 부실한 ‘정보유출 대책’에 비판 쏟아져
“6개월 동안 피해사례 없으니 앞으로도 괜찮다?”

KB국민카드와 롯데카드, NH농협카드 등 고객 정보유출 카드 3사가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대책’을 내놨지만 ‘눈가리고 아웅’ 식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심재오 KB국민카드 사장은 이날 오전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고객 정보 유출에 따른 대책을 발표했다. 심 사장은 “2차 피해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다”며 “유통되기 전에 검찰에 의해 모두 압수됐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실 일이 없다. 검찰 수사결과 지금까지 6개월여동안 당사에는 어떤 피해 사례도 접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심 사장은 이어 “국민카드는 카드번호, 유효기간, 비밀번호 등이 유출되지 않은 만큼 고객 피해는 없을 것”이라며 “만일 카드 부정사용을 인지하고 신고하게 되면 60일 이전 부당사용은 보상하겠다”고 밝혔다. 심 사장은 또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문자서비스, SMS를 일정 기간 무료로 제공하겠다”며 “마케팅 업무를 중단하고 해당인력(1400명 이상) 집중 투입해 피해상황 예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 사장이 발표한 이런 대책에 대해 누리꾼들은 “2차 피해는 보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개인 정보 유출 뒤 6개월 동안 피해사례가 없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트위터리언(@ru****)은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카드번호 유효기간까지 유출됐는데 2차 피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무슨 그런 안일한 소리를 하십니까”라며 “긴급기자회견다운 대응책은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다른 트위터리언(@li*****)도 “1차 피해만 보상하겠다는 거구만, 그 정보로 인한 2차 피해는?”이라며 ‘내용 없는’ 대책을 꼬집었다.

 

심 사장은 “국민카드 경영진은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어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다. 아이디 @KB****)의 트위터리언은 “카드사 정보유출에 대한 사과회견에 나온 자, 전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다른 트위터리언(@@TY****)은

 

“개인이 기업 정보 유출: 범죄, 기업이 개인 정보 유출: 사죄”라며, 정보 유출 책임자들에 대한 ‘엄벌’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카드사들이 고객정보를 이용해 마케팅과 컨설팅 등 경제적 가치 창출에 한껏 이용해놓고는 막상 피해가 발생하자 ‘300원짜리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갈음하려는 태도도 누리꾼들의 도마에 올랐다. 한 누리꾼(@ce*****)은 “대량의 고객정보가 유출된 롯데, 국민, 농협은 월 300원의 결제내역 알림 문자서비스를 1년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내 개인정보가 겨우 3600원짜리였어?”라고 꼬집었다.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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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시계' 선거법 위반? 짝퉁까지 등장

 
 

 

 


청와대는 지난 1월 17일 새누리당 의원 전원에게 일명 '박근혜 시계'라고 불리는 박근혜 대통령 친필 서명이 들어간 시계를 선물했습니다. 

이번에 청와대가 돌린 '박근혜 시계'는  새누리당 의원 1인당 벽걸이 시계 1개와 손목시계 10개로, 과거 1인당 1세트만(남성,여성용 2개) 선물했던 점에 비해 무려 5배나 많은 수량이었습니다.
 
설날을 앞두고 갑자기 박근혜 대통령이 '박근혜 시계'를 새누리당 의원 전원에게 많은 수량의 시계를 선물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는 박근혜 시계' 

박근혜 시계는 굉장히 찾기 힘든 시계였습니다.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에 비해 '반신반인'의 후손이라 불리며 숭배적인 요소가 많아 수요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는 박근혜 시계를 구해달라는 지인, 지역주민의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은 지역주민의 요청으로 하나라도 더 받고 싶어 애걸복걸 하거나, 공장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청와대는 절대 불가를 외쳤습니다. 

 

 

 


박근혜 시계를 찾는 사람이 많았지만, 시계가 없는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2013년 6월까지는 기념품 등을 많이 제작하지 않았던 희소성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청와대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대통령 비서실 업무 추진비 집행 내역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보다 훨씬 적은 경조사 기념품비를 지출했습니다. 

2013년 6월까지 대통령 시계를 제작하지 않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추석에 야당 의원은 제외하고 새누리당 의원에게만 겨우 1세트씩 선물했습니다. 
 

 

 


검소함을 강조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갑자기 2014년 설날을 앞두고 박근혜 시계를 대량으로 선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설을 앞두고 지역구 등에 '선물용'으로 활용하라는 차원으로 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준 박근혜 시계는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지역 단체장, 선거 조직원, 각종 모임 대표 등에 전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번 설에는 지방자치단체장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이 대거 선거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구에 선물하라고 대통령이 시계를 10개씩 줬다는 것은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공직선거법상 기부행위가 금지된 정치인(국회의원,시장,도지사,구청장,군수,시도의회 의원, 정당 대표자,공직선거 출마예정자와 배우자)이 설 인사를 명목으로 유권자에게 소액의 선물세트를 제공하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받은 사람도 최대 50배 이하 과태료 부과

비록 대통령이 직접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회의원이 지방선거 출마 예정자에게 주고 후보자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운동원과 각종 모임의 대표에게 줬다면 이것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됩니다. 

추후, 박근혜 시계가 과연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확인해봐야 하고, 만약 선거운동에 활용됐다면, 관련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것입니다. 

(혹시 박근혜 시계를 일반인이 받았다면 나중에 최소 1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선관위가 원칙을 지킬 경우에만)


' 대통령 시계의 원조는 박정희'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대통령 시계를 제작해 배포했습니다. 이런 대통령 시계의 원조는 박정희였습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새마을지도자와 향군유공자 등 관변 조직 단체장들과 유공자 등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했습니다. 

당시 경제 상황에서는 손목시계 자체도 귀한 시대였기에, 이런 대통령의 시계는 시계 자체만으로 엄청난 선물이 됐습니다. 


시계만으로도 대단한 선물이었는데, 그 시계가 대통령이 하사한 선물이었기에 그 가치와 영향력은 엄청났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서 대통령 표창과 선물을 받았던 사람이 마을로 돌아오면 마치 조선시대 임금님 하사품을 받은 백성들처럼 동네잔치가 벌어졌고,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가보처럼 모시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대통령 선물과 훈장을 수여하는 방식을 통해 각 마을마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열혈 충성자를 만들기도 했으며, 마을 단위로 충성 경쟁을 벌이는 북한식 통치방식을 독재 정권 유지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 박근혜 시계, 짝퉁은 없다?' 

박정희가 시작한 대통령 시계는 역대 대통령들도 계속 활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추석 선물이나 설날 선물은 식품 종류이기 때문에 한 번 받고 나면 끝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친필 서명이 들어간 대통령 시계는 계속해서 차고 다니면서 남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시계는 지지율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지율이 높을 때는 대통령 시계가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지지율이 낮을 때는 창피해서 차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지율이 높을 당시에는 대통령 시계 모조품이 나돌기도 했는데, 2009년에는 서울 청계천 노점 일대 상인들이 청계천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명박 대통령 서명이 새겨진 짝퉁 대통령 시계 1,300여개를 만들어 팔다가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시계를 선물해달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다가 2013년 8월부터 국가유공자 선물용으로 처음 제작,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 시계가 과시용으로 남발될 것을 우려해, 제작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모조품은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청와대의 주장과 다르게 아이엠피터는 박근혜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짝퉁 시계를 찾아냈습니다. 

시계 제작 업체가 올린 박근혜 시계는 진품 시계가 메탈인 데 반해, 가죽시계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은색으로 되어 있는 원형 테두리가 짝퉁은 검은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부 짝퉁 시계는 은색도 있음) 박근혜 시계가 숫자 없이 큐빅으로 처리됐지만, 박근혜 짝퉁 시계는 숫자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짝퉁 시계를 판매하는 사람이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시계 견본을 2013년 4월에 올려놓았던 점에 비추어, 박근혜 시계의 모조품은 이미 진품 시계가 나오기도 전에 시장에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두환을 전땅크로 칭송하는 일베에서 전두환 대통령 시계를 인증하며 올린 사진. 출처:일간베스트

 


대통령 시계를 제작, 선물하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대통령 시계를 가지고 국민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충성심을 유발했던 통치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었습니다. 

청와대는 박근혜 시계가 과시용으로 남발될 것을 우려해서 제작하지 않다가 엄격한 배포과정을 통해 본연의 목적인 '선물'로만 활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히 '선물'로 활용하겠다던 박근혜 정권은 지방선거를 앞둔 설날 선물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10개씩 무더기로 선물했습니다. 이것은 '선물'이 아닌 '선거용 뇌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선거 관련해서 말 한마디 했다가 대통령 탄핵까지 당했던 사람과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계 1705개 (새누리당 의원 155명 X11개, 당협위원장 등을 포함하면 2천개가 넘음)를 선물한 대통령, 누가 진짜 선거에 개입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시계 하나 가지고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은 아버지나 딸이나 똑같으며, 대통령이 지방선거에 벌써부터 개입하고 있어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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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20차 공판 ②] 해군준장의 고백 “잘 들으시라고 그랬다”

 
 
합조단이 합숙을 요구했던 이유 - 이해할 수없는 좌석배치
 
신상철 | 2014-01-18 08:10: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천안함 사고가 발생하고 합조단이 구성된 것은 사고 나흘 후인 3월 30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군 자체조사만으로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여론에 의하여 희생자 가족을 포함한 민간전문가도 참여하는 ‘민군합동조사단’을 꾸리기로 가닥이 잡히면서 4월 중순이 되도록 난항을 거듭합니다.

[DongA.com] 합동조사단 구성 지지부진
국방부 “주말이나 내주초 확정”… 가족측 전문가 섭외도 난항
軍위주로 조사 시작 가능성… 鄭총리 “아직 의심의 눈 많아”

2010-4-14 | 이유종 기자

실종자가족 초계함 방문 13일 오후 실종자 가족 80여 명이 평택 2함대에 정박 중인 영주함을 방문했다.

 

국방부가 지난달 30일 천안함 침몰 사건의 원인을 규명할 민군 합동조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번 주 안으로 예상되는 함미 인양 이후에도 합조단의 조직 구성조차 끝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조사 현장에서 군과 관련 인사들이 1차 조사 작업을 마친 뒤에야 민간 전문가들이 뒤늦게 참여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 함미 인양 후에도 조직 구성 못할 전망

원태재 국방부 대변인은 13일 정례 브리핑에서 “전반적인 (합조단의) 규모 등을 정확하게 지금 말씀을 드리지 못한다.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초 정도에 확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외 전문가들의 조사단 합류에 대해서도 “이분들이 다 와야 본인들의 전문분야를 함께 대화하면서 업무를 나누어서 맡게 된다”고 말했다.

합조단은 당초 합동참모본부와 국방과학연구소, 국방부 조사본부의 해상무기와 폭약, 선박 전문가 등 군 관련 기관 중심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조선해양공학 전공 교수 일부가 참여했다. 그러나 인원을 82명에서 갑자기 해외 전문가와 실종자 가족대표 50여 명을 추가해 130여 명으로 늘리기로 하면서 체계적인 업무 시스템이 갖춰질지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합조단에 참여할 실종자 가족대표 민간 전문가를 뽑는 노력은 이날 원점으로 돌아갔다. 실종자가족협의회는 이날 섭외를 거의 마친 선체파괴분석 전문가 1명이 처우 문제 등을 이유로 참여를 고사해 가족대표 1명을 제외한 전문가 3명이 모두 공석이 됐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새로운 전문가를 섭외하기 위해 시민단체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협의회 측은 “국방부에 추천한 민간 전문가의 처우 문제를 논의했으나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자 해당 전문가가 불참 의사를 전해왔다”고 밝혔다.

국회도 아직까지 추천 인사 3명의 명단을 제출하지 않았다.

○ 군 인사 위주로 조사 시작 가능성

국방부에 따르면 현재 백령도 인근의 기상상태를 고려할 때 천안함 함미는 이번 주 안에 인양될 것으로 보인다. 합조단 구성이 다음 주까지 늦춰지면 함미 부분에 대한 조사는 군 관계자들만으로 이뤄지게 된다. 천안함 함미가 인양된 뒤에도 일정 기간은 민간 전문가들이 합조단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천안함 함미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천안함 탐색구조단이 민간 전문가를 배제하고 군 관련 인사들만이 절단면 등을 먼저 조사한 게 아니냐는 논란도 제기됐다. 국방부는 “함미를 해저에 다시 내리기에 앞서 부유물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쳐 놓은 그물 같은 게 제대로 돼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조사 차원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더욱이 조사 현장에는 소수의 인원만 파견될 수밖에 없다. 합조단이 조사 내용을 간추려 분석 결과를 내기 때문에 군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는 구조다. 군 관계자는 “합조단은 국방부 소속으로 김태영 국방장관과 이상의 합참의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계”라고 말했다.

○ 정 총리 “납득할 수 있도록 밝혀야”

정운찬 국무총리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사건 발생 시간에 대한 혼선이 빚어지고 원인을 둘러싼 각종 유언비어와 억측이 난무함으로써 국민의 의혹이 증폭됐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각종 위기대응 매뉴얼에서 정보공개의 범위와 방법, 절차, 유언비어 대응 등 제반 사항에 문제점이 없는지를 세세하게 점검해 정비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이어 “군사비밀이 공개되는 문제점이 발생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으로 정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합조단은 국민과 국제사회가 모두 납득할 수 있도록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해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위 동아닷컴의 기사가 작성된 2010년 4월 14일, 천안함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함미를 인양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날이 4월 12일입니다. 국방부는 인양업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저수심으로의 이동’을 요구했고, 제3의 부표 인근 해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물속에 넣었다가 3일이 지난 4월15일 함미를 물속에서 건져 바지선에 올린 후 시신을 인양합니다. 그 다음날인 4월 16일 함미를 평택으로 이송하게 됩니다. 

하여 천안함이 평택 2함대 야적장에 거치된 4월 16일 이전까지는 천안함 선체에 대한 조사자체가 이루어질 수도 없었고, 기사에 나와 있듯이 국회추천 민간조사위원의 명단조차도 확정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박정수 준장은 다음과 같이 거짓증언을 합니다.

“신 위원 합류 이전부터 합조단은 백령도에서 조사를 하고 있었고, 신 위원에게 여러차례 전화를 해서 조사에 참석하라고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뚜껑이 열리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사실관계를 그렇게 왜곡을 해도 되는 것인지. 법정에서 말이지요.


합조단 문병옥 준장과의 대화

4월 중순, 합조단의 문병옥 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국회추천위원으로 위촉되었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서’평택2함대로 오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일단 합류하면 합숙을 해야 하고, 외출이 금지되며, 조사가 끝날 때까지 외부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제 머리 속에는 ‘이 양반들이 나를 2함대 내에 묶어두려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천안함 사고 원인과 관련 깊이있는 분석을 하고 있었고, 칼럼을 통해 십 수편의 관련글을 발표하였으며, 온라인 상으로 네티즌들과 폭넓은 논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합조단이 그 사실을 모를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나는 합조단에 합류하지 않겠다. 민주당에 얘기해서 조사위원을 반납하겠다”고 하자 문 준장은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문병옥 준장은 다시 전화로 “국회에서 이미 위촉을 한 상태라 취소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간조사와 최종조사 두 번만 참석하는 걸로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을 하여 저는 흔쾌히 수락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천안함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발생한 모든 정황을 바탕으로 사고원인의 분석을 통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고, 천안함이 인양되어 바지선에 올려지는 과정을 통해 제가 분석한 내용의 상당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확정짓기 위한 ‘단 한번의 조사’가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번의 참석만으로 저는 충분하다 판단하였습니다.  

혹자들이 저를 비난하던 내용 중 하나가 <당신 너무 건방진 거 아냐? 한 번만 보면 사고 원인을 알 수 있다고? 당신이 신이야?>류의 비난입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쪼개진 생철판 하나를 가져와서 이거 사고 원인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분석하는데 한달이 걸릴지 몰라도, 천안함처럼 사고의 발생부터 실물이 눈에 들어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존재하는 사고의 경우 이미 그 원인의 체크리스트는 완성되게 됩니다.

현장에서 실물을 보고 체크리스트 가운데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는 과정, 선박전문가라면 그리고 천안함 사고 과정을 면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천안함의 선수부터 선미까지, 그리고 내부 전반을 조사하는 Full Survey’한 번만으로 사고의 원인을 확정하는데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좌초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폭발이 존재했는지 여부, 충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합조단이 합숙을 요구했던 이유 - 이해할 수없는 좌석배치

합조단에서 저에게 ‘평택2함대 독도함에서의 합숙’을 요구한 것이 조사의 편의성 때문인지, 아니면 2함대 내에 묶어두기 위함이었는지 여부는 제가 합조단에 첫 조사를 나갔던 4월 30일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가 쓴 칼럼 모두를 복사를 하여 칼러펜으로 마킹을 한 자료를 펼쳐놓고 저를 설득하려고 애쓰더군요. 그래서 저는 “나는 조사하려고 왔지 설명들으러 온 게 아니다”며 설득의 노려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번의 재판에서 합조단이 저를 설득, 회유를 위해 애쓴 흔적의 한 단면이 증인심문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그것도 해군 준장의 증언을 통해서 말이지요. 변호인이 박정수 준장에게 물었습니다.

“증인, 신상철 위원이 2함대에 첫 조사를 갔던 날 회의실의 좌석배치가 사진의 내용과 같지요?”

박정수 준장은 “맞다”고 하였습니다. 합조단의 모든 분과가 참여했던 그날 회의실에는 합조단 수뇌부와 군조사위원은 물론 민간조사위원 거의 대부분이 참석하여 4~50명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상석으로 안내해서 앉게 하였던 것이지요. 저는 순간‘왜 내가 이 자리에 앉아야 하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앉자마자 브리핑이 시작되어 그냥 앉게 되었습니다.

브리핑이 시작되고 옆을 둘러보니 제 오른편에 박정이 군합조단장, 그 옆에 윤덕용 민간합조단장, 그 옆에 토머스에클스 미대표단장이 앉아 있더군요. 앞에 두 줄로 나열된 테이블에는 군 장성들, 교수들, 과학자들, 한나라당 추천 조사위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군대는 계급이고, 계급은 자리배치로 나타납니다. 생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왜 높으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걸까요?

변호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증인, 신상철 위원의 자리를 상석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씩씩한 군인 박정수 준장은 굳이 답변을 애둘러가지 않더군요. 사나이 다웠습니다.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입가에 머문 채 그는 나즈막히 대답하였습니다.  

“에… 신 위원이 처음 참석했고, 군 발표에 가장 반대가 심해서… 잘 들으시라고 그렇게 배치했다.”

박 준장은 ‘처음 참석한 위원 좋은 자리를 배치했는데 뭐가 문제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들은 사전에 민간위원이 썼던 칼럼까지도 모두 복사하여 마킹해가며 분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견주어 볼 때 그것이 ‘회유’의 단적인 사례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결과에 다름아닙니다.

4월 30일 조사가 끝나고, 평택2함대를 출발하여 여의도로 돌아오던 중 저는 이해찬 전 총리께 전화로 보고를 드렸습니다.

“총리님, 이 친구들 천안함 사고원인을 ‘폭발’로 몰아가며 조작하고 있습니다. 내일 상세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심각한 문제를 언론에 알렸습니다. 칼럼을 쓰고, 인터뷰를 하며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만약 그 시기를 놓치고 머뭇거리면 저에게 어떤 회유와 압박이 오게 될 지 불 보듯 했습니다. 국방부의 조작과 거짓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 그 고민을 두고 무엇보다도 제게 두려움으로 다가 왔던 것은, 만약 내가 알게 된 그 진실을 묻어버린다면 제 남은 평생 내내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제가 언론에 국방부의 거짓과 조작을 대대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자 국방부와 합조단은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조사요원을 교체해 달라고 국회에 공문을 보낸 것이지요.

[연합뉴스] 국방부, 합조단 신상철 위원 교체요청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국방부가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한 민.군 합동조사단에 참여한 신상철 위원을 교체해 줄것을 국회에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13일 "민주당에서 추천한 신상철 위원을 교체해줄 것을 국회에 공식으로 요청했다"면서 "신 위원이 조사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개인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등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보낸 공문에서 "신씨가 공식 결론에 반하는 내용의 개인의견을 조사위원자격을 내세워 언론매체에 주장하는 등 대외적으로 불신 여론을 조장, 국회와 합조단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가 합조단의 조사위원 교체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신씨는 인터넷 정치 웹진 '서프라이즈'의 대표다. 

한나라당 논평 - 천안함 유언비어 제조기가 민군조사단에 들어간 충격적 사실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친노사이트의 대표가 민주당 추천으로 천안함 민군합동조사단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사람은 합동조사단 출범 직후 단 하루 회의에 참석한 것 외에는 일체 조사활동에 참여안하면서 조사위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각종 매체를 통해서 엉터리 괴담과 음모론을 퍼뜨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천안함이 좌초됐을 때 그냥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아무도 희생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후진으로 빠져나와서 정상항해구역으로 이동을 했는데 심한 충격이 발생하는 2차 사고를 당했다고 본다.” “천안함 사고는 어떤 다른 선체와 충돌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충돌한 선체는 미군측 군함일 가능성일 높다.” “주한미군사령관이 고 한주호 준위 분향소를 방문하고 주한미대사가 백령도를 찾았다. 미군측이 깊숙이 인볼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좌초론이라든가 미군함충돌론이라든가 이런 것은 민주당도 사건 초기에는 주장을 했다가 함체가 인양이 되고 절단면이 조사가 되고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가 나오면서 더 이상 주장하지 않고 있는 근거 없는 사실들인데 이런 주장을 이 사람이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 것은 합동조사단에 들어갈 때부터 원인규명에는 관심이 없고 진상을 왜곡·호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이 합동조사단에 이름을 올린 것도 위원의 이름으로 조사의 신뢰성에 물타기를 하고 국민여론을 현혹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 지도부도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합조단에 추천이 되어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참 무책임한 발언이 아닌가 싶다.

민주당은 이런 엉터리 사이비 전문가가 중차대한 천안함 조사단에 민주당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된 경위를 밝혀내고 즉각 추천을 취소하고 천안함 유가족들과 국민들한테 사과를 해야 한다.

2010.   5.   13

한나라당 대변인 조해진

진실은 마치‘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바지를 뚫고 나와 허벅지를 찌르게 된다고 하지요. 여기저기 뚫린 구멍이 숭숭한데도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국방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더 버티게 될지 지켜 볼 일입니다.

박정수 준장, 그는 참 씩씩한 군인입니다. 군 복무하는 동안 평판도 좋았습니다. 군 서열로 따지자면 저보다 몇 해 선배뻘이기도 합니다. 만약 천안함이 아닌 다른 일로 인연이 만들어졌더라면 두주불사하며 친하게 지냈을 분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친화력과 사나이다움이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그 분은 본인 스스로 ‘국방부가 자신에게 부여한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자부심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양심의 가책을 억누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국민 모두가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당위적 가치 외에 ‘그것으로부터 교훈과 지혜를 얻어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않고 방지하는 것’의 의미가 크다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통사고’를 ‘살인사건’으로 조작하는 행위는 인륜적으로도 해서는 안될 일이지요.

우리 해군, 이순신 장군의 후예로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볼 일입니다.

신상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3&table=pcc_772&uid=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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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끝나지 않은 'BBK사건'…"다스에 140억 요구"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18 12:00
  • 수정일
    2014/01/18 12: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옵셔널벤처스 측, 김경준-다스 상대로 한 美 소송에서 승소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7 11: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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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셔널벤처스(옵셔널) 주식 사기 사건 피해자들이 주식회사 다스 '140억 송금'을 놓고 미국에서 벌인 재판이 15일(현지시간) 옵셔널의 승리로 귀결됐다. 옵셔널캐피탈(옵셔널벤처스의 후신) 장용훈 대표는 16일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승소 판결문을 근거로 주식회사 다스 측에 140억 원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미국 연방법원이 "극도로 복잡한 사건"이라고 했을 정도로 난마(亂麻)와 같다. 이 소송은 지난 2010년 말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미국 연방법원은 옵셔널캐피탈 피해자들이 김경준 씨 측과, 알렉산드리아 인베스트먼트 회사, 스위스 알렉산드리아 계좌 등을 상대로 낸 '371억 원을 횡령 사건'에서 김경준 씨 등의 횡령이 맞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미 연방 검찰은 김경준 씨 측으로부터 압류해 보관 중이던 140억 원에 대해 옵셔널, 다스, 김경준 측 등 3자가 소유권을 결정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김경준 씨 측은 다른 민사소송을 근거로 미 연방법원의 관할권 하에 있던 스위스 알렉산드리아 계좌에서 140억 원을 빼내 다스 측에 송금을 해버렸다.

'횡령 피해자'인 옵셔널 측은 140억 원에 대한 처분권의 우선순위는 자신들에게 있다며 이같은 방식의 송금이 부적절하다고 소송을 냈지만, '소송관련 행위에 자유를 보장하는 특별법'에 따라 미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김 씨 측이 옵셔널이 아닌 다스를 선택해 송금한 것이 '소송의 특권'에 따른 적절한 행위였다는 취지다.
 
▲ 장용훈 대표가 보내온 판결문

▲ 장용훈 대표가 보내온 판결문

▲ 밑줄친 부분에 '소송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돼 있다.

▲ 밑줄친 부분에 '소송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돼 있다.



그러나 옵셔널 측은 곧바로 항소했다. 이에 대해 항소법원이 "김경준의 크레딧스위스뱅크 계좌에 있던 돈은 옵셔널에서 횡령한 돈으로 이미 입증됐기때문에 140억 원 송금은 사기성 이체로 이는 '소송특권법'에 따른 특권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1심 판결을 사실상 뒤집은 것이다.

미국 연방 법원은 2심제로, 이는 최종 판결에 해당한다는 것이 장용훈 대표의 설명이다. 장 대표는 이번 판결의 의미에 대해 "140억 원을 다스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확보한 것"이라며 "먼저 다스 측에 이 판결을 근거로 140억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것이고, 돌려주지 않겠다면 '추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스 측이 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옵셔널 측은 이 판결을 근거로 다스 미국 자산 등에 대한 동결 조치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또 "문제가 됐던 스위스 계좌에서 어떻게 돈이 송금됐는지,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MBC 자료화면

ⓒ MBC 자료화면


이 사건의 뿌리는 BBK사건과 닿아 있다. BBK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에리카김 씨의 동생 김경준 씨가 함께 설립한 투자회사다. BBK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실소유주 의혹을 받고 있는 주식회사 다스가 190억 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과 김 씨는 결별하게 되고, 김 씨는 BBK의 사실상 후신인 옵셔널벤처스의 회사 돈을 횡령해 미국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옵셔널 측과 다스 측이 모두 '피해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김경준 씨는 미국에서 벌어진 소송을 통해 옵셔널 측 피해자가 아닌 다스 측에 140억 원을 송금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의 이면합의' 의혹 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 판결로 '140억 송금 사건'의 진실과 함께, 다스의 '실소유주'에 대한 의혹의 실마리가 드러나게 될지 주목된다.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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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고 천에 싸다가 뛰는 심장에…

등록 : 2014.01.17 20:29수정 : 2014.01.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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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5년 전 용산 생존자 이충연·정영신 부부이야기
2009년 이전 삶은 부끄러워, 이젠 우리가 희망 되고파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은 이제 없다.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을 집어삼켰던 불탄 망루도 없다.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이충연(왼쪽)·정영신씨 부부는 용산을 떠나지 못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친다. 13일 오전 ‘용산참사 5주기 범국민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마친 뒤 부부는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남일당 터를 둘러싼 가림막에 국화를 꽂았다.

 

 

인터뷰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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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전 삶은 부끄러워, 이젠 우리가 희망 되고파

 

[토요판] 커버스토리 / 용산참사 생존자 이충연·정영신 부부

 

 

▶ 2003년 이충연(41)씨는 정영신(42)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답니다. 이씨는 무려 전라남도 장흥까지 밥 먹으러 가자고 하고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깜깜한 길이 무섭다며 손을 잡아달라 했습니다. 이씨는 정씨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천천히 운전했다고 하더군요.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뒤 두 사람을 덮은 어둠은 그 밤보다 짙었습니다. 부부는 그 5년 동안 손을 꼭 잡고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2009년 1월19일 새벽 3시, 아버지와 아들은 깨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앞에 섰다. 트럭의 짐을 하나하나 건물 안으로 옮겼다. 옥상에 오르자 물대포가 날아들었다. 아들은 물대포를 맞으며 망루를 지었다. 일흔한살의 아버지는 옆에서 거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겐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함께 올라온 30여명을 다독이며 일을 마무리했다. 오후 5시 망루가 완성됐다. “이제 대화하자고 할 거다”라며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 부자가 있었다. 14시간 뒤인 이튿날 아침 7시께 아버지와 아들은 망루 4층에 있었다. 망루에 불이 붙었다. 아들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들은 ‘용산 4구역 상가·공장 철거민대책위원회’(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 위원장 이충연(41)씨였다. 망루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죽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건 아버지 이상림(당시 71살)씨였다. 아버지는 1년 뒤 차가운 땅에 묻혔고 아들은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망루에서 뛰어내린 이충연씨가 의식을 잃고 중앙대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21일 새벽 1시께 아내 정영신(42)씨는 순천향대병원에서 시아버지의 주검과 만났다. 장례를 치른 건 355일 뒤었다. 하지만 아직 감옥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남편이 있었다. 아내는 용산을 떠날 수 없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상근활동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유가족이자 생존자로, 또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가로 이충연·정영신 부부는 처음으로 함께 1월20일을 맞는다. 올 1월20일은 생계 대책을 요구하며 용산 4구역(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 철거민 등 30여명이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은 ‘용산참사’ 5주기다. 부부를 8일 용산구 원효로 1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진상규명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망루 농성자 30여명 중 유일하게 부자가 망루에 올랐다.

 

이충연 “나는 당시 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원장이었고, 아버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반년 전 용산 4구역 조합 앞에서 생계 대책을 마련하라는 펼침막을 달다 용역과 싸웠다. 경찰은 30대 건장한 용역은 무혐의 처분하고 아버지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용산 4구역 개발 문제가 해결돼야 본인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망루에서 최후 맞은 시아버지 
살아남았으나 감옥에 간 남편 
폐인처럼 지내다 기운 차리고 
진상규명 상근활동한 아내 
4년 만에 남편도 돌아와 함께

 

 

“경찰이 망루 양쪽 잡아당기자 
불기둥이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폭발할 듯해 밖으로 뛰어내렸다 
태양처럼 빨갛고 뜨거운 벽에 
얼굴 녹아내린단 생각 들었는데…”
 
 

 

 

 

죽은 줄 알고 천에 싸다가 뛰는 심장에…

 

망루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2008년 5월30일 관리처분인가가 났다. 관리처분인가가 나면 철거가 시작된다. 대화하자고 하면 돌아오는 건 용역의 주먹과 찬바람뿐이었다. 당시까지 용산 4구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본인이나 아이가 장애인이거나,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무허가 노점이란 이유로 보상도 못 받은 정말 힘든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 같은 철거민밖에 없었다. 그냥 내쫓기는 게 억울해 대화하고 생계대책 만들어 달라고 망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망루만 기억한다. 철거민들을 망루로 내몬 시간은 잊혔다. 공식 명칭이 ‘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인 용산 4구역 기본계획은 2001년 7월 수립됐다. 주거 아닌 상업지 중심의 재개발인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고시된 게 2006년 4월이다. 조합의 재개발 계획을 확정하는 ‘사업시행인가’는 2007년 11월, 주민의 비용 부담이 정해지는 ‘관리처분인가’는 2008년 5월 결정됐다. 남은 절차는 철거와 공사뿐인 상황에서 용산 4구역 상가세입자는 7월 조합의 감정평가에 따른 영업보상비를 통보받았다. 보상은 턱없이 적었다. 이충연씨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던 ‘레아 호프’의 보상금은 1억500만원. 권리금과 시설비용이 3억 이상 들어간 호프집이다.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용산 4구역 상가세입자 평균 보상비는 2500만원이었다. 상가 주인인 조합원 1인당 개발 이익이 5억4000여만원으로 추산됐다. 자릿세인 권리금은 인정되지 않았고, 생계 보장을 위한 임대상가는 언급도 안 됐다. 세입자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용역의 폭력도 무서웠다. 2007년 겨울 나타난 용역은, 이듬해 2월부터 세입자가 떠난 빈집에 살기 시작했다. 시공사였던 삼성물산·대림건설·포스코와 철거 계약을 맺은 무허가 철거용역업체 두 곳의 직원들이었다. 빈집에 오물을 쌓아두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매일 찾아가 해코지했다. 2008년 6월30일까지 철거를 못 끝내면 하루에 1인당 510만원씩 지체 보상금을 시공사 쪽에 물어주기로 한 용역업체는 주민들에게 강압적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나가자니 생계가 막막하고, 머물자니 용역이 위협하는 상황이지만 대화 통로는 막혔다. 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는 망루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가족들은 걱정하지 않았나?

 

정영신 “망루가 뭔지도 몰랐다. 위험한 곳 아니라고, 며칠 지나면 나도 왔다갔다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 어쨌거나 용산은 서울 중심지니까 망루 만들면 며칠 안에 대화하자고 할 거라고 했다.”

 

남일당 건물에서 하루 동안 어떻게 지냈나?

 

 “경찰의 호위를 받은 용역이 망루 짓는 우리에게 물대포를 쐈다. 옷이 다 젖어 너무 추워 교대하며 만들었다. 망루를 완성하자 곧 대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축제 분위기였다. 실제 생활은 4층에서 했다. 난로 켜고, 침낭 놓고, 가스버너로 밥도 해 먹었다. 하지만 용역들이 계속 1층에서 불을 피우거나 화학탄을 쏴 연기를 올려 보내 숨쉬기가 어려웠다. 잠도 거의 못 잤다. 건물에 들어간 뒤 얼마 안 돼 경찰이 입구를 막아 짐만 옮겨주고 가기로 한 사람들까지 갇혔다. 그래서 하루 만에 마실 물도 다 떨어지고 음식도 쌀밖에 없었다. 급하게 진압하지 않아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9년 1월20일 오전 6시30분 경찰 진압이 시작됐다. 농성 하루 만의 진압이었다. 건물 안 상황은 어땠나?

 

 “진압 전 남일당 건물 앞 한강대로 차량을 통제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방에서 물대포가 갑자기 비처럼 쏟아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루액이 든 물대포를 얼굴에 맞고 눈도 못 떴다. 사람들은 물대포를 피해 건물이나 망루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경찰이 진압하면 연대하러 온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용산 4구역 철거민들만 망루에 남아 싸우기로 했다. 하지만 우왕좌왕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망루 안에 들어가 발전기를 돌려 불을 켜고 4층으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오는 경찰을 봤다. 경찰이 망루 안으로 들어와 1층부터 연행해 갔다. 쇠파이프나 골프공으로 못 올라오게 막았다. 화염병은 망루 안에 안 던졌다. 불이 나지 않겠나.”

 

 “그 새벽에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제안이 와 희망이 생겼다. 방송 나가면 이제 곧 대화하자 할 거고, 대화하면 곧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특공대가 유리창을 방패로 깨면서 진압을 시작하더라. 그 방패로 내 가슴을 치는 것 같아 무서워 울었다. 그때부터 남편과 연락이 안 됐다. 경찰이 올라가는데 건물 안에 있던 용역도 무서워서 건물 옆 임시건물 지붕 위로 뛰어내리더라. 안에 있던 지석준씨가 난간에 매달린 것도 보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불이 확 끼쳤다. 그리고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오전 7시20분 불이 나던 순간을 기억하는지?

 

 “경찰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겨 옆을 벌렸다. 그 틈으로 채증카메라가 보이더니, 불기둥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불이 주변으로 확 퍼지자 폭발한다는 생각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내 옆에 태양처럼 빨갛고 뜨거운 벽이 서 있어 얼굴이 녹아내린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화염병을 든 ‘도시 테러리스트’들의 ‘무장농성’ 기사가 담긴 아침신문이 집집마다 배달됐을 무렵, 현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2009년 1월20일 오전 6시30분 경찰특공대 3·5제대원 남일당 1층 계단 진입. 6시45분 경찰특공대 1제대원 10여명 컨테이너 타고 옥상 진입. 7시6분 1차 화재로 7시10분 경찰특공대원 일시 철수. 7시18분 경찰특공대 1·2·5제대 소속 10여명 망루 2차 진입. 7시20분 화재 발생. 용산 4구역 철거민 이상림·양회성(당시 56살)씨와 연대하러 망루에 오른 다른 지역 철거민 한대성(당시 53살)·이성수(당시 50살)·윤용헌(당시 48살)씨 5명과 경찰특공대원 김남훈(당시 31살) 경사가 숨졌다. 불이 나기 전 16명, 불이 난 뒤 8명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병원에 실려갔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이후 어떻게 된 건가?

 

 “옥상 벽과 망루 사이 80㎝ 틈으로 떨어졌다가 불이 다 꺼진 뒤에야 소방관들에게 발견됐다.”

 

 “온몸이 까매서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망자라면서 천으로 쌌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떤 소방관이 가슴에 손을 댔는데 심장이 뛰니까 구급차로 병원에 옮겼다. 안 그랬으면 그대로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로 갈 뻔했다.”

 

이충연(왼쪽)·정영신씨 부부는 2009년보다 더 웃고, 더 밝고, 더 건강해 보였다. 상처가 아물어서가 아니다. 지금도 밤에 잠을 설치고 소리에 예민하다. 부부를 넘어 동지가 된 서로가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사무실에서 부부를 만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감옥서 편지도 안 써

 

1월20일은 유가족들에게 긴 하루였다.

 

 “하루종일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아무도 생사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밤이 돼서야 시아버지 주검이 있다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유전자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다음날부터 이상림씨라고 보도됐다. 경찰에 따지니 그제야 ‘신분증도 있고 지문도 나왔다’고 하더라. 신분증이 있다면 미리 말해줄 수 있었는데 왜 얘길 안 했나. 그때부터 숨기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덕 어머님(고 양회성씨 부인)이 시신을 전부 봤는데 손목, 발목이 잘리거나 이빨이 다 빠지거나, 갈비뼈가 튀어나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화재사가 아니었다. 부검 시간을 벌기 위해 우리를 하루종일 애먹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장례식을 미루게 됐다.”

 

유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한 건 1월21일 새벽 1시께다. 경찰은 유가족 통보 없이 국과수에서 부검한 뒤, 순천향대병원에 주검을 안치하고도 유가족을 막았다. 주검 5구를 모두 보고 나온 김정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당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웅크리는 등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유가족은 공권력 폭력이 있었는지 봐달라고 했는데 시신이 많이 훼손됐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부검한 건 감춰야 할 게 있던 게 아니었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검은 2010년 1월9일 장례식 날까지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충연씨의 상태는 어땠나?

 

 “의식이 거의 없던 채로 3일 있다 일반실로 옮겼다. 폐에 매연이 고여 있어 그 치료부터 1주일 받고 검찰에 체포됐다. 다리와 등도 많이 다쳤는데 구속되면서 병원 치료도 못 받고 휠체어 탄 채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언제 알았나?

 

 “일반실로 옮긴 날 뉴스 보고 알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기 전 마치 다른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막아주겠다는 듯이 4층 계단 앞에 있던 아버님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뉴스 본 심정을… 표현하기 너무 어렵다. 내게 이런 일이 닥칠 거라 생각하지 못해 감당하기 힘들었고 두려웠고 막막했다. 무엇보다 죄송했다. 난 살아났고…. 내가 그 상황에서 냉정하게 정신 차렸다면 그분들부터 망루 밖으로 모셔야 했는데.”

 

2009년 1월28일 병원에서 검찰에 체포·구속된 이충연씨는 화염병을 던져 망루에 불을 내 경찰관 1명을 숨지게 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등으로 다른 철거민 23명과 함께 기소됐다. 하지만 경찰의 살인, 업무상 과실치사 등 무리한 진압에 대한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됐다. 죽음을 당한 철거민 5명은 망루에 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경찰을 죽인 가해자로 몰렸다.

 

구속된 뒤 상황은 어땠나?

 

 “구속될 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일부러 독방에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죄송함이 컸다.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아내에게 편지도 안 썼다. 동지들은 죽었는데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편지 쓰는 것마저 죄송스러웠다.”

 

2010년 11월11일 대법원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은 어땠나?
남일당 건물 철거 장면.

 

 “재판 과정은 부당했다. 검찰은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하지 않았다. 검찰이 내놓지 않은 수사 자료에는 경찰이 무리한 진압을 인정한 내용이 있었다. 화재 원인도 납득이 안 된다. 우리는 망루 안으로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 국과수는 당시 영하 10도라 몸에서 나는 정전기도 발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망루 2층에서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국과수가 그 발전기 스위치를 잃어버렸다더라. 17명의 경찰이 채증하고 있었는데도 불이 나는 7시20분 전후 영상만 모두 없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조사도, 기소도 안 됐다.”

 

이송범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현장 상황을 잘 전달받았으면 중단시켰을 텐데 지도부가 상황을 잘 몰라 역부족이었던 것이 안타깝다”고 검찰 조사에서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경찰특공대가 성급하게 2차 진입을 시도했다며 경찰력 행사가 위법이라는 의견을 법원에 제출했다. 검찰이 망루 안에서 화염병 공격 대상이 됐다고 지목한 경찰특공대원 2명은 재판 과정에서 ‘화염병이 터져 불이 붙는 걸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변호인단은 발전기나 정전기 등 다른 화재 원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에 불리하고 농성자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감옥에 홀로 갇힌 이충연씨만큼 밖에서 유가족·구속자 가족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싸웠던 정영신씨도 외로웠다.

 

2009년 한 해를 집 없이 거리에서 떠돌았다.

 

 “2009년은 내게서 많은 걸 뺏어갔다. 내가 그동안 믿었던 대한민국이 고작 이건가 싶었다. 내 삶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국가가 내가 필요 없고 걸림돌이 된다며 쓰레기 취급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뒤 우리도 시청광장에 빈소를 만들었다. 노 대통령 조문 행렬은 줄이 길게 서 있는데 우리는 텅 비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 발길도 끊어지자 정말 답답했다. 그럴수록 나라도 힘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더더욱 어머니들과 남편 이충연 위원장 곁을 지키려 했다.” 
 

 

 

 

“그날 새벽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제안이 와 희망이 생겼다 
방송 나가면 대화가 재개 될 거라고 
그런데 경찰특공대가 유리창을 
방패로 깨면서 진압 시작하더라”

 

 

“뉴타운 되면 잘살 줄 알았다 
그들 사탕발림에 이용당한 건데 
우리도 같이 허황된 꿈 꾸며 
개발을 부추긴 게 아닌가 싶다 
용산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도움 줬던 그분들은 지금 강정과 밀양에

 

정부와 장례식·보상 등에 합의해 사건 발생 355일 만인 2010년 1월9일 장례식을 치렀다. 그 뒤에는 어떻게 지냈나?

 

 “장례 치르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진실 규명이 돼서 한 장례는 아니지만 유가족을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장례 뒤부터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망루에서 떨어져 바로 옆에서 불이 났는데도 멀쩡했던 건 ‘너는 살아서 억울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돌아가신 분들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자본론> 같은 어려운 책도 읽고, <임꺽정> 같은 소설도 보며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알려고 노력했다.”

 

 “나는 피해자가 가해자·살인자로 뒤바뀌어 감옥에 있는데 그들을 두고 장례 치르는 게 너무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어머님들의 삶을 알기에 고집부릴 수 없었다. 2009년 12월30일에 정부와 협상 타결되고 맞은 신정 때 용산 4구역에 있던 집도 철거돼 어머님과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미치겠더라. ‘내가 왜, 뭐 때문에 싸웠지?’ 하면서 갑자기 사람이 싫어졌다. 2010년은 내게 없는 해다. 매일 술만 마시고 폐인처럼 살았다.”

 

하지만 정영신씨는 2011년부터 진상규명위 상근 활동을 시작했는데.

 

 “경기도 성남 위례신도시 행정대집행을 막으러 갔다가 용산에 있던 용역을 만났다. ‘너네 용산 모르냐, 용산처럼 되고 싶냐’고 하더라. 그들이 여전히 용산을 훈장 삼아 자랑하고 다니는 걸 바꾸고 싶었다. 그즈음 진상규명위가 강제퇴거 금지법을 만든다고 해서 활동을 시작했다.”

 

친구의 친구였던 두 사람은 6년 연애 끝에 2008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생활은 8개월에 그쳤다. 용산 참사는 두 사람을 갈라놨다. 이별은 2013년 1월31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이충연씨가 4년 만에 가석방되면서 끝났다.

 

출소 뒤 어떻게 지냈나?

 

 “장례 치르게 도와준 분들께 인사하고 다녔다. 시민사회 모든 분들이 도와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들이 지금 강정과 밀양에 있다. 그곳은 주민 간의 다툼, 공권력의 탄압 등 용산과 닮은 점이 많다. 아픔을 겪어 봐서 그런지 아내와 함께 그런 아픔 있는 곳을 계속 찾아다녔다.”

 

4년 만에 함께 지낸 1년은 어땠나?

 

 “남편이 동지가 됐다.(웃음) 유가족 어머님들과 구속자 가족 중간에 있던 나는 그동안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할 사람이 있어서 좋다. 솔직히 어머님들 앞에서는 죄송하다. 똑같이 고생했는데, 제 신랑만 옆에 돌아왔으니….”

 

이 “집사람이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더 성숙해졌다. 저 하나만 보며 버티면서, 재개발 정책 바꾸고 진상규명 노력 하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도 존경심도 커졌다.”

 

정영신씨의 싸움은 이제 외롭지 않다. 남편은 새 가게를 여는 대신 유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진상규명 활동과 연대를 다녔다. 두 사람은 “최소한 5주기 추모제까지는 유가족 어머님들이 해온 만큼은 해야 돌아가신 아버님들께 면이 설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유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나?

 

 “어머님(고 이상림씨 부인 전재숙씨)은 한국외대 앞에서 도시락 가게를 하고, 형님은 수원에서 호프집을 열었다. 김영덕 어머님(고 양회성씨 부인)은 숙명여대 앞에서 이자카야를, 권명숙 어머님(고 이성수씨 부인)은 두 아들과 치킨집을 운영한다. 유영숙 어머님(고 윤용헌씨 부인)은 서울시 중구 순화동 철거 투쟁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고, 신숙자 어머님(고 한대성씨 부인)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다른 일을 못하고 있다.”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 취임 반대 투쟁을 하는데, 경찰들이 앞에서 2009년처럼 우리를 막고 욕하더라. 자칫하면 다시 2009년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싶어 고문피해자 모임인 ‘진실의 힘’에서 제안한 치유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다.”

 

 

내 가족의 행복과 남의 행복, 그 사이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참사 이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나?

 

 “해결된 게 없다. 돌아가신 분들 주검에 타살 흔적이 있다. 죽음의 이유와 경찰 진압 과정은 재조사돼야 한다. 책임자도 여전히 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진상규명위의 질문에 ‘진상규명 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경찰 진압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을 공기업 사장에 앉혔다.”

 

유가족의 삶은 멈췄지만 경찰 진압 책임자와 검사·판사들은 안녕했다.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경찰청장으로 경찰청장 내정자였던 그는 사건 발생 직후 사퇴했다. 그러나 2011년 오사카 총영사가 되더니 2012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경북 경주에 출마했다. 이충연씨 대법원 판결 주심이었던 양승태 대법관이 현재 대법원장이다.

 

용산참사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용산 4구역이 포함된 국제업무지구 개발은 서울역부터 한강까지 이어지는 ‘서울부도심’ 개발 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이는 당시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꿈이기도 했다. 서울시장 때 청계천 복원과 재개발·뉴타운 사업을 진행했던 이명박 대통령을 이어받은 거다. 재개발로 이익과 권력 잡은 이명박 정권, 오세훈 서울시장과 경찰청장 내정자였던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의 과잉충성이 핵심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무지함도 있을 것이다. 18대 총선 때 뉴타운 공약으로 내세운 사람 다 당선됐다. 개발 소식 들으면 ‘나도 거기 땅 사놓을걸’ 하며 부러워하지 않나. 사실 나도 그랬다. 뉴타운 개발되면 다 잘사는 줄 알았다. 그들의 사탕발림에 이용당한 건데, 우리도 같이 허황된 꿈을 꾸며 개발을 부추겼다. 용산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이후 삶은 어떻게 변했나?

 

 “전에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내 가족만을 위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도 못 돕고 살았는데, 많은 사람이 도와준 덕분에 장례나마 치를 수 있었다. 이제 알았다. 내 가족만을 위한 행복은 남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후회 안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2009년 전의 삶은 부끄러웠다. 바로 옆 용산 5가 철거 투쟁 하는데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웃의 어려움을 알았다면 무지하게 당하지도, 억울한 일 당하고 외면받지도 않았을 거다. 이제는 내가 희망이 되고 싶다. 내가 가는 곳마다 아픔은 사라지고 행복이 솟았으면 좋겠다. ‘제2의 용산참사’라는 말을 없애고 싶다.”

 

2010년 12월1일 남일당 건물 철거 날, 근처의 한 정육점을 찾았다.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저 건물을 보면 없는 게 죄지 싶지만, 나는 저렇게 싸우기보단 빨리 돈 벌고 상가를 장만해 나가고 싶다.” 용산을 지켰던 문정현 신부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2010년 1월9일 장례식 전날 만난 신부님은 루카(누가)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길에서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구한 건 사제나 레위인이 아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신부님이 말했다. “강도 만난 이를 그냥 지나친 사람은 이웃이 아닌데, 이 절절한 용산 참사를 보고 그냥 지나간다면….” 용산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물었다. 그 용산에서 살아남은 부부는 이제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자 한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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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방위 중대제안에 정부 전면거부 배경

"비방중상 하겠다는 것이냐?"<해설> 북한 국방위 중대제안에 정부 전면거부 배경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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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17  14:4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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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방위원회가 △설 계기 상호 비방중상 중단, △상호 군사적 적대행위 전면중지, △한반도 비핵화 의지 표명 등 중대제안을 지난 16일 제시했다. 이에 정부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며 17일 전면 거부했다.

오는 2월말로 예정된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 제안은 정부가 연례적인 방어훈련이라는 주장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치더라도, 북한의 상호 비방중상 중단 제안을 거부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 입장에서는 신년사에서도 밝혔듯이 남북간에 대화하고 관계개선을 하고 싶다는 뜻에서 다시 한번 비방중상을 하지 말자는 연장선으로 제의한 것"이라며 "한.미 군사훈련 기간이 끝난 다음에 시작될 남북대화에 대해서 사전 정지작업으로 비방중상을 하지 말자고 나온 것으로 본다"며 북한 국방위의 제안을 평가했다.

하지만 정부는 "남북간 '비방중상 중지'합의를 위반하면서 그 동안 비방중상을 지속해 온 것은 바로 북한"이라며 "북한은 남북간의 신뢰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라며 북한 신년사를 지목했다.

즉,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문제, 북남관계를 외부에 들고 다니며 국제공조를 청탁하는 것은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농락물로 내맡기는 수치스러운 사대매국 행위"라는 발언이 곧 '비방중상'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한이 상호 비방중상을 중단하자고 했는데, 이런 제안을 거부하면 정부가 앞으로 비방중상을 하겠다는 것이냐"며 "과연 정부가 진정성이 있는지 묻고싶다"고 지적했다.

이번 통일부 대변인 논평은 청와대에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가 열린 뒤,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인도를 순방 중인 가운데 결정됐다. 이날 회의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 김관진 국방장관, 남재준 국정원장 등 유관부처 관계자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남재준 국정원장을 필두로 강경파가 주도했고, 이를 박근혜 대통령이 최종 사인했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도 이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한 전문가는 "북측의 중대제안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며 "상호 비방중상 중단을 우선적으로 제안하기에 앞서, 군사적 신뢰조치를 취하는 등 남측을 배려하는 게 부족했다.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선제적으로 한 제안을 정부가 받기 곤란하지 않았겠느냐"고 평가했다.

이는 북한이 비방중상과 한.미 연합군사연습 등을 하나로 묶어 중단을 제안하고,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기에는 정부 내 외교안보라인 의사결정자들 면면을 볼 때, 쉽지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가 북한 국방위원회의 중대제안을 거부한 배경은 지난해 북한 장성택 처형을 두고 "북한 내부가 불안하다. 북한이 붕괴될 것이다"라는 정부 내부 판단의 연장선이라는 게 중론이다.

장성택 처형 이후 남재준 국정원장이 지난달 국정원 간부 송년회에서 "오는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다. 우리 조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라고 발언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정부가 어떻게 대북정책을 인식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뒤이어 북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강조하고, 이를 두고 남북관계 개선 조짐을 점쳤던 분석들이 쏟아지자, 정부는 이틀만에 입장을 발표,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리고 장성택 처형을 두고 "형식적 재판 후 4일만에 처형하는 것을 볼 때 북한의 인권상황을 스스로 되돌아 본다면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주장인지 국제사회가 다 알고 있다"면서 북한을 자극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출입기자들과 함께한 신년회에서 "남북관계 분위기 마련 좋다. 좋은데 거기다 대고 엉뚱한 소리 하게 되면 그건 지적을 할 필요가 있다"며 "지적할 건 지적하고 우리가 제안할 건 하고,우리는 있는 그대로 이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건 해야겠다"고 말해 정부의 북한 신년사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다.

즉,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이라는 대목보다 비방중상에 해당되는 표현들을 지적함으로써 일종의 북한을 길들이겠다는 말로 풀이된다.

이러한 정부내 인식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장성택 처형이 곧 북한 불안정성의 상징이고,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말로 과정없는 결과론적 통일론을 강조한 데서 공식화됐다.

여기에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도 작용하고 있다.

북한 국방위원회의 중대제안에 대해, 미국 백악관 제이 카니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의 대북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북한은 일련의 유엔 안보리 결의를 더 이상 위반하지 말고 국제 의무를 준수함으로써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미국 국무부 젠 사키 대변인도 "우리의 핵심 대북정책은 변함 없다"고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했다.

이러한 반응은 성김 주한미대사가 17일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급변사태를 포함한 모든 사태에 대비해 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며 "한 가지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급변사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엳보인다.

즉, 한.미가 북한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의 불안정성을 강조하고 이를 급변사태, 북한 붕괴론과 연계시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대박론'은 흡수통일론, 북한 붕괴론과 궤를 같이 한다는게 대부분의 인식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장성택 처형으로 북한이 불안정하다는 분석, 나아가 북한 국방위원회의 상호 비방중상 중단 제안은 곧 북한이 붕괴할테니 거부해도 된다는 판단의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백학순 수석연구위원은 "남쪽에서 통일대박론이 나온다. 이건 누가봐도 북한 붕괴론에다가 모자를 씌운 것에 불과하다"며 "김정은이 장성택을 숙청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정권 안정성 획득인데, 그걸 정부가 자꾸 거꾸로 해석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북한의 제의에 '상호 비방중상 중단을 적극 환영한다'라는 정답이 있었다. 이를 통해 관계개선, 화해증진을 이뤄가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며 "그런데 현 정부는 1년밖에 안됐는데 북한 붕괴론을 기반에 깔았다. 앞길이 상당히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양무진 교수는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권력투쟁이 불안하다? 일종의 정치적 분석아니냐"며 "결국 남북이 함께하는 평화통일이 아니라 급변사태, 붕괴, 흡수통일론이다. 정부가 솔직히 진정성을 보이려면 흡수통일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정말로 한반도 평화통일 기반구축이 목표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면 북한의 제안이 진정성이 있든 없든 사전에 재단하지 말고 만나서 확인하고 접점을 찾는게 올바른 방안"이라고 이번 거부를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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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희귀새 황새, 백령도 폐염전에 최대 규모 찾아와

윤순영 2014. 01. 17
조회수 3523 추천수 0
 

한두마리 보기도 힘든 황새가 17마리 큰 무리 이뤄 월동

인적 드문 폐염전서 물고기 등 먹어…부근서 농수로 공사, 보호대책 절실

 

st0.jpg» 담수호 갈대밭에 무리지어 찾아온 황새.


지난 4일 귀중한 제보를 담은 메일이 왔다. 이런 내용이었다.

   

두루미에 관한 기사 잘 봤습니다. 철원에 살아봐서 두루미에 대하여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이곳은 백령도인데 황새가 보입니다. 사람들 말로는 계속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이곳에 온 지 일 년이 되는데 처음 봤습니다. 7~8마리가 물가에 있다가 다가가면 피하고 하는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 데 너무 멀어 선명하지 않습니다. 황새가 우리나라에서는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나 해서 알려 드리니 참고 바랍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황새가 틀림없었다. 황새 7마리는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무리 중 적은 수가 아니다.

 

겨울철에 천수만과 금강하구, 해남, 제주도에 불규칙하게 5~10 마리가 찾아오는 것이 전부이다. 지난해 환경부의 겨울철새 동시 센서스에서는 간월 호 등 전국 6곳에서 모두 9마리가 관찰됐을 뿐이다.

 

직접 확인하고 싶어 이튿날 바로 백령도로 향했다. 2008년 점박이물범 조사 차 15박16일을 백령도에서 생태조사를 한 적이 있어 지리는 익숙하다.

 

6년 만에 다시 가는 먼 바닷길이다. 인천항에서 약 220㎞ 떨어진 서해 최북단의 이 섬에 가려면 쾌속선으로도 네댓 시간이 걸린다. 어둠이 깔린 오후 6시께 백령도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아침을 기다렸다.

 

st1.jpg» 호수가에 멀리 황새 무리가 보인다.

 

다음 날 갯골을 막아 백령도 주민의 자급자족의 농경지확보와 담수를 확보하기위해 만든 백령호수(약991,735 미방미터)로 향했다. 백령호수는 대가을리, 장촌리, 진촌리 중심에 있다. 날씨가 흐리고 을씨년스러운 호수엔 안개가 서려있다.

 

백령 호를 우선 둘러보기로 했다. 호수 가장자리에 황새 한 마리가 눈에 띤다. 그냥 지나쳐왔다. 무리를 보기 위해서다.

 

호수 건너편 갈대숲에 어렴풋이 하얀 물체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황새들이 모여 있다. 마음이 설렌다.

 

st12_화동염전YS3_9857.jpg» 화동 염전. 버려진 염전이 많아 황새의 먹이터 구실을 한다.

 

화동폐염전뒤로 대가을리 마을이 보인다.» 화동폐염전뒤로 대가을리 마을이 보인다.

 

폐염전으로 황새가 날아들고 있다.» 폐염전으로 황새가 날아들고 있다.

 

황새가 있는 곳을 가려면 화동염전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화동염전 갈대숲에서 4마리의 황새가 날아오른다. 일찍 백령 호 잠자리에서 나온 황새로 보인다.

 

백령 호에서 잠을 잔 황새들이 먹이 터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먼 거리이지만 차량을 세워 촬영을 하는데, 한두 마리씩 화동염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백령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황새 무리.» 백령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황새 무리.

 

생전 처음 황새 17마리가 있는 큰 무리를 관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황새는 겨울철에 천수만과 금강하구, 해남, 제주도에 불규칙하게 2~10마리의 무리가 찾아오는 것이 전부이다. 백령도에서 17마리의 황새가 관찰된 것은 처음 있는 일 같다.

 

백령호수를 떠난 황새가 옆에 자리한 하동염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80%가 폐염전이고 일부가 염전 구실을 하고 있다.

 

폐염전 주변에서는 농수로 개설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황새들이 갈대숲에 숨어 불안해 하고 있다.» 폐염전 주변에서는 농수로 개설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황새들이 갈대숲에 숨어 불안해 하고 있다.

 

폐염전에는 민물이 고여 갈대가 무성하고 조류들의 먹이가 풍부해 서식처로 제격이다. 하지만 염전에서는 농수로 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모처럼 큰 무리를 이룬 황새가 그 공사 때문에 방해를 받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백령도여서 다행이다. 황새의 새로운 도래지가 망가지지 않도록 당국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주 먼 거리에서도 황새는 곁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사 때문에 경계심과 불안감이 높아서인 것 같다.

 

백령 호 위를 날고있는황새 무리.» 백령 호 위를 날고있는황새 무리.

 

st4_아침햇살에붉게물든황새YS2_1110.jpg

 

st5_아침햇살에붉게물든황새YS2_1116.jpg»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하늘을 날아가는 황새.

 

황새는 아주 예민한 새다. 몇 년 전 러시아에서 황새 둥지를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까마귀가 집요하게 알을 훔쳐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까마귀뿐 아니라 맹금류가 어린새끼를 잡아가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경계심은 필수적인 조건 일 수 있다.

 

황새는 황해도와 충청북도 부근에서 8·15 광복 전까지 흔히 번식하던 텃새의 하나였다.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따라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개체수가 대폭 줄어든 데다 1960년을 전후해 밀렵 등으로 모두 희생되었고, 마지막 번식지였던 충청북도 음성의 한 쌍마저도 1971년 4월 밀렵으로 수컷이 사살되었고 암컷이 홀로 남아 해마다 무정란을 낳았다.

 

우리나라 마지막 토종 황새는 1971년 '과부 황새'가 되었고 농약에 중독돼 1983년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진 뒤 1994년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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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흰색 가슴털이 길고 날개깃은 검은색이며 날개 가장자리는 회색이다. 검은 부리는 길고 두터우며 크고 매우 강하게 보인다. 힘센 부리는 철판이라도 뚫을 기세다.

 

몸집에 비해 가늘어 보이는 주홍색 다리는 허약한 인상을 준다.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듯 정적인 몸짓, 한 걸음 한 걸음 살포시 내딛는 조심스런 발걸음은 느림의 미학을 보는 듯하다.

 

회색의 고혹적인 눈, 눈 둘레 붉은 피부의 무늬는 화장을 한 듯 이국적인 모습이다. 정중하고 묵직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동시에 주변의 모든 상황을 예리하게 눈동자 속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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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매를 두루 살펴볼 때 균형이 맞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런 역동성 덕분에 은밀하고 실수가 없는 매우 정확한 사냥꾼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황새는 몸길이 100~115㎝, 편 날개 길이 190~195㎝로 꽤 큰 편이다. 날개를 펴면 날개 윗면에 검은색과 흰색이 번갈아 나열된 굵은 무늬가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케 하며 흑백의 미를 더한다. 몸무게가 4.4~5㎏로 제법 무거운데도 발돋음 없이 사뿐히 날아오른다.

 

어미 새라도 울대나 울대 근육이 없어 다른 새들처럼 울지 못하고 목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숙이면서 부리를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낸다. 즐거워도 슬퍼도 울지 못하고 원초적인 몸짓 언어로 내면의 세계를 소통하고 표현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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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는 겉보기에 다른 새들에 견줘 완벽한 느낌을 주지 못하고 부족한 듯 어수룩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완벽함이야말로 자연의 경이로움 아닐까.

 

황새는 4년이 돼야 어른이 된다. 사람 나이로 12살 정도라야 번식을 하는 늦게 성숙하는 새이다. 5월~6월 2~6개의 흰 알을 낳아 32~35일 품으며 새끼를 53∼55일간 기른다. 번식지인 시베리아, 아무르 강, 연해주 남부 등에서는 알을 도둑맞는 일도 흔한데, 특히 까마귀가 집요하게 알을 훔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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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의 먹이는 물고기, 개구리, 무척추동물, 곤충, 쥐, 뱀, 다른 조류의 새끼, 식물성 먹이 등 잡식성이지만 이곳 백령도에서 황새가 즐겨 찾는 곳은 폐염전의 민물이 고인 곳이다.

 

그곳엔 어류가 풍부하고 옆엔 백령 호가 잠자리를 마련하고 주변에 평야와 습지가 있어 자유롭게 오가며 물고기와 작은 동물, 식물성 먹이를 먹는다.

 

st9_YS2_1711.jpg» 백령도의 황새 도래지는 갈대밭과 폐염전, 부근의 농지가 어울려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

 

황새는 지구상에 2500마리 이하가 생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이다. 이들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인접한 아무르와 우수리강변에서 번식을 한다. 월동을 마치고 4월에 번식지에 도착하여 나무 위에 새 둥지를 짓거나 옛 것을 수리하여 사용한다.

 

유럽황새는 부리와 다리가 모두 검붉은 색인 데 비해 한국의 황새는 다리만 붉은색이고 부리는 검다. 온몸이 흰색이지만 일부 날개깃은 검은색이다.

 

황새가 한국에서 예로부터 흔한 새였다는 것은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를 그림과 자수 등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서구의 황새는 신화나 우화에서 행복과 끈기, 그리고 인내를 상징하는 새로 묘사되어 왔다.

 

황새는 국제 자연보호연맹의 적색 목록에 제26번으로 등록되어 있는 국제 보호조로서 현재 러시아 시베리아의 시호테알린 자연 보호구에 약 650마리의 황새 무리가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선 1968년 5월 30일 천연기념물 제199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5월 31일 환경부에서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황새를 밀렵하다 적발되는 사람에게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고, 상습범은 7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는다.

 

백령도/글·사진 윤순영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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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해직 언론인들, 해고무효 소송에서 승소

법원 "파업의 정당성 인정된다"... 44명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서 원고 손 들어줘

14.01.17 10:27l최종 업데이트 14.01.17 12:34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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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해직 언론인들, 해고무효 소송 '승소' 판결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위원장(가운데), 최승호 PD(오른쪽), 강지웅 전 노조사무처장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하자, 서로 안아주며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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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17일 낮 12시 15분] 

2012년 170일간 파업을 벌이다 해고·징계 처분을 받은 MBC 언론인들이 해고 및 징계무효 확인소송에서 승소했다. 

17일 오전 서울남부지방법원 제13민사부(박인식 부장판사)는 언론노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에서 "MBC가 원고들에게 내린 각 징계 처분을 모두 무효로 확인하고, 해고자에게는 각 2000만 원, 나머지에게는 각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앞서 지난 2012년 MBC본부 노조원들이 170일간 파업을 진행하자, 회사는 정영하 당시 MBC본부장 등 6명을 해고하고 나머지 노조원에 대해서는 무더기 징계를 내렸다. 노조원들은 해고·징계 처분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는 "방송 매체는 일반 기업과 달리 표현의 자유와 올바른 알권리 보장을 위해 방송의 객관성과 공정성 보장이 필요하다"면서 "방송의 공정성을 위한 파업의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한 당시 노조원들이 파업을 한 목적을 두고 "특정 경영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MBC 경영진이) 공정방송협의회를 제대로 열지 않는 등 공정성을 위한 여러 절차를 훼손한 것에 대한 파업이었으므로 정당하다고 본다"며 "따라서 원고들에 대한 각 징계는 위법하다고 판단돼 모두 무효"라고 판시했다. 

정영하 전 MBC본부장은 "이번 판결은 파업에 대해 명확히 정의했으며, 무엇보다 파업의 정당성을 100% 인정해준 판결"이라면서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해고자와 징계자들을 원위치 시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최승호 전 MBC PD도 "방송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언론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이 땅의 언론 자유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닌 판결"이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MBC 경영진들이 판결을 받아들여 현재도 저질러지고 있는 불공정 방송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이라 말했다. 

MBC 항소할까? 노조원들 "박근혜 정부 향한 판결임을 명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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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하 전 MBC 노조위원장 축하해 주는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왼쪽)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하자,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이 축하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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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로 해직 언론인들이 MBC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됐다. MBC기자회는 성명을 내고 승소한 노조원들의 즉각적인 복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경우, 복직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MBC 해직언론인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정영하 전 본부장은 "이번 판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이것이 현 정권에 걸림돌이 될지 디딤돌이 될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승호 전 PD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한 행동들을 보면, 이명박 전 정권을 넘어서서 그 이상의 언론탄압을 하는 정부가 아닌가 싶다"며 "이번 판결은 이명박 정부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를 향한 판결이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에 이어 오는 23일에는 사측이 파업에 따른 업무방해 혐의로 제기한 195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선고가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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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소 판결에 기뻐하는 MBC 해직 언론인들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왼쪽)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4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한 뒤 함께 해고된 박성호 전 MBC기자협회장(가운데)을 안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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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받는 정영하 전 MBC 노조위원장 이명박 정부 시절 낙하산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을 요구하다 해직된 MBC 정영하 전 노조위원장(가운데)이 17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MBC본부 노조원 43명에 대한 해고·징계 무효 확인 소송 선고공판에서 승소한 뒤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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