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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민망한 중대 발표는 금요일에 합시다

2013년의 금요일들.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왼쪽부터),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 처형, 김용판·원세훈 국정조사 출석,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 성희롱 사건 등 금요일에 터진 대형 사건·사고로 <한겨레> 토요판은 커버스토리를 교체하거나 편집을 급하게 변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2013년 금요일의 사회사

▶ 올 한해 유독 금요일에 발표된 중요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검찰의 발표가 주로 금요일에 잡히면서, 법조기자들 사이에선 “신은 검찰을 위해 금요일을 창조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죠. 우연히 역사가 금요일에 이뤄진 걸까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금요일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토요판팀’의 기자가, 2013년 금요일의 한국 사회를 되짚어 봤습니다. 

 

 

지난 9월13일, 금요일. 불길하다는 13일의 금요일이었지만 <한겨레> 편집국은 조용했다. 지난해 1월 토요판 형식의 지면 제작이 시작된 이래 여느 금요일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최소한 오전까지는 그랬다.

 

기획기사 중심의 토요판이 발행되면서 <한겨레> 편집국의 금요일은 이전과 달라졌다. 당일자 사건기사 지면이 대여섯면으로 줄면서 금요일 근무인력은 이전보다 줄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평온한 분위기가 돌 맞은 유리창처럼 깨졌다. 오후 1시17분께 법무부가 출입기자들에게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을 실시하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2시 법무부 대변인은 공식 브리핑을 통해 ‘채동욱 총장의 혼외자식 의혹에 대해 진상 규명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30분 뒤에는 채동욱 당시 총장이 검찰 대변인을 통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신문 지면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날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사는 ‘채동욱 찍어내기, 청와대 직접 압박’이었다. 전날 오전까지만 해도 계획에 없던 기사였다.

 

 

만델라 서거·장성택 처형이야 그렇다 치고… 

 

2013년은 유독 금요일에 사건·사고가 많았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목요일 밤늦게 서거해 금요일 아침부터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고, 북한의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됐다는 소식도 금요일에 알려졌다. 담당 기자들은 사건 발생 직후 분주하게 기사를 작성했다. 국제부 기자들은 만델라의 생애를 조명했고, 통일부 출입기자들은 장성택 처형의 이유와 북한의 동향을 살폈다. 불가피했던 이들 사건과 달리 일부러 금요일을 택한 부류도 있었다. 특히 법무부와 검찰은 상습적이었다. 이로 인해 법조기자들에게 ‘불금’은 ‘불타는 금요일’이 아닌 ‘불안한 금요일’이 됐다. ‘금요일에 발표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검찰 고위 관계자들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금요일 발표가 검찰이 아닌 ‘윗선’의 의지라는 방증이었다.

 

올 한해 검찰과 법무부가 중요한 발표를 금요일에 한 것은 모두 다섯 번이다. 시작은 6월14일. 검찰은 금요일인 이날 국가정보원과 경찰의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반대에도 검찰은 선거법 적용을 강행해 야권에 ‘대선 정당성 시비’의 빌미를 제공했다.

 

 

13일의 금요일에 벌어진 
법무부의 감찰 발표와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퇴 
법조기자에게 ‘불금’이란 
‘불안한 금요일’의 줄임말 
경찰의 국정원 피의자 소환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국감 출석도 
새누리당의 서청원 공천 확정도 
교육부의 한국사 교과서 수정도 
약속이라도 한 듯 금요일에 발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선거법 적용’ 강행으로 정부에 미운털이 박히자 이번엔 법무부가 금요일 발표를 이어갔다. <조선일보>가 9월6일 ‘혼외자식 의혹’을 보도하자 법무부는 9월13일 금요일 사상 최초로 현직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2주 뒤인 9월27일 금요일에도 언론사 마감시간이 임박한 오후 5시20분에 감찰 결과를 발표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날 법무부는 이미 사퇴한 채 전 총장이 혼외관계 의혹을 받는 임씨의 레스토랑을 자주 출입했고, 채 총장의 집무실에 찾아와 부인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 임씨가 의혹 보도 하루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설명했다. 감찰 결과 중에 의혹을 뚜렷이 밝힐 만한 근거는 없었다. 현직 검찰총장을 사퇴로 이끌며 시작한 감찰이라고 보기엔 초라할 정도의 결과였다.

 

채 전 총장에 대한 감찰 결과가 발표될 당시는 기초연금 공약 후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빗발치던 때였다. 기초연금 공약 불이행이라는 이슈가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와 맞물려 커졌고, 대통령의 사과에도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기초연금과 연계되는 국민연금에 대한 불안감도 커졌다. 마침 이때 법무부는 이미 사퇴한 채동욱 전 총장에 대한 감찰 결과를 발표했다.

 

채 전 총장이 떠난 검찰은 금요일인 11월8일 감찰위원회를 열어 윤석열 전 국정원 사건 수사팀장에 대해 정직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윤 전 수사팀장은 트위터에 대선 관련 글을 올린 국정원 직원을 체포하면서 내부보고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감찰을 받던 중이었다. 하지만 수사 진행을 막았다는 의혹을 받는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은 ‘외압의 실체를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지 않았다. 일주일 뒤 금요일인 11월15일엔 검찰이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조명균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 대화록 초본을 의도적으로 폐기했다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검찰은 여론의 반응이 부담스러운 내용을 연이어 금요일에 발표했다.

 

 

비판이 예상되면 금요일에 발표 

 

금요일 발표는 검찰·법무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경찰은 국정원 사건의 주요 피의자, 참고인을 소환하는 날짜로 금요일을 골랐다. 대선 직전 누리집 ‘오늘의 유머(오유)’에서 여론 조작에 나섰던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는 올해 두 차례의 소환조사를 모두 금요일에 받았다. 취재를 담당한 <한겨레> 정환봉 기자는 1월4일 금요일 밤 12시를 넘어 새벽까지 수서경찰서 앞에서 김씨를 기다렸다. 정 기자는 “정씨에게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10시간 가까이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런 보람 없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귀가해야 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국정원 직원의 인터넷 활동을 도운 민간인 이아무개(42)씨와 또다른 국정원 직원 이아무개(39)씨를 소환 조사한 것도 2월22일, 4월5일로 모두 금요일이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도 금요일을 선호했다. 국회에서 진행된 국정원 국정조사의 증인으로 출석을 요구받은 이들은 당초 국정조사 마지막 날인 8월21일 수요일에 출석한다고 밝혔다. 최대한 날짜를 연기해 출석을 피하려 한다는 야권의 비판을 받자 금요일인 8월16일에 출석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오전 10시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거부했고, 원세훈 전 원장도 이날 오후에 국회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이들은 국회에 출석한 증인 가운데 헌정 사상 최초로 증인선서를 거부하며 “국민의 기본권인 방어권 차원에서 선서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의 후보를 결정하는 날로 금요일을 골랐다. 새누리당은 애초 10월7일 최고위원회를 열어 공천 후보를 정하기로 했으나 금요일인 4일로 앞당겨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의 공천을 확정했다. 이날 기습적으로 비리 전력이 있는 친박(친박근혜) 인사의 공천이 확정되자 당내에서조차 “국민들에게 박수를 받기 힘든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금요일 발표는 유행처럼 번졌다. 기획재정부는 7월5일 금요일 재원 마련 계획을 빼놓은 대선 지방공약 이행 계획을 발표했다. 총 167개의 지방공약 사업 가운데 96개 신규 사업에 들어갈 84조원의 재원 마련 계획이 빠진 졸속 발표였으나 많은 언론사는 이를 토요일자 단신으로 처리했다. 교육부도 금요일을 골라 교과서 수정을 명령했다. 나승일 교육부 차관은 11월29일 금요일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지학사 등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7종에 대해 41건의 수정명령을 통보했다. 교육부는 수정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출판사는 교과서 발행을 정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는 고의로 발표한 내용 이외에 불가피하게 터진 사건조차 금요일에 알렸다.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이 ‘올 한해 세계 8대 굴욕 뉴스’로 선정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대통령 방미 기간 중 성희롱 사건이 알려진 시기도 5월10일 금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정부와 검찰, 정치권은 왜 금요일 발표를 선호할까. 이명박 정부 시절 검찰을 출입한 한 기자는 “박근혜 정부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명박 정부 때도 비판이 예상되는 수사 결과를 금요일에 발표했다”고 말했다. 실제 검찰은 2010년 7월16일 금요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효성그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한상률 전 국세청장 사건(2011년 4월15일)과 특검 수사로 진행됐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저 터 헐값 매입 사건(2012년 6월8일) 등의 수사 결과를 금요일에 발표했다. 세 사건 모두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부는 대개 중요한 발표를 할 때 금요일을 피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서 두 차례 전월세 대책을 발표했다. 두 발표 모두 취득세, 양도소득세 완화 면제 등으로 부동산 거래비용을 줄여 전세수요를 매매수요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정부 발표의 내용을 인지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때 정부가 고른 요일은 월요일(4월1일)과 수요일(8월28일)이었다. 기획재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한 날짜는 8월8일 목요일이었다. 서민에 대한 세 부담이 무거워진다는 여론이 커지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세제개편안의 원점 재검토”를 지시한 시기는 월요일인 8월12일이었다. 국방부가 이어도를 포함한 새 방공식별구역을 발표한 시기는 12월8일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 발표하면 신문에는 월요일치에 실린다.

 

 

기자들의 대응도 소극적이었다 

 

이처럼 정부가 사안에 따라 다른 요일을 선호하는 모습은 뉴스의 생산 및 소비 형태와 관련이 깊다. 일단 토요일치 신문에는 당일자 뉴스 지면이 적다. 토요일엔 전체 지면의 수가 평일보다 4~8면 정도 줄어들고, 여기에 기획기사의 비중이 높아져 당일자 뉴스는 더욱 적어진다. 이런 경향은 지난해 1월 <한겨레>를 시작으로 국내 일간지들이 ‘토요판’을 잇달아 발행하면서 더욱 가속화됐다. <한겨레>를 따라 <세계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중앙일보> <국민일보> 등도 토요판을 발행하고 있다. <한국일보>와 <한국경제신문>도 ‘커버스토리’라는 문패를 걸고 기획기사의 비중을 늘렸다. 당일자 뉴스의 감소는 기자들의 근무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토요판이 보편화된 이후 금요일에 쉬는 기자들이 늘었다. 금요일에 큰 사건이 터질 경우 대처할 수 있는 인력이 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방송사들도 주말엔 뉴스 시간을 10~20분가량 줄여 편성한다. 내용도 연성기사로 채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뉴스의 소비 형태도 정부의 금요일 발표를 부추긴다. 국내 대부분의 일간지는 가정보다 직장 구독 비중이 높다. 토요일에 신문을 받아 보지 못하는 직장인이 꽤 있다는 의미다. 온라인을 이용하는 독자도 주말보다는 평일에 더 많은 뉴스를 소비한다. 지난 한달간의 <한겨레> 누리집 뉴스 조회수를 종합해보면, 주말에 뉴스를 조회하는 숫자(페이지뷰)가 주중의 60~70% 수준이었다. 또한 평일에 뉴스가 보도되면 이해 관계자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후속 보도가 이어질 수 있으나 주말에는 이마저도 어렵다. 이 때문에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일요일에는 뉴스가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다음주에 터지는 뉴스가 새롭게 부각되곤 한다. 마케팅 전문 업체인 뉴스와이어는 자사 블로그에서 ‘공휴일이 다가오거나 다른 뉴스가 진행되는 상황에는 보도자료 배포를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신문에 보도되기를 원한다면 금요일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권고한다.

 

악의적인 금요일 발표에 대한 기자들의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검찰을 출입했던 한 기자는 “과거에 검찰이 악의적으로 발표를 금요일로 택하자 기자단이 단합해 엠바고(보도 유예)를 걸고 월요일에 일제히 보도한 적이 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려면 정부의 잘못된 전달 방식을 지적하고 개선하게 하는 것도 언론의 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6월8일 금요일에 검찰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저 터 헐값 매입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오후에 발표를 접한 기자들은 검찰의 전달 방식을 문제삼고 월요일까지 보도를 유예해 평일자에 쓰기로 합의했다. 당시 합의를 이끈 이 기자는 “기자단이 보도를 유예해도 보안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위험이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자들의 결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꼬집었다.

 

새해 금요일은 어떨까. 적어도 <한겨레> 토요판은 내년 송년호에 한해의 금요일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기사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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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풀어놨더니 생태계가 살아났다

늑대 풀어놨더니 생태계가 살아났다

조홍섭 2014. 01. 10
조회수 11668 추천수 0
 

최상위 포식자 생태계 안정 구실 밝혀져, <사이언스> 총설 논문

퓨마는 하천둑 안정화, 늑대와 해달은 식물의 탄소 저장 도와

 

ap4.jpg» 1995년 미국 옐로스톤에 복원한 회색늑대. 청소동물이 번창하는 등 예상치 못한 생태계 영향이 보고되고 있다. 사진=윌리엄 리플


 
1995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회색늑대를 복원한 뒤 예상치 못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단지 먹이인 말코손바닥사슴이 줄어든 것만이 아니었다. 사슴이 뜯어 먹어 자라지 못하던 나무들이 무성해졌고, 이는 다시 생태계에 연쇄적인 파급효과를 냈다. 
 

 

무엇보다 늑대가 사냥하고 남기는 사슴의 주검이 늘어난 것은 회색곰부터 까치까지 청소동물에게 희소식이었다. 먹을 것 없는 긴 겨울을 버틸 양식을 늑대가 제공한 것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굶주린 사슴이 폐사하는 시기가 점차 늦어져 이들 동물이 굶주리던 참이었다. 결국, 늑대는 식물이 저장하는 탄소의 양을 늘려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한편,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의 영향을 완충하는 구실까지 했던 것이다.

 

ap3.jpg» 회색늑대가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일으킨 직접 간접 영향. 그림=윌리엄 리플 외, <사이언스>
 

 

ap1.jpg» 대형 포식자의 감소로 증가한 종과 감소한 종. 그림=윌리엄 리플 외, <사이언스>

 

흔히 맹수라고 불리는 초대형 포식자는 우리가 이제껏 몰랐던 다양한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윌리엄 리플 미국 오리건 주립대 교수 등 연구진은 지난 10일치 <사이언스>에 실린 총설 논문을 통해 세계의 대형 포식자 실태와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폭넓게 분석했다.
 

 

연구진은 사자, 호랑이, 표범, 회색늑대, 퓨마, 북극곰 등 31종의 맹수를 중심으로 기존 논문을 검토한 결과 이들 최상위 포식자는 단지 직접 먹이로 삼는 초식동물뿐 아니라 소형 포식자를 조절하고, 이는 다시 먹이 그물을 타고 수많은 생태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사자와 표범은 역사적 서식지의 각각 17%와 65%에만 살아남았는데, 이들이 줄어드는 만큼 개코원숭이가 늘어났다. 그런데 개코원숭이가 증가하면 영양 등 작은 발굽동물과 소형 원숭이도 줄어들고, 사하라 이남에서는 농가의 가축과 작물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중간 포식자가 먹는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은 사람과 겹친다. 그 피해는 개코원숭이를 밭에서 쫓기 위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에까지 미친다.
 

 

ap6.jpg»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데려간 개가 야생화한 딩고. 토종 보호에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포식자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5000년 전 오스트레일리아로 건거간 원주민이 데려간 개가 야생화한 딩고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최상위 포식자의 생태계 기능을  대륙 규모로 실험한 동물이다. 유럽 이주민들은 목양지역에서 딩고 피해를 막기 위해 5500㎞ 길이의 방대한 울타리를 세우기도 했다.

 

딩고를 박멸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생태계 변화는 분명했다. 딩고는 캥거루 등 토종 초식동물뿐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온 토끼와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 역시 들여온 여우를 잡아먹어 그 수를 조절했다. 그 결과 호주 고유의 식물과 소형 동물이 늘어났다. 하지만 딩고를 제거한 곳에선 외래종 토끼와 여우가 판을 쳐 소형 유대류의 멸종을 재촉했다.
 

 

ap5.jpg» 아메리카의 사자 퓨마. 사슴의 개체 조절부터 강변 유지까지 다양한 생태계 기능을 한다. 사진=윌리엄 리플

 

아메리카의 사자인 퓨마는 강둑을 지켜 준다. 퓨마는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대부분 사라졌는데, 그 반작용으로 사슴이 급증했다. 사슴은 어린나무와 풀이 돋는 강변에 출몰했고, 큰 나무뿌리가 지켜주던 강둑은 약해져 홍수에 쓸려 내려갔다.

 

늘어난 사슴은 멸종위기 식물의 감소는 물론 로드 킬로 인한 교통사고의 증가를 초래했다. 퓨마의 영향은 이밖에도 육상 및 수생 생물, 야생화, 양서류, 도마뱀, 나비 등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18~19세기 모피 사냥으로 멸종 직전에 몰렸던 해달은 최근 개체수를 회복했다. 그 과정에서 해달의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해달이 줄면 그 먹이인 성게가 늘고, 다시 그 먹이인 해초가 준다. 반대로 해달이 늘자 해초도 늘었는데, 방대한 연안의 해초 숲은 다량의 탄소를 가두어 기후변화를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
 

 

ap2.jpg» (사진 왼쪽) 1971년 해달이 많았던 알래스카 해안. 해초가 많다. 아래는 2001년 범고래가 해달의 90% 이상을 잡아먹은 뒤 성게가 바닥을 메운 모습이다. 오른쪽 위는 옐로스톤에 늑대를 복원하기 전 포플러 숲의 모습. 사슴이 갉아먹어 하층식생이 빈약하다. 아래는 2012년 늑대가 사슴을 잡아먹기 시작한 뒤의 모습이다. 사진=윌리엄 리플, <사이언스>

 

최상위 포식자는 수효도 적고 넓은 지역을 배회하며 많은 양의 고기를 먹기 때문에 쉽사리 인간이나 가축과 갈등을 빚는다. 그런데 연구진은 언듯 최상위 포식자가 목축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밝힌다.

 

맹수가 야생 초식동물을 솎아주어 풀의 생산성을 높여주고 초식동물의 질병이 가축으로 퍼지는 것을 막아 줘 오히려 목축의 지속가능성을 높여 준다는 것이다. 물론 가축을 잡아먹는 등 직접 피해는 있지만 이런 비용과 장기적 편익의 균형을 잡는 노력과 아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맹수의 잠재적인 혜택이 종종 과소평가된다”고 지적했다. 
 

 

경외와 상징의 동물이기도 한 맹수의 대다수가 멸종위기에 몰려 있다. 이제 자연계에는 최고 포식자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사람이 차지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의 사냥은 자연계의 최고 포식자가 하는 일을 대신하고 있을까.
 

 

이 논문은 “사람의 사냥은 포식자를 대신할 수 없다. 생태계에서 그 둘이 같은 기능을 하는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보통 자연의 포식자는 연중, 밤낮으로, 사람이 접근하기 곤란한 곳에서 사냥을 한다. 대상으로 하는 먹이 동물의 나이와 성별, 사냥 강도와 시기도 사람의 사냥과는 많이 다르다. 최상위 포식자는 먹잇감에 ‘공포의 생태학’이라 할 만한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결코 포식자가 생태계에서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맹수의 최대 위협은 사람의 인구 증가와 육식 증가라고 연구진은 강조한다. “맹수가 식물 다양성, 질병, 산불, 탄소 저장, 강의 유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상위 포식자는 생태계의 안정을 지켜주는 수호자 구실을 한다. 그들을 잃는다면 수많은 파급효과가 생태계를 흔든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맹수와 어떻게 공존하고 그들의 존재를 용인하는가에 지구 생태계 건강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William J. Ripple et. al., Status and Ecological Effects of the World’s Largest Carnivores, Science10 January 2014:  Vol. 343  no. 6167  
 DOI: 10.1126/science.1241484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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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 욕먹으며, 철도파업 대체인력 됐지만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4/01/11 08:15
  • 수정일
    2014/01/11 08:1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대체인력' 청년의 고백... 철도파업 철회 이후, '죽을 맛'입니다

14.01.10 19:58l최종 업데이트 14.01.10 19:58l

 

 

2013년 12월 철도파업이 장기화되자 코레일은 기관사 역할을 대신할 208명의 신규 인원을 채용했습니다. 12월 30일, 철도노조는 극적으로 파업을 철회했습니다. 대체인력이 출근한 첫 날입니다. 그들은 긴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순간 머릿속에서 '계약기간은 철도공사 요청시'까지란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종료된 지 열흘, 코레일 기관사 대체인력으로 채용된 박승원(28·가명)씨를 만났습니다. 그의 동의를 얻어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제보자의 요청으로 지명은 익명 처리합니다). [편집자말]
기사 관련 사진
▲ 코레일 '대체인력' 청년의 고백 "욕먹어도 어쩔 수 없어. 쓸 거야" 선배는 그날 밤 울분에 차 말했다. 세상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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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그날은 코레일 신규채용 원서마감이 하루 남은 12월 26일 저녁이었다. 책상에 앉아 코레일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반 년 만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늘 '남자는 기술을 배워야 잘 산다'고 하셨다. 그래서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유망하다는 지역의 철도학과를 선택했다. 후회한 적은 없다. 열심히 했다. 2012년 졸업과 동시에 기관사 자격증도 땄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우리 아들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셨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2년, 두 번의 코레일 상반기 공채에서 연속으로 낙방했다. 실력이 부족해 떨어졌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함께 시험 본 동기 30명이 모두 떨어졌다. 답이 보이질 않았다.

부모님께 더 이상 손 벌릴 수도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이력서를 다시 썼다. 자격증을 살피니 '철도기사'와 '대형면허'가 있었다. 군대에서 운전병하다 받은 대형면허가 새로운 직업을 갖게 할 줄 몰랐다. 2013년 11월부터 A와 B지역을 왕복하는 시외버스 기사가 됐다. 그렇게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나갔다.

"욕하라고 해, 어쩔 수 없어... 쓸 거야"

2013년 12월 철도 파업이 시작됐다. 

"뉴스에서 철도인원들 새로 뽑는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 일하고 있잖아요." 

괜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지 않았다. 너무너무 들어가고 싶던 코레일에서 새로 사람 뽑는다는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한 둘이 아녔다. '온 나라가 파업으로 인해 난리인데.' 선배들 자리 꿰차는 것 같아 우선 미안했고, 막상 들어가게 돼도 '대체인력'이라는 꼬리표가 걱정됐다.

12월 25일, 대학 선배·동기 넷이 만났다. 철도학과를 나왔지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보며 내년 공채를 준비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나마 일을 하는 건 나밖에 없었다. 술이 오르자 3년 동안 시험을 본 경훈 선배가 말했다.

"나는 쓸 거야. 이건 또 다른 기회야. 욕하라고 해. 쓸 거야."
"그럼 나도 쓸게. 경험이라도 좋아."
"언제 잘릴지 모르잖아."
"어쩔 수 없어."

그 날 대화는 밤을 새우며 이어졌다. 술은 내가 샀다. 다들 거하게 취한 밤이었다. 아침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콩나물국을 끓여주셨다. 

"아직 공채 안 끝났지?" 

다시 한 번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12월 27일, 공채가 마감되던 날 선배·동기 4명과 함께 코레일 A지부를 찾았다. '방문접수'만 허용한 탓에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부족했다. 원서를 내고 나와 집에 가기 위해 열차를 탔다. '철도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알림이 이어졌다.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하루 만에 하루살이 되다"

12월 30일 '대체인력' 첫 출근날, 떨리는 마음으로 교육장을 찾았다. 교육장엔 나를 포함해 대부분이 20대 중후반이었다. 그나마 친구 둘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퇴직 기관사'라며 "일당 15만 원씩 준다는 말에 지원하게 됐다"는 분도 있었다.

"여러분, 모두 아시겠지만 채용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채용은 철도공사 요청일까지'입니다."

근무계약서를 내밀며 담당자는 '채용일'을 강조했다. 교육은 이론부터 시작됐다. 오전 11시,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교육을 받고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어머니셨다. 그런데 다들 무언가 급한 연락을 계속 받는 것 같았다. 순간 분주해 졌다. 그리곤 이내 누군가 말했다.

"철도노조가 파업 철회를 결정했데."

파업 돌입 22일 만에 철회를 선언한 것이다. 그날부터다. 머릿속에서 '철도공사 필요시까지'라는 계약 문구가 떠나질 않았다. 뉴스마다 우리 이야기가 보였다. 댓글엔 "(대체인력은) 잘라도 된다", "연대도 모르는 놈들이다", "대체인력 어떡할 거냐" 등의 내용이 달렸다.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됐다. 

불안의 연속이었다. 오전 8시 30분 출근하면 제일 먼저 듣는 소리가 "우린 하루살이다"라는 자조였다. 다들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게 될 걸 알았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교육은 이어졌다. 뉴스에선 여전히 우리 이야기가 나왔다. 이론 교육은 닷새 동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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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만에 하루살이 되다" 채용은 '철도공사 요청일까지'입니다.
ⓒ 국토교통부 트위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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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벙어리가 됐다"

새해 벽두, 한 언론의 '속보'성 기사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 기사에는 '철도파업 대체인력 208명 계약해지'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잠시 후 국토교통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그 기사가 '오보'라고 했다.

"철도노조 불법파업에 따른 대체인력으로 채용한 217명 중 자발적으로 그만둔 9명을 제외한 208명은 현재도 근무 또는 교육 중임을 알려드립니다. 열차 운행이 정상화되는 시기(1월 14일) 이후에도 인력 부족 등을 고려하여 대체인력은 당분간 유지할 계획입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보도자료 하단에 꼬리표처럼 달린 '대체인력 채용 근로 조건'은 다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가. 근무기간 : 계약체결일부터 철도공사 요청일까지
나. 계약방법 : 일용근로계약

1월 3일, 최연혜 코레일 사장도 뉴스에 나와서 말했다.

"208명 중 코레일 퇴직자를 제외하고, 기관사 면허소지자와 인턴 수료자 171명은 근무를 이어갈 거다. 신규 채용 시 가산점이 있다."

이날 이후 더 이상 우리 '대체인력'들은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잘될 거"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 날 새로운 일정표를 받았다. 부기관사로 70시간 실습이 포함된 일정표였다. 하지만 1월 18일까지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빈 칸뿐이었다.

다들 겉돌았다. 서로 인사도 잘 안 했다. "이러다 잘리는 거지"란 말만 입에 달고 살았다. 아침 출근길에 어머니가 "괜찮은 거지?"라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는데 막상 집을 나와 버스를 타니 괜찮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일자리를 왜 그만뒀나'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그제야 불안한 현실이 온전히 보였다.

회사에 도착해도 마찬가지였다. 복도에서 서로 만나면 고개를 먼저 돌렸다. 파업에서 돌아온 사람도, 파업 때 남았던 사람도, 파업 때문에 새로 채용된 사람도, 파업으로 대체인력을 고용한 회사도. 다들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0시간의 실습이 시작됐다. 처음 실전에 투입되는 거라 바짝 긴장했다. 기관사를 보조하는 부기관사 역할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승원입니다." 

선배는 "잘 왔다"고 답해줬다. 하지만 표정이 없었다. 어두운 기관실, 4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열차는 운전 내내 덜컹거렸다. '채용은 요청일까지'란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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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 거리는 열차 우리는 4시간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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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종훈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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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청년사회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 중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대학생들은 책 발간 사업청소년들은 근현대사 공부모임

청년들의 성찰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촉구하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청년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교내 게시판에 대자보를 처음 붙인 고려대 주현우씨(28)와 40여명의 대학생은 지난 5일 고려대에서 모임을 갖고 철도 민영화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밀양 송전탑, 국정원 정치개입, 성소수자 등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다양한 주제의 대자보들을 책으로 내기로 했다. 대자보 내용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주씨는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안녕들’의 가장 큰 의미”라며 “참가한 사람 수만큼의 ‘안녕하지 못한’ 사연들을 기록해 두면 앞으로 각자의 처지에 따른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책은 오는 2월 중에 발간할 예정이다.
 
 

▲ 대자보 이야기·성과 정리
2월 목표로 출판사와 논의
철도 민영화 등 현안 회의도


▲ 왜곡 교과서·학교 벗어나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
매주 1회씩 책 읽고 토론


사회 현안에 대한 토론회 등도 준비 중이다. 이화여대 ‘안녕들’ 참가 학생들은 지난 4일 가진 모임에서 “철도노조 총파업이 끝났다고 철도 민영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므로 정기적인 회의와 토론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학생들은 먼저 11일에 철도노조의 파업을 평가하자는 차원에서 공공부문 민영화가 추진되는 이유와 민영화 해외 사례 등의 주제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청소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중앙대에서는 11일 ‘대자보 백일장’이 열린다. 학생들은 ‘중앙대 청소노동자 투쟁을 지지한다’와 ‘불통 중앙대를 규탄한다’는 두 가지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해 대자보를 쓴 뒤 페이스북 ‘안녕들’ 페이지에 올리고 학교 안에 붙이기로 했다.

고등학생 주축으로 개설된 ‘안녕들’ 페이스북 방문자들은 역사왜곡 논란을 낳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에 맞서 근현대사 공부 모임을 구성하기로 했다. 청소년들 스스로 ‘역사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기 위해서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한 청소년은 “박근혜 정부를 두고 어른들 사이에서 ‘유신 회귀’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데 ‘과연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학교 밖에서 공부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오는 23일부터 매주 1회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할 예정이다.

성공회대 ‘안녕들’ 학생들은 밀양에서 송전탑 설치 반대 활동을 하다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지난 9일 구속영장이 신청된 이 학교 새내기 조은별양(19)의 석방을 촉구하는 온라인 탄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동국대 등 서울과 지방 대학에서도 ‘안녕들’ 대자보에 공감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토론 모임들이 잇따르고 있다.

또 온·오프라인 ‘안녕들’ 참가자들은 각 지역별로 연대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해 국정원의 정치개입과 철도·의료 민영화 문제 등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고려대 김정훈씨(27)는 “참가자들의 생각이 다양해 일치된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성과를 분명히 남기고 열기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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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자살 '클릭'하는 우리, 모두 "자살 생존자"

 

 

['지금-여기'를 성찰하는 '자살론'] 천정환에게서 듣다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0 오후 7:59:46

 

 

 

 

 

 

 

본능적으로 삶을 지속해가는 우리에게 예고 없이 끼어드는 '누군가의' 죽음은 심리를 동요시키는 사건이다. 그 중에서도 자살은, 죽은 사람이 기획하고 실행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남은 자들에게 더 심대한 충격과 불가해함을 안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충격과 행위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본 적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성찰은커녕,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만연하고 일상적인 사건이자 때때로 호사거리가 되곤 한다. 이번 주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부모와 조부모가 동반 자살하자 역시나 많은 연예 매체가 빈소에서 플래시를 터트렸고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통해 비극을 실시간으로 소비했다. 고인들의 복잡했을 사정은 쉽게 한 가지 동기로 치환되었고, 죽음은 즉시 '치매가 불러온…' '치매 대책은 없나' '치매 정책 검토' 등 남은 자들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자살의 정황을 부정하려거나, 미디어 시대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해석과 표상의 메커니즘 자체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무거운 죽음이 인터넷 속에서 다른 검색어들과 뒹굴며 관음되는 상황, 너무 빨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의 율법으로 복귀하고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 삼아볼 수 있다.

 

▲ <자살론>(천정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국문학자 천정환은 그러한 우리의 "불충분한 애도, 불충분한 성찰"을 돌아보기 위한 시도로써 지난해 말 <자살론>(문학동네 펴냄)을 펴냈다. 19세기 말 뒤르켐의 <자살론 Le Suicide> 이래 많은 학자, 작가들에 의해 자살론이 시도되었고 천정환 역시 그 대열에 서 있지만 그는 자살이 "어떤 접근법과 '과학'으로도 완벽히 재현되거나 '이론화'되기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책을 연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책을 쓴 동력이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살의 근대'에 대한 문화론과 문화사적 접근이다. 근대 한국에서 일어난, 즉 우리의 '지금-여기'와 결부된 자살 사건과 그 '고통과 해석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하여 자살의 문제성을 밝혀내고자 한다. 미디어와 국가기구의 문법인 개인 문제-사회 책임이라는 이분법의 유혹을 거부하며 그는 "'윤리적 개인-사적 관계-사회적 상황'"의 연쇄 고리와 이를 둘러싼 근대의 클라우드를 구축해 보인다.

다음은 저자가 <자살론>을 통해 전달한 이야기 중 일부를 지난해 말 출간 기념 강연과 책의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강연은 지난해 12월 16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개최되었다. <편집자>


① '자살생각'

<자살론>을 쓴 뒤 많은 자리에서 "어쩌다 이런 책을 썼는가"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저를 잘 아는 분들도 '이런 주제에까지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시더군요. 자살이라는 주제가 그렇죠. 모두 중요한 줄은 알면서도 입에 올리는 것은 꺼리거나 부담스러워 합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그랬습니다.

책을 내고 인터뷰를 몇 번 했는데, 두 명의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머뭇거리면서 "죄송하지만 선생은 자살 충동을 느끼십니까"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약간 망설이다가 원론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자살 충동'이란 말은 잘 안 쓰고 '자살생각'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이라면 많이 한다고요.

자살이란 행동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의 심리적 문턱이 있는데요. 가령 막연하게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구체적으로 방법을 기획하거나 고민하는 것까지 말이지요. 그것들을 포함해 자살과 관련한 생각 전부를 자살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 자살 상황에 대해 이해해 보려 하고, 그 자살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고 언어화해보기 위한 생각, 즉 '자살생각'이라면 많이 해 봤다고 답했던 겁니다.

우리는 많은 자살 사건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루에 4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는 직접 아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혹은 유명인이라서 미디어를 통해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이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그 죽음에 대해 둔감한 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실감과 충격이 치유되는 것 자체가 삶의 경이로운 작용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지 못하고, 또 제대로 애도하거나 이야기해보지도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엔 쉬운 도덕적 평가 속에 안주해버리곤 하죠. 이게 <자살론>을 쓰던 저의 고민이고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제정된 '자살예방법'이 많은 허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해서, 2000년대 이후 낮아진 적 없던 자살률이 최근 들어 약간이긴 하지만 낮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살 동기에서부터 자살 유가족 상황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보건학·정신의학·사회학·복지학 등 많은 접근 방법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학위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적·학술적 노력이 자살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지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자살이란 말을 터부시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를 완화할 것으로도 기대되고요. 저 역시 마찬가지로, 자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자살을 학문적 틀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저뿐만이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전부 재현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이 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명시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 저자 천정환(국문학자, 성균관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② 자살의 '원인', 무엇일까?

이 책의 주요 관심사는 자살의 문화(사)입니다만, 그 문화는 사람들에게 자살이란 행위를 생각하게 하거나 실제로 하게끔 만드는 힘으로써의 고통의 내용과 성격이 변해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실제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의미화했는지, 이 역시 변화해 왔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을 '해석'이라 이름 붙인 거지요.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당장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며 '해석'을 시도하죠. 우리의 심리와 윤리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해석에 들어가는 것은 자동적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의식이고, 어떤 경우엔 죄의식의 정반대의 힘이지요. 그렇게 의미화하는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발전시키고 공유합니다. 그래서 사건들이 보도되고 '이런 원인이었다'라고 특정 지어져 전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이유)'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저는 그 표현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살행위는 하나의 인자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인이라 부르는 것들은 결정적인 방아쇠 역할을 한 것뿐이지, 사실 거기에 이르는 고통은 누적되고 반복되고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책에서는 자살의 '문제 상황'이라고 썼습니다.

"자살한 사람들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모든 우리처럼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며, 자살에 관련된 '객관적인' 상황과 맥락들을 갖고 있다. 그 상황과 맥락을 곧 '자살 이유'라 등치시켜 말하기는 어렵다. 즉 자살의 '이유'가 아니라 자살의 '문제 상황'이 있다. (…) '인과'와 '환원'의 유혹은 언제나 강력하지만 그것은 항상 오류와 오해의 결정적인 이유 아닌가." (<자살론> 46쪽)
 

ⓒ천정환


위의 도표는 각각 자살을 야기하는 복합적인 '문제 상황'과(그림1), 자살행동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그림2)으로, 다카하시 요시토모의 <고독의 병: 자살의 심리학>(변은숙 옮김, 알마 펴냄)과 박형민의 <자살, 차악의 선택>(이학사 펴냄)에 나오는 도표를 재구성하고 변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실제로 자살이 실행되는 데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일어납니다. 자살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결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고, 그 사이에 여러 문턱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직장, 사회가 무엇을 해주느냐, 어떤 안전장치를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결과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유럽 국가들은 자살률이 높은 편인데, 자살을 유발하는 요인 중에 일조량 부족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리학적 요인으로서 우울증과 자살 유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자연적인 한계를 복지 확충 등 사회적 노력으로 보완하려고 했던 거고요.

자살은 개인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극히 개인적인, 죽음의 일인칭성을 극대화하는 사건인 동시에 관계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말 그대로 자기-죽음(自殺)인데, '동반자살'이 매우 잦은 빈도로 일어나는 걸 보면 그 아이러니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어쨌든 자살의 문제 상황에서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살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거창하고 대단한 '살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그냥' 삶을 지속시켜주는 작은 장치들이었을 겁니다. 자살 직전에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 갑자기 느끼는 배고픔 등이 실제로 자살로 가는 문턱을 막을 수 있었다는 거죠.

"자살은 특히 지지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막연하거나 구체적인 자살생각을 할 때, 혹은 자살행동의 심리적 원인이 되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그것을 제어하고 '위로'해줄 타인과의 '관계'가 곧 지지다. 자살생각과 자살행동은 지지에 의해 결정적으로 제어될 수 있으며, 반대로 자살행동에 이르게 하는 것도 곤경에 처한 관계와 그에 대한 주체의 평가다." (61쪽)

"자살은 '관계'의 사건이다. 이 '관계'에 개적 자아의 상황과 사회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이 결절·접합하는 지점이 있겠다. 개별 인간의 '자아'가 처한 아포리아들, 즉 해결하기 어려운 사적인 삶의 모순과 함께 사회적 삶의 질곡이 만나는 접점들의 '관계'가 있고, 그것이 모두 파탄에 이를 때 자살이라는 비극이 야기된다." (62쪽)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자살, 차악의 선택>(박형민 지음, 이학사 펴냄). ⓒ이학사
<자살, 차악의 선택>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인 박형민이 자신의 사회학 박사 논문을 쉽게 고쳐 쓴 것이다. 3개 경찰서 관할에서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발생한 1321건의 자살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과 각 기록에 첨부되어 있는 405건의 유서를 분석하여 해당 자살자들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천정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많은 유서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상태를 더 이상 끌고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즉 "삶이 최악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자살을 '차악'으로 선택했다고 적고 있다. 책은 자살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객관화시켜 자신의 문제 상황과 삶에 대한 평가를 하는 '성찰성', 이런 과정을 거쳐 도출된 '메시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인 '타자 지향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살을 '소통적 자살'이라 개념화하며 그것을 8가지로 유형화한다. 즉 1300여 건 중 400여 건, 약 30%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기 위해" '차악의 선택'을 했고, 그것을 유서로 남겼다는 것이다.


③ 통계적 진실 : 지금 한국에서 자살 위험이 가장 높은 이들은?

한국의 자살과 관련된 몇 가지 통계를 보겠습니다. 그 전에, 자살을 '양적'으로 연구하는 통계학적 접근이 자살에 관한 인간적 진실을 전혀 못 보여준다는 공박을 짚고 넘어가 봅시다. 저는 자살의 통계학에도 분명 진실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인간-동물 '군락'의 진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유일한 '진리'인 야만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데, 양적 연구는 그 '진리'의 작용에 대한 대체적인 추세를 가시화하고 표상화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0년 한국의 자살 사망자는 1만 5566명으로, 하루 평균 42.6명이었습니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31.2명으로 OECD 가입국 중 1위입니다. (일본 19.7명, 프랑스 13.8명, 미국 10.5명으로 뒤를 이음) 이 세계 최고라는 자살률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시기의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반등, 그리고 이후의 꾸준한 상승으로 달성된 것입니다.

1998년의 자살자는 1997년 대비 42.6%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기록적이지요. 이건 당시의 자살률과 경제적 문제가 커다란 상관관계를 가졌음을 나타내는데요. 이 시기 자살자의 구성을 보아도, 25세~44세 남성 자살자는 49.7%, 45~64세의 남성 자살자는 무려 67.8%나 증가했습니다. 이후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17.4%와 -8.3%로 낮아졌습니다. 이 기록적 변동 양상을 'IMF 극복·경기 활성화' 이외의 다른 이유로 설명할 길이 별로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자살 통계는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경제'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못합니다. 즉, 빈곤의 구체적 의미와 그것이 자아들에 미치는 상태를 전혀 말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박형민 박사의 말대로 자살하는 구체적인 행위는 '문제 상황'으로부터 "성찰"과 "의미 부여"를 거치고 난 뒤에만 일어납니다.

"경제적 곤란이나 신체적 고통 같은 외적인 문제 상황에 대한 자살자들의 평가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과정이, 외적 '고통'을 내면화된 주관적 고통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같은 주관적 상황이 자살이라는 실제 행위로 이어지기 위해서 주체는 자살행위가 가져올 효과를 다각도로 평가한다. '내가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고찰, 상상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통한 소통의 욕구를 충족하고 표현하려 한다. 이 '의미 부여'의 과정이 충족될 때 비로소 자살이라는 행위가 일어난다." (<자살론> 50쪽)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높은 자살률은 거의 노인 자살 때문입니다. 노인, 특히 남성 노인의 경우 자살률이 너무 높아서 전 세대 평균 자살률의 4배에 이릅니다. 지역적으로는 강원, 충청 등 소외된 지역이 특히 높습니다. 자살이 자살 방법·도구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농약 등 비교적 '쉬운' 선택지가 신변에 있는 것도 원인 중 하나 아닐까 합니다.

앞서 말했듯 최근 약간 자살률이 낮아지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은 적은데요. 바야흐로 노령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독일 의사가 남성 우울증에 관해서 쓴 책을 보니, 인류사 전체에서 남자들이 이렇게 오래 산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반적인 기대수명이 80세가 넘는 것 자체가 미증유의 사태라 딱히 대책이 없다고 합니다. 여성들의 경우, 수다나 친밀한 감정 나눔 등 여성 특유의 생활양식 덕분에 우울증이 오더라도 강도는 약하다고 그 책은 설명합니다.

한국 노인뿐 아니라 전 세계, 전 세대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의 자살률이 평균 1.5배쯤 높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중독, 약물중독, 운동중독 등을 통해 우울증이 올만한 심리 상태나 스트레스를 잠시 밀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잠복되어 있다가 은퇴를 하거나 사회적 변동이 오거나 그로 인해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양상이 바뀔 때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그게 남성 우울증·자살을 불러오는 원인이라고 합니다.

한편 직업군을 다섯 개로 나눴을 때, 농림어업군, 단순노무직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관리직과 전문가 집단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출처 : '우리나라에서 직업군에 따른 자살의 표준화 사망비와 연령보정 비례사망비의 추세', 윤진하 외,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제23권 제2호, 2011년 6월, 173~182쪽))

지역으로 보면, 전국에서 서울의 자살률이 가장 낮습니다. 2013년, 6년 만에 감소한 서울시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23.8명으로 전국 최저입니다. 또한 도시 내부를 들여다보면, 서울의 경우 관악·용산의 자살률이 서초·종로보다 높고, 부산의 경우 "강서구(43.4)와 중구(34.7) 서구(31.4) 등 부산 외곽과 원도심 지역의 자살률이 크게 높"게 나타납니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학력이 높을수록 자살률이 낮으며 계층이 낮을수록 자살률이 높다고 합니다. 여성의 경우 이와 관련한 유의미한 통계는 없습니다. (출처 : '사회 계층이 자살 사망 위험도에 미치는 영향', 김문두 외, <보건과 사회과학>(제14집, 2003년 12월, 249~271쪽)) 그리고 소득은 자살생각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만, 취업 여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출처 : '우리나라의 자살 급증 원인과 자살 예방을 위한 정책 과제', 노용환 외, <보건복지포럼>(제 200호, 2013년 6월, 7~18쪽))

지금까지 자살 관련 한국의 현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상당히 거칠고 거시적인 통계들인데요. 자살예방법 같은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마 이런 것들을 참고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어떤 도움이 될까요? 그러니까 '40대/남성의 자살'을 둘러싼 숫자들을 살펴보는 게 그 사람의 자살을 막는 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이 통계들은 오늘날 한국 자살자 중 노인이 많다거나, 경기가 안 좋으면 중장년층의 자살률이 급등한다는 '현상'은 말해주지만, 자살에 이르게 하는 그들의 미시경제와 남성-자아의 드라마들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40대/남성/어떤 계층/어떤 원인(들)'까지 조사를 해야 자살의 진짜 문제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겠지요. 이와 관련한 보다 더 세밀한 역학조사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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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자살학적 문화사 : 조선시대의 열녀

자살은 초시대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해, 인간은 심하게 모욕당했을 때, 감당하지 못할 곤경을 겪을 때, 우울이나 다른 신체적 질병 때문에 절망에 빠졌을 때, '자기보존'이라는 본능의 원칙을 거슬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절망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동 방식,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징죄와 선악 판단 시스템, 그리고 그 정신적 토대를 이루는 '마음의 구조'는, 자살의 사회·문화적 내용과 형태를 바꾸어 왔습니다. 즉 이 죽음 충동에도 모종의 '역사성'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진정한 개인이 성립한 '근대'로 이행해 왔을까요?

조선, 특히 조선 후기에는 먼저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들이 속출했고 국가적으로 그들의 사례를 기록, 보존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유서에 해당하는 글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외의 유서는 왕조의 몰락과 함께 순사한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이 남긴 것으로, 모두 성리학적 세계관을 따른 삶과 죽음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몽아비 보아라
내 집 가난하니 백사에 네 가슴 태우는 일 알겠고 네 머리 반백 되었으니 내 가슴 아프고 넉O지 못한 살림 살며 가슴 태우는 일 알겠고 [혈흔으로 해독 불가] 네 자식 된 지 해 [혈흔으로 해독 불가], 내 초년 일은 오히려 네 모를 듯하니 대강 이르노라. 슬프다, 네 아버지 초상에 함께 죽기가 무엇이 어려우리마난 팔십 시어머니 의지하실 데 없고, 가장의 후사를 잇지 못하고 두 딸이 어리니 차마 함께 죽지 못하고, 그 후 시어머니 삼년상 지내고, (…) 네 마음 이러하니 내 차마 일시에 속이지 못하여 내 죽기를 지금까지 슬퍼 머뭇거렸더니 [혈흔으로 해독 불가] 아마 남은 생애가 많지 아닐 듯하고, 병들어 죽고 싶지는 않고, 한날 죽기로 한 맹서는 고치기 어렵고 이 맹서를 바꾸면 지하에 가서 남편을 대할 낯이 없을 듯하여, 네 효심을 다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


숙종 42년(1716년) 이 씨라는 열녀가 자기 아들에게 남긴 유서를 현대어로 번역한 글입니다. (<자살론> 75~76쪽에 수록) 그녀 나이 43세 때였다고 합니다. 이 여인의 남편은 27살에 죽었고, 그때 자기도 죽었어야 하는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이제껏 살아남다가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하였으니 자살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엔 그 당시에 요구됐던 미망인의 의무, 순절의 의무를 이제야 수행한다는 정서가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대부분 두 가지 이유로 자살을 감행했습니다. 위의 이 씨처럼 남편을 따라 죽는 경우가 하나이고(바로 자결하는 경우에서부터 삼년 상 치른 후에, 혹은 시어머니 모시고 아들 키우다가 도덕적 의무가 완수되었다고 판단할 때에 죽은 경우까지 유형은 다양합니다.), 하나는 여성으로서 수절하고 순결을 지켜야 하는데 강간을 당하거나 당할 위험을 입었다는 이유로 자살한 경우입니다.

특히 병자호란(1636~7) 당시 자살한 여성들에 관한 기록이 정말 끔찍합니다. 그 당시 조선이 청에 패하고 30만 명 정도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할까봐 혹은 강간을 당해서 자살을 감행합니다. 오빠나 남편이 '명예자살'을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고, 가부장이 자기 딸과 며느리와 함께 목숨을 끊어 몇 명이 한꺼번에 자살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그들이 유교 도덕 사회를 지키는 보루인 양 '열녀'라 칭송하고 기렸던 거죠. 한편, 그 와중에도 죽지 않고 끝내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환향(還鄕)녀'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사대부 사회가 골머리를 앓기도 했고요.

그로부터 한 세기 후,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1752~1800)조차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임금은 바쁜 와중에 지방 수령들에게 보고를 받아서 각 지역의 살인·강력계 사건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일일이 해석적 코멘트를 달아 <심리록>이란 책으로 남겼는데요. 여기에 자살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어떤 젊은 도령이 여인의 옷을 잡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강간이라 볼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도령은 여인을 짝사랑했고, 이후에 그녀에게 청혼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여인은 자기 몸이 더러워졌다면서 자살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인데, 정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건 즉시 죽었어야 여인의 본심(제대로 된 도덕심)이 드러날 텐데 왜 뒤늦게 죽었냐고요.

이런 열녀/정절 이데올로기에 반감을 가진 이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그랬습니다. 그는 '열녀 함양 박씨전'(1793?)이라는 소설인지 수필인지 살짝 모호한 글을 지어, 여인들이 남편을 따라 순사하는 일의 '과잉'을 비판했습니다.

작품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분량이 가장 긴 뒷부분의 내용은 전형적인 열녀 이야기입니다. 함양 박 씨라는 여인은 대대로 경남 함양 근처에서 현리를 지낸 '하찮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열아홉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약간 사기결혼(?)을 당한 것 같습니다. 정혼한 이후에야 남편감의 병(아마도 폐병)이 깊어 얼마 못 산다는 걸 알게 되죠. ("비록 용모가 잘생겼으나 병이 깊고 기침을 자주 해, 버섯이 서 있는 듯, 그림자가 걸어다니는 듯") 남편은 결국 6개월 만에 세상을 떴습니다. 박 씨는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며 삼년상을 다 치르고는 남편이 죽은 날 같은 시각에 맞춰 극약을 먹고 세상을 떠납니다.

작품의 두 번째 부분은 이 이야기와 사뭇 대조됩니다. 옛날 어느 형제가 관직에 있었는데, 그들의 하마평을 둘러싸고 여론이 시끄러워집니다. 그것은 형제가 과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고, 과부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형제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불러놓고 너희 사내놈들이 규중의 깊은 사정을 어찌 아느냐고 오히려 아들들을 꾸짖으며 동전 하나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일찍이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 자신이 수십 년간 밤마다 외로움과 싸우며 굴리고 만지던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동전이 네 어미가 죽음을 참을 수 있었던 부적이란다. 십 년 동안 손으로 만졌더니 이렇게 닳고 말았지. 무릇 인간의 혈기는 음양에 그 근본이 있고, 정욕은 그 혈기에 심어진 것이야. 사상(思想)은 홀로된 설움에서 생기고 상심과 슬픔은 사상에서 비롯되며, 과부란 것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니, 그 상심과 슬픔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지. 게다가 혈기란 것은 때에 따라 왕성해지기도 하니, 과부라고 해서 어찌 정욕이 일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 본능과 슬픔, 외로움을 다 견디고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야말로 '진정한 열녀'라는 것이 박지원의 입장입니다. 또한 작품의 서두에서는 "농가의 어린 부인네나 중인 계급의 청상과부의 경우"들까지 양반가에 강요되는 '열녀 되기'에 나서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합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사대부 가문이 누리는 특권만큼 유교적, 도덕적 의무도 무거웠고, 따라서 농민이나 상민 등 '무지렁이'들까지 그 의무를 질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박지원은 '사대부 지식인'이었지만,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녀 칭송의 문화는 근대 이행기와 초기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1899년에는 14세 된 어린 청상과부가 납치되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 1909년에도 강원도 철원에서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젊은 여성이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1917년)에서도 성폭행을 당해 정조를 잃은 주인공 박영채가 자살을 시도하지요.

그런데 이 당시 여성 자살의 표상에 이전과 구분되는 차이가 있다면, 정조를 유린당했다는 고난이 자살할 동기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10년대 후반 신 지식청년인 일본 유학파들이 쓴 근대적 단편소설을 보면 여성 자살은 매우 빈번하게 '성공'하는 사건이지만 그 주인공들이 동시에 주체적으로 처결할 '자신(自身)'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요컨대 과도기의 새로운 문학작품에서 자살은 구래의 표상과 전부 결별하지는 못했으면서도, 다른 차원의 자아의 고난이나 젠더 구조를 드러내기 위한 유력한 장치가 되었다. 이런 자살 서사를 통해 실제로 당시 조선 여성의 '마음'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이중구속의 상황으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110쪽)

또한 1910년대~30년대 여성 자살 사건을 보면,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혹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위하여 함께 자살한다는 개념인 정사(情死)나 실연으로부터 오는 실연 자살도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는 책의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실연 등은 지금이야 상당히 보편적인 경험이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失戀'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감정의 교환이나 이성애의 상황이, 그러한 상황을 지칭하는 언어 표상이 없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젠더 문제와 결부된 자살의 양태를 통해, 우리가 아는 자살/자살생각이 '역사적'이고 '근대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자살학적 문화사 : '분(憤)'이라는 감수성/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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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자살과 결부된 가장 강력한 담화소는 단연 '우울', '우울증'입니다. 조선시대에서 근대 이행 초기까지의 그것은, '분(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분'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화가 난다'고 할 때의 그 분노가 아니라, 수치·억울함·분노 등의 복합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분하고 수치스러워서'라는 심리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자살 동기를 표시하는 말은, 조선 사람들의 충동적이고 즉자적인 감성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라 유교 공동체인 조선을 떠받치던 주자학 이념과 깊이 연관된 정동이었습니다. 사단(四端) 중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부끄러움'을 가리키는 '수'는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리키고, 증오를 말하는 '오'는 타인의 부도덕에 대한 판단과 교정의 자세를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수와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오는 다르지 않은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의분과 즉통하는 이 수오는 공격적입니다. 의분은 자기 스스로나 타인에 의해 어떤 근본적인 도덕적 가치가 훼손되었을 때 마땅히 일으켜야 하는 감성으로, 의분 없는 인간은 윤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수오와 의분의 논리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처벌과 타인에 대한 의로운 폭력은 모두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명예자살과 타인에 대한 의살(義殺)의 경계는, 조선 시대 세계관 안에서는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부연하자면, 1890년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한 남자에게 모독을 당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아들이 어머니를 모독한 사람을 찾아가서 살인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살해당한 사람의 아버지가 '참 잘 했노라'고 오히려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불의의 상황에 처했을 때 도덕적 행위(폭력)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단지 수치스러워하거나 화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응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한편 '분'은 자살을 야기한 심리적 정동의 표현이자, 당시 사람들의 자살에 관한 앎과 표상이기도 했습니다. 즉 자살자들이 정말로 분을 못 이겨 자살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옛 문헌들이 독자들이 납득하게끔 '사실'로 쓸 때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라는 관용구를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근현대 한국인의 자살 유형 중 가장 일반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다음의 케이스를 통해 당시 조선인의 자살과 윤리에 대한 생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1896년 6월 27일자 독립신문 기사는 (…) 인천 항구의 병막지기 김소성이라는 사람이 "생애(생계)가 없는 데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 집 건넌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김소성에게 품을 파는 칠십 된 노모와, 오십 된 병든 처가 있었다며 그의 어려운 형편을 '서사'하고 있다. 이른바 '생계형 자살'로 분류될 만한 사건이다. 신문은 김 씨 부부에게 자녀가 하나도 없었고, 김 씨의 네 형제도 모두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점을 부기했다. 의지하거나 '지지받을' 가족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 씨의 고통이 인내될 수 없었다는 것으로 자살 '동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 어쨌든 주목할 점은, 이런 나름의 복잡한 원인이 있는 '자살'도,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를 써서 표상되고 있다는 점이다." (79쪽)

한편 이 '분'의 코드 또는 분사의 자살 서사는 1910년대에 들어서 차차 사라지게 되고 대신 "세상을 비관하여"라든가 "세상에 살기 싫은 까닭"과 같은 새로운 화소가 해석의 틀로 자리하게 됩니다. 제 책에서는 당시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내놓게 된 통계를 통해 새롭게 제시된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관료적 서사와는 별도로 이광수의 소설 등 문예 장르에서 나타난 '우울한 주체'도 살펴보았는데요. 당시 일제 경찰이 자살 원인을 분류하면서 "염세에 의한 자살" "우울로 인해" 같은 항목을 추가했다는 점, 초기 근대소설의 '자아'가 우울과 허무한 자의식에 휩싸여 있었으며 자살생각에 대한 표백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 등을 통해 자살 표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의분의 이념적·문화적 기반이 해체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 자신에 대한 도덕적 처벌로서의 자결이나 의살의 주자학적 가치체계와 그 수행성이 무너져 간 것이지요. 이 이후부터 '자살의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⑥ 자살의 근대 : 미디어

1910~30년대 조선의 원인별 자살자 비율을 보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정신 착란'입니다. 거기서부터 생활 곤란, 병의 고통, 가정 또는 친족과의 불화, 지난 잘못을 후회하거나 뉘우침 등등이 있는데요. 일제가 조선의 사회와 형사(刑事)를 지배하면서 처음으로 나오게 된 자살 관련 통계이고, 그들이 임의로 만든 원인 구분입니다. 엉성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이 통계로 인해 '자살률이 얼마다'라든지, '우리 사회가 어떤 고통에 처해 있다'라든지 하는 자살의 담론도 시작되게 됩니다.

1920년대 신문을 보면 자살 사건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자살이라는 현상이 급격히 '사회 문제'로서 포착·인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보도에는 분명 선정주의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오늘날 같은 자살에 대한 (자율적) 보도 규제도 전혀 없었고요. 특히 여성의 자살이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됐고,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식으로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기사도 많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부제를 달게 된 사료이기도 한데요. 1922년 5월 30일 한강 인도교 위에서 조순현이라는 배제고보 2학년생이 자기 교모와 교복을 벗어놓고 투신자살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실종자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였고 유서도 없었으니 교복 주인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자살인지 아닌지도 왈가왈부가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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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동아일보>는 그 주변을 추적해서 이틀에 걸친 상당히 긴 기사를 썼는데요. 처음 뽑은 큰 표제는 "낙제생의 투신자살"이었습니다. 즉 고등보통학생이 낙제를 했다는 사실, 그것을 자살의 원인으로 의미화한 것이지요. 그리고 중간 제목에 "자살이 분명"이라고 나와 있죠. "성명은 조순현", 또 "근인(近因)은 조혼의 죄악인가"라는 중제도 있습니다.

"금년 3학년 시험에 낙제를 하였으므로 항상 비관을 하였을 뿐 아니라…"라는 교사의 말을 인용해 '원인'을 추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주변인인 동급생의 말을 인용해 자살자가 "그전부터 신경쇠약이 있었으므로 정신에 이상이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도 썼습니다.

그가 낙제한 건 사실이고, 조사를 해보니 부모와의 갈등도 있더랍니다. 또 알고 보니까 1919년 3.1 운동에 학생으로 참가해 감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 후 자살자의 부모는 "자식의 행동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기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켰습니다. 조순현이 "최근에 이르러 이혼을 하겠다 하였더니 그 부모는 학비도 아니 보"냈으며, "이와 같은 사정으로 그는 항상 세상을 비관하여왔"다는 건데요. '근인은 조혼의 죄악인가'라는 중제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결국 비관이라는 결말은 같아도 '낙제'에서 출발한 자살 서사와는 인과관계의 연결이 상당히 다릅니다. 3.1 운동, 세대 갈등, 조혼 같은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차원의 문제가 결부되지요. 그리고 다음 날 이어진 후속 보도에서는 그의 친척이 전날 보도에서 말을 바꾸고 "원래 간질 증세를 가"졌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자살자를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실체적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죽음을 둘러싼 '맥락'은 상당히 풍부합니다. 이 신문 기사는 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탐구하고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인용된 자살자의 주변인들은 자살에 대한 인식과 '해석 갈등'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고요. 거꾸로 말해, 죽음을 둘러싼 해석 갈등이 신문의 언어를 통해 전 사회에 '중계'되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자살은 개인 탓 vs. 자살은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라는 논쟁의 씨앗이 보이기도 하고요.
 

ⓒ프레시안(최형락)


⑦ 자살의 후기 근대

미디어와 관련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자살을 둘러싼 해석과 담론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죠. 아니, 2013년 여름 성재기 씨의 죽음은 해석과 담론뿐만 아니라 죽음 예고와 상황까지도 중계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속에서 죽음은 대중문화의 현상 자체로서, 또는 인터넷 이념 대립이나 이야깃거리의 일부로 소비되었습니다. 물론 애도도 행해지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너무 쉽게 대상화되고 휘발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지요.

이 책은 '자살의 근대'에 대해 문화론과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 것입니다. 근대 초기 한국에서의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당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처한 새로운 '문제 상황'과 고통 자체가 보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다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자본주의나 새로운 젠더 및 가족의 정황들이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고통들 가운데에서, 또는 고통에 대한 해석의 그늘에서 '자살의 문화'라는 것이 피어납니다.

그렇다면 '자살의 후기 근대'도 있을까요? 저는 '자살의 근대'가 지속되는 한편, 그 속에서 자살의 후기 근대라 부를 만한 상태가, 아직 막연하나마,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징후는 앞서 이야기한 상황, 인간의 삶/죽음이 미디어가 제공하는 환상과 실재의 틈바구니에서 진행되는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미디어 중에서도 돈은 제1의, 궁극의 미디어이고요.

덧붙여 자살의 후기 근대는,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의 정념이 바뀌어 '동정 없는 세상', 무관심과 비공감의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무관심과 비공감은 이 후기 근대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조직하고 몸과 정신을 근저에서 변화시킨 결과이고요.

마지막으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이자 활동가였던 고(故) 윤주형(1977~2013) 씨의 유서 일부분입니다. 제가 읽어 본 자살 유서 중 가장 슬프고 강렬한 것이었고, 굉장히 문학적인 글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노동자로서 노동 운동에 참가하면서 겪은 일과,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썼는데요. 제겐 하나의 징후처럼 읽히더라고요.

"무엇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었답니다.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고 구구절절을 남깁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혹여, 다만, 어울리지 않는 열사의 칭호를 던지지 마세요.
잊혀지겠다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요.

(중략)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밸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후략)"


7~80년대 소위 '열사'라는 단어가 있었죠.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불러일으키는 심상, 실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들이 모이고, 아파하고 공감하면서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이 되곤 했던 일들. 그런데 이제 그런 일들이 이제 중단된 거죠.

물론 여전히 그 죽음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굉장히 일시적이거나 작은 규모이고, 오히려 미디어를 통해 쉽게 대상화됩니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도 무려 스물 몇 사람이나 되었기 때문에 '겨우' 정치적 쟁점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 '무반응'이야말로 바로 그 잇단 죽음의 가장 유력한 사회적 원인이며, 결과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죽음 문화의 가장 선명한 형식이고요.

"인간 해방의 이념과 대서사가 실종되어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이 사라지자,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도 소진된다. '노동'에 대한 추방과 배제는 이러한 과정의 정치적·정서적 효과의 하나다. 노동에 대한 배제는 노동자들의 죽음도 배제시킨다. (…)

죽음에 대한 인식 능력과 표상을 배분하고 또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윤리적 능력이나 이데올로기의 상황에 근거한다. 이제 우리는, 누가, 어떻게, 죽으면 충격을 받고, 또 그것을 인간다움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실천하는 재료로 삼을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전반적으로 상태가 안 좋은' 것이다. 이런 점이 우리가 처한 '자살의 후기 근대'가 아닌가 싶다." (332~333쪽)

 

ⓒ프레시안(최형락)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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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규제해도 돈 버는 병원, 빗장까지 풀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4/01/10 13:00
  • 수정일
    2014/01/10 13:0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의료민영화 집중조명②] 영리규제해도 돈 버는 병원, 빗장까지 풀면...

학교법인 직영 약품도매상들 부당내부거래 통한 배당 잔치 논란 되기도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입력 2014-01-10 07:12:37l수정 2014-01-10 11:06:26

 

 

 

 

"의료법인과 의료기관을 개설한 비영리법인은 의료업(부대사업을 포함)을 할때 공중위생에 이바지하여야 하며, 영리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감기로 동네 병원만 찾다가
목통증으로 MRI를 찍으려고 하니


의료법 시행령 20조(의료법인 등의 사명)의 내용이다. 법에서는 의료법인의 영리 추구를 금지하고 있다. 현실은 어떨까? 병원도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평소 감기 정도로만 동네의 개인병원을 이용하는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병원의 돈벌이를 실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몸 여기저기가 고장나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회사원 정모(38)씨는 최근 목에 통증이 있고 손가락마저 잘 안 움직여 사무실 근처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몇 마디 묻지도 않고, 심지어 손으로 아픈 부위를 만져보는 촉진도 없이 대뜸 "목디스크 같다"며 "CT를 찍어야 겠다"고 했다. 10만원 내외의 CT 촬영 비용도 부담이지만 의사가 미덥지 못했던 정 씨는 인근의 다른 정형외과를 찾았다. 증상을 말했더니 이번에는 엑스레이를 먼저 찍어보자고 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의사는 "목디스크 같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MRI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정씨의 머리속은 복잡해졌다. 병원 두 곳에서 목디스크 의심 진단을 받고나니 목은 더 아픈 것 같았다. 비용 부담은 돼도 MRI를 빨리 찍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왕 찍는 것 대학병원에 가서 찍고 경험많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게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정 씨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비급여진료비 정보를 확인했다. 홈페이지에는 암, 뇌혈관질환, 간질, 척수손상 등 몇가지 질환의 경우 MRI도 보험적용을 받을 수 있지만, 목디스크 진단을 위한 경추(목부위) MRI는 보험적용이 안 된다고 고지돼 있었다. 비용은 병원마다 약간 차이가 났다. 사무실 인근 병원을 우선 보니 서울대병원은 72만원이었고, 고려대병원은 70만원이었다. 서울대병원에 진료예약을 하려 하니 대기환자가 많아 한 달 뒤에나 진료가 가능했다. 그나마 고려대병원은 일주일 안에 진료가 가능했다. 그런데 MRI 촬영 비영과 별도로 선택진료비를 포함해 초진비만 2만원이 넘어갔다. 

정 씨는 고민끝에 동네 영상의학과에서 35만원에 MRI를 찍고, 촬영 필름을 CD에 담아 동네 정형외과로 들고가서 진료를 받는 쪽을 택했다. 
 
병원 내시경

서울의 한 병원에서 내시경 모니터에 치료제 주입을 위해 구멍을 뚫은 무릎연골이 보이고 있다.(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뉴시스

 
비영리법인으로 세제혜택 받으면서 
돈 벌기 위해 노력하는 병원들
환자 대상 돈 버는 방법 '과잉진료'


의료법인, 학교법인, 사회복지법인 병원들은 비영리법인으로 세제혜택을 받는다. 의료법인 병원은 소득금액의 50%까지 고유목적사업준비금으로 인정돼 법인세가 할인된다. 학교법인과 사회복지법인 병원의 경우 소득금액 전액이 고유목적사업준비금으로 인정돼 법인세를 안 낸다. 이들 병원들은 그외 취등록세, 지방세에서도 혜택을 받는다. 모두 비영리법인이기 때문에 받는 혜택들이다. 

비영리병원으로 세제혜택을 받으면서도 이들 병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환자를 대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과잉진료를 하는 것이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급여 진료와 검사를 늘리는 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상업화가 가장 많이 된 곳은 대형병원들이다. 중증 환자들이 많이 찾다보니 진료와 치료를 위해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과잉진료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병원은 부대사업을 통해서도 돈을 번다. 현행 의료법 49조와 의료법 시행규칙 60조에 따르면, 의료법인이 개설하는 의료기관에서는 매점, 음식점, 제과점, 산후조리원, 미용실, 장례식장, 부설 주차장 등의 사업을 직영 또는 위탁 운영할 수 있다. 대부분의 대형병원들이 이같은 시설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국립병원인 서울대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병원노조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장례식장, 식당, 커피점, 빵집 등을 병원내에서 운영해 한 해 150억원 가량을 번다. 

정부는 부대사업의 범위를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가 지난달 '투자활성화대책'을 발표하면서 예시로 든 사업은 의료기기 등 구매, 의료기관 임대, 의약품 개발, 화장품·건강보조식품·의료용구 개발 임대 판매, 의료기기 개발, 온천·목욕장업 등이다.

가능한 부대사업의 범위만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부대사업을 위한 자회사 설립도 가능해진다. 현재는 병원에서 진료와 부대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더라도 고스란히 고유목적사업인 의료에 재투자를 해야 한다. 그러나 주식회사인 자회사를 설립하게 되면 수익의 일부를 배당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회사에 투자한 주주들이 이익을 가져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교병원 직영 약품 도매상들
병원에 약품 비싸게 공급해 높은 당기순이익 내고
주주들에게 천문학적인 배당잔치


그렇다면 주주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자회사의 이익을 최대화해 배당금을 많이 챙겨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모회사인 병원이 자회사의 수익 창출 터전이 될 수 있다. 이때문에 비영리법인인 의료법인에 자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의료법인을 영리화시키는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모법인인 의료법인이 자회사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게 되면, 사실상 비영리법인인 의료법인이 적극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서울대병원분회장은 "자회사가 이득을 내지 못하면 자회사는 존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모회사인 병원은 자회사의 수익 창출 루트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병원이 자회사의 수익 창출 루트가 된다면 그 부담은 환자와 국민들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례가 있다. 학교법인 병원들은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해 자회사를 갖고 있다. 2009년 국정감사 때 이게 문제로 불거진 바 있다. 대형병원을 소유하고 있는 학교법인의 이사장과 가족 등 특수관계인들이 병원에서 필요한 의약품을 공급하는 직영도매상을 설립해 거의 독점적으로 의약품을 공급받았다. 당시 전혜숙 민주당 의원은 모두 8개의 직영도매상들이 계열 병원에 비싸게 약품을 공급했다고 지적했었다. 

당시 이들 병원이 직영도매상을 통해 공급받은 의약품 단가는 동일의약품을 국공립병원이 공급받을 때보다 평균 7% 비싸게 구매한 것으로 드러났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240개 의약품을 국공립병원들은 1조2797억원에 구매한 반면, 직영도매상을 통해 의약품을 공급받았던 계열병원들은 국공립병원들보다 86억1200만원 더 비싼 1조3659억원에 구매했다. 사실상 부당 내부거래로, 그만큼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이 된 것이다. 

계열병원에 약품을 비싸게 독점공급한 덕분에 직영도매상들은 업계 평균보다 훨씬 높은 당기순이익을 올렸고, 천문학적인 배당 잔치를 벌였다. 당시 전혜숙 의원이 직영도매상들의 감사보고서를 통해 배당금 내역을 확인한 결과, 4313%의 배당률을 보인 곳도 있었다. 1주에 1만원인 주식 1주당 배당금이 43만1373원이었던 것이다. 감사원 감사와 국감 등을 통해 이같은 사실이 이슈화 되면서 이후 약사법이 개정돼 약품 도매상들이 특수관계에 있는 계열 병원에는 약품을 공급하지 못하게 됐다. 

"자본투자 허용은 의료 영리화에 쐐기를 박는 정책"
"의료비 증가 속도, 건강보험이 견딜 수 없을 것"


정부는 의료법인의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면서 부작용을 막기 위해 △자법인 수익은 고유목적사업인 의료분야에 재투자하도록 하고 △모법인의 자법인 출자 비율을 제한하는 등의 규제 장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주식회사 설립을 허용한다는 것은 자본이 의료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들이 영리를 추구하고 그로부터 나온 이익을 배당금으로 챙겨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보고 미국 보다 더 영리화돼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민간병원이 94%인 나라는 전 세계에 아무데도 없다. 마지막 쐐기를 박는 것이 자본투자를 허용하는 것이다. 맹장수술 1500만원은 괴담이 아니라 우리 현실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국민건강보험체계를 손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료민영화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우리나라는 민간의료기관이 94%나 되기 때문에 그 민간의료기관을 통제하는 게 정부의 가장 큰 공적 기능이다. 민간의료기관을 통제하는 가장 큰 규제장치가 비영리법인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자회사 설립 허용은 비영리법인인) 의료법인을 영리화하면서 정부의 규제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료 민영화다"라고 말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당연지정제 등 건강보험체계에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도, 개인병원 중 20%만 영리병원으로 전환하면 연 1조5천억원의 의료비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을 2009년 내놓은 바 있다. 건강보험체계에 변화가 없어도 영리를 추구하는 병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국민 의료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얘기다. 건강보험 체계에 변화가 없으니 의료민영화가 아니라는 정부의 주장이 논리적으로는 맞아도, 현실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통계다.

우석균 정책실장은 "당시 보건산업진흥원 연구에서는 비급여 진료가 1% 증가할 때마다 진료비는 1천억원 씩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의료비 증가율이 OECD 국가 중 1위인데,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의료비 증가속도를 건강보험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의료법인에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고 병원 인수합병 등을 허용하는 정부 정책 방향이 건강보험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 전면적 의료 영리화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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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간디의 참회와 아버지의 눈물

김경재 목사 2014. 01. 10
조회수 98 추천수 0
 

[특별기고] 소년 간디의 참회와 아버지의 눈물 

 

2013.1.9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마하트마 간디와 넬슨 만델라 그 두 사람을 각각 ‘위대한 혼’과 ‘위대한 사람’이라고 존칭하면서 인종이나 정치이념의 울타리를 넘어 인류가 두 거인에게 쏟는 사랑과 신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두 지도자의 숭고함은 진실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용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간디는 아예 “진리가 곧 하느님이다”라고 굳게 믿었고, 만델라는 “진실을 고해하면 보복하지 않는다”고 자기를 박해하던 정적들에게 약속했다. 두 지도자의 공통적인 신념은 참 곧 진실만이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자유롭고 화평하게 한다고 믿었다.


특히 간디는 ‘진실과 용기’를 개인의 진리파지(眞理把持)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간디는 참만이 모든 도덕의 실체이며 또한 정치의 바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간디를 존경했던 타고르가 ‘마하트마’라는 존칭을 붙이자고 제의하여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르는데, 그 존칭이 사실은 두 가지 큰 부작용을 일으켰다. 첫째, 간디 자신에게 명예로운 기분은커녕 도리어 항상 ‘깊은 고통’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실토한다. 둘째, 사실 간디란 인물은 지극히 평범하고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진리실험’을 자신과 사회공동체 삶 속에서 실천해 가면서 위대한 인간으로 변화되고 완성되어간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첨부터 특별한 인물 되도록 타고났다는 잘못된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갖게 한다.

간디편집.jpg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 ‘진리에 대한 나의 실험 이야기’라고 부제를 붙였다. 그의 자서전 속에 다음 같은 고백적 이야기가 나온다. 간디가 십대 소년기 초반일 때였다. 겁 많고 내성적이었던 소년 간디도 보통 아이들이 일탈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처럼, 사춘기로 넘어오면서 성장을 위한 이런저런 유혹에 빠진다. 부모 몰래 담배를 피우고, 담뱃값을 마련하기 위해 나이 많은 집안 하인의 주머니에서 치사하게 동전을 훔치고, 친구 꼬임에 끌려들어가 채식주의 서약을 어기고 부모님 모르게 육식을 1년 가까이 했다. 결혼 초기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야 할 시간에 간디는 아내와의 잠자리에 탐닉했다고 고백한다.

간디의 자서전 속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들, 곧 평범하다 못해 평범 이하의 보통사람 성장과정 같은 고백적 이야기를 듣고 나면, 간디가 살해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직후 아인슈타인이 안타깝게 토로한 다음 같은 말을 얼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탄식은 뉴델리 간디기념관 입구 벽면에 쓰여 있다: “미래의 세대들은, 일찍이 실제 산 사람으로서 (간디 같은 사람이) 이 지구 위 세상을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20세기 최고 과학자의 추모사였다.

간디의 위대한 가능성은 15살 되던 해, 형님 주머니에서 금화 몇개를 훔친 일련의 사건에서부터 나타난다. 또래 아이들과 얽혀서 금지된 못된 일을 지속하기 위한 자금 조달 때문이었다. 그 도둑질이 너무 양심에 가책이 되어,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아버지 앞에, 떨리는 심정으로 글로써 적어 바치는 도둑질 고백문 제출 사건에서 ‘위대한 혼’은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한 소년 간디의 영혼은 자기를 착한 아들로 믿고 있는 부모를 속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덮고 넘어갈 수 없었다. 모든 꾸지람과 벌책을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자백하기로 맘먹었다. 성장하면서 한번도 부모에게서 체벌 당한 경험은 없지만, 소년 간디가 가장 두렵고 걱정되는 일은 자기를 믿던 아버지가 낙심하여 맘의 상처와 심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범죄를 계속 숨기고 지낼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의 양심 가책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상에 누워 있던 간디의 아버지는 평소 착하던 아들이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도둑질 참회문’을 받아들고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찬찬히 읽어내려 갔다. 종이에는 아들이 금화를 도둑질했다는 사실, 죗값을 어떤 벌로써든지 달게 받겠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도둑질 같은 짓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망 드린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행여나 자책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시 일그러진 아버지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그 눈물은 소년 간디가 내민 죄책 고백문 종이 위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소년 간디도 흐느껴 울었다. 아무 말도 없이 간디의 아버지는 아들이 내밀었던 죄책 고백문 종이를 죽죽 찢어버리고 침상에 다시 아픈 몸을 뉘었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기를 그 당시엔 아버지의 눈물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의 눈물’인 줄만 알았지만, 훗날 깨달은 것은 아버지의 눈물은 모든 것을 품고 감내하고 변화시키는 깊고 신비한 ‘참의 힘, 아힘사’였다고 고백한다. 간디 아버지의 눈물을 실험실에서 화학성분 분석 방법을 가지고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들 인생 경험을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감정이 간디 아버지로 하여금 말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러내리게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첫째, 순간적으로 오는 감정은 믿었던 아들이 저질러 놓은 실망스런 도둑질에 좌절, 분노, 일말의 배신감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부정(父情)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갈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런 감정은 순간이요, 간디 아버지 눈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둘째 이유인즉 착했던 아들이 도둑질하고 그동안 양심 가책을 받으면서 얼마나 맘고생이 컸을까를 생각하는 부모로서의 안쓰러운 맘 때문이었다. 대학입시와 취직시험에 합격하지 못해서 맘으로 괴로워하는 자녀를 보는 부모는, 자녀가 입시와 취직에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실패로 인해 마음앓이 하는 자녀가 안쓰러워, 마음 고통이 배나 더 큰 것이다. 간디 아버지의 눈물 속에는 셋째 요소가 들어 있다. 그것은 죄고백이라는 고통의 시련을 이겨내고, 양심의 자유와 인격의 자존심을 되찾은 아들의 영혼이 가진 용기와 진실을 향한 결단이 한없이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철도파업한겨레김태형기자.jpg

*철도노조 조합원들의 모습. 한겨레 김태형 기자

 

 

우리 사회 속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실고백의 용기와 행동하는 양심’이며, 비폭력적 자기희생의 내공, 곧 ‘아힘사’가 요청된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인간화된 사회가 온다. 그때라야만 갈기갈기 찢겨진 민심 분열은 치유되고 민족 영혼의 상처 부위에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인간다움의 본질은 날카로운 어금니와 강한 발톱에 있지 않고 진실에의 용기와 연민의 마음에 있다. 한민족은 지금 ‘진실의 법정’이라는 역사시험대 앞에 있다.
칼 포퍼는 진리에 가까운 이론이나 체제를 사이비 그것들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 ‘반증가능성’을 내세웠다.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 과학, 정치이념, 광신적 종교는 가장 무서운 개방사회의 적이며, 시민들을 불행에 빠뜨리는 독재자들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철도노조 파업 중 우리가 가장 슬퍼해야 할 사실은, 노조 간부 체포자에게는 일계급 특진 포상을 한다는 공권력의 반인륜적 모독 행위였다. 노조 간부는 사람이지 사냥감이 아니지 않은가?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집단적 의사표현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집회의 자유라는 법타령을 제쳐놓고 말하더라도, 솔직히 말해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이기적 사회집단 간의 조직적 힘의 균형과 상호견제라는 정치행동이지 왕조시대 임금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몰아세우는 야만적 행위와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오류의 가능성, 반증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용기 없음과 진실 외면이 진리를 살해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평안치 못하게 한다. 종교와 정치에서 교조주의와 선민의식은 독선과 광기 면에서 서로 너무나 닮았다. 특히 정권을 잡은 권력집단과 교권을 잡은 종교집단이 그러한 유혹의 덫에 걸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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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목사
근현대 한국 정신사의 한 획을 그은 함석헌 선생과 한신대·기독교장로회 교단 설립자 장공 김재준 목사 등 양대 거목으로부터 진리를 배운 신학자. 전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이자 한신대 명예교수.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내며 삭개오작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이메일 : jacobjae@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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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일제 망령…해법은 동학농민군 계승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16> 갑오년에 되짚는 동학농민전쟁

강응천 문사철 주간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10 오전 7:57:00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는 8.15처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들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는 기획이다. 필자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 <민음 한국사> 등 다양한 역사책을 기획하고 써 왔으며, 현재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주간을 맡고 있다. <편집자>
 

역사 오디세이
<1> 분단에 대한 배상…세 번째 8.15가 필요하다

<2> 8.29는 국치일일 뿐이다? "신한국 최초의 날"
<3> 서태지는 왜 노동당사 앞에서 발해를 꿈꿨나 
<4> 김구도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 당찮은 소리
<5> 해방 공간의 '전태일'들, 망각의 늪에서 구하라

<6> '단군이 오래전 건국', 그것만 자랑할 건가
<7>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8> 10월유신 41년…더 무서운 괴물이 솟아나고 있다
<9> 하얼빈역·궁정동…한국 근현대사 관통한 두 번의 10.26
<10> 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 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2> 미국이 한국 독립 낙점? 유영익의 기묘한 이승만 띄우기
<13> 개화파의 역사적 과오, 안중근이 씻어 내다
<14> 망령 되살린 수구의 '종북' 칼춤…6.29의 저주 풀어야
<15> 억압과 저항의 '선사 시대' 넘어 '민중기원'은 온다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여기서 다른 수단이란 무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전쟁은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시정잡배들의 패싸움과는 달리 정치 세력 간의 무력 대결을 필수 요소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1894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청일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그 전쟁에는 조선도 주체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청과 일본의 군대는 정부군이고 조선의 군대는 농민 집단이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동학농민군은 목적이 뚜렷한 정치 세력의 무력 조직이었다. 그전까지 민중이 이처럼 거대한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예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흔히 청일전쟁이라 불리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동학농민군을 핵심 주체로 하는 '1894년 동아시아 전쟁'으로 불려 마땅하다.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의 배경에는 갑신정변 실패 뒤의 '잃어버린 10년'이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당은 죽거나 망명하고 김홍집, 박정양 등 온건 개화파는 사대당 정권과 협력하며 숨죽인 채 지내야 했다. 역사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는 이 같은 상황은 호시탐탐 이권을 노리는 열강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우선 갑신정변을 진압한 여세를 몰아 조선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굳히려는 청의 압박이 거세졌다. 1887년에는 조선이 일본과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청의 속국인 조선은 외교도 청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갑신정변 때 체면을 구긴 일본도 조선을 개항시킨 자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청과 신경전을 벌였다. 그러한 신경전은 각종 특권과 시장 개방의 요구로 이어졌다. 일본이 싼값으로 곡식을 사 가는 바람에 조선 백성이 먹을 곡식이 모자랄 지경에 이르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일본으로 곡식이 반출되는 것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했다.

러시아도 이권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동해안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던 러시아에 조선은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그러자 동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와 신경전을 벌이던 영국이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여수 앞바다에 있는 거문도를 점령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것이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이 같은 영국과 러시아의 일촉즉발의 신경전은 청의 중재로 봉합되었다. 주권 국가인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민 씨 정권의 관료들과 아전들의 가렴주구는 더욱 심해졌다.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값싼 공산품이 조선의 산업을 억누르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전신주가 세워지고 전깃불이 들어오며 전차와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근대 문물이 일반 백성에게는 거의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아니라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이다

그때 소리 소문 없이 백성들 사이로 스며들어 간 것이 동학(東學)이었다.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인 천주교에 맞선 '민족 종교'인 동시에, 성리학에 맞서 인간 평등을 고취하는 '민중 종교'였다. 호서(충청도)와 호남(전라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던 동학은 1892년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최제우는 사악한 가르침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1864년에 잡혀 죽었는데, 수천 명의 동학교도가 모여 교조의 신원(伸寃)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이듬해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외세 구호로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개항 이후 쌓이고 쌓인 모순이 밑바닥 민심에서 폭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894년이 왔다. 그해 1월 10일(음력) 전라도 고부에서 작은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민란이라고 하니까 절차도 질서도 없는 농투성이들의 난장판일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날 노동자들의 파업만큼이나 공공연한 의사 표현의 수단이었다. 1892년 부임한 고부 군수 조병갑은 저수지인 만석보를 건설하는 노역에 농민들을 동원해 놓고 대가도 주지 않는가 하면, 저수지가 생겼다고 고을 백성에게서 무거운 물세를 거둬들였다. 참다못한 고부 양반들이 향회(鄕會)를 열어 시정을 촉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회(都會)라는 백성들의 집회를 통해 다시 요구 사항을 밝혔다. 그래도 안 되자 여러 명이 한꺼번에 상소하는 등소(等訴)를 하지만, 조병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지도자인 전봉준을 잡아 가뒀다.

이런 단계를 거쳐 마침내 전봉준이 고을 백성과 함께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아를 점령한 것이 고부 민란이었다. 그러자 조정은 장흥 부사로 있던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내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그런데 이용태는 탐관오리들의 비리를 규명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는커녕 그 책임을 민란 지도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꼼짝없이 죽게 된 전봉준은 일단 몸을 피했고, 민란 정도로는 썩어 빠진 조선 사회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월이 되자 전봉준은 주변 지역에 사발통문을 돌려 세를 규합했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 동학 접주들이 호응해 농민군과 함께 모여들자, 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무장(지금의 전북 고창)에서 봉기를 선포했다. 이들 농민군이 백산(지금의 전북 부안)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는 그 인원이 8000명을 넘었다. 여기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하라.
셋째,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혀라.
넷째,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멸하라.


셋째와 넷째 조항을 보면 농민군이 봉기한 목적이 정확히 드러난다. 농민군은 이미 전라도에 국한해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공격 대상에는 '권귀'라고 표현한 양반 집권층뿐 아니라 개항 이후 이 나라에 들어와 이권을 챙기고 백성을 궁핍으로 몰아가던 일본인까지 명시돼 있었다.

이처럼 명확한 목적을 가진 동학 농민군은 4월 들어 전라도 관군을 황토현에서 격파하고 그 위세를 만천하에 떨쳤다. 깜짝 놀란 조정은 대포와 기관총을 갖춘 중앙군을 내려보냈지만, 이들조차 황룡촌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의 총포를 막아내기 위해 '장태'(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고 속에 짚을 넣어 만든 것)를 굴리며 전진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4월 27일,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성이 동학 농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민 씨 정권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다. 제 나라 백성을 죽이라고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다. 청은 옳다구나 하고 군대를 보냈고, 일본도 청과 맺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했다. 톈진 조약은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으로, 어느 한쪽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다른 한쪽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파병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외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이들이 간섭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워 주었다. 그리고 전라 감사 김학진과 협력하면서 각지에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와 '도소'라는 지도 본부를 두고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써 내전이었던 동학농민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절반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 황룡 전투 부조. 황룡전적지(전남 장성) 소재. ⓒ강응천


백성 죽이라고 청군 끌어들인 왕실, 일본군 몰아내려 일어선 농민군

하지만 전주 화약은 동학농민군의 오판이었다. 전주 화약이 이루어지자 청군은 일본 진영에 함께 철군하자는 신호를 보냈으나 일본군은 철수를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이번이야말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확실히 제거하고 자국의 이익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명성황후의 맞수이던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 씨 정권을 무너뜨렸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영토를 탐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구실로 우선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며느리를 낙마시키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경복궁을 장악한 지 이틀 만에 일본군은 서해안의 풍도에서 청군에 선제공격을 가해 청일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 이틀 후 경복궁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우고 김홍집, 박정양 등으로 온건개화파 내각을 꾸려 갑오개혁을 시작했다. 조선의 독자적 개국 기원을 사용해 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게 하고, 의정부와 8아문의 기능을 확대해 국왕의 인사권, 군사권 등을 빼앗거나 축소시켰다. 문벌과 반상(班常)의 차별을 폐지하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며 과부의 재혼도 허가했다. 10년 전 갑신정변에서 실시하려던 개혁이 대부분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갑신정변이 어느 정도 자주적 성격을 지녔던 반면 갑오개혁은 철저한 일본의 감시와 보호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재현한 우키요에. ⓒ문사철 제공


뒤통수를 세게 맞은 동학농민군은 일단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 개혁을 추진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농민군이 지켜본 것 중 하나는 흥선대원군의 행보였다. 훗날 체포된 전봉준은 자신들과 흥선대원군 세력의 조직적 연계 가능성을 완강히 부인했고, 실제로도 두 세력의 정치적 목적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정부군과 협상을 할 때마다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복귀시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흥선대원군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동학농민군을 이용하려 했다. 당시 정국에서 상징적인 의미에서나마 민중의 신뢰를 얻고 있던 정치인은 '늙고 이빨 빠진 호랑이' 흥선대원군 한 명뿐이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청일전쟁의 추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움직여 일본 세력을 제압하고 일거에 정권을 잡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강인한 권력 의지와 당시의 좁은 입지를 감안하면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8월에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일본군에 참패하고 승기를 내주고 말았다.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평양전투가 일본군에 안겨준 좌절이 이번엔 청군에 밀려든 것이다.

국내에서 일본이 세력을 굳혀 가는 것과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들썩이는 것은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순수 친일 내각으로 제2차 갑오개혁을 시작하던 10월, 동학농민군도 남원, 삼례 등에서 재봉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적은 단순명료했다. 일본군이었다. 서세동점의 대리인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낡은 세력인 청,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력인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이중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은 1894년 동아시아 전쟁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은 전국적으로 20만 명에 달했지만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전봉준의 군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나흘간의 혈전을 벌인 끝에 궤멸되었다. 청군은 랴오둥반도까지 밀려난 끝에 뤼순과 다롄을 점령당하고 벼랑 끝으로 몰렸다. 그해 12월 2일 체포된 전봉준은 이듬해 4월 24일 갑오개혁의 근대적 법 개정에 따른 최초의 사형수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보다 조금 앞선 3월 23일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청일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
 

▲ 청일전쟁을 공식 종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재현한 우키요에. ⓒ문사철 제공


동학농민전쟁은 근대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얘기

동학농민군은 1894년 동아시아 전쟁에 참여한 세력 가운데 가장 전력이 약했지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그때까지 동학농민군에 비견될 만한 민중 세력이 이토록 강력하게 역사의 전면에 대두한 적이 없다. 그들은 민족 해방, 민중 해방을 부르짖으며 20세기 세계사를 장식하게 될 수많은 민중의 군대를 예고하고 선도한 세력이었다.

1894년 동아시아 전쟁에 참여한 일본 침략군, 청군, 조선 정부군은 모두 역사의 냉혹한 심판을 받고 사라져 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은 아직 역사에서 현실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동학농민군의 강령을 볼 때 그들의 전쟁은 근대를 여는 혁명이 아니라 왕정을 옹호하는 근왕적 농민 봉기였다고 평가절하한다. 가소로운 얘기다. 당시의 근대화, 이른바 개화가 무엇인가? 갑오개혁 때 이뤄진 '외세 의존적 근대화'가 아닌가? 개화파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 동학농민군이 그런 근대화를 뭐가 좋다고 따랐겠는가? 그들이 내세운 '제세안민'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내던져 버린 조선의 이상이었다. 자기모멸로 치닫던 왕과 사대부들이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동학농민군을 짓밟았을 때 그 이상은 조선을 넘어서고 근대마저 넘어서는 미래의 이상으로 전변했다.

2014년 갑오년을 맞아 동아시아의 정세가 1894년 갑오년의 정세를 연상시킨다는 분석이 많다. 이 소란스러운 정세에 끼어들어 춤추는 것들 중에는 이미 심판 받은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까지 있다. 그들은 망령에 불과하지만 이 땅에는 살아 숨 쉬는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 있다. 정의와 민주주의에 그 누구보다 민감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이야말로 1894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2014년 동아시아의 위기를 평정할 유일한 세력이 아닐까?

*주: 조선은 1896년부터 지금과 같은 태양력을 공식으로 채택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 1894년과 1895년의 날짜를 표기할 때는 당시의 공식 역법인 태음력에 따랐다.

 
 
 

 

     

/강응천 문사철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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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었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일부 고등학교가 교학사 교과서를 취소했습니다. 그러자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은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국정교과서라는 말은 별도로 없습니다. 1종 ,2종, 7종 등의 호칭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가 1종, 즉 '국정교과서'가 된 것은 1974년 박정희 정권 때입니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뀐다는 문교부 기사. 출처:동아일보

 


1973년 문교부는 검인정으로 되어 있는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1974년부터 단일책, 즉 국정교과서로 발행한다고 발표합니다. 

1974년 국정교과서로 바뀌기 전에는 중학교 11종, 고등학교 11종의 국사 교과서가 존재했었습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총 22종의 다양한 국사 교과서를 딱 하나만 남기고 없앤 것입니다. 


'박정희, '국적있는 교육'을 명령하다' 

박정희가 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꾼 배경에는 유신이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10월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며, '국적있는 교육'을 통해 10월 유신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1972년 3월 24일 대구에서는 박정희와 국무위원, 전국 77개 대학 총장, 전문학교장, 중고등학교 교장,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 및 문교부 공무원 등이 참가하는 '전국교육자대회'가 열렸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박수치는 연습까지 마친 교사와 교장,총장 등의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박정희는 '국적있는 교육'을 '명령'했습니다. 도대체 '국적있는 교육'이 무엇이었는지, 당시 전국교육자대회의 결의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국교육자대회 결의문>

① 안보교육체제 확립
우리는 국가의 안전과 겨레의 생존을 지키기 위하여 총력안보체제를 확립해야 할 국가적 요청에 교육의 전기능을 집중시킨다.

② 새마을운동 추진
우리는 자립과 번영을 위한 거족적 노력에 보조를 맞추어 방방곡곡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마을 운동에 우리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이십만 교육자와 팔백만 학생이 다 함께 전진한다.

③ 국민총화 저해요인의 제거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불신과 부조리를 제거하는데에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것이며, 학풍을 바로잡아, 나라가 요청하는 인재를 기르는데 우리의 정성과 열정을 다 바친다. 

④교육풍토 개선
교육자는 겨레의 스승으로서의 품위와 자질과 권위를 스스로 바로 세워 교권을 확립하고, 학교와 가정과 사회의 일치 협조로써 학원에 공부하는 분위기가 충만하도록 교육풍토개선에 과감한 노력을 펴나간다. 
 

전국의 교사와 교장, 총장, 교육부 관계자 등 8천명이 모여 낸 결의문을 보면, 무슨 반공단체의 결의문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북한 인민 전당대회에 나오는 결의문과 흡사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결의문을 통해 문교부는 1974년 장학목표를 <국적있는 교육과 생산적인 교육을 추진하여, 유신과업 수행에 앞장서는 성실하고 능력있는 한국인을 육성>으로 세웠습니다.  

박정희가 '국적있는 교육'을 명령한 결과 나온 것이 반공 교육과 새마을 운동의 확산, 그리고 비판 기능을 제거한 유신 과업 수행을 위한 기계적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국정교과서' 

박정희가 명령한 '국적있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1974년 나온 국사교과서는 한 마디로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교과서였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국정교과서를 보면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표기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5.16쿠데타를 ' 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뜻있는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켰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4.19의거는 독재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혁명'이었고, 5.16쿠데타는 '혼란과 공산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혁명'이었다고 주장하며, 4.19의거와 5.16쿠데타를 동일한 혁명이라고 서술했습니다.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했으며, '한국 민주주의 정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국정교과서는 이처럼 5.16쿠데타와 10월 유신을 찬양하는 홍보지에 불과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 국정교과서는 단순히 찬양에 그치지 않고, 아예 역사를 왜곡해버렸습니다. 

5.16쿠데타에 나온 혁명공약 6조를 보면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979년 국사 교과서를 보면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을 조속히 성취하고 새로운 민주 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로 바뀌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 국정교과서는 박정희의 장기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는데도 그 증거를 왜곡한 것입니다. 이것이 박정희가 22종의 국사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를 만든 목적이었습니다. 

' 편리를 위해 교육을 말살하겠다는 '국정교과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려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의 움직임에 많은 시민, 교사들이 걱정과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걱정은 이미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국정교과서 정책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각계이견, 출처:동아일보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서도 국정교과서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계속 있었습니다. 특히 신문에서조차 국정교과서가 문제라는 시각과 비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국사의 획일에서 오는 (대학입학시험 혼란방지) 이점은 있으나, 정확한 지식의 전달이란 점에서 무모, 국정교과서가 가장 좋은 책이란 보장 없어'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융통성을 길러주는 것이 고등학교 교육, 국정교과서는 암기교육을 더욱 강조하는 폐단도 초래' 
'획일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역사연구의 중요성이 사건의 단순한 기술보다 올바른 이해와 해석에 있기 때문, 국정교과서는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성만 찾는 위험한 발상' 


1974년 교육 전문가들이 내세운 국정교과서의 장점은 '대학입학시험'의 편리성입니다. 그러나 교육적인 측면에 의한 다양성과 사고력 배양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국정교과서를 비판했습니다. 
 

 

 


새누리당 염동열 의원은 JTBC '뉴스 9'에 출연하여, 국정교과서에 대해 '역사교과서가 하나로 통일되어 사교육이 줄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염동열 의원의 주장은 마치 1974년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대입시험의 편리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편리성을 위해 정작 중요한 교육은 배제한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1974년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고 찬양하기 위해 유신형 인간 배양을 목적으로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었습니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국정교과서'로 바꾸려고 하는지,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왜곡한 역사를 일본이 들고 나온다면, 무엇이라 변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면서,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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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외압 폭로' 권은희, 총경 승진 탈락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영향 미친 듯... 시민단체 "치졸한 보복"

14.01.10 00:36l최종 업데이트 14.01.10 00:5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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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권은희-김용판 지난해 10월 1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왼쪽)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앞)이 국정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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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에서 윗선의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한 권은희 수사과장이 총경 승진 인사에서 결국 탈락했다. 고시 출신들이 총경까지는 대부분 무난히 승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권 과장의 탈락은 이례적이다.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는 당장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정권의 치졸한 보복과 탄압"이라고 성토하고 나섰다. 

경찰청은 9일 경찰청 홍보 곽병우 경정 등 89명에 대한 총경 인사를 단행했다. 경찰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개인의 업무성과, 직무수행능력 뿐 아니라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청렴성, 도덕성 등까지 일선 기관장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는지를 꼼꼼히 점검했다"고 설명했다.

청문회가 낳은 '스타' 권은희, 경찰 지휘부엔 '뜨거운 감자'

그러나 경찰이 발표한 총경 승진 예정자 명단에서 권은희 과장의 이름은 없었다. 권 과장은 올해 총경 승진에서 탈락하면 계급정년을 맞게 된다. 그는 다음 승진에서도 탈락하게 되면 4년 뒤에는 퇴직해야 한다. 

이번 인사를 앞두고 권은희 과장의 총경 승진 여부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과정에서 '경찰 윗선 개입'을 폭로해 '스타 경찰'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권 과장은 국회 청문회 등에서 "경찰 윗선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부정한 목적으로 수사를 축소·은폐했다"고 폭로해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송파경찰서 사무실에는 시민들이 보낸 선물과 화분이 쇄도했고, 고등학생들이 방문해 권 과장과 경찰관들에게 빵 100개를 돌리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또한 실명 인증을 거쳐야 글을 쓸 수 있는 송파경찰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무려 2400여 개의 격려 메시지가 쏟아졌다. 인터넷 포털 다음 아고라의 청원 게시판에도 권은희 과장을 응원하는 청원 5개가 올라와 수만 명의 누리꾼들이 동참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반면 경찰 지휘부의 속내는 복잡했다. 권 과장의 외압 폭로에 대해 "경찰조직을 해쳤다"며 곱지 않은 시선이 팽배했지만, 당장 그에 대해 조치를 취하기에도 부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 과장을 인사 조치했다가 오히려 경찰 지휘부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경찰은 지난해 4월 권 과장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며 감찰을 시사했지만,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진상조사를 중단했다. 

당시 송파경찰서 자유게시판에는 권 과장에 대한 인사 불익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경찰 지휘부가 만에 하나 정권의 눈치를 보며 권 과장을 인사 조치한다면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과 경찰의 축소·은폐 시도에 성나있는 국민들에게 기름을 붓는 격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민진홍씨)
"부디 경찰 스스로가 '견찰'로 신세 하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신재연씨) 

특히 경찰 지휘부의 고민은 권 과장의 승진을 앞두고 더욱 깊어졌다. 권 과장은 사법연수원 33기로, 지난 2005년 특별채용을 통해 경정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경찰청 법무과를 거쳐 서초·수서·송파서 수사과장을 지냈다. 각종 경제사범이 몰리는 서울 강남권의 수사과장은 경찰 조직 내에서도 요직으로 꼽힌다. 게다가 고시 출신 경찰들이 대부분 총경까지 승진한 전례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총경 승진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끝내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권 과장이 경찰 조직에 불명예를 안겼다고 판단한 경찰 지휘부가 결국 그를 승진 대상에서 탈락시킨 셈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권은희 과장도 승진 대상자였는데, 이번에는 포함이 안 됐다"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권 과장이 총경 승진에서 탈락함에 따라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거센 반발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도 예상된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날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권 과장의 승진 누락에 대해 "누가 보더라도 치졸한 보복이고 탄압"이라고 성토했다. 안 처장은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장애가 되는 사람이라면 채동욱이든, 권은희든 누구라도 부도덕하게 찍어내고 불익을 주고 고통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은 커져간다"며 "두고 봐라. 고스란히 박근혜 정부와 경찰에 대한 심판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김현 민주당 의원도 "권 과장이 진실을 밝히려는 것에 대해 경찰이 계속 은폐하고 불익을 줘 왔다"며 "그의 공을 공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찰 지휘부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오면 경찰이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는데, 권은희 과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은 새롭게 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 강제 진입 작전 책임자들, 무더기 승진 논란

이날 경찰이 발표한 총경급 간부 23명의 경무관 승진자 중에 지난달 22일 민주노총 및 철도노조 강제 진입 작전 책임자들이 다수 포함된 것도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철도노조 강제 진입 작전에 참여한 뒤 이번에 승진한 경찰 고위직 인사는 정보·경비·수사를 책임지던 박건찬 경찰청 경비과장과 이용표 정보3과장, 송갑수 서울경찰청 경비1과장과 이철구 수사과장, 김양수 정보2과장이다. 서울경찰청 수사부와 정보 파트는 철도노조 지도부 수사 및 소재 파악을 위한 정보 취합을 전담하고 있고, 경비부는 진압 작전 당시 건물 진입과 안팎 경비 등을 맡았다. 

이들 고위 간부들은 민주노총 본부가 있는 경향신문 건물에 진입하는 작전을 감행하고도 정작 지도부 검거에 실패했지만, 이번 승진 인사에서 무더기로 포함됐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경찰은 지난달 말 치안감 승진 인사에서도 이번 작전의 책임자였던 이상식 경찰청 정보심의관과 서울경찰청 김양제 기동단장, 정해룡 수사부장을 승진시켜 비판을 받았다. 

영남권에서 경무관 승진내정자가 타 지역보다 2배 이상 많이 나온 것도 특정지역 쏠림현상이라는 지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출신 지역별로는 영남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충청 5명, 서울·경기 4명, 호남 4명 등 순이다.

경찰은 "민생치안의 최일선에서 '4대악 근절' 등 주요 국정과제를 적극 추진해 온 지역치안 책임자 등을 승진과 연계했다"며 "앞으로 총경 이하 후속인사를 조속히 마무리해 인사로 인한 치안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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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 개발독재'와 박근혜의 '민영화'

 
 

 

 


지난 1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국회의원 회동에서 철도 민영화에 대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몸에 끼기도 하고 불편하다, 몸에 맞는 옷으로 바꿔내야 한다.'면서 '경제 패러다임을 지금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문구는 사실 42년 전인 1972년에 TV에 이미 나왔던 표현입니다. 10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TV에서는 몸에 맞지 않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바지랑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영상이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이는 '현재 헌법이 국민 수준에 맞지 않은 큰 옷이다. 그래서 몸에 맞는 유신헌법에 찬성 투표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유신헌법 국민투표 홍보 광고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하는 '몸에 맞는 민영화'와 박정희가 주장했던 '몸에 맞는 유신헌법' 과연 타당성 있는 주장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개발독재, 그 수혜자는 국민이 아닌 재벌' 

유신헌법은 단순히 헌법을 바꾼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회,경제,문화 체제를 모두 변화시켰습니다. 특히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만들면서, 개발독재를 통해 이룩한 경제적 혜택의 수혜자로 국민이 아닌 재벌을 선택했습니다. 
 

 

 

 

 

유신헌법 개정이 있기 전인 1972년 8월 3일, 박정희는 일명 '8.3조치'라고 불리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 제 15호'를 발표합니다. 

'8.3조치'는 대기업이 빌려 쓰고 있는 고리 사채를 동결하여 대기업의 자본과 기업활동을 도와 경제 성장을 발전하겠다는 명분을 외부적으로는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8.3조치'는 박정희 정권과 기업유착의 정점을 찍는 재벌을 향한 엄청난 특혜였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8.3조치'를 위해 2000억원의 특별 금융채권, 200억원의 긴급 금융, 500억원의 합리화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이 자금을 통해 대기업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기존의 사채를 정리하거나 새로운 자금을 사채가 아닌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기업은 36.5%의 고금리 사채나 시중은행 대출금리 18%의 반도 안 되는 8%로 대출을 받아, 이자 지출이 3분의 1로 줄었습니다. 또한, 원금상환 일정이 최장 8년 뒤로 유예되어 대기업 입장에서는 지출이나 현금 유동성 면에서 속칭 '복권'을 맞은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기업의 건실한 운영을 위해 이런 혜택을 줬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기업들의 사채를 신고받고 보니, 신고사채의 3분의 1에 가까운 돈이 사채업자의 돈이 아니라 기업주의 돈이었습니다. 즉 기업주가 자기 돈을 자기 소유 기업에 빌려주고 고리 사채 대금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체 사채의 60%를 대기업과 공기업이 사용했으며 대기업의 타자본 의존도가 79.5%였다는 사실은 어떤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업주의 방만하고 불법적인 경영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채 때문에 기업 운영이 힘들다고 했던 기업주들이 실제로는 자신들의 돈을 불리기 위해 위장사채를 운영했으며, 박정희는 이들을 위해 엄청난 특혜를 베푼 것입니다. 

' 독재자는 특혜를 재벌은 정치자금을'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경부고속도로를 보면서 박정희가 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의 도로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된 강남개발은 '토건족'의 시작이자,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평당 5100원에 사들였던 강남땅 18만평을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71년에 1만6천원에 팔아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잠실아파트를 비롯한 매립사업 등을 진행하면서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챙겼습니다. 이렇게 박정희는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조성된 정치자금을 유신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통치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무너지게 된 동기 중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개발독재를 하면서 '조금만 참으면 우리도 잘살 수 있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지만, 실제 그 혜택은 오로지 정치자금을 주는 재벌에게만 돌아갔습니다.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박정희는 이런 애타는 목소리를 간첩과 용공조작으로 몰아갔고, 이런 억압적인 독재는 결국 유신반대 운동과 함께 뭉쳤던 것입니다. 

' 진짜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자칭 보수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 박정희가 벌였던 '8.3조치'는 반 자유민주주의에 해당합니다. 

고금리 사채이지만, 사채도 엄연히 당사자 간의 계약입니다. 이런 개인의 계약에 정부가 나섰다면 '사유재산권 침해'가 됩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 그 누구도 '사유재산권 침해'라고 입도 뻥끗하지 못했습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전에 나온 유신지지 광고. 출처:경향신문

 


10월 유신이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경제,문화,교육 등에는 유신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유신이 빠지면 간첩이 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구국의 유신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
'10월 17일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하듯이 평화통일 이루네'
' (유신헌법 국민투표) 잘 살기 위한 국민투표'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
'10월 유신은 구국의 길'
'10월 유신은 민족적 과업이다'


10월 유신이라는 말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로 대한민국은 바뀌었습니다. 이런 역사 앞에서도 여전히 자칭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외칩니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가 있고 다음 달인 12월에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간접 선거를 통해 99.9%의 찬성으로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이 됐습니다. 

박정희는 유신으로 모든 것을 잘살게 해준다고 했지만, 그 혜택은 재벌과 박정희에게만 돌아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민영화가 지금 시대에 맞는 옷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은 아버지 박정희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다른 사람이 잘살게 된다면 그것은 범죄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시간이 흘러도 범죄인지 모르는 대통령에게 2014년에 걸맞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르쳐줄 사람을 청와대는 찾아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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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kV 송전탑 아래선 전기가 없어도 불이 들어온다

▲ 765kV 초고압 송전탑, 밤이 되면... 이 영상은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촬영하는 '타임랩스'기법으로 촬영한 것으로 총 2200여장의 사진으로 만들었다.
ⓒ 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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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 송전선 아래에서는 전기가 없어도 형광등이 빛난다. 

송전선 아래 농로에 50여 개의 폐형광등을 꽂아두자, 형광등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빛을 발했다. 

이 영상은 지난 6일 밤 <오마이TV>가 당진화력발전소 부근 76만5000V 초고압 송전탑 아래에서 촬영했다. 송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자기장의 영향으로 폐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 전자기장에 의해 전자파가 발생된다. 

대한전기학회가 한국전력의 용역을 받아 작성한 '가공 송전선로 전자계 노출량 조사연구' 보고서에는 "76만5000V 송전선로 80m 이내에는 평균 3.6밀리가우스(mG) 전자파가 생성된다"라고 나와 있다. 

해외 연구 보고서는 "3밀리가우스(mG)의 전자파는 소아백혈병 유발률을 3.8배 높일 수 있는 수치"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한전은 "수많은 조사 결과의 하나일 뿐"이며 "확증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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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진화력발전소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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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충남 당진군 왜목마을 일대에 설치된 765kv 송전탑 아래에서 전자파의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설치한 형광등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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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현재까지 건설된 76만5000V 초고압 송전선로의 길이는 약 457km, 송전탑은 약 900기에 달한다. 

당진과 똑같은 76만5000V 초고압 송전선로인 밀양지역의 송전선로 공사는 올해 안에 완공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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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충남 당진군 왜목마을 일대에 설치된 765kv 송전탑 아래에서 전자파의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설치한 형광등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멀리 보이는 당진화력발전소가 밝게 빛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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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오후 충남 당진군 왜목마을 일대에 설치된 765kv 송전탑 아래에서 전자파의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설치한 형광등이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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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TV>가 7일 오후 충남 당진군 왜목마을 일대에 설치된 765kv송전탑 아래에서 송전탑 전자파의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형광등을 설치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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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세계 최대 희토류 생산국 되나

북한, 세계 최대 희토류 생산국 되나
 
 
 
NK투데이 
기사입력: 2014/01/09 [01: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편집자 주: 새로 창간한 북 전문 통신사 'NK투데이'에서 2013/12/18에 올린 글인데 올바른 한반도 운명개척 방도를 찾는데 꼭 필요한 정보라고 판단되어 늦었지만 자주민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원문은 http://nktoday.tistory.com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009년 7월 1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함흥반도체재료공장을 시찰하면서 희토류광물생산공장에서 생산한 제품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자주민보, 한호석 소장 제공



오스트레일리아의 국제 사모펀드 <SRE 미네랄스>(이하 SRE)는 12월 4일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의 <조선천연자원무역회사>와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희토류를 개발하기 위한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합작회사 <퍼시픽 센추리>(Pacific century Rare Earths Minerals Limited:PCL)가 앞으로 25년 간 정주시 지역의 모든 희토류 개발권을 가지며 그 가치는 약 65조 달러(약 6경8799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SRE 집행이사 루이스 슈어만(Louis W. Schurmann) 박사는 지질탐사 프로젝트 29년 경력의 이 분야 전문가로 현재 남아공 샤모니 지오컨설턴트(Chamoni Geoconsultants) 이사, 광물수출업체인 TRV 글로벌 지질 및 관리부문 이사, 아시안 타이거골드 코퍼레이션 최고경영자(CEO), 북한 안주 천연에너지 총괄이사, PCL 총괄이사 등을 맡고 있다. 슈어만 박사는 정주가 세계 최대 희토류 산출지(“the World’s largest known REE occurrence”)라고 주장했다. 
   

희토류란 무엇인가   

희토류(稀土類, Rare Earth Elements:REE)란 란타넘족 원소 15개와 스칸듐, 이리듐 등 17개 원소를 말한다. 희토류는 희귀한 원소는 아니지만 농축된 광물 형태로는 구하기 힘들어 희토류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토류가 들어있는 광물은 200종 이상이지만 실제 경제성이 있어 공업용으로 이용되는 광석은 모나자이트(monazite), 바스트나사이트(bastnasite), 제노타임(xenotime), 이온흡착형광 등 몇 개 없다. 원소를 기준으로 경희토(輕稀土, LREE), 중희토(中稀土), 중희토(重稀土, HREE), 비란탄계가 있다.  

희토류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된 금속 원소로 건조한 날씨에도 변화하지 않고 열을 잘 전도하며 탁월한 화학·전기·자기 성질을 갖고 있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희토류의 종류와 용도는 아래 표와 같다.  




표에서 보듯 희토류는 첨단 산업에 두루 쓰이는 매우 귀중한 금속이다. 우리가 늘 쓰는 스마트폰, 카메라, 컴퓨터, 삼파장 램프, LCD 연마광택제는 물론 하이브리드 자동차, 풍력발전, 태양광발전 등 차세대 산업에도 필수적인 금속이다. 그래서 흔히 희토류를 21세기 산업의 비타민이라 부른다.    


그런데 희토류는 분리 정제가 매우 어려워 개발이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일부 나라들이 선전 처리기술을 독점하고 있어 한국은 원료 소재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은 1천년 동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지만 94%가 경희토류이며 그 가운데서도 세륨과 란타늄이 74%에 달한다. 나머지 희토류는 매우 희귀한 상황이다. 한국에도 약 32만2천 톤의 모나자이트가 있지만 대부분 전희토산화물(Total Rare Earth Oxide:TREO) 함량, 즉 품위(grade)가 0.1% 이하로 개발이 불가능하다. 2011년 6월 말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충주, 홍천의 희토류 15만 톤 발견도 결국 0.6% 정도의 낮은 품위로 인해 경제성 논란을 불렀다. 


현재 희토류는 매장량이나 생산량 모두 중국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별 희토류 매장량, 생산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출처 : <월간 세라믹코리아> 2012년 7월호 통권 290호. 생산량은 2008년 기준
   

북한 희토류 매장량은 세계 1위?

그렇다면 북한에는 얼마나 많은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을까?  

이번 계약을 위해 북한 정주시에서 광물탐사작업을 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 지질 자문업체 HDR 살바(Salva)에 따르면 정주시의 희토류는 광물로 60억6497만 톤이며 TREO로 2억1617만 톤(이 가운데 2.66%는 중희토류-HREE)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전세계 TREO 매장량 1억5422만 톤보다도 많은 양이다. 
  

이 믿기 어려운 수치가 과연 사실일까?

사실 북한의 희토류에 대해서는 이미 전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져왔다. 2011년에는 일본 <조선신보>가 <세계가 주목하는 조선의 레아 아스>(레아 아스는 Rare Earth, 즉 희토류를 뜻함)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북한이 세계적 희토류 매장지이며 정주시가 있는 평안북도는 물론 황해남도, 강원도, 함경남도, 량강도 등 거의 전 지역에서 약 2천만 톤이나 발견됐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2012년 11월에 나온 주간 시사인 271호 기사 <북한 희토류 매장량, 알고보니 세계 2위>에는 북한의 합영투자위원회가 그해 3월 발표한 자료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희토류 광물 매장량이 10억 톤 이상, TREO로 4800만 톤이라고 한다.  

2012년 12월 18일 방영된 KBS 시사기획 창 37회 <북한 자원을 지켜라>편은 북한의 희토류 매장량이 2천만 톤이며 경제적 가치는 50조 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HDR 살바의 탐사 결과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북한의 희토류 매장량이 세계 1, 2위를 다툴 만큼 많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품질도 우수한 북한 희토류   

한편 희토류는 광물 내 함량이 낮고 정제가 까다로워 품위(grade)가 매우 중요하다. 품위란 광물에서 유용성분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를 비율로 나타낸 것으로 광석의 가치를 따지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다. HDR 살바의 탐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 정주의 희토류 품위는 평균 3.56%이며 품위별 매장량은 다음과 같다. 



 
평균 3.56% 품위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마운트 웰드(Mt. Weld) 광산(평균 품위 8%)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꽤 높은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품위가 2% 이하면 경제성이 떨어져 채광하지 않는다. 참고로 세계 6위 매장량을 자랑하는 미국의 베어 랏지(Bear Lodge) 광산의 평균 품위가 3.45%다.  

앞서 언급한 시사인 보도나 KBS 방영물에서도 북한 광산에서 나온 샘플을 분석한 결과 품위가 10%를 넘어 중국이나 미국보다도 우수하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는 샘플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전체 평균 품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북한은 일찍부터 희토류를 연구, 개발했으며 이 분야에서 일정한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희토류 공업에 뛰어든 때는 1980년대며 1988년에는 조선국제화공합영회사를 설립해 희토류를 수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함경남도 함흥시에는 전 세계에 몇 개 없는 희토류 제련소가 있다.   

<월간 세라믹코리아> 2013년 7월호 통권 302호에 실린 <희토류 제련 기술 현황 및 국내 희토류광 개발 전망>에 따르면 북한은 가성소다분해법을 이용해 모나자이트 정광을 분해하는데 이는 농황산분해법에 비해 조업자 건강이나 환경보호에 좋고 설비 부식을 막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사실 희토류 개발이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희토류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환경파괴 때문이다. 농황산분해법을 이용하면 1톤의 희토류 정제 후 약 7만5천 리터의 산성폐수와 방사성 폐기물을 포함해 1천만 리터 가량의 폐기물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가성소다분해법이다.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에 대해서는 전부터 많은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희토류에 대한 보도처럼 시간이 갈수록 새롭고도 놀라운 내용이 나오고 있어 북한 지하자원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귀한 지하자원을 외국에 팔아넘겼다며 안타까워하지만 이번 희토류 개발은 분명 북한 기업과 국제 펀드의 합작투자다. 투자 비율과 수익금 배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간 북한 정부가 지하자원에 대해 남달리 까다로운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서해 유전에 대해서는 경제가 어려웠다는 90년대에도 영국 아미넥스(Aminex) 등 여러 외국 기업의 투자 제안을 거절했다. 이 때문에 외국 관계자들은 북한이 자기 고집으로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보고 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희토류 수입량은 3287톤, 5900만 달러였다. 이번에 SRE가 밝힌 정주시 희토류의 가치는 6경8799조 원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액수에 달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자원을 외국 펀드와의 합작이 아닌 남북합작으로 개발했다면 남북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이익을 주었을 것이다. 꽉 막힌 남북관계를 마냥 방치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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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박근혜 복지 공약,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토론회] "감세 기조 철회하고 적정 부담·적정 복지로 바꿔야"

김윤나영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08 오후 4:47:44

 

 

 

 

 

 

 

경제민주화와 복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었다. 하지만 지난 6일 취임 1년이 다 돼서야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복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임기 첫해 박근혜 정부의 복지 정책을 평가하고 남은 과제를 모색하는 토론회가 7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복지국가정치추진위원회·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최하고 <프레시안>이 후원한 이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이상이 복지국가정치추진위원회 대표는 "박근혜 후보의 복지국가 공약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며 "현재의 '저부담-저복지'에서 '적정 부담-적정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이 대표는 먼저 기초연금, 보육,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 부담, 국민기초생활보장 공약 등이 축소되거나 파기됐음을 언급한 뒤, "이명박 정부의 감세와 '작은 정부'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복지국가를 하겠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정책 기조는 결국 공약 파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복지국가정치추진위원회는 7일 국회도서관에서 '박근혜 정부의 복지 정책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프레시안(김윤나영)


"2007년 조세 회복이 2017년 목표? 복지 자연증가분도 해결 어려워"

박근혜 정부는 공약 이행을 위해 재원을 어느 정도로 마련하겠다고 밝혔을까. 지난해 8월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중장기 조세정책 방향'을 보면, 2012년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20.2%에 불과해 북유럽 국가 평균인 33%, OECD 회원국 평균인 25%보다 훨씬 낮다. 여기에 기획재정부는 현행 20.2%인 조세부담률을 박근혜 정부의 임기 말인 2017년까지 21%로 높이겠다고 밝혔는데, 참여정부 말기였던 2007년 조세부담률이 바로 21%였다.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며 이상이 대표는 "2017년 조세부담률을 10년 전 수준인 GDP의 21%로 유지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복지 수요 자연증가분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박근혜 대선 캠프 수장이던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도 '조세부담률을 현 수준에 놓고 복지니 뭐니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 같은 얘기'라고 현 정부를 비판했다"고 꼬집었다.

"저부담-저복지 → 적정 부담-적정 복지로 가야"

이 대표는 "남은 과제는 주권자인 국민이 복지국가의 열망을 표출하고 기꺼이 형편에 맞게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섬으로써 감세 기조를 되돌리는 것"이라며 "'저부담-저복지'를 '적정 부담-적정 복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박근혜 정부가 2017년까지 GDP의 22~23%까지는 조세부담률을 높여야 복지 예산의 숨통이 트이고 복지 공약을 이행할 때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단계적으로는 조세부담률을 점차 올려 OECD 평균 수준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국회가 소득세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과세 표준구간을 현행 3억 원 초과에서 1억5000만 원 초과로 낮추고, 법인세 최저한세율을 현행 16%에서 17%로 높이는 법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 '사실상 부자 증세'라고 일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이러한 조치로 얻는 추가 세수가 연간 6000억 원에 불과해, 공약을 지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 대표는 "복지국가로 가려면 비례성 강한 선거제도를 도입하고, 다당제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며 "양당제를 넘어서는 큰 틀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복지국가 정치' 질서의 창출이며, 이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새 정치'"라고 주장했다.

"국가 신뢰 회복하고, 감세 기조 되돌리자"

토론자로 나선 윤홍식 참여연대 사회복지부위원장은 '누진적 보편 증세'를 도입하기 위한 각론을 덧붙였다. 먼저 윤 부위원장은 "북유럽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타적이어서 세금을 50%씩 내고, 한국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이어서 세금 내기를 주저하는 게 아니다"라며 "국가에 대한 신뢰 관계가 구축돼야 증세나 재원 확대도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윤 부위원장은 또 "복지국가인 노르웨이와 유럽의 후진국인 그리스의 GDP 대비 복지 지출이 비슷한데 결과는 다르다"며 "단순히 재원을 늘리기 전에 한국 사회의 복지국가 상을 제대로 그리고, 그에 맞는 조세 체계와 재원 체계를 고민해야 제대로 된 복지 체계가 구축된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누진적 보편 증세' 방안으로는 4단계론을 제시했다. 윤 부위원장은 먼저 "기업에 대한 조세 감면 제도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 국가에서는 실효세율(법인세)을 낮출 때 기업에 주던 조세 감면 제도를 철폐하는데, 한국은 둘 다 낮춘다"며 "기업 조세 감면 제도를 축소하는 것이 우선 신뢰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다음으로 소득세에 대한 누진성과 보편성을 강화하고, 이후 기업이 내는 사회보장세를 늘리며, 마지막으로 소비세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보편 복지에 대한 열망이 정치 이슈화되지 않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남북 분단"이라며 "종북 프레임, 분단 문제만 걸리면 무기력해지는 게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평화 운동과 복지 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영화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며 "재원을 아무리 늘려도 민간 중심의 복지 전달 구조에서는 복지를 체감하기 어렵다. 공공성을 담보하는 복지 전달 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금 폭탄론 들고 나온 민주당, 반성해야"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은 "(무상 급식 논쟁을 통해) 지난 지방 선거에서 국민은 민주당이 집권할 길을 열어줬는데, 민주당이 '증세 없는 복지'라는 틀에 갇혀버린 데 진지하게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정 상임고문은 특히 지난해 8월 세법 개정안을 거론하며 "민주당이 소득 공제를 세액 공제로 바꾸면 누진성과 형평성이 올라가는 것을 눈 감고 세금 폭탄이라고 했다"며 "복지국가를 주장했던 야당이 '세금 폭탄론'을 들고 나온 건 지도부를 포함해 민주당의 철학 없음을 보여준 만큼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상임고문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희망을 얻으려면 2017년에는 어찌됐건 제1야당이 대안"이라며 "민주당이 대내적으로 복지국가에 대한 철학을 체화하고, 대외적으로 평화 체제에 대한 신념으로 무장할 때 대안 세력으로서 믿음이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래경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 대표가 좌장을 맡은 가운데, 토론자로 윤홍식 참여연대 사회복지부위원장,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장,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장영기 광명복지소사이어티 대표,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 등이 참석했다.

 
 
 

 

     

/김윤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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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시위 22주년, 일본 정부 사죄·배상요구에 22년째 묵묵부답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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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4/01/09 08:31
  • 수정일
    2014/01/09 08:3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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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할머니들에게 해방을! 우리에게 평화를!"수요시위 22주년, 일본 정부 사죄·배상요구에 22년째 묵묵부답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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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8  18:3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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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일 수요시위 22주년을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1108차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8일 수요시위 22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제1108차 정기 수요시위를 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적극적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거리로 나와 처음으로 수요시위를 시작한 지난 1992년 1월 8일로부터 22년이 되는 날이다.

"22년이 되도록 해결된 것 하나 없으니 가슴이 답답한 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루빨리 일본 정부는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고 우리 정부도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앞장서서 일본 정부를 향해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도록 매듭을 지어 주었으면 좋겠다."

   
▲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 한국 정부의 성의있는 대책마련을 거듭 촉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이날 "22년간 수요시위에 나오면서 60대 '아줌마'였던 내 모습도 이제 90을 앞둔 '할망구'가 됐다"며 이같이 말하고 참가한 학생들에게는 "이제 할머니들은 세상을 떠날 때가 다 됐다. 여러분은 남북이 통일되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돼서 다시는 후손들이 이같은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미리 작성한 성명서에서 지난 22년간 외쳐 온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전쟁범죄 인정,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정당한 요구는 무엇 하나 이행되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는 여전히 역사왜곡과 군사대국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국 정부 역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정부가 조속히 나서라고 판결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벌써 2년 반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이렇다 할 조치와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또한 "수요일의 외침은 천번을 넘고 다시 또 다시 백번을 넘어 희망의 역사로 새로이 거듭나고 있다"며 지난 "수요시위 22년은 부끄러운 자화상만은 아닌 우리 모두의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록"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는 22년 경과보고에서 "일본에서는 망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통해서 전쟁범죄자들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꾸짖지 않았기 때문이며, 앞으로 우리가 계속해야 할 일이 바로 그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미향 상임대표는 아울러 "우리 스스로 과거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교육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았으면 좋겠다"며 수요시위 22주년의 소회를 피력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한국여성단체연합 간사로서 1차 수요시위부터 꾸준히 자리를 지켰던 신미숙(민주당 이미경 의원 보좌관) 씨는 "수요시위에 참가한 이후 출산을 해 딸이 21살이 되도록 계속되고 있는 이 자리에 서니 할머니들과 제 딸같은 대학생들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자책감을 토로하고 "우리의 마음과 역사의 기록과 진실을 증언하는 양심세력이 있을 때, 그리고 이 세력이 변하지 않고 확산돼 갈 때,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는 확신이 있다"고 언급했다.

지난 1995년부터 매주 소속 수녀들이 한번도 거르지 않고 수요시위에 참가한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김영미 수녀는 "여기 계신 할머니들께서는 지난 세월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안녕하지 못하다"며 "꽃다운 청춘을 피기도 전에 저버리게 만들고 존재의 기반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자들은 사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영미 수녀는 이어서 "꽃같던 처녀들이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됐지만 이분들의 아픔과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할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고 사죄조차 하지 않았다"고 지탄했다.

   
▲ 이날 정기 수요시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적 연대가 모색된 자리이기도 했다. 미국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온 이벳 벨 씨는 '할머니들은 우리들 마음속 보석'이라는 피켓을 들고 연대사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에서 온 이벳 벨 씨는 "할머니들과 연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며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준 할머니들의 용기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할머니들은 우리들 마음속 보석(You are all jewels in our hearts!)"이라는 피켓을 들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뒤이어 자유발언에 나선 인일여고 학생들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은 그대로이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할머니들을 위해서 외치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 있었다"며 심경을 토로했고 경남 삼천포여고 동아리에서 온 학생은 "두번째 참가하는 수요시위인데 첫번째 참가때와 같이 일본대사관의 창문은 닫혀있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한 학생은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세워진 해외 최초의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백악관 청원사이트에서 하고 있는 서명운동에 맞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녀상 수호 서명운동에 한국측 참여가 저조하다"고 알리고 "주위에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수요시위에는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길원옥 할머니가 참석한 가운데 국립국악고, 삼천포여고, 충주여고, 인일여고 학생들과 인천 효성남초등학교 학생들, 그리고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소속 수녀와 수사 등 200여명이 참가했다. 

   
▲ 수요시위 22주년을 기념하는 케잌 커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인천효성남초등학교 학생들이 김복동 할머니에게 선물과 편지를 전달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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