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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지역구도 깰 선거제 개편, 거대 양당 결단만 남았다

승자독식·지역구도 깰 선거제 개편, 거대 양당 결단만 남았다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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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현행 선거구제 폐해 및 대안

승자독식·지역구도 깰 선거제 개편, 거대 양당 결단만 남았다
 

대통령·국회의장·야당 이구동성…수십년 과제, 화두로 부상 
중선거구·연동형비례대표제 적용 땐 정의당 23석까지 늘어
한국당 “대표성 확대 방안 강구” 외형상 동참…민주당은 미적

선거구제 개혁 논의가 부상하고 있다. 대통령, 국회의장, 야 4당이 이구동성으로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승자독식 정치구조의 원흉으로 지목돼 왔다. 지역구도 탈피, 소수정당 진입, 적대적 정치문화 청산을 위해서는 선거구제 개편이 필수적이라는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관건은 거대 여야 정당의 결단이다. 

■ 문제는 ‘승자독식 정치구조’ 

현행 선거구제는 1987년 6월항쟁이 낳은 산물로, 1998년 13대 총선부터 적용됐다. 소선거구제와 병립형 비례대표제가 두 축이다. 소선거구제는 한 지역구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명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제도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득표수와 별개인 정당투표 득표율로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는 제도이다. 13대 이후 국회의원 의석수만 미세하게 조정됐을 뿐 소선거구제는 유지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치러진 20대 총선의 경우 소선거구제로 지역구에서 253명,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 47명 등 총 300명이 선출됐다. 

현행 제도의 폐해는 뚜렷하다. 일단 소선거구제가 갖는 표의 등가성 문제가 있다. 1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된다. 2위를 한 후보가 49.9%의 득표율을 올려도 모두 사표가 된다. 49.9% 시민의 뜻은 사라진다. 

 

이런 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승자독식의 정치구조를 만들어낸다. 거대 여야 정당만 생존하는 양당 구조를 고착화시킨다. 지역구도도 강화된다. 특히 소수정당의 진입이 어렵다. 이에 따라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대변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선거구제 개혁 요구는 항상 있어 왔다. 17·18·19대 국회도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를 구성했지만 논의에 그쳤다. 각 정당의 이해관계가 달랐다. 여야 거대 정당이 현행 체제의 수혜자라는 모순적 상황도 장애물이었다. 

다만 상황이 나아질 조짐은 있다. 무엇보다 야 4당의 선거구제 개편 의지가 강하다. 특히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협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등은 선거제도 개혁을 ‘협치의 조건’으로 내거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일 신임 정동영 평화당 대표에게 축하 전화를 하면서 “저는 이미 몇 차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고, 그 내용을 개헌안에 담았다”며 “정치개혁은 여야 합의가 관례이니 국회의 뜻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문희상 국회의장도 지난달 18일 “선거제도 개편이 따르지 않는 개헌은 의미가 없다”면서 “정치개혁의 요체는 오히려 선거제도 개편이 더 크다”고 했다. 

■ 중대선거구제 등이 대안 

개편 방향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 있다. 일단 소선거구제의 경우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는 방안이 거론된다. 중대선거구제 개편안은 전국 모든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을 선출하는 ‘전면적 중선거구제’와 농촌지역은 소선거구제, 도시지역은 중선거구제로 하는 도농복합선거구제로 크게 나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목소리도 높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전체 의석을 정당투표 득표율대로 나누고 각 정당은 지역구 당선자를 먼저 배정한 후 비례대표로 남은 의석을 채우는 제도이다. 다만 비례대표 명부를 전국 단위로 할지 아니면 권역별로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실제로 중대선거구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경우 양당 구조는 완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올해 2월 ‘중선거구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결합 시뮬레이션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해당 보고서는 현행 병립형 비례대표제에 도농복합선거구제와 전면적 중선거구제 등 2가지 경우를 적용해 의석수 변화를 추산했다. 그다음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2가지 중선거구제를 적용했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13~47석,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은 5~21석이 줄어들었다. 반면 당시 국민의당은 21~45석, 정의당은 2~17석이 늘어났다. 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할 경우 정의당은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소병훈·김상희·박주민 의원과 민주평화당 박주현,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각각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 정개특위에서는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조만간 시작될 예정이다. 위원장은 선거구제 개혁 의지가 강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다. 

최근 타계한 정의당 노회찬 전 원내대표의 숙원도 선거구제 개혁이었다. 그는 2016년 국회 비교섭단체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국민의 지지가 국회 의석에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즉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이야말로 공정한 정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공정한 사회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민주당과 한국당 등 거대 정당의 태도다. 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8일 “국민 대표성과 비례성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외형상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소선구제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영남권 의원들이 반대하고 있어 당론을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날 “(선거구제 문제 등은) 정개특위에서 논의하면 될 뿐 그 이상은 없다”고만 했다. 현재의 고공 지지율이 유지된다면 현행 제도가 차기 총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선거구제 개편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의원정수 증원에 대한 따가운 여론도 넘어야 할 산이다.

 

오늘의 핫클릭!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090600025&code=910100#csidx21aaa3847ea3b56b846720da134bd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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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갈길을 가야 한다. 대북제재 해제하고 종전 선언하라"

"우리는 갈길을 가야 한다. 대북제재 해제하고 종전 선언하라"각계 대표 300여명, '종전선언·대북제재 해제 촉구 각계 공동선언' 발표 기자회견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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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8  16: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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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의 주요 근거가 되어 온 북한의 핵, 미사일 시험 중단과 관련 시설 해체는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진전이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관계정상화, 평화보장 조치로써 대북제재 해제는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북측이 여러가지 인도적 조치, 비핵화의 첫 조치들을 이행하는 상황에서,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첫 조치로서 종전선언은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북과 미국사이에 앞으로 전쟁이 없을 것임을 공식선언함으로써 이제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운 관계로 나아갈 것임을 명확히 약속하는 것은 평화체제 구축의 첫 단계이다."

4.27판문점선언과 6.12북미공동선언에서 밝힌 세기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한반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진전이 더딘 상황에서 각계 시민, 사회, 종교단체들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종전선언 및 대북제재 해제 촉구 각계 공동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공동선언에 참여한 각계 300여명의 대표자들은 "연내 종전선언과 적극적인 대북제재 유예 및 해제 조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고 비로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향한 긴 여정의 첫 관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라면서 "대북제재 해제와 종전선언으로 한반도 비핵화, 항구적 평화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까지 공동선언에는 박경조 성공회 주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김상근 6.15남측위 명예대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함세웅 신부, 이부영 동북아평화연대 명예이사장,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한영수 YWCA 회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본부장 원택스님 등 각계 300여명의 대표자들이 참여했다.

   
▲ 왼쪽부터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 김선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회장,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철도도 연결해야 하고 개성공단도 재개해야 하며, 남북경협도 활성화시켜야 하는데 너무 진척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갈길을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자리를 만들었다"면서 간곡한 뜻이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한용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은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경협 의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졌고 북미정상회담까지 다 마친 상황이지만 남북 경협은 한발자욱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지체되고 있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인내도 고갈되고 생존의 위협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기업들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했다.

이어 "개성공단은 대북제재와는 관련없는 예외적인 사업으로, 즉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단으로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개성공단을 박근혜 정부가 북의 4차 핵실험 이후 유엔 대북제재가 발동되기도 전에 주변국의 동참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선제적으로 폐쇄한 것이다. 그야말로 자의적이고 법적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위법조치이다. 개성공단 중단은 남북관계 최대의 적폐라고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 회장은 "정부는 판문점선언과 북미공동선언의 기본 정신이 선 비핵화 후 관계개선이 아니라 선 관계개선 후 비핵화 또는 최소한 동시적 이행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며, 6.15시대의 옥동자인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것이야 말로 남북의 신뢰를 쌓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결정적 기여를 할 것이기 때문에 선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선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회장은 "가을에는 금강산에 다시 가서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는 것 느끼고 싶다. 무엇보다 대북제재 완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간명하게 뜻을 밝혔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우리 민족끼리는 굉장히 좋은 미국때문에 안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미 3자 종전선언을 하자고 했고 북에서도 희망하고 있다. 다만 미국이 막고 있다"면서 "남쪽의 경제형편이나 청년실업 문제가 이토록 악화되어 있는데 개성공단만 다시 열어도 거기서 파생되는 효과가 엄청날텐데 이것도 미국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미 주장을 제기했다.

   
▲ 최진미 전국여성연대 대표와 정종성 한국청년연대 상임대표가 공동선언을 낭독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대표자들이 제안한 '종전선언 및 대북제재 해제 촉구 각계 공동선언'은 오는 14일까지 더 많은 참여자를 모아 주요 일간지 광고 등의 방식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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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또 시장으로 넘어갔는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8/09 07:41
  • 수정일
    2018/08/09 07: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김민웅의 인문정신] '은산분리' 완화, 그리고 한국사회
2018.08.09 00:45:35
 

 

 

 

'은산분리' 규제 완화로 가는 문재인 정부
 
대자본의 독점구조 혁파는 이제 물 건너가는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기조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도리어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금융시장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는 자본의 본질적 욕망이다. 이를 막아내거나 통제하지 못하면 이 사회는 거대자본의 손아귀에서 좀체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노동자를 비롯해서 보통의 시민들의 정치적, 경제적 발언권이 앞으로 더더욱 줄어들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자본의 확대 재생산구조는 보장되고 빈곤은 제도화된다. 
 
최저임금 정책은 을과 을 또는 을과 병의 싸움으로 그 부담이 전가되었다. 최저임금 산입 방식도 노동자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수당, 상여금 등 따로 줘야 할 돈마저 최저임금에 계산하면 그게 어디 최저임금인가? 실제로는 임금 삭감 아닌가? 게다가 마치 최저임금이 경제악화의 주범처럼 몰아대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최저임금이 부담되는 자영업자, 영세 중소기업에 대한 조처는 없다.  
 
이러한 상황을 구조적으로 확정하고 있는 대기업에게 부담을 함께 감당하는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의 것을 빼앗고 있는데 정부는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경제가 잘 움직이지 않으니 지지율이 빠지고, 이런 상황에 초조할 수 있지만 이럴 때 일수록 본질로 돌아가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혹여 허둥대고 애초의 기조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려된다. 
 
재벌개혁 물 건너갔나?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도 이미 그 답이 나온 셈이다. 문재인 정부와 삼성의 밀월 동맹은 시작되었고, 이제는 공개적 수준으로 접어들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삼성 방문 이후 삼성은 180조를 풀어 4만 명을 직접 고용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과정이 순수하지 않다. 여기에 바이오시밀러(복제약) 관련 규제 완화라는 대가도 요구한 다음이었다. 국민건강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바이오 산업분야의 검증체계, 독과점 구조가 아주 간단하게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정책이 동력을 보이지 않으면서 압박을 받고 있는 정부와, 법률적 압박 아래 놓인 삼성의 손잡기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이 힘들어졌던 시기의 문제와 모순에 대한 성찰이 현실 앞에서 졸지에 사라진 것일까? 촛불시민혁명의 요구에는 재벌개혁이 분명하게 담겨져 있다.  
 
특례법? 특혜법! 
 
산업자본의 금융시장에 대한 지배비율을 현재 4퍼센트 이하로 제한되어 있는 것을 무려 34퍼센트 또는 50퍼센트까지 상향조정한다는 것은 대자본에게 금융시장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특례법"이다. 그러나 내용은 "특혜법"이다. 말로는 IT 기술을 통한 금융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지배구조가 바뀌는 것에 대한 답변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 추진방식 또한 대단히 폭력적이다. 이 정도로 중대한 정책전환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건너뛰다 시피하고 있다. 대자본의 이해를 적극 옹호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이러한 정책 전환에 대해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은산분리 규제완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명확하다. 
 
더불어 민주당은 은산분리가 경제민주화의 원칙 안에서 작동하도록 하겠다고 하지만, 그 작동의 장치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말 만이다. 위태로운 태도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초국적 거대 금융자본이 인터넷 뱅킹을 장악할 날도 머지않다. 삼성의 바이오시밀러 규제완화도 초국적 제약 산업과 그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 이는 의료정책의 영리화로 가는 길이 더더욱 열리는 것을 뜻한다.  
 
방치된 노동자들 그리고 전교조 
 
이런 상황이 한편에서 전개되는 동안,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는 완전 방치상태다. 박근혜 정권 당시 정권의 요구와 사법부의 거래로 희생된 내용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해결은 여전히 문재인 정부의 해결목록 우선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폭염 단식 20일을 넘기면서 병원에 후송되었다. 정부는 여전히 묵언수행중이다.
 
교육 노동자들의 제도적 합법성을 보장해줄 방법이 결코 어렵지 않은데, 정치적 부담을 논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다. 지지율 타령에 빠져 힘 있게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상실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 
 
교육 개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2022년도 대입제도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은 입시제도 개혁의 주도세력이 서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생기고 있다. 전교조는 바로 그 세력의 중심축이다. 이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논의되는 교육정책의 변화는 출발부터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아무리 공론화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교육혁신의 경험과 논리, 그리고 현장의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세력의 입장이 담겨져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안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마련하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그야말로 절대적 지지를 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의 숙원이자, 평화가 곧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평화도 정의로운 제도와 정책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지 못한 채 바로 그 기득권 질서에 의존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면, 모순은 더더욱 심화되고 서민들의 고통은 가중될 수 밖에 없다. 의도가 그렇지 않다고 해도 현실은 그렇게 나타난다.
 
이반 일리치의 일깨움 
 
인간 혁명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깨달음의 혁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체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면 무슨 무기든 개발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 새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특권과 면허장의 종언'이 될 것입니다."  
 
IT 기술을 내세워 금융자본의 지배구조를 더더욱 강화하고, 이에 대해 면허장과 특권을 부여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  
 
이를 혁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 침묵당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이반 일리치는 "침묵의 문법은 소리의 문법보다 훨씬 배우기 어려운 기술입니다"라고 일깨우고 있다. 정치는 바로 이 기술이 습득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자본의 유혹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지켜내는 정치를 보고 싶다. 대자본에게 특권과 면허장을 주는 정부가 아니라.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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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이'하는 삼양동 옆집에서 40대 사망... 박 시장 일정 취소하고 조문

[현장] '이웃집' 남자 고독사에 박원순 "큰 숙제 받았다"

'한달살이'하는 삼양동 옆집에서 40대 사망... 박 시장 일정 취소하고 조문

18.08.08 18:51l최종 업데이트 18.08.08 18:51l

 

강북구 삼양동 40대 남성 숨진채 발견 8일 숨진채 발견된 40대 남성의 집을 강북구 관계자가 소독하고 있다.
▲ 강북구 삼양동 40대 남성 숨진채 발견 8일 숨진채 발견된 40대 남성의 집을 강북구 관계자가 소독하고 있다.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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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삼양동 동네주민들이 A(41)씨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냄새였다. A씨의 집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야 다다를 수 있지만 썩은내가 언덕 초입부터 코를 찔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곳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 달 강북살이'를 하고 있는 옥탑방과 담을 맞대고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8일 강북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20분쯤 서울 강북구 삼양동 주민이 "골목에서 냄새가 난다"라고 119에 신고를 했다. 소식을 접하고 출동한 경찰은 해당 골목 중간쯤 위치한 1층짜리 단독주택 안방에 A씨가 숨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북경찰서 관계자는 "발견 당시 부패가 심했다"라며 "사망한 지 3~4일쯤 지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그는 "타살 정황은 없다"라면서 "평소 A씨가 간질환과 알코올 중독 증세를 앓고 있었다는 유족들의 말에 따라 지병이 있는 상태에서 과음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7일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파악할 예정"이라고 했다.

 

낮 12시 40분쯤 강북구청 관계자가 소독을 했지만, 냄새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소독을 위해 문을 열자 안에서 파리들이 튀어나왔다. 현관문 건너로 넘어다 본 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거실과 방 안에는 수십 개의 플라스틱 소주병이 이불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과 이미 뜯은 컵라면이 여기저기 바닥에 놓여있었다. 무엇인가를 먹은 흔적이 있는 냄비 3개가 거실과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A씨는 차상위계층으로 전기요금과 도시가스요금 등을 인하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집 앞에는 '전기공급 제한 알림' 고지서가 바닥에 붙어있었다. 4월부터 전기요금이 미납돼 6일 오전 10시부터 순간 전력량이 660W로 제한된다는 내용이었다. 660W는 TV와 선풍기 등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한 전력이다. 그 옆에는 카드대금이 미납됐음을 알리는 고지서 여러 장이 떨어져있었다.

강북구 삼양동 '혼자 살던 40대 남성의 죽음'

동네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A씨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A씨가 삼양동 골목으로 이사 온 이후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봤다는 사람이 드물었다. A씨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게 주민들의 이야기였다.

A씨의 집 바로 옆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B씨는 "가끔 집 앞에서 마주칠 때 보면 수염도 깎지 않은 채였다"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B씨는 "배달시켜 먹고 내놓은 빈 그릇과 소주병 여러 개가 집 앞에 자주 나와 있었다"라며 "전등이 켜졌다 꺼지고 TV소리가 나는 걸로 '살아있구나' 했다"라고 했다. 그는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으니 악취가 자주 담을 넘어왔다"라며 "항의를 하려고 문을 흔들거나 두드려도 나와보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아주 가끔 어머니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라고 덧붙였다.

박 시장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사는 문아무개(68)씨는 "박 시장이 이사 오기 전에도 냄새가 하도 나서 동네 주민들이 신고했었다"라며 "당시 경찰과 구청 직원들이 왔었는데, 사람이 나와서 '괜찮다' 싶었다"라고 했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 7월부터 취약계층을 직접 찾아가 복지·건강 상담을 하는 '찾아가는동주민센터(찾동)' 서비스를 시행중이다. A씨는 이를 거부해,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못 했다고 서울시 관계자는 전했다.

시 관계자는 "중장년층 1인가구인데다가 시각장애 6급, 차상위계층이라 '찾동 서비스'로 관리해왔다"라며 "7월에도 두 번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거부했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방문이 7월 18일인데 당시에도 본인이 방문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참치캔을 드리고 왔다"라며 "그 날 A씨의 어머니께도 연락해서 주거상태에 대해 말씀드렸다"라고 했다.

동네 주민의 비보를 접한 박 시장은 이날 오후에 잡혀있던 강북구 북부시장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오후 5시쯤 빈소를 찾았다. 조문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박 시장은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했다. 박 시장은 "찾동 사업으로 예전에는 방치됐던 사각지대가 확인되기 시작했지만 이처럼 본인이 서비스를 거절하는 경우에는 (적용이) 어려웠던 게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박 시장은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단절이 생겼다"라며 "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고 큰 숙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그간 1인 가구의 고립·단절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 간 연대와 협력인 '사회적 우정'을 강조해 온 박 시장이 '한 달 강북살이' 이후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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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경쟁 ‘선전포고’···평화당, 김대중·노무현 사진 내걸었다

입력 : 2018.08.08 10:14:00 수정 : 2018.08.08 10:16:41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과 명패를 회의실에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과 명패를 회의실에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이 8일 국회 당 대표실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은 더불어민주당 국회 내 회의실에도 걸려 있다. 민주당과 평화당 회의실에 모두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이 붙은 것이다. 평화당이 정동영 신임 대표 취임 후 ‘진보 선명성’을 내세우면서 ‘진보경쟁’이 시작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과 명패를 회의실에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과 명패를 회의실에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 장병완 원내대표 등이 8일 국회에서 열리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 앞서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영 대표는 지난 6일 당선 직후 “평화당을 존재감 있는 당으로 만들어갈 것”이라며 “현 정권이 먹고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이 나라에서 국민이 평화당을 바라볼 때까지 전진해야 한다”고 했다. 정 대표는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는 것이 평화당의 목표” “민주당의 우클릭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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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081014001&code=910100#csidxee7a1cad6ee229fb38a62a855743d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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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선언시대 종전선언이 가지는 의미


[기획] 종전선언이 필요하다(3/끝)
  • 안호국 시사평론가
  • 승인 2018.08.08 09:30
  • 댓글 0

싱가포르에서 종전선언이 있을 거라는 섣부른 기대가 있었으나 정전협정 65년째인 7월27일이 지나도록 종전선언 소식은 깜깜하다. 북은 핵‧미사일 시험 동결, 북부 핵시험장 폐기, 미군 유해송환, 미사일발사 시험장 해체 등 선제적 조치를 연이어 취하고 있지만, 미국은 외려 몽니를 부리며 선비핵화 요구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다고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닌데, 패권주의의 미몽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4.27판문점선언 시대를 낙관하는 것은 좋으나 미국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금물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상황이다. 이에 4.27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할 종전선언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안호국 시사평론가의 글을 세 차례 연재한다.

1. 휴전협정, 강화협정, 평화협정 그리고 종전선언
2. 한국전쟁, 휴전협정과 정전체제
3. 판문점선언시대 종전선언이 가지는 의미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면 북과 미국, 남과 북을 전쟁상태, 적대관계에 두고 있는 정전체제를 먼저 해체해야 한다.

6.15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대화와 협력, 화해와 교류, 통일과 평화의 시대가 열리자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해서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10.4선언에서는 종전선언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10.4선언 4항에서는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남측이 합의이행을 거부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극단적인 대결과 적대정책을 추구하였다. 미국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새 전쟁책동을 비롯한 대북 적대정책을 재개하였고,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는 적대정책을 고수하며 북의 붕괴를 추구하는 ‘전략적 인내정책’에 매달렸다.

2017년의 격렬한 군사적 대결을 거친 후 2018년 벽두부터 시작된 지금의 변화는 한반도에서의 북미간 힘의 균형이 달라진 결과물이다.

일부 사람들은 제재를 못 견뎌 북이 대화에 나왔다거나, 미국의 군사적 압박이 효과를 내서 북이 비핵화를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근거를 내놓지는 못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조차 자기 말을 별로 신뢰하지 못하는 그저 자기 주장의 일관성을 위해서 또는 자기 합리화나 위로를 목적으로 하는 주장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에서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의 몰락 및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미국에서 주류정치를 부정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등 몇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어쨌던 현재의 변화가 한 세기에 걸친 우리 민족과 미국간의 대결이 결산되고 있는 역사적 흐름속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의 변화는 미국에게는 ‘강요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낡은 체제와 질서의 힘은 결코 만만치 않다. 대북 적대정책을 추구해온 미국내 대결주의자와 호전세력의 반발과 준동은 거세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물꼬를 튼 북미 관계정상화가 결실을 맺으려면 미국이 북을 적대적인 대상으로 삼는 입장부터 버리도록 해야 한다.

한국정부는 제재를 비롯한 미국의 대북정책 눈치를 보느라 교류와 협력 사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 판문점선언의 이행도 더디게 진행하고 있다. 전쟁과 정전체제가 심어놓은 ‘주적이념’에 사로잡혀있는 군부 인사들과 정부 관료들은 군사적 긴장완화 조치도 취할 생각을 못하고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판문점선언이 차질없이 이행되려면 남과 북을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있는 정전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판문점선언 이전에 종전선언을 추진한 것은 극단적인 군사적 대치를 완화하고 당면한 전쟁위기를 해소하자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남북관계 특히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은 분단을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받았다. 또한 평화제체 수립 없는 정전체제 해체는 한반도의 불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진보진영과 통일운동은 종전선언보다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도 제 나름의 이유 때문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그것은 첫째로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한국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강화협정이나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협정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전쟁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즉 패전했다는 평가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정전협상 당시 ‘명예로운 정전’이라는 엉뚱한 이름까지 붙이며 한국전쟁에서 실패한 사실을 가리려고 하였다. 이는 이후 정전협정 이행을 거부하거나 어기면서 북에 대한 적대정책과 적대적 입장을 고수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것으로 공인되면 북에 대해 적대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지는 등 적대정책을 추진할 동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쟁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큰 제약을 받지 않고 거리낌없이 북에 대한 전면전쟁 도발위협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내게 되면 미국은 이같은 행위를 하는데서 새로운 선전포고, 군사도발이라는 부담을 져야한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이 근거로 삼고있는 정전체제에 의한 적대적 관계가 사라진다.

그런데 북과 미국이 2013∼2017년의 군사적 대결을 거치면서 정전선언에 대한 입장과 정전선언이 가진 의미가 달라졌다.

길게 보면 1989년 미국의 영변핵시설 의혹을 제기한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30년에 이르는 이 대결의 결과 북미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 적대적 대결에서 우호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또한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이 달라져 ‘전쟁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가 미국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일시적 전쟁중단 상태에 있는 상대가 자기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핵미사일을 보유했다는 사실이 미국 사람들에게 주는 공포와 불안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종전선언, 정전체제 해체는 남북관계의 발전과 북미관계의 전환을 촉진시키는데서도 큰 역할을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에 거쳐야 하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종전선언은 북미공동성명, 북미관계의 전환을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게 된다. 싱가포르에서 이루어진 북미정상의 합의를 파탄내려는 미국 내외의 대결주의자들의 책동을 무력화할 수 있는 유효한 방도이기도 하다.

종전선언은 한국내 반통일수구집단, 분단적폐를 청산하는데도 큰 힘이 된다.

한국전쟁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단과 적대적 대결을 조장하는 집단의 발판을 허물게 된다. 또한 사람들이 분단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된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반통일수구집단과 통일애국세력간의 사회적 힘의 균형 변화는 더 촉진될 것이다. 당면해서는 판문점선언 이행을 방해하는 갖은 책동들이 동력을 상실할 것이다.

종전선언이 판문점선언 이행이다

한국전쟁 종전선언이 한국전쟁 휴전협정과 정전체제, 그리고 한반도 평화협정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판문점시대에 종전선언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았다.

한국의 진보진영과 통일운동이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이 운동을 무슨 내용으로, 어떤 구호를 가지고, 어떤 방식의 운동으로 펼칠 것인가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연구에서는 ‘종전선언 이행을 대중적인 요구로 정착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운동’을 벌이는 것이 당면한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의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제출한다.

덧붙여 종전선언 이행운동을 펼치는 데서 유의해야 하는 점 몇 가지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판문점선언시대에서 종전선언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종전선언이 가진 전략적 의의와 시대적 역할을 제대로 아는 것은 종전선언 이행운동이 구축할 사회적 힘의 크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상호관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종전선언은 한반도평화협정의 주요한 내용이자 그 전제이다. 하지만 평화협정 속에 용해되거나 평화협정의 일부는 아니다. 지금의 역사적 격변에서는 종전선언이 가지는 독자적인 지위와 위상을 제대로 알아야 이 운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종전선언이 가지는 정치군사적 힘, 그것이 낳을 변화를 잘 이해 해야한다.

판문점선언의 시대는 격변의 시대이며 놀라운 창조의 시대이다. 모름지기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며, 과감하게 구상하고 높은 진취적인 기상을 가져야 한다.

종전선언이 한반도에 가져올 변화를 상상해보자. 판문점선언 이행에 속도를 높이고, 북미관계의 전환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그 변화는 종전선언으로 더욱 확고한 현실로 될 것이다.

힌국전쟁 종전선언이 가지는 힘과 불러올 변화를 잘 알수록 종전선언 이행운동은 높은 활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연구가 판문점선언 이행운동이 보다 실속있게 펼쳐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고 지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안호국 시사평론가  minplusnews@gmail.com

icon관련기사icon한국전쟁, 휴전협정과 정전체제icon휴전협정, 강화협정, 평화협정 그리고 종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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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없는 핵 신고? 미국에 '선제타격' 명단 넘기는 셈

[한반도 브리핑] 북한의 '불가역'과 미국의 '가역', 맞바꿀 수 있나

 

 

 

1. 종전 외교의 시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4월 1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시 한국전쟁의 종전에 관해서 "남북이 (정상회담 의제로) 종전을 논의하고 있으며, 어떻게 협의 되느냐에 달려있지만, 그들의 종전 논의는 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흘 후 4월 27일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의 3항에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며 종전과 관련한 문구가 들어갔다. 

선언의 3항뿐만 아니라 선언문의 전문 (前文) 격에 해당하는 앞부분에도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중략)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라는 문구가 포함돼있다.  

이로부터 약 한 달 반 뒤에 열린 6월 12일(현지 시각) 미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선언문 3항에는 (북한 <노동신문>에 발표된 발표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2018년 4월 27일에 채택된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하였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한편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도 정상회담 전후에 본인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과거 전문가들의 비관론을 비판했고, 자신의 방식이 과거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과거의 관행과 편견에 발목을 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 북핵 비핵화 과정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쓰고 북핵 비핵화라고 읽는다) 종전 논의가 비핵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알렉산더의 칼 역할을 하였고, 미국 대통령이 거기에 힘을 실어주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미북 정상회담까지 협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종전 논의를 합의문에서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 비핵화 과정이 이제 다시 과거의 편견과 관행으로 돌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위의 문구들에 나와 있듯이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기로만 되어 있을 뿐, 어떠한 조건 하에서 어떤 순서로, 또 어떤 형식으로 종전선언을 할 것인지, 그 선언이 3자 종전선언인지 4자 종전선언인지, 상징적 선언인지, 협정인지 등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종전선언 다음 단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도 남북미 3자인지 아니면 남북미중 4자인지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다.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문에도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한다고만 되어 있고, 종전선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러한 합의문은 좋은 합의문일 수도 있고 나쁜 합의문일 수도 있는데, 좋은 것은 정상의 축복 하에 큰 틀의 방향을 정해 놓고 실무진들이 일을 빨리 진행시킬 때이고, 나쁜 것은 정상이 국내 정치적인 이유로 합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 못할 때 신뢰부족과 합의문의 구체성 결여로 인하여 양쪽 모두 합의실행을 극히 조심스러워할 때이다. 

이번 비핵화 과정은 정상이 처음부터 깊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을 기대하였는데, 결국은 신뢰부족과 구체성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운 지점에 와 있다.  
 

▲ 지난 6월 12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2. 종전 외교의 문제점 

그런데 여기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나타난다. 첫째, 종전 논의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칼이었다면, 가장 애지중지하고 역점을 기울여서 다루었어야 했던 것이 바로 그 종전선언을 어떠한 조건과 순서, 형식을 갖추고 언제 하느냐에 대한 남북미 간 합의였을 것이다.  

또 종전선언이 왜 중요하고, 종전선언을 하면 왜 비핵화를 촉진시킬 수 있고, 종전선언에 대해서 미국이 왜 조심스러운지 등, "왜"와 관련된 질문에 서로 답을 공유하고 있었어야 했다. 즉 문제의식이 공유되어서 합의문이 나왔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과연 문제의식에 대한 협상실무진 간 공유가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둘째, 만약 종전선언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조건, 순서, 형식에 대한 합의의 공유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다면 우리 당국자는 이를 위해 북한과 미국을 매우 분주하게, 그리고 전략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종전선언의 조건과 순서, 형식, 시기에 대한 합의를 도출 했어야 했다. 즉 "종전선언 로드맵"을 만들어서 남북미 간에 공유할 수 있었어야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러한 전략이 과연 있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셋째, 요즘 종전선언의 조건으로 미국이 내세우는 "신고"라는 말이 (핵과 관련하여 어디까지 신고해야 하는지가 모호한)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워싱턴 D.C의 한반도 전문가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일관되게 나오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비판한 소위 과거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미국정부가 받아들여 과거의 견해와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히 좋은 징조는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신속하고 정교한 대응책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3. 선 신고, 후 선언의 문제점 : 비가역 대 가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략적 실수를 통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미국에게 종전선언이 왜 비핵화를 촉진하는지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원안대로 설득이 안 된다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북한은 아직 전쟁 상대국이다. 군사력으로 보면 훨씬 약세인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잠깐 방심하면 언제 군사적으로 당할지 모르는 전쟁 중에 있다. 물론 우리도 북한으로부터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한 전쟁 중에 만약 북한이 억지력의 관점에서 자신의 최고 핵심전력이자 방어무기인 핵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일방적이고 투명하게 미국에 신고한다면, 적장에게 선제타격의 목표물을 알아서 넘기는 것이 된다. 영화에서 보면 적국 스파이나 할 짓이다. 

만약 미국의 비확산 전문가나 한반도 전문가, 군수산업 관련 전문가들이 북한의 신고를 믿을 수 없는 신고라고 일제히 포문을 열면, 비핵화 협상은 다시 교착상태로 바뀌고 북한은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뿐만 아니라 매일 선제타격의 공포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신고는 매우 "비가역적"인 행위다. 그래서 아무리 독재국가이고, 권력기반이 안정되어 있고, 또 백두혈통의 김정은 위원장이라 하더라도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선언 없이 선제타격의 목표물을 미국에 먼저 건네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군부와 인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권력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반면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언급한 것과 달리 종전선언은 그렇게 비가역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한번 선언하면 다시 원상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비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종전선언을 취소할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이전의 현상유지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협정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한미동맹의 우산 속에서 북한을 다시 적대국으로 설정하고, 여태까지 해 오던 것을 그대로 할 수 있다. 북한을 다시 "악의 축"으로, "불량국가"로 규정할 수 있고 국가안보보고서나 핵 태세 보고서에서 확실한 위협으로 명확히 언급할 수도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주한미군의 주둔을 설득할 명분도 충분하다. 상황에 따라 오히려 이전의 현상유지보다 더욱 더 강력해진 동맹과 주한미군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합동군사훈련도 재개되고, 전략자산도 다시 들어오고, 미사일 방어무기도 더욱 전격적으로 들어올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종전선언과 핵 신고의 교환은 북한에게 매우 불리한 "비가역적 조치"와 비교적 "가역적인 선언"의 교환이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비핵화의 명분을 주어 군부와 인민을 끌고 갈 수 있게 하려면 종전선언이나 그에 준하는 미국의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종전선언 이후의 평화체제나 유엔사의 문제, 주한미군, 주일미군의 문제 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북한의 붕괴를 포함하여) 비핵화가 되면 나올 문제들이다. 북한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어도 나올 문제이고, 평화적으로 비핵화의 길을 가더라도 나올 문제이다. 이 문제가 골치아프다고 계속 뒤로 미룬다면, 이는 책임의 방기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4. "종전의 시작"이라도 선언하자 

필자는 종전선언이 어려우면 종전과정의 로드맵을 만들어 "종전의 시작"을 먼저 선언하고, 종전의 마무리와 함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물론 종전선언이 가능하다면 종전선언이 선행하고 핵 신고가 따르는 순서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어 지혜를 모아 대안을 찾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들에 그 지혜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비핵화의 끝장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전략수립 및 실행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시대적 요구가 있다. 임기응변적인 대응도 중요하지만, 전술과 전략을 정교하게 조화시키는 준비된 외교가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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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민들이 ‘고대사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국학연.민족주의포럼 국학강좌(7) 임찬경 ‘고대사 논쟁’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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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7  17: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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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찬경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7월 19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2018 국학 월례강좌’ 일곱 번째 강연자로 나서 ‘국학과 역사–고대사 논쟁’을 주제로 발표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많은 시민들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대사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올바른 논쟁의 방법을 파악해야 한다.”

임찬경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30호에서 열린 ‘2018 국학 월례강좌’ 일곱 번째 강연자로 나서 ‘국학과 역사–고대사 논쟁’을 주제로 “우리사회의 ‘고대사 논쟁’ 그 실태와 진전을 위한 방법 모색”을 발표했다.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고구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찬경 연구원은 “우리사회의 고대사 논쟁의 주요 쟁점들이 많은데, 실제로 따지고 보면 그 쟁점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들”이라며 “우리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쟁되고 있는 문제, 우리 역사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역사 서술이 달라진다”고 운을 뗐다.

이병도 “용변을 보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영감이”

   
▲ 임찬경 연구원은 기존 학계가 이병도의 고대사 관련 주장들을 지금까지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실제로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정립된 학계의 정설이 없고, 단군은 신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위만조선의 위치 및 한사군 문제가 고대사 논쟁의 핵심적 사안”이라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이병도 등의 한사군 주장은 전혀 학술적이지 못하다”며 “한사군 중의 현토군이 현재 중국의 환인(桓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현토(玄菟)의 발음이 환인의 옛 지명인 환도(丸都 혹은 桓都)와 발음이 비숫하다는 것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무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저 유명한 ‘현토군환도설(玄菟郡丸都說)’에 대한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선생님(이병도)은 많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였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하루는 뒷간으로 들어가서 용변을 보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는 것처럼 문제가 해결되었노라고 얼굴에 웃음을 피우시면서 그 내력을 들려주시었다”는 증언을 예시했다.(尹武炳, 「斗溪先生과 史蹟踏査」 『歷史家의 遺香』, 一潮閣, 1991)

그는 “이병도로부터 비롯되어 그의 후학들에게 거의 비판없이 이어지는 한국사학계의 고대사에 대한 오류들은 예를 들면, 한사군 문제를 비롯하여 고조선의 위치, 위만의 족계(族係) 문제,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위치 및 강역 문제, 삼한과 예 및 옥저의 위치 문제, 삼국과 왜의 관계 등 고대사 거의 전반에 널려있다”며 “전부 이병도가 만들어놓은 고대사의 틀 속에서 우리 고대사학계가 아직도 그것을 못 벗어나고 있는 거다”라고 진단했다.

특히 “이병도의 여러 고대사 관련 서술은 실증이 없고 미검증 상태”라고 평가하고 “우리 사회의 고대사 논쟁의 쟁점들은 일종의 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낙랑군 평양설

   
▲ 임찬경 연구원이 제시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낙랑 관련 도표.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표적 사례로 “한사군 중의 낙랑 문제는 처음에, 현재의 평양이 고대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있던 지역이며, 또 서기전 108년에 한무제가 이곳을 정벌하여 한사군 중의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식의 역사왜곡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며 그 이유로 “그들이 정통으로 여기는 기자를 평양에 꼭 모셔야 놔야 한다”고 비판했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시대 학자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어했다는 것. 이에 더해 “일제는 조선 역사의 식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현재의 평양에 낙랑을 반드시 위치시켜야 했다”고.

그러나 기자조선 평양설은 도저히 학술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워 이제는 슬며시 위만조선과 낙랑군 평양설만 남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현재의 평양에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다는 한사군 인식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이라며 “문제는 21세기로 넘어선 이 시점에도 역시 조선시대의 사대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왜곡시킨 한사군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논리로 고대사 논쟁을 지속하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라고 짚었다.

그는 김부식이 1145년에 지은 『삼국사기』을 근거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은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의무려산 일대에 있다는 거다”며 “왜 고구려 첫 도읍이 이 지역에 있었는지 알게 됐느냐면, 고려시기에 요나라를 방문하는 고려의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확인했다는 거다”고 말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제사 기록들이 나온다”며 “초기부터 6백년대까지 졸본에 가서 계속 제사를 지낸 거다. 어떤 때는 졸본에 제사를 가서 한달, 두달 머물다 오기도 한다”며 고구려 첫 도읍 졸본이 600년대까지 고구려 강역이었음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 임찬경 연구원이 제시한 고구려 첫 수도 졸본과 위만조선 추정 지역.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는 “첫 도읍을 600년대까지 계속 유지했다면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여기 와서 있을 가능성은 없다”며 “사료에 근거해서 위만조선의 위치를 대충 추정해 보면 난하, 조백하 일대”라고 추정하고 “이것이 고려시대 역사인식”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서기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쳐서 해체시켜서 한사군 중에 낙랑군을 만든 지역은 대동강 일대가 아니다”며 “그런 관점은 삼국사기에 분명하게 서술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실 ‘통일신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라며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1892)에서 ‘통일신라’란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고 지적하고, “그 책을 저술할 당시의 청(淸)으로부터 조선을 역사적으로 분리시켜 내기 위해, 신라와 당(唐)의 대립 및 신라에 의한 당의 축출을 강조하는 과정에 ‘통일신라’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일부 재야사학계는 발해(대진국)와 신라(통일신라)의 남북국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에 통일신라를 우리 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의 연원으로서 서술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며 “해방 이후에 이런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세력에 의해서 계속 이어진다. 경상도 쪽이 집권을 많이 하고,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조선시대부터 맥이 이어진다”고 짚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화랑’, ‘풍류’ 부각도 이같은 역사 왜곡의 맥락이라는 것.

“이데올로기로서의 사관을 정확히 파악해야”

   
▲ 임찬경 연구원은 고대사 논쟁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는 지난해 <한겨레21>이 한겨레 주주통신원까지 뛰어든 ‘고대사 논쟁’을 다뤘지만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이제는 정치적 주장보다 역사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자세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접근과 노력이 절실한 때”라고 두루뭉술하게 맺은데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할 철저한 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 “역사청산이라는 작업은 위험하기도 한 작업”이라며 “침묵의 카르텔에는 여도 야도 없었다. 노무현과 같은 정당에 있더라도 정당 소속원이지만 결국 그 사람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침묵의 카르텔의 일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극복하려는 고대사 논쟁을 올바로 시작하려면, 시대에 따라 그 사실 왜곡에 작용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사관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그 서술에 작용했던 사관을 배제하고 우리의 민족·민주·민중적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현재도 역사청산 꼭 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꼭해야 될 일을 해야 한다. 누구나 논쟁에 참여할 이유가 있다”며 “현재 우리사회의 국학연구자들에게는 고대사 논쟁을 통해서 반드시 과거사 청산을 이루고, 우리사회의 역사를 바로 잡음으로써 오래도록 왜곡되어온 불평등과 모순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겠다는 혁명적 자세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올바른 논쟁의 방법’으로 “낙랑 문제가 왜 저렇게 왜곡됐는가를 바로 알면 그것을 논쟁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논쟁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뭔가를 터득하게 된다”며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본래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이유를 알면, 왜곡된 사관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는 변화가 있을 거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권은 촛불시민혁명에 의해서 집권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사회의 그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일은 다수 시민의 참여로만 가능하다”며 “기득권 권력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바꿀 수 있는 거지 지금 이건 학문적 논쟁은 아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사실 역사라는 것이 교과서 수준의 역사는 올바른 관점에 의해서 씌여진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안되니까 국정교과서든 검인정교과서든 문제가 된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조금더 민주화되고 조금더 국민 다수의 합의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회로 진보하는 시점이 되면 역사교과서는 국가에서 써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강연에 이어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국학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주최하고 <통일뉴스>가 후원하는 ‘2018 국학 월례강좌’ 여덟 번째 강연은 임영태 현대사연구회 연구위원이 ‘현대사 논쟁’을 주제로 8월 23일 오후 7시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30호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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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은산분리 완화에 환호한 보수신문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선일보 4면에 환히 웃는 대통령… 한겨레·경향은 ‘공약 파기’
식품대기업 SPC그룹도 오너 일가 일탈로 위기… 차남 마약 혐의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08월 08일 수요일
 

조선일보가 모처럼 대통령의 환하게 웃는 사진을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은산분리 완화를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18년 옥죈 은산분리 규제 IT기업에 한해 풀어줄 듯’이란 제목으로 1면에 화답했다.

조선일보는 4면에 ‘은산분리 완화’란 문패를 달고 한 면을 모두 털어 보도했다. 조선일보 4면 머리기사는 ‘문 대통령, 붉은 깃발법 언급하며 은산분리 완화 길 텄다’는 제목이었다. 대통령은 인터넷 전문은행에 대한 규제를 19세기 말 연국이 자동차산업으로부터 마차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붉은 깃발법’에 비유했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게 했고 그 결과 영국은 자동차산업에서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고 말았다. 영국의 자동차산업처럼 인터넷 전문은행도 한국에선 규제가 발목을 잡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조선일보 4면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
▲ 조선일보 4면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

 

조선일보는 이 일화를 4면에 “마차 보호하려다 車산업 뒤처진 영국처럼 되면 곤란”이란 제목으로 달아 보도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인용한 제목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행사장에서 QR코드를 이용한 결제기술을 체험하는 대통령의 환하게 웃는 사진도 실었다. 

▲ 조선일보 4면
▲ 조선일보 4면

 

반면 같은 내용을 한겨레는 8일 1면에 ‘문 대통령, 인터넷은행 규제 완화…은산분리 공약 훼손 논란’이란 부정적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관련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달아 한겨레보다 더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8일 1면 머리기사에 ‘원칙 꺾나…은산분리 규제완화 꺼낸 문 대통령’이란 제목으로 달았다.  

 

식품대기업 SPC그룹도 오너 일가 일탈로 위기

SPC그룹(옛 삼립식품) 3세이자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41)이 마약 흡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허희수 부사장은 2007년 SPC그룹 계열사 파리크라상 상무로 입사해 그룹 마케팅전략실장을 거쳐 2016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8일자 신문들은 이 소식을 사회면에 1~2단의 작은 기사로 보도했다. 매일경제신문은 29면에 1단 기사로, 동아일보는 12면에 2단 기사로, 경향신문은 10면에 2단 기사로 실었다. SPC그룹은 일감몰아주기, 부당내부거래, 역외탈세 등의 광범위한 혐의를 받아 지난달 26일 국세청의 대규모 세무조사를 받은 가운데 이번 사건이 불거졌다. 그룹은 입장문을 내고 “허 부사장을 경영에서 영구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오너 일가의 일탈에 다른 그룹보다 훨씬 발빠른 대응이었다. 그러나 경영에서 영구배제하겠다는 발표가 지켜질지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경 29면, 동아일보 12면, 경향신문 10면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경 29면, 동아일보 12면, 경향신문 10면

 

 

1921년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태어난 SPC그룹(옛 삼립식품) 창업자인 허창성 회장은 14살 때부터 빵집 점원으로 일했다. 10여 년 일하다 해방을 맞아 그동안 배운 기술로 1945년 10월 고향에서 ‘상미당’이란 작은 빵집을 차렸다. 48년 서울로 진출한 상미당은 방산시장에서 출발했다. 허창성 회장은 1961년 용산에 본사와 공장을 마련하면서 ‘삼립’이란 이름을 처음 내걸었다. 때마침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소비를 촉진한데다 바로 옆 미군기지에 군납업체로 선정돼 삼립빵은 급성장했다. 1967년 가리봉동 야산 일대에 큰 공장을 세웠고, 1969년엔 공장 옆에 신사옥까지 세워 본격적인 가리봉동 시대를 열었다. 1971년 시흥공장, 1978년 아이스크림 공장까지 전국에 여러 공장을 세워 호황을 누렸다.  

허창성 회장은 1975년 기업공개에 이어 1977년 50대 중반에 일찍부터 서서히 경영에서 손을 뗐다. 큰 아들에겐 삼립식품의 여러 공장을, 차남에겐 성남의 샤니공장만 물려줬다. 큰 아들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반대로 차남은 일찍부터 제빵에 전력투구해 승승장구했다. 차남은 형의 삼립식품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차남이 키운 기업은 오늘날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 베스킨라빈스31, 던킨도너츠를 거느린 식품대기업 SPC그룹이 됐다. 작은 빵 공장을 그룹으로 키운 차남이 바로 현 SPC그룹 허영인 회장이다. 형보다 나은 아우였다. 그런 회장의 차남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룹의 명예에 먹칠을 했으니 SPC그룹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수많은 재벌 오너들의 일탈이 사회적 비난을 받는 속에 SPC그룹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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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못 들어준 재벌 숙원, 문재인 정부가 왜?"

전성인 "은산분리 완화, 문재인 공약 뒤집은 유령정책"
2018.08.07 12:23:08
 

 

 

 

청와대·여당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정책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금융은 의료와 함께 재벌의 숙원 사업"이며 이를 수용한 정부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뒤집기"라는 비판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실과 정의당 정책위원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연대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은산분리 규제 완화의 문제점 진단'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고, 토론자로는 백주선 민변 민생경제위원장(변호사),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회계사), 정명희 금융산업노조 정책실장 등이 참여했다.  

전성인 교수는 발제에서 "대통령도 대선 공약에서 안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말 바꾸기'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대선공약집 120쪽을 보면 '금융산업 구조 선진화 추진' 항목에 '인터넷전문은행 등 각 업권에서 현행법상 자격요건을 갖춘 후보가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라고 돼 있다"며 "업계가 로비를 했겠고, 반대 논거도 있었을 것이다. 표를 얻기 위해 그냥 다 들어주자며 만방 허용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현행 제도 유지'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이 정도 선이 우리 당과 새 정부가 취할 스탠스'라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또 "작년 7월의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작년 말의 '2018년 경제정책 방향', 올해 7월 18일의 '하반기 이후 경제여건 및 정책방향'에는 '인터넷은행'이나 '은산분리'라는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정부 문건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정책'을 대통령이 나서서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왜 지금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느냐. 금융위 외의 다른 부서에서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게 지난 6월 27일, '준비 부족'으로 몇 시간 전에 대통령이 취소한 규제혁신회의 때 처음 공식 어젠다로 올라갔다"고 지적했다.

그 근거로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은산분리 완화, 이번에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는 <머니투데이> 보도를 들며 "정책 방향을 다 정해놓고 무슨 토론을 하느냐. 그래 놓고 반대하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거나, 반대하는 의원 3명은 (금융위 관할 상임위인) 정무위원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고 비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해당 보도에 대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그런 발언을 하신 기억이 없다"고 부인하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전 교수는 '말 바꾸기'라는 차원을 떠나,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 완화는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으로 이어갔다. 그는 "(이 정책을) 왜 하는지 정확하게 서술된 정부 공식 문건을 찾기가 어렵다. 언론 보도를 통해 관계자 말이라며 슬금슬금 뒷구멍으로 나오는게 3가지이고 최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말한 게 1가지 더 있다"면서 "(관계자 말은) '첫째, 4차 산업혁명 활성화를 위해 인터넷은행이 활성화돼야 한다. 둘째, 고용이 는다. 셋째, 중금리 대출이 활성화된다'는 것이고, 홍 원내대표 말은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규제를 완화해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하지만 "규제 완화를 한다고 천국이 오느냐"며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마다 조목조목 반박했다. '4차 산업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는 "(인터넷전문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은 빅데이터 안 하고 블록체인 안 하느냐. 오히려 기존 은행의 IT 투자가 훨씬 어마어마하고, 은행이 가진 빅데이터는 온 나라가 탐내는 '깨끗한 정보'다. 4차 산업혁명은 인터넷전문은행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용이 는다'는 주장에는 "아무리 300인의 전사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케이뱅크는 300명 정도의 회사다. 300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고용 촉진의 첨병이 될 수 있느냐"고 지적하며, 또한 "작년처럼 모 은행이 '우리 이제 지점 다 없애고 인터넷은행 하겠다. 비대면 영업만 하겠다'며 사람들을 다 자를 가능성이 없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비대면 거래가 늘면 그 자체는 고용이 늘지 않지만 파급 효과로 고용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는데, 경제학의 기본은 1차 효과가 언제나 파생 효과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파급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중금리 대출 활성화' 주장에 대해선 "지난 1~2년간 인터넷은행의 (대출 영업)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드러났다"고 한 마디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사내유보금 투자 유도' 부분에 대해 그는 "은산분리 완화를 해 주고 사내유보금을 받아쓰자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며 "그게 갖다 쓸 수 있는 돈인지 없는지도 토론해봐야 하겠지만, 그 돈은 대부분 하청업체 기술 탈취나 납품가 후려치기로 조달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쓰더라도 하청업체를 위해 써야지, 그게 왜 은산분리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 교수는 이어 은산분리 완화에 대한 '보완 장치'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했다. 전 교수는 "대기업 대출, 산업자본 대출, 대주주 대출을 막았으니 사금고화 우려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원래 소유 규제는 개별적 행위규제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매우 뭉툭한 규제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 규제를 완화하는 근거라며 '한두 개 막아놨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규제의 ABC를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했을 때의 장점은 단지 '급전 유통'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은행이 가진 막대한 데이터와 예금통화를 찍어내는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 면에서도 "은행은 독과점 사업이고, 최근 선진국에 비해 총자산 대비 수익이 낮디고는 하지만 일정 궤도에 들어가면 수익이 매우 안정적"이라며 결국 재벌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고 우려했다.  

전 교수는 이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왜 문재인 정부가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케이뱅크의 부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거나 △케이뱅크 대주주인 우리은행의 지주적격성 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는 정권교체 후 감사원 감사에서 케이뱅크 인허가에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등 금융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그는 문 대통령에 대해 "은산분리 완화 시도를 즉각 중지하고, 케이뱅크 인허가 및 은행법 시행령 삭제 연루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고 감사원 감사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자가 있는지 조사하며, 케이뱅크는 예금자·직원의 정당한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케이뱅크 '정리' 방안에 대해서는 KT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우리은행이 100% 소유하는 자은행으로 인수하는 방안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다른 발제자인 박상인 교수도 "문재인 정부 2년차에 이런 세미나를 하고 제가 발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참담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추진했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된다며 반대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 논리적 설명 없이 입장을 바꿔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박 교수는 금융위원회가 시민단체의 질의에 대해 보낸 공식 답변에서 "은산분리의 기본 취지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한다. 은산분리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재벌들이 제조업에서의 경쟁력을 잃고 있으면서 눈독을 들이는 게 의료와 금융"이라며 "그 숙원 사업의 총대를 맨 것이 지난 정부(박근혜 정부)인데, 지난 정부도 못 한 것을 하겠다는 게 문재인 정부"라고 한탄했다. 그는 "인터넷전문은행 규제 완화를 통해 낼 수 있다는 고용효과나 경쟁력 강화, 핀테크산업 등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자신이 있다면 언론을 통해 프로파간다만 하지 말고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가 공개 토론을 하자"고 말했다. 그는 2013년 동양그룹 사태의 사례를 들며 "은산분리 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고,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카카오뱅크는 가계신용대출에서 급속 성장했는데 케이뱅크는 뚜렷한 실적을 보여주지 못해 자본 확충에 실패했다. 인터넷전문은행 성공은 은산분리와 무관하다는 게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의 사례에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또 "가장 핀테크 기술이 발전했고 인터넷전문은행을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도 은산분리를 하고 있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나라"라며 "규제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직격탄을 쏘았다.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도 토론을 통해 "케이뱅크가 증자에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분 비율에 비례해 기존 주주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정부의 인허가 사업에서, 출범하자마자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은 애초의 심사과정이 졸속이었다는 것이다. 인가 시점으로부터 2년이 경과 되지 않아 전체가 삐걱거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결국 케이뱅크가 은행업 인가 과정에서 자금조달 방안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제출했거나, 금융위원회가 심사를 부실하게 진행한 것"이라며 "(즉)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은산분리 규제와 무관하고, 현재 금융위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주장은 자신의 부실한 행정을 덮기 위함일 수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어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만났고 오늘은 은산분리 규제완화 당정협의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과 경제 정의마저 완화시키는게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이 쏠린다"고 지적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권영준 경실련 공동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데, 최근 자꾸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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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도 30도 넘겼다…고온 현상이 보내온 옐로카드

등록 :2018-08-07 11:35수정 :2018-08-07 13:04

 

 

북반구 남반구 곳곳에서 최고기온 경신 릴레이… 
광범위한 고온 현상이 보내는 경고 주목해야
“북극권 제트기류(대기 상층부에서 띠 형태로 빠르게 이동하는 바람)가 약해진 가운데 북반구 일대에 걸쳐 강력하게 형성된 고기압이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면서 겹쳐져,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열돔 현상’이 발생했다. 북반구 전역을 강타하고 있는 기록적인 폭염이 장기화하면서….”(영국 일간지 <가디언> 7월13일치)

 

덥다. 왜 더운 건지 설명을 듣는 것도 숨이 찬다. 우리만 더운 게 아니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까? 북극권의 최고기온도 30도대에 들어선 터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밤 최저기온이 42.6도

 

올해 6월 시작된 불볕더위가 두 달여 세계를 휘감고 있다. 지구촌 북쪽 반구가 아주 뜨겁다. 폭염과 관련한 기존 기록이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다. 6월28일 아라비아반도 남동부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남쪽 바닷가 어촌 마을 쿠리야트에선 기이한 신기록이 세워졌다. 낮 최고기온이 높았던 게 아니라, 밤 최저기온이 42.6도를 기록한 게다. 세계기상기구(WMO)의 공인을 받진 않았지만, 관측 이래 최고 기록이다.

 

7월5일엔 알제리의 사하라사막 인근에 인구 19만 명이 사는 도시 우아르글라에서 낮 최고기온이 51.3도까지 치솟았다. 알제리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서 관측 이래 최고치다. 현재까지 지구에서 기록된 낮 최고기온은 19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에서 측정된 56.7도다.

 

위도를 조금 높여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남부 코카서스 지방의 내륙국가인 아르메니아는 평균 고도가 해발 990m에 이르는 산악 지대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선 7월 들어 수은주가 42도까지 치솟는 등 일주일 동안 40도가 넘는 이상고온현상이 발생했다. 예레반의 예년 7월 평균기온은 26.4도에 그친다. 아르메니아에선 올해 2월(19.6도)과 3월(28도)에도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서유럽은 5월 이후 최악의 가뭄과 폭염을 동시에 겪고 있다. 예년 6월 평균기온이 20도를 넘지 않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선 6월28일 31.9도를 찍었다. 가뭄이 심각해지면서 영국 정부는 북서부 지방 일대에 이른바 ‘호스 파이프 밴’(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세차하거나 식물에 물을 주는 등의 행위 금지) 조처를 내렸다.

 

가뭄으로 메마른 산과 들판은 ‘성냥갑’으로 변해간다. 스웨덴에선 7월 한 달 동안에만 산불이 60건 이상 났다. 이 가운데 10여 건이 북극권에서 났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시베리아 북부지역과 북극해 지역에서도 평년 기온을 4~5도 웃도는 고온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7월엔 한때 최고기온이 32도를 넘기도 했다.

 

북아메리카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미국 서부 일대에서도 7월 한 달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운 콜로라도주와 캘리포니아주에 피해가 집중됐다. 캘리포니아주에선 최고 48도에 이르는 폭염이 주 전역을 강타했다. 역시 기상관측 시작 이래 최고 기록이다.

 

 

밀 가격에 원전 가동까지 폭염의 공습

 

두 달 넘게 이어진 폭염과 가뭄이 불러온 사회·경제적 파장은 이미 구체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 뉴스 매체 <블룸버그> 통신은 7월25일 “폭염과 가뭄으로 유럽 전역에서 생산량 감소가 불가피해지면서, 밀 선물 가격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실제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에선 6년 만에 처음으로 생산량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올해 1월16일 1t에 166.3유로였던 파리상품거래소 밀 선물값은 7월25일 198.8유로까지 올랐다. 밀값 폭등은 또 다른 파장을 부른다. 1억 명에 가까운 인구에게 정부가 빵값을 보조하는 이집트에선 식량값 폭등을 염려하고 있다.

 

전력 부문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 파리의 7월 평균기온은 지난 30년 평균치인 20도 안팎보다 5~10도나 높았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자력발전소 58기에 의존하는 전력 수출국이다. 이상 고온에 따라 강물의 수온도 높아지면서, 이를 냉각수로 쓰는 원전 가동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프랑스의 전력 생산량이 줄어들면 주변 전력 수입국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기적인 폭염으로 냉방용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공급 가격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다. 폭염의 연쇄반응이다.

 

북반구뿐이 아니다. 현재 겨울철인 남반구에서도 이상고온현상이 목격된다. 7월5일과 6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기온이 25도까지 치솟았다. 기상관측을 시작하고 159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이 이틀 연속 기록됐다. 사실 이상고온현상은 지난해부터 지구촌 차원에서 꾸준히 나타났다.

 

지난해 4월 최고기온이 50.2도를 기록한 파키스탄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4월’을 보냈다. 5월엔 파키스탄 투르바트의 기온이 53.5도를 기록하며, ‘5월 지구촌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6월엔 이란 아흐바즈의 기온이 역시 역대 최고치인 53.7도를 찍었고, 7월엔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수은주가 46.9도까지 치솟았다. 또 10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일대에서 기온이 42도까지 오르는 등 미국 전역에서 10월 최고기온 기록이 잇따라 바뀌었다. 또 지난해 11월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사흘이나 최고기온이 42도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장 기온이 높았던 2016년의 폭염은 지구온난화와 함께 강력한 엘니뇨(지구에서 태양에너지 유입이 가장 많은 적도 부근 열대 동태평양과 중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은 상태로 몇 달씩 유지되는 현상)가 결합돼 생긴 현상이었다. 올해는 상대적으로 기온을 낮추는 라니냐(엘니뇨의 반대 현상)의 영향 아래 있음에도 예년 평균기온을 5도 이상 넘기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독일의 소리>(도이체벨레)는 7월18일 이렇게 전했다. 실제 세계기상기구 자료를 보면, 올해 전반기 6개월은 라니냐 현상이 발생한 해 가운데 역대 가장 기온이 높았다. 올해 말 라니냐가 물러가고 엘니뇨 현상이 시작되면, 내년엔 기온이 더욱 올라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서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7월13일치에서 마이클 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지구과학센터 소장의 말을 따 이렇게 경고했다.

 

 

엘니뇨 오면 내년 기온 더 오를 수도

 

“북반구 전역에 걸쳐 폭염이 발생한 것은 규모 면에서 분명 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일이다. 특정 지역의 최고기온이 높게 나온 게 문제가 아니라, 고온 현상이 이처럼 광활한 지역에서 관측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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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소매 걷은 당·정·청 "7·8월 누진제 한시 완화"

"누진제 1·2단계 구간 확대... 가구당 평균 19.5% 전기요금 인하 효과 기대"

18.08.07 11:59l최종 업데이트 18.08.07 12:08l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남소연
"이번 주 각 가정에 도착하는 419만 가구의 7월 고지서를 분석해봤다. 지난해보다 전기요금이 감소하거나, 증가 금액이 1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가 89%였고, 5만 원 이상 증가한 가구는 불과 1% 수준이었다. 지난해 7월보다 폭염 일수가 2.5배 늘었는데 마음 놓고 냉방하지 못하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기 요금 대책 당·정·청 논의에서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안타깝다"라며 서두에 꺼낸 말이다.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전기요금 걱정에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없는 대다수 가구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당·정·청의 긴급 처방은 '7·8월 누진제 완화'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 7·8월 두 달 간 누진제 한시적 완화 ▲ 사회적 배려계층 전기 요금 복지 할인 규모 7·8월 두 달 동안 추가 30% 확대 ▲ 출산 가구 할인 대상 1년 이하 영아에서 3년 이하 영유아 가구로 확대 등 총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출산 가구 할인 대상 추가 지원... "정부 재정으로 조달"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남소연
누진제 완화의 경우에는 3단계 누진 구간 중 1단계(200kWh에서 300kWh)와 2단계(400kWh에서 500kWh)를 100kWh씩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정부에서 이를 최종 확정하면 요금 인하 효과는 총 2761억 원으로, 가구당 평균 19.5%의 인하 효과가 기대된다"라고 전망했다.

냉방 사각 지대에 있는 사회적 배려 계층에 대한 특별 지원 대책도 내놨다. 김 의장은 "최대 68만 가구로 추정되는 취약계층에 대한 대책, 출산 가구에 대한 추가 지원 대책도 포함될 예정"이라면서 "출산 가구 할인 대상을 확대해 46만 가구, 매년 250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재원 조달은 정부 재원을 통해 지원할 계획이다. 김 의장은 "당은 폭염으로 인한 국민의 불편을 한시라도 덜기 위해 정부에 관련 절차를 신속하게 마무리할 것을 당부했다"라면서 "누진제 한시 완화와 사회적 배려 계층 지원 대책에 대해서는 재난안전법 개정과 함께 재해대책 예비비 등을 활용해 정부 재정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한시 처방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듯, 중장기 대책도 언급했다. 다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김 의장은 "당·정은 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체계 전반에 대한 개선은 중장기 과제로 추진하기로 했다"라면서 "아울러 주탁용 계시별 요금제 도입, 스마트미터 보급 등의 추진 상황도 점검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관련 기사 : 문 대통령의 '누진제 완화' 지시, 민주당은 환영했지만...)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남소연
"재킷 벗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당·정·청 관계자들은 회의 시작에 앞서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8월 국회의 폭염 대비 입법을 강조했다. 홍 원내대표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폭염을 상시 대비해야 한다. 폭염과 한파도 특별재난으로 선포해 피해 예방을 지원하는 법 개정을 검토할 것이다"라면서 "가능하면 8월 중 입법을 완료해 좋은 결과를 마련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회의는 당·정 논의로 공지된 바와 달리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또한 참석해 당·정·청 회의로 진행됐다. 윤 수석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문 대통령도 전기 요금과 관련해서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기 요금 걱정 때문에 냉방기를 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발생할 일이므로 차제에 전기 요금 누진성을 포함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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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8/08/07 13:20
  • 수정일
    2018/08/07 13: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08/06 [22: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일 김동연 부총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사진 : 기획재정부)     © 편집국

 

6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기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바이오 산업 규제 완화 등을 정부에 요청했고김 부총리는 몇 가지 제안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휴가 복귀 후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이를 가로막는 규제부터 과감히 혁신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 부회장을 직접 만난 바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는 논평을 통해 우려를 표했다.

 

민주노총은 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라며 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김 부총리가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기록한 것을 두고 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이며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질렀다고 반박했다.

 

민주노총은 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며 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며 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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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재용을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오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이재용을 만났다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다구속되었다가 2심 재판부의 이재용 살리기 적폐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대법 판결을 앞두고 있는 국정농단 범죄의 공범이다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고 한다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다뿐만 아니라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지른 것도 드러났다대한민국 경제수장이 재벌총수에게 바치는 낯부끄러운 헌사(獻詞).

 

이재용은 김동연의 방문에 맞춰 원래 100조 원대 투자계획을 발표하려했으나 청와대의 투자구걸’ 논란이후 발표가 연기했다고 한다그러나 단순한 투자구걸 문제가 아니다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다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 살리기 행보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오늘 김동연이 이재용과 외쳤다고 하는 혁신과 성장구호는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라도 재벌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극명한 구호다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가 위태롭다.

 

2018년 8월 6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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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처녀 유인납치.. 국정원과 정보사 합작품

기무사 ‘계엄 문건’에 ‘국가테러’가 생각나는 이유
 
강진욱  | 등록:2018-08-06 17:13:24 | 최종:2018-08-06 17:33:5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6년 4월 북한식당 여종업원 집단 탈북이 결국 우리 정보기관이 기획한 유인납치극으로 결론이 날 모양이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궁색한 변명을 달아서… 때마침 대통령이 국군기무사령부를 해체하는 수준으로 재창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가 죄에 합당한 벌이고, 유사 범죄의 재발을 막는데 충분하기를 바라지만…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역사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 이 나라의 3대 정보기관이라 일컬어지는 이들 조직은 평소 ‘적’으로부터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한다. 또 한편으로는 ‘적’을 상대로 - 또는 겨냥한 - 다양한 ‘공작’도 벌인다.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럽고 끔찍한 공작을 저들은 “국가를 위하는 일”로 여긴다.

북한 처녀들 납치극에 가담한 정보사 요원이 표창을 상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했으면 그랬을까? 동족에 대한 적개념이 지나쳐 국가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하긴 38선을 넘어가 북한 군인들을 살상하고 주민들을 납치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국회에서 떠벌리는 선배도 있었으니… 생사람을 패고 찢어 간첩(단)을 만들어 표창을 받은 이는 또 얼마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내력이 있다. 해방된 조국 남녘을 점령한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우익반공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백색테러를 부추긴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우익을 자처하며 좌익을 살상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여기던 무자비한 테러리스트들을 정보기관으로 불러들였고, 미국을 뒷배로 하는 이 나라 반공 우익정권들은 저들의 만행을 방조했다.

이승만 정권 .. 박정희 정권 .. 전두환 정권 .. 노태우 정권 .. 정통성 없는 부도덕한 정권이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내부의 적’을 - 만들고 - 살상하는 국가테러리즘을 활용했고, 그 부정한 정권에 기생하던 권력의 개들은 그런 행위를 ‘국가를 위한 일’로 둔갑시켰다. 자국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살상하는 테러를 저들은 ‘내수공작’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협박하거나 두들겨 패고(동아방송, 동아일보 간부 테러), 그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법정에 난입해 법조인들을 겁박하고, 출근길에 나선 신문사 사회부장이 사미미칼 테러를 당했고(1988.8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테러), 한밤에 사회단체 사무실에 침입해 잠자던 여인을 강간하는 테러를 자행했다(1988.8 우리마당 사건).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와 정보사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와 공모해 벌인 짓이었다.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특정해 납치 또는 살해한 일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1973.8.8),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 박정희가 죽기 19일 전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살해(1979.10.7) ... 이들 사건 모두 자∼랑스런 대한민국 정보기관 공작팀의 소행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처럼 정권 또는 권력자에 반항하거나 도전하는 이들을 살상하는 국가테러는 더 끔찍한 테러로 진화했다. ‘적을 겨냥한 공작’은 더 비열하고 악랄해졌고, 급기야 자국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며 그 책임을 ‘적’에게 뒤집어씌우는 공작이 시작됐다. ‘북괴의 테러’로 각인돼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1983.10.9)와 KAL 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이들 두 사건의 징검다리 격인 김포공항 폭탄 테러(1986.9.14)도 마찬가지다. 중국 내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은 이런 ‘해외공작’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과거의 끔찍한 국가테러리즘의 계보를 잇는 사건들에 비하면 훨씬 점잖고 한편으로는 애교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테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게 다가 아니다. 그 ‘국가테러 리스트’에 또 하나의 사건이 추가돼야 한다.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이 벌어진지 10개월 뒤인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김정남 살해 사건’.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통일부, 얼치기 국회의원들, 소위 북한 전문가들, 패널들, 기레기들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김정은의 만행’이라고 침을 튀기며 떠벌리던 사건. 누구 짓일까?
                                                   

방첩, 첩보, 침투, 공작.. 이 나라 정보기관의 정체성

이 나라 정보기관은 곧 ‘소위 국가라는 것’ 그 자체이며, 그 정보기관의 역사는 분단체제의 공고화 과정 그 자체다. 이 나라 정보기관은 ‘적’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분석 보다는,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빼오고 ‘적’을 겨냥한 공작을 벌이는데 역점을 뒀다. 정보 수집이나 분석은 이 나라의 ‘큰집’인 미국의 몫이었고, 우리네 정보 조직은 저 ‘큰집’에서 시키는 허드렛일을 했던 것이다. 

그 역사는 1945년 9월 9일 미군 24군단 소속 정보부대원들로 구성된 방첩부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우리 땅에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이 1946년 1월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를 설치했다.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과 기무사령부(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를 낳을 씨가 이때 뿌려진 것이다.

이 국방총사령부 정보과가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된 뒤 이 정보국에서 정보 분석을 주로 하던 부서는 육군정보대(MIG)로 확대돼 오늘날의 국가정보원에 이르고, 첩보 및 공작을 맡는 2과와 방첩을 담당하는 3과가 생겨 각각 정보사령부와 기무사령부의 모체가 된다. 아마도 육군정보대 (국가정보원의 모체)에 이어 특별조사과(기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고, 이어 정보국 2과(정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면서 특별조사과를 3과로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2과와 3과 역시 미국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조직이다. 미군 CIC(방첩부대) 제971 파견대(제224CIC가 제971CIC 파견대로 교체됨)가 1948년 5월 각 연대 정보 장교 및 간부 33명을 선발해 육군본부 정보국에 설치한 것이 3과(특별조사과)다. 이름하여 육군정보국 방첩대(CIC). 장차 보안사령부를 거쳐 기무사령부가 되는 조직이다.

정보사령부의 모체인 육군본부 정보국 2과는 1950년 7월에 생겼다. 해방 직후, 특히 6.25 전후 미군이 월남자들을 첩자로 양성한 HID 북파공작원들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출발했다. 1951년 3월 첩보와 공작을 담당하던 2과가 독립해 첩보부대로 독립하며, 1972년(또는 1970년대 초) 육군정보사령부로 정식 발족하고, 육군정보사령부는 1990년 해·공군 첩보부대와 합쳐져 국군정보사령부로 통합돼 오늘에 이른다. 1951년 3월 독립한 첩보부대 대장이 이철희(李喆熙)였다.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공작 담당 차장으로 일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총괄 지휘했고, 1982년 어음 사기 사건의 주인공 장영자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나라 공작정치의 역사는 이처럼 웅숭깊다.

육군본부 정보국 1.2.3과는 1945년 해방 이후 이 땅 남녘을 점령한 미군이 이승만의 극우반공 체제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었다. 미 군정은 북녘의 김일성 체제에 반감을 가진 서북청년단 등 월남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북파공작을 본격화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남한 각지에 보내 좌익계를 탄압하고 살상하는데 활용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북선 분국 책임자 김일성 씨”(동아일보 1946.1.13 / 이 시기 도하 신문에는 “씨”보다 “장군”이라는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다)와 김책·강양욱 등 북측 요인들을 겨냥한 테러가 빈발한 이유이다. 또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획책하는 분단체제 구축에 방해가 되거나 이에 저항하며 ‘남북협상’이니 ‘합작’ 또는 ‘통일’을 입에 담는 인사들이 하나 둘 살해됐던 이유이다.

육군정보부 1.2.3과에는 서북청년단이나 백의사 등 극우반공 조직의 간부급 인사들이 상당수 편입돼 있었다. 이들이 과거 자신들이 부리던 수하들을 시켜 좌익을 겨냥한 백색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이 육군정보국 방첩대(미 CIC 분견대) 소속이었고 서북청년단 간부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근로인민당 당수를 살해한 자들은 백의사 소속이었다.

2004년 9월, 주한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일명 ‘실리보고서’ 1949.7.1)가 공개된 바 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국 CIC 요원이자, 우익 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과 김창룡 특무대장 / 서울 통의동(옥인동)에 있던 특무부대 본부 : 1955~1971년)

방첩을 전담하기로 한 방첩대가 직접 국내 인사를 살해하는 공작을 벌인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보안사가 정보사 요원을 시켜 일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작업방식(modus operandi)이다. 방첩 전문 보안사와 공작 전문 정보사 간 공모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 및 사회단체인을 겨냥한 국가테러 때도 반복된다.

정보와 첩보 및 방첩 업무를 보는 육군정보국 1.2.3는 6.25 전쟁을 계기로 각각 별도 조직으로 분화한다. 6.25 전쟁 발발 4개월 뒤인 1950년 10월 21일 육군정보국 3과인 육군정보국 방첩대가 먼저 육군 특무부대로 승격된다.

안두희가 체포돼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보살피던 김창룡은 6.25 전쟁 발발 직후 육군정보 정보국 특무대장이 돼 ‘아무나’ 좌익의 누명을 씌워 살상하며 이승만의 극우반공체제를 지탱했다. 전쟁 전후 시기, 제주 4.3 사건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미군의 방조 아래 미군의 지휘를 받는 특무대가 주도했다.

中情의 전신 이후락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우익의 전위로 이승만 시대를 호령했던 육군특무대는 4.19 의거 직후 이승만과 함께 사라지고, 1960년 7월20일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된다. 그리고 몇 달 뒤 미국은 중앙정보연구위원회(회장 이후락)를 만든다. 국가정보원의 모체다. 더럽고 궂은일 하는 조직에 육군방첩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정보 업무를 전담하는 별도 조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을 계기로 특무부대와 첩보부대가 독립해 3분할됐던 정보조직은 이승만 체제가 무너지고 박정희 체제가 들어서기 전에 또 한 번 재정비된 것이다. 미국이 이 나라의 새 권력 창출을 위해 정보조직을 재정비한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부추기고 있었다. 에버레디 플랜(EverReady Plan)이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 말기 미국이 중앙정보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은 미국이 쿠데타를 도모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 땅에 정보부의 모체를 만들 때 활용한 이가 바로 박정희 시대 중반인 유신정권 창출 때 까지 박정희를 모셨던(?) 이후락이었다. 

미국이 왜 이후락을 정보책임자로 만들려 했는지는 그의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43년 일본 항공기정비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해 귀국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말 미국이 세운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4개월 만인 1946년 3월 대위로 졸업하면서 임관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본 정보국장 김종필의 회고에 의하면, 이후락은 주로 북파공작 및 첩보 조직인 HID 업무를 총괄했다 한다. 당시 HID는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 뒤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인 1955년 2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2년 6개월간 주미대사관 부(副)무관으로 일하며 정보 업무와 기술을 익혔다. 그 기간 “한-미간 군사적 유대를 강화한 공로로” 1958년 1월 미국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후락은 사실상 미국의 ‘자산’(asset)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미대사관 부무관 일을 마치고 1957년 10월 귀국한 이후락은 국방부 ‘79부대장’으로 군에 복귀한다. ‘79호실’로도 불렸던 이 제79부대는 미 CIA 한국지부 격이었다. ‘79’는 이후락의 군번 10079에서 따왔다. 미국은 얼마 뒤 이후락을 미 CIA 한국 지부이자 장차 한국 중앙정보부의 모체가 되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으로 만든다.

이때부터 이후락은 ‘79부대장’ 자격으로 중앙청에서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석해 당시 라오스 사태와 월남 정세를 브리핑했다 한다. 이후락은 또 직접 라오스에 가 그 나라 지도자 노사반을 만났다. 프랑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져 베트남에서 쫓겨 난 뒤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집어 먹으려 호시탐탐 할 때, 이후락은 ‘미국의 대리 특사’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미국은 그를 통해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에게 미국의 동남아 전략과 관련해 어떤 지침을 교수(敎授)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월남 파병 훨씬 전인 1950년대 말부터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 이야기가 나온 이유이다.

이후락이 중앙정보연구회 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1961년 초다.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 김흥한 씨가 장 총리에게 물었다. “이후락이, 괜찮겠습니까?” 장 총리는 “응, 미국이 좋다고 해서 시켰어”했단다. 최경록 육군참모총장까지 나서 ‘인물도 아닐뿐더러 현역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장 총리는 미국의 요구임을 강조했다. 결국 이후락은 군복을 벗고(준장 예편)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이 됐다.(<신동아> 1997.4.1 정대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4.19특집]장면 최후 고백>) 장 총리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고, 이 장군은 “힘센 쪽에 붙어 다니는 형편없는 군인”이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락의 위세는 5.16 쿠데타로 끝나는 듯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그가 밀고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군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그는 권력에서 소외돼 얼마 동안 대한공론사 명함을 갖고 다녔지만, 몇 달 안 돼 박정희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고(1961.12), 이후 박의 비서실장(1963∼1969), 중앙정보부장(1970∼1973)이 돼 박의 곁을 지키다, 7.4 남북공동성명 체제를 파탄시키기 위한 미국의 공작으로 박의 곁을 떠나게 된다.  

육군방첩대 609부대장 이진삼

4·19 직후인 1960년 7월20일 육군 특무부대가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되고,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립된데 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인 1961년 7월 육군첩보대(Army Intelligence Unit)가 창설된다. 오늘날의 기무사와 국정원, 정보사로 발전할 3개 조직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육군첩보대는 휴전선 이북으로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거나 적진을 유린하는 북파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었지만, 이 조직이 생겨나면서 ‘내부의 예비 적(possible enemy)’을 감시·사찰하고 살상하는 ‘내수 테러’의 시대가 열린다.

1960년대는 명실상부 육군방첩대와 육군첩보대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육사 15기 이진삼이다.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뒤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고 나중에는 국회의원도 되는 인물이다. 단, 1960년대 육군첩보대(정보사의 전신)는 육군방첩대(보안사/기무사의 전신) 산하 조직이었거나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북파공작과 내수테러를 전문으로(?) 하던 609 부대가 육군방첩대장 직속이었고(기무사령관이 정보사령부 특공부대를 지휘), 609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이 훗날 정보사령관이 된다.

이진삼의 놀라운 업적(?)이 세상이 알려진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였다.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1년 자유선진당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던 그는 1월 24일 국회 국방위 간담회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을 세워 놓고 “내가 이북에 세 번 들어가서 보복 작전[?]한 내용 알고 있습니까”라며 “몸으로 때려 부순거야. 33명이 사망했어요”라고 자랑한 것이다. 당시 간담회는 비공개여서 그의 이야기는 10여일 뒤 MBC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그가 말한 ‘보복 작전’(?)은 1967년 9월과 10월에 있었던 세 차례의 북파 침투 공작을 말한다. 당시 대위였던 그가 특수공작원 3명과 함께 황해도 개풍군에 침투해 인민군 수 십 명을 살상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진삼 씨는 아마도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널리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그의 ‘애국적(?) 북파공작’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내수공작 즉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있어서도 가히 1인자였다.

그의 국회 국방위 발언이 알려진 직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양정철 씨가 이 점을 지적했다. 양 전 비서관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알려지지 않은 그 분의 다른 작전들도 국민이 알아야지요”라며 1965년 9월 있었던 민간인 테러 사건을 상기했다.

“1965년 9월7일 밤 11시45분경.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였던 변 모씨 집 대문에 폭발물이 터져 집이 크게 파괴 .. 약 1시간 뒤인 8일 새벽 0시40분경 서울 성동구 성수동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 모씨 집에 지프를 탄 괴한 3명이 들이닥쳐 .. 성북구 장위동까지 끌고 가 노상에서 집단 구타 .. 8일 오후에는 당시 동아방송 본부국장 최 모씨 집에 “가족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내용의 협박전화 .. 동아일보 이 모 기자 집엔 .. 불온문서 1장이 투입돼 용공조작 ..의혹 .. 경찰은 △추석을 앞두고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황 .. △통행금지시간 전후임에도 범인들이 탄 지프가 검문에 걸린 적이 없으며 △변 씨 집 대문 폭파에 사용된 폭발물이 군용 TNT였다는 점을 들어 범인들이 군인이라는 심증 .. 10여일 만에 육군 모 방첩부대 소속 군인들의 사건 관련 수상한 동향을 알아냈고 군 수사당국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 군검경 합동수사반을 편성.. 10일간의 수사 끝에 서울시내 주둔 특수부대인「6·25용사회」 소속 부대장 이진삼 대위와 부하 두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하지만 소환조사가 어렵다며 수사반을 해체 .. 2차 합동수사반을 구성했지만 역시 용두사미 .. 1975, 1980년에도 .. 진상규명 여론이 일었으나 재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미궁에 ..”

당시 신문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까지 꾸려져 이진삼과 그의 부하 두 명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군 당국이 이들 세 명을 베트남으로 빼돌려 조사를 방해했고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정보사 출신 요원들의 양심선언으로 1985년과 1986년 테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한 창일 때, 1965년 테러에 대한 진상 규명 요청이 있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보안사와 정보사의 힘이 청와대와 국회의 권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 뒷배까지 가세하면 실로 그 힘은 어마어마하다 할 것이다.

1965년 당시 검사로서 검.경 합동수사반장이었던 김일두(金一斗. 70). 변호사는 1993년 7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 수사당국이 용의선상에 오른 군인에 대한 수사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소환된 군인 중에는 권총을 차고 수사본부에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수사의 어려움을 털어놨다(동아일보 1993.7.26). 동아일보는 1965년 당시 편집국 고위 간부들을 겨냥한 테러의 피해 규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동아일보 1993년 7월 26일 자 30면과 31면. 1965년 9월 발생한 자사 간부 2명에 대한 테러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밝히면서 이진삼 씨의 사진을 싣고 그 옆에 “조사받는 이(李) 대위”라는 사진 제목과 “趙東華(조동화) 씨와의 대질신문을 받으러 당시 합동수사반에 출두한 李鎭三(이진삼) 대위”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진삼 대위 위 사진은 “1965년 9월 7일 밤 폭탄테러로 부서진 당시 변영권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의 집 대문”이다. 오른쪽 해설 기사에는 ‘이듬해도 동아 기자 테러 2건 발생’이라는 제목과 “66년 4월 25일 저녁 정치부 최영철 기자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보안사-정보사-중정 정립기 : 국가테러 극성기

이진삼의 609부대로 이름을 떨치던 육군방첩대는 ‘1.21 김신조 사건’ 직후인 1968년 2월 15일 갑자기 윤필용 방첩대장이 경질되면서 한동안 내홍을 치른다. 그 내홍은 8개월 뒤인 1968년 10월 11일 김재규 육군방첩대장이 육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 될 때까지 계속된다. 김신조가 TV에 나와 “박정희 목을 따러...” 운운해 박정희가 노발대발 윤필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돌지만,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윤필용의 경질은 북파공작의 명수인 이진삼 609부대장의 모종의 역할을 포함해 김신조 사건의 어떤 내막과 관련돼 있을 것으로 본다. 윤필용 육군방첩대장을 경질한 직후 - 훗날 이진삼이 지휘하게 되는 - 정보사령부를 별도 조직으로 떼어내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정보사령부 창설 시기를 70년대 초 또는 1972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즈음 정보(국가정보원)와 방첩(기무사령부), 첩보(정보사령부) 조직이 정립(鼎立)해 3위1체로 움직이면서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창출했고,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양산됐으며 각종 의문사와 국가테러가 자행됐다. 대표적인 국가테러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1973.8.8),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 육영수 저격(1974.8.15),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를 들 수 있다.

이들 사건이 일어나던 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1970.12.21∼1973.12.2)과 신직수(1973.12.3∼1976.12.3), 육군보안사령관은 강창성(1971.9.23∼1973.8.14)과 김종환(1973.814∼1975.2.26), 진종채(1975.2.28∼1979.3.5) 였다. (윤필용 경질 다음날인 1968년 2월 16일 육군방첩대장에 임명돼 8개월 뒤 초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는 김재규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준비하던 때 물러났다.) 그 시기에, 그 ‘국가테러 체계’의 하부에서 수족처럼 움직였을 정보사령부의 수장이 누구였는지 아는 이가 없다. 

1972년 유신 계엄 때는 보안사가 국회의원들을 잡아다 고문한 일도 있었다. 1975년 3월 열린 국회 국방위 회의에서 송원영(宋元英) 신민당 의원은 “명색이 국회의원을 발가벗겨 난타하고 그 부인에까지 폭언을 퍼부었다”면서 “대공 업무에 전담해야 할 보안사가 8대 의원들을 수사하면서 김대중 씨, 김영삼 씨 등과의 관계, 자금 출처 등 정치적 문제를 수사한 것은 군의 중립성을 벗어난 것이며 정치적 보복의 인상이 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75.3.15)

또 1973년 전두환과 노태우의 밀고로 시작된 소위 ‘윤필용 모반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 때는, 그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대우실업 사장이던 김우중이 보안사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윤필용은 1968년 육군방첩대장 직에서 밀려나 월남 맹호사단장으로 쫓겨 갔지만 1972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었다. 5.16 쿠데타 이전부터 이어진 박정희와의 인연 덕에 재기에 성공했지만, ‘더 큰 권력’ 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 ‘더 큰 권력’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우려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윤필용 모반 사건의 또 다른 타깃이 바로 명실상부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준장이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부관(참모장)이었던 손영길은 늘 전두환.노태우 보다 앞서 나갔다. 윤필용 사건이 나던 해인 1973년 1월 1일 별을 달 때도 손영길이 선임이었다. 하나회를 이끈 것도 그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이 거세되지 않았다면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라는 타이틀이 전두환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청와대 30경비대장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도 손영길이었고, 전두환은 그의 자리를 물려받곤 했다. 사진 오른쪽은 1973년 ‘윤필용 모반 사건’ 재판 모습. 앞줄 맨 오른쪽이 윤필용 수경사령관, 그 옆이 손영길 참모장이다. )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와 전두환의 시대

극악무도했던 박정희의 극우반공 체제가 조락(凋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인 1977년 10월 7일 육군보안사령부와 해.공군.해병 보안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탄생한다. 2년 뒤인 1979년 3월 별 둘짜리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들어앉고, 그로부터 7개월 뒤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전두환이 모든 정보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자리가 1977년 만들어졌던 것이다.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까지 대통령이 된 것은 보안사가 5공과 6공 권력 창출의 핵이었음을 뜻한다. 1980년대 말, 노태우(전두환과 함께 육사 11기) 다음 보안사령관이 된 박준병(육사 12기)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국군보안사령부가 신설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0월 17일 전두환 1사단장은 제3 땅굴 발견자로 등장, 땅굴 안에서 존 베시 주한미군사령관과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고, 이 공로로 1년 뒤인 1979년 5.16민족상 수상자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사진이 또 실린다. 이는 차기 대권 주자를 부각시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전두환 권력에 이어 노태우까지, 1950년대 말 함께 미국 군사유학을 다녀온 ‘미국의 밀리터리 보이’ 둘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군보안사령부는 노태우 정권 중반인 1991년 국민의 지탄 속에 국군기무사령부로 개명해야 했다. 1990년 10월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1천300명에 대한 사찰 문건을 들고 나와 양심선언을 했고, 5공 정권과 결별하는 모양새를 노린 노태우 정권이 국민들의 반감을 앞세워 슬쩍 이름만 바꾼 것이다. 

’85·86·88년 테러의 일상화 : 형제 정보사령관 이진삼·이진백

1970년대의 가공할 국가테러의 실행자가 누구였을지는 1980년대 드러난 ‘내수 공작’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자들이 잇달아 대통령을 해먹는 시기에, 한때 보안사에서 한솥밥을 먹던 저들의 국가테러 범죄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끔찍한 범죄의 꼬리가 밟힌 것이다.

1980년대 국가테러의 중심에는 이진삼.이진백 형제 정보사령관이 있었다. 과거 육군방첩대장 직속 609 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은 전두환 정권의 기세가 등등할 때인 1985∼86년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60년대 식 ‘내수 테러’가 재연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전두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언론이 재갈을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이 양심고백을 하고 나서였다. 그들의 양심선언이 없었더라면, 1965년 ‘내수 공작’ 이후의 이진삼 씨 행적은 더 이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양심선언을 한 이는 북파공작원 출신 김형두 씨(당시 41세)와 정팔만 씨(당시 39세)였다.

김 씨는 1993년 7월 5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5년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 씨의 상도동 자택에 침입했고, 양순직 신민당 부총재를 폭행하는 등 다른 야당 의원들에게 테러를 저질렀다고 고백했고, 정팔만 씨는 녹음증언을 통해 “85년 10월 중순 쯤 행동대장 주 모 씨와 대원 김 모, 이 모 씨 등과 함께 권총, 마취제 등으로 무장”한 채 김영삼 대통령 집 2층 서재에 침입해 물건을 절취한 사실 등을 시인했다.

김 씨는 또 “86년 4월 29일 오후 10시쯤 테러단을 지휘한 ‘이[상범] 부장’의 지시로 나와 이 모 씨가 서울 신대방동 앞길에서 귀가하는 양[순직] 씨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밝히고, 지난 [1993년] 6월 이[상범] 부장과의 전화통화에서 “배반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내용도 녹음으로 공개했다.(<“또 다른 테러 기도했었다” - 김·정 양씨 증언> 중앙일보 1993.7.8) 테러단을 모으고 테러를 지시한 이상범은 정보사령부 소속(중령)으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한진구 대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의 양심선언이 아니었다면, 1980년대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정치테러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이 이종일씨, 오른쪽이 김형두 씨)

김영삼 대통령의 집을 털었다는 양심 고백의 파장은 컸다. 국방부가 즉각 조사에 나섰고, 검찰도 경찰도 서로 달려들어 수사에 적극성을 보였다. 국방부 검찰부는 7월 14일 ‘정보사 정치테러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 당시 정보사령관이었고 노태우 정권 시절 체육청소년부 장관까지 지낸 이진삼 씨와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예비역소장(55·갑종 151기)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진술을 한운구씨 (54·당시 정보사 3처장)로부터 받아내고 이들 3명의 혐의사실을 서울지검에 통보했다.(이진삼 씨는 자신의 책 <별처럼 또 별처럼: 전 육군참모총장 이진삼의 인생이야기>에서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기 전 우리 국민들은 또 한 번 정보사의 끔찍한 테러를 경험해야 했다. 이번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이진삼 씨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이진백 씨가 정보사령관에 임명된 직후인 1988년 8월 6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씨가 출근길에 괴한들의 습격으로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고, 8월 17일 새벽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에 괴한들이 침입해 잠을 자던 남자 회원을 폭행해 쓰러뜨리고 여성 회원을 강간한 것이다.

신문사 사회부장 테러마저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거의 묻힐 무렵 우리마당 사건이 터졌고, 그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일고 야당이 목청을 높이고서야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이진백 정보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범행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 수사의 단초가 됐던 우리마당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마당 대표는 김기종(당시 29세) 씨로, 2015년 주한미국 대사 모씨에게 ‘커터칼 테러’를 가한 주인공이다. 김 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사건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분신해 전신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이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테러가 기승을 부리던 1985∼1986년 안기부장은 장세동(육사 16기. 재임 1985.2.19∼1987.5.25), 보안사령관은 이종구(육사 14기. 1985.6.1∼1986.7.4)였고, 1988년 오홍근 부장 테러와 우리마당 테러 당시 안기부장은 배명인(1988.5.7∼1988.12.4), 보안사령관은 최평욱 (1987.12.29∼1988.12.7)이었다.

이들 ‘내수 공작’과 더불어 1980년대를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전성기로 만든 것은 ‘해외 공작’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북괴의 공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와 KAL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두 사건의 징검다리격인 김포공항 테러(1986.9.14)도 있다.(이들 사건에 대해서는 졸저 <1983 버마>(박종철 출판사)와 ‘진실의 길’ 기고 <1986 김포공항 테러 : 진상과 은폐의 서사>(2018.7.10)‘진실의 길’ 신성국 신부의 글 참조.)

1983년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당시 정보사령관은 이상규, 보안사령관은 박준병(재임 1981.7.14∼1984.7.6)이었고, 국가안전기획부의 파트너는 박세직 차장이었다. 모두 육사 12기 동기.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의 이름이 알려진 것도 북파공작원 장교급 인사들의 우연한 증언을 통해서였다. 김현희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은 고명승(육사 15기. 1986.7.4∼1987.12.29), 중앙정보부장은 안무혁(1987.5.25∼1988.5.6)이었다.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무사를 없애면 정보사가 없어질까?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 따위가 눈에 보이는 권력이라면, 국군기무사와 이 기무사의 그림자와 같은 국군정보사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국가정보원은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 사이에 있다. 보이는 권력은 유한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한하다. 보이는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훨씬 더 무섭고 간교하다.

이 나라 남녘에 극우반공 체제를 고착시켜 분단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온갖 범죄와 범죄적 행위의 주체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새로운 권력 창출이 필요할 시점에 은밀하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무사령부를 해체하고 새로 조직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소식이다. 기무사의 과거는 이 땅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육과 추악하고 추잡한 테러와 음모, 조작, 협잡의 역사였다. 그런데 기무사령부가 해체되면 그 정치테러의 망령도 사라질까?

<시사저널>은 장기간에 걸쳐 정보사령부가 저질러 온 국가테러의 진상을 추적한 끝에 지난 2004년 11월 제788호에서 정보사령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현역과 예비역 북파공작원으로 각각 구성된 정치공작팀 ‘남산대’를 산하에 두고 있었다고 폭로하면서 “과거 정보사 정치테러는 정보사 단독작품이 아니었다”라며 “계획 단계에서부터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 정보사가 유기적으로 개입하거나 묵인 방조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기무사를 재창설돼 현직 검사가 기무사 감찰실장을 맡으면 남산대가 없어질까? 늘 저들은 변하는 듯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도 미국의 손아귀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흉측한 국가테러는 없었다. 그러다 옛사랑의 추억을 더듬는 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예의 유사행위가 빈발했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려는 자들이 세운 박근혜 정권 시절 두 번이나 국가테러 행위가 자행된 이유다. 저 조직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이 나라에서는 언제고 또 가공할 국가테러가 벌어질 것이다. (20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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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만에 김기춘 석방시킨 ‘구속만기’…조윤선은 언제까지

[뉴스AS] 18개월만에 김기춘 석방시킨 ‘구속만기’…조윤선은 언제까지

등록 :2018-08-06 11:34수정 :2018-08-06 12:58

 

 

기소 1년6개월만에 석방된 김기춘
블랙리스트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한 날
대법원, 김 전 비서실장 구속 취소 결정

신체의 자유·무죄추정 원칙 지키려
형사소송법 구속기간 제한 둬
별도 사건 구속영장 발부 않으면
1심·2심·3심 각 6개월만 구속 가능

김종덕·김상률도 지난달 말 석방
2심서 구속된 조윤선은 9월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15년 1월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업무보고경제혁신 3개년 계획Ⅱ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15년 1월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업무보고경제혁신 3개년 계획Ⅱ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기춘(79)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자정 구속기간이 끝나 석방됐다. 지난해 1월21일 구속된 지 562일 만이다. 여론은 좋지 않다. 이날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선 김 전 비서실장은 자신의 석방을 반대하는 시민들과 마주했다. 이들은 “김기춘 석방 절대 안 돼”라는 구호 등을 외치며 김 전 비서실장을 막아섰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가까스로 자동차에 탔지만 차까지 막아선 시민들에 막혀 40여분을 갇혀있어야 했고, 앞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그는 구치소를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지난 7월27일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취소를 결정했다. 이날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합의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면서, 상고심 심리가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구속재판 기간 6개월을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92조는 구속기간을 2개월로 하되, 심급마다 2개월 단위로 2차에 한하여 갱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2심과 3심을 의미하는 항소심에서는 3차에 한해 갱신이 가능하다. 즉 구속기소된 경우를 기준으로 1심 2개월+4개월(2번 갱신), 2심 6개월(3번 갱신), 3심 6개월(3번 갱신)까지만 구속 재판이 가능하며, 별도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는 한 불구속 재판을 해야 한다.

 

구속재판 기간에 맞춰 하급심 재판도 진행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해 2월7일 김 전 비서실장을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구속 기간은 구속된 날을 포함해 계산하기 때문에, 1심 구속 재판 기간은 6개월 뒤인 지난해 8월6일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는 지난해 7월27일 김 전 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범행을 가장 정점에서 지시하고 실행 계획을 승인했으며 때로는 이를 독려했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도 구속 기한 6개월을 앞둔 지난 1월23일, 블랙리스트에다 1심이 무죄로 판단한 문체부 공무원 사직 강요 혐의까지 인정해 김 전 비서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로 “헌법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문화예술계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 배제를 위하여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막대한 권한을 남용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구속 재판 기간도 6개월인데, 이에 따르면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 재판 기한은 8월6일이었다. 6개월이 지나서도 선고하지 못하면 구속된 피고인을 잡아 둘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김 전 비서실장은 석방된 것이다. 한 판사는 “국정농단 사건 피고인 대부분에 적용된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는 판례가 많지 않아 대법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블랙리스트 공모 혐의를 받는 박 전 대통령 사건이 상고되면 대법원에서 통일적으로 판단해야 해 재판 기간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구속 재판 기간을 제한하는 규정은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 당시에는 “구속기간은 2월로 한다. 특히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심급마다 2차에 한하여 갱신할 수 있다”고 해 오히려 지금보다 구속재판 기간이 짧았다. 상소심에서 3차 갱신이 가능해 구속 재판 기간이 늘어난 건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 때로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렇다면 왜 구속재판 기간을 규정해둔 것일까.

 

헌법재판소는 2001년 재판관 7대2 의견으로 구속 기간을 정해둔 형사소송법 제92조 제1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이 조항의 입법 목적이 “강제처분은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필요최소한도의 원리가 무죄추정의 법리와 함께 구속기간의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조항의 바탕이 되는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법률조항은 미결구금의 부당한 장기화로 인한 인권의 침해, 구체적으로는 신체의 자유의 침해를 억제하려는 데에 그 입법 목적을 두고 있다”라고 밝혔다. 헌법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고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확정판결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제한 구속을 막은 것이다. 이어 헌재는 “법원이 심리를 더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구속을 해제한 다음 기간의 제한에 구애됨이 없이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 따라서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된다고 볼 수 없다”며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헌재 결정은 대전고법이 이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기 때문에 나왔는데, 구속 기간에 쫓겨 재판해야 하는 판사들이야 말로 구속 재판 기간 제한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김 전 비서실장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구속 기간이 만료돼 지난달 28일과 29일 각각 석방됐다. 다만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다음 달 22일이 구속 만기다. 조 전 장관은 김 전 비서실장과 함께 지난해 1월 구속됐으나, 1심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러다 2심은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됐다. 따라서 조 전 장관의 최대 구속기간은 2개월+6개월(3차 갱신)으로, 구속된 1월23일부터 8개월이다.

 

이날 석방된 김 전 비서실장은 법정에서 계속 볼 수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 외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 보수단체에 정부 지원을 몰아준 화이트리스트 사건,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 보고시간 조작 사건 등 2개의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고령인 김 전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 사건 때부터 환자복을 입고 나와 지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최근에는 직접 증인을 신문하거나, 변호인의 변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등 김 전 비서실장은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검찰은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이 취소되자 두 1심 재판부에 구속영장을 발부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판사는 “국민들의 여론도 중요하지만, 재판은 불구속 재판이 원칙이고 헌법의 무죄 추정 원칙도 중요하다. 헌법과 법률의 원칙은 당사자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지난해 12월 2심 최후 진술에서 아내와 아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지었다. “저에게 남은 소망은 제 늙은 아내와 식물인간으로 4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53살 된 제 아들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주고, 못난 남편과 아비를 만나서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건네고 아들에게는 이런 상태로 누워있으면 아버지가 눈을 감을 수 없으니 하루빨리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당부한 뒤 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김 전 비서실장은 재판을 받는 1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블랙리스트 범행을 사과한 적이 없다. “북한과 종북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공직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던 김 전 비서실장은 “배제 대상 명단 작성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일도 없고 그런 명단을 본 사실조차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진정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김 전 비서실장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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