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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종전선언, 사전에 미측과 충분한 논의했다”

<추가> BBC 인터뷰서, “늦지 않게 2차 북미 정상회담 열릴 것”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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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2  16: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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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앞두고 12일 청와대에서 영국 공영 BBC방송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제공 - 청와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미국의 상응 조치와 함께 속도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타임 테이블에 대해서 양쪽 정상들이 통 크게 합의를 했으면 하는 기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유럽 순방에 앞서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를 갖고 “저는 이 프로세스의 진행에 대해서 아주 강한 낙관을 가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종국에는 비핵화의 완성과 동시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될 것”이라며 “그런 프로세스로 나아가는 것이 미국이 취해 주어야 할 상응하는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미측의 ‘상응조치’를 강조했다.

특히 “종전선언은 사전에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서 미 측과 충분한 논의를 한 것”이라며 “가급적 일찍 조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점에 대해서 한미 간에 공감대가 있었다”고 밝히고 “종전선언은 시기의 문제일 뿐, 반드시 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미측의 상응조치로 종전선언 외에도 “당장 경제 제재의 완화가 어렵다면 경제 제재하고는 무관한 인도적 지원을 허용해 나간다든지, 그리고 또 문화예술단이 서로 교환 방문을 한다든지, 또는 앞으로 경제 제재가 풀리고 난 이후의 준비를 위해서 경제시찰단을 서로 교환한다든지, 또는 북한에 미국의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든지 하는 등의 조치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시했다. 나아가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정도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서서히 완화해 나가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북미 간에 협의해야 될 내용”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는 추가적인 핵실험과 핵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서 핵을 생산하고 미사일을 발전시키는 시설들을 폐기한다는 것, 그리고 현존하는 핵무기와 핵물질들을 전부 없애겠다는 것, 전부가 포함된 것이었다”며 “완전한 비핵화의 개념 속에 그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것은 서로 분명히 의견이 일치할 수 있었다”고 확언했다.

아울러 “김정은 위원장은 아주 젊지만 이 가난한 나라를 발전시켜야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또 아주 예의바르고, 솔직담백하면서 연장자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그런 아주 겸손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로라 비커 BBC 서울 특파원과 인터뷰하며 경내 소정원을 산책하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와 조우했다. [사진제공 - 청와대]

문 대통령은 기자와 산책하며 평양 5.1경기장 연설을 회고하고 “긴장된 순간이었는데 다행히 잘해낸 것 같다”며 “김정은 위원장이 그 연설을 전하면서 아무런, 말하자면 조건을 달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적으로 저의 분별에 맡겨 주었는데 그것은 북한이 그만큼 달라졌다는 것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제게 대단한 신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

문 대통령은 “그렇게 늦지 않게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중간선거 이후에 빠른 시일 내에 2차 정상회담을 열기 위해서 지금 실무적으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양국 간에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확인했다.

대북제재와 남북경협에 대해서는 “남북 간에 본격적인 경제 협력은 이 제재가 풀리거나 또는 제재에서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이 예외적인 조치로 그렇게 용인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며 “본격적인 경제 협력은 그 제재의 완화에 따르되, 그때까지 경제 협력을 위한 사전 준비들을 미리 해 두자는 것”이라고 밝히고 공동 조사, 또는 공동 연구, 앞으로의 방안들에 대한 협의 등을 예시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북한도 보편적인 그런 인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면서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가장 실질적으로 개선해 주는 방법은 이런 남북 간의 협력, 그리고 국제사회와 북한 간의 어떤 협력, 그리고 또 북한이 개방의 길로 나와서 이렇게 정상적인 국가가 되어 가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유럽은 지금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자라고 하는 우리 정부의 목표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지지해 줬다”며 “앞으로 남북 대화나 또는 북미 대화가 교착에 빠질 경우에 이란 핵협상에서 유럽이 아주 창의적인 그런 방안들을 제시하면서 중재를 했듯이 그런 대화의 교착 상태를 중재하고 창의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그런 역할도 EU가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나아가 “앞으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이렇게 구축되려면 결국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전체의 다자평화안보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며 “유럽의 지혜와 경험을 많이 나눠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부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3일부터 21일까지 7박 9일의 일정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교황청, 벨기에, 덴마크 순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18일 교황을 만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교황 초청 의사를 전달할 계획이다.

이날 로라 비커 (Laura Bicker) BBC 서울 특파원과의 인터뷰는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경내에서 진행됐으며, BBC는 1922년 세계최초로 설립된 공영방송의 대명사이자 유럽 및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공영방송사다.


(추가,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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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게 한국은 미국의 속국인가

[기고]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18.10.12 09:38l최종 업데이트 18.10.12 09:38l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강경화 외교장관의 "5·24 제재"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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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국회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 의원이 "북한의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응한 5·24 조치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고 묻자 강 장관은 "관계부처와 검토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여야 의원들이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 검토는 아니다"라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북이 평화공존과 협력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교류의 걸림돌인 5·24 조치를 해제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주권자들의 여론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 조치는 2010년 5월 24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므로 문재인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언제라도 해제할 수 있고 유지하겠다고 정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원수가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5·24 조치 해제 문제가 국회에서 도마에 오르자마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한국 정부)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AP통신은 트럼프가 대북 독자 제재를 해제할 것이라는 한국의 제안은 "자신이 허락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오만방자한 언행이다. 트럼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대북한 경제 제재조치'라 하더라도 "나의 승인 없이는 그것을 해제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을 텐데, 한국의 대북정책인 5·24 조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천만부당한 일이다.

트럼프의 한국 주권 모독 발언에 대해 국내의 여야 정치인 대다수가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유독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만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유엔 제재사항은 유엔 제재위원회의 승인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그 외에 우리나라의 5·24 조치나 미국의 대북제재 등 한·미 단독 제재 사항은 상호 '협의' 사항이지 누구의 '승인'을 받아야 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썼다. 그는 "'승인'이 아니라 '긴밀한 사전협의' 취지였음을 트럼프 대통령이 명확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정부도 이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트럼프의 식민지 지배자 같은 행태 비판해야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에 들어간 직후부터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에 종속되는 속도가 아주 빨라졌다. 그런 길로 가게 만든 결정적 동인은 미국과 한국이 1953년 10월 1일 조인한 뒤 이듬해 11월 18일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그 조약 4조에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이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한국은 군사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체결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과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에 얽매어 군사적으로 미국은 '갑', 한국은 '을'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는 얼마 전에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비를 100% 부담하라"고 말한 바 있다. 식민지나 속국에 대해서만 내릴 수 있는 오만한 '명령'처럼 들렸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한반도의 남반부를 속국처럼 여기는 미국의 권력자들을 향해 당당하게 자주적 태도를 보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에다 막강한 비밀정보기관까지 보유한 미국의 지배세력에 저항했다가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에 힘입어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전의 정부들보다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자주권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서, 북한 정권과 손을 잡고 냉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바탕을 다져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이 함께하는 '종전선언', 그리고 훨씬 더 나아가 평화협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연한 자세를 보여야 하겠지만 트럼프의 식민 지배자 같은 행태는 엄중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종철(1944년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1967년 11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하지만 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거쳐 <한겨레> 논설위원과 <연합뉴스> 대표,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 2016민주평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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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트랙터야, 분단의 선을 넘자” 농민들 북에 트랙터 100대 보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11일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 기자회견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8-10-11 18:32:11
수정 2018-10-11 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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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가자 통일트랙터야, 한반도 분단의 선을 넘자"

4.27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 담긴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남측의 농민들이 트랙터 100대를 북에 보내는 계획을 추진한다. 남북 교류의 물꼬를 열었던 1998년 소 떼 방북의 정신을 하겠다는 취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본관 2층 중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 결성을 선언했다. 대북제재 해제와 남북 민간교류 활성화를 위해 꾸려진 운동본부에는 전농과 민주노총을 비롯한 약 20여개의 농민·노동·시민 단체들이 참여했다.

운동본부는 발족 선언문을 통해 "대북제재와 남북의 교류 협력 증진은 함께 갈 수 없다"며 "통일트랙터를 통일 대장정의 선봉에 세우자"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분단의 철조망을 녹여 통일의 농기구를 만들자'는 민중의 염원이 통일 트랙터에 있다"며 "통일트랙터로 남북 민간교류의 첫 삽을 뜨자"고 덧붙였다.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
11일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결성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일트랙터야, 선을 넘자’라는 구호 아래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향후 활동계획을 밝혔다. 2018.10.11.ⓒ뉴시스

북에 통일 트랙터를 보내자는 제안을 가장 먼저 한 것은 전농이다. 박행덕 전농 의장은 "우리 민족이 5천년을 같이 살아왔고, 불과 70년 떨어져 살았다"면서,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철조망을 트랙터로 깔아뭉개고 걷어내고 통일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도 운동본부 발족식에 축하 인사를 전했다. 이 상임대표는 "남측 농민들이 북측 농민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 계획 안에 스며있다"면서, "대북제재 완화 또는 철회, 5.24 조치 해제 등 통일 장애물을 제거하는 핵심적인 통일 운동이 될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날 조직 결성에 참여한 단체들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밝혔다.

윤여두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상임대표는 "북의 농업하고 우리 농업하고 협력하면, 세계 어느나라와 FTA(자유무역협정)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북에 없는 게 우리한테 있고, 우리가 많은 게 북에 없다"며 남북 농업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 대표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2005년 평양 시내 공단에 농기계 조립공장을 설립했고, 2010년 5.24 조치 이전까지 4~5년 동안 농기계를 만들어 북에 공급했다.

그는 "북에는 지금 농기계가 거의 없다"며 "가을에 가서 보면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못 앉아 있고, 전부 나와 벼베기 전쟁에 다 나간다. 우리가 콤바인으로 한 나절이면 벨 것을 북은 낫으로 한 달동안 벤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이 약 150만톤 정도의 식량이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의 경지 면적은 남보다 넓지만, 같은 면적에서 나오는 양이 남의 절반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통일농기계품앗이운동'에 대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화를 일치시켜나가는 아주 중요한 운동"이라면서, "우리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들이 앞장서서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통일을 할 때 만이 통일 이후 8천만 겨레와 민족이 소외되는 사람 없이 함께 더불어 잘 사는 평등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트랙터 자료사진
트랙터 자료사진ⓒ정의철 기자

이날 운동본부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통일트랙터는 제2의 소 떼 방북으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것"이라고 자부했다. 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1998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며 소 1001마리를 이끌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거쳐 방북했다. 당시 소떼 방북을 계기로 남북 민간 교류가 급물살을 탔고 이는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 공단이 세워지는 초석이 됐다.

또 이들은 "통일트랙터는 전 국민의 지지와 환호 속에 분단선을 넘을 것"이라며 "통일트랙터를 밀고 당겨달라"고 국민적 참여를 호소했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내년까지 장기적으로 트랙터 100대 보내기를 추진할 것"이라면서 "향후 40억 원(트랙터 100대)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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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교육자, 조만간 만나리라 기대”

 10.4 평양대회 참석한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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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9: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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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남측 전교조와 교총, 북측 교직동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한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지난 4일부터 6일 동안 평양에서 열린 10.4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은 조만간 남북 교육자들이 만나는 행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10년간 중단된 남북 교육교류가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이미 북측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에 남북 교육교류를 제안, 조만간 첫발을 뗄 것이라고 밝혔다.

교직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라고 소감을 밝힌 조창익 위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통일뉴스>가 만났다.

처음 방북한 조창익 위원장,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5만여 명의 전교조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직의 위원장이기에 앞서 교사이기도 한 조창익 위원장의 눈에는 북녘 아이들이 먼저 들어왔다. 

새벽녘 고려호텔 주변을 산책하던 조 위원장은 탁아소 풍경을 바라봤다. 등원하는 아이들에게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모를 이가 하나하나 아이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보기 좋았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한 그는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며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어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관심을 보였다.

남쪽 인사들에게 처음 공개된 과학기술전당에서 “전율을 느꼈다”던 조 위원장은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점, 그런 부분들은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 평양을 방문한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은 파트너인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6.15북측위 관계자들과 만났다. 사진은 6.15북측위 소속 강승일 씨와 찍은 사진.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남북 교육자모임, 조만간 성사될 것”

조 위원장은 이번 방북 기간 북측 파트너인 교직동 관계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만간 남북 교육자모임이 성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교조는 지난 8월 서울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기간 북측에 △남북교육자 교류협력체계 복원과 유지, △2019년 1월 전국참교육실천대회 북측 대표단 초청, △남북교육자 합동연구대회 추진, △남북학생 교류사업, △남측 학생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상호방문, △역사바로세우기 공동사업,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 등을 제안한 상태.

조 위원장은 “(남북 교육단체 간)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면서 남북 교육교류 가능성을 크게 내다봤다.

다만,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이후 북미 정상회담, 종전선언 등이 있어, 북측이 속도를 내기보다는 현 상황을 지켜본 뒤 나설 뜻을 밝혀, 본격적인 남북교류는 내년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관측했다.

“정부, 시민사회진영 통일운동 배려해야.. 통일운동진영 재편도”

조창익 위원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이 아닌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6.15남측위) 교육부문 위원장 자격으로 방북했다. 6.15남측위가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던 것도 사실.

이를 두고, 조 위원장은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대신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꾸준한 노력,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도 피력했다.

조 위원장은 남북교육교류 외에도 교사와 학생들의 통일 감수성을 높이는 자체적인 사업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남북교육교류가 전교조에 국한된 것은 아닌 만큼,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협력하려는 의지도 강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첫 방북,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 통일뉴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으로 다녀오셨다. 평양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신가?

■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 처음이다. 사실 올라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양보심이 강해서, 선배님이 가신다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다. 분위기 좋아서 다음에 또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됐다. 10년이 넘으니 아쉬웠다.

□ 첫 방북 하셨는데 소감이 어떠하셨는가.

   
▲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평양의 가을은 따뜻했다. 온화했다. 사람은 따뜻했다. 새벽에 뭐도 모르고 호텔 주변을 돌아다녔다. 아이들 보고 싶어서. 8시 25분경 탁아원에 갔어요. 아이들을 맡기는데,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인지 보건교사인지, 아침에 나오는 아이들에게 ‘아픈 데 없니’ 하고 검사하더라.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건강을 아침부터 챙겨주더라. 너무나 보기 좋았어요.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평양과 북한에 대한 사전인식과 현장에 가서 직접 목도하고 느낀 감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안도감이라고 할까. 황금 들녘을 봤다. 식량난 등 항간에서 이야기하는데, 다른 지역은 모르지만, 평양 인근 들녘은 남녘의 들녘과 다름없이 황금색이었고, 추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자체적으로 넉넉하게 만들고 공급하는 토대는 되어있었다.

흥분상태였다. 산천, 들녘, 건물, 농촌, 도시. 그 전에 있었다는 혁명적 구호나 선전선동 구호, 그것과 현재 나와 있는 인민의 경제적 자립성을 강조하거나, 생활에 대한 강조나 인민존중사상,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한다’는 구호 등 과거에는 우리에게도 좀 있을 수 있는 구호이지만, 강성대국이나 군사강국으로 위용을 떨치고자 하는, 그런 전쟁의 분위기가 많이 잊혀지고 수그러들고 극복하면서 변하고 있는 북의 모습에, 한편으로 안도하고 한편으로 응원하고 싶고 감격했다.

뭐랄까, 새벽에 붉은 닭이 홰치는 소리,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이랄까, 우스개로 개구리가 뛰려고 웅크리고 있는, 도약하는 모습, 그런 느낌이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둘러보니, “교육의 국가책임제에 눈길”
과학기술전당에서는 “전율을 느꼈다”

□ 이번 방북에서는 아쉽지만, 학교를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참관했는데, 교사로서 느낌이 어떠했는가.

■ 사전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다만, 듣는 정도였는데, 하루 5천여 명이 방과 후 원하는 학생들 와서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수준이 될 때까지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예컨대 재능을 발굴해서 완성하는 완결구조 자체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것이 일반화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만 아니었을 것이라는, 교육을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싶어 하는 목표 등 이런 것들이 느껴졌다.

우리로서는 갖고 있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 교육을 우선시하고 국가책임제로 관철시키는 그런 모습은 한편 시장화되어있고 경쟁과 효율성을 따지는 우리의 교육질서에 견주어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유훈과 현재 살아있는 언어로 교육의 방향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은 사회주의국가, 혁명을 성취한 국가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부심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 남북이 정치.사회적인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보면서 우리 교육 현실에도 접목할 만한 점이 있었는가.

■ 체제 자체가 우선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국가책임제가 관철되는 북한하고 우리는 공교육 체제가 일정 정도 책임지는 상황에서 운용해야 하는 환경이 있다 하더라도, 교육방법과 내용, 교수방식에서 현장에서 구현되는 모습들은 소인수 학생들을 상대로 각 영역별로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책임지고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모습들은 우리 대한민국 교육체제에도 차용될 부분이 있었다.

교육이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느냐는 부러움이 있었다. 우리 교육에 비하면, 소수 아이들이 각 분야에서 자기 재능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내려는 국가의 목표와 의도성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 10.4민족통일대회 방북단이 지난 4일 평양 과학기술전당을 방문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이번에 북측에서 남측 인사들에게는 처음으로 과학기술전당을 공개했다. 어떠했는가.

■ 과학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전율이 느껴졌다. 건물 구조 자체가 각자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학생들이 끝나고 와서 공부를 각자 컴퓨터 앞에서 하는데, 상대가 어떻게 하는가도 보이지만, 모든 것을 집중, 최고의 목표, 하나의 목표, 과학기술혁명의 하나의 목표는 은하 3호로 구현되는 발사체, 세계 최고 우주공학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핵 무력에 대한 기초공사가 그런 과시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과학기술 인력을 키워내겠다는 것, 여명거리, 과학자거리 보면, 과학자를 고급아파트로 이주시키고 대우하고 이러면서 과학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 과학을 앞세우고 교육을 앞세우고, 군사가 있지만, 산업에 대한, 빛나는 조국에서도 주제영역별로 펼치는데, 교육을 상당히 우선순위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래세대가 조국의 미래라는 지침. 그런 부분들은 중요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반영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중고생도 오더라. 컴퓨터를 다루는 데 고개만 들면 발사체가 있다. 눈앞에 있는 거다. 과학이. 그게 인공위성이라고 하는 우주에 대한 진출에 대한 욕망, 꿈이 있고, 무장으로서 세계지배력 확보하겠다는 그 꿈만이 아니고, 과학기술, 우주 공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력을 증진시킴으로해서 아이들에게 과학 인재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렇게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하면 그렇게 진지하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다 다른 주제인데, 텍스트 보고 어떤 사람은 동영상 보고 자기 글을 쓰고 다양하게 주제별로 다르고, 모두가 다. 굉장히 많이 와있는데, 지켜본다고 조용할까? 자기 집중력을 보이고 있고, 억지로 온 학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평양의 교육기관들을 둘러보면서 남측에도 접목할 만한 내용이 있었는가.

■ 문화예술자산, 교육자산에서 국가책임제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존엄한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국가 중심부에서 인적 영혼에 대한 가치, 자유로운 상상력 영역은 오롯이 국가책임제로 뒷받침하는 무상교육 등이 와닿았다.

방북 기간 북측 ‘교직동’ 관계자 못만나... 그러나 “조만간 남북교육자모임 열릴 것”

□ 전교조의 북측 파트너는 ‘조선교육문화일꾼직업동맹’(교직동)이다. 이번 방북 기간 동안 교직동 관계자와 만났는가.

■ 만나지 못했다. 직총 관계자도 못 오고, 교직동도 못 오고, 여성, 농민 각 분야가 못 왔다. 6.15북측위 중심으로 만났다. 남측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의 만남이 성사됐으면 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

□ 북측 교직동을 만나지 못했지만, 전교조 차원에서 남북 교류사업을 구상하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을 북측에 제안하려고 하는가.

   
▲ 조창익 위원장이 북측에 제안한 남북교육교류제안서를 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지난 8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당시 북측에 우리의 남북교류제안서를 보낸 바 있다. 교육교류를 촉진하자는 내용이다. 남북 간 교육교류는 상당히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먼저, 남북교육자교류를 복원하고 복원해야 한다. 남북 교사들이 교류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오는 1월 부산대에서 열리는 참교육실천대회에 북측이 오셨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교류의 발판을 굳건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로는 교사교류이다. 교사들이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크게 할 수 없지만, 교사교류를 통해서 교육내용, 방법, 통일, 판문점선언의 교육적 이행을 실천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 등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교류이다. 학생들의 북녘 수학여행, 교육견학단 등을 꾸리고 싶다. 이밖에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이와 별도로 조선학교 지원 공동사업도 제안한 상태이다. 저희들은 하고 싶은 게 많다.

□ 10년간 단절된 남북관계는 민간영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북 단체들이 다시 신뢰를 쌓아야 하는 단계라고들 한다. 전교조는 어떠한가.

■ 간극은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구조는 쌓여있다. 북에서 전교조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연민의 정을 느끼고 연대하고 싶다고 하고 응원하는 그럼 마음들은 확인된다.

다만, 남북관계가 빠른 속도로,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 이후에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쪽으로 가는데, 상수 관계는 거기에 있으니까. 연말 이전에 큰 변화가 종전선언 다음 평화선언 등 여러 정치적 변수들이 작동함으로써 이후에 교육 분야에도 협의할 수 있지 않나 싶다.

□ 북측이 남북교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꼈는가.

■ 제가 있는 데서 북측이 직접 이야기를 했다. 곧바로 속도 내기 어렵다. 예를 들면, 대학생 교류 이런 것들은 안 해본 부분이라 새롭게 하는 것은 하기 어렵다. 기왕 해오던 것, 예를 들면 전교조, 교총과 북측 교직동과의 교류는 해오던 것이니까 북에서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은 부담이 되는 것 같다.

지자체가 열정적으로 남북사업에 관심이 높은데, 수십 수백 개가 몰려들며 교통정리가 안 되니까, 우선은 어렵다는 의사를 북측이 표명했다. 농민, 지역, 여성 등도 안 해온 부분이라 북측이 자신이 없다, 천천히 가자고 했다.

□ 남북교류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교총)과 연대도 필요하다. 협력방안이 있는가. 

■ 교총 회장과 제가 만나서 약속했다. 사무처장과 실무협의하고 가서 이야기 나누고, 필요하다면, 남북교육교류사업 이전에 합동기자회견을 해서 양 단체의 교류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양 집행부 만나서 논의구조 확보하자고 했다. 교총과 이야기가 진행될 것이다.

   
▲ 조창익 위원장은 정부의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를 주문했다. 그리고 통일운동진영도 재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정부, 시민사회 통일운동 진정성 배려해야 한다”
“공통의 지향점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 6.15남측위 소속으로 방북하셨다. 이번 방북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이 있었다. 어떻게 보고 있는가. 

■ 시민사회단체가 10년 동안 줄기차게 투쟁으로 돌파한 이 어려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시민사회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시당한 처사로 절망을 안겨준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갖고 갈등상황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이후 펼쳐가는 데 별로 좋지 않다.

다만, 정부가 그간 시민사회진영의 통일에 대한 열정, 그동안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온 노력에 대해서, 통일운동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현 정부의 통일정책도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좋은 시기라고 해서, 과실 따 먹는 형식으로 집권세력 내부에 기득권이 부활해서 차지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투쟁 양상이 비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경고를 스스로 해야 한다. 

지향점을 크게 깔고 공통의 지향점으로 힘을 모으자는 쪽으로 통일운동진영을 재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통일운동은 너와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일이다. 6.15 남측위도 최대한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본다.

서울로 내려오는 민족통일대회는 내년에 해야죠. 그때는 이제 6.15남측위를 존중해주는 정부의 모습을 기대한다.

   
▲ 지난 4일 10.4민족통일대회 환영공연이 열린 평양대극장 앞에서 단일기를 펼쳐보이는 조창익 위원장. [사진제공-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전교조, ‘판문점선언’ 시대 본격 준비”

□ 전교조 교사들의 통일역량, 통일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어떻게 내부적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 이제 본격적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위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사업을 해왔다. 이제 실제로 대중운동적 차원에서 북한 바로 알기, 북한 교육내용 등에 대해서 정보가 공유되어 있지 않은 데, 학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교육교류를 계기로 조금 더 대중운동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 학생들의 통일감수성도 중요하다. 과거 6.15 계기 수업 같은 것도 있었다. 판문점선언 시대에서는 어떻게 준비하는가. 

■ 판문점선언은 역사적 계기이다. 교과서가 새로 나올 것이라고 본다. 계기 수업 자료도 만들 것이다. 통일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꾸는 등 사실 굉장히 할 일이 많다. 애정을 갖고 북측을 바라보는 등 구체적인 지침서도 마련하고 힘차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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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10대 동독 소년, 지금은 어떻게 살까?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⑤] 동독 1020세대가 기억하는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기존 동독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30~50대의 동독 주민들 중에서는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똑같은 변화를 겪은 10~20대는 이들과는 좀 달랐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양태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동독 사회와 비교했을 때 보다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서방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에 <프레시안>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며 청년‧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요하네스 빈클러(Johannes Winkler, 1965년 생), 세바스티안 플뤼겔 (Sebastian Flügel, 1973년 생), 칼 에릭 다움 (Carl Erik Daum. 1978년 생) 씨를 만나 그들이 기억하는 독일 재통일과 동독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재통일로 인해 동독 사회와 주민들이 받았던 충격과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의 인터뷰는 지난 9월 9일(현지 시각) 신 연방주(옛 동독 지역이었던 5개주) 중 하나인 튀링엔(Thüringen) 주에 위치한 예나 시에서 진행됐다.  

재통일의 출발, 교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당시 김나지움 6학년(김나지움은 독일의 인문계 중등 교육기관이다. 김나지움 6학년은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에 해당한다. 편집자) 이었던 다움 씨는 동독 이야기를 꺼내자 가장 먼저 동독 시절 국가보안부이자 소위 '비밀 경찰'로 악명 높았던 '슈타지'(Stasi)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동독 시절 철물점을 운영하셨다. 그런데 가게에 이따금 정보를 캐내기 위해 슈타지 요원들이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슈타지 요원이 들어오면 금방 표시가 났기 때문에, 가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 있게 "당신 슈타지 맞지?"라고 말하면 그 요원은 그냥 나가버리곤 했다. 이런 식으로 슈타지 요원들이 정보를 캐내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움)

다움 씨에 따르면 슈타지는 교회나 환경단체와 같이 동독 내에서 활성화된 주민들 모임에 이른바 '정보원'을 한 명씩 심어놓았다. 그런데 이 정보원은 단체 내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관찰하기만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누가 정보원인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플뤼겔 씨는 교회를 관리하는 고위층은 누가 슈타지인지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목사들은 오히려 슈타지가 한 명씩 심어져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동독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는 반정부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의 경우, 슈타지가 교회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설명이다. 
 

▲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서 슈타지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분명했다. 교회가 반정부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1989년 9월 25일, 라이프치히(Leipzig)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를 중심으로 시민 8000여 명이 집결한 '월요 시위'가 동독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독 내에서 교회가 민주주의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냐는 질문에 플뤼겔 씨는 "민주주의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교회나 환경 단체가 큰 가족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사람들 하고 있으면 편하다, 좋다고 느꼈고 여기서는 내가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 동독 시절에는 지금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두 배 정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주말에 교회를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놀러갈 수도 있지만, 동독 시절에는 교회를 가는 것외에 다른 여가 생활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독 내에서) 재통일을 주도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교회나 환경 단체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독 정부는 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시도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소련의 지원도 떨어지자 정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나 환경단체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플뤼겔)  

동독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슈타지의 활동도 많이 위축됐다. 플뤼겔 씨는 장벽이 무너진 이후인 1989년 12월 즈음부터 슈타지가 교회나 다른 단체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슈타지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재통일 이후 슈타지들이 보험회사나 운전 학원, 부동산 중개소 등으로 전업했지만 동독 사람들은 누가 슈타지였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충성심을 보여라  

동독 정부는 체제에 충성심을 보이는 학생들에게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열어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대학 진학과 취업의 갈림길에 섰던 빈클러 씨는 동독 체제가 이어졌다면 자신의 대학 진학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내가 아비투어(Abitur, 대학입시자격)를 치르고 대학 공부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학급이 25명이라고 한다면 동독 정부는 그 중 3명 정도만 아비투어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줬다. 그런데 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의 집권당)의 소년단이라고 불리는 FDJ(Freie Deutsche Jugend, 자유 독일 청년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SED의 당원도 아니었다" (빈클러)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광학회사인 칼자이스(Carl Zeiss)가 운영하는 엔지니어 교육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장벽이 무너진 뒤인 1990년에는 이 교육기관의 본부가 있는 예나에서 공부했다.  

동독 시절에 정부에 충성하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빈클러 씨는 "아버지가 교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성경의 십계명에 써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을 소신있게 이야기한다고 가르쳤다"며 정부에 거짓으로 충성하는 표시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 요하네스 빈클러 씨 ⓒ특별취재팀


다움 씨 역시 동독 내에서 대학을 가려면 충성심을 증명하는 증표가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다움 씨보다 10살이 많은 형은 장벽이 무너졌을 때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동독 시절에는 대학에 가려면 동독 정부에 충성하는 것이 필요했다. FDJ에 속하거나 당원이 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군대에 3년동안 복무해야 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는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 형은 동독이 계속 유지됐다면 (군 복무를 했더라도) 대학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었는데 통일이 되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다움)  

동독 TV를 누가 봐?  

슈타지와 충성 유도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던 동독 정부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특히 서독의 TV 채널이 동독에서도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동독의 몇몇 지역만 빼고 서독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아마 동독 사람 중에 동독 TV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가끔 동독 TV에서 좋은 영화를 보여주거나, 호네커(동독 최고 집권자, SED의 서기장)가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만 동독 TV를 봤다. 

요즘도 그렇지만 뉴스 시작하기 전에 시계가 나오지 않나. 당시 서독 방송에는 동그란 시계가, 동독 방송에는 네모난 시계가 나왔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TV 속 시계 모양을 물어봤는데, 학생들 대부분 당연히 동그랗다고 대답했다. 다 서독 TV만 보니까.(웃음) 

1989년 가을 서독 방송에서 헝가리가 국경을 열어 사람들이 넘어가는 장면이 나왔다. 또 체코의 프라하에서는 한 엄마가 수 미터 정도 되는 (서방국가의) 높은 대사관 담장 위로 자기의 아이를 넘기는 장면이 방영됐다. 동독인들은 이 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이 아무런 폭력적인 상황 없이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교회를 주축으로 평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100명이 모였다가 다음날 500명이 됐고, 학생이나 젊은층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도 같이 나갈 정도였다. 방송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셈이다" (플뤼겔) 
 

▲ 세바스티안 플뤼겔 씨 ⓒ특별취재팀


동독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와중에 1989년 5월 사람들의 시위에 불을 당긴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SED가 부정선거를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SED는 98.9%가 자신들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이건 당시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치였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실제 어느 정당에 투표했냐고 조사를 해봤다. 그 결과는 SED가 말한 것과 너무 달랐다" (빈클러) 

"당시 선거는 기표소에 들어가서 후보를 찍는 비밀선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비밀선거를 하는지 확인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밀투표를 하겠다고 기표소에 들어가는 순간 정부에 낙인이 찍혔다" (다움)  

"기표소에 들어가면 비밀투표를 했다고 표시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다음 날 직장 상사가 불러서 기표소에 좀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회사가 지원을 못 받는다면서 말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플뤼겔)  

동독이 소위 '큰 형님'이라고 부르던 소련의 태도 변화도 동독 사람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는 데 주요한 촉매제가 됐다.  

"동독 사람들에게 소련은 모범적인 국가로 인식돼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개방을 한다고 하니까 동독에서 혼란이 커졌다. 소련에서 동독으로 보내는 잡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그 잡지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서 동독 사람들은 정부에 더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내게 됐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호네커에게 "도와줄게"가 아니라 "변화 늦게 하면 너한테 벌을 줄거야"라고 이야기하니까 동독 주민들은 "이게 뭐지" 싶었다" (플뤼겔)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이 시위를 막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시위에 나서게 됐다" (다움) 

장벽 붕괴를 전후로 학교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다움 씨는 동독으로부터 도망친 선생님도 있었다고 말했다.  

"1989년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 정부는 중국 정부가 정말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었다. 동독 정부에 대해 친화적인 발언을 했던 선생님들도 그 발언 수위가 약해졌다. 

동독은 당시 매년 9월 1일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기 시작 첫 날에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 한 분이 안 계셨다. 알아보니 프라하에서 (서방국가 쪽) 대사관으로 넘어갔다고 하더라. 선생님뿐만 아니라 서독으로 넘어간 친구들도 많았다. 하루하루가 변화의 연속이었다" (다움) 

통일이 아니었다면?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졌다. 다움 씨와 플뤼겔 씨는 당시 통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동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연방주(구 동독)가 서독에 흡수되고 화폐 개혁도 예정보다 몇 달 더 빨리 이뤄졌다. 동독에서는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 매일 매일 느껴졌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동독 내에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혁된 동독을 유지하자고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도망갔을 것이다. 흡수통일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더 좋은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다움) 

"서독이 동독을 흡수했거나 훔쳐갔다고 보지 않는다. 동독에서 그 상태로 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경제를 비롯해 동독 내의 많은 것이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플뤼겔) 

빈클러 씨 역시 당시 시위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통일로 인해 유토피아가 열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동독 말기에는 (1989년 5월 지방선거와 같은) 부정선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SED에서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시위에 나갔다. 사회주의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당시 시위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원했다.  

개인적으로는 동독에서 여행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동독 내에서 억압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권리인데 그게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흡수통일이 내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긴 했다.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 직장을 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빈클러 씨는 튀링엔 주 천문관측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편집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낙원이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빈클러)  

빈클러 씨와 다움, 플뤼겔 씨에게 통일이 나름의 기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다움 씨는 본인이 통일로 인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세대일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의 부모님 세대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전히 서독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경우도 있을 거라고 전했다.  
 

▲ 칼 에릭 다움 씨 ⓒ특별취재팀


"통일될 무렵에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이후 서독 교육 시스템에 바로 안착해서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 갈 수 있었다. 10살 많은 형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들에게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또 연금과 관련, 재통일 체제에서 동독 사람들이 동독 시절 직장에 다녔다는 것을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동독 내에서는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만한 기술이 있는 공장도 있었지만, 재통일 체제에서 이런 공장을 없애버린 경우도 많다. 기존 서독 지역에 경쟁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서독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부분 때문이다" (다움) 

30년이 지났지만  

독일 재통일이 이뤄진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동서독 간 차이는 존재한다. 이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서독 사람들과 만났을 때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가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첫 1년은 뮌헨에 있었다. 당시 회사 사장이 동독 사람에게 '프로젝트가 언제 끝나냐'고 물으면 동독 사람은 '한달 후'라고 대답하고 정말 한 달 후에 끝냈다. 그런데 서독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주일 후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라. 하지만 절대 그 기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동독 사람들은 불평도 많고 좀 딱딱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약속은 지키는 성향이 있는데, 서독 사람들은 말은 다 해줄 것처럼 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플뤼겔)  

"서독 출신들은 동독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랐기 때문에 생활 방식도 다르다. 유머감각도 좀 다르고. 예를 들어 서독 출신 사람들은 동독 출신에 비해 자산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 

또 동독 사람들은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지 않았나? 그래서 물건을 샀는데 뭔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서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서독 사람들은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동독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에서 동독의 잔재 같은 것이 남아있다. 동독 시절에 언론 매체가 하도 거짓말을 많이 해서 지금도 언론 매체를 통해 나오는 기사를 보면 일단 덮어놓고 믿지는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빈클러)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독 시절에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밖에서 자유롭게 말하면 안 되는 사회였는데, 서독의 경우에는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스스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발표 수업을 한다. 자꾸 자기를 보여주는 교육을 십수 년 동안 배우면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움)  

동서독 간 격차가 많이 좁혀졌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차이도 여전하다.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전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나이대에 서독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보다 출발할 때의 자본이 두 배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리고 그 아이들의 자손 세대 정도가 되어야 서독과 대등한 경제적 출발 자본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일반 기업들도 40년 동안의 동독 시절에 다 망가졌다. 지금 동독에 큰 회사들이 이따금 있지만 나머지는 굉장히 영세하다. 겨우 겨우 열심히 일해서 회사를 키워 놓으면 서독에서 그 회사를 사버리곤 한다. 앞으로 두 세대는 더 지나야 동서독이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플뤼겔)  

동서독은 40년 동안 따로 살다가 재통일됐지만 남북은 분단만 해도 70년이 넘어가고 있다. 또 전화나 편지를 교환하고 서로 방문도 할 수 있었던 독일에 비하면 남북은 교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북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동독의 다수는 체제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독 정부는 개인의 의견을 통제하지 못했다. 서독에서 친척이 오고 가면 동서독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정보가 왔다갔다 했는지 동독 정부는 몰랐다. 이런 측면에서 동서독은 남북 상황과 비교되지 않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다움) 

"동서독은 재통일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남북은 이런 식으로 통일하면 안된다" (플뤼겔) (통역 : 조경혜) 

"너희도 통일할 것 같아?"  

플뤼겔 씨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바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은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독일어판으로 번역한 조경혜 번역가다. 조 번역가는 1996년 예나로 유학을 왔고 이후 지금의 남편인 플뤼겔 씨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22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소회와 바깥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어떤지 들어보기 위해 9월 10일(현지 시각)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 조경혜 번역가 ⓒ특별취재팀


우선 1990년대 중반, 독일이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예나라는 구 동독 지역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서독 지역에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가 많았을텐데 왜 하필 예나였을까?

"1996년이면 재통일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독문학을 공부하려고 알아보던 중 교수님이 요즘에는 동독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래서 서독 지역에도 지원하고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와 예나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는데 예나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 그래서 입학허가서 들고 바로 왔지.  

그 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예나에 얼마나 있는지 그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짐 싸서 왔다. 예나에 도착해서 알게 됐는데 당시 한국 사람이 5명 있었다. 첫 번째 한국인을 만나는데 3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여기가 예전 동독 지역이다 보니,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한인지 북한인지를 물어봤다. 어르신들 중에는 동독 시절에 북한 사람 많이 알고 지냈다는 분도 계신다"  

학위만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느새 독일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백인이 아닌 동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물어봤다. 특히 요즘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떠오르면서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도 늘어가고 있어 독일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독일 극우 집단들의 타깃이 동아시아 쪽은 아니라서 제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낀 건 없다. 그런데 지난해 60대 여성이 한 난민에 의해 강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일 사람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 때문에 외국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다만, 이슬람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터키계 무슬림이 많이 거주하는데도 그렇다.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경우 전략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동독 지역을 공략한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난민 때문이라는 식으로 선전을 한다. 

그런데 난민에 대한 반감은 극우뿐만 아니라 중산층에도 좀 있는 것 같다. 자기가 낸 세금을 가지고 난민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보인다"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도 독일을 위한 대안당이 주로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얻은 이유가 됐을 거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실제 동독 지역에 거주하면서 동서독 간 경제적 차이를 느낀 적은 없었을까?  

"예전 서독 지역에 가면 분위기가 동독 지역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예전 서독 지역 중에서도 주로 큰 도시를 가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확실히 동독 지역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독일 기준으로 외국인도 훨씬 많고. 

또 예나는 대학이 있어서 동독 내에서도 발전이 좀 이뤄진 도시이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 도시들은 좀 어렵다. 라이프치히만 해도 큰 공장 건물을 가지고 있음에도 수리할 수 있는 자본이 없어서 빈 건물로 놔둔 곳이 상당수 있다.  

물론 예나도 재통일 전에는 좀 어두웠다고 한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에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색을 칠하고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밝아졌다고 한다. 예나의 건물 중에 웬만한 건 다 수리했다고 보면 된다. 하다못해 페인트칠이라도 다 새로 했다" 

분단 40년에 통일 30년이 가까워 오지만 동서독 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곧 있으면 분단 100년이라는 시간표를 받아들지도 모를 남북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좋을까?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남북 간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여기가 한국보다 더 난리다. 지난해에는 저도 걱정되더라.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너희도 통일할 거 같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어려울 거 같다고 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하기도 했고 분단됐을 때 교류도 안했고. 또 이산가족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고. 

독일은 40년 분단 기간 20년 정도는 TV부터 시작해서 통신 등을 허가하면서 동서독 간 교류를 해왔다. 이게 기반이 되어 국제 정세가 딱 맞아 떨어질 때 통일을 한 것이다. 이 사람들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남북이 교류하는 게 선행되어야 통일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경제적인 문제보다 남북이 이질화가 심각해졌다는 것이 가장 문제 아닐까 싶다. 남한은 문명과 변화에 너무 민감하고 북한은 너무 통제돼서 사실 극과 극이다. 이 둘이 융화되려면 남북이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면서 조금씩 통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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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법부냐!”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 발표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12 [01: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사진 : 참여연대)     © 편집국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원로 및 시민사회민중단체정당 등 각계인사 318명이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11일 오전 930분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를 개최하고이어 11시 같은 장소에서 시국선언 및 활동계획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들 인사들은 시국선언을 통해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며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사법부를 향해 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며 성실한 수사협조관련 모든 자료 제출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국회를 향해서도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하며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끝으로 사회원로 및 각계인사들은 국민들을 향해 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며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했다.

 

한편 기자회견에 앞서 진행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3차 시국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사법농단 법관 탄핵과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캠페인 나는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을 파면한다를 10월 동안 진행해 11월 초 국회에 제출하고, 11월 탄핵돼야 할 법관 명단과 탄핵소추 사유를 발표하기로 했다또 20일엔 3차 사법농단 규탄집회 및 행진을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하고 영장 기각 규탄 1인 시위지역별 시국선언신문광고 등의 행동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번 시국선언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김중배 전 MBC 사장한승헌 변호사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해동 목사함세웅문정현 신부명진 스님 등 시민사회원로와 각계 인사 318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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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법부냐!

사법적폐청산 촉구 시국선언문

 

오늘 우리는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누적된 사법적폐를 뿌리 뽑을 것을 다시금 촉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주지하다시피양승태 대법원은 박근혜 적폐정권의 비위를 맞추며 재판을 거래하고이를 통해 제 기득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7~80년대 노동탄압 관련 소송쌍용차 정리해고 소송, KTX 여승무원 소송강제징용 소송긴급조치 국가배상 소송전교조 법외노조 소송키코 피해자 등 중소상공인 소송그리고 강제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관련 소송 등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렸다가히 민주주의와 헌법의 근본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법농단이었다.

 

사법농단의 전모가 드러나면서그리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를 공개하고 성실한 수사협조를 약속하면서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정권 당시의 사법 적폐가 낱낱이 청산되기를 기대했다이를 주도한 적폐 법관들이 퇴출되고 사법부의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다그러나 사건이 공개된 지 넉 달이나 지난 지금그간의 기대는 실망과 분노로 변하고 말았다.

 

감옥으로 가야 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직 수사도 받지 않고 있고재판거래와 사법농단을 저지른 전현직 법관들에 대한 압수수색구속 영장은 거의 대부분이 기각되었다그러는 사이에 사법 농단의 증거자료들은 파기훼손되고 있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 범죄의 최고 책임자인 전직 대법원장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청구에 대해서는 주거안정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유로 연거푸 기각하였다실로 기가 막힐 지경이다.

 

대법원장이 약속한 성실한 수사협조는 온 데 간 데 없고학벌지연저들만의 카르텔에 기반한 제 식구 감싸기만 횡행하고 있다사법부가 실정법 준수에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조직적으로 수사방해를 일삼으면서 법질서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법관들이 사실상 법위에 군림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법관들 스스로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법치주의를 부정하고국민 기본권보장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의 존재의의를 짓밟는 실로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지금우리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양심적인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촉구한다더 이상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스스로 국민들에게 공개 약속한 대로 성실하게 수사협조하라사법농단과 재판거래 관련 모든 자료를 제출하라이 길만이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촉구한다국회는 더 이상 뒷짐지지 말고 직접 나서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사법농단과 재판거래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위해 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그것만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법부의 수사방해와 셀프재판으로 인한 재판왜곡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다또한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이 있는 적폐법관들을 지체 없이 탄핵소추함으로써 이들에 의한 추가적인 사법왜곡을 방지해야 한다.

 

우리는 국민에게 호소한다법원이 제 식구 감싸기식으로 사법적폐를 비호하고 있는 지금이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또 국민의 기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광장에 다시 모여 촛불을 들 것을 호소한다.

 

이에 우리는사법적폐 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담아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양승태 전 대법원장그리고 사법농단과 재판거래에 책임있는 적폐법관들을 즉각 구속처벌하라!

둘째국회는 영장발부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재판부 설치와 특별 재심요건 등을 입법화하는 특별법을 즉각 제정하라!

셋째사법농단 적폐법관들을 지체없이 탄핵하라!

넷째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원상 회복조치를 실시하라!

 

2018년 10월 11일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해결 촉구를 위한 각계 시국선언 참가자 318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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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개인주의의 한계

휴심정 201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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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더 나은 사회] 박원순-데이비드 코튼 좌담

 

박원순 서울시장
“전환도시 방향 확고하게 정할 시점
협동으로도 경제 살릴 수 있어
1 대 99의 사회,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

데이비드 코튼 교수
“현재의 경제체제는 ‘자살경제’
공동체에 보탬 되는 경제 틀 짤 때
부자들도 미래 없다는 걸 깨달아야”

 

1.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생태문명과 도시전환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태문명 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첫 만남이라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10일 아침 서울시청 시장실에서 열린 좌담에 앞서 박원순 시장과 데이비드 코튼 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시장실 내부를 장식한 다양한 지도와 전광판을 가리키면서 잠시 환담을 나눴다. 박 시장은 코튼 교수의 ‘생태담론’에 공감과 동의를 나타냈고, 코튼 교수는 친필 서명이 담긴 자신의 영어판 저서(국내엔 <이야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라는 제목으로 2017년 출간)를 선물하며 서울시의 도시혁신 활동에 지지를 보냈다. 생태문명을 설파하는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시 주최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문명 전환과 도시의 실험’을 주제로 내걸고 열리는 이 행사는 서울시의 도시혁신 경험을 지구촌과 함께 나누고 도시 전환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다. 코튼 교수는 첫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도시의 역할’이란 제목의 발제를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마련한 이번 좌담은 한 시간 남짓 진행됐다.

 

2.JPG» 최근 유럽의 4개 도시를 다녀온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개발·원조 일하다 ‘자본주의 비판가’로
 인류가 끊임없이 물질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지구와 자연환경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무시하기 힘들다. 지구의 나이를 가르는 구분으로 ‘인간세’(인류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에 대한 두 분의 견해부터 듣고 싶다.
데이비드 코튼(이하 코튼) “인류란 무엇인가, 문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필요한 때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자연과 사람을 파괴하며 발전해왔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며, 대중과 생명체, 지구를 억압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재화를 창출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생명체를 파괴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자살경제’(suicide economy)라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박원순(이하 박) “큰 방향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충분히 동의한다. 성장 일변도의 사회가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불평등도 키웠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대안이 필요하다. 서울시는 원전하나줄이기 노력을 펼쳐오고 있고 보행친화도시로의 전환도 노력 중이다. 에너지 자립마을이나 에코마일리지 제도도 있다. 서울시도 전환도시로서 방향을 확고하게 정할 때다.”

 

3.JPG»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선진국의 개발과 원조가 원주민의 삶을 파괴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열정적인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37년 보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코튼 교수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국제개발처 고문으로 일하면서 서유럽 나라들의 개발정책이 개발도상국 빈곤층 주민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다 물질문명의 한계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그가 강조하는 생태담론이 과연 발전 단계와 상황이 다른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코튼 교수는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는 이상주의적인 미국 중산층이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대화를 이어갔다.
코튼 “20년 동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빈곤을 줄이는 운동을 했다. 개발과 원조가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일궈왔던 주민들과 공동체에 오히려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수도 없이 눈으로 지켜봤다. 그나마 도움을 준 거라곤 보건분야 정도뿐이다. 주민들을 땅에서 내몰고 공장의 싼 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켰다. 좀 더 발전한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돈이 중개자 노릇을 하는 사회가 됐다. 오늘 아침 여기 오기 전 레스토랑에서 밖을 바라보니 사람보다 차가 더 많더라. 차 안에는 죄다 한 사람만 타고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4.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이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열린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의 좌담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사회적 경제가 대세구나’ 자신감 얻어”
박 “최근 도시 네 곳(바르셀로나·빌바오·취리히·탈린)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선 기존의 역사 흔적을 파괴하지 않고도 생활환경을 더 인간적으로 바꿀 수 있구나 느꼈다. 빌바오에선 서울시가 의장도시를 맡고 있는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 참석했다. 86개 나라에서 1700여명이 왔다. 경쟁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시도 의욕적으로 힘을 쏟고 있는 사회적 경제가 세계적 대세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서울시는 도시재생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혹시 코튼 교수가 서울시에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코튼 “박 시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힘이 난다.(웃음) 도시는 중앙정부보다도 공동체를 좀 더 배려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중앙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 대부분이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경제 틀을 짜는 일은 도시가 더 잘할 수 있다. 서울시가 노동이사제를 시행한다고 들었다. 아주 훌륭한 정책이다. 덧붙이자면 도시는 차보다 사람을 위해 디자인돼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치, 제도, 인프라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의 전통을 살리는 도시재생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코튼 교수는 시장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서울시 보행도로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멋지다, 훌륭하다”고 치켜세웠다. 이에 박 시장은 지난여름 강북의 삼양동 옥탑방 체험을 떠올리며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박 “마을(옥탑방)에 살아보니 마을 경제가 다 무너졌더라. 골목식당, 철물점, 미용실 이런 건 다 사라지고 죄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뿐이다. 거기서 나온 수익은 전부 본사로 돌아간다. 1 대 99의 경제를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서울시가 돈을 써도 정작 건설사 주머니로 돌아갈 뿐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서울시가 세금으로 쓰는 돈만이라도 동네 주민들한테 돌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마음먹었다. 지역 주민들이 만드는 제품들이 팔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jpg»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서울시청 6층 시장실 전광판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혹시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박 “귀한 조언 잘 새겨듣겠다. 서울시가 마을공동체 사업을 처음 시작하자 대도시에 무슨 마을 타령이냐, 19세기 농촌경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냐 반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다. 대도시도 마을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한다. 지역과 마을의 재생이 대도시의 성장과 대립하는 게 아니다.”
박 시장은 내친김에 코튼 교수를 향해 “아예 한달 정도 서울에 머무르면서 동네를 들여다보시라”고 웃으면서 권하기도 했다. 좌담을 마무리하며 코튼 교수는 ‘세가지 결론’을 하나하나 정리하듯 짚었다.
코튼 “첫째, 세계 리더십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만심에서 나오는 서구의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는 동양의 사고방식으로. 둘째, 이대로는 부자들도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과 지구가 죽으면 모두 끝이다. 부를 분배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사회로 가야 한다. 셋째,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도 너무 늦었다.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행·정리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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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러 3국 협상 “대조선 단독제재 반대” 합의

북·중·러 3국 협상 “대조선 단독제재 반대” 합의공동보도문 발표… “유엔안보리 대조선 제재 조절과정 가동해야”
▲ 최선희 북한(조선) 외무성 부상이 지난 9일 북중러 3자 회담을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무부 영빈관에 도착했다.[사진 : 뉴시스/ NHK 캡쳐]

최선희 북한(조선) 외무성 부상과 쿵쉬안유(孔鉉佑) 중국 외교부 부부장, 그리고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이 지난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3자 협상을 갖고 결과를 담은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11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3자는 공동보도문에서 “조선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의지를 재확언”하곤 “이러한 과정들이 신뢰조성을 선행시키면서 단계적이며 동시적인 방법으로 전진되여야 하며 관련국들의 상응한 조치가 동반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공통된 인식을 가지였다”고 밝혔다.

이어 “3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의의 있는 실천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취한데 대해 주목하면서 유엔안보리사회가 제때에 대조선 제재의 조절과정을 가동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견해일치를 보았다”면서 “3자는 단독제재를 반대하는 공동의 립장을 재천명하였다”고 밝혔다. ‘조절과정’이란 간접적 표현을 사용했지만 유엔안보리가 대북 제재 해제 또는 완화 조치를 취해 나가야한다는 데 사실상 합의했다는 얘기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 등 개별 국가들의 대북 제재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주목된다. 대북 제재 문제와 관련해 북중러 3국이 유엔에서 공조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3자는 또 “조선반도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평화적이며 정치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데 대하여 의견일치를 보았다”면서 “조선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관련국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호상 우려를 해소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북남조선 사이의 협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더불어 “협상에서는 조선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해당 나라들 사이에 쌍무 및 다무적 협력을 강화하여야 할 필요성이 구체적으로 토의되였다”면서 “3자는 대화를 계속 진행해나가기로 합의하였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조선중앙통신은 “3자 협상에서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이고 있는 공화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높이 평가되였으며 조선반도 정세의 현 긍정적인 추이가 지속되도록 그에 상응한 조치들이 취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대해 견해일치를 보았다”고 알렸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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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새로운 방식의 비핵화 '빅딜' 필요하다

[현안진단] '시퀀스' 빅딜이 현실적 대안
2018.10.11 11:00:15
 

 

 

 

종전선언과 영변 핵시설의 교환은 '스몰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으로 북·미간 비핵화 협상의 교착국면 해소를 위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당일치기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면담이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미간 이견의 조정이나 실무협상이 아닌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에 대한 '확약'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직후 미 국무부는 김정은 위원장이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 확인을 위한 사찰단을 초청했다고 밝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사찰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언급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평양 공동선언'에서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계기로 종전선언과 영변 핵시설을 등가물로 교환하는 협상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현재핵의 핵심인 원자로와 재처리 및 농축시설을 포함하고 있다. 북한이 미래핵인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에 이어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의 해체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다음 단계 현재핵의 비핵화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으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화하고 있으며, 그 동안 북한의 집착을 고려할 때 북·미 정상회담의 재개는 종전선언의 성사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북·미간의 스몰딜의 수준을 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입구일 뿐이며 불가침을 포함하는 항구적 평화상태의 달성, 즉 한반도 평화협정의 길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이다.  

영변 핵시설은 북한 현재핵의 핵심시설이지만 북한의 다른 지역에도 우라늄 농축시설이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핵의 다른 핵심분야인 ICBM 제조시설은 더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개연성이 있다. 북한의 단거리 및 중장거리, 그리고 ICBM 제조시설은 상호 긴밀히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의 핵심은 과거핵이다. 과거핵은 이미 생산한 핵물질, 핵탄두, 그리고 ICBM 등 운반수단이다. 과거핵은 당장 쓸 수 있는 무기라는 점에서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이 핵심적 레버리지로 활용할 수 있다. 과거핵 폐기는 북한 비핵화의 성공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영변 핵시설의 폐기와 종전선언이 등가물로 교환된다고 해도 보다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비핵화 방식에 대한 북·미간 이견 

북·미간 이견이 반복되는 근본적 원인은 비핵화 방식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는 신고-검증-폐기를 내용으로 하는 사찰 매뉴얼 방식이다. 매뉴얼 방식은 초기에 북한 핵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으며 투명하게 비핵화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에 매뉴얼 방식을 적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상존한다. 우선 핵연료의 채취에서 농축, 재처리 그리고 운반수단의 제조 등 핵무기생산 일관체계를 갖춘 북한과 같은 자발적 핵보유국에 대한 매뉴얼 방식에 따른 비핵화 사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방대한 규모의 북한 핵시설 및 폐기의 기술적 문제를 감안했을 때 단기간 내 완전한 비핵화도 어렵다. 

매뉴얼 방식의 보다 큰 문제는 당사자인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선 신고단계에서 북한 핵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신고내용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의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한은 제한된 장소와 분야를 공개하길 원할 것이며, 미국은 제한이 없는 검증방식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마찰의 가능성이 있다. 신고단계의 이견으로 협상이 파기될 경우 북한은 성과 없이 자신들의 핵능력만 공개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신고단계에서의 협상파기는 이미 과거 북·미 비핵화협상에서 경험한 바다. 신고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해도 비핵화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대북제재의 해제와 체제보장 조치가 단행되기도 어렵다. 매뉴얼 방식을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다.

북한이 선호하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시행한 자발적 비핵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발적으로 비핵화 조치를 실시한 이후 NPT 가입 및 IAEA의 사찰을 받아들였다. 검증과정에서의 잡음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폐기 1년, 검증 2년 등 비교적 단기간 내 비핵화 전 과정을 마무리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와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의 해체, 그리고 영변 핵시설의 영구폐기 제안 등의 조치는 모두 북한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발적 비핵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북한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프로그램은 농축방식의 핵물질 제조시설과 7개가량의 원자탄급 핵탄두 등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반면 북한은 농축과 원자로를 이용한 재처리 등 2가지 방식의 핵물질 제조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운반수단인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제조시설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핵프로그램이 방대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비핵화의 대가로 체제보장과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북한은 비핵화조치를 단계화하여 상응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자발적 비핵화의 가장 큰 문제는 비핵화 완료시점 이전까지는 북한 핵프로그램의 전모를 알 수 없으며, 궁극적 비핵화의 신뢰성을 사전에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북한의 일방적인 자발적 비핵화는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다. 
 

▲ 7일 북한에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오른쪽)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가졌다. ⓒ폼페이오 트위터


북·미간 '시퀀스 방식'의 빅딜이 현실적 대안이다 

종전선언 이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비핵화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빅딜, 즉 북·미간 이견을 보이고 있는 비핵화의 방식에 대한 합의이다. 양측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방식과 미국의 프론트로딩(front loading)방식을 결합하는 절충안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방식을 일부 수용하되 주요 비핵화의 시간표와 절차에 합의하고, 핵심적인 비핵화를 조기에 선행하는 일종의 '시퀀스 방식'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북한 비핵화의 시간과 단계를 서너 덩어리의 완결된 핵심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시퀀스 방식은 신고에서 출발하는 매뉴얼 방식의 문제를 우회할 수 있으며, 신속하게 실질적인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미 모두에게 유용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시퀀스 방식에 있어서 선행조치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실질적 임기인 2020년 말까지 핵심대상의 폐기시간표를 약속하는 것이다. 방대한 북한 핵프로그램과 기술적 문제를 감안했을 때 단기간 내 완전한 비핵화는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핵무기 및 제조시설 등 핵심분야를 대상으로 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비핵화는 가능하다. 

비핵화의 절차와 대상을 구체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실질적 비핵화가 완료되었다는 평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미래핵, 현재핵, 과거핵의 핵심부분이 완전하게 폐기되어야 한다. 이미 폐기절차에 돌입한 미래핵에 이어 영구 폐기의사를 밝힌 영변의 원자로와 재처리 및 농축시설과 아울러 은닉된 농축시설과 ICBM급의 주요 제조시설에 대한 비핵화 조치도 필요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된 핵물질과 핵탄두, ICBM 등 과거핵의 상당부분을 조기반출 또는 폐기하는 프론트로딩의 실행이다. 프론트로딩의 대상이 북한 핵능력의 전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미국의 상응조치가 수반될 경우 북한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다. 프론트로딩은 사실상 북한의 진정성과 비핵화 프로세스의 순조로운 이행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이다. 

비핵화 프로세스에 상응하는 체제보장 및 보상조치의 시퀀스도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과 보상은 종전선언과 단계적 제재해제, 그리고 평화협정 체결의 순서가 될 것이다. 종전선언으로 비핵화와 한반도평화체제 구축의 입구가 마련될 경우 평화협정으로 가는 협상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영변핵시설 영구 폐기의 시작 또는 과거핵 폐기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는 대북제재의 단계적 해제를 통해 비핵화를 견인해야 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핵심분야의 북한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는 판단이 섰을 때 가능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평화협정 체결은 핵심분야 비핵화조치의 완료와 북한 핵프로그램 전모의 투명한 공개를 의미한다. 남은 과제는 잔여 핵프로그램의 중장기적 비핵화조치가 될 것이다.  

시퀀스 방식은 북한 핵의 전모에 대한 투명한 조기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의 차선책이다. 시퀀스 방식의 신뢰성은 각 단계를 구성하는 비핵화 조치들이 독립적으로 북한 핵프로그램에 불가역적이고 영구적 손상을 주는 형식을 통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핵심분야의 비핵화로 북한의 전략적 핵능력과 핵위협이 신속하게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뢰가 필요하다. 

한국의 운전자 역할은 멈출 수 없다 

비핵화를 위한 협상의 테이블에서 북·미 모두 일방적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다. 북한은 비핵화를 향한 확고한 신뢰를 입증해야 하며, 미국은 일방적 압박과 제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도모해야 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한반도 비핵·평화체제구축 프로세스를 진행해야 할 것이며, 시퀀스 방식의 비핵화는 그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퀀스 방식의 북한 비핵화과정에서 한국의 운전자 역할은 중요하다.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은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며, 북·미간 신뢰의 형성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비핵화의 단계마다 이견이 부각될 가능성도 상존한다. 지난 5월과 8월 북·미 정상회담과 폼페이오 장관 방북 연기로 초래된 북핵 협상 교착국면에서 보여준 한국의 운전자로서의 역량이 향후에도 필요한 이유이다.  

비핵화 및 평화체제구축 단계와 연계하여 지속가능한 새로운 남북관계를 형성하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의 전략적 목표는 비핵·평화체제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남북협력의 시대를 개막하는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중장기적인 통일로드맵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반도와 동북아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언급대로 역내 국제정치구도의 근본적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북한 비핵화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태평양전쟁에 대한 미완의 전후처리에 기반을 둔 동북아 국제질서, 즉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새로운 신안보질서로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동북아 신안보질서 형성과정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한국의 국가이익을 구현하기 위한 신국가전략을 모색할 때다. 한반도가 열강의 패권경쟁 속에서 표류했던 구한말의 아픈 기억을 성찰하고 시공간을 보다 길고 넓게 내다보면서 국가발전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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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해제 검토’ 공방에 트럼프까지 뛰어든 이유는?

‘5.24 해제 검토’ 공방에 트럼프까지 뛰어든 이유는?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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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1  11: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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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벌어진 ‘5.24 제재 해제 검토’ 공방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뛰어들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0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에서 ‘5.24 제재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국정감사 발언 관련 질문을 받고 “우리의 승인 없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의 승인 없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10일 강 장관은 ‘5.24 제재 해제 용의가 있는가’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질문에 “관계부처와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가 “관계부처(통일부)가 검토 중”이라고 말을 바꿨다. 논란이 커지자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검토는 아니다”고 물러섰다. 

외교부는 별도 자료를 통해 “5.24 조치 해제 문제는 남북관계 상황 및 대북제재 국면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하여 검토해나갈 사안”이라며, “10일 외교장관의 언급은 남북관계 발전 및 비핵화 관련 대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안보리 결의 등 대북제재의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나아가 “현 단계에서 정부 차원에서의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강 장관과 외교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증폭되는 이유는 ‘대북 제재 완화 문제’가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달 17일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유지’를 당부했으나, 중국.러시아는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7일 방북 계기에 한.중.일을 찾아 ‘대북 제재 유지’를 강하고 주문했다. 반면, 북.중.러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자 차관 대화’를 열어 “비핵화 문제에서 조선(북한)의 중요한 조치와 결합하여 적시에 안보리 대북 제재조치 조정 개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맞섰다. 

한편, 폼페이오 장관이 7일 방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2차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조기에 개최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최선희 외무상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조만간 마주 앉을 예정이다. 최 부상이 미국 측에 요구할 ‘상응조치’에 ‘제재 완화’가 들어갈 가능성이 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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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안 나서면 아무도 친구의 죽음을 밝히지 않을 거예요”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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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10/11 11:16
  • 수정일
    2018/10/11 11:16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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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노동자 단속 중 추락사한 현장목격 증언 “단속반이 발 붙잡은 뒤 중심잃고 머리부터 추락”
경찰 수사 부진 “단속반이 찼던 바디캠 영상 봤지만 더 확인해봐야”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8년 10월 11일 목요일

열흘 전인 지난달 30일, 코코(29‧가명)씨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발언대에 올랐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미등록체류자 단속 중 추락해 숨진 친구 딴저테이씨(27)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부평역 앞 광장에서 열린 ‘법무부 죽음의 단속 규탄·딴저테이씨 죽음 진상규명 촉구 추모집회’에서였다. 코코씨 발언은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가 한국어로 동시에 옮겼다.

“저도 미등록체류자입니다. 여기 나오면 위험하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친구가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죽어갈 텐데. 제가 나와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요. 그래서 왔습니다. 무섭지만. 무섭지만.” 지난 8월22일 코코씨는 딴저테이씨가 단속반에 둘러싸여 창밖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단속반은 점심시간에 들이닥쳤다. 코코씨와 딴저테이씨는 건설현장에 딸린 식당에서 닭고기 반찬을 배식 받아 마주앉았다. “오늘 맛있겠다. 많이 먹자”고 대화를 나누고 첫 술을 뜨던 참이었다. 출입구쪽에서 쾅 소리가 났다. “앉아, 앉아, 앉아! 야! 앉아!” 한 미얀마 노동자는 ‘중국 노동자들끼리 싸움이 난 줄 알았다’고 돌이켰다. 들이닥친 이들은 곧바로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단속 나왔어. 위험해, 뛰어.”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영문을 모르던 코코씨에게 딴저테이씨가 말했다. 돌아보니 공무원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3명, 몸집이 큰 사복 차림이 5명. 유니폼 중 1명은 영상을 찍고 있다. 둘은 서로 반대쪽으로 뛰었다.

식당에 딸린 창고로 향해 뛰며 코코씨는 친구를 돌아봤다. 딴저테이씨는 앞서 뛰어내린 4명에 이어 창틀에 올랐다. 코코씨는 “단속반이 친구가 뛰지 못하게 다리를 붙잡는 걸 봤다”며 “친구는 중심을 잃어 창문 넘어 8m 지하로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했다. 딴저테이씨가 떨어진 곳은 창문 밑 얕은 평지 너머 공사 중이던 현장이었다. 앞서 뛴 4명은 평지에 착지해 살아남았다.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 지난 8월22일 딴저테이씨가 창문에서 추락한 위치.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가 추락한 직후에도 단속반은 단속작업에 열중했다고 코코씨는 말한다. “‘야, 1명 떨어졌어’ 하고 외치는 소리를 창고 안에서 들었어요. 그래도 상관 없이 계속 (단속 색출)해요.” 현장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딴저테이씨가 추락하고 30분가량 흐른 뒤에야 구급대에 실려갔다고 말한다. “추락 20~30분 후 한국인 동료(과장)가 와서 소장에게 무전기로 말했어요. 소장님이 와서 ‘야, 아직 안 죽었잖아. 119 불러’라고 했어요. 5분 뒤에 구급차가 와서 딴저테이를 데려갔어요.” 딴저테이씨는 17일 간 뇌사상태에 있다 9월8일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건 당일 중국, 베트남 등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가운데 36명이 붙잡혔다. 미얀마 팀 9명 가운데 5명이 붙잡힌 뒤 본국에 보내졌다. 

법무부 해명은 현장 증언과 엇갈린다. 법무부는 지난 1일 ‘장기기증 미얀마인 불법체류자 추락 보도 내용 관련 설명자료’에서 “보도된 미얀마인은 발견 즉시 법무부 직원에 의해 119에 신고됐다”고 했다. 단속반이 12시5분 단속을 시작했고, 추락한 딴저테이씨를 8분에 발견하자 마자 구급대를 불렀다는 설명이다. 이주인권운동가 소모뚜씨는 “법무부와 현장 목격자 말이 다른데, 증거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부는 딴저테이씨 죽음이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입장이다. 법무부는 설명자료에서 당시 “외국인의 안전사고에 대비하고자 창문 등에 단속직원을 미리 배치”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입장을 전해들은 코코씨는 안전에 대비한다면 그날 그 시간과 장소를 택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건 아이도 못 믿는 말이에요. 현장에서 단속하는 게 제일 위험해요. 5명이 창문으로 도망쳤고, 딴저테이는 밖으로 떨어져 죽었잖아요.” 법무부 훈령인 ‘출입국사범 단속과정의 적법절차 및 인권보호 준칙(준칙)’은 “제3자의 주거지, 영업장소에서의 단속은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최소한도로 실시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단속반의 반말과 폭언 주장을 두고는 “단속 과정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욕설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준칙은 “외국인 등에 대하여 폭언이나 가혹행위 또는 차별적 언행을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밝히고 있다.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 딴저테이씨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주노동자 동료 코코(29)씨(왼쪽)를 인천 부평역 인근 미얀마이주민 협동조합 식당에서 7일 만났다. 오른쪽은 인터뷰 통역을 도운 틴아웅(25)씨. 사진=김예리 기자
 

병원 기록에 추락 사유가 ‘자살’로 적힌 점도 미스터리다. 119 구급대 쪽은 이같이 사유를 밝힌 적이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도 부인하고 있다. 설명자료에서 “법무부 직원은 (119 차량이 병원에 도착한) 그 이후에 병원에 도착”했다며 “병원에 이송된 뒤 기록에 추락사유가 ‘자살’이라고 표기돼있는 것에 대해서는 법무부가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경찰이 “사건을 수사 중”이라고 했지만 추락 원인 규명은 지지부진하다. 김포경찰서는 현장 단속반원이 찼던 바디카메라 영상 원본을 제출받아 추락 경위를 확인했다고 밝혔으나 접촉 여부를 놓고는 “수사 중이라 말하기 어렵다”며 “확인해 봐야겠다”고 했다. 경찰은 “(단속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이 없는지 더 확인할 예정”이라며 새로운 현장 증언도 참고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8월 일어난 사건의 정확한 경위를 현재까지 가려내지 않은 점은 의문이 생기는 대목이다. 

경찰은 단속반원 1명과 건설업계 관계자를 대상으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이 단속반원과 건설업계 관계자는 추락 장면을 정확히 목격하지 못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지난 2008년부터 10년 동안 정부가 미등록체류자 단속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인정한 사망자 수는 10명이다. 징계받은 법무부 직원은 1명도 없다. 

미등록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토끼몰이식’ 강력단속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이주인권센터 활동가 박정형씨는 “이전 정권이 미등록이민자를 범죄율과 연동시켰다면, 이제는 서민일자리 보호라는 명분으로 조직적인 과격 단속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 난민이기도 한 소모뚜씨는 “건설현장을 보면 관리자만 한국인이다. 나머지 청소 등 밑바닥 일은 이주노동자가 아니면 하려 하지 않는다”며 “서민 일자리 창출을 말하며 이주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은 부조리”라고 말했다.

딴저테이씨 사건 이후에도 정부는 강력단속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달 20일 “불법체류 외국인이 국민 일자리를 잠식”한다며 “건설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불법취업자 단속활동을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일에는 ‘불법체류자 특별대책’을 시행한다며 △특별 자진출국 기간 △집중단속 등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 8월22일 출입국관리사무소 강제단속 과정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미얀마 미등록 이주노동자 딴저테이(27)씨. 사진=코코씨 제공
 

딴저테이씨는 “1년만 ‘불법체류자’로 일하다 고향에 가겠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딴저테이씨의 비자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지난 10월 만료됐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단속 과정에서 사상자가 생기면 자체 가입한 보험으로 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한다. 딴저테이씨의 입원치료비 3600만 원과 장례비 600만 원은 건설사 측이 낸 위로금 5000만원으로 지불했다. 딴저테이씨는 한국인에게 장기를 기증하기로 해 총 4명이 장기를 이식받았다. 

 

인력부족 3D 업종 채우도록 묵인, 착취 방조하다 2004년 이후 추방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의 역사] 
 

1. 1980년대 – 묵인 

인접 아시아 국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유입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이주민정책 골자는 ‘묵인’이었다. 기업들이 저임금 고강도-위험노동 업종에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이 자리를 채웠다. 인력이 모자르다는 기업의 호소에 정부는 1992년 6월부터 17차례에 걸쳐 미등록 노동자들의 출국을 유예했다. 이주노동자는 정부의 침묵 속 승인 아래 10년이 넘게 노동시장 밑바닥을 지켰다. 

2. 1990년대 – 착취 

1994년에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생기면서 산업노동자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이주해왔다. 제도 명목은 개발도상국의 노동력을 받고 한국의 기술을 전수한다는 ‘경제협력’이었다. 그러나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제도를 ‘교육의 이름을 한 착취’라고 했다. 산업연수생을 노동자가 아닌 교육생 신분으로 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했다. 열악한 노동조건 탓에 업장 내 가혹행위도 늘어났다. 관리운영 업체의 횡포에도 그대로 노출됐다. 

산업연수생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업장을 바꾸면 ‘불법체류자’가 됐다. 산업연수생 신분을 벗어나 미등록 노동자가 되면 돈도 더 벌 수 있었다. 그 탓에 미등록 체류자가 급증해 2002년엔 이주노동자 가운데 미등록율이 79.8%(36만 2천여 명 가운데 28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때리지 마세요.’ 1995년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푯말을 내걸고 명동성당 쇠사슬 농성에 나서 ‘현대판 노예제’ 폐지를 촉구했다.

한편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둔 3월 정부는 ‘불법체류자 자진신고기간’을 발표하고 신고자에 한해 2003년 3월31일까지 출국 유예했다. 이 기간에 전체 미등록 체류자의 93%가 자진신고를 마쳤다. 

3. 2004년~현재 – 추방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요구가 커지자 정부는 다른 제도를 꺼내들었다. 고용허가제다. 명목은 △이주노동자 시장을 양성화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연수생제도에 따른 인권탄압 시비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제도로 정부는 인력을 연수생이 아니라 노동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간 중소기업중앙회가 맡았던 인력 도입과 관리를 정부가 도맡았다. 

정영섭 이주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이 전환기를 ‘정부가 공인한 추방’으로 꼽는다. 2003년 말 고용허가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 차례 미등록 체류자 19만여 명을 합법화한 후 법무부는 대대적 강제 단속에 나섰다. 인권단체 ‘이주노동자 지원대책위원회’에 따르면 2004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강제단속으로 8명이 숨졌다. 미등록 체류자들은 단속을 피하다 객사하거나 적발된 후 강제추방이 두려워 자살했다. 

4. 산업연수생 제도의 착취는 여전 

현대판 노예제라는 오명은 그대로다. 고용허가제도 모든 권한이 사업주에게 집중되긴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상습 폭언이나 성폭행 등 사유를 대고 입증하지 못하면 이주노동자가 업장을 옮길 수 없다. 횟수도 4년 10개월 내 3번으로 제한한다. 이를 어기면 그대로 단속 대상이 된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옴짝달싹하면 ‘불법체류자’로 전락시키는 제도인 셈이다. 

토끼몰이식 단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이 법무부에 제출 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며 80명이 부상하거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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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 존재 이유에 의문이 생기는 까닭

유엔사 존재 이유에 의문이 생기는 까닭
▲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지난 8월 열린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송환식 기자회견에서 웨인 에어 유엔군 사령부 부사령관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지난 65년간 존재감 없던 유엔군사령부가 최근 다시 ‘뜨고’ 있다.

지난 8월 남북철도 연결 시범운행차 방북하는 남측 점검단을 유엔사가 불허하면서부터다. 이때도 한미연합사나 주한미군사령부가 아닌 유엔사가 왜 나서는지 의아해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지난달 28일엔 리용호 북 외무상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유엔사를 거론했다. 리 외무상은 유엔사가 “미국의 지휘에만 복종”하면서 “신성한 유엔의 명칭을 도용하고 있다”며 해체를 주장했다.

유엔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3일 비무장지대(DMZ) 내 지뢰제거 작업을 유엔사가 승인했다는 보도를 통해서다. 남측 DMZ의 관리권이 유엔사에 있음을 재확인한 것.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에 따라 남과 북이 공동으로 DMZ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유엔사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도 의아하지만 1975년 9월 유엔총회에서 이미 해산 결정이 내려진 유엔사가 4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유엔사는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24일 일본 도쿄에서 창설돼, 전쟁이 끝난 1957년 미8군과 함께 용산 주한미군기지로 이전했다.

유엔 창설 이래 최초로 결성된 미국 주도 연합군인 유엔사는 탄생에서부터 위법성 논란에 휘말렸다. 유엔헌장이 군사기구 창설의 전제조건으로 규정한 ‘특별협정’을 미국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

그래선지 1975년 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 유엔사 해체를 결의했고,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1976년 1월1일부로 유엔사 해체를 약속했다. 그러나 43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국은 유엔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미국은 유엔사를 해체하는 대신 1978년 한미연합사를 창설해 유엔사의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한편 한미합동군사훈련 팀스프리트를 시작한다.

▲ 육군은 비무장지대 내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작업을 2일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서 개시했다. [사진 : 뉴시스]

철도·도로 연결과 DMZ 지뢰 재거에 유엔사는 개입할 권한이 있을까, 없을까? 이 문제와 관련해선 이미 선례가 있다.

6.15공동선언 발표 직후인 지난 2000년 11월 조선인민군과 유엔사 간에 동·서해지구 철도 연결을 위한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에 의해 철도와 도로가 통과하는 비무장지대 구역은 남측이 관리(Administration)한다고 명시됐으나, 2002년 남북지뢰검증단 교환을 둘러싸고 유엔사가 억지를 썼다. 유엔사가 돌연 관리권은 우리 정부에 있지만 관할권(Jurisdiction)은 자기네에 있다고 강변한 것. 그러나 합의서에 ‘정전협정에 따라 처리한다’고 명시(정전협정문엔 관리권만 있고 관할권은 따로 언급되지 않음)됨에 따라 미국의 억지는 결국 통하지 않았다.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에 따라 DMZ 내 유해 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이 시작됐다. 또 DMZ 내 역사유적 조사까지 진행되면 사실상 남쪽 DMZ 전 구역의 관리권이 우리 정부에 이양되는 셈이다.

9월 평양공동선언 군사부속합의서는 유엔사의 존재 이유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합의서에서 오는 11월1일 이후 ‘상대방을 겨냥한 군사훈련을 중지’하기로 함에 따라 군사분계선 일대 한미합동군사훈련에 한국군은 참가하지 않는다. 한미합동이 아니라 미군 단독훈련만 가능하다.

아울러 남과 북은 “상대방을 겨냥한 대규모 군사훈련 및 무력증강 문제, 다양한 형태의 봉쇄 차단 및 항행 방해, 정찰행위 중지 등에 대해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긴밀히 협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지금까지 유엔사와 한미연합사가 한미군사위원회를 통해 협의하던 주요 군사 현안 역시 이제 ‘남북공동군사위원회’에서 다루게 됐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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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을 강조했던 손석희 사장마저도 똑같았다.

언론의 보도 방식에 따라 시민들의 반응도 여론도 달라질 수 있다
 
임병도 | 2018-10-10 09:14: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10월 8일 고양 저유소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언론은 앞다퉈 속보를 내놓았고, 관련 기사만 수백 건이 넘게 보도됐습니다.

뉴스타파 박대용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합뉴스와 한국일보 기사 이미지와 함께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같은 사건 다른 제목
– 외국인 국적을 부각한 연합뉴스
– 부실한 관리를 부각한 한국일보

박대용 기자의 글처럼 연합뉴스와 한국일보의 고양 저유소 화재 보도는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연합뉴스가 제목에서 강조했듯이 누가 불을 냈느냐를 중심으로 보도했다면, 한국일보는 왜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했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언론이 고양 저유소 화재 사건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실화가 아닌 고의적 방화처럼 보도한 ‘연합뉴스’

▲연합뉴스는 속보를 통해 고양저유소 화재 용의자가 저유소 불을 지켜봤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용의자는 불이 난 것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연합뉴스는 속보라며 ‘경찰 “스리랑카인, 풍등 쫓아가다 되돌아가…저유소 불 지켜봐”‘라는 제목으로 편집한 CCTV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CCTV를 보면 용의자 A씨가 풍등을 쫓아가다 서 있는 장소 주변에는 높은 나무와 담장이 있었습니다. 좌측에 화재 모습이 보이지만, A씨 편에서는 나무 때문에 가려진 상태였습니다. 화재 현장에 접근하고 싶어도 높은 담장 때문에 불가능해 보입니다.

Q. 피의자가 풍등을 날린 경위는.

A. 10월 6일 오후 8시쯤 인근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아버지 캠프 행사에서 풍등 날리는 행사가 있었다. 산 뒤에서 풍등 2개가 날아왔는데, 피의자가 호기심에 풍등 1개에 불을 붙였고 순식간에 그게 올라가는 바람에 벌어진 그런 상황이었다.

Q. 이후 상황은.

A. 풍등이 날아가는 걸 보고 쫓아가다가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놀라서 도망간 것은 아니고 날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제지를 하려고 했다가 못한 것이다. 잔디에 떨어지는 장면은 못 봤어도, 떨어지는 건 확인했다.

서울신문이 보도한 고양경찰서 형사과장의 질의응답을 보면 용의자 A씨는 풍등을 쫓아가 떨어지는 것은 확인했지만, 불이 난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용의자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불이 난 사실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연합뉴스의 기사 제목을 보면 화재 현장을 지켜본 것처럼 묘사됩니다. 기사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보도입니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연달아 보도한 ‘국제신문’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가 20분 간격으로 송고한 기사. 기자의 억지스러운 주장이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는 10월 10일 00:34분에 ‘저유소 화재 불 낸 스리랑카인 낼 돈 1700만 원+43억 원?…”평생 귀향 못할 수도”‘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이승륜 기자는 소방기본법 제12조 1항을 언급하며 스리랑카인이 불법 풍등 날리기 혐의로 벌금형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자는 소방기본법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작성한 듯 보입니다.

제12조(화재의 예방조치 등) ①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은 화재의 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소화(消火) 활동에 지장이 있다고 인정되는 물건의 소유자ㆍ관리자 또는 점유자에게 다음 각 호의 명령을 할 수 있다. <개정 2017. 12. 26.>

1. 불장난, 모닥불, 흡연, 화기(火氣) 취급, 풍등 등 소형 열기구 날리기, 그 밖에 화재예방상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행위의 금지 또는 제한

소방기본법 제12조를 보면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풍등 날리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지, 풍등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용의자 A씨가 실화 혐의와 손해를 책임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생 귀향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자의 예상이지 법의 판결은 아닙니다. 마치 기자가 판사처럼 법적 처벌까지 내린 셈입니다.

국제신문 이승륜 기자는 20여분 뒤에 ‘스리랑카인 지른 저유소 화재 원인은 풍등…”동남아 부처님 오신 날 인기라는데 왜?”‘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또다시 송고했습니다.

관련 기사를 20분 간격으로 송고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동남아 부처님 오신 날 인기’라는 문장이 굳이 필요했을까라는 의문도 듭니다.

언론사가 사건만 터지면 관련 기사를 여러 개 보도하는 이유는 포털사이트에서 클릭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포털 뉴스를 보면 언론은 이번에도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비슷하거나 억지스러운 기사를 여러 차례 송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널리즘을 강조했던 손석희 사장마저도 똑같았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는 1부와 2부에서 용의자를 다르게 표현했다. 그러나 자막은 여전히 국적을 표기했다.

10월 8일 JTBC 뉴스룸 1부에서 손석희 앵커는 고양 저유소 폭발 화재를 보도하면서 ‘경찰은 용의자로 27살 스리랑카인 남성을 긴급 체포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2부에서는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부의 보도와는 다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막에서는 여전히 국적을 표기했습니다.

“풍등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 유발 혐의 스리랑카인 체포”
“풍등 날리다 고양 저유소 화재 유발 혐의 용의자 체포”

이주민 지원센터 ‘친구’라는 비영리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조영관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목에서 꼭 국적을 밝히지 않아도 보도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국적을 표기했고, 댓글에는 ‘테러’라는 단어와 함께 외국인 혐오 발언들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난민, 불법체류자들 제대로 관리 안하더니 드디어 우리나라도 테러 발생했네. ㅉㅉㅉ 갈수록 더 심각한 테러들 많이 일어날거다.’
‘이러고도 난민들 더 수용할거냐???’
‘외노자 아웃’
‘외국인들 함부로 들이지마라 다문화니 뭐니 하면서 이래저래 혜택만 주고있으니’
‘국가시설에 어떻게 스리랑카인이 들어갈수가 있나요? 이해가 않되네요.테러가능성도 조사해야할듯.’

조영관 변호사는 ‘ 독일언론협회의 보도준칙에 따르면 소수자 보호와 선입견 방지를 위해 범죄 용의자의 국적과 종교는 보도금지를 원칙으로 한다’며 ‘우리나라의 범죄 관련 보도에서는 국적, 종교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조 변호사는 ‘외국인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외국인이 증가하면 범죄율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게 조사되는 데는 이런 언론의 보도 태도에도 책임이 있다’라며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언론의 보도 방식에 따라 시민들의 반응도 여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백 건의 고양 저유소 화재 기사를 보면, 대한민국 언론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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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④] 슈타지 역사기록소의 리히터 씨

 

 

독재 정권은 필연적으로 경찰국가 체제를 완성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위협함으로써 독재 체제는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 민주화 전 한국이 그랬다. 현재 북한도 그렇다. 과거 동독이 그랬다. 
 
슈타지(STASI, 국가안전부)가 동독 일당 독재 체제를 떠받쳤다. '당의 방패와 검'이라는 구호로 1950년 2월 출범한 방첩기관 슈타지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직후인 1989년 12월 14일 해체되기 전까지 동독 인민 1450여만 명을 철저히 감시했다. 1950년 2700여 명이었던 슈타지 공식 요원은 1989년 8만8897명까지 늘어났다.  
 
슈타지 요원들은 민간인 비공식 협력자(IM, 민간인 비밀정보원)를 활용해 극단적인 시민 감시 활동을 벌였다. 1989년 당시 IM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동독 포환던지기 대표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우도 바이어(Udo Beyer, IM 코드명 캡틴)도 있다. 펑크 밴드의 베이시스트, 동구권 국가의 관광객 등으로 위장한 IM들이 동독 사회 곳곳에서 시민을 감시하고,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을 슈타지 교도소(Stasi-Untersuchungshaftanstalt)로 보냈다. 동독 시절, 25만 명 이상의 시민이 슈타지에 의해 정치범으로 몰려 고통 받았다. 이들 중 수천 명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추방됐다. 당시 슈타지 감시망은 인구 175명 중 한 명 꼴에 달할 정도였다. 슈타지의 모델이었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보다 훨씬 강력한 감시 체제였다.  
 
재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 시절 슈타지를 포함한 당국의 반인권 범죄 약 7만5000건을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10만여 명의 혐의대상자가 추려졌고, 이들 중 1737명이 피고인으로 확정, 10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중 유죄판결을 받은 이는 756명이었는데, 이들 중 92%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소개할 칼 하인츠 리히터(Karl-Heinz Richter) 씨는 청소년 시절 슈타지 교도소에 끌려갔다. 서독으로 몰래 탈출하려했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리히터 씨의 평생에 걸친 동독 독재 정부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슈타지와 갈등한 자기 삶을 기록한 책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본업인 건축업을 하는 한편, 자신이 수감 생활을 했던 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 인근 역사박물관에서 가이드로 활동한다. 독일 언론과도 자신의 경험을 인터뷰한 바 있다.  
 

▲ 베를린 슈타지의 옛 본부를 개조한 슈타지 박물관에 KGB(왼쪽)와 슈타지(오른쪽) 문양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슈타지는 동독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기구였다. ⓒ특별취재팀

그의 삶을 정리하자면 자연스럽게 '북한 과거사 청산'이라는, 현재 해빙 분위기의 한반도에서는 거론하기 매우 힘든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작은 희망도 소중한 지금의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국가안전보위부(북한의 방첩기관)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가장 바람직한 건 긴 시간을 두고 북한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여러 통일 전문가들이 남북 통일을 긴 호흡으로 보되, 디테일한 문제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며, 북한의 문제는 북한 스스로 풀도록 남한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국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주도적으로 들고 나온다면, 자칫 한국은 북한 위에 군림하려는 하는 모습으로 오인될 수 있다. 현재 통일 담론에서 한국은 강자고 북한은 약자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 군림했다는 비판은 지금도 구 동독 지역에서 강하게 나오는 불만의 이유다.  
 
여러 이유로, 어쩌면 리히터 씨 인터뷰는 여럿에게 불편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체제와 불화한 이의 목소리 역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리히터 씨의 남북 관계에 관한 관점은 이역만리 외국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체계적이고, 진지했다. 다음은 리히터 씨의 목소리로 재구성한 그의 이야기다. 
 
탈출 실패...슈타지에게 끌려가다 
 
난 1946년 7월 31일, 브란덴부르크 주 동쪽의 슈바르츠하이데(Schwarzheide)에서 태어났어요. 베를린에서 120㎞가량 떨어진 곳이지. 어릴 적부터 난 동독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독재 시스템이 일상에 영향을 미쳤으니까. 이웃끼리, 친구끼리 서로를 평가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웃 중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그 사람이 서쪽으로 도망친 건지, 감옥에 끌려간 건지 알 수가 있나.  
 
학교에 다닐 때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수업을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어요. 난 그 따위 수업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1963년, 10학년까지만 마치고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의 중고등학교)을 그만뒀어요. 체제에 신물이 나서 친구 17명과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모색했죠. 탈출 방법은 간단해. 다리에서 서베를린행 기차로 뛰어내리는 거지. 탈출 시도가 흥미로웠는지, 요즘에도 가끔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요. 첩보영화 같다 생각들 하나봐.  
 
부모님 생각 안 했느냐고? 물론 마음의 짐이 됐죠. 사회 분위기와 달리 우리 집 분위기는 좋았거든. 그래서 탈출계획을 짤 때 친구들과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하잖아요. 탈출하기로 했지.  
 
재수가 없었어. 탈출에 나만 실패했어요. 기차에서 떨어져서 팔뼈과 갈비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죠. 이 상태로 슈타지에게 발각됐어요. 동베를린 북부 판코우(Pankow)의 교도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간 수감됐죠. 슈타지가 도망가려던 건방진 젊은 놈을 치료할 필요 없다고 봤는지, 제대로 치료해주지도 않더군요. 그대로 죽을 운명이었죠. 
 
다행히, 서독으로 도망에 성공한 친구가 기자회견에서 내 얘길 했어요. 나중에야 알았는데, 서독 언론이 엄청나게 몰렸죠. 다른 나라 언론사도 취재 올 정도였어요. 이 기자회견 덕분이었는지, 시간이 좀 지나자 슈타지도 나에게 어느 정도 의료 지원을 해 줬어요. 그래도 수감 초반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서 출옥 후 18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어요.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이상하게 붙어버렸거든. 골절 부위를 다시 절개하고 새로 붙이는 수술을 했죠. 나이 드니 상처 부위가 쑤셔.  
 
출옥 후에는 엔지니어 직업 교육을 받았고 기계공으로 일했어요. 1968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1970년에 결혼했죠. 그러다 친구 소개로 국영 정유회사 미놀(VEB Minol)의 주유소 직원으로 일했는데, 이 때 주유 가격을 조작해 뒷돈을 좀 벌었지. 나쁘다고? 그렇긴 한데, 당시 경제 형편이 다들 어려우니 이런 일이 흔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집단적, 도덕적 타락을 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핑계로 위안'한 거지(인용구는 리히터 씨가 직접 쓴 책의 내용). 대체로 한동안은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죠.  
 

▲ 칼 하인츠 리히터 씨. 젊은 시절 권투에 빠지기도 했다는 그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별취재팀

동독과의 싸움 
 
하지만 난 여전히 체제가 싫었거든. 1974년부터 정부에 서독으로의 출국 허가 요청서를 계속 올렸어요. 나 이 체제 싫으니 서독으로 보내달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슈타지가 내 아내를 잡아가버렸어요. 내가 주유소에서 부당하게 챙긴 이익을 부인의 혐의라며 잡아간 거예요. 다행히 부인은 6개월 간 수감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이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어? 
 
결국 1975년 8월 13일, 난 아내, 딸과 함께 합법적으로 동독에서 '제명'되었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됐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지. 나 같은 사람이 1975년에 서베를린으로 많이 추방됐어요. 아마 그때 무슨 협약이 있어서 가능했지 싶은데? (1975년 7월 30일부터 사흘간 열린 헬싱키 협정으로, 미국을 포함해 동서방 체제 35개국이 모여 주권존중·전쟁방지·인권보호를 핵심으로 체결한 협정이다. 동독도 이 협정에 서명했다.) 
 
부모님을 남겨두고 떠났느냐고? 그래, 맞아요. 당시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는 함께 이주를 권유했지만 당신이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 겁난다며 거부하셨어요. 다행히 당시 어머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계셔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죠. 
 
서베를린에서는 화물 운전사 일을 구했어요. 이대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좋게 풀렸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서야 아내가 슈타지에게 감금됐을 때 진실을 뒤늦게 알았어요. 성고문을 당했죠. 이후로 아내는 평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어요(인터뷰 당일에도 리히터 씨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내가 보기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오른 나를 슈타지가 길들이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요(실제 베를린의 슈타지박물관에는 슈타지가 블랙리스트 길들이기 수법으로 이 같은 방법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내의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슈타지 때문에 망가졌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복수를 해야 했지. 장거리 화물차 뒤편에 운전수가 누워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죠? 그걸 개조해서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데려왔어요. 탈출하는 사람과 만날 지점을 정하면, 그곳을 지나다가 차를 잠시 정차해요. 그러면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탈출자가 벼락같이 차에 뛰어들어서 숨어 들어가는 거죠. 동독 경찰이 검사 안 했느냐고? 나 이제 서독 사람이야. 국경 경찰이 서독 차량을 함부로 못 뒤졌죠.  
 
그렇게 21명을 동에서 서로 탈출시켰어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였죠. 당시 서독 화물차가 동독 내부로 진입은 불가능했지만, 동서독 교차 지역의 고속도로는 이용 가능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 슈타지 박물관은 슈타지에 협력한 주요 IM들의 실명과 얼굴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슈타지의 IM이었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우도 바이어. ⓒ특별취재팀

외국 망명... 그리고 귀국 
 
그런데 일이 또 희한하게 진행되더군요. 이 일을 처음 나에게 제안한 동독 출신 동료가 있는데, 알고 보니 그 놈이 슈타지의 IM이었어. 이 탈출계획도 알고 보니 슈타지가 날 잡으려고 만든 함정이었더라고. 슈타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요원 두 놈이 서독 경찰로 위장해 우리 집을 찾아오기도 했어요(슈타지는 동독 출신 서독인 약 700여 명을 동독으로 불법 납치했다.). 그 놈들 세계 곳곳에서 첩보 활동을 했어요. 결국, 서독 경찰이 서독을 떠나라고 권고하더군요. 나이지리아로 떠나게 됐어요. 1979년의 일이에요.  
 
가족이 나이지리아에 정착했지만, 아내와 딸이 지내기 힘들어했어요. 아내와 딸은 베를린과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살았죠. 그런데 나이지리아도 안전하지 않았어요. 그곳에서도 슈타지의 납치 시도가 있었거든.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또 넘어갔죠.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예멘 등에서 일했어요. 그 나라들에서 위스키 밀수를 해서 돈 엄청 벌었지. 그쪽 나라에서 술 밀수하다 걸리면 사형이야. (웃음) 그러고 보니, 당신들 한국에서 왔죠? 나 중동에서 한국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적 있어요. 노예처럼 일하더군. 안타까웠어요. 
 
외국을 전전하면서도 난 꾸준히 서독 경찰과 연락했어요. 내가 슈타지의 납치 대상이다 보니, 서독 경찰이 정기적으로 연락했어요. 그러다 1989년이 왔어요. 운명의 해지. 
 
바깥에서도 뉴스로 고국 소식 꾸준히 봤죠. 동독이 심상치 않더라고. 서독 경찰에게 '이제 독일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제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을 거라 하더군요. 그 말을 믿고 1989년에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운명처럼, 내가 서베를린 쪽 장벽 부근에 있을 때 장벽이 무너졌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동쪽에서 마구 밀려들어왔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에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두근해. 드디어 저 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싶었지.  
 

▲ 동독 정부는 사진에서 보듯 펑크 패션도 허용했지만, 그 메시지가 체제에 위협적이어선 안 되었다. 나쁜 메시지의 옷을 입어 슈타지 조사를 받은 당시 젊은이의 모습. 슈타지박물관에 전시. 슈타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타락을 인민에게 선전했는데, 록 음악, 선정적 영화 등을 예로 들었다. ⓒ특별취재팀

난 동독과 불화했어요.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지. 나 말고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문제는 체제 말기가 오기 전까진 용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다는 거예요. 더러운 체제에서 침묵한다면, 결국 그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침묵하는 이들이 소시민적인 평화, 나만의 평화를 추구한 걸 지나치게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침묵이 다른 이들에게 억압으로 돌아갔음을 알아야 해요. 
 
베를린 장벽이 왜 무너졌겠어요? 동독 말기에는 경제적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요. 판이 바뀌었지. 그러다 보니 입 다물고 살던 사람들까지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예전에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적으니 슈타지가 여러 심리 전략으로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불가능해진 상황이 온 거죠.  
 
동독만 변해서 장벽이 무너진 게 아니에요.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면,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 당시 대학살이 일어났을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벽은 운이 좋았기에 무너졌어요.  
 

▲ 리히터 씨가 자신의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특별취재팀

남북한에 전하는 통일 선배의 조언 
 
아무래도 내가 독재 체제를 살아봐서 그런지, 남북한 소식에 관심이 많아요. 내가 당신들만큼 그 사회를 잘 알진 못하겠지만, 북한은 여러 독재 체제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독특한 사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항하는 이들이 쉽게 나오지 않겠지. 아마 동독보다 훨씬 강하게 이데올로기 주입 교육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4월의 남북 정상회담은 나도 아주 감동적으로 봤어요. 난 남북이 언젠가 꼭 통일국가를 만들기를 바라요.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하나가 된다는 건 아주 중요해요. 
 
내가 보기에 남북 통일에서 가장 힘든 건 남북한 경제적 격차가 아니에요. 경제적 격차가 있더라도 투자가 이어지면 경제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돼요. 정말 힘들고, 정말 중요한 건 북쪽의 민주화에요. 북한 사람들 사고방식이 남한 사람들과 아주 많이 다를 걸요? 
 
뭔가를 알아야 그리워할 수 있어요. 나는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전을 알아서 자유가 뭔지 조금 알았어요. 그러니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과연 자유가 무엇인지 알까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자유를 그리워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자유에 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가 (통일 후) 현실을 마주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요. 남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거야.  
 
북한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요. 통일 여건이 조성되면 남한에 기대하는 게 클 텐데, 그건 절대로 충족되지 않을 거예요. 이게 충족되지 않음을 알게 되면, 크게 상처받을 수 있어요. 주제넘긴 하지만, 동독 출신으로서 내 경험을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 당이 도와주지 않아요. 동독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통일 후 매우 힘들었어요.  
 
남한의 젊은 세대도 내가 보기엔 통일의 변수가 될 것 같아요. 그들은 분단과 어떤 직접적 상관이 없잖아요? 그런데 통일 상황이 조성되면, 그들은 그 모든 변화가 자신들의 부담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향한 반발심이 강하게 일어날 수도 있지. 좋은 통일을 이루려면 그들을 잘 달래야 해요.  
 
통일 이후 대도시와 소도시의 격차, 빈부 격차로 인한 문제에도 주의해야 해요. 남한에서 대도시와 소도시 사람 간 삶의 질이 차이나지 않아요? 그런데 통일이 되면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내려올 거 아니에요. 그러면 원래 가진 것 없던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될 거예요.  
 
잘 본 것 같다고? 이런 일을 우리가 다 경험했어요. 재통일 후 독일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을'들의 싸움, 즉 약자가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사회 현상이 일어났어요. 아마 남북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급박한 통일은 안 된다... 남북이 배워야 할 교훈 
 
맞아요. 내가 말한 '을들의 싸움'이란 게 극우화 현상이에요. 우리에겐 악몽과 같은 현상이지. 이 문제를 사람마다 다르게 볼 텐데, 난 특히 작센 주의 특수성에 주목해요. 
 
그 동네 사람들이 원래 좀 달라요. 작센 주 주도 드레스덴 근처에 프라이탈(Freital)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가 협곡에 위치했어요. 그래서 분단 시절에 서독 TV 전파가 안 닿았어요. 결국 그 사람들이 서독 미디어를 가장 적게 접했죠. 그런데 그 동네가 요즘 극우 문제로 가장 시끄러워요. 그 동네는 정말 '무 개념의 계곡'이라고. (웃음) (이 같은 지역 비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터뷰이의 생각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한편, 독일 내에서 작센 주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선을 전하고자 그대로 옮긴다. 상당수 독일인들이 작센 주를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기본적으로 동독 사람들이 외국인을 두려워해요. 많이 접해보지 않아서 그래. 동독 시절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던 쿠바나 에티오피아, 베트남 등에서 다양한 인종의 이주민이 오긴 했어요. 그런데 그 수가 굉장히 적었고, 대부분은 대도시에 살았어요. 그러니 그런 시골 동네 사람들은 외국인 자체를 접해보지 못했어요. 다르니 두려워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 통일 후 한꺼번에 변화가 닥치니, 그 분노를 생소한 외국인에게 표출하는 거지. 그게 극우가 잘 나가는 이유예요. 
 
그런 사람들, 어차피 동독 시절이었다 해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했을 거예요. 자본주의 체제로 세상이 바뀌니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더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러니 더 분노하는 거라고. 이제 그 동네 문제를 어떻게 손쓰기 어려운 지경이 돼 버렸어요. 안타까워.  
 
이런 문제 때문이라도 남북은 급박한 통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당장 우리가 너무 급하게 통일했다가 통일 30년이 지나도록 이런 문제를 겪고 있잖아요. 일단 두 개의 정부 체제를 유지하고 천천히 통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한테서 배울 건 배우라고. 내가 너무 주제넘은 참견을 하나? (웃음) (통역: 추영롱) 
 
그간 재통일 당시 이미 장년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했다. 다음부터는 상대적으로 젊은 통일 세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하지만 이들은 동독 체제에서 경제적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재통일을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통일 독일에서 서독 사람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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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함식 참석하는 대통령님, 왜 우린 외면하시나요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10/10 14:07
  • 수정일
    2018/10/10 14:0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강정마을 평화이주민이 띄우는 편지] 오늘도 우리들의 길은 막히지만

18.10.10 10:45l최종 업데이트 18.10.10 11:41l

 

 10일 제주 국제관함식이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오후 서귀포 앞바다에서 해군 함정과 헬리콥터 등이 해상사열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  10일 제주 국제관함식이 열릴 예정인 가운데 8일 오후 서귀포 앞바다에서 해군 함정과 헬리콥터 등이 해상사열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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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제주도 강정마을 지킴이 또는 평화이주민이라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곳에 온 시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해군기지반대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제관함식이 열리는 오늘 10월 10일은 바로 강정 해군기지 반대활동을 한 지 4164일째 되는 날입니다. 강정마을 주민과 지킴이들에게 이 숫자는 하루하루 잊을 수 없는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잘못된 '국가사업'으로 평화로운 강정마을이 파괴되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형제가, 이웃이 서로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구럼비 해변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이제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60여 명이 구속되고 700여 명이 잡혀가고 수없이 재판정을 들락거리며 벌금을 내고 노역을 살았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평화를 지키려는 노 사제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수염이 뽑히는 조롱도 당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국가폭력으로 주민과 평화 지킴이의 인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촛불의 힘으로 만들어진 정부 역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강행의 절차적 문제와 국가폭력으로 가해진 피해에 공식적인 사과도 없었으며 진상규명 요구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번 국제관함식 개최 여부를 두고 청와대가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취한 방식은 11년 전 강정마을에 대한 강압적이고 위선적인 정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더 비겁하고 야만적입니다.

손만 대지 않았지 서로 싸우도록 분위기를 조장하고, 결국 싸우는 사람들이 직접 결정하도록 했으니까요.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도 문제를 참으로 손쉽게 해결한 꼴이 됐지요. 이런 방식의 뒤로 물러선 보이지 않는 힘의 행사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문 대통령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평화와는 어떻게 일맥상통할 수 있나요?  

문재인 대통령님.

어제는 70대 초반의 마을 삼촌이 '대통령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냐'며 저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삼촌의 친구는 '대통령을 만나면 그동안의 억울함을 토하려고 한다' 전해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대통령께서 관함식에 참여하는 줄 알았지만 주민들을 만나러 마을 안까지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곳곳에 붙은 마을 공고문에는 2007년 4월 이전부터 거주하는 주민에 한해 참가자격이 제한되어 있더군요. 이번에는 마을 주민과 평화 이주민들을 가르고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끈질기고도 치열했던 해군기지반대운동 저항의 역사와 그 시간을 함께 만들어간 사람들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품고 자신의 삶과 꿈을 이 작은 마을을 지키는데 쏟아온 평화 이주민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제주 해군기지 강행은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였습니다. 강정의 평화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지켜야 할 약속이며 권리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이러한 구별짓기는 참으로 비열한 행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문 대통령께서는 강정마을에 대해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지닌 고통의 역사와 평화와 정의를 향한 시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 역시 제대로 알고 계십니다. 2011년 9월, '노무현 재단 제주 준비위' 발족식에 앞서 참여정부 당시의 과오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문제점을 바로 잡으셨지요. 

전북 부안 방폐장 건설 과정의 선례를 언급하며 주민들과의 충분한 대화가 빠진 절차상의 문제와 평화의 섬 제주도에 군사화를 한층 강화시킬 수 있는 해군기지입지 선정의 부적절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셨습니다.

또 2017년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로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뚜렷해지고 평화를 갈망하는 심장은 고통스럽게 박동치는 곳, 그곳이 2017년 9월, 오늘의 한반도 대한민국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전쟁의 기억과 상처가 뚜렷해지고 평화를 갈망하는 심장이 고통스럽게 박동치는 곳이 바로 오늘의 강정입니다.
 
 지난 9월 27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가 국제관함식 즉각 취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지난 9월 27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가 국제관함식 즉각 취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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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군기지 완공 후 미국의 핵잠수함을 비롯해 각국 군함이 제주에 모습을 드러내고 미 태평양 사령관은 제주해군기지에 줌월트급 스텔스 구축함을 배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제주가 평화의 섬이 아니라 군사기지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열리는 국제관함식은 군사기지를 정당화하는 절차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주 해군기지에 수십 대의 군함들이 나타나 전투력을 뽐내고, 수만의 군인들이 용맹함을 과시하려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80대의 전투기를 탑재한다는 원자로를 갖춘 핵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가 입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한 귀퉁이에 앉아있습니다. 한명의 몸뚱이로 차지하는 한평의 평화의 땅을 지키고자 밤 낮 할 것 없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줌 밖에 되지 않지만 대통령에게 지난 11년간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에도 버텨온 끈질긴 저항의 목소리와 평화의 갈망이 들리지 않으시는지요. 우리가 국제관함식을 반대하는 것은 제주해군기지가 동북아의 새로운 군사기지로 떠오른 것을 우려하는 것이며, 이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최근 남북관계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청산하고 핵무장 포기를 통해 스스로 평화의 길을 선택하도록 하셨지요? 얼마 전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손을 잡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한라산에도 언젠가 함께 오르고 싶다 하셨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주 강정에서는 국제관함식을 개최하면서 군사력을 이용해 평화유지의 방법을 선택하려고 하시나요? 방위산업 전시와 해상 침투시범, 해상사열식 등의 활동을 통해 제주해군기지의 전쟁기지 활용가능성을 알리는 이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 문 대통령께서는 어떤 설명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대통령은 '평화는 삶의 소명이자 역사적 책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한 국가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 문재인에 앞서 사람 문재인에 대한 기대를 아직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 서귀포에서 촛불을 들고 다시 한라산을 넘어 제주시로 가서 촛불을 들었던 그 힘과 열정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가 탄생됐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대통령이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 대통령께서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반대운동은 단순히 지역적이고 지엽적인 평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한 줌에 불과한 사람들이 일구어온 평화와 정의는 한국 사회 곳곳에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희망과 연대의 어깨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 전 세계에서 전쟁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 항거하는 다른 동료 사람들에게 멈추지 않고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용기와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희들이 가는 평화의 길은 또 다시 막힙니다. 해군들의 비열한 웃음에, 경찰들의 무관심에, 해군이 고용한 용역들의 과격한 행동에 밀쳐지고 내쳐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방해는 저희들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저희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더 미루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을 더 부추기게 할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께 감히 말씀 드립니다. 강정마을은 대한민국의 평화운동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평화를 위한 길을 모색합니다. 대통령님께서 그토록 갈구하는 평화를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저희들의 움직임을 부디 막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도 저희들의 저항의 몸짓은 평화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역사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는 것도 꼭 기억해주십시오. 

저희들에게는 이번에 기지 내에서든 마을 안에서든 문 대통령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모두 차단되어 아마도 얼굴을 직접 뵙기는 어렵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실을 담아 이 편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잘 다녀가시기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평화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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