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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없는 핵 신고? 미국에 '선제타격' 명단 넘기는 셈

[한반도 브리핑] 북한의 '불가역'과 미국의 '가역', 맞바꿀 수 있나

 

 

 

1. 종전 외교의 시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올해 4월 1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시 한국전쟁의 종전에 관해서 "남북이 (정상회담 의제로) 종전을 논의하고 있으며, 어떻게 협의 되느냐에 달려있지만, 그들의 종전 논의는 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흘 후 4월 27일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판문점 선언의 3항에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라며 종전과 관련한 문구가 들어갔다. 

선언의 3항뿐만 아니라 선언문의 전문 (前文) 격에 해당하는 앞부분에도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중략) 냉전의 산물인 오랜 분단과 대결을 하루빨리 종식시키고"라는 문구가 포함돼있다.  

이로부터 약 한 달 반 뒤에 열린 6월 12일(현지 시각) 미북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싱가포르 선언문 3항에는 (북한 <노동신문>에 발표된 발표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2018년 4월 27일에 채택된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하였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한편 미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라고 말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도 정상회담 전후에 본인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과거 전문가들의 비관론을 비판했고, 자신의 방식이 과거 방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과거의 관행과 편견에 발목을 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 북핵 비핵화 과정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쓰고 북핵 비핵화라고 읽는다) 종전 논의가 비핵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알렉산더의 칼 역할을 하였고, 미국 대통령이 거기에 힘을 실어주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미북 정상회담까지 협상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종전 논의를 합의문에서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 비핵화 과정이 이제 다시 과거의 편견과 관행으로 돌아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위의 문구들에 나와 있듯이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기로만 되어 있을 뿐, 어떠한 조건 하에서 어떤 순서로, 또 어떤 형식으로 종전선언을 할 것인지, 그 선언이 3자 종전선언인지 4자 종전선언인지, 상징적 선언인지, 협정인지 등이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종전선언 다음 단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회담도 남북미 3자인지 아니면 남북미중 4자인지 명확하게 되어 있지 않다.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문에도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한다고만 되어 있고, 종전선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실 이러한 합의문은 좋은 합의문일 수도 있고 나쁜 합의문일 수도 있는데, 좋은 것은 정상의 축복 하에 큰 틀의 방향을 정해 놓고 실무진들이 일을 빨리 진행시킬 때이고, 나쁜 것은 정상이 국내 정치적인 이유로 합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지 못할 때 신뢰부족과 합의문의 구체성 결여로 인하여 양쪽 모두 합의실행을 극히 조심스러워할 때이다. 

이번 비핵화 과정은 정상이 처음부터 깊이 개입하였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갈 것을 기대하였는데, 결국은 신뢰부족과 구체성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운 지점에 와 있다.  
 

▲ 지난 6월 12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2. 종전 외교의 문제점 

그런데 여기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나타난다. 첫째, 종전 논의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칼이었다면, 가장 애지중지하고 역점을 기울여서 다루었어야 했던 것이 바로 그 종전선언을 어떠한 조건과 순서, 형식을 갖추고 언제 하느냐에 대한 남북미 간 합의였을 것이다.  

또 종전선언이 왜 중요하고, 종전선언을 하면 왜 비핵화를 촉진시킬 수 있고, 종전선언에 대해서 미국이 왜 조심스러운지 등, "왜"와 관련된 질문에 서로 답을 공유하고 있었어야 했다. 즉 문제의식이 공유되어서 합의문이 나왔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과연 문제의식에 대한 협상실무진 간 공유가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둘째, 만약 종전선언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조건, 순서, 형식에 대한 합의의 공유가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다면 우리 당국자는 이를 위해 북한과 미국을 매우 분주하게, 그리고 전략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종전선언의 조건과 순서, 형식, 시기에 대한 합의를 도출 했어야 했다. 즉 "종전선언 로드맵"을 만들어서 남북미 간에 공유할 수 있었어야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러한 전략이 과연 있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셋째, 요즘 종전선언의 조건으로 미국이 내세우는 "신고"라는 말이 (핵과 관련하여 어디까지 신고해야 하는지가 모호한) 미국 정부뿐만 아니라 워싱턴 D.C의 한반도 전문가들의 입에서 공통적으로, 일관되게 나오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비판한 소위 과거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미국정부가 받아들여 과거의 견해와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히 좋은 징조는 아니다. 이러한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신속하고 정교한 대응책이 있었는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3. 선 신고, 후 선언의 문제점 : 비가역 대 가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략적 실수를 통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미국에게 종전선언이 왜 비핵화를 촉진하는지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원안대로 설득이 안 된다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북한은 아직 전쟁 상대국이다. 군사력으로 보면 훨씬 약세인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잠깐 방심하면 언제 군사적으로 당할지 모르는 전쟁 중에 있다. 물론 우리도 북한으로부터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한 전쟁 중에 만약 북한이 억지력의 관점에서 자신의 최고 핵심전력이자 방어무기인 핵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일방적이고 투명하게 미국에 신고한다면, 적장에게 선제타격의 목표물을 알아서 넘기는 것이 된다. 영화에서 보면 적국 스파이나 할 짓이다. 

만약 미국의 비확산 전문가나 한반도 전문가, 군수산업 관련 전문가들이 북한의 신고를 믿을 수 없는 신고라고 일제히 포문을 열면, 비핵화 협상은 다시 교착상태로 바뀌고 북한은 군사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뿐만 아니라 매일 선제타격의 공포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신고는 매우 "비가역적"인 행위다. 그래서 아무리 독재국가이고, 권력기반이 안정되어 있고, 또 백두혈통의 김정은 위원장이라 하더라도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선언 없이 선제타격의 목표물을 미국에 먼저 건네줄 수 없을 것이다. 북한 군부와 인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권력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반면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언급한 것과 달리 종전선언은 그렇게 비가역적이라고 볼 수 없다. 한번 선언하면 다시 원상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비가역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종전선언을 취소할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이전의 현상유지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협정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한미동맹의 우산 속에서 북한을 다시 적대국으로 설정하고, 여태까지 해 오던 것을 그대로 할 수 있다. 북한을 다시 "악의 축"으로, "불량국가"로 규정할 수 있고 국가안보보고서나 핵 태세 보고서에서 확실한 위협으로 명확히 언급할 수도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주한미군의 주둔을 설득할 명분도 충분하다. 상황에 따라 오히려 이전의 현상유지보다 더욱 더 강력해진 동맹과 주한미군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합동군사훈련도 재개되고, 전략자산도 다시 들어오고, 미사일 방어무기도 더욱 전격적으로 들어올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종전선언과 핵 신고의 교환은 북한에게 매우 불리한 "비가역적 조치"와 비교적 "가역적인 선언"의 교환이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비핵화의 명분을 주어 군부와 인민을 끌고 갈 수 있게 하려면 종전선언이나 그에 준하는 미국의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종전선언 이후의 평화체제나 유엔사의 문제, 주한미군, 주일미군의 문제 등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북한의 붕괴를 포함하여) 비핵화가 되면 나올 문제들이다. 북한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어도 나올 문제이고, 평화적으로 비핵화의 길을 가더라도 나올 문제이다. 이 문제가 골치아프다고 계속 뒤로 미룬다면, 이는 책임의 방기이거나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4. "종전의 시작"이라도 선언하자 

필자는 종전선언이 어려우면 종전과정의 로드맵을 만들어 "종전의 시작"을 먼저 선언하고, 종전의 마무리와 함께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물론 종전선언이 가능하다면 종전선언이 선행하고 핵 신고가 따르는 순서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어 지혜를 모아 대안을 찾아야 할 때이다. 

어쩌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들에 그 지혜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비핵화의 끝장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전략수립 및 실행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시대적 요구가 있다. 임기응변적인 대응도 중요하지만, 전술과 전략을 정교하게 조화시키는 준비된 외교가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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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민들이 ‘고대사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국학연.민족주의포럼 국학강좌(7) 임찬경 ‘고대사 논쟁’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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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7  17: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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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찬경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7월 19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2018 국학 월례강좌’ 일곱 번째 강연자로 나서 ‘국학과 역사–고대사 논쟁’을 주제로 발표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많은 시민들이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대사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올바른 논쟁의 방법을 파악해야 한다.”

임찬경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30호에서 열린 ‘2018 국학 월례강좌’ 일곱 번째 강연자로 나서 ‘국학과 역사–고대사 논쟁’을 주제로 “우리사회의 ‘고대사 논쟁’ 그 실태와 진전을 위한 방법 모색”을 발표했다.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고구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찬경 연구원은 “우리사회의 고대사 논쟁의 주요 쟁점들이 많은데, 실제로 따지고 보면 그 쟁점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들”이라며 “우리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쟁되고 있는 문제, 우리 역사의 시작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역사 서술이 달라진다”고 운을 뗐다.

이병도 “용변을 보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영감이”

   
▲ 임찬경 연구원은 기존 학계가 이병도의 고대사 관련 주장들을 지금까지 비판 없이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실제로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고대사에 대한 정립된 학계의 정설이 없고, 단군은 신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위만조선의 위치 및 한사군 문제가 고대사 논쟁의 핵심적 사안”이라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이병도 등의 한사군 주장은 전혀 학술적이지 못하다”며 “한사군 중의 현토군이 현재 중국의 환인(桓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현토(玄菟)의 발음이 환인의 옛 지명인 환도(丸都 혹은 桓都)와 발음이 비숫하다는 것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무병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저 유명한 ‘현토군환도설(玄菟郡丸都說)’에 대한 것인데 이 문제를 놓고 선생님(이병도)은 많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였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하루는 뒷간으로 들어가서 용변을 보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는 것처럼 문제가 해결되었노라고 얼굴에 웃음을 피우시면서 그 내력을 들려주시었다”는 증언을 예시했다.(尹武炳, 「斗溪先生과 史蹟踏査」 『歷史家의 遺香』, 一潮閣, 1991)

그는 “이병도로부터 비롯되어 그의 후학들에게 거의 비판없이 이어지는 한국사학계의 고대사에 대한 오류들은 예를 들면, 한사군 문제를 비롯하여 고조선의 위치, 위만의 족계(族係) 문제,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위치 및 강역 문제, 삼한과 예 및 옥저의 위치 문제, 삼국과 왜의 관계 등 고대사 거의 전반에 널려있다”며 “전부 이병도가 만들어놓은 고대사의 틀 속에서 우리 고대사학계가 아직도 그것을 못 벗어나고 있는 거다”라고 진단했다.

특히 “이병도의 여러 고대사 관련 서술은 실증이 없고 미검증 상태”라고 평가하고 “우리 사회의 고대사 논쟁의 쟁점들은 일종의 사관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그리고 낙랑군 평양설

   
▲ 임찬경 연구원이 제시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낙랑 관련 도표.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표적 사례로 “한사군 중의 낙랑 문제는 처음에, 현재의 평양이 고대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이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있던 지역이며, 또 서기전 108년에 한무제가 이곳을 정벌하여 한사군 중의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식의 역사왜곡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며 그 이유로 “그들이 정통으로 여기는 기자를 평양에 꼭 모셔야 놔야 한다”고 비판했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시대 학자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됐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어했다는 것. 이에 더해 “일제는 조선 역사의 식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현재의 평양에 낙랑을 반드시 위치시켜야 했다”고.

그러나 기자조선 평양설은 도저히 학술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워 이제는 슬며시 위만조선과 낙랑군 평양설만 남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현재의 평양에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있었다는 한사군 인식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이라며 “문제는 21세기로 넘어선 이 시점에도 역시 조선시대의 사대사관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왜곡시킨 한사군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논리로 고대사 논쟁을 지속하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라고 짚었다.

그는 김부식이 1145년에 지은 『삼국사기』을 근거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고구려의 첫 도읍은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의무려산 일대에 있다는 거다”며 “왜 고구려 첫 도읍이 이 지역에 있었는지 알게 됐느냐면, 고려시기에 요나라를 방문하는 고려의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확인했다는 거다”고 말했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제사 기록들이 나온다”며 “초기부터 6백년대까지 졸본에 가서 계속 제사를 지낸 거다. 어떤 때는 졸본에 제사를 가서 한달, 두달 머물다 오기도 한다”며 고구려 첫 도읍 졸본이 600년대까지 고구려 강역이었음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 임찬경 연구원이 제시한 고구려 첫 수도 졸본과 위만조선 추정 지역.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는 “첫 도읍을 600년대까지 계속 유지했다면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여기 와서 있을 가능성은 없다”며 “사료에 근거해서 위만조선의 위치를 대충 추정해 보면 난하, 조백하 일대”라고 추정하고 “이것이 고려시대 역사인식”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서기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쳐서 해체시켜서 한사군 중에 낙랑군을 만든 지역은 대동강 일대가 아니다”며 “그런 관점은 삼국사기에 분명하게 서술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사실 ‘통일신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라며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1892)에서 ‘통일신라’란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고 지적하고, “그 책을 저술할 당시의 청(淸)으로부터 조선을 역사적으로 분리시켜 내기 위해, 신라와 당(唐)의 대립 및 신라에 의한 당의 축출을 강조하는 과정에 ‘통일신라’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풀이했다. 일부 재야사학계는 발해(대진국)와 신라(통일신라)의 남북국시기로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에 통일신라를 우리 민족의 형성과 민족문화의 연원으로서 서술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며 “해방 이후에 이런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세력에 의해서 계속 이어진다. 경상도 쪽이 집권을 많이 하고,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조선시대부터 맥이 이어진다”고 짚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화랑’, ‘풍류’ 부각도 이같은 역사 왜곡의 맥락이라는 것.

“이데올로기로서의 사관을 정확히 파악해야”

   
▲ 임찬경 연구원은 고대사 논쟁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는 지난해 <한겨레21>이 한겨레 주주통신원까지 뛰어든 ‘고대사 논쟁’을 다뤘지만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이제는 정치적 주장보다 역사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자세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접근과 노력이 절실한 때”라고 두루뭉술하게 맺은데 대해 “그 문제를 해결할 철저한 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 “역사청산이라는 작업은 위험하기도 한 작업”이라며 “침묵의 카르텔에는 여도 야도 없었다. 노무현과 같은 정당에 있더라도 정당 소속원이지만 결국 그 사람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침묵의 카르텔의 일원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극복하려는 고대사 논쟁을 올바로 시작하려면, 시대에 따라 그 사실 왜곡에 작용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사관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그 서술에 작용했던 사관을 배제하고 우리의 민족·민주·민중적 시각으로 역사를 재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현재도 역사청산 꼭 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꼭해야 될 일을 해야 한다. 누구나 논쟁에 참여할 이유가 있다”며 “현재 우리사회의 국학연구자들에게는 고대사 논쟁을 통해서 반드시 과거사 청산을 이루고, 우리사회의 역사를 바로 잡음으로써 오래도록 왜곡되어온 불평등과 모순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겠다는 혁명적 자세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올바른 논쟁의 방법’으로 “낙랑 문제가 왜 저렇게 왜곡됐는가를 바로 알면 그것을 논쟁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논쟁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뭔가를 터득하게 된다”며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본래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이유를 알면, 왜곡된 사관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는 변화가 있을 거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권은 촛불시민혁명에 의해서 집권했기 때문”이라고 전제하고 “사회의 그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일은 다수 시민의 참여로만 가능하다”며 “기득권 권력을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바꿀 수 있는 거지 지금 이건 학문적 논쟁은 아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사실 역사라는 것이 교과서 수준의 역사는 올바른 관점에 의해서 씌여진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안되니까 국정교과서든 검인정교과서든 문제가 된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조금더 민주화되고 조금더 국민 다수의 합의에 의해서 운영되는 사회로 진보하는 시점이 되면 역사교과서는 국가에서 써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강연에 이어 질문과 답변 시간이 이어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사)국학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주최하고 <통일뉴스>가 후원하는 ‘2018 국학 월례강좌’ 여덟 번째 강연은 임영태 현대사연구회 연구위원이 ‘현대사 논쟁’을 주제로 8월 23일 오후 7시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30호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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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은산분리 완화에 환호한 보수신문

[아침신문 솎아보기]
조선일보 4면에 환히 웃는 대통령… 한겨레·경향은 ‘공약 파기’
식품대기업 SPC그룹도 오너 일가 일탈로 위기… 차남 마약 혐의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08월 08일 수요일
 

조선일보가 모처럼 대통령의 환하게 웃는 사진을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은산분리 완화를 발표하자 조선일보는 ‘18년 옥죈 은산분리 규제 IT기업에 한해 풀어줄 듯’이란 제목으로 1면에 화답했다.

조선일보는 4면에 ‘은산분리 완화’란 문패를 달고 한 면을 모두 털어 보도했다. 조선일보 4면 머리기사는 ‘문 대통령, 붉은 깃발법 언급하며 은산분리 완화 길 텄다’는 제목이었다. 대통령은 인터넷 전문은행에 대한 규제를 19세기 말 연국이 자동차산업으로부터 마차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붉은 깃발법’에 비유했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게 했고 그 결과 영국은 자동차산업에서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고 말았다. 영국의 자동차산업처럼 인터넷 전문은행도 한국에선 규제가 발목을 잡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조선일보 4면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
▲ 조선일보 4면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

 

조선일보는 이 일화를 4면에 “마차 보호하려다 車산업 뒤처진 영국처럼 되면 곤란”이란 제목으로 달아 보도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직접인용한 제목이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행사장에서 QR코드를 이용한 결제기술을 체험하는 대통령의 환하게 웃는 사진도 실었다. 

▲ 조선일보 4면
▲ 조선일보 4면

 

반면 같은 내용을 한겨레는 8일 1면에 ‘문 대통령, 인터넷은행 규제 완화…은산분리 공약 훼손 논란’이란 부정적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관련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달아 한겨레보다 더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8일 1면 머리기사에 ‘원칙 꺾나…은산분리 규제완화 꺼낸 문 대통령’이란 제목으로 달았다.  

 

식품대기업 SPC그룹도 오너 일가 일탈로 위기

SPC그룹(옛 삼립식품) 3세이자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41)이 마약 흡연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허희수 부사장은 2007년 SPC그룹 계열사 파리크라상 상무로 입사해 그룹 마케팅전략실장을 거쳐 2016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8일자 신문들은 이 소식을 사회면에 1~2단의 작은 기사로 보도했다. 매일경제신문은 29면에 1단 기사로, 동아일보는 12면에 2단 기사로, 경향신문은 10면에 2단 기사로 실었다. SPC그룹은 일감몰아주기, 부당내부거래, 역외탈세 등의 광범위한 혐의를 받아 지난달 26일 국세청의 대규모 세무조사를 받은 가운데 이번 사건이 불거졌다. 그룹은 입장문을 내고 “허 부사장을 경영에서 영구 배제하겠다”고 밝혔다. 오너 일가의 일탈에 다른 그룹보다 훨씬 발빠른 대응이었다. 그러나 경영에서 영구배제하겠다는 발표가 지켜질지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경 29면, 동아일보 12면, 경향신문 10면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매경 29면, 동아일보 12면, 경향신문 10면

 

 

1921년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태어난 SPC그룹(옛 삼립식품) 창업자인 허창성 회장은 14살 때부터 빵집 점원으로 일했다. 10여 년 일하다 해방을 맞아 그동안 배운 기술로 1945년 10월 고향에서 ‘상미당’이란 작은 빵집을 차렸다. 48년 서울로 진출한 상미당은 방산시장에서 출발했다. 허창성 회장은 1961년 용산에 본사와 공장을 마련하면서 ‘삼립’이란 이름을 처음 내걸었다. 때마침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소비를 촉진한데다 바로 옆 미군기지에 군납업체로 선정돼 삼립빵은 급성장했다. 1967년 가리봉동 야산 일대에 큰 공장을 세웠고, 1969년엔 공장 옆에 신사옥까지 세워 본격적인 가리봉동 시대를 열었다. 1971년 시흥공장, 1978년 아이스크림 공장까지 전국에 여러 공장을 세워 호황을 누렸다.  

허창성 회장은 1975년 기업공개에 이어 1977년 50대 중반에 일찍부터 서서히 경영에서 손을 뗐다. 큰 아들에겐 삼립식품의 여러 공장을, 차남에겐 성남의 샤니공장만 물려줬다. 큰 아들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반대로 차남은 일찍부터 제빵에 전력투구해 승승장구했다. 차남은 형의 삼립식품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차남이 키운 기업은 오늘날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 베스킨라빈스31, 던킨도너츠를 거느린 식품대기업 SPC그룹이 됐다. 작은 빵 공장을 그룹으로 키운 차남이 바로 현 SPC그룹 허영인 회장이다. 형보다 나은 아우였다. 그런 회장의 차남이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룹의 명예에 먹칠을 했으니 SPC그룹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 수많은 재벌 오너들의 일탈이 사회적 비난을 받는 속에 SPC그룹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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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못 들어준 재벌 숙원, 문재인 정부가 왜?"

전성인 "은산분리 완화, 문재인 공약 뒤집은 유령정책"
2018.08.07 12:23:08
 

 

 

 

청와대·여당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정책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우려 목소리가 나왔다. "금융은 의료와 함께 재벌의 숙원 사업"이며 이를 수용한 정부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뒤집기"라는 비판이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실과 정의당 정책위원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참여연대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은산분리 규제 완화의 문제점 진단'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와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발제를 맡았고, 토론자로는 백주선 민변 민생경제위원장(변호사),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회계사), 정명희 금융산업노조 정책실장 등이 참여했다.  

전성인 교수는 발제에서 "대통령도 대선 공약에서 안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말 바꾸기'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문 대통령과 민주당의 대선공약집 120쪽을 보면 '금융산업 구조 선진화 추진' 항목에 '인터넷전문은행 등 각 업권에서 현행법상 자격요건을 갖춘 후보가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라고 돼 있다"며 "업계가 로비를 했겠고, 반대 논거도 있었을 것이다. 표를 얻기 위해 그냥 다 들어주자며 만방 허용하겠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현행 제도 유지'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가 '이 정도 선이 우리 당과 새 정부가 취할 스탠스'라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또 "작년 7월의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작년 말의 '2018년 경제정책 방향', 올해 7월 18일의 '하반기 이후 경제여건 및 정책방향'에는 '인터넷은행'이나 '은산분리'라는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정부 문건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정책'을 대통령이 나서서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왜 지금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느냐. 금융위 외의 다른 부서에서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게 지난 6월 27일, '준비 부족'으로 몇 시간 전에 대통령이 취소한 규제혁신회의 때 처음 공식 어젠다로 올라갔다"고 지적했다.

그 근거로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은산분리 완화, 이번에 되는 거죠"라고 말했다는 <머니투데이> 보도를 들며 "정책 방향을 다 정해놓고 무슨 토론을 하느냐. 그래 놓고 반대하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설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거나, 반대하는 의원 3명은 (금융위 관할 상임위인) 정무위원회에서 내보내려고 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고 비판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해당 보도에 대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그런 발언을 하신 기억이 없다"고 부인하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전 교수는 '말 바꾸기'라는 차원을 떠나,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 완화는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으로 이어갔다. 그는 "(이 정책을) 왜 하는지 정확하게 서술된 정부 공식 문건을 찾기가 어렵다. 언론 보도를 통해 관계자 말이라며 슬금슬금 뒷구멍으로 나오는게 3가지이고 최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말한 게 1가지 더 있다"면서 "(관계자 말은) '첫째, 4차 산업혁명 활성화를 위해 인터넷은행이 활성화돼야 한다. 둘째, 고용이 는다. 셋째, 중금리 대출이 활성화된다'는 것이고, 홍 원내대표 말은 '재벌의 사내유보금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규제를 완화해줘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전 교수는 하지만 "규제 완화를 한다고 천국이 오느냐"며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근거마다 조목조목 반박했다. '4차 산업혁명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는 "(인터넷전문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은 빅데이터 안 하고 블록체인 안 하느냐. 오히려 기존 은행의 IT 투자가 훨씬 어마어마하고, 은행이 가진 빅데이터는 온 나라가 탐내는 '깨끗한 정보'다. 4차 산업혁명은 인터넷전문은행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용이 는다'는 주장에는 "아무리 300인의 전사가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케이뱅크는 300명 정도의 회사다. 300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고용 촉진의 첨병이 될 수 있느냐"고 지적하며, 또한 "작년처럼 모 은행이 '우리 이제 지점 다 없애고 인터넷은행 하겠다. 비대면 영업만 하겠다'며 사람들을 다 자를 가능성이 없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비대면 거래가 늘면 그 자체는 고용이 늘지 않지만 파급 효과로 고용이 늘어난다는 말도 있는데, 경제학의 기본은 1차 효과가 언제나 파생 효과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파급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중금리 대출 활성화' 주장에 대해선 "지난 1~2년간 인터넷은행의 (대출 영업)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드러났다"고 한 마디로 잘랐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사내유보금 투자 유도' 부분에 대해 그는 "은산분리 완화를 해 주고 사내유보금을 받아쓰자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며 "그게 갖다 쓸 수 있는 돈인지 없는지도 토론해봐야 하겠지만, 그 돈은 대부분 하청업체 기술 탈취나 납품가 후려치기로 조달됐을 확률이 높다. 그러면 쓰더라도 하청업체를 위해 써야지, 그게 왜 은산분리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 교수는 이어 은산분리 완화에 대한 '보완 장치'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했다. 전 교수는 "대기업 대출, 산업자본 대출, 대주주 대출을 막았으니 사금고화 우려는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원래 소유 규제는 개별적 행위규제로 통제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매우 뭉툭한 규제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 규제를 완화하는 근거라며 '한두 개 막아놨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규제의 ABC를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했을 때의 장점은 단지 '급전 유통'에만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은행이 가진 막대한 데이터와 예금통화를 찍어내는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 면에서도 "은행은 독과점 사업이고, 최근 선진국에 비해 총자산 대비 수익이 낮디고는 하지만 일정 궤도에 들어가면 수익이 매우 안정적"이라며 결국 재벌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고 우려했다.  

전 교수는 이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왜 문재인 정부가 은산분리 규제 완화를 하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며 △케이뱅크의 부실을 은폐하기 위해서이거나 △케이뱅크 대주주인 우리은행의 지주적격성 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는 정권교체 후 감사원 감사에서 케이뱅크 인허가에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등 금융정책 실패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제기했다.  

그는 문 대통령에 대해 "은산분리 완화 시도를 즉각 중지하고, 케이뱅크 인허가 및 은행법 시행령 삭제 연루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고 감사원 감사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한 자가 있는지 조사하며, 케이뱅크는 예금자·직원의 정당한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방향으로 조속히 정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케이뱅크 '정리' 방안에 대해서는 KT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우리은행이 100% 소유하는 자은행으로 인수하는 방안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안"이라고 제안했다. 

다른 발제자인 박상인 교수도 "문재인 정부 2년차에 이런 세미나를 하고 제가 발제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참담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추진했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된다며 반대했는데 하루아침에 아무 논리적 설명 없이 입장을 바꿔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박 교수는 금융위원회가 시민단체의 질의에 대해 보낸 공식 답변에서 "은산분리의 기본 취지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한다. 은산분리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재벌들이 제조업에서의 경쟁력을 잃고 있으면서 눈독을 들이는 게 의료와 금융"이라며 "그 숙원 사업의 총대를 맨 것이 지난 정부(박근혜 정부)인데, 지난 정부도 못 한 것을 하겠다는 게 문재인 정부"라고 한탄했다. 그는 "인터넷전문은행 규제 완화를 통해 낼 수 있다는 고용효과나 경쟁력 강화, 핀테크산업 등은 전혀 근거가 없다"며 "자신이 있다면 언론을 통해 프로파간다만 하지 말고 금융위원장이나 경제부총리가 공개 토론을 하자"고 말했다. 그는 2013년 동양그룹 사태의 사례를 들며 "은산분리 완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고, 사회적 비용은 매우 크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 "카카오뱅크는 가계신용대출에서 급속 성장했는데 케이뱅크는 뚜렷한 실적을 보여주지 못해 자본 확충에 실패했다. 인터넷전문은행 성공은 은산분리와 무관하다는 게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의 사례에서 보인다"고 했다. 그는 또 "가장 핀테크 기술이 발전했고 인터넷전문은행을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도 은산분리를 하고 있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나라"라며 "규제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직격탄을 쏘았다.  

김경율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소장도 토론을 통해 "케이뱅크가 증자에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분 비율에 비례해 기존 주주들이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며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하는 정부의 인허가 사업에서, 출범하자마자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은 애초의 심사과정이 졸속이었다는 것이다. 인가 시점으로부터 2년이 경과 되지 않아 전체가 삐걱거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결국 케이뱅크가 은행업 인가 과정에서 자금조달 방안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제출했거나, 금융위원회가 심사를 부실하게 진행한 것"이라며 "(즉) 케이뱅크의 유상증자 실패는 은산분리 규제와 무관하고, 현재 금융위의 은산분리 규제 완화 주장은 자신의 부실한 행정을 덮기 위함일 수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토론회를 주최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어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만났고 오늘은 은산분리 규제완화 당정협의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촛불' 이후 문재인 정부가 재벌개혁과 경제 정의마저 완화시키는게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이 쏠린다"고 지적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은 권영준 경실련 공동대표도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데, 최근 자꾸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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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도 30도 넘겼다…고온 현상이 보내온 옐로카드

등록 :2018-08-07 11:35수정 :2018-08-07 13:04

 

 

북반구 남반구 곳곳에서 최고기온 경신 릴레이… 
광범위한 고온 현상이 보내는 경고 주목해야
“북극권 제트기류(대기 상층부에서 띠 형태로 빠르게 이동하는 바람)가 약해진 가운데 북반구 일대에 걸쳐 강력하게 형성된 고기압이 장기간 세력을 유지하면서 겹쳐져,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열돔 현상’이 발생했다. 북반구 전역을 강타하고 있는 기록적인 폭염이 장기화하면서….”(영국 일간지 <가디언> 7월13일치)

 

덥다. 왜 더운 건지 설명을 듣는 것도 숨이 찬다. 우리만 더운 게 아니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까? 북극권의 최고기온도 30도대에 들어선 터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밤 최저기온이 42.6도

 

올해 6월 시작된 불볕더위가 두 달여 세계를 휘감고 있다. 지구촌 북쪽 반구가 아주 뜨겁다. 폭염과 관련한 기존 기록이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다. 6월28일 아라비아반도 남동부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남쪽 바닷가 어촌 마을 쿠리야트에선 기이한 신기록이 세워졌다. 낮 최고기온이 높았던 게 아니라, 밤 최저기온이 42.6도를 기록한 게다. 세계기상기구(WMO)의 공인을 받진 않았지만, 관측 이래 최고 기록이다.

 

7월5일엔 알제리의 사하라사막 인근에 인구 19만 명이 사는 도시 우아르글라에서 낮 최고기온이 51.3도까지 치솟았다. 알제리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서 관측 이래 최고치다. 현재까지 지구에서 기록된 낮 최고기온은 19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에서 측정된 56.7도다.

 

위도를 조금 높여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남부 코카서스 지방의 내륙국가인 아르메니아는 평균 고도가 해발 990m에 이르는 산악 지대다.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선 7월 들어 수은주가 42도까지 치솟는 등 일주일 동안 40도가 넘는 이상고온현상이 발생했다. 예레반의 예년 7월 평균기온은 26.4도에 그친다. 아르메니아에선 올해 2월(19.6도)과 3월(28도)에도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웠다.

 

서유럽은 5월 이후 최악의 가뭄과 폭염을 동시에 겪고 있다. 예년 6월 평균기온이 20도를 넘지 않는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선 6월28일 31.9도를 찍었다. 가뭄이 심각해지면서 영국 정부는 북서부 지방 일대에 이른바 ‘호스 파이프 밴’(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세차하거나 식물에 물을 주는 등의 행위 금지) 조처를 내렸다.

 

가뭄으로 메마른 산과 들판은 ‘성냥갑’으로 변해간다. 스웨덴에선 7월 한 달 동안에만 산불이 60건 이상 났다. 이 가운데 10여 건이 북극권에서 났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시베리아 북부지역과 북극해 지역에서도 평년 기온을 4~5도 웃도는 고온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7월엔 한때 최고기온이 32도를 넘기도 했다.

 

북아메리카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미국 서부 일대에서도 7월 한 달 크고 작은 산불이 끊이질 않고 이어졌다.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갈아치운 콜로라도주와 캘리포니아주에 피해가 집중됐다. 캘리포니아주에선 최고 48도에 이르는 폭염이 주 전역을 강타했다. 역시 기상관측 시작 이래 최고 기록이다.

 

 

밀 가격에 원전 가동까지 폭염의 공습

 

두 달 넘게 이어진 폭염과 가뭄이 불러온 사회·경제적 파장은 이미 구체화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전문 뉴스 매체 <블룸버그> 통신은 7월25일 “폭염과 가뭄으로 유럽 전역에서 생산량 감소가 불가피해지면서, 밀 선물 가격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실제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인 러시아에선 6년 만에 처음으로 생산량이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올해 1월16일 1t에 166.3유로였던 파리상품거래소 밀 선물값은 7월25일 198.8유로까지 올랐다. 밀값 폭등은 또 다른 파장을 부른다. 1억 명에 가까운 인구에게 정부가 빵값을 보조하는 이집트에선 식량값 폭등을 염려하고 있다.

 

전력 부문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 프랑스 파리의 7월 평균기온은 지난 30년 평균치인 20도 안팎보다 5~10도나 높았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자력발전소 58기에 의존하는 전력 수출국이다. 이상 고온에 따라 강물의 수온도 높아지면서, 이를 냉각수로 쓰는 원전 가동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프랑스의 전력 생산량이 줄어들면 주변 전력 수입국은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장기적인 폭염으로 냉방용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공급 가격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다. 폭염의 연쇄반응이다.

 

북반구뿐이 아니다. 현재 겨울철인 남반구에서도 이상고온현상이 목격된다. 7월5일과 6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기온이 25도까지 치솟았다. 기상관측을 시작하고 159년 만에 가장 높은 기온이 이틀 연속 기록됐다. 사실 이상고온현상은 지난해부터 지구촌 차원에서 꾸준히 나타났다.

 

지난해 4월 최고기온이 50.2도를 기록한 파키스탄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4월’을 보냈다. 5월엔 파키스탄 투르바트의 기온이 53.5도를 기록하며, ‘5월 지구촌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6월엔 이란 아흐바즈의 기온이 역시 역대 최고치인 53.7도를 찍었고, 7월엔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수은주가 46.9도까지 치솟았다. 또 10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일대에서 기온이 42도까지 오르는 등 미국 전역에서 10월 최고기온 기록이 잇따라 바뀌었다. 또 지난해 11월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사흘이나 최고기온이 42도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장 기온이 높았던 2016년의 폭염은 지구온난화와 함께 강력한 엘니뇨(지구에서 태양에너지 유입이 가장 많은 적도 부근 열대 동태평양과 중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상시보다 높은 상태로 몇 달씩 유지되는 현상)가 결합돼 생긴 현상이었다. 올해는 상대적으로 기온을 낮추는 라니냐(엘니뇨의 반대 현상)의 영향 아래 있음에도 예년 평균기온을 5도 이상 넘기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독일의 소리>(도이체벨레)는 7월18일 이렇게 전했다. 실제 세계기상기구 자료를 보면, 올해 전반기 6개월은 라니냐 현상이 발생한 해 가운데 역대 가장 기온이 높았다. 올해 말 라니냐가 물러가고 엘니뇨 현상이 시작되면, 내년엔 기온이 더욱 올라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앞서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7월13일치에서 마이클 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지구과학센터 소장의 말을 따 이렇게 경고했다.

 

 

엘니뇨 오면 내년 기온 더 오를 수도

 

“북반구 전역에 걸쳐 폭염이 발생한 것은 규모 면에서 분명 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일이다. 특정 지역의 최고기온이 높게 나온 게 문제가 아니라, 고온 현상이 이처럼 광활한 지역에서 관측된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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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소매 걷은 당·정·청 "7·8월 누진제 한시 완화"

"누진제 1·2단계 구간 확대... 가구당 평균 19.5% 전기요금 인하 효과 기대"

18.08.07 11:59l최종 업데이트 18.08.07 12:08l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 협의에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협의에 참석한 백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 남소연
"이번 주 각 가정에 도착하는 419만 가구의 7월 고지서를 분석해봤다. 지난해보다 전기요금이 감소하거나, 증가 금액이 1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가 89%였고, 5만 원 이상 증가한 가구는 불과 1% 수준이었다. 지난해 7월보다 폭염 일수가 2.5배 늘었는데 마음 놓고 냉방하지 못하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기 요금 대책 당·정·청 논의에서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안타깝다"라며 서두에 꺼낸 말이다.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전기요금 걱정에 마음껏 에어컨을 틀 수 없는 대다수 가구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당·정·청의 긴급 처방은 '7·8월 누진제 완화'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 7·8월 두 달 간 누진제 한시적 완화 ▲ 사회적 배려계층 전기 요금 복지 할인 규모 7·8월 두 달 동안 추가 30% 확대 ▲ 출산 가구 할인 대상 1년 이하 영아에서 3년 이하 영유아 가구로 확대 등 총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출산 가구 할인 대상 추가 지원... "정부 재정으로 조달"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밝힌 백운규 장관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밝혔다. 오른쪽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남소연
누진제 완화의 경우에는 3단계 누진 구간 중 1단계(200kWh에서 300kWh)와 2단계(400kWh에서 500kWh)를 100kWh씩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정부에서 이를 최종 확정하면 요금 인하 효과는 총 2761억 원으로, 가구당 평균 19.5%의 인하 효과가 기대된다"라고 전망했다.

냉방 사각 지대에 있는 사회적 배려 계층에 대한 특별 지원 대책도 내놨다. 김 의장은 "최대 68만 가구로 추정되는 취약계층에 대한 대책, 출산 가구에 대한 추가 지원 대책도 포함될 예정"이라면서 "출산 가구 할인 대상을 확대해 46만 가구, 매년 250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재원 조달은 정부 재원을 통해 지원할 계획이다. 김 의장은 "당은 폭염으로 인한 국민의 불편을 한시라도 덜기 위해 정부에 관련 절차를 신속하게 마무리할 것을 당부했다"라면서 "누진제 한시 완화와 사회적 배려 계층 지원 대책에 대해서는 재난안전법 개정과 함께 재해대책 예비비 등을 활용해 정부 재정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한시 처방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듯, 중장기 대책도 언급했다. 다만 구체적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김 의장은 "당·정은 주택용 누진제 전기요금 체계 전반에 대한 개선은 중장기 과제로 추진하기로 했다"라면서 "아울러 주탁용 계시별 요금제 도입, 스마트미터 보급 등의 추진 상황도 점검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관련 기사 : 문 대통령의 '누진제 완화' 지시, 민주당은 환영했지만...)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폭염 전기요금 지원 대책 논의하는 당·정·청 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폭염으로 인한 전기요금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당정청협의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정부를 대표해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한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를 7, 8월 두 달 간 완화하고 사회적 배려 계층에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라고 말했다.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도 이날 협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댔다. ⓒ 남소연
"재킷 벗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당·정·청 관계자들은 회의 시작에 앞서 정장 재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8월 국회의 폭염 대비 입법을 강조했다. 홍 원내대표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폭염을 상시 대비해야 한다. 폭염과 한파도 특별재난으로 선포해 피해 예방을 지원하는 법 개정을 검토할 것이다"라면서 "가능하면 8월 중 입법을 완료해 좋은 결과를 마련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회의는 당·정 논의로 공지된 바와 달리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또한 참석해 당·정·청 회의로 진행됐다. 윤 수석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문 대통령도 전기 요금과 관련해서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기 요금 걱정 때문에 냉방기를 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도 발생할 일이므로 차제에 전기 요금 누진성을 포함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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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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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08/07 13:20
  • 수정일
    2018/08/07 13:2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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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이재용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 위태롭다”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08/06 [22:5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일 김동연 부총리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 (사진 : 기획재정부)     © 편집국

 

6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경기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간담회를 가졌다이 자리에서 이 부회장은 바이오 산업 규제 완화 등을 정부에 요청했고김 부총리는 몇 가지 제안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도휴가 복귀 후 첫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신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이를 가로막는 규제부터 과감히 혁신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를 강조했다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 부회장을 직접 만난 바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는 논평을 통해 우려를 표했다.

 

민주노총은 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라며 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김 부총리가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기록한 것을 두고 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이며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질렀다고 반박했다.

 

민주노총은 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며 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며 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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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정부가 위태롭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9일 인도에서 이재용을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오늘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를 방문해 이재용을 만났다이재용은 박근혜-최순실에게 뇌물을 건넨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는 중범죄자다구속되었다가 2심 재판부의 이재용 살리기 적폐판결로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대법 판결을 앞두고 있는 국정농단 범죄의 공범이다이런 중대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게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직접만나 격려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을 하시길 바란다"고 적었다고 한다삼성 이재용은 경제발전의 초석은커녕 자신의 경영권 세습을 위해 정권에 뇌물을 주고 국민연금 의결권까지 매수한 자다뿐만 아니라 검찰경찰노동부와 협잡하여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대해 온갖 추악한 노조파괴범죄를 저지른 것도 드러났다대한민국 경제수장이 재벌총수에게 바치는 낯부끄러운 헌사(獻詞).

 

이재용은 김동연의 방문에 맞춰 원래 100조 원대 투자계획을 발표하려했으나 청와대의 투자구걸’ 논란이후 발표가 연기했다고 한다그러나 단순한 투자구걸 문제가 아니다삼성의 투자계획 발표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사면을 약속한 대가라는 국민적 의심이 지극히 합리적이다국민들은 재벌총수의 투자계획이 왜 권력과 만날 때만 발표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대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의 이재용 살리기 행보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하더니 또 다시 삼성 이재용앞에서 멈추고 있다오늘 김동연이 이재용과 외쳤다고 하는 혁신과 성장구호는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라도 재벌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극명한 구호다기업과 불법 오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자들이 경제정책을 주무르고 있는 한 재벌개혁도소득주도성장도노동존중사회도 불가능하다중대범죄 피의자 이재용을 감싸고도는 문재인 정부가 위태롭다.

 

2018년 8월 6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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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처녀 유인납치.. 국정원과 정보사 합작품

기무사 ‘계엄 문건’에 ‘국가테러’가 생각나는 이유
 
강진욱  | 등록:2018-08-06 17:13:24 | 최종:2018-08-06 17:33:5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6년 4월 북한식당 여종업원 집단 탈북이 결국 우리 정보기관이 기획한 유인납치극으로 결론이 날 모양이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는, 궁색한 변명을 달아서… 때마침 대통령이 국군기무사령부를 해체하는 수준으로 재창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가 죄에 합당한 벌이고, 유사 범죄의 재발을 막는데 충분하기를 바라지만… -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역사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군정보사령부. 이 나라의 3대 정보기관이라 일컬어지는 이들 조직은 평소 ‘적’으로부터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한다. 또 한편으로는 ‘적’을 상대로 - 또는 겨냥한 - 다양한 ‘공작’도 벌인다. 일반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럽고 끔찍한 공작을 저들은 “국가를 위하는 일”로 여긴다.

북한 처녀들 납치극에 가담한 정보사 요원이 표창을 상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스로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했으면 그랬을까? 동족에 대한 적개념이 지나쳐 국가이성이 마비된 것이다. 하긴 38선을 넘어가 북한 군인들을 살상하고 주민들을 납치해 온 것을 자랑스럽게 국회에서 떠벌리는 선배도 있었으니… 생사람을 패고 찢어 간첩(단)을 만들어 표창을 받은 이는 또 얼마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내력이 있다. 해방된 조국 남녘을 점령한 미국이 이승만을 앞세워 우익반공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백색테러를 부추긴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우익을 자처하며 좌익을 살상하는 것을 ‘애국’이라고 여기던 무자비한 테러리스트들을 정보기관으로 불러들였고, 미국을 뒷배로 하는 이 나라 반공 우익정권들은 저들의 만행을 방조했다.

이승만 정권 .. 박정희 정권 .. 전두환 정권 .. 노태우 정권 .. 정통성 없는 부도덕한 정권이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내부의 적’을 - 만들고 - 살상하는 국가테러리즘을 활용했고, 그 부정한 정권에 기생하던 권력의 개들은 그런 행위를 ‘국가를 위한 일’로 둔갑시켰다. 자국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살상하는 테러를 저들은 ‘내수공작’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협박하거나 두들겨 패고(동아방송, 동아일보 간부 테러), 그 집에 폭탄을 설치하고, 법정에 난입해 법조인들을 겁박하고, 출근길에 나선 신문사 사회부장이 사미미칼 테러를 당했고(1988.8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테러), 한밤에 사회단체 사무실에 침입해 잠자던 여인을 강간하는 테러를 자행했다(1988.8 우리마당 사건).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와 정보사가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와 공모해 벌인 짓이었다.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을 특정해 납치 또는 살해한 일도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1973.8.8),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 박정희가 죽기 19일 전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살해(1979.10.7) ... 이들 사건 모두 자∼랑스런 대한민국 정보기관 공작팀의 소행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처럼 정권 또는 권력자에 반항하거나 도전하는 이들을 살상하는 국가테러는 더 끔찍한 테러로 진화했다. ‘적을 겨냥한 공작’은 더 비열하고 악랄해졌고, 급기야 자국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며 그 책임을 ‘적’에게 뒤집어씌우는 공작이 시작됐다. ‘북괴의 테러’로 각인돼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1983.10.9)와 KAL 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이들 두 사건의 징검다리 격인 김포공항 폭탄 테러(1986.9.14)도 마찬가지다. 중국 내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은 이런 ‘해외공작’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과거의 끔찍한 국가테러리즘의 계보를 잇는 사건들에 비하면 훨씬 점잖고 한편으로는 애교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테러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게 다가 아니다. 그 ‘국가테러 리스트’에 또 하나의 사건이 추가돼야 한다. 북한식당 여종업원 납치극이 벌어진지 10개월 뒤인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김정남 살해 사건’.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통일부, 얼치기 국회의원들, 소위 북한 전문가들, 패널들, 기레기들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김정은의 만행’이라고 침을 튀기며 떠벌리던 사건. 누구 짓일까?
                                                   

방첩, 첩보, 침투, 공작.. 이 나라 정보기관의 정체성

이 나라 정보기관은 곧 ‘소위 국가라는 것’ 그 자체이며, 그 정보기관의 역사는 분단체제의 공고화 과정 그 자체다. 이 나라 정보기관은 ‘적’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분석 보다는,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빼오고 ‘적’을 겨냥한 공작을 벌이는데 역점을 뒀다. 정보 수집이나 분석은 이 나라의 ‘큰집’인 미국의 몫이었고, 우리네 정보 조직은 저 ‘큰집’에서 시키는 허드렛일을 했던 것이다. 

그 역사는 1945년 9월 9일 미군 24군단 소속 정보부대원들로 구성된 방첩부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우리 땅에 진주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이 1946년 1월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를 설치했다. 국가정보원(중앙정보부)과 기무사령부(보안사령부), 정보사령부를 낳을 씨가 이때 뿌려진 것이다.

이 국방총사령부 정보과가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된 뒤 이 정보국에서 정보 분석을 주로 하던 부서는 육군정보대(MIG)로 확대돼 오늘날의 국가정보원에 이르고, 첩보 및 공작을 맡는 2과와 방첩을 담당하는 3과가 생겨 각각 정보사령부와 기무사령부의 모체가 된다. 아마도 육군정보대 (국가정보원의 모체)에 이어 특별조사과(기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고, 이어 정보국 2과(정보사령부의 모체)가 생기면서 특별조사과를 3과로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2과와 3과 역시 미국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조직이다. 미군 CIC(방첩부대) 제971 파견대(제224CIC가 제971CIC 파견대로 교체됨)가 1948년 5월 각 연대 정보 장교 및 간부 33명을 선발해 육군본부 정보국에 설치한 것이 3과(특별조사과)다. 이름하여 육군정보국 방첩대(CIC). 장차 보안사령부를 거쳐 기무사령부가 되는 조직이다.

정보사령부의 모체인 육군본부 정보국 2과는 1950년 7월에 생겼다. 해방 직후, 특히 6.25 전후 미군이 월남자들을 첩자로 양성한 HID 북파공작원들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출발했다. 1951년 3월 첩보와 공작을 담당하던 2과가 독립해 첩보부대로 독립하며, 1972년(또는 1970년대 초) 육군정보사령부로 정식 발족하고, 육군정보사령부는 1990년 해·공군 첩보부대와 합쳐져 국군정보사령부로 통합돼 오늘에 이른다. 1951년 3월 독립한 첩보부대 대장이 이철희(李喆熙)였다. 1973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공작 담당 차장으로 일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총괄 지휘했고, 1982년 어음 사기 사건의 주인공 장영자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나라 공작정치의 역사는 이처럼 웅숭깊다.

육군본부 정보국 1.2.3과는 1945년 해방 이후 이 땅 남녘을 점령한 미군이 이승만의 극우반공 체제를 구축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었다. 미 군정은 북녘의 김일성 체제에 반감을 가진 서북청년단 등 월남자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북파공작을 본격화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남한 각지에 보내 좌익계를 탄압하고 살상하는데 활용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북선 분국 책임자 김일성 씨”(동아일보 1946.1.13 / 이 시기 도하 신문에는 “씨”보다 “장군”이라는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다)와 김책·강양욱 등 북측 요인들을 겨냥한 테러가 빈발한 이유이다. 또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획책하는 분단체제 구축에 방해가 되거나 이에 저항하며 ‘남북협상’이니 ‘합작’ 또는 ‘통일’을 입에 담는 인사들이 하나 둘 살해됐던 이유이다.

육군정보부 1.2.3과에는 서북청년단이나 백의사 등 극우반공 조직의 간부급 인사들이 상당수 편입돼 있었다. 이들이 과거 자신들이 부리던 수하들을 시켜 좌익을 겨냥한 백색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도 이 육군정보국 방첩대(미 CIC 분견대) 소속이었고 서북청년단 간부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근로인민당 당수를 살해한 자들은 백의사 소속이었다.

2004년 9월, 주한미군 971 CIC 파견대 소속 조지 E.실리 소령이 김구 암살 후 보고한 ‘김구-암살 관련 배경 정보’(일명 ‘실리보고서’ 1949.7.1)가 공개된 바 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범 김구 시해범 안두희가 미국 CIC 요원이자, 우익 단체인 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승만과 김창룡 특무대장 / 서울 통의동(옥인동)에 있던 특무부대 본부 : 1955~1971년)

방첩을 전담하기로 한 방첩대가 직접 국내 인사를 살해하는 공작을 벌인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보안사가 정보사 요원을 시켜 일을 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작업방식(modus operandi)이다. 방첩 전문 보안사와 공작 전문 정보사 간 공모는 1960년대와 1980년대 정치인과 언론인 및 사회단체인을 겨냥한 국가테러 때도 반복된다.

정보와 첩보 및 방첩 업무를 보는 육군정보국 1.2.3는 6.25 전쟁을 계기로 각각 별도 조직으로 분화한다. 6.25 전쟁 발발 4개월 뒤인 1950년 10월 21일 육군정보국 3과인 육군정보국 방첩대가 먼저 육군 특무부대로 승격된다.

안두희가 체포돼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보살피던 김창룡은 6.25 전쟁 발발 직후 육군정보 정보국 특무대장이 돼 ‘아무나’ 좌익의 누명을 씌워 살상하며 이승만의 극우반공체제를 지탱했다. 전쟁 전후 시기, 제주 4.3 사건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미군의 방조 아래 미군의 지휘를 받는 특무대가 주도했다.

中情의 전신 이후락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우익의 전위로 이승만 시대를 호령했던 육군특무대는 4.19 의거 직후 이승만과 함께 사라지고, 1960년 7월20일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된다. 그리고 몇 달 뒤 미국은 중앙정보연구위원회(회장 이후락)를 만든다. 국가정보원의 모체다. 더럽고 궂은일 하는 조직에 육군방첩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정보 업무를 전담하는 별도 조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을 계기로 특무부대와 첩보부대가 독립해 3분할됐던 정보조직은 이승만 체제가 무너지고 박정희 체제가 들어서기 전에 또 한 번 재정비된 것이다. 미국이 이 나라의 새 권력 창출을 위해 정보조직을 재정비한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를 부추기고 있었다. 에버레디 플랜(EverReady Plan)이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 말기 미국이 중앙정보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은 미국이 쿠데타를 도모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 땅에 정보부의 모체를 만들 때 활용한 이가 바로 박정희 시대 중반인 유신정권 창출 때 까지 박정희를 모셨던(?) 이후락이었다. 

미국이 왜 이후락을 정보책임자로 만들려 했는지는 그의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43년 일본 항공기정비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해 귀국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말 미국이 세운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4개월 만인 1946년 3월 대위로 졸업하면서 임관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본 정보국장 김종필의 회고에 의하면, 이후락은 주로 북파공작 및 첩보 조직인 HID 업무를 총괄했다 한다. 당시 HID는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그 뒤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고 졸업과 동시인 1955년 2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2년 6개월간 주미대사관 부(副)무관으로 일하며 정보 업무와 기술을 익혔다. 그 기간 “한-미간 군사적 유대를 강화한 공로로” 1958년 1월 미국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는다. 이쯤 되면 이후락은 사실상 미국의 ‘자산’(asset)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미대사관 부무관 일을 마치고 1957년 10월 귀국한 이후락은 국방부 ‘79부대장’으로 군에 복귀한다. ‘79호실’로도 불렸던 이 제79부대는 미 CIA 한국지부 격이었다. ‘79’는 이후락의 군번 10079에서 따왔다. 미국은 얼마 뒤 이후락을 미 CIA 한국 지부이자 장차 한국 중앙정보부의 모체가 되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으로 만든다.

이때부터 이후락은 ‘79부대장’ 자격으로 중앙청에서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석해 당시 라오스 사태와 월남 정세를 브리핑했다 한다. 이후락은 또 직접 라오스에 가 그 나라 지도자 노사반을 만났다. 프랑스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져 베트남에서 쫓겨 난 뒤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집어 먹으려 호시탐탐 할 때, 이후락은 ‘미국의 대리 특사’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미국은 그를 통해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에게 미국의 동남아 전략과 관련해 어떤 지침을 교수(敎授)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월남 파병 훨씬 전인 1950년대 말부터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 이야기가 나온 이유이다.

이후락이 중앙정보연구회 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1961년 초다.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 김흥한 씨가 장 총리에게 물었다. “이후락이, 괜찮겠습니까?” 장 총리는 “응, 미국이 좋다고 해서 시켰어”했단다. 최경록 육군참모총장까지 나서 ‘인물도 아닐뿐더러 현역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지만, 장 총리는 미국의 요구임을 강조했다. 결국 이후락은 군복을 벗고(준장 예편)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실장이 됐다.(<신동아> 1997.4.1 정대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4.19특집]장면 최후 고백>) 장 총리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고, 이 장군은 “힘센 쪽에 붙어 다니는 형편없는 군인”이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락의 위세는 5.16 쿠데타로 끝나는 듯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그가 밀고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군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그는 권력에서 소외돼 얼마 동안 대한공론사 명함을 갖고 다녔지만, 몇 달 안 돼 박정희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고(1961.12), 이후 박의 비서실장(1963∼1969), 중앙정보부장(1970∼1973)이 돼 박의 곁을 지키다, 7.4 남북공동성명 체제를 파탄시키기 위한 미국의 공작으로 박의 곁을 떠나게 된다.  

육군방첩대 609부대장 이진삼

4·19 직후인 1960년 7월20일 육군 특무부대가 육군방첩부대로 승격되고,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립된데 이어,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인 1961년 7월 육군첩보대(Army Intelligence Unit)가 창설된다. 오늘날의 기무사와 국정원, 정보사로 발전할 3개 조직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육군첩보대는 휴전선 이북으로 침투해 첩보를 수집하거나 적진을 유린하는 북파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조직이었지만, 이 조직이 생겨나면서 ‘내부의 예비 적(possible enemy)’을 감시·사찰하고 살상하는 ‘내수 테러’의 시대가 열린다.

1960년대는 명실상부 육군방첩대와 육군첩보대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육사 15기 이진삼이다.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뒤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고 나중에는 국회의원도 되는 인물이다. 단, 1960년대 육군첩보대(정보사의 전신)는 육군방첩대(보안사/기무사의 전신) 산하 조직이었거나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북파공작과 내수테러를 전문으로(?) 하던 609 부대가 육군방첩대장 직속이었고(기무사령관이 정보사령부 특공부대를 지휘), 609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이 훗날 정보사령관이 된다.

이진삼의 놀라운 업적(?)이 세상이 알려진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였다.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1년 자유선진당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던 그는 1월 24일 국회 국방위 간담회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을 세워 놓고 “내가 이북에 세 번 들어가서 보복 작전[?]한 내용 알고 있습니까”라며 “몸으로 때려 부순거야. 33명이 사망했어요”라고 자랑한 것이다. 당시 간담회는 비공개여서 그의 이야기는 10여일 뒤 MBC 보도를 통해 전해졌다.

그가 말한 ‘보복 작전’(?)은 1967년 9월과 10월에 있었던 세 차례의 북파 침투 공작을 말한다. 당시 대위였던 그가 특수공작원 3명과 함께 황해도 개풍군에 침투해 인민군 수 십 명을 살상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진삼 씨는 아마도 특수부대 장교 출신으로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널리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의 이력은 그의 ‘애국적(?) 북파공작’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내수공작 즉 내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있어서도 가히 1인자였다.

그의 국회 국방위 발언이 알려진 직후,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양정철 씨가 이 점을 지적했다. 양 전 비서관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알려지지 않은 그 분의 다른 작전들도 국민이 알아야지요”라며 1965년 9월 있었던 민간인 테러 사건을 상기했다.

“1965년 9월7일 밤 11시45분경. 서울 동대문구 보문동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였던 변 모씨 집 대문에 폭발물이 터져 집이 크게 파괴 .. 약 1시간 뒤인 8일 새벽 0시40분경 서울 성동구 성수동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 모씨 집에 지프를 탄 괴한 3명이 들이닥쳐 .. 성북구 장위동까지 끌고 가 노상에서 집단 구타 .. 8일 오후에는 당시 동아방송 본부국장 최 모씨 집에 “가족들을 죽여 버리겠다.”는 내용의 협박전화 .. 동아일보 이 모 기자 집엔 .. 불온문서 1장이 투입돼 용공조작 ..의혹 .. 경찰은 △추석을 앞두고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황 .. △통행금지시간 전후임에도 범인들이 탄 지프가 검문에 걸린 적이 없으며 △변 씨 집 대문 폭파에 사용된 폭발물이 군용 TNT였다는 점을 들어 범인들이 군인이라는 심증 .. 10여일 만에 육군 모 방첩부대 소속 군인들의 사건 관련 수상한 동향을 알아냈고 군 수사당국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 군검경 합동수사반을 편성.. 10일간의 수사 끝에 서울시내 주둔 특수부대인「6·25용사회」 소속 부대장 이진삼 대위와 부하 두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하지만 소환조사가 어렵다며 수사반을 해체 .. 2차 합동수사반을 구성했지만 역시 용두사미 .. 1975, 1980년에도 .. 진상규명 여론이 일었으나 재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미궁에 ..”

당시 신문들이 보도한 내용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단까지 꾸려져 이진삼과 그의 부하 두 명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군 당국이 이들 세 명을 베트남으로 빼돌려 조사를 방해했고 수사는 흐지부지됐다. 정보사 출신 요원들의 양심선언으로 1985년과 1986년 테러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한 창일 때, 1965년 테러에 대한 진상 규명 요청이 있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보안사와 정보사의 힘이 청와대와 국회의 권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 뒷배까지 가세하면 실로 그 힘은 어마어마하다 할 것이다.

1965년 당시 검사로서 검.경 합동수사반장이었던 김일두(金一斗. 70). 변호사는 1993년 7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 수사당국이 용의선상에 오른 군인에 대한 수사 협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소환된 군인 중에는 권총을 차고 수사본부에 들어 온 사람도 있었다”고 당시 수사의 어려움을 털어놨다(동아일보 1993.7.26). 동아일보는 1965년 당시 편집국 고위 간부들을 겨냥한 테러의 피해 규명을 위해 발벗고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동아일보 1993년 7월 26일 자 30면과 31면. 1965년 9월 발생한 자사 간부 2명에 대한 테러 사건의 전모를 소상히 밝히면서 이진삼 씨의 사진을 싣고 그 옆에 “조사받는 이(李) 대위”라는 사진 제목과 “趙東華(조동화) 씨와의 대질신문을 받으러 당시 합동수사반에 출두한 李鎭三(이진삼) 대위”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진삼 대위 위 사진은 “1965년 9월 7일 밤 폭탄테러로 부서진 당시 변영권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의 집 대문”이다. 오른쪽 해설 기사에는 ‘이듬해도 동아 기자 테러 2건 발생’이라는 제목과 “66년 4월 25일 저녁 정치부 최영철 기자가 괴한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보안사-정보사-중정 정립기 : 국가테러 극성기

이진삼의 609부대로 이름을 떨치던 육군방첩대는 ‘1.21 김신조 사건’ 직후인 1968년 2월 15일 갑자기 윤필용 방첩대장이 경질되면서 한동안 내홍을 치른다. 그 내홍은 8개월 뒤인 1968년 10월 11일 김재규 육군방첩대장이 육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 될 때까지 계속된다. 김신조가 TV에 나와 “박정희 목을 따러...” 운운해 박정희가 노발대발 윤필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돌지만, 그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윤필용의 경질은 북파공작의 명수인 이진삼 609부대장의 모종의 역할을 포함해 김신조 사건의 어떤 내막과 관련돼 있을 것으로 본다. 윤필용 육군방첩대장을 경질한 직후 - 훗날 이진삼이 지휘하게 되는 - 정보사령부를 별도 조직으로 떼어내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흔히 정보사령부 창설 시기를 70년대 초 또는 1972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즈음 정보(국가정보원)와 방첩(기무사령부), 첩보(정보사령부) 조직이 정립(鼎立)해 3위1체로 움직이면서 박정희의 유신정권을 창출했고,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양산됐으며 각종 의문사와 국가테러가 자행됐다. 대표적인 국가테러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1973.8.8),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 육영수 저격(1974.8.15), 장준하 선생 살해(1975.8.17)를 들 수 있다.

이들 사건이 일어나던 때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1970.12.21∼1973.12.2)과 신직수(1973.12.3∼1976.12.3), 육군보안사령관은 강창성(1971.9.23∼1973.8.14)과 김종환(1973.814∼1975.2.26), 진종채(1975.2.28∼1979.3.5) 였다. (윤필용 경질 다음날인 1968년 2월 16일 육군방첩대장에 임명돼 8개월 뒤 초대 육군보안사령관이 되는 김재규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준비하던 때 물러났다.) 그 시기에, 그 ‘국가테러 체계’의 하부에서 수족처럼 움직였을 정보사령부의 수장이 누구였는지 아는 이가 없다. 

1972년 유신 계엄 때는 보안사가 국회의원들을 잡아다 고문한 일도 있었다. 1975년 3월 열린 국회 국방위 회의에서 송원영(宋元英) 신민당 의원은 “명색이 국회의원을 발가벗겨 난타하고 그 부인에까지 폭언을 퍼부었다”면서 “대공 업무에 전담해야 할 보안사가 8대 의원들을 수사하면서 김대중 씨, 김영삼 씨 등과의 관계, 자금 출처 등 정치적 문제를 수사한 것은 군의 중립성을 벗어난 것이며 정치적 보복의 인상이 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75.3.15)

또 1973년 전두환과 노태우의 밀고로 시작된 소위 ‘윤필용 모반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 때는, 그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대우실업 사장이던 김우중이 보안사에 잡혀간 일도 있었다. 윤필용은 1968년 육군방첩대장 직에서 밀려나 월남 맹호사단장으로 쫓겨 갔지만 1972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영전했었다. 5.16 쿠데타 이전부터 이어진 박정희와의 인연 덕에 재기에 성공했지만, ‘더 큰 권력’ 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그 ‘더 큰 권력’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우려는 세력이었을 것이다. 윤필용 모반 사건의 또 다른 타깃이 바로 명실상부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던 손영길 준장이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부관(참모장)이었던 손영길은 늘 전두환.노태우 보다 앞서 나갔다. 윤필용 사건이 나던 해인 1973년 1월 1일 별을 달 때도 손영길이 선임이었다. 하나회를 이끈 것도 그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손영길이 거세되지 않았다면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라는 타이틀이 전두환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67년 청와대 30경비대장 자리를 먼저 차지한 것도 손영길이었고, 전두환은 그의 자리를 물려받곤 했다. 사진 오른쪽은 1973년 ‘윤필용 모반 사건’ 재판 모습. 앞줄 맨 오른쪽이 윤필용 수경사령관, 그 옆이 손영길 참모장이다. )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와 전두환의 시대

극악무도했던 박정희의 극우반공 체제가 조락(凋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인 1977년 10월 7일 육군보안사령부와 해.공군.해병 보안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탄생한다. 2년 뒤인 1979년 3월 별 둘짜리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들어앉고, 그로부터 7개월 뒤 박정희가 살해되면서 전두환이 모든 정보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자리가 1977년 만들어졌던 것이다.

전두환에 이어 보안사령관이 된 노태우까지 대통령이 된 것은 보안사가 5공과 6공 권력 창출의 핵이었음을 뜻한다. 1980년대 말, 노태우(전두환과 함께 육사 11기) 다음 보안사령관이 된 박준병(육사 12기)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국군보안사령부가 신설된 지 꼭 1년 만인 1978년 10월 17일 전두환 1사단장은 제3 땅굴 발견자로 등장, 땅굴 안에서 존 베시 주한미군사령관과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고, 이 공로로 1년 뒤인 1979년 5.16민족상 수상자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사진이 또 실린다. 이는 차기 대권 주자를 부각시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전두환 권력에 이어 노태우까지, 1950년대 말 함께 미국 군사유학을 다녀온 ‘미국의 밀리터리 보이’ 둘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군보안사령부는 노태우 정권 중반인 1991년 국민의 지탄 속에 국군기무사령부로 개명해야 했다. 1990년 10월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민간인 1천300명에 대한 사찰 문건을 들고 나와 양심선언을 했고, 5공 정권과 결별하는 모양새를 노린 노태우 정권이 국민들의 반감을 앞세워 슬쩍 이름만 바꾼 것이다. 

’85·86·88년 테러의 일상화 : 형제 정보사령관 이진삼·이진백

1970년대의 가공할 국가테러의 실행자가 누구였을지는 1980년대 드러난 ‘내수 공작’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보안사령관 출신자들이 잇달아 대통령을 해먹는 시기에, 한때 보안사에서 한솥밥을 먹던 저들의 국가테러 범죄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 끔찍한 범죄의 꼬리가 밟힌 것이다.

1980년대 국가테러의 중심에는 이진삼.이진백 형제 정보사령관이 있었다. 과거 육군방첩대장 직속 609 부대장이었던 이진삼은 전두환 정권의 기세가 등등할 때인 1985∼86년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다. 1960년대 식 ‘내수 테러’가 재연된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전두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언론이 재갈을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고,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이 양심고백을 하고 나서였다. 그들의 양심선언이 없었더라면, 1965년 ‘내수 공작’ 이후의 이진삼 씨 행적은 더 이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 양심선언을 한 이는 북파공작원 출신 김형두 씨(당시 41세)와 정팔만 씨(당시 39세)였다.

김 씨는 1993년 7월 5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985년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 씨의 상도동 자택에 침입했고, 양순직 신민당 부총재를 폭행하는 등 다른 야당 의원들에게 테러를 저질렀다고 고백했고, 정팔만 씨는 녹음증언을 통해 “85년 10월 중순 쯤 행동대장 주 모 씨와 대원 김 모, 이 모 씨 등과 함께 권총, 마취제 등으로 무장”한 채 김영삼 대통령 집 2층 서재에 침입해 물건을 절취한 사실 등을 시인했다.

김 씨는 또 “86년 4월 29일 오후 10시쯤 테러단을 지휘한 ‘이[상범] 부장’의 지시로 나와 이 모 씨가 서울 신대방동 앞길에서 귀가하는 양[순직] 씨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밝히고, 지난 [1993년] 6월 이[상범] 부장과의 전화통화에서 “배반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한 내용도 녹음으로 공개했다.(<“또 다른 테러 기도했었다” - 김·정 양씨 증언> 중앙일보 1993.7.8) 테러단을 모으고 테러를 지시한 이상범은 정보사령부 소속(중령)으로,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한진구 대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의 양심선언이 아니었다면, 1980년대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정치테러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이 이종일씨, 오른쪽이 김형두 씨)

김영삼 대통령의 집을 털었다는 양심 고백의 파장은 컸다. 국방부가 즉각 조사에 나섰고, 검찰도 경찰도 서로 달려들어 수사에 적극성을 보였다. 국방부 검찰부는 7월 14일 ‘정보사 정치테러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 당시 정보사령관이었고 노태우 정권 시절 체육청소년부 장관까지 지낸 이진삼 씨와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예비역소장(55·갑종 151기)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진술을 한운구씨 (54·당시 정보사 3처장)로부터 받아내고 이들 3명의 혐의사실을 서울지검에 통보했다.(이진삼 씨는 자신의 책 <별처럼 또 별처럼: 전 육군참모총장 이진삼의 인생이야기>에서 자신이 모함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기 전 우리 국민들은 또 한 번 정보사의 끔찍한 테러를 경험해야 했다. 이번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이진삼 씨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이진백 씨가 정보사령관에 임명된 직후인 1988년 8월 6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씨가 출근길에 괴한들의 습격으로 전치 3주의 상처를 입었고, 8월 17일 새벽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에 괴한들이 침입해 잠을 자던 남자 회원을 폭행해 쓰러뜨리고 여성 회원을 강간한 것이다.

신문사 사회부장 테러마저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거의 묻힐 무렵 우리마당 사건이 터졌고, 그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일고 야당이 목청을 높이고서야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이진백 정보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범행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 수사의 단초가 됐던 우리마당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마당 대표는 김기종(당시 29세) 씨로, 2015년 주한미국 대사 모씨에게 ‘커터칼 테러’를 가한 주인공이다. 김 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사건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분신해 전신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이 사건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테러가 기승을 부리던 1985∼1986년 안기부장은 장세동(육사 16기. 재임 1985.2.19∼1987.5.25), 보안사령관은 이종구(육사 14기. 1985.6.1∼1986.7.4)였고, 1988년 오홍근 부장 테러와 우리마당 테러 당시 안기부장은 배명인(1988.5.7∼1988.12.4), 보안사령관은 최평욱 (1987.12.29∼1988.12.7)이었다.

이들 ‘내수 공작’과 더불어 1980년대를 대한민국 국가테러의 전성기로 만든 것은 ‘해외 공작’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북괴의 공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와 KAL858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가 그것이다. 두 사건의 징검다리격인 김포공항 테러(1986.9.14)도 있다.(이들 사건에 대해서는 졸저 <1983 버마>(박종철 출판사)와 ‘진실의 길’ 기고 <1986 김포공항 테러 : 진상과 은폐의 서사>(2018.7.10)‘진실의 길’ 신성국 신부의 글 참조.)

1983년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 당시 정보사령관은 이상규, 보안사령관은 박준병(재임 1981.7.14∼1984.7.6)이었고, 국가안전기획부의 파트너는 박세직 차장이었다. 모두 육사 12기 동기.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의 이름이 알려진 것도 북파공작원 장교급 인사들의 우연한 증언을 통해서였다. 김현희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은 고명승(육사 15기. 1986.7.4∼1987.12.29), 중앙정보부장은 안무혁(1987.5.25∼1988.5.6)이었다. 이 사건 당시 정보사령관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무사를 없애면 정보사가 없어질까?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 따위가 눈에 보이는 권력이라면, 국군기무사와 이 기무사의 그림자와 같은 국군정보사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다. 국가정보원은 보이는 권력과 보이지 않는 권력 사이에 있다. 보이는 권력은 유한하지만,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한하다. 보이는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훨씬 더 무섭고 간교하다.

이 나라 남녘에 극우반공 체제를 고착시켜 분단체제를 영구화하기 위한 온갖 범죄와 범죄적 행위의 주체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새로운 권력 창출이 필요할 시점에 은밀하지만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무사령부를 해체하고 새로 조직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소식이다. 기무사의 과거는 이 땅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육과 추악하고 추잡한 테러와 음모, 조작, 협잡의 역사였다. 그런데 기무사령부가 해체되면 그 정치테러의 망령도 사라질까?

<시사저널>은 장기간에 걸쳐 정보사령부가 저질러 온 국가테러의 진상을 추적한 끝에 지난 2004년 11월 제788호에서 정보사령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현역과 예비역 북파공작원으로 각각 구성된 정치공작팀 ‘남산대’를 산하에 두고 있었다고 폭로하면서 “과거 정보사 정치테러는 정보사 단독작품이 아니었다”라며 “계획 단계에서부터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 정보사가 유기적으로 개입하거나 묵인 방조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기무사를 재창설돼 현직 검사가 기무사 감찰실장을 맡으면 남산대가 없어질까? 늘 저들은 변하는 듯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도 미국의 손아귀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흉측한 국가테러는 없었다. 그러다 옛사랑의 추억을 더듬는 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 예의 유사행위가 빈발했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려는 자들이 세운 박근혜 정권 시절 두 번이나 국가테러 행위가 자행된 이유다. 저 조직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이 나라에서는 언제고 또 가공할 국가테러가 벌어질 것이다. (2018.8.5)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613&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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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월만에 김기춘 석방시킨 ‘구속만기’…조윤선은 언제까지

[뉴스AS] 18개월만에 김기춘 석방시킨 ‘구속만기’…조윤선은 언제까지

등록 :2018-08-06 11:34수정 :2018-08-06 12:58

 

 

기소 1년6개월만에 석방된 김기춘
블랙리스트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한 날
대법원, 김 전 비서실장 구속 취소 결정

신체의 자유·무죄추정 원칙 지키려
형사소송법 구속기간 제한 둬
별도 사건 구속영장 발부 않으면
1심·2심·3심 각 6개월만 구속 가능

김종덕·김상률도 지난달 말 석방
2심서 구속된 조윤선은 9월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15년 1월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업무보고경제혁신 3개년 계획Ⅱ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15년 1월15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 정부업무보고경제혁신 3개년 계획Ⅱ 회의에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듣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기춘(79)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자정 구속기간이 끝나 석방됐다. 지난해 1월21일 구속된 지 562일 만이다. 여론은 좋지 않다. 이날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선 김 전 비서실장은 자신의 석방을 반대하는 시민들과 마주했다. 이들은 “김기춘 석방 절대 안 돼”라는 구호 등을 외치며 김 전 비서실장을 막아섰다. 김 전 비서실장은 가까스로 자동차에 탔지만 차까지 막아선 시민들에 막혀 40여분을 갇혀있어야 했고, 앞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그는 구치소를 떠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지난 7월27일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취소를 결정했다. 이날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합의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면서, 상고심 심리가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구속재판 기간 6개월을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92조는 구속기간을 2개월로 하되, 심급마다 2개월 단위로 2차에 한하여 갱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2심과 3심을 의미하는 항소심에서는 3차에 한해 갱신이 가능하다. 즉 구속기소된 경우를 기준으로 1심 2개월+4개월(2번 갱신), 2심 6개월(3번 갱신), 3심 6개월(3번 갱신)까지만 구속 재판이 가능하며, 별도의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는 한 불구속 재판을 해야 한다.

 

구속재판 기간에 맞춰 하급심 재판도 진행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지난해 2월7일 김 전 비서실장을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구속 기간은 구속된 날을 포함해 계산하기 때문에, 1심 구속 재판 기간은 6개월 뒤인 지난해 8월6일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황병헌)는 지난해 7월27일 김 전 비서실장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범행을 가장 정점에서 지시하고 실행 계획을 승인했으며 때로는 이를 독려했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조영철)도 구속 기한 6개월을 앞둔 지난 1월23일, 블랙리스트에다 1심이 무죄로 판단한 문체부 공무원 사직 강요 혐의까지 인정해 김 전 비서실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로 “헌법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문화예술계 개인·단체에 대한 지원 배제를 위하여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막대한 권한을 남용했다”고 밝혔다. 대법원 구속 재판 기간도 6개월인데, 이에 따르면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 재판 기한은 8월6일이었다. 6개월이 지나서도 선고하지 못하면 구속된 피고인을 잡아 둘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김 전 비서실장은 석방된 것이다. 한 판사는 “국정농단 사건 피고인 대부분에 적용된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는 판례가 많지 않아 대법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블랙리스트 공모 혐의를 받는 박 전 대통령 사건이 상고되면 대법원에서 통일적으로 판단해야 해 재판 기간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구속 재판 기간을 제한하는 규정은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될 때부터 있었다. 당시에는 “구속기간은 2월로 한다. 특히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심급마다 2차에 한하여 갱신할 수 있다”고 해 오히려 지금보다 구속재판 기간이 짧았다. 상소심에서 3차 갱신이 가능해 구속 재판 기간이 늘어난 건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 때로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렇다면 왜 구속재판 기간을 규정해둔 것일까.

 

헌법재판소는 2001년 재판관 7대2 의견으로 구속 기간을 정해둔 형사소송법 제92조 제1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헌재는 이 조항의 입법 목적이 “강제처분은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필요최소한도의 원리가 무죄추정의 법리와 함께 구속기간의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조항의 바탕이 되는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법률조항은 미결구금의 부당한 장기화로 인한 인권의 침해, 구체적으로는 신체의 자유의 침해를 억제하려는 데에 그 입법 목적을 두고 있다”라고 밝혔다. 헌법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고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확정판결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제한 구속을 막은 것이다. 이어 헌재는 “법원이 심리를 더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구속을 해제한 다음 기간의 제한에 구애됨이 없이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 따라서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된다고 볼 수 없다”며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헌재 결정은 대전고법이 이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기 때문에 나왔는데, 구속 기간에 쫓겨 재판해야 하는 판사들이야 말로 구속 재판 기간 제한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구속기간 만료로 석방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김 전 비서실장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구속 기간이 만료돼 지난달 28일과 29일 각각 석방됐다. 다만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다음 달 22일이 구속 만기다. 조 전 장관은 김 전 비서실장과 함께 지난해 1월 구속됐으나, 1심에서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러다 2심은 블랙리스트 관련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됐다. 따라서 조 전 장관의 최대 구속기간은 2개월+6개월(3차 갱신)으로, 구속된 1월23일부터 8개월이다.

 

이날 석방된 김 전 비서실장은 법정에서 계속 볼 수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 외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 보수단체에 정부 지원을 몰아준 화이트리스트 사건,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 보고시간 조작 사건 등 2개의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고령인 김 전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 사건 때부터 환자복을 입고 나와 지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최근에는 직접 증인을 신문하거나, 변호인의 변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등 김 전 비서실장은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검찰은 김 전 비서실장의 구속이 취소되자 두 1심 재판부에 구속영장을 발부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아직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다른 판사는 “국민들의 여론도 중요하지만, 재판은 불구속 재판이 원칙이고 헌법의 무죄 추정 원칙도 중요하다. 헌법과 법률의 원칙은 당사자에 대한 호불호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비서실장은 지난해 12월 2심 최후 진술에서 아내와 아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지었다. “저에게 남은 소망은 제 늙은 아내와 식물인간으로 4년 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53살 된 제 아들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주고, 못난 남편과 아비를 만나서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다는 말을 건네고 아들에게는 이런 상태로 누워있으면 아버지가 눈을 감을 수 없으니 하루빨리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당부한 뒤 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김 전 비서실장은 재판을 받는 1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블랙리스트 범행을 사과한 적이 없다. “북한과 종북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공직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던 김 전 비서실장은 “배제 대상 명단 작성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일도 없고 그런 명단을 본 사실조차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진정으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 김 전 비서실장에 대해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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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오늘의 '회칼테러'를 기억하며

[기고] 군사문화는 청산되었는가?
2018.08.06 10:19:12
 

 

 

군과 군사문화는 역시 병영 안에 있어야 했다. 그게 거기서 바른 자세로 굳건하게 서서, 나라를 지켜내고 국민을 보호할 때는 이기(利器)이자 길기(吉器)이지만, 한눈팔며 울타리를 넘어 '탈영'을 감행하면 흉기(兇器)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추구하는 가치를 놓고 비교해 보아도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흔히 군사문화의 특성으로 사람들은 승리와 능률 추구에 일사불란을 꼽는다. 대단한 장점이다. 허나 그 가치가 병영 밖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승패나 능률과 상관없이, 다양함을 추구하는 사회의 여러 가치들과 충돌하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병영 안에서는 졸(卒)들이 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졸권(卒權: 졸병의 기본권) 하나하나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기본인권이 무시될 수 없다. 군과 군사문화는 역시 병영 안에 있어야하는 게 정답이다.  
 
군과 군사문화는 사실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대부분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힘으로 나라와 백성들을 통치했다. 물론 무조건 나빴다고도 할 수 없고 더러 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국민들이 눈을 떠가고 기본 인권과 공정과 타당함을 따지기 시작하면서 군사문화는 '주목' 받고 퇴조하기 시작한다.  
 
이 나라에서는 뒤늦게 해방을 맞아 비로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헌법을 세웠으나, 1961년 당시 박정희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병영 안에 있던 군사문화를 이끌고 나와,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사회에 질펀하게 깔아놓았다. 그러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마당에서 군사문화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부딪쳤다.
  
과한 욕심을 부렸다. 남북대결구도를 악용해 위기의식을 조작해가며 '한국적 민주주의'만이 살 길이라고 악을 써댔다. 유신과 긴급조치 같은 것으로 날밤을 지샜다. 민주주의 멱살을 틀어쥐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대물림 되며 죄 없는 생사람들 숱하게 죽였다. 군사문화는 청산해야한다는 글을 썼다가 나도 현역 군인들로부터 칼부림을 당했다. 운 좋게도(!) 목숨을 건졌다.  
 
1988년 8월이었다. 30년 전이다.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세월이요, 한 세대가 바뀌는 기간이다. 과연 군사문화는 청산되었는가. 슬프게도,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군사문화가 아직껏 청산되지 못한 데는 한국적 정치상황이라는 '특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시절부터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특수성이다.  
 
해방을 맞이했을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기반 세력이 없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 운동가를 잡으러 다니던 고등계 형사나 헐벗은 백성들을 수탈하던 친일파 부호들이 생존을 위해 그의 곁에 모여들었다. 친일파 척결을 목표로 국회의결을 거쳐 세워진 반민특위 사무실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경찰관들의 습격을 받던 시절이었다. 청산대상이던 친일세력들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원이 되었다.  
 
그 자유당원들 대부분은 5·16이 터지자 군인들이 만든 민주공화당으로 몰려가 이 나라 정치판 군사문화 기득권 세력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후 공화당은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계속 바꿔가며 '정신'을 계승해 갔다. 해바라기처럼 힘 센 쪽 향해 북 치고 장구 치고 박수치며 함성을 질러댔다. 기껏 한 두 줌 기득권을 보호 받는 게 고작이었으나, 그저 옳다고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숱한 꾼들이 모여들었다. 바람잡이들의 전성시대였다. 거대한 마피아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시스템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편 가르기 대결구도가 필요했다. 밥그릇 지키기 위해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없이 종북좌빨 딱지를 붙여댔다. 블랙리스트도 만들었다. 국가 공무원 조직인 국가정보원을 앞세우고 국군기무사나 사이버 사령부까지 동원하고 심지어 4대강 사업 찬성을 강요하는 등 나쁜 짓이란 나쁜 짓에는 손을 안 댄 곳이 거의 없다. 
 
대법원에까지 군사사문화가 스며들었다. 졸(卒)인 무지렁이 백성들이 억울한 피해자가 되는 것을 막아줘야 했으나 '인권 최후의 보루'라는 소명 의식도 팽개쳤다. 뜻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변협 회장 뒷조사도 했다.  
 
군사문화에서 남북대결 위기의식은 절대로 필요하다.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좌익들만 찬성하는 위장 평화 쇼'라면서 이 땅에 혹시라도 '잘못되어' 평화가 찾아올까봐 밤잠 못자고 고민하며 겁을 내던 사람들을 우리는 보았다. 그거 다 군사문화다. 
 
바람잡이들과 함께, 이 땅에 군사문화가 칡넝쿨처럼 얽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이른바 언론'들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언론'이라 하지 않고 '이른바 언론'이라 했다. 그 이른바 언론들의 비호 아래 군사문화는 그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이 땅에 맑은 윗물 대신 구정물을 끊임없이 흘러내려 보냈다고 본다. 
 
30년 전 칼을 맞고 병실에 누워있으면서 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언론은 바로 설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꿔야했다. 그 테러사건과 관련해 유형무형으로 짓쳐오는 여러 '압력'들과 맞닥뜨리면서 나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현실을 절감해야했다. 
 
언론은 자본 권력으로 부터도 자유로워야 바로 설 수 있다. 또 있다. "내가 조작하면 조작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숙달된 여론 조작꾼들로 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언론이 바로서야 군사문화는 '청산'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ilys123@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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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게이트' 특검이 필요하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8/06 11:08
  • 수정일
    2018/08/06 11:0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고]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18.08.06 07:52l최종 업데이트 18.08.06 07:52l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 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자신의 자택 인근에서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의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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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기의 사법행정권 농단과 박근혜 정권 말기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의 '내란음모'(또는 쿠데타 미수)다. 후자는 휴가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일 "기무사를 해편(解編)하고, 과거와 역사적으로 단절된 '새로운 사령부'를 창설하라"고 지시함으로써 국민의 우려를 씻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전자는 아직 본격적 수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사법부가 주권자들이 납득할 수 없는 법적 조치들을 남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희대의 사건을 '양승태 게이트'라 불러 마땅하다

지금까지 문건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만 보더라도, 양승태를 정점으로 한 사법부의 핵심 법관들이 저지른 위법 행위들은 탄핵을 넘어 엄정한 사법처리를 받아야 마땅한 사건이다. 지난 6월 5일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한 문건 68건을 공개한 뒤 안철상 처장은 "특정 언론기관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첩보나 전략 문서 파일은 재판 및 법관의 독립 침해·훼손에 관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는 거리가 있어 공개 범위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행정처는 지난달 31일 추가로 196개 문건을 공개했다. 

핵심적 내용이 뭉텅이로 삭제되거나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기는 했지만 판독 가능한 사실들로만 미루어보더라도 양승태 체제가 저지른 사법농단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이자 최대의 '사법 파괴 사건'임이 명백하다. 2016년 10월 하순에 터지기 시작한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지던 시기 훨씬 전에 양승태의 사법부는 거기 버금가는 위법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을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다. 신문과 방송에 보도된 기사의 제목들을 선별해 보겠다.
 

· 무서운 양승태 행정처···'상고법원' 청(靑) 뒤로 숨는 연막술까지
· '뇌물판사' 청 관심 돌리려 '이석기 선고' 앞당긴 대법
· 양승태 대법, 파워블로거 등 민간인 SNS도 사찰했다
· 양승태 대법, 청와대에 '재판개입 길 터주겠다' 제안
· 행정처 출신 '전관'까지 입법로비에 조직적 동원 의혹
· 대법·조선일보 '상고법원' 거래 의혹 진실규명 촉구 잇따라
· 임종헌, 박근혜 청와대 찾아가 '징용소송' 상의했다
· 징용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고 판사는 해외로 나갔다
· 양승태 대법원, 외교부 간부에 '판사 유엔 파견' 청탁
· 문건 속 사법부 '민낯'···국민 내려다본 선출되지 않은 권력
· '지역구에 상고법원 지부' 의원 비위 맞추기 골몰한 사법부
·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사실로 확인됐다



양승태 대법원은 대통령 박근혜만을 '지엄한 군주'로 섬겼을 뿐, 입법부와 행정부는 물론이고 언론까지도 로비의 대상으로 삼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리 원칙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주권자인 국민을, "'내 사건'은 대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들"이라고 폄하했다. 

이 모든 사법농단과 위법 행위의 정점에는 양승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희대의 사건은 '양승태 게이트'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는 대법원장직을 떠난 뒤인 지난 6월 1일 경기도 성남시의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장으로 재임했을 때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한 적이 결단코 없으며 재판을 놓고 흥정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순전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최근의 문건 공개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그는 일언반구도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양승태 게이트에 대처하는 김명수 사법부의 자세 
 

제헌절 경축식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70주년 제헌절 경축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 제헌절 경축식 참석한 김명수 대법원장 김명수 대법원장이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70주년 제헌절 경축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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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게이트에 법적으로 대처하는 김명수 사법부의 자세는 무책임을 넘어 '동류(同流)의 비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난 7월 24일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 이규진 전 양형실장 등의 자택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하자 법원은 "피의자 양승태·박병대가 지시 또는 보고 등 피의자 임종헌과 공모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했다"며 기각했다. 지난 1일에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소송 '재판거래'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검찰이 청구한 법원행정처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이 기각했다. 

검찰이 지난 7월 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강제수사를 시작한 뒤 4차례에 걸쳐 22곳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지만 임종헌(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주거지와 사무실, 그리고 외교부에 대해서만 영장이 발부되었다. 기각률은 무려 91%나 되었다. '제 식구 감싸기'를 넘어 '법관의 독재'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정도 아닐까?

그러자 비난의 화살이 현직 대법원장 김명수에게 쏠리고 있다. 양승태체제의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와 거래를 하고, 국회· 언론 등을 대상으로 전방위 로비를 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면서 사법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법원장이 영장담당 판사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수는 없겠지만, 법 적용에 관한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사법부 개혁'을 강조하며 취임한 그는 사법부의 적폐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법원장들과 고법 부장판사들로 구성된 차관급 이상 고위 법관들이 여전히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선임된 인물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기에는 현재 사법부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급하다. 

헌법 제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양승태는 물론이고 그를 따라 사법농단을 일삼은 고위 법관들이 헌법 제7조 1항과 제103조를 위반했음이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문건으로 명백히 드러났다. '국사범'으로 다루어야 할 그들을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최근 법원의 영장 기각률 91%라는 수치로 입증되었다. 양승태 게이트 관련자들을 철저히 수사해 기소하는 작업을 강도 높게 추진하려면 특검이 설치되어야 한다.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약칭 특검법) 제2조(특별검사의 수사대상 등)는 "법무부장관이 이해관계 충돌이나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이 수사대상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제2조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결정될 경우 대통령은 제4조(특별검사 임명절차)에 따라 구성된 특별검사추천위원회(국회가 구성)에 지체 없이 2명의 특별검사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여야 한다." 극우 또는 수구적 야당이 특검 구성에 반대하겠지만 대다수 주권자들은 사법농단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 위한 대통령과 국회의 결단을 강력히 지지할 것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양승태 게이트에 대한 향후 재판의 공정성을 위해 '특별재판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박주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사법농단 사건을 맡을 영장전담판사를 서울중앙지법에 새로 지정하고, 특별재판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특별법안을 국회에서 이른 시일 안에 발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법 정의를 바로세우지 못하면...

박정희 정권 시기의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인혁당 관련 피고인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함으로써 행정부 수장의 '하수인'이 되어버렸다. 법무부는 확정 판결이 나온 지 18시간 만에 그들을 교수대로 보내 목숨을 앗아갔다. 국제법학자회의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치욕의 날'로 명명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이들도 나중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무수히 입증되었다. 불행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양승태 게이트는 법정에서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종철(1944년생)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학중이던 1967년 11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하지만 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공동대표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거쳐 <한겨레> 논설위원과 <연합뉴스> 대표, 사단법인 ‘한국·베트남 함께 가는 모임’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아자유언론수호 투쟁위원회 위원장, 사단법인 유라시아문화연대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민주주의국민행동 공동대표, 2016민주평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는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마침내 하나 됨을 위하여>, <오바마의 미국, MB의 대한민국>, <세시봉 이야기>, <박근혜 바로보기>, <폭력의 자유>, <문화의 바다로>(전 5권), <동아일보 대해부>(전 5권), 5권, <조선일보 대해부>(공저, 전 5권), <촛불혁명의 뿌리를 찾아서-1980년대 민주민족민중운동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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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화, “3일 리용호와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해”

강경화, “3일 리용호와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해”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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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05  13: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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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ARF 갈라 만찬에서 만난 강경화 외교장관과 리용호 북 외무상. [사진출처-외교부]

“지난 3일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 갈라 만찬 계기에 자연스럽게 리용호 외무상을 만나 한반도 정세 진전 동향과 향후 협력방안 등에 대해 짧지만 허심탄회한 의견 교환을 할 수 있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오전 싱가포르에서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 결산브리핑을 통해 “우리 측은 그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번 계기에 만나 판문점선언의 충실한 이행을 위한 남북 외교장관 간 만남을 갖자는 의사를 전달해왔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정식 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강 장관은 “매우 진솔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남북 정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을 외교무대에서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고 자평하고 “남북 외교당국 간 소통과 협력이 더욱 강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ARF 회의 광경. [사진출처-외교부]

강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이라는 목표를 향한 우리의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에 대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요국과 아세안 회원국들의 단합된 지지를 보다 굳건히 하는 유용한 계기가 됐다”고 ARF를 비롯한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 성과를 전했다. 

아울러 “우리 정부의 신남방정책에 대한 아세안 측의 지지 재확인하고 공고히 했다”면서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한국 개최에 공감대를 이뤘으며 “금년 11월 아세안 정상들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강 장관은 “(리 외무상과)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의견교환이 있었다”고 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함구했다. ‘종전선언’ 시기에 대해서는 “(9월 하순) 유엔총회를 중요한 계기로 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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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알게 되리, 약속이행의 길을

[개벽예감 309] 그러면 알게 되리, 약속이행의 길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08/06 [07: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2018년 1월 7일 아침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생긴 일

2. 그 동안 중대한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다

3. 트럼프의 이행의지 시험하는 워싱턴의 복잡한 내부사정

4. 트럼프를 이행의 길로 이끌어주는 친서외교

 

 

1. 2018년 1월 7일 아침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생긴 일 

 

2018년 1월 초부터 오늘까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조미관계의 변화, 그리고 남북관계의 변화는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오직 그런 승패결과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미증유의 변화들이다. 만일 조미핵대결이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2017년 12월에 끝나지 않았다면, 2018년 1월 초부터 조미관계와 남북관계에서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난 25년 동안 지속되어온 조미핵대결은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을 것이며, 남북관계도 극단적인 대결상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2017년 5월 이후 <자주시보>에 발표해오는 여러 글들에서 조미핵대결이 발생한 원인과 그 경과, 그리고 핵대결의 승패를 결정하는 최종국면에 대해 상세하게, 여러 차례 논한 바 있다. 이를테면, 2017년 5월 8일 <자주시보>에 실린 ‘담력전에서 패한 트럼프, 조미정상회담 예고하다’(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3451)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와 그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의 민감한 반응을 분석하면서 이런 문장으로 그 글을 끝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의 핵동결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지만, 미국의 철군문제와 조선의 핵동결문제를 담판형식으로 일괄타결하게 될 조미정상회담을 예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조선과 미국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문제도 일괄타결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천지개벽을 예감할 때가 아닌가.”

 

그 글에서 나는 조미핵대결 종식과 조미정상회담 성사를 예견하였을 뿐 아니라,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의제도 예상하였는데, 그 글이 <자주시보>에 실린 때로부터 여덟 달 뒤에 조미핵대결이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끝났고, 조미핵대결이 끝난 때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2018년 6월 12일 싱가폴공화국에서 역사적인 조미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단독회담에서 조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중대현안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구두로 합의, 약속하였다. 2018년 7월 30일 <자주시보>에 실린, ‘비공개 구두약속, 세상을 바꾸는 격변의 기폭제’라는 제목의 글은 내가 지난 1년 동안 조미관계에서 일어난 온갖 변화양상들을 분석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집필한 글이다.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승리하였고 미국이 패배하였음을 입증해줄 결정적인 정보는 어디에 있을까? 조선의 국가문서고와 미국의 국가문서고에 각각 보관되어 있는 비밀문서들에 들어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비밀문서를 열람하지 못하지만,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또 하나 중요한 정보가 얼마 전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중요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팜페오 국무장관 사진과 김영철 부위원장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서훈 국정원장 사진과 김영철 부위원장 사진을 이어붙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김영철-서훈-팜페오 비밀연락선을 통해 조미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그 사실을 파헤치면, 2017년 11월 말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하였다는 진실을 만나게 된다. 오늘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조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모든 변화양상들은 바로 그 진실에서 시작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8년 7월 9일 <주간조선> 2515호에 실린 보도기사에 따르면, 2018년 1월 6일 판문점에서 서훈 국정원장과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2018년 1월 9일 판문점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이끄는 남측 대표단과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이끄는 북측 대표단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진행하였다는 사실은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보다 사흘 앞선 1월 6일 판문점에서 서훈-김영철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주간조선> 보도기사에 따르면, 2018년 1월 6일 서훈-김영철 비밀회담에서는 북측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문제와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가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제가 논의된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므로, 특기할 만한 정보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하는 뜻밖의 일이 비밀회담 직후에 일어났다. <주간조선> 보도기사에 따르면, 비밀회담이 진행된 2018년 1월 6일 밤 서훈 국정원장은 그 날 낮에 진행된 비밀회담의 결과를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에게 직통전화로 전했고, 팜페오 국장은 그 내용을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서울과 워싱턴의 시차를 계산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팜페오 국장을 독대하고 서훈-김영철 비밀회담결과를 보고받은 때는 미국 동부시간으로 2018년 1월 7일 아침이었다. 당시 팜페오 국장이 매일 아침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 트럼프 대통령을 독대하고, 극비정보를 보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사진 2>

 

▲ <사진 2> 위쪽 사진은 미국 중앙정보국장이 매일 아침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보보고문건을 담은 접이식 서류철이다. 중앙정보국 문장을 새겨넣고, 가죽으로 만든 서류철이다. 상당한 분량에 이르는 정보보고서를 아침마다 읽어야 하는 부담을 꺼린 트럼프 대통령은 문건보고를 구두보고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아래쪽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집무실에서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이다. 책상 위에는 문서들이 상당히 쌓였는데, 전화기 바로 옆에 그가 즐기는 코카콜라와 얼음이 담긴 유리잔이 놓여있다. 2018년 1월 7일 아침, 트럼프 대통령은 팜페오 당시 중앙정보국장의 정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서훈-김영철 비밀회담결과를 듣고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자신의 의사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팜페오 국장의 정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서훈-김영철 비밀회담결과를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팜페오 국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는 자신의 의사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팜페오 국장은 그 지시를 받고 깜짝 놀랐을 터인데, <주간조선>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서훈 국정원장에게 직통전화로 알려주면서, 김영철 부위원장에게 그 제안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뜻밖의 제안을 전해들은 서훈 국정원장은 급히 청와대로 달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는 사실을 보고받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을 것이다. 

 

<주간조선> 보도기사에 따르면, 서훈 국정원장은 2018년 1월 16일 판문점에서 김영철 부위원장과 제2차 비밀회담을 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전하였는데, 그 놀라운 제안을 전해들은 김영철 부위원장은 “자기 선에서 답할 수 없다고 한 뒤 일단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고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팜페오→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을 받고 그 제안을 승낙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승낙을 김영철 부위원장을 통해 전해들은 서훈 국정원장은 그 사실을 팜페오 국장에게 전해주기 위해 비공개로 워싱턴을 방문하였는데, 그 때가 2018년 1월 말이었다. <조선일보> 2018년 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서훈 국정원장은 “2018년 1월 말 극비리에” 미국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서훈 국정원장의 비공개 방미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조미정상회담 승낙을 김영철→서훈→팜페오 비밀연락선을 통해 전달받았음을 의미한다.  

 

원래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가동하였는데, 그 비밀연락선이 가동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끼어들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미정상회담 개최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팜페오→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가동하였다. 

 

 

2. 그 동안 중대한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다

 

위에 서술한 정보가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중대한 사실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 오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2018년 3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훈 국정원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특사단으로 평양에 파견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온 그들을 접견하였는데, 접견석상에서 특사단에게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런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접견을 받고 서울에 돌아간 특사단은 2018년 3월 6일 기자회견장에서 방북결과를 설명하는 언론발표문을 내놓았는데, 그 언론발표문에 “북측은 비핵화 문제 및 북미관계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하였음”이라는 문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특사단이 평양을 방문하기 두 달 전인 2018년 1월 초, 트럼프 대통령은 팜페오→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위에 인용된 언론발표문만 읽어본 사람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대조선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런 오해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에 견디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조선적대조치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2017년 1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장장 11개월 동안 조선은 미국을 국가안보파탄으로 떠밀어버리는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전례 없이 높은 강도로, 그리고 미처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연속적으로 펼치면서 국가핵무력 완성을 다그쳤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해보려고 몸부림을 치던 미국은 거듭되는 전략적 핵압박공세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고, 결국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완패를 당했다. 바로 그렇게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완패한 미국의 국가안보가 완전히 파탄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조선적대조치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촌각을 다툴 만큼 매우 다급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16일 팜페오→서훈→김영철 비밀연락선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을 다급히 제안하였다는, 결정적으로 중대한 정보가 그 동안 은폐되었을 뿐 아니라, 2018년 3월 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특사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전했다는 소식만 세상에 퍼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이 어떻게 되어 갑자기 조미정상회담 협상국면으로 급전되었는지 그 내막을 알 수 없었고, 조미핵대결의 승자가 누구이고 패자가 누구인지도 가려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조미핵대결은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이 조선과 미국이 서로 비긴 싸움이 아니었고, 미국이 승리하고 조선이 패배한 싸움은 더구나 아니었다. 1993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25년 세월이 그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지난 시기 조선의 핵무기개발을 극력 저지하려고 온갖 압박과 위협을 들이대었던 미국, 그리고 그런 것에 전혀 굴하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레 더 강하게 미국을 압박하고 위협하여 궁지에 몰아넣은 조선, 그 두 나라가 각기 국운을 걸고 벌인 심각하고 격렬한 핵대결에서 조선은 이미 여러 차례 전술적 승리를 거두며 자기의 결심과 의도대로 핵무기를 기어이 개발하여 조미핵대결 1차전에서 미국을 꺾고 승리의 환성을 올렸다. 2006년 10월 9일 조선이 제1차 지하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것은 조미핵대결 1차전에서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를 확정지은 대사변이었다. 

 

그러면 조미핵대결 2차전은 또 어떠했나? 그것은 이미 핵보유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벌인, 한층 더 심각하고 격렬한 대결이었다. 국가핵무력 완성이란 조선이 미국 본토 전역을 전략핵타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초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내느냐 만들어내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로 결정되는 최종단계였다. 미국은 국가핵무력을 완성하려는 조선의 노력을 무조건 가로막아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술책과 압박을 거듭 들이밀다 못해, 사정이 급해지자 선제핵타격을 노린 전략핵자산까지 들이미는 핵위협에 매달리며 광란하였다. 

 

그러나 그런 핵광란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설 조선이 아니었다. 2017년 1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극도로 격화되었던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에서 뚜렷이 입증된 것처럼, 조선은 미국이 핵공갈을 꺼내면, 그보다 한층 더 심한 핵공갈로 대응하고, 미국이 전략핵자산을 동원한 핵위협을 가하면 그보다 더 강한 핵위협으로 보복하면서 국가핵무력 완성을 드팀없이 다그쳐갔으며, 미국 본토 전역을 전략핵타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초강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 시험발사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극적으로 완성하였으니, 그 날이 2017년 11월 29일이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를 발표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촬영된 사진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고, 미국 본토 전역이 조선의 핵타격권 안에 들어왔으며, 자신의 책상 위에 핵단추가 놓였다고 말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포의 직격탄'을 날렸다. 새해 첫날부터 '공포의 직격탄'을 맞고 정신이 얼얼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2018년 1월 7일 팜페오 국장의 매일정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하라는 다급한 지시를 내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이 자기의 국가핵무력 완성을 화성-15형 시험발사로 당당히 입증한 날로부터 한 달이 되던 2018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조선이 “국가핵무력완성의 력사적 대업을 성취”하였음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면서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타격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우에 항상 놓여있다는 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라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공포의 직격탄’을 날렸다. 새해 첫날부터 ‘공포의 직격탄’을 맞고 정신이 얼얼해진 트럼프 대통령은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2018년 1월 7일 팜페오 당시 중앙정보국장의 매일정보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조미정상회담 제안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하라는 다급한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3. 트럼프의 이행의지 시험하는 워싱턴의 복잡한 내부사정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조미정상회담 제안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각료회의에서 논의도 하지 않은 채, 단독적으로 결심하고 즉석에서 결정해버렸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미정상회담 제안문제를 각료들과 상의하지 않고 단독적으로 결정하였지만, 그의 결정은 일시적인 기분에 따른 즉흥행동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조미정상회담 제안문제는 2017년 한 해 동안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받을 때마다 고심을 거듭해온 문제였다. 

 

미국의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최고 중대사안을 각료들과 상의하지 않거나, 각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결정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이하고 고집스러운 행동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관찰대상이다. 그는 조미정상회담 제안문제를 결정할 때도 그렇게 하였고, 미러정상회담 제안문제를 결정할 때도 그렇게 하였다. 또한 그는 조미정상회담과 미러정상회담을 비난하고 헐뜯는 워싱턴의 정적들, 그리고 자기를 향해 대립각을 세운 미국 언론매체들과 맞서 싸우면서, 자기 트위터를 이용하여 그 두 정상회담의 정당성과 성과를 미국과 전 세계에 직접 알리는 여론전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비록 지금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기 정적들과 미국 언론매체들의 공세에 맞서 난타전을 벌이고 있지만, 그가 단독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구두로 약속한 중대사안들을 자기의 결심과 고집대로 이행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여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구두약속을 나누었던 쎈토사섬의 정상회담, 근본문제를 해결할 비공개 합의가 이루어진 그 역사적인 회담은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그 핵대결에서 패배한 트럼프 대통령이 승자와 패자로 마주앉은 불평등회담이었다. 조선은 정상회담에 끌려나온 미국을 너무 자극하지 않고 협상을 이어가야 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 자랑스러운 사실을 차마 세상에 공개할 수 없었고, 미국은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패했으나 핵제국의 체면만은 끝내 지켜야 하는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 수치스러운 사실을 차마 세상에 공개할 수 없었으나, 쎈토사섬의 정상회담이 승자와 패자의 불평등회담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조선에게는 자랑스럽고, 미국에게는 수치스러운, 그러나 각자의 서로 다른 사정 때문에 차마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불평등회담에 대해 알지 못하면, 두 정상이 그 회담에서 나눈 구두약속이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불평등회담에 대해 알면, 승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시한 요구를 패자인 트럼프 대통령이 군소리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행하겠노라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문제는 간단해졌다. 이제는 조선과 미국이 두 정상의 비공개 구두약속을 동시적-단계별 행동원칙에 따라 차근차근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불평등회담에서 비공개 구두약속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두 달이 다 되어오는 오늘, 조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구두약속을 차근차근 이행해왔으나,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구두약속을 초보적으로만 이행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2018년 7월 30일 <자주시보>에 실린, ‘비공개 구두약속, 세상을 바꾸는 격변의 기폭제’라는 제목의 나의 글에서 상세히 논하였으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으나, 미국이 종전선언 발표와 대조선경제제재 완화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 언론매체들은 조선이 핵검증신고서를 미국에게 아직 보내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이 핵검증신고서를 보내야 미국이 종전선언을 발표하게 될 것이고 대조선경제제재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떠들어댔지만, ‘핵검증신고’라는 것은 조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적이 없는 것이므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이고, 조선이 비핵화 약속을 차근차근 이행하고 있는 데도 미국이 그에 상응하여 대조선경제제재를 완화하지 않는 것은 핵제국의 체면을 지키려다 되레 체면을 잃어버릴 수 있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워싱턴의 정적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비핵화 의지가 없다느니, 조선이 비핵화 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느니 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리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행의지를 시험대로 끌고 갔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7월 16일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단독회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뿌찐 대통령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정상의 표정은 마치 격론을 벌일 것처럼 매우 굳어져 있다. 쎈토사섬에서 진행된 단독회담 직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러정상회담을 마친 뒤 불과 사흘만에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제2차 미러정상회담 일정을 잡고, 뿌진 대통령을 올가을에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2차 미러정상회담을 그토록 서두르는 까닭은 오는 11월 6일 미국에서 중간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미러관계에서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다급한 사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고대하게 된 사정에도 똑같이 관련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하지만 워싱턴의 복잡한 내부사정이 트럼프 대통령의 이행의지를 그처럼 어렵고 힘들게 시험해도, 그가 이행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며 언제까지나 허송세월을 할 수는 없다. 다음에 서술하는 몇 가지 사실들은 그가 왜 허송세월을 할 수 없는지를 말해준다. <워싱턴포스트> 2018년 7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7월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울라지미르 뿌찐(Влади́мир Пу́тин) 러시아 대통령(사람이름과 나라이름, 땅이름과 바다이름을 미국식으로 변형시켜 제멋대로 표기하지 말고, 현지어 발음에 따라 표기해야 함)과 정상회담을 진행한 트럼프 대통령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7월 19일 존 볼턴(John R. Bolton)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제2차 미러정상회담 일정을 잡고, 뿌찐 대통령을 올가을에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미러정상회담을 굴욕회담이니 뭐니 하면서 터무니없이 헐뜯는 트럼프의 정적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러정상회담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제2차 미러정상회담을 추진하려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을 끌지 않고 미러관계의 근본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는 시원시원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왜 이례적으로 미러정상회담을 끝내자마자 제2차 미러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서둘렀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런 이례적인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6일 미국에서 중간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미러관계에서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제2차 미러정상회담 추진을 서두른 것이다. 그가 중간선거 전에 미러관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제2차 미러정상회담을 서두르는 까닭은, 중간선거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되기 때문이다. 만일 올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의 정적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공화당이 다수당 지위를 잃고 소수여당으로 전락하는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대통령에 재선되는 재집권 야망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연방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으로부터 그가 러시아의 미국 대선개입공작을 방치했다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최악의 탄핵위기로 몰릴 수 있다.  

 

이런 절박한 사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대러시아관계개선의 시급성에만 관련되는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대조선관계개선의 시급성에도 당연히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11월 6일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 대조선관계개선과 대러시아관계개선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지경에 놓인 것이다. 

 

 

4. 트럼프를 이행의 길로 이끌어주는 친서외교

 

트럼프 대통령의 절박한 사정을 간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워싱턴의 정적에게 발목이 잡혀 이행의 언저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는 그를 이행의 길로 이끌어주었다. 6.25전쟁 중에 사망한 미국군 유골을 지난 7월 27일 미국에 송환하는 것과 함께 친서외교를 펼친 것이다. 워싱턴의 정적에게 발목이 잡힌 트럼프 대통령을 이행의 길로 이끌어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유골송환과 친서외교는 즉각적인 효험을 발생시켰다. 2018년 8월 1일 미국 동부시간으로 오후 9시 38분, 백악관에 어둠이 깃든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였는데, 그가 트위터로 발신한 메시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고 소중한 우리 전사자들의 유골을 송환하는 일을 시작하고, 약속을 지킨 김정은 위원장에게 감사드립니다. 내게는 당신의 그런 인정 있는 행동(kind action)이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은 친서(nice letter)를 보내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당신을 곧(soon)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불과 네 줄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트위터 메시지였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계속 내보내는 3인칭 메시지와는 전혀 다르게, 평양으로 향한 2인칭 메시지였다. 구구절절 솔직한 심정이 담겼음을 느낄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받은 즉시 답신형식으로 작성된 트럼프 대통령의 2인칭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사실들이 발견된다.   

 

(1)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군 유골을 송환하겠다고 언명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 약속이 이행되기 시작한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였다. 사의표명 속에 들어있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약속을 이행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는 자신이 약속을 이행하기 시작할 차례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다. 지금 트럼프의 정적들은 조선이 비핵화를 완전히 실현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압박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떠들어대며 트럼프 대통령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그가 자기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정적들의 손아귀를 단호히 뿌리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이행에 상응하여 자기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 만일 그가 자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계속 머뭇거리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정치생명마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2)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기에게 친서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 하는 심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그런 심정이 담긴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워싱턴의 복잡한 내부사정에 발목이 잡혀 이행의 언저리를 맴돌며 머뭇거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이행의 길로 이끌어주려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생각이다. 제1차 조미정상회담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쎈토사섬의 ‘기적’을 일으켰던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외교로 제2차 조미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전 세계를 놀라게 할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적들에게 발목이 잡혀 이행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자신을 그래도 믿어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마음을 친서에서 읽었다. 워싱턴의 복잡한 내부사정에 얽혀 이리저리 떠밀리며 부대끼던 그의 마음은 친서를 읽으면서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즉각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전하고, 회답친서를 썼다. 2018년 8월 4일 싱가폴공화국에서 진행되는 아세안지역안보연단(ARF)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팜페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회답친서를 그 회의에 참석한 리용호 조선외무상에게 전할 기회를 가졌노라고 자신의 트위터에서 밝혔다. 성 김 필리핀주재미국대사가 리용호 외무상에게 회답친서를 직접 전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8년 8월 4일 싱가폴공화국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연단 외교장관회의에 팜페오 국무장관을 수행하여 참석한 성 김 필리핀주재미국대사가 리용호 조선외무상에게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회답친서를 전하는 장면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 이전에 조미관계에서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오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대조선경제제재를 완화해야 한다. 다른 방도는 없다. 일시적으로 조성된 장애를 넘어 쎈토사섬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때, 어지러운 사태를 바로잡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은 언제 열릴 것인가? 위에 서술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올가을” 제2차 미러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에 내렸고,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미국의 중간선거는 오는 11월 6일에 시행될 것이므로, 제2차 미러정상회담은 오는 10월 중순에 열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 일정을 예상하면, 제2차 조미정상회담은 오는 9월 중순이나 하순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 이전에 조미관계에서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오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대조선경제제재를 완화해야 한다. 다른 방도는 없다. 

 

아세안지역안보연단에 참석한 강경화 외무장관은 2018년 8월 5일 현지에서 한국 취재진에게 자신이 종전선언 발표를 위해 미국측, 중국측과 “상당한 협의”를 진행하였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을 발표하기 위한 뭍밑협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결단을 내리고 직권을 발동하면, 종전선언은 며칠 뒤라도 발표될 수 있다.    

 

<한겨레> 2018년 7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서훈 국정원장은 2018년 7월 26일부터 29일에 이르는 기간에 워싱턴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팜페오 국무장관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조치 가운데 남측의 대북경제협력과 관련된 부분이라도 우선 면제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판문점 선언을 이행해야 하는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게 시급히 요청하는 것은, 개성공업지구 재가동, 금강산관광 재개, 남북종단철도 개통 등이다. 서훈 국정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팜페오 국무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면제요청에 즉답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결단을 내리고 직권을 발동하면, 미국의 대조선경제제재조치 가운데 남측의 대북경제협력과 관련된 부분은 며칠 뒤라도 면제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대결단을 내리고 직권을 발동하여 종전선언 발표문제와 대조선경제제재 완화문제를 해결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그에 상응하는 긍정적인 조치를 즉각 취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조성된 장애를 넘어 쎈토사섬의 약속을 이행할 것이다. 성실한 약속이행만이 어지러운 사태를 바로잡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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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을 위한, 정신장애인의 미디어 ‘마인드포스트’

[인터뷰] 박종언 마인드포스트 편집국장,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대안 언론 “우리를 빼고 우리를 이야기하지 말라”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8년 08월 05일 일요일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 차가 섰다. 여러 명이 내려 순식간에 강제로 차에 태웠다. 낯선 이들이 가득한 건물에 가뒀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복해봤자 감금 기간이 길어질 뿐이다. 묶여 있기도 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대답을 하고 나면 풀려날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결정은 그들이 한다.’

이는 정신장애인들이 강제입원(비자의입원)당할 때 상황이다. 마치 독재정권의 정보기관이 시민을 납치하던 방법 같다. 보호의무자(보통 가족)의 동의와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면 그 자체로 ‘정신질환자’가 된다. 정신병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은 번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가장 오래된 자유권인 신체의 자유가 박탈된다. 이들은 근대 이전을 살고 있다.  

정신장애인들은 ‘당사자’라는 말을 강조한다. 형제복지원·선감학원 피해생존자나 신체장애인 등 복지시설에서 감금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그렇다. 그간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없었으니 누가 자신을 대리·대표한다는 개념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당사자 운동에서 당사자 한명 한명의 이야기에 좀 더 큰 무게를 두는 까닭이다.  

하지만 기성언론과 같은 공론장 내부에선 일개 당사자 한둘의 목소리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 지난 6월11일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자신의 시각을 남기기 위해 대안언론 ‘마인드포스트’를 만들었다. 마인드포스트는 창간사에서 “우리는 우리를 표현할 언어가 없었으며 의료권력의 진단명에 의존하는 수동적 존재였다”며 “우리를 빼고 우리를 이야기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마인드포스트는 정신장애인 관련 뉴스 뿐 아니라 당사자의 일상과 치유의 이야기도 싣는다. 

 

 

▲ 마인드포스트 메인화면 갈무리.
▲ 마인드포스트 메인화면 갈무리.
 

미디어오늘은 지난 1일 서울 서초의 한 카페에서 박종언 마인드포스트 편집국장을 만나 매체 창간 이유, 지향점 등을 물었다. “3년 전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교수님과 직원들이 먼저 ‘정신장애인 중에 기자생활한 사람이 있으니 언론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를 꺼냈어요.” 기자생활을 해본 이는 박종언 국장이었다. 그때부터 당사자 10명 정도가 모여 기사쓰기 등을 준비했다.

 

1년 뒤에 창간하자는 계획은 미뤄져 3년이 걸렸다. 박 국장은 “정신장애인 특성상 힘든 걸 더 견디지 못해 떠나는 사람이 많았고 물론 다시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가 많은 기자 일을 하기란 더 쉽지 않았다. 지금은 기자 4명과 일부 시민기자 등이 기사를 쓰고 있다. 신생 매체라 광고나 후원이 열악하다. 매체 생존 자체가 큰 목표다.  

박 국장은 “마인드포스트는 불편부당한 언론을 지향하지 않는다”며 “정치성·정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한국사회가 정신장애인을 매도하면 우리 입장에서 사회와 맞설 수 있다”며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의료권력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으로 해석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만드는 언론을 보면 보통 시민이 가진 정신장애인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 간 재산 문제로 강제입원제도를 악용하기도 해 정신병원이 감옥처럼 그려지지만 강제입원은 치료를 위해 유용한 제도라는 주장이 많다. 강제입원을 거부하는 환자를 ‘자신의 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한 칼럼도 있다. 

 

박 국장은 반드시 그렇진 않다고 반박했다. 시민이 정신장애인을 두려워하니 격리했고, 경험하지 못하니 존재 자체가 두려워진다. 의료 권력과 언론은 이를 자극했다는 지적이다.  

“2015년 기준 범죄가 200만 건이 넘었는데 정신장애인의 범죄는 8300건, 약 0.4%였어요. 그런데 기자들이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거죠. 언론을 통해 정신장애인을 간접 경험하면서 공동체 밖으로 보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생겼죠.”  

치료인가, 배제인가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의사들은 병원·요양시설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라지만 박 국장은 정신장애인을 배제하기로 사회가 합의한 결과물이라고 봤다. 전국에 정신병원은 8만 병동, 정신요양시설은 1만 병동이 넘는다. 박 국장은 “통계를 보면 정신요양시설 1만 명 중 10년 이상 거주한 비율이 65%, 20년 이상 거주한 비율이 35%”라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사람이 62%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시설 안에 존재가 박혀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국장은 “1984년 정신과 병상이 1만2000개 수준이었는데 2016년에 와선 9만 병상으로 약 500%이상 증가했다”며 “국가가 요양시설에 1인당 100만원씩 주는데 이러니 수십 년씩 거기 사는 사람이 나온다”고 말했다. 정신요양시설에는 시설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을 못하는 거주인들이 상당수 있다.

정신보건법 제정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의사들은 지역사회에서 받을 준비가 안 됐다며 탈원화 정책을 우려한다. 실제 지자체마다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는 비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한다. 정신장애인과 신뢰가 생겨도 금방 사람이 바뀐다. 박 국장은 “의료권력은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강제입원 절차가 까다롭다고 지적한다”며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5년 12월 정신보건법을 제정한 이후 한국의 정신건강 정책은 질병분류기호 ‘F코드(정신 및 행동장애)’를 받은 이들, 즉 정신질환자를 찾아내 격리·배제하는데 초점을 뒀다. 박 국장은 “과거에는 정신과에서 상담만 받아도 F코드를 받아 사람들이 정신과를 피했다”며 “최근엔 경증 우울증같은 건 빼는 등 F코드의 범위를 줄였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은 국가 정책과 맞물려있다”는 의미다. 

F코드의 범위를 줄인 결과 사회분위기도 달라졌다. 박 국장은 “‘연예인들이 정신과 약을 먹는다’ 이런 내용도 기사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신병이 특별한 게 아니라고 알리고 싶어서다. F코드를 받은 이들 중 국가에 장애인 등록을 한 이들이 정신장애인이다. 그 수는 약 10만 명으로 1·2·3급으로 나누는데 약 65%가 3급 장애인이다.  

신체의 자유 박탈, 누가 결정하나 

정신장애인의 인권문제가 불거지자 강제입원 조건이 까다로워졌다. 2016년 국회가 전면 개정한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을 보면 이제 보호의무자 2명의 동의와 서로 다른 의료기관의 의사 2명이 동의해야 강제입원이 가능하다. 처음엔 3개월, 이후부턴 6개월씩 연장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신체를 의사가 결정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강제입원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자는 주장일까. 박 국장은 “1978년부터 정신병원을 없애기 시작한 이탈리아도 강제입원제도는 있다”며 “가고 싶은 정신병원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서구 선진국의 강제입원 비중은 10%대인 반면 한국은 그 비율이 70% 이상이다.  

언제든 정신장애인들이 가서 쉴 수 있는 공간, 자율적으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병원이 돼야 치료도 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강제입원 당했던 당사자들은 길에서 앰뷸런스만 봐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병원 안에서 구타·강박하는데 어떻게 치료가 되겠느냐”며 “병원에서 다 회복·완치하고 사회로 나간다는 건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고 했다.  

의료계에서도 현 강제입원제도를 문제 삼는다. 현재 강제입원을 하면 일정기간 내에 국공립병원 또는 보건복지부에서 지정한 병원에 근무하는 정신과 의사가 2차 진단을 해 1차 진단 전문의와 소견이 다르면 즉시 퇴원해야 한다. 결국 2차 진단 의사가 신체 구속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2차 진단 의사에겐 엄청난 부담이다. 강제입원에 동의한 뒤 고발당한 의사도 있다.

의료계에선 전국 모든 환자를 심사하기 벅차므로 사법·준사법기구에서 2차 진단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영국 등 일부 국가는 법원이나 준사법기구가 판단하는 사법입원제도를 도입했다. 선진국에서 한다고 한국 현실에도 맞는지는 의문이다.  

지난해 법이 개정되면서 지난 5월부터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를 설치해 강제입원한 이들의 입원적합성을 심사한다. 안전장치를 만든다고 인권의 수준이 올라갈까. 박 국장은 “입원된 사람이 10만 명인데 제대로 심사가 되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연간 4만여 건의 심사가 예상되는데 조사원은 50여명 수준이다.  

의사들이 사법입원제도로 프레임을 짜면 찬반 논쟁으로 접어든다. 당사자들은 관점이 다르다. 마인드포스트는 아직 사법입원제도 관련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임형빈 마인드포스트 기자는 “사법기구든 준사법기구든 입원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보장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면서 “공론화를 통해 인권 친화적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민주적인 공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신장애인 배제하는 제도 없애기  

박 국장의 다른 관심사를 물었다. “정신장애인이 아닌 다른 장애인은 삶의 만족도가 55%라고 해요. 그런데 정신장애인은 31%에 불과하대요. 어떤 사람들은 정신장애를 통해 우리가 성숙해졌다고 하는데 왜 우린 다른 장애인보다 만족도가 떨어질까요.” 정신장애인은 행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노력한다. 그래도 어느 순간 마음이 무너질지 모른다. 

▲ 마인드포스트 명함 뒷면. "우리를 빼고 우리를 말하지 말라"는 마인드포스트의 주요 주장이다.
▲ 마인드포스트 명함 뒷면. "우리를 빼고 우리를 말하지 말라"는 마인드포스트의 주요 주장이다.
 

 

삶의 만족도는 차별과 연관이 있다. 아직 한국사회는 정신장애인과 살아갈 준비가 안 됐다. 박 국장은 “몇 군데서 고치긴 했지만 많은 지역 조례에서 정신장애인은 공공도서관 등 공공시설을 못 들어가게 하거나 문화공연을 볼 수 없도록 했다”며 “정신장애인은 의사·약사·한의사·이발사 등을 할 수 없는데 당사자에게 차별적인 면허가 20개쯤 된다”고 말했다.  

한 예로 의료법에 보면 의료인 결격사유로 정신질환자를 규정하고 있다. 다만 전문의가 인정할 경우 의사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선원법에 보면 선박소유자의 의무로 정신질환자 승무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 위험할까. 전방위로 정신장애인을 배제하고 있지만 사실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적은 없다.  

마음의 상처를 가진 채 눈치 보기 바쁜 실제 다수의 정신장애인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힌 언론 속 정신장애인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지하철 탔는데 누가 중얼중얼하면 무서워하지 마세요. 자기 고통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짖는 개는 안 문다고 하죠. 아파서 혼자 소리칠 순 있지만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아요.” 이 말은 아직 대중에게 와 닿지 않는다. “경험이 태도를 바꾸죠. 당장 어떻게 바꾸겠어요.” 소망과 냉소가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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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도 사치"... '8시간 폭염노동' 내몰린 가스 검침원들

[현장] 15년차 도시가스 검침원 동행기 "우리가 죽어야 폭염대책 나올까"

18.08.04 20:46l최종 업데이트 18.08.04 22:12l

 

 가스 계량기는 미관상 건물의 노출면에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택간 간격이 좁은 곳 많아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틈으로 들어가 검침하는 일이 허다하다.
가스 계량기는 미관상 건물의 노출면에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택간 간격이 좁은 곳 많아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틈으로 들어가 검침하는 일이 허다하다. ⓒ 이희훈
 김영애씨는 검침을 돌 때는 하루 평균 약 700~1000호를 방문한다. 전체 약 4600호를 돌아야 하고 검침이 끝나면 점검과 고지서 송달 업무를 해야 한다.
김영애씨는 검침을 돌 때는 하루 평균 약 700~1000호를 방문한다. 전체 약 4600호를 돌아야 하고 검침이 끝나면 점검과 고지서 송달 업무를 해야 한다. ⓒ 이희훈
"속도 메슥거리고 머리가 다 띵해요. 이러다 죽겠다 싶다니까요."

15년차 도시가스 점검검침원 김영애(51)씨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한 번 훔치며 말했다. 도시가스 점검과 검침을 하며 15번의 여름을 보낸 그이지만 요즘 같은 폭염은 처음이라고 했다. 손수건이 지나가지 못 한 그의 목과 양 팔에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3일 오전 11시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온도는 섭씨 35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체감온도는 37도였다. 하지만 아침사이 달궈진 아스팔트가 내뿜는 지열은 체감온도를 더 높이고 있었다. 단독주택과 오피스텔이 많은 중곡동 골목에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골목에 "가스 검침하러 왔습니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김영애씨가 벨을 누르자 '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단독주택의 대문을 지나 마당에 난 잡초와 나무 등을 헤집고 건물 뒤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PDA에 계량기 번호를 넣었다. 그나마 이는 수월한 곳이었다. 검침을 위해 햇볕으로 달궈진 주차장과 창고의 철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음식물과 각종 생활 쓰레기가 담긴 봉투를 치운 채 철문을 열고 들어가, 높은 턱을 올라야만 계량기를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철문이 낮아 머리를 부딪히기도 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검침을 하고 내려오다 나무뿌리에 걸려 발이 삐끗하기도 했다.
 셔터 안 쪽에 있는 계량기의 검침을 마치고 힘겹게 다시 셔터를 내리고 있다.
셔터 안 쪽에 있는 계량기의 검침을 마치고 힘겹게 다시 셔터를 내리고 있다. ⓒ 이희훈
 검침을 마치고 통로를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 김영애씨.
검침을 마치고 통로를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 김영애씨. ⓒ 이희훈
 김영애씨는 이 곳에서 검침을 하기위해 낡은 사다리를 오르다 사다리가 부러져 허리를 다쳤다. 건물주의 배려로 철재 사다리로 바뀌었지만 검침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았다.
김영애씨는 이 곳에서 검침을 하기위해 낡은 사다리를 오르다 사다리가 부러져 허리를 다쳤다. 건물주의 배려로 철재 사다리로 바뀌었지만 검침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았다. ⓒ 이희훈
하루 8시간 700~1000개 검침 '폭염 노동', "물도 사치"

벽과 벽 사이를 오가는 업무를 김씨는 오전 9시 10분부터 오후 5시 45분까지 꼬박 해야 한다. 이날 700~1000개의 가스 계량기 검침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8시간 '폭염노동'을 해야 하지만 김영애씨는 사실상 맨 몸이었다. 쿨토시, 얼음조끼, 휴대용 선풍기는커녕 물통도 없다. 검은색 캡모자와 손수건이 전부였다. 김씨는 "가방에 가스점검기, 검침용 PDA단말기 등이 담겨있다"라며 "이것만 해도 무게가 상당한데 물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폭염시 대낮 야외 활동에는 충분한 수분 섭취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검침원에게 이는 불가능하다. 김씨는 "집집마다 돌아다녀야 하는데 물을 많이 마시면 화장실을 자주 가야한다"라며 "동사무소나 교회 화장실 아니면 가기 힘들다"고 했다. 오전 9시 10분부터 땡볕에 있었지만 김씨가 섭취한 수분은 오전 10시 30분쯤 주민에게 얻어 마신 물 한 컵이 전부였다.
 김영애씨는 검침을 하던 중 추윤구 광진구 의원을 만나 검침원들의 민원을 전달했다. 유일한 휴식 공간인 주민센터에 휴게실이 없어져 혹한,혹서기에 검침원들의 휴식 공간이 꼭 마련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김영애씨는 검침을 하던 중 추윤구 광진구 의원을 만나 검침원들의 민원을 전달했다. 유일한 휴식 공간인 주민센터에 휴게실이 없어져 혹한,혹서기에 검침원들의 휴식 공간이 꼭 마련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희훈
 김영애씨가 검침 도중 고객의 명의 변경 요청을 하자 자세히 방법을 안내해 주고 있다.
김영애씨가 검침 도중 고객의 명의 변경 요청을 하자 자세히 방법을 안내해 주고 있다. ⓒ 이희훈
"그러다 죽어."

주택들을 돌며 검침을 하던 중 마주친 80대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런 날에는 일 좀 안 하면 안 되냐"며 "폭염으로 사람이 죽어난다는데 뭐하는거냐"고 말했다. 양산과 휴대용 선풍기를 든 주민은 김씨에게 "더운데 어떻게 다니세요"라고 묻기도 했다. 김씨는 "가스 검침기간이잖아요"라며 "할당량 채우기 전에 사무실 못 들어가요"라고 말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시간이 지체됐는지 김영애씨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싶어도 몸을 숨길 그늘조차 없었다. 그는 "중곡4동 주민센터 4층에 검침원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작은 카페가 있었는데 올해 없어졌다"며 "1층 도서관에 무더위 쉼터가 생겼지만, 우리가 들어가서 한숨 돌리기에는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그는 "한 번은 어질어질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있기도 했다"며 "참을 수 없이 더운 날에는 고객들이 준 페트병 물을 다리 사이나 옆구리 사이에 둔 채 있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캡모자를 쓰고 다니다보니 햇볕에 머리가 그대로 노출된다"며 "뒷골이 땡긴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렇다고 다른 모자를 쓰면 머리가 더워서 미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신축 빌라도 가스계량기는 건물 뒤편에 숨겨져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야 검침이 가능하다.
신축 빌라도 가스계량기는 건물 뒤편에 숨겨져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야 검침이 가능하다. ⓒ 이희훈
 허리를 숙여 들어간 쪽문 안에는 폐기물들이 쌓여 있다. 그 틈을 지나 미끄러운 바닥 위를 건너야 계량기를 겨우 확인 할 수 있었다.
허리를 숙여 들어간 쪽문 안에는 폐기물들이 쌓여 있다. 그 틈을 지나 미끄러운 바닥 위를 건너야 계량기를 겨우 확인 할 수 있었다. ⓒ 이희훈
 김영애씨는 15년째 같은 지역을 검침하고 있다. 계량기가 있는 위치는 거주자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김영애씨는 15년째 같은 지역을 검침하고 있다. 계량기가 있는 위치는 거주자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 이희훈
김씨에게 이 같은 '폭염노동'은 일상이다. 검침이 끝난다고 야외 업무가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200~300가구씩 방문해 가스가 새는지 확인하는 점검기간이 있다. 이후 지로용지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송달 업무도 해야 한다. 집이 비어, 점검이나 검침을 못 한 곳도 중간중간 방문해야 한다. 김씨는 이렇게 15년을 살았다.

김씨는 "서울시와 서울시의 위탁을 받은 예스코는 별다른 폭염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며 "그러는 사이 도시가스 검침원들이 열사병으로 쓰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폭염에도 중곡동을 돌다가, 어지러움을 느껴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는 "햇볕이 뜨거운 2~3시에는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축축해진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검침이나 점검을 위해 집을 방문해도 고객들이 안 계셔서 헛걸음할 때가 있다"며 "업무시간을 앞당기거나 저녁에 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어 "폭염이다 보니 가스 사용량이 적다"며 "7~8월만 계량기를 검침하지 않고 전달이나 전년 고지금액을 기준으로 청구하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폭염에 일하다 검침원 한 명 죽어야 대책 세울까요?"
 체감 온도가 42도에 육박한 날씨에 검침원 김영애씨는 뜨거운 햋빛을 피할 곳이 없었다. 구석진 계량기가 있는 건물 틈사이 숫자를 보는 순간이 잠시였다. 김씨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 방울을 닦으면서도 폭염속 근무하는 동료들의 휴식을 걱정했다.
체감 온도가 42도에 육박한 날씨에 검침원 김영애씨는 뜨거운 햋빛을 피할 곳이 없었다. 구석진 계량기가 있는 건물 틈사이 숫자를 보는 순간이 잠시였다. 김씨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 방울을 닦으면서도 폭염속 근무하는 동료들의 휴식을 걱정했다. ⓒ 이희훈
폭염 노동을 견디다 못 한 도시가스 검침원들은 지난 2일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와 도시가스 업무를 위탁받은 회사들에게 폭염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에 다녀온 뒤에도 폭염노동을 한 김씨는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긴 채 중곡동 골목으로 떠났다.

"검침원들끼리 아침에 나가면서 '살아남자'라는 이야기를 해요. 제가 일하다 119에 실려 가면 해결이 될까요? 도시가스 검침원 중 한 명이 일하다 죽어야 서울시와 회사는 폭염대책을 세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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