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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값폭등?...농민단체들, 언론의 왜곡보도 중단촉구

쌀값폭등?...농민단체들, 언론의 왜곡보도 중단촉구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25 [01:4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중당과 농민단체들이 언론의 '쌀값폭등' 관련 기사를 반박하고 나섰다. (사진 : 민중당)     © 편집국

 

농민단체들이 최근 쌀값폭등” 등에 대한 언론보도를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민중당과 농민의길(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가톨릭농민회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전국쌀생산자협회는 24일 오후 2시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 쌀값은 2016년도에 12만 원대로 대폭락했던 쌀값이 겨우 회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언론에는 쌀값 폭등’ 기사가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북에 쌀을 퍼주어 쌀값이 올랐다는 괴소문 뉴스부터쌀값이 올라 밥맛이 떨어진다소비자 주머니에 부담이 된다는 등의 자극적인 보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농민들은 지난 30년간 물가인상률에도 미치지 못한 쌀 가격으로 고통 받았다며 “2016년 수확기 쌀 가격 12만 9천원은 30년 전 가격이며 2017년 수확기 쌀 가격 15만 3천 원은 20년 전 가격이라며 그동안의 저곡가 정책을 지적했다.

 

이들은 “2016년 밥 한 공기 평균 가격은 175원이었습니다. 2017년 밥 한 공기 평균 가격은 170원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현재 밥 한 공기 가격은 220원입니다라며 농민들은 밥 한 공기 300쌀 1kg에 3,000원은 받아야 최소한 쌀농사를 유지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국민들을 향해 농민들에게는 쌀값을 보장하고 국민들에겐 쌀을 안정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며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 실시를 다 같이 요구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쌀값이 오른다고 서민과 농민을 대립하게 만드는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며 지난 30년간 역대 최대치로 떨어진 2016년 가격과 비교해 30~40% 폭등했다는 기사는 지식인으로써 최소한의 지적탐구 의무와 공정보도를 해야 하는 언론인으로서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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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공기 300원 보장언론의 공정보도 촉구 긴급 기자회견문>

 

쌀값 폭락과 정부의 무분별한 농지전용으로 지난 10년간 쌀 재배 면적은 21% 감소했습니다.

2017년부터 쌀 생산량은 처음으로 400만 톤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2018년 생산량은 작년보다 12만 톤 떨어진 385만 톤이 생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농민들은 지난 30년간 물가인상률에도 미치지 못한 쌀 가격으로 고통 받았습니다전체 농업소득에서 쌀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년 전 45%에서 현재 22%로 반 토막 났습니다.

2016년 수확기 쌀 가격 12만 9천원은 30년 전 가격이며 2017년 수확기 쌀 가격 15만 3천 원은 20년 전 가격입니다김대중 정부 때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정권이 다섯 번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쌀을 포함한 저()농산물 가격정책입니다.

 

2016년 밥 한 공기 평균 가격은 175원이었습니다. 2017년 밥 한 공기 평균 가격은 170원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현재 밥 한 공기 가격은 220원입니다.

농민들은 밥 한 공기 300쌀 1kg에 3,000원은 받아야 최소한 쌀농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절절하게 호소합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쌀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쌀은 공기와 물과 같아서 항상 국민들 곁에 있었습니다너무 싸서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습니다쌀 걱정은 항상 농민들 몫이었습니다.

농민들에게는 쌀값을 보장하고 국민들에겐 쌀을 안정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 실시를 다 같이 요구합시다.

정부와 농협이 나서서 쌀을 공공재로 인식하고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야 합니다쌀 공공수급제를 전체 주요 농산물 공공수급제로 확대하는 길이 농산물 값 안정의 지름길입니다.

 

국민여러분그리고 언론인 여러분!

 

최저임금이 오른다고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 학생을 대결하게 하는 언론쌀값이 오른다고 서민과 농민을 대립하게 만드는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국민들은 쌀 값 너무 올라 장보기 두렵다’, 농민들은 더 올라야 한다‘ 이런 식의 대립구도를 언론이 만들고 있습니다.

 

2004년 정부 수매제가 폐지된 이후쌀 값 및 농산물 값 안정을 위해 취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농협과 농민생산자 조직의 역할을 재조명해야 합니다정부비축 및 공공급식 확대 등 농산물 수급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모색하는 일에 언론은 집중하길 바랍니다.

 

지금의 쌀값은 2012년과 2013년 가격을 회복하고 있습니다지난 30년간 역대 최대치로 떨어진 2016년 가격과 비교해 30~40% 폭등했다는 기사는 지식인으로써 최소한의 지적탐구 의무와 공정보도를 해야 하는 언론인으로서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임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농촌 현장은 지금 수확이 한창입니다.

폭염과 가뭄가을 태풍과 잦은 비를 극복하기위해 농민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통일시대가 열리는 이 때식량을 우리민족끼리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전체 국민이 한 목소리로 농업회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합시다.

감사합니다.

 

2018년 10월 24

민중당농민의길(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가톨릭농민회전국친환경농업인연합회), ()전국쌀생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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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파괴해도, 노동자를 해고해도, 재벌이면 봐줍니까?”

“노조를 파괴해도, 노동자를 해고해도, 재벌이면 봐줍니까?”
 
 
 
백남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18/10/24 [07: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현대기아자동차를 판매해 온 비정규노동자들이 서울고용노동청을 규탄하고 나섰다. (사진 : 민중의소리)     © 편집국

 

현대·기아자동차 하청 대리점의 비정규직 자동차판매 노동자들이 재벌 감싸기로 일관하는 노동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금속노조 자동차판매연대지회는 지난 6월 18일 법률상 사용자인 현대·기아차그룹이 대리점을 앞세워 비정규직 자동차판매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침해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한 바 있다. 6월 25검찰은 서울고용노동청에 관련 사안을 조사하라고 수사 지시를 내렸지만 고용노동부가 4개월째 수사에 나서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는 23일 오후1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의 자동차 판매노동자 탄압과 이를 방기하고 있는 서울노동청을 규탄했다.

 

금속노조는 지금까지 현대·기아차 판매대리점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판매 노동자는 원청 판매직과 업무의 구분 없이 똑같은 일을 하고도기본급의 차별, 4대보험의 차별, 10년 넘게 근무하고도 퇴직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노예 같은 취급을 20년 넘게 견디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속노조는 현대·기아차는 인간의 권리를 무시했다며 노조를 결성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대리점 소장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금속노조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교섭을 요청한 자동차 판매 대리점 중에서 7곳이 강제 폐업 당했다며 모두 1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자 신세가 됐다남은 조합원들도 끊임없는 탈퇴공작과 회유에 시달렸고 끝까지 버티면 부당해고 통지가 날아왔다고 밝혔다.

 

판매연대지회는 지금까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한 대리점소장들을 모두 검찰에 고소해 왔다하지만 금속노조는 지금까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한 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이 벌금형 같은 미약한 처벌을 받았다고 지적했다금속노조는 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이 노동부 조사검찰 조사법원 재판과정에서 모두 한결같이 원청인 현대·기아차가 시켜서 한 일이라는 취지의 진술과 증언을 내놓고있으며 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이 한 명이라도 노조에 가입하면 대리점 재계약을 해지한다는 원청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조합원을 해고했노라고 진술한다고 설명했다.

 

금속노조는 서울노동청을 향해 수사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며 고의로 수사를 지연하고 있다며 이것은 하청업체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난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원청을 직접 수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나아가 범죄 집단인 현대·기아차 재벌은 철저히 감싸고 돌면서 공직자로서 노동부의 책무는 등한시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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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

 

현대차의 판매노동자 탄압조사조차 안 하는 서울노동청

노조를 파괴해도노동자를 해고해도재벌이면 봐줍니까?

 

우리는 자동차 판매 노동자다우리가 파는 자동차는 현대자동차 공장에서기아자동차 공장에서 똑같이 생산되는 똑같은 자동차다그러나 똑같은 자동차도 우리는 다르게 팔아야 한다왜냐하면우리는 비정규직 판매 노동자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정가보다 더 낮게기준보다 더 싸게 팔아야 한다왜냐하면우리는 하청 대리점 판매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대·기아차 판매대리점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판매 노동자는 원청 판매직과 업무의 구분 없이 똑같은 일을 하고도기본급의 차별, 4대보험의 차별, 10년 넘게 근무하고도 퇴직금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노예 같은 취급을 20년 넘게 견디고 있다이것이 잘못됐기 때문에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 위해노동조합만이 길이라고 깨달은 우리는 지난 2015년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는 인간의 권리를 무시했다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한 조합원은 노조를 결성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대리점 소장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렸다당시 이 사건은 3일 연속 지상파 뉴스로 보도됐다이후 노조 위원장이 근무하던 현대자동차 안산중앙대리점을 선두로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교섭을 요청한 자동차 판매 대리점 중에서 7곳이 강제 폐업 당했다모두 1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하루아침에 해고자 신세가 됐다남은 조합원들도 끊임없는 탈퇴공작과 회유에 시달렸고 끝까지 버티면 부당해고 통지가 날아왔다.

 

판매연대지회는 지금까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한 대리점소장들을 모두 검찰에 고소했다수십 명의 대리점 소장들이 기소됐다노조 위원장을 폭행했던 현대자동차 안산중앙대리점 소장은 고작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40시간을 선고받았다지금까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한 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이 벌금형 같은 미약한 처벌을 받았다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은 부당노동행위로 기소되었고 이어진 노동부 조사검찰 조사법원 재판과정에서 모두 한결같이 원청인 현대·기아차가 시켜서 한 일이라는 취지의 진술과 증언을 내놓고 있다노조위원장이 근무했던 현대자동차 안산중앙대리점 소장은 형사재판과 민사재판 모두 원청인 현대자동차에서 김선영 노조 위원장을 해고하라 지시했으며 대리점을 폐업한 이유 역시 원청의 압박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

 

현대자동차 문래중앙 대리점 소장은 원청의 지시에 따라 조합원을 해고한 혐의로 기소돼 최근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기아자동차 목동법원 대리점 소장 역시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본사에 수십 번 불려 가 조합원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시인했다현대자동차 효성서부 대리점 소장은 본사 임원의 지시로 노조탈퇴서를 받고 탈퇴를 종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최근 법원에서 벌금 500만 원의 유죄를 선고받았다위에 열거한 사례에 더해 수많은 대리점 소장들이 한 명이라도 노조에 가입하면 대리점 재계약을 해지한다는 원청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조합원을 해고했노라고 진술한다.

 

판매연대지회는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인 6월 18서울중앙지검에 현대·기아차 원청을 고소했으며 검찰은 즉시 서울고용노동청에 수사지휘를 내렸다하지만 놀랍게도 서울고용노동청은 4개월이 넘도록 단 한 명의 참고인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다수사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며 고의로 수사를 지연하고 있다이것은 하청업체에서 조직적으로 일어난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원청을 직접 수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나아가 범죄 집단인 현대·기아차 재벌은 철저히 감싸고 돌면서 공직자로서 노동부의 책무는 등한시한 것이다.

 

지금까지 노동부가 고의로 수사를 지연한 결과 전국에 걸친 현대·기아차 대리점에서는 수많은 노동탄압이 쌓여만 가고 있다노동부는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에 섰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법과 정의공무원의 양심에 따라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은 현대·기아차 재벌을 엄정하게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보장받는 길은 노동부가 공정한 잣대로 노사관계를 바라보고 노동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노동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금속노조는 진심으로 노동부의 반성과 변화를 기대한다금속노조와 판매연대지회는 노동부가 현대·기아차 재벌을 엄정하게 수사하고잘못을 가리고죄를 물을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18년 10월 23일 

전국금속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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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 손정목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8.10.24 10:23
  • 댓글 0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 [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지난 9월말 이래 미국 국채금리가 심리적 저지선이던 3%를 넘어 3.25%로 급격히 상승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지난 10, 11일 미 증권시장이 대폭락하자 지난 수년간 제기되어 왔던 거품붕괴론이 현실화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 공화당 의원 론폴(Ron Paul)은 지난 7일 미국의 CNBC방송에서 지금의 미국 금융상황을 “인류역사상 최대의 거품(bubble)”이라고 지적하고 내년 어느 시점에 미 주식시장이 50%이상 폭락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것은 막을 수 없다”고까지 비관적 전망을 하였다. 이런 전망은 비단 론폴만이 아니다. 유로퍼시픽캐피털의 CEO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피터 쉬프(Peter Schiff)등 상당수 경제전문가들 역시 현 상황을 미국, 유럽, 일본 중앙은행들의 양적완화(QE)로 만들어진 사상최대 금융거품의 말기로 조만간 거대한 거품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류역사상 최대의 거품”이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붕괴된 채권, 주식시장에 자금을 주입해 연명시키기 위해 미 연준(Fed)이 주도한 양적완화(Quantity Easing. QE) 정책의 결과로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진 채권과 파생상품의 거품을 말한다. 2008년 11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양적완화는 미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이 국채나 회사채 등 각종 채권을 담보로 현금을 대량 찍어내 공급해온 정책으로 현재까지 10년간 13조 달러(약 1경4천조 원)가 증쇄됐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리먼브라더스 붕괴 이후 5년간의 양적완화로 4조5천억 달러(약 5천조 원)를 증쇄하고, 제로금리로 대규모 자금을 주입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연방은행의 재정 건전성이 악화되고, 기축통화로서의 신용 상실이 우려되자 2014년 가을 미 연준은 양적완화를 중단하면서 동맹국인 유럽과 일본 중앙은행에 양적완화를 위임했고, 유럽과 일본 중앙은행은 현재까지 8조5천억 달러(약 9천조 원)를 증쇄해 공급했다. 미국이 달러의 기축성 유지를 위해 금리를 올리는 방향으로 돌아섰는데 유럽과 일본은 달러기축체제를 떠받치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까지 채택한 것이다.

이런 부채기반의 양적완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높아지자 미 정부는 경제회복이란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가시적 실적 호조에 집착해 시간이 걸리는 생산영역 투자보다 단기적 금융차익에 집중하여, 실물경기는 회복되지 않은 채 채권, 주식시장만 과열되는 비정상적 상황이 연출됐다. 그 결과 이제 세계 채권의 시가 총액은 100조 달러에 이르고, 채권 관련 파생상품 총액은 그의 5배가 넘는 550조 달러(약 60경원)에 이르게 됐다. 세계 GDP 총액보다 무려 7배나 더 많은 것이다. 또 국제금융협회(IIF)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세계 부채는 247조 달러(약 27경6천조 원)에 달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부채의 거품이자 바벨탑이다. 누구도 이 많은 부채를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미국 주도의 달러체제는 역사상 최대의 거품, 최고의 공황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양적완화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JP모건조차 “위기가 닥치면 지난 50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주식시장 붕괴와 사회 불안정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3일 IMF도 ‘세계 부채가 2008년 이상으로 쌓이고, 은행시스템 개혁의 실패가 세계공황을 촉발할 수 있다’고 노란불을 켰다. 이제 영미식 세계 자본주의는 마지막 지점에서 그 탐욕과 기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해 빚더미로 하늘에 닿으려다가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2. 겨울이 오고 있다(Winter is Comming)

2008년 금융위기로 금융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한 정책인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지만, 그 달콤한 열매에 중독된 금융독점자본은 반성은커녕 더욱 더 자기들만의 천국을 위한 탐욕의 질주를 계속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는 높아진 은행과 금융시스템 개혁요구에 허울뿐인 규제법안인 도드-프랭크법을 제정했지만 이마저도 트럼프 정부는 폐기하려 하고 있다. 사실 무엇 하나 개선된 것은 없었다. 지난 10년간 미 연준에 모여 앉은 이들은 금융위기에 의한 유동성 부족을 명분으로 부채를 담보로 한 현금을 수혈 받아 더욱더 많은 부를 쌓아올렸고, 이로부터 소외된 일반대중의 가난은 더 심화되었다. 그 결과 세계는 슈퍼리치 8명이 세계 인구 절반의 부를 소유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불평등 세계가 됐었다.

이런 상황은 대중의 강력한 분노를 낳았고,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신흥국들은 부채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달러체제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비롯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의 반EU 정권 등장,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에서 반EU 정치세력 강화 등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새로운 정치현상은 모두 누적된 불평등한 사회경제정책과 금융독점자본의 탐욕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등 신흥국들의 달러 국채 매각, 금 보유의 확대, 석유 거래에서 달러가 아닌 자국 통화 내지 위안화, 유로화 결제 확대, 달러를 배제한 새 금융결제시스템 구축 시도 등은 모두 달러기축체제의 붕괴를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미 정부와 대부분 주류언론들(국내 언론 포함)이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마치 양적완화가 금융위기를 이겨내고 경제를 살린 것처럼 호도한다. 미 정부는 주식시장의 활황을 내세워 경제가 살아나고, 실업률이 떨어지고 소비력이 증대하고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가 지난 3월 “미국 식료품 체인의 연속된 파산은 ‘소매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듯이 미국은 식품은 물론 백화점, 전자부품, 완구 등 대형 소매체인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파산보호를 신청하고 있다. 132년 된 미국의 대표적 백화점 시어스, 70년 된 장난감 회사 토이저러스, 대표적 식료품체인 톱스마케츠 등 최근 2~3년 동안 30여개의 전통적인 소매 대기업들이 문을 닫은 것은 소비력이 살아나지 않았다는 단적인 예다. 주류언론들은 이를 아마존과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란 식으로 평가하지만, 이런 평가는 마치 한국의 롯데, 현대백화점이 네이버 쇼핑몰에 밀려 무너졌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이런 분석은 미국의 실물경기 실상을 가리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양적완화는 소수의 금융독점세력과 군산복합세력들이 탐욕과 이익을 위해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극한으로 남용해 세계경제를 헤어날 수 없는 부채와 금융위기의 늪으로 빠뜨린 결정적 정책이다. 이들은 이를 분식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고 선전하고 주식시장에 자금을 주입해 활황세를 지속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물경기가 받쳐주지 않은 조건에서 주식시장으로 자금 유입이 중단되거나 감소된다면 시장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양적완화가 중단된다면 부채의 바벨탑이 무너지는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3, 금리인상, 무역전쟁, 경제제재의 남발은 양날의 칼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부채의 무한증대는 불가능하다. 기축통화국인 미국 자체도 양적완화를 5년 만에 중단했듯이 유럽과 일본의 양적완화 역시 그들 경제의 건전성을 심각히 훼손하기에 지속될 수 없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유럽연합은 적”이란 발언과 일본에게도 ‘환율협상’을 요구한 것처럼 유럽, 일본과의 관계가 더 이상 동맹이 아닌 경쟁상대로 여겨진 조건에서 EU와 일본이 계속 미국과 달러체제 유지를 위해 헌신할 리 없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미 지난 6월 올해 안에 양적완화를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일본 역시 내년 중에 양적완화를 중단할 것으로 보인다.

양적완화 중단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가 달러체제를 유지하고 자국 주식시장의 활황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제조업 육성 등을 위해 시행하는 비상한 조치가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재재의 확대다. 금리인상은 양적완화와 제로금리로 상실된 달러의 신용을 회복해 기축체제를 유지하고,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달러를 미국으로 모아 주가를 떠받치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다. 그리고 무역전쟁과 경제제재는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과 EU까지도 저울질하고 있는 달러 배제의 새로운 국제통화체제, 다극화된 경제질서 준비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이들 세 정책은 각기 고유의 특성이 있지만 모두 위기에 처한 달러기축체제 유지를 공통의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상호 연관돼 있다.

그러나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론 미국의 패권과 달러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해당국의 반발을 불러와 달러기축 붕괴를 가속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이 압도적 무력을 앞세워 달러로만 석유대금을 결제케 했던 이른바 페트로 달러(Petro-Dollar) 체제에선 이런 압박정책이 해당국을 순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미국의 핵무력이 압도적이지 않고 달러체제 역시 천문학적 부채로 위태로운 조건에서는 제재와 압박이 되레 해당국들의 단결을 촉진시켜 달러를 배제하는 다극화된 경제질서를 앞당기는 명분이 된다.

전후 70년을 유지해온 달러를 축으로 한 세계경제질서가 근본에서 흔들리고 있다. 세계는 정치, 군사적 측면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전환기적 진통을 겪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이 겨울이 따뜻한 봄을 맞이하는 준비기가 될지 아니면 더 긴 혹독한 추위로 이어질지는 향후 몇 년 안에 판가름 날 것이다.(2편에 계속)

손정목 편집기획위원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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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고아들 유럽으로 보낸 북한, 김일성의 큰 그림

다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조명한 북한 전쟁고아의 삶

18.10.24 09:44최종업데이트18.10.24 09:44
아주 어린 나이에 미국이나 유럽에 입양돼 성장한 뒤, TV 화면에 나타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런 아픔의 시작은 6·25가 배출한 전쟁고아들의 해외입양이다.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전쟁고아는 아직 그 정확한 수치마저도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남한 측에서 발생한 전쟁고아의 수가 4만 4648명, 5만 9000명, 4만 8322명 등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5만여 명 내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 전체에서 발생한 전쟁고아의 수를 약 10만 명으로 보는 견해(국방부 견해)에 따른다면, 북한 지역에서도 남한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전쟁고아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2015년 <중동유럽한국학회지>에 실린 이해성의 논문 '폴란드에 남겨진 북한 전쟁고아의 자취를 찾아서.'
 
위와 같이 남북한에서 배출된 전쟁고아는 대략 5만 정도로 추정된다. 남한의 경우에는, 그중 상당수가 고아원이나 외국 양부모의 손에 맡겨졌다. 북한 경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같은 국립시설 또는 외국 국립양육기관에 맡겨졌다.
 
남한과 판이했던 북한 전쟁고아 실태를 소개하고 그로 인해 북한 고아들이 받았을 심리적 영향을 다룬 영화가 추상미 감독의 다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6·25가 배출한 북한 전쟁고아들을 가장 많이 수용해준 나라가 폴란드다. 이 영화가 폴란드로 간 전쟁고아들을 다룬 이유는 그런 대표성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포스터.ⓒ 보아스필름

  
북한의 전쟁고아와 남한의 전쟁고아
 
감독 겸 주연으로 출연한 이 영화에서 추상미는 북한 전쟁고아에 관심을 갖고 다큐영화를 준비하게 된 사연, 이 문제를 함께 탐사하게 될 탈북소녀 송이를 만나게 된 사연, 송이와 함께 폴란드로 날아가 북한 고아 양육시설을 답사하고 거기 근무했던 폴란드인들을 만난 이야기 등을 순차적으로 들려준다.
 
감독은 영화 중간 중간에, 1951년 이후 촬영된 북한 고아들의 폴란드 생활을 담은 동영상이나 사진, 이 문제와 관련된 신문기사 등도 함께 제시했다. 그러면서 송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탈북 청소년들의 이야기도 이따금씩 들려줬다.
 
송이를 폴란드행의 동반자로 선택한 것은, 감독 본인이 전쟁고아들의 심경을 탈북소녀를 통해 들여다보는 한편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곳곳에서 탈북 청소년들의 가슴 속의 상처를 들려준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추상미.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추상미.ⓒ 보아스필름

  
폴란드로 날아간 추 감독과 송이가 접한 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는, 그동안 남한에서 접했던 남한 전쟁고아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전쟁고아들이 겪었을 아픔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별 차이가 없겠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양쪽의 접근법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이 문제를 원칙상 민간에 맡긴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에서는 정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국내에서 수용할 수 없는 아이들을 중국·소련 혹은 동구권 동맹국들로 보내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이 중에서 동구권에 보내진 고아들은 "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에 6천여 명, 루마니아에 3천여 명, 헝가리에 950여 명, 동독에 600여 명, 체코슬로바키아에 400여 명, 불가리아에 500여 명"이라고 위의 이해성 논문은 말한다.
 
폴란드가 북한 고아들을 가장 많이 수용한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제작노트에 언급된 것처럼,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 망명정부를 둬야 할 정도로 시련을 겪었을 뿐 아니라 "(1945년) 당시 폴란드 고아원의 90% 이상이 전쟁고아로 가득 찼을 정도로" 인평피해와 재산손실도 크게 경험했다.
 
그런 폴란드인들을 적극 도운 나라가 인도였다. 이해성 논문에 따르면, 인도의 지방 유력자인 잠 사헵 디그비자이신지(Jam Saheb Digvijaysinhji) 같은 사람은 천여 명의 폴란드 고아를 직접 보살피는 한편, 5천여 명의 폴란드 아이가 여타 유력자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렇게 인도인들한테 빚진 경험이,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북한 고아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배우 겸 동반자로 출연한 송이.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배우 겸 동반자로 출연한 송이.ⓒ 보아스필름

  
가장 많은 전쟁고아를 받은 폴란드
 
그런데 북한 고아들을 맡아준 나라들이 이들에 대해 배타적 보호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도 언급됐듯이, 아이들이 해외입양이 아니라 위탁교육 형식으로 맡겨졌기 때문이다. 남한 전쟁고아들에 대해 해외입양 방식이 적용된 데 비해, 북한 전쟁고아들에게는 해외위탁 방식이 적용됐다. 위 논문에 따르면, 북한 고아들이 폴란드로 떠나는 날 김일성이 작별인사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멀리 유럽의 어느 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너희들은 가능한 한 최대로 많이 배워야 하며 더욱 더 많이 익혀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이곳으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건설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서도 소개됐듯이, 아이들은 폴란드 교사뿐 아니라 북한 교사의 지도도 함께 받았다. 이해성 논문에 따르면, 북한에서 파견된 교사들은 한글과 역사뿐 아니라 전통 무용과 민요까지 가르쳤다. 심지어 군사훈련도 있었다. 영화에 언급된 것처럼 사상교육도 있었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북한 전쟁고아들과 폴란드인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북한 전쟁고아들과 폴란드인들.ⓒ 보아스필름

  
전쟁고아들이 입양이 아니라 해외위탁 형식으로, 그것도 북한 교사의 관리 하에 폴란드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스토리 전개방식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영화에서는 탈북 청소년들의 심경을 통해 전쟁고아들의 심경을 유추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탈북 청소년들은 북한과의 공식적 연계가 끊어진 데 반해, 전쟁고아들은 여전히 그 연계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언급된 것처럼 아이들 상당수가 북한으로 돌아가기 싫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북한 정부의 관리를 받았으므로 이들의 고통을 탈북 청소년들의 고통과 등치시키는 것은 최상의 접근법이 아닐 수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모국 정부의 관리를 받는 가운데 북한 전쟁고아들이 겪었을 독특한 시련이 관객들에게 설명됐어야 한다. 탈북 청소년들도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이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없는 전쟁고아들만의 독특한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이 영화에서 나타나지 않은 게 아쉽다.
 
북한 정부는 고아들을 맡긴 지 7년 뒤인 1958년부터 고아들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귀국시켰다. 북한이 이들을 불러들인 이유를,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북한 내부의 노동력 수요와 연결 지었다. 천리마운동에 참여시킬 인력을 확보하고자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가 아닌 일부만 설명하는 해답이다.

뜻깊은 조명,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들
 
1958년이면 북한에서 전쟁복구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였다. 그래서 북한이 고아들을 귀국시킬 만한 여건이 조성돼 있었다. 이에 더해 공산권의 분열도 작용했다. 1956년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폭동이 발생한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동유럽 정치상황이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다. 거기다가 북한과 중국·소련의 관계도 예전처럼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쟁고아들을 더 이상 중국·소련 및 동유럽에 맡겨두기 힘들었다.
 
그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돼서 전쟁고아들의 귀국으로 연결된 것이다. 박종철·정은이의 논문 '한국전쟁 이후 북한 재건을 위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원조에 대한 검토'에서 보다 상세한 상황을 접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유럽의 북한 유학생과 전쟁고아들이 동시에 귀국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이후, 사회주의 각국의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다. 북한의 8월 종파사건(정권전복 음모에 맞선 숙청작업)과 헝가리·폴란드 사태 시기에,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 및 레닌주의적 민주원칙이 주창되면서 북한은 체제 단속을 위하여 유학생과 고아의 동시 귀국을 추진하였다. 둘째, 8월 종파사건으로 북중·북소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김일성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1958년 철군이 완료되었다."
 
-  2014년에 <중동유럽한국학회지>에 실린 논문
 
북한과 공산권의 연계가 약해지고 동유럽이 정치적으로 혼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고아들을 맡겨두기 힘들어서 1958년부터 전쟁고아들을 귀국시켰던 것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강조한 것처럼 노동력 확보를 위한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이것은 부차적인 측면이었다.
 
동유럽에서 7, 8년 정도 생활하다가 북으로 귀화한 아이들 중에는 그 7, 8년의 경험을 토대로 북한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들이 적지 않다. 폴란드로 간 전쟁고아들 중에서 한의표는 폴란드 대사가 됐고 한경식은 인민군 대좌를 거쳐 폴란드대사관 무관이 됐다. 박동호는 외교관이 됐고, 조성무는 조선·폴란드 친선협회 의장을 거쳐 폴란드어 교수가 됐다.
 
북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다들 그랬던 것은 아니다. 폴란드에 보낸 편지에서 그 7, 8년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아이들도 있고,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덜 얽매인 상태에서 자신을 안아준 폴란드인들의 품이 북한에 가서도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북한 고아들을 태우고 폴란드를 떠나는 비행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스틸 컷. 북한 고아들을 태우고 폴란드를 떠나는 비행기.ⓒ 보아스필름

  
전쟁이 발발하면 누구나 다 고통을 겪지만, 전쟁고아들의 고통은 일반인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런 고아들에 대해 남북이 각각 별개의 접근법을 취했고, 이로 인해 남북의 전쟁고아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그럴지라도 전쟁고아로서 겪는 시련은 동일하겠지만, 모국과의 연결고리라는 측면에서 남북 고아들은 서로 다른 조건에 처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낯선 북한 전쟁고아 문제와 그들의 독특한 경험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뜻 깊은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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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티 비리 연루자를 부산교통공사 사장에 임명한 오거돈 부산시장

정무수석부터 부산시장까지 연루됐던 엘시티 게이트
 
임병도 | 2018-10-24 09:16:2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경진 부산교통공사 사장 후보자가 부산시 정책기획실장, 행정부시장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엘시티 시행사로부터 금품을 수수 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난 22일 부산시 류제정 감사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2월 엘시티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로부터 받은 명단을 부산시에 통보했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이 통보한 명단에는 2010년부터 2016년 2월까지 엘시티 측으로부터 명절 때마다 선물을 받은 현직 공무원 5명, 퇴직 공무원 13명, 공기업 임직원 4명, 부산시 도시계획위원 6명으로 정경진 부산교통공사 사장 후보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부산 해운대 엘시티 게이트 주범인 청안건설 이영복 회장은 돈과 여자로 부산 지역 정,관계 인사를 꽉 잡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이영복 회장을 아는 자체가 부산 지역의 권력자임을 나타내는 증거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권력을 등에 업고 인허가 과정에서 각종 특혜를 받았고, 분양 대금 등을 빼돌려 수백억 원의 비자금 등을 조성한 혐의로 징역 6년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이영복 ‘돈을 풀지 않으면 (포스코 건설) 사장이 바뀔 것’

▲엘시티 비리 주범이었던 이영복 회장은 비자금을 조성하던 분양대금 통장을 포스코 건설이 막자, 황태현 포스코 건설 사장을 협박하기도 했다. ⓒSBS뉴스 화면 캡처

2009년 당시 해운대 엘시티 부지는 고층 건물이나 주거 시설 등을 건설할 수 없어 수익성이 떨어져, 건설사가 모두 포기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시는 돌연 ‘고도 제한’이나 ‘아파트 건축’ 등의 규제를 풀어줬습니다.

규제가 풀렸지만, 건설사들은 엘시티 건설을 주저했습니다. 특히 세계 최대 중국 건설회사조차 사업성이 없다며 시공 계약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포스코 건설이 엘시티 사업의 시공을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영복 회장은 포스코 건설 덕분에 사업비 1조 7천8백억 원을 대출받는 데 성공했고, 이 회장은 하청 대금이나 분양 수수료를 허위로 지급하는 수법으로 570억 원을 빼돌렸습니다.

이영복 회장의 비자금 조성에 포스코 건설이 제동을 걸자, 이 회장은 직접 포스코 건설 사장을 찾아가 “돈을 풀지 않으면 사장이 바뀔 것”이라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이 회장의 협박은 사실로 이루어졌습니다. 황태현 포스코 건설 사장은 이 회장의 요구를 거절하고 한 달 뒤에 연임이 되지 않고 회의 중에 해임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영복 지명 수배 중에도 아들은 박근혜 만나 기념사진

▲ 2016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VR 관련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만난 이영복 회장 아들 A씨(박 대통령 뒤)ⓒ박근혜정권 청와대

2016년 엘시티 비리 문제로 이영복 회장은 검찰의 지명 수배를 받았습니다. 이영복 회장이 도피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이 회장의 아들은 서울에서 열린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서울 상암동 DMC에서 열린 ‘코리아 가상현실 페스티벌’ 현장에 방문해 VR 전문 벤처 스타트업 대표들과 만났습니다. 청와대가 올린 행사 사진을 보면 이 회장의 아들 A씨가 박 대통령의 뒤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씨는 아버지 이영복 회장이 소유한 엘시티 시행사인 청안건설의 임원입니다. 이영복 회장의 공소장에도 A씨의 이름이 올라와 있어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영복 회장은 A씨 등 가족을 엘시티 시행사 임직원 이름으로 등재한 뒤 임금 등 75억 원을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정무수석부터 부산시장까지 연루됐던 엘시티 게이트

▲엘시티 게이트에 연루된 정,관계 인사 ⓒ부산일보

엘시티 게이트는 전직 부산 시장은 물론 전직 청와대 정무수석까지 연루된 권력형 비리였습니다. 엘시티 비리 수사 결과 관련된 인물들은 1심에서 전원 실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1억 25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정기룡 전 부산시 경제특보는 엘시티 시행사 법인카드로 4800만 원을 쓴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허남식 전 부산시장은 측근을 통해 3000만 원의 현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을, 배덕광 자유한국당 의원은 7700만 원의 현금과 향응을 받은 혐의로 징역 6년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서병수 부산시장의 최측근이었던 전 포럼부산비전 사무처장 김모씨는 2억 2000만원의 현금과 사무실 임대료 대납 등의 받은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습니다.


허남식, 서병수 부산시장 재임 시절 금품을 받았던 정경식

▲서병수 부산시장 재직 시절 행정부시장이었던 정경진 부산교통공사 사장 후보자. 그가 재직 시절 청렴을 강조했던 동영상 ⓒ부산시 유튜브 화면 캡처

해운대 엘시티 비리에는 허남식 전 부산시장과 서병수 부산시장의 최측근이 연루됐습니다. 이번에 부산교통공사 사장으로 내정된 정경진 후보자는 이 기간에 부산시 정책기획실장과 행정부시장으로 재직했습니다.

정경진 후보자는 부산시 고위공무원으로 재직하던 2012년 하반기부터 3년 6개월 동안 금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산시는 정경진 후보자가 받은 금품과 직무관련성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전, 현직 부산시장이 비리로 연루됐던 엘시티 시행사가 정기적으로 금품을 보냈다는 사실 만으로도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지하철노조, 오거돈 시장은 즉각 인사 철회 해야 한다

정경진 후보자에 대한 인사검증을 하루 앞둔 10월 23일 부산지하철노조는 “오거돈 부산시장은 정경진 부산교통공사 사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를 즉각 철회하고, 부산시의회는 인사검증을 취소해야 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 8월 22일 부산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부산 민선7기 지방공기업 공공성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세미나

부산지하철노조는 이런 사태를 예견이나 한 듯 지난 8월에 ‘부산 민선7기, 지방공기업 공공성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과거 부산시장들의 독단적인 낙하산 인사로 공공성이 훼손됐던 지역 공기업을 어떻게 하면 시민의 품으로 돌려줄지에 대한 논의를 가진 바 있습니다.

바뀔 것이라고 믿었던 오거돈 부산시장도 과거 전임 시장들과 똑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공공성과 공익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지방공공기관이 여전히 부산시의 밀실 보은 낙하산 인사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지난 3월 오거돈 후보를 취재하면서 엘시티 비리 공무원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 후보의 답변을 들으면서 적폐 청산에 대한 의지가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엘시티 비리 연루자를 공공기관장에 내정한 오거돈 부산시장을 보며, 설마 했던 우려가 사실로 드러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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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끈은 말‧글‧얼이다

<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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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4  0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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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 집단의 문화정체성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민족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동화의 신뢰할 만한 지표 역시 민족집단의 언어동화가 우선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민족정체성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정체성이란 공유된 민족적 특성들로 인해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특정 민족 집단에 대해 느끼는 소속감으로 개념화 할 수 있다. 우바(Uba, L.)는 (1) 한 개인이 자신의 민족 집단에 대한 일반 지식, 신념, 기대들을 일으키고, (2) 그가 사물, 상황, 그리고 타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들의 의미를 해석하느냐를 결정짓는 인지적, 정보처리적 틀 또는 필터로서 기능하며, (3) 그의 행위 기준이 된다고 민족정체성을 설명하였다. 한마디로 나와 우리를 규정짓는 처음과 끝이 민족정체성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민족정체성은 그 집단의 언어와 떨어질 수 없다. 언어(말과 글)가 민족정체성(얼)을 지탱하는 그물망이라면, 얼은 더더욱 말과 글의 정신적 뿌리가 된다. 언어의 상실이 민족정체성의 붕괴와 직결되듯, 민족정체성의 쇠퇴는 언어의 퇴행을 필연적으로 몰고 올 수 밖에 없다. 말‧글‧얼을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가 그 대표적 경험이다. 우리의 말‧글‧얼을 말살시키기 위해 광분했던 일제의 준동(蠢動)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의 말‧글‧얼을 철저하게 압살해 갔다. 1910년대 후반부터 우리 얼의 중심인 대종교의 국내 거점을 궤멸시키는가 하면, 우리 국어(한글)를 외국어(조선어)로 몰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神道와 일본어)을 우리의 국교(國敎)와 국어로 이식(移植)시켜 식민지의 완성을 도모하려 하였다.

일제는 1937년 중국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에 대한 말살정책을 더더욱 가속화해 갔다. 1938년 이후 외국어처럼 가르쳤던 조선어 교육마저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가 하면, 한글로 된 신문과 잡지마저 전면 폐간시켰다. 그리고 1940년에 들어서는 창씨개명을 통해 우리 이름마저 일본식 이름으로 강제화하였다.

그러한 민족말살의 정점이 '조선어학회사건(1942. 10)'과 ‘대종교지도자일제구속사건(大倧敎指導者一齊拘束事件, 1942. 11, 대종교에서는 ’壬午敎變‘이라 부름)’이다. 1개월의 사이를 두고 발생한 이 사건은, 일제가 우리의 말‧글‧얼을 없애기 위해 저지른 마지막 발악이었다.

말‧글‧얼을 분리해 이해할 수 없듯이 조선어학회와 대종교 역시 떼어 놓고 말하기 힘들다.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뿌리가 대종교였으며 대종교의 비밀결사가 조선어학회였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주시경으로부터 김두봉‧이극로‧최현배‧신명균‧권덕규‧정열모‧이병기 등등, 그 중심인물들의 대부분이 대종교의 핵심이었다.

두 사건 모두 이극로와 연관이 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당시 이극로는 대종교의 국내 중심이자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이었다. 임오교변이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펴는 말」이라는 글이 단서가 된 것 같이, 조선어학회사건은 만주에서 윤세복이 국내 이극로에게 보낸 「단군성가(檀君聖歌)」라는 가사가 단초가 되었다. 「단군성가」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이다.

일제가 우리 말‧글‧얼의 중심이었던 대종교를 그렇게 없애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 대종교가 국내외적 모든 기반을 잃어가면서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정체성의 다툼이었다. 지키고자 한 집단과 바꾸고자 한 세력의 양보 없는 전면전이었다.

해방 이후에 들어 우리의 정체성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망국(亡國)의 대가로 찾아 낸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스스로의 노안(奴眼)에 의해 다시 풍비박산이 났다. 우리의 해방은 자력에 의한 환희가 아니었다. 더욱이 이념의 족쇄와 분단의 고착은 한반도를 질시와 반목이 판을 치는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민족을 묻어버린 부류와 민족을 배반한 자들 간의 좌우의 굿판이 시작된 것이다.

6‧25는 근근이 숨을 쉬던 그 정체성의 잔명마저 질식시켜 놓았다. 일제강점기 정체성의 중심이었던 대종교지도자들은 해방 이후 남북으로 쪼개졌다.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북과 윤세복을 정점으로 한 남으로 찢어진 형국이 되었다. 조만간 합쳐질 것으로 기대한 윤세복의 바람과는 달리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치달았다.

6‧25 직전에 월북한 이극로와 홍명희, 전쟁 당시 납북 당한 조완구‧조소앙‧안재홍‧정인보‧명제세, 그리고 전쟁 발발 후 자진 월북한 정열모‧류열 등등으로 인해, 남쪽의 대종교 인물 지형은 더더욱 공동화(空洞化) 되었다. 나아가 전쟁 직후 이들의 입지는 남북 쪽 모두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한 쪽에선 종파주의로, 또 한 편에선 공산주의‧국수주의 등으로 매도되어 사라져갔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얼을 지키던 인물들의 도태와 더불어 대종교의 기반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말과 글만은 그 인물들에 의해 지켜졌다. 북에서는 김두봉, 그리고 그를 계승한 이극로‧정열모‧류열 등이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았다. 남에서는 최현배가 고군분투하며 한글을 사수했다.

김두봉은 나철의 수제자이자 주시경의 수제자로 대종교의 교리‧교사와 한글 부문에서 누구보다 해박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 받아 『조선말본』을 저술했다. 당시 『조선말본』은 그 때까지 발표된 문법학설로는 가장 깊고 넓게 연구된 대표적 권위라는 평가를 받은 책이다. 1916년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할 당시는 수석시자(首席侍者)로도 동행한 인물이 김두봉이다.

최현배 역시 주시경‧김두봉의 영향을 받고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경성고보 시절 그가 중시한 두 가지가 주시경에 의한 한글공부와 나철에 의한 대종교 참여였다. 심지어 일본인 교사로부터 대종교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던 인물이 최현배다.

남북은 단절과 대립 그리고 전쟁으로 더더욱 멀어져 갔다. 그럼에도 북의 흰못[白淵, 김두봉의 우리말 호]과 남의 외솔에 의해 우리말‧우리글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같은 얼을 공감해 온 이들이 정체성의 외연(外延)을 놓지 않은 것이다.

개천절과 한글날이 얼마 전 지났다. 안재홍의 말처럼 ‘국가적 의미에서 개천절이요, 민족문화적 의미에서 한글날’이다. 한글을 기리는 행사가 남북 모두 열린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다만 남쪽은 한글 반포일을, 북쪽은 한글 창제일을 기준으로 함이 다를 뿐이다.

무슨 이유인지 개천절과 한글날만은 대통령이 너나없이 딴전을 핀다. 거시기 대통령이나 머시기 대통령, 그 대통령이나 저 대통령 다 만찬가지다. 정체성이 망가진 나라의 서글픈 초상이다. 올 한글날 대통령은 세종대왕 영릉은 참배했고, 남북 겨레말 큰사전 공동편찬 작업을 재개한다는 국무총리의 축사가 그나마 작은 위안을 주었다.

일부는 남북 언어의 이질화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우다. 외국어도 못 끌어다 써서 안달인 판에, 표준어면 어떻고 문화어면 어떠랴. 상호(相互)만이 단어고 호상(互相)은 단어가 아니란 법 없다. 방언(사투리)이 고어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또한 향토색을 살리고 표준어를 보완해 준다는 것도 주지하는 바다.

무엇보다 같은 말, 같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뜻 깊은 일인가. 남북지도자 단 둘이 나눈 판문점 '도보다리'의 밀담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같이 웃고, 함께 고민하며, 더불어 공감하던 두 지도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둘이 아니라는 희열을 만끽하였다.

얼빠진 말과 글이 박제된 기호에 불과하듯, 말‧글 없는 얼은 심장만 박동하는 뇌사상태와 같다. 우리의 말‧글‧얼이 한민족 정체성의 본질이자 현상임을 다시금 강조해 보는 이유다. 다만 그 말‧글 속에 숨겨진 얼을 각성할 날은 언제 올 것인지. 그러한 깨우침이야말로 한민족 정체성 확립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통일의 가장 확실한 끈임을 상기할 때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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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를 내고도 정신 못 차린 ‘조선일보’

서울교통공사 채용 비리 보도의 진실은?
 
임병도 | 2018-10-22 09:21: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지난 10월 18일 김성태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서울 시청에 진입하려다 이를 막는 시청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날 김성태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시청에서 ‘청년일자리 탈취 고용세습 엄중수사 촉구’ 긴급 규탄대회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 청사 내부는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없는 곳이라 시청 직원들이 막은 겁니다.

당시 서울시청 청사 8층에서는 서울시 국정감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자유한국당 의원 8명 중 7명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결국, 서울시 국정감사는 파행됐습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서울시청 로비에서 현수막을 내걸며 ‘청년일자리 도둑질 서울시’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보 낸 조선일보, 하루 만에 정정보도

▲10월 19일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박원순 취임 후…해고된 서울교통공사 민노총간부 30명 복직’ 기사. 다음날 조선일보는 오보를 인정했다. ⓒ조선일보 PDF

자유한국당 김용택 사무총장은 이날 서울시 국감장에서 “서울교통공사 전 노조위원장 김모씨의 아들이 비정규직에서 무기계약직이 되고, 이번엔 정규직이 됐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김용택 사무총장의 발언을 받아 10월 19일자 3면에 ‘박원순 취임 후… 해고된 서울교통공사 민노총 간부 30명 복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직 노조위원장 김모씨를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본지 취재결과 아들이 교통공사에 특혜 취업했다는 의혹을 받는 전 노조 간부는 5대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을 지낸 김모씨다. (김씨는) 1993년 위원장 취임 후 이듬해 3월 서울·부산지하철 총파업을 주도해 해고됐다. 2000년엔 민노총 공공연맹 위원장을 지냈다. 2004년 총선에서 민노총 공공연맹 추천을 받아 민주노동당 후보로 광명시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직후 복직 대상으로 꼽혔으나 당시 60세로 정년에 걸려 제외됐다.” (10월 19일자 조선일보/해당 기사는 현재 삭제)

조선일보가 사례로 지적했던 노조위원장은 서울지하철 5대 노조위원장을 지낸 김연환 위원장입니다. 김 전 위원장의 아들은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김연환 전 위원장은 복직은커녕 해고 노동자로 정년을 넘긴 채 떠났습니다.

조선일보는 오보가 명백하자, 20일자 신문 2면 귀퉁이에 ‘바로잡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정정보도를 했습니다.

“지난 19일자 A3면 ‘박원순 취임 후…해고된 서울교통공사 민노총간부 30명 복직’ 기사 중 아들이 교통공사에 특혜 취업했다는 의혹을 받는 전 노조 간부는 5대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김모씨가 아니라 전직 도시철도노조 위원장으로 확인됐기에 바로잡습니다. 김 전 위원장과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10월 20일자 조선일보)


서울교통공사 채용 비리 보도의 진실은?

조선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언론은 서울교통공사 채용 비리에 대해 앞다퉈 보도를 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보도가 모두 진실일까요?

서울시가 밝힌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 과정 ⓒ서울시

Q:노조 친인척은 무조건 특혜 채용을 했다?
A: 서울메트로와 도시철도 공사가 통합하면서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은 총 1.285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중 직원 친인척은 총 108명이며, 이 중 34명은 구의역 사고 (2016년 5월 28일) 이전 전환자로 13년에 걸쳐 누적된 인원입니다. 74명은 구의역 사고 이후 안전강화 차원에서 추가 채용됐는데, 이 중 제한 경쟁을 통해서 36명, 나머지 38명은 공개 채용됐습니다.

제한경쟁 채용 과정에서 21명의 가족 구성원이 밝혀졌는데, 엄정한 심사절차를 거쳐 6명은 최종 배제됐고, 15명만 채용됐습니다. (당시 15명 중 9명은 용역업체 채용 당시 공채과정을 거쳐 구제됐음)

Q:계약직이 정규직 된다는 소문 때 직원 가족이 대거 입사했다?
A:65명의 채용 공고와 입사가 이루어진 시기는 2016년 7월 15일에서 2017년 3월 17일 사이로 서울시의 무기계약직 일반직화 방침 발표인 2017년 7월 17일보다 이전이었습니다. 소문만 듣고 무기계약직 채용에 지원했다는 것은 일정상 불가능합니다.

Q:무기계약직에서 일반직 전환도 무시험으로 이루어졌다?
A: 무기계약직 전환 이후 동일노동 동일처우 요구가 일어났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안전업무직 전원을 일반직화 하는 내용의 노사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특혜 및 공정성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일반직 7급 전환 시험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당시 시험 과목:공통(취업규칙 5문항)+직종별 관련사규(20문항)+역량평가(25문항)

서울교통공사는 친인척 재직 문제(부부 동일부서 근무 방지 등)에 따른 인사운영을 위해 지난 3월에 ‘친인척 재직 현황 조사’를 했습니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사람은 17,045명으로 공사 전 직원(17,084명)의 99.8%였습니다. 오히려 친인척 재직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조사가 이루어졌던 셈입니다.


오보를 내놓고도 정신 못 차린 조선일보

▲조선일보의 10월20일자 지면 1면, 3면, 민주노총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문제를 다뤘다. 이날 조선일보 2면에는 19일에 보도한 기사에 대한 정정보도가 작게 실렸다. ⓒ조선일보 PDF

조선일보의 정정보도가 나온 10월 20일자 지면 1면의 제목은 “그들끼리 나눠먹는 취준생 일자리”였습니다. 기사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채용 등이 편법과 꼼수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3면에서도 “인성검사 떨어진 민노총 前간부 아내, 채용방식 바꿔 합격”이라는 제목으로 민주노총을 겨냥해 비난했습니다.

민주노총은 페이스북을 통해 김용택 사무총장이 제기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던 전직 노조 위원장은 ‘한국노총 산하 전직 위원장이며 현재는 공사 1급 간부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울교통공사노조는 10월 20일자 조선일보 사설에 나온 ‘서울교통공사 식당․목욕탕 직원, 이용사까지 정규직이 되어서 ‘도덕적 해이’의 문이 활짝 열렸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언주 의원의 ‘밥하는 아줌마’ 주장처럼 조선일보의 주장은 특정 직역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도덕적 해이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가 이런 기사를 내보내는 이유는 일자리 문제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는 동시에 내부 갈등을 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선일보가 악의적이고 부정적인 프레임을 만들려다 보니 오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정신 못 차리고 기사마다 ‘고용 세습’, ‘부정’, ‘비리’,’ 특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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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PC방 살인사건으로 본 ‘심신미약 범죄’의 오해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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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8/10/23 09:54
  • 수정일
    2018/10/23 09:54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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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PC방 살인사건으로 본 ‘심신미약 범죄’의 오해들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18-10-22 20:27:05
수정 2018-10-23 08:47:09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 씨가 22일 오전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서울 양천경찰서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 씨가 22일 오전 정신감정을 받기 위해 서울 양천경찰서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정신 질환이 살인 보험이냐”

지난 14일 서울 강서구 한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 청년이 살해됐다. 해당 사건 피의자 측은 10년간 우울증약을 복용했다며 심신미약을 주장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살인 사건 피의자가 우울증약 복용을 이유로 감형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심신미약 감형 반대 여론이 형성됐다.

언론은 여론을 부추겼다. 피의자가 아직 심신미약 판정을 받지 않았음에도 언론은 이를 전제로 감형 여부에만 초점을 맞춰 기사를 쏟아냈다. 이에 더해 희생자 담당의가 자신의 SNS에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여론의 불씨를 잡아당겼다.

역대 최다 동의를 얻은 국민청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 또 심신미약 피의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청원자는 “언제까지 우울증, 정신질환, 심신미약 이런 단어들로 처벌이 약해져야 하느냐”며 “나쁜 마음 먹으면 우울증약 처방받고 함부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정신과 의사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 봉직의협회(이하 봉직의협회)는 지난 20일 성명서를 통해 “현재 가해자는 심신미약의 여부는 물론, 정신감정을 통한 정확한 진단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가해자의 범죄행위가 정신질환에 의한 것이라거나, 우울증과 심신미약을 혼동해 마치 감형의 수단처럼 비춰지는 것은 정신질환을 앓는 많은 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낙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다.  

심신미약이 뭐 길래  

심신미약은 정신의학이 아닌 법률상의 개념이다. 형법 제10조 제1항은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 변별 능력이 없거나,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이어 제2항은 이 같은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형한다고 규정한다.  

형법이 규정한 심신장애는 범행 당시 사물 변별 능력, 의사 결정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느냐에 따라 심신상실과 심신미약으로 나뉜다. 해당 능력이 아예 없는 심신상실 상태가 인정되면 무죄가 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애완견에게 있던 악귀가 옮겨갔다며 딸을 살해한 어머니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 그 예다. 당시 재판부는 어머니가 환각, 피해망상, 조울증 등 심각한 정신질환을 겪어 심신상실 상태라고 판단했다.  

심신미약은 어느 정도 사물 변별 능력, 의사 결정 능력을 할 수 있는 상태다. 주로 환청, 망상이 심해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조현병 환자, 정신지체 장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김지민 봉직의협회 회장은 “주로 심신미약이 정신질환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이 쉽게 혼동한다”면서도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과 심신미약 상태는 전혀 다른 의미”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심신미약 상태는 단순 정신질환의 유무가 아니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단과 심도 있는 정신감정을 거쳐 법원이 최종 판결을 내리는 매우 전문적이고 특수한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피의자의 심신장애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법원은 국립법무병원 등에 정신감정을 의뢰한다. 국립법무병원 등은 피의자를 2주~4주 동안 입원시키고 의료진과 면담 등을 통해 심신장애 여부를 판단한다.  

피의자가 정신 질환에 걸렸다고 주장하거나 정신 질환에 걸린 척 연기한다고 심신장애 판단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의료진과의 면담 이외에도 피의자가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환자들이나 간호사 등과 지내며 보이는 태도 역시 판단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대다수 정신과 의사들은 “(심신미약) 감형을 악용하기 위해 모두를 속이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심신장애 상태를 인정받은 피의자들이 무죄 또는 감형 선고를 받아도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치료감호시설에 수용돼 치료받아야 한다. 심신장애는 15년, 약물‧알코올 중독은 2년까지 수용될 수 있다. 실형과 치료감호가 동시에 선고되면 치료감호가 먼저 진행된다. 치료감호 기간은 형 집행 기간에 포함되며 추가 치료가 인정되면 2년씩 3번 연장될 수 있다.

“정신질환과 심신미약은 다르다”  

김 회장은 심신미약과 정신질환이 동일시되면서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신질환이 강력 범죄의 원인처럼 비치면서 사건과 관계없는 선량한 정신질환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김 회장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이 감형을 위한 수단으로 비치면 실제 중증 정신질환자들의 심신미약 상태가 고려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심신미약 감형 자체가 안 좋은 것이 아니고 이를 악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며 “정신질환은 그 자체가 범죄의 원인이 아니며 범죄를 정당화하는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황도수 건국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는 형법에 심신미약 감형이 들어간 취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 교수는 “기계에 책임을 안 지우는 이유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며 “인간은 자유에 따라 의사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심신미약 감형 제도를 둔 이유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지 않은 행동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국민들이 심신미약 감형 규정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과 제도의 괴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심신미약 감경의 취지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적합하다”면서도 “심신미약 입증이 애매해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입증 여부가 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심신미약을 입증하는 것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돈을 많이 들여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면 결과적으로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 방지 위해 ‘치료 유지’돼야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력 처벌이 아니라 치료 유지라고 말한다. 김 회장은 “중증 정신질환자는 스스로 치료받으러 오기 어렵다”며 “중증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저질러 법적 책임을 다한 뒤 치료가 계속 유지되지 않아 또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중증 정신질환자라는 자체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며 “치료가 잘 안되면 병이 악화하고, 병이 악화하면 판단 능력이 더 떨어져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법적 책임을 다한 후에도 치료를 유지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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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가장... 명상 한 달 만에 이렇게 달라졌다

[중년이란 무엇인가] 회사에서 좌천되고 찾아온 공황장애와 안면홍조 극복기

18.10.23 07:42l최종 업데이트 18.10.23 07:42l

 

앞만 보고 살았는데 어느덧 중년입니다. 기대했던 40대, 50대의 모습과 전혀 다른 지금 내 모습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불안하니까 중년'이라는 말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시대, 중년들의 불안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나는 X세대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나 X세대로 분류된 나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기업인을 롤모델로 삼으며 자랐다. 마지막 학력고사를 치르고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제는 주윤발 성냥개비 물던 시절의 설화 같은 이야기지만 말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가족과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면 X세대들은 자아실현, 자기계발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  베이비붐 세대가 가족과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면 X세대들은 자아실현, 자기계발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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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대들은 멋진 회사원을 꿈꾸며 청춘을 불살랐다. 아무리 야근을 많이 해도 카페인 음료 한 병 마시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면 다시 열정이 치솟는, 그런 신화 속의 회사원 말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가족과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면, X세대들은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불구덩이를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말이다

 

나 역시 청춘을 하얗게 불태웠다. 그 후 자연스럽게 한 집안의 가장이 됐다. 지금은 운동을 하면 운동을 한 곳이 아프고, 운동을 안 하면 운동을 안 한 부위가 아픈 '저질 체력'이 됐다. 그래서 살기 위한 '생존운동'으로 연명하고 있다.

43살이 되던 새해 첫 출근날 좌천 통보를 받았다. 말이 좌천이지 회사를 나가라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절을 떠날 수 없어 눈칫밥을 먹는 스님처럼 살았다. 너무나 허탈했다.

초보 직장인 시절을 돌아보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에 우유 한 잔 못 마시고 새벽 6시 영어 수업을 듣는 도시인으로 살았다. 저녁은 월세를 아끼기 위해 500원짜리 햄버거 네 개로 때웠다. 정크푸드로 내 위장을 해친 후에는 다시 영어 숙제를 하며 오직 더 좋은 회사원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은 하루가 이어지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샐러리맨 출신 재벌이 될 수 있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차라리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무언가가 되기를 갈망했더라면 역류성 식도염을 달고 살진 않았을 텐데... 이렇게 살아온 나를 회사는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안도, 대책도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이었다.

도인을 만나다

그렇게 6개월을 버티자 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안면홍조 현상이 하루 종일 지속됐다. 극장에서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더니, 지하철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길로 한의원을 찾아갔다. 공황장애 판정을 받고 한 달에 60만 원 하는 한약을 4개월 이상 복용했다. 차도가 있었으나 더 이상 약값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현대인은 스트레스와 생각과다로 인해 안면홍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동영상을 봤다. 약 없이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영상 속 한의사의 말을 믿고 싶었다. 뭔가 다른 대책이 시급했다.

이전부터 관심 있던 명상을 해 보기로 했다. 우선 관련 서적을 읽어봤다. 혼자서는 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적한 지방에 용하다는(?) 곳들이 있었으나, 회사에 다니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고민 끝에 유명 팟캐스트 진행자가 운영하는 명상 수련원으로 결정했다. 2달 코스였고, 수강료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한 달 치 약값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건강한 정신과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귀한 시간 내신 것도 모자라 비싼 수강료 내고 오셨는데 잠드시면 안 됩니다."

명상 첫 시간, 도인님은 명상 도중 잠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수강료를 걱정해주는 모습에 믿음이 갔다. 도인은 저러다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수업에 임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스트레스 지수를 확인할 수 있는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현대인들은 20점대 후반에서 30점대 초반이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40점이 넘어가시는 분들은 스트레스 위험 수치입니다. 또한 20점 이하이신 분들은 열반의 경지에 오르신 분들이니 명상이 필요 없으십니다. 여기서 당장 나가시면 됩니다."

도인의 농담에도 수강생들은 웃지 못하고 자기의 점수를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예상보다 낮은(?) 32점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나와 아내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행을 갈 때도 30분 단위로 일정을 계획하고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당장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일 분 일 초를 다투며 살아야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반면 아내는 곧잘 혼자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일을 급하게 처리하는 법이 없다. 이런 아내를 나는 때때로 답답하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아내에게 설문지를 내밀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할래."

다음 날 점심시간이 지나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는 몇 점이 나온 거야? 나는 18점이 나왔는데?"

아! 나는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 아내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닌 방향
 
 명상 4주 차가 지나면서 안면 홍조 현상이 90% 이상 사라졌다.
▲  명상 4주 차가 지나면서 안면 홍조 현상이 90% 이상 사라졌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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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느끼는 바가 많았다. 내가 아내처럼 되기 위해 명상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이제부터라도 나의 뇌에 휴식을 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세상 걱정의 90%는 해결되지 않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인생이 계획한 대로 다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속도가 아닌 세상의 속도에 맞추며 살아오다 마음의 건강을 잃고 말았다.

명상을 할 때마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인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차츰차츰 명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 외에도 명상에 대한 관련 자료를 찾아 봤고, 유도명상이라는 것이 나에게 적합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목소리 좋은 안내자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니 명상에 좀 더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도인님이 내준 숙제에 따라 아침에는 호흡 명상을, 잠들기 전에는 이완 명상을 꾸준히 해나갔다.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는 TV 리모콘을 돌리듯이 전환하라는 말과 수강료를 떠올렸다.

명상 4주 차가 지나면서 안면 홍조 현상이 90% 이상 사라졌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럴 때는 10분 정도 짬을 내서 휴게실에서 호흡명상을 했다. 몰라 보게 호전된 증상을 보고 아내가 안타까워했다.

"처음부터 명상을 했으면 좋았을 걸."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조금 느리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속도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속도에만 포커스를 맞추다 이 꼴이 났다. 이제는 조금은 느리게 나아가려고 한다. 물론 세상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르게 돌아가겠지만 천천히 가다 보면 방향 전환이 쉬운 장점도 있지 않을까?

스트레스 지수 18점을 향해서 아저씨는 오늘도 명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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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넘어 사회서비스 전반에 비리 확산

[아침신문 솎아보기] 요양원장 유흥비로 유용…靑민정수석 보도자료에 조선일보 ‘스캔들 피하려 선제대응’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10월 23일 화요일

사립유치원과 노인요양시설, 특수학교 등에서 일하는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은밀하게 가해졌던 각종 비리와 폭력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전국요양서비스노조는 22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회견을 열고 ‘노인요양 시설 원장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경기 성남시 A요양원 대표는 벤츠 승용차를 리스해 보증금 5171만원과 월 328만원의 사용료를 시설 운영비로 냈다. 뿐만 아니라 1800만원의 시설 운영비를 나이트클럽 유흥비, 골프장 이용료, 개인 여행비로 사용했다. 수원의 B요양원 대표도 성형외과 진료비, 골프장 이용권 등에 요양시설 운영비 1400만원을 썼다. 

어르신과 장애인, 어린이 들이 주로 이용하는 사회서비스 업종 대부분에 비리가 만연해 서비스 이용자와 거기서 일하는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 한겨레 5면
▲ 한겨레 5면
 

 

원장 쌈짓돈처럼 유흥비에 유용, 이용자와 노동자만 피해

한겨레신문은 이 같은 내용을 23일자 1면과 5면에 각각 실었다. 한겨레신문은 23일자 1면 머리에 ‘운영비로 골프·여행…유치원 뺨치는 민간 요양원 비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감사결과 경기도에서만 305억원의 회계부정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이들 요양시설에서 일하던 요양서비스노조 위원장이 22일 삭발하고 농성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 한겨레 1면
▲ 한겨레 1면
 

 

서울신문도 23일 11면에 “유치원 뿐만 아니다… 요양시설·특수학교도 썩은 지 오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갑질의 타깃이 된 사회적 약자들이 잇따르는 교육·보호시설 비리를 폭로하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은 전국 곳곳의 요양원 운영비가 원장의 ‘쌈짓돈’처럼 유흥비로 낭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서울신문 11면
▲ 서울신문 11면
 

 

靑 민정수석 보도자료에 조선일보 ‘스캔들 피하려 선제대응’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2일 보도자료를 내고 청와대 사칭 사기사건 6건을 소개했다. 사기 전과자인 A씨가 지방 유력 인사들에게 문 대통령 명의로 가짜 문자 메시지를 보내 수억원을 챙긴 사건과 임종석 비서실장, 현병도 정무수석비서관, 이정도 총무비서관을 팔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챙긴 사건들을 소개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이 보도자료 내용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소식을 매일경제신문은 23일자 2면에 ‘3천 주면 임실장 통해 사면…靑사칭 사기주의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한국일보도 이날 2면에 ‘대통령 명의로 문자 보내 수억 편취’라는 제목으로 보도했고, 한겨레신문도 4면에 ‘문 대통령 직접 청와대 사칭 주의보 발령’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10면에 ‘문 대통령 靑사칭 사기 알려라 지시’라는 제목으로, 세계일보도 6면에 ‘문 대통령도 깜짝 놀란 청와대 사칭 범죄’라는 제목으로 각각 보도했다.

▲ 조선일보 6면
▲ 조선일보 6면
 

 

그러나 조선일보는 23일자 6면에 이 소식을 전하면서 “文대통령이 나서 ‘靑인사 사칭 어처구니없다’…왜?”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보다 ‘왜?’에 더 집중해 해설을 내놨다. 조선일보는 청와대 공직기강을 감시할 특별감찰관이 2년째 공석중인데다가 청와대가 ‘스캔들을 피하려 선제대응’했다고 분석했다.

특별감찰관이 25개월째 공석중인 이유는 다른데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국회에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을 요구했지만 여야가 추천권을 놓고 다투면서 흐지부지됐다.

역대 정권은 청와대발 ‘스캔들’로 정책집행에 엄청난 차질을 빚었고, 직전 대통령은 결국 스캔들이 대규모 비리 사건으로 비화돼 최초로 탄핵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일보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스캔들을 피하려고 선제대응’했다고 작은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기사 본문엔 ‘스캔들’로 비화할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제목에 달린 ‘스캔들’은 역대 정권의 부정적 이미지와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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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 추진

산림협력 분과회담, 공동방제 등 공동보도문 채택 (전문)
개성=공동취재단/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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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22  20: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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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은 22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산림협력 분과회의를 열고,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남북이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측은 다음 달까지 소나무 재선충 방제약품을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남북은 22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산림협력 분과회의를 열고,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우선, 남북은 소나무재선충병을 비롯한 산림병해충 방제사업을 매년 병해충 발생 시기별로 진행하기로 했다. 병해충 발생 상호 통보, 표본교환 및 진단.분석 등 산림병해충 예방대책과 관련한 약제 보장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당면해, 남측은 11월 중 소나무재선충 방제에 필요한 약품을 북측에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 7월 남북이 금강산 지역 산림병해충 방제 공동조사를 한 만큼, 금강산 지역 방제가 우선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측에서 시범적으로 해야 할 곳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금강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박종호 산림청 차장이 밝혔다.

   
▲ 남북이 올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측은 다음 달까지 소나무 재선충 방제약품을 제공하고 내년 3월까지 공동방제를 진행하기로 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남북, 올해 내 북측 양묘장 10개 현대화 사업 추진..대북제재 위반여부도 검토

남북은 북측 양묘장 현대화를 위해 도, 시. 군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우선 올해 내 10개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현대화 사업 대상지인 양묘장 10개는 북측이 제시하는 데 따라 논의를 통해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양묘장 온실 투명패널, 양묘 용기 등 산림 기자재 생산 협력문제를 협의하고, 필요한 시기에 북측 양묘장과 산림 기자재 공장에 대한 현장 방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문제로 북측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북측 단장인 김성준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총국장은 이날 종결회의 발언에서 “우리 민족이 귀중히 여긴, 사랑해 온 소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재선충병 구제 문제와 양묘장 현대화를 위한 문제 등 산림협력사업에서 실천적 의지를 다지는 이러한 문제들을 정말 토론했는데, 민족이 바라는 기대만큼 토론됐다고 볼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보다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성과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서로 진심어린 손을 잡고 산악같이 일떠서서 폭풍을 맞받아나가자고 호소하고 싶다”고 말했다.

   
▲ 남측 수석대표인 박종호 산림청 차장은 현지 회담 결과 브리핑을 열고 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남측 수석대표인 박종호 산림청 차장은 현지 회담 결과 브리핑에서 “북측에서 기대한 것이 많았는데, 저희는 바로 추진할 수 있는 사항도 있는 사항도 있고, 논의해 가면서 해야 할 것도 있어서 북측의 기대치에는 그런 것이 좀 있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산림협력은 관련국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 추진되고 있”으며 “(제재 문제 등도) 포함되지만, 관련국과 협의 내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상적으로 국제제재나 이런 부분에서 (산림협력은) 자유로운 분야”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간다고, 하다 보면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제재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런 부분을 보면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남북은 산불방지 공동대응, 사방사업 등 자연생태계 보호 및 복원을 위한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산림과학기술 공동토론회 개최를 비롯해 아시아산림협력기구와 협력, 산림을 활용한 온실가스 감축 협력 등도 협의하기로 했다.

   
▲ 이날 남북은 오전 10시부터 10시간 넘게 전체회의 2회, 수석대표접촉 4회, 대표접촉 2회 등을 하며 회담을 이어갔다. 회담을 마친 남북 대표단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개성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에 남측은 박종호 산림청 차장을 수석대표로 임상섭 산림청 산림산업정책국장, 김훈아 통일부 개발지원협력과장, 북측은 김성준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총국장을 단장으로 최봉환 국토환경보호성 산림총국 부국장, 손지명 민족경제협력위원회 참사 등이 마주했다.

이날 남북은 오전 10시부터 10시간 넘게 전체회의 2회, 수석대표접촉 4회, 대표접촉 2회 등을 하며 회담을 이어갔다. 

(추가2, 22:23)

[전문]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 공동보도문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고위급회담 합의에 따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남북산림협력 분과회담을 진행하고 다음과 같이 실천적 대책을 취해나가기로 하였다.

1. 남과 북은 소나무재선충병을 비롯한 산림병해충방제사업을 매년 병해충 발생 시기별로 진행하며, 병해충 발생 상호 통보, 표본 교환 및 진단, 분석 등 산림병해충 예방대책과 관련된 약제 보장문제를 협의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 남측은 11월 중 소나무재선충 방제에 필요한 약제를 제공하고 공동방제를 다음해 3월까지 진행하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북측 양묘장 현대화를 위해 도, 시, 군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으며, 당면하여 올해 안에 10개의 양묘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양묘장 온실 투명패널, 양묘용기 등 산림기자재 생산 협력문제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시기에 북측의 양묘장들과 산림기자재 공장에 대한 현장 방문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산불방지 공동대응, 사방사업 등 자연생태계 보호 및 복원을 위한 협력사업을 적극 추진하며, 산림과학기술 공동토론회 개최를 비롯한 제기되는 문제들을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산림협력에서 실무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문서교환 방식으로 협의하기로 하였다.

2018년 10월 22일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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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마웅 자니 인터뷰 “천천히 타오른 로힝야족 학살, 스마트폰이 혐오 폭탄 됐다”

[단독]미얀마 마웅 자니 인터뷰 “천천히 타오른 로힝야족 학살, 스마트폰이 혐오 폭탄 됐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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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와 미얀마 민주화운동 이끈 마웅 자니 박사 방한 인터뷰
페북발 가짜뉴스, 불교도·버마족의 두려움 증폭 역할…공격이 정당화돼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 탄압과 학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인 마웅 자니 박사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 탄압과 학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미얀마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인사인 마웅 자니 박사가 21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모든 사람의 손에 ‘혐오 폭탄’을 발사할 무기가 쥐어졌다. 이 폭탄이 실제로 터져 로힝야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로힝야 집단학살’ 문제의 세계적 권위자 마웅 자니 박사(55·사진)는 2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되는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1995년 미국 유학 중 ‘자유버마연합’을 창설해 미얀마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다. 아웅산 수지와 함께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앞장서서 이끈 자니 박사가 한국 언론과 공식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다.

자니 박사는 이날 경향신문과 만나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는 가짜뉴스 문제에 우려를 나타냈다. ‘페이스북이 로힝야족 대량학살을 가속화시켰다’는 최근 연구 결과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 제한적인 정보만 접했던 미얀마인들은 새로운 정권의 수립과 함께 2013년 스마트폰의 ‘SIM카드’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가격이 폭락하자 누구나 쉽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유일하게 미얀마어 서비스를 지원하는 페이스북으로 사용자가 몰렸다. 현재 미얀마 인구 5300만명 중 1800만명가량이 페이스북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이 시작된 후 페이스북은 ‘혐오 폭탄’의 도화선이 됐다. 수천명의 로힝야족이 목숨을 잃고 70만명이 국경 밖으로 도망가는 동안에도 로힝야족을 개·돼지로 묘사한 혐오 게시물들은 ‘좋아요’를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자니 박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로힝야족이 테러를 저질렀다’거나 ‘수염이 있는 로힝야 남자가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식의 가짜뉴스가 빠르게 퍼지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공격과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감정을 조작하고, 거짓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가짜뉴스가 혐오 범죄를 부추긴다고 봤다. 가짜뉴스 자체가 혐오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만, 미얀마인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불교도와 버마족들의 두려움·혐오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니 박사는 “혐오와 두려움은 늘 함께 움직이는데, 가짜뉴스는 로힝야족과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을 거짓으로 과장되게 꾸며 그들을 향한 혐오를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며 “신문·TV를 통해 유포되던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을 모든 개인이 스마트폰을 통해 전파할 수 있게 됐다. 모두가 혐오를 퍼트리는 무기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군대·정부, 집단학살 피 묻히면, 아웅산 수지가 손 씻겨주고 있어”

미얀마 마웅 자니, 국내 언론 첫 인터뷰 

미얀마의 ‘치부’가 된 로힝야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자니 박사는 현재 ‘국가의 적’으로 몰려 있다. 자니 박사의 내한 소식이 알려지자 ‘재한 미얀마 국민’ 이름으로 그의 한국 강연을 반대하는 인터넷 청원이 이어졌다. 이들은 자니 박사가 “과장되고 자극적 주장과 일방적이기만 한 견해”를 퍼트리고 “사익만 추구하는 용병”이라고 비판했다. 자니 박사는 “많은 미얀마인들은 나를 ‘배신자’ ‘사기꾼’이라고 하거나 ‘국가의 적’이라 부른다”며 “그들이 나를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학자는 양심에 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니 박사는 2014년 공동발표한 논문에서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을 1960년대부터 미얀마 정부와 군대, 불교계 등에 의해 조직적으로 지속돼온 ‘천천히 타오르는 집단학살’이라고 정의했다. 이 논문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을 집단학살로 정의한 첫 연구로 꼽힌다.

자니 박사가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천천히 타오른다’고 정의한 것은 보스니아·르완다·캄보디아 등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벌어진 대량학살과 달랐기 때문이다. 장기간 동안 육체, 정신, 문화, 경제, 종교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짧은 시간 벌어진 대량 인종학살 범죄보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니 박사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은 집단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의 교과서적인 사례이며, 나치 시절 독일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는 단순히 불교와 이슬람교의 갈등도 아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와도 다른 전형적인 집단학살”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 위해 함께 싸웠지만 
수지에 대한 모든 기대 끊어
로힝야족 향한 잔인한 탄압 
‘제노사이드’ 전형적 사례

자니 박사는 한때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함께 싸웠던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에 대한 모든 기대를 끊었다고 했다. 그는 “군대와 정부가 로힝야족을 학살해 손에 피를 묻히면 아웅산 수지가 그 손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게 지금의 미얀마”라고 직격했다. 그는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되길 기대했지만, 지금의 미얀마는 민주주의가 아닌 파시즘 국가이며 여러 소수민족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의 미얀마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아웅산 수지를 비판하면 언론인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파시즘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자니 박사는 지난 30년간 어머니를 단 3번 만났다. 영국에 주로 체류하면서 전 세계에서 강연·연구 활동을 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지만 2006년 이후로는 미얀마에 들어갈 수 없었다. 미얀마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자적인 양심과 책임감으로 로힝야 문제에 대한 비판을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자니 박사는 “우리 집안의 많은 친척이나 친구들도 군인 출신이다. 로힝야에서 벌어지는 학살은 내 친구가 저지르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는 미얀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서,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멈추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국제사회 국가들이 앞장서서 미얀마에 전향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로힝야족에 대한 폭력이 멈출 때까지 무역을 중단하는 등 실제적 행동에 나서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미얀마는 파시즘 국가 
스스로 해결할 상황 안돼
한국 등 국제사회 행동해야
 

자니 박사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자 K팝 가수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등 문화 강대국인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로힝야족 대량학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면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이 일을 멈추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자니 박사는 이날 세계선교협의회(CWM) 콘퍼런스에 참여한 뒤, 22일엔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에서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등 ‘로힝야와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모임’ 주최로 강연을 열어 로힝야 사태의 배경을 설명하고 해결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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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지율스님의 추억

 
가슴 아픈 지율스님의 추억
 
 
 
정운현 | 2018-10-22 09:44: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단식 50일째를 맞은 지율스님

아, 지율스님..
스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스님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두 차례, 무려 150일이나 단식을 하셨을까. 누가 뭐래도 스님처럼 목숨을 건 투쟁을 한 사람은 흔치 않다.

지율스님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두 번째 단식이 100일이 다 돼 갈 무렵이었다. 스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각계에서 터져 나왔는데 스님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었다. 청와대는 물론 언론에서도 스님의 행방을 수소문 하느라 난리가 났다. 그때 오마이뉴스로 제보가 들어왔다. 양평 모 수도원에 계시다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가 연말연시여서 나는 그날밤 전직장 OB모임에 참석해 있었다. 핸드폰으로 스님 소식을 접한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급히 광화문 회사로 향했다. 그리고는 몇몇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을 비상소집하였다. 나는 당시 김병기 사회부장에게 회사에 남아서 기사를 처리하라고 지시하고는 권우성 사진기자까지 너댓 명이 새벽 너댓시경 경기도 양평으로 향했다. 수도원의 정확한 이름이나 위치도 모른채. (이날 우리는 여건이 되면 현장에서 기사를 부르고 김 부장이 사무실에서 받아서 속보로 현장중계를 할 예정이었는데 여의치 않아 기사를 쓰지 못했다. 대신 그 이튿날 내가 당시 상황을 칼럼으로 하나 썼다)

광화문 회사에서 한 시간여를 달려 양평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어서 사방이 캄캄해 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요기도 할 겸 양평의 명물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주인에게 사정얘기를 했더니 근처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히끄무리하게 날이 밝아오자 우리는 식당주인이 알려준 곳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초행길이어서 좀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번짓수도 정확히 모르는데다 요즘처럼 네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렵게 수도원을 찾았다. 구불구불 2차선 도로가에 있었는데 간판이 너무 작아서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도로에서 제법 멀리 정문이 있었는데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다. 차를 몰고 경사진 곳을 올라 정문앞에 다다르자 큰 개 너댓 마리가 우루루 나와 차를 막아섰다. 개 짓는 소리가 나자 잠시 뒤 사람이 나왔는데 수도사 복장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용건을 얘기하자 나를 그곳 대표자 되는 분에게 안내해주었다.

나는 일단 대표자에게 스님의 안위부터 물었다. 여기 계시는데 상태는 위중하다고 했다. 한번 뵙기를 청했더니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떠나서 스님 목숨부터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내가 목청을 높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뒤 한 마디 했다. “종교인은 믿음에 따라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섬뜩했다. 우리는 쉬 납득하기 어렵지만, 종교인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나는 한사코 스님을 빨리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떼를 쓰다시피 했지만 도통 말이 통하질 않았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스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했더니 안된다고 했다. 외부인을 일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스님을 두번 만나 뵌 적이 있고 오마이뉴스가 스님 관련 기사를 여러번 보도해서 신뢰감을 갖고 계실 거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가 그 대표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스님을 설득할 수 있는 분이 안계십니까?”
그분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분이 입을 열었다.
“정토회관으로 법륜스님을 찾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스님이 누워계시다는 별채의 겉모습만 한 장 찍고는 급히 서초동 정토회관으로 향했다. 한 시간 전후로 정토회관에 도착했다. 나는 다짜고짜 법륜스님을 급히 좀 뵙고 싶다고 부탁했다. 마침 계시다고 했고 스님께로 안내해주었다. 스님께 제대로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거의 떼를 쓰다시피 내가 말씀을 드렸다. “지율스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제발 법륜스님께서 좀 나서주십시오. 방금 양평 수도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법륜스님은 듣고만 계셨다. 이미 상황을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하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들 가십시오..”
스님은 무슨 묘책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럼 저희는 스님만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그로부터 2, 3일 뒤에 지율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초동 정토회관으로 나오셨다. 그때가 설날 하루 전날이었다. 이걸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스님 취재 때문에 몇몇 언론사 기자들이 귀성을 못해 불평을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어느새 근 13년 전의 얘기다. 

단식 100일 무렵 체중이 28.3kg까지 떨어진 지율스님

대법 “ ‘지율스님 때문에 6조원 손해’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
(연합뉴스 / 임순현 기자 / 2018-10-19)

“천성산터널 공사중단 손해 6조원 아냐…정정보도문 게재하라”

▲2004년 8월 25일 단식농성 중인 지율(오른쪽)스님을 방문한 문재인(왼쪽) 당시 시민사회수석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지율스님의 ‘도롱뇽 단식’ 등으로 인해 대구 천성산 터널 공사가 지연돼 6조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조선일보 기사는 허위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지율스님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9일 밝혔다.

지율스님은 2003년 2월 정부가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위해 대구 천성산에서 터널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자 도롱뇽이 서식하는 고산습지 생태계가 파괴된다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공사를 중단하고 대안 노선 검토를 추진했지만,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해 2003년 9월 공사를 재개했다.

그러자 지율스님은 법원에 공사금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정부는 법원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2004년 8월∼11월, 2005년 8월∼11월 두 차례에 걸쳐 공사를 중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6년 6월 공사금지 가처분 기각을 확정했고, 조선일보는 2010년 5월 ‘도롱뇽 탓에 늦춘 천성산 터널…6조원 넘는 손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재인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천성산 터널 문제 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공사가 중단되면서 2조5천억원의 사회·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지율스님은 “공사중단으로 인한 손실이 51억원에 불과한데도 기사 제목에 손해가 6조원이 넘는다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소송을 냈다.

1심은 “기사의 중요 부분이 진실하거나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면서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기사의 제목과 내용, 문구의 배열 등을 종합하면 독자들에게 원고의 단식농성 등으로 공사가 지연돼 총 6조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묵시적으로 적시해 허위 사실을 보도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6조원이 넘는 손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포함된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고 선고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10/18/0200000000AKR20181018159700004.HTML?input=1195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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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개벽예감 319] 6명의 책사들과 점령군 철수,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8/10/22 [09:35]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1.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미국은 79년 전 독일이 뽈스까(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직후 핵무기개발에 달라붙었다. 1939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 이후 미국은 핵무기와 원자력에 관련된 핵기술개발사업에 총 5조3천억 달러(한화 약 6,000조 원)를 쏟아부었고, 1,054회 핵시험을 하였으며, 2018년 현재 핵무기 약 4,000발을 쌓아놓았다. 

 

미국의 안보문제연구기관 헤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2015년 10월 28일에 펴낸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을 포함하여 29개 나라, 10억 명 인구를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고 한다. 그들은 보호라는 말을 썼지만, ‘핵우산’으로 보호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29개 나라를 거느리고, 10억 명의 인구를 가진 아메리카핵제국(Nuclear Empire of America)은 세계 각지에서 무력침공과 내정간섭, 막후통치와 강권외교, 전쟁위협과 군사대결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그런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전략을 25년 동안 주물렀던 책사들이 있었다. 언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흑막 뒤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 세계지배책략을 조언해준 책사들이다.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들인 월터 아이삭슨(Walter Isaacson)과 에번 토머스(Even Thomas)가 공동으로 집필한 ‘현자들: 6명의 벗들과 그들이 만든 세계(The Wise Men: Six Friends and the World They Made)’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 책사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986년에 출판된 그 책은 1945년 트루먼 행정부에서 1969년 존슨 행정부까지 장장 25년 동안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책략에 결정적인 영항을 미쳤던 6명의 책사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세계사적 전환기였던 1945년 4월에 자기들끼리 비공개협의체를 결성한 6명의 책사들은 갓 출범한 트루먼 행정부의 막후에서 세계지배책략수립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으로 첫 작업을 시작하였다. 6명의 책사들은 다음과 같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7년 어느 날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 대통령집무실에서 책사들과 토론하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왼쪽부터 트루먼, 제벌총수로 국방장관을 역임한 로벗 로벳, 소련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조지 케넌, 소련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찰스 볼런이다. 1945년부터 1969년까지 장장 25년 동안 아메리카핵제국의 세계지배책략을 설계한 6명의 책사들 가운데 사진에 나타난 사람은 3명이고, 미국 국무장관과 재무장관을 역임한 딘 애치슨, 재벌총수로 상무장관을 역임한 애버럴 해리먼, 세계은행 총재를 역임한 존 맥클로이는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국가건설운동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행동에 옮긴 미국의 세계지배책략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격렬한 정면충돌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우리 민족은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을 돌파해야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딘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 - 미국 국무장관과 재무장관 역임

조지 케넌 (George F. Kennan, 1904~2005)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찰스 볼런 (Charles E. Bohlen, 1904~1974) - 소련주재 미국대사 역임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1891~1986) - 재벌총수로 상무장관 역임

로벗 로벳 (Robert A. Lovett, 1895-1986) - 재벌총수로 국방장관 역임

존 맥클로이 (John J. McCloy, 1895~1989) - 세계은행 총재 역임

 

1945년부터 1969년까지 25년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소련봉쇄와 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 일본 점령과 유엔 창설,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 중동전쟁과 베트남전쟁, 대만해협위기와 꾸바미사일위기 같은 워싱턴발 대격변들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조선해방 4개월 전부터 1953년 정전협정체결 6개월 전까지 8년 동안, 한반도가 해방과 점령,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바로 그 기간에 제33대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분단고착, 대량학살, 전쟁범죄 같은 극악한 죄악을 저질렀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의 한반도책략수립에 6명의 책사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 5년 동안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국가건설운동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행동에 옮긴 미국의 세계지배책략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그 격렬한 정면충돌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 민족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2018년 10월 현재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 민족이 70여 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였던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을 돌파해야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명백한 이치를 말해준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미국의 세계지배책략은 무엇이었던가? 6명의 책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소련을 새로운 적국으로 규정하고 소련의 팽창주의를 무력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믿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가 조지 케넌이었다는 ‘정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소련봉쇄전략의 설계자는 케넌을 포함한 6명의 책사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부에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였던 냉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되었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중심적인 내용은 소련봉쇄전략이었고,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책략을 수행하였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안겨준 분단체제와 정전체제는 바로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성립된 것이다.

 

 

2. 500명만 남고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

 

1949년 6월 21일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회가 특별한 청문회를 열었다.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군사지휘관들이 그 청문회에 불려나갔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은 그 청문회에서 남조선점령군 철수문제를 놓고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한 자기 군대를 남조선점령군(occupation forces in South Korea)이라고 불렀다.

 

연방하원의원 - “합참본부가 이번에 점령군 철수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건의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연방하원의원 - “귀관은 육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하는데...”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히 그렇다. 전술부대들만 철수한 것이다.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군 고문단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병력이 증강된 연대급 전투부대들인 전술부대들의 철수다.” 

연방하원의원 - “미국군 고문단의 규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500명의 장교들과 사병들이다.”

연방하원의원 - “점령군 철수에 의해 발생한 공백을 한국 정부가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합참본부 군사지휘관 - “확실하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소속 하원의원들과 합참본부 군사지휘관들 사이에서 오간 위와 같은 청문회 질의응답이 어떤 원인과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한 해 동안 남조선점령군 40,000명 가운데 7,500명만 남겨놓고 대폭 감축하였다. 그것은 계속주둔을 위한 병력감축이 아니라 완전철수를 위한 단계적 병력감축이었다. 1948년 4월 2일 트루먼 행정부는 1948년 9월 15일부터 시작한 남조선점령군의 단계적 철수를 1949년 6월 30일 이전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군 합동참모본부가 트루먼에게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제출하였고, 트루먼은 그 철군계획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상정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남조선점령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봉쇄정책을 수행하는 데서 중요한 요소이므로,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시 연방의회의 일반적인 견해였는데, 트루먼 행정부는 그런 기존관념을 뒤집고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하였다. 당시 미국 연방의회는 트루먼 행정부가 왜 남조선점령군을 완전히 철수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위와 같이 철군문제를 다루는 특별청문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트루먼 행정부의 남조선점령군 철수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의 일환이라는 사실이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르면,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트루먼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6명의 책사들이 남조선점령군 철수라는 정세변화를 촉발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세계지배책략에서 소련봉쇄전략과 남조선점령군 철수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었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1948년 11월 23일 트루먼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비밀문서 ‘NSC 20/4’에서 찾을 수 있다. 6명 책사들이 작성한 세계지배책략 설계도에 의거하여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관료들이 작성한 이 비밀문서에서 미국의 전후 세계지배책략이 드러나는데, 미국군을 해외에 배치하는 우선순위가 그 문서에 명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비와 병력을 대폭 감축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정된 병력을 해외 각지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배분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비밀문서에 명기된 우선순위에 따르면, 영국은 1위에 올랐고, 일본은 13위로 쳐졌고, 한국은 15위로 완전히 밀려났다. 트루먼 행정부의 세계지배책략에서 서유럽이 최우선이고, 중동이 그 다음이고, 아시아는 뒤로 밀려났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트루먼 행정부가 해외배치병력 배분순위에서 한국을 최하위로 밀어놓았으니,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고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것은 소련봉쇄전략을 수행하는 데서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갖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남조선점령군 사령관으로 군림했던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이 미국 육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과 악수하는 장면이다. 1948년 5월 19일 하지는 브라운을 제주도에 군사지휘관으로 파견하여 남조선국방경비대와 경찰의 지휘권을 맡기고, 제주양민학살을 명령하였다. 미국은 1948년 9월 15일부터 남조선점령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1949년 6월 30일 철수를 완료하였는데,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도 그들은 제주학살, 여순학살을 지휘하였다. 나중에는 보도연맹원 학살도 지휘하였다. 당시 남조선점령군은 그처럼 잔인포악하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여 철수한 게 아니라, 자기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철수한 것이었으므로, 그처럼 극악무도한 양민학살을 지휘하면서 철수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남조선점령군이 철수한 뒤에 남은 군사고문단의 임무는 1948년 9월 5일에 창설된 한국군의 무력증강과 군사작전을 계획, 지휘하는 한편,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을 일본으로 탈출시키는 비전투원소개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며 광분하였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점령군 철수와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궐기한 진보적 민중 약 100만 명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한국군과 경찰이 자행한 제주항쟁 대량학살, 여순항쟁 대량학살, 보도연맹원 대량학살은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의 명령과 지휘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이다. 또한 남조선점령군 군사고문단은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한국군의 공격작전을 지휘하면서 북침광기를 부추겼다.    

 

남과 북은 북위 38도선 지역에서 1948년에 930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49년에 2,617여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고, 1950년에는 6월 25일 직전까지 1,147 차례의 무력충돌을 벌였는데, 특히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강릉 등에서는 사실상 내전이 벌어졌다. 그처럼 6.25전쟁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었던 긴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는 남조선점령군을 증강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완전히 철수해버렸다. 거기에 더하여 한국에 대한 무력증강지원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를테면, 1950년 6월 23일 미국군 합참본부 합동전략기획위원회가 작성한 1급 비밀보고서는 “합동참모본부는 한국이 전략적 측면에서 별로 가치가 없다는 점에 동의했다. 따라서 상호방위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한국에 군사자금을 추가로 지원하는 것은 정당한 처사로 보기 어렵다”고 명기하였던 것이다. 

 

 

3. 미국이 태평양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이유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1947년 6월 16일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문라이즈(Moonrise)’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미국군 합참본부가 작성한 대소전쟁계획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팽창주의정책에 매달리는 소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2) 미국군은 유럽전선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지만, 전쟁이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동시에 일어나면 미국군이 그 두 전선에서 모두 이길 수 없으므로, 아시아전선에서는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군의 남진공격을 저지해야 한다. 따라서 오끼나와공군기지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3)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점령군 2개 사단과 남조선군은 패할 것이고, 소련군 5개 사단은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 전역을 점령할 것이다. 

(4) 미국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5) 미국은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해야 한다. 

 

위에 서술된 대소전쟁전략에 따르면, 한반도는 전략적 가치를 잃고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당연히 남조선점령군을 일본으로 철수해야 하였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8년 4월 2일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문서화한 ‘SANACC 176/39’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였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철군계획을 승인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1949년 2월 28일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극비정보평가서다. 이 비밀문서는 1976년에 기밀해제되었다. 제목은 '1949년 봄 코리아에서 미국군 철수의 영향들'이다.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8년 4월 2일 남조선점령군 철수계획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하여 최종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남조선점령군은 1949년 6월 30일에 철수를 완료하였는데, 철수가 완료되기 전에 작성된 위의 비밀문서는 철수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예견한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되었으므로, 위의 비밀문서를 작성하였던 1949년에는 저급한 정보력밖에 갖지 못했고, 따라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발언권도 약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진 부서는 합동참모본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군부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군 합참본부의 철군계획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철군결정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되기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까지 완전히 철수되었다. 미국군 합참본부는 1949년 12월 8일 ‘문라이즈’를 보강하여 ‘앞태클(Offtackle)’이라는 명칭의 대소전쟁전략을 완성하였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전국언론인협회(NPC)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 대해 설명한 것은,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발언이었다. 또한 1950년 6월 루이스 존슨(Louis A. Johnson) 미국 국방장관과 오마 브래들리(Omar N. Bradley) 미국군 합참의장이 하와이, 필리핀, 일본, 알래스카를 순방, 시찰하면서, 한국만 빼놓았던 것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채택한 소련봉쇄전략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런데 1949년 6월 30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하였던 트루먼 행정부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군을 급파하여 3년 동안 격전을 벌였다. 그 전쟁이 정전상태로 전환된 이후 오늘까지 65년 동안 미국은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해왔다. 

 

 

4. 6.25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은 이유

 

의문이 생긴다. 한반도가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였다고 판단하고 점령군을 철수하였던 미국은 왜 미국군을 다시 한국에 파병하였고, 정전 이후에도 65년 동안 유지하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어주는 해답은 다음과 같다.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집행한 소련봉쇄전략에서 말하는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유럽전선과 아시아전선에서 일어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였다. 당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졌던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핵무기로 소련군을 궤멸시키면 자기들이 이길 것으로 타산했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가 예상했던 소련이 도발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참전하지 않은 6.25전쟁이 일어났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신생독립국 조선과 국지전을 벌였다. 핵무기를 가진 미국은 창건된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조선을 전쟁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 대해 크게 오판한 것이었다.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조선인민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개전 두 달 뒤에는 38도선 이남지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애초에 전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신생독립국과 맞붙은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며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이 패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3년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패주하던 미국군 병사들이 어느 산비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철모가 옆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 매우 큰 심리적 충격을 받은 듯하다. 아마도 전투 중에 사망한 전우들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곁에 앉아 있는 한국군 병사는 종이쪽지에 무엇인가 쓰고 있다. 애초에 전쟁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신생독립국 조선과 맞붙은 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이며 세계 유일의 핵보유국인 미국이 패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치욕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그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3년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0년 6월 16일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Harry S. Truman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에서 ‘코리아전쟁 60주년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워싱턴D.C.에 있는 윌슨 쎈터(Wilson Center)가 공개한 소련의 비밀문서를 분석한 ‘코리아전쟁 중 조선과 중국의 갈등’이라는 제목의 특이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논문은 6.25전쟁 개전일로부터 석 달 동안 조선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모두 거절하면서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었다. 당시 조선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조국해방전쟁’을 주체역량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원칙을 지켰던 것이다. 조선이 주체적 전쟁수행원칙에 얼마나 철저했으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이 프랑스 통신사 <AFP>의 긴급보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고 깜짝 놀랐겠는가. 조선은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에야 연락장교 한 사람을 베이징에 파견하여 전황을 처음 통보했다. 1950년 7월 초 마오쩌둥 주석은 평양주재 중국대사에게 조선측과 중국의 파병문제를 협의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조선은 파병문제를 협의하기는커녕 중국대사에게 전황정보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조국해방전쟁’에 중국이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전황을 알지 못해 잔뜩 답답해진 중국은 군사고문단을 조선전선에 파견하여 전황을 알아보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조선은 그 요청도 거절하였다. 미국의 대규모 파병으로 전쟁정세가 바뀌자, 1950년 8월 11일 마오쩌둥 주석은 조선전선에 파병하겠다고 직접 제의했으나, 김일성 주석은 파병제의를 또 다시 거절하였다. 

 

1950년 9월 15일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전황이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쩌둥 주석은 김일성 주석에게 중국의 파병을 다시 제안하였고, 9월 21일에는 소련까지 나서서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조선에게 간곡히 권고하였다. 조선로동당 정치국이 소련의 군사지원제의와 중국의 파병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날은 1950년 9월 28일이었다. 

 

만일 소련이 중국과 함께 6.25전쟁에 파병하였더라면, 미국은 대소전쟁계획에 따라 공군력을 동원하여 소련 연해주와 중국 동북지방을 폭격하여 전선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하였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의 전쟁은 대만해협으로, 일본 홋까이도(北海道)로, 동유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서술한 것처럼, 조선은 6.25전쟁 초기에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의 파병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국지전에 대처하는 전쟁계획만 수행하였고, 6.25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5. 7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철군의 기회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소련봉쇄전략을 행동에 옮긴 트루먼 행정부가 그 전략에 따라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한 때로부터 어언 70년 세월이 흘렀다. 2018년도 기울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민족은 지난 70년 동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올해 들어 일어난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70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한 트루먼 행정부의 소련봉쇄전략은 오늘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으로 대체되고, 확대되었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만 상대하면 되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에서 중국과 맞서야 하고, 유럽에서 러시아와 맞서야 하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빠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보려고 집착하는 중국봉쇄전략과 러시아봉쇄전략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중심내용은 미국의 핵무력증강이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기존 핵군축조약들을 줄줄이 파기하면서 핵무력을 증강하려고 광분하고 있다. 이를테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전에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탄도탄요격미사일조약(ABM)’에서 이미 탈퇴하였고, ‘중거리핵무력조약(INF)’을 곧 파기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신전략무기감축협정(NSART)’까지 파기할 기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의 핵무력증강은 한반도 비핵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트럼프 행정부가 핵무력을 증강할수록 조선에게 비핵화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가 조선의 단계적 핵동결과 미국의 단계적 철군으로 귀결될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2)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자국의 첫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던 상황은 2017년 11월 29일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미국의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지난 70년 동안 미국이 유지해오는 태평양방어선 전체가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도 조선의 핵공격권 안에 들어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 소련이 조선의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가 11,000km가 넘는 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한 날이 1961년 2월 2일이었으므로, 소련은 1960년까지는 미국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70여 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의 핵시험 성공 직후에 직면했던 국가안보파탄위기보다 오늘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의 화성-15 시험발사 성공 직후에 직면한 국가안보파탄위기가 훨씬 더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5> 

  

▲ <사진 5> 요즈음 트럼프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70여 년 전, 6명의 책사들이 설계하였고, 트루먼 행정부가 구축해놓은 태평양방어선을 자기 임기 동안만이라도 지켜야 하겠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중국은 현대화되고 증강된 해군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는 군사작전을 수시로 연습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서유럽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미사일부대들을 자꾸 서쪽으로 이동시키며 전진배치하고 있다. 더욱이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기세로 백악관을 전방위로 압박하면서 조미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수리아(씨리아)에서 패한 미국군은 조만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미국의 힘으로는 유지하기 힘든 세계지배체제를 유지하려고 버티다보니, 트럼프의 고민인들 오죽하겠나. 더 심각한 문제는 트루먼에게는 6명의 책사들이 있었지만, 트럼프에게는 유능한 책사가 없다는 것이다. 팜페오와 볼턴은 책사로서는 수준이 낮은 실무관료에 가깝다. 책사가 없는 백악관에서는 전략적 판단이 자꾸 흐려져 툭하면 고위관료들끼리 고성이 오가는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곤경에 빠진 트럼프 대통령이 찾아야 할 비상탈출구는 우선 조미협상을 진척시켜 한반도 비핵화문제와 철군문제를 동시적, 단계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3) 70년 전, 미국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소련군 5개 사단이 북조선군과 협공하여 개전 20일 안에 남조선을 점령할 것으로 예견했고, 1945년 8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남조선을 점령했던 미국군 2개 사단과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남조선군이 참패할 것으로 예견하였지만, 오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조선인민군은 초단기속결전으로 개전 72시간 만에 주한미국군과 한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줄 것으로 예견된다.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남조선점령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인민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한 주한미국군을 신속히 일본으로 철수하고 일본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  

 

(4)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섬들로 연결된 태평양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의 태평양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오늘 트럼프 행정부는 알류산열도 - 일본 본토 - 오끼나와 - 필리핀 - 괌으로 이어지는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중국의 해군력과 공군력을 저지하기 힘들다.   

 

미국은 태평양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한 군사대결을 벌이고 있다. 쌍방이 공군력과 해군력을 각각 동원하는 군사대결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 장거리전략폭격기를 동중국해 상공과 남중국해 상공에 각각 출동시켜 군사대결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2018년 8월 13일 괌의 앤더슨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8월 23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1대가 동중국해 상공에 나타났으며, 9월 24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여러 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고, 10월 16일에도 같은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52 장거리전략폭격기 2대가 남중국해 상공에 나타났다. 2018년 9월 하순, 중국은 미국의 장거리전략폭격기 출동에 대응하여 중국 남부에 있는 해군항공기지에 최신형 H-6J 장거리전략폭격기 4대를 전진배치하였다. 중국의 항공모함 함대와 장거리전략폭격기 편대들은 수시로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을 돌파하는 장거리기동훈련을 반복함으로써 그 방어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태평양방어선을 지키려는 미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은 제한적이다.    

 

(5) 미국의 온라인 군사전문지 <브레이킹 디펜스(Breaking Defense)> 2015년 2월 24일 보도와 미국의 온라인 안보전문지 <워싱턴자유횃불(Washington Free Beacon)> 2015년 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다고 한다. 구체적인 사정은 다음과 같다.

 

ㄱ. 미국 본토 방어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변함없이 계속 유지한다.

ㄴ. 미국군이 전진배치된 유럽, 동북아시아, 중동, 서남아시아 등 4대 해외작전구역 전체에서 군사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해외군사력을 재배치한다.

ㄷ.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을 폐기하고, 1개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작전능력만 유지한다.

ㄹ. 다른 나라에서 갑자기 발생하는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작전능력을 유지하는 기존 방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항들은 미국이 ‘1-4-2-1 전쟁전략’을 대폭 축소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미국의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된 반면, 미국과 맞선 조선, 러시아, 중국의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전시증원군을 급파하는 능력이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 본토 전역이 조선의 핵공격위험 속에 빠지는 바람에 전시증원군을 파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 오늘, 주한미국군은 존재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70년 전 트루먼 행정부가 남조선점령군을 철수했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행정부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곤경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은 복잡한 정세변화를 파악할 만한 지적 능력은 갖지 못했으나, 자기의 직관력으로 주한미국군 철수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가 백악관 고위관리들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한 것은 그런 사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969년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제기하였으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79년 지미 카터(Jimmy E. Carter)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검토하였으나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오늘 세계정세와 한반도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백악관 고위관리들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할 수 없는 여러 조건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결, 미국과 중국의 대결,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이미 일정에 오른 제2차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게 된 상황 등이 바로 그런 조건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군의사는 그런 조건들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그가 자기의 철군의사를 관철시킬 것으로 예상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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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을 비판했나?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⑫]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2018.10.22 09:51:59
 

 

 

옛 동독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일 재통일을 조망해 보는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의 마지막 주인공은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다. 그는 독일 내에서 손꼽히는 동아시아 전문가로, 북한 김일성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생활을 한 적도 있다.  

프랑크 교수는 지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에 대해 "연설문 작성자를 해고하라"고 비판한 바 있다. (☞ 기사 보기 : 동독 출신 교수 "박근혜, 연설문 작성자 해고하라") 그가 박 대통령 연설에 이같이 다소 과격해보일 수 있는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드레스덴 연설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2018년, 서울에서 프랑크 교수를 만났다. 그는 당시 연설을 비판한 이유에 대해 "(박 대통령이)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프랑크 교수는 당시 동독 사람들이 서독과 통일을 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서도 "우리는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프랑크 교수는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뤄졌다. 통일 당시 20대였던 프랑크 교수는 동독 내 자신의 부모님 세대들이 통일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이러한 측면이 당시 동독에 있던 10~20대에게 대물림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공통적인 이념이 없다는 점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독일의 재통일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에 대해 프랑크 교수는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것은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 뿐이라면서, 통일 전에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랑크 교수는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며 북한이 일방적인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이러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프랑크 교수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 차 한국을 방문했던 지난 7월 16일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뤼디거 프랑크 비엔나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동독 출신으로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청년기에 직접 경험했는데, 당시 동독 지역의 분위기는 어땠나? 그리고 당시 청년 세대들은 어떤 변화를 바라고 있었나? 

프랑크 : 동독의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련, 심지어 중국과 같은 개혁을 원했다. 동독이 좀 더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은, 그리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지 통일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서독에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로운 혁명을 원했다. 물론 먼 미래에 통일을 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에는 통일이 아니라 개혁을 원했다. 

이런 저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혁명이 서독의 정치 세력에 의해 장악됐을 때 많은 불만이 있었다. 많은 동독인들이 느끼기에 통일은 서독의 프로젝트였다. 동독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프레시안 : 여전히 동서독 간에 갈등이나 동독인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갈등이나 차별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주목할 만한 차이는 있다. 독일 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더들이 서독 출신인 경우가 많다. 정치인이나 교수 등을 보면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동독에 살고 있는데도 서독 억양을 쓰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대학 총장이나 교수의 80%가 서독 출신이다. 

물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동독 출신이긴 한데, 사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대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했다. 즉 메르켈 총리의 경우 원래는 서독 출신인데 동독 출신으로 바뀐 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메르켈 총리가 동독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서독 간 갈등과 관련해서는, 세대에 따라 좀 다른 것 같다. 몇 주 전에 예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는 내가 라디오에 출연한 것을 들었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독 리포터의 멍청한 질문에 대해 동독 출신의 교수가 똑똑한 대답을 했다고 평가했다.  

반면에 지난 2월 나의 새 책을 소개하기 위해 TV에 출연했을 때 나는 익명의 서독 사람으로부터 엽서를 하나 받았다. 그는 내가 동독 출신이라는 것에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물론 이런 반응은 구세대의 이야기다. 그들은 냉전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양쪽의 '프로파간다'를 모두 겪었고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통일 당시 40대였던 이런 분들은 그때의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직업도 많이 잃었다. 물론 당시에 직업이나 지식이 통일된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지는 몇몇 분들은 행운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적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또 동독이 서독의 체제나 법을 받아들이는 상황, 즉 외부 시스템이 들어온 것이었기 때문에 동독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쓰거나 일본 신을 숭배하는 등의 행위를 싫어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제 세대는 좀 달랐다. 통일된 이후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고, 대학도 졸업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법도 알고 있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통일된 이후 태어난 제 아들은 지금 18살인데 그 아이에게는 통일이 중요하지 않다. 이미 통일된 독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제 아들은 독일을 그냥 독일 그 자체로 생각한다.  

또 부모님 세대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한국에도 그렇겠지만 부모가 소득이 낮고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좋은 관계망(연줄)을 갖지 못하면 그게 다음 세대까지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독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다. 특히 통일 이후에도 같은 장소에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교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없애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가 고향이 라이프치히인데, 아직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 중 한 명은 여전히 소득이 매우 적다. 기본적인 생활 외에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독일 통일의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등이 있는 작센주는 통일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통일로 인해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분석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동독의 경제 수준이 서독의 70% 정도라고 대체적으로 보고 있는데, 통일 이후 장기적으로 동서독 간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나? 

프랑크 : 경제적으로 몇몇 긍정적인 사례들이 있고, 작센주의 경우 통일 이전부터 발전됐던 곳이긴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통일 이후 산업이 많이 붕괴됐고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 옛 동독 지역에 위치한 인구 25만 명의 켐니츠 시의 모습. 동독 당시에는 '칼마르크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시 도시로서 번화했지만, 통일 이후 경제 위기를 겪으며 쇠락했다. 사진을 촬영한 곳은 중앙역 부근 시내 중심가였는데 평일 오전 9시였음에도 지나다니는 차량도, 사람도 많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그런데 이같은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이같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 게다가 독일과는 달리 통일 이후 북한에 투자할 자본이 있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북한이) 중국과 근접해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 중 하나다.  

그리고 동서독 간 경제 문제와 통일을 연결짓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 1990년대 통일 이전에는 동독과 서독이 체제가 달랐기 때문에 경제적 격차가 있을 수 있는데, 30년이나 흐른 지금은 그 차이가 통일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만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같은 서독인데 뮌헨은 좀 더 돈이 많고 브레멘은 그렇지 않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요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인지, 어떤 것이 통일 때문에 생긴 변화인지 구분 짓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동독 쪽에 특별한 지원이나 프로그램은 없을 것 같다. 도시 간의 차이처럼 개인 간의 삶도 통일이라는 변수로 구분 짓기는 굉장히 어렵다. 

프레시안 : 지역 격차, 세대 격차, 가치관 변화 등이 동독 지역에 급격히 일어났을 텐데, 그로 인해 동독 내부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통일의 영향으로 새로운 사회 문제, 예를 들면 극우화 현상 등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 

프랑크 : 일단 스킨헤드, KKK(Ku Klux Klan, 백인 우월주의 단체) 등 극우적인 행동이 서방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동독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지만 사실 이건 동독 지역의 현상이 아니다. 심지어 이건 독일의 현상도 아니다. 

정치적 극단주의는 이념의 공백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강자에 의해 식민지가 됐다'는 느낌과 결합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건은 동독 지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고 이것이 동독 지역에서 극우적인 움직임이 힘을 얻게 된 이유다. 

그런데 소위 "새로운" 사회적 문제들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라 매우 오래된 것들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직업과 수입이 없고 그래서 미래가 없다는 문제는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부동산이 가치를 잃고, 나이든 사람들은 불만이 많아지면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은 동독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동독 지역에서 정말로 새로운 현상은 이러한 모든 일이 매우 갑자기, 그리고 빠르게 일어났다는 점이다. 실제 이러한 현상은 구 동독 지역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통일 이후) 불과 1~2년 사이에 실업률이 0%에서 10%, 심할 때는 20%까지 올라갔다. 

프레시안 : 경제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분야의 문제 때문에라도 '독일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내부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랑크 : 독일 통일은 예상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필요로 했다. 우선 정치적으로 동서독 간 공통된 이념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 국가주의(애국주의)는 나치 시대의 경험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고, 그래서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예를 들면 월드컵에서 독일 깃발을 흔드는 것이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드는 것과는 다른 의미인가?  

프랑크 : 국기를 흔들고 응원하는 문제가 독일 신문이나 TV에 자주 나오는 토론 주제다. 일단 국기는 그 경기가 있을 때만 흔드는 것이다. 다른 데서 흔들면 '나치 아니야? 우파 아니야?'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월드컵 기간 중에 항상 그런 문제가 제기된다. 근데 이건 독일 사람에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정치인이 이런 주제를 꺼내면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정부든 공통된 사회 통합의 가치를 만들고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을 것 같은데 독일 정부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지?  

프랑크 : 사회통합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하면 좋겠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동독의 유산 

프레시안 : 독일의 통일이 서독 중심의 흡수통일이었지만, 동독에도 통일 이후에 계속 남길 만한 가치나 유산이 있을 것 같다. 동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것 중에 통일 이후에도 살릴 만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프랑크 : 알다시피 우리는 독재 속에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 중 하나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하고,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동독에서는 정치적인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통일 이후 이런 자유를 쟁취하다 보니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서독에서는 원래 그런 게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덜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프레시안 : 통일 당시 여성학자들의 인터뷰를 보니까 통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동독의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동독 사회에서 여성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했는데 서독 사회는 여성의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이후 저숙련 여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많이 잃었다고 한다. 

프랑크 : 당시 동독 여성들은 사회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고 독립적이었다. 동독 경제가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육아도 도움을 주고 사회복지도 잘 마련했어야 했다. 그런데 통일 이후에는 많은 여성들이 정규직보다는 파트타임으로 많이 일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동독 때보다 적은 상황이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인해 여성들이 일을 많이 하지 않고 있는 측면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세금 문제다. 독일은 결혼하면 부부의 수입을 합해 세금을 매긴다. 또 세금에 누진세가 있어서 부부가 모두 일을 할 경우 수익이 많아지고,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 중에서는 차라리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정 전체 수익 측면에서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프레시안 : 통일 후와 비교했을 때 예전 동독이 더 좋았던 사례 중 하나로 여성이 노동하기 좋은 환경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까? 

프랑크 : 그런데 이건 잘못된 이유로 좋은 결과가 나왔던 사례다. 동독 정부는 여권 신장의 차원에서 여성의 노동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을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물론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평등을 보장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레시안 :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 한동안 '오스탈기'(Ostalgie, '동쪽'이라는 뜻의 '오스텐(Osten)'과 '노스탤지어'의 독일어인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 동독에 대한 향수를 의미한다. 편집자) 현상이 일어났고, 최근에는 오스탈기 제품이 이른바 '힙스터 문화'의 소비재로 각광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스탈기 현상은 단순히 통일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한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랑크 : '오스탈기'와 같은 예전을 그리워하는 현상이 특별히 구 동독 지역에서만 나타난다고 오해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노스탤지어'는 모든 곳에 있다. 이건 과거에 대해 이상적으로 해석하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모든 언어에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또한 과거에 대한 갈망은 예전의 국가, 예전의 시스템 또는 예전의 생활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크다. 이는 왜 노스탤지어가 중산층이나 고연령층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동독에 대한 향수 또는 그리움을 갖는 경우도 동독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본인이 젊었을 때, 어렸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여러 비판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당신에게, 그리고 독일에 준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프랑크 : 14세기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을 때 그 시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처럼 (독일의) 통일은 내 삶의 일부다. 몇몇 사람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 또는 1987년의 민주화를 경험했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한 사건이 있다. 이는 종종 동시에 나타난다. 통일을 동떨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통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바꿨다. 나에게 있어서 통일은 큰 변화였다. 

그러나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통일 보다는 세계 2차대전이 더 큰 사건이었고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99년 태어난 내 아들 입장에서는 통일은 단지 역사 책으로부터 알게 된 사실일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지만, 때때로 큰 변화들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단지 살아남아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계기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오직 이기거나 오직 패하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독일 통일의 영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독일 내에 존재하는 많은 개인들의 삶 만큼이나 다양하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을 것으로 본다.  

준비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 

프레시안 :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을 두고 '독일 통일과 동독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 진 연설문'이라고 비판했다. 드레스덴 연설이 왜 문제였는지를 간략히 설명해 달라. 아울러 남북이 독일 통일 혹은 동독 개혁의 실패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독일 통일이 동독에 대한 서독의 승리인 것 같은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또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이와 유사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남한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평양(북한에)에 신뢰를 줄 수 없다. 

독일의 사례가 한국에 어떤 교훈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이다. 한국은 독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 독일과 한국은 너무 많은 측면에서, 너무 많이 다르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일단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면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한국이 동독으로부터 배울 점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국은 통일 전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통일 이후 재산권 처리 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땅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누가 북한의 땅을 가지고 있는지. 남한에서는 부동산 서류 있으면 땅의 소유가 어느 정도 증명이 되지만 평양의 경우, 예를 들어 누군가가 류경호텔이 있던 자리에 대해 이거 내 땅이라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이러면 누가 진짜 소유권자인지에 대한 싸움이 일어나고 몇 년에 걸쳐 법적 공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렇게 법적 공방이 진행될 동안에는 누구도 거기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면 일자리도 사라질 것이고 통일 비용도 그만큼 많이 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이 아직 독일의 사례를 제대로 배우거나 이를 통해 통일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두 번째로 북한의 엘리트들을 통일 이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특히 노동당의 고위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독재에 가담했으니 그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감옥에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을 것인가? 북한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결정을 미리 내려 놓아야 한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독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너무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 한국이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한국 정부 관계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알고 있는데 나중에 통일되고 나서 생각해 볼게" 라고 한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독일의 경험에 따르면 지금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프레시안 : 현재 통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준비가 너무 미흡하다는 뜻인가? 

프랑크 : 한국이 대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인이 문제지. 그래서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당신이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보라. 일단 임기 동안에 할 수 있는 것만 하자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어려운 문제는 미룰 수밖에 없다. 

북한 당 간부 및 군, 관료 등의 처리 문제만 해도 만약 어떻게 처리하겠다고 발표하면 당연히 북한에서는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화해 기조랑 평화 분위기를 무너뜨린다고 반발할 수 있음 있다. 그래서 쉬쉬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다. 또 정치인들에게 장기적인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트럼프와 같은 대통령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웃음)  

프레시안 : 한국 정부는 올해 안으로 종전선언이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남북 경제협력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보다는 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지?

프랑크 : 일단 경제협력은 북한에 대한 제재가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투자할 수 있으니까. 평화협정과 종전선언을 올해 안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정부가 무엇인가 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사고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예를 들어 민간 부문에서 투자가 가능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투자를 하라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환경을 마련해줘서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을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또 특정한 한 정부에 국한된 단기적인 통일 정책보다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할 수 있는, 그리고 모든 사회가 함께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필요 없을 수 있지만 가능성이 있는 한 대비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고 남한처럼 개발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를 통해 최악의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한국 도움 필요 없을 수도  

프레시안 : 올해 들어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문가로서 최근 급변하는 남-북-미 관계를 어떻게 지켜봤나? 

프랑크 : 2018년 초 남북이 단지 (어떤 상황이 일어나서 거기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더욱이 그들은 미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에서 힘을 가진 국가들을 다루기 위해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0년대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외교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사진은 함께 군사분계선(MDL)을 넘는 남북 정상 ⓒ공동취재단


남북이 필요에 의해 이같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의 주도권을 남북이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읽혔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내전이 있었을 때 일본이 침입했는데,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단 내전을 멈추고 협력해서 일본을 무찔렀다. 그 이후에 다시 경쟁했다.

지금 남북은 함께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평창 올림픽에 맞춰 의제를 설정했다. 또 4월 27일 정상회담을 이뤄냈다. 남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모든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에 감사를 표시했으며 심지어 노벨 평화상까지 언급했다.  

프레시안 : 통일 이전에 남북이 서로 만나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데, 남북 주민들은 여전히 제한적인 교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앞으로 남북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독일의 통일 과정이랑 똑같을 거라고 전제하는데 그건 오류다. 보통 약자가, 즉 북한이 한국의 체제를 따를 것이고 한국으로부터 도움이나 자금을 요청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통일 전에 북한이 나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본다. 북한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즉 둘 다 경제 성장을 이뤘을 때 통일이 되면 북한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북한으로 일자리가 넘어가면서 한국의 일자리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 독일 같은 경우 동독에서 서독으로 일자리가 이동했다. 그래서 동독이 어려워졌는데, 한국에서는 반대로 나타날 수 있다.  

프레시안 : 한국 경제의 큰 특징은 소수의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이 경제 체제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통일이 되면 한국 경제의 이러한 특수성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프랑크 : 재벌의 자본이 북한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북한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북한 내에서도 재벌이 생기고 있다. 주유소, 화장품, 컴퓨터 공장 등도 있고 고려항공의 경우에는 항공사업뿐만 아니라 택시나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이 통일된다고 해서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북한의 기업은 국가기업이긴 한데 족벌 경영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가족이 경영하기도 하고 군이 경영하기도 하는, 약간 섞여 있는 형태다. 기업 이름 중에 '승리'라는 말이 들어있으면 보통 군이 경영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남북이 교류를 하면 북한도 사실상 한국이 과거에 겪었던 것과 같은 고도성장을 거칠까?  

프랑크 : 경제성장이 어떻게 될 거라고 완벽하게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독일 통일 과정처럼 북한이 붕괴해서 남한이 흡수통일 하는 것과 북한이 내부의 개혁을 통해 정치 체제는 유지하되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 두 번째 시나리오가 현실 가능하다면 북한은 한국과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북한에는 값싼 노동력도 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숙련된 노동자도 존재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관념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은 독재 체제라서 특정한 산업을 공략,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또 북한은 섬이나 다름 없는 남한과는 달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광물자원도 남한에 비해 많다. 다만 미국과 같은 정치적인 파트너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파트너를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젊은 세대가 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를 계기로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통일 가능성에 대해 전망해본다면? 

프랑크 : 통일은 여론의 문제가 아니다. 1990년 당시 많은 독일 사람들은 통일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통일은 일어났다. 최근의 사건들은 거의 20년 동안 (남한 사람들이) 가져왔던 북한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통제 불가능할 수도 있고 1990년 전후로 생겨났던 동유럽의 상황으로 (국면을) 이끌 수도 있다. 또는 1978년 이후 중국처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한국 통일의 기회가 커질 것으로 본다.  

트럼프와 한반도 평화 

프레시안 : 중국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크게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한 경제가 붕괴해 난민이 발생하지 않게끔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적 우려 또한 있다. 

프랑크 : 우선 북한과 중국은 무역 분야에서는 계속 교류를 했다. 그런데 한국-미국과 같은 동맹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리더로 입지를 굳히길 원한다. 이를 위해 인접해있는 국가인 한국이 꼭 필요하다. 마치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 쿠바와 같은 이웃 국가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중국이 한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중국에 우호적인지, 한국이 안정적인지 등이 중국에게는 중요하다. 

또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존재를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미국이 남한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도입하려고 할 때처럼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의 밑바탕에는 최소한 현 상황을 유지하거나 미국의 영향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 뤼디거 프랑크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북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 이건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중국은 북한의 붕괴 위협이 커지면 이를 막으려고 할 것이다. 이게 중국이 북한의 안정을 원하는 이유다. 

프레시안 : 현재의 한반도 평화 국면을 만드는 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역할이 어느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프랑크 : 트럼프 정책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는 트럼프가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전 미국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 조건을 높이면서, 즉 CVID를 먼저 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제조건을 내세웠는데 트럼프는 '이전에는 어땠든지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행동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가 위험한 부분도 있다. '화염과 분노', 지난해 유엔 총회에서 발언했던 완전한 파괴, 핵 단추 이야기 등 그의 발언에는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계속 고수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트럼프의 인내심이 끊어져서 군사적인 행동을 취하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고 2차 한국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재선을 하지 못하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워질까? 

프랑크 : 부시 정부는 ABC(Anything but Clinton), 즉 전임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했던 것을 부정하고 이와 반대되는 정책을 취했다. 트럼프는 ABO, 'Anything but Obama', 즉 오바마 정부에서 했던 정책을 부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에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했던 정책과 반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북미 간의 이러한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통역 : 이지인)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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