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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 방해’ 의혹 해수부 전 장관·차관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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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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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 방해’ 의혹 해수부 전 장관·차관 구속됐다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8-02-02 09:11:42
수정 2018-02-02 09: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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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를 받는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윤학배 전 차관이 1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를 받는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윤학배 전 차관이 1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임화영 기자
 

박근혜 정부 시절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한 혐의를 받는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유학배 전 차관이 구속됐다.

양철한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1일 "범죄혐의가 소명되고 도망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김영석 전 장관과 윤학배 전 차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앞서 서울동부지검 형사 6부(부장 박진원)는 지난달 30일 이들에 대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해수부 내부 법적 검토를 무시하고 세월호 특조위 활동 기간을 고의로 축소하는 등 특조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해수부 직원들과 세월호 특조위 파견 공무원에게 세월호 특조위 내부 상황과 활동 동향 등을 확인해 보고하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직원들에게 세월호 특조위 활동에 대한 각종 대응 방안을 문건으로 작성하고 시행을 지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세월호 특조위 대응 문건 작성에 청와대가 개입했는지 여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확인할 방침이다. 해수부 내부 감사 결과에서도 세월호 인양 추진단 실무자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세월호 특조위 관련 현안대응 방안' 문건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해양수산비서관실과 협의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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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먹은 독수리는 왜 납중독에 걸렸나

고라니 먹은 독수리는 왜 납중독에 걸렸나

김봉균 2018. 01. 31
조회수 3747 추천수 1
 
농약, 납 총탄 등 사체 먹은 맹금류 피해 잇따라
고라니 사체 먹이로 주기 전에 엑스선 촬영해야
 
e4.JPG» 밀렵꾼이 오리를 잡으려고 농약을 묻힌 볍씨를 뿌리자, 죽은 오리를 먹고 독수리도 농약에 중독돼 조난했다.
 
매년 겨울철이면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독수리나 흰꼬리수리 같은 대형 맹금류가 구조되어 들어옵니다. 녀석들은 덩치도 크고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유유히 비행하는 습성을 지녔기에 누군가의 눈에 띄기 쉽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하나같이 법정 보호종에 속해 보호받아야 하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임에도 누군가가 쏘아대는 총에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적 테두리를 한참이나 벗어난 야만적 행태이지요.
 
녀석들을 위협하는 것은 밀렵만이 아닙니다. 안개가 끼거나 흐린 날에는 교각이나 전깃줄, 풍력발전소의 날개와 같은 인공구조물에 부딪히곤 합니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즉각적인 회피 비행이 어려워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구조물을 미처 피하지 못하곤 합니다. 
 
독수리나 흰꼬리수리 같은 대형 맹금류는 종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죽은 동물의 사체도 곧잘 찾아 먹는 청소동물이기도 합니다. 사체를 먹는 동물의 습성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편견일 뿐 생태계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사람들이 먹는 고기 역시 대부분은 죽은 동물의 사체에서 비롯되는 걸요. 이상할 것 하나 없죠. 
 
e1.JPG» 독수리는 대표적인 청소동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동물이 생태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사체가 오래 방치되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질병의 확산과 해충의 집단 발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 독수리와 같은 청소동물이 나타나 사체를 소비한다면 이런 문제를 예방하고 질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동물의 개체수가 급감해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든다면 우리는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는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청소동물에 대해 잘못 알려진 상식 중 하나가 썩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청소동물에게 사체를 찾아 먹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녀석들에겐 꽤 간절한 기회지요. 또 최근 폐사한 신선한 먹이만을 찾아 헤맬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만약 신선한 먹이만을 선호하는 성향을 지닌 청소동물이라면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서 쉽게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시간이 지나 부패가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먹이를 포기할 수 없는 거죠. 그렇다 보니 부패한 먹이를 섭취해 식중독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e2.JPG» 독수리, 까치, 큰부리까마귀가 모여 고라니 사체를 먹고 있다.
 
이처럼 사체를 먹는 청소동물에게는 ‘먹이원인 폐사체가 과연 어떤 이유로 폐사했는가'가 녀석들의 생사를 결정합니다. 만약 농약을 먹어 죽은 동물을 먹는다면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로 농약 중독에 걸립니다. 또 누군가가 쏜 납탄에 맞고 죽은 동물을 먹는다면 납중독으로 이어집니다. 농약 중독과 납중독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량을 섭취해도 문제가 발생하며 쉽게 분해되지 않고 축적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역에 서식하는 많은 동물이 같은 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기도 합니다. 절대 경계를 늦출 수 없는 문제겠지요.
 
e3.JPG» 농약 묻은 볍씨를 먹고 가창오리 수십 마리가 죽었다. 독수리는 이 가창오리를 뜯어먹고 농약에 중독됐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축산물의 야외 폐기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청소동물이 먹이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녀석들을 보호하기 위해 민간단체와 관공서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먹이를 공급하고 있죠. 하지만 제공되는 먹이에 도축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포함돼 있거나, 가축농장에서 나온 폐사체 등도 활용하고 있어 잠재적인 질병 감염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정육을 제공하기에는 가격이 비쌉니다. 
 
e4.JPGe5.jpg» 농가에서 기르다가 폐사해 버린 닭을 먹는 어린 흰꼬리수리와 까치.
 
최근에는 사고로 인해 폐사한 야생동물, 특히 고라니를 먹이로 제공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폐사한 야생동물이 다른 야생동물에게 섭식 되어 에너지원이 된다는 것 자체에는 의미가 있지만, 주로 제공되는 고라니의 경우 수렵 때 사용한 납탄이 몸에 박혀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독수리나 흰꼬리수리가 먹게 된다면 심각한 납중독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고라니 등의 야생동물을 먹이로 제공하기 이전에는 방사선 촬영을 통해 몸에 납탄이 있는지를 우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e6.jpg» 차량충돌로 폐사한 고라니의 사체를 흰꼬리수리가 깔끔하게 발라먹은 모습. 사냥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어린 대형 맹금류에게 도로 위의 사체는 위험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먹이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2차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e7.jpg» 차량에 충돌해 구조된 고라니의 근육 속에 납탄이 박혀 있다(아래 흰점). 이 고라니가 청소동물의 먹이로 제공된다면 납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너무 많은 수의 대형 맹금류를 한 장소에 모이게 하면 예기치 못한 질병의 확산이나 오염원과의 접촉으로 대규모 피해가 야기될 수 있기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독수리들이 대규모로 도래하는 지역에서 여러 마리가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단체로 조난에 처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먹이를 안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먹이 제공을 중단한다면 녀석들은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거든요. 아주 다양한 곳에 나눠 제공하는 것 역시 물리적인 어려움이 있겠지요. 앞으로도 이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당사자들 간의 지속적인 협의가 필요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봄이 찾아오면 이 덩치 큰 친구들은 그들의 번식지인 몽골과 러시아 등으로 북상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잘 먹고 잘 쉬다가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꼭 내년에 새끼를 데리고 우리나라를 찾아와 다시금 만날 수 있기를, 푸른 하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녀석들과 오래오래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8.jpg» 바람을 타고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독수리.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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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다니 굉장히 감격” “꿈인가 생시인가” 셀렘과 반가움 교차한 남북 스키훈련

마식령스키장서 1박2일 남북 스키훈련...1일 북측 선수들과 함께 귀국

공동취재단 최지현 기자
발행 2018-02-01 10:09:01
수정 2018-02-01 11: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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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북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출경하며 취재진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북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출경하며 취재진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여러분 지금 막 (북한 영공을) 통과했습니다. 누군가가 앞서 걸었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게 됐습니다. 굉장히 감격스럽습니다.”

1월 31일 오전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북한 갈마비행장으로 향하는 아시아나항공 전세기 차호남 기장의 안내 방송이 기내에 흘러나왔다. 기내에는 타고 있던 스키 선수단의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했다.

이들은 이날부터 1박2일 동안 북한 원산 마식령스키장에서 북측 선수들과 스키 합동훈을 갖기로 한 남측 선수단이다. 이는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열리는 문재인 정부의 첫 남북 스포츠교류 행사이다.

대한스키협회 임원과 선수로 구성된 남측 선수단을 싣고 갈마비행장까지 비행할 예정이었던 아시아나 전세기의 이륙 여부는 출발 당일인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9월 대통령 행정명령(13810호)으로 발표한 독자 대북제재 때문이었다. 이 행정명령은 북한에 착륙했던 항공기는 180일간 미국에 착륙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미 간 막판 협의 끝에 정부는 이번 전세기 운항은 미국 독자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미국 측의 승인을 받았고, 가까스로 전세기는 이륙할 수 있게 됐다.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북한 원산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출국준비 하고 있다.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에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북한 원산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출국준비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선생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어” 스키협회 반갑게 맞이한 북측

이른 아침에 양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선수단의 표정은 밝았다. 난생 처음 가보는 북한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하는 동시에 기대감을 높이고 있었다.

선수들은 모여서 손을 들고 ‘화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김현수 선수(단국대, 22)는 “좀 긴장되기는 하지만 재밌는 경험일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재혁 전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감독은 “정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생각했다”며 불과 며칠 전 정부로부터 남북 합동훈련 제안을 받았을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굉장히 기대가 된다. 남북이 이렇게 합동 훈련을 한다는 데 대해서 정말 스키선수로서 스키인으로서 굉장히 영광”이라며 “가서 북측 선수들과 좋은 훈련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출국장에서도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 연출됐다. 이주태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전세기 탑승을 위해 국제선 출발장에서 내민 표를 보고 항공사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저희는 북한에 가는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뒤에 줄 서있던 사람도 “저희 방북하는 겁니다”라고 부연했다.

표 받아든 직원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신기하다는 듯이 표를 유심히 보다가 되돌려줬다. 그 뒤로는 항공권 검사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전세기는 ‘역 디귿(ㄷ)’ 모양으로 비행해 갈마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김철규 갈마비행장 항공역장과 리항준 체육성 국장이 남측 선수단을 맞이했다. 리 국장은 남측 김남영 대한스키협회 부회장에게 “선생님이 다시 오실 줄 알았어”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북한 원산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있다.
알파인스키 국가대표 상비군들이 강원도 양양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마식령스키장으로 훈련을 떠나기 위해 북한 원산행 비행기 티켓을 들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스키장 정상에서 남북이 함께 외친 “우리는 하나다”

남측 선수단은 갈마비행장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마식령스키장에 도착했다. 마식령호텔 식당에서 가진 점심 메뉴는 무려 19가지나 됐다. 남측 선수들은 “이렇게 잘 나올 줄은 몰랐다.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어 설질 등을 확인하기 위한 프리스키 훈련이 오후 3시부터 1시간 반 가량 실시됐다. 남측 알파인 선수들은 북측 선수들과 같이 스키를 타기도 했다.

남측 박제윤 선수는 “선수 입장에서는 굉장히 훈련하기가 좋은 스키장이었다. 설질도 괜찮았다”며 “지형 변화가 많고 슬로프의 각이 클수록 좋은데, 이 스키장은 그런 측면에 있어 좋은 조건을 갖춘 스키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남북 선수들은 곤돌라를 타고 스키장 정상으로 올라가서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선수들은 스키복에 번호를 달고 훈련에 임했다. 남북은 스키 합동훈련을 할 때 선수들이 옷에 단 번호표 위는 초상 휘장, 태극기 등 아무것도 달지 말자고 서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틀째인 1일 오전에는 알파인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스키 종목에서 남북이 친선경기과 공동훈련을 한다. 훈련을 마친 뒤 이날 오후에 전세기를 타고 돌아올 때에는 평창 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 스키 선수들을 포함한 북한 선수단 일부와 함께 올 예정이다.

마식령 스키장의 북한 주민들
마식령 스키장의 북한 주민들ⓒ뉴시스/AP
금강산 남북합동문화행사와 마식령스키장 공동훈련 사전점검 차 방북한 남측 선발대가 지난 24일 마식령 스키장을 점검했다. 마식령 스키장 전경
금강산 남북합동문화행사와 마식령스키장 공동훈련 사전점검 차 방북한 남측 선발대가 지난 24일 마식령 스키장을 점검했다. 마식령 스키장 전경ⓒ통일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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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6.15 자주통일 헌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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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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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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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6.15 자주통일 헌법을 요구한다
 
 
 
박해전 6.15 10.4 국민연대 상임대표 
기사입력: 2018/02/01 [11: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박해전 6.15 10.4 국민연대 상임대표가 30일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정기총회에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람일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을 촉구하며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6.15 10.4 국민연대 호소문>

 

우리는 조국의 분단을 막고 민족통일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한 역사적인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70돌이 되는 올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 실현과 분단 적폐 청산을 완수할 것을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주권자들과 참정권을 갖는 해외동포들에게 열렬히 호소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헌법 개정과 관련해 “헌법은 국민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며 “국가의 책임과 역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우리 국민의 생각과 역량이 30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30년이 지난 옛 헌법으로는 국민의 뜻을 따라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국민의 뜻이 국가운영에 정확하게 반영되도록 국민주권을 강화해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하고,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며 “지방선거와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는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불멸의 업적인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소중히 이어갈 것과, 그와 관련한 법제화를 공약했다.

 

국민주도헌법개정전국네트워크는 국회에 제출한 ‘개헌 15대 과제’ 청원서에서 “촛불정신을 반영해 헌법 전문 및 총강 규정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민주권을 유린해온 식민과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자주통일 평화번영을 완수하는 것은 촛불시민혁명의 본질적 요구이다. 6.15 시대에 맞게 개정 헌법의 전문에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 대강령인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과 평화번영의 실천강령인 10.4 선언을 핵심으로 담아내야 한다.

 

또한 4.19혁명에 이어 5.18민중항쟁, 6.10항쟁, 촛불시민혁명을 민주이념으로 개정 헌법 전문에 명시하고, 헌법 전반에 걸쳐 이러한 전문의 정신이 관통되도록 해야 한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리려면 무엇보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실천해 남북경제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한다. 6.15 10.4 선언을 짓밟은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통일경제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가계부채는 1500조원에 육박하고 기업부채와 정부부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국민경제는 총체적 파산 직전에 몰려 있다.

 

그동안 6.15 10.4 자주통일 평화번영을 가로막은 정치인들의 민생 ‘복지타령’은 분단기득권에 안주한 정치기술자들의 구두선이며 속임수에 지나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으로 유무상통 공리공영의 남북경제공동체의 길을 활짝 열어야 천문학적 규모의 분단비용을 복지로 돌려 민생을 살리고, 온 겨레가 행복한 통일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분단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고, 남북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공동 개발해 청년실업을 비롯한 일자리문제를 전면 해결하고, 내수를 살려 기업이 열 배 백 배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통일복지국가의 남북경제공동체가 실현되면 남과 북은 세계 최고의 물류기지, 금융의 중추, 관광대국으로 발전할 것이며, 골드만삭스 같은 외국 신용평가기관이 전망한 바와 같이 머지 않아 세계 1등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역사는 6.15 10.4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을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은 국민주권자들의 기본권 중의 핵심이며, 한세기 식민과 분단의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정의와 역사정의를 높이 세우는 길이다.

 

우리는 이러한 국민주권을 보장하는 개헌을 위해 6월 국민투표 실시 전에 분단 적폐 중의 적폐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할 것을 촉구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 제정당사회단체, 국민주권자들과 참정권을 지닌 해외동포들이 분단기득권의 권력구조 재편 논의에 매몰되지 말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기초한 자주통일 평화번영 헌법 개정에 지혜와 힘을 모아줄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한다.

 

                                         2018년 2월 1일

                           <6.15 10.4 국민연대 상임대표 박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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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핵 이야기 1 - 황분희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부회장

일곱째별  | 등록:2018-02-01 08:25:55 | 최종:2018-02-01 10:24:0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 사고가 터졌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는 체감 온도가 달랐다. 인근 지역이었고 안전제일주의 일본에서 일어난 사고라면 세계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할 거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1주기를 앞둔 2012년 2월 29일, 나는 시청 앞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안전한 밥상을’이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어찌 보면 탈핵운동은 집집마다 자가용을 몰고 밤마다 조명을 켜고 여름이면 에어컨에 겨울이면 보일러 없이는 못사는 에너지 소비시대에 바람 부는 들에 붙은 불을 지푸라기 같은 인간이 끄겠다고 덤비는 일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한낱 먼지 같은 인간이 감히 지구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데는 무모함만큼의 거룩함이 있다. 나 하나 살다 갈 세상이면 상관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지켜야 할 다음 세대가 있다. 그것이 내가 탈핵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5년 후, 사진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2017년을 ‘사진으로 하는 탈핵 운동’의 원년으로 정했다.
  
1차 촬영
 
황분희 부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2017년 1월 21일 제13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였다. 경주에서 올라와 서울 시민들에게 원전을 줄이기 위해 전기를 아껴 써 달라는 부탁이 기억에 남는다. 같은 해 8월 23일, 고리를 거쳐 월성으로 갔다. 고리 원전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낯선 이방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원전 앞바다인데 방사능으로 물고기가 괜찮겠냐고 묻자 그들은 ‘바다가 얼마나 넓은데’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릴낚시를 했다. 그들은 숭어를 잡고 있었는데 숭어야말로 뻘을 뒤지는 생태로 인해 방사능 물질이 잘 농축될 수 있는 어종이었다. 월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고 다소 지친 상태였다.
 
월성 원전 4기를 코앞에서 보고 있자니 시퍼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거기서 1km 안에 있는 홍보관 옆 비닐하우스 농성장에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황분희 부회장 과 7살 외손자가 있었다. 먼지 뿌연 선풍기가 돌고 있었지만 무척 더웠다. 할머니에게 꼭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그 아이는 만 4세 때 이미 제 아버지의 세 배 되는 삼중수소 17.5베크렐(Bq, 1초에 방사선이 1개 방출되면 1베크렐)이 체내에서 검출됐다고 한다. 삼중수소는 약한 방사선을 방출하는 방사성동위원소로 원자로의 핵분열과정에서 발생되는데 환경으로 누설되어 섭취하면 체내에서 장기간 방사선을 발생시켜 돌연변이나 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출처, SNEPC-서울대학교 원자력 정책센터)
 
원전은 감속재에 따라 경수로와 중수로로 나눈다. 보통의 물인 경수(H2O)와 그보다 무거운 물인 중수(D2O)를 사용하는 차이인데 경수로는 우라늄을 농축한 핵원료를 사용하지만 중수로는 천연우라늄을 핵원료로 사용한다. 천연우라늄은 핵폭탄의 원료로 쓰이는 플루토늄이 많이 나온다. (출처, 한수원블로그) 플루토늄은 방사성 독성이 강하며 흡입되어 몸속에 들어가면 허파와 골수에 영향을 미쳐서 폐암이나, 흔히 뼈암이라 부르는 골육종을 유발한다고 한다. 월성원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중수로형 핵 발전소이다.  

방사능은 외부피폭 보다 호흡기나 음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부피폭이 훨씬 위험하다. 방사능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민감하고, 어른보다 세포분열 속도가 빠른 어린이가 20배 더 민감하다. 마을 주민에게 삼중수소 검사를 4번 했는데 100%가 오염됐다고 한다. 원전 제한구역은 중수로인 경우에 914m, 경수로는 560m인데 방사선에게 914m 밖으론 나가지 말란다고 말을 듣나.
 
“기자님도 지금 숨 쉬고 있는 중에 피폭이 되고 있어요.” 
 
나야 어쩌다 들르는 외부인이지만 어린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아이들만큼은 방사능 위험 없는 지역에서 키우고 싶다는 소망이 이곳 주민들의 속 타는 심정이다. 

월성 원자력홍보관과 이주대책위원회 농성장앞

황분희 부회장은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서 산 지 30여 년 되었지만 원자력발전소가 몸에 나쁜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후에야 알았다. 한국수력원자력(주)나 정부는 깨끗하고 안전한 원자력 덕분에 값싼 전기 사용한다고 했다.
 
1982년에 가동된 월성1호기는 2012년이 30년 설계수명 만료 시점이었다. 그런데 후쿠시마 사고 한 달 전에 10년 수명연장을 받았다. 마을에선 후쿠시마 사고 후 월성1호기 재가동을 막으려고 탈핵운동을 시작했다. 월성1호기는 2012년 10월 30일부터 2015년 6월 22일까지 가동을 중단했다가 현재 재가동 중이다. 
   
월성 원전이 위험한 이유는 또 있다. 원전에서 쓰고 남은 핵연료인 고준위 핵폐기물의 전국 53%가 월성에 있다. 중수로의 경우는 운전하면서 매일 소량의 핵연료집합체를 교체하기 때문이다. 현재 있는 임시저장고는 2019년에 포화상태가 된다고 한다. 최소 10만 년은 격리해야 하는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은 아직 세계에 없고 현재 유일하게 핀란드에서 건설 중이다. 나아리 주민들은 정말 핵폐기물을 둘 데가 이곳밖에 없다면 완충 지역을 만들어 내보내 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경주 시장은 아마도 ‘보관세’ 받기 위해 고준위 핵 폐기장도 유치하겠지요. 방사능 피해 받는 소수 주민 희생시키고 어마어마한 돈이 경주시민들한테 돌아가겠죠.”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고 깨끗하다면 전기에너지의 주 소비층이 살고 있는 대도시 특히 수도권에 지으면 이동 경로도 짧아지고 좋지 않은가? 그러나 대부분의 원전은 대도시에서 먼 고령화 경제 낙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밀양 송전탑도 마찬가지다. 대도시의 편리한 전력 소비를 위해 시골 마을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발하는 주민들에게 ‘님비현상(not in my backyard:꼭 필요한 공공시설이지만 자신이 사는 곳에 설치하는 것만은 기피하는 현상-출처, 다음백과)’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과연 다수는 늘 옳은 것인가?
 
한수원은 주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마을 대표들에게 지원금을 주며 사업을 해서 이익금을 나눠가지라고 했지만 그 돈은 일부 사람들만 배부르게 하고 일반 주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받은 사람들 중 잘 모르고 썼다가 감사가 나오자 감당 못 해서 자살하는 사태도 벌어졌다고 한다.  
  
2016년 9월 12일 밤, 마침내 서울에서 꿈쩍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주에서 5.8규모의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천재지변을 당해낼 그 어떤 생물체도 지구상엔 없다.   
2013년에 품질기준에 미달하는 부품들이 시험 성적서가 위조되어 수년 이상 납품되어왔던 비리사건이 터졌으면서도 그동안 사고 안 난다고 장담하던 한수원도 지진 앞에서는 별 수 없을 것이다.
 
마을 건물마다 공실이 눈에 띄었다. 건물주만 남고 세입자들은 빠져나간 상태였다. 자력으로 나갈 능력이 없는 주민들만 나아리에 남았다. 
  
“한수원이 우리 집들을 현 시가대로만 사주면 어디든 깨끗한 곳에 가서 살고 싶어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방사능 기준치 미달이니 괜찮다, 이주 시킬 법적인 근거가 없다 뿐. 게다가 한수원에서는 주민들이 기자들 불러들이고 전국에 다니며 알려서 매매가 안 되는 거라고 도리어 탓을 했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전에 경주 지진 나고 제일 먼저 내려오셔서 따뜻한 말씀해 주시고 가셨어요. 대통령 되면 탈핵 하겠다고 했으니 그리 해 주시겠죠.”
 
부회장은 또 며칠 전 찾아온 인터넷 신문 기자 명함을 보여주며 그 사람도 어떻게든 알려주겠노라 다짐하고 갔다고 했다. 무얼 어떻게 해 주겠다는 장담을 할 처지가 못 되는 나는 애꿎은 홍보자료를 찾았다. 3년이 넘은 투쟁에 제대로 된 유인물 한 장이 없었다. 현수막도 다 찢어졌다고 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우니 그저 다니면서 알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천막 안 열기도 점점 사그라졌다. 한 시간여 통분을 듣고도 내게 도울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에 낙담했다. 조용히 현수막을  보러 가자고, 가서는 찢어진 현수막을 잡고 서보시라고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그 해 12월 한겨레신문 ‘한 장의 다큐’에 실렸다.

당신은 방사능 피폭 위험 지역에 들어오셨습니다

갑상선 암 피해자 기자회견
 
2017년 10월 11일 수요일 국회 정론관, <원전 주변지역, 갑상선암 피해자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황분희 부회장과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과 균도 씨와 그 아버지 이진섭 씨 등을 만났다.
 
균도 씨는 선천성 자폐로 발달장애아였고 그의 아버지 이진섭 씨는 직장암, 어머니인 박 씨는 갑상선암을 앓고 있었다. 이들은 2012년 7월, 한수원을 상대로 한 건강권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14년 10월, 갑상선 암 발생에 근 20년의 거주지 10km 이내에 있는 고리, 신고리 원전 6기 방사선 노출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판결로 승소해서 주변 피해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이후 4개 원자력 발전소 주변지역 618명 주민이 2015년부터 갑상선암 발병에 따른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한수원을 상대로 공동소송 중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가동 이후 반경 10km 이내에 5년 이상 거주한 이후 갑상선암이 발병해 수술한 주민들과 피해자 가족을 포함한 총 2,882명이 원고인 대규모 소송이었다. 황분희 부회장도 5년 전 갑상선 암 수술을 했다.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약 20년간 핵발전소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역학 조사(한국전력공사 발주, 교육과학기술부 운영, 서울대학교 의학연구원 원자력 영향·역학 연구소 수행)에 의하면 ‘핵발전소 주변 지역에 사는 여성들에게는 발전소와 관련이 없는 지역에 사는 여성들에서보다 갑상선암이 2.5배 발생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로 올라와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다음 날 아침부터 경주 시내에서 탈핵시위를 한다고 바삐 내려가는 이들을 서울역에서 배웅했다. 70세에 소화하기엔 버거운 일정이었지만 황 부회장은 청년처럼 씩씩했다.  
 
2차 촬영
 
10월 13일 금요일, 2차 촬영을 하러 다시 원전을 찾았다. 갈 때마다 하늘이 도와 날씨가 쾌청했다. 지난 촬영 때 흰 구름이 맞아주었다면 이번에는 흰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랑 모래사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자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자유로움이 마음을 채웠다. 어휘를 선택하느라 긴장할 필요 없이 뷰 파인더에 집중했다. 구도를 선택하고 초점과 조리개 값을 맞추다가 문득 내가 혼자서도 외로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경이로운 자연 속에서 찍고 있는 내 사진이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곳에 핵발전소라니……. 마음이 쓰라렸다.  

위험 출입금지 너머 고리 원전

월성 바다는 고리보다 더욱 짙푸르렀다. 원전 앞에 몰아치는 흰 파도를 찍었다. 방파제에는 고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천막 안에는 황분희 부회장이 기다리고 계셨다.
 
“아이고, 이렇게 혼자 다녀. 고생스럽게.”
 
점심을 먹었냐고 물으셨다. 한 손엔 렌터카 핸들, 한 손엔 찐 고구마를 들고 먹으며 운전을 해 온 길이었다.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답하자, 옆에 있던 쇼핑백 안의 손수 키운 단감을 먹으라고 주셨다. 유기농이 아니면 좀처럼 먹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한수원에선 기준치 미달이라고 주장하지만 방사능 오염 지역에서 생산한 과일을 먹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황분희 부회장은 그 땅에서 30년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갑상선 암 수술도 받았다. 이주를 하고 싶어도 꼼짝 못하고 살고 있다. 딸과 사위, 손주들 몸에 피폭이 되는 걸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 앞에서 어찌 못 먹어요,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단감을 휴지로 닦아 껍질째 우적우적 씹어 삼켜 우정을 보여드렸다.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함께 죽을 각오 아니면 이 일이 뛰어들지도 않았어.’

마을 주민들 이름을 쓴 가관들

황분희 부회장은 나아리 사람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마다 가관(假棺)을 끌고 한수원 앞까지 행진을 한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경주시청 앞부터 경주역, 성동시장을 거쳐 다시 경주시청으로 가는 경주탈핵순례를 한다.
 
“여러분이 흥청망청 전기를 쓸 때 희생하고 있는 지역민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여기는 죽음의 동네예요. 이렇게 위험한 걸, 이거 터지면 여기뿐만 아니라 울산, 부산 모두…….”
 
경주시민들은 나아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시민들은 과연 자신들이 쓰고 있는 에너지원 때문에 핵발전소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한들 자신들의 편리를 포기할 마음이 1베크렐이라도 있을까?

노후원전 월성1호기 폐쇄

<참고도서 > 
한국탈핵, 김익중, 한티재, 2013
탈핵 학교, 김정욱 외 11명, 반비, 2016
핵을 넘다, 이케우치 사토루, 홍상현 옮김, 나름북스, 2017

길목협동조합 소식지 ‘길목인’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394&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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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갖춘 스승 만나면,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나요"

[이한기의 뷰] 세계 지성들과 만났던 인터뷰어 안희경의 '키워드'

18.01.31 20:35l최종 업데이트 18.02.01 08:42l

 

"세계의 석학들은 생존 가능한 사회, 억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답을 한국인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성취해온대로 또다시 다수의 삶을 지켜낼 변화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보려고, 더 멀리 보려고 안경알만 닦아왔던 내게 석학들이 꺼내준 것은 거울이었다. 내 안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결국 답은 내 안에 있었다."|<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오마이북, 2013)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관념,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습관이 된 희망 속에서 더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성장의 동력으로 격려받았다... 국내총생산(GDP)과 국민총소득(GNI)의 숫자가 높아진 동시에 빈부의 차이가 커지면서 우울한 국민도 함께 늘어나는 이 진행 방향을 성장과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문명, 그 길을 묻다>(이야기가있는집, 2015)


 

"'다수의 약자들은 왜 강자를 위한 선택을 할까?'라는 물음을 떨칠 수 없었다. 답은 '내 마음을 흔드는 힘의 실체를 살피지 못해서가 아닐까'로 모아졌다... '나'의 삶이 가능한 조건을 보다 깊이 살핀다면 '나'는 세상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보살핌을 받는 존재라는 자각도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나'의 안녕을 위해 지구 전체가 안녕해야 한다는 각성은 공존의 미래를 건설하는 진전이리라. 이성의 동물이라는 우리가 그 이성을 하루에 몇 분이나 써가며 사는지 점검해보고 싶었다."|<사피엔스의 마음>(위즈덤하우스, 2017)



꾸준히 세계 지성들과 만나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등 미디어를 통해 그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건넸다. 못다한 이야기는 인터뷰어의 시각이 담긴 글로 다듬어, 호흡 긴 독자들을 위해 단행본 책으로 펴냈다. 이처럼 혜안을 갖춘 지성과 눈 밝은 독자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 재미작가이자 전문 인터뷰어 안희경씨다. 

세계 지성들과의 대화로 엮은 '문명 3부작'
 

 안희경 작가.
▲  안희경 작가.
ⓒ Adam Singsinthem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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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부터 2년 주기로 펴낸 세계 지성들과의 인터뷰 책은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등 3권. 안희경은 이를 '문명 3부작'이라고 부른다. 이와 별도로 지난해 12월에 펴낸 <어크로스 페미니즘>(글항아리)은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주제별 대화를 담았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SBS와 불교방송(BBS) 리포터로 활동했던 안희경은 8년 동안 불교방송 PD로 일했다. 1998년과 2000년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을 받으며 잘나갔던 그는 지난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번역 일과 본격적인 취재 활동에 나선 건 지난 2009년부터다. 큰 범주에서는 언론 활동이지만, 팀 플레이를 했던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단독 플레이어로 뛴 셈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안희경은 한 해에 두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해에도 12월 초에 들어왔다 올해 1월 초에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사피엔스의 마음>과 <어크로스 페미니즘> 등 새책을 주제로 서울과 대구 등에서 독자들과 '북 토크'를 가졌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작가 안희경을 만났다. 독자들에게 에너지를 주기 위해 본인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쓴 탓일까? "이번엔 약간 번아웃(burnout)된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자주 쓰는 키워드가 있다. 그 키워드를 좇다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나와 우리, 약자와 사회, 개인과 망(網), 문명과 미래, 왜(Why)... 안희경의 글과 말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다. 

기자가 생각하기엔, '안희경의 키워드'에 등장하는 '나'는 객체이자 주체다. '우리'는 뜻을 함께 하는 공동체이자 사회다. '약자'는 말 그대로 공동체 안의 마이너리티다. '망(網)'은 네트워크로 직역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를 담고 있다. 점선일 수도 있고, 실선일 수도 있지만, 눈에 띄거나 손에 잡히는 개념은 아니다. '문명'과 '미래'는 성찰이자 지향이다. 그 모든 것에는 '왜?'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그리고 그 말과 글은 마치 망과 같은 '생각 기차'로 연결된다. '조합'이 아닌 '결합'의 형태다. 그 안에서 사유가 똬리를 튼다.

"지혜를 갖춘 스승을 만나면,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요"
 

 노암 촘스키와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노암 촘스키와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김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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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미국에선 마이너리티에요. 한국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을 보면 자매같은 느낌을 받아요. 나도 미국에서는 이방인이자 여성이고 사회적인 약자이니까요. (미국 생활) 처음에는 미소를 많이 지었어요. 약자는 미소를 많이 머금게 돼요. 아이들이나 강아지도 귀여운 얼굴이 우성이듯. 오래 살다보니 지금은 (그런 강박에서) 조금 벗어났어요. 남들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신경을 덜 쓰게 됐지요.)"

안희경의 키워드에 등장하는 '약자(마이너리티)'는 탐구 대상일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처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조건의 다름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소중한 공동체의 일원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책을 읽다가 '머리 속에서 팝콘이 터지듯'이라는 표현을 봤어요. 맞아요. 지혜를 갖춘 스승들에게 만남을 청하고, 만나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팝콘이 터지듯 머릿속에서 지진이 나요. 이 분들을 섭외해서 만나는 게 중요하지만, 만나서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가 더 어렵고 중요해요. (누구나 물어봐서) 이미 답변했던 이야기를 나누려면 뭐하러 찾아가겠어요. 현장과 밀착된 이야기, 내 질문을 던져야지요. 내가 느끼는 아픔이 무엇인지, 막막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 것으로 꽉 차서 가지 않으면 그 분들에게 지혜를 얻기가 어렵죠."

안희경의 '인터뷰 로드'는 고단한 여정이다. 지난 2014년 <경향신문>에 '문명, 그 길을 묻다'를 연재할 때 재레드 다이아몬드, 노암 촘스키, 지그문트 바우만, 장 지글러, 원톄쥔, A.T. 아리야라트네 등 시대의 스승에게 배움을 청하는 길을 나섰다. 같은 이름의 책 서문에서 안희경은 20만리가 넘는 그 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과 부산의 겨울에서 영국 리즈의 겨울로, 다시 파리의 겨울을 거쳐 혹한의 폭설주의보가 내린 보스턴의 겨울까지 옷깃 여미며 가슴 데우는 시간을 가졌다. 봄, 2월부터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캘리포니아 꽃의 향연을 4월 대륙의 동쪽 끝 뉴저지에서 망울 터지는 벚꽃으로 다시 맞았다. 남부 캘리포니아, 서울, 타이베이, 일본 시나노 오오마치의 여름에서 뉴헤이븐 예일대 고즈넉한 가을의 문턱까지, 그렇게 사계절 내내 마음을 품으며 순례했다."

"아, 대화의 또다른 심도는 쉼표에 있구나"
 

 마루야마 겐지.
▲  마루야마 겐지.
ⓒ 안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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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얼굴 한 번 마주 보기조차 힘든 지성들을 어떻게 만나서 속내를 끄집어냈을까. 그 비결은 무엇일까? 결론은 '공짜 점심이나 왕도는 없다'는 것이다. 공을 들였는데도 인연이 안돼 못 만난 이들도 있고, 대부분 만남을 청한 뒤 최소 수개 월이 지나야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지 명확한 건, '역지사지' 해서 그들이 지금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를 심도깊게 고민하는 정지작업이 중요하다는 것. 그런 뒤 온 힘을 다해 '내가 왜 당신을 만나야 하는지, 만나려고 하는지'를 편지(이메일)로 띄웠다. 그렇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 다수의 책이 소개돼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 그는 독설(직설)과 은둔의 작가로 불린다. 안희경은 마루야마 겐지를 만날 때도 출판사를 통해 그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집단의식을 드러내보고 싶다"고. 마루야마 겐지는 일관되게 국가라는 허상과 허울 속에서 잠든 개인의 이성을 흔들어 깨우는 일을 해왔기에,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다. 만나지 못하면 인터뷰는 성립되지 않는다. 핵심을 꿰고, 마음을 담은 제안이 아니면 움직이기 어렵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도 역설적으로, 부처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안희경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지성들과 '면대면 인터뷰'를 추구하는 까닭은, 그들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호흡을 살피는 것도 인터뷰의 중요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과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아쉬움이 많았단다. 그건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갖는 언어의 한계만은 아니다. 오히려 교감의 제약 탓이 더 컷다.

지성들과 '면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안희경은 '쉼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인터뷰를 할 때 질문이 매끄러운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은 예전보다 영어가 늘어 질문도 길어졌지만, 처음에는 머리 속에서 번역기가 작동하니까 '포즈(pause)'가 발생해 오래 걸리는 거예요. 예전에 한국에서 방송할 때는 매끄러웠는데. 그래서 고민을 했죠. 내가 호응을 잘 하면 저 분의 답변 내용이 더 깊어질까? 그런데, '포즈' 때문에 질문이 매끄럽게 쑥 들어가지 못하니까 오히려 상대(인터뷰이)가 더 깊게 내려가더라구요. 아, 대화의 또다른 심도는 '포즈'구나. 침묵이 끌고가는 심도가 있구나. 이걸 배운 거죠." 

반전이 숨어 있었던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인터뷰
 

 지그문트 바우만과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지그문트 바우만과 인터뷰하는 안희경 작가.
ⓒ 안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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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도 그러하듯 인터뷰도 종종 뜻한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벼운 답변을 예상하고 던진 질문인데, 예상 외로 답변이 길어질 때도 있다. 더 난처한 건,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어렵사리 잡은, 분초를 다투는 지성들과의 인터뷰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상황은 노력한다고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애초 예상했던 상황과 다르게 진행됐던 인터뷰에 대해 물었다. 안희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영국 리즈에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을 만났을 때 그랬어요.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학자에게 사랑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어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5분쯤 지나자, 한 여성 분이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바우만이 '진짜 사랑 얘기는 이 사람이 전문가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난감했어요. 바우만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건데, (인터뷰를) 망친 거잖아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도 사회학에서 이름난 석학이었어요. 폴란드 초대 대통령의 딸인 알렉산드라 야신스카 카니아는 바우만의 부인이었어요. 알렉산드라에게서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뜻 깊은 이야기였고, 완전 반전이었죠. (지성들과 인터뷰를 계속하다보니) 예상했던 인터뷰 각이 종종 틀어진다는 걸 알게 됐죠. 그 분들과 인터뷰를 할 때는 (질문을 다 못한다고 해도) 고민해간 키워드 서너 개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지난 2017년 1월 9일 바우만은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고작 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이지만, 매번 내 무지의 더께를 쪼개어 세상을 한 뼘 더 깊숙이 들어가 통찰하도록 해줬던" 바우만의 별세 소식을 듣고 안희경은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바우만이 전해주려고 했던 사랑의 진실을 떠올렸다. 바우만, 촘스키, 반다나 시바 등 우리시대 사상의 거장들은 "처음부터 바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안희경은 말한다. 그러나 바우만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심연으로 사라졌다.

"아, 목숨 값을 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재미작가 안희경.
▲  재미작가 안희경.
ⓒ Cork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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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사회주의화요."

앞으로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안희경은 이렇게 답했다. 기회가 되면 '유기농 투어'를 하고 싶단다. 왜? "가장 중요한 복지는 누구에게나 양질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사슴이나 코요테도 스스로 자기 먹을 것을 찾는데, 자본의 질서 아래서 인간은 돈을 벌어야 먹고 살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 먹고 사는 방식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문명 3부작'의 후반부에 마음을 좇다보니, 진짜 중요한 게 몸이라는 걸 깨달았단다. 자본주의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을 흙에서 찾아보겠다는 안희경은 요즘 '자립'이라는 키워드에 골몰하고 있다.

안희경의 이런 고민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든 게 아니다. 몇 해 전, 안희경이 '365일 우주로 향해 열린 키친'이라고 불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걸치 선원(Green Gulch Palm Zen Center)'에 갔을 때였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 그 곳에서 모종을 심어놓은 모판을 봤다. 모판에 붙여놓은 테이프에 수많은 벌레들이 달아붙은 채 죽어 있었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내가 먹고 사는 것에는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연결돼 있구나. 아, 목숨 값을 하며 살아야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물었다. '안희경에게 글쓰기는 무엇이냐'고? 잠시 머뭇거리다 답이 돌아왔다. 

"쥐뿔도 못 쓰는데 무서워요. 그래서 나를 다독여요. '글은 지웠다가 다시 쓰고 고치면 되잖아'. 고치고 고쳐서 쓴 글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고치고 바꿀 수 있다면... 내 아이가 웃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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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110만원…최저임금 비판하는 분들 이 돈으로 살아보라”

등록 :2018-01-31 05:00수정 :2018-01-31 08:56

 

최저임금 생활자들에게 들었습니다
전기장판 고장나도 구매 망설여
창피하지만 이게 생계비 전부
‘최저임금 생활자’ 3인의 목소리
“많은 돈 벌겠다는 욕심 없어
삶 지탱하려면 최저임금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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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이 시간당 7530원으로 오른 지 꼭 한달이 됐다. 최저임금 16.4% 인상 뒤 ‘기업 부담이 커지고, 고용이 줄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약속했던 ‘최저임금 1만원’(2020년) 목표가 자칫 흐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당수 ‘최저임금 노동자’의 목소리는 숱한 논란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구 생계를 대부분 책임지는 ‘핵심 소득원’의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는 대형마트 노동자와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 인디뮤지션 등을 만나 그들의 눈에 비친 ‘최저임금 논란’을 따라가봤다.

 

통장이 아닌 ‘텅장’(텅 빈 통장)이었다. 월급은 매달 10일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입금과 동시에 사라졌다. 꼬박 10년을 일했지만 남는 것은 마이너스 통장 대출 1천만원이 전부다. 올해 마흔여섯, 중학생 아들을 혼자 키우는 여성 마트노동자 박성실(가명)씨의 삶은 팍팍했다.

 

박씨는 10년 전 남편과 이혼했다. 당시 5살인 아들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30대 중반에 일자리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겨우 자리잡은 곳이 대형마트인 홈플러스 매장이었다. 첫 2년은 시간제로 일했다. 이후 무기계약직 자리를 얻었다. 박씨는 마트 영업시간에 따라 하루 7시간씩 3교대로 하루 종일 서서 일했다. 환불과 반품 처리 등 주로 고객상담 업무를 맡았다.

 

박씨 임금은 늘 시급 기준으로 최저임금보다 고작 몇원 많았다. 지난해 세금 등을 떼고 통장에 찍히는 돈은 한달 110만원 남짓에 그쳤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가는’ 것만 같았다. 임대주택 임차료와 관리비 16만원, 아들 학원비 25만원, 보험료·통신비 등 고정지출로만 월급 절반이 훌쩍 날아갔다. 한창 자랄 나이인 아들 식비는 차마 줄이지 못한다. 통장에 현금이 없다는 것이 박씨한테는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최대한 아껴 쓴다고 해도 월급보다 지출이 많으니까 현금 거래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가끔 경조사 생기면 현금서비스를 받았어요. 저축도 거의 못 했는데 빚만 남았네요.”

 

2013년부터 경기도 안산의 한 제조업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김미애(34)씨도 최저임금 생활자다. 하루 종일 서서 조립과 검수 업무를 한다. 원청업체 쪽의 물량 압박 탓에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물도 못 마시고 일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받는 임금은 최저시급보다 50원 많은 수준에 그쳤다. 월급은 130만원 남짓이다.

 

남편도 학원강사를 하며 한달 120만원 남짓을 벌어, 가구 소득은 250만원을 조금 넘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빠듯했다. 신혼집 전세자금 대출 2천만원도 갚는 중이고 최근엔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비도 보태야 했다.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다.

 

“월급 받으면 장부터 보는데 먹는 것도 줄여야 했고, 마트를 갈 때에는 늘 할인되는 품목만 샀어요. 병원비도 제법 나갔는데 그럴 때면 휘청하는 거죠.”

 

김씨한테는 최근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3월 출산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육아용품도 사야 하고, 산후조리원 비용도 엄청 비싸잖아요. 자연분만을 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제왕절개하면 병원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갈 테고요.”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고령 노동자한테 노후 준비는 먼 이야기다. 김미애씨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심아무개(56)씨는 1년 넘게 투병하던 남편을 5년 전 떠나보내야 했다. 자녀는 이미 충분히 컸지만, 자신이 퇴직하거나 병원 신세라도 지게 되면 그들한테 짐이 되지는 않을지 그게 걱정이다.

 

심씨는 “남편의 입원 기간에 정작 치료비보다 간병비가 더 많이 들었다”며 “그 이후 의료실비보험에 간병인보험까지 들어,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만 해도 꽤 된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노동을 11년째 하고 있는 심씨는 손가락·허리 등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다. 빠듯한 생활에 노후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해 걱정이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에 바빠 정년퇴직 이후에는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으로 살아야 할 형편”이라며 “의료비와 노후 준비가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인디뮤지션 임솔잎(가명)씨는 1인 가구다. 음반 작업과 생계 활동을 함께 하려고, 지난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달 160시간 정도 해서 120만원 정도를 벌었다.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집세·공과금·생활비를 감당하고 있다. 작업비를 모아야 하는 만큼, 임씨의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했다.

 

“겨울에는 난방비만 해도 아무리 아껴도 7만~8만원씩은 나가서 더더욱 부담이 돼요. 전기장판이 고장났는데도 구매를 망설일 정도였어요.”

 

최저임금이 곧 임금의 전부이고 이 돈으로 생계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이들한테 최저임금이 갖는 의미는 더없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한국노동패널조사 결과를 살펴보니, 최저임금 수준 임금을 받는 노동자 10명 가운데 7~8명은 가구의 ‘핵심 소득원’(가구주나 그 배우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보조 소득원’으로, 최저임금을 ‘알바 시급’쯤으로 여기는 일각의 분위기에 이들은 갑갑함을 느낀다.

 

“최저임금으로 한달이라도 살아본 뒤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저임금 때리기’에 몰두하는 정치권과 언론 등을 향해 여러 최저임금 생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형마트 노동자 박씨는 “안 아픈 곳 하나 없이 골병이 들 정도로 몸과 마음을 상해가면서 고작 ‘용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창피해서 말을 잘 못 한다뿐이지 다들 생계를 위해 나와서 일한다”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심씨도 “본인들이 와서 직접 (최저임금만으로) 살아보면 차마 그런 얘기를 못할 것”이라며 “정신 나간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한테, 이번 최저임금 인상은 어떻게 다가올까? 인디뮤지션 임씨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임씨는 “계속 시급 6500원에 머물러 있었으면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지 못하고 음악 작업을 미루는 상황이 왔을 것”이라며 “같은 시간을 일해도 한달에 20만원을 더 벌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크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내하청노동자 김씨도 “주 8시간을 일하면 월 150만원은 벌 수 있으니 생활이 조금은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대출금 빨리 갚고, 남편과 한달에 하나씩 자신을 위한 선물을 사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청노동자 심씨는 “월 20만원이 오른다고 해도 애초 받던 월급이 워낙 적어 많은 여유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며 “상여금을 기본급에 녹여서 최저임금 인상에도 실제 임금이 오르지 않은 곳도 많은데 정부에서 이런 ‘꼼수’를 규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원 감축이나 휴게시간 증가 등 ‘꼼수’ 없이 최저임금 인상폭만큼 월급이 많아졌다는 서울 광진구의 한 아파트단지 경비노동자 우아무개(60)씨는 “돈이 모이면 사는 게 생동감 들고 재미있다”며 “그동안 애들 키우느라 노후 준비는 생각도 못했는데, 가족들과 외식도 하고 저축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빼놓지 않았다. 마트노동자 박씨는 “나처럼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한테 최저임금은 정말 절실하다”고 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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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례 방북 취재 “있는 그대로 취재해왔다”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의 방북취재기 대전특강
대전=임재근 객원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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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1  09:3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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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이후 두 차례 방북 취재기, 그리고 차마 방송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제목으로 1월 30일 저녁 7시에 진행된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 초청 강연회.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교육‧문화 활동을 통해 시민들 속에서 평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고 민족공동체 정신을 함양시키는 활동을 펼쳐온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이사장 김병국)는 지난 해 10월과 11월 두 차례 방북 취재를 진행했던 재미언론인 진천규 기자를 초청해 신년특강을 진행했다.

‘2017년 10월 이후 두 차례 방북 취재기, 그리고 차마 방송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 제목으로 1월 30일 저녁 7시에 빈들공동체 교육장(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진천규 기자는 두 차례 방북취재에서 찍어 온 사진 보따리를 풀어냈다.

한겨레신문과 미주 한국일보 기자를 지낸 진천규 기자는 지난 해 10월 6일부터 8박 9일, 11월 10일부터 12박 13일 총 22일 간 신의주, 평양, 원산 등을 취재해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북한 모습을 여과 없이 국내 언론에 알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두 정상이 손 맞잡고 올린 역사적 장면을 기록한 기자’

 

   
▲ 진천규 기자가 자신이 찍은 ‘2000년 6월 14일 목란관에서 남북 정상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치켜드는 장면’을 보여주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진천규 기자는 자신을 소개하는 일화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흡입됐다. 그는 한겨레신문사 사진기자로 재직하면서 1992년 남북고위급회담 중 평양에서 열린 6차 회담 당시 2박 3일 동안 방북 취재에 이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방북 취재에 동행했다며 두 차례 방북 취재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그중 2000년 6월 14일 목란관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남북 정상들이 공동선언에 구두로 합의를 하며 박수 소리가 나자 이 역사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자고 자신이 제안해 남북 정상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치켜드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큰 소리로 ‘우리 배우한번 합시다’고 말하며 흔쾌하게 호응했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는데, 북한에서도 이 일화를 지난 2005년 6월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평양상봉의 나날에’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바 있다.

진천규 기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 할 수 있었다”며, 북측에서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난해 북측이 자신의 방북 취재를 받아들인 이유 중에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이지만 방북 취재 가능

진천규 기자는 2001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지만,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방북취재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영주권자들의 방북은 ‘허가’사항이 아니라 ‘신고’사항이라는 것.

또한 지난 해 여름,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시민권자들에게 북한여행 금지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민권자들은 북한여행이 불가했지만, 그는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방북 취재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행히 북한 당국에서도 취재를 허용해서 엄혹하던 시절에 운 좋게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며,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방북한 최초의 민간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비자를 보여주며 방북 취재 경위를 설명하는 진천규 기자.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 진천규 기자가 방북 취재시 발급 받은 비자에 국적이 ‘남조선’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있는 그대로, 가서 본 것 그대로 취재해왔다”

그는 “두 차례 방북에서 유심히 살펴본 부분은 ‘가장 많이 바뀐 것이 무엇’이며, ‘유엔제재를 비롯해 심지어 중국에서도 제재를 가한 엄혹한 제재 속에서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였다”며 “이 부분을 유심히 살피면서 취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백화점에서 장을 보는 장면이나 장보면서도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말이나 글로 백번 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직접 보여 주니 진보, 보수를 떠나서 의외로 놀랐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있는 그대로, 가서 본 것 그대로 취재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에 보급된 휴대폰이 400만대에 달한다”며, “북한 사람들이 핸드폰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하나 바뀐 부분은 ‘택시’였다”며, “마트나 역 앞에 심지어 옥류관 앞에도 택시들이 즐비했다”고 밝혔다. 그는 “평양 시내에 ‘려명’, 'KKG' 등 4개의 택시회사가 있고, 6천대 정도의 택시가 운행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평양뿐만 아니라 신의주와 원산에서도 택시를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진천규 기자는 “비행기를 타고가면 1시간이면 평양에 도착할 수 있지만, 황금벌판의 모습도 보고, 기차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도 지켜보고 싶어 두 차례 모두 단둥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며, 자신의 비자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보여준 비자는 여권에 도장을 찍은 것이 아닌 별지 비자로 국적에 ‘남조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또한 북한의 전기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가 두 차례 방북한 22일 동안에 “정전이 된 경우는 1~2초간 딱 한번 있었다”며, “그 외에는 정전은 없었고, 밤에도 개선청년공원, 려명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개선문, 평양역 등 야경을 볼 수 있었다”며 관련 사진들을 보여줬다.

 

   
▲ 진천규 기자 초청강연에 7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북측, “검열 없었다” “있는 그대로 제대로 좀 보여 달라”

진천규 기자는 취재한 사진과 동영상에 대한 북측의 검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사진과 영상에 대한 북측의 검열은 없었다”며, "북측은 '자신들의 ‘최고 존엄’ 영상이 훼손되지 않게 할 것 등 몇가지만 주의해 달라'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측에서는 남쪽 언론이 북쪽을 너무 왜곡하기 때문에 억울해한다”며, “‘진 선생은 이점들만 지키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제대로 좀 보여 달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진 기자는 “북한 사회의 특징을 생각하면 북측의 그런 요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특히 북한 사회는 광고가 없고, 대신에 야외 선전물의 대부분이 북한 지도자들의 동상이나 그림이 포함된 선전물이기 때문에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지나가면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지 못하게 하는 것도 북한이 거리 선전물에 있는 그들의 ‘최고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시간에 걸친 이번 강연에서 진천규 기자는 지난 두 차례의 방북취재 동안 찍은 사진 중 300여장으로 추려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둥에서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오는 동안 기차 안팎의 모습과 려명거리,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를 비롯한 평양 거리뿐 아니라, 려명거리 살림집 내부모습도 소개했다.

또한 중앙동물원, 인민빙상장, 초등학원, 애육원, 양로원을 비롯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옥류관 냉면 등 그가 먹은 음식, 그리고 마식령 스키장과 원산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의 모습까지 그가 담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진천규 기자는 “아직도 유력지라고 하는 언론에서 북한에 대해 흑색선전 내지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보도하곤 한다”며, “거짓말하지 말고, 확인된 이야기만 해야 한다”며 언론의 문제를 꼬집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생각보다는 보고 들은 것만 전달하는 기자 본연의 역할만 하면 된다”며 자신의 취재정신을 명확히 했다.

 

   
▲ 진천규 기자의 방북취재기 강연에 흥미와 관심을 보이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통일TV 창간으로 통일의 작은 밑거름이 되고파

방북취재 이야기를 끝마친 진천규 기자는 한동안 기회가 닿는 한 자신의 취재기를 알리는 강연에 매진할 예정이고, 평창올림픽이 끝난 이후는 방북 취재를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케이블 방송 ‘통일TV’를 준비 중에 있다”며, “북한의 주의, 주장은 뺀 역사드라마나 자연다큐멘터리, 스포츠, 어린이 만화영화 등 영상물을 제공하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지난 70여 년 동안 단절된 남과 북의 문화교류를 열어 통일의 작은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수정-오전 11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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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인터뷰] 연희미용고 학생이 ‘미용사’란 꿈 대신에 마주한 세상

졸업 앞두고 폐교 날벼락… 수업거부에 나선 학생들 “우리 선생님들 돌려주세요”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8-01-30 22:42:46
수정 2018-01-30 22: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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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우리들의 선생님들을 돌려주세요.”

30일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 위치한 미용 전문 고등학교인 서울연희미용고를 찾았다. 학교 입구에서부터 게시판과 계단벽면, 심지어 학교 교무실에도 “선생님을 돌려달라”는 수많은 쪽지와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지난 26일 금요일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담임 선생님 다섯 분의 복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400여명의 전교생은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였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하고, 학교 법인화를 요구하기 위해 모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 모인 학생 대부분은 졸업 후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진학했다고 말했다. 꿈을 위해 통학시간이 왕복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군포나 통학이 불가능한 전라남도·광주·제주도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하 나 같이 최초로 세워진 미용학교의 명성과 학생들을 위해 온갖 열의와 성의를 다하는 선생님들을 믿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들 중 상당수가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사실상 학교는 폐교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학교 졸업식을 앞둔 지난 26일(금요일) 학교 측은 이들 선생님들에게 해고통지서를 나눠줬다. ‘신분증명서 반납과 업무 인수인계, 출근은 29일(월요일)까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학생들 생활기록부조차 작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고 선생님 중에는 학생들의 학교생활정보를 담당하는 선생님도 포함돼 있었다. 최근 설립자로부터 학교를 상속받은 박모씨 등은 학생들의 올바로 교육받을 권리나, 선생님들의 교권은 안중에 없었다. 학교를 이어갈 생각이 없던 이들은 부동산 매각하듯 팔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폐교절차를 밟아갔다. 해고사유 또한 황당했다. ‘2018년 학생 수 감원에 따라 학교 존속을 위한 경영상 해고’가 그것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돌려 달라”며 일어선 이유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도 연희미용고 전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했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도 연희미용고 전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했다.ⓒ연희미용고 학생 제공
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헤어디자이너를 꿈꾸던 17세 학생의 호소
“우리 선생님들이 왜 해고당해야 하나요”

 

연희미용고에서 만난 2학년 최은진(17) 양의 꿈 역시 ‘미용사’였다. 경기도 군포에서 통학을 한다는 최양은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 반대하는 부모님을 수차례 설득시켜 지원을 하게 됐다고 했다. 최양은 처음 학교에 합격했을 당시를 심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학교 발표가 있는 날, 시간을 딱 맞춰서 홈페이지에 접속했어요. 합격이었어요. 함께 있던 친구들도 모두 기뻐해주고, 저도 좋아서 부모님께 연락드리고, 담임 선생님도 잘 됐다고 해주셨어요. 꿈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됐다는 희망을 느꼈어요. 그런데…”

그만큼 가고 싶었던 학교이기에, 지각과 결석 한 번 없이 1년을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수학선생님은 자신 없던 수학에 처음으로 흥미를 갖게 해줬고, 헤어미용·피부미용·네일아트·메이크업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고 말했다. 그런데 학교설립자이자 교장이 지난해 7월22일 숨지면서 폐교 소식이 돌았고, 불안과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동안 수업을 받아왔다고 지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던 중 지난 26일 선생님 다섯 분이 한꺼번에 해고를 당하면서 “학생들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폐교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부모님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설명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졸업은 보장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애들도 다 갈팡질팡 못하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7~8월 계속됐어요. 두려움에 떨었어요.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시면 항상 학교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저희를 안심시키며 그렇게는 절대 안 될 거라고 했어요.”

30일 오전 서울연희미용고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여있는 모습
30일 오전 서울연희미용고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지하 1층 예배당에 모여있는 모습ⓒ민중의소리

그나마 학교 폐교를 막고자 애썼던 선생님들이 해고를 당하자, 최양을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분개했다. 최양은 “금요일(지난 26일) 선생님들이 부당해고를 당하고 단톡방에 미안하다는 글을 올렸다”며 “이 소식을 듣고 선배들과 힘을 합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교에 비리가 정말 심하다는 얘기를 들어왔다”며 “이번에 학교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은 물론,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부당해고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양의 말처럼 학교 설립자이자 지난해 숨을 거둔 박모 교장은 그동안 학교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내 쓰듯 함부로 유용해 왔다. 현재 학교를 상속받은 자녀들을 각각 국제협력팀장과 부팀장으로 허위 임명시킨 뒤 학교 돈으로 해외 현장학습에 동행시키는가 하면,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단체에 회비 6천여만원을 냈던 것이 시교육청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잠시 교육당국으로부터 받아왔던 인권보조비가 끊기기도 했다. 학교는 뻔뻔하게도 운영을 잘못한 지점은 감추고, 교사들에게 고통분담을 강요하면서 인건비를 삭감했다.

이런 학교의 행태에 분노한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주말에 피켓을 만들었다. 한 학년 높은 선배들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서 준비를 했다고 최양은 전했다. 그리고 월요일(29일) 선배들을 따라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시작했다. 현 교장이 있는 5층 교장실로 올라가 선생님들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고 외쳤다. 이 같은 사태를 설명하는 최양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선생님들이 잘못한 것도 없고, 해고할 만한 사유도 없는데, 저희와 계속 함께 했던 선생님들인데, 그 선생님들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니까 모두가 울컥하고 슬퍼하고…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에요.”

지난 29일에 이어 30일에도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하교 교사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하며 수업을 거부했다.
지난 29일에 이어 30일에도 연희미용고 학생들은 하교 교사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를 촉구하며 수업을 거부했다.ⓒ연희미용고 학생 제공

‘학교의 횡포’, ‘교육청의 무책임’에 짓밟힌 학생들

최양은 답답한 마음에 교육청에 전화를 걸었다. 최양은 담당자를 찾고 “저희 한 번만 더 와주셔서 저희 학교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담당자의 답변은 “이 상태로는 안 된다”였다. 다짜고짜 수업에 복귀하란 말 뿐이었다. 이에 최양은 “수업을 하려면 선생님들이 필요한데, 안 계시다”고 했지만, 담당자는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학교기물을 마음대로 부수고, 지금 질서를 유지하지 않기에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고 협박조에 가까운 목소리로 몰아 부칠 뿐이었다. 학교 곳곳에 대자보와 쪽지를 붙이긴 했지만, 기물을 부순 것은 없다고 학생들은 황당해 했다.

또 교육청 담당자는 “교감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지도하지 않냐, 당장에 모여서 전화만 하라고 지도하고 있나”라며 마치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시켜서 교육청을 압박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쏘아 붙였다. 교육청 담당자와 통화했던 내용을 쏟아내는 최양은 교육청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최양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거고, 이 시위도 그렇고, 선생님들은 학교에 오도록, 수업에 들어가도록 계속 얘기한다. 왜 선생님들이 시키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묻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양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전날 학교상황을 살피러 온 교육청 관계자의 행동에도 실망하고 있었다. 29일 오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부모들도 학교에 찾아와 사태해결을 촉구하자, 교육청 관계자들은 이날 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상속자인 현 이사장 두 명도 참석한 자리였다. 학생들과 학부모·선생님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교육청 관계자들은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은 사유재산이어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30일 연희미용고 상황
30일 연희미용고 상황ⓒ민중의소리

꿈을 이루기 위해 진학한 학교에서 최은진 양이 만난 세상은 ‘부당해고로 무참히 짓밟힌 선생님들이 교권’, ‘폐교 수순에 따른 진로진학에 대한 위협’, ‘학교 권력자의 교비유용’, ‘정부기관 관계자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삼키듯 주먹을 움켜쥔 최양은 “학생들 의견 하 나도 안 들어주는 교육청에 전화를 할 때마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들 부당해고 당하고, 마음도 추스르기 어려웠을 텐데, 학교는 가족들에게 해고통보사실을 먼저 알려버리고. 가정까지 건드리는 게 너무 속상해요. 그리고 저희도 한 가정의 자녀고 대한민국의 미래잖아요. 이렇게 어렵게 용기내서 아우성 치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듣고 저희에게 좀 관심을 가져줬으면… 응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한편, 학부모들은 31일 오전 11시 학교에 모여 함께 서울시교육청을 방문할 계획이다. 또한 해고당한 5명의 교사들도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계속해서 출근을 이어갈 예정이다. 학생들은 교육청 앞 집회시위를 오는 2월2일 경찰서에 신고한 상태며, 해고 교사들의 복직과 학교 법인화가 해결될 때까지 수업거부와 집회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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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의 8년과 안태근 검사의 8년

피해자는 "수치심에 매일 밤 가슴 쥐어뜯어"... 가해자는 권력 등에 업고 출세 가도

18.01.30 16:15l최종 업데이트 18.01.30 19:10l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한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은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검 수사팀과의 부적절한 '돈 봉투 만찬' 파문으로 면직 처분됐다. 이전까지 그는 검찰과 법무부에서 주요 요직을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검사'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박근혜 정권에서 권력의 핵심과 연결된 검찰 실세였다. 피해자 서 검사가 고통 속에 보냈던 8년 동안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국회의원에게도 뻣뻣했던 검찰 실세
 

안태근 검찰국장 정상출근 '돈 봉투 만찬사건'의 당사자인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이 1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17.5.19
▲ 안태근 검찰국장 정상출근 '돈 봉투 만찬사건'의 당사자인 안태근 법무부 검찰국장이 19일 오전 경기도 과천시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17.5.19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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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국장은 지난 1987년 제29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94년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법무부 검찰국 검사,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2부장, 법무부 정책기획단장, 대검 정책기획단당, 서울서부지검 차장 등을 지냈다. 2013년에는 박근혜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법무부 인권국장에 임명됐고, 2015년에는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이 됐다. 법무부 검찰국장은 고검장 승진 1순위로 꼽히며, 검찰총장추천위원회에도 참석하는 최고 요직이다. 

 

안 전 국장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돈 봉투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16년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출석해 '부산 엘시티 비리 의혹' 사건과 관련해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질문을 받았다. 노 의원이 "엘시티 사건에 대해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보고가 되고 있느냐"라고 묻자 안 전 국장은 "기억이 없다"라고 답했다.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의 검찰 수사 개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에 노 의원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보고 안 했으면 안 한 거지, 보고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라고 질책하자 "보고 안 했을 수도 있고. 아니, 제가 보고한 기억이 없다"라고 말했다. 노 의원이 "답변을 그따위로 하는가? 보고한 사실이 없는 게 아니라 기억이 없다고?"라고 하자 "그럼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을 대신해 질문하는 국회의원에게 성의 없는 답변만 늘어놓자 노 의원은 "막장입니다. 막장"이라고 혀를 찼다. 

안 전 국장은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우병우 라인'이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안 전 국장은 검찰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검찰국장으로 우 전 수석의 최측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수차례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압수수색 정보가 새어 나가는 등 우 전 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가 번번이 어긋나자 안 전 국장의 이름이 거론됐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던 박영수 특검팀은 안 전 국장과 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2016년 7월부터 10월 사이에 1000차례 이상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검찰은 우 전 수석의 가족회사 ㈜정강 등을 압수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안 전 국장은 "우 수석과 업무상 통화를 했다"라고 해명했지만, 4개월간 1000차례 통화는 하루 8건 이상을 했다는 것으로 단순 업무상 통화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회의원 앞에서도 뻣뻣하고, 정권 실세와도 막역했던 안 전 국장이 시련을 겪은 것은 지난해 6월 '돈봉투 만찬'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지난해 법무부·대검찰청 합동감찰반에 따르면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특별수사본부(특수본) 간부 6명, 검찰국 과장 2명이 참석한 만찬 자리에서 돈봉투를 돌렸다. 안 전 국장은 특수본 간부들에게 70만∼100만 원씩, 이 전 지검장은 법무부 과장 2명에게 100만 원씩 격려금을 줬다.

이에 안 전 국장은 곧장 사의를 표명했지만, 징계절차가 진행되면서 우선 대구지검으로 좌천됐다. 결국, 지난해 6월 법무부는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에게 중징계인 면직을 의결했다. 면직이 확정됨에 따라 이 전 지검장과 안 전 국장은 퇴직금과 연금은 정상적으로 받지만, 2년간 변호사 개업은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면직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법원에 행정 소송을 낸 상태다.

안 전 국장은 이후 최근 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앤조이> 보도에 따르면 안 전 검사는 지난해 10월 온누리교회에서 간증(신앙고백)을 하며 "30년 동안 공직자로 살아오며 나름대로 깨끗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순탄하게 공직생활을 해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은 본의 아닌 일로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고, 주변의 많은 선후배·동료·친지들이 '너무 억울하겠다'며 같이 분해하기도 하고 위로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돈봉투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공직을 떠났다는 얘기다. 그는 또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얼마나 마음고생 많냐고 묻지만,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주시고, 교만을 회개할 기회를 주신 거라 생각하니 처음 느꼈던 억울함과 분노도 사라졌다"라며 "믿음 없이 교만하게 살아온 죄 많은 저에게 이처럼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라고 말했다. 안 전 국장의 간증 영상에는 그가 울먹이는 모습도 담겨 있다.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올라..."
 

 JTBC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
▲  JTBC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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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국장이 권력을 등에 업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동안 서지현 검사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그는 3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지난 8년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매일 밤 가슴을 쥐어뜯었다"라며 "그날 '그 사람'의 그 눈빛이 떠오르는데 잠을 이룰 수가 있었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안 전 국장을 뜻한다. 서 검사는 또 "그날 충격이 너무 커 화장실에 쓰러져 있다가 집에 있는 아이 생각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귀가했다"라며 "이후 그날의 트라우마로 유산을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앞서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을 통해 "2010년 10월 30일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 장관을 수행하고 온 당시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라며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지만, 그 후 어떤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서 검사는 "갑작스러운 사무 감사를 받은 이후 검찰총장의 경고를 받고, 통상적이지 않은 인사발령을 받았다"라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인사발령의 배후에 안 검사가 있다는 것을, 안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현 자유한국당 의원인 당시 최교일 법무부 검찰국장이 앞장서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에 안 전 국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오래전 일이고 술을 마신 상태라 기억이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며 "다만 그 일이 검사 인사나 사무감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사실상 성추행 사건 자체는 부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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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박종철, 31년만에 경관 자필기록 확인

<단독> 소영환 교도관, 강진규 경사 옥중 최초기록 보관
이승현/김치관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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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30  19: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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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박종철!, 아! 1987년!

   
▲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그곳 509조사실에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역사적인 87년 6월시민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만큼, 당시 폭압적 국가권력에 의해 빈번하게 자행되었던 사건으로는 드물게 널리 알려졌지만, 그날의 전모를 밝혀 진실과 정의를 세우려는 노력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86년 10월 말 건국대에서 1,290명의 대학생을 대량 구속시킨 전두환 세력은 이듬해인 1987년 초반까지 당시 안기부와 보안사, 치안본부 등으로 초법적인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핵심 수배자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재집권에 최대 장애가 되었던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허문데 이어 핵심지도부를 파괴하려던 전두환 세력의 계획은 필사적이었고 그만큼 빠른 결과를 얻기 위해 그동안 당연시하던 고문도 더욱 가혹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 고문치사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악랄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축소·은폐·조작했다.

1월 14일 저녁 시신을 비밀리에 화장 처리하기로 하고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발표를 계획하면서, 그들은 박종철의 죽음을 ‘단순 쇼크사’로 조작하려고 시도했으나 고문치사를 직감한 검사의 부검 강행 등 양심적인 인사들의 노력에 막혀 실패로 돌아갔다.

1월 15일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사건 직후 박종철을 검안한 전문의가 물고문에 의한 사망가능성을 시사하는 증언을 했지만, 안기부 주도의 관계기관 대책회의 결정에 따라 검찰은 17일 오후 수사권을 포기하고 경찰에 자체 조사를 맡겼다.

고문치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경찰은 19일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인한 불상사’ 의견으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을 고문경관으로 구속 송치해 마무리를 시도했다.

고문경관 숫자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한 것은 경찰이 일상적이고 조직적으로 고문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업무과욕으로 인해 발생한 불상사라고 조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끝내 역사로 살아나는 ‘진실’

   
▲ 옛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다. [사진출처-박종철기념사업회]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그해 1월 20일~23일까지 진행된 1차 수사뿐만 아니라 이후 재수사, 재재수사, 이듬해 1월에는 재재재수사까지 4차례에 걸쳐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번번이 사건의 진실을 외면했다. 매번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면 재수사가 결정되었고, 그때마다 그동안 진행된 수사는 졸속, 짜맞추기, 축소, 은폐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근 영화 <1987>이 개봉되고 영화를 관람한 수백만 관객이 30년전 박종철과 6월항쟁에 대해 다시 뜨거운 관심을 보이면서 그날의 ‘진실’이 오늘로 불려 나오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성명은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에 골몰하던 전두환 세력을 궁지에 몰아넣고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해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성명은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이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3명 더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바깥으로 ‘비둘기’(비밀서신)를 내 보냄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부영은 영등포교도소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2월 23일 한재동·전병용 교도관을 통해 이 소식을 외부에 전했으며, 비둘기는 4월 7일까지 3차례에 더 교도소 담장을 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이부영은 훗날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사건 진상폭로는 내가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쓴 특종’이라고 회고하면서 ‘민주교도관들의 용기있는 협력’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31년 만에 드러난 역사의 한 조각, 더 늦출 이유 없다

   
▲ 1987년 1월 20일 당시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담당 교도관이었던 소영환씨가 31년간 보관하고 있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특별사동에는 고문경관으로 구속 수감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실을 밖으로 내보낸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 등이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통일뉴스>는 박종철을 고문해 치사에 이르게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 최초 2명의 고문경관 중 한 명인 강진규 경사(당시 30살)가 1987년 1월말께 편지지 10쪽 분량으로 작성한 자필 진술서 원본이 있다는 제보를 오래 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영화 <1987>로 드디어 이 문건이 세상에 드러날 멍석이 깔린 셈이다.

제보자는 당시 강진규가 수감되어 있던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의 본무 담당으로 근무한 소영환 전 교도관(당시 30살).

1990년 교도관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법률전문가로 일하고 있는 소영환 씨는 1987년 1월 말께 자신이 강진규를 설득해 자필 진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그 후 31년간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본을 보관해 왔으며, 그 내용을 당시 처음으로 이부영에게 구두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16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소 씨가 근무하는 서울 서초구 한 법률사무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원문과 당시의 복잡한 심경 등을 기록한 소 씨의 일기장 등 자료를 확인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원문의 언론 공개는 처음이고, 강진규를 취재해온 <SBS>가 합석했다.

1981년 12월 5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정직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일해 온 소 씨는 1987년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5학년에 다니던 중 휴가를 내고 협력대학인 서울대학교에서 시험을 본 후 1월 19~20일께 업무에 복귀했다.

그때 “한 사람은 자살 가능성이 있으니 특별히 관리하라는 업무지시를 받고 근무에 돌입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영등포교도소 9사 특별사동은 원래 여사로 사용되던 곳인데, 이부영은 1986년 5.3인천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그해 10월 잡혀와 수감 중이었고 이듬해 1월 20일 조한경 경위(당시 42살)와 강진규가 같은 사동에 수감되었다.

박종철에 대한 고문치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경찰 지휘부가 ‘일부 경관의 지나친 직무의욕으로 발생한 불상사’라는 자체 발표와 함께 1987년 1월 19일 조한경과 강진규를 2명의 고문경관으로 지목해 구속 수감했으나 당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영등포교도소로 온 것이다.

살해 위협을 느낀다며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불안해했던, 특별관리가 필요한 ‘한 사람’이 바로 강진규였다.

고문 가해 당사자가 쓴 최초의 현장 기록

   
▲ 소영환씨는 1987년 2월 27일 ‘眞實’(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일기로 남겼다. 그는 일기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시간과 세월 그리고 역사 속에 묻어야 할 일들도 많이 있다”며, “나는 오늘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물론 내 자신이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라고 썼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강진규는 1957년생으로 자신과 비슷한 연배인데다 법학도였던 소 씨에게 자신은 고문에 가담한 바 없으며 여기 와 있을 이유도 없다는 하소연을 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아내와 변변한 외식 한번 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도 오명을 남기게 된 데 대해 미안해하면서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스스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수호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가법 적용을 받아 10년 중형이 점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불안해했다.

소 씨는 당시 심각한 불안과 심경변화를 겪고 있던 강진규에게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다면 사실대로 진술을 하는 게 좋겠다. 담당검사에게 다시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할 테니 조사에 응하라”고 조언했고, 강진규는 구속수감 일주일 쯤 후인 1월 말께 사흘에 걸쳐 10쪽 분량의 자필 진술서를 작성했다. 제출 목적으로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바로는 2월 초순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경관들은 가족과의 면담에서 고문에 가담한 3명이 경관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설했고, 이후 경찰 상급자와의 면회에서도 “억울하다, 사실을 이야기하겠다”며 갈등을 빚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회유와 압박이 가해졌고 그 와중에 2월 23일 이부영의 비둘기가 바깥으로 전해진 것이다.

강진규의 자필 진술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직후 작성한 최초의 기록이며, 자기변호를 위해 쓰인 동기를 감안하더라도 축소·은폐·조작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현장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당시 현장을 진실에 가깝게 복원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로 보인다.

강진규는 진술서에서 자신은 대공분실 수사 4반 소속으로 여건주 반장과 1월 13일 저녁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에 따라 민식(가명)의 자취방에 잠복근무를 하러 갔다가 자물쇠로 잠겨있어 남영동으로 철수, 당시 영하 14도의 추운 날씨에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여러 병 마셨다고 기록했다.

이튿날 아침 8시 55분께 남영동 사무실(공안분실)로 출근하여 10시 20분께 1반 반장인 조한경 경위와 황정웅, 반금곤 등으로부터 5층 8호실에 박종철이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관련 수배자인 박OO 수사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이후 두 번이나 조사실을 옮겨가면서 고문을 가해 치사에 이르게 된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강진규 경사가 1987년 1월말께 영등포교도소에서 자필로 작성한 사건 경위 진술서(요약)

1월 13일 5시-대공3부 5과 2계 사무실에서 박윤택 계장으로부터 전국학생운동지도부 검거를 위한 업무지시를 받았다. 민식(가명) 자취방 잠복근무하며, 중요수배자인 최OO(서울대 81)의 첩보에 따라 여자친구인 OOO(OO대 대학원) 소재파악 검거할 것.

1월 13일 6시-4반장인 여건주와 함께 학생운동 선전책 민식 자취방 갔으나 자물쇠로 잠겨있어 철수. 남영동 사랑방다방 옆 포장마차에서 술 마심. 영하 14도의 날씨. 중국집에서 고량주 5병 마심.

1월 14일 08:55-사무실 출근, 10:00-1반장 조한경, 황정웅 등 사무실에서 (수배자인)박종O에 대해 이야기 함, 10:20-5층 심문실에서 1반 조한경, 황정웅, 반금곤이 학생 1명 데리고 있고, 하종O(서울대학원 인류 1년) 연행, 1반에서 공작첩보 제출해 박종O에 대해 같이 수사하자고 함.

반금곤과 같이 8호실에 가보니 이정호가 있고, 박종철이 있었음.

□ 경찰 : 아버지도 공무원(부산시청 수도과)인데 부모님과 가족들 생각도 좀 해야 되지 않겠나

■ 박종철 : 나는 지금 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실 외에는 모른다

□ 박종O은 어떻게 알고 있나

■ 선배를 통해 알고 있다

□ 여기에 자세히 써라

본인(강진규)은 14호실에 있다가 8호실로 왔는데 6과 1계 김부O 경장이 어떤 피의자를 데리고 와서 좀 비켜 달라고 하였다. 14호실에 있던 조한경한테 가서 김 경장이 8호실을 비워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자 조한경이 ‘아무 곳이나 옮기지 뭐’ 라고 하여 옆방 9호실을 보니 아무도 없어서 옮겼다. (당시 9호실에는 이정호만 있었음)

박종철이 86년 11월 말에 강OO(서울대 OO학과)이 박종철 하숙방에 와서 자고 가고, 87년 1월 8일 와서 돈 10,000원을 준 사실이 있다고 진술.

14호실에 있던 조한경과 반금곤이 9호실로 왔고, 조한경이 9호실서 신문, 고함소리.

□ 조한경(높은 언성으로 심문하면서) 이놈 혼좀 나봐야 되겠느냐, 이놈 혼좀 내라고 고함.

□ 강진규 : 너 입고 있는 옷 다 벗어

■ 박종철 : (순순히 옷벗으면서)전부 다 벗어야 하느냐

□ 강 : 그래

■ 박 : (옷 전부 다 벗음)

□ 강 : (조한경 반장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네 수사 총책임자이니 사실대로 말씀 드리라

□ 강 :(이때 반금곤은 욕조에 물 채우고 있었음)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계속 대답)

□ 조 : (화가 나서) 이 자식 혼 좀내라 (큰소리치면서) 사람 더 오라.

이때 이정호가 14호실에 있던 황종웅을 불러옴. 반금곤은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을 뒤로 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고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감. 물을 먹어보라고 하자 박종철이 욕탕 안으로 머리를 숙여 머리 전부를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한 뒤 일으켜 세움

□ 조 : 박종운 어디 있느냐

■ 박 : 요즘 독서실에서 기거하는데 독서실 티켓은 본 사실이 있다

□ 조 : 그 독서실이 어디 있느냐

■ 박 : 모른다

□ 조 : 너 혼 좀 나야 말하겠느냐

■ 박 : (계속) 모른다

-이때 반금곤이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음.

조한경은 “혼 좀 내라”며 나감

욕조 앞의 박종철 왼쪽에 황정웅이, 오른쪽엔 반금곤이 박종철의 팔과 몸 사이로 각각 손을 넣어 양 어깨를 누르고 다른 한 팔은 박종철의 머리를 잡음. 이정호는 박종철의 양 다리를 들고 욕조 안으로 넣음. 본인(강진규)은 이때 바지를 벗고 팬티 차림으로 욕조 안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물이 차가워서(영하 16도) 욕조위에 올라서 있었음.

-반금곤이 약 1분 30초가량 뒤에 박종철의 머리를 들어 “어디 있느냐”고 하자 박종철이 다시 “모른다”고 하여 다시 위의 자세로 욕조 안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누르고 있는데 조한경이 들어와 의자에 앉았음(약 20~30초)

-끌어내라고 하여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잡은 곳을 놓자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을 보고 조한경이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가 박종철을 밖으로 끌어내어 바닥에 눕히자(이때 11:20경) 조한경이 갑자기 침대위에 눕히라고 함.

-여건주 4반장이 조한경에게 뭐라 말하고(물기를 닦으라?) 나가면서 같이 눕히는데 박종철이 힘없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음

-조한경이 빨리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하자 황정웅과 이정호가 나감. 조한경은 박종철의 입에 인공호흡을 하고 본인(강진규)은 인공호흡 하는 것에 맞춰 박종철의 가슴을 누르고 반은 전신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4반 김기호 경장이 왔음.

-본인(강진규)과 김기호 교대한 후 계장인 박원택과 과장 유정방 등 오고 조금 있다 의사가(중앙대 용산병원 오연상) 도착(11:40)

-조한경이 나가있으라고 하여 5층 14호실에 가 있었음

1월 14일 오후 1시 30분-박종철 사망, 지금 경찰병원으로 옮기고 있다고 함.

1월 14일 오후 3시-황정웅 보고서 작성, 주심문자는 조한경, 부심문관은 강진규라고 기재(계장과 과장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최대한 잘될 것이라고 안심시킴). 박원택 과장이 보고함.

1월 17일(토)-단장, 경무관, 권석진이 조한경과 본인(강진규)를 불러 나감, 강민창 본부장 전화 옴(언론보도가 나와서 형식적으로라도 감찰조사는 해야 한다. 장소를 호텔로 하자. 조사대상은 보고서대로 조한경, 강진규, 계장으로 하자, 보고서 내용도 쇼크사로 하자. 조사관은 감찰담당관, 경무관 조용우외 2명 정도로 간단히 할 것-그러나 토요일에 호텔이 없다고 해서 치안본부 2대(신길동 소재)로 정하고 1518(사무실차) 타고 계장 박원택과 조한경, 본인 강진규이 특수 2대에 도착함)

오후 9시-갑자기 장소 바꾸고 특수대 직원으로 교체, 정신없이 구속

1월 19일-구속영장 발부.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잠

1월 20일-영등포교도소로 바로 이관. 부장검사 진창언으로부터 검찰조사 받음, 검사관 상무 검사 박상옥

1월 22일- 다시 검찰 조사

*이 내용은 지난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열람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 내용을 메모해 작성되었다.

기록이 기억으로, 기억은 행동과 역사로 이어진다

   
▲ 소 씨가 남긴 또 하나의 기록. 당시 공소장에 기록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의 그림과 조직도 등이 그려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의 진술서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자체 인쇄한 편지지에 쓰였다.

편지지 5장의 앞·뒷면 10쪽에 빼곡히 작성되었으며, 여기에 소 씨와 강진규가 사실 확인과 보완을 위해 주고받은 문답 및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스케치 등을 적은 두 쪽 분량의 메모도 덧붙어 있다. 볼펜으로 양면을 다 쓴 자필 진술서와 달리 메모는 연필로 줄친 편지지의 뒷면만 사용했다.

소씨는 지난 16일 기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31년 만에 고문치사 가해 경관의 자필 기록을 공개하게 된 데 대해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당시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할 뿐이며,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영화 <1987>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조그마한 부분이지만 이번 증언 등을 계기로 당시의 진실이 바로 알려지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16일과 23일 두 차례 이어진 만남에서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자필 진술서를 작성한 당사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라면서 기록 원본에 대한 촬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기자와 만난 직후 연락이 닿아 지난 17일 31년 만에 처음 만난 강진규가 “편지(진술서)가 공개되면 사돈들에게 면목 없고 아직 자식들의 혼사가 남아있는 동료(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며, “인권법을 전공한 법률가로서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진규는 이날 소 씨에게 “그 일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일이고 지금은 몇몇 사람만 만날 뿐 은둔생활과 다름없다”고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고 한다.

위에 별도 기사로 소개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23일 촬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고문 가담한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 과연 기대할 수 있나

   
▲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26일 통일뉴스와 만나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하루 빨리 공개되기를 기대했다. 또 경찰을 비롯해 전근대적 고문을 일삼았던 공안세력의 뼈아픈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이후 최초로 고문치사에 가담한 당사자의 입으로 고문경관이 2명이 아니라 5명이라는 핵심적인 진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강진규의 자필 진술서는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고문치사 사건 발생 후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겪던 가해 당사자가 보름 이내의 짧은 시간 내에 그것도 제출 목적이 아니라 직접 증언의 성격을 담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6일 오전 광화문 사무실에서 만난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강진규도 그 때 구속되어서 자기가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이행한 것에 대해 뉘우친 것 아니겠나. 그래서 고문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뉘우친 내용을 담은 것인데,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면서도 “이제 정리하는 시점에서 강진규의 문서가 공개되는 것은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의미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 공안사건을 다룬 가해자들의 경우 그들만의 오래된 조직과 이권 등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소 씨가 강진규를 설득해 자료 공개를 하도록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사람의 자료가 이제 그곳 4층에 있는 박종철기념관으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경찰이 아직도 스스로 책임있는 정리도 없이 남영동을 관리하는 상황에서 이번 자료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넘겨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이부영 운영위원장은 1987년 1월 수감자 신분으로 영등포교도소 내에서 바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관련 소식을 보낸 것과 관련해 최근 제기되는 몇 가지 새로운 주장에 대해서는 “새롭게 검토할 일은 특별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 씨가 특별사동 근무 교도관이었고 그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내용을 들은 바 있다”고 확인했지만 “고문치사 사건의 가담자가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전에 한재동 교도관으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소 씨로부터 전해들은 강진규의 진술은 그가 가해 경관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믿을 수 없어서 안유 보안계장으로부터 다시 확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소 씨가 당시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상대하지 않고 들은 내용도 가급적 잊어버리려고 했다. 한재동 교도관과 안유 보안계장은 당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작성한 ‘비둘기’를 밖으로 내보낸 한재동 전 교도관을 29일 안양 근무지에서 만났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부영 운영위원장이 ‘비둘기’를 날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재동 당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은 29일 오후 안양 근무지에서 기자와 만나 강진규 자필 기록에 대해 “며칠 전 이부영 의원과 만나서 처음 봤다”며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자세히 기록해 놨더라”고 말했다.

한재동 전 교도관은 “나는 당시 공장담당이었는데 5시에 폐방하면 특사 바로 옆 직원이발소에서 대기하다 6시에 퇴근하게 되는데, 그 시간을 이용해 이부영 의원을 만나곤 했다”며 “소영환 교도관이 못 오게 했으면 내가 들락거릴 수가 없었는데, 그때 한쪽으로 피해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 역시 “자료는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영환 씨에게 조언했다”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는 권력층에 찍힐까봐 관련 인터뷰나 보도도 없었는데, 매년 기념일 전후라도 기사가 나가서 젊은 세대가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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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까

[1987 영화감상문] 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까
 
 
 
김련희 평양시민 
기사입력: 2018/01/29 [22: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1987년 연세대학교 백양로에서 직격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이한열 열사, 결국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1달암에 영영 심장의 고동이 멈추었으며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6월항쟁으로 전두환독재정권을 몰아내게 되었다.  

 

2018년 새해를 맞으며 나는 남녘에서 6년만에 2차 송환을 기다리시는 장기수선생님들과 함께 영화관을 가게 되었다.

별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여서 가기 싫다고 망설였지만 장기수선생님들이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며 한사코 데리고 가시는 것이였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어르신들의 성의에 이끌려 간 곳이지만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남쪽의 영화관은 사뭇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북에서 영화관에 가본 경험으로 1000석이 넘는 큰 방으로 생각했었는데 정작 눈앞에 펼쳐진 서울대입구 롯데시네마 4관은 100석정도의 아담하고 귀여운 작은 방이었다.

 

▲ 영화 1987 

 

우리가 보게 된 영화는 <1987>, 2017년 12월 27일부터 한창 대개봉중에 있는 신작이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조사 중에 잔인한 고문행위에 의해 스물두 살 애젊은 서울대생의 사망으로부터 시작되는 <1987>은 처음부터 가슴을 조여왔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크나큰 충격이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이 말을 시작으로 고문치사 사건이 은페되자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공안검사, 기자, 교도관 등 용기있는 사람들의 정의의 행동과 이한렬 열사의 죽음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가슴 벅참과 울분으로 마음은 먹먹하고 무거웠다.

 

“와 못 가노, 종철아, 잘 가그라,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영화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박종철열사의 마지막 떠나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은 강에 달라붙은 아들의 유해를 손으로 떠서 강물에 흘러보내시는 아버지의 저 피눈물의 모습,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이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견뎌나갈 수 있을까

꽁꽁 얼어붙은 강위에 자식의 유해를 뿌리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저 아버지의 타들어가는 아픔과 피터지는 고통을 누가 감히 다 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식을 가진 같은 부모로써, 또 7년 째 보석같이 소중한 딸자식과 생이별 당하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슬픔으로 다가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손으로 때려잡은 사람들 비명소리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요, 우리가 애국자입니까?”

 

대공수사관의 이 말이 마음속에 콱 박힌다. 너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고문행위들과 최루탄을 쏘아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학생들을 때려잡는 수사관들과 경찰들의 모습을 보며 분노와 울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도무지 현실이었다고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서웠다.

이한렬 열사를 비롯한 대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들도 20대 젊은 청년들이였다.

저 사람들이 지금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감정일가? 그때를 기억할 때마다 어떤 마음일가? 

아마도 깊은 자책감으로 평생을 가슴 조이며 살아갈 것이다.

 

“데모하려 가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그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지 마요. 정신 차려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대사이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묻는 연희의 저 생각은 일반인들의 전반적인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 화장을 밀어붙이는 경찰에 시신보존명령을 내렸던 최검사나 고문치사협의로 수감중인 조형사를 통해 알게 된 사건의 진상을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알려내는 교도관,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보도 지침이냐며 진실을 찾기 위해 발로, 땀으로 뛰여다닌 기자들, 이 분들이 그때 그런 용기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더라면.......  

그 날 같은 거 안온다고 모든 사람들이 공권력에 머리 숙이고 현실을 도피했다면 ......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렇다, 최루탄을 맞아가며 경찰들과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꽃다운 청춘까지도 바쳐야 했던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국민이었고 애젊은 대학생들이었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었다. 언뜻 북에 있을 때 보았던 광주에 대한 영화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피여도 피여도 꽃은 없고

맺어도 맺어도 열매없으니

강산은 찢기여 원한이 사무쳤네

오 짓밟힌 내 고향이여

아 남이 사는 내 고향이여

살아도 살아도 살  곳 없고 

죽어도 죽어도 묻힐데 없으니

강산은 찢기여 원한이 사무쳤네

폭풍아 몰아쳐라

바다여 노호하라

수난을 불사르고 새봄을 맞이하자

 

그 영화에서 한 청년이 이렇게 절절하게 웨치고는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때는 그냥 영화로만 다가왔기에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거세찬 6월 항쟁의 불길을 보며 잠시 생각해 본다.

...나도 그 시절 함께 존재했더라면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토록 천진하고 무관심하던 연희도 이한렬열사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어느덧 버스에 올라 자연스럽게 주먹을 추켜든다.

수천의 사람들로 꽉 채운 서울광장의 가슴 뛰는 모습은 결코 어둠은 진실을 이길 수 없고 민중의 힘은 누구도 당할 자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방에는 먹먹하고 무거운 기운만이 맴돌았다. 자막에서 흘러나오는 “그날이 오면”의 애절하고 간절한 선률만이 조용한 정적 속을 유유히 흘렀다.

 

나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함께 가셨던 장기수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저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예요? 나라 없던 식민지 때라면 몰라도 당당하게 자기 나라에서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저렇게 최루탄으로 쏴죽이고 물고문으로 죽일 수 있나요?’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6월항쟁 이전에 대공분실에 갇혀 당했던 물고문, 통닭고문, 전기고문, 데포수정, 쭉지묶기, 고문들은 차마 너무 부끄러워 감히 영화에도 내놓치를 못해’

아!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정말 이건 아닌데, 어떻게 같은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1987>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그때도 민주화를 외치며 애젊은 청춘을 바쳤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민주화를 부르며 차디찬 거리에 뛰쳐나가고 있다.

광주인민봉기 때는 비행기와 탱크를 내몰아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6월항쟁 때는 최류탄으로 20대 꽃다운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2016년 박근혜 반대시위 때는 물대포를 쏘아 농부의 소중한 목숨을 또다시 앗아갔다.

오랜 세월 수많은 소중한 생명들이 민주화를 부르며 목숨을 바쳐왔지만 아직도 너무나 민주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이 땅에는 공권력의 탄압이 그대로 남아있다.

언제면 먼저 간 열사들의 민주화 소원이 실현될 수 있을까?

언제면 우리가 탄압과 희생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면 이 땅에서 대공분실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언제면 반공, 종북의 무서운 쇠사슬에서 벗어나 우리 한민족이 통일의 광장에서 얼싸안고 춤출 수 있을까?

 

이 땅에 민주화와 평화를 간절히 소원하며 자신의 청춘도, 생명도, 가정도, 모든 것을 깡그리 바치신 애국열사분들에게 경견한 마음으로 머리숙여 인사드립니다.

열사들의 값비싼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며 후대들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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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로 평화를, ‘KOREA’의 땀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8/01/30 10:21
  • 수정일
    2018/01/30 10:2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포토]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훈련 현장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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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9  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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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이 11일 앞으로 다가왔다. 북측의 평창 올림픽 참가로 평화올림픽이 막을 오르게 됐다. 여기에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은 스포츠를 통해 평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올림픽의 임무와 맞닿아 있다.

지난 25일 북측 여자 아이스하키 감독과 선수 등 15명이 방남했다. 다음달 10일 ‘코리아’와 스웨덴의 첫 예선전을 앞두고 빠른 시일 내에 훈련을 해야하기 때문.

남북 선수들은 현재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KOREA’ 팀의 저력을 보여주기 위한 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북측에서는 박철호 감독과 김은정, 려송희, 김향미, 황충금, 정수현, 최은경, 황설경, 진옥, 김은향, 리봄, 최정희, 류수정 선수 등이 함께 하고 있다. 새러 머리 ‘KOREA’ 총감독의 지휘 하에 남북 선수들은 일부 논란을 불식시키려는 듯,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공동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남북 선수들이 새러 머리 총감독의 지도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남북 선수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훈련 중 의견을 교환하는 남북 선수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남북 선수들의 의견 교환.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북측 선수의 훈련 모습.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남북 선수들이 함께 연습 경기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북측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는 머리 총감독.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남측 코치의 설명을 듣는 북측 선수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25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 도착한 남북 선수들이 자기 소개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부]
   
▲ 남북 선수들의 만남. [사진제공-통일부]
   
▲ 남북 선수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통일부]
   
▲ 함께 식사를 하는 남북 선수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 생일을 맞은 북측 선수를 팀원들이 축하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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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여론 잇따르자 ‘부랴부랴’ 소방관련법 처리 나선 국회

국회 법사위서 계류 중인 소방관련법 30일 일괄 처리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 2018-01-29 19:27:36
수정 2018-01-29 19: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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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
국회 본회의ⓒ정의철 기자
 
 

수많은 사상자를 낸 대형 화재 참사가 발생했지만 정작 국회에서는 소방 관련 입법들을 1년 넘게 방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천 화재 참사부터 밀양 화재 참사까지 대형 참사가 잇따랐지만 국회에서 가로막힌 소방 안전 관련 법안만 34건에 달하는 상황이다. '입법 공백'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국회는 그제서야 법안 처리 일정을 잡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2월 임시국회 개회식이 열리는 30일 전체회의를 열고 법사위서 계류 중인 소방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키기로 했다. 임시국회 개회 전에 법사위를 열어 법안을 처리하는 조치는 이례적인 일로, 소방 관련 법들이 국회에서 발이 묶여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법사위에서는 ▲소방기본법 개정안 ▲도로교통법 개정안 ▲소방시설 공사업법 개정안 등을 처리할 방침이다.

소방기본법 개정안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 주택에 소방차 전용 주차구역 설치를 의무화하고, 이곳에 주차하거나 진입을 가로막으면 과태료를 물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소방 관련 시설의 주변 구역을 주정차특별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그 구역에서의 불법 주·정차에 대한 처벌 수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소방시설 공사업법 개정안은 방염처리 업자의 능력을 국가가 평가하고 공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소방기본법과 소방시설 공사업법은 지난 2016년 11월, 도로교통법은 지난해 3월 발의됐지만 지금까지 처리되지 못했다. 제천 화재 참사까지만 해도 이들 법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자 행안위는 국회가 폐회 중임에도 긴급하게 회의를 열고 관련 법을 일괄 상정해 통과시켰다. 다만, 당시에는 국회 회기가 아닌 기간이었기 때문에 법사위에 상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밀양 화재 참사 이후 다시금 소방 관련법들이 주목받자 국회는 부랴부랴 관련 법 처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들 법안이 30일 법사위에서 처리되면 여야는 같은 날 오후에 열리는 2월 임시국회 개의를 위한 본회의에서 곧바로 의결할 예정이다.

정세균 국회의장도 화재예방 및 소방안전 관련 법률안의 조속한 처리를 당부했다. 정 의장은 법사위, 행안위 등 4개 관련 상임위원장에게 별도로 서한을 보내 관련 법안들의 처리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의장은 "국회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입법적, 제도적으로 미흡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게 된다"며 "참사 재발 방지를 위해 우리 국회가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안전입법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현재 국회에 제출돼 있는 화재예방 및 소방안전 관련 법률안은 총 34건으로 법사위에는 5건, 관련 상임위에는 29건이 계류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26일 오전 경남 밀양시 가곡동 세종병원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화재원인 및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26일 오전 경남 밀양시 가곡동 세종병원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소방대원들이 화재원인 및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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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에 세금 322조? 자유한국당의 '눈속임 현수막'

[사진] 밑에는 보일락말락하게 '2050년까지'... "중앙당에서 일괄적으로 걸라고 했다"

18.01.28 14:04l최종 업데이트 18.01.29 22:03l

 

 

최저임금이 322조라고? 무슨소리인가 봤더니 322조 아래 작은글씨로 '2050년까지'라고 기재했다. 전형적인 눈속임 현수막이다.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 최저임금이 322조라고? 무슨소리인가 봤더니 322조 아래 작은글씨로 '2050년까지'라고 기재했다. 전형적인 눈속임 현수막이다.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 엄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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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9일 오후 6시 30분]

안산 단원구 문화광장 거리에 현수막이 하나 걸렸다. 

"최저임금? 322조. 박순자"

 

지나가며 보이는 큰 글씨로 알아 볼 수 있는 문구는 이것이다. 언뜻 보면 최저임금에 322조가 들어갔거나, 최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이 322조를 받거나 하는 의미로 보인다. 2018년 최저임금 인상으로 최저임금 적용을 받는 노동자들이 엄청난 임금을 받아갔다는 의미를 담은 현수막으로 보였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니 최저임금, 물음표 옆에 삽입표시를 하고 작은 글씨로 '세금'이라고 적어줬다. 박순자 자유한국당 의원은 아마 국민세금 322조가 최저임금으로 "새어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322조라는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확대해보았다. 

'322조' 문구 아래 콩알만한 글씨가 이제서야 보인다. 

'2050년까지'.

눈속임 현수막이다.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지금부터 32년 뒤까지 들어가는 세금까지 계산하여 본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최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이 '뺏어가는' 세금은 644조가 될 수도 있고, 966조가 될 수도 있다. 콩알만한 글씨로 '2082년까지' 또는 '2114년까지'라고 적으면 그만이니까. 

박순자 의원은 새누리당 의원이었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바른정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자유한국당으로 다시 당적을 옮긴 안산 단원을 3선 의원이다.

박순자 의원실은 "해당 현수막은 자유한국당 중앙당에서 일괄적으로 걸라고 시안을 보내준 것"이라며 "저희들은 그대로 걸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같은 시각 서울 은평구 은평구청 주변에도 이같은 유형의 현수막이 걸려있어, 눈속임 현수막이 자유한국당의 조직적 움직임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현수막에는 자유한국당 은평당원협위원장 명의로 '퍼쓰는 건강보험 318조'라고 쓰여있고, 역시 그 밑에는 눈에 보일락말락한 글씨로 '2050년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퍼쓰는 건강보험! 318조  서울 은평구 은평구청 주변 도로변에 걸린 자유한국당 은평당원협위원장 명의의 플래카드.
▲ 퍼쓰는 건강보험! 318조 서울 은평구 은평구청 주변 도로변에 걸린 자유한국당 은평당원협위원장 명의의 플래카드.
ⓒ 박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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