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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실가스배출량 다시 증가…‘디커플링’은 아직

김정수 2017. 12. 20
조회수 163 추천수 0
 
온실가스정보센터, 2015년 6억9020만t 확정
2014년 감소 따른 ‘디커플링’ 기대 못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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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2014년 국내총생산(GDP)이 증가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줄어들어 ‘디커플링’의 시작에 대한 기대를 불렀던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이듬해 다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디커플링은 경제 규모와 온실가스 배출량이 동반해 증가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경제는 성장하면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은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증가 폭은 전년 대비 2.8%인 국내총생산 증가율에 견줘 미미한 수준인 0.2%에 불과했다.
 
국무조정실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는 20일 2015년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6억9020만tCO₂eq(이산화탄소 상당량)으로 집계한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통계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년도 배출량 6억8920만tCO₂eq보다 1백만tCO₂eq(0.2%) 증가한 것이다. 
 
배출 부문 별로 보면 에너지 부문과 폐기물 부문에서 각각 330만tCO₂eq과 100만tCO₂eq가 늘어나 배출량 증가를 이끈 반면, 산업공정과 농업 부문은 전년보다 각각 300만tCO₂eq, 20만tCO₂eq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배출량 추이.jpg
자료: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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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는 2015년 배출량이 소폭 증가한 이유로 두바이유 기준 유가가 전년 대비 47%나 내려가는 등 저유가에 따른 교통량 증가와 석유제품 생산 증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정책 시행에 따른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했다. 
 
2015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년 대비 증가하기는 했으나 증가폭이 국내총생산 증가폭의 14%에 불과해, 국내총생산 10억원 당 배출량은 471tCO₂eq로 1990년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에 10억원 당 698tCO₂eq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국내총생산량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인 온실가스 집약도가 33%나 향상된 셈이다.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은 2012년 이후 지속적으로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는 낮게 나타나고 있으며, 2014년에는 국내총생산이 증가한 가운데 처음으로 절대량이 전년 대비 감소한 바 있다. 과거 온실가스 배출량 절대량이 전년보다 준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는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등 경제 침체기에 나타난 것으로, 경제가 성장하는 가운데 배출량이 줄기는 2014년이 처음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온실가스 통계 발표 직후 ‘디커플링’의 시작일 수 있다는 기대도 나왔다.
 
05865033_P_0.JPG» 정부의 석탄발전소 확대 방침에 반대하는 환경단체 회원들이 7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석탄화력발전의 피해를 표현한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정부는 2015년 기후변화 파리협정에 참여하며 유엔에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전망치(BAU) 대비 37% 줄이겠다는 감축계획을 제출하고, 지난해 말에는 2030년까지 배출량을 5억3600만으로 줄이기 위한 로드맵을 확정한 바 있다. 이 목표가 무리 없이 달성되려면 가능한 일찍 디커플링이 시작될 필요가 있다. 2015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이 다시 증가한 것은 한국이 디커플링 단계에 들어간 것은 아님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배출량 증가폭이 매우 미미하다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최형욱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 연구관은 “유가가 떨어지면 에너지 소비량이 크게 느는 것이 통상적 ”이라며 “전년에 감소했던 것에서 다시 증가하기는 했지만, 국제 유가가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2.8%의 경제성장을 기록한 상황에서도 우려했던 것 만큼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향후 온실가스 배출량은 결국 에너지원별 발전 비율인 전력믹스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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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한·미 군사훈련 연기가 아니라 근본적 적대관계 해소해야

문 대통령 한·미 군사훈련 연기가 아니라 근본적 적대관계 해소해야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2/21 [04:3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문재인 대통령의 한미연합훈련 연기를 미국에 제안했다고 외신과의 대담에서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대통령 전용고속열차인 '트레인 원' 내에서 미국 측 평창동계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NBC와 대담을 갖고 통상 2월 말에서 3월 초에 시작하는 연례 한·미 연합훈련을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이후로 연기하는 것을 미국 정부에 제안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미국 측에서도 지금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으며 한미연합사령부에서는 동맹국 한국의 결정에 따를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은 한미연합사는 미 국방부 소관이고 백악관에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했으며 미 상원 의원들 속에서는 훈련 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미연합사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시설개관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이상하게 미 군부가 평창 올림픽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이전부터 한미정부 사이에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미국 정부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과 대화 국면을 조성해보려는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평창올림픽을 성사시키자는 차원에서, 그것도 중단도 아닌 훈련 연기를 전제로 북에게 핵무장력 시험 중단을 요청하는 것이 과연 북에 통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 북은 이런 남측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도 2012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를 안정적으로 추진할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북과 이산가족상봉을 제안하는 등 남북교류를 제안했을 때 북은 이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핵안보정상회의를 마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남북관계를 험악하게 몰고 갔다. 

물론 문재인 대통령을 이명박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어쨌든 근본적인 한반도 문제 해결보다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일단 성사시키자는 목적이 먼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북이 이런 남측의 요구를 들어줄지 이제는 미지수다.

특히 미국이 대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계속 가한다면 평창올림픽이건 뭐건 북은 바로 대미 대응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번 일을 계기로 북미대화가 시작되어 평화적으로 한반도문제가 풀릴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고 밝히기는 했다. 고무적인 지적이다.

더 좋기로는 북미관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남북관계를 흔들림 없이 추진할 확고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북이 남북교류협력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미국과 공조하여 대북 제재와 압박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북과 관계를 풀라고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북과 대화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것이 없이는 내년에도 남북관계 개선은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 우려가 높다.

 

미국도 정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과 대화국면을 조성하려면 대미군사훈련 중단을 선언하여 대북 군사적 압박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엄청난 미군 군사력을 북을 위협하면서 핵무장력 시험을 중단하라고 하면 북은 반발만 더 거세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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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KBS 파업 아나운서를 만나다

게시됨: 업데이트됨: 
 
 
 

지난 여름 타계한 프랑스 누벨바그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 잔 모로는 "목소리라는 것은 한 인간의 측면이자 감정이 비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아나운서 정세진의 목소리가 좋은 예일 것이다. 정세진의 목소리는 프루스트의 문장처럼 물처럼 한없이 흘러가는 듯 하다가도 단단하게 멈춰서고, 대를 물려가며 공들여 사용한 은식기처럼 정감어린 온기가 느껴지면서도 기품이 서려있다. 그녀가 진행하는 93.1FM 라디오 '노래의 날개 위에'에서 정세진의 멘트는 언제나 소개되는 쟁쟁한 성악가들의 노래와 목소리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KBS 파업이 시작되고 파봉단에서 파업영상을 만들고 있는 최승현 PD는 39기 강승화 아나운서를 파업 집회에서 새롭게 발견했다고 평했다. 기수가 낮아, 쟁쟁한 선배들과 다양한 직군이 모두 집중하는 자리인 파업 집회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분위기에 촌철살인의 유머와 재치를 더하면서도 날카로움을 간직한 매끄러운 진행으로 한껏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이 인상깊다고 말했다. 이런 강승화 아나운서가 월요일 고정을 맡아 모두가 지치지 않고 집회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다며, 최PD가 직접 대사를 써서 연출한 '적폐와의 대화' 에 주저없이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KBS 파업이 100일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유례없이찾아온 혹한에 맞서며 240시간, 10일동안 547명의 조합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릴레이 발언을 이어나갔다. 아나운서 구역의 정세진, 강승화 두 아나운서를 만나 파업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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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강승화 아나운서(좌), 정세진 아나운서(우)

-파업 현장에서 눈물 고인 얼굴을 하고 있는 사진이 인상깊었습니다. 어떻게 찍힌 사진이었나요?

=강승화(이하 강): 플룻 연주자 분들이 저희 파업 집회 현장에 응원을 하러 오셨어요. 처음에 저는 안 울려고 했어요.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개사해서 '파업이 끝나는 날에' 이걸 노래를 해주셨는데, 눈물이 난 건 아니었어요. 저는 눈물이 별로 없거든요. 가사를 읽고 노래를 하는데 옆의 선배분 들이 거의 흐느끼면서 우시는 거에요. 박영주 선배부터, 저희 기수 높은 선배들이 막 어깨가 들썩이면서 많이 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눈물이 너무 나길래 이걸 참으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게 딱 사진으로 찍힌 거에요. 선배들 옆에서 눈물이 너무 나는데 어쩌나 싶어서 먼 산 봐야지 하는데요. 그게 파업 66일째였나. 그랬어요. 저희 생각보다 파업이 길어져서 대부분 조합원들이 마음이 약해진 상태라 그날 정말 다 울었어요.

-파업이랑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닌 분이라 이번에 파업 취재를 하면서 정세진 아나운서님이 2012년에 리셋뉴스 진행도 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리셋뉴스를 하게 되셨나요?

=정세진(이하 정): 저는 97년 입사인데 그때 막 입사 신입사원으로 연수원에 들어와 있었는데 총파업 중이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은 신입인데 이게 뭐지? 하면서 연수원에서 앵커가 아닌 기상 캐스터가 9시 뉴스를 진행하는 걸 봤죠.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9시 주말 뉴스를 할 때였어요.

99년도쯤 저는 9시 뉴스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 하고 싶어했던 사람이라 위에서 막 늦은 새벽까지 연락이 왔어요. 파업할 거냐, 안 할 거냐.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묻더군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동료들은 당연히 저한테 뉴스 하면 안된다고 했죠. 새벽이었는데, 3-4시쯤에 결정을 직접 내렸어요. 계속 고민했고, 밤새 생각을 했는데 한 순간 명료해지더라고요. 윗 사람에게 전화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제가 결정한 거기 때문에 이런 결정에 대해 후환이 두렵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누가 저를 막 설득하거나 떠밀린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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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9시 뉴스라면 아나운서 모두가 꿈꾸는 자리 아닌가요? 큰 결정이었겠네요.

=정: 후배들 중에서도 이번에 파업에 참가한 자기 한 사람 때문에 방송이 녹화 들어가기 직전에 안 되었다고, 그러면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나운서는 대부분 그런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제가 내린 결정이라 힘겹지 않았던 거고요. 2012년 파업이 있었어요. '리셋 뉴스'가 2012년인데, 저는 그때 파업에 처음부터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파업에 반대한다기 보다는, 좀 더 전략적으로 준비를 잘 갖춰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파업을 한다는 게 큰 결정인데, 시간을 들여서라도 좀 더 전략을 세워서 들어가야 한다고요.

집행부나 새노조의 구성원들이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해요. 좀 계산을 덜 한달까, 저는 파업 기간이 길어지는 것보다는 긴장 구도를 최대한 끌어서 조일만큼 조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확 들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흔히 투쟁의 대상을 쉽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싸우는 상대가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그렇게 순순하게 지금까지 쥐고 있던 권력을 내려놓을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는 길어질 거라고 예상을 했어요. 정권이 바뀌었다고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대로 쉽게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았고요. 정권이 바뀌었으니 장악된 방송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좀 순진하죠. 더 대오를 갖추고 싸움이 시작되기를 바랐던 거죠.

2012년에 저는 2주 정도 시간을 좀 더 끌다가 내려왔어요. <노래의 날개 위에> 게시판에 글도 올리고,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93.1 FM방송이지만 우리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알리고 싶었으니까요. 제가 글을 자주 남기는 스타일이 아닌데 청취자들에게 알리려고 들자 위에서는 제 글도 사진도 바로바로 삭제하더라고요. 약간의 압력도 주고요. 2주 정도 시간이 지나 이미 파업에 참여한 동료들을 저버리는게 제 마음이 너무 안 좋은 거에요. 그때는 새노조에 소속된 아나운서가 15명이었어요. 그렇게 파업에 참여하고 중간쯤 지났을 때 우연히 중국집에서 리셋 뉴스 팀을 만났어요. 선배들이 너무 고생하시는게 눈에 보였어요.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저도 조합원이니 얼마든지 활용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바로 리셋 뉴스를 해달라고 하시는 거에요. 선배 기자들이 계셨고, 저는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도 아니고 따로 간 거였어요. 저는 처음에 뉴스 한 회차를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그 뒤로 계속 하는 거더라고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속된 말로 저는 리셋뉴스 때문에 찍힌 게 되어버렸죠. 아무래도 화제가 되고, 홍보도 많이 되고 많은 분들이 보셨고 하니까요. 저는 그것도 제가 결정한 거라, 하나도 불이익을 받는 거라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없었어요. 제가 누구한테 떠밀려서 갔다면 불이익을 받았다고 느꼈을 텐데, 제가 결정해서 들어간 건데 거기에 대해서 억울하다 여기지 않는 거죠. 진심으로요.

후배들이 물어볼 때가 있어요. 파업해야 하는지, 방송 내려 놓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니까요. 저는 언제나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해요. 선배가 끌어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저는 늘 자기가 결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이야기해요.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건 성인이라면 당연한 거고요. 누가 끌어줘서, 누가 설득해서 이게 아니라 내가 이게 정당하다고 소신을 갖고 생각한다면 하는 거고, 아니면 방송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 파업 안하고 방송하는 거고요.

-방송이냐, 파업이냐 본인이 정해야 하는 거군요.

=강: 그걸 안 정하면 파업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이걸 내가 방송이 너무 하고 싶은데 파업도 하고 싶고, 오락가락 하면 너무 괴롭고 이도 저도 아니게 되니까요. 확실하게 지금 뭘 해야 되는지 각오를 하고 파업을 해야 하는 거에요. 파업이 저희에게는 정말 힘들죠. 우선 생활인인데 월급을 못 받고요.

=정: 이 기간 동안 우리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죠.

=강: 그 반성이 이만큼 길어지고 있는 거죠. 지금 100일이 넘었잖아요.

-KBS 구성원들과 지난 9월 초순에 인터뷰를 했는데, 파업 얼른 마치고 추석 특집쯤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시더군요.

=정: 그게 어떤 면에서는 너무 순수한 거고, 한편으로는 오만인 거에요. 정말 전략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너무 사람들이 순수한거죠. 노조 집행부도 다 너무 순수하게 계산 속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좀 더 전략적으로 움직였으면 해요. 저희 파업이 언제나 그래요. 참 순수하게 대의를 가지고 시작하고, 조합원들도 순수하게 따라주거든요. 결과가 늘 가시적으로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신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이랄까, 이런 건 참 좋아지더라고요. 서로 각각 구역이 달라서 모르던 사람을 다 만나고 또 보게 되니까요. 사람을 알게 되는 기회에요.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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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터뷰에서는 아나운서로서 새노조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블랙리스트라고 전해들었습니다.

=강: 저는 지역에 있을 때에는 새노조 아니었고 서울에 와서는 새노조에 바로 가입했어요. 제가 지역 근무 갔던 대구가 새노조 활동이 쉬운 곳도 아니고요. 왜 새노조에 들어갔느냐고 묻는다면 정치적인 신념 때문은 아니에요. 어차피 노조라는 건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내가 속해야 할 곳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뜻이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잖아요. 2014년에 서울에 오니까 딱 새노조에 가입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가입할 때에는 아나운서 실에 구노조가 6, 새노조가 4였는데 1년 지나고 역전이 되었고요. 이번에는 거의 9대1로 바뀌었고요.

-돌아가시면 어떤 방송을 하고 싶으세요?

=정: 저는 제가 하고 있는 방송인 '노래의 날개 위에'를 워낙 좋아해요. 석달 넘게 재방송이 나가고 있어서 제가 파업을 하는지 모르는 청취자 분들도 있을 거에요. 목소리 그대로 나가고 날짜나 이런 이야기를 안하니까요. 이 추위에 폭염 이야기 하는게 나오고 그렇지만 (웃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이고, 방송을 통해서 저 자신을 더 알게 해준 그런 고마운 방송이에요. 클래식은 방송을 하면서 제가 적성을 찾은 거에요. 그 전에는 클래식을 전혀 안 들었고 회사 다니면서 좋아하게 된 거에요. 아나운서는 제작하는 분들로부터 선택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제작하는 쪽에서 원하는 것과 우리가 잘 할 수 있는게 합이 맞아야 하고요. 그게 서로 딱 맞을 때 방송이 잘 되고 흔히 말하는 "뜬다"는 것도 그때 가능한 거고요. 방송을 접하는 사람들이 다 인지를 하게 되요. 그게 안 맞아 떨어지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람들에게까지 다 전달이 안된달까. 아나운서인 내가 원하는 건 이건데 피디가 원하는 건 저거니까 저거를 하고 따라가야지, 그게 잘 안되거든요. 저는 뉴스와 클래식 음악, 두 가지를 제가 찾은 거고요. 뉴스보다도 사람들이 클래식 프로그램을 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처음에 저는 이게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성격도 굉장히 털털하고 남성스러운데, 보이는 이미지는 또 그렇지 않아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이미지와 진짜 나 중에 뭐가 제 모습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스튜디오에 혼자 앉아서 1시간짜리 음악을 듣는게 너무 좋더라고요. 특히 성악곡들은 다 외국어라서, 이게 직접적으로 들리지가 않잖아요. 그냥 음가를 가진 소리로 들리는 거라...가곡이나 우리말 가사는 직접적으로 들려서 생각을 좀 방해하는데, 저는 그 자체로 듣는 게 좋아서 가사를 굳이 그 의미까지 알려고 하지 않을 때도 많아요. 소리만으로도 그 자체가 음악적으로 선율과 함께 완성이 된 상태로 느껴져서요. 가사를 분석해달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오는데, 저는 그냥 포인트만 잡고, 제가 음악을 전공한 건 아니라 절대 음감이거나, 화성의 변화를 느낀다거나 하는 건 못하지만 직감적으로는 알고 선율을 느끼죠. 클래식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파업이야기를 한다는 게 뭔가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야 들지만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도 끝날 때에는 투쟁의 역사에 대해 말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제가 멘트를 집어 넣었어요. 혁명이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아리아를 고를 수도 있었을 것 같네요.

=강: 저는 39기로 연차가 매우 낮은 편이라, 제가 뭘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급이 아직 아니고요. 저는 앞으로 변화할 우리 프로그램들이 기대가 되요. 제가 파업 직전에 했던 프로그램이 '서가식당'이라고, 책을 소개하면서 책에 나오는 음식을 해먹는 그런 컨셉이었거든요. 교훈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재미도 추구하고,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흔히 종편스러운 면이 있는 프로그램이었죠. 제가 왜 '서가식당' 이야기를 하냐면, 출연자 섭외가 참 힘들었어요. 제가 엠씨고 배우 권해효, 박찬일 셰프,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이런 분들이었어요. 그 분들이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나누면 진보쪽에 속한 분들이잖아요. 제작진들이 그 분들을 섭외하는 게 너무 힘들었고 프로그램 런칭까지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요. 피디들 조차 자기 검열을 정말 지나치게 했어요. 심지어 프로그램이 런칭된 이후에, 책을 이야기 하는 건데 특정 출연자의 멘트에 대해서도 위쪽에서 압력이 있었어요. 보도도 아닌 교양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피디들이랑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는 파업 직전이라 어쩔 수 없다, 며 서로 위로하고 말았는데 돌아가게 되면 정말 제대로 하고 싶어요. 우리가 할 일이 정말 많았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았거든요. 책도 선정할 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성 맞고, 시사점을 줄 수 있는 그런 책이 많잖아요. 저희가 그런 책을 선정하면 위쪽에서 아니 그거 말고, 라는 식으로 막았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하겠다고 하면 아니 그 책 너무 어려워, 남녀노소 모두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해. 이런 식이었어요. 참 교묘한 억압이죠. 시청자들에게 지적으로 자극을 주고, 조금 어렵고 낯설더라도 사유의 폭을 넓히게 하려는 걸 애초에 차단하는 거고요. 그런 역할을 공영방송이 아니면 어떤 채널이 하겠어요? 이런 건 확실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파업 이후 저희가 돌아갔을 때, KBS가 달라진다면, 정말 공영방송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국민들에게 제공하는데 앞장선다면 그런 프로그램의 진행을 하고 싶어요. 교양이든 뭐든 좀 의미를 가진 뉴스를 전달하는 거요.

-그런 간섭과 억압을 많이 경험하셨나요?

=강: 제가 연예뉴스를 전달하는데, 심지어 그런 연예뉴스에서조차 멘트를 하는 거에 대해 자기 검열을 해야 했어요. 원래 연예는 좀 웃기고 재미있는 거잖아요. 약간 비꼬고 해학적인 구석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걸 할 수가 없었어요. 운신의 폭이 너무 좁은 거죠.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늘 받았어요. 자기 검열을 자꾸 할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번 투쟁 이후에, 앞으로는 변화가 있을 거라고 봐요. 지난 10월말 국정감사에서 특정 당에 소속된 모 국회의원이 왜 개그콘서트에서 "다스"를 이야기 하냐고 KBS가 왜 그런 내용을 만드냐고 뭐라고 했거든요. 그게 말이 안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뭘 만들든, 방송쟁이들이 방송하는 건데 예능 프로그램 내용을 두고 국회의원이 왜 국정감사에서 추궁을 하나요? 국회랑 개그콘서트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시즌 1로 끝나버린 '서가식당'을 다시 시작 하든 어떤 새 프로그램을 하든, 힘있는 사람한테도 안 쫄고, 화끈하게 할말을 하고 싶어요.

아나운서들은 특성상 굉장히 조심하고 몸을 사릴 수 밖에 없어요. 프로그램의 가장 최전선에 있고 전달하는 사람이고 또 선택을 받는 입장이라서요. 저는 스포츠 진행할 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스포츠 대작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당시 출연자가 박철민 배우였어요. 레이디제인도 나오고, 그게 녹화 하루 전에 폐지가 되었어요. 갑자기 폐지가 되었고, 제대로 된 사유도 없었는데 형식상의 이유는 저희 편성본부장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폐지 시킨 거에요. 너무 난데없었고, 납득이 안 되는 이유였어요. 저희가 추측하기로는 당시 엠씨가 저랑 김현태 선배였는데, 김현태 선배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을까도 싶고요. 그때 한창 "비타 500사건" 이 있었어요. 당시 총리가 비타 500상자에 돈을 담아 전달한 사건이 한참 회자되는 중이라 저희가 자유롭게 패러디를 하나 했거든요. 그 사건 직후에 폐지가 되었어요. 겉으로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일이죠. 다 추측이죠. 정말 비타 500패러디 때문인지 확실한 물증이 있거나 하는 건 아닌데, 정황상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거죠. 비타 500패러디가 거슬렸거나 진행자 두 아나운서가 모두 새노조니까....

제가 그런 일들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뭘 하든, 대중들이 궁금해 하는 거, 사실에 근거해서 할 이야기 하고,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좀 더 약하고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요.

=정: 이미 만나셨다는 이슬기 기자도 그렇고 강승화 아나운서도 마찬가지에요. 최전선에서 보도를 하고, 전달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들을 건드려버리니까 그 다음에는 이게 정말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강: 정말 자존심 상하잖아요. 소수의 몇몇이 저희의 생각을 조종하려고 들고, 손안에 쥐고 흔들려고 든다는 거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고요. 이런 교묘한 억압과 굴종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없어지면 좋겠어요.

=정: 제가 97년에 입사하고 10년동안은 이런 일들이 없었어요. 2008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고 2012년 파업 이후에는 정말 노골적으로 이런 간섭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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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골적인 간섭이라면요?

=강: MC 선정, 프로그램 배치 이런 모든 과정에서 불투명한 게 너무 많았어요. 뉴스 앵커를 선정하는데 개인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 것 때문에 이 싸움을 하게 된 거에요. 보도의 공정성은 물론, 개인의 실력대로 정직하게 프로그램을 맡고 경쟁하면서 방송할 수 있게 보장해 달라고요. 방송인으로서 개개인이 가진 역량이 다 다르잖아요. 공영방송이라면 더더욱, 한 개인이 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회사여야 하는 거고, 우리의 양심대로 공정하게 방송할 수 있어야 하고요. 정말 최소한의, 필수적인 조건이잖아요. 그런데 그 동안 KBS에서는 그 최소한이 지켜지지 않았어요. 우리가 싸우면서 요구하는 건 개개인이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방송할 수 있게, 솔직한 양심에 따른 정직한 이야기를 내보내만 달라는 거에요.

=정: PD나 기자쪽에서 아나운서 누구랑 하겠다고 캐스팅이 들어와도, 윗 선에서 막는게 분명히 있어요. 진행자인 아나운서를 고를 때, 늘 능력 이외의 조건이 굉장히 많이 작용을 해요.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까 능력 이외의 것이 완전히 배제된다고는 못 하겠지만 방송만큼은 능력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직군이죠. 예를 들어 새노조라서 안되고, 자기 라인이 아니라서 안 되고 이렇게 되요. 누가 더 방송을 잘하냐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에요. 위에서 결정권을 갖춘 사람들이 능력은 안되지만 하라는 대로 하고,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 옆에서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을 원해요. 2012년 파업 이후, 저희 때는 새노조에 가입한15명 명단을 같은 아나운서실 선배가 다 직접 적어서 윗사람에게 갖다 주고 그랬어요. 이 15명은, 사람들은 방송에 나가는 걸 철저히 막겠다. 활동 못하게 한다, 이런 게 있었어요. 고생하고 말 잘 듣는 우리 라인 잘 살펴 달라는 거, 실제로 있었고 문서도 있고요. 저는 아홉시 뉴스도 해봤고, 제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찾았고 아나운서로서 활동을 해보기도 했고, 이제 어느정도 초탈하게 되어서 괜찮아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한테는 그게 잘 안되죠. 어떻게 저 부분까지 건드리나, 싶은데 젊은 친구들에게 납득이 안가고 황당한 경우가 이어지니까 이렇게 강경하게 파업에 임하는 거에요. 저는 사실 후배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파업에 참여할 줄은 몰랐어요. 이야기들 들어보니까 말도 안되는 걸 다들 경험하니까, 너무 상식 밖의 일들을 경험하니까 싸워야 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말도 안되는 상황이 한 두번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이런게 아니라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돌아갔다고 보시면 되요.

=강: 방송사는 이벤트들이 많잖아요. 이벤트가 생기면 그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여럿이죠. 그럼 거기에서 공정한 경쟁을 원하는 건 당연한 거에요. 그런 경쟁이 제대로 이뤄진 적이 지금까지 거의 없었어요.

-KBS는 지난 몇 년간 능력이 아니라 손바닥 잘 비비는 사람이 큰 프로그램을 맡고 잘 나가는 구조인가요?

=강: 그렇다고 확답은 할 수 없지만 합리적으로 추측은 할 뿐이에요. 사람한테 잘하고 업무외적으로 어필하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능력 9에 사회생활 잘하는게 1이었다면 이제는 사회 생활 잘하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게 더 결정적으로 되는 거에요.

=정: 그런 게 없을 수야 없고 노골적이지 않아야 하는데, 아주 노골적이 되어버렸어요.

=강: 인맥을 쌓고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이런 건 사실 상관이 없어요. 최소한 공개적인 오디션만큼은 공정해야 하는 거잖아요. 거기에선 장난을 치면 안되는 거잖아요. 심지어 오디션 조차 이미 내정 해놓고 눈가림식으로 치르는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오디션에 참가하는 아나운서들에게 공정한 것처럼 속이면서 헛된 희망을 주는 거였어요. 모를 것 같이 하고 넘어가도 시간 지나면 다 드러나잖아요. 예를 들어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에서 아나운서를 찾아서 제가 지원을 했어요. 모든 피디들이 저를 원하는데 단지 새노조 소속이라는 이유로 결과가 뒤집어 진 적도 있어요.

=정: 자기들끼리 MC선정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어요. 전혀 공정하게 심사하는 게 아닌데, 공정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예전에는 없던 MC선정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공정함을 가장했어요. 제도적으로 기구를 하나 만들어서, 피디도 납득할 수 있도록, 절차적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도록요. 실제로는 완전히 편향된 위원회였죠.

=강: 피디들도 정말 피로감이 쌓였을 거에요. 프로그램을 만드는 입장에서 원하는 아나운서 누구를 쓰기 위해 너무 많이 싸워야 하니까요. 피디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작 독립성인데, MC가 대체 뭐라고...어느 선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윗 선에서 계속 개입을 하니 피곤하죠. 어차피 원하는 아나운서를 하려면 너무 많이 싸워야 하니까 아예 아나운서실에 알아서 "아무나 주세요"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님 강승화 골라봤자 어차피 안 되는데 차라리 연예인 누구랑 하지, 이런 경우도 있고요. 퇴사한 사람들은 이런 이유들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거에요. KBS가 진짜 멋진 방송국이 되면 퇴사할 필요가 있나요? 여기에서 계속 좋은 방송 만들고 MC하고 그럼 되는 걸요. 저희는 그 어떤 방송사보다도 물량으로나 시스템적으로도 충분한 제작 제반 환경을 갖추고 있거든요. 정말 훌륭한 시사프로그램, 누가 봐도 진짜 좋은 방송이다 인정할 수 있는 거, 만들면 계속 KBS아나운서로 남을 수 있죠. 돈, 명성,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방송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최우선은 좋은 방송을 하는 거에요. 열의가 넘치는 피디들과 기자들이랑 정말 멋진 프로그램을 하는 거,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기억되는 걸 바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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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소수의 몇몇이 아나운서실에서 자기 라인 만들고, 사사건건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데 개입하고 그랬어요. 선배가 자기 후배들을 명단 만들어서 방송 커리어를 완전히 망쳐버리겠다고 하는 걸 다 지켜 봤거든요. 인사 고과도 제일 낮게 주면서 방송을 몇 년 못하게 되는 게 마치 능력이 부족해서 인 것처럼 하고, 그 사람은 자기 후배들을 팔아 넘겨서 승진을 했고 여전히 방송도 하고 있어요. 그쯤 되면 단순한 부역자 수준이 아닌 거죠.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면 아마 처세의 달인으로 또 어떤 스탠스를 취할 지 알 수가 없어요.

KBS는 한국사회의 축소판 같달까, 워낙 인원도 많고 사람들의 결이 다양해서 구성원들 중에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사람부터 다 있다고 보시면 되요. 이 다양한 구성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 사이사이에서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MBC랑은 달라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안 나오고 좀 더딘 것도 있고요. 그런 사람들끼리 또 모여있기도 하고 그래서 저희 싸움이 더 힘들어요. 새노조 사람들이 마음이 여리고 또 착해서, 그들을 적대시 하지 않기도 하고요. 시스템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그들을 해직시키거나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공존하면서 방송을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KBS는 잘 꾸려나가기가 참 어려워요.

=강: 응징은 사실상 힘들 것이고, 그런 분들이 저지른 악행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걸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면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 못지 않게, 구조적으로 장치를 만들어 투명하게 능력과 성과 위주로 평가될 수 있기를 바라요. 정권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에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 해요.

=정: 제 경험상, 정권이 바뀌고 방송이 독립성을 지킨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새노조 안에서도 참 색깔이 다양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겠죠.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요.

-희망을 갖고 계시는 거네요.

=강: 저는 MBC 파업 마치고 올라가서 돌아가는 거 보고, 희망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특히 보도랑 시사분야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지 벌써 기대가 되고요.

=정: 저는 24기인데 지금 29기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모임을 만들고 그 윗선 선배들에게도 할말을 하는 분위기인데요. 26,27기 정도까지는 중간에서 위 아래가 충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요. 결정은 젊은 친구들이 내려주고 그 방향으로 가야지, KBS에 미래가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봐요. 저만 해도 70년대 생이라 될까? 의심하는 게 있고 좌절의 기억이 있거든요. 더 젊고,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10년 전에, 탐사보도팀 다 있고, '미디어포커스' 있고, 9시 뉴스 하면서 일하는게 너무 즐겁고 신나서 어쩔줄 모르던 때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고요. 저희는 그때 방송하면서 당시 방송 지형에서 탐사 보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 뿌듯함도 컸고, 사명감을 정말 많이 느꼈고, 그때는 방송 내용에 대해 개입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9시 뉴스 하는 동안 그 누구도 저에게 와서 앵커 멘트 왜 이렇게 썼어? 라고 한다거나 제가 다 고쳐 쓰는데 저한테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앵커 멘트 고치는 걸 못하게 하고, 고쳐서 가져오면 위에서 기자나 피디들이 다시 다른 뉘앙스로 손대고 뉴스가 한 방향으로만 가더라고요. 이런 젊은 친구들은 저희가 겪었던 거랑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한 거니까요. 그런 것들이 자유로워진다면 저희가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는 거겠죠.

-나아지는 방향이라면요?

=강: KBS는 채널이 2개라 공영방송이고 좀 프로그램을 아주 질적으로 잘 만들어야 해요. 그게 저희 사명이고요. 그렇게 안하고 위에서 자꾸 프로그램 폐지하고 배제하고, 출연진 하나하나에까지 간섭하니까 이제 KBS라고 해도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없어요. 이제 시청자분들이 기억해 줄만한 프로그램들을 돌아가서 만들어야죠.

=정: 올해 가장 화제가 된 프로그램이죠. '알쓸신잡'의 유시민도 KBS에서는 캐스팅이 어려운 사람이니까요. 수준높은 평론이 사라진 시대이고, 'TV 책을 말하다' 같은 프로그램도 '클래식 오딧세이'도 다 폐지되었고요. 라디오 7시 뉴스 할 때 아직도 기억나요. 백남기 농민 사건때 물대포가 아니라 물줄기라고 쓰여진 대본이 왔어요. 그거 읽어야 했을 때 정말 착잡하더군요. 제가 9시 뉴스했던 사람이니까, 아예 그 단어를 빼버리고 제가 멘트를 새롭게 해서 읽었어요. 요 근래 몇 년 동안 너무 말도 안되는, 읽고 싶지 않은 기사들이 막 들어왔어요. 회사가 저희들의 입을 다 틀어막았어요. 멘트를 하면 위에서 싫어한다고 하거나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요. 늘 한쪽 방향에서 보니까 저쪽에서 이렇게 보니까 치우치게 보이죠. 작년 촛불 시위 할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촛불' 단어만 언급해도 난리가 나는 거에요. 라디오 뉴스 할 때 받은 대본들의 수준도 그렇고, 이 뉴스 뭐하러 하지? 내가 이걸 왜 읽지? 이런 순간들이 참 많았어요. 작년에 최순실 관련 미르재단 뉴스가 하나 둘 터지고, 국정농단 스캔들이 말 불거지는 시점에, 최대한 최순실 관련 뉴스를 뒤쪽으로 배치하는 거에요. 하나도 안 중요한 것처럼요. JTBC가 터트리고 난 이후에도 어떻게든 중요하지 않은 뉴스처럼 배치를 했어요. 저도 기자도 아무리 위에다 이야기를 해도 편집부에서 다 편집권을 쥐고 있어서 저희가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었어요. 우리는 읽는 사람이잖아요. 뉴스가 내려오면 그걸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거고, 저희가 아무리 그 앞에서 이거 좀 앞에다가 배치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해도 그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거죠. 답답해도 할 수 있는게 너무 없었어요.

-이렇게까지 압박을 많이 받으셨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강: 이런 걸 압박이라고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는 이게 잘못된 거다, 압박하는 거다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회사 잘 돌아가는데 무슨 문제 있어? 아나운서는 그냥 원고 나오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또박또박 읽고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이렇게 생각하고 회사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냐고, 월급 주고 자아실현 시켜주고 TV에 나오게 해주는데 너네 파업하는 거 다 배불러서 그러는 거야, 이러는 사람들도 있어요. 파업 초기에 뜻을 같이 해 달라고 설득하고, 설명도 해보고 했는데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더라고요. 언론인으로서 이전에 인간적으로 공감능력이 좀 떨어지는 걸 수도 있죠. 세월호 참사 때에도 별로 슬퍼하지 않고, 최순실 사건에도 이게 뭐? 하는 거고. 같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느끼는 바가 많이 달랐을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주파수가 다른 곳에 맞춰져 있는 거겠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 이전에 상사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이고 어떤 보직을 받을 수 있는지, 더 큰 프로그램을 맡고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 혼자 잘되고 그런 거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정: 중학교 2학년도 다 이해할 수 있을 수준으로 방송을 해야 한다고 늘 그렇게 교육 받았어요. 그건 전달하는 말을 쉽게 사용하라는 것이지 컨텐츠가 중학교 2학년 수준이어야 한다는 게 아닌데 그걸 놓치기도 하죠. 정말 긴장해서 공들여서 잘 만들어야 하는 방송을 그렇게 안 하는 거고요. 아나운서는 아무 힘이 없고,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직군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희 아나운서 실장이 나서서 저희를 좀 보호해주려는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데, 자신의 보직과 출세에만 관심있는 분이 아나운서실을 이끌면서, KBS안에서 아나운서는 참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수년을 지나왔어요. 이렇게 연약한 존재들인데 파업할 때에는 노출도 많이 되고, 가장 열심히 해요. 2012년에도 저희가 겨우 15명에 불과했지만 집회 사회도 보고 바깥에서도 저희를 가장 먼저 알아봐 주시니까 전단지 돌리고 하는 것도 열심히 했고 시민들에게 더 보여질 수 있도록 했어요. 이번에도 저희가 사회를 돌아가면서 열심히 보고요. 역할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얼굴 팔리는 일이라 꺼려할 수도 있는데 강승화 아나운서는 심지어 월요일 고정이에요.

강: 다들 월요일은 좀 부담스러워 하니까 제가 먼저 월요일 고정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우선 한 사람이라도 부담이 줄어드는 거잖아요. 4명만 돌아가면 되니까요. 기수도 낮고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제 진행을 좋아해 주셔서 뿌듯해요.

-100일을 훌쩍 넘긴 파업이 이제 방통위에서 강규형 이사의 해임안이 통과되면서 어느정도 끝이 보이는 것 같은데, 어떤 소회가 드시나요?

=강: 아나운서는 약간 개인사업자처럼 각개전투로 활동할 수밖에 없거든요. 다양한 직군들이 나오는 파업집회에서 제가 진행을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있고 전혀 모르던 피디들과도 친분이 생기고 돌아가면 하고 싶은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파업이 아니면 절대 다른 직군을 만나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거든요. 하고 싶은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신나게 나누기도 했는데 돌아가면 정말 근사하게 멋지게 뭔가를 함께 하고 싶어요. 반성을 참 오래 했으니까요. 돌아가서 좋은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정: 파업이 끝나고 돌아간다면, 아나운서실의 대장이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한눈에 팔린 게 아니라 할말은 하고, 아나운서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어요. 피디랑 작가, 기자와 함께 프로그램의 구성 단계에서부터 아나운서도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렇게 처음부터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한다는 건 모든 게 다 셋팅되고 와서 진행만 해주세요, 라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거든요. 프로그램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고, 제작단계에서부터 의견을 내고 다른 직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나운서로서도 굉장히 많은 성장을 할 수가 있어요. 저희가 단지 셋팅된 상황에서 차려입고 꾸민 상태로 나와 그냥 앵무새처럼 읽기만 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단순한 전달자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도 있어요. 뉴스의 통찰력을 불어넣고 멘트를 다르게 해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운 좋게 이미 '클래식 오딧세이'처럼 제가 제작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났고,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뿌듯하게 방송을 하는 경험을 누려봤어요. 얼른 파업이 끝나고 돌아가서 이런 젊은 친구들도 저처럼 방송을 통해 그런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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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MBC 뉴스데스크 “백화점식 보도 안 한다”

26일부터 주중 박성호·손정은, 주말 김수진 앵커 체제 
‘시민에 응답하는 뉴스, 시민과 소통하는 뉴스’ 슬로건

노지민 기자 jmnoh@mediatoday.co.kr  2017년 12월 20일 수요일
 

MBC ‘뉴스데스크’가 오는 26일 시청자 앞에 다시 선다. 지난 8일 최승호 신임 사장의 보도국 인사로 중단된 지 19일 만으로, 사실상 5년 만의 ‘정상화’다. 주중 박성호·손정은 앵커, 주말 김수진 앵커 체제로 진행되는 ‘뉴스데스크’는 ‘시민에 응답하는 뉴스, 시민과 소통하는 뉴스’를 슬로건으로 세웠다. ‘백화점식 보도’를 지양하고 시청자에게 필요한 뉴스에 집중한다는 것이 ‘뉴스데스크’의 방향이다.

한정우 보도국장은 지금까지의 뉴스를 ‘미디어 세일즈’로 규정하며 ‘공급자 중심의 뉴스’에서 벗어나겠다고 밝혔다. 한정우 국장은 “지금까지는 정보·권력·돈을 가진 공급자들, 이른바 ‘센 사람’들이 제공한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전달해 ‘미디어 세일즈’를 해왔다. 이제는 일반 시민이 요구를 표출하고 평가하는 시대인 만큼 소비자 시각으로 바꾸자는 의미”라며 개편 취지를 설명했다. 

‘뉴스데스크’ 새 앵커들은 시민과의 응답·소통이라는 슬로건의 의미를 짚었다. 박성호 앵커는 “뉴스가 여전히 기자나 공급원들의 언어로 지배당하고 있다. 이슈의 의미를 설명하고 맥락을 짚는데 보탬이 되겠다”고 말했다. 손정은 앵커는 “겸손한 자세, 진실 되고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시청자에 다가가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김수진 앵커의 경우 “지난 6년 동안 소비자 입장에서 보니 제작·권력자를 위한 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회적 약자가 주인이 돼야 한다는 이용마 기자의 말을 적어두고 관성이 생기려 할 때마다 새기겠다”고 말했다. 26일 ‘뉴스데스크’ 첫 방송은 시민들에게 전하는 사죄와 각오를 담은 리포트로 시작될 예정이다.

 

 

 
▲ MBC 뉴스데스크 평일 진행을 맡은 박성호·손정은 앵커. 사진=MBC
▲ MBC 뉴스데스크 평일 진행을 맡은 박성호·손정은 앵커. 사진=MBC
 
▲ MBC 뉴스데스크 주말 진행을 맡은 김수진 앵커. 사진=MBC
▲ MBC 뉴스데스크 주말 진행을 맡은 김수진 앵커. 사진=MBC
 

‘뉴스데스크’는 정보 전달을 위해 1분30초 분량 단발성 기사를 이어붙이는 ‘백화점식 보도’에서도 탈피할 계획이다. 한정우 국장은 “2분 미만 리포트를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며 그날그날 중점적으로 다룰 주제를 선정하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한 보도국 관계자는 “일상적인 날씨 리포트나 주요 인물 동정 보도는 과감히 버리고 탐사 및 보도 기능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귀띔했다.

 

‘팩트체크’ 코너도 신설된다. 윤색되거나 가공된 이른바 ‘가짜뉴스’가 만연해 있는 만큼 진실을 확인하고 방송으로 풀어나가는 코너가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해당 코너는 1996년 입사한 박영회 기자가 맡는다. JTBC ‘뉴스룸’, SBS ‘8뉴스’ 등에서 이미 팩트체크 코너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동시간대 방송사 간의 차별화 경쟁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5년 동안 망가진 보도기능이 정상화되기까지 ‘임시 체제’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상존한다. 박성호 앵커는 “기존 방식의 뉴스를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사실이다. 26일부터 본격적인 시도를 시작하기 어렵겠지만, 정상화된 뉴스의 틀을 갖추고 여러 실험을 거쳐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도국에선 내년 2월 말 이후 개편을 기점으로 ‘뉴스데스크’에 힘을 실어나간다는 계획이다.

인력 부족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보도국 관계자는 “깊이 있는 보도에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기자가 많지 않아 고민”이라고 밝혔다. 지난 5년, 부당 전보 등으로 취재현장에서 배제된 기자들이 상당한 데다 경력·시용 형태로 입사한 뒤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등을 고려해 현재 취재 투입 인력이 80명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내년 1월 중 대규모 신입·경력기자 공개채용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MBC 탐사보도의 한 축을 이뤄 온 ‘시사매거진 2580’과 대표 시사프로그램 ‘100분토론’도 내달 첫 방송을 목표로 진행자 섭외와 포맷 준비에 한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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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계기 남북교류재개 희망...북측 적극 나서주길"

김홍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취임, '국제 반전평화연대회의 개최' 제안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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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9  22: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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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신임 대표상임의장이 19일 저녁 서울 용산 드래곤시티에서 진행된 취임식 취임사를 통해 평창올림픽 계기에 남북교류 재개를 간절히 희망한다면서 북측도 적극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반도에 결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민화협에 참여하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게 평창평화올림픽 기간에 국제 반전평화연대회의를 개최하는 것을 제안드린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반전평화운동에 함께 참여해 주길 바란다."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신임 대표상임의장은 19일 저녁 서울 용산 드래곤시티 그랜드볼룸 백두에서 진행된 취임식 취임사를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평화이며 평화로 가는 길은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무엇보다 민화협이 새기고 나아가야 할 첫 번째 원칙"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또 민화협은 진보·보수의 구별없이 모든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하는 만큼 "평화를 제도화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려는 정부의 정책방향에 민화협이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어 그동안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민화협이 이제 민간차원에서 남북대화와 협력의 길을 새롭게 열겠다. 정부 대 정부간 대화가 막혀있을 때 민간에서라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터야 한다. 사회문화분야, 개발협력분야, 인도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도록 하겠다. 이것이 19년전 민화협이 만들어진 이유"라고 각오를 다졌다.

구체적으로 "내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교류 재개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면서, "민간교류를 복원하고 남북관계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 북측도 적극 나서주길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 의장은 처음엔 대표상임의장직 제의를 사양했으나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만드신 단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는 소회와 함께 "아직 젊고 부지런히 뛸 수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가는 기분으로 새출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이날 열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소통과 공감마당'에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조명균 통일부장관,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 그리고 정세현·김덕룡 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을 비롯해 회원단체 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해 김 의장 취임에 쏠린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이 착석한 헤드테이블. 정세현, 김덕룡 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과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 조명균 통일부장관,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 문희상 민주당 의원이 함께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정부간 대화가 막힌 상황에서 민간 차원에서라도 교류의 물꼬를 트겠다'고 한 김홍걸 대표상임의장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면서 "정부도 힘껏 돕겠다"고 협조를 약속했다.

또 남북관계가 아직 풀리지 않아 안타깝지만 반드시 해빙의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면서 "북핵문제에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노력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길에 "정부와 민간이 함께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남북관계의 복원과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당국간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민간의 적극적인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면서 "인도적 지원을 비롯해서 남북 교류협력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민간차원의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고 김대중 대통령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민화협이 남남대화와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한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문 대통령은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화협 창립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뜻을 상기시키면서 범국민적인 상설 통일운동협의체인 민화협 창립을 통해 정당과 종교계, 시민사회단체가 모이고 진보와 보수가 함께 했으며 이념과 지역, 세대와 계층의 차이를 넘어 통일운동의 지평이 크게 넓혀져 결국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의장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만드신 단체를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가슴이 뭉클하다"면서 "민화협이 남남대화와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한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딛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날 민화협 창립 19주년과 대표상임의장 취임을 기념하는 의미로 진행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소통과 공감마당'에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조명균 통일부장관,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당·정·청을 대표해 축하인사를 전했고 정세현·김덕룡 전 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을 비롯해 회원단체 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해 김 의장 취임에 쏠린 안팎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주었다.

   
▲ 왼쪽부터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 김덕룡 민주평통 상임부위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지선 스님,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2005년 5월부터 2009년 9월까지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을 역임한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지난 1998년 4월 11일부터 18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남북비료회담이 결렬된 후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당국에 앞서 민간이 나서는 것이 좋겠다는 '선민후관', △쉬운 일부터 시작하자는 '선이후난', △경제를 먼저하고 정치를 뒤에 하자는 '선경후정', △먼저 주고 나중에 받자는 '선공후득' 등 16자 원칙이 정립되었으며, 민족화해협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합의가 절실하다는 뜻이 모아졌다고 민화협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정 전 장관은 1998년 5월부터 토의를 시작해 그해 9월 3일 출범한 민화협이 내년이면 20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연말에 50대 신임 의장이 취임하는 것은 "내년 20년을 기해 민화협의 르네상스를 일궈내라는 민족사적 소명으로 이해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민화협은 처음 10년간은 '선민후관'의 원칙에 입각해서 활동이 바빴는데 그 뒤 9년은 일이 없었다"면서 "이제 다시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데 민화협이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가는데 '끌개'역할을 해주고 또 필요하다면 '마중물' 역할도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역대 대표상임의장 중 가장 젊은 분이 취임해서 든든하기도 하고 기대가 크다"면서 "민화협은 출범 초기부터 김대중 대통령께서 큰 관심을 갖고 지도해 주었고 단체의 이름도 지어주면서 독려해 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를 받들어서 실천한다는 점에서도 김홍걸 의장의 취임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민화협은 통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주고 평화통일의 여론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본격적인 남북교류의 시대가 열리면서 민족공동행사 추진과 6.15남측위 결성과 운영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민화협은 6.15남측위의 참으로 중요한 조직중 하나"라면서,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그 누구보다도 잘 계승할 김홍걸 대표상임의장과 각계를 대표하는 상임의장들께서 남북관계 개선과 민간교류의 큰길을 뚝심있게 밀고 나가게 될 것을 기대하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  민족화해의 문을 열겠습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김홍걸 대표상임의장 취임식 이후 참석자들은 얽히고 꼬인 남북관계를 상징하는 매듭을 푸는 '결의와 다짐'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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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연합훈련을 평창올림픽 뒤로 연기하자고 미국에 제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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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19일 평창겨울올림픽 뒤로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할 것을 미국에 제안했고, 미국 쪽이 (연기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평창올림픽을 위해 22일 개통할 서울~강릉 경강선 케이티엑스(KTX) 대통령 전용열차 ‘트레인1’에서 미국 엔비시(NBC)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평창올림픽 때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한·미 연합훈련의 축소 등을 포함한 과감한 조처를 고려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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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나는 미국에 이를 제안했고, 미국은 현재 이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은 북한의 행태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평창올림픽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안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북한이 올림픽 게임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은 아직 평창올림픽 참가를 알려오지 않았으나 과거의 행적으로 볼 때 막판에 참가 여부를 정하지 않겠느냐며, 북한이 막판에 참가를 통보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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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문 대통령은 한국체육기자연맹 소속 37개 언론사 체육부장들과 한 전용열차 기자간담회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는 북한이 평창겨울올림픽에 참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희망하는 취지의 발언은 있었지만, 문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참가 가능성에 대해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를 위해 우리 정부는 아이오시, 아이피시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고, 양 위원회는 북한의 참가를 지속적으로 권유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은 “과거 사례를 보면 북한이 참가하더라도 확약하는 것은 거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라고 본다”며 “그때까지 계속 설득하고 권유할 계획이다. 정부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88 서울올림픽이 냉전 구도 종식과 동서 진영의 화합에 큰 기여를 했다면 이번 올림픽은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평화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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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 가능성을 언급한 가운데 최문순 강원지사가 제3회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중국 쿤밍에서 18~19일 연이틀 동안 문웅 북한 여명체육단장을 만난 사실이 알려졌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으로 남북한 체육계는 대화 채널이 사실상 모두 끊겼던 터라 최 지사와 차관급 체육계 인사인 문 단장의 만남은 의미있는 진전으로 여겨진다. 최 지사는 18일 북한팀과 만찬을 하고 “이번 축구대회가 북한의 선수단, 응원단,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평창겨울올림픽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또 내년 상반기엔 평양에서, 하반기엔 한국에서 연간 두 차례 교류전을 하기로 합의했다.

이 대회는 북한과 중국, 한국의 강원도에서 각각 2개 팀씩 참가하는 15살 이하 유소년 축구대회로, 1회는 경기도 연천, 2회는 평양에서 열렸고, 올해 3회 대회가 강원도에서 열리기로 했다가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중단된 뒤 중국 쿤밍으로 장소를 옮겨 치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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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보리 북한 미국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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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anie Keith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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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반미투쟁 참가자들의 소회를 밝히다

2017 반미투쟁 참가자들의 소회를 밝히다
 
 
 
박한균 기자 
기사입력: 2017/12/20 [09:22]  최종편집: ⓒ 자주시보
 
 

지난 17일 조국과 민족은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2017 반미투쟁보고 및 격려모임에서 참가자들이 투쟁 과정에서 느꼈던 진심어린 소회를 전했습니다. 이날 모임에서는 청년대학생 등이 다양한 형식으로 참신하고재치 있게 대중적인 반미투쟁을 펼쳐나갔던 성과들을 뜻 깊게 평가했습니다. 특히 한반도 디톡스 청소년 대원은 설렘 반불안감 반에서 나섰던 반미 디톡스 활동이었지만이후 당당함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솔직 담백한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에 한반도 디톡스 통일선봉대사드기지 진입 투쟁대학생 반전버스킹트럼프 참수 퍼포먼스방미 트럼프탄핵 청년단 등의 활동을 펼친 대원들의 후기를 전합니다.

  

▲ 한반도 디톡스 통일선봉대가 2017년 8월 7일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로 9일간의 활동에 돌입했다.     ©편집국

 

● 한반도 디톡스 청소년 대원 후기

 

한반도 디톡스(Detox) 통일선봉대(이하 통일선봉대)’는 지난 8월 7일부터 15일까지 미국의 내정간섭 중단과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 처음엔 사실 학교 빠지고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는 가벼운 기대감과 설렘 반행사나 공연 같은 걸 해야할 거라는 불안감이 반이었어요.

 

솔직히 청소년 팀이 따로 없었으면 안갔을거예요공동체 생활을특히 어른들 사이에 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거든요어색하고재미없고...

 

그래서 초반에는 별로 도움되는 것 같지도 않고폐만 끼치는 것 같아 불편했어요해야 할 일도 잘 모르겠고...

 

주한미군이 나가야 하는 이유사드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통일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방법 등등을 찾아 청소년 팀 나름대로 공부도 했지만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통일 부채 만들기 체험을 열었던 일이었어요가장 힘들었던 일이었죠그만큼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요.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건입을 떼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하지만 한번 해보고 나니점점 쉬워졌고이제와 보면 정말 좋은 경험이더라고요그 경험 덕분에 낯선 사람 앞에서 더 당당해졌고학교에서 발표할 때도 더 여유로워졌고제 자신에게 더 자신감도 생겼어요.

 

이후로도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되던어떤 직업을 갖게 되던저는 집회가 열린다면 언제든 광장으로 갈 거고이모 삼촌들과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 2017.08.08 대구 동성로에서 진행한 한반도 디톡스 통일선봉대 마당사업 모습.   ©자주시보

 

▲ 반미 통일선봉대 한반도 디톡스가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자주시보

 

● 한반도 디톡스 대원 후기

 

운동 늦깎이에게 일찍이 그리고 진득하게 찾아와서 몇 년 동안 저를 괴롭혔던 슬럼프’ 운동이 재미가 없다니!? 나는 쓸모없는 놈이야저 동지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내 마음을 털어놓으면 나를 더 싫어하게 될거야...

 

이랬습니다극복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지만 매번 실패.

그런 와중에 슬럼프 극복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반미 통일선봉대 디톡스>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그날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대원들 한명 한명의 각자 다른 장점이 모이고 모여서 전체 디톡스를 빛내는 것을 매일 매일 몸으로 심장으로 느꼈습니다제 생각에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칭찬이었습니다.

 

특히 한반도 디톡스 대장님이 동지들의 좋은 점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는데거기에 감복한 대원의 장점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었습니다또 매일 일과를 마치고 모범대원 뽑기를 했습니다각자가 모범대원을 추천하여 최다 득표를 한 사람이 모범대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대원들은 누구나 똑같이 내가 오늘은 꼭 모범으로 뽑힐거야!’가 아니라 누구를 모범대원으로 할지를 매번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누가 그렇게 하자고 짠 것도 아닌데 모범대원은 매번 가장 묵묵히 열정적으로 하루를 보낸 대원에게 고루고루 돌아갔습니다어느새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칭찬을 하고 상대방을 높여주고 하다 보니 모든 대원들의 하나하나의 성향이 긍정적으로 발휘되어서 디톡스 전체가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디톡스 대원들이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에 매우 감동을 받았습니다몸을 아끼지 않고 서명을 받고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가 하면매일같이 밤을 새며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노래를 만들고손재주를 발휘해서 동지를 챙기고 작품을 만들고... 특히 대장님을 비롯한 실무진들은 잠도 잘 못자고 매번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되었을 텐데 항상 밝은 표정으로 디톡스의 길을 열어나갔습니다이렇듯 책임감집단주의신념동지애헌신성을 발휘한 디톡스 대원 한명 한명과 활동 하나 하나에 김승교(민주인권 변호사) 의장님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디톡스 활동을 하며 저의 새로운 모습을 찾았습니다동지들이 저의 어딘가 깊은 곳에 있는 좋은 점들을 끄집어내어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또 운동의 기본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동지를 사랑하는 것에 제 한 몸을 아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제가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잘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못나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마음을 비우게 되니 한결 편안해졌습니다비로소 운동을 즐기게 되었습니다특히 인간관계가 편해졌습니다더 풍성해지고더 다가가게 되고상대방도 저를 더욱 편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항상 민중을 위해조국을 위해라는 잣대를 가지고(많이 어렵긴 합니다저를 솔직히 드러내고저에게 더욱 집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예전에는 주어진 사업 따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억지로 꾸역꾸역 집행하곤 했는데이제는 제 것이 될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게 되었습니다바뀐 저의 모습에 생경함이 많이 비춰졌는지 동지 간에 갈등이 생긴 경우도 있었습니다하지만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으로 비춰져야겠다는 욕심이 어느새 비워져 있었습니다.

 

디톡스에서 얻었던 이러한 귀중한 가르침들 덕분에 슬럼프에서 벗어났습니다부산에서 저만 전일 결합으로 디톡스를 갔다 온 것도 부산 동지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항상 디톡스의 교훈을 바탕으로 부산 운동에 어떻게 좋은 영향을 줄까를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요즘은 무엇보다 동지들에게 푸욱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동지들이 힘든 것은 없는지 먼저 살피고 이야기 들어주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또 제 이야기도 마음 터놓고 하면서 술을 마시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한편으로는 언젠가 다시 슬럼프가 찾아오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그래서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틈틈이 정세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함이 있지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많을 것 같습니다디톡스에서 배운 대로 묵묵하게 제 길을 신명나게 뚜벅뚜벅 걸어 나갈 생각입니다.

 

동지를 위해민중을 위해조국을 위해!

  

▲ 화염과 분노 발언에 대해 트럼프 참수작전 퍼포먼스를 재치있게 하는 청년들 [사진출처-페이스북]    

 

▲ 트럼프 참수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의열단     ©대학생통신원

 

 

● 트럼프 참수 퍼포먼스 참가자 후기

 

안중근 의열단 소속 청년들은 북을 상대로 참수작전완전파괴 등의 거친 말을 쏟아내며 전쟁위기를 고조시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한 트럼프 참수작전’ 퍼포먼스를 진행했습니다.

 

☞ 오랜만에 이렇게 '의열단'이라는 이름으로 인사를 드리니까 반갑기도 하고 오래 쉬었는지 어색한 느낌도 같이 듭니다너무 감사하게도 많은 선배님들께서 의열단 활동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즐겁고 어려움 없이 활동했던 것 같은데처음 의열단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참수'라는 단어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생소한 단어여서 그런지 과격하게도 느껴지고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미 대사관 바로 앞에서 보란 듯이 트럼프를 참수하다가 연행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이 들었습니다고민을 많이 하고 있을 때 '일제강점기 때는 항일 투쟁이 독립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반미투쟁이 독립운동이다'라는 선배님의 말씀그리고 연행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진짜 트럼프한테 한 방 먹여 봐야겠다열심히 해봐야겠다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참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부를 하면서마음도 뜨거워지고 정말 여러모로 트럼프가 이 지구에서 있어선 안될 놈이라는 걸 제대로 느꼈습니다전쟁광 미치광이양키 일베또라이 등 트럼프 앞에 붙는 수식어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요이 전쟁분위기 고조를 멈추지 않는 미치광이 트럼프를 보면서 '우리도 다른 식으로 한번 미쳐보자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사실 결의도 하고 준비도 많이 했지만막상 미 대사관 앞에서 확성기를 등에 메니 한편으로는 긴장도 조금 됐습니다미 대사관 앞에서도 하고국방부 앞에서도 한 차례 진행했었는데요매번 발언을 할 때마다 긴장이 됐었지만 갈아버린다던가총을 쏜다던가진짜 눈앞에 트럼프가 있는 것처럼 감정이입을 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나중엔 긴장하기보다 오히려 퍼포먼스를 즐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의열단을 수행한 날발언을 마치고 한 퍼포먼스였던 권총 퍼포먼스를 하고 나니 진짜 트럼프를 향해 총을 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굉장히 신나기도 했는데요내가 이렇게 쏜 총을 트럼프는 알기는 할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워싱턴 주미대사관 국감장에서 저와 동지들이 함께 한 트럼프 참수대회 동영상이 재생되었다고 하는데요사실 참수를 매번 할 때도 트럼프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었는데 생각치도 못했던 국감장에서까지 우리의 투쟁이 보여졌다는게 많이 뿌듯하기도 하고자랑스럽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참수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더 큰 퍼포먼스를 위해 준비중입니다그동안 큰 관심과 응원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나가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사드저지 미국반대 청년결사대' 청년들이 사드반입 강요하는 미국을 규탄, 항의하고 사드반입 저지를 위해 골프장에 진입하고 있다.     <사진-페이스북>

 

 

● 성주사드기지 진입 투쟁 후기

 

☞  무거운 공기낯선 동지들과 겸언 쩍은 인사 뒤에 둘러앉은 첫 대면장좁은 방희뿌연 불빛사이로 몇 안 되는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있던 건작은 종이에 슥슥 멋없이 채워진 약도와 빨간 화살표보안 때문에 짧게 줄인 글과 말 속에서 흐르던 어색한 긴장감황량한 도시의 밤을 헤맨 끝에 어느 골작은 집에서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기실광주에서 출발할 때까진 '기지 진입 투쟁'이 말이 실체로 다가오지 않았었습니다예의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투쟁이려니.

 

하물며 그 밤사전답사까지 먼저 한 동지들의 입에서 간간히 나오는 말들이 더해지니 더욱 막연했지요.

 

"천연의 요새다", "주민들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다" "뚫을 만한 단서를 찾고자 종일 답사를 했지만 길이 분명치 않다이 쪽은 절벽이요저 쪽은 요소요소가 막혀있다철조망과 초소적외선카메라 등등"

 

하지만그가 종이 위에 끄려 적는 우리의 목표.

1진입 2철조망 3연행시 투쟁

첫날 안되면 비박을 해서라도 간다.

 

그 밤까지도 그 목표는 종이 위에 쓰여진 글씨일 뿐이였습니다적어도 저에게는.

 

처음 목표한 길이 끊어짐을 확인하고절벽뿐이라던 두 번째 길을 에돌아 올라타던 중 가느다란 빗줄기속에서 적외선 카메라와 초소의 실체를 확인했지요.

 

그렇게 우리가 넘어야 할 그 산의 실체를 접하니 비로소 온 몸의 세포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더군요.

 

결국우리가 가야할 길이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이어야 함을 몸으로 느꼈나봅니다깍아지른 듯한 절벽위에서 어느 순간 "못 갈 길도 아닌데외마디가 튀어 나오더군요그렇게 우린 빗속을 구르고 뒹굴며 짐승도 발자욱을 낼 수 없을 길을 한참 헤쳐갔습니다아니만들어갔지요.

 

몇 시간을 탔을까요굵어진 빗방울 사이로 산모기가 옷 속을 헤집을 때쯤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렵도록 날이 어두워집니다그가 이젠 물었지요비박을 하고 새벽에 이동하는 게 어떻겠냐며이번엔전원의 의견으로 결론을 냈습니다한결 분명해진 목표를 몸으로 자각하면서성공을 위한 방책을 확인한 일보후퇴.

 

그렇게 다음 날우리는 해냈습니다.

이중삼중 철조망을 짓이겨 넘으며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던 투쟁을 목표한대로 성사해냈지요.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부대 지휘관들의 모습단봉하나 들지 않은 우리의 외침에 주눅 든 눈빛으로 고개도 들기 힘겨워한 앳띤 병사들왜 우리의 목표가 '실제 진입이었는지를 견주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유치장에서 나온 뒤평가자리에서 동지들이 말합니다.

"이건 도저히 안 되는 투쟁이다그걸 확인시켜 주겠다는 오기로 끝까지 했다그런데 결국기지 안이더라"

"말도 안 되는 절벽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크게 다쳤을 때정말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미는 동지의 손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더라"

 

놀랐지요.

다들 결사의 각오로 모인 줄만 알았는데왠걸나처럼 목표를 가벼이 여기기도 하고 투쟁방향에 대한 의구심조직에 대한 나름의 불신까지...

 

우리 분명히 출발선에서 다 같은 마음은 아니였던 겁니다.

함께 길을 뚫으며 어느 덧마음이 모이고 있었던 것이지요.

투쟁의 길이 눈에 훤히 보이지 않아 불안하면서도방책이 시원스레 손에 잡히지 않아 답답해하면서도집행을 위한 세련된 대책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미심쩍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해냅니다.

그 원천그 이유무엇이었을까요?

 

끝으로.

산을 내려오는 길멧돼지와 대면까지 하고서도 진입한 동지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며 한 달음으로 굴러 내려온 동지들은 그 날 밤을 온전히 비를 맞으며 김천서 앞을 지켰습니다연행된 동지들이 따뜻한 유치장에서 배부르게 단 잠 잘 때.

그렇게 우린 하나였지요.

 

▲ 방탄청년단의 뜻에 공감하는 시민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서포터즈' 웹홍포.    <사진-페이스북>

 

● 방미 트럼프탄핵 청년단 후기

 

☞  지난 10/24부터 11/8까지, 15박 16일간의 시간동안 정말로 많고 많은 추억과 경험생각과 의미들을 남긴 방탄청년단 활동이었다그 방탄청년단 활동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고자 했었나나의 운동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규정하기 어려웠고 복잡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름대로 수기라는 것을 써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방탄청년단 덕분에 이제는 고민이 들더라도 그저 주저하고 있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방탄청년단에 활동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마음은 그리 건강하지 않았다. 4년째에 접어들어 운동이 너무 좋기도 하고 또 너무 두렵기도 했다나에게 있어 운동의 처음의 마음은 내 곁으로 삶으로 다가왔던 동지애와 실천이었다그렇게 운동을 접한 이후 평화자주민주통일 등 가볍지 않은 그 단어들의 지향과 가치가 스며든 세상을 상상하며 가슴이 뛰고마음속에 함께 기뻐할 사랑하는 얼굴들이 떠올라 벅차고자신의 꿈과 목표가 되어 앞으로 내달리게끔 했다하지만 여전히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실망과 같은 감정이 이따금씩 들고왠지 모르게 사람들 속에만 있으면 드는 부끄러움과 불안도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사람과 함께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는 일을 버거워하곤 했다스스로 나의 발전과 운동에 있어서 일정정도 벽과 한계를 지으며 내가 방탄청년단 활동을 맡아서 할 자격이 있을까‘, ’나보다 훨씬 더 앞서서 노력하는 동지들 앞에서시대가 요구하는 투쟁 앞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생각했다내 문제를 자주 회피하고 주저한 것에 대한 위기감도 들었다그런데 점점 방탄청년단은 그런 나의 고민과 상황을 뛰어넘게 하는 기회라는 직감이 들게 했다평소에 내가 의지하는 동지들이 함께였기 때문이다그 동지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운동을 처음 만나게 해준 실천과 동지애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사람들과 호흡하게 하고 단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동지애로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달궈지고 실천이라는 망치로 얼마나 단련될지약간 두려우면서도 떨리는 마음으로 방탄청년단을 준비했다.

 

방탄청년단의 과정은 모두가 알다시피 처음부터 녹록치는 않았다예상치 못한 전원 입국 거부 상황에 있었을 땐 많이 당황스러웠다하지만 정말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방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의 하나다입국거부라는 소식을 듣고 공항 바닥에 둘러앉아 화를 누르는 요가(?)도 하고토론을 나누며 기자회견을 가졌던 바로 그 때 나는 그 상황을 한계 지으며 감정을 억누르며 또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먼저는 한 두 명도 아니고전원 입국 거부는 말이 안 돼!!!’ 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했고 그럼 우린 앞으로 어떤 실천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걸까하고 머릿속이 까맣기만 했다하지만 동지들은 솔직하게 고민도 슬픔도 분노도 드러내 보여주었다각자 어려운 상황에 모였기에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진실된 마음에 나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는 내 자신과 동지들한테 얼마나 솔직했고 진심을 드러냈나?’ 우리는 그렇게 달궈지고 있었다아무리 막아내려 할수록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더욱 뭉치는 우리였다.

 

그렇게 돌입하게 된 14박 15일간의 농성농성 중에는 매일 학습과 실천의 연속이었는데 덕분에 내 생에 이렇게 많은 실천들을 매일빠르게진행해 본 적이 있을까 싶다매일이 도전의 연속이었다매일 촛불을 진행할 때특히 초반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지 고민했고 주저함도 극복해내고 싶었다학습과 실천과 동지들이 없었다면 마이크 잡고 노래 하나발언 하나하기 벅차하면서도 기자회견 발언구성을 준비해보고 사회를 맡도록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학습의 필요성은 너무 많이 강조된 만큼 내가 놓쳐왔던 영양분이었다.

 

왜 트럼프 탄핵을 외치는가 부터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본을 숭상하며 인간을 노예화하고 파괴하는 제국주의의 본질을 다시금 깨달았다인류의 투쟁은 세계 각국에서 제국주의의 침탈에 저항하며 민중해방의 역사를 진보시켰다시대를 밝혀가는 도도한 역사를 통해 내가 사람들 속에서 주저하지 말고 바로 서야 할 이유를 찾았다바로 그 길에 부지런히 함께 웃으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방탄청년단이었다우리 동지들과 함께한 실천은 미국과 수구 세력들의 방해공작에도 노래와 춤그림과 예술품퍼포먼스다양한 아이디어를 담은 영상제작까지 한데 어우러진 예술이었다지나가는 외국인들과 외쳤던 노트럼프존선언함께 춤췄던 임피치스타일은 방탄청년단의 작품이다결국엔 방

미까지 기어코 성공해내어 광화문에서도 뉴욕에서도 반트럼프 반전평화로 함께한 기억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겨졌고 당당한 자주의 목소리로 역사에 남았다.

 

나에게 방탄청년단은 운동에서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다그리고 어두운 시대를 양심으로 사람사랑으로 묵묵히 밝혀나가는 당당하고 유쾌한 청년들이다내가 병든 사회에서 깊게 박힌 스스로의 불안과 불신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안보이게 누구보다 헌신하고 마음 채워준 방탄청년단이다이번엔 내가 누군가의 처음의 마음이 되고자 한다각자의 자리에서 헌신하는 동지들처럼 항상 준비된 일꾼으로 후배들사람들 삶에 함께하고 실천하고 싶다.

 

▲ 2017년 9월 30일 춘천 반전버스킹을 함께해준 참가자들     ©대학생통신원

 

● 반전버스킹 피스어게인 후기

 

전세계에 도처에서 미제를 쓸어버리자!

 

☞  반전버스킹을 하게된 계기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죠처음에 들었을때는 전국을 돌아야한다고????” 하는 생각에 주저주저했습니다그런데 지금 정세를 보며 우리는 뭐할까 라는 생각을 하다말다 까먹었다 생각났다 했었던 찰나그래지금 이런거 필요한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되는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3일을 하려고 한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국순회버스킹 이름을 걸고 3일 가는게 너무 말만 거창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너무 씽 일정으로만 잡아놔서 더 많은 단위의 참가를 막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날짜를 5일로 늘렸습니다.

 

물론 중요한건 주축이였던 씽 단원들의 의지와 열의였죠다행히 반미반전의 의지가 매우 높은 상태였기 때문에그리고 그만큼 지금 이 버스킹이 의미가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진행될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그리고 민들레(진보 예술인모임)의 적극 결합으로 버스킹이 풍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무도 필요한 재정도 시스템도 걱정도 더 풍성풍성 ᄏᄏᄏ처음은 미래에서 이틀참가를 결정하시고그 다음엔 베란다항해에서 이틀이였다가 삼일로 결의를 높여주셨죠.

 

대구수원을 가고 지역선배들의 후원과 사랑을 받고 그리고 생각보다 높은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속에 첫주 버스킹을 잘 마무리했습니다두 번째 주는 베란다항해 팀의 결합으로 진.반미반전분위기 흥성흥성했습니다특히 트럼프 얼굴밟기전세계에서 일으킨 미국의 침략전쟁들 걸개는 버스킹의 메인이 되었습니다마지막 춘천에서는 가장 많은 단위와 사람이 참가해주었고 강원청지(강원도 청년과지성 단체)에서 풍선나눠주기 등의 마당사업을 준비해와서 많은 시민들의 참여로 흥성거리게 되었죠.

 

반전버스킹의 성과는 과연 이 버스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생각해봤는데 지나가는 시민들을 반미전사로 만들자는 취지는 아니잖아요북미대결에 원인을 누가 제공하고 있는지올바른 해결책이 뭔지미국이 얼마나 나쁜 나라인지알리는 게 중요하다 생각했고 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반북반공적대분위기에 짓눌려있는 사회속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어", "내가 틀리지 않았어” 라는 용기와 응원을 드리는게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잘 전달되었다면 성과겠죠!

 

두번째 성과는 전국대학생노래패연합 단위들의 결합입니다처음엔 하루이틀혹은 불참이였던 데들이 버스킹을 계속 보면서 함께 하게 되었어요!. 예술의 가장 강한 힘은 선동이라고 생각하는데요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하게 만드는 힘그런 역할을 한 버스킹이였다면 좋겠습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현수막에 소금을 뿌리고 이를 찢는 퍼포먼스 모습.     ©자주시보

 

● 2017년 반미투쟁을 진행하면서 얻었던 투쟁 정신

 

늙다리 미치광이가 누구입니까?

 

지구상 만악의 근원지는 어디입니까?

만악의 근원지에 늙다리 미치광이가 대통령으로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시기 우리는 정말 열심히 싸웠습니다전체적인 체계를 신속하게 정비하고 확실한 투쟁방향을 잡고 전일적인 투쟁을 전개했습니다우리는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가야 할 길을 갔을 뿐인데 뒤돌아보니 정말 큰일을 해낸 것 같습니다.

 

조기대선과 정권교체로 희망의 열기가 높아지고 변화의 기대가 솟구치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땅 만악의 근원지를 뿌리채 뽑아버릴 결심을 했습니다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적인 통일을 위해 미국의 본질을 폭로하고 미치광이 트럼프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반도 해독투쟁을 제안하고 진행했습니다.

 

한반도 디톡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반미냐?’ ‘미국이나 북한이나 똑같은데 미국만 규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된다’ ‘미국에게 잘못 보이면 문재인 정부가 더 힘들어 질 수 있다는 우려와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는 선명한 반미와 반 트럼프 구호를 들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섰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조성되고 있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고조는 미국 때문에 생긴 것이고한반도 전쟁위기는 트럼프 때문이다” 맞는 말 아닌가요?

 

한국사회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한반도 디톡스는 이남사회에서 진보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해줬습니다우리의 주적은 미국이고 투쟁의 대상은 미국이다그리고 그 수장인 트럼프를 강력히 규탄한다.

 

전국을 돌며 잠재되어 있던 반미투쟁의 의지를 끄집어 내줬습니다그 결과 8.15대회장과 트럼프 방한 시기에 자신 있는 반미반 트럼프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이어 우리는 트럼프 참수작전을 수행했습니다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의열단이 조직되고 미국대사관 여기저기에서 트럼프 참수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참수라는 말이 좀 거칠긴 합니다잘 쓰지 않은 표현이기도 하고 상상하게 되면끔찍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그래서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 ‘너무 무섭다!’ ‘반감만 불러일으킨다!’ 이런 우려와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봅시다북한을 상대로 참수작전을 수행한다고 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 미국한테 그럴 때에는 너무한 표현이다고 하면 말이 되는 겁니까우리는 트럼프 참수작전을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방법으로 임의의 시각에 저돌적으로 꾸준히 진행했습니다그것도 미국대사관 앞에서 말이죠.

 

우리가 진행한 참수작전은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킨 트럼프에게 내리는 형벌이며 조만간 그렇게 될 것 이라는 준엄한 경고입니다또한 이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미국놈들이 별거 아니다트럼프를 규탄하는 방법이 이렇게도 많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신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던 미국이라는 존재가 별거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사드기지 타격투쟁!

 

미국놈들이 얼마나 놀랬을까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건데 건강한 청년들이 산을 타고 철조망을 넘어왔을 때 미국놈들은 오금을 저렸을 겁니다항일유격대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기지를 타격한 투쟁과 같습니다.

 

이후 미국놈들은 사드배치를 자신감 있게 추진하지 못하잖아요국가 간 협상으로 절차를 밞겠다고는 하지만 이런 투쟁이 더 크게 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있는 사드도 빼야 한다는 것을 직감 했을 겁니다우리는 잔악무도한 일제를 몰아내고 독재정권을 무너트린 민족입니다투쟁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쯤은 그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우리는 이 투쟁을 통해 싸움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미국놈들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끝까지 쫒아간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또한 우리 국민들에게는 맘만 먹으면 사드기지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가는 길이 험난하고 위험했겠지만 우리는 사드기지를 기필코 타격했습니다.

 

방탄청년단!

 

방탄청년단이 미국본토에 직접 온다고 하니 트럼프가 얼마나 쫄았겠습니까트럼프 머리를 자르고 손발을 자르고 불을 지르고 미군기지를 단숨에 넘나들던 청년들이 미국백악관 앞에 온다고 하니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그렇지 않습니까아마도 성난 호랑이로 보였을 겁니다.

 

그러니 출국 금지죠광화문 광장에 오자마자 미국대사관 앞에서의 노숙 농성미국놈들과 트럼프는 잠을 못 잤을 겁니다트럼프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의미 있는 공개적인 행보를 하지 못했던 것도 방탄청년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전체 대오가 흐트러짐 없이 옹골차게 진행한 투쟁을 통해서 광화문 광장에서 반미의 함성을 만들 수 있었고반미열정을 광장으로 모아낼 수 있었습니다.

 

방탄 청년단은 반미투쟁이 과거 운동권의 아이템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고민족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청년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그 멋을 실컷 보여줄 수 있었던 투쟁이었습니다.

 

한반도 디톡스참수작전사드기지 타격투쟁방탄청년단 미국을 정신없이 몰아부친 연속타격과 연쇄폭발로 그로기상태(권투에서 심한 타격을 받아 몸을 가누지 못한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투쟁을 우리가 왜 했겠습니까?

 

우리가 돋보이고 싶어서페이스북에 포스팅할라고그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만악의 근원인 미국놈들과 그 수장인 트럼프를 끝짱 내기 위해서 싸웠습니다.

 

아직도 진행형입니다미국과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트럼프를 없애버리는 것은 시대적 사명입니다반미, 반 트럼프 투쟁은 옳고 그름의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민족으로 살 것인가자주적인 당당한 민족으로 살것인가 하는 운명적인 문제입니다우리는 당당한 나라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살기 위해 자주로운 평화통일 국가를 위해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트럼프를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논쟁 꺼리도 아닙니다이 싸움을 나 혼자 할 수가 없습니다하반기 투쟁을 이렇게 성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옆에 있는 동지가 함께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누가 동지이고 누가 동지가 아닌가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는 모둔 분들이 동지이고 우리를 지지해주시는 분들, 7천만 겨레가 우리의 동지입니다동지가 있는 한 우리는 끝까지 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맙시다우리는 이길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트럼프를 없애고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우리 민족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맘 놓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우리가 이길 때까지 싸워야 우리가 승리자가 됩니다아직도 미군들은 서울 종로에용산에동두천에평택에, 대구에부산에광주에군산에제주도에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외세의 군화발에 이 강토가 여전히 짖밟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투쟁을 멈추는 순간 이놈들은 살아납니다각자 활동하고 있는 단체와 지역에서 반미반 트럼프 교육교양활동을 진행해야 합니다반미반 트럼프에 대한 입장이 흔들려서는 절대 안됩니다또한 기회가 있을때 마다 SNS 선전선동활동과 거리투쟁을 조직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행동합니다우리도 배우고 대중들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끊임없이 진행해야 합니다미국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을 싫어합니다다만 무서워서어쩔 수 없어서 속으로만 앓고 있는 것뿐입니다혼자서 속만 태우는 우리 국민들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돗자리도 되어 주고나팔수도 되어줍시다.

 

2017년 투쟁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 민족에게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더 큰 싸움을 만들어갑시다.

 

반미반 트럼프 투쟁을 진행하시느라 동지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 큰 싸움을 위해 쉼 없이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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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 납품 회사도, 20년 우수기업도 은행에 당했다

['금융판 세월호' 키코사태 10년①] 잘나가던 두 중소기업은 어떻게 파산했나

17.12.19 20:08l최종 업데이트 17.12.19 20:26l
사진·영상: 유성호(hoyah35)

 

 

'금융판 세월호'라 할 만한 대형 금융 사건 '키코 사태'. 10년 전, 2007년 말 은행의 권유로 키코에 가입했던 700여 개의 중소·중견기업들이 큰 손해를 입고, 대부분 파산했다. 당시 피해 기업을 '환투기꾼'이라 부르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은행이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상품을 팔았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당시 피해 기업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키코 사태 10년을 맞아 피해 기업인들을 만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편집자말]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이 14일 오후 구로구에 있는 하청업체 의류 제작 샘플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이 14일 오후 구로구에 있는 하청업체 의류 제작 샘플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조 전 사장은 “희망 사항은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사업을 할 수 있게 나라가 도와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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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우리나라에 정의가 살아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이건 정의가 아니라, 살인을 하고도 뒤집어 씌우는... 그런 식인 거죠. 실망이 너무 큰 거예요. 재봉틀 한 대로 시작해서 200대까지 운영하다가, 중국에서 스페인으로 수출하는 무역을 했는데... 그렇게 된 거죠."

바쁘게 손을 놀리며 작업물에 시선을 고정시킨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지난 14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만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 당초 조 전 사장은 이른바 '키코 사태' 당시의 일을 떠올리기도 싫다며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어렵게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풀었다.

그는 "(글로벌 의류기업) 자라(ZARA)에 직접 수출했었다"며 "무역을 하니 달러를 받았는데 그때는 환율이 900~920원 등으로 요동치던 때였다"고 말했다. 조 전 사장은 지난 2007년 말 신한은행과 키코 계약을 맺었다. 키코(knock-in, knock-out: KIKO)는 원-달러 환율(아래 환율) 변동폭이 클 때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이면 미리 정한 환율로 달러를 팔 수 있는 금융 상품이다.

은행들은 키코를 '환 헤지(위험회피)'가 가능하고, 수수료가 0원인 상품으로 소개하며 수출 기업들에게 판매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환율이 900원대에서 1500원까지 폭등하자 계약한 돈의 2~5배를 물어주게 된 수많은 기업들이 손실을 입고 파산했다. 

[에이원어패럴] "걱정하지 말라더니..." 돈 못 갚자 수출 길 막아버린 은행

 

이어 조 전 사장은 "(은행에서) 우리는 우수기업이니 선처를 해준다며 달러를 950원에 바꿔준다고 했다"며 "그렇게 알고 계약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그는 "환율이 1000원에 가면 (계약)해지가 되고, 900원으로 떨어져도 해지가 된다고 해서 계약했다"며 "그런데 나중에 보니 600만 원 가량 돈이 빠져나가게 됐다"고 했다. 환율이 떨어져 손해볼까봐 키코에 가입했는데, 오히려 환율이 치솟자 거꾸로 은행에 돈을 물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 전 사장은 이런 계약 내용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만큼 키코 계약 내용이 복잡하다. 환율 변동이 심할 때는 수출 기업이 똑같은 달러를 벌어도 원화로 환전하면 손해(환차손)를 볼 수도 있다. 은행에서 이런 기업을 겨냥해 환율이 미리 정한 범위 안에서 움직일 때는 약정 환율을 적용해주는 금융 상품을 내놓았다. 바로 키코다. 하지만 이 상품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다. 

예를 들어 A기업이 2년 동안 매달 1만 달러를 환율 1000원에 팔 수 있는 은행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고 하자, 이때 환율이 미리 정한 상한선과 하한선인 1020원과 980원 사이에서 오르내리면 A기업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문제는 환율이 상한선을 벗어날 때다. 계약기간 동안 환율이 상한선인 1020원을 넘어서면 A기업은 매달 1만 달러의 2배인 2만 달러를 약정 환율인 1000원에 은행에 팔아야 한다. 더 많은 달러를 은행에 더 비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A기업은 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에이원어패럴이 신한은행과 약정한 금액은 20만 달러, 약정 환율은 950원이었다. 환율 상한선과 하한선은 각각 1000원과 900원으로 2년간 계약했다. 다른 피해 기업들처럼 환율이 상한선을 넘어갈 경우 약정 금액이 2배 이상 뛰는 계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율이 1500원까지 올라가면서 약정 환율보다 500원 이상 높아져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게 돼 결국 폐업하게 됐다. 조 전 사장의 이야기다. 

"이런 건 들은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방방 뛰었죠. 당시 은행장이 와서 '임시적으로 잠깐 이러는 거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는 거에요. 우리가 그때 1000만불을 수출하려다 보니 예산이 부족했어요. 그러니까 대출 쪽으로 많이 도와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다음에 은행이 (신용장) 네고를 안 해주는 거죠. (키코 계약) 20만불에 대해서 600 몇 만원이 나왔는데, 그걸 얼른 줘야 네고를 해준다는 거야. 첫 번째 이자를 그렇게 물었어요. 나중에 금융감독원에 진정서를 냈더니 '이자를 냈으니 그건 당신이 계약한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사채 쓴 것도 아닌데 자고 일어나면 갚아야 할 돈이 몇 천만 원씩 불어나"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이 14일 오후 구로구에 있는 하청업체 의류 제작 샘플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  조 전 사장은 “우리같은 사람은 뭐도 모르고 은행이니까 믿고 했는데 은행이 설마 사기를 칠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라며 “사채를 쓴 것도 아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몇 천만원씩 돈이 불어났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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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은행은 이를 이유로 무역에 필요한 신용장 처리를 해주지 않았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회사가 이를 갚게 됐다는 것. 이후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을 때 금융당국은 갚은 돈을 키코 계약이 성사된 증거로 봤다는 게 조 전 사장 설명이다.   
더불어 조 전 사장은 "사채를 쓴 것도 아니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몇 천만 원씩 갚을 돈이) 불어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조금 더 벌겠다고 화장실도 없는 중국 산지에 가고 그랬는데 몇 푼 벌어봤자 (갚을 돈이 많아) 소용이 없어 (무역을) 중단했다"고 덧붙였다.  

억울한 마음에 조 전 사장은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때 신한은행이 키코에 대해 제대로 설명했다고 반격하자, 당시 출입국확인서를 제출하면서 한국에 없어 설명을 들을 수 없었음을 증명했다고 조 전 사장은 설명했다.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이 14일 오후 구로구에 있는 하청업체 의류 제작 샘플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  재봉틀 1대로 시작해 200대까지 운영했다는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은 키코(knock-in, knock-out:KIKO) 사태로 불어난 이자를 갚지 못해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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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조정희 전 에이원어패럴 사장이 14일 오후 구로구에 있는 하청업체 의류 제작 샘플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키코 계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  조 전 사장은 불어난 이자를 갚기 위해 밤낮 쉬지 않고 재봉틀 작업을 했다. 그는 "손을 너무 많이 써서 연골이 다 닳았다"라며 "약을 먹어보고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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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도 이를 인정해 은행이 상품 설명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고 키코계약 손실액 약 13억 원의 절반을 은행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에이원어패럴은 나머지 6~7억 원에 붙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30여 년 살던 집을 팔고, 회사 사무실도 팔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조 전 사장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빚을 갚고 있다. 

키코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에이원어패럴은 꾸준히 성장하는 회사였다. 중국에서 옷을 만들어 의류기업 '자라'에 납품하는 업체였다. 키코 사태 이후 회사가 사라지자 조 전 사장과 그의 남편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회사에 취업해 돈을 벌었다. 현재는 한국에서 개인사업자 형태로 일하고 있다. 예전에는 자라에 옷을 직접 납품하는 업체였지만, 이제는 단순히 의류 샘플을 만들어 다른 업체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글로벌 의류 브랜드의 1차 협력업체에서 2차 하청업체로 전락한 것이다.

조 전 사장은 기자에게 손목을 보여주며 "손을 너무 많이 써서 연골이 다 닳았다"고 말했다. 이어 "약을 먹어보고 안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키코로 속앓이를 하다가 뇌종양 판정까지 받았다"며 "다행히 수술을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조 전 사장은 여전히 은행이 자신들을 상대로 사기행위를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은행이니까 100% 믿었다"며 "설마 사기를 칠 거라고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희망을 물었더니, "정부가 나서서 다시 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동화산기] "기업회생 신청하자 회사 빼앗겨... 변호사 선임도 못하고 끝났다"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박용관 동화산기 전 회장
▲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박용관 동화산기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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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관 전 동화산기 회장도 키코 사태 여파로 회사를 잃은 사연을 기자에게 털어놨다.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기업회생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10년 전 키코 사태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박 전 회장은 "기업회생으로 갔는데, 그 조건이 신한은행에서 관리인을 보내는 것이었다"며 "금융권의 악랄한 수법이다. 자기 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키코 손실을 막아내지 못한 동화산기가 기업회생을 신청하자 채권자인 신한은행이 회사를 넘겨 받겠다고 나섰다는 얘기다. 이어 그는 "그 관리인은 은행편이니 회사를 빨리 매각해야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2009년 말 쯤에 회사가 매각됐다"고 덧붙였다. 박 전 회장이 당황하던 찰나 은행에 회사를 빼앗겼고 이후 회사가 중국으로 팔렸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법적 권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며 "돈이 없으니 변호사 선임도 못하고 그렇게 끝이 났다"고 했다. 

동화산기는 타이어 제조 설비를 만드는 회사였다.1987년 설립 이래 지난 2007년에는 약 600억 원이라는 최고 매출액을 기록하고, 국가품질 경쟁력 우수기업, 금호타이어 설비협력업체 가운데 1등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당시 컨설팅 업체로부터 코스닥 상장을 권유받기도 했었다고 박 전 회장은 설명했다. 모두 키코 사태가 불거지기 이전의 이야기다. 이어 키코 계약 당시를 떠올리며 박 전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신상훈 전 신한은행장까지 나서서, 자금 지원 약속하며 키코 영업"

"2007년 말 쯤이었어요. 은행이 기업 담당자들과 대표들을 데리고 말레이시아로 해외연수를 보내줬죠. (키코를) 환헤지 상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외화가 들어오는데 환율이 떨어질 때 위험을 피할 수 있겠구나 한 거죠. 신상훈 신한은행장도 와서 설명할 때 옆에 앉아있더라고요. 믿음을 주는 겁니다. 최대한 기업을 지원해주겠다 하니 듣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금융권의 자금(대출)을 지원 받아서 멋있는 회사를 만들어 국가에도 기여하고, 그렇게 생각했죠."

당시 40여 개 기업들이 이 연수에 참가했다는 것이 박 전 회장의 설명이다. 이후 계약한 키코로 인해 동화산기는 총 186억 원 가량 손실을 보고, 이를 막지 못해 매각됐다. 이에 대해 박 전 회장은 "기업회생 신청까지는 갔었다"며 "다른 (채권) 은행들은 모두 회생에 동의했는데 신한은행이 반대했고, 그 지점장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 전 회장은 대표이사직을 빼앗겼고, 키코 관련 자료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 박 전 회장은 개인신용불량자가 돼버렸고, 지금은 고철유통업을 하고 있다. 이어 그는 "키코 피해 기업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적폐청산"이라며 "빨리 기업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박 전 회장은 키코 피해자에게 자금 지원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은행들이 나눠 피해를 보상하고, 기업들이 (살아나)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실업율도 높은데, 이에 도움 줄 수 있는 힘을 길러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박용관 동화산기 전 회장
▲  키코(knock-in, knock-out:KIKO)로 파산한 박용관 동화산기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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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충칭 임시정부 청사 기념사진에 부쳐 : 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문재인 대통령이 충칭의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방문하여 옛 임정 요인들의 포즈를 본따 남긴 기념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젖어 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섰던 많은 임시정부 요인들도 오늘을 굽어보며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해서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여사의 이야기를 옮겨볼까 합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한 김자동 선생의 모친이시기도 한 분이죠. (물론 그분이 직접 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1인칭으로 구성한 그분의 삶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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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이 인사조차 어색할 만큼 평안치 못한 시대를 사는 여러분께 이리 인사드리는 것이 미안하오만 나도 꽤 험한 인생을 산 이로서 여러분께 이리 인사드릴 자격은 있을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안녕들 하십니까. 내 이름은 정정화라 합니다. 아마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꽤 많은 관객을 모았던 영화 <덕혜옹주>를 빌어 내 소개를 해 볼까요? 나는 극중의 등장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영화 중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이 있어요.
 
영화 속에서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탈출 작전이 나오는데 영화적인 설정일 뿐이지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영친왕의 탈출 계획을 세운 적은 있었지만 영친왕 스스로 일본 탈출을 시도한 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의붓형 의친왕의 경우는 달랐어요.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고 임시정부에 알려 왔고 국내 탈출을 결행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이때 의친왕의 탈출 작전을 주도한 이는 동농 김가진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대한 제국의 대신을 두 번씩이나 지냈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남작 작위까지 선사한 분으로 조선 땅에서는 평생 떵떵거리며 지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1항쟁 후 상해로 망명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의 허울을 폭로하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죠. 나는 그 며느리였고 그 분의 장남 김의한의 아내였습니다. 조선에 남아 있던 저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친정아버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친정아버님의 말씀은 지금도 쟁쟁하군요,
 
“생활이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섣불리 먹은 마음이 중도에 유야무야될까봐 그것이 근심스러워 이르는 말이다.”
 
그때 내 마음은 단단했고 튼튼했지만 그 후 이어질 내 삶을 미리 알았더라면 친정아버님의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버님께 하직 인사 올린 뒤 나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상해로 망명합니다. 그 후 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25년이라는 세월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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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건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저 몇 명의 명망가들이 깃발만 들고 있었던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별 같고 범 같은 사람들이 만나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으며 그 꿈 하나로 뭉치고 부대끼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던 역사의 장이었어요. 일제와 투쟁하는 동시에 하루 세 끼 밥벌이와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챙겨야 했던 나는 참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성재 이시영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석오 이동녕 , 우당 이회영 선생 등 크나큰 존함들부터 후일 자신의 이름도 까먹고 ‘가야마 미쓰로’로 불린 친일파 이광수, 후일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상록수>를 쓴 심훈, 비운의 혁명가 김원봉 등등 이름을 주워섬기자면 몇 밤을 새도 모자랄 사람들을 겪었고 그들의 겉과 속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겁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야 더 말할 것이 없는 우리 역사의 거목이시겠지만 나는 그분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영웅을 낳은 여걸 중의 여걸이라 여깁니다. 참 키가 작으셨어요. 얼굴이 빡빡 얽으셨고 외람되지만 어떻게 저리 못났나 싶은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 작은 키에는 세상의 어떤 거인들도 밟지 못할 용기가 넘쳐났고 백범 같은 거목을 능히 품어낼 국량이 도사리고 있었지요.
 
언젠가 그분의 생신 때 제가 동료들과 함께 비단 솜옷을 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뒤라 중국인들이 우리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이러저한 중국인 귀빈들도 종종 찾을 때라 어머님 위신을 세워 드리려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는 비단옷을 집어던지면서 호통을 치셨어요. “지금 우리가 이나마 밥술이라도 넘기고 앉았는 건 온전히 윤의사의 핏값이야. 피 팔아서 옷 해 입게 생겼나? 당장 물려 와.”
 
머리에 화로라도 인 것처럼 부랴부랴 옷을 물리려 뛰어가던 중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왔습니다. 돌아가신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였지요. 고부간에 사이 좋은 건 착한 왜놈보다 찾기 어려울 일이지만 최준례 여사와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어느 어머니와 딸보다도 의가 좋았고 죽이 척척 맞으셨어요. 백범 선생이 부부싸움이라도 하거나 아내에게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먼저 불호령을 내렸으니까요. “네가 네 처에게 이렇게 할 수는 없다 이놈아!”
 
최준례 여사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시다시피 임시정부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 안에 있었고 그 경계를 벗어날 경우 어느 밀정이나 일본 관헌의 손에 변을 당할지 몰랐지요. 하지만 최준례 여사의 병이 깊어 조계 밖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어요. 형편이 극도로 어렵고 당시 갓난 아이였던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의 배냇옷을 만들 천이 없어 내 헌옷을 손질하여 만들 정도였던지라 제대로 구완도 못했지요. 1925년 새해 벽두였을 겁니다. 최준례 여사 병이 위중하다 하여 달려갔더니 이미 가망이 없더군요. 꺼져가는 것이 역력한 얼굴 앞에서 나는 애타게 물었어요.
 
“선생님(백범)께 오시라고 할까요?” 그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겨워하던 최준례 여사는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고개를 저으셨어요. 어차피 못 올 사람이라도 고개라도 끄덕여 보지, 평생 고생 시킨 남편 얼굴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고 불러 달라고나 해 보지, 최준례 여사가 야속할 정도였습니다. 시어머니 곽낙원 역사라도 부르자고 해도 도리질이셨지만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조계로 뛰어갔지요.
 
백범에게도 소식을 전했지만 끝내 조계 밖으로 나오지 못하셨고 어머니가 오셨을 때 이미 최준례 여사는 세상 사람이 아니셨습니다. 한글학자이자 임시정부 임정원 의원이던 김두봉 선생이 우리 글로 써 주신 묘비 앞에서 며칠을 펑펑 울었는지 모릅니다. 참람한 생각까지 들었지요. 독립이 뭐라고, 나라가 해 준 게 뭐라고 이리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고생을 하며 죽어가야 하는가. 그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왔습니다. 이세창이라는 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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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몇 번 잠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신의주에는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책으로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분이 이세창씨였습니다. 그분은 저를 여동생 돌보듯 챙겨 주셨고 여자의 몸으로 위험한 일을 하는 걸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헤어지면서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내레 솔직하게 한 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시다. 독립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 같이 다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억세지만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던지는 이세창 씨의 질문을 들으면서 저는 ‘독립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은 우리같이 ‘귀골’로 태어난 사람들, 나라 있을 때 배 부를 만큼 부르고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 앞장서서 했어야 마땅했겠는데 이세창 씨는 대체 무슨 덕을 보았다고 ‘위험한’ 일을, ‘험악한’ 활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귀골로 산 사람들' 걱정을 하셨는가 말입니다. 그 분의 마지막 말씀에 저는 기찻간에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위인전에서 읽었던 쟁쟁한 독립투사들. 그분들 말고도 그분들의 수십 배 수백 배 되는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심지어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후손들의 기억으로부터도 배제된 채, 여러분이 오늘날 우리 말을 쓰고 우리 글을 읽고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자유를 위하여, 그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스러움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죽었다는 것을. 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이 일제 경찰에 붕괴되면서 저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의 이세창 씨도 체포됐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어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후손은 어떤지 아무도 모릅니다.
 
제가 상해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은 만주에서 온 승전보에 열광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였지요. 일본군 수천 명이 죽었다는 이 기막힌 소식에 술 못 먹는 사람도 축배를 찾을 지경이었습니다. 기쁜 소식 뒤엔 눈물나는 얘기도 따르는 법이지요. 몇날 며칠을 먹지 못하고 싸우는 독립군 입에 주먹밥이라도 물리려고 광주리 이고 산을 오르다가 일본군 총에 맞아 죽은 아주머니 이야기, 일본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렸다는 풍물패 이야기, 그 와중에 기관총 중대장이었다는 최인걸의 이야기는 눈물겨웠지요.
 
아녀자들 비녀와 애들 돌반지까지 팔아 마련한 단 6정의 기관총 가운데 하나를 맡았던 그는 아예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묶어 버렸다고 합니다. 절대로 몸에서 떼지 않고 총에 맞더라도 죽을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겠다는 각오였겠죠. 그리고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집중 사격의 대상이 되어 돌아갔다고 해요. 우리는 그 이름만 들었지, 그가 어디 사람인지 나이는 얼마인지, 후손은 남겼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왜 죽었을까요.
 
김구 선생이 안중근 의사 가문과 사돈을 맺었고 안중근 의사 가문 사람들이 임시정부에 많았기에 나는 안중근 의사를 둘러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슴 아팠던 분은 안병찬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구한말, 정말 팔도를 탈탈 털어 몇 없었을 변호사였습니다. 안중근 의거 소식을 들은 그는 폐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원천리 뤼순으로 달려와 변호를 자청합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비롯한 외국인 변호사들의 변호를 일체 불허했고 안병찬 변호사는 이에 거칠게 항의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재판 때마다 참석하여 공판을 지켜 보았고 소송 기록을 열람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공판을 낱낱이 기록하여 역사에 남깁니다. 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인 “동포에 고함”은 그를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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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마지막 외침을 세상에 알린 이로서 안병찬 변호사는 그 의미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법조인으로서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을 변호하였고 그 뒤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러시아까지 가서 레닌으로부터 독립 운동 자금을 받아 오던 그는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마적의 습격을 받아 외로운 피를 뿌리며 사라져 갔습니다. 대한제국 천지에서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곤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3대가 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던 변호사의 선택은 망명객이었고 독립군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요.
 
세계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역사 교육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일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어떤 고난을 무슨 용기로 극복했으며 그 투쟁에서 빛났던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느 정도를 알고 계신가요.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피를 토하여 대륙의 흙먼지를 적시며 살아갔던 그 허다한 사람들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물론 그분들이 여러분더러 자신들을 알아 보기를 바라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돌아간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이 열린 적이 있지요. 중국 정부의 호의와 도움 속에 근근히 유지됐던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기억하는 이로서 매우 감개무량한 순간이 돼야 마땅했으나 시진핑 국가 주석이 우리 대통령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땅을 치고 울 뻔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나 봤더니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디다. “한국의 유명한 지도자인 김구 선생님께서 저장(浙江)성에서 투쟁 하셨고, 중국 국민이 김구 선생님를 위해 보호를 제공했습니다.” 시진핑은 우리 대통령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정말 그랬다면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슬몃 의심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가 회담을 했던 절강성 항주에서, 호남성 장사 찍고 광동성 광주 지나, 광서성을 거쳐 사천성 중경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들어보기는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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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떠납니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역사적 DNA로 후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나 가끔은 슬플 때가 있답니다. 과연 이 유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지요. 언젠가 어느 학자라는 작자가 “중국인 김구, 미국인 안창호가 만든 임시정부”라는 망발을 토해 낼 때 나는 그를 응징하고 싶었습니다. 연약한 여인의 손이지만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싶었습니다. 내 눈으로 보았던 흐드러진 꽃망울 같던 사람들, 그들이 뿜어내던 불길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어찌 이런 망발을 지껄이느냐. 이 독한 짐승들아 외치고 싶었습니다. 
 
2017년 12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에 오셨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옛 임정어른들이 사진을 찍던 그 대열로 요인들과 함께 사진도 남기셨군요. 아마 그분들도 이 모습 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실 겁니다. 그분들의 팔도 사투리로 감회를 털어놓으시겠지요.
 
“야 아주 잊혀진 거는 아니구마니.”, “어데 뭐 기억될라꼬 독립운동했능교.”, “보기 좋아유. 아주 보기 좋아유.” “대통령 얼굴 참 훤하지비. 그 부모님들은 우리 함경도 출신이라 했재이요.”, “참말로 짠하구만이라. 한국 대통령 온 게 시방이 처음인 게 맞소? 한중수교허고도 25년인디.”, “말하면 뭐해니. 내 가슴이 마이 아파.”
 
 
P.S. 정정화 여사와 임시정부의 이야기는 정정화 여사 아드님인 김자동 선생의 <임시정부의 품안에서>에 보면 상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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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017]
석정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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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실마저 ‘갑질’…하청노동자 “휴가 거의 못썼다”

등록 :2017-12-19 08:52수정 :2017-12-19 10:46
 
멈춰, 직장갑질 ① 공공기관

 

사장님 갑질, 부장님 갑질, 정규직 갑질, 원청업체 갑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직장갑질 빅뱅의 시대다. 40여일 전 문을 연 오픈카톡방 ‘직장갑질119’에는 매일 700명 이상의 직장인이 들어와 자신이 당하는 직장갑질 사례를 제보하고 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갑질’을 검색하면 누구나 방에 들어올 수 있다. 저마다 털어놓는 온갖 애환을 보고 있노라면 ‘직장이 지옥’이란 생각이 들 정도다. 직장갑질119와 <한겨레>가 공동으로 기획해 연속 보도한다. 제보: gabjil119@gmail.com

 

 

 

직장갑질 119가 마련한 직장갑질 피해자의 모임 ‘가면무도회’에 참가자들이 쓴 가면들이 놓여있다. 가면엔 ‘갑질NO’, ‘울지도 몰라’ 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직장갑질 119 제공
직장갑질 119가 마련한 직장갑질 피해자의 모임 ‘가면무도회’에 참가자들이 쓴 가면들이 놓여있다. 가면엔 ‘갑질NO’, ‘울지도 몰라’ 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직장갑질 119 제공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이 정보시스템 유지·보수 업무를 하는 사내하청 성격의 노동자들에게 밤샘근무와 휴일근로를 시키고도 휴가조차 거의 보내주지 않는 등 갑질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좋은 사용자의 모범이어야 할 정부의 ‘컨트롤타워’마저 되레 직장 갑질에 앞장선 셈이다. 행정부처 전반의 정확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8일 국무조정실 정보시스템 운영·유지·보수를 맡은 사내하청 ㅇ업체 전·현직 노동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들은 1주일에 한차례 이상 2~4시간짜리 야근을 하고 한 달에 1~2차례씩은 주말에도 불려나와 휴일근로를 했으나 정작 연차휴가는 물론 대체휴가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3월에 입사해 9월에 업체를 그만둔 나갑철(가명)씨는 <한겨레>와 만나 “여름휴가 5일과 5월1일 노동절 빼곤 휴가를 써 본 적이 없다.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국무조정실 공무원들에게 ‘하루 쉬겠다’고 하면 그쪽에서 ‘시스템 작동에 지장 없도록 하고 쉬라’거나 ‘업무의 연속 유지에 지장이 없으면 쉬라’고 했다. 우리로선 쉬지 말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사실상 휴가를 쓸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어쩌다 하루 쉬어도 다음날 “왜 연락이 안 됐느냐”는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게 노동자들의 증언이다.

 

 

정보시스템 유지·보수 노동자에
빈번히 야근·휴일근로 시켜놓고
쉴 틈 안줘 휴가라곤 사흘 남짓
사업자엔 노조활동 대책 요구도
총리실쪽 “오해소지 문구 없앨것”

 

 

실제로 <한겨레>가 이날 국무조정실을 통해 확인한 결과, 7달 동안 대체휴가 하루를 쓴 박씨를 뺀 나머지 노동자 7명이 지난 1월부터 이달 15일까지 쓴 휴가는 모두 6일(2명), 7일, 8일, 8.5일, 10.5일, 12.5일이었다. 여기엔 여름휴가로 한번에 쓴 5일이 포함된 것이다. 절반 이상이 여름휴가를 빼곤 1년 내내 평일에 쓴 휴가가 하루에서 사흘 남짓에 불과한 셈이다. 10.5일을 쓴 이는 업체 관리자였다.

 

이들은 올해 들어서만 4차례 안팎 정보시스템 유지·관리·보수 업체 노동자의 고유 업무로 보기 힘든 새 티에프 시스템 구축 업무도 맡아 밤샘근무를 해야 했다. 첫번째는 지난 5월 중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준비 때였다. 서울 종로구 금융연수원에 마련된 준비팀원 50여명의 사무환경 구축을 위해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무하는 업체 직원 7명 가운데 4명이 서울에 올라와 작업하느라 2~3일 동안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이다. 준비팀 1인당 2대씩 모두 100여대에 이르는 피시에 운용·보안시스템을 깔고 인터넷·정부전산망·프린터 등을 랜선으로 연결한 뒤 정상 작동 여부를 점검해야 했다. 이후 국무조정실에 소통위원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살충제달걀티에프(TF)를 구성할 때도 규모만 다를 뿐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국무조정실이 이들을 각종 티에프 관련 구축 작업에 동원한 건 의무에 없는 일을 시킨 ‘갑질’에 해당한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관련 서류와 법률을 검토한 직장갑질119의 윤지영 변호사는 “사업 계약 내용이 명확하지 않으나, 일반 계약의 원칙을 비롯해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등의 취지에 비춰 보면 티에프 관련 정보시스템 구축은 애초 계약의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새로운 사업으로 봐야 한다”며 “티에프 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계약 내용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발주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국무조정실은 올해 1월에 조달청 나라장터에 공고 한 정보시스템 운영·유지·보수 업체 입찰 제안요청서에 “본 사업과 관련해 투입되는 인력의 노조활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 업체 노동자의 노동3권을 옥죄는 ‘정부 갑질’이자 부당노동행위라는 비판이 가능한 대목이다. 정부 계약 특성상 제안요청서 내용은 계약서와 효력이 같다.

 

이에 대해 국무조정실 쪽은 “제안요청서에 ‘장비 설치와 업무용 소프트웨어 설치 지원’ 항목이 있어서 이들에게 티에프 사무실 등의 구축 업무를 맡긴 건 잘못이 아니다”며 “업체 직원에게 휴가 등 복리후생을 제공하는 것은 위탁 업체 소관사항으로, 국무조정실에서는 위탁 직원의 휴가에 대해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활동 관련 제안요청서 내용에 대해선 “문구상 오해의 소지가 있어 내년도 사업 제안요청서에선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24086.html?_fr=mt1#csidx0c6a9520e8c278aad80b696d83fa9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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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 위헌소지 있다”

대법원에 의견 제출 결정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7-12-19 10:20:40
수정 2017-12-19 10:20:40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들이 15일 서울 세종대로 청계광장 인근에서 법외노조 철회 교원성과급제, 교원평가제 폐기 등 3대 교육적폐 청산 촉구하며 가진 전국교사결의대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들이 15일 서울 세종대로 청계광장 인근에서 법외노조 철회 교원성과급제, 교원평가제 폐기 등 3대 교육적폐 청산 촉구하며 가진 전국교사결의대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통고처분이 헌법의 위배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대법원에 제출하기로 했다.

인권위는 18일 제19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전교조 법외노조통보처분 취소소송에 관해 담당 재판부에 의견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 처분의 근거 법령인 '노조법 시행령' 제9조 제2항은 시정 요구 불이행에 대한 제재로 노조법상 향유할 수 있는 권리의 일시정지 등 덜 침익적인 형태의 방법을 강구하기보다는 신고증 철회와 같이 노동조합의 지위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가장 침익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헌법상 기본권 제한의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전교조는 1999년 합법화 당시에도 조합원 중에 해직 교원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후 이 사건 처분을 받기까지 약 14년간 합법노조로 활동해 왔다. 이 사건 처분과 관련하여 문제가 된 해직 조합원수는 9명으로 전체 조합원 중 해직 조합원의 비중이 극히 미미했다. 인권위는 초기업단위 노조의 특성 상 해직 조합원의 존재가 전교조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많지 않음에도 9명의 해직 교원을 이유로 6만여 명에 달하는 절대 다수 조합원의 단결권 행사를 전면 중지시키는 처분을 한 것은 이로 인한 공익적 기대효과에 비해 전교조가 받은 피해가 매우 커 비례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인권위는 '해직 교원의 교원노조 가입 자격 여부'와 관련해 "교원노조의 ‘초기업단위 노조’로서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 소송 1, 2심 재판부가 제시한 교원의 직무특수성(윤리성·자주성·중립성), 교육의 공공성 및 학생의 교육권 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2004년 대법원 판결 이후 해고자, 실업자, 구직자 등이 초기업단위 노조에 가입하는 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교원노조에 대해서만 해고자의 가입을 제한하는 것은 교원의 단결권을 과도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봤다.

또한 인권위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인권조약 및 전교조 법외노조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와 권고를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모든 사람의 자유롭고 차별 없는 노동조합 결성 및 가입 권리'는 유앤 사회권규약,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등 국제인권규범에 명시된 기본적 인권 항목"이라고 밝혔다.

이에 전교조는 이날 논평을 통해 "인권위가 대법원에 제출할 의견이 구구절절 옳은 것이고 전교조의 입장과 부합함에도 이를 전적으로 환영하기 어렵다"며 "지금 인권위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대법원보다도 정부에 대하여 고용노동부의 2013년 10월 24일 '노동조합으로 보지 아니함 통보'를 철회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10월 고용부는 해직 교원 9명의 가입을 이유로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처분을 했다. 현행 교원노조법 제2조에 따르면, 조합원 자격을 현직 교사로 제한하며, 노조법 제2조는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을 허용하는 경우 노조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교조는 그 후 법외노조 처분의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했고,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하고 있다. 이로인해 노조 전임자 해고 등의 피해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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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이 나왔지만, 변하지 않는 한국 언론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2/19 10:35
  • 수정일
    2017/12/19 10:3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기자가 쓴 자살 사건 기사로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이 나왔지만, 변하지 않는 한국 언론
 
임병도 | 2017-12-19 09:01:3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중앙일보 트위터에는 얼굴이 그대로 노출됐지만, 아이엠피터가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12월 18일 중앙일보 트위터에 <속보, 샤이니 종현, 청담동서 숨진 채 발견>이라는 기사를 링크한 트윗이 올라왔습니다. 이 트윗에는 ‘#종현자살’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렸습니다. 네티즌들은 해시태그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비판을 했습니다.

언론사 SNS 계정에서 검색이 쉬운 해시태그를 다는 것이 뭐가 문제이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트윗을 올린 시각은 오후 7시 15분이었고, 정확히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중앙일보는 해당 트윗을 삭제했습니다.

자살과 연관된 사망 사건 보도는 신중해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자살보도 권고안’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샤이니 종현씨의 사망 사건 뉴스는 기준도 없이 보도됐습니다. 언론의 자살보도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자살 사건, 반복적으로 보도하거나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지 마라’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에는 기사에 나왔던 ‘갈탄’이 계속 상위권에 노출됐다.

 

WHO의 ‘자살보도 권고안’을 보면 ‘자살 관련 기사를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거나 반복 보도하는 것을 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언론은 ‘기회는 이때다’라며 클릭 장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특히 연예 관련 기사를 주로 보도하는 매체의 뉴스를 타 언론사가 제목만 바꿔 올리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조선닷컴>은 <종현, 10년간 무대서 빛났던 샤이니..이젠 하늘의 별>이라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원래 <OSEN>의 <종현, 10년간 무대서 빛났던 샤이니..이젠 하늘의 ★> 기사를 그대로 보도한 것입니다.

WHO는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 자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샤이니 종현씨의 사망 당시 ‘갈탄’이 방 안에 있었다고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를 보면 ‘갈탄’이 계속 상위권에 등장했습니다.


‘연예인 자살 사건 이후, 자살 급증’

 

▲ 연구팀은 “미디어의 유명인 자살보도가 일반인 중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쳐 모방 자살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WHO는 ‘연예인 자살을 보도할 때는 특별히 더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연예인 또는 유명인의 자살 이후 자살이 급증하기 때문입니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전홍진 교수팀이 2005~2011년 사이 국내에서 자살로 사망한 94,8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 자살 사건의 18%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 후 1개월 이내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년의 연구기간 동안 자살 사건으로 TV와 신문 매체에 1주일 이상 보도된 유명인은 총 13명이었는데, 이들의 사망 후 1개월 이내에 자살한 사람은 17,209명으로 전체 자살 사건의 18.1%를 차지했습니다.

유명인의 자살 전 1개월간 하루 평균 자살자가 36.2명이었습니다. 유명인 한 명이 자살한 후 1개월 동안 하루 평균 자살자는 45.5명으로 무려 9.3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전홍진 교수는 “유명인의 자살이 일반인의 자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유명인이 사망한 경우에는 언론에서 감정적이나 자극적인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살 보도 기준만 지켜도 자살을 막을 수 있다’

 

▲ 오스트리아 언론이 ‘자살보도 권고 기준’을 지키면서 자살보도가 줄었고, 자살률도 감소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간된 이후 유럽 전역에서 소설과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한 연쇄 모방 자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베르테르(Werther) 효과’라고 부릅니다.

독일에서는 “어느 학생의 죽음(Tod eines Schülers)”이라는 자살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이후 철도 투신자살이 175% 증가했습니다. 파라세타몰(Paracetamol)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 보도 이후 첫 주에만 동일 방식의 자살률이 17%나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 오스트리아의 지하철 자살률이 갑자기 급증했습니다. 학자들은 자살률이 높아진 이유가 미디어가 자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87년 지하철 자살에 대한 ‘보도 권고안’이 도입됐고, 언론사들이 이를 따르자 지하철 자살률이 줄어들었습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이 나왔지만, 변하지 않는 한국 언론’

 

▲자살 보도 권고 기준안은 신문, 방송, 인터넷 신문 등 언론 미디어뿐만 아니라 블로그, 인터넷 카페, SNS 등을 통해 사회적 소통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됩니다

 

한국에서도 언론의 자살 보도가 자살 빈도와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2004년에 ‘한국기자협회 자살보도 윤리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2013년에는 ‘자살보도 권고기준 2.0’도 제정됐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반복적인 자살 보도 관련 기사를 쏟아냅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자살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합니다. 동료 연예인을 동원해 연예인의 자살을 부각하거나 추측성 기사를 남발합니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2013년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쓴 자살 사건 기사로 누군가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면 쓰십시오.’

자살에 대한 보도는 무조건 자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큰 보도의 가치는 없습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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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요? 아파트 한번이라도 살아보고싶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2/19 10:05
  • 수정일
    2017/12/19 10: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지옥고에 산다 ②] 반지하에 사는 30대 김씨, 결혼 '유예'형을 받다

17.12.18 21:17l최종 업데이트 17.12.18 21:17l

 

주택법에는 최저주거기준이란 게 있다. 인간이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 확보해야 하는 주거 면적을 말한다. 1인 가구의 경우 대략 4평(14㎡)이 최저주거기준이다. 요즘 유행하는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라는 주거유형은 대부분 최저주거기준 미달이다. 즉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것. 하지만 지옥고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지옥고 경험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그 실상을 들여다복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기자 말
 
 반지하방 입구를 나오면 바로 계단이 있다. 일곱 계단을 오르면 빌라 밖으로 나가는 건물 현관이 나온다.
반지하방 입구를 나오면 바로 계단이 있다. 일곱 계단을 오르면 빌라 밖으로 나가는 건물 현관이 나온다. ⓒ 이희훈
"1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김아무개(32)씨를 만난 곳은 지난달 30일, 서울 관악구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1번 출구 앞이었다. 그가 사는 집을 보고 싶다고 하자, 김씨는 "10분 정도를 걸어 가야 한다"고 했다. 10분 정도 걷는 건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낙성대역에서 그가 사는 집까지 가는 길은 30도 되는 급경사길을 넘어야 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15분을 걸었다. '10분 정도'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상당히 멀게 느껴졌다. 거친 숨이 차오르는 걸 느낄 때쯤, 그가 살고 있는 집이 보였다. 

도로 옆에 있는 반지하, 먼지와 소음 그대로 전해져
 
 김씨의 집 창은 지면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엔 어김없이 차 한 대가 주차되어 빛을 막았다.
김씨의 집 창은 지면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엔 어김없이 차 한 대가 주차되어 빛을 막았다. ⓒ 이희훈
 101호, 김씨가 7개의 계단을 내려가 살고 있는 반지하방의 호수다.
101호, 김씨가 7개의 계단을 내려가 살고 있는 반지하방의 호수다. ⓒ 이희훈
역세권에서 15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입지(일반 아파트 입지를 1~4 등급으로 나누면 3등급 이하다), 그것도 다세대 주택의 10평 남짓한 반지하방이 그가 머무는 공간이다. 

창문은 도로 옆에 있었다. 창문을 통해 오가는 사람들의 발, 차량의 바퀴가 그대로 보였다. 마침 집의 창문 앞에는 차량 1대가 주차돼 있었다. 차량의 알루미늄 휠이 창문 밖 풍경의 전부였다. 

주차된 차량이 시동을 걸면, 매연이 스며들었다. 도로와 인접한 창문 밖으로는 항상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소음과 먼지, 반지하방에 사는 그가 항상 마주하는 것들이다. 

"택배 차량이 자주 드나드는데, 항상 저희 집 앞 창문에 서더라고요. 그 차량이 서있는 동안 매연이 들어오는 거죠. 밤에 차량이 오갈 때면 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기도 해요. 차들이 오갈 때 먼지가 들어오는 건 당연하고요"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났다. 예전에 겪었던 질병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반지하방으로 쉴새없이 들어오는 먼지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았다. 반지하방에 사는 그의 미래는 아직 불투명하다.

집만 마련됐으면, 결혼 더 진지하게 생각했을지도
 
 김씨는 자신이 사는 집 바로 뒤로 아파트 단지를 바라 봤다. 반지하를 벗어나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가지고 있다.
김씨는 자신이 사는 집 바로 뒤로 아파트 단지를 바라 봤다. 반지하를 벗어나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희훈
 반지하 생활을 하면 내려온 계단 옆으로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집안에 두기 힘든 짐을 보관하기도 한다. 김씨는 몇 해 전 산 자전거를 세워뒀다.
반지하 생활을 하면 내려온 계단 옆으로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집안에 두기 힘든 짐을 보관하기도 한다. 김씨는 몇 해 전 산 자전거를 세워뒀다.ⓒ 이희훈
대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가 연구 활동을 하면서 버는 돈은 월 150만~160만원 남짓이다. 연구 활동 거리가 끊기면, 수입은 '0 원'이다. 내 집 마련을 꿈꾸기 어려운 형편이다. 

학사장교 생활로 모은 3000만원은 반지하 보증금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4년을 만난 여자친구가 있지만, '결혼' 얘기를 쉽게 할 수 없다. 반지하 신혼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집 문제가 해결됐으면, 좀 더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했을 거 같아요. 여자친구와도 하는 이야기가 집 걱정만 해결되면, 지금 고민의 90% 이상은 해결 됐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집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이게 가장 큰 고민이에요."

이런 그에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는 선망의 대상이다. 90년대식, 발코니 확장도 적용되지 않은, 평범한 공공 분양 아파트였다. 그는 이 아파트를 지나오면서 "정말 좋은 아파트"라고 칭찬을 거듭했다. 허름해 보이는 아파트는 그의 '꿈' 같은 존재였다.

"아파트가 이젠 꿈이 된 거죠. 항상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그 생각을 해요. 아, 저 아파트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고 싶은데...막상 들어갈 생각하면 비용 자체가 수억원,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죠."

부동산앱 켜고 아파트 얼마인가 확인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사는 집 바로 뒤로 아파트 단지를 바라 봤다. 반지하를 벗어나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가지고 있다.
김씨는 자신이 사는 집 바로 뒤로 아파트 단지를 바라 봤다. 반지하를 벗어나 아파트에서 사는 꿈을 가지고 있다. ⓒ 이희훈
그의 취미는 부동산 앱 보기다. 다른 지역을 갈 때마다, 부동산 앱을 켠다. 이 지역 아파트는 얼마인지 확인해본다. 가격을 보면서 또 한 번 탄식을 한다. 

"어딜 갈 때면 꼭 부동산 앱을 켜요. 근처 아파트는 얼만지 확인해 봐요. 습관이 된 거 같아요. 대부분 서울 아파트는 보통 6억이 넘어가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고, 언제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죠."

연구직에 있는 그는 조만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구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을 다녀온 뒤 미래에 대해서도 확실히 답을 하지 못했다. 유학을 다녀온다고 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행복주택 같은 정부의 공공 주택은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다.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지레 포기했다.

"행복주택 같은 정부에서 내놓는 주택들은 사실 관심 있게 보진 않았어요. 제 소득도 기타 소득으로 잡혀서 별다른 세금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주택들은 더) 자격 요건이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파트를 구할 수 있을까' 1시간 대화에서 그는 공허한 물음을 반복했다. 서울에서의 반지하방 생활 10여년, 그 시간은 그에게 희망을 그릴 수 있는 '그림판'을 앗아 버린 것 같았다. 대화를 마치고 반지하방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의 어깨가 유달리 쓸쓸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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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차 군수공업대회와 ‘2018년 조미전쟁설’

[개벽예감278] 제8차 군수공업대회와 ‘2018년 조미전쟁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12/18 [12:2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완성에로 이끈 다섯 가지 ‘특대사변’들 

2. 세계에서 가장 빠른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열핵탄두 장착된다

3. 군사분계선 우발사태를 우려하는 펜타곤

4. 조선의 통일대전인가, 조선과 미국의 핵결전인가

 

1.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완성에로 이끈 다섯 가지 ‘특대사변’들 

 

2017년 12월 11일부터 12일까지 평양에 있는 4.25문화회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성대히 진행되었다.  

제1차 군수공업대회에서부터 제7차 군수공업대회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으므로, 그 일곱 차례 군수공업대회들이 각각 언제 진행되었는지 외부에서는 알지 못한다. 이제껏 군수공업대회라는 말 자체가 외부에 알려진 바 없었다. 김일성 주석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로선을 제시하였던 때가 1962년 12월이었으므로, 군수공업대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국방공업부문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룩될 때마다 한 차례씩 진행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말하는 국방공업이란 국방과학연구와 군수공업생산을 포괄하는 개념인데, 조선 각지에 있는 국방과학연구기지들과 군수공장들이 그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 한 차례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군수공업대회가 이번에 사상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조선의 국방공업부문에서 획기적 발전이 이룩되었으므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진행된 것이고, 그 대회를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2017년 12월 11일부터 12일까지 평양에 있는 4.25문화회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제8차 군수공업대회의 한 장면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단 한 차례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군수공업대회가 이번에 사상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조선의 국방공업부문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룩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조선에서 방영된 기록영화 '절세의 애국자 김정일장군 2 조국수호의 전초선에 계시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느 군수공장 생산현장을 시찰하면서 기계 앞에서 공장일군들과 담화하는 장면이다. 조선의 국방공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도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 강화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이번에 진행된 제8차 군수공업대회에 관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몇 해 사이에 조선의 국방공업부문에서 이룩된 획기적인 발전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각종 첨단무기들이 개발, 완성된 것이다. 제8차 군수공업대회 개막식 보고에서 태종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적대상물들을 정밀타격할 수 있는 각종 공격수단들과 우리 식의 위력한 저격무기, 땅크, 장갑차, 반땅크로케트 그리고 현대적인 함상무장장비들과 무인전투장비 등 첨단무기들과 전투기술기재들이 마련된 것은 인민군대의 싸움준비완성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성과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지적 중에서 무인전투장비라는 말에 관심이 쏠린다. 전투장비의 무인화는 최첨단 현대군사과학기술의 응축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무인전투장비들 가운데 무인타격기만 세상에 공개되었고, 다른 무인전투장비들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이 어떤 무인전투장비들을 만들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인타격기 이외에 무인정찰공격기, 무인잠수정, 무인전투함 등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국가핵무력이 완성된 것이다. 제8차 군수공업대회 개막식 보고에서 태종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우리 조국은 남들이 수십년을 두고도 이루지 못할 군사적 기적들을 불과 1~2년 안에 이룩하며 세계적인 핵강국, 군사강국의 전렬에 당당히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하면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을 완성에로 이끈 다섯 가지 ‘특대사변’들을 열거하였다. 

(1) 2016년 1월 6일에 수소탄기폭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2017년 9월 3일에 수소탄두기폭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이 수소탄두기폭시험을 ‘대륙간탄도로케트 장착용 수소탄시험’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그 기폭시험이 국가핵무력을 완성시킨 계기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2) 2017년 3월 18일 대출력발동기 지상분출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이 대출력발동기 지상분출시험을 ‘3.18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그 지상분출시험이 국가핵무력을 완성시킨 계기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3)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제1차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이 제1차 시험발사를 ‘7.4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제1차 시험발사가 국가핵무력을 완성시킨 계기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4) 2017년 7월 28일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제2차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이 제2차 시험발사를 ‘7.28의 기적적 승리’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제2차 시험발사가 국가핵무력을 완성시킨 계기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5) 2017년 11월 29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서 이 시험발사를 ‘11월 29일의 위대한 대승리’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그 시험발사가 국가핵무력을 완성시킨 계기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첨단무기들을 만들어내고, 국가핵무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국방공업을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정보화하였기 때문이다. 제8차 군수공업대회 개막식 보고에서 태종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 정보화를 실현하여 국가핵무력 완성과 우리 식의 위력한 주체무기들을 개발생산하기 위한 사업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고 지적하였다.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12월 12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보도사진들 가운데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진행되는 4.25문화회관 내부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커다란 은백색 구면체처럼 생긴 핵탄두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핵탄두 표면에 마치 꼭지처럼 생긴 작은 물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이 사진은 2017년 12월 13일 영국 에서 방영되어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사진에 나타난 핵탄두는 1999년에 조선을 방문하였던 파키스탄의 핵개발 총책임자 압둘 카디르 칸 박사에게 조선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핵탄두다. 당시 조선은 그에게 핵탄두 3발을 보여주면서 '관찰학습'을 하도록 배려하였는데, 그 핵탄두의 직경은 약 60cm이고, 뇌관 64개가 장착되어 있었다고 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세계에서 가장 빠른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열핵탄두 장착된다

 

영국 <BBC> 2017년 12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2017년 12월 12일 중국의 어떤 트위터 사용자 한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려놓은 사진 한 장이 세계 각국 군사전문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진은 2017년 12월 12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제8차 군수공업대회가 진행되는 4.25문화회관 내부모습을 촬영한 보도사진인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탄두를 살펴보는 장면이 보인다. 사진에 나타난 핵탄두는 커다란 농구공처럼 생긴 은백색 구면체인데, 표면에는 마치 꼭지처럼 생긴, 크기가 작은 은백색 물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듬성듬성 튀어나왔다. <사진 2>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살펴본 그 핵탄두는 1999년에 조선을 방문하였던 파키스탄의 핵개발 총책임자였던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박사에게 조선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핵탄두이고, 당시 칸 박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직경이 약 60cm이고 뇌관 64개가 장착된 바로 그 핵탄두이며, 그가 “완벽한 핵탄두, 파키스탄의 핵탄두보다 기술적으로 더 진보된 핵탄두”라고 평하였던 바로 그 핵탄두인 것이다.   

 

제8차 군수공업대회 개막식 보고에서 태종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은 “나라 사정이 제일 어려웠던 시기 우리 조국이 핵보유의 민족사적 대업을 이룩하고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 전변된 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강철의 담력과 불굴의 공격정신이 안아온 력사의 기적”이라고 지적하였다. 나라 사정이 제일 어려웠던 시기에 핵보유의 민족사적 대업을 이룩하였다는 말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핵탄두를 생산하였다는 뜻이다. 

 

나는 2016년 6월 20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핵탄생산 20년, 동방의 핵대국이 등장하다’에서 “이미 1990년에 시험용 핵기폭장치를 완성한 조선은 1996년부터 실전용 핵탄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생산된 핵탄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6년 3월 8일 핵무기병기화사업을 현지지도하면서 살펴본 핵탄두와 다른 것이다. 은백색 구면체로 생김새는 똑같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살펴본 핵탄두 표면에는 꼭지처럼 생긴, 크기가 작은 은백색 물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살펴본 핵탄두는 1세대 핵탄두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살펴본 핵탄두는 2세대 핵탄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6년 3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병기화사업을 현지지도하면서 핵탄두를 살펴보는 장면이다. 은백색 구면체로 생긴 것은 <사진 2>에 나오는 핵탄두와 똑같지만, 이 핵탄두에는 표면에 꼭지처럼 생긴 물체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살펴본 핵탄두는 1세대 핵탄두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살펴본 핵탄두는 2세대 핵탄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2017년 11월 29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에는 이전 핵탄두들과 전혀 다른 열핵탄두들이 장착되었다. 시험발사에서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약을 넣지 않으므로, 화성-15형에는 장약 없는 열핵탄두가 장착되었다. 이 열핵탄두는 조선이 2017년 9월 3일 기폭시험에서 성공한 대륙간탄도미사일 장착용 열핵탄두다. 화성-15형에 장착된 각개발사식 다발재돌입체 안에 들어가는 열핵탄두는 화성-13에 장착된 단발재돌입체 안에 들어가는 핵탄두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은 핵탄두를 생산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20년 만에 각개발사식 다발재돌입체 열핵탄두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말하는 국가핵무력 완성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열핵탄두만 생산한다고 해서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열핵탄두를 지구 반대쪽으로 날려 보내는 강력한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생산해야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2017년 9월 3일 열핵탄두기폭시험에서 성공을 거둔 조선은 2017년 11월 29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정부 소식통이 전해준 정보를 인용한 <디플로맷(Diplomat)> 2017년 12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총비행시간은 53분 49초였는데, 그 가운데서 1단 로켓 연소시간은 2분 8초였고, 2단 로켓 연소시간은 2분 41초였다고 한다. 

위에 열거한 수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면, 미국이 운용하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닛맨(Minuteman)-III의 연소시간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미닛맨-III의 총비행시간은 약 30분인데, 그 가운데서 1단 로켓 연소시간은 1분 2초이고, 2단 로켓 연소시간은 1분 18초이고, 3단 로켓 연소시간은 약 1분이다.  

 

2단형으로 설계된 화성-15형의 총연소시간은 4분 49초이고, 3단형으로 설계된 미닛맨-III의 총연소시간은 약 3분 20초다. 다시 말하면, 화성-15형은 4분 49초 동안 상승비행하여 최고정점고도 4,475km에 도달하였고, 미닛맨-III은 약 3분 20초 동안 상승비행하여 정점고도 1,120km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화성-15형의 평균상승비행속도가 초속 11.5km이고, 미닛맨-III의 평균상승비행속도는 초속 5.6km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화성-15형은 미닛맨-III보다 2배 빠른 속도로 상승비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7년 11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진행된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준비장면이다. 9축18륜 자행발사대차에 실린 화성-15형이 조립공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다. 자료에 의하면, 화성-15형의 평균상승비행속도는 초속 11.5km이고, 미국의 미닛맨-III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평균상승비행속도는 초속 5.6km다. 화성-15형이 미닛맨-III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상승비행을 한 것이다. 화성-15형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비행을 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놀랍게도, 화성-15형은 미국, 러시아,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비행을 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것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는 말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생산하였다는 뜻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7년 12월 12일 제8차 군수공업대회 폐막식 연설에서 “조선로동당의 위대한 령도가 있기에 우리의 국방공업, 자위적 국방력은 상상할 수 없이 비상한 속도로 강화되고 우리 공화국은 세계 최강의 핵강국, 군사강국으로 더욱 승리적으로 전진비약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2017년에 핵강국의 지위에 올라선 조선을 ‘세계 최강의 핵강국’으로 더 높이 올려세우기 위해 국가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하는 사업에 계속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7년 9월 15일 화성-12형 중장거리전략탄도미사일 발사훈련을 현지지도하면서 천명한 것처럼, “미국과 실제적인 힘의 균형을 이루어 미국 집권자들의 입에서 함부로 우리 국가에 대한 군사적 선택이요 뭐요 하는 잡소리가 나오지 못하게” 할 때까지 조선은 국가핵무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지금 미국이 이런 엄청난 현실을 외면한 채, 무턱대고 조선의 핵무력을 포기시키겠다는 ‘비핵화’를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억설이 아닌가.   

 

 

3. 군사분계선 우발사태를 우려하는 펜타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2017년 12월 13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렸다. 그 공개서한이 관심을 모으게 된 까닭은 미국 육군 퇴역장성 28명, 미국 해군 퇴역장성 12명, 미국 공군 퇴역장성 11명, 미국 해병대 퇴역장성 7명을 비롯하여 퇴역장성 58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군 퇴역장성 58명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것은 특이한 사건이다. 공개서한은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조선의 핵포기를 추구해온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다. 그들은 공개서한에서 “미국이 택하고 있는 현재의 해결방법은 북조선의 핵기술 및 미사일기술 개발을 중지시키는 데서 실패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실패하고 있다는 현재진행형으로 서술하였지만, 조선은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으로 핵무력을 완성하였다고 선포하였으므로, 미국의 대조선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는 과거완료형으로 서술해야 더 정확하다.   

(2) 대조선정책에서 실패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군사적 선택방안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만일 미국이 조선을 먼저 공격하면 조선의 보복공격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을 것이 그들의 우려다. 그들은 공개서한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군사행동은 서울에 대한 즉각적인 대량보복을 촉발시켜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게 될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150,000명이 넘는 미국인들의 생명도 위험에 처해있다”고 지적하였다. 

(3) 트럼프 대통령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조미전쟁위험을 피해야 하고, 조선의 핵동결 및 긴장완화를 위한 외교해법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제안이다. 그들은 공개서한에서 “미국은 북조선의 핵개발 및 미사일개발을 동결시키고, 지역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공격적이고, 긴급한 외교노력을 개시하고 주도해야 한다. 군사적 선택방안들이 바람직한 행동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특이한 공개서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국군 퇴역장성 58명은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조미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하였고, 조미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이 상상을 초월하는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될 것이며, 그와 함께 재한미국인들도 위험에 빠지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오판과 뒤섞여 있는 것이다. 현역에서 물러난 퇴역장성들은 최신 군사정보를 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판한 것으로 생각된다. 퇴역장성들의 오판은 접어두고, 미국 국방부가 우려하는 이른바 ‘2018년 조미전쟁설’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7년 1월 23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입각하자마자 미국 국방부에 있는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미국군 고위지휘관들과 회의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2018년 조미전쟁설'이 떠돌고 있고, 펜타곤은 군사분계선 우발사태로 조미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조섭 던포드 미국군 합참의장은 중국 군부에게 한반도에서 우발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상설회의체를 내오자고 중국 군부에게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미국군과 중국군은 2017년 11월 29일 워싱턴에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을 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 국방부는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조미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군사분계선에서 발생한 우발사태(contingency)로 조미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우발사태로 조미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하는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우발사태에 휘말려 총격전을 벌이면,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 비화되면서 조미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미국군 합참의장의 행동이 눈길을 끈다. <AP통신> 2017년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2017년 8월 중순 베이징을 방문한 그는 팡펑후이(房峰輝)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과 만난 고위급 군사회담 중에 한반도에서 우발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그것이 곧바로 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다룰 상설회의체를 내오자고 제안하였고, 중국 군부와 합의하여 2017년 11월 29일 워싱턴에서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 열렸다고 한다. 이 군사회담에 관해서는 2017년 12월 11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조용한 군사회담에서 펠트먼 평양방문까지’에서 상세히 논하였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군 지휘부가 예상치 못한 우발사태로 조미핵대결이 폭발하여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7085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발사태가 2017년 11월 13일 군사분계선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은 그 우발사태로부터 보름 뒤에 진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발사태라는 것은, 조선인민군 비무장 탈영병 한 명이 군용차량을 몰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접근하더니, 차량을 버리고 남측으로 탈주하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 조선인민군 경비병들의 집중사격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는데, 한국군 장병 3명이 포복으로 접근하여 사경을 헤매는 그를 끌어내 헬기편으로 후송한 사건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적측으로 탈주하는 탈영병을 사살하는 것은 군율이다. 이런 군율은 북측이나 남측이나 마찬가지다. 한국군 탈영병이 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탈주하는 경우라도, 한국군 경비병들은 탈주장면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집중사격으로 그를 사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려되는 문제는, 군사분계선에서 일어난 그런 우발사태가 쌍방의 무력충돌을 불러올 수 있고, 무력충돌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 비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세계일보> 2017년 1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탈영병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탈주하였을 때, 한국군 지휘부는 2개 소대 병력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지역에 긴급증파하였고, 인근 전방사단 포병부대는 K-9 자주포와 천무 다련장로켓포를 조선인민군 제4경비초소를 향해 발사할 사격준비를 갖추고 비상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판문점에서 서울로 통하는 작전지대에 배치된 한국군 제6야전포병단은 3개 K-9 자주포대대와 2개 K-55 자주포대대로 편성되었는데, 1개 자주포대대마다 자주포가 18문씩 배치되었으므로, 5개 자주포대대는 총 90문의 자주포로 무장하였다. 또한 천무 다련장로켓포는 2015년 8월부터 한국군 제1군단에 실전배치되기 시작하였는데, 생산량이 제한되어 제1군단에 1개 대대밖에 배치하지 못했다. 1개 대대에 천무 27문이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격준비를 갖추고 비상대기하고 있었던 한국군 화력은 자주포 90문과 천무 다련장로켓포 27문이었다. 

그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만일 쌍방 경비병들이 판문점 일대에서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면, 판문점 인근에 있는 한국군 포병부대와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제각기 포문을 열고 불을 뿜었을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7년 10월 27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송영무 국방장관과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지역에서 북측을 바라보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왼쪽이 매티스 장관이고, 오른쪽이 송영무 장관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판문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초소를 시찰하면서, 송영무 장관은 언덕 너머 북측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티스 장관에게 군사분계선 너머 북측에 21개 포병대대가 있다고 하면서, 저들의 엄청난 화력을 방어하는 것은 실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군사분계선에서 발생한 우발사태가 포격전으로 확대되는 경우, 조선인민군 포병부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국군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펜타곤이 우발사태를 우려할 만도 하다.     ©

 

위의 보도기사에 나오는 한국군 소식통은 한국군 포병부대가 포사격으로 조선인민군 제4경비초소를 완전히 파괴할 것처럼 말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뉴욕타임스> 2017년 10월 27일 보도에서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다. 보도에 따르면, 2017년 10월 27일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미국 국방장관이 송영무 국방장관과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초소를 시찰하였을 때, 송영무 장관은 언덕 너머 북측 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티스 장관에게 “저쪽에는 21개 대대가 있다. 내 견해로는 이처럼 많은 장거리포들에 맞서는 방어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송영무 장관이 지적한대로, 판문점 인근 북측 지역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21개 포병대대의 화력은 얼마나 강할까?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와 자행포부대가 최전방에 배치되었는데, 12개 방사포대대와 9개 자행포대대가 배치되었다고 보면, 그 화력은 아래와 같이 엄청나다. 조선인민군 1개 방사포대대는 3개 방사포중대로 이루어졌는데, 방사포중대마다 방사포가 9문씩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12개 방사포대대는 총 324문의 방사포로 무장한 것이다. 또한 조선인민군 자행포대대는 2개 자행포중대로 이루어졌는데, 자행포중대마다 자행포가 9문씩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9개 자행포대대는 총 162문의 자행포로 무장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송영무 장관이 언급한, 판문점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21개 포병대대는 방사포 324문과 자행포 162문으로 무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주포 90문과 천무 다련장로켓포 27문으로 무장한 한국군 포병부대와 자행포 162문과 방사포 324문으로 무장한 조선인민군 포병부대의 화력격차는 너무 크다. 포격전이 벌어지는 경우,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단숨에 한국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펜타곤이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할 만도 하다.   

 

 

4. 조선의 통일대전인가, 조선과 미국의 핵결전인가

 

조선외무성은 2017년 4월 6일에 발표한 ‘미국의 반공화국전쟁책동과 우리의 선택’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우리의 통일대전은 외세에 의하여 강점된 령토를 되찾기 위한 정정당당한 국가자주권의 행사로 되며 어떤 경우에도 침략으로 매도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외무성이 비망록에서 통일대전의 정당성을 언급한 것 자체가 미국에게 우려를 안겨주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관리들은 군사분계선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무력충돌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 비화되면, 조선이 주저 없이 통일대전에 돌입하게 되리라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정기기고자인 대니얼 드레즈너(Daniel W. Drezner) 미국 터프츠대학교 국제정치학 교수는 2017년 12월 14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자신의 글에서 지난 12월 초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관리들을 만난 경험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국가안보관리들은 미국이 조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어 전쟁은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며, 조선이 통일대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기묘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관리들은 조미핵대결→우발사태→조선의 통일대전으로 전개될 대사변을 우려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관리들이 더욱 우려하는 것은, 조선이 통일대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다. 조선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으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으므로, 그들은 조선이 통일대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것으로 우려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자국의 핵무기가 동족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태평양작전지대와 미국 본토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이미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혔다. 조선이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자국 영토를 핵무기로 파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자기 핵탄을 자국 영토에 떨어뜨리는 나라는 없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의 화력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은 통일대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한국군을 이길 수 있다고 그들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조선인민군은 통일대전에서 자기들이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쟁피해를 극소화하고 통일대전을 단숨에 결속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들에서 여러 차례 거론하였던 ‘72시간 통일대전씨나리오’는 전쟁소설이 아니라 현실예상이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6.25전쟁 정전 62주년에 즈음하여 2015년 7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진행된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지휘성원들의 전투비행술경기대회-2015'의 개막식 장면이다. 조선인민군 군악대가 땅바닥에 깔아놓은 미국 국기를 발로 밟고 전승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아래쪽 사진은 전승곡을 연주하는 중에 군악대 성원 두 사람이 땅바닥에서 짓밝힌 미국 국기를 두 쪽으로 찢어버리는 장면이다. 이 사진은 조선인민군의 대미적개심이 얼마나 고조되었으며, 미국과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강렬해졌는지를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이 우려하는 문제는 미국이 조선의 통일대전에 무력으로 개입할 가능성이다. 조선이 통일대전에서 한국군과 주한미국군을 압도적인 화력으로 제압하고, 재한미국인 20여 만 명의 발을 묶어놓으면, 미국은 조선에게 항복하든지 아니면 조선과 전면전을 벌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일 미국이 정세를 오판하여 조선의 통일대전에 무력으로 개입하여 조미전쟁이 벌어지면, 그 전쟁은 핵강국과 핵강국이 맞붙는 미증유의 핵결전으로 될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조미핵대결→우발사태→조선의 통일대전→미국의 무력개입→조미핵결전으로 전개될 새로운 전쟁씨나리오를 거론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 들어 미국 언론매체들은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예상한 조미핵결전씨나리오를 몇 차례 기사화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핵무력에 대한 심층정보를 알지 못하는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이 조선과의 핵전쟁에서 혹심한 피해를 입겠으나 최종승리는 미국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판박이 결론’을 이구동성으로 전파하고 있다. 잘못된 가정과 잘못된 전제 위에서 내리는 그런 ‘판박이 결론’을 논박하려면, 이 글의 지면이 너무 모자라므로, 여기서는 그들이 예상한 조미핵결전 인명손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워싱턴포스트> 2017년 12월 8일부에 실린 가상씨나리오에 따르면, 조미핵결전에서 조선의 핵공격으로 미국, 한국, 일본에서 근 20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내셔널 인터레스트> 2017년 11월 22일부에 실린 가상씨나리오에 따르면, 조미핵결전에서 조선의 핵공격으로 미국인 80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조미핵결전에서 미국이 그처럼 참혹한 인명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조미핵결전이 사실상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처럼 참혹한 인명손실을 예상한 미국은 조선과 핵결전을 감히 벌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조선과 핵결전을 감히 벌이지 못하도록 억지한다는 점에서, 조선의 핵무력은 가장 확실한 대미핵억지력으로 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미핵대결→우발사태→조선의 통일대전으로 전개될 72시간 통일대전씨나리오가 실제상황에 가장 가까운 가상씨나리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관리들은 조미핵대결이 고도의 긴장상태에 들어선 최종국면에서 군사분계선 우발사태가 일어날 위험성을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 심각한 우려는 펜타곤만이 아니라 백악관에서도 대조선핵공포지수가 날로 높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악관은 날로 높아가는 핵공포지수를 보면서도 조선의 핵포기를 유도해보겠다는 억설만 계속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철군협상을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핵무력 완성으로 너무 절박해진 국가안보파탄위험에서 벗어날 미국의 마지막 탈출구는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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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태 인터뷰] "분권형 개헌‧선거구제 개편, 2019년에도 가능"

"민주당-한국당, 권력구조‧선거구제 서로 양보해야"
 
2017.12.18 08:04:32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겠다."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 사사건건 다투던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후보가 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개헌의 내용과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각 당을 대표한 여야 대선후보들이 국가적 대사의 '시간표'에 합의한 의미는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2018년을 '개헌의 적기'로 꼽았다. 
 
집권 뒤 개헌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했던 과거 대통령들과 달리, 문 대통령은 당선 뒤에도 개헌 의사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저는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기를 놓친다면 국민들이 개헌에 뜻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에서 일정을 헤아려 개헌을 논의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개헌과 함께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의 개편도 여야 합의로 이뤄지기를 희망합니다.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으로 새로운 국가의 틀이 완성되길 기대하며 정부도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겠습니다."(11월 1일 국회 시정연설)
 
약속을 뒤집은 쪽은 제1야당을 이끄는 홍준표 대표다. 그는 지난달 30일 "개헌을 지방선거에 붙여서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개헌 시기를 못 박을 것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 임기 중에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때부터 상황이 변했다. 116석을 가진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은 불가능하다. 국회 개헌특위 차원의 개헌안 마련(2월) → 국회 개헌안 발의(3월) → 국회 개헌 의결(5월) → 개헌 국민투표(6월)로 이어지는 '순조로운' 일정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권력구조 변경과 짝을 이루는 선거구제 개편도 난항에 빠져들었다. 개헌특위와 함께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 활동 시한도 올해로 끝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는 현재로선 철통같다. 
 
오래전부터 분권형 개헌과 소선거구제 개편을 주장해온 유인태 전 의원을 만나봤다. 그는 "홍준표 대표의 태도로 봐선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하더라도 "한국당이 더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매듭을 단번에 풀 왕도가 없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치권의 대승적 결단이라는 원칙이 중요하다. 자유한국당 다수가 선호하는 분권형 개헌을 여권이 수용하고, 그 대신 한국당이 소선거구제에 대한 고집을 버리는 대타협이다. 
 
유 전 의원은 "선거구제 변경은 자유한국당이 양보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자유한국당이 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수용하는 협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내년 지방선거 때 할 수 없다면, 2019년에 추진할 수도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분권형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이 필요한 이유로 그는 "국민통합"과 "다원화된 정당체제"를 들었다. 정파간 연정이 일상화되는 권력구조로 갈등 비용을 줄이고, 국회를 대타협의 장으로 바꾸려면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이 맞물려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 대통령의 임기 내에 개헌이 이뤄지기 위해선 두 가지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고 본다. 의회에 대한 불신 탓에 분권형 개헌에 미온적인 문 대통령의 변화, 그리고 리더십 없이 표류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의 변화다. 아직, 개헌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유인태 전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한국당 의원 다수는 분권형 개헌 찬성한다" 
 
프레시안 : 예산 국회가 끝나고 개헌 이슈가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분권형 개헌을 주장해 온 입장에서 여야의 개헌 논의를 어떻게 보나. 
 
유인태 :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투표를 동시에 하는 방안은 지금으로선 거의 어려워진 상황이다. 홍 대표가 그런 일정 자체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헌은 모든 당의 합의 속에서 가능한데, 제1야당이 지방선거 때 개헌을 국민투표 부치는 방안 자체를 거부하면 불가능하다.  
 
홍준표 대표를 이해 할 수 없다. 올해 1월 상황을 보자.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대통령 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하자고 주장했다. 대선 때 홍 대표는 문 대통령을 향해 개헌을 거부하는 후보라고 압박까지 했다. 1년도 지나지 않은 일들을 이렇게 새카맣게 잊어버려도 되나 싶다. 문 대통령이 개헌 공약을 안 지킬까봐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던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홍 대표가 이제와 개헌 국민투표를 거부한다? 말이 안 된다. 
 
이처럼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내년 6월 개헌은 어렵지만 개헌 이슈 자체가 물 건너간 것은 아니다. 구심점 없이 표류해온 자유한국당은 개헌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의견수렴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한국당 다수의 의원들은 분권형 개헌에 찬성한다. 분권형 개헌안이 관철 될 수 있다면, 선거구제에서 양보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홍 대표가 반대하는 이유로 개헌이 엮이면 지방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들이 나온다. 
 
유인태 :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은 구심점 없이 좌충우돌 표류해왔다. 개헌 정국은 제1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다. 개헌 정국에선 국민의당 39석보다 116석 자유한국당이 중요하다. 개헌안을 내년 3월까지 도출한다면, 국가적 중대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갈 수 있다. 친박-비박 내분 탓에 10%대 초반인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하기 나름인 거다.
 
자유한국당의 방황과 표류가 개헌의 장애물이다. 이제 새 원내대표가 뽑혔으니 새로운 리더십으로 개헌에 대해 전향적으로 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유한국당이 달라지지 않으면 국회에 행정권을 맡기는 분권형 개헌에 국민들은 더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프레시안 :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 다수 의원들 사이의 인식 차가 존재한다는 얘기인데.
 
유인태 : 그렇다. 내부에서 시시비비가 많다. 예를 들어 김무성 의원도 2014년 당 대표 시절에 개헌 얘기를 꺼낸 바 있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들은 김무성 의원의 개헌안에 공감했다. 그 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김무성 개헌론'에 반대했다. 
 
그러던 박 전 대통령도 20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바뀌면서 개헌에 관한 생각을 바꿨다. 작년 6월, 그러니까 최순실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공개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박 전 대통령도 개헌 준비를 결심했다. 이렇게 볼 때,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다수 의원들의 견해를 잘 수렴해서 전향적으로 임하면 국면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홍 대표의 태도로 봐선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 조금 시간을 가지고 문 대통령 임기 내에 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2020년은 총선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 내년 지방선거 때 할 수 없다면, 2019년에 추진할 수도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여야가 합의하는 개헌안 도출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면서 플랜B가 거론된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국회가 해결하지 못하면 대통령에게 개헌 발의를 요청할 수도 있다고 했다. 
 
유인태 : 그건 상당히 우려스럽다. 갈등만 유발할 것 같다. 대통령이 개헌안을 내면 자유한국당이 받겠나.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개헌안을 던지면 한국당은 더 반대할 것이다. 물론 지난 대선 때 있었던 여야 합의를 환기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대통령의 개헌안이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은 없다. 100석이 넘는 한국당의 반대로 인해서. 
 
프레시안 : 자유한국당을 뺀 정당들이 합의안을 도출해 발의할 가능성은?
 
유인태 : 개헌은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아무리 용을 써봐야 될 수가 없다. 설령 그렇게 처리가 된다면 날치기라고도 볼 수 있다. 현상 변경을 하려면 정파 간 합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프레시안 : 권력구조를 뺀 개헌 추진이라면 어떤가. 문 대통령은 지방분권과 기본권 신장 등 낮은 수위의 개헌을 생각하는 듯하다. 
 
유인태 : 기본권과 지방분권을 추진하는 개헌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개헌안을 대통령이 발의하면 자유한국당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에 국회 통과가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진다.
 
"선거제도 바꾸려면 한국당과 협상해야" 
 
프레시안 : 대통령과 민주당 다수는 4년 중임제를 선호한다. 권력구조 문제에서 분권형과는 다른 방향인데. 
 
유인태 : 대통령은 분권형 개헌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방분권, 감사원의 국회 이관, 대통령 권한을 국회로 조금 이관하는 정도에 관심을 두고 있지 권력구조 자체를 바꿀 의지는 크지 않다고 본다. 문 대통령 입장이 그렇다 보니 민주당 내 분권형 개헌론자들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프레시안 : 문 대통령이 분권형 개헌에 소극적인 이유는 뭔가?
 
유인태 : 문 대통령은 의회에 대한 불신이 깊은 편이다. 4년간 국회에서 겪은 경험이 컸던 것 같다. 권한을 국회에 넘겨도 괜찮을까 하는 의심을 하는 것 같다. 국회가 합의해오면 권력구조 문제도 수용하겠다고 했을 뿐,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바꿀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민주당에 분권형 개헌에 신념이 있는 의원들도 있다. 본래 자유한국당 다수가 분권형 개헌을 선호하는데, 개헌과 세트가 되는 선거구제 문제에서 한국당의 양보를 받아내는 협상이 필수다. 문 대통령도 국회가 합의하면 권력구조 문제를 수용하겠다고 했다. 
 
프레시안 : 자유한국당이 선호하는 분권형 개헌을 여권이 수용하고, 한국당은 선거구제 변경을 수용해야 한다는 얘기인가? 
 
유인태 : 그렇다. 분권형 개헌이 필요한 이유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던졌던 근본적인 고민은 국민통합을 이루지 않고는 한 발짝도 앞으로 못 나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갈등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들은 사회적 대타협이 잘 된 나라들이다. 우리처럼 진영이 극도로 분열된 나라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사회적 대타협을 하려면 분권형 개헌으로 정파 간 연정이 원활해져야 한다.  
 
선거구제도 마찬가지로 변해야 한다. 현행 소선거구제가 바뀌면 4당 체제 정도가 예상된다. 바른정당이 주장하는 소위 합리적 보수 블록도 생기고 정의당과 민주당 내 진보파 등 진보 블록도 안정적인 정당이 될 수 있다. 다원화된 우리사회를 반영하는 정당 체제다. 이렇게 되면 어느 세력도 자기 주장대로 국정을 끌고 갈 수 없다. 설령 1당이 되더라도 연정을 하게 되고 국회가 대타협의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선거구제 변경은 자유한국당이 양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가장 이익을 누리는 당이 한국당이다. 지지율만큼의 의석을 확보하는 선거제도로 바꾸려면 자유한국당이 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수용하는 협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권력구조는 그대로 두고 선거구제만 바꾸자고 하면 될 리가 만무하다. 꿈을 깨야한다. 그만큼의 주고받기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프레시안 : 이인영 의원이 최근 개헌을 공론화위원회 논의를 통해 풀어가자는 제안을 했다. 
 
유인태 : 정치권이 합의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해야 한다. 국민들 의견을 수렴하는 분야는 여러 기본권에 관련된 것이지, 권력구조 문제는 어렵다. 주권자의 참여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고 많은 국민들의 의견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수렴해야겠지만, 권력구조 문제를 공론화위에서 논의하자는 제안은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 아닌가 싶다. 정파 간에 분권형 개헌에 대타협을 먼저 하면 국민여론도 우호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평소 유 의원은 선거구제 개편 없는 개헌은 반대한다고 했다. 권력구조와 선거구제가 서로 조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두면, 분권형 개헌이 이뤄져도 문제가 된다고 보나.  
 
유인태 : 선거구제를 이대로 둔 채 분권형 개헌은 위험하다. 영남(66석)은 호남(30석)보다 의석수가 두 배가 넘는다. 공업화 과정에서 인구 자체가 비대칭이 됐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완화됐다고는 해도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칫 일본 자민당처럼 영남당 장기 집권 체제가 될 수 있다. 소선거구제에선 지금의 대통령제가 그나마 더 낫다. 선거구제를 바꾸지 않는 분권형 개헌은 반대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선거구제만 먼저 바꾼다면? 
 
유인태 : 그건 자유한국당이 받지 않는다. 사실 나는 선거구제만이라도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다당제는 내각제와, 대통령제는 양당제와 세트다. 결국 함께 가야한다. 
 
프레시안 :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은 사실상 어렵다. 앞서 2019년 개헌을 언급했는데, 지방선거 이후에도 개헌의 동력이 남아 있을까? 
 
유인태 : 할 수 있다면 총선 전에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하고, 바뀐 선거구제로 2020년 총선을 치르는 게 좋다. 그리고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22년에 새로운 분권형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2022년부터 제7공화국이 된다. 2019년까지 개헌과 선거구제 개편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일정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 협치 노력 아쉬워" 
 
프레시안 : 개헌이나 선거구제 문제도 그렇지만, 당장 정기국회는 물론이고 이번 임시국회에서도 개혁입법 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유인태 : 대통령의 협치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처음엔 당선 되자마자 야당도 방문하고 여야 원내대표도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 뒤로는 대통령이 의회에 협력을 구하는 노력이 충분치 않았다고 본다. 아쉬운 대목이다. 
 
내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할 때는 야당 대표와 청와대 만찬, 오찬도 많이 했다. 각 당별로 당 대표,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까지 초청해서 식사를 같이 했다. 만찬을 하면 최고위원들까지 10여명을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자유한국당이 표류한 측면이 있다고는 해도, 대통령이 한국당 지도부를 초청해서 국회 관련 얘기도 듣고, 국민의당 지도부에도 그렇게 하면 어떤가. 홍준표 대표가 다른 당들과 같이 참석하는 게 싫다고 하면 따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홍 대표가 한국당을 대표할만한 리더십이 있느냐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영수회담을 못할 이유도 없다. 문 대통령이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만나면 대화를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은 결과가 나온다. 
 
프레시안 : 자유한국당의 태도로 봐선 여야 협치가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이번에 당선된 김성태 원내대표도 대여 투쟁을 내걸었는데.   
 
유인태 : 자유한국당도 지방선거가 다가오니 10%대 지지율이라도 유지해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상식적인 행태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중도보수를 다시 지지층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 상식에 기반해 판단을 하기 바란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한국노총에서 잔뼈가 굵었고, 중도, 합리적 보수를 하려고 했던 바른정당에서 복귀한 사람 아닌가. 기대는 해본다. 
 
프레시안 : 내년 지방선거 구도와 관련해서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론은 어떻게 보나.
 
유인태 : 지금 봐선 통합까지 가기는 어렵다. 잘해야 선거연대 정도 아닐까 싶다. 안철수 대표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모든 계산을 자기 대권에 맞춘 것처럼 속이 너무 훤히 보였다. 바른정당과의 연대 문제를 제대로 된 개혁을 하기 위한 연대로 가야했는데 자기 욕심만 앞세우는 것으로 국민들 눈에 비쳐졌다. 이미 국민의당에서 안철수 현상을 지지했던 젊은층은 다 떠나갔다. 지금 국민의당을 지탱하는 건 오히려 호남과 문 대통령을 대립하게 만든 박지원 전 대표 역할이 컸다. 
 
프레시안 :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어떻게 보나. 자유한국당 등은 정치보복이라고 한다.
 
유인태 : 적폐청산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과거 국가기관의 드러난 문제조차도 그냥 넘어가면 촛불 들었던 국민들이 문재인 정부에게 뭐라고 하겠나. 지난 9년 동안 국정원이 개판을 친 것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하면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정권이라고 할 수 있겠나? 정치보복은 먼지털기식 표적수사가 정치보복이다.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나. 최경환 의원 문제도 국정원 특수활동비 조사를 하다 보니 드러난 것이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도 불가피하다고 보나.
 
유인태 : 국정원 문제나 사이버사령부 의혹을 보면 MB와 박근혜는 견원지간이었음에도 (MB 임기 말) 두 사람의 청와대 회동에서 대타협을 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가기관을 동원한 국기문란 행위를 박근혜 정부가 바통 터치 한 것이다. 그 점을 이 정부에서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고 본다. 
 
임경구 기자 hilltop@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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