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수원 인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추석 귀성 차량들. 좌우로 벼가 익어가는 논이 보인다.(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 많은 이들이 도시를 떠나 고향인 농촌으로 향한다. 지루한 교통체증을 뚫고 몇 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들녘엔 폭염과 태풍을 견딘 곡식과 과일이 영글어 간다. 탐스럽게 익어가는 농작물을 보며 올 한해도 애써 농사를 지은 농부들을 떠올리게 된다.
농부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어떨까? 돈벌이가 잘 되지 않고 고생스럽다며 논밭과 과수원을 두고 모두 어디론가 이주한다면 어떻게 될까. 믿고 먹을 수 있는 국산농산물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잘 정돈된 들녘과 오밀조밀한 고향 풍경은 없어지고 사람의 온기가 사라져 황폐해진 폐허가 우리를 맞게 되리라.
이렇듯 농민들의 사회적 역할은 농산물 생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도시 외 수많은 지역이 황폐해지지 않게 관리하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꾸려가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이 역할에 주목하지 않았다. 정부는 1990년대 이후 각종 무역협상에서 농업부문을 개방해, 농가소득이 줄고 농민들이 피폐해지는데도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사회는 농민들의 노력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했다.
농업과 농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농민들이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자신들이 하는 사회적·공익적 역할에 대해 이제라도 국가가 인정하고 소득으로 보전해 줘야 한다는데 뜻을 모은 것이다.
농민수당 도입을 위해 공부하는 농민들.2019.08.13ⓒ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4.13 20대 총선을 보름여 앞둔 가운데 농민의길 소속 농민단체 대표들이 29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수당,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0대 총선 농정공약 발표 회견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주경야독 끝에 농민들이 만들어 낸 정책
‘농민수당’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5년 처음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논의를 시작했고, 이어 2016년엔 농민단체 연대체인 농민의길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농민들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규정한 ‘농업의 다원적 기능’, 현행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이 짚은 ‘농업 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자신들이 하고 있다고 봤다.
그래서 ‘농민수당’은 농민이 농업을 하며 식량의 안정적 공급, 생태계의 보전, 국토 환경 및 자연경관 보전 등을 통해 공익적 기능을 하는데 대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상해 주는 형태를 취하게 됐다.
학습과 토론 끝에 ‘농민수당’이 정책의 얼개를 갖추자, 농민들은 2016년 총선 전 각 정당에 이를 공약으로 해 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에 민중당이 해당 제안을 처음으로 수용했고, 전국의 농민 출신 후보들이 농민수당을 내걸고 선거에 나가 많은 유권자들에게 이를 알려냈다.
파급효과는 적지 않았다. 농촌 사회에서 공감의 물결이 일자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더 많은 정당과 후보들이 ‘농민수당’을 공약으로 하고 출마했고, 이들 중 일부는 당선돼 현재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농민수당’을 공약으로 건 명현관 군수후보(민주평화당)와 이정확 군의원(민중당) 후보가 모두 당선된 전남 해남군에선 작년 12월 28일 전국 최초로 ‘해남군 농업보전 등을 위한 농민수당 지원 조례’가 만들어졌다. 공식적으로 한국 사회 최초로 ‘농민수당’이 도입된 것이다.
전북 고창군 농민수당 지급처 안내판과 지급된 고창사랑상품권ⓒ사진 제공 = 독자 이대종 님
실현에도 확산에도 농민이 앞장선다
농민들은 이 조례가 제정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은 농민수당 도입을 위해 농민들을 상대로 교육, 설명회, 토론회 등을 지속적으로 열었다. 전농 관계자는 군청의 정책 회의에 참여해 끊임없이 의견을 내고 담당 공무원, 전문가들과 정책이 문제없이 실행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그 결과 해남군 농민수당은 문제 없이 시행돼, 올 6월과 9월 두 차례 농민들에게 지급됐다.
해남의 사례는 농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됐다. 전남 함평군에서는 지난 2월 ‘함평군 농어가수당 지원 조례’가 제정돼 8월에 하반기 분이 지급됐다. 전북 고창군에서도 지난 6월 농민들이 앞장 서 만든 ‘농민수당’ 조례가 통과돼 하반기 농민수당이 한 차례 지급됐다.
먼저 기초자치단체 중심으로 ‘농민수당’ 도입의 물결이 일었다. 각지의 농민들이 주민조례발의 서명판을 들고 나가 지역 주민들에게 서명을 받고, 지방 정부에 제출하며 제도화에 발동을 걸었다. 9월 현재 전남 화순군과 영암군에서는 농민수당 주민조례발의 서명이 완료돼 후 군청에 제출됐고, 고흥군과 나주시에서는 주민조례제정을 준비중이다. 곡성, 광양에선 시민들을 상대로 한 농민수당 강연회, 설명회가 진행됐다.
농민들이 조례안을 제출하지는 않았지만 지방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제도가 도입되는 곳도 생겼다. 경북 청송군에서는 농민회와의 협의를 거쳐 윤경희 군수 발의 조례안이 제출돼, 이번달 군의회를 통과했다.
전라북도 농민수당 주민참여 조례제정 서명운동 모습ⓒ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페이지
전남 농민수당 주민참여조례 청구인 서명 받는 농민ⓒ사진 = 농민 민중당 페이스북
기초자치단체에서 광역자치단체로 확산 중
주민참여조례 추진 양상, 친환경 무상급식 운동과 닮아
농민들은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농민수당’이 도입되길 원하고 있다. 전농은 각 시도연맹 차원에서 지역 노동·시민단체와 손을 잡고 주민참여조례안을 만들어 시도의회에 접수하고 있다.
가장 많이 농민수당이 확산된 전남도에서는 전농, 전여농이 도내 시군 순회 간담회를 통해 농민 의견을 수합했고, 전남시민 공개토론회와 심화세미나를 통해 ‘전라남도 농민수당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마련했다. 지난 6월 이를 주민참여조례로 만들어 도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농민단체와 민주노총 전남본부, 민중당 전남도당이 청구인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50여 일만에 제출가능인원 16,000명의 세 배에 가까운 43,000명의 서명을 받아, 7월 25일 도의회에 제출했다.
전북도에서도 7월 22일 전농, 전여농이 26개 시민 사회단체와 함께 ‘농민공익수당 조례제정을 위한 주민발의 전북 운동본부’를 발족했고, 8월 21일부터 청구인 서명을 받아 10일만에 29,610명의 도민 참여를 이끌어 냈다. 운동본부 측은 지난 4일 전북도의회에 서명지를 제출했다.
광주광역시, 충청남도, 제주도에서도 시민들이 주민참여조례안 발의를 위해 청구인서명을 받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외에도 충북도과 경남도에서 주민 조례 제정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30일 오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등 시민단체가 친환경무상급식 파괴하는 표적감사 흑색선전 관권선거개입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2014.05.30ⓒ김철수 기자
농민들이 주민참여조례 제정을 통해 ‘농민수당’을 도입하려 하는 데는 특별한 의의가 있다. 우선 노동자, 시민들이 함께 하는 청구인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 해당 정책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이해를 높이려 한다. 또 정책이 실현될 시 적잖은 광역시도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서명을 받으며 시도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지지를 호소하려는 뜻도 있다.
이는 친환경무상급식운동이 정책으로 수용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 시민사회가 시작한 친환경무상급식운동은 주민참여조례제정 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주노동당은 이를 주요 정책으로 받아 안았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5당(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이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와 친환경무상급식 정책 협약을 맺으면서 이는 전국 곳곳에서 시행되기 시작한다.
정책 도입 및 실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일까. 현재 농민들은 작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유사한 내용으로 조례 내놓는 지자체와 의원들
농민들 “주민 발의 과정 무력화하지 마라”
충남도에서는 시민단체들이 함께 주민참여조례 서명을 받고 있다. 도내 논산, 당진, 예산에서도 주민들이 주민조례 발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산군의회가 8월 27일 ‘예산군 농민수당 지원 조례안’을 입법예고해 논란이 됐다. 충남농민수당 조례제정운동본부 측은 “지자체가 농민수당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주민 발의 과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전남도에서도 상황이 비슷하다. 농민들이 7월 하순 경 주민참여조례안 청구인 서명을 완료하고 도의회에 이를 제출했는데, 전남도 측이 8월 16일 ‘전남도 농어민 공익수당 지급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모 정당 의원도 7월 하순 도의회에서 ‘전남도 농어민 기본수당 지급 조례안’을 발의했다. 결국 전남도의회는 이달 중 도집행부안, 주민발의안, 의원발의안까지 세 가지안을 심의하게 됐다. 지역농민단체들은 도 측에 해당 조례안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자치법규 메뉴얼을 통해 주민조례 입법 청구권을 존중하기 위해 자치단체가 유사조례를 발의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9일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전농과 민중당이 '농민수당법, 어민수당법 발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중당 이상규 상임대표가 농민수당법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2019.09.09ⓒ사진 = 민중당
‘농민수당’의 최종단계는 입법화
민중당, ‘농민수당법’ 발의 예고
농민들이 바라는 ‘농민수당’의 최종 단계는 국가 차원에서의 도입이다. 9일 전농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중당과 함께 ‘농민수당법’, ‘어민수당법’을 발의할 계획임을 밝혔다.
박행덕 전농 의장은 “지난해 지방선거 때 민중당이 농민수당을 공약한 이래 여러 지자체에서 농민수당이 도입되고 있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다. 전농은 민중당과 함께 농민수당, 어민수당 도입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전농과 민중당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제 농민수당은 거스를 수 없는 농업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전국 광역자치단체 주민발의운동으로 활화산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이제 입법화되어야 한다.”면서 “농민수당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증진하기 위한 정책으로 직불제로 대변되는 소득보전 정책, 복지정책 일원화와 양극화 해소방안으로 모색되는 기본소득제와도 다른 농업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안주용 민중당 공동대표는 “농민단체의 안을 기초로 법안을 완성키 위해 국회 법제실과 긴밀하게 논의 중이다. 오는 16일 국회 토론회를 개최해 더 넓게 의견을 수렴한 후 법안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중당이 발의할 ‘농민수당’ 법안은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농민수당’을 받는 대상을 ‘농업인’이 아니라 ‘농민’으로 분명히 정했고, 국가가 관련 재원 조성의 의무를 지게 했다. 또 농민수당 지급대상 선정 등 논의를 진행할 ‘농민수당심의위원회’에 농민과 정부관계자를 1:1로 참여케 해 농민의 정책참여의 길을 열어뒀다. 지급수단을 현금과 지역화폐로 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게 하고, 농민의 수령권 보호를 위해 ‘압류대상’ 범위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한편, 안 공동대표는 ‘농민수당법(안)’과 함께 ‘어민수당법(안)’도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민수당 법안 논의과정에서 어민수당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사자인 어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니, 농민수당에 어민수당을 슬쩍 포함시키는 형식으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업의 공익적 기능’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두 가지 법안이 발의돼 논의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농민수당’의 경우 올해 국회에서 입법되지 않는다 해도, 내년 총선의 주요 정책 공약 중 하나로 떠오를 것은 자명해 보인다.
북미 두 정상의 DMZ판문점 회동으로 잘 굴러갈 것만 같았던 북미대화가 한미합동군사훈련 등으로 인해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최선희 제1부상의 9일 담화 “미국과 9월 하순 대화 용의”(<로동신문>, 2019.09.09.)로 급물살을 탈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하더라도 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여러 요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으로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 대북강경파들의 잇따른 대북강병발언 등이 그 주요한 한 요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지난달 21일에는 폼페이오가 “북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강력한 대북제재를 유지할 것”, 그리고 지난달 27일에는 “북의 불량행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들이 그 예다. 다시 말하면 ‘북이 완전히 핵을 포기해야만 체제를 보장해줄 것’이라는 인식에서 한 발짝도 못나간 미국이었다.
이렇듯 미국의 시각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데 있다. <조선신보>가 북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2019년 7월 12일 밝힌 예의 그 ‘공정성’문제에 대해 아직까지 미국이 답을 내놓지 못해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해서 북이 ‘9월 하순 대화 용의’발언을 했다 해서 대화가 곧바로 재개될 수 있다느니, 뭔가 긍정적인 합의가 나올 수 있겠다느니 하는 그런 기대는 말 그대로 ‘소망적’ 기대 그 이상 이하도 아니고, 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최선희 제1부상이 같은 날 발언한 이 발언을 미국이 제대로 외교적으로 이해했느냐, 못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봐야한다.
“만일 미국 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북미) 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북(김정은)은 예의 그 ‘새로운 계산법’을 올 연말까지로 해서 그 시한을 못 박고 있는데, 그런데도 미국이 또다시 과거와 같은 그런 ‘낡은 계산법’으로 북을 압박하려 든다면 ‘연내 시한’은 지켜질 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 결과도 비록 위태롭기는 했지만, 나름 지켜져 왔던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한낱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서 이번 최선희 제1부상의 발언에서 주목돼야 되는 것은 이미 언론에서 보도한 것처럼 ‘9월 하순 대화 용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과연 ‘새로운 계산법’을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고, 만약 미국이 그러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북은 예의 그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메시지가 이번 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를 통해 공표된 핵심내용이다.
그래놓고, 예의 그 ‘새로운 계산법’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복잡한 문제도 아니다.
미국 스스로가 너무나도 많은 정치적 셈법을 갖다 붙여 괜히 어렵게 만들어버린 그 오류가 더 문제라는 것이고, 문제의 심각성을 그렇게 해석해낸다면 한번 생각해봐야할 것은 70여년 이상이나 적대했던, 그것도 그냥 적대라기보다는 ‘철천지원수’처럼 대했던 두 국가가 그 적대를 종식하고 ‘새로운 신뢰관계’를 형성하려면 누가 보더라도 합당한 이치는 폼페이오가 “북, 몇 주 내에 협상 복귀 희망”(2019.09.08. 현지시간, <ABC> ‘디스 위크’에 출연해서 한 발언)과 같은 그런 입에 발린 립 서비스가 아니라, <행동 대 행동으로>, <이행 대 이행으로>, <단계별 대 단계별로>라는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퍼즐을 그렇게 맞춰가다 보면 신뢰관계가 쌓이게 되고, 그렇게 신뢰관계가 쌓이다보면 비핵화는 그 결과로써 당연히 주어지게 된다. 해서 비핵화는 미국이 의도하고 있는 봐와 같이 ‘북이 핵을 포기하면 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된다기보다는 이 이행과정에서 생겨나는 신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하겠다.
그래야만 북도 기간 미국의 그 무엇을 믿고 핵을 폐기할 수 있겠다 했으며, 또 북은 너무나도 일관되게 지난 70년 간 적대해온 양국의 관계가 새로운 관계 수립을 위해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그 요인이 자신들 스스로가 오직 자체의 힘만으로 완성시켜 낸 ‘국가핵무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미국이 그 한마디, 말(립서비스)만 믿고 덜렁 핵을 폐기한다?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른바 서로가 원하는 그 최고 목표치에 대해서는 각자의 포지션에서 외교적 모호성으로 남겨놓고, 지금 현 단계에서 서로 합의하고 이행할 수 있는 것만 하나하나 협상해가는 그런 step-by-step전략만이 유일한 해법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미국은 자신들이 그렇게 원하던 비핵화를, 북은 자신들이 그렇게 원하던 대북제제 해제와 적대정책 철회를 얻게 된다.
이는 출발 전부터 불가능한 합의를 통한 신뢰 쌓기가 아니라, 그 반대 즉,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는 서로의 요구주장 최대치를 충분히 뒤로 물리고, 합의 가능한 등가의 ‘단계적’이행을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고, 그 비례로 계속해서 step-by-step하다보면 비핵화문제가 서로가 원하는 방향 하에서 풀어질 수 있는 그런 전략 다름 아니다.
출발선도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고, 일정한 국제사회의 합의도 있는 리비아식의 빅딜 안의 완전폐기와 대북적대 정책 철회, 단계적 동시적 이행을 통한 북의 비핵화 상응대가가 그 정답이다.
오직 그렇게만 등가의 그 ‘공정성’개념에 가장 충실해야 한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0일 초대형방사포시험사격을 또다시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11일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0일 초대형방사포시험사격을 또다시 현지에서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은 11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은 위원장이 초대형방사포의 전투전개시간을 측정해보며 이번 시험사격에서 확증할 지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했으며 시험사격은 두 차례 진행됐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다시 진행된 초대형방사포시험사격은 시험사격목적에 완전 부합되었으며 무기체계 완성의 다음단계방향을 뚜렷이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김정은 위원장이 “초대형방사포무기체계는 전투운영상측면과 비행궤도특성, 정확도와 정밀유도기능이 최종검증되었다면서 앞으로 방사포의 위력상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되는 연발사격시험만 진행하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전했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 식 초대형방사포무기체계 개발사업에서 연속적이며 기록적인 성공을 안아오고 있는 국방과학연구부문의 지도간부들과 과학자, 기술자들의 열렬한 애국심과 당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또한 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초대형방사포를 비롯한 우리 식 전술유도무기들의 생산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국방과학 분야의 최첨단설정목표들을 계속 줄기차게 점령해나가는데서 나서는 당면한 과업과 방도들에 대하여 밝혔다”고 전했다.
이날 시험사격은 박정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육군대장과 김여정, 조용원, 리병철, 김정식을 비롯한 당중앙위원회 간부들, 장창하, 전일호, 정승일을 비롯한 국방과학연구부문의 지도간부들이 함께 지도했다.
앞서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는 10일 “우리 군은 오늘 오전 6시 53분경, 오전 7시 12분경 북이 평안남도 개천 일대에서 동쪽으로 발사한 미상의 단거리 발사체 2발을 포착했다”라고 밝혔다.
1950년, 야당인 공화당이 국내 빨갱이 사냥에 골몰해 있는 동안 집권 민주당은 대외 패권의 확보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작성된 NSC-68은 핵전력 및 재래식 군사력의 대폭 강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두 달 후 발발한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에 돌입할 수 있었고 1952년 말이 되면 영구 전쟁국가로 탈바꿈한다. 국방 예산은 1950년 이전에 비해 3-4배 늘었고 핵무기와 재래식 군사력이 대폭 증강됐다. 특히 2백만 명 가까운 상비군 체제가 정착되면서 수 십 만 명의 미군이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도처에 상시 주둔하게 됐다.
상비군 체제와 미군의 해외 상시 주둔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건국 이래 미국은 상비군 보유를 극력 꺼렸다. 군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미군의 해외 주둔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상비군 제도와 미군의 해외 주둔은 건국 이래 미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매우 엄청난 변화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한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충격만으로 전쟁국가를 완성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NSC-68은 기획 단계부터,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이견과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립주의 성향의 공화당은 결사 반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버드대 총장을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이 대국민 설득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며 이는 미국의 안보에 대한 '현존하는 위험(Present Danger)'임을 각인시켰다. 즉 소련의 군사력이 미국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음을,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해냈다. 그 결과 1952년 말에는 '반공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가 확고한 국민적 합의로 정착된다.
훗날 역사가들은 1950년 당시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소련은 세계를 군사 정복할 의도와 능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서유럽 등 자유세계의 대대적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월터 리프먼이 말한 '동의의 조작(Manufacturing Consent)'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해낸 조직이 바로 '현존위험위원회(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 CPD)'다.
대학 총장과 고위 언론인, 전직 관료와 기업가 등으로 구성된 민간 로비 조직인 현존위험위원회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내세워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을 적극 옹호했다. 이를 통해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를 무력화하고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미국의 군사주의를 영속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이후에도 미국에서는 중요한 고비마다 새로운 '현존위험위원회'가 나타나 평화국가로의 전환을 가로막아 왔다. 1976년 11월에는 두 번째 CPD가 결성돼 닉슨과 키신저가 시작한 데탕트를 좌초시켰다. 2004년에는 과격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는 세 번째 CPD가, 급기야 올해 3월에는 중국을 주적으로 삼는 네 번째 CPD가 출범해 활동 중이다.
CPD는 2차 대전 이후 미 대외정책의 패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상의 적, 또는 과장된 외부의 위협을 이유로 내부를 통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그 요체는 군사주의다. 이 때문에 제리 샌더스라는 연구자는 CPD를 '위기를 파는 행상꾼들(Peddlers of Crisis)'이라고 부른다. 위기를 내세워 자신들의 목표, 즉 군사주의를 관철시킨다는 뜻이다. 그가 1983년에 펴낸 같은 이름의 책을 바탕으로 첫 번째 CPD 활동을 살펴본다.
한국전쟁 위기 속 출범한 1차 현존위험위원회
첫 번째 CPD는 1950년 12월 12일 공식 출범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미국이 큰 위기에 몰렸을 때다. 이에 앞서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탄 사용을 시사했다가 영국의 반대로 물러선 바 있다.
이날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과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 과학계의 거물 바네바 부시 등 CPD 창립 멤버 세 명은 워싱턴 윌라드호텔에서 창립 성명을 통해 "소련의 침략 음모"야말로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선언했다. 이들은 소련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재무장이 시급하며, 미국은 보다 많은 병력과 물자와 원조를 유럽에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미국의 18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이날 뉴욕타임스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토 장관회의 참석을 위해 곧 브뤼셀을 방문할 것이라면서 "미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핵심지역인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려는 소련의 술책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음 날인 12월 13일 CPD는 국방부에서 오프더레코드 브리핑을 듣고 국방부 관리들과 안보문제에 대해 비공식적인 논의를 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지도자들을 불러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국방비 증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2월 14일 트루먼 대통령은 51회계연도의 네 번째 추가 국방예산(NSC-68/4)을 요청하는 한편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날 애치슨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며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했다.
12월 15일 트루먼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국가,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존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군 병력을 350만으로 늘려야(CPD가 요구한 수치) 하고,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며, 서유럽 동맹국들과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2월 20일 트루먼은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에 앞서 유럽을 방문한 애치슨이 서유럽 국가들과 함께 유럽 통합 방위력 구성에 합의한 데 따른 조치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국방예산(1951 회계연도)은 당초 135억 달러에서 482억 달러로 3.6배 늘어난다. 그런데 늘어난 국방예산의 대부분은 한국전쟁보다는 유럽 재무장에 사용됐다. 일례로 1950년 후반 서유럽에 대한 군사물자 원조는 전년 대비 2배로 늘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위기에 빠졌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는 미국 및 유럽의 재무장과 유럽에 대한 대대적 군사지원, 그리고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트루먼 행정부에게 한국전쟁은 대대적 재무장의 빌미였을 뿐이다.
CPD의 활동 목표 역시 한국전쟁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 그리고 서유럽에 대한 대규모 미군 병력 파견과 군사 원조가 목표였다. CPD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프린스턴, 브라운, 버클리, 미시간대 등 10여 개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중심적 역할을 했다.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 CPD 의장이었고, 미국대학협회 회장이자 브라운대 총장인 헨리 리스턴은 집행위원이었다.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수장들이 당면한 한국전쟁을 제쳐놓고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을 적극 설득하러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대학 총장들이 대국민 설득에 최적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 자체의 수행보다는 미국 및 서유럽의 대대적 재무장과 나토 결성을 더 중요시했다. 후자야말로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이었다. 재무장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당시 트루먼 행정부는 미 국민에게 더 많은 피와 땀을 제공하라고 설득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공화당의 매카시즘 공세로 국무부는 빨갱이들의 소굴로 낙인 찍혔고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당에 유약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결국 NSC-68의 실천을 위해서는 저명한 민간 인사들에 의한 대국민 설득 작업이 필요했고 하버드의 코난트 등 명문 대학의 총장들이 앞장을 선 CPD가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51년 4월 미군 10만 파병이 의회의 승인을 받고, 10월에는 기존 경제 원조(마셜 플랜)를 군사 원조로 대체하는 상호안보법이 의회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목표는 이뤄진다. 이로써 1949년 4월 출범했으나 서류상 조직에 불과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명실상부한 군사동맹으로, 그리고 미국의 반공군사주의는 완성된다. CPD 창립에 이르는 과정을 되돌아본다.
유럽의 중도주의를 봉쇄하라
이미 1949년 초부터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현존하는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소련의 군사력이 아니었다. 서유럽의 이탈 가능성이었다. 1948년부터 시행된 마셜 플랜에도 불구하고 경제 재건이 늦어지면서 서유럽이 중도주의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서유럽의 이탈을 막기 위한 대책이 대대적 재무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대중에게 제시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 문서로 불리는 NSC-68은 딘 애치슨과 폴 니츠의 작품이다. 애치슨은 1949년 1월 21일 국무장관으로 승진했고, 1950년 1월 조지 케난 대신 니츠를 국무부 정책기획단장에 기용했다. 니츠는 NSC-68을 실제 작성했다. 둘 다 월가의 국제변호사 출신으로 대기업의 이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미 대외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런데 1949년 초까지 서유럽의 경제 부흥이 지지부진하면서 서유럽의 향배가 이들의 근심거리였다. 중도주의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서유럽으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이웃, 소련과 대결하기보다는 화해하고 교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다가 공화당과 국민 대다수는 퍼주기라며 마셜 플랜을 반대했다.
서유럽은 전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였다. 서유럽이 이탈한다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유럽을 미국의 세력권에 묶어놓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 핵심이 군사주의였다.
즉 대대적 재무장을 통해 첫째, 소련의 견제를 무력화 시킨다. 다시 말해 미국의 행동의 자유를 확보한다. 애치슨은 이를 '힘의 우위(Position of Strength)'에 바탕을 둔 협상이라고 표현했는데, 실상은 미국식 일방주의다.
둘째, 군사 원조의 형태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을 강화한다. 경제 지원에 대한 미국 여론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한 꼼수다.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크게 부풀릴 필요가 있다.
셋째, 군사동맹을 통해 서유럽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 놓는다. 즉 미국의 봉쇄정책은 소련이라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을 막는 것과 함께 서유럽이라는 내부의 이탈을 막는다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봉쇄정책은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라고도 불린다.
미국 및 서유럽의 재무장과 군사동맹 결성이라는 책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미국의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점을 미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그래야 대대적 재무장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SC-68의 핵심 논지다. 애치슨은 이미 1949년 1월부터 이러한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국무장관 취임 직후 국방 예산에 대해 "턱없이 부족하다...미국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 비해 너무나 적다"고 불평했다. 대공황 이후 2차 대전까지 20년간 계속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연간 국방예산 상한을 135억 달러로 대폭 낮춘 데 대한 불만이었다.
애치슨의 불평에 동조한 이가 폴 니츠다. 그는 1949년 봄 '미국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성을 가지려면 국방예산이 300억-400억 달러는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군사력을 증강해야만 소련을 겁 줄 수 있고 서유럽을 미국 편에 묶어둘 수 있다는 얘기다. 소련의 첫 핵실험 6개월 전, NSC-68 작성 1년 전이다. 흔히 미국의 재무장(NSC-68)은 소련 핵실험 및 중국 공산화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전, 1949년 초부터 검토가 시작된 것이다.
니츠는 1949년 여름부터 국방예산에 대한 제약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과 소련 경제의 비교 연구를 통해 미국은 대규모 군비 증강을 감당할 충분한 경제력이 있으며, 오히려 군비 투자가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른바 군사케인스주의다.
1949년 9월 소련의 핵실험 사실이 밝혀지고 10월 중국 공산화가 확정되면서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갑자기 증폭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 30일 수소탄 개발을 결정하는 한편 국무부와 국방부 합동으로 대외 정세의 급변에 대한 대응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NSC-68이다.
조지 케난 vs. 딘 애치슨
이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은 조지 케난의 봉쇄(Containment)에서 애치슨-니츠의 봉쇄군사주의(Containment Militarism)로 바뀐다. 두 정책의 결정적 차이는 군사력의 역할에 있다. 케난은 군사력을 대외정책의 보조적 요소로 본 반면 애치슨-니츠는 군사력, 특히 핵무기를 결정적 요소로 파악했다.
봉쇄정책의 창시자 케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봉쇄는 소련의 정치적 위협에 대한 정치적 봉쇄였지, 군사적 위협에 대한 군사적 봉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방에 대한 소련의 위협은 정치, 경제, 외교적 차원'이며 '설사 군사적 위협이 있다 해도 그것은 특정한 분쟁지역의 제한적인 군사적 도전으로, 미국의 기존 군사력으로 대처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케난은 핵무기 사용에 반대했다. 1950년 2월 17일 자 메모에서 그는 "미국의 전쟁 계획에서 현재의 핵무기 의존을 즉각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련이 재래식 군사력으로 서유럽을 침공하면 자동적으로 핵무기로 대응한다는 핵 인계철선(nuclear tripwire) 전략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는 재래식 군사 공격에 대한 미국의 핵 반격은 외교적 참사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핵무기의 파괴력으로 적을 굴복시키기보다는 국제여론의 반발을 살 것이라는 얘기다. 나아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한 상황에서도 중국의 공산화나 소련의 동유럽 장악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핵무기의 정치, 외교적 효용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애치슨은 소련의 핵실험에 대해 수소탄 개발로 맞서는 등 핵무기의 가치를 높게 봤다. 니츠 역시 NSC-68을 통해 "즉각 사용할 수 있는 총 군사력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정책은-이는 계산된 점진적 강제라고 할 수 있다-허풍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특히 전략 핵무기에서의 우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애치슨-니츠의 반공군사주의 노선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도, 트루먼 행정부 내의 다수 의견도 아니었다. 국무부 최고의 소련 전문가인 케난과 찰스 볼렌은 NSC-68의 대대적 재무장 계획에 대해 그야말로 경악했다고 한다. 우선 소련에게는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은 1958년 이전까지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조차 갖지 못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케난을 정책기획단장에서 해임한 데 이어 남미로 장기 출장을 보냈고 볼렌은 프랑스의 미국 대사관으로 유배를 보냈다. NSC-68을 작성하는 동안(2월 중순-3월 말) 이들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도 국방비를 일거에 3-4배 증액하는 데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특히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결사 반대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도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야당인 공화당, 그리고 일반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
NSC-68 추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국민 설득이었다. 즉 국민들에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각인시켜 대규모 재무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예컨대 1950년 2월 17일 국무-국방부 정책검토위원회에서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의장 레온 케이설링과 전 전쟁부 차관보이자 금융가인 로버트 로벳은 '국방 예산 500억 달러 돌파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미국 경제력은 국방예산 500억 달러를 감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문제는 국방비를 단숨에 3-4배 인상하는 데 대한 대중들의 저항을 어떻게 무마하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매카시즘 열풍으로 양당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가 대국민 설득에 나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3월 10일 같은 회의에서 록펠러재단의 체스터 바나드 의장은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국가적 노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면서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러한 인물로 아이젠하워(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총장), 로버트 스프롤(버클리대 총장) 등을 꼽았다.
이어 3월 16일 회의에서 로버트 로벳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국내외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를 갖춰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망 있는 민간 인사들의 활동이 대통령 임명에 의해 추진되는 모양새는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대중들이 보기에 (그러한 선전 작업에) 정부가 개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NSC-68 추진세력들은 계획 작성 단계부터 대국민 설득 방안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미국 정부는 냉전 초기부터 공포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다. 1947년 3월 냉전을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 발표 당시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의회에 가셔서 온 나라에 확 겁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차관이었던 애치슨은 보통사람들에게 대외정책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단순, 과격, 무식한 방법으로 요점을 강조해야" 하며 "진실보다도 더 선명하게" 핵심을 부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을 위해서는 소련의 위협을 실제보다 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NSC-68에 대해서도 이 계획의 목표는 정부 고위지도자들의 집단지성에 강력한 충격을 가해 대통령이 (대규모 재무장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이 결단이 실행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1950년 초 정부 내 최고 소련 전문가인 조지 케난과 찰스 볼렌을 워싱턴에서 쫓아내면서 NSC-68 작성을 관철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대통령을 설득해 즉각 군사 개입을 결정했고, 7월에는 전쟁 수행을 이유로 106억 달러 규모의 추가 국방 예산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억 달러가 유럽에 대한 군사 원조였다.
재정 보수주의자인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국방비 증액, 특히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에는 결사 반대였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9월 12일 존슨 국방장관을 전격 해임하고 전 국무장관 조지 마셜을 그 자리에 앉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국방 부장관에 로버트 로벳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로벳은 NSC-68 작성에 관여하면서 재무장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는 '매우 거대한 선전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국방장관 존슨의 해임과 마셜, 로벳의 기용은 애치슨-니츠 라인의 승리였다. 즉 트루먼 행정부 내의 재무장 반대 세력이 제거된 것이다.
존슨 국방장관 경질 사흘 후인 9월 15일, 애치슨은 뉴욕에서 서유럽 외무장관들과 만나 미국의 대규모 군사 원조 및 미국-서유럽 군사동맹 결성에 관한 미국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냈다. 이제 다음 과제는 미국 국민들에게 대대적 재무장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부어리스와 코난트
CPD 출범은 1950년 8월 두 사람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트레이시 부어리스 전 육군부 차관과 제임스 코난트 하버드대 총장이다. 부어리스는 NSC-68 찬성파로 서유럽에 대한 경제지원과 군사원조를 통합하자는 '부어리스 리포트'를 작성한 인물이다. 마셜 플랜에 대한 공화당의 거센 반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유럽으로 하여금 군사물자를 생산케 하고 이를 미국이 사들이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리포트로 존슨 국방장관의 노여움을 사 차관직을 사퇴했다.
1950년 8월 부어리스는 코난트를 만나 안보 상황의 엄중함을 호소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미국의 안보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에도 국민은 물론 의회도 이러한 위기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7월 트루먼이 의회에 요청한 국방예산 증액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소속 존슨 국방장관의 반대에 부딪힌 상황이었다. 유럽에 대한 군사원조가 문제였다.
부어리스의 호소를 들은 코난트는 "저명인사들을 불러 모아 계획을 세우고 대중들에게 제시합시다, 대중들이 의회에 편지를 보내 상황의 엄중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귀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금 미국은 잠들어 있군요. 깨워 일으켜야만 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부어리스는 "총장께서 그런 위원회의 리더가 돼주실 수 있습니까?"고 요청했다.
훗날 코난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는 몰랐지만 바로 그때 우리는 CPD 창설을 시작한 것이다. CPD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용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부어리스가 코난트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은 그가 미국 최고 명문 대학의 총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아탑 속의 학자가 아니었다. 1차 대전 때부터 미국의 전쟁 노력에 적극 동참한 정부 내 핵심 인사였다. 화학자였던 그는 1차 대전 당시 화학무기 개발에 참여했고, 2차 대전 때는 바네바 부시와 함께 원자탄 개발 등 미국 과학기술계의 연구 업적을 전쟁 역량으로 실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일원으로서 사전 경고 없이, 인구밀집지역에 원자탄을 투하한다는 결정을 주도했다. 나아가 2차 대전 이후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고, 미국의 안보를 위해 보편복무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 코난트는 군사주의의 신봉자였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NSC-68 작성에 관여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코난트는 자문위원이었고 부어리스는 검토위원회 위원이었으며 NSC-68 실현을 위한 보고서(부어리스 리포트)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CPD 회원의 절반 가까이는 2차 대전 이후 국방부, 국무부의 고위 관리를 역임했거나 미국의 대외 개입을(2차 대전 참전, 마셜 플랜) 위한 각종 시민 로비 조직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은 CPD가 정파를 초월한 중립적 인사들인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트루먼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이자 미국의 군사화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CPD의 주요 멤버는 의장 제임스 코난트, 부의장 트레이시 부어리스를 필두로 로버트 패터슨(전 육군부 장관), 윌리엄 클레이튼(전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도노반(전 OSS 국장),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뉴욕타임스 부사장),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총장, 미국대학협회 회장) 등이다.
코난트는 부어리스와의 만남 이후 당시 미국대학협회 회장인 헨리 리스턴 브라운대 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때부터 대학 총장들이 CPD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저는 유럽에 100만 미군 병사를 빨리 배치할수록 좋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병력 규모를 300-500만으로 늘리기 위해 즉각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에 지금 필요한 것은 보편복무제도를 위한 장기적이고 건전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수 개 월내에 만일 대학 총장들께서 이러한 계획을 제출하신다면 대단히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내부자들의 '시민회의'
1950년 9월 28일 '시민회의(Citizen's Conference)'라는 이름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참가자는 일반 시민들이 아니라 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재계의 거물급 인사 약 50명이었다. 제임스 코난트(하버드대), 헨리 리스턴(브라운대) 등 7개 대학 총장이 주최한 이 모임에는 뉴욕타임스의 줄리어스 옥스 아들러 부사장을 비롯해 제네럴 모터스의 알프레드 슬로언 회장, J.P. 모건의 조지 휘트니 회장, 존 D. 록펠러,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윈스롭 올드리치 총재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했다.
당시까지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NSC-68의 내용을 공유하고 12월 현존위험위원회(CPD) 출범 때 발표될 창립 성명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극비문서였던 NSC-68의 내용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75년이다)
이날 모임에서는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 아이젠하워가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첫째, 소련의 목표는 세계 정복이다. 이를 위해 소련 지도자들은 기꺼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미국 국민은 현 위기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국민들은 병사들을 고국으로 데려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지금 그(때 이른 군비 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비 지출을 대폭 늘리고 18세 이상 모든 남성들의 군 복무, 즉 보편복무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소련은 미국 안보에 현존하는 위험이며, 미국은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며 미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군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시민회의 주최자들도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아이젠하워를 발제자로 내세운 것이다. NSC-68을 일반 국민들에 설득하기에 앞서 오피니언 리더들의 동의를 구한 것이다. 즉 CPD 출범에 앞선 사전 정지 작업이었던 셈이다.
10월 초 코난트는 로벳 국방 부장관을 만나 CPD 출범을 논의했다. 2차 대전 당시 과학계를 대표해 국립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로벳은 물론 마셜 국방장관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어 코난트는 마셜에 서한을 보내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마셜이 CPD가 하려는 일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면 11월 중간 선거 후 1951년 초 의회가 열리기 전 기간에 "위기의 시기에 취해야 할 조치들에 관한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마셜은 "여러분들의 제안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환영했고, 11월 20일 자신의 국방장관 집무실에서 코난트 등을 접견했다.
이처럼 CPD는 태동부터 실제 활동까지 트루먼 행정부와의 긴밀한 공조 아래 진행된 것이다. CPD는 1950년 12월부터 소련의 위협을 내세워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을 선동했으나 공화당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1951년 1월부터 약 6개월 동안 CPD는 의회 증언, 대언론 성명 발표, 라디오 연설, 소책자 발간 등을 통해 대중들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공화당의 고립주의, 그리고 아시아우선주의를 격파하고 개입주의, 유럽우선주의를 관철해 나간다.
▲ 북 해외식당 종업원 문제해결을 위한 범시민대책회의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틀전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결정문을 반박,하고 인권위를 규탄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국가인권위원회가 1년 6개월만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에 통보한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에 대한 결정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피해 당사자(북 종업원)와 진정인(민변TF)이 자의적 입국이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기획탈북이라고 한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하고 거꾸로 국가정보원과 국군정보사령부 등 관련 기관의 증거인멸은 순순히 받아들여서 인권옹호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자의에 의한 입국'이라는 반인권적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북 해외식당 종업원 문제해결을 위한 범시민대책회의'(북 종업원 대책회의)는 11일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인권위가 보여준 부실하고 성의없는 조사, 정권의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하는 모습은 단순히 직무유기를 넘어 독립기관으로서 인권위의 권능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를 규탄했다.
북 종업원 대책회의는 기자회견문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다른 어떤 정치적 고려나 정무적 판단도 배제한 채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종업원들의 피해사실, 인권침해 사실을 확인하고 즉시 인권보호에 나서줄 것을 기대했으나 인권위의 이번 결정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고 질타했다.
먼저 이번 결정문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확인한대로 '국가정보기관의 위법부당한 개입을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확인할 수 없었다'면 신속히 검찰의 강제수사를 요청하고 종업원들이 당하고 있던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또 이번 결정문이 국가기관의 위법부당한 개입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언론 공표과정만 집중 부각시켜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무능함을 감추고 국가기관의 정치적 의도를 덮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가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조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늦어지고 종업원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도 가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격욱 민변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대응TF 팀장은 "인권옹호라는 근본문제를 외면하고 피해 종업원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이런 기구는 필요없다"며 목소리를 높여 국가인권위원회의 사망을 선고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인 박승렬 목사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탈북 의혹이라는 핵심적 내용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기각결정을 하기보다는 검찰 조사를 통한 적극적인 진상규명을 했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피해 종업원의 증언과 직접 조사를 한 토마스 오헤아 칸타나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의 결론, 그리고 평양 방문 조사를 마친 국제조사단의 일치된 결론은 '유인 납치'였으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진상규명을 위해 적극 협조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는 물론 정부 당국의 애매모호하고 석연치 않은 태도에 유감을 표시했다.
북 종업원 대책회의는 "앞으로도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사건 피해 당사자들의 인권보호와 원상회복을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낙동강 현장 탐사취재를 했다. '삽질 10년, 산 강과 죽은 강' 특별기획 보도는 9월 말까지 이어진다. 10월 말경에는 <오마이뉴스>가 제작한 4대강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영화투자배급사 엣나인필름)을 영화관에서 개봉한다. 이번 기사는 9월 9일 이상돈 의원실, 낙동강네트워크, 4대강재자연화시민위원회가 국회에서 주최한 '영주댐 현황점검 및 처리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병기 기자가 발제한 PT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편집자말]
▲ 내성천 회룡포 마을에 세운 표지석 ⓒ 정수근
원래 내성천은 대한민국 최우수 하천이라는 훈장을 받은 강이다. 내성천 회룡포 마을 뿅뿅다리 앞에는 위와 같은 표지석이 서 있었다. 여기에는 2008년 12월 국토부가 우수한 하천 100개를 선정하고 그중 백미를 내성천이라고 꼽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2008년 내성천과 2019년 내성천의 모습은 너무 달랐다.
국토부가 표지석을 세운 1년 뒤인 2009년 12월. 내성천에 영주댐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4대강사업의 마지막 구간이었다. 높이 50m, 길이 400m의 구조물을 세우는 작업. 내성천 110km 구간의 중간지점에 세운 댐이다. 보상비를 포함해서 총 1조1천억 원이 들었다. 사업목적은 낙동강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서 1300만 영남인들의 식수원을 맑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2016년 12월에 준공했고, 그 뒤 3년이 흘렀다.
▲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지난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1박2일간 내성천과 영주댐을 취재했다. ⓒ 이상돈의원실
<오마이뉴스>는 이상돈 의원실과 낙동강네트워크, 마창진 환경운동연합, 대구환경운동연합 등과 함께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낙동강 하굿둑에서부터 거슬러오르면서 낙동강을 취재했다. 내성천 구간은 30일부터 31일까지 1박2일 동안 진행했고, 현장 안내와 해설은 이상돈 의원실의 박용훈 작가가 맡았다. 내성천 110km 구간 중 이번에 조사한 구간은 70km. 내성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핵심 포인트 6~7 지점을 영상 취재했다.
[번계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내성천 번계들의 변화된 모습 ⓒ 박용훈
취재팀과 조사단이 석포교에서 김진창(농부)씨를 만나 내성천의 현황 설명을 듣고 처음으로 간 곳은 번계들이다. 영주시의 최대 곡창지대였다. 2013년에 영주시는 이곳에서 메뚜기 잡이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과거와 같다면 우리가 갔을 때인 8월 말에는 황금벌판에서 벼가 한참 익어갈 시점이었다. 하지만 잡초밭이었다. 산세를 보면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수몰예정지이기에 뒤늦게 보상을 해줬고, 농민들을 내쫓았다. 과거 농민들에게는 수확의 장소였고, 아이들에게는 농부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일깨우는 자연친화형 교육의 장소이자 놀이공간이었던 곳이 처참하게 변했다.
최근 자유한국당은 "농업용수가 부족할 것"이라면서 농민들을 위하는 척하며 보 해체 반대 집회를 열고 있는데, 10년 전 그들은 이곳의 농토를 빼앗았고, 농민들을 일터에서 쫓아버렸다. 번계들의 농민들처럼 영주댐 때문에 자기 고향을 등진 사람이 531세대에 달한다.
[두월교] 1급수 투명한 물을 흉측한 몰골로 만든 주범
▲ 내성천 유사조절지 댐 상류에 있는 두월교의 모습 ⓒ 박용훈
우리는 계속 차를 몰아 하류로 이동했다. 위의 왼쪽 사진은 과거 두월교 인근의 내성천 모습이다. 유사조절지댐으로부터 2.2km 상류 지점. 모래톱이 잘 발달되어 있고, 모래 위를 흐르는 물은 투명하다. 그냥 먹어도 될 수 있을 정도인 1급수로 보인다.
하지만 2011년과 2019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위의 우측은 1달여 전에 박용훈 작가가 찍은 사진이다. 지난 31일 취재팀이 도착했을 때에는 가을장마가 계속됐는데도, 녹조가 선명했다. 장마도 이긴 녹조, 1급수의 투명한 물을 흉측한 몰골로 만든 주범은 하류에 있는 유사조절지댐이었다.
[유사조절지] 투명한 물은 녹조로 바뀌고
▲ 내성천 유사조절지 댐 주변의 변화된 모습 ⓒ 박용훈
유사조절지 댐 지역도 과거에는 맑은 물이 흐르던 곳이었다. 두월교의 과거 모습과 같이 새하얀 모래톱 위로 투명한 물이 흘렀다. 그런데 추악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곳은 영주댐으로부터 13km 상류에 있다. 높이는 10m, 길이는 288m. 이 댐은 영주댐과 함께 지었다. 내성천 상류와 토일천에서 내려오는 모래를 막을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주댐에 모래가 쌓여서 담수효과를 반감시키기 때문이다. 지금도 모래는 막고 있지만, 강물은 녹조 범벅이었다.
위의 영상은 하늘에서 본 유사조절지의 모습이다. 역시 가을장마 때문에 육안으로는 녹조가 보이지 않았지만, 녹조제거용 수차 두 개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댐 양쪽의 작은 수문에서 내려오는 물 색깔이 녹색이다. 두월교를 지나는 과거의 맑은 물을 모아두자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고인물은 썩는다는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는 곳이다.
▲ '내성천 SOS' 영주댐 상류 퍼포먼스 ⓒ 권우성
▲ 4대강 사업 관련 낙동강 현장조사팀이 지난 8월 30일 경북 영주댐 상류 내성천 모래톱에서 '내성천 SOS' 현수막을 들고 있다. ⓒ 권우성
이날 취재팀은 다음 목적지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이곳은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는 곳이다. 과거 평은면사무소 소재지였는데, 모래톱이 형성됐다. 영주댐과 유사조절지댐 사이에 있는 이곳은 물도 맑았다. 취재팀과 탐사팀은 이곳에서 맑은 물속을 걸으면서 모래톱 위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박용훈 작가는 "유사조절지가 완공된 뒤인 2016년 7월 큰 홍수 때 많은 모래가 물과 함께 쏟아져 내려왔다"면서 "10m 높이의 모래가 유사조절지 위로 범람해 들어오면서 여기에 모래를 실어 날랐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래의 수질정화 능력이었다. 유사조절지댐에 갇혀 있던 오염된 물이 모래를 통과하면서 맑은 물로 변했다.
4대강사업 찬성론자들은 물그릇을 키우면 물이 희석돼 수질이 좋아진다고 지금도 억지 주장을 하지만, 유사조절지 댐에 가둔 많은 물은 썩었다. 오히려 과거처럼 물이 모래를 통과하면서 수질이 정화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주댐] 썩은 물로 수질 정화한다는 언어도단
▲ 영주댐 근방의 변화된 모습 ⓒ 오마이뉴스
이곳은 과거의 영주댐 근방의 모습이다. 내성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곳도 물이 맑고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다. 하지만 영주댐이 내성천의 허리를 자르면서 자연풍광과 물의 색깔이 확연하게 변했다. 오른쪽 사진은 2017년 영주댐 건설된 뒤 시험담수할 때의 모습이다. 당시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취재를 했던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들이 망연자실하게 녹조물을 바라보고 있다. 영주댐의 16%정도만 담수했는데도 이런 지경이었다.
결국 환경부는 2018년에 영주댐 수문을 전면 개방했다. 저런 녹조물로는 낙동강 수질 정화용 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판정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영주댐이 계획될 때부터 낙동강의 수질 오염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 지난 8월 30일 낙동강 상류 경북 영주댐. (드론 촬영) ⓒ 권우성
위의 사진은 이번에 드론으로 찍은 영주댐의 모습이다. 수문을 열었지만 댐의 하부 구조물에 갇힌 물은 녹조가 아니라 '흑조'였다. 취재팀이 오기 전까지도 비가 계속 왔는데 물의 빛깔이 시궁창처럼 시커멓다. 이렇게 고인물은 썩었다. 이런 물을 흘려보내 낙동강의 수질을 정화하겠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
[멱실마을] 양산 쓰고 책 읽던 아주머니는 어디로?
▲ 내성천 멱실마을의 달라진 풍경 ⓒ 박용훈
영주댐에서 하류로 내려오다가 잠시 들른 곳은 멱실마을 앞쪽의 내성천이었다. 영주댐에서 13km 떨어진 곳이다. 위 사진은 물론 예전의 모습이다. 박용훈 작가가 지나가다가 하도 예뻐서 찍었는데, 한쪽 구석에 동네 아주머니가 양산을 쓰고 책을 읽는 장면이 찍혔다. 모래톱은 힘겨운 노동으로 지친 몸이 잠시 쉴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다.
오른쪽 사진은 이번에 찍은 모습이다. 풀이 키보다 높게 자랐다. 과거의 경관은 흔적조차 없고, 이런 잡초밭에는 들어갈 수도 없다. 모래톱을 잡초밭으로 만든 원흉은 영주댐이다. '멀쩡한 영주댐'이 과거처럼 모래가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을 막았다. 원래 있던 모래는 4대강사업으로 수심을 6m 깊이로 판 낙동강 본류로 쓸려내려가고 있다.
결국 이곳의 모래톱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거친 자갈과 흙 위에서 잡초가 자랐다. 과거에는 홍수가 지면 이런 풀들은 물의 강력한 에너지로 모래와 함께 하류로 쓸려갔는데 영주댐은 물의 에너지까지 굳게 막고 있는 상황이다.
멱실마을에서 하류로 이동해 우래교로 갔다. 이곳은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물에서 수영 하고, 투명카약을 띄워놓고 영상 취재했던 곳이다. 올해에도 김종술 기자가 수중영상을 찍었다. 과거에 비해 물속 모래 알이 굵어졌지만 맑다. 치어들도 보인다. 이곳으로부터 15km 상류의 영주댐 썩은 물은 그나마 남아 있는 이곳 모래강을 지나면서 맑은 물로 정화됐다. 평은면 소재지와 같은 현상이다.
[선몽대] 캠핑객이 모래톱에 내려가지 않고 솔밭에만 있는 이유
▲ 내성천 선몽대의 변화된 모습 ⓒ 박용훈
다음으로 들른 곳은 명사십리로 불리는 명승 19호 선몽대이다. 예전에는 금은모래톱이 쫙 깔려 있던 곳이었다. 예천 관광 8경의 하나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꿈에 내성천 모래톱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선몽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국보급 경관이 잡초밭이 됐다. 이번에 갔을 때에 두 가족 정도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모래톱에 내려가지 않고 솔밭에만 있었다. 이유는 다음 동영상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본 선몽대의 모습이다. 명승지라는 이름만이라도 유지하려고 앞부분만 풀을 뽑은 게 확연히 드러난다. 녹조 때문에 1조1천억 원을 들이고도 물을 1년 넘게 가두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영주댐을 유지하면서 '민족의 보물'을 망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현장이다.
[회룡포] 녹색과 검은 색이 파먹어가는 새하얗던 백사장
▲ 회룡포의 변화된 모습 ⓒ 박용훈
선몽대처럼 내성천의 상징물이기도 한 회룡포도 마찬가지였다. 왼쪽은 과거 모습이다. 옛날에 용이 날아오르면서 크게 한 바퀴 돌아간 자리에 강물이 흘러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회룡포는 명승 16호이다. 회룡포 마을에 있는 대한민국 최우수 하천 표지석에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 역시 국보급 풍광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오른쪽 사진과 같다. 흉측한 모습으로 망가지고 있는 현장이다. 새하얗던 백사장을 녹색과 검은 색이 파먹어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다. 녹색 부분은 잡초가 들어선 것이고, 검은 색은 자갈이다.
▲ 자갈밭으로 변한 회룡포 ⓒ 박용훈
가까이 가서 보면 과거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다. 금은 모래톱이 자갈밭으로 변했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토요일(8월 31일)이어서 사람들이 뿅뿅다리 위로 지나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모래톱, 아니 자갈밭 위를 거닐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목격하지 못했다.
<오마이뉴스>가 환경단체들과 함께 취재하고 조사한 내성천의 죽어가는 모습은 여기까지다. 우리가 목격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 영주댐 조감도 ⓒ 국토부
위의 사진은 영주댐의 조감도이다. 국토부는 2011년 9월 영주댐 정초식을 알리는 보도자료를 통해 "국내 최초로 하천의 환경개선을 주목적으로 하는 댐"이라고 소개했다. 영주댐에 가둔 물이 위의 조감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푸르고 맑은 물이고, 이런 물이 과거보다 더 많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면 국토부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 많던 미생물은 어디로 갔을까
▲ 내성천 석포교에서 만난 농부 김진창씨는 영주댐의 녹조 원인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 김병기
영주댐은 1급수 강물을 4~5급수로 만드는 '녹조라떼' 제조공장이었다. 과거, 그냥 떠먹을 수 있는 물이 농업용수는 물론 공업용수에도 사용하기 어려운 물이 되었다. 석포교에서 만난 농부 김진창 선생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민국에 많은 댐이 있는데 그 유역 면적 중에 농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큰 곳이 내성천입니다. 영주댐은 유역면적 내 농경지 비율이 21%, 대청댐은 16%, 소양강댐은 6.5%입니다. 농경지에 비료 살포하면 토양으로 25% 흡수되고, 나머지는 공기 중으로 20%, 강우로 50% 가량 유출됩니다.
농경지에서 흘려보내는 물을 정화하려고 돈을 써서 시설을 설치해도, 비가 오면 어쩔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내성천은 모래강입니다. 모래 1㎤에 미생물이 2억마리 살고 있는데, 유기물이 모래를 통과하는 순간 수질이 정화됩니다. 영주댐이 없을 때 내성천은 그런 강이었습니다."
▲ 자갈밭, 잡초밭으로 변한 명승지의 모습 ⓒ 박용훈
영주댐은 수려한 국보급 경관을 망쳤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천수만년 동안 만들어진 경관이다. 자연의 선물인 내성천의 모래톱이 자갈밭이 된 뒤에 다시 잡초밭으로 변하고 있다. 박 작가는 내성천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강이 산이 될 거야."
실제 이번 답사에서 목격한 잡초밭들을 그대로 둔다면, 영주댐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할머니의 말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영주댐 허물어야 영주댐 세운 목적이 실현되는 역설
▲ 모래강 내성천은 국내 최대의 수질개선용 강이다. ⓒ 박용훈
내성천에서 또 확인한 것은 영주댐을 허물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리는 것이 댐 건설 목적과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내성천의 모래는 오염물질을 거르는 콩팥 역할을 했다. 물이 모래속으로 들락날락하면서 정화됐고, 그 물이 낙동강으로 흐른다면 맑은 용수를 공급하려고 했던 영주댐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유사조절지 댐의 오염된 물이 하류에서 정화되는 모습을 봤고, 또다시 영주댐의 썩은 물이 모래강을 거치면서 맑은 물로 바뀌는 모습도 목격했다. 모래톱은 댐을 만든 과학보다 더 우수한 자연 수질정화 필터였다.
▲ 모래는 '댐'이다. ⓒ 박용훈
또 모래강은 '자연댐'이라고도 한다. 오경섭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2011년 4월에 한국하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하천 모래톱의 생성 배경과 효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모래가 쌓여 형성된 다공질 모래톱의 공극들은 수분 통과를 어렵게 할 정도로 작지도 않지만 너무 빨리 빠져나가게 하지도 않는다. 모래톱의 다공질 공간은 물 흐름을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 교수는 "갈수기에는 모래톱의 역할이 더욱 돋보인다"면서 "모래톱을 통과하는 물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이와 맞물려 모래톱의 다공질 공간은 정체되지 않은 물의 저장고 역할을 하면서 하천 수위와 지하수면의 하강을 완화시켜 준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4대강 사업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재 정부가 강행하는 4대강 사업에서 물을 저장하겠다고 약 6억㎥ 정도의 모래층을 준설하는데, 이는 약 3억㎥ 정도의 좋은 물을 포기하고 6억㎥의 부패하기 쉬운 물로 바꾸는 것이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냉장 기능을 없애고 김치저장 공간만 늘린다면 어느 누가 수긍할 수 있단 말인가?"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만든 포스터. ⓒ 문재인 후보 포스터 갈무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만든 선거포스터이다. 하지만 아직도 4대강 적폐는 청산되지 않았다. 낙동강의 경우 8개 보의 수문조차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다. 내성천은 영주댐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사실 환경부가 2018년 수문개방을 결정한 것은 영주댐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주장처럼 영주댐으로 물을 가두어서 물그릇을 키웠는데 소위 '희석 효과'가 나타난 게 아니라 녹조라떼가 창궐했다.
1년 넘게 빈 그릇인 쓸모없는 영주댐을 유지하는 데에만도 매년 37~50억 원이 들어간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댐 상류 녹조 문제와 댐 하류 생태계 훼손 문제로 인한 댐 유지비용으로 천문학적인 세금이 투입될 것이라는 점이다. 막대한 혈세를 쓰면서 강을 죽이고 국보를 없애고 있다.
환경부, 수공 뒤에서 내성천 죽이는 데 앞장서지 마라
▲ 수공의 내성천 연구용역결과 보고서. ⓒ 수자원공사
위의 사진은 이상돈 의원실이 제공한 문건이다. 수자원공사가 연구용역한 '영주댐 수질관리대책 추진계획'. 2025년까지 지금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1100억 원의 혈세를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환경부가 그동안 근본적인 영주댐 문제를 외면한 채 수공의 등을 떠미니, 수공이 댐을 벗어난 먼 상류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축분 처리문제에 골몰하는 모양새이다.
영주댐의 순수 건설 비용은 2300여억 원 정도. 이 돈이면 낙동강 수질정화용 댐을 최초로 건설하겠다고 지금의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이 주장했지만, 거짓임이 판명이 났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수공은 이 비용의 절반 이상을 투입해서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이고, 수공이 주장하는 개선효과도 26.7%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주댐을 지금이라도 해체한다면 과거 1급수를 만들던 모래강으로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수공의 용역결과처럼 1100억 원을 투입하면 수질 개선 효과도 미지수이다. 또 수공의 기대처럼 수질이 개선된다고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내성천이라는 국보급 모래강은 더 이상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 모래 유입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최근 수공은 2016년 12월에 준공된 영주댐의 하자보수기간 3년이 오는 12월에 만료되기 때문에 담수를 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나중에 감사를 받아야 하고 관계자들이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문을 닫고 다시 물을 가둬서 제대로 된 시험담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물도 가두지 못하는 것으로 증명된 댐, 이미 엄청난 하자가 발견된 댐의 하자보수를 위해 다시 담수를 한다는 것도 명분이 없는 일이다. 환경단체들은 어렵사리 열린 댐의 수문을 다시 닫으면 그 다음 단계는 1100억 원 투입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4대강 적폐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운 환경부가 이제는 전면에 나서야 한다. 수공 뒤에서 내성천을 죽이는 데 앞장서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부의 환경부처럼 문재인 정부의 환경부가 내성천이라는 위대한 자연환경을 죽이는 데 동조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영주댐에 대한 전격적인 해체를 검토해야 한다. 해체만이 내성천을 살리고 낙동강도 살리는 길이라는 게 지난 2~3년만에 증명됐다. 내성천은 스스로 추악한 몰골로 변해가면서 영주댐의 문제점을 증명했다.
▲ 4대강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의 한 장면. ⓒ 오마이TV
위의 사진은 오마이뉴스 김종술 기자가 금강의 녹조를 손으로 뜬 모습이다. 걸쭉하다. 오마이뉴스가 오는 10월말 경에 개봉하는 4대강 다큐멘터리 영화 <삽질>의 한 장면이다. 영주댐에 갇힌 물은 지금 저런 녹조보다 더 진한 '흑조'로 변했다. 영주댐은 4대강사업의 폐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영주댐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4대강에 박혀 있는 16개 시멘트 덩어리도 견고하기는 하지만 멀쩡한 강을 죽이는 흉물이다. 유지관리하는 데에만도 매년 5천억 원에서 1조 원의 세금을 퍼먹는 하마이다.
최근 자유한국당은 4대강조사평가기획위원회가 금강-영산강의 일부 보 해체 방안을 제시하자 '멀쩡한 보를 부순다'고 성토하고 있다. '예산을 낭비하면서 국가시설을 파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게 맞는 말일까?
이제는 환경부가 전면에 나서서 짧게는 2-3년, 길게는 지난 10여 년 동안 내성천과 4대강을 모니터링하면서 얻은 과학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결론을 내야 한다. 겉만 멀쩡한 댐을 해체하고 멀쩡한 강을 죽인 4대강사업에 대한 해결방안을 당장 실행해야 한다. 죽어가는 강을 다시 멀쩡한 강으로 되살려야 한다. 영주댐을 하루 속히 허물어야 하고, 영주댐을 기획해서 멀쩡한 내성천을 망가트리고, 혈세를 쏟아 부으면서 국민들을 속인 자들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가 9일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조국 장관 임명을 놓고 우리 사회에 벌어진 논란을 3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 박 대표는 밑바닥에 깔린 불평등 문제만 가지고 접근할 경우 자칫 적폐세력에 의도에 말려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검찰개혁 아이콘이 됐지만, 가족 수사와 관련된 검찰의 범죄행위를 직접 감찰할 순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길을 정리해줘야 한다."
박석운(64)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가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과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선출된 권력'과 '검찰 권력' 간에 권력 쟁투가 벌어졌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 대표는 "검찰에서 조국 장관 가족 수사를 계속 진행하게 하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수사자료 유출이나 피의사실공표 등 범죄행위가 있었는지 고강도 감찰을 해야 한다"면서 "(조국 장관이 직접 진행하긴 어렵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민간인이 60~70% 이상 참여하는 감찰단을 만들어 국민 앞에 진상을 투명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석운 대표 인터뷰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 임명이 알려지기 직전인 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도렴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진보진영의 마당발인 박 대표는 지난 7월부터 국내 75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를 맡아 촛불항쟁 불씨를 되살렸다. 지난 8월 31일까지 매주 진행했던 아베규탄 촛불문화제를 월 1회로 바꾸고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지만, 나라 안팎으로 경계의 끈은 놓지 않고 있었다. 박 대표가 이른바 '아베 앞잡이'라고 부르는 국내 적폐 세력의 시선이 조국 장관을 향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베정권 기습공격은 촛불항쟁 체제 뒤엎으려는 것"
▲ 8월 2일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한국YMCA, 흥사단 등 682개 단체 소속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아베 정권을 규탄하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촉구하고 있다.
- 지난 2017년까지 이어진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이후 이렇게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건 2년 만인데, 아베규탄시민행동을 결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7월 초만 해도 굉장히 심각한 사태인데도 정부나 언론도 중심을 못 잡고 바라보고만 있던 상황이었다. 아베정권의 경제보복은 강제동원과 식민 지배를 부인한 역사왜곡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촛불항쟁 때문에 생긴 문제다. 촛불 항쟁이 아니었으면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근혜-아베 야합이 엎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강제동원 판결을 미룬 사법농단도 바로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난 한국의 촛불 체제에 대한 아베정권의 반동이라고 본다. 군국주의를 꾀하는 아베정권이 한국을 굴복시켜 경제적·군사적 하위파트너로 만들려고 했는데 촛불항쟁 때문에 깨진 것이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핑계 삼아 한국 경제 급소를 기습 공격했는데 다행히 촛불항쟁의 저력이 되살아났다."
박 대표는 10년 동안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공동대표를 지낸 언론운동가이기도 하다. 지난 7월 16일 아베정권 경제보복에 대한 첫 시민사회 기자회견이 열린 곳도 바로 조선일보사 앞이었다.(관련 기사 : "<조선> 보도→ 일본이 받고→ 한국당이 정부 공세" http://omn.kr/1k26h)
"경제보복 초기 언론들의 공론화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내용은 한동안 다루지도 않고 아베정권 발언 받아쓰기와 경마 중계식 보도로, 양비론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저널리즘 실패뿐 아니라 공론화 방향이 거꾸로 돼 대법원 판결 취지가 실종되고 말았다. 아베의 기습공격이 촛불항쟁 체제를 뒤집어엎고 한국을 군사적·경제적 하위 파트너로 굴복시키려는 의도라는 걸 국민에게 알리려면 다시 촛불을 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진보연대, 민주노총 등 60여 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7월 17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7월 20일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첫 번째 아베규탄 촛불문화제를 예고했다. '제2의 촛불항쟁' 서막이었다. (관련 기사 : '아베 규탄' 촛불집회 연다는 소식에, 일본 언론 총 출동 http://omn.kr/1k2qb)
"1차 촛불에 1천 명이 모였고, 2차 5천 명, 3차 1만5천 명으로 늘어가는 걸 보고 촛불이 확산될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폭염에 휴가철인데도 1차 촛불 때 모인 1천 명 가운데 조직된 단체는 거의 없었고 30~50대 여성 참가자들이 유독 많았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대중들의 분노가 굉장히 근본적이고 폭발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8월 15일 광화문광장에 10만 명이 모일 수 있었다."
- 8월 31일까지 7차에 걸쳐 진행된 아베규탄 촛불항쟁이 거둔 성과는 무엇인가.
"아베정권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고강도 갈등 국면에서 지소미아 파기를 계기로 중저강도 갈등 국면으로 넘어간 상황이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아베정권과 '일본회의'라는 극우파 그룹이 주도하는 아베 일당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1차 반도체 핵심부품 3가지 수출규제, 2차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에 이어, 새로운 3차 공격도 예상된다. 중기적으로 갈등 국면이 지속돼 길목을 잡고 계속 투쟁을 이어가다가 추가 공격이 있으면 다시 촛불이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방사능에서 안전한 올림픽 만들기' 캠페인으로 아베 급소 공략
▲ 8월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15 74주년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 규탄 및 정의평화실현을 위한 범국민 촛불문화제’
- 앞으로 예상되는 추가 공격과 아베정권에 맞선 투쟁 계획은 무엇인가.
"강제동원 관련 법원에서 압류한 재산을 강제 처분하는 과정이 또 하나의 정점이 될 수 있고, 11월 23일 지소미아 공식 파기가 추가 공격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는 9월 28일 촛불문화제에선 10일 출범하는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가칭)'에서 주관해 언론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10월 30일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1주년에는 강제동원 문제를 주로 다룰 계획이다.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평화세력들도 '전쟁가능법'이 통과된 10월 19일과 평화헌법 제정일인 11월 3일에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집회 일정이 확정되면 한일 시민사회가 양국 집회에 참석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집회뿐 아니라 아베 정권의 '급소'를 찾아 반격하는 국제 캠페인도 고민하고 있다.
"국내에선 부산과 서울에서 전범기업 제품 불매 조례를 제정했는데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국제 사회를 향해 인권, 평화, 전쟁범죄 등 보편적 가치를 앞세운 캠페인을 벌여,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가 없고 국가와 개인 책임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릴 계획이다.
아울러 아베에게 급소가 될 수 있는 '방사능에서 안전한 올림픽 만들기' 국제 캠페인도 검토하고 있다. '도쿄올림픽 보이콧'은 스포츠를 정치적 가치로 접근한다는 역풍이 불 수 있지만 '방사능 프리'는 탈핵·환경단체들이 추구하는 국제적인 가치다. 아베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방사능 공포를 극복했다고 일본 국민들을 상대로 여론 조작을 하고 있는데, 아베가 스포츠를 정치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걸 거꾸로 공략해야 한다."
아베규탄시민행동이 상대해야 할 '적'은 아베 정권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항쟁 당시 3대 적폐로 꼽았던 언론과 재벌, 검찰 '삼각 동맹'도 여전히 건재하다.
"국내 친일적폐청산도 심각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놀랍다. 나도 그동안 언론운동, 민중운동, 시민운동 오래 했는데 촛불항쟁 이후 시민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 촛불문화제하면서 6차례 행진했는데 조선일보사 앞으로 가면 불평하기는커녕 '조선일보 폐간'이란 구호가 시민들 입에서 먼저 나온다. 시민들도 적폐 언론이 나라를 망친다는 걸 이미 체험해서 알게 된 것이다.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항쟁 때도 '언론도 공범, 재벌도 공범, 검찰도 공범'이라고 외쳤는데, 제대로 적폐 청산이 제대로 안 돼 지금 되치기 당하고 있는 거다."
지소미아 종료 성과 거뒀지만 7차례 촛불로 빚만 4500만 원 남겨
- 시민행동에서 줄기차게 요구해온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라는 성과도 거뒀다. 예상했던 결과인가?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도 지소미아 파기 집중행동을 준비했지만 한국 정부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촛불정부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거란 점에서 결국 촛불항쟁의 성과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야합, 지소미아,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시스템) 알박기 모두 당시 한국 정부도 떠밀려선 한 것이어서 촛불 정부로선 외곬 수순이었다. 아베나 네오콘(미국 신보수주의세력)도 촛불항쟁 민초들을 계산에 넣지 않은 판단 착오를 했다."
- 일본 정부 안에서도 사태 초기에 한국의 대응을 과소평가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도 있었다.
"아베정권이 촛불을 몰랐고 조선일보 (일본판) 덕도 있다. 지금까지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위태로웠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계기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우선 아베가 설익은 상태로 무리수를 쓰는 바람에 국내 앞잡이 세력이 다 드러났다.
두 번째로 한국경제 구조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됐다. 세 번째는 자칫 지소미아에 이어 군수지원·병력지원협정까지 갈 뻔했던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하위파트너 재편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안일하고 느슨하게 진행했던 촛불 개혁에 다시 한번 신발끈 고쳐매고 나설 수밖에 없도록 좋은 자극제가 됐다."
이처럼 아베규탄 촛불항쟁도 짧지 않은 기간 나름 성과를 거뒀지만 재정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아베규탄시민행동에서 지금까지 7차례 촛불문화제를 진행하는 데 들어간 돈만 1억 5천여만 원. 동참한 시민단체 분담금으로 4천여만 원을 충당하고 시민 현장 모금으로 5천여만 원을 모았지만, 여전히 4500여 만 원이 빚이 남아 있다.
"조국 수석이 아베규탄 촛불 공론화 계기 마련"
▲ 박석운 대표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과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선출된 권력"과 "검찰 권력"간에 "권력쟁투"가 벌어졌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날 인터뷰 도중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부 장관을 임명했다는 속보가 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조국 장관을 둘러싼 또 다른 '적폐' 논란으로 이어졌다.
- 자유한국당과 보수 언론에서는 조국 사태를 덮으려고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꾸로 된 얘기다. 촛불 논의할 때 시민사회에서 먼저 문제제기하면 제도권에서 받아주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초기 국내 언론에서는 <오마이뉴스>를 빼고 별로 받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응답해 공론화 계기가 됐다. 조국 이슈를 덮으려고 지소미아 종료하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지소미아를 둘러싼 국제 상황을 이해 못 하는 저열한 정세 인식에서 나온 주장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
▲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가 9일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조국 장관 임명을 놓고 우리 사회에 벌어진 논란을 3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
박 대표는 조국 장관 임명을 놓고 우리 사회에 벌어진 논란을 3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 밑바닥에 깔린 불평등 문제만 가지고 접근할 경우 자칫 적폐세력에 의도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경고였다.
"조국 문제는 기저, 중층, 상층 등 3중 이상의 다중적인 층위 문제다. 가장 기저에는 자산불평등과 교육불평등, 불공정사회에 대한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실망, 불만, 분노가 깔려 있다. 두 번째, 적폐 세력의 총궐기 측면이 중층이다. 세 번째, 상층에서는 선출된 권력과 검찰 권력 간의 대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적폐세력이 총궐기하면서 대중적 불만에 편승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밑그림이 있다. 그래서 굉장히 인화성이 높고, 근본적으로 분리해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국 문제를 권력형 비리와 연결하는 것도 맞지 않다. 말 제공 사건 등에서 보듯 최순실-정유라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저지른 권력형 비리였다. 2012년 당시에 조국 교수가 권력이었나? 권력형 비리라기보다 불평등 사회에서 구조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실망스럽고 불만스럽지만, 적폐세력 총궐기 국면에 편승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
박 대표는 조국 청문회를 계기로 드러난 교육불평등 문제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실망과 불만, 분노는 정당하다면서도, 이같은 국민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검찰과 언론 행태는 비판했다.
"나도 이번에 세 번 놀랐다. 교육 불평등 문제와 관련된 강남 부자들의 적나라한 민낯이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일반 국민이 실망하고 불만, 분노하는 것도 이해한다. 나름 정당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기자들의 '기레기(기자+쓰레기 합성어로, 일부 언론의 그릇된 보도 행태를 비꼬는 말)성'을 보고 또 놀랐다. 민언련 공동대표 10년 하면서 봤지만, 기자들이 저렇게 기본기가 안 돼 있고 기본적 취재도 안 하고 동어 반복하는 수준 미달이란 건 몰랐다. 언론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9월 2일 조국 후보 검증 차원에서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시청한 수많은 국민들이 절감했을 것이다.
세 번째 놀란 건 인사청문회 전후 검찰의 준동이다. 모두 비판해온 검찰의 적나라한 민낯을 국민들이 실감하게 됐다. 검찰의 정치개입에 대해 나도 오죽했으면 '권력 쟁투'라고 표현했겠나. 난 조국 문제를 이렇게 입체적으로 보면서, 3가지 층위에 맞는 주권자로서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국정원 대체한 검찰 권력이 선출된 권력 길들이려 해"
▲ 박 대표는 조국 청문회를 계기로 드러난 교육불평등 문제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실망과 불만, 분노는 정당하다면서도, 이같은 국민적 감정을 이용하려는 검찰과 언론 행태에 대해 비판했다.
- 지금까지 대부분 진보성향 시민단체들은 조국 장관 임명에 대해 말을 아꼈다. 경실련에서 지난 8일 조국 장관 임명 반대 성명을 발표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민중진보단체들은 (일반 시민단체보다) 더 핍박받고 바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한 실망과 불신, 분노가 더 심하다. 하지만 조국 문제가 중층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게 올바른지 지켜봤다. 결과적으로 자유한국당이 문제 제기하고 검찰이 준동하면서 조국 장관은 검찰 개혁의 아이콘이 돼 버렸다."
한발 더 나아가 박 대표는 "(조국 문제는)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싸움이 아니라 검찰 권력과 선출된 권력의 싸움"이라고 규정하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검찰 공안부나 정치검찰 등 이른바 '검찰 권력'이 국정원이 무력화된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가 주인 행세하면서 선출된 권력을 길들이는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그 화살 역시 언론을 향했다.
- 시민행동은 그동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을 국내 적폐세력으로 분류했다. 이번 조국 장관 가족에 대한 언론 보도 행태를 어떻게 보나.
"언론이 검찰의 수족이 돼 버렸다. 출입처 언론 플레이에 동원돼 '단독 보도' 같은 헛된 경쟁에 빠져 출입처에서 흘려주는 꼬랑지 정도 물고 난리를 쳤다.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검찰 공식 발표도 아닌 '카더라'인 경우가 많다.
검찰이 수사 자료를 유출하고 피의사실을 공표하는데 언론은 팩트체크나 확인 취재도 안 하고 보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부산의료원 PC 자료나 조국 장관 부인 PC에 총장직인 파일이 있다는 둥 검찰 쪽에서 확인 안 해주면 어떻게 보도했겠나. 검찰이 조국 문제 기저에 깔린 국민들의 실망과 불만, 분노에 편승해 선동하고 있고 언론이 앞잡이,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피의사실공표 등 검찰 범죄행위 고강도 감찰해야"
- 조국 사태를 계기로 검찰 권력에 대한 비판 여론도 커지고 있다.
"조국 장관은 검찰 개혁 아이콘이 돼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진퇴양난일 때는 정면 돌파하는 게 국민을 위해서도 좋다. 선출된 권력과 검찰 권력이 이 판에 제대로 한번 공개적으로, 정면으로 싸워야 한다. 당연히 선출된 권력이 앞서야 하고 이번 기회에 검찰 적폐들을 개혁해야 한다. 조국 장관 임명이 정파적 행위로 머물게 되면 문재인 정부에도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정면 돌파만 해선 안 되고 제대로 개혁해야 한다. 단호하고 즉각적인 검찰 개혁에 나서야 굉장히 정교한 칼질이 필요하다."
- 조국 장관이 가족 수사 부담 때문에 검찰 개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거란 우려도 있다.
"사실 걱정스럽다. 인사청문회에서 이철희 민주당 의원이 당시 조국 후보자에게 '민정수석할 때 (검찰개혁 안 하고) 뭐했냐'고 따졌는데, 정말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 바람만 잡고 이미지만 좋게 만들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제대로 칼질해야 하는데 조국 장관이 너무 물러서, 대충할까 싶어서 걱정이다.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지만 자기 문제와 관계되는 걸로 칼질 못 한다는 게 딜레마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임명에 난색을 표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조국 장관을 임명하지 않았다면 이 정부는 '식물 정부'가 된다. 선출 권력이, 국민 주권이 검찰 권력에 복속되는 심각한 민주주의 파괴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대통령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국 가족 수사 과정에서 검찰의 수사 자료 유출, 피의사실공표 같은 범죄행위가 있었는지 고강도 감찰을 해야 한다. 조국 장관이 고감도 감찰을 진행하면 불에다 기름 끼얹는 꼴이 된다. 검찰이 노리는 것도 바로 그거다.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민간인이 60~70% 이상 참여하는 감찰단을 구성해 고강도 감찰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그와 함께 대통령은 검찰에게 조국 가족 수사를 제대로 하라고 해야 한다. 이렇든 저렇든 투명하게 제대로 국민 앞에 진상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아울러 박 대표는 지난 5월 활동을 종료한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에 대해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했고 시늉만 한 것"이라면서 "대통령 직속 국민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지난 20년간 검찰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사이에 발생한 각종 국민적 의혹들에 대해 추가로 진상조사를 하고 그것을 검찰 개혁의 지렛대로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재인 정부, 위기 맞다. 위기는 위험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기회를 살리려면 경제적, 사회적으로 과감한 개혁을 해야 한다. 과감한 사회복지, 교육특권 해소, 특목고와 자사고 폐지, 정원 외 특례 입학 폐지도 필요하다. 교수, 의사, 판·검사, 변호사, 기자 같은 전문직을 특정계층에서 독과점하지 않도록 공영화해야 하고 그러려면 중고등학교와 대학 체제도 바뀌어야 한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실망과 불만, 분노를 개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게 유일한 혈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정치적 위기가 올 위험이 있다."
조선·동아 청산 시민행동 발족…대중강연·인터뷰·부역 언론인 명단 발표 계획 윤수현 기자|승인2019.09.10 15:09
[미디어스=윤수현 기자]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검증하는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 발족했다. 시민행동은 조선·동아의 친일·반민주 행태를 폭로하는 대중강연을 진행하고 친일·독재 부역 언론인 명단을 발표할 계획이다.
10일 조선·동아 시민행동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행동에는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전국언론노동조합·자유언론실천재단 등 6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했다.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선·동아 시민행동 발족 기자회견 (사진=미디어스)
시민행동은 조선·동아 창간 100년을 맞아 각종 홍보 활동 및 교육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행동은 ▲조선·동아의 친일, 반민주, 반통일, 반민중 행태 폭로 ▲조선·동아의 과거사 왜곡 보도 및 행사 반박 활동 ▲시민사회 활동 콘텐츠·프로그램 개발 ▲조선·동아 실체 공유 등을 활동목표로 삼았다. 시민행동은 대중강연, 촛불문화제 주관, 언론 기고 활동, 조선·동아 창간 100년 관련 보도 모니터링, 친일·독재 부역 언론인 명단 발표 등을 계획하고 있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조선·동아에서 해직당한 기자들은 시민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시민행동에 참여한 조선투위·동아투위는 1975년 조선·동아 대량 해고 사건으로 물러난 기자들이 만든 단체다. 이들이 해고당한 지 40여 년이 흘렀지만, 조선·동아는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의 주역이자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이부영 이사장은 “조선·동아의 창간 100년이 그들의 만찬장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면서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건 당시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보냈던 시민 모임을 발족하기로 했다. 독재하에서 광고를 보내온 시민들과 함께 여러 활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이부영 이사장과 김종철 위원장(오른쪽) (사진=미디어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은 “동아일보는 국민주로 창간된 신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김성수 일가의 사유물이 됐다”면서 “조선·동아는 민족을 배신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았다. 내년 조선·동아는 100년 잔치를 벌일 건데, 이를 좌시할 순 없다.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당시 ‘민족지’를 자처하며 국민주를 모았다. 1920년 동아일보는 전국 지식인과 유력인사 412명을 주주로 모집하고 자본금 100만 원 중 70만 원을 국민주로 채웠다. 그러나 해방 이후 동아일보는 김성수 일가 소유의 언론사가 됐다.
오정훈 언론노조 위원장은 “조선·동아의 반민주·반민중 역사는 젊은 세대에게 잊혀간다"면서 "특히 조선·동아에서 해고당하고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길거리를 헤맸던 해직 언론인들은 잊히고 있다. 조선·동아 창간 100년을 맞아 반성의 역사를 되새기고, 그들에게 사죄의 역사를 확인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발족식에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자비 광고를 냈던 시민이 함께했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운동에 참여했던 김하범 씨는 “당시 동아일보 개인 광고에 참여한 분들은 다양했다”면서 “유명한 분들은 물론 평화시장 노동자, 목사, 선교사, 농민 등 다양한 사람들이 백지 광고에 저항했다. 이런 활동은 서로에게 많은 격려가 됐다”고 말했다.
김하범 씨는 “특히 어떤 부부가 아이의 생일을 맞아 광고를 내기도 했다”면서 “아이에게 언론 자유를 선물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동아일보 광고운동은 70년대 중반 해방구 같은 역할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1975년 동아일보 시민 광고 (사진=KBS 방송화면 갈무리)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는 독재정권의 대표적인 언론 탄압 사례로 꼽힌다. 1974년 겨울 박정희 정권은 기업에 ‘동아일보와의 광고 계약을 해약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동아일보가 광고면을 백지로 내보내자 시민들은 사비를 들여 개인 광고를 넣었다. 하지만 동아일보 사측은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해고했다. 해직 기자들은 동아투위를 결성했고, 이들이 중심이 돼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조선·동아 시민행동 공동대표는 이부영 이사장, 김종철 위원장, 신홍범 전 조선투위 위원장, 강성남 새언론포럼 회장,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대표, 정연우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대표 등이다. 시민행동 고문으로는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중배 전 MBC 사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신경림 시인,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해동 목사, 임재경 전 한겨레 부사장, 함세웅 신부, 권영길 전 언론노련 위원장 등이 참여한다. 집행위원장은 오정훈 언론노조 위원장이다.
한국도로공사의 요금수납원 고용 방안 발표가 있던 9일, 해고된 요금수납원들의 하루는 길었다.
세종시 국토교통부에서 이날 오후 2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이강래 한국도로공사 사장의 발표를 기다리던 300여 명의 요금수납원은 발표가 나자마자 경북 김천에 있는 도로공사 본사로 달려갔다. 이 사장은 대법원의 요금수납원 직접고용 판결 관련해 해당자들에게 '자회사고용 수납업무' 혹은 '직접고용 조무업무'를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나머지 1, 2심 소송 진행자는 그마저도 일부만 적용하겠다는 고용 방안을 발표했다.
김천 도로공사를 찾은 요금수납원들 일부는 사장실 앞에 자리 잡고 나머지는 1층 로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곧바로 사측 인원 300여 명과 경찰이 투입되면서 1층 로비를 점거한 요금수납원들은 2층 로비로 밀려났다. 사측 인원 대부분은 건장한 남성이었고, 요금수납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 과정에서 요금수납원 7명이 다쳤다.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요금수납원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었다. 모여든 요금수납원들은 "나와라 이강래", "숨지 말고 나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건물 진입을 시도했다. 물품 반입도 문제였다. 로비로 들어가지 못한 요금수납원들은 로비 안 농성자들에게 침낭을 보내려 했지만,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이러한 경찰 및 사측 인원과 요금수납원들의 충돌은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10일 오전에도 몇 차례 충돌이 이어졌다. 오후 12시경에는 전날 경찰의 강제진압에 항의하며 일부 요금수납원이 경찰 앞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앉아있기도 했다. 경찰은 여성 노동자들이 상의를 탈의한 상황에도 채증을 계속했다.
▲ 한국도로공사 본사 2층 로비에 앉아 있는 요금수납원들. ⓒ프레시안(최용락)
▲ 응급실로 후송 중인 요금수납원. ⓒ프레시안(최용락)
"1500명 직접고용 원칙으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교섭하자"
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한 요금수납원들은 이강래 사장과 면담을 갖고 직접고용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해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톨게이트 노동조합은 10일 도로공사 본사 2층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는 이강래 사장과의 면담, 9월 9일 발표한 고용 방안의 폐기, 1500명 직접고용 원칙을 기초로 구체적 방안에 대한 집중교섭을 요구한다"며 "이에 대한 이강래 사장의 답이 없다면 우리는 제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고 발표했다.
전날 벌어진 경찰의 강제진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박순향 톨게이트본부지부 부지부장은 9일 상황에 대해 "구조물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을 사측 인원이 밀어 떨어지고 우리가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 있었고, 정년이 내년인 요금수납원이 사측 인원 사이로 들어가자 사지를 잡아서 밖으로 던지기도 했다"며 "경찰은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정말 하늘이 노랬다"고 말했다.
박 부지부장은 "이강래 사장이 노동조합과 만나서 교섭다운 교섭을 했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왔겠냐"며 "최소한 발표하기 전에 수납원들과 교섭을 했어야 하는데, 자회사 설립 때와 판결 이후 행동이 너무나도 똑같고 일방적"이라고 성토했다.
전날 가슴 부상으로 인한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후송됐다 돌아온 김희경 서울영업소지회 조합원은 "어제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고 있는데, '내가 가도 힘은 안 되고 짐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기 상황이 마음에 걸려 돌아왔다"며 "우리는 도로공사 직원이고 여기가 내 집이라며 우리에게는 여기 남아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 한국도로공사 본사 2층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진행 중인 톨게이트 노조. ⓒ프레시안(최용락)
"청와대와 한국도로공사는 잘못 인정하고 요금수납원 직접고용해야"
이날 비정규직 노동자와 종교, 인권, 법률, 시민사회단체들도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도로공사에 1500여 명의 해고된 요금수납원을 직접고용할 것을 촉구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등 30여 개 시민사회단체는 "조직의 대표 중 가장 나쁜 사람은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길을 바꾸지 않는 자"라며 "이강래 사장은 아집을 멈추고 불법파견에 대해 사죄하고 요금수납원 전원을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1500명의 수납노동자 해고에 노동존중은 없고 정규직 전환 판결을 왜곡하면서 노동자를 협박하는 한국도로공사에 정규직 전환 의지는 없다"며 "노동존중과 정규직 전환을 말하던 청와대가 지금이라도 한국도로공사와 함께 스스로의 잘못을 되돌리고 톨게이트 노동자 1500명을 즉각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명호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원장은 "톨게이트 수납엄무를 하는 노동자 중에 장애인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애인 노동자가 사실상 하기 어려운 조경이나 환경 업무를 하라는 것은 퇴직하라는 겁박에 지나지 않는다"며 "어느 기업보다도 장애인 차별을 시정해야 하고 법원의 판결을 수용해야할 공기관인 한국도로공사가 법원의 판결에 반하고 장애인에게 더 나쁜 일자리를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명박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국정원, 검찰, 언론의 '논두렁시계'로 상징되는 조작에 기초한 마녀사냥으로 자살을 강제 당했다.
노무현정권 말기, 정부의 실정과 친노세력의 패권에 깊이 실망했던 사람들은 이명박정권의 노무현 전 대통령 표적집중수사와 조작질, 언론들의 집중포화를 방관하였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지못미를 슬프고 분한 가슴에 새겼다.
2) 통진당 해산의 출발이었던 '당권파'의 경선부정이라는 마녀사냥이 난리였다.
2012년 총선이 끝나고 통진당 안에서 '당권파'가 경선부정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고 모든 언론에서 이를 가지고 '당권파'를 공격하는 집중포화를 장기간 쏟아 부었다. 이것 때문에 통진당은 분열하였고 '당권파'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 후 내려진 사법판단은 '당권파'가 아니라 '당권파'가 경선부정을 했다고 주장한 '그 사람들'이 경선부정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권파'에 적대적인 검찰의 대대적인 수사 결과에도 '당권파'의 경선부정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의 경선부정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반성과 원상복구를 하지 않았고, 언론들도 사과와 정정 보도를 하지 않았다.
3)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6.12 지방선거의 유례없는 대승으로 촛불세력이 보수적폐 척결에 총력을 다해야 할 절호의 시기에, 뜬금없이 이재명 사건이 모든 언론을 뒤덮었다.
문재인정권과 집권여당 안의 일부세력, 언론들, 수사기관, 보수적폐 세력들이 온통 이재명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그렇게 간 시간동안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도 가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문재인 집권세력의 분열과 상처, 한숨 돌리고 전열을 정비한 자한당과 태극기 부대등이 자리 잡았다.
4) 일본놈들의 경제공격으로 반일, 반자한당 열기가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일본놈들 편드는 미국놈들에게도 경고를 날리는 민심이 끓어오르는 시점, 조국을 물고늘어지며 모든 언론과 자한당등 보수정치권, 그리고 깡패검찰이 반문재인, 반조국 칼춤을 미친 듯이 추었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러나 지못미를 새긴 시민들이 반공격총력전을 펼치고 문재인정권과 여당이 원칙을 가다듬고 강력대처하여 검찰을 앞세운 보수적폐들의 쿠데타를 1단계는 진압하였다.
2. 친일보수적폐들의 조작, 마녀사냥 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분단 과정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왜곡한 동아일보의 조작공작, 이것으로 '소련반대, 신탁통치 반대' 몰이를 한 친일세력,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덩달아 따라간 김구선생의 실책 등이 있다.
이승만은 적수인 조봉암 선생을 조작사건을 가지고 사법 살해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유능한 민주투사이자 정치인인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매도하였고 온갖 언론들은 그것을 수십년동안 도배질하였다. 그리고 '빨갱이' 광주시민을 우리나라 군인이 죽여도 괜찮았다.
3. 진보민주개혁세력은 이겨야 한다.
보수적폐, 저들은 변하지 않는다. 기득권이란 무서운 것이다. 기득권세력이 스스로 잘못된 기득권을 내려놓은 예는 없다. 기득권세력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힘과 수법을 악독하게, 끊임없이 육성, 개발한다. 저들이 그저 놀고 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민주개혁세력은 먼저, 저들을 항상 경각성을 가지고 원칙적으로 대해야 한다.
저들에게 환상을 갖는 것을 금해야 한다. 윤석열이 보복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검사가 깡팹니까?'라고 한 적이 있다. 이번에 윤석열은 깡패보다도 못한 짓을 하였다. 촛불이 믿음으로 준 공권력을 검찰의 적폐기득권 지키기에 쏟아 부었으니, 국민들에게 원래 욕 얻어먹는, 사제 주먹을 휘두르는 깡패보다도 더 나쁜 놈이 되었다. 검찰이 조국 관련 압수수색 들어간 초기에 윤석열을 생각하며 뭔가 정의로운 것이 있나? 하고 잠깐 헛갈렸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은 곧바로 본질을 간파하고 '윤석열을 감옥으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단결해야 한다.
대상을 바로 봐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보수적폐들의 오래된 조작, 마녀사냥 질은 배후가 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 등으로 미국의 배후 질은 계속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배후 질이야 세상이 다 안다. 미국, 일본, 자한당, 보수언론, 적폐 검찰, 적폐 사법부, 재벌 등등이 한통속이다.
저들을 상대하여 진보와 개혁 진영은 민주를 공통으로 단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보역량의 강화다.
개혁세력은 진보를 품지 못하지만 진보세력은 개혁을 품을 수 있다. 개혁세력은 노동자, 농민등 민중들을 품지 못하지만 진보세력은 노동자, 농민의 자식들이며 그 자체이다. 민중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4. 깨어있는 시민들과 문재인정권은 깡패검찰을 앞세운 보수적폐세력들의 반문재인, 반조국 쿠데타의 실체를 밝히고, 그것의 기획자, 실행주동자들을 찾아내 뿌리 뽑아야 한다. 저들에게 틈을 주지 말고 연속공격을 가해야 한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한국에 전환된 뒤 유엔군사령부(유엔사)가 그것을 맡게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결론부터 밝히면 이는 미국이 수년 전부터 추진해왔고 한국이 그에 대해 침묵을 지켰던 미래의 밑그림의 하나라 하겠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한미연합군에 대한 최고 지휘권을 미국이 계속 장악하면서 주한미군을 미군 장성의 지휘하에 한반도에 계속 주둔시키려는 노림수로 해석된다. 즉 미국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에 대비해 1978년 11월 한미연합군사령부(연합사)를 만들었고 이어 전작권 전환 문제가 구체화되자 껍질만 있던 유엔사를 최근 계속 보강해왔다.
유엔사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설립된 군사기구로 전쟁기간 동안 해외참전국 및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했고,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되었다. 유엔사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1978년 11월 연합사가 창설되면서 연합사로 넘어갔다. 현재 연합사령관 겸 주한미사령관이 유엔사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는데, 향후 연합사와 유엔사 두 사령관을 각기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하게 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 정전협정 66주년을 맞은 27일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 내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유엔사사령관 [사진 : 뉴시스]
미국이 전작권 전환 이후의 한미연합체제의 최고 지휘권을 유엔사가 갖도록 방침을 굳힌 것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즉 한반도 유사시 미군 증원군을 한반도에 직접 파견할 경우 북한 미사일 공격 대상이 되기 때문에 유엔사 후방기지로 되어 있는 일본을 증원기지로 활용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사가 전작권을 갖게 되면 미군이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 7곳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된다<한겨레 2018-06-08>. 미국은 종전 선언을 할 경우, 유엔사가 해체되면서 일본 내 유엔사 후방기지 7곳도 영향을 받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큰 차질이 생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일본은 유엔사 후방기지의 역할을 담당해 유엔군 소속의 병력과 장비를 한국으로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향후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미군 해상호송 등의 역할을 담당해 일본이 전력제공국이 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엔사는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 인천 항구 지리에 해박한 일본인 수십 명을 차출해 상륙정의 해상 및 육상 작전을 지원토록 했으며, 당시 일본인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다고 일본 NHK가 지난 6월 방송한 바 있다.
미국은 향후 한반도 유사시 막대한 병력을 증파할 전략을 수립해놓았는데 이를 위해 한국이 최근 종료 결정을 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이 대단히 긴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미 지상군, 해군, 공군 병력 69만 명, 선박 160척, 비행기 2000대 등 지원군을 한반도에 증강 배치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유엔사 후방기지인 비행장과 항구가 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는 지소미아에 의해 보장될 수 있을 것으로 미국은 판단하고 있다(<자유아시아방송> 2019년 8월 6일). 미국 정부가 지소미아와 관련해 한국정부에 부정적 태도를 강력히 보인 이유다.
이와 관련해, 유엔군사령부 웨인 에어 부사령관이 지난 4월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있는 유엔사 본부에서 진행된 기자설명회에서 밝힌 유엔사에 대한 견해가 주목된다<VOA 2019.4.22.>. 그는 ‘전작권이 주한미군에서 한국군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유엔사의 지위에는 변화가 없다. 유엔사는 연합사를 지원할 것이며 그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에어 부사령관은 이어 ‘유엔사가 해체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먼저, 유엔사가 창설될 때와 마찬가지로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안이 통과돼야 유엔사가 해체될 수 있다. 두 번째, 유엔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면 유엔사가 해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유엔사가 해체될 만한 정치적 상황이나 조건, 환경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추측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1970년대 맺어진 합참-유엔사-연합사 관계약정(TOR)에는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한 유엔사가 연합사를 지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한겨레. 2019.9.5.>. 에어 부사령관의 말과 한겨레의 보도를 종합하면 향후 유엔사가 계속 주둔하면서 한미연합사의 지휘권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렇게 될 경우 한국군의 전작권 행사는 물 건너가는 꼴을 면키 어렵다.
미국이 해외 파병역사에서 연합군 사령관직을 계속 맡아왔는데, 그 이유로 미국이 참전할 당시 동맹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군대와 무기를 파견한 것 등이 거론된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미국은 핵과 같은 첨단무기를 가장 많이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역대 최고사령관을 미군 장성이 역임해 왔고, 역대 부사령관은 영국군 또는 독일군의 장성이 맡아왔다.
미국과 한국의 국방장관은 지난해 11월 제50차 한미안보협의회의를 통해 현재의 연합사 구조를 지속 유지하기로 하고, 전작권 전환 이후 미래 연합사에서는 한국군 4성 장성이 사령관을 맡고 미군 4성 장성이 부사령관을 맡도록 한다는 공동의 공약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핵우산과 주한미군의 첨단전력 우위 등의 실상을 고려할 때 NATO의 전철을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정부는 국민이 확신하고 있는 한국군의 연합사 지휘라는 미래의 청사진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국민에게 알려 공론화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해제와 지소미아 동결조치 백지화에 대한 가능성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에 배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경우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 등은 어렵게 되고 동북아에 냉전에 다시 시작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을 놓고 보수 야권이 '반대' 입장에 공감대를 이루면서 이번 사태가 야권 재편의 변수가 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국민연대"를 공개 제안했고,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측은 "사전 교감은 없었다"면서도 "생각이 같다면 합류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황교안 대표는 10일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임명 폭거를 통해서 국민과 맞서겠다고 선언했다"며 "문 대통령의 독선과 이 정권의 폭주를 막아내려면 결국 자유민주주의 가치 아래에 모든 세력이 함께 일어서야 한다. 이에 '조국 파면과 자유 민주 회복을 위한 국민연대'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황 대표는 "뜻을 같이하는 야권과 재야 시민사회단체, 자유 시민들의 힘을 합쳐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살려내야 한다"며 "조국 파면과 자유 민주 회복을 위한 국민연대가 이 나라의 폭정을 막는 마지막 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황 대표는 제안의 배경 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전희경 한국당 대변인은 야권 내 다른 정파에 대한 사전 교감 등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어제 조국 임명이 강행됐기 때문에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발빠르게 움직일 생각"이라고 했다.
바른미래당에서는 유승민 전 대표가 간만에 공개 석상에 등장해 '저항권'을 언급하며 조 장관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유 전 대표는 이날 당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해 "문 대통령이 조 장관을 임명한 것은 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며 "지금부터 국민의 저항권으로 이 정권을 끝장내야 한다"고 매우 높은 수위의 발언을 했다.
유 전 대표는 "헌법에 따라, 저런 식으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불법과 반칙을 권력이 일삼을 때 우리 국민은 저항권을 갖고 있다"며 "문 대통령과 이 정권 사람들은 그 입에 정의와 공정, 평등을 올릴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유 전 대표는 특히 "정부가 지독한 오기로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당이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나서야 한다"며 "보수 정치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온 국민이 원했던 정의, 공정, 평등이라는 헌법 가치를 등한시했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진지한 자세로 그런 가치를 실현할 때 국민이 보수를 돌아볼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유 전 대표는 회의 후 기자들이 '한국당 측과 교감이 있었던 것이냐'고 묻자 "그쪽과 특별히 교감은 없었다"면서도 "이번에 (조 장관의) 임명을 철회하고 원점으로 돌리는 일에는 저나 시민들, 정당들 누구라도 협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당과의 연대 문제는, 저나 한국당이나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같다면 합류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열린 태도를 보이며 다만 "그런데 그런 제의가 아직 온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유 전 대표와 가까운 한 바른미래당 의원은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사전 교감은 전혀, 0%였다. 그게 팩트"라면서도 "사전에 그런 얘기가 오고감이 없이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조 장관 임명에 대해)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때문에 어디에서 접점이 있을지 모른다"고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 의원은 "조 장관 문제는 다양한 입장이 아니라 '임명이 불가피하다'와 '절대 안 된다' 2가지 입장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따라 그간 유 전 대표 측에 '러브콜'을 보내 온 한국당과, 한국당에 비판적 태도를 보여온 유 전 대표 측이 이번 사태를 고리로 연합정치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총선을 앞둔 최대 변수로 꼽히던 '보수 통합'이 급물살을 탈지 주목된다.
한편 바른미래당을 탈당한 후 이른바 '태극기 세력' 등 강경보수·극우 단체와 보조를 맞춰오던 무소속 이언주 의원은 이날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조 장관 임명에 항의하는 의미로 삭발을 감행했다. 우리공화당 등 강경보수를 대변하는 정당도 광화문 광장에 천막 당사를 치는 등 조 장관 임명 반대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논란'은 9월 9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의 임명 결정을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습니다. 하지만 소위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대표의 글을 게재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조국 사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편집자말]
▲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법무부장관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청와대에서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함에 따라 조국 사태는 1막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조국 사태는 한국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킴과 동시에 수다한 논쟁거리를 낳았다. 한국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국 사태가 남긴 숱한 이슈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국 사태에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건 민주공화국 내에서 검찰과 사법의 역할 및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한 것이다. 조국 임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들은 윤석열 검찰이 전면에 나선 이후부터 양상과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차례대로 짚어보자.
대통령의 권한 행사 저지하려는 검찰
첫째, 윤석열 검찰의 행위는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다. 임명 전의 국무위원에 대한 검찰의 전격적, 전방위적 수사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헌법이 부여한 가장 중요한 권한 중 하나인 국무회의 구성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방해하는 반헌법적 행위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에게 한시적으로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 권한을 위임했고, 대통령은 행정부의 가장 중요한 헌법기관인 국무회의 심의, 의결을 통해 국가중대사를 처리한다. 그런데 윤석열 검찰은 조국 후보자 일가에 대한 초고강도 수사를 통해 국민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국무회의 구성권을 침해(좋게 해석하더라도 방해)하는 반헌법적 행위를 지속했다. 이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최고권력의 헌법상 권한행사를 실질적으로 저지(좋게 해석하더라도 지연)하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헌정질서를 문란케하는 행위라 할 것이다.
만약 검찰이 앞으로도 대통령이 지명한 국무위원에 대해 조국 케이스처럼 수사를 해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결과적으로 검찰 입맛에 맞는 국무위원을 지명토록 유도하는 일이 발생한다면(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검찰은 대통령 위에 있는 권력이 된다. 이는 '민주공화국의 죽음'이자 '헌법의 정지'라 할 만하다.
기본권에 대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협
▲ 구내식당 향하는 윤석열 검찰총장 윤석열 검찰총장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둘째, 검찰과 법원이 긴밀히 협업(?)하면 국민의 기본권이 언제라도 유린될 수 있음을 모든 국민이 목격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윤리와 일상의 판단영역(내란혐의 수사하듯 수사한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한 게 겨우 동양대 봉사 표창장 위조 혐의다)에 있는 조국 일가의 행위에 대해 검찰은 부동산등기부등본 발급신청하듯 법원에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등본 발급해주는 공무원처럼 영장을 발급해줬다.
본디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없다.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면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그것도 비례의 원칙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강제수사의 일종인 압수수색 영장 같은 경우는 검찰이 엄격하게 청구해야 하고, 검찰의 영장청구를 받은 법원은 최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보충적으로 영장을 발부해야 맞다.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사법작용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 조국 일가에 대한 압수수색의 경우, 이런 헌법 및 형사소송의 대원칙이 송두리째 무너진 느낌이다. 조국 일가의 경우는 특수하지 않냐고? 일반인에게 검찰과 법원이 조국 일가에게 했던 것처럼 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조국 일가가 검찰과 법원에 당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본권에 대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협이라 할 것이다.
내가 진정 놀라는 건 미디어들 중 어떤 미디어도 이런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점을 짚으며, 검찰과 법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청와대와 검찰이 정면 충돌한다'는 식의 말도 되지 않는(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위원인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받는 검찰총장이 어떻게 충돌할 수가 있나?) 보도들뿐이다. 답답하고 암울하다.
▲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주년을 맞아 9일 오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주년 의의와 과제'를 주제로 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의 국회 특별연설로 발표되어 첫 선을 보인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30주년을 맞아 9일 오후 서울웨스틴조선호텔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30주년 의의와 과제'를 주제로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와 김연철 통일부장관, '평화·통일비전 사회적대화 전국시민회의'(통일비전 시민회의) 상임공동의장인 류종열 흥사단 이사장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여섯 번의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동안 모든 정부가 일관되게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공식 통일방안으로 계승한 것은 당시 정부가 탈냉전과 민주화, 통일논의 확산이라는 대내외적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다양한 국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남북관계과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뿌리깊은 이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열망과 의지가 충만하기 때문에 서로 경청하면서 대화를 하다보면 작은 공통점을 찾아 얼마든지 크게 확대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도 이견이 없었다.
▲ 이홍구 전 국무총리.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으로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수립하고 발전시킨 주역이었던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이날 특강에서 △탈냉전 세계화의 흐름 △1987년 체제로 확인된 국민들의 민주화, 통일 열망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큰 원칙 아래 현실화시킨 정치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등을 통일방안 태동의 비결로 꼽았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그때 나오게 된 것은 어느 한 사람의 계획이나 결정때문이 아니라 역사가 변하고 있다는 국민의 공통된 인식이 확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크게 보면 세계사와 국제정치의 흐름이 있고 우리 역사가 있는데, 이걸 잘 연결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앞으로 나가느냐 하는 것이 역사의 진전을 이뤄는 일이라고 본다. 그게 잘 된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여러 요소들이 결합이 되어서 이루어진 행운의 시간이었다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들이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한국 정치의 지도자로 인정하니까 그 분들하고 잘 이야기해서 만들어보라고 자신(이 전 총리)에게 위임했고, 3김 역시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세심하게 마음을 쓰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국민의 열망이 크더라도 통일을 하루 아침에 이룰 수는 없고 단계적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체제는 이미 국가체제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통합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서 진행할 수 밖에 없다는 데 당시 3김이 모두 동의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골자는 "과거 삼국시대에 국가는 신라, 백제, 고구려로 나뉘어 있지만 지금 우리는 민족공동체로 인식하지 않나. 민족공동체는 하나, 국가체제는 둘이라는 현실을 일단 받아들이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면서 결국은 통일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김연철 통일부장관.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연철 장관은 환영사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는 30년 전 냉전 해체라는 거대한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민족의 장래를 고민했던 각계각층 시민들의 다양한 생각이 담겨 있다"며, 당시 정부가 250여회에 걸쳐 세미나와 간담회를 개최하고 426건의 통일 논의를 취합, 분석하였으며, 전문가를 포함한 전 국민 1만6,000여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에서 범국민적 합의를 위해 노력한 결과 보수·진보 양 진영이 모두 수용가능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또 이런 특성으로 인해 30년이 지나도록 이 통일방안이 계승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장관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들어 낸 30년전 그 때처럼 "먼저 우리 안의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곧 한반도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라며, 지난 4월 평화·통일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모아갈 목적으로 보수·진보·중도·종교단체들이 모여 만든 통일비전 시민회의의 역할에 기대를 표명했다.
▲ 김연철 장관의 사회로 김덕룡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경서 대한적십자회 회장, 김희중 대주교, 류종열 통일비전 시민회의 상임공동의장이 참여해 '통일국민협약과 초당적 협력'을 주제로 의견을 나누는 특별좌담회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류종열 상임공동의장은 '통일비전시민회의 경과 및 쟁점'에 대한 발제를 통해 우리 사회에는 편가르기와 진영논리,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이 날로 심화되어 사회적갈등에 따른 경제적 손실만 연 82조~246조원에 이른다며, 지난 4월 30일 지속가능한 국민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보수(범시민사회단체연합), 진보(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중도(흥사단, YMCA), 종교계(7대종단 한국종교인평화회의)로 구성된 통일비전 시민회의가 창립했다고 소개했다.
통일비전 시민회의는 통일문제와 관련해 국민 누구나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 도출을 목표로 정부와 협력하는 가운데 현재 국내외에서 사회적 대화를 추진해 나가고 있다. 우선 각계 의견수렴과 전문가 검토를 거쳐 선별된 12개 주요 의제(북한을 보는 시각, 통일의 기대효과, 평화체제와 비핵화의 우선순위, 경협의 상대적 이득, 통일교육의 강조점, 한반도 평화통일체제, 남북교류협력시 성평등 보장, 대북인도지원의 조건 등)를 중심으로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아가고 있다.
지난해 전국 각지에서 1,500명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20여회 시범적으로 실시해 통일문제와 관련해 대화와 합의를 통한 사회갈등 해소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으며, 현재 17개 광역시도에서 지역별 대화를, 10월에는 종합적인 사회적대화를 진행해 대북 인도지원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예정이다.
류 의장은 "지금까지 진행한 사회적대화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다. 통일정책수립 과정에 참여한다는 보람도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30년전 만들어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평화통일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 담겨있고 대화를 통해 차이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협조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류 의장의 발제 이후 '통일국민협약과 초당적 협력'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특별좌담회는 김연철 장관의 사회로 김덕룡 전(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 박경서 대한적십자사 회장, 김희중 대주교 등이 의견을 나누었다.
이어진 특별 학술회의에서는 '통일방안의 역사적 의미와 발전 방향'이라는 주제로 김학성 충남대학교 교수(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와 이남주 성공회대학교 교수(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발전적 계승)이 발표하고 최완규 신한대학교 설립자 석좌교수, 이현숙 통일교육위원 중앙협의회 의장,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 김갑식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연구실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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