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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개혁위 정말 이대로 끝? 이래선 안 된다

[캠페인] 이명박근혜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불법사찰 낱낱이 밝혀야

17.11.28 09:29 | 글:곽노현쪽지보내기|편집:박혜경쪽지보내기

<열어라 국정원, 내놔라 내파일> 운동에 동참하길 바라는 시민은 국정원이 '갑'이 되는 방법(아래)을 클릭해주세요. 이와 관련한 문의가 있다면, 아래의 연락처로 연락해주길 바랍니다. <시민행동> 사무처장 전문갑 010-2288-6757 [편집자말]
▲ 16일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검찰이 발부한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남재준,이병호 (왼쪽부터), 이병기 전 국정원장 (지난 11월13일 검찰 출석 당시 사진) ⓒ 최윤석

연말까지로 설정된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의 활동시한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 이 기간 중에 국정원개혁위는 국회에 국정원법개정안을 제출하고 4대강사업심리전, 노조파괴공작, 진보교육감사찰 등 대여섯 건의 조사신청사안에 대해 조사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또 있다. 자유한국당이 조사를 신청한 노무현 정권 관련 14건에 대해서도 처리방침을 정하고 조사결과를 내놔야 한다. 

국정원 선거개입 낱낱이 밝혀야
 
▲ 2013년 8월 19일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왼쪽)가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가림막 뒤에서 미리 준비해 온 답변자료를 들고, 심문에 응하고 있다. ⓒ 유성호

국정원개혁위는 지난 서너 달 동안 문화계블랙리스트 작성운용에서 명진스님 주지자리 박탈공작까지 15건의 대형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를 이어오며 국정원 적폐청산국면을 이끌어왔다. 

특히 검찰은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청와대 및 국회상납사실을 밝혀내고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등 박근혜 시절의 전직 국정원장 전원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남재준, 이병기 2인의 구속영장이 떨어지던 날, 이명박근혜 국정원의 적폐청산이 정점을 찍었다.    

서훈 국정원장은 이쯤에서 적폐청산 국면을 청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르다. 생각해보라. 국정원은 정권안보목적이나 사회통제목적으로 관행처럼 해온 불법 국민사찰의 전모를 아직까지 드러내지 않았다. 

폐쇄된 7, 8국 요원들이 국가안보와 무관하게 국가와 사회의 어떤 부분을 대상으로 어떤 정보를 일상적으로 수집, 분석하며 직권을 남용했는지 스스로 전모를 밝히든가 전면적으로 검찰수사를 자청해야 한다. 

이명박근혜의 국정원이 법원과 검찰, 언론과 방송,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일상적으로 사찰해 왔으리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법적 국민사찰의 전모 및 그 지속 메커니즘이 밝혀지기 전에 국정원개혁위가 문을 닫아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정원개혁위는 무엇보다도 국정원의 선거개입의 흑역사를 낱낱이 밝혀야 한다. 

국정원, 뜨거운 이슈마다 불법사찰·심리전 수행
 
▲ 2013년 8월 31일 국정원 대선개입 및 정치공작 규탄 제10차 범국민촛불대회가 서울역광장에서 국정원 시국회의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특히 지난 2010년과 2014년 6월의 시도지사와 교육감선거, 2012년 12월 서울교육감보궐선거에서 국정원이 한 일을 밝혀내야 한다. 보수후보 단일화를 위해 공작하며 진보후보를 상대로 불법사찰과 심리전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어정쩡하게 넘어가선 안 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공작은 확실하게 뿌리 뽑아야 할 국정원 적폐 1호다. 국정원의 공작과 지원을 받아 당선된 후보가 행여 내년 지방선거에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정원 내부에선 원장에서 말단직원까지 모두 이쯤에서 개혁위 활동을 종료하고 땅에 떨어진 조직의 사기를 추스르기를 바랄 것이다. 국정원조직은 국정원개혁위의 활동을 반기지 않는다. 사건조사는 검찰 수사 의뢰나 징계 청구로 이어지고 검찰 수사는 관련 간부와 직원의 형사처벌로 이어진다. 서훈 국정원장도 조사신청사건을 하루바삐 종결하고 활동기한 연장에 한사코 반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발탁으로 서훈 원장이 임명된 뜻은 적당한 수준으로 개혁하며 제식구 감싸기를 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부사정을 잘 아는 국정원전문가로서 제대로 된 개혁을 하라는 뜻이었다. 

국민들은 모두 서훈 원장 임명을 이렇게 해석한다. 만약 개혁위의 활동시한이 연장되지 않으면 4대강 추진에 따른 환경단체와 비판 교수에 대한 불법사찰과 심리전 수행사실이 덮인다. 2010년 7월 진보교육감시대 개막에 따른 서울, 경기 등 6인의 진보교육감에 대한 집중사찰사실이 덮인다. 

특히 서울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오세훈 시장 엄호목적으로 치밀하게 기획하고 집행했을 대규모 사찰활동과 심리전 수행사실이 덮인다. 무엇보다 민주노총과 전교조에 대해 불법사찰과 심리전 수행, 조직원 사칭과 침투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행된 파괴공작의 흑역사가 묻힌다. 

이래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국정원이 가장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불법사찰과 기획심리전을 수행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적으로 흔들어온 국정원의 최대고객이었다. 

특히 한진중공업 노조나 쌍용차 노조 등에 대한 파괴공작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한다. 정권적 차원에서 전교조의 법외노조화를 추진한 모든 과정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이것조차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정원개혁위의 활동을 끝낼 수는 없다.     

이대로 국정원개혁위 활동 끝?
 
▲ 민변,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 등 국정원감시네트워크 단체 회원들이 지난 6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지난 19일 출범한 ‘국정원 개혁위’가 조사해야할 적폐리스트를 발표했다. ⓒ 권우성

지난 9일 '내놔라 내파일 시민행동'은 550명의 개인과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 20여 개 단체들의 정보공개청구서를 국정원에 제출했다. 내놔라 시민행동은 국정원의 불법사찰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개인과 단체들이 불법사찰파일의 공개, 삭제, 파기를 요구하는 시민행동이다. (국정원이 '갑'이 되는 방법)

서훈 국정원장은 불법사찰의 중단과 7, 8국의 폐쇄를 단행했지만 이미 7, 8국이 수집, 작성해놓은 개인과 단체 관련 불법사찰파일에 대해서는 어떤 처리방침도 내놓지 않았다. 국정원개혁위는 불법사찰파일의 공개와 삭제, 파기에 관한 원칙과 기준을 국정원에 권고하고 국정원은 그 원칙과 기준을 내놔라시민행동의 정보공개청구에 대해 최우선적으로 적용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서훈 국정원장, 정해구 국정원개혁위원장에게 촉구한다. 연말로 설정된 국정원개혁위의 활동기한을 연장하라. 만약 연말에 국정원개혁위가 예정대로 숨을 거둬 국정원 옆구리도 못 찌르는 상황이 오면 국정원의 내부개혁추진 동력은 그날로 눈 녹듯 사라질 게 뻔하다. 

지금에라도 민주노총과 전교조, 진보교육감에 대한 불법사찰과 심리전수행의 전모를 밝히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불법사찰파일의 공개, 삭제, 파기 등 처리방침도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째깍째깍 활동시한이 다가오지만 국정원개혁위는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청와대는 국정원개혁위의 충분한 수명연장으로 국정원 적폐청산과 개혁의지를 재천명해야 한다. 55년 묵은 비밀정보기관의 적폐를 고작 5개월 만에 국민이 납득하고 안심할 만한 수준으로 청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정원개혁위의 활동시한 연장은 국정원의 실질적 해체재편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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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북한 사람 아닌 증거 너무나 많다”

[KAL858 30주기⑤] 김현희와 악연, 탈북민 홍강철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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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7  17: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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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연재 순서>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KAL858 30주기①]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


“김현희, ‘17살 이전 탈북자’ 확신”
[KAL858 30주기②] ‘KAL858 시민대책위’ 신성국 신부

“결국 김현희의 귀가 결정타가 될 것”
[KAL858 30주기③] KAL858 의혹 불씨 던진 현준희


“어떤 운명의 목소리가 있는 것 같다”
[KAL858 30주기④] KAL858기 사건 연구자 박강성주

 

   
▲ 북한 보위부 파견 간첩으로 몰려 징역을 살다 1.2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홍강철 씨가 23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김현희 씨는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현희 씨가 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는 증거가 너무나 많다. 그러니까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나 많으니까. 내가 장담하는 것은 군사교육도 받지 않았고, 북한에서 어렸을 때 학생교육도 받아본 사람도 아니다. 당원도 아니다.”

북한에서 살다 2013년 남한으로 들어온 홍강철(45) 씨는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 씨가 북한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북에서 살아온 자신이 김현희 씨의 수기나 책을 읽어보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 투성이라는 것.

23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홍강철 씨는 남한에 발을 딛자마자 ‘북한 보위부 간첩’으로 몰려 허위자백을 강요받았지만 1,2심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김현희는 ‘국정원 조작간첩’의 롤 모델

   
▲ 홍강철 씨는 국정원이 간첩혐의 조사과정에서 김현희 씨를 ‘롤 모델’로 제시했다고 증언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그는 이 과정에서 김현희 씨와 악연을 맺게 됐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조작 간첩’들이 국가정보부(국정원)의 ‘김현희 팔이’에 걸려든 것으로 확인됐다.

김현희 씨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국내에 들어와 합동신문센터에서 만화로 김현희 씨를 접하게 된 그에게 국정원은 “김현희도 비행기 폭파시켜 115명을 죽이고도 국정원 직원과 결혼해서 딸까지 낳고 지금 잘 살고 있는데, 너는 왜 (간첩이라고) 인정 못하냐”고 몰아붙였고, 결국 “감옥도 안 보낸다니까 허위자백하게”됐다는 것이다.

국정원 6개월, 교도소 6개월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낸 뒤 출옥하고서야 “김현희 때문에 피해입은 탈북자가 많다. 국정원의 롤모델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내가 김현희에 대해서 언젠가 한번은 밝혀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간첩죄로 복역하고 억울해서 재심을 받아보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오는 탈북자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같이 “국정원이 김현희처럼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허위자백 했다”며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날 버리냐”고 하소연 하더라는 것이다.

‘왜 김현희 씨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선 공작원 선발과정부터 잘못됐다”고 짚었다. 시군당 간부부 ‘5과’에서 중학교 4학년을 대상으로 직접 학교에 나와 선발하고 6학년 때까지 검열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김현희 씨는 초고속으로 선발됐고, 외가 쪽에 월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졌다는데, 이는 북한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그는 “북한에서 여기로 치면 경찰, 보안원 한 명 신원조회하는 데도 최소 6개월은 걸린다. 사돈네 팔촌까지 다 캔다. 그런데 한달반 안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이건 북한 사람 누구나 아는 거다. 나만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작원 양성 초대소에 ‘무기고’도 없나?

선발된 뒤 명함 사진을 시내 사진관에서 찍었다는 진술에 대해서도 “전문적으로 공작원을 선발해서 키우는 중앙당 조사부가 사진기 한 대 없어서 시내 사진관에 가서 찍겠느냐”고 고개를 저었고, “김현희 씨가 자기가 머물던 초대소의 구조에 대해서 쓴 글에 어느 초대소나 있는 무기고가 없다”고 짚었다.

   
▲ 김현희가 작성한 북한 룡성 40호 초대소 평면도. 그녀는 수많은 도면을 그렸고, 비치품 목록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해내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줬다. 무기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공작원들이 머무는 초대소에는 어느 곳이나 무기고가 필수적으로 구비돼 있고, 총탄류와 무기류 관리가 철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씨가 손으로 그린 초대소 건물 평면도 등에는 무기고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김현희 씨는 그런 무장을 가지고 있는 단위에서 생활을 못해 본 거다”고 단언했다.

홍 씨는 북한에서 군사학교와 유사한 고등물리전문학교를 2년간 다녔고, 군생활 3년 후 강건종합군관학교를 거쳐 중국 단둥과 마주한 곳에서 국경경비대 소대장으로 5년간 근무했다. 제대 후에는 함북도당학교 제대군관반에 들어가 재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 생산현장에서 ‘초급 지휘성원’으로 일해 북한 군사교육 등에 밝은 편이다.

예를 들어 “바레인에서 체포됐는데 눈을 떠보니까 검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관단총을 45도 각도로 세우고 자기를 지키고 있었다고 썼다”며 “김현희 씨가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기관단총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방 이후에 제일 먼저 만들어낸 총이 71연발 따발총 기관단총”이고 다른 종류의 기관단총은 자동총이라고 구별해 부를 정도로 “북한 사람들은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기관단총조차 구분 못하는 김현희 씨에 대해 그는 “북한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또한 “김현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예과에 다녔다는데 나는 안 믿어진다”며 “예과라는 건 중학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군인, 노동자, 이런 사람들이 가서 기초교육을 다시 공부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예과에 입학하자마자 6개월간 교도대훈련을 갔다는데, 대학생 교도훈련은 대학 2학년 때 보낸다. 그건 북한 어느 대학이나 똑같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전화번호 5개 못 외워 수첩에 암호로 적어?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조사팀장인 서현우 작가와 김현희 씨 자필 자료들을 검토하고 있는 홍강철 씨.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더구나 “조선노동당에 입당한다는 것 자체가 최대의 영예다. 그리고 그 당증 번호는 내가 정치적 생명을 받아안은 두 번째 이름이나 같은 거다”며 “당원이라면 생일은 까먹어도 당증 번호는 까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당증 번호를 단숨에 외워 제시했다. 김현희 씨는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면서도 당증 번호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김 씨가 손으로 그린 당원증도 실제 당원증 모양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현희 씨의 압수된 수첩에 암호로 적힌 유럽지역 북한대사관 전화번호에 대해서도 “북한 대사관 전화번호들을 김현희 씨는 수첩에다 암호로 적더라. 전화번호 다섯 개인가 밖에 안 된다. 일반적인 사람들도 전화번호 열 개는 외우는데 공작원 교육을 7년 8개월 받았다는 그리고 머리가 그렇게 좋다는데 말이 안 된다. 증거를 남기는 거다”고 꼬집었다.

   
▲ 김현희 씨는 자필로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다고 밝혔지만 당증 번호는 제시하지 못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김현희로부터 압수한 수첩의 암호 내용. 왼쪽은 숫자를 이용, 오른쪽은 한자(漢字)에 방점을 찍어 내용을 은닉했다고 안기부는 발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북한 주민 입장에서의 ‘상식적인’ 지적은 끝없이 이어졌다. 청년근위대의 박격포와 고사포 명칭, 김 씨가 걸었다는 배움의 천리길에 백두산이 포함된 점, 인분을 말려 바쳤다는 대목 등등... 더구나 공작원 교육과정에서 행군이나 격술훈련 과정 묘사 등은 ‘총참모부 훈련강령’에 전혀 맞지 않는가 하면,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1년동안의 교육프로그램은 1년에 소화하기 불가능한 내용이라는 대목까지 짚었다.

그는 특히 “일본인화 교육을 일본에서 납치해온 리은혜 씨를 통해서 받았다고 하는데, 북한에 일본에서 살다 온 재일동포가 10만이 넘는다”며 자신이 만나본 재일동포 가정의 일본식 문화를 언급하며 “그런 사람들한테 배우지 않고 리은혜 같은 사람에게 배웠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간다”고 말했다.

“김현희 씨는 정치술어를 잘 모른다”

   
▲ 인터뷰 내내 무겁던 그의 표정도 가족 이야기로 옮겨가자 환해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나아가 그는 “김현희 씨는 정치술어를 잘 모른다”며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체계와 체제가 뭔지 몰라 혼용해서 쓴다”는 점과 “혁명사적지와 혁명전적지를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고 북한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

“혁명사적지는 해방후 김일성이 다녀간 데고, 혁명전적지는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때 싸운 곳이다. 그런데 왕재산 혁명전적지를 왕재산 혁명사적지를 다녀왔다고 말한다”며 “정치적인 개념이 완전히 제로다”라고 짚었다.

그는 KAL858기를 북한 공작원이 폭파시켰다는 이 사건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도 손잡고 조국통일을 같이 해나가야 할 혁명의 동반자라고 교육한다”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만약 죽임으로 해서 북한이 얻을 이득이라는 게 하나도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북한에서는 ‘테러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 역사에서 그렇게 배워준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자들 자체가 북한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 있기 때문에 뛰쳐나와서 좋지 않은 감정으로부터 북한을 비난하고 이런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사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그건 틀리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김현희 씨가 하루빨리 테러범 딱지를 벗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인터뷰를 마쳤다.

(수정,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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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아직도 정치·경제의 도구인가?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2017년 한국의 과학기술계
2017.11.27 10:24:10
 
 
넓은 의미에서 정치는 여러 사람들이 관계된 일을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정치적이지 않은 일은 없겠지만 2017년 과학기술계에는 다른 해에 비해 정치와 연관된 일들이 많았다는 느낌이다. 금년에 일어난 '사건'과 인물을 통해 한국 과학기술계를 돌아보고자 한다. (필자)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론화 위원회
 
과학기술과 관련되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위원회이다. 여러 언론 매체에서 공론화 위원회의 활동에 관하여 상세히 소개하였고, 이에 대한 평가와 개선 방향은 3주 전 본 이슈페이퍼에서 다루었지만 그 중요성에 비추어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원전의 건설 재개는 지지하지만 향후 원전을 축소해야 한다는 시민참여단의 결정은 과학기술계의 문제를 공론화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는 점에서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이 결정의 주요 요인에는 전력 공급의 경제성, 지역 및 국가산업, 전기요금, 환경성 등이 있어 과학기술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원전의 안전성과 안정적 에너지 공급이 꼽혔다는 점에서 과학기술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를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결정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견제의 대표적 사례로, 앞으로 과학기술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의 해결책을 결정하는 데 시민의 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원전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뉜다. 안전성 때문에 원전 축소에 찬성하는 측과 원전은 위험하지만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고 실보다 득이 많기 때문에 원전 확대에 찬성하는 측으로 나뉜다. 원전 확대에 긍정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전 전문가들의 주장대로 충분히 안전하다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팽창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원전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의견이다. 필자의 입장은 원전 축소에 찬성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원전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금년에 일어난 사고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8월에 일어난 아직도 그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평택 국제대교 붕괴사고이다. 1994년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사고치고는 아주 조용히 넘어가는 느낌인데, 다행히도 사상자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대교 붕괴는 사고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보여준다. 

한빛 4호기(원전)의 증기발생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11cm 길이의 망치 형태 금속 이물질은 환자의 신체 내부에 남겨두고 봉합해버린 수술기구와도 같다. 문제는 이런 의료 사고는 재수술로 수습할 수 있지만 이 망치 형태 물질은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증기발생기에는 외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방사능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증기발생기를 개봉하여 금속 이물질을 제거할 수 없다. 만일 이 망치 형태 물체가 증기발생기에 구멍이 내 방사능 물질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가장 이목이 쏠리는 국가적인 교육 '행사'인 수능까지 연기시킨 포항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원전의 부실공사가 안전성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사실이다. 평택 국제대교나 한빛 4호기는 현대 기술이 거대하고 복잡하여 그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국가적인 규모의 안전 문제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번 공론화 위원회의 결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은 지역 및 국가산업이라고 한다. 이는 원전 축소 결정이 국가 경제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독일, 대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탈원전은 이제 세계적인 추세이며, 원전의 안전한 폐쇄 기술은 앞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중요한 기술이 될 전망이다. 원전은 건설 못지않게 폐쇄에도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거대과학기술인 원전 폐쇄에 소요될 엄청난 비용을 사전에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앞으로 이어질 폐로 작업에 필요한 기술 확보는 원자력공학자들이 집중해야 할 당면 과제라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인간 세상을 아주 길게 또 긍정적으로 본다면 현재 전세계 핵탄두들에 탑재되어 있는 상상을 넘어서는 양의 방사능 물질을 안전한 폐기하는 기술 역시 필요할 것이다. 이 방사능 물질을 안전하게 이용하는 기술보다 안전하게 폐기하는 기술이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원전을 대신할 에너지원에 대한 시각은 <그림 1>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재생가능(renewable) 에너지의 총량은 원자력 에너지보다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부분은 수력(Hydro)이다. (수력은 재생가능 에너지로 분류된다.) 수력의 성장이 에너지 수요 증가를 감당하지 못하며 다른 재생가능 에너지의 성장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설이 쉬운 원자력 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림 2에 나와 있는 풍력과 태양 에너지로부터 얻는 전력의 성장 곡선은 그런 전망이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재생가능 에너지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런 성장 속도는 장기적으로 원전을 폐쇄하더라도 재생가능 에너지가 에너지 수요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원에 대한 기술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이다. 관련 장비를 모두 수입하고 거기에 기술료까지 지불해야 한다면 경제성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또한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화석 연료, 즉 석유 석탄 천연가스의 비중은 절대적인데, 이를 이용하는 화력발전보다 원전이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탈원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유명 과학자의 지적도 있다. 이는 재생가능 에너지가 가진 잠재력을 원자력보다 낮게 보기 때문인데, 유명 과학자의 중요한 예견은 맞을 때보다 틀릴 때가 더 많다는 점도 염두에 두자.   
 

▲ <그림 1> 세계 에너지 소비 추세.

                                   

▲ <그림 2> 풍력과 태양 에너지에서 얻는 전력 비율 추세.


시민참여를 통한 원전의 미래에 대한 결정은 전문가주의에 대한 타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많은 현대 과학기술 활동이 국가적 지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당연하지만 전문가 영역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에 의한 통제는 쉽지 않다. 중이온가속기와 같이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거대과학기술 시설 건설에 대해서는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학기술계 내부에 존재하는 세부 분야들을 나누는 칸막이로 인한 또 다른 전문가주의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밀실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JSA 귀순병사 사건과 관련되어 언급된 외상센터 문제는 국민 의료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와 관련된 전공의(專攻醫) 쏠림 현상 방지 정책 역시 의료계라는 매우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전문가 집단이 주도적으로 결장하며, 여기서도 여러 세부 전공의 칸막이에 따른 분야 이기주의가 개입된다. 이런 문제들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라 시민참여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에게 모두 맡기기보다 전문가는 상황 판단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최종 결정은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들은 꽤나 많다.  
 
창조과학  
 
지난 8월 24일 정부는 포항공대 박성진 교수를 신설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후보자로 지명하였는데, 박성진 교수는 인사청문회 사흘 후인 9월 15일 사퇴하였다. 문재인 정부의 기조와는 크게 다른 역사관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사퇴에 작용하였겠지만 과학자들의 커다란 반발을 부른 요인은 창조과학이라는 후보자의 과학관이다. 창조과학은 근본주의 신앙에 기초하여 과학을 받아들이는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과학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사이비 과학이다. 기독교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에서는 창조과학과 관련된 유명한 법정 다툼들이 있었고 대통령을 포함한 유명인들이 이를 옹호하는 공개적인 발언을 하는 지경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공계 현직교수가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삼 심각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과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답을 찾는' 학문이 아니라 '답을 만들고' 그 답에 대해 과학자 사회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과학이 만든 답에는 항상 오류가 있어왔으며 어느 과학자도 현재의 과학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사, 문학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분야에서나 자기 분야의 역사를 연구하고 교육 과정에도 포함시킨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과학사에 도입된 이래 과학사는 과학의 범주를 넘어 여러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과학사를 예비과학자인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하는지는 논쟁거리였다. 과학사에서 다루는 고대 그리스, 중세, 근대 과학은 현대 과학에 비추어보면 오류로 보이기 때문에 과학사가 예비과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과학사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그 내용으로부터 잘못된 개념을 습득할 수도 있고, 선배 과학자들을 멍청한 사람들로 오해할 수도 있다. 과학은 주어진 증거들로부터 그에 대한 답을 만드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그 답은 항상 불완전했으며 계속 불완전할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과학이 만든 답에 대한 끊임없는 크고 작은 수정 과정들로 이루어진다. 창조과학은 이런 과학의 본질을 망각하고 실재를 왜곡하는 데 과학의 이름을 사용한다. 박성진 교수 '사건'은 이런 왜곡 현상이 사회적으로 그 세를 불려 과학에,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해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지진이 정부 탓이라는 생각은 창조과학과 맥을 같이 하며, 일식(日蝕)이 임금의 실정 때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세태를 일과성이라고 넘겨왔기 때문에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과 증거를 통해 성경 내용을 정당화하려는 창조과학은 과학을 도구로 보는 시각의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을 도구로 보는 시각은 19세기 말 서양의 과학기술에 압도된 동양에서 내세운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역사가 깊으며,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학을 일종의 물리적 도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만든 설명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지식체계로, 유력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면에서 과학은 기(器)라기보다 도(道)이다. 현대 과학이 높은 수준의 기술에 힘입어 발전하고 있고, 과학 지식이 기술로 매우 빠르게 응용되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과학 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받기 위해 과학의 경제적 가치를 과장하고 강요받은 역사적 배경도 과학과 기술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구로 동일시하는 분위기에 일조하였다. 
 
과학을 경제적 도구를 넘어 정치적 도구로 생각한 결과가 과학계는 물론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친 예는 쉽게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을 홀대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홀대한다는 표현은 과학을 정치적 도구로 생각하여 지원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노벨상과 같은 대중적 선전 효과에 중점을 두고 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예는 황우석 사건인데, 이 사건에서 황우석 개인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그를 이용하려는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 8월 7일 과학기술 혁신본부장에 선임되었다가 서울대 교수들의 퇴진 서명 운동이 있었던 8월 11일 사퇴한 박기영 교수의 재등장 시도는 문재인 정부가 가진 과학기술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 사건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황우석 사건에 깊이 연루된 박기영 교수를 재기용하려 한 것은 황우석 사건에서와 같이 과학을 정치적 도구로 생각하여, 선전 효과가 큰 신화를 재현하고 싶은 욕구를 과학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이 든다.  
 
두 박교수 '사건'은 한국 과학기술계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준다. 박성진 교수와 관련하여 등장한 '생활보수'라는 표현은 과학기술자를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으며, 박기영교수의 재등장 시도는 정치적 도구화에 부응할 수 있는 경우에만 과학기술자가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자괴감을 갖게 한다. 이는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제대로 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자들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적절한 시스템을 갖추지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과학이 그 활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가치 창출의 도구인 하드웨어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합리적 사고방식의 틀을 제공하는, 백과사전에서 찾을 수 없는 지혜를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역할 역시 수행하고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사회적 유용성을 확산시키기 위한 시스템이 미흡해 보인다. 
 
다른 교육과 다르지 않은 과학교육  
 
과학기술이 인문 사회과학의 대상과 동떨어진 대상을 다루기 때문에 이들 학문 분야들과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론적인 면에서 다른 학문 분야와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을 추동하는 메커니즘 역시 교육과 연구인데, 둘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며, 교육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17년 대통령 선거 과정 중에 한국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안철수 후보의 연설 목소리였다. 그의 연설 목소리는 웅변 전문가에게도 새로운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라도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하여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으며, 의학박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공계 교육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람인데, 그가 겪어온 모든 교육 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독학'이며, 이는 한국 교육의 중요한 특성이다.  
 
40여 년 전 이루어진 고교 평준화 이후 중·고등학교 수업은 대체적으로 하향평준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우수한 학생들이 학교 수업에서 새로운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배울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평준화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 평준화 이후 그 정도가 심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고교 평준화의 공과를 논할 의도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 강의 중 질문하는 학생은 거의 없으며, 간혹 새로운 교수법을 시도하는 교수들이 있긴 하지만 학생이나 교수에게나 모두 낯설다. 많은 대학교수는 자신이 경험한 배움의 방식에 기초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이 결과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의 대부분은 흔히 가장 중요한 공부 방법이라고들 말하는 '독학'으로 채워진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50과목 이상의 강의를 수강하였겠지만 기억에 남는 강의를 꼽는 일은 교수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석·박사 과정에서의 주된 배움의 방식은 여전히 '독학'이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교육을 통해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 학습하는 근래의 풍경은 공교육의 기능이 학생을 평가하는 것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선행 학습 과목은 주로 수학과 과학인데,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선행 학습은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파악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런 교육 환경은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교사의 역할은 배움의 범위를 지적하는 것에 그치며, 교사로부터 모르던 것을 배웠다는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면에서 학생들은 '독학'을 하고 있다. 궁금한 것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 깨닫는 가장 편리한 배움의 방식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던 식민지 시대의 교육 분위기가 쇄신되지 못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학'으로 경험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과 배려이다. 소통과 배려를 경험해보지 않고도 별 어려움이 없었던 – 사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 사람들은 이에 대한 절실함을 느끼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를 실천하기도 힘들다. '배려 없음'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교육 환경도 분명히 일조하고 있다.  
 
현역 시절 '독학'으로 뛰어난 선수였던 감독이 부진한 선수들을 배려하여 지도하기보다 선수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질책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도 아니다. 특정할 필요도 없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전공의들에 대한 의대 교수들의 '갑질'은 그들이 배려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면 당연한, 자신이 경험하였던 학창시절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려는 배려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학창시절과 비교하며 퇴행적 '갑질'을 하기 쉽다. 지난 6월 일어난 모 대학교수에게 일어난 폭발물 배달 사건의 원인이 오롯이 폭발물을 만든 학생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갑질', 성범죄 등의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위협 받는 직업 중 하나로 교사가 꼽힌다. (어떤 사람은 교사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망 직종이라고 한다.) 훌륭한 '독학'의 방편으로 인터넷 강의와 인공지능을 통한 교육이 보편화되겠지만 이를 통해 교육받은 학생들을 다른 이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쌍방향 대화를 잘 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국에서 소통과 배려에 능한 '좋은' 교육용 인공지능이 만들어지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새로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은 엄청나지만 제대로 된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과 배려의 경험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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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핵질서의 구조적 불평등성 및 핵무기보유국들의 이중성

<칼럼>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이장희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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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7  05: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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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국제 핵규범 질서의 가장 중대한 위반자로 북한을 꼽는다. 그래서 북한만 유독 핵규범 질서를 가장 많이 위반하는 나라로 국제적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특히 미국이 그 선봉에 서서 공식 핵무기보유국 5개국과 함께 북한의 핵무기 실험 및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UN 안보리 제재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 개발을 결코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행 국제 핵규범 질서의 본질적 불평등성과 핵무기보유국들의 도덕적 이중성을 국제사회는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드는 지속가능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한다.

먼저 국제 핵규범 질서의 기초인 1968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 1945년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핵무기는 인류공멸의 무기로서 더 이상 핵무기 위협 및 사용은 안 된다는 국제사회의 절대적인 공감이 이미 형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이 앞 다투어 핵무기 개발을 위한 첫 관문인 핵실험 경쟁을 1950,60년대에 치열하게 벌였다. 이에 기존 핵기득권을 가진 미국이 심각한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60년 중반, 이미 핵실험을 통해 핵을 보유한 5개국의 핵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여타 국가에로의 핵보유 확산은 근원적으로 봉쇄하자는 의도하에 NPT체제를 만들었다.

그래서 NPT체제는 핵무기보유국은 제조 및 이전을 포함하는 핵에 대한 수평적 확산 자유를 인정해주고, 비핵무기보유국에게 핵무기 제조 및 이전을 전혀 못하게 금지하였다. 이것의 관철을 위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엄격한 사찰을 통해서 매순간 보고요구와 감시를 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5개 핵무기보유국은 현행 핵무기를 심층 개발하는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에 대해서는 도덕적 준수의무를 강조하고, 비핵무기보유국에게는 핵의 수직적 확산도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봉쇄하였다. 이처럼 NPT체제는 근본적으로 핵무기보유국과 비핵무기보유국을 차별하는 근본적 불평등성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 5개 핵무기보유국의 도덕적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1996년 9월 10일 UN 총회에서 채택된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에 대한 소극성이다. 2017년 11월 현재 CTBT 183개 회원국 중에 서명국은 166개국이고, 비준국은 36개국이다.

그 발효조건인 핵관련 주요 국가 44개국의 비준이 필요한데, 핵무기보유국 8개국이 비준하지 않아 미 발효상태에 있다. 이들 국가들은 외양적으로 핵없는 세상을 외치면서 CTBT에 서명 비준을 전혀 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UN 헌장 제2조 4항에 명시된 개별국가는 자위권을 제외하고는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서 개별적 무력사용의 금지 및 위협 금지라는 국제법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을 포함하는 5개 공식 핵무기보유국과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을 포함한 3개 비공식 핵무기보유국은 이를 명백히 위반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평화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다만 핵무기라는 특정무기 보유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이 부재한 약점을 수십년 동안 5개 공식, 3개 비공식 핵무기보유국들은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제사회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이나 UN제재조치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1996년 국제사법재판소는 권고적 의견을 통해서 UN총회의 핵무기 사용 및 위협의 불법성 질문에 대해서 매우 애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이 적대관계 종식 및 한미합동군사연습 중단에 대한 협상의지를 보여준다면, 북한은 대화 테이블에 나와서 북한 핵에 대한 최소한 동결문제라도 논의할 의사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전혀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UN 안보리 제재 결의 준수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만 강요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2017년 노벨위원회 평화상 수여는 핵무기에 대한 5개 핵무기보유국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핵무기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노벨위원회가 미국, 프랑스 등 핵무기보유국의 강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10월 6일 국제 NGO 단체인 ICAN(핵무기폐기국제운동)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것이다.

노벨위원회가 선정한 노벨 평화상 기준은 분명했다. “핵무기 사용으로 인한 인류의 재앙적 인도주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고, 조약에 기반한 핵무기 금지를 막으려는 획기적인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ICAN은 핵무기보유국의 강한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UN 총회에서 핵무기금지조약(TPNW)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이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998년 국제대인지뢰캠페인(ICBL)이 대인지뢰금지조약 UN 채택을 유도한 것처럼 국제사회에서 국가주의가 해내지 못한 핵무기금지조약(TPNW)이라는 군축조약의 UN 채택을 NGO의 힘으로 해 낸 것이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300여 개인을 포함한 단체를 추천받아 엄선된 ICAN 수상자를 발표한 것이었다, 이어 ICAN의 베아트리스 핀 사무총장은 “핵무기금지조약을 위한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고 모두가 기뻐해야 할 영광스런 상"이라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2017년 노벨 평화상 수여는 핵무기의 사용 및 위협은 오로지 북한만 위반한다는 일방적 국제사회의 왜곡된 시각에 균형적 그리고 성찰적 시각을 제공해 준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2017년 7월 7일 핵무기금지조약 UN총회 채택에도 미국을 비롯한 5개 공식 핵무기보유국과 4개 비공식 핵무기보유국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과 국제사회가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약속한 1992년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만을 남북한에 강요할 수 있겠는가? 꼭 필요하다면 남북한은 ‘동북아비핵지대화’(Nuclear Weapons Free Zone in Northeast Asia)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도 북한 핵무기에 대해 현상만 무비판적으로 보지 말고, 왜 북한이 핵무기 실험과 개발을 하지 않을 수 없는가라는 국제핵질서의 구조적 불평등성과 핵무기보유국들의 도덕적 이중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공론화가 필요한 때이다.

 

이장희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고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학석사, 독일 킬대학 법학박사(국제법)

-한국외대 법대 학장, 대외부총장(역임)
-대한국제법학회장,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회장.
엠네스티 한국지부 법률가위위회 위원장(역임)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통일교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민화협 정책위원장(역임)
-동북아역사재단 제1대 이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역임)
-민화협 공동의장, 남북경협국민운동 본부 상임대표,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동아시아역사네트워크 상임공동대표, SOFA 개정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현재)
-한국외대 명예교수, 네델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대한적십자사 인도법 자문위원, Editor-in-Chief /Kore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현재)

-국제법과 한반도의 현안 이슈들(2015), 한일 역사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공저,2013), 1910년 ‘한일병합협정’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공저, 2011),“제3차 핵실험과 국제법적 쟁점 검토”, “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 등 300여 편 학술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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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적폐청산 수사 제동]거침없던 6개월…고민 깊어진 ‘윤석열호’

구교형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입력 : 2017.11.26 22:49:02 수정 : 2017.11.26 22:54:46

 

ㆍ‘비리·적폐’ 피의자 석방·영장 기각에 잇단 소환 거부
ㆍMB·박근혜 정부 ‘국정원 수사’ 연내 종결 계획 차질
ㆍ정치권 공수처 신설·수사권 조정 논의 본격화도 부담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지난 6개월간 전·현 권력을 조준하며 거침없이 진행돼온 검찰 수사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비리 의혹을 받는 여권 핵심 인사의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이미 구속된 전 정부 인사들은 법원의 구속적부심사를 거쳐 잇따라 석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사들 모두 문재인 정부 들어 파격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윤석열 지검장(57)이 주도하고 있다. 검찰 수사가 잇따라 제동이 걸리면서 정치권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적폐청산 수사가 위기로 몰리고 있다.

대기업을 상대로 자신이 명예회장으로 있던 한국e스포츠협회에 거액의 후원금을 내게 한 혐의(뇌물수수 등)를 받고 있는 전병헌 전 청와대 정무수석(59)의 구속영장이 지난 25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검찰이 현 청와대 고위 인사를 대상으로 한 첫번째 수사를 시작하며 결과가 주목됐던 사건이다. 검찰은 전 전 수석이 정무수석직을 내놓고 검찰 ‘포토라인’에 서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향후 수사에 타격을 받게 됐다. 검찰은 “기각 사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며 보강 수사 후 영장 재청구 방침을 공표했지만 전 전 수석은 “결백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여권에서는 전 전 수석 수사를 계기로 검찰을 향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적폐수사가 한창일 때 ‘여야 균형 맞추기’ 차원에서 전 전 수석 비리를 수사선상에 올렸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초반인 2003년 검찰의 불법대선자금 수사 때처럼 정치권이 검찰 수사에 휘둘리며 검찰개혁의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연내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국군 사이버사령부 적폐수사를 종결짓겠다는 검찰 수뇌부의 계획도 차질이 생기고 있다. 사이버사 댓글 공작을 지휘·감독한 혐의(군형법상 정치관여)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68)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64)이 지난 22일과 24일 구속적부심사를 거쳐 차례로 석방됐기 때문이다. 

법원은 김 전 장관 등을 풀어주면서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못박았다. 이 수사의 최종 목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인데, 이들에 대한 범죄 혐의가 제대로 소명되지 않는다면 이 전 대통령 수사도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검찰은 “공범에 대한 추가 수사가 예정돼 있음에도 ‘혐의에 대해 다툼이 있다’는 취지로 석방한 법원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발하고 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67)에 이어 김 전 장관까지 구속될 때만 해도 이 전 대통령의 2012년 총·대선 개입 혐의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 원 전 원장 역시 이 전 대통령을 향해 불리한 진술을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보다 앞서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재판 방해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변창훈 검사(당시 국정원 파견)와 국정원 소속 정치호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적폐사건의 핵심 피의자들이 잇따라 검찰 소환을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시절 국정원에서 특수활동비 1억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로 입건된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62)은 28일 예정된 검찰 조사에 불응하겠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공정하지 못한 수사에는 협조하기 어렵다”며 공개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현역 국회의원에게는 불체포특권이 인정돼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 나와야만 체포가 가능하다. 

야권에서는 이우현·원유철 한국당 의원 등 다른 동료들을 향해서도 검찰 수사가 가시화한 상황에서 현역 의원 체포 선례를 만들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2012년 12월 경찰의 국정원 댓글 공작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수시로 통화하면서 수사정보를 누설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를 받고 있는 김병찬 서울 용산경찰서장도 지난 25일 출석해달라는 검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김 서장의 소환 거부는 경찰 수뇌부의 재가 없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검경 갈등으로 비화할 소지가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20일 정부·여당은 당·정·청회의를 소집해 공수처 법안의 국회 통과 전략을 논의했다. 


야당에서는 경찰에 힘을 실어주는 형태의 검경 수사권 조정에 찬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여야는 각론에서 차이가 있을 뿐 큰 틀에서 검찰개혁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관련 입법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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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죽자 미국대사는 이 비밀문서를 만들었다

[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⑦] NARA에서 만난 사람 Ⅳ - 김구팀(Kim Koo Team)

17.11.27 08:29l최종 업데이트 17.11.27 09:40l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정문 표지판과 표지석.(2017. 10. 27. 촬영). 이곳 NARA는 한국 현대사 및 세계 현대사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정문 표지판과 표지석.(2017. 10. 27. 촬영). 이곳 NARA는 한국 현대사 및 세계 현대사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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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 서고의 문서 상자들로 전세계정보의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  NARA 서고의 문서 상자들로 전세계정보의 데이터베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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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팀' 팀장으로부터의 초대

제4차 방미 이튿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로 출근해 노트북을 켜는데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보낸 이는 이선옥씨로 지난날 김구팀(Kim Koo Team, 백범김구 암살배후 조사팀) 팀장이었다.

"박도 선생님…. 목요일 저희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박유종 선생님과도 이야기했고요. 그날 NARA에서 일을 마치시고, 곧장 오세요. 간소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고 싶어요. 주태상(남편)씨도 선생님 뵙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선옥 드림"

 

나는 그 메일을 읽자 만감이 교차했다. 그들 부부와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2004년 2월 2일 아침, 메릴랜드 한 숙소로 재미동포 주태상씨가 찾아왔다. 그는 <한겨레신문>에서 권중희 선생과 나의 방미 기사를 보고 자원봉사를 자청한 재미동포였다. 

그는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숙소의 문을 두드린 열혈 청년이었다. 마치 지난날 상하이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봉길 의사와 같은….

마침 그는 컴퓨터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하기에 나는 연결이 안 된 노트북을 그에게 맡겼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컴맹이어서 노트북조차 없었다.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노트북을 빌려온 처지였다. 그는 숙소에서 1시간여 땀을 흘리면서 연결을 시도했으나 끝내 연결시키지 못했는데, 숙소에 인터넷선이 깔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지금보다 값싼 숙소로, 인터넷이 깔린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나와 권중희 선생은 NARA에서 가까운 곳에 방 두 개인 숙소에 묵고 있었는데 하루 숙박비가 100달러로 부담이 컸다. 이는 그때 자원봉사 유학생 김만식씨가 장기간 두 사람이 한 방에서 기거하면 불편하다고 방 두 개(투 룸)짜리 숙소를 구해준 것이었다. 일리 있는 배려였지만 겨레의 성금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나의 간곡한 부탁에 알아보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날 우리 두 사람을 곧장 NARA로 안내했다. NARA에 이르자 고 권중희 선생은 당신 평생 소원이 이뤄지는 것처럼 매우 감격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NARA 2층 자료실에 마련된 KIM KOO TEAM 리서처(조사자) 좌석.
▲  NARA 2층 자료실에 마련된 KIM KOO TEAM 리서처(조사자) 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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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Koo Team'

그날 오후에는 유학생 이선옥씨가 우리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바쁜 유학생활이지만 백범 선생 암살배후 진상을 규명 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자원봉사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 열정과 진지한 자세에 감동을 받아 우리와 함께 일하는 걸 승낙했다.  

그때 김구팀(Kim Koo Team)은 모두 여덟 분의 재미동포와 유학생들로 구성됐는데, 이들 외에도 이도영, 박유종, 이재수, 김만식, 정희수, 권헌열씨 등이 우리 일을 도와줬다. 그분들 가운데 주태상씨는 NARA에서 리서치(Research, 검색)뿐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을 자기 승용차로 출퇴근시켜 주는 일, 값싼 숙소를 구해주고 이삿짐 나르는 일, 컴퓨터 설치 및 스캐너 빌려주는 일 등 한국의 두 노인의 손발 역할을 도맡았다.
 

 권중희 선생과 필자의 귀국에 배웅 나온 김구 팀 자원봉사 조사자들(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권헌열 아드님,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팀원 중 이도영, 김만식 등은 빠졌음.)
▲  권중희 선생과 필자의 귀국에 배웅 나온 김구 팀 자원봉사 조사자들(왼쪽부터 정희수, 권헌열, 권헌열 아드님, 주태상, 권중희, 이선옥, 박유종, 이재수, 팀원 중 이도영, 김만식 등은 빠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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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옥씨는 자원봉사 중 유일한 여성으로, 대단히 열정적이고 학구적이며, 아주 야무지게 일을 잘했다. 내가 그를 팀장으로 정하자 모두들 동의해줬다. 그러자 그는 문서 찾는 일들을 조직적으로, 한 치 차질 없게 추진했다. 그때 우리 김구팀은 40여 일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암살 배후가 될 만한 문서를 찾았다. 

특히 NARA의 문서 자료에서 김구, 이승만, 안두희 등의 이름만 나오면 무조건 복사했다. 그런 다음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읽은 뒤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하지만 그 문서들은 백범 암살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이었다. 정곡을 꼭 찌르는 결정적인 문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당시 김구팀이 찾았던 문서 몇 장을 소개한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 불리한 문서는 대부분 파기했다"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1
▲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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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서는 주한 무초(John. J. Muccio) 미국대사와 김규식 박사 간의 대화(1949년 6월 28일)로, 김구 선생의 죽음에 관련한 루머(rumor, 뜬소문), 김구 선생 장례 절차에 대한 논란(국장, 국민장으로 할 것인가 등), 한독당의 미래, 한독당 내에서 김규식 박사의 지도력(Leadership)과 함께, 김규식 박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문서를 요약하면, 김규식 박사는 김구 선생과는 달리 지방의 조직도 갖지 않았고, 정치적인 야망도 크게 없었고, 정치적인 캠페인(Campain, 운동)도 이전에 해보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독당 내에서 소임을 다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이야기다. 

그밖에도 김규식 박사와 김구 선생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 간의 협력 시도, 한국 내에서 정당간, 국민간의 화합과 연대의 문제점, 공산주의와 한국인들, 중국인들 이야기, 공산주의자로 분류되는 국회의원들의 체포에 대한 김규식 박사의 우려 등도 기록돼 있다.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2
▲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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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3
▲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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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4
▲  NARA에서 발굴한 김구 관련 문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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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세 문서에는 김구의 출생부터 활동 및 업적에 대해 열거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12시 20분께 한국 군인의 미제 소총 4발로 사망했다는 소식, 김구 선생의 죽음으로 인한 한국인들의 충격, 이승만 정부의 성공적 야당 지도자이자 유일한 비공산주의자였던 김구 선생에 대한 애도, 김구 선생의 암살자로 서울 경찰의 안두희 지목 관련 내용, 정부 관료들의 공식적 입장 등이 실려 있다. 

하지만 아무리 NARA 서고의 문서를 뒤져봐도 김구 선생 암살 배후에 관해 정곡을 찌르는, 딱 부러지는 문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암살 지령자가 멍청하게 딱 부러지는 말이나 문서를 남기겠는가? 그 지령 단계는 대체로 점조직이기 마련이고, 그 지령은 이심전심의 비법을 쓰기 마련이다. 암살 지령자는 그것마저도 믿을 수 없어 암살 하수인을 다른 하수인을 시켜 죽여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비정한 암살 세계 아니겠나(관련 기사 :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했을까?).

게다가 NARA의 한 아키비스트(Achivist, 문서관리자)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무성이나 CIA에서 미국에 불리한 문서 97~98%를 파기(Destroyed)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런 점을 몰랐던 우리 아마추어 김구팀은 핵심 문서를 찾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힐 '알맹이'는 없었다
 

 NARA의 한 아키비스트가 조사자들에게 중요문서 97~98%는 파기(DESTROYED)됐다고 전하는 메모지로 NARA 검열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  NARA의 한 아키비스트가 조사자들에게 중요문서 97~98%는 파기(DESTROYED)됐다고 전하는 메모지로 NARA 검열 도장이 선명히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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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에서 발국한 문서5
▲  NARA에서 발국한 문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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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에서 발굴한 문서6
▲  NARA에서 발굴한 문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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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RA에서 발굴한 문서7
▲  NARA에서 발굴한 문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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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서5는 CIA 이전 CIC, OSS 측 도서관에서 만든 1948년~1950년 한국 정치인들에 대한 인덱스(Index, 색인)카드다. 이 인덱스카드를 보고 다시 그 문서를 찾아가 보니 해당 문건 (#432089)의 실제문서 대신 문서6와 문서7이 존재했다.

이 노란색 종이(문서7)가 바로 문서 수거에 대한 정보다. 즉, 미 CIA에서 이 문서를 일단 비밀해제 했지만, 다시 이 문서를 스크린(screen, 정밀조사)한 뒤, 한국과 미국간 혹은 김구 관련 민감한 내용이 있어 CIA가 1978년 10월 16일 이 문서를 수거한 것(문서6)을 1979년 2월 22일에 이를 확인한 것(문서7)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CIA의 한국 정치인 이름 인덱스카드 상에서 관심 있는 문서 #432089를 찾아봤더니 이 문서 대신 CIA측에서 이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아직도 이를 가지고 있다는, 이 문서에 대한 '접근 제한' 노티스(Notice, 주의사항, 또는 알림)로 1979년 2월 22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미국의 국익에 위배되는 문서나, 반미(反美) 감정을 유발하거나, 한국현대사에 아주 예민한 정보가 담긴 문서는 아직도 NARA 비밀서고에 잠자고 있다는 이야기다. 

조사자가 이를 미국의 정보공개요구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요구를 해도 미국 측에서 응하지 않을 뿐더러, 마지 못해 응한다 해도 해당부분은 새카만 색깔로 덧칠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미국의 명분은 국가 안보와 사생활 보호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No' 하면 뾰족한 대처 방법이 없다고 한다. 더 이상의 요구는 미국 국법에 위배되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미국 내정을 간섭하는 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중요 기밀문서의 공개는 미국의 국익과 사생활 보호를 빌미로 '엿장사 마음대로'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아마추어 조사자들이 해결하는 데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한계점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우리 김구팀은 분루(憤淚, 분하여 흘리는 눈물)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NARA에서 발굴한 서류철. 이 서류철은 고 권중희 선생이 보관했다. 얼마 전에 사모님을 만나 이 서류철의 행방을 문의하자 권 선생 사후 이삿짐 센터에 보관했는데 아마도 폐기처분했을 거라는 답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이 아마도 백범 진상 규명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 서류철은 팀장 이선옥 씨 작품이었다.
▲  NARA에서 발굴한 서류철. 이 서류철은 고 권중희 선생이 보관했다. 얼마 전에 사모님을 만나 이 서류철의 행방을 문의하자 권 선생 사후 이삿짐 센터에 보관했는데 아마도 폐기처분했을 거라는 답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이 아마도 백범 진상 규명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 서류철은 팀장 이선옥 씨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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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자들의 점심시간으로 토의장이기도 했다(장소는 NARA 1층 구내식당으로 오른쪽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그리고 취재 중인 EBS 김봉렬 PD.)
▲  조사자들의 점심시간으로 토의장이기도 했다(장소는 NARA 1층 구내식당으로 오른쪽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그리고 취재 중인 EBS 김봉렬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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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사진을 보다

이런 사실을 미국 NARA 현지에서 뒤늦게 알게 된 우리 김구팀은 계속 리서치 작업을 하느냐 마느냐 문제로 한동안 갑론을박했다. 이곳을 오랫동안 드나들며 자료를 수집했던 고 이도영 박사는 "핵심 문서는 비공개됐지만, 유탄의 파편은 그래도 남아 있을 것"이라면서 "조사자들은 그것을 찾아 퍼즐게임처럼 윤곽을 맞춰 가면 실체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씀을 했다. 

그때 우리의 결론은 다수결로, 기왕 여기까지 누리꾼들의 성금으로 왔으니까 북데기 속에서 알곡을 찾는, 농사꾼의 심정으로 애초 계획한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로 했다. 

"우리가 이 무모해 보이는 이 일을 시작하면 후세에 누군가 사명감을 가지고 백범 암살 배후의 실체를 밝힐 것이다. 우리는 그 씨앗을 뿌리는 농사꾼 심정으로 이 일을 계속하자."

나의 말에 재미 자원봉사자들은 화답했다. 

"설령, 두 분 선생님은 빈손으로 귀국하시더라도 남아있는 저희들이 계속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일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때 영어에 매우 어두운 나는 마침 NARA 5층 자료실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발견하고 밥값을 할 수 있다고 무릎을 쳤다. 그 사진들은 이전에 내가 보지 못한 것들로 거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똥처럼 마구 쏟아붓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란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평양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란민들,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란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란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된다고 해, 주태상씨의 스캐너를 빌려 박유종 선생의 도움으로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40여 일간 수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엄선했다. 이는 <오마이뉴스>에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의 연재로 알려졌다. 

귀국 후 연재가 끝난 즉시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여러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독자들의 성원도 컸다. 나는 분외의 성원에 NARA에서 미처 들춰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아른거려, 다시 지난 2005년 11월에 2차로, 이어 2007년 2월에 제3차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NARA뿐 아니라 버지니아 남단 노퍽의 맥아더기념관까지 두 차례 방문해 한국전쟁 관련 기록물 1800여 점을 입수해 왔다.  

마치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왔던 고사처럼 한국전쟁 자료를 복사해왔는데, 자원봉사자 박유종, 주태상씨 등의 도움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스캔하는 필자. 스캐너는 주태상 씨, 노트북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것이었다.
▲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한국 근현대사 관련 자료를 스캔하는 필자. 스캐너는 주태상 씨, 노트북은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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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는 과연 단독범이었을까

안두희의 주장대로 그는 단독범일까. 아니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에 거대한 조직과 막강한 권력이 숨어있는 걸까.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한 권중희 선생과 수개월 동안 침식을 함께하고, 안두희 저승사자였던 박기서 의사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필자는 아직도 백범 암살범 배후는 오리무중이다. 

그 진상은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한 개인으로서, 더욱이 영어가 먹통인 필자와 같은 아마추어 조사자에게는 거대한 벽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은 정부가 혹은 정부기관의 수사 전문가가 나서서 찾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 평생 조국 독립에 몸 바치신 백범 선생에 대한 후손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이번 회에서는 그때 김구 팀이 NARA에서 발굴한 백범장례 행렬 사진을 모두 싣는다.
 

 1949년 7월 5일 고 백범김구 선생 영결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른 뒤 효창동으로 운구하고자 상여가 서울운동장을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 여기 사진들은 모두 '김구 팀'에서 발굴했다. 여기 사진들은 미 육군정보팀에서 촬영하여 본국에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  1949년 7월 5일 고 백범김구 선생 영결식이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른 뒤 효창동으로 운구하고자 상여가 서울운동장을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 여기 사진들은 모두 '김구 팀'에서 발굴했다. 여기 사진들은 미 육군정보팀에서 촬영하여 본국에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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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자매 형제여, 우리의 살길은 자주 독립의 한 길 뿐이다. 이 길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여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가지는 못하는 길이다. 주저하지도 말고 유혹 받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부월(斧鉞, 형구로 쓰는 도끼))이 당전(當前, 바로 눈 앞에))할지라도(곧, 중형을 받고 죽게 될지라도) 도피하지는 아니하겠다." - 부월이 당전해도 단정 반대. 1948년 3·1절 기념사 -
▲  "친애하는 자매 형제여, 우리의 살길은 자주 독립의 한 길 뿐이다. 이 길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여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가지는 못하는 길이다. 주저하지도 말고 유혹 받지도 말고 앞만 향하여 매진하자. 내가 비록 불초할지라도 이 길을 개척하고 나가는 데는 앞에서 나갈 각오와 용기를 가지고 있다. 부월(斧鉞, 형구로 쓰는 도끼))이 당전(當前, 바로 눈 앞에))할지라도(곧, 중형을 받고 죽게 될지라도) 도피하지는 아니하겠다." - 부월이 당전해도 단정 반대. 1948년 3·1절 기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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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백범 어록
▲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 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백범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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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激成)할 뿐일 것이다." - '통일 독립 달성을 위한 7거두 성명' 중에서
▲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다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激成)할 뿐일 것이다." - '통일 독립 달성을 위한 7거두 성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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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이 없이는 독립이 있을 수 없고, 독립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민족단결 뿐이다. 그러나 현시에 우리 조국이 미·소 양국의 분단점령을 당하고 있는 이상 국제협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협조에 노력하였고, 앞으로 이 노력을 계속할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하여 국제협조의 노력도 공고한 민족단결이 있은 뒤에야 주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다." - 통일 독립기구 강화. 1948. 6. 7 -
▲  "통일이 없이는 독립이 있을 수 없고, 독립이 없이는 우리는 살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는 민족단결 뿐이다. 그러나 현시에 우리 조국이 미·소 양국의 분단점령을 당하고 있는 이상 국제협조를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제협조에 노력하였고, 앞으로 이 노력을 계속할 결심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의하여 국제협조의 노력도 공고한 민족단결이 있은 뒤에야 주효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다." - 통일 독립기구 강화. 1948. 6.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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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 <나의 소원>중에서 -
▲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 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 <나의 소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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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
▲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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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 작성에 김구 팀장 이선옥씨의 자료 해설과 자료 이미지 변환에 눈빛출판사 편집부 성윤미씨의 도움이 컸음을 밝힙니다.

태그:#김구#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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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결정적 국면 열어갈 범민련 27돌 기념대회

통일의 결정적 국면 열어갈 범민련 27돌 기념대회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1/27 [06:5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017년 11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범민련 27돌 기념식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017년 11월 26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조국통일범민족련합(이하 범민련) 결성 27돌 남측본부 기념대회가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에서 수백 명 참가자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결의차게 진행되었다.

이번 결의대회에서 가장 강조된 말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북미대결전',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이라는 말이었다. 

구체적 과제로는 반미자주, 평화협정체결, 반전평화, 남북공동선언이행투쟁 등이 강조되었다. 

 

▲ 2017. 11. 범민련 27돌 기념식 주요 참가 인사, 시계방향으로 이규재, 한기명, 박중기, 김영제, 원진욱(사회자), 한충목, 정현찬,김영표, 김창한, 노수희, 이창복, 권낙기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범민련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은 대회사에서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향한 우리 민족의 자랑찬 행군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며 "우리 민족은 미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국의 위상을 가지고 민족자주와 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미제와의 대결전에서 마침내 최종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3자연대 기치를 높이 들고 반미자주, 평화수호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하자."고 호소하였다.

 

이 의장은 특히 3자연대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년 초에는 27년 동안 한 번도 직접 만나서 진행하지 못했던 범민련 공동의장단회의를 실제로 만나서 진행할 것을 범민련 북과 해외본부 그리고 남측의 민족자주진영과 통일애국세력에게 제안할 것이다."고 밝히고 "이제 시대와 민족의 요구에 적극 부응하고자 범민련 남측본부의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도록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나가자."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격려사에 나선 통일광장 권낙기 대표는 "가장 엄혹탄 탄압을 이겨내 온 범민련"이감라고 높이 평가하고 "감성적 낙관주의에 빠지지 말고 늘 실천을 중심에 두는 범민련이 되자."고 조언하였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단체연대회의 박중기 명예의장도 격려사에서 "촛불 승리 후 범민련 결성 27돌을 맞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며 "촛불 시위는 4.19 이후 그 많았던 집회 중에서 그렇게 진지하고 사려 깊은  집회는 처음이었다."고 평가하고 "적폐청산은 국민의 요구, 시대의 요구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그 먹을 것도 없다던 북에서 핵무기를 개발했다. 이제 미국도 전쟁이 터지면 풀 한포기 남아날 것이 없게 된다. 미국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우리도 미국에 할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대사에 나선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도 "오늘날 70여 년 이어져 온 한반도의 전쟁구조, 분단체제가 요동치고 있다."며 "트럼프 전쟁책동이 엄중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도 전임 정부의 대북적대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하고 "한반도 전쟁구조의 갈등과 모순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이 격돌의 끝에서 반드시 평화체제, 통일된 한반도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이 땅 평화와 주권실현, 통일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라며 "언제나 통일의 길에서 거침없이 투쟁했던 범민련이 이 엄중한 국면에서도 크게 역할하시리라."는 기대를 표명하였다. 

 

▲ 리금철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이 2017년 범민련 결성 27돌 기념사를 남측본부에 보내왔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리금철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도 연대사에서 "지난 세기 90년대 출발의 닻을 올린 때로부터 범민련이 걸어온 장구한 로정은 민족자주 반전평화를 위한 길이었으며 민족 최대의 숙원인 조국통일로 향한 행로였다."고 평가하고 "반미대결전의 최후 승리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며 "우리의 범민련 남측본부가 남녘의 각계각층과 굳게 손잡고 민족문제에 대한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침략전쟁책동을 단호히 저지시키고, 조국통일의 새날을 안아오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서 언제나 선봉적 역할을 다해나가리라는 굳은 확신을 표명한다."며 많은 성과를 기대하였다. 

 

범민련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이 대독한 해외본부 연대사에서는 민족자주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연대사는 먼저 "트럼프 남한 행각은 한반도 위기 없이는 한미동맹이 유지될 수 없으며 한미동맹이 없으면 한반도 위기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일갈하고 "이는 한미동맹이 붕괴해야 주한미군이 철수하며,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미동맹이 붕괴한다는 이치를 역으로 설명해주었다."며 "반 트럼프 투쟁을 이제 본격적으로 반미반전평화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미국도 과거 제국들처럼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미국의 폴 케네지 말을 언급하며 "자주통일, 우리 민족끼리 기치 높이 들고 나가자,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면 민중을 중시하고 민족의 힘에 철저히 기반해야 한다.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다. 자기민족의 힘을 보지 못하고 민족허무주의에 빠지면 외세에 의존하게 되고 남북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협의해나가자."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1부 마지막 순서로 '민주항쟁의 촛불에서 반미항쟁의 촛불로'라는 제목의 영상이 상영되었다. 

 

▲ 2017년 범민련 27돌 기념대회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7년 범민련 27돌 기념대회 김창한 민중당 상임대표의 정치발언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부 결의대회에서는 새로 창당한 민중당 김창한 상임대표정가 "새로운 민족사를 열어내는 민족자주통일 대행진에 모두 나서자’ 정치발언으로 포문을 열었다. 

김 대표는 특히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외세공조에 있지 않고 민족공조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 참석한 이갑용 노동당 대표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이어 이갑용 노동당 대표도 "노동당은 작은 당이기는 하지만 노동해방과 함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당이다. 함께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투쟁발언에 나선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촛불정부 들어섰지만 한반도 평화, 자주와 통일이 오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적폐중에 적폐이며 양대 기둥적폐인 주한미군과 국가보안법 철폐 없이 통일이 올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제거하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엿다. 

하여 진보연대는 2018년 초 자주통일선포식을 갖고 2018년는 반드시 통일대회합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하였다. 특히 2018년 2월 3일 국가보안법 허무는 투쟁 선포식 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2018년을 자주통일 대전환기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범민련이 함께 해주기 바란다."는 연대투쟁의 뜻을 피력하였다. 

 

이어진 투쟁발언에서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미국의 전쟁위협이 심각하다."며 " 촛불을 든 심정으로 그날의 긴장감으로 이땅의 미국의 전쟁책동을 막고 노동해방 세상을 기어이 만들어 내자."고 호소하였다. 

그는 특히 "촛불정부에서도 노동자의 권리가 여전히 짓밟히고 있다."며 "적폐세력들이 반격을 가해오고 있다. 근로기준법 개악되고 이에 맞서 굴뚝시위도 계속 되고 있다."며 서로 힘을 모아 더욱 가열차게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이어 투쟁발언에 나선 김영표 빈민해방실천연대 공동대표도 "범민련만큼 박해와 탄압을 많이 받아온 단체는 없다."고 평가하고 "미치광이 트럼프가 10조 넘는 무기를 강매했다. 국회의원들 그런 국회연설을 하는 트럼프에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트럼프와 사진을 찍지 못해 안달이 난 꼴불견을 보여주었다."고 개탄하고 "초중고 무상급식을 13년나 실시할 액수가 10조 원이다. 6.15, 10.4. 이행으로 조국통일을 이루어내는 길에 함께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 2017년 11월 범민련 27돌 기념대회 희망새의 기념공연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결의발언이 끝나자 가극단 '희망새'가 나와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촛불승리고 반트럼투쟁까지 장국한 투쟁의 역사를 형상화한 가극공연을 진행하여 참가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결의를 다지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마지막으로 정현찬 전 전농의장 등이 무대에 올라 정세보고와 범민련 남측본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우리 민족끼리 반미공동투쟁으로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

"3자연대운동을 새로운 높이에서 활성화하여 범민련의 자기 역할을 다하자!"

"범민련을 강화하여 자주통일의 선봉적 역할을 다하자!"는 내용의 결의문을 모든 참가자들이 함께 낭독하며 뜨거운 결의를 다졌다.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결의를 다지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결의를 다지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결의를 다지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결의를 다지는 참가자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의 청년 참가자. 이들의 어깨에 통일의 미래가 달려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딸에게  행사 진행 내용에 대해 설명해주는 다정한 어머니와 앳된 자녀
▲ 2017. 범민련 27돌 기념대회에서 함께 통일노래를 부르는 엄마와 딸, 대를 이어서라도 기어이 민족의 혈맥을 이어내야 한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일제식민치하와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과 4.19, 5.18, 6월항쟁 그리고 촛불혁명까지 우리 민족 투쟁사를 관통하며 싸워온 원로 투사(자주시보 김병길 대표)가 범민련의 결의문 낭독을 감회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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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샌프란시스코 시 ‘위안부 동상’ 공식 승인

 Posted by: 편집부 in Headline, Topics, 국제 2017/11/23 23:29 0 355 Views BBC,

샌프란시스코 시 ‘위안부 동상’ 공식 승인 

-오사카 시, 샌프란시스코 시와 자매결연 끝낼 수 있다고 위협 

-위안부 실상 세상에 처음 알린 김학선 할머니 

 

BBC는 샌프란시스코 시가 시의회를 통과한 위안부 동상 설치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고 보도하며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동상의 의미와 상징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BBC는 샌프란시스코에 설치된 위안부 동상은 한국, 중국 및 필리핀 출신의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서 있는 세 명의 젊은 여성과 이 여성들을 바라보는 나이든 한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BBC는 세 명의 소녀상을 바라보는 나이든 할머니의 모습을 한 여성은 2차 세계대전 중 당시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성노예로서 강제로 일본 제국주의 군 위안소로 끌려가 경험한 것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김학선 씨를 나타낸다고 소개했다. 

 

또한 BBC는 샌프란시스코에 설치된 위안부 동상 설치와 공식 승인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을 소개했다. BBC는 일본 오사카 시가 위안부 동상의 설치를 막기 위해 자매결연까지 끊겠다고 위협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히로후미 요시무라 오사카 시장은 샌프란시스코 에드윈 리 시장에게 위안부 동상 설치와 공식 승인에 대해 항의하며 1957년부터 이어져 온 두 도시간의 자매결연을 끝낼 수 있다는 서한을 보냈다. 

 

아울러 BBC는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동상의 측면에 새겨진 글귀를 소개했다. 

 

“이 기념비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태평양 13개국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던, 완곡한 표현으로 ‘위안부’로 불리는 수십만 명의 여성들과 소녀들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BBC 보도 전문이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bbc.in/2zZjK0t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7/11/23/san-francisco-accepts-comfort-women-statue/ 

 

San Francisco accepts ‘comfort women’ statue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동상 공식 승인 The controversial statue depicts three young women from Korea, China and the Philippines. Image copyright GETTY 논쟁이 되어온 이 동상은 한국, 중국 및 필리핀 출신 소녀 세 명을 보여준다. San Francisco has officially accepted a statue representing the “comfort women”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for Japanese soldiers during World War Two. 샌프란시스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을 위한 성노예로 일하도록 강요받은 ‘위안부 여성들’을 상징하는 동상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The work depicts three young women – from Korea, China and the Philippines – standing in a circle holding hands. 그 작품은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서 있는 한국, 중국 및 필리핀 출신 세 명의 소녀를 묘사하고 있다. Similar statues around the world have angered Japan. San Francisco’s Japanese sister city, Osaka, has already threatened to cut ties over the move. 전 세계의 비슷한 소녀상들이 일본을 분노케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자매도시인 오사카는 이미 동상 승인 움직임에 대해 자매도시 협약을 끊겠다고 위협했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7/11/23/san-francisco-accepts-comfort-women-statue/ 

 

It’s estimated that some 200,000 women were kept in these military brothels. 약 20만 명의 여성들이 군 위안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ome of the women were willing, others were lured with the offer of paid work as cooks or cleaners and many were forced, a UN report said.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 여성들 중 일부는 자원했고, 일부는 요리사나 청소원 등의 임금 노동의 제안에 넘어갔으며, 그리고 상당수는 강제였다. They are thought to have been mainly from Korea, but also from China, Indonesia, the Philippines, and Taiwan. 그 여성들은 대부분 주로 한국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지만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및 대만 출신도 있다. The statue in San Francisco was set up privately in late September, but on Wednesday mayor Edwin Lee signed confirmation that the city council officially accepted the monument.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소녀상은 9월 말 민간에 의해 세워졌지만 수요일 에드윈 리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시 의회가 공식적으로 그 기념비를 받아들였다고 확인 서명했다. Kim Hak-sun was the first woman to speak out about her experiences as a comfort woman. Image copyright GETTY IMAGES 김학선 씨는 위안부로서 자신의 겸험을 처음 이야기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An inscription on the side of the statue reads: “This monument bears witness to the suffering of hundreds of thousands of women and girls euphemistically called ‘Comfort Women,’ who were sexually enslav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ed Forces in thirteen Asian-Pacific countries from 1931 to 1945”. 동상 측면에는 “이 기념비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아-태평양 13개국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성노예가 되었던, 완곡한 표현으로 ‘위안부’로 불리는 수십만 명의 여성들과 소녀들의 고통을 증언하고 있다.” A fourth figure stands nearby, depicting an elderly woman meant to be Kim Hak-sun, the first woman to speak out about her experie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during the war. 전쟁 당시 일제 식민지하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한 첫 번째 여성인 김학선 씨를 나타내며 할머니모습을 그린 4번째 인물이 옆에 세워져 있다. Similar memorials have been placed elsewhere, most notably in South Korea. 유사한 기념물들이 세계 곳곳에, 특히 한국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7/11/23/san-francisco-accepts-comfort-women-statue/ 

 

In January, Japan temporarily withdrew its ambassador to South Korea over a new statue outside the Japanese consulate in South Korea’s port city Busan. A statue also stands outside Japan’s consulate in Seoul. 지난 1월 일본은 한국 항구 도시 부산의 일본 영사관 밖에 새로운 동상이 설치된 것으로 인해 한국 주재 일본 대사를 잠시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Japan says the statues in South Korea violate a 2015 deal, which agreed that Japan’s reparations would “finally and irreversibly” resolve the issue – but many Koreans view that settlement as inadequate and the issue continues to plague ties. 일본 정부는 한국의 소녀상들이 2015년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당시 일본이 지불하는 배상금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임에 합의했다고 말하지만,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 합의를 부적절하다고 여기며 이 문제는 계속해서 양국의 협력 관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 But there are other statue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as well as in Australia, which saw its first “comfort woman” statue set up in 2016 – these have caused varying degrees of tension. 그러나 2016년 첫 번째 “위안부” 동상이 설치된 오스트레일리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에 다른 소녀상들이 있으며, 이들 소녀상들은 각종 긴장 관계를 초래했다. In this case Osaka mayor Hirofumi Yoshimura wrote to his San Francisco counterpart to protest against the statue and said he might end the sisterhood between the two cities, which dates back to 1957. 이번 경우에 히로후미 요시무라 오사카 시장은 샌프란시스코 시장에게 위안부 동상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며 1957년부터 이어져 온 두 도시간의 자매결연을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번역 저작권자 :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 주십시오.]

[저작권자: 뉴스프로, 기사 전문 혹은 부분을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https://thenewspro.org/2017/11/23/san-francisco-accepts-comfort-women-sta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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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 수괴'로 불린 노동자, 그와의 마지막 식사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1/26 12:42
  • 수정일
    2017/11/26 12:42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권을 먹다③]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과 오리고기

17.11.26 11:38l최종 업데이트 17.11.26 11:38l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2014년 11월 말 새벽, 잠결에 전화기의 진동을 느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겨우 눈을 떠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역시...

"여보세요."
"조사관님....아버지가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 말 뒤로 들려오는 울음소리.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결코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었다. 부정하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불편한 순간이 다가왔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흐느낌을 한참 동안 듣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힘을 내라는 말과 어머님 잘 위로해 드리라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례식 장소를 물어본 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순간,

"혹시 장례대행업체 아시는 곳 있으신가요? 아버지 장례식장도 아직 정해지지 못했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래요.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알아보고 전화 줄게요. 알겠죠?"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가족의 죽음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자신을 추스르기도 벅찬 상황에서 망자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 것이 어디 쉬우랴. 곧바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장례대행업체를 정했다. 다시 조금 전 걸려왔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업체연락처를 알려준 뒤 연락이 오면 장례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들려오는 고맙다는 말.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시간에 나에게 부탁하는 상대방이 더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난 고작 전화 몇 통 돌렸을 뿐인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큰 슬픔과 상실감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왜 하필 지금일까. 조금만 더 견뎠으면 그렇게 바라던 결과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강철서신 그리고 정형근

1986년 12월 겨울.
그날은 구로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그가 노동운동을 하며 만난 아내와 함께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가 작성한 '선진적노동자의임무'라는 문건을 친구가 말없이 가져가 소위 '강철서신'이라는 이름의 팸플릿에 끼워넣어 세상에 뿌렸고,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주사파의 수괴'가 되어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게 된 것이다. 

40여일 가까운 무자비한 고문을 견뎌내던 그 앞에 나타난 것은 정형근이었다. 굴복하라는 말을 거부하자 그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폭력이 쏟아졌다. 그의 폭력이 멈춘 것은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던 87년 1월이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불안신경증, 만성두통, 근육신경통 등을 앓고 있다고 했다.

조사 결과 그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불법감금, 고문이 확인되었다. 그는 위원회의 결정문을 가지고 곧바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에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4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재심일 결정되던 날 수화기 너머로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고 심진구가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쥐 그림
▲  고 심진구가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쥐 그림
ⓒ 심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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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그가, 죽었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자 국화꽃 사이로 환하게 웃는 그의 사진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아내와 딸들이 서 있었다. 간단히 목례 후 고인에게 예를 갖춘 후 유족에게 인사를 나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됐는지, 왜 갑작스럽게 죽었는지 묻지 못했다.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떡이며, 전이며, 밥과 국을 가져다 주셨다. 그가 없는 식탁을 마주하니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그날의 식당이 떠올랐다.

2011년 법원에서 재심결정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산에서 그와 그의 아내를 만났다. 조사실에 만날 때와는 다르게 작업복 차림의 두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느라고 힘드셨죠? 식사 때도 되었으니 어디 가서 같이 식사해요. 아직 식사 전이시죠?"
"네."

그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봉고차가 하나 서 있었다.

"차에 물건이 실려 있어서 좀 불편하실 거예요."

문을 열자 봉고차 뒤에는 견과류가 가득 실려 있었다. 

"애들이 이제 대학생인데 먹고 살려니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여기저기 차 끌고 다니면서 파는 거예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변명하듯 구구절절 풀어 놓는다. 가난은 왜 늘 변명이 되어야 하는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고기 집에 도착했다. '느티나무'라는 간판의 식당 앞에 도착하자 뭘 좋아하는지 묻지도 않고 왔다며 미안해했다.

"시골 출신이라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식당에 들어서며 걱정하는 부부에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으며 오리백숙과 구이를 주문했다. 아내는 남편이 오리고기를 좋아해서 자주 들른다고 한다.

"원래는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더욱 챙겨 먹고 있어요. 건강에 좋다고 하고 소화도 잘 된다고 하니까.."
"부부가 같은 음식을 좋아하니 보기 좋네요."

아내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동그랗고 커다란 밝은 달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고기 집에 도착했다.
▲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고기 집에 도착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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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식사하며 그동안의 어려웠던 이야기,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상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안기부에서 고문 받고 재판에 넘겨져 집행유예를 받고 나올 때만 해도 함께 고생했던 동지들이 고생했다며 위로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나와 보니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거예요. 내가 집행유예로 나온 것이 안기부와 무언가 모종의 합의를 하거나 동지의 이름을 팔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박쥐같은 처지가 되어 아무 곳도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럴 때마다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녔다. 안산에서 고문이나 통일 관련된 행사를 하는 곳이면 안 가본 것이 없었다.

"한양대 앞에서 고문 관련해서 강연하기 위해 갔었는데 경찰이 행사장을 원천봉쇄 했더라고요. 행사장으로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하다가 결국 전투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엄청나게 맞았어요. 경찰들에게 맞다가 점점 의식을 잃어갔어요. 

그런데 파란 하늘에 갑자기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거예요. 동그랗고 커다란 밝은 달. 왜 이런 대낮에 저렇게 큰 달이 떴지 하고 생각하며 자세히 쳐다보았더니 달덩이 같던 그게 제 딸아이 얼굴이더라구요. 아내가 그 자리에 와서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안고 경찰과 싸우고 있던 거예요. 그 환하고 밝았던 보름달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그와 마주한 마지막 식사였다.

"차라리 재심 결정이 나지 않았다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아내가 다가와 앉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가신 건지?"
"사실 주변에는 알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몇 해 전부터 암을 앓고 있었어요. 병원치료와 민간요법을 병행했는데 아시다시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아서 변변한 치료는 엄두도 못 냈거든요.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왜 나에게 죄송해야 하는지 몰랐다. 미리 알렸던들 내가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내가 죄송할 뿐이었다.

"남편은 여기도 저기도 서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너무 큰 고통을 느꼈나 봐요.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하소연 해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재심결정이 나자 긴장이 풀렸을까요. 갑자기 몸이 더 안 좋아지더라구요. 초조했었나 봐요. 생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차라리 재심결정이 나지 않았다면 더 버틸 수 있었을까요?"

그랬다. 순리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조급함과 초조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누구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시간이 삶을 지탱하고 의지하게 되는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그때 오리고기 집에 자주 가셨던 것도...?"
"네, 암 환자들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하더라구요. 자주도 못 가고 한 달에 한두 번 갔는데 참 좋아하대요. 다른 건 못해줘도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오리고기 집에 가자고 할 때는 두 말 없이 따라갔어요."
"사모님도 좋아하시니 그래도 다행이었어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보며 웃어보였다.

"사실 저 같이 몸이 찬 사람들은 오리고기가 맞지 않는다네요. 오리고기 집에 다녀오면 꼭 배탈이 나더라구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려야 해요. 그래도 제가 음식을 피하기라도 하는 내색을 비추면 남편이 미안해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싫은 기색은 안 했어요. 먹으면 화장실을 들락거릴 걸 알면서도요." 

그녀는 웃으며 오리고기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날 장례식장을 다녀오며 왜 미안함은 늘 우리 같은 피해자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남은 자의 몫인 것인가? 먼저 간 자는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가난과 사회적 편견을 미안해하고, 남은 자는 왜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억울하게 먼저 간 자에 대한 미안함을 떠안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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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

‘국가보안법 70년 적폐 청산’ 장경욱 변호사 강연회

적폐청산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가 23일 올해로 69년 동안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70년 적폐 국가보안법 청산’을 주제로 강연회를 마련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인 장경욱 변호사(민변 통일위원회, 미군문제연구위원회 회원,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의혹사건대응 TF팀장)를 강사로 초청해 진행된 이날 강연은 모처럼의 주제여서인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 피해자다"

장 변호사가 청중에게 물었다. “여기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겪어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드문드문 손을 드는 사람들. 이어 강사가 말한다.

"북을 주적으로 규정해야만 하는 것을 강요받는 사회가, 그리고 북의 인권을 비난하며 우리 인권이 더 낫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입니다."

"탈북자들을 데려다가 고문하고 때려서 간접을 조작하는 사회, 유우성씨 사건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며 허위자백을 받아내 조작간첩을 만들기 위해 국정원 등이 우리의 눈을 피해 아직도 고문과 구타 등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법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란 강사의 설명에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중의 질문도 나왔다. 북이 판문점을 통해 탈북한 청년 군인에게 총을 마구 쏘아대던 장면을 보며 북이 인권이 있는 사회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질문에 장 변호사는 “휴전 중이고 분단돼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극으로 봐야 한다. 누군가 거꾸로 북으로 넘어가려고 하면 마찬가지로 남의 군인에게 총을 맞지 않겠느냐. 분단체제에서 발생하는 안타까운 문제이며 우리 모두가 사실 분단의 피해자인 것”이라며 답했다.

국가보안법은 노동운동의 발전도 가로막았다

이날 강연엔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들, 그리고 사회변혁노동자당 당원들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도 함께했다. 따라서 노동운동에 미친 국가보안법의 영향을 묻는 질문도 나왔는데 강사는 “활발한 운동이 있는 곳에 국가보안법의 탄압이 있었다”며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어김없이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씌워 탄압하려 했다”고 답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뒤풀이, 영상 등 잘 준비된 강연

강연의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적잖은 사람들이 새벽녘까지 뒤풀이를 이어가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또한 강사와 참가자들은 국가보안법 강연이 오랜만이었음에도 영상 등을 통해 내용을 효과적으로 알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을 하였다.

반송남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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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패배를 앞둔 미국’ 강조

북, ‘패배를 앞둔 미국’ 강조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7/11/26 [02: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은 마국이 패배를 앞두고 가련한 몸짓을 보이고 있다고 조소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북은 미국이 조.미대결전에서 패배를 앞두고 가련한 몸짓을 보이고 있다고 조소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5일 논평에서 최근 조.미 핵대결에서 대참패를 당한 미국의 가련한 몰골이 특대소식으로 세계보도계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중앙통신 논평은 러시아 빠뜨리오띄 모스크바가 영토로 보나 인구 수로 보나 조선은 크지 않은 나라이다이러한 조선이 지금까지 미국의 핵위협을 가장 극심하게 받아왔다세계최초의 핵보유국세계 최대의 핵무기보유국인 미국은 남조선에 수많은 핵장비들과 핵무기를 배비하고 해마다 남조선에서 팀 스피리트을지 포커스 렌즈 등 각종 핵전쟁연습들을 감행하였으며, 지어 조선을 핵선제공격대상으로 공식 선포하였다.”는 보도를 게재했다.

 

, “이로부터 조선이 택한 길이 바로 자위를 위한 핵보유의 길핵억제력 강화의 길이었다.”며 미국의 핵위협종식을 위해 핵을 보유한 조선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지역의 안전보장을 위해 수소탄시험까지 단행하여, 세계 6대핵강국의 지위를 당당히 차지하였다.”고 말한 소식도 전했다.

 

이어 미국의 선택은 조선과 대화를 진행하고, 동북아시아지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뿐이라고 한 이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미국 케이토연구소 상급연구원 밴도우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미국에 있어서 현실적이고 현명할 것이라는 소식도 실었다.

 

한편 영국신문 데일리 스타미국신문 더 힐 등은, 미 전략군 사령관 죤 하이튼이 북조선에 대한 트럼프의 핵공격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소식과, 미국의 많은 망사용자들이 이를 지지해 나선 데 대하여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다.”고 알렸다.

 

아울러 프랑스의 AFP통신은 지난 14일 로버트 켈러 전 미 전략군 사령관에 이어 죤 하이튼 미 전략군 사령관도 대통령의 위법적 핵공격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는 같은 입장을 밝힌 것은 미국 대통령의 핵무기 사용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국회의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고 평하였다.”고 밝혔다.

 

논평은 미국 등 유수 언론들의 미국 비판 소식을 전하며 국제사회가 평하듯이 미국이 시대착오적인 대조선 적대시정책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세계 유일 초대국에 차례지는 수치와 파멸의 대가는 더욱더 커질 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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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는 잊어라, 이제 미국의 정치권력은 ‘실리콘 밸리’에서 나온다

Voice of the World / 편집 : 이정무 기자
발행 2017-11-26 10:18:02
수정 2017-11-26 10:18:02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첨단기술기업들의 로고 -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구글, 트위터, 페이팔, 페이스북.
첨단기술기업들의 로고 -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구글, 트위터, 페이팔, 페이스북.ⓒ민중의소리
 

배리 린 박사는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인 뉴아메리카 재단(the New America Foundation)에서 지난 15년간 점점 커지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회사들의 ‘힘’을 연구해 왔다. 린 박사에게 그 15년 중 14년은 아주 괜찮은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주에 해고됐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연구가 구글이나 페이스북, 아마존과 같은 IT 거인들의 독점을 규제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자, 뉴아메리카 재단의 최대 후원자 중 하나인 구글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게 린 박사의 분석이다.

공개된 이메일을 보면, 뉴아메리카 재단은 린 박사의 비판이 모금을 어렵게 할까봐 걱정했던 것 같다. 뉴아메리카 재단의 앤머리 슬라터 대표는 “정말 중요한 핵심 분야 몇몇에서 구글과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려고 재단이 현재 노력 중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지원금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라는 이메일을 린 박사에게 보냈다.

슬라터 대표는 린 박사가 구글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해고됐다는 것을 부인한다. 하지만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과 에릭 슈미트 대표가 1999년 이후 뉴아메리카 재단에 무려 2천1백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슬라터 대표의 말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슈미트 알파벳 대표가 수년간 뉴아메리카 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했고 뉴아메리카재단의 대회의장 이름이 “에릭 슈미트 아이디어 연구실(Eric Schmidt Ideas Lab)”이기도 하다. 슬라터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다.

대형 은행과 거대 제약회사, 그 뒤를 이은 실리콘 밸리

싱크탱크를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가장 강력한 기업들이 정책입안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기업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백악관에서 불과 1마일 떨어진 정치적 권력의 ‘기지’에서 압력을 주로 행사한다. 로비업계의 심장부인 워싱턴 D.C.의 K-스트리트에서 말이다.

K-스트리트는 싱크탱크 뿐만 아니라 영악한 기업의 로비스트들과 그들의 끄나플들, 그리고 각종 이익단체들로 가득 차 있다. 로비스트들은 자신의 사적 이익이 법률과 규제에 반영되도록 국회의원들의 주위에 맴돌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대형 은행들과 거대 제약회사들이 재력을 바탕으로 수십 년간 워싱턴에서 큰 힘을 휘둘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뛰어넘은 후발 주자가 있다. 바로 실리콘 밸리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5대 첨단기업들은 워싱턴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해 현재는 월가보다 무려 2배나 되는 로비자금을 쓴다. 구글과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그리고 아마존은 작년 한해에만 워싱턴에 4천9백만달러의 로비자금을 지출했고, 실리콘 밸리 임원과 정부 고위직을 오가는 회전문 인사는 일상화 됐다.

첨단기술회사들이 국회와 늘 이렇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 엄청난 부와 시장점유율을 확보했다. 하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선구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는 1997년에 단지 2백만 달러의 로비자금만 썼다. 워싱턴으로부터 거리를 뒀던 것이다.

하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썬마이크로시스템스, IBM, 노벨을 포함한 경쟁사들의 로비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클린턴 정부의 반독점 기관으로부터 관심을 받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운영체제의 독점을 이용해 자사의 익스플로러 브라우저를 강매해 경쟁사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혐의로 마이크로소프트를 고발했다.

수년간 이어진 법정 공방 끝에 마이크로소프트는 경쟁사들의 소프트웨어가 좀더 쉽게 윈도우 운영체제에 통합될 수 있도록 강제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이후 더 조심스럽고 덜 공격적으로 기업을 운영했다. 애플과 구글이 꽃을 피운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기념비적 소송으로 실리콘 밸리의 첨단기업들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정계를 외면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이 소송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의 전 CEO이자 노벨의 CEO로 마이크로소프트의 공개적 거세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에릭 슈미트 알파벳 대표에게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슈미트는 이 교훈을 가슴깊이 새긴 채 2001년 구글의 CEO로 발탁됐다. 슈미트의 주도로 구글은 국회에 친구를 만들고 정책입안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로비자금을 크게 늘렸다.

구글은 2003년에 로비자금으로 겨우 8만 달러만 썼다. 그러나 지금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은 다른 그 어떤 회사보다 많은 로비자금을 쓴다. 2016년에는 1천5백만 달러를, 2017년엔 상반기에만 9백5십만 달러를 썼다. 게다가 알파벳은 2013년에 국회에서 1마일도 채 안 되는 곳에 백악관만한 크기의 사무실을 장만했다.

워싱턴에 돈을 쏟아 붓는 것은 구글 혼자가 아니다. 페이스북과 아마존, 애플 그리고 큰 코 다쳤던 마이크로소프트도 마찬가지다.

일리노이 대학의 로버트 멕체스니 커뮤니케이션학 교수는 “이들은 돈과 로비스트들로 워싱턴의 양쪽을 뒤덮고 있다”며 “실리콘 밸리의 억만장자들과 CEO들은 공화당 관계자를 만날 때는 자유지상주의와 세금 인하, 탈규제를 지지하는 코크 형제의 친구로, 민주당 관계자를 만날 때는 대마초를 피우고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쿨한 활동가로 변신한다”고 꼬집었다.

이 거대 첨단기술 회사들이 워싱턴 최고의 파티들에 초대받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점(oligopolies)을 지키기 위해 거금을 쓴다.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독과점 등 반경쟁적 행위에 대한 규제나 소송 등으로 세금 인상, 인터넷 중립성 강화, 네티즌의 사생활 보호 강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오바마의 선거운동에 깊게 관여했던 슈미트 알파벳 대표는 올 1월에 대통령이 “악랄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이런 우려 때문에 결국 도널드 트럼프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난 6월에 그는 그 동안의 어조를 바꿔 트럼프 정부 덕분에 “새로운 기회가 폭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발간된 ‘Move Fast Break Things:How Facebook, Google, and Amazon Cornered Culture and Undermined Democracy’의 저자 조나단 태플린은 “이런 사람들에게 정치는 거래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백악관 행사에 참석한 슈미트 알파벳 회장.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을 이끌고 있는 슈미트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를 6월 들어 정상화했다. 2017.6.19
백악관 행사에 참석한 슈미트 알파벳 회장.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을 이끌고 있는 슈미트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를 6월 들어 정상화했다. 2017.6.19ⓒAP/뉴시스

소프트 파워

실리콘 밸리의 로비자금 사용은 공개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는 “소프트 파워”를 통해 불투명한 방식으로도 정책입안자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싱크탱크와 연구소, 무역협회 등 정부에게 로비를 하거나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포함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을 포함한 여러 실리콘 밸리 회사에서 일했던 한 워싱턴 관계자는 “정말 혼탁한 세상”이라며 “기부를 받은 싱크탱크들은 하나같이 규제가 온라인 상권을 죽일 것이라는 백서를 발표한다”고 말했다.

최첨단 회사들이 워싱턴의 비위를 맞추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방법 중 또 하나는 수억 달러가 드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다.

구글이 지난 8월초 시실리 서남쪽에서 3일간의 비밀 콘퍼런스를 연 것이 일례다. 주요 기업인들은 구글이 제공한 전용 헬기나 슈퍼 요트를 통해 모여들어 배우 엠마 왓슨과 숀 펜, 영국의 헨리 왕자와 엘튼 존과 어울렸다. 물론 이 콘퍼런스의 목적은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세계의 주요 문제와 정책, 인터넷의 미래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와인 테이스팅과 스파 방문 중간중간에 말이다.

실리콘 밸리의 임원들과 정부 고위직들 간의 회전문 인사도 만연하다. ‘Campaign for Accountability’에 따르면 구글 한 기업만에도 오바마 정부 출신이 무려 183명 영입됐고, 58명의 구글 출신이 워싱턴으로 이직했다.

모호하면서 훈훈한 브랜드 이미지

엄청난 권력과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첨단기업들은 가족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악해지지 말자 (Don’t Be Evil)”거나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든다 (We’re Bringing the World Closer Together)” 등을 모토를 내건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말이다.

회전문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인 제프 하우저는 “대중이 첨단기술을 월가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 생각하게 하도록 PR(public relations)을 통해 노력한다”며 “이를 통해 최첨단 기술밖에 모르는 자신들이 전 인류를 위해 뼈빠지게 일하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 회사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가장 비정한 기업가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태플린은 “페이스북이 얼마나 훈훈한 기업인지 스냅채트 직원들에게 물어보라”며 무자비한 기술 모방으로 스냅체트를 부도위기로 내몬 페이스북의 행태를 꼬집었다. 그는 “첨단 대기업들이 회사 하나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것을 해내고 만다”고 단언했다.

태플린은 첨단 대기업들이 동성애자들의 권리나 인종차별, 이민 등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시각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 기업들의 총수나 투자자 대부분은 ‘자유지상주의자’로 국가와 정부의 개입에 반대한다고 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걸림돌이며 규제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이념적 뿌리

인터넷 회사들은 인터넷 초창기 시절이었던 1990년대에 법망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으로 실리콘밸리에서 급성장했다. 인터넷 회사들의 테크노-자유지상주의의 바탕에는 국경 없는 사이버 공간이 물리적 세계와 별개로 존재하며, 물리적 세계의 규율이 가상적 사이버 공간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믿음은 전자프런티어재단(EFF)이 1996년 발표한 “사이버 공간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Cyberspace)”에 잘 나타나 있다.

“산업세계의 정권들, 너 살덩이와 쇳덩이의 노쇠한 거인들아. 나는 정신의 새 고향, 사이버 공간에서 왔노라. 미래의 이름으로 너희 과거의 망령에게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너희는 환영받지 못한다. 네게는 우리의 공간을 통치할 권한이 없다.”

EFF의 창단 멤버 존 페리 바틀로가 내놓은 선언이다. 어떠한 정부 개입도 반대한다는 입장이 선명하다.

첨단기업의 급속한 성장에는 빌 클린턴 정부의 자유시장주의 이데올로기도 일조했다. 클린턴 정부가 디지털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해 인터넷 회사의 세금 부담을 줄인 것이다.

정부의 개입이 없자,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이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기업이 디지털 경제의 대륙 하나씩을 완전히 지배하게 됐다. 구글이 검색을, 페이스북이 SNS를, 아마존이 온라인 쇼핑을 차지했다.

이들은 돈을 버는 족족 더 많은 재산가치가 있는 기반시설 - 이를테면 데이터센터, 고객데이터, 알고리즘, 경쟁기업의 인수 또는 모방 - 들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더 규모가 있고 경쟁력이 있는, 그래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섰다.

그럼에도 이들 첨단기술 회사들은 ‘고객은 언제든 다양한 서비스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며 자신들이 독점기업임을 부인한다.

“경쟁은 단지 한번의 클릭일 뿐(Competition is just a click away)”이라고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대표하는 인터넷 협회의 마이클 베커만이 주장한다. “한 회사의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웹사이트나 앱을 사용하는 등 아주 쉽게 다른 회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커만은 “마이스페이스(MySpace)가 독점적 지위를 잃는 날이 올까?”라는 제목의 2007년 가디언지 기사를 언급하며 거대 기술기업이 얼마나 빨리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마이스페이스의 최대 사용자수는 1억 명에 불과했다. 지금 페이스북의 사용자수는 그 20배에 이른다.

맥체니는 “그건 완전 개소리”라며 “아인 랜드(Ayn Rand, 이기주의를 미덕으로 간주한 소설가)의 광팬인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신뢰할 만한 모든 경제학자는 이들이 독점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역사적으로 기업 로비의 영향을 덜 받는 유럽의 기관들은 애플과 아마존의 탈세를 조사해 애플에게 145억 달러의 추징금을 부과하고 페이스북에게 왓츠앱과의 합병 과정에서 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게 했다. 일련의 법적 대응으로 첨단기술기업을 제재해 온 것이다. 이는 이들 첨단기술기업들이 (독점을 통해)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유럽은 또 지난 6월의 기념비적 반독점 소송에서 구글에게 약 3조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구글이 검색 결과에서 자사의 서비스를 우대했다는 이유였다.

미국 연방무역위원회(FTC)도 유럽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160페이지에 이르는 FTC의 보고서에는 구글의 검색처리 방식이 “소비자, 온라인 검색의 혁신, 그리고 광고시장에 큰 피해를 초래했다”고 밝히며 정치인들에게 구글을 제소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구글의 독점방지법 위반 사실을 확인하고도 만장일치로 이를 무혐의 처리했고, 구글이 심각한 제재 없이 자체적으로 검색처리 방식을 수정토록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확실한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구글이 워싱턴에서 로비비용으로 2천5백만 달러를 쓴 것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제재냐 혁신이냐

태플린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유럽이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옥죄는 건 미국 기업에 대한 편견과 지나친 관료주의 탓이라는 주장이다. 그 때문에 유럽의 혁신 능력이 위축되고 유럽 자체의 정보기술 대기업 탄생이 가로막혔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일례로 베커만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눈부신 성장이 미국의 느슨한 규제 덕분에 가능했다며 “성공적인 인터넷 회사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탄생해 성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빌 게이츠조차 1998년에 PC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것이 정부의 어떤 개입도 없이 이뤄졌다는 것이 매우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건 실리콘 밸리의 리더들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업이 탄생하고 성장한 기반에는 탄탄한 정부의 개입과 공적 자금이 있었다. 국가의 개입이 없었다면 구글을 비롯한 첨단기술 기업은 절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 정부는 이미 1960년대부터 ARPA(오늘날의 DARPA)를 통해 5대 첨단기술 기업들이 의존하는 장기적인 연구나 최첨단 기술 개발을 지원했다. 스탠포드 리서치 연구소는 혁신과 지역 경제 개발의 주축으로 지원받았고 결국 최초의 컴퓨터와 마우스, 그리고 초기 인터넷을 개발했다.

GPS부터 이동통신, 인터넷, 반도체, 시리(Siri)와 터치스크린까지 아이폰이 사용하는 모든 핵심 기술이 미국 정부, 미군의 연구와 금전적 지원 덕분에 탄생했다. 구글의 검색엔진 알고리즘도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지원으로 개발됐다.

“야심만만한 벤처사업가들이 인터넷을 발명했다는 것은 미신이다. 인터넷은 수십 년간 미국 중앙 정부가 독자적으로 발명하고 개발시켰다”고 맥체니는 지적했다.

미 정부는 3개의 역사적인 반독점 소송으로 독점을 해체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바꿨다.

이를테면 IBM이 메인프레인 컴퓨팅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던 1970년대에 정부는 소송을 걸어 IBM의 하드웨어 부문과 소프트웨어 부분을 분리하려 했다. 결국 IBM은 다른 회사들도 IBM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도록 허용했고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마이크로소프트도 반독점 소송을 당했고 이는 구글이 탄생할 공간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이야기는 다시 구글의 에릭 슈미트 대표로 돌아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작은 정보기술회사의 로비스트는 “슈미트는 역으로 이 상황을 이용할 줄 안다. 그는 구글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커다란 규모의 반독점 소송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티핑 포인트

미국 IT 거인들의 현 세대를 통제하려는 워싱턴의 노력은 지금까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곧 바뀔지도 모른다. 민주당이 ‘반독점’을 향후 4년간 추진할 핵심 정책 중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의 한 연설에서 엘리자베스 워렌 상원의원은 “이제 테디 루즈벨트(Teddy Roosevelt)를 따라 할 때가 됐다. 지금은 반독점 회초리를 집어들 때”라고 선언했다.

워렌 상원의원은 이미 작년 6월, 뉴아메리카 재단의 베리 린이 주최한 행사에서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이 “경쟁을 없앨”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며 이런 생각을 밝힌 바 있었다.

공화당조차 페이스북이나 구글이 일상에서 꼭 필요한 서비스가 됐기 때문에 이를 물이나 전기같은 생필품처럼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실리콘 밸리를 통제하려는 워싱턴의 의지는 커져간다. 하지만 그런 통제가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유럽의 어마어마한 벌금에도 불구하고 업계내에서의 구글의 압도적 우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한 관계자는 “인터넷에 대해 규제하려는 생각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게 구글을 느리게 만들수 있을까? 아마 (구글을 대리하는) 변호사들이야 돈을 많이 벌겠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규제가 시장 상황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찌되었건 가짜 뉴스의 확산과 개인 정보의 약탈, 자동화가 취업이나 세금 탈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여론은 바뀌고 있다.

맥체니는 이 IT 기업들이 현재의 경제상황과 긴밀히 연계돼 있다며 “경기 침체와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이 IT 기업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경제적, 정치적 힘을 정당화하기 어려워질 것”이라 내다봤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을 지켜보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의는 사그러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우저도 “언젠가는 대중이 곡괭이를 들고 이 회사들을 덮칠 것”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시위가 어디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겠지만 말이다.”

기사출처:Forget Wall Street – Silicon Valley is the new political power in Wash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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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유종 다람쥐 프랑스 천덕꾸러기 된 까닭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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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7/11/25 13:01
  • 수정일
    2017/11/25 13:01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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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유종 다람쥐 프랑스 천덕꾸러기 된 까닭

조홍섭 2017. 11. 24
조회수 2977 추천수 1
 
빙하기 고립 독립 종으로 진화, 남한 내에도 3개 집단 분화
1980년대까지 수백만 마리 수출, 라임병 숙주로 골치꺼리
 
s-1.jpg» 설악산에서 촬영한 다람쥐. 한반도 고유종일 가능성이 크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다람쥐가 바쁜 철이다. 숲 바닥에 떨어진 밤톨이나 도토리, 씨앗 등을 볼주머니에 가득 채운 뒤 땅속 깊숙이 파 만든 저장 창고에 들락거린다. 기온이 떨어지고 눈이 쌓이는 다음 달 중순께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다람쥐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비교적 흔하게 만나는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동물에 관해 잘 모른다. 한반도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다람쥐가 사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과거 다람쥐는 애완용으로 수백만 마리를 수출했고, 그곳에서 최근 라임병을 옮기는 침입종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국내·외 연구자들이 밝힌 다람쥐의 기원과 생태를 알아본다.
 
다람쥐는 한반도 고유종
 
지도-s.jpg» 다람쥐의 자생지(짙은 부분)와 도입 지역(옅은 부분). 출처: 조영석 박사(2014)
 
다람쥐는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와 중국 내륙,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유럽의 볼가 강부터 캄차카 북쪽까지 널리 분포한다. 이처럼 방대한 분포지역의 남쪽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한반도의 다람쥐는 형태나 습성 등에서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최근 수행된 일련의 분자 유전학 연구는 한반도 다람쥐가 별개의 종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가리킨다. 흔한 다람쥐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반도 고유종이라는 얘기다.
 
이무영 서울대 수의대 한국 야생동물 유전자원 은행 연구원(현 국립생물자원관 전문위원) 등 한국과 러시아 연구자들은 2008년 과학저널 ‘분자와 세포’에 실린 논문에서 한·중·러 3국 다람쥐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한 결과 처음으로 한반도 다람쥐의 염기서열 변이가 다른 것보다 11.3%나 다른 것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미토콘드리아 사이토크롬 비 유전자에서 이런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은 한반도 다람쥐가 새로운 종일 수 있음을 가리킨다”며 “신종 확인을 위해서는 핵 유전자와 형태적 분석 등 후속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후 고흥선 충북대 교수(현 명예교수) 등은 2010년 핵 디엔에이(DNA) 분석을 통해 한반도 다람쥐가 별도 종일 가능성을 뒷받침했고, 러시아 학자 등은 두개골 등 형태학적인 차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북한 다람쥐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이 큰 한계였다.
 
P6290416-1.jpg» 먹이를 찾고 있는 다람쥐. 강원도 홍천에서 촬영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총련 계열의 일본 도쿄 조선대학교의 정종률 교수가 돌파구를 열어줬다. 북한 다람쥐의 표본을 확보해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팀에 전달한 것이다. 이 교수팀은 교육과학부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북유라시아 다람쥐과 동물 3종의 비교계통지리’ 보고서(2013)에서 “국내 다람쥐 개체군의 유전적 구조는 인접 국가 중국, 일본, 몽골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며 “한반도에 서식하는 다람쥐 일부는 고유종임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대륙 다람쥐와 한반도 다람쥐의 분포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이 교수는 “애초 추정과 달리 경계선은 더 아래 양강도와 자강도 선으로 내려왔다”며 “결과적으로 북한에는 대륙형과 한반도형 두 종이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물론 한반도 고유종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려면 더 많은 북한 쪽 표본 조사가 필요하고, 대륙형과 한반도형 사이에 잡종이 이뤄졌는지 등 추가로 분석해야 할 일이 남은 상태다.
 
이처럼 한반도의 다람쥐가 다른 종이 된 것은 빙하기 영향인 것으로 과학자들은 본다. 빙하기 때 한반도와 중국 내륙, 극동 러시아 등의 피난처에 고립된 다람쥐가 유전적으로 분화한 뒤 간빙기 때 서식지를 확대한 뒤에도 한반도에서는 그 차이를 유지해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무영 박사팀의 연구에서 그런 분화 시기는 100만∼300만 년 전인 빙하기로 밝혀졌고, 남한 내에 적어도 2곳의 피난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무엇보다 이 연구에서는 남한 안에도 지역적으로 북부·중부·남부 등 3곳에서 다람쥐의 유전적 형태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실질적인 의미가 크다. 이들 지역 다람쥐의 겉모습은 같아도 오랫동안 격리돼 유전적으로는 다른 진화의 경로를 밟은 독특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다람쥐를 함부로 포획해 판매하거나 놓아주면 안 된다”며 “예컨대 강원도 다람쥐를 잡아 부산에 풀어놓으면 유전적으로 분리된 두 집단이 뒤섞이는 사태가 발생한다”라고 지적했다.
 
유럽 간 한국 다람쥐
 
P6301696-1-s.jpg» 동작과 모습이 귀엽고 깜찍한 다람쥐는 1960년대부터 애완동물로 많은 개체가 수출됐다. 조홍섭 기자
 
한반도 다람쥐의 생물학적 가치가 밝혀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다람쥐는 현재 환경부의 포획·채취 금지 야생동물로 지정돼 있지만 1980년대까지도 유력한 수출품이었다. 1962년 강원도 산 다람쥐 655마리가 마리당 1달러에 애완동물로 일본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1970년엔 30만 마리가 수출됐다. 남획이 문제가 되자 1971년 정부는 다람쥐 수출량을 한 해 10만 마리로 제한하고 수출용으로만 포획을 허용하자, 다람쥐의 인공사육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결국 산림청은 1991년 다람쥐 포획을 전면 금지했다.
 
다람쥐를 장기간 대규모로 수출한 나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다람쥐가 너무 늘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람쥐는 유럽의 100대 침입종 가운데 하나이다. 귀여운 애완동물로 수입한 다람쥐를 기르다가 싫증이 나 놓아주거나 일부러 공원에 풀어놓거나 탈출한 개체가 야생에 자리 잡았다. 유럽연합의 외래종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유럽 22곳에 다람쥐가 야생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11곳이 프랑스에 있고 나머지는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도시 근교 숲과 도시공원에서 쉽게 눈에 띈다.
 
벨기에-1.jpg» 다람쥐를 외래종으로 안내한 벨기에 정부의 누리집. 국토의 상당 부분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파리를 비롯해 북부에만 10만 마리가 사는 것으로 추정한다. 벨기에 브뤼셀에는 1980년 17마리를 공원에 풀어놓았는데 20년 만에 2만 마리로 불었다. 다람쥐가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라임병을 일으키는 보렐리아 박테리아를 진드기가 옮기는데, 다람쥐가 주요 숙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마우드 마르소 프랑스 국립 농학연구소 연구원 등이 과학저널 ‘플로스 원’ 2013년 1월호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파리 근교의 다람쥐는 전통적으로 진드기의 주요 숙주였던 들쥐보다 진드기 감염률이 8.5배나 높았다.
 
프랑스 등 유럽에 확산하는 다람쥐는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산으로 드러났다. 베노아 피사누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 생물학자 등이 2013년 과학저널 ‘생물학적 침입’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프랑스의 다람쥐 자생지 11곳 가운데 5곳에서 포획한 다람쥐의 유전자는 모두 한국산과 같았다. 연구자들은 유럽에서 다람쥐가 성공적으로 퍼진 이유가 널리 분포해 적응력이 뛰어난 종이기 때문으로 추정했지만 조사해 보니 분포지의 극히 한 지역인 한반도로 드러난 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수십만 마리에 이르는 워낙 많은 개체가 들어왔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Lee, MY,Lissovsky AA,Park SK,et al. Mitochondrial Cytochrome b Sequence Variations and Population Structure of Siberian Chipmunk (Tamias sibiricus) in Northeastern Asia and Population Substructure in South Korea[J]. MOLECULES AND CELLS, 2008,26(6):566-575.
 
이항, 북유라시아 다람쥐과 동물 3종의 비교계통지리, 교육과학기술부 2013.
 
B. Pisanu et al, Narrow phylogeographic origin of five introduced populations of the Siberian chipmunk Tamias (Eutamias) sibiricus (Laxmann, 1769) (Rodentia: Sciuridae) established in France, Biol Invasions (2013) 15:1201–1207. DOI 10.1007/s10530-012-0375-x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친근하지만 잘 몰랐던 다람쥐의 생태
다람쥐는 도토리보다 밤을 좋아한다
지하 1m 바닥 낙엽 깔고 차곡차곡 쌓아
 
클립아트코리아-s.jpg» 나무에 올라 열매를 따는 다람쥐. 다람쥐는 밤과 도토리 등 큰 열매뿐 아니라 작은 씨앗도 다량 거두어 저장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겨울잠을 앞두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가 많은 숲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조사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다람쥐는 도토리보다 밤을 좋아한다.
 
조영석 국립생물자원관 박사가 강원도 홍천에서 직접 조사한 결과 다람쥐 굴에서 나온 열매의 비율은 무게로 따져 밤이 77%로 압도적이었다. 이어 신갈나무 도토리가 12.1%, 벌노랑이 씨앗 2.1% 등이었다. 조 박사는 “숲에 압도적으로 신갈나무가 많고 드문드문 야생 밤나무가 있는 곳이어서 도토리가 많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며 “아마도 밤 쪽이 열량이 높아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람쥐는 나무를 잘 타지만 잠은 땅속에 판 굴에서 잔다. 겨울잠을 자는 곳도 땅속이다. 조 박사가 조사한 결과 다람쥐의 굴은 깊이가 1m 가까웠고 잠자리와 화장실, 먹이창고로 나뉘었으며 터널로 연결돼 있었다. 
 
흔히 다람쥐가 먹이를 감춘 곳을 잊어버려 결과적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효과를 낸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조 박사는 “그런 속설이 있지만 다람쥐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열매를 여기저기 파묻는 청설모와 달리 다람쥐는 한 곳에, 그곳도 깊숙히 저장하는데, 싹이 트기에는 너무 깊다는 것이다. 
 
둥지-s.jpg» 다람쥐 굴의 구조. N은 둥지, L은 화장실, C는 먹이 창고이다. 출처: 조영석 박사(2014)
 
 화전민들이 다람쥐의 저장고를 찾아내 숨겨놓은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과연 저장한 열매의 양은 얼마나 될까. 조 박사는 “저장한 열매가 상당히 양이 많다. 바닥에 낙엽을 깔고 꼼꼼히 쌓아놓았는데 큰 열매뿐 아니라 작은 씨앗도 다양하게 쌓여 한 되 이상의 분량이었다”라고 말했다. 
 
중국 다람쥐는 열매를 저장할 때 싹이 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갉아내는 등 사전 처리를 한다는 보고가 있다. 우리나라 다람쥐도 그런 행동을 할까. 조 박사는 “깍지를 뗀 도토리와 밤을 쌓아 놓았지만 전처리를 하지는 않았다”며 “여러 지역에서 더 많은 생태연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다른 야생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나라에 다람쥐 연구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번 현장연구에서 홍천 지역의 다람쥐는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람쥐의 겨울잠은 신진대사를 거의 중단하는 박쥐 등과 달리 기온이 올라가면 금세 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하는 ‘가짜 겨울잠’이라고 조 박사는 말했다. 저장한 열매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식량이다.
 
국립생물자원관은 다람쥐에 관한 기초연구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내년에 시민참여형 다람쥐 연구를 추진할 예정이다. 다람쥐가 전국 어디에나 분포하기 때문에 등산객 등이 휴대전화 앱에 다람쥐를 관찰한 시간과 장소 등을 입력하도록 하면 전국 차원의 ‘다람쥐 빅데이터’가 구축될 터이다. 이를 분석하면 지역마다 다람쥐가 어떤 생태계에서 언제 활동을 시작하는지 등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Yeong-Seok Jo & Hong Seomun & John T. Baccus, Habitat and food utilization of the Siberian chipmunk, Tamias
sibiricus, in Korea, Acta Theriol. DOI 10.1007/s13364-014-0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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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을 가릴 순 없습니다

테오도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박찬운  | 등록:2017-11-24 13:58:40 | 최종:2017-11-24 14:03: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세월호 선체에서 뼈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은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조직적 은폐사건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은폐라기 보다는 ‘발견을 알리는 시점에 대한 판단미스’로 보입니다. 유족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실수입니다. 그것은 은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은폐해서 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가요?

이걸 가지고 자유한국당이 들고 일어나 온갖 비난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얼굴이 두껍습니다. 욕을 못하는 사람의 입에서도 온갖 욕이 튀어 나옵니다. (이럴 땐 욕 잘하는 사람, 급 부러움!)

2년 전 오늘 세월호 특조위가 정권과 새누리당의 갖은 방해로 조사활동을 할 수 없을 때 글 하나를 썼습니다. 아주 점잖은 글이지요. 예술로 현실을 비판한 글이니까요. 오늘 그 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순 없습니다
- 테오도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데자뷔(déjà vu)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심리학적 용어가 언젠가부터 심심치 않게 지상(紙上)에서 보인다. 굳이 번역하면 기시감(己視感)이란 뜻이니, 처음 보는 것 같지만 어디선가 이미 본 것처럼 느끼는 정신현상을 말한다. 이 말이 일상용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는 유사한 대형사건이 우리사회에서 반복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림공부를 좀 한 사람들이라면 데자뷔를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저 사건 어디서 본 듯한데… 그게 무엇일까” 미술사에서 세월호의 데자뷔? 그게 무엇일까?

오늘 보는 바로 이 그림이다. 1819년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천재라 불리는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이란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19세기 회화 방에 들어가면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그림이다. 높이는 5미터에 가깝고 길이는 무려 7미터가 넘는 초대형 역사화다.

그림의 역사적 배경을 몰라도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서 작은 뗏목을 탄 사람들이 먼 바다를 향해 손을 들어 필사적으로 소리를 친다. 그림을 바라본 다음 가만히 눈을 감아 보라. 그들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살려줘요! 우리 여기 있어요! 제발 우리를 살려줘요!”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그런 아우성 중에도 뗏목에선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마지막 고비를 버티지 못하고 이미 세상과 작별한 사람들이 뗏목 위에서 엎어지고 자빠진 채 뒹굴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816년 7월 2일 아프리카 식민지 세네갈로 향하던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망망대해에서 난파되었다. 메두사호의 승선원 400명 중 250여명은 구명보트에 탔지만 나머지 선원과 승객 149명은 뗏목을 급히 만들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13일 동안 이들은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면서 죽음과 질병, 광기와 폭동, 기아와 탈수를 경험하고 마침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구출된 생존자는 오로지 15명.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지옥을 경험한다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제리코는 이런 절대 절명의 상태에 빠진 이들이 13일의 표류 끝에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이 그림으로 묘사했다.

세월호 사건의 첫 번째 데자뷔는 메두사호가 난파되면서 보여준 선장과 선원들의 태도였다.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선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메두사호의 선장이란 놈(!)과 고급선원 그리고 당시 이 배에 타고 있었던 귀족과 돈 많은 승객들은 배가 난파되자 자신들만 살겠다고 배에 실려 있던 구명보트에 먼저 타 버리고 말았다.

원래 선장과 고급선원들은 구명보트에 먼저 탄 다음 앞에서 뗏목을 끌고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험한 바다에서 그게 어렵다고 판단한 이 선장이란 놈은 뗏목으로 이어진 밧줄을 끊어 버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 대목이 세월호 선장 이준석과 몇몇 선원들이 보여준 행동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한국에 메두사호 선장과 선원들이 환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월호 사건에서 두 번째 데자뷔는 메두사호 사건이 일어난 전후의 정권의 태도다. 이 사건은 당시 나폴레옹을 쫓아내고 막 복귀한 부르봉 왕조로선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참사였다. 메두사호의 난파와 뗏목의 비극을 만들어낸 이 선장 놈은 애당초 선장될 자격이 없었던 자다.

선장으로 임명되기 전 20년 동안 거의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었음에도, 왕당파라는 이유로 거함을 지휘하는 선장이 되어, 남들 앞에서 거들먹대던 천하의 모자란 놈이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싣고 가는 정기여객선 세월호에 무책임한 비정규직 선장을 고용한 것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부르봉 왕조는 이런 무자격자를 선장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시민들이 메두사호 난파 내막을 안다면 정치적으로 부르봉 왕가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함구하고 더 나아가 은폐를 시도했다.

바로 이 같은 모습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대한민국에서 똑 같이 벌어지고 있다.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 가족과 국민의 여망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진상규명을 위해 만들어진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관련부서의 비협조, 집권여당의 방해, 여당추천 특조위원들의 정권에 대한 충성심으로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이승만이 친일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만든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대관식’ , 1808년. 제리코가 살아 있을 때 돈을 벌고 유명해지려면 이런 살아 있는 권력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우리에게 비극적 데자뷔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진실이 결국 승리한다는 단순한 이치와 위대한 한 화가의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쩜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게 바로 오늘 내가 이 그림을 소개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메두사호의 난파와 뗏목에서 일어났던 참상은 처음에는 가려지는 듯 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서서히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고 마침내 그 진상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정권이 진실을 가리려 했지만 그것을 영원히 가두지는 못했다. 아마 세월호도 그럴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 명명백백하게 사고의 원인과 사고 후 은폐의 내막이 드러날 것이다. 그게 역사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가의 작가정신을 이 그림에서 발견하는 것도 우리에겐 매우 소중하다. 당시 프랑스 낭만주의 사조 하에서는 위대한 영웅의 역사적 사건을 과장적으로 그리는 게 유행이었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1808) 같은 그림 말이다. 현재의 권력자를 높이 6미터가 넘고 길이가 9미터가 넘는 작품 정도로 그려야 돈도 벌고 유명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은 시대적 조류에선 한참 떨어진 그림이었다.

제리코라는 천재가 그런 길을 몰라서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그릴 것만 생각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술혼의 소산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당시 생존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참상의 실체에 다가갔다.

그는 뗏목에서의 생존자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지, 그런 그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아 광인들을 관찰했다. 심지어는 병원과 시체 안치소를 찾아가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관찰하면서 이들 피부의 색과 질감을 연구했다.

그 뿐 만인가. 그는 목수를 고용해 실제 크기의 뗏목을 만들고, 밀랍으로 사람 모형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철저한 고증 끝에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했을까. 진실을 자신의 예술혼으로 그려내야겠다는 작가정신, 그것이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애당초 탄생할 수 없었다.

이 그림은 1819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당시 부르봉 왕조 하에서는 당연히 예상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평가를 받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은 제리코의 이 그림을 위대한 진실의 승리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루브르에서 지금도 세계의 시민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리코라는 한 젊은 화가의 작가정신이 빚어낸 위대한 승리다.

우리 예술가 중에서도 지금 어딘가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버금가는 ‘세월호’라는 작품을 그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구일까?

(2015. 11. 24.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350&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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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김관진 석방, 법원이 해명해야 한다

구속적부심사에 단호했던 법원... 김관진 석방 판사의 '인용-기각 비율' 등 공개해야

17.11.25 09:27l최종 업데이트 17.11.25 11:32l

 

'구속적부심' 석방되는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이 결정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22일 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 '구속적부심' 석방되는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이 결정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22일 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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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이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에 개입한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구속되었다가 11일 만에 구속영장실질심사를 통해서 석방되었다. 대부분의 피의자들은 감히 구속적부심 청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구속적부심은 사실상 구속의 타당성 여부를 다시 한번 심사하는 것이어서 이를 받아들여 인용할 경우에는 영장발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꼴이므로 사정변경이 없는 한 쉽사리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오랜 경험에 비춰보더라도 폭행사건이나 사기 사건 등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 구속 후 합의를 하는 등의 사정변경이 없는 한 적부심을 통하여 석방되었던 예를 보지 못하였다. 더욱이 무죄를 주장하면서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건의 경우 방어권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적부심을 청구하였지만 여지없이 구속적부심이 기각되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자나 그 가족이 구속된 후 적부심을 청구하자고 말하면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말린다. 오히려 재판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신청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구속적부심은 피의자의 구속이 과연 합당한지를 법원이 다시 판단하는 절차로, 국민 누구나 수사기관으로부터 구속을 당하였을 때 관할법원에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적부심을 청구하였을 때 거의 모든 법원과 판사들은 구속 후 피해자와의 합의 등 사정변경이 없는 한 적부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기각한다. 변호인이나 구속된 피고인은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불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단골 메뉴로 들고 나온다. 그래도 대부분의 판사들은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단호하게 기각하는 것이 법원의 일반적인 태도다. 

법원은 왜 방어권 보장 이유로 '김관진 적부심' 받아들였나?

 

2016년도 사법연감을 들여다보자. 전국적으로 2437건의 구속적부심 청구가 이루어졌지만(체포적부심 15건 포함) 인용은 367건, 기각은 1980건, 나머지는 취하한 경우다. 인용한 367건이 어떤 이유로 인용된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 피해자와의 합의 등 사정변경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경우 164건을 신청해서 인용 32건, 기각 124건, 나머지는 취하하였다. 

그런데 김관진은 왜 쉽게, 그것도 일반인에게는 그토록 인색하던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적부심을 받아들였을까? 특히 국정농단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질서와 법치질서를 무너뜨린 중대 범죄다. 그것도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범죄다. 범죄혐의가 어느 정도 소명되면 결코 구속을 벗어날 수 없는 중한 범죄유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속적부심을 통해서 석방한다? 오랫동안 형사변론을 해왔고, 적부심도 수십 번 청구했던 필자로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신광렬 부장판사는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한 다툼의 여지가 있어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신광렬 부장판사는 다른 사건에서도 그러한 이유를 들어서 구속적부심을 쉽게 인용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다른 사건에서도 같은 논리로 구속적부심을 인용해 왔다면 형사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일관된 것이어서 납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해명이 있어야 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하지만 이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답변이 필요하다. 

일반 국민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실질이 다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신광렬 부장판사가 경북 봉화 출신, 서울대 84학번, 연수원 19기로 우병우 수석과 같은 경력의 소유자여서 혹시 국정원 댓글 사건을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헌정질서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민들 의구심 해소해야
 
'구속적부심' 석방되는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이 결정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22일 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 '구속적부심' 석방되는 김관진 전 국방장관 구속적부심에서 석방이 결정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22일 밤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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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회에 법원은 명백하게 밝혀야 한다. 신광렬 부장판사가 그동안 구속적부심 재판을 담당했던 사건이 몇 건이고, 그중에서 인용과 기각 비율이 어떠한지 말이다. 그리고 인용의 경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줄 의무가 있다. 또한 사법연감에 나온 구속적부심 인용례 중 사정 변경이 아니라 단지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적부심을 인용한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국민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야 한다. 

일반국민들에게 그렇게 인색했던 구속적부심 재판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 경계를 무너뜨린다면 법원 스스로 우리의 헌정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법원의 재판은 나름 최고의 재량권이 인정되지만 그만큼 책임도 무거운 것이다. 누가 뭐래도 모든 국민들에 대한 기준은 동일해야 한다. 헌법에서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평등권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국방부장관은 군인이 아닌데도 군형법 제94조의 정치관여 금지조항을 적용한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군형법이 군인과 군무원 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맞다(군형법 제1조). 그러나 국방부장관은 국방에 관련된 군정 및 군령과 그 밖에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사람이다(정부조직법 제33조제1항). 따라서 군인으로 봐야 하며 당연히 군형법이 적용돼야 한다. 군형법 제1조의 취지는 군과 관련되는 일을 하는 경우 군형법의 적용대상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변호인은 김관진에게 적용된 군형법 제94조가 위헌제청되어 있음을 이유로 불구속 재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법원이 위헌제청되었다는 사유를 들어서 구속적부심을 받아들였던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다른 국민들이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구속적부심 청구를 하였을 때, 신광렬 부장판사는, 그리고 법원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고 하지만 그 양심은 주관적인 양심이 아니라 법조적 양심이다. 객관성과 합리성이 담보된 양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양심은 일관되게 형평성 있는 적용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신뢰성을 상실한 판결이다. 더이상 국민들이 따라야 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의 자리는 헌법에서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며,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라는 것이다. 법관 한 사람이 주관적 감정에 따라서 판결을 하게 되면 판결의 신뢰와 사법부의 독립성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정범씨는 법무법인 민우 변호사이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입니다.

태그:#김관진구속적부심, #김관진신광렬, #신광렬구속적부심, #김관진석방, #김관진댓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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