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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단독]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조미덥·남지원 기자 zorro@kyunghyang.com
입력 : 2017.10.25 06:00:02 수정 : 2017.10.25 06:01:00

 

ㆍ황교안 ‘법외노조 알 박기’ 어떻게 했나
ㆍ교육부, 진보 성향 교육감 전임 허가 ‘직권 취소’ 통보
ㆍ전교조 반발…대선 교육 이슈 부각시켜 ‘이념전’ 유도

[단독]새 정부 서기 전에…“전교조 교사 한 달 내 조치” 징계 속도전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60·사진)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징계 지시와 교육부의 이행은 5·9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이 진행돼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황 전 권한대행 지시 이후 교육부와 전교조의 갈등이 불거지고 각 대선 주자들은 전교조 법외노조에 대한 입장을 내놓으면서, 이념적 이슈가 대선의 전면에 부각되기도 했다.

■ 대선 전 전교조 징계 속도전 

지난 대선을 앞두고 각 시·도교육청은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에 대해서 “대선 후 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이 재검토될 가능성이 크다. 차기 정권에서 다뤄야 한다”(조희연 서울시교육감 3월29일 기자회견)는 입장이 다수였다. 교육부에서도 정권 교체가 유력한 상황에서 전교조 전임자에 대한 조치를 대선 뒤로 미루자는 기류가 강했다. 

하지만 황 전 권한대행이 지난 3월30일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에서 “법외노조인 전교조 전임교사에 대한 일부 교육청의 휴직 허가는 불법이 명백한 만큼, 신속·단호하고 분명하게 조치할 것”을 지시한 후 상황이 급변했다. 4월 한 달 동안 빠른 속도로 징계가 진행됐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24일 경향신문에 공개한 온나라 국정관리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는 지난 4월 총리실에 황 전 권한대행 지시 이후 전교조 전임자 16명에 대해 허가 취소를 요구하거나 중징계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있는 교육청에 대해선 전임 허가에 대한 직권 취소를 통보했다. 전교조 전임자에게 연차를 허가한 학교장에 신분상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전교조 관계자는 “교육부가 압박을 넣기 전엔 전임 허가를 내주려던 전남·세종 교육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서울의 경우 교육부가 전임 허가를 직권취소했다”며 “기존 전임자는 다수가 직위해제되고, 시·도교육청 징계위에 회부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선 후 정권이 바뀌면서 각 교육청에서 징계가 실제 이뤄진 곳은 없다”고 했다. 

교육부는 황 전 권한대행의 ‘전교조에 예산 지원 중지’(4월6일 국정현안 관계장관회의) 지시에 대해서도 “4월14일 각 시·도교육청에 관련 법령에 따른 엄정한 예산 집행을 요구했다”고 총리실에 보고했다. 

■ 대선을 전교조 이념전으로 

교육부의 징계 속도전에 전교조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는 대선의 교육 분야 핵심 이슈로 부각됐다. 황 전 권한대행이 전교조 문제를 이슈 중심으로 만들어 대선을 이념전으로 이끈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대선 주자들은 전교조 문제를 놓고 엇갈렸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캠프는 당시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보겠다”며 “국제사회가 전교조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3권을 보장한 헌법과 노동조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교조 합법화에 가까운 의견이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면서 입장 표명은 유보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교원노조법 개정, 법외노조 통보 취소 등의 방법으로 전교조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교조에 대한 비판적 논조를 확고히 한 것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였다. 홍 후보는 4월9일 언론 인터뷰에서 “사회 좌편향을 이끄는 전교조를 반드시 응징하겠다”면서 전교조와 전면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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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찰청,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를 보안법 피의자로 조사

대구경찰청,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를 보안법 피의자로 조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10/24 [22:23]  최종편집: ⓒ 자주시보
 
 

 

[↑2015년 7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앞에서 박창숙 통일인사 구속규탄 기자회견에서 열열하게 박근혜 정권과 국가보안법을 규탄하는 김병길 대표]

 

▲ 자주시보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박창숙 씨 국가보안법 구속 규탄 집회에서 보안법을 규탄하는 김병길 대표     © 자주시보

 

▲ 2015년 8.15민족대회 행사에 참여한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 8월 1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자택 압수수색을 받았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4일 대구경찰청 보안수사대가 대구 모처 보수대 조사실에서 본지 김병길 대표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위반혐의로 약 7시간 동안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다.

 

제주도에서 구속된 필명 '홍익인간' 인터넷 논객에게 꾸준히 자주시보 기사를 우편으로 보내 준 점을 문제 삼아 지난 8월 1일 김병길 대표의 집을 전격 압수수색했던 보수대에서 관련 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제주도 보안수사대에서 압수수색을 나왔다고 했고 압수수색 결과 집에서 특별히 나온 것이 없었으며 컴퓨터 하드만 복사해 갔는데 컴퓨터에도 인터넷에 소개된 노동신문 중에 미처 다 보지 못한 것들을 후에 보려고 저장해 둔 것이 좀 있었을 뿐이었고 제주 보안수사대 수사관들도 '홍익인간' 사건과 관련하여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런다.'며 '별 문제 아니라고 했다.'해서 압수수색 후 본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한 주목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돌연 태도를 바꿔 여든이 훨씬 넘은 본지 김병길 대표를 북에 동조한 것으로 보이는 한호석 소장 글 등을 옥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포했고 몇 년 전 서프라이즈에도 몇 편 올린 것을 확인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하겠다며 7시간이 음침한 보수대 사무실에 억류하고 온갖 질문과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김병길 대표는 "한호석 소장 글 등 자주시보의 글이 그렇게 문제가 되면 자주시보에 올리지 못하게 해야지 합법적인 언론사로 등록된 자주시보의 기사가 보안법에 위반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런 글을 서 너명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준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라며 수사관들에게 당당히 맞섰다고 말했다.

 

참고로 본지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박창숙 씨 보안법 재판에서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기사를 페북에 게시하고 여기저기 퍼트린 혐의에 대해서 재판부는 무죄를 판결한 바 있다.

 

본지 김병길 대표를 참고인이 아닌 피의자로 조사를 시작한 이상 본지에서는 이를 비상사건화 하고 적극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자문변호인단과 협의결과 앞으로 경찰 조사는 일절 대답하지 않고 묵비를 행사할 것을 김병길 대표에게 권하였고 대구지역 민변과 연계를 취해 담당 변호사 선임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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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형'도 모자란 박근혜, 용서받을 방법은 이것뿐이다

[송경동 시인이 띄우는 편지] 반성 없는 박근혜의 '인권' 운운,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 마주하라

17.10.24 19:59l최종 업데이트 17.10.24 20:52l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연장 후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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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신의 새로운 법무팀인 국제법률 자문회사 MH그룹이 CNN을 통해 '당신(박근혜 전 대통령)의 감옥 생활에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고 한다.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살고 있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불을 계속 켜놓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고, '침대도 없이 딱딱한 바닥에서 자고 있다'는 내용 등이다. 유엔 인권위원회에 위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법무부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당신은 일반인 수용자 열 명이 쓰는 공간에 해당하는 10.08㎡, 3.2평의 독실에 거주하는 '특혜수용자'로 '바닥 난방 시설과 텔레비전, 관물대, 수세식 화장실이 구비된 적정 면적의 수용실에 수용돼 있다.', '충분한 진료 기회와 운동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고 하고 '계속 불을 켜놓고 있다'는 인권 침해 제기에 대해서는 '수용자 관리와 보호를 위해 (야간에도) 수용실 내 전등 3개 가운데 1개를 켜놓고 있으며, 밝기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만 조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수면에 불편함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제대로 된 침대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국내 모든 수용자들은 침대 대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도록 돼 있'고 당연히 매트리스가 제공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인권 침해' 운운한 박근혜, 감옥 인권에 대한 직무유기 증거일 뿐

 

가까운 2011년 11월 초순 경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기획 혐의로 부산구치소 독방 생활을 경험했기에 법무부의 설명이 95%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5%를 말하라면 수면용 전등의 조도가 좀 더 낮아야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다는 정도이다. 물론 내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법무부의 설명대로 당신 방 안의 조도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정도'로 '수면에 불편함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면 아마도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치고는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감옥 생활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감옥에서의 인권 침해 운운은 혹여 타국의 기준이라면 모를까, 대한민국 내에서는 투정 같은 것이다. 만약 서울구치소가 '더럽고 차가운 감방'이라면 그건 당신이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 감옥 인권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부재했다는 직무유기 증거 중 하나일 뿐. 전국의 구치소 중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곳이 서울구치소다. 

정반대로 내가 살던 부산구치소는 당신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예의 '더럽고 차가운 감방'의 전형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에서 제일 오래된 구치소로 진즉 철거하고 새로 지었어야 했다. 촛불시민정부는 그렇게 하리라 믿어본다. 공안사범이기는 매양 마찬가지인 당신과 나의 헌법적 차이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살던 독방은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3.2평보다 1/5 정도 작은 0.67평이었다. 아무리 작아도 화장실은 최소 크기로 있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당신이 사는 방은 실제로는 훨씬 더 클 것이다. 

더더욱 부산구치소는 '바닥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관물대'도, '수세식 화장실'도 없었다. 앉으면 엉덩이와 머리가 닿는 좁은 '뺑끼통'(감방 안에 있느 변기)에 물 호스 하나만 달랑 달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응가'도 하고, 세수도 하고, 과일도 씻어야 했다. 하루 세 번 바닥 변기 위에 식기를 놓고 씻는 건 필수였다. 나는 경건하게 나를 닦는다는 마음으로 식기와 함께 변기를 정성스레 닦곤 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 뺑끼통에서 식기를 닦는 일이 어느 고요한 절에서 수행하는 일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내가 나를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오랜만의 안식을 준 이명박씨가 고맙기도 했다. 어쩌다 얻은 라면박스를 '뺑끼통' 위쪽에 딱풀로 간신히 붙여놓은 간이 관물대는 여지없이 압수당했다. 

0.67평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양계장에 갇힌 닭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평수였다. 옆으로 서면 어깨가 닿는 너비에 길이는 내 키가 쏙 들어가는 관 정도의 크기였다. '오래 살다 보면 사람도 광어처럼 옆으로 뉘어지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그해 겨울 내내 모포 두어 장을 끌어안고 온몸이 '시아시'(차게 됨)가 된 상태로 얼어 지내야 했다. 열흘에 한 번쯤 매트리스를 걷으면 내 몸의 온도에 기생하는 허연 곰팡이가 오래된 마룻바닥에 엉덩짝보다 크게 피어 있었다. 

하루 30분쯤 쪽창 사이로 잠깐 내방하는 햇빛 한 줄기에 얼굴을 대고 해바라기처럼 따라다니기도 했다. 햇볕만 쬘 수 있다면 해바라기의 휜 목처럼 내 목이 휘어도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살던 층 아래 1층 독방촌은 더 열악해 종일 햇빛 한 줄기 들지 않았다. 내 방보다 작은 아래층 방은 과거엔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주로 살았다는데 내가 살던 당시에는 대부분이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아무리 타국인이지만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그들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른다. 

여하튼 이 정도는 되어야 감옥 인권 침해에 대해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이 대통령일 때 국가세금으로 수백만 원짜리 침대를 몇 개나 청와대 안으로 들이고, 수억의 양장비를 쓰고, 보톡스 등을 맞으며 수정궁에서 여왕벌처럼 지낼 때 대한민국 감옥의 인권이 이러했다. 먹을 게 불충분해 영양실조 상태라는 말 역시 당신이 사는 감옥의 쥐들도 웃을 일이다. 

기본 급식과 부식 외에 일반 수형자들도 지금은 영치금만 있으면 언제든지 닭고기살과 햄과 삶은 달걀과 빵과 사과와 귤과 컵라면 등을 일주일에 두 번 구매해 싸놓고 먹을 수 있다. 감옥의 인권이 좋아진 게 아니라 감옥의 상술이 좋아진 것이다. 밖의 세상처럼 철저히 빈익빈 부익부인 사회. 감옥 안에서도 특권을 누리며 사는 당신의 영치금 통장이 비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감옥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개선했어야 할 대통령이었다
 

국감장에 신문지깔고 드러누운 노회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19일 오전 서올 종로구 감사원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12월에 헌법재판소가 서울구치소 내 과밀수용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수용자 1인당 가용면적은 1인당 1.06㎡(약 0.3평)에 불과했다”며 국감장 바닥에 1인당 가용면적인 신문지 2장반을 깔고 드러누웠다.
▲ 국감장에 신문지깔고 드러누운 노회찬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19일 오전 서올 종로구 감사원에서 열린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서 "지난 12월에 헌법재판소가 서울구치소 내 과밀수용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는데, 당시 수용자 1인당 가용면적은 1인당 1.06㎡(약 0.3평)에 불과했다”며 국감장 바닥에 1인당 가용면적인 신문지 2장반을 깔고 드러누웠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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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당신이 대통령이던 시절 수만 명의 일반 재소자들은 하루 24시간을 당신이 쓰는 방의 1/10쯤에 해당하는 1.06㎡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지난 8월엔 부산고등법원이 1.06㎡이하 면적에 수용됐던 재소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정부 패소판결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노회찬 의원의 이야기대로 '유엔에 탄원서를 내야 할 사람은 일반 재소자의 열 배 넘는 공간을 쓰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하에서 하루 24시간 1.06㎡에 갇혀 있었던 수만 명의 일반 재소자'들이다. '정작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은 일반 재소자들'이고, 당신은 당시 행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으로 '인권침해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지금 대한민국 '감옥의 인권'을 얘기하고 싶다면 먼저 바로 누워 당신 얼굴 위로 침부터 뱉어야 한다. 당신은 얼마 전까지 그 감옥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개선했어야 할 대통령이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러므로 빨리 나만을 풀어달라'가 아니다. 당신이 정말 한 나라의 대통령쯤은 했던 이라면, 왜 저 수형수들은 저리 좁게 자며, 왜 저 수형수들에게는 깨끗한 관복이 지급되지 않으며, 왜 소내 면회시간과 운동시간은 이리 짧으냐며, 왜 어떤 책은 여전히 반입이 되지 않는 거냐고 일반수들을 대신해 '소내 인권'을 위해 싸워주는 것이다. 때로 그렇게 일반수 모두의 인권 신장을 위해 싸우다 징벌방으로 끌려가더라도 감옥 안에서 '양심수', '공안수'라는 사람들이 했던 역할이 그런 일이었다. 

제발 역사 속 모든 '양심수', '공안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기를. 나처럼 촐랑거리는 사람도 그곳에서만은 말을 줄이고 힘없는 수형자를 도울 일이 없는지를 찾으며 생활의 모범이 되기 위해 힘썼음을 알기를. 공안수라는 이름으로 어떤 특혜도 입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알기를. 

당신이 국내 변호인단을 위장 사임케 하고 선임했다는 영국의 로펌 MH그룹도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당신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로드니 딕슨 변호사가 그간 변호했던 이들은 대체로 수많은 이들의 '인권'을 짓밟은 자들이었다. 대량학살로 사형선고를 받은 리비아의 전 대통령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카다피와 세르비아 내전 당시 민간인 살해 혐의 전범으로 기소된 하라디나이 코소보 총리, 그리고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반군에게 군수품을 제공하고 부당 이득을 취득한 라이베리아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와 방글라데시 테러범 하스나트 카림 등이 로드니 딕슨 변호사가 그간 변호해 온 이들이다. 혹 그런 무시무시한 '인권'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것인가. '인권'을 미끼로 유엔 등에 국제적인 백색 로비를 해서 신의 한 수라도 얻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건강 악화로 병보석을 따내고, 가택 연금 등을 무기로 구속을 면하는 정치 협상의 국면이라도 열고 싶은 것인가. 

당신의 죄질은 일반 재소자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어떤 재소자도 청와대를 왕궁으로 만들고 한 나라의 역사책을 개인들의 족보책으로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아무런 권한도 부여한 바 없는 비선 실세들에게 국가 정보와 권력을 부당하게 넘기지 않았다. 국가 재산을 빼돌려 착복하거나, 화이트리스트들을 육성하는 데 불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왕국에 저항하는 공무원을 부당하게 내쫓고 재벌에게 특혜를 주며 거액의 삥을 듣지도 않았다. 1만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철저히 인권을 유린하지 않았다. 

블랙리스트는 법조계와 보건복지계 방송언론계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존재했다는 게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 어떤 범죄자도 헌정을 유린하고 총체적인 국정 농단과 파탄으로 한 나라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이끌지 않았다. 당신의 파면을 둘러싼 찬반 집회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만 네 명이다. 당신의 죄를 묻기 위해 17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지난해 겨울부터 올봄까지 생업을 놓고 거리로 뛰쳐나와야 했다. 그 죄과를 일반 재소자들의 기준으로 물으려면, 미안하지만 '천년의 형'을 언도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당신은 단 한 치의 반성도 없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이라고 한다.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고, 모두 모르는 일이라 한다. 아랫사람들이 했을 거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 그대로다.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의 수첩 속에 적힌 세상밖에 모른다. 모두가 온돌형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 감옥에서 '침대가 없'어 인권 침해라는 당신에게서 비루한 한 생을 본다. 아직 찬바람도 불지 않은 10월부터 바닥 열선이 들어오는 온돌에 누워 '춥다'는 타령을 하는 당신에게서, 프랑스 혁명 당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했다는 유명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리게 된다. 알려진 대로 그는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단두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한국의 감옥은 당신을 단두대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다분히 상식적인 법의 잣대로 당신의 죄를 물을 것이다. 그렇게 물어도 만년의 형이 부족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블랙리스트 작가들의 책 수백여 종을 세종도서 선정에서 부당하게 배제시킨 것으로 확인된다. 권당 1천 권씩 100명의 작가라치면 10만 권의 책이 전국의 도서관으로 갈 수 없었다. 10만 권의 책을 읽을 100만 명의 시간이 사라졌다. 100만 명의 독자가 가질 1억 개의 상념의 시간이 불법으로 도난당했다. 

진정 배웠어야 했던 건 '독재의 추억' 말고 '독재의 처참한 말로'였다 
한 권의 책이 쓰이기까지 최소 3년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당신과 당신의 수족들은 백 권의 책이 쓰인 3백 년의 아픈 시간을 빼앗고 그 시간에 주리를 틀었다. 당신이 배제시킨 수백 편의 연극을 볼 수만 명 관객의 수십만의 시간이 강탈당한 것이며, 수백 편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불태운 수천 명의 젊은 연극인의 앞날을 짓밟고 빼앗은 것이다. 당신과 당신 전임인 이명박이 집권한 10년 내내 1만 명의 블랙리스트가 빼앗기고 짓밟혀왔던 시간을 모두 더하면, 그들의 작품과 만났어야 할 수천만 명의 눈과 입과 귀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당신은 감옥에서 보내야 할까. 

그런 당신이 황후 같은 수용생활을 하며 기껏 '침대'를 들어 말하는 '인권'이 참 가당찮다. 그런 당신이 예전 청와대에서 '영예'라 불리며 살던 시절, 당신의 아버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가 그 감옥으로 영장도 없이 끌려가 고문받았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의문사로 사라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학생이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군징집 당해 얻어터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간첩으로 조작되어 죄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벌방에 흑수정이 채워진 채 던져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이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강제 전향공작 고문에 온몸이 아득해져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 학생이 정의를 외쳤다는 까닭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책이 금서로 낙인찍혀 압수당하고 불태워졌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표현들이 억압당하고 차별당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은 '법자'(은어 : 법무부 자식들이라는 뜻으로 무전유죄의 가난하고 버려진 사람들을 뜻함)가 진짜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서 최소한의 인권(인권이라는 말은 장기수로 복역하다 출소한 서준식 선생에 의해 1990년대 초반에야 한국사회에 비로소 이식되었다)도 보장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야 했는지 아는가. '뺑끼통'에서 구더기가 떼로 올라오는 방에서 칼잠을 자 보았는가. 얇디얇은 군용 모포 한 장으로 겨울을 나 보았는가. 한 달에 한 번 허연 비지 한 조각이 구경할 수 있는 고기의 전부였던 그런 시절을 아는가. 그것조차 힘없고 나약한 이들은 모두 빼앗기고, 매일 샌드백처럼 두들겨 맞아도 그것이 갱생의 길이라 했던 당신 아버지의 '인권' 개념을 아는가. 

'그런 시절을 생각해 당신이 아무런 주장도 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무슨 연좌제도 아니고 아버지의 죗값을 당신이 대신 치르라는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감옥 인권이 그만하면 됐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도리어 대한민국의 감옥 인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져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포함해 감옥 안의 그 어느 누구도 마땅히 치러야 할 죗값 이외의 인권을 유린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어떤 체벌도 인격 유린도 없기를 바란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배웠어야 했던 건 '독재에 대한 달콤한 추억'이 아니라 당신 아버지가 걸은 '썩은 독재의 처참한 말로'였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할 것은 당신이 짓밟은 수많은 '천부인권의 시간'에 대한 반성과 이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이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정말 최소한의 시민의식이다. 세상의 모든 부의 원천은 자연에서 빌려 온 물질과 그 물질을 가공해내는 모든 인간의 협업과 노동을 통해서만 나오기에 그 주인 또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깨달음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가, 예속과 굴종이 아닌 자주가, 억압이 아닌 자유가, 독점이 아닌 나눔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게 당신이 진정으로 얻어야 할 '인권'은 당신 바깥에 있지 않고 당신 안에 있다. 시종에게 둘러싸인 비운의 왕녀처럼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인생 안에 있다. 이제라도 나는 당신이 '과거의 감옥'에서 나와 오늘의 햇빛을 환하게 쐬었으면 좋겠다. 감옥의 시간을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1700만 명의 촛불의 시간을 얻어 사는 거라고 여겨도 좋겠다. 

세상의 작은 빛 하나, 작은 바람 한 점, 작은 씨앗 하나, 작은 날갯짓 하나에서도 생명의 거룩함을 보게 되는 값진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비로소 당신의 겸허한 삶 하나가 도리어 크고 귀한 '인권' 하나가 되어 다가오는 그런 날, 우린 비로소 당신을 용서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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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년, 박정희 체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인터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①
2017.10.24 10:28:22
 
 

 

 

 

2013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됐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중 박정희 유신 체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단행본 9, 10, 11권이 발간됐다. 이번에 발간된 세 권은 1972년 10월 17일을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유신 쿠데타'와 관련 각각 △유신을 왜 일으켰나(9권) △왜 유신 체제를 막지 못했나(10권) △유신의 뿌리, 일본 군국주의(11권) 등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는 1945년 해방 후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주화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으로 해방과 분단을 다룬 1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을 다룬 2권, 이승만 독재와 이에 맞선 조봉암의 비극을 그린 3권, 4월 혁명을 다룬 4권에 이어 5권부터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탄생과 전개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 유신 체제를 해부하는 세 권의 단행본에 이어 향후 6월 항쟁에 이르는 과정도 다뤄질 예정이다. 

<프레시안>은 촛불 시위 1주년이자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0년을 맞아 저자인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를 만나 촛불 시위의 의의를 되새김과 동시에 유신 체제와 한국의 앞날을 조망하는 인터뷰를 마련했다.  

촛불 시위가 없었다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성대한 박정희 탄생 100주년 행사를 지켜봤을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서 교수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박정희 신드롬'이 만연해있다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프레시안>은 이번 인터뷰를 세 편에 나누어 소개한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프레시안 : 지난해 10월 말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면서 조기대선이 치러졌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부마 항쟁, 광주 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이번 촛불 시위의 의의는 무엇일까?  

서중석 : 4월 혁명과 부마항쟁,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을 이어받은 위대한 민주주의 운동이자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려는 운동이었다. 특히 11월 하순에서 12월 초에 100만 명이 참여한 집회가 두 번 열렸는데, 이는 1960년 4월 19일 서울 집회와 1987년 6월 10일, 18일, 26일에 있었던 집회를 떠오르게 했다. 촛불 시위대의 함성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에도 정의가 뜨겁게 살아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모습을 보며 감명을 받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1960년 4월 혁명 때는 200명 가까운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는 광주항쟁 때 희생자와 비슷하다. 6월 항쟁 당시 10일~26일에 국한시켜서만 보더라도, 시위 참가자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지독한 최루가스를 견디며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말 이런 대단한 투쟁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광주나 부마항쟁 또한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했고.  

이러한 투쟁들은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꿔 놓았다. 4월 혁명이 1945년 8·15에 이은 제2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는데, 4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됐다.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1인 독재정권을 세우는 데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지 11년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점도 4월 혁명의 영향이 얼마나 심대했는지를 보여준다. 4월 혁명의 힘 때문에 박정희가 좀 더 빨리 독재정권을 세우고 싶었어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4월 혁명의 진한 여운이 남아있다. 1980년대에 4.19를 전후로 대학가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민주화운동이 강렬해졌다. 여기에 5월, 광주를 기억하면서 훨씬 더 큰 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6월 항쟁으로 가게 되는 것인데, 4월 혁명이 계속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6월 항쟁은 제3해방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항쟁을 통해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비록 중간에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훼손시키는 행위를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이 항쟁으로 획득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6월항쟁은 또한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우리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학문적 예술적 자유를 누렸고,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촛불 시위 이전에는 박근혜 정권이 그렇게 몰락할지는 예견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이번 촛불 시위가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다른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촛불 시위는 '박근혜 퇴진'이 중심이었다. 한때 박근혜 퇴진 주장은 <조선일보>나 종편(종합편성채널)에서도 찬동했다. 그게 당시 국민들의 일반 의사였다. 이는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고난의 투쟁 속에서 이뤄진 성과와 차이가 있다. 

또 촛불 시위에서 민주화 및 우리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 4월 혁명이나 6월 항쟁과 같은 강한 메시지가 있었는지에 대해 좀 회의적이다. 촛불 시위가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 이상으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는 박근혜 정권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 역행을 바로잡은 정도지, 새로운 길을 뚫어낸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인가? 

서중석 : 민주주의를 복구했다는 부분은 성과가 있지만 역행을 바로잡았다는 측면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촛불 시위를 촛불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면 폭넓은 민주주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정치 교육, 곧 민주주의 교육을 연상할 수 있는데, 그 민주주의 교육은 박정희 신드롬을 해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 교육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단히 특이한 중요성을 갖는 게 있다. 그게 바로 현대사 교육이다. 다른 나라들은 현대사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학생 등이 현대사에 대해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감성적‧획일적‧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깊이 있는 인식이나 명료하고 분명한 인식을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이 1980년대 인식에서 얼마나 나아가고 있는지도 반성해야 한다. 뉴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는 것들을 일반 사람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반박하고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 이런 능력이 결핍돼있지 않은지 점검해봐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 과연 한국에 미래가 있을까? 박정희 신드롬이 약화될 수 있을까? 촛불 시위가 촛불 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한국사람들은 굉장히 역동적이다. 이게 지금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현대사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 기본 요인이 돼왔다. 그런데 거기에 지적 능력이나 성찰이 수반되지 못한다면 이를 뛰어넘는 사유를 할 수가 없다. 일제시기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수구 세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현대사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민주주의 교육을 시켜야 한다. 수구세력이나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합리적 보수와 진보주의가 이땅에 뿌리 내리도록 하는 활동을 해나가야 한다.  

촛불 시위가 혁명으로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지적 성찰적 노력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북핵 문제 대처, 한반도 평화 달성, 국제사회에서 자주성과 자율성을 갖는 데에도 현대사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북한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 지난해 12월 3일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유신'이 몸에 밴 박근혜, 새 시대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시안 : 촛불 시위의 배경을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일단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함과 반민주적인 사고가 가장 표면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나는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 좋은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한 가지는 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기사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망쳤고 우리 미래의 암적인 장애 요인이 '박정희 신드롬'인데, 이 신드롬이나 박정희에 대한 지지 열기를 크게 감소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이게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공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박근혜의 무능 때문에도 박정희 정권이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다는 인식을 할 수 있게 하지 않겠냐는 예측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민주 언론이 과연 선거에 적극적으로 임했냐 하는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박근혜 후보는 문제가 심각하니까 떨어뜨려야 한다는 노력을 벌였고, 역사학자들도 이만열 선생이 중심이 돼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모 일간지에 장기간에 걸쳐 유신 체제의 성격에 대해 글을 쓴 것도 그 일환이었다. 

나도 학술 발표 등을 통해 유신 체제 비판 활동을 했다. 선거를 얼마 앞둔 발표에서 유신 말기의 정치적 경제적 난맥상, 박정희의 정신적 상황, 왜 그렇게 철옹성처럼 보인 유신 체제가 쉽게 붕괴되었는가 등을 분석하면서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를 비중있게 다뤘다. 

발표장에서 발표를 마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잘 아는 정치인으로부터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한 자료가 더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이상하게 정치권과 언론에서 당시 박근혜-최태민 관계의 문제점을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정치인들에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불미스러운 소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박근혜의 대응을 보면 박근혜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할 사람인지, 옛날식으로 표현한다면 나라를 망칠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보여준다고 그 정치인에게 역설했다. 그래서 이 점을 정치권에서 크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의 '라스푸틴'으로 불리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 '구국여성봉사단'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이들은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일역을 맡았다. 그런데 그 당시 최태민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치안본부에서 최태민을 조사했다. 하지만 이를 조사했던 치안본부 관계자들만 사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와 최태민이 밤에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돌 때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이 최태민의 비행을 조사해서 여러 차례 박정희에게 보고했는데, 이 역시 먹혀 들지 않았다. 또 1978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에 대해 뒷조사를 한 결과 최태민이 재벌들이 기탁한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 불륜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대통령에게 이걸 보고했는데, 박정희는 김재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한 간부를 앉히고 다른 쪽에 최태민과 박근혜를 앉혀서 소위 '친국'이라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한 짓을 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 기관의 보고나 ‘친국 사건’이 있을 때 박근혜는 아주 강하게 반발하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이를 유야무야한 일로 덮으려고 했다. 나중에는 검찰에서도 조사했는데 중앙정보부 조사와 별 차이가 없다고 나왔다. 

내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이거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다면 박근혜가 최태민과 관계를 단절하든가, 구국여성봉사단 활동을 다른 방식으로 한다든가 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고, 최소한 잘못을 인정해야 했는데 박근혜는 전혀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그래서 1990년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 말썽이 났다. 이는 박근혜가 어떤 행태의 정치를 할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이 부분을 대선에서 크게 문제 삼고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나 말이다.

또 한 가지 학술 발표나 다른 자리에서 역설했던 것은 박근혜가 유신 체제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유신체제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청소년기나 청년기에 받은 영향이 평생을 간다고 하는데, 박근혜는 젊었을 때 유신체제밖에 보고 배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유신체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육영수가 사망한 이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했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었다. 

더군다나 박근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익히거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를 못했다. 만나는 사람도 굉장히 협소했고, 그들은 박근혜를 추켜올리기만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지난 2013년 2월 25일에 열린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지난해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박근혜 4촌 형부인 김종필은 <시사저널>에 박근혜가 아버지, 어머니의 나쁜점을 그대로 닮았다고 말했다. 역사가 아이러니한 것이 사실 박근혜가 아버지 때문에 인기가 높아졌고 대통령까지 됐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박근혜가 결국은 탄핵을 받아서 쫓겨나게 됐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 때의 경험, 유신 체제 때의 잘못된 경험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 대통령은 왕보다도 더 힘이 강했던 '지존(至尊)'이었고, 절대적 위치였다. 여성관계든 어떤 분야든 일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행위를 해도 아무도, 어떤 기구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유신시대 때의 박정희와 같은 위치를 가질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였다.  

여기서 큰 간극이 생겨나는데 그걸 박근혜가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동안 공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유신 시대의 현실을 몰랐고, 더군다나 새 시대가 시작된 2000년대를 과연 체감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현실감이 상당히 결핍될 수 있었다고 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번에 출판한 회고록에 박정희 권력은 절대권력의 마성이 너무나 강했다고 평가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으로 써놓은 셈이지만, 이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니라고 본다.  

박정희는 당시 스스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근혜는 그걸 옆에서 항상 배웠다. '사적 권력의 무한정한 질주' 라고 할까? 바퀴 빠진 수레가 어디론가 질주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상태에서 국가 운영의 심각한 일탈현상이 일어났다. 유신 시대에 박근혜가 이런 것들을 아주 잘못 배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중요한 일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예컨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이 곧 붕괴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붕괴쪽으로만 몰고 갔고,-일부에서는 최순실 쪽에서 그런 관념을 심어줬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어쨌든 북한에 대한 그런 시각을 가지고 강경 일변도로만 나갔고 북핵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만약 제대로 대처했다면 지금 북핵 문제가 저 정도까지 될 수 있었을까? 박근혜 정부는 북핵 문제가 더 이상 커지지 못하도록 실질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개성공단 문제만 해도, 개성공단이 갖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데 공단 중단 결정을 할 때 과연 공론화 과정을 거쳤는지 의문이다. 또 한일 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할 때도,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결정할 때도 그랬다. 당시 교육부 책임자도 실제로는 소극적이었다. 심지어는 <조선일보>에서도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국정화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설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순식간에 결정됐으니,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은 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 결정도 북한과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 관계를 비롯해 한국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이 있음에도 성급하게 결정됐다. 박정희 때 옆에서 보고 배운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막걸리 마시고 모내기 하는 모습 때문에 서민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유신 체제 하에서는 성장 위주 정책을 쓰면서 재벌과 가진 자 중심으로 모든 정책을 펴나갔다. 노동자나 서민 위주의 정책은 거의 없었다. 아파트 정책만 보더라도 당시 언론에서도 서민층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대형아파트 중심으로 지어졌다. 이것도 유신체제의 성장 위주 정책과 관련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YH여성노동자신민당농성사건, 부마항쟁 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역시 서민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을 당시에, 인명 구조를 위해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에 박근혜가 뭘 했는지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지 않나?  

박정희가 서민을 무시한 정책을 계속 펴다가 YH 사건, 부마항쟁이 일어나 유신 체제가 붕괴했다. 세월호 침몰이 박근혜 몰락의 하나의 큰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이 오히려 이후에 정치를 하는 데 큰 걸림돌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체제, 촛불 이후에도 여전하다 

프레시안 :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을 때 일부에서는 두 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안착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건전한 정책 대결이 있을 거고 민주주의가 퇴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보수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민주주의가 퇴행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행태를 보면 후자가 현실이 된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그 강도는 약하지만 점진적 쿠데타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유신 체제와 흡사한 면을 보였다. 이제 촛불 시위로 박정희 체제가 끝났다고 볼 수 있을까

서중석 : 성급한 판단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박근혜의 퇴진과 구속으로 박정희 신드롬이 상당히 많이 훼손됐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망령이 수구 세력을 다시 살려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불러낸 상황을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 박정희 신드롬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이 강고하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 신드롬은 상당한 힘을 가질 수 있고 박정희 체제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박정희 신드롬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할까? 중요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현대사 전공자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에 대한 지지가 집권 기간이었던 18년보다 사후에 더 강고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만 환생하면 우리 경제가 살아나고 우리나라가 잘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분명히 착각인데, 그러한 박정희 신드롬이 존재했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그가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현대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박정희 신드롬이 한창이었을 때 열기를 보면, 집권했을 당시에는 더 강력한 지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야말로 착각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첫 번째 치른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간신히 15만 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서울에서는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윤보선이 이겼다. 당시 윤보선과 벌인 사상논쟁에서 누가 더 유리했는지의 문제는 둘째치고, 남도 지방이 수재로 큰 피해를 입었던 상황이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에서 들여온 밀가루를 이때 대규모로 살포했다. 이게 박정희 당선에 더 큰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밀가루 선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밀가루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박정희 표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이 선거를 남북 선거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도‧경상도에서도 도시에서는 윤보선이 이긴 곳이 많았다. 

1967년 대선이 박정희가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선거인데 여기서도 전라도와 충청남도, 경기도, 서울 등 서쪽에서는 박정희가 모두 패배했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5~66년부터 우리 경제가 좋아지고 있었는데 서부지방에서 신선함이 없는 윤보선이 이겼다는 것은 박정희 지지가 여전히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박정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지역에서 표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혜택이 경상도에 집중됐고, 영남에서의 압도적 지지로 서쪽 지역에서의 열세를 뒤집었다. 

1971년 대선은 당시 중앙정보부가 계속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용호상박 백중지세의 기세로 맞붙었다. 도무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선거였다. 물론 여기도 결정적으로 특정 지역의 몰표가 더 크게 선거를 좌우했다. 

유신 체제에서는 '과연 이게 선거냐'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선거만 있었지만, 그나마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총선이 예전 선거와 유사했다. 당시 이 총선에서 신민당은 공화당보다 1.1% 더 표를 얻었다. 여기에 통일당이 얻은 표까지 합하면 야당이 여당에 8.5%나 앞섰다. 유신체제에서, 그것도 긴급조치 9호가 국민을 벙어리로 만들었던 때 치러진 선거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거에 가깝게 치러진 선거가 이거 하나였는데, 여기서도 박정희가 졌다. 

박정희가 집권 시절에 이른바 '경제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다면 1971년 선거에서 그렇게까지 아슬아슬한 시소 게임을 벌였을까? 유신체제가 경제에 그렇게 유리한 체제여서 경제를 발전시켜놨다면 12.12선거에 농민까지 반대를 찍은 결과가 나왔을까? 그런데 죽은 박정희가, 2000년대 이후에 두 번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 
 

▲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9, 10, 11권 (서중석 지음, 오월의 봄 펴냄, 2017)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은 무엇이 문제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회의나 부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 사회에 꼭 민주주의가 필요하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한국인에게 민주주의가 적당한 거냐는 등의 말이 2000년대 치러진 선거에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 파시즘적인 증상이나 징후가 2000년대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유신 체제 때 주장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에 기여했던 성장‧경제 제일주의도 박정희가 유신 시대에 그렇게 부르짖었던 주장이었다.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빠져 있는데 이 주장이 강한 영향을 갖고 있는 한 박정희 신드롬이나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은 생겨날 수 없다고 본다. 

또 하나의 요소는 반공주의다. 요즈음은 ‘종북’이라는 말이 더 쉽게 다가오지만, 박정희 시기의 반공주의는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와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기억이 나겠지만, 당시 반공교육을 받다 보면 북에는 인간이 아닌 흡혈귀 혹은 이리나 승냥이가 사는 땅 같았다. 오죽하면 북한을 방문했던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에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그런 희화적인 말을 했을까. 

박정희는 끊임없이 남침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전 국가를 병영 국가화했고 전 국민을 간첩 잡기에 동원했다. 애인도, 친척도, 이웃도 간첩이 될 수 있다면서 전 국민이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신드롬의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인간성을 파괴하는 효과를 낳는다.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만큼 인간성이 마멸된 것 아닌가? 성장‧경제 제일주의가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서민이 존재할 수 없고 일반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특히 반공주의가 심하게 인간성을 파괴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박정희 신드롬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 신드롬이 왜 이런 위력을 갖게 됐을까?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되돌아보지 못한 것 같다. 

핵심은 반공교육이었다. 유신체제에서 반공교육은 인간성을 이렇게 까지 파괴시킬 수 있느냐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한 주민들에 대해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갖게 하는 것이 과연 초등‧중등학교 시기의 교육 내용으로 적합한 것이지 의문이다. 어떤 내용이든, 어떤 방식이든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 증오나 적개심을 키우는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다. 

장구한 세월의 군사 독재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박정희가 집권하던 18년 동안 성장기를 가졌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2012년 대선 때 투표장에 많이 갔던 50~60대 다수가 여기에 해당하는 세대다. 당시 이들에게 대통령은 박정희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박정희=대통령'이라는 등식 속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특히 유신 치하에 들어가면 학교 교육이나 TV를 통해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인지 끊임없이 주입당했다. 1970년대에는 1950, 60년대랑 달라서 여성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진학했기 때문에 교육의 역할이 훨씬 커졌고 내용적 측면에서도 박정희 때의 반공교육이 이승만 때보다 훨씬 더 강했고 구체적이었다. 

또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에는 그 이전과 달리 TV나 라디오가 상당히 많이 보급돼있었다. 1970년대 말에는 가구당 TV가 한 대는 있을 정도로 많은 TV가 보급됐다. 당시 별다르게 즐길만한 대중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한 뒤 TV를 봤다. 그런데 뉴스든 연속극이든 정부 홍보물이든 TV 프로그램이 주로 반공 또는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물론 유신체제, 그것도 긴급조치시대여서 박정희 비판은 어디서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2012년 50, 60대의 투표 성향을 두고 본인들이 땀 흘려 일한 것이나 고난을 젊은 세대가 몰라준다는 점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이 나왔는데 이 점도 중시해야겠지만, 더 크게 작용한 것은 유년기 청년기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이고, 이것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 다수에 의해 박근혜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대사에서 박정희 신드롬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 미래는 있을 수 없고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새로운 관계망 형성도 생겨날 수 없다. 

'박정희 신드롬', 민주화 세력에게도 책임 있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화 세력들이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측면도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신드롬'이 강하게 자리잡은 원인이 됐던 것 같다.  

서중석 :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도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중요 요소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있는데, 적지 않은 한국인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 데에는 민주주의 세력도 잘못한 것이 있다.  
 

▲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락(프레시안)

물론 1970, 80년대에는 민주화 세력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그렇지만 1987년 12월 대선 때 양김(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이 적절히 대응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양김이 저질렀던 '대통령병'이 고스란히 1987년 대선 때 되살아났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의 상당수가 김대중 당시 평민당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김후보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게 그 사람들과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또 양김의 출마 때문에 노태우 정권이 등장한 것을 볼 때 과연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행위가 일반 사람들에게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수구 보수 세력들 사이에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는데, 마치 그에 대한 근거라도 생긴 것처럼 이제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정하게 민주주의의 퇴조를 불러왔다.  

1988년 4.26 총선에서는 어땠나? 단적으로 말해서 소선거구제는 지금까지 아주 심각한 지역주의가 뿌리 깊게 살아있게 만든 계기였다. 당시 재야에서 이제는 양김이 단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또 실패했고, 그러면서 특정 정치가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소선거구제가 채택돼 87대선보다도 더 심한 지역주의가 자리 잡게 됐다. 

여기에 중대선거구를 주장했던 김영삼 측이 득표에서는 평민당보다 4% 이상 앞질렀지만, 부산·경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제3당으로 전락하면서 코너로 몰렸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노태우-김종필 측과 합당을 선택했다. 지역주의는 박정희 신드롬의 온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망국병이었다.

그런데 더 놀랍고 무서운 일은 독재정권 아래서 선명 야당을 주장했던 김영삼 쪽 정치인들이 김영삼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 등에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민자당 탄생 이전에는 야당 세력이 강했던 경상도 지역이 전부 특정정당 지지세력이 되고, 호남처럼 어느 한쪽으로 몰표를 던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됐다. 이런 상황이 우리 정치를 계속 힘들게 했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커졌고 수구 세력들은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과거의 잘못이나 악행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나와도 괜찮은 분위기가 생긴 것도 우리의 미래, 즉 촛불 혁명을 가로막고 있다. 촛불 시위와 박근혜 구속 이후에도 수구적 정당과 언론은 그 이전과 다름없는 소리를 계속 외치고 있다. 이것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유신체제가 붕괴하자 심지어 유신체제 수호에 앞장섰던 유신정우회 정치인들까지 잘못을 시인했다. 6월항쟁 직후에도 그런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신군부정권을 찬양했던 언론계가 반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 노태우 정권의 등장과 민자당의 출현 이후 전두환 정권에 붙었던 정치인이나 신문 종사자, 지식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전두환 신군부의 입법회의나 민정당에 가담했던 민간인들이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야당 당수까지 되고, 진보적 언론인으로 각광을 받는 것도 혼란을 초래했다.  

민자당 출현 얼마 후부터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신드롬은 1995년 해방 50년을 맞으면서 수구 언론의 노력도 가세해 힘을 얻었고, 1997년 외환위기-IMF사태가 일어나자 날개를 단 듯했다. 여기에 뉴라이트가 등장하면서 그들 나름의 현대사 논리까지 발전시켰는데, 여기에 대응해야 할 측에서는 별다른 지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2016년 촛불 시위가 갖는 한계로 이런 부분들이 논의되기 어려웠고, 또 여전히 경제 제일주의 등 박정희 신드롬이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위태롭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양극화 부분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지 않았나. 

서중석 : 김대중 대통령이 신속한 경제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러면서 주요 공기업을 외국자본에 많이 넘겨줬다. 약간 더디더라도 참았어야 했는데 강하게 긴축 정책을 벌이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썼다. 노무현 정부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박정희 경제정책의 유산도 작용해 새로운 모색이 힘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민주화 세력이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일부 국민에게 주게 됐다. 그래서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대해 회고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퇴행적 사고를 갖게 만들었다.  

프레시안 :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신드롬은 여전히 죽지 않고 강고하게 남아있고, 일종의 세력으로 구축돼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서중석 : 과거에 대한 성찰이 결핍되면 그렇게 될 수 있고, 이른바 정계와 재계, 언론계의 기득권 세력은 박정희 신드롬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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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

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희망래일 대륙학교 2기의 2박3일 연수 동행기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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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4  07: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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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전 10시 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약 2시간 40분의 비행. 분단은 하늘길도 끊어놓았다. 그렇게 비행기는 중국 간도지역 상공을 지났다. 

사단법인 '희망래일'(이사장 이철)이 운영하는 대륙학교 2기생 등 30명은 13일부터 15일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산 등 연해주 연수를 떠났다. 대륙의 꿈을 안은 이들의 연해주 기행, <통일뉴스>가 함께했다.

   
▲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 자리한 '이상설 선생 유허비'.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다. 올해는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수이푼강. 이상설 선생의 유해는 동해로 향했을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기행단은 곧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약 1시간여에 걸쳐 이동한 버스는 일행을 이상설 선생 유허비로 안내했다. 이상설. 1907년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알리려던 인물.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대종교 북도본사를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설 선생은 1917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선생의 유언을 산자는 야속하게도 그대로 받들었다. 동해로 흐르는 수이푼강.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 이 곳에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표식이 덩그러니 남았다. 선생의 유해는 분단된 한반도 동해를 오르내리리라. 

   
▲ 발해 옛터 '솔빈부'. 말을 기르던 곳으로 광야가 펼쳐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일행을 태운 버스는 보다 더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발해 옛터 '솔빈부'. 5경 15부 중 말을 방목해 기르던 솔빈부는 말그대로 광야였다. 늦가을의 바람이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잊혀진 역사 발해 그리고 후손들은 일제의 억압을 끊어내고자 이 땅을 다시 찾았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하느냐"라던 윤심덕의 자조섞인 노래가 어울린 듯 아닌 듯. 독립투사들은 과연 너른 발해 옛땅을 달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분단의 역사, 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상념에 들게 하는가. 솔빈부에 부는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같으리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기행단은 최재형 선생 고택을 방문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잊혀진 최재형이라는 이름 석자 만큼이나 고택은 형편이 낡고 초라했다. 여기저기 벗겨진 페인트, 스산하기만 한 집안.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살았던 선생의 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최재형 선생이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거주한 고택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최재형.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인물.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한 선생은, 가난에 못이겨 11살의 나이에 가출했다. 그리고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으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검은머리 러시아인'에 그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검은머리 미국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한인 지도자로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과 동포 자녀 교육 사업에 힘을 썼고, 러일전쟁 이후 국권수호를 위해 의병운동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선임되는 등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일본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세력을 제거하고 한인 독립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킨다. 선생도 참변으로 희생됐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선생의 고택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욱 뜻깊은 것은 한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러시아 정부가 협조하고 있지만, 공사의 주체는 바로 고려인들이라는 것. 어스름한 시각에도 고려인들은 공사장에서 한창 선생의 뜻을 복원하고 있었다.

현재 학교로 쓰이는 '전로한족중앙총회결성' 장소를 지나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문화센터에서 펼쳐진 공연은 북한식 조선춤이었다. 분단의 역사는 해외에서 통일된 느낌이랄까.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의 공연이 분단의 현실을 느끼게 해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이 북한식 조선춤인 칼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우수리스크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행단은 이튿날 14일 조선인 이주와 고려인 강제이주의 긴 여정을 더듬었다. 

라즈돌로예역.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잇는 연해주 1번 국도와 북한, 러시아, 중국을 잇는 대륙횡단 열차 중간 기착지. 작고 허름한 역에서 1937년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길에 올랐다. 극동지역에서의 일본 정보원 침투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고려인을 열차에 강제로 태웠다. 

18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야간에, 라즈돌로예역에 집결해 맨몸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슬픔을 간직한 역사 내부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입김이 공기를 감싸고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픈 눈망울이 여기저기 맺혀있는 듯했다. 우리는 고려인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 땅을 밟던 포시에트항, 목허우로 향했다. 버스가 달린 도로는 하산과 라즈돌노예를 잇는 군사전용도로로, 최재형 선생이 당시 조선인을 모아 건설했다. 100년이 가까운 도로는 여전히 러시아 연해주의 유일한 도로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곡괭이질을 하며 땀을 흘렸을까.

   
▲ 라즈돌로예역.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8만 여 명의 고려인들이 이 곳에 집결에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러시아 최초 조선인 마을 '지신허'로 향하는 길.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상념에 젖었을 찰나, 13도의군 유인석 장군이 1년간 머물렀다는 바라바쉬 마을을 지나 러시아 최초의 조선인 마을인 '지신허'에 도착했다. 1860년 이전부터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갔다. 1863년 최운과 양응범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1864년 60가구 308명에서 1868년 165가구, 1869년 766가구가 거주하고 1900년대에는 1천6백명이 살았다. 1937년 강제이주정책으로 마을이 해체되기 전까지 '지신허'는 대륙을 향한 조선인들의 꿈이 서린 곳이었다. 

가수 서태지의 기부로 '지신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기행단은 철망에 가로막혀 대륙을 꿈꾼 조상의 발자취를 까치발을 들어 바라만 봐야 했다. 

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지 4시간이 가까웠을 시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도착했다. 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평가되는 '연추'가 바로 이곳이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세 차례의 이전으로 이 곳에 위치하게 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대륙학교 2기 연해주 연수에 참가한 이들이 단지동맹비 앞에서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연추의 첫 방문지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 12명은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모아 '대한독립'을 적었다. 그리고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역사를 기리기 위한 '단지동맹비'의 이력은 말그대로 수난의 길이었다. 2001년 추카노보 강변에 세워졌지만, 상습 침수지대에 있어 방치된 상태였다. 2007년 비석은 이전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국경수비대 발급 출입증이 없는 외국인 출입을 제한해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다 2011년 크리스키노에 현지 농장을 갖고 있는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의 협조로, 유니베라 농장 앞에 우뚝섰다. 지금은 꾸준히 제대로된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동양평화론을 펼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대륙학교 2기생들은 희망래일이 펼치고 있는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을 연출했다. 의사의 뜻이 분단을 넘어 통일로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추 일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크라스키노 전망대. 1938년 두만강 부근에서 소련과 일본의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한 것을 기념한 하산전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발해 옛성 염주성과 연추가 한 눈에 보이는 곳.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박차를 가해 말 달려왔다는 지역. 이성계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할 것을 알았을까. 

탁트인 조망을 뒤로한 대륙의 꿈은 점차 분단의 현실에 다가섰다. 기행단은 포시에트항에 도착했다. 첫 한인 도착지라는 느낌보다 가로막힌 남북.러 경제협력의 터라는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포시에트항은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의 경유지이다. 이곳을 거쳐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열차가 내달린다.

하지만 지난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러시아 측의 외국인 출입불허 조치로 정작 가보고 싶던 북.러 경제협력의 현장은 볼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5.24조치' 예외로 인정받아 세 차례 시범운송까지 진행됐지만, 정부의 독자 대북제재로 중단된 상태.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내세워, 나진-하산프로젝트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으리라던 꿈은,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압박으로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 포시에트항.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 중간기착지로, 열차는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향한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5시간 가까이 밤길을 내달려, 안타까움의 심정으로 지친 몸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버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1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아침은 청량했다.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러시아 극동지역 부동항인 금각만을 바라보고, 블라디보스토크역, 블라디보스토크항, 혁명광장, 영원의 불꽃, 니콜라이 2세 개선문 등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어진 기행은 또 다시 마음을 저미게 했다.

먼저, 철제 울타리 넘어 조명희 문학비를 바라봤다. 일제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민족문학가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동참했으며, '낙동강', '짓밟힌 고려' 등 저항시를 발표한 작가. 하지만 그는 1937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됐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문학비는 방문객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채 쓸쓸히 철망 너머 한 켠에 서있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조명희 문학비. 철제 울타리에 가로막혀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신한촌 기념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마지막 방문. 버스는 신한촌 기념비로 향했다. 일제시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들은 개척리에 모여살았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이유로 한인들을 서북편 외곽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잡초가 무성한 자갈밭을 일구며 한인들은 '신한촌'을 형성했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이다.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신한촌에 러시아인들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곳이 신한촌임을 증명하는 '신한촌 기념비'가 세워졌다. 물, 바람, 구름처럼 떠돌아야 했던 한인을 기억하려는 듯 세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고령의 고려인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었다. 너희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듯. 신한촌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몫이었다.

2박3일의 짧은 기행이 끝났다. 간도 하늘 위를 날던 비행기는 일본 열도를 따라 내려왔다. 3시간이 넘는 비행. 대륙으로 향하던 선조들이 걸어갔던 길을 오늘의 우리는 빙 둘러가야 했다. 분단의 아픔은 금단의 선으로 남아 남한을 섬으로 만들었다. 대륙을 향한 꿈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할 때 꿀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을 끊어내는 힘은, 바로 우리자신, 평화를 향한 외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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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계속된다” 28일 ‘촛불 1주년’ 집회 연다

퇴진행동 기념위 “적폐청산‧사회대개혁 위해 광화문광장서 한번 더 촛불”
▲사진 : 뉴시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킨 광화문 촛불집회를 이끈 시민사회단체들이 오는 28일 촛불집회 1주년 기념집회를 열어 “촛불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촛불 1주년’ 선포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주의를 되살린 1700만 촛불의 역사적 항쟁을 기념하고, 촛불 국민의 명령이었던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서 한 번 더 촛불을 든다”고 밝혔다.

퇴진행동은 지난해 10월29일 1차 집회를 시작으로 올해 4월29일까지 모두 23차에 걸쳐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끈 연인원 1700만이 참여한 촛불집회를 주도했다. 퇴진행동은 지난 2월엔 사회대개혁 실현을 위해 재벌체제 개혁, 정치·선거제도 개혁, 좋은 일자리·노동기본권, 위험사회 구조개혁 등 ‘10대 분야 100대 촛불개혁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회견에서 “촛불이 밝혀진 지 1년이 다 됐고 정권이 교체된 지 6개월여가 지났지만 해결된 과제는 2%에 불과하다”면서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것, 진척되고 있으나 아직 미흡한 과제는 52%로 나타났다”고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미흡한 현실을 우려했다.

박석운 퇴진행동 기록기념위 공동대표는 “100대 개혁 과제 중에서 이재용 등 재벌총수 구속과 검찰의 청와대 편법근무 방지 2개 과제만 해결됐다”면서 “100대 과제 중 국회 입법과제가 69개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국회의 역할이 매우 높아야 하다. 그러나 일부 야권은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이라고 규정하며 적폐청산 사회대개혁을 거부하고 있다. 촛불이 국회로 옮겨붙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강자 공동대표도 “1700만 촛불 시민은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지만 적폐청산을 위해 내세웠던 100대 과제들이 얼마나 실현됐는지는 의문이 든다. 촛불은 계속된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해 오는 28일 오후6시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은 계속된다’는 주제 아래 대규모 집회를 연다고 밝혔다. 집회에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시민자유발언과 예술인들의 문화공연, 그리고 ‘소등 퍼포먼스’ 등도 펼쳐진다. 집회를 마친 다음엔 청와대 인근 청운동치안센터 방향으로 거리행진할 계획이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는 또 내년 3월10일 탄핵 1년을 앞두고 다체로운 행사를 계획 중이다. 12월9일 국회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토론회를 연다. 내년 2월께엔 학술토론회를, 3월엔 세계 집회시위 주역들을 초청한 국제토론회도 개최한다. 또 촛불백서를 만들어 전국의 공공·대학 도서관과 온라인에 무료로 배포하고, 광화문광장에 바닥 동판 형태로 기념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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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때문에 피고인된 22명, 탄핵 뒤에도 법정에 섭니다

'박근혜 표적수사' 총선넷 활동가 1심 공판, 24일 다시 시작

17.10.24 08:48l최종 업데이트 17.10.24 08:48l

 

 24일 총선시민네트워크 탄압사건의 공판이 재개된다. 김진동 판사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사건까지 맡으면서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의 무리한 표적수사 탓에, 22명의 총선넷 활동가들이 1년이 넘도록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  24일 총선시민네트워크 탄압사건의 공판이 재개된다. 김진동 판사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사건까지 맡으면서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의 무리한 표적수사 탓에, 22명의 총선넷 활동가들이 1년이 넘도록 피고인이 되고 말았다.
ⓒ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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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시민네트워크(아래 총선넷) 활동가들의 재판이 임박했습니다. 22명이 다시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에 서게 됩니다. 공판은 24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이어집니다. 재판장 김진동 판사와 반 년이 넘어서야 다시 마주하는 셈이네요. 그 분이 지난 3월 말 이재용 부회장 뇌물사건까지 맡으며 총선넷 사건이 후순위로 밀렸기 때문이지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1년이 넘도록 피고인 신세인 이유가 궁금하시지요. 긴 과정을 요약하면, 2016년 4월 총선에서 패한 박근혜 정부가 시민사회단체를 원흉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표적수사를 남발했습니다. 낙선운동을 빌미로 인권탄압을 벌인 셈이지요. 

그동안 증거가 없어 의혹 수준에 그친 일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선거개입 정황이 담긴 '캐비닛 문건'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기 때문인데요. 최근에는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실수비) 결과 보고서도 공개됐습니다. 

 

이 문건들에 따르면 2016년 1월,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관변단체들의 총결집을 지시하고, 2월엔 '비판 세력의 특정 후보 낙선운동 등 불법선거운동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엄정 대응하라'고 했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던 담당 행정관은 구속됐습니다. 

지난 9년 '이명박근혜' 정부를 관통하는 통치철학은 '편 가르기'였을까요. 지금까지 드러난 문화예술인과 연예인, 언론인에 그친 게 아니었나 봅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블랙과 화이트로 나눠 관리하려 했던 것인가요. 총선넷도 아마 블랙리스트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관변단체와 정반대의 일을 한, 그들의 표현대로 '비판 세력'이었으니 말이죠.  

퍼즐 조각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관변단체를 총동원했는데도 패했으니 약이 바짝 올랐겠지요. 낙선운동 한다며 돌아다닌 시민단체들이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요. 총선이 끝나기 무섭게 시민사회를 향한 표적수사는 정권 차원의 불편한 심기가 반영된 결과로 짐작됩니다. 이제 조만간 총선넷 표적수사 하명문건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이랬던 박근혜가 인권을 화두로 던지다니

이런 정권의 꼭대기에 있던 박근혜씨가 인권을 화두로 던지셨다지요. 인권 탄압 운운했다는 그 속내가 이해는 갑니다. 박근혜 정부가 가장 역점에 둔 정책이 그분의 '최고 존엄성' 지키기였으니까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요소들은 사전에 잘려나가곤 했지요. 

무수한 진짜 민생입법들이 막혔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도, 경찰력 남용으로 목숨을 잃은 백남기씨도, 가습기살균제참사 특별법까지도 예외는 없었네요. 철벽같은 심기경호를 받던 분이 독거실에 들어가 계시니 마음에 차실리가 없겠지요. 

재판까지 거부하며 국내외를 막론한 여론전에 나서고,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 우격다짐하는 그분에게 성찰과 반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요. 일관된 무책임의 경지에 탄식이 나옵니다. 

국정원과 어버이연합 관계자의 구속영장도 연달아 기각됐습니다. 선거개입과 대국민 공작까지 불법행위의 실무를 책임진 이들인데 말이지요. 찜찜합니다. 혐의는 인정되나, 지위가 낮고,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나요. 총선넷 활동가들이 그들이 벌인 일의 반만이라도 따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돈과 권력이 없는, 평범한 다수가 느끼는 법 감정과 현실의 간극은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법과 인권을 언제까지, 강자들을 '더욱 평등하게' 지켜주는 도구로 방치해야 할까요. 총선넷을 피고인으로 엮어낸 선거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깨끗한 선거를 위해 도입한 법이, 주권자 시민들의 참정권과 표현의 자유마저 지나치게 억누르는 게 정당한 걸까요. 

박근혜씨가 탄핵되고, 박근혜 정부의 불법선거개입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6어도, 22명의 총선넷 활동가들은 여전히 피고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와 실질적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당당히 맞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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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가사 입은 도적들, 박근혜 옆으로”

[영상] 명진스님 “가사 입은 도적들, 박근혜 옆으로”
  • 신희권 기자
  • 승인 2017.10.23 11:18
  • 댓글 6
 
 
 

조계종 적폐청산과 청정교단 구현을 위한 무기한 단식정진에 들었던 명진스님이 공식법회에 모습을 보였다. 22일 서울 중구 문화살롱 기룬에서 열린 단지불회 10월 법회에서 명진스님은 불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성찰을 당부했다. 또 조계종 제35대 총무원장에 당선된 설정스님에 대한 소감과 향후 계획을 밝혔다.

명진스님은 “시의원도 학력 속이면 출마 못한다. 반장, 이장도 하면 안 된다. 공적인 자리 나서면 안 된다”는 말로 설정스님의 출마를 평가하고 “이런 분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고 원로회의에서 인준되는 것이 조계종의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박쥐승, 가사 입은 도적들은 적당하게 권력과 타협해 종단권력을 유지하는 적폐세력들”이라며 “조만간에 503호(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 옆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명진스님은 가깝게 지내는 스님들이 더 이상의 투쟁을 만류하고 있지만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한국사회 적폐청산의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조계종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간절한 발원이 있다”며 타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함께해준 재가불자들에게는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했다. 스님은 “외부로 나갔던 눈길을 안으로 돌려 내면을 살펴야 한다”며 “부처님은 바른 길을 가면서도 발걸음을 끊임없이 살피는 사람을 요구했고 이런 불자를 원했다. 긴 호흡으로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운동하자”고 당부했다.

이날 법회에는 사부대중 80여 명이 동참했다. 다음은 법문 요약.

오래간만에 뵙는다. 여러분들이 많이 걱정하셨는데 의외로 건강한걸 보고 안심하는 것 같아 제 마음도 편하다.

이번 단식 과정 속에서, 불교를 바로 세우자고 조계사 앞에서 천막치고 농성하는 과정 속에서, 이 세상에 이익이 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행동하는 많은 분들을 만난 것이 저에게는 큰 소득이었다. 재가불자들의 진정성과 부처님 법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애쓰는 노력들을 보면서 부끄러움 많이 느꼈고 정말 잘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던 기회였다.

지난 4월, 5월부터 종각 앞에서 조계사 앞을 다니며 하루하루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우리의 말이 어떻게 전달되고 불교가 바뀌어 나갈지 끝없이 고민해왔다. 또 우리가 잘 못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옳은지 되돌아보았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불교의 잘못된 부분을 바꾸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되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가 없다면 자칫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 그대로, 그들과 닮아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우리가 4개월 가까이 길에서 그 더운 여름에 모기에 뜯기도 폭우를 맞으며 피켓을 들며 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일까? 이제 만추다. 한 템포 쉴 때가 되었다. 우리 안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외부로 향했던 치열한 분노를, 싸우던 눈길을 안으로 조용히 돌려 내면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반성도 하고 살아온 시간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춰서는 안 된다. 왜냐면 옳은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은 길을 가더라도 항상 돌이켜보며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점검해야 한다. 다른 길이 없어, 하고 가는 사람은 ‘불신지옥 예수천국’하는 사람과 똑 같다. 내가 옳다는 도그마에 빠진다. 함정에 빠진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지만 우리가 가는 길을 되돌아보고, 확실한 발걸음을 떼면서도 항상 발걸음을 살피는 사람. 부처님은 이런 사람을 원했다. 이것이 성찰이다.

내면의 세계를 향해 눈을 돌리는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재가불자와 거짓으로 국민을 속이고 불자를 속이고 결국은 자신조차 속이면서 오랜 세월 살아온 머리 깎은 박쥐승 중 과연 누구의 삶이 행복한 삶이겠느냐. 내가 하는 거짓말이 언제 들통 날지, 다른 사람들이 뒤통수에서 욕하는 것을 알고 사는 삶. 그것을 지옥이라고 한다. 이런 출가자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그 인생이 과연 행복하겠느냐. 그동안 살아온 삶도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자식을 두고, 시주금으로 재산 모으고, 더 나아가 학력을 속인 것이 들통 났다. 시의회 의원들도 학력을 속였다면 출마 못한다. 동네 반장, 이장도 하면 안 된다. 공적인 자리에 나서면 안 된다. 게다가 과속을 하면서 사람을 치어 죽였다는 얘기 나왔는데도 반발을 안 한다. 그런 사람이 조계종 수장이 되는 현실이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표를 찍어주고 원로회의를 통과하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가볼 예정이다. 저를 아는 스님들은 그만해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불교계를 위해 일을 하라고 한다. 저는 타협할 생각이 없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도, 한국사회에 만연한 적폐라 불리는 불의한 일에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도 조계종이 바뀌는 모습을 보이고픈 간절한 마음이 있다.

저들은 자신이 부처님 법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거짓으로 속이고 사람을 데려다 폭행하고 적당히 권력과 타협하며 종권을 유지하는 그들이야말로 적폐세력들이다. 지금은 강고하고 넘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역사는 언제든 진보하고 정의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이 정도로 불교가 타락했다면 부처님 말씀을 잘 전달하는 종단인가, 과연 종단이 필요한 것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문화재보호구역에서 문화재나 관리하는 관리요원으로 정부 돈 받아 문화재 관리하고, 업자들과 적당히 담합하고, 안 들키면 처자식에게 주고. 이런 모습을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저는 타협할 생각이 없다. 긴 숨으로, 서두르지 말고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가야 한다.

중들이 돈에 욕심내고 벼슬 하겠다고 돈 주며 표를 구하는 모습 보면서 그러려고 중노릇 하느냐, 자괴감 들지 않느냐 묻고 싶다. 조만간 모모 승들은 503호 옆으로 보내겠다.

반론ㆍ정정ㆍ추후 보도를 청구하실 분은 이메일(budgate@daum.net)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불교포커스'에서 생산한 저작물은 누구나 복사할 수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센스 2.0: 영리금지 개작금지'에 따릅니다. 정보공유라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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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대한민국 세력' 국정원을 리셋하는 8가지 방법

 

[연속기고-국정원, 이렇게 개혁하자①] 오동석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7.10.23 10:52l최종 업데이트 17.10.23 10:52l

 

현재 국정원개혁발전위에 의한 국정원 적폐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적폐청산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다만 그것만으로 국정원 개혁이 완성될 수는 없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국정원 9대 적폐사건 집중분석'에 이어 국정원감시네트워크와 함께 가장 중요한 '국정원 8대 개혁과제를 제시한다. 국정원감시네트워크에는 민들레-국가폭려기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가 참여하고 있다. [편집자말]
희망촛불 가족 31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을 위한 '송박영신' 1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 참여한 한 가족이 대형 '희망촛불'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희망촛불 가족 지난 2016년 12월 31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을 위한 '송박영신' 10차 범국민행동의 날에 참여한 한 가족이 대형 '희망촛불'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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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촛불 집회에서 나온 '이게 나라냐?'는 말은 좋게 해석하면 '이게 민주공화국이냐?'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국가 자체의 존재와 정당성은 인정하는 '관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국가정보원의 행적에 대한 각종 언론 보도를 보자면, '파시즘 범죄단체'와 다를 바 없다는 참담함을 느낀다. 또 '과연 우리에게 국가라는 게 필요할까'라는 절망감에 빠져든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무덤덤한 인권적, 민주주의적, 공화주의적 감각이다.

국가정보원은 '반대세'의 본산이었다. '반대세'는 '반(反)대한민국 세력'의 준말이다. 국정원이 개입하여 출판한 단행본 <반대세의 비밀, 그 일그러진 초상>에서 등장한 용어다(<한겨레21>, 2013년 6월 20일). 이 책은 "좌성향 세력은 반정부·반체제·반미 촛불시위를 주도하는 등 보수 우익 정권에 타격을 주어 국민들의 민심 이반을 유도한 후 반보수 대연합을 통해 좌익 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187쪽). 그러나 이것은 고스란히 국가정보원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은 민주공화국이다. 국가정보원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 정체성을 부정한다. 국가정보원식의 '결단주의 우적론'에서는 국가에 무조건 충성하는 것이 적으로부터 우군동지를 식별하는 유일한 기준이고, 이것이 집단적 내면화의 과정을 거치면 헌법현실의 파시즘화 경향은 필연적인 현상이다(국순옥,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무엇인가', <민주법학> 제8호, 1994년, 156쪽). 그 중심에 국가정보원이 있다.
 
2017년 6월 19일 '국정원개혁발전위원회'가 발족했다. 그 아래 '적폐청산 TF'와 '조직쇄신 TF'를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국가정보원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안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설령 민간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국가정보원 차원의 셀프 개혁을 통해 일정한 국가정보원 개혁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적폐'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따라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하여금 정보기구를 비롯한 공안권력이 저지른 반(反)헌법적 행위를 조사하게 하되,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 국가안보기능의 조직체계를 전면 재편하는 일은 국회와 협력하여 국가체제를 혁신하는 입법적 조치로서 완성해야 한다.
 
 추명호 전 국정원 국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추 전 국장은 17일 검찰 소환 조사 도중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및 정치관여 혐의로 긴급체포 됐다.
▲  추명호 전 국정원 국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추 전 국장은 17일 검찰 소환 조사 도중 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및 정치관여 혐의로 긴급체포 됐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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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적 국정원, 이중국가체제의 블랙박스

2004년 출범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1차적으로 7개 의혹사건과 2차적으로 6개 분야를 조사했다. 2007년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종합보고서를 발간했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은 그 약속을 철저히 짓밟았다. 해체밖에는 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결과는 국민에게는 참혹한 일이었다. 

지금도 국가정보원의 반(反)헌법적 범죄행위는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논두렁 시계사건, 정치인 룸살롱 검색 사건, NLL 대화록 논란, 선거개입 여론조작 사건, 좌익효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사건, 예술적 표현행위에 대한 배제와 탄압, 유우성씨 간첩 조작 사건, 카카오톡 사찰 논란,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도입 논란, 어버이연합 게이트, 탈북자 시위 알바 동원, 박원순 서울시장 조직적 음해 공작, 판사후보자 면접 사건, 대법원장 사찰, 헌재 불법사찰 논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 헤아릴 수 없다.

국가정보원의 파시즘적 행태는 이중국가체제의 블랙박스였다. 

"… 안보 관련 기구들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주요 국가정책의 결정 및 집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국가 안의 국가가 머리를 내미는 이른바 이중국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공식국가가 비공식국가에 자리를 내주고, 양지의 국가가 음지의 국가에 밀리는 무정부적인 국가 해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결과 헌법 하위법에 의하여 설치된 안보 관련 기구들이 초헌법적 주권기관으로 군림함으로써 공식 국가기관들은 박제된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한다."(국순옥, <민주주의 헌법론>, 아카넷, 2015, 497쪽).

국가정보원에는 민주적·법적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이 자의적 절대 권력을 어떻게 남용했는지는 아직까지도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국가정보원 차원에서 규명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의 반(反)헌법행위가 국가보안법체제에서 사람들의 생각, 사고, 사상 등 개인의 내면 영역까지 지배하려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이다. 국가보안법체제는 인간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면서 언제든지 비판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체제다.

과거 사상범 또는 양심수에 대한 사상전향제도와 다를 바 없는 각종 제도와 현상들이 존재한다. 보안관찰제도, 정부 정책 비판을 세뇌의 결과로 보는 발언, 군 정보기관까지 가담한 민간인 사찰과 대국민 심리전,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 블랙리스트 존재 등은 가히 '사찰 왕국'이라고 할 만한, 파시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국가폭력이다.

두 번째 문제는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할 사회적 자율 영역에 국가정보원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민사회를 조종한 건 전체주의적 폭력이다. 보수단체에게 자금 등을 제공하여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국가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과정에 개입하여 저지른 반(反)민주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3․15부정선거가 4․19혁명으로 이어진 헌정사를 되짚어볼 때, 국가권력의 선거개입은 헌법 자체와 국가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범죄행위다. 그것은 형법상의 내란·외환죄 이상의 범죄다.

마지막 네 번째 문제는 국가정보원이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인권을 침해함은 물론 국가안보에 기여하기보다는 국가안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을 상실시킴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 안보범죄의 주체였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원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사권을 틀어쥐고 그것을 남용함으로써 위법한 감금과 수사기법을 확산하는 악영향을 끼쳤다. 

북한해외식당 종업원 탈북 관련 사건을 비롯하여 탈북자 관련 사안에서는 남북관계를 악화하는 방향으로 정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헌법이 명령한 평화통일 원칙을 무력화한다. 무소불위의 절대적인 안보 권력은 민주적 견제 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부패의 온상이 됐다. 아울러 평화적 생존을 위협하고 현실적인 안보 무능력을 초래했다. 
 
 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언론장악 국정원 문건 피해자 보고대회에 민일홍 KBS 라디오 PD, 김범수 KBS 전 <추적 60분> PD, 이근행 MBC 전 시사교양국 PD, 이우환 MBC 전 <PD수첩> PD가 참석하고 있다.
▲  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언론장악 국정원 문건 피해자 보고대회에 민일홍 KBS 라디오 PD, 김범수 KBS 전 <추적 60분> PD, 이근행 MBC 전 시사교양국 PD, 이우환 MBC 전 <PD수첩> PD가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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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울 8가지 헌법원칙

헌법은 원칙규범이다. 예외상황 논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현실 여건을 고려한 점진적 개선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헌법에서 유래하는 원칙을 확인하는 일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국가정보원의 구체적 개혁안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아래와 같은 헌법적 원칙에 따른 목표를 설정하고 점진적 이행방안을 담아야 할 것이다. 원칙이 먼저이고 주도적이며, 현실과 예외는 구체적 실증을 통해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

첫째,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에 복무하며 헌법에 합치하는 비밀정보기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국가정보원 개혁 문제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이다. 비밀정보기구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작동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비밀정보기구의 확장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비밀정보기구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때만 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밀정보기구의 개혁 문제는 헌법 문제로서 국가정보원이라는 기관의 문제에 한정할 수 없고 다른 국가기구와 관련 법제와 내부의 행정규칙 등 국가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 과제를 부과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평화주의원칙을 굳건히 견지해야 한다. 그것은 분단체제를 이유로 민주공화국의 예외 상태를 강요하는 현실을 넘어서게 할 힘이다. 헌법의 평화원칙이 남북관계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된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인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국가보안법은 반공주의와 국가안보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테러방지법도 존재이유가 없다. 테러가능성을 높이는 군의 해외파병도 금지할 일이다. 

과잉의 국가안보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국민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 견제 기능을 약화함으로써 부패의 온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정권에 충성하는 정보기구, 구성원의 사익(私益)과 결부한 부패동맹, 방위산업의 비리 등으로 이러한 점을 확인했다.

셋째, 인권 존중 원칙을 회복하여 최대한으로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헌법 제10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면서 국가에게 개인이 가지는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국가는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명령한 기본적 인권의 본질적 내용 침해 금지 원칙에 따라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엄정한 적법절차에 따라 과잉금지원칙을 준수하면서 기본적 인권을 제한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의 조직 원칙에서도 준수해야 하며,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와 정보기관의 분산과 견제 체계 수립, 수사기관의 정보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으로 인권 존중 원칙을 뒷받침해야 한다.

넷째, 정보기구를 다시 편성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은 정보수집과 법 집행의 분리원칙이다. 분리원칙(Trennungsgebot)은 경찰과 정보기관을 조직과 기능 모두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당연히 비밀정보기관에게는 수사권 같은 집행권한이 없다. 

독일은 '비밀첩보기관이면서 동시에 경찰기관'이었던 나치스 정권의 국가비밀경찰(게슈타포)에 대한 역사적 청산과 반성의 의미에서 분리원칙을 헌법상 지위를 가지는 원칙으로 이해했다. 독일의 상황이 현재 한국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분리원칙을 정립하면, 한편으로 정보기구에게 집행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경찰 같은 집행기관에게는 정보수집기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정보원의 범죄 수사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분리원칙은 정보와 집행, 국내와 해외 그리고 사이버, 민간과 군, 경찰·검찰·일반행정기관 등에서 정보 기능 폐지 등 그 범위를 확장하여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과거 행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분리원칙을 구체화하면, 국가정보원은 해외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만을 수행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정보원의 국내정보 수집을 금지하고, 정보 및 보안 업무 기획조정권을 폐지하며, 각 정보기구 간 분리와 견제 관계를 전제로 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비밀보호 정책 수립과 신원조사와 보안측정 기능, 사이버 보안 기능 등은 각 개별 정부기관이 필요하고 적정한 범위에서 인권을 준수함을 전제로 하여 제한적으로 수행하도록 한다. '심리전' 등 국내 정치에 관여하거나 정보수집 기능을 넘어서는 적극적 활동은 엄중한 형사 처벌 대상이다.

다섯째,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모든 정보기구에 대해 민주적 통제와 법적 통제의 유기적 제어기제를 수립하는 일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와 별도로 국회 소속의 '전문가형 정보기관 감독기구'와 대통령 소속 '정보감찰관'을 설치하여 각종 정보기구 통제장치를 신설한다. 정보기관의 임무를 정보수집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비밀주의에 따른 정보의 왜곡과 정보권력의 오·남용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통제와 감독 체계가 필수적이다. 

그것은 안보 업무의 답책성(accountability) 확보를 수반한다. 정보 활동에 대하여 해명 또는 설명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만약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적절한 곳에서 그 결과를 수용하도록 하고, 비판을 받거나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게 해야 한다.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면, 비밀 정도에 따라 적정한 답책 체계를 구축하면 될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국회 정보위원회의 과잉 비공개주의를 개선하여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정보위원회의 국가정보원 보유 자료 제출권과 답변 요구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섯째, 정보권력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예산을 삭감하고 인력을 축소하며 문민 통제를 강화하고, 그 법적 위상을 약화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정보원 예산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예산회계특례법을 폐지하고, 예산결산위원회의 심사 면제조항을 폐지하며, 국가정보원 직원에 대한 수사 사실과 결과를 통보하는 것 등이다.

일곱째, 정보수집 방법의 제한이다. 패킷 감청 금지와 도청장치 수입과 사용 금지 등을 비롯한 도청의 원칙적 금지와 매우 엄격한 예외적 인정이다. 광범위한 통신사실 확인 등 개인정보 수집 제한이다. 각종 리스트 작성 등에 대한 금지와 엄격한 처벌이다. 

여덟째, 정보기구의 내부적 통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의 정보수집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매뉴얼을 마련하고, 각종 통제·감독 기구가 매뉴얼 준수 여부를 감사하며, 그 위반 행위에 대한 징계 책임을 엄정하게 추궁하는 기제를 마련하는 것이다. 

정보기구 전면 해체 후 정보기능의 재편성

개혁의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는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비밀정보권력이 저지른 폭력과 범죄의 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양보할 것도 피할 데도 없는 현실을 맞닥뜨려서도 국가정보원을 혁신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절박함의 표현인 것이다. 

국가정보원의 개혁은 '촛불 혁명'의 정신에 따라 혁명적인 '리셋'이어야 한다. 새로 헌법을 제정한다는 단호함과 결연함으로써 국가정보원 혁신을 완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 개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민주주의 복원력 문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근원은 헌법의 권력구조가 아니라 법치주의 통제를 벗어나 헌법을 파괴할 수 있는 비밀권력의 존재다. 헌법을 고칠 것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을 옹위하고 있는 국가권력기구, 특히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각종 정보기구의 전면 해체 후 정보기능의 재편성이야말로 민주공화국체제로 회귀할 수 있는 최우선 과제다. 

문재인 대통령과 국회의 엄중한 현실 인식과 적극적인 대처방안 실행이 절실하다. 특히 헌법파괴행위로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의 경우 국가정보원의 혁신을 방해하는 행위는 반(反)헌법적 범죄행위의 공모자임을 자백하는 일이다. 과거 행적에 대한 뼈를 깎는 자기반성 위에 국민의 인권을 최우선시하는 보수의 이념을 실천함으로써 주권자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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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은폐하는 트럼프의 정치촌극, 언제 끝날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10/23 10:57
  • 수정일
    2017/10/23 10:5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개벽예감 271] 패배를 은폐하는 트럼프의 정치촌극, 언제 끝날까?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10/23 [10: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의 화성-14형 발사와 매티스 국방장관의 비밀보고서

2. 패배를 은폐하는 백악관에게 ‘극약처방’ 준비한 조선

3. 핵무력 완성 이후 조선이 내건 새로운 목표

 

1. 조선의 화성-14형 발사와 매티스 국방장관의 비밀보고서

 

2017년 7월 4일 평양시간으로 오전 9시, 조선의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굉음과 화염과 후폭풍을 내뿜으며 창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3년 동안 미국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고, 64년 동안 위태로운 정전상태에서 미국과 대치해왔으며,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해 최후결전을 각오하고 결전준비를 다그쳐온 미국의 최대 적국이 미국 본토를 초토화할 열핵탄두가 장착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성공적으로 시험발사한 것이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은 장장 25년 동안 지속되어오는 조미핵대결을 종식시켜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내는 대격변의 분기점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발사일로부터 석 달 이상 지났는데도, 그 사실은 언론에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 

 

지금 최종국면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는 조미핵대결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이 왜 역사적인 분기점으로 되는지 알 수 없다. 더욱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미국이 241번째 독립기념일을 맞은 그 날 최대 적국과 맞붙은 핵대결에서 자기들이 패하고 말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 사실을 꽁꽁 감춰버렸다.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이 왜 조미핵대결을 종식시키는 승리와 패배의 분기점으로 되었는지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이 조미핵대결에서 추구해온 전략적 목표는 조선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핵공격력을 갖지 못하게 저지하고 조선을 비핵화하려는 것이었다. 그와 정반대로, 조선이 조미핵대결에서 추구해온 전략적 목표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핵공격력을 개발함으로써 핵무력을 완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미핵대결의 최종국면은 핵무력 완성과 비핵화라는 상극이 격돌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7년 7월 4일 평양시간으로 오전 9시, 8축16륜 발사대차에 실려 발사지점으로 이동한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수직으로 세워진 장면이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은 장장 25년 동안 지속되어오는 조미핵대결을 종식시켜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내는 대격변의 분기점으로 되었다. 지금 최종국면에서 격렬하게 전개되는 조미핵대결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면,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이 왜 역사적인 분기점으로 되는지 알 수 없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 상극의 격돌 중에 조선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핵공격력을 개발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조선의 비핵화를 추구해온 자기의 전략적 목표를 상실하였고, 조선은 조선의 핵무력 완성을 추구해온 자기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고 허세를 부리는 아메리카합중국이 건국 이후 241년 만에 적국과의 대결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였음을 말해준다. 건국 이후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충격이 오죽 심했으면, 백악관 주인은 “조선을 전부 파괴하겠다”는 극악무도한 전쟁폭언을 토해내며 미치광이처럼 길길이 날뛰었겠는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충격을 받아 거의 돌아버릴 뻔한 도널드 트럼프(Donal J. Trump) 미국 대통령은 미국군 수뇌부에게 조선의 핵무력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설명해줄 정보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화성-14형 발사로 급전된 상황에서 조선과의 핵대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미국군 수뇌부가 화성-14형 시험발사에 관한 정보를 비롯하여 조선의 핵무력 전반에 관한 심층정보를 분석한 비밀보고서를 작성하기까지 약 2주 걸렸다. 그렇게 되어 2017년 7월 20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 있는, ‘탱크(tank)’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나는 2017년 10월 16일 <자주시보>에 실린 ‘트럼프의 발광전략 뒤에 무엇이 보이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2017년 7월 20일에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 대해 분석, 고찰하였는데, 미국군 수뇌부가 그 회의에서 보고한 조선의 핵무력에 관한 정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글에 서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에 미처 서술하지 못한 미국군 수뇌부의 조선 핵무력 관련 정보보고를 논하려고 한다.

 

2017년 7월 20일 미국군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미국군 수뇌부가 보고한 조선의 핵무력에 관한 정보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보도기사가 <워싱턴포스트> 2017년 8월 8일부에 실렸다. 아래 인용문은 그 보도기사에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북조선은 미사일 내부에 장착하는 소형화된 핵탄두를 생산하는데 성공하였고, 그로써 어엿한 핵강국(a full-fledged nuclear power)으로 되는 길에서 중요한 문턱을 넘어섰다는 것이 미국 정보관리들이 비밀보고서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지난달(2017년 7월을 뜻함-옮긴이) 국방정보국이 완성한 그 분석은 공산주의국가(조선을 뜻함-옮긴이)의 핵무기체계에서 핵탄의 총수량이 몇 발인가에 관한 공식적인 추정을 말해주는 또 다른 정보보고에 잇따라 나온 것이다. 지난달 미국은 북조선의 김정은 영도자가 통제하고 있는 핵무기가 최대 60발에 이른다고 산정하였다. (줄임) 지난달 미국 관리들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평양의 노력이 생각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고 결론하였다. (줄임)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지난 7월 28일에 작성한 요약본에 나오는 새로운 정보분석의 결론은 북조선이 ICBM급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탄도미사일들로 운반하는 핵무기를 생산하는 중대한 시점(critical milestone)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지난 7월 20일에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이 보고한 조선의 핵무력에 관한 비밀보고서는 당연히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은 며칠 뒤에 그 비밀보고서의 요약본(조선의 핵무력에 관한 1급 비밀이 제외된 2급 비밀문서)을 따로 만들어 국무부와 국방부의 중간급 관리들에게 열람시킨 것으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보도기사는 그 요약본을 열람한 어떤 익명의 관리가 <워싱턴포스트> 취재기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보도기사에는 좀 모호하고 부정확한 내용도 들어있지만, 두 가지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매티스 국방장관이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조선의 핵탄두가 최대 60발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조선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사실이다. 매티스 국방장관이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보고한 이 두 가지 정보는 조선이 미국의 집요한 저지공작을 파탄시키고 결국 핵무력을 완성하였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마익 팜페오(Michael R. Pompeo) 중앙정보국장은 2017년 10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국가안보문제 토론회에서 조선이 핵무력을 거의 완성했다느니, 핵무력 완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직전이라느니, 몇 달 뒤에는 핵무력을 완성할 것이라느니 하는 주장을 늘어놓았는데, 그는 자기가 말한 조선의 핵무력 완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나는 탄도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와 열핵탄두를 만들고, 그와 더불어 조선에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 것을 조선의 핵무력 완성으로 본다. 이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 조선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와 1메가톤급 열핵탄두 기폭시험에서 각각 성공함으로써 핵무력을 완성하였다는 점은 명백하다.  

 

조선이 미국의 저지공작을 파탄시키고 핵무력을 완성하였다고 지적한 매티스 국방장관의 보고가 끝났을 때, 국가안보회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해졌다. 지난 25년 동안 온갖 술수와 계략, 강압과 협박을 들이대면서 조선의 핵무력 개발을 저지하려고 그처럼 무던히도 애를 써왔지만 결국 실패하였으니 분위기가 어찌 침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7년 7월 20일 미국 국방부에 있는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그 회의에서 조선이 미국의 저지공작을 파탄시키고 핵무력을 완성하였다고 언급한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의 보고가 끝났을 때, 국가안보회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해졌다. 지난 25년 동안 온갖 술수와 계략, 강압과 협박을 들이대면서 조선의 핵무력 개발을 저지하려고 그처럼 무던히도 애를 써왔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니 분위기가 어찌 침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조미핵대결에서 패하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에 인용한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그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단도직인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여 회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윽고 흥분으로 떨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목소리가 침울해진 회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핵탄두를 6,800발이나 가진 우리가 핵탄두를 60발밖에 갖지 못한 북조선을 왜 공격할 수 없는가?” 트럼프 대통령이 그 회의에서 미국군 수뇌부에게 던진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아마도 그런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핵전쟁이 뭔지 모르는 무식한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은 미국군 수뇌들은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마도 이렇게 답변하였을 것이다. “조선은 핵탄두만이 아니라 열핵탄두도 갖고 있다. 만일 미국 본토 상공 300km 고도에서 1메가톤급 열핵탄두가 폭발하면, 강력한 전자기파(EMP)가 방사되어 전국적 범위에서 전력공급망, 통신망, 교통망, 급수망, 급유망이 마비될 것이고, 미국 본토에 열핵탄두 한 발만 떨어져도 상상을 초월한 핵참화를 입게 된다. 그러니 조선에 대한 공격은 단념하는 게 좋다.” 

그런 답변을 듣고 기가 막힌 트럼프 대통령은 무식한 질문을 또 다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북조선이 우리 본토를 향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면, 그 동안 수 백 억 달러를 들여 구축해놓은 미사일방어체계로 요격해버리면 될 텐데, 당신들은 도대체 뭘 그렇게 염려하는 건가?”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뭔지 모르는 무식한 대통령으로부터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받은 미국군 수뇌들은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아마도 이렇게 답변하였을 것이다. “우리 미사일방어체계로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한다. 이제껏 탄도미사일 요격에 성공하였다고 여러 차례 발표하였지만, 그것은 요격에 최적화되도록 짜놓은 각본에 따라 표적탄두 1발을 요격탄두 1발로 맞추는 1 대 1 요격시험에서 성공한 것인데, 그렇게 각본  대로 했는데도 요격성공률은 50% 이하에 머물렀다. 그런데 진짜탄두들과 가짜탄두들이 뒤섞여 날아오는 실전상황에서는 진짜와 가짜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요격성공률을 예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조선과의 전쟁은 단념하는 게 상책이다.”  

 

 

2. 패배를 은폐하는 백악관에게 ‘극약처방’ 준비한 조선

 

2017년 7월 4일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한 조선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패배를 인정하고 조만간 어떤 형식으로든 ‘굴복의사’를 표명하지 않을까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하면서 7월 20일 국가안보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 언론매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7월 20일 국가안보회의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고, 조선도 백악관 내부의 그런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한 방 크게 얻어맞고서도 뒤로 물러설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선은 타격이 좀 약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 며칠 뒤 화성-14형을 한 발 더 쏘았다. 이것이 바로 2017년 7월 28일 화성-14형이 일본 열도 상공을 넘어 북태평양으로 날아가게 된 사연이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7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가 올린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준비를 끝낸 정형과 대책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에 수표하는 장면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으로 한 방 크게 얻어맞고서도 뒤로 물러설 반응을 보이지 않자, 조선은 타격이 좀 약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 며칠 뒤 화성-14형을 한 발 더 쏘았다. 이것이 바로 2017년 7월 28일 화성-14형이 일본 열도 상공을 넘어 북태평양으로 날아가게 된 사연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 본토를 타격할 화성-14형이 연속적으로 시험발사되어 두 방이나 연타를 얻어맞았을 때, 미국 군부는 이러다가 화성-14형이 미국 본토 가까이까지 날아오는 게 아닌가 하는 심리적 동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 심리적 동요를 느낀 미국 국방부 관리들 가운데는 지난 7월 20일 매티스 국방장관이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조선의 핵무력에 관한 비밀보고서 요약본을 열람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열람한 요약본의 일부내용을 <워싱턴포스트>에 흘려주었고, 그 내용이 지난 8월 8일 기사화되었다. 위에 서술한 대로, <워싱턴포스트> 2017년 8월 8일 보도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조선의 핵무력이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그 보도기사가 나온 지난 8월 초순까지만 해도 7월 20일에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가 진행되었다는 사실마저도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당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의 핵무력이 완성되었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보고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2017년 8월 8일 <워싱턴포스트>가 문제의 기사를 보도하였을 때, 그 보도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파한 미국의 전문가들이 입을 열었다. 미국 언론에 조선의 핵문제가 크게 부각될 때마다, 그에 관해 비교적 온당한 논조로 자기 견해를 밝히곤 하는 제프리 루이스(Jeffrey Lewis)를 손꼽을 수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부 먼트레이(Monterey)에 있는 미들베리 국제문제연구원(Middlebur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산하 제임스 마틴 비확산연구쎈터 동아시아 비확산프로그램 책임자다. 그는 2017년 8월 9일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른 팔러씨(Foreign Policy)>에 ‘경기는 끝나고, 북조선이 이겼다(The Game Is Over, and North Korea Has Won)’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제프리 루이스가 그 글에서 직접 밝힌 것처럼, 그는 전날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문제의 보도기사를 읽고 그 글을 썼다. 그는 글에서 “북조선을 외교 또는 강제력으로 비핵화하는 창문이 폐쇄되고 말았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을 비핵화하려던 미국의 전략적 목표가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으니, 미국이 패하고 조선이 승리하였다는 제프리 루이스의 논조는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조미핵대결이 끝나게 된다는 나의 ‘개벽예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미국이 조미핵대결에서 패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시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은 미국이 조미핵대결에서 패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해보려고 이전보다 더 야비한 공갈과 겁박을 들이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전략폭격기 편대를 한반도 상공으로 출격시켜 정세를 더욱 긴장시켰다. 이를테면, 2017년 8월 7일 괌에서 이륙한 B-1B 전략폭격기들이 한반도 상공에 출동하여 실전연습을 벌였고, <워싱턴포스트> 2017년 8월 8일부 보도기사가 나온 직후, 때마침 뉴저지주 골프장에 머물던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이 “불과 분노(fire and fury)”를 맞게 될 것이라고 공갈하였으며, 8월 9일에는 매티스 국방장관이 성명을 발표하여 “조선은 정권의 종말과 인민의 파멸로 나아가는 그 어떤 행동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겁박하였다.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패한 주제에 조선을 향해 그런 공갈과 겁박을 늘어놓으며, 전략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조선을 위협하려 든 것은, 트럼프식 발광전략의 진면모를 드러낸 참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았는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조선정책기조를 천명하는 긴급성명을 발표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매티스 국방장관과 틸러슨 국무장관의 공동명의로 작성된 ‘우리는 평양을 주시하고 있다(We're Holding Pyongyang to Account)’라는 제목의 이례적인 성명이 <월스트릿저널> 2017년 8월 13일부에 실렸다. 그 두 사람은 성명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실패한 전략적 인내 정책이 새로운 전략적 책임 정책(a new policy of strategic accountability)으로 대체되는 중”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새로운 대조선정책은 군사적 선택방안이 아니라 “평화로운 압박(peaceful pressure)”으로 조선을 비핵화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2017년 7월에 두 차례나 실행된 화성-14형 시험발사가 모두 성공하여 조선의 핵무력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그로써 조선을 비핵화하려는 자기들의 전략적 목표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조선의 비핵화’니 ‘평화로운 압박’이니 하는 망측스러운 요설을 꺼내놓았다.    

 

이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의 화성-14형 시험발사로 두 차례나 연타를 얻어맞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발광전략으로 맞서면서 요설을 늘어놓고 있었으니,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수준을 뛰어넘는 ‘극약처방’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극약처방’이란 평시에 조선을 위협하고, 전시에 조선을 공격할 미국군 전략기지가 도사리고 있는 괌(Guam)의 주변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여러 발 쏘아 낙탄시키는 군사작전계획을 말한다.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가 시행하는 무력시위형 성능시험이고, 화성-12형 괌포위사격은 조선인민군 전략군이 시행하는 극약처방형 군사작전이다.  

조선인민군 전략군 대변인은 2017년 8월 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화성-12형을 발사하는 괌포위사격을 단행하겠다고 밝혔고, 이튿날 조선인민군 전략군 사령관은 화성-12형 4발을 동시발사하여 괌을 포위사격하는 방안을 “심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8월 14일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를 시찰하고 괌포위사격계획을 비준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7년 8월 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인민군 전략군사령부를 시찰하면서 전략군 지휘부가 작성한 괌포위사격계획을 검토하는 장면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의 화성-14형 시험발사로 두 차례나 연타를 얻어맞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발광전략으로 맞서면서 요설을 늘어놓고 있었으니, 조선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수준을 뛰어넘는 '극약처방'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평시에 조선을 위협하고, 전시에는 조선을 공격할 미국군 전략기지인 괌의 주변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여러 발 쏘는 군사작전계획이 바로 그런 '극약처방'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망측스러운 발광전략과 요설로 자기들의 패배를 은폐하려다가 괌포위사격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받게 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당혹감을 느낀 트럼프 대통령은 8월 18일에 또 다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였다. 그가 7월 20일에 첫 번째로 소집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는 미국군 합참본부 회의실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가 8월 18일에 두 번째로 소집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빗(Camp David)에서 진행되었다. 8월 21일에 시작된 ‘을지프리덤가디언’ 전쟁연습을 사흘 앞두고 열린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는 조선이 ‘을지프리덤가디언’에 대한 보복으로 괌포위사격을 단행하는 경우 그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과 화성-14형 시험발사성공 이후 변화된 정세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 등이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을지프리덤가디언’ 기간 중에 괌포위사격을 단행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였는데, 조선은 그런 예상을 뒤엎고, 9월 3일에 열핵탄두 기폭시험을 단행하였다. 폭발위력이 1메가톤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는 열핵탄두의 대폭발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충격과 경악에 몰아넣었다. 

 

<NBC> 2017년 9월 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이 열핵탄두 기폭시험을 단행한 때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트럼프 대통령은 긴급히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였다. 7월 20일과 8월 18일에 이어 9월 3일에 세 번째로 소집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는 백악관에서 진행되었다. 그 회의에는 존 켈리(John F. Kelly) 대통령 비서실장, 마익 펜스(Michael R. Pence) 부통령,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허벗 맥매스터(Herbert R. McMaster) 국가안보보좌관, 조섭 던포드(Joseph F. Dunford) 합참의장, 댄 코우츠(Daniel R. Coats) 국가정보실장이 참석하였다. 오찬을 마친 뒤 그들은 백악관 상황실로 자리를 옮겨 국가안보회의를 진행하였는데, 다른 지역에 출장 중이던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 국무장관과 마익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은 영상통화를 통해 회의에 동참하였다.  

2017년 9월 3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들은 미국이 패한 조미핵대결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명예롭게’ 끝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고심하여야 하였다. 조미핵대결에서 패하고서도 패하지 않은 것처럼 짐짓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그 핵대결을 ‘명예롭게’ 끝내어 대제국의 체면을 지키는 방도를 고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월 3일 세 번째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가 진행된 때로부터 지난 10월 10일 네 번째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가 진행된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였던 행동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이 드러난다. 

첫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들은 미국이 패한 조미핵대결을 ‘명예롭게’ 끝내기 위한 방안, 다시 말해서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마지막 선택방안을 비밀리에 검토하였다. 나는 2017년 10월 16일 <자주시보>에 실린 글 ‘트럼프의 발광전략 뒤에 무엇이 보이는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들이 지난 10월 10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한반도 철군문제를 검토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였으므로, 여기서 재론하지 않는다. 

둘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성원들은 지난 10월 10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진행된 특별한 국가안보회의에서 미국이 패한 조미핵대결을 ‘명예롭게’ 끝내는 한반도 철군문제를 조선과 합의할 때까지 그 문제를 검토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당분간 기존 3대 방책을 계속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3대 방책이란 발광전략, 고립압박, 무력시위를 뜻한다.  

셋째,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1월 4일부터 11일까지 도꾜, 서울, 베이징을 차례로 순방하고, 베트남 다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의에 각각 참석하게 된다. 그는 도꾜, 서울, 베이징을 순방할 때, 도꾜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그 다음으로는 베이징에서 두 번째로 오래 머물고, 서울에서는 24시간도 되나마나하게 머물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순방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본을 포용하고, 중국과 거래하면서, 한국을 경시하는 그의 정책적 의도다. 미국이 장차 한반도 철군을 실행에 옮기려면, 지금부터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해야 하고, 중국과의 거래관계를 잘 처리해야 하지만, 한국은 경시할 수밖에 없다.   

 

 

3. 핵무력 완성 이후 조선이 내건 새로운 목표  

 

<연합뉴스> 2017년 10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국제비확산회의’에 참석한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북미주국장이 2017년 10월 20일 동북아시아 안보문제 토론회에 발표자로 출연하여 연설하였다고 한다. 최선희 국장의 연설내용을 전한 <연합뉴스> 보도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미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는 한, 조선의 핵무기는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우리는 미국과의 힘의 균형에 거의 도달했으며, 우리의 최종목적은 미국이 조선에 대한 어떤 군사행동에 관해서도 얘기하지 못하도록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위에 서술한 첫 번째 인용문은, 미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하게 되면, 조선의 핵문제를 협상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미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경우밖에 없으므로, 위의 인용문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군하여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하게 되면, 조선의 핵문제를 협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조선의 핵문제를 협상한다는 말은 조선을 비핵화하는 문제를 협상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의 속뜻은 두 번째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국제비확산회의'에 참석한 최선희 조선 외무성 북미주국장이 2017년 10월 20일 동북아시아 안보문제 토론회에서 발표자로 출연하여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미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공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는 한, 조선의 핵무기는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면서, 조선의 최종목표는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인데, 지금 조선은 그 최종목표에 거의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르는 것을 최종목표로 설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룬다는 말은 미국과 핵군비경쟁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을 핵감축으로 끌어내 미국의 핵전쟁위험을 감소시킨다는 뜻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두 번째 인용문은 조선이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최종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최선희 국장이 미국과의 힘의 균형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리용호 조선 외무상도 러시아 <타쓰통신> 2017년 10월 11일부에 실린 대담기사에서 “우리는 미국과 실제적인 힘의 균형(a real balance of force)을 이루려는 우리의 최종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종착점에 거의 도달하였다”고 말했다. 조선 외무성은 2017년 9월 13일에 발표한 보도자료에서도 “우리는 미국과 실제적인 균형을 이루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고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힘을 다져나가는데 더 큰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조선 외무성이 2017년 3월 4일에 발표한 대변인담화에서 “핵무력을 질량적으로 더욱 강화하여 힘의 균형을 이룩하는 것”을 언급하였으므로, 조선에서 말하는 힘의 균형이란 핵무력의 균형(balance of nuclear forces)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위의 인용문들은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최종목표를 추구해왔는데, 현재 그 최종목표를 거의 달성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최종목표를 거의 달성하게 되었다는 말은 조선의 핵무력이 미국의 핵무력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증강되고 있다는 뜻인가? 2017년 현재 미국은 핵탄두를 6,800발이나 보유하였는데, 조선이 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핵탄두를 보유하였다는 뜻인가? 

미국의 핵탄개발역사는 70년이고, 조선의 핵탄개발역사는 20년이므로, 핵탄개발에서 미국은 조선보다 50년 앞섰다.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를 인용한 <뉴욕타임스> 2017년 4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핵탄을 6~7주에 한 발씩 만드는 생산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이 핵탄생산능력을 더욱 고도화하여 3주에 한 발씩 생산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50년 앞선 미국의 핵보유량을 20년 만에 따라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부문은 핵탄두를 장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2017년 현재 미국은 핵탄두를 장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449발과 핵탄두를 장착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239발을 보유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이 화성 계열 중장거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400발정도 만들고, 북극성 계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200발정도 만들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매우 고도화된 조선의 미사일생산능력을 생각하면, 앞으로 1~2년 뒤에 화성 계열 중장거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 400발과 북극성 계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200발을 생산하는 최종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는 최종목표에 거의 도달하였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닐까.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6년 3월 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부문의 과학자, 기술자들을 만나 핵무기병기화사업을 지도하는 장면이다. 이 사진에 나타난 거대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조선이 아직 시험발사하지 않은 것이고, 공식명칭도 외부에 아직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은 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KN-14'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른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부문은 핵탄두를 장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조선이 화성 계열 중장거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400발정도 만들고, 북극성 계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200발정도 만들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고도화된 조선의 미사일생산능력을 생각하면, 앞으로 1~2년 뒤에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는 최종목표에 도달할 것으로 예견된다. 조선은 미국의 한반도 철군 이후 동북아시아에 여전히 남아있을 미국의 핵전쟁위험까지 완전히 해소할 최종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려는 것은 미국과 핵군비경쟁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과 동등한 지위에 올라서서 핵군축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게 되면, 핵군축협상으로 미국의 핵무력을 감축시키고 미국의 핵전쟁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미국과 핵무력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미국의 핵무기는 한 발도 감축시킬 수 없다. 조미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면 한반도에서는 미국의 핵전쟁위험이 해소되어도 동북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의 핵전쟁위험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핵군축을 실현하려는 핵강국만이 트럼프의 광란적인 핵무력 증강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핵군축으로 끌어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은 오래 전부터 핵군축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해오고 있다. 이를테면, 2012년 4월 21일 조선 외무성은 조선의 핵정책을 천명한 ‘조선반도와 핵’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에서 “다른 핵보유국들과 동등한 립장에서 국제적인 핵군축노력에 참가할 것”이라고 밝혔고, 최고인민회의는 2013년 4월 1일에 발포한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한 법’에서 “핵전쟁위험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핵무기가 없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겠다고 명기하였다. 이것은 세계무대에 핵강국으로 등장한 조선이 트럼프의 광란적인 핵무력 증강에 제동을 거는 동북아시아지역의 핵군축과 비핵지대화 창설을 새로운 목표로 내걸었음을 말해준다. 조선은 미국의 한반도 철군 이후에도 동북아시아에 여전히 남아있을 미국의 핵전쟁위험까지 완전히 해소하기 위한 최종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본다.   

 

10월은 자주시보 후원확대의 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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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바로 가기 : www.jajusibo.com/sub_read.html?uid=35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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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아~ 반미시위는 처음이지?

항모 '로널드 레이건'호 맞이하는 부산의 반미반전 투쟁
 

부산에 입항한 미국 핵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줄지어선 수십 대의 관광버스, 또 늘어선 정화조 차량들. 지난 21일 미국의 핵항모 ‘로널드 레이건’호가 입항한 이후 부산 백운포의 풍경이다.

미국 핵항모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군의 숫자와 부산물들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 미국의 핵항모 ‘로널드레이건’호가 21일 부산 백운포에 입항했다.

6000여명의 미군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부산 전역과 인근 경남에서 관광버스 수십 대가 동원되었다. 관광버스들은 전용 셔틀버스로 사용되며 매일 오전 7시부터 밤 1시까지 해운대 해수욕장, 부산역 텍사스촌 등지로 미군들을 실어 나른다. 핵항모의 오물을 처리하기 위한 정화조 차량도 부산 동구와 남구에서 모두 8대가 차출됐다.

▲ 백운포 기지 앞에선 핵항모 입항을 반대하는 집회가 부산민중연대의 주최로 열렸다.

여기는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여기는 너희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구호 소리가 크게 울린다.

로널드 레이건이 입항한 당일인 21일 백운포 기지 앞에선 핵항모 입항을 반대하는 집회가 부산민중연대의 주최로 열렸다.

핵항모의 미군들이 부대 밖을 나오자마자 맞닥드린 것은 핵항공모함 입항 규탄시위였다.

‘Yankee! Go Home!’ 팻말을 든 시위자가 부대 정문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미군들을 향해 거센 목소리로 항의한다. 미군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부대 안으로 자리를 옮겨 셔틀버스를 기다린다.

시위를 피해 부대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나오던 미군 차량들도 시위대의 거센 항의를 피하지 못했다.

핵항모의 미군들이 탑승한 관광버스엔 미군을 향해 쓴 영어 유인물이 붙여졌다. 유인물엔 “Dotard Trump, Stop lunacy!(늙다리 미치광이 트럼프, 광기를 멈춰라!)”라고 쓰여있었다.

▲ 백운포 기지 앞에선 핵항모 입항을 반대하는 집회가 부산민중연대의 주최로 열렸다.

거센 항의는 민심을 보여줬다. 한 참가자는 “미군이 편하게 기항하는 부산이 이제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부산 백운포에는 미해군사령부가 자리잡고 있고 수시로 미국의 핵항모와 핵잠수함이 입항한다. 또 부산 감만 8부두엔 미군의 생화학실험시설이 들어서있고 인근엔 미55보급창(부산 동구 군수물자 보급기지(Busan Storage Center))이 있다. 이 참가자의 발언은 부산의 미군기지화에 반대하는 여론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집회를 주최한 부산민중연대 관계자는 “미군들이 있는 동안 끊임없이 트럼프의 대북 적대정책 반대 투쟁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반송남 담쟁이기자  minplusnews@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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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 위해 한반도 평화구축 노력한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10/23 10:00
  • 수정일
    2017/10/23 10:0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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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창립 20년, '남북보건의료협력 선언문' 발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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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1  20: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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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녘 어린이의 건강을 위해 매진해 온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가 창립 20년을 맞아 21일 서울 연건동 함춘회관에서 기념식을 개최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남북 주민들이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북녘 어린이의 건강을 위해 매진해 온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이사장 나동규)가 창립 20년을 맞아 남북 주민의 건강한 삶을 위해 한반도 평화구축에 노력할 것을 강조했다.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는 21일 오후 7시 서울 연건동 함춘회관에서 '한반도 평화.자주적 통일, 남북보건의료협력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이날 발표된 '남북보건의료협력 선언문'을 통해 "남북의 어린이를 비롯해 동포 누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반도 평화구축에 핵심가치를 두고 이를 위협하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는 이날 창립 20주년을 맞아 '남북보건의료협력 선언문'을 발표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최근 10년간 남북의 대결과 단절은 민간차원의 남북교류협력을 봉쇄하였고, 대북 민간단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강요당했"고, "전면적인 전쟁의 상황이 아니라 해서 평화롭다 말할 수 없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이 함께 노력할 때 평화의 실체가 바로 드러난다"는 인식에서다.

특히, "보건의료는 공동체 생존을 위한 필수분야"이기에,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남북 정부 당국은 지난 20년간의 역사를 교훈삼아 더 이상 정치적 이해관계로 남북교류협력을 훼손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남북보건의료 교류협력사업과 더불어 남북이 함께 운영할 통합 보건의료제도 모색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며, "한반도 평화구축, 남북교류협력사업 그리고 남북보건의료제도 연구사업을 시민들과 함께 해갈 것"이라고 향후 사업방향을 밝혔다.

나동규 이사장은 "지원본부는 민족분단과 고통을 딛고서 북녘의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자 만들어낸 소중한 공동체"라며 "남북 어린이를 비롯해 동포 누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구축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이 준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창립정신을 다시 되돌아보며, 변화된 현 환경에서 지원본부는 보다 지속적인 보건의료 남북협력사업을 새로이 추진하고자 한다"며 "평화구축의 작은 주춧돌이 될 것이다. 남북협력과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나동규 이사장은 "보다 지속적인 보건의료 남북협력사업을 새로이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초대 이사장을 지낸 심재식 의사는 "근자의 세월은 우리에게 활동을 허용하지않았다. 천안함 사건 등으로 5.24조치로 이어지고 많은 교류와 지원을 전부 차단했다"며 "지원본부는 하나의 가치를 갖고 있다. 인도주의적 동포애로 북녘 어린이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남북의 괴리를 오지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현재 참 많이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제는 북녘 어린이를 돕는 차원이 아니라 남북이 전부 무로 돌아가는 전쟁위협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며 "이제는 전쟁을 억제할 수있는 우리의 주장, 평화가 필요한 것이지 많은 여러가지 말이 필요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추무진 대한의사협회장, 김정란 서울시약사회여약사회장,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관계자 등 1백여 명이 참석했으며, 보건약방을 운영하며 1997년부터 지금까지 후원하고 있는 김종현 씨와 한미약품에 감사장이 수여됐다.

   
▲ 임종진 사직작가의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사진전시회가 부대행사로 마련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한편, 부대행사로 임종진 작가의 '사는거이 다 똑같디요' 사진전이, 기념식에 앞서 '북측 보건의료 학술지를 통해 본 북녘 보건의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는 1997년 결성됐으며, 평양 어린이영양관리연구소 지원, 평양 대동강구역병원, 평양 철도성병원 및 철도위생방역소 현대화 사업, 평양 만경대어린이종합병원 건립 등의 사업을 진행해왔다. 20년동안 총 85회, 147억 여 원을 지원했으며, 51회 370명이 방북해 사업을 진행해왔다.

특히, 창립 20년을 맞아 '만경대어린이종합병원' 사업 기금 마련을 위한 1인 20만원 모금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 밖에도 통일이후 남북보건의료체제 연구를 위한 '남북보건의료협력센터'를 설립했으며, '사랑의 의약품 뱅크'를 구축해 의료사각지대 의료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라크 어린이, 미얀마 난민, 중국 조선족 등에도 지원하고 있다.

   
▲ 이날 행사에는 각계 1백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1997년부터 지금까지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에 후원하고 있는 보건약방 김종진 씨에게 감사장이 증정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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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민주주의 무시하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한 ‘국민의당’

문재인 대통령, 원전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다
 
임병도 | 2017-10-23 08:12: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공사 재개를 결정하고 정부에 권고했다. ⓒKTV 화면 캡처

 

지난 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위원장 김지형)는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최종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김지형 위원장은 “471명 시민참여단을 상대로 한 최종 조사결과 건설 재개 쪽을 최종 선택한 비율이 59.5%로, 건설 중단을 선택한 40.5%보다 높았다”고 밝혔습니다.

공론화위원회는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기는 찬성했지만 향후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는 원전 확대보다(9.7%) 축소를(53.9%) 선택했습니다.

공론화위원회는 “원자력 발전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결정할 것을 정부에 권고한다”는 내용의 정부 권고안을 이낙연 총리에게 전달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원전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공사 재개’ 결정을 수용하며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공론화 위원회 결정에 대해 “공사중단이라는 저의 공약을 지지해주신 국민들께서도 공론화위원회의 권고를 존중하고 대승적으로 수용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며 공론화 위원회의 결정을 ‘정책추진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은 “참으로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라며 “민주주의는 토론할 권리를 가지고 결과에 승복할 때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에 대한 대통령 입장’을 보면 비록 자신의 공약을 뒤엎는 결정이지만, 그 과정에 승복하고 따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문 대통령의 입장을 보면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책과 공약이 국민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입니다.


‘2,187시간, 89일 동안 공론화된 원전’

 

▲숫자로 보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를 결정한 ‘공론화 위원회’는 시민 471명이 참여해 결정했습니다. 특히 결정이 단순한 여론조사가 아니라 공론화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역, 성별, 연령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정된 471명의 시민참여단은 최종결정을 위해 무려 2,187시간 동안 학습과 의견청취, 질의응답, 토의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마지막에는 2박 3일 동안 종합토론회까지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책을 위해 시민들이 2박 3일 동안 토론회에 참가해 결정하고, 정부가 이를 따르는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특히 토론을 위해 공론화 위원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신고리 5·6호기 공사 찬성과 반대 의견을 담은 각종 자료를 검토하고, 몇 번이고 토론회를 통해 각자의 의견을 내놓고 듣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사 중단 여부에 대해 ‘유보’하겠다고 했던 시민들이 다양한 자료와 토론 등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결정했습니다. 무작정 ‘중단’이나 ‘재개’가 아닌 합리적인 근거와 방식에 의해 결정했다는 사실은 ‘숙의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줬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숙의민주주의’

‘숙의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시민들이 대다수입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에게 위임해 정책을 결정하기보다, 시민들이 직접 충분한 ‘숙의'(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 과정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론조사와 공론조사의 비교 출처:김선희(2006), “공론조사기법: 학습과 토론을 통해 공론 확인하기”

 

여러가지 이유로 정책 결정에 ‘여론조사’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단순히 찬반이라는 의견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대표성과 정확성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론조사’는 설문과 학습, 토론 등을 통해 능동적 참여와 신중한 의사결정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폐단을 보완할 수 있는 점에서 ‘숙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참여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국민의당, “신고리 5·6호기 멈춰버린 3개월…문 대통령 사과해야”

그동안 원전 중단을 주장했던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신고리 5ㆍ6호기 원자력발전소 공론화위원회의 공사 재개 권고에 대해 “시민들의 숙의를 통해 내려진 이번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국민의당 손금주 대변인은 “3개월 동안 공사를 중단하면서 감당해야 했던 건설업체들과 노동자들의 고통, 낭비된 시간, 사장 위기에 처했던 기술, 막대한 손해와 공론화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탈원전에 대한 논의까지 포함해 의견을 제시한 공론화위원회의 결론도 월권”이라며 “시간 낭비와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 탈원전과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별도로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숙의민주주의를 무시한 오만함의 극치’

국민의당의 주장은 궤변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30년 후, 300년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한 일에 ‘공사 3개월 중단’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론화위원회는 7월 17일 ‘국무총리훈령 제690호’로 법에 따라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2017년 4월 26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대신해 선거대책본부 이태흥 정책실장이 서명한 ’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잘가라 핵발전소 서약서’

 

더 중요한 문제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대선 과정에서 ‘신고리 5ㆍ6호기 건설 중단’을 밝힌 바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대신해 선거대책본부 이태흥 정책실장이 참석해 ‘잘가라핵발전소’ 서약식에 서명했습니다. 여기에는 신고리 5ㆍ6호기 건설 중단뿐만 아니라 ‘공론화 재실시’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안철수 대표와 국민의당이 대선 공약을 뒤엎으면서 ‘에너지 정책’을 국회에서만 논의하겠다는 주장은 ‘숙의민주주의’를 무시한 오만함의 극치입니다.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의 의견과 결정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도 ‘정책 공론화’ 과정을 통한 ‘숙의민주주의’가 더욱더 필요해 보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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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켜진 광장의 촛불, 이번 타킷은 이명박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 이명박 정권 적폐청산을 요구
 
임두만 | 2017-10-22 09:31:1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오는 10월 29일은 촛불집회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촛불혁명 1주년을 앞두고 21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단체 모임인 4·16연대, ‘MB 심판 범국민행동본부’ 등의 주관으로 다시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켜졌다.

 4.16연대의 주관으로 시작된 세월호 진상규명 촛불집회는 2기특조위 구성 법안통과를 촉구했다. © 신문고뉴스 이명수 기자

오후 7시 시작된 집회에서, 광화문에 모인 약 500여 명의 참석자들은 세월호 2기 특별조사위원회 출범을 위한 관련법 국회 통과를 촉구했다. 이는 지난해 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한 이 법안이 다음 달 17일 330일 간의 의무심사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다음 달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므로 필히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 ‘MB 심판 범국민행동본부’는 이날 오후 이 전 대통령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연데 이어 광장에서 구속을 촉구하는 팻말 등을 들고 MB 정부 시절 국정원의 각종 여론조작을 규탄했다.
 
특히 ‘쥐를 잡자 특공대’를 조직,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시작한 시민들은 앞장서서 '이명박 구속'을 외쳤다. 이들은 또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 검은 정치 진상규명, 자원외교 및 방위산업 비리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 매일 이명박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태라은경’이라고 자신을 밝힌 여성이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을 주장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울구치소 수인번호가 503번인 점에 빗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수인번호를 504번으로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신문고뉴스 이명수 기자

현재 SNS는 “그런데 다스는 누구겁니까?”라는 헤시태그 운동이 번지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들 이시형씨가 다스 총 회계책임자가 된 데서 실소유주 의혹 구명에 나선 것이다.
    
한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기록위원회는 오는 28일 촛불 1주년 집회를 개최한다고 알렸다.
 
작년 촛불집회는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이화여대에 불법입학, 편법수업 이후 학점취득을 하는 등의 비리가 불거지면서 이화여대생들의 학교와 재단을 상대로 한 투쟁이 불씨였다. 또 7월 한겨레의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설립비리를 보도도 불씨를 지폈다. 이 보도로 여론이 꿈틀거리자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 의사를 밝히면서 정국을 개헌 블랙홀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10월 24일 JTBC는 ‘최순실 테블릿PC’라는 메가톤급 특종을 터뜨리면서 결국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의 인정 및 사과성명을 내게 만들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국면전환용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29일 급기야 광장에 촛불을 들고 섰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를 시작으로 한겨울 1,000만 인파가 매주 전국의 광장으로 나왔다. 하루 120만 인파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광장의 요구는 급기야 당시의 대통령 박근혜를 국회가 탄핵하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거쳐 파면을 끌어냈다.
 
더 나아가 특검과 검찰의 수사를 거치면서 최순실은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 핵심 보좌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감옥으로 보낸 국민의 목소리가 되었다. 지금 이들은 영어의 몸이 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광장의 국민정치가 권력실세를 제압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폭발했던 ‘광장 정치’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의 소리를 불러 낸 광장 주동세력은 오는 29일 촛불집회 1주년을 기념, 다시 광장에 촛불을 밝혀 이명박 정권 적폐청산을 요구한다는 계획이다

▲ 참석자들의 거의 모든 손펫말은 이명박 구속 촉구였다. © 신문고뉴스 이명수 기자

이번의 타킷은 정확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실제 현재 국정원과 검찰을 통해 나타나는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을 이용한 권력 사유화와 반대파를 블랙리스트로 다스렸던 ‘적폐’는 박근혜 정권에서 이뤄진 것 못지 않은 적폐임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그를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김장겸 고대영 등 MBC, KBS 사장을 권좌에서 끌어내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이뤄야 한다며 파업 중인 언론 노동자들과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어 이들의 투쟁에도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21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28일 대대적 집회를 연 것을 필두로 매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전국적 촛불집회 붐을 일으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 세월호의 진상규명. 공영방송 정상화 등을 이뤄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아래는 이날 집회의 이모저모를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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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피 빤 모기가 귀신같이 도망치는 비결

배불리 피 빤 모기가 귀신같이 도망치는 비결

조홍섭 2017. 10. 22
조회수 143 추천수 1
 
다리 힘 아닌 초당 600번 날갯짓으로 날아올라
긴 다리로 충격 완화, 포유류 감지 한도의 4분의 1
 
m1_mosquito_takeoff_bloodfed_Florian Muijres, Wageningen University..jpg» 말라리아 모기가 빠른 날갯짓과 긴 다리를 이용해 숙주가 눈치채지 못하게 날아오르는 모습. 플로리안 뮈즈레스, 와게닝언대
 
모기는 냄새와 색깔 등 여러 가지 단서를 바탕으로 먼 거리에서도 적당한 상대를 찾아낸 다음 2개의 초소형 펌프를 이용해 자신의 체중 1∼2배에 이르는 피를 1∼2초 안에 흡수한다(■ 관련 기사모기가 당신을 찾는 방법…처음엔 코 다음엔 눈'최고 위험 동물' 모기, 왜 내 피만 좋아할까). 그러나 피를 빨아 뚱뚱해진 몸으로 어떻게 들키지 않고 날아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미국 연구자들은 말라리아모기를 대상으로 초당 12만5000 프레임을 찍는 초고속 카메라 3대를 이용해 모기가 숙주의 피부로부터 도망치는 비결을 조사했다. 그 결과 흡혈로 체중이 2배로 불어난 몸집인데도, 모기는 포유류의 민감한 피부로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힘만을 미치고 날아갔다. 강력한 날갯짓과 긴 다리가 그 원동력으로 밝혀졌다.
 
대부분의 곤충은 이륙할 때 강력한 다리 힘을 이용한다. 파리는 위협을 느끼면 먼저 다리로 바닥을 박차 몸을 공중으로 내던진 뒤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해 도망친다. 전투기 비행사의 비상탈출 같은 이 과정에서 파리는 종종 비행 통제력을 잃기도 한다.
 
그렇다면 파리와 체중이 비슷한 모기는 어떨까. “모기는 이륙을 대부분 날개 힘으로 하고 다리로는 아주, 아주 조금만 밀어내는데, 아마 전혀 쓰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연구에 참여한 소피아 창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대학원생은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그는 네덜란드 공동연구자들이 피 공급장치를 제공해 주기 전까지 자신의 팔뚝을 모기에 내주며 실험을 진행했다고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m2_cdc_Anopheles_stephensi.jpg» 말라리아 모기가 피를 빠는 모습. 은밀하게 접근해 도망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질병통제본부(CDC), 위키미디어 코먼스
 
조사 결과 모기는 날아오르기 직전 0.03초 동안 초속 600번의 빠른 속도로 날갯짓했다. 이륙에 필요한 양력의 61%를 날개가 냈다. 이륙하는 동안 모기는 긴 다리를 천천히 펼쳐 피부를 누르는 힘을 분산시켰다. 
 
체중만큼 피를 빤 모기는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이륙속도가 18%나 느려진다. 자칫 알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혈액을 어렵게 확보하고도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느려진 속도를 벌충하기 위해 발로 박차는 힘을 늘리면 숙주가 감지할 위험도 커진다. 은밀성이냐 속도냐의 갈림길에서, 모기는 강력한 날갯짓과 긴 다리라는 제3의 해법을 찾은 것이다. 
 
연구자들의 실험에서 초파리는 이륙할 때 포유류의 피부 감지 한계보다 2배 이상의 힘을 미쳤지만(그래서 이륙 순간 눈치채고 손바닥으로 때릴 수 있지만) 모기는 한계의 3∼4분의 1에 그쳤다(배부른 모기가 문 자리를 박차고 날아가는 순간은 보기 힘들다).
 
 
 
측정 결과 모기의 이륙속도는 같은 체중의 초파리와 비슷했다. 속도 손실 없이 은밀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창은 “이런 능력은 모기에게 특별한 것이지만 다른 흡혈 곤충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숙주로부터 피를 빤 뒤 슬그머니 도망치는 능력은 다른 흡혈 곤충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연구자들은 모기가 어떻게 피부에 눈치채지 못하게 내려앉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밝혔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실험생물학’ 19일 치에 실렸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F. T. Muijres et al, Escaping blood-fed malaria mosquitoes minimize tactile detection without compromising on take-off speed, Journal of Experimental Biology (2017) 220, 3751-3762 doi:10.1242/jeb.16340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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