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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고리 입고 '소녀상' 된 82세 일본인 여성의 절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8/15 10:39
  • 수정일
    2019/08/15 10:3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세계 위안부 기림일, 나고야에서 열린 '소녀상 전시 재개 요구' 집회

19.08.14 18:21l최종 업데이트 19.08.14 18:21l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열리는 아이치 미술관을 배경으로 저고리를 입고 의자에 앉아 '소녀상'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니시 에이코씨.
▲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열리는 아이치 미술관을 배경으로 저고리를 입고 의자에 앉아 "소녀상"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니시 에이코씨.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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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위안부 기림일인 8월 14일. 일본 우익세력들의 전화·메일 협박으로 '평화의 소녀상'을 비롯한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가 전시 중지된 지 10여 일이 지난 8월 14일 아침. 나고야 사카에에 있는 아이치 드리엔날레 전시장 입구에 시민 100여 명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재개를 요구하는 아이치시민들의 모임(아래 시민의 모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한 날을 기억하기 위한 '세계 위안부 기림일'에 맞춰 열린 집회였다. 시민의 모임은 '부당한 폭력에 굴해 표현의 자유가 침해돼서는 안 된다'면서 아이치 드리엔날레 주최측인 아이치현에 하루 빨리 전시를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집회 현장 앞 쪽에는 빈 의자가 마련됐는데, 한쪽 자리에 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의자에 앉아 '소녀상'이 되는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가서 지금까지 고통당한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소녀상'이 도대체 뭐가 나쁘다는 겁니까? '소녀상'이 뭘 잘못했다고 겨우 3일만에 전시를 중지시키는가 말이에요!"

 
이 여성은 니시 에이코(82, 나고야 거주)씨. 그는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전시 재개를 호소했다. 니시씨는 "지금이라도 소녀상에게 달려가서 꼬옥 끌어안고 함께 펑펑 울고 싶어요, 그리고 '이젠 안심해요'라고 말을 걸고 싶다고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할 수 없도록 대체 누가 막는단 말이에요?"라며 전시 취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들의 나이와 별로 차이가 안 난다면서 "나보다 겨우 몇 살 위의 언니같은 사람들이 겪었을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밖에 나오지가 않는다"라며 울먹였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잊지 말 것을 호소한 것. 
   

 그녀는 "지금 당장 '소녀상'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고 함께 펑펑 울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그녀는 "지금 당장 "소녀상"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고 함께 펑펑 울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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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집회는 1시간가량 진행됐다.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으나 참가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한 식민지 지배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 배상을 요구하는 소리를 냈다.

시민단체 활동을 잘 다루지 않는 일본 언론도 이날은 집회장을 주목했다. 이것은 아이치 트리엔날레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의 전시 중지가 보수적인 일본 언론이 보기에도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들은 전시 중지가 발표된 뒤에도 매일 전시장 입구에서 전시 재개를 요구하는 피켓팅을 벌이고 있다. '시민의 모임'은 앞으로도 전시가 재개될 때까지 피켓팅을 이어갈 것이고, 다른 지역의 단체 및 개인과도 연대해 이번 조치의 부당성을 알릴 계획이다. 

아이치현 쪽에는 재개 요청문과 방문 등을 통해 압박을 계속해 나가고, 오는 24일에는 큰 규모의 집회를 열 계획이다. 대규모 집회를 통해 시민들의 여론을 모아 전시가 재개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보고 싶었는데... 폭력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지 마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참가자들.
▲  "보고 싶었는데... 폭력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지 마라"는 현수막을 들고 있는 참가자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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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좋아 소녀상~ 싫어 싫어 검~열 소녀상 좋아요~~
소녀상 온다고 해서 아이치 트리엔날레 와봤더니
가와무라가 표현의 부자유전 중지하라고
헐~~ 검열? 장난치냐~?"


한 참가자는 소녀상 전시를 두고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짓밟는 일"이라면서 전시 중단을 요청한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을 비판했다. 이 참가자는 유명 애니메이션 삽입곡에 나고야 시장을 비판하는 가사를 입혀 불러 참가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표현의 자유 침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분노하면서 행사 주최 측 회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가 하루빨리 전시 재개를 지시할 것을 촉구했다.

아이치현의 오무라 지사는 지난 9일,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중지와 관련된 '검증위원회'를 설치해, 기획 과정부터 중지까지 과정에 대한 검증을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검증위원회는 11월 말에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한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는 10월 14일에 폐막하기 때문에, 검증위원회가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그 결론이 전시 재개로 이어지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 결과, 자신들만의 힘으로 전시 재개를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일본 시민들 앞에 놓여졌다. 폐막까지 남겨진 시간은 2개월. 두 달 안에 일본 시민들이 거대 권력과 우익세력의 방해를 넘어 전시 재개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아이치현의 '부자유전 중지를 위한 검증위' 설치를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  아이치현의 "부자유전 중지를 위한 검증위" 설치를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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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재개를 위한 시민집회를 취재하러 온 언론들.
▲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재개를 위한 시민집회를 취재하러 온 언론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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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도 '소녀상'의 자리를 지키는 니시 에이코씨.
▲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도 "소녀상"의 자리를 지키는 니시 에이코씨.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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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상' 전시 중단 이후에도 매일 전시장 입구에서 시민들의 피켓팅이 이어지고 있다.
▲  "소녀상" 전시 중단 이후에도 매일 전시장 입구에서 시민들의 피켓팅이 이어지고 있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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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재개' 구호를 외치는 참가자들.
▲  "전시 재개" 구호를 외치는 참가자들.
ⓒ 이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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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는 왔지만 남녘땅에는 여전히 해방이 오지 않았다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8/1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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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청에서 일장기가 내려진 그 자리에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다.



 

<사설> 8.15는 왔지만 남녘땅에는여전히 해방이 오지않았다 

 
 

8.15는 민족대경사의 날이다. 우리민족이 영웅적인 전민항쟁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고 민족사의 위대한 새출발을 시작한 감격과 환희의 날이 바로 8.15인 것이다. 

 

8.15 74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은 북과 남 해외의 모든 민족성원들이 한없이 기뻐하고 축하해야할 날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여전히 그 감격적인 기쁨을 마냥 느낄수만은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아직도 남녘땅에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해방이 오지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해방이 아니라 미국이 왔고 분단이 찾아왔다. 그로인해 이 민족이 겪고있는 고통과 질곡의 정도는 이루 말로하기조차 힘든 지경이다. 

 

민족해방을 가로챈 미국의 야만적인 강점으로 인해 우리민족은 오늘도 천추의 한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미국의 날강도적인 식민지화 정책으로 인해 남과 북 해외에 산재한 우리민족은 엄청난 수난과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라는 외세의 강점으로 인해 남녘땅은 지금 해방의 환희를 맛보지도 못하고 시든 꽃처럼 온갖 사회적 고통과 불행을 얼싸안은채 민족불행의 상징지구로 변모해있다.  

 

미국 식민지통치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놓인 남녘에서는 온갖 사회적 불행과 고통이 겹쌓인채 외세의 지배로 인한 민족의 고통이 가시질 않고있다. 일제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남녘땅에 들어온 아메리카 제국은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사회건설에 대한 정당한 꿈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앞잡이 정권을 조작해내고 민족자주적 정부수립과 통일된 민주적 국가실현이라는 이 민족의 소박한 꿈을 철저하게 짓밟아 왔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하늘에 닿던 그때 어느 누구도 외세에 의해 우리 나라와 민족이 둘로 갈라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인위적인 조작이며 민족의 존엄성에 대한 용서못할 도전이다. 우리민족이 살아갈 길은 오직 외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일 뿐이며 오직 우리민족끼리 우리의 장래를 개척해 나가는 길에 있을 뿐이다.  

 

 

남녘은 이제 하루속히 해방되어야 한다. 북의 위협과 적화로부터의 보호라는 외세의 논리는 강요된 억지이고 조작된 허구이다. 우리민족은 그 누구도 외세가 말하는 같은 민족을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며, 누구보다도 제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그런 민족이 미국이라는 외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쟁무기를 사다재우고 동족을 원수로 여기고 동족에 대한 어떠한 선의나 올바른 평가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야만적인 사회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 대결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제국의 전형적인 분리통치전략(divide and rule)일 뿐이며 결코 남녘을 이롭게하는 원조나 호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긴 세월이 지났고 이제 민족은 서서히 눈을 떠 가고 있다. 누가 정의의 편이고 누가 악의 편인지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민족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 한 제국과 그에 기생해온 민족반역 친일-친미세력들의 정체가 날이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우리민족은 이제 더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민중들과 민족구성원들은 분단과 민족불행의 모든 화근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모두함께 떨쳐 일어서 나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해방을 기필코 성취하게 될 것이다. 남녘땅은 반드시 해방될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본사논설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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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조심 해라, 바다 멀리 해라... 이게 말이 됩니까"

[인터뷰] 〈섬문화 답사기〉 쓰는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문화관광연구실장

19.08.14 10:21l최종 업데이트 19.08.14 10:21l

 

 섬을 오랫동안 지키며 살아온 섬사람들. 과학기술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섬살이를 해오고 있다. 김준 실장은 그것을 '경험'이라 했고, 경험은 과학보다 앞선다고 했다.
▲  섬을 오랫동안 지키며 살아온 섬사람들. 과학기술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섬살이를 해오고 있다. 김준 실장은 그것을 "경험"이라 했고, 경험은 과학보다 앞선다고 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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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 너무 좋습니다. 섬의 모습은 변하더라도 섬마다 고유한 특징이 잘 살아 있어요. 그 점이 좋아요. 섬의 고유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섬이 지닌 가치를 다른 사람들, 특히 도시민과 나누고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섬을 지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요."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문화관광연구실장의 얘기다. 김 실장이 〈섬문화 답사기〉를 쓰는 이유다. 그의 〈섬문화 답사기〉는 모두 8권으로 기획돼 있다. 그 동안 '신안편', '여수·고흥편', '완도편'을 낸 데 이어 '진도·제주편' 발간을 앞두고 있다.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문화관광연구실장이 그동안 펴낸 3권의 〈섬문화 답사기〉 표지. 그의 〈섬문화 답사기〉는 모두 8권으로 기획돼 있다.
▲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문화관광연구실장이 그동안 펴낸 3권의 〈섬문화 답사기〉 표지. 그의 〈섬문화 답사기〉는 모두 8권으로 기획돼 있다.
ⓒ 보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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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섬과 바다, 섬사람과 어민들의 속내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아요. 육지의 눈과 생각으로 재단을 하잖아요. 그때 정말 화가 납니다. '바다를 멀리해라', '물을 조심해라'는 말도 그렇고요. 삼면이 바다이고 물과 바다와 친하게 지내며 미래가치를 만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멀리 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지난 3일 기자와 마주한 김 실장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는 기성세대들이 말로는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이라고 하면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섬과 바다를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섬살이입니다. 섬살이는 경험이고, 과학보다 앞선 것이 경험이에요. 섬에는 오랫동안 섬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이상 섬과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섬지기들이죠. 이 분들의 섬살이는 과학보다 앞선 경험이고,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만든 독특한 문화입니다."

현대인에게 섬문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자 돌아온 김 실장의 답변이다.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세상에서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섬지기들의 이야기가 생명 존중과 자연보호를 외치는 현대사회에 긴요한 지혜를 선물해 줄 것"이라는 얘기다. 그가 섬문화를 기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은 김준 실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섬 자체가 민속이요, 사람이 보물입니다"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실장. 그의 일상은 섬을 드나듦이다. 더 많은 섬과 섬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한테 하고 싶어 한다. 그가 〈섬문화 답사기〉를 쓰는 이유다.
▲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실장. 그의 일상은 섬을 드나듦이다. 더 많은 섬과 섬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한테 하고 싶어 한다. 그가 〈섬문화 답사기〉를 쓰는 이유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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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들어가는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는데요. 보통 섬 여행은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어려운 점은 없는지?
"시간입니다. 섬의 시간은 뭍의 시간과 달라요. 섬은 바다의 영향을 받잖아요. 섬사람들의 일상은 밀물과 썰물, 물때에 따라 달라져요. 이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바다의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다른 어려운 점은 없어요."

- 네 번째 〈섬문화 답사기〉 발간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도와 제주를 한데 묶은 이유가 무엇인지?
"인천에서 시작된 뱃길이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진도 서쪽 조도군도를 지나 제주도로 이어집니다. 목포에서 시작되는 뱃길도 진도와 해남 사이 울돌목을 지나 제주도로 이어지고요. 옛날에도 그 뱃길은 유효했어요. 뱃길만이 아니죠. 삼별초부터 근현대사로 이어지는 질긴 끈이 있었어요. 쌀과 소금이 부족한 제주에서 미역과 귤을 가지고 들어왔던 곳도 진도, 해남, 완도였으니까요."

- 진도와 제주만의 매력을 꼽는다면?
"진도는 민속의 보고입니다.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남도들노래 등이 마을과 골목에서 불리는 곳입니다. 죽은 자를 불러 산 자를 해원케 하는 진도씻김굿의 지혜도 바다에서 태동한 것이고요. 진도의 민속과 소리가 감동을 주는 이유입니다. 조도의 다도해는 짭조름한 미역을 먹고 사는 섬이고요.

제주도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제주해녀, 세계농업유산 밭담, 오래된 포구와 원담, 집안에 들여놓은 우영팟, 몸국 등 제주인의 삶과 지혜가 끝이 없습니다. 제주의 속살과 가치에 공감하고 싶었어요. 돌, 물, 한라산, 오름, 바다, 음식 등에 제주사람들의 아픔과 기쁨까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와 문화를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바다와 섬의 시간에 맞춰 사는 섬사람들. 섬의 시간은 뭍의 시간과 달리 바다의 영향을 받는다. 섬사람들의 일상은 밀물과 썰물, 물때에 따라 달라진다.
▲  바다와 섬의 시간에 맞춰 사는 섬사람들. 섬의 시간은 뭍의 시간과 달리 바다의 영향을 받는다. 섬사람들의 일상은 밀물과 썰물, 물때에 따라 달라진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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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진도만의 가치와 문화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한국민요를 대표하는 아리랑, 그 가운데 '진도아리랑'은 그 자체로 민중시입니다. 민족 음악이며 민속 음악이죠. 섬사람의 삶을 잘 표현해 남도 전체의 민요를 상징하기도 하고요. 진도는 많은 예인들과 무형문화재를 배출한 곳입니다. 진도는 간척지가 많고 육지 농사가 많이 행해지고 있어 '섬 같지 않은 특징을 지닌 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진도문화의 기저에는 바다가 있고, 섬만의 독특한 소리와 문화가 전승되고 있죠. 섬 자체가 민속이요, 사람이 보물입니다. 진도를 '민속의 원형' '보배로운 섬'이라고 부르는 이유죠."

- 진도의 많은 섬 가운데, 하나만 소개한다면 어디를?
"소마도.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작은 섬입니다. 하지만 농사지을 땅이 충분하고, 이웃 섬에까지 나눠줄 만큼 충분한 물을 보유하고 있어요. 섬사람들에게는 논밭보다 소중한 갱번(갯바위)도 좋은 곳이죠. 미역 공동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잇고 있는 섬입니다. 쑥도 가득한 섬입니다."
   
- 제주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비양도 얘기를 해볼까요. 큰 화산암에 새겨진 '천년기념비'가 반기는 섬인데요. 해안도로에 보행기가 늘어서 있더라고요. 아이가 아닌, 물질하는 잠녀들이 이용하는 보행기였습니다. 보행기가 제주 해녀들의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고 있더라고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도의 많은 섬 가운데서도 외지인 때문에 생긴 몸살을 가장 늦게 앓은 곳이죠. 제주다운 섬이었고, 그래서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제주였습니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섬사람과 만나는 김준 실장. 그는 틈나는 대로 섬을 찾아다니며 섬과 섬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  섬사람과 만나는 김준 실장. 그는 틈나는 대로 섬을 찾아다니며 섬과 섬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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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만의 독특한 섬살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제주의 마을사를 보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공동체 문화를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서귀포의 대평리 '케매기 문화'와 사계리 '베늘 문화'입니다. 제주의 말과 소는 방목을 하잖아요. 그래서 쉽게 밭, 묘지, 집 등을 넘나들곤 했는데요. 대평리처럼 담 쌓을 돌을 구하기 쉽지 않은 곳을 중심으로 공동으로 '케매기'를 조직했어요. 밭이 잘 보이는 곳에 관리 망대를 만들고 '켓집'이라는 관리인을 둔 겁니다.

베늘 문화에서도 제주만의 공동체 문화가 보여지는데요, 모래밭이나 사구에서 자라는 순비기나무는 그물망처럼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모래를 붙잡는 역할을 하죠. 여기에 '베늘'을 세워서 마을의 순비기나무 지역을 공동으로 관리합니다. 제주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죠."

- 끝으로, 〈섬문화 답사기〉를 쓰는 이유는?
"섬지기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운이 좋아서 자식이 대를 잇기도 하고 새로운 섬지기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해요. 이 분들은 외래종이 넘치는 세상에서 섬문화를 지키는 씨앗 같은 존재입니다. 섬지기들이 점점 사라지면서 섬문화도 함께 사라지고 있어요. 섬의 이야기와 문화를 보존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섬주민들로부터 제가 받은 무한한 은혜에 대한 작은 보답이기도 하고요."
  

 김준 실장의 일상은 바다와 섬에 맞춰져 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섬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  김준 실장의 일상은 바다와 섬에 맞춰져 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섬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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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군국주의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일본의 재무장 논리에서 보는 통치의 보편성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9.08.14 09:04
 

[미디어스] 한국이 일본을 사실상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맞불 조치’를 실시하는 등 양국 간의 경제적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대일메시지는 상대적으로 ‘톤다운’된 분위기지만, 역사 문제를 근거로 한 일본의 경제보복을 ‘경제침략’으로 규정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여전히 이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보통국가화와 재무장 논리이다. 그렇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대다수 국내 언론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근거로 이를 설명한다. 전쟁 이후 체제에서 천황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전범세력 청산에 실패했으며, 이렇게 살아남은 극우세력이 국가 신토 등과 연계해 세력을 키워 아베 신조 총리 대에 이르러 비로소 통치를 장악하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본 극우세력의 총본산인 ‘일본회의’에 주목하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개봉한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도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흔히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주전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비상식과 퇴행적 인식을 고발한다. ‘일본회의’의 주요 인사가 위안부 피해 날조설을 말하면서 이와 대치되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책은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은 ‘백미’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성’에 기댄 논의에만 주목하면 ‘보편성’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기회를 놓치게 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일본회의의 특별고문이라는 아베 신조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베 신조 정권의 시대에는 극우세력이 주도하는 집권 자민당이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고 다수 야당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야당의 논리는 정확하게 말해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하는,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개헌에 반대한다’는 것에 가깝다. 야권의 정치인도 개헌이나 자위대의 해외 파병 자체에 대한 정책적 견해에 대해서는 불명확하게 답변하는 경우가 많다. 사민당이나 공산당 등의 진보적 색채가 뚜렷한 군소정당 소속 정치인들만이 재무장에 대한 명시적 반대를 표명하는 게 현실이다. 이들 진보정당들의 입장도 전성기에 비하자면 다소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일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하면서 양국 관계의 개선을 말한다. 자민당 내 파벌 구도를 기준으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유지를 잇는 그룹은 얼마 전 한국 의원들과도 회동했던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이 파벌 영수를 맡은 바도 있는 헤이세이연구회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 파벌’과는 확실히 구분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보통국가화나 재무장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현재의 주류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 신조 총리 등이 자민당 내 논의를 주도하기 전부터 이미 그랬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배출한 총리는 지난 2006년 사망한 하시모토 류타로이다.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는 ‘다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을 역임했고 실제 총리로 재직하던 1996년 7월 개인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물론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와 부친인 아베 신타로가 속했던 파벌과 역사적으로 경쟁해 온 또 하나의 자민당 내 파벌은 고치회이다. 현재 고치회를 이끄는 인물은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이다. 우리에게는 2015년 외무대신으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룹의 경우 개헌이나 재무장에 상대적으로 소극적 태도를 보이지만 현 정권에 협력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베 신조 총리 등에 각을 세우지는 못하는 분위기다.

오히라 마사요시는 고치회가 배출한 총리 중 한 명이다. 1962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단독 회담을 통해 한일협정의 기본 내용을 협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리 재직 시절 나름 좋은 뜻으로 제기한 국제협조주의는 적극적 평화주의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케하는 헌법 해석 변경 등 논리의 근간이 됐다. 1990년대 중반 <일본개조계획>이란 저서로 이를 공격적으로 제기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오자와 이치로는 현재 야권의 근간인 민주당 정권 개국 공신의 한 명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3일 야마구치(山口)현 나가토(長門)에 있는 선친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늘날 개헌 불가를 외치는 대표적 인물 중에는 민주당 정권을 이끌었던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한국을 방문해 여러 차례 역사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전쟁에 대한 일본의 ‘무한책임’ 등을 인정하는 발언을 내놓은 바 있다. 일본 정치인답지 않은(?) ‘개념 행보’는 이런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헌법 9조 개정 자체에 대해서는 찬성 입장을 갖고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모두 극우파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이 보통국가화와 재무장을 지지하는 것에는 군국주의에 대한 열망 외에도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첫째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의 의중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로 갈등하지 않고 동맹관계를 유지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일본의 재무장을 통한 동아시아 정세 개입을 모색해왔다. 일본이 미국의 우방을 자처하는 한 개헌을 통한 재무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사실상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둘째는 실제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활용한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게 주류 정치의 논리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가 재무장을 열망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부활과 주변국 침략의 야욕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장에 군대를 파견해 이의 반대급부로 국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겠다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보편적 문제’이다. 과거 사회당이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를 배출하면서 ‘비무장중립’ 원칙을 포기한 것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류 정치가 이 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은 ‘개혁’의 깃발을 들고 집권한 참여정부의 ‘이라크 파병’이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안인 ‘호르무즈 해협 파병’ 문제에서도 발견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호르무즈 해협 파병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경제적 이익이 첨예하게 걸린 문제”라며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사태를 통해 마주해야 할 근본적 질문은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그만두고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며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배보상 등의 문제에서 한국 정부와 합의를 이룬다면, 이 합의에 대한 국민적 반발 여부와는 별개로 우리는 일본의 보통국가화와 재무장을 용인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럼에도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가 제기해야 할 정치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정치의 가능성은 일본의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표현의 부자유전-그 이후>를 둘러싼 논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스스로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라고 말하자만 엄연한 금기가 있다는 게 이 전시의 핵심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그 ‘금기’에는 과거 군국주의를 촉발한 ‘천황제’ 문제와 ‘평화의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식민지배와 전쟁범죄 등 역사문제에 관한 것이 포함된다. 즉,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권력의 작용이 국민을 전쟁으로 내몰았던 과거의 역사적 악행과 동일한 지반 위에 서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시인 것이다.

이런 정치적 행위를 다름 아닌 일본인들이 감행하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넘어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근본적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항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현대 일본에 필요한 것이 보편적 차원에서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라면, 우리 역시 이런 원칙을 스스로에게도 기꺼이 적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덴만 해역에서 활동하는 청해부대 30진 강감찬함이 임무 교대를 위해 출항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한 생각이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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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왜의 왕국과 조선삼국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1)
  •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 승인 2019.08.13 21:19
  • 댓글 0

극우로 치닫는 일본을 극복하고, 토착왜구를 박멸하자는 운동이 연일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군국주의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연재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에 계신 강성은(康成銀) 조선문제연구센터장의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조선에서본 일본의 역사>
1. 일본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왜의 왕권과 조선삼국
2. 일본의 성립과 신라·발해, 몽골의 내습과 동아시아
3. 무로마찌시대·쇼꾸호우정권기·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교린, 그 허실
4. 근대일본의 조선침략 개시-정한론과 강화도조약
5.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제1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6. 대한제국과 러일전쟁(제2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7. 대한제국의 폐멸-한국《보호》조약과 한국《병합》조약
8. <무단통치>와3·1운동
9. <문화정치>와 동화주의
10. <황국신민화>정책
11. 전쟁동원
12. 제3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 해방과 분단
13. 해방후 제4차 조선전쟁 = 동북아시아전쟁 - 분단의 고착
14. <한일조약>과 냉전의 장기화
15. 세계에서의 냉전의 종식과 조선반도

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일본열도의 주민형성과정을 볼 때 재래의 죠몽사람(繩文人. 고몽고로이드=남몽고로이드)과 야요이(彌生)이후의 도래계의 사람(신몽고로이드=북몽고로이드)들의 쌍방을 시야에 넣어 파악하여야 한다. 현재의 아이누민족, 류큐민족은 고몽고로이드에 속하는 선주민족인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 <일본민족>은 야요이 이후 대량적으로 조선반도로부터 도래하게 된 신몽고로이드와 재래의 고몽고로이드가 혼합하고 형성된 집단이다. 어떤 시뮤레션에 의하면 현대의 일본인은 전국 평균으로 죠몽계 3, 도래계 7의 비율로 쌍방의 유전자를 갖추고 있고 서일본에서는 도래계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 일본 선주민인 조몬인(왼쪽)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인 야요이인(오른쪽)의 얼굴.[사진 : 필자제공]

야요이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에 규슈(九州) 북부로부터 시작되고 서일본부터 동일본에로 짧은 기간에 혹가이도(北海道)와 서남 제도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역에 퍼졌다. 야요이문화의 특징은 ① 신석기시대의 죠몽시대에 비하여 생산기술의 종합적,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수전벼농사가 시작되고 금석기를 제작하고 사용하였다. ② 유물의 조선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좁은놋단검(細形銅劍), 야우수식 질그릇(夜臼式土器)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③ 묘제의 변화, 즉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이 시기에 규슈지방에서 쓰이기 시작하였다. ④ 사람뼈의 변화이다. 야마구찌현 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에서 출토된 사람뼈 207체의 평균신장 164㎝인데 죠몽시대인의 160㎝보다 훨씬 높다. 이와 같이 야요이문화는 조선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 좁은놋단검[사진 : 필자제공]

하니와라 가즈로우(埴原和郞)는 일본인의 기원에 대하여 죠몽사람과 야요이사람과의 <2중구조모델>을 제창하였다(『日本人の成り立ち』人文書院、1995年). 그는 야요이로부터 고분시대(古墳)시대에 걸쳐 일어났던 급격한 인구증가는 일반의 농경사회의 인구증가(년률 0.1%∼0.2%)로서는 설명 못하며 이 기간 100만 명 규모의 도래인의 유입이 있었다고 하는 대량도래설(100만명도래설)을 제창하였다. 죠몽말기의 일본열도의 인구는 7만 6천명 정도인데 나라(奈良)시대에는 약 540만명 정도로 급증하였다. 야요이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4세기경으로 가정하면 1천년 간의 인구증가률은 년 0.4%로 된다.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로의 도래는 야요이시대만이 아니라 7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파도처럼 계속되였다.

야요이문화가 보급함에 따라 북규슈 각지에 소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의 왜에는 백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정기적으로 락랑군에 조공하는 소국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후한서>동이전에는 건무중원 2년(서력 57년)에 왜의 노국왕(奴國王)이 조공하고 이에 대하여 전한의 광무제가 인수(印綬)를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18세기에 하까따만의 시까노시마(志賀島)에서 금도장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 발견되였는데 이 사료의 신빙성을 잘 보여준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왜인조(약칭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2세기말에 왜국에서 큰 난이 일어났고 히미꼬(卑彌呼)를 여왕으로 하여 난을 수습하였다. 히미꼬가 통치하는 야마따이국(邪馬臺國)에는 30여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사가현의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은 야요이중기(기원전 1세기전후)의 분구묘와 야요이후기(기원 2,3세기)의 환호부락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유적이다. 옹관 1만 5천기, 좁은놋단검, 관옥 등 조선의 영향이 짙은 유물이 대량적으로 출토하였다.

7세기 후반에 성립하는 <일본>이라는 것은 이러한 야요이문화와 그 계보의 위에 창출된 것이다. 이 점을 애매하게 한 채 죠몽문화와 <일본>을 직결시켜 <일본인>이나 <일본문화>의 기원을 터무니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왜의 왕국과 조선삼국 - <미마나일본부>설

4세기의 동아시아를 부감하면 중국은 3세기에 위・오・촉의 3국, 4세기에 동진・5호16국, 5세기에 남북조의 시대였으며 조선은 고구려의 성장, 백제・신라의 건국,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의 시대였다. 왜국은 전방후원분이 출현, 확산하고 야마또(大和)조정에 의한 통합이 진전하는 시기다. 그런데 266년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에 걸쳐 중국의 역사서에서 왜국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 <공백기간>이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불리우는 까닭이다.

이 공백기간을 메꾸기 위하여 일본인사가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편찬)에 있는 진구우(神功) 황후의 전설 등에 의거하여 일본고대사의 이미지를 4세기중엽에 야마또왕정이 전국을 통일하고 나아가서 조선반도에 출병하고 남부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기관인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고 562년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에 걸쳐 존속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사료라고 한 것이 백제칠지도나 광개토왕릉비, 왜의 5왕의 칭호였다.

▲ 칠지도[사진 : 필자제공]

명치시대 이래의 이러한 연구에 대하여 해방 후 북남조선의 사학자들이 근본적인 비판을 하였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까미시궁(石上神宮)에 백제칠지도(百濟七支刀)가 전해져 왔다. 길이 75㎝, 좌우에 엇갈린 가지모양의 검신이 3개씩 뻗어있는 특이한 형태의 철검이다. 앞면에 34자, 뒤면에 27자가 금으로 상감되고 있다. 일본인사학자들은 백제왕이 복속의 표시로서 야마또조정에 헌상했다고 읽었다. 이 해석은 칠지도의 명문 그 자체의 검토에 기초한 해석이라기보다 <일본서기>의 기술에 따라 이해하려고 한 견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북의 사학자 김석형이 근본적인 비판을 하였다(<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3년 1호). 그는 명문의 <후왕(侯王)>, <왜왕지(倭王旨)>라는 말에 주목하였다. 후왕이란 본래 한나라시대에 황제와 군신(君臣)관계를 맺은 조공국(朝貢國)의 왕에게 주어진 것인데 왜왕에 대하여 백제왕이 후왕이라고 경칭을 붙이지 않고 있는 데서 백제왕이 상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왜왕지>의 <지(旨)>를 왜왕의 고유명사로 보고 <왜왕○>이라는 말투는 중국 황제와의 주고받는 말에서 쓰이는 형식이니 백제왕이 이렇게 부르고 있는 한 왜왕을 아래사람으로 보고 칠지도는 상위에 있는 백제왕이 하위의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석형의 연구는 그때까지의 연구가 주로 <일본서기>에 의거해서 진행되였던데 대하여 명문 그 자체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시한 점에서 획기적인 지적이였다.

당시는 남하를 노리는 고구려와 백제가 격렬한 싸움을 벌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외교를 진행하였다. 이미 366년과 368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72년에는 동진(東晋)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았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의 일환으로 왜와의 동맹이 성립된 것이고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하사한 것이 칠지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인사학자들이 4세기 야마또왕정의 조선 남부지방 지배를 증명하는 또하나의 사료로 광개토왕비문을 들고 온다. 고구려가 발전하는 기초를 닦은 광개토왕이 413년에 서거한 이듬해에 대를 이은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여 수도 국내성(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에 세운 것이 광개토왕비이다. 비석은 높이 6.3m、밑변 1.2부터 2m의 4각형이고 4면에 1775정도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 제1면에 “왜이신미년도래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는 기사가 나온다.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사진 : 필자제공]

일본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왜가 신묘년(서력 391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또는 ),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하였다”고 해석하여 4세기에 야마또왕정이 조선 남부지방을 지배한 증거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학계는 <왜가 신묘년에 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 신설은 <래>와 <해>의 사이에 문장을 끊고 왜가 신묘년에 와서 이에 대하여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온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에 알맞게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주체로 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도해>(渡海)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바다를 건너온 주체가 혹시 왜라 할지라도 여기서 말하는 왜는 야마또왕정이 아니라(4세기의 야마또왕정은 아직 나라분지를 넘어서지 못한 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본국(조선삼국)의 정세에 대응한 왜땅에 있는 조선계의 세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끊어지고 있었던 왜국에 관한 기사가 다시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413년이였다. 421년부터 502년에 걸쳐서는 왜의 5명의 왕이 보내온 사신이나 책봉, 칭호수여의 기사가 계속된다. <송서(宋書)>(5세기말편찬)에 왜의 5왕의 이름과 그들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여러 칭호가 기록되고 있다. 명치 이래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칭호속에 조선지명이 들어있어 당시의 조선반도에서의 왜국의 우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① 칭호에 있는 지역명은 같은 시기에 복수의 사람들에게 같은 칭호를 주고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칭호에 기재된 지역명은 실제로 군사지배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② 고구려나 백제에 주어진 칭호와 비교하면 왜왕에 주어진 칭호는 항상 낮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미마나일본부>의 문제

<일본서기>는 <미마나>라는 말을 가야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쓰고 있다. 가야는 이전의 변한지방을 중심으로 백제나 신라에 의한 통합에 편입되지 않고 소국(금관가야, 안라국, 대가야 등)이 분립하면서 연맹을 유지해온 지역이다. 금관국, 안라국 등 가야지방의 남부는 예로부터 왜와의 관계가 깊고 철자원의 교역이나 문화교류의 거점으로 된 지역이다. 왜의 출병도 이러한 소국과 연휴해서 진행되였다. 가야 전체를 왜의 지배지인 것처럼 그려온 <일본서기>의 <미마나일본부>설로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와의 공방을 전개해온 가야사의 약동을 놓치게 된다.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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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4년.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해방된 나라인가?

광복 74년.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해방된 나라인가?
 
 
 
김용택 | 2019-08-14 08:46: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내일은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 74주년이 되는 광복절이다. 광복(光復)이란 ‘빛을 되찾았다’는 한자어에서 볼 수 있듯이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민족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우리민족끼리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함께한 우리민족의 철천지 원수의 나라는 우방이다. 동족을 주적이라며 살상무기를 만들고 있으면서 우리민족에게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짓을 하고도 반성은커녕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큰 소리 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퍼붓고 있는 나라가 왜 우방인가? 이런 한 일본과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맺고 우방이라고 지내는 대한민국은 진정한 해방이 된 나라인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36년간 남의 나라 영토를 강탈해 우리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온갖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던 나라. 청소년들을 학도병으로 끌고 가 총알받이로 삼기도 하고 강제징용, 징병, 생체실험, 정신대로 끌고 가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한 나라, 6·25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게 한 죄며, 민족과 국토를 두 동강이 낸 남북분단의 죄, 우리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보물들을 훔쳐간 죄… 이 기막힌 범죄를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2억 달러로 속죄가 되는가? 돈으로 죄값을 갚았다고 우리에게 빚진 게 없다며 오히려 큰소리치는 나라가 일본이다.

“우리 자손과 그 다음 세대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아베의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2차세계대전의 전범국가로서 그 어떤 피해국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한 밀이 없다. 해마다 아베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 조선을 강제 병합한 ‘대일본제국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우국지사’들의 혼령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며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헌법 개정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일본이 오늘날 같은 경제부국이 된 것은 6·25전쟁특수로 얻은 반사이익이다. 동족간에 총질을 해 137만 명의 희생자를 낸 댓가로 얻은 경제력으로 또다시 전쟁을 하려는 악마의 나라가 일본이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런 일본을 74년간 우방으로… 동족은 주적이라며 한일군사비밀협정을 체결하고 동족을 죽일 온갖 무기로 만들고 있으니 아 대한민국이여!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숨져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영령에 고개를 들 수 있는가?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으며 독립투사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 얼마나 참혹한 고문과 학대을 당했는지 서대문형무소를 가보라!

해방 74년 광복절을 다시 맞으며 대한민국은 지금 진정한 해방이 된 나라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는 ‘우리 일본이…’ 이라는 말을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당당하게 말하고 엄마부대는 일본정부에 사과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구석 하나 말끔하게 친일잔재를 청산했는가? 해방 74년이 맞는 대한민국 애국가는 작곡자도 작사자도 친일인사다. 학생들의 성적표기방식은 일본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이 누가 적의 목을 많이 베어 오는가에 따라 붙이던 ‘수-우-미-양-가(秀優美良可)’도 그대다.

황국신민 정신을 주입하기 위해 시행하던 애국조례며 학교장 훈화도 그대로요, 일본식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인 ‘차렷, 경례’도 그대로다. 불량선인을 색출하기 위한 교실첩자(?)인 주번제도며 복장위반이나 지각생을 단속하던 교문지도는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학생이 다니던 학교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제일고·○○동중학교·○○서중학교라는 교명도 그대로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버젓이 그대로 부르고 있는 학교가 있는가 하면 친일파 동상과 기념관이 그대로 남이 있는 학교도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총리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조선을 쫓겨 가면서 남긴 말… 해방 74년을 맞으며 다시 생각해 보자.

“역사를 잊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3년간 종살이.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과...? 일본관리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한 사과를 받아 들였는가? 용서란 피해자가 ‘그만’할 때까지 해도 모자란다. 그런데 일본은 사과는커녕 제 2의 식민지시대를 꿈꾸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버젓이 올려 가르치고 있다. 일본은 용서해서 안 된다. 그들이 반성할 때까지는… 그러나 그전에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친일잔재부터 말끔히 청산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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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운동과 촛불시위는 이 시대의 3.1운동”

2차 시국회의, ‘8.15, 8.24 범국민 촛불문화제’ 발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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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3  16: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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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찬 전국비상시국회의를 마친 참가자들은 13일 오후 서울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8.15 범국민촛불문화제 계획 등을 발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아베의 과거사 부정과 경제적 압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과 촛불시위는 이 시대의 3.1운동이다.”

2차 전국시국회의 참가자들은 13일 오후 2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는 8월 15일 저녁 6시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아베 규탄 촛불문화제’를 공동으로 개최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또한 “8월 24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시한 종료일을 맞이하여, 아베를 규탄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의 파기를 촉구하는 촛불을 들 것”이라고 예고했다.

아베규탄시민행동과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일간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시국기도회’, 광복74주년 8.15평화손잡기,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 망라된 750개 단체들은 공동으로 이 행사들을 주최한다.   

참가자들은 박행덕 전농 의장과 이연희 겨레하나 사무총장이 공동낭독한 ’8.15 광복절 74년에 즈음한 제2차 전국시국회의 기자회견문‘을 통해 “아베 정권이 현재 취하고 있는 행태는 과거 일제 침략사와 그로 인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희생에 대한 전면 부정이며, 현재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선량한 경제 주체들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특히 아베 정권이 자신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한일 양국의 시민들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나아가 식민지배 이후 70여년간 이어진 한반도 분단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동아시아에 인위적인 갈등과 군사적 긴장을 부추기는 행태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정부를 향해서도 “일본 평화헌법 훼손과 집단적 자위권 추구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아베 정권의 자해적 공격에 맞선 우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과 항의 행동은 정당하다”면서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아베’다”라고 분명히 했다.

   
▲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맨 왼쪽)는 사업계획 발표에 나서 이후 일정을 공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사업계획 발표에 나서 이후 일정을 공개했다.

△‘아베 정권에 대응한 한일 시민단체의 평화행동 모색을 위한 긴급 토론회’(15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 글로벌센터)
△8.15 아베 규탄 촛불 문화제(15일 오후 6시, 광화문 북측광장), 행진(일본대사관-조계사-종로-조선일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페기 48시간 연속 시민발언대(22일 오후 5시, 일본 대사관),
△6차 아베 규탄 촛불 문화제(24일 오후 7시, 광화문 또는 일본대사관 앞),
△한일평화연대 활동(27일, 도쿄 총리 관저 앞)

박석운 상임대표는 “가장 핵심적인 사업 내용은 광복절 74주년 8.15에 아베규탄 촛불문화제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10만 이상의 촛불시민들이 참여하는 촛불행사로 진행하려고 한다”며 “지소미아 폐기 시한인 24일을 앞두고 일본 대사관 앞에서 48시간 연속 시민발언대를 설치하면서 사실상 농성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기자회견은 원로 언론인 김중배 선생을 시작으로 이희자 대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대표,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발언을 이어갔고, 이상규 민중당 대표와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등이 참석했다.

   
▲ 참가자들은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아베’다”라고 분명히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중배 선생은 “아베의 경제 도발로 어지러워진 국면에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 시민들은 다시 한번 촛불혁명의 세계사적 현장에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적절하게도 8.15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고 “어쩌면 장기화 될지도 모르는 이 국면에 꾸준히 정진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고 투지를 다졌다.

조성우 이사장은 “토착왜구들, 정계‧학계‧관계‧군‧경찰 고위직에 떵떵 거리고 그 후손까지 자리잡고 있다. 그것 제대로 정리 못한 업보를 지금 받고 있다”며 “친일의 뿌리를 뿌리채 뽑아내는 것, 이게 아베규탄 공동행동의 기본목표이자 과제라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가자들은 “모이자! 8월 15일 6시, 광화문에서!”, “아베 재무장 길 터주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하라!”, “한일 시민이 연대하여, 새로운 동북아 평화시대를 열어가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8.15 광복절 74년에 즈음한 제2차 전국시국회의 기자회견문(전문)

곧 8.15 광복 74주년을 맞는 우리의 심정은 참담하다. 일본 아베 정권이 일제 침략의 과거사를 부정하고 경제적 압박을 자행하면서 동아시아 평화의 안전장치인 평화헌법마저 폐기하고 재무장의 길로 나아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전범기업의 책임을 명문화 한 2012년, 2018년의 대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은 물론 국제법과 보편적 인권규범에 비추어 정당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전범기업에 대한 우리 재판부의 판결을 부정하고, 이 판결에 따른 정부의 행정조치를 빌미로 반도체 소재 3종의 수출 규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를 수출절차우대국에서 제외하는 경제적 도발을 연이어 강행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일련의 경제압박 조치들을 즉각 철회하고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 있는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해야 한다.

아베 정권이 현재 취하고 있는 행태는 과거 일제 침략사와 그로 인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희생에 대한 전면 부정이며, 현재 한국과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선량한 경제 주체들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행위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더욱이 아베 정권이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인하면서 그 재발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일본 평화헌법 9조를 훼손해 다시 욱일기를 휘날리며 군사대국의 길로 향하는 것을 우리는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일본의 평화헌법이 훼손되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결코 평화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아베 정권이 자신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한일 양국의 시민들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고, 나아가 식민지배 이후 70여년간 이어진 한반도 분단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동아시아에 인위적인 갈등과 군사적 긴장을 부추기는 행태를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 관계의 시계를 과거로 돌리려는 아베의 도발에 보편적 원칙과 기준을 바탕으로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단호히 대응하여, 이번 도발을 새로운 한일관계 수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원칙없는 태도를 취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추구하는 일본 아베정권과 군사협력을 지속해온 것이 아베의 도발을 가져왔다. 이런 점에서 일본 평화헌법 훼손과 집단적 자위권 추구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촛불항쟁 당시 이미 대표성을 부정당한 박근혜 정권이 국민의 동의 없이 강행한 일본과의 사실상의 군사동맹협정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연장을 거부해야 한다. 더불어 아베 총리가 제안하여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군사협력 구상에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동아시아에 평화공존의 협력체제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아베 정권의 경제 도발을 용이하게 했던 의존적 한일 경제관계 및 국내의 재벌기업과 중소상공인과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정치권과 언론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우리의 정당한 사법적 조치에 대한 경제적 압박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고 그 군국주의적 시도를 잠재우며 왜곡된 한일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당리당략과 정파적 득실을 따지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 위기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정파적 이유로 사태의 본질을 오도하는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도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우리에 대한 경제 도발, 군국주의 구상을 막아내는 것은 일본과 한반도, 동아시아와 지구촌 모든 시민들의 책무다. 과거 불법행위의 진실을 덮기 위해 경제적압박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는 아베 정권의 자해적 공격에 맞선 우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과 항의 행동은 정당하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아베’다. 이 나라 곳곳에서 식을 줄 모른 채 더욱 거세지고 있는 불매운동의 불길과, 점점 커져가고 있는 아베 규탄 촛불은, 보편적 인권, 정의 평화에 기초한 새로운 한일관계를 열망하는 우리 국민의 의지가 얼마나 높은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한일 시민들 간의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재무장의 빌미를 찾으려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부활시도를 정의, 인권,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시민들과 연대하여 반드시 좌절시킬 것이다.

올해는 3.1운동 100년을 맞는 해다.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사소한 차이를 넘어 손을 맞잡고 평화롭게 일어나 완전한 독립과 자결, 모두가 행복한 나라, 평화롭게 공존하는 동아시아, 정의와 인도가 지배하는 세계를 향한 열망을 당당히 외쳤다. 일제의 총칼 앞에 쓰러지면서도 결코 배타적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했다. 이제 우리는 100년여 간 이어져온 식민과 분단의 그늘에서 벗어나 평화와 통일의 새시대로 나아가려는 새로운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다시 3.1 운동의 정신을 발휘하여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새로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우리가 앞장서서 열어가자.

아베의 과거사 부정과 경제적 압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과 촛불시위는 이 시대의 3.1운동이다. 한일 시민 모두의 행복한 미래, 그리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 그리고 정의의 실현을 위한 행동이다. 오는 8월 15일 광복절 74주년을 맞이하여 모두 광화문에 모이자. 우리는 8월 15일 저녁 6시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아베 규탄 촛불문화제>를 공동으로 개최할 것이다. 또한 오는 8월 24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시한 종료일을 맞이하여, 아베를 규탄하고 한일군사정보협정의 파기를 촉구하는 촛불을 들 것이다.

모이자! 8월 15일 6시, 광화문에서!
아베에 맞서, 정의와 인권, 평화의 촛불을 높이 들자!
친일적폐 청산하자!
아베 정권은 경제압박 중단하고 강제동원 배상에 협력하라!
일본 재무장 길 터주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하라!
한일 시민 연대하여 일본 평화헌법 지켜내고 한반도 평화통일 앞당기자!
한일 시민이 연대하여, 새로운 동북아 평화시대를 열어가자!

2019년 8월 13일
8.15 광복 74주년에 즈음한 2차 전국비상시국회의 참가자 일동

광복74주년 8.15평화손잡기 추진위원회,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강원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경기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경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 공익활동가사회적협동조합동행 / 광주시민단체협의회 / 금융정의연대 / 녹색교통운동 / 녹색연합 /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 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민생경제연구소 / 민주언론시민연합 / 생태지평 / 여성환경연대 /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전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전남시민단체연대회의 / 참여연대 / 충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통일맞이 / 평화를만드는여성회 / 한국YMCA전국연맹 / 한국여성단체연합 / 한국여성민우회 / 한국여성의전화 / 한국투명성기구 / 함께하는시민행동 / 환경운동연합 / 환경정의 / 흥사단 / KYC), 역사왜곡ㆍ경제침략ㆍ평화위협 일본 아베정권 규탄 시민행동(1923한일재일시민연대, 3D프린팅산업클러스터, 4.19문화원, 4.27시대연구원, 5.18구속부상자회, 5.18기념재단, 5.18기념재단설립동지회, 5.18민족통일학교, 5.18민족통일학교 인천지부,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광주본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울산본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전북본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 제주본부, 6월민주포럼, 6월항쟁기념사업회, KIN지구촌동포연대, KIPF(코리아피스포럼), NCCK언론위원회, SK매직서비스 노동조합, 가톨릭농민회, 강동시민연대, 강원 춘천지역 아베규탄 촛불 참가단체(춘천농민회, 춘천여성회, 춘천환경운동연합, 춘천시민연대, 춘천의병마을,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하는 춘천시민모임, 춘천생명의숲, 춘천여성민우회, 춘천역사문화연구회, 민중당 춘천지역위원회, 벨몽드 마트 노동조합), 강제동원문제해결과대일과거청산을위한공동행동, 강진농민회, 강진진보연대, 개성공단금강산관광재개 전북도민운동본부, 거제농민회, 거창군여성농민회, 거창농민회, 거창민중연대, 건약광전지부, 겨레사랑청년회, 경기자주여성연대, 경기진보연대, 경기청년연대, 경남대학교 동문공동체, 경남여성연대, 경남여성정치네트워크 경남민주행동여성위원회, 경남진보연합, 경산농민회, 경산시여성농민회, 고령농민회, 고성군여성농민회, 고성농민회, 고양여성회, 고양평화청년회, 고창군여성농민회, 고창농민회, 고흥농민회, 곡성농민회, 공무원노조광주본부, 공주농민회, 관악여성회, 광복회, 광양진보연대, 광주YMCA, 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 광주기독교교회협의회(NCC), 광주농민회, 광주민족예술단체총연합, 광주비정규직센터, 광주세월호시민상주모임,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시민사회단체총연합, 광주엄마가달린다, 광주여성단체협의회, 광주여성민우회, 광주여성회,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광주전남시민행동,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전남우리겨레하나되기, 광주전남추모연대, 광주주권연대, 광주진보연대, 광주청년연대, 광주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광주푸른청년회,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흥사단, 괴산농민회, 교수노조대경지부, 교수노조전북지부, 교육희망 울산학부모회, 구례군여성농민회, 구례농민회, 구례민주단체연합, 구로여성회, 구리여성회, 구속노동자후원회, 국민대 평화의소녀상 건립추진위'세움’, 국민주권실현적폐청산대전운동본부, 국민주권연대, 국민주권연대 제주지역본부(약칭 제주주권연대), 군산YMCA, 군산농민회, 군산미군기지우리땅찾기시민모임, 군산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군포청년회,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기독학생청년실천연대, 김제농민회, 김제시여성농민회, 김천농민회, 김포농민회, 김해농민회, 김해진보연합, 깨어있는대구시민들, 나눔문화, 나라사랑청년회, 나주농민회, 나주시여성농민회, 나주진보연대, 남북경제교류협회, 남북사진문화교류위원회,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남양주여성회, 남원농민회, 남해농민회, 남해민중연대, 남해진보연합, 노동실업광주센터, 노동인권회관, 노동희망발전소, 노원겨레하나, 노후희망유니온, 논산농민회, 논산시여성농민회, 단양농민회, 담양농민회, 당진농민회, 당진시여성농민회, 대구경북주권연대, 대구경북진보연대, 대전청년회, 대학생겨레하나,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본사선운사,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울산시당, 더불어민주당 전북도당, 도깨비방망이지역아동센터, 독립유공자유족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동학실천시민행동, 동학천도교보국안민실천연대, 동학천도교보국안민실천연대 전북지부, 동행풍물패, 무안군여성농민회, 무안농민회, 무안진보연대, 무주농민회, 무주시민회, 묵점서당, 문지모(문재인을지키는모임), 민족광장,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언어연구원, 민족자주평화통일 서울회의, 민족자주평화통일 중앙회의, 민족통일애국청년회,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경기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경남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경북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대구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부산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서울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울산지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인천지부,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동대문중랑지역연합회,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서부지역연합회,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중부지역연합회,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지부, 민주언론시민연합,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협의회, 민주평화당 전북도당, 민주평화초심연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북지역회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중당, 민중당 강남서초구위원회, 민중당 강서양천구위원회, 민중당 경기도당, 민중당 경남도당, 민중당 경북도당, 민중당 관악구위원회, 민중당 광주시당, 민중당 구로구위원회, 민중당 금천구위원회, 민중당 노원구위원회, 민중당 대구시당, 민중당 도봉구위원회, 민중당 동대문구위원회, 민중당 마포구위원회, 민중당 부산시당, 민중당 서대문구위원회, 민중당 서울노동자민중당, 민중당 서울빈민민중당, 민중당 서울시당, 민중당 서울청년민중당, 민중당 성동광진구위원회, 민중당 성북구위원회, 민중당 영등포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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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내 일제잔재 전수 조사하고, 청산하라!”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잔재 실태조사 결과 발표
▲ 사진 :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전교조 부산지부를 비롯한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 소속 단체들이 12일 오전 부산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부산지역 학교 내 일제잔재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 단체는 지난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약 한 달간 부산지역 내 초·중·고등학교의 교화, 교목, 교가 등을 중점적으로 검토했다고 밝혔다(초등학교 305교, 중학교 174교, 고등학교 143교, 특수학교 15교 등 총 637교/ 유치원 413교 제외).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가 이날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며 현재 자위대의 군기로 사용되고 있는 욱일기를 연상케 하는 교표(학교 상징)를 사용하는 학교가 있었다.

▲ 자료 :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

교목·교화를 조사한 결과,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국채보상운동이 활기차게 진행되던 대구에 가서 의도적으로 기념식수 1호로 심어 조선침탈의 상징으로 알려진 ‘가이즈카 향나무’를 교목으로 채택한 학교가 122개교였으며, 일본이 3대 미수(美樹)로 꼽은 나무이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들어와 국내에 퍼진 대표적 수종인 ‘히말라야시다(설송)’가 교목인 학교는 23개교로 나타났다. 이 외에 일본이 원산지인 영산홍(연산홍), 국화, 벚꽃을 교화로 채택하고 있는 학교도 52개교로 밝혀졌다. 또, 친일 인사가 작사 또는 작곡한 교가를 부르는 학교는 16개교로 나타났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학급 급장’, ‘담임’, ‘차렷, 경례’ 등 친일문화(용어)도 여럿 지적했다.

학급 급장의 ‘급장’은 일제시대 교육부의 최말단 행정 기구인 ‘학급’에서 총독부 발행 교과서 성적이 1등인 자를 급장으로 임명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담임’은 학급의 업무를 맡아서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시대 때 사용되던 용어라는 것이다. ‘차렷, 경례’ 역시 일본식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이며, 교감(校監)이나 교육감(敎育監)에 들어있는 감(監, 살필 감)이라는 말도 교사를 감시하기 위한 일제시대의 흔적이라는 지적이다.

‘수-우-미-양-가’로 표기되는 성적표기 역시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평가를 하는 방식이지만, 이 제도는 일본 전국(戰國)시대에 사무라이들이 누가 적의 목을 많이 베어오는가에 따라 ‘수-우-양-가’로 표기하던 방식”이라며 “해방 후 일제강점기의 학적부를 생활기록부로 바꾸면서 ‘미’를 추가해 평가·기술하면서 5단계 성적표기 방식이 됐다”고 설명했다.

유아들을 교육하는 학교가 ‘유치원(幼稚園)’이라고 불리게 된 사연도 “1897년 일본인들이 자기 자녀들의 유아교육을 위해 부산에 세웠던 유아학교 이름을 ‘부산유치원’으로 부르면서부터 시작됐다”면서 “유치(幼稚)라는 단어는 ‘나이가 어리다’ 혹은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고 지적했다. 1945년 해방 후 중국에서는 유치원 명칭을 ‘유아원’으로 변경해 일제 잔재를 청산했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천황에서 충성하는 황국신민’이라는 뜻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라고 바꾸는데도 무려 51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상기하곤 “우리 주변의 일제잔재를 조사하고 이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부산시 교육청에 ▲학교 내 일제잔재 전수 조사 ▲학교 내 일제잔재청산 위한 계획 수립 ▲학교의 자발적인 일제잔재 청산운동 전개를 위한 방안 강구 및 시행 등을 요청했다.

학교 내 일제잔재를 전수조사하고 청산하라!

지난 3월 4일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은 여전히 군국주의의 야욕을 버리지 못한 상황 속에서 우리 안의 친일 잔재를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회원단체들과 함께 학교 내에 남아 있는 일제잔재를 조사하여 개선을 촉구하는 친일잔재 청산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지난 6월 말부터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의 소속 단체들과 함께 부산의 각 자치구를 나누어 맡아서 해당 자치구 관내 초·중·고등학교의 교화와 교목, 교가 등을 전수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산지역 몇몇 학교에서는 욱일기를 연상케 하는 교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학교들은 해방 이전에 개교한 학교라는 특징이 있었다.

둘째, 교목과 교화 조사 결과, 가이즈카 향나무를 교목으로 채택한 학교가 122교(19.2%), 히말라야시다 23교(3.6%), 연산홍 33교(5.2%), 국화 16교(2.5%), 벚꽃 3교(0.5%)였다. 특히 가이즈카 향나무의 경우, 조선총독부 초대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침탈의 상징으로 기념식수를 하였으며, 이후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학교와 관공서에 심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는 가이즈카 향나무를 사적지에 심을 수 없는 부적합 수종으로 결정한 바 있다.

셋째, 학교에서는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여전히 부르는 학교가 있었다. 친일인사인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가 4개교, 김성태가 작곡한 교가가 4개교, 김동진이 작곡한 교가가 7개교, 이항녕이 작사한 교가가 1개교, 총 16개교이다.

넷째, 교가 내용에서 성차별적인 내용이 있는 교가가 많았다. 여학교 교가의 경우, 수동적 이미지나 꽃에 대한 비유가 많고, 착함·순결·요조 등의 여성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남학교 교가에는 씩씩하고 굳세며 큰 뜻을 지니며 이끌어가는 남성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현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의 교가도 적지 않았다. 즉, ‘학생의 성장’보다는 ‘나라에 충성하고 성실한 일꾼이 되자는 계몽적인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작사 또는 작곡 미상의 교가를 쓰는 학교도 32개교나 되었다.

다섯째, 학교 내에는 친일문화가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 때부터 사용되어온 용어가 다수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담임, 교감(교육감), 각종 상장(개근상·정근상·표창장) 등이 있고, 군국주의 교육의 잔재로 ‘차렷, 경례’, 교문지도, 군대식 거수경례, 애국조회나 조회대, 주번제 등도 있었다.

여섯째, 학교 내에는 친일 기념물로 버젓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OO고에 설치되어 있는 안용백 흉상이다. 안용백은 조선총독부 학무부에 근무하면서 내선일체를 찬양하고, 대한국인들을 선동, 회유하여 일본 대동아전쟁 시 징병과 노역 등으로 우리 선조들을 내몰았던 인물이다.

위의 조사 결과를 통해서 보았듯이 학교 안에는 일제잔재가 많이 잔존해 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일제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주변의 일제잔재를 조사하고 이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정된 시간과 인력으로 더 많은 내용을 조사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다. 지금이야말로 부산시교육청이 나서야 할 때이다.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학교 내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부산시교육청과 함께 노력할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항을 교육청에 요구한다.

첫째, 부산시교육청은 학교 내 일제잔재를 전수 조사하라.

둘째, 부산시교육청은 학교 내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라. 셋째, 부산시교육청은 학교문화혁신의 일환으로 학교가 자발적으로 일제잔재 청산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시행하라.

넷째, 부산시교육청은 부산시 내의 일제잔재 조사를 위해 부산시와 협력하라.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는 앞으로도 유무형의 방대한 친일잔재 청산에 힘을 쏟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친일잔재를 청산할 수 있도록 관심과 지지, 동참을 요청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8월12일
부산교육희망네트워크

조혜정 기자  jhllk20@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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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미국과 이스라엘에 붕괴 경고

이란, 미국과 이스라엘에 붕괴 경고

 

이장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8/13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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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미국과 이스라엘에 경고

▲     © 자주일보


 이란이 해사면합군창설을 앞두고있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두고 '붕괴'라는 말을 써가며 강력  경고했다. 

이란 외무상 모함마드 자바드 자리프가 9일 페르샤만 지역의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의 책동을 비난하였다.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최근 미국이 페르샤만지역의 안전보장을 구실로 해상연합군을 창설하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그는 전략적인 이 지역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 자체가 바로 불안정을 조성하는 근원으로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페르샤만이 이란의 국가 안전 보장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이란 외무성 대변인은 이스라엘이 미국의 해상 연합군 창설 책동에 합세하려 하고있는 데 대해 이것은 명백히 이란에 대한 위협으로 된다고 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위험한 행동으로 부터 초래 될 모든 후과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 하였다.

한편 "이란 이슬람교 혁명 근위대  총사령관이 8일 자기 나라를 반대하는 임의의 새로운 전쟁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위협으로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그 어떤 대결도 유태 복고주의 정권에 전면적인 위협으로 되며 되 돌릴 수 없는 붕괴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도 이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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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독후감 적은 홍준표

“좌파보다 더한 보수 유튜버”
 
임병도 | 2019-08-13 09:31: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읽어보니 이건 아니다 싶은데 왜 이 책을 보수 유튜버가 띄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글을 올리자, 보수 유튜버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12일 홍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토지조사사업, 쇠말뚝, 징용, 위안부 문제 등 전혀 우리 상식과 어긋난다”며 “오히려 일본의 식민사관 주장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책에 관한 소감을 올렸습니다.

홍 전 대표는 “반일운동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제국의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동의하기 어렵다”며 “이러니 보수·우파들이 친일 프레임에 걸려드는 거다”라며 보수·우파들에게 쓴소리를 쏟아냈습니다.

페이스북에 홍준표 전 대표의 글이 올라오자 4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비판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극우 만화가로 알려진 윤서인씨는 “실제 진실은 이러한데 그 책의 이런 부분은 이러이러해서 문제입니다. 이렇게 명확한 근거와 논리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홍 전 대표는 윤서인씨의 댓글에 “짧은 글로 반박하니 그렇습니다. 윤 작가님도 한 번 읽어보시면 생각이 다를 겁니다.”며 “나는 조국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적었는데 달려드는 것을 보니 좌파들 보다 더하네요”라는 답글을 남겼습니다.

보수 유튜버도 홍준표 전 대표의 페이스북 글을 커뮤니티에 인용하면서  “진실에는 동의 따위는 필요치 않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마지막에는 “세상이 흉흉해지니 벼라별(별의별) 사람이 다 정치를 하네요”라며 홍 전 대표의 페이스북 글을 비꼬기도 했습니다.

조국, 반일 종족주의를 가리켜 “구역질 나는 책” 

홍준표 전 대표의 글에 보수 유튜버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가 페이스북에 “이런 구역질 나는 책을 낼 자유가 있다면 시민들은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를 자유가 있다”는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유튜브 채널 ‘이승만TV’에 나와  “그러한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고 싶다”라며 “평생 비정치적으로 연구실을 지켜온 사람을 부역·매국 친일파라고 매도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보수 유튜버들이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을 옹호하는 것과 달리 자유한국당 내부에서는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읽는 동안 심한 두통을 느꼈다”라며 “저자가 뱉은 침이 제 얼굴에 튄 것 같은 불쾌함을 느낀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장 의원은 “강제징용은 허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자해행위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라며 “한편에서는,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매국행위를,  다른 한편에서는, ‘지식인의 용기’로 포장된 ‘역사 자해행위’를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반일종족주의에 나온 충격적인 이야기들 

‘반일 종족주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김낙년 낙성대경제연구소장, 김용삼 이승만학당 연구자와 함께 낸 책입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습니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습니다. 이웃 일본을 세세(歲歲)의 원수로 감각하는 적대 감정입니다. 온갖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퍼지는 것은 이같은 집단 심성에 의해서입니다. 바로 반일 종족주의 때문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중에서) 

이영훈 전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이웃나라 일본을 원수로 적대하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표현했다며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 반일 종족주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반일 종족주의’에서는 독도 영유권에 관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합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해서도 “이는 한일 간 최선의 합의였다.”며 “한국인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과의 과거사가 매듭지어졌음을, 과거사가 청산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안부 강제동원도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는다”며 “그것은 당시의 제도와 문화인 공창제의 일부였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단순한 학자의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전 교수는 스승인 안병직 교수와  ‘근대 조선의 경제구조'(1989년),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1992년)라는 책을 일본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400만엔을 받고 진행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련기사:日극우재단 자금 받는 뉴라이트와 한국교수)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가 과거에 일본의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주장을 의심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통 보수 우파의 생각과도 맞지 않아 보입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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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스리스크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 열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8/13 09:36
  • 수정일
    2019/08/13 09:36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한청단도 참석...내년 순국 100주년 앞두고 다양한 행사
우스리스크=오정윤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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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2  22: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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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리스크=오정윤 통신원 / 한국청소년역사문화홍보단 대표

 

   
▲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12일 오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기념관(고택)에서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기념관(고택)에서 12일 오후 4시(현지시간)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제막식에는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문영숙 최재영기념사업회장,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이 플라디미르 우수리스크시의원,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최발렌틴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등이 참석했다.

개회사는 안민석 국회의원, 기념사는 소강석 이사장, 건립문 낭독은 문영숙 이사장이 맡았고 답사는 유족을 대표하여 최발렌틴 회장이 하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기념비 건립문>
   
▲ 제막식을 가진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최재형 선생의 2020년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2019년 8월 15일 광복절에 그의 고귀한 희생과 위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소강석 이사장의 제안으로 대한민국 국회 안민석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김니꼴라이 회장, 최재형 선생의 후손 및 각계 인사들의 뜻과 정성을 모으고, 국가보훈처와 주블라디보스톡 한국영사관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 추모하는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운다.

민간공익단체인 한국청소년역사문화홍보단(한청단)은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 참석을 위해 연해주 항일독립-발해 역사대탐방의 우수리스크 일정을 12일로 맞추고 한국의 답사단체로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행사에 참석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에서 막대한 부를 쌓고 대한의군, 13도 의병, 안중근 의거를 지원하고, 항일민족지인 <대동공보>를 맡아 운영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맡는 등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웠지만 안타깝게도 블라디보스톡을 침략한 일제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4월참변’으로 1920년 4월 5일(6~7일설도 있음)경에 일본군의 만행으로 순국하였다.

   
▲ 기념비가 흰 천으로 가려진 채 개막식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 민간공익단체인 한국청소년역사문화홍보단(한청단)이 일정을 맞춰 개막식에 참석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내년 2020년은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으로 그의 업적과 항일독립의 의지를 계승하는 대대적인 추모사업이 진행중이고 12일에 거행된 기념비 제막식은 여러 행사의 일환으로 열렸다.

한청단은 이곳 연해주 항일독립과 발해역사를 널리 알리고 그 뜻을 계승하는 연해주답사를 매년 여름방학에 실시할 계획이고, 많은 한국의 청소년, 일반인들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여행을 계획한다면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고택, 기념관, 그리고 이번에 제막한 최재형 기념비를 꼭 찾아주기를 희망한다.

   
▲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최재형 고택'. [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 기념과 내부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오정윤 통신원]

 

최재형의 생애 연표(1860-1920)

1860 8월 15일, 조선(이북지역) 경원군에서 출생.

1869 러시아 연해주 남부 티진헤 마을로 이주.

1871 집에서 가출하여 포시에트(Посьет)항 무역상선의 견습선원이 됨.

1871-77 2회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그) 구간을 항해.

1878 선장의 추천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직.

1881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에서 큰 아들 부부와 거주하고 있는 아버지 최흥백(Цой Хын Бек-원문에서는 세 가지 형태(Цой Хын Бяк, Цой Хын Бек, Цой Хен Бяк)로 표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자는 이 중에서 한국식 표기에 가장 가까운 Цой Хын Бек으로 통일해서 표기)에게 돌아옴.

한인들 사이에서 문화-교육계몽 및 농업정착 사업 활동을 시작.

1882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하마탕)-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 구간 고속도로 건설국과 지구경찰서장의 통역으로 일을 시작.

1886 한인 젊은이 첫 번째 그룹을 상대로 러시아 유학 파견 사업을 조직.

1888 고속도로 건설관련 공로로 첫 은메달을 받음.

1890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발의로 노보키예프스크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1916년에는 슬라뱐카(Славянка)의 학교 내에 공원이 조성됨.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지원 자금 마련을 위해 산업체 인사들과의 사업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함.

1893 스타니슬라프 금장으로 된 두 번째 은메달을 수여받음.

얀치헤 볼로스치(Янчихинская волость, 얀치헤 읍,邑)의 책임자(старшина)으로 선출됨.

1894 제1차 전러시아 읍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1895 얀치헤에 최초의 정교 교회와 교사 및 사제를 위한 학교와 주택들이 건립됨.

1896.5.13 수도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황제 니콜라이 2세(Н.А.Романов Ⅱ)의 즉위식에 참석함.

1898 친선-형제관계에 의거해 상업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를 통해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교육계몽, 건설, 농업관련 비용들을 조달함.

1904 항일운동 조성을 위해 연해주 한인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함.

최고영예의 금메달을 수여받음.

1905 한국과 관련한 국가정책을 알기위해서 일본의 수도 도쿄에 다녀옴.

가족과 함께 노보키예프스크(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해옴.

1906 최초의 한인 빨치산 부대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수비대에 대해 기습을 감행함.

1910 가족과 함께 슬라뱐카로 이사해옴.

1911 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비밀회의에서 전 극동지역 57명의 대표위원 입회하에 새로운 단체 ‘권업회’가 조직되고,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권업회 회장으로 선출됨.

11월에 권업회의 합법적인 활동권을 보장받았으며, 12월에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권업회의 지도부가 선출됨.

1913 로마노프(Романов) 왕조 제위 300주년 기념식에 한인단체(7명)의 일원으로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권업회의 지도자들(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박 에스. 베.(С.В.Пак), 채 아.(А.Цхай)이 곤닫티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Н.Л.Гондатти, Приамурский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에게 한인의 러시아이주 50주년 기념행사 조직위원회의 조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으며, 동년 10월에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로부터 허가를 받음.

1915 슬라뱐카에서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됨.

1917 얀치헤 읍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1918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동해 옴.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자치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군자치단체 감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일본군에 대항해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1919 상해임시정부 위원으로 선출됨.

1920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함.

1953 7월 13일 부인 엘레나 페트로브나(Елена Петровна)가 사망했으며, 7월 16일 (키르기즈스탄) 비쉬케크시 (프룬제) 공동묘지에 안장됨.
 

<출처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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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기르러 서울대 갔던 조국, '두꺼비'에서 장관 후보자로

[조국의 생각] 현실 참여하던 법학자, '검찰개혁' 실행자 될 수 있을까

19.08.13 08:25l최종 업데이트 19.08.13 08:25l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단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단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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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연구실을 "작고 견고한 성(城)"이라고 말했다. 또 스스로를 정치인이나 시민운동가, 철학자가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2년 전 자신의 성을 떠나 현실 정치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는 법무부라는, 7평짜리 연구실보다 훨씬 커다랗고, 어쩌면 더 굳건할 성 앞에 섰다. 그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다.

역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조국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각을 해왔을까. <오마이뉴스>는 그의 책 <진보집권플랜>, <조국, 대한민국에 고하다>,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와 언론 보도 등을 중심으로 조국의 생각을 정리했다.

[사노맹] 자본주의 모순 비판... "경제적 살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학생이라고 가정하고 재임 기간 동안의 법률적 통치 행위에 대해 어떤 점수를 주겠나"라는 질문에 "이명박은 C마이너스, 박근혜는 D마이너스"라고 답했다.
▲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5년 1월 13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학생이라고 가정하고 재임 기간 동안의 법률적 통치 행위에 대해 어떤 점수를 주겠나"라는 질문에 "이명박은 C마이너스, 박근혜는 D마이너스"라고 답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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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조국 대전'에 출전했다. 그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국가전복 집단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 법무부장관이 되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라고 했다. 조 후보자가 1993년 울산대학교 법학과 전임강사 시절 옥고를 치른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남한사회주의과학원 사건 이야기였다.

조국 후보자는 이때 자신은 대한민국의 전복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계 극복을 꿈꿨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모순을 분명히 드러내고 독점재벌과 대결하는 운동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의 평소 신념은 그를 사노맹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1심은 조 후보자의 활동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단체 활동으로 보고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김황식 전 국무총리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남한사회주의과학원이 사노맹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을 뿐이라며 이적단체로 판단,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 판결을 그대로 확정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대하는 문제의식은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조 후보자는 2012년 <한겨레> 연재 코너에서 고 전태일씨의 동생 전순옥 당시 국회의원을 인터뷰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나라 중 한국만큼 독점자본의 무한독주를 허용하는 나라는 없다, 요즘 재벌은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이라고 했다. 자신의 책에서도 "경제적 살인"이란 말을 써가며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나 직업병 등으로 숨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두꺼비'의 현실 참여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문재인-김인회이 검찰을 생각한다> 발간기념 'The 위대한 검찰' 토크 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조국 서울대 교수와 김인회 교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선수 민변 회장(왼쪽부터)이 검찰개혁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2011년 12월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문재인-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발간기념 "The 위대한 검찰" 토크 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조국 서울대 교수와 김인회 교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김선수 민변 회장(왼쪽부터)이 검찰개혁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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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한 교사는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친구 중에도 "너는 딱 군인 체질"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혜광고 3학년 조국은 "가뜩이나 숨이 턱턱 막히는 사회와 학교분위기에 질렸던 탓에" 사관학교로 진학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사복을 입고, 편하게 머리를 기르고 싶었던 그는 198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에 진학했다.

캠퍼스의 낭만보다 한국 현대사의 야만을 몸으로 겪던 시절이었다. 결국 조 후보자는 '비(非)고시파'의 길을 택했다. 학생운동에 점점 관심이 높아가던 대학교 2학년 때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회보를 찾아 읽기도 했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는 알을 품으면 뱀을 찾아 나서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그 알은 뱀을 자양분으로 부화해 마침내 뱀을 죽이고 수많은 두꺼비로 태어난다. 80년대 대학가에는 이러한 '두꺼비'가 되려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다. ...(중략)... 이러한 과정에서 나도 작은 '두꺼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중에서


'두꺼비' 조국은 현실에 뿌리내린 법학자로 거듭난다. 감옥을 다녀온 뒤에는 국보법을 더욱 고민하게 됐다. 이후 조국은 한국 사회에서 반공과 분단의 논리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빨갱이'라고 낙인찍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국보법은 "친미, 반공, 분단, 자본의 논리를 일탈하는 사상과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며 완전한 폐지를 주장했다.

[살인검 휘두르는 검찰] 검찰개혁이라는 소명
 

머리 맞댄 법무장관·민정수석 박상기 법무부 장관(왼쪽)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수처설치법 제정 관련 당정청회의 개의를 기다리며 대화하고 있다.
▲ 머리 맞댄 법무장관·민정수석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민정수석으로 재직 중이던 2017년 11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수처설치법 제정 관련 당정청회의 개의를 기다리며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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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후보자는 교수 시절부터 줄곧 검찰개혁을 외쳐왔다. 그는 지난해 1월 14일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직접 권력기관 구조개혁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1987년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언급하며 "검사 개인은 진실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검찰 전체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재직 때는 이명박 정부의 검찰이 휘두르는 칼을 '살인검'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권의 신뢰를 얻는 데 급급하여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검찰에게 미래는 없다. '검사(檢事)'들은 종종 스스로를 '검사(劍士)'에 비유한다. 이들은 수사권과 공소권이라는 쌍검을 휘두르며 범죄와 투쟁을 벌인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략)... 그 칼이 권력의 눈치를 보는 칼이거나 권력의 의향에 따라 휘두르는 칼이라면, '활인검'이 아니라' 살인검'이라면, 검사의 손에 있을 필요가 없다."
- <조국, 대한민국에 고하다> 중에서


오랜 문제의식은 2017년 문재인 정부 첫 민정수석의 길로 그를 이끌었다. 조 후보자는 청와대에서 권력기관 구조개혁을 주도하며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수사 지휘-통제에서 협력관계로 재설정해 경찰에 1차 수사종결권을 부여하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설치하는 등 검찰의 수사권을 분산하는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남은 것은 개혁의 실행이다. 관련 법안은 이미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올라탔다. 차기 법무부 장관은 여기에 반발하고 있는 검찰을 추스르고, 국회 협조를 이끌어내야 한다. 조국 후보자는 이 모든 과제를 풀어내고, 스스로 "소명"이라고까지 한 검찰개혁을 완수할 수 있을까? 어느 때보다 치열할 국회 인사청문회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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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 새 무기 시험사격 완벽 성공<사진포함>

이정섭 기자 | 기사입력 2019/08/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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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위원장, 새 무기 시험 사격을 지도

▲     © 자주일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 무기 시험사격을 지도했다고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을 비롯한 조선의 매체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로동신문은 11일 "조선로동당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력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국가무력의 최고 영도자 김정은 동지께서 8월 10일 새 무기의 시험사격을 지도하시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은 "온 나라가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 들고 최고 영도자 동지의 역사적인 시정연설과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강령적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산악같이 떨쳐나 사회주의 건설의 전 전선에서 새로운 혁명적 앙양을 일으켜 나가고 있는 격동적인 시기에 위력한 새 전술 무기들의 훌륭한 성공 폭음을 연일 터뜨리며 우리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 투쟁을 힘 있게 고무 추동하고 있는 미더운 국방 과학자들과 군수 노동계급은 당에서 최근에 연구개발 방향을 제시한 또 하나의 새 무기체계를 완성하고 당 중앙에 자랑찬 보고를 올리였다"고 밝혀 이번 시험 사격한 전술 무기가 새로 선보였음을 확인했다.

 

신문은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새 무기 개발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즉시 시험을 진행할 데 대한 지시를 주시었다""새 무기체계의 시험사격을 지도하시기 위하여 이른 새벽 현지에 나오신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를 이병철 동지유진 동지김정식 동지장창하 동지전일호 동지정승일 동지를 비롯한 당 중앙위원회와 국방 과학부문의 지도 간부들이 맞이하였다"고 전했다.

 

신문 보도는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발사장에서 새 무기를 돌아보시었다"며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우리나라의 지형 조건과 주체 전법의 요구에 맞게 개발된 새 무기가 기존의 무기체계들과는 또 다른 우월한 전술적 특성을 가진 무기체계라고 하시면서 국방과학 부문에 이 무기체계 개발 과업을 제시한 당 중앙의 전략·전술적 기도에 대하여 설명하시었다.고 밝혔다.

 

보도는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감시소에 오르시어 시험사격을 지도하시었다"며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 사격 구령을 내리시자 하늘 땅을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을 터뜨리며 위력한 주체 탄들이 자기의 탄생을 알리듯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다"고 장엄한 광경을 전했다.

 

, "시험사격 결과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하여 새 무기체계의 우월하고도 위력한 설계상 요구가 완벽하게 현실화 되였다는 것이 확증되었다"고 성공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이어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감시소의 영상 표시 장치에 전송된 새 무기의 시험사격 결과를 보시고 당에서 구상하고 있던 또 하나의 새로운 무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못내 기뻐 하시며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우리 국방 과학자들과 군수 노동계급은 당에서 방향만 주면 그 무엇이든지 못해 내는 일이 없다고당 중앙의 전략적 구상과 의도를 그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하고 관철해 가고 있는 이들은 늘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어려움과 난관을 잊게 해주는 정말 고마운 동지들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고 피력했다.

 

로동신문은 "경애하는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는 당과 혁명에 대한 끝 없는 충성심과 가장 고결한 조국애를 지니고 당의 국방 공업 발전 전략을 충직하게 받들어 나라의 방위력을 끊임없이 다져가고 있는 국방 과학자들과 군수 노동계급의 영웅적이며 애국적인 위훈은 우리 당의 투쟁사와 더불어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시었다"고 천명했다.

 


 

▲     © 자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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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정신적 지주', 극우 '일본회의'의 놀랄 만한 실체

패망 이전의 일본 꿈꾸는 닛폰카이기, 강제징용·역사교과서 등 이슈 주도... 그들의 돈줄은?

19.08.12 07:21l최종 업데이트 19.08.12 07:27l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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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닛폰카이기)가 아베 신조 내각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3만 8천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회의는 자신들의 조국을 패망 이전으로 '리셋' 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다. 강력한 군대를 갖고 대륙 진출을 도모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일본 핵무장론도 여기서 나온다.

일본을 리셋한다는 일본회의

이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체 242명인 참의원과 전체 465명인 중의원 의원 중에서 일본회의 의원간담회 회원이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확인된다. 교도통신사 사회부·외신부 기자 및 서울특파원 등을 지낸 아오키 오사무가 집필한 <일본회의의 정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2016년에 발행됐다.
 

"일본회의 사무총국 홍보 담당자 등의 말에 따르면, 2005년 9월에 시행된 제44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들 중 간담회에 속한 중의원 의원은 모두 158명이었다. 이후 계속 증가하여 2007년 9월에는 중의원 174명, 참의원 51명으로 모두 225명이 된다. 나아가 2008년 10월에는 중·참 양원에서 모두 250명으로 늘었고, 2012년과 2014년의 총선거를 거쳐 현재는 약 280명 내외다."


의회뿐 아니라 내각에도 그들이 포진해 있다. 2016년 현재 아베 내각의 각료 20명 중에서 13명이 일본회의 회원들이었다. 이 정도면, 일본회의가 일본열도를 운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칭 그대로, 일본에 관한 핵심 회의가 이루어지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영향력을 발판으로 일본회의는 한·일 현안에서도 강경 여론을 주도한다. 위안부·강제징용·역사교과서·독도 등과 관련해 한국을 자극하는 발언들이 거기서 많이 나온다.

일례로,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7월 25일 한국에서 개봉한 위안부 다큐영화 <주전장>에서 일본회의 대표위원이자 도쿄도 본부회장인 가세 히데야키(외교 평론가)는 대중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어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이렇게 과도한 관심을 가지는 거죠? 역시 포르노 같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 35명인 일본회의 대표위원은 고문·회장단·감사·이사장·사무총장과 함께 이 단체를 이끄는 임원이다. 그런 간부가 위안부 문제를 두고 '포르노 같은 매력' 운운했다. 그것도, 곧 공개될 다큐영화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일본회의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참가한 시민촛불발언대에 참여해 일본 아배 정권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참가한 시민촛불발언대에 참여해 일본 아배 정권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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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강제징용·역사교과서·독도 이슈 주무르다

일본회의는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서도 극우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일본회의는 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통합으로 발족했다.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지난 수십 년간 있었던 역사교과서 파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단체다. 이들은 그중 세 번째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노다니엘 교토산업대 객원연구원의 <아베 신조와 일본>은 "세 번째 파동은 1986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는 일본의 우파 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지금의 일본회의)'가 편찬한 고교용 교과서 <신현일본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1980년대부터 교과서 문제로 주목을 끌었던 극우 단체가 일본회의의 양대 모체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일본회의가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20년까지 이루려 했던 자신들의 목표에 한반도가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회의는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까지 헌법 제9조를 바꿔 '전쟁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만들고 이를 토대로 패망 이전의 일본을 복원시킨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연초부터 전개된 한반도 평화 국면으로 인해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도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7월 16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 전화 인터뷰에서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는 일본회의에 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발언 일부를 한국어 어법에 맞게 수정했다.

"제9조 폐기를 위한 시나리오를 해왔는데, 2015년 중의원 선거에 이겨서 희망을 갖게 되고, 작년이 일본회의 창립 2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20주년 기념 때 올해 선거를 이기고 처음으로 헌법 개정안을 집어넣어, 내년 2020년에는 올림픽과 함께 일본이 전전(戰前)의 헌법으로 돌아감으로써 자기들의 숙원 사업이 다 성취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변수가 생겨버린 거예요. 2018년에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과 문재인 정권의 등장에 의해서 박근혜 정권이 탄핵되고 남·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올해 판문점 회동까지 이루어짐으로써 어떻게 보면 일본회의가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생긴 거고, 잘못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2017년 박근혜 탄핵 및 문재인 정부 출범 앞에 둔 것은, 발언 중에 무심코 나온 실수로 보인다. 헌법 제9조 개정으로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면 한반도 주변에 위기가 상존해야 하는데 최근의 평화 국면으로 인해 지장을 받게 됐다는 것이 이영채 교수의 말이다. 이로 인한 당혹감이 아베 내각의 무리수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판결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국면도 일본회의와 아베의 강공 드라이브를 부추기고 있다는 거다.

위 인터뷰에서 강조된 것처럼 아베 내각 배후에 일본회의가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지만, 그 일본회의의 배후에 있는 실체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 배후에는, 1945년 당시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숨어 있다. 일본을 패망시켰을 당시의 미국이 당혹스러워 할 만한 일이 바로 거기에 있다.
 
 야스쿠니신사.
▲  야스쿠니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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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도 놀랄 일본회의의 자금줄

일본열도를 점령했을 당시, 미군의 눈에 위험하게 비친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일본군국주의를 위해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장교들한테는 그곳이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 상징으로 보였다.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신도에 대한 미군의 경계심을 반영하는 것이 1945년 12월의 신도지령(神道指令)이다. 정식 명칭은 '국가신도와 신사신도에 대한 정부의 보증·지원·보전·감독·선전의 금지에 관한 건'이다.

신도지령의 핵심 내용은 국가신도를 폐지하고 정교분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 신도가 더 이상 국가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를 허용했다가는 일본이 또다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가미카제 특공대 같은 모험을 벌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같은 신도지령에 따라 신사신도에 대한 공적인 재정 지원, 국공립학교에서의 신도 교육 및 신사 참배, 공직자의 신사 참배, 국가신도에 관한 서적 배포 등이 금지됐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은 그런 정교분리를 통해 신도와 일본군국주의의 연계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데 맥아더가 금지한 그것이 지금 실현되고 있다. 바로 그 신도가 오늘날 일본회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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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도 아니고 정부기관도 아닌 민간단체가 장기간 활동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단체의 자금력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핵심적인 운영 자금이 회원들의 회비가 아닌 다른 데서 나오고 있다면, 단체가 배후의 무언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 배후의 실체가 앞서 소개한 <일본회의의 정체>에 소개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회의 창설에 깊숙이 관여한 무라카미 마사쿠니 전 참의원 의원과 일본회의 도쿄도의회 회장대행을 역임한 고가 도시아키는 일본회의의 자금줄이 일본 신도라고 말했다. "일본회의의 자금에는 회원의 회비 외에 다른 것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고가 도시아키는 이렇게 답했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회사를 경영하다가 일선에서 물러난 분들이 꽤 거액의 기부금을 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대료나 인건비를 충당하려면 가끔 들어오는 거액의 기부금으로는 부족하지요."

전직 기업 CEO들이 가끔씩 거액 기부금을 낸다고 답변했다. 평상시의 운영자금은 어디서 나오느냐는 추가 질문을 의도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라는 추가 질문이 나오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니 뭐니 해도 신사본청이지요. 메이지신궁 등이 낼 겁니다."

앞에서 1997년 창설 당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일본회의의 모체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신도계 종교단체들이 만든 모임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 신도가 일본회의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일본회의의 배후에 '일본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신도가 있다는 사실은 일본제국주의 때문에 시련을 당한 민족들한테는 끔찍한 추억을 연상시킬 만하다. 일본 군대가 종교적 신념에 취해 아시아 각국을 맹렬히 침략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맥아더는 신도와 일본 정치의 결합이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교분리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신도가 일본회의라는 극우 단체를 앞세워 일본 정치에 또다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내각과 의회에 그들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유대인이 미국 정치를 주무르는 것처럼, 신도 역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광분 속에 진행된 일본군국주의를 경험한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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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개벽예감 360]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8/12 [07:5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1.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

 

1896년 3월 29일 류인석 의병장이 지휘하는 항일의병 3,500명이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주둔하는 충주 관찰부를 공격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것이 항일전쟁의 시작이다. 의병운동이라는 말이 쓰이지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의병부대들의 무장투쟁은 의병운동이 아니라 항일전쟁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항일전쟁은 1896년 3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49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일왕 히로히또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던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교전이 벌어지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에 종전되었지만, 조선민족의 항일전쟁은 히로히또가 항복선언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에 사실상 종전되었다.  

 

49년 동안 지속된 항일전쟁은 항일의병전쟁 → 항일독립전쟁 → 항일혁명전쟁으로 발전하였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전쟁 제1단계에서는 항일의병전쟁이 전개되었고, 1911년부터 1931년까지 항일전쟁 제2단계에서는 항일독립전쟁이 전개되었고, 1932~1945년까지 항일전쟁 제3단계에서는 항일혁명전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부터 근 반세기에 걸쳐 간고한 혈전이 계속된 항일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선민족의 승리로 끝났다. 항일전쟁 종전 74주년을 맞은 오늘 그 전쟁이 어떻게 종전되었는지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7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7일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매우 특이한 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김구 임정 주석을 비롯한 임정 및 광복군 고위지휘관들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육군 소장을 비롯한 전략외사실(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 고위지휘관들의 합동작전회의였다. 전략외사실은 1942년 6월 13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의 특명으로 조직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활동하다가 1945년 9월 20일에 해체된 전시군사정보기관이다. 전략외사실을 모체로 하여 1947년 9월 18일에 중앙정보국(CIA)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전시군사정보기관 지휘관들이 왜 중국 시안에서 광복군 지휘관들을 만나 합동작전회의를 했을까?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자기의 특명으로 창설된 전략외사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몫을 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전략외사실은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워싱턴 정가에서 전략외사실 무용론이 나돌게 되었다. 존폐위기에 내몰린 전략외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격전지로 떠오른 아시아전선에서 반드시 전과를 거두어야 하였다. 다급해진 전략외사실은 일제가 강점한 한반도에 공수특전대를 침투시키는 작전계획을 1945년 1월에 수립했다. 

 

그런데 조선의 언어, 지리, 풍습도 모르고, 외모도 조선인과 전혀 다르게 생긴 미국인 공수특전대원들이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대안을 모색하던 전략외사실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광복군이었다. 그때부터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시켜 식민지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전략외사실의 전략구상이 무르익었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그 전략구상은 ‘독수리작전’이라는 비정규전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이른 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런 작전계획을 가지고 김구 주석을 만났다.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이 국내침투작전을 함께 수행하기로 최종 합의한 때는 1945년 4월 3일이었다. <사진 1>

 

 

▲ <사진 1> 위쪽 사진은 1945년 8월 7일 김구 임정 주석과 윌리엄 도노반 미국 전략외사실 실장이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광복군과 전략외사실의 합동작전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장면이다. 김구 주석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엄항섭 임정 판공비서 겸 선전부장이고, 김구 주석과 도노반 실장 사이에 보이는 두 사람이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검은 옷)과 이범석 광복군 제2지대장(흰 옷)이다. 아래쪽 사진은 1945년 8월 4일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광복군 제3지대 대원 20여 명이 다른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가운데 안경을 낀 미국인 장교가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된 20여 명 대원들에게 공수특전훈련을 시킨 클레어런스 윔스 대위이고, 그 왼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김학규 광복군 제3지대장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선발되어 공수특전훈련을 받은 20여 명 대원들 가운데는 재미동포 통일운동가였던 윤영무 선생(1920~2015)도 있다. 나는 윤영무 선생으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앞으로 언젠가 그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광복군 대원 50여 명은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전략외사실에게 위와 같은 내부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임정에게도 내부사정이 있었는데, 그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1941년 9월 17일 임정이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하던 때 장졔스 정부(국민당 정부)가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장악했었는데, 임정은 1944년 8월에 가서야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되찾았다. 작전통제권을 되찾았으나 광복군의 무장을 허용하지 않는 장졔스 정부의 저지선을 넘지 못하는 바람에 광복군은 전투를 벌이기는커녕 총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목총훈련이나 하던 판이었다. 그런 침울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중에 김구 주석은 식민지조선에 침투하는 비정규전에 광복군을 참가시키고 싶다는 도노반 실장의 제안을 받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김구와 도노반 앞에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그들이 넘을 수 없는 큰 걸림돌이 가로놓였다. 그 걸림돌은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이 종전되던 날 임정과 광복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항일전쟁이 종전되었던 74년 전, 임정과 광복군의 앞길에 걸림돌을 놓아 마지막으로 찾아온 전투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조기종전을 밀어붙인 까닭에, 임정과 광복군은 전투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1945년 8월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간 전시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기폭시험도 미처 하지 않아 터질지 안 터질지조차 알지 못하는 핵폭탄을 황급히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면 미국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소련군이 만주와 홋까이도로 남하진격하여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만약 소련군이 한반도와 일본렬도를 점령하면, 미국군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포기하고 하와이로 후퇴해야 하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련군의 진격을 멈춰 세워보려고 날뛰었다. 당시 미국의 전략목표는 종전과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고 자기들이 먼저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다급한 상황에 내몰린 미국이 소련군의 남하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황급히 선택한 것이 핵폭탄 투하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전하기 전인 1945년 8월 6일 우라늄핵폭탄을 서둘러 히로시마에 투하하였고, 소련이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던 1945년 8월 9일에는 플루토늄핵폭탄을 나가사끼에 투하하였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핵공격으로 24만 명을 참혹하게 살육한 전쟁범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시안비행장으로 돌아간 C-47 수송기

 

광복군 대원들 중에서 선발된 50여 명은 1945년 5월 11일부터 석 달 동안 전략외사실 장교들로부터 식민지조선에 침투하기 위한 공수특전훈련을 받았다. 광복군이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날은 1945년 8월 4일이었다. 후보생 50명 중에서 훈련 도중 12명이 탈락하는 바람에 공수특전훈련을 마친 대원은 38명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8월 7일 서안에서 김구 주석과 광복군 지휘관들,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과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침투작전을 위한 합동작전회의가 진행되었다. 국내침투작전은 일제가 조선을 불법병탄한 날인 1945년 8월 29일에 개시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은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광복군 대원들이 국내침투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일왕 히로히또가 항복하였다.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 조선민족이 애타게 기다려온 기쁜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에게는 환희보다 실망이 앞섰다. 그가 남긴 자서전 ‘백범일지’에는 당시 그의 심정이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어도, 도노반 실장은 작전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였다. 일제가 항복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새벽 광복군 공수특전대원들을 태운 28인승 C-47 수송기 한 대가 국내침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C-47 수송기가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서해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때, 도노반 실장이 느닷없이 무선통신으로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였는데도 조선 점령 일본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그가 사태의 위험성을 직감하고 복귀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가 내린 복귀명령은 광복군의 국내침투작전이 중단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1945년 8월 18일 C-47 수송기에 탑승한 광복군 대원들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제2경성비행장에 내렸으나, 비행장을 경비하던 일본군들의 감시 속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이튿날 중국 시안비행장으로 복귀하던 중 수송기에 비행연료를 보급받기 위해 중국 산둥성 류팅비행장에 잠시 착륙하였을 때 촬영한 것이다. 광복군 대원들이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전략외사실 실장은 그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중국인 복장을 한 대원들과 장졔스 군대의 군복을 입은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도노반 실장이 중국인으로 위장한 광복군 대원들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또 일어났다. 일제가 항복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새벽 3시 30분 광복군 대원들을 태운 C-47 수송기가 시안비행장을 이륙하여 한반도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중국 대륙 상공을 가로지르며 8시간을 비행한 끝에 당일 오전 11시쯤 그 수송기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했다. 제2경성비행장은 서울 여의도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임정과 광복군이 기대했던 국내침투작전이 아니었다. 도노반 실장은 그들에게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국내침투작전을 명령했다면,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지 않고, 서울 근교에 있는, 일본군 경비망이 어느 낙하지점 상공에서 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강하하였을 것이다. 시안비행장을 출발하기 전, 도노반 실장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장졔스 군대의 군복과 중국옷을 입혔고, 제2경성비행장에 착륙하면 중국인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기이한 명령은 도노반 실장이 그들을 대일작전에 참가시킨 것이 아니라 군사사절단으로 서울에 파견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도노반 실장이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파견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미국군의 신변안전을 확인하고 그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를 일본측과 협의하려는 데 있었다.   

 

제2경성비행장 활주로에 멈춰선 수송기의 문을 열고 내려서던 광복군 대원들은 자기들에게 총을 겨누고 다가온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광복군 대원들을 인솔한 미국군 중령 버드는 일본군에게 자신들은 군사사절단으로 왔으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일본군 지휘관은 군사사절단이 도착할 것이라는 상부의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경비병막사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군사사절단을 서울에 보내겠다고 서울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에게 미리 통보하지 않았으므로, 제2경성비행장 경비대는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 8월의 무더위만큼 불편한 시간이 흘러갔다. 다음날 광복군 대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수송기를 타고 시안으로 돌아갔다. 일제의 항복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한 전략외사실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광복군은 49년 항일전쟁이 끝나가던 종전과정에 일본군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3. 김구의 서한을 외면한 트루먼

 

만일 광복군 공수특전대가 전략외사실의 작전계획에 따라 식민지조선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비정규전을 벌였다면 항일전쟁 종전의 역사는 조선민족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을까?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제2경성비행장에 잠시 착륙했던 장준하는 대원들이 그 비행장에서 일본군과 결사전을 벌여 전사했더라면 연합국이 조선을 승전국으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면서 훗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종전상황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임정과 광복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꼬여가고 있었던 종전상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직후 중국 시안에서 김구 주석은 임정 주석 명의로 작성한 자신의 친서를 도노반 실장에게 건네주면서 그것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병약한 프랭클린 로저벌트 대통령은 1945년 4월 12일 병환으로 갑자기 별세하였고, 당일 부통령 트루먼은 대통령에 즉각 취임하였다.) 도노반 실장은 워싱턴에 소환되는 자기 부하에게 김구 주석의 친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김구 주석의 친서는 1945년 8월 18일 백악관 비서실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 있는 임정청사에서 진행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마친 직후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태극기와 장졔스 정부가 사용한 국기가 서로 엇갈려 걸려있고, 장졔스 국방부 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대원이 30여 명밖에 없었다. 장졔스는 광복군이 자기 군대 총참모장의 명령과 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가져갔다. 이에 격노한 임정은 임정을 충칭에서 워싱턴으로 옮기겠다고 하면서 장졔스를 압박하여 광복군 작전통제권을 돌려받았지만, 광복군을 유지하는 재정을 장졔스로부터 계속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 현재 임정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당시 광복군은 339명이었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광복군은 장졔스 정부로부터 보급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대원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대원이 아닌 사람들을 명단에 끼워넣었다고 한다.     

 

김구 주석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우리는 귀하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확신하며, 조선의 독립이 원동의 평화를 위한 열쇠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썼다. 그러나 김구 주석의 친서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였다. 그는 도노반 실장에게 이런 회신을 보냈다.

 

“나는 1945년 8월 18일 한국임시정부 수장이라고 소개한 김구 씨의 메시지에 답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미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자칭 정부의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본인에게 전하는 통로로 당신의 요원들이 행동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본 당신에게 사의를 표한다.”

 

트루먼 대통령이 임정과 광복군을 무시한 것은 항일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종전되었으나 조선이 승전국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임정과 광복군의 존재마저 인정받기 힘들게 되었음을 예고한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미국군이 보내준 C-47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날 임정요인들의 뒤를 따라 김포비행장에 내렸던 광복군 대원 장준하는 훗날 자서전 ‘돌베개’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시각, 자신에게 갈마든 참담한 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중략)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아프도록 불러줄 만세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4. 1945년 7월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소련군 81,000명이 전사하고, 나치군 100,000명이  전사한 베를린격전은 두 주간 동안 계속되었고, 1945년 5월 2일 마침내 소련군의 승리로 격전이 끝났다. 1945년 5월 8일 나치는 항복하였고, 유럽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그보다 석 달 앞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 크라이미아반도 얄타에서 로저벌트 미국 대통령, 스딸린 소련 총리, 처칠 영국 수상이 정상회의를 진행하였다. 그 회의에서 스딸린 총리는 나치가 항복하여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나면, 2~3개월 안에 소련이 대일전쟁을 시작하겠노라고 공약하였다. 

 

1945년 5월 8일 나치의 항복으로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끝났으므로, 소련은 유럽전선에 배치했던 소련군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수송렬차편으로  10,000km 떨어진 원동전선(Far East Front)까지 실어날랐다. 세계 역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투병력, 무장장비, 군수물자를 가장 멀리 이동하여 재배치하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동배치작전이 끝난 날은 1945년 7월 30일이었다. 

 

1945년 8월 3일 알렉싼드르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은 스딸린 총리에게 소련군의 원동전선배치가 끝났으므로,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면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소련군이 유럽전선에서 원동전선으로 이동배치되고 있었던 1945년 7월 어느 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군 총참모부 청사에서 소련군 고위지휘관 전원이 참석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와씰렙스끼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이 주재한 그 회의에서 대일전쟁전략이 토의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끄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 1998년 평양에서 출판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1945년 여름 어느 날 대일전쟁을 앞두고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던 체험담이 상세히 수록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쏘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가보니 메레쯔꼬브와 스띠꼬브를 비롯해서 대일작전과 관련되여 있는 각 전선사령부의 책임일군들도 벌써 다 와있었습니다. 와씰렙스끼 총사령관도 거기에서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모스크바에서 쥬꼬브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독일주둔 소련점령군 총사령관과 독일관리감독리사회 쏘련측 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쥬꼬브가 무슨 일로 거기에 왔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서는 매우 인상깊은 상봉이였습니다. 이름난 백전로장인 쥬꼬브는 대단히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사람이였습니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끼릴 메레쯔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었고, 테렌티 스띠꼬브는 대일전쟁 중에 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이었다.

 

광복군 통수권자인 김구 주석이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국군 합동참모본부 전략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인데, 조선인민혁명군을 지휘하는 김일성 사령관이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난 데는 두 가지 사연이 있었다.  

 

(1) <로동신문>은 2014년 8월 15일부와 8월 16일부에 김일성 사령관이 지휘한 반일인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이 벌인 수많은 전투들 가운데서 주요전투들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1. 쟈피거우전투 (1933년 3월 31일)

2. 동녕현성전투 (1933년 9월 6일~9월 7일)

3.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 (1933년 초~1934년 2월)

4. 라자구전투 (1934년 6월 26일~6월 28일)

5. 시난차전투 (1936년 7월 10일)

6. 무송현성전투 (1936년 8월 17일)

7. 만강전투 (1936년 8월 24일)

8. 보천보전투 (1937년 6월 4일)

9. 간삼봉전투 (1937년 6월 30일) 

10. 소사하수전투 (1937년 11월)

11. 남패자전투 (1938년 11월 중순)

12. 홍토산자전투 (1939년 1월 24일)

13. 사등방전투 (1939년 3월)

14. 13도구전투 (1939년 3월 상순)

15. 구가점전투 (1939년 4월 11일~4월 12일)

16. 올기강전투 (1939년 6월 10일)

17. 륙과송전투 (1939년 12월 17일)

18. 쟈신즈전투 (1939년 12월 24일)

19. 대마록구전투 (1940년 3월 11일)

20. 홍기하전투 (1940년 3월 25일)

21. 북2도구, 남2도구, 신성툰전투 (1940년 4월 29일)

22. 라진해방전투 (1945년 8월 12일)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는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 북부지대와 동만주에서 1932년부터 13년 동안 계속해온 항일전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30년대 후반 항일전쟁시기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것이다. 원래는 흑백사진이었는데, 조선에서 천연색 사진으로 재생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진 배경에 통나무로 만든 밀영집이 보인다. 사진에서 김일성 사령관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앉아 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위장용으로 안경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앞에는 나이가 매우 어려보이는 소년병이 군복을 입고 앉아있는데, 아마도 소년연락병인 듯하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연계되어 지하정치공작을 하는 조국광복회 성원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권총은 도이췰란드에서 생산된 마우저 C96이다. 이 권총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모젤권총이라고 불렸고, 중국인들은 싸창이라고 불렀다. 탄환이 10발 들어가는 이 권총의 유효사거리는 200m다.     


(2) 대일전쟁을 앞둔 1945년 여름 원동소련군 총사령부가 하바롭스크에 설치되었고, 와씰렙스끼가 원동소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자신이 하바롭스크에 드나들면서, 와실렙스끼 총사령관, 로디온 말리놉스끼(바이깔횡단전선군 사령관), 메레쯔꼬브(제1원동전선군 사령관), 스띠꼬브(제1원동전선군 정치위원), 니꼴라이 레베제브(제1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 와씰리 쥬꼬브(제2원동전선군 고위지휘관)를 비롯한 원동소련군 고위지휘관들과 친분관계를 맺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김일성 사령관이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메레쯔꼬브 제1원동전선군 사령관이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자신과 메레쯔꼬브 사령관의 첫 상봉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메레쯔꼬브는 구면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아 흔들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리를 권하고 나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에서는 조선 동지들이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대일작전에서 조선 동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국제련합군에서의 조선 지대의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료해한 다음 나에게 조선 국내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나라에서의 일본의 군사력량배치와 통치방법,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과 혁명조직들의 분포정형, 비밀근거지들과 련결되여있는 무장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소련군 총참모부 전략회의에 참석한 직후 모스크바에서 게오르기 쥬다노브를 만나 담화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하여 나치의 항복을 받아내고 도이칠란드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쥬다노브는 김일성 사령관이 그를 만났던 1945년 7월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제2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과 쥬다노브 제2비서의 담화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쥬다노브 제2비서 -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 해 동안에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김일성 사령관 - “늦어도 2~3년이면 해낼 것이다.” 

쥬다노브 제2비서 - “해방 후 조선인민의 건국투쟁에 어떤 형태의 지원을 주었으면 좋겠는가?”

김일성 사령관 - “쏘련이 독일과 4년 동안 전쟁을 했고 앞으로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르어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생각한다. (중략)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쏘련의 정치적 지지이다, 쏘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리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쥬다노브 제2비서 - “당신과의 상봉결과를 쓰딸린에게 보고하겠다.”

 

 

5. 연계를 맺으려고 애쓴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은 제1원동전선군이 폭격기, 기갑부대, 보병부대를 총동원하여 동만주로 진격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함경북도로 진격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김일성 주석이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밝힌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다.  

 

- 간백산 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한반도 북부지대로 진격한다. (간백산은 함경남도 혜산군과 함경북도 무산군에 걸쳐있는 해발고 2,164m의 높은 산이다.)

-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수송기를 타고 평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강하하여 전투에 돌입한다. (원동의 훈련기지는 당시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소련군으로부터 현대전 훈련을 받은 야영학교인데, 하바롭스크 부근에 있었다.)

-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격에 합세한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서 김일성 주석은 “같은 날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고 회고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과 경흥을 해방하였으며, 웅기에 상륙하여 웅기를 해방하고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라진은 소련군 태평양함대가 라진에 상륙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라진무장대가 해방하였고, 회령도 소련군이 공격하기 전에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와 까치봉무장대가 해방하였다.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 당시의 협동작전을 말해주고 있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45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함께 참가하였던 당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병사 울라지미르 똘스찌꼬브가 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똘스찌꼬브다. 옷차림으로 보면 이 사진은 1945년 겨울에 촬영된 것 같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8월 9일 0시가 조금 지난 시각 원동소련군 160만 명은 세 방향에서 일제관동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일성 사령관의 공격명령을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는 원동소련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약 15분 전인 8월 8일 밤 11시 50분 두만강변의 조선인 마을 토리에 있는 일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그 마을을 해방하였다. 뒤이어 두만강 연안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일제의 국경요새들을 격파하고 함경북도 경원, 경흥, 웅기,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지역무장대들, 그리고 소련군 제1원동전선군이 함경북도에 있는 일본군과 일제통치기관을 공격하고 있을 때,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 공수특전대가 출전준비를 끝냈다. 공수특전대는 수송기를 타고 한반도 깊숙이 침투하여 후방교란전을 벌이라는 김일성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비행장으로 나갔다. 그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비행장으로 나간 공수특전대는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기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항일선렬들이 피흘려 싸운 1940년대 항일전쟁 중에 민족주의무장세력은 광복군으로 집결했고, 사회주의무장세력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집결했다.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은 너무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정치이념도 서로 달랐지만, 항일전쟁 중에 서로 연계하려고 애썼다.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항일전쟁 중에 김일성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을 연계하기 위해 힘썼던 사실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병선이 주관했던 신의주의 지하조직에 관내와의 련계를 확보할 데 대한 지령을 내려보냈습니다. 그 지령에 따라 신의주의 지하조직은 천진에 있는 한 공작원에게 중경과 연안쪽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련락통로를 개척할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중경, 연안과의 합작을 위한 중간련락거점을 만들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김구 주석도 광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을 연계하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는데, ‘세기와 더불어’ 제8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의 회상에 의하면 김구도 우리에게 련락원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련락원은 만주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도에 해방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1942년 12월에는 림시정부파견원의 자격으로 김가 성을 가진 사람이 목단강까지 왔다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중경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일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복군이 연계를 맺고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웠더라면, 우리 민족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8.15 해방과 전혀 다른 8.15 해방을 맞았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강대한 민족자주역량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항일전쟁의 위대한 역사가 분단시대에 주는 통일건국운동의 제1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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