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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앞에서 통곡한 소성리 할머니 “절차 지킨다더니... 왜 이러는 겁니까”

 

서울로 상경한 성주·김천 주민들의 하루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 성주 어르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 성주 어르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문재인 정부는 지난 정부가 무시한 절차를 용인해 주고, ‘안보’라는 이름으로 헌법적 질서가 무시되는 예외를 다시 감행했습니다. 그동안 새로운 정부를 믿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고 믿고 기다려 준 주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31일 청와대 인근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열린 ‘성주·김천 주민 서울 상경 기자회견’에서 하주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장은 “문재인 정부는 (사드문제와 관련해) 국내 절차 준수와 의견 수렴을 약속한 바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사드 배치와 관련한 일련의 조치를 즉각 중단하고 지금이라도 공론화·재검토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하주희 변호사가 발언을 마치자 이날 새벽 성주 소성리에서 올라온 도금연(81) 할머니는 하 변호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도 할머니는 “(문재인 정부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통곡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몸으로 밀어내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몸으로 밀어내고 있다.ⓒ김철수 기자

주민들 서울 상경 “사드 추가 배치 철회하라”
“인원이 많다” 청와대 분수대 기자회견 가로막은 경찰

80여명의 성주·김천 주민들은 사드 발사대 4기를 임시로 추가 배치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듣고 새벽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기자회견조차 평탄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성주투쟁위와 김천시민대책위 등은 이날 11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 계획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었다. 10시 50분경 주민들은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 모여 청와대 분수대로 향했지만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 경찰은 분수대 앞 기자회견 인원을 15명으로 제한했다.

주민들은 “기자회견도 열지 못하게 막냐”며 항의했다. 이석주 성주 소성리 이장은 “정부는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하겠다고 발표한 후 15시간 만에 사드 발사대 4기를 추가 배치한다고 발표했다”며 “도저히 현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을 믿을 수 없어 이렇게 기자회견을 하러 지역에서 올라왔다”고 밝혔다. 이어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기자회견조차 할 수 없게 막고 있다”고 분노했다.

11시20분경, 주민들이 “기자회견을 보장하라”며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은 청와대 100m 앞인 효자치안센터까지 길을 열어줬다.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 관계자에 따르면, 주민들이 집회신고를 낸 곳은 치안센터 앞까지였다. 경찰은 치안센터 앞에서 다시 주민들을 막아섰다.

주민들은 결국 본래 예정된 장소가 아닌 치안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45분이 지난 상태였다. 80여명의 주민들은 기자회견 현수막 뒤에 서서 “한반도 평화위협 사드배치 철회하라”, “미국과 일본을 위한 사드배치 철회하라”, “경제타격 국익훼손 사드배치 철회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주민들은 청와대 기자회견을 마치고 곧바로 국방부 앞으로 이동한 후 사드장비 반입을 추진하는 국방부를 비판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청와대·국방부 면담...주민들 “사드반입 막을 것”

주민들은 청와대 앞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 혁신수석실 시민사회비서관을 만나 면담을 진행했으나, 별다른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이날 성주 소성리 이장을 비롯한 지역대표 5명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만났다. 이들은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 계획 철회와 불법적으로 진행된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반려 등의 요구를 담은 서한을 전달하고 40여분 동안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에 참여한 김선명 원불교 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대표단이 사드발사대 임시배치 결정 과정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전했다. 비서관은 북한이 ICBM급 미사일 발사로 변한 국내외 상황을 거론하며 사드발사대를 배치하는 것은 맞지만 ‘임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선명 위원장은 “성주 소성리에 배치된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며 “국내 방어를 위해서라는 것은 인과적인 관계로 성립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같은 이야기를 지적했으나 별다른 답변없이 이야기를 전달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우리는 마을에서 저항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명확하게 밝혔다”며 “외교안보 농단의 적폐인 사드를 청산하지 못하는 정부에게 국민의 요구를 다시 한 번 명확히 확인시켜 준다면, 결국엔 정부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편, 이날 지역대표자들은 청와대 면담 후 서주석 국방부 차관도 만나 1시간20분가량 면담했다. 면담에서 사드가동을 중단하고 전략 환경영향평가부터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면담에 참여한 이석주 소성리 이장은 “우리의 요구에 별다른 답변은 없었다”며 “다만 지난 4월처럼 새벽을 틈타 사드장비를 기습적으로 반입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새벽부터 차를 타고 서울로 온 고령의 주민들은 비와 더위가 뒤섞인 서울에서 ‘답답한’ 하루를 보내고 내려갔다. 이제 주민들은 정부가 ‘임시 배치’하겠다고 밝힌 ‘추가 발사대’가 언제 올지 불안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4기 추가 배치 지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청와대와 경찰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청와대와 경찰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청와대와 경찰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드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 등 사드 반대 단체 회원들이 31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장소로의 이동을 경찰이 막자 청와대와 경찰을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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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4대강 전투'한 두 기자의 '베스트 13장면'

 
[2017 오마이뉴스 전국일주 19] 4대강 독립군, 김종술-정수근 기자 이야기

17.07.31 21:14 | 글:김병기쪽지보내기|사진:정대희쪽지보내기

우리나라 언론에는 소위 '중앙'이라는 '서울발' 기사만 차고 넘칠 뿐 내가 사는 곳을 다룬 기사는 찾기 어렵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지역이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지역 시민기자를 만나러 가면서 해당 지역 뉴스를 다룹니다. 첫 행선지는 대구입니다. [편집자말] [편집자말]
▲ '낙동강지킴이' 정수근 시민기자와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 등 '낙동에 살어리랏다' <오마이뉴스> 탐사보도팀이 지난 2015년 8월 25일 오전 4대강사업 후 지천에서 흘러드는 모래로 강바닥이 높아진 현장을 탐사하기 위해 투명보트를 들고 구미보 하류로 이동하고 있다. ⓒ 권우성

여기 8년 동안 '이명박 4대강'과 싸워온 두 사람이 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죽어가는 금강의 아픔을 기록해 온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 김종술 기자. 또 다른 한 명은 영남인의 식수원인 낙동강을 지키려고 현장에서 기사를 쓴 오마이뉴스 4대강 독립군 정수근 기자(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이다. 

"정 국장, 아까 내가 갔던 그 '보'가 뭔 '보'여?" (김종술)
"아따, 그것도 모르고 낙동강에 왔어예? 공부 좀 해요. 그러고 무슨 기사를 써!" (정수근)
"허, 참. 이번 취재, 내 드론이 없었으면 말짱 꽝이야. 이거 왜이래." (김종술)
"우리도 조만간 드론 살거라요." (정수근)
"전에는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 눈으로 기사를 썼는데, 요즘 난 새의 눈으로 기사를 써. 하-하." (김종술) 

옆에서 보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둘이 만나면 항상 티격태격한다. 이러면서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 건, 신뢰한다는 뜻이다. 한 명은 금강에서, 다른 한 명은 낙동강에서 '나홀로 전투'를 치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서로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1일, 대구는 섭씨 37도를 웃돌았다. 사람 체온보다 높았다. 땡볕에 가만히 있는 것조차 짜증스러운데, 두 명의 4대강 독립군은 낙동강에 세운 4대강 댐을 훑었다. <2017 오마이뉴스 전국일주> 대구편을 위한 기획 현장 취재였다. 

스마트폰으로 재난문자가 날아오고, 현장에 가면 "집으로 돌아가 냉방기를 켜놓고 쉬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김 기자는 녹조물을 채운 영주댐 앞에서 얼마 전에 산 드론을 날리고, 정 기자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가서 삽질을 해 깔따구와 실지렁이를 채취했다. 둘이 만나면 궁시렁거리지만, 현장에서 쏘아올린 기사를 보면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하늘에서 본 영주댐 녹조라떼, 썩은 내 진동 
☞낙동강 270km 기록, 녹조·쓰레기·붉은 깔따구
☞ 1조 1000억짜리 '녹조라떼 카페' 
☞23명 목숨 앗아간 4대강 사업, 변한 게 없다
☞ 낙동강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 6가지
☞미국의 현명한 결단력을 배워야 한다, 이것만은 

이날 오후 5시경 취재를 마친 이들은 정 기자의 집 근처인 대구의 한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그 자리에서 두 독립군을 인터뷰했다. 정권교체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4대강의 미래가 궁금했고, 그동안 어떻게 싸워왔는지도 알고 싶었다. 잠깐 차를 주차하겠다고 나갔던 정 기자가 20여분 만에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은 채 나타났다. 

"아니, 뭐여! 난 낙동강 흙먼지 다 뒤집어썼는데, 자기만 또 샤워하고 왔구먼." (김종술 기자)
"낙동강에 오면 낙동강의 법도을 따라야 하는 법이지요-흐흐-." (정수근 기자)

4대강 독립군들의 인터뷰는 이렇게 툴툴거리며 시작했다. 이들에게 8년 동안의 싸움에서 기억하는 '베스트 13 장면'을 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죽어가는 얘들이 눈앞에서 버둥거리고..."
 
▲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이 물 속에서 삽으로 떠낸 시커먼 뻘과 붉은 깔따구를 들고 있다. ⓒ 권우성

정수근 기자(이하 '정'으로 표기) : "2010년경 4대강 사업으로 해평습지를 준설하기 전이었죠. 이석우 대구환경연합 전 운영위원, 습지와새들의친구 김경철 국장과 함께 해평습지 하중도에 위장막을 치고 흑두루미를 기다렸어요.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두루 두루' 하면서 내려오는 모습은 아직도 인상적입니다. 그 이듬해 준설이 시작된 뒤 철새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면서 우리 집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김종술 기자(이하 '김'으로 표기) : "2012년도 금강 물고기 떼죽음 때입니다. 처음 발견해 기사를 썼던 날 공무원들이 나와서 깨끗하게 강변을 청소하고 물고기도 수거했죠.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 갔는데 더 많이 죽어있었습니다. 처참했습니다. 죽어가는 얘들이 눈앞에서 버둥거리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비참함, 그게 4대강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멱살잡이하고 공사판에 드러눕고..."
 
▲ '낙동에 살어리랏다' 탐사보도팀이 지난 2015년 8월 24일 오전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앞 낙동강에서 투명카약을 타고 녹조 탐사활동을 벌였다. '금강지킴이' 김종술 시민기자가 낙동강에서 뜬 녹조물을 뿌려보고 있다. ⓒ 권우성

김 : "2014년부터 지금까지입니다. 가족과 지인,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은행 빚도 차고 압류도 들어왔어요. 개인 대출을 갚으라고 하루에 서너 번씩 전화가 걸려왔고 집주인은 6개월 동안 월세가 밀리니까 '나가라'고 했죠. 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5600원을 갖고 마지막 취재에 나섰다가 큰빗이끼벌레 특종으로 주저앉았습니다. 누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취재비 때문에 힘이 들죠." 

정 : "2012년 낙동강 댐 준공했을 때입니다. 그 전에는 4대강 사업을 막아보겠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공사 현장에 가서 강이 파괴되는 모습을 기사로 고발했습니다. 불법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부딪치고, 수자원공사 직원들과 멱살잡이 하고 대판 싸우다가 공사장에 드러눕기도 했죠. 막상 준공식을 하니 맥이 풀렸습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가장 화났을 때] 문수 스님 소신공양에 대한 조계종 총무원의 모르쇠
 
▲ 지난해 5월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소신공양한 문수스님를 위한 6번째 천도제가 경북 군위서 열렸다. ⓒ 정수근

정 : "2010년 문수스님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그 분의 소신공양, 거룩한 죽음으로 4대강 공사가 중단될 수도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자승 총무원장은 문수 스님의 죽음에 사실상 눈을 감았습니다. 다비식을 은혜사주지장으로 축소했고, 조계사 농성도 막았습니다. 다비식 때는 오지도 않고 조화만 보냈습니다. 총무원의 배신 때문에 화가 많이 났죠."
  
김: "최근입니다. '수문개방해서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을 들을 때 화가 납니다. 지난 6월 1일의 수문개방은 '수위 조정(저하)'입니다. 공주보 수위 20cm를 낮춘 것뿐입니다.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지만 '다 조작입니다. 4대강 적폐세력 앞잡이가 있어서 대통령의 수문 개방 명령을 듣지 않고 수위만 살짝 낮춘 것'이라고 설명하고 돌아설 때 화가 납니다." 

[가장 슬펐을 때] "강에 젓갈국물을 흘려보내... 엉엉 울었다" 
 
▲ 젓갈색으로 변한 공주보에 죽은 물고기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 김종술

김 : "극적으로 화가 났을 때 슬프죠. 2012년 금강 물고기 떼죽음을 고발했고, 죽은 물고기를 자루에 담아서 강변에 쌓아 침전물이 강에 흘러들어가는 것을 기사화했습니다. 결국 비닐봉지를 씌워서 젓갈국물 같은 침전물이 강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는데, 5톤 압축 쓰레기차가 강변에서 밸브를 열어서 강에다 그 국물을 흘려보내고 있더라고요. 며칠 동안 문제제기를 해서 바꿔놓았는데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정 : "낙단보 마애불이 천공이 뚫린 채 발견됐을 때 조계종 총무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영주댐 수몰지구인 금강마을의 금강사 절터에서 고려시대 보물급 유물이 나왔을 때에도 불교계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불교계만이라도 나섰다면 4대강 사업 문제점을 국민들에게 알릴 기회였는데... 그걸 발로 차버렸을 때 슬프더라고요." 

[가장 미안했을 때] "가족 앞에 서면 부끄럽고 작아진다"
 
▲ 충남 서천군 연꽃단지 인근 금강에 발생한 녹조에 돌을 던지자 곤죽이 다양한 모양을 보이며 튀어올랐다. ⓒ 이희훈

김 : "가족에게 늘 미안하죠. 동생이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누님이 '한번 가보라'고 합니다. 저는 항상 강에 있습니다. '너는 강이 중요하냐 형제가 중요하냐'라고 누님한테 한 소리 듣기도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가족도 팽개치고... 아마도 평생 동안 미안함은 남을 것 같아요. 어떤 때는 강이 가족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도 아파서 누워있고... 가족 앞에 서면 늘 부끄럽고 작아집니다." 

정 :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된 아이들이 있습니다. 녀석들이 한참 아빠한테 재롱을 피우고 커나갈 시기에 저는 바빴습니다. 외박도 많았습니다. 첫째 놈이 스케이트 타는 데 시합에 자주 나갑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빠가 챙깁니다. 아이가 함께 가자고 부탁하면, 저는 항상 강에 가봐야 한다고 말했죠. 이제는 시합이 열려도 아빠한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아빠를 찾지 않더군요."

[눈물을 흘렸을 때] "영주댐에서 내성천 최후를 보다"
 
▲ 강과 산의 경계가 사라졌다. 금수강산이 푸르게 변했다. 초록의 아름다움이 4대강 사업에 추악한 색깔로 둔갑했다. 영주댐에 갇힌 내성천이 녹조로 뒤덮였다. ⓒ 정대희

정 : "작년에 영주댐 시험담수를 했어요. 지구별에 하나뿐인 모래강 내성천 비경 중의 비경인 곳에 콘크리트 쇠말뚝을 박았습니다. 맑은 물을 가두니 녹조 범벅이었죠. 1급수를 똥물로 만들어놓고 그 물로 낙동강을 맑게 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요? 눈물이 났습니다. 

내성천에는 가족들과도 여러 번 갔습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위안을 얻으려고 가는 곳이었죠. 야생동물 흔적과 아름다운 모래톱, 왕버드나무 등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그곳이 녹조로 물들었을 때 내성천의 최후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김 : "물고기 떼죽음을 취재할 때 제일 많이 울었어요. 강변에 차를 세워놓고 밤을 새면서 펑펑 울었습니다. 눈이 팅팅 부을 정도였어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주의 새들목이라는 하중도에 갑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혼자 텐트 치고 자거나, 손수건 한 장 깔고 하룻밤을 지냅니다. 너무 힘들고 지치면 나도 모르게 거기 가서 울고 있더라고요." 

[보람을 느꼈을 때] "낙동강물 먹어도 되나요?" 이런 질문 받을 때



김 : "사람들한테 칭찬을 들을 때가 가장 좋죠. 하-하. 명절 때에도 저는 강에 있습니다. 작년에 젊은 부부가 고향 가는 길이 잠시 들렀다면서 한과랑 사과주스를 주고 갔습니다. 맛도 있었지만, 제가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복죽을 보내주는 분도 계시고,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 페친이 문상을 와서 제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가끔 제 차에서 끓여주는 차 한 잔 먹으러 올 때 보람을 느낍니다."
  
정 : "그동안 제가 영남인들의 식수원이 위험하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보수 성향의 시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주부들이 저를 찾아옵니다. 인터넷 카페에서 활동을 하거나 학부모 모임 등. 낙동강 물을 먹으며 사는 사람들이죠. 이들은 요즘 '이 물 먹어도 될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가 그동안 낙동강을 기록하고 고발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후원회원도 되어 주시고요."

[가장 기뻤을 때] 낙동강 트로이카 시절



김 : "문재인 대통령이 4대강 수문을 개방하라는 지시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입니다. 강을 혼자 걷다가 알게 되었는데, 엄청 좋았습니다."

정 : "저도 그랬습니다. 또 '낙동강 트로이카' 시절이 있었습니다. 혼자 강을 다니다가 2013년부터 3년 동안 이석우 대구환경연합 전 운영위원, 백재호 현 대구환경연합 운영위원장과 함께 다녔습니다. 천군만마 얻은 느낌이었죠.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밤늦도록 4대강의 현실과 미래를 이야기하던 시절이 좋았습니다." 

[나홀로 전투, 가장 소중한 무기] "무딘 내 성격"
 
▲ 정수근 시민기자 ⓒ 정대희

정 : "카메라죠.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죽어가는 강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죠."

김 : "나의 가장 큰 무기는 내 성격입니다. 무딘 성격. 오만 가지 일을 다 무시한 채 강에 다니면서 기록해왔습니다. 너무 무디게 세상을 살았죠." 

[언제까지 싸울 건가?] "돈 떨어질 때까지"
 
▲ 서울 동대문에서 청바지를 팔던 '잘 나가던 사장' 김종술은 4대강 사업에 빈털터리가 됐다. ⓒ 김종술

김 : "주머니에 돈 떨어질 때까지. 남들이 돈을 안 빌려줄 때까지. 하-하. 4대강 수문을 개방해도 제가 처음 보고 반했던 강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모니터링이 필요합니다. 10년이 흐를 수도 있겠죠. 주머니가 탈탈 털리면 현실적으로 어려울 테고요." 

정 : "4대강 싸움을 통해 저는 '강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4대강 뿐만 아니라 우리 하천이 자연성을 회복하는 그날까지 싸워볼랍니다." 

[4대강에서 누구와 싸우나] "나와 싸운다", "이명박과 싸운다"
 
▲ 환경운동연합이 4대강 사업의 주역으로 손꼽은 인물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권도엽 전 국토해양부 장관, 김건호 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심명필 전 4대강 추진본부 본부장, 박석순 이화여대 교수, 이재오 전 국회의원, 차윤정 전 4대강 추진본부 환경 부본부장,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박재광 미국위스콘신대 교수) ⓒ 정대희

김 : "단 하나의 적은 저입니다. 강에서 취재한 뒤 집에 들어갈 때마다 힘듭니다. 내일은 그만할까? 매일 나약해지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나와의 싸움에서 지지 않는 것이 이 싸움을 지속하는 길이죠. 나로 인해서 싸움은 중단될 수 있습니다. 최대의 적은 나입니다."

정 : "이명박씨죠. 좋게 평가하자면 그동안 강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강을 찾고 있습니다. 혈세 수십조 원을 날렸고 강을 망쳤는데, 절대로 탕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죗값을 반드시 받아야만 우리 사회가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싸움을 통해 본 언론] "4대강처럼 썩었다" 



김 : "4대강처럼 너무 많이 썩었습니다. 녹조와 이끼벌레, 깔따구 등 사람들에게 줄 먹잇감이 있을 때만 달려옵니다. 그나마 달려오는 기자들에게 고마워할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꿈쩍하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언론 역할을 못했기에 4대강 범죄가 일어난 겁니다. 언론의 사명을 저버리고 자기들 먹고살려고 4대강 사업 홍보기사를 썼던 언론인들은 퇴출해야 합니다."

정 : "정권에 따라 마구 휘둘리는 언론을 볼 때 국민 한 사람으로서 실망합니다. 언론인들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인데, 권력에 빌붙어서 먹고 살 일에 골몰하거나,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민기자로 나선 겁니다." 

[4대강, 희망이 보이나] "문재인 대통령"
 
▲ 지난 여름 내성천 회룡포를 방문한 문재인 전 대표는 4대강사업을 반드시 심판하겠다고 약속했다. ⓒ 정수근

김 : "지금 4대강의 희망은 문재인 대통령이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4대강 부역 앞잡이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강한 의지와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밀어붙여야 수문을 열 수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앞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정 : "문 대통령이 수문을 연다고 했을 때부터 희망을 봤습니다. 8년 싸움의 보상을 받은 느낌이었죠. 싸움의 끝이 보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4대강 재자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지막, 독자들에게 한마디] "4대강 이야기를 나눠달라"
 
▲ 성가소비녀회 수녀들이 금강을 찾았다. 김종술 기자가 현장특강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 정대희

김 : "이 글을 보시는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 기사를 보고 느꼈다면 그날 1시간 만이라고 친구들과 가족들과 4대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줬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한 두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그게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정 : "내성천에 한번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영주댐으로 망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4대강 원형을 간직한 강입니다. 그곳에 가면 누구나 영주댐을 철거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난 8년 동안 '이명박근혜정권'에서 4대강 독립을 위해 싸운 두 명의 기자. 이들도 강을 닮아간다. 4대강이 눈물을 흘릴 때 이들도 울었다. 죽어가는 강이 몸부림치며 내보이는 녹조라떼와 깔따구, 실지렁이들... 이걸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내보이면서 이들도 몸서리를 쳤다. 막힌 강이 잠시 흐르거나 스스로 치유하는 현장에 서면 이들도 기뻤다.   

정권은 교체됐지만 4대강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 명의 4대강 독립군이 있다. 이렇게 한 우물을 파면서 한 길을 걷는 기자들, 거의 없다. 게다가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언론사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 시민기자들이다. 고맙고 미안하다.    

10년 뒤 4대강은 어떤 모습일까? 사실 나는 강을 닮아가는 4대강 독립군이 어느 곳에서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지, 그게 더 궁금하다. 나는 또 어디서 이들을 바라볼까?

<2017 오마이뉴스 전국일주> 다음편은 '대전 충남'이다. 전국일주는 고군분투하는 시민기자들과 만나 지역의 중요한 이슈를 쏘아 올린다. 오마이뉴스에 매월 1만 원 이상씩 자발적 구독료를 내는 지역의 10만인클럽 회원들과 만나서 우리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갈 길을 묻는다. <오마이뉴스 전국일주>는 오는 9월 중순경 대전충남의 희망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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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정전은 64년 만에 종식되는가?

[개벽예감259] 7.27 정전은 64년 만에 종식되는가?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7/07/31 [14:32]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 

2. 조선은 왜 ‘조국해방전쟁’을 ‘조국통일대전’으로 종식시키려 하는가?

3.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네 가지 준비를 완료한 조선

4. 화성-14형 출현으로 다시 써야 할 72시간 전쟁씨나리오 

 

▲ <사진 1> 조선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와 열병식'을 성대히 진행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군중대회와 열병식에 참석하여 전승의 환호를 터치는 평양시민들과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고, 전승축하연설을 하였다. 미국에게 7월 27일은 잊어버리고 싶은 패전의 날이지만, 조선에게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이다. 그래서 조선은 그 날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1.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

 

미국에서 6.25전쟁은, 미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잊혀진 전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전쟁이다. 그래서 해마다 7월 27일은 미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평범한 날로 흘러간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26일에 발표한 백악관 공보문에서 7월 27일을 ‘전국 코리아전쟁 참전노병 정전의 날(National 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이라고 선포하였지만, 그 선포를 귀담아 들은 미국인은 없다. 명백하게도, 미국은 7월 27일의 역사적 의미를 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해마다 7월 27일이 오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지난 7월 27일은 조선이 전승절 64주년을 성대히 기념한 날이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찾아 화환을 진정하고 인민군 렬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일 조선 각지에서는 각계층 인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승절 경축집회, 인민군렬사묘 참배, 전승혁명사적지 참관, 전쟁노병들과의 상봉모임, 전승절 경축 음악무용공연, 전승절컵 쟁취 체육경기 등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니 교전쌍방이 무승부로 비겼다고 볼 수 있는데, 조선은 왜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일까? 조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이 정전 이후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무승부를 승리라고 재해석하여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진 1>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오다. 조선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와 열병식’을 성대히 진행하였고, 사흘 뒤에는 제1차 전국전투영웅대회를 성대히 진행하였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공화국영웅 533명과 로력영웅 16명을 비롯하여 전쟁유공자 809,89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을 수여하였고, 13개 군부대들에게 근위부대칭호를 수여하였으며, 14개 군부대들에게 국기훈장 또는 자유독립훈장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봐도, 조선이 왜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는지 알 수 있다.  

 

전쟁명칭은 전쟁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6.25전쟁을 코리아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명칭에서는 전쟁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조선에서는 6.25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전쟁명칭은 전쟁의 성격을 명백히 밝혀준다. 

 

조선이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자기 영토의 절반을 점령한 것도 성차지 않아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 전역을 점령하려는 미국의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싸운 해방전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사에서 제국주의국가의 무력점령과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싸운 전쟁을 해방전쟁 또는 독립전쟁이라 하는데, 원래 해방전쟁이나 독립전쟁은 혁명전쟁범주에 속하는 정의의 전쟁이다. 예컨대, 북아메리카 13개주가 대영제국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1775년 4월 19일부터 1783년 9월 3일까지 지속한 8년 전쟁은 영국의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무장반란이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혁명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인 것이다.

 

18세기 후반 북아메리카 13개주가 연합하여 대영제국의 식민통치와 무력점령을 반대하여 싸운 8년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위대한 미국혁명전쟁인 것처럼, 20세기 중반 신생독립국 조선이 아메리카제국의 식민통치와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싸운 3년 전쟁은 조선인민에게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남조선을 강점하고 북조선까지 점령하려던 미제의 무력침공”을 북위 38도선 근방에서 패퇴시키고, 미국에게 막대한 인명손실과 전쟁피해를 입혔으므로 ‘조국해방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기억하기 싫은 6.25전쟁 기록사진들이 오늘도 전해진다. 이 흑백사진들은 6.25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였고, 미국이 패배하였음을 말해주는 증언록이다. 

 

▲ <사진 2> 이 사진은 1950년 7월 말 미국군 전쟁포로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들고 가는 여러 가지 펼침막들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과 조선의 친선 만세!!"라고 영어로 쓴 글발, 그리고 "미국의 조선침략은 세계평화의 위협이다!"라고 우리말로 쓴 글발 등이 적혀있다. 행진대오 맨 앞에 걸어가는 전쟁포로는 1950년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조선인민군에게 투항하여 전쟁포로가 된 미국 육군 제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 대대장이다. 대전전투에 참가한 미국군 11,400명 중에서 922명이 사망했고, 228명이 부상당했으며, 2,400여 명이 실종되었는데, 실종자 대부분은 전쟁포로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2>는 1950년 7월 말 미국군 전쟁포로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들고 가는 여러 가지 펼침막들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과 조선의 친선 만세!!”라고 영어로 쓴 글발, 그리고 “미국의 조선침략은 세계평화의 위협이다!”라고 우리말로 쓴 글발 등이 적혀있다. 행진대오 맨 앞에 걸어가는 전쟁포로는 1950년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조선인민군에게 투항하여 전쟁포로가 된 미국 육군 제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 대대장이다. 대전전투에 참가한 미국군 11,400명 중에서 922명이 사망했고, 228명이 부상당했으며, 2,400여 명이 실종되었는데, 실종자 대부분은 전쟁포로다. 

 

▲ <사진 3> 이 사진은 조선인민군과 미국군이 사상 처음으로 격돌한 오산전투에서 격파당한 미국군이 대전으로 후퇴하였던 1950년 7월 7일 대전비행장 인근에서 촬영된 것이다. 오른쪽 키 큰 사람이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이고, 왼쪽 키 작은 사람이 제8군단장 월튼 워커다. 이 사진이 촬영된 날로부터 13일 뒤에 벌어진 대전전투에서 제24사단은 궤멸되었고, 사단장 딘은 전쟁포로로 생포되었다. 이 사진이 촬영된 날로부터 5개월 반 뒤에 제8군단장 워커는 경기도 의정부 인근에서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황천객이 되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6.25전쟁에 미국군 주력부대로 참전하였던 미국 육군 제8군을 지휘한 군단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전선에서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20군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전에서 군공을 세웠으나, 6.25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악전고투하다가 1950년 12월 23일 경기도 의정부 부근에서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황천객이 되었다. 워커 밑에 있었던 미국 육군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은 자기가 지휘하던 보병사단이 대전전투에서 조선인민군에게 포위, 궤멸되자 산으로 도망쳤다가 생포되었는데, 정전 후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6.25전쟁 중 오산전투, 금강도하전투, 대전전투 등에서 미국군과 한국군을 무찌르며 파죽지세로 남진공격을 몰아치던 조선인민군은 하루에 20km씩 진격하는 고속기동전을 벌여 1950년 8월 15일 조국해방 5주년 기념식을 부산에서 진행하려고 하였다. 만일 미국이 대규모 증원부대를 한반도에 보내지 않았다면, 그런 전쟁방침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 <사진 4> 이 사진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1954년 1월 28일 미국 송환을 거부한 미국군 포로들이 화물차를 타고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평양행 화물차에는 조선 국기가 펄럭이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남는다"라고 영어로 쓴 펼침막이 내걸렸다. 미국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은 미국군 전쟁포로는 23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격렬했던 3년 전쟁으로 국토가 거의 폐허로 변했을 뿐 아니라, '미국놈'이라면 치를 떠는 조선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중국 정부는 그들을 베이징대학에 보내 중국말을 배우게 하는 등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12년간의 중국생활을 접고 1966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사진 4>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1954년 1월 28일 미국 송환을 거부한 미국군 포로들이 화물차를 타고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평양행 화물차에는 조선 국기가 펄럭이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남는다”라고 영어로 쓴 펼침막이 내걸렸다. 정전 이후 미국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은 미국군 전쟁포로는 23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격렬했던 3년 전쟁으로 국토가 거의 폐허로 변했을 뿐 아니라, ‘미국놈’이라면 치를 떠는 조선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중국 정부는 그들을 베이징대학에 보내 중국말을 배우게 하는 등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12년간의 중국생활을 접고 1966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2. 조선은 왜 ‘조국해방전쟁’을 ‘조국통일대전’으로 종식시키려 하는가?

 

우리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체제는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대 초에 아직 장기화되지 않았다. 분단체제가 70년 이상 장기화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체제는 3년간의 격전으로 급속히 고착되었으며, 정전 이후 64년 세월이 흐르면서 뜻하지 않게 장기화되었다. 민족분열의 고통과 불행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분단체제가 70년 넘게 지속되면서 우리나라가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져버릴 수 있는 위험이 조성되고 있다. 분단체제를 영구화시킬 위험요인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분열되기를 바라는 미국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영영 갈라놓으려는 정전고착화정책과 분단영구화정책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정전체제와 분단체제가 평화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틀어쥔 반통일세력은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조국통일운동을 ‘종북’으로 몰아가며 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조선은 ‘조국해방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정전은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교전행동을 정지한 것이므로, 조선이 그렇게 믿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이 정전 이후 64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겨오는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전쟁을 끝내는 유력한 방도들 가운데 하나는 교전쌍방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정전 이후 64년 동안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의를 여러 차례 보냈건만, 오만한 미국은 그 제의를 거들떠보지 않고 번번이 묵살해버렸다. 

 

정전 이후 64년 동안 교체를 거듭해온 미국의 역대 행정부들 가운데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수를 추진하려 했던 매우 예외적인 경우는 카터 행정부였다. 지미 카터(Jimmy E. Carter) 당시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한미국군도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핵무기 개발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서울을 공식 방문하는 기회에 김일성 주석을 서울로 초청하여 3자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그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지시를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에게 보냈다. 글라이스틴은 그 지시를 받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고 한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안내로 의장대를 사열하는 장면이다. 정전 이후 미국 역대 행정부들은 한결같이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수를 외면했지만, 카터 행정부는 달랐다. 카터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한미국군도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핵무기 개발도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서울을 공식 방문하는 기회에 김일성 주석을 서울로 초청하여 3자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그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구상은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려던 카터 대통령은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정상회담 중에 철군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백악관의 사전 요구를 무시한 박정희는 장장 45분 동안 철군반대론을 늘어놓았고, 카터는 노여움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장황한 ‘안보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되어 여느 정상회담에서는 볼 수 없는 말싸움까지 벌어졌으나, 가까스로 잠정적인 타협에 이르렀다.

  

카터-박정희 정상회담 직후인 1979년 7월 20일 백악관은 주한미국군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는데, 1980년 11월 4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였고,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이 이끄는 극우 성향의 행정부가 등장하는 바람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던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폐기되었다. 이처럼 카터 행정부를 제외한 역대 미국 행정부들이 정전 이후 64년 동안 한결같이 평화협정체결문제를 외면해온 까닭은, 주한미국군을 주둔시켜 한국지배체제를 영구히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20년, 30년도 아니고 64년이 넘도록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해오는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가능성은 없다. 조선이 그런 미국을 설득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들어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에게는 미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드는 선택방안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는 미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난 24년 동안 조미핵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조선이 '조국해방전쟁'에서 미국을 꺾은 전승절 64주년을 경축하였던 2017년 7월 27일 밤에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이다. 지난 7월 4일에 이어 두번째 시험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조선이 미국 본토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4형을 두 차례 시험발사하여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최고 수위로 높였는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에 맞서 압박강도를 극도로 끌어올리며 끝까지 대결해보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심각한 대결상황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로 미국을 굴복시켜 평화협정을 강제로 체결하려던 조선의 전략구상이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에게 있어서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평화협정 체결이 아니라 '조국통일대전'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들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그런데 조선이 미국 본토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두 차례 시험발사하여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최고 수위로 높였는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에 맞서 압박강도를 극도로 끌어올리면서 끝까지 대결해보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심각한 대결상황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로 미국을 굴복시켜 평화협정을 강제로 체결하려던 조선의 전략구상이 더 이상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에게 있어서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평화협정 체결이 아니라 ‘조국통일대전’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들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통일전쟁은 해방전쟁이나 독립전쟁처럼 혁명전쟁범주에 속하는 정의의 전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조선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을 ‘위대한 조국통일전쟁’으로 종식시키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네 가지 준비를 완료한 조선 

 

정전 이후 조선이 걸어온 길은 ‘조국통일대전’을 준비해온 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덧 조선은 그 기나긴 길의 종착점에 이르러, 조국통일대전준비를 완료하였다. 전쟁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말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인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아래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들이 그런 긴박한 정세를 말해준다.

 

첫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사상정신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조선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강력한 무장장비보다도 강의한 사상정신에서 찾는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 이래 줄곧 견지해오는 특유한 전쟁관이다. 그래서 정전 이후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사상정신적 준비를 다그쳤는데, 특히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후대들을 사상정신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은 절실한 과업으로 되었다. 

조선에서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사상정신상태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참군열풍이다. 2016년 2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최후결전을 언급한 중대성명을 발표하였을 때, 불과 48시간만에 전국 각지에서 청년남녀 150만 명이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였다고 한다. 폭발적으로 일어난 참군열풍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사상정신적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물질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전시에 사용할 식량, 유류, 탄약을 비축해놓은 것이다.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1997년 10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전시식량 120만t, 전시유류 146만t, 전시탄약 187만t을 비축해놓았다고 한다. 

‘기름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물자는 유류다. 전투부대들에 휘발유, 항공유, 경유를 공급하지 못하면, 전투기, 군함, 전차가 멈추게 되고, 레이더도 꺼지고, 미사일도 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지금 미국은 조선의 원유공급선을 끊어버릴 제재조치를 발동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미국의 온라인매체 <NK NEWS> 2016년 11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14,000t급 원유채굴시설(jack-up rig)인 중요우하이(中油海) 17호를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으로 3km 들어간 서해 대륙붕에 끌어다놓고 원유를 퍼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 서해 대륙붕 606호 유정의 연간생산량은 19,700t이고, 609호 유정의 연간생산량은 152,000t이라고 한다. 조선 서해에서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 또는 영해에 속한 대륙붕에는 그런 유정들이 적어도 10개 이상 널려 있고, 조선 내륙 각지에도 유정들이 있다.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는 조선 서해 대륙붕에 71억5,4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원유가 묻혀있다고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중국국영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소유한 14,000t급 원유채굴시설 중요우하이(中油海) 17호가 2016년 5월 22일 중국 다롄항을 출발해 6일 뒤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 안으로 들어가 원유를 퍼올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 원유채굴시설은 조선 서해 대륙붕에 있는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 안으로 3km 들어간 수역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서해에서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과 영해에 속한 대륙붕에는 유정이 적어도 10개 이상 널려 있고, 조선 내룍 각지에도 유정들이 있다. 중국해양석유총공사는 조선 서해 대륙붕에 71억5,4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원유가 묻혀있다고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국 연방의회는 최근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 원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니, 이것은 조선을 자극하여 '조국통일대전'을 촉발시킬 요인으로 된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오판은 너무 심하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이 1990년도에 수입한 원유는 220만t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아직 원유를 생산하지 못하던 조선에게 필요한 연간수요량이다. 1990년 이후 오늘까지 27년 동안 조선의 산업생산력과 군사력이 크게 증대되었으므로, 현재 조선의 연간원유수요량은 250만t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에서 해마다 50만t씩 들여오던 원유수입을 2013년 말에 전면 중단하였다. 조선이 2015년에 러시아에서 들여온 연간원유수입량은 95,000t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현재 조선이 약 240만t에 이르는 연간원유수요를 국내원유생산으로 충당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원유생산량이 해마다 늘어나자, 조선은 서해 대륙붕 유전에서 퍼올린 원유를 들여오는 남포항에 부두와 부두 사이의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조성하여 거기에 송유시설(oil terminal)을 크게 증설하고, 거대한 원통형 저유시설 8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중이다. 

 

서해 대륙붕에서 진행되는 원유생산은 조선과 중국의 합작사업이므로, 조선은 원유공동개발협정에 따라 거기서 생산되는 원유 가운데 일부를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원유운송선들이 조선산 원유를 가득 싣고 저유시설이 있는 중국의 여러 항구들을 분주히 드나드는 모습이 요즈음 위성사진에 종종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국 연방의회는 최근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 원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니, 이것은 조선을 자극하여 ‘조국통일대전’을 촉발시킬 요인으로 된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오판은 너무 심하다.    

 

▲ <사진 8> 이 사진은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2016년 5월 6일과 7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는 장면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사업총화보고에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는 평화적 방법과 비평화적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조선은 "어떤 경우에도 다 준비되여 있"다고 지적하고, "전체 인민이 우리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국주의자들과는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침략자들을 격멸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전민항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합니다"고 말했다. 조선은 제7차 당대회에서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셋째, 조선은 2016년 5월 6일과 7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는 평화적 방법과 비평화적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다 준비되여 있다”고 지적하고, “전체 인민이 우리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국주의자들과는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침략자들을 격멸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전민항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합니다”고 말했다. <사진 8>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선의 정치적 준비들 가운데는 전시에 ‘1호작품’을 우선적으로 보위하기 위한 준비가 있다. 조선의 ‘전시사업세칙’ 제13항을 원문대로 인용하면,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은 자기 단위에 모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혁명 일가분들의 동상, 백두산 3대 장군을 형상한 미술작품들을 갱도모심실을 비롯하여 안전한 곳에 옮겨 모시고 보위한다”고 명시되었다.

 

그런데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제7차 당대회 직후 조선에서는 혁명사적물을 긴급히 대피시키는 준비를 전국적으로 갖추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비하여 전국 각지 혁명사적관들에 있는 혁명사적물들을 안전하게 보위하기 위해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1m인 방수천을 만들었고, 방수천으로 감싼 혁명사적물들을 안전하게 보위할 지하시설을 건설했으며, 긴급대피에 필요한 운반수단을 마련해두었다는 것이다. 

 

넷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2010년 6월 8일 한국 육군본부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진행한 ‘육군토론회’에 이상우 당시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이 기조연설자로 출연하였는데, 그는 조선인민군이 “장거리투발수단에 장착한 대량살상무기로 전략중심을 강타하는 타격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규모 정규군으로 전선을 돌파해 전략목표를 신속히 점령하는 기동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20만 명에 달하는 특수전력을 투입하는 특수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조선인민군이 타격전, 기동전, 특수전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그 발언이 나온 때로부터 7년이 지난 오늘 조선인민군은 공격준비를 이미 끝냈다. 

 

그래서 그의 지적에 공감한 나는 2013년 3월 16일 <자주민보>에 실린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징후 선제타격전, 전선돌파 고속기동전, 사전침투 후방습격전, 전방위 포위섬멸전으로 전개될 조선인민군의 7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서술한 바 있다. 그로부터 6일이 지난 2013년 3월 22일 조선의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는 그 글의 집필자인 나의 실명을 밝히고,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원제목을 달아놓은 4분 18초 분량의 동영상 편집물을 웹싸이트에 올려놓았다. 

 

그랬더니 한국에서 파문이 일었다. 한국 주요언론매체들이 제각기 그 동영상 편집물에 관해 보도했을 뿐 아니라, 2013년 10월 11일 국회 국방위원회는 최윤희 당시 합참의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그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그 동영상을 국회의원들과 함께 시청한 합참의장 후보자는 동영상에 나오는 72시간 전쟁씨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합참의장 후보자로서는 그런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4. 화성-14형 출현으로 다시 써야 할 72시간 전쟁씨나리오

 

조선인민군의 7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논할 때,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TV조선> 2015년 3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2013년 3월에 배포된 문건에서 “군인들이 김정은 최고사령관 동지의 무력통일구상을 실천으로 받든다”고 명시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3년 4월 “당의 무력통일사상을 신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전군에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런 보도내용을 읽어보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확고한 통일대전의지를 알 수 있고,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이 천명한 통일대전의지를 실행에 옮기려는 조선인민군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둘째, <조선일보> 2013년 11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조보근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은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여 조선인민군은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평양-원산계선 이남지역에 배치해두었던 전체 병력의 70%(약 70만명)와 전체 화력의 80%를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사리원-통천계선 이남지역으로 50km나 남하하여 재배치하였다고 지적하였고, 2012년에 조선인민군은 기존 21개 군단을 15개로 대폭 감축하는 대신에 기존 63개 사단을 90개로 대폭 증대하였다고 말했다. 

 

▲ <사진 9> 위쪽 사진은 2017년 4월 2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된 조선인민군 창건 85주년 군종합동타격시위에서 전선최정예포병부대들이 강력한 화력타격시위를 벌이는 장면이다. 화력타격시위에서 1차 사격은 240mm 22관 방사포를 일제사격하는 것이었고, 2차 사격은 위의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제1화선의 일제사격이었다. 제1화선부터 제3화선까지 순차적으로 집중타격한 다음, 3개 화선 전체가 동시에 집중타격을 하였다. 이 화력타격시위에는 각종 포 300문이 동원되었는데, 조선인민군은 최전선에 10,000문 이상의 각종 포를 배치해놓고 임의의 시각에 선제기습타격을 개시할 사격준비를 갖추었다고 하니, 그 화력타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군과 주한미국군 전방부대들은 미처 반격할 사이도 없이 불바다 속에 빠질 위험이 크다. 아래쪽 사진은 그 날 조선인민군 해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전선최정예포병무력이 참가한 군종합동타격시위 현장에 세워진 구호판을 촬영한 것이다. "조국통일의 대문도 포병이 열고 조국통일의 축포도 포병이 쏘아올리자!"라는 구호가 보인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태세가 크게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한국군 국방정보본부장의 발언은 조선인민군이 무징후 선제타격전, 전선돌파 고속기동전, 사전침투 후방습격전, 전방위 포위섬멸전을 실행에 옮길 전투준비를 완료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9>

 

거기에 더하여,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태세는 2017년 7월 중에 두 차례 진행된 화성-14형 시험발사로 최종 완결되었다. 조선은 이른바 ‘확장억제’를 감행하고 증원부대를 한반도에 급파하는 미국의 무력개입을 미국 본토 심장부에 대한 핵타격위협으로 원천차단할 최강의 타격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공격준비태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동아일보> 2013년 8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2004년 4월에 제정된 ‘전시사업세칙’을 2012년 9월에 개정하였는데, 개정본에는 조선이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하는 세 가지 개전조건이 명시되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 서술된 세 가지 개전조건을 인용하면,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침략전쟁의도가 확정되거나 공화국 북반부에 무력침공했을 때”, “남조선애국력량의 지원요구가 있거나 국내외에서 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마련될 때”,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이 국부지역에서 일으킨 군사적 도발행위가 확대될 때”라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트럼프 행정부가 모략선전, 외교고립, 경제제재, 인권공세, 전략자산투입 등으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면서, ‘평양점령’과 ‘참수작전’까지 들먹이는 전쟁연습을 멈추지 않는 것은,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전시사업세칙’ 개정본에서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개전조건으로 언급한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침략전쟁의도가 확정”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조보근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은 “군사력을 비교하면 우리가 열세”라고 인정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핵무력을 가진 군대와 재래식 무력밖에 없는 군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핵무력을 논외로 치고, 재래식 무력만 비교해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다. 왜 그런가? 한국군 전방부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부대들까지 조선인민군의 선제타격위험, 기습공격위험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조선인민군의 화력타격에 맞설 대응수단은 전투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군 전투기들은 작전 중에 고온발열탄(섬광탄)을 마구 쏘아도 조선인민군이 발사한 지대공미사일을 피할 수 없다. 한국군 전투기들에는 근적외선을 방출하는 낙후한 고온발열탄밖에 없는데, 조선인민군이 발사하는 지대공미사일은 고온발열탄의 근적외선을 외면하고 전투기 엔진에서 방출되는 중적외선(mid-infrared)을 감지, 추적하는 우수한 성능을 가졌다. 이것은 전투기, 수송기, 정찰기, 공중조기경보통제기, 해상초계기, 작전헬기를 포함한 한국군 항공무력을 구성하는 모든 기종이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전시에 한국군 공군기지들과 주한미국군 공군기지들은 조선인민군의 선제기습타격으로 가장 먼저 파괴될 것인데, 그런 불바다를 피해 전투기 몇 대가 살아남아도 5분 안에 격추될 것으로 예견된다. <사진 10>

 

▲ <사진 10> 이 사진은 한국 해군 소속 해상초계기 P-3 두 대가 고온발열탄(섬광탄)을 발사하면서 비행하는 장면이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국군 전투기들이 작전 중에 고온발열탄을 마구 쏘아도 조선인민군이 발사한 지대공미사일을 피할 수 없다. 전투기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군이 보유한 다른 항공무력수단들도 마찬가지다. 한국군 전투기들에는 근적외선을 방출하는 낙후한 고온발열탄밖에 없는데, 조선인민군이 발사하는 지대공미사일은 고온발열탄의 근적외선을 외면하고 전투기 엔진에서 방출되는 중적외선을 감지, 추적하는 우수한 성능을 가졌다. 이것은 한국군 항공무력 전체가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전시에 항공무력을 완전히 상실한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전방에 공격형으로 배치된 조선인민군 70만 명의 남진공격을 막아내야 할 한국군이 전방에 배치한 방어병력은 24만 명밖에 되지 않아 한국군 지상군은 3대 1로 열세인데, 게다가 항공무력까지 상실하면, ‘반신불수’가 된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미국신안보센터(Center of a New American Security)는 2014년 3월 27일에 발표한 ‘만일 억제하지 못하면: 한반도 갈등을 다시 생각한다 (If Deterrence Fails: Rethinking Conflict on the Korean Peninsula)’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한국군은 전시에 사용할 기본탄약마저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통일뉴스> 2009년 8월 3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한미군수협력회의(LCC)에서 한국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에게 한국군이 보유한 탄약이 부족하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당신들이 탄약을 더 생산하든지 아니면 우리에게서 사가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다급해진 한국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의 대외군사판매(Foreign Military Sales) 절차를 협의하자고 하면서 탄약지원을 다시 요청하였으나 미국 국방부는 그런 절차는 없다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탄약이 부족한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경향신문> 2017년 2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중에 실전에 참가할 수 없는 ‘도움배려병사’가 40,000여 명이고, 특히 육군의 ‘도움배려병사’는 전체 병력의 10%에 이른다고 한다. 실전에 참가할 수 없는 병사가 그처럼 많은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정전 이후 6.25전쟁의 전투경험을 분석, 검토한 조선은 미국의 증원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속결하는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였고, 그런 전법에 요구되는 전투력과 무장장비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민군이 준비한 초단기속결전은 6.25전쟁에서처럼 고속으로 종심 깊이 진격하여 적을 부산까지 밀어내는 3단계 공격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남측 전역을 동시에 포위하고, 집중타격과 전면공격, 사전침투와 후방습격으로 안팎에서, 전방위적으로 협공, 습격, 교란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적을 포위, 섬멸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 비전투원 약 20만명은 일본으로 대피하는 탈출로가 끊겨 모두 억류당하게 될 것이 뻔하다. 전시에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트럼프 대통령은 ‘확장억제’도 결정하지 못하고 증원부대도 출동시키지 못한 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항복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억류된 미국인 20만여 명을 구출하는, 세계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사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72시간 전쟁씨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이다.  

 

김영환 국가정보대학원 교수가 2009년 초에 발표한 ‘대국민 안보보고서’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1994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무력부 작전지휘관들에게 “우리 인민들이 밤에 잠든 사이에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남조선을 해방하여 아침에 잠에서 깬 인민들이 남조선해방을 확인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1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구상하였던 1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실행하려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는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영도에 의해 완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올해 7월 조선이 두 차례에 걸친 화성-14형 시험발사로 미국 본토 심장부를 타격할 전략적 핵공격력을 완성함으로써 미국의 ‘확장억제’를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군 증원부대의 한반도 출동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조선인민군의 전쟁씨나리오를 72시간 이하로 단축한 개정본을 다시 써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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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중국 앞세운 대북 압박 실패 자인

트럼프 중국 앞세운 대북 압박 실패 자인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31 [01: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오죽 급했으면 트럼프가 시진핑에게 35조 규모의 대중무역적자도 봐주겠다며 제발 북핵 좀 막아달라고 통사정했을까.     ©자주시보

 

30일 미국의소리 보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은 말만 할 뿐 북한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중국에 매우 실망하고 있다며, 미국의 “어리석은 과거 지도자”들은 중국이 무역에서 한 해에 수천억 달러를 벌도록 허용했다고 말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일 트위터에 올린 중국 비판 글  

 

미국 국무부도 이에 앞서 북의 두 번째 ICBM 발사와 관련해, 중국과 러시아를 북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경제적 조력자로 지목하면서 두 나라가 점증하는 위협에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트럼프 정부는 중국이 대북 압박에 동참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 미사일 개발의 경제적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중국에 대해 경제보복조치를 내릴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이는 미국 스스로 대북 압박정책이 실패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의지했던 대북 압박책이 바로 중국을 앞세운 경제보복조치였다. 

실제 니키 헤일리 유엔 미국 대사도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 제재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며 미국 독자제재를 시사하고 있으며 미국 의회도 미국인 대북 여행금지 등 하나하나 대북독자제재안을 통과시켜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독자제재가 아무런 효과가 없어 중국을 앞세운 대북제재에 그렇게 목을 메었던 것이기에 미국 독자제재가 북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해 경제보복조치를 단행할 경우 미국의 경제도 무사치 못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대미투자 없이 과연 위기에 처한 미국 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지도 의문인데 중국도 미국에 대미 경제제재로 맞선다면 미국 경제는 더욱 더 심각한 상황으로 굴러떨어지게 될 것이다. 

보잉사에서 구매하기로 한 비행기의 문제점 등을 파헤쳐 수입 중단 조치를 내린다거나 대미 투자 계획을 철회한다거나 중국내 미국 기업들 세무조사 샅샅이 하고 소방점검해서 지금 한국 기업을 제재하듯이 한다면 미국 경제가 어찌될지 볼만할 것이다.

 

나아가 중미가 이렇게 싸우게 되면 결국 북중러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게 되어 북의 비약적 발전만 부추긴다는 것이고 전세계 반미반제진영을 더욱 강하게 결속시키게 된다. 대 중국 경제제재는 미국의 이마에 와서 깊이 꽂히는 부메랑될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고 했다. 지금 위치는 미국이 다리를 뻗으면 벽난로 속으로 들어갈 판이다.

 

사실 답이 없는 미국이다. 이빨 다 빠진 호랑이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포효해도 빠진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고양이 울음보도 못한 찌질찌질 앙탈음이나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실 대국의 대통령이 트위터에 찔질찌질 우는 소리나 올리고 있는 그 자체가 패망하는 미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흥미있는 점은 이 모든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 북의 위력적인 핵억제력을 과시하면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며 북이 그 위력을 더해갈수록 망해가는 미국의 모습도 더욱 처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전쟁을 하건 대화를 하건 이제 북과 대결은 끝내지 않을 수 없는 국면으로 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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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을 국정농단 ‘최후의 심판대’에

 

[김종철 칼럼]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cckim999@naver.com  2017년 07월 31일 월요일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 뒤 4개월 하고도 3주가 지났다. 박근혜는 지금 서울구치소에 갇힌 채 ‘국정농단의 최고 책임자’라는 혐의로 사흘이 멀다 하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동안 ‘역사적 심판’의 무대 뒤편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인물은 이명박일 것이다. 그의 임기 5년 내내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이 많은 친인척과 측근들이 부정과 비리 때문에 사법처리를 받았는데, 그 혼자만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형사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이명박 정부의 ‘사자방’(4대강사업·자원외교·방위산업) 비리를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검찰에 지시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그는 대통령직을 파면당하기까지 4년 남짓 내내 이명박을 불가침의 ‘성역’으로 두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가 이명박한테 어떻게 덜미를 잡혔기에 저럴까’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박근혜씨가 지난 6월12일 오전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근혜씨가 지난 6월12일 오전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월10일 문재인이 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성역’에서 현직 대통령에 버금가는 호사를 누리던 이명박은 언제 자신에게 철퇴가 떨어질지 몰라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문재인이 지난 대선 기간에 이명박 정부의 ‘사자방 비리’를 철저히 조사해 부정으로 모은 재산을 모두 환수하겠다고 거듭 공약했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지난 6월 중순 4대강 사업에 대해 네 번째로 감사를 하기로 결정한 뒤 실행에 들어갔다. 대통령 문재인은 지난 1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노무현 정부 때 설치·운영된 ‘반부패관계기관협의회’를 부활시키겠다고 밝혔다. 바로 전날 감사원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1조3천억 원을 들여 개발한 국산 기동헬기 수리온이 부실 덩어리”라고 발표한 것이 동인이었다. 문재인은 방산비리는 ‘안보에 구멍을 뚫는 이적행위’라고 잘라 말했다. 수리온 개발은 참여정부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거창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이었다.  

이명박이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해 박근혜를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시켰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지난 24일에 드러났다. 전 국가정보원장 원세훈에 대한 ‘대선 개입 사건’ 파기환송심 마지막 공판에서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녹취록’이 바로 그것이다. 녹취록은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구성된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검찰에 제공한 것이었다. 이명박이 국정원장으로 임명한 원세훈은 취임 직후인 2009년 2월부터 2012년까지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우호세력’을 적극 지원하라고 부서장들에게 지시했는가 하면, ‘국민에 대한 심리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날 재판에서 검찰은 “녹취록 등을 보면 원 전 원장 등은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권 또는 대통령 보좌기관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게 명백히 드러났다. 국정원법과 선거법을 위반해 정치와 대선에 개입할 고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통령 이명박은 국정원에 대한 인사권과 감독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원세훈의 그런 위법행위를 몰랐다고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8대 대선 시기에 국정원간부와 직원들이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에게 유리한 ‘댓글’을 조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명백히 드러난 바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이명박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나는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없었는데 박근혜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최근 청와대가 발견한 박근혜 정부의 ‘캐비닛 문건’에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높이 555미터로 국내 최고층 건물인 제2롯데월드 건설은 롯데그룹의 숙원사업이었지만 역대 정부는 서울공항의 ‘안전문제’를 이유로 국방부가 강력히 반대하기 때문에 인허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기업인들과의 만남에서 제2롯데월드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인 2009년 3월 군이 서울공항 활주로 방향을 3도 변경하기로 하자 정부는 제2롯데월드 건축을 허가했다. 이명박 말고는 그렇게 무리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 사건은 ‘이명박 국정농단’의 주요 혐의로 추가되어야 마땅하다. 

 

 

▲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며 공개한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 ⓒ연합뉴스
▲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며 공개한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로 보이는 문건.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가 야당과 환경전문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4대강 사업이 22조 원이라는 국가예산을 쏟아부어 이명박의 ‘친위세력’인 영포회를 비롯한 토목업자들과 대기업들에 천문학적 액수의 특혜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임 기간에 명확히 밝혀졌다. 그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는 ‘자원외교’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31조 원을 투자했다가 국제적 사기를 당하거나 부실한 투자로 국고에 거액의 손실을 끼쳤다. 그런 과정에서 이명박 자신이 개인적으로 어떤 이익을 취했는지도 의혹의 대상이다. 그가 퇴임한 뒤 한참 지난 2014년 12월 말 국회에 ‘자원외교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에 들어갔으나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이 증인 조사 등을 사사건건 방해함으로써 특조위는 흐지부지 없어져버렸다. 

‘방산비리’는 이명박이 책임져야 할 중대한 사건이다. 검찰·경찰·군으로 구성된 정부합동수사단이 2014년 11월 하순부터 7개월 동안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6년까지 7년 동안 9천8백억여 원에 이르는 방산비리가 저질러졌는데 그 액수 가운데 대부분은 이명박 정부 시기의 것이었다. 국방전문가인 김종대(정의당 국회의원)는 2015년 6월24일자 개인 ‘블로그’에 이명박 정부의 방산비리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4년이 지난 지금 방산비리 합동조사단이 터뜨리는 각종 무기도입 비리는 전부 이명박 대통령이 돈줄을 막아버렸던 시절에 저질러졌던 사업들이다. (···) 영국으로부터 도입되는 해상작전헬기는 대잠수함 작전능력이 없는 헬기였으나 경쟁 기종인 미국제보다 싸다는 이유로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이 요구하는 작전성능 중에 대잠수함 작전 기준이 하향 조정되었다. 핵심 작전의 요구 성능이 하향 조정되는 건 해군의 권한으로도 안되는 중요한 정책결정이다. 정치권력과 합참의 고위층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될 만하다. 단지 비리로 적발된 사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군의 무기도입 전부가 일제히 부실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게 문제다.” 

국제적 무기거래에서 이른바 ‘브로커’는 거래액의 5% 이상을 챙긴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브로커는 그 돈을 독점할 수 없다. 정치권력과 군부 고위층에 상납하지 않고는 그런 사업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자신의 임기 동안 저질러진 수천억원의 방산비리에 얼마나 관여되었는지 여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앞으로 가동할 반부패관계기관협의회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의 부정과 비리를 어떻게 밝혀낼지 궁금하다. 그 협의회는 수사권이 없으므로 검찰의 조사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는 물론이고 이명박의 국정농단 수사까지를 ‘정치보복’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성남시장 이재명(변호사)은 지난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명박 재임 기간은 공소시효 중단이니 아직 처벌 가능하다”며 “부정부패 처벌은 정치보복이라 불려도 반드시 해야 정의를 세우고 재발 방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박근혜는 최순실과 함께 저지른 국정농단 사건에 관해 1심 재판부의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명박은 두 사람에 못지않은 ‘국사범’으로 마땅히 형사소추되어야 한다. 반부패관계기관협의회가 나설 수 없다면 ‘이명박 부정·비리 의혹 특검’을 구성해 그를 ‘국정농단 최후의 심판대’에 세워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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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을 아십니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31 11:11
  • 수정일
    2017/07/31 11: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녹조 배양소로 전락한 영주댐
 
이준구  | 등록:2017-07-30 12:40:34 | 최종:2017-07-30 12:42: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경부 영주에 있는 내성천은 새하얀 모래사장 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요. (첨부한 사진을 보면 그곳의 백사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잘 보실 수 있습니다.)

그곳의 깨끗한 물을 가뒀다가 낙동강으로 방류해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명분으로 1조 1천억원이나 들여 만든 것이 바로 영주댐입니다.

어제(29일) 한겨레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그 영주댐이 오히려 ‘녹조 배양소’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내성천의 아름다운 모습이 망가지는 것을 슬퍼한 많은 사람들이 제발 영주댐 만들지 말라고 온갖 방법으로 호소했어도 MB정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댐을 쌓아 올렸습니다.

듣기에는 내성천의 그 아름답던 모래 사장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거친 돌들이 널려 있는 볼성 사나운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MB정권이 뿌려놓은 국토 파괴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 그 마수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물을 막아 놓은 영주댐의 녹조라테 사태는 낙동강 8개 보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영주댐의 남조류 개체수는 물 1 밀리리터 당 18만 5천 개로 낙동강 8개 보 중 녹조가 가장 심한 달성보 주변의 3,8배에 이르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낙동강 최상류의 상주보 부근에 비하면 무려 18배가 넘는 수준이구요.

맑은 물을 가둬 둔다는 명분으로 만든 영주댐에 이렇게 심각한 녹조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그 주변에 녹조의 영양물질을 공급하는 오염원이 다른 어디보다 더 심하게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염원이 많은데도 영주댐이 없었을 때 내성천의 물이 그렇게 맑았던 것은 잘 발달된 모래사장이 물속의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뛰어난 필터 작용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생각없는 MB정권은 부질없이 댐을 쌓아 1급수가 흐르던 맑은 내성천을 녹조라떼로 얼룩진 호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철저한 사전 조사를 했더라면 이런 비극적 결과가 발생하리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요. 22조원이나 드는 대공사를 불과 몇 달만의 준비과정을 거쳐 시작한 막무가내의 인간들이니 사전 조사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겠지요.

이제 그 애물단지 영주댐을 어떻게 할 작정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낭비된 1조 1천억원이나 되는 혈세는 고사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돈을 퍼부어 넣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의 자연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름답던 내성천을 휼물스러운 돌밭 사이로 흐르는 개천으로 만들어 버린 데 대한 보상은 누구에게서 받아야 할까요?

이준구 /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단독] 내성천 영주댐, 1조1천억 들인 ‘녹조 배양소’ 전락

유역 가축밀도 대형다목적댐 평균 6배 확인
자연정화 약화된데 녹조 영양소 지속 공급
25일 측정 남조류수 낙동강 8개보보다 많아

▲경북 영주시 내성천 영주댐에 담겨 있는 물이 지난 22일 녹조로 퍼렇게 뒤덮여 있다. 영주댐은 내성천 하류 낙동강에 수질개선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지난해 완공됐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제공

경북 영주 내성천의 깨끗한 물을 가뒀다 낙동강으로 방류해 수질을 개선하겠다며 이명박 정부가 1조1천억원을 들여 4대강 사업의 하나로 만든 영주댐이 오히려 ‘녹조 배양소’로 전락하고 있다.

최근 한국수자원공사 영주댐 건설단이 측정한 영주댐 남조류 개체수를 <한겨레>가 확인해본 결과, 폭염이 지속된 지난 25일 물 1㎖에 18만5천개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낙동강물환경연구소가 24일 낙동강 8개 보 수질측정에서 가장 녹조가 심한 것으로 나타난 낙동강 중류 달성보(4만8945개)의 3.8배, 최상류 상주보(9820개)의 18배가 넘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 수자원공사 관계자는 “댐의 담수 초기에는 주변 농경지 등에서 오염물질이 용출되어 수질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지나면 수질도 안정화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영주댐은 27일 현재 총 저수용량 1억8110만㎥ 가운데 2770만㎥가 채워져 담수율 15.3%를 기록중이다.

하지만 영주댐은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수질이 개선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인 것으로 드러났다. 영주댐 건설단이 최근 수질관리 참고용으로 한 조사 결과, 상류의 댐 유역에 녹조의 영양물질을 공급하는 오염원이 다른 어느 댐 유역보다 밀집돼 있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영주댐 주변 지자체와 관련 기관이 참여하는 영주댐지역협의회에서 최근 수자원공사가 발표한 ‘다목적댐 상류 오염원’ 현황을 보면, 경북 영주와 봉화에 걸친 500㎢의 영주댐 유역 가축사육 밀도는 1㎢당 5000마리다. 유역면적이 800㎢가 넘는 소양강댐, 대청댐, 충주댐, 안동댐 등 8개 주요 다목적댐 평균(817마리)보다 6배 많다. 이들 가운데 가장 밀도가 높은 용담댐 유역(2007마리)보다도 2.5배 많다.

수질오염 기여도가 높은 대형가축인 소와 돼지의 밀도는 1㎢당 58마리와 60마리, 닭과 오리 등 가금류는 1㎢당 4878마리로 모두 8개 주요 다목적댐 유역보다 높다. 가축은 녹조의 영양물질인 질소와 인의 주 공급원이다. 생활 오폐수를 만들어내 수질에 부담을 주는 댐 유역 인구밀도도 1㎢당 53.26명으로 9개 댐 가운데 세번째다. 낙동강 상류 지천에 지어진 영주댐이 낙동강 수질을 개선해주기는커녕 낙동강 본류로 녹조의 씨앗을 공급하는 ‘녹조 배양소’가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영주댐은 이미 완공 첫해인 지난해에 이어 이번 여름까지 2년 연속 심한 녹조가 발생한 상태다.

▲댐에 수몰된 모래강 내성천의 옛 모습. 2010년 9월 녹색연합의 ‘사귀자’(4대강 귀하다 지키자) 캠페인에 참가한 이들이 영주댐 바로 위 금강마을 앞 내성천에서 댐 건설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박용훈 생태사진가 제공

수자원공사 관계자는 “오염원이 댐 안에 들어오면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많지 않다. 지자체, 환경청 등과 공동으로 상류지역 오염원을 줄일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런 방안은 상류의 댐 유역 주민들을 상대로 규제를 강화하거나 지자체와 정부가 예산을 짜내 오염정화시설을 확충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영주댐만 없었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었을 새로운 부담이다. 영주댐 본체 공사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내성천의 대부분 구간은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 기준 1급수를 유지해 수질 걱정을 모르던 곳이었다.

내성천이 상류 지역에서 유입되는 축산 폐수와 생활하수 등의 오염원에도 불구하고 1급수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데는 ‘모래강’이라는 내성천의 특성이 크게 작용했다. 내성천 강바닥의 두터운 모래층이 흐르는 물속의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필터 구실을 한 것이다. 반면 영주댐에 물이 채워질수록 물 흐름과 모래에 의한 수질정화 기능은 작동하기 어렵게 된다.

상류에서 유입된 오염물질이 누적돼 수질이 계속 악화되면 영주댐이 강원도 평창 송천의 도암댐처럼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용으로 1989년 지은 도암댐은 계획 당시 고려하지 못한 유역의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에서 유입된 오염물질로 수질이 악화돼 2001년부터 17년째 전기도 못 만들고 남한강 최상류의 오염만 가중시키는 애물단지가 됐다. 발전 터빈을 돌린 물이 흘러드는 강릉 남대천 유역 주민들이 오염수 방출에 극력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4대강 조사평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지낸 수질생태전문가 김범철 교수(강원대 환경융합학부)는 “4대강 상류에 저수지 같은 시설을 만들어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은 물의 양도 충분치 않고 수질도 썩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고 이미 과거 보고서에서 결론을 내렸다”며 “영주댐의 수질이 악화돼 녹조가 번성하면 낙동강에 녹조 씨앗을 공급하는 녹조 배양소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단체들은 “영주댐은 이미 녹조 배양소가 됐다”며 철거를 촉구하고 있다. 정수근 대구환경운동연합 생태보존국장은 “영주댐을 건설하며 제시한 편익의 90% 이상이 수질개선이었는데, 영주댐 유역에 낙동강보다 더 심각한 녹조가 발생하면서 수질개선용 댐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며 “영주댐을 철거하고 모래강 내성천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804784.html

내성천의 아름다웠던 모습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251&table=byple_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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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탈원전 비판' 조중동에 한수원 광고 몰렸다

 

<조선일보>, 2위 <중앙일보>보다 2배 많은 7536만 원 광고비 받아

17.07.31 09:11l최종 업데이트 17.07.31 09:28l
그래픽: 박종현(ttto76)

 

 

 언론홍보비
ⓒ 박종현


정부의 탈원자력발전소(탈원전) 정책 비판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 보수 언론과 경제지에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의 광고가 집중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나라에서 원전을 짓고 운영하는 유일한 발전 공기업인 한수원은 28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활동 기간 동안 신규 광고를 중단하기로 했다. 앞서 환경단체들은 한수원의 광고가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언론 보도와 여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비판해왔다.

광고비 수주 1~3위는 조·중·동

 

녹색당 탈핵특별위원회가 한수원에 지난해와 올해 광고홍보현황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한수원은 올해 1~6월 광고홍보비로 50억6570만 원을 썼다. 이 가운데 방송을 제외한 언론매체(인쇄광고) 광고비는 7억9555만 원이다. 

<오마이뉴스> 분석 결과, 한수원의 광고를 실은 108개 매체(계열 회사는 모회사에 포함) 가운데 가장 많은 광고비를 받은 곳은 탈원전 반대 보도를 연일 내놓고 있는 '조·중·동'이다.

<조선일보>는 <디지틀 조선일보> <스포츠조선> <월간 조선> 등 계열 매체를 포함해 모두 7536만 원의 광고비를 받았다. 2위인 <중앙일보>(<월간 중앙> <중앙 선데이> <코리아중앙데일리> 포함)는 3808만4000원을 받았고, 3위인 <동아일보>(<신동아> <스포츠동아> 포함)는 3468만 원을 받았다. 

경제지인 <한국경제>와 <매일경제>(<매경이코노미> <럭스맨> 포함)도 4, 5번째로 많은 광고비를 받았다. 각각 3350만 원, 3155만 원이다. 

탈원전 정책 논조를 지닌 <한겨레>(<한겨레21> 포함), <경향신문>(<스포츠경향> 포함)은 각각 2090만 원, 1125만 원의 광고비를 받았다. 

한수원은 서울대 <대학신문>, 한국시뮬레이션학회 춘계학술대회 소개집, 한국프로젝트협회 협회지, 방송기자상 수상집, 한양대 오리엔테이션 소개집, 한양대 총동문회보 등에도 광고를 싣고, 수백만 원의 광고비를 줬다.

지난해 언론매체 광고비 순위 1~3위 역시 조·중·동이었다. <조선일보>는 한수원으로부터 5552만 원의 광고비를 받았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광고비는 각각 5005만7000원, 4368만 원이었다.

"언론도 핵마피아의 한 축"
 

 언론홍보비
ⓒ 박종현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9일 부산 기장군에서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해 탈원전 정책을 공식적으로 밝힌 뒤, 보수언론과 경제지는 연일 탈원전 정책을 거세게 비판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6월 19일부터 7월 30일까지 42일 동안 '원전'을 키워드로 각 언론사의 기사 건수를 검색한 결과, <조선일보>는 240건의 원전 관련 기사를 썼다. 단순 사실을 전하거나 다른 주제를 다룬 일부 기사를 제외하면,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원전 진흥 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보도가 많았다.    

'LNG발전, 석탄보다 초미세먼지 더 많이 배출'(7월 11일 치), '600조 원전시장 스스로 걷어차는 한국'(7월 15일 치)처럼 사실과 다르거나 침소봉대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같은 기간 <중앙일보>(258건), <동아일보>(125건), <한국경제>(212건), <매일경제>(293건)도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대거 내놓았다.

강언주 부산녹색당 탈핵위원장은 "한수원이 광고를 주는 대표적인 언론사가 조중동"이라며 "공정하게 보도한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최근 <조선일보>는 주로 원자력계의 입장을 담은 기사, 칼럼, 인터뷰를 보도하고 있고, 탈원전 쪽 전문가들을 괴담 유포자로 매도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흔히들 언론을 핵마피아의 한 축이라고 한다. 조중동은 철저하게 원자력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한수원 쪽은 탈원전 비판 보도를 하는 언론에 광고를 몰아줬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한수원 홍보실 관계자는 "공기업인 한수원이 언론사에 먼저 광고를 주겠다고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면서 "보통 언론사의 요청에 따라, 한수원은 언론사 사정, 언론사 간 형평성, 광고효과 등을 감안해 광고를 집행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조선일보> 등이 많은 광고비를 받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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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는 이들 위해 이름없이 헌신한 분들께 감사”

 폐암 확진받은 ‘양심수의 대부’ 권오헌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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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31  0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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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수의 대부'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팔순에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지난 11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조천현]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이런 분들은 정말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최근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양심수의 대부’ 권오헌(81)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지난 11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끝내 ‘이름 없는 후원자’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권오헌 명예회장은 양심수를 뒷바라지하며 팔순을 넘겼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직을 내려놓고 명예회장으로 한발짝 물러났지만 여전히 현장 곳곳을 누비다 덜컥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내가 몸에 이상증상을 느낀 것은 거의 석 달이 다 되지만 의료기관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5일”이라며 “병원에서 (폐암) 4기라는 것은 이미 폐를 지나서 다른 장기나 부위로 옮겨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이럴 때는 수술이 불가능하고 약물치료 내지는 주사치료 밖에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11년전 고희(古稀) 기념 인터뷰 당시에도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정년은 없다”고 말한 바 있는 그는 “그냥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에서는 움직이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은 내가면서, 투병도 하고 또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가게 되면 갈 거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폐암 판정을 받은 다음날인 7월 6일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그는 “물론 자연에 거슬러서 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특히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팔순을 맞은 지난해부터 기존 기고글들을 모아 두 권의 책을 준비 중인 그는 “하나는 자주통일과 관련된 부분,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인권, 양심수 관련 문제”라며 “약간의 욕심이지만 최근에 서둘러서 하고 있다”고 변화된 심경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러나 정작 인터뷰 자리가 잡히자 지난 일들 가운데 묵혀뒀던 특별한 이야기거리를 기대했던 기자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의 관심은 온통 통일 정세와 양심수 문제로만 내달렸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날부터 ‘사회적 존재감’에 눈뜨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농촌 새마을운동의 원조격인 4H 활동을 통해 청소년 사회운동을 했고, 3년간 군대생활을 하고, 다시 3년간 농촌사회운동에 매진한 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부터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참여, 1968년 통일사회당 입당,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다.

출옥후 양심수와 양심수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정년 없는 양심수의 대부 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는 북에서 내려온 이름모를 피난민부터 <자본론>을 건네준 한영고교 교감, 통일사회당 입당 계기를 마련해준 박금서 성신여대 교수, 당대의 선각자들인 함석헌, 장준하 선생, 3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서 동거한 남민전 책임자 이재문 선생까지 숱한 인연을 언급했다.

또한 두 달이 넘도록 가슴앓이만 했던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만난 북 처녀, “정말 동지이고 스승이고 누님이고 어버이고 나를 키워준 유일한 분”인 ‘작은 누님’에 대한 각별한 마음도 풀어놓았다.

그러나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했지만 “언젠가는 밝히겠”다고만 넘어갔다. 특별히 “민가협 어머님들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어머니들의 소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석방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되는 과정을 긴밀하게 도운 그는 “열일곱 분인가 남아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여러 가지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다”며 “선생님들, 부디 건강하시고 선생님들 생전에 선생님들 평생 염원이 반드시 이뤄지길 간절히 빌겠다”고 안부를 전했다.

아울러 ‘강제 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며 2차 송환을 요구한 33명 중 생존해 있는 15명의 조속한 송환도 촉구했다.

속아서 강제로 끌려왔다는 탈북민 김련희 씨와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 지배인을 따라 단체로 입국한 뒤 본인들의 귀순의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12명의 여종업원에 대해 송환운동을 해온 그는 “문명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현대판 노예, 야만행위” 등 강도 높게 비판하고 조속한 송환을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에 대해서는 “미국에 대해서 할말 하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미국에게 오히려 제재와 압박, 그리고 적대정책을 폐기함으로써 해결하는 순서를 밟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세와 협의한다거나 허락을 받아서 할 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떳떳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남북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현재 남북 간에 얽혀있는 것을 완전히 풀어야 된다”는 것.

또한 “핵.미사일 문제는 어차피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 때문에 나온 것”이라며 “외세의 침략을 막는 방어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둘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대북 ‘세컨더리 보이콧’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밝힌 강경화 외교장관에 대해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생을 양심수 후원활동에 전념해온 그는 “양심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양심수 석방 문제는 ‘그 사람들이 바로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6.15민족공동행사가 평양에서 개최될 경우 방북하기 위해 병원 측의 입원 권유조차 보류한 채 기다렸다는 그는 6.15공동행사가 무산된데 이어 8.15민족공동행사마저 무산으로 흐르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인터뷰 내내 꼿꼿함을 잃지 않은 그는 이후에도 <통일뉴스> ‘최다 출연자’답게 6.15남측위원회가 주최한 7.27 정전협정일 기자회견이나 최근 남민전 장기수 박석률 전 민자통 의장의 추모식에서도 항상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지난 11월 서울 마포 한 오피스텔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조천현 작가가 영상과 사진 촬영을 맡았다.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

   
▲ 권오헌 명예회장은 흐트러짐 없이 인터뷰에 응했고, 현 정세와 양심수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진 - 조천현]

□ 통일뉴스 : 갑자기 건강이 안 좋다는 사실을 목요집회에서 공개했다. 먼저 그 내용부터 알려 달라.

■ 권오헌 명예회장 : 내가 몸에 이상증상을 느낀 것은 거의 석 달이 다 되지만 의료기관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5일이었다. 서울대학병원 호흡기내과에서 CT촬영이나 조직검사, 여러 검사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폐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앞으로 2주 동안에 걸친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7월 19일에 다시 병원에 가서 아마 첫 치료를 할 것 같다.

□ 폐암이 4기라면 오래되고 진전된 상태 같다. 몸에 이상을 자각했다지만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겠다.

■ 문헌상으로 보니까 폐암은 증상을 알았을 때는 많이 발전된다고 한다. 나도 4기라는 얘기에는 좀 놀랐다.

실제로 왼쪽 폐에 있는 부위는 자그마한 거였다. 덩어리가 작아서 그렇게 심한 건 아니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리고 기침 나오는 것 외에는 통증이나 호흡 곤란이나 다른 부위에 대한 통증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4기라는 것은 이미 폐를 지나서 다른 장기나 부위로 옮겨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이럴 때는 수술이 불가능하고 약물치료 내지는 주사치료 밖에 없다고 한다.

□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해왔고, 고령에 비해 활동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4기가 되도록 어떻게 그렇게 계속 활동을 해왔는지 믿기지 않는다.

■ 그래서 내가 목요집회에서도 얘기한 바 있다. “물론 자연에 거슬러서 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특히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가장 존경하는 민가협 어머니들,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비전향장기수 여러분들, 목요집회에 항상 나오는 사회단체 여러분들에 대한 내 개인의 애정이고 또 그분들과의 동지적 연대감이다. 또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서 함께했다는 측면에서 서로에게 힘을 주자는 의미를 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디 요양하러 간다거나 이런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에서는 움직이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은 내가면서, 투병도 하고 또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가게 되면 갈 거다.

사실 너무 오래 살았다. 원래 내가 몸이 약했고, 위가 약해서 60을 넘겨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80을 넘겼기 때문에 다른 욕심은 없다. 그래서 내가 활동하는 한은 종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 그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두 권의 책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사진 - 조천현]

□ 2006년 선생의 고희를 맞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벌써 11년이 흘렀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한발짝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똑같이 활동해 온 것 같다. 좀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후배들의 바람도 있었는데, 계속 일선 활동에 전념한 이유는?

■ 그 때도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양심수후원회 회장의 임기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정년은 없다.

사실 어떤 직책을 맡고 안 맡는 것과는 관계없이 통일문제나 민주화문제, 특히 늘 만나야하는 양심수 가족들과의 생활, 이것은 임기를 떠나서 그냥 ‘내 생활의 일부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자긍심을 가지고 보람있게 생각할 뿐이지 고통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그래서 사실은 명예회장이 된 이후에도 일상활동은 거의 변함없이 했다. 그리고 회장의 자리를 침범한다거나 이런 개념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 권오헌이 우리 민족문제나 민주화문제나 양심수에 대한 생각에 따라 활동은 변함없이 했다.

□ 고희 때 책을 낸 적이 있는데, 팔순에는 계획이 없었나? 고희 때 자서전을 내고 싶다고 말했는데 진척이 있나?

■ 자서전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고 했을 때 얘기가 나와야 된다.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웠지만 80 가까워지니까 지나간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그런 생각이 안 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계획된 바가 없었고, 다만 그동안 썼던 글들, 주로 후원회 소식지에 썼던 글인데 ‘이것을 엮어내는 것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전 70때에는 한겨레신문이나 대학신문에 쓴 것이 많았다. 이번에는 주로 통일뉴스에 기고형식으로, 사월혁명보라든가 민중의소리, 자주시보 이런 언론사에 썼던 글들이다. 후원회 소식지에도 실었던 글들인데, 이것을 엮어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특히 양심수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 음력으로 치면 80인 작년에 책을 내면서 팔순잔치도 하자고 했는데 내가 일이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아무 것도 않는 것 같아도 굉장히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정리를 시작한 것이 올 초부터였고, 올 초 내 조카가 그걸 정리했다. 그러다가 내가 몸이 안 좋게 돼서 기왕에 하려면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글모음을 정리하고 있다.

다른 글들은 제외시키고 주로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령 자주통일이라든가 평화, 전쟁반대, 인권, 민주주의, 양심수, 국가보안법, 민중생존권 이런 부분에 있어서의 내 마음 속에 생각을 거쳐서 나온 것이 우리 주장이었다.

그래서 우리 주장만을 그것도 다가 아니라 추려서 두 권으로 모아냈다. 하나는 자주통일과 관련된 부분,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인권, 양심수 관련 문제, 이렇게 나눠서 정리하고 있다. 약간의 욕심이지만 최근에 서둘러서 하고 있다.

“개인사라기 보다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

   
▲ 6.15산악회 회장이 맡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은 얼마 전까지도 산행을 함께했다. 하늘색 조끼는 6.15산악회 단체복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현대사를 깊숙이 체험하며 살아왔는데, 자서전 계획은?

■ 마음속으로는 좀 갖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것이 그냥 개인사라기 보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철이 들고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이 해방 다음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작은 아버님이 “일본이 망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장롱 속에 깊숙이 놔뒀던 지금으로 치면 한글교본을 주면서 “오늘부터 이 공부를 해라. 왜놈 글은 이제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바로 그날 면사무소와 학교를 가보니까 학교 신사가 불타고 일본 교장선생이 아래만 가리고 발가벗긴 채 “나니모 나이, 나니모 나이(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봤다.

그때 청년들이 왜놈들로부터 그 압박과 설움을 받았는데 “이제 우리 독립을 했다. 우리는 독립국가다”고 외치던 것이 쟁쟁하다.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거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던 해방공간의 여러 일들이 있다. 그것이 청년운동이기도 했지만 좌익운동이기도 했고, 지금으로 보면 자주통일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동네사람 70여명이 한꺼번에 잡혀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심각한 우리 이념대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적 존재감이 내가 어머니 아버님 일찍 돌아가시고 사회적으로는 아주 격변시대였고, 전쟁을 겪었다. 어려운 시대를 지내면서, 그럴수록 왜 그렇게 책을 보고싶어 했는지. 사회적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것이 움터서 나중에 이런 사회활동 하는 토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3년간 4H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 사회운동을 했고, 3년동안 군대생활 했고, 제대 후 3년간 농촌사회운동을 했고, 이때부터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회운동이었다.

64년부터 한일회담 반대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된다. 68년 통일사회당 입당, 그 뒤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이렇게 해서 감옥살고 나와서, 양심수 문제와 통일 문제 관련해서 사회활동하고 이렇게 한생을 보냈다.

이것이 그냥 소박한 개인사라기 보다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이런 것도 하나 기록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지금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묻어뒀던 이야기가 있다면 한두 가지 말해 달라.

■ 이상하게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생활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에서 생활했고, 또 4H 그룹이라는 이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래서 개인생활이 없었다.

한 가지 이야기한다면 64년에 농촌사회운동 3년을 하다가 농촌을 떠나서 충청북도 단양에 한일시멘트공장 짓는 현장에 갔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조그만 천막을 치고 수천명이 모여서 하루 일을 하는 거다.

새벽 3시쯤이나 일어나 줄을 서야 되는 거다. 삽이나 곡괭이 같은 공구를 받아야 일하는 거다. 그때 나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사람들 삶이 이렇게 절박하고 일이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라 생존권이라는 게 이렇게 절박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북에서 피난왔다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한 걸 기억한다. “회사에서는 나한테 공구를 안 줬지만 나한테 임금을 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으니까. 나는 집도 없고 잘 곳도 없어서 여기서 하루 일을 해야만 사는 사람이다.”

여기서 회사는 사회,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나를 살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국가나 사회는 특정 개인을 떠나 사람들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된다. 그분은 전혀 지식인도 아니고 그냥 떠돌이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다.

□ 1964년이면 한일협정이 사회적 이슈가 됐던 때 같다.

   
▲ 젊은 시절 권오헌 명예회장. 64년께부터 서울에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64년 그해가 굉장히 무더웠다. 한일회담 때문에 서울이 아주 부산했다. 현장 모르게 서울에 올라와서 광화문네거리에서 데모 속에 들어갔다가 종로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는데, 만일 그날 못 내려가면 아주 큰일 날 일이었다. 어떻게 용케 빠져 나가서 내려가면 현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9월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함석헌, 장준하 이런 분들이었다. 나는 그때 진보라든가 이런 것보다 그 분들의 한일회담 반대 활동이나 <사상계> 글을 통해서 지식인으로서 평가했던 것이다.

사실 사상계를 본 것이 사상계가 창간된 다음해인 54년쯤 될 거다. 시골에 있으면서 그때는 한자도 잘 모르던 땐데 사상계를 봤다. 진보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책자 <중앙정치>도 전부 한자였다. 평화통일론을 접한 거다.

그런 걸 열심히 볼 정도로 많은 책을 통해서 속을 채우긴 했다. 그래서 함석헌, 장준하 선생을 만나서 생각의 차이나 대화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느끼지 않고 지냈다.

서울에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보면서 많은 토론회를 거의 다 갔고, 그것이 하나의 나의 학습장, 교정이었다.

65년인지 67년에 졸업하고 10여년이 지나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을 만났다. 전쟁시기에 부역을 했다해서 우리학교에서 쫓겨나 서울에 와서 어느 대학 사학과를 나와 고등학교에 있다고 듣고 수소문해 만났다.

왕십리 근처 한영고등학교 교감 선생으로 있더라. 그 교감 선생을 만난 것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분이 나한테 <자본론> 1,2,3권을 준 분이다. 해방공간에서 처음으로 <자본론> 3권이 나왔는데, “이건 자네나 봐야할 거네. 나는 이제 못 보겠고”라고 줬다.

얼마나 어렵나. 그걸 수십 번 읽곤 했다. 다른 비판적 막시즘이나 보다가 그걸 보니까 아주 논리정연하고 내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뒤로 통일사회당도 들어가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내 전부는 아니었다.

□ 남민전이나 비전향장기수 관련해서 비화나 공개 못할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의미가 있는데 안 알려져 있거나 이번 기회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 이재문 선생이 우리집에 3개월 있었던 것은 공개한 바 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지금 어떤 것을 특정하지는 못 하겠다. 정리를 쭉 해놓고 봐야 어떤 것이 중요했던지 알 것 같다.

□ 혹시 남로당이나 조선로동당에서 당원 가입을 권유받거나 가입하지 않았나?

■ 남로당 당시에는 소년이었고, 남민전 사건은 전선이었고, 전혀 그런 건 없었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유일하게 당에 들어간 거다.

통일사회당에 입당한 것도 독특한 이야기다. 박금서 성신여대 교수가 박정희 쿠데타 세력한테 밀려나서 현장에 쫒겨나와 나하고 현장에서 만난 거다.

그때 입석이라고 충북시멘트공장 짓는 현장인데, 거기서 보니까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지 않나. 모든 것이 너무 찰떡궁합이었다. “미스터 권, 정치 한번 해보지 않을래?” 그래서 김철 씨를 소개해줘서 통일사회당 가게 된 거다.

그 사람 아주 참 재밌었다. 그 뒤로 나와는 절친했고, 그 사람 이야기만 해도 참 많다.

□ 혼자 독신으로 사시는데 연애는 안 했나?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후원자가 따로 있었나? 독자들도 궁금해 할 것 같다.

■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간간이 이야기 한 적은 있다.

군대생활 할 때 화진포에 추경명이라고 통역장교가 관리소장으로 가고 내가 위생병으로서 장병들 건강 관리하러 갔다. 바로 거기가 휴전선 바로 아래인데 휴전 전에는 이북 땅이다. 지금도 거기 가면 가슴이 좀 뛴다.

그때 우연히 북의 처녀를 만났다. 지금으로 치면 포장마차처럼 돼 있는 집에 들어가서 술을 한잔하게 됐는데, 먼저 와 있는 장병들과 우리하고 맞닿았다. 다들 팬티만 입고 있어 누가 장교인지 모르는 거다. 서로 싸움 날 뻔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 고향 사람이고 훈련소에 같이 입대해 그 사람은 3소대 서무계였고 나는 1소대 서무계였다. 그래서 쌈이 날 듯 하다가 화기애애해져서 노래 부르고 그랬다.

그런데 포장마차에 묘령의 너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나나 추경명 장교나 다툴 뻔 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 다음날 또 간 거다. 그런데 그 여인이 가버렸다.

그것이 정말 두 달 이상 가더라.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 회원들은 화진포만 가면 거기 가보자 한다.

우리 작은 누님은 정말 동지이고 스승이고 누님이고 어버이고 나를 키워준 유일한 분이었다. 누님이 건강이 안 좋을 때 화진포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보낸 적이 있다.

□ 개인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양심수 후원하는 일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됐을 텐데.

■ 내가 토목공사장 현장에서 일했고, 장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걸 하면서 일종의 내 퇴직금 겸해서 내가 장비를 사서 동업을 했다. 그것이 바로 남민전 사건 터지던 해인가 그 전해다.

사실상 사업도 해보지도 못하고 감옥 갔다 왔는데, 나오니까 장비 값이 뚝 떨어지고 장비가 고장만 나고 엉망이 됐더라. 그래서 그것을 동업자가 팔고, 나하고 다 정리가 됐다. 그래서 누님이 그 당시에 800만원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그 돈하고 좀 보태서 불도저를 하나 사서 기사하고 동업했다. 역시 기사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또다시 돈 하나도 없이 대우에서 나온 0.2입방미터라는 뜻인데 ‘공투’ 포크레인을 할부금으로 샀다. 그것도 기사한테 전적으로 맡기고 나는 내 나름대로 활동했다.

그때는은 남민전 석방운동과 민가협 장기수가족협의회 활동을 할 때다. 결국은 두 가지가 다 잘 안 됐다. 89년에 다 처분했다. 기사들 생활은 됐지만 나한테 큰 생활인 안 된 거다.

내가 크게 돈 쓸 게 없고 나름대로 강남에 12평짜리 집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생활했던 거다. 처분한 것 가지고 생활하다 2001년에 그 12평 아파트가 재건축됐고 그때 나는 팔았다.

당시 오진으로 암진단을 받고 죽으면 안 되니까 주는 대로 받고 다 정리하고 지금 수유리에 9평짜리 집을 샀던 거다. 그리고 얼마 남은 걸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도움 주신 분이 있다. 얼마 후에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될 거다. 그것이 내 생활 전부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양심수후원회는 특정한 후원자 한 분이 계신다. 그리고 인혁당재건위 분들이 보상이 나오니까 그 중에 몇 분이 개인적으로 후원해줬다. 내가 민주화운동 공헌자로 돼서 생활지원금이라고 4,800만원인가 받았다. 그것이 전부다.

이제까지 다른 후원을 받거나 어떤 대우를 받아가면서 생활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

   

▲ 권오헌 명예회장은 1130여 회째 열리고 있는 '민가협 목요집회' 여는말 고정 발언자였다. 사진은 문재인 정부 들어 첫 목요일인 5월 11일, 1122회차 목요집회에서 여는말을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새 정부에서도 여전히 양심수 석방을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실제로 많은 양심수들이 석방되고 비전향장기수 송환되고, 했지만 여전히 목요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 양심수 현황은 어떻게 되나?

■ 지금 양심수가 그전처럼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87년 6월항쟁 때만 해도 천명 이상이 됐고 가장 많은 때는 1989년 1,700명까지 이르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50명 안팎인데 많은 숫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더 엄밀히 따지면,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로 구속된 사람까지 치면 500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금 40~50명 내외라 볼 수 있다.

□ 오랫동안 양심수 석방, 후원 활동을 해왔다. 지금 양심수 문제나 국가보안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 독재국가 특히 군부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의 양심수와 그래도 이른바 문민정부, 특히 오늘 촛불시민에 의한 새로운 정부 하에서 양심수는 다르다. 오늘 문재인 정부 하에서 양심수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양심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수 석방 문제는 ‘그 사람들이 바로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는 것이다.

그럼 양심수는 어떤 사람들이냐.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인해 구속된 사람이다. 또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다. 또 하나는 자기 활동이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정당했기에 확신을 가지고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다.

이런 양심수, 확신수는 단 한사람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이런 양심수를 잡아 가둔다는 것은 반문명적인 야만행위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는 양심수와 국가보안법이 연관돼 있다. 지금 국가보안법 관련 양심수는 몇 명이나 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 지금 양심수 절반 이상이 국가보안법 관련 양심수들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코리아연대 사건으로 자주통일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들이다. 또 인터넷 상에 통일관련 의견을 개진했던 이른바 ‘인터넷 논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가 무죄고 지하혁명조직 RO가 없는 걸로 판명됐음에도 불구하고 9년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완전히 정치보복이고 이건 야만시대의 행태나 다름없다고 본다.

그 다음에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상징적으로 되고 있다. 다 알다시피 2015년 민중총궐기 때 민중들의 요구를 짓밟고 살인진압하고 한상균 위원장을 잡아 가뒀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같이 잡혀갔다.

그 외에도 직장에서 정리해고 됐거나 직장폐쇄 됐거나 비정규직으로 노동3권 보장 투쟁을 하다 구속된 노동자들이 있다. 다 사회 공익을 위해 활동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노점상이 두 사람 있는데, 도시빈민으로서 노점상 철거에 반대하다 구속된 사람들이다.

또 종교적 신념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구속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 이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꼭 구속만 하느냐. 만약 이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통해서 잘잘못을 법정에서 가릴 수는 있다.

유엔의 자유권규약위원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국의 양심수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제언을 했다. 이것은 사상양심의 자유 침해, 또 결사의 침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석방하라 했다.

그런 이야기 전에, 천만 촛불의 힘이 있지 않나. 혁명적 발상으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서 석방을 해야 한다. 이번 8.15광복절에는 양심수가 한 사람도 없고, 정치수배자도 없어져야 한다. 민주노총 사무총장 같은 경우가 정치수배자로 몰려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석방은 됐지만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사면복권이 반드시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 탈북민 김련희 씨 문제나 12명의 여종업원 문제로 주제가 옮겨가자 권오헌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사진 - 조천현]

□ 특별하게 최근에 이슈가 된 탈북민 김련희 씨와 12명 여종업원에 대한 입장은?

■ 가장 중요한 인권문제로서 김련희 평양주민이 속아서 강제로 끌려와서 현재 사실상 억류상태에 있다. 이것은 문명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련희 평양주민은 오는 과정에서도 눈치채고 “나는 안 가겠다. 나는 돌아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을 뺐기고 강제로 끌려왔다. 오자마자 국정원에서도 그 이야기를 되풀이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현재 6년이 되도록 여기 억류된 거나 다름없다.

이게 냉전시대라면 몰라도, 지금 꼭 이렇게 해야 되나. 김련희 씨는 빨리 가족 품으로, 자기 조국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은 정부에서는 남한사회를 동경해서 왔다고 했지만 사실상 본인들이 어떻게 왔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일체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식당 지배인이 <한겨레>에 이야기했고, 또 민변에 찾아와서도 이야기했는데, 남한사회를 동경해서 온 게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 가려고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정부 당국에서 발표한 것이 거짓말인 거다.

이들이 만약에 자유의사로 왔다면 떳떳하게 이야기하면 누가 뭐라 하겠나. 부모 자식 간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 본인들이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부모들이 북쪽에서 면회라도 한번 해달라고 했고, 또 변호사들이 면회요청을 했지만 안 들어주고 있다.

또 인신보호구제신청을 통해 법정에 나와서 구제하려 했어도 법정에도 못 나오게 한다. 국가인권기구라든가 유엔인권기구 대표들이라든가 우리는 인정 않는 기구이지만 이른바 북한인권사무소, 이들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거야 말로 현대판 노예, 야만행위다. 더군다나 국정원 직원이 돈을 줘서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국가기관이 개입된 납치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

박근혜 남북대결 시대라면 그런 못된 짓도 늘 했겠지만, 이제는 문재인 시대 아니냐. 국정원의 과거 잘못을 다시 밝힌다고 한다. 국정원은 억울하게 끌려온 북 주민들을 빨리 돌려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 2차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장기수도 있고, 연세가 많아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2000년 9월 2일 북으로 송환됐던 분들의 근황도 궁금하다.

■ 다들 아다시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2001년 2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33명이 2차 송환을 희망했다.

1차 송환 때는 이른바 ‘전향’을 했다고 해서 안 간 측면도 하나 있었다. 그런데 ‘강제 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거다. 실제로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라고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인정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분들이 자기 조국을 배신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신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2차 송환 희망자 33명 중 정순택 선생은 세상을 떠나 시신을 송환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시신 송환’이라는 용어를 썼다.

리인모 선생이나 63명이 송환될 적에도 ‘송환’이라는 말을 않고 북한주민접촉신청서를 갖고 갔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정부에서도 송환이라는 말을 썼고, 송환이라는 말은 당연히 가야된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당연히 가야할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은 고향이 거의 다 북쪽이다. 처음부터 전향 대상자도 아닌 전쟁포로들도 있다. 세월이 17년이나 지나다 보니까 지금 15명도 안 남았다. 이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신념의 고향, 자기 조국이기도 한 고향으로 빨리 보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들은 아직도 보안관찰법에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이들이 빨리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들이야 다 잃었겠지만 혹시라도 처가 남아있거나 자식들이 있다면 그 혈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논란이 됐던 북한인권법 제정에 대한 입장은?

■ 북한인권법은 사실 미국에서 2005년 ‘민주주의 증진법’을 제일 먼저 만들었는데 다 북을 고립 압살시키기 위한 법이었다. 반북단체들한테 돈을 줘서 북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을 하기 위한 법이었다.

미국에서 만들고 그 다음에 일본서도 만들었다. 그때 바로 한국에서도 지금 야당이 만들었다. 그게 계속 폐기되다 재작년에 여야 합의로 만들어졌다. 지금 여당인 당시 야당은 북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킨다며 가령 인도주의 지원사업이라든가 이런 걸 포함시켜서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잘못된 법이다. 제 나라 인권이나 제대로 챙기지 남의 나라 이름을 빌려서 북한인권법을 만든 자체가 이건 굉장히 미국 같은 제국주의나 패권주의 국가나 할 수 있는, 일본 같은 망나니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이게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지금은 여당인 당시 야당이 함께했다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여러 번 국회에도 가서 이걸 막으려고 했는데 끝내 북한인권 증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이건 한마디로 문재인 정부가 폐기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인권을 정치화시켜서 북을 고립 압살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북한 인권을 증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권을 내세워 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중상모략해서 아주 악마화시키는 법이다.

문재인 정부야말로 촛불정신으로 이룩한 정부다. 이런 야만행위는 이 문명사회에서는 없어야 되는 것이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법을 없앴으면 한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가져야”

   
▲ 권오헌 명예회장은 폐암 판정 이후에도 일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정전협정 54주년을 맞은 7월 27일 권오헌 명예회장은 6.15남측위원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해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한.미 정상회담과 G20회의가 열렸고, 새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일단이 드러났다. 어떻게 평가하나?

■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가 이야기했다. 새 정부는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이룩된 정부다. 그러니까 촛불시민의 뜻을 절대로 명심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가지 국내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서 박수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일외교안보 문제에 있어서 새 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가다. 예를 들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6.15공동선언, 10.4선언이 다 무시, 외면당했는데, 그것을 다시 복원시키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미국을 간다는 것이 참 뜻밖에도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물론, 미국에서 아마 빨리 박근혜 정책을 잇기 위해서 초청했다는 것이 첫 요인이 되겠지만 미국을 생각보다는 빨리 갔다. 후보 시절 평양을 먼저 가겠다고도 이야기했는데, 우리 생각이라면 평양을 먼저 가야되지 않나.

문 대통령이 미국에 갈 적에 많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해왔던 단체나 개인들이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올바른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나도 광화문에서 며칠 동안 농성하며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우리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에 대해서 눈치보지 말고 소신껏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핵과 미사일 문제는 미국의 70년 가까운 북에 대한 적대정책, 군사적 압살정책에 따른 자위적 억제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국가, 주권국가로서 당연하게 자위권이 있는 거고,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핵 억제력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 정부가 관여 안 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관여를 한다면 미국에 대해서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도록 조언해주면 핵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나.

다른 한 가지는, 한미연합전쟁연습 이걸 꼭 해야 되는 건가? 이건 이전에 벌써 문정인 교수도 미국에 가서 이야기한 바 있고 또 북에서도 일부 외교관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고, 또 미국의 많은 전문가들이나 활동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연습 중단과 핵활동 중단이나 임시중단을 동시에 하는 것, 일단은 한미연합전쟁연습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걸 미국에 가서 트럼프와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다. 이걸 주문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됐나.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토대로 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북정책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남북관계는 한미동맹의 종속관계가 된 거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이것은 전도된, 뭐가 바뀐 거다.

첫째, 미국 가서 겉으로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왜 그걸 미국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건가.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 ‘미국과 한미동맹을 토대로 제재와 압박을 가해서 해결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거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대화와 제재는 양립될 수 없는 거다. 핵과 미사일은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에 따른 자위적 억제력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그걸 풀어야 해결될 문제이다.

대화를 한다면서 제재와 압박을 외교수단으로 쓴다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으로도 안 맞는다. 정말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동등한 자격과 입장, 권한을 가져야 한다. 동등한 자기방어권을 가져야 하는데, 대화한다면서 상대방을 압박하고 제재하면서 무슨 대화가 되느냐.

미국에게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대 정책과 고립압살 정책, 특히 핵 전력이 수시로 드나드는 이런 핵위협 공갈부터 없애야 된다. 그렇게 해야 상대도 맘 놓고 핵을 폐기할 수 있고, 동결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결과 폐기 순서로 간다고 했는데, 어떤 순서로 가든지 제재와 압박 속에서 해결한다는 것은 안 맞는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제까지의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고 얘기했는데, 그건 사실상 ‘전략적 인내’의 연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천만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세웠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미국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혁명적 발상을 가지고 해도 되는 것이다. 세계 어떤 지도자도 문재인 대통령이 이야기하면 “아, 그렇다”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위치와 역할, 이런 권능을 왜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단 말인가.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할말 하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미국에게 오히려 제재와 압박, 그리고 적대정책을 폐기함으로써 해결하는 순서를 밟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 그는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우려를 표하고 ‘민족자주의 원칙’을 강력히 주문했다. [사진 - 조천현]

□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는데,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이후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가했고, 최근에는 국회 외통위가 열려 강경화 외교장관 발언이 문제되기도 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참가차 독일을 방문해 거기서 이른바 ‘신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는데, 결국 미국서 한 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다. 이른바 북핵문제에 대해서 국제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그전 정부라면 늘 해왔으니까 그렇다지만, 촛불혁명으로 마련된 신정부라면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 혁명적 발상을 가져야 한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가지고 해야 한다. 왜 국제사회에 협력을 얻어가지고 해결하려 하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핵.미사일 문제는 어차피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 때문에 나온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폐기시키는 방법이 있고, 내부적으로 남과 북이 합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인가 심층 협의를 해야 될 것이다.

외세의 침략을 막는 방어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둘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런 대량살상무기는 인류가 폐기해야 하고 전쟁도 없애고 평화스러운 세상을 만들어야한다. 그러나 그건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항상 외세로부터 침략과 간섭을 받을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일된 조국이라 하더라도 침략적 외세에 대한 방어적 수단은 필요하다.

그래서 지난 번 목요집회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일단은 미국의 핵위협 공갈시대는 끝났다. 이제 미국 자신도 그런 위협에 노출이 현실화 됐기 때문에 다 같이 폐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이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화를 해야 된다.

미국이 지금 대북제재를 중국에게 압박을 가한다. 만약에 중국이 안 하면 독자제재를 하겠다면서 석유를 금수조치하고 노동자들 송출을 막겠다고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하겠다고 한다. 제3자에 대한 제재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국주의적인 패권주의자들의 침략 근성 그대로다. 미국이 자기들이 일등국가로 살려는 욕망이 있다면 상대방도 주권국가로서의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구성원의 생존권을 지켜야하고 그 나름대로 발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왜 그걸 인정하지 않느냐.

말이 무슨 평화와 안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약소국가에 대한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야만행패를 당장 집어치워야 되고, 한국 정부는 이런 야만행위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외무장관이라는 자가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하는데 한국이 협의 중이라고 했다. 어떻게 감히 외교장관이라는 자가 이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나.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이익과는 전혀 배치되는 행패이기 때문에 이런 외무장관은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

□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이번 베를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 중에 우리 국민들이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들도 물론 있었다. 그 중에는 7.27를 기해서 휴전선 근처에서의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든가, 10.4를 기해서 이산상봉을 추진한다든가 하는 것은 다 좋은 일이다.

이렇게 되려면 무엇을 해야 되느냐. 남북관계, 통일문제,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외세의 간섭 없이 7.4남북공동성명, 6.15공동선언, 10.4선언 정신에 따라서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한다. 이걸 선언하고 시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이 해결돼야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되고 동계올림픽도 함께 할 수 있고 그렇지 남북문제의 주체가 외세의존형으로 된다면 다른 것은 될 수가 없는 거다.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세와 협의한다거나 허락을 받아서 할 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떳떳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남북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현재 남북 간에 얽혀있는 것을 완전히 풀어야 된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데서는 자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실 핵도 미사일도 수십조원에 이르는 국방비도 정말 평화와 번영을 위한 사회복지를 위한 데로 다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홍경선 선생을 평양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만나 포즈를 취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중 하나로 이 사진을 꼽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오랫동안 인권.통일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통일뉴스> 현장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보람이나 아쉬움, 남기고 싶은 말은?

■ 가장 보람있었다면 양심수후원회가 89년에 만들어져 99년 10년만에 비전향장기수를 다 석방해냈다. 양심수후원회 만들 때 비전향장기수가 170여명이었는데 10년만에 다 석방했다.

그 당시에 비전향장기수를 양심수라고 규정한 것 자체가 참 혁명적이었다. 어떻게 간첩들을, 좌익분자들을 양심수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 내 논리는 이렇다. 수십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도 양심수다. 그래서 우리는 석방운동한다. 10년만에 다 석방을 했고, 그 다음해에 63명 비전향장기수를 송환했다.

이때 가장 긍지를 느꼈고. 내 힘이 아니지만 여러 운동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가 10년동안 보수세력에게 젖다 보니까 자기가 당연히 할 소리도 뭔가 자기검열을 하면서 못하는 거다. 현재의 집권여당이 그렇다. 야당시절의 종북 논리에 젖어서 지금 제대로 이야기를 못한다.

예를 들어서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 말 자체를 않고 있고, 북한인권법 문제도 마찬가지다. 옛날 군부독재시절에 늘 이야기 해왔던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양심수 석방하라, 국정원 해체하라, 자주통일하자’ 이런 얘기를 지금 여당이라면 옛날 생각을 해서라도 이제 제 목소리를 좀 내달라.

오랫동안 종북 논리에 젖어서 목소리를 잊고 자기 검열을 해왔다면 이제는 제목소리를 내서 하나하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소신껏 정치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오랜 활동을 해오면서 감사를 표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양심수후원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또 자기가 하는 일을 전혀 밝히지 않게 한 특별한 분들이 있다. 내가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이런 분들은 정말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민가협 어머님들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처음에는 내 자식과 내 가족 때문에 나왔지만 이제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고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계속 활동하고 지금도 1030회가 되도록 목요집회를 열고 있다. 어머니들의 소원이 이뤄졌으면, 양심수가 없고 국가보안법이 없고 자주통일 되는 세상이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 통일운동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 운동권도 어떤 측면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글 하나를 써도 그렇고 어디 가서 발언을 해도 그렇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데 이제는 소신껏 이야기를 하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간다면 떳떳하게 갈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활동하면 좋겠다.

지금 제일 중요하게 일자리 문제라든가, 최저임금 1만원 시대, 언젠가는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시대가 되면 그런 용어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나.

어제도 독일에서 온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이야기했다. 이 땅에서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가 구속됐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는 거다. 어떻게 책을 출판하고, 막시즘이라든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폈다고 구속될 수 있느냐는 거다.

사드 배치 반대, 그리고 반환 미군기지 오염 제거, 미군이 이 땅에서 물러가게 하는 문제도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어떤 원한이 있어서 갈라진 것이 아니니까, 이제야말로 우리가 같은 동족으로서 아무 원한 없이 함께 웃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자주통일 시대를 이뤄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인터뷰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내가 최근에 몸이 이러니까 여기도 내세우고 저기도 내세우고 하는데, 나는 건강 때문에 특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건강과 아무 관계없이 내가 능력이 있는 대로 종전처럼 똑같은 활동하고 싶다. 뭘 계산해서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그냥 따르려고 한다.

□ 주변에서 돌봐줄 분이 있나?

■ 내 조카가, 누님의 아들딸들이니까 생질인데, 실질적으로 내 보호자가 됐다. 내가 책 내는 것도 그 사람이 책임지고 해야 할 거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책임도 져야할 거고. 그 사람도 자기 할 일도 많은데, 지금도 수시로 다니면서 여러 가지 보살펴주고 있다. 집도 별로 멀지 않다.

많은 회원들이 전화주고 뭘 해온다고 하는데, 너무 감사하다. 관심을 가져주신 회원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여러 회원님들의 뜻에 맞게 내가 열심히 싸워서 이겨낼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 그는 특별히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밝혔다. [사진 - 조천현]

□ 남북해외 독자들에게 안부 삼아 하시고 싶은 말은?

■ 지금 몸도 여의치 않고 나라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가고 싶은 데를 못 가고 그렇다. 서울대병원 입원 날짜를 6.15를 지나서 잡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평양에 갈 수 있지 않나 자그마한 희망을 가졌었다.

10년 넘게 남과 북이 서로 오가지 못했다. 왜 같은 땅에 같은 민족끼리 오가지 못하는지. 그래서 북에 계신 반가운 얼굴들에게 인사드리고 싶은 생각이다. 또 해외에 계신 많은 분들이 있다. 전화 주신 분, 와서 쉬었다 가라는 아주 감사한 말씀 해주신 분도 있다.

많은 분들에게 감사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똑같은 마음으로 통일조국에 대한 심신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 우리 뜻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 같이 건강하고 우리가 힘을 모아서 통일조국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특히 북쪽에 비전향장기수로 가셨던 선생님들, 지금 아마 많이 돌아가시고 알기로는 열일곱 분인가 남아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여러 가지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다. 선생님들, 부디 건강하시고 선생님들 생전에 선생님들 평생 염원이 반드시 이뤄지길 간절히 빌겠다.

□ 통일뉴스에도 한 마디 남겨달라.

■ 통일뉴스는 사실 내 사회활동과 아주 직접 관련돼 있다. 아마 통일뉴스에서 보도한 횟수가 누구 못지않게 많았고, 또 통일뉴스는 언론이라는 본연의 임무 말고도 정말 우리민족 전체의 참 염원인 조국통일에 대해 언론영역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가 글을 쓰게 됐고 통일뉴스에서 늘 잘 실어줬다. 지난 10년이 별로 보도할 게 없었던 시대라면 이제야 말로 봇물 터지듯이 통일과 관련된 기삿거리 많고, 궁극적으로 자유스럽게 남북을 오가면서 취재해 북녘 소식, 남녁 소식을 서로에게 전해주는 그런 통일뉴스로 거듭나길 바란다.

통일을 지향하고 활동하는 많은 개인과 단체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줬던 언론사이면서 가장 통일의 큰 주춧돌, 주도적 역할을 한 통일뉴스의 무궁환 발전과 앞으로 그 소원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또 한번 간절히 빌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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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통령이 새벽 1시 '긴급 NSC'에서 지시한 것(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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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28일 오후 11시 41분경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발사하자 29일 새벽 1시에 곧바로 긴급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대응 조치로 △한미 연합 탄도미사일 발사를 비롯한 강력한 무력시위를 전개할 것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잔여 발사대 4기를 추가로 배치할 것 등을 지시했다. 또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긴급 요청해 강력한 대북 제재안 마련을 추진할 것도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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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문 대통령이 일반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기로 했던 사드 배치와 관련해 잔여발사대 추가 배치까지 미국과 협의할 것을 지시한 것은 이번 도발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북한이 '레드라인' 수준에 다가왔다는 의미로 읽힌다.


국방부는 지난 4월 경북 성주에 사드 1개 포대를 구성하는 발사대 6기 중 발사대 2기와 X-밴드 레이더를 배치하고, 나머지 발사대 4기는 왜관 미군 기지에 보관해왔다.(뉴스1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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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일반영향평가가 진행되는 시점이지만 북한의 미사일 도발 강행에 따라 (추가)4기에 대해서도 임시적으로 배치가 추가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이에 따른 협의가 한미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임시배치를 먼저 하고 환경평가는 평가대로 진행하면서 환경평가가 끝나는 시점에 최종적 배치여부에 대한 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했다.(머니투데이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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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무 국방부 장관도 29일 오전 9시 '북한의 ICBM급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리 군 입장'을 발표해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를 조속히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겨레에 따르면, 송 장관은 "한미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해 단호히 응징하고 대응하기 위해 한미 연합으로 지대지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며 전략자산을 전개할 것"이라며 "주한미군의 추가적인 사드 발사대를 임시 배치하기 위해 조속히 협의해나갈 것이며, 한미 연합 확장억제력과 함께 우리의 독자적인 북한 핵·미사일 대응 체계를 빠른 시일 내에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29일) 새벽 한-미 양국 군은 연합 탄도미사일 사격훈련을 실시해 북한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합동참모본부는 “한-미 미사일 부대는 오늘 오전 5시45분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하여 동해안에서 2번째 한미 연합 미사일 사격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날 훈련에서 한국군은 현무-2를, 미8군은 ATACMS(에이태킴스)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표적에 명중했다고 합참이 밝혔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지 약 6시간 만에 이뤄진 이번 훈련에 대해 합참은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도발시 즉각 응징하겠다'는 한미동맹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한겨레 7월 29일)

 
 

한편, 29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일인 27일 '친필명령'으로 이번 시험발사를 직접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28일 밤 대륙간탄도로켓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면서 "화성-14형은 최대정점고도 3천724.9㎞까지 상승하며 거리 998㎞를 47분12초간 비행하여 공해상의 설정된 수역에 정확히 탄착됐다"고 29일 주장했다.


김정은은 "오늘 우리가 굳이 대륙간탄도로켓의 최대사거리 모의시험발사를 진행한 것은 최근 분별을 잃고 객쩍은(의미 없는) 나발을 불어대는 미국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연합뉴스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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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 조미대결 최후의 단계에 들어섰다.

조선신보, 조미대결 최후의 단계에 들어섰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7/07/30 [11: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8일 밤, 2차 시험발사에 성공한 '화성-14'형 [사진출처-인터넷]     

 

29일, 조선신보가 “련발적인 탄토탄세례, '미국이 잘못 뉘우칠 때까지' 최대사거리를 모의한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라는 기사를 발표했다.

 

인터넷에 소개된 자료에 의하면 조선신보는 “28일에 진행된 대륙간탄도로케트(ICBM)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는 미국을 향한 조선의 경고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다시한번 똑똑히 보여주었다. 시험발사의 성공으로 조선이 핵전쟁위협의 장본인인 미국의 심장부를 타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보다 뚜렷이 실증”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신보는 글에서 북의 ICBM 개발에 있어서 특이한 것이 “개발과 시험발사를 투명성 있게 한”다는 것이며 “조선의 ICBM 개발은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과 핵전쟁위협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자위적 선택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선은 가증되는 미국의 핵위협공갈에 대처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ICBM을 개발한다는것을 공식선포하고 발동기연소시험으로부터 지상분출시험, 시험발사에 이르는 모든 공정들과 전술기술적 제원, 기술적 특성과 같은 예민한 문제들까지 다 공개하였다.”고 주장했다. 

 

조선신보는 글을 통해 김정은위원장이 올해 신년사를 통해 “ICBM시험발사의 준비사업이 마감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혔으며 “5월 중장거리전략탄도로케트 ‘화성-12’형의 시험발사가 성공하였을 때에는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옳바른 선택을 할 때까지 고도로 정밀화, 다종화된 핵무기들과 핵타격 수단들을 더 많이 만들어나가며 필요한 시험준비를 더욱 다그쳐 나갈데 대한 최고령도자의 명령이 공개” 되었다는 것과 “미국의 ‘독립절’에 맞추어 ICBM ‘화성-14’형의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앞으로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들을 자주 보내주자는 최고령도자의 발언”을 공개했다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어 북의 “ICBM 개발은 유언실행을 관철하시는 최고령도자의 정력적인 활동의 결실”이라며 김정은위원장이 “70여년세월 조선민족을 위협해온 미국의 핵 공갈을 더는 지속시킬수 없으며 미국의 심장부를 겨눈 ICBM를 기어이 완성하여 최후승리의 직선침로를 열어놓아야 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에 앞서, 27일 김정은국무위원장이 '28일 밤에 발사한다'라는 친필서명을 했다 [사진출처-인터넷]    

 

조선신보는 글에서 “조선과 미국의 기나긴 대결은 드디여 마지막최후계선에 들어서고 있다. 공개적인 ICBM시험발사도 조미간에서 모의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미국언론은 평안북도 구성일대에서 미싸일발사 징후로 보이는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미국방성의 익명정보에 기초하여 조선의 전승절에 시험발사가 있을 것이라고 떠들어댔으나 ‘화성-14’형은 그 이튿날 깊은 밤에 다른 곳에서 발사되였다. 조선은 미국의 허를 찔러 임의의 지역과 임의의 시간에 ICBM를 기습발사 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의 ICBM의 능력과 그 발사기술보다 주목되는 것이 있다며 “미국이 옳바른 선택을 할 때까지 핵전략무력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끈질긴 탄도탄세례가 계획되고 이미 실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은 미국과의 싸움을 무기와 전략의 대결에 앞서 의지의 대결, 담력과 배짱의 대결로 보고 있다.”며  북은 “핵대국을 자처하는 미국을 눈아래로 굽어보며 온갖 제재와 봉쇄를 박차고 초강경조치를 련발적으로 취해나갈 만단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트럼프행정부의 정책립안자들이 조선에 대한 전략적 시각을 바꾸어 전향적 행동을 일으킬 때까지 미국의 면상을 후려칠 탄토탄 세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 28일 밤,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가 성공한 뒤에, 김정은위원장과 '화성-14'형 관계일꾼들이 기뻐하고 있다. [사진출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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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독립PD의 죽음은 사고사 아닌 ‘사회적 타살’”

박환성·김광일 독립PD 영결식, 동료들과 유가족 “방송계 외주제작 갑질 적폐 개선 계기로 삼아야” 촉구

금준경 기자 teenkjk@mediatoday.co.kr  2017년 07월 29일 토요일
 

“왜 그 시간에 운전을 해야 했는지, 차에 왜 먹지 못한 햄버거가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박환성, 김광일 PD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최영기 한국독립PD협회 전 회장은 “이 죽음은 사고사가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고 강조했다.

두 독립PD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EBS 다큐멘터리 ‘야수의 방주’를 촬영하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제작비 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늦은 시간에도 두 PD가 직접 차를 몰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료들과 유가족이 현장을 찾았을 때 사고차량에선 먹지 못한 햄버거와 콜라가 발견됐다.  

▲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광일(왼쪽), 박환성 PD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금준경 기자.
▲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김광일(왼쪽), 박환성 PD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사진=금준경 기자.박환성 PD는 출국하기 직전 열악한 제작환경 문제를 앞장 서서 공론화했다. 독립PD가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받은 정부지원금을 EBS가 간접비 명목으로 요구했다는 폭로였다. 박 PD는 출국 직전 추혜선 정의당 의원실을 찾아 외주제작 불공정 거래 문제를 논의했으며, 공항에서까지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나 없는 동안 문제를 잘 해결해달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떠나기 전에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게 너무 죄송하다”고 말했다. 


권용찬 독립PD협회 대외협력위원장은 “거대 슈퍼갑인 지상파에 맞선다는 건 영원한 을인 독립PD에게 힘든 일”이라며 “고인은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적으로 이슈화해 현장 PD들에게 희망을 줬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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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불명' 헬기 출현... 삽교호의 잠 못 이루는 밤

 

'비행연습장' 된 충남 삽교호 생태숲... 주민들 소음 피해 호소

17.07.29 20:15l최종 업데이트 17.07.29 20:15l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소반리 우측에 조성된 생태숲에서 헬기가 저공비행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소반리 우측에 조성된 생태숲에서 헬기가 저공비행을 했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 네이버 지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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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시 삽교호 인근 주민들이 주한미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군용 헬기의 저공비행으로 소음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군 부대가 사전 양해 절차 없이 주거지역인 마을 옆 생태숲을 사실상 '비행 훈련장'으로 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천주교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간 솔뫼성지가 있는 충남 당진시 우강면은 당진의 대표적인 평야이자 곡창지대다. 
 
 
▲ 군용 헬기 비행 장면 충남 당진시 우강면 인근에서 군용 헬기들이 비행하고 있다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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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호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우강면 주민들은 지난해부터 계속되는 헬기 소음으로 인해 잠에 못 드는 등 고통을 받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우강면의 강문리, 소반리, 신촌리, 내경리, 부장리, 공포리, 대포리(707세대, 1597명 거주) 지역의 피해가 크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당진 우강면 소반리에 사는 김용훈씨는 "함께 사는 부모님이 일찍 주무시는 편인데, 헬기가 오후 9시·10시에도 다닐 때가 있다"라며 "(헬기가) 저공비행을 해서 매번 깜짝 놀라신다. 불편함이 크다"라고 말했다.

송산리에 거주하는 한 주민 역시 "뜨거운 한낮에는 오지 않다가 초저녁이나 밤이면 헬기들이 나타난다"라며 "헬기가 워낙 저공비행을 하니 창문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다. 삽교호 생태숲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신현철 강문리 이장은 "지난주에는 헬기가 자정이 다 되도록 마을 위를 돌아다녔다"고 말했고, 김선태 우강면 면장은 "최근에는 헬기 비행 횟수가 더 많아졌다.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비가 오지 않는 좋은 날씨엔 거의 매일 헬기들이 온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주민들이 찍은 사진 속 헬기에 'united states army'
 
 7월 5일 촬영된 사진. 헬기 뒷부분에 'UNITED STATES ARMY'라고 쓰인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  7월 5일 촬영된 사진. 헬기 뒷부분에 'UNITED STATES ARMY'라고 쓰인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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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호 인근 생태숲은 2015년 12월 조성됐다. 대전국토관리청은 하천변 국유지에 있는 논에 흙을 덮어 생태숲을 만들었고, 이곳에 수풀이 우거지게 되면서 온갖 동식물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현지 주민들 역시 자연보호를 위해 이곳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우강면 주민들은 생태숲 조성 이후인 2016년부터 군용 헬기 비행이 잦아졌다고 증언한다. 수풀이 우거지고 비교적 넓은 둔턱이 생기자 군 헬기들이 이곳을 사실상 훈련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게 주민들의 추측이다. 

실제로 헬기 소음으로 고통받던 주민들은 지난해 11월 평택 해군 2함대 측에 민원을 제기했다. 당시 헬기 훈련 사실을 인정한 해군 2함대 측은 '향후 훈련 시 사전통보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약속했다. 
 
 
▲ 군용 헬기 비행 장면 충남 당진시 우강면 인근 생태숲에서 군용 헬기가 착륙하는 듯한 모습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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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올해 들어서도 사전에 공지가 되지 않은 군용 헬기들이 지역 인근에 계속 나타났다. 올 4~5월 주민들이 촬영한 동영상에는, 군용 헬기가 주거지역 인근에서 저공비행을 하다 착륙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당진시는 해당 헬기가 평택 해군2함대 소속이 아니라고 밝혔다.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생태숲 관리 책임이 있는 대전국토관리청도 "삽교호 생태숲 지역 군사훈련에 관한 협의나 보고가 들어 온 것은 전혀 없다"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당진시와 가까운 평택의 주한미군 부대 소속 헬기들이 우강면 인근에서 사전 양해 없이 비행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역 주민과 공무원 등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헬기에 'united states army'라고 적혀 있다.

김재운 소반리 노인회장은 "올 2월 말인가 3월 초에 미군 10여 명과 한국인 통역관 한 명이 마을에 찾아와 바닥에 빠져버린 헬기를 운반 차량으로 실어 간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신현철 강문리 이장 역시 "지난해에도 미군 2명이 헬기가 고장 났다면서 마을회관에 찾아온 적이 있다"라며 "당시 미군들이 고장 난 헬기를 이송해 갔다"라고 증언했다. 미군 헬기 역시 삽교호 생태숲이 조성된 우강면 인근에서 비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8군 측 "미군 헬기... 소속 부대는 확인해 봐야"

미8군 관계자는 기자와 한 전화 통화에서 "사진과 증언으로 볼 때 (해당 헬기가) 미군일 것으로 본다"라며 "다만 정확한 소속 부대와 훈련 절차상 문제를 확인해봐야 한다. 지역신문의 기사 등을 (영어로) 번역해 미군 측에 넘겨 확인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김종대 정의당 의원실도 관련 자료를 제공받아 사실 관계를 확인 중이다. 김종대 의원실 관계자는 "우리 군뿐만 아니라 미군 헬기도 해당 지역에서 비행한 것까지는 확인이 됐지만 어느 부대 소속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라며 "헬기 이착륙시에는 훈련으로 판단하고 비행계획서를 제출하는데, 삽교호 인근에서 훈련한다는 내용은 파악된 바 없다는 게 미군 측 설명"이라고 전했다.

이어 "미군 측에 소속 부대 등을 알려달라고 요청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미군에서 구체적인 부대 정보 등을 확인해 준 적은 거의 없다"라며 "만약 주민 피해가 확인된다 해도 피해 보상은 한국 정부에서 진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박석규 우강면 개발위원장은 어기구 국회의원 측과 우강면의 도움을 받아 국민권익위원회에 관련 내용을 민원으로 제기한 상태지만, 우강면 주민들이 미군 측의 헬기 비행을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규정상 미군 훈련과 관련해 지역 주민에게 사전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은 2003년 SOFA 합동위원회 특별회의를 열고, 미군부대 훈련 시 2주 전 사전 통보하도록 한 '훈련 안전조치 합의서'에 서명한 바 있다.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조치였다. 다만 이 합의마저도 '경기 북부 지역'에만 한정돼 충남 당진시 우강면은 해당되지 않는다.

부산에선 미군이 통보 없이 총 쏘며 훈련하기도
 
 미군이 기지 방어 훈련을 진행중인 모습<자료사진>
▲  미군이 기지 방어 훈련을 진행중인 모습<자료사진>
ⓒ U.S.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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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부산에서는 지난 6월 주한미군 군수물자 기지에서 밤중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주민 신고가 잇따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총성은 주한미군이 가상훈련을 하면서 쏜 공포탄 소리인 것으로 확인됐지만, 주한미군 부대가 사전 양해 없이 주민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훈련을 진행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당시 미군은 훈련을 진행하면서도 지자체나 경찰에 사전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관련 기사 : 미군, 통보 없이 부산 도심서 총 쏘며 훈련).

당시 시민단체인 '부산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부산 평통사)'은 논평을 통해 "대도시 부산의 도심에서 주민들의 생명에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총포 훈련이 아무런 사전 통고나 예방 조치 없이 감행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며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 당국은 SOFA 등 관련 규정의 개정 및 보완을 위해 즉각 미국 측과 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박석분 부산 평통사 상임운영위원은 28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일본이나 필리핀은 SOFA와 별도로 훈련이나 기지 운용 협정을 체결한 상태"라며 "훈련 사전 양해 문제는 국민 생명·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SOFA 개정을 넘어 별도의 협정을 체결하고 국회 비준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관련 기사를 당진신문에도 게재했습니다.

태그:#삽교호#당진#당진 우강면#주한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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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紙 ‘美, 조건 없이 지금 당장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 ‘중국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
 
뉴스프로 | 2017-07-28 13:15: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타임紙 ‘美, 조건 없이 지금 당장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 ‘중국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 
-어떤 전쟁도 동맹국과 미국에 재앙이 될 것

한반도를 둘러싼 북미 간의 갈등이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타임지가 24일 ‘The Time for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Is Now-북한과 협상해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제목의 월 스트리트 한국 지부장과 타임지 편집장을 역임했던 펄스타인의 칼럼을 통해 미국은 북한과 조건 없이 협상에 나서야 된다고 강력하게 주문하고 나섰다.

펄스타인이 전 CIA 한국 지부장이자 조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코리안 소사이어티 회장과의 인터뷰 형식을 빌어 기사화 한 이 기사는 특히 ‘북한과의 회담이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상을 주는 셈’이라는 미국 정부에 만연한 의견에 대해 거부하며 위험한 상황이 악화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회담은 꼭 필요하다는 그레그의 주장을 전했다.

북한을 6번이나 방문했던 그레그는 “북한 사람들은 자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언사와 선전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지도자들이 “신중하며 제대로 교육받은 실용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레그는 ‘현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똑똑하고, 강인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인물”로서, 핵무기가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북한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는다’며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북한보다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그리고 중동을 집어삼킨 전쟁에 대해 더 우려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은 우리 심부름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중국이 북한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타임지는 그레그씨가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협상을 할 것을 촉구해왔다며 대화가 전제조건 없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돈 그레그의 생각은 옳으며 ‘지금이 그렇게 해야 할 적기’라고 지금 당장 미국 정부가 협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타임지의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ti.me/2v265Ed

NORTH KOREA 
The Time for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Is Now 
북한과 협상해야 할 시기는 바로 지금 
Norman Pearlstine 
10:50 PM ET

North Korea is “The longest running failure in the history of American espionage.”

북한은 “미국 첩보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실패한 국가”이다.

That’s the assessment of Donald P. Gregg, arguably, the man who knows more about North Korea than any living American.

이는 아마 미국인들 중 북한을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미국인 도널드 P. 그레그의 평가이다.

Gregg, 89, is a retired State Department and CIA veteran, a North Asia specia list, and a recipient of the National Intelligence Distinguished Service Medal. He says the absence of direct dialogue between the U.S. and North Korea has to change. “We can’t deal with them if we don’t understand them, and we won’t understand them if we aren’t talking to each other,” he says.

89세인 그레그 씨는 은퇴한 국무부 및 CIA 요원이자 북아시아 전문가이며 미국 국가정보국의 훈장을 받았다. 그레그 씨는 미국과 북한 간 직접적인 대화가 없는 현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면 북한을 상대할 수 없고, 북한과 대화하지 않고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Although Gregg’s thinking may be out of sync with much of what’s coming out of the Trump White House and the Congress — both are pushing for more sanctions in response to North Korea’s recent ICBM launch and its continued efforts to expand its nuclear arsenal — he has found an ally in South Korea’s new President, Moon Jae-in, who called for new talks with North Korea last week.

그레그 씨의 견해가 트럼프 대통령 정부와 의회(정부와 의회 모두 북한이 최근 ICBM을 발사하고 지속적으로 핵무기를 확대하려고 하는 것에 대응하여 제재 강화를 강력 추진하고 있다)에서 일어나는 상황과는 크게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지난 주 북한 측에 남북 회담 재개를 요청한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비슷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The two sides haven’t spoken since 2015 and the U.S. has shown little interest in negotiating with North Korea since President George W. Bush branded North Korea, along with Iraq and Iran, the “Axis of Evil” in his 2002 State of the Union speech.

2015년 이후로 남북한은 회담을 하지 않았고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낙인찍은 이후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Gregg, who has been to North Korea six times, rejects the prevailing view in Washington that meeting with North Korea rewards bad behavior. Instead, he says talks are necessary to “keep a dangerous situation from becoming worse.” He also opposes sanctions, saying they haven’t worked and they only serve to make North Korea more intransigent.

북한에 여섯 차례 방문했던 그레그 씨는 북한과의 회담이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상을 주는 셈이라는 미국 정부에 만연한 의견을 거부한다. 대신, 그레그 씨는 북한과의 회담은 “위험한 상황이 악화되지 못 하도록”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북한에 대한 제재에도 반대하며, 북한에 대한 제재는 효과를 보기는 커녕 오히려 북한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KOREAN PENINSULA North Korea is Able to Launch a `Limited Missile Attack,` Warns Top U.S. General

북한이 ‘제한적 미사일 공격’을 할 수 있다고 미 고위급 장성이 경고

In an interview at his Armonk, New York, home, Gregg is quick to acknowledge that dealing with North Korea can be difficult and frustrating. He dismisses the country’s bombastic threats to annihilate the U.S., South Korea and other perceived adversaries. “The North Koreans aren’t suicidal. They don’t want a war,” he says. Despite the rhetoric and the propaganda, he says the that North Korea’s leaders are “thoughtful, well-educated pragmatists.”

뉴욕 아르몽크에 위치한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레그 씨는 북한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고 답답할 수 있다고 즉각 시인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 그리고 적으로 여겨지는 다른 국가들을 전멸시키겠다는 북한의 위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북한 사람들은 자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북한의 언사와 선전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지도자들이 “신중하며 제대로 교육받은 실용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I first met Don Gregg 43 years ago in Seoul, where he was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station chief while I was the North Asia bureau chief of the Wall Street Journal. The American Embassy was full of savvy Korea hands, including career diplomats Ambassador Phil Habib and political counselor Paul Cleveland. North Korea was a source of tension and so too was South Korea under its authoritarian leader, Park Chung Hee. Gregg, who had come to Korea after nearly a decade with CIA in Japan, was a lousy source, remote and taciturn. But when he spoke, it was clear he had an encyclopedic knowledge of North Asian geopolitics.

나는 그레그 씨를 서울에서 43년 전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 지부의 장이었고 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동북아지부장이었다. 미국 대사관에는 한국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직업 외교관인 필 하빕 대사와 정치적 조언자 폴 클리블랜드도 그들 중 하나였다. 북한은 긴장의 근원이었고 독재자 박정희 정권하의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미국 중앙정보부에서 거의 10년을 보낸 후 한국에 온 그레그 씨는 서툰 정보통으로서, 냉정하고 과묵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면, 그가 동아시아의 지정학에 대해 백과사전 급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Gregg returned to Washington in 1975 where he continued to work for the CIA, until, after 31 years with the agency, he resigned in 1982 to become Vice President George H.W. Bush’s National Security Advisor. When Bush became President, he named Gregg Ambassador to South Korea, a position he held for four years.

그레그 씨는 1975년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CIA에서 근무했으며, 총 31년 동안 CIA에서 일한 후 1982년 퇴임하여 H.W. 부시 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는 그레그 씨를 한국 대사로 임명했고 그는 4년간 봉직했다.

Gregg then became Chairman of the Korea Society, a New York-based nonprofit known for its thoughtful essays about the Korean Peninsula, until 2009. During his years as the Society’s head, he went to North Korea five times. He last visited North Korea in 2014 and he remains in touch with North Korean diplomats at the United Nations and elsewhere.

그후 그레그 씨는 뉴욕에 있는 비영리 기관으로서, 한반도에 관한 통찰력 있는 보고서들로 잘 알려진 코리아소사이어티의 회장을 2009년까지 맡았다.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수장으로 지내는 동안, 그는 북한을 5번 방문했다. 그의 마지막 북한 방문은 2014년이었고 그는 여전히 UN 및 다른 곳에서 북한 외교관들과 연락을 유지한다.

Gregg supports Moon’s overture to North Korea, saying it is reminiscent of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 Jung’s “Sunshine Policy” which led to a softening of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Kim, who was South Korea’s President from 1998 through 2003 and who had close ties to Gregg, advocated greater contact with North Korea, coupled with substantial economic investment. He went to Pyongyang, North Korea’s capital, in 2000 for a summit meeting with Kim Jong Il, then North Korea’s leader (and the father of Kim Jong Un, the country’s current leader.) The Sunshine policy remained in effect until 2008 when one of his successors took a harder line against North Korea.

그레그 씨는 문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제안을 지지하며, 이것이 남북한 간의 관계 완화를 가져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말한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의 대통령이었으며 그레그 씨와 친분이 깊었던 김 전 대통령은 충분한 경제적 투자를 포함 북한과의 더 많은 접촉을 원했다. 그는 2000년 당시 북한의 지도자였고 현 지도자인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 수도인 평양에 갔다. 햇볕정책은 이후 후임 대통령 중 하나가 대북 강경 노선을 취하기 시작한 2008년까지 유효했다.

Gregg says that Kim Jong Un, North Korea’s current leader, is “smart, tough, and a risk taker” who sees his nuclear arsenal as protection against a U.S. attack. Although he doesn’t see North Korea abandoning its nuclear weapons and its missiles, Gregg says that nuclear proliferation is a bigger problem than just North Korea, and that he is personally more worried about Pakistan’s nuclear weapons and war engulfing the Middle East than he is about North Korea.

그레그 씨는 현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똑똑하고, 강인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인물”로서, 핵무기가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북한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한다. 비록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할 것이라고는 보지는 않지만 그는 핵 확산이 단지 북한에 국한된 것이 아닌 더 큰 문제이며, 개인적으로 북한보다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그리고 중동을 집어삼킨 전쟁에 대해 더 우려한다고 말한다.

Gregg also says the U.S. is naïve in thinking China will try to curb North Korea’s militaristic ambitions. “China’s bigger concern is a reunited Korea,” he says, and it has been consistent in opposing the continued presence of U.S. troops nearby in South Korea. “The Chinese aren’t going to carry water for us,” he says.

그레그 전 대사는 중국이 북한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순진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의 보다 큰 관심은 통일된 한국”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한국 근해에 주둔한 미 군대에 지속적으로 반대해왔다. 그는 ”중국은 우리 심부름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After each of his trips, Gregg says that he wrote or met with White House and State Department officials, urging talks. He says his efforts have been consistently rejected or ignored.

매번 방문 후에 그레그 전 대사는 백악관과 국무부 관료들에게 대화를 촉구하며 편지를 쓰거나 그들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노력은 항상 거부되고 무시되었다고 말한다.

He has also urged negotiation of a peace treaty to replace 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 that ended the Korean War. That agreement was signed by the U.S., China, and North Korea in 1953.

또한 그는 한국전쟁을 종식한 휴전협정을 대체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협상할 것을 촉구해왔다. 휴전협정은 1953년 미국, 중국, 북한이 서명했다.

Gregg laments that “it is very hard to find anyone in Washington with experience, knowledge, and an open mind when it comes to dealing with North Korea. Everyone knows malnutrition is a problem, but people are shocked when I tell them Pyongyang is an attractive, functioning city,” he says.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을 상대하는 일에 있어 경험과 지식 그리고 열린 마음을 지닌 인물을 찾기 힘들다”고 한탄하며, “영양실조가 문제임은 모두가 알면서도, 평양이 매력적이고 잘 작동하는 도시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다”고 말한다.

There is no guarantee that talks will make a difference. As B.R. Myers has written in a thoughtful book, The Cleanest Race: How North Koreans See Themselves — And Why It Matters, the north’s leaders use “race-based nationalism” to control their people. Myers writes that Pyongyang would appear weak to its own people if it renounced its nuclear ambitions. Myers also writes that South Korea’s Sunshine Policy “failed to generate even a modicum of good will from the North.”

대화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B. R. 마이어가 신중한 자신의 저서 “가장 깨끗한 민족: 북한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나-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에서도 썼듯이 북한의 지도자들은 국민을 통제하기 하기 위해 “민족기반 국가주의”를 이용한다. 마이어는 만일 북한이 핵 야심을 포기한다면 북한 정부는 자국 국민들에게 약하게 보일 것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마이어는 한국의 햇볕정책이 “북한으로부터 일말의 선의조차도 발생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Those arguments notwithstanding, it is hard to argue against increasing our diplomatic efforts with North Korea. While U.S. Defense Secretary James Mattis may be right in saying we would win a war with North Korea, he is also right in saying that any war would be “catastrophic” — to our allies and most probably to ourselves.

그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외교적 노력을 더해야 하는 것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제임스 마티스 미 국방장관이 북한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또한 어떤 전쟁도 동맹국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미국에게 “재앙적”일 것이라고 말한 것도 맞는 말이다.

President Trump has made contradictory statements about North Korea. Along with his increasingly belligerent threats, Trump, while campaigning for the Presidency and in an interview with Bloomberg News in May, said that he would be willing to meet with North Korea’s Kim Jong Un, “under the right circumstances.” Those circumstances weren’t defined.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모순적인 발언을 해왔다. 점점 호전적인 위협의 말을 던지는 와중에, 지난 대선 캠페인 기간 그리고 5월 블룸버그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상황이 적절하다면” 북한 김정은과 기꺼이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Don Gregg is right in thinking talks should begin without preconditions. Now is the time to do so.

대화가 전제조건 없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돈 그레그의 생각은 옳다. 지금이 그렇게 해야 할 적기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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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 지역 통일선봉대 활동 본격화

8.15자주통일총궐기대회 준비를 위해 지역에서 열기를 모은다

정전협정체결 64주년을 맞아 평화협정체결을 염원하는 노동자, 지역별 통일선봉대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 경남 노동자 통선대 발대식

경남에서는 120명으로 구성된 '2017 경남노동자 통일선봉대'가 21일 오전 창원노동회관에서 발대식을 갖고 활동에 들어갔다.
첫째날은 창원에서 다양한 선전전을 벌이고, 저녁 7시 정우상가 앞에서 "일제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과 친일잔재 청산, 한반도 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한 경남대회"를 열었다. 둘쨋날은 진주와 거제, 김해, 양산으로 흩어져 권역별 실천활동을 벌이고, 저녁에 경북 김천에서 열리는 "전민족대회 성사를 결의하는 토론회"를 벌였다. 셋쨋날은 성주 일대에서 '사드 미군기지 항의 퍼포먼스'를 벌이고, "사드 대신 평화협정, 전쟁연습 중단, 남북대화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 대전 통선대 활동

 

대전에서는 세상을 바꾸는 대전 민중의 힘(상임대표 이대식)과 민주노총대전지역본부 통일위원회(위원장 이성휘)는 “사드배치 철회! 한미군사훈련 중지! 남북관계 개선!”의 요구를 걸고 ‘통일선봉대’ 활동을 진행했다. 7월 21일 오전 8시 민주노총대전지역본부 앞(대덕구 대화동)에서 출정식을 갖고 하루 동안 대시민 거리캠페인, 평화기행, 통일교육과 토론 등을 펼쳤다. 이어서 대전산업단지삼거리에서 출근길 대시민 캠페인, 대전시교육청네거리에서 캠페인, 대전역서광장 등지에서 캠페인을 전개했다.

▲ 서울 통선대 발대식

 

서울지역은 22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서울지역통일선봉대 발대식을 가지고 1박 2일동안 활동에 들어갔다. 서울지통대는 용산미군기지오염 미국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투쟁 등 서울 곳곳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 부산 통선대 발대식
▲ 부산 노동자 반전평화통일 문화제

부산에서는 7월 22일 부산노동자통일선봉대 발대식을 갖고, 민주노총 부산본부, 노동자겨레하나, 부산 6.15실ㅊ펀본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부산노동자 반전평화통일 문화제에 참가하였다. 7월 27일에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산노동자 64인 출근선전전을 진행하였다.
인천, 대구 지역 등은 8월에 지역통선대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민주노총 중앙통선대는 8월 8일부터 8월 15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제18기 중앙통선대장은 박상준 금속노조 수석부위원장으로 결정되었다.

김장호 기자  jangkim21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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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관계자 “사드 발사대 4기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중국에 통보”

청 관계자 “사드 발사대 4기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중국에 통보”

등록 :2017-07-29 12:13수정 :2017-07-2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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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BM 판명나면, ‘레드라인’ 임계치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 “사드 포함 ‘북 억제 방안’ 미와 협의” 지시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밤 북한이 자강도 일대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데 대한 대응으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잔여 발사대 4기 배치를 포함해서 신뢰성 있는 확장 억제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미국과 적극 협의하라”고 29일 지시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미 배치된 사드 발사대 2기는 신속히 진행하고, 잔여 발사대 4기를 경북 성주 기지에 임시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사대 추가 배치는 전날 국방부가 10~15개월 걸리는 일반환경영향평가 계획을 밝혀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관측을 낳았으나 하루 만에 뒤바뀐 것이다.

 

이 관계자는 “사드 잔여 발사대 추가 배치는 문 대통령이 결단한 것으로 보면 된다”며 “일반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될 시점이지만, 북한의 미사일 도발 강행에 따라 4기에 대해서도 임시로 추가 배치하고 환경영향평가가 끝나면 배치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사드 잔여 발사대 4기를 추가 배치하기로 한 데 대해 중국에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이 사드 잔여 발사대까지 추가로 배치하기로 전격 결정한 것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보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금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 북한의 이번 미사일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판명될 경우, 한미 양국이 북한에 넘지 말라고 경고한 ‘레드라인’의 임계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레드라인에 도달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 대북 정책 기조 변화 등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지금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804797.html?_fr=mt1#csidx4df57cfdedc008eab927c8064b5e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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