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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3.1혁명의 총연출가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천도교 교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록 2019.02.19 08:05 수정 2019.02.19 08:49
 
<오마이뉴스>는 창간 19주년이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33일동안 특별연재 '민족대표 33인 열전'을 시작한다. 필자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처장을 지낸 친일문제 전문가이다. 이 글은 첫번째로 의암 손병희 편이다.[편집자말]
 

▲ 손병희 ⓒ


손병희의 삶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동학군의 북접 통령으로서 10만 혁명군을 이끈 혁명가이자 동학 3세 교조로 천도교를 창건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하다. 또 국권회복을 위해 3.1혁명을 주도한 독립운동의 선각자이자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인수해 후세교육에 앞장선 교육자요,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창간하고 보성사를 차려 출판 사업을 한 언론·출판인이기도 하다. 이 모두를 아울러 한 마디로 집약한다면 그는 한국 근세사의 경세가(經世家)라고 할 수 있겠다.

'서자' 콤플렉스 손병희, 동학을 만나다
   
손병희(孫秉熙)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대주리에서 태어났다. 청주목(牧)의 하급관리 출신의 부친 손두흥(孫斗興)과 그의 둘째부인 경주 최씨 사이의 서자 출신이다. 본관은 밀양, 아호는 소소(笑笑), 도호는 의암(義菴)이다. '의암'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내린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응구(應九)인데 언제 병희(秉熙)로 개명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본 망명 시절에는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쓴 적도 있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협심이 강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징크스가 하나 있었다. '서자 출신'이라는 딱지였다. 이 때문에 그는 성장기에 적잖이 방황하였다. 그 무렵 이복형(손병권)의 장남으로 7년 연상의 조카 손천민(孫天民)과 동학접주 서순택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때가 1882년 10월 5일,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신분차별에 크게 좌절하였던 그에게 동학은 커다란 희망이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골자로 하는 동학이야말로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인식하였다.

동학 입도 2년 뒤인 1884년 10월 그는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만났다. 해월은 첫 눈에 그의 인물됨을 알아봤다. 1892년 그는 동학 교단의 지도자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운동을 전개하였다. 일행은 광화문 앞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소위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였는데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3월 중순 동학교인 2만여 명은 충북 보은에 집결하여 '보국안민'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으며 정부를 상대로 보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이때 그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이 봉기하였다. 동학교도 출신의 전봉준은 봉기하면서 탐관오리 숙청과 보국안민을 천명하였다. 지역의 농민 수천 명은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불법적으로 수탈한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남접(南接)이 중심이 된 농민군은 봉기 10여 일 만에 그 숫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 5월 10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이어 정읍관아를 점령한 후 기세를 몰아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해월과 손병희가 이끈 북접(北接)은 지원은커녕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당시 북접은 농민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상황이 반전되었다. 관군과 일본군이 남접, 북접 할 것 없이 농민군을 공격하자 급기야 9월 18일 해월은 각 포(包)의 두령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이 때 손병희는 중군 통령(統領)에 임명돼 북접 소속의 10만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9월 중순부터 한 달 만에 북접 산하의 농민군은 경기도 일대를 석권하고 충북 보은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보은수비대를 격파한 농민군은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만나 연합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이 잘 훈련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당시 양측의 화력은 250대 1수준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첫 대규모 접전은 공주 우금치 전투였다. 예상했던 대로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순창에서 공동행동을 포기하고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지도부는 12월 24일 잔여부대를 해산하고는 후일을 도모하였다. 얼마 뒤 전봉준 등 주도세력은 체포되었고, 전봉준은 1895년 3월 29일(음력) 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전봉준이 처형되자 관군은 해월과 손병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도피생활로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던 해월은 후계자 선정을 서둘렀다. 그는 손병희·김연국·손천민 등 북접의 대표적 지도자 3인을 불러 놓고는 손병희를 북접 대도주(大道主)에 임명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입도 15년 만에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러나 그의 앞길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우선 해월이 처형당한 후 교단은 잠시나마 교권다툼을 벌였다. 입도 등에서 앞선 김연국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교단을 정비하는 일도 급선무였지만 관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경북 예천에 은신해 있던 무렵 관군의 추적을 피해 충북 제천까지 하루 만에 100리 길을 걸어 피신하기도 했다. 1900년 8월 교단의 지도자 손천민과 서장옥이 붙잡혀 결국 처형되었다. 손천민은 혈족이자 그를 동학으로 인도한 은인이었다. 그는 급히 호서지역으로 이동해 몸을 피한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그 무렵 시국은 날로 급변하였다. 서양의 신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조선반도를 두드렸다. 1895년에 유길준이 펴낸 <서유견문>은 당시로선 큰 충격이었다. 그는 동학을 널리 포교하려면 세계 문명국처럼 개화(開化)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는 문명개화를 배우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였다. 여기에는 관군의 무자비한 탄압을 피할 요량도 있었다.

1901년 3월 그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동생 손병흠과 이용구를 대동하고 원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미국행은 좌절되었는데 경비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에 눌러 앉게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선진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정세를 두루 살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훗날 3.1거사를 도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게 될 동지들을 여럿 만나게 됐다. 그들은 조선에서 피신한 망명객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을미사변에 연루돼 망명한 무관 출신의 권동진(權東鎭), 소위 '일심회 쿠데타 사건'에 연루돼 망명한 오세창(吳世昌) 등이 그들이다.

당시 그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으로 '충청도 부자' 행세를 했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 체류 시절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의 자제 64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선진문물을 배우도록 하였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아동문학가이자 나중에 그의 사위가 된 소파 방정환(方定煥), 춘원 이광수(李光洙)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일본 체류시절 소위 '삼전론(三戰論)'을 통해 독자적인 개화 자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과 러시아는 1903년 5월에 발생한 '용암포 사건'을 계기로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급기야 이듬해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그는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보고 일본군에 군자금 1만 원을 기증하였다. 그의 속셈은 일본군이 승리하면 그 힘을 빌려 국정을 일대 쇄신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이 일로 그는 친일파란 비난을 사게 됐고, 이 와중에 동생 병흠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러일전쟁에 앞서 그는 조선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비정(秕政)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망명객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1904년 4월, 그는 이종훈(李鍾勳) 등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도쿄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민회는 처음에는 대동회로 불렀는데 도중에 중립회로 바꾸었다가 최종 진보회(進步會)로 정했다. 1904년 8월 전국에 진보회를 결성한 후 단발을 시행하고 흰옷 대신 흑의(黑衣·개화복)를 입게 하였다. 소위 '갑진(甲辰)개화운동'이 그것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하여 조선을 근대 국민국가로 개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도에 악재가 터져 이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심복이자 진보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용구(李容九)가 개인적인 이권을 위하여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일진회는 '을사늑약' 직전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한 친일단체였다.

이 일로 동학은 세간에서 매국단체로 매도당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자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어 이듬해 1월 5일 급거 귀국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해 9월에는 이용구 등 62명의 일진회 무리를 출교(黜敎)처분하는 등 교단정비에 나섰다.

이용구 무리를 쫓아냈지만 교단은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교단의 재정을 쥐고 있던 그들에게 재단의 재산 상당 부분을 탈취 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해 대문을 봉쇄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용구 일파가 떨어져 나갈 때 신도 가운데 상당수가 따라 나가 교세도 현저하게 준 상태였다.

이 때 그가 고안해낸 것이 성미제(誠米制)였다. 끼니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교단에 바치는 성미제는 의외로 신도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교단의 재정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도주를 지낸 박인호(朴寅浩)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각 교구에서 모은 쌀을 금전으로 환전하면 매년 10만 원 정도 됐는데 그 중 5만원은 해당 지방에서 쓰게 하고 5만원은 중앙총부로 보냈다고 한다.

탄탄한 재정을 토대로 그가 시작한 사업은 '삼전론'의 마지막 '언전(言戰)', 즉 언론·출판 사업이었다. 일본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활자 등 인쇄시설을 기반으로 1906년 2월 27일 박문사(博文社)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그해 6월에는 천도교 기관지로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는데 초대사장은 오세창이 맡았다. 오세창은 창간사에서 "아한(我韓) 인민의 지식을 계발키 위하여 작(作)함"이라며 민중 계몽지를 자임했다. 실지로 <만세보>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으로는 문명개화·문화계몽 등 민중계몽에 적극 앞장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세보>는 운영난으로 창간 1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무렵 그의 또 다른 관심사는 교육 사업이었다. 그는 일본 체류시절에도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 교육을 받게 하였다. 우선 1차로 당시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보성학원(현 고려대)을 인수하였다(1907.12). 당시 그가 보성학원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 후 고려대는 교정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이어 여자 교육기관인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가 심한 경영난에 빠진 것을 알고 매월 10원씩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밖에도 보창학교, 양명학교, 창동학교 등 20여 개의 사립학교에 매달 일정액을 지원하는 등 후세교육에 관심을 쏟았다.

1910년 8월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손병희를 '사이비 교주' 등 갖은 비방과 음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천도교의 신도 수는 되레 급증하였다. 당시 나라 잃은 민중들에게 천도교는 유일한 마음의 의지처 같은 존재였다.

교인이 폭발적으로 늘고 교세가 확장되자 교인 수련도장으로 북한산 우이동에 봉황각을 건립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지도급 간부들을 이곳으로 불러 '연성회(練性會)'라는 수련회를 개최했다. 겉으로는 기도회요, 수련회였으나 이는 3.1혁명에 대비한 정신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회합을 갖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3.1혁명 거사가 이곳에서 싹 튼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권상실 이후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그 선두에는 제국신문 사장 출신으로 독립선언서 인쇄를 맡았던 옥파 이종일(李鍾一)이 있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 <묵암 비망록>에는 그런 흔적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 사원들은 비밀결사체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 등을 꾸려 활동했다. 이들은 또 군자금을 모아 독립의군부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1913년에는 '천도구국단'을 꾸려 민중봉기를 계획하기도 했다.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는 손병희, 단장은 이종일, 총무는 보성사 직원 장효근이 맡았다. 이들은 실지로 장총과 실탄을 구입해 만약에 사태에 대비하였다.

1918년 파리 세계평화회의 '민족자결주의'

1918년 1월 중순,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렸다. 이는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차원이었다. 이 회의에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4대조 평화원칙'을 공표해 주목을 끌었다. 그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약소국에겐 복음과도 같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종일 등은 손병희를 찾아가 민중봉기 계획을 설명하고 타 종교단체와 연대하여 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아직 때가 아니다"며 이를 만류하였다. 그 나름의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19년 1월 상순, 그는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측근 3인방을 불렀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국권회복 방안으로 여섯 가지를 신중하게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여섯 가지 방안은 △무력봉기 여부 △대중시위 수단 △외교활동 전개 △국민대회 개최 △독립청원서 제출 △독립선언문 발표 등이다. 그리고는 2월 28일 그는 천도교 교주 자리를 대도주 박인호에게 넘겨주었다. 이를 두고 "손병희 스스로가 죽음을 각오하고 3.1운동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진영 내 여러 그룹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또 상해 신한청년당의 여운형(呂運亨) 대표는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에 파견하여 국제정세를 살폈다.

기독교 진영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주의 유명 기업가 출신이자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두텁던 남강 이승훈(李昇薰)은 상해에서 밀파된 선우혁의 방문을 받고 관서지방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11월(음력)에는 만주·노령(露領) 지역의 망명 지사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전선에 불을 지폈다.

3.1혁명 과정에서 천도교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 가운데 하나는 자금조달이다. 김규식의 파리 파견 경비 10만원 가운데 3만원, 3.1 거사 때 기독교 측의 경비 5천원은 전부 천도교에서 부담했다. 천도교는 100만원의 독립기금을 모으기 위해 1918년 4월 4일 열린 부구(部區)총회에서 중앙대교당 및 중앙총부 건물 신축을 결의했다. 건축자금 명목으로 모은 돈 가운데 일부를 독립기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실지로 교당 건축성금으로 모인 1백만 원 가운데 건축비로 쓴 돈은 27만여 원이었으며, 대부분은 독립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성금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은 돈이었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등 측근 3인방은 동대문 밖에 있던 손병희의 사저(상춘원)를 찾았다. 이들은 그에게 때가 무르익었으니 교단 차원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흔쾌히 허락하고는 '3대 원칙'을 결정하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는 3인방에게 역할을 분담시켰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최린은 천도교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밖에 구체적인 사안은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내부에서 3.1 거사의 깃발이 오른 셈이다.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외부 인사들과의 연합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대상은 타 종교 지도자들과 구한국 관료 출신 가운데 명망가들이었다. 당시 천도교를 비롯해 종교계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아 이들을 얼굴로 내세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1차로 윤용구·박영효·한규설·윤치호 등을 대상자로 선정해 접촉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모두 허사였다. 때가 좋지 않다느니 혹은 칭병(稱病)을 내세워 하나같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그는 매국노 이완용을 찾아가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이완용마저도 끝내 사양하였다. 그러자 최린은 "독립운동의 신성한 제전에 늙은 소보다 어린 양이 좋다"는 말로 자위하면서 자신들이 대표로 나서기로 하였다.

결국 종교계로 집중하기로 방향을 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천도교 내에서는 기독교 쪽과 교섭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대외교섭 담당인 최린은 일본 유학시절에 알게 된 육당 최남선(崔南善)을 찾아가 부탁했다. 육당은 기독교 측과도 교류가 깊었고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육당은 김도태를 통해 평북 정주의 이승훈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2월 11일 상경한 이승훈은 천도교 측을 대리한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 측의 거사 추진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이튿날 평북 선천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장로교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이후에는 다시 감리교 지도자들과도 협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함태영, 이갑성 등이 큰 도움을 주었다.

2월 22일, 기독교 측 대표 격인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집을 방문했다. 이날 모임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당초 기독교 측에서 계획했던 독립청원서 대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양측이 연대하여 '일원화'를 이뤄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틀 뒤 24일 이·함 두 사람은 다시 최린을 만나 양측의 연대를 최종 결정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또 독립운동의 추진방법에 대해 세부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②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分送)한다.
③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 독립선언서 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④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할 것.
⑤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⑥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⑦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⑧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기독교 측과의 연대문제가 해결되자 불교 측 섭외에 나섰다. 최린은 2월 24일 밤 서울 재동 43번지 만해 한용운의 집을 방문하였다. 당시 만해는 이 집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행하면서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만해는 즉석에서 동참할 것을 승낙하고는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선승이라는 특수 신분과 사찰이 산간 오지에 있어 연락이 쉽지 않았다. 결국 당시 서울 종로 3가 대각사의 백용성 혼자 서명을 받아내는 데 그쳤다. 당시 불교계의 다수가 이미 친일의 길로 들어서 상태여서 더 이상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이 쉽지도 않았다.

결국 민족대표로 참가한 33인은 전부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3.1거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당시 상황 때문이었다. 총독부의 무단정치 하에서 웬만한 민족단체는 전부 해산 당하여 씨가 말라 있었다. 그나마 국내에 남은 조직적인 세력은 종교단체와 학교뿐이었다. 유림 역시 접촉하였지만 소극적인데다 참여의사를 밝힌 심산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뒤늦게 연락이 닿아 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들은 한때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할 계획으로 선언서까지 만들어 두었으나 최종적으로 민족대표들과 연대하기로 하였다. 3.1혁명 당시 이들은 민족 대연합전선의 전위대로 활동하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장로교 7, 감리교 9), 불교 2인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외에도 천도교의 박인호와 노헌용, 기독교의 함태영과 김세환, 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등을 포함하여 흔히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함태영, 송진우 등은 뒷일을 대비해 일부러 빠졌으며, 최남선은 "학자로 남겼다"며 선언서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서명자가 확정되자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각 종교별 대표자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날인 순서를 정하였다. 논의 끝에 손병희를 영도자로 모시기로 하고 제일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 다음은 기독교를 대표해 길선주(장로교)·이필주(감리교) 목사가 2번과 3번을, 네 번째로는 불교 대표 백용성의 이름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재동 손병희 집에서 최종 점검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행사 장소를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선언식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일경과 충돌하여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정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인산일인데다 3월 2일은 일요일(주일)이어서 이 날짜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언식 장소인 태화관은 한때 이완용이 살던 집으로 이곳에서 을사5조약과 한일병탄조약이 입안·논의되었다. 바로 그런 치욕의 장소에서 독립선언을 함으로써 반(反)독립적인 조약을 전부 무효화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 3.1 선언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화. ⓒ


3월 1일 오후 1시, 그는 권동진 등 측근 4~5명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예정대로 태화관 1실(室)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 시각 인근 6호실에 열혈청년 6명을 극비리에 잠입시켜 당시 상황 일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3.1운동비사(秘史)>를 펴낸 이병헌은 6인 가운데 한 사람임)

선언서 낭독은 생략한 채 바로 한용운이 간단한 인사말을 시작했다. 이어 참석한 29인의 민족대표가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곧이어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쳐 민족대표들을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하였다. 지방에서 뒤늦게 올라온 길선주·유여대·정춘수 등도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여 이들과 합류하였다. 김병조 한 사람만 상해로 망명하여 구속을 피했다.

연행 당일로부터 취조가 시작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1차 취조를 마친 후 일행은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몇 차례의 심문을 거쳐 4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다. 일제의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으니 일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사범(國事犯)에 해당됐다.

아니나 다를까 예심 재판부는 민족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극형에 처할 방침이었다. 재판부는 특히 '공약 3장'의 제2항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는 민중폭동을 선동한 것이 아니냐며 심문과정에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 물었다. 8월 상순 재판은 경성고등법원으로 이송되었다.
 

▲ 손병희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6) ⓒ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는 조선인의 반감을 우려한 나머지 이들에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의회의 여론은 곧 재판에 반영되었다. 고등법원은 내란죄 대신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장차 조선이 독립되면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며 "조선이 독립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1919년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의 진술 한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피고 등은 독립을 선언하면 어떤 순서에 의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답: 나는 세계가 개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에 보내면 일본정부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독립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문: 조선이 독립되면 어떤 정체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었는가.
답: 민주정체(政體)로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나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럽전쟁이 한창일 때 교도들과 우이동에 갔을 때,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문: 피고는 천도교를 생명으로 한다는 것이고, 사람을 훈화해야 할 지위에 있으면서 정치의 와중으로 뛰어 들어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다는 것은 피고의 사상에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것은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는데,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해지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래도 종교가가 정치에 관계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문: 그러나 역사상 순정한 종교는 정치와 혼효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 명백한데, 천도교는 정치에 대한 비밀결사이었기 때문에 이번 조선독립을 기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국가가 종교를 도와주면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는 한에는 종교는 정치에 붙어가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종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한 것이다. 나는 조선이 독립국이 되더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독립 후에 벼슬길에 나아간다고 한다면 정치상의 야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지만, 나에게는 종교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는 측근 3인방 등 7명과 함께 최고형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에 양한묵은 옥사하였다. 33인 가운데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 사이에 서울과 상해 등지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대한민간정부와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어의 몸이어서 부임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뜻도 아니었다. 이는 당시 그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한 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손병희가 없었다면 3.1운동도 없었다"

서대문감옥 독방에 갇힌 그는 천도교 주문을 외고 수련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보냈다. 평소 위장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 주옥경은 하루 두 차례씩 사식을 차입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11월 28일 뇌일혈로 쓰러져 병감(病監)으로 옮겨졌다. 이에 주옥경은 그의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감옥 측은 허락하지 않았다. 경성복심법원 재판 때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출정하여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근 1년 뒤인 1920년 10월 22일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매일신보, 1920.10.24). 보석금으로 1500원을 내고서였다. 상춘원에서 요양을 하던 그는 이듬해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날 아침 서울시내 거리에는 그의 부음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졌다.
   

▲ 손병희의 서거를 알린 동아일보 호외(1922.5.19.) ⓒ


총독부는 그의 장례식도 방해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면 시위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장례는 천도교장으로 6월 5일 치르기로 했고, 장례위원장은 권동진이 맡았다. 5일 아침 상춘원에서 발인하여 천도교 대교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후 도중에 삼선교에서 약 한 시간 동안 시민·학생 등과 고별식을 가졌다. 5천여 명이 참석한 영구행렬은 30리에 달했는데 그 뒤로 자동차 10여 대와 200여 개의 인력거가 따랐다. 그의 유해는 이날 오후 5시 우이동 봉황각 인근에 안장되었다. 해방 후 환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지사 순방 첫 번째로 그의 묘를 찾았다.

1959년 3.1독립선언 40주년을 맞아 '의암손병희기념사업회'가 꾸려졌다. 기념사업회는 그해 10월 8일 우이동 그의 묘소에서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은 노상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했다. 서거 44주년을 맞아 3.1혁명의 성지인 탑골공원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0년에는 그의 생가 유허지에 '의암기념관'이 건립됐다.

그의 측근이자 평생 동지였던 권동진은 한 잡지 기고문에서 "손 의암(義菴)은 천도교의 태양이자 우리의 구주(救主)였다"며 "실로 근세에 조선이 가진 거인(巨人) 중 한 분"이라고 상찬했다.

<의암 손병희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기미년 3.1운동은 의암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선생은 인격, 신앙심, 리더십, 인력동원과 자금지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실로 그는 3.1혁명을 기획하고 사람을 엮어내고 자금을 대는 등 3.1혁명의 기획·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 손병희 묘소(서울 우이동). 금년 1월 12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총리로는 처음으로 참배, 헌화했다. ⓒ 정운현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987
-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손병희 편', 1992.3
- 이진기, '의암 손병희의 문명개화론 인식과 천도교 개창',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2
- 박성수, '3.1운동과 의암 손병희', <중앙사론> 제21집 특집호, 2005.6
- 이현희, '의암 손병희와 3.1운동', <동학학보>, 13권 1호, 2009.6
- 송영헌, '의암 손병희의 민족독립사상',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삼천리 등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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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당이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까닭


시사평론 겉과속 20190218
  • 안호국 시사평론가
  • 승인 2019.02.19 07:59
  • 댓글 0
▲ 6.25전쟁중 이승만 정권의 최대학살 사건의 하나인 보도연맹 학살장면[사진 : 나무위키 캡처]

1. 쿠데타를 서둘러야 했던 절박한 이유

‘민간인학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은 1961년 박정희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였다. 
그 전해인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붕괴하자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요구들이 봇물터지듯이 솟구쳤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운동중의 하나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생생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학살이 자행된 전국 곳곳에서는 산더미같은 유골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학살된 민간인은 형무소 수감자 2만여명과 국민보도연맹원 20만∼25만명을 포함하여 45만명에 이른다. 제주4.3때와 여순사건때의 학살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이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투와 관련없이 자행되었으며 어떤 재판도 거치지 않고 벌어졌다. 그러니 그 잔혹함과 참상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조국의 산천도 고발한다. 푸른 별도 증언한다.’ 당시 유가족들이 내걸었던 구호를 보면 그들의 피맺힌 고통과 원한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일당이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이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 세워졌던 위령비를 모두 파괴하였다. 단순히 철거한 것이 아니라 산산조각을 냈다. 부산에 세워졌던 위령비는 아예 가루를 내어 철길변에 뿌렸다. 
진상규명운동에 나섰던 유족들을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고 고통을 주었다.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은 털끝만큼이라도 알려고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2. 학살로 만들어지고 유지된 정권

쿠데타를 일으킨 그들이 바로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었다. 이들의 학살 전력은 단지 해방정국과 한국전쟁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이미 일제가 자행한 조선인에 대한 야만적인 학살을 집행했던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지금은 ‘일제때 친일 안한 사람이 어디있느냐?’는 궤변으로 자기들의 반민족행위를 가려보려 하지만 이들이 일제식민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흉악한 야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피를 묻힌 손에 수십만 민간인의 피를 더한 박정희일당은 자신들의 야만적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들 자신의 범죄에 그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민간인학살은 이승만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한 핵심적인 일이었다.
80년 신군부는 광주에서 학살을 다시 자행하였다. 이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것은 민주화요구를 억누르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전두환은 당시 ‘누가 독침으로 사람을 찔렀다’, ‘불순분자가 개입하고 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조작된 간첩사건을 발표하는 등 사회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려고 갖은 수를 썼다. 
이처럼 이승만정권이나 전두환정권 즉 자한당의 뿌리인 민정당정권은 학살의 토대위에 세워진 정부라는 점에서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독재정권은 18년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학살로 수립되었을 뿐만아니라 학살에 의해 유지된 정권이었다. 이 또한 이 정부들의 공통점이다.

3. 학살을 꿈꾸는 무리들

자한당의 국회의원들이 ‘광주항쟁에 북한군이 개입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기괴한 상상력을 동원하여도 만들어내기 힘든 소문의 창작자는 극우편집증이 날로 심해지는 지모를 포함한 극우맹동에 사로잡힌 인물들이다. 
자한당 당대표로 출마하고 있는 4인중 2명이 이 주장의 유포에 앞장서고 있고 다른 자들도 적극 부정하지 않고 있으니 자한당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들이 이런 괴이한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들의 정체가 다 밝혀지면 매우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항쟁은 ‘지난 일’이다. 아픔과 고통이 그대로 남아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이 매우 미흡하지만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것을 뒤집어보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태극기부대’라고 불리우는 극우맹동집단의 집회에서는 듣기에도 끔직한 저주와 폭력을 선동하는 말이 넘쳐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자면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나 광주학살은 열 번도 더 일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적폐집단, 국정농단세력이 권력을 다시 쥐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최근 이들의 생각은 행동으로 나가고 있다. 황당한 ‘북한군개입설’을 퍼뜨리며 광주학살을 정당화하는 것은 이런 책동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이없다’고 웃어넘기기에는 한국의 현대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친일매국세력이 결집했던 서북청년회로 대표되는 야만적인 극우집단은 대한민국 건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받은 군부가 50년 넘게 야수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런 때로 되돌아가는 것을 열망하고 있다.

4. 광기에 사로잡힌 집단은 없어져야 한다

사대매국과 집단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무리들은 지금에 와서 태극기부대라 불리우는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자한당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8천명의 태극기부대들이 선거권이 있는 자한당 당원이 되었고, 3만명이 입당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110석이 넘은 의석을 가진 자한당은 명실상부하게 태극기부대들이 벌이는 극우망동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었다. 
태극기부대의 정당을 자처하였던 대한애국당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한국 정치와 대한민국 국회에게는 참혹한 사태다. 촛불혁명에게 매우 위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한당의 원내대표 나경원은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기로 되어있는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반대한다며 뉴욕까지 갔다. 
나경원은 ‘북이 뉴욕DC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천기를 누설해가며 반북대결을 선동하며 돌아다녔다. 아무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북의 미사일능력까지 주장하는 만용을 부린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흐름을 적대와 대결, 파괴와 살육의 낡은 시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친일로 시작한 사대매국의 광기에 사로잡히면 정신이 나간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자한당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 것인지는 정상적인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다. 
‘설마 그런 일을?’ 또는 ‘어차피 망하게 되어있는 집단이다’는 식의 이성적인 반응만으로는 이들의 책동을 막을 수 없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가 말해주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 자한당은 태극기부대식 극우선동에 앞장서는 김모가 당의 유력한 정치인으로 되어 있으며, 국정농단의 돌격대장이었던 황모가 당대표를 차지할 것이 유력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당이 촛불혁명시대의 대한민국 국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정부 집권2년차가 넘어서며 이런 저런 트집거리가 생기자 적폐집단들, 국정농단의 공범자들이 촛불혁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들을 부추키고 뒤를 봐주는 것이 국회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한당이다. 
이들이 사로잡힌 광기의 수준으로 볼때 집단학살로 얼룩진 비극과 아픔이 되풀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적폐집단, 국정농단 세력은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도 반성할 줄 모르며, 그들이 쥐었던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다시 쥐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을 정당화하려고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당치도 않는 주장을 버젓이 해대는 것이 증명해주고 있다.
자한당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한줌의 힘도 남겨주어서는 안된다. 
적폐청산, 국정농단 관련자처벌을 향한 촛불혁명에 힘을 모으고 더 힘있게 전진시켜야 한다.

안호국 시사평론가  webmaster@minplus.or.kr

관련기사icon[사설] 괴물집단 자유한국당을 해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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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 100년, 이젠 복지국가 혁명이다

[복지국가SOCIETY] 3.1혁명 명칭 변경보다 중요한 복지국가 운동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정명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는 것이다. 운동이 기존의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에 그치는 것이라면, 혁명은 기존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을 말한다. 기존의 3.1운동을 3.1혁명으로 이름을 바꾸자는 정명론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3.1운동과 3.1혁명
 
첫째, 3.1운동의 내용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3.1혁명은 전근대 사회를 근대 사회로 바꾸고, 제국이 빼앗은 주권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은 1919년 4월 11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로 이어진다. 1910년 황실과 양반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했던 국가에서 3.1혁명을 통해 민중이 처음으로 주인으로 등장했으며, 제국의 시대를 끝내고 민국의 시대를 처음으로 열었다는 것이 3.1혁명론의 근거다.
 
3.1혁명 덕분에 해방 이후에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것은 당연시되었고,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흔히 있었던 왕정복고파와 민주공화파의 갈등과 혼란이 없었다. 역사상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경험이 없었는데도, 수천 년 간 전제왕권과 35년간의 천황제를 경험한 국가에서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주공화정 이외에 다른 정치체제를 주장한 이들이 없었다. 3.1혁명이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임과 동시에 역사상 처음으로 민국으로 전환을 촉발시키고 근대 시민을 등장시킨 마중물 역할을 했다. 
 
둘째, 3.1혁명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명칭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제헌헌법 이전까지 3.1운동은 3.1혁명으로 불렸고, 제헌헌법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3.1운동으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의 서문에는 “삼일대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3.1혁명'은 '3.1', '3.1운동', '3.1(대)혁명', '독립선언', '만세운동', '기미운동', '기미독립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특정한 이름이 확정적이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1948년 5.10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30명의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했고, 유진오 안을 중심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만든 헌법 초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전문이 들어 있었다. 
 
유진오의 회고에 따르면 제헌의원의 합의에 의해 '3.1혁명'이 헌법 초안의 전문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조헌형이 제안한 '기미 3.1운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안건에 이승만이 기존의 입장을 바꿔 동의하면서 제헌의회에서 토론이 생략된 채 표결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3.1혁명이란 말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3.1운동의 성격이나 용어의 역사성을 볼 때, 이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사회시스템 전환의 근본적인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1절 기념식 당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3.1 만세 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청와대

3.1혁명 100주년의 '지금, 여기'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해방 이후에 1960년 4월 혁명,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항쟁, 2017년 촛불시민혁명 등 독재와 전제를 하려는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민중이 주도하는 운동과 혁명이 있어왔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미완의 상태다. 완전한 민주공화국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비그포르스의 말처럼 잠정적인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래에 촛불 시민혁명은 민주공화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으로 등장하는 극우주의 세력이 우리 사회라고 비켜갈 리 없다.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극복해야 한다. 형식적·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경제 문제, 특히 일자리 문제다.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지만, 우리 사회의 집권 세력과 진보 세력도 경제 문제의 해결에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기업들을 만나 고용과 투자를 유도하고 소득주도 성장, 혁신 성장, 공정 경제의 온전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지난해 후반기부터 친기업적 행보를 자주 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기조가 변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진보적 시민들이 보기에 필요한 것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공정한 관계를 만드는 경제민주화의 확립이지 재벌 대기업 규제 완화 등의 친기업적 방식은 아니다.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는 마치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와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었지만, 서울 시민의 절반이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한 것은 공급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와 분배의 문제다. 이런 구조 하에서 아무리 주택 공급을 늘려도 다주택자들의 소유만 늘어날 뿐 일반 서민들의 주택 소유율을 높이기는 어렵다. 대기업의 투자도 이와 비슷하다. 이미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의 국내 총투자율은 이미 최상위권이며, 투자를 더 유도하더라도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진보적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새로운 100년, '복지국가 혁명'이 필요하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으로 도약하려면 '복지국가 혁명'을 해야 한다. 2010년 지방선거를 전후해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복지국가 담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사회복지 지출 수준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0.2%로 OECD 평균인 19%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53.7%)에 그쳤다. 프랑스(32.0%)나 스웨덴(26.3%), 독일(24.9%)에는 비할 바가 못 되고, 심지어 신자유주의 국가인 일본(21.9%)과 영국(21.6%)에 비해서도 절반에 못 미친다. 사회복지 지출이 낮기 때문에 국민들이 부담하는 정도 또한 낮은 상태다. 2015년 기준으로 GDP 대비 국민부담률은 25.2%로 OECD 평균인 33.7%에 크게 미치지 못 하면서 32위에 머물렀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라는 불명예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제대로 된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 문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좀처럼 꺼내지 않고 있다.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복지에 대한 투자는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장기 투자, 경제 활성화,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마중물 역할을 수행하기에 공공분야에서 복지에 대한 보다 과감한 투자와 고용 창출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공공서비스 분야의 고용 비중이 선진국의 2분의 1, 심지어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다.
 
우리의 교육 환경을 둘러봐도 교사 인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교사 1인당 아동 수가 OECD 평균에 비해 초등학교는 7.1명, 중학교 9.7명, 고등학교 6.9명이 많아 OECD 국가들 평균 교사 수의 6~70%에 그치고 있다. OECD 평균을 기준으로 한다면 13만 명 이상의 교사 충원이 필요하다. 어린이집과 같은 아동 보육시설에서도 마찬가지다. 5세 아동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사 1인이 감당해야 할 아동이 평균 25~30명인데 비해 유럽연합은 5명에 불과하다. 유럽 기준으로 맞춘다면 최소한 5~6배의 정원 확대가 필요하다. 더구나 국가가 제공하는 국공립 보육시설에 다니는 아동 수는 2018년 기준으로 13%에 불과해서 그동안 육아를 민간 시장에 내팽겨 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육아와 교육에 대해 엄마와 가족들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국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에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출산 파업이라는 결과를 맞고 있다. 이런 문제는 육아와 교육뿐만 아니라 노동과 노후 등 생애주기별로 모든 분야에 걸쳐 있기 때문에 세계 최저 출산율, 세계 최고 자살률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합계 출산율 1.0이라는 것은 한 세대가 지날 때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계적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집단적으로 '국가 소멸'의 길로 가고 있다.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바꾸자는 정명론이 일자,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도 공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지난 100년 전의 사건을 제대로 정리하고 명명하는 역사 작업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지금의 경제사회적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독일 바이미르 공화국의 무력한 길을 가거나 극좌·극우의 극단적인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1919년 3.1혁명을 통해 민주공화정의 단초를 열고, 지난 100년 동안이 민주공화국의 틀을 만드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100년은 복지국가 혁명을 통해 실질적인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3.1혁명 100주년은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100년의 청사진을 만들고 실행 계획을 구체화시킬 시점이다.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 http://www.podbbang.com/ch/10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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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사회·경제 민주화를 통해 역동적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2007년 출범한 사단법인이자 민간 싱크탱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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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만난 김용균 어머니가 기자들에게 당부한 말은

유가족과 시민대책위 기자회견 “언론에 감사… 협의체 이행과 발전산업 민영화 보도해주길 당부”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r  2019년 02월 18일 월요일
 

고 김용균씨의 유가족이 18일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용균씨 참사를 보도한 언론에 후속 취재를 거듭 당부했다.

유가족은 이날 언론에 계속 관심을 가져 달라고 요청했다. 김미숙씨는 “언론도 성심성의껏 어렵고 힘든 상황을 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언론이 함께 해주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용균씨 아버지 김해기씨도 “남은 용균이 동료들이 지금 힘들게 일하는데, 이를 해결하려면 앞으로도 여러분(기자들) 협조가 많이 필요하다. 함께 힘 모아 좋은 사회 되도록 노력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시민대책위는 정규직 전환 과정을 두고 후속 보도를 촉구했다. 당정은 지난 5일 석탄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조사하고 방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김용균씨가 일한 연료·환경설비운전 분야 정규직 전환을 위해 통합 노·사·전 협의체를 구성하기로 약속했다. 경상정비 분야도 정규직 전환을 논의할 통합 노·사·전 협의체를 만든다. 

박준선 시민대책위 상황실장은 “협의체가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하고 차별을 없앨 계기가 되도록 언론에서도 합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취재와 보도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통합협의체와 경상정비분야 노사전협의체 어떻게 구성할지 이날을 시한으로 한 공문을 보냈으나 세부답변을 받지 못했다. 

▲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18일 앉아서 진행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 끝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언론의 관심을 거듭 요청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18일 앉아서 진행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 끝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언론의 관심을 거듭 요청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기자들의 질문이 끝난 기자회견 끝무렵, 김미숙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기자들을 향해 “한고비 넘겼지만, 아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갈 길이 멀다”며 끝까지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언론이)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이날 저녁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 대통령과 면담한 결과를 밝혔다. 

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문 대통령에게 참사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김미숙씨는 “이제는 한 고비를 넘겨, 앞으론 용균이 동료들을 살리는 일을 생각한다. 대통령께 진상규명이 잘 되는지 유가족과 함께 점검해주길 부탁 드렸다”고 했다. 그는 “대통령이 같이 해준다고 약속했다. 진심으로 말했다고 생각해 정말 마음이 놓인 기분으로 나왔다”고 했다. 

▲ 고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고 김용균씨 유가족과 시민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 유가족 및 시민대책위원회 대통령면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시민대책위는 발전산업 민영화도 언론 조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석운 시민대책위 공동대표는 “기자들이 (김용균 노동자 참사를) 눈물 흘리며 취재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언론노동자들이 열심히 해 줘 이만큼이라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박석운 공동대표는 “비정규문제 핵심으로, 에너지산업 분할민영화의 구조적 문제, 발전마피아와 전력마피아를 심층취재하는 새 흐름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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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

‘말모이’, 그 감춰진 이야기<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김동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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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8  0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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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로 출발해 『큰사전』으로 결실맺다

‘말모이’란 영화가 세간의 화제다.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팩션(faction)이다. 작가의 기발한 구상에다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로 그 줄거리의 진위를 떠나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생소한 말모이란 단어도 새삼 회자되고 있다.

말모이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명사로는 사전(辭典)에 대한 순우리말 표현으로, ‘말’이라는 명사에 ‘모이’가 붙어 만들어진 합성어다. ‘모이’는 ‘모(으)다’의 어근인 ‘모’에 명사파생접사 ‘이’가 붙어 형성된 말이다. 따라서 ‘말모이’란 ‘우리말을 모아 놓은 것’ 혹은 ‘우리말을 모아 놓은 책’ 정도로 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후일 최현배가 사용한 ‘말광(말을 모아놓은 곳간)’이라는 순우리말 역시 이와 유사한 단어다.

고유명사로서의 『말모이』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이하 광문회라 칭함)가 주도한 ‘현대적인 국어사전’의 제목을 뜻한다. 『말모이』 사전 편찬의 출발은 1911년 광문회를 중심으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인 김두봉·권덕규·이규영이 민족주의적 각성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주시경의 죽음(1914)과 김두봉의 망명(1919), 연이은 이규영의 죽음(1920)으로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그 원고가 계명구락부로 이어지고 조선어학회로 계승되면서 편찬 작업이 이어졌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당시 압수된 원고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1947년 『조선말큰사전』(1권)으로, 이후 1957년 『큰사전』(6권)이란 이름으로 완간되었다. 『말모이』(1911)로 출발하여 『큰사전』(1957)으로 결실을 맺었다.

국문연구회로 출발해 한글학회까지 이어지다

영화 ‘말모이’로 대유(代喩)되는 조선어학회의 맹아는 국문연구회(혹은 국어연구회, 1907년 1월)로부터 출발한다. 주시경이 연구원 겸 제술원으로 참여한 이 단체는 지석영이 대한의학교내에 설치한 최초의 우리말 연구회였다.

이후 1907년 7월 우리말 연구의 필요성에 의해 마련된 기관인 국문연구소가 등장한다. 이 기관은 대한제국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으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설치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연구기관이었다. 주시경은 국문연구소의 주임위원(奏任委員)과 후일 전임위원(專任委員)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뿌리는 1908년 주시경에 의해 조직된 국어연구학회다. 이 학회의 주축은 하기국어강습소의 졸업생 및 유지들이었다. 이 강습소는 주시경이 1907년 국어·국문을 강습하여 자국사상(自國思想)을 장려할 목적으로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한 강습기관이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09년 국어강습소(후일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를 정식으로 부설하고 이후 수많은 수강생들을 배출하였다. 1917년까지 중등과가 6회에 걸쳐 총 265명, 고등과가 5회에 걸쳐 110명, 초등과는 1914년 1회 졸업생 8명을 길러냈다.

주시경의 후계학자 대부분이 이 곳 출신으로 후일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뤘다. 김두봉·이규영·권덕규·신명균·최현배·이병기·정열모 등을 위시하여 윤복영(尹福榮)‧송창희(宋昌禧)‧박승두(朴勝斗)‧김두종(金斗鍾)‧이세정(李世楨)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이곳 출신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망하면 국어도 없어진다. 일제의 병탄 이후인 1911년 9월 국어연구학회를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로 바꾸게 된 배경이다. 국어강습소 역시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하였다. 주권을 빼앗겼던 시기,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의 국어를 국어라 못하고 조선어라는 명칭으로 타자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국어로 자리 잡은 것이 일본어다. ‘나’를 ‘나’라 못하고 ‘그’라고 칭하게 된 역사적 아픔이다.

그 배경은 이렇다. 조선언문회로 바꾸기 한 달 전인 1911년 8월,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조선교육령」을 발포한다. 제5조는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전수하고 특히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일본어-필자 주)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우리말이 나그네의 언어인 조선어로 몰락하고, 일본어가 국어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 행세를 하게 됨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한글학회로 자리 잡았지마는, 조선어학회란 명칭 역시 그 아픔의 연장이었다.

국어를 국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에서, 조선언문회라는 명칭은 주시경에게도 뼈아픈 충격이었다. 조선언문회를 순우리말 ‘배달말글모듬’으로 바꾼 이유다. 1913년 ‘배달말글모듬’을 ‘한글모’로 다시 개칭하고 1914년에는 조선어강습원도 ‘한글배곧’으로 바꿔 불렀다.

1914년 7월 주시경이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 김두봉과 신명균 등이 중심이 되어 ‘한글모’와 ‘한글배곧’을 이끌었다. 광문회로부터 시작된 『말모이』를 조정하여 사전으로 개편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1916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받들어 『조선말본』을 출판한 김두봉이 1919년 상해로 망명했다. 또한 1920년에는 조선언문회통사(朝鮮言文會通史)인 『한글모죽보기』를 기록한 이규영마저 사망하고 만다.

신명균‧권덕규‧장지영‧김윤경‧이병기 등은 새로운 재충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1921년 휘문의숙에 모여 조선언문회(한글모)를 조선어연구회로 재창립한 배경이다. 이들은 조선어강습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가갸날’(1926, 1928년에 한글날로 개칭)을 제정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에 적극 앞장섰다. 그리고 1927년에는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하여 한글 보급에 더욱 매진한다. 이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편되었고 해방 이후인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이어진 것이다.

감춰진 이야기, 대종교

‘말모이’에서 감춰진 부분도 지나칠 수 없다. 가장 꼽아야 할 이야기가 대종교와의 연관성이다. 흔히 원초주의(原初主義) 입장에서 민족을 이해할 때 중시되는 요소로 종교와 언어를 꼽는다. 이 두 요소는 집단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정체성은 중차대한 위기의 시기였다.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에 의한 대종교 말살과 일본어 국어정책에 의한 우리말의 탄압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에 대한 대종교의 저항 역시 총체적 방면에서 이루어진다. 언어적 저항도 대종교 항일투쟁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역사적으로도 훈민정음 등장 이후 구한말까지, 우리의 말과 글은 국어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저 언문(諺文)이나 ‘암클’ 정도로 업수이 여김이 전부였다. 그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화적 사회구조와 밀접하다. 까닭에 우리글의 의미를 민족문화의 반열 위에 내세운다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틀과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의미와도 상통했다.

정신적으로는 유교적 사대모화사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며, 구조적으로는 기득권 지식층의 한문어(漢文語)를 청산하고 우리글의 민중 보급을 조직적으로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말모이’ 시대의 한글운동은 중화적 가치의 청산과 함께 일본어 국어정책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이중투쟁이었다.

대종교와 ‘말모이’는 표리 관계다.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단체나 연관 인물들의 그 불가분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말모이』는 광문회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어학회로 연결된다. 최남선이 주도한 광문회는 대종교의 정신으로 국학의 재건을 도모했던 모임이다. 또한 우리의 고전들을 수집‧간행‧보급하여 우리 민족 역사와 전통의 우수성을 일깨우려 단체였다.

당시 직접 참여한 인사로서는 최남선‧김교헌‧박은식‧류근‧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이인승‧남기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김교헌‧박은식‧류근 등은 최남선의 실질적 스승이었다. 또한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은 『말모이』를 주도한 핵심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대종교의 중심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말모이』의 1차적 성과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간행(1936년)한 조선어학회 역시 대종교의 국내비밀결사였다. 당시 대종교의 핵심이었던 이극로를 비롯하여 최현배‧신명균‧권덕규‧이병기‧이윤재‧한징‧정인보‧안재홍 등이 그 중심인물들이다,

조선어학회사건도 대종교와의 연관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당시 교주였던 윤세복이 만주 동경성에서 이극로에게 보낸 ‘대종교 노래 가사[檀君聖歌]’와 연결된다. 그 가사가 조선어학회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일경(日警)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조선어학회사건의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다.

일제가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중심(神道中心)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하는 표방 하에서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 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라고 못 박은 것이나, “(조선어학회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가지고,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은 목적한 실력배양단체”로 지목한 것도 동일하다.

국내의 조선어학회사건과 만주의 임오교변(壬午敎變, 대종교지도자 일제구속사건)이 1942년 10월〜11월 사이 동시에 자행된 것도 이러한 배경과 연결된다. 우리 정체성의 중심인 정신(대종교)과 언어(조선어학회)를 일거에 붕괴시키기 위함이었다.

가슴에 새겨야 할 인물들, 주시경부터 한징까지

‘말모이’ 그 중심인물들의 삶 또한 굴곡이 컸다. 그 대표적 인물이 대종교적 언어민족주의의 선봉에 섰던 주시경이다. 배재학당 졸업 당시에 받은 예수교 세례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무력침략보다 정신적 침략을 더 무서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914년 7월 27일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한글을 통한 언어민족주의와 한글 대중화를 위해 오로지 헌신했다.

그는 국어학자인 동시에 국어를 통하여 민족혼을 불어넣은 사상가였다. 1908년에 이미 우리말에 대한 연원을 단군시대로부터 찾았으며, 그러한 우수한 언어와 문자에 대해 사천 년 동안 연구가 없어 어전(語典) 한 권도 갖추지 못했음을 개탄한 인물이다.

주시경은 1909년 대종교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대종교의 교리와 거의 동일한 주장으로 그의 논리를 펼쳤다. 그가 1909년 『국문연구』에서 주장한 단군의 신성한 정교(政敎)에 의해 그 언어는 고상하고 국문의 본원도 심원하다고 말한 것이나, 1910년 『국어문법』을 통해 드러낸 대동아주의적 역사관 및 우리 국어의 출현이 단군의 강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특히 1909년에 저술한 『국문초학』에서는 단군의 출현 배경과 조선이라는 국호에 대해 설명하고, 단군신앙과 연관된 유적 소개와 함께, 단군시대의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찬양하고 있다.

주시경의 이러한 주장은 대종교 사관에 나타나는 ‘단군-부여 정통론’과 맞닿는 것이며, 단군시대의 신성한 역사에 대한 찬양 또한 대종교 사관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우리글의 명칭을 ‘한글’이라고 처음 명명한 인물도 주시경이었다.

광문회 시절부터 주시경과 함께 『말모이』 편찬을 주도한 김두봉·이규영·권덕규의 삶도 애환이 많다. 김두봉은 1914년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이어 『조선말본』을 저술하고, 이어 1916년에는 대종교 교주 홍암 나철의 구월산 순교(殉敎)를 시봉(侍奉)하였다. 1919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도 『깁더조선말본』(1922년)을 간행한다. ‘깁더’란 증보(增補)했다는 의미다. 해방 이후 북한을 택한 김두봉은 북조선의 국어 확립에 적극 기여하였으나, 종파주의자로 낙인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규영 역시 31세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우리말 바로잡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인물이다. 그의 저술 『온갖것』(비망록), 『말듬』(기초문법서), 『한글모죽보기』(조선언문회연혁), 『한글적새』(국어연구서), 『읽어리가르침』(敎案) 등에 나타나는 우리말 갈고 닦음이 그 흔적들이다.

권덕규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김두봉의 망명과 이규영의 죽음 이후 『말모이』의 유업을 떠안다시피 한 그였다. 식민지라는 ‘술 권하는 사회’ 속에서 집 팔아 술로 채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 그가 바로 권덕규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병으로 인해 기소중지가 되고 해방 이후 쓸쓸하게 숨을 거둔다. 애틋한 것은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27년 『한글』 창간의 동인인 이병기·신명균·최현배·정열모 등의 자취도 더듬어 볼 일이 다. 이병기는 우리나라 현대시조의 개척자로,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직접 배웠다. 창씨개명의 거부와 일체의 친일적 내용이 담긴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은 대쪽 같은 애국자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배경 또한 대종교와 무관치 않다.

신명균의 삶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는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1933년 10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해 11월 『주시경선생유고』를 엮어 발행한 인물도 신명균이다. 그의 삶에서도 대종교는 정신적 버팀이었다. 1941년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 자결 당시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도 스승 홍암 나철의 사진이었다.

‘한배나라’ 하면 최현배가 떠오른다. ‘조국(祖國)’을 그렇게 부른 최현배다. 그는 주시경‧김두봉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교한 후 한글공부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한배’ 역시 대종교적 용어다. 학창시절 그가 중시한 두 가지가 주시경에 의한 한글공부와 나철에 의한 대종교 참여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현배의 한글사랑과 나라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여준 일제에 대한 문화투쟁의 배경 역시 대종교였음을 알게 해 준다.

정열모는 김두봉‧이극로와 함께 잊혀진 한글학자다. 6‧25 당시 월북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대종교 정신을 배경으로 조선어사전편찬위원,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글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대종교의 주요 요직 활동은 물론 해방 후 대종교단에서 설립한 홍익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인물도 그였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도 있다. 치타(러시아)에서 상해까지 걸어와 이광수를 놀라게 했다던 이극로가 그다. 조선어학회의 동력은 사실상 이극로의 열정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사장으로 어학회를 사실상 이끌었던 그는 주시경의 제자인 김영숙(金永肅, 대종교명으로는 金振)을 통해 한글연구에 눈을 뜬다. 이후 윤세복, 신규식, 안희제로 연결되는 대종교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독일로 유학을 했다. 더욱이 이극로는 베를린대학에 조선어과를 설치해 전세계에 우리 국어‧국문 그리고 우리 문화를 최초로 선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은인이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와 한징도 묻어둘 수 없다. 특이하게도 이윤재는 1920년대 초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귀국 후 흥사단 활동과 더불어 대종교에 적극 가담하면서, 1928년 대종교남도본사에서 창간한 『한빛』을 주간한다. 이윤재는 그의 한자 호인 ‘환산(桓山, 한뫼)’의 ‘환’을 대종교의 ‘환인‧환웅’에서 따올 정도로 대종교 신자로서의 역사 인식이 투철하였다.

한징은 1920년대 초 민족언론 창달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자 출신이다. 그 역시 1923년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민족적 저항의 지평을 크게 넓혀 갔다. 그 정신으로 언어민족주의에 눈을 뜨고 조선어학회에 적극 가입한다. 그리고 이윤재·이극로·신명균·최현배·이중화 등, 대종교 동지들과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올 해는 3‧1독립선언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나 민간이나 그 의미를 새긴답시고 세상 시끄럽다. ‘말모이’ 영화 역시 그러한 시의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 주제 설정이나 올 초에 개봉한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말모이’는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현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핀 바와 같이 그 본질은 숨겨진 정신 속에 있다. 영화 ‘말모이’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그 본질을 찾아가라는 암시일 듯하다.

모든 것이 타자화 된 지금이다. 나를 나라 하면 눈총을 받는다. 국수주의자, 배타주의자, 편협주의자로 낙인됨이 태반이다. 그러나 묻는다. 나 없는 세상에 너는 누구고 그는 또 누구냐. 그저 너 나 없이 아무개일 뿐이다. 나를 나라고 못하는 세상에서는 너도 없고 그도 없다.

이제 한힌샘도 가고 배못, 검돌, 한별도 갔다. 가람, 주산(珠山), 외솔, 백수(白水), 고루, 한뫼, 효창(曉蒼) 등등의 인물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말모이』를 도모하던 동아리 역시 흔적마저 희미하다. 그들이 찾고 만들고 버티고 지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다. 나의 정신을 통한 나의 언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감춰진 부분을 지금껏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나를 위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그들이다. 나를 나라고 외치며 살고자 목숨까지 걸었던 그들이다. 시간이 가고 아무개들만 날뛰는 이 세상에서, 또다시 나라고 외쳐댈 이 누구 없는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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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흐려도 아름답다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9/02/18 11:44
  • 수정일
    2019/02/18 11:4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필름사진 여행기] 제주 동부지역 오름 탐방... 구름을 뚫고 내려온 빛내림

19.02.18 10:44l최종 업데이트 19.02.18 10:44l

 

이 기사의 사진은 모두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촬영 후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사진마다 기종 및 필름의 종류를 괄호 내에 표기하였습니다. - 기자 말

1월 7일 새벽 0시 30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을 위해 차량에 각종 야영 장비와 옷을 잔뜩 넣고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눈이 쌓인 맑은 날을 기다려 한라산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열흘 동안 기다리게 되었고, 2주 정도 기간 동안 여유롭게 많은 곳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전 기사: 눈 귀한 겨울... 열흘 기다렸더니 한라산에 드디어

16박 17일 동안 계속되었던 여행은 미세먼지와의 눈치 싸움이었다. 하루 전에 예보를 확인하고 그날 그날 여행 계획을 즉석으로 세웠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바다로 나갔고 비교적 시야가 좋은 날은 산으로 올랐다. 최고로 심했던 이틀은 실내에서 책을 읽었다.

손자봉에서 바라본 동쪽 풍경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여행지를 좋아한다. 창작이 가미되지 않는 풍경사진을 찍다보니, 다소 소박하더라도 흔치 않는 모습을 담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위성 지도를 볼 수 있으니 참 편하다. 밤이 되면 텐트에서 다음 날 가고 싶은 곳을 지도 어플을 통해 찾는다.

1월 10일 오후, 손자봉(손지오름)으로 향했다. 그곳에 오르면 용눈이오름과 성산일출봉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발걸음이 많이 닿지 않다 보니 등산로를 찾기 어려웠다. 오름은 그리 높지 않아서 20분도 걸리지 않아 능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자봉에서 본 용눈이오름 (SW612/Portra400)늦가을이었다면 하얗고 풍성한 억새꽃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갈색으로 물든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 손자봉에서 본 용눈이오름 (SW612/Portra400)늦가을이었다면 하얗고 풍성한 억새꽃이 장관이었을 것이다. 갈색으로 물든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안사을

손자봉의 매력은 비단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만 있지 않다. 손자봉 자체의 모습도 꽤나 아름답다. 어떤 블로거는 '모히칸 머리를 한 사나이'같다고 표현했다. 아래의 사진은 동검은이오름(동거미오름)과 손자봉 사잇길에서 담은 모습이다.
 
멀리서 본 손자봉 (SW612/Pro400H)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벌판과 파란 하늘 사이로 손자봉이 보인다. 왼편에 있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 멀리서 본 손자봉 (SW612/Pro400H)겨울에도 초록빛을 잃지 않는 벌판과 파란 하늘 사이로 손자봉이 보인다. 왼편에 있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안사을
 
손자봉과 동검은이오름 주변은 그야말로 제주 내륙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관광지로 개발할 만큼 엄청난 경치가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바람을 친구 삼아 홀로 몇 시간이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이름없는 언덕에서 (SW612/Portra400)왼쪽부터 다랑쉬오름, 족은다랑쉬오름, 손자봉이 있고 그 뒤로 아주 작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 이름없는 언덕에서 (SW612/Portra400)왼쪽부터 다랑쉬오름, 족은다랑쉬오름, 손자봉이 있고 그 뒤로 아주 작게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안사을
북쪽을 바라보면 (SW612/Portra400)왼편에는 높은오름, 오른편으로는 다랑쉬오름의 일부가 보인다. 가운데 작게 보이는 오름은 돗오름이고 그 오른편으로 비자림이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15킬로 가량 떨어진, 제주 북쪽 바다.
▲ 북쪽을 바라보면 (SW612/Portra400)왼편에는 높은오름, 오른편으로는 다랑쉬오름의 일부가 보인다. 가운데 작게 보이는 오름은 돗오름이고 그 오른편으로 비자림이 있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15킬로 가량 떨어진, 제주 북쪽 바다.ⓒ 안사을

이 날의 탐방은 사실 사전답사에 가까웠다. 일출경을 담을 위치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손자봉에서 용눈이오름과 성산일출봉을 방향으로 사진을 담을 위치를 정하고 며칠을 기다렸다. 이윽고 먼지가 없는 날이 되었고 어둠 속을 천천히 달려 손자봉을 다시 찾았다. 

수면과 맞닿은 해는 찍을 수 없었다. 구름이 잔뜩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출시각 직전에는 하늘이 비어있었는데 해가 떠오르는 속도와 맞추어 기가 막히게 해를 가렸다. 허탈감에 터덜터덜 산을 내려와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구름을 뚫고 빛이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다시 산을 올랐다. 삼각대 채로 카메라를 손에 들고 뛰었다. 이런 극적인 풍경은 10분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침이 말라 목이 붙으면 소리를 질렀다. 원맨쇼에 가까운 행위 덕분에 용눈이오름을 향한 태양의 스포트라이트를 잡을 수 있었다. 
 
손자봉에서, 아침 (SW612/Pro400H)빛내림을 선명하게 담기 위해 노출을 두 스톱 아래로 계산했다.
▲ 손자봉에서, 아침 (SW612/Pro400H)빛내림을 선명하게 담기 위해 노출을 두 스톱 아래로 계산했다. ⓒ 안사을
하늘의 틈 사이로 (SW612/Pro400H)5분 후의 모습. 이전 사진과 달리 한 단계만 아래로 노출을 계산했다.
▲ 하늘의 틈 사이로 (SW612/Pro400H)5분 후의 모습. 이전 사진과 달리 한 단계만 아래로 노출을 계산했다.ⓒ 안사을
 
성읍 영주산의 계단을 오르면

예로부터 성읍마을의 주산으로 여겨진 산이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신성한 '영주산'이다. 사실 영주산이라는 명칭은 한라산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 그것이다.

봉래산은 금강산이고 방장산은 지리산이며 영주산은 지금의 한라산이다. 성읍의 주산에 영주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을 보면 그만큼 이곳이 주민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성읍마을에서 천미천을 따라 서북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영주산의 들머리를 만날 수 있다. 정상까지는 약 25분이 소요된다. 오름의 특성상 높이는 낮지만 쉼 없이 올라가는 길이니 잠시나마 숨이 찰 각오는 해야 한다.

이곳은 '산'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역시 오름 중의 하나이다. 말굽형 분화구가 있어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산체로 보이고, 동남쪽이 터져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직접 오르기 전까지는 기생화산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영주산 초입 (SW612/Pro400H)왼편의 움푹한 곳이 분화구. 서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 영주산 초입 (SW612/Pro400H)왼편의 움푹한 곳이 분화구. 서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안사을
색색의 계단과 동쪽 풍경 (SW612/Pro400H)숨이 찰 즈음에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풍경
▲ 색색의 계단과 동쪽 풍경 (SW612/Pro400H)숨이 찰 즈음에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풍경ⓒ 안사을
 
이 날의 미세먼지 상황은 '나쁨'이었다. 영주산은 해발 326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주변이 평지이고 건물이 거의 없어서 동쪽으로는 해변까지의 평원, 서쪽으로는 한라산의 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뿌연 시야였지만 마음을 비우고 셔터를 눌렀다.
 
영주산 정상에서 (SW612/Pro400H)정상에서 바라본 동편의 모습
▲ 영주산 정상에서 (SW612/Pro400H)정상에서 바라본 동편의 모습ⓒ 안사을
정상에서 본 성읍저수지 (SW612/Pro400H)지도나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저수지. 사진의 가장 왼편에 매우 희미하게 한라산이 보인다.
▲ 정상에서 본 성읍저수지 (SW612/Pro400H)지도나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저수지. 사진의 가장 왼편에 매우 희미하게 한라산이 보인다.ⓒ 안사을
 
성읍저수지 주변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억새 평원이 펼쳐져 있다. 저수지의 주변은 산에 오르기 며칠 전에 미리 탐방을 다녀왔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곳이었는데 몇몇 글을 보니 밭을 일구는 주민들이 일부 몰지각한 관광객들로 불편을 겪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는 길을,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흔적 없이 답사했다. 저수지와 평원은 영주산과 개오름의 사이에 있다. 개오름으로 가는 길은 고요한 산책로로 손색이 없었는데 개오름으로 진입할 수는 없다. 사유지를 보호해 달라는 팻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읍저수지와 영주산 (645N/Ektar100)파란 하늘보다 더 짙은 물빛 뒤로 영주산이 보인다.
▲ 성읍저수지와 영주산 (645N/Ektar100)파란 하늘보다 더 짙은 물빛 뒤로 영주산이 보인다.ⓒ 안사을
물과 길 (SW612/Pro400H)두시간여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도 좋을 듯 한 곳.
▲ 물과 길 (SW612/Pro400H)두시간여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아도 좋을 듯 한 곳.ⓒ 안사을
억새 사이로 걷는 길 (645N/Ektar100)개오름 방향으로 향하는 길.
▲ 억새 사이로 걷는 길 (645N/Ektar100)개오름 방향으로 향하는 길.ⓒ 안사을
영주산 뒤편 억새밭 (SW612/Pro400H)억새의 지평선 너머로 오름들이 하나 둘 씩 보인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풍경.
▲ 영주산 뒤편 억새밭 (SW612/Pro400H)억새의 지평선 너머로 오름들이 하나 둘 씩 보인다. 제주도의 전형적인 풍경.ⓒ 안사을
 
백약이오름에서 다시 만난 빛내림

기사에 다룬 곳들 외에도 붉은오름, 동검은이오름, 아부오름 등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 중 관광객이 가장 많았던 곳은 백약이오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오는 등산객들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었다.

백약이오름은 분화구의 모양이 확연히 드러나있다. 분화구 능선까지 오르막을 오른 뒤 분화구 주변을 한바퀴 돌면 훌륭한 산책 코스가 된다. 한라산을 비롯해서 그 동안 올랐던 많은 오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날 역시 구름이 잔뜩 하늘을 가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주도는 흐려도 아름답다.
 
백약이오름에서(1) (SW612/Pro400H)회색 하늘에도 빛은 있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바로 영주산이다.
▲ 백약이오름에서(1) (SW612/Pro400H)회색 하늘에도 빛은 있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산이 바로 영주산이다.ⓒ 안사을
구름과 분화구 (SW612/Pro400H)잔뜩 찌푸린 하늘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
▲ 구름과 분화구 (SW612/Pro400H)잔뜩 찌푸린 하늘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하다.ⓒ 안사을
백약이오름에서(2) (SW612/Pro400H)흩뿌리는 빛줄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 백약이오름에서(2) (SW612/Pro400H)흩뿌리는 빛줄기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안사을
 
※ <필름사진 여행기>, 제주도 야영 생활 및 해변 풍경에 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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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풍력 발전이 혐오시설이 된 까닭

태양광·풍력 발전이 혐오시설이 된 까닭

이수경 2019. 02. 18
조회수 9 추천수 0
 
괴담보다 그 토양이 문제다… 지역과 주민이 개발의 주체 돼야
 
06036318_P_0.JPG»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30일 전북 군산시 유수지 수상 태양광 부지에서 열린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 행사를 마치고 수상 태양광 시설을 돌아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은 대표적인 지속가능에너지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에너지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원자력과 석탄발전을 대체할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려가야 한다. 그런데 지속가능하다는 신재생에너지 중에서도 풍력과 태양광이야말로 성골에 해당하는 진짜배기 지속가능에너지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지속가능에너지 풍력과 태양광발전이 혐오시설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나라 전력 생산량에서 신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5.57%1), 태양 및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율(수력 포함)은 3.4%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정부가 지속가능에너지를 꾸준히 늘리겠다는 계획을 거듭 밝혀왔지만 재생에너지가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줄거나 정체를 거듭해 왔다.(그림 1)
 
재생.jpg
그림 1. 전기생산에서 재생에너지(태양광·열, 풍력, 수력 포함) 점유율 연도별 변화(자료: 세계에너지통계, 에너데이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공약은 우리나라도 이제 지속가능한 에너지 구조로 전환되어 친환경적인 신재생에너지가 확대되는 전기를 마련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재생가능에너지 확대가 예상치 못했던 암초를 만났다. 친원전 전문가나 업계의 반발이야 예상했던 일이지만 지역주민이 태양광발전을 혐오시설 대하듯 반대에 나서리란 건 의외였다.
 
2016년 전북 장수에서는 주민과 전북 환경단체의 반대로 풍력단지 개발이 무산되었다. 장수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백두대간을 파괴하고 가야유적을 훼손할 것이라는 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장수 뿐 아니라 풍력발전에 대한 인근주민의 반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대규모 풍력단지의 환경훼손과 소음 등으로 인근 주민과 환경단체마저 풍력단지의 대규모 입지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보편적 추세다.  
 
06038901_P_0.JPG» 전남 신안 주민 300여명이 지난해 9월 전남도청 앞에서 해상풍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신안 임자도 해상풍력 반대대책위 제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태양광 발전마저 인근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사업이 속속 난항을 겪고 있다. 경기도 과천에 위치한 서울대공원 주차장에 설치하려는 태양광발전에 대한 과천시민의 반대가 그 대표적 사례다. 과천뿐 아니다. 태양광을 설치하겠다는 지역마다 주민의 반대와 민원이 거세다. 주차장도 산도 저수지도 바다도 간척지도 모두 안 된다고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고 또 시급한데 주민들은 풍력도 태양광도 원자력발전소만큼 혹은 그보다 더 유해하다며 우리 마을에는 절대 들어설 수 없다고 한다.
 
정부는 이렇게 거세진 재생에너지 반대 뒤에는 주민을 선동하는 가짜뉴스가 있다고 믿고 있다. 태양광 발전이 산림을 훼손하고 경관을 해친다는 문제야 제기할 수 있다고 해도 중금속 덩어리로 범벅이 되어 있다거나 발전시설이 오염원이라는 주장에 이르면 분명 괴담을 만들고 유포해서 이익을 얻는 세력이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든 문재인 정부에 반대하든 거짓뉴스를 퍼트려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고 이 거짓 뉴스와 지역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지역주민이 있다는 것이다.
 
태양광토론회.jpg» 태양광에 관한 가짜뉴스가 사회적 논란이 되자 관련 학회와 시민단체가 연 토론회 포스터.
 
“태양광 패널의 독성이 핵발전의 300배 이상”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도 없는 괴담에 이르면  정부의 의심에 일견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사라지지 않는 가짜뉴스 태양광 중금속 괴담). 그러나 어느 사회든 괴담은 있다. 괴담이 재생에너지 사업을 가로막기보다는 괴담으로 부푸는 민심이 사업을 가로막는다.
 
2018년 10월 30일, ‘새만금 재생에너지 비전 선포식’에서 정부는 2022년까지 새만금의 10% 면적에 4기가와트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재생에너지 글로벌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축사에서 “새만금 재생에너지 사업의 개막은 우리나라 재생에너지 산업의 경쟁력을 세계적으로 높이는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새만금에 새롭게 조성되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단지에 관련 제조업체, 연구시설, 실증센터를 설치하여 재생에너지 기술력을 한 차원 더 끌어 올리겠다”고 덧붙였다(새만금에 4GW 규모 태양광·풍력발전단지 조성한다). 이 계획에 대해 새만금의 개발과 보전을 두고 대립해왔던 지역사회, 지자체, 환경단체는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우려와 기대를 표명했다. 
 
정부가 달라지고 계획이 달라지고 비판이 달라져도 30여년 동안 여전한 건 늘 정부의 계획은 “세계 최대”라는 것이다. 여느 개발과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를 추진하는 방법도 속도와 물량공세다. 정부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책임지고 있는 한 관계자는 “재생에너지 중 가장 유력한 재생에너지인 태양광발전의 경우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전력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해도 국토면적 5%에서 적게는 2%면 태양광발전만으로도 필요한 전력을 충당할 수 있어 부지는 문제가 안 된다”고 의견을 밝혔다
 
서울의 면적이 전국토의 0.6%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토 면적의 5%의 부지를 확보하는 일의 규모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부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단순히 토지와 같은 물리적인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06043365_P_0.JPG» 경기도 안성시 금광저수지 수상 회전식 태양광 발전소 모습. 연합뉴스
 
2018년 3월 강원 정선군 임계면 주민이 꾸린 임계면 풍력·태양광발전소 설치 반대 투쟁위원회는 주민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풍력·태양광발전소 사업 인허가 백지화를 요구했다. “태양광과 풍력발전은 소음과 환경훼손, 재산가치 하락과 자연재해 등의 문제가 있다. 공공의 자원인 햇빛과 바람을 이용해 개인사업자의 배만 불리고 있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주민 우려와 반대가 큰 만큼 지역 실정에 맞게 개발되고 운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풍력·태양광 신재생에너지 봇물’ 임계주민 뿔났다).
 
재생에너지 개발사업이라고 다른 개발사업과 다르지 않다. 개발계획에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지도 개발이익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오지도 않는 개발사업이 지역의 환경을 훼손하고 폐기물만 남기고 떠난 지난 경험 위에서 재생에너지 사업도 출발한다. 따라서 이 정부는 개발이익은 서울에 빼앗기고 혐오시설만 더 소외된 지역으로 밀려 온 역사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제시해야만 계획한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목표를 향해 출발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는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말해도 폐기물을 지역에 남기지 않겠다고 말해도 주민들이 목도하는 것은 지난 개발 사업과 똑같이 진행되는 개발과정이다. 중앙집중적이고 대규모로 개발되고 운영되는 원자력과 화력발전을 대신한다는 재생에너지도 개발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지역주민을 배제한 채 중앙정부가 속도와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는 원자력과는 다르다는 과학적 근거를 들이민다고 지역주민이 다르게 받아들여 주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달라야 오랜 불신을 뚫고 믿어 볼 마음이 싹튼다.
 
04932065_P_0.JPG» 재생에너지개발사업이 주민의 환영을 받으려면 주민이 개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사진은 대관령의 풍력 단지. 이병학 기자
 
집에 곰팡이가 슬면 살균제로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곰팡이가 스는 습한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또 곰팡이가 슨다. 곰팡이 포자처럼 괴담은 언제 어느 곳에나 떠돈다. 그러나 곰팡이가 퍼지는 데는 습한 환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곰팡이를 막고 싶으면 햇빛과 바람을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발전도 확대하려면 지역과 주민이 개발에 주체가 되어야 하고 그 이익이 지역과 주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괴담이 문제가 아니라 괴담이 깃드는 서운한 마음과 불공정한 세상이 문제다.
 
이수경(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장)

1) 에너지원별 발전량, 국가통계포털, 통계청

2) 전기생산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율, 세계에너지통계 2018, 에너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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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대결의 전략적승리에서 핵담판의 전략적승리에로

[개벽예감335]핵대결의 전략적승리에서 핵담판의 전략적승리에로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9/02/18 [08:4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조선이 거둔 4 대 0 전술적 승리

2. ‘가짜 황금’도 없고, ‘값진 양보’도 없다

3. 조선의 요구는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다

4.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

5.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1. 조선이 거둔 4 대 0 전술적 승리

 

2019년 1월 18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제2차 조미정상회담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한 달 앞둔 시점에 나온 그 사설은 미국의 언론매체들이 언급하기 꺼리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하다. 그 흥미로운 사설을 다시 읽어보려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외교의 재개는 분렬되고 무능한 미국 행정부에 대한 김정은 정권의 또 다른 전술적 승리(another tactical victory)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사설은 지적하였다. 외교의 재개가 아니라 조미협상의 재개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사설에서 지적한 것은, 조선과 미국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조선이 또 다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는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응당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아직 개최되지 않았지만, 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한 것 자체가 조선에게 전술적 승리를 또 다시 안겨준 것이며 미국에게는 전술적 패배를 또 다시 안겨준 것이다. 아직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두 나라가 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면, 어느 한 쪽이 승리하고, 어느 한 쪽이 패배하는 승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워싱턴포스트> 사설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이 이번에 전술적 승리를 또 다시 거두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게 제기했던 요구조건들을 포기하고, 다시 말해서 조선의 시각으로 보면 미국이 자기의 강도적 요구들을 포기하고 대폭 후퇴한 것으로 하여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조선이 대미협상에서 전술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2019년 2월 13일 당시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마익 팜페오 미국 국무장관이 뽈스까 수도 와르샤바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과 단독대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 자리에서 대담진행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에게는 12가지 전제조건을 제기하였으면서도, 왜 조선에게는 아무런 전제조건도 제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팜페오 국무장관은 "상황이 매우 달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오늘 북조선은 미국에 도달하는 핵무기를 가졌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대로 우리가 지금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는 위협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선택하였다"고 답변하였다. 다시 말해서, 미국 본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조선의 강력한 국가핵무력 앞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런 전제조건도 내걸지 않고 조미정상회담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이 조미핵대결에서 거둔 전략적 승리가 미국을 조미협상으로 끌어냈고, 지금은 그 협상에서 또 다른 전략적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워싱턴포스트>는 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치열한 협상에서 거둔 전술적 승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2019년 1월 16일 <자주시보>에 실린, 재일동포 통일학자 강민화 박사와 진행한 신년대담기록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큰 정세격변 일어난다’에서 조선이 대미협상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 바 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시작되었을 무렵, 조선의 핵무기를 미국 본토로 반출하여 해체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반출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결국 ‘핵반출론’을 철회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2018년에 조미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조선이 미국에게 핵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핵신고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핵신고’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그 무슨 미중공조로 조미협상에서 조선을 고립시키고 우위를 차지할 것처럼 이른바 ‘미중공조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중국방문과 조중정상회담을 보고 움찔하더니 더 이상 ‘미중공조’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또한 미국은 조선이 협상재개 선결조건으로 제기한 제재완화요구에 응할 수 없다느니 뭐니 하면서 이른바 ‘제재완화불가론’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다가, 조선으로 배척을 받고 움찔하더니 조선의 눈치를 보면서 최근에 제재조치를 완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의 판정승입니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사실들은 조선이 ‘핵반출론’, ‘핵신고론’, ‘미중공조론’, ‘제재완화불가론’ 같은 미국의 헛소리들을 하나씩 배척하면서, 지난해 조미협상에서 4 대 0으로 압도적인 판정승을 거두었음을 말해줍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 본토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여 조미핵대결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둔 조선은 미국이 제기한 여러 가지 부당한 전제조건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미국을 조미정상회담으로 끌어내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마익 팜페오 미국 국무장관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13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는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당시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팜페오 국무장관과 단독대담을 진행하였는데, 이란에게 12가지 전제조건을 제기한 트럼프 행정부가 왜 조선에게는 아무런 전제조건도 제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 질문을 받은 팜페오 국무장관은 “상황이 매우 달라서 그렇다”고 하면서, “오늘 북조선은 미국에 도달하는 핵무기를 가졌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대로 우리가 지금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는 위협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선택하였다”고 답변하였다.  

 

 

2. ‘가짜 황금’도 없고, ‘값진 양보’도 없다

 

<워싱턴포스트> 1월 28일 사설을 다시 읽어보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위험을 느끼는 그들의 불안한 심리상태가 사설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워싱턴포스트>만 그런 위험을 느끼는 게 아니다. 미국 여론을 주도하는 미국 연방의회의 지도급 인사들, 미국의 주요언론매체들, 미국의 전문가집단들로 이루어진 조미협상반대파들이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위험을 느끼고 있다. 8천만 우리 겨레와 세계 평화애호인민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 개최합의를 환영하고, 그 정상회담에서 위대한 전변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희망하는데, 그들은 왜 위험을 느낀다느니 뭐니 하면서 희떠운 소리를 꺼내놓은 것일까? 

 

그 까닭은 <워싱턴포스트> 1월 28일 사설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속아넘어가기 쉬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여 가짜 황금(fool's gold)을 건네주는 대가로 값진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을 속임수에 넘어가기 쉬운 어수룩한 사람으로 깎아내린 것일 뿐 아니라, 국가안보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조미협상을 속임수가 오가는 협잡거래인 것처럼 악랄하게 비방중상한 것이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그 정상회담을 협잡거래인 것처럼 악랄하게 비방중상한 것은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 평화애호인민들로부터 규탄과 배격을 받아 마땅한 악질망언이다. 

 

(1)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가짜 황금’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설에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았지만,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가장 중대한 사안은 조선의 핵동결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워싱턴포스트>가 1월 28일 사설에서 조선의 핵동결을 ‘가짜 황금’이라고 비방중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는 조선의 핵동결이 ‘가짜 황금’으로 보일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핵동결은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의 시험, 생산, 사용, 전파를 중단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지난해부터 핵강국인 조선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이므로, 핵동결만이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거듭 주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조선의 핵동결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2019년 1월 29일 연방상원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댄 코우츠 국가정보실장은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의 정보판단을 종합한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조선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2019년 2월 12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인디아양-태평양사령관 필립 데이비슨 해군제독은 청문회 보고서에서 조선이 핵무기 또는 핵무기생산시설들을 전부 폐기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런 발언들은 조선의 핵동결을 사실상 인정한 발언들이다.   

 

물론 조선의 핵동결조치는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첫 단계에서는 핵시험과 대륙간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핵물질 생산을 중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핵물질생산중단이란 녕변핵시설단지에서 가동되는 플루토늄생산시설들과 우라늄농축시설들을 전부 폐기하는 것이다. 수 억 달러나 하는 값비싼 핵물질생산시설들을 전부 폐기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복잡한 핵공학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정세를 전변시키는 중대한 정치적 계기를 마련해가는 것이므로, 어찌 간단한 문제이겠는가.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2019년 1월 3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조선정책특별대표가 연설하는 장면이다. 그는 연설에서 만일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2019년 2월 6일부터 8일까지 그는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측과 실무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므로 그 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한 미국의 상응조치가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쌍방이 그 문제에 대한 합의가능성을 찾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합의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미협상전략은 조선의 핵동결에서 완료되는 것이므로 핵동결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조선정책특별대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채택, 발표된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그리고 팜페오 국무장관이 2018년 10월 7일 방북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접견을 받은 자리에서 만일 미국이 상응조치를 취하면 녕변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의 녕변핵시설해체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2)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값진 양보’란 무엇인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시할 ‘값진 양보’는 조선의 핵동결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를 뜻한다. 조미협상의 의의를 폄하하려는 <워싱턴포스트>는 조선이 취할 조치를 ‘가짜 황금’으로 깎아내리는 한편 미국이 취할 조치를 ‘값진 양보’라고 추켜올렸지만, 미국이 조선에게 무슨 양보를 하는 게 아니라 조선과 미국이 서로 공평하게 상응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완전히 중단하고, 녕변핵시설을 전부 폐기하는 핵동결조치를 취하면, 미국도 그에 상응하는 핵동결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 연사로 출연한 비건 특별대표는 비핵화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에 대해 조선과 미국이 공감하였는가 라고 물은 참석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비핵화 개념에 대한 정의도 없고, 공유된 합의도 없다고 답변하였다. 비건의 답변은 솔직한 답변이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이 덧붙여진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조선과 미국의 견해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조선과 미국은 비핵화 개념을 합의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조선을 상대로 협상을 진전시키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가도 해결될 수 없는 비핵화 개념논쟁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을까?

 

<워싱턴포스트> 2019년 2월 12일부에 실린, 미국 언론인 데이빗 익네이셔스의 분석기사에 따르면, 비건 특별대표는 스탠퍼드대학 핵문제전문가들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문제전문가들로부터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그들이 비건에게 조언한 것은 핵폐기가 아니라 핵동결이라고 한다. 그런 조언을 받은 비건 특별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것이고, 그런 보고를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인식하였을 것이다.  

 

2019년 2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미국-메히꼬 국경장벽건설문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진행하던 중 조미협상에 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단지 시험(testing)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조선의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뜻한다. 이 말은 그가 기자회견 중에 불쑥 꺼낸 것이지만, 미국이 조선에게 바라는 것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 발언은 그가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를 인정하였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의 정상회담 개최요청을 받아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이 정의한 비핵화의 의미, 곧 핵동결의 의미를 트럼프 대통령이 인정하였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이 핵동결조치를 취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도 핵동결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조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는 조선과 미국의 상호핵동결이다. 두 나라가 상호핵동결을 하지 않고, 조선만 핵동결을 하는 것은 불완전한 비핵화이므로, 그런 불완전한 비핵화가 실현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워싱턴포스트>가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말한 ‘가짜 황금’이나 ‘값진 양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과 미국의 공평한 상호핵동결을 합의할 것으로 예견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호핵동결이란 조선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완전히 중단하고 녕변핵시설을 전부 폐기하고, 미국은 그에 상응하여 한반도 핵우산을 완전히 철거하는 것이다. 

 

조선의 완성된 국가핵무력이 미국 본토 전역을 사정권 안에 끌어들여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을 힘으로 압도하였으니, 핵우산은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하였다. 그런 까닭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한반도 핵우산을 아까워할 필요가 전혀 없고, 철거하는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해당지역에서 미국군과 (전략)자산들이 철수되는 것이 비핵화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미국이 한반도와 주변지역에서 핵전략자산의 배치, 반입, 연습, 사용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은 한반도 핵우산이 완전히 철거된다는 뜻이다. 

 

미국이 한반도 핵우산을 철거하면, 주한미국군도 당연히 핵우산과 함께 철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한미국군은 전시에 조선에게 핵우산을 사용하기 위한 인계철선역할을 수행하는 군대인데, 핵우산이 철거되면 인계철선도 함께 철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핵우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위험지역에 자국군대를 방치해둘 수 없으므로, 핵우산을 철거하면 주한미국군도 함께 철수하는 수밖에 없다.  

 

 

3. 조선의 요구는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북조선은 제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교묘하게 조종(manipulate)하여 제재완화, 종전선언, 주한미국군 철수 같은 새로운 양보를 받아낼 것으로 확실히 바라고 있다”고 서술하였다. 정상회담에서 누가 누구를 교묘하게 조종한다는 말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 대한 거부감에서 표출된 황당무계한 궤변이다. 미국 언론계를 대표한다는 일간지가 거친 감정이나 표출하면서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주요언론매체들에게 환멸을 느낄만하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열리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의 핵동결에 따르는 상응조치로 대조선제재문제, 한반도평화문제, 주한미국군철수문제의 일괄타결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요구할 것으로 예견된다. 이것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될 3대 주요의제들인데, 그 중에서 제재문제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19년 2월 13일 동유럽을 순방 중이던 팜페오 국무장관은 뽈스까 수도 와르샤와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와 대담을 진행하면서 “그러한 제재를 완화하는 대가로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우리의 완전한 의도(our full intention)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매우 바란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완화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제재문제에 대한 조선의 견해는 다르다.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붕> 2019년 1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월 17일부터 19일까지 조선대표단을 이끌고 백악관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하였던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은 백악관을 방문하기 직전 숙소호텔에서 팜페오 국무장관과 회담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조선이 이미 여러 가지 비핵화조치를 취했으므로 이제는 미국이 그에 상응하여 독자적인 대조선제재와 유엔안보리의 대조선국제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중앙일보> 2019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실무협상에서 조선 협상단은 미국 협상단에게 대조선제재해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비건 특별대표가 즉답을 내놓지 않자 조선 협상단은 워싱턴에 돌아가 협의한 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진행될 실무협상 때까지 답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도 제재해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조선은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미국은 대조선제재를 완화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선은 제재완화가 아니라 제재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해제범위도 미국의 단독제재만이 아니라 유엔안보리의 국제제재까지 전면적으로 확대해놓은 것이다. 조선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해야 하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미국이 대조선제재를 해제하지 않으면 자기의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2017년 4월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에 현지에서 성대한 준공식을 진행한 평양 려명거리의 아름다운 야경이다. 평양이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평양 곳곳에 새로 건설된 수많은 고급아파트들이 각계각층 평양시민들에게 완전히 무상으로 공급되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첨단녹색건축기술이 도입된 이 거대한 고층건물들은 조선이 제재나 봉쇄에도 그떡하지 않고, 힘차게 발전하는 자력갱생-자립자강의 강국이라는 사실을 실물로 입증하고 있다. 평양만 그런 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들과 현대적인 생산시설들과 첨단과학기술성과들이 이룩되면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립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다른 나라에 대한 제재는 실효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에 대한 제재는 아무런 실효도 내지 못하는 헛발질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헛발질 같은 제재에 매달려 허송세월할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여 조미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미국이 감행하는 독자적인 대조선제재를 해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로 조작된 유엔안보리의 국제적인 대조선제재까지 전면적으로 해제되어야,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드높이며 8천만 겨레가 절실히 바라는 남북관계개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국면을 열어놓을 수 있다.

 

팜페오 국무장관과 비건 특별대표는 김영철 부위원장과 김혁철 특별대표로부터 각각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해야 한다는 강한 요구를 받았지만, 그 요구에 제대로 답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전면적인 제재해제가 아니라 부분적인 제재완화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제재해제요구에 답할 수 있는 당사자는 트럼프 대통령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 사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선에 대한 제재가 해제될 때까지 그 어떤 조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하게 제기한 제재해제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당사자도 트럼프 대통령뿐이다. 자력갱생과 자립자강으로 국가경제를 발전시켜나가는 조선에게 제재는 사실상 실효가 없는 헛발질 같은 것에 불과하다. 미국이 헛발질 같은 제재에나 매달린다고 해서 협상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모든 사정을 살펴보고, 사실상 마지막 담판이 벌어질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대조선제재를 전면적으로 해제하는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4.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미국과 북조선,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평화로 전변되는 한반도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은 그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일본 <교도통신> 2019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6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조미실무협상에서 미국 협상단은 조선 협상단에게 불가침선언 또는 평화선언을 채택할 것을 제의했다고 한다. 요즈음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발표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고, 나는 이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들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종전선언발표를 생략하고 평화협정체결을 제의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보도내용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아니라 불가침선언을 제의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불가침협정 또는 불가침조약이 아니라 불가침선언이다. 불가침협정이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 미국 연방의회에서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트럼프 반대파가 장악한 연방의회에서 비준을 받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불가침선언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가침선언은 불가침협정 또는 불가침조약보다 국제법적 구속력이 약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협정이나 조약도 체결일방이 파기를 선언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효력이 정지되고, 또한 체결일방이 파기를 선언하지 않고서도 위반할 수도 있고, 더욱이 파기나 위반을 제재할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협정이나 조약은 선언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협정, 조약, 선언은 국제법적 구속력에 의해 지켜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키려는 체결당사자 또는 채택당사자의 정치군사적 힘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관계에서는 강력한 정치군사적 힘이 필요하다.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경우, 그 선언은 조선의 정치군사적 힘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군사적 힘의 실체는 핵억지력이다. 만일 조선이 핵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면,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더라도 그것의 이행을 위한 담보가 없으므로 그 선언은 빈 종이장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 협정이나 조약을 위반하거나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상습범’이라는 사실은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는데, 그런 ‘상습범’의 말만 믿고 불가침선언을 채택할 나라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2018년 11월 하순 비무장지대에 있는 한국군 감시초소가 철거되는 장면이다. 남과 북은 군사합의서에 따라 비무장지대 전 전선에 걸쳐 감시초소 20개에 배치된 병력과 무장장비를 후방으로 멀리 철수하였고, 감시초소들도 2018년 11월 30일까지 모두 철거하였으며, 2018년 12월 12일에는 철거현장에 대한 쌍방의 상호검증도 실행되었다. 그로써 우리 민족끼리 분단선을 뛰어넘어 화해하고 단합하려는 통일의 기운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폐허로 변해버린 감시초소철거현장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8천만 우리 겨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다. 우리 민족은 분단장벽이 철거된 아름다운 폐허 위에 위대한 자주통일강국을 세울 것이며, 반만년 민족사에 빛나는 천하제일강국을 세울 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머지않아 이루어질 가슴벅찬 현실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은 조선과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과 중국이 참가하는 2+4 형태의 양자-다자복합회담을 진행하여 채택 또는 체결할 수 있다. 그와 다르게, 상호불가침선언은 한국과 중국은 참가하지 않고, 조선과 미국이 양자회담에서 채택할 수 있다. 미국이 조선에 제의한 상호불가침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논할 필요가 있다.  

 

첫째, 2+4 형태의 양자-다자복합회담을 준비하고 합의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데, 양자회담은 그런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020년 11월 3일 대통령선거 전까지 조미관계현안들을 해결해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크게 절약되는 상호불가침선언을 바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조선과 미국이 상호불가침선언을 채택하기 위한 양자회담을 진행하는 경우, 한국이 그 회담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조선과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반대하는 주한미국군 철수문제와 한반도 핵우산 철거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셋째, 그 동안 종전선언채택문제를 두고 애써온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이 종전선언을 채택하는 다자정상회담에 자신도 참가시켜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믿은 것은 큰 실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을 빼놓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미불가침선언을 채택하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국군 주둔지원금을 해마다 대폭 증액하여 종당에는 전액 부담시키려는 강도적 요구를 문재인 정부에게 들이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철석 같이 믿는 한미동맹이란 그처럼 한 순간에 버림받을 수 있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5.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2019년 2월 11일 당시 워싱턴을 방문 중이던 한국 여야 5당 지도급 인사들이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을 면담하는 자리에 동석한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는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가 12개 이상 합의되었다고 말했다.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그처럼 많은 의제를 논의하여야 하므로, 싱가폴 조미정상회담과 다르게 이번에는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의제가 왜 그처럼 많아졌을까? 비건의 발언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2019년 1월 31일 미국 스탠퍼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비건 특별대표는 “우리는 (조미)관계전환,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구축, 완전한 비핵화라는 싱가폴 정상회담의 목표와 병행하여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루어낼 여러 조치들, 두 나라의 신뢰구축에 도움이 되는 조치들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여러 가지 신뢰구축조치들을 합의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2019년 2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미국-메히꼬 국경장벽건설문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기자회견 중에 조미협상에 관해 언급하면서 "우리는 단지 시험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조선의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시험발사를 뜻한다. 미국이 조선에게 바라는 것은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지하는 것이라고 밝힌 그의 발언은 그가 비핵화의 의미를 핵동결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미협상을 바라지 않는 대결주의자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느니 의구심이 생긴다느니 뭐니 하면서 허튼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의 의미를 핵동결로 인식하게 되었으니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시아정세를 근본적으로 전변시킬 중대한 해결방안들이 합의될 것이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여기서 말하는 신뢰구축조치는 관계개선을 추동하는 실질적인 조치이므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에서 여러 가지 신뢰구축조치들을 합의하게 되는 것은 조선과 미국의 관계개선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뜻이다. 비건 특별대표는 그 강연에서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70년의 전쟁과 적대감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미협상을 바라지 않는 대결주의자들은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느니 의구심이 생긴다느니 뭐니 하면서 허튼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렇게 확신한다면 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시아정세를 근본적으로 전변시킬 중대한 해결방안들이 충분히 합의될 것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폴공화국 쎈토사섬에서 진행된 제1차 조미정상회담 직후 현장에서 미국 텔레비전방송 <ABC>와 단독대담을 진행한 트럼프 대통령은 대담진행자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안전보장을 주었는가? 협상했는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고, 그는 기뻐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 답변은 제1차 조미정상회담 중에 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조치가 합의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안전보장조치였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그날 단독대담 중에 다른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도 유독 그 사안에 대해서만은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였는데, 그런 것을 보면, 중대한 안전보장조치를 합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싱가폴 조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대담 중에 언급한, 조선에 대한 안전보장조치가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두 정상이 단독회담 중에 조선의 안전보장조치에 대해 구두로 합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난해의 조미관계를 돌이켜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단독대담 중에 언급한 조선의 안전보장조치에 관한 구두합의를 미국이 이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이 각료들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단독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합의한 사안이기 때문에, 구두로 합의하였어도 각료들의 만류에 가로막혀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 백악관 내부사정은 지난해에 비해 크게 바뀌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단독결정을 만류하던 각료들은 모두 해임되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결심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이 며칠 뒤에 열리게 된다. 각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의 대조선협상전략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월 18일부 사설에서 “우리는 팜페오 국무장관 같은 보좌관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분별없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권유하기 바라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수리아주둔 미국군 철수명령을 내린 최근 결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보좌관들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앞으로 제3차 조미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이므로, 하노이 조미정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된다.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가 2019년 1월 31일 스탠포드대학 산하 연구소가 주최한 강연에서 말한 것처럼, 70년 동안 지속된 조미적대관계를 뛰어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그 적대관계를 뛰어넘을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그 마지막 기회에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조미핵대결에서 조선이 거두었던 전략적 승리가 이제는 조미협상에서 조선이 거둘 전략적 승리로 이어지는 대격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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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이 땅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2/18 10:19
  • 수정일
    2019/02/18 10:19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참가기> 2019 금강산 새해맞이 연대모임 - 김정수
금강산=김정수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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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8  0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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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김정수 통신원(평화를만드는여성회 상임대표)

 

   
▲ 2019 금강산 새해맞이 연대모임에 남측 여성대표 일원으로 참석한 필자. 13일 해금강 해돋이를 배경으로 찰칵. [사진 - 통일뉴스 김정수 통신원]

2019 금강산 새해맞이 연대모임에 남․북․해외여성 16명이 ‘2019 새해맞이 남북여성 연대모임’으로 만났다. 지난 해 평양에서 10.4 기념행사, 금강산에서 11월 남북민화협 연대모임에서의 여성계 만남들이 있었지만, 공식적인 남북여성 연대모임은 2015년 12월 24일 개성에서의 만남 이후 4년 만의 일이다.

남측에서 참가한 거의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필자도 금강산을 12년 만에 다시 밟았다. 다시 보는 그리운 금강산! 마음도 설레었고 북측 여성들과의 상봉에 대한 기대와 긴장감, 그 모든 것들이 엉킨 가운데 2월 12~13일의 금강산 새해맞이 행사를 기다렸다.

남측 여성들의 준비: 여성평화선언 발표와 남북여성 연대모임 제안내용 결정

지난 해 11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민화협 연대모임에서 남북여성들이 만났을 때, 북측 여성들은 주로 대북제재 중단을 위한 남측 여성들의 노력을 촉구하고, 남측 여성들은 남북여성 교류사업들을 다양하게 제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랜만의 남북여성 상봉에서 분위기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는 후일담을 들었던 터라, 이번에 금강산에서의 남북여성 만남은 좀 더 긍정적이고 진전된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남북여성 연대모임에 참석하게 된 남측여성들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6.15여성본부는 금강산에서 남북여성들이 만나기 전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여성들의 의지를 피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여 1월 28일 한겨레신문 26면 하단에 약 150여개의 여성단체와 1,000여명의 여성들이 연명한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여성선언”을 게재했다.

주요 내용은 첫째, 한반도 평화 과정은 여성들의 목소리와 관심사를 반영하는 민주적 참여를 통해 지속가능한 평화와 통일로 완성되어야 한다, 둘째, 남북여성 교류의 정례화와 남북여성 협력을 통해 남북여성들의 실질적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한다, 셋째, 평화번영의 남북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대북제재는 신속히 해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선언문은 이번에 금강산에서 만난 북측여성들에게도 전달되었다.

남측여성들은 금강산에서의 남북여성 연대모임에서 논의할 의제를 첫째,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해외여성대회’(가칭) 개최(2019년 10월 경, 평양, 각 300명 참석), 둘째, 남북여성 교류 정례화, 셋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과 올바른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 토론회 개최(평양) 등으로 정했다.

아울러 ‘2019 새해맞이 남북여성 연대모임 회의’ 자료를 준비하여 2월 12일 오후 5시 30분~7시까지 금강산 온정각 수정봉식당에서 열린 남북해외여성 연대모임에서 배포하여 이를 기초로 모임을 진행했다. 북 여성동맹의 김명순 부위원장은 한겨레신문에 게재한 여성평화선언과 함께 “남측 성원들 8명의 이름을 연명하여 통일된 회의 자료를 만들어 온 것”에 반가움을 드러냈다.

너무 적은 여성대표성 : 주석단 26명 중 여성은 단 3명에 불과

   
▲ 주석단에 앉은 26명의 남북해외 대표단 중 여성은 3명에 불과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지은희 시민평화포럼 고문,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명순 북측 여맹 부위원장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정수 통신원]

정~말 오랜만에 이뤄진 남북여성교류의 기회! 많은 이들이 참석하고 싶어하지만, 남측에서 참가할 수 있은 인원은 너무 제한되었다. 지원인력을 제외하고 약 210명의 남측 참가단 중에 여성계 참석인원이 7명으로 배정되었다고 들었을 때, 통일운동 분야에서의 여성들의 힘이 너무 왜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남측 공동단장 ‘6.15 남측위, 진보연대, 민화협, 종단, 시민’ 측에서 5인이 구성되었고 여기에 ‘여성계’ 대표성은 없었다. 시민측 공동단장으로 지은희 시민평화포럼 고문이 포함되었지만, 이에 대해 여성계 참가자들은 만족할 수 없었다.

필자가 보기에 남쪽 통일운동 인사들의 성평등 의식과 실천은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유엔안보리 결의 1325호 국가행동계획’에서 정한 ‘국방․안보․평화․통일 분야에 여성참여 확대’(정부위원회 여성 40% 참여)라는 목표에 비춰볼 때 한참 뒤떨어져 있다.

여성계 참석자들은 온정각 문화회관에서 열린 본행사 주석단에 착석한 남북해외의 26명의 인사 중 여성이 3명(북측 2명, 남측 1명), 남측 주석단 착석자 11명 중 여성계 대표성은 한 명도 없다는 데서도 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7대 종단대표(남성수장)들이 거의 다 주석단에 착석했다.

남측 공동단장인 지은희 시민평화포럼 고문이 대표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과정에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참여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지만, 남북해외 통일행사장에서의 현실은 정반대여서 오랜만의 남북공동행사에서의 반가움과 실망감이 계속 교차했다.

남북여성 연대모임 : 남북해외 여성들의 목소리와 의견들

   
▲ 남북해외 여성대표단이 함께 신계사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첫 번째 줄 왼쪽에서 4번째가 김명순 북측 여맹 부위원장이다. 왼쪽 앉아서 플랑카드를 들고 있는 이가 필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정수 통신원]

2월 12일(화) 오후 5시부터 수정봉 식당에서 90분간 진행된 남북해외여성 연대모임에 북측에서는 5명(김명순 여맹 부위원장, 김춘순 조대위 담당, 박영희 민화협 여성부 부장, 최춘영, 리금경 여맹 위원), 해외측에서는 3명(김영희 중국 615해외위원회 사무국, 리혜순 재일여맹 부위원장, 김영녀 중국 재중여성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남측 참가자는 민화협 추천으로 참석한 필자를 비롯하여 8명이었다. (부산여성회 장선화 상임대표, 수원여성회 조영숙 상임대표,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 전국여성연대 최진미 상임대표, 평화를만드는여성회 김정수 상임대표, 한국여성단체연합 백미순 상임대표,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민족화해분과위원장 이선중 수녀, 한국YWCA연합회 장미란 평화통일위원장)

북의 김명순 여맹 부위원장은 “지난 해 벌어진 역사적 북남수뇌분들이 앞장서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을 대내외에 엄숙히 선언하고 확약하는 역사적 사변이 이뤄졌고 모두의 뜻과 마음이 합쳐지면 우리 민족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며 “이제 올해는 실질적이고 애국적인 장고에서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의 이행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남북여성교류에서 북측의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박영희 북 민화협 여성부 부장은 더 나아가 “지난 해 아쉬움이 있다면, 아직도 이 땅에 전쟁의 기운이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다”면서 “특히 합동군사훈련과 전략자산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전쟁반대운동을 펼쳐야 한다. 아울러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재제 해제를 위한 노력을 기대한다”고 했다. 북측 여성들의 입장과 주장은 새해맞이 전체행사를 통해 북측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남측 여성들은 회의자료에 첨부된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번영을 위한 여성선언’에서 “대북제재가 신속히 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상기시키고, 인도적 위기를 초래하는 대북제제의 심각성을 토로하면서 북측 여성들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함을 설파하였다,

   
▲ 금강산호텔에서 판매한 북의 과자들. 닭알과자를 먹어보니 남쪽의 것에 비해 맛이 손색이 없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정수 통신원]

남측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5살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여맹의 최춘영 위원이었다. 그는 “딸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이 땅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5살짜리 딸이 (일본군 성노예와 겪었던) 그런 성노예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표현했다. 이 말을 듣고 남북여성들 모두 분쟁 하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공감대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유엔안보리결의안 1325호’나 대한민국의 국가행동계획의 분쟁 하 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 등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오랜만의 상봉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따뜻한 분위기가 90분 내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남측의 여성들은 남북여성들의 대규모 상봉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확산하고 특별히 북의 여성들의 기대와 희망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때, 공동선언 이행과 전쟁반대를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측면에서 올해 안 평양에서 남북여성 통일행사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제안도 이뤄졌다. 김명순 부위원장은 “(남북여성 통일행사)는 남측 여성들이 노력이 북남수뇌상봉의 공동선언 리행에 부합될 때 자연히 성사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남측 여성들이 공동선언 이행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남북해외여성 연대모임에서는 한국YWCA연합회,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개별단체의 남북여성 협력사업에 대한 제안서도 전달되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는 남북여성 경제역량 강화를 위한 협력사업을 중심으로 제안하였는데, 박영희 부장은 평양에 가서 여맹 성원들과 상의해 보겠다며 논의를 계속해 보자고 하였다.

해금강의 찬란한 해돋이를 바라보며 남북여성들의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다

   
▲ 해금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남북여성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영희 북측 민화협 여성부 부장이다. 남측 여성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북측의 인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정수 통신원]

이틀째인 13일 오전 7시 경의 해금강 해돋이는 그동안 보아왔던 해돋이 중 가장 아름다웠다. 해금강의 수려한 경관, 깨끗한 대기와 바람 없는 날씨, 잔잔한 바다, 멀리 보이는 눈쌓인 금강산 자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고 행복했던 해돋이를 보며 필자는 “참으로 축복된 날!”이라는 감탄을 여러 번 했다.

남북해외의 여성들은 해금강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서로를 축하하고, 2007년 복원된 신계사에서는 따뜻한 햇살 아래 함께 웃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남측의 참가단의 한 인사는 “여성계 만남이 가장 분위기가 좋은 거 같다!”고 할 정도로 서로 웃으며 정답게 팔짱끼고 남측에서 준비한 플랑카드를 함께 잡고 사진을 찍었던 남북해외의 여성들이 다시 만나 여성들이 평화롭고 안전하며 행복한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논쟁하고 지혜를 모으고 자매애와 신뢰를 형성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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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세 100년, 만세시민이 쏘아올리고 촛불시민이 되살린 ‘공화주의’

[신년기획]다·만·세 100년, 만세시민이 쏘아올리고 촛불시민이 되살린 ‘공화주의’

강병한·박광연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

입력 : 2019.02.18 06:00:03 수정 : 2019.02.18 06:01:01
 

1919년 3·1운동을 코앞에 둔 2월 말. 보성사(인쇄소) 직원인 인종익은 직접 인쇄한 기미독립선언서 수백장을 지방을 돌며 배포했다. 그는 3월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무수한 고문과 구타가 이어졌다. 3월5일 청주경찰서 취조실, 일경이 물었다. “그대들이 독립을 선언하면 황제 등 수뇌는 누구로 하여금 시킬 것인가.” 인종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의 세계를 보건대 모두 민주공화정체다. 물론 민주공화정체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4월23일 경성에서 국민대회가 열렸다. 일단의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그들의 깃발에는 ‘공화만세’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6년과 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수백만 시민의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시민들은 어깨를 겯고 헌법 1조 1항을 노래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100년. 3·1운동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가 마련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는 처음부터 ‘민주’와 함께 ‘공화(共和)’라는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공화의 정신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헌법들과 해방 후 제헌헌법을 관통하며 흘렀다. 1987년 개정된 지금의 헌법 1조 1항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그러나 독재정권들은 반공과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공화를 전유했고, 그 결과 민주공화국에서 반쪽이 사라졌다. 공화는 때론 민주와 대립되는 것으로까지 비쳤다. 

공화를 부활시킨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일궈온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공공의식과 애국심으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위기에 처한 국가공동체를 구했다.

여전히 ‘독재의 후예들’은 공화주의를 민주주의를 흠집 내는 용도로 활용하며 공화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러나 극단적 사회 갈등과 공공성 붕괴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공생과 공존의 이념이자 가치인 공화주의는 오히려 절실하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자, 공화국이다.

■ ‘민주공화국’의 사라진 반쪽, 100년 만에 시민들이 소환했다

<2부> 다시 100년의 꿈 … 공존과 평화로 ② 공화의 부활 

■ 공화, 대한민국의 출발 

1919년 3·1운동 나선 시민들 
이미 민주공화정에 열망 가져
임시헌장과 제헌헌법 1조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명시

100년 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했다.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민주공화국이란 표현은 당시 주변국인 중국·일본의 수많은 헌법문서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었다. 유럽에서도 1920년대 초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오스트리아 연방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이란 표현이 최초 등장했다. 

민주공화국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5차 개헌에도 불구하고 제1조의 자리를 지켰다. 그만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던 시민들의 강렬한 여망이 민주공화국에 담겼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조도 당연히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공화제 혹은 공화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현대적 의미의 공화주의란 시민이 주인인 ‘정체’, 그리고 공공성과 공존, 균형을 추구하는 ‘이념’을 동시에 가리킨다. 일단 당시 공화제는 ‘왕이 없는 체제’라는 국체나 정체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혁명적’이었다. 하나는 복벽주의(군주제 회복)의 거부이다. 독립 후 왕정이나 군주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다른 하나는 일제의 정점인 천황제에 대한 저항이다. 공화주의는 독립 후 왕이 없는 국가뿐만 아니라 지금 왕이 있는 일제를 겨냥한 폭발력을 가졌다. 

공화의 이념도 임시정부 헌법이나 제헌헌법에 투영됐다. 대표적으로 임시헌장과 제헌헌법 기초자인 조소앙의 삼균주의이다. 균형, 균등, 공공을 중시하는 삼균주의는 공공성과 시민연대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의 다름 아니다. 조소앙의 이념은 임시정부 헌법들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고, 제헌헌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제헌헌법의 각종 경제조항은 무제한적 시장 자유가 아니라 균등, 균평, 공공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는 “제헌헌법은 공공의 복리, 공공의 이익을 기준으로 자유와 평등을 절충하려고 했는데 공공의 이익, 공공의 선을 중시하는 이념이 공화주의”라며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은 바로 공화주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공화에 대한 이해도 유사했다. 1932년 일경에 붙잡힌 독립운동가 조용하는 임정의 공화에 대해 “경제, 정치의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안으로 국민 각자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1935년 설립한 한국국민당은 창당선언문에서 “전민적(全民的) 정치, 경제, 교육 균등의 3대 원칙 확립에 의한 완전한 민주공화국 건설”이라고 밝혔다.

■ 변질, 독재의 암흑기 

독재 정권이 정당성 강조 위해 
공화 이데올로기 심각한 왜곡
균등·공공성 중시한 헌법도 후퇴 
시민들, ‘공화’에 부정적 인식

그러나 대한민국 출발의 한 축이었던 공화는 독재정권 시절 변질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부를 지나면서 공화주의는 심각하게 왜곡됐다. 그들이 독재정부의 정당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시민들은 민주주의란 기치를 들고 저항했다. 한짝으로 시작한 민주와 공화는 ‘분리’됐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과 1962년 군정하 개헌을 거치면서 균등과 공공성을 중시하는 헌법 조항도 크게 후퇴했다. 독재정부 시절은 ‘가짜 공화주의’가 횡행하는 공화주의의 암흑기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냉전진영론에 입각해 공화를 전유했다. 그는 ‘반공주의적 공화론’을 펼쳤다. 그의 공화에 대한 시각은 1955년 3월26일 ‘제80회 탄신 경축식전에서의 인사’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세계 모든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반공하는 십자군을 지지하는 남녀들이 한국을 인류의 자유와 공화주의의 선봉으로 보는 바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야당을 비판하는 무기로도 공화를 동원했다. 그는 1952년 야당의 내각제 개헌 요구에 대해 “남의 나라 공화주의를 모방하려는 중 (중략) 가장 좋지 못한 것을 먼저 모방”한다고 비난했다. 또 1954년 한국민주당이 민주국민당으로 발전해 야당 역할을 수행하자 “민주당을 개조해서 보통평민들과 소위 하등민중이라는 사람들을 많이 포함해서 공화제도를 만들기 전에는 내가 그 정당에 가입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공화는 독재정부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4·19혁명 당시 시민들은 공화를 저항담론으로 썼다. 단적인 예로 거리시위에 나선 서울 대광고 학생들은 “3·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다.

박정희 정부하에서 공화는 완전히 변질됐다. 박정희 군부는 ‘반공화적인’ 쿠데타 명분으로 공화국을 언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으로 “진정한 민주공화국 재건”을 주장했다. 그해 미 외교협회 연설에서도 “새롭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3년 전역식 연설에서도 “민주공화의 낙토” 건설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세웠다. 박 전 대통령이 1963년 창당한 집권당 당명이 민주공화당인 것도 박정희 정부 시절 왜곡된 공화주의의 상징적 사례다. 공화당의 또 다른 설계자인 김종필 전 총리가 당명을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에서 차용했다고 밝힌 것도 아이러니다. 박정희 정부는 헌법에서 민주공화국을 삭제하지 못했지만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실제로는 공화국을 말살했다. 

12·12쿠데타와 5·17내란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공화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1982년 제헌절 경축사에서 “우리 모두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공화국을 창건하던 당시의 감격과 기본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겨 민주, 정의, 복지가 구현된 통일국가를 달성하는 데 매진할 것을 다 같이 다짐하자”고 연설했다. 그는 1984년 3·1절 기념사에서는 “세습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의 나라로서 영원한 자유와 독립을 향유해야 하며, 평화의 창조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 3·1운동이 우리 민족 모두에게 제시한 목표”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독재정부가 공화를 전유하면서 시민들은 공화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됐다. 독재정권에 대항해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이로써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가 형성됐다. 저항담론에서 ‘공화’는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

■ 부활, 촛불시민들이 쏘아올린 공화 

6월항쟁·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진전됐지만
공공성과 공존의 문제 제기되며 
한국사회서 공화주의가 재조명

1987년 6월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로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는 진전됐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는 민주주의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공공성과 공존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때를 전후해 한국 사회에서 공화주의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 거쳐
공동체성을 자각한 시민들이 
진정한 공화정 위한 실천에 나서

공화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2008년 미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촉발됐다. 수개월간 지속된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은 헌법 1조 1항을 외쳤다. 일방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대를 넘어 안전한 국가공동체를 바라는 시민들의 공적 열망이 담겼다는 분석이 나왔다. 당시 안병진 경희대 교수(정치학)는 “시민공동체의 안전한 삶 자체가 곧 국가라는 공화주의의 핵심 이념과 국가를 일부 특권의 사유물인 양 이해하는 반공화주의적 이명박 정부의 대립이 극적으로 표출된 장”이라고 진단했다. 

공화주의는 2016년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부활했다는 의견이 많다.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공공성을 발휘해 국가공동체를 정상화시키려는 공화정신의 발현이라는 시각이다. 시민들은 또다시 헌법 1조 1항을 노래했다. “이게 나라냐”는 전 국민의 구호가 됐다.

임채원 경희대 교수(행정학)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하나의 공동체임을 깨닫지 못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각하는 시점이 있다”며 “우리나라 역사에는 촛불집회가 이 사건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또 “대한민국은 그간 의례적 국호이자 하나의 구호에 그쳤으나 촛불집회라는 시민적 자각을 통해 민주공화국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되찾았다”면서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대해 시민들이 근본적 반성을 요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촛불혁명은 진정한 공화정을 구현하려는 한국 시민의 공공적 실천”이라며 “공민의식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자유시민이 수호하는 국가, 바로 그것이 촛불혁명이 지향하는 바”라고 진단했다. 

■ 소환, 현실이 불러내는 공화 

지금도 공화를 왜곡해 전유하는 정치세력이 있다. 일부 보수세력은 공화주의를 문재인 정부를 흠집내는 준거로 이용한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은 지난해 8월 말 공화주의 토론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정의와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공화주의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문재인 정부 행태를 보면 우리만 옳고 우리만 선하다는 선민의식을 갖고 국가경제를 굉장히 힘들게 하는 좌파 사회주의 포퓰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공화주의를 민주주의 대척점에 놓고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은 같은 토론회에서 “공화주의를 살펴보려는 까닭은 최근 우리의 정치의식이 너무 민주주의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저임금, 탈원전, ‘노영방송화’ 등을 언급한 후 “민주주의는 자기 파괴의 생리적 시한폭탄을 장착하고 있다”며 공화주의를 대안이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체인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과 함께 출발한 공화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공공성의 파괴, 경제적 양극화, 사회 갈등 심화라는 지금의 현실이 ‘진짜’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를 지금 국민 모두가 아니라 일부만 공유하게 됐다”며 “그 결과 경제 양극화, 이념 대결, 좌우 진영정치 등이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개인과 국가가 서로 같이 잘 사는 게 공화주의”라며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보다 국민을 중심에 놓고 국민의 이익인 민생, 권리, 자유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경쟁과 협력을 하는 것이 지금 필요한 공화주의”라고 말했다. 

김경희 이화여대 교수(정치학)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경제와 권력의 불균등, 그리고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민주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헌법 제1조 1항인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실현할 것인가는 공화에 더 명확하게 표현돼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화주의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연대인데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서로 배려하며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라며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 공생, 공영의 길을 찾아나가자는 것이 공화주의”라고 말했다.

※참고 : 김경희 <공화주의>, 박찬승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안병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 오제연 ‘이승만 정권기 공화 이해와 정치적 전유’, 윤평중 <국가의 철학>, 이영록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의 개념사’, 임채원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로서의 시민적 공화주의’, 정상호 ‘한국에서 공화 개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등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180600035&code=910100#csidxb3664432713bd3498412a00d556a6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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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입력 : 2019.02.17 09:01:00 수정 : 2019.02.17 13:40:33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기 위해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기 위해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새 경험… “검찰이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 몰랐다”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과정을 법원 밖에서 바라본 변호사들은 “이제 판사들도 우리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피고인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주변 지인에 대한 은근한 압박 등 강압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대부분의 재판장은 “지금 시대가 어떤 때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 왔지만 이제 그들도 당해봤으니 알 거라는 얘기다. 

변호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거치면서 100명 이상의 전·현직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검찰이 판사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은 몰랐다”였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한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질문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기억을 떠올려 갔다. 그런데 당초 예상했던 질문은 15~20분 정도로 끝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물었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들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검찰이 ‘이러이러한 의도로 했던 거 아니냐’고 했다. 분명한 건 당시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나는 그럴 위치에서 상의를 할 자격도 없었기 때문에 아니었다고 답하니 그때부터 언제든 나를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아, 이게 검사들의 수사방식이구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말 그대로 참고인이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압박감을 느꼈다.”

또 다른 법원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는 “검찰이 e메일 내역을 임의제출해달라는 요구를 ‘생각해보겠다’는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동의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긴 유산? 

검찰이 작성한 조서가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장에서 마치 내 답변이 검찰의 질문에 ‘예스’라고 답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조사에서 단 한 번도 ‘그렇습니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유도하듯 했던 질문에는 전부 답이 ‘그렇습니다’로 돼 있었다. 문제제기를 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사받는 과정에서 너무 지쳐 조서를 제대로 수정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조서를 집어던져라’고 했던 말이 내 일이 되고보니 그대로 와닿았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아까 질문하셨던 내용이 조서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검사가 ‘그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거라 따로 조서에 적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판사들은 참고인 또는 피의자 신분이 되고 보니 그동안 법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주장했던 검찰의 강압수사와 검찰조서의 증거능력 여부를 다투는 이유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겪어보니 알겠더라’는 얘기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를 거친 많은 판사들의 경험이 보다 더 인권친화적인 사법부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짓궂은 농담이다.

일부 판사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겨준 유산’이라고 뼈 있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고, 검찰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로 배당한 시점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기소하기까지 239일간 진행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 판사가 겪었던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될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ㄱ 부장판사는 “모든 사람은 무결할 수 없다. 나는 떳떳하다는 생각으로 검찰청사를 들어가도 조사실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 심리를 검사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 제기되는 포토라인에 대한 인권침해 주장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개 소환조사 다음날 자신의 블로그에 ‘이제 포토라인 악습도 걷어내자’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 부장판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유죄의 1심 판결이라도 나기 전에 그 의사에 반해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포토라인은 중세 마녀재판과 행태가 다르다고 누가 이론적으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서고 안 서고를 검찰이 자의적으로 선별하여 결정한다. 누가, 어떤 법령이 검찰에 그 권한을 부여했나. 검찰이 알 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 도마에 

그동안 포토라인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 앞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폭력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만 제기돼 왔다. 법정에서 처음으로 피고인을 만나는 판사들에게 ‘포토라인 문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이 역시 판사들이 겪어보니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사례 중 하나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언론인클럽은 지난 1월 15일 ‘포토라인,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재판부의 집중심리 문제 역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변호인단은 첫 공판을 앞둔 1월 29일 재판부에 전원 사임서를 제출했다. 일종의 항의성 조치다. 재판부가 심리에 속도를 내기 위해 집중심리로 재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론권 보장이 어렵다며 전원 사임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구속기한 만료일이나 사안의 방대성 등을 고려해 임의로 집중심리를 할 수 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는 주 4회 기일을 열어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집중심리는 그러나 신속한 재판은 가능하지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법정에 선 양 당사자는 대등한 지위에서 법적 다툼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 검찰은 공소유지를 위한 모든 증거자료를 갖춘 상태에서 법정에 들어서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열람·복사를 허용할 때까지 빈 손으로 재판에 임해야 한다. “아직 열람·복사가 끝나지 않아 한 차례 더 기일을 열어주시면…”이라며 재판장에게 부탁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법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 이 문제가 지금처럼 논쟁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이 역시 판사가 겪어보니 집중심리가 얼마나 피고인 방어권 보장에 미흡한 제도인지 알게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왜 이제서야 그런 지적을 하느냐며 문제제기 시점을 탓하고, 제식구 감싸기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중견 변호사는 “몸소 겪어봤으니 이제는 법정 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남긴 성과일지도 모른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170901001&code=940100#csidx22785216be4fc1bbb6086d0bacd58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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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 의원들이 진짜 괴물" 금남로에서 찢겨진 '망언 오적 현수막'

[현장] '5.18 망언' 규탄 광주범시민궐기대회... 망언 의원 퇴출과 한국당 사죄 촉구

19.02.16 19:52l최종 업데이트 19.02.16 22:00l

 

 

찢겨지는 전두환,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지만원 사진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전두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지만원 사진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찢고 있다.
▲ 찢겨지는 전두환,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지만원 사진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전두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지만원 사진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찢고 있다.ⓒ 권우성
찢겨지는 전두환,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지만원 사진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전두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지만원 사진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찢고 있다.
▲ 찢겨지는 전두환,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지만원 사진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이 전두환, 이종명, 김진태, 김순례, 지만원 사진이 담긴 대형 현수막을 찢고 있다.ⓒ 권우성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려다 산화해 간 16살 문재학군의 한을 풀어주려고 이 자리에서 섰습니다. 문재학군이 폭도입니까? 북한서 온 게릴라입니까? 문재학군이 게릴라라는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를 구속해야 합니다. 당장 의원 배지 떼고 국회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김후식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금남로 일대가 다시 광주시민 수천 명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39년 전 전두환 군부 독재에 맞섰다면, 이제는 그 상대가 5.18 정신을 왜곡하고 희생자를 폄훼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금남로 모인 광주시민들 "망언 의원 퇴출하고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권우성

'자유한국당 망언 의원 퇴출과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광주범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4시 광주광역시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 광장)과 금남로 일대에서 열렸다.
 
광주시와 5월 단체를 비롯해 110여개 지역시민사회단체와 지방자치단체, 6개 정당으로 구성된 '자유한국당 3인 망언 의원 퇴출과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을 위한 광주범시민운동본부'는 이날 궐기대회를 시작으로 5.18 망언 의원 퇴출을 위한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돌입했다.
 
앞서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지난 8일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온 극우논객 지만원씨를 초청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5.18 공청회를 열고,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괴물'이라는 망언을 해 전 국민적 공분을 샀다.

자유한국당은 14일 뒤늦게 윤리위를 열어 이종명 의원을 제명했지만 김진태, 김순례 의원은 전당대회에 출마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유예한 상태다. (관련기사 : 지만원 "전두환은 영웅, 5.18은 북한군 주도 게릴라전" http://omn.kr/1h906, 5.18망언, 이종명만 제명... 김진태-김순례 징계 유예 http://omn.kr/1hcvv)
 
이날 궐기대회에서 윤상원, 문재학 등 5.18민주화운동 열사를 소환한 김후식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은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정의와 헌법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광주시민을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회의원이 헌법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헌법기관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나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더는 공당으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고 세 의원과 자유한국당을 비판했다.
 
이날 광주시민들은 자유한국당 의원 제명과 지만원씨 처벌에 그치지 않고, 더는 이같이 5.18 망언이 나오지 않도록 5.18 관련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희생자를 폄훼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른바 '한국형 홀로코스트법'으로 이미 19대 국회에서 수차례 발의됐으나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이날 대회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홀로코스트법을 시행하고 있다"면서 "5.18 역사 왜곡을 발본색원하려면 한국형 홀로코스트 부정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국회와 정치권에 촉구했다.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권우성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 대회사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부터) 류봉식 광주진보연대 공동대표, 김동찬 광주시의회 의장, 이용섭 광주시장,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이 대회사를 하고 있다.
▲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 대회사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부터) 류봉식 광주진보연대 공동대표, 김동찬 광주시의회 의장, 이용섭 광주시장,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이 대회사를 하고 있다.ⓒ 권우성
 
6개 정당 대표들도 화답 "역사왜곡처벌법 제정에 힘 모을 것"

이날 발언대에 선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등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6개 정당 대표들도 세 의원을 제명 처리하고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이번 국회에서 제정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 위원장인 송갑석 의원은 "자유한국당 세 의원과 지만원씨는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했지만 폭동은 역사를 짓밟은 그들이 일으켰고, 5.18이 간첩 소행이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역사와 민주주의와 헌법을 부정한 그들이 간첩이고, 5.18 유공자를 괴물이라고 표현했지만 비뚤어진 역사 의식을 가진 그들이 괴물"이라면서 "나는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괴물적 인식을 가진 국회의원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황남주 바른미래당 광주시당 사무처장은 "세 의원과 자유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과 150만 광주시민을 모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면서 "이같은 만행을 더는 저지르지 못하게 지난 19대 국회에서 5.18역사왜곡처벌법을 발의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평화당 원내대표인 장병완 의원도 "자유한국당 같은 극우보수정당의 망동이 계속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방지해야 한다"면서 "허위왜곡날조를 형사 처벌하는 역사왜곡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청년, 여성, 장애인, 종교인, 노동자 등으로 구성된 광주시민 대표들은 이날 결의문에서 자유한국당 망언 국회의원 제명과 퇴출, 지만원씨 즉각 구속, 5.18민주화운동 왜곡 폄훼 행위 강력 처벌과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 5.18 망언 규탄 외침 가득한 금남로 ''자유한국당 망언의원 퇴출, 5.18역사 왜곡 처벌을 위한 광주시민궐기대회'가 16일 오후 광주광역시 옛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열렸다.ⓒ 권우성
 
이어 궐기대회 모든 참가자들이 세 자유한국당 의원을 비롯해 지만원씨와 전두환 전 대통령 등 5명이 수의를 입은 모습을 담은 초대형 현수막을 머리 위로 들어올린 뒤 동시에 찢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날 광주범시민궐기대회에 이어 오는 23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민 궐기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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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시민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 벌이겠다"

겨레하나 창립15주년 기념식, '겨레하나'로 공식 명칭 개정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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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6  23: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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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법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창립 15주년을 맞아 16일 기념식을 개최하고 단체 이름을 '겨레하나'로 바꾸고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올해 1만2천명이 금강산을 찾아가자는 의미의 퍼포먼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사단법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 단체 명칭을 사단법인 겨레하나로 바꾸고 생활밀착형, 대중주도형 통일운동의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는 그동안 약칭으로 불러오던 '겨레하나' 네 글자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경내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가진 창립 15주년 기념식 직전 총회를 개최해 단체명칭 개정을 결정하고 이날 기념식에서 이를 세상에 알렸다.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은 "그동안 겨레하나가 해 온 일을 보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이 느껴진다"며 자부심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또 "통일 미래세대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겨레하나,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 겨레하나를 만들겠다"고 다짐을 밝혔다.

   
▲ 조성우 겨레하나 이사장은 통일미래세대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겨레하나, 더 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통일운동을 펼치는 겨레하나가 되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연희 사무총장은 '달라진 시대의 통일운동'에 대한 고민을 겨레하나의 미래비전과 과제로 정리해 좀더 구체적으로 발표했다.

먼저, 한반도 대전환의 시대에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만큼 '통일'이라는 거대담론을 생활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생활밀착형 통일운동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또 활동가들이 대중의 이해를 대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시민들이 스스로 평화 통일활동가가 될 수 있도록 리더쉽을 발굴하고 훈련하는 대중주도형 통일운동을 위해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간 겨레하나가 만들어 온 지부·지회 겨레하나와 대학생·청소년·여성·청년·노동자겨레하나 등 지역과 부문 겨레하나를 더욱 세분화하고 더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여 '겨레모임'을 이 생활속에서 대중이 참여하는 통일운동의 활동거점이 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미래세대 통일운동의 대명사이고 세대를 이으며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대학생 겨레하나는 지역이 아니라 대학 단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지금까지 남북 교류협력이 기본적으로 북에 대한 일방적 소통과 이해, 관용의 차원에서 출발했다면, 앞으로는 한반도 평화 번영의 동반자인 북과 좀더 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교류와 상생·유무상통의 협력으로 가보자고 강조했다.

아울러 통일운동의 현장성, 전문성, 소통과 공감능력 등 혁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왼쪽부터 이창복 6.15남측위 상임대표의장,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의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축사에서 "겨레하나가 4.27판문점선언, 9.19평양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믿는다. 권력에 의한 변화보다는 겨레하나와 같은 조직이 힘을 모아서 사회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우리 조국이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겨레하나 활동에 기대를 표시했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14일자 연대사에서 "귀 본부는 창립된 첫날부터 지난 15년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고 북남관계 발전을 힘있게 추동하는 의의있는 통일애국 활동과 다양한 협려교류 사업들을 적극 벌여왔다"고 치하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길에서 우리는 귀 단체와 언제나 굳게 손잡고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함께 하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이기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회장은 "겨레하나가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등 남과 북이 함께 하는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우리 민족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겨레하나의 기동성에 놀랄 뿐"이라며, 특히 "통일운동의 어르신 세대와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서 활력을 뿜어내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고 말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남북의 정서적 화합, 민족이 하나되는 공감대가 없다면 남북의 화합도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 단체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다"고 하면서 "앞으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지 말고 남에 번쩍, 북에 번쩍하시길 바란다. 내년 16주년에는 여기 모인 숫자만큼 북에도 지부가 만들어져서 북의 대표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난해 8월 무더위속에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를 하는데 등번호 427번을 달고 1,000여명이 서포터즈 응원단을 조직하는데 겨레하나가 중심이 되어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겨레하나 홍보대사인 안석환 배우는 "나의 꿈 겨레하나! 우리의 소원은 완벽한 겨레하나! 15년 역사의 겨레하나! 겨레가 하나될 때까지 너의 능력을 보여줘!'라는 인상적인 축하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 각 지역, 지회 겨레하나 대표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학생겨레하나 회원들이 대학생겨레하나는 겨레하나의 미래이자 전략이라며, 대표적인 대학생 통일동아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학생 통일합창.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기념식에는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6.15남측위 상임대표인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이윤배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이사, 황인성 민주평통 사무처장, 이용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이주태 통일부 교류협력국장,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김성민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 단장,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 조경선 전교조 통일위원장, 겨레하나 사무처장을 역임한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순덕 민가협 상임의장 등과 지부, 지회, 각 부문 겨레하나 회원, 대표를 비롯해 300여명의 인사들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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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 아버지 장례식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한 사람으로 맺어진 관계
대물림된 단절...무연고 장례식에서 만난 할머니와 손자
 
1월 중순 앳된 목소리의 20대 남성분으로부터 ○○○ 님의 장례에 참석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인의 사진이 있는지 물었을 때 남성분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의 많은 사례 중 비슷한 경우가 있어 대강의 스토리가 짐작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묻지 못했습니다.
 
장례 당일 아들의 전화를 받고 서울시립승화원 2층 무연고 전용빈소에서 만났을 때, 예상치 못한 분들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 님의 어머니와 이복동생들이었습니다.
 
세 살배기 아들을 두고 재가한 어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죄인의 마음으로 살다 어느 날 아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병명은 위암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증오하며 살아왔던 아들은 다시 만난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용서를 빌었고, 이복여동생은 늦게나마 만나게 된 오빠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했습니다. 병이 나으면 다 같이 여행을 계획했을 만큼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 님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유언으로 ○○○ 님은 폐를 끼치기 싫으니 무연고로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 님에겐 아들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 이혼을 할 당시 생후 6개월이었던 아들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고,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안 되어 시신인수를 포기했습니다. ○○○ 님은 무연고로 확정되었고, 아들은 무연고 사망자 담당 주무관으로부터 고인의 어머니가 계신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에서 비로소 손자와 할머니 사이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서 예고치 않은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눔과나눔

동생의 숨을 끊어야 했던 형님 
 
서울시 종로구의 한 쪽방에서 사셨던 ○○○ 님은 얼마 전 사우나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심근경색으로 중환자실에 계셨고, 병원에서는 가족들을 찾았습니다. ○○○ 님의 형님은 병원으로부터 쓰러졌을 당시에 응급처치만 진행했어도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님은 의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님과 형님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살았습니다. 두 분은 모두 쪽방에 살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으며 어렵게 사셨습니다. 젊었을 때 ○○○ 님은 택시를 운전하며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하면서 급격하게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경제적인 상황보다도 ○○○ 님을 힘들게 한 건 절망감이었습니다. 형님은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며 스스로 망가져가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들기만 했습니다. 밥이라도 잘 챙겨먹는지 확인하러 갔을 때 동생은 술에 의존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고,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러다 동생은 사고를 당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고, 병원에서는 여러 차례 형님에게 연락을 해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님은 병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고, 여러 날 고민 끝에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무연고자로 동생을 보내는 형님은 스스로 동생의 숨을 끊어 놓았다며 서럽게 울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집안이 살만해 서로 의지하며 살았는데, 늙어서 가난해지고 나니 가족도 형제도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형님은 자신의 미래도 똑같아질 거라며 희망 없는 눈빛으로 화장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자리, 누군가의 마지막 자리 
 
몇 년 간 무연고 장례를 진행하면서 무연고자의 마지막 자취를 찾기 위해 주소지를 검색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공문에 남은 주소지는 주택이거나 고시원, 혹은 병원과 시설 등입니다. 그곳은 사는 곳이기도 혹은 사망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생전에 마지막으로 머문 자리'는 고인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무연고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는 쓸쓸한 뒤끝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월에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중엔 집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분들이 계셨고,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정○○ 님은 서울시 서초구의 한 지하철역 승강장에 쓰러졌고, CCTV를 통해 이 장면을 목격한 승무원이 119에 신고했지만 병원에 이송된 후 돌아가셨습니다. 외람되지만 몇 달에 한 번씩 이와 비슷한 뉴스를 접할 때가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의인이 나타나 심폐소생술 끝에 쓰러진 이가 살아났다는 반가운 결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 님은 45년 이상 가족과 단절되어 살았고, 자녀들은 시신인수를 거부해 무연고자가 되었습니다.  
 
이○○ 님은 50대 중반으로 2018년 12월 초 공공건물 한쪽 흡연부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 정겨운 분위기의 무리들 속에서도 한두 명씩은 혼자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 혼자였을 것이고, 마지막 한 모금의 연기를 내뱉은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람들의 무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 이○○ 님은 그곳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지하철역, 공공건물, 시민공원, 광장 등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는 그렇듯 혼자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투명인간처럼 사람들의 시선 밖에서 머물다 사라졌습니다. 공문에 적힌 지하철역의 이름은 그가 살다간 마지막 자리로 기록되었고, 누군가는 흡연부스 위를 떠오르는 담배연기처럼 무연고자가 되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끝내 듣지 못한 사과 
 
1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이○○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에 두 분의 할머니의 타계소식은 많은 사람들에 충격을 주었고, 일본정부로부터 끝내 사과를 받지 못한 데에 분노했습니다. 아픔의 역사를 숨기고 살았지만 피해사실을 세상에 당당하게 외쳤고, 인권운동가로의 세계를 누비신 김복동 할머니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많은 것들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나눔과나눔은 이○○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 장례를 지원했고, 빈소를 지키며 많은 분들의 발걸음을 지켜보았습니다. 두 분의 장례를 치르며 나눔과나눔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겠지만, 두 분의 할머니는 사실은 무연고자였습니다.  
 
'장사등에관한법률(이하 장사법)'에 따르면 무연고자가 되는 경우는 1. 연고자가 없거나 2. 연고자가 있지만 찾기 힘든 경우 그리고 3. 연고자가 있지만 시신인수를 포기하여 무연고자가 되는 경우, 이 세 가지입니다. 여기서 '연고자'란 '장사법' 제2조 제16호에 따라 ‘배우자, 자녀, 부모, 자녀 외의 직계비속, 부모 외의 직계존속, 형제·자매, 사망하기 전에 치료·보호 또는 관리하고 있었던 행정기관 또는 치료·보호기관의 장, 시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입니다. 
 
두 분의 할머니는 연고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무연고자가 되겠지만, 이○○ 할머니는 비공개로, 김복동 할머니는 많은 분들의 배웅 속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장례가 가능했던 이유는 ‘장사법’ 제2조 제16호 아목의 ‘시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에 따라 ‘정의기억연대’ 등이 그 연고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근거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정의기억연대’ 등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장례를 치르는데 반대가 없었던 데에는 사회적인 용인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법률조항은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담당자가 있었다면 이 또한 재량권이 발휘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 김복동 할머니 장례. ⓒ나눔과나눔

가족 대신 장례 필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85조(사망신고의무자) ① 사망의 신고는 동거하는 친족이 하여야 한다. ② 친족·동거자 또는 사망장소를 관리하는 사람, 사망장소의 동장 또는 통·이장도 사망의 신고를 할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례들을 보면서 법률의 적용범위에 대해서는 누군가의 재량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무연고자의 경우 지인들이 법률상의 연고자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눔과나눔은 2015년부터 무연고 장례를 치르면서 사실혼 관계의 부부가 서류상의 부부가 아닌 경우 그리고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친구가 고아였던 여자친구를 무연고자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우 등 혈연관계가 아닌 경우 장례를 치르고 싶어도 치를 수 없었던 사례들을 보았습니다. 혈연 가족, 즉 가족관계증명서 상의 연고자가 아닌 사람은 장례를 돕고 싶어도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장례와 사망신고는 원칙적으로 혈연 가족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가족들이 해체된 지금의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법률상에는 있지만 무용지물이 되고 있는 조항들은 이제 실제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 한 방편으로 '가족대신장례', '사후자기결정권'에 관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길 바랍니다. 이제 가족의 역할을 넘어 사회가 장례를 책임짐으로써 존엄한 삶의 마무리의 기반이 마련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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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국 날강도라고 규탄 배격

조선, 미국 날강도라고 규탄 배격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9/02/17 [09:13]  최종편집: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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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17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기관지인《우리 민족끼리》에서 미국을 날 강도라는 표현을 써가며 강력 규탄했다.

 

조평통 우리민족끼리는 ‘강도적인 행위는 민심의 항거를 부른다.’라는 제목 기사에서 최근 한미 사이에 진행돼온 제10차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이 가 서명 되었다고 언급하며 이 같이 성토했다.

조평통은 이번 《협정》체결을 통해 한국이 지난해보다 무려 8.2%나 증액된 9억 1,890만US$의 많은 돈을 한국 강점 미제 침략군에게 섬겨 바치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민족끼리는 그나마도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의 유효기간이 5년에서 1년으로 줄어들어 미국이 《방위비》를 계속 늘일 수 있는 여지까지 남겨놓게 되었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매체는 실로 《선의와 신뢰의 덕분》이 아닌 강요와 굴종의 산물, 《국민이 납득할 수준》이 아니라 삼척동자도 수긍할 수 없는 굴욕적인 협상이 아닐 수 없다고 거듭 비난했다.

 

보도는 “이미 폭로된바와 같이 미국은 이번 협정을 통하여 더 많은 《방위비》를 빨아내기 위해 《한미동맹파괴》와 《남조선 주둔 미군철수 가능성》 등의 여론까지 내 돌리며 남조선 당국을 위협 공갈하고 《방위비》증액을 강박하였다.”미국의 행태를 문제 삼았다.

 

또, “지금 외신들까지도 이번 굴욕적인 협상의 결과가 미국의 압박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평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라며 “결국 《남조선을 지켜준다.》는 미명으로 남조선을 쥐고 흔들며 파렴치하게 놀아대는 미국의 강도적인 요구와 끈질긴 압박으로 하여 남조선 인민들의 혈세가 고스란히 탐욕스러운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비극이 초래 되었다.”고 참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강도적인 행위는 민심의 항거를 부르기 마련이다.’라며 “남조선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민중당을 비롯하여 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소속된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 등은 미국의 오만무례한 행위에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대폭 인상된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체결을 규탄 배격 하고 있으며 《국회》에서 이에 대한 비준을 거부할것을 요구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남한 시민사회 민주 단체의 투쟁 소식을 전했다.

 

이어 “이뿐이 아니다. 대구를 비롯한 남조선의 각 지역에서는 굴욕적인 협상을 반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떨쳐 나와 다양한 활동들을 벌리고 있다. 《국민의 뜻에 반하여 굴욕적인 협상으로 주권과 <국익>을 훼손 하였다.》,《<국회>가 국민의 뜻을 받들어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비준을 거부해야 한다.》, 《인상이 아니라 대폭 삭감하는 것이 마땅하다.》, 《미군의 <방위비>불법전용과 남용에 면죄부를 주는 꼴》, 《<한>반도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강도적인 인상 요구는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미국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국민의 혈세를 미군에 퍼주는게 <한미동맹>인가.》, 《설사 주<한>미군을 감축, 철수 한다고 해도 <방위비>증액을 반대한다.》, 《평화선언 남북군사합의 이행하라.》”는 목소리를 전했다.

 

아울러 “남조선 사회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분노와 항거의 열풍은 우리 민족의 존엄을 짓밟고 조선반도 평화와 안정을 엄중히 위협하는 미국의 강권과 전횡을 추호도 용납 하지 않을 민심의 의지의 분출이며 이것은 너무나도 응당하다.”고 역설했다.

 

끝으로 “남조선 인민들은 굴욕적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폐기투쟁을 더욱 강력히 전개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피려했다.

 

한편 이번 보도는 조.미 정상 회담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가 계속 되면 순조로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어서 주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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