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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 성공”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7/07/29 13:04
  • 수정일
    2017/07/29 13:04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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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밤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을 기습발사했다.
28일 밤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을 기습발사했다.ⓒ뉴시스
 
 

북한은 "28일 밤 대륙간탄도로켓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정전협정 체결일인 27일 '친필명령'으로 이번 시험발사 실시를 직접 지시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중앙통신은 이어 "화성-14형은 최대정점고도 3천724.9㎞까지 상승하며 거리 998㎞를 47분12초간 비행하여 공해상의 설정된 수역에 정확히 탄착됐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시험발사로 "미 본토 전역이 우리의 사정권 안에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고 중앙통신은 전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시험발사를 통해 대륙간탄도로켓체계의 믿음성이 재확증되고 임의의 지역과 장소에서 임의의 시간에 대륙간탄도로켓을 기습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이 과시됐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우리가 굳이 대륙간탄도로켓의 최대사거리 모의시험발사를 진행한 것은 최근 분별을 잃고 객쩍은(의미 없는) 나발을 불어대는 미국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의 전쟁 나발이나 극단적인 제재 위협은 우리를 더욱 각성 분발시키고 핵무기 보유명분만 더해주고 있다"며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국가방위를 위한 강위력한 전쟁억제력은 필수불가결의 전략적 선택이며 그 무엇으로도 되돌려 세울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전략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 놈들이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이 땅에 또다시 구린내 나는 상통(얼굴)을 들이밀고 핵방망이를 휘두르며 얼빠진 장난질을 해댄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차근차근 보여준 핵전략 무력으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중앙통신 발표 전문

<조선로동당의 전략적핵무력의 일대 시위 --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에서 또다시 성공>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를 지도하시였다


(평양 7월 29일발 조선중앙통신)

조선로동당 위원장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국가,군대의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직접적인 지도밑에 주체106(2017)년 7월 28일 밤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였다.

우리 당과 국가,군대의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현지에 나오시여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를 지도하시였다.

리병철동지,김락겸동지,김정식동지,장창하동지,전일호동지,유진동지,조용원동지가 동행하였다.

비범한 군사적예지와 담대한 배짱,령활한 지략으로 세인의 예상을 뒤엎으며 언제나 련전련승의 기적과 승리의 통장훈을 부르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로케트연구부문에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의 최대사거리를 모의한 시험발사를 빠른 시일안에 진행하여 로케트체계전반에 대한 믿음성을 다시한번 확증할데 대한 전투적과업을 제시하시였다.

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안고 령도자와 사상도 숨결도 발걸음도 같이하며 그 어떤 요새도 단숨에 점령해나가는 우리 당의 열혈충신들인 국방과학자,기술자들은 조선로동당의 전략적핵무력의 막강한 위력을 세계앞에 쨋쨋이 보여줄 신심드높이 결사전을 벌려 대륙간탄도로케트 2차 시험발사준비를 앞당겨 끝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준비기간 매일매일 그 정형을 보고받으시고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발사당일 밤에는 로케트시험발사장에 직접 나오시여 현지에서 지도하시였다.

이번 시험발사는 대형중량핵탄두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의 최대사거리를 비롯한 무기체계의 전반적인 기술적특성들을 최종확증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진행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발사명령을 내리시자 영웅조선의 무진막강한 힘을 재운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이 대지를 박차고 장쾌한 불줄기로 어둠의 장막을 밀어내며 우주만리로 단숨에 솟구쳐올랐다.

우리 나라 서북부지대에서 발사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은 최대정점고도 3,724.9㎞까지 상승하며 거리 998㎞를 47분 12초간 비행하여 공해상의 설정된 수역에 정확히 탄착되였다.

이번 시험발사는 최대사거리를 모의하여 최대고각발사체제로 진행하였으며 주변국가들의 안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대륙간탄도로케트 2차 시험발사를 통하여 지난번 1차 시험발사에서 확증되였던 발사대리탈특성,계단분리특성,구조체계특성 등이 재확증되였으며 능동구간에서 최대사거리보장을 위하여 늘어난 발동기들의 작업특성들과 개선된 유도 및 안정화체계의 정확성과 믿음성이 확증되였다.

또한 전투부분리후 중간구간에서 중량전투부의 자세조종특성을 재확증하고 실지 최대사거리비행조건보다 더 가혹한 고각발사체제에서의 재돌입환경에서도 전투부의 유도 및 자세조종이 정확히 진행되였으며 수천℃의 고온조건에서도 전투부의 구조적안정성이 유지되고 핵탄두폭발조종장치가 정상동작하였다는것을 확증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대성공을 이룩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결과에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로케트연구부문 과학자,기술자들과 일군들을 높이 평가하시고 당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특별감사를 주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이번 시험발사를 통하여 대륙간탄도로케트체계의 믿음성이 재확증되고 임의의 지역과 장소에서 임의의 시간에 대륙간탄도로케트를 기습발사할수 있는 능력이 과시되였으며 미본토전역이 우리의 사정권안에 있다는것이 뚜렷이 립증되였다고 긍지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오늘 우리가 굳이 대륙간탄도로케트의 최대사거리모의시험발사를 진행한것은 최근 분별을 잃고 객적은 나발을 불어대는 미국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이라고 하시면서 이 정도면 미국의 정책립안자들이 우리 국가를 감히 건드리는 날에는 미국이라는 침략국가도 무사할수 없으리라는것을 제대로 리해하였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우리 국가를 상대로 한 미국의 희떠운 전쟁나발이나 극단적인 제재위협은 우리를 더욱 각성분발시키고 핵무기보유명분만 더해주고있다고 하시면서 미제야수들에 의하여 이 땅에서 참혹한 전란을 겪어본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국가방위를 위한 강위력한 전쟁억제력은 필수불가결의 전략적선택이며 그 무엇으로써도 되돌려세울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전략자산이라고 강조하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미국놈들이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또다시 구린내나는 상통을 들이밀고 핵방망이를 휘두르며 얼빠진 장난질을 해댄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차근차근 보여준 핵전략무력으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줄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는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주체의 핵강국,세계적인 로케트맹주국의 자주적존엄과 위용을 다시한번 만방에 과시한 로케트연구부문 과학자,기술자들과 일군들을 열렬히 축하해주시며 그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으시고 력사에 길이 남을 뜻깊은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위대한 조선로동당의 새로운 병진로선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우리 공화국은 조국의 존엄과 생존권을 말살하려드는 미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게 될 그날까지 주체조선의 불패의 강대성과 무궁무진한 발전잠재력을 온 세상에 힘있게 과시하는 최강의 전략무기,주체무기들을 더 많이 개발완성하여 반제반미대결전에서 반드시 최후승리를 이룩할것이다.(끝)


<김정은동지께서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를 단행할데 대한 명령 하달>


(평양 7월 29일발 조선중앙통신)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주체106(2017)년 7월 27일 대륙간탄도로케트 《화성-14》형 2차 시험발사를 단행할데 대하여 친필명령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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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조라떼’와 '미세먼지’로 그려질 우리 삶의 길

조성화 2017. 07. 28
조회수 316 추천수 0
 
영화로 환경 읽기 22. <리버로드>
급속한 도시화로 달라진 유목민의 삶을 그린 영화 <리버로드>
우리가 가는 길은 재난영화나 공상화학 영화에 더 가까울 듯
 
리1.jpg» 영화 <리버로드>는 위구르족 형제가 아버지를 찾아 도시에서 유목지대로 찾아가는 길을 그렸다.
 
우리는 문명을 길에 비유하곤 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이나 문명의 역사를 길에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든 경험을 하게 되면 ‘고생 길’이 시작됐다고 하고, 어떤 문명이 점차 힘을 잃어 가면 문명이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왜 우리는 사람의 인생이나 문명의 역사를 길에 비유하는 것일까? 길은 실제 우리 인생이나 문명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교류하는 것처럼 길은 수많은 다른 길과 연결된다. 
 
또 길은 시작과 끝이 있고 방향성을 가진다. 편하고 빠른 길이 있는가 하면 험난하고 돌아가는 길도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길 위를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과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길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길의 특성은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과 비슷하며, 문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길은 하나의 물리적 공간이면서도 그 안에 다양한 비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길’이 중요한 소재로 종종 등장했다. ‘영화로 환경읽기’ 칼럼에서도 이미 다뤘던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나 <더 로드> 모두 길을 중요한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들이다. 이 두 영화에서의 ‘길’은 고난과 어려움을 상징했고, 그 길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영화의 중요한 줄거리였다. 
 
02-1.매드맥스.jpg
 
02-2.영화 더 로드.jpg» 길을 주제로 한 영화 <매드맥스>(위)와 <더 로드>의 한 장면.
 
급격한 산업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륙의 길
 
영화 <리버로드>도 길을 배경으로 한다. <리버로드>는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환경과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의 현재,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한 가족의 삶을 조명한다. 앞서 길이 한 문명이나 사람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리버로드>에서의 길은 문명과 사람 모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10_45_17__58a2612da16bb[S750,750].jpg» 문명과 개인의 삶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한 영화 리버로드 포스터.
 
주인공은 열 살 남짓한 꼬마 형제다. 이들을 오래전부터 유목 생활을 했던 소수 민족, 위구르족이다. 형제는 할아버지와 함께 도시에 산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고, 어머니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형제가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 가까이에서 유목을 하며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인근에 거대한 도시가 생기면서 가족은 함께 살 수 없게 되었다. 도시가 점점 커지자 도시 주변의 땅과 강이 점차 메말라 갔고, 이 때문에 목초지가 사라져서 더는 유목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두 형제는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화려한 도시가 생겨났지만 그 때문에 도시 주변 환경이 사막으로 변했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가진 인간의 삶도 붕괴한 것이다. 이러한 삶의 붕괴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리2.jpg» 도시화로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다.
 
형제를 돌보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죽게 되자, 둘은 할아버지의 장례 후 연락이 닿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한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는 과거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갔던 형제의 기억이다. 기억을 더듬어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두 형제는 과거와는 너무 달라진 풍경에 당황하게 된다. 불과 몇 년 전 풍부한 물이 흐르던 강은 메말라 버렸고, 푸른 초지였던 곳은 모래바람이 날리는 사막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급속한 환경의 변화는 형제의 기억을 방해하고, 이 때문에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두 형제는 과거 아버지가 유목 생활을 하던 장소를 찾아가지만, 이미 그곳도 사막으로 변해버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다. 
 
리3.jpg»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은 이미 사막으로 변해있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형제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찾게 되지만, 아버지의 삶은 형제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버지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리버로드>를 보길 권한다. 
 
사실 도시화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거나 개인의 삶이 영향을 받는 모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우리나라도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 방식의 문화를 대부분 잃었고, 이 과정에서 지역마다 존재했던 독특한 삶의 방식들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06.아버지와의 만남.jpg» 결국 아버지를 찾지만, 아버지는 이미 아이들이 생각했던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떨 길을 가고 있는가?
 
만약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명을 누군가가 ‘길’에 빗대어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녹조라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문제가 되는 4대강의 상황을 주제로 <그린 리버 로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1급 발암물질인 미세먼지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그 배출원을 차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을 표현하는 <마이크로 에어 로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영화를 만들더라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영화화한다면, 블록버스터급 재난영화가 되거나 암울한 미래를 그린 공상과학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영화 <패신져스> 칼럼 도입부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07-1.녹조라떼.jpg» 낙동강의 '녹조라떼'.
 
<리버로드>를 보면서 도시화가 일으킨 사막화와 이로 인한 한 가정의 몰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우리의 삶을 모티브로 한 영화를 본 누군가는 스스로 물과 공기를 오염시킨 문명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아직 우리의 길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이 길을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로 방향을 바꿀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걸까? 또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 것일까?”
 
조성화(환경과교육연구소 대표, 수원시 기후변화체험교육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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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자강도 일대서 탄도미사일 발사 "ICBM급 평가"

 

심야 발사 이례적... '화성-14형'보다 고도·비행거리 늘어나

17.07.29 06:54l최종 업데이트 17.07.29 06:54l

 

북한이 자강도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29일 "북한은 28일 오후 11시 41분께 자강도 무평리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불상의 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라고 발표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지난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발사 후 24일 만이다.

합참은 북한의 이번 미사일에 대해 "고도는 약 3700km, 비행거리는 1000km 이상, 사거리 기준으로 지난번보다 진전된 ICBM급으로 추정된다"라며 "추가 정보를 분석 중"이라고 설명했다. 화성-14형은 최고고도가 2천802㎞, 비행거리는 933㎞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합참으로부터 북한 미사일 발사를 보고받은 후 이날 오전 1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긴급 소집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도발을 강행한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7차례에 달한다.

한·미·일 "ICBM급 평가"... 미국 본토 가격 가능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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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의 제프 데이비스 대변인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감지하고 확인했다"라며 "이번 미사일은 낙하할 때까지 약 1000km를 비행했으며, 예상한대로 ICBM급으로 평가됐다"라고 밝혔다. 이는 이론상 최소 5500km를 비행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방위성은 성명을 통해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45분 정도 비행한 뒤 일본 홋카이도 오시마반도 오쿠시리섬 서쪽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낙하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발표했다.

방위성 관계자는 "이번 미사일은 고도가 3000㎞를 초과했다"라며 "발사 각도를 평소보다 높게 설정하는 '로프티드 궤도(lofted trajectory)'로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일본 정부도 아베 신조 총리의 주재로 NSC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일본 NHK에 따르면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이번 미사일의 고도와 사거리 등을 고려했을 때 ICBM급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아베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라며 "가장 엄중하고 강한 단어로 비난하며,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해서 국민의 안전 확보에 만전을 기하겠다"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북한이 사전 통보도 없이 EEZ 내에 미사일을 낙하시킨 것은 항공기와 선박의 안전에 매우 위험한 행위"라며 "미국과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러시아에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대북 제재 더욱 강화될 듯... 추가 도발 우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보도하는 NHK 뉴스 갈무리.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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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CNN 등 주요 외신은 이번 미사일이 상당한 거리를 비행한 것으로 볼 때 ICBM급 가능성이 있다며 한·미·일 군 당국이 구체적인 발사 정보를 얻기 위해 정밀 분석 중이라고 보도했다. 

한 전문가는 "북한이 자강도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처음이고, 심야에 기습적으로 발사한 것도 매우 이례적"이라며 "그동안 북한은 대개 아침에 미사일을 발사해왔고, 심야 발사는 거의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이 심야에 자강도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도 미사일 발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수 있다"라며 "이는 북한 미사일 발사의 사전 탐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이 최근 군사 적십자 회담을 공식 제의했으나 북한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면서 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비전으로 내놓은 이른바 '베를린 구상'이 당분간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이 북한 여행금지를 포함해 대북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데다가 다음 달 한·미 연합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이 시작되면 북한이 추가 도발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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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률 동지, 그러니 지금 갈 때인가”

통일애국전사 고 박석률 동지 민주사회장 추도식 엄수
▲고 박석률 선생 영정

“박석률 동지, 그러니 지금 갈 때인가. 나와 함께 계속, 40년 전의 그 ‘남민전’ 함성을 외쳐야 하지 않는가.”

‘통일애국전사 고 박석률 동지 민주사회장 추도식’이 27일 저녁 서울 도봉구 한일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동지들, 친지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오세제 서강대 민주동우회 회장의 고인 약력 소개에 이은 추도사에서 공동장례위원장인 안재구 남민전 동지회 대표는 “박석률 동지, 아쉽다. 정말 속상하다. 나보다 먼저 가서 아쉽고 속상한 게 아니다. 전사는, 우리 남민전 전사는, 짧든 길든 굵게 가자는 주의 아니던가. 사람답게 사는 사람세상 -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뻗쳐 온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가는 동지의 처신이 정말 속상하다”고 토로하곤 “우리는 그 피어린 투쟁으로 역사를 개척해 온 동지다. 그 역사의 바탕에서 지금 세계는 어떤가. 우리 민족의 자주적 대와 힘이 융성하여 세계정세가 변혁의 문턱에 올라서 있지 않은가. 우리가 소원하는 자주, 민주, 통일세상의 빗장도 풀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고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인 안재구 남민전 동지회 대표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박형선 광주전남 민청학련 동지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지난 78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석률이 형이 찾아와서는 남민전에 가입해 새롭게 시작하자고 얘기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박근혜 정권을 무너뜨린 촛불이 타오르고, 민주주의가 조그마하게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데 정작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인 지금 형은 안 계신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소처럼 눈이 크고 맑아 돈 하고는 인연이 없는 분이었고, 죽어서도 운동을 하겠다고 했는데 아마도 먼저 가신 선배들을 만나면 세 번째, 네 번째 새로운 시작을 하고 계실 거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호상을 맡은 남민전 동지회 이강 선생은 “(고인이)만날 때마다 건강의 중요성을 느낀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니 엄청난 아쉬움을 느낀다”며 “오늘 이 자리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동생인 박석삼 선생은 “석률 형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주시고, 오늘 이 추모의 자리를 가득 메워주신 여러 선생님들, 선배, 동기, 후배 여러분께 유족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한다”고 인사하곤 “저는 석률 형이 낭만적 전사로서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저는 혁명적 전사였던 석률 형을 보낸다. 저는 이제 석률 형이 돈, 권력, 명예, 출세를 따지지도 않고, 추구하지도 경쟁하지도 않는 그런 세계로 가서 그의 혁명적 낭만을 완성하길 바란다”면서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추도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고인의 영정 앞에 차례로 나와 헌화하고 묵념했다.

▲추도식을 시작하면서 참가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박석삼 선생 등 유족들이 인사와 답사를 하고 있다.
▲추도식 참가들이 고인에게 헌화하고 있다.

고 박석률 선생 약력 및 활동

 

■ 약력

1947년 광주 출생

광주 계림초등학교 졸업

광주 서중학교 졸업

서울 경기고등하교 졸업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활동

1974년 4월 ~ 1975년 2월 민청학련 수감(7년형)

1979년 11월 ~ 1988년 12월 남민전 수감(무기징역형)

1995년 11월 ~ 1996년 8월 범민련 수감

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민자통) 의장

전 6.16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공동대표

전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전 평화경제미래포럼 대표

 

■ 저서

<이땅에 살기 위하여>(녹두, 1989), <저 푸른 하늘을 향하여>(풀빛, 1989), <자주와 평화 누가 위협하는가>(풀무, 2002), <자주와 평화, 개혁으로 일어서는 땅>(백산서당, 2003)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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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안부' 문제 간섭 중단하라"

이용수 할머니 "미국도 책임..어디 건방지게 나서냐"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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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28  1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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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미 하원 일본군성노예제 결의 채택 10주년 맞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2015년 한국과 일본 정부의 일본군'위안부'합의(12.28합의) 이면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짙은 가운데, 시민사회는 미국 정부의 '위안부' 문제 간섭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28일 오전 서울 광화문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미 하원 일본군성노예제 결의 채택 10주년 맞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공개요청서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노력과 세계의 노력은 2015한일합의로 인해 위협받게 되었다"며 "피해자들에게 정의실현이 지연되고 있는 현재의 사태에 대해 미국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가해자 일본 정부가 범죄인정과 사죄, 배상할 자세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정붑에게 '위안부' 합의를 종용하고 압박하였다. 우회적으로 한미동맹을 빌미로 한일합의를 압박한 사실도 드러났다. 미국정부의 모습은 피해자에게 인권회복의 권리를 제대로 요구하지 못하게 하고 포기할 것을 압박한 것이나 다름없다."

12.28합의 이후 당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합의 지지 발언, 빈센트 브룩수 주한미군사령관과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차관보 등의 '위안부' 합의에 따른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기회 발언 등이 미국 정부의 간섭을 의미한다는 것.

"미국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의 권리를 한.미.일 동맹 강화와 국익의 거래수단으로 희생시키려 한다"는 비판이다.

그러면서 "미국 정부 및 국제사회의 부당한 압력이 아닌, 정의로운 연대와 협력을 요구한다"며 "미국사회 그리고 구 연합군이였던 나라들에게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에 대해서 불처벌과 진실은폐로 역사청산의 기회를 놓친 책임을 더욱 높이 추궁하고자 한다"며 미국 정부의 간섭중단을 촉구했다.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미국도 책임이 있다. 어디 건방지게 나서느냐"고 일갈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정부가 10억 엔으로 우리를 팔았다. 여전히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속이고 있다. 이렇게 죄를 지어놓고 죄를 모르고 있느냐"고 일갈했다.

그리고 "미국도 책임이 있다. 어디 건방지게 나서느냐"며 "이건 협상이 아니었다. 나는 한 적도 없다. 듣도보도 못했다. 도둑협상이다. 그냥 못있는다. 그냥 죽을 수없다. 열심히 끝까지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30명이 참가했으며, 길원옥, 이용수 할머니는 주한미대사관에 △2차대전 관련 공문서 공개, △간섭 중단, △올바른 해결 지원 등을 담은 공개요청서를 전달했다.

   
▲ 길원옥, 이용수 할머니가 주한미대사관 측에 공개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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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연대, 반미반전 운동기간 선포

민권연대, 반미반전 운동기간 선포
 
 
 
편집국
기사입력: 2017/07/28 [03:0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권연대는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부터 한달여간 반미반전 운동을 집중적으로 펼칠 계획이다.     © 편집국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는 미 대사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반미반전 운동기간을 선포했다민권연대는 전쟁이 끝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항시 전쟁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와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민권연대는 북한의 '화성-14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이후 미국의 대북압박은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고북한도 이에 대응해 추가적인 핵·미사일 시험 등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것을 우려했다특히 민권연대는 “8월에는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연합 훈련이 예정되어 있다며 미국의 폭격기핵항모 등 핵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집중 될 것이고 한반도 긴장은 극대화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고 주장했다.

 

민권여대는 그동안의 숱한 제재와 압박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고도화 되어 왔다며 제재와 압박으로는 북한의 핵과 ICBM을 막을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고 평가했다민권연대는 남은 것은 대화와 협상뿐이라고 강조하며, “북미간 대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 한반도 평화의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민권연대는 7월 27일부터 8월 26일까지를 반미반전 운동기간으로 선포했다민권연대는 전쟁훈련 중단사드배치 철회대북적대정책 철회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의 내용으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28일 전국 동시다발 1인 시위를 진행하며, 29일에는 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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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문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미국은 대북적대정책 철회하라!

 

오늘은 정전협정을 맺은 지 64년이 되는 날이다. ‘정전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 중인 나라들이 서로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일이다말 그대로 현재 한반도는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멈춘 상태다.

 

전쟁이 끝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은 항시 전쟁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한미연합 전쟁훈련이 진행되고미국의 최첨단 핵무기들이 한반도에 배치되고이에 반발한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한다또한 우리 국민들은 한미동맹이라는 이름하에 불평등한 SOFA협정백해무익한 사드배치 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앞으로 한반도 위기는 더욱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7월 4북한의 '화성-14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이후 미국의 대북압박은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7월 5(현지시간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 대사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필요하다면 군사력까지 사용'할 것을 언급했고, 8일에는 미국의 전략폭격기 B-1B랜서가 한반도상공에서 실사격 훈련을 진행했다트럼프 행정부는 대북 독자제재에 나서는 등 경제제재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북한은 이에 대응해 추가적인 핵·미사일 시험 등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8월에는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연합 훈련이 예정되어 있다미국의 폭격기핵항모 등 핵전략자산이 한반도에 집중 될 것이고 한반도 긴장은 극대화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제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은 이런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1차적으로 미국의 대북적대 정책이 철회되어야 하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숱한 제재와 압박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고도화 되어 왔다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의 보고서에서도 북한이 이르면 내년에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 본토를 실전에서 타격할 능력을 보유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제재와 압박으로는 북한의 핵과 ICBM을 막을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남은 것은 대화와 협상뿐이다.

 

민권연대는 오늘(727)부터 826일까지를 반미반전 운동기간으로 선포한다미국 정부를 향해 전쟁훈련 중단사드배치 철회대북적대정책 철회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이다결국 북미간 대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 한반도 평화의 해법임을 알려나갈 것이다.

 

이제는 한반도 전쟁상태를 끝내야 한다미국은 대북적대정책 철회하고 북미 평화협정 체결에 나서라!

 

2017년 7월 27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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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학자 이영훈의 망언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7/07/28 11:27
  • 수정일
    2017/07/28 11:27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전주기전대, ‘위안부는 합법적 공창’ 동영상 소감문 제출 강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학자 이영훈의 망언
 
임병도 | 2017-07-28 08:44: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전주기전대의 2017학년도 2학기 교·직원 채용 공고. 필수 제출 서류에 뉴라이트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 강의 시청 후 소감문이 포함돼 있다. ⓒ전주기전대 홈페이지 캡처

 

대학교 교직원 채용 ‘제출 서류’에 ‘위안부 망언’ 발언 교수의 동영상 강의 소감문이 포함돼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지난 7월 7일 ‘전주기전대’는 2017학년도 2학기 교·직원 채용 공고를 홈페이지에 게재했습니다. 채용공고 내 제출 서류 목록을 보면 ‘이영훈 교수 환상의나라-위안소의여인들1.2.3 시청 후 본인의견서 제출 1부’가 있습니다.

채용공고에는 이영훈 교수의 강의가 있는 링크 주소와 함께 ‘A4 3장 이내, 13포인트, 줄간격160 ,글씨체 휴먼명조’라며 자세하게 소감문 작성 요령까지 기재돼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 소감문은 필수 제출 서류로, 만약 소감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교직원 응시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전주기전대는 채용공고뿐만 아니라 지난 4월과 5월에 있었던 학교 교직원 연수에서도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을 시청하고 소감문을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전북지역 사회단체는 ‘시대착오적 사상검증’이라며 기전대학이 채용 절차와 재직 중인 교직원 연수 과정에 문제의 동영상을 포함한 의도가 무엇인지 밝혀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은 문을 닫고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위안부는 합법적 공창, 일본 극우세력과 똑같은 이영훈 망언’

 

▲이영훈 교수의 ‘위안소의 여인들’ 강의 동영상은 극우논객 정규재TV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다.

 

논란을 빚은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은 극우논객이자 박근혜씨의 탄핵 중 인터뷰를 진행했던 ‘정규재TV’에서 방송됐던 ‘극강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시리즈 중 ‘위안소의 여인들 1,2,3’편 입니다.

이영훈 교수는 ‘위안소의 여인들’ 강의에서 위안부 모집 업자가 여성의 부모에게 돈을 주고 데려왔기 때문에 ‘사기성 인신매매에 불과하다’라며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정부와 군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적인 거래’라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사기와 인신매매란 방식을 통해서 종군위안부가 되기는 했으나 성노예라고 규정할 정도는 아니었다’라며 ‘피해자들에 대한 감금과 폭행이 없어 인신의 자유가 보장된 합법적 공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은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과 똑같습니다. 2016년 일본 자민당의 사쿠라다 요시타카 의원도 “일본군 위안부는 직업으로서의 합법적인 매춘부였다.”라는 망언을 늘어놓았습니다.

특히 1997년 아베가 “한국에는 기생집이 있어 위안부 활동이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라는 발언은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조선시대의 매춘과 양반들의 성생활’ 설명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보면, 마치 일본 극우세력의 ‘위안부 망언’을 베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2004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사과했던 이영훈 교수’

 

▲ 2004년 MBC 100분 토론에서 ‘위안부 망언’ 발언을 한 이영훈 교수는 나눔의 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의 절을 했다. ⓒ한겨레 캡처

 

이영훈 교수의 ‘위안부 합법적 공창’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04년 MBC 100분 토론에서도 이 교수는 “일본군 성노예가 ‘사실상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형태’였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이영훈 교수는 발언이 논란이 되자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과의 절을 했습니다.

이 교수는 할머니들의 호통에 “거듭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할머니들의 고통을 더는 일에 동참하겠다. 할머니들의 울분을 가슴에 새기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2016년에도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는 합법적 공창’이라고 주장하는 이영훈 교수의 모습 보면, 2004년 사과도 거짓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학자 이영훈의 망언’

 

 

이영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뉴라이트 학자입니다. 특히 극우세력과 뉴라이트 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던 ‘교과서포럼’을 주도했으며 ‘대안교과서’ 저자로 참여했습니다.

‘일제시대(일제강점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78쪽)

‘지배를 위해서 철도를 깔고 도로를 뚫고 항만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근대문명의 일환이었고, 그것은 우리 한국민족도 마찬가지로 주체적으로 적응하고 훈련을 받으면서 근대 인간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영훈 교수)

이영훈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뿐만 아니라 아베의 망언이 담긴 담화를 가리켜 “진중하게 쓰인 훌륭한 문장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아베는 “서울대의 한 분이 일제시대(일제강점기)에 왜 (조선의) 인구가 증가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분석한 자료가 있다”라며 이 교수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했다는 말, 그거부터 바꿔야 한다’라며 독재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이런 주장은 극우세력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나오기도 합니다.

 

▲ 지난 7월 23일 별세한 김군자 할머니는 2004년 이영훈 교수가 나눔의 집에 왔을 때 ‘학자 자격이 없다’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지난 7월 23일 김군자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2004년 이영훈 교수가 나눔의 집에 왔을 당시 할머니는 이 교수를 향해 ‘학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학자는 무슨 학자냐? 자격 없다. 당신이 학생들을 다 버려놓았다. 우리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느냐?” (2004년 김군자 할머니)

김군자 할머니가 평생 상처를 받았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아직도 망언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늘나라에서도 할머니의 원통한 마음은 풀리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아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할머니는 이 땅에 없지만, 남아있는 우리가 끝까지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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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 원장 비판하려다 정신병원 간 스님, 불자들이 나섰다

 

[불교 적폐 청산] 적광 스님(운정스님) 인터뷰

17.07.27 22:05l최종 업데이트 17.07.27 22:29l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은 불교계 언론인 <불교 닷컴> <불교포커스>와 함께 '불교 적폐 청산' 공동기획 기사를 내보낸다. [편집자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하고 있는 적광 스님.
▲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하고 있는 적광 스님.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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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납치 폭행 당한 스님, 지금은 정신병동에

한 달 전 정신병동에서 만났던 적광 스님(운정 스님)은 결국 경찰을 고소했다. 

스님은 2013년 8월21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앞에서 벌어진 승려들의 집단 폭행 사건 피해자다. 이번에 고소한 경찰은 그가 폭행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종로경찰서 소속 그 경찰이다. 당시 스님이 신변 보호를 요청해 출동했는데도 경찰관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실상 직무유기했다. 적광 스님이 오래 전 기억을 소환한 이유다. 스님은 골절상 등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았고, 지난 4년간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 7월 19일 전철과 KTX, 버스, 택시를 갈아타면서 그가 은거하는 곳에 도착하니, 녹색 철망 문의 잠금장치를 열고 마중 나왔다. 환자복이 아니라 밀짚모자에 승복을 입었기 때문일까? 그는 한 달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적광 스님(운정스님)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뒤 농가주택을 개조한 곳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서까래가 드러난 처마 밑에 까치집이 보였다. 쪽마루에 올라 한 평 반 남짓한 방에 들어갔다. 책장에는 <서양 철학사> <인도 철학사> <코란> <플라톤의 국가론> 등 묵직한 책이 꽂혀 있다. 경전 공부하면서 수기로 써서 요점을 정리한 파일도 100여개나 있다. 
  
"요즘은 책을 못 봅니다. 우울증이 심해서. 전에는 공부를 많이 했지요. 파일을 정리해서 책도 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폐인이 다 됐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평온하던 표정이 굳어졌다.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으면 등을 뒤로 젖혔다. 잠깐 눈을 감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눈을 떴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4년 전 공포스러운 장면이 스쳤다.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할 말이 남은 까닭이다.

두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다. 그의 말을 노트북에 담았다. 기자라는 직업이 잔인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다. 그와 헤어진 뒤 택시를 타고 와 한적한 버스 정류장 앞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벤치에 앉아 한 시간마다 한번 오는 시외버스를 기다렸다. 4년 전, 그가 조계사 앞에서 호법부 승려들에 의해 납치돼 끌려가면서 외친 뒤 이번에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한민국 경찰, 이건 아닙니다."
 

 4년전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려다가 호법부 승려들에게 납치되는 적광 스님.
▲  4년전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려다가 호법부 승려들에게 납치되는 적광 스님.
ⓒ 불교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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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용서할 수 없다"

적광 스님의 절규는 4년 뒤인 지난 7월 13일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다시 울려퍼졌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자, 제가 먼저 외치겠습니다. 적광 스님이 호법부 승려들에게 끌려가면서 외친 말이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적광스님 폭행에 따른 조계종 승려, 경찰관 고소고발 기자회견'의 사회자인 '명진 스님과 함께하는 변호사 모임'의 조영선 변호사가 선창하자, 참석자들은 따라 외쳤다. 

적광 스님과 정의평화불교연대, 참여불교재가연대, 바른불교재가모임, 명진스님제적철회를 위한 원로모임 등은 당시 폭행에 가담한 7명의 호법부 소속 승려와 재가 종무원,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1명의 고소‧고발장을 서울지방검찰청에 접수했다. 

호법부 소속 승려들은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경찰관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직무유기 등의 혐의다. 적광 스님이 4년 전 '나홀로 소송'을 해서 10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폭행 가해자 2명(승려 1명, 재가 종무원 1명)은 제외됐다. 이날 발표한 기자회견문에 적힌 고소‧고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난 7월13일 서울 조계사 일주문에서 열린 '적광스님 폭행에 따른 조계종 승려, 경찰관 고소고발 기자회견'.
▲  지난 7월13일 서울 조계사 일주문에서 열린 '적광스님 폭행에 따른 조계종 승려, 경찰관 고소고발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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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광 스님의 탄원, 기자회견에도 자승 총무원장의 도박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2) 집단 폭행에 따른 상해행위임에도 승려 및 재가 종무원 2인만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원의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3) 형사처벌 받은 2인에 대한 조계종단의 징계도 없었고, 그들은 현재 그 직을 수행하고 있다.
4) 고소인은 집단 폭행 트라우마로 현재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5) 조계종 내의 폭행, 도박 등 위법, 일탈된 행위가 빈번함에도 자정 내지 처벌되지 않고 있다. 
6) 국민을 보호하고 위법행위를 저지해야 할 경찰관은 오히려 방관함으로써 폭력행위가 노골적으로, 집단적으로 전개되도록 용이하게 하였다.   

"그날 제가 외친 것에서 '대한민국 경찰'이 빠졌네요. '이건 아닙니다'가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이건 아닙니다'였습니다. 납치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5명의 경찰관들에게 '제발 나를 구해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종로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했고,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경찰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들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신경을 안정시키는 정신과 약을 매일 한 주먹씩 입에 털어 넣어도 꺼지지 않는 분노. 이걸 이해하려면 2013년 8월 21일 오후 2시, 조계종 총무원 청사 앞 우정공원 입구 인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아래 영상을 클릭하면 적광 스님이 이곳에서 13명의 호법부(조계종 경찰-검찰격) 승려와 종무원에게 끌려갈 때 무전기를 들고 지켜보던 경찰이 나온다.
 



적광 스님은 이날 자승 총무원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려다가 납치돼 조계사 경내에 있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 1층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집단 폭행을 당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그가 호법부 승려들이 내민 '환속제적원'(조계종 승적을 스스로 내려놓겠다는 내용의 각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고 다시 끌려나와 식당에 갔을 때에도 경찰 2명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제 흉측한 모습을 보고 놀랐는지, 경찰들이 경찰서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상황이 끝났는데 무슨 소용이 있냐'고 대꾸했습니다. 경찰에게 '왜 저를 지켜주지 않았냐'고 싫은 소리도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갔습니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은 늦더라도 추궁당해야 마땅합니다. 이래저래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서 경찰관도 고소한 겁니다."

당시 납치-폭행 현장을 묵인한 경찰의 행태가 그에게 미친 참담한 상황은 아래 기사를 클릭하시면 확인하실 수 있다. 

☞ "나는 도살장 끌려온 한 마리 짐승... 1200만원 돈 봉투에 영혼 팔 수 없었다"

[4년 전 열지 못한 기자회견] 자승 원장을 고발하고 싶었다  

4년 전 그가 기자회견을 하려다가 실패한 장소는 을사늑약 후 민영환이 자결로 항거한 우정국 터 앞이다. 적광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 재임을 막고 불교계를 바로잡고 싶었다"면서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이 고통과 위협을 무릅쓰고 독재에 항거했듯이 저도 그런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기자회견 장소에서 한 마디도 외치지 못하고 끌려갔다. A4용지 5쪽짜리 기자회견문과 <신동아>의 자승 원장의 도박 의혹 기사 복사본 100여 부도 호법부 승려들에게 빼앗겼다. 

- 호법부 승려들은 어떻게 알고 그 자리에 왔나?
"기자회견을 한다고 10여 개의 불교계 언론에 알렸다. 조계종 총무원의 입장에 충실한 일부 언론사 기자들이 그걸 총무원에 알렸을 것이다." 

- 당시 기자회견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나?
"자승 원장의 거액 상습 도박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자승 원장이 재임을 위해서 자기 사람들을 주요 요직에 앉히는 등 불교계를 정치 세력화한다는 비판 내용도 있다."

- 당시 못다한 기자회견을 지금 한다고 해도 같은 생각인가?
"조만간 총무원장 선거가 열릴 텐데, 자승 원장은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줬듯이 자기 후계자를 심어놓고 나갈 것이다. 4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불교계의 정치세력화를 완성시켰다. 불교의 미래가 없다. 어쨌든 사람마다 자기 몫이 있는데, 저는 그 때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폭행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적광 스님.
▲  폭행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적광 스님.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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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그의 과거] 무소의 뿔처럼 

<오마이뉴스>가 4년 만에 그를 인터뷰한 기사 (☞ 납치 폭행당한 스님, 지금은 정신병동에)에 달린 댓글 중 이런 게 있었다. 

"속세에서의 이종사촌 형으로서 적광스님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누구보다 진리추구에 밝았던 빛나고 찬란했던 젊은 열정을 지녔던 스님을 저렇게 만든 적폐세력은 새로운 정부 출범과 더불어 깨끗이 일소되고 새롭고 정의로운 종단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서박사)

적광 스님도 그 댓글을 보고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는데 저를 끔찍하게 아끼던 형이었다"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그의 '찬란하고 젊은 열정을 가졌던' 때가 궁금했다. 조계종 호계원(조계종의 사법기관-법원격)이 승적을 박탈해서 '선학원'으로부터 다시 계를 받아 '운정 스님'으로 살고 있는 적광 스님. 

대구 능인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는 수재였다. 한양대학교는 법과대학을 키우려고 고시반 제도를 운영했다.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인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해 4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고시를 준비하게 했다. 1981년에 그는 한양대에 입학했고, 4년 장학금에 매월 10만원의 생활비도 받았다. 50명의 동기생 중 35명이 고시에 합격했지만, 그는 2학년 때부터 불교에 빠졌다.      

"세상의 영광보다는 진리의 세계가 좋았어요. 세상의 길이 모래와 돌의 길이라면 불법의 길은 황금의 세계로 보였습니다. 법구경, 화엄경 등을 보면서 진리 추구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죠. 출가를 하려는데 부모님들이 학교 졸업은 해야 한다고 반대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포스코 계열 회사에서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모았어요. 그 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부모님들이 허락을 했어요. 그 때 39살(2000년)이었습니다." 

그는 출가한 뒤에도 서강대 종교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동국대학교는 물론 서강대에서도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도 불교 공부에 대한 갈증은 식지 않았다. 경남 통영의 연화도에 있는 연화사에 들어가 3년 동안 기도만 하고 나왔다. 그는 청송교도소에서 3년 동안 법회를 주관했고 경북 포항 자장암 주지를 지냈다. 

- 불교에 귀의해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참선 수행을 많이 하고 싶었다. 깨달음의 세계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옛날 일이 됐다."

- 폭행 사건을 당한 뒤에 환속(다시 속세로 돌아옴)의 유혹을 느낀 적은 없나?  
"추호도 없다. 지금 우리의 불교가 타락했지만, 나 혼자라도 바로 살면 그게 승려의 길이다."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겠다? 
"맞다."

- 지금도 출가할 때의 그 꿈을 꾸고 있나? 
"불교뿐만 아니라 우리 세상이 모두 평화로운 불법의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그 꿈을 꾸고 있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 몸이 빨리 나아지면." 

그는 지난 4년간 악몽에 시달리면서 정신과 약을 끊은 적이 없다. 최근 우울증 증세가 악화돼 35일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담당 의사는 계속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퇴원했고 한 달에 한 번씩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이때마다 우울증 치료약을 한 보따리씩 가져 온단다.

"몸조리하는 데 전념하고 있어요. 외출은 하지 못하지만, 집안 허드렛일을 하면서 풀도 뽑고 운동도 합니다. 건강했을 때에는 매주말 산행을 할 정도로 건강했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니 몸에 힘이 없습니다."

[정신과 치료, 그 후] "조계종 적폐 청산 촛불을 들 때"
 

 적광스님 폭행 관련 고소고발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재동 화백.
▲  적광스님 폭행 관련 고소고발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재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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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적광 스님이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후원모임이 생겼다. 스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최근 조계종 승적을 박탈당한 명진 스님 제적 철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조계종 적폐청산시민연대 등이 주축이 돼 후원모임을 결성했다. 

지난 13일 조계사 앞에서 열린 '조계종 승려, 경찰관 고소고발 기자회견' 때 적광 스님 후원모임의 공동대표인 박재동 화백은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한 달에 한 번씩 비구들을 모아놓고 그동안의 말과 행동에 대한 비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걸 '포살과 자자'(포살은 자신의 잘못을 대중들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는 것이고 자자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잘못을 지적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지적 받는 것.)라고 합니다. 이때 부처님이 제일 먼저 나서서 '내가 깨닫지 못한 나의 허물을 지적하고 비판해 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조계종 총무원이 자승 원장의 허물을 비판하려는 적광 스님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잡아서 족쳤습니다. 승복도 벗겼습니다. 종교의 문제 이전에 인간의 인권 문제입니다. 사적 형벌을 금지하는 법치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죠. 경찰은 폭력을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고 방조 묵인했습니다. 종단 적폐를 촛불 정신으로 청산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적광 스님 후원모임은 앞으로 치료비를 위한 모금과 소송 지원 등을 할 예정이다.

적광 스님과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우리 불교, 어떻게 바뀌어야 합니까? 
"종교는 종교다워야 합니다. 성직자가 신도들의 아픔을 보살피고 신도들과 함께하는 게 종교인데 불교계는 일부의 일탈된 세력들이 성직자의 본분을 버리고 범계 행위를 저지르며 사유재산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불교계의 적폐죠. 이걸 드러내고 불태워야 할 자승 총무원장은 전국의 사찰을 자기 정치 세력으로 만들어서 미래가 암담합니다. 

불교 수장이 부처님의 법에서 일탈한 것도 문제인데, 행동하는 승려가 없습니다. 하나둘씩 모이면 모두 이런 불교에 불만을 드러내지만 이걸 고치려는 승려가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 재가자(불교 신도)들이 불교 적폐를 없애려고 행동에 나서고 있는데, 이게 희망입니다."  

심한 우울증을 앓는 그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4년 전의 기억을 들고 나온 것은 재가자들이 만드는 희망에 한 점 보태기 위해서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지만 조계종 적폐청산을 위해 촛불 한 개 들고 싶다는 뜻이다. 그가 힘겹게 다시 시작한 심판을 응원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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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도, 미군 지휘관들도 "원폭 사용 반대"

 
[전쟁국가 미국] 그로브스 "원폭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
2017.07.27 00:18:59
 

 

 

 

2400명 희생에 34만 명 살해로 보복한 미국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서 시작돼 1945년 8월 9일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공격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미군 전사자는 2335명. 민간인 사망자는 68명이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34 : 1. 전투원만을 노린 정밀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4만 명이 즉사했는데 이중 군인은 250명이었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1 : 159.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1945년 말까지 7만 명, 1950년까지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로시마에서는 8만 명 즉사에 1945년 말까지 14만 명, 1950년까지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공식 발표를 통해 히로시마에서의 일본군 사망자는 3242명이라고 밝혔다. 

진주만 기습의 사망자는 2413명인 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는 34만 명으로 진주만 사망자의 141배에 이른다. 한마디로 지나친 복수극이라 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가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부른 이유다. 

히로시마 당시 트루먼은 포츠담회담을 마치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오거스타호 선상에서 저녁을 먹다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실을 보고받은 그는 펄쩍 뛰며 "정말 역사적인 일이야"라고 환호했다. 얼마 후 그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공표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행복한" 발표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이틀 후, 트루먼이 환호했다는 소식에 민주당의 한 정치인이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 주의를 당부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장치에 대해 환호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환호한 이유는 파괴가 아니라 이제 파괴가 종식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참전 이전 '민간인 학살 중단'을 호소했던 루스벨트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중단하자며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투 행위의 와중에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습은 (중략) 문명 세계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인류의 양심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비극적 대재앙의 시기에 이처럼 비인도적인 야만이 행해져야 한다면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현재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정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긴급한 호소를 공개적으로 하려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도, 방어 수단이 없는 도시의 민간인들에 대한 공습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랬던 미국이 정작 참전 후에는 세계 최악의 공습을 단행했다.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1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이 그것이다.  

역사가들은 그 원인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복수심과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꼽는다.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인간으로 느꼈으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나 쥐새끼쯤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루먼은 8월 11일, 원폭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원자탄 사용에 대해 나보다 더 고민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부당한 진주만 기습, 그리고 미군 포로 살해에 대해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알아듣는 언어는, 그동안 우리가 계속해 왔던 공습뿐입니다. 짐승을 대할 때는 짐승으로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복수심이나 인종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군 고위 지휘관 대다수가 원폭 사용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등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반대했다. 이는 원자탄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 무기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나아가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됐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미국 최고위층이 원자탄을 전후 세계 질서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즉 소련을 염두에 둔 것이다.  
 

▲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뜨린 핵폭탄이 폭파하는 모습. ⓒwikipedia.org


참전 이후에는 미영 핵 독점 추구 

마틴 셔윈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이미 1943년부터 외교 수단으로서의 핵무기의 가치를 인식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의 처칠은 미영 공동의 핵 독점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전후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루스벨트는 핵 개발 사실을 소련은 물론 미국 국민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오직 처칠과만 핵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닐스 보어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제의한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처칠이 제안한 미영 핵무기 독점을 추구했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내심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초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소련을 겨냥한 핵 개발로 그 성격이 바뀐다.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는 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발언이다.  

그는 1944년 3월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인 조셉 로트블랫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가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건 당신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고 말해 로트블랫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 1954년 4월에 열린 미 의회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고 나서 두 주일 뒤에 러시아가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프로젝트는 바로 그런 토대 위에서 진행됐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44년 9월 루스벨트는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처칠과 함께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을 승인하는 비밀각서를 체결했다. "충분한 숙고 후에 일본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의 패배가 분명해진 지 3개월 후였다. 같은 달, 그로브스는 핵 공격을 위한 특수비행단을 창설했다. 175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509혼성그룹은 태평양 티니안섬에서 원폭 투하 훈련을 시작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사망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직을 물려받은 직후 원폭 개발 사실을 알게 된다. 4월 13일 루스벨트의 측근이자 트루먼의 정치적 멘토였던 제임스 번스는(7월 3일 국무장관 취임) 트루먼에게 원자탄이 있으면 "전쟁 종료 후 우리가 원하는 평화협정 조건을 강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 25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비밀메모를 통해 트루먼에게 "이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 문명을 보전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보고했다.  

4월 27일, 첫 목표물선정위원회(Target Committee)가 개최됐다. 그로브스 등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미군 공습을 받지 않은 도시를 대상으로 '인구 밀집 지역 내 지름 3마일 이상의 도심'을 폭격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히로시마 등이 주요 목표지역으로 거론됐다.

이후 몇 차례 관련 회의가 열린 끝에 5월 31일 스팀슨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가 열려 최종 방침을 결정했다.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노동자 주택들로 둘러싸인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사전 경고는 없다"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지만, 최대한 많은 주민에게 최대한의 심리적 충격을 가한다"는 원칙이 추가됐다.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든가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자 거의 전부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 투하 사실을 발표하면서 적의 군사기지를 폭격했다고 강변했다.) 
 

▲ 포츠담 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탈린, 트루먼, 처칠(왼쪽부터).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원폭 투하, 일본 항복 여부와 관련 없었다  

트루먼은 원자탄을 투하하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포츠담회담(7월 17일~8월 2일)에 참석 중이던 7월 25일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이 서명한 작전명령을 승인했을 뿐이다. 명령서 요지는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이른 시일 내에 원자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5일은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이다. 즉 미국은 일본의 항복 수락 여부와 관계없이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것이다. 국내 일부 문헌들은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원자탄 공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틀린 내용이다. 

게다가 트루먼은 포츠담선언 서명식에 스탈린을 초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선언에는 스탈린의 서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일본은 소련의 도움을 얻어 좀 더 나은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는 허망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가사키 원폭 공격까지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주임 검사로 활동한 미국인 텔포드 테일러는 나가사키 원폭을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잘한 일이냐 못한 일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미국에서는 원폭 1,2개로 전쟁이 그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소한 3개는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게다가 7월 25일 트루먼의 원폭 사용 승인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8월 3일 이후에는 군부의 판단에 따라 원폭을 몇 번이고 투하할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원폭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1945년 6월 사실상 항복 결정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3차례 일본 총리를 역임한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은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의 패배가 불가피"하며 "이제 걱정해야 할 것은 패전에 따라 일어날지 모를 공산혁명"이라고 경고했다.  

1945년 4월초 소련은 일본과 1941년에 체결한 소일 중립조약(Neutrality Pact)을 갱신하지 않고 폐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소련의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1945년 6월 18일 천황은 최고전쟁지도회의에 신속한 평화 회복을 원한다고 통보했다. 회의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련이 중재자로서 천황의 안전과 천황제 유지를 보장할 수 있는 항복 조건을 주선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속사정을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7월 6일 미 합동정보위원회는 포츠담에서 회동하기로 한 연합국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 <적 상황 평가>에서 일본의 '항복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지배층은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점차 타협을 통한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조건 항복은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일본인의 상당수가 이제 군사적 완패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에 따른 피해 누적-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고 주요 도시 대부분의 시가지 25~50%가 파괴됐다-으로 그런 생각은 더욱 보편화 될 것이다" 

"무조건 항복 요구가 평화의 유일한 장애물"이라는 7월 18일 자 일본 측 암호 전문도 해독돼 미 정부 최고위층에 전달됐다. 그러나 트루먼과 번스 국무, 스팀슨 전쟁부 장관 등은 "평화를 얻어내기 위한 일본의 술수"라며 애써 무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탄 제조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자들은 원폭 사용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1945년 5월 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 화학자 해럴드 유리와 천문학자 월터 바트키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에서 제임스 번스를 면담했다. 헝가리 출신의 실라르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원폭 개발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다음은 실라르드의 전언.

"번스씨는 전쟁에 이기려면 일본 도시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다른 행정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사실상 이미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당시 번스 씨가 훨씬 더 우려한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문제였다. 그는 우리가 원자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면 유럽 문제에서 소련을 다루기가 한결 쉬워진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의 원폭 철회 노력 좌절되다 

1945년 6월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의(원자탄 제조의 출발점인 핵연쇄 반응을 성공시켰다) 과학자들은 원자력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하는 여러 위원회를 꾸렸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정치위원회는 '원자탄 사용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원자탄을 비밀리에 개발해 일본에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공격한다면 미국의 도덕적 입지가 훼손될 뿐 아니라 '완전 멸망'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소련과의 핵무기 개발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원자탄의 과학적 원리는 비밀이랄 게 없기 때문에 소련은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은 보고서와 함께 대통령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와 오크리지 우라늄농축공장의 과학자 155명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원자탄을 실제로 제작한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청원서 회람을 금지하고 이 사실을 그로브스 장군에게 알렸다. 이에 따라 과학자들의 청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해군부 차관 랠프 바드와 전쟁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 등 일부 정부 관리도 원폭 사용 반대를 건의했다. 원폭 사용을 최종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해군부 대표이기도 한 바드 차관은 6월 27일 스팀슨 장관에게 메모를 보내 "위대한 인도주의 국가인" 미국은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참전하고 원자탄이 완성 직전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알리고 항복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며칠 후 바드는 해군 차관 직을 사퇴했다.

이에 앞서 6월 18일 존 매클로이는 트루먼이 합참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해 "천황은 무사할 것이며, (종전 후) 정부 형태는 일본인의 선택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신형 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7월 2일에는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윌리스 화이트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 대한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당 소속의 호머 케이프하트 의원은 같은 날 늦게 기자회견을 통해 화이트의 요구를 지지했다. 특히 그는 천황을 폐위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장해주면 항복하겠다는 일본 측 의사를 백악관이 이미 접수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6월 11일 자 사설에서 '무조건 항복'이란 일본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켜 전투 종식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불길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미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원폭 사용 반대 

고위 군사지도자들도 대부분 원폭 사용에 반대했다. 이들은 원폭 투하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하며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에는 2차 대전 때의 전공으로 원수로 진급한 5성 장군이 7명 있었는데 이중 6명이 반대 의견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육군 항공단(미 공군의 전신) 사령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 해군의 윌리엄 리,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 원자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유럽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워는 포츠담회담 당시 스팀슨으로부터 원폭 사용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가 내 의견을 묻더군요.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반대했지요. 첫째, 일본은 이미 항복할 태세가 돼 있다. 그런 가공할 무기로 그들을 칠 필요가 없다. 둘째,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무기를 최초로 사용한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뉴스위크> 63년 11월 11일 인터뷰)

이이젠하워 전기를 쓴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트루먼과 최고위급 보좌관들에게 반대 의사를 직접 밝혔다고 한다. 

극동지역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원자탄은 "군사적 관점에서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45년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이미 졌다" "다음 전쟁은 그 참혹함이 지금보다 1만 배는 클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맥아더는 후버 전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이 항복 조건을 완화해 주었다면(천황제 유지) 전쟁은 몇 달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후버의) 현명하고도 정치인다운 충고를(1945년 5월 30일 후버는 트루먼에게 메모를 보내 항복 조건 변경을 촉구했다) 따랐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학살극을 예방했을 것이고, 폭격으로 인한 그 많은 파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항복) 조건을 일본인들이 흔쾌히 수용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단 사령관은 1949년에 낸 회고록 <지구적 사명(Global Nission)>에서 "우리는 원자탄을 쓰든 안 쓰든 일본은 이미 붕괴 일보 직전이라고 보았다"고 밝혔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유튜브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합참 의장이었던 윌리엄 리 제독은 원자탄은 화학무기, 생물학무기와 함께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모든 기독교 윤리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시 법규에" 대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이렇게 단언했다. 

"일본은 이미 패했고 항복할 태세가 돼있었다 (중략) 이 야만적인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한 것은 일본과의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수준은 암흑시대 야만인과 같은 차원으로 전락했다.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전쟁에 승리할 수는 없다" (1950년 회고록 ) 

1949년 언론인 조너선 대니얼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분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은 나에게 '(핵무기) 사용에 합의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군사목표물만 친다는 것이었죠. 물론 그러고는 최대한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해군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은 보좌관에게 "이 마당에 꼭 그래야 한다고(원폭 투하) 생각하지 않네. 그럴 필요가 없어"라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난 원자탄 같은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어"라고 말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1945년 10월 워싱턴 기념탑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사실 평화를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로 원자력시대가 공표되기 전에,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장군은 1945년 8월 7일의 일기에 "처음 워싱턴에서 내게 원자탄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주민 전체를 죽이는 도시 폭격에 대해서는 원래 찬성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 남태평양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은 "첫 번째 원자탄은 불필요한 실험이었다 (중략) 그걸 투하한 건 실수였다. 그 때문에 수많은 쪽발이가 죽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러시아를 통해 꾸준히 평화를 타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49년 의회 증언에서 "나는 민간인에 대한 폭격, 특히 원자탄 폭격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고 밝혔다. 

도청한 적대국 외교 전문의 요약보고서 작성책임자인 카터 클라크 준장은 해상 봉쇄만으로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의) 상선을 계속 침몰시키고 기아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적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 발의 원자탄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재래식 폭탄에 의한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원자탄과 러시아의 참전이 없었어도 일본은 2주 안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945년 9월 21일 <뉴욕타임스>)

1945년 8월말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번스 국무장관조차 원자탄이 전쟁 종식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45년 8월 30일 <뉴욕타임스>는 번스가 "일본이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탄이 떨어지기 이전에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러시아 쪽 증거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위 군 지휘관들이 원폭 투하 전에 이러한 입장을 대통령에게 강하게 주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로브스가 야전 지휘관의 폭격 관련 발언은 모두 전쟁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맥아더를 비롯한 장군들 입에서 원자탄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길 원치 않았다" 

요컨대 미 군사지도자들의 반대는 개인 의견에 불과할 뿐이었다.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또는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2차 대전의 또 다른 승전국 소련을 의식한 무력 과시가 목적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맥아더, 아이젠하워 등 원폭 사용에 반대했던 이들이 후에는 핵무기 옹호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게 패퇴하자 북한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강력히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대통령이 된 후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을 미국의 공식 군사전략으로 채택했다. 

하긴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으로 대량보복 독트린을 수립한 존 포스터 덜레스도 히로시마 당시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규탄했다. 당시 미국교회연합회 지도자였던 덜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국가라고 자칭하는 우리가 원자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온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원자무기는 정상적인 무기의 하나로 여겨지고 그리하여 인류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파멸하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무엇을 말하는가? 히로시마 이후 미국 정부는 '원자무기를 정상적인 무기로 여겨지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대중에 대한 정보 은폐와 왜곡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다음 회에는 지난 회에 이어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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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재판, TV 생중계가 인민재판? ‘국민의 알 권리’이다

대한민국은 재판의 공개를 이미 헌법상 원칙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임병도 | 2017-07-27 09:08: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박근혜씨와 최순실씨가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박근혜씨의 1심 판결선고가 TV로 생중계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법원은 25일 대법관 회의를 열어 재판장의 허가로 1·2심 주요사건의 판결 선고에 대한 중계방송이 가능하도록 관련 규칙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대법원의 TV 생중계 허용에 대해 “21세기 인민재판의 부활을 우려한다”라고 밝혔습니다.

강효상 대변인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사법부라도 삼권의 한 축으로서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며 “정권의 눈치를 보며 무원칙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사법부의 행태에 국민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박근혜씨 재판에 대한 TV 생중계가 ‘인민재판’인지, 각국의 사례를 포함해 알아보겠습니다.


‘미국 허용,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은 제한적 허용’

 

▲ 각국의 재판중계 제도 현황, 한국은 판이나 변론 시작 전에만 제한적으로 촬영이 허용됐다. 그러나 2013년 ‘국외이송약취 사건’과 2015년 ‘유책배우자 이혼청구 사건’,2016년 ‘세월호 관련 사건’ 등을 생중계했다.

 

각국의 재판중계제도를 보면 미국은 워싱턴 D.C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 법원에서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 일본은 금지 또는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이 형사재판에서 TV중계를 금지하는 이유는 피고인의 인격권과 방어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도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영국대법원은 2005년부터 헌법개혁법에 따라 재판과정 중계방송을 전면 허용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헌법재판과정에서 간접 공개를, 프랑스도 헌법재판에 대한 재판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1948년까지는 재판과정 사진 촬영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조명기구가 깨져 재판관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관의 착석 후 개정을 선언할 때까지의 2분 이내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대법원 대법원·항소심에 대해서는 재판중계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스페인, 노르웨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고속철 폭파사건이나 기차 탈선 사건, 총기 난사 사건 등은 부분적으로 중계하기도 했습니다.

TV중계를 제한하고 있는 영국·독일·프랑스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재판중계를 점차 확대하는 이유는 주요 사건의 경우, 인격권과 사생활 보호보다 일반 국민이 얻는 정보이익의 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민재판인가? 국민의 알 권리인가?’

 

헌법재판에 대한 TV중계는 각국 사례처럼 허용하는 분위기입니다. 문제는 형사재판과정에 대한 중계방송입니다. 형사재판 중계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형사재판의 심리과정이 공개되면, 사법부가 청렴하고 합리적으로 바뀌어 재판의 공정성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재판과정이 생중계되면 ‘막말 판사’를 막을 수 있다는 연구 보고서도 있습니다.(관련기사:“생중계 재판이 막말판사 막는다” 국내 첫 연구보고서 나와/조선일보)

또한 재판공개로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과 얼굴, 신원이 공개되면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의 준수 및 법규범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중계를 통해 사회구성원인 국민의 관심을 유도하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재판을 사전에 알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상 형사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할 수 있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기본권과 방어권, 사생활이 침해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 피고인이나 증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 내지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으며, 법관들이 인기에 영합하는 행동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의 뇌물수수사건, 기업 부정부패, 대형인명 피해 사건은 재판중계 필요’

 

 

아이엠피터는 모든 형사재판의 하급심을 TV로 중계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대법원은 법률심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낮음)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건은 재판중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① 정치인의 뇌물수수와 비리
② 기업의 부정부패 
③ 연쇄살인사건
④ 미성년자 집단 강간등 인권유린 성범죄 사건
⑤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인명 피해 사건

비록 하급심이라도 위의 사건들을 중계하면 공공의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의 경우 국민과 여론의 감시 속에서 재판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재판중계가 허용된다면, 오히려 자유한국당이 우려하는 제3자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재판관의 독립성을 해치는 행위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박근혜씨에 대한 재판중계는 ‘정치인의 뇌물수수와 비리’에 해당하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사건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재판의 공개를 이미 헌법상 원칙으로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헌법 제109조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다만, 법원조직법에 따라 중계방송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박근혜씨에 대한 재판 TV생중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자, 공공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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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50대 50, 국민 결정에 승복해야죠”

 

탈핵 운동가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인터뷰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7-07-26 19:15:32
수정 2017-07-26 20:52:08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50대 50, 장담 못 합니다.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탈핵 운동가로 8년 가까이 일해 온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에게 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여부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측하지 못하겠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탈원전 이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팽팽한 찬반의 공론장이었다. 앞으로 3개월 간 원전 찬반 측의 설득전이 펼쳐질 것이다.

정부는 지난 24일 공론화 위원회를 꾸렸고, 앞으로 3개월 간 시민 배심원단을 선정하고 토론의 과정을 거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그는 시민 배심원단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결론이 나와도 승복해야 합니다. 국민 대표가 논의해서 결론을 내면 정부가 100% 그대로 승복한다고 했어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합니다"

그의 말에서 '페어플레이' 정신이 보였다.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없이 탈원전은 없다. 그는 기본원칙인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 탈원전이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신고리 5·6호기 건설된다 하더라도 로드맵이 살짝 바뀌는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원전 여부는 국민이 결정해야”

신고리 5·6호기 운명을 결정할 공은 왜 국민에게로 패스됐을까? 의대 교수인 그는 '원전 전문가와 국민'을 '의사와 환자'에 비유했다.

"병원에 가면 전문가인 의사가 결정을 합니까? 아니요. 환자가 결정합니다. 의사는 병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죠. 원자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원자력 전문가는 여태까지 국민에게 원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고, 비밀리에 자기들이 결정을 해왔어요."

그는 원자력에 대한 결정은 국민이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것도, 사고가 나서 피해를 보는 것도 국민입니다. 물론 병원에 가는 수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에 대한 의학적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기 몸에 대한 결정이니까 본인이 해야 합니다. 원전에 관해서도 국민들이 공학적 이해가 높지 않더라도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공대 나온 사람이 수백만명, 잘 모르겠지만 2백만명이 넘을 거예요. 원자력 안전성 보고서는 공대 나온 사람들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라고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태도는 아주 기분 나쁘죠, 시대착오적인 거죠"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원자력 지지자들은 돈과 권력과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성과 상식, 윤리의식 이외에 가진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원자력에 관한 진실이 끊임없이 은폐되고, 거짓말이 횡행하는 사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의 인식의 깊이와 실천적 자세가 결정적인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김철수 기자

"괴담교수가 됐어요"

어느날 그는 일부 보수 언론에 '괴담 교수'로 찍혔다. 발단은 된 사건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6년동안 천 번도 넘게 해온 탈핵 강의였다. 이 강의는 '한국 탈핵'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일반인뿐만 아니라 원전 전문가들에게도 똑같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강연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언론들은 '원전 괴담 강의'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괴담이라는 기사를 보고 다른 기자들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괴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괴담교수가 됐어요. 다른 매체에서는 궤변이라고 살짝 틀었어요. 창조적이죠. 이젠 궤변교수가 됐네요 (웃음)"

"6년 전부터 꾸준히 똑같은 내용을 강의했는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강의 내용을 잡아서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짓인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 강의가 부정확하고, 틀렸다라고 생각이 들면 저를 불러다가 검증 토론회를 해도 돼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들이 지적한 내용 전부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원전 비전문가'라고 비난도 받고 있는 그는 의대 교수이다. 의대 교수가 탈핵 운동에 뛰어든 이유가 무엇일까? 경주에 있는 동국대 의대 교수인 그는 경주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원전 6호기가 밀집한 곳이고, 십만년이 넘도록 핵폐기물을 보관해야 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도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 얘기니까 관심을 갖게 됐고, 2009년 경주 방폐장 중지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 교수에겐 아쉽게도 경주 방폐장은 유치가 됐다.

"경주 방폐장은 방사능이 샐 겁니다. 암반이 나쁜 곳에 건설이 됐고, 지하수가 아주 많은 곳에 건설이 됐어요. 그래서 건설하는 동안에는 하루에 5천톤씩 지하수를 퍼내면서 공사를 했어요. 공사가 끝났는데 지금도 2천톤씩 퍼내요. 운영이 끝나고 난 다음에 폐쇄하면 못 퍼냅니다. 그때부터는 지하수를 통해서 방사능이 새기 시작할 겁니다. 한번 나가기 시작하면 보수공사도 안합니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다 나갑니다. 그런데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는 것은 의사로서 인정 못합니다"

원전은 일본에서는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원전은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들은 원전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미래세대에 핵폐기물은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결정적으로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원자력이 안전 문제는 의학적인 문제라고 생각돼 본격적으로 탈핵 운동에 나섰다.

그는 핵사고가 나면 그 이후엔 인간이 통제하거나 다룰 수 없다고 경고한다. 원전의 안전성을 묻는 질문에 김 교수는 "고장 안 나는 기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그는 핵사고는 교통사고처럼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오는 겁니다. 그렇게 큰 지진이, 큰 쓰나미가 올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또 후쿠시마의 노후원전인 1~4호기만 딱 골라 터질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다 안전한 줄 알았죠.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오만한 겁니다"

"만일 방사능이 눈에 보였다면 원자력은 가장 더러운 발전 방식이었을 거예요. 이게 눈에 안 보이고, 냄새도 안 나고, 맛도 없고, 우리 오감으로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클린에너지, 깨끗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하죠."

"원자력계가 그동안 원자력을 싸다고 해왔어요. 그런데 핵폐기물을 십만년간 보관할 기술도 없다는 걸 국민들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비용을 얼마로 산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싸대요... 결국 대부분 국민들이 원전이 위험하고 경제성도 의심되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대안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대안이 있다"

김 교수는 세계 통계 수치를 예로 들었다. "전 세계의 전기 생산량 중에서 원자력은 10%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는 25% 차지합니다. 지금 현재 이미 원전 전기 생산량의 2.5배를 전 세계에서 재생에너지로 만들고 있어요. 5년 후에는 5%가 더 증가해 30%가 될 거예요. 재생에너지는 1년에 1%씩 증가하는 반면 원자력은 30년 전부터 10% 근처에 머무릅니다"

그의 말대로 세계 통계만 봐도 원전 사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어가는 사업이지만, 그곳에도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에 그는 "원전은 폐쇄하는데 30년 걸립니다. 그래서 고리1호기에 근무하는 사람들 다 짤렸습니까? 이 분들은 30년 정도 더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원전기술을 가진 우리가 사양산업인 원전 건설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인 폐로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60년 후에 탈원전을 해요. 그동안 원자력 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또 10만년간 핵폐기물을 보관해야합니다."

탈원전은 하루 아침에 원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정책이다. "실제로 원전은 30년 정도 후에 많이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30~40년 후에 대한민국 에너지에 관해서 지금 논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장 전기료가 오를 것처럼 얘기하고 전기가 부족할 것처럼 얘기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을 했지만 오히려 5년 사이에 원전은 줄지 않고 늘어난다. 원전 5개를 짓고 있는 중인데 신고리 5·6호기 2개의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건설이 중단된다고 해도 3개는 완공되는 것이다. 탈원전 운동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다. 5년 사이에 전 정부에서 건설을 시작한 원전들이 완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 탈원전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탈원전과 에너지 전환은 세계적인 대세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30년 전부터 재생에너지 사업을 시작을 했고 현재 꽃을 피우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늦게 탈원전 문제의 논의가 시작됐다.

"'후래자(後來者) 삼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자리에 늦게 온 사람은 세잔을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빨리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생산률 꼴찌로 출발했지만 10~20년 내로 세계 평균만 따라가면 탈원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는 원전 개발의 장미빛 환상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재생에너지는 안전합니다. 아마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떨어지는 게 최대 사고일 거예요. 이산화탄소·방사능·미세먼지 제로죠. 오염물질이 안 나옵니다. 햇빛과 바람은 아무리 가져다 써도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 에너지입니다. 햇빛과 바람은 연료비가 공짜라 세금도 못 붙여요. 우리나라 에너지 해외의존도 97%인데, 전부 수출에서 번 달러로 사와야 하는 것들 이잖아요. 햇빛과 바람은 국산 에너지입니다"

탈원전 정책은 5년 안에 단기에 가능하지 않다. 그도 탈원전은 국가의 '장기적인 에너지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탈원전 정책은 정권에 따라 왔다갔다 할 겁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 그 다음에는 뒤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을 얼마나 설득해내냐가 승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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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중국이 휴전협상을 지연시킨 이유

17.07.27 10:29l최종 업데이트 17.07.27 10:29l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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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전개됐다. 그런데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사실상 고착된 것은 1951년 3월경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처음 9개월뿐이다. 

1951년 7월부터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부전선에서 소모적인 고지 쟁탈전이 반복됐다. 일례로, 1952년 10월 6~15일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는 12차례나 전투가 벌어져 7차례나 고지 점령자가 뒤바뀌었다. 이 하나의 전투에서, 중국군(중공군)은 1만여 명의 인명피해(전사·부상·행방불명·포로)를 입고, 한국군은 3500명 정도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에 인명피해를 입은 한국 군인은 약 62만 명이다. 이 중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3월까지 피해를 당한 한국 군인은 약 17만 명이다. 이보다 근 3배인 45만 명 정도는 그 이후에 피해를 입었다. 주로 휴전협상 기간에 피해를 당한 것이다. 협상 중에 벌어진 고지 쟁탈전이 그런 비극을 양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다. 이참에 미군의 힘으로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또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면 안보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휴전협상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유엔군 명의로 참전한 미군이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처음엔 휴전을 반대했다. 애초의 경계선인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전선이 고착됐으니, 영토를 손해 보는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 6월부터는 김일성도 휴전을 적극 찬성했다. 중국과 소련의 휴전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다가, 소모적 전쟁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휴전을 찬성하는 북한·중국·미국에 의해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 협상은 2년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는 동일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 양상이 되풀이됐다. 그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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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끝까지 주도하지 못했다. 미군의 반격으로 나라를 잃을 뻔한 그로서는 중국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체결하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한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일성도 최종 지휘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 김일성은 북한군과 중국군이 각각 별개의 지휘체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팽덕회와 갈등을 빚었다. 팽덕회는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11월 16일자 서신에서 "중국 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힘으로써 김일성은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39세)은 이승만이나 맥아더보다 팽덕회(53세)가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작전지휘권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참모 1명 및 경호원 2명과 함께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은 팽덕회는 군사행동을 최대한 천천히 전개했다. 1950년 8월 15일 이전에 끝낸다는 계획으로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으로서는 그런 '만만디' 태도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팽덕회한테는 중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1945년 이전 항일전쟁에서부터 공로를 세운 그는 임표(린뱌오)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을 제압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관철시켰다. 팽덕회가 그렇게 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참전 문제가 논의된 10월 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대치하면, 미군이 무슨 빌미든지 만들어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논리로 중국 지도부를 설득했다. 

미군 몰아내기보다 중국군 현대화에 중점
 

 팽덕회.
▲  팽덕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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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렬히 참전을 주장했던 팽덕회는 자기 부하들이 청천강(평북과 평남의 경계) 이남으로 미군을 밀어내자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됐다. 북한·중국 경계선에서 미군이 점차 멀어지자, 그는 호흡을 길게 하면서 전쟁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세계적인 냉전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서도 두 개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을 북·중 국경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되 중국군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팽덕회가 최고의 역점을 둔 것은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소련은 중국군을 참전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이용해 이참에 중국군을 현대화시키자는 게 팽덕회의 계획이었다. 미군을 몰아내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그런 계획에 따라 팽덕회는 주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일부러 긴 휴식을 가지면서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전투 장비도 보내주고 수송용 차량도 보내주고 미그기도 날려주고 금전 차관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 제33집 속에 양영조의 '6·25 전쟁 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이란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중국군 간부 섭영진의 <섭영진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팽덕회의 기획 덕분에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전체 부대의 3분의 2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다. 미군과 싸우는 대가로, 전쟁 중에 소련한테서 단단히 지원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팽덕회는 김일성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쪽으로 전쟁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남진을 최대한 늦췄다. 덕분에 미군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애타는 쪽은 김일성이지 팽덕회가 아니었다. 

팽덕회가 시간을 끌며 노골적으로 국익을 추구하니, 김일성은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1·4 후퇴 이후로는 더 그랬다. 1월 4일 국군이 서울에서 후퇴하고 1월 5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로, 팽덕회는 또다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화가 난 김일성이 1월 10일 박헌영과 함께 팽덕회를 찾아가 따졌지만, 팽덕회는 "내가 총사령관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시면, 내 목을 베시오"라며 으름장만 놓을 뿐이었다. 

팽덕회, 휴전회담마저도 만만디 작전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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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도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휴전을 거부하는 김일성을 제압하고자 스탈린까지 동원해 휴전 합의를 관철시킨 팽덕회였다. 그랬던 팽덕회가 막상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또다시 '만만디'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휴전을 서두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는데도, 오히려 팽덕회가 느긋해진 것이다.    

1951년 하반기에 벌어진 휴전협상 당시, 중국측은 '38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현재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미국측 요구에 동의해줬다. 미군이 확보한 영역이 38선 이북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태도는 미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든 자국 영토 밖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휴전선은 이렇게 북한의 의사를 무시한 채 중국과 미국의 합의로 생겨난 것이다.  

휴전회담에서 지금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합의된 때는 1951년 11월이다. 정상대로라면 휴전회담은 이때부터 몇 달 안에 끝났어야 한다. 1951년 12월이나 1952년 연초에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협상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도 팽덕회가 또다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문제와 관련해 팽덕회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중국군 체면을 살리는 것을 우선시했다. 미국은 희망하는 포로에 한해 본국으로 송환하자고 주장했다. 미군 포로보다 중국군 포로가 훨씬 더 많고, 중국군 포로 중에는 본국 송환을 꺼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팽덕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타이완(대만)이나 미국행 혹은 한국행을 선택할 경우, 자기 조국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체면을 살릴 목적으로, 또 소련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낼 목적으로 그는 휴전협상을 질질 끌었다. 

그러는 동안, 백마고지를 비롯한 중부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무한정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고한 병사들만 곳곳에서 죽어갔다. 

결국 팽덕회는 미국측 주장을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포로송환 문제를 매듭지었다. 포로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나왔다. 팽덕회는 비록 휴전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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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석률 대표

자주와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박석률 대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7 [05: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25일, 심장병으로 별세한 박석률 선생. 고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해왔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26일 박석률 선생 영정 앞으로 많은 추모의 꽃바구니가 놓여졌고 끝없이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예를 올리러 찾아왔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평생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박석률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가 25일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고인의 심장은 영면에 들고 말았다. 잠을 자다가 벌어진 일이어서 가족들에게조차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애석하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26일 소식을 듣고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 장례식장 5호실을 찾아갔다. 장례식장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동지들과 지인들이 와서 고인을 추모하였다.

상복을 입은 아내와 대학생 딸은 끝없이 찾아오는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틈을 내기 어려워 몇 마디 취재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인 딸의 친구들이 많이 와서 고인의 가는 길이 더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 사이버노동대학  김승호 대표의 위로를 받고 있는 박석률 대표의 아내와 딸     © 자주시보


“아빠의 삶과 지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아빠가 늘 책을 많이 권해주셔서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늘 느끼며 자랐습니다.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치원 때 가방에 귤과 같은 먹을 것을 넣어주고도 아무 말도 안 해 뭉개져서 ‘귤을 넣었다고 말이라도 하지~!!’ 투정을 부렸던 생각도 나고 어디서 좋은 수첩이라도 하나 구하면 ‘우리 딸을 위해 기가 막힌 선물 가져왔다’며 건네주셨습니다.”

 

수학을 아주 좋아한다는 딸은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통계학까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나라에 유능한 인재로 자랄 훌륭한 재목이었다. 유전적으로 딸은 아빠도 많이 닮는다. 공부를 잘했던 박석률 대표는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싸우느라 대학시절 이후엔 공부에서 손을 놓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하는 데나 썼었는데 그 못다 피운 공부의 꽃을 딸이 훌륭하게 피워가고 있었다. 

 

물론 작은 아빠가 있긴 하지만 결혼식을 올릴 때면 아버지가 얼마나 그립겠는가. 이렇게 훌륭한 딸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수 있었는지, 눈을 제대로 감기는 감았겠는지...

 

유신독재치하에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해온 선배들은 구속과 고문 나아가 사형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여 가족들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난과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 전사들의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시련 중에 하나가 가족고생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족들이 더욱 애틋하게 가슴깊이 새겨져 있다. 언젠가는 가족들도 그 마음을 알게 되면 동안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한꺼번에 느끼게 될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 박석률 대표의 외동딸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박석률 대표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뒤 10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김남주 시인 등과 함께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1995년 범민족대회와 관련해서 또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때는 조사 과정에 참혹한 고문과 구타를 이겨내야 했다. 옥중 고초를 겪었던 선배 투사들이 나이를 들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도 이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박석률 대표의 투쟁에서 후대들이 꼭 잊지 말아야할 점이 민주화 투쟁만이 아니라 자주와 통일 투쟁으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민청학련 투쟁은 반 유신 민주화 투쟁이었다. 서강대 민청학련 투쟁 속에는 민주화 중심 투쟁흐름과 자주, 민주, 통일을 아우르는 진보적 투쟁 흐름이 있었는데 박석률 대표는 후자를 주장했었다. 나도 뼈저린 가난 속에서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박석률 선배의 주장에 동조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민주화만 해서는 이 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박석률 선배가 옳았던 것이다. 그래서 박석률 선배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 남민전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었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박석률 대표의 서강대 후배 김택춘 선생이 장례식장에서 강조한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남민전 활동을 했던 김남주 시인, 박석률 대표와 같은 투사들이 없었다면 80-90년대 그렇게 기세 차게 타올랐던 반미투쟁, 통일투쟁의 들불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고 말고를 여전히 지금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결정한다. 핵심 군 지휘권을 미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미군사령관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적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하고서는 초보적인 민주화도 이룰 수 없다. 종북몰이, 공안광풍이 불면 누구든 빨간 칠 뒤집어쓰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범민련에서 활동했던 한 통일운동가는 “많은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제도권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박석률 대표는 그런 진보적이고 본질적인 자주 통일 투쟁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평생 재야인사로 어려운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오히려 깨끗한 투사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다”며 고인을 뜨겁게 추모하였다.

 

박석률 대표의 추도식은 27일 오후 7시 열며, 28일 오전 발인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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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ICBM 능력에 미국이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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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 THORNBERRY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속도가 생각보다 빠른 모양이다. 내년쯤에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을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의 북한 ICBM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 “북한 정권이 핵을 운반할 수 있는 ICBM을 2018년의 어느 시점에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고 2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북한이 미 본토를 핵미사일로 공격할 능력을 갖추기까지 최소 2년이 걸릴 것이라는 미 정보기관들의 전망 보다 절반 이상 앞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북한의 ICBM이 현재의 시험제작 원형 단계에서 내년까지 실제 생산 라인 단계로 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더힐에 따르면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 맥 손베리(공화∙텍사스) 하원 군사위원장은 7월25일(현지시간) 비공개로 진행된 북한 미사일 브리핑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지난 7월4일 성공한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의 분명한 성공은 북한이 핵무기로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가속하는 걱정스러운 진척"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또 "지난 8년간 우리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를 게을리해왔다"며 "방어해야 할 광대한 땅이 점증하는 위협에 직면했다. 하원에서 통과된 국방수권법은 그 목표를 향한 괄목할만한 진전이지만, 의회와 행정부 모두 책임감을 느끼고 미국과 우리 동맹이 보호받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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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ICBM 시험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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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NA KCNA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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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국민이 촛불로 이룬 성과, 누가 짓밟나

[민교협의 정치시평] 광우병, 최순실, 그리고 촛불의 무게
2017.07.26 01:16:55
 

 

 

 

유럽을 초토화시킨 기존 광우병과 달리 비정형 광우병은, 비교적 나이든 소에서 발생한다는 점, 강화된 사료 정책 및 기립불능 소를 도축에서 제외하는 조치 등이 시행되는 현실 등을 통해 볼때, 식품 위험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기존 광우병에 비해 낮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비정형 광우병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이미 높은 감염력도 확인되어 있다. 광우병 통제에 성공하고 있는 유럽에서도 비정형 광우병은 장기간 증상 없이 진행되기에 공중방역 상의 어려움이 있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간주하고 있다. 장차 발생할 광우병의 주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는 유형이기도 하다.  
 
수입국으로서는 자국민의 식품 안전을 위해 발생국의 광우병 발생 상황과 식품으로의 유입 여부 등을 공식적으로 검토한 역학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수입 중단을 하는 것이 상식이자 타당한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012년 나왔던 미국의 광우병 발생 소식에 한국 정부는 발생국의 공식 역학조사 결과도 기다리지 않은 채, 광우병 발생 소식을 통보받은 첫날부터 수출국 입장을 대변하는 공식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정작 발생국인 미국은 한달여의 역학 조사를 한 후에야 비로소 공식 결론을 내렸다. 역학조사도 없이 미국산 소고기 안전을 강조한 한국 정부의 비과학적 행보 내지는 '신기'에 찬 점쟁이 수준의 행보는 국제적으로 웃음거리가 된 바가 있다. 이처럼 수입 당사국이 광우병 발생국의 공식 역학조사가 이뤄지기도 전 성급하게 '안전 결론'부터 내놓고 어설픈 조치를 제시하는 이유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위험성으로 인해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민들이 촛불을 들었던 기억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한국 정부 입장은 검역 비율만 강화하는 정도다. 이와 함께 미국에 관련 정보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다. 무상원조도 아니고 돈을 내어 소고기를 수입하고 있는 측의 입장으로는 누가 보아도 미진한 대처다. 이때문에 국민들은 공식 역학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수입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수입하는 입장이라면 미국 현지에 가서 도축 상황이나 식품 안전 관리 수준을 확인해야 하지만, 그런 상식적 조치는 거론되고 있지조차 못한 상황이다. 현 정부가 왜 이렇게 미온적일까. 자국민의 식품 안전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현 상황의 본질과 진정한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다. 현재 정부가 미국과 맺고 있는 소고기 수입 공식 조건, 그리고 대미 협상의 현실 때문이다. 
 
정부는 2012년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미국으로부터 30개월 이하의 쇠고기를 수입하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30개월 이하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어 안전성이 확보되고 있는 것은 미국과 기존에 합의했던 공식 수입 조건 때문이 아니다. 2008년에 촛불을 든 국민들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한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은 한시적 임시 수입 조건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불행히도 현재 한미간 공식 소고기 수입 조건은 이명박이 2008년도에 공식 체결한 것인데, '연령 제한 없는 죄고기'와 폐기 처분되어야 할 특정 위험 부위에 속하는 내장까지 수입하는 것이다. 2008년도 맺어놓은 이런 비과학적 수입 조건은 당시 극심한 국론 분열을 불러왔다. 10년이 지난 현재 한국을 제외하고 주변국 어느 나라도 수용하지 않는 조건이다. 대만은 지난 2011년, 일본은 2013, 중국은 올해 되어서야 비로소 30개월 이하 미국소고기 수입을 허용한다. 
 
결국 30개월 이하 쇠고기만 수입되기에 안전하다는 정부 발표는, 과거 촛불 시민이 주장했던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 요구'가 타당했음을 말해준다. 이 조건이 1년 후인 2009년도 당시 이미 북미FTA를 체결하고 있던 멕시코가 미국과 맺은 수입조건임을 생각한다면, 2008년도 촛불을 들고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을 요구했던 한국민에게 '과학을 더 공부해야 한다'면서 주재국의 국민을 무시했던 버시바우 당시 미 대사의 발언이 얼마나 오만하고 부적절했던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당시 미국은 광우병 통제에 필요한 '강화된 사료 정책'이 실행되지 않던 때였다. 심지어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 '기립 불능소'도 도축되고 있었던 때였다. 그나마 식품 안전 차원에서 '기립 불능소'의 도축을 금지한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에 이어 부임한 오바마 대통령 때였다.식픔 안전과 관련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갑의 입장인 수입국 정부에서 을의 입장인 수출하는 나라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란, 2008년도 이명박이 스스로 상납함으로서 우리가 잃어버린 검역 주권의 굴종적 현실이기도 하다. 수입국이면서도 수입 제품에 대한 권리는커녕 수출국 측의 설명에 따라 수입 여부가 결정되는, 국제적으로도 유래 없는 우스운 내용의 수입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2008년도 이명박이 만들어 놓은 미국과의 공식 수입 조건이다 보니, 이번 상황에 있어서도 현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나 조치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납득되지 않고 무기력한 정부로 비춰지게 되는 현실은 이명박 정부가 지었던 원죄의 무게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광우병 발생과 이에 대한 부족한 대응으로 드러나는 현 상황의 진정한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은 과거 김종훈 통상본부장(전 새누리당 의원)이 '글자 하나 안고치겠다'고 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폭 양보하고 맺은 한미FTA에 대해, '죽는 소리'를 하면서 재협상을 하자고 거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양국 모두 얻고 잃은 것이 있어 미국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결코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들이 손해 보았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재협상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미국 정부의 행동 이유는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한국 정부와의 다른 여러 논의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기 쉽게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간의 이런 행보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국제외교에서 당연한 전략이라면, 정부는 과학적으로나 국제 기준으로 보나 전혀 타당하지 않은 한미 소고기 수입 공식 조건을 내세워 광우병이 발생한 미국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수입되고 있는 30개월 이하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란 2008년도 촛불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겨우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것일 뿐, 공식 수입조건은 주변국 어느 나라도 생각도 못하는 굴종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이나 중국도 30개월 이하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으니 '주변국과의 형평성'을 요구하면 된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부당한 조건으로 타결한 쇠고기 협상을 질타하는 국민들에게 '주변국이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으로 협상을 타결하면 즉시 미국과 재협상 하겠다'고 약속했던 바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2008년도에 촛불을 든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 시절 수입되던 30개월 이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아무 불평을 하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미국산 쇠고기가 무조건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비이성에 의해 선동된 이들'로 매도했다. 하지만 그 후 위키리크스를 통해 밝혀진 데 따르면 쇠고기 수입 대폭 개방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가 비밀리에 미국에 사전 약속으을 했던 것이고, 당시 이명박 당선자도 자신의 그런 행위가 사회 혼란과 국론 분열을 불러일으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국제 기준에 따르 것이라고 국민을 호도하면서 오히려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들을 '괴담에 선동됐다'는 식으로 매도했다. 그래서 진보 보수를 떠나 국민은 분노했고, 촛불을 들었던 것이다.  
 
진보·보수를 떠나 국민이 촛불을 든 기억이라면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뤄낸 촛불이 있다. 2008년과 2016년의 모습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국민을 기만한 정부에 대한 분노이자, 비상식적 상황에 대한 시정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광우병이나 최순실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의 본질과 함께,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한다. 
 
그나마 검역 조건이 '30개월 이하 쇠고기 수입'을 관철시키려 노력한 국민들 덕분에 다소나마 좋아진 것인데, 오히려 '촛불 시민이 괴담에 선동됐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또한 국정 농단이 실제했음에도 박근혜 탄핵을 여전히 '국모에 대한 천민들의 경거망동'으로 믿는 이들이 있다. 또한 '한국에 은혜를 베풀어주는 공정하고 아름다운 미국에 대해서 감히 한국인들이 전시작전권 환수, SOFA 개정, 사드 배치, 쥬피터 생물무기 프로그램 철폐 등을 할 수 있느냐'며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은 배은망덕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결론을 말하자. 공식 역학조사 결과도 없이 정부가 사전에 스스로 나서서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미국의 광우병 발생을 기회로 최악의 조건으로 타결되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해 미국에 재협상 요구를 하는 적극적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 정부가 '글자 하나 수정할 수 없다'고 했음에도 결국 대폭 양보한 한미FTA 협상마저 '재협상 하자'고 들고 나오는 미국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이렇게 정당하고 타당한 재협상 요구를 하지도 못하고 끌려 다닌다면 문제가 크다. 이는 마치 총을 들고서도 칼 든 이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과 같다. 여러 분야에 걸친 한미 간 협정에서 '불공정한 내용'과 '굴종에 가까운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우리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촛불에 의해 태어난 새 정부는 이런 굴종의 국내 문화를 극복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요구받고 있다. 당당하고 자신있는 적극적 자세로 대내외의 문제에 임하기를 바란다. 이번 미국 광우병 발생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을 대상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을 대상으로 '액션'을 취하는 것이 10년을 두고 이어 온 촛불의 의미이자 국민이 현 정부에 거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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